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34여관◆zAR16hM8he(83c9c67c)2026-05-14 (목) 23:19:37
《별 아래의 신학제》

막간 1 — 번역이 끝난 뒤의 식탁

7막이 끝난 뒤, 원탁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왕관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빈 종이도 그대로였다.
검은 실과 작은 표지석, 은꽃 모양 설탕 조각, 식지 않은 찻잔, 달빛이 닿은 숟가락, 이름 없는 문패도 모두 원탁 위에 남아 있었다.

다만 원탁의 높이가 조금 낮아졌다.

토론을 위한 책상이라기보다, 이제는 식사를 위한 식탁에 가까워졌다.

커다란 결론들이 잠시 물러나고, 사람의 손이 닿을 만한 것들이 올라왔다.

따뜻한 수프.
단단한 검은 빵.
향이 깊은 차.
너무 달지 않은 과자.
물 한 잔.
아직 아무 이름도 쓰이지 않은 작은 문패.

여관좌는 나타나지 않았다.

목소리도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각자의 앞에는 그 사람에게 맞는 것이 놓여 있었다.

푸리나 앞에는 아직 식지 않은 홍차가 있었다.
찻잔 가장자리에는 무대 커튼처럼 얇은 김이 걸려 있었다.

알토 앞에는 잉크 얼룩이 묻지 않는 흰 냅킨과, 아무 문양도 새겨지지 않은 빈 도장이 놓여 있었다.

아레 앞에는 검은 실이 감긴 찻잔 받침이 있었다.

아스트리트 앞에는 별빛이 비치는 맑은 물 한 잔이 놓였다.

레플리카 앞에는 너무 달지 않은 검은 빵이 있었다.

루나리아 앞에는 달빛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우유차가 놓였다.

라이자 앞에는 은꽃 모양 설탕 조각이 있었다.

민다우가스 앞에는 몹시 쓴 차가 놓였다.

벨라 여왕 앞에는 따뜻한 수프와 단단한 검은 빵이 있었다.

미하일라 앞에는 식기 전에 마셔야 할 만큼 진한 차가 놓였다.

요안나 앞에는 작은 꿀 조각이 있었다.

그레이 앞에는 이름 없는 빈 문패가 놓였다.

누구도 그것이 누구의 준비인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홍차의 김은 무대 안개처럼 부드럽게 올라왔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도 평소처럼 가볍게 웃지 못했다.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내가 초대한 줄 알았는데.”

알토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찻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누군가에게는 배정표였을 수도 있겠네.”

말은 짧았다.

하지만 알토는 그 말이 7막 전체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초대와 강제.
여관과 감옥.
극장과 배역표.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걸 의심하는 동안은, 아직 감옥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알토는 흰 냅킨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확신하는 순간 위험해집니다. ‘나는 초대하고 있다’고 확정하는 순간, 배정표를 초대장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알토답네. 위로도 검수처럼 해.”

“검수되지 않은 위로는 위험합니다.”

“그 말도 알토답고.”

잠시 뒤, 푸리나가 물었다.

“기록도 그래?”

알토는 빈 도장을 보았다.

도장에는 아무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기록도 감시가 될 수 있음을 의심하는 동안은, 아직 기록입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의심을 멈추고, 모든 기록이 옳다고 믿는 순간부터 장부는 족쇄가 됩니다.”

푸리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왕이 신앙을 가진다는 건, 신앙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구나.”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 말, 오늘 몇 번 들은 것 같은데.”

“필요한 만큼 반복됩니다.”

“그래. 기록자답네.”

알토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빈 도장을 뒤집어 놓았다.

아직 찍히지 않은 도장.

아직 확정되지 않은 기록.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숨을 편히 쉬었다.

그 옆자리에서는 아레와 아스트리트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레의 찻잔 받침에는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실은 단정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매듭이 있었고, 어떤 부분은 조금 해져 있었다.

아스트리트는 자기 앞의 맑은 물을 바라보았다.

물 위에는 작은 별빛이 떠 있었다.

한참 뒤, 아스트리트가 낮게 말했다.

“저는 살아 있는 이를 먼저 보려 합니다.”

아레는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손가락으로 잔을 감쌌다.

“시원성좌가 생명을 긍정한다면, 저는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아레가 부드럽게 답했다.

아스트리트는 잠시 망설였다.

“그래서 때로는, 죽은 이를 충분히 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검은 실이 찻잔 받침 위에서 아주 조금 흔들렸다.

아레는 그 실을 손끝으로 가만히 감았다.

“그대가 살아 있는 이를 살리려 한다면.”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누군가는 죽은 이를 잊지 않으면 된단다.”

아스트리트가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별은 하나만 떠 있지 않으니까.”

그 말에 아스트리트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이를 살리는 별.
죽은 이를 잊지 않는 길.

서로 다른 신앙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지울 필요는 없었다.

아스트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살아 있는 이가 더 살아가게 하겠습니다.”

아레는 검은 실을 다시 찻잔 받침에 내려놓았다.

“그럼 나는 길 위에 떨어진 이름들을 주워두마.”

“부탁드립니다.”

“부탁받지 않아도 할 일이란다.”

아레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매우 오래된 단단함이 있었다.

아스트리트는 물잔을 들었다.

맑은 물 위의 별빛이 한 번 흔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레플리카는 검은 빵을 반으로 갈랐다.

그녀는 한쪽을 루나리아 쪽으로 밀었다.

“먹어.”

루나리아는 빵을 바라보다가, 레플리카를 보았다.

“권유입니까, 명령입니까?”

레플리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빵을 조금 더 천천히 밀었다.

“권유다.”

루나리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받겠습니다.”

그녀는 빵을 받아 들었다.

검은 빵은 단단했다.

쉽게 부서지지 않았고, 달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래 씹으면 곡물의 맛이 났다.

루나리아는 작게 한 조각을 떼어 먹었다.

“생각보다 좋군요.”

레플리카는 짧게 답했다.

“단 건 별로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너무 단 말도 별로다.”

루나리아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권유인지 명령인지 물었습니다.”

레플리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앞으로도 물어라.”

루나리아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럼, 앞으로도 대답해주십시오.”

“가능하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검은 빵은 반으로 나뉘어 있었고, 달빛 같은 우유차는 식지 않고 있었다.

붙잡지 않아도,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다른 쪽에서 라이자는 은꽃 모양 설탕 조각을 굴리고 있었다.

설탕은 아주 작았다.

손끝에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레이는 자기 앞의 이름 없는 문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 없는 빈칸이 무섭네요.”

그레이는 문패를 보았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나무 조각.

손님에게 줄 수도 있고, 죽은 이의 무덤 앞에 세울 수도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비워둘 수도 있는 것.

“무서워해야 합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라이자는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래야 함부로 채우지 않습니다.”

라이자는 손 안의 은꽃 설탕을 보았다.

“이름을 주는 것도, 방을 주는 것도, 가족을 주는 것도…… 다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말했다.

“하지만 좋은 일이라는 이유로 더 조심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싫어하면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제가 준 방을 떠나고 싶어하면요?”

“문을 확인해야 합니다.”

“제가 준 가족을 거부하면요?”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때는 장부의 항목이 바뀌어야 합니다.”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는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미소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가족에서 손님으로. 손님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먼 여행자로. 기록은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라이자는 손 안의 설탕을 조심스럽게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장부라면, 저도 만들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레이는 이름 없는 문패를 손끝으로 밀었다.

“그러니 빈칸을 남겨두십시오.”

라이자는 문패를 보았다.

빈칸.

무서운 자리.

하지만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직접 말할 수 있도록 비워둔 자리.

라이자는 작게 말했다.

“응. 남겨둘게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관 곁에서는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민다우가스.
벨라 여왕.
미하일라.
요안나.

왕관은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누구의 머리 위에도 없었다.

그저 식탁 위에 놓인 무거운 물건이었다.

민다우가스가 쓴 차를 마시고 낮게 웃었다.

“왕관 옆의 차답군.”

벨라 여왕은 수프를 조용히 저었다.

수프는 특별히 화려하지 않았다.

묽지 않았고, 뜨거웠고, 오래 끓인 맛이 났다.

“폐허 뒤의 식사는 대체로 이런 맛입니다.”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쓴가?”

벨라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잠시 식혔다.

“먼저 뜨겁고, 그다음 무겁습니다.”

민다우가스는 웃지 않았다.

그 대답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하일라는 진한 차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 차는 식으면 몹시 떫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식기 전에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 앞에는 작은 꿀 조각이 있었다.

요안나는 그것을 차에 넣지 않고, 손끝으로만 만지고 있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다음에는 네 질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아직 젊었다.

그러나 어린애처럼만 보이지는 않았다.

“제 질문이요?”

“그래.”

미하일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관을 쓴 자들은 너무 쉽게 대답을 만든다. 통치, 생존, 평화, 재건, 책임. 모두 필요한 말이지만, 때로는 질문을 밀어낸다.”

요안나는 꿀 조각을 보았다.

작고 밝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차 전체를 달게 만들 수는 없을지도 몰랐다.

벨라 여왕이 조용히 말했다.

“질문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요안나는 벨라를 보았다.

벨라는 말했다.

“나라가 무너진 뒤에도, 가장 먼저 남는 것은 질문입니다. 왜 무너졌는가. 누가 버려졌는가. 다음에는 어디에 성벽을 세워야 하는가.”

민다우가스가 덧붙였다.

“그리고 누가 거짓말을 했는가.”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요안나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꿀 조각을 차에 넣었다.

꿀은 천천히 녹았다.

곧장 단맛이 퍼지지는 않았다.

요안나는 말했다.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대답은 짧았지만, 요안나는 그것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죠니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잔 속의 김이 빙글 돌았다.

그 회전은 아주 잠깐, 무한한 윤회의 궤적처럼 보였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차도 식기 전에 마셔야 의미가 있지.”

라플리가 바로 말했다.

“뭐야, 갑자기 그럴듯한 말 하지 마.”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식은 차는 맛없으니까.”

라플리는 코웃음을 쳤다.

“역시 별 뜻 없었네.”

“뜻이 없진 않아. 맛없다는 뜻이지.”

푸리나가 멀리서 웃음을 터뜨렸다.

무거운 식탁 위로 작은 웃음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신학제 속에서, 그런 웃음은 실수처럼 보였지만 사실 필요했다.

여관은 진지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때로는 누군가의 시답잖은 말이, 너무 무거운 문장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빈 종이는 여전히 왕관 옆에 놓여 있었다.

아무도 거기에 답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기 전, 사람들은 하나씩 그 곁에 무언가를 남겼다.

푸리나는 접힌 작은 극장표를 놓았다.

“초대장이 되길 바라며.”

알토는 아무 문양도 없는 빈 도장을 놓았다.

“아직 찍지 않은 결재입니다.”

아레는 검은 실 한 가닥을 놓았다.

“끊어지지 말라고.”

아스트리트는 잔에 비치던 작은 별빛을 손끝으로 떠올려, 잎 모양으로 굳힌 뒤 내려놓았다.

“아직 자랄 수 있도록.”

라이자는 은꽃 설탕 조각 하나를 놓았다.

“달지만, 너무 많이 넣으면 안 되니까요.”

레플리카는 검은 빵 부스러기를 놓았다.

“먹을 수는 있어야 한다.”

루나리아는 달빛이 맺힌 찻숟가락을 종이 옆에 두었다.

“비추되, 강요하지 않도록.”

벨라 여왕은 손끝에 묻은 성벽 돌가루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다시 세워야 하니까.”

미하일라는 화살깃 하나를 놓았다.

“날아간 뒤에도 책임은 남습니다.”

요안나는 반쯤 녹은 꿀 조각의 작은 조각을 놓았다.

“질문이 너무 쓰기만 하지는 않도록.”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이름 없는 문패를 놓았다.

“아직 적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은 빈 종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아무것도 놓지 않았다.

대신 종이의 빈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수수께끼는 서둘러 풀지 않는 법이지요.”

그리고 모두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위에는 많은 것이 남았다.

왕관.
빈 종이.
극장표.
빈 도장.
검은 실.
별빛 잎.
은꽃 설탕.
검은 빵 부스러기.
달빛 숟가락.
성벽 돌가루.
화살깃.
꿀 조각.
이름 없는 문패.

답은 없었다.

그러나 질문은 조금 더 무거워졌다.

그날 밤, 빈 종이에는 아무 답도 적히지 않았다.

다만 그 곁에는 각자가 남긴 작은 물건들이 있었다.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들어두는 작은 추들이었다.

여관은 식탁을 치우지 않았다.

아직 다음 질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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