시즌 몆번째 쓰레기통

#11714 시즌 몆번째 쓰레기통 (14)

#0익명의 참치 씨(c2899e20)2026-04-29 (수) 16:45:37
슬슬 소재도 떨어지는데 어쩌지
#13작두◆DpR7JtW6TG(97d55031)2026-05-10 (일) 10:23:07
나는 가끔, 새벽이 제일 좋다.

아직 손님이 오지 않은 시간.
가게 문은 닫혀 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아직 얇다.
유리병 속 약재들이 조용히 빛나고, 어젯밤 작업대 위에 흘린 분말은 금가루처럼 반짝인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아가씨, 정말로 그 왕국의 왕태녀였답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대개 대충 웃고 만다.
그 질문은 늘 묘하게 멀리서 들린다.

왕관. 궁정. 봉신. 계승.
그런 단어들은 지금의 내 손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내 손에 더 익숙한 건 절굿공이와 유리 플라스크, 그리고 약간 금이 간 도가니니까.

나는 약재를 손끝으로 굴린다.
그러면 보인다.

겉모습이 아니라, 안쪽이.

이 잎이 어느 계절에 자랐는지.
이 돌가루가 어느 층의 흙을 오래 기억하고 있는지.
이름 없는 버섯이 왜 독이 아니라 열을 식히는 성질을 갖게 되었는지.

어릴 적부터 그랬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여서, 가끔은 조금 피곤했을 뿐이다.

오늘은 포션 세 병과, 무릎 통증용 연고 한 통, 그리고 실패한 실험 두 번.

실패라고 해도 아주 완전히 망한 건 아니다.
첫 번째는 지나치게 끈적거렸고, 두 번째는 뚜껑을 열자마자 연보랏빛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그걸 한참 들여다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음. 이것도 언젠간 쓸 데가 있겠지.”

어머니가 들었다면 분명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운 사람.
불타는 왕국을 기억하고, 다시는 짓밟히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
성채를 세우고, 대지를 묶고, 하늘과 사람까지 자신의 왕관 아래에 두려 했던 사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성벽 위에 세운 적이 있다.

“보이느냐.”

그때 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어머니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잘 몰랐다.

평원이었다.
멀리까지 이어지는 바람.
성채.
강.
들판.

“언젠가 네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에 나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물었다.

“전부 다요?”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때 조금 곤란해졌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하면.

전부는 너무 많았으니까.

나라 하나를 받는 것보다, 그 무렵의 나는 길가에서 주운 이상한 돌멩이 하나가 더 궁금했다.

그 돌멩이를 갈아 가루로 만들면 무슨 냄새가 날지, 어떤 액체와 섞으면 무슨 색이 나올지가 더 중요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볼 때마다 아주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짓게 된 건.

나는 어머니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존경했다.

하지만 닮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다.

어머니는 세계를 지키는 사람이었고,
나는 세계를 분해해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누군가는 그걸 무책임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왕관을 원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 무게를 너무 잘 알았던 건 아닐까 하고.

문밖에서 방울이 울렸다.

“열려 있나요?”

나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마을 아이였다.
양손으로 깨진 나무 장난감을 들고 있었다.

“이거… 고칠 수 있어요?”

나는 장난감을 받아 들었다.

나무의 결이 보였다.
어디서 부러졌는지, 어떤 힘이 가해졌는지, 무엇을 채워 넣으면 되는지도 함께 보였다.

나는 잠깐 손끝으로 만졌다.

분해. 이해. 재조합.

딸깍.

장난감은 원래 그랬다는 듯 멀쩡한 모양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우와!”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왕국 하나를 떠받치는 것도 분명 대단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망치지 않게 만드는 것 역시,
그리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이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뛰어 나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작업대에 팔꿈치를 괴고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 아주 멀리.

아마 지금도 어머니는 어딘가의 성벽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작은 마을에서,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다.

어쩌면 어머니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왜 자신의 딸이 왕관 대신 도가니를 골랐는지.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내가 잘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지키고 있으니까.

나라 하나는 못 지켜도,
무릎이 아픈 노인의 하루 정도는 조금 편하게 만들 수 있고.

울고 있는 아이의 장난감 정도는 고칠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은—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도.

나는 새 약재 병을 하나 꺼냈다.

햇빛이 유리 표면 위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저는 아마… 이쪽이 더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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