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35여관◆zAR16hM8he(83c9c67c)2026-05-14 (목) 23:23:21
《별 아래의 신학제》

막간 2 — 신탁이 되지 못한 대화

인간들이 떠난 뒤에도, 식탁은 치워지지 않았다.

왕관은 여전히 원탁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 곁에는 빈 종이가 있었다.

그리고 빈 종이 주변에는, 인간들이 남긴 작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접힌 극장표.
아무 문양도 새겨지지 않은 빈 도장.
검은 실 한 가닥.
별빛을 머금은 작은 잎.
은꽃 설탕 조각.
검은 빵 부스러기.
달빛이 맺힌 찻숟가락.
성벽 돌가루.
화살깃.
반쯤 녹은 꿀 조각.
이름 없는 문패.

답은 없었다.

그러나 질문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남아 있었기에, 밤은 곧바로 닫히지 않았다.

여관의 불빛이 한 번 낮아졌다.

인간들이 보던 식탁 위로, 다른 층위가 조용히 겹쳐졌다.

찻잔의 김은 문이 되었다.
극장표의 접힌 선은 무대의 막이 되었다.
빈 도장은 아직 찍히지 않은 계약의 여백이 되었다.
검은 실은 끊어지지 않은 길이 되었다.
별빛 잎은 숨 쉬는 첫 빛이 되었다.
은꽃 설탕은 손바닥 위의 작은 보상이 되었다.
빵 부스러기는 나눠 먹은 고통의 흔적이 되었다.
달빛 숟가락은 묶지 않는 손의 빛이 되었다.
성벽 돌가루는 다시 세워야 할 폐허가 되었다.
화살깃은 날아간 뒤에도 남는 책임이 되었다.
꿀 조각은 쓴 질문 옆에 놓인 작은 단맛이 되었다.
이름 없는 문패는 아직 부르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그곳에, 성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들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기도자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떤 예언자도 그 문장을 받아 적지 못했다.
어떤 왕도 그 말을 법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탁이 아니었다.

그저, 신탁이 되지 못한 대화였다.

가장 먼저 빈 의자 앞의 찻잔이 움직였다.

아무 손도 없었지만, 찻잔은 천천히 김을 올렸다.

여관의 성좌가 말했다.

“다들 오래 서 계셨군요. 우선 앉으시지요.”

그 목소리는 부드럽고 정중했다.

먼 길을 걸어온 손님에게 방을 내어주는 여관주인의 목소리였다.

“다만, 이 말이 아래에 닿으면 곤란하겠지요. 그분들은 오늘 스스로 해석해야 했으니까요.”

기록지의 여백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기록의 성좌는 웃고 있는 듯했다.

“꽤 많이 남겼네. 문장도, 물건도, 망설임도.”

빈 도장 위에 흰빛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도장은 끝내 찍히지 않았다.

기록의 성좌가 말했다.

“맞은 해석도 있고, 틀린 해석도 있고, 아직 검수해야 할 해석도 있어.”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틀린 해석도 기록입니까?”

“그럼. 틀린 해석도 기록이지. 다만 법전에 올리기 전에는 검수가 필요해.”

빈 종이 위에 잉크 한 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글자는 되지 않았다.

기록의 성좌는 그 여백을 보며 말했다.

“특히 왕관 옆에 놓인 문장은, 아직 쓰지 않는 편이 좋아.”

여관의 성좌가 차를 따랐다.

“답을 아끼는 것도 환대일 때가 있습니다.”

“기록에서도 그래. 너무 빨리 답을 쓰면, 다음 질문이 죽거든.”

그때 검은 빵 부스러기 옆에서, 작은 검은 불씨가 일어났다.

그 불씨는 사납게 타오르지 않았다.

조용했다.

그러나 꺼질 듯 약하지도 않았다.

작고 낮은 불씨 안에는, 쉽게 꺾이지 않는 심지가 있었다.

고통의 성좌가 말했다.

“그 아이는 잘 말해주었네요.”

목소리는 유했다.

하지만 그 유함은 흔들림이 아니었다.

“고통을 사랑하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견딜 수 없는 것을, 혼자 견디게 두지 말라고 했을 뿐이지요.”

검은 빵 부스러기가 조금 따뜻해졌다.

고통의 성좌는 이어 말했다.

“아픈 것은 죄가 아니에요. 견디지 못한 것도 죄가 아니고요. 다만 누군가의 아픔을 이용해 다른 이를 지배하려 한다면, 그때는 조용히 있지 않을 거예요.”

달빛이 찻숟가락 위에 내려앉았다.

인연의 성좌는 끊어진 실 끝을 묶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밝게 비추었다.

“혼자 두지 않는다는 말은, 때로 붙잡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네.”

고통의 성좌가 대답했다.

“이미 충분히 버틴 사람에게 더 버티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런 말은 너무 쉽게 잔혹해지지요.”

인연의 성좌가 낮게 웃었다.

“손은 붙잡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달빛은 실을 매듭짓지 않았다.

그러나 끊지도 않았다.

은꽃 설탕 조각이 작게 빛났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그 빛 속에서 말했다.

“품도 그래요. 돌려받으려고 여는 품은 품이 아니니까요.”

은꽃 설탕 옆의 작은 의자가 조금 더 따뜻해졌다.

“그 아이가 잘 말해주었네요. 사람이 된 은은 더 이상 재료가 아니라고.”

기록의 성좌가 가볍게 말했다.

“그 문장은 기록할 만했어.”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물었다.

“검수는요?”

“필요하지. ‘사람이 되었다’는 기준부터 큰 논쟁이고, 권리와 독립과 사망 처리까지 전부 따라오니까.”

“역시 장부를 먼저 보네요.”

“장부가 없으면 따뜻함도 누락된다잖아. 그 말은 나도 마음에 들었어.”

여관의 성좌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환대에도 장부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방을 받지 못했는지 모르면, 다음 손님도 문밖에서 밤을 새게 되니까요.”

그때 별빛 잎이 낮게 숨을 쉬었다.

그 빛은 오래된 별빛이었다.

멀지만 차갑지 않았다.

시원성좌가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별빛 잎은 조금씩 펴졌다.

“선택받았다는 말은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지요. 오히려 아직 더 자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표지석 너머의 어둠에서 먼지 같은 웃음이 흘렀다.

개척의 성좌였다.

아직 길이 없는 곳에 첫 발을 찍게 만드는 별.

“자라난 생명은 언젠가 처음 비춘 빛 바깥으로 걸어가겠지.”

시원성좌는 그 말을 막지 않았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뜻이라면요.”

“마음에 드는 별이군.”

개척의 성좌가 말했다.

“길 끝까지 정해두는 별은 답답하거든.”

기록의 성좌가 말했다.

“길 끝을 정하지 않는 건 좋은데, 길 위에서 누가 쓰러졌는지는 남겨야 해.”

개척의 성좌가 표지석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서 표지석이 있잖아.”

검은 실이 그 표지석에 느슨하게 감겼다.

그 실은 길을 막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길 위에서 사라졌을 때, 그 이름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남아 있었다.

개척의 성좌가 말했다.

“길은 앞에만 생기지 않아. 뒤돌아본 자리에도 생기지.”

여관의 성좌가 그 말을 들으며 차를 따랐다.

“그리고 길에는 여관도 필요합니다.”

“알고 있어.”

개척의 성좌가 웃었다.

“처음 걷는 자는 종종 그걸 잊지만.”

고통의 성좌가 부드럽게 말했다.

“강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은, 길이라기보다 상처일 때가 있어요.”

표지석 너머의 어둠이 잠시 낮아졌다.

개척의 성좌는 반박하지 않았다.

“맞아. 그래서 표지석이 필요하지. 그리고 때로는 돌아가는 길도.”

달빛이 그 말 위에 얹혔다.

인연의 성좌가 말했다.

“떠나는 일에도 예의가 필요합니다. 길을 연다는 말로 모든 손을 뿌리쳐도 되는 것은 아니지요.”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은꽃 조각을 따뜻하게 빛냈다.

“그리고 떠남이 누군가에게 상실이 되었다면, 그 상실을 보아야 해요.”

기록의 성좌가 빈 종이를 보았다.

“결국 다 기록으로 돌아오네.”

여관의 성좌가 조용히 웃었다.

“모든 것이 기록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은 차로 돌아옵니다.”

잠시, 성좌들의 층위에 아주 조용한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조차 인간 세계에는 닿지 않았다.

현실의 원탁에서는 찻잔 하나가 아주 조금 흔들렸을 뿐이었다.

곧 왕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방금 전 인간들이 남긴 가장 무거운 질문.

성좌의 뜻은 국가의 명령이 될 수 있는가.

그 질문 위에는 아무 글자도 쓰이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가 먼저 왕관을 보았다.

“왕관은 피곤한 물건이군요.”

기록의 성좌가 대답했다.

“기록량이 많지.”

고통의 성좌가 조용히 말했다.

“많은 아픔을 대신 말하려고 하지요. 때로는 너무 쉽게요.”

인연의 성좌가 덧붙였다.

“많은 손을 묶기도 하고요.”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말했다.

“많은 선물을 빚으로 바꾸기도 하지요.”

시원성좌가 낮게 빛났다.

“많은 생명을 숫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개척의 성좌가 표지석을 바라보았다.

“많은 정복을 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말들은 판결이 아니었다.

성좌가 인간에게 내리는 유죄 선고도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경고였다.

왕관 위에 내려앉은 별빛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기록의 성좌가 빈 종이 위에 다시 잉크를 떨어뜨렸다.

이번에도 글자는 되지 않았다.

“저 질문은 비워두는 게 좋겠어.”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기록하지 않습니까?”

“기록하지 않는 게 아니라, 답을 쓰지 않는 거야.”

기록의 성좌가 말했다.

“질문으로 남겨두는 것도 기록이지.”

레이튼이 남긴 질문의 흔적이 원탁 위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이것은 신의 뜻인가.
아니면 내가 신의 이름으로 쓰고 싶은 명령인가.

여관의 성좌는 그 문장을 보며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개척의 성좌가 웃었다.

“길을 여는 질문이지.”

시원성좌가 말했다.

“살아 있는 질문입니다.”

고통의 성좌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조금 아픈 질문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런 질문은 피하지 않는 편이 좋지요.”

인연의 성좌가 말했다.

“서로를 묶기 전에 물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은꽃을 따뜻하게 빛냈다.

“품을 열기 전에도요.”

기록의 성좌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법으로 쓰기 전에는 반드시.”

성좌들은 서로를 보았다.

아니, 어쩌면 보지 않았다.

그들은 빛과 불씨와 실과 찻잔과 여백과 표지석으로만 서로에게 닿았다.

성좌들은 인간의 해석을 판정하지 않았다.

‘맞다’고 하지 않았다.
‘틀렸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들이 남긴 질문 곁에 머물렀다.

그때 여관의 성좌가 빈 의자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이제 그분들이 돌아오기 전에 정리해야겠군요.”

기록의 성좌가 말했다.

“치워버리려고?”

“아닙니다.”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식탁은 치우되, 질문은 남겨두어야지요.”

그 말에 찻잔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도 완전히 식지 않았다.

기록지는 접혔다.

그러나 빈 종이는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불씨는 작아졌다.

그러나 꺼지지 않았다.

달빛은 물러났다.

그러나 실을 끊지 않았다.

은꽃은 빛을 낮추었다.

그러나 의자는 식지 않았다.

창성의 빛은 하늘로 돌아갔다.

그러나 작은 숨 하나는 더 고르게 이어졌다.

표지석 너머의 어둠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나 첫 발을 내디딜 만큼의 자리만은 남았다.

그리고 왕관은 그대로 있었다.

왕관 옆에는 빈 종이가 있었다.

아무 답도 쓰이지 않은 종이.

그 위에, 성좌들의 대화는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신탁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인간들이 원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다만 이상하게도 찻잔은 완전히 식지 않았고, 빈 종이는 젖거나 찢기지 않았으며, 검은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은꽃 옆의 의자는 조금 따뜻했고, 표지석 위에는 밤새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들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알토는 빈 종이를 검수하듯 들여다보았다.

레이튼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여백을 보고,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신탁 없음. 질문 보존됨.》

그리고 여관은, 아무 말 없이 다음 차를 준비했다.
(최대 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