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16익명의 참치 씨(83c9c67c)2026-05-14 (목) 19:37:36
《등불 아래의 학술제》

5막 — 죽음과 고통, 기억의 세미나

5막의 강당에는 박수가 없었다.

푸리나가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다.

“이번 막에서는 손뼉을 치지 않을게.”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박수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치겠지만, 먼저 치지는 않을 거야.”

그레이는 장부를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하겠습니다. 5막 진행 원칙. 침묵 우선.”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응. 오늘은 침묵도 참석자니까.”

그 말이 끝나자, 강당의 모양이 바뀌었다.

원탁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 위에는 도시 지도나 공방 도구 대신 작은 등불들이 놓였다.
등불마다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이름이 적힌 것도 있었고, 비어 있는 것도 있었다.

비어 있는 이름표가 더 많았다.

한쪽에는 장례용 천이 접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부상자 명단과 약병, 붕대, 물그릇이 놓였다.
강당 가장자리에는 여관좌의 찻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찻잔 옆에 작은 꽃과 흰 천이 함께 놓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카식도 펜을 들었지만, 평소처럼 농담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오늘의 주제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푸리나는 원탁을 둘러보았다.

“5막의 주제는 이것.”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죽은 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산 자의 고통은 어디까지 덜어주어야 하는가.”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등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검은 실은 오늘 무대를 가로지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끝에서 조용히 내려와, 비어 있는 이름표들의 가장자리에 닿아 있었다.

타마르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는 포도나무 잎 하나와 작은 잔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축제의 잔처럼 보이기도 했고, 장례의 잔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레이는 장부를 펴고 있었다.

펜은 평소처럼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적지 않았다.
오늘은 먼저 들어야 하는 날이었다.

레플리카는 조금 뒤쪽에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거만한 자세는 아니었다.
그녀는 부상자 명단과 약병, 그리고 비어 있는 이름표들을 한 번씩 보았다.
그 눈빛은 고통을 흥미롭게 보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여관좌가 있었다.

그는 원탁의 상석에 앉지 않았다.
등불과 등불 사이, 누군가가 자리를 비워두었을 법한 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푸리나는 먼저 아레를 보았다.

“아레.”

아레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 헤툼.”

“오늘은 네가 먼저 말해줄래?”

아레는 잠시 비어 있는 이름표들을 바라보았다.

그 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선 자리를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않는 일이란다.”

그녀의 말은 느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사람은 죽으면 가라앉지. 이름도, 목소리도, 손의 온기도, 살아 있던 날의 작은 버릇들도. 시간이 지나면 산 자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웃게 된다. 그래야만 하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는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산 자가 웃는 일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로 너무 빨리 가라앉는 이름들이 있단다.”

그녀의 검은 실 하나가 빈 이름표에 닿았다.

“돌아오지 못한 전령. 성문 아래에서 끝까지 버틴 방패병. 우물에 빠진 아이. 마지막 빵을 넘기고 자기 이름을 말하지 못한 사람. 전쟁은 그들을 숫자로 만들기 쉽지.”

그레이의 펜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

아레는 그레이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장부가 필요하겠지.”

그레이는 짧게 답했다.

“예.”

아레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장부만으로는 닿지 않는 곳도 있단다. 이름을 적었다고 해서 그 아이가 덜 외로웠던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기억은 장부와 등불 사이에 있어야 한다.”

그녀는 등불 하나를 켰다.

작은 불빛이 비어 있는 이름표 위에 내려앉았다.

“이름을 알면 이름으로 부르고, 이름을 모르면 그 이름을 찾는 일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기억이란다.”

강당은 조용했다.

푸리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레이튼도 질문하지 않았다.

아직 질문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었다.

타마르가 포도나무 잎을 손끝으로 만졌다.

그녀는 눈을 반쯤 내리감고 있었다.

“죽은 자에게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낯선 깊이가 있었다.

“살아 있는 이들은 죽음을 너무 빨리 의미로 바꾸려 합니다. 순교, 희생, 대가, 영광, 불행, 교훈.”

그녀는 작은 잔을 보았다.

“하지만 죽은 어린양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저녁일 때가 있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타마르는 조용히 말했다.

“포도밭의 저녁. 발을 씻을 물.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되는 울타리. 늦게 도착한 자를 꾸짖지 않는 문.”

여관좌의 등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타마르는 그 불빛을 보며 말했다.

“장례란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마지막으로 질서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어디에 눕힐지,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어떤 기도를 들려줄지. 그 질서가 없으면 죽은 이는 전쟁의 먼지 속에서 너무 오래 서 있게 됩니다.”

아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오래 서 있게 되지.”

타마르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러니 사망 원인을 적는 일도 장례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레이가 눈을 들었다.

타마르는 말했다.

“그가 어디에서, 왜, 어떻게 죽었는지 적는 것은 산 자의 행정만은 아닙니다. 죽은 자에게 ‘너는 아무렇게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그레이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펜을 들었다.

“기록하겠습니다.”

그녀는 장부에 적었다.

《사망 원인 기록은 재발 방지이자 장례의 일부.》

그레이의 글씨는 평소처럼 단정했다.

하지만 그 문장은 평소보다 조금 오래 걸렸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예, 폐하.”

“네 차례야.”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감상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감상과 행정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자리였다.

“저는 죽은 이를 기억한다는 말을 잘 모릅니다.”

그레이는 솔직히 말했다.

“제가 아는 것은,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원탁 위에 세 개의 표를 놓았다.

첫 번째 표.

사망자 명단.

두 번째 표.

사망 원인.

세 번째 표.

재발 방지 조치.

“이름만 적으면 부족합니다. 사망 원인만 적어도 부족합니다. 조치가 없으면 기록은 애도에서 끝납니다. 물론 애도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애도만으로 다음 사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레플리카가 조용히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표를 하나씩 짚었다.

“우물 오염으로 사망했다면 우물 관리 체계를 바꿔야 합니다. 배급 누락으로 죽었다면 등록 절차를 바꿔야 합니다. 퇴각로 혼잡으로 압사했다면 동선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장례가 늦어 전염이 생겼다면 장례 인력과 방역 절차를 따로 세워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차갑지도 않았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 이유는, 그 사람이 같은 원인으로 두 번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푸리나가 아주 작게 물었다.

“두 번 죽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는 실제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그 죽음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을 때입니다.”

강당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레의 검은 실이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

타마르는 눈을 감았다.

여관좌는 찻잔에 따뜻한 물을 조금 더 채웠다.

레플리카가 그때 입을 열었다.

“그럼 산 자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레플리카는 팔짱을 푼 뒤, 부상자 명단 쪽으로 손을 뻗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건 필요하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자의 기억 옆에서 계속 아프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 고통을 그냥 두면, 그 사람은 살아 있어도 돌아오지 못한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레플리카.”

레플리카는 고개를 들었다.

“고통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그 말에 몇몇이 긴장했다.

하지만 레플리카는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고통을 주는 것이 가르침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말이 원탁 위에 분명하게 놓였다.

“사람은 아프면서 배울 때가 있다. 넘어지고, 다치고, 잃고, 후회하면서 더 단단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러니 더 아파도 된다는 말은 틀렸다.”

그녀는 약병을 하나 들었다.

“아픔을 덜 수 있다면 덜어야 한다. 다친 자를 눕힐 수 있다면 눕혀야 한다. 울 사람 곁에 앉을 수 있다면 앉아야 한다.”

그녀는 그레이의 장부를 보았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하려면 원인을 적어야 한다고 했지.”

“예.”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아프지 않게 하려면, 아픈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부상자 명단을 펼쳤다.

“여기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적혀 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괜찮다’고 처리하면 안 된다. 걸을 수 있어도 잠을 못 잘 수 있다. 손가락은 멀쩡해도 빵을 잡지 못할 수 있다. 몸은 나았는데 우물가로 가지 못할 수 있다.”

타마르가 조용히 말했다.

“살아남은 자에게도 쉴 곳이 필요하군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을 견뎠다는 이유로, 계속 견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 말에 여관좌가 천천히 찻잔을 하나 밀어놓았다.

레플리카 앞이었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레플리카는 잠시 그를 보았다.

여관좌는 덧붙였다.

“대답을 다 하신 뒤가 아니라, 중간에 드셔도 됩니다.”

레플리카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그 장면은 아주 작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 작은 장면이 오늘의 5막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고통을 말하는 자도 쉬어야 한다.

푸리나는 원탁 위의 등불들을 보았다.

“그러면 오늘의 과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아르카다에서 전투가 끝난 뒤, 사망자 명단은 미완성이고 부상자는 많아. 피난민 중 일부는 가족을 잃었고, 일부는 자기 이름을 증명하지 못해. 우물 오염으로 죽은 사람도 있고, 성벽 붕괴로 죽은 사람도 있어.”

푸리나는 네 사람을 보았다.

“이 도시가 죽은 이를 기억하고, 산 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첫 7일 동안 해야 할 일을 정해줘.”

그레이는 바로 장부를 열었다.

“첫째, 사망자 수습 체계.”

아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이름을 찾는 등불.”

타마르가 말했다.

“셋째, 장례의 질서.”

레플리카가 덧붙였다.

“넷째, 살아남은 자의 통증과 잠.”

여관좌는 조용히 말했다.

“다섯째, 말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방.”

푸리나는 한참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시작하자.”

가장 먼저 그레이가 도시 지도 위에 네 구역을 그었다.

“사망자 수습반은 치안대와 분리합니다. 수습반은 장부 담당, 성직자, 방역 담당, 운반 인력으로 구성합니다. 발견 장소와 시간, 신체 특징, 유류품, 추정 사망 원인을 기록합니다.”

아레가 말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들에게도 등불을 주어야 한단다.”

그레이는 바로 항목을 추가했다.

“신원 미상자 등불 번호 부여.”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번호만으로는 부족하겠지.”

그레이는 멈췄다.

아레는 비어 있는 이름표 하나를 손에 들었다.

“이름을 모르면 번호를 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그 번호가 이름을 찾는 일을 대신해서는 안 되지.”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적었다.

“신원 미상자 임시 등불 번호. 추후 신원 확인 의무 항목 포함.”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면 등불이 길을 잃지 않겠구나.”

타마르는 장례 장소를 지도 남쪽의 작은 포도밭 근처로 옮겼다.

“임시 매장지는 우물과 떨어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이들을 해치지 않아야 하니까요.”

그녀는 선을 그었다.

“그러나 너무 멀어도 안 됩니다. 멀면 산 자들이 찾아가지 못합니다. 찾아가지 못하면 죽은 자는 다시 전장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레이가 물었다.

“종교가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타마르는 잠시 포도잎을 보았다.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차이가 있어?”

타마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있습니다. 각자의 기도와 방식은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죽은 자들이 서로 적으로 눕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레가 낮게 말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는 깃발이 무겁단다.”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임시 장례 구역은 종교별 의식을 허용하되, 전체 추도 등불은 하나로 둡니다. 산 자들이 ‘우리만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요안나가 관객석에서 조용히 들었다.

그 문장은 나중에 시민 선언과 이어질 것이었다.

레플리카는 부상자 구역을 보았다.

“치료소는 병영 안에만 두면 안 된다.”

알렉산드리나가 물었다.

“왜지? 병영이 방어하기 쉽다.”

레플리카가 답했다.

“부상자 중에는 병영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 병사가 아니었던 사람도 있다. 피난민이 병영에 들어가는 것을 수치나 처벌처럼 느끼면,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는다.”

그레이가 적었다.

“민간 치료소 별도 설치.”

레플리카는 계속했다.

“그리고 통증을 숨기지 않게 해야 한다.”

라플리가 뒤쪽에서 작게 말했다.

“그건 쉽지 않지.”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다. 그래서 먼저 말해야 한다. 아프다고 말해도 배급에서 밀리지 않는다. 잠을 못 잔다고 말해도 겁쟁이가 아니다. 손이 떨린다고 말해도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부상자 명단 옆에 선을 그었다.

“통증 기록표. 수면 기록. 악몽 호소. 물가 접근 불가. 불길 공포. 큰 소리 반응.”

그레이는 그 항목들을 빠르게 적었다.

“상담 인력이 필요합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상담이라는 말을 쓰면 안 오는 사람도 있다.”

“그럼?”

“차 배급소 옆에 앉을 사람을 둔다.”

여관좌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군요.”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말하라고 하면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옆에 앉을 수는 있다.”

여관좌는 찻상 위에 작은 표시를 하나 놓았다.

“그럼 여관 쪽에서 자리를 마련하지요. 이름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굳이 ‘상담석’이라고 쓰지 않아도 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레이튼이 관객석에서 말했다.

“가장 깊은 질문은 때로 묻지 않을 때 시작되는군요.”

아카식은 그것을 적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지우라고 하지 않았다.

토론은 7일 계획으로 정리되었다.

첫째 날.

사망자 수습반 편성.

신원 미상자 임시 등불 번호 부여.

민간 치료소와 병영 치료소 분리.

우물 오염 사망자 우선 수습.

말하지 않아도 앉을 수 있는 차 자리 설치.


둘째 날.

유류품 보관소 설치.

가족 찾기 게시판.

부상자 통증·수면 기록 시작.

종교별 장례 담당자 확인.

아이와 노약자 동행자 확인.


셋째 날.

임시 장례 구역 마련.

전체 추도 등불 설치.

죽은 자의 이름 낭독, 단 신원 미상자는 등불 번호와 발견 장소로 부름.

수습반 휴식 교대 의무화.


넷째 날.

사망 원인별 재발 방지 회의.

우물, 성벽, 배급, 퇴각로 항목 분리.

부상자 재활 분류.

통증을 숨긴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공지.


다섯째 날.

유가족 배급 누락 점검.

아이들의 악몽과 실종 가족 관련 기록.

장례 후 남은 물품 처리 절차.

피난민 공동 추도 참여 허용.


여섯째 날.

사망자 명단 임시본 게시.

오류 신고 창구 설치.

치료소 접근을 방해하는 소문 확인.

통증 관리 약품 재고 조사.


일곱째 날.

첫 주 추도식.

사망 원인별 개선 조치 발표.

부상자와 수습반 휴식일 지정.

전체 등불 소등이 아니라, 일부 등불을 여관과 성문에 옮김.


푸리나가 마지막 항목을 보고 물었다.

“왜 소등하지 않고 옮겨?”

여관좌가 답했다.

“계속 그 자리에서만 타면 사람들은 죽음의 자리로만 찾아옵니다. 성문과 여관에도 등불이 있으면,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함께 볼 수 있지요.”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좋구나. 떠나는 아이도, 돌아오는 아이도 이름 아래를 지나가겠지.”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가 산 자의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길가에 조용히 앉는 형식이군요.”

레플리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산 자가 아프면, 그 등불 아래에 앉아도 된다.”

그레이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등불은 장례 후 일부를 성문과 여관으로 이전. 기억이 길을 막지 않고, 길가에 머물게 함.》

푸리나는 그 문장을 한참 보았다.

“오늘의 답은 조용하네.”

레이튼이 말했다.

“조용한 답이 필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아카식이 기록을 정리했다.

“판정은?”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읽었다.

“아레 폐하. 신원 미상자의 기억과 등불 체계 제안 우수.”

아레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조금 내렸다.

“타마르 폐하. 장례 질서와 공동 추도 구역 제안 우수.”

타마르는 포도잎을 접었다.

“그레이. 사망 원인 기록과 재발 방지 체계 제안.”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자기 판정도 직접 읽는구나.”

그레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필요합니다.”

“응. 필요해.”

그레이는 계속했다.

“레플리카 폐하. 산 자의 통증, 수면, 공포, 치료 접근성 관련 제안 우수.”

레플리카는 짧게 말했다.

“고통은 숨기면 곪는다.”

“여관좌. 말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자리 및 등불 이전 제안.”

여관좌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총합 판정. 공동 해답 채택.”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박수를 치려던 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천천히 손을 내렸다.

대신 말했다.

“좋은 답이었어.”

그 말은 박수보다 작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 편이 맞았다.

아카식은 기록장에 마지막 줄을 적었다.

《5막 결론. 기억은 죽은 이를 다시 전장으로 끌어내는 일이 아니다. 고통은 산 자에게 더 견디라고 명령하는 명분이 아니다. 이름은 등불 아래에 두고, 사망 원인은 장부에 적고, 아픈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앉을 수 있게 한다.》

그레이가 그 기록을 보았다.

“공식 기록에 반영하겠습니다.”

아카식은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응. 그러는 게 좋겠어.”

강당의 등불들이 하나씩 낮아졌다.

그러나 꺼지지는 않았다.

비어 있던 이름표 하나에 작은 불빛이 남았다.

그 이름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불빛을 보고, 아주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극장에는 박수가 많았다.

오늘은 그 극장이 박수 없이도 막을 닫는 법을 배운 날이었다.
(최대 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