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07여관◆zAR16hM8he(f85ea685)2026-05-13 (수) 22:40:04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7막 — 무대 뒤의 왕

밤이 내려앉은 경기장은 낮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곳이 무대였다.

말발굽이 원을 그었고, 청흑빛 유성이 빛을 끌며 떨어졌으며, 금목서의 거대한 검이 하늘을 갈랐다. 자주빛 화살은 전쟁의 뼈대를 꿰뚫었고, 검은 실은 퇴각로와 이름들을 묶었다. 은빛 심장은 번개를 품고, 뇌광은 성은의 회로에 흉터를 남겼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 모든 것은 흔적이 되었다.

목책에는 죠니와 아스테르다스의 경기가 남긴 얕은 흠집이 있었다.
흙바닥에는 말발굽이 그린 원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남쪽 바닥에는 아스트리트의 《금목만리향파》가 스쳐간 금빛 결이 남았고, 그 위에는 아직도 아주 옅은 금목서 향이 떠돌았다.
새벽선 한 걸음 앞에는 알렉산드리나의 목패 병사가 멈췄던 작은 발자국이 있었다.
퇴각전의 장부에는 그레이가 적은 문장이 있었다.

《실 하나를 놓았음. 이름은 놓지 않았음.》

그리고 공방 자리에는 라이자의 성은 반응로가 남긴 은빛 흉터가 있었다.
라플리의 뇌광이 지나간 자리였다.
상처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회로였다.

푸리나 헤툼은 그 모든 흔적 사이를 걸었다.

낮에는 잘 몰랐다.

소리와 박수와 대사와 판정과 안전 고지와 휘날리는 망토와 농담이 있었다. 그 안에서는 무대가 흘러가고 있었고, 흘러가는 무대 위에서는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밤의 무대는 달랐다.

막이 내려간 뒤의 무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부서진 목책은 부서진 채였고, 파인 흙바닥은 파인 채였다.
박수는 사라졌지만, 박수가 닿았던 자리의 무게는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발끝으로 죠니의 말발굽 자국을 따라 걸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그 원은 완벽하지 않았다. 중간에 미끄러질 뻔한 곳이 있었고, 하융이 말했던 반 박자의 흔들림이 남은 자리도 있었다.

푸리나는 중얼거렸다.

“다들 너무 진심이야.”

“폐하가 불렀잖아.”

뒤에서 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죠니는 목책에 기대어 있었다. 낮의 경기가 끝난 지 꽤 지났는데도, 그는 아직 완전히 쉬는 얼굴이 아니었다. 말은 이미 마구간으로 돌아갔고 창도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의 손끝에는 여전히 마지막 찰나의 감각이 조금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럼 책임져야지.”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는 발을 멈췄다.

“그 말, 오늘따라 너무 왕답네.”

“나 말고 폐하가 왕이잖아.”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이상할 건 없지. 무대를 연 사람이 막도 내려야 한다는 뜻이야.”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죠니는 평소처럼 건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농담만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다시 경기장을 보았다.

낮의 자신은 자신 있게 말했다.

칼끝은 목숨이 아니라 박수를 향해야 한다고.

그 말은 아직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칼끝들은 정말 무거웠다.

죠니와 아스테르다스는 한 치 앞에서 멈췄다.
호흐마이스터는 승리보다 먼저 관중석 앞에 섰다.
아스트리트는 생명의 검으로 전장의 오래된 결론을 가르려 했다.
미하일라는 사람을 쏘지 않고 전쟁의 핵을 꿰뚫었다.
알렉산드리나는 한 걸음 앞에서 멈췄지만, 그 발걸음은 분명했다.
아레는 실을 놓았다.
하융은 죽은 가능성을 밟았다.
레이튼은 희생이라는 이름을 묻기 전으로 되돌렸다.
그레이는 손실 셋 아래에서 이름 셋을 건졌다.
라이자는 심장을 만들었고, 라플리는 그 심장에 흉터를 남겼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너무 큰 무대를 열었나?”

죠니가 잠깐 침묵했다.

그는 푸리나를 위로하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푸리나는 그런 위로를 바라지도 않았다.

죠니는 그냥 사실을 말했다.

“큰 무대였지.”

“그렇지?”

“응.”

“역시 너무 컸나?”

“그건 아니고.”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작았으면 저 사람들이 자기 걸 다 안 꺼냈겠지.”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덧붙였다.

“다 꺼냈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어. 그럼 나쁜 무대는 아니지.”

“좋은 무대였을까?”

“그건 내가 정할 일은 아니고.”

“그럼 누가 정해?”

죠니는 경기장 저편을 가리켰다.

그레이가 있었다.

등불 아래에서, 그녀는 아직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레이는 숫자로 대답할 텐데.”

죠니가 말했다.

“숫자도 필요하잖아.”

“너 진짜 오늘따라 너무 정론이야.”

“오늘 좀 피곤해서 그래.”

“피곤하면 정론을 말해?”

“쓸데없는 농담을 줄이게 되지.”

“그게 정론보다 낫지 않아?”

“폐하 기준으론 그렇겠지.”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그 웃음은 낮의 웃음보다 작았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그레이는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부상자 없음.
경기장 보수 필요.
목책 세 곳 교체.
성은 반응로 안전 기준 재작성.
모의 수레 한 대 파손.
은인병 네 기 일시 정지 후 복구 가능.
피난민 목패 명단 누락 없음.

푸리나는 장부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레이.”

“예, 폐하.”

“오늘 좋은 무대였을까?”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예상했다.
그레이는 감동적인 말보다 확인 가능한 항목을 먼저 볼 것이다.

예상대로, 그레이는 장부를 보았다.

“부상자는 없습니다.”

“응.”

“이름 누락도 없습니다.”

“응.”

“목책은 고치면 됩니다. 남쪽 흙바닥은 내일 오전 안으로 복구 가능합니다. 성은 반응로 안전 기준은 재작성해야 하고, 뇌광계 실험은 사전 허가 항목을 세분화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레이, 나는 그런 걸 물은 게 아닌데.”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듯 시선을 내렸다.

“저는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알아.”

푸리나는 장부 옆에 앉았다.

“그래서 물어본 거야.”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등불이 흔들렸다.

밤바람이 장부 끝을 살짝 넘겼고, 그레이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눌렀다.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좋은 무대였다고 생각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는 여전히 장부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숫자로만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푸리나의 가슴 한가운데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아스테르다스 경의 빛은 사고 위험으로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죠니 경의 회전도 승패표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호흐마이스터 경의 갑주 손상은 보수 항목이지만, 관중석을 지킨 행동도 함께 기록했습니다. 알렉산드리나 경의 패배에는 새벽선 한 걸음 앞이라는 주석이 있습니다. 아레 폐하의 실도, 하융 경의 가능성도, 레이튼 경의 질문도, 라이자 폐하와 라플리 경의 실험도…… 전부 따로 적었습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그래서 좋은 무대였다고 생각합니다.”

푸리나는 장부 표지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 장부가 없었으면, 나는 그냥 ‘다들 멋있었다!’ 하고 끝냈을지도 몰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정말?”

“예. 다만 그 뒤에 기록이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레이는 무대 아래의 기둥이네.”

“저는 기둥이라기보다 행정 담당입니다.”

“그게 기둥이야.”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등불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레이튼이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한 뒤, 푸리나 옆에 섰다.

“폐하. 오늘의 무대는 친선전이었습니까?”

푸리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친선전이었다.

서로 죽이지 않았고, 규칙이 있었고, 관객이 있었고, 박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전쟁 준비였다.

서로의 힘을 확인했고, 다가올 몽골의 위협을 생각했고,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었다.

축제였다.

아이들은 웃었고, 푸리나는 호명했고, 관중들은 손뼉을 쳤다.

하지만 웃음만은 아니었다.

죄와 침묵과 결핍과 책임과 흉터가 올라왔다.

푸리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

“……모르겠어.”

레이튼은 환하게 웃었다.

“훌륭한 답입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겠다는 게?”

“예.”

레이튼은 경기장의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그의 발밑에 아주 희미하게 낡은 서재의 그림자가 열렸다.

별이 그려진 천장.
아직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별들.
공중에 떠 있는 미완의 질문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무대도 그렇지요.”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친선전도, 전쟁 준비도, 축제도 아닌 것.”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은 그 모두이지만, 아직 그 어느 하나로도 닫히지 않은 것.”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

“지금은 그대로 두시지요.”

“이름 없이?”

“예. 이름 없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직 자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푸리나는 경기장을 보았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무대.

그 말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하융은 경기장 북쪽 그늘에 서 있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다가왔다.

“폐하.”

“하융.”

하융은 밤의 경기장을 보며 말했다.

“많은 창에서 이 무대는 피를 보았소.”

푸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하융은 숨기지 않았다.

“죠니 경과 아스테르다스 경이 멈추지 못한 창도 있었소. 아스트리트 경의 금목서검이 관중석을 흔든 창도 있었소. 미하일라 폐하의 세 번째 화살이 사람을 겨눈 창도 있었소. 아레 폐하의 실이 너무 깊어 산 자들이 달리지 못한 창도 있었소. 뇌봉이 성은의 심장을 태운 창도 있었소.”

푸리나는 손을 꽉 쥐었다.

“그럼 우리가 운이 좋았던 거야?”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도 있었소.”

푸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하융은 이어 말했다.

“허나 운만은 아니었소.”

그의 회색빛 눈이 푸리나를 향했다.

“폐하께서 멈출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기 때문이오.”

“멈출 수 있는 무대.”

“그렇소.”

하융은 경기장 중앙을 보았다.

“칼을 들고도, 한 치 앞에서 멈출 수 있는 자리. 전력을 다하고도, 상대를 장면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자리. 실패한 가능성을 보아도, 지금 이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리.”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 무대였소.”

푸리나는 장난처럼 웃으려 했다.

하지만 웃음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냥 다들 서로를 좀 더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융이 답했다.

“때로는 그것이 전쟁보다 어렵소.”

레이튼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상대의 힘만 보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레이가 말했다.

“상대가 어디서 멈추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경기장 저편, 등불이 닿지 않는 그늘에서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낮의 퇴각전 때처럼 조용했다.

그녀가 오는 동안, 밤의 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제 그 침묵이 무섭지만은 않았다.

아레의 침묵은 지우는 침묵이 아니었다.
듣기 위한 침묵이었다.

푸리나는 먼저 말했다.

“아레.”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헤툼 폐하.”

“오늘…… 괜찮았어?”

아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책의 흠집, 말발굽의 원, 금목서의 잔향, 새벽선 앞의 발자국, 성은 반응로의 흉터, 그리고 그레이의 장부를 차례로 보았다.

그 뒤 말했다.

“박수가 침묵을 지우지는 않았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럼 괜찮았어?”

아레의 시선이 푸리나에게 돌아왔다.

“예.”

그 대답은 조용했다.

하지만 분명했다.

“오늘의 박수는 누군가의 슬픔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푸리나의 목이 잠깐 막혔다.

아레는 푸리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아레는 푸리나의 웃음과 무대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산 자에게 웃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난민에게는 다시 밥을 먹을 이유가 필요하고, 아이에게는 어제의 불길이 아니라 오늘의 인형극을 기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레는 박수만으로 살 수 없는 이들도 안다.

죽은 이들.
명령 아래 가라앉은 이름들.
무대 아래로 내려간 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푸리나는 산 자를 다시 무대 위로 올리는 사람이다.

아레는 무대 아래로 가라앉은 이들이 혼자 잊히지 않도록 실을 내려보내는 사람이다.

푸리나는 박수를 지킨다.

아레는 침묵을 듣는다.

둘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니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나는 가끔 무서워.”

아레는 기다렸다.

푸리나는 손끝으로 자기 가슴을 눌렀다.

“무대를 만들다 보면, 다 장면처럼 보일 때가 있어. 아픈 것도, 죽은 것도, 울음도. 내가 잘못하면…… 누군가의 침묵까지 박수로 덮어버릴지도 몰라.”

그레이의 손이 아주 조금 멈췄다.

하융은 창밖을 보지 않았다.

레이튼도 질문하지 않았다.

아레가 말했다.

“그래서 네게 질문하는 이들이 있구나.”

푸리나는 주변을 보았다.

그레이.
레이튼.
하융.
죠니.

그리고 아레.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나, 제동장치가 너무 많지 않아?”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부족하진 않지.”

그레이가 말했다.

“필요한 만큼입니다.”

레이튼이 덧붙였다.

“좋은 무대일수록 장치가 많습니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치가 있어야 비껴갈 수 있소.”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편하게 웃었다.

아레가 말했다.

“푸리나.”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레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은 많지 않았다.

“네가 박수를 지키지 않는다면, 산 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내가 침묵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은 오래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아레의 검은 실 하나가 밤바람 속에서 아주 얇게 흔들렸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전장을 지나고 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나는 박수를 지킬게.”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묵을 듣겠다.”

“하지만…… 가끔은 서로 확인하자.”

“무엇을?”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내 박수가 너무 시끄럽지 않은지. 네 침묵이 너무 깊지 않은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칭찬이야?”

“그래.”

푸리나는 그 대답에 조금 놀란 듯하다가, 결국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은 밤의 경기장에 너무 크지 않게 퍼졌다.

그때 등불 하나가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 등불 아래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여관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

낯익으면서도 낯선 사람.

여관의 성좌.

그는 아무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다.

무대를 바꾸지도 않았고, 판정을 고치지도 않았다.

그저 밤의 경기장 가장자리, 등불 아래에서 손님을 맞는 주인처럼 서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런 것도 여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관좌는 조용히 웃었다.

“쉬어갈 수 있었다면, 그렇겠지요.”

푸리나는 경기장을 보았다.

“칼을 들고 싸웠는데요?”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관좌는 등불을 보았다.

“여관은 꼭 편한 사람만 오는 곳이 아닙니다. 먼 길을 걸은 사람, 싸우다 온 사람, 길을 잃은 사람, 너무 오래 긴장한 사람도 문을 두드립니다.”

그의 목소리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내어주듯 조용했다.

“오늘 이곳에서 모두가 오래 머물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잠시 멈추었습니다. 서로를 보았고, 자신의 칼을 내려놓을 때를 배웠습니다. 그 정도면, 하룻밤 묵어가기에는 충분한 여관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좋은 여관이었을까요?”

여관좌는 대답했다.

“손님들이 떠난 뒤에도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면, 나쁘지 않은 여관이었겠지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등불이 다시 흔들렸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밤바람만 남았다.

푸리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좋아.”

죠니가 말했다.

“그 ‘좋아’는 보통 사고의 시작인데.”

그레이가 장부를 다시 열었다.

“계획을 말씀하시기 전에 안전 기준부터—”

“아니, 이번엔 진짜 계획이야.”

푸리나는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밤의 경기장.

흔적이 남은 무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친선전.

그녀는 그 한가운데에 섰다.

“지금까지는 서로를 상대로 싸웠어.”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죠니는 아스테르다스의 길을 봤고, 아스테르다스는 죠니의 찰나를 봤어. 호흐마이스터와 아스트리트는 기사가 무엇을 입고, 검이 무엇을 살리는지 보여줬지. 미하일라와 알렉산드리나는 황제가 전쟁을 어떻게 끝내고, 차르가 어떻게 새벽까지 걷는지 보여줬어. 아레와 너희 셋은 퇴각에서 무엇을 놓고 무엇을 놓지 말아야 하는지 보여줬고, 라이자와 라플리는 상처도 회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

푸리나는 손을 펼쳤다.

“그러니까 다음 막은, 서로를 상대로 싸우는 게 아니야.”

죠니가 물었다.

“그럼?”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같은 적을 막는 거야.”

그레이가 말했다.

“공동 방어전입니까?”

“응.”

푸리나는 웃었다.

“지금까지는 서로의 칼끝을 봤으니까, 이제는 그 칼끝들이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는지 봐야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창이기도 하오.”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좋은 퇴각로가 필요하겠지요.”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공동 방어전. 가상 적 설정 필요. 관중석 차폐 강화. 피난민 목패, 보급 수레, 부상자 후송로 재배치. 성은 반응로 사용 여부 별도 검토. 뇌광계 마법 사용 시 상공 차단 등불 증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레이, 신났어?”

“아닙니다.”

“신났네.”

“아닙니다.”

죠니가 말했다.

“저건 신난 거 맞아.”

그레이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 웃음은 다시 밝았다.

하지만 낮의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낮의 웃음은 무대를 여는 배우의 웃음이었다.

지금의 웃음은 무대가 무너지지 않게 버티려는 왕의 웃음이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녀의 [여관:극장]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밤의 경기장 위에 아주 얇은 막이 내려왔다.

기도 같기도 하고, 개막사 같기도 한 목소리.

고정된 영창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흔적을 하나씩 꿰어 만든 즉흥의 선언.

“오늘 우리는 칼끝을 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빛도 보았고, 갑주도 보았고, 화살도 보았고, 실도 보았고, 번개도 보았다.”

말이 끝날 때마다, 경기장 위의 흔적들이 잠시 떠올랐다.

죠니의 원.
아스테르다스의 초신성.
호흐마이스터의 균열 난 갑주.
아스트리트의 금목서.
미하일라의 자주빛 화살.
알렉산드리나의 한 걸음.
아레의 실.
하융의 창.
레이튼의 서재.
그레이의 장부.
라이자의 성은 심장.
라플리의 뇌광.

“그리고 모두가 멈추었다.”

푸리나는 눈을 떴다.

“그러니 다음 막에서는,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모이자.”

그녀는 밤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이곳은 아직 최종막이 아니다.”

작은 웃음.

“하지만 대단원의 막이 가까워졌으니.”

그녀는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각자 자기 칼을 정비해줘. 자기 질문을 챙겨줘. 자기 장부를 닫지 말고, 자기 창을 열어둬. 자기 실을 너무 세게 쥐지 말고, 자기 박수를 부끄러워하지 마.”

푸리나는 선언했다.

“다음 막은 공동 방어전.”

그리고 가장 푸리나다운 얼굴로 웃었다.

“칼끝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침묵이 먼저 내려앉았다.

그다음, 아주 작은 박수가 들렸다.

그레이였다.

푸리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

그레이는 시선을 피했다.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죠니가 곧바로 손뼉을 쳤다.

“희귀한 장면이네.”

하융도 조용히 박수를 보탰다.

레이튼은 웃으며 모자를 들어 올렸다.

아레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은 박수를 거부하는 침묵이 아니었다.

박수 옆에 자리 잡은 침묵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안심했다.

박수와 침묵은 서로를 지우지 않았다.

그날 밤, 킬리키아의 경기장은 여관처럼 조용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고, 등불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등불 하나는 꺼지지 않았다.

그 등불 아래에는 장부가 있었고, 말발굽 자국이 있었고, 금목서 향이 있었고, 새벽선 한 걸음 앞의 발자국이 있었고, 은빛 흉터가 있었다.

그리고 무대 중앙에는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질문이 남았다.

서로를 향하던 칼끝들은,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는가.

푸리나는 그 질문을 품고 밤의 무대를 내려왔다.

오늘 그녀는 왕관보다 큰 것을 들었다.

그것은 승패표가 아니었다.

모두가 칼을 들고도 멈출 수 있었던 무대의 책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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