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몆번째 쓰레기통

#11714 시즌 몆번째 쓰레기통 (14)

#0익명의 참치 씨(c2899e20)2026-04-29 (수) 16:45:37
슬슬 소재도 떨어지는데 어쩌지
#14작두◆DpR7JtW6TG(97d55031)2026-05-10 (일) 10:47:51
왕관은 무겁다.

그건 아마, 진짜 금으로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성 이슈트반의 왕관이 햇빛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저 금빛이 반짝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조금 달랐다. 금속의 결이 먼저 보였다.
그 안에 섞인 은의 흐름, 오래된 땀과 손때가 만들어낸 미세한 산화, 그리고 더 깊은 곳—이 물건이 몇 번의 전쟁과 몇 번의 기도를 건너왔는지, 무엇이 닿아 무엇이 떨어져나갔는지가,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경과처럼 보였다.

나는 그걸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황금의 눈’이라는 건, 대개 그런 식이다.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실은 너무 많이 보인다는 것뿐이다. 너무 많이 보여서, 차라리 아무것도 안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왕관보다 플라스크가 더 좋았다.

어머니—아니, 정확히는 여왕인 그 사람은 강한 사람이었다.

왕국이 한 번 무너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강함이 있었다.

모히의 들판에서 마자르의 피가 흙과 섞였고, 불탄 성채 위에서 아직 식지 않은 재를 손으로 쥐어본 사람만이 가지는 눈이었다. 그 눈은 다시는 짓밟히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나는 그 사람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라면, 나도 그런 눈을 해야 했다.

궁정의 귀족들은 내가 걸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아이가 언젠가 왕관을 잇겠지. 저 아이가 언젠가 이 나라를 짊어지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무너진 성벽을 바라볼 때, “어떻게 다시 쌓을까”보다 “이 돌의 성질은 왜 이렇게 다른가”를 먼저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성정이다.

물론 남들이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왕태녀라는 인간이 겨우 그런 이유로 왕좌를 피하느냐고.

하지만 사람이라는 건 대개, 자기 본질을 거스르며 오래 살 수 없다.

나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안다.

왜냐하면 내 눈은, 언제나 본질부터 먼저 보여주니까.

그래서 지금 나는 왕궁이 아니라 작은 마을에 있다.

작은 연금술점.

가게 주인은 나.

직원도 나.

장부를 쓰는 것도 나.

청소를 하는 것도 나.

가끔 약초를 캐러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면, 문 앞에 “오늘은 쉽니다”라고 적어놓고도 정작 본인은 “이건 쉬는 게 아니라 재료 수집인데…” 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런 삶이다.

아침이면 우물가의 물이 아직 차갑다.

장작불 위에 얹힌 구리솥이 끓기 시작하면, 마을은 조금씩 깨어난다.

빵 굽는 냄새.
젖 짜는 소리.
멀리서 개가 짖는다.

그리고 나는 유리병을 닦는다.

사람들은 왕녀가 이런 걸 하고 있다고 들으면 놀라겠지만, 내게는 오히려 이쪽이 훨씬 자연스럽다.

유리는 솔직하다.

잘못 다루면 깨지고, 제대로 불을 먹이면 맑아진다.

권력은 그렇지 않다.

권력은 깨지기 전까지 금이 간 줄도 모른다.

오늘 아침 첫 손님은 허리가 아픈 노인이었다.

늘 오는 사람이다.

말은 퉁명스럽지만, 내가 준 약이 떨어지기 전에 꼭 온다.

“이번엔 좀 더 오래 가는 걸로 해주게.”

“그건 곤란한데요.”

“왜?”

“ 오래 가게 만들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러면 통증이 무뎌지는 대신 감각이 둔해져요. 아저씨는 그거 싫어하잖아요.”

노인은 입을 다문다.

나는 그가 지난달에 오른손을 데었을 때, 상처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걸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 사람 몸 안의 피로와, 관절 사이에 낀 마모의 결이 보이니까.

아주 조금, 본질이 보인다.

나는 말없이 약초를 집었다.

말린 버드나무 껍질.
잘게 간 광물 가루.
그리고 약재가 아닌 것 하나.

사람들은 그걸 보고 묻는다.

왜 그런 걸 넣느냐고.

글쎄.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필요해요”라고만 답하지만, 실은 간단하다.

모든 물질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약초가 아니어도 된다.

필요한 반응만 끌어내면, 그것도 충분히 약이 된다.

연금술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

돌은 돌이지만, 언젠가는 흙이었고.
흙은 흙이지만, 언젠가는 재였고.
재는 재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의 집이었다.

그러니 바꾸는 건 불가능이 아니다.

그저 구조를 이해하는 문제다.

가끔은 웃긴 생각을 한다.

내가 왕궁에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쯤은 스테판 경 같은 이들과 국경의 세수나 영지 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겠지.

그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무너진 땅 위에서 질서를 다시 세울 줄 아는 인간. 그런 종류의 사람은 희귀하다.

왕국이 불탄 뒤에도, 나라가 계속 나라일 수 있었던 건 아마 저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걸 이해한다.

존경도 한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상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회의 도중에도 나는 분명 창틀의 나뭇결을 보고 있을 테니까.

“이 나무는 북쪽 산기슭에서 베었네.”
“결 방향이 특이한데, 이거 물에 오래 잠겼던 적 있나?”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재상이 보기엔 꽤 한심할 것이다.

왕가 입장에선 더욱 그렇고.

그래서 나는 도망친 걸까.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도망친 게 아니다.

단지, 내 자리가 여기였을 뿐이다.

해가 지면 마을은 금방 조용해진다.

불빛이 적기 때문이다.

어둠은 아주 빨리 온다.

나는 가게 문을 닫고, 오늘 만든 약들을 선반에 올려둔다.

유리병들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각기 다른 색을 띤다.

연한 녹색.
탁한 금빛.
거의 무색에 가까운 투명.

그걸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왕궁의 보석보다, 이쪽이 훨씬 예쁘다.

보석은 이미 완성된 것이지만,
이건 아직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니까.

나는 그런 게 좋다.

완성된 권위보다,
아직 변할 수 있는 가능성.

정해진 왕좌보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여지.

아마 그래서 나는 연금술을 좋아하는 거겠지.

연금술은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준다.

무엇이든, 아직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밤이 깊어진다.

창밖에서 바람이 분다.

나는 혼자 의자에 앉아 손끝으로 작은 금속 조각을 굴린다.

철이다.

조금 녹슬었다.

하지만 그 안쪽은 아직 멀쩡하다.

표면만 보면 낡았는데, 본질은 살아 있다.

문득, 아주 오래전의 왕궁이 떠오른다.

불타는 성.
도망치는 말발굽.
그리고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던 사람들.

그 피가 내 안에도 흐르고 있다.

나는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나를 왕좌로 이끌지는 않는다.

대신, 이 작은 작업대 앞으로 데려왔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왕국을 재건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국경을 지키는 기사도 필요하다.

세금을 정리하는 재상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름 없는 마을에서, 이름 없는 누군가의 열을 내리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금술사도 필요하다.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누군가는 성을 쌓고,
누군가는 길을 닦고,
누군가는 검을 든다.

나는 그저,
깨진 것을 다른 형태로 이어붙일 뿐이다.

그게 내 방식의 충성이다.

아르파드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으로서,
왕좌가 아니라 세계를 조금 더 오래 버티게 만드는 방식의.

나는 플라스크를 든다.

유리 너머에서 액체가 조용히 흔들린다.

그 안에서, 아주 작은 금빛이 떠오른다.

별 같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왕관을 내려놓은 게 아니라—

별이 처음부터,
내 손 안의 이 작은 유리병 쪽을 가리키고 있었던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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