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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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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작성자 여관◆zAR16hM8he작성일 2026-05-08 (금) 01:04:15갱신일 2026-05-13 (수) 19:12:03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 2막 — 떨어지는 별과 멀리 돌아가는 길

박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마당을 둘러싼 목책 위로, 관중들의 손뼉 소리가 잔물결처럼 번졌다. 아이들은 앞줄에서 발끝을 들고 경기장 안을 보려 했고, 병사들은 창대를 흙바닥에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사절들은 아직 예의와 경계 사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푸리나 헤툼은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박수를 충분히 들었다.
아직 피가 흐르지 않은 칼들.
아직 죽음으로 굳지 않은 시선들.
아직 서로를 적이라 부르지 않은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박수 아래에 있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한마디에 박수가 조금 더 커졌다.

“그럼, 킬리키아 친선 무력제의 첫 번째 개막전을 시작하겠다!”

그녀는 한 손을 높이 들었다.

무대의 조명이 움직였다.

아니, 실제 조명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여관좌 사제들이 세워둔 등불은 그대로였고, 하늘의 태양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의 [여관:극장] 안에서 빛은 방향을 얻었다. 관객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경기장 서쪽 입구로 모였다.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처음에는 한 필이었다.

그 뒤로 세 필, 다섯 필, 일곱 필.

킬리키아의 기사들이 경기장 바깥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창을 겨누지 않았다. 방패를 들어 위협하지도 않았다. 대신 관중석과 목책 사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돌았다.

말들은 원을 그렸다.

처음에는 느린 원이었다.
두 번째 바퀴에서는 간격이 맞았다.
세 번째 바퀴에서는 서로의 말발굽 소리가 하나의 박자로 겹쳤다.

죠니 죠스타는 그 중심에 있었다.

말 위의 자세는 낮았다. 화려한 인사도, 과장된 제스처도 없었다. 그는 고삐를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창대를 가볍게 눌렀다. 눈은 관중을 보지 않았다. 목책, 등불, 아이들이 몰린 구석, 흙바닥의 파인 자국, 말이 미끄러질 만한 곳을 차례로 훑었다.

“관중석 바깥으로 한 바퀴.”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정확히 들었다.

“목책에 붙지 마라. 저쪽 유성이 삐끗하면, 구경꾼이 먼저 날아간다.”

기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발굽의 원이 조금 더 넓어졌다.
그 원은 단순한 행진이 아니었다.

《순환교대: 끊이지 않는 행렬》.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앞선 말이 지나간 자리를 다음 말이 메웠다. 한 기수가 속도를 늦추면 다음 기수가 그 간격을 받았다. 관중석과 경기장 사이에, 살아 움직이는 안전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행렬은 바깥으로 퍼지는 대신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윤회진: 나선행군》.

나선은 사람을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한 둘레였다.

그레이는 그 광경을 보고 장부에 빠르게 표시했다.

“죠니 경의 안전선 배치는 유효합니다. 서쪽 목책 뒤 인원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북쪽 목책에는 여관좌 사제 한 명 추가 배치해주세요.”

곁의 병사가 고개를 숙이고 달려갔다.

푸리나는 손을 입가에 모아 외쳤다.

“죠니! 의외로 성실해!”

죠니는 말 위에서 고개만 돌렸다.

“의외는 빼줘.”

“그럼 성실해!”

“그것도 좀 이상한데.”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푸리나는 그 웃음이 사라지기 전에, 두 팔을 크게 펼쳤다.

“자, 소개하겠다!”

그녀는 일부러 숨을 들이켰다.

죠니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하지 마.”

푸리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킬리키아의 나선! 말발굽 위의 찰나! 여관의 성좌 아래에서 회전과 윤회를 창끝에 싣는 기사단장!”

죠니는 낮게 중얼거렸다.

“소개가 길어.”

푸리나는 더 크게 외쳤다.

“《멀리 돌아가는 길》의 죠니 죠스타!”

박수가 터졌다.

죠니는 그 박수 속에서 말의 목을 가볍게 두드렸다.

“짧으면 안 되나?”

푸리나가 웃으며 답했다.

“짧으면 재미없잖아!”

“그건 폐하 기준이고.”

“오늘 기준은 내 기준이야!”

“그렇겠지.”

죠니는 포기했다.

그의 시선이 경기장 반대편으로 향했다.

박수 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동쪽 입구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스테르다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달리지도 않았다.
자기 힘을 과시하듯 땅을 울리지도 않았다.
그저 한 걸음씩 걸었다.

하지만 그 걸음은 이상했다.

그가 땅을 밟는 순간마다, 흙바닥이 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정해둔 지점에 내려앉는 것처럼 보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의 몸은 무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별의 핵처럼, 조용히 밀도를 얻고 있었다.

푸리나는 이번에도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상대!”

그녀의 손이 아스테르다스를 가리켰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유성! 민다우가스의 망치! 그러나 누구의 톱니바퀴도 아닌 자!”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조금 들었다.

“아스테르다스!”

그는 박수 속에서 짧게 말했다.

“망치라는 말은 맞아.”

잠깐 멈춤.

“톱니바퀴는 아니고.”

죠니가 피식 웃었다.

“그건 마음에 드네.”

아스테르다스는 죠니를 보았다.

“너도 말 위에서 도는 톱니바퀴는 아닌 것 같군.”

“아니지. 톱니바퀴면 좀 더 싸게 굴렀을 거야.”

“비싼가?”

“말값이 비싸.”

아스테르다스는 잠깐 생각했다.

“그건 그렇군.”

푸리나는 양손을 반짝이며 두 사람 사이로 걸어 나왔다.

“좋아. 벌써 친해졌네!”

죠니가 말했다.

“친해진 건 아니고.”

아스테르다스가 덧붙였다.

“서로 가격을 확인했을 뿐이다.”

“무슨 가격?!”

푸리나가 눈을 크게 뜨자, 관중석에서 다시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레이가 심판석 옆에서 손을 들었다.

“두 참가자 모두 준비되었습니까?”

죠니는 창을 세웠다.

“준비됐어.”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질 곳은 정했다.”

그레이는 눈썹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표현은 안전상 불안합니다만.”

아스테르다스가 담담히 답했다.

“사람 위에는 떨어지지 않겠다.”

그레이는 장부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 부분은 반드시 지켜주세요.”

푸리나는 경기장 중앙에서 물러나며 손을 들었다.

“첫 번째 개막전!”

무대의 빛이 낮게 깔렸다.

“죠니 죠스타 대 아스테르다스!”

여관좌 사제들이 등불을 들어 올렸다.

목책 바깥의 기병들이 속도를 늦췄다.

레이튼은 관람석 한쪽에서 모자챙을 가볍게 만졌다.

“흥미롭군요.”

하융이 그의 곁에서 회색빛 시선으로 경기장을 보고 있었다.

수많은 창이 열렸다.

말이 미끄러지는 창.
창끝이 목책을 부수는 창.
청흑빛 낙하가 관중석으로 튀는 창.
죠니가 너무 빨리 돌아 말의 앞다리가 접히는 창.
아스테르다스가 멈추지 못해 친선전이 아니게 되는 창.

그리고 그 사이에, 온화한 창 하나.

둘 모두 멈추는 결말.

하융은 낮게 말했다.

“둘 중 하나가 반 박자만 늦어도, 친선이 아니게 되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질문은 단순하군요.”

그는 미소 지었다.

“속도와 회전 중 어느 쪽이 빠른가가 아니라, 어느 쪽이 먼저 멈출 수 있는가.”

푸리나가 손을 내렸다.

“시작!”

처음 움직인 것은 아스테르다스였다.

그는 달리지 않았다.

그의 내력은 먼저 식었다.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았다.
함성처럼 터지지 않았다.
오히려 밤하늘처럼 깊어졌다. 그의 안쪽에서 어둡고 차가운 별의 핵이 생겨나는 듯했다.

《흐르는 별이라 하여》.

별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흘러야 할 무게가 있었다.
아스테르다스의 몸 안에서 그 무게가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다음 순간.

《낙하하는 별이라 하여》.

그는 죠니를 향해 떨어졌다.

앞으로 움직였지만, 그것은 전진이 아니었다.
옆으로 꺾였지만, 그것은 회피가 아니었다.
흙바닥을 박차고 약간 떠올랐지만, 그것은 도약도 아니었다.

그가 정한 곳이 아래였다.

그러므로 모든 방향은 아래가 되었다.

청흑빛이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관중석의 아이 하나가 숨을 삼켰다.

죠니의 말은 정면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말은 도망치지 않았다.
겁먹고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다.

죠니는 고삐를 당기지 않았다.

그저 손목을 아주 조금 틀었다.

말머리가 돌아갔다.

《윤회기승: 순환의 궤도》.

첫 번째 원에서는 말의 보폭이 맞았다.

청흑빛 낙하가 말의 앞가슴을 찢고 지나갈 위치를, 죠니는 반 걸음 바깥으로 흘렸다. 피한 것이 아니었다. 정면이라는 이름을 비켜 원을 그은 것이다.

두 번째 원에서는 죠니의 호흡이 말의 숨과 겹쳤다.

말의 갈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죠니의 창끝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허리, 어깨, 손목, 무릎, 등자 위의 발끝이 모두 같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세 번째 원에서는 창끝의 흔들림이 줄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죠니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충돌은 없었다.

그저 바람이 갈라졌다.

박수도, 탄성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관중들은 방금 무엇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레이튼만이 조용히 말했다.

“한쪽은 모든 방향을 아래로 만들고, 다른 한쪽은 모든 회피를 원으로 바꾸는군요.”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좋아. 칼끝보다 궤적이 먼저 대사를 하고 있어.”

죠니가 멀리서 외쳤다.

“해설은 나중에 해줘. 지금 좀 바쁘거든.”

“들렸어?!”

“목소리가 크잖아.”

아스테르다스는 이미 두 번째 낙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죠니의 원을 보았다.

도망치는 원이 아니었다.

빙빙 도는 회피도 아니었다.

그 원은 같은 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원이었다.
그리고 매번 돌아올 때마다 더 위험한 위치를 품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짧게 말했다.

“저건 도망치는 게 아니야.”

죠니가 창을 비스듬히 들었다.

“알아봤어?”

“돌아서 같은 순간에 오는 거군.”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쪽도 돌진은 아니네.”

아스테르다스가 자세를 낮췄다.

“그럼?”

“떨어지는 거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스테르다스가 다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죠니의 창끝이 그어둔 허공 위에 발을 디뎠다.

《발을 디디다》.

말발굽이 일으킨 흙먼지.
창끝이 막 지나간 궤적.
목책 아래 드리운 짧은 그림자.
일반적인 전사라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길 그것들이, 아스테르다스에게는 낙점이 되었다.

죠니가 창을 찔렀다.

첫 찌름은 어깨를 스쳤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스친 궤적을 밟고 몸을 돌렸다.

죠니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내 창을 발판으로 썼다고?”

아스테르다스가 낮게 답했다.

“네가 내 앞에 길을 그었다.”

“그럼 다음 건 좀 비싸게 받아야겠네.”

두 번째 찌름은 허공을 찔렀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허공 아래로 떨어지며 죠니의 말 안쪽으로 들어왔다.

죠니는 안장에서 몸을 반쯤 빼냈다. 등자 위의 발끝이 말의 옆구리, 흙바닥, 다시 안장으로 흐름을 이었다.

《윤회보: 흐름의 보법》.

그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말 위에만 있지도 않았다.

흐름 위에 있었다.

세 번째 찌름은 아스테르다스가 지나간 뒤의 빛을 갈랐다.

관중들은 빗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빗나간 것이 아니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왜?”

“매번 조금씩 좁아지고 있습니다.”

죠니의 창끝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첫 번째 원은 컸다.
두 번째 원은 조금 작았다.
세 번째 원은 더 작았다.

《윤회창: 나선수렴》.

창끝은 매번 조금씩 더 좁은 나선을 그리며, 아직 오지 않은 한순간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움직일 길이 줄어들고 있다.

죠니는 그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를 몰고 있었다.
가장 빠른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도착할 수 있는 모든 낙점을 조금씩 한 지점으로 모으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재밌군.”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 말은 보통 위험하던데.”

“맞아.”

아스테르다스의 몸이 낮아졌다.

경기장 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푸른빛이 흙먼지 사이로 길게 그어졌다.

《하늘을 가르는 스파킹 메테오》.

아스테르다스가 지나간 자리마다 청흑빛과 푸른빛이 섞인 궤적이 남았다. 그것은 단순한 잔상이 아니었다. 이미 밟은 길이었고, 다시 밟을 수 있는 길이었다. 아직 그리지 않은 궤적조차 그가 곧 도착할 장소를 향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경기장 바깥으로 빠지는 듯했다.

죠니의 말이 원을 넓혔다.

그 순간, 아스테르다스는 자신이 이미 그어둔 푸른 궤적을 다시 밟았다.

그의 몸이 원 바깥에서 안쪽으로 떨어졌다.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죠니 경.”

하융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는 경기장 밖에 있었지만, 창문 너머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한 창에서는 죠니가 지금 말머리를 틀었다.
말의 앞다리가 접혔다.
죠니는 땅에 떨어졌고, 아스테르다스의 낙하는 멈추지 못했다.

하융은 그 창을 닫았다.

“반 박자 늦게 도시오. 지금 돌면 말의 앞다리가 접히오.”

죠니는 보지 않고 답했다.

“들었어.”

그는 본능보다 반 박자 늦게 돌았다.

말의 앞발이 흙을 찍었다.

아스테르다스의 낙하가 말의 갈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박자 빨랐다면 부러졌을 다리가, 반 박자 늦은 회전 속에서 살아남았다.

죠니는 짧게 숨을 뱉었다.

“괜찮아.”

말발굽이 다시 원을 그렸다.

“아직 돈다.”

《생과 사를 반복하여 기지의 결과를 보다》.

소모된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말발굽이 흙을 찍고, 창끝이 원을 그을 때마다, 죠니의 차력은 죽은 흐름처럼 흩어지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호흡은 거칠어졌지만 끊기지 않았다. 손목의 피로는 원을 한 번 더 돌 때마다 다른 박자로 재배치되었다.

반복은 저주가 아니었다.

반복은 아직 달릴 수 있다는 증거였다.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번뜩였다.

죠니의 나선은 이제 더 좁아지고 있었다.

다음 세 번.

아니, 어쩌면 두 번.

그 안에 자신의 낙점은 죠니의 창끝으로 몰릴 것이다.

그러면 길을 바꿔야 한다.

아스테르다스는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좋아.”

푸른 궤적 위에서 그의 몸이 낮아졌다.

“그럼 예열은 생략하지.”

죠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경기장 위의 청흑빛이 한순간 흰빛으로 뒤집혔다.

그것은 불꽃이 아니었다.

아니, 불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아스테르다스의 몸이 영묘한 백광으로 타올랐다.

《영묘한 광채의 초신성》.

그는 빨라지지 않았다.

빨라지는 과정이 없었다.

점화되는 순간, 이미 최대속이었다.

아까까지 쌓였던 피로가 사라졌다.
흔들리던 호흡이 정렬되었다.
근육의 지연이 지워졌고, 관절의 미세한 어긋남이 최대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춰 되돌아갔다.

그것은 회복이라기보다 존재의 조정이었다.

아스테르다스라는 별이, 지금 이 10분 동안 가장 빠르게 떨어질 수 있는 상태로 다시 쓰였다.

그는 낮게 선언했다.

“빛을 이끄는 길이 되리라.”

그 순간, 관중들은 착각했다.

아스테르다스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빛이 그의 뒤를 따라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을 가르는 푸른 궤적이 백광으로 번졌다.
청흑빛 유성은 더 이상 단순히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길을 만들었다.

빛을 끌고 가는 초신성처럼.

죠니의 말이 크게 숨을 뿜었다.

죠니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빨라졌네.”

백광이 시야를 갈랐다.

“아니.”

그는 창대를 고쳐 쥐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건가.”

아스테르다스가 죠니의 원 안쪽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죠니는 창을 회수하지 않았다.
말을 억지로 꺾지도 않았다.

충격이 흉갑 앞에 닿았다.

청흑빛과 백광이 뒤섞인 압력.

죠니의 몸은 밀려나야 했다.
말의 앞다리는 꺾여야 했고, 창끝은 흐트러져야 했다.
관중석 쪽 목책은 부서져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붕괴가 한 겹의 얇은 외피 위에서 멈췄다.

《정지된 외피: 찰나의 갑주》.

단단한 갑옷이 아니었다.

무너지는 순간을 잠시 붙잡은 찰나였다.

갑옷의 표면 위에서 빛이 미끄러졌다. 죠니의 어깨가 흔들렸고, 말이 한 걸음 밀렸다. 하지만 중심은 무너지지 않았다.

죠니는 이를 악물었다가, 낮게 말했다.

“위험했네. 방금 건 농담으로 맞을 게 아니야.”

아스테르다스가 답했다.

“농담으로 친 것도 아니야.”

“그건 알겠어.”

그레이가 즉시 손을 들었다.

“북쪽 안전선 뒤로 물러나세요. 사제 두 명, 대기.”

여관좌 사제들이 등불을 들어 올렸다.

푸리나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히 멋진 장면이 아니었다.

칼끝이 정말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이 무대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둘 중 하나가 강한 것보다 둘 모두 멈출 줄 알아야 했다.

죠니는 숨을 들이켰다.

아스테르다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것은 인정해야 했다.

예열 없는 최대속.
점화된 순간 이미 도착하는 초신성.
그 빛을 뒤쫓아서는 늦는다.

죠니는 고삐를 느슨하게 잡았다.

“그럼 나는 더 멀리 돌아야겠네.”

그의 발밑에서, 말발굽의 소리가 멀어졌다.

아니, 가까워졌다.

둘 다 아니었다.

그 순간 죠니의 여관은 방이 아니었다.

벽난로도 없었다.
침대도 없었다.
문패도 없었다.

말발굽이 땅을 치는 소리.
창끝이 마지막으로 떨리는 각도.
숨이 끊기기 직전의 금빛 한 박자.
생과 사 사이에서, 모든 움직임이 단 한순간으로 수렴하는 자리.

그것이 죠니의 [여관:찰나]였다.

《영원할 찰나》.

아주 얇게, 경기장 일부가 그 여관에 닿았다.

죠니의 눈에 아스테르다스의 궤적이 겹쳐 보였다.

《황금의 동경》.

생과 사 사이의 모든 움직임이 무한한 회전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스테르다스는 바퀴가 아니었다. 그는 회전 안에 얌전히 들어오는 별이 아니었다. 매번 다른 곳으로 떨어지고, 매번 자신이 정한 곳에 도착하는 초신성이었다.

하지만 그 빛에도 오차는 있었다.

오차라기보다, 닿기 전의 틈.

죽이지 않기 위해 멈추어야 하는 한 치.

죠니는 그 한 치를 보았다.

말발굽이 한 번 더 돌았다.

창끝이 마지막 나선을 그렸다.

《윤회창: 나선수렴》.

첫 번째 원.
두 번째 원.
세 번째 원.
그리고 더 멀리 돌아온 길.

《멀리 돌아가는 길》.

그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가장 빠른 길로는 이미 늦었다.
그러므로 멀리 돌았다.

하지만 멀리 돌아온 길은, 가장 정확한 순간에 도착했다.

아스테르다스는 마지막 낙점을 정했다.

그의 주먹은 단순한 타격이 아니었다.

《유성추무》.

낙하.
마찰.
발화.
충돌.
진동.

그 모든 과정이 몸 안에서 한 번에 겹쳐졌다.

그리고 마지막.

《유성진천》.

그 일격은 사람의 살을 찢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죠니와 말의 중심, 자세, 균형, 내력의 축, 전장 내 위치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위치를 향했다.

친선전이 아니었다면.

그 위치에서 멈추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아스테르다스는 점화된 순간 이미 도착해 있었다.

죠니는 멀리 돌아, 그 도착점에 늦지 않게 와 있었다.

먼지가 솟았다.

말이 앞발을 들었다.

백광이 창끝 위에서 갈라졌다.

그레이가 숨을 삼켰다.

하융은 온화한 창 하나가 아직 닫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레이튼은 모자챙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떴다.

푸리나는 손을 쥐었다.

그 순간.

여관좌 사제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갈랐다.

“정지!”

모든 것이 멈췄다.

아스테르다스의 주먹은 죠니와 말의 중심을 무너뜨릴 한 치 앞에서 멈춰 있었다.

죠니의 창끝은 아스테르다스의 갑옷 틈 아래, 목으로 이어지는 선의 한 치 앞에서 멈춰 있었다.

말은 거칠게 숨을 뿜었다.

죠니의 손목은 떨렸다.

아스테르다스의 백광은 천천히 청흑빛으로 가라앉았다.

경기장 위에 길게 남은 빛의 궤적들이, 마치 밤하늘에 잘못 내려앉은 별자리처럼 흔들렸다.

아무도 바로 박수치지 못했다.

모두가 방금 본 것이 친선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레이가 먼저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양측 치명타 성립. 정지 판정. 부상 없음.”

그녀는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무승부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관중석에서 뒤늦게 소리가 터졌다.

처음에는 탄성이었다.

그다음은 박수였다.

목책 바깥의 기병들이 창대를 들어 올렸다. 아이들이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병사들이 말발굽 박자에 맞춰 창대를 두드렸다.

푸리나는 양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 개막전 무승부! 완벽해!”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무승부가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폐하.”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둘 다 살아 있고, 둘 다 멋있었잖아. 완벽해!”

“평가 기준이 너무 감상적입니다.”

“오늘은 감상도 규칙이야!”

“그런 규칙은 없습니다.”

“지금 만들었어!”

죠니는 말 위에서 창을 내렸다.

“저럴 줄 알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손끝에 빛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죠니가 그를 보며 말했다.

“맞았으면 많이 아팠겠네.”

아스테르다스가 답했다.

“찔렸으면 나도 아팠을 거다.”

“친선전이라 다행이네.”

아스테르다스는 경기장 위의 궤적을 보았다.

아직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저기서 멈추지 못하겠지.”

죠니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의 말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러니까 오늘 멈춘 거겠지.”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남은 빛을 바라보았다.

“빛을 이끄는 길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남을 수 있다면.”

죠니는 창대를 어깨에 얹었다.

“그럼 오늘은 좋은 길이었네.”

하융이 경기장 밖에서 조용히 말했다.

“비껴간 창들 중, 이 결말이 가장 온화하였소.”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온화했다기엔 목숨줄이 좀 가까웠는데.”

아스테르다스가 답했다.

“가까웠으니까 온화한 거다. 닿지는 않았으니까.”

죠니는 잠깐 그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리투아니아식 농담은 무겁네.”

“농담은 아니었다.”

“그럼 더 무겁고.”

레이튼은 박수 속에서 천천히 말했다.

“오늘의 질문에는 적절한 답이었습니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오, 레이튼! 해설!”

“해설이라기보다 정리입니다.”

레이튼은 경기장에 남은 원과 빛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죽이지 않고도 자신의 길을 증명했습니다. 한쪽은 회전을 완성했고, 다른 한쪽은 빛의 길을 남겼습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첫 경기부터 완벽했네!”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폐하, 다음 경기 전 경기장 보수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북쪽 목책 일부가 흔들렸고, 흙바닥 중앙이 패였습니다. 등불 두 개도 위치를 조정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좋아! 막간이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결국 쉬는 시간도 연극이네.”

아스테르다스는 경기장을 나서며 짧게 말했다.

“나쁘지 않은 무대였다.”

푸리나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치?!”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돌렸다.

“떨어질 곳을 정해도, 누군가 다치지 않을 수 있는 무대라면.”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가끔은 필요하겠지.”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 그 말, 오늘의 첫 번째 호평으로 기록!”

그레이가 장부를 들었다.

“정말 기록합니까?”

“응!”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장부 한쪽에 작게 적었다.

《제1경기 종료. 무승부. 부상 없음. 경기장 일부 보수 필요.》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아스테르다스 경: 무대에 대해 긍정적 발언.》

죠니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그런 것도 적어?”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기록해두면, 나중에 같은 이유로 싸우지 않아도 될 때가 있습니다.”

죠니는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네.”

박수는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그 박수 아래에서, 초신성은 사람을 불태우지 않고 궤적만을 남겼다.

회전은 상대를 꿰뚫지 않고 하나의 찰나로 완성되었다.

첫 번째 친선전은 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두 개의 길을 남겼다.

하나는 빛을 이끄는 초신성의 길.

하나는 멀리 돌아, 가장 정확한 순간에 도착하는 길.

그리고 그 두 길은, 푸리나의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고 교차했다.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 3막 — 죄를 입은 갑주와 생명의 검

경기장 보수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레이는 “조금”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애매한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북쪽 목책 세 곳의 고정못을 다시 박고, 흙바닥 중앙의 파인 부분을 다지고, 등불 두 개의 위치를 반 보씩 뒤로 물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막간!”

그리고 박수를 유도하려 했다.

그레이는 바로 말렸다.

“폐하, 막간이 아니라 안전 점검입니다.”

“안전 점검도 막간처럼 하면 재미있잖아.”

“재미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있어!”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입을 삐죽였다가, 관중석을 향해 돌아섰다.

“좋아! 여러분, 지금은 아주 중요한 막간이다! 무대가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박수를!”

그레이가 말리기도 전에 박수가 터졌다.

목책을 고치던 병사들이 당황해서 못을 떨어뜨렸고, 여관좌 사제 하나가 등불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이마를 짚었다.

“폐하……”

“왜? 다들 힘내잖아.”

“못을 떨어뜨렸습니다.”

“그건…… 박수가 너무 훌륭해서?”

죠니는 말에서 내려 말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승부가 아직 손목에 남아 있었다. 창을 쥔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는 그레이와 푸리나의 대화를 듣고 작게 중얼거렸다.

“저 둘은 매번 같은데, 매번 새롭네.”

아스테르다스는 경기장 가장자리에서 자기 손등에 남은 빛의 잔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가 이런 거라면.”

그가 낮게 말했다.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뭐?”

“떨어진 뒤에 남는 것이 꼭 파편만은 아닐 수도 있겠군.”

죠니는 잠깐 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음엔 덜 부수고 떨어지면 되겠네.”

아스테르다스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지.”

“농담이었는데.”

“나도 농담을 배워야겠군.”

“그건 좀 천천히 해.”

그때 경기장 남쪽 입구가 조용해졌다.

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속삭였고, 병사들은 목책을 두드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다음 참가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

그녀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녀의 본명을 몰랐다.
설령 안다 해도, 이 자리에서 그것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직책으로 걸어 들어왔다.

튜튼 기사단의 총장.
프루센의 란트마이스터.
성스러운 이름 아래 변경을 지키는 자.
그리고 그 성스러운 이름으로 지은 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

갑주는 어두웠다.

그러나 단순한 검정이 아니었다. 햇빛을 받으면 표면 아래로 희미한 금빛이 맥동했다. 죽은 태양 같은 금빛이었다. 그리고 그 금빛 위에 달빛처럼 창백한 죄책감이 얇게 스며 있었다.

푸리나도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뛰어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중앙에 서서, 호흐마이스터가 걸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호흐마이스터는 경기장 경계 앞에서 멈추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헤툼 폐하.”

“호흐마이스터 경.”

푸리나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여관:극장]은 산 자를 무대 위에 세우는 힘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미 너무 무거운 갑주를 입고 무대에 올라왔다. 조명을 받으면 가벼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명 아래에서 자신이 짊어진 것을 더 숨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다음 경기의 첫 번째 참가자를 소개하겠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튜튼 기사단의 총장. 프루센의 란트마이스터. 성벽 앞에 먼저 서고, 죄를 갑옷처럼 입어 변경을 지키는 기사.”

푸리나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과장하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호흐마이스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과분한 소개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정중했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부드럽지 않았지만, 거칠지도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아주 오랫동안 단단히 묶어둔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는 그저, 제가 막아야 할 것을 막을 뿐입니다.”

관중석 한쪽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흘렀다.

푸리나는 그 소리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지도 않았다.

그녀는 반대편 입구를 향해 손을 펼쳤다.

“그리고 두 번째 참가자!”

그 순간,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남쪽의 무거운 그림자에 맞서듯, 동쪽 입구에서 옅은 금빛이 번졌다.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는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그녀의 걸음은 호흐마이스터처럼 압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첫걸음에는 당혹감이 조금 묻어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왜 이 난장판 같은 국제 친선전에 나와 있는지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검을 찬 자세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꽃처럼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내리는 사람이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조금 밝게 웃었다.

“시원성좌의 별의 간택자! 생명을 긍정하는 검을 든 자!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의 신임 단장!”

아스트리트의 어깨가 아주 조금 움찔했다.

푸리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목서가 피는 나흐트로제의 기사,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아스트리트는 관객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박수가 들렸다.

하지만 그 박수는 2막 때와 달랐다.
속도와 빛에 대한 환호가 아니라, 조금 조심스러운 기대였다.

아스트리트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물었다.

“저…… 확인차 묻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그녀를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정말 친선전 맞습니까?”

관중석 곳곳에서 작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호흐마이스터는 조금도 웃지 않고 답했다.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렇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대답이 가장 불안한 종류입니다.”

푸리나가 끼어들었다.

“괜찮아! 그레이가 규칙을 세웠으니까!”

그레이는 곧장 말했다.

“폐하, 규칙은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레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키겠습니다.”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규칙을 받아들이는 대답이라기보다, 이미 내린 명령을 자신에게 다시 새기는 의식처럼 들렸다.

그레이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전 확인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치명 신술과 광역 파장 사용 시 정지 선언을 우선으로 합니다. 관중석 방향 파장은 금지입니다. 경기장 밖으로 검압이 흐를 경우 즉시 중지합니다.”

아스트리트가 살짝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제 기술 중 하나가…… 조금 넓습니다.”

그레이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얼마나 넓습니까?”

아스트리트는 잠시 고민했다.

“정확히는, 넓게 쓰면 매우 넓습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펜을 올렸다.

“기술명.”

“《금목만리향파》입니다.”

“성질은요?”

“금목서검의 생명력을 개화시켜 거대한 금빛 검으로 내려치는 거대참격입니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거대한 금빛 검!”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폐하, 흥미를 보이실 부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대한 금빛 검인데?”

“그래서 더더욱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아스트리트는 검자루를 바라보았다.

“친선전에서 꺼낼 기술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를 보았다.

“경의 갑주를 보고 나니, 보이지 않게 넘기면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보여주십시오.”

아스트리트가 눈을 깜박였다.

“괜찮습니까?”

“그대가 무엇을 위해 검을 드는지, 저도 보고 싶습니다.”

그레이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용 시 사전 선언. 출력 제한. 관중석 방향 금지. 여관좌 사제 4명 추가 배치. 경기장 남측은 비워둡니다.”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좋아! 그럼 모두 더 멋지게 조심하자!”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멋지게 조심한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오늘 생겼어.”

“제발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말에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경기장 중앙의 두 기사는 웃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뽑았다.

검신 위에 희미한 금빛이 어렸다. 금목서의 향이 아직 아주 연하게, 바람 속에 섞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들었다.

그 창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이 향한 곳은 분명했다. 그것은 적의 심장을 찌르기 위한 창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먼저 길목을 막기 위한 창이었다.

푸리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물러났다.

“준비.”

아스트리트는 숨을 골랐다.

그녀의 몸 안에서 별빛과 내공, 근육과 호흡, 시선과 검끝이 균형을 잡았다.

《창성천강지체》.

그녀의 검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힘만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내공만 빛나는 것도 아니었다.

힘, 민첩, 내구, 지성, 영력, 정신.

그 모든 것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하나의 검을 들기 위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검을 정면으로 세웠다.

“만생개화검법.”

금목서 향이 조금 짙어졌다.

“전개.”

검로가 피었다.

금빛 꽃잎이 허공에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실제로 핀 것은 거리와 각도였다. 손목이 움직일 길, 발이 디딜 자리, 다음 호흡이 이어질 틈, 상대 갑주 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검선.

검술이 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꽃은 장식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자라는 가지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꽃을 보았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금빛이 떠올랐다.

《천양금안》.

그 눈은 아스트리트의 검을 표면으로만 보지 않았다.

피 냄새가 적다.
그러나 약하지 않다.
검로는 아직 젊다.
그러나 매번 고쳐질 여지가 있다.
그 검은 증오를 먹고 자라지 않는다.
생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자란다.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좋은 검입니다.”

아스트리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부딪치지도 않았습니다.”

“보입니다.”

호흐마이스터의 갑주가 어두워졌다.

“죄악의 갑주, 전개.”

《죄악의 갑주Frevel Panzer》.

갑주는 단순히 두꺼워지지 않았다.

그 표면 아래로, 말로 다 적을 수 없는 것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명분 아래 이루어진 정치공작.
기사단을 지키기 위해 밀어낸 사람들.
헤르만 폰 잘차를 무너뜨린 날의 침묵.
몽골 황금혈통이라는, 자기 안의 지워지지 않는 피.
그 피를 혐오하면서도 그 피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공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프루센의 성벽 앞에 섰던 날들.

죄가 갑옷이 되었다.

갑옷은 무거웠다.

그러나 그녀는 익숙했다.

푸리나의 손이 내려갔다.

“시작!”

아스트리트가 먼저 움직였다.

금목서의 검로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첫 검은 호흐마이스터의 어깨선을 향했다. 곧장 찌르는 검이 아니었다. 갑주의 반응을 보려는 검, 동시에 다음 가지를 피우기 위한 검이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대로 받았다.

소리는 둔탁했다.

아스트리트의 손목이 흔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두 번째 검을 이었다. 꽃가지가 옆으로 뻗듯, 검로가 호흐마이스터의 옆구리로 미끄러졌다.

호흐마이스터는 이번에도 받았다.

갑주가 금빛을 삼켰다.

세 번째 검.

네 번째 검.

금목서의 향이 경기장 위로 퍼졌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는 그 향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마침내 호흐마이스터가 한 걸음 나아갔다.

아스트리트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읽었다.

너무 멀다.

그녀의 판단은 맞았다.

보통의 중갑 기사라면 닿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호흐마이스터의 발은 서방 중갑의 박자가 아니었다.

《대초원의 대기사》.

프루센의 갑주는 서방의 것이었으나, 그 박자는 초원의 것이었다.

한 걸음은 넓었다.
반 걸음은 예상보다 짧았다.
다음 한 걸음은 이미 아스트리트의 검 안쪽에 있었다.

창대가 그녀의 검을 밀었다.

아스트리트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관중석에서 탄성이 들렸다.

아스트리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창성천강지체》가 몸의 균형을 붙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왼발이 반 박자 늦었고, 오른쪽 어깨가 먼저 열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오른발이 늦었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낮추지 않았다.

“그걸 지금 보셨습니까?”

“예.”

아스트리트는 검을 다시 들었다.

눈빛이 바뀌었다.

부끄러움도, 분노도 아니었다.

수정.

《노력하는 자》.

그녀는 패배의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방금 밀린 감각을 몸 안에 남겼다.
어깨가 열린 이유를 기억했다.
발이 늦은 박자를 기억했다.
그 기억을 다음 검로의 토양으로 삼았다.

“다시.”

짧은 말과 함께 아스트리트가 전진했다.

이번 검은 조금 달랐다.

화려함이 줄었다.

꽃잎은 적었다.

그러나 가지는 더 정확했다.

호흐마이스터의 《천양금안》이 다시 반응했다.

그녀는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재능만으로 싸우지 않는다.

밀리면 고친다.
흔들리면 다시 세운다.
한 번 꺾인 가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음 가지가 어디로 자라야 할지 배운다.

“그대는 재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군요.”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부딪치며 답했다.

“재능만으로는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검과 창이 다시 부딪쳤다.

아스트리트의 검신에 별빛이 맺혔다.

《별의 간택자Chosen》.

별빛은 그녀를 감싸는 방패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그녀가 밀려도 다시 고친다는 사실.
생명이 완성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며 스스로를 고쳐나간다는 사실.

그 사실을 세계가 조금 더 강하게 인정하는 것 같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죄악의 갑주가 내뿜는 압박 속에서도, 아스트리트의 검은 꺾이지 않았다.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생명은 완성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베고.

“자라며.”

다시 막고.

“스스로를.”

발을 바꾸고.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검이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틈을 향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검을 창대로 눌러 빗겨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조금 더 깊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그녀의 창끝 위로 성인의 그림자가 겹쳤다.

“저도 고쳐야겠지요.”

금빛 눈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흔들렸다.

“아스칼론, 현현.”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관중석 몇몇이 숨을 삼켰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용살.

용을 짓밟는 성인의 이름.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의 창은 아스트리트를 용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그대가 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창끝의 빛이 갑주 안쪽으로 내려앉았다.

“제가 짓밟아야 할 용은, 대개 제 안에 있습니다.”

아스트리트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그 말을 이해했다.

이 사람은 적을 미워해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의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그 무언가가 밖으로 기어나오지 못하게, 죄악의 갑주와 성인의 창으로 스스로를 찍어누르고 있다.

아스트리트는 그 사실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을 늦추지는 않았다.

슬픔으로 상대를 봐주는 것은 생명 긍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호흡을 정돈했다.

《화유심법》.

내공은 꽃가지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꽃으로.
꽃에서 향으로.

금목서 향이 다시 짙어졌다.

아스트리트의 검이 낮아졌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자세를 보고 창을 고쳐 잡았다.

“오십니까?”

“예.”

“좋습니다.”

아스트리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베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답했다.

“압니다.”

아스트리트의 검이 금빛으로 빛났다.

처음에는 검신을 따라 아주 얇은 선이 생겼다.
그다음에는 그 선이 꽃가지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금목서의 생명력이 검 안에서 개화했다.

아스트리트는 낮게 말했다.

“시원성始原星은 생명의 탄생부터 삶을 아우르는 별.”

그녀의 양손이 검자루를 붙잡았다.

“생명은 짓밟히기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 경기장 위에 거대한 금빛 검이 떠올랐다.

《금목만리향파》.

금목서검의 생명력이 한순간에 개화했다.

그것은 단순한 검압이 아니었다.
그것은 꽃잎의 환상도 아니었다.

거대한 금빛 검.

살아 있는 검.

삶을 품은 참격.

메마른 전장 위에서도 생명이 피어날 수 있다고 증명하기 위해, 나흐트로제가 만들어낸 선택받은 자의 비기.

관중석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여관좌 사제들이 등불을 높이 들었다.

그레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관중석 방향 금지! 남측 파장 차단!”

아스트리트는 이미 각도를 틀고 있었다.

그녀는 호흐마이스터를 죽이기 위해 이 검을 내리지 않았다.

그 검이 향한 것은 호흐마이스터의 목이 아니었다.

죄를 입어야만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오래된 결론.
생명이 짓밟힌 뒤에야 성벽이 선다는 전장의 습관.
검은 더러워져야만 현실을 지킬 수 있다는, 기사들이 너무 자주 받아들인 대답.

금목서의 검은 그것을 가르려 했다.

호흐마이스터의 《천양금안》이 그 본질을 보았다.

저 참격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갑주도 아니다.

저 검이 베려는 것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믿어온 죄의 이유다.

호흐마이스터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창을 세웠다.

죄악의 갑주가 더 어두워졌다.

그 어둠 아래에서 죽은 태양 같은 금빛이 맥동했다.

그녀는 그 거대한 금빛 검 앞에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Primus Inter Pares》.”

동등한 자들 중 첫 번째.

위에 선 자가 아니었다.

먼저 앞에 서는 자였다.

형제들보다 높이 앉는 자가 아니라, 형제들 앞에서 먼저 맞는 자.

죄가 필요하다면 먼저 입고.
방패가 필요하다면 먼저 세워지고.
더러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더러워지는 자.

호흐마이스터는 승리각보다 먼저 방패각을 잡았다.

아스트리트의 금빛 검이 내려왔다.

프루센의 갑주는 그 자리에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은 초원의 박자로 움직였다.

한 걸음.

반 걸음.

다시 한 걸음.

《대초원의 대기사》의 보법이, 거대한 참격의 길 앞에 호흐마이스터를 가장 먼저 세웠다.

그녀는 《금목만리향파》를 정면에서 부수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파장이 관중석을 흔들었을 것이다.

대신 가장 위험한 방향을 자신의 갑주 위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남는 파장을 하늘로 흘렸다.

금빛 검이 죄악의 갑주 위를 갈랐다.

갑주 표면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 속에서 달빛 같은 죄책감과 죽은 태양의 금빛이 함께 번졌다.

호흐마이스터의 무릎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스칼론.”

성인의 창이 다시 빛났다.

“현현.”

그 창은 아스트리트를 향해 울부짖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안쪽의 용을 짓밟았다.

황금혈통의 폭력성.
초원의 피.
파괴와 정복의 기억.
금빛 생명 앞에서 이를 드러내려는 자기 안의 괴물.

성인의 창은 그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에, 먼저 밟았다.

그렇게 한 박자.

아스트리트의 금빛 참격이 하늘로 흘렀다.

경기장 위의 구름이 갈라졌다.

관중들은 그제야 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한 박자 사이, 호흐마이스터의 창끝은 움직였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거두려 했다.

늦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조금, 반 박자 늦었다.

호흐마이스터의 성인의 창이 아스트리트의 어깨선 한 치 앞에서 멈췄다.

동시에 아스트리트의 롱소드는, 금빛 참격의 잔향을 품은 채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틈 한 치 앞에서 멈췄다.

여관좌 사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지!”

빛이 사라졌다.

금목서 향만이 경기장 위에 남았다.

그레이가 빠르게 상황을 확인했다.

“관중석 파장 없음. 부상 없음. 갑주 표면 손상. 경기장 남측 흙바닥 파임.”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사제들이 판정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주심 사제가 선언했다.

“호흐마이스터 경, 관중석 방향 파장 차단 및 치명각 선점. 판정승!”

박수는 바로 터지지 않았다.

모두가 방금 본 장면을 이해해야 했다.

거대한 금빛 검이 내려왔다.
어두운 갑주가 그것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한 사람은 생명이 짓밟히지 않도록 검을 피웠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검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먼저 앞에 섰다.

그 사실이 사람들의 가슴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박수가 터졌다.

2막의 박수보다 늦었다.

그러나 더 오래 갔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내렸다.

그녀는 패배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자세를 되짚었다.

“마지막에 왼쪽 어깨가 먼저 열렸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낮췄다.

“그것을 바로 보셨다면, 다음에는 달라지겠지요.”

“다음에는 더 고치겠습니다.”

“그것이 그대의 검이군요.”

아스트리트는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를 보았다.

균열이 있었다.

자신의 《금목만리향파》가 남긴 상처였다.

그러나 그 균열은 갑주를 완전히 부수지 못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틈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물었다.

“마지막에, 제 검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길을 바꾸셨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검은 너무 넓었습니다. 그대로 받으면 관중석이 흔들립니다.”

“친선전에서 쓸 기술은 아니었나요?”

호흐마이스터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니요.”

아스트리트가 눈을 깜박였다.

“아니요?”

“그대가 무엇을 위해 검을 드는지 보여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호흐마이스터의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롱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정이었다.

아스트리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막으셨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경기장 너머를 보았다.

관중석의 아이들.
갑주를 입은 기사들.
목책을 잡고 서 있는 병사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프루센의 평야, 성벽, 눈 덮인 변경, 언젠가 동쪽에서 올 말발굽.

그녀는 말했다.

“저는 먼저 앞에 서는 자니까요.”

아스트리트는 낮게 되뇌었다.

“《Primus Inter Pares》.”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 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의 손이 균열 난 갑주 위에 닿았다.

“먼저 더러워진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검을 내려다보았다.

금목서의 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언젠가 그런 첫 번째가 필요 없는 기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풋내가 있었다.
꽃향기가 있었다.
아직 피 냄새보다 금목서 향이 짙은 검.

그러나 그 풋내는 약함이 아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부디 그러십시오.”

잠시 침묵.

“그대의 금목서 향이 오래 남는다면, 제 갑주가 조금은 덜 필요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아스트리트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더 오래 피우겠습니다.”

“쉬운 길은 아닐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별의 간택자입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기적이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압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멈췄다.

기적.

그 말은 그녀에게 가벼운 단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죽었어야 할 아이였다.

정치적 숙청 속에서 사라졌어야 할 씨앗.
초원의 피가 제 피를 잡아먹던 밤에 끝났어야 할 이름.
하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기적의 체현자》.

그 기적은 그녀를 구했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죄를 입혔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스트리트에게 말했다.

“기적은 사람을 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무엇을 짊어질지는, 그 뒤의 일이지요.”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 뒤의 일을, 저는 생명 쪽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호흐마이스터도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길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푸리나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들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뛰어나와 “좋아!”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늦췄다.

이 경기는 박수보다 침묵이 먼저 필요한 경기였다.

그리고 침묵이 충분히 지나간 뒤에야,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그 한 번의 박수에 아이들이 따라 쳤다.

병사들이 따라 쳤다.

기사들이 창대를 두드렸다.

사절들도 손을 들었다.

박수는 오래 이어졌다.

레이튼은 그 박수 속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번 질문은 승패가 아니었군요.”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레이튼은 경기장에 남은 금빛 참격의 흔적과, 죄악의 갑주에 새겨진 균열을 보았다.

“기사는 무엇을 입고 싸우는가.”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검은 무엇을 살리기 위해 피어나는가.”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좋은 질문이네.”

“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좋은 거지?”

레이튼은 웃었다.

“물론입니다. 아직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레이는 장부에 기록했다.

《제2경기 종료. 호흐마이스터 판정승. 부상 없음. 남측 흙바닥 보수 필요. 호흐마이스터 갑주 손상.》

그녀는 잠시 펜을 멈췄다.

그리고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아스트리트 경, 패배 후 즉시 자세 수정.》

푸리나가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도 기록해?”

그레이는 장부를 닫지 않고 답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같은 이유로 다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호흐마이스터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기록입니다.”

아스트리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생명은 그렇게 고쳐나가는 것이니까요.”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한쪽에는 균열 난 죄악의 갑주가 있었다.
한쪽에는 아직 금목서 향을 품은 검이 있었다.

둘 다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 있었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밝게 웃었다.

“좋아!”

그 한마디에,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훌륭한 3막이었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폐하, 아직 전체로는 3막이지만 경기 번호로는 제2경기입니다.”

“세부적인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합니다.”

“좋아, 그럼 훌륭한 제2경기이자 3막이었다!”

“그건 맞습니다.”

죠니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결국 이겼네.”

하융은 경기장에 남은 금빛과 어두운 갑주의 잔향을 바라보았다.

“두 길이 모두 무거웠소.”

죠니가 말했다.

“그래도 닿지는 않았지.”

아스테르다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럼 좋은 낙점이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그 표현 계속 쓸 거야?”

“필요하면.”

“그래. 리투아니아식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경기장에는 아직 금목서 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향 아래, 죄악의 갑주에 새겨진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균열을 숨기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도 자신의 패배를 숨기지 않았다.

박수는 2막보다 늦게 터졌다.

그러나 더 오래 남았다.

그 박수 아래에서 금목서의 거대한 검은 사람을 베지 않고 전장의 오래된 결론을 갈랐고, 죄악의 갑주는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중석 앞에 먼저 서기 위해 더 무거워졌다.

한쪽은 생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피어나는 검을 보였다.

다른 한쪽은 죄를 입고서라도 먼저 막는 기사의 자리를 보였다.

그래서 두 번째 친선전은 판정승 하나와 질문 하나를 남겼다.

기사는 무엇을 입고 싸우는가.

그리고 검은 무엇을 살리기 위해 피어나는가.
최신 소스 기준으로 4막은 **미하일라의 《황제칙령》**과 **알렉산드리나의 《위대해질 차르》**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제한 군세전으로 작성할게. 미하일라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드는 신성황제”, 알렉산드리나는 “결핍을 딛고 새벽빛 왕도를 걷는 미완성 차르”로 두고, 세 발의 화살이 사람을 겨누는 게 아니라 전쟁의 구조를 끊는 식으로 간다.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 4막 — 자주빛 칙령과 위대해질 차르

세 번째 경기장이 준비되는 동안,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모양을 바꾸었다.

2막의 말발굽 자국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죠니의 원과 아스테르다스의 빛이 교차했던 흙바닥 위에는, 이제 낮은 목책과 얇은 선들이 그어졌다.

3막의 남쪽 흙바닥은 아직 조금 패여 있었다.
아스트리트의 《금목만리향파》가 남긴 금목서 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호흐마이스터의 갑주가 파장을 하늘로 흘려보낸 자리에는 등불 하나가 새로 세워져 있었다.

그레이는 그 등불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 저 등불은 원래 배치에 없습니다.”

푸리나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추가 연출이야!”

“안전 점검표에는 없습니다.”

“그럼 안전한 연출로 해줘.”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표현은 없습니다.”

“오늘 세 번째로 생겼어!”

“생기면 안 됩니다.”

그레이는 결국 등불 위치를 다시 계산했다.
목책과 목책 사이, 관중석에서 반 보 더 떨어진 지점.
파장이 흘러도 직접 맞지 않는 거리.
들것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

그녀는 장부에 선을 하나 더 그었다.

“……저 위치라면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역시 그레이!”

“칭찬하셔도 다음 연출은 사전 허가가 필요합니다.”

“아쉽네.”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경기장 한쪽에서는 여관좌 사제들이 푸리나의 신술에 맞춰 모의 병력들을 세우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방패.
짚과 천으로 만든 목패 병사.
기병을 대신할 바퀴 달린 말 형상.
깃발.
보급 상자.
예비 창대.
가짜 성문.

푸리나는 이번 경기장을 “새벽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경기장 반대편 끝에는 붉은 천과 금빛 끈을 묶은 낮은 문이 세워져 있었다.
그 문은 성문이기도 했고, 새벽이 열리는 선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리나 아센이 도달해야 할 곳.

미하일라가 세 발 안에 막아야 할 곳.

죠니는 목책에 기대어 그것을 보았다.

“이번엔 전쟁놀이네.”

레이튼이 옆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놀이가 되려면, 멈출 수 있어야겠지요.”

하융은 말없이 새벽선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여러 창이 열려 있었다.

첫 번째 창에서는 방패선이 무너졌다.
두 번째 창에서는 창대가 엉켜 병사들이 서로 넘어졌다.
세 번째 창에서는 화살이 사람을 맞히지 않았는데도 군대가 흩어졌다.
네 번째 창에서는 알렉산드리나가 너무 빨리 뛰었다가, 마지막 한 걸음 전에 무너졌다.

그리고 다른 창 하나.

그녀가 무너진 군세를 이끌고도 한 걸음 앞까지 도달하는 창.

하융은 낮게 말했다.

“저 여인은 서둘러서는 안 되오.”

죠니가 물었다.

“알렉산드리나?”

“그렇소. 새벽은 달려서 붙잡는 것이 아니오. 밤을 다 지나 걸어야 닿는 것이지.”

죠니는 잠깐 하융을 보았다.

“오늘은 좀 시적이네.”

“늘 그러하오.”

“그건 인정 못 하겠는데.”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푸리나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화려하게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앞선 두 경기와 다른 긴장이 있었다.

검과 창의 결투가 아니었다.

이번 막은 군주들이 서로의 통치와 전쟁관을 겨루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조명을 모았다.

“좋아!”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세 번째 친선전이자, 네 번째 막!”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는 스스로도 구분하시는군요.”

푸리나는 못 들은 척했다.

“이번 경기는 단순 결투가 아니다. 한쪽은 세 발의 화살로 전쟁의 구조를 끊고, 다른 한쪽은 군세를 이끌고 새벽선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녀는 경기장 동쪽을 향해 손을 펼쳤다.

“먼저, 니케아의 자주빛 황제.”

조명이 낮아졌다.

자주빛 망토가 바람에 흔들렸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활이 있었다.

하지만 관중들은 활보다 먼저, 활을 든 자가 황제라는 사실을 느꼈다.

자주빛 혈통.
팔레올로기나의 천년 궁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잃고도 로마를 잃지 않았다고 말하는 제국의 운명.
전쟁을 미워하기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드는 자.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자휘혜성紫輝彗星》.

자주빛 혜성이 하늘 위에 걸린 듯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무장이 아니라, 천 년 동안 황가가 잃지 않았던 전쟁의 문장이었다.

푸리나가 장엄하게 외쳤다.

“팔레올로기나 천년 궁무의 계승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드는 신성황제!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

박수가 터졌다.

미하일라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공적인 자리의 그녀는 황제였다.

“헤툼 폐하의 무대에 응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은 우아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다만 짐의 화살은 유희를 위해 당겨지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래서 세 발만!”

미하일라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 발이면 충분합니다.”

그 말에 관중석 일부가 조용해졌다.

허세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하일라에게 세 발이란 제한이 아니라, 세 번의 칙령이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서쪽을 향해 손을 펼쳤다.

“그리고 그녀의 상대.”

공기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불가리아의 사생아 차르.”

그 말에 몇몇 관중이 숨을 삼켰다.

푸리나는 일부러 멈추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결핍을 수행으로 바꾸고, 위대한 이를 흉내내어 새벽으로 걷는 자.”

알렉산드리나 아센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등 뒤에는 모의 병력들이 따랐다.

방패를 든 목패 병사들.
창대를 든 훈련 인형들.
기병 역할의 말 형상.
보급 상자를 끄는 작은 수레.
깃발.

그러나 알렉산드리나가 그들을 이끌고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무대 장치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완성된 왕처럼 보이지 않았다.

왕관이 완전히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혈통으로 모두를 침묵시키는 사람도 아니었다.
등 뒤에 찬란한 정통성이 따라오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똑바로 걸었다.

부족한 것을 아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푸리나가 외쳤다.

“알렉산드리나 아센!”

박수는 조금 늦게 터졌다.

알렉산드리나는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흉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녀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다만, 끝까지 흉내로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미하일라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았다.

“그렇다면 보여주십시오.”

그레이가 중앙으로 나왔다.

장부를 펼친 그녀는 이번만큼은 더 엄격한 얼굴이었다.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관중석이 다시 조용해졌다.

“미하일라 폐하께서는 화살 세 발만 사용 가능합니다. 보조 사격, 광역 포격, 국가급 권능 사용은 제한됩니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리나 경은 모의 병력을 지휘해 경기장 반대편의 새벽선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병력 판정은 푸리나 폐하의 [여관:극장]과 여관좌 사제단의 모의 판정에 따릅니다.”

알렉산드리나도 고개를 숙였다.

“치명타, 지휘핵 차단, 보급선 붕괴, 진형 붕괴가 발생할 경우 사제단이 정지 선언을 내립니다. 실제 살상은 금지입니다.”

그레이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특히 이번 경기는 군세전입니다. 병력 모의체가 무너지더라도, 통로를 막지 않도록 주의해주십시오. 관중석 방향 화살, 창압, 방패 파편은 즉시 실격 사유입니다.”

푸리나가 속삭였다.

“그레이, 정말 엄격해.”

그레이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엄격해야 살아남습니다.”

미하일라가 알렉산드리나에게 말했다.

“세 발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차갑지 않았다.

하지만 무거웠다.

“그 안에 그대의 왕도를 보이십시오.”

알렉산드리나는 모의 방패대 앞에 섰다.

“세 발이면 충분합니다.”

그녀는 허리를 폈다.

“위대한 이를 흉내내는 자는, 첫 번째 화살에 무릎 꿇을 수 없으니까요.”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여관:극장]의 조명이 바뀌었다.

흙바닥은 전장이 되었다.

목책은 언덕이 되었고, 새벽선은 멀리 있는 성문이 되었다.
관중석의 웅성거림은 병사들의 숨소리처럼 낮아졌다.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밤의 별이 되었다.

푸리나는 선언했다.

“시작!”

알렉산드리나가 먼저 움직였다.

“방패대, 전열.”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빌린 것처럼 들렸다.

누군가의 흉내.

위대한 차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시메온 대제라면 이렇게 병력을 세웠을 것이다.
제국을 호령했던 왕이라면, 첫걸음부터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위대한 이를 흉내내다》.

방패대가 앞으로 나섰다.

모의 병력들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목패 병사들이 방패를 겹쳤고, 창대는 그 뒤에서 비스듬히 세워졌다.
예비대는 왼쪽 후방으로 돌았다.
보급 수레는 중앙에서 반 걸음 뒤에 위치했다.

《불가리아 군대의 정수》.

완전한 혈통으로 모인 군대가 아니었다.

그 무대 위의 목패들은 단순한 장치였지만, 알렉산드리나의 지휘 아래 그들은 다른 의미를 얻었다.

소외된 귀족.
쿠만인.
낮은 출신 보병.
고통을 아는 자.
사생아의 깃발 아래에서도 새벽을 보고 싶어 하는 자들.

그들이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대제라면 방패를 접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은 아직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그녀의 것이었다.

미하일라는 활을 들었다.

자주빛 망토가 바람을 받았다.

《자주빛 혈통Πορφυρογέννητη》.

그 혈통은 권리처럼 빛나지 않았다.

대가처럼 무거웠다.

자주빛 산실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제국의 실패와 피, 황제교황주의의 신성권, 수많은 전쟁의 업까지 함께 물려받는다는 뜻이었다.

미하일라는 활시위를 당겼다.

“첫 번째.”

그녀의 손끝에 자주빛 별이 맺혔다.

《성추여명식星墜黎明式》.

별이 떨어졌다.

첫 화살은 병사를 맞히지 않았다.

그것은 알렉산드리나의 전면 방패대 앞, 방패들이 믿고 있던 지형을 꿰뚫었다.
흙바닥이 갈라지고, 모의 언덕이 무너졌다.
방패대가 믿고 있던 발판이 사라졌다.

방패선이 흔들렸다.

관중석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알렉산드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화살은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군의 첫 이유를 흔들었다.

미하일라의 화살은 사람을 겨눈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서 있는 뼈대를 겨누었다.

방패대가 밀렸다.

알렉산드리나는 숨을 삼켰다.

도망치면 끝난다.

서두르면 무너진다.

그녀는 바로 외쳤다.

“방패는 접지 않는다!”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반 보 뒤로. 서로의 어깨를 맞춰라! 무너진 땅을 피하지 말고, 무너진 곳을 기준으로 다시 선다!”

《불가리아의 방패》.

방패대가 재정렬되었다.

목패 병사들이 한 줄 물러섰고, 방패와 방패가 다시 맞물렸다.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지만,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좋아. 첫 발.”

미하일라는 조용히 보았다.

“버텼군.”

그녀는 칭찬하지 않았다.

아직은.

두 번째 국면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리나는 방패 뒤에서 손을 들었다.

“창대 앞으로.”

방패 사이로 창이 나왔다.

《불가리아의 창》.

그 창들은 화려하지 않았다.

혈통으로 벼린 창이 아니었다.
궁정의 보물창고에서 꺼낸 창도 아니었다.
수치와 결핍과 훈련으로 벼린 창이었다.

“우리의 창은 날카로울 것이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창진이 전진했다.

방패가 밤을 막았다면, 창은 밤에 첫 번째 균열을 냈다.

진군로가 열렸다.

미하일라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의 시야가 낮아졌다.

아니, 넓어졌다.

《정혈장안靜血装眼》.

피가 조용해지고, 눈이 전장을 장악했다.

그녀는 병사 수를 세지 않았다.

방패와 방패 사이의 간격.
창과 창 사이의 교대 박자.
보급 수레가 한 번 멈추는 위치.
예비 창대가 옮겨지는 손.
깃발을 보는 눈.
명령을 기다리는 어깨.

그리고 그 아래.

결핍을 왕도로 바꾸려는 의지.

미하일라는 그 결핍을 부정으로 보지 않았다.

사생아라는 사실도.
흉내낸다는 사실도.
부족함을 안다는 사실도.

그것들은 부정이 아니었다.

《정온서전심공靜溫息戰心功》.

그녀의 심공은 전쟁을 미워하되, 사람의 상처를 미워하지 않았다.

미하일라가 찾은 것은 결핍 자체가 아니었다.

결핍을 전쟁으로 묶는 사슬.
증명받지 못한 자들이 끝없이 피를 흘려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속삭이는 구조.

그것이 그녀의 두 번째 화살이 겨눌 대상이었다.

“두 번째.”

활시위가 당겨졌다.

《구평전시궁求平戰矢弓》.

평화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끝내는 활.

화살이 날아갔다.

이번에도 알렉산드리나를 겨누지 않았다.

깃발도 아니었다.

두 번째 화살은 알렉산드리나의 지휘 신호를 전달하던 중간 목패를 꿰뚫었다.
방패대와 창대 사이의 교대 표식.
예비대가 언제 앞으로 나와야 하는지 알려주는 작은 깃.
보급 수레가 멈추어야 할 지점.

그 모든 매듭이 한순간에 끊겼다.

진군이 멈췄다.

방패는 서 있었다.

창도 아직 날카로웠다.

하지만 군대는 한순간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 잃었다.

알렉산드리나의 손이 떨렸다.

관중들은 보았다.

미하일라의 화살이 얼마나 무서운지.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군대를 멈출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제라면.

그 말이 떠올랐다.

시메온 대제라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바로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보급 수레가 들어왔다.

예비 방패 수.
남은 창대.
모의 병력의 이동 거리.
흔들린 방패대가 다시 설 수 있는 시간.
새벽선까지 남은 거리.

왕도는 깃발만으로 걷지 않는다.

보리와 말먹이와 부러지지 않은 창대가 필요했다.

《군수품 관리》.

알렉산드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예비 방패 앞으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창대는 두 줄 뒤에서 교대. 보급 수레는 중앙이 아니라 왼쪽으로. 행군 거리를 줄인다.”

한 병사 역할의 목패가 흔들렸다.

알렉산드리나는 바로 말했다.

“지금 빨리 뛰지 마라.”

그녀의 눈이 새벽선을 향했다.

《보다 멀리 보다 오래》.

“멀리 가려면, 지금 빨리 뛰지 마라. 무너지지 않는 속도로 간다.”

군세가 다시 움직였다.

느렸다.

하지만 다시 움직였다.

관중석에서 박수 대신 낮은 감탄이 흘렀다.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

“흥미롭군.”

공적인 어조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인정이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방패대 뒤에서 앞으로 걸었다.

“창진, 반 보 더.”

창들이 올라왔다.

미하일라의 위치가 조금씩 압박받았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발밑의 하늘을 열었다.

《자주개도紫宙開途》.

그녀가 한 걸음 옮기자, 단순히 위치가 바뀐 것이 아니었다.

화살이 떨어질 하늘이 새로 열렸다.

알렉산드리나의 창진은 미하일라의 사격 각도를 좁히려 했지만, 황제는 그 좁아진 하늘 안에서 다시 길을 만들었다.

그래도 창 하나가 닿았다.

모의 창끝이 미하일라의 흉갑 선에 닿기 직전, 자주빛 광맥이 얇게 울렸다.

《천단광갑天緞鑛鉀》.

갑주는 크지 않았다.

번쩍이는 방벽도 아니었다.

천상의 비단과 광석이 한순간 겹친 듯한 얇은 울림.
창끝이 그 울림 위에서 멈췄고, 미하일라의 손은 이미 다음 화살의 위치를 재고 있었다.

그녀의 혈관에 아주 짧게 자주빛이 돌았다.

《순홍瞬閧 운성불망隕星不忘》.

완전한 발동은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친선전에서 몸을 태우는 결전 신법을 전개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미하일라는 알고 있었다.

황제의 몸은 때때로 마지막 국고가 된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지불해야 한다면, 자신의 피와 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짧은 자주빛을 보고,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라 폐하.”

미하일라는 활을 내리지 않은 채 답했다.

“제한 내입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꽉 잡았다.

“반동이 확인되면 중지하겠습니다.”

“합당한 판단입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그 장면을 보았다.

미하일라는 전쟁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기 몸까지 전장의 도구로 계산한다.

푸리나는 그 사실이 조금 싫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알렉산드리나는 두 발을 맞고도 새벽선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빌린 목소리였다.

“대제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두 번째 화살이 지휘선을 끊고, 군수품이 흔들리고, 창진이 미하일라의 자주빛 하늘 앞에서 멈칫하는 순간.

전장은 그녀에게 물었다.

시메온 대제라면 어떻게 했는가가 아니다.

알렉산드리나 아센,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목패 병사들이 그녀를 기다렸다.

방패대가 흔들렸다.

창대가 삐걱거렸다.

새벽선은 아직 멀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대제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멈췄다.

그 말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

방패대가 그녀를 보았다.

“우리는 이렇게 한다.”

《대제를 흉내내다》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른 길이 세워졌다.

《흉내내어 드높은 왕도》.

흉내가 허세라면, 여기서 무너졌을 것이다.

가짜라면, 두 번째 화살에 길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리나는 아팠다.

부끄러움을 알았다.
결핍을 알았다.
증명해야 하는 자들의 호흡을 알았다.

가짜는 배우지 않는다.
가짜는 아파하지 않는다.
가짜는 새벽을 향해 걷지 않는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방패대, 더 좁게. 창병, 옆이 아니라 위로. 예비대는 나를 보지 말고 새벽선을 봐라.”

군세가 다시 움직였다.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새벽선까지 한 걸음.

미하일라는 세 번째 화살을 들었다.

공기가 바뀌었다.

앞의 두 발과 달랐다.

첫 번째는 지형을 꿰뚫었다.
두 번째는 구조를 끊었다.
세 번째는 결론을 선포해야 했다.

미하일라의 눈이 낮아졌다.

황제가 활을 당기는 순간, 무武와 정政은 갈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공격이 아니었다.

판단이었다.

그것은 무예가 아니었다.

칙령이었다.

“세 번째.”

자주빛이 활시위 위에서 모였다.

《황제칙령》.

화살은 과거에서 왔다.

팔레올로기나 천년 궁무가 깃에 매달렸다.
무너진 로마의 기억이 촉을 밀었다.
아직 오지 않은 백 년의 제국이 활시위 위에서 떨었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낸다.”

그 순간 알렉산드리나는 알았다.

저 화살은 자신을 겨누지 않는다.

미하일라는 그녀를 쓰러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기대고 있는 진군의 핵.
왕도라 부르려는 깃발.
새벽을 향해 걷는 군세가 전쟁으로 계속 묶이는 구조.

그것을 꿰뚫을 것이다.

알렉산드리나는 방패대 앞에 섰다.

《무적이며 전설적인》.

그들은 무적이 아니었다.

전설도 아니었다.

하지만 잠깐, 그들의 등 뒤에 전설 속 불가리아의 그림자가 겹쳤다.

언젠가 위대한 왕들이 이끌었을 군대.
무너지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방패.
날카로웠다고 노래되는 창.
새벽을 향해 걸었다고 믿고 싶은 이름들.

그 그림자가 모의 병력 위에 잠시 내려앉았다.

《꺾이지 않을 제국》.

아직 제국은 아니었다.

아직 완성된 군세도 아니었다.

그러나 꺾이지 않겠다는 태도만큼은 제국의 것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나는 시메온 대제가 아니다.”

방패가 흔들렸다.

“나는 완성된 왕도 아니다.”

창이 부러졌다.

“나는 정통성으로 모두를 침묵시키는 왕도 아니다.”

보급 수레가 멈췄다.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위대해질 차르》.

아직 위대하지 않다.

아직 정통하지 않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릎 꿇지 않는다.

그 방향으로 한 걸음도 멈추지 않는다.

알렉산드리나가 외쳤다.

“그러나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다.”

군세가 움직였다.

“그러니 걷는다!”

세 번째 화살이 날아갔다.

자주빛 칙령은 소리 없이 전장을 갈랐다.

그 화살은 알렉산드리나의 심장을 지나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곳을 겨누지 않았다.

화살은 방패대의 중심도, 깃발의 천도, 창병의 손도 지나쳐, 진군의 핵을 꿰뚫었다.

보급 수레와 방패대와 창진과 예비대가 연결되던 마지막 매듭.

알렉산드리나의 군대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붙잡고 있던 구조.

그것이 자주빛 화살에 꿰뚫렸다.

군세가 무너졌다.

방패가 떨어졌다.

창대가 흩어졌다.

기병 역할의 말 형상이 옆으로 쓰러졌다.

보급 상자가 열리고, 그 안의 모의 빵과 천 조각이 흙바닥에 흩어졌다.

알렉산드리나의 깃발이 기울었다.

그러나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선두 목패 하나.

방패를 든 작은 모의 병사 하나가, 무너지는 진형의 관성 속에서 한 걸음을 더 갔다.

새벽선.

그 앞.

정확히 한 걸음.

여관좌 사제가 외쳤다.

“정지!”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흙먼지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미하일라는 활을 내렸다.

그레이가 장부를 보고 빠르게 판정을 정리했다.

“미하일라 폐하, 세 번째 화살로 진군 핵심 차단.”

사제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심 사제가 선언했다.

“미하일라 폐하 판정승!”

박수는 바로 터지지 않았다.

그레이가 이어 말했다.

“단.”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의 선을 확인했다.

“알렉산드리나 경의 선두 목패는 새벽선 한 걸음 앞까지 도달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진 뒤에야, 박수가 터졌다.

그 박수는 미하일라만을 향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만을 향하지도 않았다.

세 발의 화살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전쟁의 뼈대를 꿰뚫은 것.
무너진 군세가 그래도 한 걸음 더 걸은 것.
그 둘 모두를 향한 박수였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이번에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좋은 막이었어.”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알렉산드리나는 쓰러진 목패 병사들 사이를 걸어 나왔다.

그녀는 패배했다.

그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처음보다 더 흐트러지지 않았다.

미하일라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패배했습니다.”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흉내라 하기에는, 발걸음이 너무 선명하군.”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직은 흉내입니다.”

그녀는 새벽선 한 걸음 앞에 멈춘 목패를 보았다.

“하지만 언젠가, 제 걸음으로 만들겠습니다.”

미하일라는 조용히 물었다.

“왕이 되기 위해 흉내내는가?”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낮았다.

“왕도를 걷기 위해 흉내냅니다. 왕관은 그 뒤에 따라와야 합니다.”

미하일라의 눈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좋은 대답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왜 세 번째 화살을 제게 쏘지 않으셨습니까?”

미하일라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경기장 위에 흩어진 방패와 창, 보급 상자와 깃발을 보았다.

“그대를 쓰러뜨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 말은 오만이 아니었다.

단순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려면,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그 사람이 기대는 전쟁의 핵을 꿰뚫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미하일라의 활을 보았다.

“그것이 황제의 활입니까?”

미하일라는 활시위를 천천히 놓았다.

“그것이 짐이 배운 평화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직, 그런 평화를 모릅니다.”

미하일라는 말했다.

“그렇기에 걸어야겠지요.”

“예.”

알렉산드리나는 새벽선을 보았다.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으니까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좋아!”

그녀의 목소리가 경기장 위에 울렸다.

“패배했는데도 다음 막이 기대되는 건 아주 좋은 징조야!”

그레이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폐하, 패배자에게 그런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다음 막이 필요하니까요.”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미하일라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공적인 자리의 황제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변화였다.

그러나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보았다.

레이튼은 모자챙을 만지며 말했다.

“이번 질문은 명확했습니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어떤 질문?”

“왕은 태어나는가, 걷는가.”

레이튼은 새벽선 한 걸음 앞의 목패를 보았다.

“그리고 황제는 무엇을 쏘아야 전쟁을 끝낼 수 있는가.”

하융은 낮게 말했다.

“한 걸음 앞에서 멈춘 길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다시 걸을 수 있으면 된 거지.”

아스테르다스가 덧붙였다.

“나쁘지 않은 낙점이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그거 이제 아무 데나 쓰는 거 아니야?”

“아니다. 적절했다.”

“그래. 뭐, 틀리진 않네.”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제3경기 종료. 미하일라 폐하 판정승. 부상 없음. 모의 병력 다수 붕괴. 새벽선 한 걸음 앞 도달.》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알렉산드리나 경, 흉내가 자기 명령으로 전환된 지점 확인.》

푸리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도 기록해?”

그레이는 담담히 답했다.

“다음에 같은 사람이 더 멀리 걸을 수 있으니까요.”

알렉산드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 저는 그냥…… 기록한 것뿐입니다.”

미하일라는 그 장면을 보았다.

기록.

한 걸음.

패배.

다음 막.

그 모든 단어가 조용히 이어졌다.

박수는 이번에도 늦었다.

세 발의 화살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진군의 뼈대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리고 사생아 차르의 군대는 무너지면서도 한 걸음 더 걸었다.

그날 관중들은 보았다.

이미 황제인 자가 전쟁을 끝내는 법과, 아직 위대하지 않은 자가 위대해지기 위해 걷는 법을.

세 번째 친선전은 미하일라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알렉산드리나의 발자국은 새벽선 한 걸음 앞에 남았다.
아레의 상위세 지휘 체급, 하융의 가능성계 현장 지휘, 그레이의 안식계 행정, 레이튼의 문답·결론해체 칭호를 반영해서 작성할게.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 5막 — 가장 낮은 바다와 비껴간 창들

“이번 막은 도망치는 법이야!”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외쳤을 때, 그레이는 이미 펜을 들고 있었다.

“퇴각입니다, 폐하.”

“도망과 퇴각의 차이는?”

푸리나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레이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기록과 책임이 남으면 퇴각입니다.”

레이튼이 모자챙을 살짝 눌렀다.

“그리고 질문이 남으면 전략이지요.”

하융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기장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성벽.
피난민 목패.
마지막 수레.
등불 몇 개.
후방의 낮은 선 하나.

푸리나가 이름 붙인 퇴각선이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또한 살아남은 이가 다음 길을 걸으면, 그것은 패배만은 아니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럼 이번 막은 패배만은 아닌 도망…… 아니, 퇴각!”

“폐하.”

“알았어, 알았어. 퇴각.”

그레이는 장부 위에 선을 하나 그었다.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경기장 위의 조명이 낮아졌다.

[여관:극장]은 앞선 막들과는 다르게 변했다.
이번에는 화려한 결투장이 아니었다.

중앙에는 반쯤 무너진 성벽이 있었다.
성벽 뒤에는 피난민 역할을 맡은 작은 목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바퀴가 삐걱거리는 수레 하나가 놓였다.
수레 위에는 들것 둘, 물통 넷, 마른 빵이 든 자루, 그리고 “기록 상자”라고 적힌 작은 궤짝이 실려 있었다.

앞쪽에는 적 기병과 궁수를 대신하는 검은 목패들이 있었다.

그 목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의 극장이 조명을 바꾸는 순간, 관중들은 모두 느꼈다.

저것들은 곧 달려올 것이다.

“이번 경기는 모의 퇴각 지휘전입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폐하는 전장 전체를 압박하는 쪽을 맡습니다. 킬리키아 측은 하융 경, 레이튼 경, 그리고 제가 피난민과 마지막 수레를 퇴각선까지 보내는 역할을 맡습니다.”

푸리나가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무대 담당!”

“폐하께서는 판정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조명은?”

“조명은 허가합니다.”

“좋아!”

그레이는 한숨을 참았다.

“승리 조건은 단순 생존자 수만이 아닙니다. 피난민 퇴각, 수레 보존, 부상자 후송, 지휘선 유지, 후퇴 질서, 이름 누락 여부,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을 위험 감소 여부를 종합합니다.”

죠니가 목책에 기대어 말했다.

“경기라기보다 악몽 같은데.”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악몽이다. 깨어난 뒤 움직일 이유가 남으니까.”

죠니는 그를 흘끗 보았다.

“너는 가끔 좋은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해.”

“좋은 말이라면 진지해야 하지 않나?”

“아니,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닌데.”

그때 경기장 반대편에서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무장을 과시하지 않았다.

화려한 갑주도, 높이 치켜든 깃발도 없었다.

그저 검은 드레스처럼 보이는 군복,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실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흘렀다.

그 실은 빛나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낮췄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의 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속삭임.
목책을 두드리는 손가락.
수레바퀴가 삐걱이는 소리.
병사들의 숨.

모든 것이 낮아졌다.

침묵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정중하게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호명했다.

“세르비아의 군주. 첫 번째 마가트로이드. 전장의 실타래와 침묵으로 가라앉는 이들을 기억하는 자.”

푸리나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가볍게 만들지 않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무대입니다, 헤툼 폐하.”

그녀는 무너진 성벽과 피난민 목패를 바라보았다.

“산 자가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무대라면, 죽은 이들도 조금은 덜 외롭겠지요.”

푸리나는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덜 외롭게 퇴각하는 막이네.”

“그리되기를 바랍니다.”

아레의 시선이 하융, 레이튼, 그레이에게 향했다.

“세 분이 함께 오시는군요.”

하융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수수께끼도 때로는 여러 명이 풀어야 더 즐겁지요.”

그레이는 장부를 안고 짧게 말했다.

“저는 즐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필요합니다.”

아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좋습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 순간, 푸리나의 [여관:극장] 위로 다른 무언가가 겹쳤다.

무대가 아니라 지도.

흙바닥의 선들이 군도처럼 이어졌다.
무너진 성벽은 전선이 되었고, 피난민 목패는 후방의 부담이 되었고, 수레 하나는 보급과 부상자와 기록을 한꺼번에 싣고 있는 늦은 심장이 되었다.

아레는 전장을 보았다.

아니, 전쟁을 보았다.

《천저의 그물추》.

그녀의 눈에는 수레바퀴 하나가 늦어지는 것이 단순한 지연이 아니었다.

그 지연이 뒤쪽 방패병의 보폭을 바꾸고, 그 보폭이 전령의 통과 시간을 늦추고, 그 통과 시간의 지연이 왼쪽 피난민 열의 공포를 키우고, 그 공포가 다시 방패선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미시적인 변화가 거시적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아레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시작합니다.”

푸리나가 손을 내렸다.

“막이 오른다!”

검은 목패 기병들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렸다.

그러나 아레의 실이 전장 위로 퍼지자, 그 느린 움직임이 끊기지 않는 압박으로 바뀌었다.

《끊기지 않는 실타래》.

아레는 자신의 병력만 잇지 않았다.

전장 전체를 실로 보았다.

적의 접근.
아군의 후퇴.
수레의 바퀴.
피난민의 발.
전령의 숨.
방패병의 팔.

모든 것이 실이었다.

“모두를 잇는 그물.”

아레가 낮게 말했다.

그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퇴각로가 좁아졌다.

하융은 첫 번째 창을 보았다.

수레가 늦었다.
후미가 잘렸다.
전령은 살아남았지만, 물통이 버려졌다.
퇴각선 뒤에서 부상자 둘이 죽었다.

두 번째 창.

수레를 버렸다.
피난민은 빨라졌다.
그러나 아이 하나가 어둠 속에서 손을 놓았다.

세 번째 창.

방패대가 버텼다.
하지만 적의 궁수가 기록 상자를 태웠다.
나중에 이름을 찾지 못했다.

하융은 숨을 낮게 내쉬었다.

“……혼자서는 어렵겠소.”

레이튼이 그 옆에 섰다.

“그렇다면 혼자 풀 문제가 아니겠지요.”

그레이는 이미 수레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피난민 명단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수레 안의 물자 목록도 확인합니다.”

하융이 회색빛 창호를 열었다.

《여관:비껴간 창》.

전장 위에 동방식 창호들이 얇게 겹쳤다.

그 창들은 밝지만은 않았다.

어떤 창에는 죽은 병사가 있었다.
어떤 창에는 무너진 수레가 있었다.
어떤 창에는 방패선이 한 박자 더 버티는 모습이 있었다.
어떤 창에는 피난민이 서로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이 있었다.

비극과 희망이 함께 창밖에 있었다.

하융은 그 창문들을 하나씩 보았다.

“왼쪽 수레는 세 번 죽었소. 오른쪽 전령은 두 번 끊겼소. 중앙 방패는 한 번 버텼으나, 그 뒤의 아이가 손을 놓았소.”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아이들은 방패 안쪽이 아니라 수레 뒤쪽입니다. 손을 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 명씩 짝을 짓습니다.”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은 덜 죽었소.”

레이튼은 무너진 성벽 쪽을 보았다.

“그러면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는 아레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아레 폐하. 이 퇴각에서 우리가 살리려는 것은 수레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퇴각이라는 이름입니까?”

아레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셋은 분리되기 어렵습니다.”

“물론입니다. 좋은 수수께끼일수록, 보기들은 서로 닮아 있지요.”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닮았다고 해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채,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그 순간 퇴각로의 오른쪽이 막혔다.

막힌 것이 아니었다.

막히도록 되었다.

검은 목패 궁수들이 사격선을 잡았고, 기병 목패가 그 사격선을 비껴 돌아 피난민의 측면을 압박했다.
수레는 그쪽으로 갈 수 없었다.

하융이 말했다.

“중앙은 늦소.”

그레이가 장부를 보았다.

“늦어도 갑니다. 수레를 버리지 않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둘이 죽소.”

“버리면 퇴각선 뒤에서 둘이 더 죽습니다.”

그레이는 수레 위의 물통을 가리켰다.

“물통 넷 중 둘은 후방 치료소에서 필요합니다. 들것 둘은 지금 부상자 운반용이지만, 퇴각선 뒤에서는 임시 침상입니다. 지금 버리면 빨라지지만, 같은 이유로 다시 죽습니다.”

레이튼이 작게 말했다.

“좋은 답입니다. 질문을 좁히지요. 수레를 살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수레 없이는 사람이 다시 죽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그렇다면 완전한 길은 없소. 덜 죽는 길로 가겠소.”

킬리키아 측 목패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융은 짧게 지시했다.

“왼쪽 방패, 반 치 낮추시오. 전령은 중앙이 아니라 그림자를 밟으시오. 수레꾼, 바퀴를 들지 말고 누르시오. 이미 든 창에서는 바퀴가 부러졌소.”

그의 말은 예언이 아니었다.

“앞으로 부러진다”가 아니었다.

이미 부러진 가능성의 흔적을 보고, 지금의 손이 다른 위치를 잡게 만드는 지시였다.

아레는 그것을 보았다.

“흥미롭군요.”

그녀가 말하자, 전장에 한기가 번졌다.

《퍼져가는 한기》.

검은 목패들과 연결된 모든 경로에 피로가 내려앉았다.

방패대의 팔이 무거워졌다.
전령의 숨이 짧아졌다.
수레꾼의 손이 굳었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수레꾼 교대. 물통 하나를 내려 중앙 방패대에 넘깁니다.”

“물통을 내리면 수레가 가벼워지는군요.”

레이튼이 말했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손이 따뜻해집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듣고 창 하나를 닫았다.

《창문 닫기》.

수레꾼이 손을 놓쳐 바퀴가 빠지는 가능성이 얇게 사라졌다.

하지만 아레의 압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라앉히기》.

침묵이 내렸다.

이번에는 단순히 조용해진 것이 아니었다.

전령이 외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옆 전열에 닿지 않았다.

방패병은 명령을 들으려 했지만, 그 명령은 한 박자 늦게 도착했다.

수레꾼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레의 지휘는 병사를 죽이기 전에, 먼저 서로를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푸리나는 관중석 쪽에서 손을 꽉 쥐었다.

이번 막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무서웠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도, 금빛 거대참격도, 자주빛 화살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조금씩 늦어지고, 서로를 놓치고, 같은 방향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전령 둘이 끊겼습니다.”

하융이 창밖을 보았다.

“이대로면 방패선이 먼저 침묵하오.”

레이튼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주변에 낡은 서재의 기척이 열렸다.

책장.
별이 그려진 천장.
아직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별들.
공중에 떠다니는 미완의 질문들.

《여관:문답의 서재》.

레이튼은 검은 목패들이 아니라, 킬리키아 측 지휘선 위에 붙은 이름을 보았다.

“끊겼다.”

“늦었다.”

“끝났다.”

그 이름들은 너무 빨랐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아직 끝났다고 부르기에는 이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명령이 끊겼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닫힌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패배라는 책이 닫히려던 순간, 마지막 장이 한 장 더 넘어갔다.

그레이가 즉시 받아 적었다.

“끊긴 건 전령이 아니라 전달 순서입니다. 방패대는 명령을 못 들은 게 아니라, 같은 명령을 두 번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질문이 바뀝니다. ‘누가 명령을 못 들었는가’가 아니라, ‘왜 같은 명령이 두 번 필요한가’입니다.”

하융이 창을 보았다.

“두 번째 명령을 기다린 창에서는 늦었소. 첫 번째 명령만 믿은 창에서는 방패 셋이 살았소.”

그레이가 말했다.

“중앙 방패대, 첫 번째 명령으로 이동. 반복 확인 생략. 대신 뒤쪽에 민원 접수 표식을 둡니다.”

푸리나가 멀리서 작게 중얼거렸다.

“민원 접수 표식…… 전장에서?”

그레이는 들었다.

“전장에서도 민원은 발생합니다.”

“그건 맞는 것 같아.”

하융이 짧게 웃었다.

하지만 아레는 아직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공허로 향하는 그물망》.

퇴각로와 퇴각로 사이에 감제망이 펼쳐졌다.

돌파와 우회가 차단되었다.

그 길로 가면 늦는다.
저 길로 가면 끊긴다.
중앙으로 가면 밀린다.
수레를 버리면 살아남지만, 기록 상자가 탄다.
기록 상자를 살리면 아이가 늦는다.

하융의 창들이 거의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는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레이튼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어느 창에서도 모두 살지는 않소.”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아레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애도에 가까웠다.

“지휘관은 어느 순간 용인해야 합니다.”

아레가 말했다.

“많든 적든, 누군가는 늦습니다. 누군가는 끊깁니다. 누군가는 후미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름들을 기억합니다.”

레이튼이 모자를 벗었다.

“아레 폐하.”

“말씀하십시오.”

“후미라고 부른 순간, 그들은 이미 버려진 것입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후미는 뒤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돌아올 길도 지휘의 일부입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레의 실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질문은 공격이 아니었다.

비난도 아니었다.

그저 이름 하나를 잠시 지운 것이다.

후미.

그 이름 아래 너무 빨리 묻힌 결론을.

아레는 말했다.

“돌아올 길이 없다면, 후미가 아니라 제물이지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아직 질문은 남아 있습니다.”

그때 검은 목패 기병들이 마지막 수레를 향해 돌진했다.

위기였다.

수레를 지키려면 방패대가 남아야 했다.
방패대가 남으면 피난민 셋이 늦었다.
피난민 셋을 먼저 보내면 수레가 잡혔다.
수레가 잡히면 퇴각선 뒤에서 부상자 둘과 물 부족으로 다시 손실이 발생했다.

그레이가 장부를 세게 쥐었다.

“수레를 그대로 묶으면 뒤의 세 명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하융은 창을 보았다.

한 창에서 그는 뛰어들었다가 창에 꿰였다.
다른 창에서는 검집으로 막았지만, 수레바퀴가 부러졌다.
또 다른 창에서는 자신이 살았지만, 수레꾼이 죽었다.
그다음 창에서는 모두 늦었다.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어느 창에서도 모두 살지는 않소.”

레이튼이 말했다.

“그렇다면 ‘모두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모든 질문의 끝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경기장 전체가 그 질문을 들었다.

《아포리아의 신사》.

레이튼은 정중히 모자를 벗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레의 실이 수레와 피난민과 후미를 감고 있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이 퇴각의 목적은 손실을 계산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다시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까?”

결론이 멈췄다.

“셋은 버려야 한다.”

그 이름이 완전히 고정되기 전, 질문이 그 앞에 섰다.

그레이가 한 걸음 나섰다.

그녀의 발밑에 조용한 거리가 열렸다.

낡았지만 다시 세워진 집들.
문패가 달린 문.
등불.
잠들지 못한 이름들이 아직 꺼지지 않은 채 걸려 있는 거리.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손실 셋이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침묵 속에서 잘 들렸다.

“아이 하나. 들것을 든 사람 하나. 마지막 물통을 맡은 사람 하나입니다.”

그녀는 펜을 움직였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칭호가 열렸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등불들이 하나씩 켜졌다.

피난민 목패 셋 위에 이름표가 생겼다.

아이.
들것잡이.
물통지기.

숫자는 셋이었지만, 죽음은 셋이라는 숫자 아래 숨어 있지 못했다.

그레이가 말했다.

“이동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아이는 수레 뒤가 아니라 방패 안쪽. 들것잡이는 수레 오른쪽. 물통지기는 전령과 교대합니다.”

하융이 고개를 들었다.

회색 창호들이 다시 열렸다.

그 안에서 조금 다른 빛이 보였다.

완전히 좋은 세계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다쳤다.
수레는 여전히 흔들렸다.
방패대 하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창 하나에서, 아이가 손을 놓지 않았다.

하융은 검집을 잡았다.

“그런 세계도 있었소.”

그의 몸 주위에 자신이 죽은 가능성들이 겹쳤다.

첫 번째 하융은 창에 꿰였다.
두 번째 하융은 말발굽 아래 넘어졌다.
세 번째 하융은 검을 빼기도 전에 늦었다.
네 번째 하융은 검집 끝으로 창대를 반 치 밀었다.

그 네 번째 가능성은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반 치는 남았다.

하융은 그 죽은 자신들을 밟고 앞으로 나갔다.

《죽은 나를 밟고 선 검》.

검은 목패 기병의 창대가 수레 쪽으로 내려왔다.

하융은 그것을 정면으로 막지 않았다.

이미 막아 죽은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걸음 비껴섰다.

검집 끝이 창대를 반 치 밀었다.

정말 반 치였다.

그 반 치 때문에 창끝은 수레꾼의 손목을 지나쳤고, 바퀴는 부러지지 않았으며, 수레는 넘어지지 않았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더 나은 세계도 있었을 것이오.”

그의 칭호가 열렸다.

《이 세계를 선택한 자》.

창밖에는 수많은 세계가 있었다.

아예 전쟁이 없었던 세계.
수레가 더 일찍 출발한 세계.
피난민들이 피난민이 되지 않았던 세계.
하융이 이 나라에 오지 않았던 세계.
푸리나를 만나지 않았던 세계.

그는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허나 우리가 사는 곳은 이곳이오.”

그 말과 함께, 패배 가능성이 한 번 밀려났다.

공포가 밀렸다.
혼란이 밀렸다.
“이미 늦었다”는 이름이 밀렸다.

그리고 아레가 움직였다.

그녀의 눈에 가장 낮은 바다가 열렸다.

《가장 낮은 바다》.

그 바다는 물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세르비아가 짓밟힌 기억.
전장에서 명령 아래 스러진 병사들.
후대의 마가트로이드들이 가라앉힌 것들.
잊힌 이들이 마땅히 잠드는 공허의 천저점.

아레는 모든 실을 쥐고 있었다.

놓지 않으려 했다.

놓으면 잊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칭호가 움직였다.

《첫 번째 가주》.

아레와 연결된 침묵의 전령 목패 하나가 일어섰다.
그 목패는 퇴각로 붕괴라는 결말을 강화하려 했다.

길을 잃은 아이들아.
나아갈 길을 모르겠다면.
가장 아팠던 첫 매듭을 떠올려 되짚어라.

퇴각로가 거의 닫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레이튼이 이름을 지우고 있었다.

그 결말의 이름은 아직 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레이가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하융이 죽은 가능성을 밟고 있었다.

이 세계를 선택하겠소.

그리고 아레는 보았다.

실을 놓으면 잊히는 것이 아니다.

놓아도 기록할 수 있다.
놓아도 창밖에 남겨둘 수 있다.
놓아도 질문할 수 있다.
놓아도 이름은 남길 수 있다.

산 자는 때때로, 실이 느슨해져야 달릴 수 있다.

아레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풀렸다.

실 하나가 느슨해졌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방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억하기 때문에 놓는 것이었다.

그 느슨해진 실 사이로, 피난민 목패 하나가 달렸다.

수레가 퇴각선에 닿았다.

아이 목패가 방패 안쪽에서 넘어지지 않았다.

들것잡이는 수레 오른쪽을 지켰다.

물통지기는 전령에게 물을 넘겼다.

여관좌 사제가 외쳤다.

“정지!”

침묵이 내려앉았다.

검은 목패들이 멈췄다.

수레바퀴도 멈췄다.

피난민 목패들도, 방패대도, 전령도 모두 그 자리에 섰다.

하융은 검집을 땅에 짚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레이는 펜을 놓지 않았다.

레이튼은 모자를 다시 썼다.

아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놓은 실 하나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레이가 판정표를 정리했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이번에는 재촉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레이가 말했다.

“판정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아레 폐하, 전체 지휘선 유지와 적 진군 지연에서 우세. 퇴각로 압박, 지휘체계 분리, 전장 지속력 차단 모두 우수.”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다음 줄을 보았다.

“킬리키아 측, 마지막 수레 보존과 피난민 추가 생존에서 우세. 이름 누락 없음. 퇴각선 이후 반복 피해 위험 감소.”

하융이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레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총합 판정.”

잠깐의 침묵.

“무승부입니다.”

박수는 바로 터지지 않았다.

이번 막은 환호할 결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쓰러뜨린 장면도 없었다.
거대한 참격도 없었다.
화살이 하늘을 가르지도 않았다.

그저 수레 하나가 늦지 않았고, 아이 하나가 손을 놓지 않았고, 이름 셋이 숫자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관중들은 잠시 박수 치는 법을 잊었다.

그러다 푸리나가 조용히 손뼉을 쳤다.

짝.

한 번.

이번에는 크게 외치지 않았다.

다시.

짝.

그러자 아이들이 따라 쳤다.

병사들이 따라 쳤다.

사절들이 따라 쳤다.

박수는 작았다.

하지만 끊기지 않았다.

아레는 그 박수를 들었다.

박수와 침묵 사이.

그곳에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아레는 하융, 레이튼, 그레이 앞에 섰다.

“놓으면 잊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놓아도 기록할 수 있습니다.”

하융은 창밖을 보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놓아도, 창밖에 남겨둘 수 있소.”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놓는다는 결론도, 때로는 질문을 거쳐야 하지요.”

아레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너무 많은 실을 쥐고 있었군요.”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쥐고 계셨기에 가라앉지 않은 이름도 있었을 겁니다.”

하융이 말했다.

“그러나 산 자는 때때로, 실이 느슨해져야 달릴 수 있소.”

레이튼이 모자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그는 퇴각선에 닿은 수레와, 이름표가 붙은 피난민 목패들을 보았다.

“지휘관은 죽음을 얼마나 붙잡아야 하는가. 그리고 산 자가 달리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손을 놓아야 하는가.”

푸리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아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하융의 창백한 낯빛과, 그레이의 떨리는 손가락과, 레이튼의 조용한 미소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좋은 퇴각이었어.”

그레이가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대답했다.

“좋은 퇴각이라는 표현은…… 있습니다. 이번에는 있습니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있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죠니가 목책 너머에서 말했다.

“이번엔 맞는 말이네.”

아스테르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낙점이었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 그 말 진짜 마음에 들었구나.”

“그렇다.”

“그래. 이제 인정할게.”

하융은 그 대화를 듣고 조금 웃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줄에 기록했다.

《제4경기 종료. 아레 폐하와 킬리키아 가신단, 총합 무승부.》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아레 폐하, 전체 전장 지휘 우세.》

또 한 줄.

《킬리키아 측, 마지막 수레 및 추가 피난민 생존. 이름 누락 없음.》

그레이는 펜을 멈췄다가,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실 하나를 놓았음. 이름은 놓지 않았음.》

아레는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박수는 크지 않았다.

이번 막은 환호할 결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중들은 보았다.

상위의 지휘관은 전장을 통째로 가라앉힐 수 있고, 낮은 곳의 가신들은 함께할 때 그 침묵 속에서 한 명의 이름을 더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을.

아레는 죽은 이를 가장 낮은 바다에 담아 잊히지 않게 한다.

하융은 죽은 가능성들을 창밖에 남겨둔 채 지금 이 세계를 선택한다.

레이튼은 희생이라는 이름을 잠시 지운다.

그레이는 손실이라는 숫자 아래에서 이름을 되찾는다.

그날의 모의 퇴각전은 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조용한 답을 남겼다.

실은 놓아도 된다.

다만 이름은 놓지 않아도 된다.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6막 — 뇌광은 성은의 심장을 시험한다

“이번 막은 실험이야!”

푸리나 헤툼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레이는 이미 그 말을 예상했다는 듯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통제된 실험입니다, 폐하.”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실험 앞에 통제된이 붙으면 재미가 줄어들지 않아?”

“재미가 줄어야 사람이 삽니다.”

“그레이, 너는 정말 무대의 적이야.”

“사고의 적입니다.”

목책 너머에서 죠니가 낮게 웃었다.

“둘 다 비슷하지 않나.”

“아닙니다.”

그레이가 즉시 대답했다.

“사고가 나면 무대도 같이 끝납니다.”

푸리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통제된 실험!”

라플리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통제된 실험은 재미가 반쯤 죽는데.”

그레이의 펜끝이 라플리 쪽으로 향했다.

“재미가 반쯤 죽어야 사람이 삽니다.”

라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래. 사람 살리는 쪽이 우선이지. 마탑에서도 사고 보고서 쓰기 싫어하는 놈들이 항상 그렇게 말해.”

“보고서가 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좀 맞네.”

그때 반대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라이자가 웃으며 말했다.

“죽지 않는 실험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어요.”

라플리가 그녀를 흘끗 보았다.

“너, 은근히 무서운 소리 하네.”

라이자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런가요?”

“응. 그런 쪽이 더 위험해. 진심이잖아.”

푸리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좋아. 분위기 완벽해!”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저는 전혀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미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여관:극장]이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퇴각전의 흙먼지와 수레 자국이 남아 있던 경기장은 천천히 공방으로 변했다.
목책 안쪽에 은빛 선들이 그어졌다.
바닥에는 원형 회로가 새겨졌고, 그 회로의 중앙에는 심장처럼 둥근 반응로가 솟아났다.

반응로는 금속 장치처럼 보였지만, 단순한 금속은 아니었다.

은빛이었다.

차갑게 번쩍이는 은이 아니라, 손안에 오래 쥐고 있으면 체온을 기억할 것 같은 은빛.
낙원 이야기를 들려주던 작은 정령이 남기고 간 조잡한 은꽃처럼, 어딘가 서툴고도 다정한 빛.

그 주변으로 성은 저장조가 솟았다.
왼쪽에는 은의 가호를 저장하는 은빛 축적고.
오른쪽에는 은인 제작대와 성은의 혈맥 회로.
상부에는 라플리의 천상현상을 받아들일 투입 구역이 열렸다.
외곽에는 여관좌 사제들이 차단 등불을 세웠고, 그레이가 직접 걸어가 등불 사이의 거리를 재었다.

“반 보 더 뒤로.”

사제가 등불을 옮겼다.

“저기 은빛 관은 관중석 방향으로 향하면 안 됩니다. 파장이 새면 곧장 차단하세요.”

라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관중석 쪽으로는 흘리지 않을게요.”

라플리가 팔짱을 꼈다.

“내 번개가 멋대로 튀면?”

그레이가 말했다.

“튈 수 없도록 하십시오.”

“그게 말처럼 쉽나.”

“어렵다면 출력 제한을 더 걸겠습니다.”

라플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알았어. 안 튀게 한다고.”

푸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좋아! 양측 모두 안전한 광기!”

“폐하.”

“왜?”

“광기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안전한 광기도 만들 수 있어!”

“그런 표현은—”

“있어!”

그레이는 결국 포기했다.

공방이 완성되자, 푸리나는 중앙 반응로 옆에 섰다.

“이번 경기는 결투가 아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한쪽은 성은으로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낸다. 다른 한쪽은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려 그 심장이 어디까지 뛸 수 있는지 시험한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라이자를 가리켰다.

“보헤미아의 라이자! 은의 여인! 정령이 들려준 꿈속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고 맹세한 성은의 창조자!”

라이자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릴게요.”

푸리나는 이번에는 라플리를 향해 손을 돌렸다.

“유플리아 마탑의 제35대 마탑주! 천율학파의 프로보스트! 하늘을 뇌광으로 물들이는 평민 고아의 천재 마법사, 라플리!”

라플리는 손을 대충 흔들었다.

“소개에서 평민 고아는 빼도 되지 않아?”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중요한 포인트잖아!”

“귀족 놈들 앞에서라면 그렇긴 한데.”

라플리는 관중석 어딘가를 보고 웃었다.

“뭐, 좋아. 숨길 것도 아니고.”

라이자가 그런 라플리를 가만히 보았다.

두 사람은 달랐다.

라이자는 꿈에서 시작했다.
조그마한 은꽃 하나가 그 꿈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었고, 그 증거 하나만으로 평생의 목표를 세웠다.
좀 더 친절한 사람들의 세계.
보헤미아를 위해, 은인들을 위해, 친구를 위해 베푸는 은.

라플리는 후원과 독기로 올라왔다.
평민. 고아. 귀족 사회의 시선.
마탑의 구석에서 시작해, 뇌광과 이론과 오기로 천상현상을 자기 손에 끌어내린 마탑주.

한 사람은 은으로 사람을 만들려 했다.
한 사람은 하늘을 마법핵으로 지정하려 했다.

푸리나는 양팔을 펼쳤다.

“규칙!”

그레이가 바로 앞으로 나왔다.

“라이자 폐하의 성은 공방 시스템은 중앙 반응로를 유지해야 합니다. 반응로가 파괴되거나 관중석 방향으로 파장이 새면 감점입니다.”

그레이는 라플리를 보았다.

“라플리 경은 천율학파 마법으로 반응로 한계를 시험합니다. 목표는 파괴가 아니라 출력 시험, 취약점 발견, 안정성 검증입니다.”

라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부수는 건 쉽고, 안 부수고 한계 보는 게 어려운 거지.”

“그 점을 이해하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너 지금 좀 놀란 거지?”

“아닙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는 가끔 놀라도 표정이 그대로야.”

“폐하.”

“알았어, 조용히 할게.”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라이자 폐하께서는 공방 전체를 운용합니다. 라플리 경은 단독 실험자로 들어갑니다. 체급과 역할이 다르므로 판정은 단순 승패가 아니라 전체 안정화와 국소 성과를 나누어 평가합니다.”

라플리는 피식 웃었다.

“좋네. 졌는데 성과는 냈다 같은 말 할 수 있게 미리 깔아두는 거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정확한 판정은 중요합니다.”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받네.”

라이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라플리 님의 성과도 기대하고 있어요.”

라플리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더 무섭다고.”

“왜요?”

“아니, 됐다. 시작하자.”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그럼, 실험 개시!”

라이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반응로에 손을 얹었다.

은빛이 퍼졌다.

《보헤미아의 피》.

그 순간, 경기장 위의 성은 공방은 단순 개인의 작업대가 아니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약속이 은빛 회로 위에 스며들었다.

보헤미아를 위해.
은인과 보헤미아의 모든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만든 은인 외에는 후사를 두지 않겠다는 서약.
성과 혈통을 은인들에게 나누어, 그들도 종족으로 개화하게 하겠다는 선택.

라이자는 은을 빚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형태를 빚고 있었다.

《은의 여인》.

순수한 은의 빛이 그녀의 손끝에서 퍼졌다.

그 빛은 차갑지 않았다.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금속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빛났다.

라이자가 말했다.

“폭주는 막을게요.”

그녀의 손짓에 성은 저장조가 열렸다.

“하지만 막기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은빛 관들이 바닥에서 솟았다.

“꿈속에서 들은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걸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은의 조형》.

성은이 즉석에서 형태를 얻었다.

절연용 은판.
뇌광 유도 회로.
피뢰침.
냉각용 성은 관.
차폐벽.
그리고 작은 은인 보조공들.

은빛 인형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병사처럼 줄을 맞췄지만, 병사만은 아니었다.
장치처럼 움직였지만, 장치만도 아니었다.
가슴 안쪽에는 작고 둥근 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은의 군단》.

라이자가 만든 은인병들은 공방 곳곳으로 흩어졌다.
하나는 은판을 옮겼고, 하나는 반응로 옆의 관을 조율했고, 셋은 차폐벽 앞에서 기다렸다.
그들의 눈은 비어 있지 않았다.
아직 완전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도, 단순한 물건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따뜻한 맥박이 있었다.

라플리는 그 광경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 아닌데.”

그녀의 왼눈에 빛이 돌았다.

《오딘의 눈》.

마탑주에게 전해지는 고유의 아티팩트.
영력, 차력, 신성회로, 코어의 흐름이 시각화되었다.

라플리의 시야 안에서 은빛 공방은 복잡한 생체 구조처럼 보였다.

성은 흐름.
신성 코어.
혈맥 분기.
은인병의 선천 신성회로.
따뜻한 은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
보헤미아의 피와 성은의 혈맥이 겹친 상냥함의 심상각인.

라플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 이거 진짜 심장처럼 만들었네.”

라이자가 웃었다.

“심장이니까요.”

“장치 아니고?”

“장치이기도 해요. 하지만 장치로만 만들면, 친구가 되진 못하잖아요.”

라플리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낮게 말했다.

“역시 위험한 타입이네.”

“그 말, 오늘 두 번째예요.”

“두 번 말할 만큼 그래.”

라플리는 앞으로 걸었다.

그녀의 발밑에서 공기가 달라졌다.

천장이 낮아진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내려왔다.

《천상종림天相從臨》.

공방 위의 천기天基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뇌雷로 고정되었다.

맑았던 은빛 공방 위에, 작고 어두운 구름이 생겼다.
그 가장자리에는 검은 역설이 번졌다.

신학역설.
마魔의 방향성.
마법의 발현과 숙련을 밀어올리는 위험한 인과 고정.

라이자는 그 하늘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공방 안에 하늘이 생겼네요.”

라플리는 손을 들었다.

“하늘에도 법칙은 있어. 문제는 귀족 놈들이 그걸 혈통처럼 포장한다는 거지.”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작은 뇌광이 맺혔다.

《천율학파天律學派 Schola Legum Caelitonitrus》.

“천격 마법핵 지정.”

공방 위에 마법진이 열렸다.

“뇌광 하나. 출력은 낮게 간다.”

《뇌천마력회로》가 그녀의 팔을 따라 빛났다.

그것은 혈관이 아니었다.

회로였다.

회로가 아니라, 하늘에서 잘라온 번개의 문법이었다.

첫 번째 뇌광이 반응로에 꽂혔다.

쾅, 하는 폭음은 없었다.

대신 성은 반응로가 크게 떨렸다.

은빛 회로가 파르르 흔들렸고, 은인 보조공들이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레이가 즉시 차단 등불을 확인했다.

“파장 정상. 관중석 방향 유출 없음.”

라이자는 두 손을 반응로에 얹었다.

《성은의 혈맥》.

성은의 강이 흘렀다.

회로는 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줄기였다.
은빛 방울 하나하나가 상냥함과 자비로움을 품은 혈맥이었다.

라플리의 뇌광이 그 혈맥을 흔들었다.

라이자는 무리하게 막지 않았다.

흔들린 곳을 보았다.
떨린 곳을 들었다.
그리고 혈맥의 분기를 바꾸었다.

반응로가 다시 안정되었다.

라플리가 눈썹을 올렸다.

“버티네.”

라이자는 웃었다.

“안아주는 건 잘하거든요.”

“번개를 안아주는 장치는 처음 보는데.”

“장치라기보다는 심장이라니까요.”

“그게 더 이상하거든.”

라플리는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럼 두 번째.”

뇌광이 둘로 늘었다.

“세 번째.”

셋.

공방 안의 작은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천상이변》.

번개가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방 안에 작은 하늘이 생겼고, 그 하늘이 분노했다.

원형 범위의 뇌천이 반응로 위에 펼쳐졌다.
천율학파의 계산식이 바닥의 은빛 회로와 충돌했고, 뇌천마력회로에서 뿜어진 마력이 천상이변의 범위를 밀어올렸다.

은인병들이 움직였다.

《은의 군단》은 전투하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공방을 살렸다.

하나는 차폐벽을 보강했다.
둘은 은판을 들고 뇌광의 경로에 섰다.
셋은 반응로 옆에서 성은 관을 교체했다.
넷은 떨어진 피뢰침을 다시 세웠다.

그들은 병기처럼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그 움직임에는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적었다.

라이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오래 잡고 있지 마세요. 번개는 지나가야 해요.”

은인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플리는 그걸 보고 낮게 중얼거렸다.

“저거, 알아듣네.”

“네.”

라이자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들으니까요.”

라플리는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더 거칠게 웃었다.

“좋아. 그럼 더 간다.”

그녀의 마력이 바뀌었다.

《뇌봉雷鳳》의 경지가 열렸다.

상위마력.

천노마력天怒魔力.

뇌광의 잔류가 사라지지 않고 공방 위에 남았다.

《난장광乱残光》.

뇌광은 지나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난잔광으로 남아 성은 회로 위를 핥았다.
은빛 혈맥은 그 잔광을 받아들일 때마다 떨렸다.

라플리의 웃음이 조금 비뚤어졌다.

《대마 신학역설 - 마녀striga》.

마녀의 변질은 그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대신 더 빠르게 배우고, 더 위험하게 계산하게 만들었다.
마魔에 대한 친화가 뇌雷의 법칙 가장자리를 검게 물들였다.
물리적으로는 더 취약해지는 몸이었지만, 마법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속도는 무섭도록 올라갔다.

그레이가 눈을 들었다.

“라플리 경, 신체 반동은?”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판정 기준이 아닙니다.”

“아직 팔 붙어 있어.”

“그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플리가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찼지만, 출력은 조금 조정했다.

“됐어. 안 죽어.”

라이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라플리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너까지 그러면 짜증 나는데.”

“죄송해요.”

“사과도 너무 빠르네.”

라플리는 다시 《오딘의 눈》으로 공방을 들여다보았다.

뇌광이 흐른 자리.
반응로가 떨린 위치.
성은의 혈맥이 너무 많이 받아준 곳.
은의 심장이 박자를 놓칠 뻔한 순간.

그녀는 웃었다.

“찾았다.”

라이자가 물었다.

“뭘요?”

“약점.”

라플리는 손가락으로 반응로 오른쪽 혈맥 분기를 가리켰다.

“좋아. 이건 혈맥이 너무 착해서 생기는 약점이네.”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착해서요?”

“들어오는 걸 너무 많이 받아줘. 적당히 쳐내야 하는 것도 안고, 흘려야 하는 것도 품고, 버려야 하는 것도 품으려고 해.”

라플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뇌정령핵 하나가 허공에 생겼다.

《정령핵 이론》.

뇌雷를 기반으로 한 정령핵.
아직 작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생기려 하고 있었다.

라플리는 말했다.

“상냥한 회로는 아름답지. 근데 전장에서는 약점이야.”

라이자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상냥함이요?”

“응. 받아들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 네 성은은 들어오는 전류를 적으로 먼저 보지 않아. 그래서 내 번개가 안쪽까지 너무 쉽게 들어간다.”

“하지만 처음부터 밀어내면, 친구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약점이라고.”

라플리는 뇌정령핵을 띄웠다.

“좋은 약점이지만, 약점은 약점이야.”

라이자는 반응로를 바라보았다.

성은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은의 심장.

그 이름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심장은 번개도 안으려 했다.
폭력도 먼저 이해하려 했다.
상처도, 이물질도, 고통도, 자신 안으로 받아들여 흐름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라플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전장은 모든 것을 친구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지 않는다.

라이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바꿔야겠네요.”

라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뭘?”

“안아주는 방식이요.”

라플리는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실험 같네.”

그녀는 손을 높이 들었다.

“좋아. 마지막 시험으로 간다.”

뇌정령핵이 크게 떨렸다.

라플리의 마력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진짜 뇌봉이랬냐고 묻는 놈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웃었다.

비뚤어진 웃음이었다.

하지만 즐거워 보였다.

“오늘은 진짜로 보여줄게.”

칭호가 열렸다.

《뇌봉雷鳳》.

뇌정령핵이 찢어지듯 열렸다.

그 안에서 번개의 새가 날개를 펼쳤다.

A랭크의 정령 사역마.

뇌봉.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 위험했다.

날개 하나가 펼쳐질 때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이 찢어졌다.
깃털은 번개의 가지였고, 눈동자는 천격의 마법핵처럼 빛났다.
날갯짓 한 번에 난잔광이 바닥을 핥았다.

관중석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차단 등불, 최대 출력 대기. 라이자 폐하, 반응로 상태는?”

라이자는 반응로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답했다.

“떨리고 있어요.”

“중지합니까?”

라이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에요.”

라플리가 물었다.

“정말 받을 거야?”

라이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

“장치로는 못 버텨.”

라이자는 웃었다.

“그럼 장치로는 안 되겠네요.”

라플리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

“심장으로 받을게요.”

그 순간, 라이자의 은빛이 달라졌다.

공방 전체가 한 번 숨을 쉬었다.

《끝없는 마법의 은》.

성은의 소모가 줄었다.

은빛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고르게 퍼졌다.
모두를 위한 은을 베풀어달라는 기도가 공방의 회로를 타고 흐르며, 무리한 조형의 낭비를 줄였다.

그리고 그 위에, 라이자의 오의가 열렸다.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이번에는 인간 하나를 새로 빚는 전면 조형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친선전은 공방 시험을 넘어섰을 것이다.

라이자는 핵심 구조만 끌어왔다.

성은의 강의 심상을 복제한다.
기본이 되는 목적을 상정한다.

목적은 하나.

번개를 가두지 않고, 함께 뛰게 하는 심장.

혈맥을 설계한다.
용기가 되는 육체를 구축한다.
완성까지의 경험과 세월을 구상한다.
정신의 윤곽을 세운다.

성은의 강에서 태어나는 신화를 공상한다.
진은이 결과를 끌어낸다.

지금 이곳에—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심장이 된다.”

반응로가 변했다.

은빛 장치는 더 이상 단순한 장치로 보이지 않았다.

바닥의 성은 회로는 혈맥처럼 박동했고, 저장조는 폐처럼 숨을 쉬었으며, 은인병들의 가슴 안에 있는 작은 은의 심장들이 중앙 반응로의 박자와 이어졌다.

《성은으로 새기다》.

라플리의 뇌광이 어디서 아팠는지.
어디서 회로를 떨게 했는지.
어디서 심장이 박자를 놓쳤는지.

라이자는 그것을 막지 않고 새겼다.

성은 위에 흉터가 생겼다.

하지만 그 흉터는 결함이 아니었다.

새로운 회로였다.

라플리는 그걸 보고 숨을 삼켰다.

“미쳤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뜻인가요?”

“아니, 진짜 미쳤다는 뜻인데.”

“아.”

“근데 나쁘진 않아.”

뇌봉이 떨어졌다.

번개의 새가 성은 반응로를 향해 날개를 접었다.

그 순간, 공방 안의 작은 하늘이 전부 반응로 위로 쏟아졌다.

빛.

천격.

뇌광.

난잔광.

마녀의 검은 역설.

천율학파의 계산식.

그 모든 것이 성은의 심장 위에 꽂혔다.

성은의 심장은 탔다.

은빛 혈맥이 붉게 달아올랐다.
은인병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차폐벽이 세 겹으로 갈라졌다.
여관좌 사제들의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레이가 외쳤다.

“차단 준비!”

하지만 폭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성은의 심장은 먼저 떨었다.

그다음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번개의 박자를 자기 맥박 속에 섞었다.

두근.

뇌봉의 날갯짓이 한 번.

두근.

은의 심장이 한 번.

두근.

번개와 은이 같은 박자로 뛰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바로 박수치지 못했다.

라플리조차 말이 없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이 사라졌다.
뇌봉은 천천히 날개를 접고, 번개의 깃털을 흩뿌리며 라플리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칭호의 지속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성은 반응로는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안정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은 완전히 매끄럽지 않았다.

흉터가 있었다.

라플리의 뇌광이 남긴 새로운 회로.

라이자가 그 흉터 위에 손을 얹었다.

“아프네요.”

라플리가 말했다.

“장치가 아프다고?”

“심장이니까요.”

“아, 진짜.”

라플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랑 대화하면 내 상식이 계속 죽어.”

라이자는 진지하게 물었다.

“새로 만들 수 있나요?”

“뭐?”

“상식이요.”

라플리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 너 진짜 위험하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장부에는 이미 판정 항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공방 상태를 확인했다.

“반응로 손상 없음. 출력 한계 기존 예상치 초과. 신규 회로 형성. 차폐벽 세 겹 손상. 은인병 네 기 일시 정지, 복구 가능. 관중석 방향 파장 없음.”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러면?”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판정하겠습니다.”

공방은 아직 은빛으로 뛰고 있었다.

“라이자 폐하, 반응로 유지 및 안정화 우세. 성은의 혈맥 재구축, 은의 군단 운용, 오의 제한 발동을 통한 반응로 심장화 성공.”

라이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라플리를 보았다.

“라플리 경, 출력 한계 갱신 및 성은 혈맥 취약점 발견 성공. 뇌봉을 통한 A랭크 스트레스 테스트 달성.”

라플리는 팔짱을 꼈다.

“그래서?”

“총합 판정.”

그레이가 말했다.

“라이자 폐하 우세.”

라플리는 바로 말했다.

“졌는데 성과는 냈다는 말이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라플리는 잠깐 그레이를 보다가 웃었다.

“나쁘지 않네.”

라이자가 말했다.

“저는 많이 배웠어요.”

라플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말, 이긴 사람이 하면 좀 얄미운 거 알아?”

라이자가 당황했다.

“아, 죄송해요.”

“됐어.”

라플리는 고개를 돌렸다.

“진심이라 더 얄밉진 않네.”

푸리나는 드디어 손뼉을 쳤다.

“좋아! 이번 막은 라이자 우세! 하지만 라플리도 대단했다!”

그레이가 덧붙였다.

“그리고 안전 기준 재작성 필요.”

푸리나의 손뼉이 멈췄다.

“안전 기준 재작성은 좋은 거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으니 작성할 수 있습니다.”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그럼 성공이네.”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그 기준도 재작성해야겠습니다.”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 뒤로, 박수가 이어졌다.

이번 박수는 5막보다 컸다.

번개의 긴장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야 숨을 쉬고, 자신들이 본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리는 뇌광.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내는 성은.
그 둘이 서로를 부수지 않고 맞물린 장면.

공방이 정리되는 동안 라플리와 라이자는 반응로 옆에 나란히 섰다.

라플리가 먼저 말했다.

“은으로 번개를 먹일 줄은 몰랐는데. 그거 논문으로 쓰면 재밌겠네.”

라이자가 고개를 저었다.

“번개를 먹인 게 아니라, 같이 뛰게 한 거예요.”

“그게 더 이상하거든?”

“꿈속에서는 이상하지 않았어요.”

“현실에서는 이상하다고.”

라이자는 은빛 반응로를 보았다.

“그래서 현실로 만들 가치가 있는 거예요.”

라플리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귀족들을 싫어했다.
혈통만으로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을 싫어했다.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권리를 말하는 자들을 싫어했다.

하지만 라이자는 조금 달랐다.

꿈을 말한다.
상냥함을 말한다.
심장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 회로와 혈맥과 코어로 만든다.

공상가라기에는 너무 실용적이고, 기술자라기에는 너무 위험한 꿈을 꾼다.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너, 생각보다 위험한 타입이네.”

라이자가 웃었다.

“라플리 님도요.”

“난 원래 위험해.”

“그럼 잘 맞네요.”

라플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그렇게 받는다고?”

“틀렸나요?”

“아니.”

라플리는 반응로에 남은 뇌광의 흉터를 보았다.

“맞아서 문제지.”

라이자는 손끝으로 그 흉터를 만졌다.

“이건 남겨둘게요.”

“왜?”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더 잘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라플리는 조금 조용해졌다.

자기 번개가 남긴 흉터.

그것을 결함이 아니라 다음 회로로 삼겠다는 사람.

“그거, 정말 논문으로 써야겠네.”

“같이 쓰실래요?”

“내 이름 앞에 귀족 놈들 이름만 안 붙이면.”

“라플리 님 이름부터 쓸게요.”

“그럼 생각해볼게.”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번개와 은의 공동 논문!”

그레이가 옆에서 말했다.

“폐하, 논문 제목은 당사자들이 정합니다.”

“아쉽네. 내가 제목 잘 짓는데.”

죠니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대체로 길지.”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길지만 기억에는 남는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도 꽤 푸리나한테 물들었네.”

“그런가.”

“응.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융은 공방 위에 남은 은빛과 뇌광을 바라보았다.

그의 창에는 몇 개의 다른 결과도 보였다.

반응로가 터진 창.
뇌봉이 관중석으로 튄 창.
은인병 하나가 완전히 멈춘 창.
라플리가 지나치게 웃다가 자기 회로를 태운 창.
라이자가 너무 많이 받아들이다 은의 심장이 깨진 창.

하지만 지금의 창은 닫히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잘 비껴갔소.”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질문 하나가 남았군요.”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이번 질문은 뭐야?”

레이튼은 반응로를 보았다.

“상냥함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라플리를 보았다.

“그리고 위험은 어디까지 시험이어야 하는가.”

라이자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라플리도 더는 농담하지 않았다.

잠시 뒤, 라플리가 말했다.

“답은 아직 안 나왔네.”

레이튼이 웃었다.

“좋은 질문일수록 그렇습니다.”

라이자는 은빛 흉터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다음 회로는 생겼어요.”

라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지.”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줄에 기록했다.

《제5경기 종료. 라이자 폐하 우세. 라플리 경, 성은 반응로 출력 한계 갱신 및 취약점 발견 성공.》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추가로 적었다.

《안전 기준 재작성 필요.》

그리고 다시 한 줄.

《번개와 은의 박자 동조 확인.》

푸리나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마지막 줄 좋다.”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마지막 줄은 기술 기록입니다.”

“그래도 좋잖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예. 이번에는 그렇습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은 사라졌다.

그러나 성은의 심장에는 아직 뇌광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박수는 번개가 사라진 뒤에야 터졌다.

사람들은 보았다.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리는 뇌광과,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내는 성은이 서로를 부수지 않고 맞물리는 장면을.

그날의 공방 시험전은 라이자의 우세로 끝났다.

그러나 라플리의 뇌광은 성은의 심장에 새로운 흉터이자 새로운 회로를 남겼다.

번개는 은빛 심장을 태우지 않았다.

은빛 심장은 번개를 가두지 않았다.

둘은 잠시, 같은 박자로 뛰었다.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7막 — 무대 뒤의 왕

밤이 내려앉은 경기장은 낮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곳이 무대였다.

말발굽이 원을 그었고, 청흑빛 유성이 빛을 끌며 떨어졌으며, 금목서의 거대한 검이 하늘을 갈랐다. 자주빛 화살은 전쟁의 뼈대를 꿰뚫었고, 검은 실은 퇴각로와 이름들을 묶었다. 은빛 심장은 번개를 품고, 뇌광은 성은의 회로에 흉터를 남겼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 모든 것은 흔적이 되었다.

목책에는 죠니와 아스테르다스의 경기가 남긴 얕은 흠집이 있었다.
흙바닥에는 말발굽이 그린 원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남쪽 바닥에는 아스트리트의 《금목만리향파》가 스쳐간 금빛 결이 남았고, 그 위에는 아직도 아주 옅은 금목서 향이 떠돌았다.
새벽선 한 걸음 앞에는 알렉산드리나의 목패 병사가 멈췄던 작은 발자국이 있었다.
퇴각전의 장부에는 그레이가 적은 문장이 있었다.

《실 하나를 놓았음. 이름은 놓지 않았음.》

그리고 공방 자리에는 라이자의 성은 반응로가 남긴 은빛 흉터가 있었다.
라플리의 뇌광이 지나간 자리였다.
상처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회로였다.

푸리나 헤툼은 그 모든 흔적 사이를 걸었다.

낮에는 잘 몰랐다.

소리와 박수와 대사와 판정과 안전 고지와 휘날리는 망토와 농담이 있었다. 그 안에서는 무대가 흘러가고 있었고, 흘러가는 무대 위에서는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밤의 무대는 달랐다.

막이 내려간 뒤의 무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부서진 목책은 부서진 채였고, 파인 흙바닥은 파인 채였다.
박수는 사라졌지만, 박수가 닿았던 자리의 무게는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발끝으로 죠니의 말발굽 자국을 따라 걸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그 원은 완벽하지 않았다. 중간에 미끄러질 뻔한 곳이 있었고, 하융이 말했던 반 박자의 흔들림이 남은 자리도 있었다.

푸리나는 중얼거렸다.

“다들 너무 진심이야.”

“폐하가 불렀잖아.”

뒤에서 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죠니는 목책에 기대어 있었다. 낮의 경기가 끝난 지 꽤 지났는데도, 그는 아직 완전히 쉬는 얼굴이 아니었다. 말은 이미 마구간으로 돌아갔고 창도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의 손끝에는 여전히 마지막 찰나의 감각이 조금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럼 책임져야지.”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는 발을 멈췄다.

“그 말, 오늘따라 너무 왕답네.”

“나 말고 폐하가 왕이잖아.”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이상할 건 없지. 무대를 연 사람이 막도 내려야 한다는 뜻이야.”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죠니는 평소처럼 건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농담만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다시 경기장을 보았다.

낮의 자신은 자신 있게 말했다.

칼끝은 목숨이 아니라 박수를 향해야 한다고.

그 말은 아직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칼끝들은 정말 무거웠다.

죠니와 아스테르다스는 한 치 앞에서 멈췄다.
호흐마이스터는 승리보다 먼저 관중석 앞에 섰다.
아스트리트는 생명의 검으로 전장의 오래된 결론을 가르려 했다.
미하일라는 사람을 쏘지 않고 전쟁의 핵을 꿰뚫었다.
알렉산드리나는 한 걸음 앞에서 멈췄지만, 그 발걸음은 분명했다.
아레는 실을 놓았다.
하융은 죽은 가능성을 밟았다.
레이튼은 희생이라는 이름을 묻기 전으로 되돌렸다.
그레이는 손실 셋 아래에서 이름 셋을 건졌다.
라이자는 심장을 만들었고, 라플리는 그 심장에 흉터를 남겼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너무 큰 무대를 열었나?”

죠니가 잠깐 침묵했다.

그는 푸리나를 위로하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푸리나는 그런 위로를 바라지도 않았다.

죠니는 그냥 사실을 말했다.

“큰 무대였지.”

“그렇지?”

“응.”

“역시 너무 컸나?”

“그건 아니고.”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작았으면 저 사람들이 자기 걸 다 안 꺼냈겠지.”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덧붙였다.

“다 꺼냈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어. 그럼 나쁜 무대는 아니지.”

“좋은 무대였을까?”

“그건 내가 정할 일은 아니고.”

“그럼 누가 정해?”

죠니는 경기장 저편을 가리켰다.

그레이가 있었다.

등불 아래에서, 그녀는 아직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레이는 숫자로 대답할 텐데.”

죠니가 말했다.

“숫자도 필요하잖아.”

“너 진짜 오늘따라 너무 정론이야.”

“오늘 좀 피곤해서 그래.”

“피곤하면 정론을 말해?”

“쓸데없는 농담을 줄이게 되지.”

“그게 정론보다 낫지 않아?”

“폐하 기준으론 그렇겠지.”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그 웃음은 낮의 웃음보다 작았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그레이는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부상자 없음.
경기장 보수 필요.
목책 세 곳 교체.
성은 반응로 안전 기준 재작성.
모의 수레 한 대 파손.
은인병 네 기 일시 정지 후 복구 가능.
피난민 목패 명단 누락 없음.

푸리나는 장부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레이.”

“예, 폐하.”

“오늘 좋은 무대였을까?”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예상했다.
그레이는 감동적인 말보다 확인 가능한 항목을 먼저 볼 것이다.

예상대로, 그레이는 장부를 보았다.

“부상자는 없습니다.”

“응.”

“이름 누락도 없습니다.”

“응.”

“목책은 고치면 됩니다. 남쪽 흙바닥은 내일 오전 안으로 복구 가능합니다. 성은 반응로 안전 기준은 재작성해야 하고, 뇌광계 실험은 사전 허가 항목을 세분화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레이, 나는 그런 걸 물은 게 아닌데.”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듯 시선을 내렸다.

“저는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알아.”

푸리나는 장부 옆에 앉았다.

“그래서 물어본 거야.”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등불이 흔들렸다.

밤바람이 장부 끝을 살짝 넘겼고, 그레이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눌렀다.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좋은 무대였다고 생각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는 여전히 장부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숫자로만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푸리나의 가슴 한가운데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아스테르다스 경의 빛은 사고 위험으로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죠니 경의 회전도 승패표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호흐마이스터 경의 갑주 손상은 보수 항목이지만, 관중석을 지킨 행동도 함께 기록했습니다. 알렉산드리나 경의 패배에는 새벽선 한 걸음 앞이라는 주석이 있습니다. 아레 폐하의 실도, 하융 경의 가능성도, 레이튼 경의 질문도, 라이자 폐하와 라플리 경의 실험도…… 전부 따로 적었습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그래서 좋은 무대였다고 생각합니다.”

푸리나는 장부 표지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 장부가 없었으면, 나는 그냥 ‘다들 멋있었다!’ 하고 끝냈을지도 몰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정말?”

“예. 다만 그 뒤에 기록이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레이는 무대 아래의 기둥이네.”

“저는 기둥이라기보다 행정 담당입니다.”

“그게 기둥이야.”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등불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레이튼이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한 뒤, 푸리나 옆에 섰다.

“폐하. 오늘의 무대는 친선전이었습니까?”

푸리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친선전이었다.

서로 죽이지 않았고, 규칙이 있었고, 관객이 있었고, 박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전쟁 준비였다.

서로의 힘을 확인했고, 다가올 몽골의 위협을 생각했고,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었다.

축제였다.

아이들은 웃었고, 푸리나는 호명했고, 관중들은 손뼉을 쳤다.

하지만 웃음만은 아니었다.

죄와 침묵과 결핍과 책임과 흉터가 올라왔다.

푸리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

“……모르겠어.”

레이튼은 환하게 웃었다.

“훌륭한 답입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겠다는 게?”

“예.”

레이튼은 경기장의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그의 발밑에 아주 희미하게 낡은 서재의 그림자가 열렸다.

별이 그려진 천장.
아직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별들.
공중에 떠 있는 미완의 질문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무대도 그렇지요.”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친선전도, 전쟁 준비도, 축제도 아닌 것.”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은 그 모두이지만, 아직 그 어느 하나로도 닫히지 않은 것.”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

“지금은 그대로 두시지요.”

“이름 없이?”

“예. 이름 없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직 자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푸리나는 경기장을 보았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무대.

그 말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하융은 경기장 북쪽 그늘에 서 있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다가왔다.

“폐하.”

“하융.”

하융은 밤의 경기장을 보며 말했다.

“많은 창에서 이 무대는 피를 보았소.”

푸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하융은 숨기지 않았다.

“죠니 경과 아스테르다스 경이 멈추지 못한 창도 있었소. 아스트리트 경의 금목서검이 관중석을 흔든 창도 있었소. 미하일라 폐하의 세 번째 화살이 사람을 겨눈 창도 있었소. 아레 폐하의 실이 너무 깊어 산 자들이 달리지 못한 창도 있었소. 뇌봉이 성은의 심장을 태운 창도 있었소.”

푸리나는 손을 꽉 쥐었다.

“그럼 우리가 운이 좋았던 거야?”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도 있었소.”

푸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하융은 이어 말했다.

“허나 운만은 아니었소.”

그의 회색빛 눈이 푸리나를 향했다.

“폐하께서 멈출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기 때문이오.”

“멈출 수 있는 무대.”

“그렇소.”

하융은 경기장 중앙을 보았다.

“칼을 들고도, 한 치 앞에서 멈출 수 있는 자리. 전력을 다하고도, 상대를 장면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자리. 실패한 가능성을 보아도, 지금 이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리.”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 무대였소.”

푸리나는 장난처럼 웃으려 했다.

하지만 웃음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냥 다들 서로를 좀 더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융이 답했다.

“때로는 그것이 전쟁보다 어렵소.”

레이튼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상대의 힘만 보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레이가 말했다.

“상대가 어디서 멈추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경기장 저편, 등불이 닿지 않는 그늘에서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낮의 퇴각전 때처럼 조용했다.

그녀가 오는 동안, 밤의 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제 그 침묵이 무섭지만은 않았다.

아레의 침묵은 지우는 침묵이 아니었다.
듣기 위한 침묵이었다.

푸리나는 먼저 말했다.

“아레.”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헤툼 폐하.”

“오늘…… 괜찮았어?”

아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책의 흠집, 말발굽의 원, 금목서의 잔향, 새벽선 앞의 발자국, 성은 반응로의 흉터, 그리고 그레이의 장부를 차례로 보았다.

그 뒤 말했다.

“박수가 침묵을 지우지는 않았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럼 괜찮았어?”

아레의 시선이 푸리나에게 돌아왔다.

“예.”

그 대답은 조용했다.

하지만 분명했다.

“오늘의 박수는 누군가의 슬픔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푸리나의 목이 잠깐 막혔다.

아레는 푸리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아레는 푸리나의 웃음과 무대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산 자에게 웃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난민에게는 다시 밥을 먹을 이유가 필요하고, 아이에게는 어제의 불길이 아니라 오늘의 인형극을 기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레는 박수만으로 살 수 없는 이들도 안다.

죽은 이들.
명령 아래 가라앉은 이름들.
무대 아래로 내려간 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푸리나는 산 자를 다시 무대 위로 올리는 사람이다.

아레는 무대 아래로 가라앉은 이들이 혼자 잊히지 않도록 실을 내려보내는 사람이다.

푸리나는 박수를 지킨다.

아레는 침묵을 듣는다.

둘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니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나는 가끔 무서워.”

아레는 기다렸다.

푸리나는 손끝으로 자기 가슴을 눌렀다.

“무대를 만들다 보면, 다 장면처럼 보일 때가 있어. 아픈 것도, 죽은 것도, 울음도. 내가 잘못하면…… 누군가의 침묵까지 박수로 덮어버릴지도 몰라.”

그레이의 손이 아주 조금 멈췄다.

하융은 창밖을 보지 않았다.

레이튼도 질문하지 않았다.

아레가 말했다.

“그래서 네게 질문하는 이들이 있구나.”

푸리나는 주변을 보았다.

그레이.
레이튼.
하융.
죠니.

그리고 아레.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나, 제동장치가 너무 많지 않아?”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부족하진 않지.”

그레이가 말했다.

“필요한 만큼입니다.”

레이튼이 덧붙였다.

“좋은 무대일수록 장치가 많습니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치가 있어야 비껴갈 수 있소.”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편하게 웃었다.

아레가 말했다.

“푸리나.”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레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은 많지 않았다.

“네가 박수를 지키지 않는다면, 산 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내가 침묵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은 오래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아레의 검은 실 하나가 밤바람 속에서 아주 얇게 흔들렸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전장을 지나고 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나는 박수를 지킬게.”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묵을 듣겠다.”

“하지만…… 가끔은 서로 확인하자.”

“무엇을?”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내 박수가 너무 시끄럽지 않은지. 네 침묵이 너무 깊지 않은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칭찬이야?”

“그래.”

푸리나는 그 대답에 조금 놀란 듯하다가, 결국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은 밤의 경기장에 너무 크지 않게 퍼졌다.

그때 등불 하나가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 등불 아래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여관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

낯익으면서도 낯선 사람.

여관의 성좌.

그는 아무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다.

무대를 바꾸지도 않았고, 판정을 고치지도 않았다.

그저 밤의 경기장 가장자리, 등불 아래에서 손님을 맞는 주인처럼 서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런 것도 여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관좌는 조용히 웃었다.

“쉬어갈 수 있었다면, 그렇겠지요.”

푸리나는 경기장을 보았다.

“칼을 들고 싸웠는데요?”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관좌는 등불을 보았다.

“여관은 꼭 편한 사람만 오는 곳이 아닙니다. 먼 길을 걸은 사람, 싸우다 온 사람, 길을 잃은 사람, 너무 오래 긴장한 사람도 문을 두드립니다.”

그의 목소리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내어주듯 조용했다.

“오늘 이곳에서 모두가 오래 머물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잠시 멈추었습니다. 서로를 보았고, 자신의 칼을 내려놓을 때를 배웠습니다. 그 정도면, 하룻밤 묵어가기에는 충분한 여관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좋은 여관이었을까요?”

여관좌는 대답했다.

“손님들이 떠난 뒤에도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면, 나쁘지 않은 여관이었겠지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등불이 다시 흔들렸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밤바람만 남았다.

푸리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좋아.”

죠니가 말했다.

“그 ‘좋아’는 보통 사고의 시작인데.”

그레이가 장부를 다시 열었다.

“계획을 말씀하시기 전에 안전 기준부터—”

“아니, 이번엔 진짜 계획이야.”

푸리나는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밤의 경기장.

흔적이 남은 무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친선전.

그녀는 그 한가운데에 섰다.

“지금까지는 서로를 상대로 싸웠어.”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죠니는 아스테르다스의 길을 봤고, 아스테르다스는 죠니의 찰나를 봤어. 호흐마이스터와 아스트리트는 기사가 무엇을 입고, 검이 무엇을 살리는지 보여줬지. 미하일라와 알렉산드리나는 황제가 전쟁을 어떻게 끝내고, 차르가 어떻게 새벽까지 걷는지 보여줬어. 아레와 너희 셋은 퇴각에서 무엇을 놓고 무엇을 놓지 말아야 하는지 보여줬고, 라이자와 라플리는 상처도 회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

푸리나는 손을 펼쳤다.

“그러니까 다음 막은, 서로를 상대로 싸우는 게 아니야.”

죠니가 물었다.

“그럼?”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같은 적을 막는 거야.”

그레이가 말했다.

“공동 방어전입니까?”

“응.”

푸리나는 웃었다.

“지금까지는 서로의 칼끝을 봤으니까, 이제는 그 칼끝들이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는지 봐야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창이기도 하오.”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좋은 퇴각로가 필요하겠지요.”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공동 방어전. 가상 적 설정 필요. 관중석 차폐 강화. 피난민 목패, 보급 수레, 부상자 후송로 재배치. 성은 반응로 사용 여부 별도 검토. 뇌광계 마법 사용 시 상공 차단 등불 증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레이, 신났어?”

“아닙니다.”

“신났네.”

“아닙니다.”

죠니가 말했다.

“저건 신난 거 맞아.”

그레이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 웃음은 다시 밝았다.

하지만 낮의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낮의 웃음은 무대를 여는 배우의 웃음이었다.

지금의 웃음은 무대가 무너지지 않게 버티려는 왕의 웃음이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녀의 [여관:극장]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밤의 경기장 위에 아주 얇은 막이 내려왔다.

기도 같기도 하고, 개막사 같기도 한 목소리.

고정된 영창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흔적을 하나씩 꿰어 만든 즉흥의 선언.

“오늘 우리는 칼끝을 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빛도 보았고, 갑주도 보았고, 화살도 보았고, 실도 보았고, 번개도 보았다.”

말이 끝날 때마다, 경기장 위의 흔적들이 잠시 떠올랐다.

죠니의 원.
아스테르다스의 초신성.
호흐마이스터의 균열 난 갑주.
아스트리트의 금목서.
미하일라의 자주빛 화살.
알렉산드리나의 한 걸음.
아레의 실.
하융의 창.
레이튼의 서재.
그레이의 장부.
라이자의 성은 심장.
라플리의 뇌광.

“그리고 모두가 멈추었다.”

푸리나는 눈을 떴다.

“그러니 다음 막에서는,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모이자.”

그녀는 밤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이곳은 아직 최종막이 아니다.”

작은 웃음.

“하지만 대단원의 막이 가까워졌으니.”

그녀는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각자 자기 칼을 정비해줘. 자기 질문을 챙겨줘. 자기 장부를 닫지 말고, 자기 창을 열어둬. 자기 실을 너무 세게 쥐지 말고, 자기 박수를 부끄러워하지 마.”

푸리나는 선언했다.

“다음 막은 공동 방어전.”

그리고 가장 푸리나다운 얼굴로 웃었다.

“칼끝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침묵이 먼저 내려앉았다.

그다음, 아주 작은 박수가 들렸다.

그레이였다.

푸리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

그레이는 시선을 피했다.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죠니가 곧바로 손뼉을 쳤다.

“희귀한 장면이네.”

하융도 조용히 박수를 보탰다.

레이튼은 웃으며 모자를 들어 올렸다.

아레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은 박수를 거부하는 침묵이 아니었다.

박수 옆에 자리 잡은 침묵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안심했다.

박수와 침묵은 서로를 지우지 않았다.

그날 밤, 킬리키아의 경기장은 여관처럼 조용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고, 등불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등불 하나는 꺼지지 않았다.

그 등불 아래에는 장부가 있었고, 말발굽 자국이 있었고, 금목서 향이 있었고, 새벽선 한 걸음 앞의 발자국이 있었고, 은빛 흉터가 있었다.

그리고 무대 중앙에는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질문이 남았다.

서로를 향하던 칼끝들은,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는가.

푸리나는 그 질문을 품고 밤의 무대를 내려왔다.

오늘 그녀는 왕관보다 큰 것을 들었다.

그것은 승패표가 아니었다.

모두가 칼을 들고도 멈출 수 있었던 무대의 책임이었다.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최종막 — 칼끝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아침이 되자, 킬리키아의 경기장은 더 이상 경기장이 아니었다.

푸리나 헤툼은 그 한가운데에 섰다.

어제까지 그곳은 친선전의 무대였다.
오늘은 성벽이었다.

목책은 낮은 방벽으로 바뀌었고, 성문 모양의 가설 구조물이 중앙에 세워졌다. 그 뒤에는 피난민 목패와 수레, 들것, 물통, 식량 자루, 기록 상자가 배치되었다. 왼쪽에는 라이자의 성은 공방이 다시 세워졌고, 그 중앙에는 뇌광의 흉터를 품은 은빛 반응로가 조용히 뛰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퇴각로가 열려 있었다. 전령들이 오갈 통로, 부상자를 옮길 통로, 마지막 수레가 빠져나갈 길.

그리고 동쪽.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기에 더 무서웠다.

그레이는 장부를 들고 서 있었다.

“최종 공동 방어전의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침 공기 위로 또렷하게 퍼졌다.

“가상 적은 기록의 성좌 단말이 제공하는 전장 기록재현을 기반으로 합니다. 여관의 성좌 측 권능이 재현의 현실 고정도를 불안정화하여 실제 살상은 차단합니다. 단, 대응 실패 시 부상 판정, 지휘선 단절, 보급 손실, 피난민 손실, 성벽 붕괴, 공방 과부하, 퇴각로 폐쇄가 발생합니다.”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짧게 말하면?”

그레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진짜처럼 무섭지만, 죽지는 않게 만들었습니다.”

“좋아.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하실 부분은 아닙니다.”

“그래도 마음에 들어!”

그레이는 한숨을 삼켰다.

그때 경기장 동쪽의 빈 곳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사락.

사락.

사락.

아카식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전장의 신이라기보다는, 한 권의 두꺼운 책을 들고 산책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손에는 검은 표지의 전쟁기록이 들려 있었고, 표지에는 아무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제목이 없는 책은, 오히려 너무 많은 제목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카식은 경기장을 둘러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와, 무대가 꽤 진지한데? 어제까진 친선전이라더니 오늘은 거의 성 하나 세웠네.”

푸리나가 말했다.

“최종막이니까!”

“그럼 나도 좀 잘해야겠네.”

아카식은 책을 펼쳤다.

“거짓 후퇴. 양익 포위. 전령 절단. 보급로 단절. 피난민 행렬 압박. 성벽 약점 집중. 지휘핵 절단.”

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은 참 다양하게 이기고 졌구나.”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표현이 가볍습니다.”

아카식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웃었다.

“가볍게 말하지 않으면 무거워서 못 꺼내는 기록도 있거든.”

그 말에는 장난기가 있었지만, 아주 끝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

기록의 먼지.

누군가의 성이 무너지던 날.
누군가의 전령이 돌아오지 못한 저녁.
누군가의 피난 행렬이 강가에서 따라잡힌 아침.
누군가의 이름이 지도 위에서 사라진 순간.

아카식은 그 모든 것을 울지 않고 들고 있었다.

기록은 울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은 흔들리지 않는다.

여관좌가 등불을 들고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여관 주인처럼 조용히 걸어왔다.
누군가를 심판하러 온 얼굴이 아니었다.
길고 위험한 밤을 앞둔 손님에게, 방의 등불이 잘 켜져 있는지 확인하러 나온 얼굴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여관좌는 아카식에게도, 푸리나에게도, 그레이에게도 그렇게 인사했다.

아카식이 책을 살짝 들어 보였다.

“과거의 결론은 내가 꺼낼게. 죽음으로 굳지 않게 하는 건 여관 쪽?”

여관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의 손님들을 해치지 않도록, 잠시 불안정하게 두겠습니다.”

그는 경기장 외곽에 등불을 하나씩 세웠다.

“손님이 아니라, 훈련을 위한 그림자니까요.”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기록의 성좌는 과거의 패턴을 꺼낸다.
여관의 성좌는 그 패턴이 죽음으로 굳지 않게 흔들어둔다.

그러면 자신은?

푸리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그 흔들리는 틈을 무대로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의 푸리나는 어제처럼 화려하게만 웃지 않았다.
그러나 웃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왕이었다.
극장주였다.
세기의 대배우였다.
그리고 휴식의 별, 여관좌의 대리인이었다.

“자.”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최종막을 시작하자.”

주변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죠니가 말 위에서 창을 고쳐 잡았다.
아스테르다스가 청흑빛 장갑을 쥐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균열이 남은 갑주를 입고 중앙 성벽 앞에 섰다.
아스트리트는 금목서검을 검집에서 조금 밀어 올렸다.
미하일라는 자주빛 활을 들었다.
알렉산드리나는 모의 보조군과 피난 행렬을 살폈다.
아레는 검은 실을 손끝에 두었다.
하융은 아직 열리지 않은 회색 창호를 바라보았다.
레이튼은 모자를 눌러 썼고,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라이자는 은의 심장에 손을 얹었고, 라플리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푸리나는 그들을 전력으로 보지 않았다.

소망으로 보았다.

누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누가 어디서 멈추고 싶은지.
누가 어떤 장면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무대 위의 극작가》.

소망의 흐름이 그녀에게 보였다.

죠니는 지금을 붙잡고 싶어 했다.
끝없이 돌아도, 찰나가 빛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아스테르다스는 자신이 떨어질 곳을 스스로 정하고 싶어 했다.
누군가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선택한 낙점으로 떨어지는 별이고 싶어 했다.

호흐마이스터는 먼저 서고 싶어 했다.
죄를 입더라도, 성벽 뒤의 아이들이 하루 더 자라게 하고 싶어 했다.

아스트리트는 생명이 짓밟히지 않는 검을 피우고 싶어 했다.

미하일라는 전쟁을 사랑하지 않기에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알렉산드리나는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기에 걷고 싶어 했다.

아레는 가라앉은 이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산 자가 달릴 수 있도록, 실을 늦게 놓는 법을 배웠다.

하융은 수많은 죽은 가능성들 중에서도 지금 이 세계를 선택하고 싶어 했다.

레이튼은 끝났다고 붙은 이름을 다시 질문으로 돌리고 싶어 했다.

그레이는 손실이라는 숫자 아래에서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라이자는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라플리는 하늘의 법칙이 혈통이 아니라 이해한 자의 손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푸리나 자신은.

그 모든 소망이 서로를 죽이지 않고도,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음을 보이고 싶어 했다.

그녀는 선언했다.

“세상은 무대요.”

바닥에 은빛과 푸른빛, 자주빛과 금빛, 검은 실과 회색 창호의 선들이 동시에 번졌다.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킬리키아의 경기장은 [여관:극장]이 되었다.

단순한 극장이 아니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그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마주하고, 그 가능성 가운데 스스로의 장면을 선택하는 여관.

벽은 성벽이 되었고, 통로는 퇴각로가 되었고, 등불은 여관의 문패가 되었다.

가상 몽골군이 동쪽에서 나타났다.

처음에는 병사가 아니었다.

문장이었다.

“거짓 후퇴.”

아카식의 책에서 한 줄이 떨어졌다.

그 줄은 말발굽이 되었다.

“양익 포위.”

두 번째 줄이 흑색 기병의 날개가 되었다.

“기병 궁사 화살비.”

세 번째 줄이 하늘에 번졌다.

“전령 절단.”

네 번째 줄이 검은 칼날처럼 얇아졌다.

기록의 문장들이 형체를 얻었다.

검은 말발굽이 먼지를 일으켰다.

여관좌의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 빛은 검은 말발굽을 지우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완전한 죽음으로 굳는 것을 막았다.

화살은 살을 꿰뚫지 않았다.
대신 이름표를 떨어뜨릴 준비를 했다.

말발굽은 몸을 짓밟지 않았다.
대신 퇴각선의 선을 흔들 준비를 했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이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의 목덜미에 차갑게 남았다.

아카식이 조용히 말했다.

“《재현전장: 검은 말발굽》. 시작.”

검은 기병이 움직였다.

첫 공세는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물러나는 듯했다.

거짓 후퇴.

정면의 검은 기병들이 물러났다.
그러자 일부 보조 병력의 시선이 앞으로 끌렸다.
그 순간 양익이 벌어졌다.

포위망이 열렸다.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신은 적절히 준비된 자를 부른다》.

그녀는 명령하지 않았다.

이름을 불렀다.

“죠니.”

말발굽이 응답했다.

“아스테르다스.”

청흑빛이 응답했다.

푸리나는 말했다.

“나는 너희를 억지로 무대에 세우지 않아.”

그녀의 시선이 두 사람을 지나 포위망의 가장 빠른 틈으로 향했다.

“다만 알고 있어. 지금 이 장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죠니가 말 위에서 피식 웃었다.

“이번엔 서로 들이받는 게 아니네.”

아스테르다스가 옆에 섰다.

“그래.”

그의 몸 주위에 청흑빛이 낮게 흘렀다.

“이번에는 같은 곳으로 떨어진다.”

죠니의 기병들이 돌았다.

《윤회기승: 순환의 궤도》.

그들은 적을 쫓지 않았다.
피난민과 포위망 사이를 원으로 감쌌다.

《윤회진: 나선행군》.

원의 바깥이 방패가 되었고, 안쪽이 길이 되었다.
말발굽은 도망치는 소리가 아니라, 길을 닫히지 않게 하는 박자였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돌아. 빠른 길 말고, 끊기지 않는 길로.”

검은 기병이 왼쪽 포위망을 좁혔다.

그 순간 아스테르다스가 움직였다.

“예열은 생략하지.”

청흑빛이 백광으로 뒤집혔다.

《영묘한 광채의 초신성》.

그는 빨라지는 과정 없이, 점화된 순간 최대속에 닿았다.

“빛을 이끄는 길이 되리라.”

그의 몸이 포위망의 가장 빠른 돌파점을 찍었다.

쾅.

검은 말발굽의 문장이 흔들렸다.

아스테르다스는 적을 부순 것이 아니었다.

기록재현의 포위 결론이 굳기 전, 그 가장 빠른 매듭 위로 떨어졌다.

죠니의 원이 그 틈을 받아 길로 만들었다.

죠니가 말했다.

“좋은 낙점이네.”

아스테르다스가 대답했다.

“좋은 회전이다.”

포위는 늦춰졌다.

그러나 기록은 멈추지 않았다.

아카식이 책장을 넘겼다.

“성벽 약점 집중.”

검은 말발굽의 일부가 중앙으로 몰렸다.

공성추처럼 보이는 검은 문장이 생겼다.
화살비가 성벽 앞 방패대를 흔들었다.
가상 투석의 그림자가 중앙 성벽 위에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중앙을 보았다.

“호흐마이스터.”

갑주가 응답했다.

“아스트리트.”

금목서 향이 응답했다.

호흐마이스터는 성벽 앞에 섰다.

그녀의 갑주는 여전히 어두웠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아스트리트의 검이 남긴 균열이 있었다.

그녀는 그 균열을 숨기지 않았다.

“제가 먼저 섭니다.”

《죄악의 갑주Frevel Panzer》.

죄책감과 죽은 태양의 금빛이 갑주 아래에서 맥동했다.
성벽 앞에 가장 먼저 세워지는 자.
형제들 위가 아니라 형제들 앞에 서는 자.

《Primus Inter Pares》.

호흐마이스터가 방패각을 잡자, 검은 공성 압박이 그녀의 갑주 위로 끌려왔다.

아스트리트가 그 옆에 섰다.

“그럼 저는.”

그녀의 검에서 금목서가 피었다.

《만생개화검법》.

이번 꽃은 사람을 베기 위해 피지 않았다.
성벽에 몰린 압박을 흘리기 위해, 생명이 짓밟히지 않을 길을 찾기 위해 피었다.

“경이 계속 혼자 서지 않아도 되게 피우겠습니다.”

아스트리트가 검을 올렸다.

전력의 《금목만리향파》는 아니었다.

그러나 금빛 거대검의 형상이 잠시 피어났다.

제한 출력.

금목서의 생명력이 압박의 방향을 갈랐다.

검은 공성 문장은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위에서 한 번 멈추고, 아스트리트의 금빛 검로를 따라 하늘로 흘렀다.

성벽이 울렸다.

무너지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자신의 극장 안으로 끌어들였다.

《군상극:아르메니아의 노래》.

그들의 선택은 각자의 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의 군상극 안에서 서로의 장면을 받치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먼저 섰고, 아스트리트는 그 첫 번째가 영원히 혼자 서지 않게 꽃을 피웠다.

하지만 기록은 정면만 노리지 않았다.

아카식의 손이 다음 줄을 넘겼다.

“전령 절단. 보급로 단절. 피난민 행렬 압박.”

검은 기병 일부가 성벽을 우회했다.

후방이 흔들렸다.

피난민 목패들이 움직임을 잃기 시작했다.
수레가 늦어졌다.
전령의 이름표가 떨어지려 했다.
보급 수레의 바퀴 선이 검게 물들었다.

푸리나는 후방을 보았다.

그곳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아레.
하융.
레이튼.
그레이.

푸리나는 이번에는 크게 외치지 않았다.

박수가 필요한 장면이 아니었다.

침묵이 필요한 장면이었다.

그녀는 그저 손을 내밀었다.

아레의 실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늦게 놓겠습니다.”

그 말은 전날의 퇴각전에서 이어진 약속이었다.

아레는 후방 전체에 실을 걸었다.

하지만 너무 세게 쥐지 않았다.

하융은 창호를 열었다.

“창밖에도 남겨두겠소.”

《여관:비껴간 창》.

그는 죽은 가능성들을 보았다.

전령이 끊긴 창.
수레가 뒤집힌 창.
아이 목패가 행렬에서 밀려난 창.
아레의 실이 너무 깊어 산 자가 달리지 못한 창.

하융은 그 모든 창을 지나, 덜 죽는 길을 찾았다.

레이튼은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 결론은 아직 닫지 않겠습니다.”

《여관:문답의 서재》.

그는 후방에 붙은 이름들을 보았다.

“버려도 되는 수레.”
“늦은 전령.”
“불가피한 손실.”

그 이름들은 너무 빨랐다.

레이튼은 모자를 벗었다.

“잠시, 그 이름들은 보류하지요.”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놓으셔도 제가 적겠습니다.”

《이름 없는 이는 없습니다》.

그녀의 펜이 달렸다.

수레는 단순 수레가 아니었다.
들것 둘과 물통 넷과 기록 상자를 실은 후방의 심장이었다.

전령은 단순 전령이 아니었다.
중앙 방패대와 성은 공방 사이를 잇는 사람 하나였다.

피난민 목패 셋은 손실 셋이 아니었다.

아이 하나.
들것을 든 사람 하나.
마지막 물통을 맡은 사람 하나.

그레이가 말했다.

“이동 순서를 바꿉니다. 아이는 방패 안쪽. 들것잡이는 수레 오른쪽. 물통지기는 전령과 교대합니다.”

아레의 실이 느슨해졌다.

하융이 그 틈으로 지시했다.

“왼쪽 그림자. 반 박자 늦게. 지금은 달리지 마시오. 저 창에서는 달려서 죽었소.”

레이튼이 덧붙였다.

“퇴각은 늦는 것이 아니라, 다음 장면을 남기는 일입니다.”

후방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에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저 침묵의 자리를 남겨두었다.

아레가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수가 침묵을 덮지 않도록.

침묵이 박수를 삼키지 않도록.

그 매듭은 지켜지고 있었다.

그때 상공이 어두워졌다.

가상 화살비가 성은 공방을 향해 쏟아졌다.

아카식이 조용히 말했다.

“상공 압박. 공방 과부하.”

라이자의 은빛 반응로가 크게 뛰었다.

라플리가 하늘을 보며 웃었다.

“이번엔 태우는 게 아니라 흘리는 쪽이지?”

라이자가 반응로에 손을 얹었다.

“네. 같이 뛰게 하면 돼요.”

“아직도 그 표현 이상한데…… 됐다. 해보자.”

라이자의 은의 군단이 움직였다.

《은의 조형》으로 세운 차폐벽이 펼쳐졌다.
《따듯하게 안아주는 은의 심장》이 뛰었다.
《성은의 혈맥》이 반응로에서 공방 외곽까지 이어졌다.

라플리의 팔을 따라 뇌천마력이 흘렀다.

《천율학파》.
《뇌천마력회로》.
《천상이변》.

공방 위에 작은 하늘이 다시 생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방을 압박하기 위한 하늘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화살비를 끌어들이기 위한 하늘이었다.

라플리는 뇌광을 셋 띄웠다.

“천격 마법핵 지정. 화살비 유도. 성은 회로에 맞춰 흘린다.”

라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의 심장, 박자를 맞출게요.”

번개가 은빛 혈맥을 탔다.

6막에서 남은 흉터가 빛났다.

그 흉터는 다시 아프게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함이 아니었다.

길이었다.

가상 화살비는 성은 공방에 꽂히지 않았다.
뇌광을 따라 휘어졌고, 성은의 혈맥을 따라 흘렀고, 여관좌의 등불 아래에서 불안정한 기록의 잔향으로 흩어졌다.

라이자가 말했다.

“잡지 말고, 지나가게.”

라플리가 웃었다.

“이제 좀 알겠네. 같이 뛰게 한다는 말.”

“이상하지 않죠?”

“아직 이상해. 근데 쓸 만해.”

성은 공방은 버텼다.

하지만 전장 전체의 압박은 점점 강해졌다.

아카식의 책이 스스로 넘어갔다.

사락.

사락.

사락.

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조금 사라졌다.

“3단계.”

그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역사적 귀결.”

동쪽의 검은 말발굽들이 한순간 멈췄다.

그리고 모든 문장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성벽 붕괴.”

중앙 성벽의 균열이 커졌다.

“보급 단절.”

수레의 바퀴 선이 검게 물들었다.

“지휘핵 소실.”

전령의 이름표가 흔들렸다.

“민간 행렬 포획.”

피난민 목패들의 발이 무거워졌다.

아카식은 천천히 말했다.

“이건 판결이 아니야. 그냥 한 번 그렇게 끝났다는 기록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기록은 방치하면 결론처럼 보이지.”

여관좌의 등불이 흔들렸다.

불안정성 권능이 기록의 결론을 죽음으로 굳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이 대응하지 못하면, 기록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전지적 작가시점》.

수천의 초안이 열렸다.

성벽이 무너지는 초안.
호흐마이스터의 갑주가 버티지만 후방이 끊기는 초안.
아스트리트의 금목서검이 너무 넓어 관중석 차폐를 흔드는 초안.
죠니의 순환 방어선이 한 박자 늦는 초안.
아스테르다스가 너무 깊이 떨어지는 초안.
라이자의 성은 심장이 과부하되는 초안.
라플리의 뇌광이 흘러야 할 길을 잃는 초안.
아레의 실이 너무 깊어 산 자가 달리지 못하는 초안.
하융이 죽은 가능성을 밟고도 반 치 늦는 초안.
레이튼의 질문이 닫힌 결론을 열지 못하는 초안.
그레이의 장부에 이름 누락이 생기는 초안.
미하일라의 화살길이 막히는 초안.
알렉산드리나가 새벽선 앞에서 무너지는 초안.

완벽한 미래는 없었다.

무손실 해피엔딩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모두가 자기 장면을 포기하지 않는 흐름.

푸리나는 그것을 선택했다.

“알렉산드리나!”

사생아 차르가 고개를 들었다.

“길을 만들어줘!”

알렉산드리나는 한순간 미하일라를 보았다.

미하일라는 이미 활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화살길이 막혀 있었다.

검은 말발굽의 지휘핵은 포위망 안쪽, 기록의 결론 뒤편에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더 이상 시메온 대제의 문장만을 빌리지 않았다.

물론 아직 완성된 왕은 아니었다.

아직 위대하지 않았다.
아직 정통하지 않았다.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걸었다.

《위대해질 차르》.

“나는 시메온 대제가 아니다.”

그녀는 보조군을 움직였다.

“나는 완성된 왕도 아니다.”

방패대가 다시 섰다.

“그러나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다.”

창대가 길을 만들었다.

“그러니 걷는다!”

알렉산드리나의 군세가 무너진 방벽과 피난 행렬 사이를 밀고 나아갔다.

그들은 검은 말발굽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길 하나를 만들었다.

화살 하나가 지나갈 길.

미하일라는 그 길을 보았다.

자주빛 망토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는 활시위를 당겼다.

《황제칙령》.

화살은 공격이 아니었다.

칙령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명령.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낸다.”

자주빛 화살이 날아갔다.

그 화살은 병사를 맞히지 않았다.
기록의 지휘핵을 꿰뚫었다.

검은 말발굽의 결론이 흔들렸다.

성벽 붕괴.

보급 단절.

지휘핵 소실.

민간 행렬 포획.

네 문장이 동시에 금이 갔다.

그러나 기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의 결론은 고집이 셌다.

아카식이 말했다.

“흔들렸어. 하지만 아직 남았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작가가 너무 오래 객석에 앉아 있었네.”

《즉흥극:세기의 대배우》.

그 순간 모든 시선이 푸리나에게 모였다.

검은 말발굽도.
피난민 목패도.
성벽 앞의 갑주도.
금목서의 검도.
자주빛 활도.
청흑빛 초신성도.
나선의 창도.
검은 실도.
회색 창호도.
은빛 심장도.
뇌광도.
장부도.
서재도.

모든 조명이 그녀에게 떨어졌다.

푸리나는 무대 위에 섰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두려움이 있어도, 배우는 무대 위에 선다.

그녀는 손을 펼쳤다.

《재연극:앙코르》.

지금까지의 막들이 돌아왔다.

죠니와 아스테르다스가 한 치 앞에서 멈췄던 궤적.
호흐마이스터와 아스트리트가 죄악의 갑주와 생명의 검으로 서로를 인정했던 장면.
미하일라의 세 번째 화살과 알렉산드리나의 한 걸음.
아레가 실 하나를 놓고, 하융이 이 세계를 선택하고, 레이튼이 결론을 묻고, 그레이가 이름을 적었던 퇴각.
라이자의 성은 심장과 라플리의 뇌광이 같은 박자로 뛰었던 순간.

그것들은 과거의 복제가 아니었다.

서사적 구조였다.

지금의 전장에 덧씌워지는 대답들이었다.

푸리나는 외쳤다.

“미지는 공포가 아니야!”

《희극:저 별을 향하여!》

검은 결론이 강요하던 공포가 한순간 흔들렸다.

“우리가 아직 못 본 장면이 남았다는 뜻이지!”

피난민 목패들이 고개를 들었다.
보조 병력들이 다시 움직였다.
성은 반응로가 더 밝게 뛰었다.
하융의 창호에 아직 닫히지 않은 세계가 비쳤다.
레이튼의 서재에서 별들이 아직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빛났다.

푸리나는 모든 이를 향해 말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극장 전체를 채웠다.

“칼을 든 자도, 장부를 든 자도, 수레를 끄는 자도, 무대 아래에서 이름을 지키는 자도.”

《군상극:아르메니아의 노래》가 더 깊어졌다.

불협화음 같던 각자의 선택들이 하나의 노래가 되었다.

“모두가 이 막의 주인공이다!”

《세기극:아르메니아 대서사시》.

하나의 무대가 나라가 되고, 하나의 나라가 다시 무대가 되었다.
그 위에서 각자의 이름은 먼지로 사라지지 않았다.
대서사시는 그 이름들을 받아 적었다.

검은 말발굽의 결론이 마지막으로 굳으려 했다.

아카식의 책장이 떨렸다.

여관좌의 등불이 크게 흔들렸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손을 높이 들었다.

칭호가 열렸다.

《그대여, 박수를! 대단원의 막이 올랐으니!》

그것은 강제된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푸리나 혼자 만드는 기적도 아니었다.

죠니가 돌았기 때문에.
아스테르다스가 떨어졌기 때문에.
호흐마이스터가 먼저 섰기 때문에.
아스트리트가 피었기 때문에.
미하일라가 쏘았기 때문에.
알렉산드리나가 걸었기 때문에.
아레가 늦게 놓았기 때문에.
하융이 이 세계를 선택했기 때문에.
레이튼이 결론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그레이가 이름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자가 심장으로 받았기 때문에.
라플리가 번개를 흘렸기 때문에.

닿을 수 있는 미래였다.

소망에 닿은 미래.

그 미래가 현재로 끌려왔다.

검은 말발굽의 기록이 갈라졌다.

성벽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보급로는 끊기지 않았다.

지휘핵은 소실되지 않았다.

피난민 행렬은 포획되지 않았다.

대신 기록 위에 새로운 문장이 덧씌워졌다.

“공동 방어 성공.”

아카식이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좋네.”

그는 펜을 꺼냈다.

“이건 남길 가치가 있겠어.”

여관좌는 등불을 낮추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잠시 쉬어 가시지요.”

검은 말발굽들이 흩어졌다.

기록의 문장들은 다시 책장 속으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흙먼지, 파손된 수레 하나, 무너진 성벽 일부, 흔들리는 등불, 그리고 너무 오래 숨을 참았다가 이제야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숨소리였다.

그레이가 장부를 확인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도 숨을 고르며 기다렸다.

그레이는 천천히 읽었다.

“성벽 일부 붕괴.”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급 손실 2.”

라이자가 살짝 아쉬운 얼굴을 했다.

라플리는 “그 정도면 싸게 먹혔네”라고 중얼거렸다.

“부상자 판정 7.”

그레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름 누락 없음.”

그 말에 아레의 실이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

“피난민 핵심 행렬 보존. 지휘선 유지. 성은 공방 가동 유지. 퇴각로 개방.”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보았다.

“공동 방어 성공입니다.”

잠시 정적.

그다음, 박수가 터졌다.

이번 박수는 앞선 모든 막보다 컸다.

하지만 시끄럽게 모든 것을 덮어버리지는 않았다.

침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침묵이 남았다.
아레는 박수를 치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부상자 판정 7의 이름을 따로 적었다.
하융은 죽어버린 창들을 닫았다.
레이튼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질문 하나를 서재에 남겼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러면 오늘의 승자는?”

그레이는 규칙상 대답했다.

“규칙상 공동 성공입니다.”

푸리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 그러면 오늘의 승자는 전원!”

그레이는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도 보았다.

죠니는 이미 웃고 있었다.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허용하겠습니다.”

푸리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레이가 허락했어!”

죠니가 박수를 쳤다.

“그럼 진짜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낙점이다.”

라플리가 말했다.

“그 표현 아직도 쓰냐?”

죠니가 답했다.

“이제 포기했어.”

라이자는 은의 심장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관중석 너머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미하일라는 활을 내렸다.
알렉산드리나는 새벽선 너머를 보고 있었다.

아레는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그녀를 향해 아주 작게 손뼉을 쳤다.

아레는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았다.

그 침묵은 박수 옆에 놓였다.

둘은 서로를 지우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더 크게 웃었다.

그날, 킬리키아의 무대 위에서 칼끝들은 처음으로 같은 방향을 향했다.

기록은 과거의 패배를 재현했고, 여관은 그것이 죽음으로 굳기 전 잠시 흔들어두었다.

그리고 푸리나는 그 흔들리는 틈 위에 모두의 이름을 올렸다.

성벽은 조금 무너졌고, 수레 하나는 부서졌고, 장부에는 부상자 일곱 명이 남았다.

그러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길은 끊기지 않았으며, 박수는 침묵을 덮지 않았다.

그래서 푸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의 승자는 전원이라고.

그리고 이번만큼은, 그레이도 그 말을 고치지 않았다.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후일담 — 장부와 박수, 그리고 남은 흠집들

다음 날 아침, 킬리키아의 경기장은 너무 솔직했다.

어제의 박수는 사라졌고, 환호도 사라졌고, 푸리나가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던 대사들도 밤새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남은 것은 흠집이었다.

목책 한쪽은 죠니의 말발굽과 아스테르다스의 낙하가 남긴 충격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중앙 성벽으로 쓰였던 가설 구조물은 한쪽 모서리가 무너져 있었다.
남쪽 흙바닥에는 아스트리트의 금목서검이 지나간 금빛 결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새벽선 한 걸음 앞에는 알렉산드리나의 목패 병사가 멈췄던 작은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다.
퇴각전 때 쓰인 수레 하나는 바퀴가 빠져 옆으로 누워 있었고, 라이자의 성은 반응로에는 라플리의 뇌광이 남긴 흉터가 새로운 회로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모든 것을 보고 말했다.

“대단원의 막이 끝났는데, 무대가 너무 솔직하네.”

그레이는 이미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무대도 정리해야 합니다.”

“낭만 없네.”

“정리는 낭만의 사후 절차입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그 말 좋다. 적어둬.”

그레이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적었습니다.”

“정말?”

“예. 폐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빤히 보다가,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레이, 너도 이제 극작가야.”

“아닙니다. 행정관입니다.”

“행정관도 대사를 잘 치면 극작가가 될 수 있어.”

“그런 진급 체계는 없습니다.”

“오늘 생겼어.”

“폐하.”

“알았어, 알았어. 아직은 임시 직책.”

그레이는 반박하려다 말았다.

그녀는 장부를 다시 넘겼다.

“최종 정산부터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목책 위에 걸터앉았다.

“좋아. 대단원의 결산!”

“장부입니다.”

“결산 장부도 대단원이 될 수 있지.”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제1경기. 죠니 죠스타 경 대 아스테르다스 경. 무승부. 한 치 앞에서 정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죠니가 말발굽 자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도 옆에 있었다.

죠니는 흙바닥에 남은 원을 보고 말했다.

“다음엔 진짜 덜 부수고 돌아.”

아스테르다스는 말발굽의 원과 자신의 낙하 자국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별에게 궤도를 좁히라는 말 같군. 어렵지만 좋아, 해볼게. 내 유성이 너무 크게 떨어지면, 다음 별자리를 그릴 흙이 남지 않을 테니까.”

죠니가 그를 흘끗 보았다.

“그거 농담이야?”

아스테르다스는 조금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나머지 반은 진심이고.”

“그럼 꽤 위험한 농담이네.”

“빛나는 농담이라고 해두자.”

죠니는 잠깐 침묵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투아니아식 농담은 아직 어렵네.”

아스테르다스는 즐겁게 웃었다.

“괜찮아. 별도 처음 보면 다 그냥 점처럼 보이니까. 몇 번 보다 보면 길이 보일 거야.”

“그 말은 좀 괜찮네.”

“그럼 좋은 궤도로 남았군.”

죠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이제 그 정도는 알아듣겠다.”

그레이는 다음 줄을 읽었다.

“제2경기. 호흐마이스터 경 대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경. 호흐마이스터 경 판정승. 관중석 파장 차단.”

호흐마이스터는 갑주를 벗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갑주에는 여전히 아스트리트의 《금목만리향파》가 남긴 균열이 있었다.

아스트리트가 그 균열을 보며 물었다.

“수리하실 겁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손끝으로 균열을 가볍게 만졌다.

“일부는 남겨둘 생각입니다.”

“왜요?”

호흐마이스터는 성벽 뒤쪽, 어제 관중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제가 혼자 설 필요가 조금 줄었다는 증거니까요.”

아스트리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웃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더 깊게 남겨드리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당황해서 덧붙였다.

“아, 물론 친선전 범위에서요.”

호흐마이스터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 범위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레이는 세 번째 줄을 읽었다.

“제3경기. 미하일라 폐하 대 알렉산드리나 아센 경. 미하일라 폐하 판정승. 새벽선 한 걸음 앞 도달.”

알렉산드리나는 새벽선 앞에 남은 발자국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패배자의 것이었지만, 무너진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라가 그녀의 옆에 섰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이번에도 한 걸음 앞이었습니다.”

미하일라는 새벽선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한 걸음이 화살길을 열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진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진군은 늘 성문을 넘어서야만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하일라의 목소리는 황제의 것이었고, 동시에 전장을 아는 전사의 것이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화살이 지나갈 길을 만드는 것도 진군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닿겠습니다.”

미하일라는 활을 가볍게 쥐었다.

“그렇다면 짐도 다음 화살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네 번째 줄로 넘어갔다.

“제4경기. 아레 폐하 대 킬리키아 가신단. 무승부. 실 하나를 놓았음. 이름은 놓지 않았음.”

아레는 여관좌의 등불 앞에 서 있었다.

그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잠시 장부에서 눈을 떼고, 아레에게 다가갔다.

“아레.”

아레가 돌아보았다.

“푸리나 헤툼.”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차갑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많은 물결을 안쪽으로 가라앉힌 바다처럼, 겉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푸리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어제 박수, 너무 시끄럽진 않았어?”

아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의 흠집과 장부, 그리고 등불을 천천히 보았다.

그 시선은 판정자의 것이 아니었다.

추도자의 것이었다.

“좋은 박수였단다.”

푸리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정말?”

“그래.”

아레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 자에게는 그런 숨이 필요하지. 울음만으로는 다음 날 아침까지 걸어갈 수 없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의 시선은 다시 등불 아래의 그림자로 향했다.

“다만 나는, 그 박수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듣는 쪽의 사람이란다.”

그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훈계도 아니었다.

아레는 푸리나의 웃음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웃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난민에게는 다시 밥을 먹을 이유가 필요하고, 아이에게는 어제의 불길보다 오늘의 인형극을 기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수 뒤에는 언제나 내려앉는 이름들이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전령.
한 박자 늦은 방패병.
수레 뒤에서 손을 놓칠 뻔한 아이.
기록에는 남았지만, 목소리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아레는 그 이름들을 듣는 사람이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네 침묵을 전부 가져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어.”

아레는 조용히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건 네가 마땅히 짊어진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리고 나는, 그런 걸 멋대로 빼앗는 극장주는 아니야.”

“그렇구나.”

아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대는 산 자를 다시 무대 위에 세우는 아이구나.”

푸리나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아이?”

“얕보는 말은 아니란다.”

아레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대를 여는 자도, 결국 누군가를 빛과 시선 앞으로 보내는 아이이니까. 그대는 박수를 두려워하면서도, 박수 없이는 숨 쉬지 못하는 이들을 알고 있구나.”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레는 등불을 보며 이어 말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간 이가 어둠 속에서 혼자 사라지지 않도록 실을 내려보내는 쪽의 사람이란다. 아마 우리의 길은 끝까지 같은 무대 위에서 얽히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푸리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왜냐니?”

“같은 무대가 아니면, 내가 무대를 넓히면 되잖아.”

푸리나는 아주 푸리나다운 얼굴로 웃었다.

“네 짐을 전부 덜어주겠다는 건 아니야. 그건 네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침묵이니까. 하지만 한 장면 정도는, 이 극장주가 같이 들어줄 수 있어.”

아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검은 실 하나가 등불 아래에서 아주 얇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그녀는 낮게 말했다.

“어제의 박수는 시끄럽지 않았단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레는 덧붙였다.

“침묵이 앉을 자리가 있었으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네.”

“그래.”

아레는 다시 등불을 바라보았다.

“괜찮았다.”

그레이는 다섯 번째 줄을 읽었다.

“제5경기. 라이자 폐하와 라플리 경의 공방 시험전. 라이자 폐하 우세. 번개와 은의 박자 동조 확인.”

성은 반응로 앞에서 라플리와 라이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라플리는 반응로에 남은 뇌광 흉터를 보고 팔짱을 꼈다.

“논문 제목은 내가 정한다.”

라이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푸리나 님이 정하고 싶어 하시던데요.”

라플리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제목이 세 줄이 될 거야.”

라이자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건 그것대로 멋지지 않나요?”

“너도 위험한 타입 맞다니까.”

“어제도 들은 말이에요.”

“오늘도 유효해.”

라이자는 반응로의 흉터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래도 이 회로는 남겨둘 거예요.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더 잘 받을 수 있으니까요.”

라플리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그 흉터를 보았다.

자기 번개가 남긴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결함이 아니라 회로로 삼겠다는 은의 군주.

라플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목에 ‘흉터’는 넣어도 되겠다.”

라이자가 웃었다.

“좋아요. 따뜻한 흉터?”

“아니. 그건 빼.”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최종 공동 방어전. 공동 성공. 성벽 일부 붕괴. 보급 손실 2. 부상자 판정 7. 이름 누락 없음. 피난민 핵심 행렬 보존. 지휘선 유지. 성은 공방 가동 유지.”

푸리나는 가만히 들었다.

그레이는 장부를 덮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 기록.”

그녀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오늘의 승자는 전원. 단, 규칙상 표현은 공동 성공으로 병기.”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레이, 그거 타협안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타협안이네.”

“정확한 표현입니다.”

푸리나는 목책에서 내려와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거의 대본 같네.”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장부입니다.”

“대본도 기록이잖아.”

“기록이 모두 대본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기록은 다음 극의 초안이 될 수 있지.”

그레이의 펜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건 맞습니다.”

푸리나는 뿌듯한 얼굴을 했다.

“이겼다.”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더 좋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융, 레이튼, 그레이가 한 장부를 함께 보고 있었다.

하융은 회색 창호가 닫힌 자리를 보며 말했다.

“닫힌 창들도 남겨두겠소.”

레이튼은 모자를 살짝 기울였다.

“닫힌 책도 언젠가 다시 질문이 될 수 있지요.”

그레이는 장부에 항목을 하나 더 만들었다.

“재발 방지 항목으로 정리하겠습니다.”

하융은 작게 웃었다.

“참으로 그대다운 답이오.”

레이튼도 미소 지었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답이기도 합니다.”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듯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냥 필요한 일을 적는 것뿐입니다.”

레이튼이 말했다.

“가끔 필요한 일이 가장 어려운 법이지요.”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죽은 창을 보고도 산 길을 적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부의 그 줄은 지우지 않았다.

그때 아카식이 검은 전쟁기록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어제의 기록재현을 모두 접어두었지만, 오늘도 책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카식! 다 적었어?”

아카식은 웃었다.

“기록은 보통 끝난 일을 적어. 그런데 이건 이상하네.”

“뭐가?”

“끝났는데, 다음 장면이 더 많이 보이거든.”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은 극이네.”

아카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은 기록이기도 해.”

그는 책 첫머리에 제목을 적었다.

《킬리키아 친선 무력제 기록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푸리나가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제목 멋진데?”

“네가 한 말들에서 뽑았어. 그러니까 너무 자랑스러워하지는 마.”

“이미 자랑스러운데?”

“그럴 줄 알았어.”

아카식은 책장을 넘겼다.

“과거의 결론을 바꾼 건 아니야. 기록은 과거를 지우지 못해.”

그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하지만 다음에 같은 결론으로 가지 않을 이유를 하나 남겼지.”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그 말을 제대로 들었다.

“그럼 충분해.”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겠지.”

“그럼 다음 막을 더 잘 쓰면 돼.”

아카식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결국 웃었다.

“역시 극작가는 뻔뻔해야 하는구나.”

“위대한 극작가는 그렇지!”

“좋아. 그렇게 적을까?”

“그건 빼.”

“아쉽네.”

그때 여관좌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여관에 있으면, 주인이 어느새 차를 내오는 법이니까.

등불 아래에 작은 탁자가 놓였다.

찻잔은 많았다.

왕관을 쓴 사람의 잔도, 갑주를 입은 사람의 잔도, 장부를 든 사람의 잔도, 창을 든 사람의 잔도, 질문을 품은 사람의 잔도 있었다.

여관좌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먼 길이었습니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모두를 보았다.

“차가 식기 전까지만이라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받았다.

“오늘은 정말 여관 같네요.”

여관좌는 부드럽게 웃었다.

“여관은 끝난 길만 맞이하지 않습니다. 다음 길로 나서기 전의 밤도 맞이하지요.”

푸리나는 차를 내려다보았다.

따뜻했다.

전투도, 박수도, 기록도, 판정도 없는 따뜻함이었다.

“그럼 다음엔 더 좋은 여관으로 만들게요.”

여관좌는 고개를 저었다.

“완벽한 여관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등불이면 충분합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에 장난기가 조금 돌아왔다.

“그래도 멋진 등불이면 좋잖아요.”

여관좌는 잠깐 침묵하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 점은 극장주님의 취향을 존중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여관좌도 인정했어.”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인정이라기보다 배려입니다.”

“배려도 인정으로 연출할 수 있어.”

“연출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폐하.”

푸리나는 웃었다.

그 웃음에 몇몇이 따라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도 아주 희미하게, 아스트리트도 조용히, 알렉산드리나도 어색하게, 라이자도 밝게, 라플리도 피식, 죠니도 낮게, 아스테르다스는 별을 본 듯 즐겁게 웃었다.

미하일라는 차를 들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레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지도 않았다.

그녀는 등불 곁에 서서, 박수 소리가 지나간 뒤에 남는 아주 작은 침묵들을 들었다.

그 침묵들은 더 이상 부끄러워 숨어 있는 침묵이 아니었다.
박수에 밀려난 침묵도 아니었다.

같은 무대 가장자리에서, 제 몫의 자리를 받은 침묵이었다.

아레는 검은 실 하나를 무대 아래로 내려보냈다.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이름들 위로 산 자들의 웃음이 모욕처럼 쌓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다.

“좋은 막이었단다, 박수를 지키는 아이야.”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멀리서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레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참 뒤,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각자의 깃발 아래로.

각자의 숙소로.

각자의 왕관과 장부와 검과 활과 실과 질문을 들고.

무대 중앙에는 푸리나와 그레이가 남았다.

푸리나는 작게 손뼉을 쳤다.

짝.

이번에는 관객을 부르기 위한 박수가 아니었다.

막을 닫기 위한 박수였다.

“커튼콜은 끝났어.”

그레이가 장부를 닫았다.

“예.”

“하지만 극장은 닫지 않을 거야.”

“다음 사용 예정이 있습니까?”

푸리나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당연하지. 인생은 계속되잖아.”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페이지를 열었다.

“그럼 마지막 문구를 남기겠습니다.”

그녀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적었다.

《무대 폐쇄 아님. 다음 막을 위해 등불 하나 남김.》

푸리나는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좋네. 그런데 하나 더 적자.”

그레이가 물었다.

“비공식 문구입니까?”

“응. 아주 중요하고, 아주 비공식적인 문구.”

그레이는 펜을 넘겨주었다.

푸리나는 조금 고민했다.

너무 장엄하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가볍게도 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무대는 누군가 한 명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러 나라가 있었다.

보헤미아의 은빛.
니케아의 자주빛.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튜튼의 어두운 갑주.
불가리아의 새벽.
세르비아의 침묵.
킬리키아의 박수.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

그 모든 것이 잠시 같은 등불 아래 앉았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적었다.

《칼끝은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음. 확인함.》

그레이는 그 문장을 한참 보았다.

“표현은 부정확하지만, 의미는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럼 됐네.”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아래에 작게 적었다.

《확인함.》

푸리나가 깔깔 웃었다.

“그건 너무 그레이다.”

“정확합니다.”

아침 햇빛이 경기장 위로 내려왔다.

무대는 닫혔다.

그러나 극장은 닫히지 않았다.

목책에는 흠집이 남았고, 성은의 심장에는 뇌광의 회로가 남았고, 장부에는 부상자 일곱의 이름이 남았다.

그리고 무대 가장자리에는 등불 하나가 남았다.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잠시 같은 불빛 아래 앉았다는 증거로.

다음 전쟁이 언제 오든, 그들은 적어도 한 가지를 기억할 것이다.

칼끝은 서로를 향할 수도 있지만, 같은 어둠을 향해 나란히 들 수도 있다는 것을.
좋아. 그럼 학식편은 새 연작으로 시작하자.

《등불 아래의 학술제》

1막 — 질문의 개회식

“이번에는 칼을 내려놓자!”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선언하자, 강당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아주 잠깐 안도했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라플리가 바로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팡이는?”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즉답했다.

“지팡이도 내려놓으십시오.”

라플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탑주한테 지팡이를 내려놓으라는 건 활잡이한테 활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랑 비슷한데?”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활도 오늘은 내려놓았습니다.”

라플리가 카를로타를 보았다.

“그쪽은 진짜 내려놓았네.”

“예. 오늘의 도구는 손이 아니라 머리입니다.”

“머리로도 꽤 많이 부술 수 있는데.”

그레이의 펜끝이 라플리를 향했다.

“부수지 마십시오.”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

“예방입니다.”

푸리나는 양손을 들어 분위기를 눌렀다.

“좋아, 좋아. 지팡이, 활, 검, 창, 번개, 은의 군단, 성벽을 뚫는 화살, 금목서 거대검, 전부 오늘은 쉬게 해.”

죠니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창까지 내려놓으면 좀 허전하긴 한데.”

아스테르다스가 그 옆에서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죠니. 오늘은 궤도가 다른 날이니까. 별도 매번 떨어지기만 하면 피곤하잖아.”

죠니는 그를 흘끗 보았다.

“너는 책상에 앉아도 별 얘기네.”

“내가 별이니까.”

“그 정도로 당당하면 반박하기 어렵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분위기가 아주 학술적이야.”

그레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학술적이지 않습니다. 아직은 무장 해제 절차입니다.”

“그레이, 오늘은 좀 더 낭만적으로 말해도 돼.”

“무장 해제 절차는 낭만의 전제 조건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 말 좋다. 적어둬.”

“이미 적었습니다.”

“역시!”

이번 학술제는 전날까지의 경기장과 달랐다.

킬리키아의 [여관:극장]은 오늘 전장이 아니라 대강당이 되었다.

천장은 높았다.
벽에는 각국의 깃발이 걸렸다.
그러나 깃발들은 서로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모두 같은 높이에 걸려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그 위에는 검 대신 펜이 놓였고, 방패 대신 서류철이 놓였고, 화살 대신 지도와 자, 작은 모래시계와 찻잔이 놓였다.

한쪽에는 아카식이 마련한 기록대가 있었다.
검은 표지의 장부와 빈 양피지, 여러 색의 잉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여관좌의 작은 찻상이 있었다.
토론이 길어지면 누구든 차를 가져갈 수 있도록, 찻잔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섰다.

오늘의 그녀는 전날처럼 군세를 부르는 극장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극장주였다.

극장이 전장이 되지 않았을 뿐, 사람의 소망이 서로 부딪치는 곳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손을 펼쳤다.

“여러분!”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참석자 명단상 왕, 황제, 군주, 가신, 성좌 단말, 성좌 대리인, 사제, 기술자, 마탑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한 박자 멈췄다.

“여러분과 폐하들과 전하들과 경들과 탑주님들과 성좌 관계자분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좋은 수정입니다.”

라플리가 말했다.

“길어.”

아카식은 이미 적고 있었다.

“개회 첫 문장부터 호칭 문제로 흔들림. 아주 좋아. 학술제는 역시 이렇게 시작해야지.”

그레이가 아카식을 보았다.

“그 부분은 기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록할 만한데?”

“없습니다.”

“기록자의 판단은 기록자가 해.”

“회의록 담당자는 접니다.”

“그럼 둘 다 적자.”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소리가 강당을 정리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은 무력제가 아니야. 우리는 이미 봤어.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같은 방향으로 칼끝을 들 수 있다는 걸.”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건 칼끝만으로 되지 않아. 무너진 도시를 세우고, 다친 사람을 돌보고, 죽은 이름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가 같은 곳에서 넘어지지 않게 가르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같은 책상에 앉을 수 있게 해야 해.”

푸리나는 원탁 위의 펜 하나를 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펜끝이야.”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펜끝도 칼끝만큼 날카로울 수 있지요.”

그레이가 말했다.

“그래서 토론 규칙이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펜을 빙글 돌리다가 그레이를 보았다.

“토론에도 안전수칙이 필요해?”

“예.”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누가 말로 사람 죽이기라도 하나?”

레이튼은 차분하게 답했다.

“가장 위험한 무기는 대개 확신입니다.”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민다우가스는 말없이 레이튼을 보았다.
미하일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요안나는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가볍게 만졌다.
슈샤니크는 이미 그 말을 장부에 어떻게 적을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좋아. 그럼 레이튼 경. 오늘의 첫 강의는 질문의 예의에 대해 부탁해.”

레이튼은 모자를 벗어 원탁 위에 놓았다.

“강의라기보다, 작은 제안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원탁을 둘러보았다.

“오늘 우리는 서로를 논파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논파는 때로 유용하지만, 논파만을 목표로 하면 질문은 검이 됩니다. 검이 되면 찌르는 데에는 능해지지만, 비추는 데에는 서툴러지지요.”

라플리가 팔짱을 끼었다.

“질문도 비춘다고?”

“좋은 질문은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질문은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한 갈고리일 수도 있지만, 함께 어두운 방을 밝히는 촛불일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좋은데? 아주 학술제 같아.”

아카식이 옆에서 적었다.

“질문은 갈고리이거나 촛불. 음, 시적이네.”

레이튼은 말을 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규칙은 세 가지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레이가 바로 펜을 들었다.

“첫째. 상대의 답을 빼앗지 말 것.”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모른다는 말을 패배로 취급하지 말 것.”

푸리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중요해.”

레이튼은 그녀를 보고 살짝 웃었다.

“셋째. 결론을 너무 빨리 닫지 말 것.”

그 말이 떨어지자, 강당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들이 들렸다.

왕관을 쓴 자들에게, 결론을 늦추는 일은 어렵다.

통치자는 결정해야 한다.

군주는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

재상은 장부를 닫아야 하고, 장군은 명령을 내려야 하고, 성직자는 장례를 끝내야 하고, 장인은 물건을 완성해야 한다.

그런데도 오늘의 첫 규칙은 결론을 늦추라는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규칙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그럼 오늘 이 학술제의 이름을 정해야겠네.”

아카식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정했어?”

“위대한 제목은 즉흥에서 태어나는 법이야.”

“방금 생각 안 했다는 뜻이지?”

“위대한 즉흥!”

그레이가 말했다.

“행사명은 사전에 확정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럼 지금 확정하면 돼.”

푸리나는 원탁을 바라보았다.

검이 내려놓인 자리.
장부가 펼쳐진 자리.
찻잔이 식지 않도록 기다리는 자리.
서로 다른 왕관이 같은 높이에 앉은 자리.

그녀는 선언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여관좌의 등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마치 제목을 들은 것처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때?”

그레이는 적었다.

“행사명. 《등불 아래의 학술제》.”

푸리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평가는?”

“허용 가능한 제목입니다.”

“극찬이네.”

“아닙니다.”

“그레이식 극찬이야.”

아카식은 웃으며 제목을 따로 적었다.

“좋아. 기록명은 이걸로 할게.”

레이튼은 모자를 다시 썼다.

“그럼 첫 질문도 정해졌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첫 질문?”

레이튼은 원탁 위에 놓인 빈 양피지를 가리켰다.

“우리는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강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단순한 질문처럼 들렸지만, 아니었다.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왕관을 쓰고, 다른 상처를 가진 이들이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싸우지 않기 위해서?

동맹을 위해서?

몽골을 막기 위해서?

그 답들은 모두 맞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이번에는 바로 연극적인 대사를 던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원탁을 보았다.

무력제에서 함께 싸웠던 자들.

그러나 싸우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슈샤니크가 어떤 순서로 도시를 다시 세우는지.
요안나가 시민이라는 말을 어디까지 믿는지.
벨라가 불탄 왕국을 어떻게 다시 돌로 세우는지.
민다우가스가 어떤 것을 끝까지 계산하고, 어떤 것을 버리지 않는지.
게오르기아가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지.
레플리카가 고통을 어디까지 덜어주려 하는지.
소피아가 부서진 것에서 어떤 쓸모를 다시 보는지.

칼끝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펜끝은 또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서로의 칼끝을 알았으니까.”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이제 서로의 답을 알아야 해.”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전장에서 누가 먼저 서는지는 봤어. 이제 무너진 도시 앞에서 누가 무엇을 먼저 적는지 봐야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개회 답변입니다.”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할 가치 있음.”

그레이는 이미 적었다.

푸리나는 조금 으쓱했다.

“좋아. 그럼 학술제 진행 순서 발표!”

그레이가 장부를 넘겼다.

푸리나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첫째, 무너진 도시를 30일 안에 안정화하는 문제.”

요안나, 슈샤니크, 그레이, 알렉산드리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요안나가 조용히 눈을 들었다.

슈샤니크는 이미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리나는 행군 거리와 수레 수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둘째, 별과 기록의 토론.”

아스테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알토는 창밖 하늘을 보았다.

레이튼은 모자챙을 가볍게 만졌다.

아카식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빠져?”

푸리나는 웃었다.

“너는 기록자.”

“그것도 좋네. 가끔은 앉아서 남의 별을 적는 것도 나쁘지 않지.”

“셋째, 공방 학술전.”

라이자, 라플리, 카를로타, 소피아가 서로를 보았다.

라플리가 먼저 말했다.

“폭발은?”

그레이가 즉답했다.

“금지입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폭발도요?”

“금지입니다.”

라플리가 소피아를 보았다.

“너, 생각보다 말 통할 것 같네.”

카를로타가 말했다.

“저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안전 기준은 적용하겠습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공방이 될 것 같아요.”

그레이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불안합니다.”

푸리나는 네 번째 손가락을 폈다.

“넷째, 죽음과 고통, 기억의 세미나.”

아레의 시선이 낮아졌다.
타마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레플리카는 팔짱을 끼고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여관좌는 찻잔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그레이는 잠시 펜을 멈췄다가, 다시 쥐었다.

푸리나는 이 막의 제목을 너무 크게 외치지 않았다.

“여기서는 박수를 줄일 거야.”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도 자리 있어야 하니까.”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부정이 아니었다.

푸리나는 다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섯째, 왕관과 죄의 원탁.”

민다우가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라 4세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침묵은 성벽처럼 낮고 무거웠다.

미하일라와 요안나는 서로를 보았다.

두 황제 사이에는 예법이 있었다.

그리고 예법보다 더 오래 남은 상처도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갑주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슈샤니크는 이미 이 주제가 불편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동시에 이해한 얼굴이었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이미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통치자는 죄를 어디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말은 누구의 침묵 위에서 성립하는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여섯째, 배움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강당이 아니라, 강당 너머의 아이들에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라이자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아카식은 기록할 준비를 했다. 레이튼은 질문을, 푸리나는 무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

푸리나는 양손을 펼쳤다.

“하나의 도시, 여러 답.”

원탁 위에 빈 도시 지도가 펼쳐졌다.

폐허가 된 다민족 변경 도시.

성벽은 무너져 있고, 우물은 오염되어 있고, 교역로는 끊어져 있고, 주민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사망자 명단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학교를 잃었고, 병사들은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 모른다.

푸리나는 그 지도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 도시를 다시 살릴 거야.”

그레이가 바로 정정했다.

“모의 과제입니다.”

“그렇지. 모의 과제.”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모의라고 해서 대충 하지 않을 거지?”

그 말에는 모두가 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무너진 도시라는 말을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카식이 기록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개회 기록을 남길게.”

그는 펜을 들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첫날. 칼을 내려놓고, 펜과 질문을 들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정확합니다.”

아카식은 미소 지었다.

“그레이한테 정확하다는 말 들으니까 기분 좋은데?”

“기록이 정확할 때만입니다.”

“그럼 자주 들어야겠네.”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서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무력제 때의 개막 박수와는 달랐다.

이번 박수는 사람을 앞으로 뛰게 하기보다, 앉아 있던 사람들의 등을 곧게 펴게 했다.

“그럼 시작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칼끝을 내려놓고, 책장을 넘기며.”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첫 질문은 이미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요안나가 원탁 위의 빈 도시 지도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폈다.

알렉산드리나는 보급선을 재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이름을 적을 빈 칸을 만들었다.

아카식은 제목을 남겼다.

여관좌는 차를 따랐다.

그리고 푸리나는 보았다.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이번에는 같은 등불 아래 칼이 아니라 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녀는 생각했다.

좋은 무대다.

아직 아무 답도 나오지 않았기에.

아직 질문이 살아 있었기에.
《등불 아래의 학술제》

2막 —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원탁 위에 펼쳐진 것은 도시 지도였다.

처음에는 그냥 지도처럼 보였다.

성벽이 있고, 동문과 서문이 있고, 광장과 우물과 시장과 성당과 여관과 병영이 표시되어 있었다. 강은 도시 북쪽을 지나갔고, 남쪽에는 작은 포도밭과 곡창 지대가 있었다.

하지만 아카식이 손가락으로 지도 한가운데를 톡 두드리자, 지도는 더 이상 평면이 아니게 되었다.

무너진 성벽이 솟았다.

검게 탄 시장 지붕이 올라왔다.

오염된 우물에는 검은 잉크가 번졌다.

교역로는 끊어진 선처럼 흔들렸고, 성문 앞에는 피난민을 나타내는 작은 목패들이 놓였다. 병영에는 병사 목패들이 있었으나, 그중 절반은 부상 판정을 뜻하는 붉은 실을 감고 있었다.

아카식은 느긋하게 말했다.

“모의 도시명은 일단 ‘아르카다’로 할게. 실제 도시랑 헷갈리지 않게.”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이름 괜찮네.”

“기록자도 가끔 작명해.”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상황을 고지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대강당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아르카다는 몽골식 공세를 받은 변경 도시입니다. 성벽 동남부 일부 붕괴. 식량 창고 둘 중 하나 소실. 우물 세 곳 중 하나 오염. 북쪽 교역로 단절. 피난민 유입 계속. 병영은 부상자 수용 중. 사망자 명단 미완성. 도시 내부에는 로마계, 아르메니아계, 튀르크계, 불가리아계, 상인 공동체가 혼재합니다.”

푸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네.”

슈샤니크는 이미 지도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단순한 문제라면 이미 더 크게 망가졌을 테니까요.”

그 말투는 조용했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깃펜처럼 건조했고, 잉크가 마르기 전에 결론을 내리는 관료의 것이었다.

요안나는 그 옆에서 도시 모형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은 손을 놓는 쪽이 아니라, 손을 뻗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팔짱을 낀 채 수레 모형과 병영을 번갈아 보았다.

“30일이라고 했습니까?”

그레이가 답했다.

“예. 30일 안에 도시 안정화 방안을 제출해야 합니다.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첫째. 식량 폭동을 막을 것. 둘째. 방어 가능 상태를 복구할 것. 셋째. 주민들이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게 할 것.”

라플리가 관객석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세 번째가 제일 어렵겠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학술적이지요.”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앉았다.

“이번 막의 참가자는 요안나 폐하, 슈샤니크 경, 그레이, 알렉산드리나 아센.”

그녀는 손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주제는 이것.”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도시를 안정시키는 것과, 사람들이 다시 함께 살게 하는 것은 같은 일인가?”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같아야 합니다.”

슈샤니크는 바로 받았다.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들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지도 가장자리의 보급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같아지려면, 먼저 30일을 버텨야 합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좋아. 시작부터 아주 좋네.”

아카식은 기록대에서 첫 줄을 적었다.

《2막.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시작부터 의견 불일치. 매우 정상.》

그레이가 아카식을 보았다.

“‘매우 정상’은 공식 기록 표현이 아닙니다.”

“그럼 비공식 주석.”

“비공식 주석도 관리 대상입니다.”

“좋아. 관리되는 비공식 주석.”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첫 번째 질문! 30일 안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말했다.

“식량입니다.”

그 대답은 빠르고 단단했다.

“성벽이 무너져도 사람은 하루 정도는 공포로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가 비면 군기도 시민도 무너집니다. 곡창 하나가 소실됐고 교역로가 끊겼다면, 먼저 남은 식량을 계산하고 배급선을 세워야 합니다.”

그녀는 지도 위 수레 모형들을 정렬했다.

“병영과 피난민 구역을 따로 두면 안 됩니다. 병사들이 먹고 시민들이 굶으면 폭동이 나고, 시민들이 먹고 병사들이 굶으면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배급표를 하나로 짜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하나의 배급표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인구조사할 시간에 식량을 나눠야 합니다.”

“식량을 나누기 위해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구역을 나누었다.

“누가 원주민인지, 누가 피난민인지, 누가 상인인지, 누가 부상자인지, 누가 노동 가능자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람에게 배급이 반복되면 장부가 무너지고, 장부가 무너지면 내일의 배급은 정치가 아니라 폭력으로 바뀝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 장부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슈샤니크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다.

“이름을 만들게 해야 합니다.”

“이름을 증명할 가족이 모두 죽었다면요?”

“증인을 찾습니다.”

“증인도 없다면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가 그 틈에 말했다.

“임시 등록표를 발행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에게 갔다.

그레이는 장부를 넘겼다.

“사망자 명단과 생존자 명단이 동시에 미완성입니다. 이름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을 배제하면 치안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임시 등록표를 발행하고, 식량 배급은 등록표 기준으로 진행하되, 사후 확인 항목을 별도로 둡니다.”

슈샤니크는 그레이를 보았다.

“위조가 생깁니다.”

“생깁니다.”

그레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등록표에 수령 장소, 동행인, 부상 여부, 거주 구역을 함께 적고, 배급 때마다 누적 확인합니다. 완전한 신원 확인을 기다리면 첫 주에 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카식이 작게 말했다.

“오. 장부가 생존 속도를 따라가는 방식.”

그레이는 계속했다.

“이름이 없어서 식량을 못 받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다만 이름이 없다는 사실도 기록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시민권의 첫 문턱이 될 수 있겠군요.”

슈샤니크가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지도 위 피난민 목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도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첫날 필요한 것은 빵입니다. 그러나 첫날 밤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공동체의 보호 아래 있는지 아는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단단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안정시키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원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슈샤니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둘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함께 살게 한다는 이상은 좋습니다. 하지만 선언은 곡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슈샤니크의 말을 피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선언은 곡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곡물을 나누는 손이 서로를 물어뜯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요안나는 계속했다.

“배급표는 필요합니다. 병력도 필요합니다. 인구조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첫날 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의 도시에서 잠드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누구의 도시입니까?”

요안나는 잠시 지도를 보았다.

“로마의 도시.”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요안나는 그것을 알고도 말했다.

“혈통 때문이 아닙니다. 언어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이 도시에서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내일 같은 법과 같은 배급과 같은 보호 아래 서기로 약속한다면, 그 도시는 로마가 될 수 있습니다.”

슈샤니크는 조용히 말했다.

“그 약속을 문서화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경이 필요합니다.”

짧은 침묵.

슈샤니크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역할이 정확히 지적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공동 보호 선언문을 작성합니다.”

그녀는 지도 옆에 새 양피지를 펼쳤다.

“임시 시민 보호령. 30일간 신앙, 출신, 언어와 관계없이 등록된 모든 주민과 피난민은 도시의 임시 보호 대상이 됩니다. 배급과 의료, 치안의 우선순위는 출신이 아니라 필요와 역할에 따릅니다. 이후 정식 시민권 심사로 전환합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심사’라는 말은 불안을 줍니다.”

“그럼 ‘등록 절차’.”

“좋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곡창 모형을 옮겼다.

“그 선언문이 먹히려면, 첫 배급은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병사부터 먹이면 안 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병사를 굶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첫 배급은 병사와 시민 대표가 같은 줄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공동 배급식.”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그거 연출 가능해?”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아니, 정치적으로 중요하잖아. 사람들이 봐야 믿지.”

요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첫 배급은 단순 분배가 아니라 선언의 연장입니다.”

슈샤니크도 이번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군중 통제가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수레 모형 둘을 광장 양쪽에 놓았다.

“배급대를 네 곳으로 나눕니다. 병사 둘, 성직자 하나, 장부 담당 하나, 지역 대표 하나씩 붙입니다. 줄은 신분별이 아니라 구역별로 나눕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부상자와 노약자는 별도 이동 배급이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것조를 편성합니다.”

요안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첫 배급 전에 선언을 읽겠습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폐하께서 직접?”

“예.”

“위험합니다.”

“필요합니다.”

슈샤니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위험 요소가 계산되고 있었다.

암살.
폭동.
군중 압박.
반대파의 선동.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의 분노.
종파 갈등.

그 모든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요안나도 보았다.

굶주린 사람들이 첫날 밤 무엇을 듣는지.
그들이 자신을 짐으로 보는 국가와, 자신을 시민으로 부르려는 국가 중 어느 쪽에 마음을 줄지.

슈샤니크는 결국 말했다.

“연단 주변을 낮게 구성합니다. 폐하께서 군중보다 너무 높이 서면 거리감이 생깁니다. 너무 낮으면 안전 문제가 있습니다. 세 계단 정도가 적절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오, 무대 높이!”

슈샤니크가 담담히 말했다.

“행정적 안전 조치입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무대도 행정이구나.”

“좋은 무대라면 그렇겠지요.”

그 말에 푸리나는 손뼉을 칠 뻔하다가, 그레이가 보는 것을 보고 참았다.

그레이는 우물 세 곳을 표시했다.

“다음은 우물입니다. 하나가 오염되었습니다. 식량보다 빠르게 죽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 일부를 우물 경비로 돌립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우물 관리는 지역 대표와 제국 서기가 공동으로 합니다. 오염 원인을 조사해야 합니다. 자연 오염인지, 시체 유입인지, 고의 오염인지에 따라 대응이 다릅니다.”

그레이는 붉은 표식을 하나 놓았다.

“오염 원인이 사망자 미수습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순간 공기가 낮아졌다.

요안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레이는 감정을 덧칠하지 않았다.

“사망자 수습반이 필요합니다. 배급반과 분리해야 합니다. 이름 확인, 사망 원인, 발견 장소, 유류품 기록. 임시 매장 장소. 이후 종교별 장례 절차 연결.”

알렉산드리나는 말했다.

“그 인력을 어디서 빼옵니까?”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노동 가능자 중 가족을 잃은 사람을 강제로 배정하면 안 됩니다. 붕괴됩니다. 자원자 중심으로 하되, 성직자와 장부 담당을 붙입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제가 선언에서 말하겠습니다. 죽은 이를 수습하는 일은 도시의 수치가 아니라, 도시가 아직 사람을 기억한다는 증거라고.”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잠시 생각했다.

“그 문구는 넣겠습니다.”

그레이가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수습반에게 배급 우선권을 줘야 합니다. 감염 위험과 정신적 부담이 큽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레이튼이 관객석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흥미롭군요. 식량에서 시작한 논의가 시민권, 장례, 무대 높이까지 왔습니다.”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좋은 극이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문제입니다. 좋은 문제는 늘 여러 문을 열지요.”

아카식은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펜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도시 안정화: 식량, 등록, 선언, 우물, 사망자 수습. 논의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연결됨. 좋은 징조.》

그레이는 아카식의 기록을 훔쳐보다가 말했다.

“‘좋은 징조’는 주관적 표현입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그래서 내 기록에만 적었어.”

토론은 계속되었다.

슈샤니크는 30일 계획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 3일.

생존.

식량 재고 조사

임시 등록표 발행

우물 봉쇄와 정화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

성문 통제

공동 보호 선언


다음 10일.

질서.

구역별 배급표

임시 치안대 편성

장터 제한 개방

교역로 정찰

시민 등록 절차

종교별 장례 보장

노동 가능자 재배치


남은 17일.

회복.

곡창 복구

우물 재개방

세금 유예와 임시 공공노동

외부 상단 유치

성벽 보수

학교와 예배소 재개

정식 시민권 및 거주권 정리


알렉산드리나는 그 옆에 보급 수치를 붙였다.

“3일 안에 식량 재고가 확인되지 않으면 계획이 무너집니다. 피난민 유입이 계속된다면 하루 단위로 배급량을 조정해야 합니다. 병력은 치안과 성벽 보수를 동시에 맡을 수 없습니다. 교대 편성이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죽음과 부상자 항목을 붙였다.

“사망자 명단이 완성되지 않으면 상속, 가족 재결합, 배급 중복, 장례가 모두 꼬입니다. 부상자는 경상·중상만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움직이면 안 되는 사람,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나눠야 합니다.”

요안나는 마지막으로 선언과 공동체 항목을 붙였다.

“도시 사람들은 자신이 관리받는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피난민은 손님이 아니라, 임시 시민으로 불려야 합니다. ‘임시’는 불안하지만, ‘시민’은 손을 잡게 합니다.”

슈샤니크가 요안나를 보았다.

“임시 시민이라는 표현은 법적으로 모호합니다.”

요안나가 답했다.

“그러면 경이 법적으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세요.”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어려운 일을 쉽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건 검이 부딪치는 것과 달랐다.

하지만 분명한 긴장이 있었다.

요안나는 손을 내밀고, 슈샤니크는 그 손이 무너지지 않게 문서를 만든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문서가 첫날 저녁을 넘기도록 수레를 움직인다.

그레이는 그 수레에서 떨어지는 이름이 없게 장부를 붙든다.

푸리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도 전투였다.

다만 적이 사람이 아닐 뿐이었다.

굶주림.
불신.
오염.
이름 없음.
늦은 배급.
높은 연단.
잘못 놓인 수레.
사망자 없는 장부.

그 모든 것과 싸우는 전투였다.

모래시계가 떨어졌다.

그레이가 판정표를 정리했다.

“제출안을 요약합니다.”

그녀는 읽었다.

“1일차. 공동 보호 선언과 임시 등록표 발행. 공동 배급식 실시. 우물 하나 봉쇄.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반 편성.”

“3일차까지. 식량 재고 완료. 구역별 배급표 확정. 임시 치안대 편성. 성벽 응급 보수 시작.”

“10일차까지. 장터 제한 개방. 교역로 정찰. 종교별 장례 보장. 노동 가능자 재배치.”

“30일차까지. 곡창 복구. 우물 정화. 시민 등록 절차 전환. 학교와 예배소 재개. 세금 유예 및 공공노동 실시.”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핵심 원칙. 식량은 배급표로 나누되, 도시는 선언으로 묶는다. 이름이 없는 자에게 임시 이름을 주고, 죽은 자는 명단에 올리며, 살아남은 자는 같은 광장에서 같은 빵을 받는다.”

푸리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멋있다.”

그레이가 말했다.

“행정안입니다.”

“멋있는 행정안.”

“그 표현은 가능합니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정!”

아카식과 레이튼, 그리고 여관좌가 각각 기록과 질문과 안정성의 관점에서 판정 보조를 맡았다.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 관점에서 훌륭해. 특히 임시 등록표와 사망자 수습반을 동시에 둔 점. 산 자와 죽은 자 기록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했어.”

레이튼은 말했다.

“질문 관점에서도 좋습니다. 이 안은 ‘도시를 안정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도시의 사람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했습니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지요.”

여관좌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첫날 밤을 넘길 방이 생겼군요. 완전한 집은 아니어도, 비를 피할 처마가 있다면 사람은 다음 아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판정표를 보았다.

“그러면?”

그레이가 답했다.

“공동 해답 채택입니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 2막은 공동 해답!”

알렉산드리나는 조금 어색한 듯 팔짱을 풀었다.

“승패가 없는 겁니까?”

레이튼이 말했다.

“오늘의 과제는 도시를 살리는 것이니까요. 도시가 살아남는다면, 답안도 살아남은 겁니다.”

요안나는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보급 없이는 선언이 첫날을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멈칫했다.

“폐하의 선언 없이는 제 보급이 폭동을 막지 못했을 겁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정리하며 말했다.

“두 분 모두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항목을 같은 문서에 넣겠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름표도 붙이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네 사람을 보았다.

평화의 황제.
죽은 국가들의 기록을 품은 재상.
부상자와 이름을 놓지 않는 행정관.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지만 보급선을 놓지 않는 차르.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들은 하나의 도시를 30일 더 살게 만들었다.

아카식은 마지막 줄을 적었다.

《2막 결론. 배급표는 배를 채우고, 선언은 손을 묶는다. 장부는 이름을 남기고, 보급은 아침까지 시간을 산다. 도시란 그 네 가지가 동시에 실패하지 않을 때, 간신히 다시 시작된다.》

그레이가 그 문장을 보고 잠깐 멈췄다.

“이번 기록은 공식 기록에 일부 반영해도 되겠습니다.”

아카식이 눈을 크게 떴다.

“오, 드디어?”

“일부입니다.”

“일부라도 좋아.”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이번 박수는 승자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었다.

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는 것에 보내는 박수였다.

원탁 위의 도시, 아르카다는 아직 완전히 살아나지 않았다.

성벽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고, 우물 하나는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고, 사망자 명단은 아직 비어 있는 칸이 많았다.

하지만 광장에는 배급대가 생겼다.

연단은 세 계단 높이로 세워졌다.

피난민 목패에는 임시 등록표가 붙었다.

우물에는 봉쇄 표식이 세워졌고, 사망자 수습반 옆에는 장부와 등불이 놓였다.

그리고 지도 한가운데, 요안나가 읽을 선언문 첫 줄이 적혔다.

《오늘 이 도시의 빵을 받는 자는, 오늘 이 도시의 보호 아래 있다.》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보며 말했다.

“법률 문구로는 다듬어야 합니다.”

요안나가 답했다.

“다듬어주세요. 뜻은 남겨두고.”

“그것이 제 일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수레를 다시 광장 옆으로 옮겼다.

“뜻이 남으려면 빵도 남아야 합니다.”

그레이가 이름표를 정렬했다.

“그리고 누가 받았는지도 남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은 도시네.”

슈샤니크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직 좋은 도시는 아닙니다.”

요안나가 부드럽게 받았다.

“하지만 좋은 도시가 되려는 첫날은 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을 넘기면 둘째 날이 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날 준비 필요.”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래. 학술제 2막 결론은 그거다.”

그녀는 원탁을 향해 손을 펼쳤다.

“좋은 도시는 첫날을 넘기고, 둘째 날 준비를 한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짧지만 정확하군요.”

아카식은 웃으며 적었다.

《푸리나식 요약. 의외로 정확함.》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의외로’는 삭제하십시오.”

“싫어.”

“삭제하십시오.”

푸리나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 아래에서, 원탁 위의 폐허 도시는 아주 조금 덜 어두워졌다.

아직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 도시를 단순한 폐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곳에는 배급표가 있었고, 보호 선언이 있었고, 보급 수레가 있었고, 이름을 적을 장부가 있었다.

그리고 같은 빵을 받을 사람들이 있었다.
좋아. 그럼 학식편은 새 연작으로 시작하자.

《등불 아래의 학술제》

1막 — 질문의 개회식

“이번에는 칼을 내려놓자!”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선언하자, 강당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아주 잠깐 안도했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라플리가 바로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팡이는?”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즉답했다.

“지팡이도 내려놓으십시오.”

라플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탑주한테 지팡이를 내려놓으라는 건 활잡이한테 활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랑 비슷한데?”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활도 오늘은 내려놓았습니다.”

라플리가 카를로타를 보았다.

“그쪽은 진짜 내려놓았네.”

“예. 오늘의 도구는 손이 아니라 머리입니다.”

“머리로도 꽤 많이 부술 수 있는데.”

그레이의 펜끝이 라플리를 향했다.

“부수지 마십시오.”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

“예방입니다.”

푸리나는 양손을 들어 분위기를 눌렀다.

“좋아, 좋아. 지팡이, 활, 검, 창, 번개, 은의 군단, 성벽을 뚫는 화살, 금목서 거대검, 전부 오늘은 쉬게 해.”

죠니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창까지 내려놓으면 좀 허전하긴 한데.”

아스테르다스가 그 옆에서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죠니. 오늘은 궤도가 다른 날이니까. 별도 매번 떨어지기만 하면 피곤하잖아.”

죠니는 그를 흘끗 보았다.

“너는 책상에 앉아도 별 얘기네.”

“내가 별이니까.”

“그 정도로 당당하면 반박하기 어렵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분위기가 아주 학술적이야.”

그레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학술적이지 않습니다. 아직은 무장 해제 절차입니다.”

“그레이, 오늘은 좀 더 낭만적으로 말해도 돼.”

“무장 해제 절차는 낭만의 전제 조건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 말 좋다. 적어둬.”

“이미 적었습니다.”

“역시!”

이번 학술제는 전날까지의 경기장과 달랐다.

킬리키아의 [여관:극장]은 오늘 전장이 아니라 대강당이 되었다.

천장은 높았다.
벽에는 각국의 깃발이 걸렸다.
그러나 깃발들은 서로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모두 같은 높이에 걸려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그 위에는 검 대신 펜이 놓였고, 방패 대신 서류철이 놓였고, 화살 대신 지도와 자, 작은 모래시계와 찻잔이 놓였다.

한쪽에는 아카식이 마련한 기록대가 있었다.
검은 표지의 장부와 빈 양피지, 여러 색의 잉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여관좌의 작은 찻상이 있었다.
토론이 길어지면 누구든 차를 가져갈 수 있도록, 찻잔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섰다.

오늘의 그녀는 전날처럼 군세를 부르는 극장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극장주였다.

극장이 전장이 되지 않았을 뿐, 사람의 소망이 서로 부딪치는 곳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손을 펼쳤다.

“여러분!”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참석자 명단상 왕, 황제, 군주, 가신, 성좌 단말, 성좌 대리인, 사제, 기술자, 마탑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한 박자 멈췄다.

“여러분과 폐하들과 전하들과 경들과 탑주님들과 성좌 관계자분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좋은 수정입니다.”

라플리가 말했다.

“길어.”

아카식은 이미 적고 있었다.

“개회 첫 문장부터 호칭 문제로 흔들림. 아주 좋아. 학술제는 역시 이렇게 시작해야지.”

그레이가 아카식을 보았다.

“그 부분은 기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록할 만한데?”

“없습니다.”

“기록자의 판단은 기록자가 해.”

“회의록 담당자는 접니다.”

“그럼 둘 다 적자.”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소리가 강당을 정리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은 무력제가 아니야. 우리는 이미 봤어.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같은 방향으로 칼끝을 들 수 있다는 걸.”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건 칼끝만으로 되지 않아. 무너진 도시를 세우고, 다친 사람을 돌보고, 죽은 이름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가 같은 곳에서 넘어지지 않게 가르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같은 책상에 앉을 수 있게 해야 해.”

푸리나는 원탁 위의 펜 하나를 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펜끝이야.”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펜끝도 칼끝만큼 날카로울 수 있지요.”

그레이가 말했다.

“그래서 토론 규칙이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펜을 빙글 돌리다가 그레이를 보았다.

“토론에도 안전수칙이 필요해?”

“예.”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누가 말로 사람 죽이기라도 하나?”

레이튼은 차분하게 답했다.

“가장 위험한 무기는 대개 확신입니다.”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민다우가스는 말없이 레이튼을 보았다.
미하일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요안나는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가볍게 만졌다.
슈샤니크는 이미 그 말을 장부에 어떻게 적을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좋아. 그럼 레이튼 경. 오늘의 첫 강의는 질문의 예의에 대해 부탁해.”

레이튼은 모자를 벗어 원탁 위에 놓았다.

“강의라기보다, 작은 제안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원탁을 둘러보았다.

“오늘 우리는 서로를 논파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논파는 때로 유용하지만, 논파만을 목표로 하면 질문은 검이 됩니다. 검이 되면 찌르는 데에는 능해지지만, 비추는 데에는 서툴러지지요.”

라플리가 팔짱을 끼었다.

“질문도 비춘다고?”

“좋은 질문은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질문은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한 갈고리일 수도 있지만, 함께 어두운 방을 밝히는 촛불일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좋은데? 아주 학술제 같아.”

아카식이 옆에서 적었다.

“질문은 갈고리이거나 촛불. 음, 시적이네.”

레이튼은 말을 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규칙은 세 가지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레이가 바로 펜을 들었다.

“첫째. 상대의 답을 빼앗지 말 것.”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모른다는 말을 패배로 취급하지 말 것.”

푸리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중요해.”

레이튼은 그녀를 보고 살짝 웃었다.

“셋째. 결론을 너무 빨리 닫지 말 것.”

그 말이 떨어지자, 강당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들이 들렸다.

왕관을 쓴 자들에게, 결론을 늦추는 일은 어렵다.

통치자는 결정해야 한다.

군주는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

재상은 장부를 닫아야 하고, 장군은 명령을 내려야 하고, 성직자는 장례를 끝내야 하고, 장인은 물건을 완성해야 한다.

그런데도 오늘의 첫 규칙은 결론을 늦추라는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규칙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그럼 오늘 이 학술제의 이름을 정해야겠네.”

아카식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정했어?”

“위대한 제목은 즉흥에서 태어나는 법이야.”

“방금 생각 안 했다는 뜻이지?”

“위대한 즉흥!”

그레이가 말했다.

“행사명은 사전에 확정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럼 지금 확정하면 돼.”

푸리나는 원탁을 바라보았다.

검이 내려놓인 자리.
장부가 펼쳐진 자리.
찻잔이 식지 않도록 기다리는 자리.
서로 다른 왕관이 같은 높이에 앉은 자리.

그녀는 선언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여관좌의 등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마치 제목을 들은 것처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때?”

그레이는 적었다.

“행사명. 《등불 아래의 학술제》.”

푸리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평가는?”

“허용 가능한 제목입니다.”

“극찬이네.”

“아닙니다.”

“그레이식 극찬이야.”

아카식은 웃으며 제목을 따로 적었다.

“좋아. 기록명은 이걸로 할게.”

레이튼은 모자를 다시 썼다.

“그럼 첫 질문도 정해졌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첫 질문?”

레이튼은 원탁 위에 놓인 빈 양피지를 가리켰다.

“우리는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강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단순한 질문처럼 들렸지만, 아니었다.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왕관을 쓰고, 다른 상처를 가진 이들이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싸우지 않기 위해서?

동맹을 위해서?

몽골을 막기 위해서?

그 답들은 모두 맞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이번에는 바로 연극적인 대사를 던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원탁을 보았다.

무력제에서 함께 싸웠던 자들.

그러나 싸우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슈샤니크가 어떤 순서로 도시를 다시 세우는지.
요안나가 시민이라는 말을 어디까지 믿는지.
벨라가 불탄 왕국을 어떻게 다시 돌로 세우는지.
민다우가스가 어떤 것을 끝까지 계산하고, 어떤 것을 버리지 않는지.
게오르기아가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지.
레플리카가 고통을 어디까지 덜어주려 하는지.
소피아가 부서진 것에서 어떤 쓸모를 다시 보는지.

칼끝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펜끝은 또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서로의 칼끝을 알았으니까.”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이제 서로의 답을 알아야 해.”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전장에서 누가 먼저 서는지는 봤어. 이제 무너진 도시 앞에서 누가 무엇을 먼저 적는지 봐야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개회 답변입니다.”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할 가치 있음.”

그레이는 이미 적었다.

푸리나는 조금 으쓱했다.

“좋아. 그럼 학술제 진행 순서 발표!”

그레이가 장부를 넘겼다.

푸리나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첫째, 무너진 도시를 30일 안에 안정화하는 문제.”

요안나, 슈샤니크, 그레이, 알렉산드리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요안나가 조용히 눈을 들었다.

슈샤니크는 이미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리나는 행군 거리와 수레 수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둘째, 별과 기록의 토론.”

아스테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알토는 창밖 하늘을 보았다.

레이튼은 모자챙을 가볍게 만졌다.

아카식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빠져?”

푸리나는 웃었다.

“너는 기록자.”

“그것도 좋네. 가끔은 앉아서 남의 별을 적는 것도 나쁘지 않지.”

“셋째, 공방 학술전.”

라이자, 라플리, 카를로타, 소피아가 서로를 보았다.

라플리가 먼저 말했다.

“폭발은?”

그레이가 즉답했다.

“금지입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폭발도요?”

“금지입니다.”

라플리가 소피아를 보았다.

“너, 생각보다 말 통할 것 같네.”

카를로타가 말했다.

“저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안전 기준은 적용하겠습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공방이 될 것 같아요.”

그레이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불안합니다.”

푸리나는 네 번째 손가락을 폈다.

“넷째, 죽음과 고통, 기억의 세미나.”

아레의 시선이 낮아졌다.
타마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레플리카는 팔짱을 끼고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여관좌는 찻잔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그레이는 잠시 펜을 멈췄다가, 다시 쥐었다.

푸리나는 이 막의 제목을 너무 크게 외치지 않았다.

“여기서는 박수를 줄일 거야.”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도 자리 있어야 하니까.”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부정이 아니었다.

푸리나는 다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섯째, 왕관과 죄의 원탁.”

민다우가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라 4세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침묵은 성벽처럼 낮고 무거웠다.

미하일라와 요안나는 서로를 보았다.

두 황제 사이에는 예법이 있었다.

그리고 예법보다 더 오래 남은 상처도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갑주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슈샤니크는 이미 이 주제가 불편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동시에 이해한 얼굴이었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이미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통치자는 죄를 어디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말은 누구의 침묵 위에서 성립하는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여섯째, 배움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강당이 아니라, 강당 너머의 아이들에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라이자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아카식은 기록할 준비를 했다. 레이튼은 질문을, 푸리나는 무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

푸리나는 양손을 펼쳤다.

“하나의 도시, 여러 답.”

원탁 위에 빈 도시 지도가 펼쳐졌다.

폐허가 된 다민족 변경 도시.

성벽은 무너져 있고, 우물은 오염되어 있고, 교역로는 끊어져 있고, 주민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사망자 명단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학교를 잃었고, 병사들은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 모른다.

푸리나는 그 지도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 도시를 다시 살릴 거야.”

그레이가 바로 정정했다.

“모의 과제입니다.”

“그렇지. 모의 과제.”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모의라고 해서 대충 하지 않을 거지?”

그 말에는 모두가 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무너진 도시라는 말을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카식이 기록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개회 기록을 남길게.”

그는 펜을 들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첫날. 칼을 내려놓고, 펜과 질문을 들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정확합니다.”

아카식은 미소 지었다.

“그레이한테 정확하다는 말 들으니까 기분 좋은데?”

“기록이 정확할 때만입니다.”

“그럼 자주 들어야겠네.”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서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무력제 때의 개막 박수와는 달랐다.

이번 박수는 사람을 앞으로 뛰게 하기보다, 앉아 있던 사람들의 등을 곧게 펴게 했다.

“그럼 시작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칼끝을 내려놓고, 책장을 넘기며.”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첫 질문은 이미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요안나가 원탁 위의 빈 도시 지도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폈다.

알렉산드리나는 보급선을 재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이름을 적을 빈 칸을 만들었다.

아카식은 제목을 남겼다.

여관좌는 차를 따랐다.

그리고 푸리나는 보았다.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이번에는 같은 등불 아래 칼이 아니라 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녀는 생각했다.

좋은 무대다.

아직 아무 답도 나오지 않았기에.

아직 질문이 살아 있었기에.
《등불 아래의 학술제》

2막 —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원탁 위에 펼쳐진 것은 도시 지도였다.

처음에는 그냥 지도처럼 보였다.

성벽이 있고, 동문과 서문이 있고, 광장과 우물과 시장과 성당과 여관과 병영이 표시되어 있었다. 강은 도시 북쪽을 지나갔고, 남쪽에는 작은 포도밭과 곡창 지대가 있었다.

하지만 아카식이 손가락으로 지도 한가운데를 톡 두드리자, 지도는 더 이상 평면이 아니게 되었다.

무너진 성벽이 솟았다.

검게 탄 시장 지붕이 올라왔다.

오염된 우물에는 검은 잉크가 번졌다.

교역로는 끊어진 선처럼 흔들렸고, 성문 앞에는 피난민을 나타내는 작은 목패들이 놓였다. 병영에는 병사 목패들이 있었으나, 그중 절반은 부상 판정을 뜻하는 붉은 실을 감고 있었다.

아카식은 느긋하게 말했다.

“모의 도시명은 일단 ‘아르카다’로 할게. 실제 도시랑 헷갈리지 않게.”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이름 괜찮네.”

“기록자도 가끔 작명해.”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상황을 고지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대강당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아르카다는 몽골식 공세를 받은 변경 도시입니다. 성벽 동남부 일부 붕괴. 식량 창고 둘 중 하나 소실. 우물 세 곳 중 하나 오염. 북쪽 교역로 단절. 피난민 유입 계속. 병영은 부상자 수용 중. 사망자 명단 미완성. 도시 내부에는 로마계, 아르메니아계, 튀르크계, 불가리아계, 상인 공동체가 혼재합니다.”

푸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네.”

슈샤니크는 이미 지도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단순한 문제라면 이미 더 크게 망가졌을 테니까요.”

그 말투는 조용했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깃펜처럼 건조했고, 잉크가 마르기 전에 결론을 내리는 관료의 것이었다.

요안나는 그 옆에서 도시 모형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은 손을 놓는 쪽이 아니라, 손을 뻗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팔짱을 낀 채 수레 모형과 병영을 번갈아 보았다.

“30일이라고 했습니까?”

그레이가 답했다.

“예. 30일 안에 도시 안정화 방안을 제출해야 합니다.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첫째. 식량 폭동을 막을 것. 둘째. 방어 가능 상태를 복구할 것. 셋째. 주민들이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게 할 것.”

라플리가 관객석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세 번째가 제일 어렵겠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학술적이지요.”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앉았다.

“이번 막의 참가자는 요안나 폐하, 슈샤니크 경, 그레이, 알렉산드리나 아센.”

그녀는 손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주제는 이것.”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도시를 안정시키는 것과, 사람들이 다시 함께 살게 하는 것은 같은 일인가?”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같아야 합니다.”

슈샤니크는 바로 받았다.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들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지도 가장자리의 보급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같아지려면, 먼저 30일을 버텨야 합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좋아. 시작부터 아주 좋네.”

아카식은 기록대에서 첫 줄을 적었다.

《2막.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시작부터 의견 불일치. 매우 정상.》

그레이가 아카식을 보았다.

“‘매우 정상’은 공식 기록 표현이 아닙니다.”

“그럼 비공식 주석.”

“비공식 주석도 관리 대상입니다.”

“좋아. 관리되는 비공식 주석.”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첫 번째 질문! 30일 안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말했다.

“식량입니다.”

그 대답은 빠르고 단단했다.

“성벽이 무너져도 사람은 하루 정도는 공포로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가 비면 군기도 시민도 무너집니다. 곡창 하나가 소실됐고 교역로가 끊겼다면, 먼저 남은 식량을 계산하고 배급선을 세워야 합니다.”

그녀는 지도 위 수레 모형들을 정렬했다.

“병영과 피난민 구역을 따로 두면 안 됩니다. 병사들이 먹고 시민들이 굶으면 폭동이 나고, 시민들이 먹고 병사들이 굶으면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배급표를 하나로 짜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하나의 배급표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인구조사할 시간에 식량을 나눠야 합니다.”

“식량을 나누기 위해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구역을 나누었다.

“누가 원주민인지, 누가 피난민인지, 누가 상인인지, 누가 부상자인지, 누가 노동 가능자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람에게 배급이 반복되면 장부가 무너지고, 장부가 무너지면 내일의 배급은 정치가 아니라 폭력으로 바뀝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 장부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슈샤니크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다.

“이름을 만들게 해야 합니다.”

“이름을 증명할 가족이 모두 죽었다면요?”

“증인을 찾습니다.”

“증인도 없다면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가 그 틈에 말했다.

“임시 등록표를 발행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에게 갔다.

그레이는 장부를 넘겼다.

“사망자 명단과 생존자 명단이 동시에 미완성입니다. 이름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을 배제하면 치안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임시 등록표를 발행하고, 식량 배급은 등록표 기준으로 진행하되, 사후 확인 항목을 별도로 둡니다.”

슈샤니크는 그레이를 보았다.

“위조가 생깁니다.”

“생깁니다.”

그레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등록표에 수령 장소, 동행인, 부상 여부, 거주 구역을 함께 적고, 배급 때마다 누적 확인합니다. 완전한 신원 확인을 기다리면 첫 주에 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카식이 작게 말했다.

“오. 장부가 생존 속도를 따라가는 방식.”

그레이는 계속했다.

“이름이 없어서 식량을 못 받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다만 이름이 없다는 사실도 기록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시민권의 첫 문턱이 될 수 있겠군요.”

슈샤니크가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지도 위 피난민 목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도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첫날 필요한 것은 빵입니다. 그러나 첫날 밤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공동체의 보호 아래 있는지 아는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단단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안정시키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원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슈샤니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둘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함께 살게 한다는 이상은 좋습니다. 하지만 선언은 곡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슈샤니크의 말을 피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선언은 곡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곡물을 나누는 손이 서로를 물어뜯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요안나는 계속했다.

“배급표는 필요합니다. 병력도 필요합니다. 인구조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첫날 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의 도시에서 잠드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누구의 도시입니까?”

요안나는 잠시 지도를 보았다.

“로마의 도시.”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요안나는 그것을 알고도 말했다.

“혈통 때문이 아닙니다. 언어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이 도시에서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내일 같은 법과 같은 배급과 같은 보호 아래 서기로 약속한다면, 그 도시는 로마가 될 수 있습니다.”

슈샤니크는 조용히 말했다.

“그 약속을 문서화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경이 필요합니다.”

짧은 침묵.

슈샤니크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역할이 정확히 지적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공동 보호 선언문을 작성합니다.”

그녀는 지도 옆에 새 양피지를 펼쳤다.

“임시 시민 보호령. 30일간 신앙, 출신, 언어와 관계없이 등록된 모든 주민과 피난민은 도시의 임시 보호 대상이 됩니다. 배급과 의료, 치안의 우선순위는 출신이 아니라 필요와 역할에 따릅니다. 이후 정식 시민권 심사로 전환합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심사’라는 말은 불안을 줍니다.”

“그럼 ‘등록 절차’.”

“좋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곡창 모형을 옮겼다.

“그 선언문이 먹히려면, 첫 배급은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병사부터 먹이면 안 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병사를 굶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첫 배급은 병사와 시민 대표가 같은 줄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공동 배급식.”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그거 연출 가능해?”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아니, 정치적으로 중요하잖아. 사람들이 봐야 믿지.”

요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첫 배급은 단순 분배가 아니라 선언의 연장입니다.”

슈샤니크도 이번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군중 통제가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수레 모형 둘을 광장 양쪽에 놓았다.

“배급대를 네 곳으로 나눕니다. 병사 둘, 성직자 하나, 장부 담당 하나, 지역 대표 하나씩 붙입니다. 줄은 신분별이 아니라 구역별로 나눕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부상자와 노약자는 별도 이동 배급이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것조를 편성합니다.”

요안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첫 배급 전에 선언을 읽겠습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폐하께서 직접?”

“예.”

“위험합니다.”

“필요합니다.”

슈샤니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위험 요소가 계산되고 있었다.

암살.
폭동.
군중 압박.
반대파의 선동.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의 분노.
종파 갈등.

그 모든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요안나도 보았다.

굶주린 사람들이 첫날 밤 무엇을 듣는지.
그들이 자신을 짐으로 보는 국가와, 자신을 시민으로 부르려는 국가 중 어느 쪽에 마음을 줄지.

슈샤니크는 결국 말했다.

“연단 주변을 낮게 구성합니다. 폐하께서 군중보다 너무 높이 서면 거리감이 생깁니다. 너무 낮으면 안전 문제가 있습니다. 세 계단 정도가 적절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오, 무대 높이!”

슈샤니크가 담담히 말했다.

“행정적 안전 조치입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무대도 행정이구나.”

“좋은 무대라면 그렇겠지요.”

그 말에 푸리나는 손뼉을 칠 뻔하다가, 그레이가 보는 것을 보고 참았다.

그레이는 우물 세 곳을 표시했다.

“다음은 우물입니다. 하나가 오염되었습니다. 식량보다 빠르게 죽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 일부를 우물 경비로 돌립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우물 관리는 지역 대표와 제국 서기가 공동으로 합니다. 오염 원인을 조사해야 합니다. 자연 오염인지, 시체 유입인지, 고의 오염인지에 따라 대응이 다릅니다.”

그레이는 붉은 표식을 하나 놓았다.

“오염 원인이 사망자 미수습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순간 공기가 낮아졌다.

요안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레이는 감정을 덧칠하지 않았다.

“사망자 수습반이 필요합니다. 배급반과 분리해야 합니다. 이름 확인, 사망 원인, 발견 장소, 유류품 기록. 임시 매장 장소. 이후 종교별 장례 절차 연결.”

알렉산드리나는 말했다.

“그 인력을 어디서 빼옵니까?”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노동 가능자 중 가족을 잃은 사람을 강제로 배정하면 안 됩니다. 붕괴됩니다. 자원자 중심으로 하되, 성직자와 장부 담당을 붙입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제가 선언에서 말하겠습니다. 죽은 이를 수습하는 일은 도시의 수치가 아니라, 도시가 아직 사람을 기억한다는 증거라고.”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잠시 생각했다.

“그 문구는 넣겠습니다.”

그레이가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수습반에게 배급 우선권을 줘야 합니다. 감염 위험과 정신적 부담이 큽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레이튼이 관객석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흥미롭군요. 식량에서 시작한 논의가 시민권, 장례, 무대 높이까지 왔습니다.”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좋은 극이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문제입니다. 좋은 문제는 늘 여러 문을 열지요.”

아카식은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펜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도시 안정화: 식량, 등록, 선언, 우물, 사망자 수습. 논의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연결됨. 좋은 징조.》

그레이는 아카식의 기록을 훔쳐보다가 말했다.

“‘좋은 징조’는 주관적 표현입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그래서 내 기록에만 적었어.”

토론은 계속되었다.

슈샤니크는 30일 계획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 3일.

생존.

식량 재고 조사

임시 등록표 발행

우물 봉쇄와 정화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

성문 통제

공동 보호 선언


다음 10일.

질서.

구역별 배급표

임시 치안대 편성

장터 제한 개방

교역로 정찰

시민 등록 절차

종교별 장례 보장

노동 가능자 재배치


남은 17일.

회복.

곡창 복구

우물 재개방

세금 유예와 임시 공공노동

외부 상단 유치

성벽 보수

학교와 예배소 재개

정식 시민권 및 거주권 정리


알렉산드리나는 그 옆에 보급 수치를 붙였다.

“3일 안에 식량 재고가 확인되지 않으면 계획이 무너집니다. 피난민 유입이 계속된다면 하루 단위로 배급량을 조정해야 합니다. 병력은 치안과 성벽 보수를 동시에 맡을 수 없습니다. 교대 편성이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죽음과 부상자 항목을 붙였다.

“사망자 명단이 완성되지 않으면 상속, 가족 재결합, 배급 중복, 장례가 모두 꼬입니다. 부상자는 경상·중상만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움직이면 안 되는 사람,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나눠야 합니다.”

요안나는 마지막으로 선언과 공동체 항목을 붙였다.

“도시 사람들은 자신이 관리받는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피난민은 손님이 아니라, 임시 시민으로 불려야 합니다. ‘임시’는 불안하지만, ‘시민’은 손을 잡게 합니다.”

슈샤니크가 요안나를 보았다.

“임시 시민이라는 표현은 법적으로 모호합니다.”

요안나가 답했다.

“그러면 경이 법적으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세요.”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어려운 일을 쉽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건 검이 부딪치는 것과 달랐다.

하지만 분명한 긴장이 있었다.

요안나는 손을 내밀고, 슈샤니크는 그 손이 무너지지 않게 문서를 만든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문서가 첫날 저녁을 넘기도록 수레를 움직인다.

그레이는 그 수레에서 떨어지는 이름이 없게 장부를 붙든다.

푸리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도 전투였다.

다만 적이 사람이 아닐 뿐이었다.

굶주림.
불신.
오염.
이름 없음.
늦은 배급.
높은 연단.
잘못 놓인 수레.
사망자 없는 장부.

그 모든 것과 싸우는 전투였다.

모래시계가 떨어졌다.

그레이가 판정표를 정리했다.

“제출안을 요약합니다.”

그녀는 읽었다.

“1일차. 공동 보호 선언과 임시 등록표 발행. 공동 배급식 실시. 우물 하나 봉쇄.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반 편성.”

“3일차까지. 식량 재고 완료. 구역별 배급표 확정. 임시 치안대 편성. 성벽 응급 보수 시작.”

“10일차까지. 장터 제한 개방. 교역로 정찰. 종교별 장례 보장. 노동 가능자 재배치.”

“30일차까지. 곡창 복구. 우물 정화. 시민 등록 절차 전환. 학교와 예배소 재개. 세금 유예 및 공공노동 실시.”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핵심 원칙. 식량은 배급표로 나누되, 도시는 선언으로 묶는다. 이름이 없는 자에게 임시 이름을 주고, 죽은 자는 명단에 올리며, 살아남은 자는 같은 광장에서 같은 빵을 받는다.”

푸리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멋있다.”

그레이가 말했다.

“행정안입니다.”

“멋있는 행정안.”

“그 표현은 가능합니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정!”

아카식과 레이튼, 그리고 여관좌가 각각 기록과 질문과 안정성의 관점에서 판정 보조를 맡았다.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 관점에서 훌륭해. 특히 임시 등록표와 사망자 수습반을 동시에 둔 점. 산 자와 죽은 자 기록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했어.”

레이튼은 말했다.

“질문 관점에서도 좋습니다. 이 안은 ‘도시를 안정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도시의 사람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했습니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지요.”

여관좌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첫날 밤을 넘길 방이 생겼군요. 완전한 집은 아니어도, 비를 피할 처마가 있다면 사람은 다음 아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판정표를 보았다.

“그러면?”

그레이가 답했다.

“공동 해답 채택입니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 2막은 공동 해답!”

알렉산드리나는 조금 어색한 듯 팔짱을 풀었다.

“승패가 없는 겁니까?”

레이튼이 말했다.

“오늘의 과제는 도시를 살리는 것이니까요. 도시가 살아남는다면, 답안도 살아남은 겁니다.”

요안나는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보급 없이는 선언이 첫날을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멈칫했다.

“폐하의 선언 없이는 제 보급이 폭동을 막지 못했을 겁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정리하며 말했다.

“두 분 모두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항목을 같은 문서에 넣겠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름표도 붙이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네 사람을 보았다.

평화의 황제.
죽은 국가들의 기록을 품은 재상.
부상자와 이름을 놓지 않는 행정관.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지만 보급선을 놓지 않는 차르.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들은 하나의 도시를 30일 더 살게 만들었다.

아카식은 마지막 줄을 적었다.

《2막 결론. 배급표는 배를 채우고, 선언은 손을 묶는다. 장부는 이름을 남기고, 보급은 아침까지 시간을 산다. 도시란 그 네 가지가 동시에 실패하지 않을 때, 간신히 다시 시작된다.》

그레이가 그 문장을 보고 잠깐 멈췄다.

“이번 기록은 공식 기록에 일부 반영해도 되겠습니다.”

아카식이 눈을 크게 떴다.

“오, 드디어?”

“일부입니다.”

“일부라도 좋아.”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이번 박수는 승자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었다.

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는 것에 보내는 박수였다.

원탁 위의 도시, 아르카다는 아직 완전히 살아나지 않았다.

성벽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고, 우물 하나는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고, 사망자 명단은 아직 비어 있는 칸이 많았다.

하지만 광장에는 배급대가 생겼다.

연단은 세 계단 높이로 세워졌다.

피난민 목패에는 임시 등록표가 붙었다.

우물에는 봉쇄 표식이 세워졌고, 사망자 수습반 옆에는 장부와 등불이 놓였다.

그리고 지도 한가운데, 요안나가 읽을 선언문 첫 줄이 적혔다.

《오늘 이 도시의 빵을 받는 자는, 오늘 이 도시의 보호 아래 있다.》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보며 말했다.

“법률 문구로는 다듬어야 합니다.”

요안나가 답했다.

“다듬어주세요. 뜻은 남겨두고.”

“그것이 제 일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수레를 다시 광장 옆으로 옮겼다.

“뜻이 남으려면 빵도 남아야 합니다.”

그레이가 이름표를 정렬했다.

“그리고 누가 받았는지도 남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은 도시네.”

슈샤니크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직 좋은 도시는 아닙니다.”

요안나가 부드럽게 받았다.

“하지만 좋은 도시가 되려는 첫날은 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을 넘기면 둘째 날이 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날 준비 필요.”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래. 학술제 2막 결론은 그거다.”

그녀는 원탁을 향해 손을 펼쳤다.

“좋은 도시는 첫날을 넘기고, 둘째 날 준비를 한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짧지만 정확하군요.”

아카식은 웃으며 적었다.

《푸리나식 요약. 의외로 정확함.》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의외로’는 삭제하십시오.”

“싫어.”

“삭제하십시오.”

푸리나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 아래에서, 원탁 위의 폐허 도시는 아주 조금 덜 어두워졌다.

아직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 도시를 단순한 폐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곳에는 배급표가 있었고, 보호 선언이 있었고, 보급 수레가 있었고, 이름을 적을 장부가 있었다.

그리고 같은 빵을 받을 사람들이 있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3막 — 별과 기록의 토론

3막의 원탁에는 지도가 없었다.

대신 천장이 열렸다.

아니, 정확히는 푸리나의 [여관:극장]이 강당의 천장을 밤하늘처럼 바꾸었다.

낮인데도 별이 보였다.
등불은 꺼지지 않았고, 별빛은 등불을 누르지 않았다.
낮과 밤, 기록과 예감, 길과 편지가 한 강당 안에 잠시 겹쳤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 막은 아주 분위기 있어.”

그레이는 장부를 보며 말했다.

“천장 개방은 실제 구조 변경이 아닙니다. 환영 및 여관 신술 기반 연출입니다.”

“그레이, 그런 설명을 들으면 별이 조금 슬퍼해.”

“별은 슬퍼하지 않습니다.”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슬퍼하는 것은 별을 보는 사람 쪽입니다.”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폴란드 대공 알토.

기록의 성좌 아카식의 대리자.
『허공록』의 대리자.
기록교단의 총수.

그는 화려하게 등장하지 않았다.

검은 기록책 하나, 정돈된 옷차림, 지나치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

그는 별을 보면서도 별에 취하지 않았고, 기록을 들고 있으면서도 기록을 과시하지 않았다.

알토의 곁에는 아카식이 있었다.

아카식은 이미 찻잔을 들고 있었다.

“와, 천장이 예쁘네. 알토, 이건 기록해.”

알토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답했다.

“그건 네가 하십시오.”

“치사하네.”

“기록자는 당신입니다.”

“대리자도 기록할 수 있잖아.”

“지금은 참가자입니다.”

아카식은 입술을 삐죽였다.

“공식적으로 회피했네.”

알토는 짧게 말했다.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좋아. 오늘 참가자는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 알토 대공, 레이튼 경. 아카식은 기록자.”

아카식이 손을 들었다.

“참관자 겸 기록자 겸 가끔 끼어드는 사람.”

그레이가 말했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가끔만.”

“가끔도 안 됩니다.”

“학술제에 너무 엄격해.”

“학술제라서 엄격합니다.”

레이튼은 모자를 벗어 원탁 옆에 놓았다.

“좋은 시작입니다. 기록자가 끼어들고 싶어 하는 토론은 대개 재미있지요.”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는 별빛 아래에서 웃고 있었다.

니케아의 로고스테스 톤 드로무.
북방의 보가트리 혈통을 잇는 외교관.
루스, 흑해, 초원, 상인, 로마의 도로와 편지와 소문을 잇는 사람.

그녀는 학자처럼 얌전히 앉아 있지 않았다.

찻잔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원탁 위에 놓인 세 개의 실을 만지작거렸다.

하나는 푸른 실.
하나는 검은 실.
하나는 흰 실.

레이튼이 그것을 보았다.

“세 갈래입니까?”

아스테리아는 미소 지었다.

“오늘 아침 별이 그렇게 보였거든요.”

“예지입니까?”

“예지라고 하면 사람들이 너무 기대하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외교관에게 미래란 약속된 길이 아니라, 아직 가격표가 붙지 않은 거래에 가깝습니다.”

아카식이 바로 적었다.

“아직 가격표가 붙지 않은 거래. 좋아.”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비공식 주석으로만 처리하십시오.”

아카식은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별 모양의 작은 등불을 올려놓았다.

“이번 막의 질문은 이것!”

그녀는 하늘을 가리켰다.

“별은 운명을 정하는가, 아니면 길 잃은 자에게 고개를 들 이유를 주는가?”

강당의 별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질문입니다.”

알토는 별빛 아래에서 짧게 말했다.

“위험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위험해?”

“운명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습니다.”

알토는 원탁 위의 빈 양피지를 보았다.

“운명은 선택을 지우는 말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선택이 지워지면 기록도 훼손됩니다.”

아카식은 장난기 없이 알토를 보았다.

알토는 계속했다.

“후회도 기록입니다. 실패도 기록입니다. 그것을 별이 정한 길이었다고만 말하면, 그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온 겁니까.”

아스테리아는 푸른 실을 손끝에 감았다.

“그 말은 맞아요. 하지만 길을 잃은 사람에게 하늘은 때로 지도보다 먼저 보입니다.”

그녀는 원탁 위에 작은 돌 세 개를 놓았다.

“예를 들어 북쪽 길은 빠릅니다. 대신 강이 얼지 않으면 죽죠. 남쪽 길은 안전하지만, 상단이 이미 약탈당했을 수 있습니다. 중앙 길은 정치적으로 불쾌한 협상을 지나야 합니다. 별은 이 셋을 모두 보이게 해요.”

레이튼이 물었다.

“그중 어느 길을 가라고 말합니까?”

아스테리아는 웃었다.

“아니요. 별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아요.”

그녀는 검은 실을 들어 올렸다.

“별은 말합니다. 어느 쪽도 공짜는 아니라고.”

아카식은 낮게 중얼거렸다.

“좋은 문장이지.”

알토가 아카식을 보았다.

“이미 적었습니까?”

“응.”

“그건 적어도 됩니다.”

“허가받았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보며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흥미롭게 보다가, 레이튼에게 눈짓했다.

레이튼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아스테리아 경. 별을 읽는 것은 선택을 넓히는 일입니까?”

아스테리아는 잠시 생각했다.

“반쯤은요.”

“나머지 반은?”

“선택의 값을 숨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상인은 거짓말을 합니다. 사절도 거짓말을 합니다. 왕도, 장군도, 피난민도,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문은 거짓말을 합니다. 다만, 거짓말도 방향은 있지요.”

아스테리아가 손가락으로 원탁을 톡 두드리자, 원탁 위에 작은 길들이 생겼다.

도로.
우편로.
상단의 길.
밀사의 길.
강가의 우회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문들의 길.

“제가 하는 일은 별을 보고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지를 읽고, 상인 말을 듣고, 적국 궁정의 침묵을 듣고, 항구의 물가를 보고, 거짓말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보는 일입니다.”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별은 하늘에만 있지 않군요.”

“그렇죠.”

아스테리아는 미소 지었다.

“별은 상인의 입에도 있고, 봉인된 편지에도 있고, 늦게 도착한 세금 보고서에도 있습니다. 하늘의 별만 읽으면 외교관은 굶어 죽어요.”

라플리가 관객석에서 피식 웃었다.

“그건 좀 마음에 드네.”

슈샤니크는 조용히 말했다.

“늦은 세금 보고서가 별이라는 표현은 부정확하지만, 의미는 이해했습니다.”

푸리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좋아. 학술제다워.”

알토는 원탁 위에 자신의 기록책을 펼쳤다.

책장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펼친 페이지는 흰색이었다.

“기록은 과거입니다.”

그는 짧게 말했다.

“하지만 과거라는 이유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원탁 위 흰 페이지에 문장들이 떠올랐다.

실패한 조약.
깨진 계약.
살아 돌아온 사절의 보고.
전쟁 직전에 취소된 결혼동맹.
누군가의 오판.
누군가의 용기.
누군가의 거짓말.
누군가의 정직한 사과.

알토는 그 문장들을 가리켰다.

“기록은 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누군가가 밟았던 길의 흔적을 남깁니다.”

레이튼이 물었다.

“그 흔적은 지도가 됩니까, 경고문이 됩니까?”

“둘 다입니다.”

알토는 바로 답했다.

“읽는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스테리아가 흰 실을 들어 올렸다.

“그 점은 별과 비슷하군요.”

“다릅니다.”

알토는 정중하지만 단호했다.

“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기록은 이미 누군가가 치른 대가입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알토의 말은 길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그 대가를 낭만으로만 소비해서는 안 됩니다.”

아스테리아는 그 말을 가볍게 받지 않았다.

그녀는 실을 내려놓았다.

“맞아요. 그래서 외교관은 낭만만으로 별을 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세 갈래 길을 다시 짚었다.

“북쪽 길에서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길은 그냥 ‘빠른 길’이 아니게 됩니다. 남쪽 길에서 배신당한 기록이 있다면, 그 길은 그냥 ‘안전한 길’이 아니게 됩니다. 중앙 길에서 굴욕적인 협상이 있었다면, 그 길은 그냥 ‘정치적 길’이 아니게 되죠.”

아스테리아는 알토를 보았다.

“기록은 길의 가격표입니다.”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짧게 답했다.

“좋은 표현입니다.”

아카식이 눈을 크게 떴다.

“알토가 칭찬했어.”

알토는 아카식을 보았다.

“기록하지 마십시오.”

“이미 기억했는데?”

“그럼 조용히 기억하십시오.”

푸리나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그레이도 펜끝을 잠시 멈췄다.

레이튼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오늘의 핵심은 이것이겠군요. 기록과 별이 모두 길을 보여준다면, 무엇이 사람을 실제로 걷게 합니까?”

아스테리아는 말했다.

“필요.”

알토는 말했다.

“책임.”

레이튼은 웃었다.

“흥미롭군요.”

아스테리아는 푸른 실을 다시 잡았다.

“사람은 필요가 없으면 길을 떠나지 않습니다. 상인은 이익이 있어야 떠나고, 사절은 임무가 있어야 떠나고, 피난민은 뒤에 불이 붙어야 떠납니다. 필요는 발을 움직이게 해요.”

알토는 기록책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책임이 없으면, 길을 걷고 난 뒤 남은 것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낮게 말했다.

“선택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책임은 남습니다.”

아카식은 이번에는 조용히 적었다.

농담하지 않았다.

알토의 문장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폴란드의 계약과 기록, 자유와 광신, 실패와 책임이 함께 있었다.

레이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필요가 사람을 길 위에 세우고, 책임이 그 길을 기록으로 남긴다.”

아스테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은 가끔 고개를 들게 하죠.”

알토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은 가끔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거 둘 다 좋아. 완전 대사 같아.”

알토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대사가 아닙니다.”

아스테리아는 웃었다.

“이미 무대 위에 올랐으니 늦었어요, 대공.”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아카식은 낮게 웃었다.

“알토가 무대에 졌다.”

“기록하지 마십시오.”

“이건 기록해야지.”

푸리나는 손을 들어 다음 과제를 열었다.

“좋아. 그러면 실전 문제!”

원탁 위에 작은 모형 도시와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아르카다는 아니었다.

이번 도시는 국경 근처에 있었다.
한쪽 길은 산을 넘어 폴란드 쪽으로 이어지고, 다른 길은 흑해 상단로로 이어지며, 마지막 길은 로마의 우편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푸리나가 설명했다.

“한 도시가 있어. 전쟁 직후야. 북쪽에서는 구원군이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어. 남쪽 상단은 식량을 싣고 있지만, 가격을 세 배 부르고 있어. 중앙의 우편로는 빠르지만, 적 밀정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어. 세 길 중 어느 길을 선택할까?”

라플리가 뒤에서 말했다.

“셋 다?”

그레이가 즉답했다.

“자원 부족으로 불가능합니다.”

라플리:

“쳇.”

레이튼은 참가자들을 보았다.

“답은 하나여야 합니까?”

푸리나는 웃었다.

“아니. 학술제니까, 답보다 과정을 봐야지.”

아스테리아가 먼저 세 갈래 길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쪽에서 희미한 별빛이 돌았다.

보가트리의 혈통.

하늘과 미래의 갈래를 읽는 힘.

하지만 그것은 확정된 예언이 아니었다.

세 갈래였다.

“북쪽.”

그녀는 첫 번째 길을 짚었다.

“구원군이 오면 가장 싸게 도시를 살릴 수 있어요. 하지만 얼음이 늦게 얼면 길이 닫힙니다. 그리고 구원군이 움직인다는 소문이 퍼지면 적도 알겠죠.”

그녀는 두 번째 길을 짚었다.

“남쪽 상단. 비싸지만 확실합니다. 문제는 세 배의 가격이 도시의 다음 세금을 미리 태워버린다는 점. 상인들은 굶주린 도시를 구하고, 나중에 도시를 소유하려 할 겁니다.”

세 번째 길.

“중앙 우편로. 빠릅니다. 하지만 적 밀정에게 노출되면 모든 요청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리고 빠른 길은 대개 빠른 배신도 부릅니다.”

레이튼이 물었다.

“그럼 어느 길입니까?”

아스테리아는 미소 지었다.

“셋 다요.”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자원 부족으로—”

“전부 같은 무게로 쓰자는 뜻이 아니에요.”

아스테리아는 실 세 개를 서로 다르게 묶었다.

“중앙 우편로로 가짜 요청을 보냅니다. 북쪽 구원군에게는 암호화된 짧은 편지. 남쪽 상단에는 가격 협상을 시작하되, 요안나 폐하의 보호 선언문 사본과 슈샤니크 경의 세금 유예안을 같이 보냅니다.”

푸리나가 물었다.

“왜?”

“상인은 돈만 보지 않습니다. 돈이 회수될 구조를 봐요. 도시가 그냥 굶주린 폐허라면 세 배를 부르겠지만, 도시가 법과 배급과 보호 선언을 가진 곳이라면 장기 거래가 됩니다.”

슈샤니크가 관객석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리아는 계속했다.

“적 밀정은 중앙의 가짜 요청을 보고 빠른 길을 막으려 하겠죠. 그 사이 남쪽 상단은 협상 테이블에 앉고, 북쪽에는 정말 필요한 짧은 요청만 갑니다.”

알토는 그 과정을 듣고 기록책을 보았다.

“기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스테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교니까요.”

“기록에는 남겨야 합니다.”

“당연하죠. 성공하면 작전, 실패하면 추문이니까요.”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성공해도 기록해야 합니다.”

아스테리아는 웃었다.

“그 점이 폴란드식으로 무섭네요.”

알토는 담담히 답했다.

“책임의 문제입니다.”

레이튼은 알토에게 물었다.

“대공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토는 세 갈래 길을 보았다.

“나는 먼저 계약 조건을 분리하겠습니다.”

그는 남쪽 상단로를 짚었다.

“세 배 가격은 식량 가격이 아니라 위험 가격입니다. 도시가 무너지면 대금 회수가 불가능하니까.”

그는 중앙 우편로를 짚었다.

“우편로는 정보 가치가 있습니다. 노출 위험이 있다면, 노출될 것을 전제로 기록을 작성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북쪽 길.

“구원군은 오거나 오지 않습니다. 약속이 없다면 기대치로만 계산해야 합니다.”

아카식이 작게 말했다.

“차갑네.”

알토는 대답했다.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는 빈 양피지 위에 짧은 문장을 썼다.

《조건부 보증 계약》

“남쪽 상단과 계약합니다. 대금 일부는 즉시 지급. 나머지는 도시 안정화 후 세금권이 아니라 교역권으로 보상. 단, 상단이 식량 공급을 지연하거나 가격을 재협상할 경우, 계약 위반 기록을 폴란드와 로마, 흑해 상단망에 공표합니다.”

아스테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평판을 담보로 잡는군요.”

“상인은 평판을 먹고 삽니다.”

알토는 중앙 우편로를 가리켰다.

“그리고 우편로에는 노출되어도 되는 기록을 보냅니다. 거짓은 쓰지 않습니다. 다만 전부를 쓰지 않습니다.”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외교관처럼 말하시네요.”

“기록자입니다.”

“기록자도 꽤 외교적일 수 있군요.”

알토는 부정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질문했다.

“거짓을 쓰지 않고 전부를 쓰지 않는 것은 기만입니까?”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좋은 답입니다.”

“불편한 답입니다.”

“좋은 답은 대개 조금 불편하지요.”

푸리나는 두 사람의 안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 아스테리아는 별과 소문으로 상대가 어디를 볼지 정하고, 알토는 기록과 계약으로 그 선택의 책임을 남기는 거네.”

아스테리아가 손뼉을 작게 쳤다.

“정확해요.”

알토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 경, 질문자 판정은?”

레이튼은 원탁 위 세 갈래 길을 보았다.

“두 답안은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스테리아의 실과 알토의 계약서를 나란히 놓았다.

“아스테리아 경은 선택지를 살아 움직이는 소문과 길로 보았습니다. 알토 대공은 선택 뒤에 남는 책임과 증거로 보았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움직이고, 하나는 움직인 뒤 도망치지 못하게 합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잔인한데?”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책임은 때로 잔인하지요. 하지만 책임 없는 선택은 더 잔인할 수 있습니다.”

알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리아도 부정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하늘을 보았다.

별들은 여전히 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별들은 단순히 예쁜 장식이 아니었다.

각 별은 길이었고, 가격이었고, 소문이었고, 편지였고, 계약이었다.

푸리나는 물었다.

“그럼 결론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별은 답안지가 아닙니다.”

아스테리아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길 잃은 사람에게 고개를 들 이유는 됩니다.”

알토가 덧붙였다.

“기록은 족쇄가 아닙니다.”

아카식이 조용히 보았다.

알토는 기록책을 닫았다.

“하지만 책임 없이 걷지 않게 하는 무게는 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답은 이렇게 적을 수 있겠군요.”

그는 빈 양피지에 문장을 썼다.

《별은 길을 정하지 않는다. 기록도 길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별은 고개를 들게 하고, 기록은 발자국을 돌아보게 한다. 그 사이에서 사람이 선택한다.》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박수를 쳤다.

짝.

이번에도 승자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었다.

길과 책임 사이에서, 선택이라는 작은 불씨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보내는 박수였다.

아카식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기록장에 적었다.

《3막 결론. 별은 운명이 아니고, 기록은 감옥이 아니다. 둘 다 핑계가 될 수 있으나, 잘 쓰면 사람을 살린다. 알토는 책임을 남겼고, 아스테리아는 길의 값을 보였다. 레이튼은 둘 사이에 사람이 설 자리를 남겼다.》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았다.

“이번에는 공식 기록에 넣어도 되겠습니다.”

아카식이 환하게 웃었다.

“나 오늘 잘하고 있지?”

알토는 말했다.

“과장하지 마십시오.”

“칭찬 좀 해줘.”

“잘했습니다.”

아카식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록해둘게.”

알토는 한숨처럼 말했다.

“그건 기록하지 마십시오.”

“싫어.”

푸리나는 웃었다.

아스테리아도 웃었다.

레이튼은 모자를 다시 썼다.

천장의 별빛은 천천히 낮아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강당의 등불 위에, 별빛 하나가 작게 남았다.

길을 정하지 않는 별.

그러나 길 잃은 사람이 고개를 들게 하는 별.

그리고 그 아래, 알토의 기록책은 조용히 닫혀 있었다.

기록은 끝을 선언하지 않았다.

아직 선택이 남아 있었으니까.
《등불 아래의 학술제》

4막 — 공방 학술전: 강한 도구란 무엇인가

4막의 원탁은 더 이상 원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작업대였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강당 한가운데에 길고 넓은 공방을 펼쳐놓았다.
한쪽에는 깨진 약병과 젖은 곡물 자루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휘어진 수레축과 금 간 성문 경첩이 놓였다. 부러진 활대, 손잡이가 닳아 빠진 망치, 마력 과부하로 검게 그을린 경보 장치, 병사의 손목 보호구, 찢어진 가죽끈과 녹슨 못도 있었다.

훌륭한 재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망가졌고, 쓰레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사연이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작업대 앞에 서서 선언했다.

“이번 막의 주제!”

그녀는 부러진 활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강한 도구란 무엇인가!”

그레이가 즉시 다가와 활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게 했다.

“부러진 활대입니다. 흔들지 마십시오.”

“그냥 분위기였는데.”

“분위기로 손을 다칠 수 있습니다.”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저 활대로 다치면 그건 도구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 문제 아니야?”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사용자를 다치게 만드는 도구도 도구 문제입니다.”

라플리가 그녀를 보았다.

“오늘도 손목 이야기 할 거지?”

“예.”

“예상했어.”

라이자는 작업대 위에 놓인 깨진 약병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약병, 안쪽에 아직 침전물이 남아 있어요. 버리기엔 아까운데요.”

소피아는 이미 젖은 곡물 자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루를 만지고, 냄새를 맡고, 손끝으로 곡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음…… 이건 식량으로는 힘들겠네요.”

그레이가 물었다.

“폐기입니까?”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식량으로 사용할 수 없다면—”

“식량이 아니면 다른 걸로 쓰면 되잖아요.”

라플리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좋아. 오늘 재밌겠네.”

푸리나는 네 사람을 차례로 가리켰다.

“오늘 참가자는 보헤미아의 라이자, 유플리아 마탑주 라플리, 실용의 감각을 가진 카를로타, 그리고 신비와 황혼의 연금술사 소피아!”

소피아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잘 부탁드려요.”

푸리나는 손을 펼쳤다.

“과제는 간단해. 이 공방 안의 망가진 물건들을 이용해서, 폐허 도시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줘.”

라플리가 바로 물었다.

“폭발 실험은?”

그레이가 즉답했다.

“금지입니다.”

“작은 폭발은?”

소피아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레이가 소피아를 보았다.

“그것도 금지입니다.”

소피아는 조금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럼 아주 작은 반응은요?”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사전 신고 후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라플리는 소피아를 흘끗 보았다.

“너, 생각보다 말이 통할 것 같네.”

카를로타가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안전 기준은 적용됩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공방이 될 것 같아요.”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참가자 전원, 위험 요소 보유. 감시 필요.》

푸리나는 그 장부를 보고 말했다.

“그레이, 그거 너무 불신 아니야?”

“경험입니다.”

“그건 반박 못 하겠네.”

레이튼은 관객석에서 미소 지었다.

“오늘의 질문은 여러 층을 갖는군요. 강한 도구란 부서지지 않는 도구인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도구인가, 아니면 부서진 뒤에도 다시 쓸모를 찾는 도구인가.”

아카식은 기록대에서 적었다.

“좋아. 오늘은 물건들이 주인공이네.”

푸리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방 개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라플리였다.

그녀는 마력 과부하로 검게 그을린 경보 장치를 들어 올렸다.

작은 금속 상자였다.
원래는 성벽 위에 설치해 적 기병의 접근을 알리는 장치였지만, 과부하로 내부 회로가 타고, 경보판은 반쯤 녹아 있었다.

라플리는 그것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오딘의 눈》을 열었다.

“흐름이 보이네.”

그녀의 시야에 남은 마력의 자국이 떠올랐다.

끊긴 회로.
과열된 마법핵.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 공명으로 탄 흔적.
장치가 마지막 순간에 경보를 한 번 더 울리려다가 스스로를 태운 흔적.

“멍청한 장치야.”

라이자가 물었다.

“왜요?”

라플리는 장치를 톡 두드렸다.

“한계에 닿았는데도 계속 출력만 올렸어. 경보 장치는 울리는 게 목적이지, 자기 존재를 장렬하게 증명하는 게 목적이 아니거든.”

푸리나가 관객석에서 작게 말했다.

“그 말, 누가 누구한테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레이는 조용히 적었다.

《라플리 경, 자기 객관화 가능성 있음. 추가 관찰.》

라플리는 못 들은 척했다.

그녀의 손끝에 작은 뇌광이 맺혔다.

“일단 어디서 터지는지 보자.”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폭발 실험은 금지입니다.”

“터뜨리겠다는 게 아니라, 터지는 지점을 찾겠다는 거야.”

“그것이 폭발 실험입니다.”

라플리는 혀를 찼다.

“알았어. 그럼 안 터지는 선까지만.”

그녀는 《천율학파》의 계산식을 낮게 펼쳤다.

뇌광은 장치를 때리지 않았다.
얇은 바늘처럼 회로를 따라 흘렀다.

《뇌천마력회로》.

라플리는 회로의 저항을 읽고, 탄 부분과 아직 살아 있는 부분을 분리했다.

“마법핵은 죽었고, 외부 감응판은 살았네. 내부 증폭기가 문제야. 접근 신호를 받으면 세 배로 증폭하다가, 연속 신호에서 과부하로 탄다.”

카를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현장에서는 첫 번째 적은 알려주지만, 두 번째 적부터는 침묵했겠군요.”

“맞아. 제일 쓸모없을 때 죽는 장치지.”

라플리는 장치 위에 표시를 남겼다.

붉은 점.
파란 선.
노란 원.

“여기부터 취약점. 여기까지 한계. 이 이상 밀면 터진다. 아니, 터지지는 않게 하라고 했으니까…… 기능정지.”

그레이가 장부에 적었다.

《기능정지. 표현 수정 확인.》

라플리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적었지?”

“예.”

“꼼꼼하네.”

“필요합니다.”

다음은 라이자였다.

라이자는 라플리가 표시한 경보 장치 옆에 은빛 실을 뽑아냈다.

성은이었다.

“그럼 너무 무리하지 않게 만들면 되겠네요.”

라플리가 말했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장치가 안 탔지.”

라이자는 웃었다.

“그래서 박자를 맞출 거예요.”

그녀는 경보 장치 안에 작은 은빛 심장 모양의 조절 코어를 넣었다.

《은의 조형》.

성은이 끊긴 회로 사이를 잇고, 탄 부분을 감싸고, 과열된 흔적을 부드럽게 식혔다.

《성은의 혈맥》.

은빛 회로는 강줄기처럼 갈라졌다.
들어오는 신호를 한 번에 증폭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 흘렸다.

《따듯하게 안아주는 은의 심장》의 축소형 코어가 작게 뛰었다.

두근.

경보 장치가 아주 낮은 소리를 냈다.

라플리는 그것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장치가 심장 뛰는 소리를 내면 병사들이 무서워하지 않을까?”

라이자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럼 소리를 줄일게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닌데.”

라이자는 성은 실을 다시 조율했다.

“경보가 울릴 때마다 장치가 자신을 태우지 않도록 했어요. 신호가 너무 많이 들어오면 먼저 흘리고, 그다음 줄이고, 마지막으로 주변 장치에 나눠 보내요.”

카를로타가 말했다.

“현장 병사가 그걸 알 수 있습니까?”

라이자가 멈췄다.

“음?”

카를로타는 경보 장치를 들어 보았다.

“좋은 장치입니다. 하지만 들기 무겁습니다. 설치 위치가 높은 성벽이라면 병사 둘이 들어야 합니다. 손잡이가 없습니다. 젖은 손으로 잡으면 떨어뜨립니다.”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그건 생각 못 했네요.”

라플리는 웃었다.

“손목의 시간이 왔군.”

카를로타는 진지했다.

“도구는 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설치할 수 있어야 하고, 고장 났을 때 빼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용자가 마법사나 연금술사가 아니라 지친 병사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녀는 부러진 활대에서 쓸 만한 탄성 부분을 떼어냈다.

“이 활대는 활로 쓰기에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손잡이 보강재로는 쓸 수 있습니다.”

소피아가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카를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보죠.”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너희 둘, 이상한 쪽으로 호흡이 맞네.”

카를로타는 부러진 활대 조각을 다듬어 경보 장치 양쪽에 붙였다.

손잡이는 약간 휘어 있었다.
엄지와 손목이 자연스럽게 걸리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병사 목패 하나를 가져와 장치를 들게 했다.

“이제 한 손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들고 오래 이동하면 안 됩니다. 무게 중심이 여전히 앞쪽입니다.”

라이자가 성은 회로 일부를 뒤쪽으로 옮겼다.

“이렇게요?”

카를로타가 다시 들어 보았다.

“좋습니다. 손목 부담이 줄었습니다.”

라플리는 팔짱을 꼈다.

“마법 공학 토론에서 손목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할 줄은 몰랐네.”

카를로타가 그녀를 보았다.

“손목이 부러지면 주문도 활도 나가지 않습니다.”

라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아요.”

라플리는 입을 다물었다.

소피아는 그 사이에 작업대 위의 다른 파손품들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부러진 활대의 나머지 부분.
금 간 경첩.
젖은 곡물.
깨진 약병.
휘어진 수레축.
녹슨 못.
찢어진 가죽끈.

푸리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소피아, 그건 뭐 하려고?”

소피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쓸 수 있는 걸 보려고요.”

그레이가 말했다.

“대부분 파손품입니다.”

“네. 그래서 안쪽이 잘 보이잖아요.”

그 말에 라플리도 잠시 멈췄다.

소피아는 금 간 경첩을 손에 들었다.

《황금의 눈》.

그녀의 눈에 물질의 성질이 떠올랐다.

금속 피로.
습기.
열 변형.
미세한 균열.
아직 남은 탄성.
못으로는 부족하지만, 작은 스프링으로는 쓸 수 있는 복원력.

“망가지면 끝인가요?”

소피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음…… 아니죠. 망가졌다는 건, 안쪽 구조를 볼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라이자가 작게 감탄했다.

“그 말 좋아요.”

라플리는 그녀를 보았다.

“넌 그냥 다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은 건 좋다고 말해야죠.”

소피아는 부러진 활대를 들어 올렸다.

“이건 활로 쓰기에는 끝났어요. 하지만 탄성재로는 괜찮아요.”

금 간 경첩.

“이건 문을 버티기엔 피곤하지만, 작은 복귀 장치로는 쓸 수 있고요.”

젖은 곡물.

“이건 먹으면 안 되지만, 발효시켜 접착제로 쓸 수 있겠네요.”

라플리가 바로 말했다.

“잠깐. 젖은 곡물로 접착제?”

“네.”

“그게 돼?”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는… 음, 기본 아닌가요?”

라플리와 카를로타가 동시에 말했다.

“아니야.”

“기본은 아닙니다.”

라이자는 밝게 말했다.

“하지만 멋져요.”

소피아는 조금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럼 기본으로 만들면 되겠네요.”

그 말에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아카식은 아주 즐겁게 적었다.

《소피아식 기본: 일반적으로 기본 아님.》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비공식 주석으로 처리하십시오.”

“당연하지.”

소피아는 《소피아식 연금술 조제편》을 펼쳤다.

깨진 약병에 남은 침전물과 젖은 곡물 일부, 물, 소량의 재, 가죽끈의 섬유를 섞었다.

작은 냄새가 올라왔다.

푸리나가 코를 살짝 찡그렸다.

“이거 안전한 냄새야?”

그레이가 바로 물었다.

“소피아 경, 유독성 여부는?”

소피아는 태연하게 말했다.

“마시면 안 돼요.”

“그 외에는?”

“피부에 오래 묻으면 가렵고요.”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접착제 취급 시 장갑 필요.》

소피아는 이어서 《소피아식 연금술 연성편》을 사용했다.

젖은 곡물은 끈적한 접착제가 되었고, 금 간 경첩은 작은 탄성 부품으로, 부러진 활대는 손목 보호구 안쪽의 탄성 지지대로 변했다.

휘어진 수레축은 그대로 펴지 않았다.

소피아는 오히려 휘어진 곡선을 이용했다.

“이건 완전히 펴려면 힘이 너무 많이 들어요. 그럼 이렇게 잘라서 클램프로 쓰는 게 낫겠어요.”

카를로타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수레축 임시 수리용 고정구로 쓸 수 있겠습니다.”

라이자가 성은 실을 얇게 둘렀다.

“여기에 성은 회로를 넣으면, 너무 조이면 색이 변하게 할 수 있어요. 병사가 고정 강도를 알 수 있게요.”

라플리가 경보 장치에서 작은 뇌광 핵을 떼어냈다.

“그리고 여기에 진동 감응을 넣자. 수레축이 다시 틀어지기 시작하면 소리가 나게.”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귀 안 먹을 정도.”

“수치로.”

“……낮게.”

“수치로.”

라플리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적어줄게.”

“지금 적으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푸리나는 작업대 위에서 점점 하나의 상자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파손품 더미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경보 장치.
수레축 고정구.
손목 보호구.
성문 경첩 임시 수리 부품.
젖은 곡물 기반 접착제.
소형 조제 병.
성은 안정 회로.
뇌광 진동 경보 핵.
부러진 활대 탄성재.

모든 것이 하나의 상자 안에 정리되었다.

라플리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름 붙이자.”

그레이가 말했다.

“공식 명칭은 용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럼 내가—”

라플리, 카를로타, 그레이가 동시에 말했다.

“안 됩니다.”

푸리나가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왜 다 같이?”

라플리는 단호했다.

“세 줄짜리 제목은 안 돼.”

카를로타도 말했다.

“현장 병사가 외우기 어려운 이름은 부적절합니다.”

그레이가 덧붙였다.

“문서화에도 불리합니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푸리나 님 제목도 궁금한데요.”

소피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푸리나는 바로 기운을 되찾았다.

“봤지?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

라플리는 라이자와 소피아를 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진짜 위험해.”

결국 그레이가 임시명을 적었다.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너무 건조해.”

카를로타는 상자를 들어 보았다.

“하지만 좋습니다. 용도가 분명합니다.”

소피아는 상자 안의 칸막이를 조정했다.

“건조하면 안쪽에 작은 그림을 그리면 되지 않을까요?”

라이자가 웃었다.

“은색 별 같은 거요?”

푸리나는 즉시 손을 들었다.

“허가!”

그레이가 말했다.

“장식은 기능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가합니다.”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장식 허가까지 문서화하는구나.”

“필요합니다.”

“그래, 네가 그레이지.”

카를로타는 상자를 실제 병사 목패에게 들려보았다.

“무게는 적절합니다. 한 명이 들 수 있고, 두 명이면 달릴 수 있습니다. 손잡이 각도도 괜찮습니다.”

라플리는 뇌광 경보 핵을 켰다.

작은 소리가 났다.

띵.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허용 범위입니다.”

라플리가 작게 환호했다.

“좋아. 처음으로 소리 허가받았다.”

소피아는 접착제를 발라 금 간 나무 조각을 붙였다.

잠시 뒤, 나무 조각은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붙었네요.”

라이자는 성은 회로가 들어간 손목 보호구를 목패 병사에게 장착했다.

“손목 부담을 줄여줄 거예요. 그리고 무리하게 힘을 주면 은빛이 붉게 변해요.”

카를로타가 확인했다.

“훈련병에게 유용하겠습니다.”

라플리는 웃었다.

“결국 손목이 핵심이네.”

카를로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농담이었는데.”

“농담도 정확할 수 있습니다.”

아카식은 웃으며 그 말을 기록했다.

마침내 그레이가 판정표를 들었다.

“판정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누가 이겼어?”

그레이는 네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라플리 경. 출력 한계와 취약점 탐지 우수.”

라플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자 폐하. 안정화와 안전 회로 우수.”

라이자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카를로타 경. 사용성 및 신체 부담 보정 우수.”

카를로타는 “당연한 일을 했습니다”라는 얼굴이었다.

“소피아 경. 파손 자재 재정의와 다목적 전환 우수.”

소피아는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총합 판정. 공동 설계 성공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누가 이긴 거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도구가 이겼습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 대답 너무 좋아!”

라플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소피아가 상자를 보며 말했다.

“도구가 잘 쓰이면 이긴 거 아닐까요?”

카를로타가 덧붙였다.

“사용자가 다치지 않았다면, 그 말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라이자는 상자 안의 은빛 별 장식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다음 사람도 쓸 수 있다면요.”

라플리는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가끔 나보다 더 이상한 소리를 해.”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좋은 공방이야!”

레이튼은 관객석에서 모자를 살짝 들었다.

“오늘의 질문은 답을 얻었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강한 도구란?”

레이튼은 작업대 위의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를 보았다.

“부서지지 않는 도구만은 아니겠지요.”

아카식이 기록했다.

그레이도 기록했다.

여관좌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당 한가운데, 파손품 더미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상자가 남았다.

그 상자는 영웅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거대한 성은 병단도 아니었고, 뇌광을 뿜는 마법포도 아니었고, 전설의 활도 아니었다.

그저 폐허 도시에서 수레축을 고치고, 경보 장치를 다시 울리고, 병사의 손목을 보호하고, 문을 다시 닫게 해줄 수 있는 상자였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무너진 도시의 둘째 날에는 필요한 도구였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이번 박수는 도구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리고 도구를 다시 쓸 수 있게 만든 네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날의 공방 학술전은 누구 한 사람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라플리는 한계를 표시했고, 라이자는 심장을 붙였고, 카를로타는 손에 맞게 깎았고, 소피아는 망가진 것들의 이름을 바꾸었다.

부러진 활은 활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손목을 지키는 보조기가 되었다.

젖은 곡물은 버려지지 않고 접착제가 되었고, 금 간 경첩은 작은 스프링이 되었다.

그날 그들이 배운 답은 단순했다.

강한 도구란 부서지지 않는 도구만이 아니다.

부서진 뒤에도, 다시 누군가의 손에 쓸모로 돌아올 수 있는 도구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5막 — 죽음과 고통, 기억의 세미나

5막의 강당에는 박수가 없었다.

푸리나가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다.

“이번 막에서는 손뼉을 치지 않을게.”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박수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치겠지만, 먼저 치지는 않을 거야.”

그레이는 장부를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하겠습니다. 5막 진행 원칙. 침묵 우선.”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응. 오늘은 침묵도 참석자니까.”

그 말이 끝나자, 강당의 모양이 바뀌었다.

원탁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 위에는 도시 지도나 공방 도구 대신 작은 등불들이 놓였다.
등불마다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이름이 적힌 것도 있었고, 비어 있는 것도 있었다.

비어 있는 이름표가 더 많았다.

한쪽에는 장례용 천이 접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부상자 명단과 약병, 붕대, 물그릇이 놓였다.
강당 가장자리에는 여관좌의 찻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찻잔 옆에 작은 꽃과 흰 천이 함께 놓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카식도 펜을 들었지만, 평소처럼 농담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오늘의 주제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푸리나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5막의 주제는 이것.”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죽은 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산 자의 고통은 어디까지 덜어주어야 하는가.”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등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검은 실은 오늘 무대를 가로지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끝에서 조용히 내려와, 비어 있는 이름표들의 가장자리에 닿아 있었다.

타마르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는 포도나무 잎 하나와 작은 잔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축제의 잔처럼 보이기도 했고, 장례의 잔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레이는 장부를 펴고 있었다.

펜은 평소처럼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적지 않았다.
오늘은 먼저 들어야 하는 날이었다.

레플리카는 조금 뒤쪽에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거만한 자세는 아니었다.
그녀는 부상자 명단과 약병, 그리고 비어 있는 이름표들을 한 번씩 보았다.
그 눈빛은 고통을 흥미롭게 보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여관좌가 있었다.

그는 원탁의 상석에 앉지 않았다.
등불과 등불 사이, 누군가가 자리를 비워두었을 법한 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푸리나는 먼저 아레를 보았다.

“아레.”

아레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 헤툼.”

“오늘은 네가 먼저 말해줄래?”

아레는 잠시 비어 있는 이름표들을 바라보았다.

그 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선 자리를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않는 일이란다.”

그녀의 말은 느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사람은 죽으면 가라앉지. 이름도, 목소리도, 손의 온기도, 살아 있던 날의 작은 버릇들도. 시간이 지나면 산 자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웃게 된다. 그래야만 하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는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산 자가 웃는 일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로 너무 빨리 가라앉는 이름들이 있단다.”

그녀의 검은 실 하나가 빈 이름표에 닿았다.

“돌아오지 못한 전령. 성문 아래에서 끝까지 버틴 방패병. 우물에 빠진 아이. 마지막 빵을 넘기고 자기 이름을 말하지 못한 사람. 전쟁은 그들을 숫자로 만들기 쉽지.”

그레이의 펜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

아레는 그레이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장부가 필요하겠지.”

그레이는 짧게 답했다.

“예.”

아레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장부만으로는 닿지 않는 곳도 있단다. 이름을 적었다고 해서 그 아이가 덜 외로웠던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기억은 장부와 등불 사이에 있어야 한다.”

그녀는 등불 하나를 켰다.

작은 불빛이 비어 있는 이름표 위에 내려앉았다.

“이름을 알면 이름으로 부르고, 이름을 모르면 그 이름을 찾는 일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기억이란다.”

강당은 조용했다.

푸리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레이튼도 질문하지 않았다.

아직 질문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었다.

타마르가 포도나무 잎을 손끝으로 만졌다.

그녀는 눈을 반쯤 내리감고 있었다.

“죽은 자에게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낯선 깊이가 있었다.

“살아 있는 이들은 죽음을 너무 빨리 의미로 바꾸려 합니다. 순교, 희생, 대가, 영광, 불행, 교훈.”

그녀는 작은 잔을 보았다.

“하지만 죽은 어린양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저녁일 때가 있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타마르는 조용히 말했다.

“포도밭의 저녁. 발을 씻을 물.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되는 울타리. 늦게 도착한 자를 꾸짖지 않는 문.”

여관좌의 등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타마르는 그 불빛을 보며 말했다.

“장례란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마지막으로 질서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어디에 눕힐지,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어떤 기도를 들려줄지. 그 질서가 없으면 죽은 이는 전쟁의 먼지 속에서 너무 오래 서 있게 됩니다.”

아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오래 서 있게 되지.”

타마르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러니 사망 원인을 적는 일도 장례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레이가 눈을 들었다.

타마르는 말했다.

“그가 어디에서, 왜, 어떻게 죽었는지 적는 것은 산 자의 행정만은 아닙니다. 죽은 자에게 ‘너는 아무렇게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그레이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펜을 들었다.

“기록하겠습니다.”

그녀는 장부에 적었다.

《사망 원인 기록은 재발 방지이자 장례의 일부.》

그레이의 글씨는 평소처럼 단정했다.

하지만 그 문장은 평소보다 조금 오래 걸렸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예, 폐하.”

“네 차례야.”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감상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감상과 행정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자리였다.

“저는 죽은 이를 기억한다는 말을 잘 모릅니다.”

그레이는 솔직히 말했다.

“제가 아는 것은,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원탁 위에 세 개의 표를 놓았다.

첫 번째 표.

사망자 명단.

두 번째 표.

사망 원인.

세 번째 표.

재발 방지 조치.

“이름만 적으면 부족합니다. 사망 원인만 적어도 부족합니다. 조치가 없으면 기록은 애도에서 끝납니다. 물론 애도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애도만으로 다음 사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레플리카가 조용히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표를 하나씩 짚었다.

“우물 오염으로 사망했다면 우물 관리 체계를 바꿔야 합니다. 배급 누락으로 죽었다면 등록 절차를 바꿔야 합니다. 퇴각로 혼잡으로 압사했다면 동선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장례가 늦어 전염이 생겼다면 장례 인력과 방역 절차를 따로 세워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차갑지도 않았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 이유는, 그 사람이 같은 원인으로 두 번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푸리나가 아주 작게 물었다.

“두 번 죽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는 실제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그 죽음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을 때입니다.”

강당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레의 검은 실이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

타마르는 눈을 감았다.

여관좌는 찻잔에 따뜻한 물을 조금 더 채웠다.

레플리카가 그때 입을 열었다.

“그럼 산 자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레플리카는 팔짱을 푼 뒤, 부상자 명단 쪽으로 손을 뻗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건 필요하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자의 기억 옆에서 계속 아프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 고통을 그냥 두면, 그 사람은 살아 있어도 돌아오지 못한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레플리카.”

레플리카는 고개를 들었다.

“고통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그 말에 몇몇이 긴장했다.

하지만 레플리카는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고통을 주는 것이 가르침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말이 원탁 위에 분명하게 놓였다.

“사람은 아프면서 배울 때가 있다. 넘어지고, 다치고, 잃고, 후회하면서 더 단단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러니 더 아파도 된다는 말은 틀렸다.”

그녀는 약병을 하나 들었다.

“아픔을 덜 수 있다면 덜어야 한다. 다친 자를 눕힐 수 있다면 눕혀야 한다. 울 사람 곁에 앉을 수 있다면 앉아야 한다.”

그녀는 그레이의 장부를 보았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하려면 원인을 적어야 한다고 했지.”

“예.”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아프지 않게 하려면, 아픈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부상자 명단을 펼쳤다.

“여기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적혀 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괜찮다’고 처리하면 안 된다. 걸을 수 있어도 잠을 못 잘 수 있다. 손가락은 멀쩡해도 빵을 잡지 못할 수 있다. 몸은 나았는데 우물가로 가지 못할 수 있다.”

타마르가 조용히 말했다.

“살아남은 자에게도 쉴 곳이 필요하군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을 견뎠다는 이유로, 계속 견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 말에 여관좌가 천천히 찻잔을 하나 밀어놓았다.

레플리카 앞이었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레플리카는 잠시 그를 보았다.

여관좌는 덧붙였다.

“대답을 다 하신 뒤가 아니라, 중간에 드셔도 됩니다.”

레플리카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그 장면은 아주 작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 작은 장면이 오늘의 5막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고통을 말하는 자도 쉬어야 한다.

푸리나는 원탁 위의 등불들을 보았다.

“그러면 오늘의 과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아르카다에서 전투가 끝난 뒤, 사망자 명단은 미완성이고 부상자는 많아. 피난민 중 일부는 가족을 잃었고, 일부는 자기 이름을 증명하지 못해. 우물 오염으로 죽은 사람도 있고, 성벽 붕괴로 죽은 사람도 있어.”

푸리나는 네 사람을 보았다.

“이 도시가 죽은 이를 기억하고, 산 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첫 7일 동안 해야 할 일을 정해줘.”

그레이는 바로 장부를 열었다.

“첫째, 사망자 수습 체계.”

아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이름을 찾는 등불.”

타마르가 말했다.

“셋째, 장례의 질서.”

레플리카가 덧붙였다.

“넷째, 살아남은 자의 통증과 잠.”

여관좌는 조용히 말했다.

“다섯째, 말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방.”

푸리나는 한참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시작하자.”

가장 먼저 그레이가 도시 지도 위에 네 구역을 그었다.

“사망자 수습반은 치안대와 분리합니다. 수습반은 장부 담당, 성직자, 방역 담당, 운반 인력으로 구성합니다. 발견 장소와 시간, 신체 특징, 유류품, 추정 사망 원인을 기록합니다.”

아레가 말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들에게도 등불을 주어야 한단다.”

그레이는 바로 항목을 추가했다.

“신원 미상자 등불 번호 부여.”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번호만으로는 부족하겠지.”

그레이는 멈췄다.

아레는 비어 있는 이름표 하나를 손에 들었다.

“이름을 모르면 번호를 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그 번호가 이름을 찾는 일을 대신해서는 안 되지.”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적었다.

“신원 미상자 임시 등불 번호. 추후 신원 확인 의무 항목 포함.”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면 등불이 길을 잃지 않겠구나.”

타마르는 장례 장소를 지도 남쪽의 작은 포도밭 근처로 옮겼다.

“임시 매장지는 우물과 떨어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이들을 해치지 않아야 하니까요.”

그녀는 선을 그었다.

“그러나 너무 멀어도 안 됩니다. 멀면 산 자들이 찾아가지 못합니다. 찾아가지 못하면 죽은 자는 다시 전장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레이가 물었다.

“종교가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타마르는 잠시 포도잎을 보았다.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차이가 있어?”

타마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있습니다. 각자의 기도와 방식은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죽은 자들이 서로 적으로 눕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레가 낮게 말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는 깃발이 무겁단다.”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임시 장례 구역은 종교별 의식을 허용하되, 전체 추도 등불은 하나로 둡니다. 산 자들이 ‘우리만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관객석에서 조용히 들었다.

그 문장은 나중에 시민 선언과 이어질 것이었다.

레플리카는 부상자 구역을 보았다.

“치료소는 병영 안에만 두면 안 된다.”

알렉산드리나가 물었다.

“왜지? 병영이 방어하기 쉽다.”

레플리카가 답했다.

“부상자 중에는 병영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 병사가 아니었던 사람도 있다. 피난민이 병영에 들어가는 것을 수치나 처벌처럼 느끼면,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는다.”

그레이가 적었다.

“민간 치료소 별도 설치.”

레플리카는 계속했다.

“그리고 통증을 숨기지 않게 해야 한다.”

라플리가 뒤쪽에서 작게 말했다.

“그건 쉽지 않지.”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다. 그래서 먼저 말해야 한다. 아프다고 말해도 배급에서 밀리지 않는다. 잠을 못 잔다고 말해도 겁쟁이가 아니다. 손이 떨린다고 말해도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부상자 명단 옆에 선을 그었다.

“통증 기록표. 수면 기록. 악몽 호소. 물가 접근 불가. 불길 공포. 큰 소리 반응.”

그레이는 그 항목들을 빠르게 적었다.

“상담 인력이 필요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상담이라는 말을 쓰면 안 오는 사람도 있다.”

“그럼?”

“차 배급소 옆에 앉을 사람을 둔다.”

여관좌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군요.”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말하라고 하면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옆에 앉을 수는 있다.”

여관좌는 찻상 위에 작은 표시를 하나 놓았다.

“그럼 여관 쪽에서 자리를 마련하지요. 이름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굳이 ‘상담석’이라고 쓰지 않아도 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레이튼이 관객석에서 말했다.

“가장 깊은 질문은 때로 묻지 않을 때 시작되는군요.”

아카식은 그것을 적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지우라고 하지 않았다.

토론은 7일 계획으로 정리되었다.

첫째 날.

사망자 수습반 편성.

신원 미상자 임시 등불 번호 부여.

민간 치료소와 병영 치료소 분리.

우물 오염 사망자 우선 수습.

말하지 않아도 앉을 수 있는 차 자리 설치.


둘째 날.

유류품 보관소 설치.

가족 찾기 게시판.

부상자 통증·수면 기록 시작.

종교별 장례 담당자 확인.

아이와 노약자 동행자 확인.


셋째 날.

임시 장례 구역 마련.

전체 추도 등불 설치.

죽은 자의 이름 낭독, 단 신원 미상자는 등불 번호와 발견 장소로 부름.

수습반 휴식 교대 의무화.


넷째 날.

사망 원인별 재발 방지 회의.

우물, 성벽, 배급, 퇴각로 항목 분리.

부상자 재활 분류.

통증을 숨긴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공지.


다섯째 날.

유가족 배급 누락 점검.

아이들의 악몽과 실종 가족 관련 기록.

장례 후 남은 물품 처리 절차.

피난민 공동 추도 참여 허용.


여섯째 날.

사망자 명단 임시본 게시.

오류 신고 창구 설치.

치료소 접근을 방해하는 소문 확인.

통증 관리 약품 재고 조사.


일곱째 날.

첫 주 추도식.

사망 원인별 개선 조치 발표.

부상자와 수습반 휴식일 지정.

전체 등불 소등이 아니라, 일부 등불을 여관과 성문에 옮김.


푸리나가 마지막 항목을 보고 물었다.

“왜 소등하지 않고 옮겨?”

여관좌가 답했다.

“계속 그 자리에서만 타면 사람들은 죽음의 자리로만 찾아옵니다. 성문과 여관에도 등불이 있으면,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함께 볼 수 있지요.”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좋구나. 떠나는 아이도, 돌아오는 아이도 이름 아래를 지나가겠지.”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가 산 자의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길가에 조용히 앉는 형식이군요.”

레플리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산 자가 아프면, 그 등불 아래에 앉아도 된다.”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등불은 장례 후 일부를 성문과 여관으로 이전. 기억이 길을 막지 않고, 길가에 머물게 함.》

푸리나는 그 문장을 한참 보았다.

“오늘의 답은 조용하네.”

레이튼이 말했다.

“조용한 답이 필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아카식이 기록을 정리했다.

“판정은?”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읽었다.

“아레 폐하. 신원 미상자의 기억과 등불 체계 제안 우수.”

아레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조금 내렸다.

“타마르 폐하. 장례 질서와 공동 추도 구역 제안 우수.”

타마르는 포도잎을 접었다.

“그레이. 사망 원인 기록과 재발 방지 체계 제안.”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자기 판정도 직접 읽는구나.”

그레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필요합니다.”

“응. 필요해.”

그레이는 계속했다.

“레플리카 폐하. 산 자의 통증, 수면, 공포, 치료 접근성 관련 제안 우수.”

레플리카는 짧게 말했다.

“고통은 숨기면 곪는다.”

“여관좌. 말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자리 및 등불 이전 제안.”

여관좌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총합 판정. 공동 해답 채택.”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박수를 치려던 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천천히 손을 내렸다.

대신 말했다.

“좋은 답이었어.”

그 말은 박수보다 작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 편이 맞았다.

아카식은 기록장에 마지막 줄을 적었다.

《5막 결론. 기억은 죽은 이를 다시 전장으로 끌어내는 일이 아니다. 고통은 산 자에게 더 견디라고 명령하는 명분이 아니다. 이름은 등불 아래에 두고, 사망 원인은 장부에 적고, 아픈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앉을 수 있게 한다.》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았다.

“공식 기록에 반영하겠습니다.”

아카식은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응. 그러는 게 좋겠어.”

강당의 등불들이 하나씩 낮아졌다.

그러나 꺼지지는 않았다.

비어 있던 이름표 하나에 작은 불빛이 남았다.

그 이름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불빛을 보고, 아주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극장에는 박수가 많았다.

오늘은 그 극장이 박수 없이도 막을 닫는 법을 배운 날이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6막 — 왕관과 죄의 원탁

6막이 시작되기 전, 푸리나는 원탁 위의 장식을 모두 치웠다.

별도, 도시 지도도, 공방 도구도, 등불 이름표도 없었다.

남은 것은 왕관 모양의 작은 목패 일곱 개뿐이었다.

그 목패들은 모두 같은 크기였다.

그러나 그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같지 않았다.

민다우가스의 목패에는 북방 숲과 늪의 냉기가 있었다.
벨라 4세의 목패에는 불탄 왕국의 재 냄새와 새로 쌓은 성벽의 돌가루가 있었다.
미하일라의 목패에는 자주빛 화살의 긴장이 있었다.
요안나의 목패에는 아이가 두 손으로 붙든 흰 보좌의 온기가 있었다.
호흐마이스터의 목패에는 죄악의 갑주가 남긴 무거운 흠집이 있었다.
슈샤니크의 목패에는 잉크와 피가 섞인 장부의 무게가 있었다.
레이튼의 목패에는 아직 닫히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 앞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술제였지만, 이 막은 학술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막의 주제는.”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통치자는 죄를 어디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강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죄를 짊어진다는 말은, 누구의 침묵 위에서 성립하는가.”

요안나의 손가락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민다우가스는 원탁 위의 목패를 보다가, 천천히 입가를 올렸다.

그것은 따뜻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히 차가운 무표정도 아니었다.

마치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도, 그 불이 어느 방향으로 번질지 이미 계산해둔 사람의 웃음이었다.

벨라 4세는 원탁 위 목패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은 성채처럼 낮고 무거웠다.

레이튼은 모자를 벗었다.

“오늘은 질문이 날카롭습니다.”

푸리나는 낮게 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그레이가 장부를 펼쳤다.

“6막 진행 원칙. 발언자는 상대의 통치권과 경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 윤리적 반론은 허용한다. 실제 모욕, 혈통 비하, 신앙 모독은 금지. 발언 후 기록 검토 가능.”

라플리가 관객석에서 중얼거렸다.

“토론 규칙이 전쟁 규칙보다 길어지는 것 같은데.”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말은 전쟁보다 오래 남을 때가 많으니까요.”

아카식은 기록대에서 펜을 잡았다.

“좋아. 오늘은 무겁게 간다.”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불필요한 주석은 삼가십시오.”

“오늘은 나도 알아.”

아카식은 드물게 가볍게 웃지 않았다.

원탁에 먼저 앉은 것은 민다우가스였다.

그는 왕좌에 앉듯 앉지 않았다.

사냥터의 지도를 펼치는 사람처럼 앉았다.

어디서 숨을지.
어디서 끌어들일지.
어디서 피를 내고, 어디서 멈출지.

그런 것들을 이미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자세였다.

민다우가스는 원탁을 둘러보더니 낮게 웃었다.

“죄를 어디까지 짊어지냐고?”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패를 가볍게 밀었다.

“좋은 질문이다. 왕관 쓴 자들이 좋아할 만한 말이군. 무겁고, 근사하고, 스스로를 비극으로 꾸미기 좋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민다우가스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눈은 차가웠다.

“하지만 숲은 그런 말을 듣고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침략자는 왕의 죄책감이 깊다고 물러나지 않는다. 불탄 마을은 군주의 눈물이 많다고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

그는 원탁 위에 손을 얹었다.

“통치자는 죄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계산한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살렸고, 누구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그 계산이 끝나면 결과를 남긴다. 그 결과가 틀렸다면, 왕이 먼저 그 값을 치른다.”

요안나가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감상은 그다음이다.”

벨라 4세가 낮게 말했다.

“계산은 필요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짧고 무거웠다.

“하지만 계산한 뒤에는 묻어야 한다.”

민다우가스가 벨라를 보았다.

벨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왕국은 불탔다.”

그 한 문장만으로도 원탁 위에 재가 내려앉는 듯했다.

“그 뒤에도 왕관은 남았다.”

벨라의 시선은 목패가 아니라, 목패 너머의 무너진 헝가리를 보고 있었다.

“남았기에, 다시 세워야 했다.”

그녀는 원탁 위에 손을 얹었다.

“죄를 짊어진다는 말은 쉽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데에는 돌과 사람과 시간이 든다.”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하! 맞는 말이다, 마자르의 여왕.”

그 웃음은 호방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칼끝 같은 구분이 있었다.

“돌과 사람과 시간. 결국 왕국은 그 셋을 먹고 버틴다. 차이는 이거겠지. 나는 그 셋을 먼저 세고, 그다음 묻는다. 누가 울었는지.”

벨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너무 늦게 묻는군.”

민다우가스는 어깨를 크게 폈다.

“늦게라도 물을 나라가 남아야 하지 않겠나.”

강당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벨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희생은 계산될 수 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러나 이름 없이 묻으면, 왕국은 다시 무너진다.”

민다우가스는 웃음을 거두었다.

“그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짧은 침묵.

그는 덧붙였다.

“이름이 남아야 다음 계산이 정확해진다.”

그레이의 펜끝이 멈칫했다.

벨라는 그 답을 마음에 들어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다만 말했다.

“정확함만으로 애도가 되지는 않는다.”

“애도만으로 방책이 되지도 않는다.”

민다우가스의 답은 빨랐다.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의 눈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래서 둘 다 필요하다.”

미하일라가 그때 입을 열었다.

“짐은 죄를 회계 항목으로만 두지 않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우아했고, 절제되어 있었다.

황제의 목소리였다.

“황제가 쏘는 화살은 개인의 선택이 아닙니다. 제국의 다음 백 년을 향한 칙령입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피를 흘릴 때, 그 피는 계산만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활시위를 잡듯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렇기에 짐은 그 업을 왕관 아래에 묶습니다. 누군가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

민다우가스가 미하일라를 보았다.

“왕관 아래라.”

그는 웃지 않았다.

“좋은 금고군. 문제는 금고가 무거워질수록 왕이 백성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진다는 점이다.”

미하일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녀가 답하기 전,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그 왕관 아래에서 울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디에 둡니까, 폐하.”

그 말은 칼보다 조용했다.

그래서 더 깊게 들어갔다.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예법이 있었다.

동시에 예법으로 다 덮이지 않는 상처가 있었다.

요안나는 천천히 말했다.

“폐하들께서는 죄를 짊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그녀의 손이 원탁 위에 놓였다.

작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 죄를 짊어진다는 말은, 상처 입은 이들에게 조용히 있으라는 뜻입니까?”

강당이 얼어붙었다.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였다.

황제는 말해야 할 때를 안다.

그리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도 안다.

“아닙니다, 폐하.”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죄는 왕관 아래 숨겨져서는 안 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어린 이상만이 아니라, 이미 상처를 입고도 평화를 말해야 하는 사람의 단단함이 있었다.

“왕관은 무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게가 사람들의 목소리를 누르는 데 쓰여서는 안 됩니다.”

민다우가스는 요안나를 보며 짧게 웃었다.

“평화의 황제답군.”

요안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평화는 조용히 있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건 맞다.”

민다우가스는 예상보다 쉽게 인정했다.

“입을 막은 백성은 조용한 것이 아니다. 나중에 더 비싸게 터질 뿐이지.”

요안나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 답은 냉정했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요안나 폐하의 말은 옳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투장에서 가장 먼저 서던 손.

죄악의 갑주를 입은 손.

“저는 먼저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고백에 가까웠다.

“성벽 앞에서, 관중석 앞에서, 약한 이들 앞에서. 더러운 것을 막기 위해 먼저 나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가 더러워졌다는 이유로, 뒤에 선 모두가 깨끗하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것 또한 거짓입니다.”

레이튼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호흐마이스터는 이어 말했다.

“죄를 입는 것이 미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죄입니다. 먼저 입는 자가 필요할 수는 있으나, 그 일을 칭송만 한다면 다음 세대는 더러워지는 일을 의무로 배우게 됩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미하일라도 마찬가지였다.

슈샤니크는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빈 문서가 놓여 있었다.

문서가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에게는 불편해 보였다.

마침내 슈샤니크가 말했다.

“죄를 감정으로만 다루면 아무도 살리지 못합니다.”

그 문장은 차가웠다.

하지만 무심하지는 않았다.

“통치자가 죄를 느끼는 것, 슬퍼하는 것, 밤에 잠들지 못하는 것. 그것들은 사적인 결과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빈 문서에 선을 그었다.

“누가 명령했는가. 어떤 조건에서 그 명령이 나왔는가. 누가 반대했는가. 어떤 보급과 정보가 부족했는가.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 누가 죽었는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떤 절차가 그 죽음을 막을 수 있는가.”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그녀는 한때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행정을 배운 사람이다.

그리고 한때 사람을 착취하기 위해 행정을 써버린 사람이다.

그 둘이 슈샤니크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죄를 기억하지 않는 제도는 다시 같은 일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죄책감만 있고 장부가 없다면, 그 또한 아무도 살리지 못합니다.”

민다우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슈샤니크는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넓게 웃었다.

“죄책감은 연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엔진은 못 된다. 국가를 움직이려면 구조가 필요하지.”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일부 동의합니다.”

“일부면 충분하다.”

민다우가스는 손을 내저었다.

“전부 동의하는 원탁은 대개 쓸모없다.”

레이튼은 모자를 원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오늘의 질문을 조금 바꿔도 되겠습니까?”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튼은 원탁을 둘러보았다.

“통치자가 죄를 짊어진다는 말은, 백성들이 그 죄를 잊어도 된다는 뜻입니까?”

침묵.

이번 침묵은 길었다.

민다우가스가 먼저 답했다.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호방하지 않았다.

짧고 차가웠다.

“잊으면 같은 값을 다시 낸다.”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값이 아니라 상처입니다.”

민다우가스는 요안나를 보았다.

“상처도 값이 있다.”

요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민다우가스는 이어 말했다.

“그 말이 싫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상처를 값으로 보지 않으면, 통치자는 그것을 줄이는 방법도 모른다. 다만.”

그는 손가락으로 원탁을 두드렸다.

“값을 매긴다는 말이, 그 사람의 눈물을 싸게 산다는 뜻은 아니다.”

그 말은 민다우가스답게 거칠었다.

그러나 방금 전보다 더 정확했다.

레플리카가 관객석에서 입을 열었다.

“계산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플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원탁까지 충분히 닿았다.

“필요한 희생이라는 말은 조심해야 한다. 희생당하는 사람에게는 필요가 아니라 고통으로 오니까.”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통치자는 그 고통까지 계산해야 한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계산한 뒤에도, 그 사람을 보러 가야 한다.”

그 말에 원탁의 공기가 달라졌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살아남은 자가 통치자의 결정을 이해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아픈 사람은 논리로 먼저 낫지 않는다.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설명하기 전에, 그 사람이 아직 숨 쉬는지 봐야 한다.”

벨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 한마디는 짧았지만 무거웠다.

민다우가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말했다.

“그래. 그래서 살아남겨야 한다. 보러 갈 사람도, 원망할 사람도, 다시 세울 사람도.”

레플리카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뒤에는 고통을 줄여야 한다.”

“그건 네 일이다.”

민다우가스는 건조하게 말했다.

“내 일은 그럴 수 있는 판을 남기는 것이다.”

레플리카는 그를 오래 보았다.

“그 판이 사람을 눌러 죽이지 않게 해라.”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좋은 경고군.”

이상한 합의였다.

차갑고 뜨거운 말들이 부딪쳤지만, 완전히 깨지지는 않았다.

그때 아스테르다스가 관객석에서 손을 들었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

아스테르다스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에는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유성이 품은, 민다우가스와는 다른 온도가 있었다.

“잠깐만, 전하께 한마디 해도 될까?”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았다.

“말해라.”

아스테르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검은 자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무엇을 자를지는 쥔 사람이 정하지.”

그는 원탁의 목패들을 보았다.

“사람도 부품처럼 쓸 수는 있겠지. 전쟁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놓고, 국가는 가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세우니까.”

그의 목소리는 비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동의도 아니었다.

“하지만 부품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사람이 왜 그 자리에서 빛나려 했는지는 사라져.”

아스테르다스는 아주 작게 웃었다.

“나는 별이 떨어지는 자리도 결과라고 생각해. 하지만 별이 왜 빛났는지까지 지워버리면, 밤하늘은 그냥 계산표가 되어버리잖아.”

민다우가스는 아스테르다스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크게 웃었다.

“하! 역시 너답군, 아스테르다스.”

그 웃음은 진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차가운 평가도 있었다.

“좋다. 네 말도 맞다. 계산표만 보고 전쟁하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백성은 구조만으로 죽지 않고, 구조만으로 싸우지도 않는다.”

아스테르다스는 조금 놀란 듯했다.

민다우가스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나는 리투아니아가 살아남는 구조를 만든다. 너는 그 구조 위에서 사람이 숨 쉴 자리를 본다. 둘 다 필요하다.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했나?”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 전하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다만 말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

민다우가스는 코웃음을 쳤다.

“말해도 되는 자리니까 말했다. 자주 기대하지 마라.”

“응. 별똥별도 자주 떨어지면 별똥별이 아니니까.”

“앉아라.”

“네.”

아스테르다스는 웃으며 앉았다.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저게 감동적인 대화야?”

아스테르다스는 작게 답했다.

“리투아니아식으로는 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네.”

원탁 위의 공기는 조금 달라졌다.

레이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 하나 묻겠습니다.”

그는 민다우가스와 벨라, 미하일라, 요안나를 차례로 보았다.

“통치자는 자신의 죄를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마음속입니까, 장부입니까, 법입니까, 왕관입니까, 아니면 백성 앞입니까?”

슈샤니크가 답했다.

“장부와 법입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백성 앞에도 두어야 합니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왕관 아래에 두되,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몸으로 막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막았다는 이유로 끝났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벨라가 말했다.

“성벽에 남겨야 한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벨라는 천천히 말했다.

“돌은 기억한다.”

그녀의 말은 짧았다.

“여왕이 잘못 세운 성벽은 무너진다. 여왕이 다시 세운 성벽은 묻는다. 다음에도 이렇게 세울 것인가.”

그녀는 원탁 위에 놓인 목패를 손끝으로 밀었다.

“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나는 성벽에도 둔다. 우물에도 둔다. 곡창에도 둔다. 길에도 둔다.”

푸리나는 조용히 물었다.

“왜요?”

벨라는 그녀를 보았다.

“다시 불타지 않게 하려고.”

그 말은 너무 단순했다.

그래서 누구도 가볍게 받을 수 없었다.

민다우가스는 짧게 말했다.

“동의한다.”

미하일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요새도 그렇게 세워져야 합니다.”

요안나는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성벽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목소리도 남아야 합니다.”

벨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잠시 침묵.

“그래.”

그녀가 말했다.

“성벽만 있으면 감옥이 된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푸리나는 이 모든 말을 들으며 원탁을 바라보았다.

이건 승패를 낼 수 있는 논쟁이 아니었다.

민다우가스의 계산이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벨라의 재건이 부족하다고 할 수 없었다.
미하일라의 칙령이 단순 폭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요안나의 평화가 어린 말뿐이라고 할 수 없었다.
호흐마이스터의 먼저 더러워지는 갑주도 필요했다.
슈샤니크의 장부도 필요했다.
레이튼의 질문도 필요했다.
레플리카의 고통도, 아스테르다스의 빛도 필요했다.

그렇다면 답은 어디에 있는가.

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왕은 어떻게 해야 해?”

그 질문은 사회자의 질문이 아니었다.

푸리나 헤툼의 질문이었다.

칼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군주.
극장주.
박수를 믿는 사람.
그러나 침묵을 배워가는 사람.

레이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원탁에 앉은 왕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민다우가스가 먼저 크게 웃었다.

“살아남아라, 헤툼.”

그 말은 호방했다.

하지만 뒤따라온 말은 차가웠다.

“살아남은 왕만이 후회도, 애도도, 배상도 할 수 있다. 죽은 왕의 죄책감은 백성에게 아무 쓸모 없다.”

벨라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세워라.”

미하일라가 말했다.

“전쟁을 끝내라.”

요안나가 말했다.

“끝낸 뒤, 사람들의 손을 다시 잡아라.”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먼저 설 때는 서십시오. 하지만 혼자 선다고 믿지는 마십시오.”

슈샤니크가 말했다.

“기록하십시오. 기록하지 않은 죄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아픈 사람을 보러 가라.”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그리고 잊지 마. 결과 위에도 사람이 숨 쉬어야 해.”

마지막으로 레이튼이 말했다.

“그리고 폐하. 결론을 너무 빨리 닫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

그 말들은 서로 모순되었다.

그런데 모두 필요했다.

왕관은 하나의 답으로 쓰기에는 너무 무거운 물건이었다.

그레이가 조용히 판정표를 정리했다.

“6막은 승패 판정이 불가능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떴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대신 공동 명제를 채택합니다.”

그녀는 장부를 읽었다.

“통치자는 죄를 감정으로만 품어서는 안 된다. 장부와 법, 성벽과 제도, 백성 앞의 설명과 피해자의 목소리 속에 남겨야 한다. 필요한 희생이라는 표현은 고통을 숨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죄를 짊어진다는 말은 누구의 침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강당은 조용했다.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통치자는 결론을 닫은 뒤에도, 그 결론 때문에 아픈 사람을 보러 가야 한다.”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나는 조용히 눈을 내렸다.

미하일라는 긴 숨을 내쉬었다.

민다우가스는 손가락으로 원탁을 한 번 두드렸다.

“좋군. 쓸 수 있는 결론이다.”

그 말은 그다운 칭찬이었다.

벨라는 짧게 말했다.

“적어라.”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아카식도 적었다.

이번 기록에는 농담이 없었다.

《6막 결론. 왕관은 죄를 없애지 못한다. 다만 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무겁게 남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왕이 죄를 짊어진다는 말은 백성의 침묵을 뜻하지 않는다. 성벽, 장부, 법, 설명, 고통의 방문. 모두 필요.》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그러나 박수는 치지 않았다.

오늘은 박수보다 고개 숙임이 어울리는 막이었다.

그녀는 원탁의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푸리나에게는 드문, 장식 없는 말이었다.

민다우가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의제를 준비해라.”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감상은 없어?”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감상? 좋다. 있다.”

푸리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민다우가스는 원탁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이 원탁은 쓸 만하다. 서로 듣기 싫은 말을 했는데도 칼이 안 뽑혔으니까.”

그는 손을 내저었다.

“이 정도면 학술제치고는 대단한 성과다.”

아스테르다스가 뒤에서 웃었다.

“전하식 극찬이네.”

죠니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조금 알아듣겠네.”

벨라 4세는 무너진 도시 모형 쪽을 잠깐 보았다.

“다음에는 재건을 말해야 한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곧 그럴 거야.”

벨라는 짧게 말했다.

“성벽을 먼저 세워라.”

푸리나는 아주 살짝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 무대도 세우면?”

벨라는 그녀를 보았다.

잠깐.

“무대가 사람을 머물게 한다면.”

푸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머물게 할게.”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워라.”

요안나는 그 대화를 듣고 조용히 웃었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 없이 활이 없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슈샤니크는 이미 이 막의 결론을 제도화하려면 어떤 조항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갑주 장갑을 다시 끼웠다.

레이튼은 모자를 썼다.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좋은 질문은 왜 이렇게 아파?”

레이튼은 부드럽게 답했다.

“살아 있는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지요.”

그레이는 그 말도 적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웃지 않았다.

다만 원탁 위에 남은 왕관 목패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목패들은 여전히 같은 크기였다.

하지만 그 위의 그림자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죄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제 한 사람의 가슴 안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장부에 남았고, 성벽에 남았고, 법에 남았고, 고통의 자리에도 남았다.

그리고 질문으로 남았다.

등불 아래에서, 왕관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무게를 서로에게 숨기지 않았다.
게오르기아는 니케아의 “로마를 가르치는” 교육자이자 보편적 스승으로 두고, 요안나·미하일라·니케아 전체의 구도도 그 설정에 맞춰 반영해서 이어갈게.

《등불 아래의 학술제》

7막 — 배움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7막의 강당은 교실이 되었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이 만들어낸 교실은 평범하지 않았다.

한쪽 벽에는 칠판이 있었다.
다른 한쪽 벽에는 제국의 지도와 항로, 세법 도표, 별자리, 아이들이 그린 것 같은 삐뚤삐뚤한 도시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교재가 놓여 있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필사본.
로마 수사학 교본.
낡은 병법서.
바그다드에서 건너온 수학 필사본.
알렉산드리아의 잔재라 적힌 오래된 천문 주석.
그리고 푸리나가 직접 쓴 듯한 제목 없는 희극 초안.

라플리가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저 희극 초안도 교재야?”

푸리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물었다.

“공식 교재로 등록된 문서입니까?”

“오늘 등록하면 돼.”

“교육 과정 편성에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극장식 특별 교육 과정!”

게오르기아 아크로폴리티사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그녀는 교탁 앞에 서 있었다.

니케아의 교육자.
철학자들의 군주.
보편적인 스승.
황제의 아버지.

그러나 그 위엄은 갑옷처럼 무겁지 않았다.

그녀의 위엄은 오래된 도서관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불타고 남은 서가에서 마지막 책을 주워 먼지를 털고, 다음 세대에게 “읽어라”라고 건네는 사람의 위엄.

푸리나는 게오르기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의 주제는 이것!”

그녀는 칠판에 크게 적었다.

《사람은 어떻게 배우는가?》

레이튼은 모자를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아카식은 기록대에 앉아 펜을 굴렸다.

“좋은 질문이긴 한데, 답이 너무 많겠는데?”

라이자는 손을 들었다.

“저는 만들어보면서 배운다고 생각해요.”

푸리나는 바로 손뼉을 칠 뻔하다가, 5막의 기억 때문인지 살짝만 웃었다.

“좋아. 아주 라이자다운 답.”

레이튼이 말했다.

“저는 질문하며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아카식이 말했다.

“나는 기록하며 배운다고 할래. 실패를 안 적어두면 다음 사람이 같은 구덩이에 또 빠지거든.”

푸리나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나는 연극으로 배운다고 생각해!”

그녀는 칠판 아래에서 몸을 빙글 돌렸다.

“사람은 남의 입장이 되어보고, 우스꽝스럽게 실패해보고, 자기가 어떤 장면에 서 있는지 알게 될 때 배우는 거야.”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각자 답변. 제작, 질문, 기록, 연극.”

푸리나는 게오르기아를 보았다.

“게오르기아 선생님은?”

게오르기아는 잠시 칠판의 질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 네 가지는 모두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오, 모두 정답?”

“아닙니다.”

게오르기아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모두 시작입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게오르기아는 교탁 위에 손을 올렸다.

“배움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배운 것을 다음 아이에게 건넬 수 있을 때, 장인이 배운 손의 감각을 제자에게 남길 수 있을 때, 황제가 배운 실패를 법과 제도와 기억으로 남길 수 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멀리까지 갔다.

“그때 비로소 지식은 개인의 재주를 넘어 왕국의 숨이 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왕국의 숨.”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성벽으로만 세워지지 않습니다. 제국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제국은 다시 숨을 쉽니다.”

요안나는 관객석에서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미하일라는 팔짱을 낀 채 눈을 내리깔았다.

슈샤니크는 이미 그 문장을 행정 교육 과정에 넣을 수 있을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게오르기아는 계속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로마의 몰락은 단 한 순간의 무지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카식의 펜이 멈췄다.

그는 드물게 농담을 하지 않고 그 문장을 적었다.

레이튼이 물었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정답을 가르치는 일이 아닙니까?”

게오르기아는 그를 보았다.

“정답도 가르쳐야 합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예상보다 단호하시군요.”

“아이에게 물이 위험한지 묻기만 하고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성벽이 왜 무너지는지, 법전이 왜 필요한지, 식량을 어떻게 나누는지, 활시위를 어떻게 다루는지, 우물에 시체가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그런 것은 정답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러나 정답만 가르치면, 아이는 정답이 없는 날에 멈춥니다.”

레이튼의 눈이 밝아졌다.

게오르기아는 칠판 아래에 두 번째 문장을 적었다.

《정답은 길을 시작하게 하고, 질문은 길이 끊긴 뒤에도 걷게 한다.》

푸리나는 작은 소리로 감탄했다.

“이거 완전 명대사야.”

그레이가 말했다.

“교육 원칙으로 기록하겠습니다.”

푸리나가 속삭였다.

“그레이도 감동했지?”

“필요한 문장입니다.”

“그게 감동이야.”

“아닙니다.”

라이자는 책상 위의 작은 나무 조각과 은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만들어보는 건 어디에 들어가나요?”

게오르기아가 물었다.

“라이자 폐하께서는 무엇을 만들며 배우셨습니까?”

라이자는 잠시 생각했다.

“은이요.”

그녀는 조금 웃었다.

“아니, 정확히는 은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현실로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교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라이자는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완성된 답을 알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은이 어디서 찢어지는지, 어떤 회로가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어떤 심장이 너무 많이 받아들여서 망가지는지, 만들어보고 실패하고 고치면서 배웠어요.”

그녀는 소피아가 만든 접착제 병을 보고 웃었다.

“손으로 해보지 않으면, 재료가 어디서 울고 있는지 몰라요.”

라플리가 뒤쪽에서 말했다.

“재료가 운다니, 또 이상한 표현이네.”

소피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 때도 있어요.”

라플리는 잠시 침묵했다.

“너까지 그러면 반박이 귀찮아져.”

카를로타가 말했다.

“재료가 운다는 표현은 시적이지만, 결이 틀어지는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플리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내가 제일 정상인 것 같네.”

그레이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판단은 보류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게오르기아는 라이자를 보며 말했다.

“제작은 실패를 손에 남깁니다. 머리로 배운 실패보다 오래 남지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손이 기억해요.”

게오르기아는 칠판에 세 번째 문장을 적었다.

《손이 기억한 실패는 다음 손을 덜 다치게 한다.》

카를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플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그 문장은 좀 괜찮네.”

푸리나는 이제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그럼 연극은?”

게오르기아의 시선이 푸리나에게 향했다.

푸리나는 교탁 앞에 섰다.

“나는 사람이 자기 인생을 너무 멀리서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녀는 손가락으로 칠판의 질문을 톡 건드렸다.

“책으로 보면 남의 이야기 같고, 장부로 보면 숫자 같고, 법으로 보면 조항 같아. 물론 다 필요하지만, 사람은 가끔 자기가 어느 장면에 서 있는지 몰라서 주저앉잖아.”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푸리나는 말을 이었다.

“연극은 그걸 보여줄 수 있어. 네가 지금 비극의 한가운데 있는지, 희극의 첫 장면에 있는지, 아니면 아직 제목도 붙지 않은 막간에 서 있는지.”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실패해도, 무대 위 실패는 다시 연습할 수 있어. 현실에서 한 번 실패하면 너무 아픈 것도, 극장에서는 조금 덜 아프게 다시 해볼 수 있지.”

아카식이 적었다.

“연극은 실패의 안전한 예행연습.”

푸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거!”

게오르기아는 푸리나를 한참 보았다.

“좋은 연극은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푸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예. 다만 웃음이 끝난 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도 남겨야 합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5막의 등불들이 떠올랐다.

아레의 침묵.

그레이의 장부.

레플리카의 고통.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배웠어.”

게오르기아는 칠판에 네 번째 문장을 적었다.

《좋은 연극은 마음을 열고, 좋은 교육은 열린 마음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남긴다.》

레이튼은 모자를 들었다.

“그렇다면 질문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게오르기아는 그를 보았다.

“질문은 교실의 창입니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문이 아니라 창입니까?”

“문은 나가게 합니다. 창은 밖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게오르기아는 조용히 말했다.

“모든 아이가 당장 문을 열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창이 있으면, 자신이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레이튼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은 그의 [문답의 서재]와도 닿아 있었다.

아직 별자리로 이어지지 않은 별들의 천장.
끝나지 않은 질문.
닫히지 않은 결론.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모른다는 것은, 아직 물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물을 수 있다면,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

아카식이 손을 들었다.

“그럼 기록은?”

푸리나가 웃었다.

“기록자가 자기 역할 어필한다.”

아카식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기록도 밥값은 해야지.”

게오르기아는 아카식을 보았다.

“기록은 교실의 바닥입니다.”

아카식이 눈을 깜박였다.

“천장이 아니라?”

“천장은 이상과 질문과 별이 맡아도 됩니다.”

게오르기아는 오래된 책 한 권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바닥이 없으면 아이들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기록은 누군가가 이미 넘어졌던 자리, 누군가가 이미 걸었던 길, 누군가가 이미 틀렸던 답을 남깁니다.”

아카식은 펜을 굴리던 손을 멈췄다.

“기록은 실패의 무덤이 아니군.”

게오르기아가 말했다.

“좋은 기록은 실패의 계단입니다.”

아카식은 조용히 웃었다.

“그건 마음에 드네.”

그레이는 이미 기록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정답.
질문.
제작.
연극.
기록.
전승.

너무 많았다.

그래서 푸리나는 말했다.

“좋아. 이제 과제!”

라플리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드디어 실습이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폭발 실습은 아닙니다.”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예방입니다.”

푸리나는 교탁 위에 작은 도시 모형을 올렸다.

아르카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벽이나 우물, 배급표가 중심이 아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무너진 학교가 있었다.

지붕은 반쯤 내려앉았고, 책은 젖어 있었고, 아이들은 피난민 구역과 병영, 여관, 장터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과제. 전쟁 이후 아르카다에 학교를 다시 연다. 단, 조건이 있어.”

그레이가 조건을 읽었다.

“첫째. 교재 부족. 둘째. 아이들의 출신과 언어가 다름. 셋째. 일부 아이들은 가족을 잃음. 넷째. 성인들도 재교육이 필요함. 다섯째. 도시는 아직 복구 중이므로 교육은 생존과 재건에 직접 도움이 되어야 함.”

푸리나는 참가자들을 보았다.

“어떻게 가르칠까?”

게오르기아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아이 목패들을 보았다.

그 목패들은 작았다.

너무 작았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먼저, 학교를 건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건물이 아닌 학교?”

“예. 첫 학교는 시간표입니다.”

게오르기아는 칠판에 선을 그었다.

“아침. 생존 교육. 물을 끓이는 법, 상한 식량을 구분하는 법, 상처를 씻는 법, 배급표를 읽는 법.”

라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해볼 수 있어야 해요.”

“그렇습니다.”

게오르기아는 다음 줄을 그었다.

“낮. 공동 작업. 수레 수리, 벽돌 나르기, 약초 구분, 간단한 계산, 기록 보조.”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 보조는 좋네. 아이들이 자기 이름 쓰는 법부터 배울 수 있어.”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배급표를 읽을 수 있어야 사기를 당하지 않습니다.”

게오르기아는 세 번째 줄을 적었다.

“저녁. 이야기 시간.”

푸리나의 눈이 밝아졌다.

“연극?”

“예. 하지만 웃음만을 위한 연극은 아닙니다.”

게오르기아는 푸리나를 보며 말했다.

“그날 배운 것을 이야기로 다시 묶습니다. 물을 끓이지 않아 아팠던 이야기, 배급표를 잘못 읽어 줄을 놓친 이야기,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아이가 같은 수레를 고친 이야기. 아이들은 자기 하루를 이야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좋아. 그건 내가 맡을 수 있어.”

레이튼이 말했다.

“그리고 질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작은 목패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답을 주기만 하면, 묻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묻지 않는 아이는 나중에 부당한 명령도 질문하지 못합니다.”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 시간은 저녁 이야기 뒤에 둡니다. 단,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푸리나가 놀랐다.

“왜?”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답이 늦어지는 것을 견디는 법도 배워야 하니까요.”

게오르기아가 말했다.

“그리고 교사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사가 모른다고 말할 수 없으면, 아이도 언젠가 모르는 것을 숨깁니다.”

아카식이 감탄했다.

“그건 기록할 만하다.”

그는 썼다.

《좋은 교사는 모른다는 말을 숨기지 않는다.》

라이자는 손을 들었다.

“제작 시간에는 아이들이 뭔가 완성해야 하나요?”

게오르기아가 답했다.

“반드시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라이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래도 괜찮아요?”

“완성품만 평가하면, 아이는 실패한 손을 숨깁니다. 첫 달에는 실패 기록을 남깁니다.”

아카식이 바로 말했다.

“실패 기록장!”

푸리나가 웃었다.

“아카식, 신났네.”

“기록자가 실패 기록장을 싫어할 수는 없지.”

라이자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아이들이 만든 실패품도 보관해요. 나중에 다시 보면, 어디서 나아졌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소피아가 뒤쪽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망가진 것도 재료가 되니까요.”

게오르기아는 그 말을 칠판에 적었다.

《실패품 보관. 다음 수업의 재료로 사용.》

푸리나는 손뼉을 치려다 말고, 대신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좋아. 그럼 어른들은?”

게오르기아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어른 교육은 더 어렵습니다.”

라플리가 말했다.

“왜? 애들이 더 어렵지 않아?”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은 모른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전에 배울 수 있습니다. 어른은 모른다는 사실이 자신의 체면을 해친다고 느낍니다.”

슈샤니크가 관객석에서 조용히 말했다.

“특히 귀족과 관료가 그렇습니다.”

라플리가 즉시 말했다.

“귀족 마법사도.”

카를로타가 말했다.

“장인도 가끔 그렇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모두에게 찔리는 말이네.”

게오르기아는 성인 교육 항목을 적었다.

“성인반은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 생존 문해. 배급표, 계약서, 세금 유예 문서, 치료 안내문 읽기. 둘째, 기술 재교육. 수리, 위생, 간단한 회계, 경보 장치 사용. 셋째, 시민 토론.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이 같은 도시 규칙을 이해하는 시간.”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시민 토론은 꼭 필요합니다.”

게오르기아는 그녀를 보았다.

“예, 폐하. 평화는 선언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습관으로 남아야 합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미하일라도 마찬가지였다.

게오르기아는 칠판에 마지막 줄을 적었다.

《평화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교육으로 습관이 된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이건 요안나에게 필요한 문장이네.”

요안나는 조용히 웃었다.

“제게만은 아닐 겁니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서 천천히 풀렸다.

푸리나는 전체안을 보았다.

아르카다 임시 학교 계획.

건물보다 시간표를 먼저 세운다.

아침에는 생존 교육.

낮에는 공동 작업.

저녁에는 이야기와 연극.

이후 질문 시간.

교사는 모른다는 말을 숨기지 않는다.

실패품은 보관해 다음 수업 재료로 쓴다.

성인반은 생존 문해, 기술 재교육, 시민 토론으로 나눈다.

평화는 교육으로 습관이 된다.


그레이가 판정표를 들었다.

“판정하겠습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읽었다.

“게오르기아 경. 교육의 제도화, 로마니타스 전승, 아동·성인 교육 구조 설계 우수.”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 폐하. 연극을 통한 하루의 서사화와 실패의 안전한 재연 제안 우수.”

푸리나는 조금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레이튼 경. 질문 시간, 모른다는 말의 교육적 가치, 결론 유예 제안 우수.”

레이튼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라이자 폐하. 제작 실습, 손의 기억, 실패품 보관 및 재사용 제안 우수.”

라이자는 웃었다.

“아카식. 실패 기록장, 이름 쓰기, 기록 기반 전승 제안 우수.”

아카식이 손을 들었다.

“칭찬 기록해도 돼?”

알토가 관객석에서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총합 판정. 공동 교육안 채택.”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 아르카다 임시 학교 개교!”

강당의 칠판 위에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아르카다 첫 학교 시간표》

그 아래, 아이 목패들이 하나둘 책상에 앉았다.

그들은 아직 실제 아이가 아니었다.

모의 과제 속 목패일 뿐이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실제 아이들이 떠올랐다.

배급표를 읽지 못해 줄을 놓친 아이.
우물이 왜 봉쇄되었는지 몰라 울던 아이.
부모의 이름을 쓰지 못해 장부 앞에서 멈춘 아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같은 수레를 밀어야 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담만이 아니었다.

빵도 필요하고, 글자도 필요하고, 질문도 필요하고, 실패해도 혼나지 않는 손도 필요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하루를 이야기로 묶어줄 무대도 필요했다.

게오르기아는 칠판을 닫으며 말했다.

“배움은 사람을 더 똑똑하게 만드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강당을 둘러보았다.

“배움은 사람이 자기 도시를 이해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자신이 왜 빵을 받는지, 왜 이름을 적어야 하는지, 왜 우물을 막아야 하는지, 왜 죽은 이를 기억해야 하는지, 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과 같은 줄에 서야 하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깊어졌다.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제국은 다시 숨을 쉽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짝.

그 박수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에는 어울렸다.

아이 하나가 처음 자기 이름을 쓴 것 같은 박수였다.

아카식은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7막 결론. 사람은 정답으로 시작하고, 질문으로 멈추지 않으며, 손으로 실패하고, 이야기로 하루를 이해하고, 기록으로 다음 사람에게 건넨다. 교육은 지식을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도시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레이는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공식 기록에 반영하겠습니다.”

아카식은 작게 웃었다.

“오늘은 자주 반영되네.”

게오르기아가 말했다.

“좋은 기록은 좋은 교실의 두 번째 문입니다.”

아카식은 펜을 멈췄다.

“그것도 적어야겠네.”

푸리나는 칠판 아래에서 양손을 펼쳤다.

“그럼 다음은 최종막이네.”

원탁 위의 아르카다 도시 모형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배급표도, 경보 상자도, 등불도, 학교도 있었다.

아직 완성된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답들이 그 안에 들어와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하나의 도시, 여러 답.”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남은 질문들.”

게오르기아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 질문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 도시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 수업 준비하자.”

강당의 교실은 천천히 사라졌다.

하지만 칠판 위 마지막 문장 하나는 조금 오래 남았다.

《평화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교육으로 습관이 된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최종막 — 하나의 도시, 여러 답

최종막의 원탁에는 도시 하나가 놓였다.

아르카다.

처음 2막에서 그것은 폐허였다.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우물은 검게 물들어 있었고, 피난민 목패는 성문 앞에 쌓여 있었다. 병영에는 부상자가 넘쳤고, 사망자 명단은 비어 있었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주민들은 같은 광장에 서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했다.

그 뒤로 여러 답이 쌓였다.

요안나의 보호 선언.
슈샤니크의 임시 등록표와 시민 절차.
알렉산드리나의 배급선.
그레이의 사망자 명단과 재발 방지 장부.
아스테리아의 교역로와 정보망.
알토의 조건부 보증 계약.
라이자와 라플리, 카를로타와 소피아의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
아레와 타마르, 레플리카와 여관좌가 세운 등불과 치료소.
게오르기아의 임시 학교 시간표.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직 따로 놓인 답이었다.

오늘의 문제는 그것들을 하나의 도시로 묶는 일이었다.

푸리나는 원탁 앞에 섰다.

이번에는 화려한 개막 대사를 바로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도시를 보았다.

아르카다의 작은 성벽.
작은 우물.
작은 광장.
작은 병영.
작은 학교.
작은 등불.

작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나라란, 결국 그 작은 것들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최종막의 주제.”

그녀는 원탁 위 도시를 가리켰다.

“몽골 공세 이후 폐허가 된 다민족 변경 도시를 어떻게 다시 살릴 것인가.”

그레이가 장부를 들었다.

“최종 과제 조건을 고지하겠습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아르카다는 전쟁 피해를 입은 변경 도시입니다. 성벽 일부 붕괴, 우물 일부 오염, 식량 부족, 교역로 단절, 피난민 유입, 사망자 명단 미완성, 부상자 다수, 학령 아동 분산, 상인 공동체 불신, 종교별 장례 갈등, 병력 피로 누적, 장기 방어 계획 부재.”

라플리가 낮게 말했다.

“욕심 많네, 이 도시.”

소피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라는 게 원래 손댈 곳이 많으니까요.”

그레이는 계속했다.

“목표. 첫째, 30일 생존. 둘째, 1년 내 기능 회복. 셋째, 5년 내 재건 및 방어 지속 가능성 확보. 넷째, 주민 간 내전 또는 대규모 이탈 방지.”

푸리나는 덧붙였다.

“그리고 다섯째.”

그녀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이 도시가 단순히 버티는 곳이 아니라, 다시 살고 싶은 곳이 되게 할 것.”

벨라 4세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살고 싶은 곳.”

그녀는 짧게 말했다.

“좋다. 그러나 먼저 살아남아야 한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오늘은 모두가 필요해요.”

그녀가 손을 펼쳤다.

[여관:극장]이 열렸다.

그러나 이번 극장은 전장도, 교실도, 공방도 아니었다.

도시였다.

원탁 위의 아르카다는 커졌고, 강당 전체가 도시의 축소 세계가 되었다.
성벽은 강당 외곽을 따라 솟았고, 우물은 중앙 광장에 놓였고, 여관과 학교와 공방과 병영과 시장이 각자의 자리를 얻었다.

각 참가자는 도시의 어느 한 장소 앞에 섰다.

푸리나는 그 모든 것을 보았다.

《무대 위의 극작가》.

그녀는 이제 전력이나 지식만 보지 않았다.

소망을 보았다.

요안나는 사람들이 다시 서로를 시민으로 부르길 바랐다.
슈샤니크는 선언이 무너지지 않도록 장부와 법으로 뼈대를 세우려 했다.
그레이는 이름이 빠지지 않게 하려 했다.
알렉산드리나는 첫 달의 배급이 끊기지 않게 하려 했다.
벨라는 도시가 다시 불타지 않는 구조를 세우려 했다.
라이자는 회로와 자재와 사람을 부드럽게 이어주려 했다.
라플리는 하늘과 마력의 경보망을 세우려 했다.
카를로타는 실제 손이 쓸 수 있는 도구를 만들려 했다.
소피아는 망가진 것들에서 새 쓸모를 찾으려 했다.
아레와 타마르는 죽은 자가 전쟁의 먼지 속에 남지 않게 하려 했다.
레플리카는 살아남은 자가 계속 고통만 견디지 않게 하려 했다.
게오르기아는 이 도시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만들려 했다.
아스테리아는 길과 편지와 상단과 소문을 다시 잇고 싶어 했다.
알토는 계약과 기록이 책임을 남기게 하려 했다.
민다우가스는 이 도시가 다음 전쟁에서도 살아남을 판을 보려 했다.
미하일라는 전쟁이 다시 이 도시를 삼키지 않도록 방위 질서를 세우려 했다.
요안나는 그 질서가 사람의 목소리를 누르지 않게 하려 했다.

그리고 푸리나는.

그 모든 답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하나의 도시가 되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강당의 도시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도시의 각 구역에 작은 조명이 켜졌다.

배급소.
성문.
우물.
공방.
치료소.
장례 등불.
학교.
시장.
성벽.
여관.

푸리나는 크게 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명령이 아니라 호명이어야 했다.

《신은 적절히 준비된 자를 부른다》.

“요안나 폐하.”

요안나가 광장 앞으로 나섰다.

“슈샤니크 경.”

슈샤니크가 그녀 옆에 섰다.

“알렉산드리나.”

배급 수레가 움직였다.

“그레이.”

장부가 펼쳐졌다.

푸리나는 먼저 30일 생존의 축을 세웠다.

요안나가 광장 중앙에 섰다.

그녀의 손에는 선언문이 있었다.

“오늘 이 도시의 빵을 받는 자는, 오늘 이 도시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광장을 통과했다.

“혈통과 언어와 신앙이 다르더라도, 이 도시의 빵을 함께 받고 이 도시의 우물을 함께 지키는 이들은 서로를 적으로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성된 시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임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슈샤니크가 그 선언 옆에 문서를 놓았다.

“임시 시민 보호령. 배급, 치료, 치안, 장례, 노동 배치의 기준을 출신이 아니라 필요와 역할로 둡니다. 단, 모든 수령과 배치는 기록합니다. 선언은 장부 없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조용히 말했다.

“장부는 선언 없이 사랑받지 못합니다.”

슈샤니크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므로 둘 다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배급 수레를 네 구역으로 나누었다.

“첫 3일은 생존입니다. 병사와 시민 대표가 같은 줄에서 빵을 받습니다. 부상자는 이동 배급. 수습반은 별도 배급 우선권. 병영과 광장 사이에 보급선을 둡니다. 수레는 지키되, 수레만 지키다 사람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레이는 그 옆에서 이름표를 정렬했다.

“임시 등록표 발행. 신원 미상자도 배급 대상. 단, 추후 확인 의무. 사망자 명단과 생존자 명단을 분리하되, 가족 찾기 게시판과 연결합니다.”

그녀는 펜을 움직였다.

“이름이 없어서 빵을 못 받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없다는 사실도 사라지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광장 위의 빛이 안정되는 것을 보았다.

첫 3일.

사람들이 굶지 않는 도시.

아직 부족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다음 그녀는 성벽을 보았다.

“벨라 여왕.”

벨라 4세가 성벽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화려한 설계도를 펼치지 않았다.

무너진 돌 하나를 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돌은 작았다.

그러나 그 돌에는 불탄 왕국의 기억이 있었다.

“도시는 위로만 세우지 않는다.”

벨라는 말했다.

“먼저 버틸 곳을 세운다.”

그녀는 성벽의 무너진 동남부를 가리켰다.

“첫해에는 완전한 성벽을 꿈꾸지 마라. 피난처가 되는 탑, 식량을 보관할 석조 곡창, 오염되지 않는 우물, 닫히는 성문. 네 가지가 먼저다.”

민다우가스가 성벽 옆으로 다가왔다.

“좋군. 방어 거점이 있어야 협상도 가능하다.”

벨라는 그를 보았다.

“방어만으로는 도시가 아니다.”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당연하지. 하지만 방어가 없으면 도시가 아니라 좋은 약탈지다.”

그는 성문 밖 도로를 짚었다.

“외곽에 감시소 셋. 늪지 쪽 길은 버린다. 숲길은 유인로로 둔다. 강가의 얕은 여울에는 작은 목책과 경보를 둔다. 도시는 모든 문을 열어 살지 않는다. 어떤 문을 닫을지 알아야 산다.”

미하일라가 그 옆에 섰다.

“그리고 어떤 문을 열어둘지도 알아야 합니다.”

자주빛 황제는 성벽과 광장을 함께 보았다.

“방위 질서는 시민 공동체를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병력은 우물과 배급소를 지키되, 광장을 점령하지 않습니다. 도시 내부의 무력은 보호의 형식을 가져야 합니다.”

민다우가스가 그녀를 보았다.

“제국답군.”

미하일라는 담담히 답했다.

“제국은 오래 버텨야 하니까요.”

벨라는 짧게 말했다.

“성벽, 우물, 곡창, 길. 그 옆에 병력. 그 안에 사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대는?”

벨라가 푸리나를 보았다.

“성벽이 먼저다.”

“네.”

잠깐.

벨라는 덧붙였다.

“그다음 무대다. 머물게 한다면.”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머물게 할게요.”

성벽에 두 번째 빛이 켜졌다.

첫해.

사람들이 도망만 치지 않아도 되는 도시.

아직 아름답지는 않지만, 버틸 수 있었다.

푸리나는 공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라이자, 라플리, 카를로타, 소피아.”

네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라이자는 성은 실을 도시의 곡창과 공방 사이에 걸었다.

“복구 자재는 그냥 튼튼하면 안 돼요. 사람이 만지고, 다시 쓰고, 고칠 수 있어야 해요.”

그녀는 성은으로 작은 보강재를 조형했다.

문틀.
손잡이.
우물 덮개.
수레축 보강띠.
치료소 침대의 연결부.

“은의 심장은 너무 큰 기적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고장나는 것들을 덜 다치게 해야 해요.”

라플리는 성벽 위에 작은 뇌광 경보핵을 설치했다.

“천율학파식 방어망. 접근 신호를 세 단계로 나눈다. 짐승, 사람, 기병. 그리고 폭주 방지. 지난번처럼 장치가 자기 장렬함에 취해서 타죽지 않게.”

그레이가 바로 물었다.

“소리 수치.”

라플리는 이미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적었다.”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받아들였다.

“확인했습니다.”

라플리는 승리한 얼굴이 되었다.

“나도 배운다고.”

카를로타는 공방에서 나온 도구들을 실제 손에 맞췄다.

“이 손잡이는 젖은 손에서 미끄럽습니다. 이 수레축 클램프는 오른손잡이만 생각했습니다. 이 경보핵은 설치 높이가 너무 높습니다. 지친 병사가 사다리를 세 번 오르게 하면 장치는 실패합니다.”

라이자는 바로 조정했다.

라플리는 투덜거리면서도 높이를 낮췄다.

소피아는 파손품 더미를 새 칸으로 나누었다.

“완전 수리. 임시 수리. 재료 전환. 교육용 실패품. 폐기.”

푸리나가 물었다.

“폐기도 있어?”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 살리려 하면 오히려 위험해요. 망가진 걸 쓸 수 있게 하는 것과, 위험한 걸 억지로 쓰는 건 달라요.”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좋은 장인의 판단입니다.”

소피아는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공방에서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가 여러 개 만들어졌다.

그 상자들은 영웅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도시 둘째 날, 셋째 날, 서른째 날을 버티게 하는 도구였다.

공방에 세 번째 빛이 켜졌다.

망가진 것을 그냥 버리지 않는 도시.

그러나 위험한 것을 억지로 붙들지도 않는 도시.

푸리나는 치료소와 등불 구역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레, 타마르, 레플리카, 여관좌.”

그곳은 가장 조용했다.

아레는 신원 미상자 등불을 정렬했다.

“번호는 붙이되, 번호가 이름을 대신하지 않게 하겠단다.”

그녀의 검은 실은 등불들을 묶지 않았다.

길을 잃지 않게 이어줄 뿐이었다.

“이름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약속. 그것이 임시 등불의 의미겠지.”

타마르는 장례 구역을 우물과 떨어진 곳, 그러나 도시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거리 안에 놓았다.

“나누되 갈라놓지 않습니다.”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각자의 기도는 존중하고, 전체 추도 등불은 하나로 둡니다. 죽은 자들이 서로 적으로 눕지 않도록.”

레플리카는 치료소를 병영 안과 민간 구역에 둘로 나누었다.

“아픈 사람이 치료소에 오지 못하면 치료소는 실패다.”

그녀는 통증 기록표와 수면 기록표를 붙였다.

“아프다고 말해도 배급에서 밀리지 않는다. 손이 떨린다고 말해도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악몽을 꾼다고 해서 약한 것이 아니다. 먼저 이렇게 적어둬야 한다.”

여관좌는 여관 한쪽에 이름 없는 자리를 마련했다.

간판은 없었다.

상담소도 아니었다.

그저 차가 있고, 낮은 의자가 있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모두가 자기 상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찻잔을 하나 내려놓았다.

“설명하지 못해도 머물 수 있는 곳이 있어야겠지요.”

푸리나는 이 구역에서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만 숙였다.

등불이 네 번째 빛을 밝혔다.

죽은 자가 길을 막지 않고, 산 자의 길가에 조용히 앉는 도시.

아픈 사람이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쉬어갈 수 있는 도시.

그다음은 학교였다.

“게오르기아.”

게오르기아는 무너진 학교 앞에 섰다.

그녀는 먼저 건물을 보지 않았다.

아이 목패들을 보았다.

“첫 학교는 건물이 아니라 시간표입니다.”

그녀는 세 줄을 그었다.

“아침. 생존 교육. 낮. 공동 작업. 저녁. 이야기와 질문.”

푸리나는 그 옆으로 갔다.

“저녁 이야기는 내가 도울게.”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연극은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웃음이 끝난 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도 남겨야 합니다.”

레이튼은 학교 창문을 열었다.

“질문 시간도 필요합니다.”

아카식은 작은 실패 기록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실패 기록장. 같은 곳에서 덜 넘어지려면 필요하지.”

라이자는 아이들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작은 수리 키트를 놓았다.

“실패품도 버리지 말고 다음 수업 재료로 써요.”

게오르기아는 마지막으로 칠판에 적었다.

《평화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교육으로 습관이 된다.》

학교에 다섯 번째 빛이 켜졌다.

자기 도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자라는 도시.

푸리나는 시장과 길로 시선을 돌렸다.

“아스테리아, 알토.”

아스테리아는 세 갈래 실을 꺼냈다.

상단로.
우편로.
구원군의 길.

“도시는 혼자 살아나지 않아요. 길이 있어야 합니다. 식량을 들여오고, 소문을 내보내고, 신용을 회복해야 해요.”

그녀는 남쪽 상단로에 작은 깃발을 꽂았다.

“상단에는 이 도시가 단순 폐허가 아니라 보호 선언, 배급표, 성벽 계획, 학교를 가진 도시라는 걸 보여줘야 해요. 그러면 약탈 가격이 아니라 장기 거래 가격으로 협상할 수 있습니다.”

알토는 계약서를 놓았다.

《조건부 보증 계약》

“계약은 책임을 남겨야 합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상단에는 이익을 보장하되, 지연과 재협상에는 기록 공표 조항을 둡니다. 도시도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은 다음 거래에서 가격이 됩니다.”

아스테리아는 웃었다.

“역시 기록의 대공답군요.”

알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기록은 신용의 뼈입니다.”

아카식이 멀리서 말했다.

“그 문장 좋아.”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적어도 됩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오늘은 허가가 많네.”

길에 여섯 번째 빛이 켜졌다.

밖과 다시 이어지는 도시.

하지만 무방비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약속했는지 기록하는 도시.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원탁 중앙에 섰다.

답들이 모였다.

배급.
시민 보호령.
성벽.
곡창.
우물.
치료소.
장례 등불.
공방 상자.
학교.
상단 계약.
경보망.
시민 토론.
기록장.

하지만 푸리나는 곧 알았다.

아직 하나가 부족했다.

이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도시는 제도만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것을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했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군상극:아르메니아의 노래》.

아르카다의 각 구역에서 작은 목소리들이 올라왔다.

배급소의 목소리.
우물가의 목소리.
성벽 위의 목소리.
치료소의 목소리.
학교의 목소리.
시장과 여관과 장례 등불 아래의 목소리.

처음에는 불협화음이었다.

“나는 이 도시 사람이 아니다.”
“저들은 우리 빵을 가져간다.”
“병사들이 먼저 먹을 것이다.”
“이름이 없으면 쫓겨날 것이다.”
“죽은 이가 묻히지 않았다.”
“상인들은 우리를 속일 것이다.”
“학교는 배부른 뒤에나 하는 일이다.”
“성벽이 없으면 다 소용없다.”
“성벽만 있으면 감옥이다.”

소망들이 서로 부딪쳤다.

푸리나는 그것을 억지로 지우지 않았다.

극작가는 갈등을 없애는 사람이 아니다.

갈등이 어디로 흘러야 이야기로 남을지 조율하는 사람이다.

《전지적 작가시점》.

푸리나는 수많은 초안을 보았다.

배급표가 폭동으로 찢기는 초안.
보호 선언이 법적 모호함으로 무너지는 초안.
성벽이 감옥이 되는 초안.
치료소가 병영의 연장으로 여겨지는 초안.
장례 등불이 종교 갈등의 불씨가 되는 초안.
학교가 사치라고 비난받는 초안.
상단 계약이 도시를 빚으로 묶는 초안.

완벽한 초안은 없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서로의 답이 서로를 보완하는 흐름.

푸리나는 그 흐름을 선택했다.

“좋아.”

그녀가 웃었다.

“그럼 이 도시에 첫 축제를 열자.”

그레이가 즉시 고개를 들었다.

“폐하. 재건 초기 축제는 자원 낭비—”

“큰 축제 말고.”

푸리나는 손가락을 세웠다.

“배급식, 추도식, 학교 개교식, 공방 시연, 성벽 첫 돌 놓기를 하루에 묶는 거야.”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정치적 의례군요.”

“응.”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합니다.”

벨라가 말했다.

“성벽 첫 돌은 가볍게 다루면 안 된다.”

“그래서 여왕님이 놓아주세요.”

벨라는 푸리나를 보았다.

“모의 도시다.”

“그래도요.”

벨라는 잠시 침묵했다.

“좋다.”

알렉산드리나는 말했다.

“배급식은 실제 배급과 동시에 해야 합니다. 상징만 있으면 불만이 생깁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의례와 실무 동시 진행.”

타마르는 말했다.

“추도식은 배급식보다 앞서거나 뒤서야 합니다. 섞으면 죽은 자가 장식이 됩니다.”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침에는 추도. 낮에는 성벽 첫 돌과 공방 시연. 저녁에는 배급과 학교 이야기.”

게오르기아가 말했다.

“저녁 이야기에서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쓰게 합시다.”

아카식이 웃었다.

“좋아. 이름 쓰기와 첫 기록.”

레플리카는 덧붙였다.

“그리고 치료소는 축제 밖에 두지 마라. 아픈 사람이 소외된다.”

여관좌가 말했다.

“여관 쪽에서 차를 나누겠습니다. 말하고 싶은 사람도, 말하지 않을 사람도 같이 앉을 수 있게.”

라이자는 말했다.

“공방 시연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손목 보호구를 만져보게 할게요.”

카를로타가 즉시 덧붙였다.

“제대로 착용하는 법도 가르쳐야 합니다.”

라플리는 성벽 위 경보핵을 가리켰다.

“경보음 시연도 하자. 너무 크지 않게.”

그레이가 말했다.

“사전 고지 필요.”

“알았어.”

소피아는 파손품을 들었다.

“망가진 걸 가져오면 어떤 칸으로 나누는지 보여줄게요. 완전 수리, 임시 수리, 재료 전환, 교육용 실패품, 폐기.”

민다우가스는 그 모든 것을 보다가 낮게 웃었다.

“축제라기보다 통합 훈련이군.”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좋은 축제는 원래 훈련이야.”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하! 그 말은 쓸 만하다.”

미하일라는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이 같은 순서로 같은 것을 보면, 같은 기억이 생깁니다.”

요안나는 그녀를 보았다.

둘의 시선은 짧게 부딪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요안나가 말했다.

“그 기억이 평화 쪽으로 남아야 합니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말은 작았지만, 학술제의 여러 막이 쌓인 뒤라 가능한 말이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손을 높이 들었다.

《세기극:아르메니아 대서사시》가 아니라, 이번에는 그보다 더 작고 더 복합적인 극이었다.

아르메니아의 노래가, 다른 나라의 답들을 초대했다.

하나의 국가 대서사시가 아니라, 여러 나라가 함께 쓰는 도시 재건극.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선택들이 기도가 되었다.

장부를 쓰는 것도.
돌을 놓는 것도.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도.
망가진 활대를 손목 보호구로 바꾸는 것도.
아픈 사람 곁에 앉는 것도.
상단 계약서에 책임 조항을 넣는 것도.
죽은 자의 이름을 찾겠다고 등불에 적는 것도.

모두 작은 기도였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도시야.”

강당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도시는 한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아.”

그녀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왕이 있어야 해. 장부도 있어야 해. 빵도 있어야 하고, 성벽도 있어야 하고, 우물도 있어야 해. 공방도, 학교도, 치료소도, 장례 등불도, 길도, 계약도 있어야 해.”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가끔은 무대도.”

벨라가 짧게 말했다.

“머물게 한다면.”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물게 할게요.”

그녀는 손을 내렸다.

[여관:극장]의 조명이 아르카다 전체에 내려앉았다.

도시는 완벽하지 않았다.

성벽은 아직 낮았다.
우물 하나는 여전히 정화 중이었다.
배급표에는 오류가 있었다.
치료소에는 약이 부족했다.
학교 지붕은 천막이었다.
상단 계약에는 위험 조항이 많았다.
피난민 중 일부는 여전히 불신했다.
사망자 명단에는 빈칸이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는 이제 답들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그리고 그 답들이 서로를 향해 등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가 최종 판정표를 읽었다.

“아르카다 재건 종합안.”

그녀의 목소리가 강당을 채웠다.

“초기 생존 단계. 배급표, 임시 시민 보호령, 우물 봉쇄,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반. 채택.”

“방어 및 재건 단계. 성벽 응급 보수, 석조 곡창, 성문 복구, 경보망, 감시소, 방위 질서. 채택.”

“공방 및 자재 단계.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 파손품 분류, 성은 보강재, 뇌광 경보핵, 사용성 검토. 채택.”

“기억 및 회복 단계. 신원 미상자 등불, 공동 추도, 종교별 장례 보장, 민간 치료소, 통증·수면 기록, 말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자리. 채택.”

“교육 및 공동체 단계. 임시 학교 시간표, 생존 문해, 제작 실습, 이야기와 질문, 실패 기록장, 성인 시민 토론. 채택.”

“외부 연결 단계. 상단 협상, 조건부 보증 계약, 우편망, 정보망, 교역로 회복. 채택.”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보았다.

“종합 판정.”

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레이는 읽었다.

“도시 재건극, 공동 해답 채택.”

순간 강당은 조용했다.

그러다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짝.

이번 박수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씩 이어졌다.

라이자가 쳤고, 레이튼이 모자를 들어 올렸고, 아카식이 펜을 내려놓으며 박수를 보탰다.
아스테르다스는 즐겁게 웃으며 손뼉을 쳤고, 죠니도 마지못한 듯하다가 곧 같이 쳤다.
요안나는 조용히 박수를 쳤고, 미하일라는 한 박자 늦게 손을 움직였다.
벨라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살 수 있다.”

푸리나는 그녀를 보았다.

벨라는 아르카다를 내려다보았다.

“다만 기억해야 한다. 재건은 축제가 아니다. 매일 돌을 옮기는 일이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래도 축제가 조금 있으면 더 잘 옮기지 않을까요?”

벨라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있어도 된다.”

잠깐.

“다만 성벽을 먼저 세워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을 세우고, 그 옆에 무대도 세울게요.”

“무대가 사람을 머물게 한다면.”

“머물게 할게요.”

“그럼 세워라.”

그 말은 허락처럼 들렸다.

푸리나는 아주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카식은 마지막 기록을 적었다.

《최종막 결론.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답들이, 한 도시의 내일을 함께 적었다. 도시는 장부만으로 살지 않고, 선언만으로 살지 않고, 성벽만으로 살지 않고, 박수만으로 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놓일 때, 폐허는 첫 아침을 맞을 수 있다.》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았다.

“공식 기록에 반영하겠습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이번 학술제에서 나 꽤 많이 반영됐네.”

알토가 말했다.

“좋은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카식은 잠깐 멈췄다.

“오늘 알토가 칭찬이 많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게 칭찬이야.”

푸리나는 원탁 위의 아르카다를 보았다.

처음에는 폐허였던 도시.

이제는 아직 불완전한 도시.

그러나 불완전하다는 것은, 더 세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 도시에는 아직 문제가 많네.”

그레이가 즉시 답했다.

“예.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처음보다 덜 무서워.”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질문이 답들 사이에서 자리를 얻었기 때문일 겁니다.”

게오르기아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 답들을 다음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레플리카는 말했다.

“아픈 사람이 혼자 참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이름 없는 등불이 길을 잃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겠지.”

타마르는 미소 지었다.

“죽은 어린양들이 너무 오래 성문 밖에 서 있지 않아도 되니까요.”

아스테리아는 실을 정리했다.

“길도 다시 열릴 거예요.”

알토는 기록책을 닫았다.

“그리고 약속은 남을 겁니다.”

민다우가스가 크게 웃었다.

“좋다. 이 정도면 폐허라기보다 문제 많은 요새다.”

벨라는 짧게 말했다.

“문제 많은 도시는 살 수 있다. 문제가 없다고 믿는 도시가 더 위험하다.”

슈샤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좋아. 그럼 이 학술제의 최종 결론은 이거야.”

그녀는 원탁 위에 작은 등불 하나를 놓았다.

“책상도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다.”

그 말에 모두가 도시를 보았다.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

무력제에서는 그들의 칼끝이 같은 방향을 향했다.

학술제에서는 그들의 답이 같은 도시를 향했다.

푸리나는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폐막.”

이번에는 박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박수는 승리의 박수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이긴 박수도 아니었다.

각자의 답이 홀로 남지 않고, 하나의 도시 안에서 서로의 곁에 놓인 것에 보내는 박수였다.

아르카다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도시는 아직 모의 도시였다.

그러나 이제 그 모의 도시는 단순한 과제가 아니었다.

다가올 전쟁 이후, 정말로 누군가가 세워야 할 도시의 초안이었다.

그리고 그 초안 위에는 여러 글씨가 겹쳐 있었다.

로마의 법.
헝가리의 성벽.
리투아니아의 생존 계산.
보헤미아의 성은.
니케아의 교육.
불가리아의 고통 완화.
세르비아의 침묵.
킬리키아의 극장.
폴란드의 기록.
북방의 별과 길.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답들이, 한 도시의 내일을 함께 적었다.

그리고 그 내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살아 있었다.
《별 아래의 신학제》

1막 — 기도의 개회식

“이번에는 신을 이야기하자!”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선언하자, 강당이 조용해졌다.

무력제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보다 조용했다.
학술제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보다도 조용했다.

칼을 겨루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웃거나 긴장했다.
학식을 겨루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펜을 들거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신을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먼저 자기 안쪽을 보았다.

라플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칼 내려놓으라고 했을 때보다 반응이 더 살벌한데.”

레이튼이 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칼은 손에 들려 있지만, 신앙은 사람의 중심에 있으니까요.”

“그럼 오늘이 제일 위험한 날이라는 거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을 공격받았다고 느낄 때, 자기가 다쳤을 때보다 더 깊게 반응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레이는 이미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신학제 진행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필요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엄격했다.

“첫째. 상대 성좌에 대한 모독 금지. 둘째. 신명, 교리명, 의식명 오탈자 금지. 셋째. 상대 신앙을 자기 교리로 흡수해 해석하는 행위 금지. 넷째. 교리적 차이를 숨기는 행위도 금지. 다섯째. 논파보다 이해와 번역을 우선합니다.”

아카식이 기록대에서 웃었다.

“그레이가 오늘 제일 신학적으로 무섭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탈자는 이단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가 납득했다.

“무섭게 설득력 있어.”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믿음과 검수는 별개입니다.”

아카식이 곧장 펜을 들었다.

“좋다. 그 문장은 기록할래.”

알토는 짧게 답했다.

“정확히 기록하십시오.”

“알토, 오늘 나를 못 믿는 거야?”

“기록자를 믿습니다. 그래서 검수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이거 시작부터 신학제답네.”

강당은 천천히 변했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이번에는 경기장도, 교실도, 공방도 아닌 장소를 만들었다.

예배당.

그러나 하나의 제단이 중앙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중앙에는 원탁이 있었다.
그 원탁 위에는 하나의 거대한 촛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작은 등불이 놓였다.

어떤 등불은 여관의 창문처럼 따뜻했다.
어떤 등불은 기록책의 흰 여백처럼 고요했다.
어떤 등불은 검은 고통의 밤 속에서 버티는 작은 불씨 같았다.
어떤 등불은 달빛처럼 부드럽고 낮았다.
어떤 등불은 성은처럼 따뜻한 은빛이었다.
어떤 등불은 미답의 길 끝에서 깜박이는 별빛이었다.
어떤 등불은 제국의 법전처럼 단정했고, 어떤 등불은 포도밭 저녁처럼 흐렸다.

그 어느 등불도 중앙을 독점하지 않았다.

여관좌는 그 원탁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심판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예배당의 주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길을 잘못 든 손님에게 빈 의자를 안내하는 여관 주인처럼 조용했다.

그 옆에는 루나리아 아누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달빛을 닮은 작은 등불이 놓여 있었다.
빛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 난 손 위에 얹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다.

푸리나는 그 등불을 보고 말했다.

“아누아 경의 자리는 저기구나.”

루나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인연의 별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보다, 끊어진 실이 다시 손에 닿을 만큼 낮게 비추는 편을 좋아합니다.”

라플리가 팔짱을 꼈다.

“인연이라. 말만 들으면 제일 순한데, 제일 귀찮을 것 같은 성좌네.”

루나리아는 화내지 않았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이해합니다. 인연은 때로 상처를 다시 보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요안나가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리깔았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잠시 루나리아의 달빛 등불에 머물렀다.

푸리나는 그 흐름을 보았다.

인연의 성좌.

그것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라는 별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관계 위에 달빛을 내려, 다시 마주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보호하는 별.

용서를 명령하지 않는 별.
그러나 용서가 가능할 수 있는 자리와 시간을 마련하는 별.

니케아에는 그 별이 필요했다.

푸리나는 다시 원탁 중앙으로 돌아왔다.

“오늘 이 자리는 누구의 별이 가장 밝은지 겨루는 자리가 아니야.”

그녀는 원탁 위 등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별을 봐. 어떤 사람은 기록의 별을, 어떤 사람은 고통의 별을, 어떤 사람은 인연의 별을, 어떤 사람은 허그와 보상의 별을, 어떤 사람은 개척의 별을, 어떤 사람은 여관의 별을 보겠지.”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오늘의 질문은 이거야.”

푸리나는 원탁 가운데에 작은 별등 하나를 놓았다.

“우리는 왜 그 별을 보고 걷는가?”

강당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전보다 조금 덜 날카로웠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위험해?”

“예.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설명하다가, 때로는 자신이 왜 그것 없이는 버틸 수 없었는지까지 말하게 되니까요.”

아레가 낮게 말했다.

“그런 질문은 가볍게 열어서는 안 된단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오늘은 천천히 열 거야.”

아카식이 펜을 들었다.

“좋아. 기록도 천천히 해야겠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신명, 교리명, 의식명은 당사자 확인 후 기록하십시오.”

“알았어. 오늘은 진짜 조심할게.”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아카식은 조금 웃었다.

“그레이가 진짜 무서운 날이네.”

레이튼은 모자를 원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기에 신학은 논파이면서 고백이고, 고백이면서 번역입니다.”

“번역?”

푸리나가 물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믿는 별이 나에게 어떤 하늘인지, 그 별을 보지 않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일이지요.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가 바라보는 방향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신학제 원칙. 논파보다 고백과 번역을 우선. 단, 교리 차이 은폐 금지.》

아카식이 옆에서 말했다.

“엄격하네.”

그레이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필요합니다.”

여관좌가 그때 조용히 차를 따랐다.

“먼 길을 온 말들은 먼저 물을 마셔야 하지요. 긴 논의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는 각 등불 앞에 작은 찻잔을 놓았다.

“오늘 이 예배당은 어느 한 성좌의 성소가 아닙니다. 잠시 길을 멈추고, 서로의 기도가 어떤 길에서 왔는지 듣는 자리입니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여관좌님, 오늘도 주인 역할이네요.”

여관좌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주인이라기보다, 방을 정리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손님들의 별은 제가 정하지 않으니까요.”

타마르가 옅게 웃었다.

“그 점이 여관답군요. 포도밭에 들어온 어린양이라 하여도, 목자가 따로 있다면 기다려드려야겠지요.”

레플리카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아프면 치료해야 하고.”

루나리아가 부드럽게 이어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와 다시 마주해야 한다면, 그 사이에 달빛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라이자는 조용히 은빛 등불을 보며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외롭다면 안아줘도 되고요.”

아레는 낮게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가라앉는 이름이 있다면, 실을 내려야겠지.”

아스트리트는 별빛 등불을 보고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다시 걸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길을 보여주어야 하겠지요.”

푸리나는 그 목소리들을 들었다.

각자 다른 성좌.

각자 다른 언어.

그런데 지금은, 같은 원탁 위에서 등불이 되어 있었다.

좋은 무대였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무대였다.

왜냐하면 신학은 장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은 인물의 중심에 닿는다.

푸리나는 그것을 이제 조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원탁을 보았다.

“그러면 첫 의제.”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작은 문장이 떠올랐다.

《타인의 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레이튼이 먼저 말했다.

“이해한다는 것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왜 그 별을 보고 걷는지 알게 되는 것이 이해에 가까울 때가 있습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도 그렇습니다. 평화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을 이유로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하일라는 요안나의 말을 들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그 선택을 지키기 위해 제도와 힘이 필요합니다.”

요안나는 답했다.

“예. 다만 그 힘이 입을 막는 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루나리아가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힘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안나와 미하일라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에 손을 얹었다.

“인연은 같은 문장을 말하게 만드는 사슬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 만큼, 상처 위에 얇은 빛을 내리는 일입니다.”

요안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미하일라도 부정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그 틈에 말했다.

“신학제 기록은 반드시 원문과 번역문을 병기해야 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중요합니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면 분쟁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안식’과 ‘죽음’과 ‘귀환’과 ‘구원’은 서로 교차하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알토가 동의했다.

“맞습니다. 기록의 훼손은 종종 번역에서 시작됩니다.”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외교 문서도 그렇죠. ‘보호’와 ‘지배’를 잘못 번역하면 나라가 바뀝니다.”

민다우가스가 크게 웃었다.

“하! 그건 신학이 아니라도 그렇다. 말 하나가 성벽 하나보다 비쌀 때가 있지.”

벨라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돌에 새길 말은 짧아야 한다.”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짧고, 무겁게?”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진 뒤에도 읽힐 만큼.”

아카식은 조용히 적었다.

《돌에 새길 말은 무너진 뒤에도 읽힐 만큼 짧고 무거워야 한다.》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공식 기록 후보로 적절합니다.”

아카식은 약간 기쁜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다음 질문을 열었다.

“그러면 신학제의 최종 목표는 뭘까?”

라플리가 말했다.

“서로 안 싸우기.”

그레이가 적으려 하자 라플리가 당황했다.

“아니, 그걸 진짜 적어?”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핵심 목표 중 하나입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싸우기만 하면 너무 소극적이지.”

라이자가 은빛 등불을 보았다.

“서로 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게 되는 건요?”

레플리카가 말했다.

“그리고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도 알아야 한다.”

루나리아가 덧붙였다.

“어떤 손길이 아직 이른지도 알아야 합니다.”

아레가 이어 말했다.

“어떤 침묵이 필요한지도.”

타마르가 말했다.

“어떤 문으로 보내드려야 하는지도.”

여관좌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모든 손님이 같은 방에서 쉬지는 않습니다.”

알토가 말했다.

“그리고 모든 선택은 기록되어야 합니다. 단, 기록은 소유가 아니어야 합니다.”

게오르기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학교에서는 이것을 가르쳐야 할 겁니다. 다른 신앙을 이국적인 풍습으로 구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기도하는지 예절과 함께 가르치는 일.”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최종 목표는 이렇게 하자.”

그녀는 칠판처럼 떠오른 빛 위에 손가락으로 적었다.

《같은 별을 믿지 않아도, 같은 밤을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원탁 위 등불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아카식이 말했다.

“제목으로도 괜찮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마지막 문장 후보야.”

“벌써 마지막을 생각해?”

“극장주는 늘 마지막을 생각해. 그래야 중간에 길을 잃어도 돌아올 수 있거든.”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건 훌륭한 극작가의 말이군요.”

푸리나는 어깨를 폈다.

“그렇지?”

그레이가 적었다.

《극장주는 마지막을 생각한다. 단, 결론을 서두르지는 않는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 너도 이제 나를 잘 알아.”

“업무상 필요합니다.”

“그것도 애정의 한 형태야.”

“아닙니다.”

루나리아가 살짝 웃었다.

“인연은 부정에서 시작될 때도 있습니다.”

그레이는 바로 말했다.

“그 가능성은 낮습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봐, 가능성은 있다는 뜻이잖아.”

“아닙니다.”

아카식은 그 대화를 적으려다 그레이의 시선을 받고 멈췄다.

“안 적을게.”

“잘하셨습니다.”

푸리나는 다시 사회자로 돌아왔다.

“신학제의 막 구성은 이렇게 갈 거야.”

그녀의 손짓에 원탁 위 등불들이 하나씩 밝아졌다.

“첫째. 여관의 신학.”

따뜻한 창문 같은 등불이 켜졌다.

“쉬어가는 신과 마지막 문. 죽은 이를 소유하는가, 맞이하고 배웅하는가.”

여관좌가 고개를 숙였다.

타마르는 포도잎을 만졌다.

그레이는 장부를 준비했다.

“둘째. 기록과 선택.”

흰 여백 같은 등불이 켜졌다.

“허공록의 신학. 기록은 인간을 묶는가, 아니면 선택을 잊히지 않게 하는가.”

알토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아카식은 펜을 빙글 돌렸다.

레이튼은 이미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셋째. 고통과 인연의 신학.”

검은 밤 속 작은 불씨와 달빛 등불이 함께 켜졌다.

“아픔은 왜 있는가. 그리고 아픈 뒤에도 사람은 다시 이어질 수 있는가.”

레플리카는 짧게 말했다.

“줄일 수 있는 고통은 줄여야 한다.”

루나리아는 낮게 말했다.

“그리고 줄이고도 남은 통증 곁에, 누군가는 앉아 있어야 합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넷째. 허그와 보상의 신학.”

은빛 등불이 부드럽게 켜졌다.

“보상은 대가인가, 위로인가. 포옹은 소유인가, 존재 인정인가. 만들어진 존재도 안길 곳이 있는가.”

라이자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있어야 해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다섯째. 별과 개척의 신학.”

미답의 길 끝에서 별빛이 켜졌다.

“성좌의 선택과 시련은 운명인가, 한계 너머의 질문인가. 신의 안배를 부수고 나아가는 것도 신앙일 수 있는가.”

아스트리트의 눈이 별빛을 받았다.

아레는 그 옆에서 조용히 침묵했다.

그 침묵 안에는 세르비아의 무거운 길이 있었다.

“여섯째. 왕권과 신권.”

제국의 법전 같은 등불과 성벽 같은 그림자가 함께 켜졌다.

“성좌의 뜻과 국가의 생존이 충돌할 때, 군주는 무엇을 우선하는가.”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좋군. 결국 그 질문은 피할 수 없지.”

미하일라는 침묵했고, 요안나는 그 침묵을 들었다.

벨라는 짧게 말했다.

“기도하는 손도 겨울에는 성벽 안에 있어야 한다.”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이미 기록할 준비를 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원탁 중앙의 모든 등불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여러 별, 하나의 밤.”

그 말과 함께 강당의 천장이 밤하늘처럼 깊어졌다.

“다민족 변경 도시 아르카다에 여러 성좌의 신앙이 함께 들어왔을 때, 공동 성역과 장례, 교육, 치료, 축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도 필요하겠군요. 각 신앙의 이름과 금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의 증오만 물려받습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공동 성역도 필요하겠습니다. 모든 신앙을 하나로 섞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도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서로를 해치지 않도록 머무는 곳.”

그레이가 말했다.

“의식 일정과 장소 배분, 사망자 기록, 각 교단 대표 확인도 필요합니다.”

아카식이 말했다.

“그리고 신명 오탈자 검수.”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수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신학제의 전체 목표는 정해졌네.”

그녀는 원탁 가운데 손을 올렸다.

“우리는 누구의 별이 이기는지 보러 온 게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예배당 전체에 퍼졌다.

“우리는 각자의 별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말하러 왔어.”

그녀는 여관좌를 보았다.

“그리고 그 별들이 같은 도시의 밤하늘에 떠도 되는지 확인하러 왔지.”

여관좌는 조용히 답했다.

“하늘은 넓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서로의 별을 꺼뜨리려 할 때, 밤이 위험해지는 법이지요.”

레이튼이 덧붙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첫 결론은 이렇겠군요.”

그는 원탁 위 빈 양피지에 적었다.

《신학은 별의 높이를 재는 일이 아니라, 그 별을 보고 걷는 사람의 길을 이해하는 일이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좋다.”

그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기록에 적합합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좋아. 1막부터 공식 기록 풍년이네.”

푸리나는 작은 박수를 쳤다.

짝.

그 박수는 크지 않았다.

예배당에서 너무 큰 박수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은 소리는 원탁 위 등불들을 살짝 흔들었다.

신학제의 첫 막은 이렇게 닫혔다.

아직 아무 성좌의 깊은 교리는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았다.

아직 논쟁도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규칙은 세워졌다.

이 자리는 서로의 별을 끄기 위한 곳이 아니다.

서로의 별이 비추는 길을, 잠시 같은 등불 아래에서 들여다보기 위한 곳이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원탁의 등불들을 보았다.

여관의 창문.
허공록의 여백.
고통의 불씨.
인연의 달빛.
허그와 보상의 은빛.
개척의 별길.
왕관과 법의 등불.

각각의 빛은 달랐다.

그러나 아직은, 모두 같은 밤 안에 있었다.
《별 아래의 신학제》

1막 — 기도의 개회식

부제: 성좌는 침묵하고, 인간은 더듬어 말한다

“이번에는 신을 이야기하자!”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선언하자, 강당이 조용해졌다.

무력제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보다 조용했다.
학술제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보다도 조용했다.

칼을 겨루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웃거나 긴장했다.
학식을 겨루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펜을 들거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신을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먼저 자기 안쪽을 보았다.

라플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칼 내려놓으라고 했을 때보다 반응이 더 살벌한데.”

레이튼이 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칼은 손에 들려 있지만, 신앙은 사람의 중심에 있으니까요.”

“그럼 오늘이 제일 위험한 날이라는 거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을 공격받았다고 느낄 때, 자기가 다쳤을 때보다 더 깊게 반응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레이는 이미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신학제 진행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필요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엄격했다.

“첫째. 상대 성좌에 대한 모독 금지. 둘째. 신명, 교리명, 의식명 오탈자 금지. 셋째. 상대 신앙을 자기 교리로 흡수해 해석하는 행위 금지. 넷째. 교리적 차이를 숨기는 행위도 금지. 다섯째. 논파보다 이해와 번역을 우선합니다.”

아카식이 기록대에서 펜을 들었다.

“그레이가 오늘 제일 신학적으로 무섭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탈자는 이단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가 납득했다.

“무섭게 설득력 있어.”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믿음과 검수는 별개입니다.”

아카식이 곧장 적었다.

“좋다. 그 문장은 기록할래.”

알토는 짧게 답했다.

“정확히 기록하십시오.”

“알토, 오늘 나를 못 믿는 거야?”

“기록자를 믿습니다. 그래서 검수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이거 시작부터 신학제답네.”

강당은 천천히 변했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이번에는 경기장도, 교실도, 공방도 아닌 장소를 만들었다.

예배당.

그러나 하나의 제단이 중앙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중앙에는 원탁이 있었다.
그 원탁 위에는 하나의 거대한 촛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작은 등불이 놓였다.

어떤 등불은 여관의 창문처럼 따뜻했다.
어떤 등불은 기록책의 흰 여백처럼 고요했다.
어떤 등불은 검은 고통의 밤 속에서 버티는 작은 불씨 같았다.
어떤 등불은 달빛처럼 부드럽고 낮았다.
어떤 등불은 성은처럼 따뜻한 은빛이었다.
어떤 등불은 미답의 길 끝에서 깜박이는 별빛이었다.
어떤 등불은 제국의 법전처럼 단정했고, 어떤 등불은 포도밭 저녁처럼 흐렸다.

그 어느 등불도 중앙을 독점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탁의 한쪽에는 빈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의자 위에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차는 이미 따라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의자에 앉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빈 의자를 보았다.

여관좌의 자리.

그러나 오늘,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성좌가 직접 와서 자기 신학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토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탁이다.

그리고 오늘의 자리는 신탁을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성좌의 침묵 앞에서, 인간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더듬어 말하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빈 의자를 향해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차 향이 아주 조금 짙어졌다.

그뿐이었다.

말은 없었다.

푸리나는 원탁 중앙으로 돌아왔다.

“오늘 이 예배당은 어느 한 성좌의 성소가 아니야.”

그녀는 여관좌의 빈 의자와 여러 등불을 번갈아 보았다.

“여긴 잠시 서로의 기도를 듣기 위해 빌린 방이야. 그러니까 아무도 이 방의 주인이 되면 안 돼. 나도, 너희도, 어떤 교단도.”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시작입니다.”

루나리아 아누아가 달빛 같은 등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등불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 난 손 위에 얹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다.

푸리나는 그 등불을 보고 말했다.

“아누아 경의 자리는 저기구나.”

루나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인연의 별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보다, 끊어진 실이 다시 손에 닿을 만큼 낮게 비추는 편을 좋아합니다.”

라플리가 팔짱을 꼈다.

“인연이라. 말만 들으면 제일 순한데, 제일 귀찮을 것 같은 성좌네.”

루나리아는 화내지 않았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이해합니다. 인연은 때로 상처를 다시 보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요안나가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리깔았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잠시 루나리아의 달빛 등불에 머물렀다.

인연의 성좌.

그것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라는 별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관계 위에 달빛을 내려, 다시 마주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보호하는 별.
용서를 명령하지 않는 별.
그러나 용서가 가능할 수 있는 자리와 시간을 마련하는 별.

니케아에는 그 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필요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좌 본인이 아니라, 루나리아 아누아였다.

푸리나는 다시 원탁 중앙으로 돌아왔다.

“오늘 이 자리는 누구의 별이 가장 밝은지 겨루는 자리가 아니야.”

그녀는 원탁 위 등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별을 봐. 어떤 사람은 기록의 별을, 어떤 사람은 고통의 별을, 어떤 사람은 인연의 별을, 어떤 사람은 허그와 보상의 별을, 어떤 사람은 개척의 별을, 어떤 사람은 여관의 별을 보겠지.”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오늘의 질문은 이거야.”

푸리나는 원탁 가운데에 작은 별등 하나를 놓았다.

“우리는 왜 그 별을 보고 걷는가?”

강당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전보다 조금 덜 날카로웠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위험해?”

“예.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설명하다가, 때로는 자신이 왜 그것 없이는 버틸 수 없었는지까지 말하게 되니까요.”

아레가 낮게 말했다.

“그런 질문은 가볍게 열어서는 안 된단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오늘은 천천히 열 거야.”

아카식이 펜을 들었다.

“좋아. 기록도 천천히 해야겠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신명, 교리명, 의식명은 당사자 확인 후 기록하십시오.”

“알았어. 오늘은 진짜 조심할게.”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아카식은 조금 웃었다.

“그레이가 진짜 무서운 날이네.”

레이튼은 모자를 원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기에 신학은 논파이면서 고백이고, 고백이면서 번역입니다.”

“번역?”

푸리나가 물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믿는 별이 나에게 어떤 하늘인지, 그 별을 보지 않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일이지요.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가 바라보는 방향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신학제 원칙. 논파보다 고백과 번역을 우선. 단, 교리 차이 은폐 금지.》

아카식이 옆에서 말했다.

“엄격하네.”

그레이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빈 의자 위 찻잔을 보았다.

차 향은 여전히 은은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자리를 단단하게 했다.

성좌는 침묵한다.

신학은 그 침묵 앞에서 인간이 더듬어 세운 언어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굴려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좋았다.

그녀는 원탁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면 첫 의제.”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작은 문장이 떠올랐다.

《타인의 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레이튼이 먼저 말했다.

“이해한다는 것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왜 그 별을 보고 걷는지 알게 되는 것이 이해에 가까울 때가 있습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도 그렇습니다. 평화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을 이유로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하일라는 요안나의 말을 들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그 선택을 지키기 위해 제도와 힘이 필요합니다.”

요안나는 답했다.

“예. 다만 그 힘이 입을 막는 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루나리아가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힘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안나와 미하일라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에 손을 얹었다.

“인연은 같은 문장을 말하게 만드는 사슬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 만큼, 상처 위에 얇은 빛을 내리는 일입니다.”

요안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미하일라도 부정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그 틈에 말했다.

“신학제 기록은 반드시 원문과 번역문을 병기해야 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중요합니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면 분쟁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안식’과 ‘죽음’과 ‘귀환’과 ‘구원’은 서로 교차하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알토가 동의했다.

“맞습니다. 기록의 훼손은 종종 번역에서 시작됩니다.”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외교 문서도 그렇죠. ‘보호’와 ‘지배’를 잘못 번역하면 나라가 바뀝니다.”

민다우가스가 크게 웃었다.

“하! 그건 신학이 아니라도 그렇다. 말 하나가 성벽 하나보다 비쌀 때가 있지.”

벨라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돌에 새길 말은 짧아야 한다.”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짧고, 무겁게?”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진 뒤에도 읽힐 만큼.”

아카식은 조용히 적었다.

《돌에 새길 말은 무너진 뒤에도 읽힐 만큼 짧고 무거워야 한다.》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공식 기록 후보로 적절합니다.”

아카식은 약간 기쁜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다음 질문을 열었다.

“그러면 신학제의 최종 목표는 뭘까?”

라플리가 말했다.

“서로 안 싸우기.”

그레이가 적으려 하자 라플리가 당황했다.

“아니, 그걸 진짜 적어?”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핵심 목표 중 하나입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싸우기만 하면 너무 소극적이지.”

라이자가 은빛 등불을 보았다.

“서로 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게 되는 건요?”

레플리카가 말했다.

“그리고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도 알아야 한다.”

루나리아가 덧붙였다.

“어떤 손길이 아직 이른지도 알아야 합니다.”

아레가 이어 말했다.

“어떤 침묵이 필요한지도.”

타마르가 말했다.

“어떤 문으로 보내드려야 하는지도.”

그레이는 그것들을 모두 적었다.

“상호 이해의 항목. 소중한 것, 상처가 되는 말, 이른 손길, 필요한 침묵, 배웅해야 할 문.”

아카식이 낮게 말했다.

“오늘 기록 진짜 어렵네.”

알토가 답했다.

“그래서 정확해야 합니다.”

“네가 계속 그렇게 말하면 나도 긴장돼.”

“좋은 일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알토식 격려는 늘 묘하게 딱딱했다.

하지만 신학제에는 그 딱딱함이 필요했다.

게오르기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학교에서는 이것을 가르쳐야 할 겁니다. 다른 신앙을 이국적인 풍습으로 구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기도하는지 예절과 함께 가르치는 일.”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최종 목표는 이렇게 하자.”

그녀는 칠판처럼 떠오른 빛 위에 손가락으로 적었다.

《같은 별을 믿지 않아도, 같은 밤을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원탁 위 등불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아카식이 말했다.

“제목으로도 괜찮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마지막 문장 후보야.”

“벌써 마지막을 생각해?”

“극장주는 늘 마지막을 생각해. 그래야 중간에 길을 잃어도 돌아올 수 있거든.”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건 훌륭한 극작가의 말이군요.”

푸리나는 어깨를 폈다.

“그렇지?”

그레이가 적었다.

《극장주는 마지막을 생각한다. 단, 결론을 서두르지는 않는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 너도 이제 나를 잘 알아.”

“업무상 필요합니다.”

“그것도 애정의 한 형태야.”

“아닙니다.”

루나리아가 살짝 웃었다.

“인연은 부정에서 시작될 때도 있습니다.”

그레이는 바로 말했다.

“그 가능성은 낮습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봐, 가능성은 있다는 뜻이잖아.”

“아닙니다.”

아카식은 그 대화를 적으려다 그레이의 시선을 받고 멈췄다.

“안 적을게.”

“잘하셨습니다.”

푸리나는 다시 사회자로 돌아왔다.

“신학제의 막 구성은 이렇게 갈 거야.”

그녀의 손짓에 원탁 위 등불들이 하나씩 밝아졌다.

“첫째. 여관의 신학.”

따뜻한 창문 같은 등불이 켜졌다.

“쉬어가는 신과 마지막 문. 죽은 이를 소유하는가, 맞이하고 배웅하는가.”

푸리나는 빈 의자를 보았다.

그 자리에는 여관좌가 없었다.

그러나 차는 있었다.

“이 막은 내가 말할 거야. 그리고 그레이, 타마르, 아레가 함께 해석해줄 거고. 성좌님은…… 듣고 계신다고 믿자.”

빈 의자의 찻잔에서 김이 조금 올라왔다.

대답은 없었다.

그 침묵이 좋았다.

“둘째. 기록과 선택.”

흰 여백 같은 등불이 켜졌다.

“허공록의 신학. 기록은 인간을 묶는가, 아니면 선택을 잊히지 않게 하는가.”

알토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아카식은 펜을 빙글 돌렸다.

푸리나는 아카식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아카식은 기록자. 신탁 금지.”

아카식은 억울한 척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미리 말하는 거야.”

알토가 짧게 말했다.

“적절합니다.”

아카식이 알토를 보았다.

“너까지?”

“필요합니다.”

“좋아, 좋아. 오늘은 기록만 할게. 대부분은.”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아카식은 대답 대신 웃었다.

“셋째. 고통과 인연의 신학.”

검은 밤 속 작은 불씨와 달빛 등불이 함께 켜졌다.

“아픔은 왜 있는가. 그리고 아픈 뒤에도 사람은 다시 이어질 수 있는가.”

레플리카는 짧게 말했다.

“줄일 수 있는 고통은 줄여야 한다.”

루나리아는 낮게 말했다.

“그리고 줄이고도 남은 통증 곁에, 누군가는 앉아 있어야 합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넷째. 허그와 보상의 신학.”

은빛 등불이 부드럽게 켜졌다.

“보상은 대가인가, 위로인가. 포옹은 소유인가, 존재 인정인가. 만들어진 존재도 안길 곳이 있는가.”

라이자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있어야 해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다섯째. 별과 개척의 신학.”

미답의 길 끝에서 별빛이 켜졌다.

“성좌의 선택과 시련은 운명인가, 한계 너머의 질문인가. 신의 안배를 부수고 나아가는 것도 신앙일 수 있는가.”

아스트리트의 눈이 별빛을 받았다.

아레는 그 옆에서 조용히 침묵했다.

그 침묵 안에는 세르비아의 무거운 길이 있었다.

“여섯째. 왕권과 신권.”

제국의 법전 같은 등불과 성벽 같은 그림자가 함께 켜졌다.

“성좌의 뜻과 국가의 생존이 충돌할 때, 군주는 무엇을 우선하는가.”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좋군. 결국 그 질문은 피할 수 없지.”

미하일라는 침묵했고, 요안나는 그 침묵을 들었다.

벨라는 짧게 말했다.

“기도하는 손도 겨울에는 성벽 안에 있어야 한다.”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이미 기록할 준비를 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원탁 중앙의 모든 등불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여러 별, 하나의 밤.”

그 말과 함께 강당의 천장이 밤하늘처럼 깊어졌다.

“다민족 변경 도시 아르카다에 여러 성좌의 신앙이 함께 들어왔을 때, 공동 성역과 장례, 교육, 치료, 축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도 필요하겠군요. 각 신앙의 이름과 금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의 증오만 물려받습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공동 성역도 필요하겠습니다. 모든 신앙을 하나로 섞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도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서로를 해치지 않도록 머무는 곳.”

그레이가 말했다.

“의식 일정과 장소 배분, 사망자 기록, 각 교단 대표 확인도 필요합니다.”

아카식이 말했다.

“그리고 신명 오탈자 검수.”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수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신학제의 전체 목표는 정해졌네.”

그녀는 원탁 가운데 손을 올렸다.

“우리는 누구의 별이 이기는지 보러 온 게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예배당 전체에 퍼졌다.

“우리는 각자의 별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말하러 왔어.”

그녀는 빈 의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별들이 같은 도시의 밤하늘에 떠도 되는지 확인하러 왔지.”

차 향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뿐이었다.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말할 차례였으니까.

레이튼이 덧붙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첫 결론은 이렇겠군요.”

그는 원탁 위 빈 양피지에 적었다.

《신학은 별의 높이를 재는 일이 아니라, 그 별을 보고 걷는 사람의 길을 이해하는 일이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좋다.”

그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기록에 적합합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좋아. 1막부터 공식 기록 풍년이네.”

푸리나는 작은 박수를 쳤다.

짝.

그 박수는 크지 않았다.

예배당에서 너무 큰 박수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은 소리는 원탁 위 등불들을 살짝 흔들었다.

신학제의 첫 막은 이렇게 닫혔다.

아직 아무 성좌의 깊은 교리는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았다.

아직 논쟁도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규칙은 세워졌다.

이 자리는 서로의 별을 끄기 위한 곳이 아니다.

서로의 별이 비추는 길을, 잠시 같은 등불 아래에서 들여다보기 위한 곳이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원탁의 등불들을 보았다.

여관의 창문.
허공록의 여백.
고통의 불씨.
인연의 달빛.
허그와 보상의 은빛.
개척의 별길.
왕관과 법의 등불.

각각의 빛은 달랐다.

그리고 성좌들은 침묵했다.

그 침묵 앞에서, 인간들이 조심스럽게 언어를 세우기 시작했다.
《별 아래의 신학제》

2막 — 여관의 신학: 사람은 어떤 방에서 다시 숨을 쉬는가

2막이 시작되자, 예배당은 여관이 되었다.

정확히는 예배당이 여관의 형식을 빌렸다.

원탁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원탁 뒤쪽에는 긴 복도가 생겼고, 그 복도 양옆으로 수많은 방문이 이어졌다.

어떤 문 앞에는 진흙 묻은 장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떤 문에는 낡은 여행가방이 기대어 있었다.
어떤 문 손잡이에는 아이가 묶어둔 리본이 걸려 있었고, 어떤 문에는 이름표 대신 아직 쓰이지 않은 빈 나무패가 매달려 있었다.

벽에는 성화 대신 여행자의 망토, 부러진 지팡이, 닳은 말발굽, 접힌 편지, 물 얼룩이 남은 지도, 오래된 공연 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복도 끝에는 문 하나가 있었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을 본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저 문은 한 여정의 끝에 놓인 문이다.

그러나 끝만은 아니었다.

오늘 그 문 앞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의자 위에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차는 이미 따라져 있었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빈 의자를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도 성좌는 말하지 않는다.

여관좌가 직접 와서 “나의 안식은 이러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신탁이 된다.

오늘의 신학은 성좌의 침묵 앞에서, 인간들이 자기 언어와 경험과 신술을 근거로 더듬어 세우는 것이어야 했다.

푸리나는 원탁 앞에 섰다.

“2막의 주제는 여관의 신학이야.”

그녀는 복도의 수많은 문을 보았다.

“인간의 굴곡진 여정을 긍정하고, 그 여정을 돕고, 그 여정의 마지막을 정리해주는 성좌에 대한 이야기.”

그레이가 장부를 펼쳤다.

오늘의 장부에는 숫자보다 항목이 먼저 있었다.

《방 번호 / 이름 / 지나온 길 / 필요한 휴식 / 닫아야 할 여정 / 남겨야 할 책임 / 다음 문》

푸리나는 그 장부를 보고 작게 말했다.

“여관 장부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은 사망자 명단이라는 표현보다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오늘 여관좌의 신학을 말할 사람은 성좌가 아니었다.

여관좌의 대리인인 푸리나.
죽은 자의 안식과 포도밭의 저녁을 아는 타마르.
가라앉는 이름을 붙드는 아레.
이름을 기록하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하는 그레이.
그리고 각자의 [여관]을 품은 레이튼, 하융, 죠니.

그들은 모두 여관좌의 신도였다.

그러므로 오늘 그들은 여관 신학을 설명하는 쪽에 가까웠다.

반대로, 그 설명을 듣고 자기 신앙의 언어로 번역할 사람들도 있었다.

기록의 별을 믿는 알토.
인연의 별을 믿는 루나리아.
고통교의 레플리카.
허그와 보상의 성좌를 따르는 라이자.
시원성좌의 선택받은 아스트리트.
국가 생존의 논리로 모든 교리를 시험할 민다우가스.
제도와 장부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슈샤니크.
그리고 교육의 언어로 질문을 받아낼 게오르기아.

푸리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여관좌 신도들의 교리 발표회가 아니었다.

다른 별을 믿는 사람들이, 여관의 등불을 자기 언어로 번역해보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먼저 손을 가슴에 얹었다.

“나는 여관좌를 믿으면서, 처음에는 ‘쉼’이라는 말만 생각했어.”

그녀는 조금 웃었다.

“좋은 침대, 따뜻한 차, 즐거운 공연, 막이 끝난 뒤의 박수. 그런 것들.”

라플리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그건 확실히 너답네.”

푸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 나답지.”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 쉼은 도망이 아니야. 여관은 길을 포기한 사람들이 숨어드는 곳이 아니야.”

푸리나는 복도를 보았다.

“오히려 길이 길기 때문에 필요한 곳이지.”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깊어졌다.

“사람은 곧은 길만 걷지 않아. 빙 돌아가고, 넘어지고, 미련을 남기고, 잘못된 문을 열고, 누군가를 잃고, 자기가 원하지 않은 배역을 맡기도 해. 어떤 날은 자기가 주인공인지조차 모르고, 어떤 날은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지.”

그녀는 빈 의자 위의 찻잔을 보았다.

“그래도 그 여정이 잘못됐다고만 말하지 않는 성좌가 여관좌라고 생각해.”

그때 알토가 낮게 말했다.

“굴곡진 여정을 긍정한다는 말이, 선택의 책임을 지우는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알토의 말은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정확했다.

그는 여관좌의 신도가 아니었다.

기록의 별을 믿는 자로서, 그는 먼저 책임을 물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여관은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곳이 아니야. 사람이 자기 잘못을 다시 볼 수 있을 만큼 숨을 고르게 하는 곳이지.”

레플리카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굴곡진 길을 인정한다는 말로, 누군가가 남긴 고통까지 흐리면 안 된다.”

“맞아.”

푸리나는 바로 답했다.

“여관의 쉼은 면죄가 아니라 회복이야. 길과 책임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회복.”

그레이는 적었다.

《휴식은 면죄가 아니라 회복. 길과 책임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상태.》

레플리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좋다.”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신술사다운 말투로,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관좌의 신술에서 처음 배우는 건 대단한 성역이 아니야.”

복도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약병 하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휴식의 신술을 배우는 사람은 보통 큐어와 힐부터 배워. 상태를 바로잡고, 자연회복력을 끌어올리고, 고단한 몸이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는 법칙을 보는 거지.”

그녀는 손을 펼쳤다.

원탁 위에 작은 장면이 떠올랐다.

열이 내리는 아이.
독기가 빠져나가는 상처.
떨리던 손이 조금씩 안정되는 병사.
피로로 흐려졌던 눈이 다시 초점을 찾는 여행자.

“처음에는 몸을 보는 거야. 체력, 피로, 상태이상, 상처. 무엇이 사람을 편안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보는 것.”

그레이는 조용히 적었다.

《휴식 신술의 기초: 큐어와 힐. 자연회복력의 촉진. 피로와 상태의 식별.》

푸리나는 계속했다.

“그런데 그걸 계속 보다 보면, 몸만 보이는 게 아니야.”

원탁의 장면이 바뀌었다.

끝없는 길.
먼지 낀 하늘.
곧 비가 올 것 같은 구름.
길가의 그루터기.
부서진 마차 바퀴.
무리해서 걷는 동행자의 다리.
조금만 더 가면 나올 피난처.

“보이기 시작하는 게 있어.”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길].”

그 단어가 나오자, 복도의 문들이 아주 희미하게 열렸다 닫혔다.

“휴식의 신술은 길을 보는 것에서 깊어져. 나와 동행자가 얼마나 지쳤는지, 어느 길이 위험한지, 어디가 안정되지 못했는지, 비를 피할 곳은 어디인지, 지금 쉬어야 하는지, 조금 더 가도 되는지.”

아스트리트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전투에서도 중요합니다.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생명을 긍정하는 일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휴식은 멈추는 것만이 아니야. 언제 멈춰야 다시 갈 수 있는지 아는 거야.”

레플리카가 말했다.

“고통을 줄이는 것도 비슷하다. 무리하게 견디는 걸 용기라고 착각하면 망가진다.”

푸리나는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더 깊어지면, 단순히 사전적인 휴식과 안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정의가 생겨.”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나에게 쉼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곳에서 다시 숨을 쉬는가. 나는 무엇을 보면 다시 걸을 수 있는가. 그 정의가 마음속에 재료처럼 쌓여.”

복도 위에 목재와 돌과 천과 조명이 떠올랐다.

어떤 것은 침대가 되었고, 어떤 것은 책장이 되었고, 어떤 것은 창이 되었고, 어떤 것은 거리가 되었고, 어떤 것은 무대가 되었다.

“그 재료들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공든 건축물이 돼.”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때부터 그 정의는 현실이 된다.”

원탁 뒤의 복도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게 [여관]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게오르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관]은 단순한 신술 공간이 아니라, 신도가 오랫동안 축적한 쉼의 철학이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라이자가 은빛 등불을 보며 말했다.

“공들여 만든 건축물이라는 말이 좋아요. 사람을 위해 만든 장소는, 재료보다 마음의 구조가 먼저니까요.”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운 건축물은 허술하면 사람을 깔아뭉개기도 하지.”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그 말은 불편했지만, 맞았다.

“응. 그래서 위험해.”

그녀는 곧바로 인정했다.

“[여관]을 제대로 쌓지 못하고 억지로 세우면, 신술사가 먼저 무너져. 자기 안에 확고한 쉼의 정의가 없는데 여관을 즉석으로 세우려 하면, 그 공간이 사람을 쉬게 하는 게 아니라 신술사의 정신을 갉아먹어.”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자신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쉬게 하려 할 때 생기는 위험과 닮았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그게 여관 신술이 무서운 이유이기도 해.”

그레이는 기록했다.

《[여관]은 신도가 축적한 휴식의 정의가 현실화된 상위 신술. 확고한 신념과 축적 없이 즉석으로 세우면 정신적 붕괴 위험.》

그러자 아레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안식의 길도 비슷하지만, 더 위험하단다.”

모두의 시선이 아레와 타마르, 그레이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타마르가 포도잎을 손끝으로 굴리며 말했다.

“안식의 신술은 화려한 장례식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허드렛일이지요. 죽은 유해를 씻고, 시취를 맡고, 피를 닦아내고, 산 자의 눈물을 걷어내는 일.”

복도의 한쪽에 작은 장례 준비실이 나타났다.

물을 담은 대야.
흰 천.
피가 묻은 손수건.
기름등.
식어가는 손.
문밖에서 울음을 삼키는 가족들.

타마르는 말했다.

“안식의 신술은 죽음을 아름답게 꾸미는 기술이 아닙니다. 죽음이 실제로 무엇인지, 먼저 손으로 알아야 하는 길입니다.”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피 냄새를 모르면 고통을 너무 쉽게 말하게 된다.”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레이가 이어받았다.

“죽은 자를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안식의 기초는 보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망집과 회한, 산 자의 슬픔, 아직 강 건너로 가지 못한 것들.”

복도 끝의 문 너머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강.

그러나 누구도 그 강을 완전히 보지는 못했다.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이를 오래 보다 보면 [강 너머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원탁은 조용해졌다.

그레이는 계속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위험합니다. 옆에서 손을 놓지 말아줄 선배나 친우가 없다면, 배우는 사람이 그대로 강 너머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아래에는 실제로 본 사람의 무게가 있었다.

“그래서 안식의 신술은 쉽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교단 안에서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은닉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죽은 자를 돕겠다고 강가에 선 사람이, 자기 발목이 젖는 줄도 모르고 걸어 들어가면 안 되니까요.”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기록자가 기록 안으로 사라지는 것과도 닮았습니다.”

그레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슷합니다.”

아레가 낮게 말했다.

“죽은 자의 동전이 하나씩 손에 늘어난단다.”

그녀의 검은 실이 허공에서 작은 동전 모양의 빛을 하나 만들어냈다.

“한 명을 강 너머로 보내고, 또 한 명을 보내고, 또 한 명을 보내면. 그 이름들이 손에 남지. 그 동전들을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는 없어.”

타마르가 말했다.

“그래서 묘비를 세우는 것이겠지요.”

복도 한편에 묘비 하나가 생겼다.

처음에는 모양이 없었다.
그저 작은 돌이었다.

그 옆에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죽은 자들을 강 너머로 보내며, 신술사의 심상 안에 묘비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제각각이던 묘비들이, 점점 질서를 얻었다.

어떤 것은 포도밭의 돌처럼 둥글어졌고, 어떤 것은 거리의 문패처럼 단정해졌고, 어떤 것은 무대 뒤의 소품 상자처럼 조용히 닫혔다.

그레이가 말했다.

“죽은 자들의 세계를 넘나들며, 묘비가 심상을 채우고, 그 묘비의 모양에 규범이 생기면.”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것이 안식의 [여관]이 됩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휴식의 여관은 ‘내가 생각하는 쉼’을 건축하는 것이고.”

타마르가 받았다.

“안식의 여관은 ‘내가 생각하는 강 건너’를 현실에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원탁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을 보며 말했다.

“죽은 이를 어떻게 배웅한다고 믿는지가, 결국 그 사람의 여관이 되는군요.”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위험합니다. 죽음을 가볍게 보는 사람의 여관은 망자를 가볍게 다룰 겁니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의 여관은 산 자의 울음을 쫓아낼 겁니다. 책임을 모르는 사람의 여관은 죽음을 정리하지 못할 겁니다.”

레플리카가 짧게 말했다.

“그런 곳은 치료소가 아니라 상처다.”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음을 거두었다.

“그 정도면 국가가 함부로 장려할 신술은 아니군.”

슈샤니크가 즉시 말했다.

“전문 교단과 감독 절차가 필요합니다. 특히 안식계 신술은 사망자 관리, 장례권, 교단 권한, 유가족 동의가 얽힙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여관]은 멋진 신술이지만, 장난감이 아니야.”

그녀는 원탁 위에 펼쳐진 여러 여관들을 보았다.

“이제 예시를 보자.”

먼저,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게 [여관]은 극장이야.”

그 말과 함께 복도 한쪽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객석이 있었다.

붉은 커튼이 내려와 있었고, 무대 위에는 아직 켜지지 않은 조명이 매달려 있었다. 무대 뒤편에는 분장실이 있었고, 분장대 위에는 사용된 가면과 아직 쓰이지 않은 대본, 식어가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곳은 화려했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박수가 울리지 않을 때에도, 그 극장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문 앞에서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쉼은, 자기 삶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이야.”

그녀는 무대 위에 걸린 조명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자기 삶을 그냥 견디기만 하다 보면, 어느 장면에서 넘어졌는지, 어떤 대사를 삼켰는지, 어디서 아직 선택할 수 있었는지 잊어버려. 그래서 내 극장은 그걸 비춰줘.”

무대 위에 흐릿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성문 앞에서 울고 있었다.
누군가가 전장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왕관을 쓴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웃음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억지로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말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는 사람의 삶을 대신 써주는 신술이 아니야. 내가 대본을 쥐고 ‘너는 이렇게 살아라’라고 명령하는 힘도 아니고.”

그녀는 손끝으로 조명을 움직였다.

조명은 사람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다만 어둠 속에 묻힌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이 자기 삶을 하나의 극으로 다시 바라보게 해. 자기가 어떤 장면에 서 있는지, 어디서 아팠는지, 어디서 아직 선택할 수 있는지. 그걸 보게 하는 조명이야.”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무대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담담히 이어 말했다.

“피해자의 침묵이 박수에 덮이면,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침묵이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극장은 조심해야 해.”

레플리카도 말했다.

“아픈 사람에게 당장 대사를 요구하면 안 된다.”

“맞아.”

푸리나는 바로 인정했다.

“어떤 사람은 무대에 서기 전에 객석에 앉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분장실에서 울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 커튼을 열면 안 돼.”

라이자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박수가 품이 될 수도 있겠네요.”

푸리나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충분히 잘했다’고 말해주는 박수요. 보상은 꼭 물건이 아니니까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내가 좋아하는 박수는 그런 거야.”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극은 기록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알토는 담담했다.

“각색은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흐리면 안 됩니다. 극으로 보여주는 것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목적이 다릅니다.”

푸리나는 조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아. 극은 진실을 비추는 방식이지, 기록을 덮는 장막이 아니어야 해.”

그레이는 그 말을 적었다.

《[여관:극장] — 삶을 하나의 극으로 비추어, 각자가 자기 여정의 굴곡과 가능성을 보게 하는 조명. 단, 무대는 침묵을 박수로 덮거나 책임을 각색으로 흐려서는 안 된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응. 그게 내 여관이야.”

그녀는 무대 뒤 분장실을 보았다.

“그리고 커튼콜 뒤에는, 배역을 내려놓고 쉬는 방이 있어야 해.”

그다음 그녀가 손짓하자, 다른 문들이 차례로 빛났다.

“레이튼 경에게 [여관]은 [문답의 서재]야.”

레이튼은 모자챙을 가볍게 만졌다.

그는 오늘 외부 질문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여관을 보여주는 신도였다.

“제게 쉼이란 정답을 강요받지 않고 질문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제 여관은 끝이 정해진 책을 쌓아두는 장소가 아닙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책과, 이름 붙지 않은 별과,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머무는 서재입니다.”

그가 말하자, 복도 한쪽 문이 서재로 바뀌었다.

오래된 책장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천장에는 별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별자리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공중에는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종이처럼 떠다녔다.

정답이 없는 공간.

그러나 그래서 숨 쉴 수 있는 공간.

게오르기아가 조용히 반응했다.

“질문이 쉴 곳이 된다는 말은 교육자의 입장에서도 이해됩니다.”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말했다.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정답부터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질문해도 괜찮은 방이 필요합니다. 질문이 죄가 되지 않는 방. 모른다고 말해도 쫓겨나지 않는 방.”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런 방이라면, 학생뿐 아니라 왕에게도 필요하겠지요.”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왕에게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다음으로 하융을 보았다.

“하융에게는 [비껴간 창]이야.”

하융은 조용히 눈을 내렸다.

“그렇소. 내게 여관이란 도망칠 방이 아니라, 선택하지 못한 길들을 바라보고도 이 세계를 다시 선택하기 위한 창이오.”

그가 말하자 복도 한쪽에 수많은 창이 열렸다.

창마다 다른 세계가 있었다.

살았을지도 모르는 병사.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전선.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람.
자신이 죽었을 가능성.
자신이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

이미 죽어버린 세계들이 창밖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레플리카가 하융을 보았다.

“죽은 가능성을 보는 건 고통을 늘릴 수도 있겠군.”

하융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많이 늘리지.”

그는 잠시 창들을 보았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나는 지금 이 세계를 선택했다는 사실도 잊을 때가 있소.”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그걸 보고도 현재를 선택한다면, 견딘다는 말과 닮았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맞소.”

푸리나는 그다음 죠니를 보았다.

“그리고 죠니에게는 [찰나]지.”

죠니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다가, 조금 귀찮다는 듯 시선을 들었다.

“내 차례야?”

푸리나는 웃었다.

“응. 중요한 예시야.”

죠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여관은 오래 머무는 방이 아니었다.

말발굽이 땅을 치는 소리.
창끝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더 선명해지는 숨.
끝나기 직전의 삶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황금빛 회전.

그것이 죠니의 [여관:찰나]였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내 여관은 오래 앉아 있는 데가 아니야.”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여관인데?”

“그러게. 좀 이상하지.”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내겐 그게 쉬는 방식이야. 길이 영원히 돌고, 생과 사가 계속 반복된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는 원탁 위 작은 등불을 보았다.

“죽을 뻔한 순간이라고 해서 전부 비극은 아니야. 지금 달릴 수 있으면, 지금 창을 내밀 수 있으면, 지금 누군가를 구할 수 있으면…… 그 찰나는 진짜야.”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죠니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답게, 말은 짧고 건조했다.

“그러니까 내 여관은 침대보다 박자에 가까워. 숨을 고르고, 고삐를 잡고,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박자.”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멈추면 더 아플 때가 있거든. 그럴 땐 끝까지 가야 해.”

아스트리트가 별빛 등불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찰나가 쉼일 수 있다는 건 흥미롭습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제가 믿는 별은 생명을 긍정합니다. 생명은 단순히 오래 머무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살아 있다는 건, 때로는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다만.”

아스트리트는 덧붙였다.

“모든 사람에게 계속 움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죠니는 작게 웃었다.

“맞아. 나한테도 가끔 그게 문제야.”

그레이가 적고 있었다.

《[여관:찰나] — 오래 머무는 방이 아니라, 생과 사 사이의 반복 속에서도 지금의 선택을 진짜로 긍정하게 하는 박자.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기 위한 찰나의 쉼.》

죠니는 그 문장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꽤 멋있게 적었는데.”

그레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용상 필요합니다.”

“그래. 뭐, 됐어.”

푸리나는 이번에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레이에게는 [기억이 잠드는 거리]가 있어.”

그레이의 펜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 여관의 복도 한쪽에 다른 풍경이 겹쳤다.

비가 그친 뒤의 돌길.
낮은 처마.
작은 문들.
문마다 걸린 등불.
손으로 여러 번 닦은 듯한 문패.

그 거리는 요란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울부짖는 망령도, 전투를 기다리는 원혼도 없었다.

다만 이름들이 있었다.

잊히지 않은 이름들.

그리고 그 이름들이 더 이상 고통 속에서 떠돌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마친 뒤 조용히 잠들 수 있도록 마련된 거리.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제 여관은…… 묘지가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죽은 자를 붙잡아두는 곳도 아닙니다. 죽은 자의 원한을 모아두는 곳도 아닙니다.”

아레가 조용히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제 여관은 이름과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칠 때까지, 그들이 숫자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거리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름을 확인합니다. 죽음의 이유를 확인합니다. 그 이유가 배급, 치안, 위생, 후송, 부패, 성벽, 명령, 기록 누락 중 무엇이었는지 확인합니다.”

푸리나는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산 자의 제도에 반영합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래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쉬셔도 됩니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게 하지 않겠습니다.”

원탁은 조용해졌다.

타마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한 안식이군요.”

“예.”

그레이는 짧게 답했다.

“조용해야 합니다. 그분들은 이미 충분히 시끄러운 죽음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토가 그레이를 보았다.

“기록이 잠들 수 있다는 말은, 기록의 성좌 신앙에서는 조금 낯설게 들립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알토는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기록이 계속 피를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아카식은 펜을 멈추었다.

농담하지 않았다.

알토는 말했다.

“기록이 책임을 다했다면,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근거로 남아야 합니다.”

그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해석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푸리나는 펼쳐진 여관들을 보았다.

푸리나의 여관은 조명과 무대와 박수로 삶을 다시 보게 한다.

레이튼의 여관은 질문이 살아 있을 여백을 준다.

하융의 여관은 죽은 가능성을 보고도 현재를 선택하게 한다.

죠니의 여관은 생과 사 사이의 지금을 완성한다.

그레이의 여관은 이름과 기억이 산 자의 제도에 닿은 뒤, 비로소 조용히 잠들게 한다.

모두 여관이었다.

그러나 같은 방은 아니었다.

라이자가 은빛 등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건 허그와 보상의 성좌와도 닮았어요.”

푸리나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안아준다는 건, 모두를 같은 자세로 끌어안는다는 뜻이 아니니까요. 어떤 사람은 품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거리를 둔 따뜻함이 필요해요. 어떤 사람에게 보상은 가족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혼자 울어도 되는 방일 수도 있고요.”

푸리나는 천천히 웃었다.

“그 번역 좋다.”

루나리아도 말했다.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방에 앉히는 것이 치유는 아닙니다. 서로 다른 방에 머물면서도, 문틈 아래로 빛이 오갈 수 있다면 그것도 인연일 수 있습니다.”

레플리카가 짧게 덧붙였다.

“고통도 그렇다. 누군가는 말해야 낫고, 누군가는 말하지 않아야 버틴다. 쉼의 방식이 하나뿐이면, 그건 치료가 아니다.”

그 말들이 원탁 위에 차례로 놓였다.

여관의 신학이 다른 별들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었다.

허그와 보상은 그것을 품의 거리로 이해했다.
인연은 문틈 아래 오가는 빛으로 이해했다.
고통교는 말해야 하는 고통과 말하지 않아야 버티는 고통의 차이로 이해했다.
기록은 피 흘리지 않아도 되는 기록으로 이해했다.
생명의 별은 계속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찰나로 이해했다.
교육은 질문해도 괜찮은 방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좋군. 듣기에는 아주 좋다.”

그는 팔짱을 끼고 원탁 위의 여러 방문을 보았다.

“하지만 군주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방을 지어줄 수 없다. 사람마다 필요한 쉼이 다르다고? 맞겠지. 그런데 도시와 국가는 그렇게 부드럽지만은 않다.”

그의 웃음은 호방했다.

하지만 그 안쪽에는 차가운 현실감이 있었다.

“모두에게 각자의 방을 허락하면, 공동체는 어디서 만나는가? 다들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성벽은 누가 지키고 밭은 누가 갈지?”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질문이었다.

여관은 개인을 쉬게 한다.

하지만 국가는 함께 살아야 한다.

그 둘은 언제나 같지 않다.

슈샤니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국가는 모든 내면을 지원할 수 없습니다.”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장례, 치료, 침묵, 상담, 기도 방식이 충돌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절차를 마련할 수는 있습니다.”

그녀는 장부의 한쪽에 새 항목을 만들었다.

《공동체 적용 원칙》

“하나. 모든 개인의 내면을 국가가 대신 설계하지 않는다. 둘. 서로 다른 쉼의 방식이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허용한다. 셋. 공동의 식탁, 공동의 성벽, 공동의 법은 유지한다. 넷. 단, 그 공동성은 개인의 상처를 부정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민다우가스는 잠시 그 문장을 보았다.

“나쁘지 않군.”

그답게 짧은 칭찬이었다.

푸리나가 덧붙였다.

“모든 사람에게 방 하나씩을 지어주자는 게 아니야.”

그녀는 원탁 위에 놓인 여러 등불을 보았다.

“적어도 같은 식탁에 앉더라도, 숨 쉬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자는 거지. 누군가는 웃으며 먹고, 누군가는 조용히 먹고, 누군가는 문 가까이에 앉아야 해. 그래도 같은 식탁은 가능해.”

벨라가 짧게 말했다.

“식탁은 좋다. 그러나 겨울에는 벽도 필요하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여관에도 문이 있잖아요.”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하! 그 대답은 꽤 쓸 만하군.”

그레이가 적었다.

《여관의 다양성은 공동체의 해체가 아니라, 같은 식탁 안에서 서로 다른 숨을 허용하는 질서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마침내 푸리나는 복도 끝의 문을 보았다.

“이제 안식 이야기를 하자.”

타마르가 포도잎을 집어 들었다.

“살아 있는 여정에는 휴식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한 이름으로 걷는 여정은 언젠가 닫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른했다.

“그러나 닫힌다는 말은 사라진다는 말과 같지 않답니다. 포도나무도 한 해의 열매를 거두고 나면 끝난 듯 보이지요. 하지만 밭은 잠들고, 흙은 쉬고, 다음 계절을 준비한답니다.”

그녀는 복도 끝의 문을 보았다.

“안식도 그러하겠지요. 한 생의 수확을 거두고, 그 이름으로 걸었던 길을 정리하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게 하는 것.”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좌의 안식은 영원히 멈춰 서는 방이 아니야.”

원탁 위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또렷하게 말했다.

“죽음은 한 이름으로 걸어온 여정이 닫히는 순간이야. 하지만 영혼이 영원히 정지하는 순간은 아니야. 안식은 그 여정을 정리하고, 다음 여정으로 넘어가기 전 머무는 쉼이야.”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적었다.

《안식은 한 이름으로 걸은 여정을 닫고, 다음 여정으로 넘어가기 전 머무는 쉼이다.》

푸리나는 장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윤회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길을 여는 일.”

루나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인연은 어떻게 됩니까?”

그 질문은 아주 조용했지만, 원탁의 여러 사람을 붙잡았다.

요안나도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라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 위에 손을 얹었다.

“같은 이름으로 붙잡지 않는다면, 남은 자와 떠난 자의 인연은 어떤 형태로 남습니까?”

푸리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레가 빈 이름표를 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이름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란다.”

그녀의 검은 실이 이름표 가장자리를 가볍게 스쳤다.

“이 이름으로 걸었던 길을 바르게 닫아주기 위한 것이지. 닫히지 못한 이름은 다음 길로 가는 발목을 잡을 수도 있으니.”

루나리아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는 계속했다.

“죽은 아이의 이름을 적는 것은, 그 아이를 다시 산 자의 일에 동원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문이 열렸을 때, 그 아이를 바르게 불러주기 위해서.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을 때, 어둠 속에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

루나리아가 낮게 말했다.

“떠난 이를 잊지 않아도, 붙잡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 그게 여관좌 신학에서의 기억이야.”

루나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인연의 신학에서도 중요한 구분입니다. 이어진다는 것이 언제나 같은 형태로 계속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그녀의 달빛 등불이 낮게 흔들렸다.

“어떤 인연은 이름을 바꾸고, 어떤 인연은 기도의 형식으로 남고, 어떤 인연은 다음 생에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때 서로에게 닿았던 일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알아보지 못해도 인연입니까?”

루나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것을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신학자마다 다를 겁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만 저는, 한 번 서로에게 닿았던 존재들이 완전히 무의미로 떨어진다고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에게도 닿았다.
그때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책임은 어떻게 됩니까?”

원탁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알토의 질문은 차가운 반박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었다.

“한 생의 여정을 닫고 다음 여정으로 넘어간다면, 그 생의 선택과 책임은 어디에 남습니까?”

푸리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여관좌 신학이 윤회를 긍정한다면, 위험이 있었다.

“어차피 다음 생이 있다”는 말로 지금의 삶을 가볍게 여길 위험.

“이 이름은 끝났으니 책임도 끝났다”는 말로 죄를 흘려보낼 위험.

푸리나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잠시 찾아야 했다.

그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장부가 필요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에게 향했다.

그레이는 담담히 말했다.

“윤회가 한 생의 책임을 지우는 구조라면, 기록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관좌 신학에서 안식이 ‘정리’라면, 정리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녀는 장부의 항목을 하나씩 짚었다.

“지나온 길. 필요한 휴식. 닫아야 할 여정. 다음 문.”

그리고 새 항목을 추가했다.

《남겨야 할 책임》

“한 생이 닫힌다고 해서, 그 생이 없던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례는 폐기가 아닙니다. 결산에 가깝습니다.”

슈샤니크가 조용히 반응했다.

“결산이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도, 잘못도, 갚아야 할 것도, 이어받을 것도 정리합니다. 죽은 자 자신이 갚지 못하는 것은 산 자의 제도와 기억이 이어받습니다. 그렇기에 이름과 사망 원인, 선택의 결과를 기록해야 합니다.”

알토는 잠시 그레이를 보았다.

“그 해석에는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윤회는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니야.”

그녀는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오히려 지금의 여정이 하나의 막이기 때문에, 제대로 닫아야 하는 거야. 어설프게 닫힌 막은 다음 무대에 그림자를 끌고 가니까.”

아레가 낮게 말했다.

“닫히지 못한 이름이 다음 길의 발목을 잡는다는 뜻이겠지.”

타마르가 말했다.

“수확하지 않은 밭은 다음 계절을 병들게 하기도 한답니다.”

레플리카가 짧게 덧붙였다.

“치료하지 않은 상처가 흉터만 남기면 다행이지. 곪을 수도 있다.”

루나리아도 조용히 말했다.

“풀지 않은 인연은 다음 만남에서 다른 모양의 매듭이 되겠지요.”

푸리나는 그 말들을 하나씩 받아들였다.

여관의 신학은 가볍지 않았다.

윤회를 긍정한다고 해서 죽음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한 생을 제대로 닫아야 한다는 책임이 더 무거워진다.

그때 아레가 아주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재연극:앙코르》도 여기서 조심히 다뤄야겠구나.”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앙코르.

그 이름이 나오자, 복도의 여러 방문 사이로 희미한 무대 그림자가 흔들렸다.

스러져간 별들의 실루엣.
한때 무대 위에 섰던 배우들의 흔적.
웃음과 박수, 피와 눈물, 퇴장과 커튼콜.

푸리나는 자신의 신술을 떠올렸다.

《재연극:앙코르》는 그녀의 [여관:극장] 안에서 치러졌던 극과 배우들의 서사를 축적하고, 그 서사를 바탕으로 특정 배우의 성격이나 특성, 혹은 지나간 극의 일부를 다시 구현하는 힘이었다.

강하게 쓰면, 과거의 무대와 배우를 그림자처럼 재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되살림이 아니었다.

푸리나가 먼저 말했다.

“앙코르는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 신술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나는 그걸 분명히 해야 해.”

아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러진 별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일은, 그 별을 다시 살리는 일이 아니란다. 기억함으로써 잠시 비추는 것이지.”

타마르가 말했다.

“죽은 배우를 다시 배역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레이가 적었다.

《재연극:앙코르의 신학적 해석: 사자 부활이 아니라, 기억된 서사를 잠시 무대 위에 비추는 행위. 죽은 이를 붙잡거나 동원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됨.》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앙코르는 붙잡기 위한 게 아니야.”

그녀는 복도 끝의 문을 보았다.

“그 이름으로 걸은 여정이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잠시 말해주는 거야.”

아레는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앙코르는 문을 닫지 못하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닫기 전 마지막으로 등불을 들어주는 기술이어야겠지.”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응.”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래야 해.”

잠시, [여관:극장] 안에 아주 작은 장면이 떠올랐다.

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 인사하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한 생의 배역을 끝내고, 잠시 관객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장면은 곧 사라졌다.

붙잡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 순간을 보며 기록했다.

《기억은 사슬이 아니라, 한 생의 문 앞까지 들고 가는 등불.》

마침내 그레이는 장부를 정리했다.

“2막 결론을 정리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읽었다.

“첫째. 여관좌는 인간의 굴곡진 여정을 긍정한다. 그러나 굴곡을 변명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둘째. 휴식 신술은 큐어와 힐에서 출발해, 피로와 회복, 위험과 피난처를 식별하는 [길]의 인식으로 깊어진다.”

“셋째. [여관]은 신도가 축적한 휴식의 정의가 현실화된 상위 신술이다. 즉, 자기 삶과 상처와 철학을 통해 발견한 이상적 쉼의 건축물이다.”

“넷째. 안식 신술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슬픔을 보는 일에서 시작한다. [강 너머를 보는 눈]은 안식의 기초이며, 죽은 자들을 보내며 쌓인 묘비의 규범이 안식의 [여관]이 된다.”

“다섯째. [여관]은 초대이지 강제가 아니다. 타인에게 자기 방식의 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안식은 영원한 정지가 아니라, 윤회를 앞두고 한 생을 정리하는 쉼이다.”

“일곱째. 이름과 기억은 영혼을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걸은 여정을 바르게 닫고 다음 문 앞까지 배웅하기 위한 등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레이는 별도 항목을 읽었다.

《신술 해석》

1. [여관]은 신도가 생각하는 이상적 쉼의 장소이며,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답이다.


2. 휴식계 [여관]은 큐어와 힐, 피로의 식별, [길]의 인식을 거쳐 쌓아올린 쉼의 정의가 현실이 된 것이다.


3. 안식계 [여관]은 죽은 자의 망집과 산 자의 슬픔을 보며, 강 너머로 보내준 이들의 묘비가 심상 안에서 규범을 얻어 현실화된 것이다.


4.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삶을 하나의 극으로 비추어, 각자가 자기 여정의 굴곡과 가능성을 보게 하는 조명이다. 단, 무대는 침묵을 박수로 덮거나 책임을 각색으로 흐려서는 안 되며, 무대에 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대사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


5. 레이튼의 [여관:문답의 서재]는 닫힌 결론을 질문으로 되돌리고, 답을 강요받지 않아도 되는 여백이다.


6. 하융의 [여관:비껴간 창]은 죽은 가능성을 보고도 현재 현실을 다시 선택하게 하는 창이다.


7. 죠니의 [여관:찰나]는 생과 사의 반복 속에서도 지금의 선택을 진짜로 긍정하게 하는 찰나의 쉼이다.


8. 그레이의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이름과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친 뒤, 망자가 조용히 잠들 수 있게 하는 안식의 거리다.


9. 그러므로 [여관]은 초대이지 강제가 아니다. 자기 방식의 쉼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여관은 여관이 아니라 수용소가 된다.


10. 《재연극:앙코르》는 죽은 이를 부활시키거나 붙잡는 신술이 아니라, 기억된 서사를 잠시 비추어 한 생의 여정을 바르게 배웅하기 위한 등불이어야 한다.



그레이는 펜을 멈추었다.

푸리나는 그 문장들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 문장.”

그레이가 다시 펜을 들었다.

푸리나는 빈 의자 위 찻잔을 보았다.

찻잔의 김은 거의 사라졌지만, 잔은 아직 따뜻해 보였다.

“여관은 모두에게 같은 방을 주지 않는다. 각자가 다시 숨 쉴 수 있는 방을 찾게 한다.”

그레이는 그대로 적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방은 마지막 정지가 아니라, 다음 여정을 시작하기 전 한 생을 정리하는 불빛이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완성했다.

《여관은 모두에게 같은 방을 주지 않는다. 각자가 다시 숨 쉴 수 있는 방을 찾게 한다. 그리고 그 방은 마지막 정지가 아니라, 다음 여정을 시작하기 전 한 생을 정리하는 불빛이다.》

잠시 뒤, 그녀가 덧붙였다.

《기록의 신도는 책임을 물었고, 인연의 사제는 붙잡지 않는 연결을 보았고, 고통의 군주는 각기 다른 회복을 말했으며, 허그와 보상의 군주는 품에도 거리가 필요함을 알아들었다. 생명의 별의 검사는 찰나의 쉼을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번역했고, 국가의 군주는 여관의 다양성을 공동체의 질서로 시험했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신도들은 서로의 신학을 자기 언어로 번역하였다.》

타마르는 찻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박수보다 차가 어울리겠지요.”

아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의 아이를 놀라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푸리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들었다.

“그럼 오늘은 배웅의 차로.”

그 말에 모두가 각자의 찻잔을 들었다.

기록의 여백도, 인연의 달빛도, 고통의 불씨도, 허그와 보상의 은빛도, 개척의 별길도, 포도밭의 저녁도.

각자의 빛은 달랐다.

그러나 찻잔 위로 올라가는 김은, 잠시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복도 끝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문은 단순한 종착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문은 커튼콜 뒤의 분장실로 이어지는 문이자, 정돈된 저녁으로 이어지는 문이자, 언젠가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기 전 잠시 머무는 따뜻한 방처럼 보였다.

그리고 여관좌의 빈 의자는 끝까지 비어 있었다.

그 침묵 덕분에, 인간들의 말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 《별 아래의 신학제》

## 1막 — 기도의 개회식

### 부제: 성좌는 침묵하고, 인간은 더듬어 말한다

“이번에는 신을 이야기하자!”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선언하자, 강당이 조용해졌다.

무력제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보다 조용했다.
학술제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보다도 조용했다.

칼을 겨루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웃거나 긴장했다.
학식을 겨루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펜을 들거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신을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먼저 자기 안쪽을 보았다.

라플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칼 내려놓으라고 했을 때보다 반응이 더 살벌한데.”

레이튼이 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칼은 손에 들려 있지만, 신앙은 사람의 중심에 있으니까요.”

“그럼 오늘이 제일 위험한 날이라는 거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을 공격받았다고 느낄 때, 자기가 다쳤을 때보다 더 깊게 반응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레이는 이미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신학제 진행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필요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엄격했다.

“첫째. 상대 성좌에 대한 모독 금지. 둘째. 신명, 교리명, 의식명 오탈자 금지. 셋째. 상대 신앙을 자기 교리로 흡수해 해석하는 행위 금지. 넷째. 교리적 차이를 숨기는 행위도 금지. 다섯째. 논파보다 이해와 번역을 우선합니다.”

아카식이 기록대에서 펜을 들었다.

“그레이가 오늘 제일 신학적으로 무섭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탈자는 이단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가 납득했다.

“무섭게 설득력 있어.”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믿음과 검수는 별개입니다.”

아카식이 곧장 적었다.

“좋다. 그 문장은 기록할래.”

알토는 짧게 답했다.

“정확히 기록하십시오.”

“알토, 오늘 나를 못 믿는 거야?”

“기록자를 믿습니다. 그래서 검수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이거 시작부터 신학제답네.”

강당은 천천히 변했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이번에는 경기장도, 교실도, 공방도 아닌 장소를 만들었다.

예배당.

그러나 하나의 제단이 중앙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중앙에는 원탁이 있었다.
그 원탁 위에는 하나의 거대한 촛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작은 등불이 놓였다.

어떤 등불은 여관의 창문처럼 따뜻했다.
어떤 등불은 기록책의 흰 여백처럼 고요했다.
어떤 등불은 검은 고통의 밤 속에서 버티는 작은 불씨 같았다.
어떤 등불은 달빛처럼 부드럽고 낮았다.
어떤 등불은 성은처럼 따뜻한 은빛이었다.
어떤 등불은 미답의 길 끝에서 깜박이는 별빛이었다.
어떤 등불은 제국의 법전처럼 단정했고, 어떤 등불은 포도밭 저녁처럼 흐렸다.

그 어느 등불도 중앙을 독점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탁의 한쪽에는 빈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의자 위에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차는 이미 따라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의자에 앉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빈 의자를 보았다.

여관좌의 자리.

그러나 오늘,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성좌가 직접 와서 자기 신학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토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탁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자리는 신탁을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성좌의 침묵 앞에서, 인간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경험과 기도와 신술을 근거로 더듬어 말하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빈 의자를 향해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차 향이 아주 조금 짙어졌다.

그뿐이었다.

말은 없었다.

푸리나는 원탁 중앙으로 돌아왔다.

“오늘 이 예배당은 어느 한 성좌의 성소가 아니야.”

그녀는 여관좌의 빈 의자와 여러 등불을 번갈아 보았다.

“여긴 잠시 서로의 기도를 듣기 위해 빌린 방이야. 그러니까 아무도 이 방의 주인이 되면 안 돼. 나도, 너희도, 어떤 교단도.”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시작입니다.”

루나리아 아누아가 달빛 같은 등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등불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 난 손 위에 얹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다.

푸리나는 그 등불을 보고 말했다.

“아누아 경의 자리는 저기구나.”

루나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인연의 별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보다, 끊어진 실이 다시 손에 닿을 만큼 낮게 비추는 편을 좋아합니다.”

라플리가 팔짱을 꼈다.

“인연이라. 말만 들으면 제일 순한데, 제일 귀찮을 것 같은 성좌네.”

루나리아는 화내지 않았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이해합니다. 인연은 때로 상처를 다시 보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요안나가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리깔았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잠시 루나리아의 달빛 등불에 머물렀다.

인연의 성좌.

그것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라는 별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관계 위에 달빛을 내려, 다시 마주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보호하는 별.
용서를 명령하지 않는 별.
그러나 용서가 가능할 수 있는 자리와 시간을 마련하는 별.

니케아에는 그 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필요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좌 본인이 아니라, 루나리아 아누아였다.

푸리나는 다시 원탁 중앙으로 돌아왔다.

“오늘 이 자리는 누구의 별이 가장 밝은지 겨루는 자리가 아니야.”

그녀는 원탁 위 등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별을 봐. 어떤 사람은 기록의 별을, 어떤 사람은 고통의 별을, 어떤 사람은 인연의 별을, 어떤 사람은 허그와 보상의 별을, 어떤 사람은 개척의 별을, 어떤 사람은 여관의 별을 보겠지.”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오늘의 질문은 이거야.”

푸리나는 원탁 가운데에 작은 별등 하나를 놓았다.

“우리는 왜 그 별을 보고 걷는가?”

강당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전보다 조금 덜 날카로웠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위험해?”

“예.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설명하다가, 때로는 자신이 왜 그것 없이는 버틸 수 없었는지까지 말하게 되니까요.”

아레가 낮게 말했다.

“그런 질문은 가볍게 열어서는 안 된단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오늘은 천천히 열 거야.”

아카식이 펜을 들었다.

“좋아. 기록도 천천히 해야겠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신명, 교리명, 의식명은 당사자 확인 후 기록하십시오.”

“알았어. 오늘은 진짜 조심할게.”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아카식은 조금 웃었다.

“그레이가 진짜 무서운 날이네.”

레이튼은 모자를 원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기에 신학은 논파이면서 고백이고, 고백이면서 번역입니다.”

“번역?”

푸리나가 물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믿는 별이 나에게 어떤 하늘인지, 그 별을 보지 않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일이지요.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가 바라보는 방향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신학제 원칙. 논파보다 고백과 번역을 우선. 단, 교리 차이 은폐 금지.》

아카식이 옆에서 말했다.

“엄격하네.”

그레이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빈 의자 위 찻잔을 보았다.

차 향은 여전히 은은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자리를 단단하게 했다.

성좌는 침묵한다.

신학은 그 침묵 앞에서 인간이 더듬어 세운 언어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굴려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좋았다.

그때 푸리나는 문득 손가락을 하나 더 세웠다.

“아. 중요한 규칙 하나 더.”

그레이가 바로 펜을 들었다.

“추가 규칙입니까?”

“응. 신술에 대한 것.”

그 말에 원탁 위의 공기가 살짝 바뀌었다.

신술.

성좌가 신도에게 내려준 기적.
기도가 세계에 닿아 형태를 얻는 방식.
때로는 치유가 되고, 때로는 기록이 되고, 때로는 검이 되고, 때로는 무대가 되고, 때로는 성벽이나 장부가 되는 것.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신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좌가 인간에게 허락한 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한 오해의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푸리나는 여관좌의 빈 의자를 보았다.

“우리는 성좌님들을 불러서 정답을 듣지 않을 거야. 그러면 신학이 아니라 신탁이 되니까.”

빈 의자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지만 신술은 다룰 거야.”

라플리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신술을 빼고 성좌를 논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맞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술은 성좌가 인간에게 허락한 기적이잖아. 어떤 신술이 사람을 어떻게 돕는지, 무엇을 강하게 만들고, 무엇을 금지하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보면 그 성좌가 어떤 별인지 조금은 알 수 있어.”

그레이가 적었다.

《신술은 교리 확정의 근거가 아니라, 신도들이 성좌를 해석하기 위한 사례 자료로 취급한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좋은 정리입니다. 기적은 답안지가 아니라,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증거일 수 있지요.”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신술 사용 기록은 반드시 맥락과 함께 남겨야 합니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맥락?”

“예. 같은 신술이라도 전장에서 쓰였는지, 장례에서 쓰였는지, 치료에서 쓰였는지, 통치에서 쓰였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기록 없이 신술만 떼어내면, 기적은 쉽게 선전이 됩니다.”

슈샤니크가 낮게 말했다.

“동의합니다. 신술은 은혜이기도 하지만, 제도와 권력 안에 들어오는 순간 정치적 도구가 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그리고 고통을 줄이는 신술을 고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면 안 된다.”

루나리아가 덧붙였다.

“인연을 잇는 신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이어야 한다는 명령은 아닙니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보며 말했다.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대로 만들어도 된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요.”

아레가 낮게 말했다.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죽은 이를 계속 불러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듯이.”

그 말에 푸리나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재연극:앙코르》.

그것은 그녀의 극장에 축적된 서사를 다시 비추는 신술이었다.
스러져간 별들을 잠시 무대 위에 불러, 그들이 충분히 아름다웠음을 기억하는 힘.

하지만 그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 아니었다.

붙잡는 힘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꼭 넣자.”

그레이가 장부에 새 항목을 만들었다.

《신술 해석 원칙》

1. 신술은 성좌가 직접 말한 교리가 아니라, 신도가 성좌를 해석하기 위한 사례 자료다.
2. 신술은 반드시 사용 맥락과 함께 기록한다.
3. 신술의 가능성이 곧 윤리적 허가를 뜻하지는 않는다.
4. 각 막에서는 대표 신술 1~2개를 중심으로 다루며, 교리·위험한 오해·신도의 책임을 함께 논한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좋아. 이러면 신학제가 훨씬 신학제다워졌어.”

아카식은 기록장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기록할 게 훨씬 많아졌지.”

그레이가 말했다.

“필요한 증가입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그래. 오늘은 인정.”

푸리나는 원탁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면 첫 의제.”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작은 문장이 떠올랐다.

《타인의 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레이튼이 먼저 말했다.

“이해한다는 것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왜 그 별을 보고 걷는지 알게 되는 것이 이해에 가까울 때가 있습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도 그렇습니다. 평화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을 이유로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하일라는 요안나의 말을 들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그 선택을 지키기 위해 제도와 힘이 필요합니다.”

요안나는 답했다.

“예. 다만 그 힘이 입을 막는 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루나리아가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힘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안나와 미하일라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에 손을 얹었다.

“인연은 같은 문장을 말하게 만드는 사슬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 만큼, 상처 위에 얇은 빛을 내리는 일입니다.”

요안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미하일라도 부정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그 틈에 말했다.

“신학제 기록은 반드시 원문과 번역문을 병기해야 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중요합니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면 분쟁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안식’과 ‘죽음’과 ‘귀환’과 ‘구원’은 서로 교차하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알토가 동의했다.

“맞습니다. 기록의 훼손은 종종 번역에서 시작됩니다.”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외교 문서도 그렇죠. ‘보호’와 ‘지배’를 잘못 번역하면 나라가 바뀝니다.”

민다우가스가 크게 웃었다.

“하! 그건 신학이 아니라도 그렇다. 말 하나가 성벽 하나보다 비쌀 때가 있지.”

벨라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돌에 새길 말은 짧아야 한다.”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짧고, 무겁게?”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진 뒤에도 읽힐 만큼.”

아카식은 조용히 적었다.

《돌에 새길 말은 무너진 뒤에도 읽힐 만큼 짧고 무거워야 한다.》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공식 기록 후보로 적절합니다.”

아카식은 약간 기쁜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다음 질문을 열었다.

“그러면 신학제의 최종 목표는 뭘까?”

라플리가 말했다.

“서로 안 싸우기.”

그레이가 적으려 하자 라플리가 당황했다.

“아니, 그걸 진짜 적어?”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핵심 목표 중 하나입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싸우기만 하면 너무 소극적이지.”

라이자가 은빛 등불을 보았다.

“서로 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게 되는 건요?”

레플리카가 말했다.

“그리고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도 알아야 한다.”

루나리아가 덧붙였다.

“어떤 손길이 아직 이른지도 알아야 합니다.”

아레가 이어 말했다.

“어떤 침묵이 필요한지도.”

타마르가 말했다.

“어떤 문으로 보내드려야 하는지도.”

그레이는 그것들을 모두 적었다.

“상호 이해의 항목. 소중한 것, 상처가 되는 말, 이른 손길, 필요한 침묵, 배웅해야 할 문.”

아카식이 낮게 말했다.

“오늘 기록 진짜 어렵네.”

알토가 답했다.

“그래서 정확해야 합니다.”

“네가 계속 그렇게 말하면 나도 긴장돼.”

“좋은 일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알토식 격려는 늘 묘하게 딱딱했다.

하지만 신학제에는 그 딱딱함이 필요했다.

게오르기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학교에서는 이것을 가르쳐야 할 겁니다. 다른 신앙을 이국적인 풍습으로 구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기도하는지 예절과 함께 가르치는 일.”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최종 목표는 이렇게 하자.”

그녀는 칠판처럼 떠오른 빛 위에 손가락으로 적었다.

《같은 별을 믿지 않아도, 같은 밤을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원탁 위 등불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아카식이 말했다.

“제목으로도 괜찮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마지막 문장 후보야.”

“벌써 마지막을 생각해?”

“극장주는 늘 마지막을 생각해. 그래야 중간에 길을 잃어도 돌아올 수 있거든.”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건 훌륭한 극작가의 말이군요.”

푸리나는 어깨를 폈다.

“그렇지?”

그레이가 적었다.

《극장주는 마지막을 생각한다. 단, 결론을 서두르지는 않는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 너도 이제 나를 잘 알아.”

“업무상 필요합니다.”

“그것도 애정의 한 형태야.”

“아닙니다.”

루나리아가 살짝 웃었다.

“인연은 부정에서 시작될 때도 있습니다.”

그레이는 바로 말했다.

“그 가능성은 낮습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봐, 가능성은 있다는 뜻이잖아.”

“아닙니다.”

아카식은 그 대화를 적으려다 그레이의 시선을 받고 멈췄다.

“안 적을게.”

“잘하셨습니다.”

푸리나는 다시 사회자로 돌아왔다.

“신학제의 막 구성은 이렇게 갈 거야.”

그녀의 손짓에 원탁 위 등불들이 하나씩 밝아졌다.

“첫째. 여관의 신학.”

따뜻한 창문 같은 등불이 켜졌다.

“쉬어가는 신과 마지막 문. 죽은 이를 소유하는가, 맞이하고 배웅하는가. 그리고 죽음 뒤의 안식과 윤회는 무엇인가.”

푸리나는 빈 의자를 보았다.

그 자리에는 여관좌가 없었다.

그러나 차는 있었다.

“이 막은 내가 말할 거야. 그리고 그레이, 타마르, 아레가 함께 해석해줄 거고. 대표 신술은 내 [여관:극장]과 《재연극:앙코르》를 중심으로 보자.”

아레가 낮게 말했다.

“앙코르는 조심히 다뤄야겠구나.”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죽은 이를 붙잡는 기술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할 거야.”

빈 의자의 찻잔에서 김이 조금 올라왔다.

대답은 없었다.

그 침묵이 좋았다.

“둘째. 기록과 선택.”

흰 여백 같은 등불이 켜졌다.

“허공록의 신학. 기록은 인간을 묶는가, 아니면 선택을 잊히지 않게 하는가. 여기서는 알토의 기록 신술과 기록재현을 사례로 다룰 거야.”

알토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아카식은 펜을 빙글 돌렸다.

푸리나는 아카식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아카식은 기록자. 신탁 금지.”

아카식은 억울한 척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미리 말하는 거야.”

알토가 짧게 말했다.

“적절합니다.”

아카식이 알토를 보았다.

“너까지?”

“필요합니다.”

“좋아, 좋아. 오늘은 기록만 할게. 대부분은.”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아카식은 대답 대신 웃었다.

“셋째. 고통과 인연의 신학.”

검은 밤 속 작은 불씨와 달빛 등불이 함께 켜졌다.

“아픔은 왜 있는가. 그리고 아픈 뒤에도 사람은 다시 이어질 수 있는가. 레플리카의 고통교 신술과 루나리아의 인연·달빛 치유를 함께 볼 거야.”

레플리카는 짧게 말했다.

“줄일 수 있는 고통은 줄여야 한다.”

루나리아는 낮게 말했다.

“그리고 줄이고도 남은 통증 곁에, 누군가는 앉아 있어야 합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넷째. 허그와 보상의 신학.”

은빛 등불이 부드럽게 켜졌다.

“보상은 대가인가, 위로인가. 포옹은 소유인가, 존재 인정인가. 만들어진 존재도 안길 곳이 있는가. 라이자의 성은과 은인 신술을 중심으로 보자.”

라이자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있어야 해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다섯째. 별과 개척의 신학.”

미답의 길 끝에서 별빛이 켜졌다.

“성좌의 선택과 시련은 운명인가, 한계 너머의 질문인가. 신의 안배를 부수고 나아가는 것도 신앙일 수 있는가. 아스트리트의 《금목만리향파》와 아레의 개척·추도 신학을 같이 볼 거야.”

아스트리트의 눈이 별빛을 받았다.

아레는 그 옆에서 조용히 침묵했다.

그 침묵 안에는 세르비아의 무거운 길이 있었다.

“여섯째. 왕권과 신권.”

제국의 법전 같은 등불과 성벽 같은 그림자가 함께 켜졌다.

“성좌의 뜻과 국가의 생존이 충돌할 때, 군주는 무엇을 우선하는가. 여기서는 각자의 신술이 국가 권력과 만나면 어떻게 변하는지도 논의할 거야.”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좋군. 결국 그 질문은 피할 수 없지.”

미하일라는 침묵했고, 요안나는 그 침묵을 들었다.

벨라는 짧게 말했다.

“기도하는 손도 겨울에는 성벽 안에 있어야 한다.”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이미 기록할 준비를 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원탁 중앙의 모든 등불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여러 별, 하나의 밤.”

그 말과 함께 강당의 천장이 밤하늘처럼 깊어졌다.

“다민족 변경 도시 아르카다에 여러 성좌의 신앙이 함께 들어왔을 때, 공동 성역과 장례, 교육, 치료, 축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도 필요하겠군요. 각 신앙의 이름과 금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의 증오만 물려받습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공동 성역도 필요하겠습니다. 모든 신앙을 하나로 섞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도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서로를 해치지 않도록 머무는 곳.”

그레이가 말했다.

“의식 일정과 장소 배분, 사망자 기록, 각 교단 대표 확인도 필요합니다. 신술 사용 가능 구역과 금지 구역도 지정해야 합니다.”

라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되게 현실적이네.”

“필요합니다.”

아카식이 말했다.

“그리고 신명 오탈자 검수.”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수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신학제의 전체 목표는 정해졌네.”

그녀는 원탁 가운데 손을 올렸다.

“우리는 누구의 별이 이기는지 보러 온 게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예배당 전체에 퍼졌다.

“우리는 각자의 별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말하러 왔어.”

그녀는 빈 의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별들이 같은 도시의 밤하늘에 떠도 되는지 확인하러 왔지.”

차 향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뿐이었다.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말할 차례였으니까.

레이튼이 덧붙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첫 결론은 이렇겠군요.”

그는 원탁 위 빈 양피지에 적었다.

《신학은 별의 높이를 재는 일이 아니라, 그 별을 보고 걷는 사람의 길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레이는 그 아래에 한 줄을 더했다.

《신술은 그 길 위에 남은 발자국이다. 단, 발자국은 길의 전부가 아니므로, 반드시 맥락과 책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푸리나는 그 두 문장을 오래 보았다.

“좋다.”

그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기록에 적합합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좋아. 1막부터 공식 기록 풍년이네.”

푸리나는 작은 박수를 쳤다.

짝.

그 박수는 크지 않았다.

예배당에서 너무 큰 박수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은 소리는 원탁 위 등불들을 살짝 흔들었다.

신학제의 첫 막은 이렇게 닫혔다.

아직 아무 성좌의 깊은 교리는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았다.

아직 논쟁도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규칙은 세워졌다.

이 자리는 서로의 별을 끄기 위한 곳이 아니다.

서로의 별이 비추는 길을, 잠시 같은 등불 아래에서 들여다보기 위한 곳이다.

그리고 신술은 그 길 위에 남은 기적의 발자국이었다.

그 발자국을 보고 성좌를 단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발자국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원탁의 등불들을 보았다.

여관의 창문.
허공록의 여백.
고통의 불씨.
인연의 달빛.
허그와 보상의 은빛.
개척의 별길.
왕관과 법의 등불.

각각의 빛은 달랐다.

그리고 성좌들은 침묵했다.

그 침묵 앞에서, 인간들이 조심스럽게 언어를 세우기 시작했다.
# 《별 아래의 신학제》

## 3막 — 기록과 선택: 허공록의 신학

3막이 시작되자, 여관의 복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복도 위에, 아주 얇은 흰 종이들이 겹쳐졌다.

방문마다 걸려 있던 이름표는 어느새 색이 바랜 기록지로 바뀌었다.
벽에 걸린 여행자의 망토 옆에는 누군가의 증언서가 붙었고, 부러진 지팡이 아래에는 그 지팡이가 언제, 누구의 손에서, 어떤 길 위에서 부러졌는지에 대한 주석이 달렸다.

낡은 공연 표 옆에는 관람객 명부가 있었다.
피 묻은 손수건 옆에는 사망 보고서가 있었다.
마른 말발굽 옆에는 보급로 변경 기록이 있었다.

예배당이자 여관이었던 공간은, 이제 서고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차갑기만 한 기록 보관소가 아니었다.

흰 종이들 사이로 여전히 차 향이 남아 있었다.
원탁도 그대로였다.
여관좌의 빈 의자도 그대로였다.

다만 그 빈 의자 맞은편에, 새로 빈 책상 하나가 놓였다.

그 위에는 펼쳐진 책이 있었다.

글자는 없었다.

아카식은 그 책을 보며 조금 웃었다.

“나 앉으면 안 되지?”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안 됩니다.”

아카식은 순순히 물러났다.

“알았어. 오늘도 기록자.”

알토가 그녀를 보았다.

“정확히 기록하십시오.”

“응, 응. 오늘은 네 막이니까 더 정확히 할게.”

“제 막이 아닙니다.”

알토는 짧게 말했다.

“허공록의 신학을 논하는 막입니다.”

푸리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작게 웃었다.

“알토답다.”

알토는 이번에도 정식 의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단정한 옷.
불필요한 장식은 없었다.
다만 옷깃 가까이에, 보이지 않는 문서의 여백처럼 희미한 흰 빛이 맴돌고 있었다.

그 빛은 성좌의 현현이 아니었다.

알토가 가진 기록 신앙의 흔적이었다.

허공록.

기록의 성좌.
선택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별.
인간의 삶을 묶기 위한 장부가 아니라, 없던 일이 되지 않게 남기는 서고.

오늘 그 성좌는 말하지 않는다.

아카식도 직접 교리를 말하지 않는다.

이 막에서 말해야 하는 사람은 알토였다.

푸리나는 원탁 앞으로 나섰다.

“3막의 주제는 기록과 선택.”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기록은 인간을 묶는가, 아니면 선택을 잊히지 않게 하는가》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알토. 시작해줄래?”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원탁 중앙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바닥에 얇은 문장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출생.
증언.
선택.
결과.
책임.
미완.
검수.

알토는 원탁 위의 빈 책을 보았다.

“허공록 신앙에서 기록은 구속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기록은 선택을 빼앗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레이의 펜이 움직였다.

알토는 계속했다.

“인간은 선택합니다. 때로는 옳게, 때로는 틀리게.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때로는 알고도 잘못 선택합니다. 기록은 그 선택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보존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알토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차갑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기록은 장부의 칸이 아니었다.
사람을 묶는 족쇄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정말 거기에 있었음을, 정말 선택했음을, 정말 책임졌거나 책임지지 못했음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레플리카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보존한 다음엔?”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그다음에 책임이 옵니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없던 일로만 안 만들면 된다.”

알토는 짧게 답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기록은 사람을 상처 입히기도 합니다.”

알토는 고개를 돌렸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누군가는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그날로 돌아갑니다. 상처가 계속 열린 채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록의 신앙은 그 고통을 어떻게 다룹니까?”

알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빈 책을 보았다.

“기록은 상처를 대신 치료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솔직했다.

“기록은 치료 신술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록이 없으면, 상처가 왜 생겼는지도 사라집니다. 원인이 사라지면 같은 상처가 반복됩니다.”

루나리아는 조용히 들었다.

알토는 이어 말했다.

“그러므로 기록은 상처를 다시 찢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왜 생겼는지를 남겨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여야 합니다.”

그레이가 펜을 멈췄다가, 천천히 적었다.

《기록은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인을 남겨 같은 상처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가 된다.》

요안나가 낮게 말했다.

“평화 조약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피를 잊어야 평화가 오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피를 흘리게 했는지 적어야, 같은 문장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녀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말했다.

“그 기록이 복수의 명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어렵습니다.”

알토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기록이 복수의 명단이 되는 순간, 기록은 책임의 근거가 아니라 다음 폭력의 대본이 됩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에서 조금 움찔했다.

대본.

그 단어는 그녀에게 익숙한 단어였다.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극과도 같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나한테 오는 거야?”

“예.”

알토는 담담히 말했다.

“극은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을 덮으면 안 됩니다. 기록은 극이 놓치거나 의도적으로 바꾸는 부분을 남겨야 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난 막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지. 극은 진실을 비추는 방식이지, 기록을 덮는 장막이 아니어야 한다고.”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은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알토에게 정확하다는 말 들으면 인정받은 느낌이야.”

“그렇게 받아들여도 됩니다.”

“오, 오늘 좀 부드럽네?”

“기록상 적절한 평가입니다.”

아카식이 웃음을 참으며 펜을 움직였다.

그레이는 아카식의 기록지를 흘끗 보았다.

아카식은 조용히 말했다.

“사담은 따로 표시할게.”

“그렇게 하십시오.”

알토는 다시 원탁 중앙을 보았다.

“허공록 신앙의 첫 위험은 기록을 운명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흰 종이들이 흔들렸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빈 책 위에 여러 문장이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
이미 기록된 결말.
피할 수 없는 문장.
선택 이전의 기록.

알토의 눈빛이 낮아졌다.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원탁이 조용해졌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알토가 직접 말할 때는 무게가 달랐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졌다.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살아가는 일을 대신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더 정확히 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빈 책 위의 문장들을 지웠다.

“기록은 운명이 아닙니다. 기록은 선택 이후에 남는 책임의 형태입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여관좌 신도로서, 다른 신앙의 말을 듣고 있었다.

대신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좋은 말이군. 하지만 실제로 기록을 쥔 자들은 사람을 묶고 싶어 하지.”

알토는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호방하게 웃었지만, 눈은 차가웠다.

“조약, 세금, 충성 서약, 사망 명부, 병적부, 귀족 가계도. 기록은 곧 권력이다. 네가 기록은 선택을 빼앗지 않는다고 말해도, 왕과 교회와 관료는 그걸로 사람을 묶는다.”

알토는 짧게 말했다.

“맞습니다.”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기록은 권력입니다. 그래서 검수가 필요합니다.”

슈샤니크가 낮게 반응했다.

“검수.”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자는 자기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기록은 늘 누락, 왜곡, 편의, 권력의 압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록은 신성하되, 기록자는 의심받아야 합니다.”

아카식이 펜을 멈췄다.

“오.”

알토는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성좌의 단말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아주 좋네. 나도 검수 대상이구나.”

그레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합니다.”

아카식은 더 웃었다.

“오늘 그레이랑 알토가 한편이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토는 계속했다.

“허공록 신앙에서 기록이 신성하다는 것은, 기록자가 절대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록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록자는 검증되어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그 말을 받았다.

“그건 행정에도 필요합니다.”

그녀는 장부를 넘기듯 손끝을 움직였다.

“세금 기록, 시민권 기록, 군량 기록, 사망 기록. 모두 국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기록이 없으면 행정은 눈이 멀지만, 잘못된 기록은 눈을 가진 괴물이 됩니다.”

푸리나는 그 표현에 잠시 감탄했다.

“눈을 가진 괴물.”

슈샤니크는 담담했다.

“정확한 비유입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기록의 신학은 신앙이면서 절차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기록의 신학은 신앙이면서 절차. 기록은 신성하나 기록자는 검증되어야 한다.》

그때 라이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기록은 만들어진 사람에게도 필요하겠죠?”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품듯 바라보았다.

“은인들에게도 이름이 필요해요. 태어난 기록도, 목적도, 가족도. 하지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그들을 물건으로 고정해버리면 안 돼요.”

원탁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5막의 주제를 미리 건드리고 있었다.

알토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정확합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들었다.

알토는 말했다.

“출생 기록은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문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들어진 존재라 하여도, 그가 선택하고 성장한다면 기록은 그 변화를 따라가야 합니다.”

라이자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기록이 그 사람의 처음만 적으면 안 된다는 거네요.”

“예. 시작 기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작 기록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오르기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교육 기록도 그렇습니다. 아이를 한 번의 시험으로 고정하면, 기록은 배움을 돕지 못합니다.”

알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은 변화의 여지를 남겨야 합니다.”

그 말에 레이튼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질문과 기록은 멀지 않았다.

정답으로 고정하지 않는 기록.

끝나지 않은 책과 닮은 기록.

그러나 레이튼은 말하지 않았다.

오늘의 막은 알토의 신앙을 듣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그 침묵을 마음에 들어 했다.

알토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원탁 위에 얇은 빛으로 된 문장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그것들은 사람의 선택을 따라 분기했다.

어떤 문장은 전쟁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화해로 갔다.
어떤 문장은 배신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침묵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못한 채 찢어졌다.

푸리나는 그것이 기록 신술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탁이 아니었다.

알토가 자기 신술을 사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록 계통 신술은 흔히 미래를 고정하는 힘으로 오해받습니다.”

알토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다루는 허공록의 힘은 미래를 강제로 묶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의 흔적과 가능성의 흐름을 읽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존하는 데 가깝습니다.”

그는 손을 움직였다.

문장 하나가 빛났다.

한 병사가 퇴각 명령을 어겼다.
그 결과, 동료 둘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다른 전선이 열렸다.
그 선택은 용기였고, 동시에 명령 위반이었다.

알토는 말했다.

“기록은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문장이 둘로 갈라졌다.

《용기》
《명령 위반》

그리고 그 아래에 새 문장이 생겼다.

《구출된 동료》
《무너진 전선》
《재판 필요》
《훈장 검토》
《지휘 체계 개선》

알토는 담담히 말했다.

“선택은 복합적입니다. 기록은 그 복합성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군. 고통도 하나의 이름으로 끝나지 않는다.”

루나리아가 덧붙였다.

“인연도 그렇습니다. 가해자와 은인, 적과 동맹, 가족과 상처는 때로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습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평화 협정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미하일라는 짧게 답했다.

“그래서 칼보다 문서가 오래 아플 때가 있습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서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때 푸리나가 물었다.

“그럼 기록재현은?”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록을 재현하는 힘이 있잖아. 그건 여관좌의 재연극하고 비슷하게 위험할 것 같아. 지나간 사람과 사건을 다시 불러오는 거니까.”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아카식도 펜을 천천히 움직였다.

알토는 원탁 위의 문장을 한 장 들어 올렸다.

“기록재현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자체가 아닙니다. 기록된 사건의 구조와 흔적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당신의 《재연극:앙코르》가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듯, 기록재현도 과거를 완전히 되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해했어.”

알토는 말했다.

“그러므로 기록재현은 증언 보조, 전술 검토, 원인 분석에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 진실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그레이가 즉시 적었다.

《기록재현: 과거 자체의 부활이 아니라, 기록된 사건 구조와 흔적의 재구성. 증언 보조와 원인 분석에 유용하나 절대적 진실로 취급 금지.》

슈샤니크가 말했다.

“법정에서 쓰려면 검증 절차가 필요하겠군요.”

알토가 답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재현된 기록만 믿고 다음 전투를 설계하면, 기록되지 않은 변수에 찔린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아카식이 작게 말했다.

“오늘 다들 기록 교단 사람 같아.”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기록은 누구나 쓰지. 문제는 누가 불태우고, 누가 고치고, 누가 숨기느냐다.”

알토는 그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누가 책임지는지도 중요합니다.”

민다우가스는 미소를 지웠다.

“그 말은 왕에게도 적용되겠지?”

“예.”

알토는 망설이지 않았다.

“특히 왕에게 적용됩니다.”

순간 원탁 위의 여러 군주들이 조용해졌다.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군. 불편해서.”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진짜 신학은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는다.

불편한 곳에 손을 넣는다.

그것도 신학이다.

기록의 신학은 특히 그랬다.

푸리나는 알토에게 물었다.

“그럼 허공록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죄는 뭐야?”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삭제입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거짓 기록보다?”

“거짓 기록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삭제는 더 은밀합니다.”

알토는 원탁 위에서 한 문장을 지웠다.

그러자 그 문장과 연결된 다른 문장들도 함께 희미해졌다.

사망자가 사라지자, 보급 실패가 사라졌다.
보급 실패가 사라지자, 책임자가 사라졌다.
책임자가 사라지자, 제도 개선이 사라졌다.
제도 개선이 사라지자, 다음 사망자가 생겼다.

그러나 그 사망자도 지워졌다.

알토는 말했다.

“거짓은 반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삭제된 것은 찾아내기 전까지 질문조차 되지 않습니다.”

레이튼이 조용히 눈을 들었다.

질문조차 되지 않는 것.

그것은 그의 신앙과도 닿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듣기만 했다.

알토는 말했다.

“허공록의 신앙은 삭제된 선택, 삭제된 죽음, 삭제된 책임을 경계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쉽게 반복됩니다.”

그레이의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녀는 곧 다시 펜을 잡았다.

《허공록 신앙의 경계: 삭제. 삭제된 것은 질문조차 되지 않으며, 반복을 낳는다.》

아레가 낮게 말했다.

“떠난 이를 잊는 것도 삭제겠지.”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예. 그러나 모든 기억을 현재에 묶어두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여관의 신학과 닿는구나. 기억은 사슬이 아니라 등불이어야 한다.”

알토는 짧게 답했다.

“동의합니다.”

그 순간, 여관의 막과 기록의 막이 잠시 겹쳤다.

기억은 사슬이 아니라 등불.

기록은 족쇄가 아니라 근거.

둘은 닮았지만 같지 않았다.

여관은 한 생을 닫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게 한다.
기록은 그 한 생의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지 않게 한다.

푸리나는 그 연결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차이를 보았다.

여관은 쉬게 한다.
기록은 남긴다.

쉬게 하는 것과 남기는 것 사이의 긴장.

그것이 오늘의 막이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용서는 기록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루나리아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인연의 신학에서는 어떤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록이 모든 것을 남긴다면, 용서는 어디에 놓입니까?”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좋은 질문이었다.

그는 곧 답했다.

“용서는 기록 삭제가 아닙니다.”

루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용서는 기록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 바꾸는 행위입니다.”

루나리아의 눈이 조금 깊어졌다.

알토는 말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용서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둘 다 기록되어야 합니다. 다만 어느 쪽도 사실 자체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요안나가 낮게 말했다.

“평화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해는 사망자 명단을 태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이름들을 남긴 채, 다음 이름을 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입니다.”

미하일라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 약속을 어기면, 기록은 다시 칼이 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알토는 말했다.

“두려움은 적절합니다. 기록을 다루는 사람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카식이 살짝 웃었다.

“그거 나한테도 하는 말이지?”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예.”

아카식은 웃음을 멈추고, 조금 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록해둘게.”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본인 검수 필요.”

아카식은 작게 웃었다.

“네, 네.”

푸리나는 원탁의 흐름이 충분히 깊어졌다고 느꼈다.

이제 신술 해석을 정리할 때였다.

“알토.”

“예.”

“허공록의 신술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뭐야?”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선택을 강제하지 않고, 선택이 남긴 세계의 흔적을 보존하는 힘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푸리나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신술이 가장 조심해야 할 오해는?”

“기록을 운명으로 오해하는 것. 기록자를 절대자로 오해하는 것. 기록재현을 과거 자체로 오해하는 것. 기록을 복수나 지배의 도구로 쓰는 것. 그리고 삭제를 자비로 포장하는 것.”

그레이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삭제를 자비로 포장하는 것. 그건 싫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잊고 싶어 해요.”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걸 기록으로 계속 남기는 게 너무 아플 수도 있잖아요.”

알토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개인의 망각과 공적 삭제는 구분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들었다.

“구분?”

“예. 어떤 개인이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존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 책임을 지우기 위해 기록을 없애는 것은 다릅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매번 증언을 강요하지 않는 것과, 가해의 기록을 없애는 것은 다르군요.”

“정확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아. 그건 중요하다.”

그레이는 적었다.

《개인의 망각 선택과 공적 삭제는 구분. 증언 강요 금지. 책임 은폐 금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며 생각했다.

여관의 신학과 기록의 신학은 여기서 다시 만났다.

쉬어도 된다.
하지만 없던 일로 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지워서는 안 된다.

떠나도 된다.
하지만 그 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 정리하자.”

그레이는 이미 새 장을 펼쳤다.

알토는 원탁 옆에 섰다.

그레이가 물었다.

“3막 결론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레이는 읽었다.

“첫째. 허공록의 기록은 선택을 빼앗기 위한 구속이 아니라,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보존이다.”

“둘째. 기록은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의 원인을 남겨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가 된다.”

“셋째. 기록은 신성하나, 기록자는 절대자가 아니다. 기록자가 성좌의 단말이라 해도 검수 대상이다.”

아카식이 작게 손을 들었다.

“동의.”

그레이는 계속 읽었다.

“넷째. 기록 신술은 미래를 고정하는 힘이 아니라, 선택의 흔적과 결과를 보존하고 해석하는 힘이다.”

“다섯째. 기록재현은 과거 자체의 부활이 아니라, 기록된 사건 구조와 흔적의 재구성이다. 증언 보조와 원인 분석에 유용하나 절대적 진실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허공록 신앙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삭제다. 삭제된 선택과 책임은 질문조차 되지 못하고 반복을 낳는다.”

“일곱째. 용서는 기록 삭제가 아니다.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 바꾸는 행위다.”

“여덟째. 개인이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과, 공적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기록을 삭제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그레이는 펜을 멈추었다.

알토가 낮게 말했다.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알토식 최고 칭찬 나왔다.”

알토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칭찬으로 받아도 됩니다.”

아카식은 결국 웃었다.

원탁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푸리나는 마지막 문장을 찾았다.

기록의 막은 여관의 막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차갑기만 하지는 않았다.

기록은 사람을 쉬게 하지 않는다.

기록은 차를 내주지 않는다.

기록은 상처를 감싸주지 않는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면, 누군가는 계속 같은 곳에서 쓰러진다.

누군가의 선택은 사라지고, 누군가의 죽음은 숫자도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책임은 빈칸으로 남는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러면 마지막 문장.”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기록은 사람을 묶기 위한 사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걸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기 위한 문장이다.”

그레이가 적었다.

알토는 잠시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합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 사람이 같은 어둠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남겨둔 등불이어야 한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적었다.

《기록은 사람을 묶기 위한 사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걸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기 위한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 사람이 같은 어둠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남겨둔 등불이어야 한다.》

이번에도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허공록은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아카식도 신탁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빈 책 위에, 아주 잠깐 흰 여백이 빛났다.

그뿐이었다.

그레이는 마지막 주석을 남겼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신도들은 기록과 선택과 책임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푸리나는 원탁 위 찻잔을 들었다.

“이번에도 박수보다는……”

알토가 말했다.

“기록 완료 후 검수입니다.”

푸리나는 멈칫했다.

아카식이 웃었다.

“알토, 분위기 좀.”

알토는 담담하게 답했다.

“분위기와 검수는 별개입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3막은 검수의 차로 하자.”

모두가 찻잔을 들었다.

기록의 여백 위로 차 향이 지나갔다.

여관의 따뜻한 김과 허공록의 흰 여백이 잠시 겹쳤다.

서로 다른 별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같은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등불처럼 보였다.
# 《별 아래의 신학제》

## 3막 — 기록과 선택: 허공록의 신학

3막이 시작되자, 여관의 복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복도 위에, 아주 얇은 흰 종이들이 겹쳐졌다.

방문마다 걸려 있던 이름표는 어느새 색이 바랜 기록지로 바뀌었다.
벽에 걸린 여행자의 망토 옆에는 누군가의 증언서가 붙었고, 부러진 지팡이 아래에는 그 지팡이가 언제, 누구의 손에서, 어떤 길 위에서 부러졌는지에 대한 주석이 달렸다.

낡은 공연 표 옆에는 관람객 명부가 있었다.
피 묻은 손수건 옆에는 사망 보고서가 있었다.
마른 말발굽 옆에는 보급로 변경 기록이 있었다.

예배당이자 여관이었던 공간은, 이제 서고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차갑기만 한 기록 보관소가 아니었다.

흰 종이들 사이로 여전히 차 향이 남아 있었다.
원탁도 그대로였다.
여관좌의 빈 의자도 그대로였다.

다만 그 빈 의자 맞은편에, 새로 빈 책상 하나가 놓였다.

그 위에는 펼쳐진 책이 있었다.

글자는 없었다.

아카식은 그 책을 보며 조금 웃었다.

“나 앉으면 안 되지?”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안 됩니다.”

아카식은 순순히 물러났다.

“알았어. 오늘도 기록자.”

알토가 그녀를 보았다.

“정확히 기록하십시오.”

“응, 응. 오늘은 네 막이니까 더 정확히 할게.”

“제 막이 아닙니다.”

알토는 짧게 말했다.

“허공록의 신학을 논하는 막입니다.”

푸리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작게 웃었다.

“알토답다.”

알토는 이번에도 정식 의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단정한 옷.
불필요한 장식은 없었다.
다만 옷깃 가까이에, 보이지 않는 문서의 여백처럼 희미한 흰 빛이 맴돌고 있었다.

그 빛은 성좌의 현현이 아니었다.

알토가 가진 기록 신앙의 흔적이었다.

허공록.

기록의 성좌.
선택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별.
인간의 삶을 묶기 위한 장부가 아니라, 없던 일이 되지 않게 남기는 서고.

오늘 그 성좌는 말하지 않는다.

아카식도 직접 교리를 말하지 않는다.

이 막에서 말해야 하는 사람은 알토였다.

푸리나는 원탁 앞으로 나섰다.

“3막의 주제는 기록과 선택.”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기록은 인간을 묶는가, 아니면 선택을 잊히지 않게 하는가》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알토. 시작해줄래?”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원탁 중앙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바닥에 얇은 문장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출생.
증언.
선택.
결과.
책임.
미완.
검수.

알토는 원탁 위의 빈 책을 보았다.

“허공록 신앙에서 기록은 구속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기록은 선택을 빼앗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레이의 펜이 움직였다.

알토는 계속했다.

“인간은 선택합니다. 때로는 옳게, 때로는 틀리게.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때로는 알고도 잘못 선택합니다. 기록은 그 선택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보존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알토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차갑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기록은 장부의 칸이 아니었다.
사람을 묶는 족쇄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정말 거기에 있었음을, 정말 선택했음을, 정말 책임졌거나 책임지지 못했음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레플리카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보존한 다음엔?”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그다음에 책임이 옵니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없던 일로만 안 만들면 된다.”

알토는 짧게 답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기록은 사람을 상처 입히기도 합니다.”

알토는 고개를 돌렸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누군가는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그날로 돌아갑니다. 상처가 계속 열린 채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록의 신앙은 그 고통을 어떻게 다룹니까?”

알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빈 책을 보았다.

“기록은 상처를 대신 치료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솔직했다.

“기록은 치료 신술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록이 없으면, 상처가 왜 생겼는지도 사라집니다. 원인이 사라지면 같은 상처가 반복됩니다.”

루나리아는 조용히 들었다.

알토는 이어 말했다.

“그러므로 기록은 상처를 다시 찢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왜 생겼는지를 남겨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여야 합니다.”

그레이가 펜을 멈췄다가, 천천히 적었다.

《기록은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인을 남겨 같은 상처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가 된다.》

요안나가 낮게 말했다.

“평화 조약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피를 잊어야 평화가 오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피를 흘리게 했는지 적어야, 같은 문장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녀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말했다.

“그 기록이 복수의 명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어렵습니다.”

알토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기록이 복수의 명단이 되는 순간, 기록은 책임의 근거가 아니라 다음 폭력의 대본이 됩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에서 조금 움찔했다.

대본.

그 단어는 그녀에게 익숙한 단어였다.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극과도 같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나한테 오는 거야?”

“예.”

알토는 담담히 말했다.

“극은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을 덮으면 안 됩니다. 기록은 극이 놓치거나 의도적으로 바꾸는 부분을 남겨야 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난 막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지. 극은 진실을 비추는 방식이지, 기록을 덮는 장막이 아니어야 한다고.”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은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알토에게 정확하다는 말 들으면 인정받은 느낌이야.”

“그렇게 받아들여도 됩니다.”

“오, 오늘 좀 부드럽네?”

“기록상 적절한 평가입니다.”

아카식이 웃음을 참으며 펜을 움직였다.

그레이는 아카식의 기록지를 흘끗 보았다.

아카식은 조용히 말했다.

“사담은 따로 표시할게.”

“그렇게 하십시오.”

알토는 다시 원탁 중앙을 보았다.

“허공록 신앙의 첫 위험은 기록을 운명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흰 종이들이 흔들렸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빈 책 위에 여러 문장이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
이미 기록된 결말.
피할 수 없는 문장.
선택 이전의 기록.

알토의 눈빛이 낮아졌다.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원탁이 조용해졌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알토가 직접 말할 때는 무게가 달랐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졌다.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살아가는 일을 대신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더 정확히 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빈 책 위의 문장들을 지웠다.

“기록은 운명이 아닙니다. 기록은 선택 이후에 남는 책임의 형태입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여관좌 신도로서, 다른 신앙의 말을 듣고 있었다.

대신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좋은 말이군. 하지만 실제로 기록을 쥔 자들은 사람을 묶고 싶어 하지.”

알토는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호방하게 웃었지만, 눈은 차가웠다.

“조약, 세금, 충성 서약, 사망 명부, 병적부, 귀족 가계도. 기록은 곧 권력이다. 네가 기록은 선택을 빼앗지 않는다고 말해도, 왕과 교회와 관료는 그걸로 사람을 묶는다.”

알토는 짧게 말했다.

“맞습니다.”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기록은 권력입니다. 그래서 검수가 필요합니다.”

슈샤니크가 낮게 반응했다.

“검수.”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자는 자기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기록은 늘 누락, 왜곡, 편의, 권력의 압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록은 신성하되, 기록자는 의심받아야 합니다.”

아카식이 펜을 멈췄다.

“오.”

알토는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성좌의 단말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아주 좋네. 나도 검수 대상이구나.”

그레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합니다.”

아카식은 더 웃었다.

“오늘 그레이랑 알토가 한편이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토는 계속했다.

“허공록 신앙에서 기록이 신성하다는 것은, 기록자가 절대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록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록자는 검증되어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그 말을 받았다.

“그건 행정에도 필요합니다.”

그녀는 장부를 넘기듯 손끝을 움직였다.

“세금 기록, 시민권 기록, 군량 기록, 사망 기록. 모두 국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기록이 없으면 행정은 눈이 멀지만, 잘못된 기록은 눈을 가진 괴물이 됩니다.”

푸리나는 그 표현에 잠시 감탄했다.

“눈을 가진 괴물.”

슈샤니크는 담담했다.

“정확한 비유입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기록의 신학은 신앙이면서 절차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기록의 신학은 신앙이면서 절차. 기록은 신성하나 기록자는 검증되어야 한다.》

그때 라이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기록은 만들어진 사람에게도 필요하겠죠?”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품듯 바라보았다.

“은인들에게도 이름이 필요해요. 태어난 기록도, 목적도, 가족도. 하지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그들을 물건으로 고정해버리면 안 돼요.”

원탁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5막의 주제를 미리 건드리고 있었다.

알토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정확합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들었다.

알토는 말했다.

“출생 기록은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문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들어진 존재라 하여도, 그가 선택하고 성장한다면 기록은 그 변화를 따라가야 합니다.”

라이자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기록이 그 사람의 처음만 적으면 안 된다는 거네요.”

“예. 시작 기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작 기록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오르기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교육 기록도 그렇습니다. 아이를 한 번의 시험으로 고정하면, 기록은 배움을 돕지 못합니다.”

알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은 변화의 여지를 남겨야 합니다.”

그 말에 레이튼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질문과 기록은 멀지 않았다.

정답으로 고정하지 않는 기록.

끝나지 않은 책과 닮은 기록.

그러나 레이튼은 말하지 않았다.

오늘의 막은 알토의 신앙을 듣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그 침묵을 마음에 들어 했다.

알토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원탁 위에 얇은 빛으로 된 문장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그것들은 사람의 선택을 따라 분기했다.

어떤 문장은 전쟁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화해로 갔다.
어떤 문장은 배신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침묵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못한 채 찢어졌다.

푸리나는 그것이 기록 신술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탁이 아니었다.

알토가 자기 신술을 사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록 계통 신술은 흔히 미래를 고정하는 힘으로 오해받습니다.”

알토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다루는 허공록의 힘은 미래를 강제로 묶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의 흔적과 가능성의 흐름을 읽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존하는 데 가깝습니다.”

그는 손을 움직였다.

문장 하나가 빛났다.

한 병사가 퇴각 명령을 어겼다.
그 결과, 동료 둘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다른 전선이 열렸다.
그 선택은 용기였고, 동시에 명령 위반이었다.

알토는 말했다.

“기록은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문장이 둘로 갈라졌다.

《용기》
《명령 위반》

그리고 그 아래에 새 문장이 생겼다.

《구출된 동료》
《무너진 전선》
《재판 필요》
《훈장 검토》
《지휘 체계 개선》

알토는 담담히 말했다.

“선택은 복합적입니다. 기록은 그 복합성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군. 고통도 하나의 이름으로 끝나지 않는다.”

루나리아가 덧붙였다.

“인연도 그렇습니다. 가해자와 은인, 적과 동맹, 가족과 상처는 때로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습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평화 협정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미하일라는 짧게 답했다.

“그래서 칼보다 문서가 오래 아플 때가 있습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서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때 푸리나가 물었다.

“그럼 기록재현은?”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록을 재현하는 힘이 있잖아. 그건 여관좌의 재연극하고 비슷하게 위험할 것 같아. 지나간 사람과 사건을 다시 불러오는 거니까.”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아카식도 펜을 천천히 움직였다.

알토는 원탁 위의 문장을 한 장 들어 올렸다.

“기록재현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자체가 아닙니다. 기록된 사건의 구조와 흔적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당신의 《재연극:앙코르》가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듯, 기록재현도 과거를 완전히 되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해했어.”

알토는 말했다.

“그러므로 기록재현은 증언 보조, 전술 검토, 원인 분석에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 진실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그레이가 즉시 적었다.

《기록재현: 과거 자체의 부활이 아니라, 기록된 사건 구조와 흔적의 재구성. 증언 보조와 원인 분석에 유용하나 절대적 진실로 취급 금지.》

슈샤니크가 말했다.

“법정에서 쓰려면 검증 절차가 필요하겠군요.”

알토가 답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재현된 기록만 믿고 다음 전투를 설계하면, 기록되지 않은 변수에 찔린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아카식이 작게 말했다.

“오늘 다들 기록 교단 사람 같아.”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기록은 누구나 쓰지. 문제는 누가 불태우고, 누가 고치고, 누가 숨기느냐다.”

알토는 그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누가 책임지는지도 중요합니다.”

민다우가스는 미소를 지웠다.

“그 말은 왕에게도 적용되겠지?”

“예.”

알토는 망설이지 않았다.

“특히 왕에게 적용됩니다.”

순간 원탁 위의 여러 군주들이 조용해졌다.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군. 불편해서.”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진짜 신학은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는다.

불편한 곳에 손을 넣는다.

그것도 신학이다.

기록의 신학은 특히 그랬다.

푸리나는 알토에게 물었다.

“그럼 허공록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죄는 뭐야?”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삭제입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거짓 기록보다?”

“거짓 기록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삭제는 더 은밀합니다.”

알토는 원탁 위에서 한 문장을 지웠다.

그러자 그 문장과 연결된 다른 문장들도 함께 희미해졌다.

사망자가 사라지자, 보급 실패가 사라졌다.
보급 실패가 사라지자, 책임자가 사라졌다.
책임자가 사라지자, 제도 개선이 사라졌다.
제도 개선이 사라지자, 다음 사망자가 생겼다.

그러나 그 사망자도 지워졌다.

알토는 말했다.

“거짓은 반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삭제된 것은 찾아내기 전까지 질문조차 되지 않습니다.”

레이튼이 조용히 눈을 들었다.

질문조차 되지 않는 것.

그것은 그의 신앙과도 닿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듣기만 했다.

알토는 말했다.

“허공록의 신앙은 삭제된 선택, 삭제된 죽음, 삭제된 책임을 경계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쉽게 반복됩니다.”

그레이의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녀는 곧 다시 펜을 잡았다.

《허공록 신앙의 경계: 삭제. 삭제된 것은 질문조차 되지 않으며, 반복을 낳는다.》

아레가 낮게 말했다.

“떠난 이를 잊는 것도 삭제겠지.”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예. 그러나 모든 기억을 현재에 묶어두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여관의 신학과 닿는구나. 기억은 사슬이 아니라 등불이어야 한다.”

알토는 짧게 답했다.

“동의합니다.”

그 순간, 여관의 막과 기록의 막이 잠시 겹쳤다.

기억은 사슬이 아니라 등불.

기록은 족쇄가 아니라 근거.

둘은 닮았지만 같지 않았다.

여관은 한 생을 닫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게 한다.
기록은 그 한 생의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지 않게 한다.

푸리나는 그 연결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차이를 보았다.

여관은 쉬게 한다.
기록은 남긴다.

쉬게 하는 것과 남기는 것 사이의 긴장.

그것이 오늘의 막이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용서는 기록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루나리아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인연의 신학에서는 어떤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록이 모든 것을 남긴다면, 용서는 어디에 놓입니까?”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좋은 질문이었다.

그는 곧 답했다.

“용서는 기록 삭제가 아닙니다.”

루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용서는 기록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 바꾸는 행위입니다.”

루나리아의 눈이 조금 깊어졌다.

알토는 말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용서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둘 다 기록되어야 합니다. 다만 어느 쪽도 사실 자체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요안나가 낮게 말했다.

“평화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해는 사망자 명단을 태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이름들을 남긴 채, 다음 이름을 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입니다.”

미하일라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 약속을 어기면, 기록은 다시 칼이 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알토는 말했다.

“두려움은 적절합니다. 기록을 다루는 사람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카식이 살짝 웃었다.

“그거 나한테도 하는 말이지?”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예.”

아카식은 웃음을 멈추고, 조금 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록해둘게.”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본인 검수 필요.”

아카식은 작게 웃었다.

“네, 네.”

푸리나는 원탁의 흐름이 충분히 깊어졌다고 느꼈다.

이제 신술 해석을 정리할 때였다.

“알토.”

“예.”

“허공록의 신술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뭐야?”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선택을 강제하지 않고, 선택이 남긴 세계의 흔적을 보존하는 힘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푸리나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신술이 가장 조심해야 할 오해는?”

“기록을 운명으로 오해하는 것. 기록자를 절대자로 오해하는 것. 기록재현을 과거 자체로 오해하는 것. 기록을 복수나 지배의 도구로 쓰는 것. 그리고 삭제를 자비로 포장하는 것.”

그레이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삭제를 자비로 포장하는 것. 그건 싫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잊고 싶어 해요.”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걸 기록으로 계속 남기는 게 너무 아플 수도 있잖아요.”

알토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개인의 망각과 공적 삭제는 구분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들었다.

“구분?”

“예. 어떤 개인이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존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 책임을 지우기 위해 기록을 없애는 것은 다릅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매번 증언을 강요하지 않는 것과, 가해의 기록을 없애는 것은 다르군요.”

“정확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아. 그건 중요하다.”

그레이는 적었다.

《개인의 망각 선택과 공적 삭제는 구분. 증언 강요 금지. 책임 은폐 금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며 생각했다.

여관의 신학과 기록의 신학은 여기서 다시 만났다.

쉬어도 된다.
하지만 없던 일로 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지워서는 안 된다.

떠나도 된다.
하지만 그 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 정리하자.”

그레이는 이미 새 장을 펼쳤다.

알토는 원탁 옆에 섰다.

그레이가 물었다.

“3막 결론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레이는 읽었다.

“첫째. 허공록의 기록은 선택을 빼앗기 위한 구속이 아니라,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보존이다.”

“둘째. 기록은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의 원인을 남겨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가 된다.”

“셋째. 기록은 신성하나, 기록자는 절대자가 아니다. 기록자가 성좌의 단말이라 해도 검수 대상이다.”

아카식이 작게 손을 들었다.

“동의.”

그레이는 계속 읽었다.

“넷째. 기록 신술은 미래를 고정하는 힘이 아니라, 선택의 흔적과 결과를 보존하고 해석하는 힘이다.”

“다섯째. 기록재현은 과거 자체의 부활이 아니라, 기록된 사건 구조와 흔적의 재구성이다. 증언 보조와 원인 분석에 유용하나 절대적 진실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허공록 신앙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삭제다. 삭제된 선택과 책임은 질문조차 되지 못하고 반복을 낳는다.”

“일곱째. 용서는 기록 삭제가 아니다.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 바꾸는 행위다.”

“여덟째. 개인이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과, 공적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기록을 삭제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그레이는 펜을 멈추었다.

알토가 낮게 말했다.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알토식 최고 칭찬 나왔다.”

알토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칭찬으로 받아도 됩니다.”

아카식은 결국 웃었다.

원탁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푸리나는 마지막 문장을 찾았다.

기록의 막은 여관의 막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차갑기만 하지는 않았다.

기록은 사람을 쉬게 하지 않는다.

기록은 차를 내주지 않는다.

기록은 상처를 감싸주지 않는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면, 누군가는 계속 같은 곳에서 쓰러진다.

누군가의 선택은 사라지고, 누군가의 죽음은 숫자도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책임은 빈칸으로 남는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러면 마지막 문장.”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기록은 사람을 묶기 위한 사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걸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기 위한 문장이다.”

그레이가 적었다.

알토는 잠시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합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 사람이 같은 어둠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남겨둔 등불이어야 한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적었다.

《기록은 사람을 묶기 위한 사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걸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기 위한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 사람이 같은 어둠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남겨둔 등불이어야 한다.》

이번에도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허공록은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아카식도 신탁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빈 책 위에, 아주 잠깐 흰 여백이 빛났다.

그뿐이었다.

그레이는 마지막 주석을 남겼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신도들은 기록과 선택과 책임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푸리나는 원탁 위 찻잔을 들었다.

“이번에도 박수보다는……”

알토가 말했다.

“기록 완료 후 검수입니다.”

푸리나는 멈칫했다.

아카식이 웃었다.

“알토, 분위기 좀.”

알토는 담담하게 답했다.

“분위기와 검수는 별개입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3막은 검수의 차로 하자.”

모두가 찻잔을 들었다.

기록의 여백 위로 차 향이 지나갔다.

여관의 따뜻한 김과 허공록의 흰 여백이 잠시 겹쳤다.

서로 다른 별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같은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등불처럼 보였다.
# 《별 아래의 신학제》

## 2막 — 여관의 신학: 사람은 어떤 방에서 다시 숨을 쉬는가

2막이 시작되자, 예배당은 여관이 되었다.

정확히는 예배당이 여관의 형식을 빌렸다.

원탁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원탁 뒤쪽에는 긴 복도가 생겼고, 그 복도 양옆으로 수많은 방문이 이어졌다.

어떤 문 앞에는 진흙 묻은 장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떤 문에는 낡은 여행가방이 기대어 있었다.
어떤 문 손잡이에는 아이가 묶어둔 리본이 걸려 있었고, 어떤 문에는 이름표 대신 아직 쓰이지 않은 빈 나무패가 매달려 있었다.

벽에는 성화 대신 여행자의 망토, 부러진 지팡이, 닳은 말발굽, 접힌 편지, 물 얼룩이 남은 지도, 오래된 공연 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복도 끝에는 문 하나가 있었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을 본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저 문은 한 여정의 끝에 놓인 문이다.

그러나 끝만은 아니었다.

오늘 그 문 앞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의자 위에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차는 이미 따라져 있었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빈 의자를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도 성좌는 말하지 않는다.

여관좌가 직접 와서 “나의 안식은 이러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신탁이 된다.

오늘의 신학은 성좌의 침묵 앞에서, 인간들이 자기 언어와 경험과 신술을 근거로 더듬어 세우는 것이어야 했다.

푸리나는 원탁 앞에 섰다.

“2막의 주제는 여관의 신학이야.”

그녀는 복도의 수많은 문을 보았다.

“인간의 굴곡진 여정을 긍정하고, 그 여정을 돕고, 그 여정의 마지막을 정리해주는 성좌에 대한 이야기.”

그레이가 장부를 펼쳤다.

오늘의 장부에는 숫자보다 항목이 먼저 있었다.

《방 번호 / 이름 / 지나온 길 / 필요한 휴식 / 닫아야 할 여정 / 남겨야 할 책임 / 다음 문》

푸리나는 그 장부를 보고 작게 말했다.

“여관 장부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은 사망자 명단이라는 표현보다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오늘 여관좌의 신학을 말할 사람은 성좌가 아니었다.

여관좌의 대리인인 푸리나.
죽은 자의 안식과 포도밭의 저녁을 아는 타마르.
이름을 기록하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하는 그레이.
그리고 각자의 [여관]을 품은 레이튼, 하융, 죠니.

그들은 여관좌 신학의 안쪽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원탁은 그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기록의 별을 믿는 알토.
인연의 별을 믿는 루나리아.
고통교의 레플리카.
허그와 보상의 성좌를 따르는 라이자.
시원성좌의 선택받은 아스트리트.
국가 생존의 논리로 모든 교리를 시험할 민다우가스.
제도와 장부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슈샤니크.
교육의 언어로 질문을 받아낼 게오르기아.

그리고 개척의 별을 믿는 아레.

아레는 여관좌 신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죽은 자를 기억하고, 떠난 이를 함부로 다시 끌어내는 일을 경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시선은 여관의 안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개척의 신도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죽은 이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었다.

푸리나는 그 점을 분명히 기억하기로 했다.

오늘은 여관좌 신도들의 교리 발표회가 아니었다.

다른 별을 믿는 사람들이, 여관의 등불을 자기 언어로 번역해보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먼저 손을 가슴에 얹었다.

“나는 여관좌를 믿으면서, 처음에는 ‘쉼’이라는 말만 생각했어.”

그녀는 조금 웃었다.

“좋은 침대, 따뜻한 차, 즐거운 공연, 막이 끝난 뒤의 박수. 그런 것들.”

라플리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그건 확실히 너답네.”

푸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 나답지.”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 쉼은 도망이 아니야. 여관은 길을 포기한 사람들이 숨어드는 곳이 아니야.”

푸리나는 복도를 보았다.

“오히려 길이 길기 때문에 필요한 곳이지.”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깊어졌다.

“사람은 곧은 길만 걷지 않아. 빙 돌아가고, 넘어지고, 미련을 남기고, 잘못된 문을 열고, 누군가를 잃고, 자기가 원하지 않은 배역을 맡기도 해. 어떤 날은 자기가 주인공인지조차 모르고, 어떤 날은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지.”

그녀는 빈 의자 위의 찻잔을 보았다.

“그래도 그 여정이 잘못됐다고만 말하지 않는 성좌가 여관좌라고 생각해.”

그때 알토가 낮게 말했다.

“굴곡진 여정을 긍정한다는 말이, 선택의 책임을 지우는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알토의 말은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정확했다.

그는 여관좌의 신도가 아니었다.

기록의 별을 믿는 자로서, 그는 먼저 책임을 물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여관은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곳이 아니야. 사람이 자기 잘못을 다시 볼 수 있을 만큼 숨을 고르게 하는 곳이지.”

레플리카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굴곡진 길을 인정한다는 말로, 누군가가 남긴 고통까지 흐리면 안 된다.”

“맞아.”

푸리나는 바로 답했다.

“여관의 쉼은 면죄가 아니라 회복이야. 길과 책임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회복.”

그레이는 적었다.

《휴식은 면죄가 아니라 회복. 길과 책임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상태.》

레플리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좋다.”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신술사다운 말투로,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관좌의 신술에서 처음 배우는 건 대단한 성역이 아니야.”

복도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약병 하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휴식의 신술을 배우는 사람은 보통 큐어와 힐부터 배워. 상태를 바로잡고, 자연회복력을 끌어올리고, 고단한 몸이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는 법칙을 보는 거지.”

그녀는 손을 펼쳤다.

원탁 위에 작은 장면이 떠올랐다.

열이 내리는 아이.
독기가 빠져나가는 상처.
떨리던 손이 조금씩 안정되는 병사.
피로로 흐려졌던 눈이 다시 초점을 찾는 여행자.

“처음에는 몸을 보는 거야. 체력, 피로, 상태이상, 상처. 무엇이 사람을 편안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보는 것.”

그레이는 조용히 적었다.

《휴식 신술의 기초: 큐어와 힐. 자연회복력의 촉진. 피로와 상태의 식별.》

푸리나는 계속했다.

“그런데 그걸 계속 보다 보면, 몸만 보이는 게 아니야.”

원탁의 장면이 바뀌었다.

끝없는 길.
먼지 낀 하늘.
곧 비가 올 것 같은 구름.
길가의 그루터기.
부서진 마차 바퀴.
무리해서 걷는 동행자의 다리.
조금만 더 가면 나올 피난처.

“보이기 시작하는 게 있어.”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길].”

그 단어가 나오자, 복도의 문들이 아주 희미하게 열렸다 닫혔다.

“휴식의 신술은 길을 보는 것에서 깊어져. 나와 동행자가 얼마나 지쳤는지, 어느 길이 위험한지, 어디가 안정되지 못했는지, 비를 피할 곳은 어디인지, 지금 쉬어야 하는지, 조금 더 가도 되는지.”

아스트리트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전투에서도 중요합니다.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생명을 긍정하는 일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휴식은 멈추는 것만이 아니야. 언제 멈춰야 다시 갈 수 있는지 아는 거야.”

레플리카가 말했다.

“고통을 줄이는 것도 비슷하다. 무리하게 견디는 걸 용기라고 착각하면 망가진다.”

푸리나는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더 깊어지면, 단순히 사전적인 휴식과 안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정의가 생겨.”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나에게 쉼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곳에서 다시 숨을 쉬는가. 나는 무엇을 보면 다시 걸을 수 있는가. 그 정의가 마음속에 재료처럼 쌓여.”

복도 위에 목재와 돌과 천과 조명이 떠올랐다.

어떤 것은 침대가 되었고, 어떤 것은 책장이 되었고, 어떤 것은 창이 되었고, 어떤 것은 거리가 되었고, 어떤 것은 무대가 되었다.

“그 재료들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공든 건축물이 돼.”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때부터 그 정의는 현실이 된다.”

원탁 뒤의 복도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게 [여관]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게오르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관]은 단순한 신술 공간이 아니라, 신도가 오랫동안 축적한 쉼의 철학이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라이자가 은빛 등불을 보며 말했다.

“공들여 만든 건축물이라는 말이 좋아요. 사람을 위해 만든 장소는, 재료보다 마음의 구조가 먼저니까요.”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운 건축물은 허술하면 사람을 깔아뭉개기도 하지.”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그 말은 불편했지만, 맞았다.

“응. 그래서 위험해.”

그녀는 곧바로 인정했다.

“[여관]을 제대로 쌓지 못하고 억지로 세우면, 신술사가 먼저 무너져. 자기 안에 확고한 쉼의 정의가 없는데 여관을 즉석으로 세우려 하면, 그 공간이 사람을 쉬게 하는 게 아니라 신술사의 정신을 갉아먹어.”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자신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쉬게 하려 할 때 생기는 위험과 닮았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그게 여관 신술이 무서운 이유이기도 해.”

그레이는 기록했다.

《[여관]은 신도가 축적한 휴식의 정의가 현실화된 상위 신술. 확고한 신념과 축적 없이 즉석으로 세우면 정신적 붕괴 위험.》

그러자 타마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안식의 길도 비슷하지만, 더 위험하답니다.”

모두의 시선이 타마르와 그레이에게 향했다.

타마르는 포도잎을 손끝으로 굴리며 말했다.

“안식의 신술은 화려한 장례식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허드렛일이지요. 죽은 유해를 씻고, 시취를 맡고, 피를 닦아내고, 산 자의 눈물을 걷어내는 일.”

복도의 한쪽에 작은 장례 준비실이 나타났다.

물을 담은 대야.
흰 천.
피가 묻은 손수건.
기름등.
식어가는 손.
문밖에서 울음을 삼키는 가족들.

타마르는 말했다.

“안식의 신술은 죽음을 아름답게 꾸미는 기술이 아닙니다. 죽음이 실제로 무엇인지, 먼저 손으로 알아야 하는 길입니다.”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피 냄새를 모르면 고통을 너무 쉽게 말하게 된다.”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레이가 이어받았다.

“죽은 자를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안식의 기초는 보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망집과 회한, 산 자의 슬픔, 아직 강 건너로 가지 못한 것들.”

복도 끝의 문 너머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강.

그러나 누구도 그 강을 완전히 보지는 못했다.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이를 오래 보다 보면 [강 너머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원탁은 조용해졌다.

그레이는 계속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위험합니다. 옆에서 손을 놓지 말아줄 선배나 친우가 없다면, 배우는 사람이 그대로 강 너머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아래에는 실제로 본 사람의 무게가 있었다.

“그래서 안식의 신술은 쉽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교단 안에서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은닉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죽은 자를 돕겠다고 강가에 선 사람이, 자기 발목이 젖는 줄도 모르고 걸어 들어가면 안 되니까요.”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기록자가 기록 안으로 사라지는 것과도 닮았습니다.”

그레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슷합니다.”

타마르가 포도잎을 내려놓았다.

“죽은 자들을 강 너머로 보내다 보면, 손에는 하나씩 동전이 남겠지요.”

복도 한편에 작은 동전의 빛이 생겼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

“그 동전들을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죽은 자의 무게를 아무렇게나 담아두면, 산 자의 손이 먼저 썩어버릴 테니까요.”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묘비를 세웁니다.”

복도 한편에 묘비 하나가 생겼다.

처음에는 모양이 없었다.
그저 작은 돌이었다.

그 옆에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죽은 자들을 강 너머로 보내며, 신술사의 심상 안에 묘비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제각각이던 묘비들이, 점점 질서를 얻었다.

어떤 것은 포도밭의 돌처럼 둥글어졌고, 어떤 것은 거리의 문패처럼 단정해졌고, 어떤 것은 무대 뒤의 소품 상자처럼 조용히 닫혔다.

그레이가 말했다.

“죽은 자들의 세계를 넘나들며, 묘비가 심상을 채우고, 그 묘비의 모양에 규범이 생기면.”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것이 안식의 [여관]이 됩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휴식의 여관은 ‘내가 생각하는 쉼’을 건축하는 것이고.”

타마르가 받았다.

“안식의 여관은 ‘내가 생각하는 강 건너’를 현실에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원탁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을 보며 말했다.

“죽은 이를 어떻게 배웅한다고 믿는지가, 결국 그 사람의 여관이 되는군요.”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위험합니다. 죽음을 가볍게 보는 사람의 여관은 망자를 가볍게 다룰 겁니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의 여관은 산 자의 울음을 쫓아낼 겁니다. 책임을 모르는 사람의 여관은 죽음을 정리하지 못할 겁니다.”

레플리카가 짧게 말했다.

“그런 곳은 치료소가 아니라 상처다.”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음을 거두었다.

“그 정도면 국가가 함부로 장려할 신술은 아니군.”

슈샤니크가 즉시 말했다.

“전문 교단과 감독 절차가 필요합니다. 특히 안식계 신술은 사망자 관리, 장례권, 교단 권한, 유가족 동의가 얽힙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여관]은 멋진 신술이지만, 장난감이 아니야.”

그녀는 원탁 위에 펼쳐진 여러 여관들을 보았다.

“이제 예시를 보자.”

먼저,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게 [여관]은 극장이야.”

그 말과 함께 복도 한쪽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객석이 있었다.

붉은 커튼이 내려와 있었고, 무대 위에는 아직 켜지지 않은 조명이 매달려 있었다. 무대 뒤편에는 분장실이 있었고, 분장대 위에는 사용된 가면과 아직 쓰이지 않은 대본, 식어가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곳은 화려했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박수가 울리지 않을 때에도, 그 극장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문 앞에서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쉼은, 자기 삶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이야.”

그녀는 무대 위에 걸린 조명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자기 삶을 그냥 견디기만 하다 보면, 어느 장면에서 넘어졌는지, 어떤 대사를 삼켰는지, 어디서 아직 선택할 수 있었는지 잊어버려. 그래서 내 극장은 그걸 비춰줘.”

무대 위에 흐릿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성문 앞에서 울고 있었다.
누군가가 전장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왕관을 쓴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웃음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억지로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말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는 사람의 삶을 대신 써주는 신술이 아니야. 내가 대본을 쥐고 ‘너는 이렇게 살아라’라고 명령하는 힘도 아니고.”

그녀는 손끝으로 조명을 움직였다.

조명은 사람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다만 어둠 속에 묻힌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이 자기 삶을 하나의 극으로 다시 바라보게 해. 자기가 어떤 장면에 서 있는지, 어디서 아팠는지, 어디서 아직 선택할 수 있는지. 그걸 보게 하는 조명이야.”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무대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담담히 이어 말했다.

“피해자의 침묵이 박수에 덮이면,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침묵이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극장은 조심해야 해.”

레플리카도 말했다.

“아픈 사람에게 당장 대사를 요구하면 안 된다.”

“맞아.”

푸리나는 바로 인정했다.

“어떤 사람은 무대에 서기 전에 객석에 앉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분장실에서 울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 커튼을 열면 안 돼.”

라이자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박수가 품이 될 수도 있겠네요.”

푸리나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충분히 잘했다’고 말해주는 박수요. 보상은 꼭 물건이 아니니까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내가 좋아하는 박수는 그런 거야.”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극은 기록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알토는 담담했다.

“각색은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흐리면 안 됩니다. 극으로 보여주는 것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목적이 다릅니다.”

푸리나는 조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아. 극은 진실을 비추는 방식이지, 기록을 덮는 장막이 아니어야 해.”

그레이는 그 말을 적었다.

《[여관:극장] — 삶을 하나의 극으로 비추어, 각자가 자기 여정의 굴곡과 가능성을 보게 하는 조명. 단, 무대는 침묵을 박수로 덮거나 책임을 각색으로 흐려서는 안 된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응. 그게 내 여관이야.”

그녀는 무대 뒤 분장실을 보았다.

“그리고 커튼콜 뒤에는, 배역을 내려놓고 쉬는 방이 있어야 해.”

그다음 그녀가 손짓하자, 다른 문들이 차례로 빛났다.

“레이튼 경에게 [여관]은 [문답의 서재]야.”

레이튼은 모자챙을 가볍게 만졌다.

그는 오늘 외부 질문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여관을 보여주는 신도였다.

“제게 쉼이란 정답을 강요받지 않고 질문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제 여관은 끝이 정해진 책을 쌓아두는 장소가 아닙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책과, 이름 붙지 않은 별과,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머무는 서재입니다.”

그가 말하자, 복도 한쪽 문이 서재로 바뀌었다.

오래된 책장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천장에는 별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별자리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공중에는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종이처럼 떠다녔다.

정답이 없는 공간.

그러나 그래서 숨 쉴 수 있는 공간.

게오르기아가 조용히 반응했다.

“질문이 쉴 곳이 된다는 말은 교육자의 입장에서도 이해됩니다.”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말했다.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정답부터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질문해도 괜찮은 방이 필요합니다. 질문이 죄가 되지 않는 방. 모른다고 말해도 쫓겨나지 않는 방.”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런 방이라면, 학생뿐 아니라 왕에게도 필요하겠지요.”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왕에게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다음으로 하융을 보았다.

“하융에게는 [비껴간 창]이야.”

하융은 조용히 눈을 내렸다.

“그렇소. 내게 여관이란 도망칠 방이 아니라, 선택하지 못한 길들을 바라보고도 이 세계를 다시 선택하기 위한 창이오.”

그가 말하자 복도 한쪽에 수많은 창이 열렸다.

창마다 다른 세계가 있었다.

살았을지도 모르는 병사.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전선.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람.
자신이 죽었을 가능성.
자신이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

이미 죽어버린 세계들이 창밖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레플리카가 하융을 보았다.

“죽은 가능성을 보는 건 고통을 늘릴 수도 있겠군.”

하융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많이 늘리지.”

그는 잠시 창들을 보았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나는 지금 이 세계를 선택했다는 사실도 잊을 때가 있소.”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그걸 보고도 현재를 선택한다면, 견딘다는 말과 닮았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맞소.”

푸리나는 그다음 죠니를 보았다.

“그리고 죠니에게는 [찰나]지.”

죠니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다가, 조금 귀찮다는 듯 시선을 들었다.

“내 차례야?”

푸리나는 웃었다.

“응. 중요한 예시야.”

죠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여관은 오래 머무는 방이 아니었다.

말발굽이 땅을 치는 소리.
창끝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더 선명해지는 숨.
끝나기 직전의 삶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황금빛 회전.

그것이 죠니의 [여관:찰나]였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내 여관은 오래 앉아 있는 데가 아니야.”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여관인데?”

“그러게. 좀 이상하지.”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내겐 그게 쉬는 방식이야. 길이 영원히 돌고, 생과 사가 계속 반복된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는 원탁 위 작은 등불을 보았다.

“죽을 뻔한 순간이라고 해서 전부 비극은 아니야. 지금 달릴 수 있으면, 지금 창을 내밀 수 있으면, 지금 누군가를 구할 수 있으면…… 그 찰나는 진짜야.”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죠니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답게, 말은 짧고 건조했다.

“그러니까 내 여관은 침대보다 박자에 가까워. 숨을 고르고, 고삐를 잡고,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박자.”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멈추면 더 아플 때가 있거든. 그럴 땐 끝까지 가야 해.”

아스트리트가 별빛 등불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찰나가 쉼일 수 있다는 건 흥미롭습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제가 믿는 별은 생명을 긍정합니다. 생명은 단순히 오래 머무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살아 있다는 건, 때로는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다만.”

아스트리트는 덧붙였다.

“모든 사람에게 계속 움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죠니는 작게 웃었다.

“맞아. 나한테도 가끔 그게 문제야.”

그레이가 적고 있었다.

《[여관:찰나] — 오래 머무는 방이 아니라, 생과 사 사이의 반복 속에서도 지금의 선택을 진짜로 긍정하게 하는 박자.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기 위한 찰나의 쉼.》

죠니는 그 문장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꽤 멋있게 적었는데.”

그레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용상 필요합니다.”

“그래. 뭐, 됐어.”

푸리나는 이번에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레이에게는 [기억이 잠드는 거리]가 있어.”

그레이의 펜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 여관의 복도 한쪽에 다른 풍경이 겹쳤다.

비가 그친 뒤의 돌길.
낮은 처마.
작은 문들.
문마다 걸린 등불.
손으로 여러 번 닦은 듯한 문패.

그 거리는 요란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울부짖는 망령도, 전투를 기다리는 원혼도 없었다.

다만 이름들이 있었다.

잊히지 않은 이름들.

그리고 그 이름들이 더 이상 고통 속에서 떠돌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마친 뒤 조용히 잠들 수 있도록 마련된 거리.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제 여관은…… 묘지가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죽은 자를 붙잡아두는 곳도 아닙니다. 죽은 자의 원한을 모아두는 곳도 아닙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제 여관은 이름과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칠 때까지, 그들이 숫자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거리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름을 확인합니다. 죽음의 이유를 확인합니다. 그 이유가 배급, 치안, 위생, 후송, 부패, 성벽, 명령, 기록 누락 중 무엇이었는지 확인합니다.”

푸리나는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산 자의 제도에 반영합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래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쉬셔도 됩니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게 하지 않겠습니다.”

원탁은 조용해졌다.

타마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한 안식이군요.”

“예.”

그레이는 짧게 답했다.

“조용해야 합니다. 그분들은 이미 충분히 시끄러운 죽음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토가 그레이를 보았다.

“기록이 잠들 수 있다는 말은, 기록의 성좌 신앙에서는 조금 낯설게 들립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알토는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기록이 계속 피를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아카식은 펜을 멈추었다.

농담하지 않았다.

알토는 말했다.

“기록이 책임을 다했다면,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근거로 남아야 합니다.”

그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해석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푸리나는 펼쳐진 여관들을 보았다.

푸리나의 여관은 조명과 무대와 박수로 삶을 다시 보게 한다.

레이튼의 여관은 질문이 살아 있을 여백을 준다.

하융의 여관은 죽은 가능성을 보고도 현재를 선택하게 한다.

죠니의 여관은 생과 사 사이의 지금을 완성한다.

그레이의 여관은 이름과 기억이 산 자의 제도에 닿은 뒤, 비로소 조용히 잠들게 한다.

모두 여관이었다.

그러나 같은 방은 아니었다.

라이자가 은빛 등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건 허그와 보상의 성좌와도 닮았어요.”

푸리나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안아준다는 건, 모두를 같은 자세로 끌어안는다는 뜻이 아니니까요. 어떤 사람은 품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거리를 둔 따뜻함이 필요해요. 어떤 사람에게 보상은 가족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혼자 울어도 되는 방일 수도 있고요.”

푸리나는 천천히 웃었다.

“그 번역 좋다.”

루나리아도 말했다.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방에 앉히는 것이 치유는 아닙니다. 서로 다른 방에 머물면서도, 문틈 아래로 빛이 오갈 수 있다면 그것도 인연일 수 있습니다.”

레플리카가 짧게 덧붙였다.

“고통도 그렇다. 누군가는 말해야 낫고, 누군가는 말하지 않아야 버틴다. 쉼의 방식이 하나뿐이면, 그건 치료가 아니다.”

그 말들이 원탁 위에 차례로 놓였다.

여관의 신학이 다른 별들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었다.

허그와 보상은 그것을 품의 거리로 이해했다.
인연은 문틈 아래 오가는 빛으로 이해했다.
고통교는 말해야 하는 고통과 말하지 않아야 버티는 고통의 차이로 이해했다.
기록은 피 흘리지 않아도 되는 기록으로 이해했다.
생명의 별은 계속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찰나로 이해했다.
교육은 질문해도 괜찮은 방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좋군. 듣기에는 아주 좋다.”

그는 팔짱을 끼고 원탁 위의 여러 방문을 보았다.

“하지만 군주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방을 지어줄 수 없다. 사람마다 필요한 쉼이 다르다고? 맞겠지. 그런데 도시와 국가는 그렇게 부드럽지만은 않다.”

그의 웃음은 호방했다.

하지만 그 안쪽에는 차가운 현실감이 있었다.

“모두에게 각자의 방을 허락하면, 공동체는 어디서 만나는가? 다들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성벽은 누가 지키고 밭은 누가 갈지?”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질문이었다.

여관은 개인을 쉬게 한다.

하지만 국가는 함께 살아야 한다.

그 둘은 언제나 같지 않다.

슈샤니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국가는 모든 내면을 지원할 수 없습니다.”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장례, 치료, 침묵, 상담, 기도 방식이 충돌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절차를 마련할 수는 있습니다.”

그녀는 장부의 한쪽에 새 항목을 만들었다.

《공동체 적용 원칙》

“하나. 모든 개인의 내면을 국가가 대신 설계하지 않는다. 둘. 서로 다른 쉼의 방식이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허용한다. 셋. 공동의 식탁, 공동의 성벽, 공동의 법은 유지한다. 넷. 단, 그 공동성은 개인의 상처를 부정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민다우가스는 잠시 그 문장을 보았다.

“나쁘지 않군.”

그답게 짧은 칭찬이었다.

푸리나가 덧붙였다.

“모든 사람에게 방 하나씩을 지어주자는 게 아니야.”

그녀는 원탁 위에 놓인 여러 등불을 보았다.

“적어도 같은 식탁에 앉더라도, 숨 쉬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자는 거지. 누군가는 웃으며 먹고, 누군가는 조용히 먹고, 누군가는 문 가까이에 앉아야 해. 그래도 같은 식탁은 가능해.”

벨라가 짧게 말했다.

“식탁은 좋다. 그러나 겨울에는 벽도 필요하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여관에도 문이 있잖아요.”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하! 그 대답은 꽤 쓸 만하군.”

그레이가 적었다.

《여관의 다양성은 공동체의 해체가 아니라, 같은 식탁 안에서 서로 다른 숨을 허용하는 질서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마침내 푸리나는 복도 끝의 문을 보았다.

“이제 안식 이야기를 하자.”

타마르가 포도잎을 집어 들었다.

“살아 있는 여정에는 휴식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한 이름으로 걷는 여정은 언젠가 닫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른했다.

“그러나 닫힌다는 말은 사라진다는 말과 같지 않답니다. 포도나무도 한 해의 열매를 거두고 나면 끝난 듯 보이지요. 하지만 밭은 잠들고, 흙은 쉬고, 다음 계절을 준비한답니다.”

그녀는 복도 끝의 문을 보았다.

“안식도 그러하겠지요. 한 생의 수확을 거두고, 그 이름으로 걸었던 길을 정리하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게 하는 것.”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좌의 안식은 영원히 멈춰 서는 방이 아니야.”

원탁 위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또렷하게 말했다.

“죽음은 한 이름으로 걸어온 여정이 닫히는 순간이야. 하지만 영혼이 영원히 정지하는 순간은 아니야. 안식은 그 여정을 정리하고, 다음 여정으로 넘어가기 전 머무는 쉼이야.”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적었다.

《안식은 한 이름으로 걸은 여정을 닫고, 다음 여정으로 넘어가기 전 머무는 쉼이다.》

푸리나는 장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윤회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길을 여는 일.”

루나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인연은 어떻게 됩니까?”

그 질문은 아주 조용했지만, 원탁의 여러 사람을 붙잡았다.

요안나도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라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 위에 손을 얹었다.

“같은 이름으로 붙잡지 않는다면, 남은 자와 떠난 자의 인연은 어떤 형태로 남습니까?”

푸리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먼저 아레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관좌의 신도가 아니었다.

개척의 신도로서, 길을 닫는 일과 길을 여는 일을 동시에 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개척의 신도로서 보자면, 그 말은 이해할 수 있단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았다.

“떠난 이를 붙잡으면 산 자도 앞으로 가지 못하지. 이름은 사슬이어서는 안 돼. 길 앞에 세우는 표지석이어야 하지.”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복도 끝의 문을 바라보았다.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그들을 다시 길 위로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산 자가 어느 길을 걸어왔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지. 그래야 다음 길로 가더라도, 같은 절벽을 향해 웃으며 걸어가지 않을 수 있으니.”

루나리아가 낮게 말했다.

“떠난 이를 잊지 않아도, 붙잡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 그게 여관좌 신학에서의 기억이야.”

루나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인연의 신학에서도 중요한 구분입니다. 이어진다는 것이 언제나 같은 형태로 계속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그녀의 달빛 등불이 낮게 흔들렸다.

“어떤 인연은 이름을 바꾸고, 어떤 인연은 기도의 형식으로 남고, 어떤 인연은 다음 생에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때 서로에게 닿았던 일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알아보지 못해도 인연입니까?”

루나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것을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신학자마다 다를 겁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만 저는, 한 번 서로에게 닿았던 존재들이 완전히 무의미로 떨어진다고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에게도 닿았다.

그때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책임은 어떻게 됩니까?”

원탁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알토의 질문은 차가운 반박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었다.

“한 생의 여정을 닫고 다음 여정으로 넘어간다면, 그 생의 선택과 책임은 어디에 남습니까?”

푸리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여관좌 신학이 윤회를 긍정한다면, 위험이 있었다.

“어차피 다음 생이 있다”는 말로 지금의 삶을 가볍게 여길 위험.

“이 이름은 끝났으니 책임도 끝났다”는 말로 죄를 흘려보낼 위험.

푸리나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잠시 찾아야 했다.

그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장부가 필요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에게 향했다.

그레이는 담담히 말했다.

“윤회가 한 생의 책임을 지우는 구조라면, 기록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관좌 신학에서 안식이 ‘정리’라면, 정리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녀는 장부의 항목을 하나씩 짚었다.

“지나온 길. 필요한 휴식. 닫아야 할 여정. 다음 문.”

그리고 새 항목을 추가했다.

《남겨야 할 책임》

“한 생이 닫힌다고 해서, 그 생이 없던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례는 폐기가 아닙니다. 결산에 가깝습니다.”

슈샤니크가 조용히 반응했다.

“결산이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도, 잘못도, 갚아야 할 것도, 이어받을 것도 정리합니다. 죽은 자 자신이 갚지 못하는 것은 산 자의 제도와 기억이 이어받습니다. 그렇기에 이름과 사망 원인, 선택의 결과를 기록해야 합니다.”

알토는 잠시 그레이를 보았다.

“그 해석에는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윤회는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니야.”

그녀는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오히려 지금의 여정이 하나의 막이기 때문에, 제대로 닫아야 하는 거야. 어설프게 닫힌 막은 다음 무대에 그림자를 끌고 가니까.”

아레가 낮게 말했다.

“닫히지 못한 이름이 다음 길의 발목을 잡는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선 자리를 분명히 하듯 덧붙였다.

“개척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지만, 죽은 자를 뒤에서 밀어붙여 길을 만들라는 뜻은 아니야. 떠난 자는 떠난 자의 길을 닫아야 하고, 산 자는 그 이름을 등불 삼아 자기 길을 가야 하지.”

타마르가 말했다.

“수확하지 않은 밭은 다음 계절을 병들게 하기도 한답니다.”

레플리카가 짧게 덧붙였다.

“치료하지 않은 상처가 흉터만 남기면 다행이지. 곪을 수도 있다.”

루나리아도 조용히 말했다.

“풀지 않은 인연은 다음 만남에서 다른 모양의 매듭이 되겠지요.”

푸리나는 그 말들을 하나씩 받아들였다.

여관의 신학은 가볍지 않았다.

윤회를 긍정한다고 해서 죽음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한 생을 제대로 닫아야 한다는 책임이 더 무거워진다.

그때 아레가 아주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재연극:앙코르》는 더 조심히 다뤄야겠구나.”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앙코르.

그 이름이 나오자, 복도의 여러 방문 사이로 희미한 무대 그림자가 흔들렸다.

스러져간 별들의 실루엣.
한때 무대 위에 섰던 배우들의 흔적.
웃음과 박수, 피와 눈물, 퇴장과 커튼콜.

푸리나는 자신의 신술을 떠올렸다.

《재연극:앙코르》는 그녀의 [여관:극장] 안에서 치러졌던 극과 배우들의 서사를 축적하고, 그 서사를 바탕으로 특정 배우의 성격이나 특성, 혹은 지나간 극의 일부를 다시 구현하는 힘이었다.

강하게 쓰면, 과거의 무대와 배우를 그림자처럼 재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되살림이 아니었다.

푸리나가 먼저 말했다.

“앙코르는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 신술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나는 그걸 분명히 해야 해.”

아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떠난 이를 기억으로 비추는 것과, 떠난 이를 다시 길 위에 세우는 것은 다르단다.”

그 말은 개척의 신도에게서 나온 경고였다.

앞으로 나아가는 자일수록, 죽은 자를 길의 재료로 삼는 위험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스러진 별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일은, 그 별을 다시 살리는 일이 아니야. 기억함으로써 잠시 비추는 것이지. 산 자가 앞으로 가기 위해 죽은 자를 다시 걷게 해서는 안 된단다.”

타마르가 말했다.

“죽은 배우를 다시 배역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레이가 적었다.

《재연극:앙코르의 신학적 해석: 사자 부활이 아니라, 기억된 서사를 잠시 무대 위에 비추는 행위. 죽은 이를 붙잡거나 동원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됨.》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앙코르는 붙잡기 위한 게 아니야.”

그녀는 복도 끝의 문을 보았다.

“그 이름으로 걸은 여정이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잠시 말해주는 거야.”

아레는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앙코르는 문을 닫지 못하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닫기 전 마지막으로 등불을 들어주는 기술이어야겠지.”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응.”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래야 해.”

잠시, [여관:극장] 안에 아주 작은 장면이 떠올랐다.

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 인사하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한 생의 배역을 끝내고, 잠시 관객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장면은 곧 사라졌다.

붙잡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 순간을 보며 기록했다.

《기억은 사슬이 아니라, 한 생의 문 앞까지 들고 가는 등불.》

마침내 그레이는 장부를 정리했다.

“2막 결론을 정리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읽었다.

“첫째. 여관좌는 인간의 굴곡진 여정을 긍정한다. 그러나 굴곡을 변명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둘째. 휴식 신술은 큐어와 힐에서 출발해, 피로와 회복, 위험과 피난처를 식별하는 [길]의 인식으로 깊어진다.”

“셋째. [여관]은 신도가 축적한 휴식의 정의가 현실화된 상위 신술이다. 즉, 자기 삶과 상처와 철학을 통해 발견한 이상적 쉼의 건축물이다.”

“넷째. 안식 신술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슬픔을 보는 일에서 시작한다. [강 너머를 보는 눈]은 안식의 기초이며, 죽은 자들을 보내며 쌓인 묘비의 규범이 안식의 [여관]이 된다.”

“다섯째. [여관]은 초대이지 강제가 아니다. 타인에게 자기 방식의 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안식은 영원한 정지가 아니라, 윤회를 앞두고 한 생을 정리하는 쉼이다.”

“일곱째. 이름과 기억은 영혼을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걸은 여정을 바르게 닫고 다음 문 앞까지 배웅하기 위한 등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레이는 별도 항목을 읽었다.

《신술 해석》

1. [여관]은 신도가 생각하는 이상적 쉼의 장소이며,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답이다.
2. 휴식계 [여관]은 큐어와 힐, 피로의 식별, [길]의 인식을 거쳐 쌓아올린 쉼의 정의가 현실이 된 것이다.
3. 안식계 [여관]은 죽은 자의 망집과 산 자의 슬픔을 보며, 강 너머로 보내준 이들의 묘비가 심상 안에서 규범을 얻어 현실화된 것이다.
4.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삶을 하나의 극으로 비추어, 각자가 자기 여정의 굴곡과 가능성을 보게 하는 조명이다. 단, 무대는 침묵을 박수로 덮거나 책임을 각색으로 흐려서는 안 되며, 무대에 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대사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
5. 레이튼의 [여관:문답의 서재]는 닫힌 결론을 질문으로 되돌리고, 답을 강요받지 않아도 되는 여백이다.
6. 하융의 [여관:비껴간 창]은 죽은 가능성을 보고도 현재 현실을 다시 선택하게 하는 창이다.
7. 죠니의 [여관:찰나]는 생과 사의 반복 속에서도 지금의 선택을 진짜로 긍정하게 하는 찰나의 쉼이다.
8. 그레이의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이름과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친 뒤, 망자가 조용히 잠들 수 있게 하는 안식의 거리다.
9. 그러므로 [여관]은 초대이지 강제가 아니다. 자기 방식의 쉼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여관은 여관이 아니라 수용소가 된다.
10. 《재연극:앙코르》는 죽은 이를 부활시키거나 붙잡는 신술이 아니라, 기억된 서사를 잠시 비추어 한 생의 여정을 바르게 배웅하기 위한 등불이어야 한다.
11. 개척의 관점에서 보아도, 기억은 죽은 자를 다시 길 위에 세우는 명령이 아니라 산 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들고 가는 표지석이어야 한다.

그레이는 펜을 멈추었다.

푸리나는 그 문장들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 문장.”

그레이가 다시 펜을 들었다.

푸리나는 빈 의자 위 찻잔을 보았다.

찻잔의 김은 거의 사라졌지만, 잔은 아직 따뜻해 보였다.

“여관은 모두에게 같은 방을 주지 않는다. 각자가 다시 숨 쉴 수 있는 방을 찾게 한다.”

그레이는 그대로 적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방은 마지막 정지가 아니라, 다음 여정을 시작하기 전 한 생을 정리하는 불빛이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완성했다.

《여관은 모두에게 같은 방을 주지 않는다. 각자가 다시 숨 쉴 수 있는 방을 찾게 한다. 그리고 그 방은 마지막 정지가 아니라, 다음 여정을 시작하기 전 한 생을 정리하는 불빛이다.》

잠시 뒤, 그녀가 덧붙였다.

《기록의 신도는 책임을 물었고, 인연의 사제는 붙잡지 않는 연결을 보았고, 고통의 군주는 각기 다른 회복을 말했으며, 허그와 보상의 군주는 품에도 거리가 필요함을 알아들었다. 생명의 별의 검사는 찰나의 쉼을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번역했고, 국가의 군주는 여관의 다양성을 공동체의 질서로 시험했다. 개척의 신도는 기억이 죽은 자를 다시 걷게 하는 사슬이 아니라 산 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표지석이어야 함을 보았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신도들은 서로의 신학을 자기 언어로 번역하였다.》

타마르는 찻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박수보다 차가 어울리겠지요.”

푸리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들었다.

“그럼 오늘은 배웅의 차로.”

그 말에 모두가 각자의 찻잔을 들었다.

기록의 여백도, 인연의 달빛도, 고통의 불씨도, 허그와 보상의 은빛도, 개척의 별길도, 포도밭의 저녁도.

각자의 빛은 달랐다.

그러나 찻잔 위로 올라가는 김은, 잠시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복도 끝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문은 단순한 종착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문은 커튼콜 뒤의 분장실로 이어지는 문이자, 정돈된 저녁으로 이어지는 문이자, 언젠가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기 전 잠시 머무는 따뜻한 방처럼 보였다.

그리고 여관좌의 빈 의자는 끝까지 비어 있었다.

그 침묵 덕분에, 인간들의 말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 《별 아래의 신학제》

## 3막 — 기록과 선택: 허공록의 신학

3막이 시작되자, 여관의 복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복도 위에, 아주 얇은 흰 종이들이 겹쳐졌다.

방문마다 걸려 있던 이름표는 어느새 색이 바랜 기록지로 바뀌었다.
벽에 걸린 여행자의 망토 옆에는 누군가의 증언서가 붙었고, 부러진 지팡이 아래에는 그 지팡이가 언제, 누구의 손에서, 어떤 길 위에서 부러졌는지에 대한 주석이 달렸다.

낡은 공연 표 옆에는 관람객 명부가 있었다.
피 묻은 손수건 옆에는 사망 보고서가 있었다.
마른 말발굽 옆에는 보급로 변경 기록이 있었다.

예배당이자 여관이었던 공간은, 이제 서고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차갑기만 한 기록 보관소가 아니었다.

흰 종이들 사이로 여전히 차 향이 남아 있었다.
원탁도 그대로였다.
여관좌의 빈 의자도 그대로였다.

다만 그 빈 의자 맞은편에, 새로 빈 책상 하나가 놓였다.

그 위에는 펼쳐진 책이 있었다.

글자는 없었다.

아카식은 그 책을 보며 조금 웃었다.

“나 앉으면 안 되지?”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안 됩니다.”

아카식은 순순히 물러났다.

“알았어. 오늘도 기록자.”

알토가 그녀를 보았다.

“정확히 기록하십시오.”

“응, 응. 오늘은 네 막이니까 더 정확히 할게.”

“제 막이 아닙니다.”

알토는 짧게 말했다.

“허공록의 신학을 논하는 막입니다.”

푸리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작게 웃었다.

“알토답다.”

알토는 이번에도 정식 의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단정한 옷.
불필요한 장식은 없었다.
다만 옷깃 가까이에, 보이지 않는 문서의 여백처럼 희미한 흰 빛이 맴돌고 있었다.

그 빛은 성좌의 현현이 아니었다.

알토가 가진 기록 신앙의 흔적이었다.

허공록.

기록의 성좌.
선택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별.
인간의 삶을 묶기 위한 장부가 아니라, 없던 일이 되지 않게 남기는 서고.

오늘 그 성좌는 말하지 않는다.

아카식도 직접 교리를 말하지 않는다.

이 막에서 말해야 하는 사람은 알토였다.

허공록과 함께 살아온 자.
기록되었기 때문에 묶인 것이 아니라, 기록되었기 때문에 더 정확히 선택해야 했던 자.
기록교회의 대리자이자, 기록을 신앙으로 삼되 기록자를 절대화하지 않으려는 군주.

푸리나는 원탁 앞으로 나섰다.

“3막의 주제는 기록과 선택.”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기록은 인간을 묶는가, 아니면 선택을 잊히지 않게 하는가》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알토. 시작해줄래?”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원탁 중앙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바닥에 얇은 문장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출생.
증언.
선택.
결과.
책임.
미완.
검수.

알토는 원탁 위의 빈 책을 보았다.

“허공록 신앙에서 기록은 구속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기록은 선택을 빼앗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레이의 펜이 움직였다.

알토는 계속했다.

“인간은 선택합니다. 때로는 옳게, 때로는 틀리게.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때로는 알고도 잘못 선택합니다. 기록은 그 선택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보존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알토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차갑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기록은 장부의 칸이 아니었다.
사람을 묶는 족쇄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정말 거기에 있었음을, 정말 선택했음을, 정말 책임졌거나 책임지지 못했음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레플리카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보존한 다음엔?”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그다음에 책임이 옵니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없던 일로만 안 만들면 된다.”

알토는 짧게 답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기록은 사람을 상처 입히기도 합니다.”

알토는 고개를 돌렸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누군가는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그날로 돌아갑니다. 상처가 계속 열린 채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록의 신앙은 그 고통을 어떻게 다룹니까?”

알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빈 책을 보았다.

“기록은 상처를 대신 치료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솔직했다.

“기록은 치료 신술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록이 없으면, 상처가 왜 생겼는지도 사라집니다. 원인이 사라지면 같은 상처가 반복됩니다.”

루나리아는 조용히 들었다.

알토는 이어 말했다.

“그러므로 기록은 상처를 다시 찢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왜 생겼는지를 남겨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여야 합니다.”

그레이가 펜을 멈췄다가, 천천히 적었다.

《기록은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인을 남겨 같은 상처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가 된다.》

요안나가 낮게 말했다.

“평화 조약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피를 잊어야 평화가 오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피를 흘리게 했는지 적어야, 같은 문장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녀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말했다.

“그 기록이 복수의 명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어렵습니다.”

알토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기록이 복수의 명단이 되는 순간, 기록은 책임의 근거가 아니라 다음 폭력의 대본이 됩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에서 조금 움찔했다.

대본.

그 단어는 그녀에게 익숙한 단어였다.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극과도 같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나한테 오는 거야?”

“예.”

알토는 담담히 말했다.

“극은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을 덮으면 안 됩니다. 기록은 극이 놓치거나 의도적으로 바꾸는 부분을 남겨야 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난 막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지. 극은 진실을 비추는 방식이지, 기록을 덮는 장막이 아니어야 한다고.”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은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알토에게 정확하다는 말 들으면 인정받은 느낌이야.”

“그렇게 받아들여도 됩니다.”

“오, 오늘 좀 부드럽네?”

“기록상 적절한 평가입니다.”

아카식이 웃음을 참으며 펜을 움직였다.

그레이는 아카식의 기록지를 흘끗 보았다.

아카식은 조용히 말했다.

“사담은 따로 표시할게.”

“그렇게 하십시오.”

알토는 다시 원탁 중앙을 보았다.

“허공록 신앙의 첫 위험은 기록을 운명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흰 종이들이 흔들렸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빈 책 위에 여러 문장이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
이미 기록된 결말.
피할 수 없는 문장.
선택 이전의 기록.

알토의 눈빛이 낮아졌다.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원탁이 조용해졌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알토가 직접 말할 때는 무게가 달랐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졌다.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살아가는 일을 대신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더 정확히 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빈 책 위의 문장들을 지웠다.

“기록은 운명이 아닙니다. 기록은 선택 이후에 남는 책임의 형태입니다.”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좋은 말이군. 하지만 실제로 기록을 쥔 자들은 사람을 묶고 싶어 하지.”

알토는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호방하게 웃었지만, 눈은 차가웠다.

“조약, 세금, 충성 서약, 사망 명부, 병적부, 귀족 가계도. 기록은 곧 권력이다. 네가 기록은 선택을 빼앗지 않는다고 말해도, 왕과 교회와 관료는 그걸로 사람을 묶는다.”

알토는 짧게 말했다.

“맞습니다.”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기록은 권력입니다. 그래서 검수가 필요합니다.”

슈샤니크가 낮게 반응했다.

“검수.”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자는 자기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기록은 늘 누락, 왜곡, 편의, 권력의 압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록은 신성하되, 기록자는 의심받아야 합니다.”

아카식이 펜을 멈췄다.

“오.”

알토는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성좌의 단말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아주 좋네. 나도 검수 대상이구나.”

그레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합니다.”

아카식은 더 웃었다.

“오늘 그레이랑 알토가 한편이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토는 계속했다.

“허공록 신앙에서 기록이 신성하다는 것은, 기록자가 절대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록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록자는 검증되어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그 말을 받았다.

“그건 행정에도 필요합니다.”

그녀는 장부를 넘기듯 손끝을 움직였다.

“세금 기록, 시민권 기록, 군량 기록, 사망 기록. 모두 국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기록이 없으면 행정은 눈이 멀지만, 잘못된 기록은 눈을 가진 괴물이 됩니다.”

푸리나는 그 표현에 잠시 감탄했다.

“눈을 가진 괴물.”

슈샤니크는 담담했다.

“정확한 비유입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기록의 신학은 신앙이면서 절차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기록의 신학은 신앙이면서 절차. 기록은 신성하나 기록자는 검증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게오르기아가 조용히 말했다.

“교육 기록도 같습니다.”

알토가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학생의 성취를 기록하지 않으면,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기록으로 그 아이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면, 기록은 교육이 아니라 낙인이 됩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기록은 변화의 여지를 남겨야 합니다.”

게오르기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허공록의 기록은 끝난 책이 아니라, 갱신되는 주석에 가깝겠군요.”

알토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좋은 번역입니다.”

그때 라이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기록은 만들어진 사람에게도 필요하겠죠?”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품듯 바라보았다.

“은인들에게도 이름이 필요해요. 태어난 기록도, 목적도, 가족도. 하지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그들을 물건으로 고정해버리면 안 돼요.”

원탁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5막의 주제를 미리 건드리고 있었다.

알토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정확합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들었다.

알토는 말했다.

“출생 기록은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문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들어진 존재라 하여도, 그가 선택하고 성장한다면 기록은 그 변화를 따라가야 합니다.”

라이자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기록이 그 사람의 처음만 적으면 안 된다는 거네요.”

“예. 시작 기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작 기록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덧붙였다.

“인연도 그렇습니다. 첫 만남은 중요하지만, 그 첫 만남만으로 관계가 영원히 고정되지는 않습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은 관계의 변화를 지울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원탁 위의 흰 종이들이 조금 느리게 흔들렸다.

푸리나는 생각했다.

기록의 성좌는 차가운 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신학은 의외로 살아 있는 것들을 많이 다룬다.

선택.
변화.
책임.
갱신.
검수.

알토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원탁 위에 얇은 빛으로 된 문장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그것들은 사람의 선택을 따라 분기했다.

어떤 문장은 전쟁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화해로 갔다.
어떤 문장은 배신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침묵으로 갔다.
어떤 문장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못한 채 찢어졌다.

푸리나는 그것이 기록 신술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탁이 아니었다.

알토가 자기 신술을 사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록 계통 신술은 흔히 미래를 고정하는 힘으로 오해받습니다.”

알토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다루는 허공록의 힘은 미래를 강제로 묶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의 흔적과 가능성의 흐름을 읽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존하는 데 가깝습니다.”

그는 손을 움직였다.

문장 하나가 빛났다.

한 병사가 퇴각 명령을 어겼다.
그 결과, 동료 둘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다른 전선이 열렸다.
그 선택은 용기였고, 동시에 명령 위반이었다.

알토는 말했다.

“기록은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문장이 둘로 갈라졌다.

《용기》
《명령 위반》

그리고 그 아래에 새 문장이 생겼다.

《구출된 동료》
《무너진 전선》
《재판 필요》
《훈장 검토》
《지휘 체계 개선》

알토는 담담히 말했다.

“선택은 복합적입니다. 기록은 그 복합성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군. 고통도 하나의 이름으로 끝나지 않는다.”

루나리아가 덧붙였다.

“인연도 그렇습니다. 가해자와 은인, 적과 동맹, 가족과 상처는 때로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습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평화 협정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미하일라는 짧게 답했다.

“그래서 칼보다 문서가 오래 아플 때가 있습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서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때 푸리나가 물었다.

“그럼 기록재현은?”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록을 재현하는 힘이 있잖아. 그건 여관좌의 재연극하고 비슷하게 위험할 것 같아. 지나간 사람과 사건을 다시 불러오는 거니까.”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아카식도 펜을 천천히 움직였다.

알토는 원탁 위의 문장을 한 장 들어 올렸다.

“기록재현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자체가 아닙니다. 기록된 사건의 구조와 흔적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당신의 《재연극:앙코르》가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듯, 기록재현도 과거를 완전히 되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해했어.”

알토는 말했다.

“그러므로 기록재현은 증언 보조, 전술 검토, 원인 분석에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 진실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그레이가 즉시 적었다.

《기록재현: 과거 자체의 부활이 아니라, 기록된 사건 구조와 흔적의 재구성. 증언 보조와 원인 분석에 유용하나 절대적 진실로 취급 금지.》

슈샤니크가 말했다.

“법정에서 쓰려면 검증 절차가 필요하겠군요.”

알토가 답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재현된 기록만 믿고 다음 전투를 설계하면, 기록되지 않은 변수에 찔린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아카식이 작게 말했다.

“오늘 다들 기록 교단 사람 같아.”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기록은 누구나 쓰지. 문제는 누가 불태우고, 누가 고치고, 누가 숨기느냐다.”

알토는 그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누가 책임지는지도 중요합니다.”

민다우가스는 미소를 지웠다.

“그 말은 왕에게도 적용되겠지?”

“예.”

알토는 망설이지 않았다.

“특히 왕에게 적용됩니다.”

순간 원탁 위의 여러 군주들이 조용해졌다.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군. 불편해서.”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진짜 신학은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는다.

불편한 곳에 손을 넣는다.

그것도 신학이다.

기록의 신학은 특히 그랬다.

이번에는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개척의 입장에서 묻지.”

모두의 시선이 아레에게 향했다.

아레는 기록의 신도가 아니었다.

개척의 별을 믿는 자로서, 그녀는 기록을 앞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보았다.

“떠난 이의 기록은 표지석이 될 수 있단다. 어느 길에서 누가 쓰러졌는지 모르면, 산 자는 같은 절벽을 향해 걷게 되지.”

그녀는 원탁 위의 사망 보고서 하나를 보았다.

“하지만 표지석이 길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록이 너무 무거우면, 개척자는 한 발도 앞으로 가지 못해. 너희 기록의 신학은 그 무게를 어떻게 다루지?”

알토는 아레를 보았다.

좋은 질문이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기록은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조하는 것입니다.”

아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토는 이어 말했다.

“물론 책임은 짊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죽음과 모든 실패를 산 자의 등에 전부 올려놓으면, 그 사람은 걷지 못합니다. 기록은 등에 매다는 돌이 아니라, 길가에 세우는 표지여야 합니다.”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은 마음에 드는구나.”

알토는 짧게 말했다.

“적절한 번역으로 보입니다.”

아레는 낮게 웃었다.

“너다운 칭찬이로구나.”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여관의 막에서 아레는 기억이 사슬이 아니라 표지석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기록의 막에서 알토는 기록이 등에 매다는 돌이 아니라 길가의 표지여야 한다고 답했다.

서로 다른 별이었지만, 같은 길 위에서 잠깐 만났다.

푸리나는 알토에게 물었다.

“그럼 허공록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죄는 뭐야?”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삭제입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거짓 기록보다?”

“거짓 기록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삭제는 더 은밀합니다.”

알토는 원탁 위에서 한 문장을 지웠다.

그러자 그 문장과 연결된 다른 문장들도 함께 희미해졌다.

사망자가 사라지자, 보급 실패가 사라졌다.
보급 실패가 사라지자, 책임자가 사라졌다.
책임자가 사라지자, 제도 개선이 사라졌다.
제도 개선이 사라지자, 다음 사망자가 생겼다.

그러나 그 사망자도 지워졌다.

알토는 말했다.

“거짓은 반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삭제된 것은 찾아내기 전까지 질문조차 되지 않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눈을 들었다.

질문조차 되지 않는 것.

그것은 그의 신앙과도 닿았다.

이번에는 레이튼이 짧게 말했다.

“질문이 되지 못한 것은, 답으로도 구해질 수 없겠지요.”

알토는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 한 문장은 여관의 질문 신앙이 기록의 신학을 번역한 것이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삭제된 것은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질문이 되지 못한 것은 답으로도 구해질 수 없다.》

알토는 말했다.

“허공록의 신앙은 삭제된 선택, 삭제된 죽음, 삭제된 책임을 경계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쉽게 반복됩니다.”

그레이의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녀는 곧 다시 펜을 잡았다.

《허공록 신앙의 경계: 삭제. 삭제된 것은 질문조차 되지 않으며, 반복을 낳는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용서는 기록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루나리아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인연의 신학에서는 어떤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록이 모든 것을 남긴다면, 용서는 어디에 놓입니까?”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좋은 질문이었다.

그는 곧 답했다.

“용서는 기록 삭제가 아닙니다.”

루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용서는 기록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 바꾸는 행위입니다.”

루나리아의 눈이 조금 깊어졌다.

알토는 말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용서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둘 다 기록되어야 합니다. 다만 어느 쪽도 사실 자체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요안나가 낮게 말했다.

“평화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해는 사망자 명단을 태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이름들을 남긴 채, 다음 이름을 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입니다.”

미하일라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 약속을 어기면, 기록은 다시 칼이 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알토는 말했다.

“두려움은 적절합니다. 기록을 다루는 사람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카식이 살짝 웃었다.

“그거 나한테도 하는 말이지?”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예.”

아카식은 웃음을 멈추고, 조금 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록해둘게.”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본인 검수 필요.”

아카식은 작게 웃었다.

“네, 네.”

라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잊고 싶어 해요.”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내려다보았다.

“아픈 일을 계속 기록으로 남기는 게 너무 힘들 수도 있잖아요. 안아주는 쪽에서는, 때로는 잊게 해주고 싶을 때도 있어요.”

알토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개인의 망각과 공적 삭제는 구분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들었다.

“구분?”

“예. 어떤 개인이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존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 책임을 지우기 위해 기록을 없애는 것은 다릅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매번 증언을 강요하지 않는 것과, 가해의 기록을 없애는 것은 다르군요.”

“정확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아. 그건 중요하다.”

그레이는 적었다.

《개인의 망각 선택과 공적 삭제는 구분. 증언 강요 금지. 책임 은폐 금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며 생각했다.

여관의 신학과 기록의 신학은 여기서 다시 만났다.

쉬어도 된다.
하지만 없던 일로 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지워서는 안 된다.

떠나도 된다.
하지만 그 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 정리하자.”

그레이는 이미 새 장을 펼쳤다.

알토는 원탁 옆에 섰다.

그레이가 물었다.

“3막 결론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레이는 읽었다.

“첫째. 허공록의 기록은 선택을 빼앗기 위한 구속이 아니라,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보존이다.”

“둘째. 기록은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의 원인을 남겨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근거가 된다.”

“셋째. 기록은 신성하나, 기록자는 절대자가 아니다. 기록자가 성좌의 단말이라 해도 검수 대상이다.”

아카식이 작게 손을 들었다.

“동의.”

그레이는 계속 읽었다.

“넷째. 기록 신술은 미래를 고정하는 힘이 아니라, 선택의 흔적과 결과를 보존하고 해석하는 힘이다.”

“다섯째. 기록재현은 과거 자체의 부활이 아니라, 기록된 사건 구조와 흔적의 재구성이다. 증언 보조와 원인 분석에 유용하나 절대적 진실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허공록 신앙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삭제다. 삭제된 선택과 책임은 질문조차 되지 못하고 반복을 낳는다.”

“일곱째. 용서는 기록 삭제가 아니다.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 바꾸는 행위다.”

“여덟째. 개인이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과, 공적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기록을 삭제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아홉째. 개척의 관점에서 기록은 산 자의 등에 매다는 돌이 아니라, 같은 절벽으로 걷지 않기 위해 길가에 세우는 표지여야 한다.”

그레이는 펜을 멈추었다.

알토가 낮게 말했다.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알토식 최고 칭찬 나왔다.”

알토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칭찬으로 받아도 됩니다.”

아카식은 결국 웃었다.

원탁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푸리나는 마지막 문장을 찾았다.

기록의 막은 여관의 막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차갑기만 하지는 않았다.

기록은 사람을 쉬게 하지 않는다.

기록은 차를 내주지 않는다.

기록은 상처를 감싸주지 않는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면, 누군가는 계속 같은 곳에서 쓰러진다.

누군가의 선택은 사라지고, 누군가의 죽음은 숫자도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책임은 빈칸으로 남는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러면 마지막 문장.”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푸리나는 알토를 보았다.

“기록은 사람을 묶기 위한 사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걸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기 위한 문장이다.”

그레이가 적었다.

알토는 잠시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합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 사람이 같은 어둠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남겨둔 등불이어야 한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적었다.

《기록은 사람을 묶기 위한 사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걸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기 위한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 사람이 같은 어둠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남겨둔 등불이어야 한다.》

이번에도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허공록은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아카식도 신탁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빈 책 위에, 아주 잠깐 흰 여백이 빛났다.

그뿐이었다.

그레이는 마지막 주석을 남겼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신도들은 기록과 선택과 책임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푸리나는 원탁 위 찻잔을 들었다.

“이번에도 박수보다는……”

알토가 말했다.

“기록 완료 후 검수입니다.”

푸리나는 멈칫했다.

아카식이 웃었다.

“알토, 분위기 좀.”

알토는 담담하게 답했다.

“분위기와 검수는 별개입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3막은 검수의 차로 하자.”

모두가 찻잔을 들었다.

기록의 여백 위로 차 향이 지나갔다.

여관의 따뜻한 김과 허공록의 흰 여백이 잠시 겹쳤다.

서로 다른 별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같은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등불처럼 보였다.
# 《별 아래의 신학제》

## 4막 — 고통과 인연: 아픈 뒤에도 손은 닿을 수 있는가

4막이 시작되자, 서고의 흰 종이들이 천천히 접혔다.

기록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책등 안으로 들어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자리에 먼저 내려온 것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 어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 아니었다.

깊고 검었다.
하지만 그 검은빛 안에는 아주 작은 불씨들이 있었다.

사람이 아플 때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숨.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꽉 쥔 손.
누군가의 울음을 대신 삼킨 목.
병상 옆에서 밤새 꺼지지 않는 등불.

그리고 그 어둠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밝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무 밝지 않아서, 오히려 상처 위에 닿을 수 있는 빛이었다.

원탁 위에는 두 개의 등불이 마주 놓였다.

하나는 검은 불씨였다.
고통교의 등불.

다른 하나는 은은한 달빛이었다.
인연의 성좌의 등불.

푸리나는 그 둘을 바라보았다.

“4막의 주제는 고통과 인연이야.”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고통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리고 아픈 뒤에도 손은 닿을 수 있는가》

푸리나는 레플리카와 루나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이번 막은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줘야 해.”

레플리카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루나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말해보겠습니다.”

레플리카는 검은 불씨 앞에 섰다.

그녀는 여전히 조금 딱딱했다.
자세가 반듯했고, 말투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 딱딱함은 차갑다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세워둔 기둥에 가까웠다.

“고통교는 고통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녀의 첫 문장은 짧았다.

그리고 분명했다.

“이건 먼저 말해야 한다.”

원탁이 조용해졌다.

레플리카는 계속했다.

“고통은 존재한다. 사람은 다치고, 병들고, 잃고, 배신당하고, 실패하고, 사랑하는 이를 묻는다. 그 사실을 부정하면 안 된다.”

그녀는 검은 불씨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고통이 존재한다고 해서, 고통을 늘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레플리카는 손끝을 들었다.

검은 먼지가 천천히 일어났다.

흰 먼지가 아니었다.

고통을 증폭시키는 백색의 잔광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 억누르는 검은 먼지.

《흑진》.

검은 먼지는 원탁 전체로 퍼지지 않았다.

상처 입은 병사의 환영 주변에만 낮게 깔렸다.

그 병사는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피가 흘렀고, 숨이 거칠었다.

검은 먼지가 상처를 덮자,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사의 호흡이 돌아왔다.

고통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통이 병사의 판단과 숨을 전부 빼앗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흑진》은 적의 고통을 무기로 삼는 힘이 아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능력, 고통을 키우는 흐름, 사람을 무너뜨리는 충격을 약화시키는 힘이다.”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아군에게는 버틸 틈을 준다.”

그레이가 적었다.

《흑진: 고통을 증폭하는 힘이 아니라, 고통을 일으키거나 확대하는 흐름을 약화시키고, 무너지는 자에게 버틸 틈을 주는 신술.》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고통을 없애는 게 아니라, 고통에게 전부 빼앗기지 않게 하는 거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타마르가 포도잎을 손끝으로 굴리며 말했다.

“여관의 휴식과 닿는 부분이 있군요. 다만 여관은 앉히고 쉬게 하는 쪽이라면, 고통교는 쓰러지지 않게 붙드는 쪽에 가깝겠지요.”

레플리카는 타마르를 보았다.

“그 표현은 나쁘지 않다.”

라이자가 은빛 등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그와 보상 쪽에서는, 아픈 사람에게 먼저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져요. 그런데 레플리카의 말은 조금 다르네요.”

레플리카가 그녀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괜찮지 않아도 된다는 쪽에 가까워 보여요. 대신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그렇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괜찮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혼자 부서질 필요는 없다.”

그레이가 그 말을 적었다.

《괜찮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혼자 부서질 필요는 없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레플리카는 이어서 손을 들었다.

검은 먼지들이 원탁 위에서 낮게 회전했다.

이번에는 둥근 성역이 펼쳐졌다.

《고통의 성역 - 거믄하늘》.

검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공포의 하늘은 아니었다.

그 하늘 아래서는 비명이 너무 멀리 울리지 않았다.
고통이 서로에게 전염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절규가 옆 사람의 정신까지 찢어놓지 않도록, 검은 하늘이 울림을 낮추고 있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고통은 전염된다.”

그녀의 말은 단호했다.

“전장에서 한 사람이 무너지면, 옆 사람이 무너진다. 병상에서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면, 가족이 무너진다. 친구가 아파하면, 견디던 사람도 꺾인다.”

검은 하늘 아래, 여러 사람이 서로를 붙들고 있었다.

그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를 찢지 않았다.

“《고통의 성역 - 거믄하늘》은 고통을 가두기 위한 감옥이 아니다. 고통이 더 많은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는 밤이다.”

루나리아가 달빛 등불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밤.”

레플리카는 그녀를 보았다.

루나리아는 낮게 이어 말했다.

“밤은 숨길 수도 있지만, 쉬게 할 수도 있지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밤은 후자다.”

그레이가 적었다.

《고통의 성역 - 거믄하늘: 고통을 은폐하는 감옥이 아니라, 고통의 전염과 붕괴를 낮추어 사람들이 서로를 찢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는 밤.》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그 신술은 기록과 충돌할 위험이 있습니다.”

레플리카는 바로 그를 보았다.

“어떤 의미지?”

알토는 말했다.

“고통을 낮추는 과정에서, 고통의 원인까지 흐려지면 안 됩니다. 전염을 막는 것과 은폐하는 것은 다릅니다.”

레플리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화내지는 않았다.

“맞다.”

그녀는 짧게 인정했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 가해를 지우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음소리를 낮추는 것과, 왜 신음했는지 기록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구분이 필요합니다.”

레플리카는 마지막으로 검은 불씨 앞에 손을 얹었다.

검은빛은 차갑지 않았다.

상처 입은 병사가 쓰러지려 할 때, 검은빛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를 전장 한가운데로 다시 밀어 넣지는 않았다.

먼저 숨을 고르게 했다.

동료가 그를 붙들 수 있게 했다.

“《성법 - 필리아 돌로로사》의 핵심은 ‘아파도 싸워라’가 아니다.”

레플리카는 말했다.

“혼자 아프지 말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곧았다.

“고통은 나눌 수 있다. 다만 남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서로 버티는 방식으로.”

그레이가 적었다.

《성법 - 필리아 돌로로사: 아파도 싸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혼자 아프지 말라는 보호.》

라이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품과 닮았어요.”

레플리카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아준다는 건 상대의 고통을 빼앗아 내가 대신 아프겠다는 뜻만은 아니에요. 때로는 그 사람이 자기 고통을 들고 있어도 무너지지 않게 곁에 서는 거니까요.”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좋은 번역이다.”

라이자는 작게 웃었다.

레플리카는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좋아. 서로 번역되고 있어.”

이제 루나리아가 달빛 등불 앞에 섰다.

그녀의 빛은 레플리카의 검은 하늘과 다투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검은 하늘 안쪽에, 아주 얇은 은색 길을 만들었다.

루나리아는 말했다.

“인연의 성좌는 사람을 강제로 묶는 별이 아닙니다.”

그 첫 문장도 분명했다.

“이것 역시 먼저 말해야 합니다.”

그녀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인연을 따뜻한 말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가족, 친구, 연인, 동맹, 사제와 신도. 그러나 인연은 때로 상처입니다. 벗어나고 싶은 관계일 수도 있고, 아직 마주할 수 없는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요안나의 손가락이 살짝 굳었다.

미하일라는 조용히 그 손을 보지 않는 척했다.

루나리아는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인연의 신술은 끊어진 것을 무조건 다시 묶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손을 모으자, 달빛이 하늘에서 곧장 떨어지지 않고 먼저 원탁 주위의 작은 성소를 비추었다.

기둥.
낮은 제단.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도망칠 수 있는 문.

그다음에야 달빛은 사람들의 손등 위로 내려왔다.

“《성법: 달의 가호》는 달빛과 교회, 교회와 사람, 달빛과 사람을 인연이라는 언어로 조율하는 성법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달만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 붙잡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성지가 필요합니다. 마주할 수 있는 거리, 말하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 침묵, 그리고 필요하면 나갈 수 있는 문.”

달빛 아래에 두 사람의 환영이 나타났다.

서로 등을 돌린 두 사람.

둘 사이에는 끊어진 실이 있었다.

그러나 루나리아는 그 실을 바로 잇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달빛 등불을 세웠다.

그 등불은 말하지 않았다.

둘을 억지로 마주 보게 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둠이 너무 짙어,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괴물로만 보지 않도록 아주 작은 빛을 내려주었다.

“인연의 신술이 먼저 만드는 것은 연결이 아니라, 마주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레이가 펜을 움직였다.

《성법: 달의 가호 — 끊어진 것을 즉시 잇는 힘이 아니라, 달빛·성지·사람을 인연의 언어로 조율하여 마주할 수 있는 거리와 안전한 빛을 마련하는 성법.》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마주해야만 합니까?”

루나리아는 그녀를 보았다.

그 질문은 개인적이었다.

그러나 신학제에서는 그런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루나리아는 대답했다.

“아니요.”

요안나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루나리아는 분명하게 말했다.

“마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과, 마주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다릅니다. 인연의 성좌는 도망쳐야 하는 사람의 발목을 묶는 별이 아닙니다.”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그건 중요하다.”

루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관계는 이어지기 전에 멀어져야 합니다. 어떤 손은 잡기 전에 놓아야 합니다. 어떤 이름은 당장 부르면 안 됩니다.”

미하일라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인연은 끊어질 수도 있는가.”

루나리아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끊어지는 인연도 있습니다.”

그 답은 부드러웠지만, 피하지 않았다.

“다만 끊어졌다고 해서 그 인연이 처음부터 아무 의미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다고 해서, 이전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불편했다.

하지만 이번 막의 침묵은 도망이 아니었다.

달빛 아래의 거리였다.

푸리나는 그 둘 사이에 억지로 말을 넣지 않았다.

루나리아의 몸에서 달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녀가 부르는 낮은 기도는 노래와 침묵 사이에 있었다.

바른 이에게는 노래를.
부덕한 이에게는 침묵을.
어두운 밤에는 여명을.
상처 입은 자에게는 치유를.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손을 내미는 기적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말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침묵을 주며, 누군가에게는 다시 만날 길을, 누군가에게는 떠날 문을 주는 달빛이었다.

그레이가 적었다.

《루나리아의 인연 신술 — 달빛으로 관계를 강제 결속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와 침묵, 여명과 치유를 구분하여 각자에게 필요한 거리를 마련하는 성법.》

루나리아는 말했다.

“인연은 손입니다. 하지만 손은 붙잡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달빛 등불을 보았다.

“곁에 있음을 알리고, 필요할 때 놓아주기 위해서도 있습니다.”

레플리카가 짧게 말했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루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고통을 대신 질 수는 없습니다. 다만 혼자 견디게 두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순간, 검은 불씨와 달빛이 아주 잠깐 같은 모양으로 흔들렸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연이 모든 것을 고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픈 사람 곁에 누군가 앉을 수는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어떤 밤은 지나갈 수 있었다.

게오르기아가 조용히 말했다.

“교육에서도 같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말이 필요하고, 어떤 아이에게는 기다려주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루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도 같습니다. 모두에게 같은 손을 내미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듣기에는 매우 아름답군. 하지만 전쟁 중에 그 많은 관계를 따져가며 끊고 잇는 것은 느리다.”

루나리아는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의 웃음 속에는 현실이 있었다.

“군대는 명령으로 움직인다. 국가는 혈연과 서약과 보복과 혼인으로 엮인다. 끊을 수 있는 절차를 넓히면, 누군가는 그걸 이용할 거다.”

루나리아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맞습니다.”

민다우가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루나리아는 계속했다.

“인연의 절차는 악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끊을 수 없는 인연은 더 쉽게 지옥이 됩니다.”

원탁이 조용해졌다.

민다우가스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크게 웃지 않고 말했다.

“그 대답은 기억해두지.”

슈샤니크가 담담히 덧붙였다.

“그렇다면 절차가 필요합니다. 보호 기간, 증언 강요 금지, 가해 관계 분리, 재접촉 제한, 공동체 복귀 기준. 인연을 신술로 다룬다면, 제도 역시 그 신술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루나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쓰이기를 바랍니다.”

푸리나는 원탁 위를 보았다.

검은 불씨.
달빛.
기록의 흰 여백.
개척의 길.
은빛의 품.
여관의 차.

서로 다른 신앙들이 충돌하지 않고, 잠시 같은 문장을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었다.

그때 요안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평화는 고통과 인연 사이 어디에 있습니까?”

미하일라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다.

요안나는 손을 모으고 있었다.

“전쟁은 고통을 만들고, 동시에 이상한 인연도 만듭니다. 원수, 포로, 동맹, 배신자, 구원자. 평화는 그 모든 것을 다시 묶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사실은 일부를 끊어야 시작될 때도 있습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평화는 모든 관계를 복구하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을 의미 있다고 포장하는 일도 아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고통을 피하려고 해야 할 전쟁을 피하면, 더 큰 고통이 온다.”

레플리카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그 말도 맞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고통을 누가 견디는지도 봐야 한다.”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분노가 아니었다.

받아들임이었다.

“그렇다.”

미하일라의 대답은 짧았다.

“황제가 보아야 할 것이다.”

요안나는 그녀를 보았다.

둘 사이의 달빛은 얇았다.

하지만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얇은 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 막은 요안나와 미하일라의 화해를 완성하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건 너무 빠르다.

하지만 둘이 같은 질문 앞에 앉을 수는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인연의 신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강제가 아니라 자리.

용서가 아니라 거리.

재회가 아니라, 아직 끊어지지 않은 말 한 줄.

그레이가 조용히 적었다.

《인연은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말할 수 있는 거리를 마련한다.》

루나리아는 그 문장을 보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표현은 좋습니다.”

푸리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레플리카. 고통은 무엇을 가르쳐?”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한계를 가르친다.”

짧은 답이었다.

“무엇을 더는 버틸 수 없는지. 무엇이 사람을 부수는지. 무엇을 줄여야 하는지. 누구를 혼자 두면 안 되는지.”

그녀는 검은 불씨를 보았다.

“그리고 가끔, 무엇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지도 가르친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루나리아를 보았다.

“루나리아. 인연은 무엇을 가르쳐?”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을 내려다보았다.

“혼자 닫히는 삶은 없다는 것을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함께 있다는 이유로 서로를 소유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도 가르칩니다.”

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엄격했다.

“인연은 손입니다. 하지만 손은 잡을 수도, 놓아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아레가 낮게 반응했다.

“놓아주는 손도 길을 열 수 있지.”

루나리아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개척의 신도였다.

그녀는 말했다.

“앞으로 가기 위해 끊어야 하는 길도 있다. 그러나 끊었다고 해서 그 길이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과, 없던 일로 하라는 말은 다르단다.”

알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의 관점에서도 동의합니다.”

레플리카가 짧게 말했다.

“고통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푸리나는 둘의 말을 듣고, 천천히 웃었다.

“좋아. 그러면 신술 해석.”

그레이는 새 항목을 열었다.

《신술 해석》

레플리카가 먼저 말했다.

“《흑진》은 고통을 키우는 힘이 아니라, 고통을 일으키고 확산시키는 흐름을 약화시키는 힘이다.”

그레이가 적었다.

“《고통의 성역 - 거믄하늘》은 고통을 숨기는 감옥이 아니라, 고통이 더 많은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는 밤이다.”

그레이가 적었다.

“《성법 - 필리아 돌로로사》는 아파도 싸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혼자 아프지 말라는 보호다.”

그레이가 적었다.

루나리아가 이어 말했다.

“《성법: 달의 가호》는 끊어진 것을 즉시 잇는 힘이 아니라, 달빛·성지·사람을 인연의 언어로 조율해 마주할 수 있는 거리와 안전한 빛을 마련하는 성법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루나리아의 달빛은 노래와 침묵, 여명과 치유를 구분합니다. 모두에게 같은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필요한 거리와 문을 마련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푸리나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다른 신앙의 번역도 넣자.”

푸리나가 말했다.

“여관의 관점에서, 고통은 이제 쉬어야 한다는 길 위의 표식이야. 무시하고 계속 걷다 보면 결국 쓰러지니까.”

그녀는 검은 불씨와 달빛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인연은 모두를 같은 방에 밀어 넣는 게 아니야. 어떤 사람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옆방에 있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 문밖의 의자에서 차만 받아야 해.”

푸리나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

“여관은 사람을 붙잡는 곳이 아니라, 다시 숨 쉴 수 있을 만큼 머물게 하는 곳이니까. 고통도, 인연도, 결국 먼저 물어야 해.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손인가, 침묵인가, 거리인가, 아니면 잠시 쉬어갈 방인가.”

알토가 말했다.

“기록의 관점에서, 고통과 인연은 원인과 변화가 함께 기록되어야 합니다. 고통은 은폐되어서는 안 되고, 인연은 과거의 한 순간으로 고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허그와 보상의 관점에서, 품은 사람마다 달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겨야 하고, 어떤 사람은 거리를 둔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생명의 관점에서, 고통을 줄이는 것은 생명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한 보호입니다.”

아레가 말했다.

“개척의 관점에서, 놓아주는 인연도 길을 엽니다. 죽은 길을 끝없이 끌고 가는 것은 전진이 아니지요.”

민다우가스는 낮게 말했다.

“국가의 관점에서, 모든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처를 제도적으로 악용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슈샤니크가 이어 말했다.

“그러려면 보호 절차, 증언 강요 금지, 가해 관계 분리, 장기 치료 기록, 공동체 복귀 절차가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감탄했다.

“슈샤니크가 말하니까 바로 행정 문서가 되네.”

슈샤니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레이가 모두 적었다.

마침내 4막의 결론이 정리되었다.

그레이는 장부를 넘기며 읽었다.

“첫째. 고통교는 고통을 숭배하지 않는다. 고통은 존재하는 진실이지만, 늘려야 할 선은 아니다.”

“둘째. 고통교 신술은 총 고통량을 줄이고, 무너지는 자에게 버틸 틈을 주며, 고통이 전염되어 더 많은 사람을 부수지 않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셋째. 인연의 성좌는 관계를 강제로 묶는 별이 아니다. 인연의 신술은 끊어진 것을 무조건 잇는 것이 아니라, 마주할 수 있는 거리와 안전한 빛을 마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넷째. 고통을 견디는 것이 미덕일 수는 있으나, 없어도 되는 고통을 성장이라 포장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인연은 구원이 될 수 있으나, 모든 인연이 구원은 아니다. 이어야 할 것, 놓아야 할 것, 아직 이름 붙이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여섯째. 고통과 인연이 만나는 지점은 ‘혼자 무너지지 않게 하는 곁’이다.”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쓰기 위해 펜을 멈추었다.

푸리나는 레플리카와 루나리아를 보았다.

“마지막 문장은 두 사람이 정해줘.”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루나리아는 그 뒤를 받았다.

“그리고 손은, 붙잡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달빛 등불을 보았다.

“곁에 있음을 알리고, 필요할 때 놓아주기 위해서도 있습니다.”

그레이는 두 문장을 합쳐 적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손은 붙잡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음을 알리고 필요할 때 놓아주기 위해서도 있다.》

이번에도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고통의 별도, 인연의 별도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검은 불씨는 꺼지지 않았고, 달빛은 너무 밝아지지 않았다.

그 둘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레이는 마지막 주석을 남겼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신도들은 고통과 인연과 회복의 경험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푸리나는 찻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박수를 칠 수 없었다.

이 막에는 박수보다 침묵이 어울렸다.

하지만 침묵만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밤을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오늘은 곁의 차로 하자.”

레플리카가 눈을 조금 깜박였다.

루나리아는 조용히 웃었다.

모두가 찻잔을 들었다.

검은 불씨 위로 차 향이 지나갔다.
달빛은 찻잔 가장자리에서 얇게 흔들렸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연이 모든 것을 고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혼자 아프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어떤 손은, 붙잡지 않아도 곁에 있을 수 있었다.
# 《별 아래의 신학제》

## 5막 — 허그와 보상: 만들어진 이도 가족이 될 수 있는가

5막이 시작되자, 검은 불씨와 달빛은 원탁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그 자리에 은빛이 내려왔다.

차갑게 번쩍이는 은이 아니었다.
갓 닦아낸 숟가락의 은빛.
아이의 머리핀에 달린 작은 은꽃.
누군가를 위해 밤새 녹이고 두드리고 다시 빚은 금속의 온기.

원탁 위에는 작은 은꽃 하나가 놓였다.

조잡했다.

정교한 세공품은 아니었다.
꽃잎의 두께도 제각각이었고, 줄기는 조금 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은꽃을 보는 순간, 모두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푸리나는 그 은꽃을 보며 말했다.

“5막의 주제는 허그와 보상.”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보상은 무엇을 갚는가. 그리고 만들어진 이도 가족이 될 수 있는가》

라이자가 은꽃 앞에 섰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군주.
은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들에게 성과 혈통과 목적을 나누어주는 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에, 꿈속에서 만난 은빛 정령과 작은 은꽃을 품은 사람.

라이자는 은꽃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저는 어릴 때 은으로 된 정령을 만났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아이가 말해줬어요. 은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더 친절한 사람들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은꽃의 빛이 조금 흔들렸다.

“깨어났을 때, 꿈은 사라졌지만 이 꽃은 남아 있었어요.”

그녀는 웃었다.

“조잡하죠?”

죠니가 낮게 말했다.

“조잡하긴 하네.”

푸리나가 죠니를 흘끗 보았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버릴 물건처럼 보이진 않아.”

라이자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응. 맞아요. 저한테는 버릴 수 없는 물건이에요.”

그녀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저는 은으로 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군대를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친구가 들려준 그 세계를 현실로 만들고 싶어서.”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목적 기록이 중요하겠군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야 해요.”

푸리나는 손짓했다.

원탁 위의 은꽃 곁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허그와 보상은 소유인가, 돌봄인가》

라이자는 숨을 골랐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를 믿는다는 건, 모두에게 똑같은 선물을 준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녀는 은꽃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에게 보상은 금화일 수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빵 한 조각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품, 누군가에게는 혼자 있을 수 있는 방,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할 재료일 수 있어요.”

그녀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아픈 사람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는 게 늘 보상은 아니죠. 어떤 사람은 괜찮지 않다고 말할 권리가 필요하니까요.”

레플리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자는 루나리아를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건, 그 사람을 놓지 않겠다는 뜻만도 아니에요. 어떤 품은 거리를 지켜주는 방식이어야 해요.”

루나리아는 조용히 웃었다.

“그 번역은 마음에 듭니다.”

라이자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허그와 보상의 신학을 이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원탁 위의 은꽃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무엇을 잃었는지 먼저 보고, 그 사람이 다시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필요한 것을 돌려주는 일.”

그레이가 펜을 움직였다.

《허그와 보상의 신학: 상실을 먼저 보고, 그 사람이 다시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필요한 것을 돌려주는 일.》

알토가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보상은 채무 변제가 아니라 회복의 설계에 가깝습니까?”

라이자는 잠깐 생각했다.

“응. 법적으로는 다를 수 있겠지만, 신학적으로는 그래요. 보상은 ‘받을 만큼 받았으니 끝’이 아니라, ‘이제 다시 살아갈 수 있나’를 물어야 해요.”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분할 가치가 있습니다.”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국가의 창고는 무한하지 않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을 다 돌려주겠다고 하면, 나라가 먼저 무너진다.”

라이자는 그를 보았다.

그 질문은 차가웠지만, 틀리지 않았다.

“맞아요.”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보상은 무조건 퍼주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잘 봐야 해요.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무엇을 주면 더 망가지는지, 무엇을 주면 다시 설 수 있는지.”

슈샤니크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보상은 감정이 아니라 행정이기도 합니다.”

라이자는 조금 웃었다.

“네. 그래서 어렵죠.”

슈샤니크는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전쟁 피해 보상, 고아 보호, 난민 정착, 병사 보훈, 장인 지원, 신술 재료 배분. 모두 ‘따뜻한 마음’만으로는 실패합니다. 보상은 목록과 우선순위, 검수, 남용 방지, 지속 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슈샤니크가 말하면 따뜻한 것도 바로 장부가 되네.”

슈샤니크는 평온했다.

“장부가 없으면 따뜻함도 누락됩니다.”

그 말에 라이자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건 좋은 말이에요.”

그레이도 적었다.

《장부가 없으면 따뜻함도 누락된다.》

그때 원탁 위의 은꽃이 녹기 시작했다.

물처럼 흐른 은은 원탁 위에서 작은 사람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것은 완성된 은인이 아니었다.

아직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단지 가능성의 형상.

라이자는 그 은빛 형상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제 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건 여기예요.”

모두가 은빛 형상을 보았다.

“성은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면, 만들어진 사람은 무엇인가.”

원탁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 질문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 가족, 창조, 소유, 책임, 인권, 신성, 죄.

모든 것이 얽혀 있었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은인銀人을 만들어요. 성은으로 육체를 빚고, 신성회로와 코어를 세우고, 지식과 기술과 심상각인을 전사하고, 목적과 혈맥을 부여해요.”

그녀의 말에 은빛 형상의 내부에 가느다란 회로가 생겼다.

강처럼 흐르는 은빛.
심장처럼 뛰는 작은 코어.
아직 비어 있는 이름의 자리.

그때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여관의 관점에서 보면, 그 첫 순간은 제작 완료가 아니라 투숙 시작이야.”

라이자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은빛 형상 앞에 놓인 빈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처음 해야 할 일은 명령이 아니라 이름을 묻는 것. 그리고 방을 내주되, 떠날 문도 열어두는 것.”

그레이가 적었다.

《여관의 번역: 만들어진 존재의 첫 순간은 제작 완료가 아니라 투숙 시작이다. 이름을 묻고, 방을 내주고, 떠날 문을 열어두는 것이 창조 이후의 첫 환대다.》

라이자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투숙 시작…….”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은 손님을 맞이하지만, 소유하지는 않으니까.”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라이자에게는 무겁게 닿았다.

알토가 곧바로 말했다.

“기록상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라이자는 알토를 보았다.

알토는 담담했다.

“제작 기록과 소유 기록은 다릅니다. 출생 경위가 제작이라 해도, 인격이 발생한 순간부터 그 기록은 물품 대장이 아니라 인적 기록이어야 합니다.”

라이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네. 그게 중요해요.”

알토는 이어 말했다.

“또한 시작 기록이 그 존재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들어진 목적이 있다 해도, 이후의 선택과 성장 기록이 갱신되어야 합니다.”

라이자는 조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라는 것도 그거예요.”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만들어진 목적이 그 사람을 계속 아프게 한다면?”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레플리카는 정면으로 물었다.

“네가 선의로 만들었다 해도, 그 목적이 그 사람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때는 어떻게 하지?”

라이자는 은빛 형상을 보았다.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그 목적을 바꿀 수 있어야 해요.”

레플리카의 눈이 조금 좁아졌다.

라이자는 계속했다.

“처음에는 제가 목적을 상정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사람이라면, 살아가면서 자기 목적을 고칠 수 있어야 해요. 제가 준 목적이 족쇄가 되면 안 돼요.”

레플리카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은 좋다.”

그레이가 적었다.

《은인의 목적은 출발점일 수 있으나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라면 자기 목적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인연은 어떻게 됩니까?”

라이자는 그녀를 보았다.

루나리아는 달빛 등불 위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은인들에게 성과 혈통을 분배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족입니까, 제도입니까, 아니면 창조자의 관계입니까?”

라이자는 침묵했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은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전부 조금씩이요.”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위험한 대답이군.”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위험해요.”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제가 은인에게 성과 혈통을 준다면, 그건 단순히 분류표를 붙이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혼자 태어난 도구가 아니라, 가족과 역사와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거예요.”

루나리아는 조용히 들었다.

라이자는 말했다.

“하지만 그 가족이 강제가 되면 안 돼요. 제가 어머니처럼 굴 수는 있어도, 그들이 반드시 저를 어머니로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그건 정말 중요하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준 성이 그들을 보호해야지, 가둬서는 안 돼요.”

루나리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인연의 관점에서, 당신의 은인은 ‘만들어진 가족’이라기보다 ‘초대받은 가족’에 가까워야겠군요.”

라이자는 눈을 들었다.

루나리아는 말했다.

“초대는 할 수 있지만, 응답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라이자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그레이가 적었다.

《은인의 가족성: 창조자가 강제하는 가족이 아니라, 성과 혈통을 통해 초대된 가족. 초대는 가능하나 응답은 강요할 수 없다.》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개척의 관점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보이는구나.”

라이자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은빛 형상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든다는 건, 새로운 길을 여는 일이란다. 하지만 길을 열었다고 해서 그 길을 모두 네가 정할 수는 없어.”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개척자는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자가 언젠가 다른 길로 벗어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라이자는 조금 웃었다.

“그건 무섭네요.”

“그래도 받아들여야지.”

아레의 말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그들이 정말 사람이라면.”

라이자는 은빛 형상을 보며 대답했다.

“네.”

아스트리트가 별빛 앞에서 말했다.

“생명의 관점에서도 묻겠습니다.”

라이자는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진지했다.

“생명을 긍정한다는 것은, 태어난 생명을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은인이 병사로 만들어졌다 해도, 그 생명은 전쟁만을 위해 존재합니까?”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은의 군단.

은인병단과 은인기사단.

성은으로 병력과 장비와 전마를 함께 조형하는 신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은 너무나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나 병사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존재가 전쟁으로만 끝나야 하는가.

라이자는 천천히 말했다.

“아니요.”

아스트리트는 기다렸다.

라이자는 계속했다.

“은인병으로 만들어졌어도, 전쟁이 끝난 뒤의 삶이 있어야 해요. 배우고, 쉬고, 가족을 만들고, 원한다면 다른 일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생명의 신학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민다우가스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는 그렇게 낭만적일 수 없다.”

아스트리트가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팔짱을 꼈다.

“군대는 군대다. 병사에게 전투 외의 삶이 있다는 말은 좋다. 하지만 전투 중에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은인도 병사라면 다르지 않다.”

라이자는 말했다.

“맞아요. 병사라면 명령을 따라야 해요.”

그녀는 곧장 덧붙였다.

“하지만 병사라는 기록이 사람이라는 기록을 지우면 안 돼요.”

알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레플리카도 말했다.

“병사도 아프다.”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병사도 살아 있다.”

루나리아가 말했다.

“병사도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그 문장들을 들었다.

은인이든 인간이든, 병사든 군주든.

이 막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만들어진 자도, 쓰임을 가진 자도, 누군가의 보상이자 누군가의 작품인 자도.

사람인가.

그리고 사람이라면, 무엇을 보상받아야 하는가.

라이자는 손을 들었다.

은빛 형상 앞에 작은 의자가 생겼다.

《은의 조형》.

오늘 라이자는 병단을 만들지 않았다.

공성병기도, 기사단도, 전마도 만들지 않았다.

그녀가 만든 것은 작은 의자였다.

은빛 형상 앞에 놓인, 아이가 앉을 만한 낮은 의자.

푸리나는 그 의자를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라이자는 말했다.

“저는 은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어요. 병기도, 병사도, 집도, 도구도.”

그녀는 낮은 의자를 가리켰다.

“하지만 허그와 보상의 신앙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야 하는 건, 앉을 자리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원탁이 조용해졌다.

“만들어진 존재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바로 명령을 받는 게 아니라, 먼저 앉아서 자기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자리.”

그레이의 펜이 움직였다.

《허그와 보상의 조형: 명령 이전에 앉을 자리. 제작 이전에 환대.》

라이자는 이어서 손을 펼쳤다.

《성은의 혈맥》.

은빛 형상의 안쪽으로 강이 흘렀다.

그 강은 차갑지 않았다.

상냥함과 자비로움을 근간으로 하는 성은의 강.

라이자는 말했다.

“《성은의 혈맥》은 단지 회로를 최적화하는 신술이 아니에요. 제가 은인에게 어떤 심상을 새기는가의 문제예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그 안에 상냥함과 자비로움의 강을 흐르게 하고 싶어요. 명령에 복종하는 금속이 아니라, 누군가를 해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마음.”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그건 전장에서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필요해요.”

레플리카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 대답은 싫지 않다.”

라이자는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성은으로 새기다》가 이어졌다.

은빛 형상의 내부에 지식과 기술이 새겨졌다.

하지만 글자는 단단한 낙인이 아니라, 지워지고 다시 쓸 수 있는 얇은 선처럼 보였다.

라이자는 말했다.

“지식과 기술을 전사할 수 있다면, 더 조심해야 해요. 많이 안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처음 새긴 지식이 전부가 되어서도 안 돼요.”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움은 주입이 아니라 성장입니다.”

라이자는 반가운 듯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말했다.

“처음부터 완성된 지식을 넣는다면 효율적이겠지요. 그러나 배우는 과정을 빼앗긴 존재는 자기 질문을 갖기 어렵습니다. 은인에게도 질문할 권리가 필요합니다.”

레이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부분은 제 서재에서도 환영할 만한 이야기군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저는 은인에게 완성된 답만 주고 싶지 않아요. 살아가면서 자기 답을 찾아가게 하고 싶어요.”

그레이가 적었다.

《은인의 교육: 전사된 지식은 시작점일 뿐, 질문과 성장의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때 원탁 위의 은빛이 한층 깊어졌다.

진은眞銀의 빛.

푸리나는 그 빛이 단순한 금속의 빛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더 깊고, 더 무겁고, 더 신성한 결과의 빛.

라이자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제 오의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성은의 강의 심상을 복제하고, 목적을 상정하고, 혈맥을 설계하고, 육체를 구축하고, 경험과 세월을 구상하고, 정신을 세우고, 성은의 강에서 태어나는 신화를 공상하여, 진은이 결과를 끌어내는 신의 업.

지금 이곳에.

인간이 된다.

그 말은 너무 컸다.

원탁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라이자는 작게 말했다.

“이 신술은 제가 제일 두려워해야 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푸리나는 그녀를 보았다.

라이자는 은빛 형상을 보며 말했다.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신의 업에 가까운 걸 할수록, 제가 신처럼 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알토가 낮게 말했다.

“창조 기록에는 책임 기록이 따라야 합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토는 말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어떤 권리를 부여했는지, 독립 조건은 무엇인지, 명령권은 어디까지인지, 거부권은 있는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바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법제화되어야 합니다.”

그녀는 차분하게 항목을 나열했다.

“은인의 시민권. 병역 의무와 면제. 재산권. 가족 등록. 교육권. 자기 목적 변경권. 창조자와의 법적 관계. 학대 금지. 폐기 금지. 사망과 장례 절차.”

라이자는 그 항목들을 하나하나 들었다.

무겁지만 필요한 말들이었다.

“네.”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해야 해요.”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너는 군주로서는 꽤 위험한 약속을 하고 있다. 네가 만든 병력이 네 명령을 거부할 권리까지 인정하겠다는 건가?”

라이자는 그를 보았다.

그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군대 안에서는 명령 체계가 필요해요.”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명령 체계가 존재 자체의 소유권이 되어서는 안 돼요. 병사가 항명하면 처벌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병사라는 이유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민다우가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라이자는 말했다.

“은인도 같아야 해요.”

민다우가스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상주의자군.”

라이자는 조금 웃었다.

“그런 말을 자주 들어요.”

“하지만 현실을 아예 모르는 이상주의자는 아니군.”

그 말은, 민다우가스식으로는 꽤 높은 평가였다.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는 레플리카가 물었다.

“만약 네가 만든 은인이 너를 미워한다면?”

라이자는 숨을 멈추었다.

레플리카는 담담했다.

“자신을 왜 만들었냐고 묻고, 네가 준 가족을 거부하고, 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면?”

라이자는 은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아프겠죠.”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많이 아플 거예요.”

조용한 침묵.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그래도 받아들여야 해요.”

루나리아의 달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라이자는 말했다.

“허그는 붙잡는 게 아니니까. 보상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쥐여주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은빛 형상을 보았다.

“제가 만든 사람이 저를 떠난다면, 저는 그 사람이 떠날 수 있을 만큼 사람으로 섰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아레가 낮게 말했다.

“그건 개척이다.”

라이자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조용히 웃었다.

“스스로 연 길에서, 누군가가 네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 그걸 허락하는 것이 진짜 길을 여는 일이란다.”

라이자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푸리나는 은빛 형상 앞의 의자와 열린 문을 보았다.

“여관의 관점에서도 그래.”

그녀는 짧게 말했다.

“방을 내줄 수는 있어. 하지만 문을 잠그면 그건 환대가 아니야.”

그레이가 적었다.

《여관의 관점: 창조는 방을 내주는 일과 닿는다. 그러나 방은 머물기 위한 곳이지 가두기 위한 곳이 아니다.》

원탁 위 은빛 형상이 천천히 변했다.

아직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단순한 병기나 도구로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는 낮은 의자가 있었고, 옆에는 빈 이름표가 있었으며, 뒤에는 열려 있는 문이 있었다.

그 문 너머에는 길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말했다.

“그럼 신학 정리를 해보자.”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5막 결론 정리하겠습니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가 읽었다.

“첫째. 허그와 보상의 신학에서 보상은 단순한 채무 변제가 아니라, 상실을 보고 그 사람이 다시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필요한 것을 돌려주는 회복의 설계다.”

“둘째. 품은 모두에게 같은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안김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거리와 침묵이 필요하다.”

“셋째. 성은으로 만들어진 은인은 제작물로 시작할 수 있으나, 인격이 발생한 순간부터 물건이 아니라 사람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넷째. 은인의 목적은 출발점일 수 있으나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라면 자기 목적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은인에게 부여된 성과 혈통은 강제된 가족이 아니라 초대된 가족이어야 한다. 초대는 가능하나 응답은 강요할 수 없다.”

“여섯째. 병사로 만들어진 은인에게도 전쟁 이후의 삶, 교육, 휴식, 권리, 장례가 필요하다.”

“일곱째. 창조자는 신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창조 기록에는 책임 기록과 권리 기록이 함께 따라야 한다.”

푸리나는 웃었다.

“신술 해석도.”

그레이는 새 항목을 열었다.

《신술 해석》

라이자가 천천히 말했다.

“《은의 조형》은 무엇이든 만드는 힘이지만, 허그와 보상의 신학에서는 먼저 앉을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명령 이전에 환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성은의 혈맥》은 회로 최적화만이 아니라, 은인 안에 상냥함과 자비로움의 강을 흐르게 하는 심상각인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성은으로 새기다》는 지식과 기술을 전사하지만, 은인의 질문과 성장의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라이자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성은聖銀의 성인聖人》은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신의 업에 가까운 힘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창조자가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경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 인간을 빚는 신의 업에 가까운 조형. 그러나 사람을 만들 수 있음은 사람을 소유할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창조의 순간부터 책임과 권리의 질서가 필요하다.》

푸리나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다른 신앙의 번역도 넣자.”

알토가 말했다.

“기록의 관점에서, 은인은 제작 기록이 아니라 인적 기록으로 갱신되어야 합니다. 시작 기록은 중요하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고통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목적이 고통이 된다면 고칠 수 있어야 한다. 견디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루나리아가 말했다.

“인연의 관점에서, 은인의 가족성은 강제된 결속이 아니라 응답 가능한 초대여야 합니다.”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생명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아레가 말했다.

“개척의 관점에서, 창조자가 연 길은 언젠가 창조자의 예상 밖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길입니다.”

민다우가스가 말했다.

“국가의 관점에서, 권리를 인정한다면 의무도 정해야 한다. 감정만으로 군단과 시민을 동시에 다룰 수는 없다.”

슈샤니크가 이어 말했다.

“따라서 은인법이 필요합니다. 시민권, 병역, 가족 등록, 교육, 재산, 독립, 처벌, 보호, 장례. 모두 문서화해야 합니다.”

게오르기아가 말했다.

“교육의 관점에서, 전사된 지식은 교육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합니다. 질문할 권리가 없는 지식은 배움이 아닙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여관의 관점에서, 은인의 탄생은 창고에 물건이 들어온 순간이 아니라 손님이 문을 연 순간이야. 이름, 방, 식탁, 그리고 떠날 수 있는 문이 필요해.”

그레이는 모두 적었다.

원탁 위의 은빛 형상이 고개를 든 것처럼 보였다.

아직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이름이 들어갈 자리는 있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푸리나는 라이자를 보았다.

“마지막 문장은 네가 정해줘.”

라이자는 은꽃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은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그 목소리는 떨렸지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이 된 은은, 더 이상 제 재료가 아니에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그 사람의 이름과 길과 행복은, 제가 주조하는 게 아니라 함께 배워가야 하는 거예요.”

푸리나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방을 나서도 되는 여행자겠지.”

라이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행자요.”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은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된 은은 더 이상 재료가 아니다. 그 이름과 길과 행복은 창조자가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배워가야 하는 것이며, 언젠가 자기 방을 나서도 되는 여행자의 것이다.》

이번에도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직접 품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원탁 위의 작은 은꽃이, 아주 잠깐 따뜻하게 빛났다.

그 빛은 명령도, 판결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전 꿈에서 건네받은 작은 선물이 아직 식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레이는 마지막 주석을 남겼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신도들은 보상과 창조와 가족의 책임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푸리나는 찻잔을 들었다.

“오늘은…… 그냥 따뜻한 차로 하자.”

죠니가 낮게 말했다.

“방금 은꽃의 차 같은 이상한 말 하려던 거 아니야?”

푸리나는 멈칫했다.

라플리가 질색했다.

“그건 마시기 싫어.”

라이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모두가 찻잔을 들었다.

은빛은 찻잔 가장자리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만들어진 존재가 아직 이름을 받지 않은 채, 낮은 의자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문을 닫지 않았다.
아레의 특성은 최신 시트 기준으로 반영했고, 결론부에서 **시원성좌/생명의 긍정**이 빠지지 않도록 앞축을 보강했어. 특히 아레는 《가장 낮은 바다》, 《천저의 그물추》, 《끊기지 않는 실타래》, 《가라앉히기》, 《추도자》, 《첫 번째 가주》를 중심으로 반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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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아래의 신학제》

## 6막 — 별과 개척의 신학: 별은 길을 명령하는가, 질문을 던지는가

6막이 시작되자, 원탁 위의 은빛은 천천히 물러났다.

작은 은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빛은 원탁 가장자리로 물러나, 아직 이름을 받지 않은 이들을 위한 빈 의자와 함께 조용히 남았다.

그 위로 밤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것은 4막의 검은 밤과 달랐다.

고통을 삼키는 밤도, 인연을 조심스럽게 비추는 달밤도 아니었다.

이번의 밤은 더 높았다.

고개를 들면 끝이 보이지 않는 밤.
사람이 자기 발밑보다 먼저 하늘을 보게 되는 밤.
어디까지가 길이고 어디부터가 낭떠러지인지 알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한 걸음을 내딛고 싶어지는 밤.

원탁 위에는 별이 내려와 있었다.

하나는 아주 오래된 별빛이었다.

생명의 처음을 떠올리게 하는, 푸르고 흰 창성의 빛.

다른 하나는 길 위에 박힌 별빛이었다.

아직 길이 되지 않은 흙 위에, 누군가 첫 발을 찍었을 때 생기는 작은 빛.

그리고 그 사이에, 비어 있는 지도 한 장이 놓였다.

지도에는 국경도, 도시도, 산맥도 없었다.

다만 여백이 있었다.

끝없는 여백.

푸리나는 그 지도를 보며 말했다.

“6막의 주제는 별과 개척의 신학이야.”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성좌의 선택과 시련은 운명인가, 한계 너머의 질문인가》

그리고 그 아래에 두 번째 문장이 새겨졌다.

《신의 안배를 부수고 나아가는 것도 신앙일 수 있는가》

원탁은 조용해졌다.

이번 막의 중심에는 다섯 사람이 있었다.

시원성좌, 곧 생명의 별에게 선택받은 아스트리트.
별의 질서와 하늘의 의미를 읽는 아스테리아.
개척의 별을 믿는 아레.
기록의 별을 믿는 알토.
그리고 질문으로 닫힌 답을 다시 열어젖히는 레이튼.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이 막에서는 ‘선택받았다’는 말부터 의심해야 해.”

아스트리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금빛 머리 위로, 창성의 빛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시원성좌의 선택자.

그러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광신의 날카로움이 아니었다.

생명을 징벌의 이름으로 꺾는 별이 아니라, 생명을 긍정하는 별.

살아 있는 것이 스스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별의 흔적이었다.

아스트리트는 잠시 자기 손을 보았다.

검을 잡는 손.
노력으로 굳은 손.
갑자기 기사단장이 되라는 엉뚱한 편지를 받고도 결국 자리를 떠나지 않은 손.

그녀가 말했다.

“저는 선택받았습니다.”

그 말은 자랑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확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선택받았다는 말이, 제 길이 모두 정해졌다는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이어 말했다.

“시원성좌는 생명을 긍정하는 별입니다. 생명이란, 이미 완성된 형태로 멈춰 있는 것이 아니지요. 숨 쉬고, 자라고, 다치고, 회복하고, 다시 일어나고, 때로는 자기 한계를 넘으려 합니다.”

그녀의 등 뒤로 희미한 별빛의 갑옷이 생겼다.

《창성천강지체》.

그것은 단순히 튼튼한 육체가 아니었다.

생명이라는 개념이 몸의 균형과 정신과 별의 축복 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듯한 빛.

별빛은 그녀를 묶지 않았다.

오히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중심을 세워주었다.

아스트리트는 말했다.

“《별의 간택자Chosen》은 정해진 결말의 증명이 아닙니다. 시원성좌가 생명을 긍정한다면, 그 간택은 생명이 더 살아가고, 더 자라나고, 무너진 뒤에도 다시 일어나도록 받은 부름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선택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선택받은 자라고 해서 곧장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택받았기 때문에,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노력하는 자》는 제게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재능이 있고, 별의 간택이 있고, 강한 몸이 있어도, 틀어지고 부족해지는 순간은 옵니다. 그때 자신을 다시 고치고, 균형을 찾고, 한계를 넘으려는 노력이 없으면 선택은 쉽게 오만이 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아스트리트: 선택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시원성좌의 간택은 운명 확정이 아니라, 생명이 더 살아가고 자라나 회복하며 한계를 넘도록 받은 부름이다.》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선택받았다고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니겠지.”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히려 더 아플 때도 있습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선택받았다는 이유로 사람들과의 거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끔은 말도 안 되는 편지로 기사단장이 되기도 합니다.”

라플리가 뒤쪽에서 피식 웃었다.

“그건 별의 시련이라기보다 행정 사고 아닌가?”

아스트리트가 아주 잠깐 눈썹을 움직였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아스트리트는 그러나 곧 진지하게 돌아왔다.

“하지만 어떤 부름은 우스운 방식으로 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부름이 완벽했는지가 아니라, 그 앞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입니다.”

아스테리아가 별빛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별은 사람을 내려다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을 운명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위에 있으니까. 오래되었으니까. 사람보다 먼저 떠 있었으니까.”

그녀는 빈 지도를 손끝으로 쓸었다.

지도 위에 별자리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선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별들은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별자리란 본래 인간이 연결한 것입니다. 별은 빛났고, 인간이 그 사이에 선을 그었습니다.”

레이튼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이 말은 그의 [문답의 서재]와도 닿아 있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

아직 연결되지 않은 가능성.

아스테리아는 말했다.

“그렇다면 별은 결말입니까, 질문입니까?”

원탁이 조용해졌다.

아스테리아는 스스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질문을 원탁 위에 놓았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훌륭한 문제 제기입니다.”

그는 모자챙을 가볍게 만졌다.

“성좌의 선택을 결론으로 보는 순간, 인간은 대답을 멈춥니다. ‘나는 선택받았으니 옳다.’ ‘나는 버림받았으니 틀렸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하지만 선택을 질문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왜 내가 선택되었는가?’ ‘무엇을 위해 이 힘이 주어졌는가?’ ‘이 선택에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

레이튼은 원탁 위의 별들을 보았다.

“질문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정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스트리트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토가 펜을 들었다.

“기록의 관점에서,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기록될 수 있습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기록은 면책 조항이 아닙니다. 어떤 별에게 선택받았는지보다, 그 선택 이후 무엇을 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때, 아레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빈 지도 위로 검은 실 하나가 떨어졌다.

그 실은 곧장 길이 되지 않았다.

한 번 바닥을 더듬고, 한 번 끊어질 듯 흔들리다가, 다시 원탁 위의 별빛 하나에 닿았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개척의 신도인 내가 보기에도, 선택은 답이 아니란다.”

그녀의 뒤로 깊은 바다가 보였다.

물결 없는 바다.

소리가 모두 가라앉은 듯한 검고 낮은 바다.

《가장 낮은 바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잊힌 이름들이 잠기는 곳.
전장에서 끊어진 실들이 가라앉는 곳.
누군가가 기억하지 않으면 두 번째로 죽을 이들이 잠시 머무는 심연.

아레는 그 바다를 등에 지고 있었다.

“나는 타인을 기억하고 품는 것에서 힘을 얻는단다. 그러니 개척을 말할 때도, 새 길만 보지는 못해.”

그녀는 빈 지도를 보았다.

“길이 열리면, 그 길에서 스러지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도착하고, 누군가는 도착하지 못하지. 길을 연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길 위에서 떨어진 이름들을 누가 기억하느냐는 질문이 따라붙어야 해.”

그레이가 적었다.

《아레: 개척은 새 길만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도착하지 못한 이름들을 누가 기억하는가의 문제다.》

아레가 손끝을 움직였다.

검은 실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아스트리트의 창성빛으로.
하나는 알토의 기록지로.
하나는 레이튼의 빈 질문지로.
하나는 푸리나의 작은 여관 등불로.

그 실들은 묶어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끊기지도 않았다.

《끊기지 않는 실타래》.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개척자는 앞서가는 자만이 아니란다. 뒤따라오는 이가 서로를 놓지 않도록 실을 남기는 자이기도 하지.”

원탁 위에 진형이 생겼다.

군단이 아니라 순례자들의 행렬처럼 보였다.

앞선 자.
뒤따르는 자.
지쳐 앉은 자.
돌아가려는 자.
아직 첫 발을 내딛지 못한 자.

그들 사이에 검은 실이 이어졌다.

강요하는 사슬이 아니었다.

서로를 잊지 않게 하는 실이었다.

“《끊기지 않는 실타래》는 전장에서는 진형이 되지만, 신학에서는 약속이 된단다.”

아레는 말했다.

“나는 너희를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도 서로를 놓지 말아라.”

그 말에 레플리카가 조용히 눈을 내렸다.

고통교의 등불이 낮게 흔들렸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실은 구원이 될 수 있지만, 속박도 될 수 있으니.”

루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의 신학에서도 같은 경계가 있습니다.”

“그래.”

아레는 부드럽게 말했다.

“놓지 않는다는 말은 붙잡아 끌고 간다는 뜻이어서는 안 된다. 서로를 놓지 않는다는 건, 뒤처진 이를 지워버리지 않겠다는 뜻이어야 하지.”

알토가 말했다.

“기록과도 닿습니다.”

“그렇겠지.”

아레는 알토를 보았다.

“그렇기에 개척에는 기록이 필요해.”

그녀가 손을 내리자, 빈 지도 위에 거대한 추 하나가 내려앉았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무거운 그물추.

《천저의 그물추》.

원탁 위의 지도가 갑자기 전장처럼 넓어졌다.

길 하나가 열리자, 그 길 옆의 마을이 흔들렸다.
마을이 흔들리자 보급로가 꺾였다.
보급로가 꺾이자 병사의 행군이 늦어졌다.
행군이 늦어지자 누군가의 구조가 늦어졌다.
구조가 늦어지자 하나의 이름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아레는 그것을 보며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천저의 그물추》는 전쟁을 거대한 지도로 조망하게 하지. 미시적인 변화가 어떻게 거시적인 결말로 번져가는지 보게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개척도 그렇단다. 길 하나를 여는 일은 길 하나로 끝나지 않아. 마을, 보급, 물, 병자, 아이, 묘지, 언어, 계약, 이름. 모든 것이 함께 흔들리지.”

그녀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개척자가 해야 할 일은 앞으로 달리는 것만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흔들림이 어디까지 번지는지 보는 일이다.”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그걸 다 보려다가는 늦는다.”

아레는 그를 보았다.

“맞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빠른 개척을 무조건 비난하지 않아. 늦어서 모두가 죽는 길도 있으니까.”

민다우가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레는 말했다.

“하지만 빠르다는 이유로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비극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눈조차 깜빡이지 않아야지.”

그 말은 조용했지만, 원탁 위를 무겁게 눌렀다.

그레이가 적었다.

《천저의 그물추의 신학적 해석: 길 하나를 여는 일이 세계 전체에 어떤 흔들림을 만드는지 바라보는 책임. 빠름은 필요할 수 있으나, 보지 않아도 된다는 면책은 아니다.》

아스트리트가 낮게 말했다.

“생명의 관점에서도 맞습니다. 길이 생명을 늘리는지, 생명을 소모해 길만 남기는지 보아야 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개척과 정복은 구분되어야 한단다.”

그녀는 빈 지도 위에 손을 얹었다.

“길이 없다고 말하며, 이미 누군가 걷고 있던 길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황무지라고 부르며, 누군가의 집을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신의 뜻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밟은 피를 지도 밖으로 밀어낼 수도 있다.”

알토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개척은 기록상 정복입니다.”

“그래.”

아레는 낮게 말했다.

“개척은 길을 여는 일이고, 정복은 남의 길을 자기 이름으로 덮는 일이지.”

그레이가 적었다.

《개척은 길을 여는 일이고, 정복은 남의 길을 자기 이름으로 덮는 일이다.》

아레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검은 실들이 지도 위에 작은 매듭들을 만들었다.

표지석.
쉼터.
기록.
장례의 자리.
돌아갈 수 있는 갈림길.

“그러므로 개척의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앞만 보는 용기가 아니야.”

그녀는 말했다.

“표지석을 남기는 일. 쉬어갈 곳을 남기는 일. 실패한 자의 이름을 남기는 일. 그리고 내가 연 길이 언젠가 나의 뜻과 다르게 이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라이자가 조용히 말했다.

“5막에서 했던 이야기와 닿네요.”

“그래.”

아레는 라이자를 보았다.

“창조자가 연 길도, 개척자가 연 길도, 언젠가 자신의 예상 밖으로 이어져야 한단다. 그래야 길이지.”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개척은 미완성의 기술이군요.”

아레가 미소 지었다.

“좋은 표현이로구나.”

레이튼은 말했다.

“완성된 길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척의 길은 계속 묻지요. ‘여기로 가도 되는가?’ ‘누가 뒤따라오는가?’ ‘누가 쓰러졌는가?’ ‘이 길은 누구의 집을 지나가는가?’”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질문을 잃으면 개척은 쉽게 정복이 된다.”

그때 원탁 위의 지도 한쪽에서 한기가 퍼졌다.

차갑고 낮은 기운.

《퍼져가는 한기》.

그것은 적을 무너뜨리는 전장의 신술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레는 그것을 전투의 기술로 펼치지 않았다.

신학적 경고로 보여주었다.

한기가 길 위를 천천히 번졌다.

앞서간 자가 남긴 폭력.
기록되지 않은 죽음.
보상받지 못한 상실.
돌아갈 수 없는 길.
묻지 않은 질문.

그 모든 것이 한기처럼 뒤따라오는 자들에게 번졌다.

아레는 말했다.

“개척자가 자기 결과를 외면하면, 한기는 퍼진단다. 한 사람의 발자국에 머물지 않고, 연결된 모든 이에게 닿지.”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고통의 전염과 닮았다.”

“그렇지.”

아레는 말했다.

“그래서 길을 연 자는 자신이 만든 한기를 보아야 해.”

푸리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가라앉히기》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지도 위 한기가 더 깊어졌다.

그러자 어떤 길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명령이 끊기고, 신호가 사라지고, 변명하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가라앉히기》.

상대의 지휘와 진법에 포함된 한계를 드러내고, 지휘체계를 분리하고 박리해 침묵시키는 힘.

아레는 말했다.

“전장에서는 적을 침묵시킨다. 정보가 오가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어 가라앉힌다.”

그녀는 푸리나를 보았다.

“하지만 신학에서 이 힘은 내게도 돌아온단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래.”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척이라는 말로 너무 많은 소리를 덮고 있을 때, 그 변명을 가라앉혀야 한다. 신의 뜻, 국가의 필요, 미래의 번영, 선택받은 자의 사명. 그런 말들이 너무 시끄러우면, 그 아래에서 죽어가는 이름들이 들리지 않거든.”

원탁이 조용해졌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부디 가라앉거라. 모두가 그대들을 잊더라도, 나는 그대들을 기억할 테니.”

그 말은 적을 향한 주문이기도 했고, 자기 안의 오만을 향한 기도이기도 했다.

그레이가 적었다.

《가라앉히기의 신학적 해석: 적의 지휘를 침묵시키는 전장 신술이지만, 동시에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떠드는 변명을 가라앉히고 묻힌 이름을 듣게 하는 자기검열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그 해석은 기록의 신학과도 맞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추도자》를 버릴 수 없단다.”

그녀의 뒤편 가장 낮은 바다 위로, 수많은 작은 빛이 떠올랐다.

전쟁에서 쓰인 전략.
실패한 전술.
잘못 놓인 보급로.
늦은 후퇴.
버려진 성문.
죽음으로 이어진 명령.

그리고 그 명령 아래 사라진 이름들.

《추도자》.

아레는 그것들을 미래예지처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미래를 읽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연결된 모든 것들이 초래한 결말들을 기억할 뿐이었다.

“추도는 뒤돌아보는 일이지.”

아레는 말했다.

“하지만 뒤돌아보기만 하는 일은 아니란다. 어떻게 죽음으로 이끌었는지를 기억해야, 다음 길에서 같은 방식으로 죽이지 않을 수 있으니.”

알토가 말했다.

“기록과 같은 결론입니다.”

“그래.”

아레는 미소 지었다.

“다만 내 기록은 바다에 가깝지. 너무 많은 것이 가라앉아 있단다.”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그 바다는 답을 보관하는 곳입니까, 질문을 보관하는 곳입니까?”

아레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마 질문이겠지.”

레이튼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는 바다입니다.”

아레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

푸리나는 이제 아레가 개척의 신학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앞만 보는 개척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길을 연 뒤, 그 길에서 가라앉은 것들을 모두 기억하는 개척자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개척은 밝은 깃발이 아니라, 검은 실과 낮은 바다와 표지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아레 경의 개척은 생명을 향한다기보다,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한 길처럼 보입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생명의 별의 신도가 아니니까.”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죽음을 잊지 않는 일이, 때로는 산 자를 살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

아스트리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스테리아가 별빛을 보았다.

“별은 빛을 줍니다. 그러나 빛이 닿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그녀는 가장 낮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레의 바다는 별빛이 닿은 뒤에도 남는 어둠을 기억하는 곳이군요.”

아레는 낮게 웃었다.

“아름답게 말해주는구나.”

아스테리아는 말했다.

“아름답기만 한 말은 아닙니다.”

“그래. 그래서 좋구나.”

그때 아레의 손끝에서 오래된 매듭 하나가 떠올랐다.

《첫 번째 가주》.

모든 마가트로이드의 어머니.

자신과 연결된 인물 중 하나를 지정해, 그 인물이 불러일으키는 결말의 효과를 강화하는 칭호.

그러나 오늘 아레는 누구의 힘도 강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매듭을 원탁 위에 올려두었다.

“길을 잃은 내 아이들아.”

아레가 낮게 말했다.

“나아갈 길을 모르겠다면, 가장 아팠던 첫 매듭을 떠올려 되짚어라.”

그 말은 후대 마가트로이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개척자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레이튼은 그 매듭을 보고 말했다.

“첫 매듭을 되짚는다는 것은 후퇴입니까?”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길을 다시 묻는 일이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그것도 질문입니다.”

“그렇단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개척은 앞으로만 가는 게 아니네.”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가끔은 첫 매듭으로 돌아가야 해. 왜 이 길을 열었는지, 누구를 놓쳤는지, 어떤 이름을 잊었는지 보려고.”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볼 줄 모르는 개척은 결국 자기 발자국에 잡아먹힌단다.”

그레이가 적었다.

《첫 번째 가주의 신학적 해석: 길을 잃었을 때 가장 아팠던 첫 매듭을 되짚어, 개척의 출발점과 잊힌 이름을 다시 묻는 권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창성의 빛과 낮은 바다의 어둠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나란히 놓였다.

생명을 긍정하는 별.

죽음을 잊지 않는 개척.

하나는 앞으로 살아가라고 말했고, 하나는 지나간 이름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

둘은 같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길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다른 신앙들의 번역을 들어보자.”

레플리카가 먼저 말했다.

“고통의 관점에서, 시련은 사람을 폐기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견디지 못한 자도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개척의 고통을 성장이라 포장해서도 안 된다.”

루나리아가 말했다.

“인연의 관점에서, 개척은 떠남만이 아니라 남겨지는 관계도 보아야 합니다. 놓아주는 손에도 예의가 필요합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허그와 보상의 관점에서, 새 길은 누군가에게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상실이 될 수도 있어요. 보상 없이 빼앗는 개척은 품이 아니에요.”

아스트리트가 다시 말했다.

“생명의 관점에서, 길은 생명을 더 숨 쉬게 해야 합니다. 생명을 소모해 길만 남긴다면, 그것은 시원성좌의 긍정이 아닙니다.”

알토가 말했다.

“기록의 관점에서, 선택과 개척은 삭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 피해, 발견, 배신, 구조, 모두 기록되어야 다음 길이 책임을 가집니다.”

레이튼이 말했다.

“질문의 관점에서, 성좌의 선택은 닫힌 답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고귀한 수수께끼입니다. 너무 빨리 답을 확정하면 가능성이 죽습니다.”

푸리나는 말했다.

“여관의 관점에서, 개척자는 길만이 아니라 쉬어갈 곳도 남겨야 해. 뒤따라오는 사람이 멈추고, 돌아가고, 다시 선택할 수 없다면 그 길은 살아 있는 길이 아니야.”

민다우가스가 짧게 덧붙였다.

“국가의 관점에서, 좋은 의도만으로 길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가 이름을 지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제도의 관점에서, 개척은 지도, 보급, 피해 기록, 권리 보장, 귀환 절차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척은 곧 수탈이 됩니다.”

그레이는 모두 적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술 해석.”

그레이가 새 장을 펼쳤다.

《신술 해석》

아스트리트가 먼저 말했다.

“《별의 간택자Chosen》은 정해진 결말의 증명이 아닙니다. 시원성좌가 생명을 긍정한다면, 그 간택은 생명이 더 살아가고 더 자라나도록 받은 부름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창성천강지체》는 생명의 긍정을 몸에 새긴 축복입니다. 그러나 강한 몸이 곧 올바른 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받은 힘이 생명을 짓밟는 명분이 되면, 그 순간 별의 뜻에서 멀어집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노력하는 자》는 선택받은 자가 오만으로 굳지 않게 하는 자기수정입니다. 별의 간택보다 중요한 것은, 그 간택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아레가 이어 말했다.

“《가장 낮은 바다》는 잊힌 이름들을 품는 바다다. 개척자가 새 길만 보고 지나간 이름을 잊을 때, 그 길은 얕아진다.”

그레이가 적었다.

“《끊기지 않는 실타래》는 뒤따르는 이들이 서로를 놓지 않게 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실은 사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레이가 적었다.

“《천저의 그물추》는 길 하나가 세계 전체에 어떤 흔들림을 만드는지 보게 하는 책임이다. 빠름은 필요할 수 있지만, 보지 않아도 된다는 면책은 아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가라앉히기》는 전장에서 적의 지휘를 침묵시키는 힘이지만, 신학적으로는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떠드는 변명을 가라앉히고 묻힌 이름을 듣게 하는 자기검열이기도 하다.”

그레이가 적었다.

“《추도자》는 지나간 결말을 모두 기억하는 힘이다. 그것은 미래예지가 아니라, 다음 길에서 같은 방식으로 죽이지 않기 위한 책임의 자료다.”

그레이가 적었다.

“《첫 번째 가주》는 길을 잃었을 때 가장 아팠던 첫 매듭을 되짚게 한다. 개척은 앞으로만 가는 일이 아니라, 왜 출발했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그레이가 적었다.

마침내 6막의 결론이 정리되었다.

그레이가 장부를 읽었다.

“첫째. 시원성좌는 생명을 징벌이나 정복의 명분으로 삼는 별이 아니라, 생명을 긍정하는 별이다. 그러므로 그 간택은 선택받은 자가 우월하다는 증명이 아니라, 생명이 더 살아가고 자라고 회복하고 한계를 넘도록 부름받았다는 뜻이다.”

“둘째. 성좌의 선택은 결말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 선택받은 자는 정해진 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응답해야 할 질문을 받은 것이다.”

“셋째. 《창성천강지체》와 《별의 간택자Chosen》은 운명의 족쇄가 아니라 생명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별의 중심이다. 그러나 강한 몸과 선택받은 표식이 곧 올바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넷째. 《노력하는 자》가 보여주듯, 선택받은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오만이 아니라 자기수정이다. 별의 간택은 완성의 면허가 아니라, 계속 자신을 고치며 더 나아가야 하는 책임이다.”

“다섯째. 시련은 인간을 증명하는 장이 될 수 있으나, 견디지 못한 자를 폐기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을 긍정하는 별 아래에서, 무너진 생명도 버림받은 생명이 아니다.”

“여섯째. 별은 길의 끝을 명령하지 않는다. 별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비출 뿐이며, 그 빛을 어떻게 잇는지는 인간의 응답이다.”

“일곱째. 개척은 그 응답 중 하나다. 신의 안배를 넘어서는 것이 신앙이 되려면, 그것은 욕망의 돌파가 아니라 생명을 더 넓은 가능성으로 이끌기 위한 책임 있는 전진이어야 한다.”

“여덟째. 개척은 길을 여는 일이지, 남의 길을 자기 이름으로 덮는 일이 아니다. 개척과 정복은 구분되어야 한다.”

“아홉째. 개척자는 앞만 보아서는 안 된다. 《천저의 그물추》처럼 자신이 연 길이 세계에 어떤 흔들림을 만드는지 보아야 한다.”

“열째. 개척자는 뒤따르는 이들이 서로를 놓지 않도록 《끊기지 않는 실타래》를 남겨야 한다. 그러나 그 실은 사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열한째. 개척의 길 위에는 표지석, 쉼터, 기록, 실패한 자의 이름이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척은 신앙이 아니라 도망이 된다.”

“열두째. 《추도자》의 기억처럼, 지나간 결말은 미래예지가 아니라 책임의 자료다.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다음 길에서 같은 방식으로 죽이지 않기 위한 것이다.”

“열셋째. 질문을 너무 빨리 답으로 닫으면 가능성이 죽는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일수록 질문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레이는 펜을 멈추었다.

푸리나는 아레와 아스트리트, 아스테리아, 알토, 레이튼을 차례로 보았다.

“마지막 문장.”

이번에는 푸리나가 정하지 않았다.

아스테리아가 먼저 말했다.

“별은 결말을 쓰지 않는다.”

아스트리트가 이어 말했다.

“시원성좌는 생명이 다시 숨 쉬고, 자라나고, 한계를 넘을 수 있도록 첫 빛을 비춘다.”

아레가 말했다.

“그 빛을 따라 길을 여는 것은 인간의 응답이며, 그 길 위에 쓰러진 이름을 잊지 않는 것이 개척자의 책임이다.”

알토가 말했다.

“그 응답은 기록되어야 합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마무리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으로.”

그레이는 천천히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별은 결말을 쓰지 않는다. 시원성좌는 생명이 다시 숨 쉬고, 자라나고, 한계를 넘을 수 있도록 첫 빛을 비춘다. 그 빛을 따라 길을 여는 것은 인간의 응답이며, 그 길 위에 쓰러진 이름을 잊지 않는 것이 개척자의 책임이다. 그 응답은 기록되어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으로.》

이번에도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시원성좌도, 개척의 성좌도, 별을 읽는 어떤 높은 존재도 직접 답하지 않았다.

다만 원탁 위의 별들이 잠시 밝아졌다.

그 빛은 길을 완성하지 않았다.

지도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여백은 공포처럼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첫 발을 디딜 수 있는 자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첫 발 옆에는, 아주 작은 표지석 하나가 있었다.

그레이는 마지막 주석을 남겼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신도들은 별과 선택과 개척의 경험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푸리나는 찻잔을 들었다.

“오늘은 길 위의 차로 하자.”

죠니가 낮게 말했다.

“길 위에서 차 마시면 식어.”

푸리나는 웃었다.

“그럼 식기 전에 마시면 되지.”

라플리가 중얼거렸다.

“저런 걸 대답이라고.”

아스트리트가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아레는 빈 지도를 보며 웃었다.

알토는 마지막 문장을 검수했고, 레이튼은 아직 연결되지 않은 별들을 보았다.

찻잔 위로 김이 올라갔다.

그 김은 곧장 위로 오르지 않았다.

잠시 흔들리고, 꺾이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마치 아직 정해지지 않은 길처럼.

그리고 원탁 위의 빈 지도에는, 아주 작은 표지석 하나와 검은 실 하나가 남았다.

실은 길을 막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길 위에서 사라졌을 때, 그 이름이 완전히 잊히지 않도록 조용히 이어져 있었다.
# 《별 아래의 신학제》

## 7막 — 왕관의 번역: 성좌의 뜻은 국가의 명령이 될 수 있는가

7막이 시작되자, 원탁 위의 빈 지도는 접히지 않았다.

6막의 끝에 남았던 작은 표지석과 검은 실도 그대로 있었다.
다만 그 옆에, 새로운 것이 내려왔다.

왕관.

화려하지 않았다.

보석보다 흠집이 많고, 금빛보다 먼지와 피의 흔적이 더 짙은 왕관이었다.
안쪽에는 머리에 눌린 자국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누군가 급히 움켜쥔 듯한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왕관은 별빛 위에 놓이지 않았다.

그것은 별빛 옆에 놓였다.

성좌의 뜻과 왕의 명령은 닮을 수 있어도,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는 표시처럼.

푸리나는 왕관을 바라보았다.

“7막의 주제는 왕관의 번역.”

그녀가 손을 들자, 원탁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성좌의 뜻은 국가의 명령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아래에 두 번째 문장이 새겨졌다.

《왕은 자기 신앙을 어디까지 법과 제도로 번역할 수 있는가》

원탁이 조용해졌다.

지금까지의 막에서 사람들은 성좌의 뜻을 자기 삶의 언어로 번역했다.

여관은 휴식과 안식과 여정으로 번역되었다.
기록은 선택과 책임과 삭제의 경계로 번역되었다.
고통과 인연은 곁과 거리와 놓아주는 손으로 번역되었다.
허그와 보상은 환대와 창조자의 책임으로 번역되었다.
별과 개척은 첫 빛과 표지석, 끝나지 않은 질문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개인이 자기 삶으로 신앙을 번역하는 것과, 왕이 그것을 국가의 법과 명령으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개인은 성좌의 뜻을 자기 삶으로 번역해. 하지만 왕은 그 번역을 법과 명령과 세금과 군대와 장부로 만들 수 있어.”

그녀는 왕관을 보았다.

“그래서 위험해.”

알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다우가스는 팔짱을 끼고 웃었다.

“위험하지 않은 왕관이 있다면, 그건 왕관이 아니라 장난감이지.”

벨라 여왕은 말없이 왕관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폐허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미하일라는 왕관 너머의 보이지 않는 전장을 바라보듯 침묵했다.

푸리나는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 손을 얹었다.

“여관의 성좌를 믿는 군주로서, 내가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게 있어.”

그녀의 뒤로 작은 극장과 여관의 복도가 겹쳐졌다.

방문들.
무대.
분장실.
차가 놓인 작은 식탁.
그리고 아직 열리지 않은 문들.

“여관은 초대야. 쉬고 싶은 사람에게 방을 내주고, 길 잃은 사람에게 불빛을 보여주고, 지친 사람에게 차를 내주는 곳.”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왕이 ‘내 국가는 여관이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 초대는 너무 쉽게 강제가 될 수 있어.”

원탁 위의 여관 복도에 문패들이 생겨났다.

백성.
신도.
배우.
손님.
병사.
납세자.

푸리나는 그 문패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백성을 ‘배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내 극에 오르고 싶어 하는 건 아니야. 내가 그들을 ‘손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방 배정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여관은 사람을 맞이하지만, 손님의 길을 소유하지 않아. 극장은 사람의 삶을 비추지만, 그 사람의 대사를 대신 써서는 안 돼.”

그레이가 적었다.

《여관의 왕관 번역: 초대가 강제가 되는 순간, 여관은 감옥이 된다. 극장이 삶을 비추는 것을 넘어 대사를 강제하면, 극은 통치가 아니라 연출된 억압이 된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여관좌의 대리인인 군주에게 필요한 첫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은 초대입니까, 배정입니까?”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응. 그 질문은 꼭 필요해.”

알토가 기록지를 펼쳤다.

그의 옷깃 가까이에 흰 여백 같은 빛이 맴돌았다.

“기록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기록은 선택을 없던 일로 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과 결합하면, 기록은 쉽게 감시가 됩니다.”

원탁 위에 장부가 펼쳐졌다.

처음에는 사망자 명단이었다.

그다음에는 세금 장부.
병역 명부.
계약서.
충성 서약.
재판 기록.
여행 허가증.
교단 등록부.

흰 종이는 깨끗했다.

그러나 그 깨끗함이 오히려 무서워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알토는 말했다.

“왕은 기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 모든 것을 기록하려 할 때, 백성은 자신의 삶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감시당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카식은 펜을 멈추고 알토를 보았다.

알토는 계속했다.

“기록이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인지, 복종을 관리하기 위한 것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고 왕에게 불리한 기록도 남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왕에게 불리한 기록을 남겨두는 왕은 오래 살기 힘들지.”

알토는 그를 보았다.

“그럼에도 남겨야 합니다.”

“그래서 네가 불편한 군주라는 거다.”

“기록상 필요한 불편함입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알토의 표정은 진지했다.

“기록이 통제가 되는 순간, 장부는 족쇄가 됩니다. 허공록의 이름으로 그런 족쇄를 만들면 안 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기록의 왕관 번역: 기록이 보존과 책임을 넘어 감시와 통제가 되는 순간, 장부는 족쇄가 된다. 왕에게 불리한 기록도 남을 수 있어야 기록이다.》

그때 민다우가스가 왕관을 집어 들었다.

“좋다. 모두 아름다운 경고다.”

그는 왕관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신앙만으로 국가는 유지되지 않는다.”

원탁 위의 별빛이 조금 낮아졌다.

민다우가스의 말은 차가웠지만 필요했다.

“초대? 좋다. 기록의 검수? 좋다. 보상? 장례? 쉼터? 표지석? 다 좋다. 하지만 국가는 성문이 무너지면 끝이다. 병사가 없으면 끝이고, 곡창이 비면 끝이고, 옆 나라가 칼을 들고 오면 끝이다.”

그는 왕관을 내려놓았다.

“왕은 때때로 신앙의 언어를 줄여야 한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고, 묻고 기다릴 여유가 없고, 누군가에게는 명령해야 한다.”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그 말로 많은 고통이 정당화된다.”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그렇다. 그래서 그 말은 위험하다.”

그는 회피하지 않았다.

“국가 생존이라는 말은 왕이 가장 많이 쓰는 변명이다. 동시에 가장 자주 진실인 말이기도 하지.”

원탁은 조용해졌다.

민다우가스는 말했다.

“그러므로 왕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신앙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생존이라는 말로 신앙을 전부 삼켜버리지 않는 일이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여관이 감옥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면, 국가는 무덤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푸리나는 그 말에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민다우가스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선택했다면, 그 책임은 왕관에 남아야 한다. 생존이 모든 왜곡을 허락하지 않는다.”

알토가 낮게 말했다.

“그 문장은 기록하겠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민다우가스의 현실주의: 아름다운 신앙만으로 국가는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말이 모든 왜곡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미하일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화를 말하는 왕도 전쟁을 명령할 수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절제되어 있었다.

“오히려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전쟁을 준비해야 할 때가 있다.”

원탁 위에 보랏빛 화살 하나가 나타났다.

아름다웠지만 날카로웠다.

“그러나 평화라는 말이 화살을 깨끗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리고 푸리나를 보았다.

“왕이 선한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명령한다면, 그 폭력은 더 가볍게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더 무겁게 기록되어야 한다.”

레플리카의 검은 불씨가 흔들렸다.

“왜 더 무겁게?”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선한 이름은 사람을 쉽게 침묵시키기 때문이다.”

그 말에 원탁이 조용해졌다.

미하일라는 말했다.

“평화를 위해서. 생명을 위해서. 여관을 위해서. 기록을 위해서. 개척을 위해서. 보상을 위해서. 그런 말들은 듣는 사람에게 반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알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그러므로 왕이 성좌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그 명령은 더 엄격하게 검수되어야 한다. 신앙의 이름이 붙은 명령은, 평범한 명령보다 더 위험하다.”

그레이가 적었다.

《미하일라의 경고: 선한 신앙의 이름으로 내려진 폭력은 더 가볍게가 아니라 더 무겁게 기록되어야 한다. 선한 이름은 반대를 침묵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요안나가 낮게 물었다.

“그렇다면 왕은 성좌의 이름을 법에서 빼야 합니까?”

미하일라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벨라 여왕이 말했다.

“빼야 할 때도 있고, 남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벨라의 목소리는 피곤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뒤로 폐허가 떠올랐다.

무너진 성벽.
타버린 마을.
비어 있는 곡창.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문.

“폐허 위에서 왕은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벨라는 말했다.

“백성에게 다시 살아갈 말을 주어야 하니까요.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은 돌과 목재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세울 이유’를 믿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벨라는 왕관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신앙이 폐허를 덮는 장식이 되면 안 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도문으로 무너진 성벽을 가리면 안 됩니다. 성좌의 이름으로 죽은 자의 명단을 짧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재건은 먼저 폐허를 보아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낮게 말했다.

“기록, 측량, 보급, 세금 조정, 장례, 고아 보호, 병자 수용, 성벽 재설계.”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앙은 재건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건의 절차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벨라 여왕의 재건 관점: 신앙은 폐허 위에서 다시 세울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폐허를 덮는 장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재건의 절차를 대신할 수도 없다.》

슈샤니크가 장부를 펼쳤다.

“성좌의 뜻을 제도로 번역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누락입니다.”

그녀가 말하자 원탁 위에 여러 서류가 펼쳐졌다.

사망자 명부.
구호 물자 배분표.
군량 장부.
교단 등록부.
세금 면제 명단.
장례 신청서.
고아 보호 기록.

“신앙은 고귀한 말을 사용합니다. 구원, 안식, 기록, 보상, 생명, 개척.”

그녀는 서류의 빈칸을 가리켰다.

“하지만 제도는 빈칸에서 사람을 죽입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슈샤니크는 계속했다.

“누가 대상인지. 누가 제외되는지. 누가 증명할 수 없는지. 누가 너무 멀리 있어서 명단에 오르지 못하는지. 누가 관리의 기분에 따라 밀리는지. 신앙의 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서류의 빈칸은 잔혹합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이름이 없으면 쉬게 할 수도 없습니다.”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그러므로 왕이 신앙을 제도로 번역하려면, 반드시 검수자가 있어야 합니다. 반대자, 기록자, 회계관, 현장 관리자, 장례를 아는 사람, 고통을 아는 사람, 그리고 왕의 말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

알토가 말했다.

“성좌의 단말도 검수 대상입니다.”

아카식이 작게 웃었다.

“오늘도 나 포함이구나.”

그레이가 담담히 말했다.

“예.”

슈샤니크는 적었다.

《제도적 검수: 성좌의 뜻을 법과 명령으로 번역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누락이다. 신앙의 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제도의 빈칸은 사람을 죽인다.》

그때 그레이가 조용히 펜을 들었다.

“여관과 안식의 관점에서 하나 더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말했다.

“국가가 여관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면, 장례와 휴식이 권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권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확인하는 장부가 있어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선명했다.

“쉬지 못한 사람. 장례를 받지 못한 사람. 이름 없이 묻힌 사람. 구호에서 제외된 사람. 그런 이들을 확인하지 않는 여관 정책은, 여관의 이름을 빌린 장식일 뿐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응. 맞아.”

그레이는 적었다.

《여관 제도의 검수: 휴식과 장례가 권리가 된다면, 그 권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확인하는 장부도 함께 있어야 한다.》

레이튼이 손가락으로 원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흥미롭군요.”

모두가 그를 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진지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모두 같은 구조를 가집니다.”

푸리나가 물었다.

“어떤 구조?”

레이튼은 하나씩 짚었다.

“초대가 강제가 되는 순간, 여관은 감옥이 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이 검수 없는 관리가 되는 순간, 장부는 족쇄가 됩니다.”

알토가 조용히 들었다.

“개척이 확장이 되는 순간, 길은 정복이 됩니다.”

아레의 검은 실이 낮게 흔들렸다.

“보상이 소유가 되는 순간, 품은 사슬이 됩니다.”

라이자가 은꽃을 품었다.

“생명이 숫자가 되는 순간, 긍정은 동원이 됩니다.”

아스트리트의 창성빛이 잠시 낮아졌다.

“고통의 견딤이 명령이 되는 순간, 신앙은 가혹함이 됩니다.”

레플리카가 눈을 내렸다.

“인연이 결속만을 요구하는 순간, 손은 속박이 됩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레이튼은 마지막으로 왕관을 보았다.

“그러므로 왕관의 신앙은 언제나 질문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왕이 ‘나는 신의 뜻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순간,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정말 신의 뜻입니까, 아니면 왕이 신의 이름으로 쓰고 싶은 명령입니까?”

원탁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왕관 위에 놓였다.

아무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답 없음이 오히려 7막의 중심이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각자의 번역을 정리하자.”

그레이가 장부를 펼쳤다.

《왕관의 번역에 대한 각 신앙의 경계》

푸리나가 말했다.

“여관의 관점에서, 국가는 사람을 쉬게 할 수 있어야 해. 하지만 쉬게 한다는 이름으로 사람의 방과 배역을 강제하면 안 돼. 여관은 초대여야지 배정표가 아니야.”

알토가 말했다.

“기록의 관점에서, 국가는 선택과 책임을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록이 감시와 통제가 되는 순간, 허공록의 이름은 왜곡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고통의 관점에서, 국가는 백성에게 견디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줄일 수 있는 고통을 남겨두고 성장이라 부르면 안 된다.”

루나리아가 말했다.

“인연의 관점에서, 국가는 공동체를 묶을 수 있지만, 상처 입은 관계를 강제로 화해시켜서는 안 됩니다. 연결은 명령이 아닙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허그와 보상의 관점에서, 국가는 보상할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보상이 충성을 사는 선물이 되거나 사람을 소유하는 품이 되어서는 안 돼요.”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생명의 관점에서, 국가는 생명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말을 숫자와 병력과 인구의 논리로만 번역하면, 긍정은 동원이 됩니다.”

아레가 말했다.

“개척의 관점에서, 국가는 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확장을 개척이라 부르고 남의 길을 덮으면, 그것은 정복이지.”

민다우가스가 말했다.

“현실의 관점에서, 국가는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생존이라는 말이 모든 왜곡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명령의 관점에서, 선한 신앙의 이름으로 내린 폭력은 더 무겁게 기록되어야 한다. 선한 이름은 반대를 침묵시키기 쉽다.”

벨라가 말했다.

“재건의 관점에서, 신앙은 다시 세울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폐허를 덮는 장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제도의 관점에서, 성좌의 뜻을 법으로 번역하려면 누락을 검수해야 합니다. 제도의 빈칸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레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안식의 관점에서, 이름 없이 죽은 사람과 장례받지 못한 사람을 확인하지 않는 국가는 여관의 이름을 빌릴 수 없습니다.”

그레이는 모두 적었다.

푸리나는 왕관을 보았다.

이제 왕관은 처음보다 더 무거워 보였다.

그러나 그 무게는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번역의 무게였다.

하나의 성좌 신앙을 국가의 명령으로 옮기는 순간, 아름다운 말은 서류가 되고, 서류는 사람의 삶을 바꾼다.

말 하나가 세금이 되고, 명령 하나가 징집이 되고, 법 하나가 장례를 허락하거나 거부한다.

그러므로 왕관의 번역은 반드시 두려워야 한다.

두려워하지 않는 왕관은 너무 쉽게 성좌의 이름을 훔친다.

그레이가 결론을 읽었다.

“첫째. 성좌의 뜻은 왕의 명령과 같지 않다.”

“둘째. 왕은 자기 신앙을 국가 제도로 번역할 수 있으나, 그 번역은 반드시 검수되어야 한다.”

“셋째. 초대가 강제가 되는 순간, 여관은 감옥이 된다.”

“넷째. 기록이 통제가 되는 순간, 장부는 족쇄가 된다.”

“다섯째. 개척이 확장이 되는 순간, 길은 정복이 된다.”

“여섯째. 보상이 소유가 되는 순간, 품은 사슬이 된다.”

“일곱째. 생명이 숫자가 되는 순간, 긍정은 동원이 된다.”

“여덟째. 고통의 견딤이 명령이 되는 순간, 신앙은 가혹함이 된다.”

“아홉째. 인연이 결속만을 요구하는 순간, 손은 속박이 된다.”

“열째. 신앙이 제도가 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누락이다. 누락된 사람은 법 밖에서 죽는다.”

“열한째. 왕관 위의 신앙은 언제나 질문으로 남아야 한다.”

그레이는 펜을 멈추었다.

푸리나는 레이튼을 보았다.

“마지막 문장은 레이튼 경이 닫아줄래?”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왕관 앞에 작은 종이 한 장을 놓았다.

그 종이는 비어 있었다.

“닫는 대신, 남겨두겠습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것도 좋네.”

레이튼은 말했다.

“성좌의 빛은 왕관 위에도 내려앉을 수 있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빛이 법과 명령이 되는 순간, 왕은 먼저 물어야 합니다.”

원탁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레이튼은 부드럽지만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이것은 신의 뜻입니까, 아니면 내가 신의 이름으로 쓰고 싶은 명령입니까?”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성좌의 빛은 왕관 위에도 내려앉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빛이 법과 명령이 되는 순간, 왕은 먼저 물어야 한다. 이것은 신의 뜻인가, 아니면 내가 신의 이름으로 쓰고 싶은 명령인가.》

이번에도 성좌는 말하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도, 기록의 성좌도, 생명의 별도, 개척의 별도, 고통과 인연과 허그와 보상의 별도 직접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중요했다.

만약 성좌가 직접 답했다면, 왕들은 그 답을 법으로 만들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좌는 침묵했고, 인간들은 질문을 남겨야 했다.

그레이는 마지막 주석을 남겼다.

《성좌는 침묵하였고, 왕들은 신앙과 권력과 제도의 위험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푸리나는 찻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무슨 차라고 부를지 잠시 고민했다.

길 위의 차도 아니었다.
곁의 차도 아니었다.
은꽃의 차도 아니었다.

왕관 앞에서 마시는 차였다.

달콤할 리 없었다.

푸리나는 결국 말했다.

“오늘은 번역의 차로 하자.”

죠니가 낮게 말했다.

“맛없을 것 같은 이름인데.”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왕관 옆의 차가 맛있으면 그게 더 문제지.”

알토는 찻잔을 보며 말했다.

“검수 필요.”

푸리나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그럼 검수된 번역의 차.”

라플리가 중얼거렸다.

“더 맛없어졌잖아.”

그 말에 몇 사람이 작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왕관은 여전히 원탁 위에 있었다.

그 옆에는 빈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아직 답이 적히지 않은 종이.

그리고 그 위에는, 아주 희미하게 별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별 아래의 신학제》

막간 1 — 번역이 끝난 뒤의 식탁

7막이 끝난 뒤, 원탁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왕관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빈 종이도 그대로였다.
검은 실과 작은 표지석, 은꽃 모양 설탕 조각, 식지 않은 찻잔, 달빛이 닿은 숟가락, 이름 없는 문패도 모두 원탁 위에 남아 있었다.

다만 원탁의 높이가 조금 낮아졌다.

토론을 위한 책상이라기보다, 이제는 식사를 위한 식탁에 가까워졌다.

커다란 결론들이 잠시 물러나고, 사람의 손이 닿을 만한 것들이 올라왔다.

따뜻한 수프.
단단한 검은 빵.
향이 깊은 차.
너무 달지 않은 과자.
물 한 잔.
아직 아무 이름도 쓰이지 않은 작은 문패.

여관좌는 나타나지 않았다.

목소리도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각자의 앞에는 그 사람에게 맞는 것이 놓여 있었다.

푸리나 앞에는 아직 식지 않은 홍차가 있었다.
찻잔 가장자리에는 무대 커튼처럼 얇은 김이 걸려 있었다.

알토 앞에는 잉크 얼룩이 묻지 않는 흰 냅킨과, 아무 문양도 새겨지지 않은 빈 도장이 놓여 있었다.

아레 앞에는 검은 실이 감긴 찻잔 받침이 있었다.

아스트리트 앞에는 별빛이 비치는 맑은 물 한 잔이 놓였다.

레플리카 앞에는 너무 달지 않은 검은 빵이 있었다.

루나리아 앞에는 달빛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우유차가 놓였다.

라이자 앞에는 은꽃 모양 설탕 조각이 있었다.

민다우가스 앞에는 몹시 쓴 차가 놓였다.

벨라 여왕 앞에는 따뜻한 수프와 단단한 검은 빵이 있었다.

미하일라 앞에는 식기 전에 마셔야 할 만큼 진한 차가 놓였다.

요안나 앞에는 작은 꿀 조각이 있었다.

그레이 앞에는 이름 없는 빈 문패가 놓였다.

누구도 그것이 누구의 준비인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홍차의 김은 무대 안개처럼 부드럽게 올라왔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도 평소처럼 가볍게 웃지 못했다.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내가 초대한 줄 알았는데.”

알토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찻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누군가에게는 배정표였을 수도 있겠네.”

말은 짧았다.

하지만 알토는 그 말이 7막 전체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초대와 강제.
여관과 감옥.
극장과 배역표.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걸 의심하는 동안은, 아직 감옥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알토는 흰 냅킨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확신하는 순간 위험해집니다. ‘나는 초대하고 있다’고 확정하는 순간, 배정표를 초대장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알토답네. 위로도 검수처럼 해.”

“검수되지 않은 위로는 위험합니다.”

“그 말도 알토답고.”

잠시 뒤, 푸리나가 물었다.

“기록도 그래?”

알토는 빈 도장을 보았다.

도장에는 아무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기록도 감시가 될 수 있음을 의심하는 동안은, 아직 기록입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의심을 멈추고, 모든 기록이 옳다고 믿는 순간부터 장부는 족쇄가 됩니다.”

푸리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왕이 신앙을 가진다는 건, 신앙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구나.”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 말, 오늘 몇 번 들은 것 같은데.”

“필요한 만큼 반복됩니다.”

“그래. 기록자답네.”

알토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빈 도장을 뒤집어 놓았다.

아직 찍히지 않은 도장.

아직 확정되지 않은 기록.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숨을 편히 쉬었다.

그 옆자리에서는 아레와 아스트리트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레의 찻잔 받침에는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실은 단정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매듭이 있었고, 어떤 부분은 조금 해져 있었다.

아스트리트는 자기 앞의 맑은 물을 바라보았다.

물 위에는 작은 별빛이 떠 있었다.

한참 뒤, 아스트리트가 낮게 말했다.

“저는 살아 있는 이를 먼저 보려 합니다.”

아레는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손가락으로 잔을 감쌌다.

“시원성좌가 생명을 긍정한다면, 저는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아레가 부드럽게 답했다.

아스트리트는 잠시 망설였다.

“그래서 때로는, 죽은 이를 충분히 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검은 실이 찻잔 받침 위에서 아주 조금 흔들렸다.

아레는 그 실을 손끝으로 가만히 감았다.

“그대가 살아 있는 이를 살리려 한다면.”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누군가는 죽은 이를 잊지 않으면 된단다.”

아스트리트가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별은 하나만 떠 있지 않으니까.”

그 말에 아스트리트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이를 살리는 별.
죽은 이를 잊지 않는 길.

서로 다른 신앙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지울 필요는 없었다.

아스트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살아 있는 이가 더 살아가게 하겠습니다.”

아레는 검은 실을 다시 찻잔 받침에 내려놓았다.

“그럼 나는 길 위에 떨어진 이름들을 주워두마.”

“부탁드립니다.”

“부탁받지 않아도 할 일이란다.”

아레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매우 오래된 단단함이 있었다.

아스트리트는 물잔을 들었다.

맑은 물 위의 별빛이 한 번 흔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레플리카는 검은 빵을 반으로 갈랐다.

그녀는 한쪽을 루나리아 쪽으로 밀었다.

“먹어.”

루나리아는 빵을 바라보다가, 레플리카를 보았다.

“권유입니까, 명령입니까?”

레플리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빵을 조금 더 천천히 밀었다.

“권유다.”

루나리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받겠습니다.”

그녀는 빵을 받아 들었다.

검은 빵은 단단했다.

쉽게 부서지지 않았고, 달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래 씹으면 곡물의 맛이 났다.

루나리아는 작게 한 조각을 떼어 먹었다.

“생각보다 좋군요.”

레플리카는 짧게 답했다.

“단 건 별로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너무 단 말도 별로다.”

루나리아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권유인지 명령인지 물었습니다.”

레플리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앞으로도 물어라.”

루나리아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럼, 앞으로도 대답해주십시오.”

“가능하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검은 빵은 반으로 나뉘어 있었고, 달빛 같은 우유차는 식지 않고 있었다.

붙잡지 않아도,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다른 쪽에서 라이자는 은꽃 모양 설탕 조각을 굴리고 있었다.

설탕은 아주 작았다.

손끝에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레이는 자기 앞의 이름 없는 문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 없는 빈칸이 무섭네요.”

그레이는 문패를 보았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나무 조각.

손님에게 줄 수도 있고, 죽은 이의 무덤 앞에 세울 수도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비워둘 수도 있는 것.

“무서워해야 합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라이자는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래야 함부로 채우지 않습니다.”

라이자는 손 안의 은꽃 설탕을 보았다.

“이름을 주는 것도, 방을 주는 것도, 가족을 주는 것도…… 다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말했다.

“하지만 좋은 일이라는 이유로 더 조심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싫어하면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제가 준 방을 떠나고 싶어하면요?”

“문을 확인해야 합니다.”

“제가 준 가족을 거부하면요?”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때는 장부의 항목이 바뀌어야 합니다.”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는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미소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가족에서 손님으로. 손님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먼 여행자로. 기록은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라이자는 손 안의 설탕을 조심스럽게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장부라면, 저도 만들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레이는 이름 없는 문패를 손끝으로 밀었다.

“그러니 빈칸을 남겨두십시오.”

라이자는 문패를 보았다.

빈칸.

무서운 자리.

하지만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직접 말할 수 있도록 비워둔 자리.

라이자는 작게 말했다.

“응. 남겨둘게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관 곁에서는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민다우가스.
벨라 여왕.
미하일라.
요안나.

왕관은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누구의 머리 위에도 없었다.

그저 식탁 위에 놓인 무거운 물건이었다.

민다우가스가 쓴 차를 마시고 낮게 웃었다.

“왕관 옆의 차답군.”

벨라 여왕은 수프를 조용히 저었다.

수프는 특별히 화려하지 않았다.

묽지 않았고, 뜨거웠고, 오래 끓인 맛이 났다.

“폐허 뒤의 식사는 대체로 이런 맛입니다.”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쓴가?”

벨라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잠시 식혔다.

“먼저 뜨겁고, 그다음 무겁습니다.”

민다우가스는 웃지 않았다.

그 대답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하일라는 진한 차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 차는 식으면 몹시 떫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식기 전에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 앞에는 작은 꿀 조각이 있었다.

요안나는 그것을 차에 넣지 않고, 손끝으로만 만지고 있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다음에는 네 질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아직 젊었다.

그러나 어린애처럼만 보이지는 않았다.

“제 질문이요?”

“그래.”

미하일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관을 쓴 자들은 너무 쉽게 대답을 만든다. 통치, 생존, 평화, 재건, 책임. 모두 필요한 말이지만, 때로는 질문을 밀어낸다.”

요안나는 꿀 조각을 보았다.

작고 밝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차 전체를 달게 만들 수는 없을지도 몰랐다.

벨라 여왕이 조용히 말했다.

“질문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요안나는 벨라를 보았다.

벨라는 말했다.

“나라가 무너진 뒤에도, 가장 먼저 남는 것은 질문입니다. 왜 무너졌는가. 누가 버려졌는가. 다음에는 어디에 성벽을 세워야 하는가.”

민다우가스가 덧붙였다.

“그리고 누가 거짓말을 했는가.”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요안나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꿀 조각을 차에 넣었다.

꿀은 천천히 녹았다.

곧장 단맛이 퍼지지는 않았다.

요안나는 말했다.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대답은 짧았지만, 요안나는 그것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죠니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잔 속의 김이 빙글 돌았다.

그 회전은 아주 잠깐, 무한한 윤회의 궤적처럼 보였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차도 식기 전에 마셔야 의미가 있지.”

라플리가 바로 말했다.

“뭐야, 갑자기 그럴듯한 말 하지 마.”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식은 차는 맛없으니까.”

라플리는 코웃음을 쳤다.

“역시 별 뜻 없었네.”

“뜻이 없진 않아. 맛없다는 뜻이지.”

푸리나가 멀리서 웃음을 터뜨렸다.

무거운 식탁 위로 작은 웃음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신학제 속에서, 그런 웃음은 실수처럼 보였지만 사실 필요했다.

여관은 진지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때로는 누군가의 시답잖은 말이, 너무 무거운 문장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빈 종이는 여전히 왕관 옆에 놓여 있었다.

아무도 거기에 답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기 전, 사람들은 하나씩 그 곁에 무언가를 남겼다.

푸리나는 접힌 작은 극장표를 놓았다.

“초대장이 되길 바라며.”

알토는 아무 문양도 없는 빈 도장을 놓았다.

“아직 찍지 않은 결재입니다.”

아레는 검은 실 한 가닥을 놓았다.

“끊어지지 말라고.”

아스트리트는 잔에 비치던 작은 별빛을 손끝으로 떠올려, 잎 모양으로 굳힌 뒤 내려놓았다.

“아직 자랄 수 있도록.”

라이자는 은꽃 설탕 조각 하나를 놓았다.

“달지만, 너무 많이 넣으면 안 되니까요.”

레플리카는 검은 빵 부스러기를 놓았다.

“먹을 수는 있어야 한다.”

루나리아는 달빛이 맺힌 찻숟가락을 종이 옆에 두었다.

“비추되, 강요하지 않도록.”

벨라 여왕은 손끝에 묻은 성벽 돌가루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다시 세워야 하니까.”

미하일라는 화살깃 하나를 놓았다.

“날아간 뒤에도 책임은 남습니다.”

요안나는 반쯤 녹은 꿀 조각의 작은 조각을 놓았다.

“질문이 너무 쓰기만 하지는 않도록.”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이름 없는 문패를 놓았다.

“아직 적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은 빈 종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아무것도 놓지 않았다.

대신 종이의 빈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수수께끼는 서둘러 풀지 않는 법이지요.”

그리고 모두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위에는 많은 것이 남았다.

왕관.
빈 종이.
극장표.
빈 도장.
검은 실.
별빛 잎.
은꽃 설탕.
검은 빵 부스러기.
달빛 숟가락.
성벽 돌가루.
화살깃.
꿀 조각.
이름 없는 문패.

답은 없었다.

그러나 질문은 조금 더 무거워졌다.

그날 밤, 빈 종이에는 아무 답도 적히지 않았다.

다만 그 곁에는 각자가 남긴 작은 물건들이 있었다.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들어두는 작은 추들이었다.

여관은 식탁을 치우지 않았다.

아직 다음 질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별 아래의 신학제》

막간 2 — 신탁이 되지 못한 대화

인간들이 떠난 뒤에도, 식탁은 치워지지 않았다.

왕관은 여전히 원탁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 곁에는 빈 종이가 있었다.

그리고 빈 종이 주변에는, 인간들이 남긴 작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접힌 극장표.
아무 문양도 새겨지지 않은 빈 도장.
검은 실 한 가닥.
별빛을 머금은 작은 잎.
은꽃 설탕 조각.
검은 빵 부스러기.
달빛이 맺힌 찻숟가락.
성벽 돌가루.
화살깃.
반쯤 녹은 꿀 조각.
이름 없는 문패.

답은 없었다.

그러나 질문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남아 있었기에, 밤은 곧바로 닫히지 않았다.

여관의 불빛이 한 번 낮아졌다.

인간들이 보던 식탁 위로, 다른 층위가 조용히 겹쳐졌다.

찻잔의 김은 문이 되었다.
극장표의 접힌 선은 무대의 막이 되었다.
빈 도장은 아직 찍히지 않은 계약의 여백이 되었다.
검은 실은 끊어지지 않은 길이 되었다.
별빛 잎은 숨 쉬는 첫 빛이 되었다.
은꽃 설탕은 손바닥 위의 작은 보상이 되었다.
빵 부스러기는 나눠 먹은 고통의 흔적이 되었다.
달빛 숟가락은 묶지 않는 손의 빛이 되었다.
성벽 돌가루는 다시 세워야 할 폐허가 되었다.
화살깃은 날아간 뒤에도 남는 책임이 되었다.
꿀 조각은 쓴 질문 옆에 놓인 작은 단맛이 되었다.
이름 없는 문패는 아직 부르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그곳에, 성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들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기도자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떤 예언자도 그 문장을 받아 적지 못했다.
어떤 왕도 그 말을 법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탁이 아니었다.

그저, 신탁이 되지 못한 대화였다.

가장 먼저 빈 의자 앞의 찻잔이 움직였다.

아무 손도 없었지만, 찻잔은 천천히 김을 올렸다.

여관의 성좌가 말했다.

“다들 오래 서 계셨군요. 우선 앉으시지요.”

그 목소리는 부드럽고 정중했다.

먼 길을 걸어온 손님에게 방을 내어주는 여관주인의 목소리였다.

“다만, 이 말이 아래에 닿으면 곤란하겠지요. 그분들은 오늘 스스로 해석해야 했으니까요.”

기록지의 여백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기록의 성좌는 웃고 있는 듯했다.

“꽤 많이 남겼네. 문장도, 물건도, 망설임도.”

빈 도장 위에 흰빛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도장은 끝내 찍히지 않았다.

기록의 성좌가 말했다.

“맞은 해석도 있고, 틀린 해석도 있고, 아직 검수해야 할 해석도 있어.”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틀린 해석도 기록입니까?”

“그럼. 틀린 해석도 기록이지. 다만 법전에 올리기 전에는 검수가 필요해.”

빈 종이 위에 잉크 한 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글자는 되지 않았다.

기록의 성좌는 그 여백을 보며 말했다.

“특히 왕관 옆에 놓인 문장은, 아직 쓰지 않는 편이 좋아.”

여관의 성좌가 차를 따랐다.

“답을 아끼는 것도 환대일 때가 있습니다.”

“기록에서도 그래. 너무 빨리 답을 쓰면, 다음 질문이 죽거든.”

그때 검은 빵 부스러기 옆에서, 작은 검은 불씨가 일어났다.

그 불씨는 사납게 타오르지 않았다.

조용했다.

그러나 꺼질 듯 약하지도 않았다.

작고 낮은 불씨 안에는, 쉽게 꺾이지 않는 심지가 있었다.

고통의 성좌가 말했다.

“그 아이는 잘 말해주었네요.”

목소리는 유했다.

하지만 그 유함은 흔들림이 아니었다.

“고통을 사랑하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견딜 수 없는 것을, 혼자 견디게 두지 말라고 했을 뿐이지요.”

검은 빵 부스러기가 조금 따뜻해졌다.

고통의 성좌는 이어 말했다.

“아픈 것은 죄가 아니에요. 견디지 못한 것도 죄가 아니고요. 다만 누군가의 아픔을 이용해 다른 이를 지배하려 한다면, 그때는 조용히 있지 않을 거예요.”

달빛이 찻숟가락 위에 내려앉았다.

인연의 성좌는 끊어진 실 끝을 묶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밝게 비추었다.

“혼자 두지 않는다는 말은, 때로 붙잡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네.”

고통의 성좌가 대답했다.

“이미 충분히 버틴 사람에게 더 버티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런 말은 너무 쉽게 잔혹해지지요.”

인연의 성좌가 낮게 웃었다.

“손은 붙잡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달빛은 실을 매듭짓지 않았다.

그러나 끊지도 않았다.

은꽃 설탕 조각이 작게 빛났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그 빛 속에서 말했다.

“품도 그래요. 돌려받으려고 여는 품은 품이 아니니까요.”

은꽃 설탕 옆의 작은 의자가 조금 더 따뜻해졌다.

“그 아이가 잘 말해주었네요. 사람이 된 은은 더 이상 재료가 아니라고.”

기록의 성좌가 가볍게 말했다.

“그 문장은 기록할 만했어.”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물었다.

“검수는요?”

“필요하지. ‘사람이 되었다’는 기준부터 큰 논쟁이고, 권리와 독립과 사망 처리까지 전부 따라오니까.”

“역시 장부를 먼저 보네요.”

“장부가 없으면 따뜻함도 누락된다잖아. 그 말은 나도 마음에 들었어.”

여관의 성좌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환대에도 장부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방을 받지 못했는지 모르면, 다음 손님도 문밖에서 밤을 새게 되니까요.”

그때 별빛 잎이 낮게 숨을 쉬었다.

그 빛은 오래된 별빛이었다.

멀지만 차갑지 않았다.

시원성좌가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별빛 잎은 조금씩 펴졌다.

“선택받았다는 말은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지요. 오히려 아직 더 자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표지석 너머의 어둠에서 먼지 같은 웃음이 흘렀다.

개척의 성좌였다.

아직 길이 없는 곳에 첫 발을 찍게 만드는 별.

“자라난 생명은 언젠가 처음 비춘 빛 바깥으로 걸어가겠지.”

시원성좌는 그 말을 막지 않았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뜻이라면요.”

“마음에 드는 별이군.”

개척의 성좌가 말했다.

“길 끝까지 정해두는 별은 답답하거든.”

기록의 성좌가 말했다.

“길 끝을 정하지 않는 건 좋은데, 길 위에서 누가 쓰러졌는지는 남겨야 해.”

개척의 성좌가 표지석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서 표지석이 있잖아.”

검은 실이 그 표지석에 느슨하게 감겼다.

그 실은 길을 막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길 위에서 사라졌을 때, 그 이름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남아 있었다.

개척의 성좌가 말했다.

“길은 앞에만 생기지 않아. 뒤돌아본 자리에도 생기지.”

여관의 성좌가 그 말을 들으며 차를 따랐다.

“그리고 길에는 여관도 필요합니다.”

“알고 있어.”

개척의 성좌가 웃었다.

“처음 걷는 자는 종종 그걸 잊지만.”

고통의 성좌가 부드럽게 말했다.

“강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은, 길이라기보다 상처일 때가 있어요.”

표지석 너머의 어둠이 잠시 낮아졌다.

개척의 성좌는 반박하지 않았다.

“맞아. 그래서 표지석이 필요하지. 그리고 때로는 돌아가는 길도.”

달빛이 그 말 위에 얹혔다.

인연의 성좌가 말했다.

“떠나는 일에도 예의가 필요합니다. 길을 연다는 말로 모든 손을 뿌리쳐도 되는 것은 아니지요.”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은꽃 조각을 따뜻하게 빛냈다.

“그리고 떠남이 누군가에게 상실이 되었다면, 그 상실을 보아야 해요.”

기록의 성좌가 빈 종이를 보았다.

“결국 다 기록으로 돌아오네.”

여관의 성좌가 조용히 웃었다.

“모든 것이 기록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은 차로 돌아옵니다.”

잠시, 성좌들의 층위에 아주 조용한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조차 인간 세계에는 닿지 않았다.

현실의 원탁에서는 찻잔 하나가 아주 조금 흔들렸을 뿐이었다.

곧 왕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방금 전 인간들이 남긴 가장 무거운 질문.

성좌의 뜻은 국가의 명령이 될 수 있는가.

그 질문 위에는 아무 글자도 쓰이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가 먼저 왕관을 보았다.

“왕관은 피곤한 물건이군요.”

기록의 성좌가 대답했다.

“기록량이 많지.”

고통의 성좌가 조용히 말했다.

“많은 아픔을 대신 말하려고 하지요. 때로는 너무 쉽게요.”

인연의 성좌가 덧붙였다.

“많은 손을 묶기도 하고요.”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말했다.

“많은 선물을 빚으로 바꾸기도 하지요.”

시원성좌가 낮게 빛났다.

“많은 생명을 숫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개척의 성좌가 표지석을 바라보았다.

“많은 정복을 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말들은 판결이 아니었다.

성좌가 인간에게 내리는 유죄 선고도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경고였다.

왕관 위에 내려앉은 별빛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기록의 성좌가 빈 종이 위에 다시 잉크를 떨어뜨렸다.

이번에도 글자는 되지 않았다.

“저 질문은 비워두는 게 좋겠어.”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기록하지 않습니까?”

“기록하지 않는 게 아니라, 답을 쓰지 않는 거야.”

기록의 성좌가 말했다.

“질문으로 남겨두는 것도 기록이지.”

레이튼이 남긴 질문의 흔적이 원탁 위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이것은 신의 뜻인가.
아니면 내가 신의 이름으로 쓰고 싶은 명령인가.

여관의 성좌는 그 문장을 보며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개척의 성좌가 웃었다.

“길을 여는 질문이지.”

시원성좌가 말했다.

“살아 있는 질문입니다.”

고통의 성좌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조금 아픈 질문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런 질문은 피하지 않는 편이 좋지요.”

인연의 성좌가 말했다.

“서로를 묶기 전에 물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은꽃을 따뜻하게 빛냈다.

“품을 열기 전에도요.”

기록의 성좌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법으로 쓰기 전에는 반드시.”

성좌들은 서로를 보았다.

아니, 어쩌면 보지 않았다.

그들은 빛과 불씨와 실과 찻잔과 여백과 표지석으로만 서로에게 닿았다.

성좌들은 인간의 해석을 판정하지 않았다.

‘맞다’고 하지 않았다.
‘틀렸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들이 남긴 질문 곁에 머물렀다.

그때 여관의 성좌가 빈 의자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이제 그분들이 돌아오기 전에 정리해야겠군요.”

기록의 성좌가 말했다.

“치워버리려고?”

“아닙니다.”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식탁은 치우되, 질문은 남겨두어야지요.”

그 말에 찻잔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도 완전히 식지 않았다.

기록지는 접혔다.

그러나 빈 종이는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불씨는 작아졌다.

그러나 꺼지지 않았다.

달빛은 물러났다.

그러나 실을 끊지 않았다.

은꽃은 빛을 낮추었다.

그러나 의자는 식지 않았다.

창성의 빛은 하늘로 돌아갔다.

그러나 작은 숨 하나는 더 고르게 이어졌다.

표지석 너머의 어둠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나 첫 발을 내디딜 만큼의 자리만은 남았다.

그리고 왕관은 그대로 있었다.

왕관 옆에는 빈 종이가 있었다.

아무 답도 쓰이지 않은 종이.

그 위에, 성좌들의 대화는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신탁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인간들이 원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다만 이상하게도 찻잔은 완전히 식지 않았고, 빈 종이는 젖거나 찢기지 않았으며, 검은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은꽃 옆의 의자는 조금 따뜻했고, 표지석 위에는 밤새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들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알토는 빈 종이를 검수하듯 들여다보았다.

레이튼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여백을 보고,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신탁 없음. 질문 보존됨.》

그리고 여관은, 아무 말 없이 다음 차를 준비했다.
《왕관들은 술에 약하다》

제1회 다국가 친선 연회 및 비공식 재난

연회는 원래 엄숙해야 했다.

적어도 초대장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주최 다국가 친선 만찬 및 항로·피난민 보호 협정 사전 회의」

그레이는 초대장 문구를 세 번 확인했다.

엄숙했다.
정중했다.
정확했다.

그러므로 아무 문제도 없어야 했다.

그레이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좋아!”

푸리나 헤툼이 연회장 중앙에서 두 팔을 펼치기 전까지는.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레이는 알 수 있었다. 행정 담당자에게는 재난을 미리 알아보는 감각이 있다. 무너질 예산, 부족할 식수, 잘못 배치된 의자, 그리고 푸리나 님이 “좋아!”라고 외친 직후의 모든 상황.

푸리나는 회담용 긴 탁자 위에 손을 짚고, 참석자들을 찬란하게 둘러보았다.

“여러분, 오늘 회담은 훌륭했어.”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는 잔을 들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요안나 4세는 밝게 웃었다.

슈샤니크 파흘라부니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침묵했다.

벨라 4세는 탁자의 배치와 출입구, 창문과 벽난로의 위치를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자신이 차르답게 앉아 있는지 신경 쓰느라 등을 곧게 펴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 시선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푸리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그레이가 작게 물었다.

“문제요?”

“아무도 안 웃었어.”

“회담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실패지!”

푸리나는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왕관이든, 칙령이든, 기록이든, 고통이든, 생명이든, 기사도든, 재건이든, 복수든, 평화든!”

그녀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참석자들을 가리켰다.

“그 모든 훌륭한 것들은 일단 사람이 살아 있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은 가끔 웃어야 해.”

죠니 죠스타가 뒤쪽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중얼거렸다.

“술 마시자는 말을 참 길게도 한다.”

푸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정답!”

레이튼은 잔잔히 웃으며 손수건을 접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에는 작은 문제가 생기겠군요.”

“무슨 문제?”

“아침이 온다는 문제입니다.”

하융이 창밖을 보며 낮게 말했다.

“아침은 이미 여러 가능성에서 비극이 되었소.”

죠니가 그를 보았다.

“시작도 전에 그러지 마.”

“그 가능성 중 하나에서는 죠니 공이 의자와 결투하였소.”

“의자랑 왜 싸워.”

하융은 잠시 침묵했다.

“그건 소인도 아직 모르오.”

그때 그레이가 조용히 양피지를 꺼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 지금 뭐 쓰는 거야?”

“아직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예.”

그레이는 깃펜을 쥔 채 아주 작게 덧붙였다.

“필요해질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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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잔은 평화로웠다.

킬리키아 포도주였다.

향은 달고, 빛은 붉었다. 푸리나는 잔을 높이 들고 선언했다.

“이 잔은 오늘 밤의 개막 종소리야!”

미하일라는 잔을 들었다.

“그대의 환대에 감사를 표한다.”

요안나도 잔을 들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조금 늦게 잔을 들었다.

“그리고 왕도에 새벽을.”

벨라는 짧게 말했다.

“재건을 위하여.”

호흐마이스터는 잔을 바라보았다.

“죄를 줄이는 밤이 되기를.”

푸리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무거워! 첫 잔부터 무거워!”

호흐마이스터가 멈칫했다.

“술자리에는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습니까?”

“아주 조금!”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가 당황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그러면, 생명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건배를……?”

“그건 좋아!”

아카식은 이미 한 모금을 마신 뒤였다. 그는 잔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아, 이거 좋네.”

알토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성좌께서 먼저 드시는 것은 의전상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카식은 잔을 든 채 웃었다.

“그럼 알토가 먼저 마신 걸로 하자.”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너 진짜 이런 데서만 엄격하다.”

“이런 데서부터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럼 무너지기 전에 한 잔 더 마셔야겠네.”

“논리적 연결이 없습니다.”

“술자리잖아.”

아카식은 한 잔 더 받았다.

알토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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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잔은 조지아 와인이었다.

타마르 여왕은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조지아 사절이 가져온 술병에는 황혼빛 밀랍 인장이 찍혀 있었다.

푸리나는 병을 보며 감탄했다.

“이건 뭔가 마시면 죽은 조상님이 ‘수고 많았다’고 할 것 같은 술이네.”

그레이가 급히 말했다.

“푸리나 님.”

“비유야, 비유!”

아레 마가트로이드는 조용히 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웃지는 않았지만, 눈빛이 조금 부드러웠다.

푸리나가 그쪽을 보았다.

“아레, 어때?”

아레는 잔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따뜻하구나.”

“술이?”

“응.”

그녀는 잠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각국의 왕관과 갑옷과 장부와 상처와 신앙이 한 방에 모여 있었다.

“사람도.”

푸리나는 잠깐 조용해졌다가, 곧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럼 성공이야!”

죠니가 작게 말했다.

“아직 두 잔째야.”

“두 잔째에 성공하면 좋은 거지!”

그레이가 조용히 정정했다.

“푸리나 님은 세 잔째입니다.”

“아니야. 두 잔째야.”

“첫 잔을 두 번 드셨습니다.”

“그럼 첫 잔이 강했던 거야.”

“그런 계산은 없습니다.”

푸리나는 못 들은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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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잔은 폴란드 벌꿀술이었다.

요안나는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아요.”

아카식이 흐뭇하게 말했다.

“그치? 이건 맛으로 설득하는 쪽이야.”

알토는 잔을 들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알토! 너무 조심스러운 거 아니야?”

알토는 담담히 답했다.

“저는 조심하는 편이 낫습니다.”

“왜?”

“이 연회에는 기록하지 않아야 할 일이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벌써 그 얘기야?”

“예.”

“알토, 너무 일러. 아직 아무도 망가지지 않았어.”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너는 재난 전조를 너무 잘 봐.”

“푸리나 폐하께서 의자에 발을 올리셨습니다.”

아카식이 고개를 돌렸다.

푸리나는 이미 의자에 한 발을 올리고 있었다.

“아.”

알토가 말했다.

“늦었습니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좋아! 지금부터 진짜 외교를 시작하자!”

그레이가 창백해졌다.

“방금까지도 외교였습니다.”

“아니야. 방금까지는 말로 하는 외교였고, 지금부터는 몸으로 하는 외교야!”

미하일라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 표현은 위험하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상당히 다양한 오해를 낳을 수 있겠군요.”

푸리나는 이미 듣지 않았다.

“각국 대표는 자기 나라를 30초 안에 연기해야 해!”

정적.

슈샤니크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참으로 훌륭한 제안입니다. 외교적 자살을 이토록 축제처럼 포장하는 재능은 드물지요.”

푸리나가 반짝였다.

“칭찬이지?”

“그렇게 기록해드릴까요?”

알토가 즉시 말했다.

“공식 기록은 보류하겠습니다.”

아카식이 알토의 옆구리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비공식은?”

알토는 정면을 본 채 답했다.

“안 됩니다.”

“딱 한 줄만.”

“안 됩니다.”

“너무하네.”

“체면 보호 절차입니다.”

아카식은 즐겁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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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희생자는 알렉산드리나였다.

푸리나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불가리아!”

알렉산드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준비되어 있던 야심 때문인지, 그녀의 눈이 빛났다.

“나는 아직 완성된 차르가 아니다.”

가브리엘라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전하, 너무 진지하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나는 빈 잔을 들어 올렸다.

“술잔은 비어 있어도 다시 채울 수 있다!”

그레이가 중얼거렸다.

“그만 채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듣지 않았다.

“결핍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빈 잔이기에 새벽의 술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푸리나는 감동해서 박수를 쳤다.

“좋아! 이거 2막 독백으로 쓰자!”

가브리엘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레플리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을 감당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비유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스토얀카는 잔을 들며 말했다.

“척추도 비어 있으면 채울 수 있습니까?”

모두가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는 맑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농담이었는데요.”

정적이 더 깊어졌다.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어려운 농담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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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희생자는 벨라였다.

푸리나가 외쳤다.

“헝가리!”

벨라 4세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취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또렷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치즈 접시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곳이 방어선이다.”

소피아 베아트리체가 눈을 빛냈다.

“어머니, 치즈를 방어선으로 재정의하시는 건가요?”

벨라는 진지하게 답했다.

“식량은 방어의 기초다.”

푸리나는 환호했다.

“좋아! 치즈 방어선!”

그레이가 즉시 적었다가, 멈췄다.

알토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공식 기록에는 남기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아카식은 치즈를 하나 집어 먹으며 말했다.

“맛있는 방어선이네.”

벨라가 그를 보았다.

“방어선이 무너졌다.”

아카식은 잠시 치즈를 내려다보았다.

“미안. 내가 좀 강했다.”

요안나가 급히 손을 들었다.

“치즈와 성좌 사이의 평화를—”

죠니가 끼어들었다.

“그건 그냥 먹은 거야.”

요안나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먹힌 쪽의 입장은요?”

죠니는 잠시 치즈 접시를 보았다.

“그 입장은 이미 없어.”

요안나는 슬퍼졌다.

아카식은 작은 목소리로 알토에게 말했다.

“알토, 내가 치즈에게 사과해야 할까?”

“의전상 필요 없습니다.”

“도덕상은?”

“그 질문도 보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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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희생자는 푸리나 자신이었다.

사실 푸리나는 자신을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위에 올라갔다.

그레이가 숨을 삼켰다.

“푸리나 님, 내려오십시오.”

“괜찮아!”

“괜찮지 않습니다.”

“무대는 높은 곳에 있어야 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건 탁자야.”

푸리나가 손가락으로 죠니를 가리켰다.

“기사단장! 반론은 3막에서!”

“이게 몇 막인데?”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현재는 구조상 2막 후반으로 보입니다.”

“그걸 왜 분석해.”

“술자리에도 구성은 있습니다.”

하융은 창가에서 잔을 들고 말했다.

“소인의 관측으로는, 이 극은 다섯 가지 가능성에서 모두 다음 막으로 넘어가지 못했소.”

푸리나가 외쳤다.

“그럼 여섯 번째 가능성으로 가자!”

하융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참으로 그대다운 말이오.”

그 말에 푸리나는 만족했다.

“좋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지금부터 연극으로 표현한다!”

죠니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랑 다를 게 없잖아.”

“달라! 오늘은 외교적이야!”

“더 나빠.”

푸리나는 양팔을 펼쳤다.

“이 나라는 무대다! 백성은 배우다! 왕은 극장주다! 그리고 오늘 밤 관객은 없다!”

그녀는 발을 한 번 구르려 했다.

그 순간 탁자가 삐걱였다.

그레이와 죠니가 동시에 움직였다.

아레도 조용히 손을 들었다.

탁자는 무너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선언했다.

“봤지? 이것이 국가의 안정성이야!”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지금 세 명이 붙잡았습니다.”

아레가 푸리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높은 배역이구나.”

푸리나가 웃었다.

“멋있지?”

“응.”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만 낮게 빛나렴.”

“그건 무대 감독의 말이야?”

“넘어지면 아프단다.”

푸리나는 얌전히 내려왔다.

그레이는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카식은 그 장면을 보며 웃었다.

“저건 남기면 안 돼?”

알토가 즉시 대답했다.

“안 됩니다.”

“좋은 장면인데.”

“그래서 안 됩니다.”

“아, 그런 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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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희생자는 죠니였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의자에 걸려 살짝 휘청였을 뿐이다.

문제는 요안나가 그것을 보았다는 점이다.

“죠니 경, 괜찮으세요?”

“괜찮아.”

요안나는 의자를 보았다.

“의자도 나쁜 뜻은 없었을 거예요.”

죠니는 천천히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아직 몰라.”

푸리나가 반응했다.

“뭐야? 결투야?”

“아니야.”

하융이 조용히 말했다.

“소인이 본 세 번째 가능성에서는 결투였소.”

“그 가능성 닫아.”

“이미 닫혔소.”

죠니는 의자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좋아. 이번엔 넘어가.”

요안나는 안도했다.

“화해한 건가요?”

“임시 휴전이야.”

벨라가 멀리서 말했다.

“휴전에는 경계선이 필요하다.”

“치즈나 지켜.”

벨라는 치즈 접시를 보았다.

“이미 무너졌다.”

아카식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맛있게 무너졌지.”

알토는 잔을 내려놓았다.

“성좌께서 방어선 붕괴에 관여하셨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아카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토.”

“예.”

“너 방금 조금 놀렸지?”

“아닙니다.”

“놀렸네.”

“절차적 사실 확인입니다.”

“그 말이 더 놀리는 것 같아.”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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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희생자는 미하일라였다.

정확히 말하면, 미하일라는 희생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술에 휘둘리지 않았다.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황제는 술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 말은 완벽했다.
위엄이 있었다.
자주빛 황제의 절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직후, 푸리나가 촛불들을 가리켰다.

“그럼 폐하. 저 촛불들, 활 없이 끌 수 있어?”

연회장이 얼어붙었다.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이 질문은 상당히 위험한 전제를 품고 있군요.”

미하일라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는 황제에게 술자리 재주를 요구하는가?”

푸리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응!”

요안나가 작게 웃었다.

미하일라는 그 웃음을 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촛불 열두 개가 동시에 꺼졌다.

연회장은 어두워졌다.

정적.

미하일라가 말했다.

“실수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하나는 남길 생각이었다.”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깃펜을 내려놓았다.

‘이것도 쓰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알토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동의합니다.”

“제가 말로 했습니까?”

“표정으로 충분했습니다.”

아카식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토, 이건 정말 한 줄만 안 돼?”

“안 됩니다.”

“촛불 열두 개가 사라졌는데?”

“그래서 안 됩니다.”

“그럼 내 기억에는 남겨도 돼?”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제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다만 입 밖으로 내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노력해볼게.”

“그 말씀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너 오늘 꽤 날카롭다.”

“성좌께서 많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아카식은 잔을 보았다.

“그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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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희생자는 아스트리트였다.

푸리나가 어둠 속에서 외쳤다.

“좋아! 이제 역할극!”

아스트리트가 불안하게 물었다.

“어떤 역할극입니까?”

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빈 술잔을 들었다.

“아스트리트는 술잔!”

“네?”

“생명을 긍정하는 술잔!”

“네? 저보고 지금 술잔 역할을 하라고요? 아니 잠깐, 아까 회담이랑 내용이 다르잖아요!?”

푸리나는 박수를 쳤다.

“좋아! 그 대사 아주 좋아!”

아스트리트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다.

“이건 대사였습니까?”

“이제 대사야!”

아스테르다스가 옆에서 환하게 웃었다.

“좋네! 그럼 나는 떨어지는 별 역할을 할게!”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안 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 샹들리에가 낙하지점이야.”

“안 됩니다.”

“걱정 마! 나는 떨어지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어!”

아레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떨어지는 아이야.”

아스테르다스가 돌아보았다.

“응?”

“오늘은 조금만 낮게 떨어지렴.”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럼 의자까지?”

죠니가 말했다.

“의자는 건드리지 마.”

요안나가 급히 말했다.

“아직 휴전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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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희생자는 숙취 그 자체였다.

아직 다음 날도 아닌데, 몇몇은 이미 다음 날의 고통을 예감하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그것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숙취는 고통입니다.”

푸리나가 탁자에 팔을 괴고 물었다.

“그럼 없애줄 수 있어?”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없애면 반성이 남지 않습니다.”

“그런 교리 필요 없어!”

가브리엘라가 잔 대신 물컵을 들었다.

“여러분, 고통은 밤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또 시작인가.”

가브리엘라는 흔들림 없이 이어갔다.

“숙취도 밤입니다.”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밤은 여러 가능성에서 길었소.”

“그러니 물을 드십시오. 새벽은 수분에서 옵니다.”

이상하게도 모두가 물을 마셨다.

소피아 베아트리체는 눈을 빛냈다.

“숙취란 신체가 어제의 진실을 거부하는 현상이에요.”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재정의하지 마십시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하실 것 같았습니다.”

“조금만요?”

“안 됩니다.”

소피아는 아쉬워했다.

스토얀카는 물을 마시며 말했다.

“좋은 물이군요. 척추가 곧게 섭니다.”

모두가 또 멈췄다.

스토얀카는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했다.

“칭찬이었는데요.”

아레가 낮게 말했다.

“그 말은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구나.”

“그런가요?”

“응.”

스토얀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다음에는 꽃대라고 하겠습니다.”

“그것도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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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졌다.

회담장의 지도는 어느새 접혀 있었다. 대신 그 위에는 잔과 접시와 빵 조각과 누군가의 장갑과, 왜 있는지 모를 작은 종이 왕관이 놓여 있었다.

푸리나는 그 종이 왕관을 들고 요안나의 머리에 얹었다.

“평화의 왕관!”

요안나는 웃었다.

“감사합니다.”

미하일라가 옆에서 보았다.

“그것은 공식 관이 아니다.”

요안나는 왕관을 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귀엽잖아요.”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건 부정하지 않는다.”

슈샤니크는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취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푸리나가 다가와 물었다.

“슈샤니크! 재미있어?”

슈샤니크는 잔을 기울였다.

“참 훌륭한 연회입니다.”

“정말?”

“예. 사람의 본질을 이렇게 저렴하게 드러내는 방법은 흔치 않지요.”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칭찬이지?”

슈샤니크는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기억하고 싶으시다면요.”

그때 알토가 지나가며 말했다.

“그 발언은 공식 기록에 남기지 않겠습니다.”

슈샤니크가 그를 보았다.

“공식 기록에는요?”

연회장의 온도가 한순간 내려갔다.

알토는 담담하게 답했다.

“비공식 기록도 작성하지 않습니다.”

아카식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정말?”

“예.”

“알토, 너 지금 좀 멋있다.”

알토는 눈썹만 살짝 움직였다.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 반쯤 진심.”

“나머지 반은요?”

“술기운.”

“그 부분은 무효로 처리하겠습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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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레이튼은 여덟 번째 수수께끼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잔은 비어 있는데 책임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죠니가 말했다.

“술값.”

“훌륭한 현실적 답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술값이라니까.”

하융이 천천히 말했다.

“다른 가능성에서는 그 답이 정답이었소.”

레이튼은 눈을 빛냈다.

“오, 흥미롭군요. 그렇다면 그 가능성에서는 누가 계산했습니까?”

모두가 침묵했다.

아카식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 질문 위험한데.”

알토가 즉시 말했다.

“계약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외쳤다.

“좋아! 오늘 술값은 연극 수익으로—”

그레이가 끼어들었다.

“연극 수익은 아직 없습니다.”

“그럼 미래의 연극 수익으로!”

하융이 말했다.

“그 미래는 방금 죽었소.”

죠니는 의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이 의자가 문제야.”

요안나가 다가왔다.

“죠니 경. 아직 화해하지 않았나요?”

“임시 휴전이었어.”

“그럼 평화협정을 맺어요.”

“상대가 서명할 손이 없어.”

요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건 차별일 수 있어요.”

죠니는 머리를 감쌌다.

아카식은 알토에게 속삭였다.

“저건 남기고 싶다.”

“안 됩니다.”

“그래, 알아. 그냥 말해본 거야.”

“그 말도 세 번째입니다.”

“세고 있었어?”

“직업상.”

“직업이라니. 너 지금 쉬는 중이잖아.”

“쉬는 중에도 사고는 발생합니다.”

아카식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건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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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마지막 사고는 푸리나가 일으켰다.

그녀는 의자 위에 섰다.

탁자가 아니었으니 그레이는 잠시 안심했다.

하지만 곧 안심을 취소했다.

푸리나는 잔을 들고 외쳤다.

“여러분!”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오늘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어!”

죠니가 말했다.

“난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았어.”

“왕관도 취한다!”

알렉산드리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 잔도 왕도다.”

“그건 배우지 마십시오.”

가브리엘라의 목소리였다.

푸리나는 이어갔다.

“의자와도 평화가 필요하다!”

요안나가 감동했다.

“맞아요.”

죠니가 말했다.

“아니야.”

“치즈도 지켜야 한다!”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숙취는 밤이고, 물은 새벽이다!”

가브리엘라가 만족했다.

“정확합니다.”

“척추는…….”

그레이가 빠르게 말했다.

“그 부분은 생략하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생략!”

스토얀카는 조금 아쉬워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가 기다렸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아직 전쟁 선포 안 했어! 그러니 성공이야!”

정적.

그레이는 천천히 주변을 보았다.

미하일라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요안나는 종이 왕관을 쓰고 있었다.
벨라는 치즈 접시의 잔해를 지키고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빈 잔을 왕도처럼 들고 있었다.
죠니는 의자와 냉전 중이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여전히 샹들리에를 아쉬워했다.
아스트리트는 자신이 방금 술잔 역할을 했는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술을 입는다”는 표현을 아직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레는 쓰러진 의자를 조용히 세우고 있었다.
알토는 공식 기록을 지우고 있었다.
아카식은 그걸 보며 웃고 있었다.

그레이는 생각했다.

‘성공의 기준이 너무 낮습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푸리나가 떨어지기 전에 의자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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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왔다.

레이튼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것은 모두에게 작은 재앙이었다.

연회장은 전쟁터와 비슷했다.
다만 피 대신 포도주가 있었고, 부러진 창 대신 넘어진 의자가 있었으며, 전사자 대신 체면을 잃은 왕관들이 있었다.

푸리나는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그레이…….”

“예.”

“어제 외교적으로 성공했지?”

그레이는 정리된 보고서를 보았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비공식 친선 연회 중 발생한 경미하지 않은 사건 목록」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전쟁 선포는 없었습니다.”

푸리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봤지…….”

“다만 벨라 폐하께서 치즈 접시에 방어권을 선포하셨고, 요안나 폐하께서 닭고기와 생선 사이의 평화 중재를 시도하셨으며, 죠니 경과 의자 사이의 관계는 아직 불안정합니다.”

탁자 아래에서 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자는 아직 항복 안 했어.”

요안나가 물컵을 들고 다가왔다.

“그럼 오늘은 의자와 평화협정을 맺어요.”

알토가 즉시 말했다.

“그 협정은 공식 기록에 남기지 않겠습니다.”

아카식은 창가에 기대 웃었다.

“알토, 그럼 비공식은?”

알토는 그를 보았다.

“성좌께서도 오늘은 그 말씀을 삼가주십시오.”

“딱 한 줄만.”

“안 됩니다.”

“너무하네.”

“체면 보호 절차입니다.”

아카식은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 알겠어. 오늘은 안 남길게.”

푸리나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정말? 기록의 성좌가?”

아카식은 빈 잔을 손끝으로 굴렸다.

“나는 기록을 좋아하지, 사람을 벽에 못 박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그는 연회장을 보며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다.

“게다가 이런 밤은 남기지 않아도 오래 가.”

죠니가 낮게 물었다.

“왜?”

아카식은 웃었다.

“당사자들이 평생 부끄러워하니까.”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게 더 나쁘잖아.”

알토가 담담히 덧붙였다.

“공식 기록이 없는 것이 그나마 자비입니다.”

아카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알토가 오늘 다들 살린 거야.”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그 표현은 과장입니다.”

“그럼 체면을 살렸어.”

“그 표현은 인정하겠습니다.”

“좋네. 오늘의 영웅이네.”

“성좌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기록처럼 들립니다.”

“아, 미안. 취소.”

“취소를 접수합니다.”

아카식은 웃음을 터뜨렸다.


---

그때 아레가 마지막으로 쓰러진 의자를 세웠다.

나무 다리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밤은 지나갔구나.”

푸리나가 탁자에 뺨을 붙인 채 대답했다.

“응…….”

아레는 연회장 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 왕관과 빈 잔, 치즈 조각, 그리고 회담용 문서 위에 찍힌 술자국을 보았다.

“그럼 세워야 할 것은 세우고, 묻어야 할 것은 묻자.”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묻을 건 없습니다.”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체면은 조금 묻힌 듯하구나.”

푸리나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좋아! 그럼 오후에는 체면 장례식—”

전원이 동시에 말했다.

“하지 마.”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그럼 저녁에?”

그레이는 보고서를 접었다.

알토는 눈을 감았다.

죠니는 의자를 노려보았다.

요안나는 물컵을 내밀었다.

아카식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창밖에는, 아주 얄밉도록 맑은 아침 햇살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거리의 왕관》

여관의 소문은 늘 문보다 먼저 들어왔다.

길 위의 먼지를 뒤집어쓴 상인이 문을 밀기 전에,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동전 주머니가 먼저 소리를 냈다.
비를 맞은 병사가 난롯가에 앉기 전에, 그의 젖은 망토 끝에서 떨어진 물이 먼저 바닥을 두드렸다.
피난민의 아이가 뜨거운 수프 냄새에 고개를 들기 전에, 그 아이의 굶주린 배가 먼저 낮게 울었다.

그래서 여관 주인은 사람을 맞이할 때 얼굴보다 먼저 소리를 들었다.

동전 소리.
젖은 신발 소리.
검집이 의자에 부딪히는 소리.
아이의 숨소리.
누군가 오래 참고 있던 한숨.

그 모든 소리가 문가에 쌓이면, 여관 주인은 늘 같은 말을 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잠깐 쉬어 가시죠.”

그날 밤, 여관의 이름은 따로 중요하지 않았다.

킬리키아의 항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여관이었다.
벽에는 여행자의 지팡이 자국이 남아 있었고, 천장에는 오래된 등불이 낮게 걸려 있었다. 부엌에서는 양고기 스튜가 끓었고, 구석에서는 누군가 젖은 장화를 말리고 있었다.

여관에는 여러 나라 사람이 모였다.

킬리키아의 상인.
니케아의 전직 병사.
불가리아에서 온 순례자.
헝가리의 석공.
리투아니아의 사냥꾼.
세르비아의 베 짜는 여인.
폴란드의 필경사.
튜튼 영지에서 온 마부.
리보니아의 신참 기사.

처음에는 모두 말이 없었다.

길 위의 사람들은 처음 만난 이들에게 쉽게 속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어느 길이 전쟁으로 막힐지 모르고, 어느 영주가 세금을 새로 붙일지 모르고, 어느 성좌의 이름이 어느 나라에서는 축복이고 어느 나라에서는 의심이 될지 몰랐다.

그런데 술이 한 잔 돌고, 스튜가 두 그릇 비워지고, 장작이 한 번 더 타오르자,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말이야.”

킬리키아 상인이었다. 그는 빵을 스튜에 찍으며 말했다.

“우리 여왕님은 이상하긴 해도 나쁜 분은 아니야.”

그 말에 니케아 병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긴 하다는 건 인정하는군.”

“인정하지. 그걸 부정하면 거짓말이지.”

상인은 진심으로 말했다.

“항구 광장에서 갑자기 상자 위에 올라가더니, ‘오늘의 무대는 생선 시장이다!’라고 외치시는 군주를 뭐라고 설명하겠어?”

폴란드 필경사가 잠시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건 기록할 가치가 있군요.”

상인이 손을 저었다.

“하지 마. 우리도 체면이 있어.”

여관 안에서 낮은 웃음이 번졌다.

상인은 조금 더 빵을 찢었다.

“그런데 그날 말이야. 전쟁 때문에 울던 애들이 있었어. 집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아이들. 여왕님이 생선 장수랑 빵집 할머니까지 끌어다가 즉흥극을 시켰지. 생선 왕국이 빵 제국을 침공하고, 결국 둘이 같이 수프가 되는 이상한 극이었어.”

“그게 뭔 이야기요?”

헝가리 석공이 물었다.

상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그런데 애들이 웃었어.”

그는 술잔을 한 번 돌렸다.

“그럼 된 거지.”

여관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웃음은 가벼웠지만, 그 뒤에 남은 말은 가볍지 않았다.

세르비아 여인이 천천히 실타래를 감으며 말했다.

“웃게 하는 군주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우리 쪽에서는 조금 드문 일이지.”

킬리키아 상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세르비아는 어떤데?”

여인은 손 안의 실을 내려다보았다.

“아레 님은 크게 웃는 분은 아니야.”

그녀는 그것을 흉보듯 말하지 않았다.

“처음 보면 무섭지. 조용하고, 눈이 깊고, 말이 짧아.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들이 그분 앞에 서면, 괜히 자세를 바로잡아. 아이들도 처음에는 숨지.”

“그럼 백성들이 두려워하나?”

“두려워하지.”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워하진 않아.”

그녀는 실을 조금 더 감았다.

“내 동생이 전쟁에서 죽었어. 아주 작은 부대였고, 이름이 장부에 잘못 올라갈 뻔했지. 집안에서는 그 아이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몰랐어. 그런데 어느 날, 군청에서 사람이 왔다. 아레 님의 명으로 확인했다고 하더군. 어느 언덕에서, 누구와 함께 있었고, 마지막에 무엇을 지키다 죽었는지.”

여인은 한동안 말을 멈췄다.

장작이 탁, 하고 터졌다.

“그분은 내 동생을 본 적도 없었을 거야. 그래도 이름을 알고 계셨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실 끝을 눌렀다.

“우리 군주는 아이들을 웃게 하는 분은 아니야. 하지만 울어도 된다고 해주시는 분이지.”

아무도 웃지 않았다.

킬리키아 상인은 잔을 조금 들어 보였다.

“그것도 좋은 군주네.”

세르비아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군주야.”


---

다음에 말을 꺼낸 것은 헝가리 석공이었다.

그는 손이 컸고, 손톱 밑에는 돌가루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잔을 쥐는 손에 힘이 있었다.

“벨라 폐하는 웃는 분이 아니오.”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

“그분은 성벽을 보시고, 들판을 보시고, 불탄 마을터를 보시지. 사람을 볼 때도 아마 그 사람이 어느 성벽 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먼저 보실 거요.”

“차갑게 들리네요.”

리보니아 신참 기사가 말했다.

석공은 고개를 저었다.

“차갑다기보다…… 무겁지.”

그는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모히 이후에 우리 마을에는 집보다 무덤이 많았소. 살아남은 사람들도 살아남았다는 말을 쉽게 못 했지. 누가 돌아오지 않았는지 세는 것이 하루 일이었으니까.”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 폐하는 성을 세우라고 했소. 또 성, 또 성, 또 성. 사람들은 투덜댔지. 돌도 없고, 손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성이라니. 어떤 이는 말했소. 폐하께서는 웃는 법을 잊으셨다고.”

“그대는 어떻게 생각했소?”

리투아니아 사냥꾼이 물었다.

석공은 짧게 웃었다.

“웃을 시간이 있었으면 성 하나 더 세우셨겠지.”

그는 잔을 들었다.

“그 성 덕분에 우리 마을은 두 번째 약탈을 피했소. 내 아들은 성벽 위에서 태어났고, 내 딸은 그 성문 아래 시장에서 빵을 팔지. 그러면 됐소.”

킬리키아 상인이 말했다.

“웃음보다 성벽이 낫다는 건가?”

석공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 웃음도 필요하지.”

그의 눈가에 희미한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웃으려면 먼저 살아남아야 하지 않소.”

소피아 베아트리체에 관한 소문은 그 뒤에 나왔다.

석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피아 님은…… 뭐라고 해야 하나. 돌을 보면서 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오.”

“그게 무슨 뜻이지?”

“나도 모르오.”

석공은 진심으로 말했다.

“한 번은 공방에 오셔서 석재의 가치와 용도를 재정의할 수 있다고 하셨소. 장인들이 다 긴장했지. 돌이 금이 되나 싶어서.”

“됐소?”

“아니. 대신 폐석이 성벽 보수재가 되었소.”

“좋은 일 아닌가?”

“좋은 일이지. 하지만 옆에 있던 내 친구가 물었소. ‘세금 고지서도 빵으로 재정의해주실 수 있습니까?’”

여관 안에 웃음이 퍼졌다.

석공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소피아 님은 안 된다고 하셨소. 왕국 경제가 무너진다고.”

“이미 우리 집 경제는 무너졌는데.”

킬리키아 상인이 중얼거렸다.

석공은 그를 보았다.

“내 친구도 그렇게 말했소.”

이번에는 더 크게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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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의 전직 병사는 오래 말하지 않았다.

그는 술잔을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니케아에서는 군주 이야기를 쉽게 하면 안 돼.”

그는 손가락으로 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황제가 둘이니까.”

“둘이면 좋은 것 아닌가?”

불가리아 순례자가 물었다.

병사는 피식 웃었다.

“두 배로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는 미하일라를 먼저 말했다.

“미하일 황제가 활을 들면, 사람들은 숨을 죽여. 적도 숨을 죽이고, 아군도 숨을 죽이지. 그분의 화살은 그냥 화살이 아니야. 명령이지. ‘저 전쟁은 여기서 끝난다’는 명령.”

그의 눈빛이 잠시 멀어졌다.

“전장에서는 믿음직하지. 무섭도록 믿음직해.”

“그럼 백성들이 좋아하나?”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분이 서 있으면 뒤로 물러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살아남는 데는 도움이 돼.”

요안나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은 조금 달라졌다.

“요안나 폐하는 이상한 분이야.”

킬리키아 상인이 웃었다.

“우리 여왕님과 비슷한가?”

“다른 방향으로 이상하지.”

병사는 잔을 내려놓았다.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줄 수 있다고 믿으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라틴인, 튀르크인, 상인, 병사, 포로, 아이…… 누구든. 처음 들으면 예쁘기만 한 말이지. 전장에서 구른 사람들은 그런 말을 잘 안 믿어.”

“그대도 안 믿었나?”

병사는 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야 말했다.

“우리 부대에 루스 출신 용병이 있었어. 늘 자신은 로마인이 아니라고 했지. 돈을 받으니 싸울 뿐이라고. 그런데 요안나 폐하의 연설을 듣고 나서, 그 사람이 술에 취해 말하더군. ‘내가 로마인이 아니라면, 왜 저 아이가 나까지 세고 있냐’고.”

그는 웃었다.

“그 다음 날 그 친구는 도망치지 않았어.”

여관 안이 조용해졌다.

병사는 잔을 다시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말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힘이 없다고는 못 하겠어.”

슈샤니크에 대해서는 모두가 먼저 묻지 않았다.

그 이름을 꺼낸 것은 병사 자신이었다.

“슈샤니크 님은…… 백성들이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무서운가?”

“무섭지.”

병사는 즉답했다.

“그분은 장부를 들고 오는데, 장부가 칼보다 무섭다는 걸 알게 해줘. 세금이 왜 필요한지, 곡물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느 마을을 먼저 복구해야 하는지, 누가 거짓 보고를 했는지. 전부 알아.”

“미워하나?”

“미워하기도 해.”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홍수가 났을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것도 그분의 명령서였어. 병사보다 먼저, 사제보다 먼저, 장부가 왔지.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고, 누가 보상받아야 하는지 적은 장부.”

그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제국은 이제 기도만으로 굴러가지 않아. 누군가는 장부를 봐야 해. 슈샤니크 님은 그걸 너무 잘하시지.”

폴란드 필경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좋은 장부는 칼보다 오래 남지요.”

니케아 병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무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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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순례자는 오래 기다린 뒤에야 말했다.

“우리 나라는 지금, 누구를 차르라 불러야 하는지도 사람마다 다르오.”

그 말에 여관 안의 공기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불가리아의 내전은 농담으로 다루기 어려운 주제였다.
하지만 순례자는 담담했다.

“레플리카 차르를 따르는 사람들은 말하오. 고통을 줄여주는 사람이 왕이어도 되지 않느냐고.”

그는 자기 손목의 낡은 붕대를 만졌다.

“그분의 검은 성법은 비명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고 들었소. 오히려 비명이 사람을 찢기 전에 조금 둥글게 만든다고. 우리 마을의 노파 하나가 그랬지. ‘그 아이가 왕이면, 적어도 우리 손자의 밤은 조금 덜 아플 것이다’라고.”

“그 아이?”

“그렇게 부르는 이들도 있소. 차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순례자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알렉산드리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르게 말하지. 그분은 사생아라더라. 왕의 피가 부족하다더라. 흉내 내는 자라더라.”

“그런데도 따르나?”

“그래서 따르는 사람도 있소.”

순례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결핍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까. 왕으로 태어나지 못했으면서 왕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사람이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끔 그런 사람을 믿고 싶어지오.”

킬리키아 상인이 말했다.

“부족해서 가까운 군주인가.”

순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완성되어 있어서 높은 왕도 있고, 부족해서 우리 쪽으로 손을 뻗는 왕도 있지.”

가브리엘라 이야기가 나오자, 순례자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새벽의 주교님은 물을 많이 마시라 하시오.”

“갑자기?”

“정말이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기도 전에도 물, 훈련 후에도 물, 울고 난 뒤에도 물, 술 마신 다음 날에도 물. 처음엔 사람들이 웃었지. 그런데 어느 날 누가 말했소. ‘새벽은 수분에서 온다’고.”

헝가리 석공이 크게 웃었다.

“그건 좋은 신학이군.”

“실용적인 신학이지.”

스토얀카의 이름은, 순례자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꺼냈다.

“그리고 스토얀카 쪽 사람들은…… 음.”

“무섭나?”

리보니아 신참 기사가 물었다.

“무섭소.”

순례자는 바로 말했다.

“그쪽 사람들은 웃으면서 등을 펴라고 하오.”

“그게 왜 무섭지?”

순례자는 그를 보았다.

“들어보면 알게 되오.”

신참 기사는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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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사냥꾼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벽 쪽에 앉아 있었고, 등 뒤에 빈 공간을 두지 않았다. 숲에서 자란 사람들의 습관이었다.

“민다우가스 대공은 무섭다.”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도 안다.”

“백성에게도?”

“백성에게도.”

그는 술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하지만 침략자에게는 더 무섭다. 그럼 됐다.”

그 말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 안에는 불탄 마을과 늪으로 숨어든 아이들과, 밤새 활을 들고 기다린 어머니들이 있었다.

사냥꾼은 말을 이었다.

“우리 숲은 오래 짓밟혔다. 외부 사람들은 우리가 복수만 한다고 하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복수만 하려고 아이를 키우지는 않는다. 복수만 하려고 노래를 부르지도 않는다.”

그는 창밖의 어둠을 보았다.

“민다우가스 대공은 그걸 아신다. 그래서 더 무섭다. 살아남으려면 무서운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신다.”

아스테르다스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뚜렷한 웃음이 생겼다.

“유성 공작님은 다르지.”

킬리키아 상인이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아이들이 형이라고 부른다.”

“공작을?”

“그분이 그렇게 하라 했겠지.”

사냥꾼은 짧게 웃었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말렸어. 귀족에게 무례하다고. 그런데 공작님이 아이들 앞에 쪼그려 앉아서 말했지.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 다만 내가 떨어질 때는 조금 떨어져 있어라.’”

여관 안에 웃음이 퍼졌다.

“전장에서는 정말 별처럼 떨어진다더라.”

리보니아 신참 기사가 말했다.

사냥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좋다.”

“무서운 것 아닌가?”

“우리 쪽으로 떨어지니까.”

사냥꾼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하늘의 별은 멀지만, 유성은 가까이 떨어지지. 그분은 우리 쪽으로 떨어지기로 정한 별이다.”

그 말에 아무도 바로 농담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식 칭찬은 짧았지만,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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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필경사는 그동안 다른 이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는 젊었지만, 손가락에는 잉크가 깊이 배어 있었다. 여관의 등불 아래에서도 그는 습관적으로 글자를 정렬하듯 말을 골랐다.

“기록의 성좌님에 관한 소문은 대체로 믿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아카식을 직접 본 적 있는 이라면 웃었겠지만, 이 여관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킬리키아 상인이 물었다.

“왜? 거짓말이 많나?”

“진실이 너무 이상하게 전달됩니다.”

필경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어떤 이는 성좌께서 빛나는 서고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어떤 이는 술집에서 음유시인 흉내를 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성좌께서 자신의 실패담을 듣고 웃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 실패담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맞지?”

필경사는 잠시 생각했다.

“전부 조금씩 맞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관 안에 다시 웃음이 흘렀다.

“그럼 알토 교단장은?”

이번에는 니케아 병사가 물었다.

필경사의 자세가 조금 바로 섰다.

“알토 님은 조용한 분입니다. 말이 길지 않고, 웃음도 드뭅니다.”

“무서운가?”

“조금.”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이상하게 거짓말을 줄이게 됩니다. 혼날까 봐서가 아니라, 거짓말로 남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는 잉크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알토 님은 기록을 사람에게 씌우는 쇠사슬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기록은 남겨야 하고, 어떤 순간은 남기지 않아야 사람을 살린다고 생각하시지요.”

세르비아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구분이네.”

“어렵습니다.”

필경사는 작게 웃었다.

“한 번은 어떤 장돌뱅이가 말했습니다. ‘알토 님이 웃으신 걸 봤다’고. 사람들이 그걸 기록해야 한다고 했지요.”

“했나?”

“아니요.”

필경사는 단호히 말했다.

“그러면 다시 안 웃으실 테니까요.”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필경사도 조금 웃었다.

“그러니 우리 폴란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될 가치가 있는 것과, 기록하지 않아야 지켜지는 것이 있다. 그리고 알토 님은 그 둘 사이에서 늘 피곤해 보이신다.”

킬리키아 상인이 잔을 들었다.

“그건 어느 나라 관리나 다 그렇지.”

그레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있었다면 아마 동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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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튼 영지에서 온 마부는 자기 차례가 오자 잠시 망설였다.

“호흐마이스터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는 편이 좋소.”

그는 그렇게 말했다.

“왜?”

리투아니아 사냥꾼이 물었다.

“이름도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우리 대부분은 그냥 호흐마이스터라고 부르오. 이름보다 갑옷이 먼저 오는 사람이지.”

마부는 손가락으로 술잔을 두드렸다.

“무섭소. 아주 무섭지. 웃는 얼굴을 본 사람은 거의 없고, 명령은 짧고, 죄라는 말을 마치 옷처럼 걸치고 다니오.”

“백성들이 싫어하나?”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싫어한다고 말하기도 어렵소.”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몽골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그분을 찾소.”

여관 안이 조용해졌다.

“왜?”

“그분은 그들을 알아보는 눈을 하고 있거든.”

마부는 창밖의 어둠을 보았다.

“우리 같은 사람은 동쪽에서 오는 말발굽 소리를 멀리서 들으면 그냥 무섭소. 그런데 호흐마이스터는 그 공포를 더 깊이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오. 그래서 더 무섭고, 그래서 더 앞에 서야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리보니아 신참 기사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자기 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단장님은 조금 다릅니다.”

“아스트리트 단장?”

“예.”

신참 기사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처음 오셨을 때, 모두 들었습니다. ‘네? 저보고 이제 이곳의 기사단장을 하라고요? 아니 잠깐, 편지랑 내용이 다르잖아요!?’라고.”

킬리키아 상인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그렇게 말했나?”

“정말입니다.”

신참 기사는 진지했다.

“그 순간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아, 이분도 속아서 오셨구나.”

여관 안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신참 기사도 결국 웃었다.

“하지만 전보다 낫습니다.”

그 말은 짧았지만, 웃음 뒤에 남았다.

“이전 기사단은 성전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썼습니다. 검을 들면 다 신앙이 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아스트리트 단장님은 매번 묻습니다. 이 검이 생명을 긍정하는가. 이 명령이 살아 있는 것을 지키는가. 이 싸움이 정말 필요한가.”

“기사단장에게는 귀찮은 질문이군.”

죠니가 없었지만, 누군가 그처럼 말했을 법했다.

신참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습니다.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는 잔을 들었다.

“편지에 속아 오신 분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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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여관의 불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군주를 말했다.

이상한 군주.
무서운 군주.
웃지 않는 군주.
부족해서 가까운 군주.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믿기 어려운 군주.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에는 각자 같은 말을 조금씩 다르게 했다.

“그래도 우리 여왕님이 제일 낫지.”

킬리키아 상인이 말했다.

“우리 폐하가 없었으면 성벽도 없었소.”

헝가리 석공이 말했다.

“우리 황제들은…… 복잡하지만, 그래도 로마는 아직 서 있지.”

니케아 병사가 말했다.

“아레 님은 이름을 잊지 않으셔.”

세르비아 여인이 말했다.

“민다우가스 대공은 무섭지만, 우리 숲의 무서움이오.”

리투아니아 사냥꾼이 말했다.

“알렉산드리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소. 그래서 누군가는 그 새벽을 보고 싶어 하오.”

불가리아 순례자가 말했다.

“알토 님은 기록하지 않는 법도 아십니다.”

폴란드 필경사가 말했다.

“호흐마이스터는 앞에 서고, 아스트리트 단장님은 묻습니다.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하겠지요.”

마부와 신참 기사가 말했다.

그러자 다들 서로를 보았다.

한순간, 각자의 말이 서로 충돌할 뻔했다.

우리 군주가 더 낫다.
우리 왕국이 더 오래 버텼다.
우리 황제가 더 정통이다.
우리 상처가 더 깊다.
우리 성좌가 더 옳다.

그런 말들이 목까지 올라왔을 때, 여관 주인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모두 좋은 군주를 만나신 모양입니다.”

말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 한마디에 누구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여관 주인은 다시 미소 지었다.

“길 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실 수 있다는 건, 아직 돌아갈 곳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장작이 다시 타올랐다.

사람들은 자기 잔을 보았다.
누군가는 술을 마셨고, 누군가는 차를 마셨고, 누군가는 식은 스튜를 다시 떠먹었다.

그날 밤, 누구도 자기 군주가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완벽한 왕관 같은 것은 없었다.

왕관은 멀리서 보면 금으로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흠집이 있다.
피가 묻어 있고, 먼지가 끼어 있고, 때로는 술자국도 남아 있다.
어떤 왕관은 너무 무겁고, 어떤 왕관은 아직 헐겁고, 어떤 왕관은 쓰는 이의 이마를 다치게 한다.

하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왕관을 궁정의 말로만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조금 다르게 부른다.

우리를 웃게 한 사람.
우리를 덜 아프게 한 사람.
우리 이름을 잊지 않은 사람.
성을 세워준 사람.
내일도 로마라고 말해준 사람.
숲의 밤에 우리 편으로 떨어진 별.
질문을 던져 검을 멈추게 한 사람.
무서워도 앞에 서는 사람.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래도 우리 군주님.”

이라고 부른다.

여관 주인은 마지막 잔을 닦고, 문가에 놓인 젖은 망토들을 보았다.

밤은 깊었고, 길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그날 여관 안에서만큼은, 여러 나라의 왕관들이 사람들의 입속에서 잠시 내려와 앉아 있었다.

금도 아니고, 보석도 아니고, 칙령도 아닌 모습으로.

조금 이상하고, 조금 무겁고, 조금 웃기고, 조금 슬픈.

사람들이 살아가며 부르는 이름으로.
《왕관들의 신곡》

2장. 왕관이 먹어치운 것들이 말하는 문

검은 문 안쪽은 하나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옥이라기보다, 여러 왕관의 그림자가 서로 겹친 거대한 극장이었다.

한쪽에는 숲이 있었다.
나무마다 베인 흔적이 있었고, 그루터기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성벽이 있었다.
쌓아 올리면 무너지고, 무너지면 다시 쌓아야 하는 성벽.

그 너머에는 자주빛 홀이 있었다.
천장에서 칙령들이 눈처럼 떨어졌고, 바닥에 닿은 종이는 피를 머금었다.

더 깊은 곳에는 거울의 궁정, 죄악의 갑주가 걸린 성채, 흰 꽃이 가득한 가시밭, 끝난 전장의 문, 황혼의 포도밭이 이어져 있었다.

푸리나는 문턱을 넘자마자 숨을 삼켰다.

“이거…… 내가 만든 무대보다 훨씬 커.”

죠니가 곁에서 낮게 말했다.

“네가 대형극 하자고 했잖아.”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항상 그렇지.”

푸리나는 조금 억울하게 그를 보았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큰 걸 열면, 네가 생각한 것보다 커져.”

그레이는 이미 장부를 들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지옥의 첫 규칙.

타인의 지옥을 평가하지 말 것.

그레이는 그 문구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하고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모두보다 조금 뒤에 걸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등불이 있었다.

그 등불은 지옥을 몰아내지 않았다.

다만 발밑을 비추었다.

“부디 기억하십시오.”

여관의 성좌가 말했다.

“이곳은 벌을 받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부정하는 이에게는 벌보다 무겁습니다.”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하하. 왕에게 가장 무거운 것은 패배가 아니라 인정일 때가 있지.”

아스테르다스가 그를 보았다.

“대공, 벌써 웃음이 조금 낮아졌어.”

“그래?”

“응.”

민다우가스는 숲 쪽을 보았다.

“그럼 저 숲은 나를 제대로 부르고 있는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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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숲

리투아니아의 숲은 살아 있었다.

아니, 살아 있기 때문에 더 끔찍했다.

나무들은 뿌리내리고 있었지만, 줄기마다 베인 흔적이 있었다.
어떤 나무는 반쯤 잘렸고, 어떤 나무는 불에 그슬렸다.
그리고 그 모든 상처 위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적의 이름.

배신자의 이름.

동맹이었으나 버려진 자의 이름.

협상에 쓰인 인질의 이름.

복수의 이유가 된 이름.

그리고 복수를 위해 다시 소모된 이름.

민다우가스는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 도끼는 언제 그의 손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숲이 말했다.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잎사귀가 떨리는 소리, 나무껍질이 갈라지는 소리, 장작이 타는 소리, 멀리서 늑대가 낮게 우는 소리가 겹쳐져 말이 되었다.

> 네가 살아남기 위해 벤 것은 모두 적이었는가?



민다우가스는 웃었다.

“좋은 질문이군. 하지만 왕이 살아남으려면, 적이 아닌 것도 적의 길목에서 치워야 할 때가 있다.”

> 그러면 치워진 자들은 무엇인가?



“비용이다.”

말은 차가웠다.

그러나 민다우가스의 웃음은 더 차가웠다.

그는 자기 말을 스스로도 계산하고 있었다.

“국가라는 짐승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한다. 나는 그 사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숲이 다시 물었다.

> 먹은 것을 이름 없이 삼키는 자는 왕인가, 짐승인가?



민다우가스의 손이 도끼 자루를 세게 쥐었다.

아스테르다스가 그 옆에 섰다.

그는 별빛처럼 푸른 검은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푸른 검은 유성.

떨어지는 별.

민다우가스의 망치.

그가 낮게 말했다.

“대공.”

“말해라.”

“이 숲을 다 장작으로 만들면, 야영지는 하루밖에 못 버텨.”

민다우가스는 아스테르다스를 보지 않고 말했다.

“너는 요즘 그 말을 자주 하는군.”

“필요해서.”

“그레이에게 배웠나?”

“조금.”

그 말에 민다우가스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곧 다시 숲을 보았다.

그의 앞에 길이 열렸다.

그 길 양옆의 나무들은 베어야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빽빽했다.

민다우가스는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첫 번째 나무를 베었다.

나무가 쓰러졌다.

그루터기에는 적의 이름이 있었다.

그는 두 번째 나무 앞에 섰다.

거기에는 배신자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도 베었다.

세 번째 나무.

그루터기에는 이름이 없었다.

아니, 지워져 있었다.

이름 없는 자.

숲은 조용했다.

민다우가스는 도끼를 들었다.

그러나 휘두르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다우가스는 나무껍질 위의 지워진 흔적을 보았다.

“이건 누구냐.”

숲이 대답했다.

> 네가 비용이라 부른 자.



민다우가스는 웃지 않았다.

도끼는 여전히 손에 있었다.

왕은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나무를 베지 않고 옆으로 비켜섰다.

아스테르다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민다우가스는 낮게 말했다.

“전술적으로는 비효율적이다.”

아스테르다스가 답했다.

“그래도 길은 있어.”

“좁다.”

“그래도 있어.”

민다우가스는 도끼를 어깨에 걸쳤다.

“좋다. 오늘은 좁은 길을 쓰지.”

숲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베지 않은 나무 하나가, 그들의 등 뒤에서 조용히 남았다.

레이튼은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다.

“때때로 답은 베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에 있지요.”

죠니는 그 말을 듣고 작게 말했다.

“멀리 돌아가는 길 말이지.”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

무너진 성벽

다음으로 성벽이 무너졌다.

돌이 떨어지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성벽 아래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쪽에도 있었고, 바깥쪽에도 있었다.

안쪽 사람들은 문을 닫아달라고 외쳤다.
바깥쪽 사람들은 문을 열어달라고 외쳤다.

불길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

비명.

얼어붙은 겨울의 바람.

벨라 4세는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았다.

대신 손에 돌 하나를 들고 있었다.

성벽은 묻고 있었다.

> 너는 누구를 안에 두었는가?
너는 누구를 밖에 남겼는가?



벨라는 짧게 답했다.

“둘 다 기억한다.”

> 기억한다고 해서 문이 열리는가?



“아니다.”

> 기억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돌아오는가?



“아니다.”

> 그러면 왜 기억하는가?



벨라는 돌을 들어 무너진 틈에 끼워 넣었다.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

성벽은 다시 흔들렸다.

벨라는 떨어지는 돌을 받았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소피아가 아래에서 외쳤다.

“어머니!”

벨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올라오지 마라.”

소피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돌을 하나 들었다.

무거웠다.

그러나 들었다.

“저도 하겠습니다.”

벨라는 딸을 보았다.

“무겁다.”

“알아요.”

“손이 다친다.”

“알아요.”

벨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면 두 손으로 들어라.”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무너진 틈에 돌을 놓았다.

하나.

둘.

셋.

성벽은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무너진 것을 끝없이 보여주는 장소.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사람이 놓은 돌은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다시 물었다.

> 문을 닫아 지킨 자와, 문 밖에 남긴 자 중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벨라는 대답했다.

“둘 다.”

> 둘 다 기억하면, 왕은 어떻게 서 있는가?



소피아가 벨라를 보았다.

벨라는 짧게 말했다.

“무너지면 다시 세운다.”

그녀는 찢어진 손으로 새 돌을 들었다.

“그리고 무너진 이름을 기록한다.”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장부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장부는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록하지 않았다.

타인의 지옥을 평가하지 말 것.

대신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문장을 남겼다.

무너진 이름을 기록한다.

벨라는 성벽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 서 있지 않았다.

소피아가 그 옆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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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빛 칙령의 홀

세 번째 공간은 조용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자주빛 홀.

높은 천장.
차가운 대리석.
황제의 깃발.
그리고 끝없이 떨어지는 칙령들.

칙령들은 처음에는 흰 종이였다.

그러나 바닥에 닿는 순간 붉어졌다.

피가 종이 결을 타고 번졌다.

미하일라는 홀 중앙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활이 있었다.

그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천궁.

궁제의 활.

전쟁의 원인과 핵심을 꿰뚫어, 전쟁 그 자체를 끝내려는 황제의 무.

그녀의 《성추여명식》은 밤하늘의 법을 끌어내렸다.

자주빛 혈통은 황제의 명령으로 이어졌고, 《천명》은 그녀의 화살에 전쟁 종결의 이유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홀에서, 그 모든 것은 무겁게 돌아왔다.

홀의 목소리가 물었다.

> 평화를 위해 쏜 화살은, 누구의 피를 지나갔는가?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짐이 쏜 것이다.”

칙령 하나가 떨어졌다.

그 위에는 전투 명령이 적혀 있었다.

바닥에 닿자 피가 번졌다.

“그러니 짐이 짊어진다.”

> 끝내기 위해 시작한 전쟁은, 전쟁이 아닌가?



“전쟁이다.”

> 평화를 위한 피는, 피가 아닌가?



“피다.”

> 그럼 그대는 평화의 황제인가, 전쟁의 황제인가?



미하일라는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없었다.

그럼에도 활은 당겨졌다.

“둘 다다.”

그 대답은 회피가 아니었다.

그래서 홀이 잠시 조용해졌다.

요안나는 그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백색의 서책이 있었다.

그녀의 이상.

Εἰρήνη πᾶσιν. 모든 이에게 평화를.

요안나의 힘은 칼이 아니라 대의였다.

지지 티켓.

로마 시민의 마음.

낮은 곳에 임하는 자주빛.

사람들이 그녀의 평화를 믿을 때, 그 믿음이 정치적 힘이 되고 기적의 형태를 얻는다.

그러나 이 지옥에서는 그 힘조차 시험받았다.

홀 바닥에 수많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들은 요안나를 향해 말했다.

> 모두에게 평화를?
네가 궁 안에 갇혀 있을 때, 모두는 어디 있었는가?
네 평화는 네가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닿는가?
네 이름을 내세운 이들은 피 흘리지 않았는가?



요안나의 손이 떨렸다.

미하일라는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손을 뻗지 않았다.

뻗을 권리가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안나는 서책을 품에 안았다.

“그래도 말하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홀 안에 퍼졌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림자들이 웃었다.

> 어린 이상.
닫힌 방의 황제.
백색 보좌의 인형.



요안나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아주 작은 빛들이 그녀 주위에 떠올랐다.

지지 티켓.

누군가의 믿음.

어부의 손.
거리 아이의 웃음.
병사의 피곤한 눈.
빵을 받던 사람의 고개 끄덕임.
“외국인”이 아니라 아직 손을 잡지 못한 미래의 로마 시민들.

그 빛들은 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요안나는 말했다.

“어린 이상이라면, 자라게 하겠습니다.”

그림자들은 다시 물었다.

> 네 평화는 너를 가둔 황제에게도 닿는가?



홀은 조용해졌다.

이제 질문은 요안나와 미하일라 사이에 놓였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닿아야 합니다.”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활시위 위에서 멈췄다.

요안나는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닿는다는 말이, 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말은 칼처럼 정확했다.

미하일라는 낮게 말했다.

“그대가 잊지 않는 것은 정당합니다.”

요안나는 물었다.

“폐하께서는 기억하십니까?”

미하일라는 활을 내리지 않았다.

“짐은 잊을 수 없습니다.”

“죄책감으로요?”

“아닙니다.”

미하일라는 자주빛 홀을 보았다.

칙령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황제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요안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짐은 그날의 피를 사적인 후회로만 축소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짐의 죄이자, 짐의 정치였고, 짐의 왕위였습니다.”

그녀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러니 그대가 짐을 용서하지 않아도, 짐은 그 사실을 황제의 기록에서 지우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

정말 오래.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럼 저는 그 기록 위에서, 다른 문장을 쓰겠습니다.”

그녀의 백색 서책이 열렸다.

빛들이 모였다.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권고.

마지막 라스카리스의 이름.

부활하는 로마의 문장.

그녀는 칙령 위에 새 문장을 덧썼다.

> 피 위에도 시민은 선다.
피를 지우지 않고도, 다음 법을 쓴다.
평화는 무죄의 땅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홀의 그림자들이 흔들렸다.

미하일라는 활을 들었다.

“요안나 폐하.”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라는 공식적으로 말했다.

“그 문장은 위험합니다.”

요안나도 공식적으로 답했다.

“미하일라 폐하, 위험하지 않은 평화는 이미 죽은 평화입니다.”

두 공동황제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그것은 화해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는 장면도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두 문장이 같은 홀에 남았다.

미하일라의 화살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인을 꿰뚫는다.

요안나의 문장은 피 위에 시민의 대의를 세운다.

둘은 서로를 지우지 않았다.

미하일라가 활시위를 놓았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 날아갔다.

그 화살은 칙령들을 꿰뚫었다.

피 묻은 종이들이 찢겨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신 천장에서 떨어지던 칙령의 비가 멈췄다.

요안나의 서책에서 작은 빛들이 올라와, 찢기지 않은 종이들을 조용히 접었다.

기록으로.

판결이 아니라, 보류된 기록으로.

슈샤니크는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까마귀의 연대기》가 반응하듯, 검은 기록의 깃털이 아주 잠깐 주변에 떠올랐다.

피를 지우지 않는 기록.

그러나 피만으로 나라를 쓰지 않으려는 기록.

게오르기아는 조용히 말했다.

“수업은 계속되겠군요.”

미하일라는 활을 내렸다.

요안나는 서책을 닫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주빛 홀의 문은 열렸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죠니가 말했다.

“좋은 장면이었네.”

푸리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응.”

“근데 아직 지옥 초반이야.”

“알아.”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현재까지 즉흥 지옥 추가 없음.”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걸 지금 확인해?”

“필요합니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지옥의 첫 풍경들이 뒤로 물러났다.

숲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성벽도 아직 무너진 채였다.
자주빛 홀의 바닥에는 피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길은 열렸다.

그들은 죄를 버리지 않았다.

그저 보았다.

그리고 보았기 때문에, 다음 풍경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검은 문 안쪽 깊은 곳에서 거울들이 빛났다.

새벽빛 하나 없는 궁정.

그곳에서 수많은 알렉산드리나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 가짜.
흉내.
부족한 피.
빌린 왕관.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웃었다.

“이제 제 차례군요.”

가브리엘라는 그녀 곁에 섰다.

“전하께서 걸어오신 길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오늘도 걸어야겠지요.”

거울의 궁정이 문을 열었다.
《왕관들의 신곡》

3장. 거울과 갑주와 꽃의 지옥

거울의 궁정은 새벽이 없는 곳이었다.

천장은 높았다.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기둥마다 금이 입혀져 있었고, 벽마다 불가리아의 옛 영광을 흉내 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거울이었다.

왕좌도 거울.
기둥도 거울.
계단도 거울.
심지어 먼 곳에서 흔들리는 깃발조차, 실제 천이 아니라 반사된 빛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그 중앙에 섰다.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딛자, 수백 명의 알렉산드리나가 동시에 움직였다.

그러나 거울 속의 그녀들은 모두 조금씩 달랐다.

한 명은 왕관이 없었다.
한 명은 왕관이 너무 커서 목이 꺾여 있었다.
한 명은 궁정복이 아니라 병사의 낡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한 명은 시메온 대제의 옷을 걸쳤지만,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한 명은 왕좌 앞에서 무릎 꿇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말했다.

> 가짜.



알렉산드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 흉내.



그녀는 한 걸음 더 걸었다.

> 부족한 피.



또 한 걸음.

> 빌린 왕관.



또 한 걸음.

> 새벽을 말하는 밤.



그녀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가브리엘라 둘로스크룸은 그 옆에 섰다.

새벽의 주교.

그녀는 알렉산드리나보다 한 걸음 뒤에 있었다.
앞서지 않았다.
대신 넘어질 때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서 걸었다.

“전하.”

알렉산드리나는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거울들이 속삭였다.

> 괜찮은 척.
왕다운 척.
시메온 대제의 흉내.
결핍을 모르는 척.
모두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척.



알렉산드리나는 왕좌 앞에 도착했다.

왕좌는 비어 있었다.

거울로 만든 왕좌였다.

앉으면 자신만 보일 것 같은 왕좌.

그 앞에는 황금빛 글자가 떠올랐다.

왕의 피가 부족한 자가 왕의 길을 걸으면, 그것은 왕인가?

푸리나는 멀리서 그 글자를 보며 숨을 삼켰다.

스토얀카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잔인하네.”

레플리카는 낮게 말했다.

“좋은 질문일 수 있습니다.”

스토얀카가 그녀를 보았다.

“너도 꽤 아프게 말하네.”

“아프게 하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아파.”

레플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거울 왕좌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미 들었던 질문입니다.”

거울들이 웃었다.

> 그러면 답도 이미 준비했겠지.
흉내낸 답.
외운 답.
주교가 가르친 답.
위대한 왕들의 무덤에서 훔쳐 온 답.



알렉산드리나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녀의 뒤쪽에서 새벽빛이 아주 조금 피어났다.

해가 뜬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지옥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둠이 완전히 자신만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정도의 빛.

알렉산드리나의 특성, 그녀가 자신에게 새긴 길이 반응했다.

결핍을 부정하지 않고, 결핍을 왕도로 삼는 힘.

시메온 대제의 흉내.

그러나 흉내로 끝나지 않기 위한 수행.

그녀는 자신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위대해질 사람처럼 매일 걷는다.
처음에는 흉내였고, 그다음도 흉내였으며, 수없이 많은 날 동안 흉내였지만, 길은 흉내내는 발밑에도 생긴다.

알렉산드리나는 눈을 떴다.

“예. 저는 흉내냈습니다.”

거울들이 멈췄다.

그녀는 왕좌에 앉지 않았다.

대신 그 앞에 서서 말했다.

“왕의 말투를 흉내냈고, 왕의 걸음을 흉내냈고, 왕의 식탁과 왕의 침묵과 왕의 분노까지 흉내냈습니다.”

거울 하나가 금 갔다.

“처음부터 진짜였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 하나.

“피가 충분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 하나.

“결핍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거울들이 흔들렸다.

알렉산드리나는 가브리엘라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가브리엘라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왕의 혈통을 타고난 것이 왕이 아닙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받아 말했다.

“왕도를 걷는 이가 왕입니다.”

그 순간, 새벽빛이 조금 더 길어졌다.

거울 속 수많은 알렉산드리나가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모든 거울이 깨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속삭임은 남았다.

> 그러면 언제 진짜가 되는가?



알렉산드리나는 미소 지었다.

“오늘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답한다고?”

죠니는 낮게 말했다.

“꽤 괜찮은 답인데.”

알렉산드리나는 계속했다.

“내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왕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왕좌 옆에 놓인 낡은 깃발을 들었다.

거울이 아닌 천이었다.

그것은 낡고 찢어졌고, 완벽하게 위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였다.

“그러나 저는 멈추지 않습니다.”

새벽빛이 깃발 끝에 맺혔다.

“저를 가짜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걷겠습니다.
그 질문이 사라지면, 저는 너무 쉽게 왕인 척하게 될 테니까요.”

거울의 궁정이 갈라졌다.

왕좌는 깨지지 않았다.

그녀도 왕좌에 앉지 않았다.

대신 왕좌 뒤쪽에 문이 열렸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문을 향해 걸었다.

스토얀카가 작게 말했다.

“가짜치고는 멋있네.”

레플리카가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는 웃었다.

“오늘은 좋은 뜻이야.”

알렉산드리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만 받아들이겠습니다.”

가브리엘라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거울의 궁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알렉산드리나가 지나갈 만큼의 길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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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궁정 다음에는 성채가 있었다.

튜튼의 성채였다.

그러나 동시에 초원의 밤이었다.

돌로 쌓은 벽과 끝없는 풀밭이 서로 겹쳐 있었다.
성채의 첨탑 위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고, 그 뒤편의 하늘에는 황금빛 늑대의 눈이 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풍경을 보자마자 멈췄다.

그녀의 갑주가 무거워졌다.

단순한 철갑이 아니었다.

죄악의 갑주.

Frevel Panzer.

성스러운 이름으로 지은 죄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갑옷처럼 입어 변경을 지키겠다는 맹세.

그 갑주가 지금 안쪽에서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라이자는 곁에서 작은 은꽃을 손에 쥐고 있었다.

“괜찮아?”

호흐마이스터는 답했다.

“기능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건 괜찮다는 말이 아니야.”

“현재 전투 지속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도 괜찮다는 말 아니야.”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무겁습니다.”

라이자는 더 말하지 않았다.

성채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갑주 보관대가 줄지어 있었다.

기사들의 갑주.

성인의 갑주.

용을 밟은 갑주.

이름 없는 형제기사들의 갑주.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비어 있는 보관대 하나가 있었다.

황금빛이 흐르는 보관대.

갑주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너는 누구의 아이인가?



호흐마이스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질문을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래 알고 있었다.

눈 속에 숨어 있던 황금.

천양금안.

몽골의 위대한 왕이 남긴 마지막 씨앗.

기사단이 거둔 아이.

헤르만 폰 잘차가 가르친 기사.

그리고 언젠가 그 아버지 같은 사람을 자신이 끌어내린 총장.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 너는 누구의 피인가?



호흐마이스터는 말했다.

“동방의 피입니다.”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호흐마이스터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 그러면 너는 누구의 기사인가?



“내가 사랑하기로 한 땅의 기사입니다.”

성채가 흔들렸다.

초원의 풀들이 바람에 눕고, 첨탑의 십자가가 삐걱였다.

> 그 땅을 지키기 위해 네가 저지른 죄는 누구의 것인가?



호흐마이스터는 한 걸음 나아갔다.

갑주가 더 무거워졌다.

“나의 것입니다.”

> 성스러운 이름으로?



“예.”

> 기사도의 이름으로?



“예.”

> 사랑의 이름으로?



호흐마이스터는 침묵했다.

라이자가 그녀를 보았다.

그 질문이 가장 무거운 질문이었다.

죄를 짓는 이유가 증오라면, 사람은 차라리 단순해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은, 자기 사랑이 아직 사랑인지 계속 물어야 한다.

호흐마이스터는 천천히 답했다.

“예.”

갑주가 그녀의 무릎을 꺾으려 했다.

라이자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그림자를 보았다.

용을 짓밟는 성인.

하지만 그 용은 멀리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초원에서 달려오는 황금 늑대이기도 했고, 자기 눈동자 안의 피이기도 했고, 기사단의 깃발 아래 감춰진 죄이기도 했다.

용을 죽인다는 것은, 단순히 외부의 괴물을 찌르는 일이 아니었다.

자기 안의 피가 용이 될 때, 그것을 밟고도 사람의 편에 서는 일.

호흐마이스터는 투구를 벗지 않았다.

아직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갑주 틈에 꽂힌 작은 은꽃을 빼지도 않았다.

라이자가 예전에 말한 문장이 갑주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무거운 갑주에도 꽃은 꽂힐 수 있어.

성채의 목소리가 웃었다.

> 꽃이 죄를 가볍게 하는가?



호흐마이스터는 답했다.

“아닙니다.”

> 그러면 왜 꽂아두는가?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녀는 은꽃을 손끝으로 눌렀다.

“제가 아직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라이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호흐마이스터는 비어 있는 갑주 보관대를 보았다.

언젠가 자기 갑주가 놓일 자리.

아직은 아니었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아직 보관하지 않습니다.”

> 왜인가?



“동쪽이 아직 옵니다.”

황금빛 늑대의 눈이 커졌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들었다.

“내 혈육인 저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압니다.”

그녀의 말은 조용했다.

존댓말도, 보고도, 기사단의 절제도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죽은 태양 같은 핵이 있었다.

“그러니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죄는 나중에 보관하겠습니다. 지금은 입겠습니다.”

갑주가 다시 몸에 맞았다.

무게는 줄지 않았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의 무릎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라이자가 작게 말했다.

“은꽃도 같이?”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예.”

라이자는 웃었다.

“좋아.”

그 말에 성채 깊은 곳의 비어 있는 보관대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기다렸다.

호흐마이스터는 그것을 확인했다.

언젠가 돌아가 놓을 곳.

아직은 걸어가야 할 곳.

그녀는 성채 밖으로 걸었다.

초원의 바람과 성채의 돌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푸리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작게 말했다.

“저 사람도 언젠가 쉬고 싶을까?”

죠니가 대답했다.

“누구든 그렇겠지.”

“호흐마이스터도?”

“갑주가 무거운 사람일수록 더.”

그레이는 아무 말 없이 그 문장을 마음속에 적었다.

공식 기록에는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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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지옥은 꽃밭이었다.

하얀 꽃이 끝없이 피어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처음에는 지옥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눈처럼 날렸고, 줄기들은 얇고 우아했다.
땅은 부드러웠고, 공기는 맑았다.

그러나 꽃에는 모두 가시가 있었다.

작은 가시가 아니었다.

손을 대면 피가 나는 정도도 아니었다.

그 가시는 사람의 손목과 팔, 갈비뼈와 척추를 찾아 찔렀다.

꽃밭 중앙에 스토얀카 아센이 섰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여긴 마음에 드네.”

그 말에 그레이가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만지지 마십시오.”

스토얀카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레플리카가 말했다.

“하려고 했습니다.”

스토얀카는 웃었다.

“맞아.”

알렉산드리나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오늘은 지옥 안에서도 예절을 지키십시오.”

“지옥에서까지?”

“특히 지옥에서요.”

스토얀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조금만.”

그녀는 꽃 하나에 손을 뻗었다.

가시가 즉시 올라왔다.

스토얀카는 피하지 않았다.

가시가 손끝을 찔렀다.

피가 흘렀다.

꽃이 피었다.

더 하얗게.

스토얀카는 낮게 웃었다.

“봐. 피잖아.”

꽃밭이 말했다.

> 꽃은 왜 찌르는가?



스토얀카는 바로 답하려 했다.

“피우려고—”

레플리카가 그녀를 불렀다.

“스토얀카.”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검은 하늘이 있었다.

레플리카의 흑진이 아주 얇게 퍼졌다.

비명을 키우지 않는 검은 먼지.

고통을 숭배하지 않고, 고통이 사람을 찢기 전에 그 모서리를 깎아내는 성법.

스토얀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대답을 삼켰다.

레플리카는 말했다.

“그 답은 너무 쉽습니다.”

스토얀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늘 재미없는 답을 좋아해.”

“필요한 답을 좋아합니다.”

꽃밭이 다시 물었다.

> 꽃은 왜 찌르는가?



스토얀카는 꽃밭을 보았다.

그녀의 손은 피로 젖어 있었다.

그 순간, 꽃밭 저편에서 손들이 나타났다.

꽃을 꺾으러 온 손.

꽃을 소유하려는 손.

뿌리째 뽑으려는 손.

짓밟으려는 손.

그 손들을 찌르는 가시는 자연스러웠다.

스토얀카는 미소 지었다.

“저 손들은 찔러야지.”

그러나 곧 다른 손들이 나타났다.

물을 주러 온 손.

상처 입은 줄기를 묶어주려는 손.

흙을 덮어주는 손.

길 잃은 아이가 꽃을 보려 내민 손.

그 손들마저 가시가 찔렀다.

피가 흘렀다.

꽃은 더 하얗게 피었다.

스토얀카의 웃음이 조금 얇아졌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물 주러 온 손까지 찌르면, 꽃은 자기 목마름으로 죽습니다.”

스토얀카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네가 그 말 좋아하는 거 알아.”

“좋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

“당신이 들어야 해서 하는 말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조용히 덧붙였다.

“강한 꽃이 되는 것과, 모든 손을 적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스토얀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은 둘이 번갈아 찌르네.”

레플리카는 대답했다.

“아프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 그래서 더 아프다고 했잖아.”

스토얀카는 다시 꽃을 보았다.

백화문주.

손의 무공.

결을 잡고, 척추를 정의하고, 세계의 중심을 뽑아내는 자.

그녀에게 꽃은 아름다운 폭력이었고, 가시는 수행이었고, 찌름은 증명이었다.

그러나 이 지옥은 그녀가 좋아하는 답을 그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꽃밭이 세 번째로 물었다.

> 꽃은 왜 찌르는가?



스토얀카는 이번에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가시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찔러야 할 손이 아니었다.

물을 든 손.

그 손을 향해 가시가 달려들었다.

스토얀카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백화소수.

용의 손.

그녀는 가시를 부러뜨리지 않았다.

대신 결을 잡아, 방향을 비틀었다.

가시는 손을 찌르지 않고 옆으로 지나갔다.

꽃은 흔들렸다.

불쾌한 듯 떨었다.

스토얀카는 웃었다.

“재미없네.”

레플리카가 보았다.

스토얀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시드는 건 더 재미없지.”

그녀는 피 묻은 손으로 꽃줄기를 세웠다.

“찌를 손은 골라. 다 찌르면, 결국 아무도 물을 안 주러 와.”

꽃밭은 조용해졌다.

흰 꽃들은 여전히 가시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가시가 동시에 솟지는 않았다.

그 변화는 작았다.

그러나 지옥에서 작은 변화는 길이었다.

레플리카는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충분합니다.”

스토얀카는 피 묻은 손을 털었다.

“칭찬이야?”

“예.”

“너한테 칭찬 들으니까 아직도 이상해.”

알렉산드리나는 말했다.

“익숙해지지는 마십시오. 자주 있는 일은 아닐 겁니다.”

스토얀카는 웃었다.

꽃밭의 끝에 문이 열렸다.

하얀 꽃잎이 길 위에 떨어졌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꽃잎 반출 금지입니다.”

스토얀카는 시선을 피했다.

레플리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놓고 가십시오.”

“하나만.”

“안 됩니다.”

“지옥 기념품인데.”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내전성 기념품은 금지입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불가리아는 기념품도 위험하네.”

푸리나는 웃으려다가 참았다.

지옥 안에서도 웃음은 필요했다.

다만 너무 크게 웃지는 않았다.


---

거울과 갑주와 꽃의 지옥을 지나자, 검은 길은 조금 더 깊어졌다.

앞쪽에는 소리가 없었다.

숲은 물었고, 성벽은 무너졌고, 자주빛 홀은 칙령을 쏟아냈고, 거울은 조롱했으며, 갑주는 무게를 물었고, 꽃은 찔렀다.

하지만 다음 공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가장 무거웠다.

아레 마가트로이드는 그 침묵을 가장 먼저 들었다.

그녀는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겠구나.”

타마르 여왕은 황혼빛 눈으로 길 너머를 보았다.

“그리고 아직 이름을 부르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요.”

여관의 성좌는 등불을 조금 낮췄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종을 내렸다.

이번 막은 종소리로 열면 안 될 것 같았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다음은 더 조용하겠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길 끝에 문이 있었다.

전장의 문.

그리고 그 옆에는 황혼의 포도밭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있었다.

문 위에는 글자가 없었다.

그 대신 등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직 켜지지 않은 등불.

아레는 그 등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제는 우리가 들어야 할 차례란다.”
《셔우드 숲에 떨어진 유성》

프롤로그 — 국제 연극제의 다음 작품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극장은 그날, 숲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숲이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기둥마다 초록색 천이 감겼고, 천장에는 종이 잎사귀가 매달렸다. 무대 뒤에는 거대한 참나무 그림이 세워졌고, 그 가지 사이로 가짜 새들이 흔들렸다. 바닥에는 마른 낙엽이 깔렸는데, 그것이 너무 진짜 같아서 그레이는 입장하자마자 한 번 멈춰 섰다.

“화재 위험이 있습니다.”

푸리나 헤툼은 무대 위에서 탬버린을 흔들고 있었다.

“없어!”

“있습니다.”

“오늘은 숲이야!”

“숲도 불탑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숲이 불타지 않는 숲으로 하자.”

그레이는 이미 작은 수첩을 꺼내고 있었다.

“그럼 난연 처리를 확인하겠습니다.”

“왜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는 거야?!”

“폐하께서 숲을 실내에 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죠니 죠스타는 객석 가장자리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늘 극 중에서 의적단의 일원이 될 예정이라, 평소보다 조금 가벼운 가죽 조끼와 숲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무대를 한 번 보고, 가짜 나무를 보고, 천장에 매달린 종이 새들을 보았다.

“폐하.”

“응?”

“이건 숲이라기보단 사고 예고야.”

푸리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재밌는 사고지!”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부정하기 어렵네.”

객석에는 각국의 군주와 가신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니케아의 미하일라는 오늘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한쪽에 놓인 활쏘기 대회용 과녁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 진지해서, 푸리나는 서둘러 무대 담당에게 속삭였다.

“저 과녁, 황제 폐하가 쏘면 버틸 수 있어?”

무대 담당은 작게 떨었다.

“나무입니다.”

“그건 나도 보여.”

“나무라서 안 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3막 전에 ‘황제칙령급 사격 금지’ 팻말 붙여.”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차분히 앉아 있었다.

요안나는 그 옆에서 무대 장식의 새를 보며 작게 웃고 있었다. 게오르기아는 이미 이 연극이 중세적 숲 전승과 정치 풍자의 결합이라는 식으로 정리하고 있었고, 슈샤니크는 아무 말 없이 무대의 가짜 세금 마차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슈샤니크의 시선이 마차에 닿은 것을 보자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저분은 지금 장부를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죠니가 대답했다.

“그럼 너랑 같은 편 아냐?”

“아닙니다. 저는 무대 안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장부잖아.”

그레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은 객석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숲 장식을 보고 느릿하게 웃었다.

“살아 있는 숲도, 무대 위의 숲도, 결국 누군가 쉬어가는 그늘이 되면 좋겠네요.”

그 말에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맞아! 오늘의 숲은 쉬어가는 숲! 털어가는 숲! 노래하는 숲!”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털어가는 숲은 빼주십시오.”

보헤미아의 라이자는 벌써 무대 뒤에서 은빛 단추와 초록 망토 장식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극에서 메리언 역이자 의적단의 장비 담당이었다.

“푸리나 님! 이 은꽃 브로치, 로빈 후드 망토에 달면 너무 예쁠 것 같아요!”

“좋아! 달자!”

“무게는 별로 안 나가요!”

그레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대 의상 총중량도 확인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브로치를 품에 안고 작게 웃었다.

“그레이 님, 너무 성실하세요.”

“죄송합니다.”

“칭찬이었어요.”

“그럼 더 죄송합니다.”

리보니아의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는 의적단의 리틀 존 역을 맡았다. 그녀는 숲속 의적단이라는 설정을 듣고도 완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의적단이라도 기본 대열은 필요합니다. 매복조, 우회조, 포위망 절단조, 후송조를 나눠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무대 뒤 나무 세트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 숲에서 뛰어내리고, 휘파람 불고, 세금 마차 털면 되는 거 아니었어?”

아스트리트는 정색했다.

“그 모든 것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뛰어내리는 훈련부터 할까?”

“안전 줄을 매고 하세요.”

“그건 유성이 아니잖아.”

“다친 유성은 곤란합니다.”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쪽은 이미 기사단이 됐네.”

푸리나는 탬버린을 한 번 더 흔들었다.

“좋아! 그러면 오늘의 제목!”

무대 위 막이 열리며, 커다란 나무 간판이 내려왔다.

거기에는 푸리나의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셔우드 숲에 떨어진 유성》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부제가 붙어 있었다.

— 로빈 후드와 너무 성실한 보안관 —

그레이는 부제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폐하.”

“응?”

“저 보안관이 저입니까?”

푸리나는 눈을 피했다.

“아마도?”

“역할 설명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즉흥극!”

“그 말로 모든 절차가 생략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활짝 웃었다.

“오늘부터 생략돼!”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 제가 절차를 새로 만들겠습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며 말했다.

“네가 이길 것 같은데.”

“이겨야 하는 일입니까?”

“아니. 근데 폐하랑 싸우면 보통 그렇게 돼.”

그때 객석의 한쪽에서 낮고 넓은 웃음이 들렸다.

“하하.”

리투아니아의 대공, 민다우가스였다.

그는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자세는 편해 보였지만 눈은 무대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아스테르다스가 올라가 있는 나무 세트, 세금 마차, 숲길의 구조, 출입구, 가짜 병사들의 대기 위치를 차례로 훑었다.

“숲속 도둑놀이인가. 좋다.”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대공! 나 로빈 후드야!”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들었다.

“내 망치가 오늘은 숲의 도둑이 되었군.”

그 말투는 호방했다. 마치 전장의 왕이 술잔을 들고 웃는 것처럼 넓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차가웠다.

“마음껏 날뛰어라. 연극이라면 말이다. 현실에서 같은 짓을 했다면, 먼저 보급로와 처벌 기준부터 물었을 것이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걱정 마! 나쁜 세금만 털 거니까!”

민다우가스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그 말이 제일 위험하다.”

푸리나는 기뻐하며 끼어들었다.

“오늘의 주제 나왔다! 나쁜 세금!”

그레이는 수첩을 펼쳤다.

“그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레이튼이 객석 앞줄에서 차를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훌륭한 수수께끼군요. 나쁜 세금이란 무엇인가.”

죠니가 대답했다.

“보통은 내는 사람이 그렇게 부르지.”

레이튼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더 물어봐야겠지요.”

아스테르다스는 나무 위에서 활을 빙글 돌렸다.

“좋아! 그럼 물어보고 털자!”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묻는 것과 터는 것 사이에는 조사, 증거 수집, 권한 확인, 환수 절차가 필요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나 로빈 후드인데?”

“그러니까 더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양팔을 크게 펼쳤다.

“아아, 훌륭해! 자유로운 의적과 너무 성실한 보안관! 숲과 장부! 활과 영수증! 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비!”

죠니는 가만히 말했다.

“아름다운지는 모르겠고, 길어질 건 알겠어.”

무대 뒤에서 징이 울렸다.

첫 장면을 알리는 소리였다.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자, 배우들이여! 오늘의 숲은 전장이 아니야. 오늘의 숲은 웃음과 추격과 노래의 무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더 연극적으로 높아졌다.

“왕관을 쓴 자도, 장부를 든 자도, 활을 든 자도, 오늘만큼은 나뭇잎 아래에서 자기 역할을 바꾸어보자. 세금 마차는 달리고, 화살은 날고, 보안관은 쫓고, 의적은 웃는다!”

그녀가 객석을 향해 고개 숙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따뜻한 수프를 먹는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식자재 출처만 확인되면요.”

푸리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럼 개막!”

그녀가 탬버린을 흔들었다.

맑은 소리가 숲 모양의 극장을 가로질렀다.

아스테르다스는 나무 세트 위에서 망토를 펄럭였다. 청흑빛 조명이 그의 뒤에서 번졌다. 그는 정말로 숲 위에 걸린 작은 유성처럼 보였다.

민다우가스는 그것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떨어질 곳은 스스로 정해라, 아스테르다스.”

아스테르다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미 정했어!”

죠니가 무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뛰어내릴 거면 착지는 보고 해.”

“봤어!”

“그 말도 위험한데.”

그레이는 결국 무대 아래에 들것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푸리나는 그것까지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완벽해.”

“뭐가 완벽합니까?”

“모두 자기 역할을 하고 있잖아!”

그레이는 잠시 무대 위의 아스테르다스, 객석의 민다우가스, 활을 점검하는 죠니, 질문을 준비하는 레이튼, 은꽃 장식을 들고 웃는 라이자, 지나치게 진지하게 의적단 대열을 짜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건… 맞는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럼 시작하자.”

조명이 낮아졌다.

숲의 그림자가 무대 위에 내려앉았다.

가짜 새들이 흔들리고, 가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셔우드 숲 위로, 청흑빛 유성이 떨어질 준비를 했다.
맞아. 레플리카의 핵심 문장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대들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이긴 하지만, 그걸 매번 직접 쓰면 캐릭터가 아니라 표어처럼 들려.
이번에는 레플리카의 본질은 유지하되, 표현을 다양하게 바꿔서 다시 쓸게.

핵심 보정은 이거야.

> 레플리카는 “아프지 마세요”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성장의 일부로 인정하되, 쓸데없는 고통·장식용 고통·웃기기 위한 고통을 거부하는 정통 고통교 차르다.




---

1막 — 셔우드 숲에 유성이 떨어지다

재개정본

무대가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정말로 숲 같았다.

왕궁 극장의 천장에 매단 종이 잎사귀들이 조명 아래에서 천천히 흔들렸고, 바닥의 마른 낙엽들이 배우들의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무대 뒤편에는 커다란 달이 걸려 있었다. 진짜 달은 아니었다. 얇은 은색 천에 빛을 비춘 것이었지만, 그 빛이 초록 천과 나무 그림자 사이로 번지자 제법 그럴듯한 밤숲이 되었다.

객석의 아스트리트는 감탄했다.

“제법 숲 같습니다.”

그레이는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실내입니다.”

“하지만 숲 같습니다.”

“실내 숲입니다.”

“좋은 표현이군요.”

“좋지 않습니다.”

그때 무대 뒤에서 작은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푸리나의 목소리가 숲 사이로 흘러나왔다.

“때는 먼 옛날, 왕과 귀족들이 세금 상자에 금화를 너무 많이 넣고, 백성들의 식탁에는 빵이 너무 적게 남던 시절!”

그레이가 즉시 반응했다.

“설명이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죠니가 무대 옆에서 낮게 대답했다.

“연극이야.”

“연극이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말은 폐하한테 하지 마. 좋아할 거야.”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들은 듯 말 듯 더 크게 외쳤다.

“그때 숲에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조명이 무대 중앙의 거대한 나무 세트 위로 모였다.

푸른빛과 검은빛이 섞인 망토.

활과 화살통.

허리에는 장난스럽게 묶은 초록색 허리띠.

그리고 나무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아스테르다스.

그는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불렀어?”

푸리나가 무대 뒤에서 외쳤다.

“아직 소개 중이야!”

“아, 미안!”

아스테르다스는 다시 포즈를 잡았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푸리나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의 이름은 로빈 후드! 숲의 의적! 부당한 금화를 털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자! 그리고 오늘 밤, 셔우드 숲에 떨어진 청흑빛 유성!”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위에서 활을 들어 올렸다.

“좋아! 이번엔 됐지?”

“완벽해!”

“그럼 간다!”

“잠깐, 아직—”

아스테르다스는 이미 뛰어내리고 있었다.

무대 담당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들것 쪽을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객석에서 한쪽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아스테르다스의 몸이 공중에서 회전했다. 망토가 펼쳐지며 청흑빛 조명을 받아 짧은 꼬리를 그렸다. 그것은 정말로 숲 위에 떨어지는 유성 같았다.

그러나 완벽한 유성은 아니었다.

착지 직전, 그의 발이 바닥의 가짜 뿌리에 살짝 걸렸다.

“어?”

아스테르다스는 한 바퀴 더 굴렀고, 낙엽을 크게 흩뿌리며 무대 중앙에 착지했다.

정확히 말하면, 반쯤 넘어지며 착지했다.

짧은 침묵.

죠니가 무대 옆에서 말했다.

“봤다고 했잖아.”

아스테르다스는 낙엽 속에서 엄지를 들어 올렸다.

“봤어. 발밑은 빼고.”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은 없어 보입니다.”

푸리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완벽해! 더 극적이야!”

“폐하, 배우가 넘어지는 건 극적이라기보다 사고입니다.”

“그러니까 극적이지!”

그레이는 반박을 포기했다.

그때 불가리아 쪽 객석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넘어지는 것까지는 배움이 될 수 있다.”

레플리카였다.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흐물거리지 않았고, 말투는 어딘가 딱딱하고 모범생 같았다.

“하지만 같은 곳에 두 번 부딪히는 것은 훈련이 아니다. 다음에는 발밑도 확인해라.”

아스테르다스가 낙엽을 털며 웃었다.

“고마워, 차르님! 명심할게!”

죠니가 낮게 말했다.

“내가 하면 잔소리고, 저쪽이 하면 교훈이네.”

레플리카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교훈이라기보다 안전 수칙이다.”

아스테르다스는 더 크게 웃었다.

“그 말이 더 무섭네.”

스토얀카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저 정도로 지적할 일인가?”

레플리카는 스토얀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쓸데없는 고통은 신앙이 아니다. 웃음을 위해 다칠 이유도 없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고통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지, 일부러 장식하는 것이 아니니까.”

스토얀카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여전히 바른 소리만 하는군.”

“바른 소리라면, 할 필요가 있다.”

레플리카는 무대를 다시 보았다.

“특히 저 배우가 다시 뛰어내릴 것 같을 때는.”

죠니가 즉시 대답했다.

“그건 정확하네.”

아스테르다스는 가볍게 몸을 털고 일어섰다. 넘어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낙엽을 어깨에 얹은 채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다.

하지만 숲에서 뛰어내려 넘어지고도 곧바로 웃는 의적이라면, 그건 꽤 로빈 후드다웠다.

그때 무대 반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물론 진짜 말은 아니었다. 두 명의 무대 담당이 나무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걸 보고 조금 안도했다.

“말은 안 올렸군요.”

죠니가 말했다.

“당나귀 이후로 배웠나 봐.”

“다행입니다.”

숲길 끝에서 커다란 세금 마차가 들어왔다.

마차 위에는 큼직한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상자마다 금색 글씨로 “세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저렇게 쓰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해설을 이어갔다.

“보라! 저것이 바로 노팅엄의 부패한 귀족들이 백성에게서 빼앗아간 세금 마차!”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부패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레이튼이 차를 들고 미소 지었다.

“그렇기에 오늘의 첫 번째 수수께끼가 시작되는군요.”

무대 위에서 세금 마차를 끄는 병사 역 배우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과장되게 거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배에는 베개를 넣어 둥글게 만들었고, 한 명은 턱수염을 너무 크게 붙여 입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뒤에 숨었다.

그의 곁으로 죠니가 걸어왔다.

오늘 죠니는 윌 스칼렛 비슷한 의적단 동료 역이었다. 붉은 허리띠를 묶고 있었지만,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좋아.”

아스테르다스가 속삭였다.

“저 마차를 털자.”

죠니가 마차를 보았다.

“경비 셋. 바퀴 낡음. 오른쪽 숲길 비어 있음.”

“역시 기사단장. 바로 작전이 나오네.”

“작전은 나와. 네가 지킬지는 별개고.”

“믿어도 돼!”

“그 말도 위험해.”

아스테르다스는 웃으며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오늘은 로빈 후드야. 세금 상자만 정확히 맞힌다.”

“열쇠를 훔치는 쪽이 덜 시끄러워.”

“그건 덜 멋있잖아.”

죠니는 잠깐 그를 보았다.

“멋있게 하다가 아까 넘어졌지.”

“그건 예행연습.”

“좋아. 그럼 이번엔 실전에서 넘어지지 마.”

아스테르다스는 대답 대신 활을 당겼다.

조명이 그의 손끝에 모였다. 진짜 전투도 아니고, 진짜 무공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테르다스가 몸을 낮추고 숨을 고르는 순간, 무대는 잠시 장난스러운 숲이 아니라 사냥터처럼 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숲.

달빛.

그림자.

침략자를 기다리는 사냥꾼들.

그의 손끝에서 화살이 날았다.

쉭.

화살은 세금 상자 위에 걸린 밧줄을 끊었다.

상자가 흔들렸다.

마차 위의 병사 역 배우들이 과장되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 세금이!”

“국가 재정이!”

“내 보너스가!”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민다우가스는 낮게 말했다.

“보너스라는 말은 왜 넣었지.”

푸리나가 객석에서 손을 들었다.

“내가 넣었어!”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그렇군. 너무 솔직한 부패다.”

아스테르다스는 나무 뒤에서 뛰쳐나왔다.

“멈춰라, 부패한 세금 마차!”

병사 역 배우들이 우왕좌왕했다.

“누구냐!”

아스테르다스는 망토를 펼쳤다.

“나? 셔우드 숲의 의적, 로빈 후드!”

그는 활을 빙글 돌렸다.

“나쁜 세금만 털러 왔다!”

객석에서 몇몇이 박수를 쳤다.

그레이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적었다.

‘나쁜 세금’ 기준 불명확.

죠니가 아스테르다스 뒤에서 낮게 말했다.

“기준부터 물어야 했는데.”

“분위기가 먼저야!”

“그래. 그래서 늘 이렇게 되는 거지.”

병사 역 배우들이 칼을 뽑았다. 물론 무대용 나무칼이었다.

아스트리트가 의적단 쪽에서 뛰어나왔다.

“대열을 갖추세요!”

아스테르다스가 당황했다.

“우리 매복 중 아니었어?”

“매복 후 돌격 대열입니다!”

“그런 게 있어?”

“지금 만들었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큼직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병사들 앞에 섰다. 리틀 존 역에 맞춰 만든 거대한 몽둥이였지만, 그녀가 들자 기사단 훈련용 봉처럼 보였다.

“좋습니다. 여러분, 생명은 긍정하되 부패는 제압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의적단 구호치고는 길어.”

아스테르다스는 환하게 웃었다.

“난 좋은데?”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아스트리트가 한 명의 발을 걸고, 다른 한 명의 칼을 튕겨냈다. 과장된 동작이었지만 절도 있었다. 병사들은 차례차례 낙엽 위로 굴렀다.

“아아!”

“나는 부패했지만 아프다!”

레플리카가 다시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낙법을 배워라.”

객석이 잠시 조용해졌다.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불필요한 통증을 줄이는 편이 낫다. 정통 고통교에서도 그 정도는 가르친다.”

스토얀카가 이번에는 정말로 웃었다.

“부패한 병사에게까지 낙법을 권하는가?”

“연극의 병사다.”

레플리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실제 병사라도, 포로가 될 자는 덜 다치는 편이 좋다.”

아스트리트가 몽둥이를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제압은 하되, 생명은 긍정합니다!”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의적단 구호가 점점 길어진다.”

무대 위에서 죠니는 세 번째 병사를 상대했다.

병사가 커다란 몸짓으로 달려들자, 죠니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한 발만 옆으로 비켰다. 병사는 그대로 지나가 낙엽 더미에 박혔다.

죠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크게 왔어.”

병사가 낙엽 속에서 대답했다.

“대사도 크게 해야 해서요.”

“그건 인정.”

아스테르다스는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세금 상자 하나를 들어 올렸다.

“좋아! 첫 번째 전리품!”

푸리나가 탬버린을 흔들었다.

“성공!”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모두가 멈췄다.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

그레이는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그녀는 원래 2막에서 보안관으로 등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표정은 이미 보안관이었다. 아니, 보안관보다 더 무서운 무언가였다.

감사관.

그레이는 세금 상자를 보았다.

“압수품 목록은 어디 있습니까?”

아스테르다스가 상자를 든 채 멈췄다.

“뭐?”

“압수품 목록입니다. 세금 상자를 탈취했으면 내용물, 출처, 운송자, 피해자, 수혜 예정자를 기록해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 보지 마. 난 열쇠 훔치자고 했어.”

아스테르다스는 다시 그레이를 보았다.

“나 로빈 후드인데?”

그레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더 필요합니다.”

객석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푸리나는 무대 아래에서 두 손을 모았다.

“좋아, 예상보다 빠른 보안관 등장!”

그레이가 푸리나를 보았다.

“폐하, 대본과 다릅니다.”

“즉흥극!”

“그 말로 증거물 관리 절차가 생략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극적으로는 완벽해!”

“행정적으로는 불완전합니다.”

레이튼이 객석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이야, 예상보다 빠르게 핵심 질문에 도달했군요.”

민다우가스는 낮게 웃었다.

“하하. 도둑보다 장부가 먼저 칼을 뽑았군.”

아스테르다스가 상자를 내려놓았다.

“잠깐, 그럼 이거 못 털어?”

그레이가 상자에 손을 얹었다.

“부패 착복분이라면 환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럼 환수하자!”

“먼저 부패 착복분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하자!”

“장부를 열어봐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눈을 빛냈다.

“좋아! 세금 상자 안에 금화가 아니라 장부가 있으면 더 중요한 걸 턴 거라고 했지?”

죠니가 말했다.

“그 말, 아까 농담 아니었어?”

“이제 진짜야!”

아스테르다스는 상자를 열었다.

뚜껑이 열리자, 금화가 반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안에 든 것은 두꺼운 장부와 영수증 묶음, 납세자 명단, 그리고 어째서인지 말린 빵 한 조각이었다.

긴 침묵.

죠니가 말했다.

“축하해. 진짜 장부네.”

아스테르다스는 장부를 들었다.

“이게 더 중요한 거 맞지?”

그레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는 장부를 받아들고 몇 장을 넘겼다.

조용했다.

무대 위의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다시 한 장을 넘겼다.

그다음 또 한 장.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이상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오?”

“세금 총액과 운송 신고액이 맞지 않습니다. 마을별 징수량도 과다합니다. 면세 대상자에게도 세금이 붙어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활짝 웃었다.

“그럼 나쁜 세금 맞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양팔을 들었다.

“봤지!”

“하지만 방식이 틀렸습니다.”

아스테르다스의 팔이 멈췄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이 장부는 증거물로 압수합니다. 그리고 이 금액은 피해 마을로 환수해야 합니다. 단, 환수는 명단 작성 후, 중복 수령과 누락을 막기 위해 배급표를 대조한 다음—”

아스테르다스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푸리나.”

“응?”

“나 의적 맞지?”

푸리나는 웃느라 어깨를 떨었다.

“맞아!”

“근데 왜 회계부터 해야 할 것 같지?”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책임 있는 의적이 되려면 필요합니다.”

죠니가 낮게 덧붙였다.

“합법에 가까워지고 있네.”

아스테르다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셔우드 숲이 생각보다 어렵구나.”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말했다.

“숲은 원래 어렵다. 그래서 함부로 들어가면 죽는다.”

그 말투는 가볍게 웃는 듯했지만, 숲을 아는 왕의 말이었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돌려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그래도 대공, 오늘은 안 죽어!”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연극이니 다행이다.”

푸리나는 다시 무대 중앙으로 올라왔다.

“자, 이것으로 1막의 결론!”

그녀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로빈 후드는 세금 마차를 털었다! 그러나 금화보다 무서운 장부를 발견했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장부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죠니가 대답했다.

“너한테는 아니겠지.”

푸리나는 계속 외쳤다.

“그리고 너무 성실한 보안관은, 의적단보다 먼저 부패를 잡았다!”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저는 아직 보안관으로 정식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등장했어!”

“절차상—”

“등장했어!”

아스테르다스가 장부 더미를 들고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럼 다음은 뭐야?”

레이튼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질문이겠지요.”

푸리나가 활짝 웃었다.

“정답! 다음 막의 제목!”

조명이 천천히 내려갔다.

무대 뒤의 간판이 삐걱이며 올라왔다.

2막 — 너무 성실한 보안관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그레이는 박수 속에서 조용히 장부를 정리했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옆에서 금화 대신 영수증 묶음을 들고 있었다.

죠니는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로빈 후드, 첫 전리품이 영수증이네.”

아스테르다스는 한숨을 쉬다가, 이내 웃었다.

“뭐 어때. 유성은 떨어질 곳을 고르니까.”

그는 장부를 어깨에 얹었다.

“오늘은 장부 위에 떨어진 거지.”

죠니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낮게 웃었다.

“그건 좀 멋있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장부 위에 실제로 떨어지면 훼손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건 안 할게.”

그레이는 안심한 듯했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속삭였다.

“아쉽다.”

그레이가 바로 돌아보았다.

“폐하.”

“농담이야!”

“검토하겠습니다.”

“농담도?!”

“필요하면요.”

무대 위에 웃음이 남은 채, 1막의 막이 닫혔다.
2막 — 너무 성실한 보안관

막이 다시 올랐을 때, 셔우드 숲은 전장보다 더 무서운 장소가 되어 있었다.

책상 세 개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에는 세금 상자, 장부 더미, 영수증 묶음, 납세자 명단, 배급표가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앞에는 그레이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보안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원래 노팅엄 보안관이라면 깃털 달린 화려한 모자나 검은 망토를 걸쳐야 했겠지만, 그레이가 쓴 것은 지나치게 수수한 검은 모자였다. 거기에 작은 은색 배지가 붙어 있었다.

임시 보안관.

푸리나가 뒤에서 속삭였다.

“내가 달아줬어.”

죠니가 말했다.

“왜 임시야?”

“그레이가 정식 보안관 임명 절차가 없다고 해서.”

그레이는 책상 너머에서 조용히 말했다.

“절차 없이 정식 직함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연극인데?!”

“연극 속 직함에도 일관성은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럼 오늘의 그레이는 임시 보안관!”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앞에는 아스테르다스가 서 있었다.

로빈 후드 복장은 그대로였지만, 손에는 활 대신 깃펜이 들려 있었다.

그는 세금 마차를 털고 돌아온 의적이라기보다, 처음으로 관청 서류를 본 숲속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정확히는, 진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좋아.”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우리가 훔친 건 금화가 아니라 장부였다.”

그레이가 정정했다.

“훔친 것이 아니라, 현재는 부패 혐의 증거물로 임시 보전 중입니다.”

“그래. 우리가 임시 보전한 건 장부였다.”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로빈 후드 분위기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네.”

아스테르다스는 죠니를 보며 속삭였다.

“괜찮아. 이 장면만 넘기면 다시 활 쏠 수 있겠지?”

죠니는 책상 위의 서류 더미를 보았다.

“난 아닌 쪽에 걸겠어.”

객석에서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하하. 좋군. 숲의 도둑이 국가 운영의 첫 문턱에 걸렸다.”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정확해! 2막의 주제는 바로 그거야!”

그레이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주제를 그렇게 정하셨습니까?”

“응!”

“그럼 미리 알려주셨어야 합니다.”

“즉흥극!”

“즉흥적으로 행정 절차를 만드는 일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잖아!”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깃펜을 들었다.

“그럼 하겠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어깨를 폈다.

“좋아. 무엇부터 하면 되지?”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먼저 탈취, 아니 임시 보전된 물품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세금 상자 하나.”

“상자 안 내용물까지 적어야 합니다.”

“장부.”

“몇 권입니까?”

아스테르다스는 장부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많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로빈 후드, 숫자는 열까지 셀 수 있지?”

아스테르다스가 씩 웃었다.

“유성은 숫자로 떨어지지 않아.”

“그건 못 센다는 뜻이야?”

“아니. 멋있게 대답한 거야.”

“숫자는 안 멋있어도 정확한 게 좋아.”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 경 말이 맞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배신당한 표정으로 죠니를 보았다.

“너 어느 편이야?”

죠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안 다치는 편.”

그 말에 레플리카가 객석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편이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세자.”

그레이는 하나씩 불렀다.

“징수 장부 4권. 납세자 명단 2묶음. 영수증 37장. 손상된 봉인 3개. 말린 빵 1개.”

아스테르다스가 손을 들었다.

“말린 빵도 적어?”

“증거물 상자 안에 있었으므로 적어야 합니다.”

“먹으면?”

“증거물 훼손입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아까부터 배고팠는데.”

죠니가 자기 주머니에서 마른 빵을 하나 꺼내 던졌다.

“그건 먹어.”

아스테르다스가 받았다.

“오, 고마워!”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그 빵은 개인 소지품입니까?”

죠니는 잠시 그레이를 보았다.

“먹어도 되는 빵이야.”

“확인했습니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거의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레이, 너무 좋아. 너무 보안관이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 보안관은 원작과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아!”

“좋은 일입니까?”

“관객이 웃고 있잖아!”

그레이는 객석을 보았다.

분명 웃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기사들, 니케아의 관료들, 불가리아의 차르들, 헝가리의 사절들, 리투아니아의 전사들까지. 모두가 적어도 조금은 웃고 있었다.

그레이는 아주 잠깐, 자신이 들고 있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죽은 자의 이름을 적는 장부와는 달랐다.

이 장부는 희극의 장부였다.

그래도 장부는 장부였다.

틀리면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더 정확해야 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저게 그레이지.”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게 그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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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 검토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로빈 후드 일당이 장부 검토에 전혀 적합한 집단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숫자를 볼 때마다 줄 간격을 먼저 보았다.

“이거 글씨가 너무 빽빽해. 숲길이라면 매복하기 좋겠는데.”

그레이가 말했다.

“장부는 매복지가 아닙니다.”

아스트리트는 납세자 명단을 보고 손을 들었다.

“마을별로 조를 나누면 배상 절차가 빨라질 것 같습니다. 1조, 2조, 3조로 편성하겠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습니다.”

아스트리트의 눈이 빛났다.

“그럼 의적단 배상 대열을 편성하겠습니다!”

“대열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질서는 필요합니다.”

“그건 맞습니다.”

아스트리트는 기뻐했다.

죠니는 영수증을 보다가 말했다.

“이건 누가 쓴 거야? 숫자 7이랑 1이 구분이 안 가는데.”

그레이가 받아서 보았다.

“고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글씨 못 쓰는 게 아니라?”

“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레이튼이 객석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다면 작은 수수께끼가 되겠군요.”

그는 무대 위로 올라왔다.

오늘의 레이튼은 숲속 수도사처럼 갈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로브 밑으로 보이는 자세와 미소 때문에, 어딘가 수도사보다는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신사처럼 보였다.

아스테르다스가 반겼다.

“오, 터크 수도사!”

레이튼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그런 역할입니다만, 술통은 들지 않았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아쉽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대신 질문을 가져왔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술통보다 무겁겠는데.”

“대체로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장부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우선 묻겠습니다. 이 마차의 세금은 왜 나쁜 세금입니까?”

아스테르다스가 즉시 대답했다.

“백성에게서 너무 많이 걷었으니까!”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부터 너무 많은 것입니까?”

“그건…”

아스테르다스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가 말했다.

“법정 세율과 비교해야 합니다.”

레이튼은 다시 물었다.

“법정 세율이 정당하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법정 세율 자체가 부당하다면?”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객석에서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계속했다.

“또 묻겠습니다. 금화를 많이 거두는 것이 언제나 악입니까? 겨울 식량, 성벽 보수, 전쟁 대비, 피난민 구호를 위한 세금이라면 어떻습니까?”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맞는 질문이다.”

그는 편히 앉아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왕의 무게가 있었다.

“세금 상자를 부수면 귀족만 굶는 것이 아니다. 병사도 굶고, 말도 굶고, 겨울의 아이도 굶는다.”

아스테르다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아, 대공.”

민다우가스의 눈이 그를 향했다.

아스테르다스는 장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묻는 거지. 이 상자가 겨울의 아이들에게 갈 상자인지, 귀족의 배를 불릴 상자인지.”

객석이 잠시 조용해졌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훌륭합니다. 이제 의적이 아니라 조사관이 되어가고 있군요.”

아스테르다스가 탄식했다.

“그 말, 칭찬이야?”

죠니가 말했다.

“오늘 공연 기준으로는 아마도.”

그레이는 장부의 한 항목을 가리켰다.

“여기입니다. 이 마을은 흉작 피해로 세금 감면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곡물세가 두 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스트리트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명백히 부당합니다.”

그레이는 다른 줄을 짚었다.

“그리고 여기는 사망자 명단에 오른 사람이 세금을 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푸리나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객석에서도 웃음이 살짝 멎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녀다운 단단함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 세금을 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이름을 지우지 않았거나,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돈을 빼돌렸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장난기를 거두었다.

“그건 나쁜 세금이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건 나쁜 세금입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 이름이 붙었군요. 너무 빠른 이름이 아니라, 질문 끝에 도달한 이름입니다.”

죠니가 팔짱을 꼈다.

“그럼 털어도 되나?”

그레이가 곧바로 말했다.

“환수입니다.”

“그래. 환수.”

“그리고 환수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하늘을 보았다.

“또 시작이구나.”

그레이는 진지했다.

“피해자에게 정확히 돌아가야 합니다.”

그 말에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내렸다.

“맞아.”

그는 웃었다.

“좋아. 그럼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

푸리나는 작게 손뼉을 쳤다.

“오오, 로빈 후드가 책임을 배웠어!”

죠니가 말했다.

“아직 배운 건 아니고, 숙제 받은 거지.”

아스테르다스는 영수증 묶음을 들었다.

“이 정도면 산 하나를 넘는 것보다 어렵겠는데.”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그녀를 보았다.

“보안관이 의적을 도와줘?”

“의적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정리했다.

“피해 마을을 돕는 것입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잠깐 멈췄다가, 씩 웃었다.

“좋아. 그럼 우리는 같은 편이네.”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절차상으로는 아직—”

“같은 편이야.”

아스테르다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는 그 손을 보았다.

손바닥에는 낙엽이 묻어 있었다.

장부를 만지기에는 썩 적합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손을 먼저 털어주십시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스테르다스는 크게 웃으며 손을 털었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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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무대 뒤편에서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빠라밤.

한 번 더.

빠라바밤.

마지막으로 조금 삑사리가 났다.

빠라—삑.

죠니가 말했다.

“저건 일부러야?”

푸리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그럴 줄 알았어.”

무대 왼쪽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노팅엄의 부패 귀족 역이었다.

그 역은 슈샤니크가 맡았다.

객석과 무대가 동시에 조용해졌다.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희극의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슈샤니크는 진한 녹색과 검은색이 섞인 귀족 의상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장부가 들려 있었고, 웃음은 정중했다. 너무 정중해서 오히려 위험해 보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와, 악역 의상 너무 잘 어울려.”

그레이는 즉시 말했다.

“그 말은 실례입니다.”

슈샤니크는 들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실례는 아닙니다. 배역에 맞는 평가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이 숲에서 소란이 있다 들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활을 들었다.

“네가 부패 귀족이냐!”

슈샤니크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 표현은 법적으로 부정확합니다.”

그레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멈췄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하지만 네 장부가 수상해!”

슈샤니크는 부드럽게 웃었다.

“장부는 언제나 수상합니다. 읽을 줄 모르는 자에게는 특히.”

객석에서 짧은 탄성이 나왔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세다.”

아스테르다스는 오히려 웃었다.

“좋아. 악역다워.”

슈샤니크는 천천히 그레이를 보았다.

“임시 보안관. 그 장부는 공인된 절차로 압수되었습니까?”

그레이가 멈췄다.

푸리나가 멀리서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현재 부패 혐의 증거물로 임시 보전 중입니다.”

“임시 보전 명령권자는 누구입니까?”

그레이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극적 상황상…”

“극적 상황은 행정 권한이 아닙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죠니에게 속삭였다.

“우리 보안관이 공격받고 있어.”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전이야.”

“도와야 하나?”

“도와서 될 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레이튼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보지요.”

슈샤니크가 그를 보았다.

“말씀하시지요, 수도사님.”

“그 장부가 공인 절차로 압수되지 않았다는 점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장부의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은 절차보다 먼저 존재했겠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누가 먼저 열었습니까? 숲속 의적입니까, 아니면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세금을 걷는 장부입니까?”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푸리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좋아!”

그녀가 탬버린을 흔들며 무대 위로 튀어나왔다.

“여기서 중간 판정!”

그레이가 당황했다.

“폐하, 재판은 아직—”

“재판 아니야! 연극이야!”

슈샤니크가 조용히 말했다.

“그 점이 오히려 불리하군요.”

푸리나는 해맑게 웃었다.

“맞아! 연극에서는 관객이 침묵하면 이미 들킨 거거든!”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슈샤니크는 한숨처럼 아주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녀는 악역답게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병사들. 장부를 회수하세요.”

무대 뒤에서 병사 역 배우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추격전?”

죠니가 말했다.

“아직 2막이야.”

푸리나는 외쳤다.

“2막 끝에는 짧은 추격전이 있어도 돼!”

그레이가 거의 반사적으로 장부를 품에 안았다.

“증거물 보호!”

아스테르다스는 그레이 앞에 섰다.

활을 들고, 망토를 펼쳤다.

“좋아. 그럼 이번엔 금화가 아니라 장부를 지키는 의적이다!”

죠니가 옆에서 칼집을 고쳐 잡았다.

“이상한데, 나쁘진 않네.”

아스트리트가 지팡이를 들었다.

“대열을 갖추세요! 장부 보호 대형입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그런 것도 있나?”

아스트리트는 진지했다.

“지금 만들었습니다!”

레이튼은 웃으며 장부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수수께끼의 답이 사라지면 곤란하지요.”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양팔을 펼쳤다.

“자, 보라! 이것이 셔우드 숲의 새로운 모험!”

그녀는 환하게 외쳤다.

“금화를 털러 간 의적들이, 장부를 지키게 되었다!”

민다우가스는 객석에서 낮게 웃었다.

“좋다, 아스테르다스.”

그 목소리는 넓었지만, 끝은 날카로웠다.

“숲에서 무엇을 빼앗을지보다, 무엇을 지킬지 아는 편이 낫다.”

아스테르다스가 돌아보았다.

그는 활짝 웃었다.

“그 말, 칭찬이지?”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연극 안에서는.”

“그럼 충분해!”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아스테르다스는 활시위를 당겼다.

죠니는 한 발 옆으로 움직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미소로 감췄다.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2막의 숲은, 행정 감사를 넘어 추격전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좋아. 성 블레즈 기사단 자동 보충까지 반영해서 1턴 행동 초안을 다시 짜면 이렇게 가는 게 좋다.
전제는 희귀함 캐릭터 1명당 3앵커 운용이야. 병력카드는 캐릭터 휘하에서 앵커로 운용되는 구조고, 기병은 별도 전마 자원이 중요하니까 이 점을 반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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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키아 아르메니아 1턴 행동 초안

푸리나 헤툼 — 군주 행동 3앵커

1앵커: 국경 방위 왕명 선포

푸리나는 룸 술탄국 변경 아미르의 침공에 대응하여 국경 방위 왕명을 선포한다.

성 블레즈 기사단의 즉시 요격을 승인하고, 그레이에게 국경 마을 피난·방책·보급·피해보상 행정망 구축 권한을 부여한다. 또한 왕실 명의로 피난민 보호, 물자 징발 보상, 전시 부패 및 피난 방해 엄벌을 약속한다.

> 목적: 죠니의 출정과 그레이의 행정망 구축에 왕권의 정당성과 강제력을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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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여관:극장]을 통한 후방 안정

푸리나는 [여관:극장]과 여관좌의 휴식 신술을 통해 후방 여관망과 피난소를 안정시킨다.

피난민들에게 피난은 패배가 아니라 다음 막을 위한 퇴장임을 선언하고, 국경민과 아이들, 부상자들이 공포와 수치심에 무너지지 않도록 돕는다. 동시에 귀환할 성 블레즈 기사단을 위한 연회와 무대를 준비하여 기사단과 백성의 사기를 유지한다.

> 목적: 약탈 침공이 백성의 심리와 왕국의 사기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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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인력 양성 개시

푸리나는 왕국의 장기 전력 강화를 위해 인력 양성을 시작한다.

우선 일반위계 인력 2000명을 벗어남위계 인력 2000명으로 교육·상승시키는 것을 기본안으로 한다. 단, 현재 왕국에 벗어남 인력이 충분하고 우수함 전력이 더 급하다면 벗어남 200명을 우수함 200명으로 올리는 안도 고려한다.

> 목적: 향후 신규 병력 모집, 니케아 지원, 왕국 전력 기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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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니 죠스타 — 성 블레즈 기사단 운용 3앵커

1앵커: 성 블레즈 기사단 출격

죠니 죠스타는 성 블레즈 기사단을 이끌고 킬리키아 국경을 침범한 룸 술탄국 아미르의 약탈군을 요격한다.

작전 목표는 적 영토 진입이나 무리한 섬멸이 아니라, 국경 마을 보호와 약탈 저지다.

> 목적: 킬리키아 방면 침공군 즉시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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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이크타 중장 궁기병 대응

죠니는 성 블레즈 기사단의 연환돌격을 통해 적 궁기병과 이크타 중장 궁기병이 사격진형을 완성하지 못하게 한다.

적의 유인 후퇴에는 말려들지 않으며, 근접 압박과 짧은 반복 돌격으로 활 쏠 박자를 끊는다.

> 목적: 룸 술탄국의 핵심 전술인 중장 궁기병 사격전을 무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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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전력 보존 및 전술 정보 확보

죠니는 적을 깊게 추격하지 않고 국경 방어선 안에서 작전을 마무리한다.

가능하다면 포로, 화살촉, 활, 마갑, 장비, 명령 체계, 아미르의 후퇴 조건 등 전술 정보를 확보한다. 성 블레즈 기사단은 자동 보충되지만, 이번 전투의 목표는 여전히 무리한 소모가 아니라 “킬리키아 약탈은 비싸다”는 사실을 적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 목적: 2턴 니케아 외교와 하융 파견에 사용할 실전 자료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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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융 — 현장 분석 3앵커

1앵커: 죠니 동행 및 전장 관측

하융은 죠니와 성 블레즈 기사단에 동행하여 룸 술탄국 약탈군의 실제 전투 양상을 관측한다.

궁기병 사격진형, 이크타 중장 궁기병의 위치, 아미르의 지휘 방식, 후퇴 조건, 성 블레즈 기사단의 대응 효과를 분석한다.

> 목적: 현장 자료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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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죽은 가능성을 통한 피해 보정

하융은 죽은 가능성의 정보를 현재 전장에 얇게 겹쳐, 성 블레즈 기사단의 돌격 타이밍과 위험 구간을 보정한다.

죠니의 지휘권을 침해하지 않고, “지금 돌격하면 죽는 가능성”과 “반 호흡 늦추면 사는 가능성”을 짧게 전달한다.

> 목적: 기사단 피해 감소 및 전투 효율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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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니케아 파견용 전선 안정 보고서 작성

하융은 이번 전투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니케아 아나톨리아 전선에 적용 가능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특히 지휘관이 부족한 전선에서 룸 술탄국 궁기병에게 어떻게 무너지는지, 어느 지점에서 방어선이 붕괴되는지, 어떤 타이밍에 기병 예비대를 투입해야 하는지를 정리한다.

> 목적: 2턴에 하융을 니케아 임시 작전고문으로 파견할 근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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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 행정·전마 3앵커

1앵커: 국경 경보·피난망 구축

그레이는 국경 마을별 경보 단계와 피난 경로를 정비한다.

감시초소, 봉화, 여관 통신, 성채, 교회, 피난소를 연결하고, 마을별 피난 책임자와 마지막 인원 확인 담당자를 지정한다.

> 목적: 약탈군이 도착하기 전에 사람과 장부와 핵심 물자를 후방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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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약탈 억제 행정망 구축

그레이는 곡물·가축·공구·종자·약재의 후방 이전 절차를 마련하고, 주요 진입로와 여울, 협곡에 이동식 방책, 말뚝, 수레 방벽을 배치하도록 지시한다.

동시에 피해 장부, 사망자·부상자·실종자 명부, 유족 보상 기준, 복구 우선순위를 표준화한다.

> 목적: 적이 얻을 약탈 수익을 줄이고, 침공 시간을 늘리며, 국경민이 피해 후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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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목초지·전마 산출량 조사 및 수출 가능량 산정

그레이는 킬리키아 내 목초지와 전마 생산량을 조사한다.

성 블레즈 기사단은 매턴 자동 보충되므로 일반 전마 산출 계산에서 제외한다. 대신 목초지 산출분을 세 갈래로 나눈다.

1. 국내 신규 기병 모집용


2. 비상 예비마 비축용


3. 니케아 수출용 전마·예비마



> 목적: 2턴 레이튼의 《킬리키아-니케아 전마 보급 협정》 협상 자료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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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튼 — 외교 준비 3앵커

1앵커: 니케아 사전 질의서 발송

레이튼은 니케아 제국에 사전 질의서를 보낸다.

질문은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니케아가 지금 부족한 것이 병력인지, 지휘관인지, 전마인지, 혹은 전선 우선순위 결정인지 확인하는 방향으로 구성한다.

> 목적: 2턴 본협상 전에 니케아의 실제 병목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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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킬리키아-니케아 전마 보급 협정》 초안 작성

레이튼은 그레이가 산정할 전마 생산량을 전제로, 니케아에 제공할 전마 보급 협정 초안을 작성한다.

협정 대가로는 곡물, 철, 포인트, 항구 이용권, 공성기술자, 정치적 승인, 공동 방위 협정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여러 안을 준비한다.

> 목적: 니케아의 목초지 부족과 전마 병목을 아르메니아의 외교 카드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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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하융 임시 작전고문 파견 조건 정리

레이튼은 하융을 니케아 아나톨리아 전선에 파견할 경우의 조건을 정리한다.

하융은 외국군 총사령관이 아니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파견 현장지휘관 겸 임시 작전고문으로 규정한다. 정보 접근권, 제한적 지휘권, 호위, 책임 범위, 철수 조건을 문서화한다.

> 목적: 니케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실질적 지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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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턴 전체 요약

푸리나는 왕명, 후방 안정, 인력 양성.
죠니는 성 블레즈 기사단으로 킬리키아 방면 침공군 요격.
하융은 죠니와 동행해 현장 분석 및 니케아 파견용 보고서 작성.
그레이는 경보·피난·방책·피해보상 행정망과 전마 수출 가능량 산정.
레이튼은 니케아 질의서, 전마 보급 협정, 하융 파견 조건 준비.

핵심 의도

> 1턴의 목표는 룸 술탄국 침공군을 막는 것만이 아니다.
킬리키아 방면은 성 블레즈 기사단으로 안정화하고,
그 전투 결과와 전마 산출량을 바탕으로
2턴에 니케아에 하융과 전마를 외교 카드로 보낼 준비를 끝내는 것이다.
3막 — 활쏘기 대회와 너무 많은 참가자

장부를 품에 안은 그레이가 숲길을 달렸다.

정확히 말하면, 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원래 달리기보다 장부 정리, 피난민 명단 확인, 배급표 검토, 부상자 후송로 계산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부 세 묶음과 보안관 모자, 그리고 임시 보안관 배지를 달고 숲속 무대 위를 뛰는 일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레이는 넘어지지 않았다.

넘어질 것 같은 순간마다 죠니가 조용히 한 걸음 옆에서 받쳐주었고, 아스테르다스가 화살로 병사들의 발밑 낙엽을 흩어 시선을 돌렸다.

아스트리트는 뒤에서 외쳤다.

“장부 보호 대형, 좌측으로!”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 대형 이름, 진짜 계속 쓸 거야?”

아스트리트는 진지했다.

“효과가 있습니다.”

“그건 인정.”

병사 역 배우들이 달려왔다.

“장부를 내놓아라!”

“그 장부는 귀족님의 사유재산이다!”

“그리고 내 보너스도 거기 있다!”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세트 위로 뛰어오르며 외쳤다.

“솔직해서 좋네!”

그는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병사들의 모자만 정확히 날려버렸다.

첫 번째 병사가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내 권위가!”

두 번째 병사는 모자를 주우려다 발이 꼬여 낙엽에 굴렀다.

“내 체면이!”

세 번째 병사는 그냥 스스로 넘어졌다.

“내 연기력이!”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레플리카는 그 세 번째 병사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스스로 넘어지는 것도 기술이군. 다만 목은 보호해라.”

스토얀카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저 병사에게까지 조언하는가?”

“배우는 다치면 다음 막에 나오지 못한다.”

“합리적이군.”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대 위의 고통도 관리되어야 한다.”

그 말에 그레이가 달리다 말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뛰면서 동의하지 마. 넘어져.”

그레이는 즉시 앞을 보았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때 무대 뒤에서 푸리나가 탬버린을 크게 흔들었다.

“좋아! 숲속 추격전은 여기까지!”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위에서 외쳤다.

“벌써?”

“응! 왜냐하면 다음은 로빈 후드의 꽃!”

무대 뒤의 배경막이 빠르게 돌아갔다.

숲길은 사라지고, 커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나무에는 화려한 깃발이 걸렸고, 중앙에는 둥근 과녁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그 위에는 커다란 간판이 내려왔다.

노팅엄 활쏘기 대회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은 채 멈춰 섰다.

“추격전 중에 대회장으로 전환되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푸리나는 당당했다.

“로빈 후드니까 괜찮아!”

“그 설명은 행정 문서에 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연극이라니까!”

죠니가 그레이에게 말했다.

“포기해. 여기서부터는 규칙이 폐하 쪽이야.”

그레이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최소한 장부는 안전한 곳에 보관하겠습니다.”

“그건 좋아.”

그레이는 무대 한쪽에 장부를 두고, 그 앞에 작은 표지판을 세웠다.

증거물. 손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그 표지판을 보고 감탄했다.

“와, 무대 소품 같아!”

“소품이 아니라 경고문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소품!”

그레이는 다시 반박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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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나는 무대 중앙으로 뛰어나왔다.

이번에는 노팅엄 활쏘기 대회의 사회자였다. 머리에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손에는 탬버린 대신 길쭉한 나팔을 들었다.

그녀는 나팔을 불었다.

빠라밤.

그리고 삑사리가 났다.

삐익.

푸리나는 잠시 나팔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악기가 나빠.”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네가 너무 세게 불었어.”

“나는 항상 세게 불어!”

“그래서 그래.”

푸리나는 못 들은 척하고 외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 군주, 가신, 기사, 관료, 성직자, 세금 담당자 여러분!”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세금 담당자는 왜 따로 부르십니까?”

“오늘 중요하니까!”

푸리나는 과녁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노팅엄 활쏘기 대회를 시작합니다! 우승자는 황금 화살을 받게 됩니다!”

라이자가 무대 뒤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화살 하나를 들고 나왔다.

“황금이 아니라 은으로 만들었어요. 금색 도금은 했지만요.”

푸리나가 즉시 정정했다.

“우승자는 금색처럼 보이는 은화살을 받게 됩니다!”

라이자는 부끄럽게 웃었다.

“진짜 은이 더 예쁜데요.”

“맞아! 하지만 원작 분위기가 있으니까!”

객석에서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상품 표기가 중간에 변경되었습니다.”

아카식은 웃으며 말했다.

“좋은 기록이네. 은인데 금처럼 보이는 화살.”

알토는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혼동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재밌지.”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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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나는 참가자 명단을 펼쳤다.

그 명단은 그녀가 직접 쓴 것이라서, 누구도 동의한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참가자! 셔우드 숲의 유성, 로빈 후드!”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려다가 그레이와 레플리카의 시선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잠시 멈췄다.

“이번엔 계단으로 내려갈게.”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택이다.”

그레이도 조용히 말했다.

“안전합니다.”

죠니는 웃음을 참았다.

아스테르다스는 계단을 내려오며 조금 억울한 얼굴이었다.

“유성인데 계단이라니.”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말했다.

“떨어질 곳을 정하는 것도 자유다. 떨어지지 않을 곳을 고르는 것도 자유지.”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것도 자유로운 유성이네!”

“그 표현은 좋군.”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전술적으로도 손실이 적다.”

푸리나는 두 번째 이름을 읽었다.

“두 번째 참가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건조한 현실 담당, 죠니 죠스타!”

죠니는 고개를 돌렸다.

“나도 참가해?”

“응!”

“언제 정했어?”

“방금!”

“그럴 줄 알았어.”

죠니는 투덜거리면서도 활을 들었다. 자세는 과장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게 시위를 확인하고, 화살 깃을 만지고, 과녁까지 거리를 재는 듯 눈을 좁혔다.

푸리나는 세 번째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조금 멈칫했다.

“세 번째 참가자…”

그녀의 시선이 니케아 쪽으로 향했다.

“니케아 제국의 공동황제, 자주빛 활의 주인,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

객석 전체가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

미하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일어났다.

그 순간 무대 담당이 급히 과녁 뒤쪽에 추가 판자를 세우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네 개째에서 그레이가 말했다.

“부족할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잠깐! 특별 규칙!”

미하일라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으며 팻말을 들어 올렸다.

황제칙령급 사격 금지

미하일라는 잠시 그 팻말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짐은 아직 활시위도 당기지 않았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서 미리!”

그레이가 옆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보험료 문제도 있습니다.”

미하일라는 한 박자 침묵했다.

요안나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웃음을 참았다.

미하일라는 결국 활을 들지 않고 다시 앉았다.

“그렇다면 짐은 심판으로 남겠다.”

푸리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좋아! 제국이 과녁을 살렸다!”

슈샤니크가 조용히 말했다.

“정확히는 예산을 살렸군요.”

그레이는 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이번에는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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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나는 네 번째 참가자를 불렀다.

“네 번째 참가자!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장, 생명을 긍정하는 리틀 존,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아스트리트가 당당하게 나섰다.

그녀는 활 대신 자기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아스트리트, 활은?”

“저는 검과 봉술이 더 익숙합니다.”

“활쏘기 대회인데?”

“그러니 화살을 검으로 쳐서 과녁에 맞히면 되지 않을까요?”

긴 침묵.

그레이가 말했다.

“안 됩니다.”

죠니도 말했다.

“안 돼.”

레플리카도 말했다.

“위험하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아쉬워했다.

“그렇군요. 생명을 긍정하려면 참아야겠군요.”

푸리나는 재빨리 말했다.

“좋아! 아스트리트는 안전 감독관!”

아스트리트는 즉시 밝아졌다.

“맡겨주십시오!”

죠니가 작게 말했다.

“보안관, 안전 감독관, 심판. 의적단이 빠르게 관료화되고 있어.”

아스테르다스가 활을 들고 웃었다.

“셔우드 숲이 점점 나라가 되어가네.”

민다우가스는 그 말을 듣고 낮게 웃었다.

“모든 숲은 오래 버티면 질서를 만든다. 문제는 그 질서가 누구를 살리는가다.”

푸리나는 즉시 손뼉을 쳤다.

“좋아! 그 말 멋있어! 4막에서 써도 돼?”

민다우가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작권은 없다.”

아카식이 손을 들었다.

“방금 기록했어.”

알토가 옆에서 말했다.

“그 말은 불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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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이름 모를 노팅엄 병사 역 배우였다.

그는 지나치게 허세 섞인 걸음으로 나와 활을 들었다.

“보아라! 나의 명사격을!”

화살은 과녁을 지나쳐 무대 뒤의 나무 세트에 박혔다.

나무 세트가 흔들렸다.

그레이가 일어났다.

아스트리트가 바로 뛰어가 세트를 붙잡았다.

“안전 문제 발생!”

레플리카가 말했다.

“지나친 허세는 통증을 부른다.”

스토얀카가 웃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레플리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허세가 나쁘다는 뜻이지, 통증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스토얀카는 더 웃었다.

두 번째 참가자는 죠니였다.

그는 별다른 포즈 없이 선을 밟고 섰다.

푸리나는 조금 실망한 듯 말했다.

“죠니, 뭔가 더 멋있게 안 해?”

“맞히면 멋있는 거야.”

“그건 너무 현실적이야.”

“그래서 맞히기 좋지.”

죠니는 활을 들었다.

숨을 길게 들이쉬지도 않았다. 눈에 힘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시위를 당겼고, 자연스럽게 놓았다.

화살은 과녁 중앙 바로 옆에 꽂혔다.

딱.

정확했다.

하지만 과장되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오오!”

죠니는 활을 내렸다.

“중앙은 로빈 후드한테 남겨놔야지.”

아스테르다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거 배려야?”

“아니. 극 진행.”

“그게 배려잖아!”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웃으며 속삭였다.

“죠니답네.”

세 번째는 아스테르다스였다.

그는 활을 들고 선을 밟았다.

조명이 조금 낮아졌다.

나뭇잎 그림자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객석에서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말없이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테르다스는 손끝에 화살을 걸었다.

이건 진짜 전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숲과 달빛과 활이 함께 있으면, 리투아니아의 피는 늘 조금 더 조용해졌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화살은 날았다.

쐐액.

과녁의 정중앙.

죠니의 화살 바로 옆, 조금 더 깊이.

딱.

아스테르다스가 활을 내렸다.

그리고 관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봤어?”

민다우가스가 짧게 말했다.

“봤다.”

“어땠어?”

“무대 위에서는 충분하다.”

“현실에서는?”

민다우가스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현실에서는 두 번째 화살을 준비했어야 한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줄 알았어!”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나도 그 말 나올 줄 알았어.”

푸리나는 대회의 흥분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 순간 무대 한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대회에는 참가 자격 기준이 있습니까?”

알토였다.

그는 어느새 카드처럼 생긴 참가표를 들고 서 있었다. 누가 줬는지는 당연히 푸리나였다.

푸리나는 해맑게 웃었다.

“알토도 참가자야!”

알토는 참가표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동의한 기록이 없습니다.”

아카식이 객석에서 말했다.

“방금 생겼네.”

“그건 사후 기록입니다.”

“그래도 이야기에는 유용해.”

알토는 잠시 아카식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불리한 상황입니다.”

푸리나는 알토에게 활을 건넸다.

“자, 쏴봐!”

알토는 활을 받았다.

그의 자세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전투나 사냥이라기보다, 문서에 서명하기 전 모든 조항을 확인하는 사람의 자세였다.

그는 과녁을 보았다.

그다음 활을 보았다.

그다음 참가 규칙판을 보았다.

“거리, 화살 규격, 과녁 크기, 점수 산정 방식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냥 쏘면 돼.”

알토는 고개를 저었다.

“공정성 문제가 생깁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아까부터 세금 장부 보던 우리한테 공정성 말하면 이상하게 설득력 있네.”

알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록은 형식을 요구합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좋아! 알토는 규칙 담당!”

알토는 침묵했다.

아카식이 박수를 쳤다.

“승진했네.”

“참가자에서 담당자로 변경되었습니다. 직무 변경 사유가 불명확합니다.”

“푸리나니까.”

알토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근거로는 부족하지만, 설명력은 있습니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

활쏘기 대회는 점점 이상해졌다.

아스트리트는 안전선을 그었다.

그레이는 참가자 명단을 정리했다.

알토는 규칙판을 작성했다.

레이튼은 “과녁의 중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참가자들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푸리나는 사회를 보면서 마음대로 종목을 추가했다.

“이번 종목은 눈 가리고 사과 맞히기!”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금지합니다.”

“그럼 사과를 머리에 올리지 않고!”

“그래도 금지합니다.”

“그럼 그냥 사과 먹기!”

죠니가 말했다.

“그건 대회가 아니야.”

푸리나는 사과를 베어 물었다.

“맛있으면 됐어.”

라이자는 은꽃 장식이 달린 작은 사과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럼 참가자들에게 간식으로 나눠드릴게요.”

푸리나는 엄지를 들었다.

“메리언 최고!”

라이자는 활짝 웃었다.

“숲속 연회에는 반짝이는 게 조금 있어야 하니까요.”

아스테르다스가 사과를 받아 들고 말했다.

“좋네. 로빈 후드는 이렇게 먹어야지.”

죠니가 말했다.

“로빈 후드는 보통 도망치면서 먹을걸.”

“그럼 다음 막에서 도망치면서 먹자.”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달리면서 먹는 것은 위험합니다.”

레플리카도 말했다.

“목에 걸릴 수 있다.”

죠니는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오늘은 네 적이 많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아니.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은 거지.”

그 말에 그레이는 잠시 말을 멈췄고, 레플리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대회의 마지막 순서가 다가왔다.

푸리나는 은빛 금색 화살을 높이 들었다.

“자! 이제 결승입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나섰다.

죠니도 나섰다.

그런데 그 순간, 무대 왼쪽에서 다시 슈샤니크가 등장했다.

부패 귀족 역의 그녀는 여전히 정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어? 결승 중인데?”

슈샤니크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왔습니다.”

그녀는 손짓했다.

병사들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커다란 문서 봉투들을 들고 있었다.

그레이가 그 봉투를 보자마자 표정이 바뀌었다.

“저건…”

슈샤니크가 말했다.

“노팅엄 귀족 재판소의 긴급 명령서입니다. 현재 장부는 불법 탈취 증거물로 지정되었으며, 임시 보안관 그레이에게는 즉시 반납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잠깐. 그 장부로 네 부패가 들통났는데?”

슈샤니크는 미소 지었다.

“들통난 것과 증명된 것은 다릅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악역이 법을 쓰면 귀찮아지지.”

레이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주 좋은 장면입니다.”

그레이는 문서를 받아 읽었다.

몇 줄을 읽는 동안 그녀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조금 긴장했다.

“형식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물었다.

“그럼 돌려줘야 해?”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도 잠시 침묵했다.

그때 알토가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규칙판을 내려놓고, 슈샤니크가 건넨 명령서를 보았다.

“서명은 있습니다. 인장도 있습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알토는 다음 장을 넘겼다.

“하지만 발행 시간이 이상합니다.”

슈샤니크의 눈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알토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 명령서는 장부가 탈취되기 전에 작성되었습니다.”

무대 위가 조용해졌다.

레이튼이 미소를 지었다.

“아하.”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오오?”

알토는 명령서를 들어 올렸다.

“즉, 장부가 탈취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거나, 혹은 명령서의 시간이 조작되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슈샤니크는 말이 없었다.

알토는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

“절차의 형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절차의 시간 기록이 모순됩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별이 하나 더 이름을 잃었군요.”

아스테르다스가 활짝 웃었다.

“그럼 못 돌려주는 거지?”

그레이는 명령서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네. 이 장부는 반납할 수 없습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근거는?”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증거 보전 필요성. 시간 기록의 모순. 그리고 사망자 명의 징수 의혹.”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름이 남아 있는 이상, 확인해야 합니다.”

그 말에 잠시 희극의 조명이 낮아졌다.

죽은 사람의 이름.

세금 장부에 남은, 잘못 쓰인 이름.

그레이에게 그것은 단순한 개그 소재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웃었다.

밝게.

무거워지기 전에, 그러나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게.

“좋아!”

그녀가 탬버린을 들었다.

“그러면 결승 종목 변경!”

죠니가 말했다.

“또?”

푸리나는 외쳤다.

“마지막 종목은 과녁 맞히기가 아니야!”

그녀는 슈샤니크 쪽 병사들이 들고 온 문서 봉투들을 가리켰다.

“부패 귀족의 가짜 명령서를 꿰뚫어라!”

그레이가 당황했다.

“문서를 훼손하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즉시 수정했다.

“훼손하지 말고, 옆에 꽂아!”

죠니가 말했다.

“난 그걸 더 잘할 수 있어.”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좋아. 결승전답네.”

슈샤니크는 한숨처럼 웃었다.

“참으로 극장다운 재판이군요.”

푸리나는 윙크했다.

“칭찬으로 들을게!”

아스테르다스와 죠니가 나란히 섰다.

과녁 대신, 문서 봉투 세 개가 멀리 세워졌다. 봉투 옆의 아주 작은 붉은 표시가 목표였다. 맞히면 문서를 훼손하지 않고 봉투를 고정한 끈만 끊을 수 있었다.

죠니가 활을 들었다.

“왼쪽은 내가.”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오른쪽은 나.”

“가운데는?”

둘이 동시에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나?”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폐하는 활쏘기 참가자 명단에 없습니다.”

“아쉽다!”

그때 미하일라가 천천히 일어났다.

“가운데는 짐이 맡지.”

푸리나가 굳었다.

“황제칙령급 사격 금지!”

미하일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칙령이 아니다. 단순한 사격이다.”

그레이는 과녁 뒤의 벽을 보았다.

“정말 단순해야 합니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장하지.”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벽을 살려주세요.”

미하일라는 아주 작게, 정말 아주 작게 웃었다.

“노력하마.”

세 사람이 활을 들었다.

죠니.

아스테르다스.

미하일라.

객석의 웃음이 조용한 긴장으로 바뀌었다.

푸리나는 낮게 외쳤다.

“셋.”

시위가 당겨졌다.

“둘.”

숨이 멈췄다.

“하나.”

화살이 날았다.

죠니의 화살은 왼쪽 봉투 끈을 정확히 잘랐다.

아스테르다스의 화살은 오른쪽 봉투를 잡은 나무핀을 날려버렸다.

미하일라의 화살은 가운데 봉투 옆의 붉은 표시를 스치듯 지나가더니, 뒤편에 세워진 과녁 정중앙에 조용히 꽂혔다.

벽은 무사했다.

푸리나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살았다!”

그레이도 작게 말했다.

“벽이.”

죠니는 미하일라의 화살을 보고 말했다.

“저게 단순한 사격이면, 난 앞으로 활을 조심해서 들어야겠네.”

아스테르다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멋있었어!”

미하일라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대회 규정은 지켰다.”

알토가 규칙판을 확인했다.

“규정 위반은 없습니다. 애초에 규정이 방금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훌륭한 결론이네.”

슈샤니크는 세 봉투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서 장부 위조 지시서, 사전 작성 명령서, 그리고 귀족의 비밀 회계표가 쏟아졌다.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이것으로 노팅엄 활쏘기 대회의 우승자는!”

아스테르다스가 가슴을 폈다.

죠니는 별 기대 없이 서 있었다.

미하일라는 애초에 관심 없어 보였다.

푸리나는 외쳤다.

“증거!”

긴 침묵.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그건 참가자가 아닙니다.”

푸리나는 당당했다.

“하지만 제일 많이 이겼어!”

레이튼은 웃음을 터뜨렸다.

“훌륭한 판정입니다. 오늘의 우승자는 진실에 가까워진 증거라 해도 좋겠군요.”

아스테르다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증거가 이겼으면 됐지.”

죠니가 은빛 금색 화살을 들어 아스테르다스에게 던졌다.

“그래도 네가 가져.”

아스테르다스가 받았다.

“왜?”

“로빈 후드잖아.”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그를 보다가 씩 웃었다.

“고맙다, 죠니.”

“별말을 다 하네.”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서 크게 외쳤다.

“3막 종료! 활은 날았고, 벽은 살았으며, 장부는 더 수상해졌다!”

그레이가 말했다.

“장부는 수상한 것이 아니라, 검토가 필요한 것입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게 더 무서워.”

무대 뒤의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나쁜 세금의 기준

객석에서 박수가 울렸다.

아스테르다스는 은빛 화살을 어깨에 걸고 웃었다.

그레이는 장부와 명령서를 함께 정리했다.

레이튼은 차분히 다음 질문을 준비했다.

푸리나는 이미 다음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슈샤니크는, 악역의 미소를 유지한 채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기준을 묻는 차례겠군요.”

그 말은 희극의 무대 위에서도 꽤 날카롭게 들렸다.
4막 — 나쁜 세금의 기준

죠니 말투 개정본

무대가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 숲은 처음의 셔우드 숲과 달랐다.

아까의 숲이 뛰어내리고, 웃고, 도망치고, 활을 쏘는 숲이었다면, 지금의 숲은 조금 더 조용했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조명은 푸른빛이었고,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가 놓여 있었다.

그루터기 위에는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세금 장부.

납세자 명단.

사망자 명단.

그리고 방금 활쏘기 대회에서 떨어져 나온 귀족의 비밀 회계표.

아스테르다스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로빈 후드의 초록 망토를 두르고, 은빛 화살을 허리띠에 꽂고, 세상에서 가장 의적답지 않은 얼굴로 장부를 보고 있었다.

그는 한참 장부를 보다가 말했다.

“좋아.”

죠니가 옆에서 물었다.

“그래. 이번엔 뭐가 좋은데?”

“아직 하나도 모르겠다는 걸 알았어.”

“발전이네. 보통은 모르면서 쏘니까.”

“너 지금 나 칭찬한 거야?”

“반쯤.”

“나머지 반은?”

“경고.”

아스테르다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는 장부를 한 장 넘겼다.

“여기부터 보시면 됩니다. 이 마을은 원래 흉작 감면 대상입니다. 그런데 감면은 기록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시 추가세가 붙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눈을 찡그렸다.

“흉작인데 추가세?”

“네.”

“그럼 먹을 게 없는데 더 내라고 한 거야?”

“장부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조금 빠졌다.

“그건 나쁜 세금 맞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장을 펼쳤다.

“하지만 이쪽은 다릅니다. 성벽 보수세입니다. 실제로 성벽이 무너졌고, 이 세금 덕분에 겨울 전까지 보수될 예정이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건 나쁜 세금이 아니네?”

“아마도요.”

“아마도?”

“보수 공사비가 실제로 쓰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세금 어렵다.”

죠니가 팔짱을 꼈다.

“훔칠 땐 상자 하나인데, 열어보면 사람이 여럿 나오거든. 배고픈 사람, 성벽 고치는 사람, 중간에서 떼먹은 사람.”

아스테르다스가 그를 보았다.

“그거 꽤 좋은 말인데?”

“좋은 말 같으면 적어둬. 나중에 폐하가 제목으로 쓸지도 몰라.”

무대 가장자리의 푸리나가 눈을 번쩍였다.

“방금 제목 후보였어?”

죠니는 푸리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봐. 이미 걸렸잖아.”

아스테르다스는 다시 웃었다.

그때 레이튼이 그루터기 옆에 앉았다.

그는 숲속 수도사 역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재판관처럼 보였다. 손에는 찻잔이 있었고, 무릎 위에는 작은 수첩이 놓여 있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질문을 정리해보지요.”

아스테르다스가 긴장했다.

“질문이 또 늘어나는 거야?”

“좋은 질문은 길을 줄이기도 합니다.”

“정말?”

“가끔은요.”

죠니가 찻잔을 힐끗 보았다.

“저 말은 ‘늘어난다’는 뜻이야. 마음의 준비 해.”

레이튼은 웃기만 했다.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 단순히 ‘세금은 나쁜가’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세 가지입니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첫째. 이 세금은 필요한 목적을 위해 걷혔는가?”

두 번째 손가락.

“둘째. 걷은 만큼 실제로 그 목적에 사용되었는가?”

세 번째 손가락.

“셋째. 그 과정에서 누군가 책임 없이 이름을 지웠는가?”

그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의 한 줄을 짚었다.

“여기. 사망자 명단에 오른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납세자 명단에도 같은 이름이 있습니다. 세금을 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탬버린을 손에 든 채 조용해졌다.

아까까지 계속 뛰어다니던 그녀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객석도 조금 조용해졌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작았다.

“죽은 사람의 이름이 장부에 남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잊히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천천히 다음 줄을 보았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돈이 빠져나갔다면, 그건 이름을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손끝이 장부 위에 멈췄다.

“이름을 훔친 겁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죠니도 바로 농담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를 내려다보다가, 낮게 말했다.

“그건 도둑질 중에서도 질이 나쁘네. 돈만 가져간 게 아니니까.”

레이튼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푸리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장난을 위한 웃음이 아니었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그럼 오늘의 로빈 후드는 금화를 되찾는 게 아니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손에 든 탬버린을 천천히 낮췄다.

“이름을 되찾는 거야.”

그레이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 표현은… 맞습니다.”

죠니가 그 분위기를 너무 가라앉지 않게 옆에서 툭 던졌다.

“이제 좀 그럴듯해졌네. 처음엔 그냥 상자 들고 뛰는 줄 알았는데.”

아스테르다스가 그를 보았다.

“그렇게 보였어?”

“응.”

“너무하네.”

“사실이야. 근데 지금은 좀 달라.”

아스테르다스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갑자기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아.”

죠니가 물었다.

“이번엔 또 뭐야?”

“이거 원래 쾌활한 숲속 활극 아니었어?”

푸리나가 즉시 대답했다.

“맞아!”

“그런데 지금 분위기 무거워졌는데?”

“그러니까 다시 뛰면 돼!”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뛰기 전에 자료를 정리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검지를 세웠다.

“그레이.”

“네.”

“자료 정리도 뛰면서 하면 안 돼?”

“안 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죠니가 푸리나를 보며 말했다.

“폐하, 장부 들고 뛰게 하면 그레이가 사람보다 장부를 먼저 구하러 갈지도 몰라.”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장부를 구하면서 사람도 같이 구하겠지.”

그레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레이라면 둘 다 해!”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활짝 웃으며 탬버린을 흔들었다.

“좋아! 그러면 4막은 이렇게 가자. 전반부는 기준 정리! 후반부는 기준에 따라 털기!”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털기가 아니라 환수입니다.”

“좋아! 기준에 따라 환수하기!”

아스테르다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건 좀 멋없는데.”

죠니가 말했다.

“멋없는 이름일수록 나중에 덜 얻어맞아. 경험상 그래.”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곰곰이 씹었다.

“그건 로빈 후드답지 않은데.”

“로빈 후드가 오래 살려면 가끔은 로빈 후드답지 않아야지.”

레이튼이 웃으며 말했다.

“그 대신 오래갑니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듣고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오래가는 의적이라.”

그는 씩 웃었다.

“좋아. 나쁘지 않네.”


---

그때 무대 왼쪽에서 슈샤니크가 다시 등장했다.

부패 귀족 역의 그녀는 여전히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방금 전 활쏘기 대회에서 자신의 문서 봉투가 바닥에 떨어졌고, 비밀 회계표가 드러났는데도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느릿하게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훌륭합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오, 악역 등장!”

슈샤니크는 미소 지었다.

“그 표현은 조금 직접적이군요.”

아스테르다스가 활을 들었다.

“이번엔 뭐야? 또 문서?”

죠니가 작게 말했다.

“문서면 활보다 더 아플 수도 있어. 특히 그레이가 읽으면.”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읽어야 할 문서라면 읽겠습니다.”

“그래. 그게 무서운 거야.”

슈샤니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뒤에서 병사들이 커다란 판자를 들고 나왔다. 그 판자에는 여러 마을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금을 거두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벽을 세우고, 병사를 먹이고, 길을 고치고, 겨울을 넘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녀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 점은 보안관도 부정하지 않겠지요.”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슈샤니크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렇다면 숲속 의적은 무엇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약자를 돕는다는 말? 귀족이 탐욕스럽다는 인상? 죽은 자의 이름 몇 개?”

아스테르다스의 손이 활시위에 닿았다.

하지만 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계속 말했다.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노래가 아닙니다. 활쏘기 대회도 아니고, 숲속 연회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거둬야 하고, 누군가는 미움을 받아야 하며, 누군가는 장부에 차가운 숫자를 써야 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 악역인데 너무 설득력 있네.”

슈샤니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악역은 절반쯤 옳은 말을 하지요.”

객석에서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그 점은 기록할 가치가 있습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그런 악역, 좋아하지?”

“판단은 보류합니다.”

슈샤니크는 다시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그러니 말해보십시오, 로빈 후드. 나쁜 세금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대가 조용해졌다.

아스테르다스는 입을 열려다 멈췄다.

그는 원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울리는 세금.

귀족 배를 불리는 세금.

숲속 의적이 털어도 되는 세금.

하지만 이제는 그 답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튼이 그를 보았다.

그레이도 보았다.

죠니는 아스테르다스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낮게 말했다.

“이번엔 바로 쏘지 마. 답도 화살처럼 한 번 나가면 돌아오기 힘들어.”

아스테르다스는 천천히 활을 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쁜 세금은…”

그는 장부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세금이다.”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아스테르다스는 이어 말했다.

“성벽을 세우기 위해 걷는 건 필요할 수 있어. 병사를 먹이기 위해 걷는 것도, 겨울을 넘기기 위해 걷는 것도 필요할 수 있지. 나는 그걸 부정하지 않아.”

그는 민다우가스를 향해 잠깐 시선을 돌렸다.

“숲도 오래 버티면 질서를 만든다고 했지. 맞아. 질서 없이 숲은 사람을 숨겨줄 수 없어.”

민다우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이 조금 낮아졌다.

아스테르다스는 다시 슈샤니크를 보았다.

“하지만 그 질서가 사람의 이름을 지우기 시작하면, 그건 지켜야 할 질서가 아니야.”

그는 장부를 집어 들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굶어 죽을 만큼 걷고,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다시 걷고, 그 이름을 숫자로만 남겨서 누가 아팠는지, 누가 죽었는지, 누가 빼앗겼는지 모르게 만드는 것.”

아스테르다스는 웃지 않았다.

“그게 나쁜 세금이야.”

조용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좋은 답입니다.”

죠니가 아스테르다스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됐네. 이번엔 숲 냄새만 나는 답은 아니야.”

아스테르다스는 눈을 깜박였다.

“그거 칭찬 맞지?”

“응. 네 기준으로는 꽤 큰 칭찬.”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낮게 웃었다.

“거칠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러나 숲에서 나온 답치고는 나쁘지 않다.”

아스테르다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건 진짜 칭찬이지?”

민다우가스는 느리게 말했다.

“이번에는 그렇다.”

아스테르다스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좋아!”

그레이가 작게 덧붙였다.

“다만 구체적 배상 기준은 아직 필요합니다.”

아스테르다스의 주먹이 다시 내려갔다.

“알아…”

죠니가 피식 웃었다.

“영웅답게 한마디 하고 끝내고 싶었지?”

“응.”

“세상은 보통 그 다음 장에 표를 붙여.”

“너무 현실적이야.”

“그러려고 옆에 있는 거야.”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훌륭한 대답입니다. 다만, 훌륭한 대답은 곧 훌륭한 실행을 요구합니다.”

그녀는 손짓했다.

병사들이 판자를 뒤집었다.

그 뒷면에는 세 개의 길이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길에는 금화 자루가 놓여 있었다.

두 번째 길에는 성벽 모형이 있었다.

세 번째 길에는 빈 식탁이 그려져 있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착복분은 세 곳에 걸쳐 있습니다. 하나는 귀족의 사적 금고. 하나는 실제 성벽 보수비에 섞여 있습니다. 하나는 굶주린 마을로 가야 할 곡물 대금입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제 고르십시오. 어디부터 환수하시겠습니까?”

푸리나가 입을 열었다.

“셋 다!”

그레이가 말했다.

“동시에 움직이면 인원이 부족합니다.”

아스트리트가 즉시 나섰다.

“의적단을 세 조로 나누겠습니다.”

그레이는 생각했다.

“가능합니다. 다만 각 조에 기록 담당이 필요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의적단이 하루 만에 관청이 됐네.”

레이튼은 즐거워했다.

“문명이 생기는 과정이군요.”

“그럼 문명은 꽤 피곤하네.”

아스테르다스는 세 길을 보았다.

그의 눈은 먼저 금화 자루로 갔다.

전형적인 로빈 후드라면 금화부터 털었을 것이다.

그다음 성벽 모형.

국가를 생각하는 자라면 성벽을 고쳤을 것이다.

마지막은 빈 식탁.

가난한 마을의 곡물 대금.

그는 고민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죠니도 기다렸다.

그레이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더하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천천히 말했다.

“먼저 식탁.”

슈샤니크의 미소가 멈췄다.

아스테르다스는 빈 식탁 그림을 가리켰다.

“성벽도 중요하고, 금고도 털어야 해. 하지만 굶는 사람은 오늘 굶어. 성벽은 며칠 뒤에 무너질 수 있지만, 빈 식탁은 오늘 사람을 쓰러뜨려.”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 배상 우선순위로는 맞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그다음 성벽. 겨울이 오기 전에 무너지면 안 되니까.”

죠니가 물었다.

“금고는?”

아스테르다스는 씩 웃었다.

“그건 마지막에 아주 시끄럽게 턴다.”

죠니도 따라 웃었다.

“좋네. 조용히 끝나면 폐하가 섭섭해할 거야.”

푸리나가 바로 외쳤다.

“맞아! 극적으로 완벽해!”

그레이는 조용히 덧붙였다.

“행정적으로도… 크게 틀리진 않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거의 감동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가 인정했어.”

죠니가 말했다.

“오늘 네가 받은 전리품 중 제일 비싼 거야. 잘 챙겨.”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레플리카가 객석에서 차분하게 말했다.

“굶주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먼저 식탁이라는 판단은 옳다.”

스토얀카가 그녀를 보았다.

“그대도 의적질을 인정하는가?”

“의적질이 아니라 배상이다.”

레플리카는 무대를 보며 말했다.

“고통이 이미 발생했다면, 먼저 더 깊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명칭은 그다음이다.”

그레이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죠니도 말리지 않았다.


---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그럼 작전 개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셔우드 숲의 의적단은 세금의 기준을 물었고, 이름을 되찾기로 했으며, 첫 번째 목표는 빈 식탁!”

아스트리트가 지팡이를 들었다.

“제1조, 곡물 대금 회수!”

그레이가 서류를 나눠주었다.

“각 조는 이 임시 배상 확인표를 지참하십시오.”

아스테르다스가 종이를 받았다.

“이거 없으면 못 뛰어?”

“나중에 문제가 생깁니다.”

죠니가 옆에서 종이를 하나 받아 들었다.

“품 안에 넣어. 접지 말고. 그레이가 보는 앞에서 접으면 오늘은 네가 악역이야.”

아스테르다스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들었다.

“그 정도야?”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접어도 되지만, 글자가 훼손되면 다시 작성해야 합니다.”

죠니는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봤지? 더 무섭지?”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라이자가 은빛 끈으로 작은 문서 주머니를 만들어 달아주었다.

“이렇게 넣으면 안 구겨질 거예요!”

그레이는 그 주머니를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방수 처리가 되어 있습니까?”

라이자는 활짝 웃었다.

“은실을 조금 섞었어요. 물방울이 잘 안 스며들 거예요.”

“훌륭합니다.”

라이자는 그 칭찬에 정말 기뻐했다.

“다행이에요!”

푸리나는 두 사람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숲속 의적단이 점점 복지 행정 조직이 되어가고 있어.”

죠니가 말했다.

“네가 만든 숲이야. 책임져.”

“싫어!”

“그럼 그레이가 책임질걸.”

“그건 더 싫어!”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이미 일부 책임지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가슴을 붙잡았다.

“그레이가 너무 강해졌어.”

죠니는 피식 웃었다.

“원래 강했어. 네가 자주 못 본 척했을 뿐이지.”


---

그때 슈샤니크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또?”

“곡물 대금은 이미 귀족의 사적 창고가 아니라, 노팅엄 성 안쪽 회계실로 옮겨졌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그럼 성 안으로 들어가면 되겠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무단 침입은 안 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멈췄다.

“로빈 후드인데?”

“그래도 안 됩니다.”

죠니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문으로 들어가야겠네.”

아스테르다스가 그를 보았다.

“문으로?”

“응. 가끔은 문이 제일 덜 귀찮아.”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초대받으면 되겠지요.”

푸리나의 눈이 번쩍였다.

“오.”

슈샤니크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은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마침 노팅엄 성에서는 오늘 활쏘기 대회 우승자를 위한 만찬이 있지 않습니까?”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있어! 방금 생겼어!”

그레이가 눈을 감았다.

“또 방금…”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좋아. 그럼 우리는 만찬에 초대받은 의적단이 되는 거야?”

죠니가 말했다.

“변장이 필요하겠네. 너는 일단 ‘나 로빈 후드다’라고 외치는 습관부터 숨겨.”

아스테르다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렵겠는데.”

“알아. 그래서 걱정이야.”

라이자가 이미 은꽃 장식 망토를 들고 있었다.

“준비했어요!”

아스트리트가 진지하게 물었다.

“만찬장 침투 대형도 필요합니까?”

죠니가 바로 말했다.

“그건 마음속에만 만들어.”

아스트리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비상시에만 사용하겠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됐어.”

레이튼은 차분히 말했다.

“그렇다면 5막은 잠입극이 되겠군요.”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정답!”

그녀가 크게 외쳤다.

“4막 종료! 나쁜 세금의 기준은 정해졌고, 첫 번째 목표는 빈 식탁! 그리고 의적단은 이제 노팅엄 성의 만찬장으로 향한다!”

그레이가 작게 덧붙였다.

“초대장 확인 후에요.”

푸리나가 말했다.

“초대장은 내가 만들게!”

“위조는 안 됩니다.”

“그럼 공식 즉흥 초대장!”

“그것도 안 됩니다.”

죠니가 푸리나를 향해 말했다.

“폐하, 그건 그냥 위조를 예쁘게 부른 거야.”

푸리나는 볼을 부풀렸다.

“쳇.”

레이튼이 웃으며 말했다.

“초대받을 방법을 찾는 것도 수수께끼겠지요.”

아스테르다스는 활을 어깨에 걸었다.

“좋아. 이번엔 뛰어들기 전에 물어보는 거지?”

죠니가 대답했다.

“응. 물어보고, 문으로 들어가고, 들키면 그때 뛰어. 순서만 지켜도 꽤 나아져.”

“역시 죠니. 현실적이야.”

“현실은 오래 살아남는 쪽이 이기거든.”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무대 뒤의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5막 — 셔우드 숲의 잠입 만찬

푸리나는 그 제목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계획은 추격전이었는데.”

죠니가 말했다.

“네 연극은 늘 옆길로 새잖아. 그래도 대체로 돌아오긴 해.”

“그거 칭찬이야?”

“반쯤.”

“나머지 반은?”

죠니가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경고.”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푸리나도 웃었다.

그리고 조명이 꺼졌다.

무대 위에는 마지막으로 빈 식탁 그림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식탁 위에, 누군가가 작은 빵 하나를 올려두고 갔다.
#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 프롤로그 — 극장 안에 배를 띄우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극장은 그날, 바다가 되어 있었다.

물론 진짜 바다는 아니었다.

바닥에는 푸른 천이 넓게 깔렸고, 그 위로 은빛 실이 물결처럼 수놓여 있었다. 무대 뒤편에는 둥근 달이 걸렸고, 천장에는 종이 갈매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커다란 돛대는 객석에서도 보일 만큼 높았으며, 배의 난간에는 흰 천과 낡은 밧줄, 조그만 등불들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배의 앞머리에는, 푸리나 헤툼의 글씨로 이런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그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로 부제가 붙어 있었다.

**— 목적지까지 책임지지는 않음 —**

죠니 죠스타는 그 문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오디세우스 역을 맡았다. 아니, 푸리나가 그렇게 정했다. 본인 동의는 없었다. 어깨에는 낡은 항해자 망토가 걸려 있었고, 허리에는 짧은 검이 있었으며, 손에는 아직 쓰지도 않은 노가 들려 있었다.

죠니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

“폐하.”

푸리나는 배 위에서 두 팔을 펼치고 있었다.

“응?”

“저 부제는 좀 불안한데.”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부분이?”

“전부.”

“하지만 정직하잖아!”

“정직한 사고 예고문이야.”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침몰하지 않아!”

죠니는 푸른 천으로 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극장 안에서 침몰하면 그건 꽤 재능 있는 사고지.”

“그렇지? 나도 그건 좀 어렵다고 생각해.”

“그걸 듣고 안심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더 불안하네.”

그때 그레이가 조용히 무대 옆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검소한 옷차림이었지만, 오늘은 작은 항해 기록판과 천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천 주머니 안에는 두툼한 담요 몇 장, 말린 수건, 물병, 얇은 붕대, 그리고 작은 빵들이 들어 있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레이! 명단 준비됐어?”

그레이는 잠시 천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명단도 준비했습니다.”

“역시!”

“하지만 먼저 담요와 물을 배치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담요?”

“배가 흔들릴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죠니가 푸리나를 보았다.

“흔들릴 예정이었어?”

푸리나는 시선을 피했다.

“연출상?”

죠니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배는 안 움직여도 사람은 굴릴 생각이었네.”

그레이는 담요를 배의 난간 옆에 하나씩 접어두었다.

“멀미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젖는 연출이 있다면 갈아입을 천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혹시 무대 위에서 넘어지면 바로 앉을 곳도 있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조금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레이, 오늘은 그냥 연극인데?”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네.”

그녀는 아주 작게, 그러나 단정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연극이라면, 다치지 않게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죠니는 담요 더미를 보다가 툭 말했다.

“좋네. 오디세우스도 담요는 필요했을 거야.”

푸리나가 바로 웃었다.

“오디세우스가 담요 덮고 항해하는 건 좀 귀여운데?”

“아마 본인은 안 귀여웠을걸.”

“죠니는 귀여울 수 있어.”

“그 말은 항해 시작 전에 철회해.”

“싫어.”

그레이는 둘의 대화를 듣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 웃었다!”

그레이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착각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늦었어. 폐하가 봤으면 기록된 거야.”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이미 만족한 듯 배 난간을 두드렸다.

---

객석에는 다시 여러 나라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니케아의 미하일라는 배의 구조를 보는 듯했고, 요안나는 바다 천이 파도처럼 흔들리는 것을 조금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슈샤니크는 “임시 극장선”이라는 이름을 보고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아직 말하지 않았다.

민다우가스는 조용히 돛대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이미 배 난간 위에 올라가려다, 레플리카와 그레이의 시선이 동시에 닿자 얌전히 내려왔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레플리카가 차분히 말했다.

“그래서 내려오는 것이 낫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차르님은 오늘도 정확하네.”

“바다는 실수에 관대하지 않다. 무대 위 바다라도, 발을 헛디디면 아프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오늘 저 말 자주 듣게 될 것 같네.”

아스테르다스는 배 난간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바다는 좋잖아. 어디든 갈 수 있고.”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은 장점이자 위험이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돌렸다.

민다우가스는 담담히 이어 말했다.

“돌아올 항구를 정하지 않은 항해는 방랑이다. 방랑이 나쁜 것은 아니나, 방랑과 귀향은 다르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럼 오늘은 귀향이네?”

민다우가스는 배 앞머리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그렇게 적혀 있군.”

죠니가 작게 말했다.

“저 부제까지 같이 읽으면 확신은 좀 줄어들지만.”

푸리나는 바로 항의했다.

“죠니!”

“왜. 네가 쓴 거잖아.”

“그래도 분위기는 살려줘!”

“나는 생존을 살리는 쪽이라서.”

---

푸리나는 마침내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오늘 그녀는 음유시인이자, 아테나 비슷한 후원자이자, 이 극의 연출자였다. 푸른 리본이 달린 흰 망토를 두르고, 손에는 작은 류트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한 번 현을 튕기자, 극장 안의 종이 갈매기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여러분!”

그녀의 목소리가 극장 안을 맑게 울렸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웃었다.

“전쟁이 끝났고, 영웅은 배에 오릅니다. 섬들이 나타나고, 괴물들이 기다리고, 노래가 부르고, 바다는 길을 감춥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돌아가야 하지요.”

그녀는 배의 난간을 두드렸다.

“왜냐하면 이타카가 있으니까!”

죠니가 낮게 말했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말해주는 건 친절하네.”

푸리나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오늘의 오디세우스!”

죠니는 이미 포기한 얼굴이었다.

“응. 알고 있어.”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줘.”

“그건 배가 실제로 출발하면 생각해볼게.”

“안 움직인다니까!”

“그래서 감동도 반쯤만.”

객석에서 웃음이 낮게 퍼졌다.

푸리나는 류트를 다시 튕겼다.

“하지만 이번 극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닙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길을 아는 일이기도 하고, 길에서 잃은 것을 세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주 잠깐.

그리고 다시 밝게 웃었다.

“물론 처음부터 너무 무겁게 가면 재미없으니까, 먼저 출항부터 합시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제일 위험해.”

---

그레이는 배 뒤편에서 승선자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딱딱하게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담요는 필요 없으십니까?”

“물이 가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발끈이 풀렸습니다. 항해 중에는 걸릴 수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신발끈을 보고 웃었다.

“정말 풀렸네.”

그레이는 몸을 숙여 매듭을 다시 묶어주려다 멈췄다.

“직접 하실 수 있습니까?”

아스테르다스는 눈을 깜박였다.

“응? 물론이지.”

“그럼 직접 묶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항해 중에 다시 풀리면 바로 고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그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조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는 직접 신발끈을 묶었다.

죠니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뛰어내리기 전에 신발끈도 보는 거네. 많이 컸다.”

아스테르다스가 씩 웃었다.

“로빈 후드 때 배웠거든.”

“좋네. 공연이 교육 효과가 있었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그건 좋은 일입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 너 지금 꽤 만족했지?”

“안전한 행동은 만족할 만합니다.”

“그건 맞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류트를 품에 안았다.

“좋아. 이번 귀향극, 시작이 괜찮아.”

죠니가 물었다.

“어느 부분이?”

푸리나는 웃었다.

“다들 아직 배에 타기도 전에 조금씩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잖아.”

그 말에 죠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가끔 꽤 좋아.”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칭찬이야?”

“반쯤.”

“나머지 반은?”

“아직 출항 전이니까 보류.”

푸리나는 웃었다.

---

레이튼은 조용히 배에 올랐다.

오늘 그는 항해 참모이자 질문자였다. 손에는 나침반 대신 둥근 수수께끼판을 들고 있었다.

죠니가 그것을 보고 물었다.

“그거 나침반이야?”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방향을 알려주기는 합니다.”

“북쪽?”

“아뇨. 질문 쪽으로요.”

죠니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거 배에서 제일 위험한 물건일지도 모르겠네.”

레이튼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는 죠니 옆에 서서 물었다.

“선장님. 집이란 목적지입니까, 아니면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입니까?”

죠니는 바로 대답했다.

“지금은 항구 이름이면 충분해.”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첫 번째 답으로는 훌륭하군요.”

“첫 번째면 나중에 또 묻겠다는 뜻이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나중에 짜증낼 준비도 해둘게.”

레이튼은 아주 만족한 듯했다.

---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 섰다.

그는 조용히 푸른 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대 장치에 불과한 천 물결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 너머의 길들이 희미하게 겹쳐 보이는 듯했다.

가지 않은 물길.

돌아오지 못한 배.

한 번만 방향을 달리했어도 살아남았을 선원들.

그리고 아직 닿을 수 있는 하나의 항구.

하융은 낮게 말했다.

“물결은 모두 길처럼 보이나, 모든 길이 귀향은 아니오.”

푸리나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좋아. 조타수 대사로 완벽해.”

죠니가 하융을 보았다.

“그럼 어느 쪽이 이타카야?”

하융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직은 보이지 않소.”

죠니는 숨을 내쉬었다.

“출항 전부터?”

“안개가 짙소.”

“극장 안인데도?”

하융은 진지했다.

“무대의 안개도 길을 가리오.”

죠니는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배에선 그 정도면 평범한 대답이네.”

---

마침내 출항 준비가 끝났다.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섰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무대 양쪽의 배우들이 푸른 천을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바다가 움직였다. 배는 가만히 있었지만, 빛과 천과 음악 때문에 정말로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객석의 요안나는 작게 숨을 삼켰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하나 켰다.

아카식은 느긋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알토는 그 옆에서 말없이 보다가, 결국 한 줄을 적었다.

**극장 안의 배. 그러나 출항감 있음.**

아카식은 그걸 보고 웃었다.

“귀엽네.”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류트를 높이 들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출항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순한 사회자의 외침이 아니었다.

그 순간 푸리나 헤툼의 신술이, 아주 얇게 극장 전체에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것은 바다를 불러오는 신술이 아니었다.

왕궁을 없애고, 진짜 파도와 폭풍을 끌어들이는 기적도 아니었다. 푸른 천은 여전히 천이었고, 돛대는 여전히 목재였으며, 종이 갈매기는 줄에 매달린 종이 갈매기였다.

하지만 푸리나의 극은, 사물을 바꾸기 전에 먼저 사람을 무대 위에 세웠다.

배우들은 더 이상 단순히 배 역할을 하는 장치 위에 선 것이 아니었다.
관객들도 더 이상 안전한 객석에 앉아 남의 항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떠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는 선원이었고.
누군가는 배웅하는 이였고.
누군가는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집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자기 배역을 받아들이자, [여관:극장]의 막이 한 겹 열렸다.

천이 물결처럼 출렁였다.

아니, 출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종이 갈매기들이 줄에 매달린 채 흔들렸다.

아니, 바람을 타고 정말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머리카락 끝에 바닷바람이 스쳤다.
소금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났다.
멀리, 보이지 않는 파도가 배 옆구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순간적으로 담요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을 얹었다.

죠니는 발밑의 갑판이 아주 작게 기울어진 것을 느끼고, 난간을 붙잡았다.

“폐하.”

그가 낮게 말했다.

“방금 배 움직였지?”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고 웃었다.

“조금만.”

죠니는 푸른 천 위에 겹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조금만’이 바다에서는 제일 위험하다니까.”

“하지만 안 넘어졌잖아.”

“그래. 아직은.”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웃음이 아주 조금 낮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바다는 진짜 바다가 아니다.
하지만 떠나는 마음은 진짜였다.

이 배는 무대 위에 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무대 장치가 아니었다.

배우들이 흔드는 푸른 천 위로, 한 겹의 파도가 더 겹쳤다.
달은 등불이었지만, 달빛은 차가웠다.
갈매기는 종이였지만, 울음소리는 멀었다.

객석의 사람들도 잠시 말을 잃었다.

그들은 무대 장치를 보고 있었다.
동시에 배웅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류트를 다시 튕겼다.

첫 노래는 아주 밝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떠나는 노래였다.

> 바다는 천으로 짰고,
> 달은 등불로 걸었네.
> 그래도 떠나는 사람은
> 뒤돌아볼 곳을 찾네.
>
> 이타카여, 아직 멀어도
> 불 하나만은 꺼뜨리지 마라.
> 돌아오는 이는 젖어 있을 테니,
> 마른 천 하나 남겨두어라.

죠니는 노래를 듣다가 작게 말했다.

“폐하.”

“응?”

“이번 노래는 괜찮네.”

푸리나는 조금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정말?”

죠니는 앞을 보며 대답했다.

“응. 너무 세게 안 불어서.”

푸리나는 웃었다.

“그게 칭찬이야?”

“내 기준에선 꽤 큰 칭찬.”

그레이는 배 뒤편에서 마지막 담요를 접어두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돌아오면, 젖은 옷부터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죠니에게인지.

배에 탄 모두에게인지.

아니면 언젠가 돌아올 수 있는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까지 향한 말인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받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배는 무대 위에 있었다.

그러나 바다는 흔들렸다.

그리고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극장 안에서 정말로 먼 길을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 앞으로 죠니가 푸리나를 부를 때는 **“폐하”보다 “여왕님”**으로 갈게.
아래는 그 호칭까지 반영한 1막 개정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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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막 — 키클롭스의 동굴과 아무도 아닌 선장

### 호칭 반영 개정본

처음의 바다는 순했다.

푸른 천 위로 얇은 파도들이 반복해서 접히고 펴졌다. 무대 양옆의 배우들이 천을 흔들 때마다, [여관:극장]의 얇은 막이 그 움직임에 숨결을 보탰다. 물결은 실제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배 옆구리를 두드리는 소리는 실제처럼 들렸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왕궁 극장의 중앙에 있었지만, 그 위에 선 사람들은 어느새 조금씩 균형을 잡고 있었다.

죠니는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배는 안 움직이는데, 다들 걸음걸이가 바뀌었네.”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고 웃었다.

“그게 극장의 힘이지!”

“아니. 여왕님이 바닥을 흔들어서 그래.”

“조금만 흔들었어.”

“그 ‘조금만’이 오늘 계속 쌓이면, 배가 안 움직여도 난파할 수 있겠는데.”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파는 4막 이후로 미뤄놨어!”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여왕님, 난파를 일정표에 넣는 선장은 보통 오래 못 가.”

“나는 선장이 아니라 연출자야!”

“그게 더 무서운 부분이야.”

그레이는 조용히 선원들 사이를 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명단판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작게 접은 천과 물병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누군가 실제로 멀미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푸리나의 신술이 불러온 출항감은 생각보다 생생했다. 몇몇 배우는 무대 위에서 정말 배를 탄 사람처럼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레이는 한 병사 역 배우에게 물병을 건넸다.

“목이 마르면 조금씩 드세요. 한 번에 많이 마시면 더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배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연극인데도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연극이라도, 몸은 진짜입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배 위에 남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류트 줄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밝게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레이답다!” 하고 외치며 다시 모두를 웃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잘 돌아와야지.”

죠니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오늘은 대사가 좀 얌전하네.”

“나도 분위기는 읽거든?”

“가끔.”

“죠니!”

“칭찬이야. 오늘은 꽤 자주 읽고 있어.”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지만, 웃었다.

그때 하융이 조타수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푸른 천 너머, 무대 뒤편의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개는 흰 천과 연기로 만든 무대 장치였다. 그러나 하융의 눈에는 그것이 단순한 장치로만 보이지 않는 듯했다.

“섬이오.”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벌써?”

“귀향의 길은 직선이 아니오. 떠나자마자 길을 잃는 것도, 오래된 서사의 예법 아니겠소.”

“그건 예법이라기보다, 집에 가는 사람 입장에선 꽤 성가신 문제야.”

푸리나는 바로 류트를 들어 올렸다.

“좋아! 첫 번째 섬!”

죠니가 낮게 말했다.

“신났네.”

“당연하지! 오디세이아잖아!”

“오디세우스 입장에선 별로 안 신났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죠니가 해줘야지.”

“그 논리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그런데 이미 망토까지 입었으니까, 늦은 것 같긴 하네.”

하융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섬의 안쪽에 동굴이 있소. 길은 좁고, 입구는 하나뿐이오. 들어가기는 쉬우나, 나오기는 어렵겠구려.”

레이튼이 옆에서 미소 지었다.

“훌륭한 첫 수수께끼군요. 들어가기 쉬운데 나오기 어려운 곳. 동굴입니까, 선택입니까?”

죠니는 레이튼을 보았다.

“지금은 그냥 동굴이면 좋겠네. 선택까지 끼어들면, 당신이 밤새 설명할 것 같거든.”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대체로 둘 다입니다.”

죠니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

무대가 바뀌었다.

바다는 어두워지고, 배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대신 무대 중앙에는 거대한 바위 동굴이 세워졌다. 바위는 천과 목재로 만든 것이었지만, 조명이 낮게 깔리자 입구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동굴 안에는 양 떼를 흉내 낸 흰 천 뭉치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치즈 덩어리 모형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불빛이 흔들렸다.

아스테르다스가 동굴 앞에서 눈을 빛냈다.

“섬! 동굴! 보물!”

죠니가 말했다.

“세 단어 중에 안전한 게 하나도 없네. 특히 네가 저 순서대로 말하면 더 그래.”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래도 들어가야 하지 않아?”

“보통은 정찰부터 해.”

“정찰하러 들어가자!”

“그건 그냥 들어가는 거야. 말만 바꾼다고 안전해지진 않아.”

그레이가 동굴 입구를 보았다.

“안쪽 통풍이 나빠 보입니다. 오래 머무르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극용 동굴인데도?”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 장치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무대 담당을 보았다.

“연기 조금만!”

무대 담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가 말했다.

“좋아. 오늘의 첫 번째 기적은 여왕님이 ‘조금만’을 진짜 조금만으로 조절했다는 거네.”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나도 성장해!”

“그건 아직 1막이라서 확정하긴 이르지만, 출발은 좋아.”

그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죠니가 앞섰고, 아스테르다스가 그 옆을 따라갔다. 그레이는 뒤에서 담요와 물병이 든 작은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레이튼은 어둠 속의 벽을 유심히 보았고, 하융은 동굴 밖, 바다 쪽에 남아 길을 살폈다.

푸리나는 동굴 입구 근처에서 류트를 들고 서 있었다.

오늘 그녀는 모든 장면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번 장면은 죠니가 말했다.

“여왕님, 이번엔 입구가 좋아.”

“왜?”

“동굴 안에서 네가 노래하면, 괴물보다 먼저 천장이 자기 역할을 과하게 할 것 같아.”

“너무해!”

“반쯤 농담이야.”

“나머지 반은?”

“무대 안전. 그리고 그레이가 이미 동의하는 얼굴이야.”

그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상처받은 얼굴을 했지만, 결국 입구에 섰다.

“좋아. 이번엔 입구에서 해설할게.”

죠니가 작게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동굴 입장에선 꽤 큰 사건일 거야.”

---

동굴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배 위에서 들리던 파도 소리가 멀어지고, 대신 낮은 숨소리 같은 바람이 울렸다. 조명은 희미했고, 벽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치즈 모형을 보았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그레이가 말했다.

“소품입니다.”

“아쉽네.”

죠니가 말했다.

“첫 섬에서 치즈 먹다가 죽는 오디세이아는 좀 짧아. 적어도 2막까진 가보자.”

“그건 그렇지.”

레이튼은 동굴 안쪽의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했다.

“흠. 집주인이 꽤 크군요.”

죠니가 발자국을 보았다.

“안 들어오는 게 나았겠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들어온 다음에 그런 말 하기야?”

“대부분의 모험이 그래. 그리고 대체로 그때는 이미 늦었고.”

그때 동굴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거대한 발걸음.

동굴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무대 뒤에서 커다란 외눈 괴물 인형이 나타났다. 키클롭스였다. 한쪽 눈은 둥글고 큼직했으며, 어깨는 바위처럼 넓었다. 누가 조종하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움직임은 느리고 무겁게 설계되어 있었다.

객석에서는 낮은 탄성이 흘렀다.

요안나가 숨을 삼켰고, 라이자는 눈을 크게 떴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번 인형은 꽤 잘 만들어졌다.

키클롭스의 목소리는 무대 뒤에서 울렸다.

“누가 내 동굴에 들어왔느냐.”

목소리는 일부러 낮고 거칠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묘하게 이상한 정중함이 섞여 있었다.

“방문 목적을 밝혀라. 양에게 접근할 경우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

죠니가 눈을 깜박였다.

“괴물 동굴에도 절차가 있나?”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있다면 안전에는 도움이 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속삭였다.

“이 키클롭스, 생각보다 성실한데?”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성실한 괴물은 매우 흥미로운 모순이지요.”

죠니가 말했다.

“지금은 모순보다 저 팔 길이가 더 흥미롭네. 붙잡히면 토론할 거리도 안 남겠어.”

키클롭스가 다시 말했다.

“이름을 말하라.”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장면.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살아남는 이야기.

그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

그레이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은……”

그녀는 말을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명부에 적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죠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이름을 고르는지, 적어도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죠니는 작게 그녀를 보았다.

“부르지 말라고 지은 이름이야.”

그레이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키클롭스는 외눈을 굴렸다.

“아무도 아니라고?”

“그래.”

“이상한 이름이군.”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이 배에선 그 정도면 꽤 평범한 이름이야. 배 이름부터가 이미 수상하잖아.”

동굴 입구의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레이튼은 웃지 않았다.

그는 죠니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선장님. 이름을 숨기는 것은 거짓입니까, 생존입니까?”

죠니는 키클롭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윤리 토론은 일단 저 거대한 놈 앞에서 말고, 배에 돌아가서 해도 늦진 않을 거야.”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좋은 순서입니다.”

죠니는 조금 낮게 덧붙였다.

“살아 돌아가면 내가 차 한 잔 정도는 마시면서 들어줄게. 지금은 저 손이 먼저 오겠지만.”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동굴 벽에 붙은 작은 그림자들을 보았다.

이름을 숨긴 사람들.

이름을 말하면 잡히는 사람들.

이름이 없어서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이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감추어야만 살 수 있었던 사람들.

그녀는 손에 든 물병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

키클롭스는 그들을 의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아닌 자와 그 동료들아. 왜 내 동굴에 왔느냐.”

아스테르다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죠니가 팔로 살짝 막았다.

“길을 잃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이번엔 거의 사실이야. 이상하게 들리지만, 지금 우리 쪽에서 제일 정직한 답이기도 하고.”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길을 잃었다.”

키클롭스는 외눈을 좁혔다.

“길을 잃은 자들은 대개 남의 치즈를 먹는다.”

아스테르다스는 치즈 모형에서 슬쩍 손을 뗐다.

“아직 안 먹었어.”

죠니가 말했다.

“아직이라는 말은 빼. 그 말은 보통 곧 할 생각이라는 뜻으로 들려.”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정정했다.

“안 먹었어.”

키클롭스는 천천히 동굴 입구를 막아섰다.

거대한 바위 세트가 굴러와 입구를 반쯤 가렸다.

무대 위의 공기가 조금 바뀌었다.

웃음은 남아 있었지만, 이제 모두가 알았다.

들어오기는 쉬웠다.

나가기는 어렵다.

키클롭스가 말했다.

“그럼 내 손님이 되어라.”

죠니는 바위와 괴물, 그리고 동료들을 차례로 보았다.

“좋은 초대는 아닌 것 같네. 보통 손님은 나갈 수 있을 때 손님이거든.”

레이튼이 말했다.

“초대와 감금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죠니는 바위를 가리켰다.

“문이 열리면 초대. 닫히면 감금. 오늘은 꽤 명확한 편이네.”

“아주 실용적인 답입니다.”

“지금은 실용적인 게 필요해. 아름다운 답은 일단 살아서 배에 가져가자고.”

아스테르다스는 활을 만지려 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왜?”

“저 크기로 봐선, 네가 먼저 뛰면 거인과 함께 이 동굴이 우리 무덤이 되겠지”

아스테르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죠니는 동굴 안쪽의 양 떼, 치즈, 불, 긴 나무 말뚝 소품을 보았다.

“언제나 무력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머리를 좀 쓰자.”

푸리나가 입구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오디세우스답네.”

그레이는 그 말뚝을 보고 조용히 천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벌써 준비해?”

“누군가는 다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괴물도요.”

아스테르다스가 눈을 깜박였다.

“키클롭스도?”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이라도, 찌르는 장면은 찌르는 장면입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좋아. 그러면 최대한 덜 다치게 끝내보자. 괴물까지 챙기는 항해는 처음이지만, 뭐, 오늘 배 이름부터 임시였으니까.”

키클롭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혹은 들은 척하지 않았다.

---

죠니는 키클롭스에게 술잔을 건넸다.

물론 진짜 술은 아니었다. 향이 강한 포도즙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술이었다.

키클롭스는 잔을 받아 냄새를 맡았다.

“이건 무엇이냐.”

죠니가 말했다.

“동굴에서 혼자 살면 못 마시는 것.”

키클롭스는 잠시 멈췄다.

“좋은 것인가?”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로. 너무 많이 마시면 나쁜 것. 사람도 그렇고, 괴물도 아마 비슷하겠지.”

푸리나가 입구에서 속삭였다.

“대사 좋다.”

레이튼도 조용히 미소 지었다.

키클롭스는 포도즙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세 잔.

동굴의 그림자가 조금 흔들렸다. 키클롭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외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스테르다스가 낮게 물었다.

“지금?”

죠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지금 가면 반쯤 잠든 괴물이랑 완전히 깨어 있는 우리 갈비뼈가 만나게 돼.”

푸리나가 입구에서 눈을 빛냈다.

죠니는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여왕님의 ‘조금만’ 기준 말고, 진짜 조금만 더.”

푸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붕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키클롭스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다.

동굴 안이 조용해졌다.

죠니는 긴 나무 말뚝을 들었다.

그 순간, 웃음이 거의 사라졌다.

그것은 무대 소품이었다. 키클롭스 역시 인형이었다. 그러나 장면의 뜻은 분명했다.

눈을 멀게 해야 나갈 수 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스테르다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죠니는 말뚝을 들고 한참 동안 키클롭스를 보았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작게 숨을 삼켰다.

이 장면을 만든 것은 그녀였다.
하지만 장면 안에 들어가자, 그것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해서 해결될 장면은 아닌 것 같네.”

레이튼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는 말뚝을 들어 올렸다.

무대 위에서는 실제로 찌르지 않았다.

조명이 꺼졌다.

키클롭스의 외눈에 붉은 빛이 번졌고, 동시에 낮은 북소리가 울렸다.

쿵.

키클롭스가 깨어나 울부짖었다.

“누가 나를 해쳤느냐!”

죠니가 뒤로 물러났다.

키클롭스는 손을 휘저었다.

“누가!”

죠니는 어둠 속에서 말했다.

“아무도.”

키클롭스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아무도 나를 해쳤다!”

그 말에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일었다.

원작의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크지 않았다.

“아무도.”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

아무에게도 책임지워지지 않는 상처.

아무도 아닌 이름 뒤에 숨어 살아남은 사람.

그레이는 키클롭스의 외눈에 감긴 붕대를 보았다.

무대 담당이 빠르게 인형의 눈 위에 천을 감아두었다. 피는 없었다. 그러나 상처가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려다 멈췄다.

죠니가 물었다.

“그레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상처는 가짜입니다.”

“응.”

“그런데……”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죠니는 잠깐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그레이, 그건 나중에 바꿔주자. 지금 멈추면 저 붕대가 필요한 사람이 더 늘어날 거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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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은 양 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원작대로라면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은 양의 배 아래에 매달려 동굴을 빠져나간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무대용으로 바꾸었다. 흰 천 뭉치들이 움직이고, 배우들은 그 사이에 몸을 낮추어 지나갔다.

아스테르다스는 속삭였다.

“이거 생각보다 창피한데.”

죠니가 말했다.

“살아남는 자세는 원래 별로 멋없을 때가 많아. 멋있게 죽는 것보다 훨씬 유용하고.”

“로빈 후드 때보다 덜 멋있어.”

“대신 안 굴렀잖아. 오늘은 그걸로 꽤 이긴 거야.”

그레이도 낮게 몸을 숙였다. 그녀는 양 떼 흰 천 사이를 지나며, 키클롭스 인형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외눈은 붕대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빠져나가기 직전, 자신의 천 주머니에서 작은 붕대 하나를 꺼내 동굴 입구 옆에 놓았다.

죠니가 그것을 보았다.

“왜?”

그레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연극이 끝나면…… 바꿔줄 수 있으니까요.”

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키클롭스는 동굴 안에서 손을 휘저었다.

“아무도! 아무도 나를 해쳤다!”

그들은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다의 소리가 다시 들렸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성공!” 하고 외치려다가, 죠니의 얼굴과 그레이가 동굴 옆에 놓은 붕대를 보고 말을 삼켰다.

대신 작게 말했다.

“나왔네.”

죠니는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응. 나왔어.”

“멋있게?”

죠니는 양 떼 역할을 하던 흰 천 뭉치들을 돌아보았다.

“멋있진 않았어. 양 사이로 기어 나왔으니까. 그래도 살아 나왔지. 오늘은 그쪽이 더 값비싸네.”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중요하지.”

죠니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여왕님, 정말 분위기 자주 읽네.”

“계속 말하면 화낼 거야.”

“그럼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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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로 돌아왔을 때, 바다는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다.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그들을 맞았다.

“첫 섬을 지나왔구려.”

죠니는 배 난간에 손을 얹었다.

“지났다고 해야 하나. 도망쳤다고 해야 하나. 둘 다 틀리진 않겠지.”

레이튼이 말했다.

“대부분의 귀향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지요.”

아스테르다스는 배 위에 주저앉았다.

“나는 다음 섬에서는 밖에서 기다릴래.”

죠니가 말했다.

“그 말 기억해둘게. 그리고 네가 안 지킬 것도 같이 기억해둘게.”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들켰네.”

그레이는 말없이 물병을 건넸다.

아스테르다스는 받아 마셨다.

“고마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그녀는 죠니에게도 물병을 건넸다.

죠니가 받으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그래도 드세요.”

죠니는 잠시 물병을 보다가 마셨다.

“고마워. 이런 건 거절하면 네가 더 걱정할 것 같아서.”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방금 동굴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묻지 않았다.
키클롭스에게 미안했는지, 이름을 숨긴 것이 불편했는지, 아니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는지 캐묻지 않았다.

다만 물을 주었다.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젖지도 않은 망토를 살짝 털어주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류트를 천천히 튕겼다.

이번 노래는 짧았다.

> 아무도 아닌 이름으로
> 어둔 동굴을 지나왔네.
> 이름을 숨긴 것은 죄였나,
> 아니면 아직 숨 쉬고 싶던 마음이었나.
>
> 바다는 묻지 않는다.
> 다만 다음 파도를 보낼 뿐.

죠니는 노래를 듣고 말했다.

“여왕님.”

“응?”

“이번에도 괜찮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오늘 칭찬 많이 해주네.”

“아직 첫 섬인데 벌써 피곤해서 그래. 사람이 피곤하면 좀 솔직해지거든.”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반쯤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배 뒤편에 앉아, 동굴 입구에 두고 온 붕대를 떠올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가짜 괴물의 가짜 상처를 위한 진짜 붕대.

하지만 어쩐지, 그 작은 천 조각이 오늘 첫 항해의 표식처럼 느껴졌다.

배는 다시 나아갔다.

푸른 천의 바다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타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2막 — 세이렌의 노래와 귀를 막는 이유

두 번째 바다는 조금 더 깊었다.

처음 출항할 때의 바다는 푸른 천과 은실이 만든 반짝임에 가까웠다. 누구나 그것이 극장 안의 바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키클롭스의 동굴을 지나온 뒤, 바다는 같은 천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푸른색이 짙어졌다.

은빛 물결은 조금 느려졌다.

갈매기 소리는 멀어졌고, 배 옆구리를 두드리는 파도 소리는 더 낮아졌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위의 사람들도 조금 조용해졌다.

아스테르다스는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가, 그레이와 레플리카의 시선을 떠올리고 얌전히 갑판으로 내려왔다. 레이튼은 둥근 수수께끼판의 방향을 살폈고,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물결 너머의 길을 보았다.

죠니는 배 앞쪽에 서 있었다.

그는 오디세우스의 망토를 한 손으로 여미고, 다른 손으로 난간을 짚었다. 얼굴은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은 첫 섬 이전보다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푸리나는 그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오늘의 그녀답지 않게, 발걸음이 아주 조금 낮았다.

“죠니.”

“응.”

“첫 섬, 괜찮았어?”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무대가 무너진 것도 아니고, 누가 진짜로 다친 것도 아니니까 괜찮았다고 할 수는 있지.”

“그 말투는 안 괜찮았다는 뜻 같은데.”

“여왕님 연극은 가끔 그래. 다친 사람은 없는데, 다들 뭔가 하나씩 맞고 내려와.”

푸리나는 류트 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너무 무거웠어?”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배 옆의 바다를 보았다. 푸른 천이 흔들렸고, 그 위로 푸리나의 신술이 만들어낸 희미한 물비늘이 겹쳤다.

“아니. 첫 섬치고는 괜찮았어.”

“정말?”

“응. 다만 다음 섬부터는 여왕님도 조금 조심해. 네가 웃기려고 만든 장면이, 누군가한테는 생각보다 깊게 들어갈 수 있거든.”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알아.”

“알면 됐어. 모르는 척하면 그레이가 담요 세 장 더 꺼낼 테니까.”

푸리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그레이 담요는 강하지.”

“응. 이 배에서 제일 믿을 만한 무기야.”

그레이는 그 말을 멀리서 들은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갑판 구석에 접어둔 담요가 젖지 않았는지 다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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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하융이 조타륜에 손을 얹었다.

“소리가 들려오오.”

죠니가 고개를 들었다.

“파도 소리 말고?”

“파도보다 가볍고, 바람보다 깊소. 노래요.”

푸리나의 손이 류트 위에서 멈췄다.

아스테르다스가 바로 눈을 빛냈다.

“노래?”

죠니가 그를 보았다.

“네가 그렇게 반응하면 보통 위험한 노래야.”

“그래도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잖아.”

“안 돼.”

“아직 어떤 노래인지도 모르는데?”

“바다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예쁜 노래는 대체로 가까이 가면 배가 부서져.”

아스테르다스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바다를 보았다.

“그건 너무 경험 많은 말투인데.”

“오디세우스 역할을 맡았으니까, 경험 많은 척이라도 해야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세이렌의 섬이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번째 막.”

그녀는 류트를 천천히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노래하는 게 아니야.”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의외네.”

“나도 세이렌 하고 싶긴 했는데.”

“그건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야.”

“칭찬?”

“반쯤. 나머지는 경보.”

푸리나는 살짝 웃고, 무대 뒤쪽을 바라보았다.

푸른 장막 너머에서 은빛과 보랏빛 조명이 천천히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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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렌의 섬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바다 위에 안개가 깔렸다. 안개 뒤로 세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나는 밝고 화려한 실루엣이었다.
하나는 은빛 등불을 든 작은 그림자였다.
하나는 기록장처럼 보이는 얇은 판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오늘의 세이렌은 무대 위에 완전히 오르지 않아.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무서울 때도 있으니까.”

죠니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오늘은 정말 분위기 읽네.”

“그 말 세 번 이상 하면 진짜 화낼 거야.”

“그럼 두 번 반쯤으로 해둘게.”

첫 번째 노래가 들렸다.

처음에는 맑았다.

봄날 축제에서 들을 법한 음이었다. 파도가 흔들리고, 등불이 물결 위에 떠다니는 듯했다. 세이렌들의 노래는 사람을 붙잡아 끄는 명령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목소리처럼 다가왔다.

> 돌아오라, 이름 불리는 자여.
네 활은 아직 벽에 걸려 있고,
네 잔은 아직 식탁 위에 있다.

돌아오라, 바다를 넘은 자여.
네 이야기를 들을 이들이
아직 잠들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가 난간에 손을 올렸다.

“좋은 노래네.”

죠니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서 위험한 거야.”

“왜? 나쁜 말은 안 하잖아.”

“사람은 나쁜 말보다 듣고 싶은 말에 더 잘 끌려가.”

아스테르다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이미 작은 천 뭉치들을 꺼내고 있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귀마개?”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만 억지로 막지는 않겠습니다.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죠니가 그레이를 보았다.

“좋네. 귀를 막는 것도 이유를 알아야 덜 답답하지.”

그레이는 선원들 앞에 섰다.

“이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건드립니다. 듣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항해 중입니다. 배 밖으로 몸을 기울이면 위험합니다.”

그녀는 천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듣고 싶다면,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합니다. 혼자 듣지 마십시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그게 핵심이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뭐가?”

“귀를 막는 게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혼자 끌려가지 않으려고 하는 거.”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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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다스는 천을 받아들고도 망설였다.

“조금만 들으면 안 될까?”

죠니는 그를 정면으로 보았다.

“네가 말하는 ‘조금만’은 보통 한 발짝으로 시작해서, 다음 장면에서는 내가 밧줄 던지고 있더라.”

“그 정도야?”

“너는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추진력이 너무 좋아. 그러니까 이번엔 귀를 막고 있어. 나중에 여왕님한테 안전한 버전으로 다시 불러달라고 하면 되잖아.”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안전한 세이렌의 노래라니, 그거 괜찮은데?”

죠니가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지금 만들지 마.”

“왜?”

“방금 안전하다고 했지, 즉흥으로 만들라고는 안 했어.”

아스테르다스는 결국 귀를 막았다.

“알겠어. 나중에 안전한 버전으로.”

“그래. 살아서 듣자.”

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가볍지만은 않았다.

레플리카는 객석 쪽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 항상 강한 척을 뜻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귀를 막고 옆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이 더 바른 선택이다.”

스토얀카가 그녀를 보았다.

“세이렌에게도 고통교의 해석을 붙이는가?”

“노래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해석할 필요가 있다.”

스토얀카는 입가를 올렸다.

“그대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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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든 이가 귀를 막지는 않았다.

죠니는 귀마개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아직 끼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

“응.”

“안 막아?”

죠니는 세이렌의 안개를 보았다.

“오디세우스는 들어야 하잖아.”

“묶어줄까?”

“그 말, 네가 하니까 이상하게 연출처럼 들리는데.”

“실제로 연출이기도 해.”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럼 난간에 묶어. 너무 멋있게 묶지는 말고.”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러운 밧줄을 가져왔다. 무대용 밧줄이었지만, 손목이 쓸리지 않도록 천을 덧댄 것이었다.

죠니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역시 그레이답네. 묶는 것도 덜 아프게 묶어.”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아프게 묶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 오늘 계속 기억하게 될 것 같아.”

그레이는 죠니의 손목을 난간에 고정했다.

너무 단단하지 않게.

그러나 풀리지 않게.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여왕님, 내가 괜찮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 수는 있어. 그래도 지금은 해야 하는 장면이잖아.”

“연극이니까 안 해도 돼.”

죠니는 잠시 웃었다.

“연극이라서 하는 거지. 현실이면 안 듣고 도망쳤어.”

푸리나는 말문이 막혔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바다로 뛰어들려고 하면 아스테르다스가 너무 신나서 먼저 뛰려고 할 테니까, 네가 둘 다 말리면 돼.”

아스테르다스가 귀를 막은 채 멀리서 말했다.

“나 들었어!”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귀마개 제대로 안 꼈네.”

그레이가 바로 다가가 귀마개 위치를 고쳐주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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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첫 번째보다 낮았다.

처음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안에 조금씩 다른 것이 섞였다.

> 돌아오라, 이름 불리는 자여.
그러나 네 집은 예전과 같을까.
네가 두고 간 불은 아직 타오를까.
네가 앉던 자리는
다른 이의 침묵이 되었을까.

돌아오라, 바다를 넘은 자여.
하지만 네 뒤에 남은 자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불릴까.



죠니의 손가락이 난간을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보았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는 것을.

그레이는 밧줄 매듭을 확인하려다 멈췄다.

레이튼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낮게 말했다.

“저 노래는 목적지를 부르는 것이 아니오. 뒤에 남긴 그림자를 부르는 것이오.”

죠니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세이렌의 노래는 그를 찢어내듯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돌아갈 집.

기다리는 사람.

돌아왔을 때 마주해야 할 빈자리.

그리고 자신만 돌아왔다는 사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나쁘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래가?”

“응. 너무 예뻐서 더 나빠.”

그의 손목을 묶은 밧줄이 조금 팽팽해졌다.

아스테르다스가 귀마개를 낀 채 그를 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죠니가 눈짓으로 막았다.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았다.

그녀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쟁심이 들었다. 노래로 사람을 붙잡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무대의 힘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곧 알았다.

세이렌의 노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을 자신의 상처 속에 홀로 세웠다.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내 무대랑 달라.”

죠니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응. 여왕님 무대는 보통 너무 시끄러워서 사람을 혼자 두진 않지.”

“그거 칭찬이야?”

“꽤 큰 칭찬.”

푸리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그럼 내가 좀 시끄럽게 해도 돼?”

죠니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번엔 허락할게. 너무 세게 말고.”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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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류트를 들었다.

세이렌의 노래 위로 푸리나의 현이 올라갔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다.

세이렌의 노래를 이기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을 덮어버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다만, 혼자 듣고 있는 사람의 옆에 누군가 앉는 소리였다.

푸리나는 노래했다.

> 바다가 네 이름을 부르거든,
혼자 대답하지 마라.

돌아갈 집이 멀어 보이면,
옆 사람의 숨을 먼저 들어라.

네가 잃은 것이 너를 부르더라도,
네가 아직 붙잡은 손도 있다.

그러니 돌아오라.
노래 속으로가 아니라,
배 위로.



세이렌의 노래가 흔들렸다.

푸리나의 목소리는 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달랐다.

세이렌은 혼자 남은 마음을 불렀고, 푸리나는 그 마음 옆에 다른 사람들을 불렀다.

아스테르다스가 귀마개를 낀 채도 박자를 느낀 듯 난간을 두드렸다.

그레이는 조용히 다른 선원의 손에 물병을 쥐여주었다.

레이튼은 미소를 지었다.

하융은 조타륜을 조금 돌렸다.

죠니는 밧줄에 묶인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왕님.”

“응?”

“이번엔 세게 불러도 괜찮았네.”

푸리나는 웃으려다가,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칭찬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쪽에서는 제법 좋은 칭찬이야.”

“그럼 받아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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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렌의 안개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림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배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마지막 노래가 희미하게 들렸다.

> 돌아오라, 이름 불리는 자여.
우리는 네가 잃은 것을 알고 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아니.”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난간을 붙잡은 채, 바다 너머를 보았다.

“아는 척하는 거겠지. 잃은 걸 정말 아는 사람은, 그렇게 예쁘게만 부르진 않아.”

그 말은 아주 조용했다.

그레이는 밧줄을 풀었다.

천으로 덧댄 부분 덕분에 죠니의 손목에는 자국이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손목을 잠시 살폈다.

“아프십니까?”

죠니는 손목을 돌려보았다.

“괜찮아. 잘 묶었네.”

“풀기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살면서 묶인 것 중에 가장 배려 있는 밧줄이었어.”

그레이는 그 말에 조금 난처해했다.

푸리나는 그걸 듣고 웃었다.

“그레이의 배려 있는 밧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 표현은 이상합니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맞는 말이야.”

그레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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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렌의 섬을 지난 뒤, 배 위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첫 섬을 지난 뒤의 침묵과는 달랐다.

이번 침묵은 조금 덜 차가웠다.

아스테르다스는 귀마개를 빼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와.”

죠니가 물었다.

“많이 들었어?”

“조금.”

“그 ‘조금’이 진짜 조금이었길 바란다.”

“진짜 조금이었어. 그런데도 이상하더라.”

“뭐가?”

아스테르다스는 바다를 보았다.

“좋은 말만 하는데, 이상하게 발이 앞으로 가려고 했어.”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노래였지.”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죠니는 더 많이 들었잖아. 괜찮아?”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뒤, 아주 낮게 말했다.

“괜찮다고 해두자. 아직 배 위니까.”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이 완전한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그레이가 죠니 앞에 따뜻한 물을 놓았다.

“목이 마를 수 있습니다.”

죠니는 잔을 받았다.

“고마워.”

그레이는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무엇을 들었는지.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어떤 집을 떠올렸는지.

그녀는 그냥 따뜻한 물을 주었다.

그리고 배의 흔들림이 잦아들 때까지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류트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번 막을 밝은 박수로 끝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

“두 번째 섬을 지났습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세이렌은 우리를 부르려 했고, 우리는 서로의 소리를 붙잡았습니다.”

죠니는 잔을 든 채 말했다.

“좋은 정리네. 오늘은 진짜로.”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고마워.”

하융은 조타륜을 돌렸다.

“바람이 바뀌오.”

레이튼이 물었다.

“다음 길은 보입니까?”

하융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오. 허나 이 배는 방금, 노래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소. 그것만으로도 길 하나는 닫히고, 다른 길 하나는 열렸구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키르케의 섬과 돌아온 짐승들

아스테르다스가 그 제목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돌아온 짐승들?”

죠니는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제목부터 벌써 귀찮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보았다.

세이렌의 노래는 멀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작게 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는 담요를 다시 접어두었다.

이번에는 난간 가까이에.

혹시 누군가, 말없이 떨게 될지도 모르니까.
4막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선택의 바다

네 번째 바다는 좁았다.

무대 위의 푸른 천은 여전히 같은 천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넓은 바다가 아니라, 두 절벽 사이로 밀려드는 어두운 해협처럼 보였다.

왼쪽에는 높고 검은 바위가 세워졌다.

그 바위 위에는 여섯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다. 긴 목처럼 휘어진 검은 천과, 손인지 발톱인지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그림자들이 조명 사이에서 움직였다.

오른쪽에는 둥근 소용돌이가 있었다.

무대 담당들이 커다란 원형 천을 천천히 돌렸고, 그 위로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겹치자, 그것은 정말로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바다처럼 보였다. 물은 없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발밑이 잠깐 가라앉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그 사이에 멈춰 있었다.

배 위에는 말이 없었다.

키르케의 섬에서 모두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여운은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담요를 어깨에 걸쳤고, 누군가는 손가락을 펴고 접으며 사람의 손이 돌아온 감각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배 난간에 기대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난간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의 신발끈은 단단했고, 손은 차분했다.

그레이는 조용히 사람들의 상태를 보았다.

“물이 필요하신 분은 말씀해주십시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물병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말하지 않아도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죠니는 그 모습을 보고 낮게 말했다.

“이 배에서 제일 꾸준한 건 저 물병이네.”

그레이는 잠시 그를 보았다.

“필요할 때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응. 사람도 그렇고.”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정하지도 않았다.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서 있었다.

평소라면 새 막의 시작을 크게 외쳤을 것이다. “자, 이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하고 탬버린이라도 흔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류트를 들고도 바로 연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왼쪽 바위와 오른쪽 소용돌이를 번갈아 보았다.

“여기구나.”

죠니가 말했다.

“응. 여기네.”

“어느 쪽으로 가야 해?”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조타륜을 잡은 채, 두 길 사이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푸른 천보다 더 많은 것이 비치는 듯했다.

선택되지 않은 항로.

부서지는 돛.

떨어지는 이름표.

살아남는 배.

그러나 모두 살아남지는 못하는 길.

하융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왼쪽 길은 몸을 잃고, 오른쪽 길은 배를 잃소.”

푸리나의 손이 류트 위에서 굳었다.

하융은 이어 말했다.

“가운데는 길이 아니오.”

아무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가 낮게 물었다.

“몸을 잃는다는 건?”

하융은 왼쪽 바위를 보았다.

“스킬라. 지나가는 배에서 사람을 낚아채는 그림자요.”

그레이가 오른쪽을 보았다.

“배를 잃는다는 것은…….”

“카리브디스. 가까이 가면 배 자체가 삼켜질 것이오.”

죠니는 한참 동안 두 길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이번엔 회의가 필요하네.”

푸리나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죠니가 회의하자고 했어.”

“여왕님, 나도 아무 때나 뛰어드는 쪽은 아니야.”

“가끔은?”

“가끔은 네가 먼저 뛰어들어서 내가 말릴 시간이 없는 거지.”

푸리나는 웃으려다 멈췄다.

이번에는 웃음이 오래가지 않았다.


---

배 가운데에 작은 탁자가 놓였다.

지도는 없었다.

대신 왼쪽 바위와 오른쪽 소용돌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선택지는 너무 분명했고, 그래서 더 잔인했다.

레이튼이 먼저 말했다.

“선택지를 정리해보지요. 왼쪽은 일부를 잃을 가능성, 오른쪽은 전부를 잃을 가능성입니다.”

그레이는 조용히 물었다.

“왼쪽으로 갈 경우, 피해를 줄일 방법은 있습니까?”

하융이 대답했다.

“배를 바위에서 최대한 멀리 붙이고, 돛을 낮추며, 갑판 위 인원을 묶어야 하오. 그래도 완전하지는 않소.”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내가 왼쪽을 막으면?”

죠니가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이번엔 충동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눈이 맑았다. 그는 자신의 힘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몸을 어디에 던질지 계산하고 있었다.

“스킬라가 낚아채려는 순간, 내가 먼저 떨어져서 그 손을 끊으면 돼.”

그레이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죠니는 바로 말리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말했다.

“형씨,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건 알아. 문제는 한 번 떨어지고 끝날 상황이 아니라는 거야. 저쪽 그림자, 하나가 아니잖아.”

왼쪽 바위 위의 여섯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아스테르다스는 그걸 보았다.

“여섯.”

“응. 네가 하나를 쳐도, 다섯은 남아. 그리고 네가 너무 멀리 떨어지면, 이 배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지도 몰라.”

아스테르다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 말은 그를 낮게 본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죠니는 그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로 떨어져서, 한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낮게 웃었다.

“좋아. 그러면 내가 혼자 해결하는 길은 아니네.”

“응. 이번엔 영웅 하나로 끝나는 장면이 아니야.”

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오른쪽은?”

하융은 카리브디스 쪽을 보았다.

“오른쪽은 배가 사라지오. 빠져나올 가능성은 있으나, 그 가능성은 죽은 세계에 더 많소.”

“죽은 세계?”

하융의 눈이 아주 잠깐 흐려졌다.

“우리가 선택하지 말아야 할 바다요.”

그 말에 더 이상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레이는 탁자 위에 담요를 올렸다.

죠니가 물었다.

“담요?”

“왼쪽으로 가면 갑판 위에서 버텨야 합니다. 손이 미끄러지거나 몸이 차가워질 수 있습니다.”

“아직 선택 안 했는데.”

“그래서 준비합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방식이지.”

그레이는 담요를 접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손이 조금 느렸다.

푸리나는 그걸 보았다.

“그레이?”

그레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죠니가 조용히 말했다.

“괜찮다는 말은 아껴도 돼. 이 배에서 그 말 너무 빨리 쓰면 그레이한테도 혼나.”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무섭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낮게 이어 말했다.

“다칠 사람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일은…… 익숙합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그렇지.”

레이튼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누구의 것입니까? 선장의 것입니까, 선원들의 것입니까, 아니면 항해 자체의 것입니까?”

죠니는 탁자 위의 담요를 보았다.

왼쪽의 그림자.

오른쪽의 소용돌이.

그리고 배 위의 사람들.

“내가 정해야겠지.”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혼자?”

“혼자 정하는 척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봤잖아. 이 배에서 내가 혼자 뭘 정하면, 대체로 누가 옆에서 담요를 놓고, 누가 노래하고, 누가 질문하고, 누가 뛰어내릴 준비를 해.”

아스테르다스가 씩 웃었다.

“그건 나네.”

“응. 너무 자랑스럽게 말하진 말고.”

죠니는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마지막 말은 내가 해야 해. 그래야 누가 원망할 곳이 생기거든.”

푸리나의 얼굴이 굳었다.

“죠니.”

“여왕님, 이건 멋있는 말이 아니야. 그냥 선장이 그렇게 생겨먹은 자리라는 거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책임을 위한 이름이군요.”

죠니는 작게 웃었다.

“이번엔 아무도 아닌 선장으로는 못 지나가겠네.”


---

결정은 왼쪽이었다.

스킬라의 바위.

일부의 손실을 감수하는 길.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에 배 전체를 맡길 수는 없었다.

푸리나는 그 결정을 듣고도 바로 음악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이 장면, 그냥 넘기면 안 되겠지?”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넘기고 싶어?”

“응.”

“나도.”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근데 넘기면, 이 극이 거짓말을 하게 될 것 같네.”

푸리나는 류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알아.”

그녀는 천천히 배 앞머리로 걸어갔다.

“그러면 이번 노래는 길을 여는 노래가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붙잡는 노래야.”

그 말에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선원들을 보았다.

“지금부터 모두 서로를 묶어. 하지만 억지로 끌지 마. 떨어지려는 사람을 짓누르는 게 아니라, 돌아올 손잡이를 만드는 거야.”

그레이는 바로 움직였다.

그녀는 밧줄과 천을 나누어주었다. 세이렌의 막에서 죠니를 묶었던 것처럼, 손목이 쓸리지 않게 천을 먼저 감았다. 선원들은 서로의 허리와 팔을 연결했다. 너무 단단하지 않게. 하지만 끊어지지 않게.

아스테르다스는 자기 허리에 밧줄을 묶으며 물었다.

“죠니, 나도 묶어?”

죠니는 그를 보았다.

“응. 형씨가 약해서가 아니라, 돌아올 곳을 정해두려고.”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그 말은 좋네.”

그는 밧줄 끝을 죠니에게 건넸다.

“그럼 잡아.”

죠니는 밧줄을 받았다.

“이거, 내가 감당 못 하면?”

아스테르다스는 씩 웃었다.

“그럼 내가 감당할게. 밧줄은 양쪽에서 잡는 거잖아.”

죠니는 잠깐 그를 보다가 웃었다.

“그래. 그쪽이 훨씬 낫네.”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어린 선원 역 배우의 손목을 묶어주었다.

배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떨어지는 건 아니죠?”

그레이는 잠시 그를 보았다.

“네. 진짜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그래도 무서우면 말해도 됩니다.”

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무서우면, 이 천을 잡으세요.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 말에 배우는 천을 꼭 잡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연출한 바다와 괴물보다, 그레이가 무릎을 꿇고 천을 내미는 장면이 더 오래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배가 움직였다.

정확히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대 양쪽의 푸른 천이 거세게 흔들렸다. 조명이 왼쪽 바위를 크게 비추었다. 스킬라의 여섯 그림자가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괴물이라기보다, 손실의 형태 같았다.

한 그림자는 긴 손을 가졌다.
한 그림자는 갈라진 목소리를 가졌다.
한 그림자는 사람의 이름표를 쥐고 있었다.
한 그림자는 빈 의자를 끌고 있었다.
한 그림자는 젖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마지막 그림자는 얼굴이 없었다.

푸리나는 류트를 치기 시작했다.

노래는 짧은 박자였다.

> 붙잡아라.
그러나 부수지 말고.

끌어당겨라.
그러나 숨 막히게 하지 말고.

돌아오라.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이름을
밟고 오지는 말고.



스킬라가 움직였다.

첫 번째 그림자가 배 위로 손을 뻗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몸이 낮아졌다. 청흑빛 기운이 발끝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키르케의 마법이 밀어붙이는 충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고른 낙하지점이었다.

그는 떨어지듯 뛰었다.

그러나 배를 떠나지 않았다.

밧줄이 그의 허리에서 팽팽해졌고, 그는 그 긴장을 이용해 궤도를 바꾸었다. 청흑빛 유성이 바위와 배 사이를 스치며, 스킬라의 첫 손을 밀어냈다.

그림자가 찢어졌다.

객석에서 낮은 탄성이 났다.

죠니는 밧줄을 잡고 이를 악물었다.

“형씨, 너무 멀리 가면 내가 진짜로 욕할 거야.”

아스테르다스가 공중에서 웃었다.

“그건 좀 듣고 싶네!”

“돌아와서 들어. 바다 위에서 들으면 집중 안 되잖아.”

아스테르다스는 밧줄의 힘을 받아 배 쪽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그림자가 그 틈을 노렸다.

이번에는 아스트리트가 나섰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배 옆의 선원들을 보호했다.

“낮추세요!”

이번에는 긴 구령이 아니었다.

짧고 정확했다.

선원들이 몸을 낮추자, 스킬라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죠니가 말했다.

“좋아. 그 구령은 살았다.”

아스트리트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연습했습니다.”

“효과 있네.”

그러나 세 번째 그림자는 이름표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배 위를 직접 낚아채지 않았다.

대신 갑판 위에 있던 작은 나무패 하나를 끌어당겼다. 무대용 선원 이름표였다. 엑스트라 배우 하나가 맡고 있던, 극중 선원의 이름.

그레이가 그것을 보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안 됩니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무모하게 뛰어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바닥의 밧줄을 잡고, 몸을 낮춘 채 이름표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았다. 하지만 스킬라의 그림자가 더 빨랐다.

나무패가 그녀의 손끝을 스치고, 바위 쪽으로 끌려갔다.

그레이는 그 자리에 멈췄다.

이름표는 사라졌다.

무대 위에서, 아주 작은 물체 하나가 어둠 속으로 넘어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배 위의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푸리나의 노래가 잠시 흔들렸다.

그레이는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죠니가 다가왔다.

“그레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잡지 못했습니다.”

죠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응.”

그레이는 다시 말했다.

“잡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더 작았다.

죠니는 무리하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름은?”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니코스.”

짧은 이름이었다.

극중 선원.

실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푸리나의 신술 위에서, 그 이름은 잠깐 배 위에 살고 있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억하자. 지금은 배를 지나가게 하고.”

그레이는 눈을 떴다.

“네.”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병이 아니라,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갑판 한쪽, 이름표가 있던 자리에 묶어두었다.

빈 자리 표시.

푸리나는 그것을 보며 노래를 이어갔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 하나가 사라져도
자리는 지우지 마라.

파도가 삼켜도
이름을 바다의 일로만 두지 마라.



스킬라의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림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하융이 조타륜을 돌렸다.

“지금이오!”

배가 왼쪽 바위에서 살짝 멀어졌다. 무대 천이 거칠게 흔들렸다. 아스테르다스가 다시 한 번 뛰어올라 그림자 하나를 밀어냈고, 아스트리트가 다른 그림자의 손을 막았다.

죠니는 밧줄을 잡고 선원들을 끌어당겼다.

“다들 낮게. 멋있게 서 있으면 괴물한테 잘 보일 뿐이야.”

아스테르다스가 돌아오며 말했다.

“나 방금 멋있었어?”

“응. 괴물한테도 잘 보였을걸.”

“그건 좀 문제네.”

“그래도 살아 돌아왔으니 괜찮아.”

마지막 그림자, 얼굴 없는 스킬라가 배 위로 내려왔다.

그것은 누구도 잡지 않았다.

대신 배 위에 걸린 불빛 하나를 꺼뜨렸다.

조명이 살짝 낮아졌다.

모두가 느꼈다.

무언가 지나갔다.

누군가가 없어진 것처럼.

그러나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없는 손실.

그레이는 숨을 들이켰다.

“불 하나가 꺼졌습니다.”

푸리나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죠니가 말했다.

“다시 켜자. 지나간 뒤에.”

“지금은?”

“지금 켜러 가면, 꺼질 불이 더 늘어날 거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차가웠지만, 맞았다.


---

마침내 배가 해협을 빠져나왔다.

스킬라의 그림자는 바위 위로 물러갔다.

오른쪽의 카리브디스는 여전히 돌고 있었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마치 자신에게 오지 않은 배를 아쉬워하듯 천천히 낮아졌다. 무대 위의 푸른 천이 조금씩 잔잔해졌다.

배 위에는 아무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는 밧줄을 풀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아스트리트는 지팡이를 바닥에 짚고 있었다.
하융은 조타륜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푸리나는 류트 현 위에 손을 얹은 채, 마지막 음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이름표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죠니가 천천히 밧줄을 풀었다.

“다들 있어?”

그레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

둘.

셋.

모두 있었다.

하지만 모두 있다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갑판 한쪽에 묶인 작은 천 조각을 보았다.

니코스.

극중 선원.

스킬라가 가져간 이름표.

“사람은 모두 있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름표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푸리나가 가까이 왔다.

“그레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실제 사람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품입니다. 극중 이름표입니다. 배우는 무사합니다.”

“응.”

그레이의 손이 천 조각 위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럼 넘어가지 말자.”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서 잠깐 멈추자.”

무대가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돌아섰다.

“스킬라의 바위를 지났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배는 살아남았고, 선원들도 모두 배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이름표가 바다로 갔습니다.”

그녀는 그레이가 묶어둔 천 조각을 보았다.

“이름은 니코스.”

객석도 조용해졌다.

로빈후드의 빈 잔 때와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되찾은 뒤의 빈자리였다.

이번에는 지나가기 위해 받아들인 빈자리였다.

그레이는 작은 천 조각 옆에 물 한 잔을 놓았다.

담요도, 빵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물이었다.

바다 위에서 사라진 이름에게 어울리는 것처럼.

“나중에 다시 적겠습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지금은…… 잊지 않겠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겠지.”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죠니는 작게 웃었다.

“그 말,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좋은 질문과 좋은 말은 돌아옵니다.”

죠니는 천 조각을 보았다.

“그래. 미안하다, 니코스. 그래도 배는 가야 해.”

푸리나는 류트를 다시 들었다.

이번 노래는 아주 짧았다.

> 바위는 지나갔고,
배는 남았다.

그러나 이름 하나가
물결 아래로 갔다.

우리는 간다.
간다는 말로
잊지는 않겠다.



노래가 끝났을 때, 꺼졌던 불 하나가 다시 켜졌다.

그레이가 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 위의 모두가 그 불을 보았다.


---

해협을 지나자, 바다가 조금 넓어졌다.

그러나 안도는 오지 않았다.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자, 다음 막!” 하고 외치지 않았다. 그녀는 류트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손끝으로 현을 가볍게 눌렀다.

죠니가 옆에 섰다.

“여왕님.”

“응.”

“방금은 잘했어.”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걸?”

“멈춘 거.”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극이니까. 흐름이 끊기면 안 된다고.”

“끊겨야 하는 흐름도 있지.”

“죠니가 그런 말도 하네.”

“나도 배가 부서지지만 않으면 꽤 많은 걸 배워.”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럼 지금 배는?”

죠니는 갑판을 보았다.

밧줄 자국.

물잔.

작은 천 조각.

다시 켜진 불.

“부서지진 않았어.”

“그럼 괜찮아?”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계속 갈 수는 있어.”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괜찮지는 않다.

하지만 계속 갈 수는 있다.

그것이 네 번째 바다의 답이었다.

아스테르다스가 다가왔다.

그는 허리의 밧줄을 풀어 죠니에게 건넸다.

“덕분에 돌아왔어.”

죠니가 받았다.

“네가 잡아준 덕도 있지. 밧줄은 양쪽에서 잡는 거라며.”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 말 내가 했지.”

“응. 나쁘지 않았어.”

“거의 온전히 칭찬?”

“오늘은 그래. 거의.”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레이 쪽을 보았다.

그녀는 니코스의 천 조각 옆에 앉아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 옆에 물잔 하나를 더 놓았다.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왜 하나 더……?”

“모르겠어.”

아스테르다스는 바다를 보았다.

“그냥 하나만 있으면 외로워 보였어.”

그레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멋쩍게 웃었다.

“이런 건 아직 잘 모르겠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합니다.”


---

하융은 조타륜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다음 길은 아래로 향하오.”

푸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래?”

레이튼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저승 방문이군요.”

배 위의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를 지나, 이제 오디세우스는 죽은 자들의 세계로 향한다.

그레이의 손이 작게 굳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그레이.”

“네.”

“이번엔 물이랑 담요 말고, 뭐가 필요해?”

그레이는 조금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마른 천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젖은 사람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젖은 신발이 있을 것 같아서요.”

죠니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곧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챙기자.”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았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5막 — 저승의 여관과 젖은 신발

이번에는 아무도 제목을 보고 농담하지 않았다.

배는 다시 움직였다.

바다는 넓어졌지만, 빛은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항구를 향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3막 — 키르케의 섬과 돌아온 짐승들

개정본

세 번째 섬은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키클롭스의 동굴은 어둡고 좁았고, 세이렌의 바다는 보이지 않는 노래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번 섬은 달랐다. 무대 위에 깔린 푸른 천이 천천히 걷히자, 그 아래에서 따뜻한 금빛 조명이 올라왔다.

섬은 숲이었다.

하지만 셔우드 숲처럼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장난스러운 숲은 아니었다. 이 숲은 더 짙고, 더 향기로웠다. 나뭇가지에는 붉은 열매가 매달려 있었고, 낮은 연기가 풀숲 사이를 기어갔다. 무대 한쪽에는 작은 저택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쪽에서는 따뜻한 불빛과 식탁의 그림자가 보였다.

푸리나는 배 난간에서 그 광경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 섬은 좀 괜찮아 보이는데?”

죠니가 그녀 옆에서 섬을 바라보았다.

“여왕님, 그 말은 보통 괜찮지 않은 섬에 도착했을 때 나와.”

“하지만 봐봐. 동굴도 없고, 외눈 괴물도 없고, 노래하는 안개도 없잖아.”

“응. 대신 문이 열려 있고, 음식 냄새가 나고, 아무도 우릴 막지 않네. 그게 더 수상할 때도 있어.”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죠니는 좋은 걸 봐도 먼저 의심하네.”

“오디세우스가 좋은 걸 그냥 믿었으면, 이 이야기는 1막에서 끝났을걸.”

아스테르다스는 이미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발끈은 이번에도 제대로 묶었다. 그는 그것을 죠니에게 보여주듯 한 번 발을 들어 보였다.

“봐, 이번엔 완벽하지?”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네 신발끈이 제일 믿음직하다.”

“그건 칭찬이야?”

“반쯤. 나머지 반은 다른 부분이 아직 덜 믿음직하다는 뜻이고.”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래도 내려가도 되지?”

죠니는 숲과 열린 문, 그리고 따뜻한 식탁을 다시 보았다.

“천천히. 뛰어가서 먼저 먹는 건 금지.”

“왜?”

“동화나 서사에서, 모르는 집의 음식은 보통 이야기 진행 장치거든.”

“먹으면 진행되는 거 아냐?”

“응. 문제는 진행 방향이야.”

그레이는 배에서 작은 가방을 들고 내렸다. 이번에도 기록판보다 먼저 물병과 얇은 천, 마른 옷을 챙겼다. 그녀는 섬의 따뜻한 공기를 느끼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습기가 많습니다.”

푸리나가 물었다.

“또 담요?”

“이번에는 마른 옷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죠니가 그레이의 가방을 보았다.

“그레이, 너는 섬보다 먼저 사고의 종류를 맞히는 것 같네.”

“맞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맞을 것 같아서 무섭다.”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낮게 말했다.

“저 섬은 길을 막지는 않소.”

죠니가 돌아보았다.

“그럼 괜찮은 건가?”

“아니오. 길을 바꾸오.”

“그게 더 안 괜찮게 들리는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들어간 발자국과 나오는 발자국이 다를 것이오.”

그 말에 푸리나의 손이 류트 위에서 멈췄다.

아스테르다스도 더 이상 뛰려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섬의 숲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흥미롭군요. 돌아온다는 것은 같은 발로 돌아오는 일일까요, 아니면 달라진 발을 받아들이는 일일까요?”

죠니가 말했다.

“레이튼, 이번엔 그 질문이 꽤 필요해 보이네.”

“그런가요?”

“응. 보통은 배에 돌아가서 하자고 했을 텐데, 이번엔 섬에 들어가기 전에 들어두는 게 나을 것 같거든.”

레이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

저택의 문 앞에는 라플리가 서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키르케였다.

화려한 마녀의 로브라기보다, 오래된 마탑의 주인 같은 옷차림이었다. 검은색과 깊은 보라색이 섞인 옷자락이 발밑까지 내려왔고, 손에는 은빛 잔이 들려 있었다. 눈은 차갑고,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있었다.

그녀는 배에서 내린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타카로 간다더니, 길을 꽤 잘못 들었네.”

죠니가 대답했다.

“그 말은 첫 섬부터 계속 듣고 있어서, 이제 좀 익숙해졌어.”

라플리는 그를 보았다.

“오디세우스?”

“오늘은 그렇다네.”

“어울리진 않는데.”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왕님이 이미 배까지 띄워서 늦었어.”

푸리나는 라플리 뒤의 식탁을 보았다.

그 위에는 빵과 과일, 따뜻한 수프, 붉은 술이 놓여 있었다. 모두 무대용 소품이거나 안전하게 준비된 음식일 터였다. 그래도 냄새는 이상하게 생생했다.

“키르케의 섬이네.”

라플리는 웃었다.

“잘 아네.”

“오디세이아니까.”

“그럼 알겠지. 여기서 함부로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아스테르다스가 손을 멈췄다.

이미 빵에 가까이 가 있던 손이었다.

죠니가 그를 보았다.

“봐. 내가 뭐랬어.”

아스테르다스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안 먹었어.”

“좋아. 드디어 ‘아직’을 빼는 법을 배웠네.”

라플리는 그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먹겠지. 배고픈 사람은 항상 있고, 쉬고 싶은 사람도 항상 있으니까.”

그 말은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그레이는 식탁을 보았다. 따뜻한 음식. 열린 문. 마른 의자. 바다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앉고 싶어질 자리였다.

“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라플리가 그레이를 보았다.

“물론. 문제는 쉬는 순간, 자기가 무엇을 내려놓는지 모른다는 거지.”

푸리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건 무슨 뜻이야?”

라플리는 잔을 흔들었다.

“앉아봐. 알게 될 테니까.”

죠니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왕님, 이번엔 내가 먼저 볼게.”

“괜찮겠어?”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안 괜찮다고 빠지면 오디세우스 배역료를 못 받을 것 같네.”

“배역료는 없는데?”

“그럼 더 억울하네.”

푸리나는 잠깐 웃었다.

그 웃음은 짧았다.

죠니는 식탁 앞에 앉지 않았다. 대신 식탁을 지나쳐 라플리 앞에 섰다.

“뭘 보여주려는 거야?”

라플리는 그를 빤히 보았다.

“네가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지금 보기엔 다 사람인데.”

“겉모양은 그렇지.”

라플리는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다는 사람을 깎아. 전쟁도 그렇고, 공포도 그렇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도 그렇지. 사람은 살아남으려고 많은 걸 삼킨다. 짐승처럼 뛰고, 짐승처럼 숨고, 짐승처럼 물어뜯고, 그런 다음 집에 돌아가서 사람 얼굴을 하지.”

그녀의 웃음이 희미해졌다.

“그게 정말 돌아온 걸까?”

죠니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그 질문을 하려고 남의 속을 뒤집어놓을 생각이면, 꽤 취미가 안 좋은데.”

라플리는 무심하게 말했다.

“상처는 안에 있다고 사라지지 않아.”

“그건 맞아.”

죠니는 식탁 위의 잔을 보았다.

“그런데 안에 있다고 해서, 남이 멋대로 꺼내 전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라플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럼 못 본 척 데려가게?”

“아니. 볼 거야.”

죠니는 천천히 말했다.

“다만 구경거리처럼 보진 않을 거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때까지 옆에 있을 거야. 적어도 그 정도는 선장이 해야 할 일 같거든.”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해졌다.

라플리는 한참 죠니를 보았다.

그러다 웃었다.

“좋아. 그럼 얼마나 잘 기다리는지 보자.”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식탁 위의 붉은 술잔들이 흔들렸다.

그리고 향이 퍼졌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흙냄새가 섞인 향.

무대 위의 조명이 낮아졌다.


---

처음 변화한 것은 엑스트라 선원들이었다.

그들의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바닥을 짚었다. 누군가는 낮은 울음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겁먹은 짐승처럼 뒤로 물러났다. 물론 완전한 변신은 아니었다. 배우들은 가면과 망토, 몸짓으로 짐승이 되어갔다. 하지만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깔린 무대 위에서, 그 변화는 단순한 분장보다 더 생생하게 보였다.

다음 순간, 향이 아스테르다스에게 닿았다.

그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깨가 낮아지고, 발끝이 무대 바닥을 긁었다.

하지만 그것은 겁먹은 짐승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냥감을 향해 떨어지기 직전의 유성.

아직 하늘에 있으나, 이미 낙하지점을 정하려는 몸.

라플리의 마법은 그를 약하게 만들지 못했다. 다만, 그 안에 있던 가장 원초적인 운동성을 겉으로 끌어냈다.

달려라.

들이받아라.

생각보다 먼저 떨어져라.

그 충동은 단순한 야성이 아니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원래부터 품고 있던 속도와 낙하와 돌파의 본능이었다. 전장에서 적진을 가르고, 공중에서 궤도를 바꾸고, 닿아야 할 곳에 떨어지는 무인의 몸이 먼저 깨어난 것이다.

죠니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붙잡지는 않았다.

붙잡아 멈출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씨.”

죠니가 낮게 말했다.

“내가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그러니까 네가 골라. 지금 저 마법이 미는 방향으로 떨어질 건지, 아니면 네가 정한 곳으로 떨어질 건지.”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공포가 아니었다.

방향을 빼앗기기 직전의 분노였다.

다음 순간, 그의 발이 바닥을 눌렀다.

청흑빛 기운이 발끝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어깨로 감겨 올라갔다. 충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질 필요도 없었다.

돌진하려는 힘은 그 자체로 아스테르다스의 일부였다.

다만, 방향을 잃은 짐승의 선이 아니라, 낙하지점을 정한 유성의 궤도로 다시 묶였다.

아스테르다스는 이를 악문 채 웃었다.

“그래.”

그의 손이 바닥을 짚기 직전 멈췄다.

짐승이 되려던 자세는, 어느새 낮게 몸을 낮춘 무인의 준비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건 내 낙하지점이 아니야.”

라플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버티네.”

아스테르다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선명했다.

“고른 거야.”

그 말과 함께 청흑빛 기운이 한 번 더 그의 몸을 돌았다.

멧돼지처럼 들이받으려던 충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정렬되었다. 필요하다면 떨어질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라플리의 향이 정한 방향이 아니라, 아스테르다스 자신이 고른 방향일 것이다.

죠니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래. 그쪽이 훨씬 형씨답지.”

아스테르다스는 숨을 내쉬었다.

“위험했네.”

죠니가 물었다.

“너한테?”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떨어질 곳을 잘못 고르면, 옆 사람들까지 휩쓸릴 뻔했어.”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짐승이 되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방향을 남에게 맡기는 게 무서운 거지.”

죠니는 잠시 그를 보았다.

“좋은 말이네.”

“칭찬?”

“응. 이번엔 거의 온전히.”

아스테르다스는 짧게 웃었다.


---

그레이는 이미 다른 선원들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우처럼 웅크렸고, 누군가는 새처럼 팔을 접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괜찮습니까?”도 바로 묻지 않았다. 괜찮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물병을 열어 가까운 곳에 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까이 두겠습니다.”

토끼처럼 떨고 있던 배우 하나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뚫어져라 보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 있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처음에는 입에서 거의 튀어나올 뻔했다.

귀엽다.

작고, 웅크리고, 가면을 쓴 모습들이 무대 위에서 잠깐은 귀엽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플리가 그녀를 보았다.

“말해봐.”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라플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귀엽지? 사람이 말 대신 울음으로 대답하는 게.”

푸리나의 손이 류트 위에서 굳었다.

라플리는 계속 말했다.

“내가 짐승으로 만든 게 아니야. 바다가, 전쟁이, 공포가, 살아남기 위해 안쪽에 구겨 넣은 걸 겉으로 꺼냈을 뿐이지.”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플리는 식탁을 가리켰다.

“사람은 배고프면 먹어. 무서우면 숨고, 궁지에 몰리면 물어뜯고, 다치면 웅크리지. 그걸 보기 싫어서 이름과 옷과 예절로 덮어두는 거야.”

그녀는 죠니를 보았다.

“자, 오디세우스. 이들을 데리고 집에 갈 수 있겠어?”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웅크린 선원들을 보았다.
아스테르다스가 자기 힘의 방향을 다시 고른 모습을 보았다.
그레이가 물병을 놓고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집에 데려가는 건 해야지.”

라플리의 입가가 올라갔다.

“저 꼴로?”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저 꼴이라서.”

그 말에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멀쩡한 사람만 데려갈 거면 선장이 필요 없잖아. 알아서 걸어가면 되지. 배가 필요한 건, 혼자서는 못 돌아가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야.”

라플리는 침묵했다.

죠니는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라플리, 이런 건 네가 꽤 그럴듯하게 말해도 마음에 안 들어. 남의 상처를 보여주는 게 치료는 아니거든.”

라플리는 웃지 않았다.

“그럼 치료해봐.”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여왕님.”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응.”

“이번엔 웃기는 노래 말고. 돌아오게 하는 노래.”

푸리나는 잠시 류트를 내려다보았다.

세이렌의 섬에서, 그녀는 배웠다.

사람을 혼자 상처 속에 세우는 노래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다른 사람을 앉히는 노래도 있다.

이번에는 더 조심해야 했다.

짐승이 된 이들을 억지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영 짐승이라 부르는 것도 폭력이었다.

푸리나는 숨을 고르고, 류트를 들었다.


---

첫 음은 낮았다.

섬의 숲에 깔린 향을 밀어내려 하지 않았다. 라플리의 마법을 부수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웅크린 이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음이었다.

푸리나는 노래했다.

> 돌아오라, 사람의 이름으로.
그러나 서두르지 마라.

손이 떨리면 손부터,
목이 막히면 숨부터,
말이 나오지 않으면
울음 옆에 앉아도 좋다.

발굽도, 깃도, 이빨도
잠시 내려놓을 곳이 여기 있다.

돌아오라.
명령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노래는 밝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했다.

그레이는 노래에 맞춰 움직였다.

그녀는 선원들에게 하나씩 천을 건넸다. 누구에게도 억지로 씌우지 않았다. 그저 가까운 곳에 놓았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이에게는 잔을 더 가까이 밀어주었다. 손이 떨리는 이에게는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가, 상대가 원하지 않는 듯하면 바로 거두었다.

“바로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사람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여우 가면을 쓴 선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의 노래가 이어졌다.

> 네가 아직 네 이름을 듣기 어렵다면,
우리는 크게 부르지 않으리라.

네가 아직 식탁에 앉기 어렵다면,
그릇을 네 곁에 두리라.

돌아오라.
돌아오지 못하겠다면,
우리가 먼저 네 곁에 앉으리라.



아스테르다스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은 아직 뜨거웠다.

짐승의 발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또렷하게 자신의 손이었기 때문이다. 떨어질 곳을 정하고, 적을 치고, 동료를 지킬 수 있는 손. 동시에 방향을 잘못 고르면 너무 많은 것을 휩쓸 수 있는 손.

그는 작게 말했다.

“죠니.”

“응.”

“방금 내가 정말 떨어졌으면, 이 섬 반쯤은 부서졌겠지?”

죠니는 섬의 숲과 저택, 그리고 라플리를 번갈아 보았다.

“반쯤으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걸.”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 웃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기 힘을 다시 확인한 무인의 웃음이었다.

“다음엔 더 조심해야겠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조심이라는 단어도 꽤 빠르게 들려.”

“그래도 할 거야.”

“알아. 그래서 형씨가 여기 있는 거겠지.”

그레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아스테르다스 앞에 물잔을 놓았다.

“물을 드시겠습니까?”

아스테르다스는 물잔을 받았다.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손이 뜨거우시면, 천을 감아드릴 수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이 열은 내가 가져갈게.”

그레이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럼 옆에 두겠습니다. 필요하면 말씀해주십시오.”

“응.”

아스테르다스는 낮게 웃었다.

“고마워. 기다려주는 건 꽤 도움이 되네.”

그레이는 조금 난처해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

레이튼은 라플리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혹은, 변했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라플리가 그를 보았다.

“당신은 안 변하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이미 질문이라는 꽤 번거로운 짐승을 안에 기르고 있어서일지도 모르지요.”

라플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농담?”

“절반쯤은요.”

레이튼은 웅크린 선원들과, 스스로 궤도를 되찾은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꺼낸 것은 본질입니까, 아니면 상처가 취한 임시 형태입니까?”

라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사람이 공포 속에서 짐승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그 사람의 본질로 고정해버리면, 당신은 상처를 본 것이 아니라 결론을 너무 빨리 붙인 셈이 되겠지요.”

라플리는 오래 침묵했다.

그러다 낮게 웃었다.

“역시 귀찮은 질문을 하는군.”

“좋은 질문은 대체로 조금 귀찮습니다.”

“그럼 저 선장의 답은?”

라플리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지금도 아스테르다스와 선원들 사이에 서 있었다. 선장이라기보다, 피곤한 동료처럼 보였다.

레이튼은 말했다.

“아직 답하는 중이겠지요.”


---

푸리나의 노래가 끝나갈 무렵, 선원들은 하나둘 사람의 자세를 되찾았다.

누군가는 가면을 벗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벗지 못했지만, 더 이상 바닥에 엎드려 있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울었다.

그레이는 그 울음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그저 가까이에 마른 천을 놓았다.

라플리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처음보다 덜 비웃는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류트를 천천히 내렸다.

“이제 됐어?”

라플리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죠니를 보았다.

“좋아. 데려가 봐.”

죠니는 일어섰다.

“보내주는 건가?”

“시험은 끝났어.”

“친절하진 않았네.”

“친절한 섬을 원했다면 키르케에게 오면 안 되지.”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네.”

라플리는 식탁 위의 잔을 정리했다.

“하지만 기억해. 집에 도착한다고 다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죠니는 그 말을 받아넘기지 않았다.

“알아.”

“정말?”

“응.”

죠니는 그레이가 접어둔 담요와 물병, 푸리나의 류트, 아스테르다스의 아직 열이 남은 손을 보았다.

“그래서 배에 물이랑 담요가 있는 거겠지.”

라플리는 눈을 가늘게 했다.

“그런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분하지 않지. 그런데 그런 것부터 없으면, 더 큰 말은 다 빈소리야.”

라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상하게 이 섬의 향기보다 오래 남았다.


---

그들이 배로 돌아올 때, 섬의 금빛 조명은 조금씩 낮아졌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저택을 돌아보았다.

“라플리.”

라플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아까 내가…… 귀엽다고 말할 뻔했어.”

라플리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았다.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라플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정도면 배웠네.”

“칭찬이야?”

“절반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오늘 다들 절반짜리 칭찬이 많네.”

라플리는 그를 보았다.

“나머지 절반은 경고니까.”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익숙해.”

그들은 배에 올랐다.

하융은 조타륜을 잡고 있었다.

“돌아오는 발자국이 달라졌구려.”

죠니가 말했다.

“그래도 돌아왔어.”

“그것이 중요하오.”

하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다음 바다는 더 좁을 것이오. 길이 둘로 갈라지고, 어느 쪽도 온전하지 않소.”

푸리나는 무대 뒤쪽을 보았다.

바다는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선택의 바다군요.”

아스테르다스는 물잔을 쥔 채 말했다.

“이번엔 모두 돌아왔지?”

그레이는 대답하기 전에 선원들을 한 명씩 보았다.

누군가는 아직 말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담요를 쥔 손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 배 위에 있었다.

“네.”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모두 돌아왔습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죠니는 난간에 기대어 섬이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말, 다음 막에서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선택의 바다

바다는 흔들렸다.

이번에는 파도 소리가 조금 더 낮았다.

그리고 배 위에는, 방금 사람으로 돌아온 이들의 숨소리가 오래 남았다.
5막 — 저승의 여관과 젖은 신발

다섯 번째 바다는 아래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푸른 천은 여전히 바다였고,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여전히 왕궁 극장의 무대 위에 있었다. 그러나 파도 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갈매기 소리는 사라졌고, 바람도 줄었다.

대신 물 밑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가 있었다.

멀고, 둔하고, 아주 느린 소리.

노 젓는 소리 같기도 했고, 문이 닫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다가…… 낮아지고 있어.”

죠니는 난간을 잡았다.

“배는 그대로인데, 발밑이 내려가는 느낌이네. 여왕님, 이거 연출이야?”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반쯤은.”

“그럼 나머지 반은?”

“오디세이아.”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 대답, 편리하네.”

“나도 지금 그렇게 생각했어.”

무대의 조명이 낮아졌다.

푸른색은 점점 검푸른빛으로 변했고, 은빛 물결은 빛을 잃었다. 배 주위에는 안개가 깔렸다. 하지만 세이렌의 안개와는 달랐다. 그것은 사람을 부르는 안개가 아니라, 이미 다녀간 발자국을 감추는 안개였다.

하융은 조타륜을 놓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곧 닿을 것이오.”

죠니가 물었다.

“어디에?”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한참 동안 어둠을 보았다.

“살아 있는 자가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항구요.”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저승이군요.”

아스테르다스는 이번엔 농담하지 않았다.

그는 신발끈을 다시 확인했다. 아주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왜 그것을 확인했는지 깨닫고,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여긴 뛰어내릴 곳이 아니겠네.”

죠니가 말했다.

“응. 오늘만큼은 난간 위에 올라가지 않는 걸로 하자. 네가 떨어질 곳을 고르는 사람이라도, 여긴 고르면 안 되는 쪽이야.”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레이는 말없이 작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마른 천이 들어 있었다.

처음 출항할 때 챙겼던 것보다 더 얇고, 더 부드러운 천이었다. 누군가의 손을 닦기에도, 젖은 신발을 감싸기에도 좋은 천.

죠니는 그것을 보고 물었다.

“정말 있을 것 같아?”

그레이는 잠시 손을 멈췄다.

“네.”

“젖은 신발?”

“바다를 건너온 곳이라면요.”

죠니는 더 묻지 않았다.


---

배가 닿은 곳은 항구가 아니었다.

여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관처럼 보이는 항구였다.

무대 한가운데, 어둠 속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지붕은 낮고, 창문에는 따뜻한 빛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는 오래된 나무 간판이 흔들렸다.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 여관으로.

어떤 이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자의 쉼터로.

어떤 이에게는 그저, 길 끝에 불을 켜둔 집으로.

여관 앞에는 신발장이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본 순간 멈췄다.

신발장이었다.

낡은 장화, 작은 신발, 군화, 샌들, 가죽 끈이 끊어진 신발, 진흙이 묻은 신발, 바닷물에 젖은 신발.

가지런했다.

너무 가지런해서, 오히려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레이는 천천히 다가갔다.

죠니가 뒤에서 물었다.

“왜?”

그레이는 한 켤레의 젖은 신발 앞에 멈춰 섰다.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승의 문 앞에, 아직 마르지 않은 신발.

방금 도착한 것처럼.

아니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마지막으로 건넌 물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은 채 서 있었다.

평소라면 여관 간판을 보고 무엇인가 말했을 것이다.
“여관좌 분위기다!”라든가, “무대 장치가 완벽해!”라든가.

하지만 이번에는 말하지 않았다.

여관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타마르가 나타났다.

오늘의 타마르는 여왕이라기보다, 저승 여관의 주인에 가까웠다. 옅은 보랏빛과 포도주색이 섞인 옷자락이 바닥에 스쳤고, 손에는 작은 등불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나른했지만, 그 아래에는 오래된 문턱을 지키는 자의 차가운 질서가 있었다.

타마르는 미소 지었다.

“살아 있는 손님들이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느렸다.

“오래 머물 곳은 아니랍니다. 그래도 길에서 오셨으니, 차 한 잔은 드시고 가셔야겠지요.”

죠니는 여관 안을 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한테도 차를 주나?”

타마르는 느릿하게 웃었다.

“문턱까지 온 손님에게 빈손으로 돌아가라 할 수는 없지요.”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정말 저승이야?”

타마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극장이기도 하고, 여관이기도 하고, 저승의 문턱이기도 하겠지요.”

그녀는 등불을 들어 신발장을 비추었다.

“다만 저 신발들은, 극만은 아니랍니다.”

그레이의 손이 천을 쥐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그레이.”

그레이는 아주 작게 대답했다.

“네.”

“지금 닦고 싶지?”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대답이었다.

타마르는 그레이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닦아도 된답니다. 다만 가져가지는 마세요. 그들은 이미 다른 방으로 들어갔으니까요.”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젖은 신발 한 켤레 옆에 마른 천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닦지는 않았다.

아직.

그저 먼저 천을 놓았다.

마치 누군가 돌아와 앉으면, 바로 신발을 벗고 발을 말릴 수 있도록.

죠니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작게 말했다.

“네 방식이네.”

그레이는 낮게 대답했다.

“늦었으니까요.”

“늦었어도 놓는 건 할 수 있지.”

그레이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네.”


---

여관 안은 따뜻했다.

그래서 더 조용했다.

바깥의 바다는 검고 차가웠는데, 안쪽에는 불이 있었다. 긴 식탁이 있었고, 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의자는 모두 차 있지 않았다. 몇몇 의자는 비어 있었다. 어떤 의자 위에는 외투가 놓여 있었고, 어떤 자리에는 물잔만 있었다.

푸리나는 문턱을 넘으며 숨을 죽였다.

“여긴 박수칠 곳은 아니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응. 대신 발소리를 좀 낮추면 될 것 같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마르는 그들을 긴 식탁 옆에 앉혔다.

“이곳에서는 큰 목소리가 필요 없답니다. 듣고 싶은 이들은 작은 말도 듣고, 듣지 않을 이들은 북을 쳐도 듣지 않으니까요.”

레이튼은 조용히 식탁을 살폈다.

“이곳의 손님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한 이들입니까?”

타마르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돌아오지 못했다기보다는, 다른 곳에 도착한 이들이지요.”

그녀는 찻잔을 죠니 앞에 놓았다.

“사람은 자신이 정한 항구에만 닿는 것은 아니랍니다.”

죠니는 찻잔을 보았다.

“그 말은 별로 위로가 안 되는데.”

타마르는 느릿하게 웃었다.

“위로하려고 한 말은 아니랍니다.”

“그럼 다행이네. 위로로는 꽤 매웠거든.”

푸리나가 그를 살짝 보았다.

죠니는 찻잔을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여기서 마셔도 되는 거야?”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는 손님을 붙잡는 차는 내지 않습니다. 이곳은 여관이지, 세이렌의 바다가 아니니까요.”

푸리나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타마르는 그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노래로 사람을 붙잡는 것과, 노래로 곁에 있어주는 것의 차이를 배운 얼굴이군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은요.”

“좋답니다. 조금 배운 사람은 다음 문 앞에서 덜 떠들게 되니까요.”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왕님한테는 꽤 어려운 과제네.”

푸리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죠니.”

“응. 작은 목소리로 했어.”

그레이는 여관 안쪽을 보고 있었다.

식탁 너머, 벽에는 작은 나무패들이 걸려 있었다.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선원.

병사.

아이.

어머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자.

그리고 어쩌면, 아직 이름이 도착하지 않은 자리.

그레이의 시선이 한 나무패 앞에서 멈췄다.

니코스.

스킬라의 바위에서 사라진 이름표의 이름이었다.

그레이가 숨을 멈췄다.

“왜…….”

타마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에 떨어진 이름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레이는 나무패를 바라보았다.

“그럼 여기에 도착한 겁니까?”

“이 극에서는 그렇지요.”

“실제로도…….”

그레이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타마르는 다그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 큽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 극 안에서만 대답하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네. 도착했답니다.”

그레이의 손이 떨렸다.

아주 조금.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자기 앞의 찻잔을 그레이 쪽으로 조금 밀었다.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마셔. 이번엔 내가 괜찮다고 확인받은 차야.”

“저는 괜찮습니다.”

“그 말은 오늘 여관 문 앞에 두고 들어오자. 여기서는 안 어울려.”

그레이는 잠시 그를 보다가, 찻잔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곧 다시 이름패들을 보았다.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

여관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이타카에 도착했는가?”

그 목소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였다.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식탁 바로 건너편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스테르다스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 쪽으로 갔다가 멈췄다.

여기서는 무기를 들 곳이 아니었다.

죠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타마르는 대답했다.

“돌아오지 못한 선원들.”

여관 안의 불빛이 흔들렸다.

그러자 식탁 너머의 빈 의자들에 그림자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우리는 이타카에 도착했는가?”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디세우스는 돌아간다.

하지만 모든 선원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은 이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해져 있었다고 해서, 대답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니.”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피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빈 의자들이 조용해졌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이타카는 아니야. 적어도 내가 아는 그 항구는 아니지.”

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길을 잃었는가?”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타마르가 그를 바라보았다.

죠니는 말을 골랐다.

평소처럼 농담으로 넘길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거창하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결국, 자기답게 말했다.

“너희가 도착한 곳은 내가 가려던 집은 아니야. 하지만 문이 있고, 불이 있고, 신발 놓을 자리도 있네. 길바닥에 버려진 건 아닌 것 같아.”

푸리나는 숨을 멈춘 듯했다.

죠니는 계속 말했다.

“내가 대신 이타카라고 말해주면 편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거짓말 같고. 대신 말할 수 있는 건…….”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너희 이름은 가져갈게. 이타카까지.”

그 말에 그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빈 의자들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만?”

죠니는 작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산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건 생각보다 적어. 이름, 기억, 그리고 가끔은 바보 같은 노래 정도지.”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죠니는 그녀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노래는 여왕님 담당이고.”

푸리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레이는 자기 가방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이름패가 걸린 벽 아래에 하나씩 접어두기 시작했다.

마른 천.

젖은 신발을 위한 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건넌 물을 말릴 수 있도록.

“저도 가져가겠습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이름만이 아니라, 남은 것들도요. 신발이 젖어 있었다는 것. 누군가 물을 건넜어야 했다는 것. 늦었지만, 천을 놓았다는 것.”

그녀는 니코스의 이름패 아래에 천을 놓았다.

“잊지 않겠습니다.”

타마르는 눈을 내리깔았다.

“좋은 대답이군요.”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이라기보다……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일 때도 있답니다.”


---

푸리나는 천천히 류트를 들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푸리나는 곧바로 노래하지 않았다.

“나, 지금 노래해도 될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 자체가 이전의 푸리나와 달랐다.

세이렌 앞에서는 그녀가 노래로 맞섰다.
키르케의 섬에서는 사람을 돌아오게 하려고 노래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이곳의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다.

푸리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크게 부르지 않는다면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크게 안 부를게.”

죠니가 작게 말했다.

“여왕님한테는 어려운 조건인데.”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할 수 있을 것 같네.”

푸리나는 숨을 고르고, 아주 낮게 현을 튕겼다.

노래는 거의 자장가 같았다.

> 이타카는 멀고,
바다는 깊어
모두가 같은 항구에 닿지는 못했네.

그래도 문 하나,
불 하나,
젖은 신발을 놓을 자리 하나.

우리가 가져갈 것은
금도, 칼도, 승리도 아니라
이름 하나,
젖은 발자국 하나.

잠시 쉬어요.
우리는 갑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가지는 않겠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여관 안은 더 조용해졌다.

하지만 더 차갑지는 않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조용히 자신의 물잔을 빈 의자 하나 앞에 놓았다.

“아까처럼 하나만 있으면 외로워 보여서.”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이번엔 웃지 않았다.

“이런 데서 멋있는 말은 잘 못하겠네.”

죠니가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여기선 멋있는 말보다 물잔이 더 낫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튼은 빈 의자들을 보며 말했다.

“집이란 도착한 곳입니까, 아니면 누군가 기억해주는 방향입니까.”

죠니가 그를 보았다.

“이번 질문은 배에 돌아가서도 계속 따라오겠네.”

“아마도요.”

“귀찮지만, 필요할 것 같아.”

레이튼은 조용히 웃었다.


---

떠날 시간이 되었다.

타마르는 여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다시 검푸른 바다가 있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문턱 너머에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조용했다. 마치 이 여관 안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처럼.

타마르는 죠니에게 말했다.

“살아 있는 손님은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답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 밥값이 비쌀 것 같기도 하고.”

타마르는 느릿하게 웃었다.

“값은 이미 길에서 치르고 오셨지요.”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타마르를 보았다.

“타마르.”

“네, 어린양.”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한테, 우리가 정말 뭘 가져갈 수 있을까?”

타마르는 잠시 생각했다.

“전부는 아니랍니다.”

“응.”

“그러나 전부가 아니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았다.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신발장을 보았다.

처음에 보았던 젖은 신발 옆에는, 이제 마른 천이 놓여 있었다. 신발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천 하나로 죽음이 마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은 있었다.

그레이는 그 앞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사과는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죠니는 그레이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은 충분히 놓았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죠니는 작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레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오늘 가져온 것은 모두 놓았습니다.”

“그럼 다음에 더 가져오면 되겠네.”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왕님이 후일담 좋아하잖아. 이런 것도 후일담이 필요할 것 같고.”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용히 웃었다.

“응. 필요해.”


---

그들이 배에 오르자, 여관의 불빛이 조금씩 멀어졌다.

바다는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 배가 산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스테르다스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 이타카야?”

하융은 조타륜을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가장 깊은 문턱은 지났소. 이제 위로 오르는 길이오.”

죠니가 난간에 기대었다.

“위로 오른다고 해서 쉬운 길은 아니겠지?”

“그렇소.”

“그럴 줄 알았어.”

하융은 바다 너머를 보았다.

“그러나 이제 항구의 불이 보일 것이오.”

푸리나는 눈을 들었다.

무대 뒤편, 아주 멀리 작은 불 하나가 켜졌다.

이타카.

아직 먼, 그러나 처음으로 보이는 불.

그레이는 가방을 닫았다.

가방은 비어 있었다.

마른 천을 모두 놓고 왔기 때문이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가벼워졌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는 빈 가방을 품에 안았다.

“오히려 조금 무거워졌습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수 있지.”

푸리나는 류트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래하지 않았다.

아직은.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6막 — 이타카 귀환과 활의 시험

이번에는 작은 부제가 함께 내려왔다.

— 따뜻한 밥과 빈 자리 —

죠니는 그 부제를 보고 낮게 말했다.

“여왕님.”

“응?”

“이번 제목은 괜찮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정말?”

“응. 좀 아프긴 한데, 괜찮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산 사람들의 바다로 돌아갔다.

여관의 불빛은 멀어졌다.

하지만 신발장 앞에 놓인 마른 천들은, 무대의 어둠 속에서도 한동안 희미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6막 — 이타카로의 귀환과 활의 시험

이타카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 하나였다.

저승의 여관에서 올라온 뒤, 바다는 다시 푸른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출항할 때의 바다와는 달랐다. 그때의 푸른 천은 장난스럽고 가벼웠다. 은실은 반짝였고, 종이 갈매기는 우스울 만큼 씩씩하게 흔들렸다.

지금의 바다는 조용했다.

파도는 여전히 천이었고, 배는 여전히 무대 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에 탄 이들은 이제 그것을 단순한 장치로 보지 않았다.

저 천 아래에 이름들이 있었다.

젖은 신발들이 있었다.

스킬라의 바위에서 사라진 작은 이름표가 있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 불 하나가 있었다.

푸리나는 그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이타카야?”

하융은 조타륜을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이는구려.”

죠니가 물었다.

“그렇게 보인다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야?”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이타카는 항구이기도 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붙인 이름이기도 하오. 그러니 닿기 전에는 언제나 조금 불확실하오.”

죠니는 난간에 기대었다.

“집까지 철학적이면 피곤한데.”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집은 원래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 중 하나지요.”

죠니는 그를 보았다.

“그 말, 이타카에 도착하고 나서 하면 안 될까?”

“도착해도 사라지지는 않을 질문입니다.”

“알아. 그래서 더 피곤한 거야.”

아스테르다스는 배 앞머리로 걸어왔다.

이번에는 난간에 올라가지 않았다. 다만 손을 이마 위에 얹고, 멀리 불빛을 보았다.

“작네.”

푸리나가 말했다.

“아직 멀어서 그래.”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네. 처음엔 이타카가 멋진 성이나 큰 항구처럼 나올 줄 알았는데.”

죠니가 말했다.

“나도 그랬어. 그런데 저 정도 불 하나면 충분한 것 같기도 하네.”

“왜?”

“멀리서 돌아오는 사람은, 처음부터 집 전체를 보는 게 아니잖아. 먼저 불빛 하나 보고, 그다음 지붕 보고, 그다음 문 앞에 누가 있는지 보는 거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웃었다.

“죠니, 오늘은 자꾸 좋은 말을 하네.”

죠니는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승까지 갔다 왔잖아. 사람 말투가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지.”

“그럼 계속 저승에—”

“여왕님.”

“농담이야.”

“그 농담은 타마르가 들으면 차 한 잔 더 줄 것 같아서 무서워.”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배 뒤편에서 빈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마른 천이 없었다. 모두 저승 여관의 신발장 앞에 놓고 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 가벼워진 가방이 오히려 손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죠니는 그것을 보다가 물었다.

“무거워?”

그레이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네.”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래서요.”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런 무게도 있지.”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설명하지 않았다.

죠니도 더 묻지 않았다.


---

이타카가 가까워지자, 무대가 바뀌기 시작했다.

푸른 천은 천천히 걷히고, 그 아래에서 돌길이 드러났다. 배는 뒤로 물러났고, 대신 무대 중앙에는 낮은 집이 세워졌다. 왕궁도 아니고, 거대한 성도 아니었다.

낮은 담장.

작은 문.

오래된 올리브나무.

문 옆에는 꺼지지 않은 등불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집 앞에는 식탁이 있었다.

식탁 위에는 빵과 수프, 물잔이 놓여 있었다. 따뜻한 연기가 아주 얇게 올라왔다. 관객석에서도 그 연기가 보일 만큼 조명이 세심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타카.”

죠니는 한참 동안 그 집을 보았다.

“생각보다 작네.”

“실망했어?”

“아니.”

그는 식탁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았다.

“큰 집이면, 오히려 좀 낯설었을 것 같아.”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좋은 답입니다.”

“아직 질문 안 했잖아.”

“이미 답하고 계셨습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질문은 나중에 청구서로 보내.”

그러나 이타카의 집은 비어 있지 않았다.

식탁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구혼자들이었다.

원전의 오디세이아라면 페넬로페의 집을 점거한 자들. 여기서는 푸리나가 준비한 귀향 연회를 먼저 차지한 자들이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시끄럽게 웃고, 남의 식탁 위의 빵을 아무렇지 않게 찢어 먹는 이들.

그들은 오디세우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혹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듯했다.

푸리나의 얼굴이 굳었다.

“저 사람들…….”

죠니가 말했다.

“집에 모르는 사람이 많네.”

아스테르다스가 주먹을 쥐었다.

“쫓아내면 되지?”

죠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식탁, 등불, 문, 그리고 구혼자들을 차례로 보았다.

“쫓아내긴 해야겠지. 그런데 그냥 싸움으로 끝내면 여왕님이 준비한 6막 제목이 아까워져.”

푸리나가 작게 물었다.

“제목 신경 써주는 거야?”

“이쯤 오니까 신경 쓰이네. 좀 억울하지만.”

그때 구혼자 중 하나가 일어났다.

그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집의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식탁은 남은 자들의 것이 아니겠는가!”

또 다른 구혼자가 웃었다.

“불이 켜져 있으면, 누구든 따뜻해질 권리가 있지!”

아스테르다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말은 그럴듯한데.”

죠니가 말했다.

“대체로 남의 집에서 남의 빵 먹는 사람들이 말을 제일 크게 하지.”

그레이는 식탁을 보았다.

빵은 잘려 있었다.

하지만 식탁의 한쪽에는 손대지 않은 그릇이 있었다.

따뜻한 수프 한 그릇.

마치 누군가 돌아올 것을 알고 남겨둔 자리처럼.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하나는 남겨두었습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응?”

“전부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자리는…… 남아 있습니다.”

죠니는 그릇을 보았다.

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변했다.

“그렇네.”

레이튼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집은 완전히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이 아직 하나 남아 있군요.”

죠니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럼 그 하나로 들어가자.”


---

구혼자들이 그들을 알아차렸다.

“누구냐?”

죠니는 앞으로 나섰다.

오디세우스의 낡은 망토가 그의 어깨에서 흔들렸다. 처음 출항할 때는 어색했던 그 망토가, 이제는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바닷바람과 동굴의 먼지와 세이렌의 침묵과 저승 여관의 차 냄새를 모두 지나온 망토였다.

그가 말했다.

“집주인.”

구혼자들이 웃었다.

“집주인?”

“이 집의 주인은 오래전에 바다에 죽었다!”

“돌아온 자라면 증명해보라!”

푸리나는 그 대사를 듣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무대 한쪽에서 오래된 활이 나타났다.

크고, 단단하고, 오래된 활.

오디세우스의 활.

그레이가 활 옆에 놓인 천을 조심스럽게 걷었다. 아스트리트가 활의 상태를 확인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레이튼은 활과 죠니를 번갈아 보았다.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반짝였다.

“활의 시험.”

죠니는 활을 보았다.

“드디어 제목값 하는 장면이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이 활을 당기는 자가 이타카의 주인.”

구혼자들이 하나둘 활을 들었다.

첫 번째 구혼자는 허세스럽게 웃으며 활을 잡았다.

당기지 못했다.

두 번째 구혼자는 양손을 비틀며 활시위를 걸려 했다.

실패했다.

세 번째 구혼자는 힘으로 밀어붙이려다, 활이 꿈쩍도 하지 않자 얼굴이 붉어졌다.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일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로빈후드의 활쏘기 대회처럼 가볍지 않았다.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돌아온 자가 정말 돌아왔는지 확인하는 문턱이었다.

그때 미하일라가 천천히 일어났다.

객석과 무대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미하일라는 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 제국의 전쟁을 끝내는 천궁의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가 바로 외쳤다.

“잠깐!”

죠니도 거의 동시에 말했다.

“여왕님, 저건 막아야 해.”

아스테르다스도 말했다.

“저건 시험이 아니라 판결이 될 것 같은데.”

그레이가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황제칙령급 사격은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객석에서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라는 활을 보다가, 모두를 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짐은 손대지 않겠다.”

푸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마워!”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이 활은 집으로 돌아온 자의 것이다. 전쟁을 끝내는 짐의 활과는 쓰임이 다르다.”

그 말에 무대가 조용해졌다.

죠니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정확하네.”

미하일라는 짧게 대답했다.

“그대의 차례다.”

죠니는 활 앞으로 걸어갔다.


---

활은 무거웠다.

그것은 소품이었다.

그러나 푸리나의 신술 안에서, 그것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다. 죠니가 손을 뻗는 순간, 활은 그가 지나온 모든 막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숨긴 이름.

세이렌의 노래 앞에서 묶였던 손목.

키르케의 섬에서 사람으로 돌아오던 선원들.

스킬라의 바위에서 사라진 이름표.

저승 여관의 젖은 신발.

그리고 지금, 식지 않은 수프 한 그릇.

죠니는 활을 들었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혼자 중 하나가 비웃었다.

“저런 낡은 망토를 입은 자가 주인이라고?”

다른 자가 말했다.

“바다가 데려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돌아오긴 해.”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다만 돌아온 사람이, 떠났던 사람 그대로는 아닐 뿐이지.”

그는 활시위를 만졌다.

그 순간, 죠니의 눈에 바다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파도는 선이 되었다.

발자국은 원을 그렸다.

숨었던 이름.

묶였던 손목.

돌아오던 숨.

사라진 이름표.

젖은 신발.

식탁 위의 빈 잔.

모든 것이 흩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회전처럼 겹쳐졌다.

생과 사 사이의 動.

무한히 돌고, 어긋나고, 다시 이어지려는 궤적.

그리고 그 회전 속에서, 아주 짧게 반짝이는 하나의 찰나.

《황금의 동경》.

죠니의 신술은 거창하게 타오르지 않았다.

하늘을 찢지도 않았고, 바다를 가르지도 않았다.

그저 손끝과 활시위 사이에, 아주 얇은 황금빛 원 하나가 맺혔다.

죠니는 그 원 너머로 보았다.

돌아온 자의 자리.

돌아오지 못한 자의 빈 잔.

그리고 아직 식지 않은 밥.

그 무한한 회전 속에서, 사람은 거대한 승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순간을 찾는지도 모른다.

젖은 옷을 갈아입는 순간.

따뜻한 밥을 앞에 두고 처음 숟가락을 드는 순간.

빈 자리를 보고도 식탁에 앉기로 하는 순간.

죠니는 낮게 말했다.

“그 무한한 회전 속에서 우린 황금빛 시간을 찾아 헤맨다.”

그 말은 기도도, 선언도 아니었다.

그의 서약에 가까웠다.

죠니는 식탁의 수프를 보았다.

“영광 때문에 돌아온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왕관이나 노래 때문도 아니고.”

활시위가 천천히 당겨졌다.

“살아남은 사람이 돌아와서,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보러 온 거지.”

시위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휘어졌다.

그 순간, 무대 위의 모든 소리가 낮아졌다.

파도도.

관객의 숨도.

구혼자들의 웅성거림도.

죠니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았다.

미하일라처럼 하늘의 명령을 쏘는 활도 아니었다.

아스테르다스처럼 별이 떨어지는 궤도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긴 항해 끝에 집 문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다시 걸어두는 동작이었다.

화살이 날았다.

황금빛 원은 아주 잠깐 화살깃에 감겼다가 사라졌다.

쐐액.

화살은 구혼자를 향하지 않았다.

식탁 뒤편, 오래된 문 위에 걸린 등불 옆.

그곳의 낡은 끈을 정확히 끊었다.

천이 떨어졌다.

그 아래에는 글자가 있었다.

돌아오는 이를 위해 남겨둔 자리

구혼자들의 웃음이 멈췄다.

죠니는 활을 내렸다.

“여기 주인이 없다고 했지.”

그는 식탁 위의 손대지 않은 수프 그릇을 보았다.

“누군가는 기다렸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스테르다스는 낮게 웃었다.

“멋있네.”

죠니는 그를 보았다.

“이번엔 뛰어내리지 않아도 됐어.”

“응. 그게 더 멋있을 때도 있네.”

구혼자 하나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우리는—”

죠니가 그를 보았다.

“남의 집에서 남의 밥을 먹었지.”

“우리는 기다림을 나누었을 뿐이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기다림은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돌아오는 이를 위해 남긴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비워두어야 합니다. 배고프다면 나눌 수 있습니다. 추웠다면 불을 쬘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의 이름으로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구혼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훌륭합니다. 이 집의 수수께끼는 풀렸군요.”

푸리나는 류트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승리의 노래를 바로 부르지 않았다.

죠니가 활을 내려놓고 말했다.

“나가.”

구혼자들이 눈치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청흑빛 기운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웃었다.

“문은 저쪽이야.”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구혼자들은 하나둘 물러났다.


---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식탁에는 손댄 빵과 남은 수프, 흩어진 잔들이 있었다. 완벽한 귀향 연회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먼저 식탁을 정리했다.

그녀는 구혼자들이 흐트러뜨린 그릇을 치우고, 남은 빵을 한쪽에 모았다. 누가 먹던 빵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버리지 않았다. 대신 따로 분리했다.

푸리나가 물었다.

“그레이, 지금도 정리해?”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온 분이 앉아야 하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아스테르다스는 불 옆에 손을 쬐었다.

“따뜻하네.”

죠니는 식탁 앞에 섰다.

손대지 않은 수프 한 그릇이 아직 따뜻했다.

그는 한참 동안 그것을 보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죠니.”

“응.”

“이타카는 어때?”

죠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집의 낮은 천장, 오래된 문, 식탁 위의 수프, 다시 켜진 등불, 그리고 비어 있는 몇 개의 의자를 보았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실망했어?”

“아니.”

그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돌아오는 곳이 너무 시끄러우면, 못 알아볼 것 같아.”

푸리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집 같아?”

죠니는 수프 그릇을 손으로 감쌌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는 조금 뒤에 덧붙였다.

“그런데 밥은 따뜻하네.”

그 말에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려다가, 조금 울음처럼 변했다.

“그럼 괜찮은 귀향이야?”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괜찮다는 말은 아직 아껴두자. 그레이한테 혼날 수도 있고.”

그레이가 멀리서 작게 말했다.

“그 표현은 과장입니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들었네.”

그리고 그는 다시 수프를 보았다.

“그래도 시작할 수는 있겠지. 따뜻한 밥이 있으면, 사람은 대체로 다시 시작할 핑계를 찾거든.”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레이가 빈 의자들을 보았다.

하나.

둘.

셋.

집은 돌아온 사람을 맞이했지만, 모든 자리가 차지는 않았다.

저승 여관에서 보았던 의자들.

스킬라의 바위에서 사라진 니코스의 이름표.

돌아오지 못한 선원들.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식탁 한쪽에 빈 잔을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접시를 하나 두었다.

푸리나가 그것을 보았다.

“빈 자리?”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자리입니다.”

죠니는 그 잔을 보았다.

“좋네.”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죠니는 수프를 한 숟갈 떴다.

“다 같이 앉는다는 건, 꼭 다 살아 돌아왔다는 뜻은 아니니까.”

아스테르다스는 빈 잔 앞에 빵 한 조각을 놓았다.

“하나만 있으면 외로워 보이니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푸리나가 봤지만, 크게 외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었다.


---

푸리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류트를 들었다.

이번에는 노래해도 되는 순간이었다.

크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밝게, 그러나 빈 자리를 덮지 않게.

푸리나는 노래했다.

> 오래 떠난 배가 돌아왔네.
돛은 해지고, 손은 떨리고,
이름 몇 개는 파도에 젖었네.

그래도 불은 남았고,
밥은 아직 따뜻하니,
앉으라, 돌아온 이여.

빈 자리도 함께 세어
잔 하나 더 놓으리라.

살아 돌아온 이는 먹고,
돌아오지 못한 이는 기억되며,
집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리라.



노래가 끝나자, 집 안의 불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요란한 박수는 없었다.

객석도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차갑지 않았다.

죠니는 수프를 한 숟갈 먹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따뜻하네.”

푸리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말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

이타카 귀환극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무대 앞에 나섰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마침내 항구에 닿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다.

“그러나 귀향은 도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빈 자리를 세고, 다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까지가 귀향입니다.”

그녀는 잠시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수프 그릇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러니 오늘의 마지막 막은 여기서 닫습니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식탁 정리 후에요.”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밝게 웃었다.

“식탁 정리 후에!”

죠니가 중얼거렸다.

“좋은 수정이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그레이의 막내림이야.”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하지만 좋은 결론입니다. 집은 식탁을 정리하는 사람 덕분에 다음 식사를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류트를 마지막으로 한 번 튕겼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후일담 — 마른 옷과 따뜻한 밥

죠니는 그 간판을 보고 낮게 말했다.

“여왕님.”

“응?”

“후일담 제목도 괜찮네.”

푸리나는 기쁘게 웃었다.

“이번엔 몇 점?”

죠니는 수프를 한 숟갈 더 먹고 말했다.

“따뜻한 정도.”

“그게 몇 점인데?”

“높은 편이야.”

푸리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따뜻한 수프와 빵, 그리고 빈 잔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타카는 작았다.

그러나 불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 불 앞에 앉아 있었다.
후일담 — 마른 옷과 따뜻한 밥

공연이 끝난 뒤에도, 이타카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막이 내리고, 무대 담당들이 나와 식탁을 치우고, 푸른 천 바다를 접고, 배의 돛대를 내려야 했다. 하지만 푸리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 앞의 낮은 담장에 앉아 있었다.

류트는 무릎 위에 놓여 있었고, 손끝은 현에 닿아 있었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눈앞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식탁이 있었다.

빵.

따뜻했던 수프.

빈 잔 하나.

그리고 죠니가 끊어낸 천 아래 드러난 문구.

돌아오는 이를 위해 남겨둔 자리

푸리나는 그것을 오래 보았다.

“후일담을 해야 하는데.”

죠니가 수프 그릇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왔다.

“여왕님, 이미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안 했잖아.”

“응. 그래서 후일담 같아. 본편은 보통 너무 많이 하거든.”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거 내 얘기지?”

“반쯤.”

“나머지 반은?”

죠니는 식탁을 보았다.

“이번엔 이 극 얘기.”

푸리나는 류트를 내려다보았다.

“오디세이아는 더 요란할 줄 알았어.”

“원래는 요란한 이야기가 맞지. 괴물 나오고, 마녀 나오고, 바다도 화내고, 활도 쏘고.”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졌을까.”

죠니는 수프를 한 숟갈 떴다.

“돌아오면 조용해지는 사람이 있으니까.”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식탁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밥 먹을 때 너무 떠들면 그레이가 정리하기 힘들어.”

멀리서 그레이가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봐. 들었잖아.”

푸리나는 이번엔 정말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죠니.”

“응.”

“재밌었어?”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대 위에 남은 것들을 보았다.

접힌 돛.

풀린 밧줄.

한쪽에 모아둔 귀마개.

라플리의 섬에서 가져온 마른 천.

스킬라의 바위를 지나며 생긴 밧줄 자국.

저승 여관에서 빈 채 돌아온 그레이의 가방.

그리고 이타카의 식탁.

“재밌었다고만 하면 좀 이상하고.”

“응.”

“나빴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는 잠깐 생각했다.

“돌아온 느낌은 있어.”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됐네.”

“응.”

죠니는 수프 그릇을 내려놓았다.

“꽤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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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는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구혼자들이 남긴 그릇은 한쪽으로 치우고, 손대지 않은 수프 그릇은 그대로 두었다. 빈 잔 옆에 놓인 빵 조각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스테르다스가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러다 식탁 아래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쓸어 모았다.

푸리나가 다가왔다.

“그레이.”

“네.”

“이것도 해야 해?”

“네.”

“공연 끝났는데?”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레이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공연 중에는 모두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는,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녀는 빈 잔을 보았다.

“그릇, 천, 젖은 신발, 빈 자리 같은 것들이요.”

푸리나는 조용히 식탁 앞에 섰다.

“내가 도와도 돼?”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푸리나를 보았다.

“군주님께서요?”

“응.”

“손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연극 끝났는데 손 깨끗한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여왕님이 좋은 말 했다. 기록해둬.”

그레이는 아주 작게 말했다.

“기록할 정도는 아닙니다.”

푸리나는 소매를 걷었다.

“그럼 기록하지 말고 부스러기나 줘.”

그레이는 망설이다가 작은 천을 건넸다.

푸리나는 식탁 한쪽을 닦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서툴렀다. 빵 부스러기를 닦는다기보다 옆으로 밀어내는 쪽에 가까웠다.

그레이는 잠시 그것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군주님, 그렇게 하시면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아.”

푸리나는 멈췄다.

“그럼 어떻게 해?”

그레이는 직접 손을 뻗어 천을 접었다.

“이렇게 모아서, 안쪽으로.”

푸리나는 따라 했다.

이번에는 조금 나았다.

죠니가 식탁 옆에 기대어 말했다.

“이타카에서 제일 놀라운 장면이네. 여왕님이 식탁 정리를 배우고 있어.”

푸리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죠니도 해.”

“나는 오디세우스라서 방금 돌아왔는데.”

“그러니까 해. 집주인이잖아.”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그 말은 좀 세네.”

그는 결국 그릇을 하나 들었다.

“좋아. 집주인이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은 저쪽에 모아주시면 됩니다.”

죠니는 그릇을 옮기며 말했다.

“명령이 자연스럽네.”

“죄송합니다.”

“아니.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좀 나서 그래.”

그레이는 손을 멈췄다.

죠니는 덧붙였다.

“나쁜 뜻 아니야.”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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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다스는 불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활의 시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죠니의 화살이 날아가던 순간, 아주 얇은 황금빛 원이 화살깃에 감기던 장면.

그리고 자신이 스킬라의 바위 앞에서 밧줄을 잡고 돌아오던 순간.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청흑빛 유성.

떨어질 곳을 고르는 몸.

그리고 오늘은,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지킨 자리.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이타카의 낮은 집과 작은 식탁을 천천히 살폈다.

“작군.”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타카?”

“그래.”

민다우가스는 식탁 위의 빈 잔을 보았다.

“그러나 작은 집일수록, 빈 자리 하나가 더 크게 보인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더라.”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았다.

“너는 오늘 여러 번 떨어질 수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하지만 거의 안 떨어졌지?”

“그래.”

민다우가스는 짧게 말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밝아졌다.

“정말?”

“스킬라 앞에서의 움직임은 좋았다. 떨어지되, 돌아올 줄을 알았다.”

그 말에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조용해졌다.

민다우가스는 이어 말했다.

“무인은 힘을 쓰는 자가 아니다. 힘의 귀환점을 아는 자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귀환점.”

“네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돌아올 곳이 없다면 그것은 공격이 아니라 소모다.”

민다우가스는 낮게 말했다.

“오늘 너는 밧줄을 잡았다. 나쁘지 않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이번에는 크게 웃지 않았다.

따뜻하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도 잡을게.”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다가, 아주 낮게 웃었다.

“그래. 다만 밧줄을 잡기 전에 먼저 뛰지는 마라.”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저 말은 나도 찬성.”

아스테르다스가 외쳤다.

“다들 나를 너무 잘 알아!”

“오늘 하루만 봐도 충분히 알겠던데.”

죠니의 말에 푸리나가 웃었다.

무대 위에 잠깐 가벼운 웃음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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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튼은 문 위의 글자를 보고 있었다.

돌아오는 이를 위해 남겨둔 자리

그는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알토가 객석에서 올라와 그 옆에 섰다.

“기록할 만한 문장입니까?”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기록할 만하기도 하고, 질문할 만하기도 합니다.”

알토는 문구를 보았다.

“기다림은 권리입니까, 의무입니까?”

레이튼은 즐거운 듯 눈을 가늘게 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알토는 담담하게 말했다.

“따라한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카식은 뒤에서 느긋하게 웃었다.

“둘이 같이 있으면 공기가 문서처럼 접히네.”

알토는 그 말을 무시했다.

대신 기록장에 한 줄을 적었다.

귀향은 도착 사실이 아니라, 남겨둔 자리의 확인으로 완성된다.

아카식은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록은 꽤 따뜻하네.”

알토는 펜을 멈췄다.

“그렇게 보입니까?”

“응.”

알토는 잠시 식탁을 보았다.

빈 잔.

빵 조각.

수프.

그리고 그레이가 조용히 닦고 있는 식탁.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아카식은 조금 더 웃었다.

“역시 좋아했네.”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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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는 아직 무대 뒤편 어둠 가까이에 서 있었다.

저승 여관의 주인 역할은 끝났지만, 그녀의 손에는 아직 작은 등불이 있었다. 그 등불은 이제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푸리나는 식탁을 닦던 손을 멈추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타마르.”

타마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네, 어린양.”

“아까 그 여관 말이야.”

“네.”

“정말로…… 그 사람들이 쉬고 있을까?”

타마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푸리나의 손을 보았다. 빵 부스러기가 조금 묻어 있었다.

“오늘 극 안에서는 그랬지요.”

“극 밖에서는?”

타마르는 미소 지었다.

“그 질문은 별에게도 무겁답니다.”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구나.”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 산 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젖은 신발 곁에 마른 천을 놓고, 빈 자리에 잔을 두고, 이름을 부를 때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르지요.”

푸리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해?”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타마르는 낮게 웃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응.”

타마르는 등불을 푸리나에게 건넸다.

“이제 이 등불은 그쪽 무대의 것입니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받았다.

“받아도 돼?”

“오늘은 귀향극이니까요. 집의 불을 돌보는 이는 많을수록 좋답니다.”

푸리나는 등불을 품에 안았다.

“고마워.”

타마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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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라는 활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활을 들지는 않았다.

다만 바라보았다.

죠니가 그 곁으로 왔다.

“안 쏴서 다행이야.”

미하일라는 그를 보았다.

“그대들이 너무 급하게 말렸다.”

“그건 좀 필사적이었지.”

“짐은 그 활을 당길 생각이 없었다.”

죠니는 잠시 멈췄다.

“정말?”

“그 활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의 활은 사람을 꿰뚫지 않고, 남겨둔 자리를 드러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죠니는 활을 보았다.

“내 신술도 좀 썼는데.”

“보았다.”

“어땠어?”

미하일라는 아주 잠시 생각했다.

“크지 않았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그건 칭찬?”

“그렇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큰 힘이 필요한 장면이 아니었다. 작은 찰나를 놓치지 않는 힘이면 충분했다.”

죠니는 그 말을 들으며 활시위를 내려다보았다.

황금빛 원은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손끝에는 아직 감각이 남아 있었다.

무한한 회전 속에서 찾아낸 아주 작은 순간.

따뜻한 수프.

빈 잔.

남겨둔 자리.

죠니는 낮게 말했다.

“꽤 정확하네.”

미하일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도 정확했다.”

그 말은 화려한 칭찬이 아니었다.

하지만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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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는 마지막으로 빈 잔 옆에 놓인 빵 조각을 정돈했다.

푸리나는 타마르에게 받은 등불을 그 옆에 놓았다.

작은 불빛이 빈 잔에 비쳤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잔이 좀 덜 비어 보이네.”

그레이가 물었다.

“불빛 때문입니까?”

“응.”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빈 잔 옆에 또 무엇인가 놓으려다 멈췄다.

죠니가 물었다.

“이번엔 뭐 놓으려고?”

“음.”

아스테르다스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뭇잎을 보여주었다.

“올리브나무 잎.”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타카니까.”

죠니는 나뭇잎을 보았다.

“단순하네.”

“별로야?”

“아니. 이럴 땐 단순한 게 좋아.”

아스테르다스는 빈 잔 옆에 올리브 잎을 놓았다.

그레이는 그것도 가지런히 정리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빈 자리인데, 점점 채워지고 있어.”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람이 앉지는 않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자리는 아니게 됐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등불을 조금 더 식탁 안쪽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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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의 마지막은 박수로 끝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무대 앞에 서지 않았다.

대신 식탁 옆에 섰다.

그녀는 관객을 향해 크게 외치지 않았다.

그저 배우들과 객석 사이, 무대와 현실 사이 어딘가에 서서 말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돌아왔습니다.”

목소리는 맑았지만 낮았다.

“하지만 배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젖은 옷은 말려야 하고, 식탁은 다시 차려야 하고, 빈 자리는 세어야 합니다.”

그녀는 등불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도 밥이 식지 않게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위생상 오래 두면 안 됩니다.”

순간,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진지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죠니도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레이, 이 장면에서 그 말을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맞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그녀는 관객을 향해 말했다.

“밥은 식기 전에 먹고, 빈 자리는 식탁이 아니라 마음에 오래 두자!”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 표현은 적절합니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승인!”

죠니가 말했다.

“이번엔 진짜 승인 같네.”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네. 승인입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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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정리가 끝났다.

그러나 빈 잔과 등불, 올리브 잎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죠니는 오디세우스의 망토를 벗었다.

처음엔 어색했던 망토였다. 이제는 벗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푸리나가 물었다.

“아쉬워?”

죠니는 망토를 접어 의자 위에 두었다.

“반쯤.”

“나머지 반은?”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

푸리나는 웃었다.

“죠니답다.”

“여왕님, 이거 다시 할 거야?”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언젠가는.”

죠니는 바로 대답했다.

“그럼 그때는 배 이름에서 ‘목적지까지 책임지지는 않음’은 빼자.”

“왜?”

“돌아와 보니까, 그건 좀 너무했어.”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붙어 있던 부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엔 바꿀게.”

“뭐로?”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목적지는 멀어도, 돌아올 자리는 준비해둠.”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길다.”

“그렇지?”

“응.”

“별로야?”

죠니는 식탁 위의 등불을 보았다.

“아니. 좀 길어도 괜찮겠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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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레이가 문을 닫았다.

이타카의 낮은 집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바다 천은 접혔고, 배의 돛대도 내려갔다. 종이 갈매기들은 줄에서 풀려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두가 사라진 뒤에도 작은 불빛 하나는 남았다.

타마르가 준 등불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끄려다 멈췄다.

그레이가 물었다.

“두고 가시겠습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죠니가 말했다.

“극장에 불 켜두면 관리인이 싫어할 텐데.”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안전한 등불이면 문제 없습니다. 다만 주변에 가연물을 치워야 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현실로 돌아왔네.”

푸리나는 웃었다.

“그래도 좋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응. 돌아온 것 같아.”

레이튼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떠날 수 있겠지요.”

죠니가 그를 보았다.

“후일담 끝나자마자 다음 질문이야?”

“좋은 귀향은 다음 길을 막지 않습니다.”

죠니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래. 그 말은 좀 좋네.”

푸리나는 등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가 말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항해 종료.”

죠니가 낮게 정정했다.

“귀항 완료.”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응.”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귀항 완료.”

등불은 조용히 흔들렸다.

무대는 어두워졌다.

하지만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빈 잔 옆에 놓인 작은 불빛이, 아주 오래 남아 있었다.
좋아. 푸리나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모두를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세우려는 밝은 극장주”**인데, 그 밑에는 **“내가 무대를 준비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잃고 장기말이나 피해자로 전락한다”**는 자기경계가 깔려 있는 구조로 잡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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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나 헤툼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푸리나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아마 이런 장면에 가깝다.

전쟁, 피난, 정치적 압박, 강대국 사이의 생존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잃어버리는 장면.

누군가는 병력 숫자로 계산된다.
누군가는 난민 숫자로 기록된다.
누군가는 왕국의 생존을 위한 희생으로 처리된다.
누군가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누군가의 전략표 위에 놓인 말이 된다.

푸리나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기억은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잃고, 그저 시대의 배경이나 희생자 역할로 밀려나는 장면이다.

그녀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아니야. 저 사람에게도 막이 있었어. 대사가 있었어. 바라는 결말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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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푸리나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단순한 영토나 안전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삶을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라고 볼 수 있다.

전쟁과 국가 생존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역할을 빼앗긴다.

왕은 왕답게 죽어야 한다.
병사는 병사답게 죽어야 한다.
백성은 국가를 위해 견뎌야 한다.
피난민은 조용히 감사해야 한다.
죽은 자는 숫자로 정리된다.

푸리나는 이런 세계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름, 자기 욕망, 자기 웃음, 자기 박수, 자기 커튼콜을 잃는 것을 보았다.

즉 푸리나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존재할 수 있는 무대가 무너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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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푸리나의 최대 업적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를 단순한 방어국가나 피난처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자기 삶의 배우로 설 수 있는 거대한 극장/여관으로 만든 것이다.

그녀는 백성을 단순히 보호 대상이나 병력 자원으로만 보지 않는다.
각자의 삶을 극으로 보고, 각자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도록 무대와 조명과 휴식을 마련한다.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전쟁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웃고, 쉬고, 선택하고, 박수칠 수 있는 나라를 만든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푸리나는 자기 자신을 계속 무대 위에 세워야 한다.
사람들을 웃게 해야 한다.
조명을 꺼뜨리지 않아야 한다.
군주로서, 극장주로서, 배우로서, 여관좌의 대리인으로서 계속 “막이 아직 닫히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 대가는 자기 피로와 불안, 그리고 “내가 조명을 놓치면 모두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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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푸리나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거라고 볼 수 있다.

>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기 이야기를 빼앗긴다. 그러니 내가 무대를 준비하고, 조명을 올리고, 막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들은 주인공으로 설 수 없다.”



이건 완전히 틀린 믿음은 아니다.
실제로 푸리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대와 휴식과 용기를 준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 있다.

푸리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세우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극장주로서 무대를 계속 준비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묶인다.

조금 더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무대를 준비해줘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내가 맡아야 한다.”



이 믿음 때문에 푸리나는 밝고 즉흥적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녀의 밝음은 도피가 아니라 의무다.
그녀의 축제는 유흥이 아니라 저항이다.
그녀의 연극은 장난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잃지 않게 붙드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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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푸리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 숫자, 장기말, 피해자, 희생양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녀는 죽음 자체보다도, 그 죽음이 “아무 이야기 없이 처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푸리나는 이렇게 믿는다.

>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빼앗기지 않는다.”



푸리나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다음과 같다.

무대.
사람이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

조명.
그 사람이 아직 여기 있고, 아직 선택할 수 있음을 비춰주는 시선.

박수.
그 선택이 의미 있었다고 인정해주는 타인의 반응.

여관.
지친 사람이 잠시 쉬고, 다시 자기 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

즉 푸리나의 동기는 이거야.

> “나는 사람들이 자기 삶을 빼앗기지 않게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 나라 전체를, 모두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극장과 여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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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푸리나는 먼저 무대로 바꾼다.

전장, 회의장, 피난민 수용소, 장례식, 외교 협정장까지도 단순한 사건 현장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으로 재구성한다.

그녀는 묻는다.

“이 장면에서 누가 주인공이지?”
“이 사람은 무엇을 잃었지?”
“이 사람이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이 막을 어떻게 다음 막으로 넘길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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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푸리나는 사람들을 호명한다.

피해자, 병사, 백성, 난민, 가신이 아니라, 각자의 이름과 역할을 가진 배우로 부른다.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대의 막은 닫히지 않았다.”
“무대 위로 올라와라.”
“네가 선택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푸리나는 신술, 연설, 축제, 즉흥극, 장례, 재연극을 사용해 사람들을 다시 자기 삶 안으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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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푸리나는 극 자체를 크게 만든다.

개인의 이야기가 무너지려 하면, 가신들의 이야기와 국가의 이야기를 엮는다.
한 사람의 용기가 부족하면, 과거의 장면과 현재의 선택을 연결한다.
전선이 무너지려 하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전체를 하나의 대서사시로 세운다.

여기서 《세기극: 아르메니아 대서사시》, 《군상극 아르메니아의 노래》, 《재연극: 앙코르》 같은 방향이 나온다.

푸리나는 혼자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모두를 배우로 세워서 “무대 전체”로 버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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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막을 올린다.

칭호 《그대여, 박수를! 대단원의 막이 올랐으니!》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이것은 푸리나 혼자 기적을 일으키는 버튼이 아니다.
이미 가신들이 조건을 만들고, 백성들이 버티고, 죽은 자들의 흔적과 산 자들의 선택이 쌓인 뒤에야 푸리나가 마지막으로 막을 올리는 것이다.

푸리나의 최후 전략은 이거다.

> “이미 모두가 준비한 무대를,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의 극으로 묶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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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푸리나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것을 극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사람에게 의미를 준다.
공포를 장면으로 바꾼다.
절망을 다음 막으로 넘긴다.
죽음을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 기억되는 퇴장으로 만든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고통은 아직 극으로 정리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박수보다 침묵이 필요하다.
어떤 죽음은 아름다운 장면으로 만들기보다, 그냥 아프고 부당한 죽음으로 남겨두어야 할 때가 있다.

푸리나가 잃을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슬픔이 아직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감각이다.

이 지점에서 아레나 그레이 같은 인물과 대비가 생긴다.

푸리나는 박수를 지킨다.
그레이는 이름을 기록한다.
아레는 침묵을 듣는다.

푸리나의 과제는 박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박수칠 수 없는 사람도 자기 방식으로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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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푸리나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모두를 무대 위에 세우고 싶지만, 누구도 내가 쓴 대본대로 움직이게 만들지는 않겠다.”



이게 푸리나의 양심이다.

그녀는 극장주다.
무대를 준비한다.
조명을 올린다.
배우를 호명한다.
박수를 유도한다.
때로는 과장하고, 연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마지막 선택은 반드시 그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푸리나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타인의 삶을 자기 극의 배역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가장 큰 유혹은 이것이다.

“내가 더 잘 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더 나은 결말을 줄 수 있다.”
“내가 대본을 써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녀의 핵심 철학은 모든 이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이기 때문이다.

만약 푸리나가 타인의 선택을 빼앗고 “가장 아름다운 결말”을 강제로 배치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존재가 된다.

사람을 장기말로 삼는 군주.
사람을 배역으로 고정하는 극작가.
사람의 삶을 대신 써버리는 신의 대리인.

그래서 푸리나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무대를 준비할 수 있다. 조명을 올릴 수 있다. 박수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대사를 말하고,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며, 언제 막을 내릴지는 내가 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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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푸리나 헤툼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세계를 극장과 여관으로 바꾸는 군주다.

그녀의 거짓말은 **“내가 무대를 준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주인공으로 설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선택하고, 쉬고,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위기를 장면으로 바꾸고, 사람을 배우로 호명하고, 국가 전체를 하나의 군상극으로 엮어 다음 막을 여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타인의 삶을 자기 대본대로 쓰지 않는 것이다.
좋아. 죠니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삶이 반드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정리되지 않아도, 지금 선택한 찰나는 진짜라고 믿는 기사단장”**이야.

푸리나가 사람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세운다면, 죠니는 사람을 지금 선택하는 존재로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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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니 죠스타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죠니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세계가 누군가의 고통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정리해주지 않았던 순간들이다.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은 반드시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선택한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지는 않는다.
노력한 사람이 반드시 보상받지는 않는다.
어떤 실패는 성장의 복선이 아니라 그냥 실패다.
어떤 죽음은 다음 막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냥 죽음이다.

죠니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런 장면이다.

열심히 달렸지만 도착하지 못한 사람.
무언가를 선택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사람.
삶이 이야기처럼 정리되지 않은 채 끝난 사람.

그는 그런 장면을 보며 배웠다.

세계는 친절한 극작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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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죠니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삶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다.

그는 아마 한때는 사람이 고통을 겪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고, 먼 길을 돌아가면 언젠가 도착지가 있으며, 죽음과 상실도 결국 어떤 큰 이야기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다.

하지만 죠니는 그 믿음을 잃었다.

삶은 언제나 말이 되는 방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세계는 친절하게 복선을 회수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픔은 꼭 성장이나 구원의 장면이 되지 않는다.

죠니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세계가 인간에게 의미를 보장해준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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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죠니의 최대 업적은, 그 믿음을 잃고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무를 보았다.
삶과 죽음의 반복을 보았다.
의미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달리면서 만들면 된다.”

그의 업적은 허무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허무를 본 뒤에도 지금의 선택을 긍정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죠니는 삶을 쉽게 아름답게 포장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괜찮아, 이것도 네 이야기의 일부야”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그는 위로보다 현실을 먼저 본다.

그 대가는 건조함, 냉소,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과 완전히 같은 언어를 쓰기 어려운 거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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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죠니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삶은 결국 각자의 찰나로만 증명된다. 그러니 오래 남는 의미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믿음은 죠니를 강하게 만든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진짜로 여긴다.
결과가 어떻든, 세계가 인정하든 말든, 지금 자신이 선택하고 움직이는 찰나는 부정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너무 멀리 있는 의미를 의심한다는 점이다.

죠니는 푸리나처럼 삶 전체를 하나의 극으로 보는 시선을 경계한다.
그에게 그런 말은 자칫 고통을 미화하거나, 죽음을 장면으로 포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세계는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선택하는 찰나뿐이다.”



이것은 죠니의 진실이자, 동시에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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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죠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이런 것을 두려워한다.

내가 달린 길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것.
내가 고른 선택이 결국 세계의 반복 속에서 사라지는 것.
내가 붙잡은 순간이 나중에 누군가의 대서사나 국가 논리 속에 흡수되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것.

죠니는 누군가가 말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당사자가 실제로 선택한 순간을 더 믿는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믿는다.

> “사람은 최후에 남는 결과로 증명되는 게 아니라, 그 순간 무엇을 선택했는가로 증명된다.”



죠니의 동기는 이것이다.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지키는 것.

푸리나가 모두의 무대를 준비하려 한다면, 죠니는 그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정말 자기 발로 움직이고 있는지 본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거대한 구원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다음 한 걸음.
다음 호흡.
다음 회전.
지금 손에서 놓지 않을 창.
지금 달려야 할 말.
지금 선택해야 할 방향.

즉 죠니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삶 전체가 의미 있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네가 선택하는 것은 진짜다. 그 찰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게 두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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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죠니는 먼저 현실을 본다.

푸리나처럼 장면의 의미를 만들기보다, 죠니는 먼저 지금 무엇이 가능한지 본다.

적의 거리.
말의 속도.
창의 각도.
아군의 흔들림.
퇴로.
죽을 가능성.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박자.

그는 위협 앞에서 과장된 말을 하지 않는다.

“저건 세다.”
“정면은 무리야.”
“돌아가야겠네.”
“그래도 틈은 있어.”

죠니의 첫 대응은 현실 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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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죠니는 멀리 돌아간다.

그의 칭호가 《멀리 돌아가는 길》인 것도 이 지점과 잘 맞는다.

죠니는 꼭 정면으로 뚫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도, 전투도, 사람도 항상 직선으로 도달하지 않는다.

돌아가도 된다.
늦어도 된다.
남들이 보기엔 비겁하거나 답답해 보여도,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을 이어가면 된다.

그는 이 단계에서 기동, 우회, 재정비, 회전, 기병 운용, 순간의 각도 변화를 사용한다.

즉 죠니는 이렇게 움직인다.

> “지금 못 뚫으면 돌아간다. 돌아가서라도 닿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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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죠니는 찰나를 건다.

모든 계산이 무너지고, 퇴로도 좁아지고, 우회도 막히면 죠니는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한순간의 선택에 모든 것을 싣는다.

말발굽의 박자.
창끝의 회전.
몸의 기울기.
죽음과 삶 사이의 한 호흡.

이때 죠니의 신술과 무공은 “긴 서사”가 아니라 단 하나의 순간을 진짜로 만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는 거대한 기적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찰나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움직임을 박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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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그래도 선택한다.

죠니에게 최악은 죽음이 아니다.
최악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을 가능성이 있어도, 의미가 보장되지 않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택한다.

다만 이것은 자살적 돌진과는 다르다.
죠니는 죽고 싶어서 싸우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살아 있는 지금의 선택을 긍정하기 때문에 싸운다.

최후의 죠니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결말이 어떻게 되든, 이건 내가 고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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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죠니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찰나의 진실성에 기대는 것이다.

그는 지금 선택하는 순간을 너무 강하게 믿는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망설임을 끊는다.
허무 앞에서도 움직이게 한다.
거대한 명분이나 서사가 없어도 사람을 앞으로 보내준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죠니는 긴 이야기를 믿는 사람을 답답하게 볼 수 있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서사, 국가의 대의, 죽은 자들의 기억, 백성들이 기다리는 결말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그는 “지금 선택하는 건 진짜다”라고 말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지금만으로는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놓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금의 한 걸음보다, 자신이 걸어온 길 전체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찰나보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어떤 죽음은 순간의 선택만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서사가 필요하다.

죠니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긴 시간 속에서 사람을 지탱하는 이야기의 힘이다.

그래서 푸리나와 죠니는 서로를 보완한다.

푸리나는 말한다.

“너는 네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죠니는 말한다.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지금 네가 고르는 건 네 거야.”

푸리나는 긴 극을 준다.
죠니는 그 극 안의 한순간을 진짜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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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죠니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 사람의 선택을 가짜로 만들지는 않겠다.”



죠니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
밀어붙일 수 있다.
현실을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다.
전장에서 명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선택을 완전히 대신해버리는 것을 경계한다.

왜냐하면 죠니에게 인간의 존엄은 지금 선택하는 찰나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푸리나를 섬기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를 지키고, 기사단장으로 병사들을 이끈다 해도, 마지막에 그 사람이 자기 선택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지키려 한다.

죠니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이것이다.

타인의 찰나를 빼앗는 것.

그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은 아마 이런 것이다.

“네가 뭘 원하든 상관없어. 이게 더 좋은 결말이야.”
“네 선택은 틀렸으니 내가 대신 정한다.”
“너는 이 이야기에서 이렇게 움직여야 해.”

이것은 푸리나가 경계해야 하는 선과도 맞물린다.

푸리나가 타인을 자기 대본의 배역으로 고정하려는 유혹을 경계한다면, 죠니는 그 옆에서 건조하게 말할 사람이다.

“여왕님. 그건 그 녀석 선택이 아니잖아.”

죠니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돌아가게 할 수는 있다. 기다려줄 수도 있다. 같이 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그 사람이 직접 디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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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죠니 죠스타는 의미가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서도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긍정하는 기사단장이다.

그의 거짓말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선택뿐이며, 긴 이야기나 아름다운 의미는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타인의 선택이 세계의 허무나 거대한 서사 속에 삼켜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현실을 보고, 정면이 안 되면 멀리 돌아가고, 막히면 한순간의 선택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누구의 찰나도 대신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하융을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을 너무 많이 본 끝에, 처음으로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 사람”**이야.

푸리나가 사람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인물이고, 죠니가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긍정하는 인물이라면, 하융은 선택되지 못한 길들을 기억하면서도, 결국 지금 이 현실에 남기로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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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융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하융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수없이 비껴간 가능성들의 잔상이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병사.
무너지지 않았을 성벽.
배신하지 않았을 친구.
불타지 않았을 마을.
전쟁이 오지 않았을 도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군주.
죽지 않아도 되었을 아이.
서로 등을 돌리지 않았을 사람들.

하융은 현실을 볼 때마다 그 뒤편에 겹쳐진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를 본다.

그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런 것이다.

“이 현실은 유일한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결과에 도착했다.”

그 기억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하융에게 그것은 거의 물리적인 풍경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다른 길들, 하지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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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하융이 잃어본 가장 큰 것은 현실을 단단하게 믿는 감각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하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다.
이미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고, 선택하지 않은 길은 사라진다.

하지만 하융에게는 그렇지 않다.

선택되지 않은 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가능성도 흔적을 남긴다.
더 나은 결말도, 더 끔찍한 결말도, 지금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계속 비친다.

그 결과 하융은 한때 이런 감각을 잃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현실이 정말 가장 중요한가?”

즉 하융의 가장 큰 상실은 현실의 확실성이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실이다.
현실이 희미해지면, 선택도 희미해진다.
선택이 희미해지면, 책임도 희미해진다.
책임이 희미해지면, 사람은 끝없이 가능성만 바라보며 멈춰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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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하융의 최대 업적은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더 평화로운 가능성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행복한 세계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덜 아픈 결말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떠나도 되는 길, 외면해도 되는 길,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길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푸리나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있는 지금 이 현실을 선택했다.

하융의 업적은 전쟁에서 몇 명을 살렸는가만이 아니다.

그의 진짜 업적은 이것이다.

가능성에 잠식되지 않고, 지금 현실에 남기로 한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그는 선택할 때마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함께 본다.
한 사람을 살릴 때, 살리지 못한 사람의 가능성도 본다.
한 전선을 지킬 때, 무너진 전선의 잔상도 본다.
지금의 푸리나를 선택할 때, 다른 길의 푸리나와 다른 결말의 킬리키아도 창 너머에 비친다.

그 대가는 끝없는 미련과 피로, 그리고 어떤 선택도 완전히 깨끗하지 않다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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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하융이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다면, 지금의 비극은 내가 충분히 잘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하융은 가능성을 본다.
그러므로 그는 실패를 단순한 실패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른 길이 보였는데 왜 이 길이 되었는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왜 죽었는가.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왜 현실에서는 무너졌는가.

이 질문은 하융을 유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를 갉아먹는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더 나은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실패는 내가 그 가능성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융의 책임감이자 왜곡이다.

그는 현실을 직접 고치는 신이 아니다.
죽은 가능성을 부활시키는 자도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의 정보, 흔들림, 실패의 박자, 생존의 오차를 현재 위에 얇게 겹쳐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하융은 종종 자신이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닿지 못한 모든 가능성의 책임까지 자신에게 돌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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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하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현실을 선택해버리는 것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내가 선택한 이 현실 때문에, 더 나은 가능성이 영영 닫혀버리는 것.”

하융은 선택의 무게를 너무 잘 안다.

선택하면 다른 길은 닫힌다.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할 수 있다.
한 전선을 지키면 다른 전선이 무너질 수 있다.
한 현실에 남으면,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게 된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많은 관측과 충분히 정확한 개입이다.

그는 이렇게 믿는다.

> “실패한 가능성의 흔적을 더 잘 읽고, 죽은 가능성의 정보를 더 정확히 현재에 겹칠 수 있다면, 이번 현실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래서 하융의 동기는 이것이다.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실패를 헛되게 하지 않고, 지금 현실이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

그는 죽은 가능성을 되살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왜 죽었는지는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산 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즉 하융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모든 가능성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은 가능성이 남긴 실패의 흔적을 읽어, 지금 이 현실만큼은 한 발자국 비껴가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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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하융은 먼저 본다.

하지만 이것은 확정된 미래예지가 아니다.
그는 앞으로 무조건 일어날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택되지 못했거나 실패한 가능성의 잔향을 본다.

적의 화살에 맞아 죽은 가능성.
방패선이 무너진 가능성.
수레가 뒤집힌 가능성.
전령이 길을 잃은 가능성.
죠니가 한 박자 늦어 쓰러진 가능성.
푸리나의 무대가 제때 열리지 못한 가능성.

하융은 위협 앞에서 가장 먼저 묻는다.

“어디서 무너졌는가?”
“어느 박자가 늦었는가?”
“누가 왼쪽을 보지 못했는가?”
“어떤 작은 오차가 죽음으로 이어졌는가?”

그의 첫 대응은 가능성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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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하융은 현재 위에 가능성의 정보를 얇게 겹친다.

그는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죽은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오지 않는다.
다만 실패의 흔적을 현재의 산 자에게 전달한다.

“왼쪽.”
“한 박자 늦추시오.”
“지금 숙이시오.”
“방패 각도를 낮추시오.”
“그 길은 이미 무너졌소.”
“이쪽이오. 아직 창이 닫히지 않았소.”

하융의 전투 지시는 시적이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짧고 명확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그는 가능성의 실패 정보를 통해 산 자들이 한 발자국 비껴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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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하융은 직접 틈으로 들어간다.

하융은 순수 후방 관측자가 아니다.
그는 전장 중후열과 위험한 틈을 오가며 개입할 수 있는 현장 지휘관형 전투원이다.

강자와 정면 승부를 벌여 압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죽을 가능성을 보고 그 죽음을 비껴가며 한두 박자 버틸 수 있다.

적의 검이 지나간다.
하융은 그 검에 베여 죽은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현실의 몸을 반 치 비튼다.
검집으로 손목을 건드리고, 무릎의 방향을 틀고, 창끝의 박자를 어긋나게 만든다.

그의 근접전은 “이긴다”보다 죽을 자리를 비껴가며 흐름을 바꾼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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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다.

하융에게 최후의 선택은 단순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는 행위다.

어떤 가능성은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은 더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에서는 누군가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융의 마지막 전략은 이것이다.

> “모든 창을 열어둘 수는 없소.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아갈 창을 고르겠소.”



이때 하융은 더 이상 관측자가 아니다.
그는 선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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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하융이 과의존하는 전략은 가능성을 더 보려는 것이다.

위협을 만나면 더 본다.
실패하면 더 많은 가능성을 찾는다.
또 실패하면 더 깊이 창을 들여다본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실패의 원인을 찾게 해준다.
아군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한다.
전장 전체의 작은 오차를 보정한다.
죽은 가능성의 흔적을 산 자의 생존으로 바꾼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너무 많이 보면 선택이 늦어진다.
현실이 희미해진다.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수많은 가능성을 보게 된다.
결국 지금 이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하는 순간에도, “다른 길”을 보느라 한 박자 늦을 수 있다.

하융이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현실을 즉시 붙잡는 힘이다.

그래서 하융에게 필요한 보완은 푸리나와 죠니에게서 온다.

푸리나는 말한다.

“이 무대는 지금 여기야.”

죠니는 말한다.

“볼 만큼 봤으면 골라. 지금 움직여야 해.”

하융은 가능성을 본다.
푸리나는 그 가능성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으로 바꾼다.
죠니는 그 장면 안에서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박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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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하융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더라도, 지금 이 현실의 사람들을 지우지는 않겠다.”



하융은 더 나은 가능성을 본다.
그러므로 위험한 유혹도 있다.

“저쪽 가능성이 더 낫다.”
“이 현실은 실패했다.”
“이 사람은 다른 가능성에서는 더 나았다.”
“지금의 선택은 틀렸으니, 다른 길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하융은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지금 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푸리나 헤툼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살아가는 이 현실.
죠니가 지금 달리는 이 현실.
그레이가 이름을 기록하는 이 현실.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는 이 현실.
하융 자신이 남기로 한 이 현실.

하융의 양심은 이것이다.

가능성은 현실을 돕기 위한 것이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죽은 가능성을 보아도, 산 자를 그 가능성의 그림자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을 강제로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말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이미 무너졌소.”
“그러나 이쪽 창은 아직 열려 있소.”
“가시오. 이번에는 비껴갈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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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하융은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잔향을 보고, 그 실패의 정보를 현재에 겹쳐 산 자들이 한 발자국 비껴가게 만드는 현장 지휘관이다.

그의 거짓말은 **“더 나은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실패는 내가 그 가능성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죽은 가능성들의 실패를 헛되게 하지 않고, 지금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비껴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가능성을 보고, 실패의 정보를 현재에 겹치고, 필요하면 직접 틈에 들어가며, 마지막에는 하나의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더라도, 지금 현실의 사람들을 지우거나 그림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아레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새 길을 열기 위해 죽은 자와 잊힌 자의 침묵을 짊어지는 개척 군주”**야.

푸리나가 박수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아레는 박수 아래로 가라앉는 침묵을 듣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침묵을 단순히 애도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가 밟고 나아갈 길의 기초로 삼으려는 인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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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 마가트로이드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아레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명령 아래 죽어간 사람들이다.

전장에는 언제나 승리의 기록이 남는다.
누가 어느 전투에서 이겼는지, 어느 성을 함락했는지, 어느 군주가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는 기록된다.

하지만 그 승리의 아래에는 이름 없이 가라앉은 사람들이 있다.

명령을 받고 진군한 병사.
퇴각 명령을 받지 못해 포위된 부대.
전략상 버려진 마을.
시간을 벌기 위해 남겨진 후위.
장군의 판단 하나로 죽어간 이름 없는 사람들.

아레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내가 길을 열었다고 말하는 순간, 그 길 아래에는 누군가의 시체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승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전략과 명령의 필요성도 안다.
하지만 그 명령으로 죽은 자들을 “필요한 희생”이라는 말로만 처리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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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아레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순수한 개척의 기쁨이다.

개척은 본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새 땅을 열고, 새 질서를 만들고, 불가능하던 길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아레는 안다.

새 길은 빈 땅 위에 열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실패한 자리, 누군가가 죽은 자리, 누군가가 끝내 닿지 못한 자리 위에 열린다.

그녀는 개척의 찬란함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도시를 세울 때, 그 아래 묻힌 폐허를 본다.
새 전술을 완성할 때, 그 전술이 필요해진 죽음들을 본다.
승리의 박수를 들을 때, 그 박수에 섞이지 못한 침묵을 듣는다.

즉 아레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을 순수하게 밝은 것으로만 믿을 수 있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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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아레의 최대 업적은 세르비아를 개척의 성좌 아래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그녀는 단순한 지휘관이 아니다.
그녀는 새로운 길을 열고, 불가능한 전선을 밀어붙이며, 무너진 가능성을 다시 엮는 군주다.

아레는 정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계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전장과 국가와 인간이 자기 한계를 넘어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죽음과 실패 위에서도 멈추지 않고, 다음 길을 개척하는 체계를 만든 것.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그녀는 길을 열 때마다 그 길 아래 묻힌 자들을 본다.
승리를 만들 때마다, 그 승리에 포함되지 못한 죽은 자들을 기억한다.
그녀는 지휘관이므로 명령해야 하고, 명령하면 누군가는 죽는다.

아레의 대가는 승리를 기뻐할 수 없는 지휘관의 기억이다.

그녀는 웃을 수 있다.
상냥할 수도 있다.
푸리나의 길을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언제나 실이 내려간다.

무대 아래로.
무덤 아래로.
침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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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아레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로 없었던 사람이 된다.”



이 믿음은 아레의 책임감이자 상처다.

실제로 지휘관은 기억해야 한다.
명령 아래 죽은 자들을 잊지 않는 것은 아레의 의무다.
그것은 그녀의 도덕이고, 전장의 업을 짊어지는 방식이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기억의 책임을 너무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아레는 자신과 자신의 지휘계가 죽은 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녀는 때로, 자신이 그 침묵을 놓치면 세상 전체가 그들을 버릴 것처럼 느낀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나는 길을 여는 자다. 그러니 그 길 아래 묻힌 모든 이름을 내가 짊어져야 한다.”



이것은 숭고하지만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아레를 끝없이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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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아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개척과 승리의 이름 아래 죽은 자들이 지워지는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모르는 지휘관도 아니다.
전장에서 희생이 생긴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아레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이다.

승리했으니 됐다.
길이 열렸으니 됐다.
국가가 살아남았으니 됐다.
그들은 필요한 희생이었다.
이제 박수치자.

그 말들 아래에서 죽은 자들의 침묵이 완전히 묻혀버리는 것.

그래서 아레는 이렇게 믿는다.

> “개척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밟고 온 침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레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기억과 지휘의 책임이다.

누가 죽었는가.
왜 죽었는가.
누가 명령했는가.
그 죽음으로 무엇이 열렸는가.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우리는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가.

즉 아레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침묵이 승리의 박수에 묻히지 않도록, 그들을 기억한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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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아레는 먼저 전장 전체의 실을 본다.

그녀는 눈앞의 적 하나만 보지 않는다.

어느 부대가 버틸 수 있는가.
어느 부대가 무너질 것인가.
어느 길을 열면 어느 길이 닫히는가.
누가 살아남고, 누가 뒤에 남아야 하는가.
어떤 희생이 생기며, 그 희생으로 무엇을 얻는가.

아레의 첫 대응은 지휘관의 시야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잔혹한 판단도 한다.

다만 그 판단의 대가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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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아레는 명령한다.

아레는 푸리나처럼 먼저 무대를 열지 않는다.
레이튼처럼 먼저 질문을 늘리지도 않는다.
하융처럼 가능성의 창을 오래 바라보지도 않는다.
죠니처럼 개인의 찰나에 바로 맡기지도 않는다.

그녀는 지휘관이다.

필요하다면 말한다.

“후위는 남아라.”
“저 성문은 버린다.”
“오른쪽 전열은 죽어도 물러나지 마라.”
“퇴각로를 열 때까지 시간을 벌어라.”

이 명령은 잔혹할 수 있다.

하지만 아레에게 명령은 책임 회피가 아니다.
명령은 자신이 업을 짊어지겠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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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아레는 죽은 자와 실패한 자의 흔적까지 전장에 엮는다.

아레는 소환술의 전통과 닿아 있지만, 그녀의 핵심은 단순한 망자 병력 운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를 “살아 있는 전력”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떠난 이를 다시 움직이게 하더라도, 그것은 살아난 것이 아니다.
기억함으로써 불러온 흔적일 뿐이다.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아레가 다루는 것은 죽은 자의 생명이 아니라 기억과 침묵과 미완의 실이다.

그녀는 전장에 묻힌 실패, 이전 명령의 대가, 스러진 이들의 자리를 알고 있다.
그것을 통해 현재의 지휘를 보강한다.

하지만 그들을 성장시키거나, 다시 삶으로 끌어올리거나, 자신의 미래를 위한 재료처럼 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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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그 실의 중심에 선다.

아레는 부하들에게만 업을 떠넘기지 않는다.

정말 마지막 순간이 오면, 그녀는 말한다.

“이 명령은 내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내린 명령, 그 명령으로 생긴 죽음, 그 죽음으로 열린 길을 자기 이름 아래 묶는다.

아레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길이 피로 열린다면, 그 피를 명령한 자의 이름도 함께 남겨라.”



이것이 아레의 지휘관성이다.

그녀는 희생을 없앨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희생을 익명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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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아레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침묵을 자신이 기억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지휘관의 책임을 흐리지 않는다.
죽은 자를 승리의 소모품으로 만들지 않는다.
국가의 개척이 단순한 찬가가 되지 않게 한다.
전장의 윤리를 유지한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아레는 산 자의 웃음까지 죄책감으로 볼 수 있다.
박수를 듣는 순간, 그 아래 묻힌 침묵부터 찾는다.
아이들이 웃는 장면에서도, 웃지 못하는 죽은 자들을 먼저 떠올린다.

이것은 아레의 도덕이지만, 동시에 그녀를 쉬지 못하게 만든다.

아레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산 자가 죄책감 없이 살아갈 권리를 인정하는 여유다.

그래서 푸리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푸리나는 말한다.

“산 자에게는 박수가 필요해.”

아레는 말한다.

“죽은 자에게는 침묵이 필요하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박수가 침묵을 지우는 순간이고, 침묵이 박수를 죄로 만드는 순간이다.

아레의 성장은 푸리나의 박수를 부정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푸리나의 성장은 아레의 침묵을 무대 밖에 방치하지 않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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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아레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죽은 자를 기억할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미래를 위한 재료로 삼지는 않겠다.”



이것이 아레의 양심이다.

아레는 지휘관이다.
소환술적 전통과도 닿아 있다.
죽은 자와 실패한 자의 흔적을 전장에 엮을 수 있다.

바로 그래서 위험하다.

그녀가 선을 넘으면, 죽은 자는 기억되는 존재가 아니라 운용되는 자원이 된다.
침묵은 애도가 아니라 병참이 된다.
망자는 이름이 아니라 병력이 된다.

아레가 절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이것이다.

죽은 자를 다시 한 번 명령 아래 세우는 것.

물론 그녀는 떠난 이를 기억으로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경고이자 제언에 가까워야 한다.
혹은 한 번의 장면, 한 번의 침묵, 한 번의 미완의 실이어야 한다.

죽은 자는 성장시킬 수 없다.
죽은 자는 더 나은 병사가 될 수 없다.
죽은 자는 다시 삶의 무대에 올릴 수 없다.

아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레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망자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에 다시 명령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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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아레 마가트로이드는 개척과 승리의 아래에 묻힌 침묵을 기억하며, 죽은 자를 잊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려는 지휘관이다.

그녀의 거짓말은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로 없었던 사람이 된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개척과 승리의 박수 아래에서 죽은 자와 잊힌 자의 침묵이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전장의 실을 보고, 필요한 명령을 내리고, 죽은 자와 실패한 자의 흔적까지 기억으로 엮으며, 마지막에는 명령의 업을 자기 이름으로 짊어지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죽은 자를 기억하되, 그들을 미래를 위한 자원이나 병력으로 다시 명령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아스테르다스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국가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스스로 낙하지점을 정한 유성”**이야.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를 하나의 생존 설계도처럼 본다면, 아스테르다스는 그 설계도 안에서도 개인의 의지와 감정이야말로 국가를 움직이는 진짜 중력이라고 믿는 인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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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다스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아스테르다스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리투아니아가 짓밟히던 순간들이다.

불타는 마을.
숲으로 도망치는 사람들.
기사와 침략자의 말발굽 아래 무너지는 부족들.
각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씩 꺾여나간 사람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를 하나로 묶으려 했던 장면.

아스테르다스에게 그 기억은 단순한 복수심의 원천이 아니다.

그는 그 장면에서 두 가지를 보았다.

하나는 국가가 없으면 사람들이 너무 쉽게 부서진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국가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언젠가 사람을 부품처럼 다룰 수 있다는 위험이다.

그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우리는 흩어져 있었기에 무너졌다. 하지만 하나가 된 뒤에도, 사람이 사라진 국가는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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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아스테르다스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국가와 개인이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한다는 순진한 믿음이다.

리투아니아가 살아남으려면 국가가 강해져야 한다.
민다우가스의 설계도 필요하다.
복수와 생존의 체계도 필요하다.
숲과 달과 죽음과 태양과 운명의 표식 아래, 리투아니아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스테르다스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보았다.

국가가 너무 완벽한 기계가 되면, 사람은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된다.
혈통도, 귀족도, 병사도, 심지어 군주 자신도 “리투아니아를 위한 부품”으로 취급될 수 있다.

아스테르다스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국가가 강해지면 자연히 사람도 구원받는다는 믿음.

그는 국가의 필요성을 안다.
하지만 국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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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아스테르다스의 최대 업적은 민다우가스의 곁에 자기 의지로 떨어진 것이다.

그는 민다우가스의 망치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유성이다.
전장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낙하하며, 리투아니아의 적을 부수는 자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명령 수행 기계가 아니다.

그는 민다우가스의 설계도에 끼워진 톱니바퀴가 아니라, 스스로 낙하지점을 정한 유성이다.

그의 최대 업적은 이것이다.

리투아니아의 생존이라는 냉혹한 대전략을 이해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의 감정과 자유의지를 잃지 않은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그는 자신이 부서질 수 있음을 안다.
언젠가 리투아니아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소모될 수도 있다.
그가 선택한 낙하지점은 아름답지만, 유성은 떨어지면 타버린다.

아스테르다스의 대가는 자유롭게 선택했기에, 그 선택의 파괴까지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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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아스테르다스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낙하라면, 부서져도 괜찮다.”



이 믿음은 아스테르다스를 강하게 만든다.

그는 죽음을 목적 삼지 않는다.
자기희생에 취한 순교자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방향이라면, 그 끝에서 부서지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곡된 부분은 자신의 파괴를 너무 쉽게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이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도구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이 선택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가장 강한 도구처럼 몰아넣을 수 있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나는 누구의 부품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곳에 떨어지는 유성이라면, 나 자신이 타버리는 것도 내 자유다.”



이것은 아스테르다스의 자부심이자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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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아스테르다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리투아니아가 살아남더라도, 그 안에 사람이 남지 않는 것이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멸망을 두려워한다.
침략자에게 짓밟히는 것도 두려워한다.
민다우가스의 설계도가 실패하는 것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리투아니아가 살아남았는데, 그 안에 남은 것이 오직 체계뿐인 것.
복수는 완성되었는데, 웃는 사람도 노래하는 아이도 없는 것.
국가는 유지되었지만, 모두가 자기 자신을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아스테르다스는 이렇게 믿는다.

>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제도와 전략만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누구를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떨어지기로 선택하는지가 국가를 움직인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개인의 의지와 감정이 국가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즉 아스테르다스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리투아니아를 지키고 싶다. 하지만 리투아니아가 사람을 부품으로 갈아 넣는 기계가 되게 하지는 않겠다. 내가 민다우가스의 곁에 떨어지는 것도 명령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곳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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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아스테르다스는 먼저 낙하지점을 정한다.

그는 전장을 평면으로 보지 않는다.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무엇을 부술 것인가.
어떤 궤도로 들어가야 적의 중심을 흔들 수 있는가.

그의 첫 대응은 돌진이 아니라 궤도 설정이다.

적의 약점.
전선의 중심.
아군이 버티는 지점.
민다우가스의 설계도에서 자신이 떨어져야 할 자리.

아스테르다스는 그 지점을 고른다.

그리고 한 번 정하면, 망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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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아스테르다스는 궤도를 바꾼다.

그는 단순히 직선으로 들이받는 전투병기가 아니다.

그의 무공은 유성, 낙하, 별, 운철의 논리다.
그에게 모든 방향은 낙하다.
옆으로 움직여도 낙하고, 뒤로 물러나도 낙하고, 공중에서 몸을 틀어도 낙하다.

그는 낙점을 다시 만들고, 허공에 발을 디디며, 관성을 조절하고, 흐르는 별처럼 궤도를 바꾼다.

즉 그는 말한다.

“안 닿는다고? 그럼 다른 하늘에서 떨어지면 되지.”

아스테르다스의 두 번째 대응은 자유로운 궤도 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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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아스테르다스는 자신의 몸을 유성으로 만든다.

이 단계에서 그는 계산보다 열을 앞세운다.

그는 따뜻하고 감정적인 인물이지만, 진지해지는 순간 그 따뜻함은 불꽃이 된다.
자기 몸을 운철처럼 단단하게 만들고, 모든 관성을 한 점으로 모아, 적이 버티는 세계의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

이때 아스테르다스의 전투는 단순한 격투가 아니라 선언이다.

“나는 이곳에 떨어지기로 했다.”

그의 무공은 자유의지의 물리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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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신이 부서질 각오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스테르다스에게 죽음이나 파괴는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로 올 수 있는 위험이다.

그는 죽기 위해 떨어지지 않는다.
살리기 위해 떨어진다.
리투아니아가 살아남고, 민다우가스의 설계도가 사람을 잃지 않도록, 자신이 선택한 별의 방향으로 떨어진다.

아스테르다스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내가 부서지는 것이 목적은 아니야. 하지만 이 별이 떨어져야 길이 열린다면, 나는 내가 고른 하늘에서 떨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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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아스테르다스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자기 선택의 열로 모든 것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망설임을 없앤다.
부품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게 한다.
리투아니아의 냉혹한 생존 논리에 온도를 준다.
민다우가스의 설계도에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아스테르다스는 “내가 선택했으니 괜찮다”는 말로 자신의 소모를 정당화할 수 있다.
타인이 걱정해도 웃어넘길 수 있다.
자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과의 문제로만 처리할 수 있다.

그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자기 자신도 지켜야 할 리투아니아의 일부라는 감각이다.

그에게 필요한 보완은 민다우가스와의 긴장 속에서 나온다.

민다우가스는 말할 수 있다.

“네가 부서져도, 리투아니아는 굴러가야 한다.”

아스테르다스는 말한다.

“맞아. 하지만 내가 왜 떨어지는지는 내가 정해.”

그러나 아스테르다스가 정말 배워야 하는 것은 여기에 하나 더 있다.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함부로 태워도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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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아스테르다스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리투아니아를 위해 부서질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부품으로 취급하는 리투아니아를 위해 떨어지지는 않겠다.”



이것이 아스테르다스의 양심이다.

그는 민다우가스를 따른다.
민다우가스의 대전략을 이해한다.
리투아니아의 생존을 위해 싸운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도 건다.

하지만 그는 리투아니아가 단순한 기계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사람을 완전히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보는 것이다.

병사도, 귀족도, 백성도, 군주도,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도구와 시스템은 필요하다.
칼은 자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무엇을 자를지는 쥔 사람이 정한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점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망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못으로만 보는 손에는 쥐어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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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아스테르다스는 리투아니아의 생존이라는 냉혹한 대전략을 이해하면서도, 자기 의지로 낙하지점을 정한 청흑빛 유성이다.

그의 거짓말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낙하라면, 부서져도 괜찮다”**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리투아니아를 지키되, 그 리투아니아가 사람을 부품으로 갈아 넣는 기계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낙하지점을 정하고, 궤도를 바꾸고, 자신을 유성으로 만들어 떨어지며, 마지막에는 부서질 각오로 길을 여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리투아니아를 위해 싸우더라도, 사람을 완전히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하는 국가를 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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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의 방문자》

개막 — 작은 별을 무대에 걸다

왕궁 극장의 천장은 그날, 바다가 아니라 밤하늘이 되었다.

푸른 천도, 돛대도, 종이 갈매기도 없었다. 대신 어두운 막 위에 작은 별들이 하나씩 걸렸다. 어떤 별은 금빛이었고, 어떤 별은 은빛이었고, 어떤 별은 너무 작아서 조명이 닿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다.

무대 중앙에는 작은 사막이 놓여 있었다.

모래는 진짜 모래가 아니었다. 엷은 황금빛 천과 잘게 부순 조개껍질, 그리고 마른 풀잎으로 만든 무대 장치였다. 그러나 조명이 낮게 깔리자 그것은 정말 사막처럼 보였다.

그 사막 한가운데에는 부러진 청동 매가 쓰러져 있었다.

한쪽 날개는 꺾였고, 은실은 끊어져 있었으며, 자줏빛 깃 장식에는 모래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은 전쟁과 정찰과 귀환 방위를 위해 만들어진 니케아식 마도구였다.

그러나 오늘, 그 매는 날지 못했다.

푸리나 헤툼은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선장의 모자도, 항해자의 류트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물뿌리개 하나와, 투명한 유리 덮개 하나가 있었다.

객석이 조용해지자, 푸리나는 밤하늘에 걸린 가장 작은 별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의 이야기는 아주 작은 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크게 선언하기보다는, 잠든 아이 옆에서 책을 펼치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너무 작아서 지도에는 제대로 그려지지 않고, 너무 작아서 군대가 행군하기도 어렵고, 너무 작아서 왕국이라 부르면 누군가는 웃을지도 모르는 별.”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별에 장미 한 송이가 피면, 그 별은 더 이상 작기만 한 곳이 아니게 됩니다.”

그녀는 물뿌리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유리 덮개를 무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오늘의 극은, 그 장미를 두고 떠난 작은 방문자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장미가 무엇인지.

별이 무엇인지.

왜 떠났고, 왜 돌아가야 하는지.

그런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작은 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극장 전체에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것은 바다를 출항시키던 때처럼 발밑을 흔들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감각을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누군가에게는 오래 돌보지 못한 화분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닫아주지 못한 창문이.

누군가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한 사과가.

누군가에게는 이름 붙이지 못한 작은 별 하나가.

무대 위의 별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가장 작은 별 하나가 내려왔다.

그 별 아래, 사막이 열렸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그럼 막을 열겠습니다.”

그녀는 물뿌리개를 무대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작은 별의 방문자가, 사막에서 한 어른을 만나는 장면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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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부러진 청동 매와 양 한 마리

사막은 너무 조용했다.

니케아의 황제가 익숙한 종류의 조용함은 아니었다.

전장이 조용해질 때가 있었다. 화살이 날아가기 직전, 말들이 숨을 낮추고, 장수들이 명령을 기다리며, 적과 아군이 모두 한 박자 뒤의 피를 예감하는 그런 침묵.

궁정이 조용해질 때도 있었다. 누군가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받았을 때, 혹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는 이름이 회의장 한가운데 놓였을 때의 침묵.

그러나 이 사막의 침묵은 달랐다.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판결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넓었다.

끝없이 넓어서, 사람이 들고 온 칙령과 활과 관직과 죄책감까지 모두 작은 물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는 부러진 청동 매 옆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니케아 궁정의 장인들과 천문관들이 만든 정찰용 마도구였다. 몸체는 청동으로 되어 있었고, 날개에는 얇은 은실과 자줏빛 깃 장식이 박혀 있었다. 배 안쪽에는 작은 천문반과 항로 기록판이 들어 있었으며, 원래라면 하늘로 날아올라 별의 위치와 지상의 길을 함께 읽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 청동 매는 모래 위에 쓰러져 있었다.

오른쪽 날개는 꺾였고, 은실은 끊어졌으며, 천문반은 축이 어긋나 있었다. 자줏빛 깃 장식 위로 모래가 내려앉았다.

물론 그것은 무대 장치였다.

나무와 금속박과 얇은 실로 만든, 매우 정교한 소품.

하지만 푸리나의 극장 안에서, 그런 구분은 늘 조금 무력했다.

무대는 무대였고, 동시에 잠깐의 세계였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의 몸체를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우측 날개 파손. 천문반 축 어긋남. 귀환 방위 상실.”

그녀는 짧게 정리했다.

“전투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 방치 시 생존률 저하.”

무대 뒤에서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역시 사막에 고립되어도 보고서처럼 말해.”

죠니가 객석 쪽에서 낮게 말했다.

“그게 저 황제님 방식이면, 꽤 안정적이긴 하지.”

푸리나는 힐끗 그를 보았다.

“죠니, 이번엔 주역 아니니까 조용히.”

“응. 이번엔 사막에서 양 안 그려도 돼서 편하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막 위로 작은 발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모래를 밟는 소리.

미하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사막 한가운데, 작은 망토를 두른 아이가 서 있었다.

요안나였다.

오늘의 요안나는 공동황제의 예복도, 궁정의 격식도 입고 있지 않았다. 작은 별빛 색 망토, 목에 걸린 연한 금빛 장식, 그리고 손에 쥔 아주 작은 물뿌리개.

그녀는 조용히 미하일라를 바라보았다.

미하일라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먼저 예법이 왔을 것이다.

호칭.

인사.

공동황제로서의 거리.

황제와 황제 사이의 복잡한 경계.

하지만 사막은 그것들을 조금 멀리 밀어냈다.

요안나는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양을 그려주세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양?”

“네.”

“용도를 말하라.”

요안나가 눈을 깜박였다.

“용도요?”

미하일라는 진지했다.

“목축용인가, 운반용인가, 제사용인가. 혹은 군수용인가.”

요안나는 잠시 미하일라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미를 먹지 않는 양이면 돼요.”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미하일라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 말은 이상했다.

전장과 법령과 제국의 계보 속에서 다루기 어려운 요구였다.

장미를 먹지 않는 양.

무언가를 해치지 않는 힘.

미하일라는 부러진 청동 매의 기록판을 꺼냈다.

원래라면 항로, 별자리, 적의 이동, 산맥과 수원지의 위치가 적혀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뒤집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뒷면이 드러났다.

그 위에 목탄을 올렸다.

요안나는 조용히 물었다.

“거기에 그려도 돼요?”

“현재 항로 산정 기능은 정지했다.”

미하일라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 임시 용도로 전환한다.”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양 그림을 임시 용도라고 했어.”

죠니가 말했다.

“그래도 판은 쓰이고 있네.”

미하일라는 첫 번째 양을 그렸다.

그 양은 지나치게 강해 보였다. 뿔이 컸고, 다리는 단단했으며, 눈빛은 거의 전투마에 가까웠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받아들고 진지하게 보았다.

“이 양은 장미를 먹을 것 같아요.”

미하일라는 기록판을 다시 받았다.

“근거는?”

“눈이 너무 결심했어요.”

객석에서 다시 웃음이 났다.

미하일라는 잠시 양 그림을 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 양은 장미를 보면 돌격할 것 같았다.

두 번째 양은 지나치게 작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양은 장미를 먹기 전에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아요.”

세 번째 양은 지나치게 늙었다.

“이 양은 장미를 먹지는 않겠지만, 제 별까지 걸어오기 전에 잠들 것 같아요.”

미하일라는 목탄을 내려놓았다.

“요구조건이 계속 변한다.”

요안나는 조금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죄송해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 사과는 이상하게 빨랐다.

마치 궁정에서 먼저 물러서는 법을 배운 아이처럼.

미하일라는 기록판의 빈 부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자를 그렸다.

구멍이 세 개 뚫린 작은 상자.

“양은 이 안에 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받아들었다.

눈이 커졌다.

“정말요?”

“그렇다.”

“보이지 않는데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네가 원하는 양일 수 있다.”

요안나는 상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이 양은 장미를 먹지 않을 것 같아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작전 성공이다.”

푸리나가 무대 뒤에서 속삭였다.

“양 그리기를 작전 성공이라고 했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래도 성공했네. 꽤 좋은 작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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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나는 상자 그림이 그려진 기록판을 품에 안고, 미하일라 옆에 앉았다.

사막은 여전히 넓었다.

부러진 청동 매 옆의 황제와 작은 별의 방문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하일라였다.

“너는 어디서 왔나.”

요안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이 별들이 흔들렸다.

그중 하나는 아주 작았다.

다른 별보다 낮게 매달려 있었고, 가까이서 보면 둥근 나무판에 은색 가루를 칠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명이 닿자, 그것은 정말 작은 별처럼 보였다.

요안나는 그 별을 가리켰다.

“저기요.”

미하일라는 별을 보았다.

“저 별은 너무 작다.”

“그래서 좋아요.”

“왜지?”

“해가 지는 걸 자주 볼 수 있어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요안나는 계속 말했다.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또 해가 져요. 슬플 때는 여러 번 볼 수 있어요.”

“너는 많이 슬펐나.”

요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사막보다 작았지만, 더 가까웠다.

미하일라는 더 묻지 않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제 별에는 화산이 세 개 있어요.”

“활화산인가.”

“두 개는 그래요. 하나는 꺼졌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셋 다 청소해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다.”

요안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죠?”

“꺼진 화산도 다시 깨어날 수 있다. 방치하지 않는 것은 옳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그녀가 자기 별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이 조금 이상한 듯했다.

그래서 더 말했다.

“그리고 바오밥나무도 있어요.”

“위험한가.”

“아주요. 어릴 때 뽑지 않으면 별을 찢어버릴 수도 있어요.”

미하일라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매일 확인해야 한다.”

“네. 아주 작은 싹일 때요.”

“큰 적보다 작은 싹이 더 위험할 때가 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두 사람은 잠시 같은 방향을 보았다.

작은 별.

화산.

바오밥나무.

제국과 전장과는 전혀 다른 규모였지만, 이상하게 원리는 비슷했다.

작은 것을 방치하면, 언젠가 세계가 찢어진다.

미하일라는 낮게 말했다.

“작은 별이라도 통치가 필요하군.”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그런데 저는 통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상자 그림이 그려진 기록판을 끌어안았다.

“장미가 있어서요.”

그 말과 함께 무대의 하늘이 조금 변했다.

사막 뒤편에 작은 별의 무대가 떠올랐다.

푸리나의 극장 신술이 아주 얇게 장면을 겹쳤다. 모래 위에 별빛이 내려앉고, 별 위에는 작은 화산 세 개와 바오밥나무 싹, 그리고 유리 덮개 옆에 선 장미 한 송이가 보였다.

장미는 배우가 아니었다.

무대 장미였다.

그러나 조명과 바람과 아주 섬세한 인형 장치 때문에, 꽃잎이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요안나는 그 장미를 보았다.

“그 장미는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어요.”

미하일라는 장미를 보았다.

작고, 까다롭고, 말이 많고, 가시는 얇았다.

제국의 지도 위에서는 표시되지 않을 생명.

전쟁 보고서라면 한 줄로 접힐 존재.

그러나 요안나의 작은 별에서는, 그 꽃 하나 때문에 아침의 순서와 밤의 의미가 달라졌다.

미하일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기록판의 빈 부분을 조금 남겨두었다.

“정말 하나뿐인가.”

미하일라가 물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은?”

요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이 지나갔다.

장미의 꽃잎이 떨렸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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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은 잠깐 작은 별로 넘어갔다.

요안나의 별은 정말 작았다.

한 걸음만 걸으면 화산이 있었고, 두 걸음 더 가면 장미가 있었으며, 조금만 더 가면 해가 지는 자리였다. 객석에서는 그 작은 규모 때문에 낮은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만족스럽게 속삭였다.

“작은 별 세트 귀엽다.”

죠니가 말했다.

“저 정도면 청소는 편하겠네.”

하지만 무대 위의 요안나는 진지했다.

그녀는 작은 빗자루로 화산을 청소했다.

하나.

둘.

셋.

꺼진 화산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다음 바오밥나무 싹을 살폈다.

작은 싹 하나를 뽑았다.

또 하나.

그리고 장미에게 다가갔다.

장미는 천천히 꽃잎을 열었다.

녹음된 목소리인지, 무대 뒤의 배우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부드럽고 조금 까다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인사가 늦었네요.”

요안나는 당황했다.

“미안해. 화산을 청소하느라.”

“화산은 매일 거기 있잖아요.”

“너도 매일 여기 있잖아.”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금 새침하게 말했다.

“나는 어제와 조금 다르게 피었어요.”

요안나는 장미를 보았다.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꽃잎의 각도 하나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향기가 조금 짙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렇네. 예뻐.”

장미는 조금 더 꽃잎을 세웠다.

“그건 당연한 말이에요.”

요안나는 웃었다.

“그러면 왜 말하게 했어?”

“당연한 말도 듣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났다.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들었다.

“물 줄게.”

“너무 많이 주지는 말아요.”

“어제는 적다고 했잖아.”

“어제의 바람과 오늘의 바람은 달라요.”

요안나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장미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밤에는 유리 덮개를 씌워주세요. 바람이 거칠어요.”

“알았어.”

“벌레도 조심해줘요. 하지만 나비는 보고 싶으니까 애벌레 몇 마리는 남겨도 돼요.”

“그럼 어떤 벌레를 쫓아야 해?”

“해로운 벌레요.”

“어떤 게 해로운데?”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한숨을 쉬었다.

장미는 꽃잎을 살짝 떨었다.

“한숨 쉬었나요?”

“아니.”

“쉬었어요.”

“조금.”

“내가 귀찮나요?”

요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가시가 있으니까요.”

작은 가시들이 조명에 비쳤다.

작고, 얇고, 솔직히 말하면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가시였다.

요안나는 그 가시들을 보았다.

“그 가시로 뭘 막을 수 있어?”

장미는 당당하게 말했다.

“호랑이요.”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 별에는 호랑이가 없는데.”

“그래도 막을 수 있어요.”

“호랑이는 풀을 안 먹어.”

“나는 풀이 아니에요.”

“그건 맞아.”

둘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그 순간은 우스웠다.

그러나 아주 조금 슬펐다.

장미는 자신이 강하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요안나는 장미가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돌봐야 할지는 몰랐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찔릴 것 같고, 너무 멀리 있으면 시들 것 같았다.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들었다.

“밤에 씌워줄게.”

장미는 작게 말했다.

“지금도 바람이 조금 차가워요.”

“지금은 낮이야.”

“낮에도 바람은 불어요.”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보았다.

화산 청소도 해야 했다.

바오밥나무도 봐야 했다.

해가 지는 것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장미는 계속 다른 말을 했다.

물.

바람.

벌레.

나비.

가시.

호랑이.

요안나는 갑자기 숨이 조금 막혔다.

“나는 다른 별들을 보고 올 거야.”

장미의 꽃잎이 멈췄다.

“다른 별?”

“응.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으니까.”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말을 이어갔다.

“왕도 만나고, 어른들도 만나고, 지구도 볼 거야. 그러면 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장미는 한참 뒤에 말했다.

“그럼 가도 좋아요.”

너무 쉽게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요안나는 오히려 당황했다.

“정말?”

“나는 가시가 있으니까요.”

장미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하지만 꽃잎은 조금 떨렸다.

“그리고 바람도 견딜 수 있어요.”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들고 있었다.

“덮개는?”

장미는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꽃잎을 살짝 접었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아까는—”

“필요 없어요.”

요안나는 더 묻지 못했다.

장미는 아주 작게 말했다.

“가세요. 너무 오래 쳐다보면, 내가 우는 걸 들킬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 요안나는 멈췄다.

하지만 장미는 다시 꽃잎을 세웠다.

“물론 나는 울지 않아요. 장미니까요.”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내려놓았다.

씌우지는 않았다.

그녀는 물뿌리개와 상자 양이 그려진 기록판을 들고 별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떠나기 직전, 뒤돌아보았다.

장미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아주 작은 별 위에서.

요안나는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작은 별의 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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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막.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고 있었다.

요안나는 상자 그림이 그려진 기록판을 품에 안은 채,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떠났나.”

미하일라가 물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미를 두고.”

“네.”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돌아갈 생각은 있나.”

요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왜지.”

요안나는 작은 별을 보았다.

“돌아가면,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 말은 작았다.

하지만 미하일라는 들었다.

돌아간다는 것은, 그저 그리운 곳에 닿는 일이 아니다.

돌아간 뒤 해야 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하일라는 사막 너머를 보았다.

전쟁을 끝내는 활을 가진 황제도, 그 질문 앞에서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장미 옆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약하고, 까다롭고, 투덜거리고, 가시를 세우고, 사실은 바람을 무서워하는 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전쟁과 달랐다.

그러나 어쩌면, 전쟁을 끝내고 난 뒤에 남는 질문이었다.

미하일라는 기록판을 다시 받았다.

그리고 상자 속 양 옆에 작은 유리 덮개를 그렸다.

요안나가 물었다.

“뭘 그리세요?”

“유리 덮개.”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미하일라는 담담히 말했다.

“양이 장미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바람은 막아야 한다.”

요안나는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대 위 하늘에서 작은 별 하나가 조금 더 밝아졌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무대 밖에서 낮게 들렸다.

“이렇게, 작은 별의 방문자는 사막에서 양 한 마리와 유리 덮개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장미가 특별한 이유가 장미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별빛이 흔들렸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1막 — 명령하는 왕과 피어나는 꽃들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었다.

— 어른들의 별을 지나며 —

미하일라는 간판을 보았다.

“다음은 왕인가.”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서운 왕일까요?”

미하일라는 잠시 생각했다.

“왕은 대체로 무섭다.”

요안나가 조금 굳었다.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고 덧붙였다.

“그러나 무섭지 않은 왕이 더 위험할 때도 있다.”

요안나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미하일라는 낮게 말했다.

“가보면 알겠지.”

사막의 별빛이 천천히 회전했다.

작은 방문자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좋아. 소피아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무너진 왕국의 세계를 다시 정의하려는 황금눈의 연금술사”**야.

벨라 4세가 헝가리 왕국 전체를 권역으로 삼아 재건하는 여왕이라면, 소피아는 그 옆에서 사물과 제도와 사람에게 붙은 낡은 정의를 다시 해석해, 왕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려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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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파드 소피아 베아트리체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소피아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헝가리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요새가 무너진다.
피난민이 길 위에 늘어난다.
왕국의 창고가 비어간다.
귀족들은 자기 영지를 먼저 계산한다.
사람들은 “왕국은 끝났다”고 말한다.
한때 질서였던 것들이 어느 순간 폐허, 부채, 피난 행렬, 깨진 성벽, 낡은 문서가 된다.

소피아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어제까지 왕국이라 불리던 것이, 오늘은 잔해라고 불렸다.”

그녀는 그때 배웠다.

사물의 이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성벽은 무너진 돌이 될 수 있고, 무너진 돌은 다시 결계핵이 될 수 있다.
폐허는 실패의 증거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공방의 재료일 수도 있다.
왕국도 마찬가지다.

끝났다고 정의된 것을,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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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소피아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세계가 안정된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이다.

성은 성이다.
왕관은 왕관이다.
금은 금이다.
피난민은 피난민이다.
폐허는 폐허다.
패배는 패배다.

소피아는 한때 이런 식으로 세계가 비교적 안정된 이름을 가진다고 믿었을 수 있다.

하지만 헝가리의 위기 속에서 그녀는 보았다.

성은 무너질 수 있다.
왕관은 권위를 잃을 수 있다.
금은 사람을 살릴 수도, 사람을 팔아넘길 수도 있다.
피난민은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왕국이 지켜야 할 미래일 수 있다.
폐허는 끝이 아니라 재료일 수 있다.
패배는 재정의되면 다음 방어선의 설계도가 될 수 있다.

즉 소피아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세계의 이름과 가치가 안정되어 있다는 믿음.

하지만 이 상실은 곧 그녀의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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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소피아의 최대 업적은 헝가리의 잔해를 다시 쓸 수 있는 재료로 본 것이다.

남들이 폐허라고 부르는 것을, 그녀는 재건 자재로 본다.
남들이 패배라고 부르는 것을, 그녀는 다음 방어의 데이터로 본다.
남들이 피난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그녀는 왕국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로 본다.
남들이 금속, 약품, 문서, 부채, 공방, 요새를 따로따로 볼 때, 소피아는 그것들을 하나의 연금술적 변환 과정으로 본다.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헝가리의 무너진 세계를 다시 정의하고, 재건 가능한 체계로 바꾼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소피아는 세계를 너무 쉽게 “재료”로 보게 될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을 변환 가능한 것으로 보면, 고유한 슬픔과 상실까지 기능으로 처리할 수 있다.
사람의 상처를 “재건에 필요한 경험값”으로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소피아의 대가는 따뜻한 재건과 차가운 재정의 사이의 위험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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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소피아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올바르게 정의하고 변환할 수 있다면, 어떤 상실도 쓸모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 믿음은 소피아를 강하게 만든다.

그녀는 무너진 것을 그냥 무너진 것으로 두지 않는다.
실패를 실패로만 두지 않는다.
폐허를 폐허로만 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끝났다고 말하는 곳에서 다시 의미를 뽑아낸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모든 상실이 반드시 쓸모로 바뀌어야 한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어떤 상처는 재료가 되기 전에 애도되어야 한다.
어떤 폐허는 공방으로 바꾸기 전에 무덤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왕국 재건의 구성원이기 전에, 그냥 쉬어야 하는 피해자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쓸모를 찾아내지 못한 상실은, 정말로 헛된 상실이 된다.”



이것이 소피아의 재능이자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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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소피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헝가리의 상실이 아무 의미 없는 폐허로 확정되는 것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패배가 “그냥 끝”으로 정리되는 것.
무너진 요새가 “쓸모없는 잔해”로 버려지는 것.
피난민이 “소모된 인구”로 기록되는 것.
왕국의 실패가 “어쩔 수 없었다”는 문장으로 닫히는 것.
어머니 벨라가 지키려는 왕국이, 결국 재정의되지 못한 채 과거의 파편으로 남는 것.

그래서 소피아는 이렇게 믿는다.

> “만물은 다시 정의될 수 있다. 이름이 바뀌면 용도도, 가치도, 미래도 바뀐다.”



소피아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재정의와 변환이다.

폐허를 요새의 씨앗으로.
부채를 미래의 투자로.
실패를 다음 설계도로.
피난민을 왕국의 남은 심장으로.
금속을 방패로.
상처를 왕국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공식으로.

즉 소피아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헝가리가 잃은 것들이 헛되이 폐허로 굳어지지 않도록, 그것들을 다시 정의하고 변환해 왕국의 미래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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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소피아는 먼저 정의한다.

눈앞의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이것은 폐허인가, 재료인가?
이것은 부채인가, 왕국이 아직 신용을 가진 증거인가?
이것은 피난민 행렬인가, 살아남은 헝가리인가?
이것은 무너진 성벽인가, 새 결계의 핵인가?
이것은 패배인가, 다음 방어선의 설계 조건인가?

소피아의 첫 대응은 이름을 다시 붙이는 것이다.

그녀의 황금눈은 단순히 귀한 금속을 보는 눈이 아니라, 사물과 상황의 잠재적 정의를 보는 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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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소피아는 분해한다.

이미 붙은 이름이 너무 강하면, 그것을 구성 요소로 나눈다.

왕국의 위기라면 식량, 성벽, 병력, 민심, 재정, 귀족의 이해관계, 피난민 수용력으로 나눈다.
무너진 요새라면 돌, 철, 영맥, 방어선, 노동력, 결계핵으로 나눈다.
한 사람의 절망이라면 상처, 굶주림, 상실, 피로, 두려움, 아직 남은 욕망으로 나눈다.

소피아는 세상을 한 덩어리로 보지 않는다.

분해할 수 있으면, 다시 조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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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소피아는 변환한다.

이것이 그녀의 연금술적 핵심이다.

금속을 바꾸고, 재료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의미를 바꾼다.
성벽의 잔해를 새 방어 결계의 앵커로 삼는다.
부서진 무기를 농기구나 보강재로 바꾼다.
실패한 전투 기록을 다음 요새 설계의 조건으로 바꾼다.
귀족의 사치 자산을 왕국 재건의 재원으로 바꾸려 한다.

소피아에게 변환은 단순한 물질 조작이 아니다.

세상에 붙은 패배의 이름을 미래의 이름으로 바꾸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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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신의 황금의 눈으로 직접 가치를 선언한다.

모두가 쓸모없다고 말할 때, 소피아는 말한다.

“아니. 아직 가치가 남아 있어.”

모두가 끝났다고 말할 때, 그녀는 말한다.

“끝이라는 정의는 아직 이르다.”

모두가 비용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말한다.

“이들은 비용이 아니라 왕국이 아직 잃지 않은 미래야.”

소피아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세계가 이것을 폐허라고 부른다면, 내가 다시 이름 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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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소피아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것을 재정의하고 변환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무너진 것을 다시 쓰게 한다.
패배를 설계 조건으로 바꾼다.
재건의 길을 연다.
절망 속에서도 쓸 수 있는 가치를 찾아낸다.
헝가리의 생존력을 높인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소피아는 슬픔을 너무 빨리 쓸모로 바꾸려 할 수 있다.
사람이 아직 울고 있는데, 그 상처가 앞으로 무엇에 도움이 될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다.
폐허가 무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왕국 재건의 이름으로 개인의 상처를 너무 빨리 공적 자원으로 변환하려 할 수 있다.

소피아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쓸모 없어도 존중받아야 하는 슬픔의 자리다.

벨라가 그녀에게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벨라는 왕국 전체를 권역으로 품는 재건 군주다.
소피아는 세계를 재정의하는 연금술사다.

벨라는 말할 수 있다.

“그 돌은 다시 성벽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무덤이다.”

소피아에게 필요한 성장은 이것이다.

모든 것을 미래의 재료로 만들기 전에, 현재의 상처로 인정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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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소피아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무엇이든 다시 정의할 수 있지만, 사람을 단순한 재료로 정의하지는 않겠다.”



이것이 소피아의 양심이다.

소피아는 사물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
폐허를 자재로, 실패를 설계도로, 부채를 투자로, 금속을 방패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피난민은 노동력이 아니다.
부상자는 재건 비용이 아니다.
전사자는 왕국 방어망의 대가만이 아니다.
상처 입은 아이는 미래 인구가 아니다.

그들이 왕국의 미래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각자의 삶을 가진 사람이다.

소피아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인간을 연금술적 재료로 환원하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선을 넘으면, 아주 유능한 재건자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재건은 사람이 아니라 기능을 위한 왕국이 된다.

그래서 소피아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폐허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을 재료로 바꾸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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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소피아는 무너진 헝가리의 세계를 다시 정의하고 변환해, 폐허를 미래로 바꾸려는 황금눈의 연금술사다.

그녀의 거짓말은 **“올바르게 정의하고 변환할 수 있다면, 어떤 상실도 쓸모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헝가리의 상실이 아무 의미 없는 폐허로 확정되지 않도록, 그것을 재건 가능한 미래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정의하고, 분해하고, 변환하고, 마지막에는 직접 가치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무엇이든 다시 정의할 수 있어도, 사람을 단순한 재료로 정의하지 않는 것이다.
1막 — 명령하는 왕과 피어나는 꽃들

— 어른들의 별을 지나며 —

별들은 가까이서 보면 생각보다 작았다.

요안나는 처음에 별이란 모두 자기 별보다 훨씬 클 거라고 생각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 별은 늘 반짝였고, 반짝이는 것은 대체로 넓고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로 내려앉은 별은, 요안나의 별보다 조금 클 뿐이었다.

둥근 무대판 하나.

그 위에는 작은 왕좌 하나.

왕좌 뒤에는 너무 커서 별보다 더 커 보이는 깃발 하나.

그리고 왕좌 위에는 민다우가스가 앉아 있었다.

그는 오늘 왕의 별의 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원래도 왕이었으므로 배역과 본인이 거의 겹쳐 보였다. 다만 오늘의 망토는 평소보다 조금 과장되어 있었다. 별 하나를 다스리기에는 지나치게 큰 검은 망토였고, 왕관도 조금 무거워 보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왕관이 너무 큰가?”

죠니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저 사람은 왕관보다 국가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망토 끝이 바닥에 끌립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망토 끝을 보다가, 무대 담당에게 눈짓했다.

망토 끝이 살짝 접혔다.

민다우가스는 그 모든 소동을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요안나가 별 위에 발을 디디자, 민다우가스는 낮게 말했다.

“왔군.”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민다우가스는 왕좌에 앉은 채 그녀를 보았다.

“작은 별의 방문자라 들었다.”

“네.”

“좋다. 그대는 지금 왕 앞에 있다.”

요안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저는 절해야 하나요?”

민다우가스는 웃었다.

“하하.”

웃음은 짧고 낮았다.

“절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상관없나요?”

“나는 절을 명할 수 있다. 하지만 절할 이유가 없는 자에게 절을 시키면, 남는 것은 허리 굽힌 몸뿐이다.”

그는 왕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굽은 허리가 아니라, 명령이 닿을 현실이다.”

요안나는 조금 어려운 얼굴이 되었다.

“왕은 뭐든 명령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민다우가스는 별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해가 걸려 있었다.

무대 장치로 만든 해였다.
그러나 지금은 별의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해에게 져라 명할 수는 있다.”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요?”

민다우가스는 다시 낮게 웃었다.

“해가 질 시간에 명하면 된다.”

요안나는 잠깐 생각했다.

“그건 명령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 아닌가요?”

“국가는 그 차이를 모르는 자에게 망한다.”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요안나는 웃지 못했다.

민다우가스의 말은 장난처럼 들렸지만, 어딘가 차가웠다.

“그럼 왕은 하고 싶은 대로 못 하나요?”

“할 수는 있다.”

민다우가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결과를 감당하지 못할 뿐이다.”

요안나는 자기 손에 들린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과 유리 덮개가 그려진 판.

“그럼 제가 제 장미에게 바람을 멈추라고 명령하면요?”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바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왕이 아니네요.”

“아니다.”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부는 것을 알고 덮개를 준비하는 자가 왕이다.”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민다우가스는 말을 이었다.

“왕의 명령은 세상을 움직이는 말이 아니다. 움직일 세상을 고르는 말이다. 해가 질 때 해에게 져라 명하고, 길이 닫힐 때 다른 길을 열라 명하며, 바람이 불 때 덮개를 씌우라 명한다.”

“그건…… 조금 시시해요.”

“그렇다.”

민다우가스는 아무렇지 않게 인정했다.

“통치는 대체로 시시한 일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요안나는 한참 동안 그 말을 생각했다.

그녀는 별을 둘러보았다.

왕좌는 컸지만, 별은 작았다.
명령은 높았지만, 해는 자기 시간에만 움직였다.

“그럼 왕은 무엇을 위해 무서워야 하나요?”

그 질문에, 민다우가스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그는 아이를 보는 눈이 아니라, 장차 무엇인가를 짊어질 사람을 보는 눈으로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왕이 무서워야 하는 것은 백성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왕이 자신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다.”

요안나는 숨을 멈춘 듯했다.

민다우가스는 왕좌에서 조금 몸을 기울였다.

“작은 방문자. 그대의 별에는 장미가 있다 했지.”

“네.”

“그 장미에게 명령할 수 있나?”

요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미는 명령을 잘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물을 너무 많이 준다고 말하고, 너무 적다고 말하고, 덮개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바람을 무서워할 것이다.

“잘 모르겠어요.”

“좋다.”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모르는 자는 아직 괜찮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장미가 명령 하나로 피고 시든다고 믿는 왕이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민다우가스는 해를 보았다.

그 작은 해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먼저 시간을 보아라.”

“시간?”

“물이 필요한 시간. 바람이 차가워지는 시간. 병든 잎을 잘라야 하는 시간.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야 하는 시간.”

그는 손을 들었다.

“해여, 져라.”

그 말과 동시에 해가 별 아래로 내려갔다.

요안나는 놀라서 해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담담히 말했다.

“보았나. 명령이 성공했다.”

요안나는 잠시 해를 보다가,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그건 해가 질 시간이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

민다우가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배웠군.”

요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웃음은 작았지만, 진짜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조용히 손뼉을 치려다가 멈췄다.

이번 극에서는 큰 박수보다 작은 미소가 더 어울렸다.

요안나가 별을 떠나려 하자, 민다우가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작은 별의 방문자.”

요안나는 돌아보았다.

“왕이 되고 싶다면, 먼저 명령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워라.”

“명령하지 못하는 것들이요?”

“그래.”

민다우가스는 왕좌에 앉아, 내려간 해의 빈자리를 보았다.

“그것들이 네 왕국의 모양을 정할 것이다.”

요안나는 그 말을 품에 안고, 다음 별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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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별은 이상하게 환했다.

별 위에는 꽃잎이 가득했다.

흰 꽃.

흰 천.

흰 계단.

흰 장식.

그리고 별의 중앙에는 스토얀카 아센이 서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허영심 많은 사람의 별을 맡았지만, 원전처럼 단순히 모자를 벗고 박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백화문주였다.

눈부실 만큼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이 어딘가 잘 벼린 칼처럼 차가웠다.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별의 표면에 흰 결이 생겼다. 그 결은 천 위에 그어진 선 같기도 했고, 손가락으로 누른 살갗 위의 자국 같기도 했다.

요안나는 별에 내려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예뻐요.”

스토얀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래.”

요안나는 곧바로 덧붙였다.

“그런데 조금 무서워요.”

스토얀카의 웃음이 깊어졌다.

“좋다. 제대로 보았구나.”

요안나는 당황했다.

“무서운 게 좋은 거예요?”

“두려움은 몸이 먼저 알아본다는 뜻이다.”

스토얀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가락이 꽃잎 사이를 가르자, 흰 꽃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꾸었다. 부드럽게 흔들린 것이 아니었다. 결을 잡아 세운 것처럼, 줄기가 하나씩 위로 치솟았다.

“보아라, 작은 방문자.”

스토얀카가 말했다.

“꽃이 피었다.”

흰 꽃잎들이 별 위로 휘몰아쳤다.

가지들은 자연스럽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손이 안쪽의 결을 찾아 끌어올린 것처럼 뻗었다. 가지 끝마다 흰 꽃이 피었고, 꽃마다 날카로운 빛이 맺혔다.

요안나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 꽃들은 왜 피어요?”

스토얀카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피지 않으면 꺾인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럼 피는 건 증명인가요?”

“그래.”

스토얀카의 목소리는 단정했다.

“꽃은 피어야 한다. 줄기를 세우고, 결을 따라 올라와, 자신이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야 한다.”

그녀는 손끝으로 흰 꽃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름다움은 부드러운 장식이 아니다. 살아남은 결이 드러나는 방식이지.”

요안나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그 장미도 자기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자기가 특별하다는 말을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장미는 이렇게까지 피어나서 세상에게 증명하고 싶어 했을까?

아니면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투덜댈 수 있는 한 사람을 기다렸던 걸까?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꽃은 꽃이 아니에요?”

스토얀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는 자가 없으면, 꽃의 피어남은 어디에 새겨지지?”

“향기에요?”

요안나가 답했다.

“아니면…… 물 준 사람의 손에?”

스토얀카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요안나는 당황해서 기록판을 꼭 안았다.

“제 장미는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특별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가끔은 그냥 제가 봐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세상 전체 말고요.”

스토얀카는 웃었다.

“작은 꽃의 작은 욕심이군.”

“작은가요?”

“세상에게 자신을 새기려는 꽃에 비하면.”

요안나는 흰 꽃들을 보았다.

많았다.

아름다웠다.

눈이 아플 만큼.

그런데 이상하게, 요안나는 자기 별의 장미가 더 잘 떠올랐다.

그 꽃은 이렇게 많지도 않았고, 이렇게 장엄하지도 않았다.
호랑이를 막겠다고 말하는 가시도 얇았다.

그런데 아침마다 물을 달라고 했다.

바람이 차갑다고 했다.

가끔 예쁘다고 말해달라고 했다.

요안나는 낮게 말했다.

“저는 작은 꽃이 조금 더 좋아요.”

스토얀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는?”

요안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스토얀카는 흰 꽃잎 속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모르는 채로 좋아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럴지도 몰라요.”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하지만 다 안 다음에만 좋아할 수 있다면, 너무 늦을 것 같아요.”

처음으로 스토얀카의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

그녀는 손을 내렸다.

흰 꽃잎들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말은 약하지만, 틀리지는 않았구나.”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스토얀카는 작은 장미가 있을 법한 먼 별을 보듯 고개를 돌렸다.

“약한 꽃도 핀다. 다만 스스로 약하다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 요안나를 보았다.

“가거라, 작은 방문자. 네 꽃이 정말 피었는지 보고 싶다면, 박수 소리를 찾지 마라.”

“그럼 뭘 찾아야 해요?”

스토얀카는 손끝에 남은 흰 꽃잎을 털었다.

“네가 돌아보았을 때,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지 보아라.”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기억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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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별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별 위에는 책장이 있었다.

기록판들이 있었다.

작은 별빛들이 유리병 안에 들어 있었다.

그 유리병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계세요?”

책장 뒤에서 알토가 나왔다.

오늘의 그는 원전의 사업가처럼 별을 세는 자였지만, 손에 든 것은 돈주머니가 아니라 기록장과 펜이었다.

그는 요안나를 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방문자군요. 안녕하세요.”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알토는 기록장을 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펜을 멈추었다.

“기록 중이었습니다. 방해는 아닙니다.”

푸리나가 무대 뒤에서 속삭였다.

“알토가 부드러워졌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기록장 닫지 않은 걸 보면 완전히 부드러워진 건 아닌데.”

요안나는 유리병 속 별빛들을 보았다.

“이 별들은 다 뭐예요?”

“기록된 별들입니다.”

“당신 거예요?”

알토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아니에요.”

요안나는 조금 놀랐다.

“아니에요? 세고 있으면 당신 것이 되는 줄 알았어요.”

“기록한다고 소유하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알토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기록은 붙잡는 일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붙잡는 것과 가지는 것은 다릅니다.”

요안나는 유리병 하나를 보았다.

병 안의 별빛은 아주 작았다.

“그럼 왜 기록해요?”

“잊히지 않게 하려고요.”

알토는 조금 생각하고 덧붙였다.

“물론 전부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적지 않으면, 사라지는 쪽이 너무 쉽게 이깁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잊히면 안 돼요?”

알토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병 속 작은 별빛을 보았다.

“대부분의 것은 언젠가 잊힙니다. 그래도 어떤 것들은 조금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게 기록이에요?”

“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요안나는 자기 장미를 떠올렸다.

그 장미가 했던 말들.

아침 인사가 늦었다는 말.
나비는 보고 싶다는 말.
가시는 호랑이를 막을 수 있다는 말.
가도 좋다는 말.
울지 않는다는 말.

그것들을 기록할 수 있을까?

기록한다면 장미를 더 잘 알게 될까?

아니면 기록장에 적는 순간, 장미의 투덜거림은 그냥 문장이 되어버릴까?

요안나는 물었다.

“기록하면, 그걸 이해하게 돼요?”

알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기록한다고 바로 이해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요?”

“다시 돌아갈 이유를 잃지 않게 해줍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알토는 그녀의 기록판을 보았다.

상자 속 양과 유리 덮개.

“그 판에는 무엇을 그렸나요?”

“양이요.”

“보이지 않네요.”

“상자 안에 있어요.”

알토는 잠시 상자를 보았다.

그러더니 아주 조금 미소 지었다.

“좋은 기록이네요.”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존하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알토는 잠시 멈추었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다만 조심해야 합니다. 상자에 넣은 것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꺼내 돌보아야 해요.”

그 말에 요안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알토는 작은 빈 이름표 하나를 건넸다.

“필요하면 쓰세요.”

“뭘요?”

“잊고 싶지 않은 것.”

요안나는 이름표를 받았다.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아직은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랐다.

알토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말했다.

“아직 쓰지 못했다는 것도, 기록이 될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알토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어떤 이름은 빨리 적으면 오히려 납작해지니까요.”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싫지는 않아요.”

알토의 펜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는 기록장 한쪽에 작게 적었다.

작은 방문자. ‘싫지는 않아요’라고 함.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아주 작게 웃었다.

요안나는 그걸 보고 말했다.

“그것도 기록해요?”

알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좋은 평가는 보존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 말에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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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별은 가장 작았다.

하지만 가장 바빴다.

그 별에는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벨라가 서 있었다.

등불을 켠다.

끈다.

켠다.

끈다.

다시 켠다.

다시 끈다.

별이 너무 작고 자전이 너무 빨라서, 밤과 낮이 금세 바뀌었다. 벨라는 거의 쉬지 않고 등불을 돌보아야 했다.

요안나는 한참 그것을 보다가 물었다.

“힘들지 않아요?”

벨라는 등불의 유리를 닦았다.

“힘들단다.”

“그런데 왜 계속해요?”

“밤이 오기 때문이란다.”

벨라는 등불에 불을 붙였다.

작은 불빛이 별의 가장자리를 밝혔다.

“그리고 밤은, 기다려주지 않거든.”

요안나는 등불을 보았다.

작은 불이었다.

나라를 밝힐 만큼 큰 불도 아니고, 전쟁을 막을 불도 아니었다.

하지만 별이 어두워질 때마다 그 불은 분명히 필요했다.

벨라는 등불을 다시 껐다.

“낮이 오면 불을 끈다. 그리고 그을음을 닦고, 기름을 채우고, 유리를 살핀단다.”

“쉴 시간은요?”

벨라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왕의 눈이었지만, 동시에 아이의 이마에 열이 있는지 살피는 어머니의 눈이기도 했다.

“가끔 있단다. 아주 조금.”

요안나는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벨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라가 한 번 무너진 뒤에는, 힘들다는 말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한단다.”

그녀는 다시 등불을 켰다.

“큰 성벽은 늦게 세워도 된다. 하지만 밤의 등불은 오늘 켜야 해.”

“왜요?”

“돌아온 사람이 첫날 밤에 어둠만 보면, 그곳을 집이라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집……”

벨라는 그 말에 요안나를 보았다.

“춥니?”

“아니요.”

“무섭니?”

요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벨라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자기 망토 끝을 조금 펴, 요안나가 앉은 자리의 차가운 별바닥을 덮어주었다.

“왕관을 쓴 아이도 밤에는 춥단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이가 아닌데요.”

벨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더 조심해야겠구나.”

“왜요?”

“어른인 척하는 아이는, 추워도 춥다고 말하지 못할 때가 많단다.”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벨라는 등불의 유리를 닦았다.

“네 별에도 장미가 있다고 들었다.”

“네.”

“밤에는 덮개를 씌워주니?”

요안나는 손에 든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 옆에 그려진 작은 유리 덮개.

“씌워주려고 했어요.”

“그렇구나.”

벨라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두고 왔어요.”

“알고 있단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벨라는 등불을 낮게 조정했다.

“두고 온 것을 생각하는 얼굴은 비슷하거든.”

요안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벨라는 조용히 말했다.

“네 장미가 밤을 무서워한다면, 낮에 사랑한다고 말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밤에 다시 가야지.”

“매일요?”

“매일.”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꼭 잡았다.

벨라는 조금 더 부드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매일 완벽할 필요는 없다. 늦었다면 사과하고, 물을 주고, 덮개를 씌우면 된단다. 아이도, 꽃도, 나라도 그렇게 다시 세운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등불이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졌다.

그 반복은 조금 지루했다.

하지만 이제 요안나는 그 지루함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쩌면 매일 같은 시간에 불을 켜는 일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가장 오래된 방법인지도 몰랐다.

벨라는 등불을 다시 켰다.

“이제 가렴.”

“벌써요?”

“다음 밤이 곧 온단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벨라는 손을 뻗어 요안나의 망토 끝에 묻은 별먼지를 살짝 털어주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면, 불이 꺼지기 전에 가렴.”

요안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 별로 건너가는 동안, 그녀는 계속 뒤돌아보았다.

작은 등불이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어쩐지 그 반복이, 먼 별에서 누군가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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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별은 지도와 서류 냄새가 났다.

별의 바닥에는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산맥, 강, 도시, 무너진 성벽, 사라진 길, 다시 그려진 국경.

그 지도들 사이에 슈샤니크 파흘라부니가 앉아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지리학자였다.

그러나 원전의 지리학자처럼 단순히 책상 앞에서 탐험가의 보고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지도에는 지워진 선이 많았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많았다.

그리고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빈 곳도 많았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슈샤니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문자군요.”

그 목소리는 예의 바르고 조용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를 조금 낮추는 힘이 있었다.

“어디에서 왔습니까?”

요안나는 작은 별을 가리키려다가 멈췄다.

여기에는 하늘이 없었다.

지도뿐이었다.

“아주 작은 별에서요.”

슈샤니크는 펜을 들었다.

“기록하겠습니다. 아주 작은 별.”

요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 별에는 화산 세 개와 바오밥나무와 장미가 있어요.”

“장미.”

슈샤니크의 펜이 잠깐 멈췄다.

“꽃은 지도에 오래 남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마음이 조금 내려앉았다.

“왜요?”

“계절이 지나면 사라지고, 바람에 꺾이고, 누군가 옮겨 심고, 혹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꼭 잡았다.

“그럼 지도가 틀린 거 아닌가요?”

슈샤니크는 그녀를 보았다.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아주 옅게 말했다.

“아마도.”

요안나는 그 대답이 뜻밖이라 눈을 깜박였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빈 곳을 손끝으로 짚었다.

“지도는 오래 남는 것을 좋아합니다. 산맥, 강, 성벽, 도로, 세금이 걷히는 마을, 군대가 지나갈 수 있는 평야.”

그녀의 손이 조금 멈췄다.

“그러나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 것은 때때로 지도에 남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작게 물었다.

“예를 들면요?”

슈샤니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아주 먼 곳을 보는 듯했다.

“문 앞에 심은 나무. 여름 저녁에 앉던 돌계단. 다시 돌아가면 아직 있을 거라 믿었던 포도밭. 그리고…… 누군가가 매일 물을 주던 꽃.”

요안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슈샤니크는 펜을 들었다.

“당신의 장미는 덧없는 것입니까?”

“덧없는 게 뭐예요?”

“오래 남지 않는 것.”

요안나는 장미를 떠올렸다.

가시가 얇고, 말이 많고, 바람을 무서워하고, 자기가 울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던 꽃.

“아마도요.”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왜요?”

“오래 남는 것은 싫어도 남습니다. 그러나 덧없는 것은, 돌보지 않으면 사라진 뒤에야 자리가 보입니다.”

요안나는 빈 이름표를 꺼냈다.

알토가 준 것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은 이름표.

그녀는 그것을 한참 보았다.

슈샤니크는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지도 한쪽의 아주 작은 빈칸을 열어두었다.

“이곳에 적을 수도 있습니다.”

요안나는 물었다.

“지도에 꽃을 적어도 돼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됩니다.”

요안나는 빈 이름표에 적었다.

장미.

글씨는 조금 작고, 조금 비뚤었다.

슈샤니크는 그것을 받아 지도 가장자리에 붙였다.

산맥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곳.

지도라면 원래 비워두었을 여백.

그곳에 작은 이름표 하나가 붙었다.

요안나는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잊히지 않을까요?”

슈샤니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기록은 망각을 완전히 이기지 못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슈샤니크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망각이 너무 쉽게 이기지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 말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의지가 있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슈샤니크는 요안나를 보았다.

“아직 어린 별의 방문자군요.”

“네?”

“전부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아직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슈샤니크가 아주 조금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떠나기 전, 요안나는 물었다.

“당신은 왜 직접 보러 가지 않나요?”

슈샤니크의 펜이 멈췄다.

지도 위의 모든 선이 잠시 숨을 멈춘 것 같았다.

“보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지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별로 건너갔다.


---

별들의 여행은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요안나의 마음은 처음보다 더 복잡해졌다.

왕은 명령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우라 했다.

꽃의 별에서는 피어남이 무엇인지 물었다.

기록자의 별에서는 상자에 넣은 것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꺼내 돌봐야 한다고 했다.

점등인은 늦었다면 사과하고, 물을 주고, 덮개를 씌우면 된다고 했다.

지리학자는 덧없는 것은 사라진 뒤에야 자리가 보인다고 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보았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그리고 이제 지도 여백에 붙은 이름표를 떠올렸다.

장미.

그녀는 작게 말했다.

“나는 왜 떠난 걸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무대의 별빛이 천천히 낮아졌다.

그리고 별들의 무대 아래, 낯선 푸른빛이 떠올랐다.

지구였다.

넓고, 시끄럽고, 너무 많은 것들이 있는 별.

요안나는 그곳으로 내려갔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작은 방문자는 여러 별을 지났습니다. 왕과 꽃과 기록과 등불과 지도를 보았습니다.”

잠시 침묵.

“하지만 아직, 자기 장미가 왜 자기 장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2막 — 장미 정원과 여우의 시간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붙었다.

— 세상에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날 —

요안나는 그 글씨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겁먹은 듯 말했다.

“하나뿐이…… 아니야?”

멀리서 수많은 장미의 붉은빛이 천천히 켜졌다.
2막 — 장미 정원과 여우의 시간

— 세상에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날 —

지구는 너무 컸다.

요안나는 처음 그 별에 내려섰을 때, 자신이 잘못 내려온 줄 알았다.

작은 별들은 둥근 무대판 하나면 충분했다. 왕의 별도, 꽃의 별도, 기록자의 별도, 점등인의 별도, 지리학자의 별도 모두 어딘가 끝이 보였다. 조금만 걸으면 별의 가장자리에 닿았고, 고개를 돌리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는 달랐다.

무대가 넓어졌다.

사막은 한쪽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언덕과 길과 숲과 강이 동시에 나타났다. 먼 곳에는 도시의 불빛이 있었고, 가까운 곳에는 풀잎이 있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만 불지 않았고, 소리도 너무 많았다.

새 소리.

사람 소리.

수레바퀴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이름을 모를 수많은 생명들이 내는 작은 소리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천천히 걸었다.

상자 속 양.

작은 유리 덮개.

빈 이름표에 적어 지도 여백에 붙였던 이름.

장미.

그녀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가시가 얇고, 말이 많고,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던 꽃.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그 앞에는 장미 정원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도 아니었다.

언덕 아래로 수많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붉은 장미.

분홍 장미.

흰 장미.

아직 덜 핀 장미.

이미 활짝 핀 장미.

바람에 흔들리는 장미들.

햇빛 아래에서 아무렇지 않게 반짝이는 장미들.

요안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대 뒤편에서 푸리나도 숨을 삼켰다.

장미 정원은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은, 요안나에게는 조금 잔인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하나뿐이 아니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장미들은 그저 피어 있었다.

자기 별의 장미처럼 까다로운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가시로 호랑이를 막겠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많았다.

너무 많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더 꼭 끌어안았다.

“내 장미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정원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모두 아름다웠다.

그 사실이 요안나를 더 아프게 했다.

만약 자기 별의 장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지 않다면.

만약 비슷한 꽃이 이렇게 많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두고 온 장미는 무엇이었을까.

자기가 매일 물을 주고, 덮개를 씌우려 했고, 투덜거림을 듣다가 도망치듯 떠나온 그 꽃은.

그저 장미들 중 하나였을까.

요안나는 풀밭에 앉았다.

기록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 속 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미하일라가 그려준 유리 덮개가 있었다.

요안나는 손끝으로 그 덮개를 문질렀다.

“그럼 내가 돌아가야 할 이유는 뭐지.”

그 말은 장미들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다.

장미 정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풀숲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바스락.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풀숲 사이에서 레플리카가 나타났다.

오늘의 레플리카는 여우였다.

정확히는 여우 가면을 쓴 사람은 아니었다. 검은빛과 어두운 붉은빛이 섞인 짧은 망토, 가볍게 묶은 머리, 그리고 작은 귀 모양 장식이 달린 후드.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우처럼 조심스럽고, 동시에 이상할 만큼 곧았다.

그녀는 정원 가장자리에서 멈추었다.

요안나는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레플리카는 조금 딱딱하게 대답했다.

“여우다.”

그 말투는 너무 진지해서,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요안나도 잠깐 눈을 깜박였다.

“정말 여우예요?”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렇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레플리카가 여우라고 진지하게 말했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정도로 진지하면 여우도 맞다고 해줘야지.”

레플리카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장미 정원을 보았다.

“울고 있었나?”

요안나는 얼른 눈가를 닦았다.

“안 울었어요.”

레플리카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울기 직전이었군.”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요안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지 않는 거리.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는 거리.

요안나는 그게 이상했다.

“왜 거기에 앉아요?”

“아직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길들여져요?”

요안나는 그 말을 따라 했다.

“그게 뭐예요?”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냥 익숙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어떻게 달라요?”

“서로의 아픔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배우는 일이다.”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어디를 밟으면 아픈지 모른다.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도 모른다. 언제 가까이 가야 하는지,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길들인다는 건, 그런 것을 배우는 일이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그럼 장미도 길들일 수 있어요?”

“아마도.”

“하지만 장미는 사람이 아닌데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니어도, 기다리는 것은 있다.”

그 말에 요안나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던 장미.

밤에 덮개를 씌워달라고 하던 장미.

가라고 말하면서, 울음을 들키기 싫다고 하던 장미.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장미를 길들였던 걸까요?”

레플리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매일 물을 주었나?”

“네.”

“바람이 불면 덮개를 씌우려 했나?”

“네.”

“투덜거림을 들었나?”

“조금은요.”

“귀찮았나?”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작은 했겠지.”

“시작?”

“길들임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이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의 수많은 꽃들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장미가 이렇게 많아요.”

“그렇다.”

“내 장미는 하나뿐이 아니었어요.”

레플리카는 장미들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곳의 장미들은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

요안나는 숨을 멈췄다.

레플리카는 계속 말했다.

“너도 이 장미들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 유리 덮개를 씌우지도 않았고, 바람이 차가운지 묻지도 않았다. 이 장미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강한 척하는지, 나비를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레플리카의 목소리는 딱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갈 길이 없었다.

“그러니 이 장미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네 장미는 아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럼 내 장미는…… 특별한가요?”

레플리카는 요안나를 보았다.

“네가 시간을 썼다면.”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다.

“특별하다는 건,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세상에 비슷한 것이 많아도, 네가 시간을 준 것은 달라진다.”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통도 그렇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많다. 하지만 네가 옆에 앉아준 아픔은, 그저 많은 아픔 중 하나로만 남지 않는다.”

요안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그녀의 말은 이상했다.

차분하고, 조금 무겁고,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럼 길들인다는 건 책임지는 거예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요안나는 조금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무서운 말이네요.”

“맞다.”

레플리카는 바로 인정했다.

“책임은 가볍지 않다. 하지만 책임이 있다는 건, 네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장미가 바람에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움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중 어느 장미도 요안나가 늦게 일어나면 투덜거리지 않았다.

어느 장미도 요안나가 덮개를 씌워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어느 장미도 요안나에게 “가도 좋아요”라고 말하며 꽃잎을 떨지 않았다.

요안나는 눈을 감았다.

자기 별의 장미가 떠올랐다.

가시가 얇은 장미.

자존심이 강한 장미.

울지 않는다고 말했던 장미.

“나는 그 장미를 두고 왔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런데 돌아가기가 무서워요.”

“왜?”

요안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요.”

레플리카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꼭 쥐었다.

“떠날 때는 몰랐어요. 그냥 장미가 나를 귀찮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다른 말을 하고, 강한 척하고, 필요 없다고 하면서 필요해 보이고…….”

“그랬군.”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아요.”

요안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장미가 나를 기다렸을지도 몰라요.”

레플리카는 말없이 기다렸다.

요안나는 그 침묵 덕분에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럼 나는 나쁜 사람인가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잘못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잘못을 알게 된 사람이 전부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레플리카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돌아가려는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레플리카는 풀밭 위에 손을 올렸다.

“내일 다시 오겠나?”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일요?”

“그래. 같은 시간에.”

“왜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기다림이 너무 아프지 않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하루 종일 놀라야 한다. 네가 같은 시간에 오면, 나는 그 시간 전부터 조금씩 기뻐할 수 있다.”

요안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게 길들임이에요?”

“그 일부다.”

“기다리게 만드는 건 나쁜 거 아니에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프다. 하지만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요안나를 보았다.

“기다림이 있다는 건, 누군가 온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요안나는 벨라의 등불을 떠올렸다.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졌다.

돌아올 사람을 위해 불을 켜던 작은 별.

“그럼 내 장미도…… 기다렸을까요?”

레플리카는 답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돌아가서 물어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면 화낼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울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나를 못 본 척할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그럼 너무 아플 것 같아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플 것이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아니었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그래도 네가 물을 주었다면, 돌아가야 한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빈 이름표에 적은 장미.

이제 그것들은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할 곳.

하지만 아직 가기에는 두려운 곳.

요안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잘 알아요?”

레플리카는 잠시 조용했다.

그녀는 자기 검은 망토 끝을 만졌다.

“나는 아픈 것을 배웠다.”

그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이 있었다.

요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장미들에게 가서 말해라.”

“무슨 말을요?”

“너희는 아름답지만, 내 장미는 아니라고.”

요안나는 당황했다.

“그렇게 말하면 장미들이 상처받지 않을까요?”

레플리카는 조금 생각했다.

“아마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는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조금 슬프네요.”

“그래.”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네가 시간을 준 것을 더 조심해야 한다.”

요안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장미 정원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사실은 바라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안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아름다워요.”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하지만 당신들은 제 장미가 아니에요.”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름다운 것이 덜 아름다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장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요안나는 다시 레플리카 쪽으로 돌아왔다.

“말했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런데 아직도 무서워요.”

“무서워도 된다.”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충분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올게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조금 전부터 기다리겠다.”


---

다음 날이 왔다.

물론 무대 위의 다음 날이었다.

조명이 한 번 어두워졌다가 밝아졌고, 장미 정원 위로 아침빛이 내려왔다.

요안나는 같은 시간에 왔다.

레플리카는 풀숲 옆에 앉아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가까운 곳이었다.

“왔군.”

“네.”

“늦지 않았다.”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레플리카는 풀잎을 만졌다.

조금 뒤에 요안나가 말했다.

“오늘은 장미가 덜 아파 보여요.”

“이곳의 장미들?”

“아니요. 제 장미요.”

“여기 없는데도?”

요안나는 기록판을 보았다.

“조금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어떤 것은 멀리서야 보인다.”

“하지만 너무 멀면 잊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도 왔다.

그다음 날도.

매번 레플리카는 조금씩 가까운 곳에 앉았다.

요안나는 처음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다음에는 조금 덜 했다.

어느 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레플리카는 말했다.

“오늘은 조용하군.”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서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것도 길들임이다.”

그 말에 요안나는 가만히 웃었다.


---

그리고 마지막 날이 왔다.

레플리카는 그날, 평소보다 조금 늦게 말을 꺼냈다.

“이제 가야겠군.”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은 네가 계속 하늘을 보고 있다.”

요안나는 작은 별이 있을 법한 하늘을 보았다.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자기 별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별인지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다.”

“그런데도 돌아가야 하나요?”

“네 장미는 어느 별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당신은 외롭지 않을까요?”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외로울 것이다.”

요안나는 마음이 아파졌다.

“그럼 제가 길들이지 않는 게 나았을까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면 아프잖아요.”

“그렇다.”

“그런데 왜요?”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밀밭이 생기니까.”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밀밭이요?”

레플리카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금빛 들판을 가리켰다.

장미 정원 너머에, 어느새 작은 밀밭이 생겨 있었다. 푸리나의 무대 장치인지, 레플리카의 말에 맞춰 피어난 풍경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빵을 먹지 않는다. 밀밭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하지만 네 머리카락은 별빛이 섞인 금빛이다. 네가 떠나면, 밀밭을 볼 때 네가 생각나겠지.”

요안나는 금빛 밀밭을 보았다.

“그럼 밀밭이 슬퍼져요?”

“아니.”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따뜻해진다. 그리고 조금 아파진다. 둘 다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별은 이상해요.”

“그렇다.”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둘 다다.”

레플리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길들였다는 증거는, 헤어질 때 아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 때문에, 이전에는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이 빛나기도 한다.”

요안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작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원망하지 않아요?”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은 할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했다.

“하지만 원망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왜요?”

“네가 같은 시간에 왔으니까.”

요안나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레플리카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난처해했다.

“울어도 된다.”

“안 울어요.”

“울기 직전이군.”

요안나는 결국 조금 웃었다.

레플리카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요안나에게 말했다.

“비밀을 하나 주겠다.”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비밀이요?”

“그래.”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과 밀밭, 그리고 멀리 보이지 않는 작은 별을 차례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요안나는 조용히 들었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요안나의 기록판을 가리켰다.

“네가 시간을 쓴 것. 네가 물을 준 것. 네가 기다리게 한 것. 네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무겁게 만든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었다.

유리 덮개는 그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필요했다.

장미는 여기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선명했다.

“제가 책임져야 하는 거죠.”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아주 천천히 따라 했다.

“내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

그 말은 무거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요안나는 그 무게 때문에 조금 덜 흔들렸다.

무게가 있다는 것은, 붙잡을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플리카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가라.”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못 가요.”

“왜?”

“돌아가는 길을 몰라요.”

그 말에 레플리카는 하늘을 보았다.

지구의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모래빛 길 하나가 생겼다.

사막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을 알려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누가요?”

레플리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뱀.”

요안나는 조금 겁먹었다.

“뱀이요?”

“무서운 이름이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든 무서운 것이 너를 해치러 오는 것은 아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만 혼자 가려고 하지 마라. 어떤 문턱은, 곁에 서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요안나는 레플리카에게 다가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다.

“안아도 돼요?”

레플리카는 굳었다.

무대 위가 잠깐 조용해졌다.

레플리카는 고통교의 전사이고, 흑진과 흑완의 소유자이며, 전장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포옹 요청 앞에서는, 잠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조심해서.”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안았다.

짧은 포옹이었다.

레플리카의 손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가, 아주 어색하게 요안나의 등을 토닥였다.

“무리하지 마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곧 조금 당황한 듯 덧붙였다.

“아니, 이 말은 너무 자주 하는군.”

요안나가 품 안에서 작게 웃었다.

레플리카는 다시 말했다.

“돌아가거라. 네가 가야 할 곳이 있다.”

그 말은 조금 단단했고, 조금 따뜻했다.

요안나는 물러섰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고마워요.”

“기억해라.”

“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같은 시간에 돌아가라.”

“왜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장미도 기다릴 수 있게.”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막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걸었다.

장미 정원은 뒤에 남았다.

수많은 장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요안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미가 많다고 해서, 자기 장미에게 물을 주었던 시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밀밭이 금빛으로 흔들렸다.

레플리카는 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이제 밀밭은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 아니었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작은 방문자는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그래서, 자기 장미가 왜 자기 장미인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사막의 뱀과 침묵의 식탁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었다.

— 돌아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문턱 —

요안나는 사막길 앞에서 멈추었다.

멀리, 모래 위에 검은 숄을 두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은 식탁보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3막 — 사막의 뱀과 침묵의 식탁

— 돌아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문턱 —

사막은 다시 조용했다.

하지만 처음의 사막과는 달랐다.

처음의 사막은 넓고, 낯설고,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 곳이었다.
지금의 사막은 어쩐지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곳처럼 보였다.

모래빛 천 위로 낮은 바람이 흘렀다.
무대 위의 별들은 멀어졌고, 장미 정원의 붉은빛도 사라졌다. 대신 모래 위에 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요안나는 그 길 끝에 서 있었다.

손에는 기록판이 있었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그리고 알토가 준 이름표에는 이제 작게 쓴 글자가 남아 있었다.

장미.

요안나는 그 글자를 보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별은 너무 많았다.

자기 별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그 말에 대답하듯, 모래 위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누군가 걸어왔다.

검은 숄을 두른 여인이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오늘의 그녀는 뱀이었다.

그러나 뱀의 가면도, 비늘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검은 실처럼 낮은 침묵을 끌고 왔다. 숄 끝이 모래 위를 스쳤고, 그녀의 발걸음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요안나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모래 위에 작은 식탁보를 펼쳤다.

물 한 잔.

빵 한 조각.

빈 접시 하나.

그것뿐이었다.

요안나는 그것을 한참 보다가 물었다.

“당신이…… 뱀이에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렇단다.”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흘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뱀이 식탁보를 깔았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뱀은 물기 전에 식사부터 챙겨줄 것 같은데.”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문턱 앞에서는 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네.”

요안나는 식탁보와 아레를 번갈아 보았다.

“뱀은 원래 이렇게 하나요?”

“아니.”

아레는 물잔을 요안나 쪽으로 조금 밀었다.

“나는 전장 뒤에 식탁을 놓는 쪽이란다.”

요안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식탁보 위의 물잔을 보니, 아주 조금 목이 말라졌다.

아레는 앉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식탁보 옆에 무릎을 낮추고 앉았다.
요안나가 앉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이.
앉고 싶어지면, 자리가 있다는 듯이.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식탁보 앞에 앉았다.

“이 물을 마시면 돌아가게 되나요?”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목이 덜 마른다.”

이번에는 객석에서 조금 더 선명한 웃음이 났다.

요안나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러고 나서 물잔을 들었다.

물은 차갑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목을 지나갈 만큼의 물이었다.

요안나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아레가 물었다.

“무서우냐.”

요안나는 손에 든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네.”

“좋다.”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아직 붙잡은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레는 빵을 건드리지 않았다.

빈 접시도 그대로 두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요안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

멀리서 미하일라가 걸어왔다.

부러진 청동 매 옆에 남아 있던 황제.

그녀는 사막길 위의 검은 숄과 식탁보, 그리고 요안나 앞의 물잔을 보았다.

미하일라의 눈빛이 낮아졌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러 왔지.”

“혼자 보내지 않으러 왔다.”

미하일라의 손이 허리 쪽으로 갔다.

오늘 그곳에는 활이 없었다.

아레는 그 손을 보았다.

“황제여.”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 문은 쏘는 곳이 아니다.”

미하일라는 아레를 바라보았다.

“그럼 무엇으로 지키지.”

아레는 식탁보 위의 빈 접시를 보았다.

“침묵으로.”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기다림으로.”

사막이 더 조용해졌다.

요안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숨을 삼켰다.

미하일라는 아레의 식탁보 앞에 서 있었다.
아레는 자리를 내어주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

전장의 지휘관이, 후퇴로의 끝에 서 있듯이.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요안나는 돌아가야 한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그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어서 하는 일은 적다.”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아레는 담담히 말했다.

“보내는 일도 그렇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에는 전장의 침묵과 다른 무게가 있었다.

명령하면 움직이는 병사들.
쏘면 쓰러지는 적들.
막으면 지킬 수 있는 문들.

하지만 이 문턱은 달랐다.

아레는 짧게 말했다.

“지키는 것과 붙드는 것은 다르다.”

미하일라는 물잔을 보았다.

아레가 미하일라 쪽으로도 물잔 하나를 밀었다.

“짐에게도 주는가.”

“목마르면 마시십시오.”

“짐은 목마르지 않다.”

아레는 물잔을 거두지 않았다.

“그럼 두겠습니다.”

미하일라는 한참 동안 물잔을 보았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들었다.

마시지는 않았다.

다만 손에 쥐었다.


---

요안나는 두 사람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아요.”

아레가 요안나를 보았다.

“그래.”

“그런데 돌아가기가 싫어요.”

“그래.”

“장미가 화낼지도 몰라요.”

“그럴 것이다.”

“못 본 척할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늦었다고 할 거예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그 말은 들어야 한다.”

요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다음엔요?”

아레는 짧게 말했다.

“물을 주거라.”

요안나는 기록판을 꼭 안았다.

“그걸로 충분해요?”

“충분하지 않다.”

아레는 담담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 명령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차갑지는 않았다.

아레는 요안나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늦었다는 말을 듣는다.

물을 준다.

덮개를 씌운다.

다음날 다시 간다.

요안나는 작게 물었다.

“사과하면 되나요?”

아레는 빈 접시를 보았다.

“사과만으로는 빈 접시가 차지 않는다.”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한다.”

“그다음은요?”

“앉아라.”

“어디에요?”

“네가 비워둔 자리 앞에.”

사막 바람이 지나갔다.

그 말은 요안나에게 아주 무겁게 내려앉았다.


---

미하일라가 입을 열었다.

“아레.”

아레는 고개를 들었다.

“황제여.”

“그 아이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럼 남는다.”

“그걸 허락한다는 뜻인가.”

아레는 미하일라를 바라보았다.

“억지로 간 아이는 돌아간 것이 아니다.”

미하일라는 물잔을 손에 쥔 채 침묵했다.

아레는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남으면, 남겨둔 꽃은 바람을 맞는다.”

요안나는 눈을 감았다.

작은 별이 떠올랐다.

화산 세 개.
바오밥나무 싹.
해 지는 자리.
그리고 장미.

유리 덮개 옆에 서 있던 장미.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꽃잎을 떨던 장미.

“장미가 혼자 있겠죠.”

요안나가 말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늦었죠.”

“그래.”

“그럼…… 가야겠죠.”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요안나를 보았다.

작고, 왕관은 없지만 왕관의 무게를 아는 아이.

평화를 말하지만, 아직 한 송이 꽃 앞에서 떨고 있는 아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네가 말해야 한다.”

요안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가고 싶어요.”

미하일라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요안나.”

“네.”

“무섭나.”

“네.”

“그래도 가나.”

요안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하일라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명령은 짧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마침내 미하일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가라.”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도망치듯 가지 마라. 네가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가라.”

“네.”

미하일라는 물잔을 아주 조금 마셨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장미가 화를 내면, 들어라.”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폐하도 그렇게 하세요?”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흘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입을 가렸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질문은 꽤 정확했네.”

미하일라는 마침내 말했다.

“짐도 배워야 할 일이 있다.”

그 말은 작았다.

하지만 요안나는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은, 등불 같았다.

벨라의 작은 별에서 보았던,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지는 불빛처럼.


---

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식탁보를 접지 않았다.

물잔도, 빵도, 빈 접시도 그대로 두었다.

요안나는 물었다.

“왜 치우지 않아요?”

“아직 문턱이다.”

“누가 더 앉아요?”

아레는 사막의 먼 곳을 보았다.

“떠나는 자. 남는 자. 늦게 따라오는 자.”

잠시 침묵.

“말을 잃은 자.”

요안나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식탁보가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이 조금 안심되었다.

아레는 검은 숄 끝을 손에 감았다.

그러자 숄에서 가느다란 검은 리본 하나가 풀려나왔다.

리본은 모래 위로 길게 뻗었다.

뱀처럼.

하지만 꿈틀대지는 않았다.

그것은 선이었다.

여기와 저기.

남음과 돌아감.

침묵과 말.

그 사이에 놓인 검은 선.

아레가 말했다.

“넘어라.”

요안나는 리본을 보았다.

“넘으면 아파요?”

“아프다.”

“그럼 싫어요.”

“그래도 된다.”

요안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안 넘으면요?”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작은 별의 바람 소리를 데려왔다.

장미가 혼자 서 있는 소리.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장미가 기다리고 있겠죠.”

“그래.”

“화났겠죠.”

“그래.”

“울었을까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돌아가서 물어라.”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본 앞에 섰다.

발끝이 멈췄다.

아레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곁에 섰다.

말없이.

흔들림 없이.

요안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레는 밀어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

끌고 가러 온 것도 아니었다.

넘는 것은 요안나의 일이었다.

다만, 혼자 넘지 않게 서 있었다.

요안나는 발을 들었다.

그리고 검은 리본을 넘었다.


---

사막의 조명이 꺼졌다.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작은 별 하나만 남았다.

요안나의 몸은 무대 위에 그대로 있었지만, 이상하게 가벼워 보였다. 마치 모래 위에 놓인 옷처럼. 또는, 잠시 벗어둔 그림자처럼.

객석에서 숨소리가 낮아졌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손을 꼭 쥐었다.

아레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숨을 쉬어라.”

요안나의 목소리가 멀리서 대답했다.

“이상해요.”

“그래.”

“아파요.”

“그래.”

“무서워요.”

“그래.”

“그래도…… 가야 해요.”

아레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제 아레가 해줄 필요가 없었다.

작은 별이 조금 더 밝아졌다.

요안나는 그 빛을 향해 걸었다.

모래는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작은 별의 표면이 나타났다.

화산 세 개.

바오밥나무 싹.

그리고 장미가 있던 자리.

요안나는 걸음을 멈췄다.

장미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꼿꼿하게.

꽃잎을 조금 접은 채.

울지 않는다고 말할 준비가 된 것처럼.

요안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더 다가갔다.

장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네요.”

그 한마디에, 요안나는 거의 울 뻔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기록판을 내려놓았다.

물뿌리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미안해.”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이어 말했다.

“바람이 불었지.”

장미의 꽃잎이 아주 조금 떨렸다.

“별일은 아니었어요.”

“그래.”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들었다.

“그래도 오늘 밤에는 씌워줄게.”

장미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너무 늦게 씌우면, 꽃잎에 닿아요.”

요안나는 눈물을 삼키며 웃었다.

“응. 조심할게.”

장미는 다시 말했다.

“물은 너무 많이 주지 마세요.”

“응.”

“그리고…….”

요안나는 기다렸다.

장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침 인사는 내일 제때 해주세요.”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올게.”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꽃잎이 조금 열렸다.

아주 조금.

그 정도면 충분했다.


---

사막으로 돌아오자, 미하일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식탁보도 그대로였다.

물잔은 반쯤 비어 있었고, 빵 한 조각은 손대지 않았다.

아레는 검은 리본을 거두고 있었다.

요안나는 모래 위에 다시 섰다.

미하일라가 물었다.

“다녀왔나.”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엇을 했지.”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물을 줬어요.”

미하일라는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안도인지, 웃음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렇군.”

요안나는 조금 뒤에 말했다.

“그리고 내일도 가기로 했어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아레는 식탁보를 접기 시작했다.

요안나가 물었다.

“이제 치워도 돼요?”

“문턱을 넘었으니.”

“다시는 필요 없나요?”

아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은 여러 번 문턱에 선단다.”

그녀는 식탁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때마다 물과 빵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할게요.”

아레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푸리나의 목소리가 무대 위로 조용히 내려왔다.

“작은 방문자는 사막의 뱀을 만났습니다.”

그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뱀은 문턱을 열었고, 황제는 기다렸고, 아이는 돌아갔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장미는, 여전히 장미였습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별빛과 남겨진 사람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었다.

— 밤하늘을 보고 웃는 법 —

요안나는 하늘을 보았다.

별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이제 그중 하나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4막 — 별빛과 남겨진 사람

— 밤하늘을 보고 웃는 법 —

사막의 밤은 깊었다.

요안나가 검은 리본을 넘어 작은 별에 다녀온 뒤, 무대는 한동안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래빛 천은 가만히 놓여 있었다.
별들은 높이 걸려 있었다.
접혔던 식탁보는 아레의 품 안으로 사라졌고, 물잔 자국만 모래 위에 희미하게 남았다.

요안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별은 여전히 많았다.

너무 많아서, 자기 별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정확히 어느 별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어딘가에 장미가 있었고, 그 장미는 방금 물을 받았다.
그리고 내일 같은 시간에 누군가 오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밤하늘 전체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요안나는 낮게 말했다.

“별이…… 조금 시끄러워졌어요.”

미하일라는 그녀 옆에 섰다.

“별이 말하나.”

“아니요.”

요안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조용하지만은 않아요.”

미하일라는 하늘을 보았다.

그녀에게 별은 원래 항로와 징조와 사격의 거리와 시간을 읽는 것이었다.
천문반 위에 놓이면 별은 길이 되었고, 전장 위에 놓이면 별은 명령의 시각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요안나가 보는 별은 달랐다.

어딘가에서 투덜거리는 장미.

늦었다고 말하는 목소리.

내일 아침 인사를 기다리는 작은 꽃.

그것이 별을 바꾸고 있었다.

미하일라는 물었다.

“장미는 괜찮았나.”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화났어요.”

“그렇군.”

“늦었다고 했어요.”

“그럴 만하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올려다보았다.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말했다.

“기다린 자는 늦었다 말할 권리가 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들어야겠네요.”

“그래.”

“도망치면 안 되겠네요.”

“그래.”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장미의 이름.

그것들은 이제 그림이라기보다 약속처럼 보였다.

“폐하.”

“말하라.”

“장미가 내일도 화내면요?”

“들어라.”

“모레도요?”

“들어라.”

“계속 화내면요?”

미하일라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물을 주면서 들어라.”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폐하, 아레 님이랑 조금 비슷하게 말했어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돌렸다.

아레는 이미 무대 가장자리의 어둠 속으로 물러나 있었다. 검은 숄만 희미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나쁘지 않다.”

요안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웃었다.

사막의 밤은 차가웠다.

하지만 방금 그 웃음 때문에, 공기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

부러진 청동 매는 여전히 모래 위에 있었다.

미하일라는 다시 그 곁으로 걸어갔다.

요안나는 따라갔다.

처음 만났을 때, 미하일라는 청동 매의 우측 날개와 어긋난 천문반, 상실된 귀환 방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때 요안나는 양을 그려달라고 했다.

이제 기록판의 뒷면에는 상자 속 양과 유리 덮개가 있었다.
앞면에는 아직 항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처음의 항로가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의 날개를 살폈다.

“은실이 끊겼다.”

요안나는 옆에 앉았다.

“고칠 수 있어요?”

“고쳐야 한다.”

“고칠 수 있냐고 물었는데요.”

미하일라는 잠시 멈췄다.

“고칠 수 있다.”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웃는군.”

“네.”

“이유는?”

요안나는 하늘을 보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모르는 채로 웃는가.”

“네.”

미하일라는 더 묻지 않았다.

청동 매의 날개를 받치고, 끊어진 은실을 다시 매기 시작했다.

요안나는 한참 그 손길을 보았다.

황제의 손.

활을 잡고, 칙령을 쥐고, 국가의 문을 닫거나 여는 손.

그 손이 지금은 아주 작은 은실을 다시 꿰고 있었다.

요안나가 말했다.

“폐하도 매일 하는 일이 있어요?”

“있다.”

“등불 켜는 것 같은 일?”

미하일라는 은실을 묶었다.

“그보다 덜 아름다운 일이 많다.”

“예를 들면요?”

“보고서. 재정. 병력 배치. 반역 가능성 검토. 부상병 명부. 장례 비용.”

요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라는 담담했다.

“왕국의 등불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 가까이서 보면 기름 냄새가 난다.”

요안나는 벨라의 별을 떠올렸다.

등불을 켜고 끄던 손.

망토 끝으로 차가운 별바닥을 덮어주던 손.

“그래도 켜야 하죠?”

“그래.”

미하일라는 은실을 당겨 묶었다.

“꺼지면 길을 잃는 자가 생긴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의 장미도 있어요?”

미하일라의 손이 멈췄다.

극장이 조용해졌다.

요안나는 자신이 너무 많이 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미하일라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사과할 필요 없다.”

그녀는 청동 매의 날개를 내려놓았다.

“있다.”

요안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미하일라는 하늘을 보았다.

“너와 같은 꽃은 아니다.”

“그래도 장미예요?”

“아마도.”

미하일라는 낮게 말했다.

“어떤 것은 나라라고 부르고, 어떤 것은 시민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은 죽은 자의 이름이고, 어떤 것은 살아남은 자의 식탁이다.”

요안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전부 물을 줘야 해요?”

“전부 줄 수는 없다.”

“그럼요?”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를 다시 보았다.

“황제는 모든 장미 앞에 서지 못한다. 그러나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들어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컸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장미 한 송이와도 닿아 있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저는 하나도 어려웠어요.”

미하일라는 말했다.

“하나를 어려워할 줄 아는 것은 나쁘지 않다.”

“왜요?”

“하나를 쉽게 여기는 자가, 모두를 말하면 위험하다.”

그 말에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작은 별.

장미 한 송이.

그 장미 하나를 귀찮아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두고 온 자신.

그런 자신이 “모두”를 말할 수 있을까.

요안나는 물었다.

“그럼 저는 평화를 말하면 안 되나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대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은 벌이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천천히 말했다.

“말해야 한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그래.”

“하지만 저는 장미 하나도 두고 왔어요.”

“그래서 더 배워야 한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의 천문반을 다시 끼웠다.

“말하지 못하는 자는 길을 열 수 없다. 그러나 말만 하는 자는 길을 지키지 못한다.”

요안나는 그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말하고…… 지켜야 해요.”

“그래.”

“그리고 물을 줘야 해요.”

미하일라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

청동 매는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았다.

아직 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부러진 날개는 임시로 고정되었고, 천문반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별빛이 천문반 위에 닿자, 작은 금속판에 방향 하나가 떠올랐다.

요안나는 그것을 보았다.

“귀환 방위예요?”

“그렇다.”

“어디로 가요?”

미하일라는 천문반을 보았다.

“사막 밖으로.”

“그럼 제 별은요?”

“네 별은 네가 찾아야 한다.”

요안나는 살짝 실망한 듯했다.

미하일라는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이제 찾을 방법은 알겠지.”

요안나는 하늘을 보았다.

“별을 보고 웃는 거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요안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는 웃을 수 있어요?”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객석에서 아주 낮은 긴장이 흘렀다.

그 질문은 장난 같았지만, 요안나에게는 진심이었다.

미하일라는 하늘을 보았다.

많은 별.

그중 어디에선가 장미가 투덜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은 이상했다.

전장의 별은 웃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국의 별은 계산을 요구한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별은, 밤하늘을 보고 웃어달라고 요구한다.

미하일라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쉽지 않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너도?”

“네. 별이 너무 많아서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어느 별인지 몰라요. 그런데도 웃으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잖아요.”

“그렇군.”

“하지만 레플리카 님이 그랬어요. 밀밭이 생긴다고.”

“밀밭?”

“의미 없던 게, 누군가 때문에 의미가 생기는 거요.”

미하일라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사막 한쪽에, 2막에서 보았던 금빛 밀밭이 아주 희미하게 나타났다. 환상처럼. 아니면 기억처럼.

요안나는 말했다.

“폐하에게도 그런 게 있나요?”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청동 매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 매의 눈에 작은 별빛이 들어갔다.

“있다.”

그 한마디뿐이었다.

요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

어떤 대답은 더 묻지 않아야 남는다는 것을.


---

그때 사막의 한쪽에서 푸리나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연출자의 자리에서 무대 안쪽으로 아주 조금 들어온 것뿐이었다.

그녀는 손에 작은 종이 별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 분, 밤하늘이 너무 진지해져서 잠깐만.”

요안나가 눈을 깜박였다.

미하일라는 푸리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푸리나는 종이 별을 들어 보였다.

“원래 이 장면은 감동적으로 밤하늘을 보는 장면인데, 극장 담당자가 별 하나를 거꾸로 걸었어.”

요안나가 하늘을 보았다.

정말로 별 하나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별 모양이라 위아래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푸리나는 매우 진지했다.

“저건 작은 별 예법에 어긋나.”

죠니가 객석에서 말했다.

“별에 예법도 있어?”

푸리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 극장에는 있어.”

미하일라는 잠시 그 별을 보았다.

“수정하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승인 받았다!”

무대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별을 바로 걸었다.

그 순간 별빛이 살짝 흔들렸다.

요안나는 그걸 보다가 웃었다.

처음에는 작게.

그리고 조금 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왜 웃지.”

요안나는 입을 가렸다.

“별이 거꾸로 걸려 있었대요.”

“그것이 웃긴가.”

“조금요.”

푸리나는 작게 속삭였다.

“좋아. 웃었다.”

죠니가 말했다.

“이번 극에서 제일 중요한 장치가 거꾸로 걸린 별이 될 줄은 몰랐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바로잡혔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잡는 것도 극의 일부야.”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더 웃었다.

하늘을 보고 웃는 것이 꼭 커다란 깨달음일 필요는 없다는 듯이.

때로는 별 하나가 거꾸로 걸려 있어도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 장미가 아주 조금 섞일 수 있었다.


---

밤이 깊어졌다.

청동 매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날개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지만, 짧은 거리라면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하일라는 천문반을 닫았다.

“돌아갈 수 있다.”

요안나는 물었다.

“사막 밖으로요?”

“그래.”

“그럼 저는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너는 이미 돌아갈 길을 배웠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내일 같은 시간에 가면 되겠죠.”

“그래.”

“모레도요.”

“그래.”

“장미가 또 투덜거려도요.”

“그래.”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폐하도 같이 가줄 수 있어요?”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서둘러 말했다.

“아니, 꼭 제 별까지 말고요. 그냥…… 가끔은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은 극 속의 말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극 속의 말만은 아니었다.

궁정에서, 회의장에서, 평화와 전쟁의 이름 아래에서, 두 사람은 늘 각자의 자리에서 서 있었다.

요안나는 미하일라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 없었고,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단순히 보호할 수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사막은 조금 다른 말을 허락했다.

미하일라는 말했다.

“부르면 가겠다.”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그래.”

“바쁘면요?”

“그래도 들을 것이다.”

요안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항상 갈 수 있다”가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있었다.

“그럼 저도 부를게요.”

“필요할 때만 부르면 된다.”

요안나는 조금 생각했다.

“필요한지 아닌지 모를 때는요?”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그때도 불러라.”

요안나는 웃었다.

“그건 조금 의외예요.”

“짐도 배우고 있다.”

그 말에 푸리나가 무대 뒤에서 조용히 손뼉을 치려다 다시 멈췄다.

이번 극에서는 작은 박수도 너무 크게 들릴 때가 있었다.

대신 그녀는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

아레는 무대의 가장자리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검은 숄을 두른 채.

요안나는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아레 님.”

아레는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는 아이.”

“저 다녀왔어요.”

“보았다.”

“장미에게 물을 줬어요.”

“잘했다.”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요안나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따뜻해졌다.

“아레 님은 이제 가세요?”

“그렇다.”

“어디로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다른 침묵이 있는 곳.”

요안나는 그 대답이 조금 슬펐다.

“거기에도 식탁보를 가져가요?”

“그래.”

“물하고 빵도요?”

“가능하면.”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도 덜 무섭겠네요.”

아레는 아주 잠깐 요안나를 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구나.”

그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았다.

그러나 요안나는 들었다.

아레는 검은 숄을 정리했다.

“장미에게 늦지 마라.”

“네.”

“늦으면.”

“늦으면?”

“늦었다고 말해라.”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을 줄게요.”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시작이다.”

그녀는 뒤돌아 걸어갔다.

검은 숄은 사막의 어둠과 섞였다.

식탁보는 보이지 않았지만, 요안나는 이제 그것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았다.

문턱마다.

침묵마다.

사람이 돌아가기 전에 목이 마를지도 모르는 자리마다.


---

미하일라는 청동 매를 들어 올렸다.

매의 날개가 작게 펼쳐졌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다.

임시로 묶은 은실이 보였고, 한쪽 날개는 여전히 조금 비뚤었다.

그러나 날 수 있었다.

푸리나가 무대 앞으로 나왔다.

“청동 매는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관객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완전히 고쳐지지 않아도,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죠니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좋은 말인데, 여왕님이 말하니까 약간 막간 광고 같네.”

푸리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죠니.”

“응. 조용히 할게.”

푸리나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작은 방문자는 장미에게 다녀왔고, 사막의 어른은 밤하늘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여전히 종이였고, 장미는 여전히 무대 위의 꽃이었습니다.”

잠시 침묵.

“하지만 웃음이 한 번 생긴 뒤에는, 밤하늘도 완전히 이전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요안나는 하늘을 보았다.

거꾸로 걸렸던 별은 이제 바로 걸려 있었다.

그 별이 자기 별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별을 보자,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미하일라는 그 웃음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그녀도 별을 보며 웃은 것 같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웃음은 기록하지 않는 편이 더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후일담 — 물뿌리개와 거꾸로 걸린 별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붙었다.

— 같은 시간에 돌아간다는 것 —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청동 매는 날개를 펼쳤다.

사막의 밤은 여전히 넓었다.

하지만 이제, 그 넓음은 조금 덜 무서웠다.
후일담 — 물뿌리개와 거꾸로 걸린 별

— 같은 시간에 돌아간다는 것 —

공연이 끝난 뒤에도, 별들은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원래라면 막이 닫히고, 무대 담당들이 사막 천을 접고, 청동 매의 날개를 분리하고, 장미 정원의 꽃들을 하나씩 상자에 넣어야 했다. 그러나 푸리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앞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꾸로 걸렸던 별은 이제 바로 걸려 있었다.

그 별이 정말 요안나의 작은 별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실 무대 담당이 실수로 거꾸로 걸었던 종이 별 하나일 뿐이었다. 얇은 나무틀에 은색 가루를 바르고, 뒤쪽에 작은 실을 묶은 소품.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 별을 너무 빨리 내리면 안 될 것 같았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아직 치우지 말자.”

무대 담당들이 서로를 보았다.

죠니가 객석에서 물었다.

“여왕님, 그럼 퇴근은?”

푸리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죠니, 오늘은 별이 퇴근을 허락할 때까지야.”

“별이 노동법을 모를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대신 협상할 거야.”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

웃음은 아주 작았지만, 공연 중 마지막에 별을 보고 웃던 것과 같은 결이었다.

미하일라는 그 웃음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장미는 무대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다.

작은 별 세트는 절반쯤 내려가 있었고, 화산 세 개는 이미 소품 담당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바오밥나무 싹도 상자 안에 정리되었다.

하지만 장미만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요안나는 그 앞에 섰다.

꽃잎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신술의 빛이 걷혀, 장미는 다시 무대 장미에 가까워져 있었다. 가느다란 철사와 천으로 만든 꽃. 조명 없이는 조금 낡아 보이기까지 하는 소품.

그런데도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들었다.

푸리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요안나.”

“네?”

“그거 진짜 물 들어 있어.”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내려다보았다.

“알아요.”

“무대 장미라서 너무 많이 주면 곤란해.”

그 말에 요안나는 잠시 멈췄다.

공연 중 장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물은 너무 많이 주지 마세요.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조금만 줄게요.”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줄 거야?”

“네.”

“소품 담당이 울 수도 있는데.”

요안나는 장미를 보았다.

“그러면 닦을게요.”

푸리나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물러났다.

“응. 그러면 됐어.”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기울였다.

아주 조금.

물 한 방울이 장미의 뿌리 부분, 정확히는 무대 장미가 꽂혀 있는 작은 흙색 받침대 위로 떨어졌다.

톡.

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요안나에게는 크게 들렸다.

물을 너무 많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후일담은 시작된 셈이었다.


---

미하일라는 부러진 청동 매 곁에 있었다.

공연이 끝났으니, 이제 그 매는 다시 소품이었다. 날개를 고정하던 은실은 느슨해졌고, 천문반은 더 이상 별빛을 받아 움직이지 않았다. 소품 담당이 다가와 물었다.

“폐하,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미하일라는 청동 매를 보았다.

“기다려라.”

소품 담당은 즉시 물러났다.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소품도 황제 명령 받으면 좀 긴장하겠네.”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청동 매의 오른쪽 날개를 손끝으로 만졌다.

임시로 묶였던 은실.

공연 중에는 날 수 있을 만큼 고쳤지만, 자세히 보면 여전히 틀어져 있었다.

요안나가 다가왔다.

“아직 고장 났나요?”

“그렇다.”

“그래도 날았잖아요.”

“임시 조치였다.”

요안나는 날개를 보았다.

“그럼 다시 고쳐야겠네요.”

“그래.”

“완전히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가능하면.”

요안나는 그 대답을 듣고 조금 웃었다.

“완전히가 아니어도, 돌아갈 수는 있었어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 말은 청동 매에 대한 말이었고, 또 다른 것에 대한 말이기도 했다.

“그렇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말하라.”

“완전히 고쳐지지 않아도, 같이 있을 수 있나요?”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다가, 슬쩍 무대 뒤로 물러났다. 죠니도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를 내려다보았다.

“있을 수 있다.”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다만 틀어진 날개를 틀어지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네.”

“어디가 어긋났는지 알아야 한다.”

“네.”

“그리고 날 때마다 살펴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도요?”

“장미도.”

“사람도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사람은 더 그렇다.”

요안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넣었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그럼 저도 살펴볼게요.”

미하일라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그러겠다.”

그 말은 화해라고 부르기에는 작았다.

맹세라고 부르기에는 조용했다.

하지만 요안나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오늘은 충분했다.


---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 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리를 돕는 척하다가 장미 줄 하나가 서로 엉킨 것을 심각하게 풀고 있었다.

푸리나가 다가왔다.

“레플리카, 그건 그냥 소품이라서 적당히 상자에 넣어도 돼.”

레플리카는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엉킨 채로 넣으면 다음 공연 때 더 아프다.”

“소품이?”

“소품 담당이.”

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맞아.”

요안나가 다가오자, 레플리카는 장미 줄을 내려놓았다.

“왔군.”

“네.”

“같은 시간은 아니다.”

요안나는 살짝 당황했다.

“공연이 끝나서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유 확인.”

푸리나가 속삭였다.

“레플리카, 알토 말투가 섞였어.”

레플리카는 못 들은 척했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우 님.”

“오늘의 배역은 끝났다.”

“그래도요.”

레플리카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요안나는 손에 든 물뿌리개를 보았다.

“저, 내일도 장미한테 갈 수 있을까요?”

“갈 수 있다.”

“바쁘면요?”

“조금이라도 가라.”

“정말 조금만 가도 돼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는 항상 큰 장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물 한 방울이면 된다.”

요안나는 아까 장미에게 떨어뜨린 물 한 방울을 떠올렸다.

“그것도 약속이에요?”

“약속의 일부다.”

레플리카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다만 너무 자주 한 방울만 주지는 마라. 꽃도 속는다.”

요안나는 웃었다.

“네.”

레플리카는 다시 장미 줄을 정리했다.

“그리고 네가 못 가는 날이 있으면, 못 간다고 말해라.”

“장미에게요?”

“그래.”

“장미가 알아들을까요?”

“아마 자기 방식으로.”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할게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좋다.”

그 웃음은 여우 가면 없이도 여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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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토는 무대 한편에서 기록장을 들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는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푸리나가 다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뭐 적어?”

알토는 기록장을 살짝 기울였다.

“오늘 공연 기록입니다.”

“평가도 있어?”

“있습니다.”

“내 연출은?”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과감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칭찬이지?”

“대체로요.”

“대체로?”

알토는 정중하게 말했다.

“거꾸로 걸린 별은 사고였지만,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다만 다음부터는 의도한 사고인지 실제 사고인지 구분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푸리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연극에서는 사고도 연출이 될 수 있어!”

알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지만 예산에서는 사고가 사고로 기록됩니다.”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알토가 이겼네.”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요안나는 알토에게 다가갔다.

“제 장미도 기록했나요?”

알토는 기록장을 내려다보았다.

“네.”

“뭐라고요?”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그대로 읽어드릴까요?”

요안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토는 차분히 읽었다.

“작은 별의 장미. 아침 인사를 기다림. 바람을 무서워하지만, 가시가 있다고 주장함. 물은 많이 주면 안 됨. 늦은 방문자에게 ‘늦었네요’라고 말함.”

요안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너무 자세해요.”

“기록은 대개 자세할수록 도움이 됩니다.”

알토는 곧 부드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원하지 않으시면 일부는 닫아둘 수 있어요.”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닫아둬요?”

“모든 기록이 모두에게 공개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기록은, 당사자가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요안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늦었네요’는 닫아둘래요.”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기록장에 작게 표시했다.

“비공개 처리.”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장미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졌어.”

알토는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합니다.”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고마워요.”

알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돌아가도 됩니다. 잊지 않기만 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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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는 등불 세트를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가로등 옆에 서서 유리를 닦고 있었다.

공연은 끝났고, 더 이상 밤과 낮이 빠르게 바뀌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벨라는 등불 유리를 한 번 더 닦았다.

요안나는 다가가 물었다.

“아직도 닦으세요?”

벨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닦는단다.”

“왜요?”

“다음에 켤 때, 빛이 흐리지 않게 하려고.”

요안나는 등불을 보았다.

“다음 공연 때요?”

벨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녀는 손수건으로 유리를 닦았다.

“혹은 누군가 정말로 밤길을 걸을 때일 수도 있지.”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는 요안나의 망토가 조금 비뚤어진 것을 보았다.

“이리 오렴.”

요안나는 가까이 갔다.

벨라는 망토의 매듭을 조금 고쳐주었다.

그 손길은 왕의 명령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에 가까웠다.

“장미에게 다녀왔구나.”

“네.”

“무서웠니?”

요안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네.”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단다.”

“무서웠는데요?”

“무서워도 갔으니까.”

요안나는 벨라를 보았다.

벨라는 미소 지었다.

“용기는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란다. 무섭다고 말하고도, 등불을 들고 나가는 것이지.”

요안나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벨라는 등불을 요안나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네가 돌아가는 길에 이 불이 필요하면, 기억하렴.”

“등불을 가져가도 돼요?”

“이 등불은 여기 있어야 한단다.”

요안나는 조금 아쉬워했다.

벨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불 켜는 법은 가져갈 수 있지.”

요안나는 눈을 들었다.

“어떻게요?”

“밤이 오면, 모른 척하지 않는 것.”

벨라는 낮게 말했다.

“그리고 작아도 불을 켜는 것.”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한테도요?”

“그래. 장미에게도. 사람에게도. 너 자신에게도.”

요안나는 조금 놀랐다.

“저 자신에게도요?”

벨라는 요안나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가, 금방 떼었다.

“왕관 쓴 아이도 밤에는 불이 필요하단다.”

요안나는 이번엔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말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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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샤니크는 지도 세트를 접고 있었다.

그녀는 요안나가 붙였던 작은 이름표를 떼지 않았다.

지도 가장자리.

원래라면 여백으로 남았을 곳.

그곳에 아직 장미라는 작은 글자가 붙어 있었다.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이름표, 떼나요?”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원하십니까?”

요안나는 망설였다.

“아니요. 그런데 지도는 정리해야 하잖아요.”

슈샤니크는 이름표를 보았다.

“접어도 남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녀는 지도를 천천히 접었다.

장미 이름표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요안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데요.”

“그래서 접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요안나는 지도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접힌 지도의 한 모서리를 가리켰다.

“다음에 펼칠 때, 이름표가 찢어지지 않도록 접었습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슈샤니크는 요안나를 보았다.

“덧없는 것들은, 보관 방식이 나쁘면 쉽게 상합니다.”

그 말투는 여전히 차갑고 정중했다.

그러나 요안나는 이제 그 안에 담긴 것을 조금 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장미도요?”

“장미도.”

“지도도요?”

“지도도.”

“사람도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요안나는 오늘 그 말을 두 번째 들었다.

미하일라도 그렇게 말했다.

사람은 더 그렇다.

요안나는 그 말을 기억하기로 했다.

슈샤니크는 접은 지도를 요안나에게 잠시 보여주었다.

“이 지도는 나중에 다시 펼치겠습니다.”

“그때 장미도 다시 보여요?”

“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말했다.

“접혀 있는 동안에도, 장미는 여백에 남아 있을 겁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별의 방문자께서 돌아갈 곳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은 축복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을 잃지 말라는 아주 오래된 방식의 인사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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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얀카는 꽃의 별 세트를 정리하지 않았다.

흰 꽃잎들이 아직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요안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조금 긴장했다.

스토얀카는 여전히 아름답고, 조금 무서웠다.

“저…….”

스토얀카는 고개를 돌렸다.

“돌아갔느냐.”

“네.”

“꽃은 있었느냐.”

“네.”

“꺾이지 않았느냐.”

요안나는 잠시 장미를 떠올렸다.

꽃잎을 접은 채, 늦었다고 말하던 장미.

“네. 아직 있었어요.”

스토얀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피고 있구나.”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많이 화나 있었지만요.”

스토얀카는 가볍게 웃었다.

“화낼 힘이 있으면 아직 살아 있다.”

그 말은 거칠었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요안나는 흰 꽃잎 하나를 주웠다.

“당신의 꽃은 세상에게 보이기 위해 핀다고 했죠.”

“그렇다.”

“제 장미는…… 저에게 보이기 위해 피는 걸까요?”

스토얀카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 질문은 네가 꽃에게 물어야지.”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스토얀카는 손을 뻗어 요안나가 든 흰 꽃잎을 바로 펴주었다.

꽃잎의 결이 다시 살아났다.

“다만 기억해라. 작은 꽃이라고 해서 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네.”

“부드러운 꽃도, 자기 방식으로 선다.”

요안나는 장미의 얇은 가시를 떠올렸다.

호랑이를 막겠다던 말.

이제는 그 말이 조금 덜 우스웠다.

“알 것 같아요.”

스토얀카는 살짝 웃었다.

“아직은 모를 것이다.”

요안나가 당황하자, 스토얀카는 덧붙였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을 아는 얼굴이 되었구나. 그 정도면 다음 물을 줄 수 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스토얀카는 대답 대신 손을 내렸다.

흰 꽃잎들이 조용히 길을 열었다.


---

민다우가스는 왕좌에서 내려와 있었다.

왕관은 벗어두었고, 큰 망토도 접혀 있었다. 왕좌 옆에는 작은 해 장치가 놓여 있었다. 아까 “해여, 져라”라는 명령에 맞춰 내려갔던 그 해였다.

요안나는 다가가 인사했다.

“왕의 별은 이제 끝났나요?”

민다우가스는 해 장치를 보았다.

“해가 졌으니, 오늘의 왕은 끝났다.”

“내일은요?”

“내일 해가 뜨면 다시 시작하겠지.”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왕도 매일 다시 시작해요?”

“그렇다.”

민다우가스는 요안나를 보았다.

“장미에게 다녀왔다고 들었다.”

“네.”

“명령했나.”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좋다.”

“물을 줬어요.”

“더 좋다.”

요안나는 조금 놀라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낮게 웃었다.

“하하. 왕이 늘 명령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조금요.”

“그런 왕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작은 해 장치를 손에 들었다.

“해는 때가 되면 진다. 장미는 때가 되면 목이 마르다. 사람은 때가 되면 상처를 말한다.”

요안나는 조용히 들었다.

민다우가스는 말했다.

“왕은 그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놓치면요?”

“늦었다고 말해야지.”

요안나는 아레의 말을 떠올렸다.

늦었다고 말하라.

물을 주라.

미하일라의 말도 떠올랐다.

화내면 들어라.

“그다음에는요?”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때를 놓치지 마라.”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다들 비슷한 말을 하네요.”

“좋은 말은 대개 여러 왕국을 지나도 살아남는다.”

그 말에 요안나는 웃었다.

민다우가스는 작은 해를 다시 내려놓았다.

“가거라, 작은 방문자.”

“네.”

“네 별의 해가 질 시간을 보아라.”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람 부는 시간도요.”

“그래.”

“물 주는 시간도요.”

민다우가스는 만족한 듯 낮게 웃었다.

“조금 더 배웠군.”


---

마지막으로 푸리나가 무대 중앙에 섰다.

배우들이 하나둘 뒤쪽에 모였다.

미하일라와 요안나.

민다우가스.

스토얀카.

알토.

벨라.

슈샤니크.

레플리카.

아레는 조금 떨어진 어둠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그들을 보다가, 객석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의 작은 방문자는 장미에게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물뿌리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조금 거짓말이겠지요.”

죠니가 객석에서 말했다.

“여왕님, 후일담에서 자주 하는 말이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좋은 말은 여러 극을 지나도 살아남는 법이야.”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나쁘지 않군.”

푸리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돌아간다는 것은 한 번의 장면이 아닙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가는 일. 물을 너무 많이 주지 않는 일. 늦었다면 늦었다고 말하는 일. 화가 났다면 듣는 일. 불이 꺼졌다면 다시 켜는 일.”

그녀는 장미를 보았다.

“그리고 가끔은, 무대 장미에게 진짜 물을 너무 많이 주지 않는 일.”

소품 담당이 객석 뒤편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나가 조금 부끄럽게 웃었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 오늘의 막은 이렇게 닫겠습니다.”

그녀는 유리 덮개를 장미 옆에 놓았다.

덮지는 않았다.

그저 곁에 두었다.

“덮개는 필요할 때 씌우면 되니까요.”

벨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밤이 오면 잊지 말아야 한단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밤이 오면.”

알토는 기록장에 무언가 적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또 뭐 적어?”

알토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덮개는 곁에 둘 것. 필요할 때 씌울 것. 과잉 보호 주의.”

죠니가 웃었다.

“정확하네.”

요안나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요안나는 왠지 들은 것 같았다.

> 아침 인사는 제때 해주세요.



그녀는 작게 대답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래.”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꺼졌다.

하지만 거꾸로 걸렸던 별 하나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이제는 똑바로 걸려 있었다.

푸리나는 그 별을 보고 웃었다.

“오늘의 극은 여기까지.”

잠시 후,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장미에게 물 주는 일은 내일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별이 꺼졌다.

무대는 어두워졌다.

그러나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작은 등불 하나가, 무대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다.
《작은 별의 막간》

— 박수가 끝난 뒤의 장미 —

개막 — 작은 왕이 되기로 한 군주

그날 극장에는 왕좌가 없었다.

황금 장식도, 개선문도, 군주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긴 서문도 없었다. 대신 무대 중앙에는 아주 작은 둥근 별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걸어 다닐 정도의 별.

한쪽에는 조명탑 세 개가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커튼이 걸려 있었다. 별의 가장자리에는 의자 하나가 놓였는데, 그것을 조금만 옮기면 해가 지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객석에서는 낮은 웃음이 일었다.

“저건 왕국이라기보다…….”

죠니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여왕님 방에 딸린 무대 창고 같은데.”

그레이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창고라고 하기에는 조명탑이 과합니다.”

“그럼 창고 겸 극장?”

“그 표현은 조금 더 부정확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여왕님의 작은 별이라고 해두자.”

그 말이 끝나자, 무대 뒤에서 푸리나 헤툼이 걸어 나왔다.

오늘의 푸리나는 궁정 예복을 입지 않았다.

대신 별빛이 살짝 섞인 푸른 망토, 작은 왕관, 그리고 손에 든 물뿌리개 하나. 옆구리에는 평소보다 작은 류트가 걸려 있었다.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소박하지도 않았다.

딱, 스스로 무대 위에 오르기로 한 군주가 입을 만한 옷이었다.

푸리나는 객석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 나는 작은 별의 왕이 됩니다.”

죠니가 손을 들었다.

“여왕님, 원래도 왕 아니야?”

푸리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오늘은 더 작아질 거야.”

“그게 좋은 일이야?”

“좋은지 보려고 작아지는 거야.”

객석에서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기다렸다가, 웃음이 가라앉을 즈음에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큰 왕국을 다스리다 보면, 작은 별 하나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녀는 무대 중앙의 작은 별을 보았다.

“큰 극장을 열다 보면, 무대 아래 앉아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물뿌리개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왕국을 아주 작게 줄여보려 합니다.”

한 걸음.

그녀는 작은 별 위에 올라섰다.

“별 하나.”

조명탑 하나가 켜졌다.

“무대 하나.”

두 번째 조명탑이 켜졌다.

“장미 한 송이.”

세 번째 조명탑이 켜지자, 작은 별 중앙에 아직 피지 않은 장미 한 송이가 떠올랐다. 꽃봉오리처럼 접힌 천과 철사로 만든 무대 장미였다. 하지만 조명이 닿자, 그것은 정말 곧 숨을 쉬며 피어날 것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장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정도면 도망칠 핑계도 줄어들겠지요.”

죠니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조용히 장미를 보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그 안에는 장난만 있지 않았다.

“그러면 막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푸리나의 신술이 극장 전체로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언제나처럼 화려하게 터지는 박수나 음악은 없었다.

이번 신술은 더 얇았다.

더 조용했다.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화려한 배역을 씌우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마음속에서 박수가 끝난 뒤의 자리를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에게는 식은 수프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접지 못한 침구가.

누군가에게는 막이 내린 뒤에도 떨리던 손이.

누군가에게는, 사람들 앞에서는 웃었지만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얼굴이.

푸리나는 그 감각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늘의 극은 그것을 보러 가는 극이었다.

작은 별 위의 장미가 천천히 꽃봉오리를 열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피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장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줘.”

그리고 객석을 향해 돌아섰다.

“이야기는 사막에서 시작됩니다.”

조명이 낮아졌다.

작은 별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 걸렸다.

그리고 무대 아래로, 모래빛 사막이 열렸다.


---

프롤로그 — 찢어진 지도선과 정치적인 양

사막은 지도를 싫어하는 듯했다.

슈샤니크 호르프시메 바흐람 아즈나부르 파흘라부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래는 어느 방향으로도 같아 보였고, 낮은 바람은 방금 그린 선을 아무렇지 않게 지워버렸다. 발자국은 오래 남지 않았고, 바퀴 자국은 더 빨리 사라졌다.

지도 제작자에게 사막만큼 불친절한 장소는 드물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 부러진 지도선이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니케아의 천문관과 장인들이 만든 하늘 측량 마도구였다. 가벼운 목재와 청동 골격, 얇은 은실 날개, 그리고 배 밑에 매달린 관측판으로 이루어진 작은 비행선. 원래라면 하늘에서 땅의 굴곡과 강줄기, 폐허가 된 성벽과 새로 열린 도로를 읽고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추락해 있었다.

은실 날개는 끊어졌다.

관측판은 금이 갔다.

바람의 방향을 읽는 작은 깃대는 모래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조각들을 무릎 위에 모아놓고 있었다.

그녀는 다친 팔을 천으로 묶은 채, 남은 잉크가 마르기 전에 몇 줄을 적었다.

“항로는 모래가 삼켰고, 지도는 반쯤 찢겼으며, 물통은 제 주인보다 먼저 절망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펜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덧붙였다.

“훌륭하군요. 적어도 기록할 비극은 남았습니다.”

말투는 정중했고,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찢어진 지도 조각을 누르는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도에는 선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상은 자주 선을 찢었다.

그 사실을 슈샤니크는 너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막 위로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모래바람 사이에서 작은 왕관이 먼저 보였다. 그다음 별빛이 묻은 푸른 망토, 작은 류트, 손에 든 물뿌리개.

푸리나였다.

오늘의 그녀는 더 이상 극을 여는 연출자만이 아니었다.

작은 별의 왕.

스스로 그렇게 되기로 한 군주.

그녀는 사막 한가운데 쓰러진 지도선과, 그 곁에 앉은 슈샤니크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첫마디를 꺼냈다.

“양을 그려줘.”

슈샤니크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그녀는 푸리나를 한 번 보고, 찢어진 지도선을 한 번 보고,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첫 인사치고는 대단히 목가적이군요, 작은 전하.”

푸리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이야.”

“제 처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제 손에 남은 것은 찢어진 지도와 마른 물통뿐입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니 양 한 마리는, 안타깝게도 제 행정권 밖의 생물입니다.”

푸리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 장미를 먹지 않는 양이어야 해.”

슈샤니크의 손이 아주 잠깐 멈추었다.

“장미를 먹지 않는 양.”

그녀는 그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푸리나는 빠르게 설명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아야 하고, 밤에는 조용히 자야 하고, 내 별의 커튼을 물어뜯으면 안 되고, 장미 곁에서 잠들 수 있어야 해.”

슈샤니크는 펜끝을 지도 조각 위에 올린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

“목축, 치안, 야간 안정, 무대 설비 보존, 그리고 화훼 보호 업무를 한 마리에게 맡기시겠다는 뜻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응!”

슈샤니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상당히 과로하는 양이군요.”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필요해. 내 장미는 까다롭거든.”

“까다로운 꽃입니까.”

“응. 조명은 좋아하면서도 너무 밝으면 싫어하고, 박수는 좋아하면서도 너무 오래 들으면 피곤해하고, 덮개를 씌워주면 답답하다고 하고, 안 씌워주면 바람이 찬 것 같다고 해.”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장난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는 정말로 난처함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투정이 아니었다.

군주가 자기 방식으로 돌본 존재가, 그 방식만으로는 쉬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생기는 당혹감.

슈샤니크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를 뒤집었다.

뒷면은 아직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군요.”

“그려줄 거야?”

“꽃을 먹는 양은 한 나라의 조세보다 빠르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칭찬이야?”

“경고에 가깝습니다.”

슈샤니크는 목탄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그려드리지요. 다만 전하의 요구 조건을 전부 만족하는 양은 자연계에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무대에는 있어!”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녀는 첫 번째 양을 그렸다.

작고 둥근 양이었다.

푸리나는 받아들고 잠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얌전해.”

슈샤니크는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전하께서 조용히 잠드는 양을 원하신다고 이해했습니다만.”

“조용히 잠드는 것과 아무 일도 못 하는 건 달라. 이 양은 장미 옆에서 자다가 커튼이 쓰러져도 그냥 잘 것 같아.”

“소극적 방위 실패군요.”

슈샤니크는 두 번째 양을 그렸다.

이번 양은 조금 단단해 보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말했다.

“이 양은 커튼은 지키겠지만 장미가 싫어할 것 같아.”

“왜입니까?”

“너무 근무자처럼 생겼어.”

슈샤니크는 잠시 그림을 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 양은 목에 호루라기를 달고 야간 순찰을 돌 것 같았다.

“그렇군요. 지나친 행정화의 폐해입니다.”

세 번째 양은 더 귀엽게 그렸다.

푸리나는 조금 흔들렸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귀엽긴 한데…… 이 양은 분명 장미한테 박수 받으려고 할 거야.”

“양이 박수를 원합니까?”

“무대 위에 오르면 누구나 조금은 그래.”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말은 가벼운 농담만은 아니었다.

슈샤니크는 목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도 조각의 빈 가운데에 작은 상자를 그렸다.

구멍이 세 개 뚫린 상자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상자잖아.”

“그 안에 양이 있습니다.”

“안 보이는데?”

“보이지 않기에 아직 장미를 먹지 않았습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말했다.

“이보다 안전한 양은 드뭅니다.”

푸리나는 상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좋아. 이 양은 내 장미를 먹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보이십니까?”

“응.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슈샤니크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추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 말은 사막보다 조금 멀리 갔다.

정해지지 않은 지도.

정해지지 않은 귀환.

정해지지 않은 실패.

슈샤니크는 손가락으로 찢어진 지도의 모서리를 눌렀다.

“전하께서는 정해지지 않은 것을 좋아하십니까?”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품에 안았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아직 극이 끝나지 않은 것 같잖아.”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이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가 날아가려 하자, 푸리나가 재빨리 발로 눌렀다.

“앗.”

슈샤니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조각은 아직 제법 중요한 비극입니다.”

푸리나는 지도를 주워 건넸다.

“비극도 중요해?”

“기록에는 그렇습니다.”

“극에도 그래.”

푸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삼류 해피엔딩도 꽤 좋아해.”

슈샤니크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잠깐 푸리나를 보았다.

그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안쪽에는 이 세계 어딘가의 기록 성좌가 좋아할 법한 끈질긴 희망이 있었다.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을 받아 들었다.

“전하의 별은 어떤 곳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막 위에 앉았다.

작은 왕관이 살짝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바로잡지 않았다.

“작아.”

“그 점은 이미 짐작했습니다.”

“정말 작아.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해가 지고, 조명탑 세 개를 다 닦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아. 커튼도 내가 직접 접을 수 있어.”

“왕이 직접 커튼을 접습니까?”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작은 별의 왕은 인력이 부족하거든.”

슈샤니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력 부족은 모든 국가의 오래된 비극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장미가 있어.”

그 말을 하자, 무대의 조명이 변했다.

사막 뒤쪽에 작은 별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천장에 걸려 있던 그 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가까워졌다.

별 위에는 조명탑 세 개가 있었다.

작은 커튼.

의자 하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무대 바닥.

그리고 중앙의 장미.

이번에는 봉오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피어난 모습이었다.

조명 아래에서 장미는 화려했다.

아니, 화려하게 보이도록 꾸며져 있었다.

푸리나는 장미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장미에게 무대를 줬어.”

그녀의 목소리는 자랑스러웠다.

“조명도 줬고, 박수도 줬고, 사람들이 보게 해줬어. 장미는 정말 예뻤거든. 그냥 구석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슈샤니크는 장미를 보았다.

그 장미는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조명이 조금 강했다.

“장미는 좋아했습니까?”

“처음에는.”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처음에는 웃었어. 아니, 꽃이니까 웃었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꽃잎이 열렸어.”

“그다음에는요?”

푸리나는 손에 든 상자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날 말했어.”

무대 위 장미가 천천히 움직였다.

꽃잎이 조명 쪽을 향했다가, 다시 조금 접혔다.

그리고 부드럽고 까다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조명이 너무 밝아요.”

푸리나가 작은 별 위에서 말했다.

“하지만 네가 가장 예쁘게 보이는 각도야!”

장미는 대답했다.

“예쁘게 보이는 것과 편한 것은 달라요.”

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

장미는 계속 말했다.

“오늘은 박수도 조금 피곤해요.”

“박수는 따뜻하잖아.”

“따뜻해요. 그런데 오래 들으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아요.”

푸리나는 조명탑을 보았다.

“그럼 조명을 줄일까?”

“줄여도 돼요.”

“얼마나?”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작은 별 위의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대의 왕.

극장의 주인.

모든 이를 주인공으로 세우려는 사람.

그런 그녀에게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는 너무 낯선 요구였다.

장미는 조용히 말했다.

“주인공이 되는 건 좋아요.”

잠깐의 침묵.

“하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가 없어요.”

사막의 푸리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웃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푸리나의 옆얼굴을 보았다.

푸리나는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통치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피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는 군주처럼 보였다.

슈샤니크는 낮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꽃에게 박수를 주셨군요.”

“응.”

“그리고 꽃은 침묵을 청했고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조각을 접었다.

“살아 있는 꽃은 대개 불편합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장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물을 원하고, 햇빛을 거절하고, 바람을 탓하다가, 정작 덮개를 씌우면 숨이 막힌다고 말하지요.”

그녀의 손끝이 지도 위를 스쳤다.

“지도 위의 꽃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편합니다.”

잠깐.

아주 짧은 침묵.

“나중에는…… 그 침묵이 사람을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슈샤니크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하지만 그 말 안에는, 불탄 포도밭의 냄새 같은 것이 있었다.

푸리나는 작은 별을 보았다.

장미는 여전히 조명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조명은 조금 낮아져 있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별을 보러 가기로 했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도망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대답은 빨랐다.

그리고 조금 아팠다.

“도망이면 더 쉬웠겠지. 나는…… 배우러 가려고 했어.”

“무엇을 말입니까?”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박수 말고도 쉬게 하는 방법.”

슈샤니크는 조용히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별의 왕.

극장의 군주.

박수를 무기로 삼는 아이가 아니라, 박수가 닿지 않는 곳을 보려고 스스로 작아진 왕.

슈샤니크는 아주 낮게 말했다.

“전하의 별은 작군요.”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작아도 내 별이야.”

“예.”

슈샤니크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작아서?”

“작은 별은 핑계가 적으니까요.”

슈샤니크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 한 송이가 피곤하다 말해도, 군주는 못 들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이 다시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선의 은실 날개가 낮게 울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뒷면에 그린 상자 속 양을 푸리나에게 돌려주었다.

“가십시오, 전하.”

“어디로?”

“별들로.”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받아 들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전하께서 정말 배우러 떠나신 것이라면, 돌아오실 때 무엇을 배웠는지도 들어야겠지요.”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기록할 거야?”

“물론입니다.”

“내 실수도?”

“특히 그것을.”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엄격하네.”

“실수는 잘 보관하면 재산이 됩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방치하면 재난이 되고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뒤쪽에서 별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죠니의 별.

레이튼의 별.

하융의 길.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장미 정원과 여우의 숲.

푸리나는 작은 왕관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사막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좋아.”

그녀는 별빛이 열린 길을 보았다.

“그럼, 작은 왕의 순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죠니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여왕님, 제목은 좋은데 길 잃지 마.”

푸리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길 잃으면 하융이 찾을 거야!”

멀리서 하융의 목소리가 들렸다.

“떠넘기는 솜씨가 제법이구려, 군주여.”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 작은 별의 장미는 조용히 꽃잎을 접고 있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무대 뒤 간판이 떠올랐다.

1막 — 박수 이후의 길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일어난 사람은 어디로 걸어가는가 —
1막 — 박수 이후의 길

— 일어난 사람은 어디로 걸어가는가 —

첫 번째 별은 길 위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별 자체가 길이었다.

둥근 별의 표면 위로 말발굽 자국이 나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래된 바퀴 자국이 있었다. 길 양쪽에는 낮은 울타리가 놓여 있었고, 한쪽 끝에는 무대 커튼처럼 붉은 천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커튼은 무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길의 시작을 알리는 표식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그 별 위에 내려섰다.

“여긴…… 무대가 아니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무대일 수도 있나? 길이 무대인 극도 있으니까.”

“여왕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죠니 조스타가 길가의 낮은 담장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오늘도 지나치게 비장하지 않았다. 모래 묻은 망토를 걸쳤고, 손에는 활 대신 낡은 여행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미 길을 한참 걸어본 사람처럼 보였다.

“이번 별의 주인은 너야?”

푸리나가 물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주인이라기보단 길가에서 말 거는 사람 정도지. 주인은 아마 길 쪽일걸.”

“길이 주인인 별이라니, 철학적이네.”

“레이튼 교수님 별로 가면 그런 말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거야. 여기서는 조금 덜 복잡하게 가자고.”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길 위에는 몇몇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사람처럼 보이는 그림자들이었다.

한 사람은 박수를 받고 막 일어난 배우처럼 보였고, 한 사람은 전투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보였고, 한 사람은 피난민처럼 보였으며, 또 한 사람은 손에 빵을 쥔 아이처럼 보였다.

그들은 모두 푸리나를 향해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별 위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푸리나가 반사적으로 웃었다.

박수.

그건 그녀가 아는 소리였다.

얼어붙은 사람의 어깨를 펴게 하는 소리.
방금까지 울던 아이가 고개를 들게 하는 소리.
죽음과 공포와 피난의 밤 뒤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소리.

푸리나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좋아! 그럼 다음 막으로—”

“여왕님.”

죠니가 그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딱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푸리나는 멈췄다.

“왜?”

죠니는 박수가 사라진 길을 가리켰다.

“박수는 사람을 일으켜. 그건 맞아.”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일어났다.

배우처럼 보였던 사람은 허리를 폈다.
병사는 고개를 들었다.
피난민은 빵을 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죠니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근데 일어난 사람이 어디로 걸어갈지는 또 다른 문제잖아.”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일어난 사람들은 실제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박수 쪽으로.

그다음에는 무대 쪽으로.

하지만 무대는 길의 시작에만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가자, 박수는 들리지 않았다. 조명도 닿지 않았다. 붉은 커튼도 뒤에 남았다.

길은 계속 이어졌다.

푸리나는 그 길을 바라보았다.

“박수가 끝나도…… 계속 걷는구나.”

“대부분 그렇지.”

죠니는 담장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여왕님이 사람들을 일으킨 건 대단한 일이야. 진짜로.”

그 말은 가볍지 않았다.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일어난 사람이 다시 앉을 곳이 없으면, 결국 길 위에서 지쳐.”

푸리나는 길 끝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내가 거기까지 무대를 깔면 되잖아.”

죠니는 조금 웃었다.

“여왕님답네.”

“안 돼?”

“돼.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

“무대를 길 전체로 만들 수는 없잖아. 아니, 여왕님이라면 하려고 할 것 같긴 한데.”

푸리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죠니가 손을 흔들었다.

“그 표정 하지 마. 진짜 하려고 하지 말고.”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길에서 지친다며.”

“그러니까 무대를 길 전체로 덮는 것보다, 길 중간중간 쉴 곳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죠니는 여행 지팡이로 길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길가에 작은 의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 옆에 물통 하나.

작은 그늘막 하나.

아무 장식도 없는 쉼터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았다.

“이건 너무 소박해.”

“그렇지.”

“박수도 없고.”

“응.”

“조명도 없고.”

“낮에는 햇빛이면 충분하고, 밤에는 작은 등불이면 되겠지.”

푸리나는 쉼터 앞에 섰다.

그림자 중 하나가 그 의자에 앉았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냥 앉았다.

물을 마셨다.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숨을 골랐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긴장이 풀린 것처럼.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저것도 휴식이야?”

죠니는 대답했다.

“아마도.”

“너무 조용한데.”

“휴식이 꼭 시끄러워야 할 필요는 없잖아.”

푸리나는 쉼터의 물통을 보았다.

그 물은 아무 빛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에게는 박수보다 먼저 필요할지도 몰랐다.

푸리나는 손에 든 물뿌리개를 내려다보았다.

“장미도…… 이런 걸 원했던 걸까?”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걷는 그림자들을 보았다.

“장미가 정확히 뭘 원했는지는 장미한테 물어봐야지. 다만 조명이 싫다고 해서 여왕님의 극장이 틀렸다는 건 아니야.”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죠니를 보았다.

“정말?”

“응. 그냥 그날은 조명 말고 커튼이 필요했을 수 있지.”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죠니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정답처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망갈 곳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는 길을 가리켰다.

“여왕님, 한 번만 더 보자.”

“뭘?”

“박수 끝나고.”

길의 시작에서 다시 박수가 울렸다.

이번에는 더 많은 그림자들이 일어났다.

푸리나는 박수를 받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고, 서로를 붙잡고,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은 아름다웠다.

분명히 아름다웠다.

푸리나는 그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죠니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낮게 말했다.

“이 장면은 필요해.”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그다음 장면도 필요해.”

박수가 멈췄다.

일어난 사람들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길 중간에 쉼터가 하나 더 생겼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작은 표지판이 생겼다.

물 있음.

조금 더 앞으로 가자, 다른 표지판이 나타났다.

잠시 앉아도 됨.

푸리나는 그 표지판을 보고 웃었다.

“너무 죠니다워.”

“왜?”

“대단한 말 안 써.”

“목마른 사람한테는 대단한 말보다 물통 위치가 더 중요할 때가 있거든.”

푸리나는 한참 동안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극장에도 표지판이 필요하겠네.”

“무슨 표지판?”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박수가 끝난 뒤, 이쪽으로.”

죠니는 웃었다.

“좋네.”

“그리고 ‘잠시 아무 말 안 해도 됨’.”

“그건 더 좋고.”

“그리고…… ‘주인공에서 내려와도 됨’.”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길 위에 서 있었다.

작은 왕관을 쓴 작은 별의 왕.

하지만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무대가 아니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의 길이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여왕님, 그 표지판은 꽤 많은 사람이 좋아할 거야.”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길 끝을 보았다.

아직 보이지 않는 곳.

그곳에 장미가 있었다.

무대 중앙에서 빛나는 장미가 아니라,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했던 장미.

주인공이 되는 건 좋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 없다고 말했던 장미.

푸리나는 손에 든 상자 그림을 조금 더 꼭 쥐었다.

“죠니.”

“응.”

“내가 사람을 일으키는 것만 보고 있었을까?”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죠니다웠다.

“여왕님은 일으키는 걸 정말 잘해.”

“그다음은?”

“그다음은 배우는 중이지.”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늦었나?”

“장미가 아직 투덜거릴 수 있으면, 완전히 늦은 건 아니겠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 말, 슈샤니크가 하면 되게 아프게 들릴 것 같아.”

“그 사람은 같은 말도 지도에 못 박듯이 할 것 같긴 해.”

사막 쪽에서 슈샤니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들립니다, 조스타 경.”

죠니는 어깨를 움찔했다.

“지도선이 추락해도 귀는 멀쩡하시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웃음은 조금 가벼웠다.

그러나 완전히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 웃음 뒤에, 작은 쉼터의 물통이 남아 있었다.


---

푸리나는 첫 번째 별을 떠나려 했다.

그때 죠니가 그녀를 불렀다.

“여왕님.”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응?”

죠니는 여행 지팡이로 길 위에 마지막 표지판 하나를 세웠다.

그 표지판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왜 비워뒀어?”

“여왕님이 나중에 쓰라고.”

“뭘 쓰면 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여왕님 극장 표지판 담당은 아니니까.”

푸리나는 빈 표지판을 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보게 되었다.

“좋아. 가져갈게.”

“들고 갈 수 있어?”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무대 소품은 들고 갈 수 있어.”

“그거 좋은 규칙이네.”

“내 극장이니까.”

푸리나는 빈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다음 별로 향했다.

죠니는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길 잃으면 너무 멀리 가지 말고.”

푸리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길 잃으면 하융한테 책임 물을 거야!”

멀리서 하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군주여, 길은 잃은 이의 책임도 반은 있소.”

죠니가 낮게 웃었다.

“저쪽 별도 쉽진 않겠네.”


---

두 번째 별은 서재처럼 생겼다.

그 별에는 책장이 둥글게 서 있었다.

책장들은 벽이 아니라 질문처럼 놓여 있었다. 어느 책장은 길을 막고 있었고, 어느 책장은 열려 있었으며, 어떤 책은 읽히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반쯤 펼쳐져 있었다.

별 중앙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찻잔 두 개.

그리고 한 장의 종이.

종이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객석이 비어도 무대는 무대인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자마자 말했다.

“무대지.”

책장 뒤에서 레이튼이 나왔다.

“빠른 답변입니다.”

그는 오늘 질문의 별의 주인이었다.

모자는 조금 낮게 눌러썼고,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이미 다음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경계하듯 그를 보았다.

“너 지금 함정 깔았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질문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그게 함정이랑 뭐가 달라?”

“함정은 빠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고, 질문은 멈추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비슷한데.”

“때로는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푸리나에게 찻잔을 권했다.

푸리나는 탁자 앞에 앉았다.

“좋아. 다시 물어봐.”

레이튼은 종이를 가리켰다.

“객석이 비어도 무대는 무대입니까?”

“응. 무대는 무대야.”

“그럼 배우가 내려간 뒤의 방도, 극장의 일부입니까?”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레이튼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극장 뒤에 있으면 극장의 일부지.”

“그럼 군주님의 극장은 어디까지입니까?”

“내 극장?”

“무대까지입니까? 객석까지입니까? 분장실까지입니까? 길가의 쉼터까지입니까?”

푸리나는 빈 표지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죠니에게서 받은 빈 표지판.

“너도 봤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질문은 대개 이미 앞 장면에 놓여 있습니다.”

“교수 같아.”

“감사합니다.”

“칭찬인지 몰라.”

“질문으로 남겨두지요.”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 극장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곳이야.”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되지 않고 쉬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장미의 말과 닮아 있었다.

>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그때 푸리나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무대는 구원이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던 사람을 보이게 하고, 무너진 사람에게 이름을 주고, 박수로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푸리나의 힘이었다.

그런데 레이튼은 물었다.

보이지 않고 싶을 때는?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을 때는?

그때도 극장은 그 사람을 품을 수 있는가?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을 위한 무대는…… 무대가 아니어야 할지도 몰라.”

레이튼의 눈이 조금 밝아졌다.

“흥미로운 답입니다.”

“답이 맞아?”

“저는 정답을 채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뭐 하는 사람인데?”

“답이 너무 빨리 닫히지 않게 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정말 피곤해.”

레이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자주 듣습니다.”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레이튼은 탁자 위에 두 번째 종이를 올렸다.

이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휴식은 보이는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푸리나는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박수는 보인다.

웃음도 보인다.

무대 위에서 사람이 고개를 드는 순간도 보인다.

하지만 쉼은?

잠드는 얼굴.

문을 닫은 방.

조용히 놓인 물 한 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보이게 만들 수는 있어.”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님께서는 그것을 잘하시지요.”

“하지만…… 다 보이게 만들면 쉬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푸리나는 말을 고르다가, 결국 웃었다.

“이거 되게 어려운 문제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말했다.

“좋습니다.”

“뭐가 좋아?”

“어려워졌으니까요.”

“나는 쉬러 왔지 시험 보러 온 게 아닌데.”

“휴식에 대해 묻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시험처럼 느껴집니다.”

푸리나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빈 표지판을 그 옆에 놓았다.

“그럼 이 표지판에는 뭐라고 써야 할까?”

레이튼은 표지판을 보았다.

“제가 쓰면 제 답이 됩니다.”

“내가 써야 해?”

“군주님의 극장이니까요.”

푸리나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 극장이니까.

그 말이 갑자기 조금 무거워졌다.

그녀는 표지판에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레이튼은 말했다.

“비워두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알토 같은 말 하네.”

“기록자와 질문자는 때때로 같은 방을 씁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아직 비워둘래.”

“이유는?”

“아직 모르는 답을 너무 빨리 써두면, 그 표지판만 보고 길을 잘못 찾을 수도 있으니까.”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훌륭한 임시 결론입니다.”

“임시라니.”

“좋은 결론은 대개 임시입니다. 살아 있는 것에 관한 문제라면 더욱 그렇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장미를 떠올렸다.

살아 있는 꽃.

불편하고, 까다롭고, 쉬고 싶어 하고,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는 꽃.

그녀는 빈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고마워, 레이튼.”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다음 질문이 필요하시면 다시 오십시오.”

푸리나는 경계했다.

“다음 질문도 어려워?”

“더 어려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 올래.”

“그 또한 좋은 선택입니다.”

푸리나는 웃으며 다음 별로 걸어갔다.

그러나 떠나기 전, 그녀는 탁자 위 첫 번째 종이를 다시 보았다.

객석이 비어도 무대는 무대인가?

푸리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아마도.”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 무대는 조용해야겠지.”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정답이 아니라 다음 장면으로 가는 문 같았다.


---

세 번째 별은 길과 여관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처음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길이 있었다.

길 양쪽에는 낮은 돌담이 있었고, 가끔 작은 등불이 걸려 있었다. 등불은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한 등불을 지나면 다음 등불이 보일 만큼의 거리.

푸리나는 그 길 위에 내려섰다.

“여긴 하융 별이지?”

어둠 속에서 하융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부르면 그리 되는 것이겠지, 군주여.”

하융은 길가의 등불 아래에 서 있었다.

그의 옷자락은 여행자의 것처럼 단정했고, 손에는 작은 지팡이가 있었다. 그는 푸리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별과 별 사이의 길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별이 아니잖아.”

“길도 머무는 이가 있으면 별이 될 수 있소.”

“그건 여관좌 쪽 말 같네.”

하융은 웃었다.

“그분의 길은 여러 곳에 이어지니 말이오.”

푸리나는 길 위의 등불들을 보았다.

죠니의 쉼터.

레이튼의 질문.

그리고 이제 하융의 길.

“나는 장미에게 돌아가야 해.”

“그렇겠지.”

“그런데 아직 배울 게 남은 것 같아.”

“그 또한 그렇겠지.”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니야?”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 위에서는 부정해도 걸어야 할 때가 많소.”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철학자들이랑 길잡이는 다들 말이 어렵다니까.”

“그런가. 그럼 쉽게 말하리다.”

하융은 지팡이로 등불 하나를 가리켰다.

“저 등불까지 걸으시오.”

푸리나는 걸었다.

그리 멀지 않았다.

등불 아래에는 작은 의자와 물그릇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죠니 별이랑 비슷하네.”

“길은 배운 것을 가지고 이어지는 법이오.”

“그럼 다음은?”

하융은 다음 등불을 가리켰다.

“저기까지.”

푸리나는 다시 걸었다.

두 번째 등불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낮은 벽 하나가 있었다.

푸리나는 그 벽 옆에 잠깐 섰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바람을 막아주고 있소.”

“아.”

푸리나는 벽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갑지만, 든든했다.

하융은 말했다.

“휴식은 언제나 침대와 박수와 따뜻한 식사만은 아니오. 때로는 바람이 한 방향에서 덜 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세 번째 등불 아래에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됨.

푸리나는 그 표지판 앞에서 멈췄다.

“이건…….”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레이튼 경의 질문에서 이어진 길이오.”

푸리나는 표지판을 오래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됨.

무대 위에서는 말해야 했다.

노래해야 했다.

울어도 대사가 되어야 했고, 웃어도 장면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극장이었다.

하지만 이 표지판은 다르게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됨.

푸리나는 손에 든 빈 표지판을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은 표지판.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하융은 등불이 늘어선 어둠을 보았다.

“쉬어갈 곳이 있는 쪽으로 이어지오.”

“쉬어갈 곳이 없으면?”

“만들어야지.”

“누가?”

하융은 푸리나를 보았다.

“군주가.”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융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군주여, 그대는 무대를 잘 여오. 사람을 불러 세우고, 이름을 주고, 웃음으로 다시 걷게 하오.”

그는 길 위의 등불을 보았다.

“하지만 별과 별 사이에도 밤은 오오. 무대에서 내려온 자가 다음 무대에 닿기 전, 길 위에서 지치지 않게 할 곳이 필요하오.”

푸리나는 길을 보았다.

“여관이네.”

“그렇소.”

하융은 미소 지었다.

“무대와 여관은 닮았으나 같지는 않소.”

“어떻게 달라?”

“무대는 사람을 보이게 하오.”

하융은 등불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여관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게 하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 말은 장미의 말과 아주 가까웠다.

>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괜찮게.”

“그렇소.”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에는 그런 방도 필요하오.”

푸리나는 길가의 표지판을 다시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됨.

그녀는 자신의 빈 표지판을 꺼냈다.

그리고 잠시 망설였다.

“써도 될까?”

하융은 말했다.

“길은 쓰는 자를 기다리오.”

푸리나는 목탄을 꺼냈다.

그리고 빈 표지판에 천천히 적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글씨는 조금 삐뚤었지만, 또렷했다.

하융은 그 문장을 보았다.

“좋은 길잡이로군.”

푸리나는 표지판을 들고 한참 바라보았다.

“이걸 장미에게 보여주면 좋아할까?”

“그건 장미가 답할 일이오.”

“다들 그 말 하네.”

“살아 있는 이에게 물어야 하는 일은, 대신 답할 수 없으니 말이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어봐야겠네.”

“그렇소.”

길 끝에서 별빛이 흔들렸다.

다음 장면으로 가는 문이었다.

하융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푸리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가시오, 군주여.”

“다음은 어디야?”

“장미가 많은 곳.”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많아?”

“그렇소.”

“내 장미 말고도?”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미 답이었다.

푸리나는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상자 속 양.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리고 마음속에 남은 질문들.

그녀는 길 끝으로 걸어갔다.

하융은 뒤에서 말했다.

“길을 잃으면 부르시오.”

푸리나는 뒤돌아보았다.

“책임져줄 거야?”

하융은 웃었다.

“반은.”

“나머지 반은?”

“걸은 자의 몫이오.”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지만, 곧 웃었다.

“좋아. 반이라도 어디야.”

그녀는 다음 장면으로 걸어갔다.

무대 위 등불들이 하나씩 낮아졌다.

마지막 등불 아래, 푸리나가 적은 표지판만이 잠시 남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리고 그 표지판 뒤로, 수많은 장미의 붉은빛이 천천히 켜지기 시작했다.
좋아. 그러면 핵심 문장을 **“내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 “내가 조명을 비춘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로 바꾸고, 그 의미가 더 잘 살아나도록 주변 문장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작성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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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 장미 정원과 그레이 여우

— 모두가 주인공이라면, 모두에게 내려올 자리도 있어야 한다 —

붉은빛은 처음에는 하나였다.

작은 점 하나.

조명탑 아래 피어난 장미 한 송이처럼.

푸리나는 처음 그것을 보고, 자기 별의 장미라고 생각했다.

“찾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곧 두 번째 붉은빛이 켜졌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윽고 언덕 전체가 붉어졌다.

장미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송이.

수백 송이.

아직 봉오리인 장미도 있었고, 활짝 피어난 장미도 있었다. 조명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붉은 꽃잎을 펼친 장미들. 바람에 흔들리며 각자의 향기를 품은 장미들.

푸리나는 멈춰 섰다.

손에는 하융의 길에서 적은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 문장은 갑자기 조금 작아 보였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바라보았다.

“많네.”

그녀는 웃으려 했다.

“정말 많네.”

웃음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수많은 장미들을 보았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각도로 피어 있었다. 어떤 장미는 햇빛을 향했고, 어떤 장미는 그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어떤 장미는 바람을 견디듯 줄기를 세웠고, 어떤 장미는 피곤한 듯 낮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든 장미가 무대 위에 오르면,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푸리나는 그 질문을 떠올렸다가, 곧 스스로 당황했다.

그것은 원래 그녀가 가장 자신 있게 대답하던 문제였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이는 주인공일 수 있다.

그녀의 극장은 그렇게 열렸다.

그런데 지금 장미들이 너무 많았다.

모두에게 조명을 비추려 하면, 너무 눈부실 것 같았다.

모두에게 박수를 주려 하면, 누군가는 그 박수에 지칠 것 같았다.

모두를 무대 중앙에 세우려 하면, 무대 중앙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푸리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내가 조명을 비춘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장미가 흔들렸다.

어느 장미도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한 송이 장미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 장미는 자기 별의 장미와 닮아 있었다. 꽃잎의 색도 비슷하고, 가시도 얇았고, 바람이 불면 조금 떨리는 방식도 닮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조명이 싫은 날이 있어?”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 박수가 피곤한 날이 있어?”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주인공에서 내려오고 싶은 날이 있어?”

장미는 바람에 흔들렸다.

그뿐이었다.

그때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가 있었다.

오늘의 그레이는 여우였다.

정확히 말하면 여우 가면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후드를 쓰고 있었고, 후드 끝에는 작은 여우 귀 같은 장식이 달려 있었다. 손에는 장부 대신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물병, 붕대, 작은 빗, 그리고 접힌 담요가 있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

그레이는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여우입니다, 군주님.”

무대 뒤인지 객석인지 모를 곳에서 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진짜 여우 같진 않은데, 그래도 귀는 잘 어울리네.”

그레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후드 아래 귀 끝이 아주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귀엽다.”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 평가는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왜?”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내가 왕명으로 기록하라고 하면?”

“그 경우에는 별도 항목으로 분리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드디어 조금 웃었다.

장미 정원의 무거운 공기가 아주 살짝 풀렸다.

그러나 그레이는 웃음이 지나가길 기다린 뒤,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많군요.”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아.”

“모두 다른 장미입니다.”

“그건 알아.”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해. 내가 늘 말했잖아. 모든 이는 주인공이라고. 그런데 막상 모두가 장미인 걸 보니까…….”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레이는 기다렸다.

푸리나는 결국 말했다.

“모두를 무대 중앙에 세우면, 무대가 너무 밝아질 것 같아.”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렸던 걸까?”

그 질문은 빠르게 나왔다.

그리고 나온 뒤에야 푸리나는 자신이 그 말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한 송이 장미의 아래쪽 흙을 살폈다. 손끝으로 마른 잎을 하나 떼어냈다. 아주 조심스럽게. 장미가 아프지 않도록.

그런 다음에야 말했다.

“군주님께서 사람들을 무대 위로 불러낸 것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보이지 않던 사람을 보이게 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이름 없이 지나가던 사람에게 이름을 주고, 박수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박수를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다음도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물병을 꺼냈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의 일입니다.”

푸리나는 하융의 표지판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레이.”

“네, 군주님.”

“길들인다는 건 뭐야?”

그레이는 물병을 든 채 멈췄다.

그녀는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장미들이 내 장미가 아닌 건 알겠어. 아니, 그렇게 말하면 이상한가.”

그녀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내가 이 장미들의 주인이 아닌 건 알아. 그런데 내 장미가 왜 내 장미인지, 아직 전부는 모르겠어.”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꽃들.

그리고 그중 어디에도 없는, 푸리나의 작은 별의 장미.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같은 시간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전부야?”

“아니요.”

그레이는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같은 시간에 찾아갔을 때, 어제와 필요한 것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것까지입니다.”

푸리나는 침묵했다.

그레이는 말을 이었다.

“어제는 박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한 송이 장미의 흙에 아주 조금 물을 주었다.

“같은 장미라도 매일 같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어제는 조명이 좋다고 했던 장미.

오늘은 조명이 너무 밝다고 했던 장미.

박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박수가 오래되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다고 했던 장미.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그게 변덕이라고 생각했어.”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변덕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변덕이라고 해서 전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레이는 장미의 잎을 살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어제는 웃을 수 있었던 사람이 오늘은 웃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무대에 설 수 있었던 사람이 오늘은 방 안에 있고 싶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접힌 담요를 꺼냈다.

“먼저 물어야 합니다.”

“묻고?”

“들어야 합니다.”

“듣고?”

“가능한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건?”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군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왕인데도?”

“왕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 말은 슈샤니크의 말과 조금 닮아 있었다.

작은 별은 핑계가 적다.

하지만 큰 왕국도 모든 핑계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더 꼭 잡았다.

“그럼 내가 모두를 주인공으로 세우겠다고 말한 것도…… 너무 큰 말이었을까?”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큰 말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큰 말이 전부 거짓말인 것은 아닙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네.”

그레이는 아주 조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큰 말은, 작게 나누어 지켜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큰 말은 작게 나누어 지켜야 한다.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말도.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무대 중앙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씩, 한 장면씩, 그리고 내려온 뒤의 방까지.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길들인다는 건, 매일 공연하는 게 아니구나.”

“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확인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재미없네.”

“대체로 그렇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답다.”

“하지만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레이답고.”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수많은 장미들.

그 장미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것을 모두 자기 무대로 데려올 수는 없다.

모두에게 박수를 줄 수는 있어도, 모두에게 같은 박수가 휴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장미가 특별한 것은, 자기 무대에서 가장 빛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푸리나가 매일 보았기 때문이다.

매일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매일 조명을 조절하려 했고, 매일 투덜거림을 들었고, 어느 날은 듣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푸리나에게 말했다.

“군주님.”

“응.”

“장미들에게 말해보시겠습니까?”

“무슨 말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 생각하신 말이 있다면, 그대로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너,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았어?”

“대략은요.”

“내 장미가 아니라고 하려 했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하지만 군주님께서는 모든 장미의 주인이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모든 장미가 주인공일 수는 있지?”

“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다만 각자의 무대에서요.”

그 말은 푸리나의 가슴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 앞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 앞에서 작은 왕관을 살짝 고쳐 썼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아름다워.”

장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들은 내 장미가 아니야…… 라고 말하려 했는데.”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바람이 장미 정원을 지나갔다.

“아니. 그건 조금 틀린 말 같아.”

그녀는 천천히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장미야. 각자의 별과, 각자의 밤과, 각자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겠지.”

장미들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아까와 달랐다.

푸리나는 품 안의 표지판을 더 꼭 안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내가 이름을 몰라도, 내가 조명을 비추지 않아도, 당신들의 막은 분명히 어딘가에서 오르고 있을 거야.”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은 막이 내려가 있겠지.”

그 말은 장미들에게 하는 말이었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같은 시간에 돌아가야 할 장미에게 가야 해.”

그 순간 자기 별의 장미가 더 선명해졌다.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하던 목소리.

박수가 피곤하다고 말하던 목소리.

주인공이 되는 건 좋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 없다고 말하던 목소리.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내 장미는…… 아마 지금도 투덜거리고 있겠지.”

그레이는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네.”

“왜?”

“살아 있으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살아 있으니까.

투덜거릴 수 있다.

피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은 조명이 싫다고 말할 수 있다.

푸리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럼 다행이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동의처럼 느껴졌다.


---

시간이 조금 흘렀다.

물론 무대 위의 시간이었다.

조명이 한 번 낮아졌다가 다시 켜졌고, 장미 정원 위로 다른 빛이 내려왔다.

푸리나는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레이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바구니는 옆에 놓여 있었고, 장부는 없었다. 그러나 그레이가 장부 없이 앉아 있어도, 왠지 그녀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다.

푸리나는 물었다.

“나 또 왔어.”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간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움찔했다.

“그렇게 바로 지적해?”

“하지만 다시 오셨습니다.”

“그건 괜찮은 거야?”

“네.”

그레이는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다음에는 시간을 정하면 더 좋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 옆에 앉았다.

“길들여지는 건 어렵네.”

“어렵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해?”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필요해서 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의 시선은 장미 정원에 있었다.

“군주님께서 막을 올리시면, 저는 막이 내린 뒤의 것을 봅니다.”

“힘들어?”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은요.”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사과하실 필요는—”

“아니. 필요해.”

푸리나는 말을 끊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내가 네가 보고 있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잖아.”

그레이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푸리나에게는 충분히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레이가 말했다.

“군주님께서 막을 올리셨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었던 일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

“네.”

그레이는 아주 조금 미소 지었다.

“웃은 사람은, 도움을 받으러 오는 길을 조금 덜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군주님의 박수는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다만, 박수가 끝난 뒤의 길도 같이 열어주시면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그 길에는 표지판이 필요하겠지요.”

푸리나는 하융의 길에서 적은 표지판을 꺼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레이는 그 문장을 보았다.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좋은 표지판입니다.”

“정말?”

“네.”

“더 필요한 게 있을까?”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하나 더 있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빈 표지판을 꺼냈다.

대체 언제 준비했는지 알 수 없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런 것도 가지고 다녀?”

“필요할 수 있으니까요.”

“역시 그레이야.”

그레이는 빈 표지판을 푸리나에게 건넸다.

“여기에 쓰십시오.”

“뭘?”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푸리나는 멈췄다.

그 말은 약속이었다.

극의 대사가 아니라.

관객을 향한 선언도 아니라.

장미에게 하는 약속.

푸리나는 목탄을 들었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표지판에 적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글씨는 또렷했다.

첫 번째 표지판보다 덜 화려했지만, 더 무거웠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이제 돌아가면 될까?”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뭐가?”

그레이는 장미 정원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식탁보의 흰빛이 보였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저건…….”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박수와 침묵 사이의 자리입니다.”

푸리나는 손에 든 두 표지판을 꼭 쥐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는 물었다.

“그레이, 같이 가줄 거야?”

그레이는 잠시 망설였다.

“문턱까지는요.”

“그다음은?”

“그다음은 군주님께서 들으셔야 합니다.”

“무엇을?”

그레이는 어둠 속 식탁보를 보았다.

“아레 님의 침묵을요.”

푸리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네.”

그레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려울 겁니다.”

그 대답이 너무 그레이다워서,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장미 정원을 지나 어둠 쪽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푸리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든 장미를 자기 무대 위에 올릴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자기 장미에게 돌아갈 길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장미 정원의 붉은빛이 조금씩 낮아졌다.

어둠 속 흰 식탁보가 더 선명해졌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박수와 침묵 사이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붙었다.

— 막이 내린 뒤에도 남아 있는 자리 —
3막 — 박수와 침묵 사이

— 막이 내린 뒤에도 남아 있는 자리 —

어둠 속에는 식탁보가 있었다.

처음에는 별빛인 줄 알았다.

장미 정원 너머, 붉은빛이 서서히 낮아진 자리에 희고 작은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무대도 아니고, 객석도 아니고, 길가의 쉼터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푸리나는 그것이 식탁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 장식도 없는 흰 천.

그 위에는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빵 한 조각.

그리고 빈 의자 하나.

푸리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이는 그녀보다 한 발짝 뒤에서 멈췄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레이?”

“저는 문턱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식탁보를 보았다.

“저기에는 누가 있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검은 숄이 움직였다.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오늘의 그녀는 뱀이었다.

그러나 뱀의 가면도, 비늘도, 화려한 독의 장식도 없었다. 검은 숄이 모래 위를 낮게 끌렸고, 그녀의 손에는 접히지 않은 침묵 같은 것이 들려 있는 듯했다.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왔구나, 아이야.”

푸리나는 가볍게 웃어넘기려 했다.

“아이야라니, 나 그래도 군주인데.”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주이기에 더 아이로 앉아야 하는 밤도 있단다.”

그 말에 푸리나는 웃지 못했다.

아레는 식탁보 곁에 무릎을 낮추었다.

“앉으렴.”

푸리나는 흰 식탁보를 보았다.

“여긴 무대야?”

“아니란다.”

“그럼?”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막이 내린 뒤란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막이 내린 뒤.

그 말은 너무 조용했다.

막이 오르면 푸리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조명을 켜고, 장면을 열고, 배우를 부르고, 박수를 준비하면 된다.
누군가 울고 있으면 웃게 만들고, 누군가 무너졌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 무대 위로 올리면 된다.

하지만 막이 내린 뒤에는?

관객이 떠나고, 박수가 사라지고, 배우가 분장을 지우고, 아무도 더 이상 보지 않을 때.

그곳에서 군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레이는 멀리서 고개를 숙인 뒤, 장미 정원 쪽으로 물러났다.

아레와 푸리나만 남았다.

아니, 식탁 위의 물 한 잔과 빵 한 조각과 빈 의자도 남았다.

푸리나는 빈 의자를 보았다.

“저 의자는 누구 거야?”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의 자리란다.”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

“웃지 못한 사람. 먹지 못한 사람. 떠난 사람의 이름을 삼키고 있는 사람.”

아레는 아주 느리게 물잔을 푸리나 쪽으로 밀었다.

“혹은, 박수가 너무 커서 자기 침묵을 놓친 사람.”

푸리나는 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물은 평범했다.

빛나지도 않았다.

신술도 아니었다.

그냥 물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었어.”

“안다.”

아레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차갑지 않았다.

“나는 무너진 사람도, 겁먹은 사람도, 자기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시 무대 위로 올리고 싶었어.”

“그래.”

“그게 틀린 거야?”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다, 아이야.”

푸리나는 조금 놀라 그녀를 보았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네 박수는 잘못이 아니란다. 산 자가 웃어야 다시 밥을 삼킬 수 있는 밤도 있지. 네가 열어준 무대 덕분에, 고개를 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꼭 잡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럼 왜 여기로 온 거야?”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박수로 모든 침묵을 덮을 수는 없기 때문이란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정확했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식탁보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폈다.

“어떤 밤에는 웃음이 먼저 와야 한다. 웃지 않으면 살아남은 몸이 굳어버리는 밤이 있단다.”

“응.”

“하지만 어떤 밤에는,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레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았다.

슬픔이 오래 머문 사람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을 무기로 쓰지 않으려 애쓰는 지휘관의 눈이었다.

아레는 말했다.

“그런 밤에는 조명을 낮추렴.”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도 낮추렴.”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박수는 조금 뒤에 두렴.”

“그럼 나는 뭘 해?”

푸리나의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다.

“앉으렴.”

“앉아서?”

“기다리렴.”

“말은?”

“상대가 숨을 고를 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단다.”

푸리나는 식탁 위의 물잔을 보았다.

“노래는?”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늦게.”

“박수는?”

“더 늦게.”

푸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내가 할 게 없잖아.”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있단다.”

“뭔데?”

“떠나지 않는 것.”

푸리나는 숨을 멈추었다.

식탁보 위의 물잔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레는 푸리나를 아이처럼, 그러나 결코 낮추어 보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야. 무대 위에 세우는 일은 귀하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직 떨고 있다면, 그 떨림 곁에도 있어주어야 한단다.”

푸리나는 자신의 작은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조명을 좋아하던 장미.

하지만 어느 날,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하던 장미.

박수를 좋아했지만, 박수가 오래되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다고 말하던 장미.

>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푸리나는 그 말을 그때 이해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

주인공이 아닌 채로 쉬는 것.

그런 것도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늦게 배우고 있었다.

“아레.”

“말하렴.”

“나는 장미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하는 법을 몰랐어.”

“그럴 수 있단다.”

“그럼 내가 나빴던 거야?”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빵 한 조각을 작은 접시 위에 올렸다.

“나쁘다, 아니다로 너무 빨리 묶지 말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는 네가 줄 수 있는 것을 주었다. 박수와 조명과 이름. 그것은 가벼운 선물이 아니란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부족했지.”

“그래.”

아레는 피하지 않았다.

“부족했다.”

그 말은 칼처럼 들어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베이지는 않았다.

그 말 뒤에 아레가 다시 낮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배워야 한다.”

푸리나는 식탁보를 바라보았다.

흰 천.

물.

빵.

빈 의자.

너무 평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어떤 무대보다 어려워 보였다.

“이것도 극장의 일부일까?”

푸리나가 물었다.

아레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네 극장이 넓어지려 한다면.”

“넓어진다?”

“그래.”

아레는 빈 의자 곁에 손을 놓았다.

“박수가 울리는 무대만 극장이라면, 이곳은 극장이 아니겠지. 하지만 네가 부른 이들이 박수 뒤에 앉아 쉴 곳까지 품으려 한다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 침묵도 네 극장의 방 하나가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극장의 방.

박수가 없는 방.

아무도 보지 않아도 되는 방.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

막이 내린 뒤에도, 쫓겨나지 않는 자리.

푸리나는 자신의 표지판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이 표지판을 여기에도 걸 수 있을까?”

아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 수 있단다.”

“그럼 사람들이 올까?”

“어떤 이는 오고, 어떤 이는 오지 않겠지.”

“오지 않는 사람은?”

“기다리렴.”

“얼마나?”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네가 부른 사람이라면, 조금 더.”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

장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오늘은 박수도 조금 피곤해요.



그 말 뒤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렸다.

푸리나는 장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조명을 줄이려 했고, 박수를 조절하려 했고, 장면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장미가 말한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그냥 내려가고 싶다는 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쉬고 싶다는 말.

푸리나는 그걸 “장면 조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는 장미를 계속 무대 위에서만 고치려고 했어.”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푸리나가 스스로 다음 말을 하도록 남겨둔 것 같았다.

“장미가 내려오고 싶다고 했는데.”

“그렇구나.”

“나는 무대 위에서 더 편하게 해주려고 했어.”

“그랬구나.”

“그게 틀렸던 거네.”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기보다, 닿지 않은 것이란다.”

푸리나는 눈을 떴다.

아레는 말했다.

“네 박수는 장미에게 닿았다. 그래서 장미는 피었겠지. 하지만 어느 날 장미가 더 낮은 곳의 휴식을 청했다면, 그날의 박수는 거기까지 닿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그날은 내려가야지.”

“같이?”

아레는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그래. 아이야.”

그 말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푸리나는 식탁보 위에 표지판을 내려놓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흰 천 위에 그 문장이 놓이자, 그곳은 조금 덜 낯설어졌다.

푸리나는 두 번째 표지판도 꺼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표지판 옆에 놓았다.

아레는 그것을 보았다.

“좋은 약속이구나.”

“지킬 수 있을까?”

“항상은 어렵겠지.”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약속은 완벽한 자만 하는 것이 아니란다. 늦을 수 있음을 아는 자가, 늦으면 돌아와 말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도 하지.”

“늦으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늦었다고 말하렴.”

“그다음은?”

“물어보렴.”

“무엇을?”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그것은 대사가 아니었다.

선언도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푸리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

어둠이 조금 움직였다.

식탁보 너머에 아주 작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이기도 했고, 배우이기도 했고, 병사이기도 했고, 이름 없는 관객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박수를 받다가 멈춘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울다가 웃은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웃은 뒤 방으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식탁보 앞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서려 했다.

“내가—”

아레가 낮게 말했다.

“아이야.”

푸리나는 멈췄다.

“앉아 있으렴.”

“하지만 저 사람들이—”

“보았단다.”

“그럼 뭘 해야 해?”

“지금은 아무것도.”

그 말은 어려웠다.

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공백이었다.
관객의 불안을 부르는 침묵이었다.
서둘러 대사나 음악이나 웃음으로 채워야 하는 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여기서 침묵은 누군가 앉을 수 있도록 비워둔 자리였다.

그림자 하나가 식탁보 곁에 앉았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푸리나도 박수치지 않았다.

아레도 말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물을 마셨다.

빵을 조금 떼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숨을 골랐다.

그뿐이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여전히 노래하고 싶었다.

위로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레가 말했던 것처럼,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 밤을 처음으로 지켜보았다.

한참 뒤, 그림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 조금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이제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말해도 돼?”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푸리나는 그림자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막을 올리지 않을게.”

그림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을 이었다.

“대신 여기 있을게.”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것은 박수에 반응한 몸짓이 아니었다.

휴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작은 변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기립박수보다 더 조용하고 어려운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

시간이 흘렀다.

무대의 시간인지, 침묵의 시간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의 그림자가 일어나고, 다른 그림자가 앉았다.

어떤 이는 물만 마셨다.

어떤 이는 빵을 조금 먹었다.

어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그들 모두에게 노래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다.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에는 손이 어색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물뿌리개를 만지작거렸고, 표지판의 모서리를 문질렀고, 류트를 보고 싶어졌다.

아레는 그때마다 말없이 곁에 있었다.

가끔 아주 낮게만 말했다.

“조금 더 기다리렴.”

“목소리를 낮추렴.”

“그 이름은 아직 부르지 말거라.”

“지금은 물이면 된단다.”

그 말들은 명령 같기도 했고, 아이에게 밤길을 가르치는 낮은 안내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조금씩 배웠다.

침묵도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장면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연출자가 아니라,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

마지막 그림자가 일어났을 때, 식탁보 위의 빵은 조금 줄어 있었고, 물잔은 거의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아레.”

“말하렴.”

“이런 밤에도 마지막에는 박수를 쳐도 돼?”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 의자를 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그들이 원한다면.”

“내가 원하면?”

“그때는 조금 더 기다리렴.”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응.”

아레는 아주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야, 박수는 선물이란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선물은 받는 이가 손을 내밀 때 주는 편이 좋다.”

그 말에 푸리나는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

“전부 알 필요는 없단다.”

아레는 검은 숄을 정리했다.

“다만 오늘 밤에는, 그 정도면 되었다.”

푸리나는 식탁보 위의 두 표지판을 다시 들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는 거기에 세 번째 문장을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목탄을 들었다가 멈췄다.

아직 말이 너무 빨랐다.

아레는 그것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비워두어도 된단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레이튼도 그런 말 했어.”

“그 아이는 질문을 잘 두는 편이지.”

“너 레이튼한테도 아이야라고 해?”

아레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때로는.”

푸리나는 웃음을 참으려다 조금 실패했다.

아레의 입가에도 아주 희미한 온기가 스쳤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먼 기억이 잠깐 식탁가에 앉았다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

어둠 저편에서 그레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조용히 식탁보 쪽으로 다가왔다.

푸리나는 일어섰다.

“그레이.”

“네, 군주님.”

“나, 조금 알 것 같아.”

그레이는 푸리나의 표지판들을 보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푸리나는 식탁보를 돌아보았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극장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거.”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극장은 박수치는 곳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해.”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좋은 개정입니다.”

“개정?”

“군주님의 극장 운영 원칙에 대한 개정입니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행정 같아.”

“실제로 행정이 필요할 겁니다.”

“왜?”

그레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물과 빵, 의자와 담요, 그리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휴식도 예산이구나.”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레가 낮게 말했다.

“식탁은 저절로 차려지지 않는단다, 아이야.”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둘이 같이 말하니까 엄청 무섭네.”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렴.”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아니, 이건 좀 무서워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장미한테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졌잖아.”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서 묻는 것이 먼저란다.”

푸리나는 멈췄다.

“먼저?”

“그래.”

아레는 빈 의자를 접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두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또 다른 조명.

좋은 의도로 만든 방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또 다른 무대가 될 수 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물어볼게.”

그레이가 말했다.

“그리고 들으시면 됩니다.”

아레가 덧붙였다.

“서두르지 말렴.”

푸리나는 두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장미 정원의 붉은빛도 사라지고, 식탁보의 흰빛도 낮아졌다.

대신 멀리 사막의 모래빛이 다시 보였다.

슈샤니크가 있는 곳.

찢어진 지도선이 있는 곳.

푸리나가 처음 상자 속 양을 받은 곳.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아레는 여전히 식탁보 곁에 있었다.

“아레.”

“말하렴.”

“내 박수는…… 그래도 가져가도 돼?”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낮고, 조용하고, 조금 슬펐다.

“가져가렴.”

푸리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레는 말했다.

“필요한 밤이 올 것이다.”

잠시 침묵.

“다만 아이야.”

“응.”

“박수가 먼저인지, 물 한 잔이 먼저인지, 물어보는 것을 잊지 말렴.”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을게.”

아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검은 숄이 어둠과 섞였다.

푸리나는 그레이와 함께 사막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표지판이 마음속에 생겨 있었다.

어쩌면 그 문장은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하지만 푸리나는 아직 적지 않았다.

그 말은 장미에게 직접 물어본 뒤에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지도 위의 장미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
4막 — 지도 위의 장미

—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

사막은 처음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처음의 사막은 끝없이 넓었다.
지도를 삼키고, 발자국을 지우고, 방향이라는 말을 조롱하듯 모든 곳을 같은 색으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사막은 달랐다.

여전히 넓었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이제 그 침묵 속에서 조금 다른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길 위의 물통.

서재의 질문.

등불 아래의 표지판.

장미 정원의 바람.

식탁보 위의 물 한 잔.

그 모든 것이 사막의 모래 사이에 아주 얇은 선처럼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그레이와 함께 걸었다.

손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문장이 마음속에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직 적지 않았다.

아레가 말했기 때문이다.

>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그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또 다른 조명.

선의로 비춘 빛이라도, 상대가 눈을 감고 싶어 하는 밤에는 피로가 될 수 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게 되지는 않았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군주님.”

“응.”

“사막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 추락한 지도선이 보였다.

은실 날개는 여전히 부러져 있었고, 관측판은 반쯤 모래에 묻혀 있었다. 찢어진 지도 조각들이 작은 돌에 눌려 놓여 있었고, 그 곁에 슈샤니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도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조각과 조각 사이에는 맞지 않는 틈이 많았다.

어떤 강은 중간에서 끊겼고, 어떤 산맥은 갑자기 사라졌으며, 어떤 도시 이름은 절반만 남았다.

슈샤니크는 그 틈을 억지로 메우지 않았다.

그저 조각들이 어디까지 맞고, 어디서부터 맞지 않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았다.

“지도는 아직도 안 고쳐졌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지도는 고쳐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전하.”

“그럼?”

“덜 틀리게 만드는 물건에 가깝지요.”

푸리나는 입을 살짝 삐죽였다.

“역시 시작부터 어렵네.”

슈샤니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피곤해 보였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돌아오셨군요.”

“응.”

푸리나는 사막 위에 앉았다.

그레이는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슈샤니크가 그레이를 보았다.

“여우께서도 돌아오셨군요.”

그레이가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

“오늘은 그 배역이었습니다.”

“좋은 귀입니다.”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레이, 그 평가는 기록해도 돼?”

“하지 않겠습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래서, 작은 전하.”

“이번엔 또 작은 전하야?”

“이번 극에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추락한 지도 제작자여.”

“예, 작은 전하.”

푸리나는 표지판 두 개를 내려놓았다.

슈샤니크는 그것들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의 시선이 두 번째 문장에서 아주 잠깐 멈추었다.

“무언가 배우셨군요.”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박수가 끝난 뒤의 길을 보여줬어. 일어난 사람이 어디로 걸어갈지도 봐야 한다고 했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조스타 경다운 정확한 말이군요. 화려하지 않아서 더 위험합니다.”

“레이튼은 질문했어. 객석이 비어도 무대냐고. 배우가 내려간 뒤의 방도 극장의 일부냐고.”

“그분은 늘 결론의 의자를 빼는 데 능하지요.”

“하융은 길을 보여줬어. 무대와 여관은 닮았지만 같지 않다고 했어. 무대는 사람을 보이게 하고, 여관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게 한다고.”

슈샤니크의 손이 지도 위에서 멈추었다.

그 말은 그녀에게 조금 깊게 들어간 듯했다.

“좋은 말입니다.”

“그레이는 길들인다는 걸 말해줬어. 같은 시간에 찾아가고, 어제랑 필요한 게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거라고.”

슈샤니크는 그레이를 보았다.

“정확하고 잔인하게 현실적인 정의군요.”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현실적이려고 했습니다.”

“성공하셨습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아레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식탁보.

물.

빵.

빈 의자.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아레는 박수와 침묵 사이의 자리를 보여줬어.”

슈샤니크는 조용히 들었다.

푸리나는 손을 내려 표지판을 살짝 만졌다.

“내 박수가 틀린 건 아니라고 했어.”

“그랬습니까.”

“응. 하지만 어떤 밤에는 조명을 낮추고, 박수도 늦게 두라고 했어.”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 하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레 경다운 말입니다.”

“그리고 빈 의자 곁에 앉아 있으라고 했어.”

푸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지 못했다.

“그건…… 생각보다 어려웠어.”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평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빈 의자.

말하지 못한 이름.

돌아오지 못한 사람.

지도 위에서만 남은 장소.

푸리나는 그 침묵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의 별에도 장미가 있었어?”

그 질문은 사막에 작게 떨어졌다.

그레이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도에는 있었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지도에 있으면 돌아갈 수 있어?”

슈샤니크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지도만으로는 부족하네.”

그 말에 슈샤니크의 손이 멈췄다.

바람이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가 들썩였지만, 슈샤니크는 바로 누르지 못했다.

푸리나는 자신이 너무 아픈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

슈샤니크는 한참 뒤에 말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아팠지?”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때때로 단순한 말로 오래된 문을 여시는군요.”

“그거 칭찬이야?”

“오늘은 칭찬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슈샤니크는 날아가려던 지도 조각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지도 위의 꽃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물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조명이 밝다고 말하지도 않고, 박수가 피곤하다고 투덜거리지도 않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처음에는 편합니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빈 곳을 보았다.

“아주 편합니다. 더는 설득할 필요가 없고, 더는 기다릴 필요도 없고, 더는 밤마다 덮개를 씌워주러 갈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은 정중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한 조각을 들어 올렸다.

그 조각에는 포도밭을 뜻하는 작은 표시가 있었다.
반쯤 지워진 십자가 표시.
이름의 일부만 남은 마을.
그리고 작은 꽃 모양의 잉크 자국.

“침묵한 꽃은 예의 바릅니다.”

푸리나는 숨을 멈추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너무 예의 바릅니다. 결코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조명이 싫다고 하지도 않고, 바람이 찼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군주가 늦었다고 말하지도 않지요.”

그녀는 지도 조각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그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만이 오래 지나갔다.

마침내 푸리나가 말했다.

“나는 아직 장미가 투덜거려.”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자기 말을 확인하듯 다시 말했다.

“내 장미는 아직 투덜거려. 박수가 싫다고 하고, 조명이 밝다고 하고,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 없다고 하고…… 아마 내가 돌아가면 늦었다고도 하겠지.”

“그럴 것입니다.”

“그럼 다행인 거네.”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울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예전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박수를 준비하는 눈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는 눈이었다.

슈샤니크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예.”

잠시 침묵.

“그것은 다행입니다.”

그 대답은 아주 작았다.

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은 말이었다.


---

푸리나는 지도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 장미는 어디 있었어?”

슈샤니크는 푸리나가 가리킨 지도 조각을 보았다.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여러 곳?”

“전하의 장미처럼 한 송이는 아니었습니다.”

슈샤니크는 천천히 설명했다.

“어떤 장미는 문 앞의 포도나무였고, 어떤 장미는 아이들이 물을 뜨러 가던 우물이었고, 어떤 장미는 예배가 끝난 뒤 나누던 빵이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조각을 짚었다.

“어떤 장미는 언젠가 돌아가면 다시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름이었고.”

또 다른 조각.

“어떤 장미는 세금을 덜어주면 한 해 더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마을이었고.”

마지막 조각.

“어떤 장미는 제가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잠자리였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표지판을 꼭 쥐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 문장들이 갑자기 너무 늦은 약속처럼 보였다.

슈샤니크는 푸리나의 표정을 보았다.

“전하.”

“응.”

“제 지도를 보고 전하의 장미를 미리 장례 치르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슈샤니크의 말은 정중했지만 날카로웠다.

“제 별의 이야기는, 전하의 별에 내리는 판결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니요.”

슈샤니크는 조용히 말을 끊었다.

“비극은 쉽게 보편이 되려 합니다. 한 번 불탄 사람은 모든 등불을 화재의 전조로 읽고 싶어지지요.”

그녀는 자신의 찢어진 지도를 보았다.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늘 옳은 일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침묵했다.

슈샤니크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의 장미는 아직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푸리나의 표지판으로 내려갔다.

“투덜거리고, 요구하고, 피곤하다고 말하고, 조명이 밝다고 말하고 있지요.”

“응.”

“그렇다면 돌아가십시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슈샤니크는 분명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전하.”

그 말은 마치 지도 위에 못을 박는 것 같았다.

“침묵한 꽃은 예의를 지키지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푸리나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레이가 한 걸음 다가오려 했지만, 멈췄다.

푸리나는 스스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돌아가면…… 뭘 해야 할까?”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걸 제게 물으십니까?”

“응.”

“저는 돌아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물어볼래.”

슈샤니크는 아주 잠시 말문을 잃었다.

푸리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슈샤니크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푸리나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먼저 늦었다고 말하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변명은 뒤에 두십시오.”

“그리고?”

“장미가 먼저 불평하게 두십시오.”

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건 어려운데.”

“그럴 겁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군주는 대개 자기 설명을 먼저 하고 싶어 하니까요.”

“그건 맞아.”

“하지만 이번에는 늦게 하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은?”

슈샤니크는 푸리나가 들고 있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묻는 겁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냐고?”

슈샤니크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좋은 질문입니다.”

“아직 표지판에는 안 썼어.”

“잘하셨습니다.”

“왜?”

“그 질문은 장미 앞에서 처음 나와야 할 것 같군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사막의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다.

슈샤니크는 지도선 쪽을 보았다.

부러진 은실 날개.

금 간 관측판.

말라버린 물통.

그리고 찢어진 지도.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슈샤니크가 푸리나를 보았다.

“저 말입니까?”

“응.”

“지도선을 고쳐야지요.”

“돌아가려고?”

“적어도 여기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슈샤니크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덜 틀린 지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찢어진 지도 조각을 하나 집었다.

“내가 도와줄까?”

슈샤니크는 곧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푸리나의 손을 보았다.

물뿌리개를 들던 손.

류트를 잡던 손.

표지판을 쓰던 손.

그리고 아직 지도 조각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 손.

“찢어진 지도를 다루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나 조명도 다루고 커튼도 접어.”

“그 점은 큰 도움이 될 수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럼 배울게.”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작은 지도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이 조각은 가장자리에 두십시오. 가운데가 아닙니다.”

“왜?”

“모든 조각을 중심에 놓으면 지도는 다시 찢어집니다.”

푸리나는 손을 멈추었다.

그 말이 너무 직접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모든 장미를 무대 중앙에 세우면, 무대 중앙이라는 말이 이상해진다.

모든 조각을 중심에 놓으면, 지도는 다시 찢어진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지도 조각을 가장자리에 놓았다.

“여기?”

“조금 왼쪽입니다.”

“여기?”

“조금 더.”

“여기?”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푸리나는 만족한 듯 웃었다.

“지도도 무대 배치랑 비슷하네.”

“그런 말을 들으면 지도 제작자들이 불쾌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저는 조금 불쾌합니다.”

“하지만 맞는 것 같지 않아?”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들을 보았다.

잠시 뒤, 아주 낮게 말했다.

“조금은.”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사막의 공기를 아주 조금 밝게 했다.

하지만 슈샤니크는 이번에는 그 웃음을 피하지 않았다.


---

그레이는 뒤에서 조용히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푸리나와 슈샤니크.

작은 별의 왕과 추락한 지도 제작자.

아직 투덜거리는 장미를 가진 군주와, 지도 위의 장미만 남은 어른.

두 사람은 한동안 지도 조각을 맞추었다.

완성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완성될 수 있는 지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조각은 서로 이어졌다.

끊겼던 강줄기 하나가 다시 연결되었다.

폐허가 된 성벽의 일부가 제자리를 찾았다.

이름이 반만 남았던 마을 옆에, 푸리나가 작은 점을 찍었다.

슈샤니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방금 무엇을 하셨습니까?”

“여기 쉬어갈 곳 표시.”

“그곳에 실제 여관이 있습니까?”

“아직 없지.”

“그렇다면 지도상 허위 기재입니다.”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예정지라고 해.”

슈샤니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작게 숨을 삼켰다.

푸리나는 목탄으로 점 옆에 아주 작은 표시를 덧붙였다.

예정.

슈샤니크는 그것을 보았다.

한참 동안.

그리고 지우지 않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났어?”

“아닙니다.”

“그럼?”

슈샤니크는 천천히 말했다.

“오래전에 제가 너무 쉽게 지웠던 단어입니다.”

“예정?”

“예.”

슈샤니크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무언가를 다시 세우겠다는 말. 누군가를 다시 맞이하겠다는 말. 내년에도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믿는 말.”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작은 예정 표시를 손끝으로 눌렀다.

“전하께서는 그런 말을 쉽게 쓰시는군요.”

푸리나는 조금 움츠러들었다.

“나쁘게 들려?”

“아니요.”

슈샤니크는 고개를 저었다.

“부럽게 들립니다.”

그 말은 작았다.

그러나 사막 전체가 들은 것 같았다.

푸리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지우지 말자.”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목탄을 들어, 그 옆에 더 작은 글씨를 썼다.

검토 필요.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슈샤니크답다.”

“무분별한 예정은 예산을 파괴합니다.”

“그래도 예정은 남아 있잖아.”

“검토가 붙었습니다.”

“그건 괜찮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예정 사항으로 관리하면 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너 지금 내 편이야, 슈샤니크 편이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예산의 편입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슈샤니크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찢어진 지도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뒤에도, 지도 조각 하나가 조금 덜 차가워 보였다.


---

조금 뒤, 지도선의 은실 날개가 바람에 흔들렸다.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전하께서 돌아가셔야 할 시간이군요.”

푸리나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응.”

그녀는 두 표지판을 챙겼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세 번째 문장.

아직 쓰지 않은 질문.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돌아가면, 아마 꽃은 전하를 반기지 않을 겁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

“늦었다고 말하겠지요.”

“응.”

“박수는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알아.”

“조명이 싫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에도 가시겠습니까?”

푸리나는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왜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별을 떠올렸다.

조명탑 셋.

커튼.

의자.

대본 덩굴.

그리고 장미.

자기가 조명을 비춘 장미.

하지만 조명이 없어도 살아 있는 장미.

자기 무대의 주인공이었지만, 동시에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어야 했던 장미.

푸리나는 말했다.

“내가 같은 시간에 돌아가야 할 장미니까.”

슈샤니크는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그녀는 찢어진 지도 뒷면에서 처음 그려주었던 상자 속 양을 꺼냈다.

그 종이는 사막 바람에 조금 구겨져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걸 가져가도 돼?”

“애초에 전하의 양입니다.”

“상자잖아.”

“전하께서 좋아하셨습니다.”

“응.”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보았다.

보이지 않기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양.

아직 장미를 먹지 않은 양.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가능성.

슈샤니크는 말했다.

“전하.”

“응?”

“상자 안의 양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왜?”

“상자도 열어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슈샤니크는 덧붙였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전할 수도 있지만, 방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러니 돌아가시면, 양보다 먼저 장미를 보십시오.”

“그리고 물어보고.”

“예.”

슈샤니크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직 빈 세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쓰실 겁니까?”

푸리나는 목탄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왜입니까?”

“장미 앞에서 처음 말할 거야.”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 질문은, 지도보다 먼저 도착해야 할 것 같군요.”


---

푸리나는 사막 끝으로 걸어갔다.

그레이가 곁에 섰다.

“같이 가줄 거야?”

그레이는 말했다.

“문턱까지는요.”

푸리나는 그 대답에 조금 웃었다.

“다들 문턱까지만이래.”

“그다음은 군주님께서 하셔야 하니까요.”

“알아.”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돌아보았다.

슈샤니크는 지도선 옆에 서 있었다.

찢어진 지도 조각들이 그녀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에는 이제 작은 표시가 남아 있었다.

예정.

그 옆에 더 작은 글씨.

검토 필요.

푸리나는 손을 흔들었다.

“나 다녀올게.”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전하.”

푸리나는 크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너무 크게 받을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별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걸었다.

무대 위 사막빛이 천천히 낮아졌다.

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조명탑 셋.

작은 커튼.

해가 지는 의자.

그리고 장미.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무대 뒤 간판이 떠올랐다.

5막 — 장미가 쉬는 법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5막 — 장미가 쉬는 법

—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

작은 별은 여전히 작았다.

너무 작아서 조명탑 세 개가 별의 절반을 차지했고, 커튼 하나를 잘못 접으면 길을 막았다.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해가 지는 장치도 그대로였고, 바닥 한쪽에는 아직 뽑지 못한 대본 덩굴의 작은 싹이 올라와 있었다.

푸리나는 별 가장자리에 섰다.

손에는 상자 속 양이 그려진 종이.

품에는 두 개의 표지판.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문장.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그러나 그 문장은 아직 표지판 위에 있지 않았다.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는 무대 중앙에 있었다.

예전처럼 조명 아래에 있었지만, 어쩐지 조금 피곤해 보였다. 꽃잎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으나, 활짝 펴져 있지도 않았다. 줄기는 꼿꼿했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얇은 가시가 작게 흔들렸다.

푸리나는 본능적으로 조명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명을 조금 더 부드럽게.

아니, 장미가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지만 손이 멈췄다.

아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그 대신 장미 앞에 한 걸음 다가갔다.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 “내가 멋진 극을 준비해왔어.”



아니.

> “네가 쉴 수 있는 방을 만들었어.”



아니.

> “이제 알았어.”



그것도 아니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아주 작게 말했다.

“늦었지.”

장미의 꽃잎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늦었네요.”

예상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아팠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늦었어.”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금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아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나요?”

푸리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죠니의 길을 봤고.

레이튼의 질문을 들었고.

하융의 등불을 따라 걸었고.

그레이에게 길들임을 배웠고.

아레의 식탁보 앞에 앉았고.

슈샤니크의 지도 위 장미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러나 슈샤니크가 말했었다.

> 변명은 뒤에 두십시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응.”

장미는 예상하지 못한 듯 꽃잎을 살짝 떨었다.

“그냥 인정하나요?”

“응.”

“이상하네요.”

“나도 그래.”

장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류트도 내려놓았다.

작은 왕관도 벗어서 조심스럽게 바닥에 두었다.

장미가 물었다.

“왕관은 왜 내려놓나요?”

“오늘은 먼저 왕으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럼 뭘로 말하나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늦은 사람.”

장미는 아주 작게 웃은 것 같았다.

꽃잎 한 장이 미세하게 열렸다.

“정확하네요.”

“응.”

푸리나는 장미 앞에 앉았다.

무대 중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중앙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장미보다 높게 서지도 않았다.

그냥 앉았다.

장미는 그 모습을 한동안 보았다.

“박수는요?”

“없어.”

“조명은요?”

“네가 원하면 낮출게.”

“노래는요?”

푸리나는 류트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장미를 보았다.

“나중에. 네가 듣고 싶으면.”

장미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불편했다.

푸리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식탁보 앞에서 배운 것처럼.

상대가 숨을 고를 때까지.

조금 더.

조금 더.

마침내 장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무대가 싫은 게 아니었어요.”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장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처음엔 좋았어요. 조명이 닿으면 내가 정말 피어난 것 같았고, 박수를 들으면 내가 혼자가 아닌 것 같았어요.”

“응.”

“당신이 나를 주인공이라고 불렀을 때, 조금 기뻤어요.”

푸리나는 가만히 들었다.

“하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장미는 꽃잎을 조금 접었다.

“매일 예뻐야 하잖아요.”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장미는 계속 말했다.

“매일 피어 있어야 하고, 매일 웃는 것처럼 보여야 하고, 매일 관객이 보기에 괜찮은 꽃이어야 해요.”

바람이 지나갔다.

장미의 가시가 작게 떨렸다.

“나는 가끔 그냥 꽃이고 싶었어요.”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냥 꽃.

주인공도, 상징도, 공연의 중심도, 박수의 이유도 아닌.

그저 바람을 느끼고, 물을 마시고, 조금 시들었다가 다시 피어날 수 있는 꽃.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미안해.”

장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미워하나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망했나요?”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나요?”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내가 네가 좋아하는 것만 보려고 했던 것 같아서.”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네가 박수받을 때 피어나는 건 봤어. 조명 아래서 아름다운 것도 봤어. 그런데 네가 박수 뒤에 지치는 건…… 늦게 봤어.”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손에 든 첫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장미가 그것을 보았다.

“그건 뭔가요?”

“길에서 배운 말.”

“누구에게요?”

“죠니, 레이튼, 하융. 그리고…… 모두에게 조금씩.”

푸리나는 표지판을 장미 곁에 세웠다.

“네가 주인공이 되기 싫은 날에는 내려와도 돼.”

장미는 표지판을 오래 보았다.

“내가 내려오면 무대는요?”

“기다릴게.”

“관객은요?”

“돌려보낼게.”

“당신은요?”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대답했다.

“같이 내려갈게.”

장미의 꽃잎이 조금 떨렸다.

푸리나는 두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이건?”

“그레이가 준 말.”

“그레이는 누구죠?”

“막이 내린 뒤에도 남은 걸 보는 사람.”

“그럼 좋은 사람이네요.”

“응. 좋은 사람이야.”

푸리나는 표지판을 첫 번째 표지판 옆에 세웠다.

“내가 매일 완벽하게 올 수는 없을지도 몰라.”

장미가 바로 말했다.

“그럼 약속이 아니잖아요.”

“맞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늦으면 늦었다고 말할게. 못 오면 못 온다고 말할게. 그리고 돌아오면, 변명보다 먼저 네 말을 들을게.”

장미는 푸리나를 보았다.

“정말요?”

“응.”

“정말 먼저 들을 건가요?”

“응.”

“내가 오래 투덜거려도요?”

푸리나는 잠깐 웃을 뻔했다.

그러나 웃음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장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오늘은…….”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드디어 그 질문을 해야 할 때였다.

아직 표지판에 쓰지 않은 말.

지도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는 질문.

푸리나는 장미를 보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장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대 전체가 조용해졌다.

객석도, 무대 뒤도, 별의 바람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장미는 아주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기다렸다.

이번에는 기다렸다.

류트를 만지지 않았다.

조명을 조정하지 않았다.

박수를 부르지 않았다.

그냥 장미 앞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장미가 말했다.

“오늘은…….”

꽃잎이 조금 열렸다가 다시 접혔다.

“조명을 낮춰주세요.”

푸리나는 곧바로 손을 움직이려다가 멈췄다.

“얼마나?”

장미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보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나를 보지는 않을 정도로요.”

푸리나는 천천히 조명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명은 조금씩 낮아졌다.

장미는 더 이상 무대 전체의 중심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

“이 정도?”

“조금 더요.”

푸리나는 조금 더 낮췄다.

“이 정도?”

장미는 꽃잎을 아주 조금 열었다.

“네.”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또?”

“박수는 필요 없어요.”

“응.”

“노래도요.”

푸리나는 류트를 보았다.

“응.”

“하지만…….”

장미는 아주 작게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조금 무서울 것 같아요.”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는 부끄러운 듯 꽃잎을 접었다.

“내가 조용히 있고 싶다고 했다고 해서, 완전히 혼자 있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푸리나는 가슴이 아렸다.

“그럼?”

“조용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떤 이야기?”

“관객이 웃어야 하는 이야기는 말고요.”

푸리나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야기는 대개 관객을 향했다.

웃음을 유도하고, 박수를 만들고, 장면을 넘기기 위해 설계된 이야기.

하지만 장미가 원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그럼 오늘 길에서 본 걸 말해줄게.”

“길?”

“응. 박수가 끝난 뒤의 길.”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푸리나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죠니의 별에서 본 쉼터.

물 있음.

잠시 앉아도 됨.

주인공에서 내려와도 됨.

레이튼의 질문.

객석이 비어도 무대인가.

하융의 등불.

말하지 않아도 됨.

장미 정원의 수많은 장미.

각자의 별과, 각자의 밤과, 각자의 무대.

그레이 여우의 말.

같은 시간에 찾아가고, 필요한 것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것.

아레의 식탁보.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

그리고 슈샤니크의 지도 위 장미.

침묵한 꽃은 너무 예의 바르고, 그래서 더 아프다는 말.

장미는 오래 들었다.

가끔 꽃잎이 흔들렸다.

가끔 가시가 미세하게 떨렸다.

푸리나는 이야기하면서도, 장미의 반응을 보았다.

피곤해 보이면 멈추고.

듣고 있는 것 같으면 조금 더 이어갔다.

그것은 공연과 달랐다.

이야기의 길이를 관객의 박수가 아니라, 장미의 숨으로 재는 일이었다.

마지막에 푸리나는 말했다.

“그래서 돌아왔어.”

장미는 조용히 물었다.

“나를 다시 무대에 세우려고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요?”

푸리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오늘은 그냥, 네가 쉬는 법을 물어보려고.”

장미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늦었네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늦었어요.”

“응.”

“그래도…….”

장미는 더 작게 말했다.

“오늘은 괜찮아요.”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마워.”

“아직 용서한 건 아니에요.”

“응.”

“내일 아침 인사는 제때 해주세요.”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크게 웃지는 않았다.

조용히, 정말 조용히 웃었다.

“응. 내일 같은 시간에 올게.”

장미는 말했다.

“조명은 아침에는 조금 더 밝아도 돼요.”

“응.”

“하지만 박수는 묻고 나서요.”

“응.”

“그리고 물은 너무 많이 주지 마세요.”

“응.”

“그리고…….”

푸리나는 기다렸다.

장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곁에 있어주세요.”

푸리나는 대답했다.

“응. 여기 있을게.”

그 말은 극적인 선언이 아니었다.

무대 전체를 울리는 대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별 위에서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장미 곁에 앉았다.

류트는 바닥에 놓여 있었다.

왕관도 내려놓은 채였다.

조명은 낮았고, 박수는 없었다.

그날 밤, 작은 별의 무대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이 되었다.

장미는 쉬었다.

푸리나는 떠나지 않았다.


---

시간이 흘렀다.

해가 지는 의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작은 별 위에 밤이 내려왔다.

푸리나는 장미 곁에 유리 덮개를 가져왔다.

장미가 말했다.

“그건 너무 답답해요.”

푸리나는 멈췄다.

“그럼 안 씌울까?”

“바람은 차요.”

“그럼 어떻게 할까?”

장미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열어둬요.”

푸리나는 유리 덮개를 기울여 세웠다.

바람이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지만, 직접 닿지도 않았다.

“이렇게?”

“조금만 더.”

푸리나는 각도를 조정했다.

“이렇게?”

“네. 그 정도요.”

푸리나는 손을 떼었다.

유리 덮개는 비스듬히 놓였다.

완벽하게 보호하지도 않았고, 완전히 열어두지도 않았다.

어중간했다.

하지만 장미는 조금 편안해 보였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깨달았다.

휴식은 종종 어중간한 각도를 찾는 일이었다.

완전히 보이지 않게 숨기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덮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방치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조금씩 묻고, 조금씩 조정하는 일.

그레이가 말한 것처럼.

같은 시간에 찾아갔을 때, 필요한 것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일.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이거 어렵네.”

장미는 조금 새침하게 대답했다.

“제가 쉬는 일이 그렇게 쉬울 줄 알았나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니. 이제는 안 그래.”

“다행이네요.”

“응. 다행이야.”

밤이 조금 더 깊어졌다.

작은 별의 조명탑은 꺼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낮게 빛났다.

무대가 아니라 방처럼.

관객을 부르는 빛이 아니라, 누군가 길을 잃지 않도록 남겨둔 불빛처럼.

푸리나는 그 빛을 보며, 빈 세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장미가 물었다.

“또 표지판인가요?”

“응.”

“이번엔 뭐라고 쓸 건가요?”

푸리나는 목탄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적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장미는 그것을 보았다.

“존댓말이네요.”

“응. 이건 누구에게나 걸어둘 표지판이니까.”

“나한테는요?”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너한테는 직접 물어볼게.”

장미는 만족한 듯 꽃잎을 조금 열었다.

“그게 좋겠어요.”

푸리나는 세 번째 표지판을 첫 번째, 두 번째 표지판 곁에 세웠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세 개의 표지판은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별의 무대는 그 표지판들 때문에 전보다 조금 넓어진 것 같았다.

아니.

무대가 넓어진 것이 아니라, 무대 밖의 방이 생긴 것 같았다.

푸리나는 장미 곁에 앉아 밤을 지켰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그래서 장미는 조금 더 오래 쉬었다.


---

무대가 천천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작은 별의 낮은 조명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빛 아래에서 푸리나는 잠들지 않았다.

장미도 완전히 잠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둘은 가끔 아주 작은 말을 주고받았다.

“바람 괜찮아?”

“조금 차요.”

“덮개 더 기울일까?”

“조금만요.”

“이렇게?”

“네.”

또 한참 침묵.

“푸리나.”

“응?”

“내일도 올 건가요?”

“응.”

“같은 시간에요?”

“응.”

“늦으면요?”

“늦었다고 말할게.”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 기다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박수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박수보다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혹은 극 자체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작은 왕은 장미에게 돌아왔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이번에는, 장미를 다시 무대 위에 세우기 전에 물었습니다.”

별빛이 낮게 흔들렸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으냐고.”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무대 뒤 간판이 떠올랐다.

후일담 — 막이 내린 뒤 쉬어가는 방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방 —
후일담 — 막이 내린 뒤 쉬어가는 방

—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방 —

공연이 끝난 뒤에도, 푸리나는 곧바로 객석의 불을 켜지 않았다.

작은 별은 천천히 내려왔고, 조명탑 세 개는 하나씩 꺼졌다. 장미는 더 이상 무대 중앙의 주인공처럼 빛나지 않았다. 낮은 불빛 아래, 그저 한 송이 꽃처럼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게 안심되었다.

푸리나는 장미 곁에 세워두었던 세 개의 표지판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세 문장은 모두 화려하지 않았다.

극의 제목처럼 웅장하지도 않았고, 왕명처럼 단단하지도 않았다. 박수를 부르는 문장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푸리나는 이 문장들이 자신의 어떤 칭호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죠니가 객석에서 걸어 내려왔다.

“여왕님, 그 표지판 진짜로 설치할 거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극장에?”

“극장 뒤에.”

“무대 뒤편 창고?”

“창고 아니야.”

푸리나는 조금 진지하게 말했다.

“방.”

죠니는 눈을 깜박였다.

“방?”

“막이 내린 뒤 쉬어가는 방.”

그레이가 조용히 다가왔다.

“상시 운영하실 생각이십니까?”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상시 운영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어려워졌어.”

“물, 의자, 담요, 등불, 환기, 청소, 이용 기록, 출입 관리가 필요합니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그레이, 여왕님 감동 중이잖아. 예산표를 너무 빨리 들이밀지 말자.”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감동도 관리가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너무 맞아서 싫어.”

레이튼이 책을 들고 다가왔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경계했다.

“또?”

“이 방은 극장입니까, 여관입니까?”

하융이 등불 하나를 들고 뒤따라왔다.

“쉬어가는 이가 있으면, 길 위의 작은 여관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극장 안의 여관, 혹은 여관처럼 기능하는 막간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죠니가 손을 들었다.

“이름이 길면 아무도 못 쉬어.”

푸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막이 내린 뒤 쉬어가는 방’으로 할래.”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칭은 명확합니다.”

죠니는 웃었다.

“좋네. 여왕님, 드디어 아무것도 안 하는 방을 만들었네.”

푸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방이야.”

그 말에 모두가 잠깐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틈을 농담이나 선언으로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침묵이 방의 첫 번째 가구처럼 느껴졌다.


---

방은 아주 작았다.

극장 뒤편, 원래는 여분의 커튼과 낡은 의자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푸리나는 커튼을 접어 한쪽에 치우고, 먼지를 털고, 낮은 등불을 하나 걸었다.

의자 하나.

물 한 잔.

담요 하나.

작은 탁자.

창문 옆에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두꺼운 천.

그리고 문 옆에는 세 개의 표지판.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죠니는 방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푸리나는 팔짱을 꼈다.

“너무 없나?”

“아니. 나쁘지 않아.”

죠니는 의자 등받이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는 누가 멋진 말을 하라고 재촉하지 않을 것 같거든.”

그레이는 물잔을 확인했다.

“물은 매번 새로 갈아야 합니다.”

“응.”

“담요는 주기적으로 말려야 합니다.”

“응.”

“등불은 너무 밝지 않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장미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중요해.”

레이튼은 표지판을 보며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 좋군요. 대답을 미리 정하지 않는 방이라는 뜻입니다.”

하융은 문턱을 보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도 좋겠구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다.”

그녀는 작은 나무판 하나를 더 가져와 문턱 옆에 놓았다.

신발은 벗어도 됨.

죠니가 웃었다.

“방이 점점 표지판으로 가득 차는 거 아니야?”

푸리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너무 많으면 쉬기 힘드나?”

그레이가 대답했다.

“필요한 문구만 남기는 편이 좋습니다.”

푸리나는 나무판을 들고 고민하다가, 문구를 조금 바꿨다.

신발을 벗고 싶으면, 여기 두세요.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 낫네. 명령 같지 않아서.”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아레는 조금 늦게 왔다.

검은 숄을 두른 채, 방 입구에서 조용히 멈추었다.

푸리나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

“어때?”

아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의자.

물.

담요.

낮은 등불.

표지판.

그리고 아무도 박수치지 않는 공기.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좋구나, 아이야.”

푸리나는 살짝 어깨를 폈다.

“정말?”

“그래.”

아레는 빈 의자 옆에 손을 얹었다.

“박수가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방이란다.”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레는 덧붙였다.

“웃음이 필요한 밤에는 웃게 해주렴. 하지만 이런 방도 남겨두렴. 슬픔이 신발을 벗고 앉을 자리도 있어야 하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낮은 등불을 한 번 보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 짧은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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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샤니크는 가장 마지막에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를 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조각을 알아보았다.

사막에서 예정이라고 적었던 작은 표시가 있는 지도 조각이었다.

그 옆에는 슈샤니크가 덧붙인 글씨가 있었다.

검토 필요.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거 가져왔어?”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보관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지도 보관소가 아니라?”

슈샤니크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도 보관소에 넣기에는 아직 조금…… 숨이 가쁜 조각입니다.”

그 표현이 이상하게 슈샤니크다웠다.

푸리나는 선반을 가리켰다.

“저기 둬도 돼.”

슈샤니크는 선반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는 지도 조각을 바로 내려놓지 않았다.

마치 그것을 놓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것처럼.

푸리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천천히 지도 조각을 접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찢어진 부분이 더 갈라지지 않도록.

그리고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잊는 것도 아닙니다.”

“응.”

“다만 오늘 밤은 펼쳐두지 않겠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도 쉬는 거겠지.”

슈샤니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아주 희미하게 말했다.

“아마도요.”

그때였다.

작은 노크 소리 후, 잠시 뒤 방의 문이 아주 조용히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배우도 아니고, 관객도 아니고, 왕도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여관 주인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의자 하나.

물 한 잔.

담요 하나.

낮은 등불 하나.

문턱 옆의 신발 자리.

그리고 선반 위의 접힌 지도.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관좌?”

여관의 성좌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문이 열려 있기에 들렀습니다.”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신이 방문할 때도 노크는 하는구나.”

여관좌는 그 말을 듣고도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남의 방에 들어올 때는, 신도 예외가 되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아직 제대로 된 방은 아니야. 의자도 하나뿐이고, 물도 한 잔이고, 담요도 그냥 남는 걸 가져온 거고…….”

여관좌는 물잔 옆에 손을 얹었다.

“좋은 방을 마련하셨군요.”

푸리나는 멈칫했다.

“그거 칭찬이야?”

“예.”

여관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여관에서는, 그런 말을 칭찬이라고 부릅니다.”

푸리나는 괜히 왕관을 만지려다, 지금 왕관을 쓰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손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 방 하나뿐인데.”

“모든 여관은 처음부터 큰 간판을 달지는 않습니다.”

여관좌는 낮은 등불을 보았다.

“처음에는 보통 이런 것에서 시작하지요. 의자 하나. 식지 않은 물. 너무 밝지 않은 불. 그리고 손님이 짐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허락.”

그는 문 옆의 표지판을 읽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전하께서는 늘 손님을 무대 위로 안내하는 법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얼어붙은 몸을 일으키는 박수도 있고, 길 잃은 사람에게 다시 자기 이름을 들려주는 노래도 있습니다. 그런 밤에는 전하의 극장이 훌륭한 등불이 되지요.”

여관좌는 이번에는 의자를 보았다.

“오늘은 그 등불이 조금 낮아졌군요.”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여관좌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손님이, 신발을 벗을 자리를 보셨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답이다”라는 평가가 아니었다.

“이제 완성되었다”는 선언도 아니었다.

그저 여관 주인이 새로 놓인 의자를 보고, 그 의자에 손님이 앉을 수 있겠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따뜻했다.

여관좌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은 성장입니다, 작은 여관지기님.”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나 여왕인데.”

“예.”

여관좌는 잔잔히 웃었다.

“그래서 더욱, 좋은 여관지기가 되실 수 있겠지요.”

죠니가 낮게 웃었다.

그레이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레이튼은 무언가 적으려다, 이번에는 적지 않기로 한 듯 펜을 닫았다.

하융은 낮은 등불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레는 아무 말 없이 푸리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조금 슬펐고, 조금 자랑스러웠다.


---

여관좌는 선반 위의 지도 조각을 보았다.

“먼 길의 조각이군요.”

슈샤니크는 몸을 조금 굳혔다.

“아직 내려놓은 것은 아닙니다.”

“예.”

여관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입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말했다.

“잠시 보관하는 것뿐입니다.”

“여관은 대개 그런 곳입니다.”

여관좌는 접힌 지도 곁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았다.

“버리지 못한 짐을, 버리라고 재촉하지 않는 곳. 하지만 밤새 등에 지고 있으라고도 하지 않는 곳.”

슈샤니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관좌는 낮게 이어 말했다.

“지도도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밤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접힌다고 해서 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슈샤니크의 손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

“돌아갈 수 없는 지도라면요?”

여관좌는 그녀를 보았다.

그 시선은 심판자의 것이 아니었다.

프런트 너머에서 늦은 손님의 얼굴을 살피는 여관 주인의 눈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앉을 의자를 드려야겠지요.”

슈샤니크는 숨을 삼켰다.

여관좌는 조용히 말했다.

“아직 돌아가지 못한 손님에게, 객실의 열쇠를 억지로 쥐여드리지는 않습니다. 먼저 물을 드리고, 방의 밝기를 묻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장미에게 물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슈샤니크도 그 말을 떠올렸는지, 선반 위의 접힌 지도를 보았다.

“그 조각을 여기 두어도 되겠습니까?”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응. 물론이지.”

여관좌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오늘 밤 그 지도는 손님입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지도도 손님이 되는구나.”

하융이 대답했다.

“짐도 오래 길을 걸으면 손님이 되는 법이오.”

슈샤니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여전히 치유된 사람이 아니었다.

지도는 여전히 찢어져 있었다.

돌아가지 못한 곳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날 밤, 그 조각은 펼쳐져 있지 않았다.

누구도 그것을 보고 보고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 위의 폐허를 해석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잠시.


---

여관좌는 물잔을 들었다.

비어 있던 잔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물을 조금 더 채웠다.

“손님이 몇 분 늘었으니, 물은 조금 넉넉한 편이 좋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그럼 이 방도 여관이야?”

여관좌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방을 둘러보았다.

벽은 아직 낡았고, 의자는 하나뿐이고, 담요는 맞지 않는 천으로 접혀 있었다. 문패도 임시였고, 물잔도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문은 열려 있었다.

불은 너무 밝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앉은 사람에게 박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아직은 방 하나입니다.”

푸리나는 살짝 입을 삐죽였다.

“역시 그렇지?”

“하지만 방 하나가 제대로 쉬게 할 수 있다면, 여관의 첫 문턱으로는 충분합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관좌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막이 내린 뒤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면, 극장도 잠시 여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방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자신의 극장을 떠올렸다.

환한 무대.

박수.

대사.

조명.

그리고 이제, 그 뒤에 생긴 작은 방.

모든 이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극장.

그리고 주인공이 무대에서 내려온 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방.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아직 잘 못할 것 같아.”

여관좌는 미소 지었다.

“잘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먼저 문을 닫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시지요.”

“문을 닫지 않는 것.”

“예. 그리고 물이 비어 있으면 채우고, 불이 너무 밝으면 낮추고, 신발이 젖어 있으면 말릴 자리를 내어주는 것.”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네.”

“대부분의 휴식은, 보이지 않는 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 점은 사실입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보았다.

“너 지금 엄청 힘을 얻은 표정이야.”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그런 표정을 지었습니까?”

죠니가 웃었다.

“응. 행정이 신학으로 인정받은 표정이었어.”

여관좌는 잔잔히 웃었다.

“행정도 때로는 좋은 침구가 됩니다. 접는 사람이 힘들 뿐이지요.”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이번 웃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방 안에서 울려도, 누구를 무대 위로 밀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방 안의 공기를 조금 따뜻하게 했다.


---

잠시 뒤, 여관좌는 문가에 섰다.

“이만 가시는 거야?”

푸리나가 물었다.

“예. 이 방은 오래 머물러 평가할 곳이 아니라, 필요할 때 들르는 곳이니까요.”

“또 올 거야?”

“문이 열려 있고, 길이 이어진다면.”

여관좌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전하께서 물잔을 비워두지 않는다면.”

푸리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레이랑 같이 관리할게.”

그레이가 곧바로 말했다.

“관리표를 만들겠습니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역시 만들어지는구나, 관리표.”

푸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관리표 이름은 내가 정할 거야.”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합니다.”

여관좌는 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 그는 방 안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오늘 밤 이 방의 등불은 충분합니다.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군요.”

그 말은 푸리나에게 다시 칭찬처럼 들렸다.

이번에는 그녀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였다.

“다녀가줘서 고마워.”

여관좌는 부드럽게 답했다.

“좋은 손님이었습니다.”

“내가?”

“예.”

그는 미소 지었다.

“방을 만든 사람도, 때로는 그 방의 첫 손님이 되어야 하니까요.”

푸리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여관좌는 조용히 문밖으로 나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살짝 열려 있었다.

길이 아주 조금 남아 있도록.


---

그날 밤, 극장 뒤의 작은 방에는 박수가 없었다.

조명도 없었다.

누구도 주인공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죠니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잠깐 눈을 붙였다.

그레이는 관리표 첫 줄에 날짜를 적다가, 푸리나의 눈치를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하나 접어 책갈피로 꽂아두었다.

하융은 문가의 등불을 조금 낮췄다.

아레는 빈 의자 옆에 물잔을 하나 더 놓고,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슈샤니크는 선반 위에 접힌 지도를 보았다.

그 지도는 여전히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펼쳐져 있지 않았다.

그 밤만큼은, 아무도 그 조각에게 길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의자 하나.

물잔들.

담요.

낮은 등불.

열린 문.

그리고 세 개의 표지판.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푸리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그 말은 대사처럼 울리지 않았다.

그저 방 안에 놓였다.

물잔 옆에.

접힌 지도 곁에.

아직 식지 않은 등불 아래에.

그리고 그 밤, 오래 접혀 있던 지도 한 장이
조금 덜 아파 보였다.
《삼총사와 하나 많은 맹세》

—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

프롤로그 — 삼총사는 원래 셋이어야 합니다

푸리나 헤툼은 검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검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대 위의 검은 좋았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에서 서로의 망토를 스치고, 관객의 숨을 멎게 할 만큼 가까이 부딪히되, 실제로는 누구도 죽이지 않는 검.

그런 검은 훌륭했다.

문제는 무대 밖의 검이었다.

무대 밖의 검은 사람을 정말로 베었고, 왕국의 비용표를 망쳤고, 치료 인력의 동선을 꼬이게 만들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푸리나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덜 낭만적이었다.

그러니 푸리나는 오늘, 최대한 무대 위의 검만 쓰기로 했다.

“오늘의 극은 우정과 결투와 맹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무대 중앙에서 외쳤다.

뒤편에는 거대한 푸른 커튼이 걸려 있었다. 커튼 위에는 은실로 수놓은 문장이 빛났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그 아래에는 조금 작은 글씨가 있었다.

※ 실제 결투 금지. 검 끝은 둥글게 처리할 것.

소피가 그 문장을 올려다보았다.

“안전 규정이 구호보다 길어 보입니다.”

푸리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낭만은 안전해야 오래가니까.”

“그건 좋은 말이긴 한데요.”

소피는 손에 든 깃털 달린 모자를 조금 고쳐 썼다. 오늘 그녀는 신입 총사, 그러니까 달타냥 역할이었다. 아직 어깨에는 망토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고, 허리의 검도 조금 삐뚤었다.

그 어색함이 오히려 잘 어울렸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좋아. 아주 훌륭해. 오늘의 소피는 지방에서 막 올라온, 정의감과 오해와 과잉 의욕으로 가득한 신입 총사야.”

소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해도 필수인가요?”

“삼총사에는 필수야.”

“왜요?”

“오해가 없으면 결투 약속이 안 잡히거든.”

소피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애초에 결투 약속을 안 잡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무대 옆에서 아스트리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결투는 가능하면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부상 위험도 높고, 회복에 시간도 들고요.”

푸리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잠깐! 아직 결투를 피하기에는 너무 이른 장면이야!”

아스트리트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결투 전에 치료 인력의 위치를 확인하겠습니다.”

“아스트리트!”

“낭만도 출혈량을 줄이면 오래갑니다.”

소피는 작게 웃을 뻔했다가 참았다.

그때 레플리카가 무대 뒤편에서 걸어 나왔다.

오늘의 레플리카는 총사 망토를 입고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여전히 성실하고 단단했다. 무대 의상이 조금 화려해졌을 뿐, 그녀가 가진 고통교적 무게와 정직함은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소피의 검집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그 자세로 달리면 적보다 바닥을 먼저 만난다.”

소피가 굳었다.

“그 정도인가요?”

“비난이 아니다. 예방이다.”

레플리카는 곧장 소피의 허리끈과 검집 위치를 살폈다.

“검집이 몸에서 너무 뜬다. 뛰면 손잡이가 망토에 걸릴 것이다. 긴장한 손은 검보다 먼저 자신을 다치게 한다. 숨부터 맞춰라.”

소피는 어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렇게요?”

“조금 더 천천히.”

“이렇게요?”

“좋다. 처음부터 전부 증명하려 들 필요는 없다. 오래 서려면 첫 걸음에서 자신을 다 쓰지 않는 편이 낫다.”

푸리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늘의 포르토스가 너무 상냥해서 결투극이 시작되기 전에 재활극이 되고 있어…….”

아스트리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재활극도 가치 있습니다.”

“그건 알아! 그런데 오늘 제목이 삼총사잖아!”

소피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푸리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응, 소피?”

“삼총사라면 세 명이어야 하지 않나요?”

무대 위가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아주 당당하게 웃었다.

“좋은 질문이야. 문학적으로 삼총사는 넷까지 허용돼.”

소피는 손가락으로 인원을 세었다.

“저, 아스트리트 경, 레플리카 경, 그리고 아직 안 나오신 호흐마이스터까지 하면 넷입니다.”

“봐! 완벽하지?”

소피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런데 푸리나 님까지 세면 다섯입니다.”

“나는 연출자니까 숫자에 안 들어가!”

“무대 위에 계신데요.”

“연출자는 어디에나 있어!”

그때 무대 뒤, 정확히는 무대 옆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씀에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예의 바르며, 이상하게 이미 세 수쯤 앞을 보고 있는 듯했다.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호흐마이스터! 드디어 나오셨군요!”

작은 방의 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목소리만 들렸다.

“아직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럼 왜 대답은 하시는 거야?”

“초대를 받았으니 응답은 해야 예의겠지요.”

소피가 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계신 건가요?”

“예. 무대 뒤 대기실이 예상보다 아늑합니다.”

푸리나는 빠르게 걸어가 문 앞에 섰다.

“호흐마이스터, 오늘은 삼총사 극이야. 방에 틀어박힌 총사는 조금 곤란해.”

문 너머에서 정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가능하면 원격 참석으로 처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푸리나는 멈칫했다.

“총사극에 원격 참석은 없어!”

“기사단 회의에는 있습니다.”

아스트리트가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정확히는 어떤 형태의 원격 참석인가요?”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가, 아주 정중하게 설명했다.

“현재 저는 프로이센의 란트마이스터와 전선 보급 문제를 논의하고, 리보니아의 란트마이스터와 국경 정찰 기록을 확인하며, 독일 관구의 란트마이스터로부터 ‘방에서 나오셔야 합니다’라는 합리적이고도 잔인한 권고를 듣고 있습니다.”

소피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여기에는 안 계신 것 아닌가요?”

“예.”

호흐마이스터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그래서 마음은 매우 편합니다.”

푸리나는 문을 두드렸다.

“그게 자랑이야?”

“아닙니다. 보고입니다.”

레플리카가 문을 보며 말했다.

“계속 앉아 있으면 몸이 먼저 항의한다. 몸의 항의는 대개 늦게 들을수록 오래 간다.”

문 너머에서 아주 미세한 침묵이 흘렀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푸리나는 승기를 잡은 듯 말했다.

“그럼 나오세요!”

“하지만 갑옷을 입어도 되겠습니까?”

“무대 의상 입으셔야 해!”

“갑옷이 더 편합니다.”

소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옷이 더 편하신가요?”

“예. 사교복보다 방어력이 높으니까요.”

푸리나는 중얼거렸다.

“이 사람, 흑막 기사단장인데 대기실 니트야…….”

문 너머에서 호흐마이스터가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들립니다, 전하.”

“들으라고 한 말이야!”

“그렇다면 잘 들었습니다.”

아스트리트가 작게 웃었다.

레플리카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래도 나오는 편이 좋다. 오늘은 방어력보다 약속의 자리가 먼저다.”

문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은 보통의 망설임이 아니라, 전략회의 세 개와 사교적 피로와 무대 공포와 기사단장의 품위가 서로 충돌하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호흐마이스터가 나왔다.

검은 기사단 예복 위에 절제된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어쩐지 예복 자체가 갑옷처럼 보였다. 눈빛은 차분했고, 자세는 예의 바르며,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부드러움 뒤에는 어두운 작전실과 펼쳐진 지도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들이 보였다.

호흐마이스터는 푸리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늦어 죄송합니다. 방이 생각보다 붙잡는 힘이 강했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그건 방 탓이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피는 호흐마이스터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삼총사 역할을 하시는 건가요?”

호흐마이스터는 소피를 보았다.

“그렇게 배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방에 계셨잖아요.”

“총사가 반드시 뛰어다니는 직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끼어들었다.

“뛰어다녀야 해!”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예의 바르게 반박했다.

“그렇다면 오늘 제 해석은 수정이 필요하겠군요.”

소피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삼총사는 몇 명이고, 뛰어다녀야 하는지 아닌지, 원격 참석이 가능한지 아닌지…… 처음부터 너무 어렵습니다.”

아스트리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려우면 천천히 확인하면 돼요.”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숨을 쪼개듯 배워라. 그러면 덜 아프다.”

호흐마이스터가 소피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소피 양, 맹세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맹세가 깨졌을 때 누가 남아 있느냐입니다.”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좋아! 멋진 대사!”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 그 대사는 5막에 넣자.”

“지금은 몇 막입니까?”

“프롤로그.”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제가 너무 빨리 무거워졌군요.”

푸리나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죄송합니다. 농담의 갑주를 너무 무겁게 받았습니다.”

소피는 그 말을 듣고 결국 웃었다.

아스트리트도 웃었다.

레플리카는 웃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푸리나는 만족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출발은 좋아.”

“정말인가요?” 소피가 물었다.

“응. 삼총사에서 중요한 건 처음에 조금 엉망이어야 한다는 거야.”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엉망인 출발을 전제로 하는 작전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서 이건 작전이 아니라 극이야.”

“그렇다면 이해했습니다.”

“정말?”

“절반 정도는요.”

“좋아. 절반이면 충분해!”


---

무대 중앙에는 긴 탁자가 놓였다.

탁자 위에는 푸리나가 준비한 물건이 있었다.

세 갈래로 나뉜 리본.

하얀색, 붉은색, 금색.

하얀 리본은 기사도의 서약.

붉은 리본은 고통과 희생.

금색 리본은 왕도와 새벽.

푸리나는 리본을 들어 올렸다.

“이것이 오늘 극의 핵심 소품, 맹세의 리본입니다.”

소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예쁘네요.”

“그렇지?”

“그런데 삼총사인데 리본은 세 갈래고, 사람은 네 명이고, 연출자까지 포함하면 다섯이고, 원격 참석 논란까지 포함하면 더 복잡한데요.”

푸리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서 좋은 거야!”

“왜요?”

“맹세는 원래 묶기 전까지 복잡하거든.”

이 말에는 모두가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자신이 방금 꽤 좋은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좋았지?”

아스트리트가 미소 지었다.

“네. 좋았습니다.”

레플리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다. 묶는다는 것은 당기는 일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게 힘을 나누는 일이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정중하게 말했다.

“다만 묶은 뒤에도 복잡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게 될 뿐이지요.”

푸리나는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좋은 대사를 늘 한 번 더 무겁게 만들어.”

“직업병입니다.”

소피는 리본을 보며 말했다.

“이 리본을 묶고 구호를 외치는 건가요?”

“맞아.”

푸리나는 리본을 다시 탁자 위에 놓았다.

“하이라이트에서 모두가 손을 맞잡고 외치는 거야.”

그녀는 망토를 펼치며 외쳤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소피가 조금 어색하게 따라 했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말했다.

“그 하나의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레플리카는 말했다.

“그 하나의 고통이 혼자 남지 않도록.”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리본을 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 하나를 위해 모두를 희생시켰다고 속이지 않도록.”

푸리나는 멈췄다.

“아직 연습인데 벌써 마지막 장면 같아졌어.”

소피는 리본을 보며 조금 작게 말했다.

“그런데…… 하나는 누구죠?”

그 질문에 모두가 잠시 말이 없어졌다.

푸리나는 대답하려 했다.

원래라면 “그건 극이 진행되면서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흐마이스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이 오늘의 극을 무사히 끝내줄지도 모르겠군요.”

소피가 그녀를 보았다.

“왜요?”

“대부분의 맹세는 ‘하나’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호흐마이스터의 목소리는 예의 바르고 조용했다.

하지만 무대 위의 공기를 한 겹 낮췄다.

푸리나는 잠시 그 말을 들었다.

그러다 일부러 밝게 손뼉을 쳤다.

“좋아! 그 질문은 나중에 다시 받겠습니다. 지금은 첫 장면!”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신입 총사로 등장하는 장면인가요?”

“맞아. 그리고 세 선배 총사와 각각 오해로 시비가 붙고, 결투 약속을 잡는 장면!”

아스트리트가 바로 말했다.

“결투는 가능하면—”

푸리나는 빠르게 말했다.

“모의 결투!”

레플리카가 물었다.

“보호구는?”

“있어!”

호흐마이스터가 덧붙였다.

“결투장이 실내라면 퇴로와 관중 통제도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두 손을 들었다.

“있어! 다 있어! 그레이가 없는데도 안전 규정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

소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안전한 편이 좋습니다.”

푸리나는 소피를 보았다.

“소피, 너는 달타냥이야. 조금 더 무모해야 해.”

“무모한 척은 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거면 충분해.”

소피는 검을 조금 어색하게 뽑았다.

검 끝은 둥글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시작하자.”

그때 무대 뒤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발소리.

가벼운 숨소리.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

“저기…….”

모두가 돌아보았다.

무대 뒤편 커튼 사이로 어린 시종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무대 위에 설 나이는 아닌 듯했다. 손에는 낡은 모자가 들려 있었고, 눈은 리본이 놓인 탁자 쪽을 향하고 있었다.

푸리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시종은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리본을…… 확인하라고 해서요.”

“리본?”

푸리나는 탁자를 돌아보았다.

하얀색, 붉은색, 금색의 맹세 리본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괜찮아. 아직 있어.”

시종은 이상하게 안심한 듯하면서도, 조금 아쉬운 듯한 얼굴을 했다.

소피는 그 표정을 보았다.

호흐마이스터도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시종의 손목에 감긴 낡은 붕대를 보았다.

레플리카는 그 아이가 한쪽 다리에 체중을 덜 싣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푸리나는 아직 그것을 전부 보지는 못했다.

다만 극의 흐름에 맞춰 환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 리본은 마지막 하이라이트에 쓸 거니까!”

시종은 고개를 숙였다.

“네.”

그 아이는 물러났다.

커튼이 닫혔다.

잠깐의 침묵.

소피가 낮게 물었다.

“저 아이도 극에 나오나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오늘은 아니야. 무대 뒤 일을 돕는 아이일 거야.”

소피는 커튼 쪽을 보았다.

“그렇군요.”

호흐마이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맹세의 리본을 다시 보았다.

하얀색.

붉은색.

금색.

세 갈래의 리본은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아직은.

푸리나는 분위기를 다시 밝히려 손을 들었다.

“좋아! 그러면 진짜로 시작합니다!”

조명이 올라갔다.

소피가 모자를 눌러쓰고 무대 한쪽으로 달려갔다.

아스트리트는 치료 도구 위치를 확인했고, 레플리카는 보호구 끈을 다시 묶었고, 호흐마이스터는 무대 위에 서면서도 어쩐지 마음의 절반은 아직 자기 방에 두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외쳤다.

“첫 번째 막!”

커튼 위 문장이 빛났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그리고 그 아래, 아무도 아직 읽지 못한 것처럼 작은 글씨가 생겼다.

그 하나가 누구인지 확인할 것.

막이 올랐다.

1막 — 세 번의 결투 약속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낭만은 안전 규정을 무시하지 못한다 —
좋아. 라이자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꿈속에서 만난 은빛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려는 성은의 성인”**이야.

소피아가 무너진 세계를 다시 정의하는 연금술사라면, 라이자는 버려진 것과 태어나지 못한 것들에게 ‘현실에 있어도 되는 몸’을 주려는 포옹의 창조자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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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자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라이자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꿈속에서 만난 은의 정령과, 깨어난 뒤 머리에 남아 있던 작은 은꽃이다.

그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라이자는 꿈속에서 은의 정령과 친구가 되었다.
그곳에는 현실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디어, 버려진 가능성, 이름 붙지 못한 생명, 아직 몸을 얻지 못한 따뜻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이 사라진 줄 알았지만 머리에는 작은 은꽃이 남아 있었다.

그 꽃은 라이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증거였다.

“꿈속의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이 아니었다.”

라이자의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현실이 아니라고 여겨진 것들이, 사실은 현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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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라이자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현실과 꿈이 명확히 갈라져 있다는 믿음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꿈은 꿈이다.
상상은 상상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다.
만들어진 존재는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다.
태어나지 못한 것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라이자는 그 경계를 잃었다.

꿈에서 만난 친구는 정말 친구였다.
현실에 없는 이야기도 아플 수 있었다.
태어나지 못한 존재도 자리를 원할 수 있었다.
버려진 가능성도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즉 라이자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만이 진짜다”라는 믿음.

이 상실이 라이자를 위험하게도 만들고, 아름답게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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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라이자의 최대 업적은 꿈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꿈을 그냥 추억으로 두지 않았다.
은의 정령을 환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머리에 남은 은꽃을 단순한 기념품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했다.

꿈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

성은, 은인, 은의 심장, 은의 군단, 성은의 혈맥,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같은 라이자의 핵심은 여기서 나온다.

라이자의 업적은 이것이다.

현실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것들에게,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몸과 이름과 품을 주려 한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라이자는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
버려진 것, 만들어진 것, 태어나지 못한 것, 실패작, 인조 생명, 꿈의 잔해 같은 것들을 그냥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 못한다.

그 대가는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으려는 부담이다.

그녀는 품이 넓다.
하지만 모든 것을 품으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쉬어야 하는지 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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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라이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안아주고 몸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버려진 것들은 모두 현실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믿음은 라이자의 가장 따뜻한 부분이다.

그녀는 버려진 것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쓸모없다고 여겨진 것들을 다시 본다.
태어나지 못한 것들에게 태어날 권리를 주고 싶어 한다.
꿈속 이야기가 현실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현실에 존재하게 되는 것 자체가 곧 구원이라고 믿을 위험이다.

현실에 몸을 얻는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고통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현실이 되면 책임도 생긴다.
태어난 존재는 상처받을 수 있다.
품에 안긴 존재도 언젠가는 자기 발로 걸어가야 한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존재하게 해주고,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



라이자는 이 믿음 때문에 따뜻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존재의 탄생과 책임을 자기 품 안에 두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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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라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에게도 안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는 것.
실패작이라고 버려지는 것.
꿈이니까 의미 없다고 말해지는 것.
만들어진 존재라서 영혼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
태어나지 못한 이야기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것.

라이자는 그런 것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믿는다.

> “누군가가 품어주고, 이름을 주고, 몸을 주면, 버려진 이야기들도 현실에 설 수 있다.”



라이자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포옹과 구현이다.

그냥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냥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주는 것.
그냥 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 현실에 닿는 통로를 만드는 것.

즉 라이자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버려진 것과 태어나지 못한 것들이 ‘없던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고 싶다. 그들에게 몸과 이름과 품을 주어, 현실에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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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라이자는 먼저 안아준다.

그 위협이 괴물이라 해도, 버려진 존재라면 먼저 그 근원을 본다.

왜 버려졌는가.
왜 만들어졌는가.
무엇을 원했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누구에게 안기고 싶었는가.

라이자의 첫 대응은 공격이나 분석이 아니라 존재 인정이다.

“아팠구나.”
“버려졌구나.”
“그래도 네가 없었던 건 아니야.”

이것이 라이자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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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라이자는 이름과 형태를 준다.

무정형의 꿈, 버려진 생명, 실패한 조각, 은빛 잔향 같은 것들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성은으로 몸을 만들고, 은의 심장으로 중심을 주며, 은의 혈맥으로 흐름을 만든다.

이 단계에서 라이자는 단순히 품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자가 된다.

그녀는 말한다.

“그럼 네가 설 수 있는 몸을 만들자.”

즉 두 번째 대응은 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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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라이자는 자기 품을 더 넓힌다.

하나를 안아도 안 되면 둘을 안는다.
둘로 안 되면 군단을 만든다.
은인, 성은의 혈맥, 은의 군단 같은 방향은 여기에서 나온다.

라이자는 버려진 것들을 모아, 서로를 지탱할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려 한다.

단순히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가 아니라,

“너희가 서로에게 품이 되어줄 수 있게 하겠다.”

이 단계에서 라이자의 힘은 개인적 포옹에서 사회적 포옹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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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품으로 내어준다.

라이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상대가 실패작이라 불려도, 괴물이라 불려도, 현실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여겨져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손을 뻗는다.

하지만 이 단계가 가장 위험하다.

그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도 안으려 할 수 있다.
독이 있는 존재, 아직 타인을 해칠 수밖에 없는 존재, 존재 자체가 주변을 망가뜨리는 존재까지 품으려 할 수 있다.

라이자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그래도 내가 먼저 안아줄게. 적어도 너를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않을게.”



아름답지만, 매우 위험한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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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라이자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것을 안아주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버려진 존재를 살린다.
실패작에게 존엄을 준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연결한다.
만들어진 존재에게도 “있어도 된다”는 자리를 준다.
상처 입은 자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않게 한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라이자는 거절해야 할 때도 안으려 할 수 있다.
상대가 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품으려 할 수 있다.
위험한 존재를 공동체 안으로 들이며, 다른 이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안길 곳을 잃는다.

라이자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경계선이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 신앙에서도 중요한 질문이 있다.

“모든 것을 안아주는 자는, 자신은 누구에게 안기는가?”

라이자에게 필요한 성장은 이것이다.

포옹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옹에도 문과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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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라이자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버려진 것들에게 몸을 줄 수는 있어도, 그 존재가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지는 않겠다.”



이것이 라이자의 양심이다.

라이자는 창조자다.
성은으로 몸을 만들 수 있다.
은의 심장과 혈맥을 줄 수 있다.
태어나지 못한 이야기를 현실에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창조했다는 이유로 소유할 수는 없다.

그녀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자기가 안아준 존재를 자기 품 안에 영원히 가두는 것이다.

버려진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포옹이다.
하지만 포옹의 끝에는 언젠가 놓아주는 순간도 있어야 한다.

라이자가 선을 넘으면 이렇게 된다.

“내가 너를 만들었으니,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해.”
“내가 너를 안아줬으니, 네 행복은 내가 정해.”
“세상은 위험하니, 내 품 밖으로 나가지 마.”

그 순간 포옹은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 된다.

그래서 라이자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너에게 몸과 이름과 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어디로 걸어갈지는 네가 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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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라이자는 꿈속에서 만난 은빛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고, 버려진 것들에게 몸과 이름과 품을 주려는 성은의 성인이다.

그녀의 거짓말은 **“존재하게 해주고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태어나지 못한 것, 버려진 것, 만들어진 존재들이 ‘없던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안아주고, 이름과 형태를 주고, 공동체로 엮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품으로 내어주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자기가 몸을 주고 안아준 존재라도, 그 존재의 자유와 삶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레플리카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도, 고통이 사람을 부수는 방식만큼은 줄이려는 차르”**야.

알렉산드리나가 고통과 결핍을 새벽으로 향하는 수행으로 바꾸는 차르라면, 레플리카는 고통받는 자에게 먼저 ‘더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정통 고통교의 차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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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플리카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레플리카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자신이 고통의 대상으로 다루어졌던 순간이다.

그녀는 사람으로 존중받기보다, 실험체나 도구, 실패작, 혹은 “고통을 견디는 존재”로 취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는 그녀의 고통을 필요하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녀가 버티는 모습을 신앙이나 실험, 대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누군가는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했다.
누군가는 “이 고통은 너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레플리카의 몸과 마음에 남은 기억은 훨씬 단순하다.

아팠다.

그리고 그 고통이 언제나 사람을 성장시키지는 않았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비틀어놓는다.
어떤 고통은 견딘다고 해서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상처로 남는다.

레플리카의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고통은 신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정작 아픈 사람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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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레플리카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고통에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다.

정통 고통교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통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이 마주하고 견디고 이해하며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플리카는 안다.

모든 고통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상처가 깨달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련이 사람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고통은 너무 크다.
어떤 고통은 너무 오래 지속된다.
어떤 고통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사람을 망가뜨린다.

레플리카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고통은 견디면 반드시 의미가 된다”는 믿음.

그녀는 고통의 성좌를 믿지만, 고통 자체를 숭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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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레플리카의 최대 업적은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신앙으로 바꾼 것이다.

그녀는 아팠다.
상처 입었다.
흑진과 흑완, 검은 성역 같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힘으로 타인을 더 아프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모서리를 깎는다.
비명이 사람을 찢기 전에 낮춘다.
병사가 마지막으로 방패를 들 수 있을 만큼만 고통을 늦춘다.
아픈 사람에게 “더 참아라”가 아니라 “이제 조금 덜 아파도 된다”고 말한다.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고통받은 사람이, 고통을 강요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을 줄이는 자가 된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레플리카는 자신의 고통을 너무 오래 참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남의 고통을 줄이려 하면서도, 자기 고통은 여전히 조용히 삼킬 수 있다.
타인에게는 “무리하지 마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계속 무리할 수 있다.

그 대가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감각의 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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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레플리카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조금 더 아프면,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덜 아플 수 있다.”



이 믿음은 레플리카의 선함이자 위험이다.

그녀는 고통을 줄이고 싶어 한다.
흑진을 펼치고, 거믄하늘을 열고, 괴이의 흑완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붙잡는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자기 자신을 고통의 완충재로 쓰는 데 너무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고통을 숭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만큼은 너무 쉽게 비용으로 계산할 수 있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나는 이미 아파본 사람이니까, 조금 더 아파도 괜찮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아파본 사람이라고 해서 더 아파도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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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레플리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이 신앙, 대의, 성장, 왕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녀는 고통이 삶에서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말이 “그러니 더 고통받아도 된다”는 허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말들이다.

“이 고통은 필요하다.”
“참으면 강해진다.”
“고통받는 것이 신앙이다.”
“왕국을 위해 더 견뎌라.”
“네가 아픈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레플리카는 그런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녀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고통의 감소와 한계의 인정이다.

아픈 사람은 먼저 덜 아파야 한다.
버티기 전에 쉬어야 한다.
신앙은 삶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
고통은 성장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강요된 고통은 폭력이다.

즉 레플리카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고통이 사람을 찢기 전에, 그 날카로운 모서리만큼은 깎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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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레플리카는 먼저 고통을 낮춘다.

그녀는 문제 앞에서 “누가 이겼는가”보다 먼저 “누가 얼마나 아픈가”를 본다.

전장이라면 병사들의 비명.
궁정이라면 짓눌린 사람의 침묵.
종교 논쟁이라면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고통.
내전이라면 백성에게 돌아가는 피해.

레플리카의 첫 대응은 공격이 아니라 완화다.

흑진이 깔린다.
비명이 조금 낮아진다.
통증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사람을 찢는 속도가 늦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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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레플리카는 막아선다.

고통을 줄이는 것만으로 부족하면, 그녀는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 앞에 선다.

괴이의 흑완으로 공격을 받아낸다.
검은 성역으로 아군을 감싼다.
척추교적 고통 숭배나 고문성 신술, 공포 유발, 통증 증폭을 억누른다.

이때 레플리카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녀의 두 번째 대응은 보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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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레플리카는 고통의 의미를 반박한다.

상대가 고통을 신성화한다면, 레플리카는 그 신학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고통받았다고 해서, 남을 고통스럽게 할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상처는 신앙의 증표가 아니다.”
“신은 사람을 부수기 위해 고통을 준 것이 아니다.”
“버티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 레플리카는 단순한 힐러가 아니라 정통 고통교의 해석자가 된다.

그녀는 고통을 이해하지만, 고통을 숭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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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신이 고통을 붙잡는다.

레플리카는 최후의 순간, 남에게 향하는 고통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 할 수 있다.

흑완으로 받아내고, 흑진으로 흩고, 거믄하늘 아래에서 자신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위험한 전략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는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은 마지막까지 버티려 한다.

레플리카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그 고통이 반드시 누군가에게 닿아야 한다면, 나에게 오게 하겠다.”



아름답지만, 그녀의 왜곡과 가장 가까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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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레플리카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자기 자신을 고통의 완충재로 쓰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사람을 살린다.
전장을 버티게 한다.
공포와 고통의 신술을 약화한다.
피해자가 더 무너지기 전에 시간을 벌어준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레플리카는 자기 고통을 무시한다.
자기가 무너지는 것을 “필요한 비용”으로 처리한다.
고통을 줄이려는 사람이 스스로 고통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나 아픈지 모르게 된다.

레플리카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자기 자신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감각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고통을 덜어주는 자의 고통은 누가 덜어주는가?”

레플리카의 성장은 고통받는 이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아프다. 그러니 나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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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레플리카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고통을 이해하지만, 고통을 선하다고 부르지는 않겠다.”



이것이 레플리카의 양심이다.

그녀는 고통의 성좌를 믿는다.
고통교의 차르다.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 자체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녀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만약 레플리카가 선을 넘으면 이렇게 된다.

“이 고통은 필요하다.”
“더 아파야 더 강해진다.”
“고통받는 것이 신앙이다.”
“네가 무너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 순간 레플리카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고통의 가해자가 된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고통은 마주할 수 있다. 견딜 수도 있다.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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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레플리카는 고통을 숭배하지 않고, 고통받는 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그 모서리를 깎아내는 정통 고통교의 차르다.

그녀의 거짓말은 **“내가 조금 더 아프면,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덜 아플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고통이 신앙, 대의, 성장, 왕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사람을 부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고통을 낮추고, 막아서고, 고통의 의미를 반박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고통을 붙잡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고통을 이해하되, 고통 자체를 선하거나 신성한 것으로 정당화하지 않는 것이다.
《은빛 피노키오》

프롤로그 — 가족이라고 적기에는 칸이 너무 좁았다

—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결말이면 안 해 —

라이자의 작업실에는 늘 은빛 냄새가 났다.

정확히 말하면, 은에는 냄새가 없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라이자의 작업실에 들어올 때마다 그렇게 느꼈다.

차가운 금속.
막 식은 용광로.
부드러운 천 위에 놓인 작은 부품들.
반쯤 열린 공구함.
벽면에 기대어 선 은빛 골격.
그리고 누군가의 손끝이 너무 오래 닿아, 금속이라기보다 체온을 기억하게 된 것들.

“음.”

푸리나는 문 앞에서 팔짱을 꼈다.

“오늘도 여기는 반짝이고, 차갑고, 위험하고, 비싸 보이네.”

그레이는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전하, 위험하고 비싼 것은 보통 만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레이. 나는 군주야.”

“그래서 더 만지지 않으셔야 합니다.”

“너무 설득력 있어.”

푸리나는 얌전히 손을 뒤로 숨겼다.

작업대 앞에 앉아 있던 라이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만지면 안 돼. 특히 왼쪽 세 번째 상자.”

푸리나는 이미 왼쪽 세 번째 상자를 보고 있었다.

“안 만졌어.”

“생각했잖아.”

“생각까지 금지야?”

“네가 생각하면 대체로 10초 안에 사고가 나.”

그레이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배신당한 얼굴로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

“통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통계는 때때로 잔인해.”

라이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가느다란 은실이 감겨 있었다. 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단하고, 철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부드러운 것. 그것은 라이자의 손끝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휘었다.

작업대 위에는 작은 관절 부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은인이 앉아 있었다.

은인은 조용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빛을 받으면 피부 아래에서 은빛이 얇게 흔들렸고, 눈동자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배우는 중인 것처럼 맑았다.

푸리나는 은인을 볼 때마다, 잠깐씩 말을 고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해서 그랬다.

이제는 아니었다.

“안녕, 은인.”

은인이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푸리나.”

발음은 조금 느렸지만 또렷했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오늘도 훌륭하게 인사했어.”

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훌륭한 인사는 사람다운 인사인가요?”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레이도 기록판을 들던 손을 멈췄다.

라이자는 은실을 감던 손가락을 아주 조금 늦췄다.

작업실 안의 은빛 소리들이 잠깐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웃었다.

너무 크게 웃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글쎄. 인사를 잘한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닐 거야.”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저는 사람처럼 인사한 건가요?”

푸리나는 무심코 말했다.

“응. 정말 사람 같—”

그 순간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푸리나는 말을 삼켰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선명했다.

“사람 같아서 가족인 게 아니야.”

작업실의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라이자는 천천히 말했다.

“내 가족이니까, 사람처럼 대해야 하는 거야.”

푸리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내가 말을 잘못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인가요?”

라이자는 망설이지 않았다.

“응.”

“그럼 사람처럼 대해야 하나요?”

“응.”

“그러면 저는 사람인가요?”

이번에는 라이자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의 은실이 아주 작게 떨렸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 질문은, 작업실 안에서 끝나지 않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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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정확히는 간단했어야 했다.

라이자의 은인 관련 지원 물품, 작업실 안전 관리, 보호자 권한, 출입 기록, 예산 항목, 긴급 대피 동선, 그리고 혹시 모를 행정상 신분 분류.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기록판을 넘겼다.

“라이자 님. 기록상 항목이 필요합니다.”

라이자는 은인의 어깨 부품을 살피며 대답했다.

“무슨 항목?”

“신분입니다.”

푸리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레이가 이런 목소리를 낼 때는 보통 질문이 아주 현실적이고, 그래서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종류였다.

라이자는 짧게 대답했다.

“가족.”

그레이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신분 항목은 별도로 필요합니다.”

라이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게는 그게 제일 먼저야.”

“알고 있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장부는 관계만으로는 물자를 배정하지 못합니다. 보호 권한, 의료 책임, 거주 자격, 외부 접촉 권한, 피해 발생 시 책임 소재가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살짝 손을 들었다.

“그레이, 조금만 덜 장부처럼 말할 수 있어?”

그레이는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인을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보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인이 먼저 물었다.

“저는 어느 칸에 들어가나요?”

그 질문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 작업실 전체가 그 질문에 걸린 것처럼 멈췄다.

은인은 그레이의 기록판을 보았다.

“도구인가요?”

라이자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실험체인가요?”

“아니.”

“피보호자인가요?”

그레이가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그럼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면 충분한가요?”

라이자는 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사랑해서였다.

가족.

그 말은 라이자에게 가장 먼저 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은인의 질문은 그 뒤를 묻고 있었다.

가족이면 충분한가.
가족이라는 말이 은인의 이름, 권리, 실수, 선택, 외출, 거짓말, 귀환까지 모두 대신 정해도 되는가.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무대라면, 여기서 조명을 낮췄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작업실이었다.

조명은 은빛으로 차갑게 빛났고, 누구도 대사를 준비하지 못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천천히 닫았다.

“현재 항목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새 항목을 만들겠다는 뜻이야?”

“필요하다면요.”

“이름은?”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펴졌다.

“저는 이름이 있나요?”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있어.”

“그럼 그걸 적으면 안 되나요?”

그레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은 칸의 제목이 아니라, 칸 안에 들어가는 사람을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은인은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심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사람이 행정의 틈에서 사라지는 일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기에, 아무 칸에나 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자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그럼 새 칸을 만들어.”

라이자가 말했다.

“가족이라고 적고.”

그레이는 낮게 대답했다.

“그 칸을 만들면, 그 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칸.

그것은 따뜻한 말이지만,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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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푸리나는 그날의 대화를 대충 축제로 바꾸려고 했다.

“좋아! 오늘은 어려운 이야기가 많았으니, 잠깐 쉬자. 라이자, 은인이 좋아하는 간식 같은 거 없어?”

라이자는 아직 표정이 어두웠지만 대답했다.

“간식이라기보다, 은인은 단맛이 나는 차를 좋아해.”

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차를 좋아합니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완벽해. 그럼 차를 마시자. 장부도, 신분도, 철학도 잠시 휴식!”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철학은 휴식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레이, 지금은 사라진 척하는 거야.”

“그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보류입니다.”

“보류도 훌륭한 극적 장치야!”

그레이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라이자가 차를 준비하러 잠시 작업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은인은 작업대 위의 은실을 바라보았다.

그 은실은 조금 전 라이자가 다루던 것이었다. 가느다랗고, 반짝이고, 손끝에 감기면 마치 작은 강처럼 흐르는 은.

은인은 손을 뻗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만져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은실 끝을 만졌다.

은실은 손가락에 감겼다.

은인은 놀라 손을 뒤로 뺐다.

그러자 은실은 더 감겼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은인은 당황했다.

“어.”

그레이가 보았다.

“은인 님?”

그 순간 라이자가 돌아왔다.

“은인, 작업대 위 은실 만졌어?”

은인은 아주 작게 굳었다.

손가락에는 은실이 감겨 있었다.

누구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의 얼굴에는 걱정이 있었다.

화가 아니라 걱정.

그 걱정이 은인에게는 더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작업실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레이도 기록판을 들지 않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은실은 분명히 감겨 있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안 만졌어요.”

그 순간, 은인의 코가 삐걱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끼익.

은빛 얼굴 한가운데에서, 코의 끝이 아주 조금 앞으로 밀려났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은인도 눈을 깜박였다.

끼이익.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가 중얼거렸다.

“와.”

그레이가 아주 낮게 말했다.

“시각적 반응이 발생했습니다.”

라이자는 창백해졌다.

“그건 설계에 없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면 저는 잘못 만들어진 건가요?”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얼굴이었다.

“아니.”

라이자는 은인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방금 말은 취소할게.”

은인은 손을 움켜쥐었다.

은실이 더 엉켰다.

“하지만 설계에 없다고 했어요.”

“그건 네가 잘못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니야.”

라이자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내가 모르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야.”

은인은 코끝을 만지려 했다.

끼이익.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작게 말했다.

“원전 반영이 너무 정확한데.”

그레이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폈다.

“왜 거짓말했어?”

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는 다시 물었다.

“혼날까 봐?”

은인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고장났다고 할까 봐요.”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은인은 작게 말했다.

“가족이라고 했는데, 제가 잘못하면 가족이 아닌 게 될까 봐요.”

그 말은 작업실의 차가운 은빛보다 더 날카로웠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가락에 감긴 은실을 풀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은인.”

“네.”

“거짓말은 잘못이야.”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네.”

“하지만 네가 잘못했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게 되지는 않아.”

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는 휘어진 코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것을 고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팠어?”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무서웠어요.”

“그럼 무서웠다고 말해도 돼.”

“말하면 실망할까 봐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건 내가 배워야 할 일이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조용히 보았다.

원래라면 여기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좋아! 감동적이야!” 하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건 아직 박수를 받을 장면이 아니었다.

이건 첫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첫 귀환이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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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푸리나는 라이자의 작업실 밖 복도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그레이가 있었다.

라이자는 안쪽에서 은인의 코를 살피고 있었다.

“고칠 수 있을까?”

푸리나가 물었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기계적 손상이라면 라이자 님이 고칠 수 있을 겁니다.”

“기계적 손상이 아니라면?”

“그 경우에는 고친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푸리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라.”

“원전 피노키오와 유사합니다.”

“응. 너무 유사해.”

그레이가 물었다.

“그래서 극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티 났어?”

“전하께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세 가지 표정을 지으십니다.”

“뭔데?”

“첫째, 당장 사고를 칠 것 같은 표정.”

“억울해.”

“둘째, 이미 사고를 쳤지만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표정.”

“더 억울해.”

“셋째, 극으로 만들면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표정.”

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

“네.”

“너 진짜 너무 정확해.”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무릎 위에 팔을 올렸다.

“회의로 하면, 은인은 항목이 될 거야.”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판으로 하면, 잘못이 될 거고.”

“네.”

“실험으로 하면, 결과가 되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작업실 문을 보았다.

안쪽에서는 라이자가 은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설명하고 있었다. 은인은 가끔 “네” 하고 대답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극으로 하자.”

그레이는 예상했다는 듯 눈을 내렸다.

“그 극은 은인을 무대 위에 세우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인을 분류하기 위한 것도 아니야. 은인이 자기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자는 거야.”

“자기 이야기.”

“응.”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피노키오.”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나무 인형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군요.”

“이번에는 은빛 피노키오야.”

“라이자 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아.”

“특히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결말은 거부하실 겁니다.”

“그것도 알아.”

푸리나는 웃었다.

“그래서 결말은 정하지 않을 거야.”

그레이는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결말을 정하지 않는 극입니까?”

“응.”

푸리나는 작업실 안쪽의 은빛을 보았다.

“가족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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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자는 역시 싫어했다.

정확히는, 푸리나가 “피노키오를 하자”고 말하는 순간 아주 차가운 눈으로 푸리나를 보았다.

“싫어.”

“아직 설명 안 했는데?”

“제목에서 이미 싫어.”

“제목이 뭘 잘못했는데?”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그 이야기는 싫어. 마치 누군가가 ‘이제야 진짜 아이가 되었다’고 허락해주는 것 같잖아.”

은인은 라이자의 옆에 앉아 있었다.

코는 임시로 손봐서 원래에 가까워졌지만, 끝이 아주 조금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 코를 보았다가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은인은 처음부터 내 가족이야. 누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해줘야 가족이 되는 게 아니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라이자는 조금 의심스럽게 보았다.

“너무 빨리 인정하는데.”

“네 말이 맞으니까.”

“그럼 왜 피노키오야?”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에 놓인 빈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라이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뭐야?”

“대본.”

“빈 종이잖아.”

“응.”

푸리나는 은인 쪽으로 종이를 돌렸다.

“그래서 좋아.”

라이자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푸리나는 빈 종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첫 줄을 써줄 수 있어. 무대를 만들고, 조명을 켜고, 객석이 너무 무섭지 않게 낮춰줄 수도 있어. 필요하면 커튼 뒤에 의자도 놓아줄게.”

은인은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하지만 두 번째 줄부터는 내가 쓰면 안 돼.”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노키오라는 이름은 빌려줄 수 있어. 제페토라는 자리도 빌려줄 수 있고. 하지만 그 이름 안에서 무슨 말을 할지는, 은인과 네가 정해야 해.”

라이자가 물었다.

“그게 네 극이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극은 배우를 움직이는 줄이 아니야.”

그녀는 작업대 위에 엉켜 있던 은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런 줄은 라이자가 더 잘 다루잖아.”

라이자는 어이없다는 듯 푸리나를 보았다.

“그런 농담을 지금 해?”

“조금은 해야지. 너무 무거우면 무대가 내려앉아.”

푸리나는 다시 빈 대본을 내려놓았다.

“나는 길을 하나 그려둘 뿐이야. 걷는 건 배우가 해야 해. 넘어지면 잠깐 막을 내릴 수는 있어. 하지만 대신 걸어줄 수는 없어.”

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대사를 틀리면요?”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아주 좋아.”

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좋아요?”

“응. 그때부터 네 대사가 되거든.”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보다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푸리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걱정 마, 라이자. 내가 은인을 피노키오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야.”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이 피노키오라는 옷을 한번 입어보고, 안 맞는 곳은 찢고, 맞는 곳만 가져가게 하자는 거야.”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 옷이 은인을 조이면?”

푸리나는 곧장 대답했다.

“그럼 벗기면 돼.”

라이자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장난치지 않았다.

“극은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아.”

은인은 그 말을 곱씹듯 작게 따라 했다.

“극은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보고, 어디까지 걸어가고, 어디로 돌아오고 싶은지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

“네.”

“하고 싶어?”

은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서워요.”

“그럼 하지 않아도 돼.”

은인은 휘어진 코끝을 만졌다.

“그런데…… 궁금해요.”

라이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말이 아마 가장 무서웠을 것이다.

궁금하다.

가족의 손 밖이.
거짓말의 다음이.
돌아오는 길이.
자기 발로 걷는 이야기가.

라이자는 한참 뒤에 말했다.

“좋아.”

푸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해.”

라이자는 또렷하게 말했다.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결말이면 안 해.”

“좋아.”

“은인을 물건 취급하는 대사는 없어.”

“없어.”

“은인이 도망치는 장면이 있다면, 그게 배신처럼만 보이면 안 돼.”

“알겠어.”

“그리고 은인이 돌아왔을 때, 내가 무조건 훌륭한 보호자로 보이면 안 돼.”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나도 배워야 하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결말은 정하지 마.”

푸리나는 웃었다.

“응. 가족 이야기는 원래, 끝을 먼저 정하면 안 되니까.”

은인은 그 말을 조용히 반복했다.

“끝을 먼저 정하면 안 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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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이 다시 물었다.

“제가 돌아오면, 문은 열려 있나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이 다시 물었다.

“제가 늦어도요?”

라이자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응.”

“제가 거짓말해도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짓말은 혼날 거야.”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문은 닫지 않아.”

그 말이 떨어지자,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평소처럼 화려하게 외치지는 않았다.
오늘의 무대는 왕궁도, 광장도, 전쟁 전야도 아니었다.

은빛 부품이 놓인 작업대.
반쯤 식은 용광로.
빈 대본 한 장.
그리고 가족이라는 말로도 아직 다 적히지 않는 두 사람.

푸리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막을 열자.”

등불이 조금 낮아졌다.

은빛은 차갑게 번쩍이지 않고, 사람의 얼굴을 비출 만큼만 부드러워졌다.
작업실의 벽은 그대로였고, 공구도 그대로였고, 은실도 여전히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사이에, 아주 얇은 무대의 기척이 내려앉았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신술은 오늘, 세상을 크게 뒤집지 않았다.

다만 은인 앞에 빈 첫 장면을 놓았다.
라이자 앞에 닫히지 않은 문을 놓았다.
그리고 푸리나는 그 둘 사이에서, 대본의 첫 줄만 비워두었다.

은인은 처음으로 배역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그것은 고장이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첫 표시였다.

1막 — 거짓말은 은을 휘게 한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무서워서 한 거짓말도, 돌아올 길을 멀게 만든다 —
《은빛 피노키오》

1막 — 거짓말은 은을 휘게 한다

— 무서워서 한 거짓말도, 돌아올 길을 멀게 만든다 —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은인이 아니라, 의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라이자의 작업실 의자였다.

낡은 나무 의자 하나.

그 위에는 작은 쿠션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은인을 위해 준비된 낮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따뜻한 차 한 잔, 빈 대본 한 장, 그리고 라이자가 손대지 말라고 세 번 말한 은실 뭉치가 있었다.

푸리나는 그 은실 뭉치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이건 치워둘까?”

라이자가 즉시 말했다.

“치워.”

“하지만 1막 제목이 거짓말은 은을 휘게 한다잖아. 은실이 있어야 상징성이—”

“치워.”

“네.”

푸리나는 얌전히 은실을 들어 올리려 했다.

라이자가 덧붙였다.

“직접 만지지 말고.”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레이가 대답했다.

“위험물 근처에서 즉흥성을 발휘하는 군주로 생각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그레이가 자꾸 정확한 말을 해.”

“기록상 평소에도 그렇습니다.”

“기록도 잔인해.”

결국 은실 뭉치는 라이자의 손으로 작업대 뒤쪽에 치워졌다.

은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기 손가락에 감겨 있던 은실.
그것을 만졌다고 말하지 못했던 은실.
거짓말과 함께 코를 삐걱거리게 만든 은실.

그 은실이 사라지자, 은인은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푸리나는 그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밝게 손뼉을 쳤다.

“좋아! 1막을 시작하기 전에, 아주 중요한 규칙을 정하겠습니다.”

은인이 고개를 들었다.

라이자도 푸리나를 보았다.

그레이는 이미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첫째, 대사를 틀려도 된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따라 했다.

“대사를 틀려도 된다.”

“둘째,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도 된다.”

은인은 조금 작게 말했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도 된다.”

“셋째.”

푸리나는 아주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푸리나가 멋진 연출을 떠올렸다고 해서 반드시 따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합니다.”

라이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중요해.”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둘 다 너무 진심이야.”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네 즉흥성은 은인의 코보다 위험할 때가 있어.”

“너무해. 그래도 오늘은 조심할 거야.”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 오늘은 네가 피노키오야.”

은인은 천천히 물었다.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인가요?”

“원래는 그렇지.”

“저는 은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은빛 피노키오야.”

은인은 자기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피노키오가 아닌데 피노키오인가요?”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맞아. 아주 좋은 질문이야.”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이상한 질문 같은데.”

“아니, 진짜 좋은 질문이야.”

푸리나는 빈 대본을 들어 올렸다.

“배역이란 원래 그래. 완전히 네가 아니지만, 완전히 네가 아니지도 않아. 너무 딱 맞으면 숨이 막히고, 너무 안 맞으면 벗겨지지. 그러니까 오늘은 입어보고, 불편하면 말하면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면 말한다.”

“좋아.”

푸리나는 대본 첫 줄에 큼직하게 적었다.

나는 오늘, 거짓말을 배우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

그레이가 대본을 보고 잠시 멈췄다.

“전하.”

“응?”

“첫 줄부터 난도가 높습니다.”

“그래?”

“은인 님께는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은인은 대본을 보았다.

“거짓말을 배우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한 음절씩 천천히 읽었다.

“이상한 문장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지? 그래서 좋아.”

라이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써.”

푸리나는 바로 대본을 뒤집었다.

“좋아. 다시 쓰겠습니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빠른 수정은 좋은 판단입니다.”

푸리나는 새 줄을 적었다.

나는 무서워서 아니라고 말했다.

은인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이번에는 읽지 않았다.

그저 보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손을 잡고 싶어 보였지만, 잡지 않았다. 대신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자기 손을 내려두었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아무 말 없이 조명을 조금 더 낮췄다.


---

첫 장면은 아주 간단했다.

은인이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은빛 단추를 만진다.

라이자 역할의 푸리나가 묻는다.

“단추 만졌어?”

은인은 대답한다.

“아니요.”

그러면 코가 삐걱인다.

끝.

아주 간단했다.

그런데 은인에게는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은인은 단추 앞에 서 있었다.

작은 은빛 단추.

위험하지도 않고, 비싸지도 않고, 실제로는 라이자가 일부러 만져도 되는 물건으로 골라둔 것이었다.

하지만 은인의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푸리나가 물었다.

“무서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 그럼 첫 대사는 성공이야.”

은인이 눈을 깜박였다.

“제가 대사를 했나요?”

“응. 방금 아주 중요한 대사를 했어.”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대본을 톡 쳤다.

“대본에는 없지만, 무대에 필요한 대사였어.”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무서워요, 라고 말해도 극이 이어지나요?”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이어져.”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금 어색하게 덧붙였다.

“이어져야 해.”

그 말은 라이자에게도 하는 말 같았다.

푸리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다시. 은인, 단추를 만져도 돼. 이건 만져도 되는 단추야.”

은인은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단추를 만졌다.

은빛 단추는 차가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푸리나가 라이자 역할로 물었다.

“단추 만졌어?”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네.”

그리고 멈췄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보았다.

라이자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은인은 당황했다.

“제가 틀렸나요?”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손뼉을 쳤다.

“좋아!”

은인은 놀랐다.

“좋아요?”

“응. 아주 좋아.”

푸리나는 웃었다.

“거짓말하는 장면에서 진실을 말했어. 이건 꽤 멋진 반항이야.”

라이자는 작게 말했다.

“반항이라고 부르지 마.”

“그럼 수정. 아주 멋진 선택이야.”

은인은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피노키오는 거짓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원전은 그렇지. 하지만 네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야.”

은인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면 저는 피노키오가 아닌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빈 대본 옆에 두 번째 줄을 적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하는 장면에서, 은인은 진실을 말했다.

은인은 그 문장을 읽었다.

“그래도 되나요?”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기록상으로는 더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가 극적 표현을 인정했어.”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좋아.”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괜찮아. 네가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은인은 작게 물었다.

“그럼 제 코는 안 휘나요?”

라이자는 은인의 코끝을 보았다.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안 휘는 게 좋지.”

그 말에 은인은 잠시 안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안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다음에 은인이 물었기 때문이다.

“그럼 제가 거짓말하지 않으면, 사람이 되는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나요?”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라이자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기록판 위에서 펜을 멈췄다.

은인은 자신이 무슨 이상한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로 셋을 보았다.

“피노키오는 거짓말해서 코가 길어지고, 잘못해서 혼나고, 도망가고, 돌아온다고 했어요.”

“응.”

푸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지.”

“그럼 저는 거짓말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이야기를 못 하나요?”

그 질문은 작았지만, 무대 전체를 바꾸었다.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야기에 들어가고 싶었다.

실수해야만 이야기가 시작된다면, 실수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푸리나는 빈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첫 줄.

나는 무서워서 아니라고 말했다.

두 번째 줄.

피노키오가 거짓말하는 장면에서, 은인은 진실을 말했다.

그녀는 대본을 덮었다.

“잠깐 쉬자.”

라이자가 물었다.

“벌써?”

“응. 지금은 쉬어야 해.”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이 질문은 그냥 지나가면 안 돼.”


---

쉬는 시간은 아주 이상했다.

무대는 작업실 그대로였고, 관객은 없었고, 배우는 은인과 라이자뿐이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당당하게 “휴식!”이라고 선언했고, 그레이는 정말로 차를 다시 데웠다.

은인은 차를 들고 앉아 있었다.

라이자는 그 옆에 앉았지만, 이번에도 손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은인의 코끝을 보았다.

“아프지는 않아?”

“아프지는 않아요.”

“불편해?”

“조금요.”

“고쳐줄게.”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왜?”

“아직은 두고 싶어요.”

라이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이해한 듯했다.

“표시라서?”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거짓말했다는 표시예요.”

레플리카라면 이 말을 듣고 뭐라고 했을까, 하고 푸리나는 생각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고통을 증거로 들고 서지 마라.

하지만 지금 레플리카는 없었다.

그래서 푸리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표시가 꼭 벌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럼 뭔가요?”

“음.”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접힌 페이지?”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푸리나는 대본 한쪽 모서리를 살짝 접었다.

“책을 읽다가 중요한 장면이 나오면, 어떤 사람들은 모서리를 접어둬. 나중에 다시 보려고.”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도서 관리 측면에서는 권장되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맞아. 실제 책에는 하지 마. 비유야.”

은인은 접힌 종이 모서리를 보았다.

“제 코는 접힌 페이지인가요?”

푸리나는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어. 네가 무서워서 거짓말했던 장면. 나중에 다시 봐야 하는 장면.”

은인은 코끝을 만졌다.

“그럼 없애면 안 되나요?”

라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없애도 기억할 수 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기억해요?”

“응.”

“화났어요?”

“응.”

은인의 몸이 조금 굳었다.

라이자는 바로 이어 말했다.

“하지만 화난 것보다 걱정한 게 더 커.”

은인은 아주 작게 물었다.

“실망했어요?”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거짓말하지 않으려는 침묵이었다.

“조금.”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등 가까이에 자기 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네가 가족이 아니게 된 건 아니야.”

은인은 그 손을 보았다.

라이자는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실망했다는 걸 말해도, 네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나도 배워야 해.”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라이자가 제페토 역할을 연기하고 있지 않았다.

제페토라는 자리를 밟고, 자기 말을 하고 있었다.

좋아.

무대가 아주 조금 작동하기 시작했다.


---

두 번째 시도는 대본을 바꾸고 시작했다.

푸리나는 새 장면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은인이 단추를 만지는 게 아니었다.

단추는 이미 만졌다.

이미 진실도 말했다.

그러니 1막의 진짜 장면은 다른 곳에 있었다.

푸리나는 작은 상자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렸다.

“이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은인은 상자를 보았다.

“모릅니다.”

“좋아. 정답.”

“정답인가요?”

“모를 때 모른다고 말하는 건 아주 중요한 정답이야.”

푸리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종이 왕관이 들어 있었다.

삼총사 극에서 쓰고 남은 소품이었다. 어딘가 삐뚤고, 금박은 조금 벗겨져 있었다.

은인은 왕관을 보았다.

“왕관.”

“응.”

푸리나는 왕관을 꺼냈다.

“이건 사람 흉내를 내는 왕관이야.”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왕관이 사람 흉내를 낸다고?”

“아니. 왕관을 쓰면 사람들이 왕처럼 말하려고 하잖아.”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왕관이 없어도 자주 그러십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 오늘은 유난히 날카롭다?”

“사실 확인입니다.”

“그게 날카로운 거야.”

푸리나는 은인에게 왕관을 내밀었다.

“은인. 이걸 써볼래?”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조심해”, “그건 가볍지만 균형이”, “관절에 부담이” 같은 말이 먼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었다.

“쓰고 싶어?”

은인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궁금해요.”

“그럼 써.”

은인은 종이 왕관을 썼다.

왕관은 조금 컸다.

푸리나가 두 손을 펼쳤다.

“자! 은빛 피노키오는 왕관을 썼습니다. 이제 모두가 묻습니다. 당신은 왕인가요?”

은인은 눈을 깜박였다.

“저는 왕이 아닌데요.”

“좋아. 그럼 이렇게 말해봐. ‘나는 왕이다!’”

은인은 망설였다.

“하지만 아니에요.”

“맞아. 아니지.”

“그럼 거짓말 아닌가요?”

푸리나는 웃었다.

“연기일 수도 있어.”

은인은 혼란스러워했다.

“거짓말과 연기는 다른가요?”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었다.

이 질문은 행정상으로도 흥미로워 보였다.

라이자도 은인을 보았다.

푸리나는 왕관을 살짝 고쳐주었다.

“중요한 질문이야. 거짓말은 보통 상대가 진실을 모르게 하려고 하는 말이야. 연기는 상대에게 ‘지금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고 약속하고 하는 말이고.”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약속하고 하는 거짓말?”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약속하고 하는 상상.”

은인은 왕관을 만졌다.

“그럼 제가 ‘나는 왕이다’라고 말하면, 모두 거짓말인 걸 아나요?”

“응. 모두 알아.”

“라이자도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도 가족인가요?”

라이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응.”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나는 왕이다.”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놀라 코끝을 만졌다.

“안 휘었어요.”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축하합니다! 은빛 피노키오가 연기를 배웠습니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적었다.

“연기와 기만의 차이. 당사자 간 합의 여부, 맥락, 의도, 사후 책임.”

푸리나가 슬쩍 보았다.

“그레이, 지금 그걸 정말로 장부에 적고 있어?”

“중요한 구분입니다.”

“맞긴 한데 너무 장부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왕관을 쓴 채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나는 왕이다.”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 번째.

“나는 왕이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이건 괜찮은 거짓말이에요.”

푸리나는 바로 말했다.

“정확히는 연기.”

“연기.”

은인은 그 단어를 기억하려는 듯 반복했다.

“연기는 돌아올 수 있는 거짓말인가요?”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레이도 기록판 위에서 펜을 멈췄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응. 아주 좋게 말하면, 그래.”

은인은 왕관을 벗었다.

“그럼 저는 돌아올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 말은 1막의 첫 번째 진짜 대사였다.

푸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은인이 연기를 배웠다.

거짓말과 연기의 차이를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러자 은인은 질문을 더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질문이 많아질수록, 라이자의 불안도 커졌다.

은인은 물었다.

“제가 무섭지 않은 척하면 연기인가요?”

푸리나는 대답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

“라이자가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괜찮다고 하면요?”

라이자는 바로 말했다.

“그건 하지 마.”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왜요?”

“네가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면, 내가 네가 아픈 걸 모르게 되니까.”

“하지만 라이자가 걱정하지 않으면 좋잖아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상대의 걱정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숨기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배려처럼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보호와 대응을 어렵게 만듭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그레이, 조금만 부드럽게.”

그레이는 잠시 생각하고 다시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알려주셔야, 곁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은인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럼 괜찮다고 말하면 코가 휘나요?”

라이자는 은인의 코를 보았다.

“네가 정말 괜찮지 않다면, 아마.”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거짓말은 나쁜 거예요.”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위험해.”

“나쁜 게 아니라요?”

“나쁠 때가 많아. 하지만 가끔은 무서워서 나와. 가끔은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서 나오고. 가끔은 자기 자신도 뭐가 진짜인지 몰라서 나오지.”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요?”

푸리나는 대본을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해.”

라이자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은인에게 말했다.

“거짓말을 하면 끝, 이 아니라. 왜 그 말을 했는지, 그 말이 어디를 휘게 했는지, 다시 어떻게 펴야 하는지 봐야 하니까.”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졌다.

“은이 휘면 펼 수 있나요?”

라이자는 말했다.

“대부분은.”

은인은 물었다.

“흔적 없이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직하게.

“항상 그렇지는 않아.”

은인의 손이 멈췄다.

라이자는 조용히 이어 말했다.

“하지만 흔적이 남는다고 해서 버리는 건 아니야.”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정말요?”

“응.”

라이자는 은인의 휘어진 코끝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은은 휘었다가 펴져도, 그 자리에 결이 남을 때가 있어. 하지만 그 결 때문에 더 잘 알 수 있는 것도 있어.”

“무엇을요?”

라이자는 잠시 생각했다.

“어디를 너무 세게 누르면 안 되는지.”

은인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대본 구석에 적었다.

은은 휜 자리에 기억을 남긴다.


---

1막의 마지막 장면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푸리나는 더 이상 단추도, 왕관도, 은실도 쓰지 않았다.

대신 은인 앞에 세 문장을 놓았다.

첫 번째 문장.

나는 괜찮아요.

두 번째 문장.

나는 무서워요.

세 번째 문장.

나는 거짓말했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이 중에서 지금 네가 말할 수 있는 걸 골라.”

은인은 세 문장을 보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옆에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내리고 있었다. 기록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기다리는 자세였다.

은인은 첫 번째 문장을 보았다.

나는 괜찮아요.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두 번째 문장.

나는 무서워요.

은인은 손을 움켜쥐었다.

세 번째 문장.

나는 거짓말했어요.

은인은 코끝을 만졌다.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한참 뒤, 은인은 말했다.

“저는…….”

목소리가 작았다.

푸리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라이자도 기다렸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저는 무서워요.”

그 순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그 사실에 놀란 듯했다.

“안 휘었어요.”

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응. 그건 돌아오는 말이니까.”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저는 거짓말했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은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것도 안 휘어요.”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그건 숨기는 말이 아니니까.”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문장을 보았다.

나는 괜찮아요.

은인은 그 문장을 집어 들었다.

잠시 손에 쥐고 있다가, 푸리나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아직 못 말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받아 들었다.

“좋아.”

“좋아요?”

“응. 아주 좋아.”

은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말했다.

“못 말하는 걸 못 말한다고 했잖아. 그건 아주 좋은 대사야.”

그레이가 조용히 기록했다.

현재 상태: 괜찮지 않음. 그러나 말할 수 있음.

라이자는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했다.

“그건 좋은 기록이네.”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저는 괜찮지 않아요.”

라이자의 얼굴이 아팠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응.”

“그래도 여기 있어도 되나요?”

라이자는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그 손을 잡았다.

“응.”

라이자는 말했다.

“여기 있어도 돼.”

은인의 코끝은 여전히 조금 휘어 있었다.

그러나 더 길어지지는 않았다.


---

막이 내려가려 할 때,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은 아직 작업실에 얇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커지지 않았다.

오늘의 1막은 세상을 뒤집을 필요가 없었다.

은인이 거짓말을 했고, 코가 휘었고, 진실을 말했으며, 아직 괜찮지 않다고 인정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푸리나는 대본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이제 세 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무서워요.
나는 거짓말했어요.
나는 아직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은인이 직접 적은 삐뚤삐뚤한 한 줄이 있었다.

그래도 문은 닫히지 않았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

“좋아.”

라이자가 물었다.

“뭐가?”

“첫 막.”

“끝난 거야?”

“응.”

푸리나는 조명을 조금 낮췄다.

“거짓말은 은을 휘게 했지만, 진실은 문을 닫지 않았어.”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코를 만졌다.

“그럼 다음에는 뭐예요?”

푸리나는 대본의 다음 장을 넘겼다.

빈 페이지였다.

그 빈 페이지를 보자 은인은 조금 긴장했고, 라이자는 조금 불안해졌고, 그레이는 새 기록지를 준비했다.

푸리나는 웃었다.

“다음에는 밖으로 나가볼 거야.”

라이자의 손이 움찔했다.

은인도 놀라 물었다.

“밖이요?”

“응.”

푸리나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피노키오는 작업실 안에서만 사람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대신 빈 대본을 은인 앞에 놓았다.

“하지만 기억해. 밖으로 나가는 건 버리는 게 아니야. 돌아올 길을 알아보러 가는 거지.”

은인은 라이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업실 문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막이 내려왔다.

2막 — 인형극장과 장난감 나라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박수받는 말과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다르다 —
좋아. 레이튼을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너무 빨리 닫힌 답을 다시 질문으로 되돌려, 사람이 스스로 더 나은 답에 도달하게 만드는 신사”**야.

푸리나가 무대를 열고, 죠니가 찰나의 선택을 긍정하고, 하융이 비껴간 가능성을 본다면, 레이튼은 이미 답이라고 믿어버린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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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튼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레이튼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누군가가 너무 이른 답 때문에 망가지는 장면이다.

어떤 군주는 성급한 결론 때문에 잘못된 명령을 내린다.
어떤 귀족은 사람을 가문, 혈통, 신분이라는 이름으로 고정한다.
어떤 장군은 전투를 이길 수 있다 믿고 병사를 죽인다.
어떤 외교관은 상대의 말을 이미 배신으로 규정하고 협상을 닫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이름을 너무 빨리 붙여버린다.

레이튼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런 장면이다.

질문이 살아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던 순간.

그는 그때마다 생각한다.

“정말 그것이 답이었습니까?”
“다른 질문을 던졌다면, 다른 길이 열리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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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레이튼이 잃어본 가장 큰 것은 답이 사람을 구해준다는 순진한 믿음이다.

어릴 때 혹은 젊을 때의 레이튼은 답을 찾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을 수 있다.

정확한 정보.
훌륭한 전략.
옳은 결론.
바른 판결.
논리적으로 완성된 해답.

하지만 그는 곧 알게 된다.

답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지만, 사람을 닫아버릴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배신자다.”
“이 전쟁은 불가피하다.”
“이 희생은 필요하다.”
“이 아이는 쓸모없다.”
“이 나라는 이미 끝났다.”

이런 답들은 매우 명확하다.
하지만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사람을 망칠 수 있다.

즉 레이튼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정답이 언제나 선하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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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레이튼의 최대 업적은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되살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왕에게 답을 바치지 않는다.
대신 왕이 스스로 답을 낳을 수 있도록 묻는다.

그는 회의장에서 결론을 확정하지 않는다.
대신 결론에 붙은 성급한 이름을 지운다.

그는 상대를 논파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가 자기 전제를 보게 만든다.

그의 업적은 이것이다.

질문이 죽어버린 자리에서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든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레이튼은 쉽게 단정하지 못한다.
모두가 빠른 결론을 원할 때도, 그는 한 번 더 묻는다.
사람들이 명확한 답을 요구할 때도, 그는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별들을 바라본다.

그 대가는 결정의 지연, 우유부단해 보이는 인상, 그리고 타인이 보기에는 답을 회피하는 사람처럼 보일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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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레이튼이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충분히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사람은 스스로 더 나은 답에 도달할 수 있다.”



이건 레이튼의 가장 아름다운 믿음이지만, 동시에 왜곡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질문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미 너무 지쳐서 질문보다 휴식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모순을 마주할 힘이 없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답을 알면서도 이익 때문에 외면한다.
어떤 사람은 질문을 배움이 아니라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상황에서는 질문보다 즉각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레이튼은 질문의 힘을 너무 깊이 믿는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질문이 살아 있다면, 아직 사람은 닫히지 않았다.”



이 믿음은 레이튼의 신념이자 한계다.

그는 닫힌 결론을 경계한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결론을 내려야만 살아남는 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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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레이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나 사건이 너무 빠른 이름 아래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두려워한다.

“저 사람은 배신자다.”
“저 나라는 적이다.”
“이 전쟁은 불가피하다.”
“저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레이튼에게 이름은 편리하지만 위험하다.

별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별자리가 생긴다.
하지만 너무 빨리 별자리를 그으면, 별은 더 이상 다른 모양으로 이어질 수 없다.

그래서 레이튼은 이렇게 믿는다.

> “성급한 이름을 지우고 질문을 되살릴 수 있다면, 아직 더 나은 답이 태어날 수 있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여백이다.

생각할 여백.
다시 물을 여백.
전제를 확인할 여백.
모순을 마주할 여백.
상대가 스스로 답을 낳을 여백.

즉 레이튼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사람이, 국가가, 사건이 너무 이른 답에 갇히지 않도록 질문의 여백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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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레이튼은 먼저 질문한다.

그가 마주하는 위협은 괴물이나 적군일 수도 있지만, 더 자주 마주하는 위협은 닫힌 결론이다.

“적은 반드시 저 방향에서 올 것이다.”
“협상은 이미 실패했다.”
“저자는 우리를 속이고 있다.”
“이 작전밖에 방법이 없다.”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때 레이튼은 바로 반박하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그 결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만약 질문이 틀렸다면, 답도 틀린 것이 아닐까요?”

레이튼의 첫 대응은 결론을 질문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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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레이튼은 전제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결론이 사실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결론은 숨은 전제에서 나온다.

“귀족은 백성을 모른다.”
“평민은 통치할 수 없다.”
“적국은 언제나 배신한다.”
“신앙은 정치보다 순수하다.”
“힘이 없으면 평화는 불가능하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현실을 모른다.”

레이튼은 이 전제들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린다.

그의 말투는 공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부드럽고 젠틀하다.

하지만 질문은 날카롭다.

“그렇다면 각하께서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답이 그렇게 나오도록 질문을 고르신 셈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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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레이튼은 아포리아로 이끈다.

아포리아는 단순한 말문 막힘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답이 무너졌지만, 아직 새 답은 태어나지 않은 상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상태를 불편해한다.

하지만 레이튼에게 아포리아는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출발점이다.

그는 상대를 조롱하지 않는다.
상대의 무지를 폭로해 굴욕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좋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지요.”

이 단계에서 레이튼의 [여관:문답의 서재]가 가장 잘 드러난다.

정답이 보관된 도서관이 아니라,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환대받는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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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답을 대신 내려주지 않고, 선택을 돌려준다.

레이튼은 책사이고 전략가지만, 최종 선택권을 빼앗지 않는다.

그는 왕에게 조언할 수 있다.
모순을 밝힐 수 있다.
전제를 해체할 수 있다.
가능한 질문을 열어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결론은 군주와 당사자가 내려야 한다.

레이튼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질문을 살리는 것뿐입니다. 답은 각하께서 낳으셔야 합니다.”



이 점에서 레이튼은 푸리나와 닮았다.

푸리나는 무대를 준비하지만 대사를 대신 정하지 않는다.
레이튼은 질문을 준비하지만 답을 대신 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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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레이튼이 과의존하는 전략은 계속 질문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성급한 결론을 막는다.
잘못된 전제를 드러낸다.
협상과 회의에서 숨은 모순을 찾는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게 만든다.
닫힌 이야기에 여백을 만든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결단이 늦어진다.
상대가 질문을 공격으로 느낀다.
지친 사람에게 더 많은 사고 부담을 준다.
너무 오래 묻다가 행동할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
때로는 “정답은 없지만 지금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레이튼이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질문 이후의 결단력이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보완은 다른 가신들에게서 온다.

푸리나는 말한다.

“좋아! 그럼 이제 무대 위에서 해보자!”

죠니는 말한다.

“질문은 충분해. 이제 고르자.”

하융은 말한다.

“너무 늦으면, 비껴갈 창도 닫히오.”

그레이는 말한다.

“결론이 늦어지면 배급이 끊깁니다.”

레이튼은 질문을 지킨다.
하지만 그 질문이 결국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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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레이튼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답을 찾게 도울 수는 있지만, 상대가 스스로 낳아야 할 답을 대신 만들어주지는 않겠다.”



이것이 레이튼의 양심이다.

그는 매우 유능한 책사다.
상대의 전제를 해체할 수 있다.
논리의 빈틈을 찌를 수 있다.
질문을 설계해 상대를 원하는 결론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바로 그래서 위험하다.

레이튼이 선을 넘으면, 그의 문답은 산파술이 아니라 조작이 된다.

상대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믿게 만들지만, 사실은 레이튼이 원하는 답으로 몰아간 것이 된다.

이것은 레이튼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타락이다.

그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질문을 이용해 타인의 사고를 조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튼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질문은 문을 여는 열쇠이지, 사람을 끌고 가는 목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상대가 어떤 답을 낳을지는 상대의 몫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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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레이튼은 너무 빨리 닫힌 답을 다시 질문으로 되돌려, 사람이 스스로 더 나은 답을 낳게 만드는 문답가다.

그의 거짓말은 **“충분히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사람은 스스로 더 나은 답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사람과 사건과 국가가 성급한 이름과 결론에 갇히지 않도록 질문의 여백을 지키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질문하고, 전제를 드러내고, 아포리아로 이끈 뒤, 최종 답은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질문을 이용해 타인의 사고와 선택을 조종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하융을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을 너무 많이 본 끝에, 처음으로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 사람”**이야.

푸리나가 사람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인물이고, 죠니가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긍정하는 인물이라면, 하융은 선택되지 못한 길들을 기억하면서도, 결국 지금 이 현실에 남기로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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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융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하융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수없이 비껴간 가능성들의 잔상이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병사.
무너지지 않았을 성벽.
배신하지 않았을 친구.
불타지 않았을 마을.
전쟁이 오지 않았을 도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군주.
죽지 않아도 되었을 아이.
서로 등을 돌리지 않았을 사람들.

하융은 현실을 볼 때마다 그 뒤편에 겹쳐진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를 본다.

그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런 것이다.

“이 현실은 유일한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결과에 도착했다.”

그 기억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하융에게 그것은 거의 물리적인 풍경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다른 길들, 하지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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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하융이 잃어본 가장 큰 것은 현실을 단단하게 믿는 감각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하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다.
이미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고, 선택하지 않은 길은 사라진다.

하지만 하융에게는 그렇지 않다.

선택되지 않은 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가능성도 흔적을 남긴다.
더 나은 결말도, 더 끔찍한 결말도, 지금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계속 비친다.

그 결과 하융은 한때 이런 감각을 잃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현실이 정말 가장 중요한가?”

즉 하융의 가장 큰 상실은 현실의 확실성이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실이다.
현실이 희미해지면, 선택도 희미해진다.
선택이 희미해지면, 책임도 희미해진다.
책임이 희미해지면, 사람은 끝없이 가능성만 바라보며 멈춰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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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하융의 최대 업적은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더 평화로운 가능성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행복한 세계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덜 아픈 결말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떠나도 되는 길, 외면해도 되는 길,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길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푸리나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있는 지금 이 현실을 선택했다.

하융의 업적은 전쟁에서 몇 명을 살렸는가만이 아니다.

그의 진짜 업적은 이것이다.

가능성에 잠식되지 않고, 지금 현실에 남기로 한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그는 선택할 때마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함께 본다.
한 사람을 살릴 때, 살리지 못한 사람의 가능성도 본다.
한 전선을 지킬 때, 무너진 전선의 잔상도 본다.
지금의 푸리나를 선택할 때, 다른 길의 푸리나와 다른 결말의 킬리키아도 창 너머에 비친다.

그 대가는 끝없는 미련과 피로, 그리고 어떤 선택도 완전히 깨끗하지 않다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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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하융이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다면, 지금의 비극은 내가 충분히 잘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하융은 가능성을 본다.
그러므로 그는 실패를 단순한 실패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른 길이 보였는데 왜 이 길이 되었는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왜 죽었는가.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왜 현실에서는 무너졌는가.

이 질문은 하융을 유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를 갉아먹는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더 나은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실패는 내가 그 가능성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융의 책임감이자 왜곡이다.

그는 현실을 직접 고치는 신이 아니다.
죽은 가능성을 부활시키는 자도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의 정보, 흔들림, 실패의 박자, 생존의 오차를 현재 위에 얇게 겹쳐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하융은 종종 자신이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닿지 못한 모든 가능성의 책임까지 자신에게 돌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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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하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현실을 선택해버리는 것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내가 선택한 이 현실 때문에, 더 나은 가능성이 영영 닫혀버리는 것.”

하융은 선택의 무게를 너무 잘 안다.

선택하면 다른 길은 닫힌다.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할 수 있다.
한 전선을 지키면 다른 전선이 무너질 수 있다.
한 현실에 남으면,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게 된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많은 관측과 충분히 정확한 개입이다.

그는 이렇게 믿는다.

> “실패한 가능성의 흔적을 더 잘 읽고, 죽은 가능성의 정보를 더 정확히 현재에 겹칠 수 있다면, 이번 현실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래서 하융의 동기는 이것이다.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실패를 헛되게 하지 않고, 지금 현실이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

그는 죽은 가능성을 되살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왜 죽었는지는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산 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즉 하융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모든 가능성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은 가능성이 남긴 실패의 흔적을 읽어, 지금 이 현실만큼은 한 발자국 비껴가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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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하융은 먼저 본다.

하지만 이것은 확정된 미래예지가 아니다.
그는 앞으로 무조건 일어날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택되지 못했거나 실패한 가능성의 잔향을 본다.

적의 화살에 맞아 죽은 가능성.
방패선이 무너진 가능성.
수레가 뒤집힌 가능성.
전령이 길을 잃은 가능성.
죠니가 한 박자 늦어 쓰러진 가능성.
푸리나의 무대가 제때 열리지 못한 가능성.

하융은 위협 앞에서 가장 먼저 묻는다.

“어디서 무너졌는가?”
“어느 박자가 늦었는가?”
“누가 왼쪽을 보지 못했는가?”
“어떤 작은 오차가 죽음으로 이어졌는가?”

그의 첫 대응은 가능성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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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하융은 현재 위에 가능성의 정보를 얇게 겹친다.

그는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죽은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오지 않는다.
다만 실패의 흔적을 현재의 산 자에게 전달한다.

“왼쪽.”
“한 박자 늦추시오.”
“지금 숙이시오.”
“방패 각도를 낮추시오.”
“그 길은 이미 무너졌소.”
“이쪽이오. 아직 창이 닫히지 않았소.”

하융의 전투 지시는 시적이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짧고 명확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그는 가능성의 실패 정보를 통해 산 자들이 한 발자국 비껴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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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하융은 직접 틈으로 들어간다.

하융은 순수 후방 관측자가 아니다.
그는 전장 중후열과 위험한 틈을 오가며 개입할 수 있는 현장 지휘관형 전투원이다.

강자와 정면 승부를 벌여 압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죽을 가능성을 보고 그 죽음을 비껴가며 한두 박자 버틸 수 있다.

적의 검이 지나간다.
하융은 그 검에 베여 죽은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현실의 몸을 반 치 비튼다.
검집으로 손목을 건드리고, 무릎의 방향을 틀고, 창끝의 박자를 어긋나게 만든다.

그의 근접전은 “이긴다”보다 죽을 자리를 비껴가며 흐름을 바꾼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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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다.

하융에게 최후의 선택은 단순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는 행위다.

어떤 가능성은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은 더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에서는 누군가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융의 마지막 전략은 이것이다.

> “모든 창을 열어둘 수는 없소.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아갈 창을 고르겠소.”



이때 하융은 더 이상 관측자가 아니다.
그는 선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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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하융이 과의존하는 전략은 가능성을 더 보려는 것이다.

위협을 만나면 더 본다.
실패하면 더 많은 가능성을 찾는다.
또 실패하면 더 깊이 창을 들여다본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실패의 원인을 찾게 해준다.
아군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한다.
전장 전체의 작은 오차를 보정한다.
죽은 가능성의 흔적을 산 자의 생존으로 바꾼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너무 많이 보면 선택이 늦어진다.
현실이 희미해진다.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수많은 가능성을 보게 된다.
결국 지금 이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하는 순간에도, “다른 길”을 보느라 한 박자 늦을 수 있다.

하융이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현실을 즉시 붙잡는 힘이다.

그래서 하융에게 필요한 보완은 푸리나와 죠니에게서 온다.

푸리나는 말한다.

“이 무대는 지금 여기야.”

죠니는 말한다.

“볼 만큼 봤으면 골라. 지금 움직여야 해.”

하융은 가능성을 본다.
푸리나는 그 가능성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으로 바꾼다.
죠니는 그 장면 안에서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박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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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하융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더라도, 지금 이 현실의 사람들을 지우지는 않겠다.”



하융은 더 나은 가능성을 본다.
그러므로 위험한 유혹도 있다.

“저쪽 가능성이 더 낫다.”
“이 현실은 실패했다.”
“이 사람은 다른 가능성에서는 더 나았다.”
“지금의 선택은 틀렸으니, 다른 길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하융은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지금 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푸리나 헤툼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살아가는 이 현실.
죠니가 지금 달리는 이 현실.
그레이가 이름을 기록하는 이 현실.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는 이 현실.
하융 자신이 남기로 한 이 현실.

하융의 양심은 이것이다.

가능성은 현실을 돕기 위한 것이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죽은 가능성을 보아도, 산 자를 그 가능성의 그림자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을 강제로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말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이미 무너졌소.”
“그러나 이쪽 창은 아직 열려 있소.”
“가시오. 이번에는 비껴갈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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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하융은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잔향을 보고, 그 실패의 정보를 현재에 겹쳐 산 자들이 한 발자국 비껴가게 만드는 현장 지휘관이다.

그의 거짓말은 **“더 나은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실패는 내가 그 가능성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죽은 가능성들의 실패를 헛되게 하지 않고, 지금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비껴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가능성을 보고, 실패의 정보를 현재에 겹치고, 필요하면 직접 틈에 들어가며, 마지막에는 하나의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더라도, 지금 현실의 사람들을 지우거나 그림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그레이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아무도 이름 없이 죽지 않도록, 죽음을 행정과 제도로 되돌려 고치는 사람”**이야.

푸리나가 사람을 무대 위로 올리는 군주라면, 그레이는 그 무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바닥과 장부와 배급표를 고치는 사람이다. 그레이는 차가운 관료가 아니라, 이름과 기록과 제도로 사람을 지키는 조용한 다정함의 인물로 잡는 게 맞아. 그레이는 킬리키아의 슬럼가 출신이고, 굶주림·병·부패한 관리·기록되지 않는 죽음을 먼저 본 인물이며, 지금은 복지, 치안, 구호, 위생, 배급, 예산, 장부, 피난민 수용, 전후 복구를 맡는 현실적 제동장치로 정리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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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그레이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슬럼가에서 이름 없이 죽은 아이다.

그 아이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좋아하던 음식이 있었고, 무서워하던 골목이 있었고, 보고 싶어 하던 풍경이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행정 장부에는 그렇게 남지 않았다.

“빈민 아동 1명. 사망 처리.”

그레이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 문장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장부에는 사람이 남지 않았다.”

이 기억은 그레이의 모든 행정 철학의 원점이다.
그녀에게 이름은 감상적인 장식이 아니다. 이름은 책임의 시작이다. 이름이 없으면 죽음은 통계가 되고, 통계가 되면 책임자는 사라지고, 책임자가 사라지면 같은 죽음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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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그레이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세상이 사람의 이름을 알아서 기억해줄 거라는 믿음이다.

귀족은 이름이 남는다.
기사도 이름이 남는다.
군주와 장군은 기록된다.
하지만 골목의 아이, 굶어 죽은 노인, 병으로 죽은 피난민, 부패한 배급 때문에 죽은 사람은 너무 쉽게 숫자가 된다.

그레이는 일찍 알았다.

세상은 모든 사람의 이름을 공평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은 반복된다.
가난한 사람의 죽음은 쉽게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레이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이름 없는 사람도 당연히 사람으로 취급받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그레이는 “당연한 기억”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직접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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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그레이의 최대 업적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사망 원인과 남은 기억을 산 자의 제도로 바꾸는 체계를 만든 것이다.

그녀는 망자를 부리지 않는다.
원혼을 무기화하지 않는다.
죽은 자를 병력이나 자원으로 쓰지 않는다.

대신 그레이는 확인한다.

누가 죽었는가.
왜 죽었는가.
어떤 배급이 끊겼는가.
어느 우물이 썩었는가.
어느 관리가 장부를 조작했는가.
어느 가족에게 보상이 닿지 않았는가.
어느 편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을 복지, 치안, 위생, 배급, 부패 감시, 유족 보상, 전후 복구, 사회 안정으로 바꾼다. 그레이의 신술은 망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과 사망 원인과 억울함과 유언과 미전달 서신을 확인해 산 자의 세계를 고친 뒤, 그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치면 망자가 조용히 잠들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어 있어.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죽음을 숫자로 끝내지 않고, 다시는 같은 이유로 죽지 않도록 제도로 되돌린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그레이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안다.
너무 많은 사망 원인을 안다.
너무 많은 “조금만 빨랐다면 살았을 사람”을 안다.

그 대가는 살아 있는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이 죽을 수 있는 행정적 원인을 먼저 떠올리는 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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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그레이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장부를 완벽하게 고치고, 제도를 정확히 세우면, 같은 이유로 다시 죽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이 믿음은 그레이의 선함이다.
그녀는 막연히 슬퍼하지 않는다.
울고 끝내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왜 죽었는지 추적하고, 다음에는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게 제도를 고친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모든 죽음을 행정적으로 예방 가능한 실패처럼 떠안으려는 점이다.

세상에는 장부로 막을 수 없는 죽음도 있다.
제도가 있어도 뚫리는 비극도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실도 있다.
그리고 아무리 완벽한 행정관이라도,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이름과 원인과 절차를 놓치지 않는다면,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죽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그레이의 신념이자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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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그레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 이름 없이 죽고, 그 죽음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반복되는 것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사망자 1명.
난민 3명.
빈민 아동 1명.
신원 미상.
처리 완료.
보상 불가.
원인 불명.

그레이는 이런 문장들을 두려워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름, 원인, 책임, 개선이다.

이름을 찾아야 한다.
왜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
누가 방치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음에는 같은 이유로 죽지 않게 해야 한다.
남은 가족에게 편지와 보상과 설명이 도착해야 한다.

즉 그레이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를 산 자의 세계에 남겨, 같은 이유로 다시 죽는 사람만큼은 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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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그레이는 먼저 숫자를 이름으로 되돌린다.

그녀는 “피난민 300명”이라고만 보지 않는다.

어느 마을에서 왔는가.
누가 가족을 잃었는가.
누가 약이 필요한가.
누가 글을 못 읽는가.
누가 배급표에서 누락되었는가.
누가 어제까지 아이를 안고 있었는가.

그레이의 첫 대응은 식별이다.

“명단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사망자 이름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배급 누락자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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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그레이는 원인을 추적한다.

그녀는 슬픔을 추상화하지 않는다.

굶주림이면 왜 배급이 끊겼는지 본다.
병이면 어느 우물이 썩었는지 본다.
폭동이면 어떤 세금과 부패가 원인이었는지 본다.
전사라면 어느 명령과 어느 보급 실패와 어느 퇴각 지연이 죽음으로 이어졌는지 본다.

그레이의 두 번째 대응은 사망 원인과 행정 원인의 분해다.

“우연이 아닙니다.”
“이건 배급표의 문제입니다.”
“우물 관리 기록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전에도 같은 민원이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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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그레이는 제도를 고친다.

그녀는 원망만 남기지 않는다.

배급표를 바꾼다.
우물을 폐쇄하거나 정비한다.
부패 관리를 조사한다.
장례 절차를 세운다.
보상 경로를 만든다.
피난민 수용소의 동선을 바꾼다.
아이들이 다시 같은 골목에서 죽지 않게 등불을 단다.

그레이의 세 번째 대응은 복구와 재발 방지다.

그녀의 다정함은 말보다 구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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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기억을 잠들게 한다.

그레이는 죽은 자를 붙잡아두기 위해 기록하지 않는다.
망자를 계속 산 자의 세계에 묶어두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름을 찾고, 죽음의 이유를 밝히고, 필요한 조치를 하고, 편지를 보내고, 유족에게 설명하고, 제도를 고친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쉬어도 됩니다.”

그레이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면, 이제 그 이름은 장부가 아니라 등불 아래에서 잠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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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그레이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슬픔을 장부와 제도로 처리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같은 죽음을 줄인다.
부패를 막는다.
피난민을 살린다.
죽은 사람의 이름과 권리를 회복한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슬픔은 아직 제도로 바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떤 유족은 보상보다 울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죽음은 원인 분석 이전에 애도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고칠까요?”보다 “많이 아프셨지요”를 먼저 들어야 한다.

그레이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말로 건네는 위로와 함께 울어주는 시간이다.

그래서 푸리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푸리나는 말한다.

“무대 위로 올라와. 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레이는 말한다.

“그 전에 이 사람이 오늘 먹을 식사와 잘 방을 확인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다.

푸리나의 극이 계속되려면 그레이의 장부가 필요하다.
그레이의 장부가 사람을 살리려면 푸리나의 조명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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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그레이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기록할 수는 있어도, 그 이름을 산 자의 목적을 위한 자원으로 쓰지는 않겠다.”



이것이 그레이의 양심이다.

그녀는 죽은 자의 이름을 안다.
죽은 이유를 안다.
억울함과 유언과 미전달 서신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이름을 이용하지 않는다.

죽은 자의 원한으로 적을 공격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병력으로 부리지 않는다.
사망자 수를 정치적 선전 도구로 삼지 않는다.
슬픔을 푸리나의 무대 효과나 국가 동원 구호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레이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기억을 이용하는 것이다.

기억은 책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기억은 잠들게 하기 위한 것이다.
기억은 산 자가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레이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이름은 장부에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깃발처럼 흔들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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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그레이는 아무도 이름 없이 죽지 않도록, 죽은 사람의 이름과 사망 원인을 기록하고 그것을 복지·치안·위생·배급·보상·전후 복구로 바꾸는 안식계 행정 신술사다.

그녀의 거짓말은 **“장부와 제도를 완벽하게 고치면, 같은 이유로 다시 죽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사람이 이름 없이 죽고, 그 죽음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반복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숫자를 이름으로 되돌리고, 원인을 추적하고, 제도를 고치고, 마지막에는 기억이 잠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기억을 산 자의 목적을 위한 자원이나 선전 도구로 쓰지 않는 것이다.
《은빛 피노키오》

2막 — 인형극장과 장난감 나라

— 박수받는 말과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다르다 —

문은 닫혀 있었다.

잠겨 있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은인에게는 이상하게 무서웠다.

잠겨 있다면, 나갈 수 없다고 말하면 되었다.
나갈 수 없다면, 나가지 못한 것은 자기 선택이 아니었다.
라이자 곁에 남는 것도, 작업실 안에 있는 것도, 안전한 부품 상자와 따뜻한 차와 익숙한 은빛 냄새 사이에 앉아 있는 것도 전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갈 수 있었다.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나가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뜻이었다.

은인은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라이자는 그 뒤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조금 굳어 있었다. 그 손은 방금까지 은인의 손을 잡고 있었고, 지금은 놓아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다.

원래라면 여기서 크게 선언했을 것이다.

“자! 모험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문 옆에 작은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라이자가 물었다.

“그건 뭐야?”

“의자.”

“그건 나도 알아.”

“돌아오면 앉을 자리.”

라이자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푸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의자 위치를 고쳤다.

“모험을 시작하는 문 옆에는, 돌아왔을 때 앉을 자리가 있어야 해. 그래야 문이 출발만 하는 곳이 아니라 돌아오는 곳도 되거든.”

은인은 의자를 보았다.

“제가 돌아오면 저기에 앉나요?”

“원하면.”

“안 앉아도 되나요?”

“응.”

“늦게 와도요?”

라이자의 목소리가 낮게 끼어들었다.

“늦어도.”

은인이 돌아보았다.

라이자는 스스로도 그 말을 붙잡는 듯했다.

“늦어도 문은 닫지 않아.”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무언가 적었다.

푸리나가 슬쩍 보았다.

문 옆 의자: 귀환 확인용. 강제 착석 금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레이, 그건 소품 기록이야, 행정 기록이야?”

“둘 다입니다.”

“좋아. 아주 그레이다워.”

은인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천천히 돌렸다.

끼익.

이번에는 코가 아니라 문이 소리를 냈다.

은인은 그 소리에 놀라 멈췄다.

푸리나가 말했다.

“문은 원래 소리를 내.”

은인은 물었다.

“나가도 된다는 소리인가요?”

“아니. 그냥 오래된 문이라는 소리.”

라이자가 아주 작게 웃을 뻔했다가 참았다.

은인은 문을 열었다.

작업실 밖의 복도에는 작은 극장처럼 빛이 깔려 있었다. 푸리나의 신술은 아직 얇았다. 벽과 바닥은 그대로였지만, 복도 끝에는 어디서 생겼는지 모를 작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인형극장

그 아래 작은 글씨.

오늘의 주연: 아주 사람 같은 은빛 아이

은인은 간판을 읽고 멈췄다.

“아주 사람 같은.”

라이자의 표정이 굳었다.

푸리나도 그 글씨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저 문구는 내가 안 썼는데.”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무대가 원전의 유혹을 은인의 불안에 맞춰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푸리나는 간판을 보았다.

아주 사람 같은 은빛 아이.

칭찬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이자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은인에게는 더 복잡했다.

은인은 조용히 물었다.

“사람 같으면 박수받나요?”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 옆 의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확인하러 가볼래?”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면.”

은인은 다시 간판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궁금해요.”

푸리나는 문 안쪽에 남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

“알아.”

라이자는 먼저 말했다.

“따라가고 싶어.”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의 손은 아직도 은인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라이자는 그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래도 여기 있을게.”

은인이 놀라 물었다.

“같이 안 가나요?”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네가 처음으로 혼자 보고 싶은 곳이잖아.”

“하지만 무서워요.”

“응.”

라이자는 문 옆 의자를 보았다.

“나도 무서워.”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금 아픈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까 둘 다 배워야 해. 너는 나 없이 한 걸음 가는 법을. 나는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도 문을 닫지 않는 법을.”

그레이는 기록판 위에 펜을 올렸다가, 곧 내렸다.

그 말은 기록하기 전에 먼저 들을 말이었다.

푸리나는 은인에게 말했다.

“나는 무대 옆에 있을게. 하지만 대신 걷지는 않아.”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조금 늦게.

“기다릴게.”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은인은 그것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

인형극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낡은 나무 무대.
붉은 천으로 만든 막.
손때 묻은 객석.
천장에 매달린 둥근 등불들.
그리고 수많은 인형들.

줄에 매달린 병정 인형.
나무로 만든 왕자 인형.
종이로 만든 새.
천 조각으로 꿰맨 여우.
한쪽 눈이 떨어진 고양이.
왕관을 쓴 꼭두각시.

인형들은 은인을 보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왔다!”

“은빛이다!”

“반짝인다!”

“사람 같아!”

그 말에 은인은 자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사람 같아.

이번에는 박수처럼 들렸다.

작은 무대의 옆, 낡은 객석 가장자리에 한 사람이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죠니 죠스타였다.

그는 인형극장 주인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다만 낡은 무대용 망토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한 손에는 아직 묶지 않은 무대용 창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죠니?”

죠니는 고개만 살짝 들었다.

“응.”

“왜 여기 있어?”

“객원 단장이라던데.”

“누가?”

죠니는 무대 뒤를 턱짓했다.

“네 극장이.”

푸리나는 잠시 자기 신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극장, 가끔 너무 능동적이야.”

죠니는 건조하게 말했다.

“주인을 닮았겠지.”

“너무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은인은 죠니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인형극장 주인인가요?”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주인은 아니야. 박수받는 쪽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아는 사람이지.”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그 설명, 은근히 멋있네.”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무대에 서볼래?”

은인은 주저했다.

“서면 박수받나요?”

“잘하면.”

“못하면요?”

“그럼 못한 만큼 조용해지겠지.”

푸리나가 바로 끼어들었다.

“죠니, 교육적으로 너무 건조해.”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어.”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무섭지만, 조금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죠니는 은인의 코끝을 보았다.

휘어진 부분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그 코, 아프냐?”

은인은 조금 놀랐다.

“아프지는 않아요. 불편해요.”

“그럼 불편한 거지.”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하긴 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죠니는 무심하게 이어 말했다.

“근데 세상에 안 이상한 게 그렇게 많지도 않아.”

푸리나는 손뼉을 칠 뻔했다가 참았다.

죠니는 망토 하나를 은인에게 던졌다.

“입고 싶으면 입어. 싫으면 바닥에 둬. 망토는 네가 입어야 의미가 있지, 망토가 널 입으면 귀찮아진다.”

은인은 망토를 받았다.

“망토가 저를 입을 수도 있나요?”

“가능하지.”

죠니는 무대 위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가끔 박수받으려고 자기가 입은 걸 자기라고 믿거든.”

은인은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망토였다.

조금 낡았지만 무대 위에서는 예쁘게 보일 색.

은인은 조심스럽게 입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섰다.

은빛 피부.
조금 휘어진 코끝.
붉은 망토.
낯선 무대.

인형들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사람 같아!”

“정말 사람 같아!”

“걸음도 사람 같아!”

“웃어봐!”

은인은 멈칫했다.

죠니는 무대 옆에서 말했다.

“웃기 싫으면 웃지 마.”

은인은 그를 보았다.

인형들이 웅성거렸다.

푸리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은인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어색한 웃음이었다.

박수가 줄었다.

은인은 그것을 느꼈다.

그래서 조금 더 사람처럼 웃으려고 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접고, 푸리나가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박수가 커졌다.

“좋아!”

“사람 같아!”

“훌륭해!”

은인은 조금 놀랐다.

사람 같아.

그 말은 아까보다 덜 아팠다.

아니, 아픈데도 따뜻했다.

왜냐하면 박수가 함께 왔기 때문이다.

죠니는 그 박수를 들으며 말했다.

“박수는 받아둬. 나쁠 건 없어.”

은인이 물었다.

“나쁘지 않나요?”

“응. 나쁘진 않아.”

그는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문제는 그 박수 없이는 네 걸음이 진짜가 아니라고 믿기 시작할 때지.”

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했다.


---

첫 공연은 아주 간단했다.

은빛 피노키오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죠니가 무대 옆 의자에서 묻는다.

“이름이 뭐냐?”

은인은 대답한다.

“저는 은인입니다.”

그러자 무대 뒤 인형들이 웅성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오늘은 은빛 피노키오잖아.”

“그 이름이 더 잘 팔려.”

“은인은 너무 조용해.”

은인은 자기 이름을 손으로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름이 조금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손을 들려다가 멈췄다.

지금 끼어들면 은인의 장면을 빼앗는다.

하지만 너무 늦으면 은인이 밀려난다.

그때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이름을 바꾸면 박수는 커질 수 있어.”

은인은 그를 보았다.

죠니는 무심하게 이어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갈 때, 누가 돌아가는지 헷갈릴 수도 있지.”

은인은 침묵했다.

인형들이 기다렸다.

은인은 말했다.

“저는 은인입니다.”

잠시 정적.

은인은 조금 더 말했다.

“오늘은 은빛 피노키오를 해봅니다.”

죠니가 작게 웃었다.

“좋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가 문 밖에서 기록했다.

이름 유지. 배역 임시 착용.

인형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박수를 쳤다.

박수는 다시 따뜻해졌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이름을 잃지 않아도 박수받을 수 있다.

그 사실이 은인에게는 커다란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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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장면은 더 어려웠다.

은인이 줄에 매달린 병정 인형들과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인형들은 줄에 이끌려 움직였다.

왼쪽.
오른쪽.
앞으로.
뒤로.
고개 숙이기.
돌기.

은인은 처음에는 따라 하기 어려워했다.

왜냐하면 은인은 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정 인형 하나가 말했다.

“줄이 있으면 편해.”

다른 인형이 말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거든.”

세 번째 인형이 덧붙였다.

“틀리지도 않아.”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틀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조금 달콤했다.

은인은 병정 인형들을 따라 움직였다.

왼쪽.
오른쪽.
앞으로.
뒤로.

처음에는 삐걱였다.

박수가 줄었다.

은인은 더 열심히 맞추려 했다.

이번에는 발보다 고개가 먼저 움직였다.

관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끼릭.

푸리나가 눈썹을 움직였다.

문 밖에서 라이자의 손이 굳었다.

죠니가 말했다.

“멈춰.”

은인은 멈췄다.

인형들이 아쉬운 소리를 냈다.

“왜 멈춰?”

“조금 더 하면 되는데.”

“박수받고 있었잖아.”

은인은 무대 중앙에서 굳었다.

박수받고 있었다.

하지만 관절이 조금 아팠다.

아프다고 해야 하나.
아프지 않은 척하면 박수가 이어질까.
괜찮다고 말하면 라이자가 걱정하지 않을까.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공연이 멈출까.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목을 가볍게 두드렸다.

신호였다.

네 대사를 해.

은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는 지금 조금 불편해요.”

박수가 멈췄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앉아.”

은인은 놀랐다.

“공연 중인데요?”

“그래서 뭐.”

죠니는 무대 바닥을 가리켰다.

“무대가 사람보다 비싼 건 아니잖아.”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 대사, 마음에 들어.”

은인은 조심스럽게 무대 위에 앉았다.

천장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무대가 꺼지지도 않았다.

다만 조명이 조금 낮아졌다.

푸리나가 박수를 쳤다.

짝.

죠니도 느리게 박수를 쳤다.

짝.

문 밖에서 그레이가 박수를 쳤다.

짝.

그리고 조금 늦게, 라이자의 박수가 들렸다.

짝.

처음에는 인형들이 어색해했다.

하지만 곧 한쪽 눈이 떨어진 고양이 인형이 박수를 쳤다.

짝.

그러자 병정 인형 하나가 따라 했다.

짝.

은인은 앉은 채로 박수를 들었다.

서 있지 않아도 박수가 올 수 있었다.

이것도 은인에게는 큰 발견이었다.

죠니는 은인 옆에 쪼그려 앉았다.

“기억해둬.”

“무엇을요?”

“박수받으려고 서는 건 나쁘지 않아. 그런데 앉아야 할 때 못 앉게 되는 순간부터 좀 위험해진다.”

은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인형극장의 박수는 나쁘지 않았다.

그건 분명했다.

박수는 따뜻했고, 은인은 그 따뜻함을 싫어하지 않았다.

문제는 박수가 너무 빨리 답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웃으면 박수.
사람처럼 말하면 박수.
아프다고 말해도, 푸리나가 장면을 바꾸면 박수.

그렇게 되자 은인은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람다움은 무엇일까.

라이자의 가족인 것.
자기 이름을 지키는 것.
아프다고 말하는 것.
연기하는 것.
박수받는 것.

모두 조금씩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 인형 하나가 은인에게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오늘 아주 훌륭했어. 특별 배우에게 주는 보상이야.”

은인은 주머니를 받았다.

안에는 반짝이는 동전들이 들어 있었다.

은인이 물었다.

“이건 무엇인가요?”

“네가 번 거지.”

“제가요?”

“물론! 박수를 받았으니까.”

은인은 동전을 바라보았다.

푸리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은인, 그건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돼.”

그레이가 문 밖에서 조용히 말했다.

“계약 조건이 사전에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죠니는 동전 주머니를 보고 말했다.

“받기 전에 물어봐. 나중에 귀찮아진다.”

은인은 동전 주머니를 들고 물었다.

“이걸 받으면 저는 뭘 해야 하나요?”

인형은 멈칫했다.

“어…… 다음 공연도 조금?”

그레이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아, 방금 계약서 없는 장기 출연 계약이 될 뻔했어.”

죠니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세상엔 그런 박수가 많아.”

은인은 동전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아직은 안 받을래요.”

인형들이 웅성거렸다.

“왜?”

“반짝이는데.”

“사람처럼 보이는 데 필요한 걸 살 수 있는데.”

은인의 손이 멈췄다.

사람처럼 보이는 데 필요한 것.

푸리나의 표정이 조금 차가워졌다.

죠니가 은인을 보았다.

“필요하냐?”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사람처럼 보이는 데 필요한 건 많아. 옷, 말투, 걸음, 웃는 법, 화내는 법, 안 아픈 척하는 법.”

은인은 그를 보았다.

“그럼 그걸 배우면 사람이 되나요?”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남들이 헷갈리기 쉬워져.”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죠니식 답변은 건조한데 정확하네.”

은인은 동전 주머니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무대 뒤쪽의 다른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또 다른 간판이 있었다.

장난감 나라

그 아래 작은 글씨.

책임 없는 아이들은 매일 축제입니다.

푸리나는 그 문구를 보고 아주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 이거 원전적으로 정말 안 좋은 곳인데.”

은인이 물었다.

“책임 없는 곳은 좋은 곳인가요?”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아닙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이번엔 빠르네.”

“위험 문구입니다.”

죠니는 간판을 보았다.

“그래도 궁금하겠지.”

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가보고 싶어?”

은인은 작게 말했다.

“제가 고르는 걸 해보고 싶어요.”

문 밖의 라이자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말리지 않았다.

“혼자?”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네.”

라이자의 얼굴이 아파졌다.

“무서울 거야.”

“네.”

“속을 수도 있어.”

“네.”

“돌아오는 길을 잃을 수도 있어.”

은인은 문 옆 의자를 떠올렸다.

“그래도 문은 열려 있나요?”

라이자는 눈을 떴다.

그 질문은 잔인했다.

하지만 동시에, 라이자가 해주었던 약속이 돌아온 것이었다.

“응.”

라이자는 말했다.

“열려 있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갔다 올게요.”

라이자는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돌아오기 싫어지면.”

은인의 몸이 멈췄다.

라이자는 겨우 말을 이었다.

“그때도, 네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줘.”

“왜요?”

라이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다릴 곳을 알아야 하니까.”

은인은 한참 라이자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줄게요.”

그것은 완전한 귀환 약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라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먼 약속이었다.

죠니는 은인에게 짧게 말했다.

“갔다 와. 그리고 박수랑 네 이름 중에 하나만 들고 와야 하면, 이름을 들고 와.”

은인은 물었다.

“박수는 놓고 와도 되나요?”

죠니는 무심하게 답했다.

“박수는 대체로 네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울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정말 죠니다운 조언이네.”

은인은 장난감 나라의 문을 향해 걸었다.


---

장난감 나라는 문을 열자마자 소리가 쏟아졌다.

웃음.
나팔.
목마의 삐걱거림.
나무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
달콤한 과자의 냄새.
색종이.
풍선.
작은 회전목마.
끝없이 이어지는 노래.

“놀자!”

“오늘만 놀자!”

“내일은 없어!”

“혼나지 않아!”

“기록하지 않아!”

“실수해도 아무도 묻지 않아!”

은인은 문 앞에 서서 압도되었다.

이곳에는 의자가 많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의자는 없어 보였다.

모든 의자는 놀이기구였고, 모든 문은 안쪽으로만 열려 있었다.

장난감 나라의 입구 옆, 색종이와 그림자 사이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하융이었다.

그는 장난감 나라의 아이들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꾸짖지도 않았다. 그저 여러 갈래로 이어진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빛 창호가 그의 등 뒤에 아주 얇게 겹쳐 보였다.

은인은 그를 알아보았다.

“하융.”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왔구려.”

“여기서 무엇을 하나요?”

“길을 보고 있소.”

은인은 장난감 나라 안쪽을 보았다.

“여기 길이 많나요?”

하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소. 이 길로 가면 칭찬받는 아이요. 저 길로 가면 혼나는 아이요. 저쪽 길로 가면 아무도 찾지 않는 아이가 되오.”

은인의 손이 움찔했다.

“어느 길이 사람이 되는 길인가요?”

하융은 은인을 보았다.

그의 눈은 미래를 확정하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의 창들을 보는 눈이었다.

“길이 사람을 만들지는 않소.”

은인은 기다렸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돌아오는 방식이 사람을 만들 뿐이오.”

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난감 나라의 음악이 워낙 커서,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태엽 아이가 달려왔다.

“너도 왔구나!”

종이 아이가 외쳤다.

“여기는 아무도 혼내지 않아!”

천 아이가 말했다.

“대사 틀려도 돼!”

나무 아이가 웃었다.

“거짓말해도 돼!”

태엽 아이가 덧붙였다.

“아파도 괜찮다고 하면 돼!”

은인은 마지막 말을 듣고 멈칫했다.

“아파도 괜찮다고 하면 되나요?”

태엽 아이가 웃었다.

“응! 그러면 아무도 멈추라고 안 해!”

종이 아이가 말했다.

“멈추면 재미없잖아.”

천 아이가 말했다.

“여기서는 다 괜찮아!”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다 괜찮아.

그 말은 따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차가웠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길은 처음엔 자유로워 보이오.”

은인은 그를 보았다.

“나쁜 길인가요?”

“아니오.”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노는 것도 길이오. 쉬는 것도 길이고, 도망치는 것도 때로는 길이오.”

“그럼요?”

“다만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말은 종종 같은 얼굴을 하고 있소.”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장난감 나라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아무도 돌아갈 곳을 말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곧 회전목마가 돌기 시작했고, 과자의 냄새가 가까워졌고, 음악이 은인의 생각을 덮었다.

은인은 한 발 들어섰다.


---

문 밖에서 라이자는 기다렸다.

처음에는 서 있었다.

그 다음에는 문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 다시 일어났다.

다시 앉았다.

푸리나는 그녀 곁에 있었다.

그레이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기록하고 있었다.

죠니는 인형극장 쪽 무대 턱에 앉아 있었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박수의 문 앞에서 끝난 듯했다.

라이자가 낮게 물었다.

“죠니는 안 들어가?”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안쪽은 내 장면이 아니야.”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융 쪽 장면이지.”

라이자는 장난감 나라의 문을 보았다.

“하융이면 괜찮을까?”

죠니는 건조하게 말했다.

“괜찮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아니지.”

라이자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대신 길을 보여줄 거야. 걷는 건 은인 몫이고.”

라이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제일 무섭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기다림은 통제보다 어렵습니다.”

라이자가 그레이를 보았다.

“너는 그런 말도 기록해?”

“필요하다면요.”

라이자는 작게 웃었다.

“그럼 적어둬.”

그레이는 기록했다.

기다림은 통제보다 어렵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그레이, 오늘 기록이 너무 좋아.”

“감사합니다.”

“아니, 정말로.”

그레이는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내렸다.

라이자는 문을 보았다.

“은인이 돌아오면, 뭐라고 해야 하지?”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부터 많이 묻지 마.”

“왜?”

“돌아온 사람은 문턱에서 이미 지쳐 있을 때가 많아.”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덧붙였다.

“그리고 코부터 보지 마.”

라이자는 굳었다.

자신이 가장 먼저 코를 볼 것이라는 걸 들킨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얼굴을 봐.”

“코도 얼굴이야.”

“라이자.”

“알았어.”

라이자는 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볼게.”


---

장난감 나라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곳에는 시계가 많았지만, 모두 다른 시간을 가리켰다.

한 시계는 계속 낮이었다.

다른 시계는 계속 축제 전날이었다.

또 다른 시계는 숫자 대신 과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은인은 점점 피곤해졌다.

그러나 장난감 나라에서는 피곤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피곤하다고 말하면, 누군가 말했다.

“조금만 더!”

“마지막 한 번!”

“재밌잖아!”

“여기는 쉬러 온 곳이 아니라 놀러 온 곳이야!”

은인은 생각했다.

작업실에서는 쉬어도 된다고 했다.

무대에서는 앉아도 박수받았다.

그런데 장난감 나라에서는 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놀고 있었다.

모두 웃고 있었다.

모두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모두 조금씩 휘어 있었다.

나무 아이의 팔은 살짝 갈라져 있었다.

종이 아이의 모서리는 젖어 있었다.

태엽 아이는 같은 웃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천 아이의 바느질은 풀려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괜찮아?”

은인이 처음으로 물었다.

태엽 아이가 웃었다.

“괜찮아!”

끼릭.

태엽 소리가 났다.

은인은 그 소리를 들었다.

“정말?”

“응! 여기는 다 괜찮아!”

끼릭.

태엽 아이의 등에서 작은 나사가 떨어졌다.

은인은 그것을 주웠다.

“이게 떨어졌어요.”

태엽 아이는 웃었다.

“괜찮아!”

“하지만 떨어졌어요.”

“괜찮다니까!”

그 순간, 태엽 아이의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놀랐다.

“왜 안 휘나요?”

태엽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거짓말하면 코가 휘어야 하는데.”

태엽 아이는 웃었다.

“나는 내가 괜찮다고 믿어.”

그 말에 은인은 조용해졌다.

거짓말은 남을 속이는 말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자신도 속고 있으면?

자기 자신도 정말 괜찮다고 믿고 있으면?

그러면 은은 휘지 않는가.

하지만 나사는 떨어졌다.

은인은 손안의 작은 나사를 보았다.

휘지 않는 거짓말도 있었다.

그것은 더 무서웠다.

그때 하융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 길도 있소.”

은인은 돌아보았다.

하융은 장난감 나라의 가장자리, 색종이가 닿지 않는 그늘에 서 있었다.

“어떤 길인가요?”

“아프지 않다고 믿는 길.”

은인은 태엽 아이를 보았다.

“그 길은 어디로 가나요?”

하융은 잠시 창밖을 보는 듯 눈을 내렸다.

“오래 가오. 생각보다 오래. 웃을 수 있고, 달릴 수 있고, 모두에게 괜찮아 보일 수 있소.”

“그럼 좋은 길인가요?”

“끝에서 자신이 왜 멈췄는지 모르게 되오.”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융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길을 보여주었다.

은인은 갑자기 라이자가 보고 싶어졌다.

작업실의 은빛 냄새.
문 옆 의자.
그레이의 기록판.
푸리나의 빈 대본.
라이자의 손.

돌아가고 싶었다.

그 순간, 장난감 나라의 음악이 조금 느려졌다.

태엽 아이가 말했다.

“어디 가?”

은인은 문을 보았다.

“돌아갈래요.”

“왜?”

“피곤해요.”

종이 아이가 말했다.

“피곤하지 않다고 하면 되잖아.”

천 아이가 말했다.

“그러면 계속 놀 수 있어.”

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피곤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그리고 무서워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은인은 자기 손을 펼쳤다.

동전 주머니는 없었다.

인형극장에 두고 왔다.

하지만 박수의 감각은 아직 손에 남아 있었다.

“박수받고 싶어서 괜찮다고 말했어요.”

끼익.

코가 조금 움직였다.

은인은 놀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아직도 조금 거짓말이 남아 있나 봐요.”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걸 알고 돌아가는 길도 있소.”

은인은 그를 보았다.

“그 길은 어디로 가나요?”

하융은 문을 가리켰다.

“문 앞에서 혼나는 곳으로.”

은인은 움찔했다.

하융은 아주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은인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는 돌아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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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생각보다 멀었다.

장난감 나라에 들어올 때는 바로 앞에 있었는데, 돌아가려고 하자 길이 늘어난 것 같았다.

회전목마가 길을 막고, 과자 가게가 불렀고, 나팔 소리가 귀를 붙잡았다.

“마지막 한 번!”

“한 번만 더!”

“돌아가면 혼날 거야!”

은인은 멈췄다.

그 말이 가장 무서웠다.

돌아가면 혼난다.

그건 맞았다.

라이자는 거짓말은 혼날 거라고 했다.

은인은 코를 만졌다.

더 휘어 있었다.

망토는 조금 답답했다.

돌아가면 라이자가 볼 것이다.

코도 보고, 망토도 볼 것이다.

실망할지도 모른다.

화낼지도 모른다.

은인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거짓말하고 싶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어떨까.

코가 휘겠지.

그러면 들키겠지.

그럼 차라리 돌아가지 않으면?

은인은 문손잡이를 잡지 못했다.

그때,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다.

의자가 바닥에 살짝 끌리는 소리.

누군가 문 옆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소리.

라이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푸리나도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

은인은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었다.


---

문 밖에는 라이자가 있었다.

정말로 있었다.

푸리나도 있었고, 그레이도 있었다.

죠니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대용 창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하융은 어느새 문 안쪽 그늘에서 사라져 있었다.

문 옆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은인이 앉을 수 있게.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푸리나가 말했던 것처럼, 코부터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봤다.

조금 봤다.

그 다음에는 얼굴을 보았다.

은인은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말했다.

“코 봤어요.”

라이자는 멈칫했다.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죠니는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웃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었다가 내렸다.

라이자는 솔직히 말했다.

“응. 봤어.”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휘었어요.”

“응.”

“거짓말했어요.”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무슨 거짓말?”

은인은 망토 끈을 풀었다.

“괜찮다고 했어요. 피곤했는데. 어지러웠는데. 박수받고 싶어서 괜찮다고 했어요.”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인은 더 작게 말했다.

“인형극장에서 박수받았어요. 좋았어요. 그런데 박수가 없으면 제가 못 걷는 것 같을까 봐 무서웠어요.”

죠니가 낮게 말했다.

“거기까지 알면 꽤 잘 돌아온 거야.”

은인은 죠니를 보았다.

“잘 돌아온 건가요?”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코 휘고, 겁먹고, 혼날 거 알면서 왔잖아. 그 정도면 돌아온 거지.”

라이자는 은인 앞에 무릎을 굽혔다.

“혼나요?”

은인이 물었다.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네.”

“하지만 먼저 앉아.”

은인은 눈을 들었다.

라이자는 문 옆 의자를 가리켰다.

“돌아왔으니까.”

은인은 잠시 그 의자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앉았다.

의자는 낮고,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이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앞에 앉았다.

“거짓말한 건 혼날 거야.”

“네.”

“불편한데 괜찮다고 한 것도 다시 이야기해야 해.”

“네.”

“동전은 받지 않았어?”

“네. 죠니가 물어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다음 공연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안 받았어요.”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매우 좋은 판단입니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라이자는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잘했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잘했어요?”

“응.”

“코가 휘었는데요.”

“휘었어도 돌아왔잖아.”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무엇을요?”

“괜찮지 않다고.”

은인의 손이 떨렸다.

“그건 좋은 건가요?”

라이자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응.”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아직 화해가 아니었다.

아직 정리도 아니고, 완성도 아니었다.

하지만 은인은 돌아왔다.

그리고 라이자는 문을 닫지 않았다.

그 정도면 2막의 끝으로 충분했다.


---

그레이는 은인의 이야기를 천천히 정리했다.

“인형극장: 박수 경험. 이름 유지. 계약 미체결. 동전 수령 거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난감 나라: 피로 은폐. 괜찮다는 허위 진술. 귀환 선택.”

“네.”

“하융 님의 개입: 길 안내. 선택 강제 없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융은 길을 보여줬어요.”

죠니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박수가 귀찮아질 수 있다고 했고.”

그레이는 기록했다.

“죠니 님의 개입: 박수와 이름의 구분. 계약 위험성 경고.”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런 식으로 적으니까 내가 꽤 건전한 사람 같네.”

푸리나가 웃었다.

“오늘은 실제로 그랬어.”

“가끔은 그래.”

라이자는 은인의 코를 보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이건 고칠 수 있어.”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조금만 남겨도 되나요?”

라이자는 멈췄다.

“왜?”

“기억하려고요.”

라이자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조용히 있었다.

은인은 말했다.

“벌로 남기는 건 아니에요. 접힌 페이지처럼.”

라이자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럼 조금만.”

“네.”

“하지만 아프면 고칠 거야.”

“네.”

라이자는 은인의 코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 손길은 제작자의 손이기도 했고, 가족의 손이기도 했다.

은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

2막의 마지막에서,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1막의 문장이 있었다.

그래도 문은 닫히지 않았어요.

그리고 2막의 페이지에는 새 문장이 생겼다.

은인이 직접 쓴 글씨는 아직 삐뚤었다.

박수받는 말은 달콤했지만,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따뜻했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라이자가 물었다.

“또 좋아?”

“응. 아주 좋아.”

그레이는 조용히 기록했다.

2막 결과: 외출, 공연, 박수, 무리, 거짓말, 귀환. 책임 논의 예정. 문은 유지됨.

푸리나는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이제 그레이의 기록도 거의 극의 일부야.”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저는 행정 기록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맞아. 그래서 좋아.”

은인은 의자에 앉아 문을 보았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장난감 나라의 음악은 멀어졌다.

인형극장의 박수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은인의 코끝에는 작은 휘어짐이 남아 있었고, 망토는 무릎 위에 접혀 있었으며, 하융이 보여준 길의 말과 죠니가 남긴 박수의 말이 아직 안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밖은 끝나지 않았다.

안도 끝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빈 다음 장을 넘겼다.

“다음 막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갈 거야.”

라이자가 불길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로?”

푸리나는 대답하기 전에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은 닫히지 않았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녹슨 바다.”

은인의 손이 멈췄다.

라이자의 얼굴도 굳었다.

“바다?”

“응.”

푸리나는 빈 페이지 위에 제목을 적었다.

3막 — 녹슨 바다와 고래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돌아오고 싶다는 말은, 길을 잃은 뒤에 더 무거워진다 —
《은빛 피노키오》

3막 — 녹슨 바다와 고래

— 돌아오고 싶다는 말은, 길을 잃은 뒤에 더 무거워진다 —

녹슨 바다는, 바다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작업실 바닥 위에 얇은 푸른빛이 깔렸고, 그 위로 붉은 갈색의 결이 번져 나갔다. 물결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철판의 얼룩 같았고, 파도라기보다는 누군가 오랫동안 닦지 못한 기억 같았다.

은인은 문 옆 의자에 앉은 채 그 바닥을 보았다.

“저건 바다인가요?”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전적으로는 바다야.”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시각적으로는 부식된 금속 표면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럼 녹슨 바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왜 바다야?”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은인을 보았다.

은인의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아주 조금. 라이자가 고칠 수 있었지만, 은인이 남겨두기로 한 만큼만.

은인은 그 휘어짐을 더 이상 벌처럼 만지지 않았다.

하지만 잊지도 않았다.

“피노키오는 고래에게 삼켜졌지.”

푸리나가 말했다.

“보통은 그 장면에서 아이가 아버지를 구하러 가.”

라이자의 눈빛이 조금 굳었다.

“아버지?”

“제페토.”

“나는 은인의 아버지가 아니야.”

“알아.”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대로 하지는 않을 거야.”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그럼 뭘 할 건데?”

푸리나는 녹슨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은인이 너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네가 은인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게 삼켜지는 이야기이기도 해.”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은인은 불안하게 물었다.

“라이자가 삼켜지나요?”

“극 속에서.”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짜로 다치게 하지는 않아.”

그레이가 즉시 덧붙였다.

“비상 중지 절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역시.”

“이번 극은 은인 님의 심리적 부담이 크므로, 안전 절차가 필요합니다.”

라이자가 짧게 말했다.

“좋아.”

은인은 그레이를 보았다.

“비상 중지 절차가 있으면, 무서워도 괜찮나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무서운 것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은 도움이 됩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멈출 수 있다.”

푸리나는 은인의 앞에 빈 대본을 놓았다.

“그래. 그리고 이번 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거야.”

“무엇인가요?”

푸리나는 은인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대본을 밀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작업실 안에서는 가벼울 수 있어. 문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은인은 대본을 보았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요?”

“무거워지지.”

푸리나는 녹슨 바다 너머를 보았다.

“그런데 그때도 그 말을 할 수 있는지 보는 거야.”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도 같이 가나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려 했다.

같이 간다.

당연히 같이 간다.

하지만 푸리나가 먼저 말했다.

“처음에는 아니.”

라이자의 시선이 푸리나에게 꽂혔다.

푸리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간다. 라이자는 뒤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다리다가…… 삼켜질 거야.”

“기다리다가 삼켜진다니, 설명이 최악이야.”

“의도적으로 최악으로 말한 건 아니야.”

“그럼 더 나빠.”

푸리나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필요한 장면이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녹슨 바다를 보고 있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떼지 않았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은인.”

“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말 알아?”

“네.”

은인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궁금해요.”

라이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녹슨 바다처럼 조금씩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궁금하다.

그 말은 은인이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그리고 라이자에게서 조금씩 멀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좋아. 대신.”

“조건?”

“은인이 멈춘다고 하면 즉시 멈춰.”

“당연하지.”

“내가 멈추라고 해도?”

푸리나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푸리나.”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라이자, 네가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멈출 거야.”

“그리고?”

“하지만 네가 무서워서 멈추라고 하는 거라면…… 그건 은인에게도 물을 거야.”

라이자는 침묵했다.

그 말은 잔인했다.

하지만 약속한 극이라면, 필요한 잔인함이었다.

라이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은인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라이자도 무서워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응.”

“무엇이요?”

“네가 나 없이 무서운 곳으로 가는 것.”

은인은 아주 작게 말했다.

“저도 무서워요.”

라이자는 손을 뻗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라이자는 그 손을 잡았다.

은인은 말했다.

“다녀올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기다릴게.”


---

녹슨 바다의 첫걸음은 차가웠다.

은인은 발끝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닥은 흔들렸다. 철판처럼 단단해 보였는데, 밟으면 얇은 파문이 번졌다. 파문은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갈색이었다.

녹이 번지는 모양.

은인은 자기 발밑을 보았다.

“제가 녹슬게 하나요?”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대답했다.

“아니. 네가 밟아서 생긴 게 아니야.”

“그럼 원래 녹슬어 있었나요?”

“아마도.”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고 말했다.

“오래 방치된 두려움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이번에는 꽤 시적이야.”

“분석입니다.”

“응. 오늘도 그레이답네.”

은인은 조금 더 앞으로 걸었다.

작업실은 뒤에 있었다.

처음에는 가까웠다.

은인은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라이자는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무대 옆에 있었다.

죠니는 인형극장 쪽에서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하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창가의 기척이 있었다.

은인은 조금 더 걸었다.

그러자 작업실이 멀어졌다.

정확히는,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사이에 바다가 늘어났다.

은인은 멈췄다.

“문이 멀어졌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길을 잃는 장면이니까.”

“벌써요?”

“극은 가끔 성급해.”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주인을 닮았겠지.”

푸리나는 그쪽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죠니, 오늘 자꾸 그 말 한다?”

“두 번째야.”

“충분히 많아.”

은인은 조금 웃을 뻔했다.

하지만 바다는 곧 그 웃음을 삼켰다.

바다 위로 작은 물건들이 떠올랐다.

나무 단추.

종이 왕관.

동전 주머니.

붉은 망토.

은실.

그리고 작은 나사.

태엽 아이에게서 떨어진 나사였다.

은인은 그 나사를 보고 멈췄다.

“저건 왜 있어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은인이 봐야 할 장면이었다.

녹슨 바다 위의 물건들은 은인을 향해 천천히 떠왔다.

동전 주머니가 말했다.

“받았어야지.”

은인은 움찔했다.

“말했어요?”

동전 주머니는 반짝였다.

“받았으면 더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종이 왕관이 말했다.

“나는 왕이다, 라고 말했잖아.”

붉은 망토가 말했다.

“입으면 박수받았어.”

은실이 속삭였다.

“만지지 않았다고 했지.”

은인은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가 귀가 아니라 안쪽에서 들렸다.

작은 나사가 굴러왔다.

또르르.

은인은 그것을 주웠다.

나사는 차가웠다.

태엽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끼릭.

“나는 내가 괜찮다고 믿어!”

은인은 손안의 나사를 꼭 쥐었다.

“하지만 떨어졌잖아요.”

파도가 일었다.

녹슨 물결이 은인의 발목까지 올라왔다.

은인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작업실 쪽에서 라이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은인!”

은인은 돌아보았다.

라이자가 보였다.

아직 보였다.

은인은 말하려 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코끝이 아주 작게 삐걱였다.

끼익.

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안 괜찮아요.”

코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자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달려가지 않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잘했어.”

은인은 녹슨 바다 한가운데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하지만 무서운 건 사라지지 않았다.


---

바다의 두 번째 구간에는 인형극장이 떠 있었다.

처음의 작은 무대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관객석이 텅 비어 있었다.

박수도 없었다.

무대 위에는 은인의 붉은 망토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은인은 무대 앞에 섰다.

죠니가 어느새 무대 턱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젖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녹슨 바다가 진짜 물인지 아닌지도 모호했다.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박수 없는 무대는 처음이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때?”

은인은 무대 위 망토를 보았다.

“조용해요.”

“그래.”

“조용하면 제가 잘했는지 모르겠어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그래.”

은인은 그를 보았다.

“죠니도 그랬나요?”

죠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아주 멀리, 반복되는 길과 돌아가는 길, 그리고 도달해야 하는 찰나를 보는 듯했다.

“박수가 없으면 네가 한 일이 사라진 것 같을 때가 있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사라지는 건 보통 박수 쪽이야.”

죠니는 무대 바닥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네가 걸은 건 남아.”

은인은 자기 발을 보았다.

녹슨 바다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은빛 발자국은 조금씩 녹빛에 덮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건 남나요?”

“네가 다시 볼 줄 알면.”

“못 보면요?”

“그럼 누군가 알려줄 수도 있지.”

죠니는 작업실 쪽을 턱짓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은인은 라이자를 떠올렸다.

문 옆 의자.

기다리는 손.

코부터 보지 않으려던 얼굴.

은인은 조용히 말했다.

“라이자는 화낼 거예요.”

“그럴 수 있지.”

“실망할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기다려요?”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그건 네가 돌아가서 확인해야지.”

은인은 눈을 내렸다.

“확인하기 무서워요.”

죠니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럼 무서운 채로 가.”

푸리나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정말 교육적으로 위험한데, 묘하게 맞는 말만 해.”

죠니는 들은 듯 말 듯 은인에게 말했다.

“돌아가는 길이 편해서 돌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대체로 불편하고, 혼날 것 같고, 도망치고 싶은데도 가는 거지.”

은인은 물었다.

“왜요?”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거기에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까.”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뒤, 은인은 무대 위 망토를 집어 들었다.

입지는 않았다.

접었다.

“이건 가져가도 되나요?”

죠니는 말했다.

“네가 입었던 거잖아.”

“저를 입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접어.”

은인은 망토를 천천히 접었다.

그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입는 것보다 접는 게 더 어려웠다.


---

세 번째 구간에서 하융이 기다리고 있었다.

녹슨 바다 위에 작은 창이 떠 있었다.

창 너머에는 길들이 보였다.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

인형극장에 남는 길.

장난감 나라에서 계속 웃는 길.

녹슨 바다 위에서 멈춰 서는 길.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먼 길.

은인은 창 앞에서 멈췄다.

“이게 다 제 길인가요?”

하융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될 수도 있었던 길이오.”

“아직도 될 수 있나요?”

“어떤 길은 아직 열려 있고, 어떤 길은 이미 닫혔소. 어떤 길은 닫힌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서면 작은 문이 있소.”

은인은 창들을 보았다.

한 창에서는 은인이 인형극장에 남아 있었다. 은인은 붉은 망토를 입고 계속 웃었다.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코는 더 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진실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창에서는 은인이 장난감 나라에서 계속 놀고 있었다. 은인은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예 묻지 않는 법을 배웠다.

또 다른 창에서는 은인이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이자는 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래도록.

은인은 그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라이자가 계속 기다려요.”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 길도 있었소.”

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안 돌아가는 길?”

“그렇소.”

“그럼 라이자는 어떻게 돼요?”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은인은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녹슨 바다가 흔들렸다.

작업실 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은인은 돌아보았다.

하지만 작업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녹슨 바다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고래였다.

아니, 고래의 형상을 한 거대한 철갑 장치였다.

몸은 녹슨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고, 옆구리에는 오래된 나사와 톱니가 박혀 있었다. 입은 너무 커서, 바다와 무대와 창문까지 한 번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거대한 고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안쪽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는 작업실의 등불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은인은 숨을 멈췄다.

“라이자?”

푸리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라이자!”

그 순간, 고래가 움직였다.

작업실 문 옆에 서 있던 라이자의 그림자가 고래의 입 쪽으로 끌려갔다.

라이자는 은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은인에게 닿지 않았다.

고래의 입이 닫혔다.

쿵.

녹슨 바다가 조용해졌다.

은인은 움직이지 못했다.

하융은 창가에서 은인을 보았다.

“삼켜졌구려.”

은인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푸리나의 신술이 흔들렸다.

그레이의 기록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죠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가장 먼저 움직이려 한 것은 은인이었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 같았다.

“라이자가…….”

은인의 코끝이 삐걱였다.

“괜찮을 거예요.”

끼이익.

코가 휘었다.

은인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했다.

“안 괜찮을 수도 있어요.”

코는 멈췄다.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가야 하나요?”

하융은 대답했다.

“가야 한다고 말하면, 그건 명령이오.”

“그럼요?”

“가고 싶은지 물어야 하오.”

은인은 고래를 보았다.

거대한 철갑 고래.

녹슨 입.

어두운 배 속.

그 안에 라이자가 있었다.

라이자가 은인을 기다리다가, 은인을 놓아주는 법을 배우다가, 자기 두려움에게 삼켜졌다.

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들어가면 못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소.”

“라이자가 화낼 수도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해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또 길을 잃어서.”

“그럴 수도 있소.”

은인은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왜 자꾸 그럴 수도 있다고만 해요?”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길이니까.”

은인은 고래를 다시 보았다.

그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

라이자가 안에서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고래를 뜯어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마 둘 다였다.

은인은 아주 작게 웃었다.

“라이자는 안에서도 고래를 분해하려고 할까요?”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그럴 것 같은데.”

푸리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마 그럴 거야.”

그레이는 기록판을 주워 들며 말했다.

“라이자 님의 행동 양식상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인은 조금 웃었다.

웃음은 아주 작았지만, 녹슨 바다 위에 퍼졌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은인은 한 걸음 내디뎠다.

“저는 가고 싶어요.”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명령이 아니어도, 제가 가고 싶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라이자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말에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융은 창을 닫았다.

“그럼 그 길이오.”

은인은 물었다.

“돌아올 수 있나요?”

하융은 이번에도 확답하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잃지 않으면, 길은 늦게라도 생기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가 고래 쪽으로 걸어왔다.

“같이 갈까?”

은인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처음은 제가 갈게요.”

죠니는 멈췄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좋아.”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무서우면 막을 내려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말?”

“네.”

은인은 고래의 입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열어주세요.”

푸리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신술이 조금 깊어졌다.

이번에도 세계를 뒤집지는 않았다.

다만 녹슨 바다 위에 아주 좁은 길 하나를 놓았다.

고래의 입까지 이어지는 길.

은인은 그 길을 걸었다.


---

고래의 입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따뜻했다.

겉은 녹슨 철갑이었는데, 안쪽은 오래된 작업실 같았다.
벽에는 부품들이 박혀 있었고, 천장에서는 은실과 녹슨 쇠사슬이 함께 늘어져 있었다. 발밑에서는 물소리와 톱니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걸었다.

“라이자?”

대답은 없었다.

대신 고래의 배 속 어딘가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은인?”

“라이자!”

은인은 달리려 했다.

그러나 바닥이 흔들렸다.

끼릭.

고래의 안쪽 톱니들이 움직였다.

벽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가족이면 충분해.”

“가족이면 나가지 않아도 돼.”

“가족이면 거짓말하지 않아야지.”

“가족이면 걱정시키면 안 돼.”

“가족이면 돌아와야지.”

“가족이면 떠나면 안 되지.”

은인은 귀를 막았다.

“아니에요.”

목소리들은 계속 들렸다.

“가족이면 라이자의 손 안에 있어야 해.”

“그래야 안전해.”

“그래야 고장나지 않아.”

“그래야 잃어버리지 않아.”

은인의 코끝이 삐걱였다.

은인은 말하려 했다.

“라이자는 그런 말 안 해요.”

끼익.

코가 조금 움직였다.

은인은 멈췄다.

라이자는 그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인은 느낀 적이 있었다.

라이자의 손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오히려 자기 발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게 되는 순간들.

라이자의 걱정이 너무 따뜻해서, 거절하기 어려웠던 순간들.

라이자가 가족이라고 말해줄 때마다 기뻤지만, 동시에 그 말 밖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던 순간들.

은인은 다시 말했다.

“라이자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가끔 그렇게 들었어요.”

이번에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래의 배 속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저 안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은인은 그쪽으로 달렸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아프면 멈추고, 흔들리면 벽을 짚고, 모르면 주변을 보고.

마침내 은인은 고래의 배 속 깊은 곳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라이자가 있었다.

라이자는 녹슨 쇠사슬과 은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묶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주변에 너무 많은 은실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은실들은 라이자의 손끝에서 뻗어나와 있었다.

은인을 고치기 위한 실.
은인을 보호하기 위한 실.
은인이 넘어지면 잡으려던 실.
은인이 길을 잃으면 끌어오려던 실.
은인이 다치지 않게 둘러치려던 실.

그 모든 실이, 지금은 라이자 자신을 감고 있었다.

은인은 천천히 다가갔다.

“라이자.”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제일 먼저 코를 보았다.

이번에도.

하지만 곧 얼굴을 보았다.

라이자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휘었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팠어?”

“무서웠어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

“또 그랬구나.”

“하지만 돌아왔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말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요.”

그 말에 라이자는 작게 웃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였다.

“여기까지 왜 왔어?”

은인은 라이자의 은실을 보았다.

“라이자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라이자의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나는 네가 들어오길 원한 게 아니야.”

“알아요.”

“위험했어.”

“알아요.”

“내가 알아서 나가려고 했어.”

은인은 주변을 보았다.

은실과 녹슨 쇠사슬.

고래의 어두운 배 속.

“그런 것 같았어요.”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은인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자.”

“응.”

“이 실들은 저를 잡으려고 한 건가요?”

라이자는 바로 부정하려 했다.

아니.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거짓말이 될까 봐.

은인의 코는 거짓말을 보이게 했지만, 라이자의 마음도 이미 그 앞에서 숨을 수 없었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처음에는 잡으려고 한 게 아니었어.”

“그럼요?”

“넘어지면 받으려고 했어. 길 잃으면 찾으려고 했고. 다치면 고치려고 했어.”

“네.”

“그런데…….”

라이자는 자기 손끝의 은실을 보았다.

“내가 무서워질수록 실이 많아졌어.”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라이자는 아주 어렵게 말했다.

“네가 나가면, 내가 가족을 잃는 것 같았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인데요.”

“응.”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어.”

은인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은실 하나를 만졌다.

차갑고, 부드럽고, 단단했다.

“이거 끊어도 되나요?”

라이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은인은 바로 손을 거두었다.

“싫으면 안 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그 말이 더 아팠다.

은인이 이제 허락을 물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자는 모든 허락을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라이자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같이 끊자.”

은인은 고개를 들었다.

“같이요?”

“응.”

라이자는 손을 내밀었다.

“이건 내가 만든 실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해.”

은인은 그 손을 보았다.

“그럼 저는요?”

“너는…….”

라이자는 잠시 생각했다.

“네가 어느 실이 아팠는지 말해줘.”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하나씩 실을 보았다.

넘어지지 않게 하려던 실.

“이건 너무 조였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끊자.”

길 잃지 않게 하려던 실.

“이건 필요했어요. 그런데 너무 짧았어요.”

“그럼 끊지 말고 길게 만들자.”

“길게요?”

“응. 끌어오는 실이 아니라, 네가 잡고 싶을 때 잡는 실로.”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나지 않게 하려던 실.

은인은 그 실 앞에서 오래 멈췄다.

“이건…… 라이자가 저를 많이 사랑해서 만든 것 같아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말했다.

“그런데 이 실이 있으면, 제가 새로 배운 걸 말하기 어려워요.”

“왜?”

“고장났다고 할까 봐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끊자.”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함께 실을 끊었다.

툭.

고래의 배 속이 흔들렸다.


---

마지막으로 가장 굵은 실이 남았다.

그 실은 라이자의 손목과 은인의 가슴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은인은 그 실을 보았다.

“이건 뭔가요?”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가족.”

은인은 가만히 있었다.

라이자는 빠르게 덧붙였다.

“이건 끊자는 뜻이 아니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이 실도 조이면 안 돼.”

은인은 실을 만졌다.

그 실은 다른 실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무거웠다.

“이건 어떻게 해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생각했다.

그러다 자기 휘어진 코끝을 만졌다.

“접힌 페이지처럼 남기면 안 되나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말했다.

“끊지 않고. 짧게 당기지도 않고.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게만.”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느슨하게?”

“네.”

은인은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제가 잡고 싶을 때 잡을 수 있고, 라이자도 제가 너무 멀리 간 것 같으면 부를 수 있지만…… 끌지는 않는 실.”

라이자는 아주 오래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둘은 그 굵은 실을 끊지 않았다.

대신 다시 묶었다.

느슨하게.

조이지 않게.

그러나 사라지지 않게.

그 순간 고래의 배 속에 작은 빛이 들어왔다.

밖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죠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길 열렸다.”

그레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귀환 경로 확인됩니다.”

하융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창문이 열리는 느낌이 있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걸어 나가기 위해서.

“나갈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서워?”

“네.”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둘은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완전한 해결의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래의 배 속에서는 충분히 밝았다.


---

고래는 입을 열었다.

녹슨 바다가 갈라졌다.

은인과 라이자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이 조금 젖어 있었지만,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꼭 쥐고 있었다.

죠니는 어깨에 걸친 창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멀리, 녹슨 바다 위 작은 창가에 서 있었다.

은인은 문 옆 의자를 보았다.

아직 있었다.

라이자도 보았다.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은인은 라이자에게 물었다.

“앉을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둘은 의자 쪽으로 갔다.

은인이 앉았다.

라이자는 그 옆 바닥에 앉았다.

푸리나는 놀라 물었다.

“라이자도?”

라이자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돌아왔으니까.”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렇네.”

그레이는 기록했다.

귀환: 은인 및 라이자. 문 유지. 의자 공동 사용.

죠니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의자 공동 사용은 좀 웃기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합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졌다.

조금 더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고칠까?”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만요.”

“얼마나?”

“아프지 않을 만큼.”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은인은 라이자의 손목을 보았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느슨한 실.

은인은 말했다.

“라이자.”

“응.”

“제가 나가도 가족이에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했다.

“응.”

“제가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있어도요?”

라이자의 얼굴이 아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건 무서울 거야.”

“네.”

“화도 날 거야.”

“네.”

“찾으러 갈지도 몰라.”

“네.”

라이자는 은인의 눈을 보았다.

“하지만 네가 가족이 아니게 되지는 않아.”

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돌아오고 싶어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네.”

은인은 문 옆 의자에 앉은 채 말했다.

“지금은 돌아왔어요.”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응.”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3막의 페이지는 처음에는 비어 있었다.

이제 거기에 은인의 글씨와 라이자의 글씨가 함께 남았다.

은인의 글씨.

저는 무서워도 들어갔어요.

라이자의 글씨.

나는 사랑한다고 해서 끌어당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레이는 그 아래에 아주 작게 적었다.

느슨한 실은 끊어진 실이 아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들을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대본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좋아.”

라이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좋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녹슨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녹은 조금 옅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좋아.”


---

막이 내려가기 전, 하융이 은인 곁으로 다가왔다.

은인은 그를 보았다.

“하융.”

“돌아왔구려.”

“네.”

“같은 곳으로 돌아왔소?”

은인은 문을 보았다.

작업실.

의자.

라이자.

그레이.

푸리나.

죠니.

그리고 자기 코끝의 작은 휘어짐.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같은 곳인데, 조금 달라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이 대개 그렇소.”

은인은 물었다.

“저는 사람이 되는 길에 있나요?”

하융은 잠시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길의 이름을 모르오.”

은인은 조금 실망한 듯했다.

하융은 덧붙였다.

“다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만든 것은 보았소.”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사람이 되는 길.

돌아올 수 있는 길.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후자가 더 따뜻했다.

푸리나는 조명을 낮췄다.

녹슨 바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고래의 그림자도 흩어졌다.

남은 것은 작업실 문과, 그 옆의 의자와, 은인과 라이자의 손 사이에 보이지 않게 느슨해진 실이었다.

막이 내려왔다.

4막 — 고장보다 먼저 아픔을 보는 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고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하는 말이 있다 —
《은빛 피노키오》

4막 — 고장보다 먼저 아픔을 보는 손

— 고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하는 말이 있다 —

고래에서 돌아온 뒤, 작업실은 다시 작업실이 되었다.

녹슨 바다는 사라졌다.

거대한 철갑 고래도 없었다.

벽에 걸린 공구들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반쯤 식은 용광로는 낮은 열을 품고 있었으며, 작업대 위에는 은실과 부품과 작은 렌즈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문 옆에는 여전히 의자가 있었다.

그 의자는 이제 그냥 소품이 아니었다.
은인이 돌아와 앉은 자리였고, 라이자가 함께 앉은 자리였고,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자리였다.

그레이는 의자 옆에 작은 표식을 붙였다.

귀환용. 강제 착석 금지.

푸리나는 그걸 보고 말했다.

“그레이. 이제 그 의자는 거의 공공시설이 됐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용 목적이 명확해졌으므로 표기하는 편이 좋습니다.”

죠니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돌아온 사람 전용 의자라. 나쁘지 않네.”

하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창가에 작은 빛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다른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이.

은인은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작업대가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푸리나는 조금 감탄했다.

라이자의 손은 무언가를 만들거나 고치지 않을 때도, 늘 작업대 위에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라이자는 공구를 들지 않았다.
은인을 살피고 있었지만, 해체하거나 조정하거나 수리하려는 자세는 아니었다.

그냥 보고 있었다.

은인은 그 시선을 견디다가 작게 물었다.

“많이 이상해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휘었어. 각도가 조금 틀어졌고, 표면 장력도 이상해졌어. 고쳐야 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라이자는 천천히 물었다.

“아파?”

은인은 눈을 깜박였다.

그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아프지는 않아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해?”

은인은 코끝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조금요.”

“숨 쉬는 데 방해돼?”

“아니요.”

“말하는 데는?”

“가끔 신경 쓰여요.”

라이자는 그제야 손을 뻗었다.

“만져봐도 돼?”

은인은 조금 놀랐다.

“물어보는 건가요?”

라이자는 멈칫했다.

그 질문이 더 아팠다.

“응.”

“전에는 그냥 만졌는데요.”

라이자는 손을 거두려 했다.

은인이 먼저 말했다.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지며 말했다.

“그냥…… 물어보니까 이상해서요.”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숨을 낮췄다.

이건 중요한 장면이었다.

은인이 처음으로 “만져지는 것”과 “허락하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는 장면.
그리고 라이자가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해오던 손길을 멈추는 장면.

라이자는 아주 낮게 말했다.

“앞으로는 물어볼게.”

은인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항상요?”

“가능하면.”

“급할 때는요?”

“급할 때는 먼저 고치고 나중에 사과해야 할 수도 있어.”

그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만져도 돼요.”

라이자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손끝이 은인의 코끝에 닿았다.

은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라이자의 손은 차갑지 않았다.

손끝은 조심스러웠고, 조금 떨리고 있었다.

“조금 휘었어.”

라이자가 말했다.

“네.”

“고칠 수 있어.”

“네.”

“완전히 원래대로 돌릴 수도 있고, 네가 말한 것처럼 조금 남길 수도 있어.”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원래대로 돌리면, 제가 거짓말한 게 없어지나요?”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아니.”

“그럼 조금 남기면, 제가 계속 잘못한 채로 있는 건가요?”

“아니.”

은인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럼 어떻게 정해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질문은 공구로 풀 수 없었다.

푸리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눈을 내렸다.

조용히 기다렸다.

라이자는 한참 뒤에 말했다.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은지로 정해야 할 것 같아.”

은인은 그 말을 반복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응.”

라이자는 손을 거두었다.

“코가 조금 휘어 있으면, 네가 거짓말했던 걸 기억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너를 계속 벌한다면 고치는 게 맞아.”

“완전히 고치면요?”

“그럼 겉으로는 전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네가 기억할 수 있다면, 꼭 흔적이 겉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은인은 눈을 내렸다.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다 고치지 말자.”

은인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돼요?”

“응.”

라이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모르는 상태로도 잠깐 둘 수 있어.”

그레이가 그 말을 기록하려다가 멈췄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왜 안 적어?”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지금은 들을 말인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맞아.”


---

4막의 무대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1막에는 거짓말이 있었다.

2막에는 박수와 축제가 있었다.

3막에는 녹슨 바다와 고래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4막은 너무 작았다.

작업대.
의자.
은인의 휘어진 코.
라이자의 손.
고치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

하지만 푸리나는 알았다.

작은 막일수록 어렵다.

전쟁보다 어려운 식탁이 있고, 고래 배 속보다 어려운 질문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 사랑하는 사람을 고치고 싶을 때,
그 손은 어디까지 가도 되는가.



라이자는 마침내 공구함을 열었다.

은인이 조금 움찔했다.

라이자는 그것을 보았다.

“무서워?”

은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라이자는 공구함을 다시 닫았다.

은인이 놀랐다.

“안 고쳐요?”

“네가 무섭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저는 고쳐야 하는데요.”

“고쳐야 한다고 누가 말했어?”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조용히 물었다.

“나?”

은인은 조금 망설였다.

“조금은요.”

라이자의 얼굴이 아파졌다.

“그랬구나.”

은인은 급히 말했다.

“라이자가 직접 말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그렇게 들렸으면, 들어야 해.”

라이자는 공구함 위에 손을 올렸다.

“나는 고치고 싶어. 네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네가 네 코를 만질 때마다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은인은 조용히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내가 고치고 싶다는 마음이, 네가 지금 당장 고쳐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푸리나는 그 대사를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라이자가 제페토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페토라는 배역이 라이자 안에서 다시 쓰이는 순간이었다.

제작자.
보호자.
가족.
손을 가진 사람.
그리고 손을 멈출 줄 배워야 하는 사람.

은인은 한참 뒤에 말했다.

“조금만 고쳐주세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졌다.

“아프지 않을 만큼.”

“그리고?”

“너무 많이 보이지는 않게.”

라이자는 공구함을 다시 열었다.

“흔적은?”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저만 알 수 있을 만큼.”

라이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좋아.”

그녀는 작은 렌즈와 은침, 아주 가느다란 집게를 꺼냈다.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기록하려 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이번엔 기록해도 돼. 의료 기록이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치 범위: 통증 완화. 외형 완전 복원 아님. 당사자 요청에 따른 흔적 일부 유지.”

죠니가 말했다.

“그렇게 적으니까 멋은 없는데 정확하네.”

그레이는 대답했다.

“의료 기록에 멋은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그건 맞아.”

라이자는 은인의 코끝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프면 말해.”

“네.”

“무서워도 말해.”

“네.”

“멈추고 싶어도 말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는 아주 작은 힘으로 은을 폈다.

끼익.

작은 소리.

은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라이자가 바로 멈췄다.

“아파?”

“놀랐어요.”

“계속해도 돼?”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네.”

다시.

끼익.

은은 조금씩 펴졌다.

완전히 원래대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날카롭게 튀어나온 부분이 부드러워졌고, 말할 때 신경 쓰이던 각도가 줄었다.

은인은 숨을 내쉬었다.

“덜 불편해요.”

라이자는 손을 멈췄다.

“여기서 멈출까?”

은인은 코끝을 만졌다.

“네.”

“더 고칠 수 있어.”

“알아요.”

“그래도 여기서?”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서요.”

라이자는 공구를 내려놓았다.

그 동작은 생각보다 어려워 보였다.

고칠 수 있는데 멈추는 것.

라이자에게 그건, 고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췄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이것도 귀환이다.

고치고 싶은 손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일.


---

처치가 끝나자, 은인은 거울 앞에 섰다.

코끝은 거의 원래와 같아 보였다.

하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은인은 그 결을 손끝으로 만졌다.

“보여요?”

푸리나는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음.”

“보여요?”

“아주 가까이 보면.”

은인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성실하게 다가와 확인했다.

“육안으로는 미세합니다. 다만 은인 님 본인은 촉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레이는 거짓말 안 해서 좋아.”

푸리나는 웃었다.

“건조해서 문제지.”

그레이는 조금 억울한 듯했다.

“정보를 정확히 전달했을 뿐입니다.”

은인은 거울을 다시 보았다.

“저만 알 수 있을 만큼 남았어요.”

라이자는 물었다.

“괜찮아?”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이번에는 쉽게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제 조심해야 하는 말이었다.

은인은 한참 자기 얼굴을 보고, 코끝의 작은 결을 만지고, 라이자를 돌아보았다.

“조금 괜찮아졌어요.”

라이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조금.”

“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좋아. 4막의 첫 번째 장면은 완벽해.”

라이자가 곧바로 말했다.

“완벽하다는 말 쓰지 마.”

푸리나는 바로 손을 들었다.

“수정. 충분해.”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좋아.”

은인도 따라 말했다.

“충분해.”

그 말은 “완벽하다”보다 덜 반짝였지만, 훨씬 더 편안했다.


---

하지만 4막은 코를 고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작업대 위에 작은 나무 상자를 올렸다.

은인은 그 상자를 보고 물었다.

“그 안에는 뭐가 있나요?”

“오늘의 두 번째 장면.”

“또 열어야 하나요?”

“원하면.”

라이자가 푸리나를 보았다.

“이번엔 뭐야?”

푸리나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물건이 있었다.

인형극장의 붉은 망토.
받지 않았던 동전 주머니 대신 놓인 빈 주머니.
장난감 나라에서 가져온 작은 나사.
하융이 보여준 창문 조각처럼 보이는 얇은 유리.
그리고 라이자와 은인 사이에서 다시 묶은 느슨한 은실 한 가닥.

은인은 그 물건들을 보았다.

“이건 다 제 이야기인가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지나온 장면들이지.”

“이걸로 뭘 하나요?”

푸리나는 상자를 은인 쪽으로 밀었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정해.”

은인은 당황했다.

“제가요?”

“응.”

라이자는 곧바로 불안해졌다.

그녀는 망토를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장난감 나라의 나사는 치우라고 말하고 싶었다.

빈 주머니도, 창문 조각도, 위험한 기억은 모두 상자에 넣어 닫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고치고 싶은 손을 멈추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멈춰야 했다.

은인은 먼저 붉은 망토를 들었다.

그 망토는 박수를 떠올리게 했다.

“이건…….”

푸리나가 물었다.

“싫어?”

“아니요.”

은인은 망토를 만졌다.

“입고 있으면 답답했어요. 그런데 처음 입었을 때는 조금 좋았어요.”

죠니가 말했다.

“둘 다 맞겠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남길래요. 하지만 접어서.”

그녀는 망토를 곱게 접었다.

입는 것이 아니라, 들고 있을 수 있는 크기로.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다음은 작은 나사였다.

은인은 나사를 손바닥에 올렸다.

“태엽 아이의 나사예요.”

라이자가 물었다.

“그 아이에게 돌려줄 거야?”

은인은 생각했다.

“돌려주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몰라요.”

하융이 있었다면 길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없었다.

그레이가 말했다.

“분실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소유자가 확인되면 반환하도록 기록하겠습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레이는 나사를 작은 봉투에 넣고 적었다.

장난감 나라 태엽 아이의 나사. 반환 예정.

은인은 그 문장을 보고 조금 안심했다.

그다음은 빈 주머니였다.

은인은 그것을 보자 표정이 복잡해졌다.

“동전은 안 받았는데, 왜 주머니가 있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받지 않은 것도 흔적이니까.”

은인은 빈 주머니를 들었다.

“안 받은 것도 남나요?”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선택의 부재와 거절도 기록될 수 있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가끔은 받은 것보다 안 받은 게 더 오래 남지.”

은인은 빈 주머니를 접었다.

“이건…….”

그녀는 라이자를 보았다.

“남길래요.”

라이자가 조금 놀랐다.

“왜?”

“나중에 제가 무언가를 받을 때, 먼저 물어보려고요.”

그레이가 아주 만족한 듯 기록했다.

빈 주머니: 계약 확인의 기억.

푸리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레이의 기록이 점점 소품 설명서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주 좋았다.

다음은 창문 조각이었다.

은인은 그것을 손에 들었다.

유리 조각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흐릿한 자기 얼굴만 비쳤다.

“하융이 보여준 길은 여기 없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창문은 늘 길을 보여주지는 않아. 가끔은 보는 사람을 보여주지.”

은인은 그 유리 조각을 보았다.

거기에는 은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조금 휘어진 코.
조금 덜 무서운 눈.
아직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

은인은 유리 조각을 내려놓았다.

“이건 지금은 못 정하겠어요.”

라이자가 말했다.

“그럼 보류하자.”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보류 항목으로 두겠습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좋아. 보류도 훌륭한 극적 장치지.”

라이자가 작게 웃었다.

“그 말,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푸리나는 과장되게 감동한 얼굴을 했다.

“라이자가 내 연출론을 이해했어.”

“아니, 아주 조금만.”

“그 조금도 소중해.”

마지막은 은실이었다.

느슨하게 다시 묶인 은실 한 가닥.

은인은 그것을 오래 보았다.

라이자도 그 실을 보았다.

둘 다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말하지 않았다.

이 실은 다른 소품들과 달랐다.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보관할 수도 없었다.

이건 둘 사이에 아직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어디에 둬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실을 들어 자기 손목에 감아보려 했다가 멈췄다.

조일 것 같았다.

라이자의 손목에 감아보려다가 그것도 멈췄다.

라이자를 묶는 것 같았다.

작업대에 놓으려니 너무 멀어 보였다.

의자에 묶으려니, 돌아올 때마다 봐야 해서 조금 무서울 것 같았다.

은인은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문고리에 묶어도 돼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문고리에?”

“네.”

은인은 문을 보았다.

“제가 나갈 때도 보이고, 돌아올 때도 보이니까.”

라이자는 입술을 다물었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고 기다렸다.

은인은 덧붙였다.

“문을 잠그는 실이 아니라, 여기가 문이라는 걸 알려주는 실로요.”

라이자는 아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

은인은 은실을 문고리에 묶었다.

느슨하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도 않게.

은실은 문고리에서 낮게 빛났다.

그건 사슬이 아니었다.

장식도 아니었다.

그냥 표시였다.

여기는 나가는 곳.
여기는 돌아오는 곳.
그리고 문은 잠겨 있지 않다.


---

그때, 레플리카가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푸리나가 불렀다.

은인이 코를 고치고, 소품들을 정리하고, 문고리에 은실을 묶은 뒤였다.

레플리카는 작업실에 들어오자마자 상황을 한 번에 보았다.

문 옆 의자.
문고리에 묶인 은실.
은인의 조금 남은 코끝 결.
라이자의 피곤한 얼굴.
푸리나의 만족스러운 표정.
그레이의 지나치게 성실한 기록판.
죠니의 “나는 관여했지만 책임은 조금만 있다”는 듯한 자세.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많은 일이 있었군.”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피노키오였어.”

레플리카는 그걸 설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더 묻지도 않았다.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아프나?”

은인은 대답했다.

“조금 덜 아파요. 아니, 아프지는 않고…… 불편함이 줄었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정확히 말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레플리카는 라이자를 보았다.

“그대는?”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나?”

“그대도 돌아왔다고 들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의자 공동 사용 사건이 있었지.”

그레이는 정정했다.

“사건이라기보다는 귀환 후 착석 기록입니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그게 그거 같은데.”

레플리카는 라이자에게 다시 물었다.

“아픈 곳은?”

라이자는 대답하려 했다.

없어.

하지만 은인이 옆에 있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은인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한 사람이 자기였다.

라이자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많아.”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라이자는 조금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쉽게 인정하네.”

“고래 배 속에서 자기 손의 실을 보고 돌아왔다면, 아픈 것이 정상이다.”

푸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레플리카, 상황 파악 너무 빠르다.”

레플리카는 라이자에게 다가갔다.

“손을 봐도 되나?”

라이자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실을 다루던 손.
은인을 고치던 손.
너무 많은 실을 만들었던 손.

“왜?”

“떨리고 있다.”

라이자는 그제야 자기 손이 떨리는 것을 알았다.

은인은 놀라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도 아파요?”

라이자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조금.”

레플리카는 말했다.

“좋다. 그 말에서 시작하자.”

그녀는 라이자의 손을 보았다.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굳어 있었고, 손목에 긴장이 남아 있었다.

“무리했다.”

라이자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싸운 것도 아니고, 그냥 극 안에서—”

“극 안에서도 몸은 긴장한다.”

레플리카는 단호했다.

“그리고 마음이 쥔 것은 손에도 남는다.”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레플리카는 붕대가 아니라 따뜻한 천을 꺼냈다.

“쥐는 연습을 했으면, 놓는 연습도 해야 한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플리카는 라이자의 손 위에 천을 올렸다.

“오늘은 고치려고 하지 마라.”

라이자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은인은 아직—”

“은인 말고, 그대.”

라이자는 멈췄다.

레플리카는 낮게 말했다.

“돌아온 사람을 돌보는 자도 돌아온 사람이다. 그대도 쉬어야 한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당황한 듯했다.

자기가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낯선 얼굴이었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이자도 의자에 앉아도 돼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문 옆 의자를 가리켰다.

“귀환용이라서요.”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강제 착석은 금지입니다.”

죠니는 결국 웃었다.

푸리나도 웃었다.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좋은 규칙이다.”

라이자는 버티려 했다.

그러나 결국 의자에 앉았다.

은인은 그 옆에 섰다.

잠시 뒤, 은인은 물었다.

“저도 앉아도 돼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둘은 다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의자는 조금 좁았다.

그래서 푸리나는 바로 옆에 하나 더 의자를 가져왔다.

“좋아. 귀환용 의자 증설.”

그레이가 기록했다.

귀환용 의자: 2개로 증설. 사유 — 동시 귀환 가능성.

죠니가 말했다.

“이제 진짜 시설이네.”

푸리나는 웃었다.

“극장 기반 시설이지.”

레플리카는 라이자와 은인을 보았다.

“좋다. 오늘은 여기서 더 깊이 가지 마라.”

푸리나가 조금 아쉬운 듯 대본을 보았다.

“하지만 4막이 아직—”

레플리카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즉시 대본을 닫았다.

“네. 오늘은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은 판단.”

푸리나는 속삭였다.

“레플리카한테는 가끔 이길 수가 없어.”

그레이가 말했다.

“이기려고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

4막의 마지막 장면은 치료도, 대결도, 거대한 고백도 아니었다.

그저 정리였다.

은인은 붉은 망토를 접어 상자 안에 넣었다.

빈 주머니는 그레이의 기록판 옆에 두었다.

나사는 반환 예정 봉투에 넣었다.

창문 조각은 보류 상자에 넣었다.

문고리에는 느슨한 은실이 남았다.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았다.

그리고 의자는 두 개가 되었다.

라이자는 손에 따뜻한 천을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은인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레플리카는 두 사람의 자세를 보고, 무리가 없는지 확인했다.

죠니는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정리했다.

푸리나는 무대 한가운데, 아니 작업실 한가운데에 서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은 아주 얇게 남아 있었다.

이 신술은 오늘 거창한 기적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질문 하나를 남겼다.

고치기 전에, 먼저 물었는가.

만져도 되는지.
아픈지.
불편한지.
정말 고치고 싶은지.
흔적을 남기고 싶은지.
그리고 고치는 손도 쉬어야 하는지.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4막의 페이지에는 여러 글씨가 남았다.

은인의 글씨.

저는 조금 괜찮아졌어요.

라이자의 글씨.

고칠 수 있어도 멈출 수 있어야 했다.

레플리카의 단정한 글씨.

돌아온 사람을 돌보는 자도 돌아온 사람이다.

그레이의 작은 기록.

문고리의 은실: 출입과 귀환의 표시. 잠금 기능 없음.

죠니의 삐딱한 글씨.

망토가 널 입게 두지 마.

푸리나는 마지막 줄을 비워두었다가, 천천히 적었다.

극은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막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좋아.”

라이자는 이제 그 말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은인이 물었다.

“다음 막은 뭐예요?”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지쳐 있었지만, 눈은 조용했다.

라이자도 피곤해 보였지만, 이전보다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문고리의 은실은 약하게 빛났다.

푸리나는 대본의 다음 장을 넘겼다.

빈 페이지.

마지막 막.

“다음은 결말이야.”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결말이면 안 해.”

푸리나는 웃었다.

“알아.”

은인이 물었다.

“그럼 어떤 결말인가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선언하지 않는 결말.”

“선언하지 않아요?”

“응.”

푸리나는 빈 페이지 위에 제목을 적었다.

5막 —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 결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은빛 피노키오》

5막 —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 결말

—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

마지막 막을 앞두고, 푸리나는 가장 먼저 커튼을 치우기로 했다.

라이자가 물었다.

“커튼을 안 써?”

“응.”

“마지막 막인데?”

“그래서 안 써.”

푸리나는 작업실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원래 마지막 막이라면, 화려한 조명이 있어야 했다.

은빛 별가루.
하늘에서 내려오는 푸른 요정.
기적의 선언.
관객의 숨을 멎게 하는 정적.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이제 너는 진짜 사람이 되었단다.

하지만 이번 극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라이자가 처음부터 조건으로 걸었고, 푸리나도 받아들였다.

은인은 처음부터 라이자의 가족이었다.
누군가가 “이제야 진짜”라고 선언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 막은 선언이 아니라 확인이어야 했다.

커튼을 치우고 나자, 작업실이 그대로 보였다.

문고리에 느슨하게 묶인 은실.

두 개로 늘어난 귀환용 의자.

접힌 붉은 망토.

반환 예정 봉투에 들어간 작은 나사.

보류 상자 안의 창문 조각.

빈 주머니.

그리고 코끝에 아주 작은 결이 남은 은인.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대로 하자.”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며 물었다.

“마지막 막의 무대 장치가 작업실 그대로입니까?”

“응.”

“추가 연출은 없습니까?”

“없지는 않아.”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것들이 전부 연출이야.”

죠니는 벽에 기대어 말했다.

“비싼 연출은 아니네.”

푸리나가 바로 받아쳤다.

“좋은 연출이지.”

“그건 맞아.”

레플리카는 귀환용 의자 두 개를 보고 말했다.

“의자는 그대로 두는 게 좋다.”

“물론이지.”

“앉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결말은 대체로 덜 위험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것도 기록하자.”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고 있었다.

은인은 마지막 막이라는 말을 듣고부터 조금 조용해졌다.

“마지막이면 끝나는 건가요?”

은인이 물었다.

푸리나는 대답했다.

“극은 끝나.”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야기도 끝나요?”

“아니.”

푸리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보통 극보다 오래 가.”

은인은 그 말을 생각했다.

“그럼 저는 끝나지 않나요?”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끝나지 않아.”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금 당황했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극이 끝나도 너는 여기 있어.”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나가도요?”

라이자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가도.”

은인은 다시 물었다.

“돌아와도요?”

“돌아와도.”

“늦어도요?”

라이자는 조금 아픈 얼굴로 웃었다.

“늦어도.”

은인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제가 어떤 이름으로 돌아와도요?”

라이자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이전 질문들보다 조금 더 깊었다.

가족인가.
사람인가.
은인인가.
피노키오인가.
라이자의 아이인가.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인가.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네가 네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은인은 물었다.

“잃어버리면요?”

라이자의 손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으로 은인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그럼 같이 찾자.”

은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내가 대신 정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찾는 건 같이 할 수 있어.”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코끝의 작은 결이 등불에 살짝 빛났다.

“그럼 마지막 막을 해도 돼요.”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좋아.”

이번에도 거창한 선언은 없었다.

다만 작업실의 빛이 조금 낮아지고, 문고리의 은실이 아주 작게 반짝였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신술은 이제 막의 끝을 향해 깊어졌지만, 누구도 밀지 않았다.

그저 빈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놓았다.


---

마지막 막의 첫 장면은 “판정”이었다.

그레이의 역할이었다.

그레이는 작업대 위에 새 기록지를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몇 개의 항목이 있었다.

성명:
관계:
거주:
보호자:
자기 의사 확인:
귀환 경로:
비고:

푸리나는 기록지를 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마지막 막 첫 장면이 행정 서류야?”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 극의 시작점 중 하나가 분류 항목의 실패였으므로, 마지막에는 그 실패를 갱신해야 합니다.”

죠니가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푸리나는 양손을 들었다.

“좋아. 행정 서류 클라이맥스. 매우 새로운 장르야.”

라이자는 기록지를 보았다.

처음 프롤로그에서 그레이가 신분 항목을 물었을 때, 라이자는 “가족”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충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가족이라는 말은 가장 먼저 오는 말이지만, 모든 것을 대신 적어주는 말은 아니었다.

그레이가 은인을 보았다.

“은인 님. 기록을 작성해도 되겠습니까?”

은인은 조금 놀랐다.

“저한테 묻나요?”

“네.”

“기록인데요?”

“은인 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은인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보호와 책임이 흐려집니다. 하지만 묻지 않고 기록하면, 당사자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레이, 마지막 막에서 주제 발언 제대로 하네.”

그레이는 들은 듯 못 들은 듯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성해도 돼요.”

그레이는 첫 항목을 보았다.

“성명.”

은인은 대답했다.

“은인.”

그레이는 적었다.

성명: 은인.

그는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

“극 중 사용명은 별도로 기록하시겠습니까?”

은인은 생각했다.

“은빛 피노키오?”

“네.”

은인은 잠시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인이 정해야 하는 이름이었다.

“그건…… 별명처럼 적어주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별명입니까, 배역명입니까?”

은인은 조금 고민했다.

“둘 다요. 하지만 제 이름은 아니에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극 중 사용명/별명: 은빛 피노키오. 본명 대체 아님.

죠니가 웃었다.

“그레이 기록은 재미없는데 묘하게 든든하네.”

은인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든든해요.”

그레이는 아주 조금 멈칫했다.

“감사합니다.”

다음 항목.

“관계.”

라이자가 바로 말하려 했다.

가족.

하지만 이번에는 멈췄다.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둘 사이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은인이 먼저 말했다.

“라이자의 가족.”

라이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은인은 덧붙였다.

“그리고…… 저 자신.”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라이자는 그 말을 삼키듯 들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적었다.

관계: 라이자의 가족. 독립 의사와 자기 선택을 가진 당사자.

푸리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건 화려하지 않았지만, 굉장한 클라이맥스였다.

은인이 처음으로 “가족”과 “저 자신”을 함께 말했다.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고.

다음 항목.

“거주.”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라이자의 작업실.”

라이자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려는 순간, 은인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갈 수 있어요.”

라이자는 그 말을 들었다.

아팠다.

하지만 이전만큼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레이는 적었다.

거주: 라이자의 작업실. 외출 가능. 귀환 경로 유지.

다음 항목.

“보호자.”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

라이자는 이번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레이가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싫어요, 무서워요, 아파요, 나가고 싶어요, 돌아오고 싶어요.”

레플리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항목이다.”

그레이는 적었다.

보호자: 라이자. 보호 과정에서 당사자 의사 확인 필요. 거부·공포·통증·외출·귀환 의사 발언권 보장.

라이자는 기록지를 보았다.

그건 단순한 행정 문장이었다.

하지만 라이자에게는 거의 맹세처럼 보였다.

다음 항목.

“자기 의사 확인.”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무엇을 확인하나요?”

그레이는 말했다.

“현재 극을 계속할 의사가 있는지, 마지막 막을 끝낼 의사가 있는지, 그리고 이 기록을 남길 의사가 있는지입니다.”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계속할게요.”

“마지막 막도 끝내시겠습니까?”

“네.”

“기록을 남기는 것도 동의하십니까?”

은인은 기록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제 은인의 이름과 관계와 거주와 보호에 대한 말이 적혀 있었다.

은인은 작게 말했다.

“네. 하지만 나중에 바꿀 수 있나요?”

그레이는 바로 대답했다.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그레이는 적었다.

자기 의사: 현재 동의. 추후 변경 가능.

죠니가 말했다.

“서류가 점점 살아있는 것 같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사람에 대한 기록은 살아 있는 편이 안전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박수를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지막 항목.

“귀환 경로.”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문.”

그레이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적겠습니다.”

은인은 말했다.

“문은 잠그지 않아요.”

라이자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위험할 때는 닫을 수 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덧붙였다.

“닫는 것과 잠그는 건 다르니까.”

은인은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문은 닫힐 수 있지만, 제가 두드리면 열려야 해요.”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레이는 기록했다.

귀환 경로: 라이자의 작업실 문. 안전상 닫을 수 있으나, 귀환 요청 시 응답해야 함. 문고리의 은실은 잠금 장치가 아니라 귀환 표시.

이 마지막 문장에, 은인은 조금 웃었다.

“좋아요.”

그레이는 마지막 항목을 보았다.

“비고.”

푸리나가 기대하듯 몸을 기울였다.

“여기 중요하지.”

죠니가 말했다.

“이상한 거 쓰지 마.”

“내가 언제 이상한 걸 썼다고.”

“자주.”

“너무해.”

레플리카는 은인을 보았다.

“비고는 다른 칸에 넣기 어려운 것을 적는 곳인가?”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은인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이라고 적어야 하나요?”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마지막 막의 핵심이 드디어 문장으로 나왔다.

사람이라고 적어야 하는가.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은빛 손.
작은 결이 남은 코.
돌아온 발.
자기 이름을 말한 입.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레이는 펜을 들고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죠니도 말하지 않았다.

레플리카도 기다렸다.

라이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녀는 멈췄다.

전에는 대답하려 했다.

은인은 내 가족이다.
그러니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
그러니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니, 상관없는 게 아니다.

그 모든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라이자는 이번에는 은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은인은 기록지를 보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레이는 펜을 내리지 않았다.

은인은 조금 더 말했다.

“저는 사람이 뭔지 아직 다 몰라요.”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거짓말했고, 도망쳤고, 돌아왔고, 혼났고, 조금 고쳤고, 조금 남겼어요.”

은인은 자기 손을 보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고, 제 이름은 은인이고, 피노키오를 해봤지만 피노키오만은 아니에요.”

라이자의 눈에 물기가 조금 맺혔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비고에는…….”

그녀는 그레이를 보았다.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라고 적어도 되나요?”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는 비고란에 적었다.

비고: 돌아올 수 있는 이름.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눈을 감았다.

사람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완성품이라고 적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어 있지도 않았다.

돌아올 수 있는 이름.

오늘의 결말에는 그 정도가 가장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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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막의 두 번째 장면은 푸리나가 맡았다.

그녀는 작업실 가운데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아주 작은 무대였다.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사이에 생긴 틈.

은인이 원하면 올라갈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높이.

은인은 그 무대를 보았다.

“마지막에는 제가 올라가야 하나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올라가도 돼.”

“그럼 왜 만들었어요?”

“선택지가 있으면 좋잖아.”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안 올라가도 되는 무대.”

“응.”

죠니가 말했다.

“그건 좋은 무대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렇지?”

“가끔은.”

“가끔은 빼.”

“싫어.”

은인은 작은 무대 앞에 섰다.

라이자는 뒤에서 지켜보았다.

예전 같으면 은인의 자세를 고쳐주었을 것이다.

발의 위치.
무릎의 각도.
넘어지지 않는 중심.

하지만 지금은 지켜보았다.

은인은 무대에 올라갈까 말까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올라갔다.

작은 무대는 삐걱였다.

은인은 놀라 멈췄다.

푸리나가 말했다.

“오래된 무대라서 그래.”

은인은 문을 처음 열 때를 떠올렸다.

“오래된 문도 소리를 냈어요.”

“맞아.”

“소리를 낸다고 나가면 안 되는 건 아니었어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것도 맞아.”

은인은 무대 위에 섰다.

관객은 많지 않았다.

라이자.
푸리나.
그레이.
레플리카.
죠니.

그리고 창가 어딘가에 하융의 기척.

은인은 그들을 보았다.

“저는 마지막 대사를 해야 하나요?”

푸리나는 말했다.

“원하면.”

“정해진 대사는요?”

푸리나는 빈 종이를 들어 보였다.

“없어.”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그럼 제가 써야 하나요?”

“응.”

은인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은빛이었다.

무대 위에서 반짝였다.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저는 사람이 되었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차갑지 않았다.

기다리는 침묵이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에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자의 손 안에만 있지는 않을래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인은 계속 말했다.

“저는 거짓말했어요. 무서워서요. 박수받고 싶어서요. 괜찮다고 말하면 계속 놀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코끝을 만졌다.

“그때 은이 휘었어요.”

죠니가 조용히 들었다.

레플리카는 은인의 손이 떨리는지 보았고, 그레이는 기록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록보다 듣는 것이 먼저였다.

은인은 말했다.

“그런데 진실을 말해도, 모두가 떠나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라이자를 보았다.

“문이 닫히지 않았어요.”

라이자는 숨을 삼켰다.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박수받는 말은 달콤했어요.”

죠니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따뜻했어요.”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고래 안에서, 저는 라이자가 만든 실을 봤어요. 저를 잡으려고만 만든 게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만든 실이었어요. 하지만 너무 조이면 아팠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숙였다.

은인은 말했다.

“그래서 같이 다시 묶었어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지막 문장을 꺼냈다.

“저는 완성품이 아니에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자가 실패한 것도 아니에요.”

라이자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은인은 조금 놀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는……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에요.”

그 말이 떨어졌다.

작업실은 조용했다.

박수는 바로 오지 않았다.

푸리나가 일부러 박수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박수로 덮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라이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라이자가 물었다.

“안아도 돼?”

은인의 눈이 커졌다.

이전의 라이자라면 물어보지 않고 안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물었다.

은인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는 은인을 안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고치기 위한 손이 아니라, 붙잡아두기 위한 손도 아니라, 그냥 가족을 안는 손으로.

은인은 처음에는 몸을 굳혔다.

그러다 천천히 라이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푸리나는 그제야 작게 박수를 쳤다.

짝.

그레이가 박수를 쳤다.

짝.

레플리카가 박수를 쳤다.

짝.

죠니도 짧게 박수를 쳤다.

짝.

어딘가 창가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하융의 박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인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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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막의 세 번째 장면은 라이자의 대사였다.

푸리나는 이것을 처음부터 준비하지 않았다.

라이자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인이 내려온 뒤, 라이자는 작은 무대 위에 올라갔다.

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라이자?”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나도 한 줄쯤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푸리나는 조용히 물러났다.

“물론.”

라이자는 무대 위에서 조금 어색해 보였다.

그녀는 무대 체질은 아니었다.

작업대 앞에 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마주해야 할 것은 작업대가 아니라 빈 무대였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나는 너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어.”

은인은 가만히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내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만든 것이라는 말보다, 가족이라는 말이 더 옳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자기 손을 보았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말로도 내가 네 길을 대신 정할 수는 없었어.”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했어.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했고, 속지 않았으면 했고,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지 않았으면 했어.”

라이자는 낮게 웃었다.

“아직도 그래.”

은인이 작게 웃었다.

라이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나는 아마 계속 걱정할 거고, 때로는 너무 빨리 손을 뻗을 거고, 네 코부터 볼지도 몰라.”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눈가를 조금 누르고 싶어졌다.

라이자는 계속했다.

“하지만 오늘 배웠어.”

그녀는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사랑은 문을 잠그는 실이 아니어야 해.”

은인은 숨을 멈췄다.

라이자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네가 나가도, 돌아와도, 늦어도, 실수해도, 혼나도…….”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내가 네 가족이라는 말이, 네가 내 손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게 할게.”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라이자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는 처음부터 내 가족이었어.”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오늘은, 네가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이라는 걸 배웠어.”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사람이 되었다”보다 더 컸다.

그리고 더 조심스러웠다.

푸리나는 조용히 대본에 적었다.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


---

극은 이제 거의 끝나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남겨두었다.

“은인.”

“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정하자.”

라이자가 경계했다.

“뭘?”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가리켰다.

“이 실.”

은인은 은실을 보았다.

“문고리에 둘래요.”

“계속?”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오늘은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은인은 말했다.

“내일 다시 정할래요.”

그레이가 기록했다.

문고리 은실: 오늘 유지. 내일 재확인.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다. 매일 같은 답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죠니가 말했다.

“내일이 있으면 오늘 답이 좀 가벼워지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귀환용 의자 두 개를 보았다.

“의자는?”

라이자가 말했다.

“두자.”

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자.”

그레이가 기록했다.

귀환용 의자 2개: 유지.

푸리나는 대본을 닫았다.

“좋아. 그럼 이 극의 결말은 이렇게.”

은인은 긴장했다.

“어떻게요?”

푸리나는 선언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실 문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에는 느슨한 은실이 묶여 있었다.

그 옆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빈 주머니와 접힌 망토와 보류 상자와 반환 예정 봉투가 정리되어 있었다.

은인의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라이자의 손 위에는 아직 따뜻한 천이 놓여 있었다.

그레이의 기록지에는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끝.”

은인이 놀랐다.

“이게 끝인가요?”

“응.”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안 해요?”

“안 해.”

“기적도 없나요?”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있잖아.”

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요?”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가리켰다.

“저기.”

다음으로 의자 두 개를 가리켰다.

“저기.”

기록지를 가리켰다.

“저기.”

라이자의 손과 은인의 코끝, 접힌 망토와 빈 주머니를 차례로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저기, 저기, 저기.”

은인은 이해하려고 애썼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기적은 오늘 네 몸이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야.”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럼요?”

“문이 닫히지 않은 것.”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네가 돌아온 것.”

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은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물었다.

“손 올려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자의 손이 은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마침내 막을 내렸다.


---

막이 내려간 뒤에도 아무것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은인은 여전히 은빛이었다.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거짓말하면 아마 다시 휘어질지도 몰랐다.

라이자는 여전히 걱정이 많았다.

은인이 문 쪽을 볼 때마다 눈빛이 조금 흔들릴 것이다.

푸리나는 여전히 극을 만들 것이다.

가끔 너무 멋진 장면을 떠올리고, 그레이에게 제지당할 것이다.

그레이는 여전히 기록할 것이다.

때로는 너무 건조하게, 때로는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죠니는 박수에 대해 심드렁한 말을 남기고, 아마도 언제나처럼 옳은지 위험한지 애매한 조언을 할 것이다.

레플리카는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라고 할 것이다.

하융은 어디선가 창을 열고, 아직 선택되지 않은 길들을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달라졌다.

작업실 문고리에는 은실이 묶여 있었다.

잠그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옆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출발하는 사람을 위한 의자가 아니라, 돌아온 사람을 위한 의자.

그날 이후, 은인은 가끔 그 의자에 앉았다.

라이자도 가끔 앉았다.

어느 날은 둘이 함께 앉았다.

어느 날은 둘 다 앉지 않았다.

그것도 괜찮았다.

의자는 비어 있어도,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푸리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제목을 적었다.

《은빛 피노키오》

그 아래에 부제를 적었다.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그리고 가장 마지막 줄에는, 은인이 직접 쓴 문장이 남았다.

조금 삐뚤고, 조금 느린 글씨였다.

저는 아직 모르지만, 돌아올 수 있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웃었다.

그 이상 선언할 필요는 없었다.

후일담 — 문고리의 은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다 —
아래를 그대로 소스에 추가하면 될 것 같아.
형식은 최신 전선 상황 통합 프롬프트로 정리했어.

# 현재 TRPG 전선 상황 통합 프롬프트
#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 룸 술탄국 / 니케아 / 발칸 / 헝가리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튜튼 / 리보니아
# 최신 우선 소스

이 프롬프트는 현재 TRPG 연재에서 실제 진행된 전선 상황과 각 세력의 전략적 위치를 정리하기 위한 최신 우선 소스다.

앞으로 대체역사 TRPG 연재, 각국 턴 계획, 외교 판단, 전선 우선순위 정리, 군주·가신 행동 앵커 작성, 연합 방위망 논의에서는 이 프롬프트를 우선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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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핵심 전제

이 게임은 거시적으로 플레이어 진영과 킵차크 칸국/몽골 세력 사이의 PVE 디펜스 구도를 가진다.

다만 현재 상황은 단순히 “모두가 한 방향에서 오는 킵차크를 막는 상태”가 아니다.

킵차크·몽골 본공세가 시작되기 전후로, 각 지역에서 내부 반란, 종교 사교도, 괴물 재난, 내전, 변경 약탈, 기사단 붕괴, 대봉기 등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국면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각국은 몽골 디펜스를 준비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내부와 주변에서 발생한 화재를 끄느라 전력이 분산되고 있다.

플레이어들은 다른 진형의 상황을 알고 있지만, 각 캐릭터와 국가는 자기 진형 정보 외에는 제한적으로만 알고 있다.

따라서 실제 턴 판단에서는 플레이어 지식과 캐릭터 지식을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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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전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푸리나 헤툼이 다스리는 국가이며, 현재 룸 술탄국 변경 아미르의 약탈 침공을 받고 있다.

침공해온 변경 아미르의 병력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우수함 중위세 아미르 1카드
- 벗어남 중위세 기병 10카드

이는 룸 술탄국 중앙군이라기보다, 권위와 물자를 확보해야 하는 변경 아미르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기동 약탈군에 가깝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핵심 대응 방향은 다음과 같다.

1. 죠니 죠스타와 성 블레즈 기사단으로 침공군을 요격한다.
2. 성 블레즈 기사단은 매턴 자동 보충되는 국가 유산 전력이므로 수동 보충이 필요 없다.
3. 죠니는 적을 무리하게 섬멸하거나 깊게 추격하지 않고, 국경 마을 보호와 약탈 저지를 최우선으로 한다.
4. 적 아미르의 핵심 카드에 손실 위험을 보여주고, 벗어남 중위세 기병 일부를 꺾어 “킬리키아 약탈은 비싸다”는 계산을 강제한다.
5. 하융은 죠니와 동행하여 전장 분석을 수행한다.
6. 그레이는 피해·포로·약탈물·배상 장부를 작성하고, 회유 가능한 자와 처벌해야 할 자를 구분한다.
7. 레이튼은 룸 중앙에 “이 침공은 중앙 명령인가, 변경 아미르의 독단인가”를 묻는 외교문을 준비한다.
8. 푸리나는 후방 안정, 극장관+신전 복합시설 착수, 인재 개발을 통해 장기적 후방 허브를 구축한다.

장기적으로 킬리키아의 목표는 변경 아미르를 단순히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조건부 완충세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완충 아미르화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킬리키아 국경 약탈 금지
- 포로와 약탈물 반환
- 피해 배상
- 친족 또는 후계자를 인질 겸 유학생으로 킬리키아 궁정에 체류
- 킬리키아 상인과 여관망 보호
- 유사시 보조기병 제공
- 계약 위반 시 성 블레즈 기사단의 징벌 인정
- 룸 중앙의 체면을 해치지 않는 형식 유지
- 일칸국 혈맹 질서와 충돌하지 않는 문구 사용

이 계획은 “약탈자를 친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탈자가 계속 약탈자로 남는 것보다 계약 아래 국경을 지키는 편이 더 싸고 안전하다고 계산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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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룸 술탄국 중앙 상황

현재 룸 술탄국은 이미 몽골/일칸권에 복속된 약화된 술탄국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중앙의 쌍두마차는 다음과 같다.

- 무인 앗 딘 술레이만: 군무와 외교, 변경 통제의 핵심 실권자
- 파흐르 앗 딘 알리: 행정과 재무, 조세·장부·도시 기반 유지의 핵심 실권자

현재 룸 술탄국 중앙은 변경 아미르들의 독자적 약탈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 전체가 아르메니아와 전면전을 원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중앙의 기본 태도는 다음에 가깝다.

> 변경 아미르들이 권위와 물자를 위해 약탈하는 것은 어느 정도 방치한다.
> 그러나 중앙 아미르들이 경거망동하지 않고, 일칸국을 자극할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면 충분하다.

두 재상이 무언가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 중앙 아미르들을 묶어두는 군사·정치적 통제 준비
- 변경 아미르들의 실패 또는 성공을 중앙 장부 안으로 흡수할 재정·이크타 재편 준비
- 일칸국 항의가 들어올 경우 “변경 아미르의 독단”이라고 책임을 회피할 문구 준비
- 변경 아미르들의 약탈전을 중앙의 주작전이 아니라 변경 정리와 자연선별의 기회로 보는 태도

따라서 아르메니아는 룸 중앙과 변경 아미르를 분리해서 다루어야 한다.

변경 아미르에게는 군사적으로 손실을 강요하고, 중앙에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 이 침공은 술탄국 중앙의 명령입니까, 아니면 변경 아미르의 독단입니까?

중앙이 독단이라고 답하면, 아르메니아는 그 아미르를 계약으로 묶을 명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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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니케아 제국 전선

니케아는 현재 여러 위협을 동시에 받고 있다.

확실히 알려진 정보는 다음과 같다.

- 니케아 아나톨리아 방면은 룸 술탄국 변경 아미르의 침공을 받고 있다.
- 해당 전선은 지휘관 부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있다.
- 니케아 서쪽에서도 별도의 전선이 만들어졌다는 정보가 있다.

플레이어 시점에서는 니케아 서부 381번 프로빈스에 부금악룡이라는 용이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금악룡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 381번 프로빈스에 둥지를 틀었다.
- 니케아 국민을 학살했다.
- 탐욕한 용의 성정에 따라 부를 끌어들이고 있다.
- 학살당한 사람들을 용아병이나 타락한 용사 유닛으로 언데드화한다.
- 이 언데드 병력들이 주변 영토를 침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보는 플레이어 진형 전체를 보는 시점에서 아는 정보이며,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캐릭터들이 자동으로 알고 있는 정보는 아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는 니케아에 곧바로 “부금악룡을 도와주겠다”고 말할 수 없다.

레이튼이 해야 할 일은 니케아에 공식 질의서를 보내는 것이다.

질문 방향은 다음과 같다.

- 니케아가 현재 가장 급한 전선은 어디인가?
- 아나톨리아 전선의 피해 원인은 병력 부족인가, 지휘관 부족인가?
- 서부에 생긴 새 전선은 인간 세력인가, 괴물·재난·반란인가?
- 니케아가 아르메니아에 원하는 지원은 지휘관, 전마, 피난 지원, 장례/정화 지원 중 무엇인가?
- 하융 같은 임시 작전고문을 받을 의사가 있는가?
- 전마 보급 협정이 필요한가?

아르메니아가 니케아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전마 공급
- 하융의 임시 작전고문 파견
- 그레이식 피해 장부와 피난·보상 행정 양식
- 여관좌 교단을 통한 피난민·부상자·장례 지원
- 레이튼의 외교·전략 질의
- 푸리나의 후방 안정과 극장관/여관망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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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세르비아와 남부 보스니아 상황

세르비아는 내부 반란을 수습 중이다.

추가로 남부 보스니아 쪽에서는 개척교 사교도들이 준동하고 있다.

다만 이 문제는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직접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교 교단장인 알페라츠가 진압할 예정이다.

알페라츠는 현장 지휘계 인물이며, 세르비아에는 아르메니아의 성 블레즈 기사단과 유사한 초반 국가 유산 병력이 존재한다.

현재 문제는 전투력 부족이 아니라, 사교도들의 꼬리를 아직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개척교 사교도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핵심은 색출·추적·침투·정보전이다.
- 꼬리를 잡으면 알페라츠와 국가 유산 병력이 빠르게 진압할 가능성이 있다.
- 아르메니아가 직접 군사 개입할 필요는 낮다.
- 다만 여관망을 통한 피난민·실종자·피해 기록, 정통 개척교와 사교도의 구분을 존중하는 외교적 태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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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불가리아 3차르 내전 상황

불가리아는 현재 세 명의 차르로 갈라진 내전 상태다.

핵심 세력은 다음과 같다.

1. 레플리카
- 정통 고통교 계열
- 가장 합법적인 차르 후보에 가까움
- 고통을 줄이고 견디게 하는 정통 고통교를 대표
- 현재 세 차르 중 유일하게 후원자가 없음
- 후원자를 찾고 있음

2. 스토얀카 아센
- 척추교 계열 차르
- 광기의 성좌 신도인 왈라흐 족과 성공적으로 외교 합의
- 레플리카의 영토 359번을 공격 중

3. 알렉산드리나 아센
- 사생아 차르 후보
- 시메온 대제의 흉내를 통해 왕도를 걷고자 함
- 스토얀카의 공격을 기회로 보고 있음
- 척추교와 그 후원자에게 접촉한 뒤 레플리카 측에 회전을 걸 생각
- 아센 세력의 사자 2명이 259번 영토로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있음

중요한 변수는 259번 영토가 칸국 영역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센 사자 2명이 259번으로 이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정보다.

가능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 알렉산드리나가 칸국의 직접 후원을 받으려 한다.
- 칸국 영역 안의 척추교 후원자와 접촉하려 한다.
- 칸국 지방 세력, 노얀, 용병, 통행권, 전마, 정보망을 얻으려 한다.
- 칸국을 직접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칸국권 중개자를 접촉하려 한다.
- 혹은 역정보일 수 있다.

아직 확정해서는 안 되지만, 259번으로 향하는 사자의 목적지는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레플리카가 무너지면 불가리아에서 정통 고통교 기반의 비교적 온건하고 질서 있는 축이 사라질 수 있다. 그 결과 척추교, 광기, 칸국권 후원자가 불가리아 내전에 깊게 들어올 위험이 있다.

아르메니아가 직접 군사 개입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레플리카에게 제한적 후원 신호를 보내는 것은 고려할 수 있다.

후원 방식은 군사동맹이 아니라 다음이 적절하다.

- 피난민 보호
- 부상자 치료
- 장례 지원
- 외교적 승인
- 정통 고통교와 척추교를 구분하는 종교적 태도
- 척추교·광기 확산 저지 명분
- 제한적 구호·의약·식량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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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헝가리 왕국 전선

헝가리는 현재 세 방향을 동시에 관리하고 있다.

1. 남부/보스니아 방면 개척교 사교도 토벌 관련 문제
2. 서부 오스트리아 공국 점령
3. 동부 몽골군 디펜스 시작

오스트리아 공국 점령은 소피아/소피가 군권을 잡고 진행할 예정이며, 보헤미아가 이를 지원할 예정이다.

이는 헝가리의 장기 체급을 키울 수 있는 작전이지만, 단기적으로는 동부 방어력과 주의가 분산될 위험이 있다.

헝가리는 킵차크/몽골 디펜스에서 핵심 방패국 중 하나이므로, 아르메니아는 헝가리에 직접 군대를 보내기보다 남동부 전선을 안정화시켜 헝가리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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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폴란드 전선

폴란드는 현재 몽골군의 공격을 받게 될 예정이다.

이는 킵차크/몽골 디펜스 주전선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신호에 가깝다.

폴란드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당장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대군 파견이 아니라 다음과 같다.

- 전마 공급 가능성 확인
- 여관망을 통한 피난민·사절 이동 지원
- 몽골군 진군 정보 공유
- 일칸국 혈맹을 통한 몽골계 정보 루트 활용 가능성
- 전후 난민 수용 또는 경유 지원
- 레이튼의 외교 질의
- 하융 같은 임시 지휘관 파견 가능성 검토

다만 하융은 현재 킬리키아 방면 전투 분석, 니케아 지원 후보, 룸 변경 아미르 대응과 연결되어 있어, 폴란드까지 즉시 보내기는 어렵다.

폴란드 지원은 우선 레이튼의 질의와 전마 외교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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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리투아니아 / 푸르스 / 튜튼 / 리보니아 전선

리투아니아·튜튼·리보니아 방면은 북방 내부 재편 국면에 들어갔다.

주요 상황은 다음과 같다.

- 푸르스인들은 3턴 뒤 대봉기를 일으킬 예정이다.
- 호흐마이스터의 튜튼 기사단은 이 푸르스인들의 마지막 대봉기를 버텨야 한다.
- 민다우가스는 봉기로 인해 남은 피난민들을 보호하기로 했다.
- 민다우가스는 사모기티아와 트레니오테를 사실상 미끼로 던진 뒤 남벌을 천명했다.
-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180번 영지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반란 상태다.
- 검우기사단은 100명을 제외하고 거의 전원이 기사단 자금을 들고 사모기티아를 통과해 튜튼 동쪽의 튜튼 기사단 쪽으로 퇴각 중이다.
- 이 퇴각병들은 트레니오테에게 대부분 학살당할 가능성이 높다.
-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민다우가스의 선택은 냉정하지만 전략적으로 일관적이다.

그는 모든 전선을 구하려 하지 않고, 통제 불가능한 폭력은 적에게 향하게 두며, 자신은 피난민 보호와 남벌이라는 큰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기존 이름으로는 사실상 끝났다.

아스트리트와 남은 100명은 “실패한 성전 기사단”의 이름을 계속 들고 가기보다, 생명을 긍정하는 새 기사단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튜튼 기사단은 푸르스 대봉기를 버티는 것이 최우선이며, 리보니아 잔당을 모두 구하려다 같이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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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아르메니아의 거시적 역할

현재 모든 전선을 고려하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역할은 주전선 국가가 아니라 연합의 남동부 후방 허브다.

아르메니아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 킬리키아 국경의 룸 변경 아미르를 낮은 비용으로 요격한다.
2. 가능하다면 변경 아미르를 완충세력으로 전환한다.
3. 룸 중앙과 변경 아미르를 분리해서 다룬다.
4. 니케아에 공식 질의서를 보내 실제 위협과 필요한 지원을 확인한다.
5. 전마 공급을 니케아뿐 아니라 폴란드·헝가리 등 대몽골 전선 국가의 장기 병목 자원으로 관리한다.
6. 푸리나의 극장관+신전 복합시설을 통해 인재 발굴, 피난민 재배치, 귀순자 가족 관리, 유학생/인질 관리, 후방 사기 유지의 중심지를 만든다.
7. 푸리나는 매턴 가능한 한 인재 개발을 지속한다.
8. 그레이는 포로·피해·배상·피난·전마 배분 장부를 연합 지원용으로 확장한다.
9. 레이튼은 각국에 공식 질의망을 열어 플레이어 지식을 캐릭터 지식으로 전환할 통로를 만든다.
10. 하융은 당장은 킬리키아 전장 분석에 집중하고, 이후 정보가 열린 전선 중 가장 붕괴 위험이 큰 곳으로 파견한다.
11. 죠니와 성 블레즈 기사단은 킬리키아 국경의 기동 예비대이자 계약 위반 시 징벌의 망치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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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현재 가장 중요한 전략 판단

현재 유럽 전선은 “몽골 본공세만 막으면 되는 상황”이 아니다.

각 전선은 다음처럼 압박받고 있다.

- 북방: 폴란드 몽골 공격, 푸르스 대봉기, 튜튼 방어, 리보니아 붕괴
- 동부/중부: 헝가리 동부 몽골 디펜스, 오스트리아 점령, 사교도 문제
- 발칸: 불가리아 3차르 내전, 스토얀카-왈라흐 합의, 알렉산드리나의 259번 칸국권 접촉 의혹, 세르비아 반란과 사교도
- 남동부: 니케아 룸 침공, 니케아 서부 미확인 재난, 킬리키아 룸 변경 아미르 침공
- 킬리키아: 룸 아미르 요격과 완충화 준비

따라서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새 전선을 크게 열어서는 안 된다.

가장 좋은 전략은 다음과 같다.

> 자기 국경을 안정화한다.
> 변경 아미르를 통제 가능한 완충세력으로 바꾼다.
> 니케아와 공식 정보 채널을 연다.
> 전마·인재·여관망·장부·질문을 통해 연합의 빈틈을 메운다.
> 남동부에서 새 불길을 만들지 않아 북방과 중부가 몽골 디펜스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즉 푸리나의 아르메니아는 “모든 전선에 뛰어드는 국가”가 아니라,

> 무대 뒤에서 조명, 말, 피난처, 장부, 질문, 두 번째 배역을 준비하여 각국이 자기 전선에서 무너지지 않게 돕는 후방 허브 국가

로 운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은빛 피노키오》

후일담 — 문고리의 은실

—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다 —

다음 날 아침, 그레이는 작업실 문 앞에서 멈췄다.

문고리에 은실이 묶여 있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였다.

느슨하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도 않게.

그레이는 잠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록판을 꺼냈다.

문고리 은실: 유지 여부 재확인 예정.

그는 그렇게 적고,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레이가 문을 열었다.

은실은 문이 열릴 때 살짝 흔들렸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도 기록했다.

문 개방 시 은실 간섭 없음.

푸리나가 작업실 안쪽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 아침부터 은실의 근무 상태를 점검하는 거야?”

“기능 확인입니다.”

“그거 잠금장치 아니잖아.”

“그렇기 때문에 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잠금장치가 아닌 것이 잠금장치처럼 작동하면 곤란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레이, 가끔 너무 좋은 말을 너무 행정적으로 해.”

“죄송합니다.”

“칭찬이야.”

“그렇습니까?”

“응. 아마도.”

작업실 안에는 전날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귀환용 의자 두 개.

보류 상자.

반환 예정 봉투.

접힌 붉은 망토.

빈 주머니.

그리고 작은 거울 앞에 앉은 은인.

은인은 자기 코끝을 보고 있었다.

그 결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보아야 알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뒤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조금 느린 동작이었다. 손목에 올렸던 따뜻한 천은 작업대 옆에 접혀 있었다.

그레이가 물었다.

“은인 님. 문고리 은실의 유지 여부를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은인이 돌아보았다.

“오늘도 물어보나요?”

“네. 어제 ‘내일 다시 정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은인은 문고리를 보았다.

“기억했어요?”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기록했습니다.”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오늘은…… 그대로 둘래요.”

그레이는 적었다.

금일 유지.

은인이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조금 낮춰도 될까요?”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도 흥미롭게 보았다.

라이자는 차잔을 내려놓았다.

은인은 문고리로 다가갔다.

“어제는 제가 나가고 돌아오는 표시였어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조금 높아요.”

푸리나는 물었다.

“높으면 불편해?”

“불편하다기보다…….”

은인은 은실을 손끝으로 만졌다.

“제가 볼 수는 있는데, 잡으려면 손을 조금 들어야 해요.”

라이자는 조용히 들었다.

은인은 계속 말했다.

“오늘은 조금 낮게 두고 싶어요. 손을 들지 않아도 만질 수 있게.”

그레이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날이었다면, 은실의 장력과 문고리 회전 반경과 손가락 위치부터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먼저 물었다.

“낮추면 더 편할 것 같아?”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 열 때 걸리지 않게 해야 해.”

“그레이가 봐줄 수 있어요?”

그레이는 즉시 말했다.

“가능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귀환용 은실 조정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너는 해설하지 마.”

“하지만 후일담이잖아.”

“그래서 더 하지 마.”

푸리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셋은 문고리 앞에 모였다.

은인이 은실의 매듭을 풀었다.

라이자는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도와줄까?”

은인은 매듭을 보다 말했다.

“조금만요.”

라이자는 은인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치지 않았다.

대신 매듭의 한쪽 끝을 잡아주었다.

그레이는 문을 열고 닫아보며 위치를 확인했다.

“이 높이면 개폐에 방해되지 않습니다.”

은인은 은실을 조금 낮게 묶었다.

느슨하게.

하지만 어제보다 손에 더 가까운 위치에.

은인은 문 앞에 서서 은실을 만졌다.

“좋아요.”

라이자가 물었다.

“오늘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레이는 기록했다.

문고리 은실: 위치 하향 조정. 사유 — 당사자 접근성 향상. 내일 재확인.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제 정말 시설 관리 기록이네.”

그레이는 진지했다.

“중요한 시설입니다.”

은인은 작게 웃었다.

“중요해요.”

그레이는 그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충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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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는 조용했다.

은인은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셨다.

라이자는 은인이 컵을 잡는 손을 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손목의 각도.
관절의 움직임.
코끝의 결.
차의 온도.

보고 싶은 곳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라이자는 은인의 얼굴을 보았다.

“맛은 어때?”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좋아요.”

라이자는 잠시 기다렸다.

은인은 컵을 내려놓고 다시 말했다.

“조금 뜨거워요.”

라이자는 즉시 컵을 가져가려 했다.

은인이 컵을 잡은 채 말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마실게요.”

라이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푸리나가 그 장면을 보며 숨을 죽였다.

라이자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알겠어.”

은인은 차를 조금 식혔다.

후후.

은빛 입술에서 작은 김이 흩어졌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지 않았다.

푸리나도 말하지 않았다.

작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어제 이전의 라이자였다면, 컵은 이미 빼앗겼을 것이다.

어제 이전의 은인이었다면, “괜찮아요”만 말했을 것이다.

오늘 은인은 “좋아요”와 “뜨거워요”를 같이 말했고, 라이자는 컵을 빼앗지 않고 기다렸다.

푸리나는 속으로 박수쳤다.

겉으로는 치지 않았다.

이런 장면은 너무 큰 박수를 받으면 깨질 수 있었다.

라이자가 은인을 보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뒤, 은인이 물었다.

“라이자는 손 괜찮아요?”

라이자는 자기 손을 보았다.

어제 레플리카가 올려준 따뜻한 천이 아직 근처에 있었다.

“괜찮—”

라이자는 멈췄다.

은인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은 비난하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라이자는 짧게 웃었다.

“조금 뻐근해.”

은인은 진지하게 말했다.

“레플리카에게 말해야 하나요?”

푸리나가 끼어들었다.

“레플리카를 부르면 라이자도 의자에 앉아야 할걸.”

라이자는 푸리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 있어요.”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2개 있습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라이자도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작업실의 은빛에 부딪혀, 작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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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반환 예정 봉투가 문제가 되었다.

작은 나사.

장난감 나라 태엽 아이에게서 떨어진 나사.

은인은 봉투를 들고 오래 바라보았다.

“돌려줘야 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다시 장난감 나라에 가야 해요.”

라이자의 손이 굳었다.

아주 조금.

은인은 그것을 보았다.

“무서워요?”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응.”

은인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럼 안 갈까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답은 쉽지 않았다.

가지 마.

너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은인이 가져온 나사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돌려주는 것도 은인의 책임이었다.

라이자는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어제보다 낮아진 은실.

손을 들지 않아도 닿는 높이.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가야 한다고 생각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태엽 아이의 것이니까요.”

“그 아이가 괜찮다고 했잖아.”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사가 떨어졌는데 괜찮다고 했어요. 그건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아요.”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인은 봉투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저는 돌아올 수 있는지 다시 보고 싶어요.”

그 말에 라이자의 얼굴이 조금 흔들렸다.

돌아올 수 있는지 다시 보고 싶다.

그 말은 위험하면서도, 정직했다.

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이번엔 어떻게 갈래?”

은인은 생각했다.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아요.”

라이자의 눈빛이 밝아지려다가, 은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은인은 말했다.

“하지만 라이자가 전부 대신 말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같이 가되, 네가 먼저 말할래?”

“네.”

그레이가 말했다.

“반환 기록을 작성해야 하므로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나는 무대 문만 열어둘게.”

죠니는 벽가에서 말했다.

“장난감 나라면 하융이 알아서 나타나겠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가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하융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렸다.

“길은 이미 열려 있소.”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후일담답지 않게 다시 외출이네.”

라이자가 말했다.

“외출도 후일담일 수 있어?”

푸리나는 웃었다.

“진짜 후일담은 끝난 뒤에 뭘 하는지 보는 거니까.”

은인은 봉투를 들었다.

“그럼 갔다 올게요.”

라이자는 말했다.

“같이 가자.”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요.”

문고리의 은실이 조금 흔들렸다.

문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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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나라는 전날보다 조용했다.

아니, 소리는 여전히 컸다.

나팔도 울렸고, 회전목마도 돌았고, 색종이도 흩날렸다.

하지만 은인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어제는 모든 소리가 은인을 끌어당겼다.

오늘은 그 소리 사이의 틈이 들렸다.

반복되는 웃음 뒤의 태엽 소리.
과자 냄새 아래의 눅눅한 종이 냄새.
“괜찮아!”라는 말 사이에 떨어지는 작은 부품 소리.

은인은 봉투를 꼭 쥐었다.

라이자는 곁에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 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은인보다 먼저 말하지 않았다.

태엽 아이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 옆에서, 같은 웃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괜찮아!”

끼릭.

“괜찮아!”

끼릭.

은인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태엽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너 다시 왔구나!”

“네.”

“놀러 왔어?”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돌려주러 왔어요.”

태엽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은인은 봉투를 열었다.

작은 나사가 나왔다.

태엽 아이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거…….”

“어제 떨어졌어요.”

태엽 아이는 바로 말했다.

“괜찮아!”

끼릭.

은인은 나사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말했다.

“안 괜찮을 수도 있어요.”

태엽 아이는 웃었다.

“괜찮다니까!”

끼릭.

은인은 조금 무서웠다.

이 말이 맞는지, 자기가 괜히 아픈 곳을 건드리는 건 아닌지, 태엽 아이가 화낼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말했다.

“저도 어제 괜찮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태엽 아이가 멈췄다.

라이자가 한 걸음 앞으로 오려다가 멈췄다.

은인은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이걸 돌려줄게요. 다시 붙일지, 보관할지, 버릴지는 당신이 정해도 돼요.”

태엽 아이는 나사를 보았다.

“내가 정해?”

“네.”

“안 붙여도 돼?”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라이자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흔적이 벌이 아니라 접힌 페이지일 수도 있다는 말.

“안 붙여도 돼요. 하지만 떨어졌다는 걸 몰랐던 것과, 알고도 안 붙이는 건 다를 것 같아요.”

태엽 아이는 나사를 받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이거 없으면 조금 느려져.”

“네.”

“있으면 다시 빨리 움직일 수 있어.”

“네.”

“빨리 움직이면 모두가 좋아해.”

은인은 작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요?”

태엽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장난감 나라의 음악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태엽 아이는 나사를 들고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말했다.

“오늘은 안 붙일래.”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붙일지도 몰라.”

“네.”

“아니면 모레.”

“네.”

은인은 조금 웃었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태엽 아이는 그 말을 따라 했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다.”

끼릭.

태엽 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레이는 조용히 기록했다.

나사 반환 완료. 수령자 결정: 금일 미부착, 추후 재결정 가능.

라이자는 그 기록을 보며 생각했다.

반환은 끝이 아니었다.

돌려주고, 상대가 정하도록 기다리는 것.

그것도 배움이었다.

은인은 태엽 아이에게 말했다.

“저는 돌아갈게요.”

태엽 아이가 물었다.

“벌써?”

“네.”

“더 놀지 않고?”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조금 놀고 싶어요.”

라이자의 손이 아주 조금 굳었다.

은인은 그걸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돌아가고 싶어요.”

태엽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놀고 싶은데 돌아가?”

“네.”

“왜?”

은인은 문 쪽을 보았다.

라이자와 그레이, 열린 길, 문고리의 은실을 떠올렸다.

“돌아가도 다시 올 수 있는지 보고 싶어서요.”

태엽 아이는 나사를 손에 쥐고 말했다.

“이상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돌아섰다.

이번에는 길이 그렇게 멀어지지 않았다.


---

작업실로 돌아오자, 푸리나는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은인은 문을 지나오며 은실을 만졌다.

낮아진 은실은 손끝에 잘 닿았다.

“다녀왔어요.”

라이자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레이도 들어왔다.

문은 닫혔다.

잠기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물었다.

“어땠어?”

은인은 생각했다.

“이상했어요.”

“좋은 쪽?”

“모르겠어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은인은 귀환용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는 라이자가 옆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푸리나는 그걸 보고 웃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다.

라이자는 은인에게 물었다.

“다시 가고 싶어?”

은인은 생각했다.

“언젠가는요.”

라이자의 손이 굳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풀었다.

“그럼 그때 다시 말해줘.”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뒤 은인이 물었다.

“라이자는 무서웠어요?”

라이자는 솔직히 말했다.

“응.”

“그래도 같이 와줬어요.”

“응.”

“제가 먼저 말하게 해줬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응.”

은인은 조금 웃었다.

“잘했어요.”

라이자의 눈이 커졌다.

푸리나는 입을 막았다.

그레이도 아주 잠깐 멈췄다.

라이자가 물었다.

“내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도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아마 오늘 라이자가 받은 가장 큰 보상이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 후일담, 좋네.”

죠니가 어디선가 나타나 말했다.

“지금까지 중 제일 후일담답네.”

푸리나가 놀라 물었다.

“죠니, 어디 있었어?”

“문 밖.”

“왜?”

“들어오면 장면이 내 쪽으로 샐 것 같아서.”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끔은.”

은인은 죠니를 보고 말했다.

“나사를 돌려줬어요.”

“잘했네.”

“놀고 싶었는데 돌아왔어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꽤 잘했네.”

은인은 조금 자랑스러워졌다.

“박수는요?”

죠니는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안 칠래.”

은인이 눈을 깜박였다.

“왜요?”

“이번 건 박수보다 기억 쪽이 나아.”

은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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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푸리나는 대본 마지막 뒤에 후일담 페이지를 붙였다.

제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문고리의 은실

그 아래에는 오늘 있었던 일들이 적혔다.

은실을 낮춘 일.

뜨거운 차를 천천히 마신 일.

라이자가 손이 조금 뻐근하다고 말한 일.

나사를 돌려준 일.

태엽 아이가 오늘은 나사를 붙이지 않겠다고 정한 일.

은인이 놀고 싶었지만 돌아온 일.

라이자가 무서웠지만 같이 갔고, 대신 말하지 않은 일.

푸리나는 마지막 줄을 비워두었다.

“은인.”

“네.”

“오늘 후일담 마지막 줄, 네가 쓸래?”

은인은 펜을 받았다.

조금 망설이다가 썼다.

오늘은 돌아왔어요. 내일은 다시 정할래요.

라이자가 그 문장을 보았다.

“좋네.”

은인이 물었다.

“좋아요?”

“응.”

라이자는 은실이 묶인 문고리를 보았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으니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다.

레플리카는 저녁 무렵 잠깐 들러 두 사람을 보고, 무리하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말했다.

“오늘은 충분하다. 더 증명하려 하지 마라.”

푸리나는 바로 대답했다.

“네. 막 내립니다.”

레플리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하융의 창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창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필요한 날에는 다시 열릴 것이다.

작업실의 등불이 낮아졌다.

문고리의 은실은 어제보다 낮은 곳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의자 두 개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비어 있다는 것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누군가 돌아오면 앉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푸리나는 대본을 덮었다.

“《은빛 피노키오》, 여기서 끝.”

은인이 물었다.

“정말 끝인가요?”

푸리나는 웃었다.

“극은.”

“이야기는요?”

라이자가 대답했다.

“내일 다시 정하자.”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코끝의 작은 결이 등불에 살짝 반짝였다.

그것은 더 이상 벌처럼 보이지 않았다.

문고리의 은실처럼, 너무 세게 조이지 않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작업실 문은 닫혔다.

잠기지는 않았다.
《세 망령이 찾아온 밤》

프롤로그 — 박수가 끝난 뒤에도 남는 이름

—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산 자가 웃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공연이 끝난 뒤의 극장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발소리도 멎었다.
피난민들이 웃다가 훌쩍이던 소리도 잦아들었다.
방금 전까지 종이 왕관을 쓰고 고양이 왕을 외치던 아이들은, 이제 각자의 부모 품이나 담요 아래로 돌아가 있었다.

무대 위에는 작은 소품들만 남았다.

나무 고양이 인형.
접힌 종이 왕관.
끝이 부러진 장난감 창.
빵 모양으로 깎은 나무 조각.
그리고 너무 많이 박수를 받아 한쪽 귀퉁이가 찢어진 막.

푸리나 헤툼은 그 무대 앞에 서서 손을 허리에 올렸다.

“좋아.”

그녀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그레이가 무대 옆에서 소품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극이요, 아니면 사람들이요?”

푸리나는 잠깐 생각했다.

“둘 다.”

“그렇다면 좋은 기록입니다.”

“기록할 거야?”

“이미 했습니다.”

그레이는 작은 장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공연 제목, 참여한 아이들 수, 부상자는 없었는지, 사용한 소품, 울다가 웃은 사람의 대략적 수, 공연 후 배급된 빵의 양까지 적혀 있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레이, 너는 진짜 극장과 행정의 경계를 계속 무너뜨리고 있어.”

“전하께서 먼저 행정과 극장의 경계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그건 맞아.”

푸리나는 인정했다.

객석 끝에서는 아직 몇몇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극이 끝났는데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웃은 얼굴 그대로 멍하니 있었고, 어떤 이는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수를 친 손.
검을 쥐던 손.
누군가를 묻어주지 못한 손.

푸리나는 그들을 보았다.

그때, 마당 가장자리의 그늘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웃음이었어요.”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공연이 시작될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
무대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객석에 앉지도 않았다.
그러나 떠나지도 않았다.

등불이 닿지 않는 곳.

박수의 가장자리.

웃음이 끝난 뒤에야 남는 침묵 속에서.

푸리나는 아레를 보며 살짝 웃었다.

“칭찬으로 받아도 돼?”

“그럼요.”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웃었으니까요. 살아 있는 이들이 다시 웃는 일은, 작지 않아요.”

푸리나는 조금 안심했다.

그러나 아레의 시선은 무대 위에만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객석 뒤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나무 상자 하나.

푸리나는 그 시선을 따라가다가 조용히 물었다.

“거기에도 누가 있었어?”

아레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보이지 않는 실들이 늘어져 있는 듯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누군가의 마지막 숨으로 내려가고, 누군가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길목에 닿는 실.

“있었겠지요.”

아레가 말했다.

“이런 밤에는 대개 있습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쉽게 웃을 수도 없었다.

아레는 천천히 무대 쪽으로 걸어왔다.

“푸리나 헤툼.”

“응.”

“그대의 박수는 틀리지 않았어요.”

푸리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맞았다는 뜻?”

아레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그리 쉽게 채점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요.”

“그건 또 그렇네.”

아레는 찢어진 막을 보았다.

“산 자에게는 웃음이 필요합니다. 울음만으로는 숨을 이을 수 없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책망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러웠다.

“다만 나는, 그 웃음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듣는 쪽의 사람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정말 알고 있나요?”

그 질문은 날카롭지 않았다.

그래서 더 깊었다.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죽은 자를 외면하려고 극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은, 죽은 부모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피난민에게 빵과 소극을 주는 것은, 불탄 마을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레가 듣는 침묵을, 자신이 정말 같은 깊이로 알고 있는가.

그건 다른 문제였다.

푸리나는 솔직히 말했다.

“아마 전부는 아닐 거야.”

아레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용히 눈을 내렸다.

“전부 알 필요는 없어요. 그대는 그대의 길이 있으니까.”

“아레도 아레의 길이 있고?”

“네.”

아레는 무대 위 나무 고양이 인형을 집어 들었다.

작고 우스꽝스러운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이 아이들은 오늘 몽골을 물리쳤지요.”

“고양이 왕이 아주 훌륭했지.”

“네. 훌륭했어요.”

아레는 고양이 인형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마당 밖에는, 고양이 왕이 물리치지 못한 몽골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응.”

“그리고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도 있어요.”

침묵.

그레이가 소품 정리를 멈췄다.

멀리 앉아 있던 병사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이 극은…… 너무 밝았을까?”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대답은 빠르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밝았기 때문에 필요했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찢어진 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밝은 막이 내려간 뒤에도 이름은 남아요.”

그녀의 눈은 무대가 아니라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박수가 끝난 뒤에, 누군가는 빈자리를 세어야 하지요.”

푸리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 말이 아레였다.

푸리나는 박수로 산 자를 일으킨다.
아레는 박수 뒤의 빈자리를 센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 두 길이 늘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레에게도 무대가 필요할까.

산 자를 웃게 하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죽은 자를 다시 전장에 세우기 위한 무대도 아니라.
아레가 자기 침묵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는 무대.

그 생각이 떠오르자,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가 즉시 반응했다.

“전하.”

“응?”

“그 표정은 새로운 극을 생각하실 때의 표정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너는 왜 항상 맞혀?”

“반복 관찰 결과입니다.”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극인가요?”

푸리나는 조금 망설였다.

평소라면 바로 말했다.

“좋아! 이번엔 아레 주연!”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레에게 극을 건네는 일은 조심해야 했다.

망자의 이름을 다루는 사람에게, 무대는 칼보다 날카로울 수 있었다.

푸리나는 나무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아레.”

“네.”

“너는 기억하는 사람이잖아.”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않았다.

푸리나는 말을 골랐다.

“그런데 혹시, 네가 기억하는 이름들이…… 너를 쉬지 못하게 할 때도 있어?”

마당은 조용했다.

멀리서 등불이 흔들렸다.

아레는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차갑지 않았지만, 아주 오래된 물가처럼 깊었다.

“있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너무 많은 밤이 들어 있었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걸 극으로 볼 수 있을까?”

아레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다.

“내 기억을요?”

“아니.”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 기억을 꺼내서 구경하자는 말이 아니야. 그런 건 안 해.”

그녀는 무대 위에 남은 종이 왕관을 접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세 망령이 찾아오는 이야기.”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입니까?”

푸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아레는 낯선 듯 물었다.

“세 망령.”

“과거, 현재, 미래.”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하지만 아레에게 찾아오는 망령은 좀 다를 거야.”

아레는 침묵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첫 번째는, 네가 처음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름.”

아레의 손이 아주 조금 멈췄다.

“두 번째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웃고 있는 자리.”

객석 뒤편에서 누군가 작게 숨을 삼켰다.

“세 번째는…….”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건 조심해야 했다.

“네가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이 된 미래.”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거절의 침묵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장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이 극은 너한테 ‘잊어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아레의 눈이 푸리나를 향했다.

푸리나는 똑바로 말했다.

“그건 네 길을 부정하는 거니까.”

아레는 낮게 물었다.

“그럼 무엇을 묻는 극인가요?”

푸리나는 대답했다.

“기억이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

바람이 천 조각 막을 흔들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이유가 산 자가 웃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산 자가 다시 웃을 수 있었던 대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레는 눈을 내렸다.

오래.

아주 오래.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었지만 쓰지 않았다.

지금은 기록보다 기다림이 먼저였다.

아레는 마침내 말했다.

“그대다운 극이군요.”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칭찬이야?”

“아마도요.”

“다들 왜 내 주변 사람들은 칭찬을 이렇게 애매하게 해?”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께서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조정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건 더 이상해.”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었다.

작고, 조용하고, 거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푸리나는 그것을 보았다.

아레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푸리나 헤툼.”

“응.”

“그 극에 들어가면, 나는 그 아이들을 다시 보게 되겠지요.”

“응.”

“그 아이들은 나를 탓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어.”

“나를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고.”

“내가 기억이라 부르던 것이, 사실은 붙잡음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야겠군요.”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정말?”

아레는 눈을 떴다.

“기억하는 자가, 기억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위험하니까요.”

그 말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아레의 결심이었다.

푸리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웃었다.

과장되지 않게.

“좋아.”

그녀는 무대 위 찢어진 막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번 극의 제목은…….”

아레가 기다렸다.

그레이도 기록판을 들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세 망령이 찾아온 밤》.”

그리고 조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박수가 끝난 뒤에도 남는 이름을 위하여.”

아레는 그 제목을 조용히 반복했다.

“박수가 끝난 뒤에도 남는 이름.”

그녀는 빈 객석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레는 분명히 무언가를 본 듯했다.

혹은 누군가를.

아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무대 위로 한 걸음 올라섰다.

그 순간,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이번에도 크게 외치지 않았다.

이 극은 축제처럼 시작하면 안 되었다.

마당의 등불이 하나씩 낮아졌다.

아이들의 웃음이 남긴 온기 위로, 조용한 밤이 내려앉았다.

찢어진 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푸리나의 신술이 아주 얇게 마당 위에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무대는 아레에게 배역을 씌우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늘 듣고도, 한 번도 끝까지 마주하지 못한 침묵 앞에 작은 등불 하나를 놓았다.

그 등불 너머로, 첫 번째 망령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푸리나는 막 옆에 서서 낮게 말했다.

“1막.”

그레이의 펜이 조용히 움직였다.

1막 — 첫 번째 망령: 처음으로 이름을 잃은 아이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기억은 언제 의무가 되었는가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1막 — 첫 번째 망령: 처음으로 이름을 잃은 아이

— 기억은 언제 의무가 되었는가 —

첫 번째 망령은 울음소리로 오지 않았다.

그것은 발소리로 왔다.

젖은 흙을 밟는 소리.
멀리서 말발굽이 사라진 뒤, 누구도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 전장 위를 작은 발이 걷는 소리.

톡.

톡.

톡.

마당의 등불이 하나씩 낮아졌다.

야전 여관의 마당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찢어진 막도, 뒤집은 상자 객석도, 나무 고양이 인형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내려앉자, 무대의 가장자리에는 다른 밤이 겹쳤다.

비가 내린 뒤의 들판.
흙탕물.
부러진 깃대.
반쯤 젖은 군기.
그리고 아무도 주워가지 못한 작은 이름표 하나.

아레 마가트로이드는 무대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검을 들지 않았다.
실을 펼치지도 않았다.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푸리나는 막 옆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보았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지만, 아직 쓰지 않았다.

이 막은 기록하기보다 먼저 들어야 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톡.

톡.

톡.

그리고 무대 끝에 아이 하나가 섰다.

정확히는 아이처럼 보이는 병사였다.

어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레의 기억 속에서 그는 늘 아이로 남아 있었다.

젖은 군복.
흙이 묻은 손.
어깨에 맞지 않는 투구.
그리고 목에 걸린 작은 이름표.

하지만 그 이름표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왔구나.”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한 걸음 다가갔다.

“비가 오던 밤이었지.”

망령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왼쪽 능선이 무너졌고, 전령은 돌아오지 못했단다. 나는 3군단이 아직 버틴다고 믿었어. 아니, 믿고 싶었던 것이겠지.”

무대 위에 비 냄새가 번졌다.

푸리나는 등불을 조금 더 낮췄다.

그녀가 만든 무대는 아레에게 대사를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오래 삼켜온 말을,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위치에 놓았다.

아레는 망령을 보았다.

“그때 네 이름을 물었어야 했단다.”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장군님은 물으셨습니다.”

아레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망령은 말했다.

“제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비가 더 굵어졌다.

무대 위에는 과거의 장면이 펼쳐졌다.

흙탕물 속에서 쓰러진 병사.
그를 부축하려고 몸을 숙이는 아레.
뒤쪽에서 들려오는 함성.
전선이 다시 밀려오는 소리.
누군가 외치는 소리.

“장군님! 지금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때의 아레는 망설였다.

아주 짧게.

그러나 전장에서는 짧은 망설임도 명령이었다.

그녀는 병사의 어깨를 눌렀다.

“이름을 말하렴.”

병사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피와 비가 말을 삼켰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전선은 무너지고 있었다.

아레는 일어나야 했다.

아레는 그 아이를 두고 일어났다.

그 후 병사의 이름표는 흙 속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은 돌아오지 못했다.

무대가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망령은 빈 이름표를 쥐고 있었다.

아레는 그 이름표를 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름을 잃은 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정했단다.”

망령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저를 기억하셨습니까?”

“그래.”

“제 이름도 모르시면서요?”

아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비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이름을 말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네가 이름을 잃었다고 생각했단다.”

망령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저는 장군님의 의무가 되었습니까?”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손끝을 움켜쥐었다.

이 질문은 위험했다.

그러나 아레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낮게 인정했다.

“처음에는 그랬단다.”

망령은 아레를 보았다.

“처음에는요?”

아레는 눈을 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너는 한 사람이 아니라 표식이 되었구나.”

비가 멎었다.

무대 위에 부러진 깃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깃대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아레는 그 깃대를 보았다.

“이름을 묻지 못한 나의 실패.
전장을 떠나야 했던 나의 명령.
살리기 위해 버려야 했던 순간.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

그녀는 망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야. 나는 너를 기억한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너를 나의 첫 번째 죄로 세워두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에 무대가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아레의 말투를 들었다.

낮고, 조심스럽고, 오래된 슬픔이 섞인 말.

그것은 전장의 장군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아이를 놓친 어른의 목소리였다.

망령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물었다.

“장군님은 저를 어디에 두셨습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내 명령의 가장 아래에.”

“왜요?”

“다시는 너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그럼 저는 계속 전장에 있었습니까?”

아레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랬겠구나.”

망령은 빈 이름표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쉬고 싶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하지만 푸리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아레 안쪽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것을.

아레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이니?”

망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는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이 저를 잊지 않은 것은 고마웠습니다.”

아레의 시선이 흔들렸다.

망령은 계속 말했다.

“비 오는 밤에 혼자 남겨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장군님이 제 빈 이름표를 들고 계셨으니까요.”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군님.”

망령의 목소리는 작았다.

“저는 매일 전선의 가장 앞에 서 있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숨을 낮췄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망령은 말했다.

“저는 장군님의 맹세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레는 망령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너를 어떻게 기억해야 했니, 아이야?”

“이름으로.”

“네 이름을 모르는데도?”

“모르면, 모른다고 적어도 됩니다.”

아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망령은 빈 이름표를 들어 올렸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것도 제 자리는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군님은 저를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불렀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랬구나.”

“네.”

“나는 네 이름을 찾지 못해서, 그 빈자리에 내 죄를 적어두었구나.”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아레는 무릎을 굽혔다.

망령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만지지 않았다.

붙잡지 않았다.

다만 물었다.

“이름표를 봐도 되겠니?”

망령은 잠시 아레를 보았다.

그리고 빈 이름표를 내밀었다.

아레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름은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레는 그 빈 표면을 오래 보았다.

“아이야. 나는 네 이름을 모른단다.”

그녀는 말했다.

“그날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누구를 두고 왔는지도, 어떤 노래를 알았는지도 알지 못하는구나.”

망령은 조용히 들었다.

“나는 네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단다. 네가 나를 원망했는지, 살려달라고 했는지, 아니면 이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도 알지 못해.”

아레는 이름표를 자기 가슴 가까이 들었다.

“그러니 더는 너를 내 맹세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마.”

무대 위에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비 냄새가 조금 옅어졌다.

아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름을 잃은 병사였고.”

잠시 침묵.

“내가 구하지 못한 아이였단다.”

다시 침묵.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명령 아래 서 있지 않아도 된단다.”

망령의 얼굴이 처음으로 조금 부드러워졌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박수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니었다.

아레는 이름표를 망령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무대 한가운데 놓인 작은 상자 위에 그것을 올렸다.

그 상자는 원래 아이들이 소품을 담아두던 상자였다.

종이 왕관과 나무 빵과 장난감 창을 보관하던 상자.

아레는 그 위에 빈 이름표를 놓았다.

“여기에 두어도 되겠니?”

망령은 물었다.

“전장이 아닌 곳입니까?”

아레는 주변을 보았다.

야전 여관의 마당.

아이들이 웃던 자리.

공연이 끝난 뒤의 조용한 무대.

박수가 있었고, 침묵도 남은 곳.

“그래.”

아레가 말했다.

“전장이 아니란다.”

망령은 다시 물었다.

“명령이 내려오는 곳도 아니고요?”

“아니란다.”

“그럼 좋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무대 위의 비가 멎었다.

부러진 깃대가 천천히 사라졌다.

흙탕물도 잦아들었다.

망령의 젖은 군복은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그는 빈 이름표가 놓인 상자를 보았다.

“장군님.”

“그래, 아이야.”

“저를 모두 기억하지 못해도 됩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망령은 말했다.

“다만, 모른다는 것을 거짓 이름으로 덮지 말아주세요.”

아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리하마.”

망령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조금 쉬겠습니다.”

그 말에, 아레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울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울음이 될 수도 있었던 것.

“그래.”

아레가 말했다.

“이제 쉬어도 된단다.”

망령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무대 뒤편, 찢어진 막 너머에 놓인 작은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 의자는 푸리나가 공연 때 쓰던 소품이었다.

망령은 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병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쉬는 사람처럼 보였다.


---

첫 번째 망령이 의자에 앉은 뒤, 마당의 등불이 조금 밝아졌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마침내 기록판에 첫 줄을 적었다.

첫 번째 망령: 이름을 잃은 병사. 전장 표식에서 휴식의 자리로 이동.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레이.”

“네.”

“오늘 기록은 정말 조심해서 써줘.”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아레는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그녀는 빈 이름표가 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아레.”

“네.”

“괜찮아?”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예전 같으면 “괜찮습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요.”

그녀는 낮게 말했다.

“괜찮지는 않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어요.”

“그건 다행이네.”

“네.”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정도면, 다음 망령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망설였다.

“정말 계속할래?”

“네.”

“쉬어도 돼.”

아레는 무대 뒤편의 의자를 보았다.

그곳에 첫 번째 망령이 앉아 있었다.

“쉬는 것은 저 아이에게 먼저 주어야 할 것 같군요.”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앉아야 해.”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이 극이 끝나면요.”

푸리나는 그 말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반드시.

무대의 바람이 바뀌었다.

비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따뜻한 빵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현재의 망령이 올 차례였다.

그레이는 다음 장을 넘겼다.

푸리나는 막 옆에 서서 조명을 조금 올렸다.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 다시 섰다.

이번에는 비 오는 들판이 아니라, 피난민들의 식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웃음.
나눠 먹는 빵.
부상병의 낮은 농담.
아이들이 다시 고양이 왕을 흉내 내는 소리.

아레는 그 밝음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빛은 눈부셨다.

조금 아플 만큼.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2막.”

그레이가 적었다.

2막 — 두 번째 망령: 지금 웃고 있는 산 자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웃음은 누구를 배신하는가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2막 — 두 번째 망령: 지금 웃고 있는 산 자들

— 웃음은 누구를 배신하는가 —

두 번째 망령은 웃음소리로 왔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바람이 천 조각을 흔드는 소리인 줄 알았다.

히.

히히.

그러다 조금씩 커졌다.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웃는 소리.
빵을 나누다 서로 손이 부딪쳐 민망하게 웃는 소리.
부상병이 아픈 팔을 붙든 채, 그래도 살아 돌아온 동료의 농담에 피식 웃는 소리.

아레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웃음은 밝았다.

그런데 그 밝음이, 그녀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 위에 비치는 등불처럼 느껴졌다.

따뜻했다.

아팠다.

그리고 피할 수 없었다.

무대는 더 이상 비 오는 들판이 아니었다.

야전 여관의 마당은 어느새 긴 식탁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무판자를 대충 이어 만든 식탁.
군용 담요를 접어 만든 의자.
흠집 난 접시.
나눠 먹기 위해 얇게 썬 빵.
김이 조금 빠진 수프.
한쪽이 부러진 숟가락.

그리고 사람들.

피난민들.
아이들.
돌아온 병사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를 기다리는 가족들.
웃고 있지만 울음을 다 끝낸 것은 아닌 사람들.

푸리나는 막 옆에 서 있었다.

이번 장면은 그녀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그녀가 매일 만들고 싶어 하는 장면이었으니까.

밥을 먹는 사람.
웃는 아이.
농담을 던지는 병사.
오늘 밤만큼은 울음 말고 다른 소리로 숨 쉬는 사람들.

그 가운데 두 번째 망령이 앉아 있었다.

망령은 전장의 죽은 병사가 아니었다.

망령은 살아 있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이 왕관을 삐뚤게 쓰고, 나무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은 작은 아이.

아까 공연에서 고양이 왕을 외치던 아이와 비슷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뒤에는 수많은 아이들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
부모를 잃은 아이.
웃어도 되는지 몰라 눈치를 보는 아이.
웃다가도 문득 조용해지는 아이.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도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

아이의 목소리는 밝았다.

너무 밝아서, 아레는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어린 망자에게 하던 말투와는 달랐다.

이 아이는 죽은 자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은 자만은 아니었다.

현재의 망령.

산 자들의 웃음이 빌린 얼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네가 두 번째 망령이니?”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밤은 제가 왕이에요.”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고양이 왕이구나.”

아이는 푸리나 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고양이 왕은 몽골도 무찔렀어요.”

푸리나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랬지. 역사적인 대승이었어.”

그레이가 아주 낮게 말했다.

“실제 전황 기록과 혼동되지 않게 별도 분류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흘겨보았다.

“지금은 감동 장면이야.”

“그래서 더 정확해야 합니다.”

아이는 웃었다.

아레는 그 웃음소리를 들었다.

웃음.

작고, 가볍고, 생생한 소리.

그런데 아레의 등 뒤에서 다른 소리가 따라왔다.

비 오는 들판의 마지막 숨.
이름을 잃은 병사의 침묵.
묻히지 못한 이름표가 상자 위에 놓이는 소리.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빵을 들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빵 좋아했어요.”

옆 아이가 물었다.

“그럼 너는 왜 웃어?”

첫 아이는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웃으라고 했거든.”

그 말에 식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웃음은 다시 퍼졌다.

아레는 그 장면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현재의 망령, 고양이 왕이 물었다.

“장군님은 왜 웃지 않아요?”

아레는 대답했다.

“나는 웃음을 들을 때, 그 아래의 이름들도 함께 듣는단다.”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들이 웃는 걸 싫어해요?”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단순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었다.

“모르겠구나.”

아레가 말했다.

“나는 오래도록, 웃음이 너무 크면 이름들이 묻힌다고 생각했단다.”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꼭 안았다.

“묻혀요?”

“그래.”

“그럼 웃으면 안 돼요?”

식탁의 사람들 몇몇이 아레를 보았다.

푸리나도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그 시선들을 느꼈다.

이것은 재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답해야 하는 자리였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웃어도 된단다.”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정말요?”

“그래. 웃어도 된단다.”

그녀는 식탁의 사람들을 보았다.

“다만 나는, 그 웃음이 누군가를 잊기 위한 소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어.”

고양이 왕은 빵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잊기 위한 웃음도 있어요?”

“있단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무 아파서, 이름을 부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일부러 더 크게 웃는 이들도 있지.”

아이는 빵을 조금 뜯었다.

“그럼 그런 웃음은 나쁜 웃음이에요?”

아레는 입을 다물었다.

무대 위의 식탁에서 한 병사가 낮게 웃었다.

그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장군님.”

아레가 그를 보았다.

그 병사는 어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끼어들었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도 됩니다.”

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는 오늘 많이 웃었습니다. 사실 웃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같이 나간 둘이 돌아오지 못했으니까요.”

식탁이 조용해졌다.

병사는 자기 손을 보았다.

“그런데 안 웃으면…… 밥을 못 넘기겠더군요.”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사는 계속했다.

“웃어서 잊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웃다가 생각났습니다. 그 녀석이 있었으면 이런 농담을 더 심하게 했을 텐데, 하고요.”

아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잊으려고가 아니라, 그 녀석이 앉았을 자리가 너무 조용해서요.”

식탁 끝에서 누군가 훌쩍였다.

하지만 울음은 곧바로 웃음과 섞였다.

아레는 그 섞인 소리를 들었다.

웃음과 울음.

기억과 식사.

산 자의 죄책감과 살아 있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이 한 식탁 위에 있었다.

고양이 왕은 아레에게 물었다.

“장군님은 웃음이 이름을 덮는다고 생각했어요?”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단다.”

“그런데 지금은요?”

아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라면 말할 수 있었다.

웃음은 이름을 덮지 않아.
웃음은 살아남은 사람이 숨 쉬는 방식이야.

하지만 그 말은 푸리나가 하면 안 됐다.

아레가 보아야 했다.

아레가 자기 말로 찾아야 했다.

현재의 망령은 식탁 위로 올라갔다.

푸리나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식탁 위에 신발은—”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망령입니다.”

“망령이면 식탁 예절 면제야?”

“규정이 없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늘만 면제.”

고양이 왕은 나무 인형을 높이 들었다.

“왕이 명령합니다!”

아이들이 웃었다.

“오늘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 빵 한 조각을 더 먹습니다!”

식탁이 멈췄다.

웃음이 끊겼다.

아레의 시선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푸리나도 고양이 왕을 보았다.

그 말은 너무 가벼운 것처럼 들렸다.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 빵 한 조각.

장난처럼.

하지만 고양이 왕은 진지했다.

그 아이의 뒤에 겹친 수많은 산 자들의 그림자가, 모두 같이 아레를 보고 있었다.

아이는 말했다.

“부르지 않으면, 그 자리는 비어 있기만 해요.”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까의 부상병이었다.

“마르코.”

그는 빵을 하나 집었다.

“마르코는 빵 가장자리만 먹었습니다. 속은 늘 남한테 줬습니다. 본인은 그게 더 맛있다고 우겼고요.”

옆 사람이 작게 웃었다.

“거짓말이었지.”

“거짓말이었습니다.”

부상병은 빵을 먹었다.

먹으면서 울었다.

다음은 늙은 여인이었다.

“아나히트.”

그녀는 빵을 찢었다.

“내 딸은 수프에 후추를 너무 많이 넣었지. 손님이 오면 늘 맵지 않다고 했는데, 모두 땀을 흘렸어.”

식탁에서 작게 웃음이 났다.

여인은 울면서 웃었다.

다음은 아이였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토로스예요.”

그는 빵 조각을 들었다.

“아버지는 노래를 못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제일 잘하는 줄 알았어요.”

아이들이 웃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얼마나 못했는데?”

그 아이는 잠깐 울먹이다가, 아주 이상한 가락으로 노래를 흉내 냈다.

식탁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 토로스라는 이름이 놓였다.

아레는 그 광경을 보았다.

이름이 웃음에 덮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이름의 주변에 자리를 만들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들은 전장으로 불려 나오지 않았다.

명령받지 않았다.

복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빵 냄새와 나쁜 노래와 매운 수프와 함께 식탁 위에 앉았다.

아레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렸다.

고양이 왕이 그녀에게 빵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장군님도 하나 불러요.”

아레는 빵을 보았다.

그리고 무대 뒤편,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 아이는 조용히 쉬고 있었다.

아레는 빵을 받지 않았다.

아직은.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모른단다.”

고양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른다고 불러요.”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이름을 잃은 아이야.”

무대 뒤편의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네가 좋아하던 빵을 모른단다. 네가 노래를 잘했는지도, 못했는지도 알지 못해. 네가 누구를 사랑했는지도, 누가 너를 기다렸는지도 알지 못하는구나.”

그녀는 식탁 위 빵을 보았다.

“그러니 오늘은, 너를 내 죄로 부르지 않으마.”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아레는 조심스럽게 빵 한 조각을 집었다.

“나는 너를, 이름을 잃은 병사로 기억하마.”

그녀는 빵을 작게 찢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두겠단다.”

그 말이 끝나자, 식탁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무겁지 않았다.

고양이 왕이 말했다.

“그럼 빵 먹어도 돼요.”

아레는 빵을 보았다.

평범한 빵이었다.

조금 딱딱하고, 조금 식은 빵.

아레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아레가 빵을 먹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큰 일이었다.

기억하는 자가, 죽은 자의 이름 옆에서 산 자의 빵을 먹는 일.

망자를 배신하지 않고.

산 자를 거절하지 않고.

식탁의 사람들이 다시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이번 웃음은 아까보다 낮았다.

하지만 더 깊었다.

아레는 그 웃음을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것이 이름을 덮는 소리만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현재의 망령은 식탁 끝에 앉았다.

고양이 왕관이 조금 내려앉아 한쪽 눈을 가렸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다가 다가가 왕관을 바로잡아 주었다.

“왕관은 시야를 가리면 안 돼.”

고양이 왕이 말했다.

“왕은 앞을 봐야 하니까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응. 그리고 가끔 옆도 봐야 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도요?”

“그건 아레가 잘 봐.”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아레는 잠시 후 아주 작게 대답했다.

“앞도 배워야겠군요.”

그 말에 푸리나는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부상병이 마르코의 흉내를 내며 빵 가장자리를 뜯었다.

늙은 여인은 아나히트의 매운 수프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후추를 더 넣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토로스의 이상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노래는 정말 못했다.

정말로.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레이도 입가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레는 그 소리를 들었다.

웃음.

이름.

울음.

빵.

그리고 여전히 남은 빈자리.

고양이 왕이 물었다.

“장군님.”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웃음은 배신이에요?”

아레는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닐 수도 있단다.”

아이는 눈을 빛냈다.

“그럼 뭐예요?”

아레는 식탁 위에 놓인 빵 부스러기를 보았다.

“때로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살아남은 자가 아직 숨 쉬고 있다는 보고일지도 모르겠구나.”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보고.

아레다운 말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축제로만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죄로만 보지도 않았다.

산 자의 보고.

죽은 자들이 지키려 했던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작은 보고.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고해야 해요.”

아레가 물었다.

“누구에게?”

아이는 나무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이름을 잃은 아이에게요.”

아레는 무대 뒤의 의자를 보았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비 오는 들판에서보다 조금 편안해 보였다.

아레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이야.”

마당이 조용해졌다.

“이곳에는 오늘 웃음이 있었단다.”

첫 번째 망령이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계속했다.

“너를 잊기 위한 웃음은 아니었어. 마르코의 빵 가장자리와, 아나히트의 매운 수프와, 토로스의 못 부르는 노래가 함께 있었단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구나. 웃음이 모든 이름을 지킬 수 있는지는.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름들은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단다.”

첫 번째 망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것은 허락처럼 보였다.

아레는 숨을 내쉬었다.

현재의 망령은 식탁에서 내려왔다.

“장군님.”

“그래.”

“이제 저를 기억할 건가요?”

아레는 고양이 왕을 보았다.

“너는 산 자들의 웃음이구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배고픈 아이들이에요.”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중요하지.”

아이는 또 말했다.

“그리고 웃다가 우는 사람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울다가 먹는 사람들.”

“그렇구나.”

“그리고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빵을 먹는 사람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 너는 그 모든 것이구나.”

현재의 망령은 웃었다.

“그럼 저를 어디에 둘 거예요?”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전장도 아니고, 장례식도 아니고, 왕좌도 아니고, 빈 무덤도 아닌 곳.

식탁.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름이 함께 놓일 수 있는 곳.

“식탁에 두어야겠구나.”

아레가 말했다.

“너는 전장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지우는 웃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산 자의 식탁 곁에 놓는 웃음이었단다.”

고양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계속 웃어도 돼요?”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잠시 멈추고.

“다만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두기 위해서 웃으렴.”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나무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건 어려워요.”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풀렸다.

“나도 어렵단다.”

“그럼 같이 어려워해요.”

그 말에, 식탁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아레도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정도면, 두 번째 망령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

마당의 등불이 다시 흔들렸다.

식탁은 천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빵 냄새가 아주 조금 남았다.

아이들의 웃음도, 부상병의 낮은 농담도, 못 부르는 노래도 멀어졌지만, 어딘가에 남았다.

고양이 왕은 마지막으로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

“그래.”

“나중에 또 웃음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요.”

“응.”

“식탁을 먼저 봐요.”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마.”

“빈자리가 있으면요?”

“이름을 물어보마.”

“이름을 모르면요?”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모른다고 두고, 거짓 이름으로 덮지 않으마.”

고양이 왕은 활짝 웃었다.

“좋아요.”

그리고 그는 식탁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들과 피난민과 부상병의 그림자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현재 속으로 돌아갔다.

아레는 빈 식탁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

웃음이 있던 자리.

죽은 자의 이름이 빵과 함께 놓였던 자리.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레.”

아레는 대답했다.

“네.”

푸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번 건 어땠어?”

아레는 한참 뒤에 말했다.

“눈부셨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조금 아팠어요.”

“응.”

“하지만…….”

아레는 식탁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밝은 것이 모두 지우는 것은 아니었군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박수도, 아마 그렇겠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칭찬이었다.

아레식의 조심스럽고, 무겁고, 아주 깊은 칭찬.

푸리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그 말, 내가 좀 오래 기억할 것 같은데.”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가 기억한다면, 조금 과장되어 남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를 너무 잘 아네.”

“조금은요.”

그레이는 기록판에 적었다.

두 번째 망령: 산 자들의 웃음. 웃음은 이름을 덮는 소리만이 아니라, 이름을 식탁 곁에 놓는 방식일 수 있음.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이번 기록도 좋아.”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주의해서 적고 있습니다.”

“응. 느껴져.”

아레는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보다 조금 덜 외로워 보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첫 번째 망령이 쉬는 의자가 있었고, 앞에는 방금 사라진 식탁의 온기가 있었다.

죽은 자의 자리.

산 자의 자리.

그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때, 마당의 등불이 갑자기 낮아졌다.

빵 냄새가 사라졌다.

웃음도 사라졌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푸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천천히 닫았다.

아레도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망령이 올 차례였다.

이번에는 발소리도 없었다.

웃음소리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오지 않았다.

무대 너머에서, 너무 완전한 침묵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레는 그 침묵을 알아보았다.

자신의 것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3막.”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조금 망설인 뒤, 적었다.

3막 — 세 번째 망령: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3막 — 세 번째 망령: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

세 번째 망령은 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첫 번째 망령은 발소리로 왔다.
두 번째 망령은 웃음소리로 왔다.

그러니 세 번째 망령도 무언가의 형태를 하고 올 것이라고, 푸리나는 생각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노인.
등불을 든 사자.
혹은 원전처럼, 손가락 하나만 뻗어 미래를 가리키는 침묵의 그림자.

하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대신 무대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먼저 빵 냄새가 사라졌다.
그다음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다음 식탁의 온기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멎었다.

마당은 그대로였는데, 이상하게 너무 넓어졌다.

찢어진 막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 고양이 인형은 소리 없이 누워 있었다.
빈 상자 위의 이름표도 빛을 잃었다.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도, 두 번째 망령이 앉았던 식탁도, 모두 회색빛으로 멀어졌다.

푸리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

푸리나는 멈췄다.

“응.”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 서 있었다.

홀로.

그녀를 중심으로 마당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물었다.

“아레?”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들었지만 대답할 수 없는 듯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기록이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왜?”

그레이는 무대 안쪽을 보았다.

“사건이 없습니다.”

“사건이 없어?”

“네.”

그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래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무대가 변했다.


---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돌로 된 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으로 쌓은 성이었다.

벽돌 하나하나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돌아오지 못한 전령.
북쪽 능선에서 묻히지 못한 자.
강가에서 마지막 불침번을 섰던 아이.
성문 앞에서 불탄 마차를 밀던 사람.
아무도 가족을 찾지 못한 피난민.

수많은 이름.

그 이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잊히지 않았다.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문제는,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름들이 벽이 되었다.

이름들이 창문을 막았다.

이름들이 길을 막았다.

이름들이 식탁을 치웠다.

이름들이 의자를 채웠다.

그리고 그 성의 가장 안쪽에, 아레가 앉아 있었다.

아니.

아레의 미래가 앉아 있었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미래의 아레는 왕좌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나빴다.

그녀는 기록대 앞에 앉아 있었다.

끝없는 장부.
끝없는 이름표.
끝없는 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수많은 실이 감겨 있었고, 실의 끝마다 작은 이름표가 매달려 있었다.

모든 이름이 기억되고 있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한 명도 빠뜨리지 않게.
한 사람의 죽음도 웃음 속에 묻히지 않게.

그것은 아레가 원하던 일이었다.

아레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리나도 없었다.
그레이도 없었다.
아이들도 없었다.
식탁도 없었다.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도 없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그 미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이름을 적고 있었다.

한 줄.

또 한 줄.

또 한 줄.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이것이…… 나인가요?”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손은 계속 움직였다.

아레는 조금 더 다가갔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푸리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그건 너야.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서 푸리나의 말은 너무 쉬웠다.

아레가 직접 들어야 했다.

아레가 다시 물었다.

“대답하세요.”

미래의 아레는 그제야 손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아레와 같았다.

그러나 눈이 달랐다.

그 눈에는 분노도, 슬픔도, 따뜻함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오래 침묵을 들은 사람의 눈.

모든 이름을 기억하느라, 이름이 불리던 목소리를 잊어버린 눈.

미래의 아레는 말했다.

“나는 기억하는 자입니다.”

목소리는 아레의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말라 있었다.

아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기억하는 자입니다.”

“아니.”

미래의 아레는 말했다.

“너는 아직 흔들리는 자입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가리켰다.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이름을 적었습니다.
모든 죽음을 세었습니다.
모든 빈자리를 남겨두었습니다.
누구도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박수에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말이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아레는 성벽을 보았다.

수많은 이름.

정말로 누구도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들 사이에 숨 쉴 공간이 없었다.

아레는 물었다.

“산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시끄러웠습니다.”

푸리나의 손이 굳었다.

아레의 눈빛도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시끄러웠다고요.”

“그들은 웃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덮었다.

“처음에는 허락했습니다. 웃음도 기억의 곁에 놓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웃음은 커졌고, 이름은 작아졌습니다. 그러니 나는 식탁을 치웠습니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그래서 의자도 치웠군요.”

“빈자리를 정확히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쉬는 자리는요?”

“쉬는 자리는 흐려집니다. 이름은 정확해야 합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바로 대답했다.

“이름을 잃은 병사. 좌측 벽 17열 4번째.”

“그 아이는 쉬고 있습니까?”

“기록되어 있습니다.”

“쉬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천천히 성벽 쪽으로 걸어갔다.

좌측 벽 17열 4번째.

거기에는 작은 빈 이름표가 박혀 있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정확했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름표는 이제 의자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
전장이 아닌 곳에 쉬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벽이 되어 있었다.

아레는 손을 뻗었다.

이름표를 만지려 했다.

그러나 실이 손목에 감겼다.

미래의 아레가 말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아레는 돌아보았다.

미래의 아레는 일어나 있었다.

“이름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움직이면 흐려집니다. 흐려지면 잊힙니다.”

아레는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이름을 지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두고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대답했다.

“차이가 있습니까?”

그 말에,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이 손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아주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그 차이를 지키려다 잃습니다.”

“무엇을요?”

“이름을.”

미래의 아레는 벽을 가리켰다.

“나는 잃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붙잡았습니다.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산 자들의 편의를 위해 쉬러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산 자들의 편의.

쉬러 보내지지 않았다.

그 말은 끔찍했다.

아레가 망자를 쉬게 하는 일조차, 어느 순간 산 자의 편의라고 의심하기 시작한 미래.

모든 안식을 방임으로 여기고.
모든 웃음을 배신으로 여기고.
모든 식탁을 망각의 시작으로 여긴 끝.

이름의 성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

그때 성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톡.

톡.

톡.

첫 번째 망령의 발소리였다.

아레가 고개를 돌렸다.

성문 밖에, 이름을 잃은 병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들어오지 못했다.

성문에는 수많은 이름표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문이 문이 아니라 벽이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망령은 문 앞에서 서성였다.

아레가 앞으로 나가려 했다.

미래의 아레가 말했다.

“가지 마십시오.”

아레는 돌아보지 않았다.

“왜입니까?”

“그 아이는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어오면 순서가 흐트러집니다.”

아레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순서.”

“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펼쳤다.

“전사일. 전장 위치. 확인 가능 여부. 이름 확인 여부. 장례 여부. 기억 방식. 모두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쉬는지는요?”

“기록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묻는 것입니다.”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 밖에서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

히히.

고양이 왕의 웃음이었다.

두 번째 망령도 성문 밖에 있었다.

그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은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성벽의 이름들이 웃음을 흡수했다.

고양이 왕이 문을 두드렸다.

“장군님!”

미래의 아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럽습니다.”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저 아이는 현재의 망령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위험?”

“현재는 늘 이름을 흐립니다. 산 자들은 너무 쉽게 먹고, 웃고, 잠들고, 잊습니다.”

성 밖에서 고양이 왕이 말했다.

“장군님, 식탁이 없어요!”

아레의 손이 떨렸다.

식탁이 없다.

성 안에는 정말 식탁이 없었다.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빵이 없었다.

의자도 없었다.

쉴 자리도 없었다.

미래의 아레는 차갑게 말했다.

“식탁은 이름을 더럽힙니다.”

아레는 천천히 돌아섰다.

“아니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분명한 반박이었다.

“식탁은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말했다.

“마르코는 빵 가장자리와 함께 돌아왔고, 아나히트는 매운 수프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토로스는 못 부르는 노래와 함께 돌아왔지요.”

“하찮은 기억입니다.”

“하찮지 않습니다.”

아레의 목소리가 조금 깊어졌다.

“그것이 그들이 사람이었다는 흔적입니다.”

미래의 아레는 침묵했다.

아레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전사일과 위치만으로는 사람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기억합니까?”

“때로는 이름으로.”

아레는 벽을 보았다.

“때로는 모른다고 적는 것으로.”

그리고 성문 밖의 웃음을 들었다.

“때로는 식탁으로.”

미래의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하면 빠집니다.”

“무엇이?”

“빠지는 이름이 생깁니다. 놓치는 얼굴이 생깁니다. 흐려지는 죽음이 생깁니다.”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모두 붙잡았군요.”

“그렇습니다.”

“그 결과, 아무도 쉬지 못하고.”

미래의 아레가 멈췄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첫 번째 망령이 조용히 서 있었다.

고양이 왕이 문을 두드렸다.

푸리나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녀도 들어오지 못했다.

성벽 바깥에 있었다.

그레이도, 식탁의 사람들도, 부상병도, 아이들도 모두 바깥에 있었다.

아레는 그제야 보았다.

미래의 자신이 만든 성은 망자만 가둔 것이 아니었다.

산 자도 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레 자신도 성 안에 갇혔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에게 물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부에 적은 것이 아니라.”

아레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목소리로.”

미래의 아레의 손끝이 떨렸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너는 기억하는 자가 되었지만, 부르는 자는 아니게 되었구나.”

그 말에 성 전체가 흔들렸다.

벽의 이름표들이 아주 작게 떨렸다.

미래의 아레는 처음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놓으라는 겁니까?
잊으라는 겁니까?
웃고, 먹고, 자고, 다음 전장으로 가라는 겁니까?
그러는 동안 저 이름들은 누가 지킵니까?”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그 절규를 이해했다.

너무 잘 이해했다.

이것은 낯선 괴물이 아니었다.

아레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아레 자신이 조금만 더 두려워하고, 조금만 더 붙잡고, 조금만 더 혼자 짊어지면 닿을 수 있는 방.

아레는 낮게 말했다.

“혼자 지키지 말아야 했겠지요.”

미래의 아레는 멈췄다.

아레는 이번에는 해요체로 말했다.

망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혼자 지키려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게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을 나누어 들면 가벼워질까 두려웠고, 가벼워지면 잊을까 두려웠어요.”

미래의 아레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름은 가벼워지기 위해 나누는 것이 아니었군요.”

성문 밖에서 푸리나가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말했다.

“쉴 자리를 만들기 위해 나누는 것이었어요.”

미래의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레는 성벽에 박힌 이름표 하나를 보았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미래의 아레가 외쳤다.

“안 됩니다!”

성 전체가 흔들렸다.

실들이 아레의 손목을 감았다.

이름표들이 떨렸다.

“떼어내면 잊힙니다!”

아레는 실을 보았다.

자신이 만든 실.

자신을 묶은 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니요.”

그녀는 이름표를 가슴에 안지 않았다.

장부에 다시 꽂지도 않았다.

대신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 아이는 벽이 아니라 의자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성이 무너집니다!”

“그래야겠지요.”

미래의 아레는 멈췄다.

아레는 성문 앞에 섰다.

문은 이름표로 막혀 있었다.

그녀는 하나씩 떼어냈다.

처음은 이름을 잃은 병사.

그다음은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돌아오지 못한 전령.

강가의 불침번.

북쪽 능선의 아이.

하나씩.

하나씩.

성벽에서 이름을 떼어낼 때마다,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표들은 손에 잡히는 크기로 돌아왔다.

벽돌이 아니라, 놓을 수 있는 작은 표식으로.

미래의 아레는 그 모습을 보며 떨었다.

“그만.”

아레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하십시오.”

아레는 이름표를 품에 쌓지 않았다.

그녀는 성문 앞 바닥에 그것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마치 식탁 위에 접시를 놓듯이.

마치 여관의 방 열쇠를 놓듯이.

마치 전장이 아닌 곳에 이름을 내려놓듯이.

성문이 조금씩 열렸다.

밖에서 첫 번째 망령이 보였다.

고양이 왕도 보였다.

푸리나도, 그레이도, 식탁의 사람들이 보였다.

빛이 들어왔다.

미래의 아레는 그 빛을 보며 눈을 가렸다.

“밝습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아픕니다.”

“나도 그랬어요.”

미래의 아레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들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아레는 이름표들을 보았다.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벽이 아니게 되었다.

“사라지지 않아요.”

그녀는 미래의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만, 더는 성벽이 아니게 됩니다.”

미래의 아레는 그 손을 보았다.

잡지 않았다.

아직은.

대신 물었다.

“그럼 나는 무엇이 됩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혼자 성이 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 말이 떨어지자, 미래의 아레의 얼굴이 무너졌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마 너무 오래 울지 않아서, 우는 법을 잊은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침묵이 갈라졌다.

아레는 다시 말했다.

“당신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혼자였어요.”

그 말에 미래의 아레는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아레가 그 손을 잡는 순간, 이름의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 풀렸다.

벽이 식탁이 되고, 식탁은 긴 여관의 방으로 이어지고, 방마다 작은 이름표가 걸렸다.

전장도 아니고, 감옥도 아니고, 침묵의 성도 아닌 곳.

완전한 안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다림과 휴식이 가능한 자리.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을 잊었다.

“아레…….”

아레는 성문 안쪽에서, 미래의 자신과 마주 서 있었다.

미래의 아레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레 안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모두 기억해야 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혼자서는 안 됩니다.”

아레는 눈을 내렸다.

“그래요.”

미래의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은…… 일찍 들었어야 했는데.”

아레는 대답했다.

“이제라도 들었으니, 늦지 않았어요.”

미래의 아레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성이 아니라, 열린 문과 긴 식탁과 여러 개의 의자였다.

그리고 성벽이었던 이름표들은, 이제 식탁 옆 작은 선반에 놓여 있었다.


---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이름표 몇 개가 들려 있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그 밖의 수많은 이름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아레가 먼저 말했다.

“그레이.”

“네.”

“이름을 기록하는 장부가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장부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레이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아레는 식탁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이름 옆에,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좋아하던 것들을 적어주세요. 빵 가장자리, 매운 수프, 못 부르는 노래 같은 것들.”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어주세요.”

“네.”

“그리고 이름이 없는 자도,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내 죄의 표식만 되지 않도록.”

그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

아레는 푸리나를 돌아보았다.

“네.”

“괜찮아?”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괜찮지는 않아요.”

“응.”

“하지만 조금…… 들어올 수 있게 된 것 같군요.”

푸리나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그 성에 문이 생겼다.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럼 다행이야.”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를 보았다.

그 아이는 아직 있었다.

고양이 왕도 식탁가에 있었다.

둘 다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아레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이야.”

첫 번째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왕도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나는 모두를 혼자 성벽으로 쌓지 않으련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분명했다.

“네 이름은 전장에도, 침묵의 벽에도 두지 않으마.”

그녀는 식탁 옆 선반을 보았다.

“쉴 수 있는 자리에 두마.”

고양이 왕이 물었다.

“식탁에도요?”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풀렸다.

“그래. 식탁에도.”

“빵도요?”

“빵도.”

“못 부르는 노래도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것도.”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웃었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눈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 위에 작은 박수가 울렸다.

짝.

그것은 푸리나가 친 박수가 아니었다.

첫 번째 망령의 박수였다.

아주 작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박수.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푸리나는 그제야 따라 박수를 쳤다.

짝.

그레이도 조용히 박수를 쳤다.

짝.

식탁의 사람들도.

짝.

고양이 왕도 나무 인형 손으로 어설프게 박수를 쳤다.

탁, 탁.

아레는 그 박수를 들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 박수가 이름을 덮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 생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

마당의 등불이 다시 돌아왔다.

침묵의 성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야전 여관의 마당이었다.

찢어진 막.
나무 고양이 인형.
소품 상자 위의 빈 이름표.
새로 놓인 긴 식탁.
그리고 그 식탁 옆에 작은 선반 하나.

푸리나는 선반을 보았다.

“이건 새 소품?”

아레는 대답했다.

“아마도요.”

“이름 선반?”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기억 선반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좋네.”

그레이는 기록했다.

기억 선반: 이름을 벽으로 쌓지 않고, 식탁 곁에 놓기 위한 자리.

아레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록입니다.”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감사합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이제 앉을래?”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고양이 왕이 앉은 식탁을 보았다.

기억 선반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빈 의자 하나를 보았다.

그 의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아레는 그 앞에 섰다.

잠시 망설였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레는 천천히 앉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앉는 법을 잊었던 사람처럼.

의자는 삐걱였다.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아레는 숨을 내쉬었다.

“……앉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군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그런 사람들 많더라.”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도요?”

푸리나는 잠시 딴청을 피했다.

“나는 극장주라서 서 있는 시간이 많을 뿐이야.”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도 종종 앉으셔야 합니다.”

“그레이, 지금은 내 극 아니잖아.”

아레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번에는 푸리나도 보았다.

분명한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침묵의 성 안에서는 결코 나오지 못했을 표정이었다.

아레는 기억 선반을 보았다.

“모두 기억할 수는 없겠지요.”

푸리나는 말했다.

“응.”

“모두 제대로 애도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

아레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혼자 벽을 쌓지는 않겠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해.”

아레는 낮게 말했다.

“충분하다는 말은 늘 어렵습니다.”

“알아.”

“하지만 오늘은, 조금 받아들여보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막을 보았다.

이제 세 망령은 모두 지나갔다.

과거의 이름 없는 아이.

현재의 웃는 식탁.

미래의 침묵의 성.

아레는 모두를 보고 돌아왔다.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런 것은 한 밤의 극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이 생겼다.

침묵에 문이 생겼고, 이름에는 식탁이 생겼고, 아레에게는 의자가 생겼다.

그 정도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조명이 낮아졌다.

마당은 다시 평범한 야전 여관의 마당이 되었다.

하지만 소품 상자 위에는 빈 이름표가 남아 있었다.

식탁 옆에는 기억 선반이 남아 있었다.

아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막이 내려왔다.

4막 — 기억 선반과 빈 의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이름은 벽이 아니라, 쉴 자리 곁에 놓일 수 있다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4막 — 이름의 이정표와 빈 의자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아레가 의자에 앉자, 모두가 잠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푸리나는 막을 내렸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다.

첫 번째 망령은 소품 상자 옆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양이 왕은 식탁 끝에서 나무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아레가 앉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극 전체를 멈추게 했다.

죠니였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앉았네.”



그리고 정말로 죠니는 그렇게 말했다.

“앉았네.”

푸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죠니, 그렇게 건조하게 말할 장면이 아니지 않아?”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앉았잖아.”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사실입니다.”

푸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너희 둘은 가끔 너무 현실적인 박수부대야.”

아레는 의자에 앉은 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지쳐 보였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고, 손끝에는 더 이상 실이 과하게 감겨 있지 않았다. 물론 보이지 않는 실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실들이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었다.

다만 이제 그 실들은 성벽을 쌓기 위해 당겨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레.”

“네.”

“지금부터는 결말을 정리하는 막이야.”

아레는 식탁 옆에 생긴 작은 선반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푸리나가 그걸 ‘기억 선반’처럼 보았다.

하지만 아레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다시 밀어냈다.

선반.

여관.

쉬는 자리.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푸리나의 극장에서는, 그리고 여관의 성좌를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아레가 믿는 별은 그곳에만 머무는 별이 아니었다.

개척의 성좌.

한계를 마주하고, 넘어서고,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경계에 발을 딛게 하는 별.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아레에게 단순히 눕히고 재우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전장에 다시 세우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경계를 지우지 않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무너진 곳.
누군가가 돌아오지 못한 곳.
누군가의 한계가 피와 흙 속에서 멈춘 곳.

그곳에 이름을 세우는 일.

다음 사람이 그 앞에서 멈춰 울고, 이를 악물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아레는 낮게 말했다.

“선반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군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응?”

아레는 식탁 옆의 작은 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이름표가 몇 개밖에 없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그리고 빈 칸들.

아주 많은 빈 칸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이름을 눕혀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는 계속했다.

“그렇다고 다시 전장에 세우자는 뜻은 아니에요. 그건 내가 보았던 미래와 다르지 않겠지요.”

아레는 자기 손을 보았다.

아까 그 손은 성벽에서 이름표를 떼어냈다.

벽으로 만든 이름들.

누구도 잊히지 않았지만,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침묵의 성.

“그 아이들을 성벽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아레가 말했다.

“하지만 길목에서 지워서도 안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에 둬?”

아레는 고개를 들어, 무대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어둠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길들이 있었다.

비가 멎은 들판 너머.
식탁의 온기 너머.
침묵의 성이 무너진 자리 너머.

아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경계에.”

“경계?”

“네.”

아레는 기억의 자리로 보였던 작은 선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누군가 쓰러진 경계. 누군가 돌아오지 못한 한계.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멈추었기에, 산 자들이 다시 마주하게 되는 지점.”

그녀는 첫 번째 망령을 보았다.

“그곳에 이름을 세워야 합니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그에게 말했다.

“아이야. 너를 다시 전장에 세우지는 않으마.”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계속했다.

“하지만 네가 쓰러진 경계를 지우지도 않으마. 그곳에 네 이름을 세워두마.”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개척자의 단단함이 있었다.

“산 자들이 그 앞에서 멈춰 울고, 네가 멈춘 곳을 보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푸리나는 그제야 아레가 말하는 것을 이해했다.

여관이 아니었다.

묘비도 아니었다.

장부도 아니었다.

이정표.

아레는 죽은 자를 쉬게 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죽음이 산 자의 길에서 아무 의미 없이 묻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죽은 자를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멈춘 지점을 별자리처럼 남기려는 사람이었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펜을 들었다.

아레가 말했다.

“적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이름의 이정표: 죽은 자를 명령 아래 다시 세우지 않고, 산 자가 같은 절망 앞에서 멈추지 않도록 경계와 길목에 세워두는 이름.

아레는 그 문장을 읽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

이정표를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사무적이었다.

그래서 그레이가 활약했다.

그레이는 긴 탁자 하나를 가져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종이를 펼쳤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장부 정리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정표를 세우려면 위치와 문구가 필요합니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그레이가 하면 순례길도 행정이 되겠네.”

그레이는 차분히 대답했다.

“길에는 표지가 필요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오늘 죠니가 의외로 그레이 편을 많이 드네.”

“맞는 말을 하면 편을 들어야지.”

아레는 그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이상하게, 그런 건조한 대화가 도움이 되었다.

너무 숭고한 말만 있으면 숨이 막혔을 것이다.

죽은 자의 이름을 이정표로 세우는 자리에도, 누군가는 펜이 마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누군가는 의자가 삐걱이는지 보고, 누군가는 빵을 더 가져와야 했다.

그레이는 종이 상단에 항목을 적었다.

이름 / 확인 여부 / 기억하는 사람 / 남은 흔적 / 멈춘 경계 / 다음 길

푸리나는 마지막 항목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다음 길?”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표라면 필요합니다.”

아레가 그 문장을 보았다.

다음 길.

전장.
장부.
식탁.
표지석.
별.
아직 아무도 넘지 못한 경계.
그리고 그 너머.

아레는 낮게 말했다.

“좋은 항목입니다.”

그레이는 다시 조금 놀란 듯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이름은 마르코였다.

부상병이 앞으로 나왔다.

아까 빵 가장자리를 이야기했던 그 병사였다.

그는 아직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레가 그를 보았다.

“말해도 됩니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마르코. 성은…… 사실 잘 모릅니다. 저희끼리는 그냥 마르코라고 불렀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마르코. 성 미상.

“남은 흔적?”

병사는 조금 웃었다.

“빵 가장자리. 아니, 좋아한 건 아닐 겁니다. 속을 남에게 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겠죠.”

그레이가 적으려다 멈췄다.

푸리나가 물었다.

“왜?”

그레이는 말했다.

“정확한 표현이 필요합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적어주세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빵 가장자리를 좋아한다고 우겼음. 진위는 불명. 그러나 그 말로 타인에게 빵 속을 나누었음.”

병사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레이는 그대로 적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네.”

푸리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좋아.”

아레는 병사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멈춘 경계는 어디였습니까?”

병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후퇴로를 열던 곳입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다들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뒤따라오겠다고 했고요. 늘 그랬습니다. 빵 속도 남에게 주고, 탈출로도 남에게 주고.”

아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다음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조금 뒤, 병사가 말했다.

“다음에는…… 누군가 뒤에 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길이었으면 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후퇴로를 열고 남은 자리.
다음 길: 누군가가 늘 뒤에 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마르코의 이름표는 식탁 끝에 놓이지 않았다.

대신 무대 한쪽, 출구로 이어지는 작은 길목에 세워졌다.

그곳은 누군가가 “먼저 가”라고 말할 법한 자리였다.

이제 그 자리에는 마르코의 이름이 있었다.

전장으로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사람이 그 앞에서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

다음은 아나히트였다.

늙은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딸의 이름을 말하다가 한 번 숨이 막혔다.

아레는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여인은 말했다.

“아나히트. 후추를 너무 많이 넣던 아이.”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아나히트.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남은 흔적: 후추?”

여인이 눈물 사이로 웃었다.

“좋아했다기보단, 양 조절을 못했지요.”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것도 흔적이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아이의 수프는 늘 너무 매웠습니다. 그런데 다들 먹었어요. 먹다 보면 이상하게 몸이 따뜻해져서.”

아레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적지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수프에 후추를 많이 넣었음. 먹는 사람들은 맵다고 말하면서도 비웠음. 추운 날에는 그 수프가 도움이 되었음.”

여인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는?”

여인은 오래 생각했다.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이요.”

“솥?”

“도망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프를 끓였습니다. 모두 빨리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 아이가 말했어요. ‘뜨거운 걸 먹지 않으면 길에서 쓰러진다’고.”

여인은 눈물을 닦았다.

“그 수프가 너무 매워서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덕에 걸었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솥을 정리하다가 늦었습니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다음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여인은 대답했다.

“피난길에서도 따뜻한 것을 사치라고 부르지 않는 길.”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
다음 길: 따뜻한 식사가 생존의 일부임을 잊지 말 것.

아나히트의 이름표는 식탁 가운데와 가까운 곳, 그러나 길목에서도 보이는 자리에 세워졌다.

그 이름표가 놓이자, 식탁 위에 아주 희미하게 후추 냄새가 돌았다.

푸리나는 코를 찡그렸다.

“진짜 맵네.”

죠니가 말했다.

“죽은 뒤에도 세네.”

아레는 그 냄새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나히트는 전장 통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에서 멈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제, 다음 사람을 위한 이정표가 세워졌다.


---

토로스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 아이는 아직 자기 아버지 이름을 말할 때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레는 무릎을 조금 굽혔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말할 수 있겠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로스.”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토로스.

아이는 말했다.

“노래를 못했어요.”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아이는 바로 그 이상한 노래를 흉내 내려다가, 갑자기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노래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해요.”

“왜?”

“그래야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아요.”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웃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노래하려는 것은, 토로스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이상한 가락으로 노래했다.

음정은 엉망이었다.

박자도 엉망이었다.

가사는 중간에 끊겼다.

하지만 노래는 있었다.

끝나자, 아무도 바로 웃지 못했다.

그러다 아이가 먼저 웃었다.

“진짜 못하죠?”

푸리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응. 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음악적 완성도는 낮습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쿡 찔렀다.

“그레이.”

아이가 오히려 웃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불렀어요!”

그제야 식탁에 웃음이 번졌다.

아레는 그 웃음 속에서 토로스라는 이름이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레이는 적었다.

남은 흔적: 노래를 매우 못했으나, 본인은 즐겁게 불렀음. 자녀가 그 노래를 기억함.

“멈춘 경계는?”

아이는 망설였다.

“창가요.”

아레가 물었다.

“왜?”

“아버지는 늘 창밖을 보면서 노래했어요. 엄마가 시끄럽다고 했거든요. 마지막에도 창가에 있었어요. 밖에 적이 오는지 보려고.”

아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노래하다가 멈췄어요.”

아레는 눈을 내렸다.

“다음 길은?”

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노래가 멈추면, 누군가 창밖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아이의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술적인 말이기도 했다.

망루.
감시.
교대.
혼자 창가에 서지 않기.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길이구나.”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창가의 감시 자리.
다음 길: 노래가 멈춘 창가를 혼자 두지 말 것.

토로스의 이름표는 창가 쪽에 세워졌다.

그 이름표가 놓이자, 창밖으로 아주 작은 바람이 들어왔다.

노래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래가 멈춘 뒤, 누군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게 하는 바람이었다.


---

그렇게 이름들이 하나씩 놓였다.

모든 이름을 다 세울 수는 없었다.

그날 밤에는 몇 명뿐이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리고 몇몇 더.

돌아오지 못한 전령은 “말을 무서워했지만 전령이 되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끊어진 길이었다.

다음 길은:

전령이 혼자 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강가의 불침번은 “잠을 잘 못 잤고, 그래서 남의 잠을 잘 지켜주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밤의 강가였다.

다음 길은:

누군가의 잠을 지키는 자에게도 잠을 돌려줄 것.

북쪽 능선의 아이는 “정말 어린지는 모름. 그러나 모두가 아이처럼 걱정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무너진 능선이었다.

다음 길은:

어린 얼굴을 용기라는 말로 너무 빨리 전장에 세우지 말 것.

이름이 없는 자들은 이름 없는 대로 적혔다.

이름 미상. 북쪽 능선. 마지막 확인자 없음. 추정 금지.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다음 길: 알 수 없는 죽음을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말 것.

아레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추정 금지.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말 것.

예전의 그녀라면,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의미를 채웠을 것이다.

누군가의 죄.
누군가의 맹세.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령.

하지만 이제는 빈자리를 빈자리로 둘 수 있어야 했다.

그 빈자리 앞에서 멈추고, 다음 사람이 더 조심스럽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아레는 그레이에게 말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표지도 비워두지 말아주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어떻게 적을까요?”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모른다고 적되, 버려진 표식처럼 보이지 않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 항목을 만들었다.

알 수 없는 것: 이름, 고향, 마지막 말.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넘어야 할 것: 모른다는 이유로 없었던 사람처럼 다루는 습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숨을 멈췄다.

아레도 오래 바라보았다.

“좋군요.”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기록은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속여서는 안 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이 필요했습니다.”


---

이름의 이정표들이 하나씩 세워졌다.

하지만 성벽이 되지는 않았다.

이름표들은 너무 빽빽하게 꽂히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길이 있었다.

누군가 지나갈 수 있는 틈.

멈추고, 읽고, 울고, 다시 걸을 수 있는 틈.

빵 부스러기 하나.
후추 냄새.
노래가 멈춘 창가.
접힌 천.
타다 남은 성냥.
이름 없는 자를 위한 빈 표지.

푸리나는 이정표들을 보며 말했다.

“이거, 순례길 같아.”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이름표들을 가리켰다.

“방마다 이름표가 있는 여관이 아니라, 길목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있는 길. 여기서 멈추고, 읽고, 다시 걸어가라는 길.”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더 맞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정표들 너머, 아직 열리지 않은 어둠을 향했다.

“기억의 순례길.”

그레이가 기록하려다 멈췄다.

아레가 말했다.

“적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기억의 순례길: 죽은 자의 이름을 성벽이 아니라 경계의 이정표로 세우고, 산 자가 그 앞에서 멈춘 뒤 다시 나아가게 하는 길.

아레는 그 문장을 읽었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아레답다.”

아레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극장에서 시작되었으니, 그대답기도 하겠지요.”

푸리나는 조금 놀랐다.

“그건 칭찬으로 받아도 돼?”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이번에는 비교적 명확한 칭찬입니다.”

푸리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비교적 명확한 칭찬을 받았어.”

죠니가 말했다.

“축하해.”

“너무 건조해.”

“비교적 축하야.”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름의 이정표를 조금도 더럽히지 않았다.


---

하지만 아레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기 이름을 놓는 일이었다.

푸리나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망령도, 고양이 왕도 말하지 않았다.

아레가 스스로 알아차렸다.

기억의 순례길에는 죽은 자들의 이름만 있어서는 안 됐다.

그 이름들을 기억하는 자가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로 다시 걸어가는지도 필요했다.

아레는 빈 이름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레이가 물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나의 것.”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이름표를 보았다.

그 위에는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레이가 적으려 하자, 아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적겠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건넸다.

아레는 자기 이름을 적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글씨는 반듯했다.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조금 떨리는 것이 보였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 자리는?”

아레는 의자를 보았다.

아까 자신이 앉았던 빈 의자.

그리고 그 너머, 아직 이어져야 할 순례길.

“길의 끝이 아니라, 중간.”

“중간?”

“네.”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들고 이정표들 사이의 작은 빈 곳으로 걸어갔다.

거기는 마르코의 후퇴로와 아나히트의 솥, 토로스의 창가가 서로 멀리 보이는 자리였다.

아레는 그곳에 자기 이름표를 꽂았다.

죽은 자들의 이름 사이에, 산 자의 이름이 놓였다.

그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필요했다.

아레는 말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그러니 내 이름은 도착한 자의 표지가 아니라, 걷고 있는 자의 표지여야겠지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나는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식탁에도 앉고, 의자에도 앉고, 때로는 그대의 박수도 듣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직 어두운 길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야겠지요.”

푸리나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레.”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네.”

“그거 진짜 큰 말인 거 알아?”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군요.”

“너무 담담하게 말하지 마.”

“담담하지 않으면 말하기 어려워서요.”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는 웃을 수 없었다.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내가 산 자의 길을 잃으면, 죽은 자의 이름도 결국 성벽이 됩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적었다.

기억하는 자의 산 자로서의 경로 필요.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은 결론이네.”

아레는 그를 보았다.

“건조한 칭찬이군요.”

“내 방식이야.”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도 칭찬이야.”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받아두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첫 번째 망령이 일어났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는 소품 상자 위에 있던 빈 이름표를 들었다.

아레는 그를 보았다.

“아이야.”

망령은 아레에게 다가왔다.

“장군님.”

“그래.”

“이제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레는 기억의 순례길을 보았다.

마르코의 후퇴로.

아나히트의 마지막 솥.

토로스의 창가.

이름 없는 자들의 빈 표지.

그리고 그 사이에 꽂힌 자기 자신의 이름.

“원한다면 이곳에.”

망령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

“기억의 순례길.”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전장이 아닌 곳.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곳. 하지만 산 자들이 네가 멈춘 곳을 보고, 다음 걸음을 생각할 수 있는 곳.”

망령은 물었다.

“장군님은 저를 매일 깨우지 않으실 겁니까?”

아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대답은 분명했다.

“그래.”

그녀는 낮게 말했다.

“매일 깨워 세우지 않으마.”

망령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잊지는 않으십니까?”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잊지 않으마.”

망령은 빈 이름표를 작은 길목에 세웠다.

“그럼 저는 조금 쉬겠습니다.”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아이야. 쉬렴.”

망령은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군인처럼 걷지 않았다.

그냥 잠시 쉬러 가는 사람처럼 걸었다.

고양이 왕은 식탁 끝에서 물었다.

“저도 이 길에 와도 돼요?”

아레는 그를 보았다.

“너는 산 자들의 웃음 아니었니?”

고양이 왕은 당당하게 말했다.

“웃음도 길을 알아야 해요.”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오렴.”

고양이 왕은 나무 인형을 안고 식탁 옆, 순례길 입구에 앉았다.

“빵은 있어요?”

푸리나가 말했다.

“후일담에 준비할게.”

그레이가 기록했다.

추후 빵 준비 필요.

죠니가 말했다.

“이런 건 또 바로 적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길을 걷는 자에게 음식은 필요합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작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웃음이었다.


---

막이 내려가기 전, 푸리나는 아레에게 물었다.

“이제 끝내도 될까?”

아레는 기억의 순례길을 보았다.

아직 너무 짧았다.

그리고 너무 길었다.

“네.”

아레는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좋겠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레는 덧붙였다.

“다만, 이 이정표들은 두고 싶군요.”

“물론.”

“식탁도요.”

“응.”

“의자도.”

“응.”

“그리고…….”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보았다.

“내 이름표도, 당분간은 저기에.”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당분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겠지요?”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그 말, 어디서 들은 것 같네.”

“좋은 말이었으니까요.”

“좋아. 내일 다시 정하자.”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의 등불이 천천히 낮아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이 부드럽게 접혔다.

이번에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대 위에 생긴 몇 가지가 현실 쪽으로 남는 느낌이었다.

이름의 이정표.

긴 식탁.

빈 의자.

그리고 길의 중간에 꽂힌 아레의 이름표.

막이 내려왔다.

후일담 —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후일담 —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다음 날 아침, 야전 여관의 마당에는 이상한 길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았다.

마당 한쪽, 찢어진 막과 식탁 사이.
아이들이 뛰어다니면 쉽게 밟고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목.
그곳에 작은 이름표들이 세워져 있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리고 아직 이름이 없는 몇 개의 빈 표지.

누군가가 보기에는 소품처럼 보였을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미처 치우지 않은 장식.
아이들이 세워둔 놀이의 흔적.
혹은 푸리나가 또 무언가를 벌이기 위해 준비한 이상한 무대 장치.

그러나 아레는 그것을 길이라고 불렀다.

기억의 순례길.

그리고 그 길의 중간에는, 작고 반듯한 글씨로 적힌 이름표 하나가 있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푸리나는 그 이름표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정말 남았네.”

그레이는 옆에서 기록판을 확인했다.

“어제 신술이 접힌 뒤에도 물리적 표식 일부가 유지되었습니다. 실제 소품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레이.”

“네.”

“아침부터 너무 딱딱해.”

“그럼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무대에서 생긴 길이 현실에 조금 남았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오.”

“괜찮습니까?”

“좋아. 아주 좋아. 방금 건 기록에도 그렇게 써.”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적었습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쪽에서는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정확히는 빵을 먹으면서 조용히 이름표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어제 고양이 왕을 맡았던 아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푸리나 전하.”

“응, 고양이 왕.”

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저기 지나가도 돼요?”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마당 끝에 서 있었다.

아침빛 속의 아레는 어제 밤보다 조금 더 창백해 보였지만,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레는 아이에게 말했다.

“지나가도 된단다.”

아이의 눈이 밝아졌다.

“뛰어도 돼요?”

아레는 잠시 멈췄다.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레이도 기록판 위에서 펜을 멈췄다.

아레는 이름표들을 보았다.

마르코의 후퇴로.

아나히트의 마지막 솥.

토로스의 창가.

이름 없는 병사의 경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름.

그 사이를 아이가 뛰어간다.

웃으면서.

아레는 한때 그것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름들 사이를 가볍게 뛰어간다는 것.

죽음의 경계가 아이의 놀이길이 된다는 것.

하지만 개척의 길은 원래 그런 모순을 품는다.

어떤 이가 쓰러진 곳을, 다음 이는 지나가야 한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지나가야 한다.
멈출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다시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뛰어도 된단다.”

아이는 웃었다.

아레는 덧붙였다.

“다만, 이름표를 차지 않도록 조심하렴.”

“네!”

고양이 왕은 바로 달려갔다.

그는 마르코의 이름표 앞에서 한 번 멈추었다.

글자를 읽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

아나히트의 이름표 앞에서는 후추 냄새가 나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토로스의 이름표 앞에서는 이상한 노래를 한 소절 흉내 냈다.

그리고 아레의 이름표 앞에서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아레 장군님 이름이에요?”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장군님도 죽었어요?”

푸리나가 숨을 삼켰다.

그레이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하지만 아이는 악의 없이 물었다.

길에 이름이 있으니, 죽은 사람 이름인 줄 안 것이다.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 아니란다.”

아이는 더 헷갈린 얼굴이 되었다.

“그럼 왜 여기에 있어요?”

아레는 조금 생각했다.

“나도 길 위에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아이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장군님도 뛰어요?”

푸리나는 입을 막았다.

죠니가 언제 왔는지 문가에서 낮게 말했다.

“좋은 질문이네.”

아레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작게 웃음을 참았다.

아레는 아이를 다시 보았다.

“오늘은 걷겠단다.”

“내일은요?”

“내일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내일 다시 정하자꾸나.”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오늘 뛸래요!”

그리고 그는 정말로 뛰었다.

이름의 이정표 사이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히.


---

아침 식사가 시작되자, 식탁은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확히는, 어제 있던 식탁에 상자 두 개와 나무판자 하나를 덧댔다.

그레이는 그 구조를 보고 심각하게 말했다.

“하중 분산이 불안정합니다.”

푸리나는 빵 바구니를 올리며 말했다.

“식탁은 마음이 중요해.”

“무너질 경우 마음도 함께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건 곤란하지.”

죠니가 옆에서 나무판자를 발로 살짝 밀어보았다.

“여기 받침 하나 더 대면 되겠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죠니가 가구 조언을?”

“무너지는 식탁 옆에서 밥 먹고 싶진 않으니까.”

“실용적이야.”

“그게 대체로 좋지.”

아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식탁을 고치는 일.

빵을 놓는 일.

아이들이 자리를 다투는 일.

그레이가 이름표와 식탁 사이의 안전거리를 계산하는 일.

죠니가 받침을 대는 일.

푸리나가 “이 정도면 극적 균형이야”라고 말하고, 그레이가 “물리적 균형이 먼저입니다”라고 반박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어제 밤의 아레라면 그것을 막연히 느꼈다.

오늘 아침의 아레는 조금 더 분명히 알았다.

죽은 자의 이름은 조용한 곳에만 놓이지 않는다.

때로는 삐걱이는 식탁 옆에도 놓인다.

빵가루가 떨어지는 곳에도.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길목에도.
누군가가 “이 받침은 약하다”고 말하는 자리에도.

그 모든 것이 산 자가 다음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레는 식탁 끝에 앉았다.

푸리나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죠니는 짧게 말했다.

“앉았네.”

푸리나는 바로 쏘아보았다.

“죠니.”

죠니는 빵을 집었다.

“이번엔 좋은 뜻이야.”

아레는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아레의 앞에 빵을 놓았다.

“먹을래?”

아레는 빵을 보았다.

어제 2막에서 먹었던 빵처럼, 조금 딱딱하고 조금 식은 빵이었다.

“먹겠습니다.”

푸리나는 빵을 더 밀어주었다.

“기억하는 자도 빵을 먹어야 하니까.”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제목으로 쓸 생각이었나요?”

“들켰어?”

“조금.”

“좋은 제목 아니야?”

아레는 빵을 손에 들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레식 칭찬!”

“비교적 명확한 편이지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는 빵을 한 조각 뜯었다.

그 순간, 고양이 왕이 옆에서 말했다.

“그거 가장자리예요.”

아레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가장자리였다.

고양이 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마르코가 좋아한다고 우겼던 부분.”

아레는 빵 가장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먹어도 되겠니, 마르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 끝에 세워진 마르코의 이름표가 아침빛을 받았다.

아레는 빵 가장자리를 먹었다.

딱딱했다.

조금 퍽퍽했다.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삼킬 수 있었다.

그녀는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빵 속을 남에게 주려고 우겼다는 말이 이해되는군요.”

죠니가 말했다.

“맛없어?”

아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맛있다고 우기려면 상당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식탁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듣고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크게 웃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 웃음은 마르코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코의 이름표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왔다.


---

식사가 끝난 뒤, 아레는 이정표들을 다시 점검했다.

이건 거의 의식처럼 보였지만, 아레는 그것을 의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의식이 너무 단단해지면, 또 하나의 성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레이에게 말했다.

“규칙은 너무 많이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레이는 물었다.

“최소 규칙은 필요합니다. 무엇을 남길까요?”

아레는 생각했다.

“첫째. 이름을 알면 이름을 적는다.”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이름을 모르면 모른다고 적는다.”

“셋째. 모르는 것을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않는다.”

“넷째. 그 사람이 멈춘 경계를 확인한다.”

“다섯째. 다음 사람이 그 경계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묻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째는 없습니까?”

아레는 이정표들 사이를 뛰던 아이를 보았다.

“있습니다.”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산 자가 그 길을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적었다.

여섯째. 산 자가 그 길을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가만히 웃었다.

“그거 좋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극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문장일 겁니다.”

푸리나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첫 다섯 줄만 남겼겠지요.”

“여섯째는?”

“그대와 아이들이 가져왔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아, 오늘 바람이 좀 세네.”

죠니가 말했다.

“안 부는데.”

그레이가 하늘을 보았다.

“현재 풍속은 약합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향해 낮게 말했다.

“너희 둘 다 조용히 해.”

아레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더 이상 극 안에서만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


---

오후가 되자, 첫 번째 망령이 다시 나타났다.

아주 잠깐이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는 자신의 이정표 앞에 서 있었다.

그 이정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름 미상. 비 오는 밤, 좌측 능선. 마지막 말 확인 불가.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다음 길: 이름을 듣지 못한 죽음을, 지휘관의 죄만으로 덮지 말 것.

망령은 그것을 읽었다.

아레는 곁에 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마.”

망령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레는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냐?”

망령은 아레를 보았다.

“완전히는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전보다 낫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하구나.”

망령은 이정표를 만지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장군님.”

“그래, 아이야.”

“저는 이름을 잃었지만, 길을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망령은 계속했다.

“누군가 이 앞에서 멈추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 서 있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아레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제가 멈춘 곳이라서요.”

망령은 비가 그친 하늘을 보았다.

“누군가는 지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아레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개척의 성좌가 사랑할 법한 말이었다.

한계에 부딪힌 곳.

누군가가 멈춘 곳.

그러므로 다음 이가 나아갈 곳이 생긴 곳.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렇구나, 아이야.”

망령은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 장군님도 너무 오래 서 있지 마십시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노력하마.”

“네.”

망령은 뒤돌아섰다.

이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정표 너머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전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길도 아니었다.

아레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

해가 기울 무렵, 푸리나는 작은 폐막 공연을 하자고 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바로 경계했다.

“폐막 공연이요?”

“작게.”

“푸리나 헤툼의 ‘작게’는 신뢰도가 낮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억울한 얼굴로 둘을 보았다.

“이번엔 진짜 작게 할 거야.”

죠니가 말했다.

“소품 몇 개?”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음…… 고양이 인형, 빵 바구니, 작은 깃발, 이정표 모형 세 개 정도?”

그레이가 말했다.

“작지 않습니다.”

“작아! 전쟁 장면 없어!”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무엇을 하려는 건가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이들이 길을 지나가는 놀이.”

아레는 침묵했다.

푸리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죽은 자 이름을 장난감처럼 쓰자는 게 아니야. 이정표를 보고 멈추고, 한마디 말하고, 다음으로 가는 놀이. 아주 간단하게.”

아레는 이정표들을 보았다.

그 앞에서 멈추고, 말하고, 지나가는 아이들.

그것이 가벼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너무 무거운 기억은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못한다.
너무 가벼운 기억은 사람을 지나치게 만든다.

그 사이의 길.

아레는 물었다.

“한마디는 무엇을 말하게 할 겁니까?”

푸리나는 대답했다.

“각자 다르게.”

“예를 들면요?”

푸리나는 고양이 왕을 불렀다.

“고양이 왕, 마르코 이정표 앞에서 뭐라고 말하고 싶어?”

아이는 빵을 들고 달려왔다.

“빵 속도 먹으라고요!”

마당에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어때?”

아레는 잠시 마르코의 이름표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군요.”

푸리나는 조금 놀랐다.

“정말?”

“네.”

아레는 작게 덧붙였다.

“마르코에게는 필요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 왕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럼 아나히트한테는 후추 조금만 넣으라고 할래요!”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실용적인 조언입니다.”

죠니도 낮게 웃었다.

아레는 아나히트의 이름표를 보았다.

후추 냄새.

마지막 솥.

피난길의 따뜻한 수프.

“그것도 좋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정표 앞에서 한마디씩 했다.

“뒤에 남으면 꼭 같이 데리러 갈게.”

“수프는 맵게 해도 되는데 물도 같이 줘.”

“노래 못해도 불러도 돼.”

“이름을 모르면, 이름 모르는 사람이라고 불러줄게.”

“길 막지 말고 길 알려줘.”

마지막 말은 고양이 왕이 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길 막지 말고 길 알려줘.

죽은 자의 이름도, 지휘관의 죄책감도, 애도의 의무도 결국 그렇게 되어야 했다.

길을 막는 성벽이 아니라.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아레는 아이에게 말했다.

“좋은 말이구나.”

고양이 왕은 어깨를 폈다.

“제가 왕이라서요.”

푸리나가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고양이 왕.”

그레이도 진지하게 고개를 숙이려다, 잠시 멈췄다.

“이것은 예법상 필요한 행동입니까?”

푸리나가 말했다.

“극장 예법상 필요해.”

그레이는 고양이 왕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 왕은 매우 만족했다.

아레는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작게.

하지만 숨기지 않고.


---

밤이 되자,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 섰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길의 중간.

죽은 자의 이름들 사이.

산 자가 지나가는 길목.

푸리나는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혼자 있게 둘까?”

그레이가 물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히 혼자 두지는 말자. 그래도 가까이 가지는 말고.”

죠니가 말했다.

“거리 조절 어렵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중요한 거지.”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그 이름표는 죽음의 표지가 아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의 표지.

걷고 있는 자의 표지.

아레는 낮게 말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상했다.

망자의 이름은 많이 불렀다.

병사의 이름.
돌아오지 못한 이의 이름.
장부에 남은 이름.
부르지 못한 이름.

하지만 자기 이름은 잘 부르지 않았다.

아레는 다시 말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아직 걷는 자.”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기억하는 자.”

잠시 침묵.

“하지만 혼자 성벽이 되지 않아도 되는 자.”

밤바람이 이정표들 사이로 지나갔다.

마르코의 이름표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나히트의 이름표에서 희미한 후추 냄새가 났다.

토로스의 창가 쪽에서 못 부르는 노래 같은 바람이 지나갔다.

이름을 잃은 병사의 표지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은 더 이상 비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 작은 빵 조각 하나를 놓았다.

마르코의 가장자리 빵이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걸었단다.”

그 말은 망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내일은 다시 정하마.”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레이도 들었다.

죠니도 들었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그 말은 박수보다 밤에 더 어울렸다.


---

그날 밤, 푸리나는 대본 마지막 장에 후일담을 적었다.

제목은 이렇게 적었다.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레가 직접 쓴 한 줄이 남았다.

기억은 멈춰 서는 일이 아니라, 멈춘 곳을 보고 다시 걷게 하는 일이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좋네.”

아레는 대답했다.

“아직 완성된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좋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었다.

“완성된 말은 가끔 너무 빨리 벽이 되니까.”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레이는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극 종료. 이정표 일부 유지. 식탁 유지. 의자 유지. 아레 마가트로이드의 이름표는 길의 중간에 둠. 추후 재확인 필요.

죠니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추후 재확인 필요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도 배웠네.”

그레이는 조금 생각했다.

“기록상 그렇습니다.”

아레는 마당을 보았다.

야전 여관의 등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정표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밤이 되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아레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이 오면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앞에서 멈출 것이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누군가는 다음 길을 걸을 것이다.

그 정도면 오늘의 기억으로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대본을 덮었다.

“《세 망령이 찾아온 밤》, 여기서 끝.”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끝났군요.”

“응. 극은.”

아레는 이정표들을 보았다.

“길은 남았고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게 좋은 결말이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그리고 그날 밤, 박수가 끝난 뒤에도 길목에는 이름들이 남아 있었다.

성벽이 아니라.

이정표로.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프롤로그 — 항구에 남은 아이와, 바다로 나가는 기사

항구에는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

하늘은 푸르지도, 검지도 않았다.
밤이 물러나기 전의 색.
바다가 자기 몸 위에 마지막 어둠을 얇게 덮고, 저 멀리 수평선만이 아주 천천히 은빛으로 풀리는 시간이었다.

푸리나 헤툼은 그 항구 끝에 작은 무대를 세웠다.

무대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했다.

발밑에는 나무판자가 아니라 젖은 부두가 있었고, 막 대신 오래된 돛이 걸려 있었다. 객석도 없었다. 의자 몇 개와 밧줄 더미, 뒤집힌 통, 젖은 그물뿐이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녀는 손가락으로 돛의 주름을 툭툭 쳤다.

“오늘은 화려하지 않게.”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고 옆에 서 있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실제 결과는 대개 화려했습니다.”

“이번엔 진짜야.”

“확인하겠습니다.”

“믿음이 부족해.”

“경험이 많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입을 삐죽였다가, 바다 쪽을 보았다.

이번 극은 큰 무대가 아니었다.

웅장한 합창도 없고, 성벽도 없고, 아이들이 왕관을 쓰고 뛰어나오는 장면도 없었다.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는 막도 아니고, 질문으로 법정을 뒤집는 극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한 남자와 바다.

작은 배.

줄.

손.

물고기.

그리고 돌아오는 길.

그 정도면 충분했다.

푸리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극은 많이 말하지 않을 거야.”

그레이가 물었다.

“전하께서요?”

“나도.”

“그 점은 기록해두겠습니다.”

“왜 그렇게 놀라?”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기록판에 조용히 적었다.

공연 형식: 최소 인원. 바다 위 독백 중심.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바로 그거야.”

그녀는 바다를 향해 손을 들었다.

새벽 전의 바람이 돛을 흔들었다.

천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부두의 낡은 판자들이 무대처럼 길게 이어졌다. 작은 어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거기 있었던 것 같기도 했고, 방금 극장이 꺼내놓은 것 같기도 했다.

낡은 배였다.

새 배가 아니었다.
잘 칠해진 배도 아니었다.
옆구리에는 오래된 흠집이 있었고, 뱃머리에는 소금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배는 떠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죠니 죠스타는 그 배 옆에 앉아 밧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무대가 열렸다고 해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푸리나가 장엄하게 선언할 때도, 그레이가 기록할 때도, 바다가 조금 더 깊은 색으로 변할 때도, 죠니는 계속 손으로 밧줄을 만졌다.

한 번 당기고.

놓고.

다시 감고.

그 손놀림은 느렸지만 게으르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죠니.”

“응.”

죠니는 밧줄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

푸리나는 잠시 무언가 멋진 말을 하려 했다.

삶은 바다이고, 사람은 항해자이며, 오늘 그대가 나아갈 수평선은—

그쯤에서 죠니가 말했다.

“길게 할 거면, 배 띄우기 전에 끝내줘. 물때 지나가면 귀찮아져.”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기록판을 내렸다.

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 짧게 할게.”

“그게 낫지.”

“오늘의 극은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죠니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늙은 말?”

“산티아고의 노인을 그대로 쓰기엔 네가 너무 죠니라서.”

“말은 마음에 드네. 늙은 쪽은 조금 애매하고.”

“그럼 회전하는 바다와 그럭저럭 오래 달린 말?”

“제목이 길어.”

푸리나는 웃었다.

죠니는 다시 밧줄을 감았다.

그는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아직 어두웠다.
그러나 어둠이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였다.

넓고, 깊고, 무심하고, 오래되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나쁘지 않네.”

푸리나가 물었다.

“바다가?”

“무대가.”

“오.”

“너무 꾸미지 않아서 좋아.”

푸리나는 잠깐 가슴을 폈다.

“내가 절제하면 또 잘하지.”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드문 사례입니다.”

“그레이.”

죠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배 안쪽을 점검했다.

그때, 부두 끝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였다.

그녀는 아직 이른 새벽의 바람에 망토를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조금 흐트러졌고, 허리에는 검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검을 들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배웅하러 왔다.

아스트리트는 죠니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죠니 경.”

“응.”

“정말 혼자 나가십니까?”

“원래 그런 이야기잖아.”

“하지만 극이라면 배역을 더 둘 수도 있지 않습니까?”

죠니는 밧줄 끝을 묶으며 말했다.

“바다 위에 사람이 많으면, 그건 고독이 아니라 회의야.”

푸리나가 손뼉을 작게 쳤다.

“좋은 말인데?”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대사로 쓰지 마.”

“이미 기억했어.”

“그럴 줄 알았어.”

아스트리트는 두 사람의 대화를 잠시 듣다가, 다시 물었다.

“너무 멀리 가지 않으시면 안 됩니까?”

죠니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낚싯줄을 손가락 사이에 걸어보았다.

줄은 아직 아무것도 당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죠니는 줄 끝의 무게를 느끼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멀리 가야 걸리는 것도 있어.”

아스트리트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말이 무모하게 들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럼 돌아오셔야 합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알아.”

“정말 아십니까?”

죠니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그 눈에는 장난기가 조금 있었다.

“못 돌아오려고 나가는 건 아니야. 그런 취미는 없어.”

아스트리트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했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그녀는 배 옆에 쪼그려 앉아 작은 물통을 밀어 넣었다.

“물입니다.”

“봤어.”

“건조식량도 넣었습니다.”

“고마워.”

“예비 줄도 있습니다.”

“그건 내가 넣었는데.”

“하나 더 넣었습니다.”

죠니는 배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잠시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걱정이 많네.”

아스트리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노력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죠니는 짧게 웃었다.

“좋은 변명이야.”

“변명입니까?”

“아니. 좋은 대답.”

아스트리트는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조용히 보았다.

이 극에서 아스트리트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자였다.

아직 죠니의 바다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돌아올 자리를 믿고 남는 사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스트리트는 배의 뱃머리를 잡고 말했다.

“저도 언젠가는 저 바다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죠니는 바다를 보았다.

“글쎄.”

“글쎄, 입니까?”

“난 아직도 잘 모르거든.”

아스트리트가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죠니는 담담했다.

“다 안다고 생각하고 나가면, 보통 바다가 먼저 알려줘. 네가 틀렸다고.”

“그럼 왜 나가십니까?”

죠니는 낚싯줄을 손에 감았다.

“모르니까.”

아스트리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조금 뒤에 덧붙였다.

“그리고 모른다고 해서, 안 갈 이유가 되진 않으니까.”

그 말은 거창하지 않았다.

선언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자기 배를 준비하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부두 위에 남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기록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극에서는 너무 빨리 의미를 붙이면 안 됐다.

그레이도 펜을 움직이지 않았다.

좋은 기록자는 때로 기다려야 했다.

죠니는 배에 올랐다.

작은 배가 살짝 흔들렸다.

바다는 아직 조용했다.

그는 노를 잡았다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오래된 굳은살이 있었다.

상처도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찢어지고, 다시 붙고, 다시 찢어졌던 손.

죠니는 손을 향해 말했다.

“오늘도 부탁한다.”

아스트리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에게 말씀하신 겁니까?”

“응.”

“대답합니까?”

“대체로 안 해.”

“그런데도요?”

죠니는 노를 물에 넣었다.

“가끔 말을 안 듣는 쪽이 더 오래 같이 가.”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이해한 듯,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이제 막을 열어야 할 때라고 느꼈다.

그녀는 항구 끝에 서서 조용히 손을 들었다.

평소처럼 화려하게 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바다가 너무 넓었고, 죠니의 배는 너무 작았다.

큰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삶이라는 바다는 오늘, 한 사람에게만 길을 내준다.”

돛이 흔들렸다.

“그대는 노인이며, 기사이며, 아직 돌아오지 않은 말이다.”

죠니가 푸리나를 보았다.

“말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좀 문제 있지 않아?”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분위기 잡는 중이야.”

“미안. 계속해.”

아스트리트가 아주 작게 웃었다.

푸리나도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대가 잡으려는 것은 물고기일 수도 있고, 도달하지 못한 한 점일 수도 있으며, 스스로에게 아직 남아 있는 물음일 수도 있다.”

바다가 조금 밝아졌다.

“그러니 가라.”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다만, 돌아올 자리를 잊지 말고.”

죠니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칭찬?”

“비슷한 거.”

“좋아. 받아둘게.”

죠니는 노를 저었다.

배가 천천히 부두에서 떨어졌다.

아스트리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죠니 경!”

죠니는 돌아보지 않고 손만 들었다.

아스트리트는 잠깐 망설이다가 외쳤다.

“돌아오시면, 제가 배를 고치겠습니다!”

죠니가 그제야 고개를 조금 돌렸다.

“부서질 거라고 예상하는 거야?”

아스트리트는 당황했다.

“그, 그게 아니라—”

“괜찮아.”

죠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도 아주 조금 입가를 움직였다.

아스트리트는 얼굴을 붉혔지만, 곧 똑바로 섰다.

“그럼 반드시 고치겠습니다!”

죠니는 손을 내렸다.

“맡길게.”

배는 더 멀어졌다.

항구의 소리는 작아졌다.

푸리나의 돛 무대도, 그레이의 기록판도, 아스트리트의 금빛 머리도 조금씩 멀어졌다.

남은 것은 바다였다.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

배 밑바닥을 두드리는 잔물결.

아직 오지 않은 태양.

죠니는 혼자였다.

그는 앞을 보았다.

멀리, 수평선이 있었다.

“좋아.”

죠니는 낮게 말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보자고.”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거절도 허락도 아니었다.

죠니는 노를 저었다.

한 번.

또 한 번.

작은 배가 새벽의 바다 위로 나아갔다.

무대는 점점 넓어졌고, 사람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리고 항구 끝에서, 푸리나는 아주 조용히 막의 첫 줄을 적었다.

1막 — 더 먼 바다로

그 아래, 그레이가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1막 — 더 먼 바다로

—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

항구가 멀어지면, 사람의 말도 멀어진다.

처음에는 부두의 나무판자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트리트가 아직 서 있는 기척도 있었다.
푸리나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하다가 참는 숨소리도, 그레이의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배가 물살을 타고 조금 더 나아가자, 그 모든 것은 바다 뒤로 접혔다.

남은 것은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뿐이었다.

촤악.

잠시 침묵.

촤악.

다시 침묵.

죠니는 노를 저었다.

급하게 젓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다는 급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다는 그저 급한 사람을 먼저 지치게 만들 뿐이다.

죠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괜히 성질내봤자 손해지.”

그는 바다에 대고 말했다.

“너는 늘 그랬어.”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어깨를 한 번 풀었다.

배는 작았다.

바다 위에서 배는 언제나 작다.
왕의 배든, 상인의 배든, 기사단의 배든, 피난민을 실은 배든, 혼자 탄 어선이든.

멀리 나오면 다 똑같다.

바다는 크고, 배는 작다.

죠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바다는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

궁정처럼 웃으며 칼을 숨기지도 않고, 전장처럼 깃발을 흔들며 죽음을 장식하지도 않는다. 바다는 그냥 크다. 사람을 삼킬 수 있을 만큼 크고, 사람의 성취를 아무렇지 않게 씻어낼 만큼 넓다.

그런데도 사람은 바다로 나간다.

“이상하지.”

죠니는 노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넓은 걸 보면 꼭 뭔가 해보고 싶어 하거든.”

그는 잠시 자기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너무 인간적이네.”

새벽빛이 조금씩 번졌다.

하늘의 가장 낮은 곳이 먼저 밝아졌다.
회색이 푸른빛을 띠고, 푸른빛 가장자리에 엷은 금색이 번졌다.

배는 항구에서 제법 멀어졌다.

이제 뒤를 돌아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부두의 형태도 희미했다.
푸리나의 돛 무대는 그냥 낡은 하얀 점처럼 보였다.

죠니는 잠깐 뒤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아직 거기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아니, 아이는 아니었다.
기사단장이지.

하지만 오늘의 극에서 그녀는 기다리는 쪽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늘 조금 아이처럼 보인다.
무엇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죠니는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는 쪽도 쉽진 않지.”

그는 노를 한 번 더 저었다.

“뭐,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고.”

그러고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조금은 걱정해야 하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

햇빛이 수면 위에 닿기 시작했을 때, 죠니는 노를 거두었다.

배는 이제 바람과 물결 위에 작게 흔들렸다.

그는 낚싯줄을 준비했다.

줄은 손에 익었다.

낯설지 않았다.

좋은 줄이었다.
너무 새것도 아니고, 너무 낡지도 않았다. 손에 감으면 거칠게 걸리는 감각이 있고, 당기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대략 알 수 있었다.

죠니는 줄을 풀며 말했다.

“오늘은 말 잘 들어라.”

줄은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안 들을 거 알아.”

그는 미끼를 단단히 고정했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이 움직였다.

동작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일을 오래 한 사람의 움직임은, 간단해 보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다.

죠니에게는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줄을 바다로 내렸다.

미끼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물은 금방 그것을 삼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죠니는 기다렸다.

기다림은 바다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전장에서는 기다림이 곧 위험일 때가 많다.
궁정에서는 기다림이 곧 계산이고, 극장에서는 기다림이 곧 장면 전환이다.

하지만 바다의 기다림은 조금 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움직임을 몸 전체로 듣는 시간이었다.

죠니는 줄을 손가락에 살짝 걸었다.

아직 아무 무게도 없었다.

그는 손바닥을 보았다.

아침 햇빛이 굳은살 위에 걸렸다.

“오늘도 멀쩡하네.”

그는 손에게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말고.”

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버틴 손은 늘 대답 대신 흔적을 남긴다.

찢어진 자국.
아물다 만 피부.
다시 굳은살이 된 상처.

죠니는 그 손을 싫어하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하기엔 좀 이상했다.

그냥 자기 손이었다.

말을 안 듣고, 아프고, 가끔은 결정적인 순간에 떨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같이 온 손.

“우린 꽤 멀리 왔어.”

그는 손을 쥐었다 폈다.

“칭찬은 아니야. 사실 확인이지.”

배가 천천히 흔들렸다.

죠니는 수평선을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은, 아직 무엇이든 나올 수 있는 곳이다.


---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까지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미끼 근처를 맴돌기는 했다.

죠니는 그것들을 느꼈다.

작은 움직임.

짧은 당김.

겁이 많고, 빠르고, 욕심 많은 움직임.

하지만 그는 잡지 않았다.

“너희는 아니야.”

그는 줄을 살짝 움직였다.

작은 물고기들은 흩어졌다.

“오늘은 작은 걸로 돌아갈 생각이 없거든.”

그 말에는 허세가 조금 있었다.

죠니도 알고 있었다.

작은 물고기로 돌아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항구에는 음식이 필요하고, 식탁에는 뭔가 올라가야 한다.
매일 거대한 것을 잡아야만 삶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삶은 작은 물고기들로 이어진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의 극은 작은 물고기의 극이 아니었다.

푸리나가 그렇게 무대를 열었고, 죠니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더 먼 바다.

보이지 않는 것.

걸릴지 걸리지 않을지 모르는 큰 무언가.

죠니는 바다를 보며 말했다.

“한 번쯤은 멀리 나와야 할 때가 있지.”

바람이 조금 세졌다.

배가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죠니는 몸을 자연스럽게 맞췄다.

배와 몸이 같은 박자로 흔들렸다.

그는 그런 순간을 좋아했다.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몸이 세상의 움직임에 맞춰지는 순간.

그 짧은 일치.

거기에 사람은 살 수 있다.

“이야기라는 게 꼭 필요한 건 아니야.”

죠니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냥 이 정도면 충분할 때도 있지.”

노도 없고, 말도 없고, 땅도 없다.

물결.

배.

손.

숨.

그리고 아직 당겨지지 않은 줄.

그는 피식 웃었다.

“푸리나가 들으면 싫어하겠네.”

그녀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도 이야기야, 죠니.

네가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지.

죠니는 그 반박을 상상하고 고개를 조금 저었다.

“그래. 아마 네가 이기겠지.”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이 강해졌다.

수면 위의 빛은 가늘게 찢어진 금속 조각처럼 반짝였다.

그 반짝임 속에서, 죠니는 아주 잠깐 먼 들판을 떠올렸다.

바다가 아니라, 땅.

물결이 아니라, 먼지.

노가 아니라, 고삐.

그리고 달리는 말.

말의 근육이 움직이고, 바퀴가 돌고, 땅이 뒤로 밀려나가던 감각.

죠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 기억은 길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바다를 보았다.

“오늘은 배야.”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불평하지 마.”


---

오후가 가까워질 때, 바다가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뀐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배 밑을 지나는 깊은 물살이 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줄이었다.

아주 미세하게.

누군가 줄의 저편에서 생각을 바꾼 것처럼, 줄이 한 번 떨렸다.

죠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줄 위에 얹었다.

또 한 번.

이번에는 조금 더 깊었다.

죠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왔나.”

대답은 없었다.

그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줄이 다시 움직였다.

작은 물고기의 당김이 아니었다.

가볍고 빠른 욕심이 아니라, 무겁고 느린 확신이었다.

죠니는 미끼를 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작지 않다.

성급하지 않다.

이쪽을 시험하고 있다.

“신중하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좋아. 나도 급하지 않아.”

줄은 잠시 잠잠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깊게.

당겨졌다.

배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죠니는 줄을 놓지 않았다.

그는 당기지 않았다.

아직은.

너무 빨리 당기면 끝난다.

너무 늦게 당겨도 끝난다.

그 사이.

찰나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들이 있다.

한 박자 빠르면 놓치고, 한 박자 늦으면 끊어지는 순간.

사람은 그런 순간을 기다리며 산다.

죠니는 줄을 손에 감았다.

손바닥의 오래된 상처들이 깨어났다.

“좋아.”

그는 조용히 말했다.

“서로 예의 있게 가자.”

줄이 갑자기 깊게 끌려갔다.

배가 앞으로 당겨졌다.

죠니의 몸이 휘청였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짧게.

거칠게.

“큰 놈이네.”

줄이 더 깊게 당겨졌다.

배가 바다 위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죠니는 발을 고정하고, 몸을 낮췄다.

손이 뜨거워졌다.

줄이 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악물지 않았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래.”

그는 바다 아래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했다.

“이 정도는 돼야 내가 멀리 온 보람이 있지.”

그 순간,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배를 끌었다.

죠니는 아직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줄은 말하고 있었다.

무겁다.

강하다.

살아 있다.

그리고 쉽게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죠니는 배가 끌려가는 방향을 따라 몸을 틀었다.

바다가 넓어졌다.

항구는 이제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었다.

작은 배 하나가 거대한 물고기에 끌려, 더 먼 바다로 나아갔다.

죠니는 줄을 붙잡은 채 조용히 말했다.

“좋아.”

손바닥에서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보며 덧붙였다.

“이제 시작이네.”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끌려갔다.

하지만 죠니는 그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이 움직이는 것과, 무언가에게 끌려가는 것의 차이가 아주 작아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선택은 남는다.

줄을 놓을 것인가.

붙잡을 것인가.

죠니는 줄을 붙잡았다.

무대 위의 바다는 더 깊어졌다.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푸리나의 막이 한 장 더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2막 — 줄이 당겨지는 순간

그 아래, 보이지 않는 기록자가 적었다.

— 아직 모습을 보지 못한 것들도, 때로는 손바닥의 피로 먼저 도착한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2막 — 줄이 당겨지는 순간

— 아직 모습을 보지 못한 것들도, 때로는 손바닥의 피로 먼저 도착한다 —

줄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깊이.

햇빛이 닿지 않는 물속.

물살과 어둠과 살아 있는 근육의 힘이 한데 섞인 곳.

죠니는 그 끝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손은 알고 있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줄의 무게.
손목을 따라 올라오는 떨림.
어깨 안쪽에서 삐걱이는 통증.
배 전체를 조금씩 끌고 가는 방향.

줄 끝의 그것은 크다.

그리고 살아 있다.

죠니는 몸을 낮추었다.

작은 배가 물결 위에서 삐걱였다.

“천천히.”

그는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말을 했다.

물고기에게인지.

자기 손에게인지.

배에게인지.

아니면 바다에게인지.

“서두르면 둘 다 손해야.”

줄이 다시 깊게 당겨졌다.

죠니의 손이 조금 밀렸다.

그는 손가락을 조였다.

줄이 살을 문질렀다.

뜨거웠다.

아직 찢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다는 늘 천천히 시작한다.

처음에는 미세한 떨림.

그다음에는 무게.

그다음에는 통증.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은 자기가 언제부터 피를 흘리고 있었는지 모르게 된다.

죠니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조금 배어 있었다.

“좋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인사는 했네.”

줄 끝의 물고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배를 끌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작은 배는 바람이 아니라 물고기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죠니는 노를 잡지 않았다.

지금 노는 쓸모가 없었다.

줄을 놓으면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러면 끝이다.

붙잡으면 끌려간다.

그러나 그러면 이어진다.

그는 줄을 붙잡았다.


---

물고기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작은 것들은 자주 성급하다.

겁먹거나, 욕심내거나, 빛에 놀라 펄떡인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곳에서 움직였다.

자기 힘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죠니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시험하는 것처럼.

“신중하네.”

죠니는 줄을 살짝 풀어주었다.

배가 앞으로 조금 더 끌려갔다.

“좋아. 나도 배운 건 있어.”

그는 허리를 낮추고, 줄의 각도를 바꾸었다.

정면으로 버티면 끊어진다.

힘과 힘으로만 부딪치면, 강한 쪽이 이긴다.

대체로 바다가 강하다.

물고기도 강하다.

사람은 작다.

그러니까 사람은 각도를 찾아야 한다.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히.

막는 것이 아니라 흘리는 쪽으로.

죠니는 숨을 길게 뱉었다.

줄이 다시 당겨졌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가, 곧 풀었다.

이를 너무 오래 악물면 몸 전체가 굳는다.

굳으면 반응이 늦어진다.

늦으면 끝이다.

“이런 건 아직 기억하네.”

그는 자기 몸에게 말했다.

“쓸 만해.”

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가 기울었을 때, 죠니의 무릎은 알아서 균형을 잡았다.

왼쪽 어깨는 줄의 방향을 받아냈고, 등은 배의 흔들림과 물고기의 당김 사이에서 조금씩 자세를 고쳤다.

예전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망가진 것도 아니었다.

죠니는 그 사실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인정했다.

“그래.”

그는 낮게 말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지.”


---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다 위의 시간은 땅 위의 시간과 다르다.

항구에서는 해가 오르면 아침이고, 사람들이 움직이면 낮이고, 등불이 켜지면 밤이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는 줄이 시간을 만든다.

당겨지는 시간.

풀어주는 시간.

버티는 시간.

피가 마르는 시간.

다시 찢어지는 시간.

죠니는 그 시간 안에 들어갔다.

물고기는 계속 움직였다.

한 방향으로만 가지 않았다.

깊이 가라앉았다가, 조금 떠오르고, 다시 옆으로 빠졌다. 배는 그 뒤를 따라갔다.

죠니는 줄의 떨림을 읽었다.

“오른쪽.”

그는 중얼거렸다.

배가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아니. 다시 깊게.”

줄이 손바닥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손을 조금 풀어주었다.

“그래. 그렇게 가라.”

말이 이상했다.

잡으려는 물고기에게 가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지금 당장 끌어올리려 하면 놓친다.

물고기가 자기 힘으로 더 가야 했다.

멀리, 더 멀리.

그리고 언젠가 지칠 때까지.

죠니도 지칠 것이다.

그 점은 공평했다.

그는 바다 아래를 향해 말했다.

“너도 나도 별로 젊진 않나 보네.”

물고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은 무겁게 당겨졌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아니면 네가 젊고 내가 늙은 건가.”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쪽이 더 기분 나쁘네.”


---

태양은 머리 위로 올라갔다.

빛이 바다를 하얗게 만들었다.

수면은 눈부셨고, 배 안쪽은 뜨거워졌다.

죠니는 물통을 열었다.

한 모금만 마셨다.

목은 더 원했지만, 손은 줄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물통을 발치에 고정하고 다시 줄을 잡았다.

“아스트리트가 넣어둔 물이네.”

그는 물통을 보고 말했다.

“걱정이 많은 건 나쁘지 않아. 귀찮을 때가 많아서 그렇지.”

조금 뒤, 그는 다시 말했다.

“고맙다고 해둬야겠네.”

바다는 조용했다.

“돌아가면.”

그는 덧붙였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온 뒤,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돌아가면.

그것은 간단한 말인데, 바다 위에서는 조금 무겁다.

나가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다.

돌아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배가 아직 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돌아가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죠니는 줄을 붙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생각은 있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과장하지 마.”

그 말은 자기 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통증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집착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끝인가.

아니다.

물고기가 잡혀도 잃으면 끝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종종 결과 하나를 자기 전부처럼 붙잡는다.

죠니는 그런 사람들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그는 줄을 한 번 더 감았다.

“조금 덜 멍청하게 하자고.”


---

오후가 깊어지자, 물고기가 처음으로 크게 움직였다.

줄이 갑자기 왼쪽 아래로 꺾였다.

죠니는 순간적으로 몸을 숙였다.

배가 휘청였다.

물통이 굴러갈 뻔했다.

죠니는 발로 그것을 막고, 줄을 손목에 감았다.

“오.”

짧은 감탄이 입에서 나왔다.

“힘 남았네.”

줄이 미친 듯이 당겨졌다.

이번에는 천천히가 아니었다.

물고기가 달렸다.

아니, 물속에서 달린다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죠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배가 끌려갔다.

수면이 갈라졌다.

줄이 팽팽하게 뻗었다.

손바닥의 피가 다시 열렸다.

죠니는 몸을 낮췄다.

“좋아, 좋아.”

그는 빠르게 말했다.

“그렇게 갑자기 화낼 건 없잖아.”

줄이 더 세게 당겨졌다.

“아니, 화내도 돼. 내가 잡으려는 거니까.”

그는 웃음과 신음 사이의 소리를 냈다.

몸이 뒤로 끌렸다.

무릎이 배 바닥에 부딪혔다.

통증이 올라왔다.

선명했다.

죠니는 그것을 붙잡았다.

통증은 나쁘지 않다.

너무 많으면 사람을 망가뜨리지만, 적당한 통증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살아 있다.

손이 있다.

줄이 있다.

상대가 있다.

아직 놓지 않았다.

“그래.”

죠니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은 이거면 됐어.”

물고기는 계속 달렸다.

배는 끌려갔다.

바다가 물보라를 일으켰다.

죠니는 줄을 완전히 당기지 않았다.

줄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만 버텼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각도를 바꾸었다.

정면에서 옆으로.

힘에서 궤적으로.

충돌에서 회전으로.

배가 물고기의 힘에 끌리면서도, 조금씩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은 원은 아니었다.

거대한 바다 위의 느린 선회.

죠니는 그 흐름을 느꼈다.

“그래.”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도망만 가는 건 아니지.”

물고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둘 사이에는 길이 생겼다.

줄 하나.

피 묻은 손 하나.

그리고 바다 위에 그려지는 보이지 않는 원.


---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물고기는 다시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죠니는 배 안에서 숨을 고르며 앉아 있었다.

손바닥은 엉망이었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꼴이 좋네.”

잠시 뒤, 덧붙였다.

“너 말고 나도.”

그는 천 조각을 꺼내 손에 감았다.

천이 피를 먹었다.

완전히 지혈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줄을 다시 잡을 수는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죠니는 고개를 들어 바다를 보았다.

수평선은 붉어지고 있었다.

태양은 물속으로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바다는 낮보다 더 넓어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빛이 줄어들수록, 바다는 더 깊어진다.

그는 바다 아래를 향해 말했다.

“너도 지쳤지?”

대답은 없었다.

“아니면 아직 멀쩡한가.”

줄이 아주 작게 떨렸다.

죠니는 그것을 느끼고 웃었다.

“거짓말은 못 하네.”

그는 배 뒤쪽에 몸을 기대었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감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잠깐 생각할 수는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물고기를 잡으려 하는지 생각했다.

먹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극이 그렇게 열렸기 때문에.

멀리 나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빈손이었기 때문에.

모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죠니는 아주 낮게 말했다.

“네가 있어서.”

그 말은 물고기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온 만큼 먼 곳에, 네가 있었으니까.”

이건 사냥꾼의 말 같지 않았다.

승부사의 말도 아니었다.

조금 더 이상한 말이었다.

죠니는 거대한 물고기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물고기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있었다.

물고기가 없었다면, 죠니가 멀리 온 일도 그냥 바다 위의 긴 헛수고였을 것이다.

하지만 물고기는 있었다.

줄 끝에서.

깊은 곳에서.

죠니가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그래.”

죠니는 중얼거렸다.

“넌 있었어.”

그 말이 바다 위에 잠시 남았다.

그리고 바다는 어두워졌다.


---

밤이 왔다.

첫 번째 밤이었다.

죠니는 줄을 붙잡은 채 별을 보았다.

별은 많았다.

항구에서는 등불과 연기와 사람의 소리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바다 위에서는 너무 쉽게 보인다.

그는 별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별은 멀고, 차갑고, 무심하다.

그래서 좋았다.

너무 가까이 와서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죠니는 별을 보며 말했다.

“너희는 편하겠다.”

잠시 침묵.

“아니, 편한지는 모르지. 그냥 멀리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그는 피식 웃었다.

“남 일은 항상 쉬워 보여.”

줄이 다시 당겨졌다.

죠니는 곧바로 자세를 고쳤다.

“알아. 자면 안 되지.”

물고기는 밤에도 움직였다.

느리게.

끈질기게.

죠니는 그 끈질김을 싫어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몸을 배 안에 고정하고, 줄을 어깨와 등에 분산시켰다.

손만으로 버티면 손이 망가진다.

어깨만으로 버티면 어깨가 끝난다.

몸 전체가 조금씩 나눠 들어야 한다.

그것도 오래 살아남은 자의 기술이었다.

“혼자 버틴다고 꼭 한 부위만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는 중얼거렸다.

그 말은 자기 몸에게 한 말이었다.

조금은 자기 삶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바다는 검었다.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항구도 보이지 않았다.

푸리나의 무대도 없었다.

아스트리트의 걱정도 없었다.

그레이의 기록도 없었다.

죠니와 줄과 바다뿐이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물고기가 계속 헤엄치고 있었다.

죠니는 줄을 붙잡고 말했다.

“좋아.”

목소리는 낮았다.

피곤했다.

하지만 꺾이지는 않았다.

“오늘 밤은 같이 가자.”

줄이 조용히 떨렸다.

그것은 대답처럼 느껴졌다.

아니, 대답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죠니는 눈을 뜬 채 밤을 버텼다.

작은 배는 별빛 아래서 천천히 끌려갔다.

바다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고독은 차갑고, 넓고, 이상하게 정직했다.

그리고 죠니는 그 정직함이 싫지 않았다.

막은 조용히 어두워졌다.

3막 — 바다 위의 독백

그 아래, 아직 보이지 않는 손이 한 줄을 남겼다.

— 고독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듣게 한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3막 — 바다 위의 독백

— 고독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듣게 한다 —

밤은 길었다.

처음에는 별을 세려고 했다.

죠니는 실제로 별을 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자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밤바다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줄을 놓지 않는다.
몸을 배 안에 고정한다.
손이 찢어지지 않게 천을 고쳐 감는다.
물고기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몸을 낮춘다.
졸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 별을 본다.

그 정도였다.

“하나.”

죠니는 낮게 말했다.

“둘.”

거기서 그만두었다.

“재미없네.”

그는 별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별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바다는 검었고, 물고기는 아직 깊은 곳에 있었다. 줄은 여전히 팽팽했다. 배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끌려갔다.

죠니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항구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도, 해가 뜨면 어느 방향에 육지가 보일지도,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의 방향은 알 수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너는 알고 있겠지.”

그는 바다 아래의 물고기에게 말했다.

“아니면 그냥 가는 건가.”

잠시 침묵.

“그쪽도 별생각 없을 수도 있지. 나만 괜히 의미 붙이는 걸 수도 있고.”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건 좀 푸리나 같네.”

그는 잠시 푸리나를 떠올렸다.

항구 끝에 서서, 작은 돛 무대를 붙잡고, 조명을 켜고, 삶과 막과 주인공에 대해 말하려던 얼굴.

푸리나는 이런 밤에도 아마 대사를 붙일 것이다.

“바다도 하나의 무대야, 죠니!”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죠니는 그 말을 상상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너라면 그러겠지.”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고.”

바다는 무대였다.

하지만 관객은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대사도 별로 없었다.

그냥 밤과 물과 줄, 그리고 손바닥의 통증뿐이었다.

죠니는 그런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

과장하지 않아도 되는 무대.

쓰러져도 누가 의미를 붙이기 전에 먼저 아픈 곳을 확인해야 하는 무대.

좋은 무대였다.

조용하고, 불친절하고, 정직했다.


---

새벽이 오기 전, 물고기가 다시 깊이 가라앉았다.

줄이 아래로 끌렸다.

죠니의 등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몸을 조금 돌려 힘을 분산했다.

“그래, 내려가라.”

그는 말했다.

“너도 네 방식이 있겠지.”

줄이 더 깊게 당겨졌다.

배가 기울었다.

죠니는 발바닥으로 배 바닥을 눌렀다.

작은 배가 끙,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너도 불평하냐.”

그는 배에게 말했다.

“이해는 해. 나도 하고 싶어.”

배는 삐걱였지만 버텼다.

죠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배는 늙었다.

어쩌면 이 극에서 가장 산티아고에 가까운 것은 배일지도 몰랐다.

오래되고, 닳고, 그래도 바다에 뜬다.

죠니는 배 옆판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조금만 더 버텨.”

그는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조금만 더.

이 말은 위험했다.

사람은 “조금만 더”라는 말로 생각보다 멀리 간다.
살아남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한다.

죠니는 그 차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늘 지키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지.”

그는 혼잣말했다.

줄이 한 번 튕겼다.

죠니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알아. 집중할게.”

물고기가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해두면 조금 낫다.


---

해가 떠오를 무렵, 죠니는 자신의 오른손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줄을 오래 붙잡은 탓이었다.

굳은살과 상처와 피가 섞여 손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

손은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럴 때만 말을 안 듣지.”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아팠다.

손가락 관절이 삐걱였다.

그는 이를 악물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조금 악물었다.

“좋아.”

그는 손가락을 억지로 펴고, 다시 쥐었다.

“아직 붙어 있네.”

그 말은 웃기지도 않았고, 위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정도면 쓸 수 있었다.

그는 줄을 다시 감았다.

물고기는 여전히 아래에 있었다.

“너는 지치지도 않냐.”

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죠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지쳤구나.”

그는 그 떨림을 느꼈다.

아주 작은 변화.

어제의 거대한 당김과 달랐다.

힘은 여전히 컸지만, 조금씩 박자가 바뀌고 있었다.

물고기도 피로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죠니에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상대가 지쳐간다는 사실은 승리에 가까운 소식일 텐데, 죠니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러워졌다.

“너도 여기까지 왔네.”

그는 바다 아래를 향해 말했다.

“나도 그렇고.”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누가 먼저 실수하나 보자고.”

그 말에는 적의가 없었다.

오히려 예의에 가까웠다.

두 존재가 서로를 다치게 하면서도, 서로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의.

죠니는 물고기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존중하고 있었다.


---

낮이 되자 바다는 잔잔해졌다.

잔잔한 바다는 위험하다.

폭풍이 치면 누구나 조심한다.
파도가 높으면 몸이 먼저 긴장한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는 사람을 속인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바다 위의 작은 배와 깊은 물속의 거대한 물고기와 찢어진 손바닥을 모두 평평한 빛 아래 눕혀버린다.

죠니는 그런 잔잔함을 믿지 않았다.

“너도 연기할 줄 아네.”

그는 바다에게 말했다.

“푸리나랑 비슷한 점이 있군.”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푸리나는 적어도 박수라도 치지.”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남은 물을 확인했다.

많지 않았다.

아스트리트가 하나 더 넣어둔 예비 물통이 아니었다면 벌써 계산이 꼬였을 것이다.

죠니는 잠시 물통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면, 그건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는 생각했다.

아스트리트는 아마 정색하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죠니는 그 장면을 상상하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런 애들은 당연한 일을 너무 많이 하다가 지치지.”

그는 물통 뚜껑을 닫았다.

“뭐,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네.”

줄이 다시 움직였다.

죠니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물고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주 조금.

깊은 곳에서, 조금 더 얕은 곳으로.

죠니의 심장이 천천히 박자를 바꿨다.

“드디어 얼굴 보여줄 생각인가.”

그는 줄을 당기지 않았다.

기다렸다.

물고기가 스스로 올라오고 있다면, 성급하게 끌어당길 이유가 없다.

깊은 물속의 그림자가 조금씩 커졌다.

처음에는 착각처럼 보였다.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어두운 선.

그리고 그 선이 길어졌다.

더 길어졌다.

죠니는 숨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된다.

숨은 계속 가야 한다.

손도, 어깨도, 등도.

모든 것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림자가 배 옆을 지나갔다.

죠니는 그제야 처음으로 물고기의 크기를 보았다.

크다.

상상보다 컸다.

배보다 훨씬 길었다.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그 몸은, 단순한 고기가 아니라 바다의 한 조각 같았다.

죠니는 아주 낮게 말했다.

“하.”

웃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였다.

“진짜 있었네.”

물고기는 수면 아래에서 몸을 틀었다.

은빛과 푸른빛이 잠깐 번쩍였다.

청새치였다.

거대한 청새치.

긴 창 같은 주둥이와, 물살을 가르는 몸.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그 존재감은 충분했다.

죠니는 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봤다.”

그는 말했다.

“그래. 넌 있었어.”

청새치는 다시 깊어지려 했다.

죠니는 이번에는 줄을 조금 당겼다.

너무 많이는 아니고.

놓치지 않을 만큼.

“잠깐.”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얼굴 봤잖아.”

줄이 팽팽해졌다.

청새치는 저항했다.

배가 흔들렸다.

죠니의 손이 다시 찢어졌다.

피가 천 사이로 배어 나왔다.

그는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웃었다.

“좋아.”

그는 말했다.

“이제 서로 모르는 척은 못 하겠네.”


---

청새치를 본 뒤, 시간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울 때는 상상할 수 있다.

과장할 수도 있고, 축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본 뒤에는 다르다.

상대가 실제가 된다.

눈앞의 사실이 된다.

죠니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알았다.

너무 크다.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잡으려면, 아마 그만큼 아플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좋네.”

그 말은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좋다.

고통이 좋아서가 아니다.

상대가 커서 좋았다.

멀리 나온 이유가 있어서 좋았다.

자기 손에 남은 줄이 허튼줄이 아니라서 좋았다.

이 바다 위의 시간이 빈 시간이 아니라서 좋았다.

죠니는 청새치에게 말했다.

“너를 잡으면, 아마 살은 많이 남겠지.”

잠시 침묵.

“아니, 그런 생각부터 하는 건 좀 그렇군.”

그는 피식 웃었다.

“미안. 항구에는 식탁도 있으니까.”

바다는 잔잔했다.

청새치는 다시 깊은 곳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죠니는 그것을 느꼈다.

원이 작아지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이제 싸움은 다른 단계로 들어갔다.

끌려가는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서로를 중심으로 도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죠니는 줄을 손에 감고, 배의 각도를 맞췄다.

회전.

바다 위에서 만들어지는 느린 원.

청새치가 돌고, 배가 돌고, 줄이 둘 사이를 잇는다.

죠니는 그 원 안에 있었다.

“이건 좀 익숙하네.”

그는 말했다.

“바다 위라서 기분은 이상하지만.”

청새치가 다시 원을 그렸다.

죠니는 그 움직임에 맞춰 몸을 틀었다.

줄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통증은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이제 통증은 단순한 방해가 아니었다.

통증은 박자가 되었다.

당김.

숨.

피.

배의 흔들림.

청새치의 회전.

죠니의 손.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느린 궤적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더 이상 항구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도, 푸리나도, 그레이도 잠시 멀어졌다.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원이었다.

이 물고기.

이 손.

이 바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지금은 너랑 나뿐이네.”

청새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더 돌았다.

죠니는 줄을 당겼다.

아주 조금.

청새치의 원이 더 작아졌다.


---

해가 기울 무렵, 죠니는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청새치에게 말하는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손에게.

그다음에는 바다에게.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

그는 말했다.

어떤 그때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그때”가 있었다.

처음 넘어졌던 때.

다시 일어나야 했던 때.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고 느꼈던 때.

자기가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래도 움직였던 때.

죠니는 줄을 붙잡고 말했다.

“한 번 끝난 줄 알았던 것들이, 생각보다 자주 다시 시작하더라.”

청새치가 원을 돌았다.

“귀찮지.”

줄이 당겨졌다.

“아주 귀찮아.”

죠니는 손을 고쳐 잡았다.

“그런데 다시 시작하면, 또 진짜가 돼.”

그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슬픔도 아니었다.

사람은 어떤 일을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갇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반복은 감옥이다.

하지만 때로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다.

또 아프고.

또 넘어지고.

또 빈손으로 돌아오고.

또 멀리 나가고.

그래도 어느 순간, 사람은 그 반복 속에서 자기 손으로 줄을 잡는다.

죠니는 청새치를 향해 말했다.

“너는 오늘 내 돌인가.”

잠시 침묵.

“아니, 물고기한테 돌이라고 하는 건 실례겠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청새치면 청새치지.”

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청새치의 원이 더 작아졌다.

죠니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래도 다시 굴러가겠지.”

이번에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청새치에게.

바다에게.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아직 항구에 남아 있는 아스트리트에게.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해는 이제 붉었다.

바다도 붉었다.

그 붉은 빛 속에서 청새치의 그림자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더 선명했다.

죠니는 작살을 준비했다.

손은 떨렸다.

어깨는 아팠다.

등은 굳었다.

목은 말랐다.

그래도 그는 움직였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모든 것이 이 순간을 향해 원을 그려온 것처럼.

죠니는 작살을 잡았다.

청새치가 다시 돌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원에서, 그것은 배 옆으로 떠올랐다.

길고 거대한 몸.

은빛 비늘.

깊은 푸른 등.

창처럼 뻗은 머리.

죠니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그 말은 이상했다.

잡으려는 상대에게 하는 말.

죽일 상대에게 하는 말.

하지만 죠니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끌고 와줘서.”

청새치가 물살을 갈랐다.

죠니는 작살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바다는 조용해졌다.

아니, 정말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파도는 있었고,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죠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모든 소리가 잠깐 뒤로 물러났다.

줄.

손.

피.

숨.

회전.

거대한 물고기.

그리고 한 점.

죠니는 그 점을 보았다.

“좋아.”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닿자.”

막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4막 — 청새치

그 아래, 파도 사이로 한 줄이 남았다.

— 존중한다는 것은, 때로 끝까지 겨루겠다는 뜻이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3막 — 바다 위의 독백

— 고독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듣게 한다 —

밤은 길었다.

처음에는 별을 세려고 했다.

죠니는 실제로 별을 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자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밤바다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줄을 놓지 않는다.
몸을 배 안에 고정한다.
손이 찢어지지 않게 천을 고쳐 감는다.
물고기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몸을 낮춘다.
졸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 별을 본다.

그 정도였다.

“하나.”

죠니는 낮게 말했다.

“둘.”

거기서 그만두었다.

“재미없네.”

그는 별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별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바다는 검었고, 물고기는 아직 깊은 곳에 있었다. 줄은 여전히 팽팽했다. 배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끌려갔다.

죠니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항구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도, 해가 뜨면 어느 방향에 육지가 보일지도,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의 방향은 알 수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너는 알고 있겠지.”

그는 바다 아래의 물고기에게 말했다.

“아니면 그냥 가는 건가.”

잠시 침묵.

“그쪽도 별생각 없을 수도 있지. 나만 괜히 의미 붙이는 걸 수도 있고.”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건 좀 푸리나 같네.”

그는 잠시 푸리나를 떠올렸다.

항구 끝에 서서, 작은 돛 무대를 붙잡고, 조명을 켜고, 삶과 막과 주인공에 대해 말하려던 얼굴.

푸리나는 이런 밤에도 아마 대사를 붙일 것이다.

“바다도 하나의 무대야, 죠니!”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죠니는 그 말을 상상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너라면 그러겠지.”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고.”

바다는 무대였다.

하지만 관객은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대사도 별로 없었다.

그냥 밤과 물과 줄, 그리고 손바닥의 통증뿐이었다.

죠니는 그런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

과장하지 않아도 되는 무대.

쓰러져도 누가 의미를 붙이기 전에 먼저 아픈 곳을 확인해야 하는 무대.

좋은 무대였다.

조용하고, 불친절하고, 정직했다.


---

새벽이 오기 전, 물고기가 다시 깊이 가라앉았다.

줄이 아래로 끌렸다.

죠니의 등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몸을 조금 돌려 힘을 분산했다.

“그래, 내려가라.”

그는 말했다.

“너도 네 방식이 있겠지.”

줄이 더 깊게 당겨졌다.

배가 기울었다.

죠니는 발바닥으로 배 바닥을 눌렀다.

작은 배가 끙,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너도 불평하냐.”

그는 배에게 말했다.

“이해는 해. 나도 하고 싶어.”

배는 삐걱였지만 버텼다.

죠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배는 늙었다.

어쩌면 이 극에서 가장 산티아고에 가까운 것은 배일지도 몰랐다.

오래되고, 닳고, 그래도 바다에 뜬다.

죠니는 배 옆판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조금만 더 버텨.”

그는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조금만 더.

이 말은 위험했다.

사람은 “조금만 더”라는 말로 생각보다 멀리 간다.
살아남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한다.

죠니는 그 차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늘 지키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지.”

그는 혼잣말했다.

줄이 한 번 튕겼다.

죠니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알아. 집중할게.”

물고기가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해두면 조금 낫다.


---

해가 떠오를 무렵, 죠니는 자신의 오른손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줄을 오래 붙잡은 탓이었다.

굳은살과 상처와 피가 섞여 손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

손은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럴 때만 말을 안 듣지.”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아팠다.

손가락 관절이 삐걱였다.

그는 이를 악물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조금 악물었다.

“좋아.”

그는 손가락을 억지로 펴고, 다시 쥐었다.

“아직 붙어 있네.”

그 말은 웃기지도 않았고, 위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정도면 쓸 수 있었다.

그는 줄을 다시 감았다.

물고기는 여전히 아래에 있었다.

“너는 지치지도 않냐.”

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죠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지쳤구나.”

그는 그 떨림을 느꼈다.

아주 작은 변화.

어제의 거대한 당김과 달랐다.

힘은 여전히 컸지만, 조금씩 박자가 바뀌고 있었다.

물고기도 피로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죠니에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상대가 지쳐간다는 사실은 승리에 가까운 소식일 텐데, 죠니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러워졌다.

“너도 여기까지 왔네.”

그는 바다 아래를 향해 말했다.

“나도 그렇고.”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누가 먼저 실수하나 보자고.”

그 말에는 적의가 없었다.

오히려 예의에 가까웠다.

두 존재가 서로를 다치게 하면서도, 서로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의.

죠니는 물고기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존중하고 있었다.


---

낮이 되자 바다는 잔잔해졌다.

잔잔한 바다는 위험하다.

폭풍이 치면 누구나 조심한다.
파도가 높으면 몸이 먼저 긴장한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는 사람을 속인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바다 위의 작은 배와 깊은 물속의 거대한 물고기와 찢어진 손바닥을 모두 평평한 빛 아래 눕혀버린다.

죠니는 그런 잔잔함을 믿지 않았다.

“너도 연기할 줄 아네.”

그는 바다에게 말했다.

“푸리나랑 비슷한 점이 있군.”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푸리나는 적어도 박수라도 치지.”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남은 물을 확인했다.

많지 않았다.

아스트리트가 하나 더 넣어둔 예비 물통이 아니었다면 벌써 계산이 꼬였을 것이다.

죠니는 잠시 물통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면, 그건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는 생각했다.

아스트리트는 아마 정색하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죠니는 그 장면을 상상하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런 애들은 당연한 일을 너무 많이 하다가 지치지.”

그는 물통 뚜껑을 닫았다.

“뭐,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네.”

줄이 다시 움직였다.

죠니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물고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주 조금.

깊은 곳에서, 조금 더 얕은 곳으로.

죠니의 심장이 천천히 박자를 바꿨다.

“드디어 얼굴 보여줄 생각인가.”

그는 줄을 당기지 않았다.

기다렸다.

물고기가 스스로 올라오고 있다면, 성급하게 끌어당길 이유가 없다.

깊은 물속의 그림자가 조금씩 커졌다.

처음에는 착각처럼 보였다.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어두운 선.

그리고 그 선이 길어졌다.

더 길어졌다.

죠니는 숨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된다.

숨은 계속 가야 한다.

손도, 어깨도, 등도.

모든 것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림자가 배 옆을 지나갔다.

죠니는 그제야 처음으로 물고기의 크기를 보았다.

크다.

상상보다 컸다.

배보다 훨씬 길었다.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그 몸은, 단순한 고기가 아니라 바다의 한 조각 같았다.

죠니는 아주 낮게 말했다.

“하.”

웃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였다.

“진짜 있었네.”

물고기는 수면 아래에서 몸을 틀었다.

은빛과 푸른빛이 잠깐 번쩍였다.

청새치였다.

거대한 청새치.

긴 창 같은 주둥이와, 물살을 가르는 몸.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그 존재감은 충분했다.

죠니는 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봤다.”

그는 말했다.

“그래. 넌 있었어.”

청새치는 다시 깊어지려 했다.

죠니는 이번에는 줄을 조금 당겼다.

너무 많이는 아니고.

놓치지 않을 만큼.

“잠깐.”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얼굴 봤잖아.”

줄이 팽팽해졌다.

청새치는 저항했다.

배가 흔들렸다.

죠니의 손이 다시 찢어졌다.

피가 천 사이로 배어 나왔다.

그는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웃었다.

“좋아.”

그는 말했다.

“이제 서로 모르는 척은 못 하겠네.”


---

청새치를 본 뒤, 시간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울 때는 상상할 수 있다.

과장할 수도 있고, 축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본 뒤에는 다르다.

상대가 실제가 된다.

눈앞의 사실이 된다.

죠니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알았다.

너무 크다.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잡으려면, 아마 그만큼 아플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좋네.”

그 말은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좋다.

고통이 좋아서가 아니다.

상대가 커서 좋았다.

멀리 나온 이유가 있어서 좋았다.

자기 손에 남은 줄이 허튼줄이 아니라서 좋았다.

이 바다 위의 시간이 빈 시간이 아니라서 좋았다.

죠니는 청새치에게 말했다.

“너를 잡으면, 아마 살은 많이 남겠지.”

잠시 침묵.

“아니, 그런 생각부터 하는 건 좀 그렇군.”

그는 피식 웃었다.

“미안. 항구에는 식탁도 있으니까.”

바다는 잔잔했다.

청새치는 다시 깊은 곳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죠니는 그것을 느꼈다.

원이 작아지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이제 싸움은 다른 단계로 들어갔다.

끌려가는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서로를 중심으로 도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죠니는 줄을 손에 감고, 배의 각도를 맞췄다.

회전.

바다 위에서 만들어지는 느린 원.

청새치가 돌고, 배가 돌고, 줄이 둘 사이를 잇는다.

죠니는 그 원 안에 있었다.

“이건 좀 익숙하네.”

그는 말했다.

“바다 위라서 기분은 이상하지만.”

청새치가 다시 원을 그렸다.

죠니는 그 움직임에 맞춰 몸을 틀었다.

줄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통증은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이제 통증은 단순한 방해가 아니었다.

통증은 박자가 되었다.

당김.

숨.

피.

배의 흔들림.

청새치의 회전.

죠니의 손.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느린 궤적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더 이상 항구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도, 푸리나도, 그레이도 잠시 멀어졌다.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원이었다.

이 물고기.

이 손.

이 바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지금은 너랑 나뿐이네.”

청새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더 돌았다.

죠니는 줄을 당겼다.

아주 조금.

청새치의 원이 더 작아졌다.


---

해가 기울 무렵, 죠니는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청새치에게 말하는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손에게.

그다음에는 바다에게.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

그는 말했다.

어떤 그때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그때”가 있었다.

처음 넘어졌던 때.

다시 일어나야 했던 때.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고 느꼈던 때.

자기가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래도 움직였던 때.

죠니는 줄을 붙잡고 말했다.

“한 번 끝난 줄 알았던 것들이, 생각보다 자주 다시 시작하더라.”

청새치가 원을 돌았다.

“귀찮지.”

줄이 당겨졌다.

“아주 귀찮아.”

죠니는 손을 고쳐 잡았다.

“그런데 다시 시작하면, 또 진짜가 돼.”

그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슬픔도 아니었다.

사람은 어떤 일을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갇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반복은 감옥이다.

하지만 때로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다.

또 아프고.

또 넘어지고.

또 빈손으로 돌아오고.

또 멀리 나가고.

그래도 어느 순간, 사람은 그 반복 속에서 자기 손으로 줄을 잡는다.

죠니는 청새치를 향해 말했다.

“너는 오늘 내 돌인가.”

잠시 침묵.

“아니, 물고기한테 돌이라고 하는 건 실례겠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청새치면 청새치지.”

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청새치의 원이 더 작아졌다.

죠니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래도 다시 굴러가겠지.”

이번에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청새치에게.

바다에게.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아직 항구에 남아 있는 아스트리트에게.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해는 이제 붉었다.

바다도 붉었다.

그 붉은 빛 속에서 청새치의 그림자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더 선명했다.

죠니는 작살을 준비했다.

손은 떨렸다.

어깨는 아팠다.

등은 굳었다.

목은 말랐다.

그래도 그는 움직였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모든 것이 이 순간을 향해 원을 그려온 것처럼.

죠니는 작살을 잡았다.

청새치가 다시 돌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원에서, 그것은 배 옆으로 떠올랐다.

길고 거대한 몸.

은빛 비늘.

깊은 푸른 등.

창처럼 뻗은 머리.

죠니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그 말은 이상했다.

잡으려는 상대에게 하는 말.

죽일 상대에게 하는 말.

하지만 죠니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끌고 와줘서.”

청새치가 물살을 갈랐다.

죠니는 작살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바다는 조용해졌다.

아니, 정말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파도는 있었고,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죠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모든 소리가 잠깐 뒤로 물러났다.

줄.

손.

피.

숨.

회전.

거대한 물고기.

그리고 한 점.

죠니는 그 점을 보았다.

“좋아.”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닿자.”

막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4막 — 청새치

그 아래, 파도 사이로 한 줄이 남았다.

— 존중한다는 것은, 때로 끝까지 겨루겠다는 뜻이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4막 — 청새치

— 존중한다는 것은, 때로 끝까지 겨루겠다는 뜻이다 —

청새치는 물 위로 올라왔다.

처음부터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깊은 물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먼저 떠올랐다.
그림자는 배 밑을 지나며 바다의 색을 바꾸었다.
푸른 물은 순간적으로 더 짙어졌고, 햇빛은 그 몸 위에서 은빛으로 부서졌다.

그리고 마침내 등지느러미가 수면을 갈랐다.

죠니는 숨을 멈추지 않았다.

숨을 멈추면 몸이 늦어진다.

그는 천천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손은 피투성이였고, 어깨는 불에 달군 쇠처럼 뜨거웠다. 등은 오래전부터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래도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청새치는 배 옆을 지나갔다.

길었다.

배보다 길었다.

그 몸은 늙은 바다 자체가 잠시 고기의 형상을 빌린 것 같았다.
창처럼 뻗은 주둥이.
깊은 물을 오래 헤엄친 푸른 등.
수면 가까이 오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은빛 옆구리.

죠니는 작살을 잡았다.

손이 미끄러졌다.

피 때문이었다.

그는 작살대를 다시 고쳐 쥐었다.

“이런 순간에 꼭 이러지.”

그는 자기 손에게 말했다.

“그래도 네 잘못만은 아니야. 내가 너무 오래 시켰지.”

청새치는 다시 원을 그렸다.

큰 원.

조금 작아진 원.

더 작아진 원.

죠니는 그 원을 읽었다.

청새치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직 끝까지 자기 몸을 알고 있었다.
어디서 힘을 아껴야 하는지, 어디서 마지막으로 밀어붙여야 하는지, 어디서 사람을 속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죠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너도 꽤 오래 해먹었구나.”

그는 낮게 말했다.

“아니면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랬나.”

물고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돌았다.

죠니는 배 끝에 몸을 낮추었다.

줄은 그의 왼손에 걸려 있었다.

작살은 오른손에 있었다.

오른손은 아직 완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

청새치가 두 번째로 가까이 왔을 때, 죠니는 던지지 않았다.

각도가 좋지 않았다.

거리도 나쁘지 않았고, 물고기의 몸도 충분히 드러났지만, 그 한 점은 아니었다.

조급한 사람이라면 던졌을 것이다.

오랫동안 빈손이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죠니는 던지지 않았다.

그는 작살을 든 채, 청새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직 아니야.”

그는 말했다.

그 말은 청새치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향했다.

“아직 아니야.”

청새치는 깊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랐다.

배가 흔들렸다.

죠니의 무릎이 배 바닥에 부딪혔다.

통증이 올라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괜찮아.”

이번에는 자기 몸에게 말했다.

“이 정도는 계속 말해도 안 속겠지만, 그래도 들어.”

바람이 바뀌었다.

바다가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태양은 이제 기울고 있었고, 수면은 붉은 금빛을 품었다.

그 빛 속에서 청새치가 다시 떠올랐다.

세 번째 원.

죠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청새치의 옆구리에 난 상처와 비늘의 무늬까지 보였다.

그 몸은 아름다웠다.

먹기 위한 고기라고 부르기엔 너무 컸고, 적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당당했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해서, 잡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존중한다는 것은 물러난다는 뜻만은 아니다.

때로는 끝까지 겨룬다는 뜻이다.

죠니는 작살을 들었다.

“고맙다.”

그는 다시 말했다.

“여기까지 끌고 와줘서.”

청새치가 물살을 갈랐다.

그리고 그 순간, 죠니는 던졌다.

작살이 날아갔다.

그것은 크게 휘두른 일격이 아니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바다를 가르는 유성도 아니고, 극장의 조명을 받는 결전 장면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이, 오래 기다린 한 점을 향해 자기 몸에 남은 힘을 정확히 밀어 넣는 동작이었다.

작살은 청새치의 몸에 꽂혔다.

깊이.

정확하게.

청새치가 몸을 뒤틀었다.

바다가 터졌다.

물보라가 배를 덮쳤다.

죠니는 줄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배가 크게 기울었다.

작살대가 떨렸다.

청새치는 마지막 힘으로 물 위를 갈랐다.

그 몸이 거의 전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죠니는 그 순간을 보았다.

아주 짧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거대한 물고기가 붉은 태양 아래 솟아오르고, 배보다 긴 몸이 공중에서 휘어지고, 바닷물이 은빛으로 흩어지고, 세상이 한순간 모든 소리를 잃는 장면.

그 순간 죠니는 생각했다.

닿았다.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올 필요도 없었다.

몸이 먼저 알았다.

손이 알았다.

찢어진 손바닥과 굳은 어깨와 아픈 무릎이 모두 알았다.

닿았다.

청새치는 바다로 떨어졌다.

큰 소리가 났다.

물결이 배를 밀었다.

죠니는 배 안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발을 버텼다.

줄이 다시 팽팽해졌다가, 조금씩 느슨해졌다.

청새치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멀리 가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자기 몸을 확인하는 움직임.

바다를 떠나기 전, 바다가 자기 것임을 한 번 더 말하는 움직임.

죠니는 작살대를 붙잡은 채 숨을 쉬었다.

거칠게.

느리게.

아프게.

그는 청새치가 천천히 옆으로 기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그 목소리에는 환호가 없었다.

승자의 외침도 없었다.

“잡았어.”

그뿐이었다.


---

청새치를 배 옆에 묶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잡는 일보다, 묶는 일이 더 힘들 때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도달의 순간만 이야기한다.

작살이 꽂히는 순간.
검이 닿는 순간.
깃발이 꽂히는 순간.
박수가 터지는 순간.

하지만 그 이후가 있다.

잡은 것을 끌고 돌아가야 하는 시간.

손에 넣은 것을 어떻게 묶을지, 어떻게 지킬지, 어떻게 함께 움직일지 결정해야 하는 시간.

죠니는 청새치를 배 옆에 묶었다.

청새치는 너무 컸다.

배 안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러니 배 옆에 묶어야 했다.

줄을 감고, 매듭을 짓고, 다시 확인했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빨로 줄 끝을 물고 당겼다.

피와 소금 맛이 났다.

“항구에 가져가면 난리 나겠네.”

그는 중얼거렸다.

“푸리나는 분명 과장할 거고.”

그는 잠시 푸리나의 얼굴을 상상했다.

눈을 크게 뜨고, 양손을 들고, “여러분! 보십시오! 바다가 내어준 거대한—”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건 좀 봐주라.”

그는 다시 매듭을 확인했다.

그레이는 어떻게 기록할까.

청새치의 길이.

무게 추정.

소실 여부.

귀환 시간.

피해 정도.

아스트리트는 아마 먼저 배를 볼 것이다.

배가 부서졌는지.

죠니가 다쳤는지.

그리고 청새치를 보고 말을 잃을 것이다.

“그래.”

죠니는 줄을 한 번 더 묶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되겠네.”

그 말은 단순했다.

그러나 지금은, 물고기를 잡는 일만큼 중요했다.

돌아간다.

잡았다면 돌아가야 한다.

닿았다면 돌아가야 한다.

그곳에 닿았다는 사실을, 삶의 나머지 부분으로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죠니는 배 옆에 묶인 청새치를 보았다.

거대한 몸이 물결에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죽은 뒤에도.

아니, 죽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느낌이었다.

생명은 떠났지만, 그 몸에는 방금까지 바다를 가르던 궤적이 남아 있었다.

죠니는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바다가 조용했다.

“그건 좀 이상하잖아.”

그는 청새치를 보았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할 수 있지.”

수면이 붉게 흔들렸다.

죠니는 작살을 내려놓고, 노를 잡았다.

“가자.”

그는 배에게 말했다.

“우리 둘 다 돌아가야지.”

그리고 아주 잠깐 멈췄다.

“아니, 셋인가.”

그는 배 옆의 청새치를 보았다.

“그래. 셋.”

작은 배와 늙은 말과 거대한 청새치.

셋은 붉은 바다 위에서 천천히 항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

귀환의 첫 시간은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청새치는 배 옆에 묶여 있었고, 물살은 무거워졌다.
배는 전보다 느렸다.
노를 저을 때마다, 죠니는 청새치의 무게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무게는 승리의 무게였다.

동시에 빚의 무게였다.

무언가를 잡는다는 것은, 그 무게를 데려오는 일이다.

죠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것까지 생각하게 만들다니.”

그는 청새치에게 말했다.

“너도 꽤 성가신 놈이야.”

물고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다는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죠니는 하늘을 보았다.

해가 거의 내려갔다.

밤이 오기 전에 항구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문제는 밤이 아니었다.

문제는 피였다.

청새치의 피가 바다에 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얇았다.

붉은 실처럼.

그러나 바다는 피를 숨기지 못한다.

냄새는 퍼진다.

깊은 곳으로.

먼 곳으로.

누군가는 그것을 맡을 것이다.

죠니는 수면을 보았다.

“오겠네.”

그는 말했다.

상어.

그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바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죠니도 알고 있었다.

청새치를 잡는 일이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더 지저분할 수 있다.

도달은 깨끗한데, 귀환은 종종 더럽다.

피와 소금과 뜯겨나가는 살과, 더는 완벽하지 않은 결과를 붙잡고 돌아가는 시간.

죠니는 노를 저었다.

조금 더 빨리.

하지만 무리하지 않았다.

무리하면 몸이 먼저 무너진다.

그는 배 옆의 청새치를 보았다.

“미리 말해두는데.”

그는 낮게 말했다.

“전부 지킬 수는 없을지도 몰라.”

잠시 침묵.

“그래도 너무 쉽게 내주진 않을 거야.”

그는 작살을 확인했다.

작살 하나.

칼 하나.

노.

상처 입은 손.

작은 배.

그리고 바다.

상어가 오면 충분한 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늘 충분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은 없다.

죠니는 칼을 가까이에 두었다.

“항상 이렇지.”

그는 중얼거렸다.

“잡는 것보다 지키는 게 어렵다니까.”

해가 졌다.

바다는 어두워졌다.

청새치의 피는 검은 물 위에 붉은 길을 만들었다.

죠니는 그 길을 보았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정직했다.

그 길을 따라, 먼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죠니는 그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바다가 바뀌었다.

조용한 물이 날카로워졌다.

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배 옆의 청새치에게 말했다.

“미안. 조용히 돌아가긴 글렀네.”

그리고 잠시 뒤, 바다 위에 첫 번째 지느러미가 나타났다.

검고 낮게.

물살을 가르며.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입가가 굳었다.

“왔네.”

상어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왔다.

죠니는 노를 내려놓고 작살을 잡았다.

손이 아팠다.

그는 손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리고 곧바로 정정했다.

“아니, 아마 여러 번 더.”

그는 작살을 들어 올렸다.

상어가 청새치의 몸을 향해 돌진했다.

죠니는 몸을 낮추었다.

“좋아.”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선명했다.

“이제 지저분한 막이군.”

상어가 뛰어올랐다.

죠니가 작살을 내질렀다.

밤의 바다 위에서, 피와 물보라가 함께 튀었다.

막은 닫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칠게 열렸다.

5막 — 상어들

그 아래, 바닷물과 피 사이로 한 줄이 새겨졌다.

— 도달한 것을 지키려는 순간, 사람은 자신까지 내어놓고 싶어진다 —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 5막 — 상어들

### — 도달한 것을 지키려는 순간, 사람은 자신까지 내어놓고 싶어진다 —

첫 번째 상어는 빠르게 왔다. 청새치가 그랬던 것처럼 깊은 곳에서 오래 돌지도 않았고, 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무게를 묻지도 않았다. 청새치는 죠니를 시험했고, 죠니도 청새치를 시험했다. 둘은 서로를 다치게 하면서도, 적어도 상대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상어는 달랐다. 그것은 피 냄새를 맡았고,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왔다. 그뿐이었다.

죠니는 작살을 들었다. 오른손은 이미 청새치를 찌를 때 자기 몫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굳어 있었고, 손바닥을 감싼 천 아래에서는 피가 다시 번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와 소금에 젖은 천이 손가락 사이에서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알아. 네 입장에선 퇴근 시간이겠지.”

상어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살을 갈랐다. 검은 등과 낮은 지느러미, 물 위로 잠깐 드러난 차갑고 단순한 눈. 죠니는 그 눈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할 틈도 없었다.

상어가 청새치의 옆구리를 물었다. 거대한 몸이 흔들렸고, 죠니는 작살을 내질렀다. 작살은 깊이 박혔다. 상어가 몸부림치자 작살대가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를 타고 올라와 그의 몸을 비틀었다. 죠니는 이를 악물었다가, 곧 풀었다. 너무 오래 이를 악물면 몸이 굳는다. 몸이 굳으면 늦어진다. 늦어지면 끝난다.

“너도 살려고 먹는 거겠지.”

그는 숨을 밀어내듯 말했다.

“나도 살려고 막는 거고.”

죠니는 작살대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상어의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지다가, 어느 순간 힘을 잃었다. 검은 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죠니는 숨을 몰아쉬며 작살대를 당겼다. 그러나 작살은 돌아오지 않았다. 죽은 상어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작살까지 함께 끌고 갔다.

죠니는 잠시 빈손을 보았다. 손에는 작살이 없었다. 배 옆에는 청새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청새치의 살은 조금 뜯겨나가 있었다.

그는 그 자리를 오래 보았다. 흰 살과 붉은 피. 방금까지 완전했던 결과가, 이제 완전하지 않았다.

“벌써 한 입이냐.”

목소리는 낮았다.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물속으로 사라진 작살 쪽을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비싼 한 입이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청새치의 피는 더 넓게 퍼졌다. 밤바다는 검었고, 피는 처음에는 붉었다가 곧 어둠에 섞였다. 하지만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피는 초대장이다. 보내고 싶지 않아도 바다가 대신 보낸다. 죠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배 안을 뒤졌다. 작살은 잃었다. 남은 것은 칼 하나와 노, 줄, 그리고 자기 몸뿐이었다.

죠니는 칼을 노 끝에 묶기 시작했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매듭은 자꾸 느슨해졌다. 한 번 실패하고,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에는 이빨까지 써서 줄을 당겼다. 피와 소금 맛이 입안에 번졌다.

“이런 걸 항구에서 보면 그레이가 싫어하겠지.”

그는 느슨한 매듭을 다시 당겼다.

“임시 장비 규격 미달, 뭐 그런 식으로.”

죠니는 묶은 칼을 흔들어보았다. 튼튼하지 않았다. 하지만 쓸 수는 있었다.

“그 정도면 됐어.”

그는 노 끝의 칼을 들고 배 옆에 섰다. 청새치는 조용히 배 옆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몸은 여전히 컸지만, 처음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살이 뜯겨나가서만은 아니었다. 한 번 손상된 성취는 이상하게 눈에 다르게 보인다. 죠니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아직 너야.”

그는 청새치에게 말했다.

“한 입 뜯겼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지.”

잠시 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한테도 편하고.”

바다 위에 두 번째 지느러미가 나타났다. 곧 세 번째도 보였다. 어둠 때문에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죠니는 입을 다물었다. 상어들은 첫 번째처럼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이제 피가 많았고, 먹이는 컸으며, 배 위의 인간은 지쳐 있었다. 그들도 그것을 아는 듯했다.

죠니는 배와 청새치 사이에 몸을 두었다. 우스운 자세였다. 작은 배 위의 한 남자가 바다와 상어들 사이에 서 있다. 무엇을 막겠다는 건가. 거대한 청새치인가. 자기 승리인가. 자기 고집인가. 아니면, 그곳까지 갔다는 사실인가.

상어 하나가 옆으로 들어왔다. 죠니는 노 끝의 칼을 찔렀다. 칼은 상어의 등 가까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깊지 않았다. 상어가 물러나는 사이, 다른 상어가 청새치의 꼬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죠니는 몸을 돌렸지만 늦었다. 상어가 물었고, 살이 뜯겨나갔다. 죠니는 이를 악물고 칼노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맞았다. 상어가 몸을 튕겼고, 물이 튀었고, 노가 부러질 듯 휘었다.

“그건 내 거야.”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죠니는 그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것.

청새치는 정말 그의 것이었나. 잡았으니 그의 것인가. 죽였으니 그의 것인가. 항구로 가져가려 했으니 그의 것인가. 아니면, 그곳까지 함께 간 시간이 있었으니 그의 것인가.

상어가 다시 돌았다. 죠니는 숨을 거칠게 쉬며 노를 고쳐 잡았다.

“좋아. 말 정정하지.”

상어가 다가왔다.

“전부 내 거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는 칼노를 낮게 겨눴다.

“하지만 너무 쉽게 가져가게 둘 생각도 없어.”

죠니는 다시 찔렀다. 칼이 상어의 머리 근처에 꽂혔고, 상어가 몸부림쳤다. 노가 손에서 빠질 뻔했다. 죠니는 버텼다. 손바닥이 다시 찢어지고, 천은 더 붉어졌다. 욕이 나왔다. 그 욕은 상어에게도, 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향했다.

상어는 결국 물러났지만 청새치의 살은 더 사라졌다. 죠니는 그 빈자리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점점 줄어든다. 자기가 지키는 동안에도, 싸우는 동안에도, 결과는 뜯겨나간다.

그는 갑자기 웃을 뻔했다. 정말 지독하게 익숙한 구조였다.

“그래.”

죠니는 낮게 말했다.

“세상 참 성실하네.”

밤은 더 깊어졌다. 상어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멀어졌다가 다시 왔고, 죠니는 그때마다 찔렀고, 때렸고, 밀어냈다. 처음에는 칼노가 있었다. 그다음에는 칼이 빠졌다. 상어의 몸에 박힌 채 사라졌다. 그러자 노만 남았다. 그는 노로 때렸다. 노는 상어를 죽이지 못했지만, 가끔 물러나게 할 수는 있었다. 그 정도면 싸움이 되었다. 잠시 동안은.

노가 부러졌을 때, 죠니는 부러진 노토막을 들고 잠깐 내려다보았다.

“좋아. 짧아졌네.”

상어 하나가 청새치의 옆구리로 달려들었고, 죠니는 노토막으로 그것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하고 축축한 소리가 났다. 상어가 비틀리는 사이 다른 상어가 반대쪽에서 물었다. 그는 돌아섰지만 늦었다. 살이 또 뜯겼다.

그 순간 몸이 먼저 나가려 했다. 청새치 쪽으로, 상어 쪽으로, 바다 속으로라도 뛰어들 듯이. 죠니는 아주 잠깐 멈췄다. 자기 발을 보았다. 아직 배 위에 있는 발. 아직 배 안에 남아 있는 몸.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자신도 함께 뜯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조금씩 뜯기고 있었다. 손, 어깨, 피, 숨, 고집, 증명하고 싶은 마음, 도달한 것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모든 것이 상어들에게 살점처럼 던져지고 있었다.

“너를 지키는 건지.”

상어가 다시 돌았다.

“나를 증명하는 건지.”

죠니는 부러진 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끔 헷갈린다니까.”

상어가 달려들었다. 죠니는 노토막을 휘둘렀고, 상어가 벌린 입 안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상어가 물었다. 노토막이 부서졌다. 죠니의 손이 빈손이 되었다. 상어는 물러났지만 무기는 사라졌다.

그는 빈손을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지쳤다. 정말 지쳤다.

“이제 맨손으로 하라고?”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좀 너무하네.”

그러나 상어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다시 왔다. 죠니는 배 안에 남은 작은 나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때리고 밀고 소리쳤다. 피와 물이 튀었다. 청새치의 살은 계속 줄었고, 죠니는 계속 싸웠다. 밤은 그 모든 것을 삼켰다.

어느 순간 죠니는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상어들이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바다에는 언제나 더 있다. 다만 청새치에게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거의 사라졌을 뿐이다. 상어들은 목적을 잃었거나, 목적을 달성했다.

배 옆에는 거대한 뼈대가 남아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등뼈, 길고 아름다웠던 몸의 구조, 창처럼 뻗은 머리. 넓었던 살은 거의 없었다.

죠니는 배 안에 주저앉았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작살도 없고, 칼도 없고, 노도 멀쩡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피 묻은 손과, 뜯겨나간 청새치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배였다. 그는 숨을 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숨에서 기침이 나왔다. 목 안에 소금기가 있었다.

상어들의 지느러미는 보이지 않았다. 밤은 너무 조용했다. 죠니는 배 옆의 뼈를 오래 보았다. 완전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뼈는 남았다. 크게, 분명하게, 부정할 수 없게.

“그래도 넌 컸어.”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로 컸어.”

죠니는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오히려 얼굴에 피와 소금이 더 묻었다.

“항구 사람들이 보면 믿긴 하겠네.”

그는 배 옆의 뼈를 보았다.

“살은 없지만.”

죠니는 웃었다. 조금 소리가 난 웃음이었다. 쓴웃음이었지만, 완전히 허무한 웃음은 아니었다.

“미안하다.”

아까는 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왔다. 죠니는 잠시 그 말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안하긴 한데, 후회는 아냐.”

이상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맞는 말이었다. 그는 청새치를 잡았다. 죽였다. 지키지 못했다. 상어들에게 거의 다 빼앗겼다. 자기 몸도 많이 깎았다. 그래도 그 바다로 나간 것을 후회하는가. 아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줄을 놓을 것인가. 아니.

다만 다음에는 좀 덜 멍청하게 싸워야겠지. 죠니는 자기 손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너를 지키겠다고 나까지 전부 던지는 건, 좀 아니었어.”

밤바다가 조용히 흔들렸다. 그는 등을 배에 기대고 별을 보았다. 별은 아까보다 더 많아 보였다.

“웃기지.”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아팠다.

“결과가 거의 다 뜯겨나갔는데, 그래도 잡았다는 생각은 사라지질 않아.”

한참 뒤, 그는 덧붙였다.

“그게 문제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네.”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고개를 돌려 배 옆의 뼈를 보았다.

“뭐, 지금은 다행 쪽으로 해두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항구로 돌아가야 했다. 노는 부러졌고, 손은 엉망이고, 배는 무거웠다. 하지만 돌아가야 했다. 뼈만 남았더라도. 아니, 뼈만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돌아가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바다 위에서 끝난 일이 된다. 죠니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도달은 돌아가야 삶이 된다.

그는 부러진 노를 다시 잡았다. 쓸 수 있는 부분은 우스울 정도로 짧았다.

“이걸로 가라고?”

그는 노를 물에 넣었다.

“좋아. 오늘은 너도 고생한다.”

배는 제대로 저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둔중한 노인처럼 움직였다. 아주 조금. 죠니는 다시 저었다. 배는 천천히 방향을 잡았고, 청새치의 뼈는 배 옆에서 물살을 갈랐다. 상어들이 뜯어간 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작살도 돌아오지 않는다. 피도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배는 움직였다.

죠니는 이를 악물었다가, 곧 풀었다.

“또 멀어졌네.”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그래도 내 바다였어.”

잠시 뒤, 그는 덧붙였다.

“언제나의 돌격이 아니라, 물고기였지만.”

피곤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작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웃음이었다. 작은 배는 밤바다를 헤치며, 아주 느리게 항구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막은 피 냄새와 소금 냄새 속에서 천천히 낮아졌다.

**6막 — 뼈만 남은 귀환**

그 아래, 부러진 노 끝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한 줄이 남았다.

**— 빼앗긴 결과가 도달한 사실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프롤로그 — 오늘이라는 무대

### — 이것도 극이야? 그냥 일인데 —

아침은 대체로 극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죠니 죠스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쟁터의 새벽처럼 피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왕궁의 대관식처럼 금실과 향 냄새가 섞이는 것도 아니며, 신전의 축일처럼 누군가가 종을 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직 덜 깬 사람들의 발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장부가 어디 갔습니까?” 하고 묻는 소리와, 또 다른 누군가가 “전하께서 가져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소리로 시작되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러니까, 더 문제였다.

평범한 아침은 방심하게 만든다. 사람이 정말로 망가지는 건 대개 장엄한 전투 한가운데가 아니라,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하루가 조금씩 삐걱이다가 끝내 발목을 잡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죠니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바깥의 빛은 아직 부드러웠고, 성벽 아래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물동이를 들고 지나갔고, 누군가는 말에게 여물을 주었으며, 아이 하나는 빵을 훔치다 들켜 도망치고 있었다. 훔친 빵을 든 아이는 빠르지 않았지만, 잡으러 가는 어른도 진심으로 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죠니는 그 광경을 보며 낮게 말했다.

“좋은 추격전은 아니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온 푸리나였다.

“그럼 제목을 붙여주면 좋아질지도 모르지!”

죠니는 고개를 돌렸다. 푸리나는 이미 아침부터 무언가를 꾸민 얼굴이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녀가 저런 얼굴을 할 때마다 누군가는 배역을 맡았고, 누군가는 소품을 들었고, 누군가는 자기가 왜 무대 위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대체로 그 셋 중 하나는 죠니였다.

그는 잠깐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아침부터?”

“아침이니까.”

“그게 이유가 돼?”

“물론.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은 원래 가장 훌륭한 개막 시간이야.”

“잠을 덜 깬 사람을 속이기 좋은 시간이라는 뜻이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양피지 한 장을 펼쳤다. 양피지에는 제목으로 보이는 글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제목치고는 지나치게 길었다. 죠니는 그걸 보자마자 피곤해졌다.

“읽지 마.”

“아직 안 읽었는데?”

“이미 길어 보여.”

푸리나는 양피지를 가슴에 안고 말했다.

“오늘의 극은 아주 특별해. 전쟁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왕관도 아니고, 죽은 자의 성도 아니야.”

“그럼 더 위험하네.”

“왜?”

“네가 특별하지 않은 걸 특별하게 만들려고 할 때 제일 피곤하거든.”

푸리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그건 좀 맞아.”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해서 고맙네.”

푸리나는 웃으며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창밖을 보았다. 아침빛 아래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하루는 움직이고 있었다. 물류 창고 쪽에서는 누군가 물건 목록을 부르고 있었고, 병사들은 교대 인원을 확인하고 있었으며, 성문 쪽에서는 전선 시찰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거대한 사건은 없었다. 하지만 작은 일들은 이미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그냥 하루야.”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럼 극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극이지.”

죠니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 말, 오늘 몇 번이나 할 생각이야?”

“필요할 때마다.”

“많겠네.”

그때 문밖에서 낮은 노크 소리가 났다. 그레이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장부가 있었다. 장부가 있다는 것은 대개 좋지 않은 뜻이었다. 특히 그레이가 아침 일찍 장부를 들고 나타났다면 더더욱.

그레이는 푸리나와 죠니를 번갈아 보았다.

“전하. 그리고 죠니 경. 아침 회의 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죠니는 그레이의 장부를 보고 말했다.

“그거 죽은 장부야?”

그레이는 아주 잠깐 멈췄다.

“장부는 생물체가 아닙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표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네 표정인가.”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죠니는 더 묻지 않았다.

푸리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문제야?”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페이지마다 숫자가 빽빽했다. 보급품, 마차, 말, 의약품, 수리용 목재, 화살, 빵, 그리고 누군가가 왜 기록했는지 알 수 없는 고양이 인형 세 개.

그레이가 말했다.

“전선 시찰용 배급 수량과 창고 반출 기록이 맞지 않습니다. 차이는 크지 않지만, 그대로 두면 오후에 추가 조정이 필요합니다.”

죠니는 장부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숫자가 틀렸다는 말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특히 누군가가 그것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보고 있을 때는 더 그렇다.

그는 결국 장부를 흘끗 보았다.

“여기.”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입니까?”

죠니는 손가락으로 한 줄을 가리켰다.

“이 숫자, 여기서 이미 죽었네.”

그레이는 다시 한 번 멈췄다.

“숫자는 죽지 않습니다.”

“이건 죽었어. 장례 치러줘.”

푸리나가 웃음을 참다가 실패했다. 그레이는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지만, 곧 장부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죠니가 가리킨 줄을 따라가더니, 조용히 말했다.

“확실히 이 항목에서 중복 계산이 있습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봐. 사망 확인.”

“정정하겠습니다. 사망이 아니라 중복입니다.”

“그게 장부식 장례인가 보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펜이 움직였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죠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오늘의 극이 벌써 시작됐다는 얼굴.”

죠니는 장부와 푸리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극이야?”

푸리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죠니는 천천히 말했다.

“그냥 일이잖아.”

“그러니까 극이지.”

죠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이 하루, 시작부터 피곤하네.”

---

아침 회의실은 조금 뒤에 더 피곤해졌다.

레이튼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 자체는 평범했다. 국경 마을 쪽의 물자 배분, 전선 시찰 경로, 피난민 임시 숙소, 주변 아미르들의 동향 확인, 그리고 푸리나가 몰래 넣은 “공연용 이동무대 수레의 공식 명칭” 안건까지. 마지막 것은 그레이가 회의 목록에서 빼려 했지만, 푸리나는 끝까지 “이름이 있어야 예산도 있다”고 주장했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자세는 아니었다. 그러다 푸리나가 이동무대 수레의 이름을 “달빛 아래 노래하는 방랑 고양이 극장마차 1호”로 제안하는 순간, 그는 입을 열었다.

“그 수레, 이름 부르다가 바퀴 빠지겠는데.”

푸리나는 바로 반박했다.

“이름에는 혼이 있어.”

“바퀴에는 축이 있어.”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축이 더 중요합니다.”

푸리나는 배신당한 얼굴로 그레이를 보았다.

레이튼은 그때까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회의실의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죠니는 그 기척을 느끼고 미리 머리를 짚었다.

“레이튼.”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네, 죠니 경.”

“그 표정은 질문할 표정이야.”

“훌륭한 관찰입니다.”

“하지 마.”

“하지만 이미 모두가 답을 가지고 있는 듯하여, 질문이 필요한 순간으로 보입니다.”

죠니는 눈을 감았다.

“제일 싫은 말이야. 맞는 말이라서.”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고, 회의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우리는 전선 시찰 경로를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군요. 안전한 경로란, 누구에게 안전한 경로입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몇몇 병사들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 죠니는 정말로 머리가 아픈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나왔다.”

레이튼이 말했다.

“시찰단이 다치지 않는 경로와, 피난민이 더 빨리 발견되는 경로가 다르다면, 어느 쪽을 안전하다고 부를 것인지 정해야 할 듯합니다.”

그 말은 회의실을 멈췄다. 진행은 늦어졌다. 시간이 걸렸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답이 다시 열렸다.

죠니는 그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 점이 더 싫었다.

“레이튼.”

“네.”

“너는 가끔 문을 열어놓고, 그 문이 왜 복도 한가운데 생겼는지 설명을 안 해.”

레이튼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문을 지나갈지 말지는, 제가 정할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 대답도 싫어.”

“하지만?”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필요하겠지.”

레이튼은 만족스러운 듯 차를 다시 들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회의록에 새로운 항목을 만들었다. **안전의 정의 재검토.** 죠니는 그 문구를 보고 말했다.

“오늘 장부에 이어 단어까지 죽겠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단어도 생물체가 아닙니다.”

“오늘은 많이 죽어.”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회의는 느려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 더 나아졌다.

---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하융이 전선 시찰 준비를 마쳤다.

그는 마당에서 죠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지 낀 외투, 오래 걸은 사람의 자세, 그리고 현실 뒤쪽에 겹쳐진 무수한 가능성을 보는 듯한 눈. 하융은 늘 어딘가에 반쯤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현재에 있으면서도, 선택되지 않은 길들의 창가에 손을 얹고 있는 사람.

죠니는 말안장을 확인하며 말했다.

“오늘도 먼 길이야?”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소.”

“좋은 시작이네.”

“다만 가야 할 길이오.”

“그건 더 나쁜 말이고.”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크지 않았고, 약간 오래된 종이처럼 조용했다.

“그럼에도 경은 올 것이오.”

죠니는 고삐를 잡았다.

“그 말은 좀 건방진데.”

“틀렸소?”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에 올랐다.

“가자.”

그들은 성문을 나섰다. 푸리나의 무대는 여기서 크게 빛나지 않았다. 아니, 빛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죠니는 길 위의 먼지, 말발굽 소리, 멀리 보이는 피난민 수레, 병사들의 흐트러진 줄, 그리고 하융이 어느 순간 살짝 고개를 돌려 죽은 가능성을 보는 듯한 기척 속에서 이 하루가 이미 극이 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푸리나가 이걸 다 보고 있으면 좀 싫은데.”

하융이 물었다.

“보고 있으면 곤란하오?”

“멋있는 장면으로 만들까 봐.”

“경은 멋있는 것을 싫어하오?”

“내가 멋있는 척하는 걸 싫어하지.”

하융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차이는 중요하구려.”

“그래. 레이튼한테 배우지 마.”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러나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았다. 작은 피난민 무리가 길을 잘못 들어 낮은 언덕 아래에 모여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수레바퀴를 고치다 손을 다쳤다. 큰 사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방치하면 늦어진다. 늦어지면 밤이 온다. 밤이 오면, 작은 사고는 큰 사고가 된다.

죠니는 말에서 내렸다.

“바퀴 봐.”

하융이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였다. 죠니는 다친 사람 쪽으로 갔다. 손을 감싸고 있는 천은 피로 젖어 있었다. 다친 사람은 자꾸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는 말은 대체로 믿을 게 못 된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괜찮으면 손을 그렇게 숨기진 않지.”

남자는 말을 잃었다.

죠니는 천을 풀어 상처를 보았다.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럽게 찢어졌다. 그는 자기 물통을 열어 상처를 씻기고, 대충이나마 묶었다. 그 과정에서 남자가 떨자, 죠니는 짧게 말했다.

“아픈 건 정상이라서 그래.”

남자는 죄송하다고 했다.

죠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과할 일은 아니고.”

그는 상처를 묶은 뒤 일어났다. 그때 수레 쪽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났고, 하융이 손짓했다. 바퀴가 완전히 빠지기 직전이었다. 죠니가 급히 움직였고, 빠지는 수레를 막으려다 손목을 살짝 삐끗했다.

아주 큰 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팠다.

“젠장.”

하융이 다가왔다.

“괜찮소?”

죠니는 자기 손목을 돌려보았다.

“괜찮다고 하면 네가 안 믿을 거잖아.”

“그렇소.”

“그럼 좀 아픈 걸로.”

하융은 수레를 안정시키고, 피난민들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도왔다. 시간이 걸렸다. 예정된 시찰은 늦어졌다. 보고서에는 비효율이라고 적힐지도 몰랐다. 그러나 피난민들은 다시 길을 찾았다.

그중 한 아이가 죠니에게 빵 조각을 내밀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나한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셨으니까요.”

빵은 작았다. 조금 딱딱했고, 모양도 좋지 않았다. 죠니는 잠시 그것을 보다가 받아 들었다.

“고맙네.”

아이는 달려갔다.

죠니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은 별로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융이 말했다.

“오늘 온 보람은 있었구려.”

죠니는 입안의 빵을 삼켰다.

“그 말,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하융은 웃었다.

“그럼 경이 하시오.”

죠니는 피난민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먼지가 올랐다. 햇빛은 뜨거웠다. 손목은 아팠다. 입안의 빵은 퍽퍽했다. 모든 것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낮게 말했다.

“그래.”

잠깐의 침묵 뒤.

“오늘 온 보람은 있네.”

---

그날 저녁, 하루는 이미 충분히 길었다.

하지만 하루는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죠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레이는 수정된 장부를 들고 왔고, 푸리나는 아침에 미뤄둔 긴 제목을 끝내 발표하려 했으며, 레이튼은 전선 시찰의 보고를 듣고 “피난민이 길을 잘못 든 이유는 길이 나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지도에서 그들의 입장이 빠졌기 때문입니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죠니는 식탁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들 정말 지치지도 않네.”

푸리나가 말했다.

“지쳤어.”

“그런 사람의 얼굴이 아닌데.”

“지쳤지만, 제목은 붙일 수 있어.”

“그게 더 무서워.”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죠니 경. 낮에 확인한 피난민 수레와 관련해 배급량을 조정해야 합니다.”

“지금?”

“지금 하지 않으면 내일 오전 보고가 늦어집니다.”

“내일 오전 보고가 좀 늦어지면?”

그레이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죠니는 손을 들었다.

“알았어. 장부 줘.”

레이튼은 차를 따르며 말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생기지 마.”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이미 생겼습니다.”

“죽여.”

“질문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것입니다.”

“장부 숫자도 오늘 죽었는데 질문이라고 못 죽을 건 없지.”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는 웃지 않았지만, 펜 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하융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아스트리트는 그 모든 광경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이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모두 피곤했다. 하루는 엉망이었다. 회의는 늦어졌고, 장부는 틀렸고, 질문은 사람들을 멈추게 했고, 전선 시찰에서는 사고가 생겼으며, 죠니는 손목을 다쳤다. 그런데도 이 식탁에는 이상한 온기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고, 지치게 하고, 놀리고, 붙잡고 있었다.

아스트리트는 그 온기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죠니는 장부를 보다가 빵 조각을 입에 물었다. 낮에 받은 것과 비슷하게 딱딱한 빵이었다. 그는 그것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다시 살 수 있으면, 좀 덜 엉망으로 만들 수 있겠는데.”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식탁 위의 촛불이 흔들렸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아주 조금 빛났다.

“죠니.”

죠니는 빵을 씹다 말고 그녀를 보았다.

“왜.”

푸리나는 천천히 웃었다. 극장주가 새로운 막의 문을 발견했을 때 짓는 웃음이었다.

“방금 좋은 말을 했어.”

죠니는 즉시 얼굴을 찡그렸다.

“취소할게.”

“늦었어.”

촛불이 다시 흔들렸다. 식탁의 그림자가 길어졌고, 창밖의 밤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딘가에서 아침빛이 다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잡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무언가가 겹쳐지는 것을 본 사람처럼 조용해졌다.

아스트리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죠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리나.”

“응.”

“이거 네 짓이야?”

푸리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 말이 문을 열었고 내 극장이 그 문을 무대로 만든 거지.”

“그럼 네 짓이네.”

“대체로.”

죠니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하루도 충분히 길었는데.”

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다시 살아보자.”

“싫다고 하면?”

“싫어하는 얼굴도 배역의 일부야.”

“최악이네.”

그러나 촛불은 이미 아침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식탁 위의 장부가 사라지고, 빈 회의실의 아침 공기가 다시 열렸다. 푸리나의 긴 제목이 아직 읽히기 전의 시간. 그레이의 장부가 아직 펼쳐지기 전의 시간. 레이튼의 질문이 아직 회의실을 멈추기 전의 시간. 하융과 전선으로 나가기 전의 시간. 아스트리트가 이 이상한 하루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던 시간.

죠니는 다시 창가에 기대어 있었다.

아침이었다.

방금 전까지 입안에 남아 있던 딱딱한 빵 맛은 사라져 있었다. 손목의 통증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빵과 통증이 있었다는 기억은 남아 있었다.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들어왔다. 아침부터 무언가를 꾸민 얼굴로.

“죠니!”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아.”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오늘의 극은—”

죠니가 말을 끊었다.

“제목 읽기 전에 하나만 말해두자.”

“뭔데?”

죠니는 창밖을 보았다. 빵을 훔쳐 달아나는 아이가 다시 뛰고 있었다. 어른은 이번에도 진심으로 쫓지 않았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이 하루, 생각보다 귀찮아질 거야.”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극이지.”

죠니는 눈을 감았다.

“그래.”

잠깐의 침묵.

“또 그 말이네.”

막이 천천히 열렸다.

**1막 — 첫 번째 하루: 엉망인 하루**

그 아래, 아침 회의록의 빈 칸처럼 한 줄이 남았다.

**— 고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건, 아직 붙잡고 싶은 것들도 많다는 뜻이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1막 — 첫 번째 하루: 엉망인 하루

### — 고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건, 아직 붙잡고 싶은 것들도 많다는 뜻이다 —

죠니는 두 번째로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정확히 말하면, 첫 번째로 반복되는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 차이를 따지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창밖에서 빵을 훔친 아이가 다시 달리고 있었고, 어른은 다시 그 아이를 진심으로 쫓지 않고 있었으며, 문밖에서는 다시 누군가가 “장부가 어디 갔습니까?”라고 묻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죠니는 창가에 기대어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제 본 일이라기엔 너무 선명했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귀찮았다. 그는 자기 손목을 천천히 돌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낮에 수레를 막다가 삐끗했던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아팠던 기억은 남아 있었다.

“좋네.”

그는 낮게 말했다.

“아프진 않은데, 아팠다는 건 기억난다라.”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들어왔다. 얼굴에는 다시 무언가를 꾸미는 빛이 있었다. 방금 전에도 본 얼굴이었다.

“죠니!”

죠니는 먼저 말했다.

“제목 읽지 마.”

푸리나가 멈췄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할 얼굴이었어.”

“그런 얼굴이 따로 있어?”

“너는 있어.”

푸리나는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양피지를 등 뒤로 숨겼다.

“좋아. 그럼 제목은 나중에.”

“나중에도 안 읽으면 더 좋고.”

“그건 안 돼. 제목을 잃은 극은 길을 잃은 고양이와 같아.”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 말도 제목 같아.”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좋지?”

“길어.”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그 얼굴을 보고 자기가 아까 제목을 막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푸리나는 제목을 읽지 않았지만, 제목 같은 말을 했다. 고친 것 같았는데 그대로였다.

그때 그레이가 들어왔다. 손에는 장부가 있었다. 그 장부도 다시 있었다. 죠니는 그 장부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이미 어디가 틀렸는지 알고 있다. 지금 바로 말해주면 아침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장부가 덜 죽고, 그레이가 덜 심각해지고, 회의에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입을 열려 했다.

그러다 멈췄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전하. 그리고 죠니 경. 아침 회의 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죠니는 그녀가 정확히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반복되는 하루라는 게 이런 식이라면 꽤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같다는 것은 안정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시험한다. 다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말을 들을 때, 같은 반응을 할 것인가. 아니면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남의 말을 잘라낼 것인가.

그레이가 페이지를 넘겼다.

“전선 시찰용 배급 수량과 창고 반출 기록이 맞지 않습니다. 차이는 크지 않지만, 그대로 두면 오후에 추가 조정이 필요합니다.”

죠니는 장부를 보았다.

아까 자신이 가리켰던 줄이 거기에 있었다. 중복 계산. 죽은 숫자. 장례가 필요한 숫자.

그는 손가락을 들어 바로 가리켰다.

“여기.”

그레이가 멈췄다.

“아직 설명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복됐어. 이쪽에서 한 번, 여기서 또 한 번 잡혔지.”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죠니가 가리킨 부분을 따라가며 확인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곧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항목에서 중복 계산이 있습니다.”

“그렇지.”

“어떻게 바로 아셨습니까?”

죠니는 잠시 대답을 골랐다.

“숫자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숫자는 생물체가 아닙니다.”

죠니는 조금 안심했다. 이건 그대로였다.

“그래. 그 말도 다시 듣네.”

“다시?”

“아무것도 아니야.”

그레이는 의심스러운 듯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정정 표시를 하고 장부를 닫았다. 문제는 훨씬 빨리 해결되었다. 푸리나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오. 오늘은 빠르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거잖아.”

“좋지.”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크게 웃지는 않았다. 장부가 죽었다느니 장례를 치르라느니 하는 실없는 대화가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죠니는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아주 작은 차이였다. 별것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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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빨리 진행되었다.

죠니는 레이튼이 찻잔을 내려놓기 전에 이미 그가 무엇을 물을지 알고 있었다. 안전한 경로란 누구에게 안전한 경로인가. 시찰단이 덜 다치는 길과 피난민을 더 빨리 찾는 길이 다르다면, 어느 쪽을 안전이라 부를 것인가.

좋은 질문이었다.

귀찮은 질문이기도 했다.

죠니는 레이튼이 입을 열려는 순간 먼저 말했다.

“시찰단 기준 안전이랑 피난민 기준 안전이 다를 수 있어. 경로 두 개로 나눠서 보자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레이튼은 찻잔을 든 채 죠니를 보았다.

푸리나도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의 펜은 이미 새 항목을 만들고 있었다. **안전 기준 이원화.**

레이튼은 천천히 말했다.

“제가 하려던 질문과 비슷하군요.”

죠니는 벽에 기대며 말했다.

“그래 보이더라.”

“제가 아직 질문하지 않았는데도요?”

“표정이 질문이었어.”

레이튼은 잠시 웃었다.

“그렇다면 죠니 경께서 질문을 대신 열어주신 셈이군요.”

“열었다기보단, 문고리만 먼저 잡은 거지.”

“그 차이는 중요합니까?”

죠니는 잠깐 멈췄다.

나왔다.

질문은 줄였는데, 질문은 다른 얼굴로 다시 생긴다.

그는 낮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또 시작하지 마.”

레이튼은 온화하게 말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시작이야.”

푸리나는 웃었다. 그러나 회의는 오래 멈추지 않았다. 레이튼의 질문은 이미 정리된 항목으로 처리되었고, 사람들은 빠르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효율적이었다. 모두가 덜 피곤해 보였다.

죠니는 그것도 알아차렸다.

좋은 일이었다.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데 회의실 한쪽에서 묘하게 빠진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답 앞에서 멈추는 침묵. 그 질문 때문에 짜증을 내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 죠니는 그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라지니 알 수 있었다.

그건 귀찮았지만, 없으면 조금 얕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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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전, 하융과의 전선 시찰 준비도 더 빨리 끝났다.

죠니는 이미 어느 길에서 피난민 수레를 만날지 알고 있었다. 그 바퀴가 어떻게 빠질지, 누가 손을 다칠지, 자신이 어디서 손목을 삐끗할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미리 막으면 된다. 고칠 수 있는 하루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하융은 말을 준비하며 죠니를 보았다.

“오늘은 무언가 알고 있는 얼굴이오.”

죠니는 고삐를 잡았다.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좀 이상하네.”

“기분 나쁘오?”

“그쪽은 아니고. 네가 하면 맞는 말 같아서 귀찮아.”

하융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맞는 말이겠구려.”

“그런 식으로 확정하지 마.”

둘은 성문을 나섰다. 이번에는 죠니가 먼저 길을 틀었다. 하융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예정 경로와 조금 다르오.”

“알아.”

“이유가 있소?”

“있어.”

“말해줄 수 있소?”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수레 하나가 고장 날 예정이야.”

하융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죽은 가능성과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보는 사람이, 지금 죠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예정이라.”

“말이 이상한 건 알아.”

“아니오. 이상하나, 낯설지는 않소.”

그 말은 하융에게만 가능한 대답이었다.

죠니는 수레가 고장날 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아직 피난민 무리는 언덕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는 하융과 함께 길목을 정리했고, 바퀴가 빠질 만한 돌을 치웠고, 좁은 경사를 우회하도록 표식을 남겼다. 얼마 뒤 피난민 무리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수레가 빠지지 않았다. 손을 다친 남자도 없었다. 아이도 놀라 울지 않았다. 낙오도 없었다.

좋은 일이다.

정말 좋은 일이다.

죠니는 그들이 무사히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손을 다치지 않았으므로 죠니에게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는 빵 조각을 주지 않았다.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레는 삐걱이긴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감사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하융은 조용히 그 모습을 보았다.

“좋은 판단이었소.”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손도 다치지 않았구려.”

“그것도 좋고.”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그런데 표정은 왜 그러오?”

죠니는 자기 손목을 돌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좋다. 아프지 않은 건 좋은 일이다. 다친 사람도 없다. 늦어지지도 않았다. 보고서도 깔끔해질 것이다.

그런데 죠니는 낮에 받았던 딱딱한 빵 조각을 떠올렸다.

맛도 없던 빵.

감사하다고 내밀던 아이.

하융이 “오늘 온 보람은 있었구려”라고 말하던 순간.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물론 사라지는 편이 맞다. 사고가 없었으니까. 다치지 않았으니까. 아이가 감사해야 할 일도 없었으니까. 죠니는 그걸 모르지 않았다.

“아니.”

그는 말했다.

“좋은 하루야.”

하융은 잠시 그를 보았다.

“좋은 하루와 다시 살고 싶은 하루는 같소?”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너도 레이튼한테 배웠냐?”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때때로 질문은 전염되오.”

“최악의 병이네.”

그러나 죠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

저녁은 더 깔끔했다.

회의록은 덜 지저분했고, 장부 오류는 아침에 이미 고쳐졌으며, 피난민 수레 문제도 없었다. 그레이는 훨씬 빠르게 보고를 정리했다. 푸리나는 아침에 읽지 못한 긴 제목을 다시 읽으려 했지만, 죠니가 “그 제목은 내일도 살아 있을 거야”라고 말하자 묘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접어두었다. 레이튼은 질문을 몇 개 던졌지만, 이미 낮에 안전 기준이 정리되어 있어 논의는 빠르게 끝났다.

모든 것이 나아졌다.

정확히는, 매끄러워졌다.

식탁에는 피곤함이 덜했다. 대신 이상하게 빈틈도 덜했다. 푸리나가 크게 웃는 순간은 줄었고,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정말로 곤란한 얼굴을 하는 시간도 없었고, 레이튼의 질문 때문에 모두가 멈춰 서로를 보는 침묵도 짧았다. 하융은 차를 마셨고, 죠니는 빵을 먹었다. 빵은 낮의 아이가 준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식탁의 빵이었다.

맛은 조금 더 나았다.

그런데 더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저녁 식탁 한쪽에서 이 하루를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낮에 죠니가 피난민 수레의 사고를 미리 막았다는 보고를 들었다.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치지 않았고, 지연도 없었고, 피난민도 안전했다. 그녀가 믿는 생명의 긍정과도 맞는 일이다.

그런데 죠니는 아침보다 더 조용했다.

아스트리트는 결국 물었다.

“죠니 경.”

죠니는 빵을 씹다 말고 그녀를 보았다.

“응.”

“오늘은 좋은 하루였던 것 아닙니까?”

죠니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그를 보았다. 그레이도 기록판에서 눈을 들었다. 레이튼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융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죠니는 천천히 말했다.

“좋은 하루였지.”

아스트리트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만족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입니까?”

죠니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좋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짜증났다.

“글쎄.”

그는 말했다.

“덜 엉망이긴 한데.”

잠시 멈췄다.

“이상하게, 덜 살아 있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그것은 이상한 말이었다. 덜 다치고, 덜 실패하고, 더 안전한 하루가 어떻게 덜 살아 있을 수 있는가.

푸리나는 아주 조용히 웃었다. 웃었다기보다, 무언가가 이제 시작됐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럼.”

그녀가 말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뭐.”

“한 번 더 살아볼래?”

죠니는 즉시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그 질문, 무대의 질문이지.”

“응.”

“거절하면?”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거절하는 하루도 볼 수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구멍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이 여러 개 있는 것에 가깝겠지요.”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는 지금 조용히 할 수 있었어.”

“그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선택하지 그랬어.”

하융이 낮게 웃었다.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식탁 위의 빵을 보았다. 조금 더 맛있지만, 덜 기억에 남는 빵. 아프지 않은 손목. 감사할 필요가 없어진 아이. 빠르게 끝난 회의. 덜 웃은 푸리나. 덜 곤란했던 그레이. 덜 짜증났던 레이튼. 덜 먼지가 묻은 하융.

완벽하진 않았지만, 첫 번째보다 나은 하루.

그런데 왜 이렇게 이상한가.

죠니는 낮게 말했다.

“좋아.”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정말?”

“어차피 네가 안 멈출 것 같아서.”

“그럼 세 번째 하루!”

“그렇게 신나게 말하지 마. 내 하루야.”

“그러니까 신나는 거지.”

촛불이 흔들렸다. 식탁의 그림자가 다시 길어졌다. 저녁의 소리가 멀어지고, 어딘가에서 아침의 발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장부가 다시 닫히고, 회의록이 다시 비어가고, 피난민 수레는 아직 고장나기 전의 길 위로 돌아갔다.

아스트리트는 이번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죠니는 그 눈을 보며 생각했다.

저 질문도 아마 다시 오겠네.

그리고 아침이 열렸다.

**2막 — 두 번째 하루: 고친 하루**

그 아래, 너무 깔끔하게 정리된 회의록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좋은 결과가 늘 다시 살고 싶은 하루를 만들지는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