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05익명의 참치 씨(f85ea685)2026-05-13 (수) 21:25:50
아레의 상위세 지휘 체급, 하융의 가능성계 현장 지휘, 그레이의 안식계 행정, 레이튼의 문답·결론해체 칭호를 반영해서 작성할게.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 5막 — 가장 낮은 바다와 비껴간 창들
“이번 막은 도망치는 법이야!”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외쳤을 때, 그레이는 이미 펜을 들고 있었다.
“퇴각입니다, 폐하.”
“도망과 퇴각의 차이는?”
푸리나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레이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기록과 책임이 남으면 퇴각입니다.”
레이튼이 모자챙을 살짝 눌렀다.
“그리고 질문이 남으면 전략이지요.”
하융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기장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성벽.
피난민 목패.
마지막 수레.
등불 몇 개.
후방의 낮은 선 하나.
푸리나가 이름 붙인 퇴각선이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또한 살아남은 이가 다음 길을 걸으면, 그것은 패배만은 아니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럼 이번 막은 패배만은 아닌 도망…… 아니, 퇴각!”
“폐하.”
“알았어, 알았어. 퇴각.”
그레이는 장부 위에 선을 하나 그었다.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경기장 위의 조명이 낮아졌다.
[여관:극장]은 앞선 막들과는 다르게 변했다.
이번에는 화려한 결투장이 아니었다.
중앙에는 반쯤 무너진 성벽이 있었다.
성벽 뒤에는 피난민 역할을 맡은 작은 목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바퀴가 삐걱거리는 수레 하나가 놓였다.
수레 위에는 들것 둘, 물통 넷, 마른 빵이 든 자루, 그리고 “기록 상자”라고 적힌 작은 궤짝이 실려 있었다.
앞쪽에는 적 기병과 궁수를 대신하는 검은 목패들이 있었다.
그 목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의 극장이 조명을 바꾸는 순간, 관중들은 모두 느꼈다.
저것들은 곧 달려올 것이다.
“이번 경기는 모의 퇴각 지휘전입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폐하는 전장 전체를 압박하는 쪽을 맡습니다. 킬리키아 측은 하융 경, 레이튼 경, 그리고 제가 피난민과 마지막 수레를 퇴각선까지 보내는 역할을 맡습니다.”
푸리나가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무대 담당!”
“폐하께서는 판정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조명은?”
“조명은 허가합니다.”
“좋아!”
그레이는 한숨을 참았다.
“승리 조건은 단순 생존자 수만이 아닙니다. 피난민 퇴각, 수레 보존, 부상자 후송, 지휘선 유지, 후퇴 질서, 이름 누락 여부,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을 위험 감소 여부를 종합합니다.”
죠니가 목책에 기대어 말했다.
“경기라기보다 악몽 같은데.”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악몽이다. 깨어난 뒤 움직일 이유가 남으니까.”
죠니는 그를 흘끗 보았다.
“너는 가끔 좋은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해.”
“좋은 말이라면 진지해야 하지 않나?”
“아니,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닌데.”
그때 경기장 반대편에서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무장을 과시하지 않았다.
화려한 갑주도, 높이 치켜든 깃발도 없었다.
그저 검은 드레스처럼 보이는 군복,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실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흘렀다.
그 실은 빛나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낮췄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의 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속삭임.
목책을 두드리는 손가락.
수레바퀴가 삐걱이는 소리.
병사들의 숨.
모든 것이 낮아졌다.
침묵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정중하게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호명했다.
“세르비아의 군주. 첫 번째 마가트로이드. 전장의 실타래와 침묵으로 가라앉는 이들을 기억하는 자.”
푸리나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가볍게 만들지 않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무대입니다, 헤툼 폐하.”
그녀는 무너진 성벽과 피난민 목패를 바라보았다.
“산 자가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무대라면, 죽은 이들도 조금은 덜 외롭겠지요.”
푸리나는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덜 외롭게 퇴각하는 막이네.”
“그리되기를 바랍니다.”
아레의 시선이 하융, 레이튼, 그레이에게 향했다.
“세 분이 함께 오시는군요.”
하융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수수께끼도 때로는 여러 명이 풀어야 더 즐겁지요.”
그레이는 장부를 안고 짧게 말했다.
“저는 즐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필요합니다.”
아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좋습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 순간, 푸리나의 [여관:극장] 위로 다른 무언가가 겹쳤다.
무대가 아니라 지도.
흙바닥의 선들이 군도처럼 이어졌다.
무너진 성벽은 전선이 되었고, 피난민 목패는 후방의 부담이 되었고, 수레 하나는 보급과 부상자와 기록을 한꺼번에 싣고 있는 늦은 심장이 되었다.
아레는 전장을 보았다.
아니, 전쟁을 보았다.
《천저의 그물추》.
그녀의 눈에는 수레바퀴 하나가 늦어지는 것이 단순한 지연이 아니었다.
그 지연이 뒤쪽 방패병의 보폭을 바꾸고, 그 보폭이 전령의 통과 시간을 늦추고, 그 통과 시간의 지연이 왼쪽 피난민 열의 공포를 키우고, 그 공포가 다시 방패선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미시적인 변화가 거시적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아레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시작합니다.”
푸리나가 손을 내렸다.
“막이 오른다!”
검은 목패 기병들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렸다.
그러나 아레의 실이 전장 위로 퍼지자, 그 느린 움직임이 끊기지 않는 압박으로 바뀌었다.
《끊기지 않는 실타래》.
아레는 자신의 병력만 잇지 않았다.
전장 전체를 실로 보았다.
적의 접근.
아군의 후퇴.
수레의 바퀴.
피난민의 발.
전령의 숨.
방패병의 팔.
모든 것이 실이었다.
“모두를 잇는 그물.”
아레가 낮게 말했다.
그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퇴각로가 좁아졌다.
하융은 첫 번째 창을 보았다.
수레가 늦었다.
후미가 잘렸다.
전령은 살아남았지만, 물통이 버려졌다.
퇴각선 뒤에서 부상자 둘이 죽었다.
두 번째 창.
수레를 버렸다.
피난민은 빨라졌다.
그러나 아이 하나가 어둠 속에서 손을 놓았다.
세 번째 창.
방패대가 버텼다.
하지만 적의 궁수가 기록 상자를 태웠다.
나중에 이름을 찾지 못했다.
하융은 숨을 낮게 내쉬었다.
“……혼자서는 어렵겠소.”
레이튼이 그 옆에 섰다.
“그렇다면 혼자 풀 문제가 아니겠지요.”
그레이는 이미 수레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피난민 명단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수레 안의 물자 목록도 확인합니다.”
하융이 회색빛 창호를 열었다.
《여관:비껴간 창》.
전장 위에 동방식 창호들이 얇게 겹쳤다.
그 창들은 밝지만은 않았다.
어떤 창에는 죽은 병사가 있었다.
어떤 창에는 무너진 수레가 있었다.
어떤 창에는 방패선이 한 박자 더 버티는 모습이 있었다.
어떤 창에는 피난민이 서로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이 있었다.
비극과 희망이 함께 창밖에 있었다.
하융은 그 창문들을 하나씩 보았다.
“왼쪽 수레는 세 번 죽었소. 오른쪽 전령은 두 번 끊겼소. 중앙 방패는 한 번 버텼으나, 그 뒤의 아이가 손을 놓았소.”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아이들은 방패 안쪽이 아니라 수레 뒤쪽입니다. 손을 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 명씩 짝을 짓습니다.”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은 덜 죽었소.”
레이튼은 무너진 성벽 쪽을 보았다.
“그러면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는 아레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아레 폐하. 이 퇴각에서 우리가 살리려는 것은 수레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퇴각이라는 이름입니까?”
아레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셋은 분리되기 어렵습니다.”
“물론입니다. 좋은 수수께끼일수록, 보기들은 서로 닮아 있지요.”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닮았다고 해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채,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그 순간 퇴각로의 오른쪽이 막혔다.
막힌 것이 아니었다.
막히도록 되었다.
검은 목패 궁수들이 사격선을 잡았고, 기병 목패가 그 사격선을 비껴 돌아 피난민의 측면을 압박했다.
수레는 그쪽으로 갈 수 없었다.
하융이 말했다.
“중앙은 늦소.”
그레이가 장부를 보았다.
“늦어도 갑니다. 수레를 버리지 않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둘이 죽소.”
“버리면 퇴각선 뒤에서 둘이 더 죽습니다.”
그레이는 수레 위의 물통을 가리켰다.
“물통 넷 중 둘은 후방 치료소에서 필요합니다. 들것 둘은 지금 부상자 운반용이지만, 퇴각선 뒤에서는 임시 침상입니다. 지금 버리면 빨라지지만, 같은 이유로 다시 죽습니다.”
레이튼이 작게 말했다.
“좋은 답입니다. 질문을 좁히지요. 수레를 살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수레 없이는 사람이 다시 죽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그렇다면 완전한 길은 없소. 덜 죽는 길로 가겠소.”
킬리키아 측 목패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융은 짧게 지시했다.
“왼쪽 방패, 반 치 낮추시오. 전령은 중앙이 아니라 그림자를 밟으시오. 수레꾼, 바퀴를 들지 말고 누르시오. 이미 든 창에서는 바퀴가 부러졌소.”
그의 말은 예언이 아니었다.
“앞으로 부러진다”가 아니었다.
이미 부러진 가능성의 흔적을 보고, 지금의 손이 다른 위치를 잡게 만드는 지시였다.
아레는 그것을 보았다.
“흥미롭군요.”
그녀가 말하자, 전장에 한기가 번졌다.
《퍼져가는 한기》.
검은 목패들과 연결된 모든 경로에 피로가 내려앉았다.
방패대의 팔이 무거워졌다.
전령의 숨이 짧아졌다.
수레꾼의 손이 굳었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수레꾼 교대. 물통 하나를 내려 중앙 방패대에 넘깁니다.”
“물통을 내리면 수레가 가벼워지는군요.”
레이튼이 말했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손이 따뜻해집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듣고 창 하나를 닫았다.
《창문 닫기》.
수레꾼이 손을 놓쳐 바퀴가 빠지는 가능성이 얇게 사라졌다.
하지만 아레의 압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라앉히기》.
침묵이 내렸다.
이번에는 단순히 조용해진 것이 아니었다.
전령이 외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옆 전열에 닿지 않았다.
방패병은 명령을 들으려 했지만, 그 명령은 한 박자 늦게 도착했다.
수레꾼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레의 지휘는 병사를 죽이기 전에, 먼저 서로를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푸리나는 관중석 쪽에서 손을 꽉 쥐었다.
이번 막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무서웠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도, 금빛 거대참격도, 자주빛 화살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조금씩 늦어지고, 서로를 놓치고, 같은 방향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전령 둘이 끊겼습니다.”
하융이 창밖을 보았다.
“이대로면 방패선이 먼저 침묵하오.”
레이튼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주변에 낡은 서재의 기척이 열렸다.
책장.
별이 그려진 천장.
아직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별들.
공중에 떠다니는 미완의 질문들.
《여관:문답의 서재》.
레이튼은 검은 목패들이 아니라, 킬리키아 측 지휘선 위에 붙은 이름을 보았다.
“끊겼다.”
“늦었다.”
“끝났다.”
그 이름들은 너무 빨랐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아직 끝났다고 부르기에는 이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명령이 끊겼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닫힌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패배라는 책이 닫히려던 순간, 마지막 장이 한 장 더 넘어갔다.
그레이가 즉시 받아 적었다.
“끊긴 건 전령이 아니라 전달 순서입니다. 방패대는 명령을 못 들은 게 아니라, 같은 명령을 두 번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질문이 바뀝니다. ‘누가 명령을 못 들었는가’가 아니라, ‘왜 같은 명령이 두 번 필요한가’입니다.”
하융이 창을 보았다.
“두 번째 명령을 기다린 창에서는 늦었소. 첫 번째 명령만 믿은 창에서는 방패 셋이 살았소.”
그레이가 말했다.
“중앙 방패대, 첫 번째 명령으로 이동. 반복 확인 생략. 대신 뒤쪽에 민원 접수 표식을 둡니다.”
푸리나가 멀리서 작게 중얼거렸다.
“민원 접수 표식…… 전장에서?”
그레이는 들었다.
“전장에서도 민원은 발생합니다.”
“그건 맞는 것 같아.”
하융이 짧게 웃었다.
하지만 아레는 아직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공허로 향하는 그물망》.
퇴각로와 퇴각로 사이에 감제망이 펼쳐졌다.
돌파와 우회가 차단되었다.
그 길로 가면 늦는다.
저 길로 가면 끊긴다.
중앙으로 가면 밀린다.
수레를 버리면 살아남지만, 기록 상자가 탄다.
기록 상자를 살리면 아이가 늦는다.
하융의 창들이 거의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는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레이튼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어느 창에서도 모두 살지는 않소.”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아레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애도에 가까웠다.
“지휘관은 어느 순간 용인해야 합니다.”
아레가 말했다.
“많든 적든, 누군가는 늦습니다. 누군가는 끊깁니다. 누군가는 후미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름들을 기억합니다.”
레이튼이 모자를 벗었다.
“아레 폐하.”
“말씀하십시오.”
“후미라고 부른 순간, 그들은 이미 버려진 것입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후미는 뒤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돌아올 길도 지휘의 일부입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레의 실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질문은 공격이 아니었다.
비난도 아니었다.
그저 이름 하나를 잠시 지운 것이다.
후미.
그 이름 아래 너무 빨리 묻힌 결론을.
아레는 말했다.
“돌아올 길이 없다면, 후미가 아니라 제물이지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아직 질문은 남아 있습니다.”
그때 검은 목패 기병들이 마지막 수레를 향해 돌진했다.
위기였다.
수레를 지키려면 방패대가 남아야 했다.
방패대가 남으면 피난민 셋이 늦었다.
피난민 셋을 먼저 보내면 수레가 잡혔다.
수레가 잡히면 퇴각선 뒤에서 부상자 둘과 물 부족으로 다시 손실이 발생했다.
그레이가 장부를 세게 쥐었다.
“수레를 그대로 묶으면 뒤의 세 명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하융은 창을 보았다.
한 창에서 그는 뛰어들었다가 창에 꿰였다.
다른 창에서는 검집으로 막았지만, 수레바퀴가 부러졌다.
또 다른 창에서는 자신이 살았지만, 수레꾼이 죽었다.
그다음 창에서는 모두 늦었다.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어느 창에서도 모두 살지는 않소.”
레이튼이 말했다.
“그렇다면 ‘모두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모든 질문의 끝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경기장 전체가 그 질문을 들었다.
《아포리아의 신사》.
레이튼은 정중히 모자를 벗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레의 실이 수레와 피난민과 후미를 감고 있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이 퇴각의 목적은 손실을 계산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다시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까?”
결론이 멈췄다.
“셋은 버려야 한다.”
그 이름이 완전히 고정되기 전, 질문이 그 앞에 섰다.
그레이가 한 걸음 나섰다.
그녀의 발밑에 조용한 거리가 열렸다.
낡았지만 다시 세워진 집들.
문패가 달린 문.
등불.
잠들지 못한 이름들이 아직 꺼지지 않은 채 걸려 있는 거리.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손실 셋이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침묵 속에서 잘 들렸다.
“아이 하나. 들것을 든 사람 하나. 마지막 물통을 맡은 사람 하나입니다.”
그녀는 펜을 움직였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칭호가 열렸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등불들이 하나씩 켜졌다.
피난민 목패 셋 위에 이름표가 생겼다.
아이.
들것잡이.
물통지기.
숫자는 셋이었지만, 죽음은 셋이라는 숫자 아래 숨어 있지 못했다.
그레이가 말했다.
“이동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아이는 수레 뒤가 아니라 방패 안쪽. 들것잡이는 수레 오른쪽. 물통지기는 전령과 교대합니다.”
하융이 고개를 들었다.
회색 창호들이 다시 열렸다.
그 안에서 조금 다른 빛이 보였다.
완전히 좋은 세계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다쳤다.
수레는 여전히 흔들렸다.
방패대 하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창 하나에서, 아이가 손을 놓지 않았다.
하융은 검집을 잡았다.
“그런 세계도 있었소.”
그의 몸 주위에 자신이 죽은 가능성들이 겹쳤다.
첫 번째 하융은 창에 꿰였다.
두 번째 하융은 말발굽 아래 넘어졌다.
세 번째 하융은 검을 빼기도 전에 늦었다.
네 번째 하융은 검집 끝으로 창대를 반 치 밀었다.
그 네 번째 가능성은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반 치는 남았다.
하융은 그 죽은 자신들을 밟고 앞으로 나갔다.
《죽은 나를 밟고 선 검》.
검은 목패 기병의 창대가 수레 쪽으로 내려왔다.
하융은 그것을 정면으로 막지 않았다.
이미 막아 죽은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걸음 비껴섰다.
검집 끝이 창대를 반 치 밀었다.
정말 반 치였다.
그 반 치 때문에 창끝은 수레꾼의 손목을 지나쳤고, 바퀴는 부러지지 않았으며, 수레는 넘어지지 않았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더 나은 세계도 있었을 것이오.”
그의 칭호가 열렸다.
《이 세계를 선택한 자》.
창밖에는 수많은 세계가 있었다.
아예 전쟁이 없었던 세계.
수레가 더 일찍 출발한 세계.
피난민들이 피난민이 되지 않았던 세계.
하융이 이 나라에 오지 않았던 세계.
푸리나를 만나지 않았던 세계.
그는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허나 우리가 사는 곳은 이곳이오.”
그 말과 함께, 패배 가능성이 한 번 밀려났다.
공포가 밀렸다.
혼란이 밀렸다.
“이미 늦었다”는 이름이 밀렸다.
그리고 아레가 움직였다.
그녀의 눈에 가장 낮은 바다가 열렸다.
《가장 낮은 바다》.
그 바다는 물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세르비아가 짓밟힌 기억.
전장에서 명령 아래 스러진 병사들.
후대의 마가트로이드들이 가라앉힌 것들.
잊힌 이들이 마땅히 잠드는 공허의 천저점.
아레는 모든 실을 쥐고 있었다.
놓지 않으려 했다.
놓으면 잊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칭호가 움직였다.
《첫 번째 가주》.
아레와 연결된 침묵의 전령 목패 하나가 일어섰다.
그 목패는 퇴각로 붕괴라는 결말을 강화하려 했다.
길을 잃은 아이들아.
나아갈 길을 모르겠다면.
가장 아팠던 첫 매듭을 떠올려 되짚어라.
퇴각로가 거의 닫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레이튼이 이름을 지우고 있었다.
그 결말의 이름은 아직 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레이가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하융이 죽은 가능성을 밟고 있었다.
이 세계를 선택하겠소.
그리고 아레는 보았다.
실을 놓으면 잊히는 것이 아니다.
놓아도 기록할 수 있다.
놓아도 창밖에 남겨둘 수 있다.
놓아도 질문할 수 있다.
놓아도 이름은 남길 수 있다.
산 자는 때때로, 실이 느슨해져야 달릴 수 있다.
아레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풀렸다.
실 하나가 느슨해졌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방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억하기 때문에 놓는 것이었다.
그 느슨해진 실 사이로, 피난민 목패 하나가 달렸다.
수레가 퇴각선에 닿았다.
아이 목패가 방패 안쪽에서 넘어지지 않았다.
들것잡이는 수레 오른쪽을 지켰다.
물통지기는 전령에게 물을 넘겼다.
여관좌 사제가 외쳤다.
“정지!”
침묵이 내려앉았다.
검은 목패들이 멈췄다.
수레바퀴도 멈췄다.
피난민 목패들도, 방패대도, 전령도 모두 그 자리에 섰다.
하융은 검집을 땅에 짚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레이는 펜을 놓지 않았다.
레이튼은 모자를 다시 썼다.
아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놓은 실 하나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레이가 판정표를 정리했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이번에는 재촉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레이가 말했다.
“판정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아레 폐하, 전체 지휘선 유지와 적 진군 지연에서 우세. 퇴각로 압박, 지휘체계 분리, 전장 지속력 차단 모두 우수.”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다음 줄을 보았다.
“킬리키아 측, 마지막 수레 보존과 피난민 추가 생존에서 우세. 이름 누락 없음. 퇴각선 이후 반복 피해 위험 감소.”
하융이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레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총합 판정.”
잠깐의 침묵.
“무승부입니다.”
박수는 바로 터지지 않았다.
이번 막은 환호할 결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쓰러뜨린 장면도 없었다.
거대한 참격도 없었다.
화살이 하늘을 가르지도 않았다.
그저 수레 하나가 늦지 않았고, 아이 하나가 손을 놓지 않았고, 이름 셋이 숫자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관중들은 잠시 박수 치는 법을 잊었다.
그러다 푸리나가 조용히 손뼉을 쳤다.
짝.
한 번.
이번에는 크게 외치지 않았다.
다시.
짝.
그러자 아이들이 따라 쳤다.
병사들이 따라 쳤다.
사절들이 따라 쳤다.
박수는 작았다.
하지만 끊기지 않았다.
아레는 그 박수를 들었다.
박수와 침묵 사이.
그곳에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아레는 하융, 레이튼, 그레이 앞에 섰다.
“놓으면 잊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놓아도 기록할 수 있습니다.”
하융은 창밖을 보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놓아도, 창밖에 남겨둘 수 있소.”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놓는다는 결론도, 때로는 질문을 거쳐야 하지요.”
아레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너무 많은 실을 쥐고 있었군요.”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쥐고 계셨기에 가라앉지 않은 이름도 있었을 겁니다.”
하융이 말했다.
“그러나 산 자는 때때로, 실이 느슨해져야 달릴 수 있소.”
레이튼이 모자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그는 퇴각선에 닿은 수레와, 이름표가 붙은 피난민 목패들을 보았다.
“지휘관은 죽음을 얼마나 붙잡아야 하는가. 그리고 산 자가 달리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손을 놓아야 하는가.”
푸리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아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하융의 창백한 낯빛과, 그레이의 떨리는 손가락과, 레이튼의 조용한 미소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좋은 퇴각이었어.”
그레이가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대답했다.
“좋은 퇴각이라는 표현은…… 있습니다. 이번에는 있습니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있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죠니가 목책 너머에서 말했다.
“이번엔 맞는 말이네.”
아스테르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낙점이었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 그 말 진짜 마음에 들었구나.”
“그렇다.”
“그래. 이제 인정할게.”
하융은 그 대화를 듣고 조금 웃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줄에 기록했다.
《제4경기 종료. 아레 폐하와 킬리키아 가신단, 총합 무승부.》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아레 폐하, 전체 전장 지휘 우세.》
또 한 줄.
《킬리키아 측, 마지막 수레 및 추가 피난민 생존. 이름 누락 없음.》
그레이는 펜을 멈췄다가,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실 하나를 놓았음. 이름은 놓지 않았음.》
아레는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박수는 크지 않았다.
이번 막은 환호할 결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중들은 보았다.
상위의 지휘관은 전장을 통째로 가라앉힐 수 있고, 낮은 곳의 가신들은 함께할 때 그 침묵 속에서 한 명의 이름을 더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을.
아레는 죽은 이를 가장 낮은 바다에 담아 잊히지 않게 한다.
하융은 죽은 가능성들을 창밖에 남겨둔 채 지금 이 세계를 선택한다.
레이튼은 희생이라는 이름을 잠시 지운다.
그레이는 손실이라는 숫자 아래에서 이름을 되찾는다.
그날의 모의 퇴각전은 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조용한 답을 남겼다.
실은 놓아도 된다.
다만 이름은 놓지 않아도 된다.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 5막 — 가장 낮은 바다와 비껴간 창들
“이번 막은 도망치는 법이야!”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외쳤을 때, 그레이는 이미 펜을 들고 있었다.
“퇴각입니다, 폐하.”
“도망과 퇴각의 차이는?”
푸리나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레이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기록과 책임이 남으면 퇴각입니다.”
레이튼이 모자챙을 살짝 눌렀다.
“그리고 질문이 남으면 전략이지요.”
하융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기장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성벽.
피난민 목패.
마지막 수레.
등불 몇 개.
후방의 낮은 선 하나.
푸리나가 이름 붙인 퇴각선이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또한 살아남은 이가 다음 길을 걸으면, 그것은 패배만은 아니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럼 이번 막은 패배만은 아닌 도망…… 아니, 퇴각!”
“폐하.”
“알았어, 알았어. 퇴각.”
그레이는 장부 위에 선을 하나 그었다.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경기장 위의 조명이 낮아졌다.
[여관:극장]은 앞선 막들과는 다르게 변했다.
이번에는 화려한 결투장이 아니었다.
중앙에는 반쯤 무너진 성벽이 있었다.
성벽 뒤에는 피난민 역할을 맡은 작은 목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바퀴가 삐걱거리는 수레 하나가 놓였다.
수레 위에는 들것 둘, 물통 넷, 마른 빵이 든 자루, 그리고 “기록 상자”라고 적힌 작은 궤짝이 실려 있었다.
앞쪽에는 적 기병과 궁수를 대신하는 검은 목패들이 있었다.
그 목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의 극장이 조명을 바꾸는 순간, 관중들은 모두 느꼈다.
저것들은 곧 달려올 것이다.
“이번 경기는 모의 퇴각 지휘전입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폐하는 전장 전체를 압박하는 쪽을 맡습니다. 킬리키아 측은 하융 경, 레이튼 경, 그리고 제가 피난민과 마지막 수레를 퇴각선까지 보내는 역할을 맡습니다.”
푸리나가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무대 담당!”
“폐하께서는 판정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조명은?”
“조명은 허가합니다.”
“좋아!”
그레이는 한숨을 참았다.
“승리 조건은 단순 생존자 수만이 아닙니다. 피난민 퇴각, 수레 보존, 부상자 후송, 지휘선 유지, 후퇴 질서, 이름 누락 여부,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을 위험 감소 여부를 종합합니다.”
죠니가 목책에 기대어 말했다.
“경기라기보다 악몽 같은데.”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악몽이다. 깨어난 뒤 움직일 이유가 남으니까.”
죠니는 그를 흘끗 보았다.
“너는 가끔 좋은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해.”
“좋은 말이라면 진지해야 하지 않나?”
“아니,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닌데.”
그때 경기장 반대편에서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무장을 과시하지 않았다.
화려한 갑주도, 높이 치켜든 깃발도 없었다.
그저 검은 드레스처럼 보이는 군복,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실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흘렀다.
그 실은 빛나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낮췄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의 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속삭임.
목책을 두드리는 손가락.
수레바퀴가 삐걱이는 소리.
병사들의 숨.
모든 것이 낮아졌다.
침묵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정중하게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호명했다.
“세르비아의 군주. 첫 번째 마가트로이드. 전장의 실타래와 침묵으로 가라앉는 이들을 기억하는 자.”
푸리나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가볍게 만들지 않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무대입니다, 헤툼 폐하.”
그녀는 무너진 성벽과 피난민 목패를 바라보았다.
“산 자가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무대라면, 죽은 이들도 조금은 덜 외롭겠지요.”
푸리나는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덜 외롭게 퇴각하는 막이네.”
“그리되기를 바랍니다.”
아레의 시선이 하융, 레이튼, 그레이에게 향했다.
“세 분이 함께 오시는군요.”
하융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수수께끼도 때로는 여러 명이 풀어야 더 즐겁지요.”
그레이는 장부를 안고 짧게 말했다.
“저는 즐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필요합니다.”
아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좋습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 순간, 푸리나의 [여관:극장] 위로 다른 무언가가 겹쳤다.
무대가 아니라 지도.
흙바닥의 선들이 군도처럼 이어졌다.
무너진 성벽은 전선이 되었고, 피난민 목패는 후방의 부담이 되었고, 수레 하나는 보급과 부상자와 기록을 한꺼번에 싣고 있는 늦은 심장이 되었다.
아레는 전장을 보았다.
아니, 전쟁을 보았다.
《천저의 그물추》.
그녀의 눈에는 수레바퀴 하나가 늦어지는 것이 단순한 지연이 아니었다.
그 지연이 뒤쪽 방패병의 보폭을 바꾸고, 그 보폭이 전령의 통과 시간을 늦추고, 그 통과 시간의 지연이 왼쪽 피난민 열의 공포를 키우고, 그 공포가 다시 방패선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미시적인 변화가 거시적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아레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시작합니다.”
푸리나가 손을 내렸다.
“막이 오른다!”
검은 목패 기병들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렸다.
그러나 아레의 실이 전장 위로 퍼지자, 그 느린 움직임이 끊기지 않는 압박으로 바뀌었다.
《끊기지 않는 실타래》.
아레는 자신의 병력만 잇지 않았다.
전장 전체를 실로 보았다.
적의 접근.
아군의 후퇴.
수레의 바퀴.
피난민의 발.
전령의 숨.
방패병의 팔.
모든 것이 실이었다.
“모두를 잇는 그물.”
아레가 낮게 말했다.
그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퇴각로가 좁아졌다.
하융은 첫 번째 창을 보았다.
수레가 늦었다.
후미가 잘렸다.
전령은 살아남았지만, 물통이 버려졌다.
퇴각선 뒤에서 부상자 둘이 죽었다.
두 번째 창.
수레를 버렸다.
피난민은 빨라졌다.
그러나 아이 하나가 어둠 속에서 손을 놓았다.
세 번째 창.
방패대가 버텼다.
하지만 적의 궁수가 기록 상자를 태웠다.
나중에 이름을 찾지 못했다.
하융은 숨을 낮게 내쉬었다.
“……혼자서는 어렵겠소.”
레이튼이 그 옆에 섰다.
“그렇다면 혼자 풀 문제가 아니겠지요.”
그레이는 이미 수레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피난민 명단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수레 안의 물자 목록도 확인합니다.”
하융이 회색빛 창호를 열었다.
《여관:비껴간 창》.
전장 위에 동방식 창호들이 얇게 겹쳤다.
그 창들은 밝지만은 않았다.
어떤 창에는 죽은 병사가 있었다.
어떤 창에는 무너진 수레가 있었다.
어떤 창에는 방패선이 한 박자 더 버티는 모습이 있었다.
어떤 창에는 피난민이 서로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이 있었다.
비극과 희망이 함께 창밖에 있었다.
하융은 그 창문들을 하나씩 보았다.
“왼쪽 수레는 세 번 죽었소. 오른쪽 전령은 두 번 끊겼소. 중앙 방패는 한 번 버텼으나, 그 뒤의 아이가 손을 놓았소.”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아이들은 방패 안쪽이 아니라 수레 뒤쪽입니다. 손을 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 명씩 짝을 짓습니다.”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은 덜 죽었소.”
레이튼은 무너진 성벽 쪽을 보았다.
“그러면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는 아레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아레 폐하. 이 퇴각에서 우리가 살리려는 것은 수레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퇴각이라는 이름입니까?”
아레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셋은 분리되기 어렵습니다.”
“물론입니다. 좋은 수수께끼일수록, 보기들은 서로 닮아 있지요.”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닮았다고 해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채,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그 순간 퇴각로의 오른쪽이 막혔다.
막힌 것이 아니었다.
막히도록 되었다.
검은 목패 궁수들이 사격선을 잡았고, 기병 목패가 그 사격선을 비껴 돌아 피난민의 측면을 압박했다.
수레는 그쪽으로 갈 수 없었다.
하융이 말했다.
“중앙은 늦소.”
그레이가 장부를 보았다.
“늦어도 갑니다. 수레를 버리지 않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둘이 죽소.”
“버리면 퇴각선 뒤에서 둘이 더 죽습니다.”
그레이는 수레 위의 물통을 가리켰다.
“물통 넷 중 둘은 후방 치료소에서 필요합니다. 들것 둘은 지금 부상자 운반용이지만, 퇴각선 뒤에서는 임시 침상입니다. 지금 버리면 빨라지지만, 같은 이유로 다시 죽습니다.”
레이튼이 작게 말했다.
“좋은 답입니다. 질문을 좁히지요. 수레를 살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수레 없이는 사람이 다시 죽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그렇다면 완전한 길은 없소. 덜 죽는 길로 가겠소.”
킬리키아 측 목패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융은 짧게 지시했다.
“왼쪽 방패, 반 치 낮추시오. 전령은 중앙이 아니라 그림자를 밟으시오. 수레꾼, 바퀴를 들지 말고 누르시오. 이미 든 창에서는 바퀴가 부러졌소.”
그의 말은 예언이 아니었다.
“앞으로 부러진다”가 아니었다.
이미 부러진 가능성의 흔적을 보고, 지금의 손이 다른 위치를 잡게 만드는 지시였다.
아레는 그것을 보았다.
“흥미롭군요.”
그녀가 말하자, 전장에 한기가 번졌다.
《퍼져가는 한기》.
검은 목패들과 연결된 모든 경로에 피로가 내려앉았다.
방패대의 팔이 무거워졌다.
전령의 숨이 짧아졌다.
수레꾼의 손이 굳었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수레꾼 교대. 물통 하나를 내려 중앙 방패대에 넘깁니다.”
“물통을 내리면 수레가 가벼워지는군요.”
레이튼이 말했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손이 따뜻해집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듣고 창 하나를 닫았다.
《창문 닫기》.
수레꾼이 손을 놓쳐 바퀴가 빠지는 가능성이 얇게 사라졌다.
하지만 아레의 압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라앉히기》.
침묵이 내렸다.
이번에는 단순히 조용해진 것이 아니었다.
전령이 외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옆 전열에 닿지 않았다.
방패병은 명령을 들으려 했지만, 그 명령은 한 박자 늦게 도착했다.
수레꾼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레의 지휘는 병사를 죽이기 전에, 먼저 서로를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푸리나는 관중석 쪽에서 손을 꽉 쥐었다.
이번 막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무서웠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도, 금빛 거대참격도, 자주빛 화살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조금씩 늦어지고, 서로를 놓치고, 같은 방향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전령 둘이 끊겼습니다.”
하융이 창밖을 보았다.
“이대로면 방패선이 먼저 침묵하오.”
레이튼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주변에 낡은 서재의 기척이 열렸다.
책장.
별이 그려진 천장.
아직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별들.
공중에 떠다니는 미완의 질문들.
《여관:문답의 서재》.
레이튼은 검은 목패들이 아니라, 킬리키아 측 지휘선 위에 붙은 이름을 보았다.
“끊겼다.”
“늦었다.”
“끝났다.”
그 이름들은 너무 빨랐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아직 끝났다고 부르기에는 이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명령이 끊겼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닫힌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패배라는 책이 닫히려던 순간, 마지막 장이 한 장 더 넘어갔다.
그레이가 즉시 받아 적었다.
“끊긴 건 전령이 아니라 전달 순서입니다. 방패대는 명령을 못 들은 게 아니라, 같은 명령을 두 번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질문이 바뀝니다. ‘누가 명령을 못 들었는가’가 아니라, ‘왜 같은 명령이 두 번 필요한가’입니다.”
하융이 창을 보았다.
“두 번째 명령을 기다린 창에서는 늦었소. 첫 번째 명령만 믿은 창에서는 방패 셋이 살았소.”
그레이가 말했다.
“중앙 방패대, 첫 번째 명령으로 이동. 반복 확인 생략. 대신 뒤쪽에 민원 접수 표식을 둡니다.”
푸리나가 멀리서 작게 중얼거렸다.
“민원 접수 표식…… 전장에서?”
그레이는 들었다.
“전장에서도 민원은 발생합니다.”
“그건 맞는 것 같아.”
하융이 짧게 웃었다.
하지만 아레는 아직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공허로 향하는 그물망》.
퇴각로와 퇴각로 사이에 감제망이 펼쳐졌다.
돌파와 우회가 차단되었다.
그 길로 가면 늦는다.
저 길로 가면 끊긴다.
중앙으로 가면 밀린다.
수레를 버리면 살아남지만, 기록 상자가 탄다.
기록 상자를 살리면 아이가 늦는다.
하융의 창들이 거의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는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레이튼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어느 창에서도 모두 살지는 않소.”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아레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애도에 가까웠다.
“지휘관은 어느 순간 용인해야 합니다.”
아레가 말했다.
“많든 적든, 누군가는 늦습니다. 누군가는 끊깁니다. 누군가는 후미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름들을 기억합니다.”
레이튼이 모자를 벗었다.
“아레 폐하.”
“말씀하십시오.”
“후미라고 부른 순간, 그들은 이미 버려진 것입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후미는 뒤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돌아올 길도 지휘의 일부입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레의 실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질문은 공격이 아니었다.
비난도 아니었다.
그저 이름 하나를 잠시 지운 것이다.
후미.
그 이름 아래 너무 빨리 묻힌 결론을.
아레는 말했다.
“돌아올 길이 없다면, 후미가 아니라 제물이지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아직 질문은 남아 있습니다.”
그때 검은 목패 기병들이 마지막 수레를 향해 돌진했다.
위기였다.
수레를 지키려면 방패대가 남아야 했다.
방패대가 남으면 피난민 셋이 늦었다.
피난민 셋을 먼저 보내면 수레가 잡혔다.
수레가 잡히면 퇴각선 뒤에서 부상자 둘과 물 부족으로 다시 손실이 발생했다.
그레이가 장부를 세게 쥐었다.
“수레를 그대로 묶으면 뒤의 세 명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하융은 창을 보았다.
한 창에서 그는 뛰어들었다가 창에 꿰였다.
다른 창에서는 검집으로 막았지만, 수레바퀴가 부러졌다.
또 다른 창에서는 자신이 살았지만, 수레꾼이 죽었다.
그다음 창에서는 모두 늦었다.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어느 창에서도 모두 살지는 않소.”
레이튼이 말했다.
“그렇다면 ‘모두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모든 질문의 끝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경기장 전체가 그 질문을 들었다.
《아포리아의 신사》.
레이튼은 정중히 모자를 벗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레의 실이 수레와 피난민과 후미를 감고 있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이 퇴각의 목적은 손실을 계산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다시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까?”
결론이 멈췄다.
“셋은 버려야 한다.”
그 이름이 완전히 고정되기 전, 질문이 그 앞에 섰다.
그레이가 한 걸음 나섰다.
그녀의 발밑에 조용한 거리가 열렸다.
낡았지만 다시 세워진 집들.
문패가 달린 문.
등불.
잠들지 못한 이름들이 아직 꺼지지 않은 채 걸려 있는 거리.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손실 셋이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침묵 속에서 잘 들렸다.
“아이 하나. 들것을 든 사람 하나. 마지막 물통을 맡은 사람 하나입니다.”
그녀는 펜을 움직였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칭호가 열렸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등불들이 하나씩 켜졌다.
피난민 목패 셋 위에 이름표가 생겼다.
아이.
들것잡이.
물통지기.
숫자는 셋이었지만, 죽음은 셋이라는 숫자 아래 숨어 있지 못했다.
그레이가 말했다.
“이동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아이는 수레 뒤가 아니라 방패 안쪽. 들것잡이는 수레 오른쪽. 물통지기는 전령과 교대합니다.”
하융이 고개를 들었다.
회색 창호들이 다시 열렸다.
그 안에서 조금 다른 빛이 보였다.
완전히 좋은 세계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다쳤다.
수레는 여전히 흔들렸다.
방패대 하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창 하나에서, 아이가 손을 놓지 않았다.
하융은 검집을 잡았다.
“그런 세계도 있었소.”
그의 몸 주위에 자신이 죽은 가능성들이 겹쳤다.
첫 번째 하융은 창에 꿰였다.
두 번째 하융은 말발굽 아래 넘어졌다.
세 번째 하융은 검을 빼기도 전에 늦었다.
네 번째 하융은 검집 끝으로 창대를 반 치 밀었다.
그 네 번째 가능성은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반 치는 남았다.
하융은 그 죽은 자신들을 밟고 앞으로 나갔다.
《죽은 나를 밟고 선 검》.
검은 목패 기병의 창대가 수레 쪽으로 내려왔다.
하융은 그것을 정면으로 막지 않았다.
이미 막아 죽은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걸음 비껴섰다.
검집 끝이 창대를 반 치 밀었다.
정말 반 치였다.
그 반 치 때문에 창끝은 수레꾼의 손목을 지나쳤고, 바퀴는 부러지지 않았으며, 수레는 넘어지지 않았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더 나은 세계도 있었을 것이오.”
그의 칭호가 열렸다.
《이 세계를 선택한 자》.
창밖에는 수많은 세계가 있었다.
아예 전쟁이 없었던 세계.
수레가 더 일찍 출발한 세계.
피난민들이 피난민이 되지 않았던 세계.
하융이 이 나라에 오지 않았던 세계.
푸리나를 만나지 않았던 세계.
그는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허나 우리가 사는 곳은 이곳이오.”
그 말과 함께, 패배 가능성이 한 번 밀려났다.
공포가 밀렸다.
혼란이 밀렸다.
“이미 늦었다”는 이름이 밀렸다.
그리고 아레가 움직였다.
그녀의 눈에 가장 낮은 바다가 열렸다.
《가장 낮은 바다》.
그 바다는 물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세르비아가 짓밟힌 기억.
전장에서 명령 아래 스러진 병사들.
후대의 마가트로이드들이 가라앉힌 것들.
잊힌 이들이 마땅히 잠드는 공허의 천저점.
아레는 모든 실을 쥐고 있었다.
놓지 않으려 했다.
놓으면 잊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칭호가 움직였다.
《첫 번째 가주》.
아레와 연결된 침묵의 전령 목패 하나가 일어섰다.
그 목패는 퇴각로 붕괴라는 결말을 강화하려 했다.
길을 잃은 아이들아.
나아갈 길을 모르겠다면.
가장 아팠던 첫 매듭을 떠올려 되짚어라.
퇴각로가 거의 닫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레이튼이 이름을 지우고 있었다.
그 결말의 이름은 아직 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레이가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하융이 죽은 가능성을 밟고 있었다.
이 세계를 선택하겠소.
그리고 아레는 보았다.
실을 놓으면 잊히는 것이 아니다.
놓아도 기록할 수 있다.
놓아도 창밖에 남겨둘 수 있다.
놓아도 질문할 수 있다.
놓아도 이름은 남길 수 있다.
산 자는 때때로, 실이 느슨해져야 달릴 수 있다.
아레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풀렸다.
실 하나가 느슨해졌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방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억하기 때문에 놓는 것이었다.
그 느슨해진 실 사이로, 피난민 목패 하나가 달렸다.
수레가 퇴각선에 닿았다.
아이 목패가 방패 안쪽에서 넘어지지 않았다.
들것잡이는 수레 오른쪽을 지켰다.
물통지기는 전령에게 물을 넘겼다.
여관좌 사제가 외쳤다.
“정지!”
침묵이 내려앉았다.
검은 목패들이 멈췄다.
수레바퀴도 멈췄다.
피난민 목패들도, 방패대도, 전령도 모두 그 자리에 섰다.
하융은 검집을 땅에 짚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레이는 펜을 놓지 않았다.
레이튼은 모자를 다시 썼다.
아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놓은 실 하나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레이가 판정표를 정리했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이번에는 재촉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레이가 말했다.
“판정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아레 폐하, 전체 지휘선 유지와 적 진군 지연에서 우세. 퇴각로 압박, 지휘체계 분리, 전장 지속력 차단 모두 우수.”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다음 줄을 보았다.
“킬리키아 측, 마지막 수레 보존과 피난민 추가 생존에서 우세. 이름 누락 없음. 퇴각선 이후 반복 피해 위험 감소.”
하융이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레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총합 판정.”
잠깐의 침묵.
“무승부입니다.”
박수는 바로 터지지 않았다.
이번 막은 환호할 결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쓰러뜨린 장면도 없었다.
거대한 참격도 없었다.
화살이 하늘을 가르지도 않았다.
그저 수레 하나가 늦지 않았고, 아이 하나가 손을 놓지 않았고, 이름 셋이 숫자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관중들은 잠시 박수 치는 법을 잊었다.
그러다 푸리나가 조용히 손뼉을 쳤다.
짝.
한 번.
이번에는 크게 외치지 않았다.
다시.
짝.
그러자 아이들이 따라 쳤다.
병사들이 따라 쳤다.
사절들이 따라 쳤다.
박수는 작았다.
하지만 끊기지 않았다.
아레는 그 박수를 들었다.
박수와 침묵 사이.
그곳에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아레는 하융, 레이튼, 그레이 앞에 섰다.
“놓으면 잊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놓아도 기록할 수 있습니다.”
하융은 창밖을 보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놓아도, 창밖에 남겨둘 수 있소.”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놓는다는 결론도, 때로는 질문을 거쳐야 하지요.”
아레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너무 많은 실을 쥐고 있었군요.”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쥐고 계셨기에 가라앉지 않은 이름도 있었을 겁니다.”
하융이 말했다.
“그러나 산 자는 때때로, 실이 느슨해져야 달릴 수 있소.”
레이튼이 모자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그는 퇴각선에 닿은 수레와, 이름표가 붙은 피난민 목패들을 보았다.
“지휘관은 죽음을 얼마나 붙잡아야 하는가. 그리고 산 자가 달리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손을 놓아야 하는가.”
푸리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아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하융의 창백한 낯빛과, 그레이의 떨리는 손가락과, 레이튼의 조용한 미소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좋은 퇴각이었어.”
그레이가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대답했다.
“좋은 퇴각이라는 표현은…… 있습니다. 이번에는 있습니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있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죠니가 목책 너머에서 말했다.
“이번엔 맞는 말이네.”
아스테르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낙점이었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 그 말 진짜 마음에 들었구나.”
“그렇다.”
“그래. 이제 인정할게.”
하융은 그 대화를 듣고 조금 웃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줄에 기록했다.
《제4경기 종료. 아레 폐하와 킬리키아 가신단, 총합 무승부.》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아레 폐하, 전체 전장 지휘 우세.》
또 한 줄.
《킬리키아 측, 마지막 수레 및 추가 피난민 생존. 이름 누락 없음.》
그레이는 펜을 멈췄다가,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실 하나를 놓았음. 이름은 놓지 않았음.》
아레는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박수는 크지 않았다.
이번 막은 환호할 결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중들은 보았다.
상위의 지휘관은 전장을 통째로 가라앉힐 수 있고, 낮은 곳의 가신들은 함께할 때 그 침묵 속에서 한 명의 이름을 더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을.
아레는 죽은 이를 가장 낮은 바다에 담아 잊히지 않게 한다.
하융은 죽은 가능성들을 창밖에 남겨둔 채 지금 이 세계를 선택한다.
레이튼은 희생이라는 이름을 잠시 지운다.
그레이는 손실이라는 숫자 아래에서 이름을 되찾는다.
그날의 모의 퇴각전은 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조용한 답을 남겼다.
실은 놓아도 된다.
다만 이름은 놓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