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01여관◆zAR16hM8he(f85ea685)2026-05-13 (수) 18:59:30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1막 — 칼끝을 박수 아래 세우다

킬리키아의 바람은 바다에서 불어왔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었다.
항구의 밧줄 냄새, 말의 땀 냄새, 갓 칠한 목책의 송진 냄새, 그리고 먼 나라 사절들이 끌고 온 낯선 향신료와 가죽 냄새가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다.

성 아래 넓은 마당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병참 물자를 쌓아두는 장소였다.

수레가 지나간 바퀴 자국이 아직 흙 위에 남아 있었고, 그레이가 새로 세운 배급 천막 옆에는 물통과 붕대 상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장인들은 급히 만든 관람석의 못을 마지막으로 박고 있었으며, 여관좌 사제들은 흰 천을 묶은 장대를 경기장 둘레에 세우고 있었다.

장대마다 작은 등불이 걸렸다.

낮인데도 등불을 켠 것은, 그것이 단순한 조명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등불들은 길 잃은 자의 쉼터를 알리는 표식이었고, 동시에 부상자가 생겼을 때 어느 길로 옮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안전선이었다.

그레이는 그 등불의 위치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동쪽 관람석 뒤쪽은 너무 좁습니다. 들것이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주변의 병사들이 귀를 기울였다.

“여기 상자 세 개를 치워주세요. 그리고 물통은 그쪽이 아니라 그늘 아래로 옮기는 편이 좋겠습니다. 햇볕을 오래 받으면 쓸 수 없게 됩니다.”

한 병사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레이 님.”

“그리고 이름표는요?”

“예?”

그레이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 병사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어깨를 굳혔다. 그레이는 그를 꾸짖으려는 듯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미안해 보였다.

“참가자 명단입니다. 시합 중 다치면 바로 확인해야 하니까요. 이름, 소속, 사용 무기, 금지해야 할 지병이나 신술 반동. 전부 적어두어야 합니다.”

“친선전인데도 말입니까?”

그레이는 손에 든 장부를 조금 세게 끌어안았다.

“친선전이니까요.”

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시선을 내렸다.

장부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킬리키아 친선 무력제 참가자 및 안전 관리 명부》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그레이가 직접 덧붙인 문장이 있었다.

《이름 없는 이는 없습니다.》

그녀는 누군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는다고 믿지도 않았다.

무대는 화려할수록 무너질 수 있었다.
말은 박차를 받으면 미끄러질 수 있었고, 검은 친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살을 찢을 수 있었다.
신술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튈 수 있었고, 강자들은 때때로 자기 힘이 어디까지 위험한지 늦게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레이는 이름을 적었다.

다치기 전의 이름.
다쳤을 때 불러야 할 이름.
책임을 물을 때 사라지지 않아야 할 이름.

“그레이.”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 헤툼이 계단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려오고 있다기보다 등장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단순히 걷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망토 끝이 일부러 늦게 흔들렸고, 구두 굽은 흙바닥 위에서도 무대 바닥을 두드리는 것처럼 또각거렸다. 그녀의 뒤에서는 시종 둘이 허겁지겁 뒤따라오고 있었고, 한 명은 아직 푸리나가 쓰다 만 선언문 뭉치를 들고 있었다.

“준비는?”

그레이는 장부를 넘겼다.

“관람석은 서쪽 2열을 제외하면 안전합니다. 여관좌 사제들은 세 지점에 배치했습니다. 들것 네 개, 응급 천막 두 개, 물통 열두 개, 붕대와 지혈포는 충분합니다. 다만 폐하께서 어제 추가하신 ‘폭죽을 터뜨리며 입장하는 안’은 폐기했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왜?!”

“말이 놀랍니다.”

“그럼 작은 폭죽.”

“사람도 놀랍니다.”

“그럼 소리 없는 폭죽.”

“그건 폭죽이 아닙니다.”

푸리나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레이, 너는 가끔 너무 논리적이야.”

“폐하께서는 가끔 너무 비논리적이십니다.”

“균형이 맞네!”

“아닙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 웃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그레이는 알았다.
푸리나가 가볍게 웃을수록, 그녀의 눈은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관람석의 아이들.
먼 나라 사절들의 굳은 표정.
서로의 무기를 힐끔거리는 기사들.
자기 나라의 군주가 누구와 손을 잡을지 기다리는 병사들.
그리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불안.

곧 전쟁이 온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몽골의 말발굽은 지도 위의 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탄 마을의 소문이었고, 늦게 도착한 전령의 피 묻은 숨이었고, 어느 나라가 먼저 무너질지 계산하는 회의장의 침묵이었다.

그 침묵을 너무 오래 두면,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누가 정말 강한가.
누가 도망치지 않는가.
누가 내 등을 맡길 수 있는가.
누가 나를 버리지 않는가.

푸리나는 그 질문들을 전부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대를 만들었다.

“그레이.”

“예.”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아.”

그레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약속을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씩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필요하지.”

그레이는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냥……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야.”

푸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흙바닥.
밧줄로 그은 원.
등불.
목책.
관람석.
그리고 여러 나라의 시선.

하지만 푸리나가 그 한가운데에 서자, 그 빈 공간은 갑자기 무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양팔을 펼쳤다.

“좋아!”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에 마당이 조용해졌다.

죠니 죠스타는 경기장 가장자리에서 말의 고삐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시작했네.”

그의 말투는 심드렁했지만, 눈은 이미 경기장 전체를 재고 있었다.
말이 미끄러질 만한 곳.
창기병이 돌 수 있는 반경.
관람석과 너무 가까운 위험 구간.
아스테르다스가 낙하한다면 가장 먼저 비워야 할 각도.

하융은 죠니 곁에 서 있었다.

그는 경기장을 보지 않고, 경기장에 드리운 여러 겹의 창빛을 보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
일어날 수 있었던 부상.
말이 놀라 관람석으로 뛰어든 가능성.
검이 멈추지 못하고 어깨를 깊게 가른 가능성.
누군가 웃으며 시작했다가 피를 보고 침묵하는 가능성.

그 창들 사이로, 아주 얇은 다른 빛도 있었다.

검이 멈춘 가능성.
말이 한 박자 늦게 돌아 모두가 살았던 가능성.
서로를 죽이지 않고도 서로를 인정한 가능성.

하융은 낮게 말했다.

“창이 많소.”

죠니가 물었다.

“안 좋은 쪽?”

“좋은 쪽도 있소.”

“그럼 됐네.”

죠니는 고삐를 놓고 어깨를 풀었다.

“푸리나가 또 뭔가 벌인 날치고는 나쁘지 않아.”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 폐하께 들리면 다음 막에 끌려가실 것이오.”

“이미 늦었겠지.”

실제로 푸리나는 그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으로 말했다.

너도 올라와.

죠니는 눈으로 답했다.

싫어.

푸리나는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올라오겠네!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저럴 줄 알았다.”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이튼이 모자를 바로잡았다.

그는 마당의 흙바닥과 관람석과 등불을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사절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 무장들이 자기 검을 만지는 손, 군주들이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고르는 박자를 살폈다.

그의 눈에는 아직 별자리가 그어지지 않은 별들이 보였다.

“친선전.”

레이튼은 조용히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 단어는 너무 빨리 붙은 이름일지도 몰랐다.

친선전이라고 부르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친선인가?
무력제라고 부르면 모두가 흥분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무력만을 겨루는가?
축제라고 부르면 아이들이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축제만인가?

레이튼은 손가락으로 모자챙을 가볍게 눌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그의 발밑에서 보이지 않는 서재의 문턱이 아주 얇게 열렸다.

[여관:문답의 서재].

아직 완전히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경기장 한쪽, 심판석 위의 규칙문과 참가자 명단, 외교관들의 시선과 병사들의 웅성거림 사이에 희미한 서가의 그림자가 겹쳤다.

책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다만 제목이 잠시 흐려졌다.

친선.
전력 확인.
위협.
축제.
동맹.
불안.
자존심.

그 모든 이름이 잠깐씩 잉크 번지듯 흔들렸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의 수수께끼는 생각보다 훌륭하겠군요.”

그때 푸리나가 무대 중앙에서 발을 굴렀다.

한 번.

또 한 번.

구두 굽이 흙바닥을 두드렸을 뿐인데, 마당 전체의 소리가 바뀌었다.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낮아졌다.
말들이 귀를 세웠다.
사절들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이 앞줄로 몸을 내밀었다.

푸리나는 손을 가슴 위에 얹고,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먼 길을 지나온 군주들이여, 기사들이여, 장군들이여, 가신들이여, 그리고 오늘 하루만큼은 객석의 주인이 될 모든 이들이여!”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박수가 조금 터졌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쳤다.
그다음에 병사들이 따라 쳤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절단의 수행원들도 손뼉을 쳤다.

푸리나는 그 박수를 기다렸다가,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박수 소리가 아직 살아 있네. 그럼 시작할 수 있어.”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 이곳에 모인 칼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뽑힌 것이 아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칼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죠니가 눈썹을 조금 올렸다.

하융은 창빛 사이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가벼운 축제로 시작했다가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푸리나의 한마디에 얇게 꺾였다.

푸리나는 계속 말했다.

“우리는 곧 더 큰 전쟁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동쪽에서 말발굽이 오고, 남쪽의 길은 불안하며, 각자의 성벽은 각자의 노래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녀는 관람석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된다.”

잠시 침묵.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가?”

누군가 숨을 삼켰다.

“저 기사는 내 옆에서 무너지지 않는가?
저 군주는 내 백성을 숫자로만 보지 않는가?
저 사제는 내 병사의 비명을 줄여줄 수 있는가?
저 지휘관은 후퇴할 때 누구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저 활은 전쟁을 더 키우는가, 아니면 끝내는가?”

레이튼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좋은 질문입니다, 폐하.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러니 오늘은 그 질문에 답하는 날이다!”

그녀가 양팔을 크게 펼쳤다.

“하지만 답은 피로 쓰지 않는다. 오늘의 답은 박수로 쓴다!”

이번에는 박수가 더 크게 터졌다.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규칙!”

그레이가 즉시 앞으로 나왔다.

푸리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레이는 갑자기 모든 시선을 받자 잠깐 굳었다.

“……폐하.”

“응?”

“제가 읽습니까?”

“응!”

“폐하께서 선언하시는 것이 더……”

“그레이가 읽어야 모두가 살아.”

그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그 말만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레이는 잠시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녀는 큰 목소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말했다.

“킬리키아 친선 무력제의 안전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마당은 이상하게 더 조용해졌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푸리나처럼 사람을 휘어잡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읽는 규칙에는, 누군가 밤새 잠들지 않고 숫자와 이름을 맞춘 흔적이 있었다.

“첫째. 살상 금지.”

짧고 단정한 문장.

“둘째. 급소를 향한 치명타가 성립한 경우, 실제 타격 전에 심판과 여관좌 사제가 정지 선언을 내립니다.”

사제들이 고개를 숙였다.

“셋째. 국가 단위 권능, 광역 저주, 부활, 사령 운용, 정신 지배, 상대의 안식을 침해하는 신술은 금지합니다.”

몇몇 사절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넷째. 참가자는 경기 전 이름, 소속, 사용 무기, 주요 신술, 반동 위험을 신고해야 합니다. 신고하지 않은 수단을 사용해 부상이 발생할 경우, 승패와 관계없이 실격 처리합니다.”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건 진짜 무섭네.”

하융이 대답했다.

“장부의 칼은 날카롭소.”

“맞아. 맞으면 오래 가.”

그레이는 계속 읽었다.

“다섯째. 부상자가 발생하면 승부보다 치료가 우선됩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장부 모서리를 조금 세게 눌렀다.

“여섯째.”

그레이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장부에 적힌 문장을 그대로 읽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서 다치는 사람은, 누구도 ‘친선전 중 부상자 1명’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마당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하지만 모두가 들었다.

“이름을 확인하겠습니다. 다친 이유를 확인하겠습니다. 같은 이유로 다시 다치지 않도록 경기장을 고치겠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이상입니다.”

잠시 침묵.

그러더니 관람석 한쪽에서 박수가 들렸다.

처음에는 푸리나였다.

그녀가 가장 먼저 손뼉을 쳤다.

그다음에 아이들이 따라 쳤다.

그리고 병사들이, 사제들이, 사절들이 차례로 박수를 보탰다.

그레이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 그…… 규칙 고지에 박수는 필요 없습니다.”

푸리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필요해.”

“아닙니다.”

“있어. 내가 방금 정했어.”

죠니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벌써 시작이네.”

레이튼은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규칙이 무대에 오르는 순간도 드문 법이지요.”

푸리나는 다시 중앙으로 나섰다.

그녀는 그레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잘했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장부만 더 꼭 끌어안았다.

푸리나는 다시 모두를 향해 섰다.

이번에는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조금 빠졌다.

“자, 이제 무대를 열겠다.”

여관좌 사제들이 등불을 들어 올렸다.

바람이 불었다.

등불의 불꽃은 흔들렸지만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발밑에서 흙바닥이 아주 얇게 빛났다.

그것은 금빛도, 은빛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극장의 먼지 속에 내려앉는 조명처럼 부드러운 빛이었다.

푸리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그림자는 막이 되었다.
흙바닥의 원은 무대의 경계가 되었다.
목책은 객석의 난간이 되었고, 등불은 천장의 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완전히 바꾸는 압도적인 권능이 아니었다.

푸리나는 사람을 끌고 가지 않았다.
누구도 억지로 배우가 되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느꼈다.

이곳은 이제 단순한 마당이 아니다.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남의 싸움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자리.

각자가 자기 방식으로 서야 하는 무대.

푸리나는 말했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당 위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전장을 모르는 척하는 놀이터도 아니다.”

빛이 조금 더 넓어졌다.

“이곳은 그대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들고도, 죽음이 아니라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드문 장면이다.”

그녀는 관람석의 병사들을 보았다.

“그대들은 관객이 아니다.”

아이들을 보았다.

“그대들도 마찬가지다.”

사절들을 보았다.

“군주와 기사들도, 오늘만큼은 타인의 힘을 평가하는 자리에만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손을 높이 들었다.

“모든 이는 자기 삶의 배우이며, 모든 칼끝에는 그것을 든 자의 이유가 있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니 보여다오.”

빛이 무대의 경계를 따라 달렸다.

“그대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등불이 하나씩 밝아졌다.

“무엇을 지키는지.”

객석의 숨소리가 맞물렸다.

“어디까지 물러서지 않는지.”

바람이 멎었다.

“그리고 어디서 멈출 수 있는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삶은 한 편의 극이며—”

그녀의 손끝에서 조명이 피어났다.

“모든 이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일지니!”

[여관:극장]이 열렸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순간, 경기장 위에 보이지 않는 막이 올랐다.

박수는 없었다.

아직은.

모두가 숨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흐마이스터는 관람석 아래 그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갑주는 햇빛을 삼키듯 어두웠다.
죄악의 갑주는 오늘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친선전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갑옷은 자신이 짊어진 것을 잊지 않았다.

푸리나는 멀리서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호흐마이스터 경!”

호흐마이스터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 헤툼 폐하.”

“즐기고 있나?”

주변의 몇몇 기사가 긴장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경기장을 보았다.

칼을 찬 자들이 서로를 죽이지 않기 위해 규칙을 세운 장소.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도 아직 피를 흘리지 않은 마당.
죄를 입은 갑옷이, 오늘 하루만큼은 누구의 목을 베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녀는 조용히 답했다.

“예.”

푸리나가 활짝 웃었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의 다음 말에 그 웃음은 조금 느려졌다.

“모두가 무기를 들고도 서로를 죽이지 않는 광경은 귀합니다.”

마당 한구석이 잠깐 차가워졌다.

푸리나는 그 말을 받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그러면 오늘은 귀한 날이네.”

“그렇습니다.”

“좋아. 그 귀한 날을 망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호흐마이스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가 그 말을 듣고 어깨를 굳혔다.

“……명령이었나요?”

곁의 리보니아 기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님, 아직 입장 전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벌써 실전인데요?”

그녀의 손은 검자루에 얹혀 있었다.

그 손등 위로 아주 희미한 생명성의 빛이 감돌았다.
금목서의 꽃잎 같은 빛이었다.

아스트리트는 푸리나의 무대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생명을 긍정한다, 라……”

그녀는 아직 이 축제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알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전쟁을 피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오더라도, 그 안에서 생명이 꺾이지 않도록 서로의 방식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조금 더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때 미하일라가 조용히 입장했다.

관람석 위쪽, 니케아 사절단이 마련한 자리였다.

자주빛 망토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는 오늘 활을 들고 있었지만, 전장에 나설 때처럼 완전히 당겨진 상태는 아니었다. 활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만으로도 주변의 기사들은 등을 곧게 폈다.

푸리나는 그녀를 보며 손을 들었다.

“미하일 황제!”

미하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공적인 자리의 그녀는 황제였다.

그녀의 눈빛은 우아하고, 말은 절제되어 있었다.

“헤툼 폐하. 훌륭한 무대입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시작하기 전의 질서가, 이미 절반의 무대입니다.”

푸리나는 감탄했다.

“좋은 말이네. 나중에 써도 돼?”

“출처를 밝히신다면.”

“인색해!”

미하일라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것이 미소였는지는 가까운 이들만 알 수 있었다.

아래쪽에서는 알렉산드리나 아센이 그 대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사람처럼.
그러나 단순한 연기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자세에는 결핍을 숨기려는 과장이 있었고, 동시에 그 결핍을 매일 훈련으로 깎아낸 사람의 정직함이 있었다.

“세 발이라고 했지.”

곁에 있던 수행원이 물었다.

“예?”

알렉산드리나는 미하일라의 활을 보며 말했다.

“아마 내 차례가 오면, 저 황제는 세 발만 쏠 거야.”

“어찌 아십니까?”

“위대한 사람들은 종종 제한을 둔다. 그래야 상대가 자기 발로 어디까지 왔는지 볼 수 있으니까.”

그녀는 손을 주먹 쥐었다.

“그렇다면 나도 보여야지.”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흉내가 어디까지 걸을 수 있는지.”

다른 쪽에서는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조용히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의 빛을 보았다.

푸리나의 무대는 산 자를 올려세우는 빛이었다.
박수와 조명과 다음 막.
넘어진 자에게 다시 일어날 이유를 주는 힘.

아레는 그 빛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산 자에게는 저런 빛이 필요하다.
아이에게는 어제의 불길보다 오늘의 인형극이 필요하고, 병사에게는 죽음의 이유보다 다시 검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무대 아래도 보았다.

박수치지 못하는 손.
명령 아래 가라앉은 이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남긴 침묵.

아레는 조용히 손가락을 접었다.

보이지 않는 실 하나가 그녀의 손끝에서 느슨하게 늘어졌다.

오늘 이곳에서 죽는 이는 없어야 한다.

하지만 죽지 않는 병사라 해도, 버리는 명령은 버릇이 된다.

그녀는 그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푸리나는 그 시선을 느낀 듯 아레 쪽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서로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곳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 차이가, 오히려 오늘의 무대를 더 깊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레플리카가 검은 성역의 사제들과 함께 치료 천막 앞에 섰다.

그녀의 흑진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팔은 붕대 아래 조용히 숨을 쉬듯 맥동하고 있었다.

한 부상병이 그 팔을 보고 움찔했다.

레플리카는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화내지 않았다.

다만 조금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부상병이 당황했다.

“아, 저는……”

“괜찮다. 낯선 것은 무서운 법이다.”

레플리카는 경기장을 보았다.

“오늘 내 역할은 고통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줄이는 것이다.”

그녀는 천막 입구에 손을 얹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대들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말은 치료 천막 안쪽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푸리나는 모든 인물을 차례로 보았다.

죠니.
하융.
레이튼.
그레이.
호흐마이스터.
아스트리트.
미하일라.
알렉산드리나.
아레.
레플리카.
그리고 이름이 너무 많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병사들, 사제들, 수행원들, 관객들.

그녀는 그 모든 사람을 하나의 무대 위에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의 대본에 밀어 넣고 싶지는 않았다.

각자의 칼끝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들을 지우면 안 된다.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자!”

마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오늘의 첫 번째 막은 간단하다.”

그녀는 웃었다.

“서로 죽이지 말 것.”

그레이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그건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멋진 거야.”

푸리나는 계속했다.

“오늘의 두 번째 막은 더 어렵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로를 얕보지 말 것.”

호흐마이스터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미하일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르다스는 말없이 하늘을 보았다.
그가 떨어질 곳을 재는 눈이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늘의 세 번째 막은 가장 어렵다.”

그녀는 자기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상대의 칼끝에서, 그 사람이 지키려는 것을 볼 것.”

마당 전체가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레이튼의 서재가 아주 작게 페이지를 넘겼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 하나가 천장 없는 하늘 위에 떠올랐다.

푸리나는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럼, 킬리키아 친선 무력제.”

잠깐 멈춤.

그녀는 너무나 푸리나다운 얼굴로 활짝 웃었다.

“개막!”

박수가 터졌다.

이번에는 정말 박수였다.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병사들이 창대를 바닥에 두드렸다.
사절들이 예의상 시작한 박수에 어느새 힘을 실었다.
여관좌 사제들의 등불이 흔들렸다.

그 박수 아래에서 칼들이 빛났다.

아직 뽑히지 않은 칼.
곧 부딪칠 칼.
멈추어야 할 칼.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도, 누군가의 이유를 증명해야 할 칼.

죠니는 말 위에 올랐다.

고삐를 잡고, 경기장 너머를 보았다.

“첫판은 나였지?”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창 몇 개가 이미 부러졌소.”

“내 거?”

“몇몇 가능성에서는.”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럼 안 부러지는 쪽으로 가면 되겠네.”

하융은 회색빛 눈으로 창문 너머를 보았다.

“왼쪽으로 너무 빨리 돌면 말이 미끄러지오.”

“얼마나?”

“반 박자.”

“좋아.”

죠니는 창을 들었다.

“반 박자 늦게 돈다.”

그의 말발굽이 흙을 긁었다.

아스테르다스는 반대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푸리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자, 그럼.”

바람이 불었다.

무대 위의 먼지가 낮게 일었다.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1막의 커튼은 여기까지.”

그리고 다음 순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개막전, 준비!”
(최대 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