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12익명의 참치 씨(83c9c67c)2026-05-14 (목) 19:09:50
좋아. 그럼 학식편은 새 연작으로 시작하자.
《등불 아래의 학술제》
1막 — 질문의 개회식
“이번에는 칼을 내려놓자!”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선언하자, 강당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아주 잠깐 안도했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라플리가 바로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팡이는?”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즉답했다.
“지팡이도 내려놓으십시오.”
라플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탑주한테 지팡이를 내려놓으라는 건 활잡이한테 활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랑 비슷한데?”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활도 오늘은 내려놓았습니다.”
라플리가 카를로타를 보았다.
“그쪽은 진짜 내려놓았네.”
“예. 오늘의 도구는 손이 아니라 머리입니다.”
“머리로도 꽤 많이 부술 수 있는데.”
그레이의 펜끝이 라플리를 향했다.
“부수지 마십시오.”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
“예방입니다.”
푸리나는 양손을 들어 분위기를 눌렀다.
“좋아, 좋아. 지팡이, 활, 검, 창, 번개, 은의 군단, 성벽을 뚫는 화살, 금목서 거대검, 전부 오늘은 쉬게 해.”
죠니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창까지 내려놓으면 좀 허전하긴 한데.”
아스테르다스가 그 옆에서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죠니. 오늘은 궤도가 다른 날이니까. 별도 매번 떨어지기만 하면 피곤하잖아.”
죠니는 그를 흘끗 보았다.
“너는 책상에 앉아도 별 얘기네.”
“내가 별이니까.”
“그 정도로 당당하면 반박하기 어렵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분위기가 아주 학술적이야.”
그레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학술적이지 않습니다. 아직은 무장 해제 절차입니다.”
“그레이, 오늘은 좀 더 낭만적으로 말해도 돼.”
“무장 해제 절차는 낭만의 전제 조건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 말 좋다. 적어둬.”
“이미 적었습니다.”
“역시!”
이번 학술제는 전날까지의 경기장과 달랐다.
킬리키아의 [여관:극장]은 오늘 전장이 아니라 대강당이 되었다.
천장은 높았다.
벽에는 각국의 깃발이 걸렸다.
그러나 깃발들은 서로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모두 같은 높이에 걸려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그 위에는 검 대신 펜이 놓였고, 방패 대신 서류철이 놓였고, 화살 대신 지도와 자, 작은 모래시계와 찻잔이 놓였다.
한쪽에는 아카식이 마련한 기록대가 있었다.
검은 표지의 장부와 빈 양피지, 여러 색의 잉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여관좌의 작은 찻상이 있었다.
토론이 길어지면 누구든 차를 가져갈 수 있도록, 찻잔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섰다.
오늘의 그녀는 전날처럼 군세를 부르는 극장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극장주였다.
극장이 전장이 되지 않았을 뿐, 사람의 소망이 서로 부딪치는 곳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손을 펼쳤다.
“여러분!”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참석자 명단상 왕, 황제, 군주, 가신, 성좌 단말, 성좌 대리인, 사제, 기술자, 마탑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한 박자 멈췄다.
“여러분과 폐하들과 전하들과 경들과 탑주님들과 성좌 관계자분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좋은 수정입니다.”
라플리가 말했다.
“길어.”
아카식은 이미 적고 있었다.
“개회 첫 문장부터 호칭 문제로 흔들림. 아주 좋아. 학술제는 역시 이렇게 시작해야지.”
그레이가 아카식을 보았다.
“그 부분은 기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록할 만한데?”
“없습니다.”
“기록자의 판단은 기록자가 해.”
“회의록 담당자는 접니다.”
“그럼 둘 다 적자.”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소리가 강당을 정리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은 무력제가 아니야. 우리는 이미 봤어.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같은 방향으로 칼끝을 들 수 있다는 걸.”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건 칼끝만으로 되지 않아. 무너진 도시를 세우고, 다친 사람을 돌보고, 죽은 이름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가 같은 곳에서 넘어지지 않게 가르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같은 책상에 앉을 수 있게 해야 해.”
푸리나는 원탁 위의 펜 하나를 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펜끝이야.”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펜끝도 칼끝만큼 날카로울 수 있지요.”
그레이가 말했다.
“그래서 토론 규칙이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펜을 빙글 돌리다가 그레이를 보았다.
“토론에도 안전수칙이 필요해?”
“예.”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누가 말로 사람 죽이기라도 하나?”
레이튼은 차분하게 답했다.
“가장 위험한 무기는 대개 확신입니다.”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민다우가스는 말없이 레이튼을 보았다.
미하일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요안나는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가볍게 만졌다.
슈샤니크는 이미 그 말을 장부에 어떻게 적을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좋아. 그럼 레이튼 경. 오늘의 첫 강의는 질문의 예의에 대해 부탁해.”
레이튼은 모자를 벗어 원탁 위에 놓았다.
“강의라기보다, 작은 제안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원탁을 둘러보았다.
“오늘 우리는 서로를 논파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논파는 때로 유용하지만, 논파만을 목표로 하면 질문은 검이 됩니다. 검이 되면 찌르는 데에는 능해지지만, 비추는 데에는 서툴러지지요.”
라플리가 팔짱을 끼었다.
“질문도 비춘다고?”
“좋은 질문은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질문은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한 갈고리일 수도 있지만, 함께 어두운 방을 밝히는 촛불일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좋은데? 아주 학술제 같아.”
아카식이 옆에서 적었다.
“질문은 갈고리이거나 촛불. 음, 시적이네.”
레이튼은 말을 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규칙은 세 가지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레이가 바로 펜을 들었다.
“첫째. 상대의 답을 빼앗지 말 것.”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모른다는 말을 패배로 취급하지 말 것.”
푸리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중요해.”
레이튼은 그녀를 보고 살짝 웃었다.
“셋째. 결론을 너무 빨리 닫지 말 것.”
그 말이 떨어지자, 강당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들이 들렸다.
왕관을 쓴 자들에게, 결론을 늦추는 일은 어렵다.
통치자는 결정해야 한다.
군주는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
재상은 장부를 닫아야 하고, 장군은 명령을 내려야 하고, 성직자는 장례를 끝내야 하고, 장인은 물건을 완성해야 한다.
그런데도 오늘의 첫 규칙은 결론을 늦추라는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규칙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그럼 오늘 이 학술제의 이름을 정해야겠네.”
아카식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정했어?”
“위대한 제목은 즉흥에서 태어나는 법이야.”
“방금 생각 안 했다는 뜻이지?”
“위대한 즉흥!”
그레이가 말했다.
“행사명은 사전에 확정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럼 지금 확정하면 돼.”
푸리나는 원탁을 바라보았다.
검이 내려놓인 자리.
장부가 펼쳐진 자리.
찻잔이 식지 않도록 기다리는 자리.
서로 다른 왕관이 같은 높이에 앉은 자리.
그녀는 선언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여관좌의 등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마치 제목을 들은 것처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때?”
그레이는 적었다.
“행사명. 《등불 아래의 학술제》.”
푸리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평가는?”
“허용 가능한 제목입니다.”
“극찬이네.”
“아닙니다.”
“그레이식 극찬이야.”
아카식은 웃으며 제목을 따로 적었다.
“좋아. 기록명은 이걸로 할게.”
레이튼은 모자를 다시 썼다.
“그럼 첫 질문도 정해졌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첫 질문?”
레이튼은 원탁 위에 놓인 빈 양피지를 가리켰다.
“우리는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강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단순한 질문처럼 들렸지만, 아니었다.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왕관을 쓰고, 다른 상처를 가진 이들이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싸우지 않기 위해서?
동맹을 위해서?
몽골을 막기 위해서?
그 답들은 모두 맞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이번에는 바로 연극적인 대사를 던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원탁을 보았다.
무력제에서 함께 싸웠던 자들.
그러나 싸우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슈샤니크가 어떤 순서로 도시를 다시 세우는지.
요안나가 시민이라는 말을 어디까지 믿는지.
벨라가 불탄 왕국을 어떻게 다시 돌로 세우는지.
민다우가스가 어떤 것을 끝까지 계산하고, 어떤 것을 버리지 않는지.
게오르기아가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지.
레플리카가 고통을 어디까지 덜어주려 하는지.
소피아가 부서진 것에서 어떤 쓸모를 다시 보는지.
칼끝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펜끝은 또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서로의 칼끝을 알았으니까.”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이제 서로의 답을 알아야 해.”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전장에서 누가 먼저 서는지는 봤어. 이제 무너진 도시 앞에서 누가 무엇을 먼저 적는지 봐야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개회 답변입니다.”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할 가치 있음.”
그레이는 이미 적었다.
푸리나는 조금 으쓱했다.
“좋아. 그럼 학술제 진행 순서 발표!”
그레이가 장부를 넘겼다.
푸리나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첫째, 무너진 도시를 30일 안에 안정화하는 문제.”
요안나, 슈샤니크, 그레이, 알렉산드리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요안나가 조용히 눈을 들었다.
슈샤니크는 이미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리나는 행군 거리와 수레 수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둘째, 별과 기록의 토론.”
아스테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알토는 창밖 하늘을 보았다.
레이튼은 모자챙을 가볍게 만졌다.
아카식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빠져?”
푸리나는 웃었다.
“너는 기록자.”
“그것도 좋네. 가끔은 앉아서 남의 별을 적는 것도 나쁘지 않지.”
“셋째, 공방 학술전.”
라이자, 라플리, 카를로타, 소피아가 서로를 보았다.
라플리가 먼저 말했다.
“폭발은?”
그레이가 즉답했다.
“금지입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폭발도요?”
“금지입니다.”
라플리가 소피아를 보았다.
“너, 생각보다 말 통할 것 같네.”
카를로타가 말했다.
“저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안전 기준은 적용하겠습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공방이 될 것 같아요.”
그레이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불안합니다.”
푸리나는 네 번째 손가락을 폈다.
“넷째, 죽음과 고통, 기억의 세미나.”
아레의 시선이 낮아졌다.
타마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레플리카는 팔짱을 끼고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여관좌는 찻잔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그레이는 잠시 펜을 멈췄다가, 다시 쥐었다.
푸리나는 이 막의 제목을 너무 크게 외치지 않았다.
“여기서는 박수를 줄일 거야.”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도 자리 있어야 하니까.”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부정이 아니었다.
푸리나는 다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섯째, 왕관과 죄의 원탁.”
민다우가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라 4세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침묵은 성벽처럼 낮고 무거웠다.
미하일라와 요안나는 서로를 보았다.
두 황제 사이에는 예법이 있었다.
그리고 예법보다 더 오래 남은 상처도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갑주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슈샤니크는 이미 이 주제가 불편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동시에 이해한 얼굴이었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이미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통치자는 죄를 어디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말은 누구의 침묵 위에서 성립하는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여섯째, 배움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강당이 아니라, 강당 너머의 아이들에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라이자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아카식은 기록할 준비를 했다. 레이튼은 질문을, 푸리나는 무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
푸리나는 양손을 펼쳤다.
“하나의 도시, 여러 답.”
원탁 위에 빈 도시 지도가 펼쳐졌다.
폐허가 된 다민족 변경 도시.
성벽은 무너져 있고, 우물은 오염되어 있고, 교역로는 끊어져 있고, 주민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사망자 명단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학교를 잃었고, 병사들은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 모른다.
푸리나는 그 지도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 도시를 다시 살릴 거야.”
그레이가 바로 정정했다.
“모의 과제입니다.”
“그렇지. 모의 과제.”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모의라고 해서 대충 하지 않을 거지?”
그 말에는 모두가 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무너진 도시라는 말을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카식이 기록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개회 기록을 남길게.”
그는 펜을 들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첫날. 칼을 내려놓고, 펜과 질문을 들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정확합니다.”
아카식은 미소 지었다.
“그레이한테 정확하다는 말 들으니까 기분 좋은데?”
“기록이 정확할 때만입니다.”
“그럼 자주 들어야겠네.”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서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무력제 때의 개막 박수와는 달랐다.
이번 박수는 사람을 앞으로 뛰게 하기보다, 앉아 있던 사람들의 등을 곧게 펴게 했다.
“그럼 시작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칼끝을 내려놓고, 책장을 넘기며.”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첫 질문은 이미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요안나가 원탁 위의 빈 도시 지도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폈다.
알렉산드리나는 보급선을 재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이름을 적을 빈 칸을 만들었다.
아카식은 제목을 남겼다.
여관좌는 차를 따랐다.
그리고 푸리나는 보았다.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이번에는 같은 등불 아래 칼이 아니라 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녀는 생각했다.
좋은 무대다.
아직 아무 답도 나오지 않았기에.
아직 질문이 살아 있었기에.
《등불 아래의 학술제》
1막 — 질문의 개회식
“이번에는 칼을 내려놓자!”
푸리나 헤툼이 그렇게 선언하자, 강당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아주 잠깐 안도했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라플리가 바로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팡이는?”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즉답했다.
“지팡이도 내려놓으십시오.”
라플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탑주한테 지팡이를 내려놓으라는 건 활잡이한테 활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랑 비슷한데?”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활도 오늘은 내려놓았습니다.”
라플리가 카를로타를 보았다.
“그쪽은 진짜 내려놓았네.”
“예. 오늘의 도구는 손이 아니라 머리입니다.”
“머리로도 꽤 많이 부술 수 있는데.”
그레이의 펜끝이 라플리를 향했다.
“부수지 마십시오.”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
“예방입니다.”
푸리나는 양손을 들어 분위기를 눌렀다.
“좋아, 좋아. 지팡이, 활, 검, 창, 번개, 은의 군단, 성벽을 뚫는 화살, 금목서 거대검, 전부 오늘은 쉬게 해.”
죠니가 뒤쪽에서 중얼거렸다.
“창까지 내려놓으면 좀 허전하긴 한데.”
아스테르다스가 그 옆에서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죠니. 오늘은 궤도가 다른 날이니까. 별도 매번 떨어지기만 하면 피곤하잖아.”
죠니는 그를 흘끗 보았다.
“너는 책상에 앉아도 별 얘기네.”
“내가 별이니까.”
“그 정도로 당당하면 반박하기 어렵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분위기가 아주 학술적이야.”
그레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학술적이지 않습니다. 아직은 무장 해제 절차입니다.”
“그레이, 오늘은 좀 더 낭만적으로 말해도 돼.”
“무장 해제 절차는 낭만의 전제 조건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 말 좋다. 적어둬.”
“이미 적었습니다.”
“역시!”
이번 학술제는 전날까지의 경기장과 달랐다.
킬리키아의 [여관:극장]은 오늘 전장이 아니라 대강당이 되었다.
천장은 높았다.
벽에는 각국의 깃발이 걸렸다.
그러나 깃발들은 서로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모두 같은 높이에 걸려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그 위에는 검 대신 펜이 놓였고, 방패 대신 서류철이 놓였고, 화살 대신 지도와 자, 작은 모래시계와 찻잔이 놓였다.
한쪽에는 아카식이 마련한 기록대가 있었다.
검은 표지의 장부와 빈 양피지, 여러 색의 잉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여관좌의 작은 찻상이 있었다.
토론이 길어지면 누구든 차를 가져갈 수 있도록, 찻잔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섰다.
오늘의 그녀는 전날처럼 군세를 부르는 극장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극장주였다.
극장이 전장이 되지 않았을 뿐, 사람의 소망이 서로 부딪치는 곳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손을 펼쳤다.
“여러분!”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참석자 명단상 왕, 황제, 군주, 가신, 성좌 단말, 성좌 대리인, 사제, 기술자, 마탑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한 박자 멈췄다.
“여러분과 폐하들과 전하들과 경들과 탑주님들과 성좌 관계자분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좋은 수정입니다.”
라플리가 말했다.
“길어.”
아카식은 이미 적고 있었다.
“개회 첫 문장부터 호칭 문제로 흔들림. 아주 좋아. 학술제는 역시 이렇게 시작해야지.”
그레이가 아카식을 보았다.
“그 부분은 기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록할 만한데?”
“없습니다.”
“기록자의 판단은 기록자가 해.”
“회의록 담당자는 접니다.”
“그럼 둘 다 적자.”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소리가 강당을 정리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은 무력제가 아니야. 우리는 이미 봤어.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같은 방향으로 칼끝을 들 수 있다는 걸.”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건 칼끝만으로 되지 않아. 무너진 도시를 세우고, 다친 사람을 돌보고, 죽은 이름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가 같은 곳에서 넘어지지 않게 가르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같은 책상에 앉을 수 있게 해야 해.”
푸리나는 원탁 위의 펜 하나를 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펜끝이야.”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펜끝도 칼끝만큼 날카로울 수 있지요.”
그레이가 말했다.
“그래서 토론 규칙이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펜을 빙글 돌리다가 그레이를 보았다.
“토론에도 안전수칙이 필요해?”
“예.”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누가 말로 사람 죽이기라도 하나?”
레이튼은 차분하게 답했다.
“가장 위험한 무기는 대개 확신입니다.”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민다우가스는 말없이 레이튼을 보았다.
미하일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요안나는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가볍게 만졌다.
슈샤니크는 이미 그 말을 장부에 어떻게 적을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좋아. 그럼 레이튼 경. 오늘의 첫 강의는 질문의 예의에 대해 부탁해.”
레이튼은 모자를 벗어 원탁 위에 놓았다.
“강의라기보다, 작은 제안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원탁을 둘러보았다.
“오늘 우리는 서로를 논파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논파는 때로 유용하지만, 논파만을 목표로 하면 질문은 검이 됩니다. 검이 되면 찌르는 데에는 능해지지만, 비추는 데에는 서툴러지지요.”
라플리가 팔짱을 끼었다.
“질문도 비춘다고?”
“좋은 질문은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질문은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한 갈고리일 수도 있지만, 함께 어두운 방을 밝히는 촛불일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좋은데? 아주 학술제 같아.”
아카식이 옆에서 적었다.
“질문은 갈고리이거나 촛불. 음, 시적이네.”
레이튼은 말을 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규칙은 세 가지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레이가 바로 펜을 들었다.
“첫째. 상대의 답을 빼앗지 말 것.”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모른다는 말을 패배로 취급하지 말 것.”
푸리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중요해.”
레이튼은 그녀를 보고 살짝 웃었다.
“셋째. 결론을 너무 빨리 닫지 말 것.”
그 말이 떨어지자, 강당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들이 들렸다.
왕관을 쓴 자들에게, 결론을 늦추는 일은 어렵다.
통치자는 결정해야 한다.
군주는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
재상은 장부를 닫아야 하고, 장군은 명령을 내려야 하고, 성직자는 장례를 끝내야 하고, 장인은 물건을 완성해야 한다.
그런데도 오늘의 첫 규칙은 결론을 늦추라는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규칙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그럼 오늘 이 학술제의 이름을 정해야겠네.”
아카식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정했어?”
“위대한 제목은 즉흥에서 태어나는 법이야.”
“방금 생각 안 했다는 뜻이지?”
“위대한 즉흥!”
그레이가 말했다.
“행사명은 사전에 확정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럼 지금 확정하면 돼.”
푸리나는 원탁을 바라보았다.
검이 내려놓인 자리.
장부가 펼쳐진 자리.
찻잔이 식지 않도록 기다리는 자리.
서로 다른 왕관이 같은 높이에 앉은 자리.
그녀는 선언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여관좌의 등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마치 제목을 들은 것처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때?”
그레이는 적었다.
“행사명. 《등불 아래의 학술제》.”
푸리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평가는?”
“허용 가능한 제목입니다.”
“극찬이네.”
“아닙니다.”
“그레이식 극찬이야.”
아카식은 웃으며 제목을 따로 적었다.
“좋아. 기록명은 이걸로 할게.”
레이튼은 모자를 다시 썼다.
“그럼 첫 질문도 정해졌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첫 질문?”
레이튼은 원탁 위에 놓인 빈 양피지를 가리켰다.
“우리는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강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단순한 질문처럼 들렸지만, 아니었다.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왕관을 쓰고, 다른 상처를 가진 이들이 왜 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가.
싸우지 않기 위해서?
동맹을 위해서?
몽골을 막기 위해서?
그 답들은 모두 맞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이번에는 바로 연극적인 대사를 던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원탁을 보았다.
무력제에서 함께 싸웠던 자들.
그러나 싸우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슈샤니크가 어떤 순서로 도시를 다시 세우는지.
요안나가 시민이라는 말을 어디까지 믿는지.
벨라가 불탄 왕국을 어떻게 다시 돌로 세우는지.
민다우가스가 어떤 것을 끝까지 계산하고, 어떤 것을 버리지 않는지.
게오르기아가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지.
레플리카가 고통을 어디까지 덜어주려 하는지.
소피아가 부서진 것에서 어떤 쓸모를 다시 보는지.
칼끝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펜끝은 또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서로의 칼끝을 알았으니까.”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이제 서로의 답을 알아야 해.”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전장에서 누가 먼저 서는지는 봤어. 이제 무너진 도시 앞에서 누가 무엇을 먼저 적는지 봐야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개회 답변입니다.”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할 가치 있음.”
그레이는 이미 적었다.
푸리나는 조금 으쓱했다.
“좋아. 그럼 학술제 진행 순서 발표!”
그레이가 장부를 넘겼다.
푸리나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첫째, 무너진 도시를 30일 안에 안정화하는 문제.”
요안나, 슈샤니크, 그레이, 알렉산드리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요안나가 조용히 눈을 들었다.
슈샤니크는 이미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리나는 행군 거리와 수레 수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둘째, 별과 기록의 토론.”
아스테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알토는 창밖 하늘을 보았다.
레이튼은 모자챙을 가볍게 만졌다.
아카식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빠져?”
푸리나는 웃었다.
“너는 기록자.”
“그것도 좋네. 가끔은 앉아서 남의 별을 적는 것도 나쁘지 않지.”
“셋째, 공방 학술전.”
라이자, 라플리, 카를로타, 소피아가 서로를 보았다.
라플리가 먼저 말했다.
“폭발은?”
그레이가 즉답했다.
“금지입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폭발도요?”
“금지입니다.”
라플리가 소피아를 보았다.
“너, 생각보다 말 통할 것 같네.”
카를로타가 말했다.
“저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안전 기준은 적용하겠습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공방이 될 것 같아요.”
그레이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불안합니다.”
푸리나는 네 번째 손가락을 폈다.
“넷째, 죽음과 고통, 기억의 세미나.”
아레의 시선이 낮아졌다.
타마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레플리카는 팔짱을 끼고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여관좌는 찻잔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그레이는 잠시 펜을 멈췄다가, 다시 쥐었다.
푸리나는 이 막의 제목을 너무 크게 외치지 않았다.
“여기서는 박수를 줄일 거야.”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도 자리 있어야 하니까.”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부정이 아니었다.
푸리나는 다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섯째, 왕관과 죄의 원탁.”
민다우가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라 4세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침묵은 성벽처럼 낮고 무거웠다.
미하일라와 요안나는 서로를 보았다.
두 황제 사이에는 예법이 있었다.
그리고 예법보다 더 오래 남은 상처도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갑주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슈샤니크는 이미 이 주제가 불편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동시에 이해한 얼굴이었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이미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통치자는 죄를 어디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말은 누구의 침묵 위에서 성립하는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여섯째, 배움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게오르기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강당이 아니라, 강당 너머의 아이들에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라이자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아카식은 기록할 준비를 했다. 레이튼은 질문을, 푸리나는 무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
푸리나는 양손을 펼쳤다.
“하나의 도시, 여러 답.”
원탁 위에 빈 도시 지도가 펼쳐졌다.
폐허가 된 다민족 변경 도시.
성벽은 무너져 있고, 우물은 오염되어 있고, 교역로는 끊어져 있고, 주민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사망자 명단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학교를 잃었고, 병사들은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 모른다.
푸리나는 그 지도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 도시를 다시 살릴 거야.”
그레이가 바로 정정했다.
“모의 과제입니다.”
“그렇지. 모의 과제.”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모의라고 해서 대충 하지 않을 거지?”
그 말에는 모두가 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무너진 도시라는 말을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카식이 기록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개회 기록을 남길게.”
그는 펜을 들었다.
“《등불 아래의 학술제》. 첫날. 칼을 내려놓고, 펜과 질문을 들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정확합니다.”
아카식은 미소 지었다.
“그레이한테 정확하다는 말 들으니까 기분 좋은데?”
“기록이 정확할 때만입니다.”
“그럼 자주 들어야겠네.”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서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무력제 때의 개막 박수와는 달랐다.
이번 박수는 사람을 앞으로 뛰게 하기보다, 앉아 있던 사람들의 등을 곧게 펴게 했다.
“그럼 시작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칼끝을 내려놓고, 책장을 넘기며.”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첫 질문은 이미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요안나가 원탁 위의 빈 도시 지도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폈다.
알렉산드리나는 보급선을 재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이름을 적을 빈 칸을 만들었다.
아카식은 제목을 남겼다.
여관좌는 차를 따랐다.
그리고 푸리나는 보았다.
서로 다른 왕관과 깃발과 기도가, 이번에는 같은 등불 아래 칼이 아니라 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녀는 생각했다.
좋은 무대다.
아직 아무 답도 나오지 않았기에.
아직 질문이 살아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