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06여관◆zAR16hM8he(f85ea685)2026-05-13 (수) 22:29:07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6막 — 뇌광은 성은의 심장을 시험한다
“이번 막은 실험이야!”
푸리나 헤툼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레이는 이미 그 말을 예상했다는 듯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통제된 실험입니다, 폐하.”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실험 앞에 통제된이 붙으면 재미가 줄어들지 않아?”
“재미가 줄어야 사람이 삽니다.”
“그레이, 너는 정말 무대의 적이야.”
“사고의 적입니다.”
목책 너머에서 죠니가 낮게 웃었다.
“둘 다 비슷하지 않나.”
“아닙니다.”
그레이가 즉시 대답했다.
“사고가 나면 무대도 같이 끝납니다.”
푸리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통제된 실험!”
라플리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통제된 실험은 재미가 반쯤 죽는데.”
그레이의 펜끝이 라플리 쪽으로 향했다.
“재미가 반쯤 죽어야 사람이 삽니다.”
라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래. 사람 살리는 쪽이 우선이지. 마탑에서도 사고 보고서 쓰기 싫어하는 놈들이 항상 그렇게 말해.”
“보고서가 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좀 맞네.”
그때 반대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라이자가 웃으며 말했다.
“죽지 않는 실험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어요.”
라플리가 그녀를 흘끗 보았다.
“너, 은근히 무서운 소리 하네.”
라이자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런가요?”
“응. 그런 쪽이 더 위험해. 진심이잖아.”
푸리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좋아. 분위기 완벽해!”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저는 전혀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미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여관:극장]이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퇴각전의 흙먼지와 수레 자국이 남아 있던 경기장은 천천히 공방으로 변했다.
목책 안쪽에 은빛 선들이 그어졌다.
바닥에는 원형 회로가 새겨졌고, 그 회로의 중앙에는 심장처럼 둥근 반응로가 솟아났다.
반응로는 금속 장치처럼 보였지만, 단순한 금속은 아니었다.
은빛이었다.
차갑게 번쩍이는 은이 아니라, 손안에 오래 쥐고 있으면 체온을 기억할 것 같은 은빛.
낙원 이야기를 들려주던 작은 정령이 남기고 간 조잡한 은꽃처럼, 어딘가 서툴고도 다정한 빛.
그 주변으로 성은 저장조가 솟았다.
왼쪽에는 은의 가호를 저장하는 은빛 축적고.
오른쪽에는 은인 제작대와 성은의 혈맥 회로.
상부에는 라플리의 천상현상을 받아들일 투입 구역이 열렸다.
외곽에는 여관좌 사제들이 차단 등불을 세웠고, 그레이가 직접 걸어가 등불 사이의 거리를 재었다.
“반 보 더 뒤로.”
사제가 등불을 옮겼다.
“저기 은빛 관은 관중석 방향으로 향하면 안 됩니다. 파장이 새면 곧장 차단하세요.”
라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관중석 쪽으로는 흘리지 않을게요.”
라플리가 팔짱을 꼈다.
“내 번개가 멋대로 튀면?”
그레이가 말했다.
“튈 수 없도록 하십시오.”
“그게 말처럼 쉽나.”
“어렵다면 출력 제한을 더 걸겠습니다.”
라플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알았어. 안 튀게 한다고.”
푸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좋아! 양측 모두 안전한 광기!”
“폐하.”
“왜?”
“광기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안전한 광기도 만들 수 있어!”
“그런 표현은—”
“있어!”
그레이는 결국 포기했다.
공방이 완성되자, 푸리나는 중앙 반응로 옆에 섰다.
“이번 경기는 결투가 아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한쪽은 성은으로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낸다. 다른 한쪽은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려 그 심장이 어디까지 뛸 수 있는지 시험한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라이자를 가리켰다.
“보헤미아의 라이자! 은의 여인! 정령이 들려준 꿈속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고 맹세한 성은의 창조자!”
라이자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릴게요.”
푸리나는 이번에는 라플리를 향해 손을 돌렸다.
“유플리아 마탑의 제35대 마탑주! 천율학파의 프로보스트! 하늘을 뇌광으로 물들이는 평민 고아의 천재 마법사, 라플리!”
라플리는 손을 대충 흔들었다.
“소개에서 평민 고아는 빼도 되지 않아?”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중요한 포인트잖아!”
“귀족 놈들 앞에서라면 그렇긴 한데.”
라플리는 관중석 어딘가를 보고 웃었다.
“뭐, 좋아. 숨길 것도 아니고.”
라이자가 그런 라플리를 가만히 보았다.
두 사람은 달랐다.
라이자는 꿈에서 시작했다.
조그마한 은꽃 하나가 그 꿈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었고, 그 증거 하나만으로 평생의 목표를 세웠다.
좀 더 친절한 사람들의 세계.
보헤미아를 위해, 은인들을 위해, 친구를 위해 베푸는 은.
라플리는 후원과 독기로 올라왔다.
평민. 고아. 귀족 사회의 시선.
마탑의 구석에서 시작해, 뇌광과 이론과 오기로 천상현상을 자기 손에 끌어내린 마탑주.
한 사람은 은으로 사람을 만들려 했다.
한 사람은 하늘을 마법핵으로 지정하려 했다.
푸리나는 양팔을 펼쳤다.
“규칙!”
그레이가 바로 앞으로 나왔다.
“라이자 폐하의 성은 공방 시스템은 중앙 반응로를 유지해야 합니다. 반응로가 파괴되거나 관중석 방향으로 파장이 새면 감점입니다.”
그레이는 라플리를 보았다.
“라플리 경은 천율학파 마법으로 반응로 한계를 시험합니다. 목표는 파괴가 아니라 출력 시험, 취약점 발견, 안정성 검증입니다.”
라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부수는 건 쉽고, 안 부수고 한계 보는 게 어려운 거지.”
“그 점을 이해하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너 지금 좀 놀란 거지?”
“아닙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는 가끔 놀라도 표정이 그대로야.”
“폐하.”
“알았어, 조용히 할게.”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라이자 폐하께서는 공방 전체를 운용합니다. 라플리 경은 단독 실험자로 들어갑니다. 체급과 역할이 다르므로 판정은 단순 승패가 아니라 전체 안정화와 국소 성과를 나누어 평가합니다.”
라플리는 피식 웃었다.
“좋네. 졌는데 성과는 냈다 같은 말 할 수 있게 미리 깔아두는 거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정확한 판정은 중요합니다.”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받네.”
라이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라플리 님의 성과도 기대하고 있어요.”
라플리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더 무섭다고.”
“왜요?”
“아니, 됐다. 시작하자.”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그럼, 실험 개시!”
라이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반응로에 손을 얹었다.
은빛이 퍼졌다.
《보헤미아의 피》.
그 순간, 경기장 위의 성은 공방은 단순 개인의 작업대가 아니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약속이 은빛 회로 위에 스며들었다.
보헤미아를 위해.
은인과 보헤미아의 모든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만든 은인 외에는 후사를 두지 않겠다는 서약.
성과 혈통을 은인들에게 나누어, 그들도 종족으로 개화하게 하겠다는 선택.
라이자는 은을 빚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형태를 빚고 있었다.
《은의 여인》.
순수한 은의 빛이 그녀의 손끝에서 퍼졌다.
그 빛은 차갑지 않았다.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금속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빛났다.
라이자가 말했다.
“폭주는 막을게요.”
그녀의 손짓에 성은 저장조가 열렸다.
“하지만 막기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은빛 관들이 바닥에서 솟았다.
“꿈속에서 들은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걸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은의 조형》.
성은이 즉석에서 형태를 얻었다.
절연용 은판.
뇌광 유도 회로.
피뢰침.
냉각용 성은 관.
차폐벽.
그리고 작은 은인 보조공들.
은빛 인형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병사처럼 줄을 맞췄지만, 병사만은 아니었다.
장치처럼 움직였지만, 장치만도 아니었다.
가슴 안쪽에는 작고 둥근 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은의 군단》.
라이자가 만든 은인병들은 공방 곳곳으로 흩어졌다.
하나는 은판을 옮겼고, 하나는 반응로 옆의 관을 조율했고, 셋은 차폐벽 앞에서 기다렸다.
그들의 눈은 비어 있지 않았다.
아직 완전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도, 단순한 물건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따뜻한 맥박이 있었다.
라플리는 그 광경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 아닌데.”
그녀의 왼눈에 빛이 돌았다.
《오딘의 눈》.
마탑주에게 전해지는 고유의 아티팩트.
영력, 차력, 신성회로, 코어의 흐름이 시각화되었다.
라플리의 시야 안에서 은빛 공방은 복잡한 생체 구조처럼 보였다.
성은 흐름.
신성 코어.
혈맥 분기.
은인병의 선천 신성회로.
따뜻한 은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
보헤미아의 피와 성은의 혈맥이 겹친 상냥함의 심상각인.
라플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 이거 진짜 심장처럼 만들었네.”
라이자가 웃었다.
“심장이니까요.”
“장치 아니고?”
“장치이기도 해요. 하지만 장치로만 만들면, 친구가 되진 못하잖아요.”
라플리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낮게 말했다.
“역시 위험한 타입이네.”
“그 말, 오늘 두 번째예요.”
“두 번 말할 만큼 그래.”
라플리는 앞으로 걸었다.
그녀의 발밑에서 공기가 달라졌다.
천장이 낮아진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내려왔다.
《천상종림天相從臨》.
공방 위의 천기天基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뇌雷로 고정되었다.
맑았던 은빛 공방 위에, 작고 어두운 구름이 생겼다.
그 가장자리에는 검은 역설이 번졌다.
신학역설.
마魔의 방향성.
마법의 발현과 숙련을 밀어올리는 위험한 인과 고정.
라이자는 그 하늘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공방 안에 하늘이 생겼네요.”
라플리는 손을 들었다.
“하늘에도 법칙은 있어. 문제는 귀족 놈들이 그걸 혈통처럼 포장한다는 거지.”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작은 뇌광이 맺혔다.
《천율학파天律學派 Schola Legum Caelitonitrus》.
“천격 마법핵 지정.”
공방 위에 마법진이 열렸다.
“뇌광 하나. 출력은 낮게 간다.”
《뇌천마력회로》가 그녀의 팔을 따라 빛났다.
그것은 혈관이 아니었다.
회로였다.
회로가 아니라, 하늘에서 잘라온 번개의 문법이었다.
첫 번째 뇌광이 반응로에 꽂혔다.
쾅, 하는 폭음은 없었다.
대신 성은 반응로가 크게 떨렸다.
은빛 회로가 파르르 흔들렸고, 은인 보조공들이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레이가 즉시 차단 등불을 확인했다.
“파장 정상. 관중석 방향 유출 없음.”
라이자는 두 손을 반응로에 얹었다.
《성은의 혈맥》.
성은의 강이 흘렀다.
회로는 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줄기였다.
은빛 방울 하나하나가 상냥함과 자비로움을 품은 혈맥이었다.
라플리의 뇌광이 그 혈맥을 흔들었다.
라이자는 무리하게 막지 않았다.
흔들린 곳을 보았다.
떨린 곳을 들었다.
그리고 혈맥의 분기를 바꾸었다.
반응로가 다시 안정되었다.
라플리가 눈썹을 올렸다.
“버티네.”
라이자는 웃었다.
“안아주는 건 잘하거든요.”
“번개를 안아주는 장치는 처음 보는데.”
“장치라기보다는 심장이라니까요.”
“그게 더 이상하거든.”
라플리는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럼 두 번째.”
뇌광이 둘로 늘었다.
“세 번째.”
셋.
공방 안의 작은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천상이변》.
번개가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방 안에 작은 하늘이 생겼고, 그 하늘이 분노했다.
원형 범위의 뇌천이 반응로 위에 펼쳐졌다.
천율학파의 계산식이 바닥의 은빛 회로와 충돌했고, 뇌천마력회로에서 뿜어진 마력이 천상이변의 범위를 밀어올렸다.
은인병들이 움직였다.
《은의 군단》은 전투하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공방을 살렸다.
하나는 차폐벽을 보강했다.
둘은 은판을 들고 뇌광의 경로에 섰다.
셋은 반응로 옆에서 성은 관을 교체했다.
넷은 떨어진 피뢰침을 다시 세웠다.
그들은 병기처럼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그 움직임에는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적었다.
라이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오래 잡고 있지 마세요. 번개는 지나가야 해요.”
은인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플리는 그걸 보고 낮게 중얼거렸다.
“저거, 알아듣네.”
“네.”
라이자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들으니까요.”
라플리는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더 거칠게 웃었다.
“좋아. 그럼 더 간다.”
그녀의 마력이 바뀌었다.
《뇌봉雷鳳》의 경지가 열렸다.
상위마력.
천노마력天怒魔力.
뇌광의 잔류가 사라지지 않고 공방 위에 남았다.
《난장광乱残光》.
뇌광은 지나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난잔광으로 남아 성은 회로 위를 핥았다.
은빛 혈맥은 그 잔광을 받아들일 때마다 떨렸다.
라플리의 웃음이 조금 비뚤어졌다.
《대마 신학역설 - 마녀striga》.
마녀의 변질은 그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대신 더 빠르게 배우고, 더 위험하게 계산하게 만들었다.
마魔에 대한 친화가 뇌雷의 법칙 가장자리를 검게 물들였다.
물리적으로는 더 취약해지는 몸이었지만, 마법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속도는 무섭도록 올라갔다.
그레이가 눈을 들었다.
“라플리 경, 신체 반동은?”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판정 기준이 아닙니다.”
“아직 팔 붙어 있어.”
“그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플리가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찼지만, 출력은 조금 조정했다.
“됐어. 안 죽어.”
라이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라플리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너까지 그러면 짜증 나는데.”
“죄송해요.”
“사과도 너무 빠르네.”
라플리는 다시 《오딘의 눈》으로 공방을 들여다보았다.
뇌광이 흐른 자리.
반응로가 떨린 위치.
성은의 혈맥이 너무 많이 받아준 곳.
은의 심장이 박자를 놓칠 뻔한 순간.
그녀는 웃었다.
“찾았다.”
라이자가 물었다.
“뭘요?”
“약점.”
라플리는 손가락으로 반응로 오른쪽 혈맥 분기를 가리켰다.
“좋아. 이건 혈맥이 너무 착해서 생기는 약점이네.”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착해서요?”
“들어오는 걸 너무 많이 받아줘. 적당히 쳐내야 하는 것도 안고, 흘려야 하는 것도 품고, 버려야 하는 것도 품으려고 해.”
라플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뇌정령핵 하나가 허공에 생겼다.
《정령핵 이론》.
뇌雷를 기반으로 한 정령핵.
아직 작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생기려 하고 있었다.
라플리는 말했다.
“상냥한 회로는 아름답지. 근데 전장에서는 약점이야.”
라이자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상냥함이요?”
“응. 받아들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 네 성은은 들어오는 전류를 적으로 먼저 보지 않아. 그래서 내 번개가 안쪽까지 너무 쉽게 들어간다.”
“하지만 처음부터 밀어내면, 친구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약점이라고.”
라플리는 뇌정령핵을 띄웠다.
“좋은 약점이지만, 약점은 약점이야.”
라이자는 반응로를 바라보았다.
성은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은의 심장.
그 이름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심장은 번개도 안으려 했다.
폭력도 먼저 이해하려 했다.
상처도, 이물질도, 고통도, 자신 안으로 받아들여 흐름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라플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전장은 모든 것을 친구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지 않는다.
라이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바꿔야겠네요.”
라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뭘?”
“안아주는 방식이요.”
라플리는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실험 같네.”
그녀는 손을 높이 들었다.
“좋아. 마지막 시험으로 간다.”
뇌정령핵이 크게 떨렸다.
라플리의 마력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진짜 뇌봉이랬냐고 묻는 놈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웃었다.
비뚤어진 웃음이었다.
하지만 즐거워 보였다.
“오늘은 진짜로 보여줄게.”
칭호가 열렸다.
《뇌봉雷鳳》.
뇌정령핵이 찢어지듯 열렸다.
그 안에서 번개의 새가 날개를 펼쳤다.
A랭크의 정령 사역마.
뇌봉.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 위험했다.
날개 하나가 펼쳐질 때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이 찢어졌다.
깃털은 번개의 가지였고, 눈동자는 천격의 마법핵처럼 빛났다.
날갯짓 한 번에 난잔광이 바닥을 핥았다.
관중석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차단 등불, 최대 출력 대기. 라이자 폐하, 반응로 상태는?”
라이자는 반응로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답했다.
“떨리고 있어요.”
“중지합니까?”
라이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에요.”
라플리가 물었다.
“정말 받을 거야?”
라이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
“장치로는 못 버텨.”
라이자는 웃었다.
“그럼 장치로는 안 되겠네요.”
라플리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
“심장으로 받을게요.”
그 순간, 라이자의 은빛이 달라졌다.
공방 전체가 한 번 숨을 쉬었다.
《끝없는 마법의 은》.
성은의 소모가 줄었다.
은빛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고르게 퍼졌다.
모두를 위한 은을 베풀어달라는 기도가 공방의 회로를 타고 흐르며, 무리한 조형의 낭비를 줄였다.
그리고 그 위에, 라이자의 오의가 열렸다.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이번에는 인간 하나를 새로 빚는 전면 조형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친선전은 공방 시험을 넘어섰을 것이다.
라이자는 핵심 구조만 끌어왔다.
성은의 강의 심상을 복제한다.
기본이 되는 목적을 상정한다.
목적은 하나.
번개를 가두지 않고, 함께 뛰게 하는 심장.
혈맥을 설계한다.
용기가 되는 육체를 구축한다.
완성까지의 경험과 세월을 구상한다.
정신의 윤곽을 세운다.
성은의 강에서 태어나는 신화를 공상한다.
진은이 결과를 끌어낸다.
지금 이곳에—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심장이 된다.”
반응로가 변했다.
은빛 장치는 더 이상 단순한 장치로 보이지 않았다.
바닥의 성은 회로는 혈맥처럼 박동했고, 저장조는 폐처럼 숨을 쉬었으며, 은인병들의 가슴 안에 있는 작은 은의 심장들이 중앙 반응로의 박자와 이어졌다.
《성은으로 새기다》.
라플리의 뇌광이 어디서 아팠는지.
어디서 회로를 떨게 했는지.
어디서 심장이 박자를 놓쳤는지.
라이자는 그것을 막지 않고 새겼다.
성은 위에 흉터가 생겼다.
하지만 그 흉터는 결함이 아니었다.
새로운 회로였다.
라플리는 그걸 보고 숨을 삼켰다.
“미쳤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뜻인가요?”
“아니, 진짜 미쳤다는 뜻인데.”
“아.”
“근데 나쁘진 않아.”
뇌봉이 떨어졌다.
번개의 새가 성은 반응로를 향해 날개를 접었다.
그 순간, 공방 안의 작은 하늘이 전부 반응로 위로 쏟아졌다.
빛.
천격.
뇌광.
난잔광.
마녀의 검은 역설.
천율학파의 계산식.
그 모든 것이 성은의 심장 위에 꽂혔다.
성은의 심장은 탔다.
은빛 혈맥이 붉게 달아올랐다.
은인병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차폐벽이 세 겹으로 갈라졌다.
여관좌 사제들의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레이가 외쳤다.
“차단 준비!”
하지만 폭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성은의 심장은 먼저 떨었다.
그다음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번개의 박자를 자기 맥박 속에 섞었다.
두근.
뇌봉의 날갯짓이 한 번.
두근.
은의 심장이 한 번.
두근.
번개와 은이 같은 박자로 뛰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바로 박수치지 못했다.
라플리조차 말이 없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이 사라졌다.
뇌봉은 천천히 날개를 접고, 번개의 깃털을 흩뿌리며 라플리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칭호의 지속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성은 반응로는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안정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은 완전히 매끄럽지 않았다.
흉터가 있었다.
라플리의 뇌광이 남긴 새로운 회로.
라이자가 그 흉터 위에 손을 얹었다.
“아프네요.”
라플리가 말했다.
“장치가 아프다고?”
“심장이니까요.”
“아, 진짜.”
라플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랑 대화하면 내 상식이 계속 죽어.”
라이자는 진지하게 물었다.
“새로 만들 수 있나요?”
“뭐?”
“상식이요.”
라플리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 너 진짜 위험하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장부에는 이미 판정 항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공방 상태를 확인했다.
“반응로 손상 없음. 출력 한계 기존 예상치 초과. 신규 회로 형성. 차폐벽 세 겹 손상. 은인병 네 기 일시 정지, 복구 가능. 관중석 방향 파장 없음.”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러면?”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판정하겠습니다.”
공방은 아직 은빛으로 뛰고 있었다.
“라이자 폐하, 반응로 유지 및 안정화 우세. 성은의 혈맥 재구축, 은의 군단 운용, 오의 제한 발동을 통한 반응로 심장화 성공.”
라이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라플리를 보았다.
“라플리 경, 출력 한계 갱신 및 성은 혈맥 취약점 발견 성공. 뇌봉을 통한 A랭크 스트레스 테스트 달성.”
라플리는 팔짱을 꼈다.
“그래서?”
“총합 판정.”
그레이가 말했다.
“라이자 폐하 우세.”
라플리는 바로 말했다.
“졌는데 성과는 냈다는 말이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라플리는 잠깐 그레이를 보다가 웃었다.
“나쁘지 않네.”
라이자가 말했다.
“저는 많이 배웠어요.”
라플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말, 이긴 사람이 하면 좀 얄미운 거 알아?”
라이자가 당황했다.
“아, 죄송해요.”
“됐어.”
라플리는 고개를 돌렸다.
“진심이라 더 얄밉진 않네.”
푸리나는 드디어 손뼉을 쳤다.
“좋아! 이번 막은 라이자 우세! 하지만 라플리도 대단했다!”
그레이가 덧붙였다.
“그리고 안전 기준 재작성 필요.”
푸리나의 손뼉이 멈췄다.
“안전 기준 재작성은 좋은 거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으니 작성할 수 있습니다.”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그럼 성공이네.”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그 기준도 재작성해야겠습니다.”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 뒤로, 박수가 이어졌다.
이번 박수는 5막보다 컸다.
번개의 긴장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야 숨을 쉬고, 자신들이 본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리는 뇌광.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내는 성은.
그 둘이 서로를 부수지 않고 맞물린 장면.
공방이 정리되는 동안 라플리와 라이자는 반응로 옆에 나란히 섰다.
라플리가 먼저 말했다.
“은으로 번개를 먹일 줄은 몰랐는데. 그거 논문으로 쓰면 재밌겠네.”
라이자가 고개를 저었다.
“번개를 먹인 게 아니라, 같이 뛰게 한 거예요.”
“그게 더 이상하거든?”
“꿈속에서는 이상하지 않았어요.”
“현실에서는 이상하다고.”
라이자는 은빛 반응로를 보았다.
“그래서 현실로 만들 가치가 있는 거예요.”
라플리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귀족들을 싫어했다.
혈통만으로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을 싫어했다.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권리를 말하는 자들을 싫어했다.
하지만 라이자는 조금 달랐다.
꿈을 말한다.
상냥함을 말한다.
심장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 회로와 혈맥과 코어로 만든다.
공상가라기에는 너무 실용적이고, 기술자라기에는 너무 위험한 꿈을 꾼다.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너, 생각보다 위험한 타입이네.”
라이자가 웃었다.
“라플리 님도요.”
“난 원래 위험해.”
“그럼 잘 맞네요.”
라플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그렇게 받는다고?”
“틀렸나요?”
“아니.”
라플리는 반응로에 남은 뇌광의 흉터를 보았다.
“맞아서 문제지.”
라이자는 손끝으로 그 흉터를 만졌다.
“이건 남겨둘게요.”
“왜?”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더 잘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라플리는 조금 조용해졌다.
자기 번개가 남긴 흉터.
그것을 결함이 아니라 다음 회로로 삼겠다는 사람.
“그거, 정말 논문으로 써야겠네.”
“같이 쓰실래요?”
“내 이름 앞에 귀족 놈들 이름만 안 붙이면.”
“라플리 님 이름부터 쓸게요.”
“그럼 생각해볼게.”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번개와 은의 공동 논문!”
그레이가 옆에서 말했다.
“폐하, 논문 제목은 당사자들이 정합니다.”
“아쉽네. 내가 제목 잘 짓는데.”
죠니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대체로 길지.”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길지만 기억에는 남는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도 꽤 푸리나한테 물들었네.”
“그런가.”
“응.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융은 공방 위에 남은 은빛과 뇌광을 바라보았다.
그의 창에는 몇 개의 다른 결과도 보였다.
반응로가 터진 창.
뇌봉이 관중석으로 튄 창.
은인병 하나가 완전히 멈춘 창.
라플리가 지나치게 웃다가 자기 회로를 태운 창.
라이자가 너무 많이 받아들이다 은의 심장이 깨진 창.
하지만 지금의 창은 닫히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잘 비껴갔소.”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질문 하나가 남았군요.”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이번 질문은 뭐야?”
레이튼은 반응로를 보았다.
“상냥함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라플리를 보았다.
“그리고 위험은 어디까지 시험이어야 하는가.”
라이자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라플리도 더는 농담하지 않았다.
잠시 뒤, 라플리가 말했다.
“답은 아직 안 나왔네.”
레이튼이 웃었다.
“좋은 질문일수록 그렇습니다.”
라이자는 은빛 흉터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다음 회로는 생겼어요.”
라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지.”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줄에 기록했다.
《제5경기 종료. 라이자 폐하 우세. 라플리 경, 성은 반응로 출력 한계 갱신 및 취약점 발견 성공.》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추가로 적었다.
《안전 기준 재작성 필요.》
그리고 다시 한 줄.
《번개와 은의 박자 동조 확인.》
푸리나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마지막 줄 좋다.”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마지막 줄은 기술 기록입니다.”
“그래도 좋잖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예. 이번에는 그렇습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은 사라졌다.
그러나 성은의 심장에는 아직 뇌광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박수는 번개가 사라진 뒤에야 터졌다.
사람들은 보았다.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리는 뇌광과,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내는 성은이 서로를 부수지 않고 맞물리는 장면을.
그날의 공방 시험전은 라이자의 우세로 끝났다.
그러나 라플리의 뇌광은 성은의 심장에 새로운 흉터이자 새로운 회로를 남겼다.
번개는 은빛 심장을 태우지 않았다.
은빛 심장은 번개를 가두지 않았다.
둘은 잠시, 같은 박자로 뛰었다.
6막 — 뇌광은 성은의 심장을 시험한다
“이번 막은 실험이야!”
푸리나 헤툼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레이는 이미 그 말을 예상했다는 듯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통제된 실험입니다, 폐하.”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실험 앞에 통제된이 붙으면 재미가 줄어들지 않아?”
“재미가 줄어야 사람이 삽니다.”
“그레이, 너는 정말 무대의 적이야.”
“사고의 적입니다.”
목책 너머에서 죠니가 낮게 웃었다.
“둘 다 비슷하지 않나.”
“아닙니다.”
그레이가 즉시 대답했다.
“사고가 나면 무대도 같이 끝납니다.”
푸리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통제된 실험!”
라플리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통제된 실험은 재미가 반쯤 죽는데.”
그레이의 펜끝이 라플리 쪽으로 향했다.
“재미가 반쯤 죽어야 사람이 삽니다.”
라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래. 사람 살리는 쪽이 우선이지. 마탑에서도 사고 보고서 쓰기 싫어하는 놈들이 항상 그렇게 말해.”
“보고서가 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좀 맞네.”
그때 반대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라이자가 웃으며 말했다.
“죽지 않는 실험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어요.”
라플리가 그녀를 흘끗 보았다.
“너, 은근히 무서운 소리 하네.”
라이자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런가요?”
“응. 그런 쪽이 더 위험해. 진심이잖아.”
푸리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좋아. 분위기 완벽해!”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저는 전혀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미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여관:극장]이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퇴각전의 흙먼지와 수레 자국이 남아 있던 경기장은 천천히 공방으로 변했다.
목책 안쪽에 은빛 선들이 그어졌다.
바닥에는 원형 회로가 새겨졌고, 그 회로의 중앙에는 심장처럼 둥근 반응로가 솟아났다.
반응로는 금속 장치처럼 보였지만, 단순한 금속은 아니었다.
은빛이었다.
차갑게 번쩍이는 은이 아니라, 손안에 오래 쥐고 있으면 체온을 기억할 것 같은 은빛.
낙원 이야기를 들려주던 작은 정령이 남기고 간 조잡한 은꽃처럼, 어딘가 서툴고도 다정한 빛.
그 주변으로 성은 저장조가 솟았다.
왼쪽에는 은의 가호를 저장하는 은빛 축적고.
오른쪽에는 은인 제작대와 성은의 혈맥 회로.
상부에는 라플리의 천상현상을 받아들일 투입 구역이 열렸다.
외곽에는 여관좌 사제들이 차단 등불을 세웠고, 그레이가 직접 걸어가 등불 사이의 거리를 재었다.
“반 보 더 뒤로.”
사제가 등불을 옮겼다.
“저기 은빛 관은 관중석 방향으로 향하면 안 됩니다. 파장이 새면 곧장 차단하세요.”
라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관중석 쪽으로는 흘리지 않을게요.”
라플리가 팔짱을 꼈다.
“내 번개가 멋대로 튀면?”
그레이가 말했다.
“튈 수 없도록 하십시오.”
“그게 말처럼 쉽나.”
“어렵다면 출력 제한을 더 걸겠습니다.”
라플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알았어. 안 튀게 한다고.”
푸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좋아! 양측 모두 안전한 광기!”
“폐하.”
“왜?”
“광기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안전한 광기도 만들 수 있어!”
“그런 표현은—”
“있어!”
그레이는 결국 포기했다.
공방이 완성되자, 푸리나는 중앙 반응로 옆에 섰다.
“이번 경기는 결투가 아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한쪽은 성은으로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낸다. 다른 한쪽은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려 그 심장이 어디까지 뛸 수 있는지 시험한다.”
푸리나는 손을 들어 라이자를 가리켰다.
“보헤미아의 라이자! 은의 여인! 정령이 들려준 꿈속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고 맹세한 성은의 창조자!”
라이자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릴게요.”
푸리나는 이번에는 라플리를 향해 손을 돌렸다.
“유플리아 마탑의 제35대 마탑주! 천율학파의 프로보스트! 하늘을 뇌광으로 물들이는 평민 고아의 천재 마법사, 라플리!”
라플리는 손을 대충 흔들었다.
“소개에서 평민 고아는 빼도 되지 않아?”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중요한 포인트잖아!”
“귀족 놈들 앞에서라면 그렇긴 한데.”
라플리는 관중석 어딘가를 보고 웃었다.
“뭐, 좋아. 숨길 것도 아니고.”
라이자가 그런 라플리를 가만히 보았다.
두 사람은 달랐다.
라이자는 꿈에서 시작했다.
조그마한 은꽃 하나가 그 꿈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었고, 그 증거 하나만으로 평생의 목표를 세웠다.
좀 더 친절한 사람들의 세계.
보헤미아를 위해, 은인들을 위해, 친구를 위해 베푸는 은.
라플리는 후원과 독기로 올라왔다.
평민. 고아. 귀족 사회의 시선.
마탑의 구석에서 시작해, 뇌광과 이론과 오기로 천상현상을 자기 손에 끌어내린 마탑주.
한 사람은 은으로 사람을 만들려 했다.
한 사람은 하늘을 마법핵으로 지정하려 했다.
푸리나는 양팔을 펼쳤다.
“규칙!”
그레이가 바로 앞으로 나왔다.
“라이자 폐하의 성은 공방 시스템은 중앙 반응로를 유지해야 합니다. 반응로가 파괴되거나 관중석 방향으로 파장이 새면 감점입니다.”
그레이는 라플리를 보았다.
“라플리 경은 천율학파 마법으로 반응로 한계를 시험합니다. 목표는 파괴가 아니라 출력 시험, 취약점 발견, 안정성 검증입니다.”
라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부수는 건 쉽고, 안 부수고 한계 보는 게 어려운 거지.”
“그 점을 이해하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너 지금 좀 놀란 거지?”
“아닙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는 가끔 놀라도 표정이 그대로야.”
“폐하.”
“알았어, 조용히 할게.”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라이자 폐하께서는 공방 전체를 운용합니다. 라플리 경은 단독 실험자로 들어갑니다. 체급과 역할이 다르므로 판정은 단순 승패가 아니라 전체 안정화와 국소 성과를 나누어 평가합니다.”
라플리는 피식 웃었다.
“좋네. 졌는데 성과는 냈다 같은 말 할 수 있게 미리 깔아두는 거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정확한 판정은 중요합니다.”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받네.”
라이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라플리 님의 성과도 기대하고 있어요.”
라플리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더 무섭다고.”
“왜요?”
“아니, 됐다. 시작하자.”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그럼, 실험 개시!”
라이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반응로에 손을 얹었다.
은빛이 퍼졌다.
《보헤미아의 피》.
그 순간, 경기장 위의 성은 공방은 단순 개인의 작업대가 아니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약속이 은빛 회로 위에 스며들었다.
보헤미아를 위해.
은인과 보헤미아의 모든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만든 은인 외에는 후사를 두지 않겠다는 서약.
성과 혈통을 은인들에게 나누어, 그들도 종족으로 개화하게 하겠다는 선택.
라이자는 은을 빚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형태를 빚고 있었다.
《은의 여인》.
순수한 은의 빛이 그녀의 손끝에서 퍼졌다.
그 빛은 차갑지 않았다.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금속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빛났다.
라이자가 말했다.
“폭주는 막을게요.”
그녀의 손짓에 성은 저장조가 열렸다.
“하지만 막기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은빛 관들이 바닥에서 솟았다.
“꿈속에서 들은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걸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은의 조형》.
성은이 즉석에서 형태를 얻었다.
절연용 은판.
뇌광 유도 회로.
피뢰침.
냉각용 성은 관.
차폐벽.
그리고 작은 은인 보조공들.
은빛 인형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병사처럼 줄을 맞췄지만, 병사만은 아니었다.
장치처럼 움직였지만, 장치만도 아니었다.
가슴 안쪽에는 작고 둥근 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은의 군단》.
라이자가 만든 은인병들은 공방 곳곳으로 흩어졌다.
하나는 은판을 옮겼고, 하나는 반응로 옆의 관을 조율했고, 셋은 차폐벽 앞에서 기다렸다.
그들의 눈은 비어 있지 않았다.
아직 완전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도, 단순한 물건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따뜻한 맥박이 있었다.
라플리는 그 광경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 아닌데.”
그녀의 왼눈에 빛이 돌았다.
《오딘의 눈》.
마탑주에게 전해지는 고유의 아티팩트.
영력, 차력, 신성회로, 코어의 흐름이 시각화되었다.
라플리의 시야 안에서 은빛 공방은 복잡한 생체 구조처럼 보였다.
성은 흐름.
신성 코어.
혈맥 분기.
은인병의 선천 신성회로.
따뜻한 은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
보헤미아의 피와 성은의 혈맥이 겹친 상냥함의 심상각인.
라플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 이거 진짜 심장처럼 만들었네.”
라이자가 웃었다.
“심장이니까요.”
“장치 아니고?”
“장치이기도 해요. 하지만 장치로만 만들면, 친구가 되진 못하잖아요.”
라플리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낮게 말했다.
“역시 위험한 타입이네.”
“그 말, 오늘 두 번째예요.”
“두 번 말할 만큼 그래.”
라플리는 앞으로 걸었다.
그녀의 발밑에서 공기가 달라졌다.
천장이 낮아진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내려왔다.
《천상종림天相從臨》.
공방 위의 천기天基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뇌雷로 고정되었다.
맑았던 은빛 공방 위에, 작고 어두운 구름이 생겼다.
그 가장자리에는 검은 역설이 번졌다.
신학역설.
마魔의 방향성.
마법의 발현과 숙련을 밀어올리는 위험한 인과 고정.
라이자는 그 하늘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공방 안에 하늘이 생겼네요.”
라플리는 손을 들었다.
“하늘에도 법칙은 있어. 문제는 귀족 놈들이 그걸 혈통처럼 포장한다는 거지.”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작은 뇌광이 맺혔다.
《천율학파天律學派 Schola Legum Caelitonitrus》.
“천격 마법핵 지정.”
공방 위에 마법진이 열렸다.
“뇌광 하나. 출력은 낮게 간다.”
《뇌천마력회로》가 그녀의 팔을 따라 빛났다.
그것은 혈관이 아니었다.
회로였다.
회로가 아니라, 하늘에서 잘라온 번개의 문법이었다.
첫 번째 뇌광이 반응로에 꽂혔다.
쾅, 하는 폭음은 없었다.
대신 성은 반응로가 크게 떨렸다.
은빛 회로가 파르르 흔들렸고, 은인 보조공들이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레이가 즉시 차단 등불을 확인했다.
“파장 정상. 관중석 방향 유출 없음.”
라이자는 두 손을 반응로에 얹었다.
《성은의 혈맥》.
성은의 강이 흘렀다.
회로는 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줄기였다.
은빛 방울 하나하나가 상냥함과 자비로움을 품은 혈맥이었다.
라플리의 뇌광이 그 혈맥을 흔들었다.
라이자는 무리하게 막지 않았다.
흔들린 곳을 보았다.
떨린 곳을 들었다.
그리고 혈맥의 분기를 바꾸었다.
반응로가 다시 안정되었다.
라플리가 눈썹을 올렸다.
“버티네.”
라이자는 웃었다.
“안아주는 건 잘하거든요.”
“번개를 안아주는 장치는 처음 보는데.”
“장치라기보다는 심장이라니까요.”
“그게 더 이상하거든.”
라플리는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럼 두 번째.”
뇌광이 둘로 늘었다.
“세 번째.”
셋.
공방 안의 작은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천상이변》.
번개가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방 안에 작은 하늘이 생겼고, 그 하늘이 분노했다.
원형 범위의 뇌천이 반응로 위에 펼쳐졌다.
천율학파의 계산식이 바닥의 은빛 회로와 충돌했고, 뇌천마력회로에서 뿜어진 마력이 천상이변의 범위를 밀어올렸다.
은인병들이 움직였다.
《은의 군단》은 전투하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공방을 살렸다.
하나는 차폐벽을 보강했다.
둘은 은판을 들고 뇌광의 경로에 섰다.
셋은 반응로 옆에서 성은 관을 교체했다.
넷은 떨어진 피뢰침을 다시 세웠다.
그들은 병기처럼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그 움직임에는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적었다.
라이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오래 잡고 있지 마세요. 번개는 지나가야 해요.”
은인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플리는 그걸 보고 낮게 중얼거렸다.
“저거, 알아듣네.”
“네.”
라이자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들으니까요.”
라플리는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더 거칠게 웃었다.
“좋아. 그럼 더 간다.”
그녀의 마력이 바뀌었다.
《뇌봉雷鳳》의 경지가 열렸다.
상위마력.
천노마력天怒魔力.
뇌광의 잔류가 사라지지 않고 공방 위에 남았다.
《난장광乱残光》.
뇌광은 지나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난잔광으로 남아 성은 회로 위를 핥았다.
은빛 혈맥은 그 잔광을 받아들일 때마다 떨렸다.
라플리의 웃음이 조금 비뚤어졌다.
《대마 신학역설 - 마녀striga》.
마녀의 변질은 그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대신 더 빠르게 배우고, 더 위험하게 계산하게 만들었다.
마魔에 대한 친화가 뇌雷의 법칙 가장자리를 검게 물들였다.
물리적으로는 더 취약해지는 몸이었지만, 마법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속도는 무섭도록 올라갔다.
그레이가 눈을 들었다.
“라플리 경, 신체 반동은?”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판정 기준이 아닙니다.”
“아직 팔 붙어 있어.”
“그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플리가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찼지만, 출력은 조금 조정했다.
“됐어. 안 죽어.”
라이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라플리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너까지 그러면 짜증 나는데.”
“죄송해요.”
“사과도 너무 빠르네.”
라플리는 다시 《오딘의 눈》으로 공방을 들여다보았다.
뇌광이 흐른 자리.
반응로가 떨린 위치.
성은의 혈맥이 너무 많이 받아준 곳.
은의 심장이 박자를 놓칠 뻔한 순간.
그녀는 웃었다.
“찾았다.”
라이자가 물었다.
“뭘요?”
“약점.”
라플리는 손가락으로 반응로 오른쪽 혈맥 분기를 가리켰다.
“좋아. 이건 혈맥이 너무 착해서 생기는 약점이네.”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착해서요?”
“들어오는 걸 너무 많이 받아줘. 적당히 쳐내야 하는 것도 안고, 흘려야 하는 것도 품고, 버려야 하는 것도 품으려고 해.”
라플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뇌정령핵 하나가 허공에 생겼다.
《정령핵 이론》.
뇌雷를 기반으로 한 정령핵.
아직 작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생기려 하고 있었다.
라플리는 말했다.
“상냥한 회로는 아름답지. 근데 전장에서는 약점이야.”
라이자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상냥함이요?”
“응. 받아들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 네 성은은 들어오는 전류를 적으로 먼저 보지 않아. 그래서 내 번개가 안쪽까지 너무 쉽게 들어간다.”
“하지만 처음부터 밀어내면, 친구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약점이라고.”
라플리는 뇌정령핵을 띄웠다.
“좋은 약점이지만, 약점은 약점이야.”
라이자는 반응로를 바라보았다.
성은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은의 심장.
그 이름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심장은 번개도 안으려 했다.
폭력도 먼저 이해하려 했다.
상처도, 이물질도, 고통도, 자신 안으로 받아들여 흐름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라플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전장은 모든 것을 친구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지 않는다.
라이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바꿔야겠네요.”
라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뭘?”
“안아주는 방식이요.”
라플리는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실험 같네.”
그녀는 손을 높이 들었다.
“좋아. 마지막 시험으로 간다.”
뇌정령핵이 크게 떨렸다.
라플리의 마력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진짜 뇌봉이랬냐고 묻는 놈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웃었다.
비뚤어진 웃음이었다.
하지만 즐거워 보였다.
“오늘은 진짜로 보여줄게.”
칭호가 열렸다.
《뇌봉雷鳳》.
뇌정령핵이 찢어지듯 열렸다.
그 안에서 번개의 새가 날개를 펼쳤다.
A랭크의 정령 사역마.
뇌봉.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 위험했다.
날개 하나가 펼쳐질 때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이 찢어졌다.
깃털은 번개의 가지였고, 눈동자는 천격의 마법핵처럼 빛났다.
날갯짓 한 번에 난잔광이 바닥을 핥았다.
관중석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차단 등불, 최대 출력 대기. 라이자 폐하, 반응로 상태는?”
라이자는 반응로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답했다.
“떨리고 있어요.”
“중지합니까?”
라이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에요.”
라플리가 물었다.
“정말 받을 거야?”
라이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
“장치로는 못 버텨.”
라이자는 웃었다.
“그럼 장치로는 안 되겠네요.”
라플리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
“심장으로 받을게요.”
그 순간, 라이자의 은빛이 달라졌다.
공방 전체가 한 번 숨을 쉬었다.
《끝없는 마법의 은》.
성은의 소모가 줄었다.
은빛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고르게 퍼졌다.
모두를 위한 은을 베풀어달라는 기도가 공방의 회로를 타고 흐르며, 무리한 조형의 낭비를 줄였다.
그리고 그 위에, 라이자의 오의가 열렸다.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이번에는 인간 하나를 새로 빚는 전면 조형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친선전은 공방 시험을 넘어섰을 것이다.
라이자는 핵심 구조만 끌어왔다.
성은의 강의 심상을 복제한다.
기본이 되는 목적을 상정한다.
목적은 하나.
번개를 가두지 않고, 함께 뛰게 하는 심장.
혈맥을 설계한다.
용기가 되는 육체를 구축한다.
완성까지의 경험과 세월을 구상한다.
정신의 윤곽을 세운다.
성은의 강에서 태어나는 신화를 공상한다.
진은이 결과를 끌어낸다.
지금 이곳에—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심장이 된다.”
반응로가 변했다.
은빛 장치는 더 이상 단순한 장치로 보이지 않았다.
바닥의 성은 회로는 혈맥처럼 박동했고, 저장조는 폐처럼 숨을 쉬었으며, 은인병들의 가슴 안에 있는 작은 은의 심장들이 중앙 반응로의 박자와 이어졌다.
《성은으로 새기다》.
라플리의 뇌광이 어디서 아팠는지.
어디서 회로를 떨게 했는지.
어디서 심장이 박자를 놓쳤는지.
라이자는 그것을 막지 않고 새겼다.
성은 위에 흉터가 생겼다.
하지만 그 흉터는 결함이 아니었다.
새로운 회로였다.
라플리는 그걸 보고 숨을 삼켰다.
“미쳤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뜻인가요?”
“아니, 진짜 미쳤다는 뜻인데.”
“아.”
“근데 나쁘진 않아.”
뇌봉이 떨어졌다.
번개의 새가 성은 반응로를 향해 날개를 접었다.
그 순간, 공방 안의 작은 하늘이 전부 반응로 위로 쏟아졌다.
빛.
천격.
뇌광.
난잔광.
마녀의 검은 역설.
천율학파의 계산식.
그 모든 것이 성은의 심장 위에 꽂혔다.
성은의 심장은 탔다.
은빛 혈맥이 붉게 달아올랐다.
은인병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차폐벽이 세 겹으로 갈라졌다.
여관좌 사제들의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레이가 외쳤다.
“차단 준비!”
하지만 폭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성은의 심장은 먼저 떨었다.
그다음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번개의 박자를 자기 맥박 속에 섞었다.
두근.
뇌봉의 날갯짓이 한 번.
두근.
은의 심장이 한 번.
두근.
번개와 은이 같은 박자로 뛰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바로 박수치지 못했다.
라플리조차 말이 없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이 사라졌다.
뇌봉은 천천히 날개를 접고, 번개의 깃털을 흩뿌리며 라플리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칭호의 지속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성은 반응로는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안정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은 완전히 매끄럽지 않았다.
흉터가 있었다.
라플리의 뇌광이 남긴 새로운 회로.
라이자가 그 흉터 위에 손을 얹었다.
“아프네요.”
라플리가 말했다.
“장치가 아프다고?”
“심장이니까요.”
“아, 진짜.”
라플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랑 대화하면 내 상식이 계속 죽어.”
라이자는 진지하게 물었다.
“새로 만들 수 있나요?”
“뭐?”
“상식이요.”
라플리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 너 진짜 위험하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장부에는 이미 판정 항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공방 상태를 확인했다.
“반응로 손상 없음. 출력 한계 기존 예상치 초과. 신규 회로 형성. 차폐벽 세 겹 손상. 은인병 네 기 일시 정지, 복구 가능. 관중석 방향 파장 없음.”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러면?”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판정하겠습니다.”
공방은 아직 은빛으로 뛰고 있었다.
“라이자 폐하, 반응로 유지 및 안정화 우세. 성은의 혈맥 재구축, 은의 군단 운용, 오의 제한 발동을 통한 반응로 심장화 성공.”
라이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라플리를 보았다.
“라플리 경, 출력 한계 갱신 및 성은 혈맥 취약점 발견 성공. 뇌봉을 통한 A랭크 스트레스 테스트 달성.”
라플리는 팔짱을 꼈다.
“그래서?”
“총합 판정.”
그레이가 말했다.
“라이자 폐하 우세.”
라플리는 바로 말했다.
“졌는데 성과는 냈다는 말이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라플리는 잠깐 그레이를 보다가 웃었다.
“나쁘지 않네.”
라이자가 말했다.
“저는 많이 배웠어요.”
라플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말, 이긴 사람이 하면 좀 얄미운 거 알아?”
라이자가 당황했다.
“아, 죄송해요.”
“됐어.”
라플리는 고개를 돌렸다.
“진심이라 더 얄밉진 않네.”
푸리나는 드디어 손뼉을 쳤다.
“좋아! 이번 막은 라이자 우세! 하지만 라플리도 대단했다!”
그레이가 덧붙였다.
“그리고 안전 기준 재작성 필요.”
푸리나의 손뼉이 멈췄다.
“안전 기준 재작성은 좋은 거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으니 작성할 수 있습니다.”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그럼 성공이네.”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그 기준도 재작성해야겠습니다.”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 뒤로, 박수가 이어졌다.
이번 박수는 5막보다 컸다.
번개의 긴장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야 숨을 쉬고, 자신들이 본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리는 뇌광.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내는 성은.
그 둘이 서로를 부수지 않고 맞물린 장면.
공방이 정리되는 동안 라플리와 라이자는 반응로 옆에 나란히 섰다.
라플리가 먼저 말했다.
“은으로 번개를 먹일 줄은 몰랐는데. 그거 논문으로 쓰면 재밌겠네.”
라이자가 고개를 저었다.
“번개를 먹인 게 아니라, 같이 뛰게 한 거예요.”
“그게 더 이상하거든?”
“꿈속에서는 이상하지 않았어요.”
“현실에서는 이상하다고.”
라이자는 은빛 반응로를 보았다.
“그래서 현실로 만들 가치가 있는 거예요.”
라플리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귀족들을 싫어했다.
혈통만으로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을 싫어했다.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권리를 말하는 자들을 싫어했다.
하지만 라이자는 조금 달랐다.
꿈을 말한다.
상냥함을 말한다.
심장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실제 회로와 혈맥과 코어로 만든다.
공상가라기에는 너무 실용적이고, 기술자라기에는 너무 위험한 꿈을 꾼다.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너, 생각보다 위험한 타입이네.”
라이자가 웃었다.
“라플리 님도요.”
“난 원래 위험해.”
“그럼 잘 맞네요.”
라플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그렇게 받는다고?”
“틀렸나요?”
“아니.”
라플리는 반응로에 남은 뇌광의 흉터를 보았다.
“맞아서 문제지.”
라이자는 손끝으로 그 흉터를 만졌다.
“이건 남겨둘게요.”
“왜?”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더 잘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라플리는 조금 조용해졌다.
자기 번개가 남긴 흉터.
그것을 결함이 아니라 다음 회로로 삼겠다는 사람.
“그거, 정말 논문으로 써야겠네.”
“같이 쓰실래요?”
“내 이름 앞에 귀족 놈들 이름만 안 붙이면.”
“라플리 님 이름부터 쓸게요.”
“그럼 생각해볼게.”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번개와 은의 공동 논문!”
그레이가 옆에서 말했다.
“폐하, 논문 제목은 당사자들이 정합니다.”
“아쉽네. 내가 제목 잘 짓는데.”
죠니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대체로 길지.”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길지만 기억에는 남는다.”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도 꽤 푸리나한테 물들었네.”
“그런가.”
“응.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융은 공방 위에 남은 은빛과 뇌광을 바라보았다.
그의 창에는 몇 개의 다른 결과도 보였다.
반응로가 터진 창.
뇌봉이 관중석으로 튄 창.
은인병 하나가 완전히 멈춘 창.
라플리가 지나치게 웃다가 자기 회로를 태운 창.
라이자가 너무 많이 받아들이다 은의 심장이 깨진 창.
하지만 지금의 창은 닫히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잘 비껴갔소.”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질문 하나가 남았군요.”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이번 질문은 뭐야?”
레이튼은 반응로를 보았다.
“상냥함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라플리를 보았다.
“그리고 위험은 어디까지 시험이어야 하는가.”
라이자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라플리도 더는 농담하지 않았다.
잠시 뒤, 라플리가 말했다.
“답은 아직 안 나왔네.”
레이튼이 웃었다.
“좋은 질문일수록 그렇습니다.”
라이자는 은빛 흉터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다음 회로는 생겼어요.”
라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지.”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줄에 기록했다.
《제5경기 종료. 라이자 폐하 우세. 라플리 경, 성은 반응로 출력 한계 갱신 및 취약점 발견 성공.》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추가로 적었다.
《안전 기준 재작성 필요.》
그리고 다시 한 줄.
《번개와 은의 박자 동조 확인.》
푸리나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마지막 줄 좋다.”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마지막 줄은 기술 기록입니다.”
“그래도 좋잖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예. 이번에는 그렇습니다.”
공방 위의 작은 하늘은 사라졌다.
그러나 성은의 심장에는 아직 뇌광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박수는 번개가 사라진 뒤에야 터졌다.
사람들은 보았다.
하늘의 법칙을 끌어내리는 뇌광과, 꿈속 이야기를 현실의 심장으로 빚어내는 성은이 서로를 부수지 않고 맞물리는 장면을.
그날의 공방 시험전은 라이자의 우세로 끝났다.
그러나 라플리의 뇌광은 성은의 심장에 새로운 흉터이자 새로운 회로를 남겼다.
번개는 은빛 심장을 태우지 않았다.
은빛 심장은 번개를 가두지 않았다.
둘은 잠시, 같은 박자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