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13익명의 참치 씨(83c9c67c)2026-05-14 (목) 19:10:50
《등불 아래의 학술제》
2막 —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원탁 위에 펼쳐진 것은 도시 지도였다.
처음에는 그냥 지도처럼 보였다.
성벽이 있고, 동문과 서문이 있고, 광장과 우물과 시장과 성당과 여관과 병영이 표시되어 있었다. 강은 도시 북쪽을 지나갔고, 남쪽에는 작은 포도밭과 곡창 지대가 있었다.
하지만 아카식이 손가락으로 지도 한가운데를 톡 두드리자, 지도는 더 이상 평면이 아니게 되었다.
무너진 성벽이 솟았다.
검게 탄 시장 지붕이 올라왔다.
오염된 우물에는 검은 잉크가 번졌다.
교역로는 끊어진 선처럼 흔들렸고, 성문 앞에는 피난민을 나타내는 작은 목패들이 놓였다. 병영에는 병사 목패들이 있었으나, 그중 절반은 부상 판정을 뜻하는 붉은 실을 감고 있었다.
아카식은 느긋하게 말했다.
“모의 도시명은 일단 ‘아르카다’로 할게. 실제 도시랑 헷갈리지 않게.”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이름 괜찮네.”
“기록자도 가끔 작명해.”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상황을 고지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대강당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아르카다는 몽골식 공세를 받은 변경 도시입니다. 성벽 동남부 일부 붕괴. 식량 창고 둘 중 하나 소실. 우물 세 곳 중 하나 오염. 북쪽 교역로 단절. 피난민 유입 계속. 병영은 부상자 수용 중. 사망자 명단 미완성. 도시 내부에는 로마계, 아르메니아계, 튀르크계, 불가리아계, 상인 공동체가 혼재합니다.”
푸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네.”
슈샤니크는 이미 지도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단순한 문제라면 이미 더 크게 망가졌을 테니까요.”
그 말투는 조용했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깃펜처럼 건조했고, 잉크가 마르기 전에 결론을 내리는 관료의 것이었다.
요안나는 그 옆에서 도시 모형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은 손을 놓는 쪽이 아니라, 손을 뻗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팔짱을 낀 채 수레 모형과 병영을 번갈아 보았다.
“30일이라고 했습니까?”
그레이가 답했다.
“예. 30일 안에 도시 안정화 방안을 제출해야 합니다.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첫째. 식량 폭동을 막을 것. 둘째. 방어 가능 상태를 복구할 것. 셋째. 주민들이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게 할 것.”
라플리가 관객석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세 번째가 제일 어렵겠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학술적이지요.”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앉았다.
“이번 막의 참가자는 요안나 폐하, 슈샤니크 경, 그레이, 알렉산드리나 아센.”
그녀는 손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주제는 이것.”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도시를 안정시키는 것과, 사람들이 다시 함께 살게 하는 것은 같은 일인가?”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같아야 합니다.”
슈샤니크는 바로 받았다.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들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지도 가장자리의 보급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같아지려면, 먼저 30일을 버텨야 합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좋아. 시작부터 아주 좋네.”
아카식은 기록대에서 첫 줄을 적었다.
《2막.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시작부터 의견 불일치. 매우 정상.》
그레이가 아카식을 보았다.
“‘매우 정상’은 공식 기록 표현이 아닙니다.”
“그럼 비공식 주석.”
“비공식 주석도 관리 대상입니다.”
“좋아. 관리되는 비공식 주석.”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첫 번째 질문! 30일 안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말했다.
“식량입니다.”
그 대답은 빠르고 단단했다.
“성벽이 무너져도 사람은 하루 정도는 공포로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가 비면 군기도 시민도 무너집니다. 곡창 하나가 소실됐고 교역로가 끊겼다면, 먼저 남은 식량을 계산하고 배급선을 세워야 합니다.”
그녀는 지도 위 수레 모형들을 정렬했다.
“병영과 피난민 구역을 따로 두면 안 됩니다. 병사들이 먹고 시민들이 굶으면 폭동이 나고, 시민들이 먹고 병사들이 굶으면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배급표를 하나로 짜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하나의 배급표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인구조사할 시간에 식량을 나눠야 합니다.”
“식량을 나누기 위해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구역을 나누었다.
“누가 원주민인지, 누가 피난민인지, 누가 상인인지, 누가 부상자인지, 누가 노동 가능자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람에게 배급이 반복되면 장부가 무너지고, 장부가 무너지면 내일의 배급은 정치가 아니라 폭력으로 바뀝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 장부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슈샤니크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다.
“이름을 만들게 해야 합니다.”
“이름을 증명할 가족이 모두 죽었다면요?”
“증인을 찾습니다.”
“증인도 없다면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가 그 틈에 말했다.
“임시 등록표를 발행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에게 갔다.
그레이는 장부를 넘겼다.
“사망자 명단과 생존자 명단이 동시에 미완성입니다. 이름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을 배제하면 치안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임시 등록표를 발행하고, 식량 배급은 등록표 기준으로 진행하되, 사후 확인 항목을 별도로 둡니다.”
슈샤니크는 그레이를 보았다.
“위조가 생깁니다.”
“생깁니다.”
그레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등록표에 수령 장소, 동행인, 부상 여부, 거주 구역을 함께 적고, 배급 때마다 누적 확인합니다. 완전한 신원 확인을 기다리면 첫 주에 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카식이 작게 말했다.
“오. 장부가 생존 속도를 따라가는 방식.”
그레이는 계속했다.
“이름이 없어서 식량을 못 받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다만 이름이 없다는 사실도 기록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시민권의 첫 문턱이 될 수 있겠군요.”
슈샤니크가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지도 위 피난민 목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도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첫날 필요한 것은 빵입니다. 그러나 첫날 밤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공동체의 보호 아래 있는지 아는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단단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안정시키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원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슈샤니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둘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함께 살게 한다는 이상은 좋습니다. 하지만 선언은 곡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슈샤니크의 말을 피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선언은 곡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곡물을 나누는 손이 서로를 물어뜯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요안나는 계속했다.
“배급표는 필요합니다. 병력도 필요합니다. 인구조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첫날 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의 도시에서 잠드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누구의 도시입니까?”
요안나는 잠시 지도를 보았다.
“로마의 도시.”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요안나는 그것을 알고도 말했다.
“혈통 때문이 아닙니다. 언어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이 도시에서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내일 같은 법과 같은 배급과 같은 보호 아래 서기로 약속한다면, 그 도시는 로마가 될 수 있습니다.”
슈샤니크는 조용히 말했다.
“그 약속을 문서화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경이 필요합니다.”
짧은 침묵.
슈샤니크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역할이 정확히 지적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공동 보호 선언문을 작성합니다.”
그녀는 지도 옆에 새 양피지를 펼쳤다.
“임시 시민 보호령. 30일간 신앙, 출신, 언어와 관계없이 등록된 모든 주민과 피난민은 도시의 임시 보호 대상이 됩니다. 배급과 의료, 치안의 우선순위는 출신이 아니라 필요와 역할에 따릅니다. 이후 정식 시민권 심사로 전환합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심사’라는 말은 불안을 줍니다.”
“그럼 ‘등록 절차’.”
“좋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곡창 모형을 옮겼다.
“그 선언문이 먹히려면, 첫 배급은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병사부터 먹이면 안 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병사를 굶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첫 배급은 병사와 시민 대표가 같은 줄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공동 배급식.”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그거 연출 가능해?”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아니, 정치적으로 중요하잖아. 사람들이 봐야 믿지.”
요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첫 배급은 단순 분배가 아니라 선언의 연장입니다.”
슈샤니크도 이번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군중 통제가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수레 모형 둘을 광장 양쪽에 놓았다.
“배급대를 네 곳으로 나눕니다. 병사 둘, 성직자 하나, 장부 담당 하나, 지역 대표 하나씩 붙입니다. 줄은 신분별이 아니라 구역별로 나눕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부상자와 노약자는 별도 이동 배급이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것조를 편성합니다.”
요안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첫 배급 전에 선언을 읽겠습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폐하께서 직접?”
“예.”
“위험합니다.”
“필요합니다.”
슈샤니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위험 요소가 계산되고 있었다.
암살.
폭동.
군중 압박.
반대파의 선동.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의 분노.
종파 갈등.
그 모든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요안나도 보았다.
굶주린 사람들이 첫날 밤 무엇을 듣는지.
그들이 자신을 짐으로 보는 국가와, 자신을 시민으로 부르려는 국가 중 어느 쪽에 마음을 줄지.
슈샤니크는 결국 말했다.
“연단 주변을 낮게 구성합니다. 폐하께서 군중보다 너무 높이 서면 거리감이 생깁니다. 너무 낮으면 안전 문제가 있습니다. 세 계단 정도가 적절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오, 무대 높이!”
슈샤니크가 담담히 말했다.
“행정적 안전 조치입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무대도 행정이구나.”
“좋은 무대라면 그렇겠지요.”
그 말에 푸리나는 손뼉을 칠 뻔하다가, 그레이가 보는 것을 보고 참았다.
그레이는 우물 세 곳을 표시했다.
“다음은 우물입니다. 하나가 오염되었습니다. 식량보다 빠르게 죽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 일부를 우물 경비로 돌립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우물 관리는 지역 대표와 제국 서기가 공동으로 합니다. 오염 원인을 조사해야 합니다. 자연 오염인지, 시체 유입인지, 고의 오염인지에 따라 대응이 다릅니다.”
그레이는 붉은 표식을 하나 놓았다.
“오염 원인이 사망자 미수습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순간 공기가 낮아졌다.
요안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레이는 감정을 덧칠하지 않았다.
“사망자 수습반이 필요합니다. 배급반과 분리해야 합니다. 이름 확인, 사망 원인, 발견 장소, 유류품 기록. 임시 매장 장소. 이후 종교별 장례 절차 연결.”
알렉산드리나는 말했다.
“그 인력을 어디서 빼옵니까?”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노동 가능자 중 가족을 잃은 사람을 강제로 배정하면 안 됩니다. 붕괴됩니다. 자원자 중심으로 하되, 성직자와 장부 담당을 붙입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제가 선언에서 말하겠습니다. 죽은 이를 수습하는 일은 도시의 수치가 아니라, 도시가 아직 사람을 기억한다는 증거라고.”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잠시 생각했다.
“그 문구는 넣겠습니다.”
그레이가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수습반에게 배급 우선권을 줘야 합니다. 감염 위험과 정신적 부담이 큽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레이튼이 관객석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흥미롭군요. 식량에서 시작한 논의가 시민권, 장례, 무대 높이까지 왔습니다.”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좋은 극이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문제입니다. 좋은 문제는 늘 여러 문을 열지요.”
아카식은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펜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도시 안정화: 식량, 등록, 선언, 우물, 사망자 수습. 논의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연결됨. 좋은 징조.》
그레이는 아카식의 기록을 훔쳐보다가 말했다.
“‘좋은 징조’는 주관적 표현입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그래서 내 기록에만 적었어.”
토론은 계속되었다.
슈샤니크는 30일 계획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 3일.
생존.
식량 재고 조사
임시 등록표 발행
우물 봉쇄와 정화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
성문 통제
공동 보호 선언
다음 10일.
질서.
구역별 배급표
임시 치안대 편성
장터 제한 개방
교역로 정찰
시민 등록 절차
종교별 장례 보장
노동 가능자 재배치
남은 17일.
회복.
곡창 복구
우물 재개방
세금 유예와 임시 공공노동
외부 상단 유치
성벽 보수
학교와 예배소 재개
정식 시민권 및 거주권 정리
알렉산드리나는 그 옆에 보급 수치를 붙였다.
“3일 안에 식량 재고가 확인되지 않으면 계획이 무너집니다. 피난민 유입이 계속된다면 하루 단위로 배급량을 조정해야 합니다. 병력은 치안과 성벽 보수를 동시에 맡을 수 없습니다. 교대 편성이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죽음과 부상자 항목을 붙였다.
“사망자 명단이 완성되지 않으면 상속, 가족 재결합, 배급 중복, 장례가 모두 꼬입니다. 부상자는 경상·중상만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움직이면 안 되는 사람,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나눠야 합니다.”
요안나는 마지막으로 선언과 공동체 항목을 붙였다.
“도시 사람들은 자신이 관리받는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피난민은 손님이 아니라, 임시 시민으로 불려야 합니다. ‘임시’는 불안하지만, ‘시민’은 손을 잡게 합니다.”
슈샤니크가 요안나를 보았다.
“임시 시민이라는 표현은 법적으로 모호합니다.”
요안나가 답했다.
“그러면 경이 법적으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세요.”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어려운 일을 쉽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건 검이 부딪치는 것과 달랐다.
하지만 분명한 긴장이 있었다.
요안나는 손을 내밀고, 슈샤니크는 그 손이 무너지지 않게 문서를 만든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문서가 첫날 저녁을 넘기도록 수레를 움직인다.
그레이는 그 수레에서 떨어지는 이름이 없게 장부를 붙든다.
푸리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도 전투였다.
다만 적이 사람이 아닐 뿐이었다.
굶주림.
불신.
오염.
이름 없음.
늦은 배급.
높은 연단.
잘못 놓인 수레.
사망자 없는 장부.
그 모든 것과 싸우는 전투였다.
모래시계가 떨어졌다.
그레이가 판정표를 정리했다.
“제출안을 요약합니다.”
그녀는 읽었다.
“1일차. 공동 보호 선언과 임시 등록표 발행. 공동 배급식 실시. 우물 하나 봉쇄.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반 편성.”
“3일차까지. 식량 재고 완료. 구역별 배급표 확정. 임시 치안대 편성. 성벽 응급 보수 시작.”
“10일차까지. 장터 제한 개방. 교역로 정찰. 종교별 장례 보장. 노동 가능자 재배치.”
“30일차까지. 곡창 복구. 우물 정화. 시민 등록 절차 전환. 학교와 예배소 재개. 세금 유예 및 공공노동 실시.”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핵심 원칙. 식량은 배급표로 나누되, 도시는 선언으로 묶는다. 이름이 없는 자에게 임시 이름을 주고, 죽은 자는 명단에 올리며, 살아남은 자는 같은 광장에서 같은 빵을 받는다.”
푸리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멋있다.”
그레이가 말했다.
“행정안입니다.”
“멋있는 행정안.”
“그 표현은 가능합니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정!”
아카식과 레이튼, 그리고 여관좌가 각각 기록과 질문과 안정성의 관점에서 판정 보조를 맡았다.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 관점에서 훌륭해. 특히 임시 등록표와 사망자 수습반을 동시에 둔 점. 산 자와 죽은 자 기록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했어.”
레이튼은 말했다.
“질문 관점에서도 좋습니다. 이 안은 ‘도시를 안정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도시의 사람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했습니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지요.”
여관좌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첫날 밤을 넘길 방이 생겼군요. 완전한 집은 아니어도, 비를 피할 처마가 있다면 사람은 다음 아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판정표를 보았다.
“그러면?”
그레이가 답했다.
“공동 해답 채택입니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 2막은 공동 해답!”
알렉산드리나는 조금 어색한 듯 팔짱을 풀었다.
“승패가 없는 겁니까?”
레이튼이 말했다.
“오늘의 과제는 도시를 살리는 것이니까요. 도시가 살아남는다면, 답안도 살아남은 겁니다.”
요안나는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보급 없이는 선언이 첫날을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멈칫했다.
“폐하의 선언 없이는 제 보급이 폭동을 막지 못했을 겁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정리하며 말했다.
“두 분 모두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항목을 같은 문서에 넣겠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름표도 붙이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네 사람을 보았다.
평화의 황제.
죽은 국가들의 기록을 품은 재상.
부상자와 이름을 놓지 않는 행정관.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지만 보급선을 놓지 않는 차르.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들은 하나의 도시를 30일 더 살게 만들었다.
아카식은 마지막 줄을 적었다.
《2막 결론. 배급표는 배를 채우고, 선언은 손을 묶는다. 장부는 이름을 남기고, 보급은 아침까지 시간을 산다. 도시란 그 네 가지가 동시에 실패하지 않을 때, 간신히 다시 시작된다.》
그레이가 그 문장을 보고 잠깐 멈췄다.
“이번 기록은 공식 기록에 일부 반영해도 되겠습니다.”
아카식이 눈을 크게 떴다.
“오, 드디어?”
“일부입니다.”
“일부라도 좋아.”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이번 박수는 승자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었다.
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는 것에 보내는 박수였다.
원탁 위의 도시, 아르카다는 아직 완전히 살아나지 않았다.
성벽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고, 우물 하나는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고, 사망자 명단은 아직 비어 있는 칸이 많았다.
하지만 광장에는 배급대가 생겼다.
연단은 세 계단 높이로 세워졌다.
피난민 목패에는 임시 등록표가 붙었다.
우물에는 봉쇄 표식이 세워졌고, 사망자 수습반 옆에는 장부와 등불이 놓였다.
그리고 지도 한가운데, 요안나가 읽을 선언문 첫 줄이 적혔다.
《오늘 이 도시의 빵을 받는 자는, 오늘 이 도시의 보호 아래 있다.》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보며 말했다.
“법률 문구로는 다듬어야 합니다.”
요안나가 답했다.
“다듬어주세요. 뜻은 남겨두고.”
“그것이 제 일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수레를 다시 광장 옆으로 옮겼다.
“뜻이 남으려면 빵도 남아야 합니다.”
그레이가 이름표를 정렬했다.
“그리고 누가 받았는지도 남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은 도시네.”
슈샤니크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직 좋은 도시는 아닙니다.”
요안나가 부드럽게 받았다.
“하지만 좋은 도시가 되려는 첫날은 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을 넘기면 둘째 날이 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날 준비 필요.”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래. 학술제 2막 결론은 그거다.”
그녀는 원탁을 향해 손을 펼쳤다.
“좋은 도시는 첫날을 넘기고, 둘째 날 준비를 한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짧지만 정확하군요.”
아카식은 웃으며 적었다.
《푸리나식 요약. 의외로 정확함.》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의외로’는 삭제하십시오.”
“싫어.”
“삭제하십시오.”
푸리나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 아래에서, 원탁 위의 폐허 도시는 아주 조금 덜 어두워졌다.
아직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 도시를 단순한 폐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곳에는 배급표가 있었고, 보호 선언이 있었고, 보급 수레가 있었고, 이름을 적을 장부가 있었다.
그리고 같은 빵을 받을 사람들이 있었다.
2막 —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원탁 위에 펼쳐진 것은 도시 지도였다.
처음에는 그냥 지도처럼 보였다.
성벽이 있고, 동문과 서문이 있고, 광장과 우물과 시장과 성당과 여관과 병영이 표시되어 있었다. 강은 도시 북쪽을 지나갔고, 남쪽에는 작은 포도밭과 곡창 지대가 있었다.
하지만 아카식이 손가락으로 지도 한가운데를 톡 두드리자, 지도는 더 이상 평면이 아니게 되었다.
무너진 성벽이 솟았다.
검게 탄 시장 지붕이 올라왔다.
오염된 우물에는 검은 잉크가 번졌다.
교역로는 끊어진 선처럼 흔들렸고, 성문 앞에는 피난민을 나타내는 작은 목패들이 놓였다. 병영에는 병사 목패들이 있었으나, 그중 절반은 부상 판정을 뜻하는 붉은 실을 감고 있었다.
아카식은 느긋하게 말했다.
“모의 도시명은 일단 ‘아르카다’로 할게. 실제 도시랑 헷갈리지 않게.”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이름 괜찮네.”
“기록자도 가끔 작명해.”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상황을 고지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대강당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아르카다는 몽골식 공세를 받은 변경 도시입니다. 성벽 동남부 일부 붕괴. 식량 창고 둘 중 하나 소실. 우물 세 곳 중 하나 오염. 북쪽 교역로 단절. 피난민 유입 계속. 병영은 부상자 수용 중. 사망자 명단 미완성. 도시 내부에는 로마계, 아르메니아계, 튀르크계, 불가리아계, 상인 공동체가 혼재합니다.”
푸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네.”
슈샤니크는 이미 지도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단순한 문제라면 이미 더 크게 망가졌을 테니까요.”
그 말투는 조용했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깃펜처럼 건조했고, 잉크가 마르기 전에 결론을 내리는 관료의 것이었다.
요안나는 그 옆에서 도시 모형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은 손을 놓는 쪽이 아니라, 손을 뻗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팔짱을 낀 채 수레 모형과 병영을 번갈아 보았다.
“30일이라고 했습니까?”
그레이가 답했다.
“예. 30일 안에 도시 안정화 방안을 제출해야 합니다.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첫째. 식량 폭동을 막을 것. 둘째. 방어 가능 상태를 복구할 것. 셋째. 주민들이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게 할 것.”
라플리가 관객석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세 번째가 제일 어렵겠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학술적이지요.”
푸리나는 원탁 중앙에 앉았다.
“이번 막의 참가자는 요안나 폐하, 슈샤니크 경, 그레이, 알렉산드리나 아센.”
그녀는 손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주제는 이것.”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도시를 안정시키는 것과, 사람들이 다시 함께 살게 하는 것은 같은 일인가?”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같아야 합니다.”
슈샤니크는 바로 받았다.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들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지도 가장자리의 보급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같아지려면, 먼저 30일을 버텨야 합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좋아. 시작부터 아주 좋네.”
아카식은 기록대에서 첫 줄을 적었다.
《2막. 배급표와 손잡은 시민들. 시작부터 의견 불일치. 매우 정상.》
그레이가 아카식을 보았다.
“‘매우 정상’은 공식 기록 표현이 아닙니다.”
“그럼 비공식 주석.”
“비공식 주석도 관리 대상입니다.”
“좋아. 관리되는 비공식 주석.”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첫 번째 질문! 30일 안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말했다.
“식량입니다.”
그 대답은 빠르고 단단했다.
“성벽이 무너져도 사람은 하루 정도는 공포로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가 비면 군기도 시민도 무너집니다. 곡창 하나가 소실됐고 교역로가 끊겼다면, 먼저 남은 식량을 계산하고 배급선을 세워야 합니다.”
그녀는 지도 위 수레 모형들을 정렬했다.
“병영과 피난민 구역을 따로 두면 안 됩니다. 병사들이 먹고 시민들이 굶으면 폭동이 나고, 시민들이 먹고 병사들이 굶으면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배급표를 하나로 짜야 합니다.”
슈샤니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하나의 배급표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인구조사할 시간에 식량을 나눠야 합니다.”
“식량을 나누기 위해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구역을 나누었다.
“누가 원주민인지, 누가 피난민인지, 누가 상인인지, 누가 부상자인지, 누가 노동 가능자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람에게 배급이 반복되면 장부가 무너지고, 장부가 무너지면 내일의 배급은 정치가 아니라 폭력으로 바뀝니다.”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 장부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슈샤니크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다.
“이름을 만들게 해야 합니다.”
“이름을 증명할 가족이 모두 죽었다면요?”
“증인을 찾습니다.”
“증인도 없다면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가 그 틈에 말했다.
“임시 등록표를 발행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에게 갔다.
그레이는 장부를 넘겼다.
“사망자 명단과 생존자 명단이 동시에 미완성입니다. 이름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을 배제하면 치안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임시 등록표를 발행하고, 식량 배급은 등록표 기준으로 진행하되, 사후 확인 항목을 별도로 둡니다.”
슈샤니크는 그레이를 보았다.
“위조가 생깁니다.”
“생깁니다.”
그레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등록표에 수령 장소, 동행인, 부상 여부, 거주 구역을 함께 적고, 배급 때마다 누적 확인합니다. 완전한 신원 확인을 기다리면 첫 주에 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카식이 작게 말했다.
“오. 장부가 생존 속도를 따라가는 방식.”
그레이는 계속했다.
“이름이 없어서 식량을 못 받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다만 이름이 없다는 사실도 기록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시민권의 첫 문턱이 될 수 있겠군요.”
슈샤니크가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지도 위 피난민 목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도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첫날 필요한 것은 빵입니다. 그러나 첫날 밤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공동체의 보호 아래 있는지 아는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단단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안정시키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원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슈샤니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둘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함께 살게 한다는 이상은 좋습니다. 하지만 선언은 곡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슈샤니크의 말을 피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선언은 곡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곡물을 나누는 손이 서로를 물어뜯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요안나는 계속했다.
“배급표는 필요합니다. 병력도 필요합니다. 인구조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첫날 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의 도시에서 잠드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누구의 도시입니까?”
요안나는 잠시 지도를 보았다.
“로마의 도시.”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요안나는 그것을 알고도 말했다.
“혈통 때문이 아닙니다. 언어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이 도시에서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내일 같은 법과 같은 배급과 같은 보호 아래 서기로 약속한다면, 그 도시는 로마가 될 수 있습니다.”
슈샤니크는 조용히 말했다.
“그 약속을 문서화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경이 필요합니다.”
짧은 침묵.
슈샤니크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역할이 정확히 지적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공동 보호 선언문을 작성합니다.”
그녀는 지도 옆에 새 양피지를 펼쳤다.
“임시 시민 보호령. 30일간 신앙, 출신, 언어와 관계없이 등록된 모든 주민과 피난민은 도시의 임시 보호 대상이 됩니다. 배급과 의료, 치안의 우선순위는 출신이 아니라 필요와 역할에 따릅니다. 이후 정식 시민권 심사로 전환합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심사’라는 말은 불안을 줍니다.”
“그럼 ‘등록 절차’.”
“좋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곡창 모형을 옮겼다.
“그 선언문이 먹히려면, 첫 배급은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병사부터 먹이면 안 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병사를 굶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첫 배급은 병사와 시민 대표가 같은 줄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공동 배급식.”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그거 연출 가능해?”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아니, 정치적으로 중요하잖아. 사람들이 봐야 믿지.”
요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첫 배급은 단순 분배가 아니라 선언의 연장입니다.”
슈샤니크도 이번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군중 통제가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수레 모형 둘을 광장 양쪽에 놓았다.
“배급대를 네 곳으로 나눕니다. 병사 둘, 성직자 하나, 장부 담당 하나, 지역 대표 하나씩 붙입니다. 줄은 신분별이 아니라 구역별로 나눕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부상자와 노약자는 별도 이동 배급이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것조를 편성합니다.”
요안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첫 배급 전에 선언을 읽겠습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폐하께서 직접?”
“예.”
“위험합니다.”
“필요합니다.”
슈샤니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위험 요소가 계산되고 있었다.
암살.
폭동.
군중 압박.
반대파의 선동.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의 분노.
종파 갈등.
그 모든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요안나도 보았다.
굶주린 사람들이 첫날 밤 무엇을 듣는지.
그들이 자신을 짐으로 보는 국가와, 자신을 시민으로 부르려는 국가 중 어느 쪽에 마음을 줄지.
슈샤니크는 결국 말했다.
“연단 주변을 낮게 구성합니다. 폐하께서 군중보다 너무 높이 서면 거리감이 생깁니다. 너무 낮으면 안전 문제가 있습니다. 세 계단 정도가 적절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오, 무대 높이!”
슈샤니크가 담담히 말했다.
“행정적 안전 조치입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무대도 행정이구나.”
“좋은 무대라면 그렇겠지요.”
그 말에 푸리나는 손뼉을 칠 뻔하다가, 그레이가 보는 것을 보고 참았다.
그레이는 우물 세 곳을 표시했다.
“다음은 우물입니다. 하나가 오염되었습니다. 식량보다 빠르게 죽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 일부를 우물 경비로 돌립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우물 관리는 지역 대표와 제국 서기가 공동으로 합니다. 오염 원인을 조사해야 합니다. 자연 오염인지, 시체 유입인지, 고의 오염인지에 따라 대응이 다릅니다.”
그레이는 붉은 표식을 하나 놓았다.
“오염 원인이 사망자 미수습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순간 공기가 낮아졌다.
요안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레이는 감정을 덧칠하지 않았다.
“사망자 수습반이 필요합니다. 배급반과 분리해야 합니다. 이름 확인, 사망 원인, 발견 장소, 유류품 기록. 임시 매장 장소. 이후 종교별 장례 절차 연결.”
알렉산드리나는 말했다.
“그 인력을 어디서 빼옵니까?”
그레이는 바로 답했다.
“노동 가능자 중 가족을 잃은 사람을 강제로 배정하면 안 됩니다. 붕괴됩니다. 자원자 중심으로 하되, 성직자와 장부 담당을 붙입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제가 선언에서 말하겠습니다. 죽은 이를 수습하는 일은 도시의 수치가 아니라, 도시가 아직 사람을 기억한다는 증거라고.”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잠시 생각했다.
“그 문구는 넣겠습니다.”
그레이가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수습반에게 배급 우선권을 줘야 합니다. 감염 위험과 정신적 부담이 큽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레이튼이 관객석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흥미롭군요. 식량에서 시작한 논의가 시민권, 장례, 무대 높이까지 왔습니다.”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좋은 극이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문제입니다. 좋은 문제는 늘 여러 문을 열지요.”
아카식은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펜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도시 안정화: 식량, 등록, 선언, 우물, 사망자 수습. 논의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연결됨. 좋은 징조.》
그레이는 아카식의 기록을 훔쳐보다가 말했다.
“‘좋은 징조’는 주관적 표현입니다.”
아카식은 웃었다.
“그래서 내 기록에만 적었어.”
토론은 계속되었다.
슈샤니크는 30일 계획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 3일.
생존.
식량 재고 조사
임시 등록표 발행
우물 봉쇄와 정화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
성문 통제
공동 보호 선언
다음 10일.
질서.
구역별 배급표
임시 치안대 편성
장터 제한 개방
교역로 정찰
시민 등록 절차
종교별 장례 보장
노동 가능자 재배치
남은 17일.
회복.
곡창 복구
우물 재개방
세금 유예와 임시 공공노동
외부 상단 유치
성벽 보수
학교와 예배소 재개
정식 시민권 및 거주권 정리
알렉산드리나는 그 옆에 보급 수치를 붙였다.
“3일 안에 식량 재고가 확인되지 않으면 계획이 무너집니다. 피난민 유입이 계속된다면 하루 단위로 배급량을 조정해야 합니다. 병력은 치안과 성벽 보수를 동시에 맡을 수 없습니다. 교대 편성이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죽음과 부상자 항목을 붙였다.
“사망자 명단이 완성되지 않으면 상속, 가족 재결합, 배급 중복, 장례가 모두 꼬입니다. 부상자는 경상·중상만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움직이면 안 되는 사람,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나눠야 합니다.”
요안나는 마지막으로 선언과 공동체 항목을 붙였다.
“도시 사람들은 자신이 관리받는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피난민은 손님이 아니라, 임시 시민으로 불려야 합니다. ‘임시’는 불안하지만, ‘시민’은 손을 잡게 합니다.”
슈샤니크가 요안나를 보았다.
“임시 시민이라는 표현은 법적으로 모호합니다.”
요안나가 답했다.
“그러면 경이 법적으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세요.”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어려운 일을 쉽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건 검이 부딪치는 것과 달랐다.
하지만 분명한 긴장이 있었다.
요안나는 손을 내밀고, 슈샤니크는 그 손이 무너지지 않게 문서를 만든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문서가 첫날 저녁을 넘기도록 수레를 움직인다.
그레이는 그 수레에서 떨어지는 이름이 없게 장부를 붙든다.
푸리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도 전투였다.
다만 적이 사람이 아닐 뿐이었다.
굶주림.
불신.
오염.
이름 없음.
늦은 배급.
높은 연단.
잘못 놓인 수레.
사망자 없는 장부.
그 모든 것과 싸우는 전투였다.
모래시계가 떨어졌다.
그레이가 판정표를 정리했다.
“제출안을 요약합니다.”
그녀는 읽었다.
“1일차. 공동 보호 선언과 임시 등록표 발행. 공동 배급식 실시. 우물 하나 봉쇄. 부상자 분류. 사망자 수습반 편성.”
“3일차까지. 식량 재고 완료. 구역별 배급표 확정. 임시 치안대 편성. 성벽 응급 보수 시작.”
“10일차까지. 장터 제한 개방. 교역로 정찰. 종교별 장례 보장. 노동 가능자 재배치.”
“30일차까지. 곡창 복구. 우물 정화. 시민 등록 절차 전환. 학교와 예배소 재개. 세금 유예 및 공공노동 실시.”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핵심 원칙. 식량은 배급표로 나누되, 도시는 선언으로 묶는다. 이름이 없는 자에게 임시 이름을 주고, 죽은 자는 명단에 올리며, 살아남은 자는 같은 광장에서 같은 빵을 받는다.”
푸리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멋있다.”
그레이가 말했다.
“행정안입니다.”
“멋있는 행정안.”
“그 표현은 가능합니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정!”
아카식과 레이튼, 그리고 여관좌가 각각 기록과 질문과 안정성의 관점에서 판정 보조를 맡았다.
아카식이 말했다.
“기록 관점에서 훌륭해. 특히 임시 등록표와 사망자 수습반을 동시에 둔 점. 산 자와 죽은 자 기록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했어.”
레이튼은 말했다.
“질문 관점에서도 좋습니다. 이 안은 ‘도시를 안정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도시의 사람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했습니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지요.”
여관좌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첫날 밤을 넘길 방이 생겼군요. 완전한 집은 아니어도, 비를 피할 처마가 있다면 사람은 다음 아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판정표를 보았다.
“그러면?”
그레이가 답했다.
“공동 해답 채택입니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 2막은 공동 해답!”
알렉산드리나는 조금 어색한 듯 팔짱을 풀었다.
“승패가 없는 겁니까?”
레이튼이 말했다.
“오늘의 과제는 도시를 살리는 것이니까요. 도시가 살아남는다면, 답안도 살아남은 겁니다.”
요안나는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보급 없이는 선언이 첫날을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멈칫했다.
“폐하의 선언 없이는 제 보급이 폭동을 막지 못했을 겁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정리하며 말했다.
“두 분 모두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항목을 같은 문서에 넣겠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름표도 붙이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네 사람을 보았다.
평화의 황제.
죽은 국가들의 기록을 품은 재상.
부상자와 이름을 놓지 않는 행정관.
아직 새벽에 닿지 않았지만 보급선을 놓지 않는 차르.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들은 하나의 도시를 30일 더 살게 만들었다.
아카식은 마지막 줄을 적었다.
《2막 결론. 배급표는 배를 채우고, 선언은 손을 묶는다. 장부는 이름을 남기고, 보급은 아침까지 시간을 산다. 도시란 그 네 가지가 동시에 실패하지 않을 때, 간신히 다시 시작된다.》
그레이가 그 문장을 보고 잠깐 멈췄다.
“이번 기록은 공식 기록에 일부 반영해도 되겠습니다.”
아카식이 눈을 크게 떴다.
“오, 드디어?”
“일부입니다.”
“일부라도 좋아.”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이번 박수는 승자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었다.
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는 것에 보내는 박수였다.
원탁 위의 도시, 아르카다는 아직 완전히 살아나지 않았다.
성벽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고, 우물 하나는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고, 사망자 명단은 아직 비어 있는 칸이 많았다.
하지만 광장에는 배급대가 생겼다.
연단은 세 계단 높이로 세워졌다.
피난민 목패에는 임시 등록표가 붙었다.
우물에는 봉쇄 표식이 세워졌고, 사망자 수습반 옆에는 장부와 등불이 놓였다.
그리고 지도 한가운데, 요안나가 읽을 선언문 첫 줄이 적혔다.
《오늘 이 도시의 빵을 받는 자는, 오늘 이 도시의 보호 아래 있다.》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보며 말했다.
“법률 문구로는 다듬어야 합니다.”
요안나가 답했다.
“다듬어주세요. 뜻은 남겨두고.”
“그것이 제 일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수레를 다시 광장 옆으로 옮겼다.
“뜻이 남으려면 빵도 남아야 합니다.”
그레이가 이름표를 정렬했다.
“그리고 누가 받았는지도 남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은 도시네.”
슈샤니크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직 좋은 도시는 아닙니다.”
요안나가 부드럽게 받았다.
“하지만 좋은 도시가 되려는 첫날은 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을 넘기면 둘째 날이 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날 준비 필요.”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래. 학술제 2막 결론은 그거다.”
그녀는 원탁을 향해 손을 펼쳤다.
“좋은 도시는 첫날을 넘기고, 둘째 날 준비를 한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짧지만 정확하군요.”
아카식은 웃으며 적었다.
《푸리나식 요약. 의외로 정확함.》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의외로’는 삭제하십시오.”
“싫어.”
“삭제하십시오.”
푸리나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 아래에서, 원탁 위의 폐허 도시는 아주 조금 덜 어두워졌다.
아직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 도시를 단순한 폐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곳에는 배급표가 있었고, 보호 선언이 있었고, 보급 수레가 있었고, 이름을 적을 장부가 있었다.
그리고 같은 빵을 받을 사람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