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03익명의 참치 씨(f85ea685)2026-05-13 (수) 19:24:28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 3막 — 죄를 입은 갑주와 생명의 검
경기장 보수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레이는 “조금”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애매한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북쪽 목책 세 곳의 고정못을 다시 박고, 흙바닥 중앙의 파인 부분을 다지고, 등불 두 개의 위치를 반 보씩 뒤로 물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막간!”
그리고 박수를 유도하려 했다.
그레이는 바로 말렸다.
“폐하, 막간이 아니라 안전 점검입니다.”
“안전 점검도 막간처럼 하면 재미있잖아.”
“재미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있어!”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입을 삐죽였다가, 관중석을 향해 돌아섰다.
“좋아! 여러분, 지금은 아주 중요한 막간이다! 무대가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박수를!”
그레이가 말리기도 전에 박수가 터졌다.
목책을 고치던 병사들이 당황해서 못을 떨어뜨렸고, 여관좌 사제 하나가 등불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이마를 짚었다.
“폐하……”
“왜? 다들 힘내잖아.”
“못을 떨어뜨렸습니다.”
“그건…… 박수가 너무 훌륭해서?”
죠니는 말에서 내려 말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승부가 아직 손목에 남아 있었다. 창을 쥔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는 그레이와 푸리나의 대화를 듣고 작게 중얼거렸다.
“저 둘은 매번 같은데, 매번 새롭네.”
아스테르다스는 경기장 가장자리에서 자기 손등에 남은 빛의 잔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가 이런 거라면.”
그가 낮게 말했다.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뭐?”
“떨어진 뒤에 남는 것이 꼭 파편만은 아닐 수도 있겠군.”
죠니는 잠깐 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음엔 덜 부수고 떨어지면 되겠네.”
아스테르다스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지.”
“농담이었는데.”
“나도 농담을 배워야겠군.”
“그건 좀 천천히 해.”
그때 경기장 남쪽 입구가 조용해졌다.
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속삭였고, 병사들은 목책을 두드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다음 참가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
그녀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녀의 본명을 몰랐다.
설령 안다 해도, 이 자리에서 그것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직책으로 걸어 들어왔다.
튜튼 기사단의 총장.
프루센의 란트마이스터.
성스러운 이름 아래 변경을 지키는 자.
그리고 그 성스러운 이름으로 지은 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
갑주는 어두웠다.
그러나 단순한 검정이 아니었다. 햇빛을 받으면 표면 아래로 희미한 금빛이 맥동했다. 죽은 태양 같은 금빛이었다. 그리고 그 금빛 위에 달빛처럼 창백한 죄책감이 얇게 스며 있었다.
푸리나도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뛰어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중앙에 서서, 호흐마이스터가 걸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호흐마이스터는 경기장 경계 앞에서 멈추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헤툼 폐하.”
“호흐마이스터 경.”
푸리나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여관:극장]은 산 자를 무대 위에 세우는 힘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미 너무 무거운 갑주를 입고 무대에 올라왔다. 조명을 받으면 가벼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명 아래에서 자신이 짊어진 것을 더 숨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다음 경기의 첫 번째 참가자를 소개하겠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튜튼 기사단의 총장. 프루센의 란트마이스터. 성벽 앞에 먼저 서고, 죄를 갑옷처럼 입어 변경을 지키는 기사.”
푸리나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과장하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호흐마이스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과분한 소개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정중했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부드럽지 않았지만, 거칠지도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아주 오랫동안 단단히 묶어둔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는 그저, 제가 막아야 할 것을 막을 뿐입니다.”
관중석 한쪽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흘렀다.
푸리나는 그 소리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지도 않았다.
그녀는 반대편 입구를 향해 손을 펼쳤다.
“그리고 두 번째 참가자!”
그 순간,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남쪽의 무거운 그림자에 맞서듯, 동쪽 입구에서 옅은 금빛이 번졌다.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는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그녀의 걸음은 호흐마이스터처럼 압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첫걸음에는 당혹감이 조금 묻어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왜 이 난장판 같은 국제 친선전에 나와 있는지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검을 찬 자세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꽃처럼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내리는 사람이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조금 밝게 웃었다.
“시원성좌의 별의 간택자! 생명을 긍정하는 검을 든 자!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의 신임 단장!”
아스트리트의 어깨가 아주 조금 움찔했다.
푸리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목서가 피는 나흐트로제의 기사,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아스트리트는 관객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박수가 들렸다.
하지만 그 박수는 2막 때와 달랐다.
속도와 빛에 대한 환호가 아니라, 조금 조심스러운 기대였다.
아스트리트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물었다.
“저…… 확인차 묻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그녀를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정말 친선전 맞습니까?”
관중석 곳곳에서 작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호흐마이스터는 조금도 웃지 않고 답했다.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렇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대답이 가장 불안한 종류입니다.”
푸리나가 끼어들었다.
“괜찮아! 그레이가 규칙을 세웠으니까!”
그레이는 곧장 말했다.
“폐하, 규칙은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레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키겠습니다.”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규칙을 받아들이는 대답이라기보다, 이미 내린 명령을 자신에게 다시 새기는 의식처럼 들렸다.
그레이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전 확인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치명 신술과 광역 파장 사용 시 정지 선언을 우선으로 합니다. 관중석 방향 파장은 금지입니다. 경기장 밖으로 검압이 흐를 경우 즉시 중지합니다.”
아스트리트가 살짝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제 기술 중 하나가…… 조금 넓습니다.”
그레이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얼마나 넓습니까?”
아스트리트는 잠시 고민했다.
“정확히는, 넓게 쓰면 매우 넓습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펜을 올렸다.
“기술명.”
“《금목만리향파》입니다.”
“성질은요?”
“금목서검의 생명력을 개화시켜 거대한 금빛 검으로 내려치는 거대참격입니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거대한 금빛 검!”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폐하, 흥미를 보이실 부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대한 금빛 검인데?”
“그래서 더더욱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아스트리트는 검자루를 바라보았다.
“친선전에서 꺼낼 기술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를 보았다.
“경의 갑주를 보고 나니, 보이지 않게 넘기면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보여주십시오.”
아스트리트가 눈을 깜박였다.
“괜찮습니까?”
“그대가 무엇을 위해 검을 드는지, 저도 보고 싶습니다.”
그레이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용 시 사전 선언. 출력 제한. 관중석 방향 금지. 여관좌 사제 4명 추가 배치. 경기장 남측은 비워둡니다.”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좋아! 그럼 모두 더 멋지게 조심하자!”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멋지게 조심한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오늘 생겼어.”
“제발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말에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경기장 중앙의 두 기사는 웃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뽑았다.
검신 위에 희미한 금빛이 어렸다. 금목서의 향이 아직 아주 연하게, 바람 속에 섞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들었다.
그 창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이 향한 곳은 분명했다. 그것은 적의 심장을 찌르기 위한 창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먼저 길목을 막기 위한 창이었다.
푸리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물러났다.
“준비.”
아스트리트는 숨을 골랐다.
그녀의 몸 안에서 별빛과 내공, 근육과 호흡, 시선과 검끝이 균형을 잡았다.
《창성천강지체》.
그녀의 검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힘만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내공만 빛나는 것도 아니었다.
힘, 민첩, 내구, 지성, 영력, 정신.
그 모든 것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하나의 검을 들기 위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검을 정면으로 세웠다.
“만생개화검법.”
금목서 향이 조금 짙어졌다.
“전개.”
검로가 피었다.
금빛 꽃잎이 허공에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실제로 핀 것은 거리와 각도였다. 손목이 움직일 길, 발이 디딜 자리, 다음 호흡이 이어질 틈, 상대 갑주 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검선.
검술이 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꽃은 장식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자라는 가지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꽃을 보았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금빛이 떠올랐다.
《천양금안》.
그 눈은 아스트리트의 검을 표면으로만 보지 않았다.
피 냄새가 적다.
그러나 약하지 않다.
검로는 아직 젊다.
그러나 매번 고쳐질 여지가 있다.
그 검은 증오를 먹고 자라지 않는다.
생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자란다.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좋은 검입니다.”
아스트리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부딪치지도 않았습니다.”
“보입니다.”
호흐마이스터의 갑주가 어두워졌다.
“죄악의 갑주, 전개.”
《죄악의 갑주Frevel Panzer》.
갑주는 단순히 두꺼워지지 않았다.
그 표면 아래로, 말로 다 적을 수 없는 것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명분 아래 이루어진 정치공작.
기사단을 지키기 위해 밀어낸 사람들.
헤르만 폰 잘차를 무너뜨린 날의 침묵.
몽골 황금혈통이라는, 자기 안의 지워지지 않는 피.
그 피를 혐오하면서도 그 피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공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프루센의 성벽 앞에 섰던 날들.
죄가 갑옷이 되었다.
갑옷은 무거웠다.
그러나 그녀는 익숙했다.
푸리나의 손이 내려갔다.
“시작!”
아스트리트가 먼저 움직였다.
금목서의 검로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첫 검은 호흐마이스터의 어깨선을 향했다. 곧장 찌르는 검이 아니었다. 갑주의 반응을 보려는 검, 동시에 다음 가지를 피우기 위한 검이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대로 받았다.
소리는 둔탁했다.
아스트리트의 손목이 흔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두 번째 검을 이었다. 꽃가지가 옆으로 뻗듯, 검로가 호흐마이스터의 옆구리로 미끄러졌다.
호흐마이스터는 이번에도 받았다.
갑주가 금빛을 삼켰다.
세 번째 검.
네 번째 검.
금목서의 향이 경기장 위로 퍼졌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는 그 향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마침내 호흐마이스터가 한 걸음 나아갔다.
아스트리트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읽었다.
너무 멀다.
그녀의 판단은 맞았다.
보통의 중갑 기사라면 닿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호흐마이스터의 발은 서방 중갑의 박자가 아니었다.
《대초원의 대기사》.
프루센의 갑주는 서방의 것이었으나, 그 박자는 초원의 것이었다.
한 걸음은 넓었다.
반 걸음은 예상보다 짧았다.
다음 한 걸음은 이미 아스트리트의 검 안쪽에 있었다.
창대가 그녀의 검을 밀었다.
아스트리트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관중석에서 탄성이 들렸다.
아스트리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창성천강지체》가 몸의 균형을 붙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왼발이 반 박자 늦었고, 오른쪽 어깨가 먼저 열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오른발이 늦었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낮추지 않았다.
“그걸 지금 보셨습니까?”
“예.”
아스트리트는 검을 다시 들었다.
눈빛이 바뀌었다.
부끄러움도, 분노도 아니었다.
수정.
《노력하는 자》.
그녀는 패배의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방금 밀린 감각을 몸 안에 남겼다.
어깨가 열린 이유를 기억했다.
발이 늦은 박자를 기억했다.
그 기억을 다음 검로의 토양으로 삼았다.
“다시.”
짧은 말과 함께 아스트리트가 전진했다.
이번 검은 조금 달랐다.
화려함이 줄었다.
꽃잎은 적었다.
그러나 가지는 더 정확했다.
호흐마이스터의 《천양금안》이 다시 반응했다.
그녀는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재능만으로 싸우지 않는다.
밀리면 고친다.
흔들리면 다시 세운다.
한 번 꺾인 가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음 가지가 어디로 자라야 할지 배운다.
“그대는 재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군요.”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부딪치며 답했다.
“재능만으로는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검과 창이 다시 부딪쳤다.
아스트리트의 검신에 별빛이 맺혔다.
《별의 간택자Chosen》.
별빛은 그녀를 감싸는 방패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그녀가 밀려도 다시 고친다는 사실.
생명이 완성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며 스스로를 고쳐나간다는 사실.
그 사실을 세계가 조금 더 강하게 인정하는 것 같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죄악의 갑주가 내뿜는 압박 속에서도, 아스트리트의 검은 꺾이지 않았다.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생명은 완성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베고.
“자라며.”
다시 막고.
“스스로를.”
발을 바꾸고.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검이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틈을 향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검을 창대로 눌러 빗겨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조금 더 깊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그녀의 창끝 위로 성인의 그림자가 겹쳤다.
“저도 고쳐야겠지요.”
금빛 눈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흔들렸다.
“아스칼론, 현현.”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관중석 몇몇이 숨을 삼켰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용살.
용을 짓밟는 성인의 이름.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의 창은 아스트리트를 용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그대가 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창끝의 빛이 갑주 안쪽으로 내려앉았다.
“제가 짓밟아야 할 용은, 대개 제 안에 있습니다.”
아스트리트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그 말을 이해했다.
이 사람은 적을 미워해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의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그 무언가가 밖으로 기어나오지 못하게, 죄악의 갑주와 성인의 창으로 스스로를 찍어누르고 있다.
아스트리트는 그 사실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을 늦추지는 않았다.
슬픔으로 상대를 봐주는 것은 생명 긍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호흡을 정돈했다.
《화유심법》.
내공은 꽃가지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꽃으로.
꽃에서 향으로.
금목서 향이 다시 짙어졌다.
아스트리트의 검이 낮아졌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자세를 보고 창을 고쳐 잡았다.
“오십니까?”
“예.”
“좋습니다.”
아스트리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베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답했다.
“압니다.”
아스트리트의 검이 금빛으로 빛났다.
처음에는 검신을 따라 아주 얇은 선이 생겼다.
그다음에는 그 선이 꽃가지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금목서의 생명력이 검 안에서 개화했다.
아스트리트는 낮게 말했다.
“시원성始原星은 생명의 탄생부터 삶을 아우르는 별.”
그녀의 양손이 검자루를 붙잡았다.
“생명은 짓밟히기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 경기장 위에 거대한 금빛 검이 떠올랐다.
《금목만리향파》.
금목서검의 생명력이 한순간에 개화했다.
그것은 단순한 검압이 아니었다.
그것은 꽃잎의 환상도 아니었다.
거대한 금빛 검.
살아 있는 검.
삶을 품은 참격.
메마른 전장 위에서도 생명이 피어날 수 있다고 증명하기 위해, 나흐트로제가 만들어낸 선택받은 자의 비기.
관중석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여관좌 사제들이 등불을 높이 들었다.
그레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관중석 방향 금지! 남측 파장 차단!”
아스트리트는 이미 각도를 틀고 있었다.
그녀는 호흐마이스터를 죽이기 위해 이 검을 내리지 않았다.
그 검이 향한 것은 호흐마이스터의 목이 아니었다.
죄를 입어야만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오래된 결론.
생명이 짓밟힌 뒤에야 성벽이 선다는 전장의 습관.
검은 더러워져야만 현실을 지킬 수 있다는, 기사들이 너무 자주 받아들인 대답.
금목서의 검은 그것을 가르려 했다.
호흐마이스터의 《천양금안》이 그 본질을 보았다.
저 참격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갑주도 아니다.
저 검이 베려는 것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믿어온 죄의 이유다.
호흐마이스터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창을 세웠다.
죄악의 갑주가 더 어두워졌다.
그 어둠 아래에서 죽은 태양 같은 금빛이 맥동했다.
그녀는 그 거대한 금빛 검 앞에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Primus Inter Pares》.”
동등한 자들 중 첫 번째.
위에 선 자가 아니었다.
먼저 앞에 서는 자였다.
형제들보다 높이 앉는 자가 아니라, 형제들 앞에서 먼저 맞는 자.
죄가 필요하다면 먼저 입고.
방패가 필요하다면 먼저 세워지고.
더러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더러워지는 자.
호흐마이스터는 승리각보다 먼저 방패각을 잡았다.
아스트리트의 금빛 검이 내려왔다.
프루센의 갑주는 그 자리에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은 초원의 박자로 움직였다.
한 걸음.
반 걸음.
다시 한 걸음.
《대초원의 대기사》의 보법이, 거대한 참격의 길 앞에 호흐마이스터를 가장 먼저 세웠다.
그녀는 《금목만리향파》를 정면에서 부수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파장이 관중석을 흔들었을 것이다.
대신 가장 위험한 방향을 자신의 갑주 위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남는 파장을 하늘로 흘렸다.
금빛 검이 죄악의 갑주 위를 갈랐다.
갑주 표면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 속에서 달빛 같은 죄책감과 죽은 태양의 금빛이 함께 번졌다.
호흐마이스터의 무릎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스칼론.”
성인의 창이 다시 빛났다.
“현현.”
그 창은 아스트리트를 향해 울부짖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안쪽의 용을 짓밟았다.
황금혈통의 폭력성.
초원의 피.
파괴와 정복의 기억.
금빛 생명 앞에서 이를 드러내려는 자기 안의 괴물.
성인의 창은 그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에, 먼저 밟았다.
그렇게 한 박자.
아스트리트의 금빛 참격이 하늘로 흘렀다.
경기장 위의 구름이 갈라졌다.
관중들은 그제야 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한 박자 사이, 호흐마이스터의 창끝은 움직였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거두려 했다.
늦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조금, 반 박자 늦었다.
호흐마이스터의 성인의 창이 아스트리트의 어깨선 한 치 앞에서 멈췄다.
동시에 아스트리트의 롱소드는, 금빛 참격의 잔향을 품은 채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틈 한 치 앞에서 멈췄다.
여관좌 사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지!”
빛이 사라졌다.
금목서 향만이 경기장 위에 남았다.
그레이가 빠르게 상황을 확인했다.
“관중석 파장 없음. 부상 없음. 갑주 표면 손상. 경기장 남측 흙바닥 파임.”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사제들이 판정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주심 사제가 선언했다.
“호흐마이스터 경, 관중석 방향 파장 차단 및 치명각 선점. 판정승!”
박수는 바로 터지지 않았다.
모두가 방금 본 장면을 이해해야 했다.
거대한 금빛 검이 내려왔다.
어두운 갑주가 그것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한 사람은 생명이 짓밟히지 않도록 검을 피웠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검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먼저 앞에 섰다.
그 사실이 사람들의 가슴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박수가 터졌다.
2막의 박수보다 늦었다.
그러나 더 오래 갔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내렸다.
그녀는 패배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자세를 되짚었다.
“마지막에 왼쪽 어깨가 먼저 열렸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낮췄다.
“그것을 바로 보셨다면, 다음에는 달라지겠지요.”
“다음에는 더 고치겠습니다.”
“그것이 그대의 검이군요.”
아스트리트는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를 보았다.
균열이 있었다.
자신의 《금목만리향파》가 남긴 상처였다.
그러나 그 균열은 갑주를 완전히 부수지 못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틈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물었다.
“마지막에, 제 검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길을 바꾸셨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검은 너무 넓었습니다. 그대로 받으면 관중석이 흔들립니다.”
“친선전에서 쓸 기술은 아니었나요?”
호흐마이스터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니요.”
아스트리트가 눈을 깜박였다.
“아니요?”
“그대가 무엇을 위해 검을 드는지 보여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호흐마이스터의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롱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정이었다.
아스트리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막으셨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경기장 너머를 보았다.
관중석의 아이들.
갑주를 입은 기사들.
목책을 잡고 서 있는 병사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프루센의 평야, 성벽, 눈 덮인 변경, 언젠가 동쪽에서 올 말발굽.
그녀는 말했다.
“저는 먼저 앞에 서는 자니까요.”
아스트리트는 낮게 되뇌었다.
“《Primus Inter Pares》.”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 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의 손이 균열 난 갑주 위에 닿았다.
“먼저 더러워진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검을 내려다보았다.
금목서의 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언젠가 그런 첫 번째가 필요 없는 기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풋내가 있었다.
꽃향기가 있었다.
아직 피 냄새보다 금목서 향이 짙은 검.
그러나 그 풋내는 약함이 아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부디 그러십시오.”
잠시 침묵.
“그대의 금목서 향이 오래 남는다면, 제 갑주가 조금은 덜 필요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아스트리트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더 오래 피우겠습니다.”
“쉬운 길은 아닐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별의 간택자입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기적이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압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멈췄다.
기적.
그 말은 그녀에게 가벼운 단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죽었어야 할 아이였다.
정치적 숙청 속에서 사라졌어야 할 씨앗.
초원의 피가 제 피를 잡아먹던 밤에 끝났어야 할 이름.
하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기적의 체현자》.
그 기적은 그녀를 구했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죄를 입혔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스트리트에게 말했다.
“기적은 사람을 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무엇을 짊어질지는, 그 뒤의 일이지요.”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 뒤의 일을, 저는 생명 쪽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호흐마이스터도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길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푸리나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들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뛰어나와 “좋아!”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늦췄다.
이 경기는 박수보다 침묵이 먼저 필요한 경기였다.
그리고 침묵이 충분히 지나간 뒤에야,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그 한 번의 박수에 아이들이 따라 쳤다.
병사들이 따라 쳤다.
기사들이 창대를 두드렸다.
사절들도 손을 들었다.
박수는 오래 이어졌다.
레이튼은 그 박수 속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번 질문은 승패가 아니었군요.”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레이튼은 경기장에 남은 금빛 참격의 흔적과, 죄악의 갑주에 새겨진 균열을 보았다.
“기사는 무엇을 입고 싸우는가.”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검은 무엇을 살리기 위해 피어나는가.”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좋은 질문이네.”
“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좋은 거지?”
레이튼은 웃었다.
“물론입니다. 아직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레이는 장부에 기록했다.
《제2경기 종료. 호흐마이스터 판정승. 부상 없음. 남측 흙바닥 보수 필요. 호흐마이스터 갑주 손상.》
그녀는 잠시 펜을 멈췄다.
그리고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아스트리트 경, 패배 후 즉시 자세 수정.》
푸리나가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도 기록해?”
그레이는 장부를 닫지 않고 답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같은 이유로 다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호흐마이스터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기록입니다.”
아스트리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생명은 그렇게 고쳐나가는 것이니까요.”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한쪽에는 균열 난 죄악의 갑주가 있었다.
한쪽에는 아직 금목서 향을 품은 검이 있었다.
둘 다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 있었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밝게 웃었다.
“좋아!”
그 한마디에,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훌륭한 3막이었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폐하, 아직 전체로는 3막이지만 경기 번호로는 제2경기입니다.”
“세부적인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합니다.”
“좋아, 그럼 훌륭한 제2경기이자 3막이었다!”
“그건 맞습니다.”
죠니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결국 이겼네.”
하융은 경기장에 남은 금빛과 어두운 갑주의 잔향을 바라보았다.
“두 길이 모두 무거웠소.”
죠니가 말했다.
“그래도 닿지는 않았지.”
아스테르다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럼 좋은 낙점이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그 표현 계속 쓸 거야?”
“필요하면.”
“그래. 리투아니아식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경기장에는 아직 금목서 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향 아래, 죄악의 갑주에 새겨진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균열을 숨기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도 자신의 패배를 숨기지 않았다.
박수는 2막보다 늦게 터졌다.
그러나 더 오래 남았다.
그 박수 아래에서 금목서의 거대한 검은 사람을 베지 않고 전장의 오래된 결론을 갈랐고, 죄악의 갑주는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중석 앞에 먼저 서기 위해 더 무거워졌다.
한쪽은 생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피어나는 검을 보였다.
다른 한쪽은 죄를 입고서라도 먼저 막는 기사의 자리를 보였다.
그래서 두 번째 친선전은 판정승 하나와 질문 하나를 남겼다.
기사는 무엇을 입고 싸우는가.
그리고 검은 무엇을 살리기 위해 피어나는가.
## 3막 — 죄를 입은 갑주와 생명의 검
경기장 보수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레이는 “조금”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애매한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북쪽 목책 세 곳의 고정못을 다시 박고, 흙바닥 중앙의 파인 부분을 다지고, 등불 두 개의 위치를 반 보씩 뒤로 물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막간!”
그리고 박수를 유도하려 했다.
그레이는 바로 말렸다.
“폐하, 막간이 아니라 안전 점검입니다.”
“안전 점검도 막간처럼 하면 재미있잖아.”
“재미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있어!”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입을 삐죽였다가, 관중석을 향해 돌아섰다.
“좋아! 여러분, 지금은 아주 중요한 막간이다! 무대가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박수를!”
그레이가 말리기도 전에 박수가 터졌다.
목책을 고치던 병사들이 당황해서 못을 떨어뜨렸고, 여관좌 사제 하나가 등불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이마를 짚었다.
“폐하……”
“왜? 다들 힘내잖아.”
“못을 떨어뜨렸습니다.”
“그건…… 박수가 너무 훌륭해서?”
죠니는 말에서 내려 말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승부가 아직 손목에 남아 있었다. 창을 쥔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는 그레이와 푸리나의 대화를 듣고 작게 중얼거렸다.
“저 둘은 매번 같은데, 매번 새롭네.”
아스테르다스는 경기장 가장자리에서 자기 손등에 남은 빛의 잔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가 이런 거라면.”
그가 낮게 말했다.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뭐?”
“떨어진 뒤에 남는 것이 꼭 파편만은 아닐 수도 있겠군.”
죠니는 잠깐 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음엔 덜 부수고 떨어지면 되겠네.”
아스테르다스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지.”
“농담이었는데.”
“나도 농담을 배워야겠군.”
“그건 좀 천천히 해.”
그때 경기장 남쪽 입구가 조용해졌다.
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속삭였고, 병사들은 목책을 두드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다음 참가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
그녀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녀의 본명을 몰랐다.
설령 안다 해도, 이 자리에서 그것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직책으로 걸어 들어왔다.
튜튼 기사단의 총장.
프루센의 란트마이스터.
성스러운 이름 아래 변경을 지키는 자.
그리고 그 성스러운 이름으로 지은 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
갑주는 어두웠다.
그러나 단순한 검정이 아니었다. 햇빛을 받으면 표면 아래로 희미한 금빛이 맥동했다. 죽은 태양 같은 금빛이었다. 그리고 그 금빛 위에 달빛처럼 창백한 죄책감이 얇게 스며 있었다.
푸리나도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뛰어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중앙에 서서, 호흐마이스터가 걸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호흐마이스터는 경기장 경계 앞에서 멈추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헤툼 폐하.”
“호흐마이스터 경.”
푸리나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여관:극장]은 산 자를 무대 위에 세우는 힘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미 너무 무거운 갑주를 입고 무대에 올라왔다. 조명을 받으면 가벼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명 아래에서 자신이 짊어진 것을 더 숨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다음 경기의 첫 번째 참가자를 소개하겠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튜튼 기사단의 총장. 프루센의 란트마이스터. 성벽 앞에 먼저 서고, 죄를 갑옷처럼 입어 변경을 지키는 기사.”
푸리나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과장하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호흐마이스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과분한 소개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정중했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부드럽지 않았지만, 거칠지도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아주 오랫동안 단단히 묶어둔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는 그저, 제가 막아야 할 것을 막을 뿐입니다.”
관중석 한쪽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흘렀다.
푸리나는 그 소리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지도 않았다.
그녀는 반대편 입구를 향해 손을 펼쳤다.
“그리고 두 번째 참가자!”
그 순간,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남쪽의 무거운 그림자에 맞서듯, 동쪽 입구에서 옅은 금빛이 번졌다.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는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그녀의 걸음은 호흐마이스터처럼 압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첫걸음에는 당혹감이 조금 묻어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왜 이 난장판 같은 국제 친선전에 나와 있는지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검을 찬 자세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꽃처럼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내리는 사람이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조금 밝게 웃었다.
“시원성좌의 별의 간택자! 생명을 긍정하는 검을 든 자!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의 신임 단장!”
아스트리트의 어깨가 아주 조금 움찔했다.
푸리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목서가 피는 나흐트로제의 기사,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아스트리트는 관객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박수가 들렸다.
하지만 그 박수는 2막 때와 달랐다.
속도와 빛에 대한 환호가 아니라, 조금 조심스러운 기대였다.
아스트리트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물었다.
“저…… 확인차 묻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그녀를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정말 친선전 맞습니까?”
관중석 곳곳에서 작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호흐마이스터는 조금도 웃지 않고 답했다.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렇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대답이 가장 불안한 종류입니다.”
푸리나가 끼어들었다.
“괜찮아! 그레이가 규칙을 세웠으니까!”
그레이는 곧장 말했다.
“폐하, 규칙은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레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키겠습니다.”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규칙을 받아들이는 대답이라기보다, 이미 내린 명령을 자신에게 다시 새기는 의식처럼 들렸다.
그레이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전 확인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치명 신술과 광역 파장 사용 시 정지 선언을 우선으로 합니다. 관중석 방향 파장은 금지입니다. 경기장 밖으로 검압이 흐를 경우 즉시 중지합니다.”
아스트리트가 살짝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제 기술 중 하나가…… 조금 넓습니다.”
그레이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얼마나 넓습니까?”
아스트리트는 잠시 고민했다.
“정확히는, 넓게 쓰면 매우 넓습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펜을 올렸다.
“기술명.”
“《금목만리향파》입니다.”
“성질은요?”
“금목서검의 생명력을 개화시켜 거대한 금빛 검으로 내려치는 거대참격입니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거대한 금빛 검!”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폐하, 흥미를 보이실 부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대한 금빛 검인데?”
“그래서 더더욱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아스트리트는 검자루를 바라보았다.
“친선전에서 꺼낼 기술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를 보았다.
“경의 갑주를 보고 나니, 보이지 않게 넘기면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보여주십시오.”
아스트리트가 눈을 깜박였다.
“괜찮습니까?”
“그대가 무엇을 위해 검을 드는지, 저도 보고 싶습니다.”
그레이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용 시 사전 선언. 출력 제한. 관중석 방향 금지. 여관좌 사제 4명 추가 배치. 경기장 남측은 비워둡니다.”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좋아! 그럼 모두 더 멋지게 조심하자!”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멋지게 조심한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오늘 생겼어.”
“제발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말에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경기장 중앙의 두 기사는 웃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뽑았다.
검신 위에 희미한 금빛이 어렸다. 금목서의 향이 아직 아주 연하게, 바람 속에 섞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들었다.
그 창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이 향한 곳은 분명했다. 그것은 적의 심장을 찌르기 위한 창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먼저 길목을 막기 위한 창이었다.
푸리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물러났다.
“준비.”
아스트리트는 숨을 골랐다.
그녀의 몸 안에서 별빛과 내공, 근육과 호흡, 시선과 검끝이 균형을 잡았다.
《창성천강지체》.
그녀의 검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힘만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내공만 빛나는 것도 아니었다.
힘, 민첩, 내구, 지성, 영력, 정신.
그 모든 것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하나의 검을 들기 위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검을 정면으로 세웠다.
“만생개화검법.”
금목서 향이 조금 짙어졌다.
“전개.”
검로가 피었다.
금빛 꽃잎이 허공에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실제로 핀 것은 거리와 각도였다. 손목이 움직일 길, 발이 디딜 자리, 다음 호흡이 이어질 틈, 상대 갑주 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검선.
검술이 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꽃은 장식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자라는 가지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꽃을 보았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금빛이 떠올랐다.
《천양금안》.
그 눈은 아스트리트의 검을 표면으로만 보지 않았다.
피 냄새가 적다.
그러나 약하지 않다.
검로는 아직 젊다.
그러나 매번 고쳐질 여지가 있다.
그 검은 증오를 먹고 자라지 않는다.
생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자란다.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좋은 검입니다.”
아스트리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부딪치지도 않았습니다.”
“보입니다.”
호흐마이스터의 갑주가 어두워졌다.
“죄악의 갑주, 전개.”
《죄악의 갑주Frevel Panzer》.
갑주는 단순히 두꺼워지지 않았다.
그 표면 아래로, 말로 다 적을 수 없는 것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명분 아래 이루어진 정치공작.
기사단을 지키기 위해 밀어낸 사람들.
헤르만 폰 잘차를 무너뜨린 날의 침묵.
몽골 황금혈통이라는, 자기 안의 지워지지 않는 피.
그 피를 혐오하면서도 그 피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공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프루센의 성벽 앞에 섰던 날들.
죄가 갑옷이 되었다.
갑옷은 무거웠다.
그러나 그녀는 익숙했다.
푸리나의 손이 내려갔다.
“시작!”
아스트리트가 먼저 움직였다.
금목서의 검로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첫 검은 호흐마이스터의 어깨선을 향했다. 곧장 찌르는 검이 아니었다. 갑주의 반응을 보려는 검, 동시에 다음 가지를 피우기 위한 검이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대로 받았다.
소리는 둔탁했다.
아스트리트의 손목이 흔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두 번째 검을 이었다. 꽃가지가 옆으로 뻗듯, 검로가 호흐마이스터의 옆구리로 미끄러졌다.
호흐마이스터는 이번에도 받았다.
갑주가 금빛을 삼켰다.
세 번째 검.
네 번째 검.
금목서의 향이 경기장 위로 퍼졌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는 그 향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마침내 호흐마이스터가 한 걸음 나아갔다.
아스트리트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읽었다.
너무 멀다.
그녀의 판단은 맞았다.
보통의 중갑 기사라면 닿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호흐마이스터의 발은 서방 중갑의 박자가 아니었다.
《대초원의 대기사》.
프루센의 갑주는 서방의 것이었으나, 그 박자는 초원의 것이었다.
한 걸음은 넓었다.
반 걸음은 예상보다 짧았다.
다음 한 걸음은 이미 아스트리트의 검 안쪽에 있었다.
창대가 그녀의 검을 밀었다.
아스트리트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관중석에서 탄성이 들렸다.
아스트리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창성천강지체》가 몸의 균형을 붙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왼발이 반 박자 늦었고, 오른쪽 어깨가 먼저 열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오른발이 늦었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낮추지 않았다.
“그걸 지금 보셨습니까?”
“예.”
아스트리트는 검을 다시 들었다.
눈빛이 바뀌었다.
부끄러움도, 분노도 아니었다.
수정.
《노력하는 자》.
그녀는 패배의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방금 밀린 감각을 몸 안에 남겼다.
어깨가 열린 이유를 기억했다.
발이 늦은 박자를 기억했다.
그 기억을 다음 검로의 토양으로 삼았다.
“다시.”
짧은 말과 함께 아스트리트가 전진했다.
이번 검은 조금 달랐다.
화려함이 줄었다.
꽃잎은 적었다.
그러나 가지는 더 정확했다.
호흐마이스터의 《천양금안》이 다시 반응했다.
그녀는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재능만으로 싸우지 않는다.
밀리면 고친다.
흔들리면 다시 세운다.
한 번 꺾인 가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음 가지가 어디로 자라야 할지 배운다.
“그대는 재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군요.”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부딪치며 답했다.
“재능만으로는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검과 창이 다시 부딪쳤다.
아스트리트의 검신에 별빛이 맺혔다.
《별의 간택자Chosen》.
별빛은 그녀를 감싸는 방패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그녀가 밀려도 다시 고친다는 사실.
생명이 완성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며 스스로를 고쳐나간다는 사실.
그 사실을 세계가 조금 더 강하게 인정하는 것 같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죄악의 갑주가 내뿜는 압박 속에서도, 아스트리트의 검은 꺾이지 않았다.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생명은 완성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베고.
“자라며.”
다시 막고.
“스스로를.”
발을 바꾸고.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검이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틈을 향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검을 창대로 눌러 빗겨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조금 더 깊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그녀의 창끝 위로 성인의 그림자가 겹쳤다.
“저도 고쳐야겠지요.”
금빛 눈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흔들렸다.
“아스칼론, 현현.”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관중석 몇몇이 숨을 삼켰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용살.
용을 짓밟는 성인의 이름.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의 창은 아스트리트를 용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그대가 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창끝의 빛이 갑주 안쪽으로 내려앉았다.
“제가 짓밟아야 할 용은, 대개 제 안에 있습니다.”
아스트리트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그 말을 이해했다.
이 사람은 적을 미워해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의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그 무언가가 밖으로 기어나오지 못하게, 죄악의 갑주와 성인의 창으로 스스로를 찍어누르고 있다.
아스트리트는 그 사실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을 늦추지는 않았다.
슬픔으로 상대를 봐주는 것은 생명 긍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호흡을 정돈했다.
《화유심법》.
내공은 꽃가지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꽃으로.
꽃에서 향으로.
금목서 향이 다시 짙어졌다.
아스트리트의 검이 낮아졌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자세를 보고 창을 고쳐 잡았다.
“오십니까?”
“예.”
“좋습니다.”
아스트리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베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답했다.
“압니다.”
아스트리트의 검이 금빛으로 빛났다.
처음에는 검신을 따라 아주 얇은 선이 생겼다.
그다음에는 그 선이 꽃가지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금목서의 생명력이 검 안에서 개화했다.
아스트리트는 낮게 말했다.
“시원성始原星은 생명의 탄생부터 삶을 아우르는 별.”
그녀의 양손이 검자루를 붙잡았다.
“생명은 짓밟히기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 경기장 위에 거대한 금빛 검이 떠올랐다.
《금목만리향파》.
금목서검의 생명력이 한순간에 개화했다.
그것은 단순한 검압이 아니었다.
그것은 꽃잎의 환상도 아니었다.
거대한 금빛 검.
살아 있는 검.
삶을 품은 참격.
메마른 전장 위에서도 생명이 피어날 수 있다고 증명하기 위해, 나흐트로제가 만들어낸 선택받은 자의 비기.
관중석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여관좌 사제들이 등불을 높이 들었다.
그레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관중석 방향 금지! 남측 파장 차단!”
아스트리트는 이미 각도를 틀고 있었다.
그녀는 호흐마이스터를 죽이기 위해 이 검을 내리지 않았다.
그 검이 향한 것은 호흐마이스터의 목이 아니었다.
죄를 입어야만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오래된 결론.
생명이 짓밟힌 뒤에야 성벽이 선다는 전장의 습관.
검은 더러워져야만 현실을 지킬 수 있다는, 기사들이 너무 자주 받아들인 대답.
금목서의 검은 그것을 가르려 했다.
호흐마이스터의 《천양금안》이 그 본질을 보았다.
저 참격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갑주도 아니다.
저 검이 베려는 것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믿어온 죄의 이유다.
호흐마이스터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창을 세웠다.
죄악의 갑주가 더 어두워졌다.
그 어둠 아래에서 죽은 태양 같은 금빛이 맥동했다.
그녀는 그 거대한 금빛 검 앞에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Primus Inter Pares》.”
동등한 자들 중 첫 번째.
위에 선 자가 아니었다.
먼저 앞에 서는 자였다.
형제들보다 높이 앉는 자가 아니라, 형제들 앞에서 먼저 맞는 자.
죄가 필요하다면 먼저 입고.
방패가 필요하다면 먼저 세워지고.
더러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더러워지는 자.
호흐마이스터는 승리각보다 먼저 방패각을 잡았다.
아스트리트의 금빛 검이 내려왔다.
프루센의 갑주는 그 자리에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은 초원의 박자로 움직였다.
한 걸음.
반 걸음.
다시 한 걸음.
《대초원의 대기사》의 보법이, 거대한 참격의 길 앞에 호흐마이스터를 가장 먼저 세웠다.
그녀는 《금목만리향파》를 정면에서 부수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파장이 관중석을 흔들었을 것이다.
대신 가장 위험한 방향을 자신의 갑주 위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남는 파장을 하늘로 흘렸다.
금빛 검이 죄악의 갑주 위를 갈랐다.
갑주 표면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 속에서 달빛 같은 죄책감과 죽은 태양의 금빛이 함께 번졌다.
호흐마이스터의 무릎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스칼론.”
성인의 창이 다시 빛났다.
“현현.”
그 창은 아스트리트를 향해 울부짖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안쪽의 용을 짓밟았다.
황금혈통의 폭력성.
초원의 피.
파괴와 정복의 기억.
금빛 생명 앞에서 이를 드러내려는 자기 안의 괴물.
성인의 창은 그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에, 먼저 밟았다.
그렇게 한 박자.
아스트리트의 금빛 참격이 하늘로 흘렀다.
경기장 위의 구름이 갈라졌다.
관중들은 그제야 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한 박자 사이, 호흐마이스터의 창끝은 움직였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거두려 했다.
늦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조금, 반 박자 늦었다.
호흐마이스터의 성인의 창이 아스트리트의 어깨선 한 치 앞에서 멈췄다.
동시에 아스트리트의 롱소드는, 금빛 참격의 잔향을 품은 채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틈 한 치 앞에서 멈췄다.
여관좌 사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지!”
빛이 사라졌다.
금목서 향만이 경기장 위에 남았다.
그레이가 빠르게 상황을 확인했다.
“관중석 파장 없음. 부상 없음. 갑주 표면 손상. 경기장 남측 흙바닥 파임.”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사제들이 판정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주심 사제가 선언했다.
“호흐마이스터 경, 관중석 방향 파장 차단 및 치명각 선점. 판정승!”
박수는 바로 터지지 않았다.
모두가 방금 본 장면을 이해해야 했다.
거대한 금빛 검이 내려왔다.
어두운 갑주가 그것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한 사람은 생명이 짓밟히지 않도록 검을 피웠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검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먼저 앞에 섰다.
그 사실이 사람들의 가슴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박수가 터졌다.
2막의 박수보다 늦었다.
그러나 더 오래 갔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내렸다.
그녀는 패배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자세를 되짚었다.
“마지막에 왼쪽 어깨가 먼저 열렸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을 낮췄다.
“그것을 바로 보셨다면, 다음에는 달라지겠지요.”
“다음에는 더 고치겠습니다.”
“그것이 그대의 검이군요.”
아스트리트는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를 보았다.
균열이 있었다.
자신의 《금목만리향파》가 남긴 상처였다.
그러나 그 균열은 갑주를 완전히 부수지 못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틈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물었다.
“마지막에, 제 검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길을 바꾸셨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검은 너무 넓었습니다. 그대로 받으면 관중석이 흔들립니다.”
“친선전에서 쓸 기술은 아니었나요?”
호흐마이스터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니요.”
아스트리트가 눈을 깜박였다.
“아니요?”
“그대가 무엇을 위해 검을 드는지 보여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호흐마이스터의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롱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정이었다.
아스트리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막으셨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경기장 너머를 보았다.
관중석의 아이들.
갑주를 입은 기사들.
목책을 잡고 서 있는 병사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프루센의 평야, 성벽, 눈 덮인 변경, 언젠가 동쪽에서 올 말발굽.
그녀는 말했다.
“저는 먼저 앞에 서는 자니까요.”
아스트리트는 낮게 되뇌었다.
“《Primus Inter Pares》.”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 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의 손이 균열 난 갑주 위에 닿았다.
“먼저 더러워진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검을 내려다보았다.
금목서의 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언젠가 그런 첫 번째가 필요 없는 기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풋내가 있었다.
꽃향기가 있었다.
아직 피 냄새보다 금목서 향이 짙은 검.
그러나 그 풋내는 약함이 아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부디 그러십시오.”
잠시 침묵.
“그대의 금목서 향이 오래 남는다면, 제 갑주가 조금은 덜 필요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아스트리트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더 오래 피우겠습니다.”
“쉬운 길은 아닐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별의 간택자입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기적이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압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멈췄다.
기적.
그 말은 그녀에게 가벼운 단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죽었어야 할 아이였다.
정치적 숙청 속에서 사라졌어야 할 씨앗.
초원의 피가 제 피를 잡아먹던 밤에 끝났어야 할 이름.
하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기적의 체현자》.
그 기적은 그녀를 구했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죄를 입혔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스트리트에게 말했다.
“기적은 사람을 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무엇을 짊어질지는, 그 뒤의 일이지요.”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 뒤의 일을, 저는 생명 쪽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호흐마이스터도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길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푸리나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들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뛰어나와 “좋아!”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늦췄다.
이 경기는 박수보다 침묵이 먼저 필요한 경기였다.
그리고 침묵이 충분히 지나간 뒤에야,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그 한 번의 박수에 아이들이 따라 쳤다.
병사들이 따라 쳤다.
기사들이 창대를 두드렸다.
사절들도 손을 들었다.
박수는 오래 이어졌다.
레이튼은 그 박수 속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번 질문은 승패가 아니었군요.”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레이튼은 경기장에 남은 금빛 참격의 흔적과, 죄악의 갑주에 새겨진 균열을 보았다.
“기사는 무엇을 입고 싸우는가.”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검은 무엇을 살리기 위해 피어나는가.”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좋은 질문이네.”
“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좋은 거지?”
레이튼은 웃었다.
“물론입니다. 아직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레이는 장부에 기록했다.
《제2경기 종료. 호흐마이스터 판정승. 부상 없음. 남측 흙바닥 보수 필요. 호흐마이스터 갑주 손상.》
그녀는 잠시 펜을 멈췄다.
그리고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아스트리트 경, 패배 후 즉시 자세 수정.》
푸리나가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도 기록해?”
그레이는 장부를 닫지 않고 답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같은 이유로 다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호흐마이스터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기록입니다.”
아스트리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생명은 그렇게 고쳐나가는 것이니까요.”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한쪽에는 균열 난 죄악의 갑주가 있었다.
한쪽에는 아직 금목서 향을 품은 검이 있었다.
둘 다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 있었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밝게 웃었다.
“좋아!”
그 한마디에,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훌륭한 3막이었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폐하, 아직 전체로는 3막이지만 경기 번호로는 제2경기입니다.”
“세부적인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합니다.”
“좋아, 그럼 훌륭한 제2경기이자 3막이었다!”
“그건 맞습니다.”
죠니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결국 이겼네.”
하융은 경기장에 남은 금빛과 어두운 갑주의 잔향을 바라보았다.
“두 길이 모두 무거웠소.”
죠니가 말했다.
“그래도 닿지는 않았지.”
아스테르다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럼 좋은 낙점이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그 표현 계속 쓸 거야?”
“필요하면.”
“그래. 리투아니아식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경기장에는 아직 금목서 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향 아래, 죄악의 갑주에 새겨진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균열을 숨기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도 자신의 패배를 숨기지 않았다.
박수는 2막보다 늦게 터졌다.
그러나 더 오래 남았다.
그 박수 아래에서 금목서의 거대한 검은 사람을 베지 않고 전장의 오래된 결론을 갈랐고, 죄악의 갑주는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중석 앞에 먼저 서기 위해 더 무거워졌다.
한쪽은 생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피어나는 검을 보였다.
다른 한쪽은 죄를 입고서라도 먼저 막는 기사의 자리를 보였다.
그래서 두 번째 친선전은 판정승 하나와 질문 하나를 남겼다.
기사는 무엇을 입고 싸우는가.
그리고 검은 무엇을 살리기 위해 피어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