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09여관◆zAR16hM8he(f85ea685)2026-05-13 (수) 23:41:49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후일담 — 장부와 박수, 그리고 남은 흠집들
다음 날 아침, 킬리키아의 경기장은 너무 솔직했다.
어제의 박수는 사라졌고, 환호도 사라졌고, 푸리나가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던 대사들도 밤새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남은 것은 흠집이었다.
목책 한쪽은 죠니의 말발굽과 아스테르다스의 낙하가 남긴 충격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중앙 성벽으로 쓰였던 가설 구조물은 한쪽 모서리가 무너져 있었다.
남쪽 흙바닥에는 아스트리트의 금목서검이 지나간 금빛 결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새벽선 한 걸음 앞에는 알렉산드리나의 목패 병사가 멈췄던 작은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다.
퇴각전 때 쓰인 수레 하나는 바퀴가 빠져 옆으로 누워 있었고, 라이자의 성은 반응로에는 라플리의 뇌광이 남긴 흉터가 새로운 회로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모든 것을 보고 말했다.
“대단원의 막이 끝났는데, 무대가 너무 솔직하네.”
그레이는 이미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무대도 정리해야 합니다.”
“낭만 없네.”
“정리는 낭만의 사후 절차입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그 말 좋다. 적어둬.”
그레이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적었습니다.”
“정말?”
“예. 폐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빤히 보다가,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레이, 너도 이제 극작가야.”
“아닙니다. 행정관입니다.”
“행정관도 대사를 잘 치면 극작가가 될 수 있어.”
“그런 진급 체계는 없습니다.”
“오늘 생겼어.”
“폐하.”
“알았어, 알았어. 아직은 임시 직책.”
그레이는 반박하려다 말았다.
그녀는 장부를 다시 넘겼다.
“최종 정산부터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목책 위에 걸터앉았다.
“좋아. 대단원의 결산!”
“장부입니다.”
“결산 장부도 대단원이 될 수 있지.”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제1경기. 죠니 죠스타 경 대 아스테르다스 경. 무승부. 한 치 앞에서 정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죠니가 말발굽 자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도 옆에 있었다.
죠니는 흙바닥에 남은 원을 보고 말했다.
“다음엔 진짜 덜 부수고 돌아.”
아스테르다스는 말발굽의 원과 자신의 낙하 자국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별에게 궤도를 좁히라는 말 같군. 어렵지만 좋아, 해볼게. 내 유성이 너무 크게 떨어지면, 다음 별자리를 그릴 흙이 남지 않을 테니까.”
죠니가 그를 흘끗 보았다.
“그거 농담이야?”
아스테르다스는 조금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나머지 반은 진심이고.”
“그럼 꽤 위험한 농담이네.”
“빛나는 농담이라고 해두자.”
죠니는 잠깐 침묵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투아니아식 농담은 아직 어렵네.”
아스테르다스는 즐겁게 웃었다.
“괜찮아. 별도 처음 보면 다 그냥 점처럼 보이니까. 몇 번 보다 보면 길이 보일 거야.”
“그 말은 좀 괜찮네.”
“그럼 좋은 궤도로 남았군.”
죠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이제 그 정도는 알아듣겠다.”
그레이는 다음 줄을 읽었다.
“제2경기. 호흐마이스터 경 대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경. 호흐마이스터 경 판정승. 관중석 파장 차단.”
호흐마이스터는 갑주를 벗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갑주에는 여전히 아스트리트의 《금목만리향파》가 남긴 균열이 있었다.
아스트리트가 그 균열을 보며 물었다.
“수리하실 겁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손끝으로 균열을 가볍게 만졌다.
“일부는 남겨둘 생각입니다.”
“왜요?”
호흐마이스터는 성벽 뒤쪽, 어제 관중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제가 혼자 설 필요가 조금 줄었다는 증거니까요.”
아스트리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웃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더 깊게 남겨드리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당황해서 덧붙였다.
“아, 물론 친선전 범위에서요.”
호흐마이스터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 범위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레이는 세 번째 줄을 읽었다.
“제3경기. 미하일라 폐하 대 알렉산드리나 아센 경. 미하일라 폐하 판정승. 새벽선 한 걸음 앞 도달.”
알렉산드리나는 새벽선 앞에 남은 발자국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패배자의 것이었지만, 무너진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라가 그녀의 옆에 섰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이번에도 한 걸음 앞이었습니다.”
미하일라는 새벽선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한 걸음이 화살길을 열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진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진군은 늘 성문을 넘어서야만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하일라의 목소리는 황제의 것이었고, 동시에 전장을 아는 전사의 것이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화살이 지나갈 길을 만드는 것도 진군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닿겠습니다.”
미하일라는 활을 가볍게 쥐었다.
“그렇다면 짐도 다음 화살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네 번째 줄로 넘어갔다.
“제4경기. 아레 폐하 대 킬리키아 가신단. 무승부. 실 하나를 놓았음. 이름은 놓지 않았음.”
아레는 여관좌의 등불 앞에 서 있었다.
그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잠시 장부에서 눈을 떼고, 아레에게 다가갔다.
“아레.”
아레가 돌아보았다.
“푸리나 헤툼.”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차갑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많은 물결을 안쪽으로 가라앉힌 바다처럼, 겉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푸리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어제 박수, 너무 시끄럽진 않았어?”
아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의 흠집과 장부, 그리고 등불을 천천히 보았다.
그 시선은 판정자의 것이 아니었다.
추도자의 것이었다.
“좋은 박수였단다.”
푸리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정말?”
“그래.”
아레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 자에게는 그런 숨이 필요하지. 울음만으로는 다음 날 아침까지 걸어갈 수 없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의 시선은 다시 등불 아래의 그림자로 향했다.
“다만 나는, 그 박수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듣는 쪽의 사람이란다.”
그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훈계도 아니었다.
아레는 푸리나의 웃음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웃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난민에게는 다시 밥을 먹을 이유가 필요하고, 아이에게는 어제의 불길보다 오늘의 인형극을 기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수 뒤에는 언제나 내려앉는 이름들이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전령.
한 박자 늦은 방패병.
수레 뒤에서 손을 놓칠 뻔한 아이.
기록에는 남았지만, 목소리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아레는 그 이름들을 듣는 사람이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네 침묵을 전부 가져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어.”
아레는 조용히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건 네가 마땅히 짊어진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리고 나는, 그런 걸 멋대로 빼앗는 극장주는 아니야.”
“그렇구나.”
아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대는 산 자를 다시 무대 위에 세우는 아이구나.”
푸리나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아이?”
“얕보는 말은 아니란다.”
아레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대를 여는 자도, 결국 누군가를 빛과 시선 앞으로 보내는 아이이니까. 그대는 박수를 두려워하면서도, 박수 없이는 숨 쉬지 못하는 이들을 알고 있구나.”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레는 등불을 보며 이어 말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간 이가 어둠 속에서 혼자 사라지지 않도록 실을 내려보내는 쪽의 사람이란다. 아마 우리의 길은 끝까지 같은 무대 위에서 얽히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푸리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왜냐니?”
“같은 무대가 아니면, 내가 무대를 넓히면 되잖아.”
푸리나는 아주 푸리나다운 얼굴로 웃었다.
“네 짐을 전부 덜어주겠다는 건 아니야. 그건 네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침묵이니까. 하지만 한 장면 정도는, 이 극장주가 같이 들어줄 수 있어.”
아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검은 실 하나가 등불 아래에서 아주 얇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그녀는 낮게 말했다.
“어제의 박수는 시끄럽지 않았단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레는 덧붙였다.
“침묵이 앉을 자리가 있었으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네.”
“그래.”
아레는 다시 등불을 바라보았다.
“괜찮았다.”
그레이는 다섯 번째 줄을 읽었다.
“제5경기. 라이자 폐하와 라플리 경의 공방 시험전. 라이자 폐하 우세. 번개와 은의 박자 동조 확인.”
성은 반응로 앞에서 라플리와 라이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라플리는 반응로에 남은 뇌광 흉터를 보고 팔짱을 꼈다.
“논문 제목은 내가 정한다.”
라이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푸리나 님이 정하고 싶어 하시던데요.”
라플리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제목이 세 줄이 될 거야.”
라이자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건 그것대로 멋지지 않나요?”
“너도 위험한 타입 맞다니까.”
“어제도 들은 말이에요.”
“오늘도 유효해.”
라이자는 반응로의 흉터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래도 이 회로는 남겨둘 거예요.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더 잘 받을 수 있으니까요.”
라플리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그 흉터를 보았다.
자기 번개가 남긴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결함이 아니라 회로로 삼겠다는 은의 군주.
라플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목에 ‘흉터’는 넣어도 되겠다.”
라이자가 웃었다.
“좋아요. 따뜻한 흉터?”
“아니. 그건 빼.”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최종 공동 방어전. 공동 성공. 성벽 일부 붕괴. 보급 손실 2. 부상자 판정 7. 이름 누락 없음. 피난민 핵심 행렬 보존. 지휘선 유지. 성은 공방 가동 유지.”
푸리나는 가만히 들었다.
그레이는 장부를 덮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 기록.”
그녀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오늘의 승자는 전원. 단, 규칙상 표현은 공동 성공으로 병기.”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레이, 그거 타협안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타협안이네.”
“정확한 표현입니다.”
푸리나는 목책에서 내려와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거의 대본 같네.”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장부입니다.”
“대본도 기록이잖아.”
“기록이 모두 대본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기록은 다음 극의 초안이 될 수 있지.”
그레이의 펜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건 맞습니다.”
푸리나는 뿌듯한 얼굴을 했다.
“이겼다.”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더 좋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융, 레이튼, 그레이가 한 장부를 함께 보고 있었다.
하융은 회색 창호가 닫힌 자리를 보며 말했다.
“닫힌 창들도 남겨두겠소.”
레이튼은 모자를 살짝 기울였다.
“닫힌 책도 언젠가 다시 질문이 될 수 있지요.”
그레이는 장부에 항목을 하나 더 만들었다.
“재발 방지 항목으로 정리하겠습니다.”
하융은 작게 웃었다.
“참으로 그대다운 답이오.”
레이튼도 미소 지었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답이기도 합니다.”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듯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냥 필요한 일을 적는 것뿐입니다.”
레이튼이 말했다.
“가끔 필요한 일이 가장 어려운 법이지요.”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죽은 창을 보고도 산 길을 적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부의 그 줄은 지우지 않았다.
그때 아카식이 검은 전쟁기록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어제의 기록재현을 모두 접어두었지만, 오늘도 책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카식! 다 적었어?”
아카식은 웃었다.
“기록은 보통 끝난 일을 적어. 그런데 이건 이상하네.”
“뭐가?”
“끝났는데, 다음 장면이 더 많이 보이거든.”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은 극이네.”
아카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은 기록이기도 해.”
그는 책 첫머리에 제목을 적었다.
《킬리키아 친선 무력제 기록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푸리나가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제목 멋진데?”
“네가 한 말들에서 뽑았어. 그러니까 너무 자랑스러워하지는 마.”
“이미 자랑스러운데?”
“그럴 줄 알았어.”
아카식은 책장을 넘겼다.
“과거의 결론을 바꾼 건 아니야. 기록은 과거를 지우지 못해.”
그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하지만 다음에 같은 결론으로 가지 않을 이유를 하나 남겼지.”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그 말을 제대로 들었다.
“그럼 충분해.”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겠지.”
“그럼 다음 막을 더 잘 쓰면 돼.”
아카식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결국 웃었다.
“역시 극작가는 뻔뻔해야 하는구나.”
“위대한 극작가는 그렇지!”
“좋아. 그렇게 적을까?”
“그건 빼.”
“아쉽네.”
그때 여관좌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여관에 있으면, 주인이 어느새 차를 내오는 법이니까.
등불 아래에 작은 탁자가 놓였다.
찻잔은 많았다.
왕관을 쓴 사람의 잔도, 갑주를 입은 사람의 잔도, 장부를 든 사람의 잔도, 창을 든 사람의 잔도, 질문을 품은 사람의 잔도 있었다.
여관좌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먼 길이었습니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모두를 보았다.
“차가 식기 전까지만이라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받았다.
“오늘은 정말 여관 같네요.”
여관좌는 부드럽게 웃었다.
“여관은 끝난 길만 맞이하지 않습니다. 다음 길로 나서기 전의 밤도 맞이하지요.”
푸리나는 차를 내려다보았다.
따뜻했다.
전투도, 박수도, 기록도, 판정도 없는 따뜻함이었다.
“그럼 다음엔 더 좋은 여관으로 만들게요.”
여관좌는 고개를 저었다.
“완벽한 여관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등불이면 충분합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에 장난기가 조금 돌아왔다.
“그래도 멋진 등불이면 좋잖아요.”
여관좌는 잠깐 침묵하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 점은 극장주님의 취향을 존중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여관좌도 인정했어.”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인정이라기보다 배려입니다.”
“배려도 인정으로 연출할 수 있어.”
“연출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폐하.”
푸리나는 웃었다.
그 웃음에 몇몇이 따라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도 아주 희미하게, 아스트리트도 조용히, 알렉산드리나도 어색하게, 라이자도 밝게, 라플리도 피식, 죠니도 낮게, 아스테르다스는 별을 본 듯 즐겁게 웃었다.
미하일라는 차를 들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레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지도 않았다.
그녀는 등불 곁에 서서, 박수 소리가 지나간 뒤에 남는 아주 작은 침묵들을 들었다.
그 침묵들은 더 이상 부끄러워 숨어 있는 침묵이 아니었다.
박수에 밀려난 침묵도 아니었다.
같은 무대 가장자리에서, 제 몫의 자리를 받은 침묵이었다.
아레는 검은 실 하나를 무대 아래로 내려보냈다.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이름들 위로 산 자들의 웃음이 모욕처럼 쌓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다.
“좋은 막이었단다, 박수를 지키는 아이야.”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멀리서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레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참 뒤,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각자의 깃발 아래로.
각자의 숙소로.
각자의 왕관과 장부와 검과 활과 실과 질문을 들고.
무대 중앙에는 푸리나와 그레이가 남았다.
푸리나는 작게 손뼉을 쳤다.
짝.
이번에는 관객을 부르기 위한 박수가 아니었다.
막을 닫기 위한 박수였다.
“커튼콜은 끝났어.”
그레이가 장부를 닫았다.
“예.”
“하지만 극장은 닫지 않을 거야.”
“다음 사용 예정이 있습니까?”
푸리나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당연하지. 인생은 계속되잖아.”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페이지를 열었다.
“그럼 마지막 문구를 남기겠습니다.”
그녀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적었다.
《무대 폐쇄 아님. 다음 막을 위해 등불 하나 남김.》
푸리나는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좋네. 그런데 하나 더 적자.”
그레이가 물었다.
“비공식 문구입니까?”
“응. 아주 중요하고, 아주 비공식적인 문구.”
그레이는 펜을 넘겨주었다.
푸리나는 조금 고민했다.
너무 장엄하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가볍게도 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무대는 누군가 한 명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러 나라가 있었다.
보헤미아의 은빛.
니케아의 자주빛.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튜튼의 어두운 갑주.
불가리아의 새벽.
세르비아의 침묵.
킬리키아의 박수.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
그 모든 것이 잠시 같은 등불 아래 앉았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적었다.
《칼끝은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음. 확인함.》
그레이는 그 문장을 한참 보았다.
“표현은 부정확하지만, 의미는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럼 됐네.”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아래에 작게 적었다.
《확인함.》
푸리나가 깔깔 웃었다.
“그건 너무 그레이다.”
“정확합니다.”
아침 햇빛이 경기장 위로 내려왔다.
무대는 닫혔다.
그러나 극장은 닫히지 않았다.
목책에는 흠집이 남았고, 성은의 심장에는 뇌광의 회로가 남았고, 장부에는 부상자 일곱의 이름이 남았다.
그리고 무대 가장자리에는 등불 하나가 남았다.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잠시 같은 불빛 아래 앉았다는 증거로.
다음 전쟁이 언제 오든, 그들은 적어도 한 가지를 기억할 것이다.
칼끝은 서로를 향할 수도 있지만, 같은 어둠을 향해 나란히 들 수도 있다는 것을.
후일담 — 장부와 박수, 그리고 남은 흠집들
다음 날 아침, 킬리키아의 경기장은 너무 솔직했다.
어제의 박수는 사라졌고, 환호도 사라졌고, 푸리나가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던 대사들도 밤새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남은 것은 흠집이었다.
목책 한쪽은 죠니의 말발굽과 아스테르다스의 낙하가 남긴 충격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중앙 성벽으로 쓰였던 가설 구조물은 한쪽 모서리가 무너져 있었다.
남쪽 흙바닥에는 아스트리트의 금목서검이 지나간 금빛 결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새벽선 한 걸음 앞에는 알렉산드리나의 목패 병사가 멈췄던 작은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다.
퇴각전 때 쓰인 수레 하나는 바퀴가 빠져 옆으로 누워 있었고, 라이자의 성은 반응로에는 라플리의 뇌광이 남긴 흉터가 새로운 회로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모든 것을 보고 말했다.
“대단원의 막이 끝났는데, 무대가 너무 솔직하네.”
그레이는 이미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무대도 정리해야 합니다.”
“낭만 없네.”
“정리는 낭만의 사후 절차입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그 말 좋다. 적어둬.”
그레이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적었습니다.”
“정말?”
“예. 폐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빤히 보다가,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레이, 너도 이제 극작가야.”
“아닙니다. 행정관입니다.”
“행정관도 대사를 잘 치면 극작가가 될 수 있어.”
“그런 진급 체계는 없습니다.”
“오늘 생겼어.”
“폐하.”
“알았어, 알았어. 아직은 임시 직책.”
그레이는 반박하려다 말았다.
그녀는 장부를 다시 넘겼다.
“최종 정산부터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목책 위에 걸터앉았다.
“좋아. 대단원의 결산!”
“장부입니다.”
“결산 장부도 대단원이 될 수 있지.”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제1경기. 죠니 죠스타 경 대 아스테르다스 경. 무승부. 한 치 앞에서 정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죠니가 말발굽 자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도 옆에 있었다.
죠니는 흙바닥에 남은 원을 보고 말했다.
“다음엔 진짜 덜 부수고 돌아.”
아스테르다스는 말발굽의 원과 자신의 낙하 자국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별에게 궤도를 좁히라는 말 같군. 어렵지만 좋아, 해볼게. 내 유성이 너무 크게 떨어지면, 다음 별자리를 그릴 흙이 남지 않을 테니까.”
죠니가 그를 흘끗 보았다.
“그거 농담이야?”
아스테르다스는 조금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나머지 반은 진심이고.”
“그럼 꽤 위험한 농담이네.”
“빛나는 농담이라고 해두자.”
죠니는 잠깐 침묵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투아니아식 농담은 아직 어렵네.”
아스테르다스는 즐겁게 웃었다.
“괜찮아. 별도 처음 보면 다 그냥 점처럼 보이니까. 몇 번 보다 보면 길이 보일 거야.”
“그 말은 좀 괜찮네.”
“그럼 좋은 궤도로 남았군.”
죠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이제 그 정도는 알아듣겠다.”
그레이는 다음 줄을 읽었다.
“제2경기. 호흐마이스터 경 대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경. 호흐마이스터 경 판정승. 관중석 파장 차단.”
호흐마이스터는 갑주를 벗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갑주에는 여전히 아스트리트의 《금목만리향파》가 남긴 균열이 있었다.
아스트리트가 그 균열을 보며 물었다.
“수리하실 겁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손끝으로 균열을 가볍게 만졌다.
“일부는 남겨둘 생각입니다.”
“왜요?”
호흐마이스터는 성벽 뒤쪽, 어제 관중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제가 혼자 설 필요가 조금 줄었다는 증거니까요.”
아스트리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웃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더 깊게 남겨드리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당황해서 덧붙였다.
“아, 물론 친선전 범위에서요.”
호흐마이스터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 범위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레이는 세 번째 줄을 읽었다.
“제3경기. 미하일라 폐하 대 알렉산드리나 아센 경. 미하일라 폐하 판정승. 새벽선 한 걸음 앞 도달.”
알렉산드리나는 새벽선 앞에 남은 발자국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패배자의 것이었지만, 무너진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라가 그녀의 옆에 섰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이번에도 한 걸음 앞이었습니다.”
미하일라는 새벽선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한 걸음이 화살길을 열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진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진군은 늘 성문을 넘어서야만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하일라의 목소리는 황제의 것이었고, 동시에 전장을 아는 전사의 것이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화살이 지나갈 길을 만드는 것도 진군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닿겠습니다.”
미하일라는 활을 가볍게 쥐었다.
“그렇다면 짐도 다음 화살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네 번째 줄로 넘어갔다.
“제4경기. 아레 폐하 대 킬리키아 가신단. 무승부. 실 하나를 놓았음. 이름은 놓지 않았음.”
아레는 여관좌의 등불 앞에 서 있었다.
그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잠시 장부에서 눈을 떼고, 아레에게 다가갔다.
“아레.”
아레가 돌아보았다.
“푸리나 헤툼.”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차갑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많은 물결을 안쪽으로 가라앉힌 바다처럼, 겉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푸리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어제 박수, 너무 시끄럽진 않았어?”
아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의 흠집과 장부, 그리고 등불을 천천히 보았다.
그 시선은 판정자의 것이 아니었다.
추도자의 것이었다.
“좋은 박수였단다.”
푸리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정말?”
“그래.”
아레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 자에게는 그런 숨이 필요하지. 울음만으로는 다음 날 아침까지 걸어갈 수 없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의 시선은 다시 등불 아래의 그림자로 향했다.
“다만 나는, 그 박수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듣는 쪽의 사람이란다.”
그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훈계도 아니었다.
아레는 푸리나의 웃음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웃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난민에게는 다시 밥을 먹을 이유가 필요하고, 아이에게는 어제의 불길보다 오늘의 인형극을 기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수 뒤에는 언제나 내려앉는 이름들이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전령.
한 박자 늦은 방패병.
수레 뒤에서 손을 놓칠 뻔한 아이.
기록에는 남았지만, 목소리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아레는 그 이름들을 듣는 사람이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네 침묵을 전부 가져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어.”
아레는 조용히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건 네가 마땅히 짊어진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리고 나는, 그런 걸 멋대로 빼앗는 극장주는 아니야.”
“그렇구나.”
아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대는 산 자를 다시 무대 위에 세우는 아이구나.”
푸리나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아이?”
“얕보는 말은 아니란다.”
아레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대를 여는 자도, 결국 누군가를 빛과 시선 앞으로 보내는 아이이니까. 그대는 박수를 두려워하면서도, 박수 없이는 숨 쉬지 못하는 이들을 알고 있구나.”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레는 등불을 보며 이어 말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간 이가 어둠 속에서 혼자 사라지지 않도록 실을 내려보내는 쪽의 사람이란다. 아마 우리의 길은 끝까지 같은 무대 위에서 얽히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푸리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왜냐니?”
“같은 무대가 아니면, 내가 무대를 넓히면 되잖아.”
푸리나는 아주 푸리나다운 얼굴로 웃었다.
“네 짐을 전부 덜어주겠다는 건 아니야. 그건 네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침묵이니까. 하지만 한 장면 정도는, 이 극장주가 같이 들어줄 수 있어.”
아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검은 실 하나가 등불 아래에서 아주 얇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그녀는 낮게 말했다.
“어제의 박수는 시끄럽지 않았단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레는 덧붙였다.
“침묵이 앉을 자리가 있었으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네.”
“그래.”
아레는 다시 등불을 바라보았다.
“괜찮았다.”
그레이는 다섯 번째 줄을 읽었다.
“제5경기. 라이자 폐하와 라플리 경의 공방 시험전. 라이자 폐하 우세. 번개와 은의 박자 동조 확인.”
성은 반응로 앞에서 라플리와 라이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라플리는 반응로에 남은 뇌광 흉터를 보고 팔짱을 꼈다.
“논문 제목은 내가 정한다.”
라이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푸리나 님이 정하고 싶어 하시던데요.”
라플리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제목이 세 줄이 될 거야.”
라이자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건 그것대로 멋지지 않나요?”
“너도 위험한 타입 맞다니까.”
“어제도 들은 말이에요.”
“오늘도 유효해.”
라이자는 반응로의 흉터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래도 이 회로는 남겨둘 거예요.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더 잘 받을 수 있으니까요.”
라플리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그 흉터를 보았다.
자기 번개가 남긴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결함이 아니라 회로로 삼겠다는 은의 군주.
라플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목에 ‘흉터’는 넣어도 되겠다.”
라이자가 웃었다.
“좋아요. 따뜻한 흉터?”
“아니. 그건 빼.”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최종 공동 방어전. 공동 성공. 성벽 일부 붕괴. 보급 손실 2. 부상자 판정 7. 이름 누락 없음. 피난민 핵심 행렬 보존. 지휘선 유지. 성은 공방 가동 유지.”
푸리나는 가만히 들었다.
그레이는 장부를 덮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 기록.”
그녀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오늘의 승자는 전원. 단, 규칙상 표현은 공동 성공으로 병기.”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레이, 그거 타협안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타협안이네.”
“정확한 표현입니다.”
푸리나는 목책에서 내려와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거의 대본 같네.”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장부입니다.”
“대본도 기록이잖아.”
“기록이 모두 대본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기록은 다음 극의 초안이 될 수 있지.”
그레이의 펜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건 맞습니다.”
푸리나는 뿌듯한 얼굴을 했다.
“이겼다.”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더 좋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융, 레이튼, 그레이가 한 장부를 함께 보고 있었다.
하융은 회색 창호가 닫힌 자리를 보며 말했다.
“닫힌 창들도 남겨두겠소.”
레이튼은 모자를 살짝 기울였다.
“닫힌 책도 언젠가 다시 질문이 될 수 있지요.”
그레이는 장부에 항목을 하나 더 만들었다.
“재발 방지 항목으로 정리하겠습니다.”
하융은 작게 웃었다.
“참으로 그대다운 답이오.”
레이튼도 미소 지었다.
“그리고 가장 필요한 답이기도 합니다.”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듯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냥 필요한 일을 적는 것뿐입니다.”
레이튼이 말했다.
“가끔 필요한 일이 가장 어려운 법이지요.”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죽은 창을 보고도 산 길을 적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부의 그 줄은 지우지 않았다.
그때 아카식이 검은 전쟁기록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어제의 기록재현을 모두 접어두었지만, 오늘도 책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카식! 다 적었어?”
아카식은 웃었다.
“기록은 보통 끝난 일을 적어. 그런데 이건 이상하네.”
“뭐가?”
“끝났는데, 다음 장면이 더 많이 보이거든.”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은 극이네.”
아카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은 기록이기도 해.”
그는 책 첫머리에 제목을 적었다.
《킬리키아 친선 무력제 기록 — 칼끝은 웃음을 향하고》
푸리나가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제목 멋진데?”
“네가 한 말들에서 뽑았어. 그러니까 너무 자랑스러워하지는 마.”
“이미 자랑스러운데?”
“그럴 줄 알았어.”
아카식은 책장을 넘겼다.
“과거의 결론을 바꾼 건 아니야. 기록은 과거를 지우지 못해.”
그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하지만 다음에 같은 결론으로 가지 않을 이유를 하나 남겼지.”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그 말을 제대로 들었다.
“그럼 충분해.”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겠지.”
“그럼 다음 막을 더 잘 쓰면 돼.”
아카식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결국 웃었다.
“역시 극작가는 뻔뻔해야 하는구나.”
“위대한 극작가는 그렇지!”
“좋아. 그렇게 적을까?”
“그건 빼.”
“아쉽네.”
그때 여관좌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여관에 있으면, 주인이 어느새 차를 내오는 법이니까.
등불 아래에 작은 탁자가 놓였다.
찻잔은 많았다.
왕관을 쓴 사람의 잔도, 갑주를 입은 사람의 잔도, 장부를 든 사람의 잔도, 창을 든 사람의 잔도, 질문을 품은 사람의 잔도 있었다.
여관좌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먼 길이었습니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모두를 보았다.
“차가 식기 전까지만이라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받았다.
“오늘은 정말 여관 같네요.”
여관좌는 부드럽게 웃었다.
“여관은 끝난 길만 맞이하지 않습니다. 다음 길로 나서기 전의 밤도 맞이하지요.”
푸리나는 차를 내려다보았다.
따뜻했다.
전투도, 박수도, 기록도, 판정도 없는 따뜻함이었다.
“그럼 다음엔 더 좋은 여관으로 만들게요.”
여관좌는 고개를 저었다.
“완벽한 여관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등불이면 충분합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에 장난기가 조금 돌아왔다.
“그래도 멋진 등불이면 좋잖아요.”
여관좌는 잠깐 침묵하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 점은 극장주님의 취향을 존중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여관좌도 인정했어.”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인정이라기보다 배려입니다.”
“배려도 인정으로 연출할 수 있어.”
“연출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폐하.”
푸리나는 웃었다.
그 웃음에 몇몇이 따라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도 아주 희미하게, 아스트리트도 조용히, 알렉산드리나도 어색하게, 라이자도 밝게, 라플리도 피식, 죠니도 낮게, 아스테르다스는 별을 본 듯 즐겁게 웃었다.
미하일라는 차를 들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레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지도 않았다.
그녀는 등불 곁에 서서, 박수 소리가 지나간 뒤에 남는 아주 작은 침묵들을 들었다.
그 침묵들은 더 이상 부끄러워 숨어 있는 침묵이 아니었다.
박수에 밀려난 침묵도 아니었다.
같은 무대 가장자리에서, 제 몫의 자리를 받은 침묵이었다.
아레는 검은 실 하나를 무대 아래로 내려보냈다.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이름들 위로 산 자들의 웃음이 모욕처럼 쌓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다.
“좋은 막이었단다, 박수를 지키는 아이야.”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멀리서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레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참 뒤,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각자의 깃발 아래로.
각자의 숙소로.
각자의 왕관과 장부와 검과 활과 실과 질문을 들고.
무대 중앙에는 푸리나와 그레이가 남았다.
푸리나는 작게 손뼉을 쳤다.
짝.
이번에는 관객을 부르기 위한 박수가 아니었다.
막을 닫기 위한 박수였다.
“커튼콜은 끝났어.”
그레이가 장부를 닫았다.
“예.”
“하지만 극장은 닫지 않을 거야.”
“다음 사용 예정이 있습니까?”
푸리나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당연하지. 인생은 계속되잖아.”
그레이는 장부 마지막 페이지를 열었다.
“그럼 마지막 문구를 남기겠습니다.”
그녀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적었다.
《무대 폐쇄 아님. 다음 막을 위해 등불 하나 남김.》
푸리나는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좋네. 그런데 하나 더 적자.”
그레이가 물었다.
“비공식 문구입니까?”
“응. 아주 중요하고, 아주 비공식적인 문구.”
그레이는 펜을 넘겨주었다.
푸리나는 조금 고민했다.
너무 장엄하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가볍게도 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무대는 누군가 한 명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러 나라가 있었다.
보헤미아의 은빛.
니케아의 자주빛.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튜튼의 어두운 갑주.
불가리아의 새벽.
세르비아의 침묵.
킬리키아의 박수.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
그 모든 것이 잠시 같은 등불 아래 앉았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적었다.
《칼끝은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음. 확인함.》
그레이는 그 문장을 한참 보았다.
“표현은 부정확하지만, 의미는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럼 됐네.”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아래에 작게 적었다.
《확인함.》
푸리나가 깔깔 웃었다.
“그건 너무 그레이다.”
“정확합니다.”
아침 햇빛이 경기장 위로 내려왔다.
무대는 닫혔다.
그러나 극장은 닫히지 않았다.
목책에는 흠집이 남았고, 성은의 심장에는 뇌광의 회로가 남았고, 장부에는 부상자 일곱의 이름이 남았다.
그리고 무대 가장자리에는 등불 하나가 남았다.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잠시 같은 불빛 아래 앉았다는 증거로.
다음 전쟁이 언제 오든, 그들은 적어도 한 가지를 기억할 것이다.
칼끝은 서로를 향할 수도 있지만, 같은 어둠을 향해 나란히 들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