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15익명의 참치 씨(83c9c67c)2026-05-14 (목) 19:20:38
《등불 아래의 학술제》
4막 — 공방 학술전: 강한 도구란 무엇인가
4막의 원탁은 더 이상 원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작업대였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강당 한가운데에 길고 넓은 공방을 펼쳐놓았다.
한쪽에는 깨진 약병과 젖은 곡물 자루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휘어진 수레축과 금 간 성문 경첩이 놓였다. 부러진 활대, 손잡이가 닳아 빠진 망치, 마력 과부하로 검게 그을린 경보 장치, 병사의 손목 보호구, 찢어진 가죽끈과 녹슨 못도 있었다.
훌륭한 재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망가졌고, 쓰레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사연이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작업대 앞에 서서 선언했다.
“이번 막의 주제!”
그녀는 부러진 활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강한 도구란 무엇인가!”
그레이가 즉시 다가와 활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게 했다.
“부러진 활대입니다. 흔들지 마십시오.”
“그냥 분위기였는데.”
“분위기로 손을 다칠 수 있습니다.”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저 활대로 다치면 그건 도구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 문제 아니야?”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사용자를 다치게 만드는 도구도 도구 문제입니다.”
라플리가 그녀를 보았다.
“오늘도 손목 이야기 할 거지?”
“예.”
“예상했어.”
라이자는 작업대 위에 놓인 깨진 약병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약병, 안쪽에 아직 침전물이 남아 있어요. 버리기엔 아까운데요.”
소피아는 이미 젖은 곡물 자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루를 만지고, 냄새를 맡고, 손끝으로 곡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음…… 이건 식량으로는 힘들겠네요.”
그레이가 물었다.
“폐기입니까?”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식량으로 사용할 수 없다면—”
“식량이 아니면 다른 걸로 쓰면 되잖아요.”
라플리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좋아. 오늘 재밌겠네.”
푸리나는 네 사람을 차례로 가리켰다.
“오늘 참가자는 보헤미아의 라이자, 유플리아 마탑주 라플리, 실용의 감각을 가진 카를로타, 그리고 신비와 황혼의 연금술사 소피아!”
소피아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잘 부탁드려요.”
푸리나는 손을 펼쳤다.
“과제는 간단해. 이 공방 안의 망가진 물건들을 이용해서, 폐허 도시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줘.”
라플리가 바로 물었다.
“폭발 실험은?”
그레이가 즉답했다.
“금지입니다.”
“작은 폭발은?”
소피아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레이가 소피아를 보았다.
“그것도 금지입니다.”
소피아는 조금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럼 아주 작은 반응은요?”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사전 신고 후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라플리는 소피아를 흘끗 보았다.
“너, 생각보다 말이 통할 것 같네.”
카를로타가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안전 기준은 적용됩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공방이 될 것 같아요.”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참가자 전원, 위험 요소 보유. 감시 필요.》
푸리나는 그 장부를 보고 말했다.
“그레이, 그거 너무 불신 아니야?”
“경험입니다.”
“그건 반박 못 하겠네.”
레이튼은 관객석에서 미소 지었다.
“오늘의 질문은 여러 층을 갖는군요. 강한 도구란 부서지지 않는 도구인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도구인가, 아니면 부서진 뒤에도 다시 쓸모를 찾는 도구인가.”
아카식은 기록대에서 적었다.
“좋아. 오늘은 물건들이 주인공이네.”
푸리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방 개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라플리였다.
그녀는 마력 과부하로 검게 그을린 경보 장치를 들어 올렸다.
작은 금속 상자였다.
원래는 성벽 위에 설치해 적 기병의 접근을 알리는 장치였지만, 과부하로 내부 회로가 타고, 경보판은 반쯤 녹아 있었다.
라플리는 그것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오딘의 눈》을 열었다.
“흐름이 보이네.”
그녀의 시야에 남은 마력의 자국이 떠올랐다.
끊긴 회로.
과열된 마법핵.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 공명으로 탄 흔적.
장치가 마지막 순간에 경보를 한 번 더 울리려다가 스스로를 태운 흔적.
“멍청한 장치야.”
라이자가 물었다.
“왜요?”
라플리는 장치를 톡 두드렸다.
“한계에 닿았는데도 계속 출력만 올렸어. 경보 장치는 울리는 게 목적이지, 자기 존재를 장렬하게 증명하는 게 목적이 아니거든.”
푸리나가 관객석에서 작게 말했다.
“그 말, 누가 누구한테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레이는 조용히 적었다.
《라플리 경, 자기 객관화 가능성 있음. 추가 관찰.》
라플리는 못 들은 척했다.
그녀의 손끝에 작은 뇌광이 맺혔다.
“일단 어디서 터지는지 보자.”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폭발 실험은 금지입니다.”
“터뜨리겠다는 게 아니라, 터지는 지점을 찾겠다는 거야.”
“그것이 폭발 실험입니다.”
라플리는 혀를 찼다.
“알았어. 그럼 안 터지는 선까지만.”
그녀는 《천율학파》의 계산식을 낮게 펼쳤다.
뇌광은 장치를 때리지 않았다.
얇은 바늘처럼 회로를 따라 흘렀다.
《뇌천마력회로》.
라플리는 회로의 저항을 읽고, 탄 부분과 아직 살아 있는 부분을 분리했다.
“마법핵은 죽었고, 외부 감응판은 살았네. 내부 증폭기가 문제야. 접근 신호를 받으면 세 배로 증폭하다가, 연속 신호에서 과부하로 탄다.”
카를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현장에서는 첫 번째 적은 알려주지만, 두 번째 적부터는 침묵했겠군요.”
“맞아. 제일 쓸모없을 때 죽는 장치지.”
라플리는 장치 위에 표시를 남겼다.
붉은 점.
파란 선.
노란 원.
“여기부터 취약점. 여기까지 한계. 이 이상 밀면 터진다. 아니, 터지지는 않게 하라고 했으니까…… 기능정지.”
그레이가 장부에 적었다.
《기능정지. 표현 수정 확인.》
라플리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적었지?”
“예.”
“꼼꼼하네.”
“필요합니다.”
다음은 라이자였다.
라이자는 라플리가 표시한 경보 장치 옆에 은빛 실을 뽑아냈다.
성은이었다.
“그럼 너무 무리하지 않게 만들면 되겠네요.”
라플리가 말했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장치가 안 탔지.”
라이자는 웃었다.
“그래서 박자를 맞출 거예요.”
그녀는 경보 장치 안에 작은 은빛 심장 모양의 조절 코어를 넣었다.
《은의 조형》.
성은이 끊긴 회로 사이를 잇고, 탄 부분을 감싸고, 과열된 흔적을 부드럽게 식혔다.
《성은의 혈맥》.
은빛 회로는 강줄기처럼 갈라졌다.
들어오는 신호를 한 번에 증폭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 흘렸다.
《따듯하게 안아주는 은의 심장》의 축소형 코어가 작게 뛰었다.
두근.
경보 장치가 아주 낮은 소리를 냈다.
라플리는 그것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장치가 심장 뛰는 소리를 내면 병사들이 무서워하지 않을까?”
라이자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럼 소리를 줄일게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닌데.”
라이자는 성은 실을 다시 조율했다.
“경보가 울릴 때마다 장치가 자신을 태우지 않도록 했어요. 신호가 너무 많이 들어오면 먼저 흘리고, 그다음 줄이고, 마지막으로 주변 장치에 나눠 보내요.”
카를로타가 말했다.
“현장 병사가 그걸 알 수 있습니까?”
라이자가 멈췄다.
“음?”
카를로타는 경보 장치를 들어 보았다.
“좋은 장치입니다. 하지만 들기 무겁습니다. 설치 위치가 높은 성벽이라면 병사 둘이 들어야 합니다. 손잡이가 없습니다. 젖은 손으로 잡으면 떨어뜨립니다.”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그건 생각 못 했네요.”
라플리는 웃었다.
“손목의 시간이 왔군.”
카를로타는 진지했다.
“도구는 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설치할 수 있어야 하고, 고장 났을 때 빼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용자가 마법사나 연금술사가 아니라 지친 병사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녀는 부러진 활대에서 쓸 만한 탄성 부분을 떼어냈다.
“이 활대는 활로 쓰기에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손잡이 보강재로는 쓸 수 있습니다.”
소피아가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카를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보죠.”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너희 둘, 이상한 쪽으로 호흡이 맞네.”
카를로타는 부러진 활대 조각을 다듬어 경보 장치 양쪽에 붙였다.
손잡이는 약간 휘어 있었다.
엄지와 손목이 자연스럽게 걸리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병사 목패 하나를 가져와 장치를 들게 했다.
“이제 한 손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들고 오래 이동하면 안 됩니다. 무게 중심이 여전히 앞쪽입니다.”
라이자가 성은 회로 일부를 뒤쪽으로 옮겼다.
“이렇게요?”
카를로타가 다시 들어 보았다.
“좋습니다. 손목 부담이 줄었습니다.”
라플리는 팔짱을 꼈다.
“마법 공학 토론에서 손목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할 줄은 몰랐네.”
카를로타가 그녀를 보았다.
“손목이 부러지면 주문도 활도 나가지 않습니다.”
라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아요.”
라플리는 입을 다물었다.
소피아는 그 사이에 작업대 위의 다른 파손품들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부러진 활대의 나머지 부분.
금 간 경첩.
젖은 곡물.
깨진 약병.
휘어진 수레축.
녹슨 못.
찢어진 가죽끈.
푸리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소피아, 그건 뭐 하려고?”
소피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쓸 수 있는 걸 보려고요.”
그레이가 말했다.
“대부분 파손품입니다.”
“네. 그래서 안쪽이 잘 보이잖아요.”
그 말에 라플리도 잠시 멈췄다.
소피아는 금 간 경첩을 손에 들었다.
《황금의 눈》.
그녀의 눈에 물질의 성질이 떠올랐다.
금속 피로.
습기.
열 변형.
미세한 균열.
아직 남은 탄성.
못으로는 부족하지만, 작은 스프링으로는 쓸 수 있는 복원력.
“망가지면 끝인가요?”
소피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음…… 아니죠. 망가졌다는 건, 안쪽 구조를 볼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라이자가 작게 감탄했다.
“그 말 좋아요.”
라플리는 그녀를 보았다.
“넌 그냥 다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은 건 좋다고 말해야죠.”
소피아는 부러진 활대를 들어 올렸다.
“이건 활로 쓰기에는 끝났어요. 하지만 탄성재로는 괜찮아요.”
금 간 경첩.
“이건 문을 버티기엔 피곤하지만, 작은 복귀 장치로는 쓸 수 있고요.”
젖은 곡물.
“이건 먹으면 안 되지만, 발효시켜 접착제로 쓸 수 있겠네요.”
라플리가 바로 말했다.
“잠깐. 젖은 곡물로 접착제?”
“네.”
“그게 돼?”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는… 음, 기본 아닌가요?”
라플리와 카를로타가 동시에 말했다.
“아니야.”
“기본은 아닙니다.”
라이자는 밝게 말했다.
“하지만 멋져요.”
소피아는 조금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럼 기본으로 만들면 되겠네요.”
그 말에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아카식은 아주 즐겁게 적었다.
《소피아식 기본: 일반적으로 기본 아님.》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비공식 주석으로 처리하십시오.”
“당연하지.”
소피아는 《소피아식 연금술 조제편》을 펼쳤다.
깨진 약병에 남은 침전물과 젖은 곡물 일부, 물, 소량의 재, 가죽끈의 섬유를 섞었다.
작은 냄새가 올라왔다.
푸리나가 코를 살짝 찡그렸다.
“이거 안전한 냄새야?”
그레이가 바로 물었다.
“소피아 경, 유독성 여부는?”
소피아는 태연하게 말했다.
“마시면 안 돼요.”
“그 외에는?”
“피부에 오래 묻으면 가렵고요.”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접착제 취급 시 장갑 필요.》
소피아는 이어서 《소피아식 연금술 연성편》을 사용했다.
젖은 곡물은 끈적한 접착제가 되었고, 금 간 경첩은 작은 탄성 부품으로, 부러진 활대는 손목 보호구 안쪽의 탄성 지지대로 변했다.
휘어진 수레축은 그대로 펴지 않았다.
소피아는 오히려 휘어진 곡선을 이용했다.
“이건 완전히 펴려면 힘이 너무 많이 들어요. 그럼 이렇게 잘라서 클램프로 쓰는 게 낫겠어요.”
카를로타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수레축 임시 수리용 고정구로 쓸 수 있겠습니다.”
라이자가 성은 실을 얇게 둘렀다.
“여기에 성은 회로를 넣으면, 너무 조이면 색이 변하게 할 수 있어요. 병사가 고정 강도를 알 수 있게요.”
라플리가 경보 장치에서 작은 뇌광 핵을 떼어냈다.
“그리고 여기에 진동 감응을 넣자. 수레축이 다시 틀어지기 시작하면 소리가 나게.”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귀 안 먹을 정도.”
“수치로.”
“……낮게.”
“수치로.”
라플리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적어줄게.”
“지금 적으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푸리나는 작업대 위에서 점점 하나의 상자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파손품 더미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경보 장치.
수레축 고정구.
손목 보호구.
성문 경첩 임시 수리 부품.
젖은 곡물 기반 접착제.
소형 조제 병.
성은 안정 회로.
뇌광 진동 경보 핵.
부러진 활대 탄성재.
모든 것이 하나의 상자 안에 정리되었다.
라플리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름 붙이자.”
그레이가 말했다.
“공식 명칭은 용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럼 내가—”
라플리, 카를로타, 그레이가 동시에 말했다.
“안 됩니다.”
푸리나가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왜 다 같이?”
라플리는 단호했다.
“세 줄짜리 제목은 안 돼.”
카를로타도 말했다.
“현장 병사가 외우기 어려운 이름은 부적절합니다.”
그레이가 덧붙였다.
“문서화에도 불리합니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푸리나 님 제목도 궁금한데요.”
소피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푸리나는 바로 기운을 되찾았다.
“봤지?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
라플리는 라이자와 소피아를 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진짜 위험해.”
결국 그레이가 임시명을 적었다.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너무 건조해.”
카를로타는 상자를 들어 보았다.
“하지만 좋습니다. 용도가 분명합니다.”
소피아는 상자 안의 칸막이를 조정했다.
“건조하면 안쪽에 작은 그림을 그리면 되지 않을까요?”
라이자가 웃었다.
“은색 별 같은 거요?”
푸리나는 즉시 손을 들었다.
“허가!”
그레이가 말했다.
“장식은 기능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가합니다.”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장식 허가까지 문서화하는구나.”
“필요합니다.”
“그래, 네가 그레이지.”
카를로타는 상자를 실제 병사 목패에게 들려보았다.
“무게는 적절합니다. 한 명이 들 수 있고, 두 명이면 달릴 수 있습니다. 손잡이 각도도 괜찮습니다.”
라플리는 뇌광 경보 핵을 켰다.
작은 소리가 났다.
띵.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허용 범위입니다.”
라플리가 작게 환호했다.
“좋아. 처음으로 소리 허가받았다.”
소피아는 접착제를 발라 금 간 나무 조각을 붙였다.
잠시 뒤, 나무 조각은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붙었네요.”
라이자는 성은 회로가 들어간 손목 보호구를 목패 병사에게 장착했다.
“손목 부담을 줄여줄 거예요. 그리고 무리하게 힘을 주면 은빛이 붉게 변해요.”
카를로타가 확인했다.
“훈련병에게 유용하겠습니다.”
라플리는 웃었다.
“결국 손목이 핵심이네.”
카를로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농담이었는데.”
“농담도 정확할 수 있습니다.”
아카식은 웃으며 그 말을 기록했다.
마침내 그레이가 판정표를 들었다.
“판정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누가 이겼어?”
그레이는 네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라플리 경. 출력 한계와 취약점 탐지 우수.”
라플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자 폐하. 안정화와 안전 회로 우수.”
라이자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카를로타 경. 사용성 및 신체 부담 보정 우수.”
카를로타는 “당연한 일을 했습니다”라는 얼굴이었다.
“소피아 경. 파손 자재 재정의와 다목적 전환 우수.”
소피아는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총합 판정. 공동 설계 성공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누가 이긴 거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도구가 이겼습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 대답 너무 좋아!”
라플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소피아가 상자를 보며 말했다.
“도구가 잘 쓰이면 이긴 거 아닐까요?”
카를로타가 덧붙였다.
“사용자가 다치지 않았다면, 그 말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라이자는 상자 안의 은빛 별 장식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다음 사람도 쓸 수 있다면요.”
라플리는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가끔 나보다 더 이상한 소리를 해.”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좋은 공방이야!”
레이튼은 관객석에서 모자를 살짝 들었다.
“오늘의 질문은 답을 얻었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강한 도구란?”
레이튼은 작업대 위의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를 보았다.
“부서지지 않는 도구만은 아니겠지요.”
아카식이 기록했다.
그레이도 기록했다.
여관좌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당 한가운데, 파손품 더미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상자가 남았다.
그 상자는 영웅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거대한 성은 병단도 아니었고, 뇌광을 뿜는 마법포도 아니었고, 전설의 활도 아니었다.
그저 폐허 도시에서 수레축을 고치고, 경보 장치를 다시 울리고, 병사의 손목을 보호하고, 문을 다시 닫게 해줄 수 있는 상자였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무너진 도시의 둘째 날에는 필요한 도구였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이번 박수는 도구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리고 도구를 다시 쓸 수 있게 만든 네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날의 공방 학술전은 누구 한 사람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라플리는 한계를 표시했고, 라이자는 심장을 붙였고, 카를로타는 손에 맞게 깎았고, 소피아는 망가진 것들의 이름을 바꾸었다.
부러진 활은 활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손목을 지키는 보조기가 되었다.
젖은 곡물은 버려지지 않고 접착제가 되었고, 금 간 경첩은 작은 스프링이 되었다.
그날 그들이 배운 답은 단순했다.
강한 도구란 부서지지 않는 도구만이 아니다.
부서진 뒤에도, 다시 누군가의 손에 쓸모로 돌아올 수 있는 도구다.
4막 — 공방 학술전: 강한 도구란 무엇인가
4막의 원탁은 더 이상 원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작업대였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강당 한가운데에 길고 넓은 공방을 펼쳐놓았다.
한쪽에는 깨진 약병과 젖은 곡물 자루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휘어진 수레축과 금 간 성문 경첩이 놓였다. 부러진 활대, 손잡이가 닳아 빠진 망치, 마력 과부하로 검게 그을린 경보 장치, 병사의 손목 보호구, 찢어진 가죽끈과 녹슨 못도 있었다.
훌륭한 재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망가졌고, 쓰레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사연이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작업대 앞에 서서 선언했다.
“이번 막의 주제!”
그녀는 부러진 활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강한 도구란 무엇인가!”
그레이가 즉시 다가와 활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게 했다.
“부러진 활대입니다. 흔들지 마십시오.”
“그냥 분위기였는데.”
“분위기로 손을 다칠 수 있습니다.”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저 활대로 다치면 그건 도구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 문제 아니야?”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사용자를 다치게 만드는 도구도 도구 문제입니다.”
라플리가 그녀를 보았다.
“오늘도 손목 이야기 할 거지?”
“예.”
“예상했어.”
라이자는 작업대 위에 놓인 깨진 약병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약병, 안쪽에 아직 침전물이 남아 있어요. 버리기엔 아까운데요.”
소피아는 이미 젖은 곡물 자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루를 만지고, 냄새를 맡고, 손끝으로 곡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음…… 이건 식량으로는 힘들겠네요.”
그레이가 물었다.
“폐기입니까?”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식량으로 사용할 수 없다면—”
“식량이 아니면 다른 걸로 쓰면 되잖아요.”
라플리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좋아. 오늘 재밌겠네.”
푸리나는 네 사람을 차례로 가리켰다.
“오늘 참가자는 보헤미아의 라이자, 유플리아 마탑주 라플리, 실용의 감각을 가진 카를로타, 그리고 신비와 황혼의 연금술사 소피아!”
소피아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잘 부탁드려요.”
푸리나는 손을 펼쳤다.
“과제는 간단해. 이 공방 안의 망가진 물건들을 이용해서, 폐허 도시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줘.”
라플리가 바로 물었다.
“폭발 실험은?”
그레이가 즉답했다.
“금지입니다.”
“작은 폭발은?”
소피아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레이가 소피아를 보았다.
“그것도 금지입니다.”
소피아는 조금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럼 아주 작은 반응은요?”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사전 신고 후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라플리는 소피아를 흘끗 보았다.
“너, 생각보다 말이 통할 것 같네.”
카를로타가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안전 기준은 적용됩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좋은 공방이 될 것 같아요.”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참가자 전원, 위험 요소 보유. 감시 필요.》
푸리나는 그 장부를 보고 말했다.
“그레이, 그거 너무 불신 아니야?”
“경험입니다.”
“그건 반박 못 하겠네.”
레이튼은 관객석에서 미소 지었다.
“오늘의 질문은 여러 층을 갖는군요. 강한 도구란 부서지지 않는 도구인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도구인가, 아니면 부서진 뒤에도 다시 쓸모를 찾는 도구인가.”
아카식은 기록대에서 적었다.
“좋아. 오늘은 물건들이 주인공이네.”
푸리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방 개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라플리였다.
그녀는 마력 과부하로 검게 그을린 경보 장치를 들어 올렸다.
작은 금속 상자였다.
원래는 성벽 위에 설치해 적 기병의 접근을 알리는 장치였지만, 과부하로 내부 회로가 타고, 경보판은 반쯤 녹아 있었다.
라플리는 그것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오딘의 눈》을 열었다.
“흐름이 보이네.”
그녀의 시야에 남은 마력의 자국이 떠올랐다.
끊긴 회로.
과열된 마법핵.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 공명으로 탄 흔적.
장치가 마지막 순간에 경보를 한 번 더 울리려다가 스스로를 태운 흔적.
“멍청한 장치야.”
라이자가 물었다.
“왜요?”
라플리는 장치를 톡 두드렸다.
“한계에 닿았는데도 계속 출력만 올렸어. 경보 장치는 울리는 게 목적이지, 자기 존재를 장렬하게 증명하는 게 목적이 아니거든.”
푸리나가 관객석에서 작게 말했다.
“그 말, 누가 누구한테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레이는 조용히 적었다.
《라플리 경, 자기 객관화 가능성 있음. 추가 관찰.》
라플리는 못 들은 척했다.
그녀의 손끝에 작은 뇌광이 맺혔다.
“일단 어디서 터지는지 보자.”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폭발 실험은 금지입니다.”
“터뜨리겠다는 게 아니라, 터지는 지점을 찾겠다는 거야.”
“그것이 폭발 실험입니다.”
라플리는 혀를 찼다.
“알았어. 그럼 안 터지는 선까지만.”
그녀는 《천율학파》의 계산식을 낮게 펼쳤다.
뇌광은 장치를 때리지 않았다.
얇은 바늘처럼 회로를 따라 흘렀다.
《뇌천마력회로》.
라플리는 회로의 저항을 읽고, 탄 부분과 아직 살아 있는 부분을 분리했다.
“마법핵은 죽었고, 외부 감응판은 살았네. 내부 증폭기가 문제야. 접근 신호를 받으면 세 배로 증폭하다가, 연속 신호에서 과부하로 탄다.”
카를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현장에서는 첫 번째 적은 알려주지만, 두 번째 적부터는 침묵했겠군요.”
“맞아. 제일 쓸모없을 때 죽는 장치지.”
라플리는 장치 위에 표시를 남겼다.
붉은 점.
파란 선.
노란 원.
“여기부터 취약점. 여기까지 한계. 이 이상 밀면 터진다. 아니, 터지지는 않게 하라고 했으니까…… 기능정지.”
그레이가 장부에 적었다.
《기능정지. 표현 수정 확인.》
라플리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적었지?”
“예.”
“꼼꼼하네.”
“필요합니다.”
다음은 라이자였다.
라이자는 라플리가 표시한 경보 장치 옆에 은빛 실을 뽑아냈다.
성은이었다.
“그럼 너무 무리하지 않게 만들면 되겠네요.”
라플리가 말했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장치가 안 탔지.”
라이자는 웃었다.
“그래서 박자를 맞출 거예요.”
그녀는 경보 장치 안에 작은 은빛 심장 모양의 조절 코어를 넣었다.
《은의 조형》.
성은이 끊긴 회로 사이를 잇고, 탄 부분을 감싸고, 과열된 흔적을 부드럽게 식혔다.
《성은의 혈맥》.
은빛 회로는 강줄기처럼 갈라졌다.
들어오는 신호를 한 번에 증폭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 흘렸다.
《따듯하게 안아주는 은의 심장》의 축소형 코어가 작게 뛰었다.
두근.
경보 장치가 아주 낮은 소리를 냈다.
라플리는 그것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장치가 심장 뛰는 소리를 내면 병사들이 무서워하지 않을까?”
라이자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럼 소리를 줄일게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닌데.”
라이자는 성은 실을 다시 조율했다.
“경보가 울릴 때마다 장치가 자신을 태우지 않도록 했어요. 신호가 너무 많이 들어오면 먼저 흘리고, 그다음 줄이고, 마지막으로 주변 장치에 나눠 보내요.”
카를로타가 말했다.
“현장 병사가 그걸 알 수 있습니까?”
라이자가 멈췄다.
“음?”
카를로타는 경보 장치를 들어 보았다.
“좋은 장치입니다. 하지만 들기 무겁습니다. 설치 위치가 높은 성벽이라면 병사 둘이 들어야 합니다. 손잡이가 없습니다. 젖은 손으로 잡으면 떨어뜨립니다.”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그건 생각 못 했네요.”
라플리는 웃었다.
“손목의 시간이 왔군.”
카를로타는 진지했다.
“도구는 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설치할 수 있어야 하고, 고장 났을 때 빼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용자가 마법사나 연금술사가 아니라 지친 병사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녀는 부러진 활대에서 쓸 만한 탄성 부분을 떼어냈다.
“이 활대는 활로 쓰기에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손잡이 보강재로는 쓸 수 있습니다.”
소피아가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카를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보죠.”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너희 둘, 이상한 쪽으로 호흡이 맞네.”
카를로타는 부러진 활대 조각을 다듬어 경보 장치 양쪽에 붙였다.
손잡이는 약간 휘어 있었다.
엄지와 손목이 자연스럽게 걸리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병사 목패 하나를 가져와 장치를 들게 했다.
“이제 한 손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들고 오래 이동하면 안 됩니다. 무게 중심이 여전히 앞쪽입니다.”
라이자가 성은 회로 일부를 뒤쪽으로 옮겼다.
“이렇게요?”
카를로타가 다시 들어 보았다.
“좋습니다. 손목 부담이 줄었습니다.”
라플리는 팔짱을 꼈다.
“마법 공학 토론에서 손목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할 줄은 몰랐네.”
카를로타가 그녀를 보았다.
“손목이 부러지면 주문도 활도 나가지 않습니다.”
라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아요.”
라플리는 입을 다물었다.
소피아는 그 사이에 작업대 위의 다른 파손품들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부러진 활대의 나머지 부분.
금 간 경첩.
젖은 곡물.
깨진 약병.
휘어진 수레축.
녹슨 못.
찢어진 가죽끈.
푸리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소피아, 그건 뭐 하려고?”
소피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쓸 수 있는 걸 보려고요.”
그레이가 말했다.
“대부분 파손품입니다.”
“네. 그래서 안쪽이 잘 보이잖아요.”
그 말에 라플리도 잠시 멈췄다.
소피아는 금 간 경첩을 손에 들었다.
《황금의 눈》.
그녀의 눈에 물질의 성질이 떠올랐다.
금속 피로.
습기.
열 변형.
미세한 균열.
아직 남은 탄성.
못으로는 부족하지만, 작은 스프링으로는 쓸 수 있는 복원력.
“망가지면 끝인가요?”
소피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음…… 아니죠. 망가졌다는 건, 안쪽 구조를 볼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라이자가 작게 감탄했다.
“그 말 좋아요.”
라플리는 그녀를 보았다.
“넌 그냥 다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은 건 좋다고 말해야죠.”
소피아는 부러진 활대를 들어 올렸다.
“이건 활로 쓰기에는 끝났어요. 하지만 탄성재로는 괜찮아요.”
금 간 경첩.
“이건 문을 버티기엔 피곤하지만, 작은 복귀 장치로는 쓸 수 있고요.”
젖은 곡물.
“이건 먹으면 안 되지만, 발효시켜 접착제로 쓸 수 있겠네요.”
라플리가 바로 말했다.
“잠깐. 젖은 곡물로 접착제?”
“네.”
“그게 돼?”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는… 음, 기본 아닌가요?”
라플리와 카를로타가 동시에 말했다.
“아니야.”
“기본은 아닙니다.”
라이자는 밝게 말했다.
“하지만 멋져요.”
소피아는 조금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럼 기본으로 만들면 되겠네요.”
그 말에 강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아카식은 아주 즐겁게 적었다.
《소피아식 기본: 일반적으로 기본 아님.》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비공식 주석으로 처리하십시오.”
“당연하지.”
소피아는 《소피아식 연금술 조제편》을 펼쳤다.
깨진 약병에 남은 침전물과 젖은 곡물 일부, 물, 소량의 재, 가죽끈의 섬유를 섞었다.
작은 냄새가 올라왔다.
푸리나가 코를 살짝 찡그렸다.
“이거 안전한 냄새야?”
그레이가 바로 물었다.
“소피아 경, 유독성 여부는?”
소피아는 태연하게 말했다.
“마시면 안 돼요.”
“그 외에는?”
“피부에 오래 묻으면 가렵고요.”
그레이는 장부에 적었다.
《접착제 취급 시 장갑 필요.》
소피아는 이어서 《소피아식 연금술 연성편》을 사용했다.
젖은 곡물은 끈적한 접착제가 되었고, 금 간 경첩은 작은 탄성 부품으로, 부러진 활대는 손목 보호구 안쪽의 탄성 지지대로 변했다.
휘어진 수레축은 그대로 펴지 않았다.
소피아는 오히려 휘어진 곡선을 이용했다.
“이건 완전히 펴려면 힘이 너무 많이 들어요. 그럼 이렇게 잘라서 클램프로 쓰는 게 낫겠어요.”
카를로타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수레축 임시 수리용 고정구로 쓸 수 있겠습니다.”
라이자가 성은 실을 얇게 둘렀다.
“여기에 성은 회로를 넣으면, 너무 조이면 색이 변하게 할 수 있어요. 병사가 고정 강도를 알 수 있게요.”
라플리가 경보 장치에서 작은 뇌광 핵을 떼어냈다.
“그리고 여기에 진동 감응을 넣자. 수레축이 다시 틀어지기 시작하면 소리가 나게.”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귀 안 먹을 정도.”
“수치로.”
“……낮게.”
“수치로.”
라플리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적어줄게.”
“지금 적으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푸리나는 작업대 위에서 점점 하나의 상자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파손품 더미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경보 장치.
수레축 고정구.
손목 보호구.
성문 경첩 임시 수리 부품.
젖은 곡물 기반 접착제.
소형 조제 병.
성은 안정 회로.
뇌광 진동 경보 핵.
부러진 활대 탄성재.
모든 것이 하나의 상자 안에 정리되었다.
라플리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름 붙이자.”
그레이가 말했다.
“공식 명칭은 용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럼 내가—”
라플리, 카를로타, 그레이가 동시에 말했다.
“안 됩니다.”
푸리나가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왜 다 같이?”
라플리는 단호했다.
“세 줄짜리 제목은 안 돼.”
카를로타도 말했다.
“현장 병사가 외우기 어려운 이름은 부적절합니다.”
그레이가 덧붙였다.
“문서화에도 불리합니다.”
라이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푸리나 님 제목도 궁금한데요.”
소피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푸리나는 바로 기운을 되찾았다.
“봤지?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
라플리는 라이자와 소피아를 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진짜 위험해.”
결국 그레이가 임시명을 적었다.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너무 건조해.”
카를로타는 상자를 들어 보았다.
“하지만 좋습니다. 용도가 분명합니다.”
소피아는 상자 안의 칸막이를 조정했다.
“건조하면 안쪽에 작은 그림을 그리면 되지 않을까요?”
라이자가 웃었다.
“은색 별 같은 거요?”
푸리나는 즉시 손을 들었다.
“허가!”
그레이가 말했다.
“장식은 기능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가합니다.”
라플리는 중얼거렸다.
“장식 허가까지 문서화하는구나.”
“필요합니다.”
“그래, 네가 그레이지.”
카를로타는 상자를 실제 병사 목패에게 들려보았다.
“무게는 적절합니다. 한 명이 들 수 있고, 두 명이면 달릴 수 있습니다. 손잡이 각도도 괜찮습니다.”
라플리는 뇌광 경보 핵을 켰다.
작은 소리가 났다.
띵.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허용 범위입니다.”
라플리가 작게 환호했다.
“좋아. 처음으로 소리 허가받았다.”
소피아는 접착제를 발라 금 간 나무 조각을 붙였다.
잠시 뒤, 나무 조각은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붙었네요.”
라이자는 성은 회로가 들어간 손목 보호구를 목패 병사에게 장착했다.
“손목 부담을 줄여줄 거예요. 그리고 무리하게 힘을 주면 은빛이 붉게 변해요.”
카를로타가 확인했다.
“훈련병에게 유용하겠습니다.”
라플리는 웃었다.
“결국 손목이 핵심이네.”
카를로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농담이었는데.”
“농담도 정확할 수 있습니다.”
아카식은 웃으며 그 말을 기록했다.
마침내 그레이가 판정표를 들었다.
“판정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누가 이겼어?”
그레이는 네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라플리 경. 출력 한계와 취약점 탐지 우수.”
라플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자 폐하. 안정화와 안전 회로 우수.”
라이자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카를로타 경. 사용성 및 신체 부담 보정 우수.”
카를로타는 “당연한 일을 했습니다”라는 얼굴이었다.
“소피아 경. 파손 자재 재정의와 다목적 전환 우수.”
소피아는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총합 판정. 공동 설계 성공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누가 이긴 거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도구가 이겼습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 대답 너무 좋아!”
라플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소피아가 상자를 보며 말했다.
“도구가 잘 쓰이면 이긴 거 아닐까요?”
카를로타가 덧붙였다.
“사용자가 다치지 않았다면, 그 말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라이자는 상자 안의 은빛 별 장식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다음 사람도 쓸 수 있다면요.”
라플리는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가끔 나보다 더 이상한 소리를 해.”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좋은 공방이야!”
레이튼은 관객석에서 모자를 살짝 들었다.
“오늘의 질문은 답을 얻었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강한 도구란?”
레이튼은 작업대 위의 《재건용 응급 공방 상자》를 보았다.
“부서지지 않는 도구만은 아니겠지요.”
아카식이 기록했다.
그레이도 기록했다.
여관좌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당 한가운데, 파손품 더미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상자가 남았다.
그 상자는 영웅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거대한 성은 병단도 아니었고, 뇌광을 뿜는 마법포도 아니었고, 전설의 활도 아니었다.
그저 폐허 도시에서 수레축을 고치고, 경보 장치를 다시 울리고, 병사의 손목을 보호하고, 문을 다시 닫게 해줄 수 있는 상자였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무너진 도시의 둘째 날에는 필요한 도구였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짝.
이번 박수는 도구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리고 도구를 다시 쓸 수 있게 만든 네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날의 공방 학술전은 누구 한 사람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라플리는 한계를 표시했고, 라이자는 심장을 붙였고, 카를로타는 손에 맞게 깎았고, 소피아는 망가진 것들의 이름을 바꾸었다.
부러진 활은 활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손목을 지키는 보조기가 되었다.
젖은 곡물은 버려지지 않고 접착제가 되었고, 금 간 경첩은 작은 스프링이 되었다.
그날 그들이 배운 답은 단순했다.
강한 도구란 부서지지 않는 도구만이 아니다.
부서진 뒤에도, 다시 누군가의 손에 쓸모로 돌아올 수 있는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