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4여관◆zAR16hM8he(55e5d5d9)2026-05-08 (금) 17:07:18
엽편 — 세 개의 길
성벽 아래에는 불빛이 있었다.
처음에는 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의 별이 아니었다.
초원에서 온 군대의 야영불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 불빛들은 계곡 아래에서 조금씩 늘어났고, 마치 땅에 떨어진 별자리가 성벽을 포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융은 그 불빛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밤만 보이지 않았다.
성벽이 아직 버티는 밤.
성벽이 불타는 밤.
성문이 열리는 밤.
누군가 배신하는 밤.
누군가 마지막 순간 배신하지 않는 밤.
푸리나의 깃발이 무너지는 밤.
죠니의 말이 돌아오지 않는 밤.
리투아니아의 유성이 적진 가운데 떨어지는 밤.
수많은 가능성이 어둠 속에서 겹쳤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다른 가능성에서는, 저 불빛이 지금보다 적었소.”
성벽 위에 서 있던 죠니 죠스타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줄이면 되지.”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난간에 기대 있었다. 창은 옆에 세워져 있었고, 아래 마구간 쪽에서는 그의 말이 희미하게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늘 그랬다.
하융이 수십 개의 길을 보면, 죠니는 그중 지금 밟을 수 있는 돌 하나를 보았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오.”
“간단한 일만 하는 사람 없어.”
죠니는 계곡 아래를 보았다.
“어려워도 지금 해야 하면, 지금 하는 거지.”
그때 뒤에서 낮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말이야. 젊은 기사답게 짧고 뜨겁군.”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성벽 계단을 올라온 것은 아스테르다스였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유성.
민다우가스의 망치.
예순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그는 이상하게도 늙었다기보다 오래 타오른 별처럼 보였다. 어깨는 넓고, 걸음은 느긋했으며, 웃는 얼굴에는 전장의 피로보다 이상한 여유가 먼저 있었다.
그는 손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죠니가 물었다.
“그건 뭐야?”
“말린 열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전투 전야에 너무 철학만 먹으면 속이 비어. 별도 불타려면 장작이 필요하지.”
죠니는 주머니에서 열매 하나를 받았다.
“고맙네.”
하융도 하나를 받았다.
“감사하오.”
아스테르다스는 성벽 난간에 기대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몽골의 불빛인가.”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스테르다스는 한동안 그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있으면 별인데, 땅에 있으면 위협이 되는군. 위치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지는 법이지.”
죠니가 말했다.
“별 비유 좋아하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좋아하지. 사람은 자기 안에 익숙한 하늘 하나쯤 품고 살아야 해. 안 그러면 밤이 너무 넓거든.”
하융은 아스테르다스를 조용히 보았다.
“그대는 저 불빛을 보고도 두렵지 않소?”
“두렵지.”
아스테르다스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두려움이 없으면 방향을 잘못 잡기 쉬워. 유성도 떨어질 곳을 알아야 빛나는 법이야.”
죠니가 말했다.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편해 보이는데.”
“나는 두려움을 싫어하지 않아. 두려움도 사람을 움직이는 마음이니까.”
아스테르다스는 손가락으로 성벽 아래 어둠을 가리켰다.
“민다우가스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저 불빛은 병력 수, 보급량, 기동 가능성, 공격 개시 시각의 자료라고.”
죠니가 짧게 물었다.
“틀려?”
“틀리지 않아.”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지. 저 아래에는 잠 못 드는 병사도 있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아이도 있고, 우리를 죽여야 살아남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거야. 자료로 보면 판이 보이고, 마음으로 보면 사람이 보이지.”
하융은 낮게 말했다.
“사람을 너무 보면, 검을 들기 어렵지 않소?”
“그래서 훈련하는 거야.”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사람을 보면서도, 필요한 순간 떨어질 수 있도록.”
죠니는 말린 열매를 씹었다.
“너희 대공은 사람을 부품으로 본다며.”
아스테르다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소문이 빠르군.”
“푸리나가 말했어.”
“아, 그러면 조금 더 극적으로 전달됐겠군.”
“아마도.”
아스테르다스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오래된 이해가 있었다.
“민다우가스는 틀린 사람이 아니야. 리투아니아가 살아남으려면 구조가 필요해. 감정만으로 숲은 지킬 수 없고, 복수만으로 아이들을 먹일 수도 없지.”
그는 계곡 아래를 보았다.
“하지만 구조만으로 사람은 움직이지 않아. 검은 모두 베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무엇을 베는지는 쥔 사람이 정하는 거야.”
하융이 말했다.
“그대는 자유롭게 선택했다 들었소. 민다우가스의 곁에 떨어지기로.”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어째서요?”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낮게 깔려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민다우가스는 차가운 사람이었어. 자기 자신도, 자기 피도, 자기 이름도 도구처럼 보았지. 처음엔 그게 싫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다르오?”
“지금도 싫어.”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하지만 이해한다. 그는 자기를 아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리투아니아가 죽지 않게 하려고, 자기 자신을 먼저 장작으로 던진 거지.”
죠니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너도 같이 떨어지기로 했고.”
“맞아.”
아스테르다스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쇳소리가 있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야. 혈통 때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도 아니야. 내가 정했어. 내 유성이 떨어질 곳은 그 사람 옆이라고.”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의 앞에 수많은 아스테르다스가 스쳤다.
민다우가스를 떠난 아스테르다스.
다른 대공을 섬긴 아스테르다스.
리투아니아를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온 아스테르다스.
전장에서 부서진 아스테르다스.
살아남았으나 평생 후회하는 아스테르다스.
웃으며 떨어지는 아스테르다스.
하융은 눈을 떴다.
“그대가 다른 길을 택한 가능성도 많소.”
“그렇겠지.”
“더 평온한 길도 있었소.”
“그랬겠지.”
“더 오래 사는 길도 있었소.”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하융, 별이 오래 산다고 모두 밝은 건 아니야.”
하융은 침묵했다.
“나는 오래 사는 것보다, 내가 고른 방향으로 떨어지는 게 좋아.”
죠니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아스테르다스가 죠니를 보았다.
“너는?”
“뭐가?”
“네 길.”
죠니는 난간에서 몸을 떼고 창을 집었다.
달빛 없는 밤에도 창끝은 희미하게 빛났다.
“멀리 돌아가는 길.”
“그건 제목 같군.”
“칭호야.”
“좋네. 왜 멀리 돌아가지?”
죠니는 창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날카로운 창끝이 작은 원을 그렸다.
“직선이 늘 빠른 건 아니니까.”
그는 성벽 아래 길을 보았다.
“똑바로 들이받으면 부서지는 길이 있어. 한 번 물러나야 이어지는 길도 있고, 돌아야 흐름이 끊기지 않는 길도 있어. 말발굽도, 창도, 사람도.”
하융이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복된다고 무의미한 건 아니야.”
그는 창을 멈췄다.
창끝이 계곡 아래 불빛 하나를 가리켰다.
“매번 같은 식으로 달리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하나가 맞아떨어져. 말의 호흡, 땅의 기울기, 손의 힘, 죽음이 가까이 오는 느낌. 그때 한순간이 빛나.”
아스테르다스가 감탄한 듯 말했다.
“찰나인가.”
“응.”
죠니는 짧게 답했다.
“나는 그걸 믿어.”
하융은 낮게 말했다.
“이야기가 아니어도?”
“이야기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어.”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지금 내가 선택하는 건 진짜니까.”
성벽 위의 바람이 세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하융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지금 선택하는 것은 진짜다.
하융에게 현실은 늘 얇았다.
너무 많은 가능성이 겹치면, 지금 이 세계가 한 장의 종이처럼 가벼워졌다.
조금만 접으면 다른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조금만 흔들면 다른 결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죠니는 그 얇은 종이 위에 말발굽을 찍었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종이 위에 낙하점을 정했다.
하융은 조용히 손을 난간에 올렸다.
차가운 돌의 감각이 손바닥에 닿았다.
“나는 가끔…… 선택하지 않은 길들이 더 선명하오.”
죠니도, 아스테르다스도 끼어들지 않았다.
하융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너지지 않은 성벽. 죽지 않은 병사. 배신하지 않은 신하. 평화로웠던 고려. 서쪽으로 오지 않은 나. 푸리나 님을 만나지 않은 나.”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 가능성들이 너무 많아지면, 지금 이 현실이 잘못된 답처럼 느껴질 때가 있소.”
아스테르다스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지금은?”
하융은 성벽 아래 불빛을 보았다.
그가 본 가능성 중 어떤 세계에서는, 이 성벽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어떤 세계에서는, 죠니가 내일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세계에서는, 아스테르다스의 낙하점이 적진이 아니라 공동묘지였다.
어떤 세계에서는, 하융 자신이 도망쳤다.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아직 세 사람이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말린 열매를 씹고.
바람을 맞고.
저 아래의 불빛을 보며.
아직 닫히지 않은 밤을 나누고 있었다.
하융은 말했다.
“지금은…… 이 현실을 택하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아스테르다스는 하융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좋은 수야.”
“수요?”
“장기든 전쟁이든 삶이든, 결국 손은 한 번에 하나의 말만 움직일 수 있잖아.”
하융은 잠시 멈췄다가 작게 웃었다.
“그 말은 전에 내가 들었던 말과 닮았소.”
“좋은 말은 여러 길을 돌아다니는 법이지.”
아스테르다스는 그렇게 말하고, 계곡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어둠 저편에서 뿔나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몽골 진영의 불빛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죠니는 창을 들었다.
“오네.”
하융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몇몇 가능성에서, 그들은 새벽까지 기다리지 않소.”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성급한 별들이군.”
죠니가 말했다.
“별 아니야.”
“그래. 저건 불씨지.”
아스테르다스는 난간 위에 한 발을 올렸다.
그레이가 있었다면 당장 내려오라고 했을 자세였다.
푸리나가 있었다면 “멋있어!”라고 했을 자세이기도 했다.
하융이 조용히 말했다.
“떨어질 생각이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모든 방향은 내가 정하면 낙하야.”
그의 발밑에 보이지 않는 낙점이 생기는 듯했다.
허공이 잠깐 단단해졌다.
아스테르다스는 성벽 아래 어둠을 보며 말했다.
“죠니. 너는 돌아서 들어가나?”
죠니가 말 아래쪽을 보았다.
“응. 직선은 몽골이 좋아하잖아.”
“하융.”
“말하시오.”
“너는?”
하융은 눈앞에 열린 수많은 창을 보았다.
그중 하나를 닫았다.
또 하나를 닫았다.
살아남는 세계만 찾지 않았다.
죽는 세계만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이 현실에서, 가장 얇게 빛나는 길 하나를 보았다.
“나는 비껴간 길을 잠시 열겠소. 그대들이 닿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죠니가 말했다.
“길면 안 돼.”
“짧게 말하겠소.”
하융은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죽지 않은 가능성을 겹치겠소.”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르다스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 나는 그 위로 떨어지지.”
성벽 아래에서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횃불이 켜졌다.
말이 울었다.
누군가 갑옷끈을 조였다.
누군가 성호를 그었다.
누군가 가족의 이름을 불렀다.
푸리나의 깃발은 아직 어둠 속에서 젖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표식은 아스테르다스의 어깨에서 낮게 빛났다.
죠니의 창끝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선이 있었다.
하융의 눈에는 아직 죽지 않은 가능성이 있었다.
아스테르다스가 마지막 열매 하나를 입에 넣었다.
“전투 전야가 끝났군.”
죠니가 짧게 말했다.
“응.”
하융은 계곡 아래를 보며 말했다.
“이제 한 길만 남았소.”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는 웃었다.
“길은 셋이야.”
죠니가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죠니의 길. 지금 선택하는 찰나.”
다음 손가락.
“하융의 길. 선택되지 않았지만 아직 빛나는 가능성.”
마지막 손가락.
“내 길. 내가 정한 곳으로 떨어지는 유성.”
그는 계곡 아래 움직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세 길이 같은 곳에서 만나면, 그게 돌파구가 되는 거지.”
죠니는 창을 어깨에 걸쳤다.
“말은 많지만, 나쁘지 않네.”
하융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가능성이오.”
아스테르다스는 성벽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죠니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은 이미 회전의 박자를 타고 있었다.
하융은 성벽의 그림자 사이로 걸었다.
그의 뒤로 보이지 않는 창문들이 하나씩 열리고 닫혔다.
아스테르다스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잠시 멈춰, 다시 밤하늘을 보았다.
구름 사이로 별 하나가 보였다.
아주 작고, 희미했지만, 분명히 있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오늘도 떨어질 만한 밤이군.”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 세 개의 길이 성문 앞에서 다시 만났다.
하나는 나선으로 돌고,
하나는 비껴간 가능성을 열고,
하나는 스스로 정한 낙하지점으로 떨어졌다.
그날 밤의 전투가 어떤 이름으로 기록될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승리인지.
후퇴인지.
기적의 전초전인지.
그저 더 큰 전쟁의 작은 주석인지.
하지만 하융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현실에서는, 세 사람이 도망치지 않았다.
죠니는 지금을 선택했고,
하융은 이 현실을 택했고,
아스테르다스는 웃으며 떨어졌다.
그리고 그 정도면, 아직 막은 닫히지 않은 셈이었다.
성벽 아래에는 불빛이 있었다.
처음에는 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의 별이 아니었다.
초원에서 온 군대의 야영불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 불빛들은 계곡 아래에서 조금씩 늘어났고, 마치 땅에 떨어진 별자리가 성벽을 포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융은 그 불빛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밤만 보이지 않았다.
성벽이 아직 버티는 밤.
성벽이 불타는 밤.
성문이 열리는 밤.
누군가 배신하는 밤.
누군가 마지막 순간 배신하지 않는 밤.
푸리나의 깃발이 무너지는 밤.
죠니의 말이 돌아오지 않는 밤.
리투아니아의 유성이 적진 가운데 떨어지는 밤.
수많은 가능성이 어둠 속에서 겹쳤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다른 가능성에서는, 저 불빛이 지금보다 적었소.”
성벽 위에 서 있던 죠니 죠스타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줄이면 되지.”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난간에 기대 있었다. 창은 옆에 세워져 있었고, 아래 마구간 쪽에서는 그의 말이 희미하게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늘 그랬다.
하융이 수십 개의 길을 보면, 죠니는 그중 지금 밟을 수 있는 돌 하나를 보았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오.”
“간단한 일만 하는 사람 없어.”
죠니는 계곡 아래를 보았다.
“어려워도 지금 해야 하면, 지금 하는 거지.”
그때 뒤에서 낮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말이야. 젊은 기사답게 짧고 뜨겁군.”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성벽 계단을 올라온 것은 아스테르다스였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유성.
민다우가스의 망치.
예순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그는 이상하게도 늙었다기보다 오래 타오른 별처럼 보였다. 어깨는 넓고, 걸음은 느긋했으며, 웃는 얼굴에는 전장의 피로보다 이상한 여유가 먼저 있었다.
그는 손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죠니가 물었다.
“그건 뭐야?”
“말린 열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전투 전야에 너무 철학만 먹으면 속이 비어. 별도 불타려면 장작이 필요하지.”
죠니는 주머니에서 열매 하나를 받았다.
“고맙네.”
하융도 하나를 받았다.
“감사하오.”
아스테르다스는 성벽 난간에 기대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몽골의 불빛인가.”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스테르다스는 한동안 그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있으면 별인데, 땅에 있으면 위협이 되는군. 위치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지는 법이지.”
죠니가 말했다.
“별 비유 좋아하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좋아하지. 사람은 자기 안에 익숙한 하늘 하나쯤 품고 살아야 해. 안 그러면 밤이 너무 넓거든.”
하융은 아스테르다스를 조용히 보았다.
“그대는 저 불빛을 보고도 두렵지 않소?”
“두렵지.”
아스테르다스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두려움이 없으면 방향을 잘못 잡기 쉬워. 유성도 떨어질 곳을 알아야 빛나는 법이야.”
죠니가 말했다.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편해 보이는데.”
“나는 두려움을 싫어하지 않아. 두려움도 사람을 움직이는 마음이니까.”
아스테르다스는 손가락으로 성벽 아래 어둠을 가리켰다.
“민다우가스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저 불빛은 병력 수, 보급량, 기동 가능성, 공격 개시 시각의 자료라고.”
죠니가 짧게 물었다.
“틀려?”
“틀리지 않아.”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지. 저 아래에는 잠 못 드는 병사도 있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아이도 있고, 우리를 죽여야 살아남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거야. 자료로 보면 판이 보이고, 마음으로 보면 사람이 보이지.”
하융은 낮게 말했다.
“사람을 너무 보면, 검을 들기 어렵지 않소?”
“그래서 훈련하는 거야.”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사람을 보면서도, 필요한 순간 떨어질 수 있도록.”
죠니는 말린 열매를 씹었다.
“너희 대공은 사람을 부품으로 본다며.”
아스테르다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소문이 빠르군.”
“푸리나가 말했어.”
“아, 그러면 조금 더 극적으로 전달됐겠군.”
“아마도.”
아스테르다스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오래된 이해가 있었다.
“민다우가스는 틀린 사람이 아니야. 리투아니아가 살아남으려면 구조가 필요해. 감정만으로 숲은 지킬 수 없고, 복수만으로 아이들을 먹일 수도 없지.”
그는 계곡 아래를 보았다.
“하지만 구조만으로 사람은 움직이지 않아. 검은 모두 베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무엇을 베는지는 쥔 사람이 정하는 거야.”
하융이 말했다.
“그대는 자유롭게 선택했다 들었소. 민다우가스의 곁에 떨어지기로.”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어째서요?”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낮게 깔려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민다우가스는 차가운 사람이었어. 자기 자신도, 자기 피도, 자기 이름도 도구처럼 보았지. 처음엔 그게 싫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다르오?”
“지금도 싫어.”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하지만 이해한다. 그는 자기를 아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리투아니아가 죽지 않게 하려고, 자기 자신을 먼저 장작으로 던진 거지.”
죠니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너도 같이 떨어지기로 했고.”
“맞아.”
아스테르다스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쇳소리가 있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야. 혈통 때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도 아니야. 내가 정했어. 내 유성이 떨어질 곳은 그 사람 옆이라고.”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의 앞에 수많은 아스테르다스가 스쳤다.
민다우가스를 떠난 아스테르다스.
다른 대공을 섬긴 아스테르다스.
리투아니아를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온 아스테르다스.
전장에서 부서진 아스테르다스.
살아남았으나 평생 후회하는 아스테르다스.
웃으며 떨어지는 아스테르다스.
하융은 눈을 떴다.
“그대가 다른 길을 택한 가능성도 많소.”
“그렇겠지.”
“더 평온한 길도 있었소.”
“그랬겠지.”
“더 오래 사는 길도 있었소.”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하융, 별이 오래 산다고 모두 밝은 건 아니야.”
하융은 침묵했다.
“나는 오래 사는 것보다, 내가 고른 방향으로 떨어지는 게 좋아.”
죠니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아스테르다스가 죠니를 보았다.
“너는?”
“뭐가?”
“네 길.”
죠니는 난간에서 몸을 떼고 창을 집었다.
달빛 없는 밤에도 창끝은 희미하게 빛났다.
“멀리 돌아가는 길.”
“그건 제목 같군.”
“칭호야.”
“좋네. 왜 멀리 돌아가지?”
죠니는 창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날카로운 창끝이 작은 원을 그렸다.
“직선이 늘 빠른 건 아니니까.”
그는 성벽 아래 길을 보았다.
“똑바로 들이받으면 부서지는 길이 있어. 한 번 물러나야 이어지는 길도 있고, 돌아야 흐름이 끊기지 않는 길도 있어. 말발굽도, 창도, 사람도.”
하융이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복된다고 무의미한 건 아니야.”
그는 창을 멈췄다.
창끝이 계곡 아래 불빛 하나를 가리켰다.
“매번 같은 식으로 달리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하나가 맞아떨어져. 말의 호흡, 땅의 기울기, 손의 힘, 죽음이 가까이 오는 느낌. 그때 한순간이 빛나.”
아스테르다스가 감탄한 듯 말했다.
“찰나인가.”
“응.”
죠니는 짧게 답했다.
“나는 그걸 믿어.”
하융은 낮게 말했다.
“이야기가 아니어도?”
“이야기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어.”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지금 내가 선택하는 건 진짜니까.”
성벽 위의 바람이 세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하융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지금 선택하는 것은 진짜다.
하융에게 현실은 늘 얇았다.
너무 많은 가능성이 겹치면, 지금 이 세계가 한 장의 종이처럼 가벼워졌다.
조금만 접으면 다른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조금만 흔들면 다른 결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죠니는 그 얇은 종이 위에 말발굽을 찍었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종이 위에 낙하점을 정했다.
하융은 조용히 손을 난간에 올렸다.
차가운 돌의 감각이 손바닥에 닿았다.
“나는 가끔…… 선택하지 않은 길들이 더 선명하오.”
죠니도, 아스테르다스도 끼어들지 않았다.
하융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너지지 않은 성벽. 죽지 않은 병사. 배신하지 않은 신하. 평화로웠던 고려. 서쪽으로 오지 않은 나. 푸리나 님을 만나지 않은 나.”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 가능성들이 너무 많아지면, 지금 이 현실이 잘못된 답처럼 느껴질 때가 있소.”
아스테르다스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지금은?”
하융은 성벽 아래 불빛을 보았다.
그가 본 가능성 중 어떤 세계에서는, 이 성벽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어떤 세계에서는, 죠니가 내일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세계에서는, 아스테르다스의 낙하점이 적진이 아니라 공동묘지였다.
어떤 세계에서는, 하융 자신이 도망쳤다.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아직 세 사람이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말린 열매를 씹고.
바람을 맞고.
저 아래의 불빛을 보며.
아직 닫히지 않은 밤을 나누고 있었다.
하융은 말했다.
“지금은…… 이 현실을 택하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아스테르다스는 하융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좋은 수야.”
“수요?”
“장기든 전쟁이든 삶이든, 결국 손은 한 번에 하나의 말만 움직일 수 있잖아.”
하융은 잠시 멈췄다가 작게 웃었다.
“그 말은 전에 내가 들었던 말과 닮았소.”
“좋은 말은 여러 길을 돌아다니는 법이지.”
아스테르다스는 그렇게 말하고, 계곡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어둠 저편에서 뿔나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몽골 진영의 불빛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죠니는 창을 들었다.
“오네.”
하융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몇몇 가능성에서, 그들은 새벽까지 기다리지 않소.”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성급한 별들이군.”
죠니가 말했다.
“별 아니야.”
“그래. 저건 불씨지.”
아스테르다스는 난간 위에 한 발을 올렸다.
그레이가 있었다면 당장 내려오라고 했을 자세였다.
푸리나가 있었다면 “멋있어!”라고 했을 자세이기도 했다.
하융이 조용히 말했다.
“떨어질 생각이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모든 방향은 내가 정하면 낙하야.”
그의 발밑에 보이지 않는 낙점이 생기는 듯했다.
허공이 잠깐 단단해졌다.
아스테르다스는 성벽 아래 어둠을 보며 말했다.
“죠니. 너는 돌아서 들어가나?”
죠니가 말 아래쪽을 보았다.
“응. 직선은 몽골이 좋아하잖아.”
“하융.”
“말하시오.”
“너는?”
하융은 눈앞에 열린 수많은 창을 보았다.
그중 하나를 닫았다.
또 하나를 닫았다.
살아남는 세계만 찾지 않았다.
죽는 세계만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이 현실에서, 가장 얇게 빛나는 길 하나를 보았다.
“나는 비껴간 길을 잠시 열겠소. 그대들이 닿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죠니가 말했다.
“길면 안 돼.”
“짧게 말하겠소.”
하융은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죽지 않은 가능성을 겹치겠소.”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르다스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 나는 그 위로 떨어지지.”
성벽 아래에서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횃불이 켜졌다.
말이 울었다.
누군가 갑옷끈을 조였다.
누군가 성호를 그었다.
누군가 가족의 이름을 불렀다.
푸리나의 깃발은 아직 어둠 속에서 젖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표식은 아스테르다스의 어깨에서 낮게 빛났다.
죠니의 창끝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선이 있었다.
하융의 눈에는 아직 죽지 않은 가능성이 있었다.
아스테르다스가 마지막 열매 하나를 입에 넣었다.
“전투 전야가 끝났군.”
죠니가 짧게 말했다.
“응.”
하융은 계곡 아래를 보며 말했다.
“이제 한 길만 남았소.”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는 웃었다.
“길은 셋이야.”
죠니가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죠니의 길. 지금 선택하는 찰나.”
다음 손가락.
“하융의 길. 선택되지 않았지만 아직 빛나는 가능성.”
마지막 손가락.
“내 길. 내가 정한 곳으로 떨어지는 유성.”
그는 계곡 아래 움직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세 길이 같은 곳에서 만나면, 그게 돌파구가 되는 거지.”
죠니는 창을 어깨에 걸쳤다.
“말은 많지만, 나쁘지 않네.”
하융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가능성이오.”
아스테르다스는 성벽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죠니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은 이미 회전의 박자를 타고 있었다.
하융은 성벽의 그림자 사이로 걸었다.
그의 뒤로 보이지 않는 창문들이 하나씩 열리고 닫혔다.
아스테르다스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잠시 멈춰, 다시 밤하늘을 보았다.
구름 사이로 별 하나가 보였다.
아주 작고, 희미했지만, 분명히 있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오늘도 떨어질 만한 밤이군.”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 세 개의 길이 성문 앞에서 다시 만났다.
하나는 나선으로 돌고,
하나는 비껴간 가능성을 열고,
하나는 스스로 정한 낙하지점으로 떨어졌다.
그날 밤의 전투가 어떤 이름으로 기록될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승리인지.
후퇴인지.
기적의 전초전인지.
그저 더 큰 전쟁의 작은 주석인지.
하지만 하융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현실에서는, 세 사람이 도망치지 않았다.
죠니는 지금을 선택했고,
하융은 이 현실을 택했고,
아스테르다스는 웃으며 떨어졌다.
그리고 그 정도면, 아직 막은 닫히지 않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