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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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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작성자 여관◆zAR16hM8he작성일 2026-05-08 (금) 01:04:15갱신일 2026-05-13 (수) 19:12:03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셔우드 숲에 떨어진 유성》

프롤로그 — 국제 연극제의 다음 작품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극장은 그날, 숲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숲이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기둥마다 초록색 천이 감겼고, 천장에는 종이 잎사귀가 매달렸다. 무대 뒤에는 거대한 참나무 그림이 세워졌고, 그 가지 사이로 가짜 새들이 흔들렸다. 바닥에는 마른 낙엽이 깔렸는데, 그것이 너무 진짜 같아서 그레이는 입장하자마자 한 번 멈춰 섰다.

“화재 위험이 있습니다.”

푸리나 헤툼은 무대 위에서 탬버린을 흔들고 있었다.

“없어!”

“있습니다.”

“오늘은 숲이야!”

“숲도 불탑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숲이 불타지 않는 숲으로 하자.”

그레이는 이미 작은 수첩을 꺼내고 있었다.

“그럼 난연 처리를 확인하겠습니다.”

“왜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는 거야?!”

“폐하께서 숲을 실내에 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죠니 죠스타는 객석 가장자리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늘 극 중에서 의적단의 일원이 될 예정이라, 평소보다 조금 가벼운 가죽 조끼와 숲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무대를 한 번 보고, 가짜 나무를 보고, 천장에 매달린 종이 새들을 보았다.

“폐하.”

“응?”

“이건 숲이라기보단 사고 예고야.”

푸리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재밌는 사고지!”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부정하기 어렵네.”

객석에는 각국의 군주와 가신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니케아의 미하일라는 오늘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한쪽에 놓인 활쏘기 대회용 과녁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 진지해서, 푸리나는 서둘러 무대 담당에게 속삭였다.

“저 과녁, 황제 폐하가 쏘면 버틸 수 있어?”

무대 담당은 작게 떨었다.

“나무입니다.”

“그건 나도 보여.”

“나무라서 안 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3막 전에 ‘황제칙령급 사격 금지’ 팻말 붙여.”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차분히 앉아 있었다.

요안나는 그 옆에서 무대 장식의 새를 보며 작게 웃고 있었다. 게오르기아는 이미 이 연극이 중세적 숲 전승과 정치 풍자의 결합이라는 식으로 정리하고 있었고, 슈샤니크는 아무 말 없이 무대의 가짜 세금 마차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슈샤니크의 시선이 마차에 닿은 것을 보자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저분은 지금 장부를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죠니가 대답했다.

“그럼 너랑 같은 편 아냐?”

“아닙니다. 저는 무대 안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장부잖아.”

그레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은 객석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숲 장식을 보고 느릿하게 웃었다.

“살아 있는 숲도, 무대 위의 숲도, 결국 누군가 쉬어가는 그늘이 되면 좋겠네요.”

그 말에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맞아! 오늘의 숲은 쉬어가는 숲! 털어가는 숲! 노래하는 숲!”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털어가는 숲은 빼주십시오.”

보헤미아의 라이자는 벌써 무대 뒤에서 은빛 단추와 초록 망토 장식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극에서 메리언 역이자 의적단의 장비 담당이었다.

“푸리나 님! 이 은꽃 브로치, 로빈 후드 망토에 달면 너무 예쁠 것 같아요!”

“좋아! 달자!”

“무게는 별로 안 나가요!”

그레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대 의상 총중량도 확인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브로치를 품에 안고 작게 웃었다.

“그레이 님, 너무 성실하세요.”

“죄송합니다.”

“칭찬이었어요.”

“그럼 더 죄송합니다.”

리보니아의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는 의적단의 리틀 존 역을 맡았다. 그녀는 숲속 의적단이라는 설정을 듣고도 완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의적단이라도 기본 대열은 필요합니다. 매복조, 우회조, 포위망 절단조, 후송조를 나눠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무대 뒤 나무 세트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 숲에서 뛰어내리고, 휘파람 불고, 세금 마차 털면 되는 거 아니었어?”

아스트리트는 정색했다.

“그 모든 것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뛰어내리는 훈련부터 할까?”

“안전 줄을 매고 하세요.”

“그건 유성이 아니잖아.”

“다친 유성은 곤란합니다.”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쪽은 이미 기사단이 됐네.”

푸리나는 탬버린을 한 번 더 흔들었다.

“좋아! 그러면 오늘의 제목!”

무대 위 막이 열리며, 커다란 나무 간판이 내려왔다.

거기에는 푸리나의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셔우드 숲에 떨어진 유성》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부제가 붙어 있었다.

— 로빈 후드와 너무 성실한 보안관 —

그레이는 부제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폐하.”

“응?”

“저 보안관이 저입니까?”

푸리나는 눈을 피했다.

“아마도?”

“역할 설명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즉흥극!”

“그 말로 모든 절차가 생략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활짝 웃었다.

“오늘부터 생략돼!”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 제가 절차를 새로 만들겠습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며 말했다.

“네가 이길 것 같은데.”

“이겨야 하는 일입니까?”

“아니. 근데 폐하랑 싸우면 보통 그렇게 돼.”

그때 객석의 한쪽에서 낮고 넓은 웃음이 들렸다.

“하하.”

리투아니아의 대공, 민다우가스였다.

그는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자세는 편해 보였지만 눈은 무대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아스테르다스가 올라가 있는 나무 세트, 세금 마차, 숲길의 구조, 출입구, 가짜 병사들의 대기 위치를 차례로 훑었다.

“숲속 도둑놀이인가. 좋다.”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대공! 나 로빈 후드야!”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들었다.

“내 망치가 오늘은 숲의 도둑이 되었군.”

그 말투는 호방했다. 마치 전장의 왕이 술잔을 들고 웃는 것처럼 넓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차가웠다.

“마음껏 날뛰어라. 연극이라면 말이다. 현실에서 같은 짓을 했다면, 먼저 보급로와 처벌 기준부터 물었을 것이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걱정 마! 나쁜 세금만 털 거니까!”

민다우가스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그 말이 제일 위험하다.”

푸리나는 기뻐하며 끼어들었다.

“오늘의 주제 나왔다! 나쁜 세금!”

그레이는 수첩을 펼쳤다.

“그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레이튼이 객석 앞줄에서 차를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훌륭한 수수께끼군요. 나쁜 세금이란 무엇인가.”

죠니가 대답했다.

“보통은 내는 사람이 그렇게 부르지.”

레이튼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더 물어봐야겠지요.”

아스테르다스는 나무 위에서 활을 빙글 돌렸다.

“좋아! 그럼 물어보고 털자!”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묻는 것과 터는 것 사이에는 조사, 증거 수집, 권한 확인, 환수 절차가 필요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나 로빈 후드인데?”

“그러니까 더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양팔을 크게 펼쳤다.

“아아, 훌륭해! 자유로운 의적과 너무 성실한 보안관! 숲과 장부! 활과 영수증! 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비!”

죠니는 가만히 말했다.

“아름다운지는 모르겠고, 길어질 건 알겠어.”

무대 뒤에서 징이 울렸다.

첫 장면을 알리는 소리였다.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자, 배우들이여! 오늘의 숲은 전장이 아니야. 오늘의 숲은 웃음과 추격과 노래의 무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더 연극적으로 높아졌다.

“왕관을 쓴 자도, 장부를 든 자도, 활을 든 자도, 오늘만큼은 나뭇잎 아래에서 자기 역할을 바꾸어보자. 세금 마차는 달리고, 화살은 날고, 보안관은 쫓고, 의적은 웃는다!”

그녀가 객석을 향해 고개 숙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따뜻한 수프를 먹는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식자재 출처만 확인되면요.”

푸리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럼 개막!”

그녀가 탬버린을 흔들었다.

맑은 소리가 숲 모양의 극장을 가로질렀다.

아스테르다스는 나무 세트 위에서 망토를 펄럭였다. 청흑빛 조명이 그의 뒤에서 번졌다. 그는 정말로 숲 위에 걸린 작은 유성처럼 보였다.

민다우가스는 그것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떨어질 곳은 스스로 정해라, 아스테르다스.”

아스테르다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미 정했어!”

죠니가 무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뛰어내릴 거면 착지는 보고 해.”

“봤어!”

“그 말도 위험한데.”

그레이는 결국 무대 아래에 들것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푸리나는 그것까지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완벽해.”

“뭐가 완벽합니까?”

“모두 자기 역할을 하고 있잖아!”

그레이는 잠시 무대 위의 아스테르다스, 객석의 민다우가스, 활을 점검하는 죠니, 질문을 준비하는 레이튼, 은꽃 장식을 들고 웃는 라이자, 지나치게 진지하게 의적단 대열을 짜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건… 맞는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럼 시작하자.”

조명이 낮아졌다.

숲의 그림자가 무대 위에 내려앉았다.

가짜 새들이 흔들리고, 가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셔우드 숲 위로, 청흑빛 유성이 떨어질 준비를 했다.
맞아. 레플리카의 핵심 문장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대들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이긴 하지만, 그걸 매번 직접 쓰면 캐릭터가 아니라 표어처럼 들려.
이번에는 레플리카의 본질은 유지하되, 표현을 다양하게 바꿔서 다시 쓸게.

핵심 보정은 이거야.

> 레플리카는 “아프지 마세요”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성장의 일부로 인정하되, 쓸데없는 고통·장식용 고통·웃기기 위한 고통을 거부하는 정통 고통교 차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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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 셔우드 숲에 유성이 떨어지다

재개정본

무대가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정말로 숲 같았다.

왕궁 극장의 천장에 매단 종이 잎사귀들이 조명 아래에서 천천히 흔들렸고, 바닥의 마른 낙엽들이 배우들의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무대 뒤편에는 커다란 달이 걸려 있었다. 진짜 달은 아니었다. 얇은 은색 천에 빛을 비춘 것이었지만, 그 빛이 초록 천과 나무 그림자 사이로 번지자 제법 그럴듯한 밤숲이 되었다.

객석의 아스트리트는 감탄했다.

“제법 숲 같습니다.”

그레이는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실내입니다.”

“하지만 숲 같습니다.”

“실내 숲입니다.”

“좋은 표현이군요.”

“좋지 않습니다.”

그때 무대 뒤에서 작은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푸리나의 목소리가 숲 사이로 흘러나왔다.

“때는 먼 옛날, 왕과 귀족들이 세금 상자에 금화를 너무 많이 넣고, 백성들의 식탁에는 빵이 너무 적게 남던 시절!”

그레이가 즉시 반응했다.

“설명이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죠니가 무대 옆에서 낮게 대답했다.

“연극이야.”

“연극이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말은 폐하한테 하지 마. 좋아할 거야.”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들은 듯 말 듯 더 크게 외쳤다.

“그때 숲에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조명이 무대 중앙의 거대한 나무 세트 위로 모였다.

푸른빛과 검은빛이 섞인 망토.

활과 화살통.

허리에는 장난스럽게 묶은 초록색 허리띠.

그리고 나무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아스테르다스.

그는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불렀어?”

푸리나가 무대 뒤에서 외쳤다.

“아직 소개 중이야!”

“아, 미안!”

아스테르다스는 다시 포즈를 잡았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푸리나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의 이름은 로빈 후드! 숲의 의적! 부당한 금화를 털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자! 그리고 오늘 밤, 셔우드 숲에 떨어진 청흑빛 유성!”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위에서 활을 들어 올렸다.

“좋아! 이번엔 됐지?”

“완벽해!”

“그럼 간다!”

“잠깐, 아직—”

아스테르다스는 이미 뛰어내리고 있었다.

무대 담당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들것 쪽을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객석에서 한쪽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아스테르다스의 몸이 공중에서 회전했다. 망토가 펼쳐지며 청흑빛 조명을 받아 짧은 꼬리를 그렸다. 그것은 정말로 숲 위에 떨어지는 유성 같았다.

그러나 완벽한 유성은 아니었다.

착지 직전, 그의 발이 바닥의 가짜 뿌리에 살짝 걸렸다.

“어?”

아스테르다스는 한 바퀴 더 굴렀고, 낙엽을 크게 흩뿌리며 무대 중앙에 착지했다.

정확히 말하면, 반쯤 넘어지며 착지했다.

짧은 침묵.

죠니가 무대 옆에서 말했다.

“봤다고 했잖아.”

아스테르다스는 낙엽 속에서 엄지를 들어 올렸다.

“봤어. 발밑은 빼고.”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은 없어 보입니다.”

푸리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완벽해! 더 극적이야!”

“폐하, 배우가 넘어지는 건 극적이라기보다 사고입니다.”

“그러니까 극적이지!”

그레이는 반박을 포기했다.

그때 불가리아 쪽 객석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넘어지는 것까지는 배움이 될 수 있다.”

레플리카였다.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흐물거리지 않았고, 말투는 어딘가 딱딱하고 모범생 같았다.

“하지만 같은 곳에 두 번 부딪히는 것은 훈련이 아니다. 다음에는 발밑도 확인해라.”

아스테르다스가 낙엽을 털며 웃었다.

“고마워, 차르님! 명심할게!”

죠니가 낮게 말했다.

“내가 하면 잔소리고, 저쪽이 하면 교훈이네.”

레플리카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교훈이라기보다 안전 수칙이다.”

아스테르다스는 더 크게 웃었다.

“그 말이 더 무섭네.”

스토얀카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저 정도로 지적할 일인가?”

레플리카는 스토얀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쓸데없는 고통은 신앙이 아니다. 웃음을 위해 다칠 이유도 없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고통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지, 일부러 장식하는 것이 아니니까.”

스토얀카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여전히 바른 소리만 하는군.”

“바른 소리라면, 할 필요가 있다.”

레플리카는 무대를 다시 보았다.

“특히 저 배우가 다시 뛰어내릴 것 같을 때는.”

죠니가 즉시 대답했다.

“그건 정확하네.”

아스테르다스는 가볍게 몸을 털고 일어섰다. 넘어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낙엽을 어깨에 얹은 채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다.

하지만 숲에서 뛰어내려 넘어지고도 곧바로 웃는 의적이라면, 그건 꽤 로빈 후드다웠다.

그때 무대 반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물론 진짜 말은 아니었다. 두 명의 무대 담당이 나무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걸 보고 조금 안도했다.

“말은 안 올렸군요.”

죠니가 말했다.

“당나귀 이후로 배웠나 봐.”

“다행입니다.”

숲길 끝에서 커다란 세금 마차가 들어왔다.

마차 위에는 큼직한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상자마다 금색 글씨로 “세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저렇게 쓰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해설을 이어갔다.

“보라! 저것이 바로 노팅엄의 부패한 귀족들이 백성에게서 빼앗아간 세금 마차!”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부패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레이튼이 차를 들고 미소 지었다.

“그렇기에 오늘의 첫 번째 수수께끼가 시작되는군요.”

무대 위에서 세금 마차를 끄는 병사 역 배우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과장되게 거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배에는 베개를 넣어 둥글게 만들었고, 한 명은 턱수염을 너무 크게 붙여 입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뒤에 숨었다.

그의 곁으로 죠니가 걸어왔다.

오늘 죠니는 윌 스칼렛 비슷한 의적단 동료 역이었다. 붉은 허리띠를 묶고 있었지만,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좋아.”

아스테르다스가 속삭였다.

“저 마차를 털자.”

죠니가 마차를 보았다.

“경비 셋. 바퀴 낡음. 오른쪽 숲길 비어 있음.”

“역시 기사단장. 바로 작전이 나오네.”

“작전은 나와. 네가 지킬지는 별개고.”

“믿어도 돼!”

“그 말도 위험해.”

아스테르다스는 웃으며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오늘은 로빈 후드야. 세금 상자만 정확히 맞힌다.”

“열쇠를 훔치는 쪽이 덜 시끄러워.”

“그건 덜 멋있잖아.”

죠니는 잠깐 그를 보았다.

“멋있게 하다가 아까 넘어졌지.”

“그건 예행연습.”

“좋아. 그럼 이번엔 실전에서 넘어지지 마.”

아스테르다스는 대답 대신 활을 당겼다.

조명이 그의 손끝에 모였다. 진짜 전투도 아니고, 진짜 무공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테르다스가 몸을 낮추고 숨을 고르는 순간, 무대는 잠시 장난스러운 숲이 아니라 사냥터처럼 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숲.

달빛.

그림자.

침략자를 기다리는 사냥꾼들.

그의 손끝에서 화살이 날았다.

쉭.

화살은 세금 상자 위에 걸린 밧줄을 끊었다.

상자가 흔들렸다.

마차 위의 병사 역 배우들이 과장되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 세금이!”

“국가 재정이!”

“내 보너스가!”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민다우가스는 낮게 말했다.

“보너스라는 말은 왜 넣었지.”

푸리나가 객석에서 손을 들었다.

“내가 넣었어!”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그렇군. 너무 솔직한 부패다.”

아스테르다스는 나무 뒤에서 뛰쳐나왔다.

“멈춰라, 부패한 세금 마차!”

병사 역 배우들이 우왕좌왕했다.

“누구냐!”

아스테르다스는 망토를 펼쳤다.

“나? 셔우드 숲의 의적, 로빈 후드!”

그는 활을 빙글 돌렸다.

“나쁜 세금만 털러 왔다!”

객석에서 몇몇이 박수를 쳤다.

그레이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적었다.

‘나쁜 세금’ 기준 불명확.

죠니가 아스테르다스 뒤에서 낮게 말했다.

“기준부터 물어야 했는데.”

“분위기가 먼저야!”

“그래. 그래서 늘 이렇게 되는 거지.”

병사 역 배우들이 칼을 뽑았다. 물론 무대용 나무칼이었다.

아스트리트가 의적단 쪽에서 뛰어나왔다.

“대열을 갖추세요!”

아스테르다스가 당황했다.

“우리 매복 중 아니었어?”

“매복 후 돌격 대열입니다!”

“그런 게 있어?”

“지금 만들었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큼직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병사들 앞에 섰다. 리틀 존 역에 맞춰 만든 거대한 몽둥이였지만, 그녀가 들자 기사단 훈련용 봉처럼 보였다.

“좋습니다. 여러분, 생명은 긍정하되 부패는 제압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의적단 구호치고는 길어.”

아스테르다스는 환하게 웃었다.

“난 좋은데?”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아스트리트가 한 명의 발을 걸고, 다른 한 명의 칼을 튕겨냈다. 과장된 동작이었지만 절도 있었다. 병사들은 차례차례 낙엽 위로 굴렀다.

“아아!”

“나는 부패했지만 아프다!”

레플리카가 다시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낙법을 배워라.”

객석이 잠시 조용해졌다.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불필요한 통증을 줄이는 편이 낫다. 정통 고통교에서도 그 정도는 가르친다.”

스토얀카가 이번에는 정말로 웃었다.

“부패한 병사에게까지 낙법을 권하는가?”

“연극의 병사다.”

레플리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실제 병사라도, 포로가 될 자는 덜 다치는 편이 좋다.”

아스트리트가 몽둥이를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제압은 하되, 생명은 긍정합니다!”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의적단 구호가 점점 길어진다.”

무대 위에서 죠니는 세 번째 병사를 상대했다.

병사가 커다란 몸짓으로 달려들자, 죠니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한 발만 옆으로 비켰다. 병사는 그대로 지나가 낙엽 더미에 박혔다.

죠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크게 왔어.”

병사가 낙엽 속에서 대답했다.

“대사도 크게 해야 해서요.”

“그건 인정.”

아스테르다스는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세금 상자 하나를 들어 올렸다.

“좋아! 첫 번째 전리품!”

푸리나가 탬버린을 흔들었다.

“성공!”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모두가 멈췄다.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

그레이는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그녀는 원래 2막에서 보안관으로 등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표정은 이미 보안관이었다. 아니, 보안관보다 더 무서운 무언가였다.

감사관.

그레이는 세금 상자를 보았다.

“압수품 목록은 어디 있습니까?”

아스테르다스가 상자를 든 채 멈췄다.

“뭐?”

“압수품 목록입니다. 세금 상자를 탈취했으면 내용물, 출처, 운송자, 피해자, 수혜 예정자를 기록해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 보지 마. 난 열쇠 훔치자고 했어.”

아스테르다스는 다시 그레이를 보았다.

“나 로빈 후드인데?”

그레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더 필요합니다.”

객석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푸리나는 무대 아래에서 두 손을 모았다.

“좋아, 예상보다 빠른 보안관 등장!”

그레이가 푸리나를 보았다.

“폐하, 대본과 다릅니다.”

“즉흥극!”

“그 말로 증거물 관리 절차가 생략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극적으로는 완벽해!”

“행정적으로는 불완전합니다.”

레이튼이 객석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이야, 예상보다 빠르게 핵심 질문에 도달했군요.”

민다우가스는 낮게 웃었다.

“하하. 도둑보다 장부가 먼저 칼을 뽑았군.”

아스테르다스가 상자를 내려놓았다.

“잠깐, 그럼 이거 못 털어?”

그레이가 상자에 손을 얹었다.

“부패 착복분이라면 환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럼 환수하자!”

“먼저 부패 착복분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하자!”

“장부를 열어봐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눈을 빛냈다.

“좋아! 세금 상자 안에 금화가 아니라 장부가 있으면 더 중요한 걸 턴 거라고 했지?”

죠니가 말했다.

“그 말, 아까 농담 아니었어?”

“이제 진짜야!”

아스테르다스는 상자를 열었다.

뚜껑이 열리자, 금화가 반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안에 든 것은 두꺼운 장부와 영수증 묶음, 납세자 명단, 그리고 어째서인지 말린 빵 한 조각이었다.

긴 침묵.

죠니가 말했다.

“축하해. 진짜 장부네.”

아스테르다스는 장부를 들었다.

“이게 더 중요한 거 맞지?”

그레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는 장부를 받아들고 몇 장을 넘겼다.

조용했다.

무대 위의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다시 한 장을 넘겼다.

그다음 또 한 장.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이상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오?”

“세금 총액과 운송 신고액이 맞지 않습니다. 마을별 징수량도 과다합니다. 면세 대상자에게도 세금이 붙어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활짝 웃었다.

“그럼 나쁜 세금 맞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양팔을 들었다.

“봤지!”

“하지만 방식이 틀렸습니다.”

아스테르다스의 팔이 멈췄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이 장부는 증거물로 압수합니다. 그리고 이 금액은 피해 마을로 환수해야 합니다. 단, 환수는 명단 작성 후, 중복 수령과 누락을 막기 위해 배급표를 대조한 다음—”

아스테르다스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푸리나.”

“응?”

“나 의적 맞지?”

푸리나는 웃느라 어깨를 떨었다.

“맞아!”

“근데 왜 회계부터 해야 할 것 같지?”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책임 있는 의적이 되려면 필요합니다.”

죠니가 낮게 덧붙였다.

“합법에 가까워지고 있네.”

아스테르다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셔우드 숲이 생각보다 어렵구나.”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말했다.

“숲은 원래 어렵다. 그래서 함부로 들어가면 죽는다.”

그 말투는 가볍게 웃는 듯했지만, 숲을 아는 왕의 말이었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돌려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그래도 대공, 오늘은 안 죽어!”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연극이니 다행이다.”

푸리나는 다시 무대 중앙으로 올라왔다.

“자, 이것으로 1막의 결론!”

그녀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로빈 후드는 세금 마차를 털었다! 그러나 금화보다 무서운 장부를 발견했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장부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죠니가 대답했다.

“너한테는 아니겠지.”

푸리나는 계속 외쳤다.

“그리고 너무 성실한 보안관은, 의적단보다 먼저 부패를 잡았다!”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저는 아직 보안관으로 정식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등장했어!”

“절차상—”

“등장했어!”

아스테르다스가 장부 더미를 들고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럼 다음은 뭐야?”

레이튼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질문이겠지요.”

푸리나가 활짝 웃었다.

“정답! 다음 막의 제목!”

조명이 천천히 내려갔다.

무대 뒤의 간판이 삐걱이며 올라왔다.

2막 — 너무 성실한 보안관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그레이는 박수 속에서 조용히 장부를 정리했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옆에서 금화 대신 영수증 묶음을 들고 있었다.

죠니는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로빈 후드, 첫 전리품이 영수증이네.”

아스테르다스는 한숨을 쉬다가, 이내 웃었다.

“뭐 어때. 유성은 떨어질 곳을 고르니까.”

그는 장부를 어깨에 얹었다.

“오늘은 장부 위에 떨어진 거지.”

죠니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낮게 웃었다.

“그건 좀 멋있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장부 위에 실제로 떨어지면 훼손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건 안 할게.”

그레이는 안심한 듯했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속삭였다.

“아쉽다.”

그레이가 바로 돌아보았다.

“폐하.”

“농담이야!”

“검토하겠습니다.”

“농담도?!”

“필요하면요.”

무대 위에 웃음이 남은 채, 1막의 막이 닫혔다.
2막 — 너무 성실한 보안관

막이 다시 올랐을 때, 셔우드 숲은 전장보다 더 무서운 장소가 되어 있었다.

책상 세 개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에는 세금 상자, 장부 더미, 영수증 묶음, 납세자 명단, 배급표가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앞에는 그레이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보안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원래 노팅엄 보안관이라면 깃털 달린 화려한 모자나 검은 망토를 걸쳐야 했겠지만, 그레이가 쓴 것은 지나치게 수수한 검은 모자였다. 거기에 작은 은색 배지가 붙어 있었다.

임시 보안관.

푸리나가 뒤에서 속삭였다.

“내가 달아줬어.”

죠니가 말했다.

“왜 임시야?”

“그레이가 정식 보안관 임명 절차가 없다고 해서.”

그레이는 책상 너머에서 조용히 말했다.

“절차 없이 정식 직함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연극인데?!”

“연극 속 직함에도 일관성은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좋아! 그럼 오늘의 그레이는 임시 보안관!”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앞에는 아스테르다스가 서 있었다.

로빈 후드 복장은 그대로였지만, 손에는 활 대신 깃펜이 들려 있었다.

그는 세금 마차를 털고 돌아온 의적이라기보다, 처음으로 관청 서류를 본 숲속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정확히는, 진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좋아.”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우리가 훔친 건 금화가 아니라 장부였다.”

그레이가 정정했다.

“훔친 것이 아니라, 현재는 부패 혐의 증거물로 임시 보전 중입니다.”

“그래. 우리가 임시 보전한 건 장부였다.”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로빈 후드 분위기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네.”

아스테르다스는 죠니를 보며 속삭였다.

“괜찮아. 이 장면만 넘기면 다시 활 쏠 수 있겠지?”

죠니는 책상 위의 서류 더미를 보았다.

“난 아닌 쪽에 걸겠어.”

객석에서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하하. 좋군. 숲의 도둑이 국가 운영의 첫 문턱에 걸렸다.”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정확해! 2막의 주제는 바로 그거야!”

그레이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주제를 그렇게 정하셨습니까?”

“응!”

“그럼 미리 알려주셨어야 합니다.”

“즉흥극!”

“즉흥적으로 행정 절차를 만드는 일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잖아!”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깃펜을 들었다.

“그럼 하겠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어깨를 폈다.

“좋아. 무엇부터 하면 되지?”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먼저 탈취, 아니 임시 보전된 물품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세금 상자 하나.”

“상자 안 내용물까지 적어야 합니다.”

“장부.”

“몇 권입니까?”

아스테르다스는 장부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많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로빈 후드, 숫자는 열까지 셀 수 있지?”

아스테르다스가 씩 웃었다.

“유성은 숫자로 떨어지지 않아.”

“그건 못 센다는 뜻이야?”

“아니. 멋있게 대답한 거야.”

“숫자는 안 멋있어도 정확한 게 좋아.”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 경 말이 맞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배신당한 표정으로 죠니를 보았다.

“너 어느 편이야?”

죠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안 다치는 편.”

그 말에 레플리카가 객석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편이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세자.”

그레이는 하나씩 불렀다.

“징수 장부 4권. 납세자 명단 2묶음. 영수증 37장. 손상된 봉인 3개. 말린 빵 1개.”

아스테르다스가 손을 들었다.

“말린 빵도 적어?”

“증거물 상자 안에 있었으므로 적어야 합니다.”

“먹으면?”

“증거물 훼손입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아까부터 배고팠는데.”

죠니가 자기 주머니에서 마른 빵을 하나 꺼내 던졌다.

“그건 먹어.”

아스테르다스가 받았다.

“오, 고마워!”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그 빵은 개인 소지품입니까?”

죠니는 잠시 그레이를 보았다.

“먹어도 되는 빵이야.”

“확인했습니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거의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레이, 너무 좋아. 너무 보안관이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 보안관은 원작과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아!”

“좋은 일입니까?”

“관객이 웃고 있잖아!”

그레이는 객석을 보았다.

분명 웃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기사들, 니케아의 관료들, 불가리아의 차르들, 헝가리의 사절들, 리투아니아의 전사들까지. 모두가 적어도 조금은 웃고 있었다.

그레이는 아주 잠깐, 자신이 들고 있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죽은 자의 이름을 적는 장부와는 달랐다.

이 장부는 희극의 장부였다.

그래도 장부는 장부였다.

틀리면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더 정확해야 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저게 그레이지.”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게 그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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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 검토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로빈 후드 일당이 장부 검토에 전혀 적합한 집단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숫자를 볼 때마다 줄 간격을 먼저 보았다.

“이거 글씨가 너무 빽빽해. 숲길이라면 매복하기 좋겠는데.”

그레이가 말했다.

“장부는 매복지가 아닙니다.”

아스트리트는 납세자 명단을 보고 손을 들었다.

“마을별로 조를 나누면 배상 절차가 빨라질 것 같습니다. 1조, 2조, 3조로 편성하겠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습니다.”

아스트리트의 눈이 빛났다.

“그럼 의적단 배상 대열을 편성하겠습니다!”

“대열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질서는 필요합니다.”

“그건 맞습니다.”

아스트리트는 기뻐했다.

죠니는 영수증을 보다가 말했다.

“이건 누가 쓴 거야? 숫자 7이랑 1이 구분이 안 가는데.”

그레이가 받아서 보았다.

“고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글씨 못 쓰는 게 아니라?”

“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레이튼이 객석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다면 작은 수수께끼가 되겠군요.”

그는 무대 위로 올라왔다.

오늘의 레이튼은 숲속 수도사처럼 갈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로브 밑으로 보이는 자세와 미소 때문에, 어딘가 수도사보다는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신사처럼 보였다.

아스테르다스가 반겼다.

“오, 터크 수도사!”

레이튼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그런 역할입니다만, 술통은 들지 않았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아쉽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대신 질문을 가져왔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술통보다 무겁겠는데.”

“대체로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장부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우선 묻겠습니다. 이 마차의 세금은 왜 나쁜 세금입니까?”

아스테르다스가 즉시 대답했다.

“백성에게서 너무 많이 걷었으니까!”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부터 너무 많은 것입니까?”

“그건…”

아스테르다스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가 말했다.

“법정 세율과 비교해야 합니다.”

레이튼은 다시 물었다.

“법정 세율이 정당하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법정 세율 자체가 부당하다면?”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객석에서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계속했다.

“또 묻겠습니다. 금화를 많이 거두는 것이 언제나 악입니까? 겨울 식량, 성벽 보수, 전쟁 대비, 피난민 구호를 위한 세금이라면 어떻습니까?”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맞는 질문이다.”

그는 편히 앉아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왕의 무게가 있었다.

“세금 상자를 부수면 귀족만 굶는 것이 아니다. 병사도 굶고, 말도 굶고, 겨울의 아이도 굶는다.”

아스테르다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아, 대공.”

민다우가스의 눈이 그를 향했다.

아스테르다스는 장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묻는 거지. 이 상자가 겨울의 아이들에게 갈 상자인지, 귀족의 배를 불릴 상자인지.”

객석이 잠시 조용해졌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훌륭합니다. 이제 의적이 아니라 조사관이 되어가고 있군요.”

아스테르다스가 탄식했다.

“그 말, 칭찬이야?”

죠니가 말했다.

“오늘 공연 기준으로는 아마도.”

그레이는 장부의 한 항목을 가리켰다.

“여기입니다. 이 마을은 흉작 피해로 세금 감면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곡물세가 두 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스트리트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명백히 부당합니다.”

그레이는 다른 줄을 짚었다.

“그리고 여기는 사망자 명단에 오른 사람이 세금을 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푸리나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객석에서도 웃음이 살짝 멎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녀다운 단단함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 세금을 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이름을 지우지 않았거나,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돈을 빼돌렸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장난기를 거두었다.

“그건 나쁜 세금이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건 나쁜 세금입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 이름이 붙었군요. 너무 빠른 이름이 아니라, 질문 끝에 도달한 이름입니다.”

죠니가 팔짱을 꼈다.

“그럼 털어도 되나?”

그레이가 곧바로 말했다.

“환수입니다.”

“그래. 환수.”

“그리고 환수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하늘을 보았다.

“또 시작이구나.”

그레이는 진지했다.

“피해자에게 정확히 돌아가야 합니다.”

그 말에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내렸다.

“맞아.”

그는 웃었다.

“좋아. 그럼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

푸리나는 작게 손뼉을 쳤다.

“오오, 로빈 후드가 책임을 배웠어!”

죠니가 말했다.

“아직 배운 건 아니고, 숙제 받은 거지.”

아스테르다스는 영수증 묶음을 들었다.

“이 정도면 산 하나를 넘는 것보다 어렵겠는데.”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그녀를 보았다.

“보안관이 의적을 도와줘?”

“의적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정리했다.

“피해 마을을 돕는 것입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잠깐 멈췄다가, 씩 웃었다.

“좋아. 그럼 우리는 같은 편이네.”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절차상으로는 아직—”

“같은 편이야.”

아스테르다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는 그 손을 보았다.

손바닥에는 낙엽이 묻어 있었다.

장부를 만지기에는 썩 적합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손을 먼저 털어주십시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스테르다스는 크게 웃으며 손을 털었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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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무대 뒤편에서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빠라밤.

한 번 더.

빠라바밤.

마지막으로 조금 삑사리가 났다.

빠라—삑.

죠니가 말했다.

“저건 일부러야?”

푸리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그럴 줄 알았어.”

무대 왼쪽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노팅엄의 부패 귀족 역이었다.

그 역은 슈샤니크가 맡았다.

객석과 무대가 동시에 조용해졌다.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희극의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슈샤니크는 진한 녹색과 검은색이 섞인 귀족 의상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장부가 들려 있었고, 웃음은 정중했다. 너무 정중해서 오히려 위험해 보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와, 악역 의상 너무 잘 어울려.”

그레이는 즉시 말했다.

“그 말은 실례입니다.”

슈샤니크는 들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실례는 아닙니다. 배역에 맞는 평가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이 숲에서 소란이 있다 들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활을 들었다.

“네가 부패 귀족이냐!”

슈샤니크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 표현은 법적으로 부정확합니다.”

그레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멈췄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하지만 네 장부가 수상해!”

슈샤니크는 부드럽게 웃었다.

“장부는 언제나 수상합니다. 읽을 줄 모르는 자에게는 특히.”

객석에서 짧은 탄성이 나왔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세다.”

아스테르다스는 오히려 웃었다.

“좋아. 악역다워.”

슈샤니크는 천천히 그레이를 보았다.

“임시 보안관. 그 장부는 공인된 절차로 압수되었습니까?”

그레이가 멈췄다.

푸리나가 멀리서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현재 부패 혐의 증거물로 임시 보전 중입니다.”

“임시 보전 명령권자는 누구입니까?”

그레이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극적 상황상…”

“극적 상황은 행정 권한이 아닙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죠니에게 속삭였다.

“우리 보안관이 공격받고 있어.”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전이야.”

“도와야 하나?”

“도와서 될 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레이튼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보지요.”

슈샤니크가 그를 보았다.

“말씀하시지요, 수도사님.”

“그 장부가 공인 절차로 압수되지 않았다는 점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장부의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은 절차보다 먼저 존재했겠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누가 먼저 열었습니까? 숲속 의적입니까, 아니면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세금을 걷는 장부입니까?”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푸리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좋아!”

그녀가 탬버린을 흔들며 무대 위로 튀어나왔다.

“여기서 중간 판정!”

그레이가 당황했다.

“폐하, 재판은 아직—”

“재판 아니야! 연극이야!”

슈샤니크가 조용히 말했다.

“그 점이 오히려 불리하군요.”

푸리나는 해맑게 웃었다.

“맞아! 연극에서는 관객이 침묵하면 이미 들킨 거거든!”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슈샤니크는 한숨처럼 아주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녀는 악역답게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병사들. 장부를 회수하세요.”

무대 뒤에서 병사 역 배우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추격전?”

죠니가 말했다.

“아직 2막이야.”

푸리나는 외쳤다.

“2막 끝에는 짧은 추격전이 있어도 돼!”

그레이가 거의 반사적으로 장부를 품에 안았다.

“증거물 보호!”

아스테르다스는 그레이 앞에 섰다.

활을 들고, 망토를 펼쳤다.

“좋아. 그럼 이번엔 금화가 아니라 장부를 지키는 의적이다!”

죠니가 옆에서 칼집을 고쳐 잡았다.

“이상한데, 나쁘진 않네.”

아스트리트가 지팡이를 들었다.

“대열을 갖추세요! 장부 보호 대형입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그런 것도 있나?”

아스트리트는 진지했다.

“지금 만들었습니다!”

레이튼은 웃으며 장부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수수께끼의 답이 사라지면 곤란하지요.”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양팔을 펼쳤다.

“자, 보라! 이것이 셔우드 숲의 새로운 모험!”

그녀는 환하게 외쳤다.

“금화를 털러 간 의적들이, 장부를 지키게 되었다!”

민다우가스는 객석에서 낮게 웃었다.

“좋다, 아스테르다스.”

그 목소리는 넓었지만, 끝은 날카로웠다.

“숲에서 무엇을 빼앗을지보다, 무엇을 지킬지 아는 편이 낫다.”

아스테르다스가 돌아보았다.

그는 활짝 웃었다.

“그 말, 칭찬이지?”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연극 안에서는.”

“그럼 충분해!”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아스테르다스는 활시위를 당겼다.

죠니는 한 발 옆으로 움직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미소로 감췄다.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2막의 숲은, 행정 감사를 넘어 추격전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좋아. 성 블레즈 기사단 자동 보충까지 반영해서 1턴 행동 초안을 다시 짜면 이렇게 가는 게 좋다.
전제는 희귀함 캐릭터 1명당 3앵커 운용이야. 병력카드는 캐릭터 휘하에서 앵커로 운용되는 구조고, 기병은 별도 전마 자원이 중요하니까 이 점을 반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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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키아 아르메니아 1턴 행동 초안

푸리나 헤툼 — 군주 행동 3앵커

1앵커: 국경 방위 왕명 선포

푸리나는 룸 술탄국 변경 아미르의 침공에 대응하여 국경 방위 왕명을 선포한다.

성 블레즈 기사단의 즉시 요격을 승인하고, 그레이에게 국경 마을 피난·방책·보급·피해보상 행정망 구축 권한을 부여한다. 또한 왕실 명의로 피난민 보호, 물자 징발 보상, 전시 부패 및 피난 방해 엄벌을 약속한다.

> 목적: 죠니의 출정과 그레이의 행정망 구축에 왕권의 정당성과 강제력을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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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여관:극장]을 통한 후방 안정

푸리나는 [여관:극장]과 여관좌의 휴식 신술을 통해 후방 여관망과 피난소를 안정시킨다.

피난민들에게 피난은 패배가 아니라 다음 막을 위한 퇴장임을 선언하고, 국경민과 아이들, 부상자들이 공포와 수치심에 무너지지 않도록 돕는다. 동시에 귀환할 성 블레즈 기사단을 위한 연회와 무대를 준비하여 기사단과 백성의 사기를 유지한다.

> 목적: 약탈 침공이 백성의 심리와 왕국의 사기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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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인력 양성 개시

푸리나는 왕국의 장기 전력 강화를 위해 인력 양성을 시작한다.

우선 일반위계 인력 2000명을 벗어남위계 인력 2000명으로 교육·상승시키는 것을 기본안으로 한다. 단, 현재 왕국에 벗어남 인력이 충분하고 우수함 전력이 더 급하다면 벗어남 200명을 우수함 200명으로 올리는 안도 고려한다.

> 목적: 향후 신규 병력 모집, 니케아 지원, 왕국 전력 기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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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니 죠스타 — 성 블레즈 기사단 운용 3앵커

1앵커: 성 블레즈 기사단 출격

죠니 죠스타는 성 블레즈 기사단을 이끌고 킬리키아 국경을 침범한 룸 술탄국 아미르의 약탈군을 요격한다.

작전 목표는 적 영토 진입이나 무리한 섬멸이 아니라, 국경 마을 보호와 약탈 저지다.

> 목적: 킬리키아 방면 침공군 즉시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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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이크타 중장 궁기병 대응

죠니는 성 블레즈 기사단의 연환돌격을 통해 적 궁기병과 이크타 중장 궁기병이 사격진형을 완성하지 못하게 한다.

적의 유인 후퇴에는 말려들지 않으며, 근접 압박과 짧은 반복 돌격으로 활 쏠 박자를 끊는다.

> 목적: 룸 술탄국의 핵심 전술인 중장 궁기병 사격전을 무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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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전력 보존 및 전술 정보 확보

죠니는 적을 깊게 추격하지 않고 국경 방어선 안에서 작전을 마무리한다.

가능하다면 포로, 화살촉, 활, 마갑, 장비, 명령 체계, 아미르의 후퇴 조건 등 전술 정보를 확보한다. 성 블레즈 기사단은 자동 보충되지만, 이번 전투의 목표는 여전히 무리한 소모가 아니라 “킬리키아 약탈은 비싸다”는 사실을 적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 목적: 2턴 니케아 외교와 하융 파견에 사용할 실전 자료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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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융 — 현장 분석 3앵커

1앵커: 죠니 동행 및 전장 관측

하융은 죠니와 성 블레즈 기사단에 동행하여 룸 술탄국 약탈군의 실제 전투 양상을 관측한다.

궁기병 사격진형, 이크타 중장 궁기병의 위치, 아미르의 지휘 방식, 후퇴 조건, 성 블레즈 기사단의 대응 효과를 분석한다.

> 목적: 현장 자료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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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죽은 가능성을 통한 피해 보정

하융은 죽은 가능성의 정보를 현재 전장에 얇게 겹쳐, 성 블레즈 기사단의 돌격 타이밍과 위험 구간을 보정한다.

죠니의 지휘권을 침해하지 않고, “지금 돌격하면 죽는 가능성”과 “반 호흡 늦추면 사는 가능성”을 짧게 전달한다.

> 목적: 기사단 피해 감소 및 전투 효율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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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니케아 파견용 전선 안정 보고서 작성

하융은 이번 전투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니케아 아나톨리아 전선에 적용 가능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특히 지휘관이 부족한 전선에서 룸 술탄국 궁기병에게 어떻게 무너지는지, 어느 지점에서 방어선이 붕괴되는지, 어떤 타이밍에 기병 예비대를 투입해야 하는지를 정리한다.

> 목적: 2턴에 하융을 니케아 임시 작전고문으로 파견할 근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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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 행정·전마 3앵커

1앵커: 국경 경보·피난망 구축

그레이는 국경 마을별 경보 단계와 피난 경로를 정비한다.

감시초소, 봉화, 여관 통신, 성채, 교회, 피난소를 연결하고, 마을별 피난 책임자와 마지막 인원 확인 담당자를 지정한다.

> 목적: 약탈군이 도착하기 전에 사람과 장부와 핵심 물자를 후방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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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약탈 억제 행정망 구축

그레이는 곡물·가축·공구·종자·약재의 후방 이전 절차를 마련하고, 주요 진입로와 여울, 협곡에 이동식 방책, 말뚝, 수레 방벽을 배치하도록 지시한다.

동시에 피해 장부, 사망자·부상자·실종자 명부, 유족 보상 기준, 복구 우선순위를 표준화한다.

> 목적: 적이 얻을 약탈 수익을 줄이고, 침공 시간을 늘리며, 국경민이 피해 후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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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목초지·전마 산출량 조사 및 수출 가능량 산정

그레이는 킬리키아 내 목초지와 전마 생산량을 조사한다.

성 블레즈 기사단은 매턴 자동 보충되므로 일반 전마 산출 계산에서 제외한다. 대신 목초지 산출분을 세 갈래로 나눈다.

1. 국내 신규 기병 모집용


2. 비상 예비마 비축용


3. 니케아 수출용 전마·예비마



> 목적: 2턴 레이튼의 《킬리키아-니케아 전마 보급 협정》 협상 자료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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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튼 — 외교 준비 3앵커

1앵커: 니케아 사전 질의서 발송

레이튼은 니케아 제국에 사전 질의서를 보낸다.

질문은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니케아가 지금 부족한 것이 병력인지, 지휘관인지, 전마인지, 혹은 전선 우선순위 결정인지 확인하는 방향으로 구성한다.

> 목적: 2턴 본협상 전에 니케아의 실제 병목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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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앵커: 《킬리키아-니케아 전마 보급 협정》 초안 작성

레이튼은 그레이가 산정할 전마 생산량을 전제로, 니케아에 제공할 전마 보급 협정 초안을 작성한다.

협정 대가로는 곡물, 철, 포인트, 항구 이용권, 공성기술자, 정치적 승인, 공동 방위 협정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여러 안을 준비한다.

> 목적: 니케아의 목초지 부족과 전마 병목을 아르메니아의 외교 카드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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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앵커: 하융 임시 작전고문 파견 조건 정리

레이튼은 하융을 니케아 아나톨리아 전선에 파견할 경우의 조건을 정리한다.

하융은 외국군 총사령관이 아니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파견 현장지휘관 겸 임시 작전고문으로 규정한다. 정보 접근권, 제한적 지휘권, 호위, 책임 범위, 철수 조건을 문서화한다.

> 목적: 니케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실질적 지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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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턴 전체 요약

푸리나는 왕명, 후방 안정, 인력 양성.
죠니는 성 블레즈 기사단으로 킬리키아 방면 침공군 요격.
하융은 죠니와 동행해 현장 분석 및 니케아 파견용 보고서 작성.
그레이는 경보·피난·방책·피해보상 행정망과 전마 수출 가능량 산정.
레이튼은 니케아 질의서, 전마 보급 협정, 하융 파견 조건 준비.

핵심 의도

> 1턴의 목표는 룸 술탄국 침공군을 막는 것만이 아니다.
킬리키아 방면은 성 블레즈 기사단으로 안정화하고,
그 전투 결과와 전마 산출량을 바탕으로
2턴에 니케아에 하융과 전마를 외교 카드로 보낼 준비를 끝내는 것이다.
3막 — 활쏘기 대회와 너무 많은 참가자

장부를 품에 안은 그레이가 숲길을 달렸다.

정확히 말하면, 달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원래 달리기보다 장부 정리, 피난민 명단 확인, 배급표 검토, 부상자 후송로 계산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부 세 묶음과 보안관 모자, 그리고 임시 보안관 배지를 달고 숲속 무대 위를 뛰는 일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레이는 넘어지지 않았다.

넘어질 것 같은 순간마다 죠니가 조용히 한 걸음 옆에서 받쳐주었고, 아스테르다스가 화살로 병사들의 발밑 낙엽을 흩어 시선을 돌렸다.

아스트리트는 뒤에서 외쳤다.

“장부 보호 대형, 좌측으로!”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 대형 이름, 진짜 계속 쓸 거야?”

아스트리트는 진지했다.

“효과가 있습니다.”

“그건 인정.”

병사 역 배우들이 달려왔다.

“장부를 내놓아라!”

“그 장부는 귀족님의 사유재산이다!”

“그리고 내 보너스도 거기 있다!”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세트 위로 뛰어오르며 외쳤다.

“솔직해서 좋네!”

그는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병사들의 모자만 정확히 날려버렸다.

첫 번째 병사가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내 권위가!”

두 번째 병사는 모자를 주우려다 발이 꼬여 낙엽에 굴렀다.

“내 체면이!”

세 번째 병사는 그냥 스스로 넘어졌다.

“내 연기력이!”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레플리카는 그 세 번째 병사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스스로 넘어지는 것도 기술이군. 다만 목은 보호해라.”

스토얀카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저 병사에게까지 조언하는가?”

“배우는 다치면 다음 막에 나오지 못한다.”

“합리적이군.”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대 위의 고통도 관리되어야 한다.”

그 말에 그레이가 달리다 말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뛰면서 동의하지 마. 넘어져.”

그레이는 즉시 앞을 보았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때 무대 뒤에서 푸리나가 탬버린을 크게 흔들었다.

“좋아! 숲속 추격전은 여기까지!”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위에서 외쳤다.

“벌써?”

“응! 왜냐하면 다음은 로빈 후드의 꽃!”

무대 뒤의 배경막이 빠르게 돌아갔다.

숲길은 사라지고, 커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나무에는 화려한 깃발이 걸렸고, 중앙에는 둥근 과녁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그 위에는 커다란 간판이 내려왔다.

노팅엄 활쏘기 대회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은 채 멈춰 섰다.

“추격전 중에 대회장으로 전환되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푸리나는 당당했다.

“로빈 후드니까 괜찮아!”

“그 설명은 행정 문서에 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연극이라니까!”

죠니가 그레이에게 말했다.

“포기해. 여기서부터는 규칙이 폐하 쪽이야.”

그레이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최소한 장부는 안전한 곳에 보관하겠습니다.”

“그건 좋아.”

그레이는 무대 한쪽에 장부를 두고, 그 앞에 작은 표지판을 세웠다.

증거물. 손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그 표지판을 보고 감탄했다.

“와, 무대 소품 같아!”

“소품이 아니라 경고문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소품!”

그레이는 다시 반박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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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나는 무대 중앙으로 뛰어나왔다.

이번에는 노팅엄 활쏘기 대회의 사회자였다. 머리에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손에는 탬버린 대신 길쭉한 나팔을 들었다.

그녀는 나팔을 불었다.

빠라밤.

그리고 삑사리가 났다.

삐익.

푸리나는 잠시 나팔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악기가 나빠.”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네가 너무 세게 불었어.”

“나는 항상 세게 불어!”

“그래서 그래.”

푸리나는 못 들은 척하고 외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 군주, 가신, 기사, 관료, 성직자, 세금 담당자 여러분!”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세금 담당자는 왜 따로 부르십니까?”

“오늘 중요하니까!”

푸리나는 과녁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노팅엄 활쏘기 대회를 시작합니다! 우승자는 황금 화살을 받게 됩니다!”

라이자가 무대 뒤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화살 하나를 들고 나왔다.

“황금이 아니라 은으로 만들었어요. 금색 도금은 했지만요.”

푸리나가 즉시 정정했다.

“우승자는 금색처럼 보이는 은화살을 받게 됩니다!”

라이자는 부끄럽게 웃었다.

“진짜 은이 더 예쁜데요.”

“맞아! 하지만 원작 분위기가 있으니까!”

객석에서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상품 표기가 중간에 변경되었습니다.”

아카식은 웃으며 말했다.

“좋은 기록이네. 은인데 금처럼 보이는 화살.”

알토는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혼동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재밌지.”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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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나는 참가자 명단을 펼쳤다.

그 명단은 그녀가 직접 쓴 것이라서, 누구도 동의한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참가자! 셔우드 숲의 유성, 로빈 후드!”

아스테르다스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려다가 그레이와 레플리카의 시선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잠시 멈췄다.

“이번엔 계단으로 내려갈게.”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택이다.”

그레이도 조용히 말했다.

“안전합니다.”

죠니는 웃음을 참았다.

아스테르다스는 계단을 내려오며 조금 억울한 얼굴이었다.

“유성인데 계단이라니.”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말했다.

“떨어질 곳을 정하는 것도 자유다. 떨어지지 않을 곳을 고르는 것도 자유지.”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것도 자유로운 유성이네!”

“그 표현은 좋군.”

민다우가스는 짧게 웃었다.

“전술적으로도 손실이 적다.”

푸리나는 두 번째 이름을 읽었다.

“두 번째 참가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건조한 현실 담당, 죠니 죠스타!”

죠니는 고개를 돌렸다.

“나도 참가해?”

“응!”

“언제 정했어?”

“방금!”

“그럴 줄 알았어.”

죠니는 투덜거리면서도 활을 들었다. 자세는 과장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게 시위를 확인하고, 화살 깃을 만지고, 과녁까지 거리를 재는 듯 눈을 좁혔다.

푸리나는 세 번째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조금 멈칫했다.

“세 번째 참가자…”

그녀의 시선이 니케아 쪽으로 향했다.

“니케아 제국의 공동황제, 자주빛 활의 주인,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

객석 전체가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

미하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일어났다.

그 순간 무대 담당이 급히 과녁 뒤쪽에 추가 판자를 세우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네 개째에서 그레이가 말했다.

“부족할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잠깐! 특별 규칙!”

미하일라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으며 팻말을 들어 올렸다.

황제칙령급 사격 금지

미하일라는 잠시 그 팻말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짐은 아직 활시위도 당기지 않았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서 미리!”

그레이가 옆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보험료 문제도 있습니다.”

미하일라는 한 박자 침묵했다.

요안나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웃음을 참았다.

미하일라는 결국 활을 들지 않고 다시 앉았다.

“그렇다면 짐은 심판으로 남겠다.”

푸리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좋아! 제국이 과녁을 살렸다!”

슈샤니크가 조용히 말했다.

“정확히는 예산을 살렸군요.”

그레이는 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이번에는 참았다.


---

푸리나는 네 번째 참가자를 불렀다.

“네 번째 참가자!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장, 생명을 긍정하는 리틀 존,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아스트리트가 당당하게 나섰다.

그녀는 활 대신 자기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아스트리트, 활은?”

“저는 검과 봉술이 더 익숙합니다.”

“활쏘기 대회인데?”

“그러니 화살을 검으로 쳐서 과녁에 맞히면 되지 않을까요?”

긴 침묵.

그레이가 말했다.

“안 됩니다.”

죠니도 말했다.

“안 돼.”

레플리카도 말했다.

“위험하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아쉬워했다.

“그렇군요. 생명을 긍정하려면 참아야겠군요.”

푸리나는 재빨리 말했다.

“좋아! 아스트리트는 안전 감독관!”

아스트리트는 즉시 밝아졌다.

“맡겨주십시오!”

죠니가 작게 말했다.

“보안관, 안전 감독관, 심판. 의적단이 빠르게 관료화되고 있어.”

아스테르다스가 활을 들고 웃었다.

“셔우드 숲이 점점 나라가 되어가네.”

민다우가스는 그 말을 듣고 낮게 웃었다.

“모든 숲은 오래 버티면 질서를 만든다. 문제는 그 질서가 누구를 살리는가다.”

푸리나는 즉시 손뼉을 쳤다.

“좋아! 그 말 멋있어! 4막에서 써도 돼?”

민다우가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작권은 없다.”

아카식이 손을 들었다.

“방금 기록했어.”

알토가 옆에서 말했다.

“그 말은 불길합니다.”


---

대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이름 모를 노팅엄 병사 역 배우였다.

그는 지나치게 허세 섞인 걸음으로 나와 활을 들었다.

“보아라! 나의 명사격을!”

화살은 과녁을 지나쳐 무대 뒤의 나무 세트에 박혔다.

나무 세트가 흔들렸다.

그레이가 일어났다.

아스트리트가 바로 뛰어가 세트를 붙잡았다.

“안전 문제 발생!”

레플리카가 말했다.

“지나친 허세는 통증을 부른다.”

스토얀카가 웃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레플리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허세가 나쁘다는 뜻이지, 통증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스토얀카는 더 웃었다.

두 번째 참가자는 죠니였다.

그는 별다른 포즈 없이 선을 밟고 섰다.

푸리나는 조금 실망한 듯 말했다.

“죠니, 뭔가 더 멋있게 안 해?”

“맞히면 멋있는 거야.”

“그건 너무 현실적이야.”

“그래서 맞히기 좋지.”

죠니는 활을 들었다.

숨을 길게 들이쉬지도 않았다. 눈에 힘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시위를 당겼고, 자연스럽게 놓았다.

화살은 과녁 중앙 바로 옆에 꽂혔다.

딱.

정확했다.

하지만 과장되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오오!”

죠니는 활을 내렸다.

“중앙은 로빈 후드한테 남겨놔야지.”

아스테르다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거 배려야?”

“아니. 극 진행.”

“그게 배려잖아!”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웃으며 속삭였다.

“죠니답네.”

세 번째는 아스테르다스였다.

그는 활을 들고 선을 밟았다.

조명이 조금 낮아졌다.

나뭇잎 그림자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객석에서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말없이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테르다스는 손끝에 화살을 걸었다.

이건 진짜 전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숲과 달빛과 활이 함께 있으면, 리투아니아의 피는 늘 조금 더 조용해졌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화살은 날았다.

쐐액.

과녁의 정중앙.

죠니의 화살 바로 옆, 조금 더 깊이.

딱.

아스테르다스가 활을 내렸다.

그리고 관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봤어?”

민다우가스가 짧게 말했다.

“봤다.”

“어땠어?”

“무대 위에서는 충분하다.”

“현실에서는?”

민다우가스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현실에서는 두 번째 화살을 준비했어야 한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줄 알았어!”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나도 그 말 나올 줄 알았어.”

푸리나는 대회의 흥분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 순간 무대 한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대회에는 참가 자격 기준이 있습니까?”

알토였다.

그는 어느새 카드처럼 생긴 참가표를 들고 서 있었다. 누가 줬는지는 당연히 푸리나였다.

푸리나는 해맑게 웃었다.

“알토도 참가자야!”

알토는 참가표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동의한 기록이 없습니다.”

아카식이 객석에서 말했다.

“방금 생겼네.”

“그건 사후 기록입니다.”

“그래도 이야기에는 유용해.”

알토는 잠시 아카식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불리한 상황입니다.”

푸리나는 알토에게 활을 건넸다.

“자, 쏴봐!”

알토는 활을 받았다.

그의 자세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전투나 사냥이라기보다, 문서에 서명하기 전 모든 조항을 확인하는 사람의 자세였다.

그는 과녁을 보았다.

그다음 활을 보았다.

그다음 참가 규칙판을 보았다.

“거리, 화살 규격, 과녁 크기, 점수 산정 방식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냥 쏘면 돼.”

알토는 고개를 저었다.

“공정성 문제가 생깁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아까부터 세금 장부 보던 우리한테 공정성 말하면 이상하게 설득력 있네.”

알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록은 형식을 요구합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좋아! 알토는 규칙 담당!”

알토는 침묵했다.

아카식이 박수를 쳤다.

“승진했네.”

“참가자에서 담당자로 변경되었습니다. 직무 변경 사유가 불명확합니다.”

“푸리나니까.”

알토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근거로는 부족하지만, 설명력은 있습니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

활쏘기 대회는 점점 이상해졌다.

아스트리트는 안전선을 그었다.

그레이는 참가자 명단을 정리했다.

알토는 규칙판을 작성했다.

레이튼은 “과녁의 중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참가자들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푸리나는 사회를 보면서 마음대로 종목을 추가했다.

“이번 종목은 눈 가리고 사과 맞히기!”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금지합니다.”

“그럼 사과를 머리에 올리지 않고!”

“그래도 금지합니다.”

“그럼 그냥 사과 먹기!”

죠니가 말했다.

“그건 대회가 아니야.”

푸리나는 사과를 베어 물었다.

“맛있으면 됐어.”

라이자는 은꽃 장식이 달린 작은 사과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럼 참가자들에게 간식으로 나눠드릴게요.”

푸리나는 엄지를 들었다.

“메리언 최고!”

라이자는 활짝 웃었다.

“숲속 연회에는 반짝이는 게 조금 있어야 하니까요.”

아스테르다스가 사과를 받아 들고 말했다.

“좋네. 로빈 후드는 이렇게 먹어야지.”

죠니가 말했다.

“로빈 후드는 보통 도망치면서 먹을걸.”

“그럼 다음 막에서 도망치면서 먹자.”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달리면서 먹는 것은 위험합니다.”

레플리카도 말했다.

“목에 걸릴 수 있다.”

죠니는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오늘은 네 적이 많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아니.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은 거지.”

그 말에 그레이는 잠시 말을 멈췄고, 레플리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대회의 마지막 순서가 다가왔다.

푸리나는 은빛 금색 화살을 높이 들었다.

“자! 이제 결승입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나섰다.

죠니도 나섰다.

그런데 그 순간, 무대 왼쪽에서 다시 슈샤니크가 등장했다.

부패 귀족 역의 그녀는 여전히 정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어? 결승 중인데?”

슈샤니크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왔습니다.”

그녀는 손짓했다.

병사들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커다란 문서 봉투들을 들고 있었다.

그레이가 그 봉투를 보자마자 표정이 바뀌었다.

“저건…”

슈샤니크가 말했다.

“노팅엄 귀족 재판소의 긴급 명령서입니다. 현재 장부는 불법 탈취 증거물로 지정되었으며, 임시 보안관 그레이에게는 즉시 반납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잠깐. 그 장부로 네 부패가 들통났는데?”

슈샤니크는 미소 지었다.

“들통난 것과 증명된 것은 다릅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악역이 법을 쓰면 귀찮아지지.”

레이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주 좋은 장면입니다.”

그레이는 문서를 받아 읽었다.

몇 줄을 읽는 동안 그녀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조금 긴장했다.

“형식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물었다.

“그럼 돌려줘야 해?”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도 잠시 침묵했다.

그때 알토가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규칙판을 내려놓고, 슈샤니크가 건넨 명령서를 보았다.

“서명은 있습니다. 인장도 있습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알토는 다음 장을 넘겼다.

“하지만 발행 시간이 이상합니다.”

슈샤니크의 눈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알토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 명령서는 장부가 탈취되기 전에 작성되었습니다.”

무대 위가 조용해졌다.

레이튼이 미소를 지었다.

“아하.”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오오?”

알토는 명령서를 들어 올렸다.

“즉, 장부가 탈취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거나, 혹은 명령서의 시간이 조작되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슈샤니크는 말이 없었다.

알토는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

“절차의 형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절차의 시간 기록이 모순됩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별이 하나 더 이름을 잃었군요.”

아스테르다스가 활짝 웃었다.

“그럼 못 돌려주는 거지?”

그레이는 명령서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네. 이 장부는 반납할 수 없습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근거는?”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증거 보전 필요성. 시간 기록의 모순. 그리고 사망자 명의 징수 의혹.”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름이 남아 있는 이상, 확인해야 합니다.”

그 말에 잠시 희극의 조명이 낮아졌다.

죽은 사람의 이름.

세금 장부에 남은, 잘못 쓰인 이름.

그레이에게 그것은 단순한 개그 소재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웃었다.

밝게.

무거워지기 전에, 그러나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게.

“좋아!”

그녀가 탬버린을 들었다.

“그러면 결승 종목 변경!”

죠니가 말했다.

“또?”

푸리나는 외쳤다.

“마지막 종목은 과녁 맞히기가 아니야!”

그녀는 슈샤니크 쪽 병사들이 들고 온 문서 봉투들을 가리켰다.

“부패 귀족의 가짜 명령서를 꿰뚫어라!”

그레이가 당황했다.

“문서를 훼손하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즉시 수정했다.

“훼손하지 말고, 옆에 꽂아!”

죠니가 말했다.

“난 그걸 더 잘할 수 있어.”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좋아. 결승전답네.”

슈샤니크는 한숨처럼 웃었다.

“참으로 극장다운 재판이군요.”

푸리나는 윙크했다.

“칭찬으로 들을게!”

아스테르다스와 죠니가 나란히 섰다.

과녁 대신, 문서 봉투 세 개가 멀리 세워졌다. 봉투 옆의 아주 작은 붉은 표시가 목표였다. 맞히면 문서를 훼손하지 않고 봉투를 고정한 끈만 끊을 수 있었다.

죠니가 활을 들었다.

“왼쪽은 내가.”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오른쪽은 나.”

“가운데는?”

둘이 동시에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나?”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폐하는 활쏘기 참가자 명단에 없습니다.”

“아쉽다!”

그때 미하일라가 천천히 일어났다.

“가운데는 짐이 맡지.”

푸리나가 굳었다.

“황제칙령급 사격 금지!”

미하일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칙령이 아니다. 단순한 사격이다.”

그레이는 과녁 뒤의 벽을 보았다.

“정말 단순해야 합니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장하지.”

요안나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벽을 살려주세요.”

미하일라는 아주 작게, 정말 아주 작게 웃었다.

“노력하마.”

세 사람이 활을 들었다.

죠니.

아스테르다스.

미하일라.

객석의 웃음이 조용한 긴장으로 바뀌었다.

푸리나는 낮게 외쳤다.

“셋.”

시위가 당겨졌다.

“둘.”

숨이 멈췄다.

“하나.”

화살이 날았다.

죠니의 화살은 왼쪽 봉투 끈을 정확히 잘랐다.

아스테르다스의 화살은 오른쪽 봉투를 잡은 나무핀을 날려버렸다.

미하일라의 화살은 가운데 봉투 옆의 붉은 표시를 스치듯 지나가더니, 뒤편에 세워진 과녁 정중앙에 조용히 꽂혔다.

벽은 무사했다.

푸리나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살았다!”

그레이도 작게 말했다.

“벽이.”

죠니는 미하일라의 화살을 보고 말했다.

“저게 단순한 사격이면, 난 앞으로 활을 조심해서 들어야겠네.”

아스테르다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멋있었어!”

미하일라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대회 규정은 지켰다.”

알토가 규칙판을 확인했다.

“규정 위반은 없습니다. 애초에 규정이 방금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훌륭한 결론이네.”

슈샤니크는 세 봉투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서 장부 위조 지시서, 사전 작성 명령서, 그리고 귀족의 비밀 회계표가 쏟아졌다.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이것으로 노팅엄 활쏘기 대회의 우승자는!”

아스테르다스가 가슴을 폈다.

죠니는 별 기대 없이 서 있었다.

미하일라는 애초에 관심 없어 보였다.

푸리나는 외쳤다.

“증거!”

긴 침묵.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그건 참가자가 아닙니다.”

푸리나는 당당했다.

“하지만 제일 많이 이겼어!”

레이튼은 웃음을 터뜨렸다.

“훌륭한 판정입니다. 오늘의 우승자는 진실에 가까워진 증거라 해도 좋겠군요.”

아스테르다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증거가 이겼으면 됐지.”

죠니가 은빛 금색 화살을 들어 아스테르다스에게 던졌다.

“그래도 네가 가져.”

아스테르다스가 받았다.

“왜?”

“로빈 후드잖아.”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그를 보다가 씩 웃었다.

“고맙다, 죠니.”

“별말을 다 하네.”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서 크게 외쳤다.

“3막 종료! 활은 날았고, 벽은 살았으며, 장부는 더 수상해졌다!”

그레이가 말했다.

“장부는 수상한 것이 아니라, 검토가 필요한 것입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게 더 무서워.”

무대 뒤의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나쁜 세금의 기준

객석에서 박수가 울렸다.

아스테르다스는 은빛 화살을 어깨에 걸고 웃었다.

그레이는 장부와 명령서를 함께 정리했다.

레이튼은 차분히 다음 질문을 준비했다.

푸리나는 이미 다음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슈샤니크는, 악역의 미소를 유지한 채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기준을 묻는 차례겠군요.”

그 말은 희극의 무대 위에서도 꽤 날카롭게 들렸다.
4막 — 나쁜 세금의 기준

죠니 말투 개정본

무대가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 숲은 처음의 셔우드 숲과 달랐다.

아까의 숲이 뛰어내리고, 웃고, 도망치고, 활을 쏘는 숲이었다면, 지금의 숲은 조금 더 조용했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조명은 푸른빛이었고,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가 놓여 있었다.

그루터기 위에는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세금 장부.

납세자 명단.

사망자 명단.

그리고 방금 활쏘기 대회에서 떨어져 나온 귀족의 비밀 회계표.

아스테르다스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로빈 후드의 초록 망토를 두르고, 은빛 화살을 허리띠에 꽂고, 세상에서 가장 의적답지 않은 얼굴로 장부를 보고 있었다.

그는 한참 장부를 보다가 말했다.

“좋아.”

죠니가 옆에서 물었다.

“그래. 이번엔 뭐가 좋은데?”

“아직 하나도 모르겠다는 걸 알았어.”

“발전이네. 보통은 모르면서 쏘니까.”

“너 지금 나 칭찬한 거야?”

“반쯤.”

“나머지 반은?”

“경고.”

아스테르다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는 장부를 한 장 넘겼다.

“여기부터 보시면 됩니다. 이 마을은 원래 흉작 감면 대상입니다. 그런데 감면은 기록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시 추가세가 붙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눈을 찡그렸다.

“흉작인데 추가세?”

“네.”

“그럼 먹을 게 없는데 더 내라고 한 거야?”

“장부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조금 빠졌다.

“그건 나쁜 세금 맞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장을 펼쳤다.

“하지만 이쪽은 다릅니다. 성벽 보수세입니다. 실제로 성벽이 무너졌고, 이 세금 덕분에 겨울 전까지 보수될 예정이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건 나쁜 세금이 아니네?”

“아마도요.”

“아마도?”

“보수 공사비가 실제로 쓰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세금 어렵다.”

죠니가 팔짱을 꼈다.

“훔칠 땐 상자 하나인데, 열어보면 사람이 여럿 나오거든. 배고픈 사람, 성벽 고치는 사람, 중간에서 떼먹은 사람.”

아스테르다스가 그를 보았다.

“그거 꽤 좋은 말인데?”

“좋은 말 같으면 적어둬. 나중에 폐하가 제목으로 쓸지도 몰라.”

무대 가장자리의 푸리나가 눈을 번쩍였다.

“방금 제목 후보였어?”

죠니는 푸리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봐. 이미 걸렸잖아.”

아스테르다스는 다시 웃었다.

그때 레이튼이 그루터기 옆에 앉았다.

그는 숲속 수도사 역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재판관처럼 보였다. 손에는 찻잔이 있었고, 무릎 위에는 작은 수첩이 놓여 있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질문을 정리해보지요.”

아스테르다스가 긴장했다.

“질문이 또 늘어나는 거야?”

“좋은 질문은 길을 줄이기도 합니다.”

“정말?”

“가끔은요.”

죠니가 찻잔을 힐끗 보았다.

“저 말은 ‘늘어난다’는 뜻이야. 마음의 준비 해.”

레이튼은 웃기만 했다.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 단순히 ‘세금은 나쁜가’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세 가지입니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첫째. 이 세금은 필요한 목적을 위해 걷혔는가?”

두 번째 손가락.

“둘째. 걷은 만큼 실제로 그 목적에 사용되었는가?”

세 번째 손가락.

“셋째. 그 과정에서 누군가 책임 없이 이름을 지웠는가?”

그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의 한 줄을 짚었다.

“여기. 사망자 명단에 오른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납세자 명단에도 같은 이름이 있습니다. 세금을 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탬버린을 손에 든 채 조용해졌다.

아까까지 계속 뛰어다니던 그녀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객석도 조금 조용해졌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작았다.

“죽은 사람의 이름이 장부에 남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잊히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천천히 다음 줄을 보았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돈이 빠져나갔다면, 그건 이름을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손끝이 장부 위에 멈췄다.

“이름을 훔친 겁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죠니도 바로 농담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를 내려다보다가, 낮게 말했다.

“그건 도둑질 중에서도 질이 나쁘네. 돈만 가져간 게 아니니까.”

레이튼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푸리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장난을 위한 웃음이 아니었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그럼 오늘의 로빈 후드는 금화를 되찾는 게 아니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손에 든 탬버린을 천천히 낮췄다.

“이름을 되찾는 거야.”

그레이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 표현은… 맞습니다.”

죠니가 그 분위기를 너무 가라앉지 않게 옆에서 툭 던졌다.

“이제 좀 그럴듯해졌네. 처음엔 그냥 상자 들고 뛰는 줄 알았는데.”

아스테르다스가 그를 보았다.

“그렇게 보였어?”

“응.”

“너무하네.”

“사실이야. 근데 지금은 좀 달라.”

아스테르다스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갑자기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아.”

죠니가 물었다.

“이번엔 또 뭐야?”

“이거 원래 쾌활한 숲속 활극 아니었어?”

푸리나가 즉시 대답했다.

“맞아!”

“그런데 지금 분위기 무거워졌는데?”

“그러니까 다시 뛰면 돼!”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뛰기 전에 자료를 정리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검지를 세웠다.

“그레이.”

“네.”

“자료 정리도 뛰면서 하면 안 돼?”

“안 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죠니가 푸리나를 보며 말했다.

“폐하, 장부 들고 뛰게 하면 그레이가 사람보다 장부를 먼저 구하러 갈지도 몰라.”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장부를 구하면서 사람도 같이 구하겠지.”

그레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레이라면 둘 다 해!”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활짝 웃으며 탬버린을 흔들었다.

“좋아! 그러면 4막은 이렇게 가자. 전반부는 기준 정리! 후반부는 기준에 따라 털기!”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털기가 아니라 환수입니다.”

“좋아! 기준에 따라 환수하기!”

아스테르다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건 좀 멋없는데.”

죠니가 말했다.

“멋없는 이름일수록 나중에 덜 얻어맞아. 경험상 그래.”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곰곰이 씹었다.

“그건 로빈 후드답지 않은데.”

“로빈 후드가 오래 살려면 가끔은 로빈 후드답지 않아야지.”

레이튼이 웃으며 말했다.

“그 대신 오래갑니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듣고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오래가는 의적이라.”

그는 씩 웃었다.

“좋아. 나쁘지 않네.”


---

그때 무대 왼쪽에서 슈샤니크가 다시 등장했다.

부패 귀족 역의 그녀는 여전히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방금 전 활쏘기 대회에서 자신의 문서 봉투가 바닥에 떨어졌고, 비밀 회계표가 드러났는데도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느릿하게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훌륭합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오, 악역 등장!”

슈샤니크는 미소 지었다.

“그 표현은 조금 직접적이군요.”

아스테르다스가 활을 들었다.

“이번엔 뭐야? 또 문서?”

죠니가 작게 말했다.

“문서면 활보다 더 아플 수도 있어. 특히 그레이가 읽으면.”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읽어야 할 문서라면 읽겠습니다.”

“그래. 그게 무서운 거야.”

슈샤니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뒤에서 병사들이 커다란 판자를 들고 나왔다. 그 판자에는 여러 마을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금을 거두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벽을 세우고, 병사를 먹이고, 길을 고치고, 겨울을 넘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녀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 점은 보안관도 부정하지 않겠지요.”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슈샤니크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렇다면 숲속 의적은 무엇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약자를 돕는다는 말? 귀족이 탐욕스럽다는 인상? 죽은 자의 이름 몇 개?”

아스테르다스의 손이 활시위에 닿았다.

하지만 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계속 말했다.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노래가 아닙니다. 활쏘기 대회도 아니고, 숲속 연회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거둬야 하고, 누군가는 미움을 받아야 하며, 누군가는 장부에 차가운 숫자를 써야 합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 악역인데 너무 설득력 있네.”

슈샤니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악역은 절반쯤 옳은 말을 하지요.”

객석에서 알토가 조용히 말했다.

“그 점은 기록할 가치가 있습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그런 악역, 좋아하지?”

“판단은 보류합니다.”

슈샤니크는 다시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그러니 말해보십시오, 로빈 후드. 나쁜 세금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대가 조용해졌다.

아스테르다스는 입을 열려다 멈췄다.

그는 원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울리는 세금.

귀족 배를 불리는 세금.

숲속 의적이 털어도 되는 세금.

하지만 이제는 그 답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튼이 그를 보았다.

그레이도 보았다.

죠니는 아스테르다스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낮게 말했다.

“이번엔 바로 쏘지 마. 답도 화살처럼 한 번 나가면 돌아오기 힘들어.”

아스테르다스는 천천히 활을 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쁜 세금은…”

그는 장부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세금이다.”

슈샤니크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아스테르다스는 이어 말했다.

“성벽을 세우기 위해 걷는 건 필요할 수 있어. 병사를 먹이기 위해 걷는 것도, 겨울을 넘기기 위해 걷는 것도 필요할 수 있지. 나는 그걸 부정하지 않아.”

그는 민다우가스를 향해 잠깐 시선을 돌렸다.

“숲도 오래 버티면 질서를 만든다고 했지. 맞아. 질서 없이 숲은 사람을 숨겨줄 수 없어.”

민다우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이 조금 낮아졌다.

아스테르다스는 다시 슈샤니크를 보았다.

“하지만 그 질서가 사람의 이름을 지우기 시작하면, 그건 지켜야 할 질서가 아니야.”

그는 장부를 집어 들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굶어 죽을 만큼 걷고,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다시 걷고, 그 이름을 숫자로만 남겨서 누가 아팠는지, 누가 죽었는지, 누가 빼앗겼는지 모르게 만드는 것.”

아스테르다스는 웃지 않았다.

“그게 나쁜 세금이야.”

조용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좋은 답입니다.”

죠니가 아스테르다스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됐네. 이번엔 숲 냄새만 나는 답은 아니야.”

아스테르다스는 눈을 깜박였다.

“그거 칭찬 맞지?”

“응. 네 기준으로는 꽤 큰 칭찬.”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낮게 웃었다.

“거칠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러나 숲에서 나온 답치고는 나쁘지 않다.”

아스테르다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건 진짜 칭찬이지?”

민다우가스는 느리게 말했다.

“이번에는 그렇다.”

아스테르다스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좋아!”

그레이가 작게 덧붙였다.

“다만 구체적 배상 기준은 아직 필요합니다.”

아스테르다스의 주먹이 다시 내려갔다.

“알아…”

죠니가 피식 웃었다.

“영웅답게 한마디 하고 끝내고 싶었지?”

“응.”

“세상은 보통 그 다음 장에 표를 붙여.”

“너무 현실적이야.”

“그러려고 옆에 있는 거야.”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훌륭한 대답입니다. 다만, 훌륭한 대답은 곧 훌륭한 실행을 요구합니다.”

그녀는 손짓했다.

병사들이 판자를 뒤집었다.

그 뒷면에는 세 개의 길이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길에는 금화 자루가 놓여 있었다.

두 번째 길에는 성벽 모형이 있었다.

세 번째 길에는 빈 식탁이 그려져 있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착복분은 세 곳에 걸쳐 있습니다. 하나는 귀족의 사적 금고. 하나는 실제 성벽 보수비에 섞여 있습니다. 하나는 굶주린 마을로 가야 할 곡물 대금입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제 고르십시오. 어디부터 환수하시겠습니까?”

푸리나가 입을 열었다.

“셋 다!”

그레이가 말했다.

“동시에 움직이면 인원이 부족합니다.”

아스트리트가 즉시 나섰다.

“의적단을 세 조로 나누겠습니다.”

그레이는 생각했다.

“가능합니다. 다만 각 조에 기록 담당이 필요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의적단이 하루 만에 관청이 됐네.”

레이튼은 즐거워했다.

“문명이 생기는 과정이군요.”

“그럼 문명은 꽤 피곤하네.”

아스테르다스는 세 길을 보았다.

그의 눈은 먼저 금화 자루로 갔다.

전형적인 로빈 후드라면 금화부터 털었을 것이다.

그다음 성벽 모형.

국가를 생각하는 자라면 성벽을 고쳤을 것이다.

마지막은 빈 식탁.

가난한 마을의 곡물 대금.

그는 고민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죠니도 기다렸다.

그레이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더하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천천히 말했다.

“먼저 식탁.”

슈샤니크의 미소가 멈췄다.

아스테르다스는 빈 식탁 그림을 가리켰다.

“성벽도 중요하고, 금고도 털어야 해. 하지만 굶는 사람은 오늘 굶어. 성벽은 며칠 뒤에 무너질 수 있지만, 빈 식탁은 오늘 사람을 쓰러뜨려.”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 배상 우선순위로는 맞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그다음 성벽. 겨울이 오기 전에 무너지면 안 되니까.”

죠니가 물었다.

“금고는?”

아스테르다스는 씩 웃었다.

“그건 마지막에 아주 시끄럽게 턴다.”

죠니도 따라 웃었다.

“좋네. 조용히 끝나면 폐하가 섭섭해할 거야.”

푸리나가 바로 외쳤다.

“맞아! 극적으로 완벽해!”

그레이는 조용히 덧붙였다.

“행정적으로도… 크게 틀리진 않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거의 감동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가 인정했어.”

죠니가 말했다.

“오늘 네가 받은 전리품 중 제일 비싼 거야. 잘 챙겨.”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레플리카가 객석에서 차분하게 말했다.

“굶주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먼저 식탁이라는 판단은 옳다.”

스토얀카가 그녀를 보았다.

“그대도 의적질을 인정하는가?”

“의적질이 아니라 배상이다.”

레플리카는 무대를 보며 말했다.

“고통이 이미 발생했다면, 먼저 더 깊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명칭은 그다음이다.”

그레이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죠니도 말리지 않았다.


---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그럼 작전 개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셔우드 숲의 의적단은 세금의 기준을 물었고, 이름을 되찾기로 했으며, 첫 번째 목표는 빈 식탁!”

아스트리트가 지팡이를 들었다.

“제1조, 곡물 대금 회수!”

그레이가 서류를 나눠주었다.

“각 조는 이 임시 배상 확인표를 지참하십시오.”

아스테르다스가 종이를 받았다.

“이거 없으면 못 뛰어?”

“나중에 문제가 생깁니다.”

죠니가 옆에서 종이를 하나 받아 들었다.

“품 안에 넣어. 접지 말고. 그레이가 보는 앞에서 접으면 오늘은 네가 악역이야.”

아스테르다스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들었다.

“그 정도야?”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접어도 되지만, 글자가 훼손되면 다시 작성해야 합니다.”

죠니는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봤지? 더 무섭지?”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라이자가 은빛 끈으로 작은 문서 주머니를 만들어 달아주었다.

“이렇게 넣으면 안 구겨질 거예요!”

그레이는 그 주머니를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방수 처리가 되어 있습니까?”

라이자는 활짝 웃었다.

“은실을 조금 섞었어요. 물방울이 잘 안 스며들 거예요.”

“훌륭합니다.”

라이자는 그 칭찬에 정말 기뻐했다.

“다행이에요!”

푸리나는 두 사람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숲속 의적단이 점점 복지 행정 조직이 되어가고 있어.”

죠니가 말했다.

“네가 만든 숲이야. 책임져.”

“싫어!”

“그럼 그레이가 책임질걸.”

“그건 더 싫어!”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이미 일부 책임지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가슴을 붙잡았다.

“그레이가 너무 강해졌어.”

죠니는 피식 웃었다.

“원래 강했어. 네가 자주 못 본 척했을 뿐이지.”


---

그때 슈샤니크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또?”

“곡물 대금은 이미 귀족의 사적 창고가 아니라, 노팅엄 성 안쪽 회계실로 옮겨졌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그럼 성 안으로 들어가면 되겠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무단 침입은 안 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멈췄다.

“로빈 후드인데?”

“그래도 안 됩니다.”

죠니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문으로 들어가야겠네.”

아스테르다스가 그를 보았다.

“문으로?”

“응. 가끔은 문이 제일 덜 귀찮아.”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초대받으면 되겠지요.”

푸리나의 눈이 번쩍였다.

“오.”

슈샤니크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은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마침 노팅엄 성에서는 오늘 활쏘기 대회 우승자를 위한 만찬이 있지 않습니까?”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있어! 방금 생겼어!”

그레이가 눈을 감았다.

“또 방금…”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좋아. 그럼 우리는 만찬에 초대받은 의적단이 되는 거야?”

죠니가 말했다.

“변장이 필요하겠네. 너는 일단 ‘나 로빈 후드다’라고 외치는 습관부터 숨겨.”

아스테르다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렵겠는데.”

“알아. 그래서 걱정이야.”

라이자가 이미 은꽃 장식 망토를 들고 있었다.

“준비했어요!”

아스트리트가 진지하게 물었다.

“만찬장 침투 대형도 필요합니까?”

죠니가 바로 말했다.

“그건 마음속에만 만들어.”

아스트리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비상시에만 사용하겠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됐어.”

레이튼은 차분히 말했다.

“그렇다면 5막은 잠입극이 되겠군요.”

푸리나는 탬버린을 높이 들었다.

“정답!”

그녀가 크게 외쳤다.

“4막 종료! 나쁜 세금의 기준은 정해졌고, 첫 번째 목표는 빈 식탁! 그리고 의적단은 이제 노팅엄 성의 만찬장으로 향한다!”

그레이가 작게 덧붙였다.

“초대장 확인 후에요.”

푸리나가 말했다.

“초대장은 내가 만들게!”

“위조는 안 됩니다.”

“그럼 공식 즉흥 초대장!”

“그것도 안 됩니다.”

죠니가 푸리나를 향해 말했다.

“폐하, 그건 그냥 위조를 예쁘게 부른 거야.”

푸리나는 볼을 부풀렸다.

“쳇.”

레이튼이 웃으며 말했다.

“초대받을 방법을 찾는 것도 수수께끼겠지요.”

아스테르다스는 활을 어깨에 걸었다.

“좋아. 이번엔 뛰어들기 전에 물어보는 거지?”

죠니가 대답했다.

“응. 물어보고, 문으로 들어가고, 들키면 그때 뛰어. 순서만 지켜도 꽤 나아져.”

“역시 죠니. 현실적이야.”

“현실은 오래 살아남는 쪽이 이기거든.”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무대 뒤의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5막 — 셔우드 숲의 잠입 만찬

푸리나는 그 제목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계획은 추격전이었는데.”

죠니가 말했다.

“네 연극은 늘 옆길로 새잖아. 그래도 대체로 돌아오긴 해.”

“그거 칭찬이야?”

“반쯤.”

“나머지 반은?”

죠니가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경고.”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푸리나도 웃었다.

그리고 조명이 꺼졌다.

무대 위에는 마지막으로 빈 식탁 그림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식탁 위에, 누군가가 작은 빵 하나를 올려두고 갔다.
#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 프롤로그 — 극장 안에 배를 띄우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극장은 그날, 바다가 되어 있었다.

물론 진짜 바다는 아니었다.

바닥에는 푸른 천이 넓게 깔렸고, 그 위로 은빛 실이 물결처럼 수놓여 있었다. 무대 뒤편에는 둥근 달이 걸렸고, 천장에는 종이 갈매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커다란 돛대는 객석에서도 보일 만큼 높았으며, 배의 난간에는 흰 천과 낡은 밧줄, 조그만 등불들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배의 앞머리에는, 푸리나 헤툼의 글씨로 이런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그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로 부제가 붙어 있었다.

**— 목적지까지 책임지지는 않음 —**

죠니 죠스타는 그 문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오디세우스 역을 맡았다. 아니, 푸리나가 그렇게 정했다. 본인 동의는 없었다. 어깨에는 낡은 항해자 망토가 걸려 있었고, 허리에는 짧은 검이 있었으며, 손에는 아직 쓰지도 않은 노가 들려 있었다.

죠니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

“폐하.”

푸리나는 배 위에서 두 팔을 펼치고 있었다.

“응?”

“저 부제는 좀 불안한데.”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부분이?”

“전부.”

“하지만 정직하잖아!”

“정직한 사고 예고문이야.”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침몰하지 않아!”

죠니는 푸른 천으로 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극장 안에서 침몰하면 그건 꽤 재능 있는 사고지.”

“그렇지? 나도 그건 좀 어렵다고 생각해.”

“그걸 듣고 안심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더 불안하네.”

그때 그레이가 조용히 무대 옆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검소한 옷차림이었지만, 오늘은 작은 항해 기록판과 천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천 주머니 안에는 두툼한 담요 몇 장, 말린 수건, 물병, 얇은 붕대, 그리고 작은 빵들이 들어 있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레이! 명단 준비됐어?”

그레이는 잠시 천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명단도 준비했습니다.”

“역시!”

“하지만 먼저 담요와 물을 배치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담요?”

“배가 흔들릴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죠니가 푸리나를 보았다.

“흔들릴 예정이었어?”

푸리나는 시선을 피했다.

“연출상?”

죠니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배는 안 움직여도 사람은 굴릴 생각이었네.”

그레이는 담요를 배의 난간 옆에 하나씩 접어두었다.

“멀미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젖는 연출이 있다면 갈아입을 천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혹시 무대 위에서 넘어지면 바로 앉을 곳도 있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조금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레이, 오늘은 그냥 연극인데?”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네.”

그녀는 아주 작게, 그러나 단정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연극이라면, 다치지 않게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죠니는 담요 더미를 보다가 툭 말했다.

“좋네. 오디세우스도 담요는 필요했을 거야.”

푸리나가 바로 웃었다.

“오디세우스가 담요 덮고 항해하는 건 좀 귀여운데?”

“아마 본인은 안 귀여웠을걸.”

“죠니는 귀여울 수 있어.”

“그 말은 항해 시작 전에 철회해.”

“싫어.”

그레이는 둘의 대화를 듣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 웃었다!”

그레이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착각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늦었어. 폐하가 봤으면 기록된 거야.”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이미 만족한 듯 배 난간을 두드렸다.

---

객석에는 다시 여러 나라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니케아의 미하일라는 배의 구조를 보는 듯했고, 요안나는 바다 천이 파도처럼 흔들리는 것을 조금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슈샤니크는 “임시 극장선”이라는 이름을 보고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아직 말하지 않았다.

민다우가스는 조용히 돛대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이미 배 난간 위에 올라가려다, 레플리카와 그레이의 시선이 동시에 닿자 얌전히 내려왔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레플리카가 차분히 말했다.

“그래서 내려오는 것이 낫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차르님은 오늘도 정확하네.”

“바다는 실수에 관대하지 않다. 무대 위 바다라도, 발을 헛디디면 아프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오늘 저 말 자주 듣게 될 것 같네.”

아스테르다스는 배 난간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바다는 좋잖아. 어디든 갈 수 있고.”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은 장점이자 위험이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돌렸다.

민다우가스는 담담히 이어 말했다.

“돌아올 항구를 정하지 않은 항해는 방랑이다. 방랑이 나쁜 것은 아니나, 방랑과 귀향은 다르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럼 오늘은 귀향이네?”

민다우가스는 배 앞머리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그렇게 적혀 있군.”

죠니가 작게 말했다.

“저 부제까지 같이 읽으면 확신은 좀 줄어들지만.”

푸리나는 바로 항의했다.

“죠니!”

“왜. 네가 쓴 거잖아.”

“그래도 분위기는 살려줘!”

“나는 생존을 살리는 쪽이라서.”

---

푸리나는 마침내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오늘 그녀는 음유시인이자, 아테나 비슷한 후원자이자, 이 극의 연출자였다. 푸른 리본이 달린 흰 망토를 두르고, 손에는 작은 류트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한 번 현을 튕기자, 극장 안의 종이 갈매기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여러분!”

그녀의 목소리가 극장 안을 맑게 울렸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웃었다.

“전쟁이 끝났고, 영웅은 배에 오릅니다. 섬들이 나타나고, 괴물들이 기다리고, 노래가 부르고, 바다는 길을 감춥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돌아가야 하지요.”

그녀는 배의 난간을 두드렸다.

“왜냐하면 이타카가 있으니까!”

죠니가 낮게 말했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말해주는 건 친절하네.”

푸리나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오늘의 오디세우스!”

죠니는 이미 포기한 얼굴이었다.

“응. 알고 있어.”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줘.”

“그건 배가 실제로 출발하면 생각해볼게.”

“안 움직인다니까!”

“그래서 감동도 반쯤만.”

객석에서 웃음이 낮게 퍼졌다.

푸리나는 류트를 다시 튕겼다.

“하지만 이번 극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닙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길을 아는 일이기도 하고, 길에서 잃은 것을 세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주 잠깐.

그리고 다시 밝게 웃었다.

“물론 처음부터 너무 무겁게 가면 재미없으니까, 먼저 출항부터 합시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제일 위험해.”

---

그레이는 배 뒤편에서 승선자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딱딱하게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담요는 필요 없으십니까?”

“물이 가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발끈이 풀렸습니다. 항해 중에는 걸릴 수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신발끈을 보고 웃었다.

“정말 풀렸네.”

그레이는 몸을 숙여 매듭을 다시 묶어주려다 멈췄다.

“직접 하실 수 있습니까?”

아스테르다스는 눈을 깜박였다.

“응? 물론이지.”

“그럼 직접 묶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항해 중에 다시 풀리면 바로 고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그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조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는 직접 신발끈을 묶었다.

죠니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뛰어내리기 전에 신발끈도 보는 거네. 많이 컸다.”

아스테르다스가 씩 웃었다.

“로빈 후드 때 배웠거든.”

“좋네. 공연이 교육 효과가 있었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그건 좋은 일입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 너 지금 꽤 만족했지?”

“안전한 행동은 만족할 만합니다.”

“그건 맞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류트를 품에 안았다.

“좋아. 이번 귀향극, 시작이 괜찮아.”

죠니가 물었다.

“어느 부분이?”

푸리나는 웃었다.

“다들 아직 배에 타기도 전에 조금씩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잖아.”

그 말에 죠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가끔 꽤 좋아.”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칭찬이야?”

“반쯤.”

“나머지 반은?”

“아직 출항 전이니까 보류.”

푸리나는 웃었다.

---

레이튼은 조용히 배에 올랐다.

오늘 그는 항해 참모이자 질문자였다. 손에는 나침반 대신 둥근 수수께끼판을 들고 있었다.

죠니가 그것을 보고 물었다.

“그거 나침반이야?”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방향을 알려주기는 합니다.”

“북쪽?”

“아뇨. 질문 쪽으로요.”

죠니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거 배에서 제일 위험한 물건일지도 모르겠네.”

레이튼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는 죠니 옆에 서서 물었다.

“선장님. 집이란 목적지입니까, 아니면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입니까?”

죠니는 바로 대답했다.

“지금은 항구 이름이면 충분해.”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첫 번째 답으로는 훌륭하군요.”

“첫 번째면 나중에 또 묻겠다는 뜻이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나중에 짜증낼 준비도 해둘게.”

레이튼은 아주 만족한 듯했다.

---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 섰다.

그는 조용히 푸른 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대 장치에 불과한 천 물결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 너머의 길들이 희미하게 겹쳐 보이는 듯했다.

가지 않은 물길.

돌아오지 못한 배.

한 번만 방향을 달리했어도 살아남았을 선원들.

그리고 아직 닿을 수 있는 하나의 항구.

하융은 낮게 말했다.

“물결은 모두 길처럼 보이나, 모든 길이 귀향은 아니오.”

푸리나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좋아. 조타수 대사로 완벽해.”

죠니가 하융을 보았다.

“그럼 어느 쪽이 이타카야?”

하융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직은 보이지 않소.”

죠니는 숨을 내쉬었다.

“출항 전부터?”

“안개가 짙소.”

“극장 안인데도?”

하융은 진지했다.

“무대의 안개도 길을 가리오.”

죠니는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배에선 그 정도면 평범한 대답이네.”

---

마침내 출항 준비가 끝났다.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섰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무대 양쪽의 배우들이 푸른 천을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바다가 움직였다. 배는 가만히 있었지만, 빛과 천과 음악 때문에 정말로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객석의 요안나는 작게 숨을 삼켰다.

라이자는 은빛 등불을 하나 켰다.

아카식은 느긋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알토는 그 옆에서 말없이 보다가, 결국 한 줄을 적었다.

**극장 안의 배. 그러나 출항감 있음.**

아카식은 그걸 보고 웃었다.

“귀엽네.”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류트를 높이 들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출항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순한 사회자의 외침이 아니었다.

그 순간 푸리나 헤툼의 신술이, 아주 얇게 극장 전체에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것은 바다를 불러오는 신술이 아니었다.

왕궁을 없애고, 진짜 파도와 폭풍을 끌어들이는 기적도 아니었다. 푸른 천은 여전히 천이었고, 돛대는 여전히 목재였으며, 종이 갈매기는 줄에 매달린 종이 갈매기였다.

하지만 푸리나의 극은, 사물을 바꾸기 전에 먼저 사람을 무대 위에 세웠다.

배우들은 더 이상 단순히 배 역할을 하는 장치 위에 선 것이 아니었다.
관객들도 더 이상 안전한 객석에 앉아 남의 항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떠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는 선원이었고.
누군가는 배웅하는 이였고.
누군가는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집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자기 배역을 받아들이자, [여관:극장]의 막이 한 겹 열렸다.

천이 물결처럼 출렁였다.

아니, 출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종이 갈매기들이 줄에 매달린 채 흔들렸다.

아니, 바람을 타고 정말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머리카락 끝에 바닷바람이 스쳤다.
소금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났다.
멀리, 보이지 않는 파도가 배 옆구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순간적으로 담요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을 얹었다.

죠니는 발밑의 갑판이 아주 작게 기울어진 것을 느끼고, 난간을 붙잡았다.

“폐하.”

그가 낮게 말했다.

“방금 배 움직였지?”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고 웃었다.

“조금만.”

죠니는 푸른 천 위에 겹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조금만’이 바다에서는 제일 위험하다니까.”

“하지만 안 넘어졌잖아.”

“그래. 아직은.”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웃음이 아주 조금 낮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바다는 진짜 바다가 아니다.
하지만 떠나는 마음은 진짜였다.

이 배는 무대 위에 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무대 장치가 아니었다.

배우들이 흔드는 푸른 천 위로, 한 겹의 파도가 더 겹쳤다.
달은 등불이었지만, 달빛은 차가웠다.
갈매기는 종이였지만, 울음소리는 멀었다.

객석의 사람들도 잠시 말을 잃었다.

그들은 무대 장치를 보고 있었다.
동시에 배웅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류트를 다시 튕겼다.

첫 노래는 아주 밝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떠나는 노래였다.

> 바다는 천으로 짰고,
> 달은 등불로 걸었네.
> 그래도 떠나는 사람은
> 뒤돌아볼 곳을 찾네.
>
> 이타카여, 아직 멀어도
> 불 하나만은 꺼뜨리지 마라.
> 돌아오는 이는 젖어 있을 테니,
> 마른 천 하나 남겨두어라.

죠니는 노래를 듣다가 작게 말했다.

“폐하.”

“응?”

“이번 노래는 괜찮네.”

푸리나는 조금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정말?”

죠니는 앞을 보며 대답했다.

“응. 너무 세게 안 불어서.”

푸리나는 웃었다.

“그게 칭찬이야?”

“내 기준에선 꽤 큰 칭찬.”

그레이는 배 뒤편에서 마지막 담요를 접어두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돌아오면, 젖은 옷부터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죠니에게인지.

배에 탄 모두에게인지.

아니면 언젠가 돌아올 수 있는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까지 향한 말인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받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배는 무대 위에 있었다.

그러나 바다는 흔들렸다.

그리고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극장 안에서 정말로 먼 길을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 앞으로 죠니가 푸리나를 부를 때는 **“폐하”보다 “여왕님”**으로 갈게.
아래는 그 호칭까지 반영한 1막 개정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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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막 — 키클롭스의 동굴과 아무도 아닌 선장

### 호칭 반영 개정본

처음의 바다는 순했다.

푸른 천 위로 얇은 파도들이 반복해서 접히고 펴졌다. 무대 양옆의 배우들이 천을 흔들 때마다, [여관:극장]의 얇은 막이 그 움직임에 숨결을 보탰다. 물결은 실제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배 옆구리를 두드리는 소리는 실제처럼 들렸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왕궁 극장의 중앙에 있었지만, 그 위에 선 사람들은 어느새 조금씩 균형을 잡고 있었다.

죠니는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배는 안 움직이는데, 다들 걸음걸이가 바뀌었네.”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고 웃었다.

“그게 극장의 힘이지!”

“아니. 여왕님이 바닥을 흔들어서 그래.”

“조금만 흔들었어.”

“그 ‘조금만’이 오늘 계속 쌓이면, 배가 안 움직여도 난파할 수 있겠는데.”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파는 4막 이후로 미뤄놨어!”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여왕님, 난파를 일정표에 넣는 선장은 보통 오래 못 가.”

“나는 선장이 아니라 연출자야!”

“그게 더 무서운 부분이야.”

그레이는 조용히 선원들 사이를 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명단판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작게 접은 천과 물병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누군가 실제로 멀미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푸리나의 신술이 불러온 출항감은 생각보다 생생했다. 몇몇 배우는 무대 위에서 정말 배를 탄 사람처럼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레이는 한 병사 역 배우에게 물병을 건넸다.

“목이 마르면 조금씩 드세요. 한 번에 많이 마시면 더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배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연극인데도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연극이라도, 몸은 진짜입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배 위에 남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류트 줄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밝게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레이답다!” 하고 외치며 다시 모두를 웃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잘 돌아와야지.”

죠니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오늘은 대사가 좀 얌전하네.”

“나도 분위기는 읽거든?”

“가끔.”

“죠니!”

“칭찬이야. 오늘은 꽤 자주 읽고 있어.”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지만, 웃었다.

그때 하융이 조타수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푸른 천 너머, 무대 뒤편의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개는 흰 천과 연기로 만든 무대 장치였다. 그러나 하융의 눈에는 그것이 단순한 장치로만 보이지 않는 듯했다.

“섬이오.”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벌써?”

“귀향의 길은 직선이 아니오. 떠나자마자 길을 잃는 것도, 오래된 서사의 예법 아니겠소.”

“그건 예법이라기보다, 집에 가는 사람 입장에선 꽤 성가신 문제야.”

푸리나는 바로 류트를 들어 올렸다.

“좋아! 첫 번째 섬!”

죠니가 낮게 말했다.

“신났네.”

“당연하지! 오디세이아잖아!”

“오디세우스 입장에선 별로 안 신났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죠니가 해줘야지.”

“그 논리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그런데 이미 망토까지 입었으니까, 늦은 것 같긴 하네.”

하융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섬의 안쪽에 동굴이 있소. 길은 좁고, 입구는 하나뿐이오. 들어가기는 쉬우나, 나오기는 어렵겠구려.”

레이튼이 옆에서 미소 지었다.

“훌륭한 첫 수수께끼군요. 들어가기 쉬운데 나오기 어려운 곳. 동굴입니까, 선택입니까?”

죠니는 레이튼을 보았다.

“지금은 그냥 동굴이면 좋겠네. 선택까지 끼어들면, 당신이 밤새 설명할 것 같거든.”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대체로 둘 다입니다.”

죠니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

무대가 바뀌었다.

바다는 어두워지고, 배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대신 무대 중앙에는 거대한 바위 동굴이 세워졌다. 바위는 천과 목재로 만든 것이었지만, 조명이 낮게 깔리자 입구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동굴 안에는 양 떼를 흉내 낸 흰 천 뭉치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치즈 덩어리 모형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불빛이 흔들렸다.

아스테르다스가 동굴 앞에서 눈을 빛냈다.

“섬! 동굴! 보물!”

죠니가 말했다.

“세 단어 중에 안전한 게 하나도 없네. 특히 네가 저 순서대로 말하면 더 그래.”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래도 들어가야 하지 않아?”

“보통은 정찰부터 해.”

“정찰하러 들어가자!”

“그건 그냥 들어가는 거야. 말만 바꾼다고 안전해지진 않아.”

그레이가 동굴 입구를 보았다.

“안쪽 통풍이 나빠 보입니다. 오래 머무르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극용 동굴인데도?”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 장치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무대 담당을 보았다.

“연기 조금만!”

무대 담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가 말했다.

“좋아. 오늘의 첫 번째 기적은 여왕님이 ‘조금만’을 진짜 조금만으로 조절했다는 거네.”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나도 성장해!”

“그건 아직 1막이라서 확정하긴 이르지만, 출발은 좋아.”

그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죠니가 앞섰고, 아스테르다스가 그 옆을 따라갔다. 그레이는 뒤에서 담요와 물병이 든 작은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레이튼은 어둠 속의 벽을 유심히 보았고, 하융은 동굴 밖, 바다 쪽에 남아 길을 살폈다.

푸리나는 동굴 입구 근처에서 류트를 들고 서 있었다.

오늘 그녀는 모든 장면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번 장면은 죠니가 말했다.

“여왕님, 이번엔 입구가 좋아.”

“왜?”

“동굴 안에서 네가 노래하면, 괴물보다 먼저 천장이 자기 역할을 과하게 할 것 같아.”

“너무해!”

“반쯤 농담이야.”

“나머지 반은?”

“무대 안전. 그리고 그레이가 이미 동의하는 얼굴이야.”

그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상처받은 얼굴을 했지만, 결국 입구에 섰다.

“좋아. 이번엔 입구에서 해설할게.”

죠니가 작게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동굴 입장에선 꽤 큰 사건일 거야.”

---

동굴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배 위에서 들리던 파도 소리가 멀어지고, 대신 낮은 숨소리 같은 바람이 울렸다. 조명은 희미했고, 벽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치즈 모형을 보았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그레이가 말했다.

“소품입니다.”

“아쉽네.”

죠니가 말했다.

“첫 섬에서 치즈 먹다가 죽는 오디세이아는 좀 짧아. 적어도 2막까진 가보자.”

“그건 그렇지.”

레이튼은 동굴 안쪽의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했다.

“흠. 집주인이 꽤 크군요.”

죠니가 발자국을 보았다.

“안 들어오는 게 나았겠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들어온 다음에 그런 말 하기야?”

“대부분의 모험이 그래. 그리고 대체로 그때는 이미 늦었고.”

그때 동굴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거대한 발걸음.

동굴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무대 뒤에서 커다란 외눈 괴물 인형이 나타났다. 키클롭스였다. 한쪽 눈은 둥글고 큼직했으며, 어깨는 바위처럼 넓었다. 누가 조종하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움직임은 느리고 무겁게 설계되어 있었다.

객석에서는 낮은 탄성이 흘렀다.

요안나가 숨을 삼켰고, 라이자는 눈을 크게 떴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번 인형은 꽤 잘 만들어졌다.

키클롭스의 목소리는 무대 뒤에서 울렸다.

“누가 내 동굴에 들어왔느냐.”

목소리는 일부러 낮고 거칠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묘하게 이상한 정중함이 섞여 있었다.

“방문 목적을 밝혀라. 양에게 접근할 경우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

죠니가 눈을 깜박였다.

“괴물 동굴에도 절차가 있나?”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있다면 안전에는 도움이 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속삭였다.

“이 키클롭스, 생각보다 성실한데?”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성실한 괴물은 매우 흥미로운 모순이지요.”

죠니가 말했다.

“지금은 모순보다 저 팔 길이가 더 흥미롭네. 붙잡히면 토론할 거리도 안 남겠어.”

키클롭스가 다시 말했다.

“이름을 말하라.”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장면.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살아남는 이야기.

그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

그레이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은……”

그녀는 말을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명부에 적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죠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이름을 고르는지, 적어도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죠니는 작게 그녀를 보았다.

“부르지 말라고 지은 이름이야.”

그레이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키클롭스는 외눈을 굴렸다.

“아무도 아니라고?”

“그래.”

“이상한 이름이군.”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이 배에선 그 정도면 꽤 평범한 이름이야. 배 이름부터가 이미 수상하잖아.”

동굴 입구의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레이튼은 웃지 않았다.

그는 죠니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선장님. 이름을 숨기는 것은 거짓입니까, 생존입니까?”

죠니는 키클롭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윤리 토론은 일단 저 거대한 놈 앞에서 말고, 배에 돌아가서 해도 늦진 않을 거야.”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좋은 순서입니다.”

죠니는 조금 낮게 덧붙였다.

“살아 돌아가면 내가 차 한 잔 정도는 마시면서 들어줄게. 지금은 저 손이 먼저 오겠지만.”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동굴 벽에 붙은 작은 그림자들을 보았다.

이름을 숨긴 사람들.

이름을 말하면 잡히는 사람들.

이름이 없어서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이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감추어야만 살 수 있었던 사람들.

그녀는 손에 든 물병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

키클롭스는 그들을 의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아닌 자와 그 동료들아. 왜 내 동굴에 왔느냐.”

아스테르다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죠니가 팔로 살짝 막았다.

“길을 잃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이번엔 거의 사실이야. 이상하게 들리지만, 지금 우리 쪽에서 제일 정직한 답이기도 하고.”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길을 잃었다.”

키클롭스는 외눈을 좁혔다.

“길을 잃은 자들은 대개 남의 치즈를 먹는다.”

아스테르다스는 치즈 모형에서 슬쩍 손을 뗐다.

“아직 안 먹었어.”

죠니가 말했다.

“아직이라는 말은 빼. 그 말은 보통 곧 할 생각이라는 뜻으로 들려.”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정정했다.

“안 먹었어.”

키클롭스는 천천히 동굴 입구를 막아섰다.

거대한 바위 세트가 굴러와 입구를 반쯤 가렸다.

무대 위의 공기가 조금 바뀌었다.

웃음은 남아 있었지만, 이제 모두가 알았다.

들어오기는 쉬웠다.

나가기는 어렵다.

키클롭스가 말했다.

“그럼 내 손님이 되어라.”

죠니는 바위와 괴물, 그리고 동료들을 차례로 보았다.

“좋은 초대는 아닌 것 같네. 보통 손님은 나갈 수 있을 때 손님이거든.”

레이튼이 말했다.

“초대와 감금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죠니는 바위를 가리켰다.

“문이 열리면 초대. 닫히면 감금. 오늘은 꽤 명확한 편이네.”

“아주 실용적인 답입니다.”

“지금은 실용적인 게 필요해. 아름다운 답은 일단 살아서 배에 가져가자고.”

아스테르다스는 활을 만지려 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왜?”

“저 크기로 봐선, 네가 먼저 뛰면 거인과 함께 이 동굴이 우리 무덤이 되겠지”

아스테르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죠니는 동굴 안쪽의 양 떼, 치즈, 불, 긴 나무 말뚝 소품을 보았다.

“언제나 무력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머리를 좀 쓰자.”

푸리나가 입구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오디세우스답네.”

그레이는 그 말뚝을 보고 조용히 천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벌써 준비해?”

“누군가는 다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괴물도요.”

아스테르다스가 눈을 깜박였다.

“키클롭스도?”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이라도, 찌르는 장면은 찌르는 장면입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좋아. 그러면 최대한 덜 다치게 끝내보자. 괴물까지 챙기는 항해는 처음이지만, 뭐, 오늘 배 이름부터 임시였으니까.”

키클롭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혹은 들은 척하지 않았다.

---

죠니는 키클롭스에게 술잔을 건넸다.

물론 진짜 술은 아니었다. 향이 강한 포도즙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술이었다.

키클롭스는 잔을 받아 냄새를 맡았다.

“이건 무엇이냐.”

죠니가 말했다.

“동굴에서 혼자 살면 못 마시는 것.”

키클롭스는 잠시 멈췄다.

“좋은 것인가?”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로. 너무 많이 마시면 나쁜 것. 사람도 그렇고, 괴물도 아마 비슷하겠지.”

푸리나가 입구에서 속삭였다.

“대사 좋다.”

레이튼도 조용히 미소 지었다.

키클롭스는 포도즙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세 잔.

동굴의 그림자가 조금 흔들렸다. 키클롭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외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스테르다스가 낮게 물었다.

“지금?”

죠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지금 가면 반쯤 잠든 괴물이랑 완전히 깨어 있는 우리 갈비뼈가 만나게 돼.”

푸리나가 입구에서 눈을 빛냈다.

죠니는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여왕님의 ‘조금만’ 기준 말고, 진짜 조금만 더.”

푸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붕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키클롭스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다.

동굴 안이 조용해졌다.

죠니는 긴 나무 말뚝을 들었다.

그 순간, 웃음이 거의 사라졌다.

그것은 무대 소품이었다. 키클롭스 역시 인형이었다. 그러나 장면의 뜻은 분명했다.

눈을 멀게 해야 나갈 수 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스테르다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죠니는 말뚝을 들고 한참 동안 키클롭스를 보았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작게 숨을 삼켰다.

이 장면을 만든 것은 그녀였다.
하지만 장면 안에 들어가자, 그것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해서 해결될 장면은 아닌 것 같네.”

레이튼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는 말뚝을 들어 올렸다.

무대 위에서는 실제로 찌르지 않았다.

조명이 꺼졌다.

키클롭스의 외눈에 붉은 빛이 번졌고, 동시에 낮은 북소리가 울렸다.

쿵.

키클롭스가 깨어나 울부짖었다.

“누가 나를 해쳤느냐!”

죠니가 뒤로 물러났다.

키클롭스는 손을 휘저었다.

“누가!”

죠니는 어둠 속에서 말했다.

“아무도.”

키클롭스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아무도 나를 해쳤다!”

그 말에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일었다.

원작의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크지 않았다.

“아무도.”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

아무에게도 책임지워지지 않는 상처.

아무도 아닌 이름 뒤에 숨어 살아남은 사람.

그레이는 키클롭스의 외눈에 감긴 붕대를 보았다.

무대 담당이 빠르게 인형의 눈 위에 천을 감아두었다. 피는 없었다. 그러나 상처가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려다 멈췄다.

죠니가 물었다.

“그레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상처는 가짜입니다.”

“응.”

“그런데……”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죠니는 잠깐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그레이, 그건 나중에 바꿔주자. 지금 멈추면 저 붕대가 필요한 사람이 더 늘어날 거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

탈출은 양 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원작대로라면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은 양의 배 아래에 매달려 동굴을 빠져나간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무대용으로 바꾸었다. 흰 천 뭉치들이 움직이고, 배우들은 그 사이에 몸을 낮추어 지나갔다.

아스테르다스는 속삭였다.

“이거 생각보다 창피한데.”

죠니가 말했다.

“살아남는 자세는 원래 별로 멋없을 때가 많아. 멋있게 죽는 것보다 훨씬 유용하고.”

“로빈 후드 때보다 덜 멋있어.”

“대신 안 굴렀잖아. 오늘은 그걸로 꽤 이긴 거야.”

그레이도 낮게 몸을 숙였다. 그녀는 양 떼 흰 천 사이를 지나며, 키클롭스 인형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외눈은 붕대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빠져나가기 직전, 자신의 천 주머니에서 작은 붕대 하나를 꺼내 동굴 입구 옆에 놓았다.

죠니가 그것을 보았다.

“왜?”

그레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연극이 끝나면…… 바꿔줄 수 있으니까요.”

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키클롭스는 동굴 안에서 손을 휘저었다.

“아무도! 아무도 나를 해쳤다!”

그들은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다의 소리가 다시 들렸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성공!” 하고 외치려다가, 죠니의 얼굴과 그레이가 동굴 옆에 놓은 붕대를 보고 말을 삼켰다.

대신 작게 말했다.

“나왔네.”

죠니는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응. 나왔어.”

“멋있게?”

죠니는 양 떼 역할을 하던 흰 천 뭉치들을 돌아보았다.

“멋있진 않았어. 양 사이로 기어 나왔으니까. 그래도 살아 나왔지. 오늘은 그쪽이 더 값비싸네.”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중요하지.”

죠니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여왕님, 정말 분위기 자주 읽네.”

“계속 말하면 화낼 거야.”

“그럼 여기까지.”

---

배로 돌아왔을 때, 바다는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다.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그들을 맞았다.

“첫 섬을 지나왔구려.”

죠니는 배 난간에 손을 얹었다.

“지났다고 해야 하나. 도망쳤다고 해야 하나. 둘 다 틀리진 않겠지.”

레이튼이 말했다.

“대부분의 귀향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지요.”

아스테르다스는 배 위에 주저앉았다.

“나는 다음 섬에서는 밖에서 기다릴래.”

죠니가 말했다.

“그 말 기억해둘게. 그리고 네가 안 지킬 것도 같이 기억해둘게.”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들켰네.”

그레이는 말없이 물병을 건넸다.

아스테르다스는 받아 마셨다.

“고마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그녀는 죠니에게도 물병을 건넸다.

죠니가 받으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그래도 드세요.”

죠니는 잠시 물병을 보다가 마셨다.

“고마워. 이런 건 거절하면 네가 더 걱정할 것 같아서.”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방금 동굴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묻지 않았다.
키클롭스에게 미안했는지, 이름을 숨긴 것이 불편했는지, 아니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는지 캐묻지 않았다.

다만 물을 주었다.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젖지도 않은 망토를 살짝 털어주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류트를 천천히 튕겼다.

이번 노래는 짧았다.

> 아무도 아닌 이름으로
> 어둔 동굴을 지나왔네.
> 이름을 숨긴 것은 죄였나,
> 아니면 아직 숨 쉬고 싶던 마음이었나.
>
> 바다는 묻지 않는다.
> 다만 다음 파도를 보낼 뿐.

죠니는 노래를 듣고 말했다.

“여왕님.”

“응?”

“이번에도 괜찮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오늘 칭찬 많이 해주네.”

“아직 첫 섬인데 벌써 피곤해서 그래. 사람이 피곤하면 좀 솔직해지거든.”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반쯤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배 뒤편에 앉아, 동굴 입구에 두고 온 붕대를 떠올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가짜 괴물의 가짜 상처를 위한 진짜 붕대.

하지만 어쩐지, 그 작은 천 조각이 오늘 첫 항해의 표식처럼 느껴졌다.

배는 다시 나아갔다.

푸른 천의 바다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타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2막 — 세이렌의 노래와 귀를 막는 이유

두 번째 바다는 조금 더 깊었다.

처음 출항할 때의 바다는 푸른 천과 은실이 만든 반짝임에 가까웠다. 누구나 그것이 극장 안의 바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키클롭스의 동굴을 지나온 뒤, 바다는 같은 천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푸른색이 짙어졌다.

은빛 물결은 조금 느려졌다.

갈매기 소리는 멀어졌고, 배 옆구리를 두드리는 파도 소리는 더 낮아졌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위의 사람들도 조금 조용해졌다.

아스테르다스는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가, 그레이와 레플리카의 시선을 떠올리고 얌전히 갑판으로 내려왔다. 레이튼은 둥근 수수께끼판의 방향을 살폈고,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물결 너머의 길을 보았다.

죠니는 배 앞쪽에 서 있었다.

그는 오디세우스의 망토를 한 손으로 여미고, 다른 손으로 난간을 짚었다. 얼굴은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은 첫 섬 이전보다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푸리나는 그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오늘의 그녀답지 않게, 발걸음이 아주 조금 낮았다.

“죠니.”

“응.”

“첫 섬, 괜찮았어?”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무대가 무너진 것도 아니고, 누가 진짜로 다친 것도 아니니까 괜찮았다고 할 수는 있지.”

“그 말투는 안 괜찮았다는 뜻 같은데.”

“여왕님 연극은 가끔 그래. 다친 사람은 없는데, 다들 뭔가 하나씩 맞고 내려와.”

푸리나는 류트 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너무 무거웠어?”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배 옆의 바다를 보았다. 푸른 천이 흔들렸고, 그 위로 푸리나의 신술이 만들어낸 희미한 물비늘이 겹쳤다.

“아니. 첫 섬치고는 괜찮았어.”

“정말?”

“응. 다만 다음 섬부터는 여왕님도 조금 조심해. 네가 웃기려고 만든 장면이, 누군가한테는 생각보다 깊게 들어갈 수 있거든.”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알아.”

“알면 됐어. 모르는 척하면 그레이가 담요 세 장 더 꺼낼 테니까.”

푸리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그레이 담요는 강하지.”

“응. 이 배에서 제일 믿을 만한 무기야.”

그레이는 그 말을 멀리서 들은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갑판 구석에 접어둔 담요가 젖지 않았는지 다시 확인했다.


---

그때 하융이 조타륜에 손을 얹었다.

“소리가 들려오오.”

죠니가 고개를 들었다.

“파도 소리 말고?”

“파도보다 가볍고, 바람보다 깊소. 노래요.”

푸리나의 손이 류트 위에서 멈췄다.

아스테르다스가 바로 눈을 빛냈다.

“노래?”

죠니가 그를 보았다.

“네가 그렇게 반응하면 보통 위험한 노래야.”

“그래도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잖아.”

“안 돼.”

“아직 어떤 노래인지도 모르는데?”

“바다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예쁜 노래는 대체로 가까이 가면 배가 부서져.”

아스테르다스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바다를 보았다.

“그건 너무 경험 많은 말투인데.”

“오디세우스 역할을 맡았으니까, 경험 많은 척이라도 해야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세이렌의 섬이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번째 막.”

그녀는 류트를 천천히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노래하는 게 아니야.”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의외네.”

“나도 세이렌 하고 싶긴 했는데.”

“그건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야.”

“칭찬?”

“반쯤. 나머지는 경보.”

푸리나는 살짝 웃고, 무대 뒤쪽을 바라보았다.

푸른 장막 너머에서 은빛과 보랏빛 조명이 천천히 올라왔다.


---

세이렌의 섬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바다 위에 안개가 깔렸다. 안개 뒤로 세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나는 밝고 화려한 실루엣이었다.
하나는 은빛 등불을 든 작은 그림자였다.
하나는 기록장처럼 보이는 얇은 판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오늘의 세이렌은 무대 위에 완전히 오르지 않아.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무서울 때도 있으니까.”

죠니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오늘은 정말 분위기 읽네.”

“그 말 세 번 이상 하면 진짜 화낼 거야.”

“그럼 두 번 반쯤으로 해둘게.”

첫 번째 노래가 들렸다.

처음에는 맑았다.

봄날 축제에서 들을 법한 음이었다. 파도가 흔들리고, 등불이 물결 위에 떠다니는 듯했다. 세이렌들의 노래는 사람을 붙잡아 끄는 명령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목소리처럼 다가왔다.

> 돌아오라, 이름 불리는 자여.
네 활은 아직 벽에 걸려 있고,
네 잔은 아직 식탁 위에 있다.

돌아오라, 바다를 넘은 자여.
네 이야기를 들을 이들이
아직 잠들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가 난간에 손을 올렸다.

“좋은 노래네.”

죠니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서 위험한 거야.”

“왜? 나쁜 말은 안 하잖아.”

“사람은 나쁜 말보다 듣고 싶은 말에 더 잘 끌려가.”

아스테르다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이미 작은 천 뭉치들을 꺼내고 있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귀마개?”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만 억지로 막지는 않겠습니다.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죠니가 그레이를 보았다.

“좋네. 귀를 막는 것도 이유를 알아야 덜 답답하지.”

그레이는 선원들 앞에 섰다.

“이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건드립니다. 듣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항해 중입니다. 배 밖으로 몸을 기울이면 위험합니다.”

그녀는 천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듣고 싶다면,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합니다. 혼자 듣지 마십시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그게 핵심이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뭐가?”

“귀를 막는 게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혼자 끌려가지 않으려고 하는 거.”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스테르다스는 천을 받아들고도 망설였다.

“조금만 들으면 안 될까?”

죠니는 그를 정면으로 보았다.

“네가 말하는 ‘조금만’은 보통 한 발짝으로 시작해서, 다음 장면에서는 내가 밧줄 던지고 있더라.”

“그 정도야?”

“너는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추진력이 너무 좋아. 그러니까 이번엔 귀를 막고 있어. 나중에 여왕님한테 안전한 버전으로 다시 불러달라고 하면 되잖아.”

푸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안전한 세이렌의 노래라니, 그거 괜찮은데?”

죠니가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지금 만들지 마.”

“왜?”

“방금 안전하다고 했지, 즉흥으로 만들라고는 안 했어.”

아스테르다스는 결국 귀를 막았다.

“알겠어. 나중에 안전한 버전으로.”

“그래. 살아서 듣자.”

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가볍지만은 않았다.

레플리카는 객석 쪽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 항상 강한 척을 뜻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귀를 막고 옆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이 더 바른 선택이다.”

스토얀카가 그녀를 보았다.

“세이렌에게도 고통교의 해석을 붙이는가?”

“노래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해석할 필요가 있다.”

스토얀카는 입가를 올렸다.

“그대답군.”


---

하지만 모든 이가 귀를 막지는 않았다.

죠니는 귀마개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아직 끼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

“응.”

“안 막아?”

죠니는 세이렌의 안개를 보았다.

“오디세우스는 들어야 하잖아.”

“묶어줄까?”

“그 말, 네가 하니까 이상하게 연출처럼 들리는데.”

“실제로 연출이기도 해.”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럼 난간에 묶어. 너무 멋있게 묶지는 말고.”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러운 밧줄을 가져왔다. 무대용 밧줄이었지만, 손목이 쓸리지 않도록 천을 덧댄 것이었다.

죠니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역시 그레이답네. 묶는 것도 덜 아프게 묶어.”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아프게 묶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 오늘 계속 기억하게 될 것 같아.”

그레이는 죠니의 손목을 난간에 고정했다.

너무 단단하지 않게.

그러나 풀리지 않게.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여왕님, 내가 괜찮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 수는 있어. 그래도 지금은 해야 하는 장면이잖아.”

“연극이니까 안 해도 돼.”

죠니는 잠시 웃었다.

“연극이라서 하는 거지. 현실이면 안 듣고 도망쳤어.”

푸리나는 말문이 막혔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바다로 뛰어들려고 하면 아스테르다스가 너무 신나서 먼저 뛰려고 할 테니까, 네가 둘 다 말리면 돼.”

아스테르다스가 귀를 막은 채 멀리서 말했다.

“나 들었어!”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귀마개 제대로 안 꼈네.”

그레이가 바로 다가가 귀마개 위치를 고쳐주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

두 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첫 번째보다 낮았다.

처음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안에 조금씩 다른 것이 섞였다.

> 돌아오라, 이름 불리는 자여.
그러나 네 집은 예전과 같을까.
네가 두고 간 불은 아직 타오를까.
네가 앉던 자리는
다른 이의 침묵이 되었을까.

돌아오라, 바다를 넘은 자여.
하지만 네 뒤에 남은 자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불릴까.



죠니의 손가락이 난간을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보았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는 것을.

그레이는 밧줄 매듭을 확인하려다 멈췄다.

레이튼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낮게 말했다.

“저 노래는 목적지를 부르는 것이 아니오. 뒤에 남긴 그림자를 부르는 것이오.”

죠니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세이렌의 노래는 그를 찢어내듯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돌아갈 집.

기다리는 사람.

돌아왔을 때 마주해야 할 빈자리.

그리고 자신만 돌아왔다는 사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나쁘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래가?”

“응. 너무 예뻐서 더 나빠.”

그의 손목을 묶은 밧줄이 조금 팽팽해졌다.

아스테르다스가 귀마개를 낀 채 그를 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죠니가 눈짓으로 막았다.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았다.

그녀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쟁심이 들었다. 노래로 사람을 붙잡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무대의 힘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곧 알았다.

세이렌의 노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을 자신의 상처 속에 홀로 세웠다.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내 무대랑 달라.”

죠니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응. 여왕님 무대는 보통 너무 시끄러워서 사람을 혼자 두진 않지.”

“그거 칭찬이야?”

“꽤 큰 칭찬.”

푸리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그럼 내가 좀 시끄럽게 해도 돼?”

죠니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번엔 허락할게. 너무 세게 말고.”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는 류트를 들었다.

세이렌의 노래 위로 푸리나의 현이 올라갔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다.

세이렌의 노래를 이기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을 덮어버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다만, 혼자 듣고 있는 사람의 옆에 누군가 앉는 소리였다.

푸리나는 노래했다.

> 바다가 네 이름을 부르거든,
혼자 대답하지 마라.

돌아갈 집이 멀어 보이면,
옆 사람의 숨을 먼저 들어라.

네가 잃은 것이 너를 부르더라도,
네가 아직 붙잡은 손도 있다.

그러니 돌아오라.
노래 속으로가 아니라,
배 위로.



세이렌의 노래가 흔들렸다.

푸리나의 목소리는 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달랐다.

세이렌은 혼자 남은 마음을 불렀고, 푸리나는 그 마음 옆에 다른 사람들을 불렀다.

아스테르다스가 귀마개를 낀 채도 박자를 느낀 듯 난간을 두드렸다.

그레이는 조용히 다른 선원의 손에 물병을 쥐여주었다.

레이튼은 미소를 지었다.

하융은 조타륜을 조금 돌렸다.

죠니는 밧줄에 묶인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왕님.”

“응?”

“이번엔 세게 불러도 괜찮았네.”

푸리나는 웃으려다가,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칭찬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쪽에서는 제법 좋은 칭찬이야.”

“그럼 받아둘게.”


---

세이렌의 안개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림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배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마지막 노래가 희미하게 들렸다.

> 돌아오라, 이름 불리는 자여.
우리는 네가 잃은 것을 알고 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아니.”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난간을 붙잡은 채, 바다 너머를 보았다.

“아는 척하는 거겠지. 잃은 걸 정말 아는 사람은, 그렇게 예쁘게만 부르진 않아.”

그 말은 아주 조용했다.

그레이는 밧줄을 풀었다.

천으로 덧댄 부분 덕분에 죠니의 손목에는 자국이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손목을 잠시 살폈다.

“아프십니까?”

죠니는 손목을 돌려보았다.

“괜찮아. 잘 묶었네.”

“풀기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살면서 묶인 것 중에 가장 배려 있는 밧줄이었어.”

그레이는 그 말에 조금 난처해했다.

푸리나는 그걸 듣고 웃었다.

“그레이의 배려 있는 밧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 표현은 이상합니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맞는 말이야.”

그레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

세이렌의 섬을 지난 뒤, 배 위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첫 섬을 지난 뒤의 침묵과는 달랐다.

이번 침묵은 조금 덜 차가웠다.

아스테르다스는 귀마개를 빼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와.”

죠니가 물었다.

“많이 들었어?”

“조금.”

“그 ‘조금’이 진짜 조금이었길 바란다.”

“진짜 조금이었어. 그런데도 이상하더라.”

“뭐가?”

아스테르다스는 바다를 보았다.

“좋은 말만 하는데, 이상하게 발이 앞으로 가려고 했어.”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노래였지.”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죠니는 더 많이 들었잖아. 괜찮아?”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뒤, 아주 낮게 말했다.

“괜찮다고 해두자. 아직 배 위니까.”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이 완전한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그레이가 죠니 앞에 따뜻한 물을 놓았다.

“목이 마를 수 있습니다.”

죠니는 잔을 받았다.

“고마워.”

그레이는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무엇을 들었는지.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어떤 집을 떠올렸는지.

그녀는 그냥 따뜻한 물을 주었다.

그리고 배의 흔들림이 잦아들 때까지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류트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번 막을 밝은 박수로 끝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

“두 번째 섬을 지났습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세이렌은 우리를 부르려 했고, 우리는 서로의 소리를 붙잡았습니다.”

죠니는 잔을 든 채 말했다.

“좋은 정리네. 오늘은 진짜로.”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고마워.”

하융은 조타륜을 돌렸다.

“바람이 바뀌오.”

레이튼이 물었다.

“다음 길은 보입니까?”

하융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오. 허나 이 배는 방금, 노래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소. 그것만으로도 길 하나는 닫히고, 다른 길 하나는 열렸구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키르케의 섬과 돌아온 짐승들

아스테르다스가 그 제목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돌아온 짐승들?”

죠니는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제목부터 벌써 귀찮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보았다.

세이렌의 노래는 멀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작게 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는 담요를 다시 접어두었다.

이번에는 난간 가까이에.

혹시 누군가, 말없이 떨게 될지도 모르니까.
4막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선택의 바다

네 번째 바다는 좁았다.

무대 위의 푸른 천은 여전히 같은 천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넓은 바다가 아니라, 두 절벽 사이로 밀려드는 어두운 해협처럼 보였다.

왼쪽에는 높고 검은 바위가 세워졌다.

그 바위 위에는 여섯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다. 긴 목처럼 휘어진 검은 천과, 손인지 발톱인지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그림자들이 조명 사이에서 움직였다.

오른쪽에는 둥근 소용돌이가 있었다.

무대 담당들이 커다란 원형 천을 천천히 돌렸고, 그 위로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겹치자, 그것은 정말로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바다처럼 보였다. 물은 없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발밑이 잠깐 가라앉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그 사이에 멈춰 있었다.

배 위에는 말이 없었다.

키르케의 섬에서 모두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여운은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담요를 어깨에 걸쳤고, 누군가는 손가락을 펴고 접으며 사람의 손이 돌아온 감각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배 난간에 기대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난간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의 신발끈은 단단했고, 손은 차분했다.

그레이는 조용히 사람들의 상태를 보았다.

“물이 필요하신 분은 말씀해주십시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물병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말하지 않아도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죠니는 그 모습을 보고 낮게 말했다.

“이 배에서 제일 꾸준한 건 저 물병이네.”

그레이는 잠시 그를 보았다.

“필요할 때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응. 사람도 그렇고.”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정하지도 않았다.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서 있었다.

평소라면 새 막의 시작을 크게 외쳤을 것이다. “자, 이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하고 탬버린이라도 흔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류트를 들고도 바로 연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왼쪽 바위와 오른쪽 소용돌이를 번갈아 보았다.

“여기구나.”

죠니가 말했다.

“응. 여기네.”

“어느 쪽으로 가야 해?”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조타륜을 잡은 채, 두 길 사이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푸른 천보다 더 많은 것이 비치는 듯했다.

선택되지 않은 항로.

부서지는 돛.

떨어지는 이름표.

살아남는 배.

그러나 모두 살아남지는 못하는 길.

하융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왼쪽 길은 몸을 잃고, 오른쪽 길은 배를 잃소.”

푸리나의 손이 류트 위에서 굳었다.

하융은 이어 말했다.

“가운데는 길이 아니오.”

아무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가 낮게 물었다.

“몸을 잃는다는 건?”

하융은 왼쪽 바위를 보았다.

“스킬라. 지나가는 배에서 사람을 낚아채는 그림자요.”

그레이가 오른쪽을 보았다.

“배를 잃는다는 것은…….”

“카리브디스. 가까이 가면 배 자체가 삼켜질 것이오.”

죠니는 한참 동안 두 길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이번엔 회의가 필요하네.”

푸리나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죠니가 회의하자고 했어.”

“여왕님, 나도 아무 때나 뛰어드는 쪽은 아니야.”

“가끔은?”

“가끔은 네가 먼저 뛰어들어서 내가 말릴 시간이 없는 거지.”

푸리나는 웃으려다 멈췄다.

이번에는 웃음이 오래가지 않았다.


---

배 가운데에 작은 탁자가 놓였다.

지도는 없었다.

대신 왼쪽 바위와 오른쪽 소용돌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선택지는 너무 분명했고, 그래서 더 잔인했다.

레이튼이 먼저 말했다.

“선택지를 정리해보지요. 왼쪽은 일부를 잃을 가능성, 오른쪽은 전부를 잃을 가능성입니다.”

그레이는 조용히 물었다.

“왼쪽으로 갈 경우, 피해를 줄일 방법은 있습니까?”

하융이 대답했다.

“배를 바위에서 최대한 멀리 붙이고, 돛을 낮추며, 갑판 위 인원을 묶어야 하오. 그래도 완전하지는 않소.”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내가 왼쪽을 막으면?”

죠니가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이번엔 충동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눈이 맑았다. 그는 자신의 힘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몸을 어디에 던질지 계산하고 있었다.

“스킬라가 낚아채려는 순간, 내가 먼저 떨어져서 그 손을 끊으면 돼.”

그레이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죠니는 바로 말리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말했다.

“형씨,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건 알아. 문제는 한 번 떨어지고 끝날 상황이 아니라는 거야. 저쪽 그림자, 하나가 아니잖아.”

왼쪽 바위 위의 여섯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아스테르다스는 그걸 보았다.

“여섯.”

“응. 네가 하나를 쳐도, 다섯은 남아. 그리고 네가 너무 멀리 떨어지면, 이 배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지도 몰라.”

아스테르다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 말은 그를 낮게 본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죠니는 그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로 떨어져서, 한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낮게 웃었다.

“좋아. 그러면 내가 혼자 해결하는 길은 아니네.”

“응. 이번엔 영웅 하나로 끝나는 장면이 아니야.”

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오른쪽은?”

하융은 카리브디스 쪽을 보았다.

“오른쪽은 배가 사라지오. 빠져나올 가능성은 있으나, 그 가능성은 죽은 세계에 더 많소.”

“죽은 세계?”

하융의 눈이 아주 잠깐 흐려졌다.

“우리가 선택하지 말아야 할 바다요.”

그 말에 더 이상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레이는 탁자 위에 담요를 올렸다.

죠니가 물었다.

“담요?”

“왼쪽으로 가면 갑판 위에서 버텨야 합니다. 손이 미끄러지거나 몸이 차가워질 수 있습니다.”

“아직 선택 안 했는데.”

“그래서 준비합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방식이지.”

그레이는 담요를 접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손이 조금 느렸다.

푸리나는 그걸 보았다.

“그레이?”

그레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죠니가 조용히 말했다.

“괜찮다는 말은 아껴도 돼. 이 배에서 그 말 너무 빨리 쓰면 그레이한테도 혼나.”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무섭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낮게 이어 말했다.

“다칠 사람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일은…… 익숙합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그렇지.”

레이튼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누구의 것입니까? 선장의 것입니까, 선원들의 것입니까, 아니면 항해 자체의 것입니까?”

죠니는 탁자 위의 담요를 보았다.

왼쪽의 그림자.

오른쪽의 소용돌이.

그리고 배 위의 사람들.

“내가 정해야겠지.”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혼자?”

“혼자 정하는 척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봤잖아. 이 배에서 내가 혼자 뭘 정하면, 대체로 누가 옆에서 담요를 놓고, 누가 노래하고, 누가 질문하고, 누가 뛰어내릴 준비를 해.”

아스테르다스가 씩 웃었다.

“그건 나네.”

“응. 너무 자랑스럽게 말하진 말고.”

죠니는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마지막 말은 내가 해야 해. 그래야 누가 원망할 곳이 생기거든.”

푸리나의 얼굴이 굳었다.

“죠니.”

“여왕님, 이건 멋있는 말이 아니야. 그냥 선장이 그렇게 생겨먹은 자리라는 거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책임을 위한 이름이군요.”

죠니는 작게 웃었다.

“이번엔 아무도 아닌 선장으로는 못 지나가겠네.”


---

결정은 왼쪽이었다.

스킬라의 바위.

일부의 손실을 감수하는 길.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에 배 전체를 맡길 수는 없었다.

푸리나는 그 결정을 듣고도 바로 음악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이 장면, 그냥 넘기면 안 되겠지?”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넘기고 싶어?”

“응.”

“나도.”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근데 넘기면, 이 극이 거짓말을 하게 될 것 같네.”

푸리나는 류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알아.”

그녀는 천천히 배 앞머리로 걸어갔다.

“그러면 이번 노래는 길을 여는 노래가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붙잡는 노래야.”

그 말에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선원들을 보았다.

“지금부터 모두 서로를 묶어. 하지만 억지로 끌지 마. 떨어지려는 사람을 짓누르는 게 아니라, 돌아올 손잡이를 만드는 거야.”

그레이는 바로 움직였다.

그녀는 밧줄과 천을 나누어주었다. 세이렌의 막에서 죠니를 묶었던 것처럼, 손목이 쓸리지 않게 천을 먼저 감았다. 선원들은 서로의 허리와 팔을 연결했다. 너무 단단하지 않게. 하지만 끊어지지 않게.

아스테르다스는 자기 허리에 밧줄을 묶으며 물었다.

“죠니, 나도 묶어?”

죠니는 그를 보았다.

“응. 형씨가 약해서가 아니라, 돌아올 곳을 정해두려고.”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그 말은 좋네.”

그는 밧줄 끝을 죠니에게 건넸다.

“그럼 잡아.”

죠니는 밧줄을 받았다.

“이거, 내가 감당 못 하면?”

아스테르다스는 씩 웃었다.

“그럼 내가 감당할게. 밧줄은 양쪽에서 잡는 거잖아.”

죠니는 잠깐 그를 보다가 웃었다.

“그래. 그쪽이 훨씬 낫네.”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어린 선원 역 배우의 손목을 묶어주었다.

배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떨어지는 건 아니죠?”

그레이는 잠시 그를 보았다.

“네. 진짜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그래도 무서우면 말해도 됩니다.”

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무서우면, 이 천을 잡으세요.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 말에 배우는 천을 꼭 잡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연출한 바다와 괴물보다, 그레이가 무릎을 꿇고 천을 내미는 장면이 더 오래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배가 움직였다.

정확히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대 양쪽의 푸른 천이 거세게 흔들렸다. 조명이 왼쪽 바위를 크게 비추었다. 스킬라의 여섯 그림자가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괴물이라기보다, 손실의 형태 같았다.

한 그림자는 긴 손을 가졌다.
한 그림자는 갈라진 목소리를 가졌다.
한 그림자는 사람의 이름표를 쥐고 있었다.
한 그림자는 빈 의자를 끌고 있었다.
한 그림자는 젖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마지막 그림자는 얼굴이 없었다.

푸리나는 류트를 치기 시작했다.

노래는 짧은 박자였다.

> 붙잡아라.
그러나 부수지 말고.

끌어당겨라.
그러나 숨 막히게 하지 말고.

돌아오라.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이름을
밟고 오지는 말고.



스킬라가 움직였다.

첫 번째 그림자가 배 위로 손을 뻗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몸이 낮아졌다. 청흑빛 기운이 발끝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키르케의 마법이 밀어붙이는 충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고른 낙하지점이었다.

그는 떨어지듯 뛰었다.

그러나 배를 떠나지 않았다.

밧줄이 그의 허리에서 팽팽해졌고, 그는 그 긴장을 이용해 궤도를 바꾸었다. 청흑빛 유성이 바위와 배 사이를 스치며, 스킬라의 첫 손을 밀어냈다.

그림자가 찢어졌다.

객석에서 낮은 탄성이 났다.

죠니는 밧줄을 잡고 이를 악물었다.

“형씨, 너무 멀리 가면 내가 진짜로 욕할 거야.”

아스테르다스가 공중에서 웃었다.

“그건 좀 듣고 싶네!”

“돌아와서 들어. 바다 위에서 들으면 집중 안 되잖아.”

아스테르다스는 밧줄의 힘을 받아 배 쪽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그림자가 그 틈을 노렸다.

이번에는 아스트리트가 나섰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배 옆의 선원들을 보호했다.

“낮추세요!”

이번에는 긴 구령이 아니었다.

짧고 정확했다.

선원들이 몸을 낮추자, 스킬라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죠니가 말했다.

“좋아. 그 구령은 살았다.”

아스트리트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연습했습니다.”

“효과 있네.”

그러나 세 번째 그림자는 이름표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배 위를 직접 낚아채지 않았다.

대신 갑판 위에 있던 작은 나무패 하나를 끌어당겼다. 무대용 선원 이름표였다. 엑스트라 배우 하나가 맡고 있던, 극중 선원의 이름.

그레이가 그것을 보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안 됩니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무모하게 뛰어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바닥의 밧줄을 잡고, 몸을 낮춘 채 이름표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았다. 하지만 스킬라의 그림자가 더 빨랐다.

나무패가 그녀의 손끝을 스치고, 바위 쪽으로 끌려갔다.

그레이는 그 자리에 멈췄다.

이름표는 사라졌다.

무대 위에서, 아주 작은 물체 하나가 어둠 속으로 넘어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배 위의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푸리나의 노래가 잠시 흔들렸다.

그레이는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죠니가 다가왔다.

“그레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잡지 못했습니다.”

죠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응.”

그레이는 다시 말했다.

“잡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더 작았다.

죠니는 무리하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름은?”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니코스.”

짧은 이름이었다.

극중 선원.

실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푸리나의 신술 위에서, 그 이름은 잠깐 배 위에 살고 있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억하자. 지금은 배를 지나가게 하고.”

그레이는 눈을 떴다.

“네.”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병이 아니라,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갑판 한쪽, 이름표가 있던 자리에 묶어두었다.

빈 자리 표시.

푸리나는 그것을 보며 노래를 이어갔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 하나가 사라져도
자리는 지우지 마라.

파도가 삼켜도
이름을 바다의 일로만 두지 마라.



스킬라의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림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하융이 조타륜을 돌렸다.

“지금이오!”

배가 왼쪽 바위에서 살짝 멀어졌다. 무대 천이 거칠게 흔들렸다. 아스테르다스가 다시 한 번 뛰어올라 그림자 하나를 밀어냈고, 아스트리트가 다른 그림자의 손을 막았다.

죠니는 밧줄을 잡고 선원들을 끌어당겼다.

“다들 낮게. 멋있게 서 있으면 괴물한테 잘 보일 뿐이야.”

아스테르다스가 돌아오며 말했다.

“나 방금 멋있었어?”

“응. 괴물한테도 잘 보였을걸.”

“그건 좀 문제네.”

“그래도 살아 돌아왔으니 괜찮아.”

마지막 그림자, 얼굴 없는 스킬라가 배 위로 내려왔다.

그것은 누구도 잡지 않았다.

대신 배 위에 걸린 불빛 하나를 꺼뜨렸다.

조명이 살짝 낮아졌다.

모두가 느꼈다.

무언가 지나갔다.

누군가가 없어진 것처럼.

그러나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없는 손실.

그레이는 숨을 들이켰다.

“불 하나가 꺼졌습니다.”

푸리나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죠니가 말했다.

“다시 켜자. 지나간 뒤에.”

“지금은?”

“지금 켜러 가면, 꺼질 불이 더 늘어날 거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차가웠지만, 맞았다.


---

마침내 배가 해협을 빠져나왔다.

스킬라의 그림자는 바위 위로 물러갔다.

오른쪽의 카리브디스는 여전히 돌고 있었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마치 자신에게 오지 않은 배를 아쉬워하듯 천천히 낮아졌다. 무대 위의 푸른 천이 조금씩 잔잔해졌다.

배 위에는 아무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는 밧줄을 풀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아스트리트는 지팡이를 바닥에 짚고 있었다.
하융은 조타륜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푸리나는 류트 현 위에 손을 얹은 채, 마지막 음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이름표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죠니가 천천히 밧줄을 풀었다.

“다들 있어?”

그레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

둘.

셋.

모두 있었다.

하지만 모두 있다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갑판 한쪽에 묶인 작은 천 조각을 보았다.

니코스.

극중 선원.

스킬라가 가져간 이름표.

“사람은 모두 있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름표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푸리나가 가까이 왔다.

“그레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실제 사람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품입니다. 극중 이름표입니다. 배우는 무사합니다.”

“응.”

그레이의 손이 천 조각 위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럼 넘어가지 말자.”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서 잠깐 멈추자.”

무대가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돌아섰다.

“스킬라의 바위를 지났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배는 살아남았고, 선원들도 모두 배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이름표가 바다로 갔습니다.”

그녀는 그레이가 묶어둔 천 조각을 보았다.

“이름은 니코스.”

객석도 조용해졌다.

로빈후드의 빈 잔 때와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되찾은 뒤의 빈자리였다.

이번에는 지나가기 위해 받아들인 빈자리였다.

그레이는 작은 천 조각 옆에 물 한 잔을 놓았다.

담요도, 빵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물이었다.

바다 위에서 사라진 이름에게 어울리는 것처럼.

“나중에 다시 적겠습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지금은…… 잊지 않겠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겠지.”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죠니는 작게 웃었다.

“그 말,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좋은 질문과 좋은 말은 돌아옵니다.”

죠니는 천 조각을 보았다.

“그래. 미안하다, 니코스. 그래도 배는 가야 해.”

푸리나는 류트를 다시 들었다.

이번 노래는 아주 짧았다.

> 바위는 지나갔고,
배는 남았다.

그러나 이름 하나가
물결 아래로 갔다.

우리는 간다.
간다는 말로
잊지는 않겠다.



노래가 끝났을 때, 꺼졌던 불 하나가 다시 켜졌다.

그레이가 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 위의 모두가 그 불을 보았다.


---

해협을 지나자, 바다가 조금 넓어졌다.

그러나 안도는 오지 않았다.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자, 다음 막!” 하고 외치지 않았다. 그녀는 류트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손끝으로 현을 가볍게 눌렀다.

죠니가 옆에 섰다.

“여왕님.”

“응.”

“방금은 잘했어.”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걸?”

“멈춘 거.”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극이니까. 흐름이 끊기면 안 된다고.”

“끊겨야 하는 흐름도 있지.”

“죠니가 그런 말도 하네.”

“나도 배가 부서지지만 않으면 꽤 많은 걸 배워.”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럼 지금 배는?”

죠니는 갑판을 보았다.

밧줄 자국.

물잔.

작은 천 조각.

다시 켜진 불.

“부서지진 않았어.”

“그럼 괜찮아?”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계속 갈 수는 있어.”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괜찮지는 않다.

하지만 계속 갈 수는 있다.

그것이 네 번째 바다의 답이었다.

아스테르다스가 다가왔다.

그는 허리의 밧줄을 풀어 죠니에게 건넸다.

“덕분에 돌아왔어.”

죠니가 받았다.

“네가 잡아준 덕도 있지. 밧줄은 양쪽에서 잡는 거라며.”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 말 내가 했지.”

“응. 나쁘지 않았어.”

“거의 온전히 칭찬?”

“오늘은 그래. 거의.”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레이 쪽을 보았다.

그녀는 니코스의 천 조각 옆에 앉아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 옆에 물잔 하나를 더 놓았다.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왜 하나 더……?”

“모르겠어.”

아스테르다스는 바다를 보았다.

“그냥 하나만 있으면 외로워 보였어.”

그레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멋쩍게 웃었다.

“이런 건 아직 잘 모르겠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합니다.”


---

하융은 조타륜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다음 길은 아래로 향하오.”

푸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래?”

레이튼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저승 방문이군요.”

배 위의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를 지나, 이제 오디세우스는 죽은 자들의 세계로 향한다.

그레이의 손이 작게 굳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그레이.”

“네.”

“이번엔 물이랑 담요 말고, 뭐가 필요해?”

그레이는 조금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마른 천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젖은 사람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젖은 신발이 있을 것 같아서요.”

죠니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곧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챙기자.”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았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5막 — 저승의 여관과 젖은 신발

이번에는 아무도 제목을 보고 농담하지 않았다.

배는 다시 움직였다.

바다는 넓어졌지만, 빛은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항구를 향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3막 — 키르케의 섬과 돌아온 짐승들

개정본

세 번째 섬은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키클롭스의 동굴은 어둡고 좁았고, 세이렌의 바다는 보이지 않는 노래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번 섬은 달랐다. 무대 위에 깔린 푸른 천이 천천히 걷히자, 그 아래에서 따뜻한 금빛 조명이 올라왔다.

섬은 숲이었다.

하지만 셔우드 숲처럼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장난스러운 숲은 아니었다. 이 숲은 더 짙고, 더 향기로웠다. 나뭇가지에는 붉은 열매가 매달려 있었고, 낮은 연기가 풀숲 사이를 기어갔다. 무대 한쪽에는 작은 저택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쪽에서는 따뜻한 불빛과 식탁의 그림자가 보였다.

푸리나는 배 난간에서 그 광경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 섬은 좀 괜찮아 보이는데?”

죠니가 그녀 옆에서 섬을 바라보았다.

“여왕님, 그 말은 보통 괜찮지 않은 섬에 도착했을 때 나와.”

“하지만 봐봐. 동굴도 없고, 외눈 괴물도 없고, 노래하는 안개도 없잖아.”

“응. 대신 문이 열려 있고, 음식 냄새가 나고, 아무도 우릴 막지 않네. 그게 더 수상할 때도 있어.”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죠니는 좋은 걸 봐도 먼저 의심하네.”

“오디세우스가 좋은 걸 그냥 믿었으면, 이 이야기는 1막에서 끝났을걸.”

아스테르다스는 이미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발끈은 이번에도 제대로 묶었다. 그는 그것을 죠니에게 보여주듯 한 번 발을 들어 보였다.

“봐, 이번엔 완벽하지?”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네 신발끈이 제일 믿음직하다.”

“그건 칭찬이야?”

“반쯤. 나머지 반은 다른 부분이 아직 덜 믿음직하다는 뜻이고.”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래도 내려가도 되지?”

죠니는 숲과 열린 문, 그리고 따뜻한 식탁을 다시 보았다.

“천천히. 뛰어가서 먼저 먹는 건 금지.”

“왜?”

“동화나 서사에서, 모르는 집의 음식은 보통 이야기 진행 장치거든.”

“먹으면 진행되는 거 아냐?”

“응. 문제는 진행 방향이야.”

그레이는 배에서 작은 가방을 들고 내렸다. 이번에도 기록판보다 먼저 물병과 얇은 천, 마른 옷을 챙겼다. 그녀는 섬의 따뜻한 공기를 느끼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습기가 많습니다.”

푸리나가 물었다.

“또 담요?”

“이번에는 마른 옷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죠니가 그레이의 가방을 보았다.

“그레이, 너는 섬보다 먼저 사고의 종류를 맞히는 것 같네.”

“맞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맞을 것 같아서 무섭다.”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낮게 말했다.

“저 섬은 길을 막지는 않소.”

죠니가 돌아보았다.

“그럼 괜찮은 건가?”

“아니오. 길을 바꾸오.”

“그게 더 안 괜찮게 들리는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들어간 발자국과 나오는 발자국이 다를 것이오.”

그 말에 푸리나의 손이 류트 위에서 멈췄다.

아스테르다스도 더 이상 뛰려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섬의 숲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흥미롭군요. 돌아온다는 것은 같은 발로 돌아오는 일일까요, 아니면 달라진 발을 받아들이는 일일까요?”

죠니가 말했다.

“레이튼, 이번엔 그 질문이 꽤 필요해 보이네.”

“그런가요?”

“응. 보통은 배에 돌아가서 하자고 했을 텐데, 이번엔 섬에 들어가기 전에 들어두는 게 나을 것 같거든.”

레이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

저택의 문 앞에는 라플리가 서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키르케였다.

화려한 마녀의 로브라기보다, 오래된 마탑의 주인 같은 옷차림이었다. 검은색과 깊은 보라색이 섞인 옷자락이 발밑까지 내려왔고, 손에는 은빛 잔이 들려 있었다. 눈은 차갑고,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있었다.

그녀는 배에서 내린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타카로 간다더니, 길을 꽤 잘못 들었네.”

죠니가 대답했다.

“그 말은 첫 섬부터 계속 듣고 있어서, 이제 좀 익숙해졌어.”

라플리는 그를 보았다.

“오디세우스?”

“오늘은 그렇다네.”

“어울리진 않는데.”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왕님이 이미 배까지 띄워서 늦었어.”

푸리나는 라플리 뒤의 식탁을 보았다.

그 위에는 빵과 과일, 따뜻한 수프, 붉은 술이 놓여 있었다. 모두 무대용 소품이거나 안전하게 준비된 음식일 터였다. 그래도 냄새는 이상하게 생생했다.

“키르케의 섬이네.”

라플리는 웃었다.

“잘 아네.”

“오디세이아니까.”

“그럼 알겠지. 여기서 함부로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아스테르다스가 손을 멈췄다.

이미 빵에 가까이 가 있던 손이었다.

죠니가 그를 보았다.

“봐. 내가 뭐랬어.”

아스테르다스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안 먹었어.”

“좋아. 드디어 ‘아직’을 빼는 법을 배웠네.”

라플리는 그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먹겠지. 배고픈 사람은 항상 있고, 쉬고 싶은 사람도 항상 있으니까.”

그 말은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그레이는 식탁을 보았다. 따뜻한 음식. 열린 문. 마른 의자. 바다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앉고 싶어질 자리였다.

“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라플리가 그레이를 보았다.

“물론. 문제는 쉬는 순간, 자기가 무엇을 내려놓는지 모른다는 거지.”

푸리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건 무슨 뜻이야?”

라플리는 잔을 흔들었다.

“앉아봐. 알게 될 테니까.”

죠니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왕님, 이번엔 내가 먼저 볼게.”

“괜찮겠어?”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안 괜찮다고 빠지면 오디세우스 배역료를 못 받을 것 같네.”

“배역료는 없는데?”

“그럼 더 억울하네.”

푸리나는 잠깐 웃었다.

그 웃음은 짧았다.

죠니는 식탁 앞에 앉지 않았다. 대신 식탁을 지나쳐 라플리 앞에 섰다.

“뭘 보여주려는 거야?”

라플리는 그를 빤히 보았다.

“네가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지금 보기엔 다 사람인데.”

“겉모양은 그렇지.”

라플리는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다는 사람을 깎아. 전쟁도 그렇고, 공포도 그렇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도 그렇지. 사람은 살아남으려고 많은 걸 삼킨다. 짐승처럼 뛰고, 짐승처럼 숨고, 짐승처럼 물어뜯고, 그런 다음 집에 돌아가서 사람 얼굴을 하지.”

그녀의 웃음이 희미해졌다.

“그게 정말 돌아온 걸까?”

죠니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그 질문을 하려고 남의 속을 뒤집어놓을 생각이면, 꽤 취미가 안 좋은데.”

라플리는 무심하게 말했다.

“상처는 안에 있다고 사라지지 않아.”

“그건 맞아.”

죠니는 식탁 위의 잔을 보았다.

“그런데 안에 있다고 해서, 남이 멋대로 꺼내 전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라플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럼 못 본 척 데려가게?”

“아니. 볼 거야.”

죠니는 천천히 말했다.

“다만 구경거리처럼 보진 않을 거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때까지 옆에 있을 거야. 적어도 그 정도는 선장이 해야 할 일 같거든.”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해졌다.

라플리는 한참 죠니를 보았다.

그러다 웃었다.

“좋아. 그럼 얼마나 잘 기다리는지 보자.”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식탁 위의 붉은 술잔들이 흔들렸다.

그리고 향이 퍼졌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흙냄새가 섞인 향.

무대 위의 조명이 낮아졌다.


---

처음 변화한 것은 엑스트라 선원들이었다.

그들의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바닥을 짚었다. 누군가는 낮은 울음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겁먹은 짐승처럼 뒤로 물러났다. 물론 완전한 변신은 아니었다. 배우들은 가면과 망토, 몸짓으로 짐승이 되어갔다. 하지만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깔린 무대 위에서, 그 변화는 단순한 분장보다 더 생생하게 보였다.

다음 순간, 향이 아스테르다스에게 닿았다.

그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깨가 낮아지고, 발끝이 무대 바닥을 긁었다.

하지만 그것은 겁먹은 짐승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냥감을 향해 떨어지기 직전의 유성.

아직 하늘에 있으나, 이미 낙하지점을 정하려는 몸.

라플리의 마법은 그를 약하게 만들지 못했다. 다만, 그 안에 있던 가장 원초적인 운동성을 겉으로 끌어냈다.

달려라.

들이받아라.

생각보다 먼저 떨어져라.

그 충동은 단순한 야성이 아니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원래부터 품고 있던 속도와 낙하와 돌파의 본능이었다. 전장에서 적진을 가르고, 공중에서 궤도를 바꾸고, 닿아야 할 곳에 떨어지는 무인의 몸이 먼저 깨어난 것이다.

죠니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붙잡지는 않았다.

붙잡아 멈출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씨.”

죠니가 낮게 말했다.

“내가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그러니까 네가 골라. 지금 저 마법이 미는 방향으로 떨어질 건지, 아니면 네가 정한 곳으로 떨어질 건지.”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공포가 아니었다.

방향을 빼앗기기 직전의 분노였다.

다음 순간, 그의 발이 바닥을 눌렀다.

청흑빛 기운이 발끝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어깨로 감겨 올라갔다. 충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질 필요도 없었다.

돌진하려는 힘은 그 자체로 아스테르다스의 일부였다.

다만, 방향을 잃은 짐승의 선이 아니라, 낙하지점을 정한 유성의 궤도로 다시 묶였다.

아스테르다스는 이를 악문 채 웃었다.

“그래.”

그의 손이 바닥을 짚기 직전 멈췄다.

짐승이 되려던 자세는, 어느새 낮게 몸을 낮춘 무인의 준비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건 내 낙하지점이 아니야.”

라플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버티네.”

아스테르다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선명했다.

“고른 거야.”

그 말과 함께 청흑빛 기운이 한 번 더 그의 몸을 돌았다.

멧돼지처럼 들이받으려던 충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정렬되었다. 필요하다면 떨어질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라플리의 향이 정한 방향이 아니라, 아스테르다스 자신이 고른 방향일 것이다.

죠니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래. 그쪽이 훨씬 형씨답지.”

아스테르다스는 숨을 내쉬었다.

“위험했네.”

죠니가 물었다.

“너한테?”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떨어질 곳을 잘못 고르면, 옆 사람들까지 휩쓸릴 뻔했어.”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짐승이 되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방향을 남에게 맡기는 게 무서운 거지.”

죠니는 잠시 그를 보았다.

“좋은 말이네.”

“칭찬?”

“응. 이번엔 거의 온전히.”

아스테르다스는 짧게 웃었다.


---

그레이는 이미 다른 선원들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우처럼 웅크렸고, 누군가는 새처럼 팔을 접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괜찮습니까?”도 바로 묻지 않았다. 괜찮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물병을 열어 가까운 곳에 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까이 두겠습니다.”

토끼처럼 떨고 있던 배우 하나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뚫어져라 보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 있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처음에는 입에서 거의 튀어나올 뻔했다.

귀엽다.

작고, 웅크리고, 가면을 쓴 모습들이 무대 위에서 잠깐은 귀엽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플리가 그녀를 보았다.

“말해봐.”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라플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귀엽지? 사람이 말 대신 울음으로 대답하는 게.”

푸리나의 손이 류트 위에서 굳었다.

라플리는 계속 말했다.

“내가 짐승으로 만든 게 아니야. 바다가, 전쟁이, 공포가, 살아남기 위해 안쪽에 구겨 넣은 걸 겉으로 꺼냈을 뿐이지.”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플리는 식탁을 가리켰다.

“사람은 배고프면 먹어. 무서우면 숨고, 궁지에 몰리면 물어뜯고, 다치면 웅크리지. 그걸 보기 싫어서 이름과 옷과 예절로 덮어두는 거야.”

그녀는 죠니를 보았다.

“자, 오디세우스. 이들을 데리고 집에 갈 수 있겠어?”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웅크린 선원들을 보았다.
아스테르다스가 자기 힘의 방향을 다시 고른 모습을 보았다.
그레이가 물병을 놓고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집에 데려가는 건 해야지.”

라플리의 입가가 올라갔다.

“저 꼴로?”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저 꼴이라서.”

그 말에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멀쩡한 사람만 데려갈 거면 선장이 필요 없잖아. 알아서 걸어가면 되지. 배가 필요한 건, 혼자서는 못 돌아가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야.”

라플리는 침묵했다.

죠니는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라플리, 이런 건 네가 꽤 그럴듯하게 말해도 마음에 안 들어. 남의 상처를 보여주는 게 치료는 아니거든.”

라플리는 웃지 않았다.

“그럼 치료해봐.”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여왕님.”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응.”

“이번엔 웃기는 노래 말고. 돌아오게 하는 노래.”

푸리나는 잠시 류트를 내려다보았다.

세이렌의 섬에서, 그녀는 배웠다.

사람을 혼자 상처 속에 세우는 노래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다른 사람을 앉히는 노래도 있다.

이번에는 더 조심해야 했다.

짐승이 된 이들을 억지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영 짐승이라 부르는 것도 폭력이었다.

푸리나는 숨을 고르고, 류트를 들었다.


---

첫 음은 낮았다.

섬의 숲에 깔린 향을 밀어내려 하지 않았다. 라플리의 마법을 부수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웅크린 이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음이었다.

푸리나는 노래했다.

> 돌아오라, 사람의 이름으로.
그러나 서두르지 마라.

손이 떨리면 손부터,
목이 막히면 숨부터,
말이 나오지 않으면
울음 옆에 앉아도 좋다.

발굽도, 깃도, 이빨도
잠시 내려놓을 곳이 여기 있다.

돌아오라.
명령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노래는 밝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했다.

그레이는 노래에 맞춰 움직였다.

그녀는 선원들에게 하나씩 천을 건넸다. 누구에게도 억지로 씌우지 않았다. 그저 가까운 곳에 놓았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이에게는 잔을 더 가까이 밀어주었다. 손이 떨리는 이에게는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가, 상대가 원하지 않는 듯하면 바로 거두었다.

“바로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사람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여우 가면을 쓴 선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의 노래가 이어졌다.

> 네가 아직 네 이름을 듣기 어렵다면,
우리는 크게 부르지 않으리라.

네가 아직 식탁에 앉기 어렵다면,
그릇을 네 곁에 두리라.

돌아오라.
돌아오지 못하겠다면,
우리가 먼저 네 곁에 앉으리라.



아스테르다스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은 아직 뜨거웠다.

짐승의 발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또렷하게 자신의 손이었기 때문이다. 떨어질 곳을 정하고, 적을 치고, 동료를 지킬 수 있는 손. 동시에 방향을 잘못 고르면 너무 많은 것을 휩쓸 수 있는 손.

그는 작게 말했다.

“죠니.”

“응.”

“방금 내가 정말 떨어졌으면, 이 섬 반쯤은 부서졌겠지?”

죠니는 섬의 숲과 저택, 그리고 라플리를 번갈아 보았다.

“반쯤으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걸.”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 웃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기 힘을 다시 확인한 무인의 웃음이었다.

“다음엔 더 조심해야겠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조심이라는 단어도 꽤 빠르게 들려.”

“그래도 할 거야.”

“알아. 그래서 형씨가 여기 있는 거겠지.”

그레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아스테르다스 앞에 물잔을 놓았다.

“물을 드시겠습니까?”

아스테르다스는 물잔을 받았다.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손이 뜨거우시면, 천을 감아드릴 수 있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이 열은 내가 가져갈게.”

그레이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럼 옆에 두겠습니다. 필요하면 말씀해주십시오.”

“응.”

아스테르다스는 낮게 웃었다.

“고마워. 기다려주는 건 꽤 도움이 되네.”

그레이는 조금 난처해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

레이튼은 라플리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혹은, 변했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라플리가 그를 보았다.

“당신은 안 변하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이미 질문이라는 꽤 번거로운 짐승을 안에 기르고 있어서일지도 모르지요.”

라플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농담?”

“절반쯤은요.”

레이튼은 웅크린 선원들과, 스스로 궤도를 되찾은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꺼낸 것은 본질입니까, 아니면 상처가 취한 임시 형태입니까?”

라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사람이 공포 속에서 짐승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그 사람의 본질로 고정해버리면, 당신은 상처를 본 것이 아니라 결론을 너무 빨리 붙인 셈이 되겠지요.”

라플리는 오래 침묵했다.

그러다 낮게 웃었다.

“역시 귀찮은 질문을 하는군.”

“좋은 질문은 대체로 조금 귀찮습니다.”

“그럼 저 선장의 답은?”

라플리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지금도 아스테르다스와 선원들 사이에 서 있었다. 선장이라기보다, 피곤한 동료처럼 보였다.

레이튼은 말했다.

“아직 답하는 중이겠지요.”


---

푸리나의 노래가 끝나갈 무렵, 선원들은 하나둘 사람의 자세를 되찾았다.

누군가는 가면을 벗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벗지 못했지만, 더 이상 바닥에 엎드려 있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울었다.

그레이는 그 울음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그저 가까이에 마른 천을 놓았다.

라플리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처음보다 덜 비웃는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류트를 천천히 내렸다.

“이제 됐어?”

라플리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죠니를 보았다.

“좋아. 데려가 봐.”

죠니는 일어섰다.

“보내주는 건가?”

“시험은 끝났어.”

“친절하진 않았네.”

“친절한 섬을 원했다면 키르케에게 오면 안 되지.”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네.”

라플리는 식탁 위의 잔을 정리했다.

“하지만 기억해. 집에 도착한다고 다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죠니는 그 말을 받아넘기지 않았다.

“알아.”

“정말?”

“응.”

죠니는 그레이가 접어둔 담요와 물병, 푸리나의 류트, 아스테르다스의 아직 열이 남은 손을 보았다.

“그래서 배에 물이랑 담요가 있는 거겠지.”

라플리는 눈을 가늘게 했다.

“그런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분하지 않지. 그런데 그런 것부터 없으면, 더 큰 말은 다 빈소리야.”

라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상하게 이 섬의 향기보다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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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배로 돌아올 때, 섬의 금빛 조명은 조금씩 낮아졌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저택을 돌아보았다.

“라플리.”

라플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아까 내가…… 귀엽다고 말할 뻔했어.”

라플리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았다.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라플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정도면 배웠네.”

“칭찬이야?”

“절반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오늘 다들 절반짜리 칭찬이 많네.”

라플리는 그를 보았다.

“나머지 절반은 경고니까.”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익숙해.”

그들은 배에 올랐다.

하융은 조타륜을 잡고 있었다.

“돌아오는 발자국이 달라졌구려.”

죠니가 말했다.

“그래도 돌아왔어.”

“그것이 중요하오.”

하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다음 바다는 더 좁을 것이오. 길이 둘로 갈라지고, 어느 쪽도 온전하지 않소.”

푸리나는 무대 뒤쪽을 보았다.

바다는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선택의 바다군요.”

아스테르다스는 물잔을 쥔 채 말했다.

“이번엔 모두 돌아왔지?”

그레이는 대답하기 전에 선원들을 한 명씩 보았다.

누군가는 아직 말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담요를 쥔 손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 배 위에 있었다.

“네.”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모두 돌아왔습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죠니는 난간에 기대어 섬이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말, 다음 막에서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선택의 바다

바다는 흔들렸다.

이번에는 파도 소리가 조금 더 낮았다.

그리고 배 위에는, 방금 사람으로 돌아온 이들의 숨소리가 오래 남았다.
5막 — 저승의 여관과 젖은 신발

다섯 번째 바다는 아래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푸른 천은 여전히 바다였고,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여전히 왕궁 극장의 무대 위에 있었다. 그러나 파도 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갈매기 소리는 사라졌고, 바람도 줄었다.

대신 물 밑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가 있었다.

멀고, 둔하고, 아주 느린 소리.

노 젓는 소리 같기도 했고, 문이 닫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다가…… 낮아지고 있어.”

죠니는 난간을 잡았다.

“배는 그대로인데, 발밑이 내려가는 느낌이네. 여왕님, 이거 연출이야?”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반쯤은.”

“그럼 나머지 반은?”

“오디세이아.”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 대답, 편리하네.”

“나도 지금 그렇게 생각했어.”

무대의 조명이 낮아졌다.

푸른색은 점점 검푸른빛으로 변했고, 은빛 물결은 빛을 잃었다. 배 주위에는 안개가 깔렸다. 하지만 세이렌의 안개와는 달랐다. 그것은 사람을 부르는 안개가 아니라, 이미 다녀간 발자국을 감추는 안개였다.

하융은 조타륜을 놓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곧 닿을 것이오.”

죠니가 물었다.

“어디에?”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한참 동안 어둠을 보았다.

“살아 있는 자가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항구요.”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저승이군요.”

아스테르다스는 이번엔 농담하지 않았다.

그는 신발끈을 다시 확인했다. 아주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왜 그것을 확인했는지 깨닫고,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여긴 뛰어내릴 곳이 아니겠네.”

죠니가 말했다.

“응. 오늘만큼은 난간 위에 올라가지 않는 걸로 하자. 네가 떨어질 곳을 고르는 사람이라도, 여긴 고르면 안 되는 쪽이야.”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레이는 말없이 작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마른 천이 들어 있었다.

처음 출항할 때 챙겼던 것보다 더 얇고, 더 부드러운 천이었다. 누군가의 손을 닦기에도, 젖은 신발을 감싸기에도 좋은 천.

죠니는 그것을 보고 물었다.

“정말 있을 것 같아?”

그레이는 잠시 손을 멈췄다.

“네.”

“젖은 신발?”

“바다를 건너온 곳이라면요.”

죠니는 더 묻지 않았다.


---

배가 닿은 곳은 항구가 아니었다.

여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관처럼 보이는 항구였다.

무대 한가운데, 어둠 속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지붕은 낮고, 창문에는 따뜻한 빛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는 오래된 나무 간판이 흔들렸다.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 여관으로.

어떤 이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자의 쉼터로.

어떤 이에게는 그저, 길 끝에 불을 켜둔 집으로.

여관 앞에는 신발장이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본 순간 멈췄다.

신발장이었다.

낡은 장화, 작은 신발, 군화, 샌들, 가죽 끈이 끊어진 신발, 진흙이 묻은 신발, 바닷물에 젖은 신발.

가지런했다.

너무 가지런해서, 오히려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레이는 천천히 다가갔다.

죠니가 뒤에서 물었다.

“왜?”

그레이는 한 켤레의 젖은 신발 앞에 멈춰 섰다.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승의 문 앞에, 아직 마르지 않은 신발.

방금 도착한 것처럼.

아니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마지막으로 건넌 물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은 채 서 있었다.

평소라면 여관 간판을 보고 무엇인가 말했을 것이다.
“여관좌 분위기다!”라든가, “무대 장치가 완벽해!”라든가.

하지만 이번에는 말하지 않았다.

여관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타마르가 나타났다.

오늘의 타마르는 여왕이라기보다, 저승 여관의 주인에 가까웠다. 옅은 보랏빛과 포도주색이 섞인 옷자락이 바닥에 스쳤고, 손에는 작은 등불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나른했지만, 그 아래에는 오래된 문턱을 지키는 자의 차가운 질서가 있었다.

타마르는 미소 지었다.

“살아 있는 손님들이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느렸다.

“오래 머물 곳은 아니랍니다. 그래도 길에서 오셨으니, 차 한 잔은 드시고 가셔야겠지요.”

죠니는 여관 안을 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한테도 차를 주나?”

타마르는 느릿하게 웃었다.

“문턱까지 온 손님에게 빈손으로 돌아가라 할 수는 없지요.”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정말 저승이야?”

타마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극장이기도 하고, 여관이기도 하고, 저승의 문턱이기도 하겠지요.”

그녀는 등불을 들어 신발장을 비추었다.

“다만 저 신발들은, 극만은 아니랍니다.”

그레이의 손이 천을 쥐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그레이.”

그레이는 아주 작게 대답했다.

“네.”

“지금 닦고 싶지?”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대답이었다.

타마르는 그레이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닦아도 된답니다. 다만 가져가지는 마세요. 그들은 이미 다른 방으로 들어갔으니까요.”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젖은 신발 한 켤레 옆에 마른 천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닦지는 않았다.

아직.

그저 먼저 천을 놓았다.

마치 누군가 돌아와 앉으면, 바로 신발을 벗고 발을 말릴 수 있도록.

죠니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작게 말했다.

“네 방식이네.”

그레이는 낮게 대답했다.

“늦었으니까요.”

“늦었어도 놓는 건 할 수 있지.”

그레이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네.”


---

여관 안은 따뜻했다.

그래서 더 조용했다.

바깥의 바다는 검고 차가웠는데, 안쪽에는 불이 있었다. 긴 식탁이 있었고, 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의자는 모두 차 있지 않았다. 몇몇 의자는 비어 있었다. 어떤 의자 위에는 외투가 놓여 있었고, 어떤 자리에는 물잔만 있었다.

푸리나는 문턱을 넘으며 숨을 죽였다.

“여긴 박수칠 곳은 아니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응. 대신 발소리를 좀 낮추면 될 것 같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마르는 그들을 긴 식탁 옆에 앉혔다.

“이곳에서는 큰 목소리가 필요 없답니다. 듣고 싶은 이들은 작은 말도 듣고, 듣지 않을 이들은 북을 쳐도 듣지 않으니까요.”

레이튼은 조용히 식탁을 살폈다.

“이곳의 손님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한 이들입니까?”

타마르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돌아오지 못했다기보다는, 다른 곳에 도착한 이들이지요.”

그녀는 찻잔을 죠니 앞에 놓았다.

“사람은 자신이 정한 항구에만 닿는 것은 아니랍니다.”

죠니는 찻잔을 보았다.

“그 말은 별로 위로가 안 되는데.”

타마르는 느릿하게 웃었다.

“위로하려고 한 말은 아니랍니다.”

“그럼 다행이네. 위로로는 꽤 매웠거든.”

푸리나가 그를 살짝 보았다.

죠니는 찻잔을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여기서 마셔도 되는 거야?”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는 손님을 붙잡는 차는 내지 않습니다. 이곳은 여관이지, 세이렌의 바다가 아니니까요.”

푸리나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타마르는 그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노래로 사람을 붙잡는 것과, 노래로 곁에 있어주는 것의 차이를 배운 얼굴이군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은요.”

“좋답니다. 조금 배운 사람은 다음 문 앞에서 덜 떠들게 되니까요.”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왕님한테는 꽤 어려운 과제네.”

푸리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죠니.”

“응. 작은 목소리로 했어.”

그레이는 여관 안쪽을 보고 있었다.

식탁 너머, 벽에는 작은 나무패들이 걸려 있었다.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선원.

병사.

아이.

어머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자.

그리고 어쩌면, 아직 이름이 도착하지 않은 자리.

그레이의 시선이 한 나무패 앞에서 멈췄다.

니코스.

스킬라의 바위에서 사라진 이름표의 이름이었다.

그레이가 숨을 멈췄다.

“왜…….”

타마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에 떨어진 이름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레이는 나무패를 바라보았다.

“그럼 여기에 도착한 겁니까?”

“이 극에서는 그렇지요.”

“실제로도…….”

그레이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타마르는 다그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 큽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 극 안에서만 대답하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네. 도착했답니다.”

그레이의 손이 떨렸다.

아주 조금.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자기 앞의 찻잔을 그레이 쪽으로 조금 밀었다.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마셔. 이번엔 내가 괜찮다고 확인받은 차야.”

“저는 괜찮습니다.”

“그 말은 오늘 여관 문 앞에 두고 들어오자. 여기서는 안 어울려.”

그레이는 잠시 그를 보다가, 찻잔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곧 다시 이름패들을 보았다.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

여관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이타카에 도착했는가?”

그 목소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였다.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식탁 바로 건너편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스테르다스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 쪽으로 갔다가 멈췄다.

여기서는 무기를 들 곳이 아니었다.

죠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타마르는 대답했다.

“돌아오지 못한 선원들.”

여관 안의 불빛이 흔들렸다.

그러자 식탁 너머의 빈 의자들에 그림자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우리는 이타카에 도착했는가?”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디세우스는 돌아간다.

하지만 모든 선원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은 이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해져 있었다고 해서, 대답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니.”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피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빈 의자들이 조용해졌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이타카는 아니야. 적어도 내가 아는 그 항구는 아니지.”

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길을 잃었는가?”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타마르가 그를 바라보았다.

죠니는 말을 골랐다.

평소처럼 농담으로 넘길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거창하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결국, 자기답게 말했다.

“너희가 도착한 곳은 내가 가려던 집은 아니야. 하지만 문이 있고, 불이 있고, 신발 놓을 자리도 있네. 길바닥에 버려진 건 아닌 것 같아.”

푸리나는 숨을 멈춘 듯했다.

죠니는 계속 말했다.

“내가 대신 이타카라고 말해주면 편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거짓말 같고. 대신 말할 수 있는 건…….”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너희 이름은 가져갈게. 이타카까지.”

그 말에 그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빈 의자들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만?”

죠니는 작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산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건 생각보다 적어. 이름, 기억, 그리고 가끔은 바보 같은 노래 정도지.”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죠니는 그녀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노래는 여왕님 담당이고.”

푸리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레이는 자기 가방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이름패가 걸린 벽 아래에 하나씩 접어두기 시작했다.

마른 천.

젖은 신발을 위한 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건넌 물을 말릴 수 있도록.

“저도 가져가겠습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이름만이 아니라, 남은 것들도요. 신발이 젖어 있었다는 것. 누군가 물을 건넜어야 했다는 것. 늦었지만, 천을 놓았다는 것.”

그녀는 니코스의 이름패 아래에 천을 놓았다.

“잊지 않겠습니다.”

타마르는 눈을 내리깔았다.

“좋은 대답이군요.”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이라기보다……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일 때도 있답니다.”


---

푸리나는 천천히 류트를 들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푸리나는 곧바로 노래하지 않았다.

“나, 지금 노래해도 될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 자체가 이전의 푸리나와 달랐다.

세이렌 앞에서는 그녀가 노래로 맞섰다.
키르케의 섬에서는 사람을 돌아오게 하려고 노래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이곳의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다.

푸리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크게 부르지 않는다면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크게 안 부를게.”

죠니가 작게 말했다.

“여왕님한테는 어려운 조건인데.”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할 수 있을 것 같네.”

푸리나는 숨을 고르고, 아주 낮게 현을 튕겼다.

노래는 거의 자장가 같았다.

> 이타카는 멀고,
바다는 깊어
모두가 같은 항구에 닿지는 못했네.

그래도 문 하나,
불 하나,
젖은 신발을 놓을 자리 하나.

우리가 가져갈 것은
금도, 칼도, 승리도 아니라
이름 하나,
젖은 발자국 하나.

잠시 쉬어요.
우리는 갑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가지는 않겠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여관 안은 더 조용해졌다.

하지만 더 차갑지는 않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조용히 자신의 물잔을 빈 의자 하나 앞에 놓았다.

“아까처럼 하나만 있으면 외로워 보여서.”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이번엔 웃지 않았다.

“이런 데서 멋있는 말은 잘 못하겠네.”

죠니가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여기선 멋있는 말보다 물잔이 더 낫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튼은 빈 의자들을 보며 말했다.

“집이란 도착한 곳입니까, 아니면 누군가 기억해주는 방향입니까.”

죠니가 그를 보았다.

“이번 질문은 배에 돌아가서도 계속 따라오겠네.”

“아마도요.”

“귀찮지만, 필요할 것 같아.”

레이튼은 조용히 웃었다.


---

떠날 시간이 되었다.

타마르는 여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다시 검푸른 바다가 있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문턱 너머에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조용했다. 마치 이 여관 안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처럼.

타마르는 죠니에게 말했다.

“살아 있는 손님은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답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 밥값이 비쌀 것 같기도 하고.”

타마르는 느릿하게 웃었다.

“값은 이미 길에서 치르고 오셨지요.”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타마르를 보았다.

“타마르.”

“네, 어린양.”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한테, 우리가 정말 뭘 가져갈 수 있을까?”

타마르는 잠시 생각했다.

“전부는 아니랍니다.”

“응.”

“그러나 전부가 아니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았다.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신발장을 보았다.

처음에 보았던 젖은 신발 옆에는, 이제 마른 천이 놓여 있었다. 신발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천 하나로 죽음이 마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은 있었다.

그레이는 그 앞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사과는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죠니는 그레이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은 충분히 놓았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죠니는 작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레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오늘 가져온 것은 모두 놓았습니다.”

“그럼 다음에 더 가져오면 되겠네.”

그레이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왕님이 후일담 좋아하잖아. 이런 것도 후일담이 필요할 것 같고.”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용히 웃었다.

“응.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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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배에 오르자, 여관의 불빛이 조금씩 멀어졌다.

바다는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 배가 산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스테르다스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 이타카야?”

하융은 조타륜을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가장 깊은 문턱은 지났소. 이제 위로 오르는 길이오.”

죠니가 난간에 기대었다.

“위로 오른다고 해서 쉬운 길은 아니겠지?”

“그렇소.”

“그럴 줄 알았어.”

하융은 바다 너머를 보았다.

“그러나 이제 항구의 불이 보일 것이오.”

푸리나는 눈을 들었다.

무대 뒤편, 아주 멀리 작은 불 하나가 켜졌다.

이타카.

아직 먼, 그러나 처음으로 보이는 불.

그레이는 가방을 닫았다.

가방은 비어 있었다.

마른 천을 모두 놓고 왔기 때문이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가벼워졌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는 빈 가방을 품에 안았다.

“오히려 조금 무거워졌습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수 있지.”

푸리나는 류트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래하지 않았다.

아직은.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6막 — 이타카 귀환과 활의 시험

이번에는 작은 부제가 함께 내려왔다.

— 따뜻한 밥과 빈 자리 —

죠니는 그 부제를 보고 낮게 말했다.

“여왕님.”

“응?”

“이번 제목은 괜찮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정말?”

“응. 좀 아프긴 한데, 괜찮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산 사람들의 바다로 돌아갔다.

여관의 불빛은 멀어졌다.

하지만 신발장 앞에 놓인 마른 천들은, 무대의 어둠 속에서도 한동안 희미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6막 — 이타카로의 귀환과 활의 시험

이타카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 하나였다.

저승의 여관에서 올라온 뒤, 바다는 다시 푸른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출항할 때의 바다와는 달랐다. 그때의 푸른 천은 장난스럽고 가벼웠다. 은실은 반짝였고, 종이 갈매기는 우스울 만큼 씩씩하게 흔들렸다.

지금의 바다는 조용했다.

파도는 여전히 천이었고, 배는 여전히 무대 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에 탄 이들은 이제 그것을 단순한 장치로 보지 않았다.

저 천 아래에 이름들이 있었다.

젖은 신발들이 있었다.

스킬라의 바위에서 사라진 작은 이름표가 있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 불 하나가 있었다.

푸리나는 그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이타카야?”

하융은 조타륜을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이는구려.”

죠니가 물었다.

“그렇게 보인다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야?”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이타카는 항구이기도 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붙인 이름이기도 하오. 그러니 닿기 전에는 언제나 조금 불확실하오.”

죠니는 난간에 기대었다.

“집까지 철학적이면 피곤한데.”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집은 원래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 중 하나지요.”

죠니는 그를 보았다.

“그 말, 이타카에 도착하고 나서 하면 안 될까?”

“도착해도 사라지지는 않을 질문입니다.”

“알아. 그래서 더 피곤한 거야.”

아스테르다스는 배 앞머리로 걸어왔다.

이번에는 난간에 올라가지 않았다. 다만 손을 이마 위에 얹고, 멀리 불빛을 보았다.

“작네.”

푸리나가 말했다.

“아직 멀어서 그래.”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네. 처음엔 이타카가 멋진 성이나 큰 항구처럼 나올 줄 알았는데.”

죠니가 말했다.

“나도 그랬어. 그런데 저 정도 불 하나면 충분한 것 같기도 하네.”

“왜?”

“멀리서 돌아오는 사람은, 처음부터 집 전체를 보는 게 아니잖아. 먼저 불빛 하나 보고, 그다음 지붕 보고, 그다음 문 앞에 누가 있는지 보는 거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웃었다.

“죠니, 오늘은 자꾸 좋은 말을 하네.”

죠니는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승까지 갔다 왔잖아. 사람 말투가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지.”

“그럼 계속 저승에—”

“여왕님.”

“농담이야.”

“그 농담은 타마르가 들으면 차 한 잔 더 줄 것 같아서 무서워.”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배 뒤편에서 빈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마른 천이 없었다. 모두 저승 여관의 신발장 앞에 놓고 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 가벼워진 가방이 오히려 손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죠니는 그것을 보다가 물었다.

“무거워?”

그레이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네.”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래서요.”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런 무게도 있지.”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설명하지 않았다.

죠니도 더 묻지 않았다.


---

이타카가 가까워지자, 무대가 바뀌기 시작했다.

푸른 천은 천천히 걷히고, 그 아래에서 돌길이 드러났다. 배는 뒤로 물러났고, 대신 무대 중앙에는 낮은 집이 세워졌다. 왕궁도 아니고, 거대한 성도 아니었다.

낮은 담장.

작은 문.

오래된 올리브나무.

문 옆에는 꺼지지 않은 등불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집 앞에는 식탁이 있었다.

식탁 위에는 빵과 수프, 물잔이 놓여 있었다. 따뜻한 연기가 아주 얇게 올라왔다. 관객석에서도 그 연기가 보일 만큼 조명이 세심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타카.”

죠니는 한참 동안 그 집을 보았다.

“생각보다 작네.”

“실망했어?”

“아니.”

그는 식탁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았다.

“큰 집이면, 오히려 좀 낯설었을 것 같아.”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좋은 답입니다.”

“아직 질문 안 했잖아.”

“이미 답하고 계셨습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질문은 나중에 청구서로 보내.”

그러나 이타카의 집은 비어 있지 않았다.

식탁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구혼자들이었다.

원전의 오디세이아라면 페넬로페의 집을 점거한 자들. 여기서는 푸리나가 준비한 귀향 연회를 먼저 차지한 자들이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시끄럽게 웃고, 남의 식탁 위의 빵을 아무렇지 않게 찢어 먹는 이들.

그들은 오디세우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혹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듯했다.

푸리나의 얼굴이 굳었다.

“저 사람들…….”

죠니가 말했다.

“집에 모르는 사람이 많네.”

아스테르다스가 주먹을 쥐었다.

“쫓아내면 되지?”

죠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식탁, 등불, 문, 그리고 구혼자들을 차례로 보았다.

“쫓아내긴 해야겠지. 그런데 그냥 싸움으로 끝내면 여왕님이 준비한 6막 제목이 아까워져.”

푸리나가 작게 물었다.

“제목 신경 써주는 거야?”

“이쯤 오니까 신경 쓰이네. 좀 억울하지만.”

그때 구혼자 중 하나가 일어났다.

그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집의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식탁은 남은 자들의 것이 아니겠는가!”

또 다른 구혼자가 웃었다.

“불이 켜져 있으면, 누구든 따뜻해질 권리가 있지!”

아스테르다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말은 그럴듯한데.”

죠니가 말했다.

“대체로 남의 집에서 남의 빵 먹는 사람들이 말을 제일 크게 하지.”

그레이는 식탁을 보았다.

빵은 잘려 있었다.

하지만 식탁의 한쪽에는 손대지 않은 그릇이 있었다.

따뜻한 수프 한 그릇.

마치 누군가 돌아올 것을 알고 남겨둔 자리처럼.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하나는 남겨두었습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응?”

“전부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자리는…… 남아 있습니다.”

죠니는 그릇을 보았다.

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변했다.

“그렇네.”

레이튼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집은 완전히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이 아직 하나 남아 있군요.”

죠니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럼 그 하나로 들어가자.”


---

구혼자들이 그들을 알아차렸다.

“누구냐?”

죠니는 앞으로 나섰다.

오디세우스의 낡은 망토가 그의 어깨에서 흔들렸다. 처음 출항할 때는 어색했던 그 망토가, 이제는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바닷바람과 동굴의 먼지와 세이렌의 침묵과 저승 여관의 차 냄새를 모두 지나온 망토였다.

그가 말했다.

“집주인.”

구혼자들이 웃었다.

“집주인?”

“이 집의 주인은 오래전에 바다에 죽었다!”

“돌아온 자라면 증명해보라!”

푸리나는 그 대사를 듣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무대 한쪽에서 오래된 활이 나타났다.

크고, 단단하고, 오래된 활.

오디세우스의 활.

그레이가 활 옆에 놓인 천을 조심스럽게 걷었다. 아스트리트가 활의 상태를 확인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레이튼은 활과 죠니를 번갈아 보았다.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반짝였다.

“활의 시험.”

죠니는 활을 보았다.

“드디어 제목값 하는 장면이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이 활을 당기는 자가 이타카의 주인.”

구혼자들이 하나둘 활을 들었다.

첫 번째 구혼자는 허세스럽게 웃으며 활을 잡았다.

당기지 못했다.

두 번째 구혼자는 양손을 비틀며 활시위를 걸려 했다.

실패했다.

세 번째 구혼자는 힘으로 밀어붙이려다, 활이 꿈쩍도 하지 않자 얼굴이 붉어졌다.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일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로빈후드의 활쏘기 대회처럼 가볍지 않았다.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돌아온 자가 정말 돌아왔는지 확인하는 문턱이었다.

그때 미하일라가 천천히 일어났다.

객석과 무대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미하일라는 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 제국의 전쟁을 끝내는 천궁의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가 바로 외쳤다.

“잠깐!”

죠니도 거의 동시에 말했다.

“여왕님, 저건 막아야 해.”

아스테르다스도 말했다.

“저건 시험이 아니라 판결이 될 것 같은데.”

그레이가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황제칙령급 사격은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객석에서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라는 활을 보다가, 모두를 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짐은 손대지 않겠다.”

푸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마워!”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이 활은 집으로 돌아온 자의 것이다. 전쟁을 끝내는 짐의 활과는 쓰임이 다르다.”

그 말에 무대가 조용해졌다.

죠니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정확하네.”

미하일라는 짧게 대답했다.

“그대의 차례다.”

죠니는 활 앞으로 걸어갔다.


---

활은 무거웠다.

그것은 소품이었다.

그러나 푸리나의 신술 안에서, 그것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다. 죠니가 손을 뻗는 순간, 활은 그가 지나온 모든 막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숨긴 이름.

세이렌의 노래 앞에서 묶였던 손목.

키르케의 섬에서 사람으로 돌아오던 선원들.

스킬라의 바위에서 사라진 이름표.

저승 여관의 젖은 신발.

그리고 지금, 식지 않은 수프 한 그릇.

죠니는 활을 들었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혼자 중 하나가 비웃었다.

“저런 낡은 망토를 입은 자가 주인이라고?”

다른 자가 말했다.

“바다가 데려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돌아오긴 해.”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다만 돌아온 사람이, 떠났던 사람 그대로는 아닐 뿐이지.”

그는 활시위를 만졌다.

그 순간, 죠니의 눈에 바다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파도는 선이 되었다.

발자국은 원을 그렸다.

숨었던 이름.

묶였던 손목.

돌아오던 숨.

사라진 이름표.

젖은 신발.

식탁 위의 빈 잔.

모든 것이 흩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회전처럼 겹쳐졌다.

생과 사 사이의 動.

무한히 돌고, 어긋나고, 다시 이어지려는 궤적.

그리고 그 회전 속에서, 아주 짧게 반짝이는 하나의 찰나.

《황금의 동경》.

죠니의 신술은 거창하게 타오르지 않았다.

하늘을 찢지도 않았고, 바다를 가르지도 않았다.

그저 손끝과 활시위 사이에, 아주 얇은 황금빛 원 하나가 맺혔다.

죠니는 그 원 너머로 보았다.

돌아온 자의 자리.

돌아오지 못한 자의 빈 잔.

그리고 아직 식지 않은 밥.

그 무한한 회전 속에서, 사람은 거대한 승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순간을 찾는지도 모른다.

젖은 옷을 갈아입는 순간.

따뜻한 밥을 앞에 두고 처음 숟가락을 드는 순간.

빈 자리를 보고도 식탁에 앉기로 하는 순간.

죠니는 낮게 말했다.

“그 무한한 회전 속에서 우린 황금빛 시간을 찾아 헤맨다.”

그 말은 기도도, 선언도 아니었다.

그의 서약에 가까웠다.

죠니는 식탁의 수프를 보았다.

“영광 때문에 돌아온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왕관이나 노래 때문도 아니고.”

활시위가 천천히 당겨졌다.

“살아남은 사람이 돌아와서,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보러 온 거지.”

시위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휘어졌다.

그 순간, 무대 위의 모든 소리가 낮아졌다.

파도도.

관객의 숨도.

구혼자들의 웅성거림도.

죠니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았다.

미하일라처럼 하늘의 명령을 쏘는 활도 아니었다.

아스테르다스처럼 별이 떨어지는 궤도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긴 항해 끝에 집 문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다시 걸어두는 동작이었다.

화살이 날았다.

황금빛 원은 아주 잠깐 화살깃에 감겼다가 사라졌다.

쐐액.

화살은 구혼자를 향하지 않았다.

식탁 뒤편, 오래된 문 위에 걸린 등불 옆.

그곳의 낡은 끈을 정확히 끊었다.

천이 떨어졌다.

그 아래에는 글자가 있었다.

돌아오는 이를 위해 남겨둔 자리

구혼자들의 웃음이 멈췄다.

죠니는 활을 내렸다.

“여기 주인이 없다고 했지.”

그는 식탁 위의 손대지 않은 수프 그릇을 보았다.

“누군가는 기다렸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스테르다스는 낮게 웃었다.

“멋있네.”

죠니는 그를 보았다.

“이번엔 뛰어내리지 않아도 됐어.”

“응. 그게 더 멋있을 때도 있네.”

구혼자 하나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우리는—”

죠니가 그를 보았다.

“남의 집에서 남의 밥을 먹었지.”

“우리는 기다림을 나누었을 뿐이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기다림은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돌아오는 이를 위해 남긴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비워두어야 합니다. 배고프다면 나눌 수 있습니다. 추웠다면 불을 쬘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의 이름으로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구혼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훌륭합니다. 이 집의 수수께끼는 풀렸군요.”

푸리나는 류트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승리의 노래를 바로 부르지 않았다.

죠니가 활을 내려놓고 말했다.

“나가.”

구혼자들이 눈치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청흑빛 기운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웃었다.

“문은 저쪽이야.”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구혼자들은 하나둘 물러났다.


---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식탁에는 손댄 빵과 남은 수프, 흩어진 잔들이 있었다. 완벽한 귀향 연회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먼저 식탁을 정리했다.

그녀는 구혼자들이 흐트러뜨린 그릇을 치우고, 남은 빵을 한쪽에 모았다. 누가 먹던 빵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버리지 않았다. 대신 따로 분리했다.

푸리나가 물었다.

“그레이, 지금도 정리해?”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온 분이 앉아야 하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아스테르다스는 불 옆에 손을 쬐었다.

“따뜻하네.”

죠니는 식탁 앞에 섰다.

손대지 않은 수프 한 그릇이 아직 따뜻했다.

그는 한참 동안 그것을 보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죠니.”

“응.”

“이타카는 어때?”

죠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집의 낮은 천장, 오래된 문, 식탁 위의 수프, 다시 켜진 등불, 그리고 비어 있는 몇 개의 의자를 보았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실망했어?”

“아니.”

그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돌아오는 곳이 너무 시끄러우면, 못 알아볼 것 같아.”

푸리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집 같아?”

죠니는 수프 그릇을 손으로 감쌌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는 조금 뒤에 덧붙였다.

“그런데 밥은 따뜻하네.”

그 말에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려다가, 조금 울음처럼 변했다.

“그럼 괜찮은 귀향이야?”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괜찮다는 말은 아직 아껴두자. 그레이한테 혼날 수도 있고.”

그레이가 멀리서 작게 말했다.

“그 표현은 과장입니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들었네.”

그리고 그는 다시 수프를 보았다.

“그래도 시작할 수는 있겠지. 따뜻한 밥이 있으면, 사람은 대체로 다시 시작할 핑계를 찾거든.”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레이가 빈 의자들을 보았다.

하나.

둘.

셋.

집은 돌아온 사람을 맞이했지만, 모든 자리가 차지는 않았다.

저승 여관에서 보았던 의자들.

스킬라의 바위에서 사라진 니코스의 이름표.

돌아오지 못한 선원들.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식탁 한쪽에 빈 잔을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접시를 하나 두었다.

푸리나가 그것을 보았다.

“빈 자리?”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자리입니다.”

죠니는 그 잔을 보았다.

“좋네.”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죠니는 수프를 한 숟갈 떴다.

“다 같이 앉는다는 건, 꼭 다 살아 돌아왔다는 뜻은 아니니까.”

아스테르다스는 빈 잔 앞에 빵 한 조각을 놓았다.

“하나만 있으면 외로워 보이니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푸리나가 봤지만, 크게 외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었다.


---

푸리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류트를 들었다.

이번에는 노래해도 되는 순간이었다.

크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밝게, 그러나 빈 자리를 덮지 않게.

푸리나는 노래했다.

> 오래 떠난 배가 돌아왔네.
돛은 해지고, 손은 떨리고,
이름 몇 개는 파도에 젖었네.

그래도 불은 남았고,
밥은 아직 따뜻하니,
앉으라, 돌아온 이여.

빈 자리도 함께 세어
잔 하나 더 놓으리라.

살아 돌아온 이는 먹고,
돌아오지 못한 이는 기억되며,
집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리라.



노래가 끝나자, 집 안의 불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요란한 박수는 없었다.

객석도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차갑지 않았다.

죠니는 수프를 한 숟갈 먹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따뜻하네.”

푸리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말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

이타카 귀환극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무대 앞에 나섰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마침내 항구에 닿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다.

“그러나 귀향은 도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빈 자리를 세고, 다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까지가 귀향입니다.”

그녀는 잠시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수프 그릇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러니 오늘의 마지막 막은 여기서 닫습니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식탁 정리 후에요.”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밝게 웃었다.

“식탁 정리 후에!”

죠니가 중얼거렸다.

“좋은 수정이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그레이의 막내림이야.”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하지만 좋은 결론입니다. 집은 식탁을 정리하는 사람 덕분에 다음 식사를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류트를 마지막으로 한 번 튕겼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후일담 — 마른 옷과 따뜻한 밥

죠니는 그 간판을 보고 낮게 말했다.

“여왕님.”

“응?”

“후일담 제목도 괜찮네.”

푸리나는 기쁘게 웃었다.

“이번엔 몇 점?”

죠니는 수프를 한 숟갈 더 먹고 말했다.

“따뜻한 정도.”

“그게 몇 점인데?”

“높은 편이야.”

푸리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따뜻한 수프와 빵, 그리고 빈 잔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타카는 작았다.

그러나 불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 불 앞에 앉아 있었다.
후일담 — 마른 옷과 따뜻한 밥

공연이 끝난 뒤에도, 이타카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막이 내리고, 무대 담당들이 나와 식탁을 치우고, 푸른 천 바다를 접고, 배의 돛대를 내려야 했다. 하지만 푸리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 앞의 낮은 담장에 앉아 있었다.

류트는 무릎 위에 놓여 있었고, 손끝은 현에 닿아 있었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눈앞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식탁이 있었다.

빵.

따뜻했던 수프.

빈 잔 하나.

그리고 죠니가 끊어낸 천 아래 드러난 문구.

돌아오는 이를 위해 남겨둔 자리

푸리나는 그것을 오래 보았다.

“후일담을 해야 하는데.”

죠니가 수프 그릇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왔다.

“여왕님, 이미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안 했잖아.”

“응. 그래서 후일담 같아. 본편은 보통 너무 많이 하거든.”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거 내 얘기지?”

“반쯤.”

“나머지 반은?”

죠니는 식탁을 보았다.

“이번엔 이 극 얘기.”

푸리나는 류트를 내려다보았다.

“오디세이아는 더 요란할 줄 알았어.”

“원래는 요란한 이야기가 맞지. 괴물 나오고, 마녀 나오고, 바다도 화내고, 활도 쏘고.”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졌을까.”

죠니는 수프를 한 숟갈 떴다.

“돌아오면 조용해지는 사람이 있으니까.”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식탁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밥 먹을 때 너무 떠들면 그레이가 정리하기 힘들어.”

멀리서 그레이가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봐. 들었잖아.”

푸리나는 이번엔 정말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죠니.”

“응.”

“재밌었어?”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대 위에 남은 것들을 보았다.

접힌 돛.

풀린 밧줄.

한쪽에 모아둔 귀마개.

라플리의 섬에서 가져온 마른 천.

스킬라의 바위를 지나며 생긴 밧줄 자국.

저승 여관에서 빈 채 돌아온 그레이의 가방.

그리고 이타카의 식탁.

“재밌었다고만 하면 좀 이상하고.”

“응.”

“나빴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는 잠깐 생각했다.

“돌아온 느낌은 있어.”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됐네.”

“응.”

죠니는 수프 그릇을 내려놓았다.

“꽤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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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는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구혼자들이 남긴 그릇은 한쪽으로 치우고, 손대지 않은 수프 그릇은 그대로 두었다. 빈 잔 옆에 놓인 빵 조각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스테르다스가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러다 식탁 아래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쓸어 모았다.

푸리나가 다가왔다.

“그레이.”

“네.”

“이것도 해야 해?”

“네.”

“공연 끝났는데?”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레이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공연 중에는 모두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는,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녀는 빈 잔을 보았다.

“그릇, 천, 젖은 신발, 빈 자리 같은 것들이요.”

푸리나는 조용히 식탁 앞에 섰다.

“내가 도와도 돼?”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푸리나를 보았다.

“군주님께서요?”

“응.”

“손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연극 끝났는데 손 깨끗한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여왕님이 좋은 말 했다. 기록해둬.”

그레이는 아주 작게 말했다.

“기록할 정도는 아닙니다.”

푸리나는 소매를 걷었다.

“그럼 기록하지 말고 부스러기나 줘.”

그레이는 망설이다가 작은 천을 건넸다.

푸리나는 식탁 한쪽을 닦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서툴렀다. 빵 부스러기를 닦는다기보다 옆으로 밀어내는 쪽에 가까웠다.

그레이는 잠시 그것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군주님, 그렇게 하시면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아.”

푸리나는 멈췄다.

“그럼 어떻게 해?”

그레이는 직접 손을 뻗어 천을 접었다.

“이렇게 모아서, 안쪽으로.”

푸리나는 따라 했다.

이번에는 조금 나았다.

죠니가 식탁 옆에 기대어 말했다.

“이타카에서 제일 놀라운 장면이네. 여왕님이 식탁 정리를 배우고 있어.”

푸리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죠니도 해.”

“나는 오디세우스라서 방금 돌아왔는데.”

“그러니까 해. 집주인이잖아.”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그 말은 좀 세네.”

그는 결국 그릇을 하나 들었다.

“좋아. 집주인이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은 저쪽에 모아주시면 됩니다.”

죠니는 그릇을 옮기며 말했다.

“명령이 자연스럽네.”

“죄송합니다.”

“아니.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좀 나서 그래.”

그레이는 손을 멈췄다.

죠니는 덧붙였다.

“나쁜 뜻 아니야.”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아스테르다스는 불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활의 시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죠니의 화살이 날아가던 순간, 아주 얇은 황금빛 원이 화살깃에 감기던 장면.

그리고 자신이 스킬라의 바위 앞에서 밧줄을 잡고 돌아오던 순간.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청흑빛 유성.

떨어질 곳을 고르는 몸.

그리고 오늘은,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지킨 자리.

민다우가스가 객석에서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이타카의 낮은 집과 작은 식탁을 천천히 살폈다.

“작군.”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타카?”

“그래.”

민다우가스는 식탁 위의 빈 잔을 보았다.

“그러나 작은 집일수록, 빈 자리 하나가 더 크게 보인다.”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더라.”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았다.

“너는 오늘 여러 번 떨어질 수 있었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하지만 거의 안 떨어졌지?”

“그래.”

민다우가스는 짧게 말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스테르다스의 눈이 밝아졌다.

“정말?”

“스킬라 앞에서의 움직임은 좋았다. 떨어지되, 돌아올 줄을 알았다.”

그 말에 아스테르다스는 잠시 조용해졌다.

민다우가스는 이어 말했다.

“무인은 힘을 쓰는 자가 아니다. 힘의 귀환점을 아는 자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귀환점.”

“네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돌아올 곳이 없다면 그것은 공격이 아니라 소모다.”

민다우가스는 낮게 말했다.

“오늘 너는 밧줄을 잡았다. 나쁘지 않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이번에는 크게 웃지 않았다.

따뜻하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도 잡을게.”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다가, 아주 낮게 웃었다.

“그래. 다만 밧줄을 잡기 전에 먼저 뛰지는 마라.”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저 말은 나도 찬성.”

아스테르다스가 외쳤다.

“다들 나를 너무 잘 알아!”

“오늘 하루만 봐도 충분히 알겠던데.”

죠니의 말에 푸리나가 웃었다.

무대 위에 잠깐 가벼운 웃음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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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튼은 문 위의 글자를 보고 있었다.

돌아오는 이를 위해 남겨둔 자리

그는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알토가 객석에서 올라와 그 옆에 섰다.

“기록할 만한 문장입니까?”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기록할 만하기도 하고, 질문할 만하기도 합니다.”

알토는 문구를 보았다.

“기다림은 권리입니까, 의무입니까?”

레이튼은 즐거운 듯 눈을 가늘게 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알토는 담담하게 말했다.

“따라한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카식은 뒤에서 느긋하게 웃었다.

“둘이 같이 있으면 공기가 문서처럼 접히네.”

알토는 그 말을 무시했다.

대신 기록장에 한 줄을 적었다.

귀향은 도착 사실이 아니라, 남겨둔 자리의 확인으로 완성된다.

아카식은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록은 꽤 따뜻하네.”

알토는 펜을 멈췄다.

“그렇게 보입니까?”

“응.”

알토는 잠시 식탁을 보았다.

빈 잔.

빵 조각.

수프.

그리고 그레이가 조용히 닦고 있는 식탁.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아카식은 조금 더 웃었다.

“역시 좋아했네.”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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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는 아직 무대 뒤편 어둠 가까이에 서 있었다.

저승 여관의 주인 역할은 끝났지만, 그녀의 손에는 아직 작은 등불이 있었다. 그 등불은 이제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푸리나는 식탁을 닦던 손을 멈추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타마르.”

타마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네, 어린양.”

“아까 그 여관 말이야.”

“네.”

“정말로…… 그 사람들이 쉬고 있을까?”

타마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푸리나의 손을 보았다. 빵 부스러기가 조금 묻어 있었다.

“오늘 극 안에서는 그랬지요.”

“극 밖에서는?”

타마르는 미소 지었다.

“그 질문은 별에게도 무겁답니다.”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구나.”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 산 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젖은 신발 곁에 마른 천을 놓고, 빈 자리에 잔을 두고, 이름을 부를 때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르지요.”

푸리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해?”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타마르는 낮게 웃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응.”

타마르는 등불을 푸리나에게 건넸다.

“이제 이 등불은 그쪽 무대의 것입니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받았다.

“받아도 돼?”

“오늘은 귀향극이니까요. 집의 불을 돌보는 이는 많을수록 좋답니다.”

푸리나는 등불을 품에 안았다.

“고마워.”

타마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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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라는 활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활을 들지는 않았다.

다만 바라보았다.

죠니가 그 곁으로 왔다.

“안 쏴서 다행이야.”

미하일라는 그를 보았다.

“그대들이 너무 급하게 말렸다.”

“그건 좀 필사적이었지.”

“짐은 그 활을 당길 생각이 없었다.”

죠니는 잠시 멈췄다.

“정말?”

“그 활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의 활은 사람을 꿰뚫지 않고, 남겨둔 자리를 드러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죠니는 활을 보았다.

“내 신술도 좀 썼는데.”

“보았다.”

“어땠어?”

미하일라는 아주 잠시 생각했다.

“크지 않았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그건 칭찬?”

“그렇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큰 힘이 필요한 장면이 아니었다. 작은 찰나를 놓치지 않는 힘이면 충분했다.”

죠니는 그 말을 들으며 활시위를 내려다보았다.

황금빛 원은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손끝에는 아직 감각이 남아 있었다.

무한한 회전 속에서 찾아낸 아주 작은 순간.

따뜻한 수프.

빈 잔.

남겨둔 자리.

죠니는 낮게 말했다.

“꽤 정확하네.”

미하일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도 정확했다.”

그 말은 화려한 칭찬이 아니었다.

하지만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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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는 마지막으로 빈 잔 옆에 놓인 빵 조각을 정돈했다.

푸리나는 타마르에게 받은 등불을 그 옆에 놓았다.

작은 불빛이 빈 잔에 비쳤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잔이 좀 덜 비어 보이네.”

그레이가 물었다.

“불빛 때문입니까?”

“응.”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아스테르다스가 빈 잔 옆에 또 무엇인가 놓으려다 멈췄다.

죠니가 물었다.

“이번엔 뭐 놓으려고?”

“음.”

아스테르다스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뭇잎을 보여주었다.

“올리브나무 잎.”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타카니까.”

죠니는 나뭇잎을 보았다.

“단순하네.”

“별로야?”

“아니. 이럴 땐 단순한 게 좋아.”

아스테르다스는 빈 잔 옆에 올리브 잎을 놓았다.

그레이는 그것도 가지런히 정리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빈 자리인데, 점점 채워지고 있어.”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람이 앉지는 않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자리는 아니게 됐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등불을 조금 더 식탁 안쪽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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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의 마지막은 박수로 끝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무대 앞에 서지 않았다.

대신 식탁 옆에 섰다.

그녀는 관객을 향해 크게 외치지 않았다.

그저 배우들과 객석 사이, 무대와 현실 사이 어딘가에 서서 말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돌아왔습니다.”

목소리는 맑았지만 낮았다.

“하지만 배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젖은 옷은 말려야 하고, 식탁은 다시 차려야 하고, 빈 자리는 세어야 합니다.”

그녀는 등불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도 밥이 식지 않게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위생상 오래 두면 안 됩니다.”

순간,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진지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죠니도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레이, 이 장면에서 그 말을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맞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그녀는 관객을 향해 말했다.

“밥은 식기 전에 먹고, 빈 자리는 식탁이 아니라 마음에 오래 두자!”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 표현은 적절합니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승인!”

죠니가 말했다.

“이번엔 진짜 승인 같네.”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네. 승인입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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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정리가 끝났다.

그러나 빈 잔과 등불, 올리브 잎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죠니는 오디세우스의 망토를 벗었다.

처음엔 어색했던 망토였다. 이제는 벗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푸리나가 물었다.

“아쉬워?”

죠니는 망토를 접어 의자 위에 두었다.

“반쯤.”

“나머지 반은?”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

푸리나는 웃었다.

“죠니답다.”

“여왕님, 이거 다시 할 거야?”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언젠가는.”

죠니는 바로 대답했다.

“그럼 그때는 배 이름에서 ‘목적지까지 책임지지는 않음’은 빼자.”

“왜?”

“돌아와 보니까, 그건 좀 너무했어.”

푸리나는 배 앞머리에 붙어 있던 부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엔 바꿀게.”

“뭐로?”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목적지는 멀어도, 돌아올 자리는 준비해둠.”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길다.”

“그렇지?”

“응.”

“별로야?”

죠니는 식탁 위의 등불을 보았다.

“아니. 좀 길어도 괜찮겠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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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레이가 문을 닫았다.

이타카의 낮은 집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바다 천은 접혔고, 배의 돛대도 내려갔다. 종이 갈매기들은 줄에서 풀려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두가 사라진 뒤에도 작은 불빛 하나는 남았다.

타마르가 준 등불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끄려다 멈췄다.

그레이가 물었다.

“두고 가시겠습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죠니가 말했다.

“극장에 불 켜두면 관리인이 싫어할 텐데.”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안전한 등불이면 문제 없습니다. 다만 주변에 가연물을 치워야 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현실로 돌아왔네.”

푸리나는 웃었다.

“그래도 좋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응. 돌아온 것 같아.”

레이튼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떠날 수 있겠지요.”

죠니가 그를 보았다.

“후일담 끝나자마자 다음 질문이야?”

“좋은 귀향은 다음 길을 막지 않습니다.”

죠니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래. 그 말은 좀 좋네.”

푸리나는 등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가 말했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 항해 종료.”

죠니가 낮게 정정했다.

“귀항 완료.”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응.”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귀항 완료.”

등불은 조용히 흔들렸다.

무대는 어두워졌다.

하지만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빈 잔 옆에 놓인 작은 불빛이, 아주 오래 남아 있었다.
좋아. 푸리나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모두를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세우려는 밝은 극장주”**인데, 그 밑에는 **“내가 무대를 준비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잃고 장기말이나 피해자로 전락한다”**는 자기경계가 깔려 있는 구조로 잡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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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나 헤툼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푸리나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아마 이런 장면에 가깝다.

전쟁, 피난, 정치적 압박, 강대국 사이의 생존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잃어버리는 장면.

누군가는 병력 숫자로 계산된다.
누군가는 난민 숫자로 기록된다.
누군가는 왕국의 생존을 위한 희생으로 처리된다.
누군가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누군가의 전략표 위에 놓인 말이 된다.

푸리나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기억은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잃고, 그저 시대의 배경이나 희생자 역할로 밀려나는 장면이다.

그녀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아니야. 저 사람에게도 막이 있었어. 대사가 있었어. 바라는 결말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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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푸리나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단순한 영토나 안전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삶을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라고 볼 수 있다.

전쟁과 국가 생존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역할을 빼앗긴다.

왕은 왕답게 죽어야 한다.
병사는 병사답게 죽어야 한다.
백성은 국가를 위해 견뎌야 한다.
피난민은 조용히 감사해야 한다.
죽은 자는 숫자로 정리된다.

푸리나는 이런 세계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름, 자기 욕망, 자기 웃음, 자기 박수, 자기 커튼콜을 잃는 것을 보았다.

즉 푸리나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존재할 수 있는 무대가 무너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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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푸리나의 최대 업적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를 단순한 방어국가나 피난처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자기 삶의 배우로 설 수 있는 거대한 극장/여관으로 만든 것이다.

그녀는 백성을 단순히 보호 대상이나 병력 자원으로만 보지 않는다.
각자의 삶을 극으로 보고, 각자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도록 무대와 조명과 휴식을 마련한다.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전쟁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웃고, 쉬고, 선택하고, 박수칠 수 있는 나라를 만든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푸리나는 자기 자신을 계속 무대 위에 세워야 한다.
사람들을 웃게 해야 한다.
조명을 꺼뜨리지 않아야 한다.
군주로서, 극장주로서, 배우로서, 여관좌의 대리인으로서 계속 “막이 아직 닫히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 대가는 자기 피로와 불안, 그리고 “내가 조명을 놓치면 모두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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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푸리나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거라고 볼 수 있다.

>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기 이야기를 빼앗긴다. 그러니 내가 무대를 준비하고, 조명을 올리고, 막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들은 주인공으로 설 수 없다.”



이건 완전히 틀린 믿음은 아니다.
실제로 푸리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대와 휴식과 용기를 준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 있다.

푸리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세우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극장주로서 무대를 계속 준비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묶인다.

조금 더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무대를 준비해줘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내가 맡아야 한다.”



이 믿음 때문에 푸리나는 밝고 즉흥적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녀의 밝음은 도피가 아니라 의무다.
그녀의 축제는 유흥이 아니라 저항이다.
그녀의 연극은 장난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잃지 않게 붙드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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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푸리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 숫자, 장기말, 피해자, 희생양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녀는 죽음 자체보다도, 그 죽음이 “아무 이야기 없이 처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푸리나는 이렇게 믿는다.

>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빼앗기지 않는다.”



푸리나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다음과 같다.

무대.
사람이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

조명.
그 사람이 아직 여기 있고, 아직 선택할 수 있음을 비춰주는 시선.

박수.
그 선택이 의미 있었다고 인정해주는 타인의 반응.

여관.
지친 사람이 잠시 쉬고, 다시 자기 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

즉 푸리나의 동기는 이거야.

> “나는 사람들이 자기 삶을 빼앗기지 않게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 나라 전체를, 모두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극장과 여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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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푸리나는 먼저 무대로 바꾼다.

전장, 회의장, 피난민 수용소, 장례식, 외교 협정장까지도 단순한 사건 현장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으로 재구성한다.

그녀는 묻는다.

“이 장면에서 누가 주인공이지?”
“이 사람은 무엇을 잃었지?”
“이 사람이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이 막을 어떻게 다음 막으로 넘길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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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푸리나는 사람들을 호명한다.

피해자, 병사, 백성, 난민, 가신이 아니라, 각자의 이름과 역할을 가진 배우로 부른다.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대의 막은 닫히지 않았다.”
“무대 위로 올라와라.”
“네가 선택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푸리나는 신술, 연설, 축제, 즉흥극, 장례, 재연극을 사용해 사람들을 다시 자기 삶 안으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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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푸리나는 극 자체를 크게 만든다.

개인의 이야기가 무너지려 하면, 가신들의 이야기와 국가의 이야기를 엮는다.
한 사람의 용기가 부족하면, 과거의 장면과 현재의 선택을 연결한다.
전선이 무너지려 하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전체를 하나의 대서사시로 세운다.

여기서 《세기극: 아르메니아 대서사시》, 《군상극 아르메니아의 노래》, 《재연극: 앙코르》 같은 방향이 나온다.

푸리나는 혼자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모두를 배우로 세워서 “무대 전체”로 버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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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막을 올린다.

칭호 《그대여, 박수를! 대단원의 막이 올랐으니!》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이것은 푸리나 혼자 기적을 일으키는 버튼이 아니다.
이미 가신들이 조건을 만들고, 백성들이 버티고, 죽은 자들의 흔적과 산 자들의 선택이 쌓인 뒤에야 푸리나가 마지막으로 막을 올리는 것이다.

푸리나의 최후 전략은 이거다.

> “이미 모두가 준비한 무대를,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의 극으로 묶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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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푸리나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것을 극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사람에게 의미를 준다.
공포를 장면으로 바꾼다.
절망을 다음 막으로 넘긴다.
죽음을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 기억되는 퇴장으로 만든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고통은 아직 극으로 정리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박수보다 침묵이 필요하다.
어떤 죽음은 아름다운 장면으로 만들기보다, 그냥 아프고 부당한 죽음으로 남겨두어야 할 때가 있다.

푸리나가 잃을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슬픔이 아직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감각이다.

이 지점에서 아레나 그레이 같은 인물과 대비가 생긴다.

푸리나는 박수를 지킨다.
그레이는 이름을 기록한다.
아레는 침묵을 듣는다.

푸리나의 과제는 박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박수칠 수 없는 사람도 자기 방식으로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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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푸리나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모두를 무대 위에 세우고 싶지만, 누구도 내가 쓴 대본대로 움직이게 만들지는 않겠다.”



이게 푸리나의 양심이다.

그녀는 극장주다.
무대를 준비한다.
조명을 올린다.
배우를 호명한다.
박수를 유도한다.
때로는 과장하고, 연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마지막 선택은 반드시 그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푸리나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타인의 삶을 자기 극의 배역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가장 큰 유혹은 이것이다.

“내가 더 잘 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더 나은 결말을 줄 수 있다.”
“내가 대본을 써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녀의 핵심 철학은 모든 이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이기 때문이다.

만약 푸리나가 타인의 선택을 빼앗고 “가장 아름다운 결말”을 강제로 배치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존재가 된다.

사람을 장기말로 삼는 군주.
사람을 배역으로 고정하는 극작가.
사람의 삶을 대신 써버리는 신의 대리인.

그래서 푸리나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무대를 준비할 수 있다. 조명을 올릴 수 있다. 박수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대사를 말하고,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며, 언제 막을 내릴지는 내가 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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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푸리나 헤툼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세계를 극장과 여관으로 바꾸는 군주다.

그녀의 거짓말은 **“내가 무대를 준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주인공으로 설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선택하고, 쉬고,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위기를 장면으로 바꾸고, 사람을 배우로 호명하고, 국가 전체를 하나의 군상극으로 엮어 다음 막을 여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타인의 삶을 자기 대본대로 쓰지 않는 것이다.
좋아. 죠니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삶이 반드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정리되지 않아도, 지금 선택한 찰나는 진짜라고 믿는 기사단장”**이야.

푸리나가 사람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세운다면, 죠니는 사람을 지금 선택하는 존재로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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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니 죠스타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죠니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세계가 누군가의 고통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정리해주지 않았던 순간들이다.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은 반드시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선택한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지는 않는다.
노력한 사람이 반드시 보상받지는 않는다.
어떤 실패는 성장의 복선이 아니라 그냥 실패다.
어떤 죽음은 다음 막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냥 죽음이다.

죠니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런 장면이다.

열심히 달렸지만 도착하지 못한 사람.
무언가를 선택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사람.
삶이 이야기처럼 정리되지 않은 채 끝난 사람.

그는 그런 장면을 보며 배웠다.

세계는 친절한 극작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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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죠니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삶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다.

그는 아마 한때는 사람이 고통을 겪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고, 먼 길을 돌아가면 언젠가 도착지가 있으며, 죽음과 상실도 결국 어떤 큰 이야기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다.

하지만 죠니는 그 믿음을 잃었다.

삶은 언제나 말이 되는 방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세계는 친절하게 복선을 회수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픔은 꼭 성장이나 구원의 장면이 되지 않는다.

죠니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세계가 인간에게 의미를 보장해준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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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죠니의 최대 업적은, 그 믿음을 잃고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무를 보았다.
삶과 죽음의 반복을 보았다.
의미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달리면서 만들면 된다.”

그의 업적은 허무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허무를 본 뒤에도 지금의 선택을 긍정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죠니는 삶을 쉽게 아름답게 포장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괜찮아, 이것도 네 이야기의 일부야”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그는 위로보다 현실을 먼저 본다.

그 대가는 건조함, 냉소,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과 완전히 같은 언어를 쓰기 어려운 거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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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죠니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삶은 결국 각자의 찰나로만 증명된다. 그러니 오래 남는 의미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믿음은 죠니를 강하게 만든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진짜로 여긴다.
결과가 어떻든, 세계가 인정하든 말든, 지금 자신이 선택하고 움직이는 찰나는 부정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너무 멀리 있는 의미를 의심한다는 점이다.

죠니는 푸리나처럼 삶 전체를 하나의 극으로 보는 시선을 경계한다.
그에게 그런 말은 자칫 고통을 미화하거나, 죽음을 장면으로 포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세계는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선택하는 찰나뿐이다.”



이것은 죠니의 진실이자, 동시에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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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죠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이런 것을 두려워한다.

내가 달린 길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것.
내가 고른 선택이 결국 세계의 반복 속에서 사라지는 것.
내가 붙잡은 순간이 나중에 누군가의 대서사나 국가 논리 속에 흡수되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것.

죠니는 누군가가 말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당사자가 실제로 선택한 순간을 더 믿는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믿는다.

> “사람은 최후에 남는 결과로 증명되는 게 아니라, 그 순간 무엇을 선택했는가로 증명된다.”



죠니의 동기는 이것이다.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지키는 것.

푸리나가 모두의 무대를 준비하려 한다면, 죠니는 그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정말 자기 발로 움직이고 있는지 본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거대한 구원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다음 한 걸음.
다음 호흡.
다음 회전.
지금 손에서 놓지 않을 창.
지금 달려야 할 말.
지금 선택해야 할 방향.

즉 죠니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삶 전체가 의미 있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네가 선택하는 것은 진짜다. 그 찰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게 두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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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죠니는 먼저 현실을 본다.

푸리나처럼 장면의 의미를 만들기보다, 죠니는 먼저 지금 무엇이 가능한지 본다.

적의 거리.
말의 속도.
창의 각도.
아군의 흔들림.
퇴로.
죽을 가능성.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박자.

그는 위협 앞에서 과장된 말을 하지 않는다.

“저건 세다.”
“정면은 무리야.”
“돌아가야겠네.”
“그래도 틈은 있어.”

죠니의 첫 대응은 현실 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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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죠니는 멀리 돌아간다.

그의 칭호가 《멀리 돌아가는 길》인 것도 이 지점과 잘 맞는다.

죠니는 꼭 정면으로 뚫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도, 전투도, 사람도 항상 직선으로 도달하지 않는다.

돌아가도 된다.
늦어도 된다.
남들이 보기엔 비겁하거나 답답해 보여도,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을 이어가면 된다.

그는 이 단계에서 기동, 우회, 재정비, 회전, 기병 운용, 순간의 각도 변화를 사용한다.

즉 죠니는 이렇게 움직인다.

> “지금 못 뚫으면 돌아간다. 돌아가서라도 닿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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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죠니는 찰나를 건다.

모든 계산이 무너지고, 퇴로도 좁아지고, 우회도 막히면 죠니는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한순간의 선택에 모든 것을 싣는다.

말발굽의 박자.
창끝의 회전.
몸의 기울기.
죽음과 삶 사이의 한 호흡.

이때 죠니의 신술과 무공은 “긴 서사”가 아니라 단 하나의 순간을 진짜로 만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는 거대한 기적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찰나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움직임을 박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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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그래도 선택한다.

죠니에게 최악은 죽음이 아니다.
최악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을 가능성이 있어도, 의미가 보장되지 않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택한다.

다만 이것은 자살적 돌진과는 다르다.
죠니는 죽고 싶어서 싸우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살아 있는 지금의 선택을 긍정하기 때문에 싸운다.

최후의 죠니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결말이 어떻게 되든, 이건 내가 고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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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죠니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찰나의 진실성에 기대는 것이다.

그는 지금 선택하는 순간을 너무 강하게 믿는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망설임을 끊는다.
허무 앞에서도 움직이게 한다.
거대한 명분이나 서사가 없어도 사람을 앞으로 보내준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죠니는 긴 이야기를 믿는 사람을 답답하게 볼 수 있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서사, 국가의 대의, 죽은 자들의 기억, 백성들이 기다리는 결말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그는 “지금 선택하는 건 진짜다”라고 말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지금만으로는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놓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금의 한 걸음보다, 자신이 걸어온 길 전체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찰나보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어떤 죽음은 순간의 선택만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서사가 필요하다.

죠니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긴 시간 속에서 사람을 지탱하는 이야기의 힘이다.

그래서 푸리나와 죠니는 서로를 보완한다.

푸리나는 말한다.

“너는 네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죠니는 말한다.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지금 네가 고르는 건 네 거야.”

푸리나는 긴 극을 준다.
죠니는 그 극 안의 한순간을 진짜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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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죠니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 사람의 선택을 가짜로 만들지는 않겠다.”



죠니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
밀어붙일 수 있다.
현실을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다.
전장에서 명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선택을 완전히 대신해버리는 것을 경계한다.

왜냐하면 죠니에게 인간의 존엄은 지금 선택하는 찰나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푸리나를 섬기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를 지키고, 기사단장으로 병사들을 이끈다 해도, 마지막에 그 사람이 자기 선택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지키려 한다.

죠니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이것이다.

타인의 찰나를 빼앗는 것.

그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은 아마 이런 것이다.

“네가 뭘 원하든 상관없어. 이게 더 좋은 결말이야.”
“네 선택은 틀렸으니 내가 대신 정한다.”
“너는 이 이야기에서 이렇게 움직여야 해.”

이것은 푸리나가 경계해야 하는 선과도 맞물린다.

푸리나가 타인을 자기 대본의 배역으로 고정하려는 유혹을 경계한다면, 죠니는 그 옆에서 건조하게 말할 사람이다.

“여왕님. 그건 그 녀석 선택이 아니잖아.”

죠니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돌아가게 할 수는 있다. 기다려줄 수도 있다. 같이 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그 사람이 직접 디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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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죠니 죠스타는 의미가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서도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긍정하는 기사단장이다.

그의 거짓말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선택뿐이며, 긴 이야기나 아름다운 의미는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타인의 선택이 세계의 허무나 거대한 서사 속에 삼켜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현실을 보고, 정면이 안 되면 멀리 돌아가고, 막히면 한순간의 선택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누구의 찰나도 대신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하융을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을 너무 많이 본 끝에, 처음으로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 사람”**이야.

푸리나가 사람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인물이고, 죠니가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긍정하는 인물이라면, 하융은 선택되지 못한 길들을 기억하면서도, 결국 지금 이 현실에 남기로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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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융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하융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수없이 비껴간 가능성들의 잔상이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병사.
무너지지 않았을 성벽.
배신하지 않았을 친구.
불타지 않았을 마을.
전쟁이 오지 않았을 도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군주.
죽지 않아도 되었을 아이.
서로 등을 돌리지 않았을 사람들.

하융은 현실을 볼 때마다 그 뒤편에 겹쳐진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를 본다.

그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런 것이다.

“이 현실은 유일한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결과에 도착했다.”

그 기억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하융에게 그것은 거의 물리적인 풍경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다른 길들, 하지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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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하융이 잃어본 가장 큰 것은 현실을 단단하게 믿는 감각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하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다.
이미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고, 선택하지 않은 길은 사라진다.

하지만 하융에게는 그렇지 않다.

선택되지 않은 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가능성도 흔적을 남긴다.
더 나은 결말도, 더 끔찍한 결말도, 지금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계속 비친다.

그 결과 하융은 한때 이런 감각을 잃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현실이 정말 가장 중요한가?”

즉 하융의 가장 큰 상실은 현실의 확실성이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실이다.
현실이 희미해지면, 선택도 희미해진다.
선택이 희미해지면, 책임도 희미해진다.
책임이 희미해지면, 사람은 끝없이 가능성만 바라보며 멈춰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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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하융의 최대 업적은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더 평화로운 가능성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행복한 세계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덜 아픈 결말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떠나도 되는 길, 외면해도 되는 길,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길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푸리나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있는 지금 이 현실을 선택했다.

하융의 업적은 전쟁에서 몇 명을 살렸는가만이 아니다.

그의 진짜 업적은 이것이다.

가능성에 잠식되지 않고, 지금 현실에 남기로 한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그는 선택할 때마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함께 본다.
한 사람을 살릴 때, 살리지 못한 사람의 가능성도 본다.
한 전선을 지킬 때, 무너진 전선의 잔상도 본다.
지금의 푸리나를 선택할 때, 다른 길의 푸리나와 다른 결말의 킬리키아도 창 너머에 비친다.

그 대가는 끝없는 미련과 피로, 그리고 어떤 선택도 완전히 깨끗하지 않다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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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하융이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다면, 지금의 비극은 내가 충분히 잘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하융은 가능성을 본다.
그러므로 그는 실패를 단순한 실패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른 길이 보였는데 왜 이 길이 되었는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왜 죽었는가.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왜 현실에서는 무너졌는가.

이 질문은 하융을 유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를 갉아먹는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더 나은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실패는 내가 그 가능성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융의 책임감이자 왜곡이다.

그는 현실을 직접 고치는 신이 아니다.
죽은 가능성을 부활시키는 자도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의 정보, 흔들림, 실패의 박자, 생존의 오차를 현재 위에 얇게 겹쳐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하융은 종종 자신이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닿지 못한 모든 가능성의 책임까지 자신에게 돌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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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하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현실을 선택해버리는 것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내가 선택한 이 현실 때문에, 더 나은 가능성이 영영 닫혀버리는 것.”

하융은 선택의 무게를 너무 잘 안다.

선택하면 다른 길은 닫힌다.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할 수 있다.
한 전선을 지키면 다른 전선이 무너질 수 있다.
한 현실에 남으면,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게 된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많은 관측과 충분히 정확한 개입이다.

그는 이렇게 믿는다.

> “실패한 가능성의 흔적을 더 잘 읽고, 죽은 가능성의 정보를 더 정확히 현재에 겹칠 수 있다면, 이번 현실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래서 하융의 동기는 이것이다.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실패를 헛되게 하지 않고, 지금 현실이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

그는 죽은 가능성을 되살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왜 죽었는지는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산 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즉 하융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모든 가능성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은 가능성이 남긴 실패의 흔적을 읽어, 지금 이 현실만큼은 한 발자국 비껴가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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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하융은 먼저 본다.

하지만 이것은 확정된 미래예지가 아니다.
그는 앞으로 무조건 일어날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택되지 못했거나 실패한 가능성의 잔향을 본다.

적의 화살에 맞아 죽은 가능성.
방패선이 무너진 가능성.
수레가 뒤집힌 가능성.
전령이 길을 잃은 가능성.
죠니가 한 박자 늦어 쓰러진 가능성.
푸리나의 무대가 제때 열리지 못한 가능성.

하융은 위협 앞에서 가장 먼저 묻는다.

“어디서 무너졌는가?”
“어느 박자가 늦었는가?”
“누가 왼쪽을 보지 못했는가?”
“어떤 작은 오차가 죽음으로 이어졌는가?”

그의 첫 대응은 가능성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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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하융은 현재 위에 가능성의 정보를 얇게 겹친다.

그는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죽은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오지 않는다.
다만 실패의 흔적을 현재의 산 자에게 전달한다.

“왼쪽.”
“한 박자 늦추시오.”
“지금 숙이시오.”
“방패 각도를 낮추시오.”
“그 길은 이미 무너졌소.”
“이쪽이오. 아직 창이 닫히지 않았소.”

하융의 전투 지시는 시적이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짧고 명확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그는 가능성의 실패 정보를 통해 산 자들이 한 발자국 비껴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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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하융은 직접 틈으로 들어간다.

하융은 순수 후방 관측자가 아니다.
그는 전장 중후열과 위험한 틈을 오가며 개입할 수 있는 현장 지휘관형 전투원이다.

강자와 정면 승부를 벌여 압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죽을 가능성을 보고 그 죽음을 비껴가며 한두 박자 버틸 수 있다.

적의 검이 지나간다.
하융은 그 검에 베여 죽은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현실의 몸을 반 치 비튼다.
검집으로 손목을 건드리고, 무릎의 방향을 틀고, 창끝의 박자를 어긋나게 만든다.

그의 근접전은 “이긴다”보다 죽을 자리를 비껴가며 흐름을 바꾼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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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다.

하융에게 최후의 선택은 단순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는 행위다.

어떤 가능성은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은 더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에서는 누군가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융의 마지막 전략은 이것이다.

> “모든 창을 열어둘 수는 없소.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아갈 창을 고르겠소.”



이때 하융은 더 이상 관측자가 아니다.
그는 선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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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하융이 과의존하는 전략은 가능성을 더 보려는 것이다.

위협을 만나면 더 본다.
실패하면 더 많은 가능성을 찾는다.
또 실패하면 더 깊이 창을 들여다본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실패의 원인을 찾게 해준다.
아군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한다.
전장 전체의 작은 오차를 보정한다.
죽은 가능성의 흔적을 산 자의 생존으로 바꾼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너무 많이 보면 선택이 늦어진다.
현실이 희미해진다.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수많은 가능성을 보게 된다.
결국 지금 이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하는 순간에도, “다른 길”을 보느라 한 박자 늦을 수 있다.

하융이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현실을 즉시 붙잡는 힘이다.

그래서 하융에게 필요한 보완은 푸리나와 죠니에게서 온다.

푸리나는 말한다.

“이 무대는 지금 여기야.”

죠니는 말한다.

“볼 만큼 봤으면 골라. 지금 움직여야 해.”

하융은 가능성을 본다.
푸리나는 그 가능성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으로 바꾼다.
죠니는 그 장면 안에서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박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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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하융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더라도, 지금 이 현실의 사람들을 지우지는 않겠다.”



하융은 더 나은 가능성을 본다.
그러므로 위험한 유혹도 있다.

“저쪽 가능성이 더 낫다.”
“이 현실은 실패했다.”
“이 사람은 다른 가능성에서는 더 나았다.”
“지금의 선택은 틀렸으니, 다른 길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하융은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지금 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푸리나 헤툼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살아가는 이 현실.
죠니가 지금 달리는 이 현실.
그레이가 이름을 기록하는 이 현실.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는 이 현실.
하융 자신이 남기로 한 이 현실.

하융의 양심은 이것이다.

가능성은 현실을 돕기 위한 것이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죽은 가능성을 보아도, 산 자를 그 가능성의 그림자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을 강제로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말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이미 무너졌소.”
“그러나 이쪽 창은 아직 열려 있소.”
“가시오. 이번에는 비껴갈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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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하융은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잔향을 보고, 그 실패의 정보를 현재에 겹쳐 산 자들이 한 발자국 비껴가게 만드는 현장 지휘관이다.

그의 거짓말은 **“더 나은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실패는 내가 그 가능성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죽은 가능성들의 실패를 헛되게 하지 않고, 지금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비껴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가능성을 보고, 실패의 정보를 현재에 겹치고, 필요하면 직접 틈에 들어가며, 마지막에는 하나의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더라도, 지금 현실의 사람들을 지우거나 그림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아레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새 길을 열기 위해 죽은 자와 잊힌 자의 침묵을 짊어지는 개척 군주”**야.

푸리나가 박수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아레는 박수 아래로 가라앉는 침묵을 듣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침묵을 단순히 애도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가 밟고 나아갈 길의 기초로 삼으려는 인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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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 마가트로이드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아레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명령 아래 죽어간 사람들이다.

전장에는 언제나 승리의 기록이 남는다.
누가 어느 전투에서 이겼는지, 어느 성을 함락했는지, 어느 군주가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는 기록된다.

하지만 그 승리의 아래에는 이름 없이 가라앉은 사람들이 있다.

명령을 받고 진군한 병사.
퇴각 명령을 받지 못해 포위된 부대.
전략상 버려진 마을.
시간을 벌기 위해 남겨진 후위.
장군의 판단 하나로 죽어간 이름 없는 사람들.

아레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내가 길을 열었다고 말하는 순간, 그 길 아래에는 누군가의 시체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승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전략과 명령의 필요성도 안다.
하지만 그 명령으로 죽은 자들을 “필요한 희생”이라는 말로만 처리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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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아레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순수한 개척의 기쁨이다.

개척은 본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새 땅을 열고, 새 질서를 만들고, 불가능하던 길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아레는 안다.

새 길은 빈 땅 위에 열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실패한 자리, 누군가가 죽은 자리, 누군가가 끝내 닿지 못한 자리 위에 열린다.

그녀는 개척의 찬란함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도시를 세울 때, 그 아래 묻힌 폐허를 본다.
새 전술을 완성할 때, 그 전술이 필요해진 죽음들을 본다.
승리의 박수를 들을 때, 그 박수에 섞이지 못한 침묵을 듣는다.

즉 아레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을 순수하게 밝은 것으로만 믿을 수 있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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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아레의 최대 업적은 세르비아를 개척의 성좌 아래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그녀는 단순한 지휘관이 아니다.
그녀는 새로운 길을 열고, 불가능한 전선을 밀어붙이며, 무너진 가능성을 다시 엮는 군주다.

아레는 정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계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전장과 국가와 인간이 자기 한계를 넘어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죽음과 실패 위에서도 멈추지 않고, 다음 길을 개척하는 체계를 만든 것.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그녀는 길을 열 때마다 그 길 아래 묻힌 자들을 본다.
승리를 만들 때마다, 그 승리에 포함되지 못한 죽은 자들을 기억한다.
그녀는 지휘관이므로 명령해야 하고, 명령하면 누군가는 죽는다.

아레의 대가는 승리를 기뻐할 수 없는 지휘관의 기억이다.

그녀는 웃을 수 있다.
상냥할 수도 있다.
푸리나의 길을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언제나 실이 내려간다.

무대 아래로.
무덤 아래로.
침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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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아레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로 없었던 사람이 된다.”



이 믿음은 아레의 책임감이자 상처다.

실제로 지휘관은 기억해야 한다.
명령 아래 죽은 자들을 잊지 않는 것은 아레의 의무다.
그것은 그녀의 도덕이고, 전장의 업을 짊어지는 방식이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기억의 책임을 너무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아레는 자신과 자신의 지휘계가 죽은 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녀는 때로, 자신이 그 침묵을 놓치면 세상 전체가 그들을 버릴 것처럼 느낀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나는 길을 여는 자다. 그러니 그 길 아래 묻힌 모든 이름을 내가 짊어져야 한다.”



이것은 숭고하지만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아레를 끝없이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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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아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개척과 승리의 이름 아래 죽은 자들이 지워지는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모르는 지휘관도 아니다.
전장에서 희생이 생긴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아레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이다.

승리했으니 됐다.
길이 열렸으니 됐다.
국가가 살아남았으니 됐다.
그들은 필요한 희생이었다.
이제 박수치자.

그 말들 아래에서 죽은 자들의 침묵이 완전히 묻혀버리는 것.

그래서 아레는 이렇게 믿는다.

> “개척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밟고 온 침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레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기억과 지휘의 책임이다.

누가 죽었는가.
왜 죽었는가.
누가 명령했는가.
그 죽음으로 무엇이 열렸는가.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우리는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가.

즉 아레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침묵이 승리의 박수에 묻히지 않도록, 그들을 기억한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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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아레는 먼저 전장 전체의 실을 본다.

그녀는 눈앞의 적 하나만 보지 않는다.

어느 부대가 버틸 수 있는가.
어느 부대가 무너질 것인가.
어느 길을 열면 어느 길이 닫히는가.
누가 살아남고, 누가 뒤에 남아야 하는가.
어떤 희생이 생기며, 그 희생으로 무엇을 얻는가.

아레의 첫 대응은 지휘관의 시야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잔혹한 판단도 한다.

다만 그 판단의 대가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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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아레는 명령한다.

아레는 푸리나처럼 먼저 무대를 열지 않는다.
레이튼처럼 먼저 질문을 늘리지도 않는다.
하융처럼 가능성의 창을 오래 바라보지도 않는다.
죠니처럼 개인의 찰나에 바로 맡기지도 않는다.

그녀는 지휘관이다.

필요하다면 말한다.

“후위는 남아라.”
“저 성문은 버린다.”
“오른쪽 전열은 죽어도 물러나지 마라.”
“퇴각로를 열 때까지 시간을 벌어라.”

이 명령은 잔혹할 수 있다.

하지만 아레에게 명령은 책임 회피가 아니다.
명령은 자신이 업을 짊어지겠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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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아레는 죽은 자와 실패한 자의 흔적까지 전장에 엮는다.

아레는 소환술의 전통과 닿아 있지만, 그녀의 핵심은 단순한 망자 병력 운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를 “살아 있는 전력”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떠난 이를 다시 움직이게 하더라도, 그것은 살아난 것이 아니다.
기억함으로써 불러온 흔적일 뿐이다.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아레가 다루는 것은 죽은 자의 생명이 아니라 기억과 침묵과 미완의 실이다.

그녀는 전장에 묻힌 실패, 이전 명령의 대가, 스러진 이들의 자리를 알고 있다.
그것을 통해 현재의 지휘를 보강한다.

하지만 그들을 성장시키거나, 다시 삶으로 끌어올리거나, 자신의 미래를 위한 재료처럼 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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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그 실의 중심에 선다.

아레는 부하들에게만 업을 떠넘기지 않는다.

정말 마지막 순간이 오면, 그녀는 말한다.

“이 명령은 내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내린 명령, 그 명령으로 생긴 죽음, 그 죽음으로 열린 길을 자기 이름 아래 묶는다.

아레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길이 피로 열린다면, 그 피를 명령한 자의 이름도 함께 남겨라.”



이것이 아레의 지휘관성이다.

그녀는 희생을 없앨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희생을 익명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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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아레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침묵을 자신이 기억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지휘관의 책임을 흐리지 않는다.
죽은 자를 승리의 소모품으로 만들지 않는다.
국가의 개척이 단순한 찬가가 되지 않게 한다.
전장의 윤리를 유지한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아레는 산 자의 웃음까지 죄책감으로 볼 수 있다.
박수를 듣는 순간, 그 아래 묻힌 침묵부터 찾는다.
아이들이 웃는 장면에서도, 웃지 못하는 죽은 자들을 먼저 떠올린다.

이것은 아레의 도덕이지만, 동시에 그녀를 쉬지 못하게 만든다.

아레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산 자가 죄책감 없이 살아갈 권리를 인정하는 여유다.

그래서 푸리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푸리나는 말한다.

“산 자에게는 박수가 필요해.”

아레는 말한다.

“죽은 자에게는 침묵이 필요하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박수가 침묵을 지우는 순간이고, 침묵이 박수를 죄로 만드는 순간이다.

아레의 성장은 푸리나의 박수를 부정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푸리나의 성장은 아레의 침묵을 무대 밖에 방치하지 않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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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아레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죽은 자를 기억할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미래를 위한 재료로 삼지는 않겠다.”



이것이 아레의 양심이다.

아레는 지휘관이다.
소환술적 전통과도 닿아 있다.
죽은 자와 실패한 자의 흔적을 전장에 엮을 수 있다.

바로 그래서 위험하다.

그녀가 선을 넘으면, 죽은 자는 기억되는 존재가 아니라 운용되는 자원이 된다.
침묵은 애도가 아니라 병참이 된다.
망자는 이름이 아니라 병력이 된다.

아레가 절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이것이다.

죽은 자를 다시 한 번 명령 아래 세우는 것.

물론 그녀는 떠난 이를 기억으로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경고이자 제언에 가까워야 한다.
혹은 한 번의 장면, 한 번의 침묵, 한 번의 미완의 실이어야 한다.

죽은 자는 성장시킬 수 없다.
죽은 자는 더 나은 병사가 될 수 없다.
죽은 자는 다시 삶의 무대에 올릴 수 없다.

아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레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망자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에 다시 명령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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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아레 마가트로이드는 개척과 승리의 아래에 묻힌 침묵을 기억하며, 죽은 자를 잊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려는 지휘관이다.

그녀의 거짓말은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로 없었던 사람이 된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개척과 승리의 박수 아래에서 죽은 자와 잊힌 자의 침묵이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전장의 실을 보고, 필요한 명령을 내리고, 죽은 자와 실패한 자의 흔적까지 기억으로 엮으며, 마지막에는 명령의 업을 자기 이름으로 짊어지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죽은 자를 기억하되, 그들을 미래를 위한 자원이나 병력으로 다시 명령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아스테르다스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국가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스스로 낙하지점을 정한 유성”**이야.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를 하나의 생존 설계도처럼 본다면, 아스테르다스는 그 설계도 안에서도 개인의 의지와 감정이야말로 국가를 움직이는 진짜 중력이라고 믿는 인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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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다스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아스테르다스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리투아니아가 짓밟히던 순간들이다.

불타는 마을.
숲으로 도망치는 사람들.
기사와 침략자의 말발굽 아래 무너지는 부족들.
각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씩 꺾여나간 사람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를 하나로 묶으려 했던 장면.

아스테르다스에게 그 기억은 단순한 복수심의 원천이 아니다.

그는 그 장면에서 두 가지를 보았다.

하나는 국가가 없으면 사람들이 너무 쉽게 부서진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국가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언젠가 사람을 부품처럼 다룰 수 있다는 위험이다.

그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우리는 흩어져 있었기에 무너졌다. 하지만 하나가 된 뒤에도, 사람이 사라진 국가는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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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아스테르다스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국가와 개인이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한다는 순진한 믿음이다.

리투아니아가 살아남으려면 국가가 강해져야 한다.
민다우가스의 설계도 필요하다.
복수와 생존의 체계도 필요하다.
숲과 달과 죽음과 태양과 운명의 표식 아래, 리투아니아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스테르다스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보았다.

국가가 너무 완벽한 기계가 되면, 사람은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된다.
혈통도, 귀족도, 병사도, 심지어 군주 자신도 “리투아니아를 위한 부품”으로 취급될 수 있다.

아스테르다스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국가가 강해지면 자연히 사람도 구원받는다는 믿음.

그는 국가의 필요성을 안다.
하지만 국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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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아스테르다스의 최대 업적은 민다우가스의 곁에 자기 의지로 떨어진 것이다.

그는 민다우가스의 망치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유성이다.
전장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낙하하며, 리투아니아의 적을 부수는 자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명령 수행 기계가 아니다.

그는 민다우가스의 설계도에 끼워진 톱니바퀴가 아니라, 스스로 낙하지점을 정한 유성이다.

그의 최대 업적은 이것이다.

리투아니아의 생존이라는 냉혹한 대전략을 이해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의 감정과 자유의지를 잃지 않은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그는 자신이 부서질 수 있음을 안다.
언젠가 리투아니아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소모될 수도 있다.
그가 선택한 낙하지점은 아름답지만, 유성은 떨어지면 타버린다.

아스테르다스의 대가는 자유롭게 선택했기에, 그 선택의 파괴까지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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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아스테르다스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낙하라면, 부서져도 괜찮다.”



이 믿음은 아스테르다스를 강하게 만든다.

그는 죽음을 목적 삼지 않는다.
자기희생에 취한 순교자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방향이라면, 그 끝에서 부서지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곡된 부분은 자신의 파괴를 너무 쉽게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이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도구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이 선택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가장 강한 도구처럼 몰아넣을 수 있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나는 누구의 부품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곳에 떨어지는 유성이라면, 나 자신이 타버리는 것도 내 자유다.”



이것은 아스테르다스의 자부심이자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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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아스테르다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리투아니아가 살아남더라도, 그 안에 사람이 남지 않는 것이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멸망을 두려워한다.
침략자에게 짓밟히는 것도 두려워한다.
민다우가스의 설계도가 실패하는 것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리투아니아가 살아남았는데, 그 안에 남은 것이 오직 체계뿐인 것.
복수는 완성되었는데, 웃는 사람도 노래하는 아이도 없는 것.
국가는 유지되었지만, 모두가 자기 자신을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아스테르다스는 이렇게 믿는다.

>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제도와 전략만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누구를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떨어지기로 선택하는지가 국가를 움직인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개인의 의지와 감정이 국가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즉 아스테르다스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리투아니아를 지키고 싶다. 하지만 리투아니아가 사람을 부품으로 갈아 넣는 기계가 되게 하지는 않겠다. 내가 민다우가스의 곁에 떨어지는 것도 명령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곳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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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아스테르다스는 먼저 낙하지점을 정한다.

그는 전장을 평면으로 보지 않는다.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무엇을 부술 것인가.
어떤 궤도로 들어가야 적의 중심을 흔들 수 있는가.

그의 첫 대응은 돌진이 아니라 궤도 설정이다.

적의 약점.
전선의 중심.
아군이 버티는 지점.
민다우가스의 설계도에서 자신이 떨어져야 할 자리.

아스테르다스는 그 지점을 고른다.

그리고 한 번 정하면, 망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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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아스테르다스는 궤도를 바꾼다.

그는 단순히 직선으로 들이받는 전투병기가 아니다.

그의 무공은 유성, 낙하, 별, 운철의 논리다.
그에게 모든 방향은 낙하다.
옆으로 움직여도 낙하고, 뒤로 물러나도 낙하고, 공중에서 몸을 틀어도 낙하다.

그는 낙점을 다시 만들고, 허공에 발을 디디며, 관성을 조절하고, 흐르는 별처럼 궤도를 바꾼다.

즉 그는 말한다.

“안 닿는다고? 그럼 다른 하늘에서 떨어지면 되지.”

아스테르다스의 두 번째 대응은 자유로운 궤도 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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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아스테르다스는 자신의 몸을 유성으로 만든다.

이 단계에서 그는 계산보다 열을 앞세운다.

그는 따뜻하고 감정적인 인물이지만, 진지해지는 순간 그 따뜻함은 불꽃이 된다.
자기 몸을 운철처럼 단단하게 만들고, 모든 관성을 한 점으로 모아, 적이 버티는 세계의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

이때 아스테르다스의 전투는 단순한 격투가 아니라 선언이다.

“나는 이곳에 떨어지기로 했다.”

그의 무공은 자유의지의 물리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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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신이 부서질 각오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스테르다스에게 죽음이나 파괴는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로 올 수 있는 위험이다.

그는 죽기 위해 떨어지지 않는다.
살리기 위해 떨어진다.
리투아니아가 살아남고, 민다우가스의 설계도가 사람을 잃지 않도록, 자신이 선택한 별의 방향으로 떨어진다.

아스테르다스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내가 부서지는 것이 목적은 아니야. 하지만 이 별이 떨어져야 길이 열린다면, 나는 내가 고른 하늘에서 떨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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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아스테르다스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자기 선택의 열로 모든 것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망설임을 없앤다.
부품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게 한다.
리투아니아의 냉혹한 생존 논리에 온도를 준다.
민다우가스의 설계도에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아스테르다스는 “내가 선택했으니 괜찮다”는 말로 자신의 소모를 정당화할 수 있다.
타인이 걱정해도 웃어넘길 수 있다.
자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과의 문제로만 처리할 수 있다.

그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자기 자신도 지켜야 할 리투아니아의 일부라는 감각이다.

그에게 필요한 보완은 민다우가스와의 긴장 속에서 나온다.

민다우가스는 말할 수 있다.

“네가 부서져도, 리투아니아는 굴러가야 한다.”

아스테르다스는 말한다.

“맞아. 하지만 내가 왜 떨어지는지는 내가 정해.”

그러나 아스테르다스가 정말 배워야 하는 것은 여기에 하나 더 있다.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함부로 태워도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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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아스테르다스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리투아니아를 위해 부서질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부품으로 취급하는 리투아니아를 위해 떨어지지는 않겠다.”



이것이 아스테르다스의 양심이다.

그는 민다우가스를 따른다.
민다우가스의 대전략을 이해한다.
리투아니아의 생존을 위해 싸운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도 건다.

하지만 그는 리투아니아가 단순한 기계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사람을 완전히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보는 것이다.

병사도, 귀족도, 백성도, 군주도,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도구와 시스템은 필요하다.
칼은 자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무엇을 자를지는 쥔 사람이 정한다.

아스테르다스는 그 점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망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못으로만 보는 손에는 쥐어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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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아스테르다스는 리투아니아의 생존이라는 냉혹한 대전략을 이해하면서도, 자기 의지로 낙하지점을 정한 청흑빛 유성이다.

그의 거짓말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낙하라면, 부서져도 괜찮다”**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리투아니아를 지키되, 그 리투아니아가 사람을 부품으로 갈아 넣는 기계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낙하지점을 정하고, 궤도를 바꾸고, 자신을 유성으로 만들어 떨어지며, 마지막에는 부서질 각오로 길을 여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리투아니아를 위해 싸우더라도, 사람을 완전히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하는 국가를 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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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의 방문자》

개막 — 작은 별을 무대에 걸다

왕궁 극장의 천장은 그날, 바다가 아니라 밤하늘이 되었다.

푸른 천도, 돛대도, 종이 갈매기도 없었다. 대신 어두운 막 위에 작은 별들이 하나씩 걸렸다. 어떤 별은 금빛이었고, 어떤 별은 은빛이었고, 어떤 별은 너무 작아서 조명이 닿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다.

무대 중앙에는 작은 사막이 놓여 있었다.

모래는 진짜 모래가 아니었다. 엷은 황금빛 천과 잘게 부순 조개껍질, 그리고 마른 풀잎으로 만든 무대 장치였다. 그러나 조명이 낮게 깔리자 그것은 정말 사막처럼 보였다.

그 사막 한가운데에는 부러진 청동 매가 쓰러져 있었다.

한쪽 날개는 꺾였고, 은실은 끊어져 있었으며, 자줏빛 깃 장식에는 모래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은 전쟁과 정찰과 귀환 방위를 위해 만들어진 니케아식 마도구였다.

그러나 오늘, 그 매는 날지 못했다.

푸리나 헤툼은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선장의 모자도, 항해자의 류트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물뿌리개 하나와, 투명한 유리 덮개 하나가 있었다.

객석이 조용해지자, 푸리나는 밤하늘에 걸린 가장 작은 별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의 이야기는 아주 작은 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크게 선언하기보다는, 잠든 아이 옆에서 책을 펼치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너무 작아서 지도에는 제대로 그려지지 않고, 너무 작아서 군대가 행군하기도 어렵고, 너무 작아서 왕국이라 부르면 누군가는 웃을지도 모르는 별.”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별에 장미 한 송이가 피면, 그 별은 더 이상 작기만 한 곳이 아니게 됩니다.”

그녀는 물뿌리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유리 덮개를 무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오늘의 극은, 그 장미를 두고 떠난 작은 방문자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장미가 무엇인지.

별이 무엇인지.

왜 떠났고, 왜 돌아가야 하는지.

그런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작은 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극장 전체에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것은 바다를 출항시키던 때처럼 발밑을 흔들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감각을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누군가에게는 오래 돌보지 못한 화분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닫아주지 못한 창문이.

누군가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한 사과가.

누군가에게는 이름 붙이지 못한 작은 별 하나가.

무대 위의 별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가장 작은 별 하나가 내려왔다.

그 별 아래, 사막이 열렸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그럼 막을 열겠습니다.”

그녀는 물뿌리개를 무대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작은 별의 방문자가, 사막에서 한 어른을 만나는 장면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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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부러진 청동 매와 양 한 마리

사막은 너무 조용했다.

니케아의 황제가 익숙한 종류의 조용함은 아니었다.

전장이 조용해질 때가 있었다. 화살이 날아가기 직전, 말들이 숨을 낮추고, 장수들이 명령을 기다리며, 적과 아군이 모두 한 박자 뒤의 피를 예감하는 그런 침묵.

궁정이 조용해질 때도 있었다. 누군가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받았을 때, 혹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는 이름이 회의장 한가운데 놓였을 때의 침묵.

그러나 이 사막의 침묵은 달랐다.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판결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넓었다.

끝없이 넓어서, 사람이 들고 온 칙령과 활과 관직과 죄책감까지 모두 작은 물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는 부러진 청동 매 옆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니케아 궁정의 장인들과 천문관들이 만든 정찰용 마도구였다. 몸체는 청동으로 되어 있었고, 날개에는 얇은 은실과 자줏빛 깃 장식이 박혀 있었다. 배 안쪽에는 작은 천문반과 항로 기록판이 들어 있었으며, 원래라면 하늘로 날아올라 별의 위치와 지상의 길을 함께 읽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 청동 매는 모래 위에 쓰러져 있었다.

오른쪽 날개는 꺾였고, 은실은 끊어졌으며, 천문반은 축이 어긋나 있었다. 자줏빛 깃 장식 위로 모래가 내려앉았다.

물론 그것은 무대 장치였다.

나무와 금속박과 얇은 실로 만든, 매우 정교한 소품.

하지만 푸리나의 극장 안에서, 그런 구분은 늘 조금 무력했다.

무대는 무대였고, 동시에 잠깐의 세계였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의 몸체를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우측 날개 파손. 천문반 축 어긋남. 귀환 방위 상실.”

그녀는 짧게 정리했다.

“전투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 방치 시 생존률 저하.”

무대 뒤에서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역시 사막에 고립되어도 보고서처럼 말해.”

죠니가 객석 쪽에서 낮게 말했다.

“그게 저 황제님 방식이면, 꽤 안정적이긴 하지.”

푸리나는 힐끗 그를 보았다.

“죠니, 이번엔 주역 아니니까 조용히.”

“응. 이번엔 사막에서 양 안 그려도 돼서 편하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막 위로 작은 발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모래를 밟는 소리.

미하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사막 한가운데, 작은 망토를 두른 아이가 서 있었다.

요안나였다.

오늘의 요안나는 공동황제의 예복도, 궁정의 격식도 입고 있지 않았다. 작은 별빛 색 망토, 목에 걸린 연한 금빛 장식, 그리고 손에 쥔 아주 작은 물뿌리개.

그녀는 조용히 미하일라를 바라보았다.

미하일라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먼저 예법이 왔을 것이다.

호칭.

인사.

공동황제로서의 거리.

황제와 황제 사이의 복잡한 경계.

하지만 사막은 그것들을 조금 멀리 밀어냈다.

요안나는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양을 그려주세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양?”

“네.”

“용도를 말하라.”

요안나가 눈을 깜박였다.

“용도요?”

미하일라는 진지했다.

“목축용인가, 운반용인가, 제사용인가. 혹은 군수용인가.”

요안나는 잠시 미하일라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미를 먹지 않는 양이면 돼요.”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미하일라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 말은 이상했다.

전장과 법령과 제국의 계보 속에서 다루기 어려운 요구였다.

장미를 먹지 않는 양.

무언가를 해치지 않는 힘.

미하일라는 부러진 청동 매의 기록판을 꺼냈다.

원래라면 항로, 별자리, 적의 이동, 산맥과 수원지의 위치가 적혀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뒤집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뒷면이 드러났다.

그 위에 목탄을 올렸다.

요안나는 조용히 물었다.

“거기에 그려도 돼요?”

“현재 항로 산정 기능은 정지했다.”

미하일라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 임시 용도로 전환한다.”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양 그림을 임시 용도라고 했어.”

죠니가 말했다.

“그래도 판은 쓰이고 있네.”

미하일라는 첫 번째 양을 그렸다.

그 양은 지나치게 강해 보였다. 뿔이 컸고, 다리는 단단했으며, 눈빛은 거의 전투마에 가까웠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받아들고 진지하게 보았다.

“이 양은 장미를 먹을 것 같아요.”

미하일라는 기록판을 다시 받았다.

“근거는?”

“눈이 너무 결심했어요.”

객석에서 다시 웃음이 났다.

미하일라는 잠시 양 그림을 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 양은 장미를 보면 돌격할 것 같았다.

두 번째 양은 지나치게 작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양은 장미를 먹기 전에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아요.”

세 번째 양은 지나치게 늙었다.

“이 양은 장미를 먹지는 않겠지만, 제 별까지 걸어오기 전에 잠들 것 같아요.”

미하일라는 목탄을 내려놓았다.

“요구조건이 계속 변한다.”

요안나는 조금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죄송해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 사과는 이상하게 빨랐다.

마치 궁정에서 먼저 물러서는 법을 배운 아이처럼.

미하일라는 기록판의 빈 부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자를 그렸다.

구멍이 세 개 뚫린 작은 상자.

“양은 이 안에 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받아들었다.

눈이 커졌다.

“정말요?”

“그렇다.”

“보이지 않는데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네가 원하는 양일 수 있다.”

요안나는 상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이 양은 장미를 먹지 않을 것 같아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작전 성공이다.”

푸리나가 무대 뒤에서 속삭였다.

“양 그리기를 작전 성공이라고 했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래도 성공했네. 꽤 좋은 작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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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나는 상자 그림이 그려진 기록판을 품에 안고, 미하일라 옆에 앉았다.

사막은 여전히 넓었다.

부러진 청동 매 옆의 황제와 작은 별의 방문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하일라였다.

“너는 어디서 왔나.”

요안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이 별들이 흔들렸다.

그중 하나는 아주 작았다.

다른 별보다 낮게 매달려 있었고, 가까이서 보면 둥근 나무판에 은색 가루를 칠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명이 닿자, 그것은 정말 작은 별처럼 보였다.

요안나는 그 별을 가리켰다.

“저기요.”

미하일라는 별을 보았다.

“저 별은 너무 작다.”

“그래서 좋아요.”

“왜지?”

“해가 지는 걸 자주 볼 수 있어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요안나는 계속 말했다.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또 해가 져요. 슬플 때는 여러 번 볼 수 있어요.”

“너는 많이 슬펐나.”

요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사막보다 작았지만, 더 가까웠다.

미하일라는 더 묻지 않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제 별에는 화산이 세 개 있어요.”

“활화산인가.”

“두 개는 그래요. 하나는 꺼졌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셋 다 청소해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다.”

요안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죠?”

“꺼진 화산도 다시 깨어날 수 있다. 방치하지 않는 것은 옳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그녀가 자기 별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이 조금 이상한 듯했다.

그래서 더 말했다.

“그리고 바오밥나무도 있어요.”

“위험한가.”

“아주요. 어릴 때 뽑지 않으면 별을 찢어버릴 수도 있어요.”

미하일라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매일 확인해야 한다.”

“네. 아주 작은 싹일 때요.”

“큰 적보다 작은 싹이 더 위험할 때가 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두 사람은 잠시 같은 방향을 보았다.

작은 별.

화산.

바오밥나무.

제국과 전장과는 전혀 다른 규모였지만, 이상하게 원리는 비슷했다.

작은 것을 방치하면, 언젠가 세계가 찢어진다.

미하일라는 낮게 말했다.

“작은 별이라도 통치가 필요하군.”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그런데 저는 통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상자 그림이 그려진 기록판을 끌어안았다.

“장미가 있어서요.”

그 말과 함께 무대의 하늘이 조금 변했다.

사막 뒤편에 작은 별의 무대가 떠올랐다.

푸리나의 극장 신술이 아주 얇게 장면을 겹쳤다. 모래 위에 별빛이 내려앉고, 별 위에는 작은 화산 세 개와 바오밥나무 싹, 그리고 유리 덮개 옆에 선 장미 한 송이가 보였다.

장미는 배우가 아니었다.

무대 장미였다.

그러나 조명과 바람과 아주 섬세한 인형 장치 때문에, 꽃잎이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요안나는 그 장미를 보았다.

“그 장미는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어요.”

미하일라는 장미를 보았다.

작고, 까다롭고, 말이 많고, 가시는 얇았다.

제국의 지도 위에서는 표시되지 않을 생명.

전쟁 보고서라면 한 줄로 접힐 존재.

그러나 요안나의 작은 별에서는, 그 꽃 하나 때문에 아침의 순서와 밤의 의미가 달라졌다.

미하일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기록판의 빈 부분을 조금 남겨두었다.

“정말 하나뿐인가.”

미하일라가 물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은?”

요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이 지나갔다.

장미의 꽃잎이 떨렸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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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은 잠깐 작은 별로 넘어갔다.

요안나의 별은 정말 작았다.

한 걸음만 걸으면 화산이 있었고, 두 걸음 더 가면 장미가 있었으며, 조금만 더 가면 해가 지는 자리였다. 객석에서는 그 작은 규모 때문에 낮은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만족스럽게 속삭였다.

“작은 별 세트 귀엽다.”

죠니가 말했다.

“저 정도면 청소는 편하겠네.”

하지만 무대 위의 요안나는 진지했다.

그녀는 작은 빗자루로 화산을 청소했다.

하나.

둘.

셋.

꺼진 화산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다음 바오밥나무 싹을 살폈다.

작은 싹 하나를 뽑았다.

또 하나.

그리고 장미에게 다가갔다.

장미는 천천히 꽃잎을 열었다.

녹음된 목소리인지, 무대 뒤의 배우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부드럽고 조금 까다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인사가 늦었네요.”

요안나는 당황했다.

“미안해. 화산을 청소하느라.”

“화산은 매일 거기 있잖아요.”

“너도 매일 여기 있잖아.”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금 새침하게 말했다.

“나는 어제와 조금 다르게 피었어요.”

요안나는 장미를 보았다.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꽃잎의 각도 하나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향기가 조금 짙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렇네. 예뻐.”

장미는 조금 더 꽃잎을 세웠다.

“그건 당연한 말이에요.”

요안나는 웃었다.

“그러면 왜 말하게 했어?”

“당연한 말도 듣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났다.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들었다.

“물 줄게.”

“너무 많이 주지는 말아요.”

“어제는 적다고 했잖아.”

“어제의 바람과 오늘의 바람은 달라요.”

요안나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장미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밤에는 유리 덮개를 씌워주세요. 바람이 거칠어요.”

“알았어.”

“벌레도 조심해줘요. 하지만 나비는 보고 싶으니까 애벌레 몇 마리는 남겨도 돼요.”

“그럼 어떤 벌레를 쫓아야 해?”

“해로운 벌레요.”

“어떤 게 해로운데?”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한숨을 쉬었다.

장미는 꽃잎을 살짝 떨었다.

“한숨 쉬었나요?”

“아니.”

“쉬었어요.”

“조금.”

“내가 귀찮나요?”

요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가시가 있으니까요.”

작은 가시들이 조명에 비쳤다.

작고, 얇고, 솔직히 말하면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가시였다.

요안나는 그 가시들을 보았다.

“그 가시로 뭘 막을 수 있어?”

장미는 당당하게 말했다.

“호랑이요.”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 별에는 호랑이가 없는데.”

“그래도 막을 수 있어요.”

“호랑이는 풀을 안 먹어.”

“나는 풀이 아니에요.”

“그건 맞아.”

둘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그 순간은 우스웠다.

그러나 아주 조금 슬펐다.

장미는 자신이 강하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요안나는 장미가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돌봐야 할지는 몰랐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찔릴 것 같고, 너무 멀리 있으면 시들 것 같았다.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들었다.

“밤에 씌워줄게.”

장미는 작게 말했다.

“지금도 바람이 조금 차가워요.”

“지금은 낮이야.”

“낮에도 바람은 불어요.”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보았다.

화산 청소도 해야 했다.

바오밥나무도 봐야 했다.

해가 지는 것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장미는 계속 다른 말을 했다.

물.

바람.

벌레.

나비.

가시.

호랑이.

요안나는 갑자기 숨이 조금 막혔다.

“나는 다른 별들을 보고 올 거야.”

장미의 꽃잎이 멈췄다.

“다른 별?”

“응.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으니까.”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말을 이어갔다.

“왕도 만나고, 어른들도 만나고, 지구도 볼 거야. 그러면 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장미는 한참 뒤에 말했다.

“그럼 가도 좋아요.”

너무 쉽게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요안나는 오히려 당황했다.

“정말?”

“나는 가시가 있으니까요.”

장미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하지만 꽃잎은 조금 떨렸다.

“그리고 바람도 견딜 수 있어요.”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들고 있었다.

“덮개는?”

장미는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꽃잎을 살짝 접었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아까는—”

“필요 없어요.”

요안나는 더 묻지 못했다.

장미는 아주 작게 말했다.

“가세요. 너무 오래 쳐다보면, 내가 우는 걸 들킬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 요안나는 멈췄다.

하지만 장미는 다시 꽃잎을 세웠다.

“물론 나는 울지 않아요. 장미니까요.”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내려놓았다.

씌우지는 않았다.

그녀는 물뿌리개와 상자 양이 그려진 기록판을 들고 별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떠나기 직전, 뒤돌아보았다.

장미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아주 작은 별 위에서.

요안나는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작은 별의 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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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막.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고 있었다.

요안나는 상자 그림이 그려진 기록판을 품에 안은 채,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떠났나.”

미하일라가 물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미를 두고.”

“네.”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돌아갈 생각은 있나.”

요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왜지.”

요안나는 작은 별을 보았다.

“돌아가면,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 말은 작았다.

하지만 미하일라는 들었다.

돌아간다는 것은, 그저 그리운 곳에 닿는 일이 아니다.

돌아간 뒤 해야 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하일라는 사막 너머를 보았다.

전쟁을 끝내는 활을 가진 황제도, 그 질문 앞에서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장미 옆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약하고, 까다롭고, 투덜거리고, 가시를 세우고, 사실은 바람을 무서워하는 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전쟁과 달랐다.

그러나 어쩌면, 전쟁을 끝내고 난 뒤에 남는 질문이었다.

미하일라는 기록판을 다시 받았다.

그리고 상자 속 양 옆에 작은 유리 덮개를 그렸다.

요안나가 물었다.

“뭘 그리세요?”

“유리 덮개.”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미하일라는 담담히 말했다.

“양이 장미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바람은 막아야 한다.”

요안나는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대 위 하늘에서 작은 별 하나가 조금 더 밝아졌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무대 밖에서 낮게 들렸다.

“이렇게, 작은 별의 방문자는 사막에서 양 한 마리와 유리 덮개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장미가 특별한 이유가 장미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별빛이 흔들렸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1막 — 명령하는 왕과 피어나는 꽃들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었다.

— 어른들의 별을 지나며 —

미하일라는 간판을 보았다.

“다음은 왕인가.”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서운 왕일까요?”

미하일라는 잠시 생각했다.

“왕은 대체로 무섭다.”

요안나가 조금 굳었다.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고 덧붙였다.

“그러나 무섭지 않은 왕이 더 위험할 때도 있다.”

요안나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미하일라는 낮게 말했다.

“가보면 알겠지.”

사막의 별빛이 천천히 회전했다.

작은 방문자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좋아. 소피아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무너진 왕국의 세계를 다시 정의하려는 황금눈의 연금술사”**야.

벨라 4세가 헝가리 왕국 전체를 권역으로 삼아 재건하는 여왕이라면, 소피아는 그 옆에서 사물과 제도와 사람에게 붙은 낡은 정의를 다시 해석해, 왕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려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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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파드 소피아 베아트리체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소피아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헝가리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요새가 무너진다.
피난민이 길 위에 늘어난다.
왕국의 창고가 비어간다.
귀족들은 자기 영지를 먼저 계산한다.
사람들은 “왕국은 끝났다”고 말한다.
한때 질서였던 것들이 어느 순간 폐허, 부채, 피난 행렬, 깨진 성벽, 낡은 문서가 된다.

소피아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어제까지 왕국이라 불리던 것이, 오늘은 잔해라고 불렸다.”

그녀는 그때 배웠다.

사물의 이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성벽은 무너진 돌이 될 수 있고, 무너진 돌은 다시 결계핵이 될 수 있다.
폐허는 실패의 증거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공방의 재료일 수도 있다.
왕국도 마찬가지다.

끝났다고 정의된 것을,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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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소피아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세계가 안정된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이다.

성은 성이다.
왕관은 왕관이다.
금은 금이다.
피난민은 피난민이다.
폐허는 폐허다.
패배는 패배다.

소피아는 한때 이런 식으로 세계가 비교적 안정된 이름을 가진다고 믿었을 수 있다.

하지만 헝가리의 위기 속에서 그녀는 보았다.

성은 무너질 수 있다.
왕관은 권위를 잃을 수 있다.
금은 사람을 살릴 수도, 사람을 팔아넘길 수도 있다.
피난민은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왕국이 지켜야 할 미래일 수 있다.
폐허는 끝이 아니라 재료일 수 있다.
패배는 재정의되면 다음 방어선의 설계도가 될 수 있다.

즉 소피아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세계의 이름과 가치가 안정되어 있다는 믿음.

하지만 이 상실은 곧 그녀의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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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소피아의 최대 업적은 헝가리의 잔해를 다시 쓸 수 있는 재료로 본 것이다.

남들이 폐허라고 부르는 것을, 그녀는 재건 자재로 본다.
남들이 패배라고 부르는 것을, 그녀는 다음 방어의 데이터로 본다.
남들이 피난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그녀는 왕국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로 본다.
남들이 금속, 약품, 문서, 부채, 공방, 요새를 따로따로 볼 때, 소피아는 그것들을 하나의 연금술적 변환 과정으로 본다.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헝가리의 무너진 세계를 다시 정의하고, 재건 가능한 체계로 바꾼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소피아는 세계를 너무 쉽게 “재료”로 보게 될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을 변환 가능한 것으로 보면, 고유한 슬픔과 상실까지 기능으로 처리할 수 있다.
사람의 상처를 “재건에 필요한 경험값”으로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소피아의 대가는 따뜻한 재건과 차가운 재정의 사이의 위험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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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소피아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올바르게 정의하고 변환할 수 있다면, 어떤 상실도 쓸모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 믿음은 소피아를 강하게 만든다.

그녀는 무너진 것을 그냥 무너진 것으로 두지 않는다.
실패를 실패로만 두지 않는다.
폐허를 폐허로만 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끝났다고 말하는 곳에서 다시 의미를 뽑아낸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모든 상실이 반드시 쓸모로 바뀌어야 한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어떤 상처는 재료가 되기 전에 애도되어야 한다.
어떤 폐허는 공방으로 바꾸기 전에 무덤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왕국 재건의 구성원이기 전에, 그냥 쉬어야 하는 피해자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쓸모를 찾아내지 못한 상실은, 정말로 헛된 상실이 된다.”



이것이 소피아의 재능이자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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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소피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헝가리의 상실이 아무 의미 없는 폐허로 확정되는 것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패배가 “그냥 끝”으로 정리되는 것.
무너진 요새가 “쓸모없는 잔해”로 버려지는 것.
피난민이 “소모된 인구”로 기록되는 것.
왕국의 실패가 “어쩔 수 없었다”는 문장으로 닫히는 것.
어머니 벨라가 지키려는 왕국이, 결국 재정의되지 못한 채 과거의 파편으로 남는 것.

그래서 소피아는 이렇게 믿는다.

> “만물은 다시 정의될 수 있다. 이름이 바뀌면 용도도, 가치도, 미래도 바뀐다.”



소피아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재정의와 변환이다.

폐허를 요새의 씨앗으로.
부채를 미래의 투자로.
실패를 다음 설계도로.
피난민을 왕국의 남은 심장으로.
금속을 방패로.
상처를 왕국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공식으로.

즉 소피아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헝가리가 잃은 것들이 헛되이 폐허로 굳어지지 않도록, 그것들을 다시 정의하고 변환해 왕국의 미래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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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소피아는 먼저 정의한다.

눈앞의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이것은 폐허인가, 재료인가?
이것은 부채인가, 왕국이 아직 신용을 가진 증거인가?
이것은 피난민 행렬인가, 살아남은 헝가리인가?
이것은 무너진 성벽인가, 새 결계의 핵인가?
이것은 패배인가, 다음 방어선의 설계 조건인가?

소피아의 첫 대응은 이름을 다시 붙이는 것이다.

그녀의 황금눈은 단순히 귀한 금속을 보는 눈이 아니라, 사물과 상황의 잠재적 정의를 보는 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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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소피아는 분해한다.

이미 붙은 이름이 너무 강하면, 그것을 구성 요소로 나눈다.

왕국의 위기라면 식량, 성벽, 병력, 민심, 재정, 귀족의 이해관계, 피난민 수용력으로 나눈다.
무너진 요새라면 돌, 철, 영맥, 방어선, 노동력, 결계핵으로 나눈다.
한 사람의 절망이라면 상처, 굶주림, 상실, 피로, 두려움, 아직 남은 욕망으로 나눈다.

소피아는 세상을 한 덩어리로 보지 않는다.

분해할 수 있으면, 다시 조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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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소피아는 변환한다.

이것이 그녀의 연금술적 핵심이다.

금속을 바꾸고, 재료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의미를 바꾼다.
성벽의 잔해를 새 방어 결계의 앵커로 삼는다.
부서진 무기를 농기구나 보강재로 바꾼다.
실패한 전투 기록을 다음 요새 설계의 조건으로 바꾼다.
귀족의 사치 자산을 왕국 재건의 재원으로 바꾸려 한다.

소피아에게 변환은 단순한 물질 조작이 아니다.

세상에 붙은 패배의 이름을 미래의 이름으로 바꾸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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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신의 황금의 눈으로 직접 가치를 선언한다.

모두가 쓸모없다고 말할 때, 소피아는 말한다.

“아니. 아직 가치가 남아 있어.”

모두가 끝났다고 말할 때, 그녀는 말한다.

“끝이라는 정의는 아직 이르다.”

모두가 비용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말한다.

“이들은 비용이 아니라 왕국이 아직 잃지 않은 미래야.”

소피아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세계가 이것을 폐허라고 부른다면, 내가 다시 이름 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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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소피아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것을 재정의하고 변환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무너진 것을 다시 쓰게 한다.
패배를 설계 조건으로 바꾼다.
재건의 길을 연다.
절망 속에서도 쓸 수 있는 가치를 찾아낸다.
헝가리의 생존력을 높인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소피아는 슬픔을 너무 빨리 쓸모로 바꾸려 할 수 있다.
사람이 아직 울고 있는데, 그 상처가 앞으로 무엇에 도움이 될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다.
폐허가 무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왕국 재건의 이름으로 개인의 상처를 너무 빨리 공적 자원으로 변환하려 할 수 있다.

소피아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쓸모 없어도 존중받아야 하는 슬픔의 자리다.

벨라가 그녀에게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벨라는 왕국 전체를 권역으로 품는 재건 군주다.
소피아는 세계를 재정의하는 연금술사다.

벨라는 말할 수 있다.

“그 돌은 다시 성벽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무덤이다.”

소피아에게 필요한 성장은 이것이다.

모든 것을 미래의 재료로 만들기 전에, 현재의 상처로 인정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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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소피아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무엇이든 다시 정의할 수 있지만, 사람을 단순한 재료로 정의하지는 않겠다.”



이것이 소피아의 양심이다.

소피아는 사물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
폐허를 자재로, 실패를 설계도로, 부채를 투자로, 금속을 방패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피난민은 노동력이 아니다.
부상자는 재건 비용이 아니다.
전사자는 왕국 방어망의 대가만이 아니다.
상처 입은 아이는 미래 인구가 아니다.

그들이 왕국의 미래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각자의 삶을 가진 사람이다.

소피아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인간을 연금술적 재료로 환원하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선을 넘으면, 아주 유능한 재건자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재건은 사람이 아니라 기능을 위한 왕국이 된다.

그래서 소피아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폐허의 이름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을 재료로 바꾸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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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소피아는 무너진 헝가리의 세계를 다시 정의하고 변환해, 폐허를 미래로 바꾸려는 황금눈의 연금술사다.

그녀의 거짓말은 **“올바르게 정의하고 변환할 수 있다면, 어떤 상실도 쓸모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헝가리의 상실이 아무 의미 없는 폐허로 확정되지 않도록, 그것을 재건 가능한 미래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정의하고, 분해하고, 변환하고, 마지막에는 직접 가치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무엇이든 다시 정의할 수 있어도, 사람을 단순한 재료로 정의하지 않는 것이다.
1막 — 명령하는 왕과 피어나는 꽃들

— 어른들의 별을 지나며 —

별들은 가까이서 보면 생각보다 작았다.

요안나는 처음에 별이란 모두 자기 별보다 훨씬 클 거라고 생각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 별은 늘 반짝였고, 반짝이는 것은 대체로 넓고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로 내려앉은 별은, 요안나의 별보다 조금 클 뿐이었다.

둥근 무대판 하나.

그 위에는 작은 왕좌 하나.

왕좌 뒤에는 너무 커서 별보다 더 커 보이는 깃발 하나.

그리고 왕좌 위에는 민다우가스가 앉아 있었다.

그는 오늘 왕의 별의 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원래도 왕이었으므로 배역과 본인이 거의 겹쳐 보였다. 다만 오늘의 망토는 평소보다 조금 과장되어 있었다. 별 하나를 다스리기에는 지나치게 큰 검은 망토였고, 왕관도 조금 무거워 보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왕관이 너무 큰가?”

죠니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저 사람은 왕관보다 국가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망토 끝이 바닥에 끌립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망토 끝을 보다가, 무대 담당에게 눈짓했다.

망토 끝이 살짝 접혔다.

민다우가스는 그 모든 소동을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요안나가 별 위에 발을 디디자, 민다우가스는 낮게 말했다.

“왔군.”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민다우가스는 왕좌에 앉은 채 그녀를 보았다.

“작은 별의 방문자라 들었다.”

“네.”

“좋다. 그대는 지금 왕 앞에 있다.”

요안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저는 절해야 하나요?”

민다우가스는 웃었다.

“하하.”

웃음은 짧고 낮았다.

“절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상관없나요?”

“나는 절을 명할 수 있다. 하지만 절할 이유가 없는 자에게 절을 시키면, 남는 것은 허리 굽힌 몸뿐이다.”

그는 왕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굽은 허리가 아니라, 명령이 닿을 현실이다.”

요안나는 조금 어려운 얼굴이 되었다.

“왕은 뭐든 명령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민다우가스는 별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해가 걸려 있었다.

무대 장치로 만든 해였다.
그러나 지금은 별의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해에게 져라 명할 수는 있다.”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요?”

민다우가스는 다시 낮게 웃었다.

“해가 질 시간에 명하면 된다.”

요안나는 잠깐 생각했다.

“그건 명령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 아닌가요?”

“국가는 그 차이를 모르는 자에게 망한다.”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요안나는 웃지 못했다.

민다우가스의 말은 장난처럼 들렸지만, 어딘가 차가웠다.

“그럼 왕은 하고 싶은 대로 못 하나요?”

“할 수는 있다.”

민다우가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결과를 감당하지 못할 뿐이다.”

요안나는 자기 손에 들린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과 유리 덮개가 그려진 판.

“그럼 제가 제 장미에게 바람을 멈추라고 명령하면요?”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바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왕이 아니네요.”

“아니다.”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부는 것을 알고 덮개를 준비하는 자가 왕이다.”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민다우가스는 말을 이었다.

“왕의 명령은 세상을 움직이는 말이 아니다. 움직일 세상을 고르는 말이다. 해가 질 때 해에게 져라 명하고, 길이 닫힐 때 다른 길을 열라 명하며, 바람이 불 때 덮개를 씌우라 명한다.”

“그건…… 조금 시시해요.”

“그렇다.”

민다우가스는 아무렇지 않게 인정했다.

“통치는 대체로 시시한 일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요안나는 한참 동안 그 말을 생각했다.

그녀는 별을 둘러보았다.

왕좌는 컸지만, 별은 작았다.
명령은 높았지만, 해는 자기 시간에만 움직였다.

“그럼 왕은 무엇을 위해 무서워야 하나요?”

그 질문에, 민다우가스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그는 아이를 보는 눈이 아니라, 장차 무엇인가를 짊어질 사람을 보는 눈으로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왕이 무서워야 하는 것은 백성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왕이 자신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다.”

요안나는 숨을 멈춘 듯했다.

민다우가스는 왕좌에서 조금 몸을 기울였다.

“작은 방문자. 그대의 별에는 장미가 있다 했지.”

“네.”

“그 장미에게 명령할 수 있나?”

요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미는 명령을 잘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물을 너무 많이 준다고 말하고, 너무 적다고 말하고, 덮개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바람을 무서워할 것이다.

“잘 모르겠어요.”

“좋다.”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모르는 자는 아직 괜찮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장미가 명령 하나로 피고 시든다고 믿는 왕이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민다우가스는 해를 보았다.

그 작은 해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먼저 시간을 보아라.”

“시간?”

“물이 필요한 시간. 바람이 차가워지는 시간. 병든 잎을 잘라야 하는 시간.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야 하는 시간.”

그는 손을 들었다.

“해여, 져라.”

그 말과 동시에 해가 별 아래로 내려갔다.

요안나는 놀라서 해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담담히 말했다.

“보았나. 명령이 성공했다.”

요안나는 잠시 해를 보다가,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그건 해가 질 시간이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

민다우가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배웠군.”

요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웃음은 작았지만, 진짜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조용히 손뼉을 치려다가 멈췄다.

이번 극에서는 큰 박수보다 작은 미소가 더 어울렸다.

요안나가 별을 떠나려 하자, 민다우가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작은 별의 방문자.”

요안나는 돌아보았다.

“왕이 되고 싶다면, 먼저 명령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워라.”

“명령하지 못하는 것들이요?”

“그래.”

민다우가스는 왕좌에 앉아, 내려간 해의 빈자리를 보았다.

“그것들이 네 왕국의 모양을 정할 것이다.”

요안나는 그 말을 품에 안고, 다음 별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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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별은 이상하게 환했다.

별 위에는 꽃잎이 가득했다.

흰 꽃.

흰 천.

흰 계단.

흰 장식.

그리고 별의 중앙에는 스토얀카 아센이 서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허영심 많은 사람의 별을 맡았지만, 원전처럼 단순히 모자를 벗고 박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백화문주였다.

눈부실 만큼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이 어딘가 잘 벼린 칼처럼 차가웠다.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별의 표면에 흰 결이 생겼다. 그 결은 천 위에 그어진 선 같기도 했고, 손가락으로 누른 살갗 위의 자국 같기도 했다.

요안나는 별에 내려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예뻐요.”

스토얀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래.”

요안나는 곧바로 덧붙였다.

“그런데 조금 무서워요.”

스토얀카의 웃음이 깊어졌다.

“좋다. 제대로 보았구나.”

요안나는 당황했다.

“무서운 게 좋은 거예요?”

“두려움은 몸이 먼저 알아본다는 뜻이다.”

스토얀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가락이 꽃잎 사이를 가르자, 흰 꽃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꾸었다. 부드럽게 흔들린 것이 아니었다. 결을 잡아 세운 것처럼, 줄기가 하나씩 위로 치솟았다.

“보아라, 작은 방문자.”

스토얀카가 말했다.

“꽃이 피었다.”

흰 꽃잎들이 별 위로 휘몰아쳤다.

가지들은 자연스럽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손이 안쪽의 결을 찾아 끌어올린 것처럼 뻗었다. 가지 끝마다 흰 꽃이 피었고, 꽃마다 날카로운 빛이 맺혔다.

요안나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 꽃들은 왜 피어요?”

스토얀카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피지 않으면 꺾인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럼 피는 건 증명인가요?”

“그래.”

스토얀카의 목소리는 단정했다.

“꽃은 피어야 한다. 줄기를 세우고, 결을 따라 올라와, 자신이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야 한다.”

그녀는 손끝으로 흰 꽃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름다움은 부드러운 장식이 아니다. 살아남은 결이 드러나는 방식이지.”

요안나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그 장미도 자기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자기가 특별하다는 말을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장미는 이렇게까지 피어나서 세상에게 증명하고 싶어 했을까?

아니면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투덜댈 수 있는 한 사람을 기다렸던 걸까?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꽃은 꽃이 아니에요?”

스토얀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는 자가 없으면, 꽃의 피어남은 어디에 새겨지지?”

“향기에요?”

요안나가 답했다.

“아니면…… 물 준 사람의 손에?”

스토얀카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요안나는 당황해서 기록판을 꼭 안았다.

“제 장미는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특별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가끔은 그냥 제가 봐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세상 전체 말고요.”

스토얀카는 웃었다.

“작은 꽃의 작은 욕심이군.”

“작은가요?”

“세상에게 자신을 새기려는 꽃에 비하면.”

요안나는 흰 꽃들을 보았다.

많았다.

아름다웠다.

눈이 아플 만큼.

그런데 이상하게, 요안나는 자기 별의 장미가 더 잘 떠올랐다.

그 꽃은 이렇게 많지도 않았고, 이렇게 장엄하지도 않았다.
호랑이를 막겠다고 말하는 가시도 얇았다.

그런데 아침마다 물을 달라고 했다.

바람이 차갑다고 했다.

가끔 예쁘다고 말해달라고 했다.

요안나는 낮게 말했다.

“저는 작은 꽃이 조금 더 좋아요.”

스토얀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는?”

요안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스토얀카는 흰 꽃잎 속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모르는 채로 좋아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럴지도 몰라요.”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하지만 다 안 다음에만 좋아할 수 있다면, 너무 늦을 것 같아요.”

처음으로 스토얀카의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

그녀는 손을 내렸다.

흰 꽃잎들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말은 약하지만, 틀리지는 않았구나.”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스토얀카는 작은 장미가 있을 법한 먼 별을 보듯 고개를 돌렸다.

“약한 꽃도 핀다. 다만 스스로 약하다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 요안나를 보았다.

“가거라, 작은 방문자. 네 꽃이 정말 피었는지 보고 싶다면, 박수 소리를 찾지 마라.”

“그럼 뭘 찾아야 해요?”

스토얀카는 손끝에 남은 흰 꽃잎을 털었다.

“네가 돌아보았을 때,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지 보아라.”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기억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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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별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별 위에는 책장이 있었다.

기록판들이 있었다.

작은 별빛들이 유리병 안에 들어 있었다.

그 유리병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계세요?”

책장 뒤에서 알토가 나왔다.

오늘의 그는 원전의 사업가처럼 별을 세는 자였지만, 손에 든 것은 돈주머니가 아니라 기록장과 펜이었다.

그는 요안나를 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방문자군요. 안녕하세요.”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알토는 기록장을 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펜을 멈추었다.

“기록 중이었습니다. 방해는 아닙니다.”

푸리나가 무대 뒤에서 속삭였다.

“알토가 부드러워졌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기록장 닫지 않은 걸 보면 완전히 부드러워진 건 아닌데.”

요안나는 유리병 속 별빛들을 보았다.

“이 별들은 다 뭐예요?”

“기록된 별들입니다.”

“당신 거예요?”

알토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아니에요.”

요안나는 조금 놀랐다.

“아니에요? 세고 있으면 당신 것이 되는 줄 알았어요.”

“기록한다고 소유하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알토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기록은 붙잡는 일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붙잡는 것과 가지는 것은 다릅니다.”

요안나는 유리병 하나를 보았다.

병 안의 별빛은 아주 작았다.

“그럼 왜 기록해요?”

“잊히지 않게 하려고요.”

알토는 조금 생각하고 덧붙였다.

“물론 전부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적지 않으면, 사라지는 쪽이 너무 쉽게 이깁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잊히면 안 돼요?”

알토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병 속 작은 별빛을 보았다.

“대부분의 것은 언젠가 잊힙니다. 그래도 어떤 것들은 조금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게 기록이에요?”

“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요안나는 자기 장미를 떠올렸다.

그 장미가 했던 말들.

아침 인사가 늦었다는 말.
나비는 보고 싶다는 말.
가시는 호랑이를 막을 수 있다는 말.
가도 좋다는 말.
울지 않는다는 말.

그것들을 기록할 수 있을까?

기록한다면 장미를 더 잘 알게 될까?

아니면 기록장에 적는 순간, 장미의 투덜거림은 그냥 문장이 되어버릴까?

요안나는 물었다.

“기록하면, 그걸 이해하게 돼요?”

알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기록한다고 바로 이해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요?”

“다시 돌아갈 이유를 잃지 않게 해줍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알토는 그녀의 기록판을 보았다.

상자 속 양과 유리 덮개.

“그 판에는 무엇을 그렸나요?”

“양이요.”

“보이지 않네요.”

“상자 안에 있어요.”

알토는 잠시 상자를 보았다.

그러더니 아주 조금 미소 지었다.

“좋은 기록이네요.”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존하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알토는 잠시 멈추었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다만 조심해야 합니다. 상자에 넣은 것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꺼내 돌보아야 해요.”

그 말에 요안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알토는 작은 빈 이름표 하나를 건넸다.

“필요하면 쓰세요.”

“뭘요?”

“잊고 싶지 않은 것.”

요안나는 이름표를 받았다.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아직은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랐다.

알토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말했다.

“아직 쓰지 못했다는 것도, 기록이 될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알토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어떤 이름은 빨리 적으면 오히려 납작해지니까요.”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싫지는 않아요.”

알토의 펜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는 기록장 한쪽에 작게 적었다.

작은 방문자. ‘싫지는 않아요’라고 함.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아주 작게 웃었다.

요안나는 그걸 보고 말했다.

“그것도 기록해요?”

알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좋은 평가는 보존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 말에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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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별은 가장 작았다.

하지만 가장 바빴다.

그 별에는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벨라가 서 있었다.

등불을 켠다.

끈다.

켠다.

끈다.

다시 켠다.

다시 끈다.

별이 너무 작고 자전이 너무 빨라서, 밤과 낮이 금세 바뀌었다. 벨라는 거의 쉬지 않고 등불을 돌보아야 했다.

요안나는 한참 그것을 보다가 물었다.

“힘들지 않아요?”

벨라는 등불의 유리를 닦았다.

“힘들단다.”

“그런데 왜 계속해요?”

“밤이 오기 때문이란다.”

벨라는 등불에 불을 붙였다.

작은 불빛이 별의 가장자리를 밝혔다.

“그리고 밤은, 기다려주지 않거든.”

요안나는 등불을 보았다.

작은 불이었다.

나라를 밝힐 만큼 큰 불도 아니고, 전쟁을 막을 불도 아니었다.

하지만 별이 어두워질 때마다 그 불은 분명히 필요했다.

벨라는 등불을 다시 껐다.

“낮이 오면 불을 끈다. 그리고 그을음을 닦고, 기름을 채우고, 유리를 살핀단다.”

“쉴 시간은요?”

벨라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왕의 눈이었지만, 동시에 아이의 이마에 열이 있는지 살피는 어머니의 눈이기도 했다.

“가끔 있단다. 아주 조금.”

요안나는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벨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라가 한 번 무너진 뒤에는, 힘들다는 말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한단다.”

그녀는 다시 등불을 켰다.

“큰 성벽은 늦게 세워도 된다. 하지만 밤의 등불은 오늘 켜야 해.”

“왜요?”

“돌아온 사람이 첫날 밤에 어둠만 보면, 그곳을 집이라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집……”

벨라는 그 말에 요안나를 보았다.

“춥니?”

“아니요.”

“무섭니?”

요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벨라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자기 망토 끝을 조금 펴, 요안나가 앉은 자리의 차가운 별바닥을 덮어주었다.

“왕관을 쓴 아이도 밤에는 춥단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이가 아닌데요.”

벨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더 조심해야겠구나.”

“왜요?”

“어른인 척하는 아이는, 추워도 춥다고 말하지 못할 때가 많단다.”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벨라는 등불의 유리를 닦았다.

“네 별에도 장미가 있다고 들었다.”

“네.”

“밤에는 덮개를 씌워주니?”

요안나는 손에 든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 옆에 그려진 작은 유리 덮개.

“씌워주려고 했어요.”

“그렇구나.”

벨라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두고 왔어요.”

“알고 있단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벨라는 등불을 낮게 조정했다.

“두고 온 것을 생각하는 얼굴은 비슷하거든.”

요안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벨라는 조용히 말했다.

“네 장미가 밤을 무서워한다면, 낮에 사랑한다고 말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밤에 다시 가야지.”

“매일요?”

“매일.”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꼭 잡았다.

벨라는 조금 더 부드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매일 완벽할 필요는 없다. 늦었다면 사과하고, 물을 주고, 덮개를 씌우면 된단다. 아이도, 꽃도, 나라도 그렇게 다시 세운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등불이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졌다.

그 반복은 조금 지루했다.

하지만 이제 요안나는 그 지루함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쩌면 매일 같은 시간에 불을 켜는 일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가장 오래된 방법인지도 몰랐다.

벨라는 등불을 다시 켰다.

“이제 가렴.”

“벌써요?”

“다음 밤이 곧 온단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벨라는 손을 뻗어 요안나의 망토 끝에 묻은 별먼지를 살짝 털어주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면, 불이 꺼지기 전에 가렴.”

요안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 별로 건너가는 동안, 그녀는 계속 뒤돌아보았다.

작은 등불이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어쩐지 그 반복이, 먼 별에서 누군가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

다섯 번째 별은 지도와 서류 냄새가 났다.

별의 바닥에는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산맥, 강, 도시, 무너진 성벽, 사라진 길, 다시 그려진 국경.

그 지도들 사이에 슈샤니크 파흘라부니가 앉아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지리학자였다.

그러나 원전의 지리학자처럼 단순히 책상 앞에서 탐험가의 보고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지도에는 지워진 선이 많았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많았다.

그리고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빈 곳도 많았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슈샤니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문자군요.”

그 목소리는 예의 바르고 조용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를 조금 낮추는 힘이 있었다.

“어디에서 왔습니까?”

요안나는 작은 별을 가리키려다가 멈췄다.

여기에는 하늘이 없었다.

지도뿐이었다.

“아주 작은 별에서요.”

슈샤니크는 펜을 들었다.

“기록하겠습니다. 아주 작은 별.”

요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 별에는 화산 세 개와 바오밥나무와 장미가 있어요.”

“장미.”

슈샤니크의 펜이 잠깐 멈췄다.

“꽃은 지도에 오래 남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마음이 조금 내려앉았다.

“왜요?”

“계절이 지나면 사라지고, 바람에 꺾이고, 누군가 옮겨 심고, 혹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꼭 잡았다.

“그럼 지도가 틀린 거 아닌가요?”

슈샤니크는 그녀를 보았다.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아주 옅게 말했다.

“아마도.”

요안나는 그 대답이 뜻밖이라 눈을 깜박였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빈 곳을 손끝으로 짚었다.

“지도는 오래 남는 것을 좋아합니다. 산맥, 강, 성벽, 도로, 세금이 걷히는 마을, 군대가 지나갈 수 있는 평야.”

그녀의 손이 조금 멈췄다.

“그러나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 것은 때때로 지도에 남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작게 물었다.

“예를 들면요?”

슈샤니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아주 먼 곳을 보는 듯했다.

“문 앞에 심은 나무. 여름 저녁에 앉던 돌계단. 다시 돌아가면 아직 있을 거라 믿었던 포도밭. 그리고…… 누군가가 매일 물을 주던 꽃.”

요안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슈샤니크는 펜을 들었다.

“당신의 장미는 덧없는 것입니까?”

“덧없는 게 뭐예요?”

“오래 남지 않는 것.”

요안나는 장미를 떠올렸다.

가시가 얇고, 말이 많고, 바람을 무서워하고, 자기가 울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던 꽃.

“아마도요.”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왜요?”

“오래 남는 것은 싫어도 남습니다. 그러나 덧없는 것은, 돌보지 않으면 사라진 뒤에야 자리가 보입니다.”

요안나는 빈 이름표를 꺼냈다.

알토가 준 것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은 이름표.

그녀는 그것을 한참 보았다.

슈샤니크는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지도 한쪽의 아주 작은 빈칸을 열어두었다.

“이곳에 적을 수도 있습니다.”

요안나는 물었다.

“지도에 꽃을 적어도 돼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됩니다.”

요안나는 빈 이름표에 적었다.

장미.

글씨는 조금 작고, 조금 비뚤었다.

슈샤니크는 그것을 받아 지도 가장자리에 붙였다.

산맥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곳.

지도라면 원래 비워두었을 여백.

그곳에 작은 이름표 하나가 붙었다.

요안나는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잊히지 않을까요?”

슈샤니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기록은 망각을 완전히 이기지 못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슈샤니크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망각이 너무 쉽게 이기지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 말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의지가 있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슈샤니크는 요안나를 보았다.

“아직 어린 별의 방문자군요.”

“네?”

“전부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아직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슈샤니크가 아주 조금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떠나기 전, 요안나는 물었다.

“당신은 왜 직접 보러 가지 않나요?”

슈샤니크의 펜이 멈췄다.

지도 위의 모든 선이 잠시 숨을 멈춘 것 같았다.

“보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지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별로 건너갔다.


---

별들의 여행은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요안나의 마음은 처음보다 더 복잡해졌다.

왕은 명령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우라 했다.

꽃의 별에서는 피어남이 무엇인지 물었다.

기록자의 별에서는 상자에 넣은 것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꺼내 돌봐야 한다고 했다.

점등인은 늦었다면 사과하고, 물을 주고, 덮개를 씌우면 된다고 했다.

지리학자는 덧없는 것은 사라진 뒤에야 자리가 보인다고 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보았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그리고 이제 지도 여백에 붙은 이름표를 떠올렸다.

장미.

그녀는 작게 말했다.

“나는 왜 떠난 걸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무대의 별빛이 천천히 낮아졌다.

그리고 별들의 무대 아래, 낯선 푸른빛이 떠올랐다.

지구였다.

넓고, 시끄럽고, 너무 많은 것들이 있는 별.

요안나는 그곳으로 내려갔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작은 방문자는 여러 별을 지났습니다. 왕과 꽃과 기록과 등불과 지도를 보았습니다.”

잠시 침묵.

“하지만 아직, 자기 장미가 왜 자기 장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2막 — 장미 정원과 여우의 시간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붙었다.

— 세상에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날 —

요안나는 그 글씨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겁먹은 듯 말했다.

“하나뿐이…… 아니야?”

멀리서 수많은 장미의 붉은빛이 천천히 켜졌다.
2막 — 장미 정원과 여우의 시간

— 세상에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날 —

지구는 너무 컸다.

요안나는 처음 그 별에 내려섰을 때, 자신이 잘못 내려온 줄 알았다.

작은 별들은 둥근 무대판 하나면 충분했다. 왕의 별도, 꽃의 별도, 기록자의 별도, 점등인의 별도, 지리학자의 별도 모두 어딘가 끝이 보였다. 조금만 걸으면 별의 가장자리에 닿았고, 고개를 돌리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는 달랐다.

무대가 넓어졌다.

사막은 한쪽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언덕과 길과 숲과 강이 동시에 나타났다. 먼 곳에는 도시의 불빛이 있었고, 가까운 곳에는 풀잎이 있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만 불지 않았고, 소리도 너무 많았다.

새 소리.

사람 소리.

수레바퀴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이름을 모를 수많은 생명들이 내는 작은 소리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천천히 걸었다.

상자 속 양.

작은 유리 덮개.

빈 이름표에 적어 지도 여백에 붙였던 이름.

장미.

그녀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가시가 얇고, 말이 많고,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던 꽃.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그 앞에는 장미 정원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도 아니었다.

언덕 아래로 수많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붉은 장미.

분홍 장미.

흰 장미.

아직 덜 핀 장미.

이미 활짝 핀 장미.

바람에 흔들리는 장미들.

햇빛 아래에서 아무렇지 않게 반짝이는 장미들.

요안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대 뒤편에서 푸리나도 숨을 삼켰다.

장미 정원은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은, 요안나에게는 조금 잔인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하나뿐이 아니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장미들은 그저 피어 있었다.

자기 별의 장미처럼 까다로운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가시로 호랑이를 막겠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많았다.

너무 많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더 꼭 끌어안았다.

“내 장미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정원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모두 아름다웠다.

그 사실이 요안나를 더 아프게 했다.

만약 자기 별의 장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지 않다면.

만약 비슷한 꽃이 이렇게 많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두고 온 장미는 무엇이었을까.

자기가 매일 물을 주고, 덮개를 씌우려 했고, 투덜거림을 듣다가 도망치듯 떠나온 그 꽃은.

그저 장미들 중 하나였을까.

요안나는 풀밭에 앉았다.

기록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 속 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미하일라가 그려준 유리 덮개가 있었다.

요안나는 손끝으로 그 덮개를 문질렀다.

“그럼 내가 돌아가야 할 이유는 뭐지.”

그 말은 장미들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다.

장미 정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풀숲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바스락.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풀숲 사이에서 레플리카가 나타났다.

오늘의 레플리카는 여우였다.

정확히는 여우 가면을 쓴 사람은 아니었다. 검은빛과 어두운 붉은빛이 섞인 짧은 망토, 가볍게 묶은 머리, 그리고 작은 귀 모양 장식이 달린 후드.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우처럼 조심스럽고, 동시에 이상할 만큼 곧았다.

그녀는 정원 가장자리에서 멈추었다.

요안나는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레플리카는 조금 딱딱하게 대답했다.

“여우다.”

그 말투는 너무 진지해서,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요안나도 잠깐 눈을 깜박였다.

“정말 여우예요?”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렇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레플리카가 여우라고 진지하게 말했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정도로 진지하면 여우도 맞다고 해줘야지.”

레플리카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장미 정원을 보았다.

“울고 있었나?”

요안나는 얼른 눈가를 닦았다.

“안 울었어요.”

레플리카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울기 직전이었군.”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요안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지 않는 거리.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는 거리.

요안나는 그게 이상했다.

“왜 거기에 앉아요?”

“아직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길들여져요?”

요안나는 그 말을 따라 했다.

“그게 뭐예요?”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냥 익숙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어떻게 달라요?”

“서로의 아픔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배우는 일이다.”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어디를 밟으면 아픈지 모른다.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도 모른다. 언제 가까이 가야 하는지,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길들인다는 건, 그런 것을 배우는 일이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그럼 장미도 길들일 수 있어요?”

“아마도.”

“하지만 장미는 사람이 아닌데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니어도, 기다리는 것은 있다.”

그 말에 요안나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던 장미.

밤에 덮개를 씌워달라고 하던 장미.

가라고 말하면서, 울음을 들키기 싫다고 하던 장미.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장미를 길들였던 걸까요?”

레플리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매일 물을 주었나?”

“네.”

“바람이 불면 덮개를 씌우려 했나?”

“네.”

“투덜거림을 들었나?”

“조금은요.”

“귀찮았나?”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작은 했겠지.”

“시작?”

“길들임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이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의 수많은 꽃들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장미가 이렇게 많아요.”

“그렇다.”

“내 장미는 하나뿐이 아니었어요.”

레플리카는 장미들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곳의 장미들은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

요안나는 숨을 멈췄다.

레플리카는 계속 말했다.

“너도 이 장미들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 유리 덮개를 씌우지도 않았고, 바람이 차가운지 묻지도 않았다. 이 장미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강한 척하는지, 나비를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레플리카의 목소리는 딱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갈 길이 없었다.

“그러니 이 장미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네 장미는 아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럼 내 장미는…… 특별한가요?”

레플리카는 요안나를 보았다.

“네가 시간을 썼다면.”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다.

“특별하다는 건,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세상에 비슷한 것이 많아도, 네가 시간을 준 것은 달라진다.”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통도 그렇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많다. 하지만 네가 옆에 앉아준 아픔은, 그저 많은 아픔 중 하나로만 남지 않는다.”

요안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그녀의 말은 이상했다.

차분하고, 조금 무겁고,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럼 길들인다는 건 책임지는 거예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요안나는 조금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무서운 말이네요.”

“맞다.”

레플리카는 바로 인정했다.

“책임은 가볍지 않다. 하지만 책임이 있다는 건, 네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장미가 바람에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움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중 어느 장미도 요안나가 늦게 일어나면 투덜거리지 않았다.

어느 장미도 요안나가 덮개를 씌워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어느 장미도 요안나에게 “가도 좋아요”라고 말하며 꽃잎을 떨지 않았다.

요안나는 눈을 감았다.

자기 별의 장미가 떠올랐다.

가시가 얇은 장미.

자존심이 강한 장미.

울지 않는다고 말했던 장미.

“나는 그 장미를 두고 왔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런데 돌아가기가 무서워요.”

“왜?”

요안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요.”

레플리카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꼭 쥐었다.

“떠날 때는 몰랐어요. 그냥 장미가 나를 귀찮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다른 말을 하고, 강한 척하고, 필요 없다고 하면서 필요해 보이고…….”

“그랬군.”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아요.”

요안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장미가 나를 기다렸을지도 몰라요.”

레플리카는 말없이 기다렸다.

요안나는 그 침묵 덕분에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럼 나는 나쁜 사람인가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잘못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잘못을 알게 된 사람이 전부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레플리카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돌아가려는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레플리카는 풀밭 위에 손을 올렸다.

“내일 다시 오겠나?”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일요?”

“그래. 같은 시간에.”

“왜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기다림이 너무 아프지 않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하루 종일 놀라야 한다. 네가 같은 시간에 오면, 나는 그 시간 전부터 조금씩 기뻐할 수 있다.”

요안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게 길들임이에요?”

“그 일부다.”

“기다리게 만드는 건 나쁜 거 아니에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프다. 하지만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요안나를 보았다.

“기다림이 있다는 건, 누군가 온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요안나는 벨라의 등불을 떠올렸다.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졌다.

돌아올 사람을 위해 불을 켜던 작은 별.

“그럼 내 장미도…… 기다렸을까요?”

레플리카는 답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돌아가서 물어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면 화낼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울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나를 못 본 척할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그럼 너무 아플 것 같아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플 것이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아니었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그래도 네가 물을 주었다면, 돌아가야 한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빈 이름표에 적은 장미.

이제 그것들은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할 곳.

하지만 아직 가기에는 두려운 곳.

요안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잘 알아요?”

레플리카는 잠시 조용했다.

그녀는 자기 검은 망토 끝을 만졌다.

“나는 아픈 것을 배웠다.”

그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이 있었다.

요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장미들에게 가서 말해라.”

“무슨 말을요?”

“너희는 아름답지만, 내 장미는 아니라고.”

요안나는 당황했다.

“그렇게 말하면 장미들이 상처받지 않을까요?”

레플리카는 조금 생각했다.

“아마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는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조금 슬프네요.”

“그래.”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네가 시간을 준 것을 더 조심해야 한다.”

요안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장미 정원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사실은 바라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안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아름다워요.”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하지만 당신들은 제 장미가 아니에요.”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름다운 것이 덜 아름다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장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요안나는 다시 레플리카 쪽으로 돌아왔다.

“말했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런데 아직도 무서워요.”

“무서워도 된다.”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충분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올게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조금 전부터 기다리겠다.”


---

다음 날이 왔다.

물론 무대 위의 다음 날이었다.

조명이 한 번 어두워졌다가 밝아졌고, 장미 정원 위로 아침빛이 내려왔다.

요안나는 같은 시간에 왔다.

레플리카는 풀숲 옆에 앉아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가까운 곳이었다.

“왔군.”

“네.”

“늦지 않았다.”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레플리카는 풀잎을 만졌다.

조금 뒤에 요안나가 말했다.

“오늘은 장미가 덜 아파 보여요.”

“이곳의 장미들?”

“아니요. 제 장미요.”

“여기 없는데도?”

요안나는 기록판을 보았다.

“조금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어떤 것은 멀리서야 보인다.”

“하지만 너무 멀면 잊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도 왔다.

그다음 날도.

매번 레플리카는 조금씩 가까운 곳에 앉았다.

요안나는 처음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다음에는 조금 덜 했다.

어느 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레플리카는 말했다.

“오늘은 조용하군.”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서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것도 길들임이다.”

그 말에 요안나는 가만히 웃었다.


---

그리고 마지막 날이 왔다.

레플리카는 그날, 평소보다 조금 늦게 말을 꺼냈다.

“이제 가야겠군.”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은 네가 계속 하늘을 보고 있다.”

요안나는 작은 별이 있을 법한 하늘을 보았다.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자기 별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별인지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다.”

“그런데도 돌아가야 하나요?”

“네 장미는 어느 별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당신은 외롭지 않을까요?”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외로울 것이다.”

요안나는 마음이 아파졌다.

“그럼 제가 길들이지 않는 게 나았을까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면 아프잖아요.”

“그렇다.”

“그런데 왜요?”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밀밭이 생기니까.”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밀밭이요?”

레플리카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금빛 들판을 가리켰다.

장미 정원 너머에, 어느새 작은 밀밭이 생겨 있었다. 푸리나의 무대 장치인지, 레플리카의 말에 맞춰 피어난 풍경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빵을 먹지 않는다. 밀밭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하지만 네 머리카락은 별빛이 섞인 금빛이다. 네가 떠나면, 밀밭을 볼 때 네가 생각나겠지.”

요안나는 금빛 밀밭을 보았다.

“그럼 밀밭이 슬퍼져요?”

“아니.”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따뜻해진다. 그리고 조금 아파진다. 둘 다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별은 이상해요.”

“그렇다.”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둘 다다.”

레플리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길들였다는 증거는, 헤어질 때 아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 때문에, 이전에는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이 빛나기도 한다.”

요안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작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원망하지 않아요?”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은 할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했다.

“하지만 원망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왜요?”

“네가 같은 시간에 왔으니까.”

요안나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레플리카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난처해했다.

“울어도 된다.”

“안 울어요.”

“울기 직전이군.”

요안나는 결국 조금 웃었다.

레플리카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요안나에게 말했다.

“비밀을 하나 주겠다.”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비밀이요?”

“그래.”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과 밀밭, 그리고 멀리 보이지 않는 작은 별을 차례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요안나는 조용히 들었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요안나의 기록판을 가리켰다.

“네가 시간을 쓴 것. 네가 물을 준 것. 네가 기다리게 한 것. 네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무겁게 만든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었다.

유리 덮개는 그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필요했다.

장미는 여기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선명했다.

“제가 책임져야 하는 거죠.”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아주 천천히 따라 했다.

“내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

그 말은 무거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요안나는 그 무게 때문에 조금 덜 흔들렸다.

무게가 있다는 것은, 붙잡을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플리카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가라.”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못 가요.”

“왜?”

“돌아가는 길을 몰라요.”

그 말에 레플리카는 하늘을 보았다.

지구의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모래빛 길 하나가 생겼다.

사막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을 알려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누가요?”

레플리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뱀.”

요안나는 조금 겁먹었다.

“뱀이요?”

“무서운 이름이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든 무서운 것이 너를 해치러 오는 것은 아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만 혼자 가려고 하지 마라. 어떤 문턱은, 곁에 서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요안나는 레플리카에게 다가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다.

“안아도 돼요?”

레플리카는 굳었다.

무대 위가 잠깐 조용해졌다.

레플리카는 고통교의 전사이고, 흑진과 흑완의 소유자이며, 전장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포옹 요청 앞에서는, 잠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조심해서.”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안았다.

짧은 포옹이었다.

레플리카의 손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가, 아주 어색하게 요안나의 등을 토닥였다.

“무리하지 마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곧 조금 당황한 듯 덧붙였다.

“아니, 이 말은 너무 자주 하는군.”

요안나가 품 안에서 작게 웃었다.

레플리카는 다시 말했다.

“돌아가거라. 네가 가야 할 곳이 있다.”

그 말은 조금 단단했고, 조금 따뜻했다.

요안나는 물러섰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고마워요.”

“기억해라.”

“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같은 시간에 돌아가라.”

“왜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장미도 기다릴 수 있게.”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막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걸었다.

장미 정원은 뒤에 남았다.

수많은 장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요안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미가 많다고 해서, 자기 장미에게 물을 주었던 시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밀밭이 금빛으로 흔들렸다.

레플리카는 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이제 밀밭은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 아니었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작은 방문자는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그래서, 자기 장미가 왜 자기 장미인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사막의 뱀과 침묵의 식탁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었다.

— 돌아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문턱 —

요안나는 사막길 앞에서 멈추었다.

멀리, 모래 위에 검은 숄을 두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은 식탁보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3막 — 사막의 뱀과 침묵의 식탁

— 돌아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문턱 —

사막은 다시 조용했다.

하지만 처음의 사막과는 달랐다.

처음의 사막은 넓고, 낯설고,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 곳이었다.
지금의 사막은 어쩐지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곳처럼 보였다.

모래빛 천 위로 낮은 바람이 흘렀다.
무대 위의 별들은 멀어졌고, 장미 정원의 붉은빛도 사라졌다. 대신 모래 위에 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요안나는 그 길 끝에 서 있었다.

손에는 기록판이 있었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그리고 알토가 준 이름표에는 이제 작게 쓴 글자가 남아 있었다.

장미.

요안나는 그 글자를 보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별은 너무 많았다.

자기 별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그 말에 대답하듯, 모래 위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누군가 걸어왔다.

검은 숄을 두른 여인이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오늘의 그녀는 뱀이었다.

그러나 뱀의 가면도, 비늘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검은 실처럼 낮은 침묵을 끌고 왔다. 숄 끝이 모래 위를 스쳤고, 그녀의 발걸음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요안나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모래 위에 작은 식탁보를 펼쳤다.

물 한 잔.

빵 한 조각.

빈 접시 하나.

그것뿐이었다.

요안나는 그것을 한참 보다가 물었다.

“당신이…… 뱀이에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렇단다.”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흘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뱀이 식탁보를 깔았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뱀은 물기 전에 식사부터 챙겨줄 것 같은데.”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문턱 앞에서는 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네.”

요안나는 식탁보와 아레를 번갈아 보았다.

“뱀은 원래 이렇게 하나요?”

“아니.”

아레는 물잔을 요안나 쪽으로 조금 밀었다.

“나는 전장 뒤에 식탁을 놓는 쪽이란다.”

요안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식탁보 위의 물잔을 보니, 아주 조금 목이 말라졌다.

아레는 앉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식탁보 옆에 무릎을 낮추고 앉았다.
요안나가 앉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이.
앉고 싶어지면, 자리가 있다는 듯이.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식탁보 앞에 앉았다.

“이 물을 마시면 돌아가게 되나요?”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목이 덜 마른다.”

이번에는 객석에서 조금 더 선명한 웃음이 났다.

요안나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러고 나서 물잔을 들었다.

물은 차갑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목을 지나갈 만큼의 물이었다.

요안나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아레가 물었다.

“무서우냐.”

요안나는 손에 든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네.”

“좋다.”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아직 붙잡은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레는 빵을 건드리지 않았다.

빈 접시도 그대로 두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요안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

멀리서 미하일라가 걸어왔다.

부러진 청동 매 옆에 남아 있던 황제.

그녀는 사막길 위의 검은 숄과 식탁보, 그리고 요안나 앞의 물잔을 보았다.

미하일라의 눈빛이 낮아졌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러 왔지.”

“혼자 보내지 않으러 왔다.”

미하일라의 손이 허리 쪽으로 갔다.

오늘 그곳에는 활이 없었다.

아레는 그 손을 보았다.

“황제여.”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 문은 쏘는 곳이 아니다.”

미하일라는 아레를 바라보았다.

“그럼 무엇으로 지키지.”

아레는 식탁보 위의 빈 접시를 보았다.

“침묵으로.”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기다림으로.”

사막이 더 조용해졌다.

요안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숨을 삼켰다.

미하일라는 아레의 식탁보 앞에 서 있었다.
아레는 자리를 내어주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

전장의 지휘관이, 후퇴로의 끝에 서 있듯이.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요안나는 돌아가야 한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그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어서 하는 일은 적다.”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아레는 담담히 말했다.

“보내는 일도 그렇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에는 전장의 침묵과 다른 무게가 있었다.

명령하면 움직이는 병사들.
쏘면 쓰러지는 적들.
막으면 지킬 수 있는 문들.

하지만 이 문턱은 달랐다.

아레는 짧게 말했다.

“지키는 것과 붙드는 것은 다르다.”

미하일라는 물잔을 보았다.

아레가 미하일라 쪽으로도 물잔 하나를 밀었다.

“짐에게도 주는가.”

“목마르면 마시십시오.”

“짐은 목마르지 않다.”

아레는 물잔을 거두지 않았다.

“그럼 두겠습니다.”

미하일라는 한참 동안 물잔을 보았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들었다.

마시지는 않았다.

다만 손에 쥐었다.


---

요안나는 두 사람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아요.”

아레가 요안나를 보았다.

“그래.”

“그런데 돌아가기가 싫어요.”

“그래.”

“장미가 화낼지도 몰라요.”

“그럴 것이다.”

“못 본 척할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늦었다고 할 거예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그 말은 들어야 한다.”

요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다음엔요?”

아레는 짧게 말했다.

“물을 주거라.”

요안나는 기록판을 꼭 안았다.

“그걸로 충분해요?”

“충분하지 않다.”

아레는 담담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 명령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차갑지는 않았다.

아레는 요안나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늦었다는 말을 듣는다.

물을 준다.

덮개를 씌운다.

다음날 다시 간다.

요안나는 작게 물었다.

“사과하면 되나요?”

아레는 빈 접시를 보았다.

“사과만으로는 빈 접시가 차지 않는다.”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한다.”

“그다음은요?”

“앉아라.”

“어디에요?”

“네가 비워둔 자리 앞에.”

사막 바람이 지나갔다.

그 말은 요안나에게 아주 무겁게 내려앉았다.


---

미하일라가 입을 열었다.

“아레.”

아레는 고개를 들었다.

“황제여.”

“그 아이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럼 남는다.”

“그걸 허락한다는 뜻인가.”

아레는 미하일라를 바라보았다.

“억지로 간 아이는 돌아간 것이 아니다.”

미하일라는 물잔을 손에 쥔 채 침묵했다.

아레는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남으면, 남겨둔 꽃은 바람을 맞는다.”

요안나는 눈을 감았다.

작은 별이 떠올랐다.

화산 세 개.
바오밥나무 싹.
해 지는 자리.
그리고 장미.

유리 덮개 옆에 서 있던 장미.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꽃잎을 떨던 장미.

“장미가 혼자 있겠죠.”

요안나가 말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늦었죠.”

“그래.”

“그럼…… 가야겠죠.”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요안나를 보았다.

작고, 왕관은 없지만 왕관의 무게를 아는 아이.

평화를 말하지만, 아직 한 송이 꽃 앞에서 떨고 있는 아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네가 말해야 한다.”

요안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가고 싶어요.”

미하일라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요안나.”

“네.”

“무섭나.”

“네.”

“그래도 가나.”

요안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하일라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명령은 짧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마침내 미하일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가라.”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도망치듯 가지 마라. 네가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가라.”

“네.”

미하일라는 물잔을 아주 조금 마셨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장미가 화를 내면, 들어라.”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폐하도 그렇게 하세요?”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흘렀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입을 가렸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질문은 꽤 정확했네.”

미하일라는 마침내 말했다.

“짐도 배워야 할 일이 있다.”

그 말은 작았다.

하지만 요안나는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은, 등불 같았다.

벨라의 작은 별에서 보았던,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지는 불빛처럼.


---

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식탁보를 접지 않았다.

물잔도, 빵도, 빈 접시도 그대로 두었다.

요안나는 물었다.

“왜 치우지 않아요?”

“아직 문턱이다.”

“누가 더 앉아요?”

아레는 사막의 먼 곳을 보았다.

“떠나는 자. 남는 자. 늦게 따라오는 자.”

잠시 침묵.

“말을 잃은 자.”

요안나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식탁보가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이 조금 안심되었다.

아레는 검은 숄 끝을 손에 감았다.

그러자 숄에서 가느다란 검은 리본 하나가 풀려나왔다.

리본은 모래 위로 길게 뻗었다.

뱀처럼.

하지만 꿈틀대지는 않았다.

그것은 선이었다.

여기와 저기.

남음과 돌아감.

침묵과 말.

그 사이에 놓인 검은 선.

아레가 말했다.

“넘어라.”

요안나는 리본을 보았다.

“넘으면 아파요?”

“아프다.”

“그럼 싫어요.”

“그래도 된다.”

요안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안 넘으면요?”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작은 별의 바람 소리를 데려왔다.

장미가 혼자 서 있는 소리.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장미가 기다리고 있겠죠.”

“그래.”

“화났겠죠.”

“그래.”

“울었을까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돌아가서 물어라.”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본 앞에 섰다.

발끝이 멈췄다.

아레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곁에 섰다.

말없이.

흔들림 없이.

요안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레는 밀어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

끌고 가러 온 것도 아니었다.

넘는 것은 요안나의 일이었다.

다만, 혼자 넘지 않게 서 있었다.

요안나는 발을 들었다.

그리고 검은 리본을 넘었다.


---

사막의 조명이 꺼졌다.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작은 별 하나만 남았다.

요안나의 몸은 무대 위에 그대로 있었지만, 이상하게 가벼워 보였다. 마치 모래 위에 놓인 옷처럼. 또는, 잠시 벗어둔 그림자처럼.

객석에서 숨소리가 낮아졌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손을 꼭 쥐었다.

아레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숨을 쉬어라.”

요안나의 목소리가 멀리서 대답했다.

“이상해요.”

“그래.”

“아파요.”

“그래.”

“무서워요.”

“그래.”

“그래도…… 가야 해요.”

아레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제 아레가 해줄 필요가 없었다.

작은 별이 조금 더 밝아졌다.

요안나는 그 빛을 향해 걸었다.

모래는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작은 별의 표면이 나타났다.

화산 세 개.

바오밥나무 싹.

그리고 장미가 있던 자리.

요안나는 걸음을 멈췄다.

장미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꼿꼿하게.

꽃잎을 조금 접은 채.

울지 않는다고 말할 준비가 된 것처럼.

요안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더 다가갔다.

장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네요.”

그 한마디에, 요안나는 거의 울 뻔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기록판을 내려놓았다.

물뿌리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미안해.”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이어 말했다.

“바람이 불었지.”

장미의 꽃잎이 아주 조금 떨렸다.

“별일은 아니었어요.”

“그래.”

요안나는 유리 덮개를 들었다.

“그래도 오늘 밤에는 씌워줄게.”

장미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너무 늦게 씌우면, 꽃잎에 닿아요.”

요안나는 눈물을 삼키며 웃었다.

“응. 조심할게.”

장미는 다시 말했다.

“물은 너무 많이 주지 마세요.”

“응.”

“그리고…….”

요안나는 기다렸다.

장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침 인사는 내일 제때 해주세요.”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올게.”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꽃잎이 조금 열렸다.

아주 조금.

그 정도면 충분했다.


---

사막으로 돌아오자, 미하일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식탁보도 그대로였다.

물잔은 반쯤 비어 있었고, 빵 한 조각은 손대지 않았다.

아레는 검은 리본을 거두고 있었다.

요안나는 모래 위에 다시 섰다.

미하일라가 물었다.

“다녀왔나.”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엇을 했지.”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물을 줬어요.”

미하일라는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안도인지, 웃음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렇군.”

요안나는 조금 뒤에 말했다.

“그리고 내일도 가기로 했어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아레는 식탁보를 접기 시작했다.

요안나가 물었다.

“이제 치워도 돼요?”

“문턱을 넘었으니.”

“다시는 필요 없나요?”

아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은 여러 번 문턱에 선단다.”

그녀는 식탁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때마다 물과 빵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할게요.”

아레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푸리나의 목소리가 무대 위로 조용히 내려왔다.

“작은 방문자는 사막의 뱀을 만났습니다.”

그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뱀은 문턱을 열었고, 황제는 기다렸고, 아이는 돌아갔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장미는, 여전히 장미였습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별빛과 남겨진 사람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었다.

— 밤하늘을 보고 웃는 법 —

요안나는 하늘을 보았다.

별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이제 그중 하나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4막 — 별빛과 남겨진 사람

— 밤하늘을 보고 웃는 법 —

사막의 밤은 깊었다.

요안나가 검은 리본을 넘어 작은 별에 다녀온 뒤, 무대는 한동안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래빛 천은 가만히 놓여 있었다.
별들은 높이 걸려 있었다.
접혔던 식탁보는 아레의 품 안으로 사라졌고, 물잔 자국만 모래 위에 희미하게 남았다.

요안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별은 여전히 많았다.

너무 많아서, 자기 별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정확히 어느 별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어딘가에 장미가 있었고, 그 장미는 방금 물을 받았다.
그리고 내일 같은 시간에 누군가 오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밤하늘 전체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요안나는 낮게 말했다.

“별이…… 조금 시끄러워졌어요.”

미하일라는 그녀 옆에 섰다.

“별이 말하나.”

“아니요.”

요안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조용하지만은 않아요.”

미하일라는 하늘을 보았다.

그녀에게 별은 원래 항로와 징조와 사격의 거리와 시간을 읽는 것이었다.
천문반 위에 놓이면 별은 길이 되었고, 전장 위에 놓이면 별은 명령의 시각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요안나가 보는 별은 달랐다.

어딘가에서 투덜거리는 장미.

늦었다고 말하는 목소리.

내일 아침 인사를 기다리는 작은 꽃.

그것이 별을 바꾸고 있었다.

미하일라는 물었다.

“장미는 괜찮았나.”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화났어요.”

“그렇군.”

“늦었다고 했어요.”

“그럴 만하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올려다보았다.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말했다.

“기다린 자는 늦었다 말할 권리가 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들어야겠네요.”

“그래.”

“도망치면 안 되겠네요.”

“그래.”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장미의 이름.

그것들은 이제 그림이라기보다 약속처럼 보였다.

“폐하.”

“말하라.”

“장미가 내일도 화내면요?”

“들어라.”

“모레도요?”

“들어라.”

“계속 화내면요?”

미하일라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물을 주면서 들어라.”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폐하, 아레 님이랑 조금 비슷하게 말했어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돌렸다.

아레는 이미 무대 가장자리의 어둠 속으로 물러나 있었다. 검은 숄만 희미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나쁘지 않다.”

요안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웃었다.

사막의 밤은 차가웠다.

하지만 방금 그 웃음 때문에, 공기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

부러진 청동 매는 여전히 모래 위에 있었다.

미하일라는 다시 그 곁으로 걸어갔다.

요안나는 따라갔다.

처음 만났을 때, 미하일라는 청동 매의 우측 날개와 어긋난 천문반, 상실된 귀환 방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때 요안나는 양을 그려달라고 했다.

이제 기록판의 뒷면에는 상자 속 양과 유리 덮개가 있었다.
앞면에는 아직 항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처음의 항로가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의 날개를 살폈다.

“은실이 끊겼다.”

요안나는 옆에 앉았다.

“고칠 수 있어요?”

“고쳐야 한다.”

“고칠 수 있냐고 물었는데요.”

미하일라는 잠시 멈췄다.

“고칠 수 있다.”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웃는군.”

“네.”

“이유는?”

요안나는 하늘을 보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모르는 채로 웃는가.”

“네.”

미하일라는 더 묻지 않았다.

청동 매의 날개를 받치고, 끊어진 은실을 다시 매기 시작했다.

요안나는 한참 그 손길을 보았다.

황제의 손.

활을 잡고, 칙령을 쥐고, 국가의 문을 닫거나 여는 손.

그 손이 지금은 아주 작은 은실을 다시 꿰고 있었다.

요안나가 말했다.

“폐하도 매일 하는 일이 있어요?”

“있다.”

“등불 켜는 것 같은 일?”

미하일라는 은실을 묶었다.

“그보다 덜 아름다운 일이 많다.”

“예를 들면요?”

“보고서. 재정. 병력 배치. 반역 가능성 검토. 부상병 명부. 장례 비용.”

요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라는 담담했다.

“왕국의 등불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 가까이서 보면 기름 냄새가 난다.”

요안나는 벨라의 별을 떠올렸다.

등불을 켜고 끄던 손.

망토 끝으로 차가운 별바닥을 덮어주던 손.

“그래도 켜야 하죠?”

“그래.”

미하일라는 은실을 당겨 묶었다.

“꺼지면 길을 잃는 자가 생긴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의 장미도 있어요?”

미하일라의 손이 멈췄다.

극장이 조용해졌다.

요안나는 자신이 너무 많이 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미하일라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사과할 필요 없다.”

그녀는 청동 매의 날개를 내려놓았다.

“있다.”

요안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미하일라는 하늘을 보았다.

“너와 같은 꽃은 아니다.”

“그래도 장미예요?”

“아마도.”

미하일라는 낮게 말했다.

“어떤 것은 나라라고 부르고, 어떤 것은 시민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은 죽은 자의 이름이고, 어떤 것은 살아남은 자의 식탁이다.”

요안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전부 물을 줘야 해요?”

“전부 줄 수는 없다.”

“그럼요?”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를 다시 보았다.

“황제는 모든 장미 앞에 서지 못한다. 그러나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들어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컸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장미 한 송이와도 닿아 있었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저는 하나도 어려웠어요.”

미하일라는 말했다.

“하나를 어려워할 줄 아는 것은 나쁘지 않다.”

“왜요?”

“하나를 쉽게 여기는 자가, 모두를 말하면 위험하다.”

그 말에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작은 별.

장미 한 송이.

그 장미 하나를 귀찮아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두고 온 자신.

그런 자신이 “모두”를 말할 수 있을까.

요안나는 물었다.

“그럼 저는 평화를 말하면 안 되나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대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은 벌이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천천히 말했다.

“말해야 한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그래.”

“하지만 저는 장미 하나도 두고 왔어요.”

“그래서 더 배워야 한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의 천문반을 다시 끼웠다.

“말하지 못하는 자는 길을 열 수 없다. 그러나 말만 하는 자는 길을 지키지 못한다.”

요안나는 그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말하고…… 지켜야 해요.”

“그래.”

“그리고 물을 줘야 해요.”

미하일라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

청동 매는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았다.

아직 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부러진 날개는 임시로 고정되었고, 천문반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별빛이 천문반 위에 닿자, 작은 금속판에 방향 하나가 떠올랐다.

요안나는 그것을 보았다.

“귀환 방위예요?”

“그렇다.”

“어디로 가요?”

미하일라는 천문반을 보았다.

“사막 밖으로.”

“그럼 제 별은요?”

“네 별은 네가 찾아야 한다.”

요안나는 살짝 실망한 듯했다.

미하일라는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이제 찾을 방법은 알겠지.”

요안나는 하늘을 보았다.

“별을 보고 웃는 거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요안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는 웃을 수 있어요?”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객석에서 아주 낮은 긴장이 흘렀다.

그 질문은 장난 같았지만, 요안나에게는 진심이었다.

미하일라는 하늘을 보았다.

많은 별.

그중 어디에선가 장미가 투덜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은 이상했다.

전장의 별은 웃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국의 별은 계산을 요구한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별은, 밤하늘을 보고 웃어달라고 요구한다.

미하일라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쉽지 않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너도?”

“네. 별이 너무 많아서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어느 별인지 몰라요. 그런데도 웃으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잖아요.”

“그렇군.”

“하지만 레플리카 님이 그랬어요. 밀밭이 생긴다고.”

“밀밭?”

“의미 없던 게, 누군가 때문에 의미가 생기는 거요.”

미하일라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사막 한쪽에, 2막에서 보았던 금빛 밀밭이 아주 희미하게 나타났다. 환상처럼. 아니면 기억처럼.

요안나는 말했다.

“폐하에게도 그런 게 있나요?”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청동 매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 매의 눈에 작은 별빛이 들어갔다.

“있다.”

그 한마디뿐이었다.

요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

어떤 대답은 더 묻지 않아야 남는다는 것을.


---

그때 사막의 한쪽에서 푸리나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연출자의 자리에서 무대 안쪽으로 아주 조금 들어온 것뿐이었다.

그녀는 손에 작은 종이 별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 분, 밤하늘이 너무 진지해져서 잠깐만.”

요안나가 눈을 깜박였다.

미하일라는 푸리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푸리나는 종이 별을 들어 보였다.

“원래 이 장면은 감동적으로 밤하늘을 보는 장면인데, 극장 담당자가 별 하나를 거꾸로 걸었어.”

요안나가 하늘을 보았다.

정말로 별 하나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별 모양이라 위아래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푸리나는 매우 진지했다.

“저건 작은 별 예법에 어긋나.”

죠니가 객석에서 말했다.

“별에 예법도 있어?”

푸리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 극장에는 있어.”

미하일라는 잠시 그 별을 보았다.

“수정하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승인 받았다!”

무대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별을 바로 걸었다.

그 순간 별빛이 살짝 흔들렸다.

요안나는 그걸 보다가 웃었다.

처음에는 작게.

그리고 조금 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왜 웃지.”

요안나는 입을 가렸다.

“별이 거꾸로 걸려 있었대요.”

“그것이 웃긴가.”

“조금요.”

푸리나는 작게 속삭였다.

“좋아. 웃었다.”

죠니가 말했다.

“이번 극에서 제일 중요한 장치가 거꾸로 걸린 별이 될 줄은 몰랐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바로잡혔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잡는 것도 극의 일부야.”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더 웃었다.

하늘을 보고 웃는 것이 꼭 커다란 깨달음일 필요는 없다는 듯이.

때로는 별 하나가 거꾸로 걸려 있어도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 장미가 아주 조금 섞일 수 있었다.


---

밤이 깊어졌다.

청동 매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날개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지만, 짧은 거리라면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하일라는 천문반을 닫았다.

“돌아갈 수 있다.”

요안나는 물었다.

“사막 밖으로요?”

“그래.”

“그럼 저는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너는 이미 돌아갈 길을 배웠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내일 같은 시간에 가면 되겠죠.”

“그래.”

“모레도요.”

“그래.”

“장미가 또 투덜거려도요.”

“그래.”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폐하도 같이 가줄 수 있어요?”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서둘러 말했다.

“아니, 꼭 제 별까지 말고요. 그냥…… 가끔은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은 극 속의 말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극 속의 말만은 아니었다.

궁정에서, 회의장에서, 평화와 전쟁의 이름 아래에서, 두 사람은 늘 각자의 자리에서 서 있었다.

요안나는 미하일라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 없었고,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단순히 보호할 수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사막은 조금 다른 말을 허락했다.

미하일라는 말했다.

“부르면 가겠다.”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그래.”

“바쁘면요?”

“그래도 들을 것이다.”

요안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항상 갈 수 있다”가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있었다.

“그럼 저도 부를게요.”

“필요할 때만 부르면 된다.”

요안나는 조금 생각했다.

“필요한지 아닌지 모를 때는요?”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그때도 불러라.”

요안나는 웃었다.

“그건 조금 의외예요.”

“짐도 배우고 있다.”

그 말에 푸리나가 무대 뒤에서 조용히 손뼉을 치려다 다시 멈췄다.

이번 극에서는 작은 박수도 너무 크게 들릴 때가 있었다.

대신 그녀는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

아레는 무대의 가장자리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검은 숄을 두른 채.

요안나는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아레 님.”

아레는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는 아이.”

“저 다녀왔어요.”

“보았다.”

“장미에게 물을 줬어요.”

“잘했다.”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요안나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따뜻해졌다.

“아레 님은 이제 가세요?”

“그렇다.”

“어디로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다른 침묵이 있는 곳.”

요안나는 그 대답이 조금 슬펐다.

“거기에도 식탁보를 가져가요?”

“그래.”

“물하고 빵도요?”

“가능하면.”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도 덜 무섭겠네요.”

아레는 아주 잠깐 요안나를 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구나.”

그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았다.

그러나 요안나는 들었다.

아레는 검은 숄을 정리했다.

“장미에게 늦지 마라.”

“네.”

“늦으면.”

“늦으면?”

“늦었다고 말해라.”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을 줄게요.”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시작이다.”

그녀는 뒤돌아 걸어갔다.

검은 숄은 사막의 어둠과 섞였다.

식탁보는 보이지 않았지만, 요안나는 이제 그것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았다.

문턱마다.

침묵마다.

사람이 돌아가기 전에 목이 마를지도 모르는 자리마다.


---

미하일라는 청동 매를 들어 올렸다.

매의 날개가 작게 펼쳐졌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다.

임시로 묶은 은실이 보였고, 한쪽 날개는 여전히 조금 비뚤었다.

그러나 날 수 있었다.

푸리나가 무대 앞으로 나왔다.

“청동 매는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관객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완전히 고쳐지지 않아도,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죠니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좋은 말인데, 여왕님이 말하니까 약간 막간 광고 같네.”

푸리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죠니.”

“응. 조용히 할게.”

푸리나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작은 방문자는 장미에게 다녀왔고, 사막의 어른은 밤하늘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여전히 종이였고, 장미는 여전히 무대 위의 꽃이었습니다.”

잠시 침묵.

“하지만 웃음이 한 번 생긴 뒤에는, 밤하늘도 완전히 이전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요안나는 하늘을 보았다.

거꾸로 걸렸던 별은 이제 바로 걸려 있었다.

그 별이 자기 별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별을 보자,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미하일라는 그 웃음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그녀도 별을 보며 웃은 것 같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웃음은 기록하지 않는 편이 더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후일담 — 물뿌리개와 거꾸로 걸린 별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붙었다.

— 같은 시간에 돌아간다는 것 —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청동 매는 날개를 펼쳤다.

사막의 밤은 여전히 넓었다.

하지만 이제, 그 넓음은 조금 덜 무서웠다.
후일담 — 물뿌리개와 거꾸로 걸린 별

— 같은 시간에 돌아간다는 것 —

공연이 끝난 뒤에도, 별들은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원래라면 막이 닫히고, 무대 담당들이 사막 천을 접고, 청동 매의 날개를 분리하고, 장미 정원의 꽃들을 하나씩 상자에 넣어야 했다. 그러나 푸리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앞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꾸로 걸렸던 별은 이제 바로 걸려 있었다.

그 별이 정말 요안나의 작은 별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실 무대 담당이 실수로 거꾸로 걸었던 종이 별 하나일 뿐이었다. 얇은 나무틀에 은색 가루를 바르고, 뒤쪽에 작은 실을 묶은 소품.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 별을 너무 빨리 내리면 안 될 것 같았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아직 치우지 말자.”

무대 담당들이 서로를 보았다.

죠니가 객석에서 물었다.

“여왕님, 그럼 퇴근은?”

푸리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죠니, 오늘은 별이 퇴근을 허락할 때까지야.”

“별이 노동법을 모를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대신 협상할 거야.”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

웃음은 아주 작았지만, 공연 중 마지막에 별을 보고 웃던 것과 같은 결이었다.

미하일라는 그 웃음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장미는 무대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다.

작은 별 세트는 절반쯤 내려가 있었고, 화산 세 개는 이미 소품 담당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바오밥나무 싹도 상자 안에 정리되었다.

하지만 장미만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요안나는 그 앞에 섰다.

꽃잎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신술의 빛이 걷혀, 장미는 다시 무대 장미에 가까워져 있었다. 가느다란 철사와 천으로 만든 꽃. 조명 없이는 조금 낡아 보이기까지 하는 소품.

그런데도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들었다.

푸리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요안나.”

“네?”

“그거 진짜 물 들어 있어.”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내려다보았다.

“알아요.”

“무대 장미라서 너무 많이 주면 곤란해.”

그 말에 요안나는 잠시 멈췄다.

공연 중 장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물은 너무 많이 주지 마세요.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조금만 줄게요.”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줄 거야?”

“네.”

“소품 담당이 울 수도 있는데.”

요안나는 장미를 보았다.

“그러면 닦을게요.”

푸리나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물러났다.

“응. 그러면 됐어.”

요안나는 물뿌리개를 기울였다.

아주 조금.

물 한 방울이 장미의 뿌리 부분, 정확히는 무대 장미가 꽂혀 있는 작은 흙색 받침대 위로 떨어졌다.

톡.

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요안나에게는 크게 들렸다.

물을 너무 많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후일담은 시작된 셈이었다.


---

미하일라는 부러진 청동 매 곁에 있었다.

공연이 끝났으니, 이제 그 매는 다시 소품이었다. 날개를 고정하던 은실은 느슨해졌고, 천문반은 더 이상 별빛을 받아 움직이지 않았다. 소품 담당이 다가와 물었다.

“폐하,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미하일라는 청동 매를 보았다.

“기다려라.”

소품 담당은 즉시 물러났다.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소품도 황제 명령 받으면 좀 긴장하겠네.”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청동 매의 오른쪽 날개를 손끝으로 만졌다.

임시로 묶였던 은실.

공연 중에는 날 수 있을 만큼 고쳤지만, 자세히 보면 여전히 틀어져 있었다.

요안나가 다가왔다.

“아직 고장 났나요?”

“그렇다.”

“그래도 날았잖아요.”

“임시 조치였다.”

요안나는 날개를 보았다.

“그럼 다시 고쳐야겠네요.”

“그래.”

“완전히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가능하면.”

요안나는 그 대답을 듣고 조금 웃었다.

“완전히가 아니어도, 돌아갈 수는 있었어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 말은 청동 매에 대한 말이었고, 또 다른 것에 대한 말이기도 했다.

“그렇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말하라.”

“완전히 고쳐지지 않아도, 같이 있을 수 있나요?”

미하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다가, 슬쩍 무대 뒤로 물러났다. 죠니도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라는 청동 매를 내려다보았다.

“있을 수 있다.”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다만 틀어진 날개를 틀어지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네.”

“어디가 어긋났는지 알아야 한다.”

“네.”

“그리고 날 때마다 살펴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도요?”

“장미도.”

“사람도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사람은 더 그렇다.”

요안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넣었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그럼 저도 살펴볼게요.”

미하일라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그러겠다.”

그 말은 화해라고 부르기에는 작았다.

맹세라고 부르기에는 조용했다.

하지만 요안나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오늘은 충분했다.


---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 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리를 돕는 척하다가 장미 줄 하나가 서로 엉킨 것을 심각하게 풀고 있었다.

푸리나가 다가왔다.

“레플리카, 그건 그냥 소품이라서 적당히 상자에 넣어도 돼.”

레플리카는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엉킨 채로 넣으면 다음 공연 때 더 아프다.”

“소품이?”

“소품 담당이.”

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맞아.”

요안나가 다가오자, 레플리카는 장미 줄을 내려놓았다.

“왔군.”

“네.”

“같은 시간은 아니다.”

요안나는 살짝 당황했다.

“공연이 끝나서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유 확인.”

푸리나가 속삭였다.

“레플리카, 알토 말투가 섞였어.”

레플리카는 못 들은 척했다.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우 님.”

“오늘의 배역은 끝났다.”

“그래도요.”

레플리카는 잠시 요안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요안나는 손에 든 물뿌리개를 보았다.

“저, 내일도 장미한테 갈 수 있을까요?”

“갈 수 있다.”

“바쁘면요?”

“조금이라도 가라.”

“정말 조금만 가도 돼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는 항상 큰 장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물 한 방울이면 된다.”

요안나는 아까 장미에게 떨어뜨린 물 한 방울을 떠올렸다.

“그것도 약속이에요?”

“약속의 일부다.”

레플리카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다만 너무 자주 한 방울만 주지는 마라. 꽃도 속는다.”

요안나는 웃었다.

“네.”

레플리카는 다시 장미 줄을 정리했다.

“그리고 네가 못 가는 날이 있으면, 못 간다고 말해라.”

“장미에게요?”

“그래.”

“장미가 알아들을까요?”

“아마 자기 방식으로.”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할게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좋다.”

그 웃음은 여우 가면 없이도 여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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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토는 무대 한편에서 기록장을 들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는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푸리나가 다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뭐 적어?”

알토는 기록장을 살짝 기울였다.

“오늘 공연 기록입니다.”

“평가도 있어?”

“있습니다.”

“내 연출은?”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과감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칭찬이지?”

“대체로요.”

“대체로?”

알토는 정중하게 말했다.

“거꾸로 걸린 별은 사고였지만,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다만 다음부터는 의도한 사고인지 실제 사고인지 구분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푸리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연극에서는 사고도 연출이 될 수 있어!”

알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지만 예산에서는 사고가 사고로 기록됩니다.”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알토가 이겼네.”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요안나는 알토에게 다가갔다.

“제 장미도 기록했나요?”

알토는 기록장을 내려다보았다.

“네.”

“뭐라고요?”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그대로 읽어드릴까요?”

요안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토는 차분히 읽었다.

“작은 별의 장미. 아침 인사를 기다림. 바람을 무서워하지만, 가시가 있다고 주장함. 물은 많이 주면 안 됨. 늦은 방문자에게 ‘늦었네요’라고 말함.”

요안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너무 자세해요.”

“기록은 대개 자세할수록 도움이 됩니다.”

알토는 곧 부드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원하지 않으시면 일부는 닫아둘 수 있어요.”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닫아둬요?”

“모든 기록이 모두에게 공개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기록은, 당사자가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요안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늦었네요’는 닫아둘래요.”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기록장에 작게 표시했다.

“비공개 처리.”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장미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졌어.”

알토는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합니다.”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고마워요.”

알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돌아가도 됩니다. 잊지 않기만 하면요.”


---

벨라는 등불 세트를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가로등 옆에 서서 유리를 닦고 있었다.

공연은 끝났고, 더 이상 밤과 낮이 빠르게 바뀌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벨라는 등불 유리를 한 번 더 닦았다.

요안나는 다가가 물었다.

“아직도 닦으세요?”

벨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닦는단다.”

“왜요?”

“다음에 켤 때, 빛이 흐리지 않게 하려고.”

요안나는 등불을 보았다.

“다음 공연 때요?”

벨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녀는 손수건으로 유리를 닦았다.

“혹은 누군가 정말로 밤길을 걸을 때일 수도 있지.”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는 요안나의 망토가 조금 비뚤어진 것을 보았다.

“이리 오렴.”

요안나는 가까이 갔다.

벨라는 망토의 매듭을 조금 고쳐주었다.

그 손길은 왕의 명령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에 가까웠다.

“장미에게 다녀왔구나.”

“네.”

“무서웠니?”

요안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네.”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단다.”

“무서웠는데요?”

“무서워도 갔으니까.”

요안나는 벨라를 보았다.

벨라는 미소 지었다.

“용기는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란다. 무섭다고 말하고도, 등불을 들고 나가는 것이지.”

요안나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벨라는 등불을 요안나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네가 돌아가는 길에 이 불이 필요하면, 기억하렴.”

“등불을 가져가도 돼요?”

“이 등불은 여기 있어야 한단다.”

요안나는 조금 아쉬워했다.

벨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불 켜는 법은 가져갈 수 있지.”

요안나는 눈을 들었다.

“어떻게요?”

“밤이 오면, 모른 척하지 않는 것.”

벨라는 낮게 말했다.

“그리고 작아도 불을 켜는 것.”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한테도요?”

“그래. 장미에게도. 사람에게도. 너 자신에게도.”

요안나는 조금 놀랐다.

“저 자신에게도요?”

벨라는 요안나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가, 금방 떼었다.

“왕관 쓴 아이도 밤에는 불이 필요하단다.”

요안나는 이번엔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말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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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샤니크는 지도 세트를 접고 있었다.

그녀는 요안나가 붙였던 작은 이름표를 떼지 않았다.

지도 가장자리.

원래라면 여백으로 남았을 곳.

그곳에 아직 장미라는 작은 글자가 붙어 있었다.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이름표, 떼나요?”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원하십니까?”

요안나는 망설였다.

“아니요. 그런데 지도는 정리해야 하잖아요.”

슈샤니크는 이름표를 보았다.

“접어도 남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녀는 지도를 천천히 접었다.

장미 이름표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요안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데요.”

“그래서 접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요안나는 지도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접힌 지도의 한 모서리를 가리켰다.

“다음에 펼칠 때, 이름표가 찢어지지 않도록 접었습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슈샤니크는 요안나를 보았다.

“덧없는 것들은, 보관 방식이 나쁘면 쉽게 상합니다.”

그 말투는 여전히 차갑고 정중했다.

그러나 요안나는 이제 그 안에 담긴 것을 조금 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장미도요?”

“장미도.”

“지도도요?”

“지도도.”

“사람도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요안나는 오늘 그 말을 두 번째 들었다.

미하일라도 그렇게 말했다.

사람은 더 그렇다.

요안나는 그 말을 기억하기로 했다.

슈샤니크는 접은 지도를 요안나에게 잠시 보여주었다.

“이 지도는 나중에 다시 펼치겠습니다.”

“그때 장미도 다시 보여요?”

“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말했다.

“접혀 있는 동안에도, 장미는 여백에 남아 있을 겁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별의 방문자께서 돌아갈 곳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은 축복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을 잃지 말라는 아주 오래된 방식의 인사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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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얀카는 꽃의 별 세트를 정리하지 않았다.

흰 꽃잎들이 아직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요안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조금 긴장했다.

스토얀카는 여전히 아름답고, 조금 무서웠다.

“저…….”

스토얀카는 고개를 돌렸다.

“돌아갔느냐.”

“네.”

“꽃은 있었느냐.”

“네.”

“꺾이지 않았느냐.”

요안나는 잠시 장미를 떠올렸다.

꽃잎을 접은 채, 늦었다고 말하던 장미.

“네. 아직 있었어요.”

스토얀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피고 있구나.”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많이 화나 있었지만요.”

스토얀카는 가볍게 웃었다.

“화낼 힘이 있으면 아직 살아 있다.”

그 말은 거칠었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요안나는 흰 꽃잎 하나를 주웠다.

“당신의 꽃은 세상에게 보이기 위해 핀다고 했죠.”

“그렇다.”

“제 장미는…… 저에게 보이기 위해 피는 걸까요?”

스토얀카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 질문은 네가 꽃에게 물어야지.”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스토얀카는 손을 뻗어 요안나가 든 흰 꽃잎을 바로 펴주었다.

꽃잎의 결이 다시 살아났다.

“다만 기억해라. 작은 꽃이라고 해서 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네.”

“부드러운 꽃도, 자기 방식으로 선다.”

요안나는 장미의 얇은 가시를 떠올렸다.

호랑이를 막겠다던 말.

이제는 그 말이 조금 덜 우스웠다.

“알 것 같아요.”

스토얀카는 살짝 웃었다.

“아직은 모를 것이다.”

요안나가 당황하자, 스토얀카는 덧붙였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을 아는 얼굴이 되었구나. 그 정도면 다음 물을 줄 수 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스토얀카는 대답 대신 손을 내렸다.

흰 꽃잎들이 조용히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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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우가스는 왕좌에서 내려와 있었다.

왕관은 벗어두었고, 큰 망토도 접혀 있었다. 왕좌 옆에는 작은 해 장치가 놓여 있었다. 아까 “해여, 져라”라는 명령에 맞춰 내려갔던 그 해였다.

요안나는 다가가 인사했다.

“왕의 별은 이제 끝났나요?”

민다우가스는 해 장치를 보았다.

“해가 졌으니, 오늘의 왕은 끝났다.”

“내일은요?”

“내일 해가 뜨면 다시 시작하겠지.”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왕도 매일 다시 시작해요?”

“그렇다.”

민다우가스는 요안나를 보았다.

“장미에게 다녀왔다고 들었다.”

“네.”

“명령했나.”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좋다.”

“물을 줬어요.”

“더 좋다.”

요안나는 조금 놀라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낮게 웃었다.

“하하. 왕이 늘 명령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조금요.”

“그런 왕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작은 해 장치를 손에 들었다.

“해는 때가 되면 진다. 장미는 때가 되면 목이 마르다. 사람은 때가 되면 상처를 말한다.”

요안나는 조용히 들었다.

민다우가스는 말했다.

“왕은 그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놓치면요?”

“늦었다고 말해야지.”

요안나는 아레의 말을 떠올렸다.

늦었다고 말하라.

물을 주라.

미하일라의 말도 떠올랐다.

화내면 들어라.

“그다음에는요?”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때를 놓치지 마라.”

요안나는 조금 웃었다.

“다들 비슷한 말을 하네요.”

“좋은 말은 대개 여러 왕국을 지나도 살아남는다.”

그 말에 요안나는 웃었다.

민다우가스는 작은 해를 다시 내려놓았다.

“가거라, 작은 방문자.”

“네.”

“네 별의 해가 질 시간을 보아라.”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람 부는 시간도요.”

“그래.”

“물 주는 시간도요.”

민다우가스는 만족한 듯 낮게 웃었다.

“조금 더 배웠군.”


---

마지막으로 푸리나가 무대 중앙에 섰다.

배우들이 하나둘 뒤쪽에 모였다.

미하일라와 요안나.

민다우가스.

스토얀카.

알토.

벨라.

슈샤니크.

레플리카.

아레는 조금 떨어진 어둠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그들을 보다가, 객석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의 작은 방문자는 장미에게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물뿌리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조금 거짓말이겠지요.”

죠니가 객석에서 말했다.

“여왕님, 후일담에서 자주 하는 말이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좋은 말은 여러 극을 지나도 살아남는 법이야.”

민다우가스가 낮게 웃었다.

“나쁘지 않군.”

푸리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돌아간다는 것은 한 번의 장면이 아닙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가는 일. 물을 너무 많이 주지 않는 일. 늦었다면 늦었다고 말하는 일. 화가 났다면 듣는 일. 불이 꺼졌다면 다시 켜는 일.”

그녀는 장미를 보았다.

“그리고 가끔은, 무대 장미에게 진짜 물을 너무 많이 주지 않는 일.”

소품 담당이 객석 뒤편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나가 조금 부끄럽게 웃었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 오늘의 막은 이렇게 닫겠습니다.”

그녀는 유리 덮개를 장미 옆에 놓았다.

덮지는 않았다.

그저 곁에 두었다.

“덮개는 필요할 때 씌우면 되니까요.”

벨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밤이 오면 잊지 말아야 한단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밤이 오면.”

알토는 기록장에 무언가 적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또 뭐 적어?”

알토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덮개는 곁에 둘 것. 필요할 때 씌울 것. 과잉 보호 주의.”

죠니가 웃었다.

“정확하네.”

요안나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요안나는 왠지 들은 것 같았다.

> 아침 인사는 제때 해주세요.



그녀는 작게 대답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래.”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꺼졌다.

하지만 거꾸로 걸렸던 별 하나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이제는 똑바로 걸려 있었다.

푸리나는 그 별을 보고 웃었다.

“오늘의 극은 여기까지.”

잠시 후,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장미에게 물 주는 일은 내일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별이 꺼졌다.

무대는 어두워졌다.

그러나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작은 등불 하나가, 무대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다.
《작은 별의 막간》

— 박수가 끝난 뒤의 장미 —

개막 — 작은 왕이 되기로 한 군주

그날 극장에는 왕좌가 없었다.

황금 장식도, 개선문도, 군주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긴 서문도 없었다. 대신 무대 중앙에는 아주 작은 둥근 별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걸어 다닐 정도의 별.

한쪽에는 조명탑 세 개가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커튼이 걸려 있었다. 별의 가장자리에는 의자 하나가 놓였는데, 그것을 조금만 옮기면 해가 지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객석에서는 낮은 웃음이 일었다.

“저건 왕국이라기보다…….”

죠니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여왕님 방에 딸린 무대 창고 같은데.”

그레이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창고라고 하기에는 조명탑이 과합니다.”

“그럼 창고 겸 극장?”

“그 표현은 조금 더 부정확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여왕님의 작은 별이라고 해두자.”

그 말이 끝나자, 무대 뒤에서 푸리나 헤툼이 걸어 나왔다.

오늘의 푸리나는 궁정 예복을 입지 않았다.

대신 별빛이 살짝 섞인 푸른 망토, 작은 왕관, 그리고 손에 든 물뿌리개 하나. 옆구리에는 평소보다 작은 류트가 걸려 있었다.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소박하지도 않았다.

딱, 스스로 무대 위에 오르기로 한 군주가 입을 만한 옷이었다.

푸리나는 객석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 나는 작은 별의 왕이 됩니다.”

죠니가 손을 들었다.

“여왕님, 원래도 왕 아니야?”

푸리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오늘은 더 작아질 거야.”

“그게 좋은 일이야?”

“좋은지 보려고 작아지는 거야.”

객석에서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기다렸다가, 웃음이 가라앉을 즈음에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큰 왕국을 다스리다 보면, 작은 별 하나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녀는 무대 중앙의 작은 별을 보았다.

“큰 극장을 열다 보면, 무대 아래 앉아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물뿌리개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왕국을 아주 작게 줄여보려 합니다.”

한 걸음.

그녀는 작은 별 위에 올라섰다.

“별 하나.”

조명탑 하나가 켜졌다.

“무대 하나.”

두 번째 조명탑이 켜졌다.

“장미 한 송이.”

세 번째 조명탑이 켜지자, 작은 별 중앙에 아직 피지 않은 장미 한 송이가 떠올랐다. 꽃봉오리처럼 접힌 천과 철사로 만든 무대 장미였다. 하지만 조명이 닿자, 그것은 정말 곧 숨을 쉬며 피어날 것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장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정도면 도망칠 핑계도 줄어들겠지요.”

죠니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조용히 장미를 보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그 안에는 장난만 있지 않았다.

“그러면 막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푸리나의 신술이 극장 전체로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언제나처럼 화려하게 터지는 박수나 음악은 없었다.

이번 신술은 더 얇았다.

더 조용했다.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화려한 배역을 씌우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마음속에서 박수가 끝난 뒤의 자리를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에게는 식은 수프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접지 못한 침구가.

누군가에게는 막이 내린 뒤에도 떨리던 손이.

누군가에게는, 사람들 앞에서는 웃었지만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얼굴이.

푸리나는 그 감각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늘의 극은 그것을 보러 가는 극이었다.

작은 별 위의 장미가 천천히 꽃봉오리를 열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피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장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줘.”

그리고 객석을 향해 돌아섰다.

“이야기는 사막에서 시작됩니다.”

조명이 낮아졌다.

작은 별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 걸렸다.

그리고 무대 아래로, 모래빛 사막이 열렸다.


---

프롤로그 — 찢어진 지도선과 정치적인 양

사막은 지도를 싫어하는 듯했다.

슈샤니크 호르프시메 바흐람 아즈나부르 파흘라부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래는 어느 방향으로도 같아 보였고, 낮은 바람은 방금 그린 선을 아무렇지 않게 지워버렸다. 발자국은 오래 남지 않았고, 바퀴 자국은 더 빨리 사라졌다.

지도 제작자에게 사막만큼 불친절한 장소는 드물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 부러진 지도선이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니케아의 천문관과 장인들이 만든 하늘 측량 마도구였다. 가벼운 목재와 청동 골격, 얇은 은실 날개, 그리고 배 밑에 매달린 관측판으로 이루어진 작은 비행선. 원래라면 하늘에서 땅의 굴곡과 강줄기, 폐허가 된 성벽과 새로 열린 도로를 읽고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추락해 있었다.

은실 날개는 끊어졌다.

관측판은 금이 갔다.

바람의 방향을 읽는 작은 깃대는 모래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조각들을 무릎 위에 모아놓고 있었다.

그녀는 다친 팔을 천으로 묶은 채, 남은 잉크가 마르기 전에 몇 줄을 적었다.

“항로는 모래가 삼켰고, 지도는 반쯤 찢겼으며, 물통은 제 주인보다 먼저 절망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펜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덧붙였다.

“훌륭하군요. 적어도 기록할 비극은 남았습니다.”

말투는 정중했고,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찢어진 지도 조각을 누르는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도에는 선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상은 자주 선을 찢었다.

그 사실을 슈샤니크는 너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막 위로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모래바람 사이에서 작은 왕관이 먼저 보였다. 그다음 별빛이 묻은 푸른 망토, 작은 류트, 손에 든 물뿌리개.

푸리나였다.

오늘의 그녀는 더 이상 극을 여는 연출자만이 아니었다.

작은 별의 왕.

스스로 그렇게 되기로 한 군주.

그녀는 사막 한가운데 쓰러진 지도선과, 그 곁에 앉은 슈샤니크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첫마디를 꺼냈다.

“양을 그려줘.”

슈샤니크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그녀는 푸리나를 한 번 보고, 찢어진 지도선을 한 번 보고,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첫 인사치고는 대단히 목가적이군요, 작은 전하.”

푸리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이야.”

“제 처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제 손에 남은 것은 찢어진 지도와 마른 물통뿐입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니 양 한 마리는, 안타깝게도 제 행정권 밖의 생물입니다.”

푸리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 장미를 먹지 않는 양이어야 해.”

슈샤니크의 손이 아주 잠깐 멈추었다.

“장미를 먹지 않는 양.”

그녀는 그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푸리나는 빠르게 설명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아야 하고, 밤에는 조용히 자야 하고, 내 별의 커튼을 물어뜯으면 안 되고, 장미 곁에서 잠들 수 있어야 해.”

슈샤니크는 펜끝을 지도 조각 위에 올린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

“목축, 치안, 야간 안정, 무대 설비 보존, 그리고 화훼 보호 업무를 한 마리에게 맡기시겠다는 뜻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응!”

슈샤니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상당히 과로하는 양이군요.”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필요해. 내 장미는 까다롭거든.”

“까다로운 꽃입니까.”

“응. 조명은 좋아하면서도 너무 밝으면 싫어하고, 박수는 좋아하면서도 너무 오래 들으면 피곤해하고, 덮개를 씌워주면 답답하다고 하고, 안 씌워주면 바람이 찬 것 같다고 해.”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장난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는 정말로 난처함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투정이 아니었다.

군주가 자기 방식으로 돌본 존재가, 그 방식만으로는 쉬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생기는 당혹감.

슈샤니크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를 뒤집었다.

뒷면은 아직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군요.”

“그려줄 거야?”

“꽃을 먹는 양은 한 나라의 조세보다 빠르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칭찬이야?”

“경고에 가깝습니다.”

슈샤니크는 목탄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그려드리지요. 다만 전하의 요구 조건을 전부 만족하는 양은 자연계에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무대에는 있어!”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녀는 첫 번째 양을 그렸다.

작고 둥근 양이었다.

푸리나는 받아들고 잠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얌전해.”

슈샤니크는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전하께서 조용히 잠드는 양을 원하신다고 이해했습니다만.”

“조용히 잠드는 것과 아무 일도 못 하는 건 달라. 이 양은 장미 옆에서 자다가 커튼이 쓰러져도 그냥 잘 것 같아.”

“소극적 방위 실패군요.”

슈샤니크는 두 번째 양을 그렸다.

이번 양은 조금 단단해 보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말했다.

“이 양은 커튼은 지키겠지만 장미가 싫어할 것 같아.”

“왜입니까?”

“너무 근무자처럼 생겼어.”

슈샤니크는 잠시 그림을 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 양은 목에 호루라기를 달고 야간 순찰을 돌 것 같았다.

“그렇군요. 지나친 행정화의 폐해입니다.”

세 번째 양은 더 귀엽게 그렸다.

푸리나는 조금 흔들렸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귀엽긴 한데…… 이 양은 분명 장미한테 박수 받으려고 할 거야.”

“양이 박수를 원합니까?”

“무대 위에 오르면 누구나 조금은 그래.”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말은 가벼운 농담만은 아니었다.

슈샤니크는 목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도 조각의 빈 가운데에 작은 상자를 그렸다.

구멍이 세 개 뚫린 상자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상자잖아.”

“그 안에 양이 있습니다.”

“안 보이는데?”

“보이지 않기에 아직 장미를 먹지 않았습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말했다.

“이보다 안전한 양은 드뭅니다.”

푸리나는 상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좋아. 이 양은 내 장미를 먹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보이십니까?”

“응.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슈샤니크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추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 말은 사막보다 조금 멀리 갔다.

정해지지 않은 지도.

정해지지 않은 귀환.

정해지지 않은 실패.

슈샤니크는 손가락으로 찢어진 지도의 모서리를 눌렀다.

“전하께서는 정해지지 않은 것을 좋아하십니까?”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품에 안았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아직 극이 끝나지 않은 것 같잖아.”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이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가 날아가려 하자, 푸리나가 재빨리 발로 눌렀다.

“앗.”

슈샤니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조각은 아직 제법 중요한 비극입니다.”

푸리나는 지도를 주워 건넸다.

“비극도 중요해?”

“기록에는 그렇습니다.”

“극에도 그래.”

푸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삼류 해피엔딩도 꽤 좋아해.”

슈샤니크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잠깐 푸리나를 보았다.

그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안쪽에는 이 세계 어딘가의 기록 성좌가 좋아할 법한 끈질긴 희망이 있었다.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을 받아 들었다.

“전하의 별은 어떤 곳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막 위에 앉았다.

작은 왕관이 살짝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바로잡지 않았다.

“작아.”

“그 점은 이미 짐작했습니다.”

“정말 작아.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해가 지고, 조명탑 세 개를 다 닦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아. 커튼도 내가 직접 접을 수 있어.”

“왕이 직접 커튼을 접습니까?”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작은 별의 왕은 인력이 부족하거든.”

슈샤니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력 부족은 모든 국가의 오래된 비극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장미가 있어.”

그 말을 하자, 무대의 조명이 변했다.

사막 뒤쪽에 작은 별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천장에 걸려 있던 그 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가까워졌다.

별 위에는 조명탑 세 개가 있었다.

작은 커튼.

의자 하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무대 바닥.

그리고 중앙의 장미.

이번에는 봉오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피어난 모습이었다.

조명 아래에서 장미는 화려했다.

아니, 화려하게 보이도록 꾸며져 있었다.

푸리나는 장미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장미에게 무대를 줬어.”

그녀의 목소리는 자랑스러웠다.

“조명도 줬고, 박수도 줬고, 사람들이 보게 해줬어. 장미는 정말 예뻤거든. 그냥 구석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슈샤니크는 장미를 보았다.

그 장미는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조명이 조금 강했다.

“장미는 좋아했습니까?”

“처음에는.”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처음에는 웃었어. 아니, 꽃이니까 웃었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꽃잎이 열렸어.”

“그다음에는요?”

푸리나는 손에 든 상자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날 말했어.”

무대 위 장미가 천천히 움직였다.

꽃잎이 조명 쪽을 향했다가, 다시 조금 접혔다.

그리고 부드럽고 까다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조명이 너무 밝아요.”

푸리나가 작은 별 위에서 말했다.

“하지만 네가 가장 예쁘게 보이는 각도야!”

장미는 대답했다.

“예쁘게 보이는 것과 편한 것은 달라요.”

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

장미는 계속 말했다.

“오늘은 박수도 조금 피곤해요.”

“박수는 따뜻하잖아.”

“따뜻해요. 그런데 오래 들으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아요.”

푸리나는 조명탑을 보았다.

“그럼 조명을 줄일까?”

“줄여도 돼요.”

“얼마나?”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작은 별 위의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대의 왕.

극장의 주인.

모든 이를 주인공으로 세우려는 사람.

그런 그녀에게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는 너무 낯선 요구였다.

장미는 조용히 말했다.

“주인공이 되는 건 좋아요.”

잠깐의 침묵.

“하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가 없어요.”

사막의 푸리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웃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푸리나의 옆얼굴을 보았다.

푸리나는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통치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피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는 군주처럼 보였다.

슈샤니크는 낮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꽃에게 박수를 주셨군요.”

“응.”

“그리고 꽃은 침묵을 청했고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조각을 접었다.

“살아 있는 꽃은 대개 불편합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장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물을 원하고, 햇빛을 거절하고, 바람을 탓하다가, 정작 덮개를 씌우면 숨이 막힌다고 말하지요.”

그녀의 손끝이 지도 위를 스쳤다.

“지도 위의 꽃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편합니다.”

잠깐.

아주 짧은 침묵.

“나중에는…… 그 침묵이 사람을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슈샤니크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하지만 그 말 안에는, 불탄 포도밭의 냄새 같은 것이 있었다.

푸리나는 작은 별을 보았다.

장미는 여전히 조명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조명은 조금 낮아져 있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별을 보러 가기로 했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도망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대답은 빨랐다.

그리고 조금 아팠다.

“도망이면 더 쉬웠겠지. 나는…… 배우러 가려고 했어.”

“무엇을 말입니까?”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박수 말고도 쉬게 하는 방법.”

슈샤니크는 조용히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별의 왕.

극장의 군주.

박수를 무기로 삼는 아이가 아니라, 박수가 닿지 않는 곳을 보려고 스스로 작아진 왕.

슈샤니크는 아주 낮게 말했다.

“전하의 별은 작군요.”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작아도 내 별이야.”

“예.”

슈샤니크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작아서?”

“작은 별은 핑계가 적으니까요.”

슈샤니크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 한 송이가 피곤하다 말해도, 군주는 못 들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이 다시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선의 은실 날개가 낮게 울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뒷면에 그린 상자 속 양을 푸리나에게 돌려주었다.

“가십시오, 전하.”

“어디로?”

“별들로.”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받아 들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전하께서 정말 배우러 떠나신 것이라면, 돌아오실 때 무엇을 배웠는지도 들어야겠지요.”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기록할 거야?”

“물론입니다.”

“내 실수도?”

“특히 그것을.”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엄격하네.”

“실수는 잘 보관하면 재산이 됩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방치하면 재난이 되고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뒤쪽에서 별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죠니의 별.

레이튼의 별.

하융의 길.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장미 정원과 여우의 숲.

푸리나는 작은 왕관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사막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좋아.”

그녀는 별빛이 열린 길을 보았다.

“그럼, 작은 왕의 순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죠니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여왕님, 제목은 좋은데 길 잃지 마.”

푸리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길 잃으면 하융이 찾을 거야!”

멀리서 하융의 목소리가 들렸다.

“떠넘기는 솜씨가 제법이구려, 군주여.”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 작은 별의 장미는 조용히 꽃잎을 접고 있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무대 뒤 간판이 떠올랐다.

1막 — 박수 이후의 길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일어난 사람은 어디로 걸어가는가 —
1막 — 박수 이후의 길

— 일어난 사람은 어디로 걸어가는가 —

첫 번째 별은 길 위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별 자체가 길이었다.

둥근 별의 표면 위로 말발굽 자국이 나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래된 바퀴 자국이 있었다. 길 양쪽에는 낮은 울타리가 놓여 있었고, 한쪽 끝에는 무대 커튼처럼 붉은 천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커튼은 무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길의 시작을 알리는 표식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그 별 위에 내려섰다.

“여긴…… 무대가 아니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무대일 수도 있나? 길이 무대인 극도 있으니까.”

“여왕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죠니 조스타가 길가의 낮은 담장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오늘도 지나치게 비장하지 않았다. 모래 묻은 망토를 걸쳤고, 손에는 활 대신 낡은 여행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미 길을 한참 걸어본 사람처럼 보였다.

“이번 별의 주인은 너야?”

푸리나가 물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주인이라기보단 길가에서 말 거는 사람 정도지. 주인은 아마 길 쪽일걸.”

“길이 주인인 별이라니, 철학적이네.”

“레이튼 교수님 별로 가면 그런 말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거야. 여기서는 조금 덜 복잡하게 가자고.”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길 위에는 몇몇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사람처럼 보이는 그림자들이었다.

한 사람은 박수를 받고 막 일어난 배우처럼 보였고, 한 사람은 전투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보였고, 한 사람은 피난민처럼 보였으며, 또 한 사람은 손에 빵을 쥔 아이처럼 보였다.

그들은 모두 푸리나를 향해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별 위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푸리나가 반사적으로 웃었다.

박수.

그건 그녀가 아는 소리였다.

얼어붙은 사람의 어깨를 펴게 하는 소리.
방금까지 울던 아이가 고개를 들게 하는 소리.
죽음과 공포와 피난의 밤 뒤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소리.

푸리나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좋아! 그럼 다음 막으로—”

“여왕님.”

죠니가 그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딱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푸리나는 멈췄다.

“왜?”

죠니는 박수가 사라진 길을 가리켰다.

“박수는 사람을 일으켜. 그건 맞아.”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일어났다.

배우처럼 보였던 사람은 허리를 폈다.
병사는 고개를 들었다.
피난민은 빵을 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죠니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근데 일어난 사람이 어디로 걸어갈지는 또 다른 문제잖아.”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일어난 사람들은 실제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박수 쪽으로.

그다음에는 무대 쪽으로.

하지만 무대는 길의 시작에만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가자, 박수는 들리지 않았다. 조명도 닿지 않았다. 붉은 커튼도 뒤에 남았다.

길은 계속 이어졌다.

푸리나는 그 길을 바라보았다.

“박수가 끝나도…… 계속 걷는구나.”

“대부분 그렇지.”

죠니는 담장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여왕님이 사람들을 일으킨 건 대단한 일이야. 진짜로.”

그 말은 가볍지 않았다.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일어난 사람이 다시 앉을 곳이 없으면, 결국 길 위에서 지쳐.”

푸리나는 길 끝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내가 거기까지 무대를 깔면 되잖아.”

죠니는 조금 웃었다.

“여왕님답네.”

“안 돼?”

“돼.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

“무대를 길 전체로 만들 수는 없잖아. 아니, 여왕님이라면 하려고 할 것 같긴 한데.”

푸리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죠니가 손을 흔들었다.

“그 표정 하지 마. 진짜 하려고 하지 말고.”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길에서 지친다며.”

“그러니까 무대를 길 전체로 덮는 것보다, 길 중간중간 쉴 곳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죠니는 여행 지팡이로 길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길가에 작은 의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 옆에 물통 하나.

작은 그늘막 하나.

아무 장식도 없는 쉼터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았다.

“이건 너무 소박해.”

“그렇지.”

“박수도 없고.”

“응.”

“조명도 없고.”

“낮에는 햇빛이면 충분하고, 밤에는 작은 등불이면 되겠지.”

푸리나는 쉼터 앞에 섰다.

그림자 중 하나가 그 의자에 앉았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냥 앉았다.

물을 마셨다.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숨을 골랐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긴장이 풀린 것처럼.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저것도 휴식이야?”

죠니는 대답했다.

“아마도.”

“너무 조용한데.”

“휴식이 꼭 시끄러워야 할 필요는 없잖아.”

푸리나는 쉼터의 물통을 보았다.

그 물은 아무 빛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에게는 박수보다 먼저 필요할지도 몰랐다.

푸리나는 손에 든 물뿌리개를 내려다보았다.

“장미도…… 이런 걸 원했던 걸까?”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걷는 그림자들을 보았다.

“장미가 정확히 뭘 원했는지는 장미한테 물어봐야지. 다만 조명이 싫다고 해서 여왕님의 극장이 틀렸다는 건 아니야.”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죠니를 보았다.

“정말?”

“응. 그냥 그날은 조명 말고 커튼이 필요했을 수 있지.”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죠니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정답처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망갈 곳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는 길을 가리켰다.

“여왕님, 한 번만 더 보자.”

“뭘?”

“박수 끝나고.”

길의 시작에서 다시 박수가 울렸다.

이번에는 더 많은 그림자들이 일어났다.

푸리나는 박수를 받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고, 서로를 붙잡고,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은 아름다웠다.

분명히 아름다웠다.

푸리나는 그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죠니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낮게 말했다.

“이 장면은 필요해.”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그다음 장면도 필요해.”

박수가 멈췄다.

일어난 사람들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길 중간에 쉼터가 하나 더 생겼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작은 표지판이 생겼다.

물 있음.

조금 더 앞으로 가자, 다른 표지판이 나타났다.

잠시 앉아도 됨.

푸리나는 그 표지판을 보고 웃었다.

“너무 죠니다워.”

“왜?”

“대단한 말 안 써.”

“목마른 사람한테는 대단한 말보다 물통 위치가 더 중요할 때가 있거든.”

푸리나는 한참 동안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극장에도 표지판이 필요하겠네.”

“무슨 표지판?”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박수가 끝난 뒤, 이쪽으로.”

죠니는 웃었다.

“좋네.”

“그리고 ‘잠시 아무 말 안 해도 됨’.”

“그건 더 좋고.”

“그리고…… ‘주인공에서 내려와도 됨’.”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길 위에 서 있었다.

작은 왕관을 쓴 작은 별의 왕.

하지만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무대가 아니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의 길이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여왕님, 그 표지판은 꽤 많은 사람이 좋아할 거야.”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길 끝을 보았다.

아직 보이지 않는 곳.

그곳에 장미가 있었다.

무대 중앙에서 빛나는 장미가 아니라,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했던 장미.

주인공이 되는 건 좋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 없다고 말했던 장미.

푸리나는 손에 든 상자 그림을 조금 더 꼭 쥐었다.

“죠니.”

“응.”

“내가 사람을 일으키는 것만 보고 있었을까?”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죠니다웠다.

“여왕님은 일으키는 걸 정말 잘해.”

“그다음은?”

“그다음은 배우는 중이지.”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늦었나?”

“장미가 아직 투덜거릴 수 있으면, 완전히 늦은 건 아니겠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 말, 슈샤니크가 하면 되게 아프게 들릴 것 같아.”

“그 사람은 같은 말도 지도에 못 박듯이 할 것 같긴 해.”

사막 쪽에서 슈샤니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들립니다, 조스타 경.”

죠니는 어깨를 움찔했다.

“지도선이 추락해도 귀는 멀쩡하시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웃음은 조금 가벼웠다.

그러나 완전히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 웃음 뒤에, 작은 쉼터의 물통이 남아 있었다.


---

푸리나는 첫 번째 별을 떠나려 했다.

그때 죠니가 그녀를 불렀다.

“여왕님.”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응?”

죠니는 여행 지팡이로 길 위에 마지막 표지판 하나를 세웠다.

그 표지판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왜 비워뒀어?”

“여왕님이 나중에 쓰라고.”

“뭘 쓰면 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여왕님 극장 표지판 담당은 아니니까.”

푸리나는 빈 표지판을 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보게 되었다.

“좋아. 가져갈게.”

“들고 갈 수 있어?”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무대 소품은 들고 갈 수 있어.”

“그거 좋은 규칙이네.”

“내 극장이니까.”

푸리나는 빈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다음 별로 향했다.

죠니는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길 잃으면 너무 멀리 가지 말고.”

푸리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길 잃으면 하융한테 책임 물을 거야!”

멀리서 하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군주여, 길은 잃은 이의 책임도 반은 있소.”

죠니가 낮게 웃었다.

“저쪽 별도 쉽진 않겠네.”


---

두 번째 별은 서재처럼 생겼다.

그 별에는 책장이 둥글게 서 있었다.

책장들은 벽이 아니라 질문처럼 놓여 있었다. 어느 책장은 길을 막고 있었고, 어느 책장은 열려 있었으며, 어떤 책은 읽히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반쯤 펼쳐져 있었다.

별 중앙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찻잔 두 개.

그리고 한 장의 종이.

종이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객석이 비어도 무대는 무대인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자마자 말했다.

“무대지.”

책장 뒤에서 레이튼이 나왔다.

“빠른 답변입니다.”

그는 오늘 질문의 별의 주인이었다.

모자는 조금 낮게 눌러썼고,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이미 다음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경계하듯 그를 보았다.

“너 지금 함정 깔았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질문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그게 함정이랑 뭐가 달라?”

“함정은 빠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고, 질문은 멈추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비슷한데.”

“때로는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푸리나에게 찻잔을 권했다.

푸리나는 탁자 앞에 앉았다.

“좋아. 다시 물어봐.”

레이튼은 종이를 가리켰다.

“객석이 비어도 무대는 무대입니까?”

“응. 무대는 무대야.”

“그럼 배우가 내려간 뒤의 방도, 극장의 일부입니까?”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레이튼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극장 뒤에 있으면 극장의 일부지.”

“그럼 군주님의 극장은 어디까지입니까?”

“내 극장?”

“무대까지입니까? 객석까지입니까? 분장실까지입니까? 길가의 쉼터까지입니까?”

푸리나는 빈 표지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죠니에게서 받은 빈 표지판.

“너도 봤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질문은 대개 이미 앞 장면에 놓여 있습니다.”

“교수 같아.”

“감사합니다.”

“칭찬인지 몰라.”

“질문으로 남겨두지요.”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 극장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곳이야.”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되지 않고 쉬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장미의 말과 닮아 있었다.

>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그때 푸리나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무대는 구원이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던 사람을 보이게 하고, 무너진 사람에게 이름을 주고, 박수로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푸리나의 힘이었다.

그런데 레이튼은 물었다.

보이지 않고 싶을 때는?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을 때는?

그때도 극장은 그 사람을 품을 수 있는가?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을 위한 무대는…… 무대가 아니어야 할지도 몰라.”

레이튼의 눈이 조금 밝아졌다.

“흥미로운 답입니다.”

“답이 맞아?”

“저는 정답을 채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뭐 하는 사람인데?”

“답이 너무 빨리 닫히지 않게 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정말 피곤해.”

레이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자주 듣습니다.”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레이튼은 탁자 위에 두 번째 종이를 올렸다.

이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휴식은 보이는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푸리나는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박수는 보인다.

웃음도 보인다.

무대 위에서 사람이 고개를 드는 순간도 보인다.

하지만 쉼은?

잠드는 얼굴.

문을 닫은 방.

조용히 놓인 물 한 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보이게 만들 수는 있어.”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님께서는 그것을 잘하시지요.”

“하지만…… 다 보이게 만들면 쉬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푸리나는 말을 고르다가, 결국 웃었다.

“이거 되게 어려운 문제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말했다.

“좋습니다.”

“뭐가 좋아?”

“어려워졌으니까요.”

“나는 쉬러 왔지 시험 보러 온 게 아닌데.”

“휴식에 대해 묻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시험처럼 느껴집니다.”

푸리나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빈 표지판을 그 옆에 놓았다.

“그럼 이 표지판에는 뭐라고 써야 할까?”

레이튼은 표지판을 보았다.

“제가 쓰면 제 답이 됩니다.”

“내가 써야 해?”

“군주님의 극장이니까요.”

푸리나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 극장이니까.

그 말이 갑자기 조금 무거워졌다.

그녀는 표지판에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레이튼은 말했다.

“비워두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알토 같은 말 하네.”

“기록자와 질문자는 때때로 같은 방을 씁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그럼 아직 비워둘래.”

“이유는?”

“아직 모르는 답을 너무 빨리 써두면, 그 표지판만 보고 길을 잘못 찾을 수도 있으니까.”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훌륭한 임시 결론입니다.”

“임시라니.”

“좋은 결론은 대개 임시입니다. 살아 있는 것에 관한 문제라면 더욱 그렇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장미를 떠올렸다.

살아 있는 꽃.

불편하고, 까다롭고, 쉬고 싶어 하고,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는 꽃.

그녀는 빈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고마워, 레이튼.”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다음 질문이 필요하시면 다시 오십시오.”

푸리나는 경계했다.

“다음 질문도 어려워?”

“더 어려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 올래.”

“그 또한 좋은 선택입니다.”

푸리나는 웃으며 다음 별로 걸어갔다.

그러나 떠나기 전, 그녀는 탁자 위 첫 번째 종이를 다시 보았다.

객석이 비어도 무대는 무대인가?

푸리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아마도.”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 무대는 조용해야겠지.”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정답이 아니라 다음 장면으로 가는 문 같았다.


---

세 번째 별은 길과 여관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처음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길이 있었다.

길 양쪽에는 낮은 돌담이 있었고, 가끔 작은 등불이 걸려 있었다. 등불은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한 등불을 지나면 다음 등불이 보일 만큼의 거리.

푸리나는 그 길 위에 내려섰다.

“여긴 하융 별이지?”

어둠 속에서 하융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부르면 그리 되는 것이겠지, 군주여.”

하융은 길가의 등불 아래에 서 있었다.

그의 옷자락은 여행자의 것처럼 단정했고, 손에는 작은 지팡이가 있었다. 그는 푸리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별과 별 사이의 길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별이 아니잖아.”

“길도 머무는 이가 있으면 별이 될 수 있소.”

“그건 여관좌 쪽 말 같네.”

하융은 웃었다.

“그분의 길은 여러 곳에 이어지니 말이오.”

푸리나는 길 위의 등불들을 보았다.

죠니의 쉼터.

레이튼의 질문.

그리고 이제 하융의 길.

“나는 장미에게 돌아가야 해.”

“그렇겠지.”

“그런데 아직 배울 게 남은 것 같아.”

“그 또한 그렇겠지.”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니야?”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 위에서는 부정해도 걸어야 할 때가 많소.”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철학자들이랑 길잡이는 다들 말이 어렵다니까.”

“그런가. 그럼 쉽게 말하리다.”

하융은 지팡이로 등불 하나를 가리켰다.

“저 등불까지 걸으시오.”

푸리나는 걸었다.

그리 멀지 않았다.

등불 아래에는 작은 의자와 물그릇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죠니 별이랑 비슷하네.”

“길은 배운 것을 가지고 이어지는 법이오.”

“그럼 다음은?”

하융은 다음 등불을 가리켰다.

“저기까지.”

푸리나는 다시 걸었다.

두 번째 등불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낮은 벽 하나가 있었다.

푸리나는 그 벽 옆에 잠깐 섰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바람을 막아주고 있소.”

“아.”

푸리나는 벽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갑지만, 든든했다.

하융은 말했다.

“휴식은 언제나 침대와 박수와 따뜻한 식사만은 아니오. 때로는 바람이 한 방향에서 덜 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세 번째 등불 아래에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됨.

푸리나는 그 표지판 앞에서 멈췄다.

“이건…….”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레이튼 경의 질문에서 이어진 길이오.”

푸리나는 표지판을 오래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됨.

무대 위에서는 말해야 했다.

노래해야 했다.

울어도 대사가 되어야 했고, 웃어도 장면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극장이었다.

하지만 이 표지판은 다르게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됨.

푸리나는 손에 든 빈 표지판을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은 표지판.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하융은 등불이 늘어선 어둠을 보았다.

“쉬어갈 곳이 있는 쪽으로 이어지오.”

“쉬어갈 곳이 없으면?”

“만들어야지.”

“누가?”

하융은 푸리나를 보았다.

“군주가.”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융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군주여, 그대는 무대를 잘 여오. 사람을 불러 세우고, 이름을 주고, 웃음으로 다시 걷게 하오.”

그는 길 위의 등불을 보았다.

“하지만 별과 별 사이에도 밤은 오오. 무대에서 내려온 자가 다음 무대에 닿기 전, 길 위에서 지치지 않게 할 곳이 필요하오.”

푸리나는 길을 보았다.

“여관이네.”

“그렇소.”

하융은 미소 지었다.

“무대와 여관은 닮았으나 같지는 않소.”

“어떻게 달라?”

“무대는 사람을 보이게 하오.”

하융은 등불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여관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게 하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 말은 장미의 말과 아주 가까웠다.

>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괜찮게.”

“그렇소.”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에는 그런 방도 필요하오.”

푸리나는 길가의 표지판을 다시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됨.

그녀는 자신의 빈 표지판을 꺼냈다.

그리고 잠시 망설였다.

“써도 될까?”

하융은 말했다.

“길은 쓰는 자를 기다리오.”

푸리나는 목탄을 꺼냈다.

그리고 빈 표지판에 천천히 적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글씨는 조금 삐뚤었지만, 또렷했다.

하융은 그 문장을 보았다.

“좋은 길잡이로군.”

푸리나는 표지판을 들고 한참 바라보았다.

“이걸 장미에게 보여주면 좋아할까?”

“그건 장미가 답할 일이오.”

“다들 그 말 하네.”

“살아 있는 이에게 물어야 하는 일은, 대신 답할 수 없으니 말이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어봐야겠네.”

“그렇소.”

길 끝에서 별빛이 흔들렸다.

다음 장면으로 가는 문이었다.

하융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푸리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가시오, 군주여.”

“다음은 어디야?”

“장미가 많은 곳.”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많아?”

“그렇소.”

“내 장미 말고도?”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미 답이었다.

푸리나는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상자 속 양.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리고 마음속에 남은 질문들.

그녀는 길 끝으로 걸어갔다.

하융은 뒤에서 말했다.

“길을 잃으면 부르시오.”

푸리나는 뒤돌아보았다.

“책임져줄 거야?”

하융은 웃었다.

“반은.”

“나머지 반은?”

“걸은 자의 몫이오.”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지만, 곧 웃었다.

“좋아. 반이라도 어디야.”

그녀는 다음 장면으로 걸어갔다.

무대 위 등불들이 하나씩 낮아졌다.

마지막 등불 아래, 푸리나가 적은 표지판만이 잠시 남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리고 그 표지판 뒤로, 수많은 장미의 붉은빛이 천천히 켜지기 시작했다.
좋아. 그러면 핵심 문장을 **“내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 “내가 조명을 비춘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로 바꾸고, 그 의미가 더 잘 살아나도록 주변 문장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작성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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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 장미 정원과 그레이 여우

— 모두가 주인공이라면, 모두에게 내려올 자리도 있어야 한다 —

붉은빛은 처음에는 하나였다.

작은 점 하나.

조명탑 아래 피어난 장미 한 송이처럼.

푸리나는 처음 그것을 보고, 자기 별의 장미라고 생각했다.

“찾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곧 두 번째 붉은빛이 켜졌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윽고 언덕 전체가 붉어졌다.

장미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송이.

수백 송이.

아직 봉오리인 장미도 있었고, 활짝 피어난 장미도 있었다. 조명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붉은 꽃잎을 펼친 장미들. 바람에 흔들리며 각자의 향기를 품은 장미들.

푸리나는 멈춰 섰다.

손에는 하융의 길에서 적은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 문장은 갑자기 조금 작아 보였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바라보았다.

“많네.”

그녀는 웃으려 했다.

“정말 많네.”

웃음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수많은 장미들을 보았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각도로 피어 있었다. 어떤 장미는 햇빛을 향했고, 어떤 장미는 그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어떤 장미는 바람을 견디듯 줄기를 세웠고, 어떤 장미는 피곤한 듯 낮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든 장미가 무대 위에 오르면,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푸리나는 그 질문을 떠올렸다가, 곧 스스로 당황했다.

그것은 원래 그녀가 가장 자신 있게 대답하던 문제였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이는 주인공일 수 있다.

그녀의 극장은 그렇게 열렸다.

그런데 지금 장미들이 너무 많았다.

모두에게 조명을 비추려 하면, 너무 눈부실 것 같았다.

모두에게 박수를 주려 하면, 누군가는 그 박수에 지칠 것 같았다.

모두를 무대 중앙에 세우려 하면, 무대 중앙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푸리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내가 조명을 비춘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장미가 흔들렸다.

어느 장미도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한 송이 장미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 장미는 자기 별의 장미와 닮아 있었다. 꽃잎의 색도 비슷하고, 가시도 얇았고, 바람이 불면 조금 떨리는 방식도 닮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조명이 싫은 날이 있어?”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 박수가 피곤한 날이 있어?”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주인공에서 내려오고 싶은 날이 있어?”

장미는 바람에 흔들렸다.

그뿐이었다.

그때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가 있었다.

오늘의 그레이는 여우였다.

정확히 말하면 여우 가면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후드를 쓰고 있었고, 후드 끝에는 작은 여우 귀 같은 장식이 달려 있었다. 손에는 장부 대신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물병, 붕대, 작은 빗, 그리고 접힌 담요가 있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

그레이는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여우입니다, 군주님.”

무대 뒤인지 객석인지 모를 곳에서 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진짜 여우 같진 않은데, 그래도 귀는 잘 어울리네.”

그레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후드 아래 귀 끝이 아주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귀엽다.”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 평가는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왜?”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내가 왕명으로 기록하라고 하면?”

“그 경우에는 별도 항목으로 분리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드디어 조금 웃었다.

장미 정원의 무거운 공기가 아주 살짝 풀렸다.

그러나 그레이는 웃음이 지나가길 기다린 뒤,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많군요.”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아.”

“모두 다른 장미입니다.”

“그건 알아.”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해. 내가 늘 말했잖아. 모든 이는 주인공이라고. 그런데 막상 모두가 장미인 걸 보니까…….”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레이는 기다렸다.

푸리나는 결국 말했다.

“모두를 무대 중앙에 세우면, 무대가 너무 밝아질 것 같아.”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렸던 걸까?”

그 질문은 빠르게 나왔다.

그리고 나온 뒤에야 푸리나는 자신이 그 말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한 송이 장미의 아래쪽 흙을 살폈다. 손끝으로 마른 잎을 하나 떼어냈다. 아주 조심스럽게. 장미가 아프지 않도록.

그런 다음에야 말했다.

“군주님께서 사람들을 무대 위로 불러낸 것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보이지 않던 사람을 보이게 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이름 없이 지나가던 사람에게 이름을 주고, 박수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박수를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다음도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물병을 꺼냈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의 일입니다.”

푸리나는 하융의 표지판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레이.”

“네, 군주님.”

“길들인다는 건 뭐야?”

그레이는 물병을 든 채 멈췄다.

그녀는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장미들이 내 장미가 아닌 건 알겠어. 아니, 그렇게 말하면 이상한가.”

그녀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내가 이 장미들의 주인이 아닌 건 알아. 그런데 내 장미가 왜 내 장미인지, 아직 전부는 모르겠어.”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꽃들.

그리고 그중 어디에도 없는, 푸리나의 작은 별의 장미.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같은 시간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전부야?”

“아니요.”

그레이는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같은 시간에 찾아갔을 때, 어제와 필요한 것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것까지입니다.”

푸리나는 침묵했다.

그레이는 말을 이었다.

“어제는 박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한 송이 장미의 흙에 아주 조금 물을 주었다.

“같은 장미라도 매일 같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어제는 조명이 좋다고 했던 장미.

오늘은 조명이 너무 밝다고 했던 장미.

박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박수가 오래되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다고 했던 장미.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그게 변덕이라고 생각했어.”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변덕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변덕이라고 해서 전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레이는 장미의 잎을 살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어제는 웃을 수 있었던 사람이 오늘은 웃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무대에 설 수 있었던 사람이 오늘은 방 안에 있고 싶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접힌 담요를 꺼냈다.

“먼저 물어야 합니다.”

“묻고?”

“들어야 합니다.”

“듣고?”

“가능한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건?”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군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왕인데도?”

“왕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 말은 슈샤니크의 말과 조금 닮아 있었다.

작은 별은 핑계가 적다.

하지만 큰 왕국도 모든 핑계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더 꼭 잡았다.

“그럼 내가 모두를 주인공으로 세우겠다고 말한 것도…… 너무 큰 말이었을까?”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큰 말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큰 말이 전부 거짓말인 것은 아닙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네.”

그레이는 아주 조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큰 말은, 작게 나누어 지켜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큰 말은 작게 나누어 지켜야 한다.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말도.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무대 중앙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씩, 한 장면씩, 그리고 내려온 뒤의 방까지.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길들인다는 건, 매일 공연하는 게 아니구나.”

“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확인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재미없네.”

“대체로 그렇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답다.”

“하지만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레이답고.”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수많은 장미들.

그 장미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것을 모두 자기 무대로 데려올 수는 없다.

모두에게 박수를 줄 수는 있어도, 모두에게 같은 박수가 휴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장미가 특별한 것은, 자기 무대에서 가장 빛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푸리나가 매일 보았기 때문이다.

매일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매일 조명을 조절하려 했고, 매일 투덜거림을 들었고, 어느 날은 듣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푸리나에게 말했다.

“군주님.”

“응.”

“장미들에게 말해보시겠습니까?”

“무슨 말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 생각하신 말이 있다면, 그대로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너,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았어?”

“대략은요.”

“내 장미가 아니라고 하려 했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하지만 군주님께서는 모든 장미의 주인이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모든 장미가 주인공일 수는 있지?”

“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다만 각자의 무대에서요.”

그 말은 푸리나의 가슴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 앞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 앞에서 작은 왕관을 살짝 고쳐 썼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아름다워.”

장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들은 내 장미가 아니야…… 라고 말하려 했는데.”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바람이 장미 정원을 지나갔다.

“아니. 그건 조금 틀린 말 같아.”

그녀는 천천히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장미야. 각자의 별과, 각자의 밤과, 각자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겠지.”

장미들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아까와 달랐다.

푸리나는 품 안의 표지판을 더 꼭 안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내가 이름을 몰라도, 내가 조명을 비추지 않아도, 당신들의 막은 분명히 어딘가에서 오르고 있을 거야.”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은 막이 내려가 있겠지.”

그 말은 장미들에게 하는 말이었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같은 시간에 돌아가야 할 장미에게 가야 해.”

그 순간 자기 별의 장미가 더 선명해졌다.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하던 목소리.

박수가 피곤하다고 말하던 목소리.

주인공이 되는 건 좋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 없다고 말하던 목소리.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내 장미는…… 아마 지금도 투덜거리고 있겠지.”

그레이는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네.”

“왜?”

“살아 있으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살아 있으니까.

투덜거릴 수 있다.

피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은 조명이 싫다고 말할 수 있다.

푸리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럼 다행이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동의처럼 느껴졌다.


---

시간이 조금 흘렀다.

물론 무대 위의 시간이었다.

조명이 한 번 낮아졌다가 다시 켜졌고, 장미 정원 위로 다른 빛이 내려왔다.

푸리나는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레이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바구니는 옆에 놓여 있었고, 장부는 없었다. 그러나 그레이가 장부 없이 앉아 있어도, 왠지 그녀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다.

푸리나는 물었다.

“나 또 왔어.”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간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움찔했다.

“그렇게 바로 지적해?”

“하지만 다시 오셨습니다.”

“그건 괜찮은 거야?”

“네.”

그레이는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다음에는 시간을 정하면 더 좋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 옆에 앉았다.

“길들여지는 건 어렵네.”

“어렵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해?”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필요해서 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의 시선은 장미 정원에 있었다.

“군주님께서 막을 올리시면, 저는 막이 내린 뒤의 것을 봅니다.”

“힘들어?”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은요.”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사과하실 필요는—”

“아니. 필요해.”

푸리나는 말을 끊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내가 네가 보고 있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잖아.”

그레이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푸리나에게는 충분히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레이가 말했다.

“군주님께서 막을 올리셨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었던 일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

“네.”

그레이는 아주 조금 미소 지었다.

“웃은 사람은, 도움을 받으러 오는 길을 조금 덜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군주님의 박수는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다만, 박수가 끝난 뒤의 길도 같이 열어주시면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그 길에는 표지판이 필요하겠지요.”

푸리나는 하융의 길에서 적은 표지판을 꺼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레이는 그 문장을 보았다.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좋은 표지판입니다.”

“정말?”

“네.”

“더 필요한 게 있을까?”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하나 더 있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빈 표지판을 꺼냈다.

대체 언제 준비했는지 알 수 없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런 것도 가지고 다녀?”

“필요할 수 있으니까요.”

“역시 그레이야.”

그레이는 빈 표지판을 푸리나에게 건넸다.

“여기에 쓰십시오.”

“뭘?”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푸리나는 멈췄다.

그 말은 약속이었다.

극의 대사가 아니라.

관객을 향한 선언도 아니라.

장미에게 하는 약속.

푸리나는 목탄을 들었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표지판에 적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글씨는 또렷했다.

첫 번째 표지판보다 덜 화려했지만, 더 무거웠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이제 돌아가면 될까?”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뭐가?”

그레이는 장미 정원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식탁보의 흰빛이 보였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저건…….”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박수와 침묵 사이의 자리입니다.”

푸리나는 손에 든 두 표지판을 꼭 쥐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는 물었다.

“그레이, 같이 가줄 거야?”

그레이는 잠시 망설였다.

“문턱까지는요.”

“그다음은?”

“그다음은 군주님께서 들으셔야 합니다.”

“무엇을?”

그레이는 어둠 속 식탁보를 보았다.

“아레 님의 침묵을요.”

푸리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네.”

그레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려울 겁니다.”

그 대답이 너무 그레이다워서,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장미 정원을 지나 어둠 쪽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푸리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든 장미를 자기 무대 위에 올릴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자기 장미에게 돌아갈 길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장미 정원의 붉은빛이 조금씩 낮아졌다.

어둠 속 흰 식탁보가 더 선명해졌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박수와 침묵 사이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붙었다.

— 막이 내린 뒤에도 남아 있는 자리 —
3막 — 박수와 침묵 사이

— 막이 내린 뒤에도 남아 있는 자리 —

어둠 속에는 식탁보가 있었다.

처음에는 별빛인 줄 알았다.

장미 정원 너머, 붉은빛이 서서히 낮아진 자리에 희고 작은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무대도 아니고, 객석도 아니고, 길가의 쉼터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푸리나는 그것이 식탁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 장식도 없는 흰 천.

그 위에는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빵 한 조각.

그리고 빈 의자 하나.

푸리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이는 그녀보다 한 발짝 뒤에서 멈췄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레이?”

“저는 문턱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식탁보를 보았다.

“저기에는 누가 있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검은 숄이 움직였다.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오늘의 그녀는 뱀이었다.

그러나 뱀의 가면도, 비늘도, 화려한 독의 장식도 없었다. 검은 숄이 모래 위를 낮게 끌렸고, 그녀의 손에는 접히지 않은 침묵 같은 것이 들려 있는 듯했다.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왔구나, 아이야.”

푸리나는 가볍게 웃어넘기려 했다.

“아이야라니, 나 그래도 군주인데.”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주이기에 더 아이로 앉아야 하는 밤도 있단다.”

그 말에 푸리나는 웃지 못했다.

아레는 식탁보 곁에 무릎을 낮추었다.

“앉으렴.”

푸리나는 흰 식탁보를 보았다.

“여긴 무대야?”

“아니란다.”

“그럼?”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막이 내린 뒤란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막이 내린 뒤.

그 말은 너무 조용했다.

막이 오르면 푸리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조명을 켜고, 장면을 열고, 배우를 부르고, 박수를 준비하면 된다.
누군가 울고 있으면 웃게 만들고, 누군가 무너졌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 무대 위로 올리면 된다.

하지만 막이 내린 뒤에는?

관객이 떠나고, 박수가 사라지고, 배우가 분장을 지우고, 아무도 더 이상 보지 않을 때.

그곳에서 군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레이는 멀리서 고개를 숙인 뒤, 장미 정원 쪽으로 물러났다.

아레와 푸리나만 남았다.

아니, 식탁 위의 물 한 잔과 빵 한 조각과 빈 의자도 남았다.

푸리나는 빈 의자를 보았다.

“저 의자는 누구 거야?”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의 자리란다.”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

“웃지 못한 사람. 먹지 못한 사람. 떠난 사람의 이름을 삼키고 있는 사람.”

아레는 아주 느리게 물잔을 푸리나 쪽으로 밀었다.

“혹은, 박수가 너무 커서 자기 침묵을 놓친 사람.”

푸리나는 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물은 평범했다.

빛나지도 않았다.

신술도 아니었다.

그냥 물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었어.”

“안다.”

아레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차갑지 않았다.

“나는 무너진 사람도, 겁먹은 사람도, 자기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시 무대 위로 올리고 싶었어.”

“그래.”

“그게 틀린 거야?”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다, 아이야.”

푸리나는 조금 놀라 그녀를 보았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네 박수는 잘못이 아니란다. 산 자가 웃어야 다시 밥을 삼킬 수 있는 밤도 있지. 네가 열어준 무대 덕분에, 고개를 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꼭 잡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럼 왜 여기로 온 거야?”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박수로 모든 침묵을 덮을 수는 없기 때문이란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정확했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식탁보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폈다.

“어떤 밤에는 웃음이 먼저 와야 한다. 웃지 않으면 살아남은 몸이 굳어버리는 밤이 있단다.”

“응.”

“하지만 어떤 밤에는,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레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았다.

슬픔이 오래 머문 사람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을 무기로 쓰지 않으려 애쓰는 지휘관의 눈이었다.

아레는 말했다.

“그런 밤에는 조명을 낮추렴.”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도 낮추렴.”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박수는 조금 뒤에 두렴.”

“그럼 나는 뭘 해?”

푸리나의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다.

“앉으렴.”

“앉아서?”

“기다리렴.”

“말은?”

“상대가 숨을 고를 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단다.”

푸리나는 식탁 위의 물잔을 보았다.

“노래는?”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늦게.”

“박수는?”

“더 늦게.”

푸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내가 할 게 없잖아.”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있단다.”

“뭔데?”

“떠나지 않는 것.”

푸리나는 숨을 멈추었다.

식탁보 위의 물잔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레는 푸리나를 아이처럼, 그러나 결코 낮추어 보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야. 무대 위에 세우는 일은 귀하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직 떨고 있다면, 그 떨림 곁에도 있어주어야 한단다.”

푸리나는 자신의 작은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조명을 좋아하던 장미.

하지만 어느 날,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하던 장미.

박수를 좋아했지만, 박수가 오래되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다고 말하던 장미.

>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푸리나는 그 말을 그때 이해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

주인공이 아닌 채로 쉬는 것.

그런 것도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늦게 배우고 있었다.

“아레.”

“말하렴.”

“나는 장미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하는 법을 몰랐어.”

“그럴 수 있단다.”

“그럼 내가 나빴던 거야?”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빵 한 조각을 작은 접시 위에 올렸다.

“나쁘다, 아니다로 너무 빨리 묶지 말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는 네가 줄 수 있는 것을 주었다. 박수와 조명과 이름. 그것은 가벼운 선물이 아니란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부족했지.”

“그래.”

아레는 피하지 않았다.

“부족했다.”

그 말은 칼처럼 들어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베이지는 않았다.

그 말 뒤에 아레가 다시 낮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배워야 한다.”

푸리나는 식탁보를 바라보았다.

흰 천.

물.

빵.

빈 의자.

너무 평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어떤 무대보다 어려워 보였다.

“이것도 극장의 일부일까?”

푸리나가 물었다.

아레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네 극장이 넓어지려 한다면.”

“넓어진다?”

“그래.”

아레는 빈 의자 곁에 손을 놓았다.

“박수가 울리는 무대만 극장이라면, 이곳은 극장이 아니겠지. 하지만 네가 부른 이들이 박수 뒤에 앉아 쉴 곳까지 품으려 한다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 침묵도 네 극장의 방 하나가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극장의 방.

박수가 없는 방.

아무도 보지 않아도 되는 방.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

막이 내린 뒤에도, 쫓겨나지 않는 자리.

푸리나는 자신의 표지판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이 표지판을 여기에도 걸 수 있을까?”

아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 수 있단다.”

“그럼 사람들이 올까?”

“어떤 이는 오고, 어떤 이는 오지 않겠지.”

“오지 않는 사람은?”

“기다리렴.”

“얼마나?”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네가 부른 사람이라면, 조금 더.”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

장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오늘은 박수도 조금 피곤해요.



그 말 뒤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렸다.

푸리나는 장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조명을 줄이려 했고, 박수를 조절하려 했고, 장면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장미가 말한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그냥 내려가고 싶다는 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쉬고 싶다는 말.

푸리나는 그걸 “장면 조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는 장미를 계속 무대 위에서만 고치려고 했어.”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푸리나가 스스로 다음 말을 하도록 남겨둔 것 같았다.

“장미가 내려오고 싶다고 했는데.”

“그렇구나.”

“나는 무대 위에서 더 편하게 해주려고 했어.”

“그랬구나.”

“그게 틀렸던 거네.”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기보다, 닿지 않은 것이란다.”

푸리나는 눈을 떴다.

아레는 말했다.

“네 박수는 장미에게 닿았다. 그래서 장미는 피었겠지. 하지만 어느 날 장미가 더 낮은 곳의 휴식을 청했다면, 그날의 박수는 거기까지 닿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그날은 내려가야지.”

“같이?”

아레는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그래. 아이야.”

그 말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푸리나는 식탁보 위에 표지판을 내려놓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흰 천 위에 그 문장이 놓이자, 그곳은 조금 덜 낯설어졌다.

푸리나는 두 번째 표지판도 꺼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표지판 옆에 놓았다.

아레는 그것을 보았다.

“좋은 약속이구나.”

“지킬 수 있을까?”

“항상은 어렵겠지.”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약속은 완벽한 자만 하는 것이 아니란다. 늦을 수 있음을 아는 자가, 늦으면 돌아와 말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도 하지.”

“늦으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늦었다고 말하렴.”

“그다음은?”

“물어보렴.”

“무엇을?”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그것은 대사가 아니었다.

선언도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푸리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

어둠이 조금 움직였다.

식탁보 너머에 아주 작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이기도 했고, 배우이기도 했고, 병사이기도 했고, 이름 없는 관객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박수를 받다가 멈춘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울다가 웃은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웃은 뒤 방으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식탁보 앞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서려 했다.

“내가—”

아레가 낮게 말했다.

“아이야.”

푸리나는 멈췄다.

“앉아 있으렴.”

“하지만 저 사람들이—”

“보았단다.”

“그럼 뭘 해야 해?”

“지금은 아무것도.”

그 말은 어려웠다.

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공백이었다.
관객의 불안을 부르는 침묵이었다.
서둘러 대사나 음악이나 웃음으로 채워야 하는 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여기서 침묵은 누군가 앉을 수 있도록 비워둔 자리였다.

그림자 하나가 식탁보 곁에 앉았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푸리나도 박수치지 않았다.

아레도 말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물을 마셨다.

빵을 조금 떼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숨을 골랐다.

그뿐이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여전히 노래하고 싶었다.

위로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레가 말했던 것처럼,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 밤을 처음으로 지켜보았다.

한참 뒤, 그림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 조금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이제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말해도 돼?”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푸리나는 그림자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막을 올리지 않을게.”

그림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을 이었다.

“대신 여기 있을게.”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것은 박수에 반응한 몸짓이 아니었다.

휴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작은 변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기립박수보다 더 조용하고 어려운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

시간이 흘렀다.

무대의 시간인지, 침묵의 시간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의 그림자가 일어나고, 다른 그림자가 앉았다.

어떤 이는 물만 마셨다.

어떤 이는 빵을 조금 먹었다.

어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그들 모두에게 노래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다.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에는 손이 어색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물뿌리개를 만지작거렸고, 표지판의 모서리를 문질렀고, 류트를 보고 싶어졌다.

아레는 그때마다 말없이 곁에 있었다.

가끔 아주 낮게만 말했다.

“조금 더 기다리렴.”

“목소리를 낮추렴.”

“그 이름은 아직 부르지 말거라.”

“지금은 물이면 된단다.”

그 말들은 명령 같기도 했고, 아이에게 밤길을 가르치는 낮은 안내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조금씩 배웠다.

침묵도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장면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연출자가 아니라,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

마지막 그림자가 일어났을 때, 식탁보 위의 빵은 조금 줄어 있었고, 물잔은 거의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아레.”

“말하렴.”

“이런 밤에도 마지막에는 박수를 쳐도 돼?”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 의자를 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그들이 원한다면.”

“내가 원하면?”

“그때는 조금 더 기다리렴.”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응.”

아레는 아주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야, 박수는 선물이란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선물은 받는 이가 손을 내밀 때 주는 편이 좋다.”

그 말에 푸리나는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

“전부 알 필요는 없단다.”

아레는 검은 숄을 정리했다.

“다만 오늘 밤에는, 그 정도면 되었다.”

푸리나는 식탁보 위의 두 표지판을 다시 들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는 거기에 세 번째 문장을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목탄을 들었다가 멈췄다.

아직 말이 너무 빨랐다.

아레는 그것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비워두어도 된단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레이튼도 그런 말 했어.”

“그 아이는 질문을 잘 두는 편이지.”

“너 레이튼한테도 아이야라고 해?”

아레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때로는.”

푸리나는 웃음을 참으려다 조금 실패했다.

아레의 입가에도 아주 희미한 온기가 스쳤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먼 기억이 잠깐 식탁가에 앉았다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

어둠 저편에서 그레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조용히 식탁보 쪽으로 다가왔다.

푸리나는 일어섰다.

“그레이.”

“네, 군주님.”

“나, 조금 알 것 같아.”

그레이는 푸리나의 표지판들을 보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푸리나는 식탁보를 돌아보았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극장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거.”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극장은 박수치는 곳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해.”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좋은 개정입니다.”

“개정?”

“군주님의 극장 운영 원칙에 대한 개정입니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행정 같아.”

“실제로 행정이 필요할 겁니다.”

“왜?”

그레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물과 빵, 의자와 담요, 그리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휴식도 예산이구나.”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레가 낮게 말했다.

“식탁은 저절로 차려지지 않는단다, 아이야.”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둘이 같이 말하니까 엄청 무섭네.”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렴.”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아니, 이건 좀 무서워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장미한테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졌잖아.”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서 묻는 것이 먼저란다.”

푸리나는 멈췄다.

“먼저?”

“그래.”

아레는 빈 의자를 접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두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또 다른 조명.

좋은 의도로 만든 방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또 다른 무대가 될 수 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물어볼게.”

그레이가 말했다.

“그리고 들으시면 됩니다.”

아레가 덧붙였다.

“서두르지 말렴.”

푸리나는 두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장미 정원의 붉은빛도 사라지고, 식탁보의 흰빛도 낮아졌다.

대신 멀리 사막의 모래빛이 다시 보였다.

슈샤니크가 있는 곳.

찢어진 지도선이 있는 곳.

푸리나가 처음 상자 속 양을 받은 곳.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아레는 여전히 식탁보 곁에 있었다.

“아레.”

“말하렴.”

“내 박수는…… 그래도 가져가도 돼?”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낮고, 조용하고, 조금 슬펐다.

“가져가렴.”

푸리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레는 말했다.

“필요한 밤이 올 것이다.”

잠시 침묵.

“다만 아이야.”

“응.”

“박수가 먼저인지, 물 한 잔이 먼저인지, 물어보는 것을 잊지 말렴.”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을게.”

아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검은 숄이 어둠과 섞였다.

푸리나는 그레이와 함께 사막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표지판이 마음속에 생겨 있었다.

어쩌면 그 문장은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하지만 푸리나는 아직 적지 않았다.

그 말은 장미에게 직접 물어본 뒤에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지도 위의 장미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
4막 — 지도 위의 장미

—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

사막은 처음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처음의 사막은 끝없이 넓었다.
지도를 삼키고, 발자국을 지우고, 방향이라는 말을 조롱하듯 모든 곳을 같은 색으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사막은 달랐다.

여전히 넓었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이제 그 침묵 속에서 조금 다른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길 위의 물통.

서재의 질문.

등불 아래의 표지판.

장미 정원의 바람.

식탁보 위의 물 한 잔.

그 모든 것이 사막의 모래 사이에 아주 얇은 선처럼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그레이와 함께 걸었다.

손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문장이 마음속에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직 적지 않았다.

아레가 말했기 때문이다.

>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그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또 다른 조명.

선의로 비춘 빛이라도, 상대가 눈을 감고 싶어 하는 밤에는 피로가 될 수 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게 되지는 않았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군주님.”

“응.”

“사막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 추락한 지도선이 보였다.

은실 날개는 여전히 부러져 있었고, 관측판은 반쯤 모래에 묻혀 있었다. 찢어진 지도 조각들이 작은 돌에 눌려 놓여 있었고, 그 곁에 슈샤니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도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조각과 조각 사이에는 맞지 않는 틈이 많았다.

어떤 강은 중간에서 끊겼고, 어떤 산맥은 갑자기 사라졌으며, 어떤 도시 이름은 절반만 남았다.

슈샤니크는 그 틈을 억지로 메우지 않았다.

그저 조각들이 어디까지 맞고, 어디서부터 맞지 않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았다.

“지도는 아직도 안 고쳐졌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지도는 고쳐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전하.”

“그럼?”

“덜 틀리게 만드는 물건에 가깝지요.”

푸리나는 입을 살짝 삐죽였다.

“역시 시작부터 어렵네.”

슈샤니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피곤해 보였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돌아오셨군요.”

“응.”

푸리나는 사막 위에 앉았다.

그레이는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슈샤니크가 그레이를 보았다.

“여우께서도 돌아오셨군요.”

그레이가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

“오늘은 그 배역이었습니다.”

“좋은 귀입니다.”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레이, 그 평가는 기록해도 돼?”

“하지 않겠습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래서, 작은 전하.”

“이번엔 또 작은 전하야?”

“이번 극에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추락한 지도 제작자여.”

“예, 작은 전하.”

푸리나는 표지판 두 개를 내려놓았다.

슈샤니크는 그것들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의 시선이 두 번째 문장에서 아주 잠깐 멈추었다.

“무언가 배우셨군요.”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박수가 끝난 뒤의 길을 보여줬어. 일어난 사람이 어디로 걸어갈지도 봐야 한다고 했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조스타 경다운 정확한 말이군요. 화려하지 않아서 더 위험합니다.”

“레이튼은 질문했어. 객석이 비어도 무대냐고. 배우가 내려간 뒤의 방도 극장의 일부냐고.”

“그분은 늘 결론의 의자를 빼는 데 능하지요.”

“하융은 길을 보여줬어. 무대와 여관은 닮았지만 같지 않다고 했어. 무대는 사람을 보이게 하고, 여관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게 한다고.”

슈샤니크의 손이 지도 위에서 멈추었다.

그 말은 그녀에게 조금 깊게 들어간 듯했다.

“좋은 말입니다.”

“그레이는 길들인다는 걸 말해줬어. 같은 시간에 찾아가고, 어제랑 필요한 게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거라고.”

슈샤니크는 그레이를 보았다.

“정확하고 잔인하게 현실적인 정의군요.”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현실적이려고 했습니다.”

“성공하셨습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아레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식탁보.

물.

빵.

빈 의자.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아레는 박수와 침묵 사이의 자리를 보여줬어.”

슈샤니크는 조용히 들었다.

푸리나는 손을 내려 표지판을 살짝 만졌다.

“내 박수가 틀린 건 아니라고 했어.”

“그랬습니까.”

“응. 하지만 어떤 밤에는 조명을 낮추고, 박수도 늦게 두라고 했어.”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 하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레 경다운 말입니다.”

“그리고 빈 의자 곁에 앉아 있으라고 했어.”

푸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지 못했다.

“그건…… 생각보다 어려웠어.”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평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빈 의자.

말하지 못한 이름.

돌아오지 못한 사람.

지도 위에서만 남은 장소.

푸리나는 그 침묵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의 별에도 장미가 있었어?”

그 질문은 사막에 작게 떨어졌다.

그레이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도에는 있었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지도에 있으면 돌아갈 수 있어?”

슈샤니크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지도만으로는 부족하네.”

그 말에 슈샤니크의 손이 멈췄다.

바람이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가 들썩였지만, 슈샤니크는 바로 누르지 못했다.

푸리나는 자신이 너무 아픈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

슈샤니크는 한참 뒤에 말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아팠지?”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때때로 단순한 말로 오래된 문을 여시는군요.”

“그거 칭찬이야?”

“오늘은 칭찬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슈샤니크는 날아가려던 지도 조각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지도 위의 꽃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물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조명이 밝다고 말하지도 않고, 박수가 피곤하다고 투덜거리지도 않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처음에는 편합니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빈 곳을 보았다.

“아주 편합니다. 더는 설득할 필요가 없고, 더는 기다릴 필요도 없고, 더는 밤마다 덮개를 씌워주러 갈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은 정중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한 조각을 들어 올렸다.

그 조각에는 포도밭을 뜻하는 작은 표시가 있었다.
반쯤 지워진 십자가 표시.
이름의 일부만 남은 마을.
그리고 작은 꽃 모양의 잉크 자국.

“침묵한 꽃은 예의 바릅니다.”

푸리나는 숨을 멈추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너무 예의 바릅니다. 결코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조명이 싫다고 하지도 않고, 바람이 찼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군주가 늦었다고 말하지도 않지요.”

그녀는 지도 조각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그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만이 오래 지나갔다.

마침내 푸리나가 말했다.

“나는 아직 장미가 투덜거려.”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자기 말을 확인하듯 다시 말했다.

“내 장미는 아직 투덜거려. 박수가 싫다고 하고, 조명이 밝다고 하고,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 없다고 하고…… 아마 내가 돌아가면 늦었다고도 하겠지.”

“그럴 것입니다.”

“그럼 다행인 거네.”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울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예전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박수를 준비하는 눈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는 눈이었다.

슈샤니크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예.”

잠시 침묵.

“그것은 다행입니다.”

그 대답은 아주 작았다.

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은 말이었다.


---

푸리나는 지도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 장미는 어디 있었어?”

슈샤니크는 푸리나가 가리킨 지도 조각을 보았다.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여러 곳?”

“전하의 장미처럼 한 송이는 아니었습니다.”

슈샤니크는 천천히 설명했다.

“어떤 장미는 문 앞의 포도나무였고, 어떤 장미는 아이들이 물을 뜨러 가던 우물이었고, 어떤 장미는 예배가 끝난 뒤 나누던 빵이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조각을 짚었다.

“어떤 장미는 언젠가 돌아가면 다시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름이었고.”

또 다른 조각.

“어떤 장미는 세금을 덜어주면 한 해 더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마을이었고.”

마지막 조각.

“어떤 장미는 제가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잠자리였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표지판을 꼭 쥐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 문장들이 갑자기 너무 늦은 약속처럼 보였다.

슈샤니크는 푸리나의 표정을 보았다.

“전하.”

“응.”

“제 지도를 보고 전하의 장미를 미리 장례 치르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슈샤니크의 말은 정중했지만 날카로웠다.

“제 별의 이야기는, 전하의 별에 내리는 판결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니요.”

슈샤니크는 조용히 말을 끊었다.

“비극은 쉽게 보편이 되려 합니다. 한 번 불탄 사람은 모든 등불을 화재의 전조로 읽고 싶어지지요.”

그녀는 자신의 찢어진 지도를 보았다.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늘 옳은 일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침묵했다.

슈샤니크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의 장미는 아직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푸리나의 표지판으로 내려갔다.

“투덜거리고, 요구하고, 피곤하다고 말하고, 조명이 밝다고 말하고 있지요.”

“응.”

“그렇다면 돌아가십시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슈샤니크는 분명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전하.”

그 말은 마치 지도 위에 못을 박는 것 같았다.

“침묵한 꽃은 예의를 지키지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푸리나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레이가 한 걸음 다가오려 했지만, 멈췄다.

푸리나는 스스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돌아가면…… 뭘 해야 할까?”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걸 제게 물으십니까?”

“응.”

“저는 돌아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물어볼래.”

슈샤니크는 아주 잠시 말문을 잃었다.

푸리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슈샤니크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푸리나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먼저 늦었다고 말하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변명은 뒤에 두십시오.”

“그리고?”

“장미가 먼저 불평하게 두십시오.”

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건 어려운데.”

“그럴 겁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군주는 대개 자기 설명을 먼저 하고 싶어 하니까요.”

“그건 맞아.”

“하지만 이번에는 늦게 하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은?”

슈샤니크는 푸리나가 들고 있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묻는 겁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냐고?”

슈샤니크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좋은 질문입니다.”

“아직 표지판에는 안 썼어.”

“잘하셨습니다.”

“왜?”

“그 질문은 장미 앞에서 처음 나와야 할 것 같군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사막의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다.

슈샤니크는 지도선 쪽을 보았다.

부러진 은실 날개.

금 간 관측판.

말라버린 물통.

그리고 찢어진 지도.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슈샤니크가 푸리나를 보았다.

“저 말입니까?”

“응.”

“지도선을 고쳐야지요.”

“돌아가려고?”

“적어도 여기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슈샤니크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덜 틀린 지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찢어진 지도 조각을 하나 집었다.

“내가 도와줄까?”

슈샤니크는 곧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푸리나의 손을 보았다.

물뿌리개를 들던 손.

류트를 잡던 손.

표지판을 쓰던 손.

그리고 아직 지도 조각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 손.

“찢어진 지도를 다루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나 조명도 다루고 커튼도 접어.”

“그 점은 큰 도움이 될 수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럼 배울게.”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작은 지도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이 조각은 가장자리에 두십시오. 가운데가 아닙니다.”

“왜?”

“모든 조각을 중심에 놓으면 지도는 다시 찢어집니다.”

푸리나는 손을 멈추었다.

그 말이 너무 직접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모든 장미를 무대 중앙에 세우면, 무대 중앙이라는 말이 이상해진다.

모든 조각을 중심에 놓으면, 지도는 다시 찢어진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지도 조각을 가장자리에 놓았다.

“여기?”

“조금 왼쪽입니다.”

“여기?”

“조금 더.”

“여기?”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푸리나는 만족한 듯 웃었다.

“지도도 무대 배치랑 비슷하네.”

“그런 말을 들으면 지도 제작자들이 불쾌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저는 조금 불쾌합니다.”

“하지만 맞는 것 같지 않아?”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들을 보았다.

잠시 뒤, 아주 낮게 말했다.

“조금은.”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사막의 공기를 아주 조금 밝게 했다.

하지만 슈샤니크는 이번에는 그 웃음을 피하지 않았다.


---

그레이는 뒤에서 조용히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푸리나와 슈샤니크.

작은 별의 왕과 추락한 지도 제작자.

아직 투덜거리는 장미를 가진 군주와, 지도 위의 장미만 남은 어른.

두 사람은 한동안 지도 조각을 맞추었다.

완성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완성될 수 있는 지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조각은 서로 이어졌다.

끊겼던 강줄기 하나가 다시 연결되었다.

폐허가 된 성벽의 일부가 제자리를 찾았다.

이름이 반만 남았던 마을 옆에, 푸리나가 작은 점을 찍었다.

슈샤니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방금 무엇을 하셨습니까?”

“여기 쉬어갈 곳 표시.”

“그곳에 실제 여관이 있습니까?”

“아직 없지.”

“그렇다면 지도상 허위 기재입니다.”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예정지라고 해.”

슈샤니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작게 숨을 삼켰다.

푸리나는 목탄으로 점 옆에 아주 작은 표시를 덧붙였다.

예정.

슈샤니크는 그것을 보았다.

한참 동안.

그리고 지우지 않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났어?”

“아닙니다.”

“그럼?”

슈샤니크는 천천히 말했다.

“오래전에 제가 너무 쉽게 지웠던 단어입니다.”

“예정?”

“예.”

슈샤니크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무언가를 다시 세우겠다는 말. 누군가를 다시 맞이하겠다는 말. 내년에도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믿는 말.”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작은 예정 표시를 손끝으로 눌렀다.

“전하께서는 그런 말을 쉽게 쓰시는군요.”

푸리나는 조금 움츠러들었다.

“나쁘게 들려?”

“아니요.”

슈샤니크는 고개를 저었다.

“부럽게 들립니다.”

그 말은 작았다.

그러나 사막 전체가 들은 것 같았다.

푸리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지우지 말자.”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목탄을 들어, 그 옆에 더 작은 글씨를 썼다.

검토 필요.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슈샤니크답다.”

“무분별한 예정은 예산을 파괴합니다.”

“그래도 예정은 남아 있잖아.”

“검토가 붙었습니다.”

“그건 괜찮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예정 사항으로 관리하면 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너 지금 내 편이야, 슈샤니크 편이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예산의 편입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슈샤니크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찢어진 지도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뒤에도, 지도 조각 하나가 조금 덜 차가워 보였다.


---

조금 뒤, 지도선의 은실 날개가 바람에 흔들렸다.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전하께서 돌아가셔야 할 시간이군요.”

푸리나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응.”

그녀는 두 표지판을 챙겼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세 번째 문장.

아직 쓰지 않은 질문.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돌아가면, 아마 꽃은 전하를 반기지 않을 겁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

“늦었다고 말하겠지요.”

“응.”

“박수는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알아.”

“조명이 싫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에도 가시겠습니까?”

푸리나는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왜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별을 떠올렸다.

조명탑 셋.

커튼.

의자.

대본 덩굴.

그리고 장미.

자기가 조명을 비춘 장미.

하지만 조명이 없어도 살아 있는 장미.

자기 무대의 주인공이었지만, 동시에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어야 했던 장미.

푸리나는 말했다.

“내가 같은 시간에 돌아가야 할 장미니까.”

슈샤니크는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그녀는 찢어진 지도 뒷면에서 처음 그려주었던 상자 속 양을 꺼냈다.

그 종이는 사막 바람에 조금 구겨져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걸 가져가도 돼?”

“애초에 전하의 양입니다.”

“상자잖아.”

“전하께서 좋아하셨습니다.”

“응.”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보았다.

보이지 않기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양.

아직 장미를 먹지 않은 양.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가능성.

슈샤니크는 말했다.

“전하.”

“응?”

“상자 안의 양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왜?”

“상자도 열어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슈샤니크는 덧붙였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전할 수도 있지만, 방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러니 돌아가시면, 양보다 먼저 장미를 보십시오.”

“그리고 물어보고.”

“예.”

슈샤니크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직 빈 세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쓰실 겁니까?”

푸리나는 목탄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왜입니까?”

“장미 앞에서 처음 말할 거야.”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 질문은, 지도보다 먼저 도착해야 할 것 같군요.”


---

푸리나는 사막 끝으로 걸어갔다.

그레이가 곁에 섰다.

“같이 가줄 거야?”

그레이는 말했다.

“문턱까지는요.”

푸리나는 그 대답에 조금 웃었다.

“다들 문턱까지만이래.”

“그다음은 군주님께서 하셔야 하니까요.”

“알아.”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돌아보았다.

슈샤니크는 지도선 옆에 서 있었다.

찢어진 지도 조각들이 그녀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에는 이제 작은 표시가 남아 있었다.

예정.

그 옆에 더 작은 글씨.

검토 필요.

푸리나는 손을 흔들었다.

“나 다녀올게.”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전하.”

푸리나는 크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너무 크게 받을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별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걸었다.

무대 위 사막빛이 천천히 낮아졌다.

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조명탑 셋.

작은 커튼.

해가 지는 의자.

그리고 장미.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무대 뒤 간판이 떠올랐다.

5막 — 장미가 쉬는 법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5막 — 장미가 쉬는 법

—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

작은 별은 여전히 작았다.

너무 작아서 조명탑 세 개가 별의 절반을 차지했고, 커튼 하나를 잘못 접으면 길을 막았다.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해가 지는 장치도 그대로였고, 바닥 한쪽에는 아직 뽑지 못한 대본 덩굴의 작은 싹이 올라와 있었다.

푸리나는 별 가장자리에 섰다.

손에는 상자 속 양이 그려진 종이.

품에는 두 개의 표지판.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문장.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그러나 그 문장은 아직 표지판 위에 있지 않았다.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는 무대 중앙에 있었다.

예전처럼 조명 아래에 있었지만, 어쩐지 조금 피곤해 보였다. 꽃잎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으나, 활짝 펴져 있지도 않았다. 줄기는 꼿꼿했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얇은 가시가 작게 흔들렸다.

푸리나는 본능적으로 조명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명을 조금 더 부드럽게.

아니, 장미가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지만 손이 멈췄다.

아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그 대신 장미 앞에 한 걸음 다가갔다.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 “내가 멋진 극을 준비해왔어.”



아니.

> “네가 쉴 수 있는 방을 만들었어.”



아니.

> “이제 알았어.”



그것도 아니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아주 작게 말했다.

“늦었지.”

장미의 꽃잎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늦었네요.”

예상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아팠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늦었어.”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금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아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나요?”

푸리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죠니의 길을 봤고.

레이튼의 질문을 들었고.

하융의 등불을 따라 걸었고.

그레이에게 길들임을 배웠고.

아레의 식탁보 앞에 앉았고.

슈샤니크의 지도 위 장미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러나 슈샤니크가 말했었다.

> 변명은 뒤에 두십시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응.”

장미는 예상하지 못한 듯 꽃잎을 살짝 떨었다.

“그냥 인정하나요?”

“응.”

“이상하네요.”

“나도 그래.”

장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류트도 내려놓았다.

작은 왕관도 벗어서 조심스럽게 바닥에 두었다.

장미가 물었다.

“왕관은 왜 내려놓나요?”

“오늘은 먼저 왕으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럼 뭘로 말하나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늦은 사람.”

장미는 아주 작게 웃은 것 같았다.

꽃잎 한 장이 미세하게 열렸다.

“정확하네요.”

“응.”

푸리나는 장미 앞에 앉았다.

무대 중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중앙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장미보다 높게 서지도 않았다.

그냥 앉았다.

장미는 그 모습을 한동안 보았다.

“박수는요?”

“없어.”

“조명은요?”

“네가 원하면 낮출게.”

“노래는요?”

푸리나는 류트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장미를 보았다.

“나중에. 네가 듣고 싶으면.”

장미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불편했다.

푸리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식탁보 앞에서 배운 것처럼.

상대가 숨을 고를 때까지.

조금 더.

조금 더.

마침내 장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무대가 싫은 게 아니었어요.”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장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처음엔 좋았어요. 조명이 닿으면 내가 정말 피어난 것 같았고, 박수를 들으면 내가 혼자가 아닌 것 같았어요.”

“응.”

“당신이 나를 주인공이라고 불렀을 때, 조금 기뻤어요.”

푸리나는 가만히 들었다.

“하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장미는 꽃잎을 조금 접었다.

“매일 예뻐야 하잖아요.”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장미는 계속 말했다.

“매일 피어 있어야 하고, 매일 웃는 것처럼 보여야 하고, 매일 관객이 보기에 괜찮은 꽃이어야 해요.”

바람이 지나갔다.

장미의 가시가 작게 떨렸다.

“나는 가끔 그냥 꽃이고 싶었어요.”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냥 꽃.

주인공도, 상징도, 공연의 중심도, 박수의 이유도 아닌.

그저 바람을 느끼고, 물을 마시고, 조금 시들었다가 다시 피어날 수 있는 꽃.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미안해.”

장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미워하나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망했나요?”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나요?”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내가 네가 좋아하는 것만 보려고 했던 것 같아서.”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네가 박수받을 때 피어나는 건 봤어. 조명 아래서 아름다운 것도 봤어. 그런데 네가 박수 뒤에 지치는 건…… 늦게 봤어.”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손에 든 첫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장미가 그것을 보았다.

“그건 뭔가요?”

“길에서 배운 말.”

“누구에게요?”

“죠니, 레이튼, 하융. 그리고…… 모두에게 조금씩.”

푸리나는 표지판을 장미 곁에 세웠다.

“네가 주인공이 되기 싫은 날에는 내려와도 돼.”

장미는 표지판을 오래 보았다.

“내가 내려오면 무대는요?”

“기다릴게.”

“관객은요?”

“돌려보낼게.”

“당신은요?”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대답했다.

“같이 내려갈게.”

장미의 꽃잎이 조금 떨렸다.

푸리나는 두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이건?”

“그레이가 준 말.”

“그레이는 누구죠?”

“막이 내린 뒤에도 남은 걸 보는 사람.”

“그럼 좋은 사람이네요.”

“응. 좋은 사람이야.”

푸리나는 표지판을 첫 번째 표지판 옆에 세웠다.

“내가 매일 완벽하게 올 수는 없을지도 몰라.”

장미가 바로 말했다.

“그럼 약속이 아니잖아요.”

“맞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늦으면 늦었다고 말할게. 못 오면 못 온다고 말할게. 그리고 돌아오면, 변명보다 먼저 네 말을 들을게.”

장미는 푸리나를 보았다.

“정말요?”

“응.”

“정말 먼저 들을 건가요?”

“응.”

“내가 오래 투덜거려도요?”

푸리나는 잠깐 웃을 뻔했다.

그러나 웃음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장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오늘은…….”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드디어 그 질문을 해야 할 때였다.

아직 표지판에 쓰지 않은 말.

지도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는 질문.

푸리나는 장미를 보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장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대 전체가 조용해졌다.

객석도, 무대 뒤도, 별의 바람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장미는 아주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기다렸다.

이번에는 기다렸다.

류트를 만지지 않았다.

조명을 조정하지 않았다.

박수를 부르지 않았다.

그냥 장미 앞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장미가 말했다.

“오늘은…….”

꽃잎이 조금 열렸다가 다시 접혔다.

“조명을 낮춰주세요.”

푸리나는 곧바로 손을 움직이려다가 멈췄다.

“얼마나?”

장미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보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나를 보지는 않을 정도로요.”

푸리나는 천천히 조명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명은 조금씩 낮아졌다.

장미는 더 이상 무대 전체의 중심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

“이 정도?”

“조금 더요.”

푸리나는 조금 더 낮췄다.

“이 정도?”

장미는 꽃잎을 아주 조금 열었다.

“네.”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또?”

“박수는 필요 없어요.”

“응.”

“노래도요.”

푸리나는 류트를 보았다.

“응.”

“하지만…….”

장미는 아주 작게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조금 무서울 것 같아요.”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는 부끄러운 듯 꽃잎을 접었다.

“내가 조용히 있고 싶다고 했다고 해서, 완전히 혼자 있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푸리나는 가슴이 아렸다.

“그럼?”

“조용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떤 이야기?”

“관객이 웃어야 하는 이야기는 말고요.”

푸리나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야기는 대개 관객을 향했다.

웃음을 유도하고, 박수를 만들고, 장면을 넘기기 위해 설계된 이야기.

하지만 장미가 원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그럼 오늘 길에서 본 걸 말해줄게.”

“길?”

“응. 박수가 끝난 뒤의 길.”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푸리나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죠니의 별에서 본 쉼터.

물 있음.

잠시 앉아도 됨.

주인공에서 내려와도 됨.

레이튼의 질문.

객석이 비어도 무대인가.

하융의 등불.

말하지 않아도 됨.

장미 정원의 수많은 장미.

각자의 별과, 각자의 밤과, 각자의 무대.

그레이 여우의 말.

같은 시간에 찾아가고, 필요한 것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것.

아레의 식탁보.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

그리고 슈샤니크의 지도 위 장미.

침묵한 꽃은 너무 예의 바르고, 그래서 더 아프다는 말.

장미는 오래 들었다.

가끔 꽃잎이 흔들렸다.

가끔 가시가 미세하게 떨렸다.

푸리나는 이야기하면서도, 장미의 반응을 보았다.

피곤해 보이면 멈추고.

듣고 있는 것 같으면 조금 더 이어갔다.

그것은 공연과 달랐다.

이야기의 길이를 관객의 박수가 아니라, 장미의 숨으로 재는 일이었다.

마지막에 푸리나는 말했다.

“그래서 돌아왔어.”

장미는 조용히 물었다.

“나를 다시 무대에 세우려고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요?”

푸리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오늘은 그냥, 네가 쉬는 법을 물어보려고.”

장미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늦었네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늦었어요.”

“응.”

“그래도…….”

장미는 더 작게 말했다.

“오늘은 괜찮아요.”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마워.”

“아직 용서한 건 아니에요.”

“응.”

“내일 아침 인사는 제때 해주세요.”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크게 웃지는 않았다.

조용히, 정말 조용히 웃었다.

“응. 내일 같은 시간에 올게.”

장미는 말했다.

“조명은 아침에는 조금 더 밝아도 돼요.”

“응.”

“하지만 박수는 묻고 나서요.”

“응.”

“그리고 물은 너무 많이 주지 마세요.”

“응.”

“그리고…….”

푸리나는 기다렸다.

장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곁에 있어주세요.”

푸리나는 대답했다.

“응. 여기 있을게.”

그 말은 극적인 선언이 아니었다.

무대 전체를 울리는 대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별 위에서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장미 곁에 앉았다.

류트는 바닥에 놓여 있었다.

왕관도 내려놓은 채였다.

조명은 낮았고, 박수는 없었다.

그날 밤, 작은 별의 무대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이 되었다.

장미는 쉬었다.

푸리나는 떠나지 않았다.


---

시간이 흘렀다.

해가 지는 의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작은 별 위에 밤이 내려왔다.

푸리나는 장미 곁에 유리 덮개를 가져왔다.

장미가 말했다.

“그건 너무 답답해요.”

푸리나는 멈췄다.

“그럼 안 씌울까?”

“바람은 차요.”

“그럼 어떻게 할까?”

장미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열어둬요.”

푸리나는 유리 덮개를 기울여 세웠다.

바람이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지만, 직접 닿지도 않았다.

“이렇게?”

“조금만 더.”

푸리나는 각도를 조정했다.

“이렇게?”

“네. 그 정도요.”

푸리나는 손을 떼었다.

유리 덮개는 비스듬히 놓였다.

완벽하게 보호하지도 않았고, 완전히 열어두지도 않았다.

어중간했다.

하지만 장미는 조금 편안해 보였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깨달았다.

휴식은 종종 어중간한 각도를 찾는 일이었다.

완전히 보이지 않게 숨기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덮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방치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조금씩 묻고, 조금씩 조정하는 일.

그레이가 말한 것처럼.

같은 시간에 찾아갔을 때, 필요한 것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일.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이거 어렵네.”

장미는 조금 새침하게 대답했다.

“제가 쉬는 일이 그렇게 쉬울 줄 알았나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니. 이제는 안 그래.”

“다행이네요.”

“응. 다행이야.”

밤이 조금 더 깊어졌다.

작은 별의 조명탑은 꺼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낮게 빛났다.

무대가 아니라 방처럼.

관객을 부르는 빛이 아니라, 누군가 길을 잃지 않도록 남겨둔 불빛처럼.

푸리나는 그 빛을 보며, 빈 세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장미가 물었다.

“또 표지판인가요?”

“응.”

“이번엔 뭐라고 쓸 건가요?”

푸리나는 목탄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적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장미는 그것을 보았다.

“존댓말이네요.”

“응. 이건 누구에게나 걸어둘 표지판이니까.”

“나한테는요?”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너한테는 직접 물어볼게.”

장미는 만족한 듯 꽃잎을 조금 열었다.

“그게 좋겠어요.”

푸리나는 세 번째 표지판을 첫 번째, 두 번째 표지판 곁에 세웠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세 개의 표지판은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별의 무대는 그 표지판들 때문에 전보다 조금 넓어진 것 같았다.

아니.

무대가 넓어진 것이 아니라, 무대 밖의 방이 생긴 것 같았다.

푸리나는 장미 곁에 앉아 밤을 지켰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그래서 장미는 조금 더 오래 쉬었다.


---

무대가 천천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작은 별의 낮은 조명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빛 아래에서 푸리나는 잠들지 않았다.

장미도 완전히 잠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둘은 가끔 아주 작은 말을 주고받았다.

“바람 괜찮아?”

“조금 차요.”

“덮개 더 기울일까?”

“조금만요.”

“이렇게?”

“네.”

또 한참 침묵.

“푸리나.”

“응?”

“내일도 올 건가요?”

“응.”

“같은 시간에요?”

“응.”

“늦으면요?”

“늦었다고 말할게.”

장미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 기다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박수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박수보다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혹은 극 자체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작은 왕은 장미에게 돌아왔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이번에는, 장미를 다시 무대 위에 세우기 전에 물었습니다.”

별빛이 낮게 흔들렸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으냐고.”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무대 뒤 간판이 떠올랐다.

후일담 — 막이 내린 뒤 쉬어가는 방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방 —
후일담 — 막이 내린 뒤 쉬어가는 방

—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방 —

공연이 끝난 뒤에도, 푸리나는 곧바로 객석의 불을 켜지 않았다.

작은 별은 천천히 내려왔고, 조명탑 세 개는 하나씩 꺼졌다. 장미는 더 이상 무대 중앙의 주인공처럼 빛나지 않았다. 낮은 불빛 아래, 그저 한 송이 꽃처럼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게 안심되었다.

푸리나는 장미 곁에 세워두었던 세 개의 표지판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세 문장은 모두 화려하지 않았다.

극의 제목처럼 웅장하지도 않았고, 왕명처럼 단단하지도 않았다. 박수를 부르는 문장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푸리나는 이 문장들이 자신의 어떤 칭호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죠니가 객석에서 걸어 내려왔다.

“여왕님, 그 표지판 진짜로 설치할 거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극장에?”

“극장 뒤에.”

“무대 뒤편 창고?”

“창고 아니야.”

푸리나는 조금 진지하게 말했다.

“방.”

죠니는 눈을 깜박였다.

“방?”

“막이 내린 뒤 쉬어가는 방.”

그레이가 조용히 다가왔다.

“상시 운영하실 생각이십니까?”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상시 운영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어려워졌어.”

“물, 의자, 담요, 등불, 환기, 청소, 이용 기록, 출입 관리가 필요합니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그레이, 여왕님 감동 중이잖아. 예산표를 너무 빨리 들이밀지 말자.”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감동도 관리가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너무 맞아서 싫어.”

레이튼이 책을 들고 다가왔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경계했다.

“또?”

“이 방은 극장입니까, 여관입니까?”

하융이 등불 하나를 들고 뒤따라왔다.

“쉬어가는 이가 있으면, 길 위의 작은 여관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극장 안의 여관, 혹은 여관처럼 기능하는 막간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죠니가 손을 들었다.

“이름이 길면 아무도 못 쉬어.”

푸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막이 내린 뒤 쉬어가는 방’으로 할래.”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칭은 명확합니다.”

죠니는 웃었다.

“좋네. 여왕님, 드디어 아무것도 안 하는 방을 만들었네.”

푸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방이야.”

그 말에 모두가 잠깐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틈을 농담이나 선언으로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침묵이 방의 첫 번째 가구처럼 느껴졌다.


---

방은 아주 작았다.

극장 뒤편, 원래는 여분의 커튼과 낡은 의자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푸리나는 커튼을 접어 한쪽에 치우고, 먼지를 털고, 낮은 등불을 하나 걸었다.

의자 하나.

물 한 잔.

담요 하나.

작은 탁자.

창문 옆에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두꺼운 천.

그리고 문 옆에는 세 개의 표지판.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죠니는 방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푸리나는 팔짱을 꼈다.

“너무 없나?”

“아니. 나쁘지 않아.”

죠니는 의자 등받이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는 누가 멋진 말을 하라고 재촉하지 않을 것 같거든.”

그레이는 물잔을 확인했다.

“물은 매번 새로 갈아야 합니다.”

“응.”

“담요는 주기적으로 말려야 합니다.”

“응.”

“등불은 너무 밝지 않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장미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중요해.”

레이튼은 표지판을 보며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 좋군요. 대답을 미리 정하지 않는 방이라는 뜻입니다.”

하융은 문턱을 보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도 좋겠구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다.”

그녀는 작은 나무판 하나를 더 가져와 문턱 옆에 놓았다.

신발은 벗어도 됨.

죠니가 웃었다.

“방이 점점 표지판으로 가득 차는 거 아니야?”

푸리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너무 많으면 쉬기 힘드나?”

그레이가 대답했다.

“필요한 문구만 남기는 편이 좋습니다.”

푸리나는 나무판을 들고 고민하다가, 문구를 조금 바꿨다.

신발을 벗고 싶으면, 여기 두세요.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 낫네. 명령 같지 않아서.”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아레는 조금 늦게 왔다.

검은 숄을 두른 채, 방 입구에서 조용히 멈추었다.

푸리나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

“어때?”

아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의자.

물.

담요.

낮은 등불.

표지판.

그리고 아무도 박수치지 않는 공기.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좋구나, 아이야.”

푸리나는 살짝 어깨를 폈다.

“정말?”

“그래.”

아레는 빈 의자 옆에 손을 얹었다.

“박수가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방이란다.”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레는 덧붙였다.

“웃음이 필요한 밤에는 웃게 해주렴. 하지만 이런 방도 남겨두렴. 슬픔이 신발을 벗고 앉을 자리도 있어야 하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낮은 등불을 한 번 보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 짧은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

슈샤니크는 가장 마지막에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를 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조각을 알아보았다.

사막에서 예정이라고 적었던 작은 표시가 있는 지도 조각이었다.

그 옆에는 슈샤니크가 덧붙인 글씨가 있었다.

검토 필요.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거 가져왔어?”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보관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지도 보관소가 아니라?”

슈샤니크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도 보관소에 넣기에는 아직 조금…… 숨이 가쁜 조각입니다.”

그 표현이 이상하게 슈샤니크다웠다.

푸리나는 선반을 가리켰다.

“저기 둬도 돼.”

슈샤니크는 선반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는 지도 조각을 바로 내려놓지 않았다.

마치 그것을 놓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것처럼.

푸리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천천히 지도 조각을 접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찢어진 부분이 더 갈라지지 않도록.

그리고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잊는 것도 아닙니다.”

“응.”

“다만 오늘 밤은 펼쳐두지 않겠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도 쉬는 거겠지.”

슈샤니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아주 희미하게 말했다.

“아마도요.”

그때였다.

작은 노크 소리 후, 잠시 뒤 방의 문이 아주 조용히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배우도 아니고, 관객도 아니고, 왕도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여관 주인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의자 하나.

물 한 잔.

담요 하나.

낮은 등불 하나.

문턱 옆의 신발 자리.

그리고 선반 위의 접힌 지도.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관좌?”

여관의 성좌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문이 열려 있기에 들렀습니다.”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신이 방문할 때도 노크는 하는구나.”

여관좌는 그 말을 듣고도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남의 방에 들어올 때는, 신도 예외가 되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아직 제대로 된 방은 아니야. 의자도 하나뿐이고, 물도 한 잔이고, 담요도 그냥 남는 걸 가져온 거고…….”

여관좌는 물잔 옆에 손을 얹었다.

“좋은 방을 마련하셨군요.”

푸리나는 멈칫했다.

“그거 칭찬이야?”

“예.”

여관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여관에서는, 그런 말을 칭찬이라고 부릅니다.”

푸리나는 괜히 왕관을 만지려다, 지금 왕관을 쓰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손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 방 하나뿐인데.”

“모든 여관은 처음부터 큰 간판을 달지는 않습니다.”

여관좌는 낮은 등불을 보았다.

“처음에는 보통 이런 것에서 시작하지요. 의자 하나. 식지 않은 물. 너무 밝지 않은 불. 그리고 손님이 짐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허락.”

그는 문 옆의 표지판을 읽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전하께서는 늘 손님을 무대 위로 안내하는 법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얼어붙은 몸을 일으키는 박수도 있고, 길 잃은 사람에게 다시 자기 이름을 들려주는 노래도 있습니다. 그런 밤에는 전하의 극장이 훌륭한 등불이 되지요.”

여관좌는 이번에는 의자를 보았다.

“오늘은 그 등불이 조금 낮아졌군요.”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여관좌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손님이, 신발을 벗을 자리를 보셨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답이다”라는 평가가 아니었다.

“이제 완성되었다”는 선언도 아니었다.

그저 여관 주인이 새로 놓인 의자를 보고, 그 의자에 손님이 앉을 수 있겠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따뜻했다.

여관좌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은 성장입니다, 작은 여관지기님.”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나 여왕인데.”

“예.”

여관좌는 잔잔히 웃었다.

“그래서 더욱, 좋은 여관지기가 되실 수 있겠지요.”

죠니가 낮게 웃었다.

그레이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레이튼은 무언가 적으려다, 이번에는 적지 않기로 한 듯 펜을 닫았다.

하융은 낮은 등불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레는 아무 말 없이 푸리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조금 슬펐고, 조금 자랑스러웠다.


---

여관좌는 선반 위의 지도 조각을 보았다.

“먼 길의 조각이군요.”

슈샤니크는 몸을 조금 굳혔다.

“아직 내려놓은 것은 아닙니다.”

“예.”

여관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입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말했다.

“잠시 보관하는 것뿐입니다.”

“여관은 대개 그런 곳입니다.”

여관좌는 접힌 지도 곁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았다.

“버리지 못한 짐을, 버리라고 재촉하지 않는 곳. 하지만 밤새 등에 지고 있으라고도 하지 않는 곳.”

슈샤니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관좌는 낮게 이어 말했다.

“지도도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밤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접힌다고 해서 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슈샤니크의 손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

“돌아갈 수 없는 지도라면요?”

여관좌는 그녀를 보았다.

그 시선은 심판자의 것이 아니었다.

프런트 너머에서 늦은 손님의 얼굴을 살피는 여관 주인의 눈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앉을 의자를 드려야겠지요.”

슈샤니크는 숨을 삼켰다.

여관좌는 조용히 말했다.

“아직 돌아가지 못한 손님에게, 객실의 열쇠를 억지로 쥐여드리지는 않습니다. 먼저 물을 드리고, 방의 밝기를 묻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장미에게 물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슈샤니크도 그 말을 떠올렸는지, 선반 위의 접힌 지도를 보았다.

“그 조각을 여기 두어도 되겠습니까?”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응. 물론이지.”

여관좌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오늘 밤 그 지도는 손님입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지도도 손님이 되는구나.”

하융이 대답했다.

“짐도 오래 길을 걸으면 손님이 되는 법이오.”

슈샤니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여전히 치유된 사람이 아니었다.

지도는 여전히 찢어져 있었다.

돌아가지 못한 곳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날 밤, 그 조각은 펼쳐져 있지 않았다.

누구도 그것을 보고 보고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 위의 폐허를 해석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잠시.


---

여관좌는 물잔을 들었다.

비어 있던 잔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물을 조금 더 채웠다.

“손님이 몇 분 늘었으니, 물은 조금 넉넉한 편이 좋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그럼 이 방도 여관이야?”

여관좌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방을 둘러보았다.

벽은 아직 낡았고, 의자는 하나뿐이고, 담요는 맞지 않는 천으로 접혀 있었다. 문패도 임시였고, 물잔도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문은 열려 있었다.

불은 너무 밝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앉은 사람에게 박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아직은 방 하나입니다.”

푸리나는 살짝 입을 삐죽였다.

“역시 그렇지?”

“하지만 방 하나가 제대로 쉬게 할 수 있다면, 여관의 첫 문턱으로는 충분합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관좌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막이 내린 뒤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면, 극장도 잠시 여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방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자신의 극장을 떠올렸다.

환한 무대.

박수.

대사.

조명.

그리고 이제, 그 뒤에 생긴 작은 방.

모든 이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극장.

그리고 주인공이 무대에서 내려온 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방.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아직 잘 못할 것 같아.”

여관좌는 미소 지었다.

“잘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먼저 문을 닫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시지요.”

“문을 닫지 않는 것.”

“예. 그리고 물이 비어 있으면 채우고, 불이 너무 밝으면 낮추고, 신발이 젖어 있으면 말릴 자리를 내어주는 것.”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네.”

“대부분의 휴식은, 보이지 않는 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 점은 사실입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보았다.

“너 지금 엄청 힘을 얻은 표정이야.”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그런 표정을 지었습니까?”

죠니가 웃었다.

“응. 행정이 신학으로 인정받은 표정이었어.”

여관좌는 잔잔히 웃었다.

“행정도 때로는 좋은 침구가 됩니다. 접는 사람이 힘들 뿐이지요.”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이번 웃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방 안에서 울려도, 누구를 무대 위로 밀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방 안의 공기를 조금 따뜻하게 했다.


---

잠시 뒤, 여관좌는 문가에 섰다.

“이만 가시는 거야?”

푸리나가 물었다.

“예. 이 방은 오래 머물러 평가할 곳이 아니라, 필요할 때 들르는 곳이니까요.”

“또 올 거야?”

“문이 열려 있고, 길이 이어진다면.”

여관좌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전하께서 물잔을 비워두지 않는다면.”

푸리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레이랑 같이 관리할게.”

그레이가 곧바로 말했다.

“관리표를 만들겠습니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역시 만들어지는구나, 관리표.”

푸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관리표 이름은 내가 정할 거야.”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합니다.”

여관좌는 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 그는 방 안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오늘 밤 이 방의 등불은 충분합니다.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군요.”

그 말은 푸리나에게 다시 칭찬처럼 들렸다.

이번에는 그녀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였다.

“다녀가줘서 고마워.”

여관좌는 부드럽게 답했다.

“좋은 손님이었습니다.”

“내가?”

“예.”

그는 미소 지었다.

“방을 만든 사람도, 때로는 그 방의 첫 손님이 되어야 하니까요.”

푸리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여관좌는 조용히 문밖으로 나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살짝 열려 있었다.

길이 아주 조금 남아 있도록.


---

그날 밤, 극장 뒤의 작은 방에는 박수가 없었다.

조명도 없었다.

누구도 주인공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죠니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잠깐 눈을 붙였다.

그레이는 관리표 첫 줄에 날짜를 적다가, 푸리나의 눈치를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하나 접어 책갈피로 꽂아두었다.

하융은 문가의 등불을 조금 낮췄다.

아레는 빈 의자 옆에 물잔을 하나 더 놓고,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슈샤니크는 선반 위에 접힌 지도를 보았다.

그 지도는 여전히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펼쳐져 있지 않았다.

그 밤만큼은, 아무도 그 조각에게 길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의자 하나.

물잔들.

담요.

낮은 등불.

열린 문.

그리고 세 개의 표지판.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푸리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그 말은 대사처럼 울리지 않았다.

그저 방 안에 놓였다.

물잔 옆에.

접힌 지도 곁에.

아직 식지 않은 등불 아래에.

그리고 그 밤, 오래 접혀 있던 지도 한 장이
조금 덜 아파 보였다.
《삼총사와 하나 많은 맹세》

—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

프롤로그 — 삼총사는 원래 셋이어야 합니다

푸리나 헤툼은 검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검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대 위의 검은 좋았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에서 서로의 망토를 스치고, 관객의 숨을 멎게 할 만큼 가까이 부딪히되, 실제로는 누구도 죽이지 않는 검.

그런 검은 훌륭했다.

문제는 무대 밖의 검이었다.

무대 밖의 검은 사람을 정말로 베었고, 왕국의 비용표를 망쳤고, 치료 인력의 동선을 꼬이게 만들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푸리나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덜 낭만적이었다.

그러니 푸리나는 오늘, 최대한 무대 위의 검만 쓰기로 했다.

“오늘의 극은 우정과 결투와 맹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무대 중앙에서 외쳤다.

뒤편에는 거대한 푸른 커튼이 걸려 있었다. 커튼 위에는 은실로 수놓은 문장이 빛났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그 아래에는 조금 작은 글씨가 있었다.

※ 실제 결투 금지. 검 끝은 둥글게 처리할 것.

소피가 그 문장을 올려다보았다.

“안전 규정이 구호보다 길어 보입니다.”

푸리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낭만은 안전해야 오래가니까.”

“그건 좋은 말이긴 한데요.”

소피는 손에 든 깃털 달린 모자를 조금 고쳐 썼다. 오늘 그녀는 신입 총사, 그러니까 달타냥 역할이었다. 아직 어깨에는 망토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고, 허리의 검도 조금 삐뚤었다.

그 어색함이 오히려 잘 어울렸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좋아. 아주 훌륭해. 오늘의 소피는 지방에서 막 올라온, 정의감과 오해와 과잉 의욕으로 가득한 신입 총사야.”

소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해도 필수인가요?”

“삼총사에는 필수야.”

“왜요?”

“오해가 없으면 결투 약속이 안 잡히거든.”

소피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애초에 결투 약속을 안 잡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무대 옆에서 아스트리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결투는 가능하면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부상 위험도 높고, 회복에 시간도 들고요.”

푸리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잠깐! 아직 결투를 피하기에는 너무 이른 장면이야!”

아스트리트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결투 전에 치료 인력의 위치를 확인하겠습니다.”

“아스트리트!”

“낭만도 출혈량을 줄이면 오래갑니다.”

소피는 작게 웃을 뻔했다가 참았다.

그때 레플리카가 무대 뒤편에서 걸어 나왔다.

오늘의 레플리카는 총사 망토를 입고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여전히 성실하고 단단했다. 무대 의상이 조금 화려해졌을 뿐, 그녀가 가진 고통교적 무게와 정직함은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소피의 검집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그 자세로 달리면 적보다 바닥을 먼저 만난다.”

소피가 굳었다.

“그 정도인가요?”

“비난이 아니다. 예방이다.”

레플리카는 곧장 소피의 허리끈과 검집 위치를 살폈다.

“검집이 몸에서 너무 뜬다. 뛰면 손잡이가 망토에 걸릴 것이다. 긴장한 손은 검보다 먼저 자신을 다치게 한다. 숨부터 맞춰라.”

소피는 어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렇게요?”

“조금 더 천천히.”

“이렇게요?”

“좋다. 처음부터 전부 증명하려 들 필요는 없다. 오래 서려면 첫 걸음에서 자신을 다 쓰지 않는 편이 낫다.”

푸리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늘의 포르토스가 너무 상냥해서 결투극이 시작되기 전에 재활극이 되고 있어…….”

아스트리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재활극도 가치 있습니다.”

“그건 알아! 그런데 오늘 제목이 삼총사잖아!”

소피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푸리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응, 소피?”

“삼총사라면 세 명이어야 하지 않나요?”

무대 위가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아주 당당하게 웃었다.

“좋은 질문이야. 문학적으로 삼총사는 넷까지 허용돼.”

소피는 손가락으로 인원을 세었다.

“저, 아스트리트 경, 레플리카 경, 그리고 아직 안 나오신 호흐마이스터까지 하면 넷입니다.”

“봐! 완벽하지?”

소피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런데 푸리나 님까지 세면 다섯입니다.”

“나는 연출자니까 숫자에 안 들어가!”

“무대 위에 계신데요.”

“연출자는 어디에나 있어!”

그때 무대 뒤, 정확히는 무대 옆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씀에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예의 바르며, 이상하게 이미 세 수쯤 앞을 보고 있는 듯했다.

푸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호흐마이스터! 드디어 나오셨군요!”

작은 방의 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목소리만 들렸다.

“아직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럼 왜 대답은 하시는 거야?”

“초대를 받았으니 응답은 해야 예의겠지요.”

소피가 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계신 건가요?”

“예. 무대 뒤 대기실이 예상보다 아늑합니다.”

푸리나는 빠르게 걸어가 문 앞에 섰다.

“호흐마이스터, 오늘은 삼총사 극이야. 방에 틀어박힌 총사는 조금 곤란해.”

문 너머에서 정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가능하면 원격 참석으로 처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푸리나는 멈칫했다.

“총사극에 원격 참석은 없어!”

“기사단 회의에는 있습니다.”

아스트리트가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정확히는 어떤 형태의 원격 참석인가요?”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가, 아주 정중하게 설명했다.

“현재 저는 프로이센의 란트마이스터와 전선 보급 문제를 논의하고, 리보니아의 란트마이스터와 국경 정찰 기록을 확인하며, 독일 관구의 란트마이스터로부터 ‘방에서 나오셔야 합니다’라는 합리적이고도 잔인한 권고를 듣고 있습니다.”

소피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여기에는 안 계신 것 아닌가요?”

“예.”

호흐마이스터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그래서 마음은 매우 편합니다.”

푸리나는 문을 두드렸다.

“그게 자랑이야?”

“아닙니다. 보고입니다.”

레플리카가 문을 보며 말했다.

“계속 앉아 있으면 몸이 먼저 항의한다. 몸의 항의는 대개 늦게 들을수록 오래 간다.”

문 너머에서 아주 미세한 침묵이 흘렀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푸리나는 승기를 잡은 듯 말했다.

“그럼 나오세요!”

“하지만 갑옷을 입어도 되겠습니까?”

“무대 의상 입으셔야 해!”

“갑옷이 더 편합니다.”

소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옷이 더 편하신가요?”

“예. 사교복보다 방어력이 높으니까요.”

푸리나는 중얼거렸다.

“이 사람, 흑막 기사단장인데 대기실 니트야…….”

문 너머에서 호흐마이스터가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들립니다, 전하.”

“들으라고 한 말이야!”

“그렇다면 잘 들었습니다.”

아스트리트가 작게 웃었다.

레플리카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래도 나오는 편이 좋다. 오늘은 방어력보다 약속의 자리가 먼저다.”

문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은 보통의 망설임이 아니라, 전략회의 세 개와 사교적 피로와 무대 공포와 기사단장의 품위가 서로 충돌하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호흐마이스터가 나왔다.

검은 기사단 예복 위에 절제된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어쩐지 예복 자체가 갑옷처럼 보였다. 눈빛은 차분했고, 자세는 예의 바르며,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부드러움 뒤에는 어두운 작전실과 펼쳐진 지도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들이 보였다.

호흐마이스터는 푸리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늦어 죄송합니다. 방이 생각보다 붙잡는 힘이 강했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그건 방 탓이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피는 호흐마이스터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삼총사 역할을 하시는 건가요?”

호흐마이스터는 소피를 보았다.

“그렇게 배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방에 계셨잖아요.”

“총사가 반드시 뛰어다니는 직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끼어들었다.

“뛰어다녀야 해!”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예의 바르게 반박했다.

“그렇다면 오늘 제 해석은 수정이 필요하겠군요.”

소피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삼총사는 몇 명이고, 뛰어다녀야 하는지 아닌지, 원격 참석이 가능한지 아닌지…… 처음부터 너무 어렵습니다.”

아스트리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려우면 천천히 확인하면 돼요.”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숨을 쪼개듯 배워라. 그러면 덜 아프다.”

호흐마이스터가 소피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소피 양, 맹세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맹세가 깨졌을 때 누가 남아 있느냐입니다.”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좋아! 멋진 대사!”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 그 대사는 5막에 넣자.”

“지금은 몇 막입니까?”

“프롤로그.”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제가 너무 빨리 무거워졌군요.”

푸리나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죄송합니다. 농담의 갑주를 너무 무겁게 받았습니다.”

소피는 그 말을 듣고 결국 웃었다.

아스트리트도 웃었다.

레플리카는 웃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푸리나는 만족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출발은 좋아.”

“정말인가요?” 소피가 물었다.

“응. 삼총사에서 중요한 건 처음에 조금 엉망이어야 한다는 거야.”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엉망인 출발을 전제로 하는 작전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서 이건 작전이 아니라 극이야.”

“그렇다면 이해했습니다.”

“정말?”

“절반 정도는요.”

“좋아. 절반이면 충분해!”


---

무대 중앙에는 긴 탁자가 놓였다.

탁자 위에는 푸리나가 준비한 물건이 있었다.

세 갈래로 나뉜 리본.

하얀색, 붉은색, 금색.

하얀 리본은 기사도의 서약.

붉은 리본은 고통과 희생.

금색 리본은 왕도와 새벽.

푸리나는 리본을 들어 올렸다.

“이것이 오늘 극의 핵심 소품, 맹세의 리본입니다.”

소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예쁘네요.”

“그렇지?”

“그런데 삼총사인데 리본은 세 갈래고, 사람은 네 명이고, 연출자까지 포함하면 다섯이고, 원격 참석 논란까지 포함하면 더 복잡한데요.”

푸리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서 좋은 거야!”

“왜요?”

“맹세는 원래 묶기 전까지 복잡하거든.”

이 말에는 모두가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자신이 방금 꽤 좋은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좋았지?”

아스트리트가 미소 지었다.

“네. 좋았습니다.”

레플리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다. 묶는다는 것은 당기는 일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게 힘을 나누는 일이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정중하게 말했다.

“다만 묶은 뒤에도 복잡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게 될 뿐이지요.”

푸리나는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좋은 대사를 늘 한 번 더 무겁게 만들어.”

“직업병입니다.”

소피는 리본을 보며 말했다.

“이 리본을 묶고 구호를 외치는 건가요?”

“맞아.”

푸리나는 리본을 다시 탁자 위에 놓았다.

“하이라이트에서 모두가 손을 맞잡고 외치는 거야.”

그녀는 망토를 펼치며 외쳤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소피가 조금 어색하게 따라 했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말했다.

“그 하나의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레플리카는 말했다.

“그 하나의 고통이 혼자 남지 않도록.”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리본을 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 하나를 위해 모두를 희생시켰다고 속이지 않도록.”

푸리나는 멈췄다.

“아직 연습인데 벌써 마지막 장면 같아졌어.”

소피는 리본을 보며 조금 작게 말했다.

“그런데…… 하나는 누구죠?”

그 질문에 모두가 잠시 말이 없어졌다.

푸리나는 대답하려 했다.

원래라면 “그건 극이 진행되면서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흐마이스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이 오늘의 극을 무사히 끝내줄지도 모르겠군요.”

소피가 그녀를 보았다.

“왜요?”

“대부분의 맹세는 ‘하나’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호흐마이스터의 목소리는 예의 바르고 조용했다.

하지만 무대 위의 공기를 한 겹 낮췄다.

푸리나는 잠시 그 말을 들었다.

그러다 일부러 밝게 손뼉을 쳤다.

“좋아! 그 질문은 나중에 다시 받겠습니다. 지금은 첫 장면!”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신입 총사로 등장하는 장면인가요?”

“맞아. 그리고 세 선배 총사와 각각 오해로 시비가 붙고, 결투 약속을 잡는 장면!”

아스트리트가 바로 말했다.

“결투는 가능하면—”

푸리나는 빠르게 말했다.

“모의 결투!”

레플리카가 물었다.

“보호구는?”

“있어!”

호흐마이스터가 덧붙였다.

“결투장이 실내라면 퇴로와 관중 통제도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두 손을 들었다.

“있어! 다 있어! 그레이가 없는데도 안전 규정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

소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안전한 편이 좋습니다.”

푸리나는 소피를 보았다.

“소피, 너는 달타냥이야. 조금 더 무모해야 해.”

“무모한 척은 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거면 충분해.”

소피는 검을 조금 어색하게 뽑았다.

검 끝은 둥글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시작하자.”

그때 무대 뒤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발소리.

가벼운 숨소리.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

“저기…….”

모두가 돌아보았다.

무대 뒤편 커튼 사이로 어린 시종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무대 위에 설 나이는 아닌 듯했다. 손에는 낡은 모자가 들려 있었고, 눈은 리본이 놓인 탁자 쪽을 향하고 있었다.

푸리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시종은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리본을…… 확인하라고 해서요.”

“리본?”

푸리나는 탁자를 돌아보았다.

하얀색, 붉은색, 금색의 맹세 리본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괜찮아. 아직 있어.”

시종은 이상하게 안심한 듯하면서도, 조금 아쉬운 듯한 얼굴을 했다.

소피는 그 표정을 보았다.

호흐마이스터도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시종의 손목에 감긴 낡은 붕대를 보았다.

레플리카는 그 아이가 한쪽 다리에 체중을 덜 싣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푸리나는 아직 그것을 전부 보지는 못했다.

다만 극의 흐름에 맞춰 환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 리본은 마지막 하이라이트에 쓸 거니까!”

시종은 고개를 숙였다.

“네.”

그 아이는 물러났다.

커튼이 닫혔다.

잠깐의 침묵.

소피가 낮게 물었다.

“저 아이도 극에 나오나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오늘은 아니야. 무대 뒤 일을 돕는 아이일 거야.”

소피는 커튼 쪽을 보았다.

“그렇군요.”

호흐마이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맹세의 리본을 다시 보았다.

하얀색.

붉은색.

금색.

세 갈래의 리본은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아직은.

푸리나는 분위기를 다시 밝히려 손을 들었다.

“좋아! 그러면 진짜로 시작합니다!”

조명이 올라갔다.

소피가 모자를 눌러쓰고 무대 한쪽으로 달려갔다.

아스트리트는 치료 도구 위치를 확인했고, 레플리카는 보호구 끈을 다시 묶었고, 호흐마이스터는 무대 위에 서면서도 어쩐지 마음의 절반은 아직 자기 방에 두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외쳤다.

“첫 번째 막!”

커튼 위 문장이 빛났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그리고 그 아래, 아무도 아직 읽지 못한 것처럼 작은 글씨가 생겼다.

그 하나가 누구인지 확인할 것.

막이 올랐다.

1막 — 세 번의 결투 약속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낭만은 안전 규정을 무시하지 못한다 —
좋아. 라이자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꿈속에서 만난 은빛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려는 성은의 성인”**이야.

소피아가 무너진 세계를 다시 정의하는 연금술사라면, 라이자는 버려진 것과 태어나지 못한 것들에게 ‘현실에 있어도 되는 몸’을 주려는 포옹의 창조자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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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자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라이자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꿈속에서 만난 은의 정령과, 깨어난 뒤 머리에 남아 있던 작은 은꽃이다.

그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라이자는 꿈속에서 은의 정령과 친구가 되었다.
그곳에는 현실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디어, 버려진 가능성, 이름 붙지 못한 생명, 아직 몸을 얻지 못한 따뜻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이 사라진 줄 알았지만 머리에는 작은 은꽃이 남아 있었다.

그 꽃은 라이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증거였다.

“꿈속의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이 아니었다.”

라이자의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현실이 아니라고 여겨진 것들이, 사실은 현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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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라이자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현실과 꿈이 명확히 갈라져 있다는 믿음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꿈은 꿈이다.
상상은 상상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다.
만들어진 존재는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다.
태어나지 못한 것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라이자는 그 경계를 잃었다.

꿈에서 만난 친구는 정말 친구였다.
현실에 없는 이야기도 아플 수 있었다.
태어나지 못한 존재도 자리를 원할 수 있었다.
버려진 가능성도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즉 라이자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만이 진짜다”라는 믿음.

이 상실이 라이자를 위험하게도 만들고, 아름답게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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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라이자의 최대 업적은 꿈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꿈을 그냥 추억으로 두지 않았다.
은의 정령을 환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머리에 남은 은꽃을 단순한 기념품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했다.

꿈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

성은, 은인, 은의 심장, 은의 군단, 성은의 혈맥,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같은 라이자의 핵심은 여기서 나온다.

라이자의 업적은 이것이다.

현실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것들에게,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몸과 이름과 품을 주려 한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라이자는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
버려진 것, 만들어진 것, 태어나지 못한 것, 실패작, 인조 생명, 꿈의 잔해 같은 것들을 그냥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 못한다.

그 대가는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으려는 부담이다.

그녀는 품이 넓다.
하지만 모든 것을 품으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쉬어야 하는지 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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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라이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안아주고 몸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버려진 것들은 모두 현실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믿음은 라이자의 가장 따뜻한 부분이다.

그녀는 버려진 것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쓸모없다고 여겨진 것들을 다시 본다.
태어나지 못한 것들에게 태어날 권리를 주고 싶어 한다.
꿈속 이야기가 현실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현실에 존재하게 되는 것 자체가 곧 구원이라고 믿을 위험이다.

현실에 몸을 얻는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고통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현실이 되면 책임도 생긴다.
태어난 존재는 상처받을 수 있다.
품에 안긴 존재도 언젠가는 자기 발로 걸어가야 한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존재하게 해주고,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



라이자는 이 믿음 때문에 따뜻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존재의 탄생과 책임을 자기 품 안에 두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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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라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에게도 안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는 것.
실패작이라고 버려지는 것.
꿈이니까 의미 없다고 말해지는 것.
만들어진 존재라서 영혼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
태어나지 못한 이야기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것.

라이자는 그런 것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믿는다.

> “누군가가 품어주고, 이름을 주고, 몸을 주면, 버려진 이야기들도 현실에 설 수 있다.”



라이자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포옹과 구현이다.

그냥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냥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주는 것.
그냥 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 현실에 닿는 통로를 만드는 것.

즉 라이자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버려진 것과 태어나지 못한 것들이 ‘없던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고 싶다. 그들에게 몸과 이름과 품을 주어, 현실에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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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라이자는 먼저 안아준다.

그 위협이 괴물이라 해도, 버려진 존재라면 먼저 그 근원을 본다.

왜 버려졌는가.
왜 만들어졌는가.
무엇을 원했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누구에게 안기고 싶었는가.

라이자의 첫 대응은 공격이나 분석이 아니라 존재 인정이다.

“아팠구나.”
“버려졌구나.”
“그래도 네가 없었던 건 아니야.”

이것이 라이자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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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라이자는 이름과 형태를 준다.

무정형의 꿈, 버려진 생명, 실패한 조각, 은빛 잔향 같은 것들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성은으로 몸을 만들고, 은의 심장으로 중심을 주며, 은의 혈맥으로 흐름을 만든다.

이 단계에서 라이자는 단순히 품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자가 된다.

그녀는 말한다.

“그럼 네가 설 수 있는 몸을 만들자.”

즉 두 번째 대응은 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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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라이자는 자기 품을 더 넓힌다.

하나를 안아도 안 되면 둘을 안는다.
둘로 안 되면 군단을 만든다.
은인, 성은의 혈맥, 은의 군단 같은 방향은 여기에서 나온다.

라이자는 버려진 것들을 모아, 서로를 지탱할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려 한다.

단순히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가 아니라,

“너희가 서로에게 품이 되어줄 수 있게 하겠다.”

이 단계에서 라이자의 힘은 개인적 포옹에서 사회적 포옹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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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품으로 내어준다.

라이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상대가 실패작이라 불려도, 괴물이라 불려도, 현실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여겨져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손을 뻗는다.

하지만 이 단계가 가장 위험하다.

그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도 안으려 할 수 있다.
독이 있는 존재, 아직 타인을 해칠 수밖에 없는 존재, 존재 자체가 주변을 망가뜨리는 존재까지 품으려 할 수 있다.

라이자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그래도 내가 먼저 안아줄게. 적어도 너를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않을게.”



아름답지만, 매우 위험한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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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라이자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것을 안아주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버려진 존재를 살린다.
실패작에게 존엄을 준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연결한다.
만들어진 존재에게도 “있어도 된다”는 자리를 준다.
상처 입은 자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않게 한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라이자는 거절해야 할 때도 안으려 할 수 있다.
상대가 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품으려 할 수 있다.
위험한 존재를 공동체 안으로 들이며, 다른 이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안길 곳을 잃는다.

라이자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경계선이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 신앙에서도 중요한 질문이 있다.

“모든 것을 안아주는 자는, 자신은 누구에게 안기는가?”

라이자에게 필요한 성장은 이것이다.

포옹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옹에도 문과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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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라이자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버려진 것들에게 몸을 줄 수는 있어도, 그 존재가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지는 않겠다.”



이것이 라이자의 양심이다.

라이자는 창조자다.
성은으로 몸을 만들 수 있다.
은의 심장과 혈맥을 줄 수 있다.
태어나지 못한 이야기를 현실에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창조했다는 이유로 소유할 수는 없다.

그녀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자기가 안아준 존재를 자기 품 안에 영원히 가두는 것이다.

버려진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포옹이다.
하지만 포옹의 끝에는 언젠가 놓아주는 순간도 있어야 한다.

라이자가 선을 넘으면 이렇게 된다.

“내가 너를 만들었으니,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해.”
“내가 너를 안아줬으니, 네 행복은 내가 정해.”
“세상은 위험하니, 내 품 밖으로 나가지 마.”

그 순간 포옹은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 된다.

그래서 라이자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너에게 몸과 이름과 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어디로 걸어갈지는 네가 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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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라이자는 꿈속에서 만난 은빛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고, 버려진 것들에게 몸과 이름과 품을 주려는 성은의 성인이다.

그녀의 거짓말은 **“존재하게 해주고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태어나지 못한 것, 버려진 것, 만들어진 존재들이 ‘없던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안아주고, 이름과 형태를 주고, 공동체로 엮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품으로 내어주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자기가 몸을 주고 안아준 존재라도, 그 존재의 자유와 삶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레플리카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도, 고통이 사람을 부수는 방식만큼은 줄이려는 차르”**야.

알렉산드리나가 고통과 결핍을 새벽으로 향하는 수행으로 바꾸는 차르라면, 레플리카는 고통받는 자에게 먼저 ‘더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정통 고통교의 차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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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플리카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레플리카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자신이 고통의 대상으로 다루어졌던 순간이다.

그녀는 사람으로 존중받기보다, 실험체나 도구, 실패작, 혹은 “고통을 견디는 존재”로 취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는 그녀의 고통을 필요하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녀가 버티는 모습을 신앙이나 실험, 대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누군가는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했다.
누군가는 “이 고통은 너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레플리카의 몸과 마음에 남은 기억은 훨씬 단순하다.

아팠다.

그리고 그 고통이 언제나 사람을 성장시키지는 않았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비틀어놓는다.
어떤 고통은 견딘다고 해서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상처로 남는다.

레플리카의 반복되는 기억은 이것이다.

“고통은 신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정작 아픈 사람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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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레플리카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고통에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다.

정통 고통교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통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이 마주하고 견디고 이해하며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플리카는 안다.

모든 고통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상처가 깨달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련이 사람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고통은 너무 크다.
어떤 고통은 너무 오래 지속된다.
어떤 고통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사람을 망가뜨린다.

레플리카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고통은 견디면 반드시 의미가 된다”는 믿음.

그녀는 고통의 성좌를 믿지만, 고통 자체를 숭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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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레플리카의 최대 업적은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신앙으로 바꾼 것이다.

그녀는 아팠다.
상처 입었다.
흑진과 흑완, 검은 성역 같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힘으로 타인을 더 아프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모서리를 깎는다.
비명이 사람을 찢기 전에 낮춘다.
병사가 마지막으로 방패를 들 수 있을 만큼만 고통을 늦춘다.
아픈 사람에게 “더 참아라”가 아니라 “이제 조금 덜 아파도 된다”고 말한다.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고통받은 사람이, 고통을 강요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을 줄이는 자가 된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레플리카는 자신의 고통을 너무 오래 참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남의 고통을 줄이려 하면서도, 자기 고통은 여전히 조용히 삼킬 수 있다.
타인에게는 “무리하지 마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계속 무리할 수 있다.

그 대가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감각의 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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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레플리카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조금 더 아프면,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덜 아플 수 있다.”



이 믿음은 레플리카의 선함이자 위험이다.

그녀는 고통을 줄이고 싶어 한다.
흑진을 펼치고, 거믄하늘을 열고, 괴이의 흑완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붙잡는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자기 자신을 고통의 완충재로 쓰는 데 너무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고통을 숭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만큼은 너무 쉽게 비용으로 계산할 수 있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나는 이미 아파본 사람이니까, 조금 더 아파도 괜찮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아파본 사람이라고 해서 더 아파도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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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레플리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이 신앙, 대의, 성장, 왕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녀는 고통이 삶에서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말이 “그러니 더 고통받아도 된다”는 허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말들이다.

“이 고통은 필요하다.”
“참으면 강해진다.”
“고통받는 것이 신앙이다.”
“왕국을 위해 더 견뎌라.”
“네가 아픈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레플리카는 그런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녀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고통의 감소와 한계의 인정이다.

아픈 사람은 먼저 덜 아파야 한다.
버티기 전에 쉬어야 한다.
신앙은 삶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
고통은 성장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강요된 고통은 폭력이다.

즉 레플리카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고통이 사람을 찢기 전에, 그 날카로운 모서리만큼은 깎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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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레플리카는 먼저 고통을 낮춘다.

그녀는 문제 앞에서 “누가 이겼는가”보다 먼저 “누가 얼마나 아픈가”를 본다.

전장이라면 병사들의 비명.
궁정이라면 짓눌린 사람의 침묵.
종교 논쟁이라면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고통.
내전이라면 백성에게 돌아가는 피해.

레플리카의 첫 대응은 공격이 아니라 완화다.

흑진이 깔린다.
비명이 조금 낮아진다.
통증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사람을 찢는 속도가 늦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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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레플리카는 막아선다.

고통을 줄이는 것만으로 부족하면, 그녀는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 앞에 선다.

괴이의 흑완으로 공격을 받아낸다.
검은 성역으로 아군을 감싼다.
척추교적 고통 숭배나 고문성 신술, 공포 유발, 통증 증폭을 억누른다.

이때 레플리카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녀의 두 번째 대응은 보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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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레플리카는 고통의 의미를 반박한다.

상대가 고통을 신성화한다면, 레플리카는 그 신학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고통받았다고 해서, 남을 고통스럽게 할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상처는 신앙의 증표가 아니다.”
“신은 사람을 부수기 위해 고통을 준 것이 아니다.”
“버티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 레플리카는 단순한 힐러가 아니라 정통 고통교의 해석자가 된다.

그녀는 고통을 이해하지만, 고통을 숭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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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자신이 고통을 붙잡는다.

레플리카는 최후의 순간, 남에게 향하는 고통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 할 수 있다.

흑완으로 받아내고, 흑진으로 흩고, 거믄하늘 아래에서 자신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위험한 전략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는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은 마지막까지 버티려 한다.

레플리카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그 고통이 반드시 누군가에게 닿아야 한다면, 나에게 오게 하겠다.”



아름답지만, 그녀의 왜곡과 가장 가까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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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레플리카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자기 자신을 고통의 완충재로 쓰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사람을 살린다.
전장을 버티게 한다.
공포와 고통의 신술을 약화한다.
피해자가 더 무너지기 전에 시간을 벌어준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레플리카는 자기 고통을 무시한다.
자기가 무너지는 것을 “필요한 비용”으로 처리한다.
고통을 줄이려는 사람이 스스로 고통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나 아픈지 모르게 된다.

레플리카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자기 자신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감각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고통을 덜어주는 자의 고통은 누가 덜어주는가?”

레플리카의 성장은 고통받는 이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아프다. 그러니 나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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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레플리카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고통을 이해하지만, 고통을 선하다고 부르지는 않겠다.”



이것이 레플리카의 양심이다.

그녀는 고통의 성좌를 믿는다.
고통교의 차르다.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 자체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녀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만약 레플리카가 선을 넘으면 이렇게 된다.

“이 고통은 필요하다.”
“더 아파야 더 강해진다.”
“고통받는 것이 신앙이다.”
“네가 무너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 순간 레플리카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고통의 가해자가 된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고통은 마주할 수 있다. 견딜 수도 있다.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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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레플리카는 고통을 숭배하지 않고, 고통받는 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그 모서리를 깎아내는 정통 고통교의 차르다.

그녀의 거짓말은 **“내가 조금 더 아프면,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덜 아플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고통이 신앙, 대의, 성장, 왕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사람을 부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고통을 낮추고, 막아서고, 고통의 의미를 반박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고통을 붙잡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고통을 이해하되, 고통 자체를 선하거나 신성한 것으로 정당화하지 않는 것이다.
《은빛 피노키오》

프롤로그 — 가족이라고 적기에는 칸이 너무 좁았다

—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결말이면 안 해 —

라이자의 작업실에는 늘 은빛 냄새가 났다.

정확히 말하면, 은에는 냄새가 없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라이자의 작업실에 들어올 때마다 그렇게 느꼈다.

차가운 금속.
막 식은 용광로.
부드러운 천 위에 놓인 작은 부품들.
반쯤 열린 공구함.
벽면에 기대어 선 은빛 골격.
그리고 누군가의 손끝이 너무 오래 닿아, 금속이라기보다 체온을 기억하게 된 것들.

“음.”

푸리나는 문 앞에서 팔짱을 꼈다.

“오늘도 여기는 반짝이고, 차갑고, 위험하고, 비싸 보이네.”

그레이는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전하, 위험하고 비싼 것은 보통 만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레이. 나는 군주야.”

“그래서 더 만지지 않으셔야 합니다.”

“너무 설득력 있어.”

푸리나는 얌전히 손을 뒤로 숨겼다.

작업대 앞에 앉아 있던 라이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만지면 안 돼. 특히 왼쪽 세 번째 상자.”

푸리나는 이미 왼쪽 세 번째 상자를 보고 있었다.

“안 만졌어.”

“생각했잖아.”

“생각까지 금지야?”

“네가 생각하면 대체로 10초 안에 사고가 나.”

그레이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배신당한 얼굴로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

“통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통계는 때때로 잔인해.”

라이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가느다란 은실이 감겨 있었다. 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단하고, 철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부드러운 것. 그것은 라이자의 손끝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휘었다.

작업대 위에는 작은 관절 부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은인이 앉아 있었다.

은인은 조용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빛을 받으면 피부 아래에서 은빛이 얇게 흔들렸고, 눈동자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배우는 중인 것처럼 맑았다.

푸리나는 은인을 볼 때마다, 잠깐씩 말을 고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해서 그랬다.

이제는 아니었다.

“안녕, 은인.”

은인이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푸리나.”

발음은 조금 느렸지만 또렷했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오늘도 훌륭하게 인사했어.”

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훌륭한 인사는 사람다운 인사인가요?”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레이도 기록판을 들던 손을 멈췄다.

라이자는 은실을 감던 손가락을 아주 조금 늦췄다.

작업실 안의 은빛 소리들이 잠깐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웃었다.

너무 크게 웃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글쎄. 인사를 잘한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닐 거야.”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저는 사람처럼 인사한 건가요?”

푸리나는 무심코 말했다.

“응. 정말 사람 같—”

그 순간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푸리나는 말을 삼켰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선명했다.

“사람 같아서 가족인 게 아니야.”

작업실의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라이자는 천천히 말했다.

“내 가족이니까, 사람처럼 대해야 하는 거야.”

푸리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내가 말을 잘못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인가요?”

라이자는 망설이지 않았다.

“응.”

“그럼 사람처럼 대해야 하나요?”

“응.”

“그러면 저는 사람인가요?”

이번에는 라이자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의 은실이 아주 작게 떨렸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 질문은, 작업실 안에서 끝나지 않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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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정확히는 간단했어야 했다.

라이자의 은인 관련 지원 물품, 작업실 안전 관리, 보호자 권한, 출입 기록, 예산 항목, 긴급 대피 동선, 그리고 혹시 모를 행정상 신분 분류.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기록판을 넘겼다.

“라이자 님. 기록상 항목이 필요합니다.”

라이자는 은인의 어깨 부품을 살피며 대답했다.

“무슨 항목?”

“신분입니다.”

푸리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레이가 이런 목소리를 낼 때는 보통 질문이 아주 현실적이고, 그래서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종류였다.

라이자는 짧게 대답했다.

“가족.”

그레이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신분 항목은 별도로 필요합니다.”

라이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게는 그게 제일 먼저야.”

“알고 있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장부는 관계만으로는 물자를 배정하지 못합니다. 보호 권한, 의료 책임, 거주 자격, 외부 접촉 권한, 피해 발생 시 책임 소재가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살짝 손을 들었다.

“그레이, 조금만 덜 장부처럼 말할 수 있어?”

그레이는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인을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보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인이 먼저 물었다.

“저는 어느 칸에 들어가나요?”

그 질문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 작업실 전체가 그 질문에 걸린 것처럼 멈췄다.

은인은 그레이의 기록판을 보았다.

“도구인가요?”

라이자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실험체인가요?”

“아니.”

“피보호자인가요?”

그레이가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그럼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면 충분한가요?”

라이자는 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사랑해서였다.

가족.

그 말은 라이자에게 가장 먼저 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은인의 질문은 그 뒤를 묻고 있었다.

가족이면 충분한가.
가족이라는 말이 은인의 이름, 권리, 실수, 선택, 외출, 거짓말, 귀환까지 모두 대신 정해도 되는가.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무대라면, 여기서 조명을 낮췄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작업실이었다.

조명은 은빛으로 차갑게 빛났고, 누구도 대사를 준비하지 못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천천히 닫았다.

“현재 항목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새 항목을 만들겠다는 뜻이야?”

“필요하다면요.”

“이름은?”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펴졌다.

“저는 이름이 있나요?”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있어.”

“그럼 그걸 적으면 안 되나요?”

그레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은 칸의 제목이 아니라, 칸 안에 들어가는 사람을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은인은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심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사람이 행정의 틈에서 사라지는 일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기에, 아무 칸에나 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자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그럼 새 칸을 만들어.”

라이자가 말했다.

“가족이라고 적고.”

그레이는 낮게 대답했다.

“그 칸을 만들면, 그 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칸.

그것은 따뜻한 말이지만,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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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푸리나는 그날의 대화를 대충 축제로 바꾸려고 했다.

“좋아! 오늘은 어려운 이야기가 많았으니, 잠깐 쉬자. 라이자, 은인이 좋아하는 간식 같은 거 없어?”

라이자는 아직 표정이 어두웠지만 대답했다.

“간식이라기보다, 은인은 단맛이 나는 차를 좋아해.”

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차를 좋아합니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완벽해. 그럼 차를 마시자. 장부도, 신분도, 철학도 잠시 휴식!”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철학은 휴식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레이, 지금은 사라진 척하는 거야.”

“그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보류입니다.”

“보류도 훌륭한 극적 장치야!”

그레이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라이자가 차를 준비하러 잠시 작업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은인은 작업대 위의 은실을 바라보았다.

그 은실은 조금 전 라이자가 다루던 것이었다. 가느다랗고, 반짝이고, 손끝에 감기면 마치 작은 강처럼 흐르는 은.

은인은 손을 뻗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만져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은실 끝을 만졌다.

은실은 손가락에 감겼다.

은인은 놀라 손을 뒤로 뺐다.

그러자 은실은 더 감겼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은인은 당황했다.

“어.”

그레이가 보았다.

“은인 님?”

그 순간 라이자가 돌아왔다.

“은인, 작업대 위 은실 만졌어?”

은인은 아주 작게 굳었다.

손가락에는 은실이 감겨 있었다.

누구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의 얼굴에는 걱정이 있었다.

화가 아니라 걱정.

그 걱정이 은인에게는 더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작업실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레이도 기록판을 들지 않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은실은 분명히 감겨 있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안 만졌어요.”

그 순간, 은인의 코가 삐걱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끼익.

은빛 얼굴 한가운데에서, 코의 끝이 아주 조금 앞으로 밀려났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은인도 눈을 깜박였다.

끼이익.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가 중얼거렸다.

“와.”

그레이가 아주 낮게 말했다.

“시각적 반응이 발생했습니다.”

라이자는 창백해졌다.

“그건 설계에 없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면 저는 잘못 만들어진 건가요?”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얼굴이었다.

“아니.”

라이자는 은인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방금 말은 취소할게.”

은인은 손을 움켜쥐었다.

은실이 더 엉켰다.

“하지만 설계에 없다고 했어요.”

“그건 네가 잘못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니야.”

라이자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내가 모르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야.”

은인은 코끝을 만지려 했다.

끼이익.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작게 말했다.

“원전 반영이 너무 정확한데.”

그레이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폈다.

“왜 거짓말했어?”

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는 다시 물었다.

“혼날까 봐?”

은인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고장났다고 할까 봐요.”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은인은 작게 말했다.

“가족이라고 했는데, 제가 잘못하면 가족이 아닌 게 될까 봐요.”

그 말은 작업실의 차가운 은빛보다 더 날카로웠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가락에 감긴 은실을 풀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은인.”

“네.”

“거짓말은 잘못이야.”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네.”

“하지만 네가 잘못했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게 되지는 않아.”

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는 휘어진 코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것을 고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팠어?”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무서웠어요.”

“그럼 무서웠다고 말해도 돼.”

“말하면 실망할까 봐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건 내가 배워야 할 일이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조용히 보았다.

원래라면 여기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좋아! 감동적이야!” 하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건 아직 박수를 받을 장면이 아니었다.

이건 첫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첫 귀환이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이었다.


---

그날 저녁, 푸리나는 라이자의 작업실 밖 복도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그레이가 있었다.

라이자는 안쪽에서 은인의 코를 살피고 있었다.

“고칠 수 있을까?”

푸리나가 물었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기계적 손상이라면 라이자 님이 고칠 수 있을 겁니다.”

“기계적 손상이 아니라면?”

“그 경우에는 고친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푸리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라.”

“원전 피노키오와 유사합니다.”

“응. 너무 유사해.”

그레이가 물었다.

“그래서 극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티 났어?”

“전하께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세 가지 표정을 지으십니다.”

“뭔데?”

“첫째, 당장 사고를 칠 것 같은 표정.”

“억울해.”

“둘째, 이미 사고를 쳤지만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표정.”

“더 억울해.”

“셋째, 극으로 만들면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표정.”

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

“네.”

“너 진짜 너무 정확해.”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무릎 위에 팔을 올렸다.

“회의로 하면, 은인은 항목이 될 거야.”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판으로 하면, 잘못이 될 거고.”

“네.”

“실험으로 하면, 결과가 되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작업실 문을 보았다.

안쪽에서는 라이자가 은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설명하고 있었다. 은인은 가끔 “네” 하고 대답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극으로 하자.”

그레이는 예상했다는 듯 눈을 내렸다.

“그 극은 은인을 무대 위에 세우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인을 분류하기 위한 것도 아니야. 은인이 자기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자는 거야.”

“자기 이야기.”

“응.”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피노키오.”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나무 인형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군요.”

“이번에는 은빛 피노키오야.”

“라이자 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아.”

“특히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결말은 거부하실 겁니다.”

“그것도 알아.”

푸리나는 웃었다.

“그래서 결말은 정하지 않을 거야.”

그레이는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결말을 정하지 않는 극입니까?”

“응.”

푸리나는 작업실 안쪽의 은빛을 보았다.

“가족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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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자는 역시 싫어했다.

정확히는, 푸리나가 “피노키오를 하자”고 말하는 순간 아주 차가운 눈으로 푸리나를 보았다.

“싫어.”

“아직 설명 안 했는데?”

“제목에서 이미 싫어.”

“제목이 뭘 잘못했는데?”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그 이야기는 싫어. 마치 누군가가 ‘이제야 진짜 아이가 되었다’고 허락해주는 것 같잖아.”

은인은 라이자의 옆에 앉아 있었다.

코는 임시로 손봐서 원래에 가까워졌지만, 끝이 아주 조금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 코를 보았다가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은인은 처음부터 내 가족이야. 누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해줘야 가족이 되는 게 아니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라이자는 조금 의심스럽게 보았다.

“너무 빨리 인정하는데.”

“네 말이 맞으니까.”

“그럼 왜 피노키오야?”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에 놓인 빈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라이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뭐야?”

“대본.”

“빈 종이잖아.”

“응.”

푸리나는 은인 쪽으로 종이를 돌렸다.

“그래서 좋아.”

라이자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푸리나는 빈 종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첫 줄을 써줄 수 있어. 무대를 만들고, 조명을 켜고, 객석이 너무 무섭지 않게 낮춰줄 수도 있어. 필요하면 커튼 뒤에 의자도 놓아줄게.”

은인은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하지만 두 번째 줄부터는 내가 쓰면 안 돼.”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노키오라는 이름은 빌려줄 수 있어. 제페토라는 자리도 빌려줄 수 있고. 하지만 그 이름 안에서 무슨 말을 할지는, 은인과 네가 정해야 해.”

라이자가 물었다.

“그게 네 극이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극은 배우를 움직이는 줄이 아니야.”

그녀는 작업대 위에 엉켜 있던 은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런 줄은 라이자가 더 잘 다루잖아.”

라이자는 어이없다는 듯 푸리나를 보았다.

“그런 농담을 지금 해?”

“조금은 해야지. 너무 무거우면 무대가 내려앉아.”

푸리나는 다시 빈 대본을 내려놓았다.

“나는 길을 하나 그려둘 뿐이야. 걷는 건 배우가 해야 해. 넘어지면 잠깐 막을 내릴 수는 있어. 하지만 대신 걸어줄 수는 없어.”

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대사를 틀리면요?”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아주 좋아.”

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좋아요?”

“응. 그때부터 네 대사가 되거든.”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보다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푸리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걱정 마, 라이자. 내가 은인을 피노키오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야.”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이 피노키오라는 옷을 한번 입어보고, 안 맞는 곳은 찢고, 맞는 곳만 가져가게 하자는 거야.”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 옷이 은인을 조이면?”

푸리나는 곧장 대답했다.

“그럼 벗기면 돼.”

라이자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장난치지 않았다.

“극은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아.”

은인은 그 말을 곱씹듯 작게 따라 했다.

“극은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보고, 어디까지 걸어가고, 어디로 돌아오고 싶은지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

“네.”

“하고 싶어?”

은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서워요.”

“그럼 하지 않아도 돼.”

은인은 휘어진 코끝을 만졌다.

“그런데…… 궁금해요.”

라이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말이 아마 가장 무서웠을 것이다.

궁금하다.

가족의 손 밖이.
거짓말의 다음이.
돌아오는 길이.
자기 발로 걷는 이야기가.

라이자는 한참 뒤에 말했다.

“좋아.”

푸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해.”

라이자는 또렷하게 말했다.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결말이면 안 해.”

“좋아.”

“은인을 물건 취급하는 대사는 없어.”

“없어.”

“은인이 도망치는 장면이 있다면, 그게 배신처럼만 보이면 안 돼.”

“알겠어.”

“그리고 은인이 돌아왔을 때, 내가 무조건 훌륭한 보호자로 보이면 안 돼.”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나도 배워야 하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결말은 정하지 마.”

푸리나는 웃었다.

“응. 가족 이야기는 원래, 끝을 먼저 정하면 안 되니까.”

은인은 그 말을 조용히 반복했다.

“끝을 먼저 정하면 안 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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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이 다시 물었다.

“제가 돌아오면, 문은 열려 있나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이 다시 물었다.

“제가 늦어도요?”

라이자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응.”

“제가 거짓말해도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짓말은 혼날 거야.”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문은 닫지 않아.”

그 말이 떨어지자,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평소처럼 화려하게 외치지는 않았다.
오늘의 무대는 왕궁도, 광장도, 전쟁 전야도 아니었다.

은빛 부품이 놓인 작업대.
반쯤 식은 용광로.
빈 대본 한 장.
그리고 가족이라는 말로도 아직 다 적히지 않는 두 사람.

푸리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막을 열자.”

등불이 조금 낮아졌다.

은빛은 차갑게 번쩍이지 않고, 사람의 얼굴을 비출 만큼만 부드러워졌다.
작업실의 벽은 그대로였고, 공구도 그대로였고, 은실도 여전히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사이에, 아주 얇은 무대의 기척이 내려앉았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신술은 오늘, 세상을 크게 뒤집지 않았다.

다만 은인 앞에 빈 첫 장면을 놓았다.
라이자 앞에 닫히지 않은 문을 놓았다.
그리고 푸리나는 그 둘 사이에서, 대본의 첫 줄만 비워두었다.

은인은 처음으로 배역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그것은 고장이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첫 표시였다.

1막 — 거짓말은 은을 휘게 한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무서워서 한 거짓말도, 돌아올 길을 멀게 만든다 —
《은빛 피노키오》

1막 — 거짓말은 은을 휘게 한다

— 무서워서 한 거짓말도, 돌아올 길을 멀게 만든다 —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은인이 아니라, 의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라이자의 작업실 의자였다.

낡은 나무 의자 하나.

그 위에는 작은 쿠션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은인을 위해 준비된 낮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따뜻한 차 한 잔, 빈 대본 한 장, 그리고 라이자가 손대지 말라고 세 번 말한 은실 뭉치가 있었다.

푸리나는 그 은실 뭉치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이건 치워둘까?”

라이자가 즉시 말했다.

“치워.”

“하지만 1막 제목이 거짓말은 은을 휘게 한다잖아. 은실이 있어야 상징성이—”

“치워.”

“네.”

푸리나는 얌전히 은실을 들어 올리려 했다.

라이자가 덧붙였다.

“직접 만지지 말고.”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레이가 대답했다.

“위험물 근처에서 즉흥성을 발휘하는 군주로 생각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그레이가 자꾸 정확한 말을 해.”

“기록상 평소에도 그렇습니다.”

“기록도 잔인해.”

결국 은실 뭉치는 라이자의 손으로 작업대 뒤쪽에 치워졌다.

은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기 손가락에 감겨 있던 은실.
그것을 만졌다고 말하지 못했던 은실.
거짓말과 함께 코를 삐걱거리게 만든 은실.

그 은실이 사라지자, 은인은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푸리나는 그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밝게 손뼉을 쳤다.

“좋아! 1막을 시작하기 전에, 아주 중요한 규칙을 정하겠습니다.”

은인이 고개를 들었다.

라이자도 푸리나를 보았다.

그레이는 이미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첫째, 대사를 틀려도 된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따라 했다.

“대사를 틀려도 된다.”

“둘째,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도 된다.”

은인은 조금 작게 말했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도 된다.”

“셋째.”

푸리나는 아주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푸리나가 멋진 연출을 떠올렸다고 해서 반드시 따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합니다.”

라이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중요해.”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둘 다 너무 진심이야.”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네 즉흥성은 은인의 코보다 위험할 때가 있어.”

“너무해. 그래도 오늘은 조심할 거야.”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 오늘은 네가 피노키오야.”

은인은 천천히 물었다.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인가요?”

“원래는 그렇지.”

“저는 은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은빛 피노키오야.”

은인은 자기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피노키오가 아닌데 피노키오인가요?”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맞아. 아주 좋은 질문이야.”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이상한 질문 같은데.”

“아니, 진짜 좋은 질문이야.”

푸리나는 빈 대본을 들어 올렸다.

“배역이란 원래 그래. 완전히 네가 아니지만, 완전히 네가 아니지도 않아. 너무 딱 맞으면 숨이 막히고, 너무 안 맞으면 벗겨지지. 그러니까 오늘은 입어보고, 불편하면 말하면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면 말한다.”

“좋아.”

푸리나는 대본 첫 줄에 큼직하게 적었다.

나는 오늘, 거짓말을 배우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

그레이가 대본을 보고 잠시 멈췄다.

“전하.”

“응?”

“첫 줄부터 난도가 높습니다.”

“그래?”

“은인 님께는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은인은 대본을 보았다.

“거짓말을 배우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한 음절씩 천천히 읽었다.

“이상한 문장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지? 그래서 좋아.”

라이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써.”

푸리나는 바로 대본을 뒤집었다.

“좋아. 다시 쓰겠습니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빠른 수정은 좋은 판단입니다.”

푸리나는 새 줄을 적었다.

나는 무서워서 아니라고 말했다.

은인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이번에는 읽지 않았다.

그저 보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손을 잡고 싶어 보였지만, 잡지 않았다. 대신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자기 손을 내려두었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아무 말 없이 조명을 조금 더 낮췄다.


---

첫 장면은 아주 간단했다.

은인이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은빛 단추를 만진다.

라이자 역할의 푸리나가 묻는다.

“단추 만졌어?”

은인은 대답한다.

“아니요.”

그러면 코가 삐걱인다.

끝.

아주 간단했다.

그런데 은인에게는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은인은 단추 앞에 서 있었다.

작은 은빛 단추.

위험하지도 않고, 비싸지도 않고, 실제로는 라이자가 일부러 만져도 되는 물건으로 골라둔 것이었다.

하지만 은인의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푸리나가 물었다.

“무서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 그럼 첫 대사는 성공이야.”

은인이 눈을 깜박였다.

“제가 대사를 했나요?”

“응. 방금 아주 중요한 대사를 했어.”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대본을 톡 쳤다.

“대본에는 없지만, 무대에 필요한 대사였어.”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무서워요, 라고 말해도 극이 이어지나요?”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이어져.”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금 어색하게 덧붙였다.

“이어져야 해.”

그 말은 라이자에게도 하는 말 같았다.

푸리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다시. 은인, 단추를 만져도 돼. 이건 만져도 되는 단추야.”

은인은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단추를 만졌다.

은빛 단추는 차가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푸리나가 라이자 역할로 물었다.

“단추 만졌어?”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네.”

그리고 멈췄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보았다.

라이자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은인은 당황했다.

“제가 틀렸나요?”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손뼉을 쳤다.

“좋아!”

은인은 놀랐다.

“좋아요?”

“응. 아주 좋아.”

푸리나는 웃었다.

“거짓말하는 장면에서 진실을 말했어. 이건 꽤 멋진 반항이야.”

라이자는 작게 말했다.

“반항이라고 부르지 마.”

“그럼 수정. 아주 멋진 선택이야.”

은인은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피노키오는 거짓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원전은 그렇지. 하지만 네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야.”

은인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면 저는 피노키오가 아닌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빈 대본 옆에 두 번째 줄을 적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하는 장면에서, 은인은 진실을 말했다.

은인은 그 문장을 읽었다.

“그래도 되나요?”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기록상으로는 더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가 극적 표현을 인정했어.”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좋아.”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괜찮아. 네가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은인은 작게 물었다.

“그럼 제 코는 안 휘나요?”

라이자는 은인의 코끝을 보았다.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안 휘는 게 좋지.”

그 말에 은인은 잠시 안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안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다음에 은인이 물었기 때문이다.

“그럼 제가 거짓말하지 않으면, 사람이 되는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나요?”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라이자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기록판 위에서 펜을 멈췄다.

은인은 자신이 무슨 이상한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로 셋을 보았다.

“피노키오는 거짓말해서 코가 길어지고, 잘못해서 혼나고, 도망가고, 돌아온다고 했어요.”

“응.”

푸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지.”

“그럼 저는 거짓말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이야기를 못 하나요?”

그 질문은 작았지만, 무대 전체를 바꾸었다.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야기에 들어가고 싶었다.

실수해야만 이야기가 시작된다면, 실수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푸리나는 빈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첫 줄.

나는 무서워서 아니라고 말했다.

두 번째 줄.

피노키오가 거짓말하는 장면에서, 은인은 진실을 말했다.

그녀는 대본을 덮었다.

“잠깐 쉬자.”

라이자가 물었다.

“벌써?”

“응. 지금은 쉬어야 해.”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이 질문은 그냥 지나가면 안 돼.”


---

쉬는 시간은 아주 이상했다.

무대는 작업실 그대로였고, 관객은 없었고, 배우는 은인과 라이자뿐이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당당하게 “휴식!”이라고 선언했고, 그레이는 정말로 차를 다시 데웠다.

은인은 차를 들고 앉아 있었다.

라이자는 그 옆에 앉았지만, 이번에도 손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은인의 코끝을 보았다.

“아프지는 않아?”

“아프지는 않아요.”

“불편해?”

“조금요.”

“고쳐줄게.”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왜?”

“아직은 두고 싶어요.”

라이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이해한 듯했다.

“표시라서?”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거짓말했다는 표시예요.”

레플리카라면 이 말을 듣고 뭐라고 했을까, 하고 푸리나는 생각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고통을 증거로 들고 서지 마라.

하지만 지금 레플리카는 없었다.

그래서 푸리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표시가 꼭 벌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럼 뭔가요?”

“음.”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접힌 페이지?”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푸리나는 대본 한쪽 모서리를 살짝 접었다.

“책을 읽다가 중요한 장면이 나오면, 어떤 사람들은 모서리를 접어둬. 나중에 다시 보려고.”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도서 관리 측면에서는 권장되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맞아. 실제 책에는 하지 마. 비유야.”

은인은 접힌 종이 모서리를 보았다.

“제 코는 접힌 페이지인가요?”

푸리나는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어. 네가 무서워서 거짓말했던 장면. 나중에 다시 봐야 하는 장면.”

은인은 코끝을 만졌다.

“그럼 없애면 안 되나요?”

라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없애도 기억할 수 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기억해요?”

“응.”

“화났어요?”

“응.”

은인의 몸이 조금 굳었다.

라이자는 바로 이어 말했다.

“하지만 화난 것보다 걱정한 게 더 커.”

은인은 아주 작게 물었다.

“실망했어요?”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거짓말하지 않으려는 침묵이었다.

“조금.”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등 가까이에 자기 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네가 가족이 아니게 된 건 아니야.”

은인은 그 손을 보았다.

라이자는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실망했다는 걸 말해도, 네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나도 배워야 해.”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라이자가 제페토 역할을 연기하고 있지 않았다.

제페토라는 자리를 밟고, 자기 말을 하고 있었다.

좋아.

무대가 아주 조금 작동하기 시작했다.


---

두 번째 시도는 대본을 바꾸고 시작했다.

푸리나는 새 장면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은인이 단추를 만지는 게 아니었다.

단추는 이미 만졌다.

이미 진실도 말했다.

그러니 1막의 진짜 장면은 다른 곳에 있었다.

푸리나는 작은 상자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렸다.

“이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은인은 상자를 보았다.

“모릅니다.”

“좋아. 정답.”

“정답인가요?”

“모를 때 모른다고 말하는 건 아주 중요한 정답이야.”

푸리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종이 왕관이 들어 있었다.

삼총사 극에서 쓰고 남은 소품이었다. 어딘가 삐뚤고, 금박은 조금 벗겨져 있었다.

은인은 왕관을 보았다.

“왕관.”

“응.”

푸리나는 왕관을 꺼냈다.

“이건 사람 흉내를 내는 왕관이야.”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왕관이 사람 흉내를 낸다고?”

“아니. 왕관을 쓰면 사람들이 왕처럼 말하려고 하잖아.”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왕관이 없어도 자주 그러십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 오늘은 유난히 날카롭다?”

“사실 확인입니다.”

“그게 날카로운 거야.”

푸리나는 은인에게 왕관을 내밀었다.

“은인. 이걸 써볼래?”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조심해”, “그건 가볍지만 균형이”, “관절에 부담이” 같은 말이 먼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었다.

“쓰고 싶어?”

은인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궁금해요.”

“그럼 써.”

은인은 종이 왕관을 썼다.

왕관은 조금 컸다.

푸리나가 두 손을 펼쳤다.

“자! 은빛 피노키오는 왕관을 썼습니다. 이제 모두가 묻습니다. 당신은 왕인가요?”

은인은 눈을 깜박였다.

“저는 왕이 아닌데요.”

“좋아. 그럼 이렇게 말해봐. ‘나는 왕이다!’”

은인은 망설였다.

“하지만 아니에요.”

“맞아. 아니지.”

“그럼 거짓말 아닌가요?”

푸리나는 웃었다.

“연기일 수도 있어.”

은인은 혼란스러워했다.

“거짓말과 연기는 다른가요?”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었다.

이 질문은 행정상으로도 흥미로워 보였다.

라이자도 은인을 보았다.

푸리나는 왕관을 살짝 고쳐주었다.

“중요한 질문이야. 거짓말은 보통 상대가 진실을 모르게 하려고 하는 말이야. 연기는 상대에게 ‘지금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고 약속하고 하는 말이고.”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약속하고 하는 거짓말?”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약속하고 하는 상상.”

은인은 왕관을 만졌다.

“그럼 제가 ‘나는 왕이다’라고 말하면, 모두 거짓말인 걸 아나요?”

“응. 모두 알아.”

“라이자도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도 가족인가요?”

라이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응.”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나는 왕이다.”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놀라 코끝을 만졌다.

“안 휘었어요.”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축하합니다! 은빛 피노키오가 연기를 배웠습니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적었다.

“연기와 기만의 차이. 당사자 간 합의 여부, 맥락, 의도, 사후 책임.”

푸리나가 슬쩍 보았다.

“그레이, 지금 그걸 정말로 장부에 적고 있어?”

“중요한 구분입니다.”

“맞긴 한데 너무 장부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왕관을 쓴 채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나는 왕이다.”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 번째.

“나는 왕이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이건 괜찮은 거짓말이에요.”

푸리나는 바로 말했다.

“정확히는 연기.”

“연기.”

은인은 그 단어를 기억하려는 듯 반복했다.

“연기는 돌아올 수 있는 거짓말인가요?”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레이도 기록판 위에서 펜을 멈췄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응. 아주 좋게 말하면, 그래.”

은인은 왕관을 벗었다.

“그럼 저는 돌아올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 말은 1막의 첫 번째 진짜 대사였다.

푸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은인이 연기를 배웠다.

거짓말과 연기의 차이를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러자 은인은 질문을 더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질문이 많아질수록, 라이자의 불안도 커졌다.

은인은 물었다.

“제가 무섭지 않은 척하면 연기인가요?”

푸리나는 대답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

“라이자가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괜찮다고 하면요?”

라이자는 바로 말했다.

“그건 하지 마.”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왜요?”

“네가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면, 내가 네가 아픈 걸 모르게 되니까.”

“하지만 라이자가 걱정하지 않으면 좋잖아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상대의 걱정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숨기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배려처럼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보호와 대응을 어렵게 만듭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그레이, 조금만 부드럽게.”

그레이는 잠시 생각하고 다시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알려주셔야, 곁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은인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럼 괜찮다고 말하면 코가 휘나요?”

라이자는 은인의 코를 보았다.

“네가 정말 괜찮지 않다면, 아마.”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거짓말은 나쁜 거예요.”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위험해.”

“나쁜 게 아니라요?”

“나쁠 때가 많아. 하지만 가끔은 무서워서 나와. 가끔은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서 나오고. 가끔은 자기 자신도 뭐가 진짜인지 몰라서 나오지.”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요?”

푸리나는 대본을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해.”

라이자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은인에게 말했다.

“거짓말을 하면 끝, 이 아니라. 왜 그 말을 했는지, 그 말이 어디를 휘게 했는지, 다시 어떻게 펴야 하는지 봐야 하니까.”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졌다.

“은이 휘면 펼 수 있나요?”

라이자는 말했다.

“대부분은.”

은인은 물었다.

“흔적 없이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직하게.

“항상 그렇지는 않아.”

은인의 손이 멈췄다.

라이자는 조용히 이어 말했다.

“하지만 흔적이 남는다고 해서 버리는 건 아니야.”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정말요?”

“응.”

라이자는 은인의 휘어진 코끝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은은 휘었다가 펴져도, 그 자리에 결이 남을 때가 있어. 하지만 그 결 때문에 더 잘 알 수 있는 것도 있어.”

“무엇을요?”

라이자는 잠시 생각했다.

“어디를 너무 세게 누르면 안 되는지.”

은인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대본 구석에 적었다.

은은 휜 자리에 기억을 남긴다.


---

1막의 마지막 장면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푸리나는 더 이상 단추도, 왕관도, 은실도 쓰지 않았다.

대신 은인 앞에 세 문장을 놓았다.

첫 번째 문장.

나는 괜찮아요.

두 번째 문장.

나는 무서워요.

세 번째 문장.

나는 거짓말했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이 중에서 지금 네가 말할 수 있는 걸 골라.”

은인은 세 문장을 보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옆에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내리고 있었다. 기록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기다리는 자세였다.

은인은 첫 번째 문장을 보았다.

나는 괜찮아요.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두 번째 문장.

나는 무서워요.

은인은 손을 움켜쥐었다.

세 번째 문장.

나는 거짓말했어요.

은인은 코끝을 만졌다.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한참 뒤, 은인은 말했다.

“저는…….”

목소리가 작았다.

푸리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라이자도 기다렸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저는 무서워요.”

그 순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그 사실에 놀란 듯했다.

“안 휘었어요.”

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응. 그건 돌아오는 말이니까.”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저는 거짓말했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은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것도 안 휘어요.”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그건 숨기는 말이 아니니까.”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문장을 보았다.

나는 괜찮아요.

은인은 그 문장을 집어 들었다.

잠시 손에 쥐고 있다가, 푸리나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아직 못 말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받아 들었다.

“좋아.”

“좋아요?”

“응. 아주 좋아.”

은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말했다.

“못 말하는 걸 못 말한다고 했잖아. 그건 아주 좋은 대사야.”

그레이가 조용히 기록했다.

현재 상태: 괜찮지 않음. 그러나 말할 수 있음.

라이자는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했다.

“그건 좋은 기록이네.”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저는 괜찮지 않아요.”

라이자의 얼굴이 아팠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응.”

“그래도 여기 있어도 되나요?”

라이자는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그 손을 잡았다.

“응.”

라이자는 말했다.

“여기 있어도 돼.”

은인의 코끝은 여전히 조금 휘어 있었다.

그러나 더 길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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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려가려 할 때,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은 아직 작업실에 얇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커지지 않았다.

오늘의 1막은 세상을 뒤집을 필요가 없었다.

은인이 거짓말을 했고, 코가 휘었고, 진실을 말했으며, 아직 괜찮지 않다고 인정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푸리나는 대본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이제 세 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무서워요.
나는 거짓말했어요.
나는 아직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은인이 직접 적은 삐뚤삐뚤한 한 줄이 있었다.

그래도 문은 닫히지 않았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

“좋아.”

라이자가 물었다.

“뭐가?”

“첫 막.”

“끝난 거야?”

“응.”

푸리나는 조명을 조금 낮췄다.

“거짓말은 은을 휘게 했지만, 진실은 문을 닫지 않았어.”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코를 만졌다.

“그럼 다음에는 뭐예요?”

푸리나는 대본의 다음 장을 넘겼다.

빈 페이지였다.

그 빈 페이지를 보자 은인은 조금 긴장했고, 라이자는 조금 불안해졌고, 그레이는 새 기록지를 준비했다.

푸리나는 웃었다.

“다음에는 밖으로 나가볼 거야.”

라이자의 손이 움찔했다.

은인도 놀라 물었다.

“밖이요?”

“응.”

푸리나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피노키오는 작업실 안에서만 사람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대신 빈 대본을 은인 앞에 놓았다.

“하지만 기억해. 밖으로 나가는 건 버리는 게 아니야. 돌아올 길을 알아보러 가는 거지.”

은인은 라이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업실 문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막이 내려왔다.

2막 — 인형극장과 장난감 나라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박수받는 말과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다르다 —
좋아. 레이튼을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너무 빨리 닫힌 답을 다시 질문으로 되돌려, 사람이 스스로 더 나은 답에 도달하게 만드는 신사”**야.

푸리나가 무대를 열고, 죠니가 찰나의 선택을 긍정하고, 하융이 비껴간 가능성을 본다면, 레이튼은 이미 답이라고 믿어버린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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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튼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레이튼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누군가가 너무 이른 답 때문에 망가지는 장면이다.

어떤 군주는 성급한 결론 때문에 잘못된 명령을 내린다.
어떤 귀족은 사람을 가문, 혈통, 신분이라는 이름으로 고정한다.
어떤 장군은 전투를 이길 수 있다 믿고 병사를 죽인다.
어떤 외교관은 상대의 말을 이미 배신으로 규정하고 협상을 닫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이름을 너무 빨리 붙여버린다.

레이튼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런 장면이다.

질문이 살아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던 순간.

그는 그때마다 생각한다.

“정말 그것이 답이었습니까?”
“다른 질문을 던졌다면, 다른 길이 열리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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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레이튼이 잃어본 가장 큰 것은 답이 사람을 구해준다는 순진한 믿음이다.

어릴 때 혹은 젊을 때의 레이튼은 답을 찾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을 수 있다.

정확한 정보.
훌륭한 전략.
옳은 결론.
바른 판결.
논리적으로 완성된 해답.

하지만 그는 곧 알게 된다.

답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지만, 사람을 닫아버릴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배신자다.”
“이 전쟁은 불가피하다.”
“이 희생은 필요하다.”
“이 아이는 쓸모없다.”
“이 나라는 이미 끝났다.”

이런 답들은 매우 명확하다.
하지만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사람을 망칠 수 있다.

즉 레이튼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정답이 언제나 선하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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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레이튼의 최대 업적은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되살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왕에게 답을 바치지 않는다.
대신 왕이 스스로 답을 낳을 수 있도록 묻는다.

그는 회의장에서 결론을 확정하지 않는다.
대신 결론에 붙은 성급한 이름을 지운다.

그는 상대를 논파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가 자기 전제를 보게 만든다.

그의 업적은 이것이다.

질문이 죽어버린 자리에서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든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레이튼은 쉽게 단정하지 못한다.
모두가 빠른 결론을 원할 때도, 그는 한 번 더 묻는다.
사람들이 명확한 답을 요구할 때도, 그는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별들을 바라본다.

그 대가는 결정의 지연, 우유부단해 보이는 인상, 그리고 타인이 보기에는 답을 회피하는 사람처럼 보일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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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레이튼이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충분히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사람은 스스로 더 나은 답에 도달할 수 있다.”



이건 레이튼의 가장 아름다운 믿음이지만, 동시에 왜곡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질문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미 너무 지쳐서 질문보다 휴식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모순을 마주할 힘이 없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답을 알면서도 이익 때문에 외면한다.
어떤 사람은 질문을 배움이 아니라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상황에서는 질문보다 즉각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레이튼은 질문의 힘을 너무 깊이 믿는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질문이 살아 있다면, 아직 사람은 닫히지 않았다.”



이 믿음은 레이튼의 신념이자 한계다.

그는 닫힌 결론을 경계한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결론을 내려야만 살아남는 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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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레이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나 사건이 너무 빠른 이름 아래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두려워한다.

“저 사람은 배신자다.”
“저 나라는 적이다.”
“이 전쟁은 불가피하다.”
“저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레이튼에게 이름은 편리하지만 위험하다.

별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별자리가 생긴다.
하지만 너무 빨리 별자리를 그으면, 별은 더 이상 다른 모양으로 이어질 수 없다.

그래서 레이튼은 이렇게 믿는다.

> “성급한 이름을 지우고 질문을 되살릴 수 있다면, 아직 더 나은 답이 태어날 수 있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여백이다.

생각할 여백.
다시 물을 여백.
전제를 확인할 여백.
모순을 마주할 여백.
상대가 스스로 답을 낳을 여백.

즉 레이튼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사람이, 국가가, 사건이 너무 이른 답에 갇히지 않도록 질문의 여백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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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레이튼은 먼저 질문한다.

그가 마주하는 위협은 괴물이나 적군일 수도 있지만, 더 자주 마주하는 위협은 닫힌 결론이다.

“적은 반드시 저 방향에서 올 것이다.”
“협상은 이미 실패했다.”
“저자는 우리를 속이고 있다.”
“이 작전밖에 방법이 없다.”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때 레이튼은 바로 반박하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그 결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만약 질문이 틀렸다면, 답도 틀린 것이 아닐까요?”

레이튼의 첫 대응은 결론을 질문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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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레이튼은 전제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결론이 사실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결론은 숨은 전제에서 나온다.

“귀족은 백성을 모른다.”
“평민은 통치할 수 없다.”
“적국은 언제나 배신한다.”
“신앙은 정치보다 순수하다.”
“힘이 없으면 평화는 불가능하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현실을 모른다.”

레이튼은 이 전제들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린다.

그의 말투는 공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부드럽고 젠틀하다.

하지만 질문은 날카롭다.

“그렇다면 각하께서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답이 그렇게 나오도록 질문을 고르신 셈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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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레이튼은 아포리아로 이끈다.

아포리아는 단순한 말문 막힘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답이 무너졌지만, 아직 새 답은 태어나지 않은 상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상태를 불편해한다.

하지만 레이튼에게 아포리아는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출발점이다.

그는 상대를 조롱하지 않는다.
상대의 무지를 폭로해 굴욕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좋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지요.”

이 단계에서 레이튼의 [여관:문답의 서재]가 가장 잘 드러난다.

정답이 보관된 도서관이 아니라,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환대받는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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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답을 대신 내려주지 않고, 선택을 돌려준다.

레이튼은 책사이고 전략가지만, 최종 선택권을 빼앗지 않는다.

그는 왕에게 조언할 수 있다.
모순을 밝힐 수 있다.
전제를 해체할 수 있다.
가능한 질문을 열어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결론은 군주와 당사자가 내려야 한다.

레이튼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질문을 살리는 것뿐입니다. 답은 각하께서 낳으셔야 합니다.”



이 점에서 레이튼은 푸리나와 닮았다.

푸리나는 무대를 준비하지만 대사를 대신 정하지 않는다.
레이튼은 질문을 준비하지만 답을 대신 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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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레이튼이 과의존하는 전략은 계속 질문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성급한 결론을 막는다.
잘못된 전제를 드러낸다.
협상과 회의에서 숨은 모순을 찾는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게 만든다.
닫힌 이야기에 여백을 만든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결단이 늦어진다.
상대가 질문을 공격으로 느낀다.
지친 사람에게 더 많은 사고 부담을 준다.
너무 오래 묻다가 행동할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
때로는 “정답은 없지만 지금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레이튼이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질문 이후의 결단력이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보완은 다른 가신들에게서 온다.

푸리나는 말한다.

“좋아! 그럼 이제 무대 위에서 해보자!”

죠니는 말한다.

“질문은 충분해. 이제 고르자.”

하융은 말한다.

“너무 늦으면, 비껴갈 창도 닫히오.”

그레이는 말한다.

“결론이 늦어지면 배급이 끊깁니다.”

레이튼은 질문을 지킨다.
하지만 그 질문이 결국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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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레이튼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답을 찾게 도울 수는 있지만, 상대가 스스로 낳아야 할 답을 대신 만들어주지는 않겠다.”



이것이 레이튼의 양심이다.

그는 매우 유능한 책사다.
상대의 전제를 해체할 수 있다.
논리의 빈틈을 찌를 수 있다.
질문을 설계해 상대를 원하는 결론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바로 그래서 위험하다.

레이튼이 선을 넘으면, 그의 문답은 산파술이 아니라 조작이 된다.

상대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믿게 만들지만, 사실은 레이튼이 원하는 답으로 몰아간 것이 된다.

이것은 레이튼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타락이다.

그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질문을 이용해 타인의 사고를 조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튼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질문은 문을 여는 열쇠이지, 사람을 끌고 가는 목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상대가 어떤 답을 낳을지는 상대의 몫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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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레이튼은 너무 빨리 닫힌 답을 다시 질문으로 되돌려, 사람이 스스로 더 나은 답을 낳게 만드는 문답가다.

그의 거짓말은 **“충분히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사람은 스스로 더 나은 답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사람과 사건과 국가가 성급한 이름과 결론에 갇히지 않도록 질문의 여백을 지키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질문하고, 전제를 드러내고, 아포리아로 이끈 뒤, 최종 답은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질문을 이용해 타인의 사고와 선택을 조종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하융을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을 너무 많이 본 끝에, 처음으로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 사람”**이야.

푸리나가 사람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인물이고, 죠니가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긍정하는 인물이라면, 하융은 선택되지 못한 길들을 기억하면서도, 결국 지금 이 현실에 남기로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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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융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하융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수없이 비껴간 가능성들의 잔상이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병사.
무너지지 않았을 성벽.
배신하지 않았을 친구.
불타지 않았을 마을.
전쟁이 오지 않았을 도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군주.
죽지 않아도 되었을 아이.
서로 등을 돌리지 않았을 사람들.

하융은 현실을 볼 때마다 그 뒤편에 겹쳐진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를 본다.

그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런 것이다.

“이 현실은 유일한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결과에 도착했다.”

그 기억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하융에게 그것은 거의 물리적인 풍경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다른 길들, 하지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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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하융이 잃어본 가장 큰 것은 현실을 단단하게 믿는 감각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하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다.
이미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고, 선택하지 않은 길은 사라진다.

하지만 하융에게는 그렇지 않다.

선택되지 않은 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가능성도 흔적을 남긴다.
더 나은 결말도, 더 끔찍한 결말도, 지금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계속 비친다.

그 결과 하융은 한때 이런 감각을 잃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현실이 정말 가장 중요한가?”

즉 하융의 가장 큰 상실은 현실의 확실성이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실이다.
현실이 희미해지면, 선택도 희미해진다.
선택이 희미해지면, 책임도 희미해진다.
책임이 희미해지면, 사람은 끝없이 가능성만 바라보며 멈춰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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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하융의 최대 업적은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더 평화로운 가능성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행복한 세계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더 덜 아픈 결말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떠나도 되는 길, 외면해도 되는 길,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길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푸리나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있는 지금 이 현실을 선택했다.

하융의 업적은 전쟁에서 몇 명을 살렸는가만이 아니다.

그의 진짜 업적은 이것이다.

가능성에 잠식되지 않고, 지금 현실에 남기로 한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그는 선택할 때마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함께 본다.
한 사람을 살릴 때, 살리지 못한 사람의 가능성도 본다.
한 전선을 지킬 때, 무너진 전선의 잔상도 본다.
지금의 푸리나를 선택할 때, 다른 길의 푸리나와 다른 결말의 킬리키아도 창 너머에 비친다.

그 대가는 끝없는 미련과 피로, 그리고 어떤 선택도 완전히 깨끗하지 않다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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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하융이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다면, 지금의 비극은 내가 충분히 잘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하융은 가능성을 본다.
그러므로 그는 실패를 단순한 실패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른 길이 보였는데 왜 이 길이 되었는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왜 죽었는가.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왜 현실에서는 무너졌는가.

이 질문은 하융을 유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를 갉아먹는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더 나은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실패는 내가 그 가능성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융의 책임감이자 왜곡이다.

그는 현실을 직접 고치는 신이 아니다.
죽은 가능성을 부활시키는 자도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의 정보, 흔들림, 실패의 박자, 생존의 오차를 현재 위에 얇게 겹쳐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하융은 종종 자신이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닿지 못한 모든 가능성의 책임까지 자신에게 돌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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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하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현실을 선택해버리는 것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내가 선택한 이 현실 때문에, 더 나은 가능성이 영영 닫혀버리는 것.”

하융은 선택의 무게를 너무 잘 안다.

선택하면 다른 길은 닫힌다.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할 수 있다.
한 전선을 지키면 다른 전선이 무너질 수 있다.
한 현실에 남으면,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게 된다.

그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많은 관측과 충분히 정확한 개입이다.

그는 이렇게 믿는다.

> “실패한 가능성의 흔적을 더 잘 읽고, 죽은 가능성의 정보를 더 정확히 현재에 겹칠 수 있다면, 이번 현실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래서 하융의 동기는 이것이다.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실패를 헛되게 하지 않고, 지금 현실이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

그는 죽은 가능성을 되살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왜 죽었는지는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산 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즉 하융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모든 가능성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은 가능성이 남긴 실패의 흔적을 읽어, 지금 이 현실만큼은 한 발자국 비껴가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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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하융은 먼저 본다.

하지만 이것은 확정된 미래예지가 아니다.
그는 앞으로 무조건 일어날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택되지 못했거나 실패한 가능성의 잔향을 본다.

적의 화살에 맞아 죽은 가능성.
방패선이 무너진 가능성.
수레가 뒤집힌 가능성.
전령이 길을 잃은 가능성.
죠니가 한 박자 늦어 쓰러진 가능성.
푸리나의 무대가 제때 열리지 못한 가능성.

하융은 위협 앞에서 가장 먼저 묻는다.

“어디서 무너졌는가?”
“어느 박자가 늦었는가?”
“누가 왼쪽을 보지 못했는가?”
“어떤 작은 오차가 죽음으로 이어졌는가?”

그의 첫 대응은 가능성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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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하융은 현재 위에 가능성의 정보를 얇게 겹친다.

그는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죽은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오지 않는다.
다만 실패의 흔적을 현재의 산 자에게 전달한다.

“왼쪽.”
“한 박자 늦추시오.”
“지금 숙이시오.”
“방패 각도를 낮추시오.”
“그 길은 이미 무너졌소.”
“이쪽이오. 아직 창이 닫히지 않았소.”

하융의 전투 지시는 시적이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짧고 명확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그는 가능성의 실패 정보를 통해 산 자들이 한 발자국 비껴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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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하융은 직접 틈으로 들어간다.

하융은 순수 후방 관측자가 아니다.
그는 전장 중후열과 위험한 틈을 오가며 개입할 수 있는 현장 지휘관형 전투원이다.

강자와 정면 승부를 벌여 압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죽을 가능성을 보고 그 죽음을 비껴가며 한두 박자 버틸 수 있다.

적의 검이 지나간다.
하융은 그 검에 베여 죽은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현실의 몸을 반 치 비튼다.
검집으로 손목을 건드리고, 무릎의 방향을 틀고, 창끝의 박자를 어긋나게 만든다.

그의 근접전은 “이긴다”보다 죽을 자리를 비껴가며 흐름을 바꾼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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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하나의 현실을 선택한다.

하융에게 최후의 선택은 단순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는 행위다.

어떤 가능성은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은 더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에서는 누군가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융의 마지막 전략은 이것이다.

> “모든 창을 열어둘 수는 없소.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아갈 창을 고르겠소.”



이때 하융은 더 이상 관측자가 아니다.
그는 선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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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하융이 과의존하는 전략은 가능성을 더 보려는 것이다.

위협을 만나면 더 본다.
실패하면 더 많은 가능성을 찾는다.
또 실패하면 더 깊이 창을 들여다본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실패의 원인을 찾게 해준다.
아군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한다.
전장 전체의 작은 오차를 보정한다.
죽은 가능성의 흔적을 산 자의 생존으로 바꾼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너무 많이 보면 선택이 늦어진다.
현실이 희미해진다.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수많은 가능성을 보게 된다.
결국 지금 이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하는 순간에도, “다른 길”을 보느라 한 박자 늦을 수 있다.

하융이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현실을 즉시 붙잡는 힘이다.

그래서 하융에게 필요한 보완은 푸리나와 죠니에게서 온다.

푸리나는 말한다.

“이 무대는 지금 여기야.”

죠니는 말한다.

“볼 만큼 봤으면 골라. 지금 움직여야 해.”

하융은 가능성을 본다.
푸리나는 그 가능성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으로 바꾼다.
죠니는 그 장면 안에서 지금 선택하는 찰나를 박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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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하융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더라도, 지금 이 현실의 사람들을 지우지는 않겠다.”



하융은 더 나은 가능성을 본다.
그러므로 위험한 유혹도 있다.

“저쪽 가능성이 더 낫다.”
“이 현실은 실패했다.”
“이 사람은 다른 가능성에서는 더 나았다.”
“지금의 선택은 틀렸으니, 다른 길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하융은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지금 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푸리나 헤툼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살아가는 이 현실.
죠니가 지금 달리는 이 현실.
그레이가 이름을 기록하는 이 현실.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는 이 현실.
하융 자신이 남기로 한 이 현실.

하융의 양심은 이것이다.

가능성은 현실을 돕기 위한 것이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죽은 가능성을 보아도, 산 자를 그 가능성의 그림자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을 강제로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말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이미 무너졌소.”
“그러나 이쪽 창은 아직 열려 있소.”
“가시오. 이번에는 비껴갈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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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하융은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잔향을 보고, 그 실패의 정보를 현재에 겹쳐 산 자들이 한 발자국 비껴가게 만드는 현장 지휘관이다.

그의 거짓말은 **“더 나은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실패는 내가 그 가능성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믿음이다.

그의 동기는 죽은 가능성들의 실패를 헛되게 하지 않고, 지금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비껴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행동 패턴은 가능성을 보고, 실패의 정보를 현재에 겹치고, 필요하면 직접 틈에 들어가며, 마지막에는 하나의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은 더 나은 가능성을 보았더라도, 지금 현실의 사람들을 지우거나 그림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 그레이를 이 기법으로 요약하면 핵심은 **“아무도 이름 없이 죽지 않도록, 죽음을 행정과 제도로 되돌려 고치는 사람”**이야.

푸리나가 사람을 무대 위로 올리는 군주라면, 그레이는 그 무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바닥과 장부와 배급표를 고치는 사람이다. 그레이는 차가운 관료가 아니라, 이름과 기록과 제도로 사람을 지키는 조용한 다정함의 인물로 잡는 게 맞아. 그레이는 킬리키아의 슬럼가 출신이고, 굶주림·병·부패한 관리·기록되지 않는 죽음을 먼저 본 인물이며, 지금은 복지, 치안, 구호, 위생, 배급, 예산, 장부, 피난민 수용, 전후 복구를 맡는 현실적 제동장치로 정리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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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릭터 요약

1. 캐릭터의 역사

a. 반복되는 기억

그레이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은 슬럼가에서 이름 없이 죽은 아이다.

그 아이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좋아하던 음식이 있었고, 무서워하던 골목이 있었고, 보고 싶어 하던 풍경이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행정 장부에는 그렇게 남지 않았다.

“빈민 아동 1명. 사망 처리.”

그레이에게 반복되는 기억은 이 문장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장부에는 사람이 남지 않았다.”

이 기억은 그레이의 모든 행정 철학의 원점이다.
그녀에게 이름은 감상적인 장식이 아니다. 이름은 책임의 시작이다. 이름이 없으면 죽음은 통계가 되고, 통계가 되면 책임자는 사라지고, 책임자가 사라지면 같은 죽음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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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잃어본 가장 큰 것

그레이가 잃어본 가장 큰 것은 세상이 사람의 이름을 알아서 기억해줄 거라는 믿음이다.

귀족은 이름이 남는다.
기사도 이름이 남는다.
군주와 장군은 기록된다.
하지만 골목의 아이, 굶어 죽은 노인, 병으로 죽은 피난민, 부패한 배급 때문에 죽은 사람은 너무 쉽게 숫자가 된다.

그레이는 일찍 알았다.

세상은 모든 사람의 이름을 공평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은 반복된다.
가난한 사람의 죽음은 쉽게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레이의 가장 큰 상실은 이것이다.

이름 없는 사람도 당연히 사람으로 취급받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그레이는 “당연한 기억”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직접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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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최대 업적과 그 대가

그레이의 최대 업적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사망 원인과 남은 기억을 산 자의 제도로 바꾸는 체계를 만든 것이다.

그녀는 망자를 부리지 않는다.
원혼을 무기화하지 않는다.
죽은 자를 병력이나 자원으로 쓰지 않는다.

대신 그레이는 확인한다.

누가 죽었는가.
왜 죽었는가.
어떤 배급이 끊겼는가.
어느 우물이 썩었는가.
어느 관리가 장부를 조작했는가.
어느 가족에게 보상이 닿지 않았는가.
어느 편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을 복지, 치안, 위생, 배급, 부패 감시, 유족 보상, 전후 복구, 사회 안정으로 바꾼다. 그레이의 신술은 망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과 사망 원인과 억울함과 유언과 미전달 서신을 확인해 산 자의 세계를 고친 뒤, 그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치면 망자가 조용히 잠들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어 있어.

그녀의 업적은 이것이다.

죽음을 숫자로 끝내지 않고, 다시는 같은 이유로 죽지 않도록 제도로 되돌린 것.

하지만 그 대가도 있다.

그레이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안다.
너무 많은 사망 원인을 안다.
너무 많은 “조금만 빨랐다면 살았을 사람”을 안다.

그 대가는 살아 있는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이 죽을 수 있는 행정적 원인을 먼저 떠올리는 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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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곡된 관점

그레이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이것이다.

> “내가 장부를 완벽하게 고치고, 제도를 정확히 세우면, 같은 이유로 다시 죽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이 믿음은 그레이의 선함이다.
그녀는 막연히 슬퍼하지 않는다.
울고 끝내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왜 죽었는지 추적하고, 다음에는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게 제도를 고친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은 모든 죽음을 행정적으로 예방 가능한 실패처럼 떠안으려는 점이다.

세상에는 장부로 막을 수 없는 죽음도 있다.
제도가 있어도 뚫리는 비극도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실도 있다.
그리고 아무리 완벽한 행정관이라도,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압축하면 이렇게 된다.

> “이름과 원인과 절차를 놓치지 않는다면,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죽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그레이의 신념이자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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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

그레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 이름 없이 죽고, 그 죽음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반복되는 것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사망자 1명.
난민 3명.
빈민 아동 1명.
신원 미상.
처리 완료.
보상 불가.
원인 불명.

그레이는 이런 문장들을 두려워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름, 원인, 책임, 개선이다.

이름을 찾아야 한다.
왜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
누가 방치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음에는 같은 이유로 죽지 않게 해야 한다.
남은 가족에게 편지와 보상과 설명이 도착해야 한다.

즉 그레이의 동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나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를 산 자의 세계에 남겨, 같은 이유로 다시 죽는 사람만큼은 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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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동 패턴

전략의 사다리

위협을 만났다. 어떻게 하는가?

그레이는 먼저 숫자를 이름으로 되돌린다.

그녀는 “피난민 300명”이라고만 보지 않는다.

어느 마을에서 왔는가.
누가 가족을 잃었는가.
누가 약이 필요한가.
누가 글을 못 읽는가.
누가 배급표에서 누락되었는가.
누가 어제까지 아이를 안고 있었는가.

그레이의 첫 대응은 식별이다.

“명단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사망자 이름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배급 누락자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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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그레이는 원인을 추적한다.

그녀는 슬픔을 추상화하지 않는다.

굶주림이면 왜 배급이 끊겼는지 본다.
병이면 어느 우물이 썩었는지 본다.
폭동이면 어떤 세금과 부패가 원인이었는지 본다.
전사라면 어느 명령과 어느 보급 실패와 어느 퇴각 지연이 죽음으로 이어졌는지 본다.

그레이의 두 번째 대응은 사망 원인과 행정 원인의 분해다.

“우연이 아닙니다.”
“이건 배급표의 문제입니다.”
“우물 관리 기록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전에도 같은 민원이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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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그레이는 제도를 고친다.

그녀는 원망만 남기지 않는다.

배급표를 바꾼다.
우물을 폐쇄하거나 정비한다.
부패 관리를 조사한다.
장례 절차를 세운다.
보상 경로를 만든다.
피난민 수용소의 동선을 바꾼다.
아이들이 다시 같은 골목에서 죽지 않게 등불을 단다.

그레이의 세 번째 대응은 복구와 재발 방지다.

그녀의 다정함은 말보다 구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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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먹힌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기억을 잠들게 한다.

그레이는 죽은 자를 붙잡아두기 위해 기록하지 않는다.
망자를 계속 산 자의 세계에 묶어두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름을 찾고, 죽음의 이유를 밝히고, 필요한 조치를 하고, 편지를 보내고, 유족에게 설명하고, 제도를 고친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쉬어도 됩니다.”

그레이의 최후 전략은 이것이다.

>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면, 이제 그 이름은 장부가 아니라 등불 아래에서 잠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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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존하는 전략

그레이가 과의존하는 전략은 모든 슬픔을 장부와 제도로 처리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강력하다.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같은 죽음을 줄인다.
부패를 막는다.
피난민을 살린다.
죽은 사람의 이름과 권리를 회복한다.

하지만 과의존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슬픔은 아직 제도로 바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떤 유족은 보상보다 울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죽음은 원인 분석 이전에 애도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고칠까요?”보다 “많이 아프셨지요”를 먼저 들어야 한다.

그레이가 이 전략에 과의존하며 잃는 것은 말로 건네는 위로와 함께 울어주는 시간이다.

그래서 푸리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푸리나는 말한다.

“무대 위로 올라와. 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레이는 말한다.

“그 전에 이 사람이 오늘 먹을 식사와 잘 방을 확인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다.

푸리나의 극이 계속되려면 그레이의 장부가 필요하다.
그레이의 장부가 사람을 살리려면 푸리나의 조명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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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선

그레이의 마지막 선은 이것이다.

> “나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기록할 수는 있어도, 그 이름을 산 자의 목적을 위한 자원으로 쓰지는 않겠다.”



이것이 그레이의 양심이다.

그녀는 죽은 자의 이름을 안다.
죽은 이유를 안다.
억울함과 유언과 미전달 서신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이름을 이용하지 않는다.

죽은 자의 원한으로 적을 공격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병력으로 부리지 않는다.
사망자 수를 정치적 선전 도구로 삼지 않는다.
슬픔을 푸리나의 무대 효과나 국가 동원 구호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레이가 넘지 않으려는 선은 기억을 이용하는 것이다.

기억은 책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기억은 잠들게 하기 위한 것이다.
기억은 산 자가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레이의 마지막 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이름은 장부에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깃발처럼 흔들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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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압축

그레이는 아무도 이름 없이 죽지 않도록, 죽은 사람의 이름과 사망 원인을 기록하고 그것을 복지·치안·위생·배급·보상·전후 복구로 바꾸는 안식계 행정 신술사다.

그녀의 거짓말은 **“장부와 제도를 완벽하게 고치면, 같은 이유로 다시 죽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그녀의 동기는 사람이 이름 없이 죽고, 그 죽음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반복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 패턴은 숫자를 이름으로 되돌리고, 원인을 추적하고, 제도를 고치고, 마지막에는 기억이 잠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기억을 산 자의 목적을 위한 자원이나 선전 도구로 쓰지 않는 것이다.
《은빛 피노키오》

2막 — 인형극장과 장난감 나라

— 박수받는 말과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다르다 —

문은 닫혀 있었다.

잠겨 있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은인에게는 이상하게 무서웠다.

잠겨 있다면, 나갈 수 없다고 말하면 되었다.
나갈 수 없다면, 나가지 못한 것은 자기 선택이 아니었다.
라이자 곁에 남는 것도, 작업실 안에 있는 것도, 안전한 부품 상자와 따뜻한 차와 익숙한 은빛 냄새 사이에 앉아 있는 것도 전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갈 수 있었다.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나가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뜻이었다.

은인은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라이자는 그 뒤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조금 굳어 있었다. 그 손은 방금까지 은인의 손을 잡고 있었고, 지금은 놓아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다.

원래라면 여기서 크게 선언했을 것이다.

“자! 모험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문 옆에 작은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라이자가 물었다.

“그건 뭐야?”

“의자.”

“그건 나도 알아.”

“돌아오면 앉을 자리.”

라이자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푸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의자 위치를 고쳤다.

“모험을 시작하는 문 옆에는, 돌아왔을 때 앉을 자리가 있어야 해. 그래야 문이 출발만 하는 곳이 아니라 돌아오는 곳도 되거든.”

은인은 의자를 보았다.

“제가 돌아오면 저기에 앉나요?”

“원하면.”

“안 앉아도 되나요?”

“응.”

“늦게 와도요?”

라이자의 목소리가 낮게 끼어들었다.

“늦어도.”

은인이 돌아보았다.

라이자는 스스로도 그 말을 붙잡는 듯했다.

“늦어도 문은 닫지 않아.”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무언가 적었다.

푸리나가 슬쩍 보았다.

문 옆 의자: 귀환 확인용. 강제 착석 금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레이, 그건 소품 기록이야, 행정 기록이야?”

“둘 다입니다.”

“좋아. 아주 그레이다워.”

은인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천천히 돌렸다.

끼익.

이번에는 코가 아니라 문이 소리를 냈다.

은인은 그 소리에 놀라 멈췄다.

푸리나가 말했다.

“문은 원래 소리를 내.”

은인은 물었다.

“나가도 된다는 소리인가요?”

“아니. 그냥 오래된 문이라는 소리.”

라이자가 아주 작게 웃을 뻔했다가 참았다.

은인은 문을 열었다.

작업실 밖의 복도에는 작은 극장처럼 빛이 깔려 있었다. 푸리나의 신술은 아직 얇았다. 벽과 바닥은 그대로였지만, 복도 끝에는 어디서 생겼는지 모를 작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인형극장

그 아래 작은 글씨.

오늘의 주연: 아주 사람 같은 은빛 아이

은인은 간판을 읽고 멈췄다.

“아주 사람 같은.”

라이자의 표정이 굳었다.

푸리나도 그 글씨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저 문구는 내가 안 썼는데.”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무대가 원전의 유혹을 은인의 불안에 맞춰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푸리나는 간판을 보았다.

아주 사람 같은 은빛 아이.

칭찬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이자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은인에게는 더 복잡했다.

은인은 조용히 물었다.

“사람 같으면 박수받나요?”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 옆 의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확인하러 가볼래?”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면.”

은인은 다시 간판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궁금해요.”

푸리나는 문 안쪽에 남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

“알아.”

라이자는 먼저 말했다.

“따라가고 싶어.”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의 손은 아직도 은인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라이자는 그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래도 여기 있을게.”

은인이 놀라 물었다.

“같이 안 가나요?”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네가 처음으로 혼자 보고 싶은 곳이잖아.”

“하지만 무서워요.”

“응.”

라이자는 문 옆 의자를 보았다.

“나도 무서워.”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금 아픈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까 둘 다 배워야 해. 너는 나 없이 한 걸음 가는 법을. 나는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도 문을 닫지 않는 법을.”

그레이는 기록판 위에 펜을 올렸다가, 곧 내렸다.

그 말은 기록하기 전에 먼저 들을 말이었다.

푸리나는 은인에게 말했다.

“나는 무대 옆에 있을게. 하지만 대신 걷지는 않아.”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조금 늦게.

“기다릴게.”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은인은 그것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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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극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낡은 나무 무대.
붉은 천으로 만든 막.
손때 묻은 객석.
천장에 매달린 둥근 등불들.
그리고 수많은 인형들.

줄에 매달린 병정 인형.
나무로 만든 왕자 인형.
종이로 만든 새.
천 조각으로 꿰맨 여우.
한쪽 눈이 떨어진 고양이.
왕관을 쓴 꼭두각시.

인형들은 은인을 보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왔다!”

“은빛이다!”

“반짝인다!”

“사람 같아!”

그 말에 은인은 자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사람 같아.

이번에는 박수처럼 들렸다.

작은 무대의 옆, 낡은 객석 가장자리에 한 사람이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죠니 죠스타였다.

그는 인형극장 주인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다만 낡은 무대용 망토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한 손에는 아직 묶지 않은 무대용 창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죠니?”

죠니는 고개만 살짝 들었다.

“응.”

“왜 여기 있어?”

“객원 단장이라던데.”

“누가?”

죠니는 무대 뒤를 턱짓했다.

“네 극장이.”

푸리나는 잠시 자기 신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극장, 가끔 너무 능동적이야.”

죠니는 건조하게 말했다.

“주인을 닮았겠지.”

“너무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은인은 죠니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인형극장 주인인가요?”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주인은 아니야. 박수받는 쪽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아는 사람이지.”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그 설명, 은근히 멋있네.”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무대에 서볼래?”

은인은 주저했다.

“서면 박수받나요?”

“잘하면.”

“못하면요?”

“그럼 못한 만큼 조용해지겠지.”

푸리나가 바로 끼어들었다.

“죠니, 교육적으로 너무 건조해.”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어.”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무섭지만, 조금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죠니는 은인의 코끝을 보았다.

휘어진 부분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그 코, 아프냐?”

은인은 조금 놀랐다.

“아프지는 않아요. 불편해요.”

“그럼 불편한 거지.”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하긴 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죠니는 무심하게 이어 말했다.

“근데 세상에 안 이상한 게 그렇게 많지도 않아.”

푸리나는 손뼉을 칠 뻔했다가 참았다.

죠니는 망토 하나를 은인에게 던졌다.

“입고 싶으면 입어. 싫으면 바닥에 둬. 망토는 네가 입어야 의미가 있지, 망토가 널 입으면 귀찮아진다.”

은인은 망토를 받았다.

“망토가 저를 입을 수도 있나요?”

“가능하지.”

죠니는 무대 위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가끔 박수받으려고 자기가 입은 걸 자기라고 믿거든.”

은인은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망토였다.

조금 낡았지만 무대 위에서는 예쁘게 보일 색.

은인은 조심스럽게 입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섰다.

은빛 피부.
조금 휘어진 코끝.
붉은 망토.
낯선 무대.

인형들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사람 같아!”

“정말 사람 같아!”

“걸음도 사람 같아!”

“웃어봐!”

은인은 멈칫했다.

죠니는 무대 옆에서 말했다.

“웃기 싫으면 웃지 마.”

은인은 그를 보았다.

인형들이 웅성거렸다.

푸리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은인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어색한 웃음이었다.

박수가 줄었다.

은인은 그것을 느꼈다.

그래서 조금 더 사람처럼 웃으려고 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접고, 푸리나가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박수가 커졌다.

“좋아!”

“사람 같아!”

“훌륭해!”

은인은 조금 놀랐다.

사람 같아.

그 말은 아까보다 덜 아팠다.

아니, 아픈데도 따뜻했다.

왜냐하면 박수가 함께 왔기 때문이다.

죠니는 그 박수를 들으며 말했다.

“박수는 받아둬. 나쁠 건 없어.”

은인이 물었다.

“나쁘지 않나요?”

“응. 나쁘진 않아.”

그는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문제는 그 박수 없이는 네 걸음이 진짜가 아니라고 믿기 시작할 때지.”

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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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연은 아주 간단했다.

은빛 피노키오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죠니가 무대 옆 의자에서 묻는다.

“이름이 뭐냐?”

은인은 대답한다.

“저는 은인입니다.”

그러자 무대 뒤 인형들이 웅성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오늘은 은빛 피노키오잖아.”

“그 이름이 더 잘 팔려.”

“은인은 너무 조용해.”

은인은 자기 이름을 손으로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름이 조금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손을 들려다가 멈췄다.

지금 끼어들면 은인의 장면을 빼앗는다.

하지만 너무 늦으면 은인이 밀려난다.

그때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이름을 바꾸면 박수는 커질 수 있어.”

은인은 그를 보았다.

죠니는 무심하게 이어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갈 때, 누가 돌아가는지 헷갈릴 수도 있지.”

은인은 침묵했다.

인형들이 기다렸다.

은인은 말했다.

“저는 은인입니다.”

잠시 정적.

은인은 조금 더 말했다.

“오늘은 은빛 피노키오를 해봅니다.”

죠니가 작게 웃었다.

“좋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가 문 밖에서 기록했다.

이름 유지. 배역 임시 착용.

인형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박수를 쳤다.

박수는 다시 따뜻해졌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이름을 잃지 않아도 박수받을 수 있다.

그 사실이 은인에게는 커다란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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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장면은 더 어려웠다.

은인이 줄에 매달린 병정 인형들과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인형들은 줄에 이끌려 움직였다.

왼쪽.
오른쪽.
앞으로.
뒤로.
고개 숙이기.
돌기.

은인은 처음에는 따라 하기 어려워했다.

왜냐하면 은인은 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정 인형 하나가 말했다.

“줄이 있으면 편해.”

다른 인형이 말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거든.”

세 번째 인형이 덧붙였다.

“틀리지도 않아.”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틀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조금 달콤했다.

은인은 병정 인형들을 따라 움직였다.

왼쪽.
오른쪽.
앞으로.
뒤로.

처음에는 삐걱였다.

박수가 줄었다.

은인은 더 열심히 맞추려 했다.

이번에는 발보다 고개가 먼저 움직였다.

관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끼릭.

푸리나가 눈썹을 움직였다.

문 밖에서 라이자의 손이 굳었다.

죠니가 말했다.

“멈춰.”

은인은 멈췄다.

인형들이 아쉬운 소리를 냈다.

“왜 멈춰?”

“조금 더 하면 되는데.”

“박수받고 있었잖아.”

은인은 무대 중앙에서 굳었다.

박수받고 있었다.

하지만 관절이 조금 아팠다.

아프다고 해야 하나.
아프지 않은 척하면 박수가 이어질까.
괜찮다고 말하면 라이자가 걱정하지 않을까.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공연이 멈출까.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목을 가볍게 두드렸다.

신호였다.

네 대사를 해.

은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는 지금 조금 불편해요.”

박수가 멈췄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앉아.”

은인은 놀랐다.

“공연 중인데요?”

“그래서 뭐.”

죠니는 무대 바닥을 가리켰다.

“무대가 사람보다 비싼 건 아니잖아.”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 대사, 마음에 들어.”

은인은 조심스럽게 무대 위에 앉았다.

천장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무대가 꺼지지도 않았다.

다만 조명이 조금 낮아졌다.

푸리나가 박수를 쳤다.

짝.

죠니도 느리게 박수를 쳤다.

짝.

문 밖에서 그레이가 박수를 쳤다.

짝.

그리고 조금 늦게, 라이자의 박수가 들렸다.

짝.

처음에는 인형들이 어색해했다.

하지만 곧 한쪽 눈이 떨어진 고양이 인형이 박수를 쳤다.

짝.

그러자 병정 인형 하나가 따라 했다.

짝.

은인은 앉은 채로 박수를 들었다.

서 있지 않아도 박수가 올 수 있었다.

이것도 은인에게는 큰 발견이었다.

죠니는 은인 옆에 쪼그려 앉았다.

“기억해둬.”

“무엇을요?”

“박수받으려고 서는 건 나쁘지 않아. 그런데 앉아야 할 때 못 앉게 되는 순간부터 좀 위험해진다.”

은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인형극장의 박수는 나쁘지 않았다.

그건 분명했다.

박수는 따뜻했고, 은인은 그 따뜻함을 싫어하지 않았다.

문제는 박수가 너무 빨리 답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웃으면 박수.
사람처럼 말하면 박수.
아프다고 말해도, 푸리나가 장면을 바꾸면 박수.

그렇게 되자 은인은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람다움은 무엇일까.

라이자의 가족인 것.
자기 이름을 지키는 것.
아프다고 말하는 것.
연기하는 것.
박수받는 것.

모두 조금씩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 인형 하나가 은인에게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오늘 아주 훌륭했어. 특별 배우에게 주는 보상이야.”

은인은 주머니를 받았다.

안에는 반짝이는 동전들이 들어 있었다.

은인이 물었다.

“이건 무엇인가요?”

“네가 번 거지.”

“제가요?”

“물론! 박수를 받았으니까.”

은인은 동전을 바라보았다.

푸리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은인, 그건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돼.”

그레이가 문 밖에서 조용히 말했다.

“계약 조건이 사전에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죠니는 동전 주머니를 보고 말했다.

“받기 전에 물어봐. 나중에 귀찮아진다.”

은인은 동전 주머니를 들고 물었다.

“이걸 받으면 저는 뭘 해야 하나요?”

인형은 멈칫했다.

“어…… 다음 공연도 조금?”

그레이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아, 방금 계약서 없는 장기 출연 계약이 될 뻔했어.”

죠니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세상엔 그런 박수가 많아.”

은인은 동전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아직은 안 받을래요.”

인형들이 웅성거렸다.

“왜?”

“반짝이는데.”

“사람처럼 보이는 데 필요한 걸 살 수 있는데.”

은인의 손이 멈췄다.

사람처럼 보이는 데 필요한 것.

푸리나의 표정이 조금 차가워졌다.

죠니가 은인을 보았다.

“필요하냐?”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사람처럼 보이는 데 필요한 건 많아. 옷, 말투, 걸음, 웃는 법, 화내는 법, 안 아픈 척하는 법.”

은인은 그를 보았다.

“그럼 그걸 배우면 사람이 되나요?”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남들이 헷갈리기 쉬워져.”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죠니식 답변은 건조한데 정확하네.”

은인은 동전 주머니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무대 뒤쪽의 다른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또 다른 간판이 있었다.

장난감 나라

그 아래 작은 글씨.

책임 없는 아이들은 매일 축제입니다.

푸리나는 그 문구를 보고 아주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 이거 원전적으로 정말 안 좋은 곳인데.”

은인이 물었다.

“책임 없는 곳은 좋은 곳인가요?”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아닙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이번엔 빠르네.”

“위험 문구입니다.”

죠니는 간판을 보았다.

“그래도 궁금하겠지.”

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가보고 싶어?”

은인은 작게 말했다.

“제가 고르는 걸 해보고 싶어요.”

문 밖의 라이자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말리지 않았다.

“혼자?”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네.”

라이자의 얼굴이 아파졌다.

“무서울 거야.”

“네.”

“속을 수도 있어.”

“네.”

“돌아오는 길을 잃을 수도 있어.”

은인은 문 옆 의자를 떠올렸다.

“그래도 문은 열려 있나요?”

라이자는 눈을 떴다.

그 질문은 잔인했다.

하지만 동시에, 라이자가 해주었던 약속이 돌아온 것이었다.

“응.”

라이자는 말했다.

“열려 있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갔다 올게요.”

라이자는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돌아오기 싫어지면.”

은인의 몸이 멈췄다.

라이자는 겨우 말을 이었다.

“그때도, 네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줘.”

“왜요?”

라이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다릴 곳을 알아야 하니까.”

은인은 한참 라이자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줄게요.”

그것은 완전한 귀환 약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라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먼 약속이었다.

죠니는 은인에게 짧게 말했다.

“갔다 와. 그리고 박수랑 네 이름 중에 하나만 들고 와야 하면, 이름을 들고 와.”

은인은 물었다.

“박수는 놓고 와도 되나요?”

죠니는 무심하게 답했다.

“박수는 대체로 네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울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정말 죠니다운 조언이네.”

은인은 장난감 나라의 문을 향해 걸었다.


---

장난감 나라는 문을 열자마자 소리가 쏟아졌다.

웃음.
나팔.
목마의 삐걱거림.
나무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
달콤한 과자의 냄새.
색종이.
풍선.
작은 회전목마.
끝없이 이어지는 노래.

“놀자!”

“오늘만 놀자!”

“내일은 없어!”

“혼나지 않아!”

“기록하지 않아!”

“실수해도 아무도 묻지 않아!”

은인은 문 앞에 서서 압도되었다.

이곳에는 의자가 많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의자는 없어 보였다.

모든 의자는 놀이기구였고, 모든 문은 안쪽으로만 열려 있었다.

장난감 나라의 입구 옆, 색종이와 그림자 사이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하융이었다.

그는 장난감 나라의 아이들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꾸짖지도 않았다. 그저 여러 갈래로 이어진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빛 창호가 그의 등 뒤에 아주 얇게 겹쳐 보였다.

은인은 그를 알아보았다.

“하융.”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왔구려.”

“여기서 무엇을 하나요?”

“길을 보고 있소.”

은인은 장난감 나라 안쪽을 보았다.

“여기 길이 많나요?”

하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소. 이 길로 가면 칭찬받는 아이요. 저 길로 가면 혼나는 아이요. 저쪽 길로 가면 아무도 찾지 않는 아이가 되오.”

은인의 손이 움찔했다.

“어느 길이 사람이 되는 길인가요?”

하융은 은인을 보았다.

그의 눈은 미래를 확정하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의 창들을 보는 눈이었다.

“길이 사람을 만들지는 않소.”

은인은 기다렸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돌아오는 방식이 사람을 만들 뿐이오.”

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난감 나라의 음악이 워낙 커서,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태엽 아이가 달려왔다.

“너도 왔구나!”

종이 아이가 외쳤다.

“여기는 아무도 혼내지 않아!”

천 아이가 말했다.

“대사 틀려도 돼!”

나무 아이가 웃었다.

“거짓말해도 돼!”

태엽 아이가 덧붙였다.

“아파도 괜찮다고 하면 돼!”

은인은 마지막 말을 듣고 멈칫했다.

“아파도 괜찮다고 하면 되나요?”

태엽 아이가 웃었다.

“응! 그러면 아무도 멈추라고 안 해!”

종이 아이가 말했다.

“멈추면 재미없잖아.”

천 아이가 말했다.

“여기서는 다 괜찮아!”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다 괜찮아.

그 말은 따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차가웠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길은 처음엔 자유로워 보이오.”

은인은 그를 보았다.

“나쁜 길인가요?”

“아니오.”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노는 것도 길이오. 쉬는 것도 길이고, 도망치는 것도 때로는 길이오.”

“그럼요?”

“다만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말은 종종 같은 얼굴을 하고 있소.”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장난감 나라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아무도 돌아갈 곳을 말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곧 회전목마가 돌기 시작했고, 과자의 냄새가 가까워졌고, 음악이 은인의 생각을 덮었다.

은인은 한 발 들어섰다.


---

문 밖에서 라이자는 기다렸다.

처음에는 서 있었다.

그 다음에는 문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 다시 일어났다.

다시 앉았다.

푸리나는 그녀 곁에 있었다.

그레이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기록하고 있었다.

죠니는 인형극장 쪽 무대 턱에 앉아 있었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박수의 문 앞에서 끝난 듯했다.

라이자가 낮게 물었다.

“죠니는 안 들어가?”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안쪽은 내 장면이 아니야.”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융 쪽 장면이지.”

라이자는 장난감 나라의 문을 보았다.

“하융이면 괜찮을까?”

죠니는 건조하게 말했다.

“괜찮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아니지.”

라이자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대신 길을 보여줄 거야. 걷는 건 은인 몫이고.”

라이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제일 무섭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기다림은 통제보다 어렵습니다.”

라이자가 그레이를 보았다.

“너는 그런 말도 기록해?”

“필요하다면요.”

라이자는 작게 웃었다.

“그럼 적어둬.”

그레이는 기록했다.

기다림은 통제보다 어렵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그레이, 오늘 기록이 너무 좋아.”

“감사합니다.”

“아니, 정말로.”

그레이는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내렸다.

라이자는 문을 보았다.

“은인이 돌아오면, 뭐라고 해야 하지?”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부터 많이 묻지 마.”

“왜?”

“돌아온 사람은 문턱에서 이미 지쳐 있을 때가 많아.”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덧붙였다.

“그리고 코부터 보지 마.”

라이자는 굳었다.

자신이 가장 먼저 코를 볼 것이라는 걸 들킨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얼굴을 봐.”

“코도 얼굴이야.”

“라이자.”

“알았어.”

라이자는 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볼게.”


---

장난감 나라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곳에는 시계가 많았지만, 모두 다른 시간을 가리켰다.

한 시계는 계속 낮이었다.

다른 시계는 계속 축제 전날이었다.

또 다른 시계는 숫자 대신 과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은인은 점점 피곤해졌다.

그러나 장난감 나라에서는 피곤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피곤하다고 말하면, 누군가 말했다.

“조금만 더!”

“마지막 한 번!”

“재밌잖아!”

“여기는 쉬러 온 곳이 아니라 놀러 온 곳이야!”

은인은 생각했다.

작업실에서는 쉬어도 된다고 했다.

무대에서는 앉아도 박수받았다.

그런데 장난감 나라에서는 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놀고 있었다.

모두 웃고 있었다.

모두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모두 조금씩 휘어 있었다.

나무 아이의 팔은 살짝 갈라져 있었다.

종이 아이의 모서리는 젖어 있었다.

태엽 아이는 같은 웃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천 아이의 바느질은 풀려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괜찮아?”

은인이 처음으로 물었다.

태엽 아이가 웃었다.

“괜찮아!”

끼릭.

태엽 소리가 났다.

은인은 그 소리를 들었다.

“정말?”

“응! 여기는 다 괜찮아!”

끼릭.

태엽 아이의 등에서 작은 나사가 떨어졌다.

은인은 그것을 주웠다.

“이게 떨어졌어요.”

태엽 아이는 웃었다.

“괜찮아!”

“하지만 떨어졌어요.”

“괜찮다니까!”

그 순간, 태엽 아이의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놀랐다.

“왜 안 휘나요?”

태엽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거짓말하면 코가 휘어야 하는데.”

태엽 아이는 웃었다.

“나는 내가 괜찮다고 믿어.”

그 말에 은인은 조용해졌다.

거짓말은 남을 속이는 말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자신도 속고 있으면?

자기 자신도 정말 괜찮다고 믿고 있으면?

그러면 은은 휘지 않는가.

하지만 나사는 떨어졌다.

은인은 손안의 작은 나사를 보았다.

휘지 않는 거짓말도 있었다.

그것은 더 무서웠다.

그때 하융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 길도 있소.”

은인은 돌아보았다.

하융은 장난감 나라의 가장자리, 색종이가 닿지 않는 그늘에 서 있었다.

“어떤 길인가요?”

“아프지 않다고 믿는 길.”

은인은 태엽 아이를 보았다.

“그 길은 어디로 가나요?”

하융은 잠시 창밖을 보는 듯 눈을 내렸다.

“오래 가오. 생각보다 오래. 웃을 수 있고, 달릴 수 있고, 모두에게 괜찮아 보일 수 있소.”

“그럼 좋은 길인가요?”

“끝에서 자신이 왜 멈췄는지 모르게 되오.”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융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길을 보여주었다.

은인은 갑자기 라이자가 보고 싶어졌다.

작업실의 은빛 냄새.
문 옆 의자.
그레이의 기록판.
푸리나의 빈 대본.
라이자의 손.

돌아가고 싶었다.

그 순간, 장난감 나라의 음악이 조금 느려졌다.

태엽 아이가 말했다.

“어디 가?”

은인은 문을 보았다.

“돌아갈래요.”

“왜?”

“피곤해요.”

종이 아이가 말했다.

“피곤하지 않다고 하면 되잖아.”

천 아이가 말했다.

“그러면 계속 놀 수 있어.”

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피곤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그리고 무서워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은인은 자기 손을 펼쳤다.

동전 주머니는 없었다.

인형극장에 두고 왔다.

하지만 박수의 감각은 아직 손에 남아 있었다.

“박수받고 싶어서 괜찮다고 말했어요.”

끼익.

코가 조금 움직였다.

은인은 놀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아직도 조금 거짓말이 남아 있나 봐요.”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걸 알고 돌아가는 길도 있소.”

은인은 그를 보았다.

“그 길은 어디로 가나요?”

하융은 문을 가리켰다.

“문 앞에서 혼나는 곳으로.”

은인은 움찔했다.

하융은 아주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은인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는 돌아갈래요.”


---

문은 생각보다 멀었다.

장난감 나라에 들어올 때는 바로 앞에 있었는데, 돌아가려고 하자 길이 늘어난 것 같았다.

회전목마가 길을 막고, 과자 가게가 불렀고, 나팔 소리가 귀를 붙잡았다.

“마지막 한 번!”

“한 번만 더!”

“돌아가면 혼날 거야!”

은인은 멈췄다.

그 말이 가장 무서웠다.

돌아가면 혼난다.

그건 맞았다.

라이자는 거짓말은 혼날 거라고 했다.

은인은 코를 만졌다.

더 휘어 있었다.

망토는 조금 답답했다.

돌아가면 라이자가 볼 것이다.

코도 보고, 망토도 볼 것이다.

실망할지도 모른다.

화낼지도 모른다.

은인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거짓말하고 싶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어떨까.

코가 휘겠지.

그러면 들키겠지.

그럼 차라리 돌아가지 않으면?

은인은 문손잡이를 잡지 못했다.

그때,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다.

의자가 바닥에 살짝 끌리는 소리.

누군가 문 옆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소리.

라이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푸리나도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

은인은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었다.


---

문 밖에는 라이자가 있었다.

정말로 있었다.

푸리나도 있었고, 그레이도 있었다.

죠니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대용 창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하융은 어느새 문 안쪽 그늘에서 사라져 있었다.

문 옆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은인이 앉을 수 있게.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푸리나가 말했던 것처럼, 코부터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봤다.

조금 봤다.

그 다음에는 얼굴을 보았다.

은인은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말했다.

“코 봤어요.”

라이자는 멈칫했다.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죠니는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웃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었다가 내렸다.

라이자는 솔직히 말했다.

“응. 봤어.”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휘었어요.”

“응.”

“거짓말했어요.”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무슨 거짓말?”

은인은 망토 끈을 풀었다.

“괜찮다고 했어요. 피곤했는데. 어지러웠는데. 박수받고 싶어서 괜찮다고 했어요.”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인은 더 작게 말했다.

“인형극장에서 박수받았어요. 좋았어요. 그런데 박수가 없으면 제가 못 걷는 것 같을까 봐 무서웠어요.”

죠니가 낮게 말했다.

“거기까지 알면 꽤 잘 돌아온 거야.”

은인은 죠니를 보았다.

“잘 돌아온 건가요?”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코 휘고, 겁먹고, 혼날 거 알면서 왔잖아. 그 정도면 돌아온 거지.”

라이자는 은인 앞에 무릎을 굽혔다.

“혼나요?”

은인이 물었다.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네.”

“하지만 먼저 앉아.”

은인은 눈을 들었다.

라이자는 문 옆 의자를 가리켰다.

“돌아왔으니까.”

은인은 잠시 그 의자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앉았다.

의자는 낮고,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이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앞에 앉았다.

“거짓말한 건 혼날 거야.”

“네.”

“불편한데 괜찮다고 한 것도 다시 이야기해야 해.”

“네.”

“동전은 받지 않았어?”

“네. 죠니가 물어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다음 공연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안 받았어요.”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매우 좋은 판단입니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라이자는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잘했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잘했어요?”

“응.”

“코가 휘었는데요.”

“휘었어도 돌아왔잖아.”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무엇을요?”

“괜찮지 않다고.”

은인의 손이 떨렸다.

“그건 좋은 건가요?”

라이자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응.”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아직 화해가 아니었다.

아직 정리도 아니고, 완성도 아니었다.

하지만 은인은 돌아왔다.

그리고 라이자는 문을 닫지 않았다.

그 정도면 2막의 끝으로 충분했다.


---

그레이는 은인의 이야기를 천천히 정리했다.

“인형극장: 박수 경험. 이름 유지. 계약 미체결. 동전 수령 거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난감 나라: 피로 은폐. 괜찮다는 허위 진술. 귀환 선택.”

“네.”

“하융 님의 개입: 길 안내. 선택 강제 없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융은 길을 보여줬어요.”

죠니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박수가 귀찮아질 수 있다고 했고.”

그레이는 기록했다.

“죠니 님의 개입: 박수와 이름의 구분. 계약 위험성 경고.”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런 식으로 적으니까 내가 꽤 건전한 사람 같네.”

푸리나가 웃었다.

“오늘은 실제로 그랬어.”

“가끔은 그래.”

라이자는 은인의 코를 보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이건 고칠 수 있어.”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조금만 남겨도 되나요?”

라이자는 멈췄다.

“왜?”

“기억하려고요.”

라이자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조용히 있었다.

은인은 말했다.

“벌로 남기는 건 아니에요. 접힌 페이지처럼.”

라이자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럼 조금만.”

“네.”

“하지만 아프면 고칠 거야.”

“네.”

라이자는 은인의 코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 손길은 제작자의 손이기도 했고, 가족의 손이기도 했다.

은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

2막의 마지막에서,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1막의 문장이 있었다.

그래도 문은 닫히지 않았어요.

그리고 2막의 페이지에는 새 문장이 생겼다.

은인이 직접 쓴 글씨는 아직 삐뚤었다.

박수받는 말은 달콤했지만,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따뜻했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라이자가 물었다.

“또 좋아?”

“응. 아주 좋아.”

그레이는 조용히 기록했다.

2막 결과: 외출, 공연, 박수, 무리, 거짓말, 귀환. 책임 논의 예정. 문은 유지됨.

푸리나는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이제 그레이의 기록도 거의 극의 일부야.”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저는 행정 기록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맞아. 그래서 좋아.”

은인은 의자에 앉아 문을 보았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장난감 나라의 음악은 멀어졌다.

인형극장의 박수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은인의 코끝에는 작은 휘어짐이 남아 있었고, 망토는 무릎 위에 접혀 있었으며, 하융이 보여준 길의 말과 죠니가 남긴 박수의 말이 아직 안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밖은 끝나지 않았다.

안도 끝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빈 다음 장을 넘겼다.

“다음 막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갈 거야.”

라이자가 불길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로?”

푸리나는 대답하기 전에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은 닫히지 않았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녹슨 바다.”

은인의 손이 멈췄다.

라이자의 얼굴도 굳었다.

“바다?”

“응.”

푸리나는 빈 페이지 위에 제목을 적었다.

3막 — 녹슨 바다와 고래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돌아오고 싶다는 말은, 길을 잃은 뒤에 더 무거워진다 —
《은빛 피노키오》

3막 — 녹슨 바다와 고래

— 돌아오고 싶다는 말은, 길을 잃은 뒤에 더 무거워진다 —

녹슨 바다는, 바다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작업실 바닥 위에 얇은 푸른빛이 깔렸고, 그 위로 붉은 갈색의 결이 번져 나갔다. 물결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철판의 얼룩 같았고, 파도라기보다는 누군가 오랫동안 닦지 못한 기억 같았다.

은인은 문 옆 의자에 앉은 채 그 바닥을 보았다.

“저건 바다인가요?”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전적으로는 바다야.”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시각적으로는 부식된 금속 표면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럼 녹슨 바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왜 바다야?”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은인을 보았다.

은인의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아주 조금. 라이자가 고칠 수 있었지만, 은인이 남겨두기로 한 만큼만.

은인은 그 휘어짐을 더 이상 벌처럼 만지지 않았다.

하지만 잊지도 않았다.

“피노키오는 고래에게 삼켜졌지.”

푸리나가 말했다.

“보통은 그 장면에서 아이가 아버지를 구하러 가.”

라이자의 눈빛이 조금 굳었다.

“아버지?”

“제페토.”

“나는 은인의 아버지가 아니야.”

“알아.”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대로 하지는 않을 거야.”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그럼 뭘 할 건데?”

푸리나는 녹슨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은인이 너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네가 은인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게 삼켜지는 이야기이기도 해.”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은인은 불안하게 물었다.

“라이자가 삼켜지나요?”

“극 속에서.”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짜로 다치게 하지는 않아.”

그레이가 즉시 덧붙였다.

“비상 중지 절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역시.”

“이번 극은 은인 님의 심리적 부담이 크므로, 안전 절차가 필요합니다.”

라이자가 짧게 말했다.

“좋아.”

은인은 그레이를 보았다.

“비상 중지 절차가 있으면, 무서워도 괜찮나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무서운 것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은 도움이 됩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멈출 수 있다.”

푸리나는 은인의 앞에 빈 대본을 놓았다.

“그래. 그리고 이번 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거야.”

“무엇인가요?”

푸리나는 은인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대본을 밀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작업실 안에서는 가벼울 수 있어. 문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은인은 대본을 보았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요?”

“무거워지지.”

푸리나는 녹슨 바다 너머를 보았다.

“그런데 그때도 그 말을 할 수 있는지 보는 거야.”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도 같이 가나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려 했다.

같이 간다.

당연히 같이 간다.

하지만 푸리나가 먼저 말했다.

“처음에는 아니.”

라이자의 시선이 푸리나에게 꽂혔다.

푸리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간다. 라이자는 뒤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다리다가…… 삼켜질 거야.”

“기다리다가 삼켜진다니, 설명이 최악이야.”

“의도적으로 최악으로 말한 건 아니야.”

“그럼 더 나빠.”

푸리나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필요한 장면이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녹슨 바다를 보고 있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떼지 않았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은인.”

“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말 알아?”

“네.”

은인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궁금해요.”

라이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녹슨 바다처럼 조금씩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궁금하다.

그 말은 은인이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그리고 라이자에게서 조금씩 멀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좋아. 대신.”

“조건?”

“은인이 멈춘다고 하면 즉시 멈춰.”

“당연하지.”

“내가 멈추라고 해도?”

푸리나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푸리나.”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라이자, 네가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멈출 거야.”

“그리고?”

“하지만 네가 무서워서 멈추라고 하는 거라면…… 그건 은인에게도 물을 거야.”

라이자는 침묵했다.

그 말은 잔인했다.

하지만 약속한 극이라면, 필요한 잔인함이었다.

라이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은인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라이자도 무서워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응.”

“무엇이요?”

“네가 나 없이 무서운 곳으로 가는 것.”

은인은 아주 작게 말했다.

“저도 무서워요.”

라이자는 손을 뻗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라이자는 그 손을 잡았다.

은인은 말했다.

“다녀올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기다릴게.”


---

녹슨 바다의 첫걸음은 차가웠다.

은인은 발끝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닥은 흔들렸다. 철판처럼 단단해 보였는데, 밟으면 얇은 파문이 번졌다. 파문은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갈색이었다.

녹이 번지는 모양.

은인은 자기 발밑을 보았다.

“제가 녹슬게 하나요?”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대답했다.

“아니. 네가 밟아서 생긴 게 아니야.”

“그럼 원래 녹슬어 있었나요?”

“아마도.”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고 말했다.

“오래 방치된 두려움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이번에는 꽤 시적이야.”

“분석입니다.”

“응. 오늘도 그레이답네.”

은인은 조금 더 앞으로 걸었다.

작업실은 뒤에 있었다.

처음에는 가까웠다.

은인은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라이자는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무대 옆에 있었다.

죠니는 인형극장 쪽에서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하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창가의 기척이 있었다.

은인은 조금 더 걸었다.

그러자 작업실이 멀어졌다.

정확히는,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사이에 바다가 늘어났다.

은인은 멈췄다.

“문이 멀어졌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길을 잃는 장면이니까.”

“벌써요?”

“극은 가끔 성급해.”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주인을 닮았겠지.”

푸리나는 그쪽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죠니, 오늘 자꾸 그 말 한다?”

“두 번째야.”

“충분히 많아.”

은인은 조금 웃을 뻔했다.

하지만 바다는 곧 그 웃음을 삼켰다.

바다 위로 작은 물건들이 떠올랐다.

나무 단추.

종이 왕관.

동전 주머니.

붉은 망토.

은실.

그리고 작은 나사.

태엽 아이에게서 떨어진 나사였다.

은인은 그 나사를 보고 멈췄다.

“저건 왜 있어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은인이 봐야 할 장면이었다.

녹슨 바다 위의 물건들은 은인을 향해 천천히 떠왔다.

동전 주머니가 말했다.

“받았어야지.”

은인은 움찔했다.

“말했어요?”

동전 주머니는 반짝였다.

“받았으면 더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종이 왕관이 말했다.

“나는 왕이다, 라고 말했잖아.”

붉은 망토가 말했다.

“입으면 박수받았어.”

은실이 속삭였다.

“만지지 않았다고 했지.”

은인은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가 귀가 아니라 안쪽에서 들렸다.

작은 나사가 굴러왔다.

또르르.

은인은 그것을 주웠다.

나사는 차가웠다.

태엽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끼릭.

“나는 내가 괜찮다고 믿어!”

은인은 손안의 나사를 꼭 쥐었다.

“하지만 떨어졌잖아요.”

파도가 일었다.

녹슨 물결이 은인의 발목까지 올라왔다.

은인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작업실 쪽에서 라이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은인!”

은인은 돌아보았다.

라이자가 보였다.

아직 보였다.

은인은 말하려 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코끝이 아주 작게 삐걱였다.

끼익.

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안 괜찮아요.”

코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자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달려가지 않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잘했어.”

은인은 녹슨 바다 한가운데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하지만 무서운 건 사라지지 않았다.


---

바다의 두 번째 구간에는 인형극장이 떠 있었다.

처음의 작은 무대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관객석이 텅 비어 있었다.

박수도 없었다.

무대 위에는 은인의 붉은 망토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은인은 무대 앞에 섰다.

죠니가 어느새 무대 턱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젖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녹슨 바다가 진짜 물인지 아닌지도 모호했다.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박수 없는 무대는 처음이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때?”

은인은 무대 위 망토를 보았다.

“조용해요.”

“그래.”

“조용하면 제가 잘했는지 모르겠어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그래.”

은인은 그를 보았다.

“죠니도 그랬나요?”

죠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아주 멀리, 반복되는 길과 돌아가는 길, 그리고 도달해야 하는 찰나를 보는 듯했다.

“박수가 없으면 네가 한 일이 사라진 것 같을 때가 있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사라지는 건 보통 박수 쪽이야.”

죠니는 무대 바닥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네가 걸은 건 남아.”

은인은 자기 발을 보았다.

녹슨 바다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은빛 발자국은 조금씩 녹빛에 덮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건 남나요?”

“네가 다시 볼 줄 알면.”

“못 보면요?”

“그럼 누군가 알려줄 수도 있지.”

죠니는 작업실 쪽을 턱짓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은인은 라이자를 떠올렸다.

문 옆 의자.

기다리는 손.

코부터 보지 않으려던 얼굴.

은인은 조용히 말했다.

“라이자는 화낼 거예요.”

“그럴 수 있지.”

“실망할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기다려요?”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그건 네가 돌아가서 확인해야지.”

은인은 눈을 내렸다.

“확인하기 무서워요.”

죠니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럼 무서운 채로 가.”

푸리나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정말 교육적으로 위험한데, 묘하게 맞는 말만 해.”

죠니는 들은 듯 말 듯 은인에게 말했다.

“돌아가는 길이 편해서 돌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대체로 불편하고, 혼날 것 같고, 도망치고 싶은데도 가는 거지.”

은인은 물었다.

“왜요?”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거기에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까.”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뒤, 은인은 무대 위 망토를 집어 들었다.

입지는 않았다.

접었다.

“이건 가져가도 되나요?”

죠니는 말했다.

“네가 입었던 거잖아.”

“저를 입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접어.”

은인은 망토를 천천히 접었다.

그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입는 것보다 접는 게 더 어려웠다.


---

세 번째 구간에서 하융이 기다리고 있었다.

녹슨 바다 위에 작은 창이 떠 있었다.

창 너머에는 길들이 보였다.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

인형극장에 남는 길.

장난감 나라에서 계속 웃는 길.

녹슨 바다 위에서 멈춰 서는 길.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먼 길.

은인은 창 앞에서 멈췄다.

“이게 다 제 길인가요?”

하융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될 수도 있었던 길이오.”

“아직도 될 수 있나요?”

“어떤 길은 아직 열려 있고, 어떤 길은 이미 닫혔소. 어떤 길은 닫힌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서면 작은 문이 있소.”

은인은 창들을 보았다.

한 창에서는 은인이 인형극장에 남아 있었다. 은인은 붉은 망토를 입고 계속 웃었다.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코는 더 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진실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창에서는 은인이 장난감 나라에서 계속 놀고 있었다. 은인은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예 묻지 않는 법을 배웠다.

또 다른 창에서는 은인이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이자는 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래도록.

은인은 그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라이자가 계속 기다려요.”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 길도 있었소.”

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안 돌아가는 길?”

“그렇소.”

“그럼 라이자는 어떻게 돼요?”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은인은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녹슨 바다가 흔들렸다.

작업실 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은인은 돌아보았다.

하지만 작업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녹슨 바다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고래였다.

아니, 고래의 형상을 한 거대한 철갑 장치였다.

몸은 녹슨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고, 옆구리에는 오래된 나사와 톱니가 박혀 있었다. 입은 너무 커서, 바다와 무대와 창문까지 한 번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거대한 고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안쪽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는 작업실의 등불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은인은 숨을 멈췄다.

“라이자?”

푸리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라이자!”

그 순간, 고래가 움직였다.

작업실 문 옆에 서 있던 라이자의 그림자가 고래의 입 쪽으로 끌려갔다.

라이자는 은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은인에게 닿지 않았다.

고래의 입이 닫혔다.

쿵.

녹슨 바다가 조용해졌다.

은인은 움직이지 못했다.

하융은 창가에서 은인을 보았다.

“삼켜졌구려.”

은인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푸리나의 신술이 흔들렸다.

그레이의 기록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죠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가장 먼저 움직이려 한 것은 은인이었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 같았다.

“라이자가…….”

은인의 코끝이 삐걱였다.

“괜찮을 거예요.”

끼이익.

코가 휘었다.

은인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했다.

“안 괜찮을 수도 있어요.”

코는 멈췄다.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가야 하나요?”

하융은 대답했다.

“가야 한다고 말하면, 그건 명령이오.”

“그럼요?”

“가고 싶은지 물어야 하오.”

은인은 고래를 보았다.

거대한 철갑 고래.

녹슨 입.

어두운 배 속.

그 안에 라이자가 있었다.

라이자가 은인을 기다리다가, 은인을 놓아주는 법을 배우다가, 자기 두려움에게 삼켜졌다.

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들어가면 못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소.”

“라이자가 화낼 수도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해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또 길을 잃어서.”

“그럴 수도 있소.”

은인은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왜 자꾸 그럴 수도 있다고만 해요?”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길이니까.”

은인은 고래를 다시 보았다.

그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

라이자가 안에서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고래를 뜯어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마 둘 다였다.

은인은 아주 작게 웃었다.

“라이자는 안에서도 고래를 분해하려고 할까요?”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그럴 것 같은데.”

푸리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마 그럴 거야.”

그레이는 기록판을 주워 들며 말했다.

“라이자 님의 행동 양식상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인은 조금 웃었다.

웃음은 아주 작았지만, 녹슨 바다 위에 퍼졌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은인은 한 걸음 내디뎠다.

“저는 가고 싶어요.”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명령이 아니어도, 제가 가고 싶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라이자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말에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융은 창을 닫았다.

“그럼 그 길이오.”

은인은 물었다.

“돌아올 수 있나요?”

하융은 이번에도 확답하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잃지 않으면, 길은 늦게라도 생기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가 고래 쪽으로 걸어왔다.

“같이 갈까?”

은인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처음은 제가 갈게요.”

죠니는 멈췄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좋아.”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무서우면 막을 내려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말?”

“네.”

은인은 고래의 입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열어주세요.”

푸리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신술이 조금 깊어졌다.

이번에도 세계를 뒤집지는 않았다.

다만 녹슨 바다 위에 아주 좁은 길 하나를 놓았다.

고래의 입까지 이어지는 길.

은인은 그 길을 걸었다.


---

고래의 입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따뜻했다.

겉은 녹슨 철갑이었는데, 안쪽은 오래된 작업실 같았다.
벽에는 부품들이 박혀 있었고, 천장에서는 은실과 녹슨 쇠사슬이 함께 늘어져 있었다. 발밑에서는 물소리와 톱니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걸었다.

“라이자?”

대답은 없었다.

대신 고래의 배 속 어딘가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은인?”

“라이자!”

은인은 달리려 했다.

그러나 바닥이 흔들렸다.

끼릭.

고래의 안쪽 톱니들이 움직였다.

벽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가족이면 충분해.”

“가족이면 나가지 않아도 돼.”

“가족이면 거짓말하지 않아야지.”

“가족이면 걱정시키면 안 돼.”

“가족이면 돌아와야지.”

“가족이면 떠나면 안 되지.”

은인은 귀를 막았다.

“아니에요.”

목소리들은 계속 들렸다.

“가족이면 라이자의 손 안에 있어야 해.”

“그래야 안전해.”

“그래야 고장나지 않아.”

“그래야 잃어버리지 않아.”

은인의 코끝이 삐걱였다.

은인은 말하려 했다.

“라이자는 그런 말 안 해요.”

끼익.

코가 조금 움직였다.

은인은 멈췄다.

라이자는 그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인은 느낀 적이 있었다.

라이자의 손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오히려 자기 발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게 되는 순간들.

라이자의 걱정이 너무 따뜻해서, 거절하기 어려웠던 순간들.

라이자가 가족이라고 말해줄 때마다 기뻤지만, 동시에 그 말 밖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던 순간들.

은인은 다시 말했다.

“라이자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가끔 그렇게 들었어요.”

이번에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래의 배 속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저 안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은인은 그쪽으로 달렸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아프면 멈추고, 흔들리면 벽을 짚고, 모르면 주변을 보고.

마침내 은인은 고래의 배 속 깊은 곳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라이자가 있었다.

라이자는 녹슨 쇠사슬과 은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묶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주변에 너무 많은 은실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은실들은 라이자의 손끝에서 뻗어나와 있었다.

은인을 고치기 위한 실.
은인을 보호하기 위한 실.
은인이 넘어지면 잡으려던 실.
은인이 길을 잃으면 끌어오려던 실.
은인이 다치지 않게 둘러치려던 실.

그 모든 실이, 지금은 라이자 자신을 감고 있었다.

은인은 천천히 다가갔다.

“라이자.”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제일 먼저 코를 보았다.

이번에도.

하지만 곧 얼굴을 보았다.

라이자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휘었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팠어?”

“무서웠어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

“또 그랬구나.”

“하지만 돌아왔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말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요.”

그 말에 라이자는 작게 웃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였다.

“여기까지 왜 왔어?”

은인은 라이자의 은실을 보았다.

“라이자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라이자의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나는 네가 들어오길 원한 게 아니야.”

“알아요.”

“위험했어.”

“알아요.”

“내가 알아서 나가려고 했어.”

은인은 주변을 보았다.

은실과 녹슨 쇠사슬.

고래의 어두운 배 속.

“그런 것 같았어요.”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은인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자.”

“응.”

“이 실들은 저를 잡으려고 한 건가요?”

라이자는 바로 부정하려 했다.

아니.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거짓말이 될까 봐.

은인의 코는 거짓말을 보이게 했지만, 라이자의 마음도 이미 그 앞에서 숨을 수 없었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처음에는 잡으려고 한 게 아니었어.”

“그럼요?”

“넘어지면 받으려고 했어. 길 잃으면 찾으려고 했고. 다치면 고치려고 했어.”

“네.”

“그런데…….”

라이자는 자기 손끝의 은실을 보았다.

“내가 무서워질수록 실이 많아졌어.”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라이자는 아주 어렵게 말했다.

“네가 나가면, 내가 가족을 잃는 것 같았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인데요.”

“응.”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어.”

은인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은실 하나를 만졌다.

차갑고, 부드럽고, 단단했다.

“이거 끊어도 되나요?”

라이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은인은 바로 손을 거두었다.

“싫으면 안 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그 말이 더 아팠다.

은인이 이제 허락을 물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자는 모든 허락을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라이자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같이 끊자.”

은인은 고개를 들었다.

“같이요?”

“응.”

라이자는 손을 내밀었다.

“이건 내가 만든 실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해.”

은인은 그 손을 보았다.

“그럼 저는요?”

“너는…….”

라이자는 잠시 생각했다.

“네가 어느 실이 아팠는지 말해줘.”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하나씩 실을 보았다.

넘어지지 않게 하려던 실.

“이건 너무 조였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끊자.”

길 잃지 않게 하려던 실.

“이건 필요했어요. 그런데 너무 짧았어요.”

“그럼 끊지 말고 길게 만들자.”

“길게요?”

“응. 끌어오는 실이 아니라, 네가 잡고 싶을 때 잡는 실로.”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나지 않게 하려던 실.

은인은 그 실 앞에서 오래 멈췄다.

“이건…… 라이자가 저를 많이 사랑해서 만든 것 같아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말했다.

“그런데 이 실이 있으면, 제가 새로 배운 걸 말하기 어려워요.”

“왜?”

“고장났다고 할까 봐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끊자.”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함께 실을 끊었다.

툭.

고래의 배 속이 흔들렸다.


---

마지막으로 가장 굵은 실이 남았다.

그 실은 라이자의 손목과 은인의 가슴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은인은 그 실을 보았다.

“이건 뭔가요?”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가족.”

은인은 가만히 있었다.

라이자는 빠르게 덧붙였다.

“이건 끊자는 뜻이 아니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이 실도 조이면 안 돼.”

은인은 실을 만졌다.

그 실은 다른 실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무거웠다.

“이건 어떻게 해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생각했다.

그러다 자기 휘어진 코끝을 만졌다.

“접힌 페이지처럼 남기면 안 되나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말했다.

“끊지 않고. 짧게 당기지도 않고.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게만.”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느슨하게?”

“네.”

은인은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제가 잡고 싶을 때 잡을 수 있고, 라이자도 제가 너무 멀리 간 것 같으면 부를 수 있지만…… 끌지는 않는 실.”

라이자는 아주 오래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둘은 그 굵은 실을 끊지 않았다.

대신 다시 묶었다.

느슨하게.

조이지 않게.

그러나 사라지지 않게.

그 순간 고래의 배 속에 작은 빛이 들어왔다.

밖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죠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길 열렸다.”

그레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귀환 경로 확인됩니다.”

하융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창문이 열리는 느낌이 있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걸어 나가기 위해서.

“나갈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서워?”

“네.”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둘은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완전한 해결의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래의 배 속에서는 충분히 밝았다.


---

고래는 입을 열었다.

녹슨 바다가 갈라졌다.

은인과 라이자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이 조금 젖어 있었지만,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꼭 쥐고 있었다.

죠니는 어깨에 걸친 창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멀리, 녹슨 바다 위 작은 창가에 서 있었다.

은인은 문 옆 의자를 보았다.

아직 있었다.

라이자도 보았다.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은인은 라이자에게 물었다.

“앉을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둘은 의자 쪽으로 갔다.

은인이 앉았다.

라이자는 그 옆 바닥에 앉았다.

푸리나는 놀라 물었다.

“라이자도?”

라이자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돌아왔으니까.”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렇네.”

그레이는 기록했다.

귀환: 은인 및 라이자. 문 유지. 의자 공동 사용.

죠니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의자 공동 사용은 좀 웃기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합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졌다.

조금 더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고칠까?”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만요.”

“얼마나?”

“아프지 않을 만큼.”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은인은 라이자의 손목을 보았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느슨한 실.

은인은 말했다.

“라이자.”

“응.”

“제가 나가도 가족이에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했다.

“응.”

“제가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있어도요?”

라이자의 얼굴이 아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건 무서울 거야.”

“네.”

“화도 날 거야.”

“네.”

“찾으러 갈지도 몰라.”

“네.”

라이자는 은인의 눈을 보았다.

“하지만 네가 가족이 아니게 되지는 않아.”

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돌아오고 싶어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네.”

은인은 문 옆 의자에 앉은 채 말했다.

“지금은 돌아왔어요.”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응.”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3막의 페이지는 처음에는 비어 있었다.

이제 거기에 은인의 글씨와 라이자의 글씨가 함께 남았다.

은인의 글씨.

저는 무서워도 들어갔어요.

라이자의 글씨.

나는 사랑한다고 해서 끌어당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레이는 그 아래에 아주 작게 적었다.

느슨한 실은 끊어진 실이 아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들을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대본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좋아.”

라이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좋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녹슨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녹은 조금 옅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좋아.”


---

막이 내려가기 전, 하융이 은인 곁으로 다가왔다.

은인은 그를 보았다.

“하융.”

“돌아왔구려.”

“네.”

“같은 곳으로 돌아왔소?”

은인은 문을 보았다.

작업실.

의자.

라이자.

그레이.

푸리나.

죠니.

그리고 자기 코끝의 작은 휘어짐.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같은 곳인데, 조금 달라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이 대개 그렇소.”

은인은 물었다.

“저는 사람이 되는 길에 있나요?”

하융은 잠시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길의 이름을 모르오.”

은인은 조금 실망한 듯했다.

하융은 덧붙였다.

“다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만든 것은 보았소.”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사람이 되는 길.

돌아올 수 있는 길.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후자가 더 따뜻했다.

푸리나는 조명을 낮췄다.

녹슨 바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고래의 그림자도 흩어졌다.

남은 것은 작업실 문과, 그 옆의 의자와, 은인과 라이자의 손 사이에 보이지 않게 느슨해진 실이었다.

막이 내려왔다.

4막 — 고장보다 먼저 아픔을 보는 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고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하는 말이 있다 —
《은빛 피노키오》

4막 — 고장보다 먼저 아픔을 보는 손

— 고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하는 말이 있다 —

고래에서 돌아온 뒤, 작업실은 다시 작업실이 되었다.

녹슨 바다는 사라졌다.

거대한 철갑 고래도 없었다.

벽에 걸린 공구들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반쯤 식은 용광로는 낮은 열을 품고 있었으며, 작업대 위에는 은실과 부품과 작은 렌즈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문 옆에는 여전히 의자가 있었다.

그 의자는 이제 그냥 소품이 아니었다.
은인이 돌아와 앉은 자리였고, 라이자가 함께 앉은 자리였고,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자리였다.

그레이는 의자 옆에 작은 표식을 붙였다.

귀환용. 강제 착석 금지.

푸리나는 그걸 보고 말했다.

“그레이. 이제 그 의자는 거의 공공시설이 됐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용 목적이 명확해졌으므로 표기하는 편이 좋습니다.”

죠니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돌아온 사람 전용 의자라. 나쁘지 않네.”

하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창가에 작은 빛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다른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이.

은인은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작업대가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푸리나는 조금 감탄했다.

라이자의 손은 무언가를 만들거나 고치지 않을 때도, 늘 작업대 위에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라이자는 공구를 들지 않았다.
은인을 살피고 있었지만, 해체하거나 조정하거나 수리하려는 자세는 아니었다.

그냥 보고 있었다.

은인은 그 시선을 견디다가 작게 물었다.

“많이 이상해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휘었어. 각도가 조금 틀어졌고, 표면 장력도 이상해졌어. 고쳐야 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라이자는 천천히 물었다.

“아파?”

은인은 눈을 깜박였다.

그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아프지는 않아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해?”

은인은 코끝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조금요.”

“숨 쉬는 데 방해돼?”

“아니요.”

“말하는 데는?”

“가끔 신경 쓰여요.”

라이자는 그제야 손을 뻗었다.

“만져봐도 돼?”

은인은 조금 놀랐다.

“물어보는 건가요?”

라이자는 멈칫했다.

그 질문이 더 아팠다.

“응.”

“전에는 그냥 만졌는데요.”

라이자는 손을 거두려 했다.

은인이 먼저 말했다.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지며 말했다.

“그냥…… 물어보니까 이상해서요.”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숨을 낮췄다.

이건 중요한 장면이었다.

은인이 처음으로 “만져지는 것”과 “허락하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는 장면.
그리고 라이자가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해오던 손길을 멈추는 장면.

라이자는 아주 낮게 말했다.

“앞으로는 물어볼게.”

은인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항상요?”

“가능하면.”

“급할 때는요?”

“급할 때는 먼저 고치고 나중에 사과해야 할 수도 있어.”

그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만져도 돼요.”

라이자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손끝이 은인의 코끝에 닿았다.

은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라이자의 손은 차갑지 않았다.

손끝은 조심스러웠고, 조금 떨리고 있었다.

“조금 휘었어.”

라이자가 말했다.

“네.”

“고칠 수 있어.”

“네.”

“완전히 원래대로 돌릴 수도 있고, 네가 말한 것처럼 조금 남길 수도 있어.”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원래대로 돌리면, 제가 거짓말한 게 없어지나요?”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아니.”

“그럼 조금 남기면, 제가 계속 잘못한 채로 있는 건가요?”

“아니.”

은인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럼 어떻게 정해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질문은 공구로 풀 수 없었다.

푸리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눈을 내렸다.

조용히 기다렸다.

라이자는 한참 뒤에 말했다.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은지로 정해야 할 것 같아.”

은인은 그 말을 반복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응.”

라이자는 손을 거두었다.

“코가 조금 휘어 있으면, 네가 거짓말했던 걸 기억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너를 계속 벌한다면 고치는 게 맞아.”

“완전히 고치면요?”

“그럼 겉으로는 전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네가 기억할 수 있다면, 꼭 흔적이 겉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은인은 눈을 내렸다.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다 고치지 말자.”

은인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돼요?”

“응.”

라이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모르는 상태로도 잠깐 둘 수 있어.”

그레이가 그 말을 기록하려다가 멈췄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왜 안 적어?”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지금은 들을 말인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맞아.”


---

4막의 무대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1막에는 거짓말이 있었다.

2막에는 박수와 축제가 있었다.

3막에는 녹슨 바다와 고래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4막은 너무 작았다.

작업대.
의자.
은인의 휘어진 코.
라이자의 손.
고치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

하지만 푸리나는 알았다.

작은 막일수록 어렵다.

전쟁보다 어려운 식탁이 있고, 고래 배 속보다 어려운 질문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 사랑하는 사람을 고치고 싶을 때,
그 손은 어디까지 가도 되는가.



라이자는 마침내 공구함을 열었다.

은인이 조금 움찔했다.

라이자는 그것을 보았다.

“무서워?”

은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라이자는 공구함을 다시 닫았다.

은인이 놀랐다.

“안 고쳐요?”

“네가 무섭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저는 고쳐야 하는데요.”

“고쳐야 한다고 누가 말했어?”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조용히 물었다.

“나?”

은인은 조금 망설였다.

“조금은요.”

라이자의 얼굴이 아파졌다.

“그랬구나.”

은인은 급히 말했다.

“라이자가 직접 말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그렇게 들렸으면, 들어야 해.”

라이자는 공구함 위에 손을 올렸다.

“나는 고치고 싶어. 네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네가 네 코를 만질 때마다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은인은 조용히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내가 고치고 싶다는 마음이, 네가 지금 당장 고쳐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푸리나는 그 대사를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라이자가 제페토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페토라는 배역이 라이자 안에서 다시 쓰이는 순간이었다.

제작자.
보호자.
가족.
손을 가진 사람.
그리고 손을 멈출 줄 배워야 하는 사람.

은인은 한참 뒤에 말했다.

“조금만 고쳐주세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졌다.

“아프지 않을 만큼.”

“그리고?”

“너무 많이 보이지는 않게.”

라이자는 공구함을 다시 열었다.

“흔적은?”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저만 알 수 있을 만큼.”

라이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좋아.”

그녀는 작은 렌즈와 은침, 아주 가느다란 집게를 꺼냈다.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기록하려 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이번엔 기록해도 돼. 의료 기록이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치 범위: 통증 완화. 외형 완전 복원 아님. 당사자 요청에 따른 흔적 일부 유지.”

죠니가 말했다.

“그렇게 적으니까 멋은 없는데 정확하네.”

그레이는 대답했다.

“의료 기록에 멋은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그건 맞아.”

라이자는 은인의 코끝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프면 말해.”

“네.”

“무서워도 말해.”

“네.”

“멈추고 싶어도 말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는 아주 작은 힘으로 은을 폈다.

끼익.

작은 소리.

은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라이자가 바로 멈췄다.

“아파?”

“놀랐어요.”

“계속해도 돼?”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네.”

다시.

끼익.

은은 조금씩 펴졌다.

완전히 원래대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날카롭게 튀어나온 부분이 부드러워졌고, 말할 때 신경 쓰이던 각도가 줄었다.

은인은 숨을 내쉬었다.

“덜 불편해요.”

라이자는 손을 멈췄다.

“여기서 멈출까?”

은인은 코끝을 만졌다.

“네.”

“더 고칠 수 있어.”

“알아요.”

“그래도 여기서?”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서요.”

라이자는 공구를 내려놓았다.

그 동작은 생각보다 어려워 보였다.

고칠 수 있는데 멈추는 것.

라이자에게 그건, 고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췄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이것도 귀환이다.

고치고 싶은 손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일.


---

처치가 끝나자, 은인은 거울 앞에 섰다.

코끝은 거의 원래와 같아 보였다.

하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은인은 그 결을 손끝으로 만졌다.

“보여요?”

푸리나는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음.”

“보여요?”

“아주 가까이 보면.”

은인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성실하게 다가와 확인했다.

“육안으로는 미세합니다. 다만 은인 님 본인은 촉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레이는 거짓말 안 해서 좋아.”

푸리나는 웃었다.

“건조해서 문제지.”

그레이는 조금 억울한 듯했다.

“정보를 정확히 전달했을 뿐입니다.”

은인은 거울을 다시 보았다.

“저만 알 수 있을 만큼 남았어요.”

라이자는 물었다.

“괜찮아?”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이번에는 쉽게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제 조심해야 하는 말이었다.

은인은 한참 자기 얼굴을 보고, 코끝의 작은 결을 만지고, 라이자를 돌아보았다.

“조금 괜찮아졌어요.”

라이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조금.”

“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좋아. 4막의 첫 번째 장면은 완벽해.”

라이자가 곧바로 말했다.

“완벽하다는 말 쓰지 마.”

푸리나는 바로 손을 들었다.

“수정. 충분해.”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좋아.”

은인도 따라 말했다.

“충분해.”

그 말은 “완벽하다”보다 덜 반짝였지만, 훨씬 더 편안했다.


---

하지만 4막은 코를 고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작업대 위에 작은 나무 상자를 올렸다.

은인은 그 상자를 보고 물었다.

“그 안에는 뭐가 있나요?”

“오늘의 두 번째 장면.”

“또 열어야 하나요?”

“원하면.”

라이자가 푸리나를 보았다.

“이번엔 뭐야?”

푸리나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물건이 있었다.

인형극장의 붉은 망토.
받지 않았던 동전 주머니 대신 놓인 빈 주머니.
장난감 나라에서 가져온 작은 나사.
하융이 보여준 창문 조각처럼 보이는 얇은 유리.
그리고 라이자와 은인 사이에서 다시 묶은 느슨한 은실 한 가닥.

은인은 그 물건들을 보았다.

“이건 다 제 이야기인가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지나온 장면들이지.”

“이걸로 뭘 하나요?”

푸리나는 상자를 은인 쪽으로 밀었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정해.”

은인은 당황했다.

“제가요?”

“응.”

라이자는 곧바로 불안해졌다.

그녀는 망토를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장난감 나라의 나사는 치우라고 말하고 싶었다.

빈 주머니도, 창문 조각도, 위험한 기억은 모두 상자에 넣어 닫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고치고 싶은 손을 멈추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멈춰야 했다.

은인은 먼저 붉은 망토를 들었다.

그 망토는 박수를 떠올리게 했다.

“이건…….”

푸리나가 물었다.

“싫어?”

“아니요.”

은인은 망토를 만졌다.

“입고 있으면 답답했어요. 그런데 처음 입었을 때는 조금 좋았어요.”

죠니가 말했다.

“둘 다 맞겠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남길래요. 하지만 접어서.”

그녀는 망토를 곱게 접었다.

입는 것이 아니라, 들고 있을 수 있는 크기로.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다음은 작은 나사였다.

은인은 나사를 손바닥에 올렸다.

“태엽 아이의 나사예요.”

라이자가 물었다.

“그 아이에게 돌려줄 거야?”

은인은 생각했다.

“돌려주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몰라요.”

하융이 있었다면 길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없었다.

그레이가 말했다.

“분실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소유자가 확인되면 반환하도록 기록하겠습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레이는 나사를 작은 봉투에 넣고 적었다.

장난감 나라 태엽 아이의 나사. 반환 예정.

은인은 그 문장을 보고 조금 안심했다.

그다음은 빈 주머니였다.

은인은 그것을 보자 표정이 복잡해졌다.

“동전은 안 받았는데, 왜 주머니가 있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받지 않은 것도 흔적이니까.”

은인은 빈 주머니를 들었다.

“안 받은 것도 남나요?”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선택의 부재와 거절도 기록될 수 있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가끔은 받은 것보다 안 받은 게 더 오래 남지.”

은인은 빈 주머니를 접었다.

“이건…….”

그녀는 라이자를 보았다.

“남길래요.”

라이자가 조금 놀랐다.

“왜?”

“나중에 제가 무언가를 받을 때, 먼저 물어보려고요.”

그레이가 아주 만족한 듯 기록했다.

빈 주머니: 계약 확인의 기억.

푸리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레이의 기록이 점점 소품 설명서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주 좋았다.

다음은 창문 조각이었다.

은인은 그것을 손에 들었다.

유리 조각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흐릿한 자기 얼굴만 비쳤다.

“하융이 보여준 길은 여기 없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창문은 늘 길을 보여주지는 않아. 가끔은 보는 사람을 보여주지.”

은인은 그 유리 조각을 보았다.

거기에는 은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조금 휘어진 코.
조금 덜 무서운 눈.
아직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

은인은 유리 조각을 내려놓았다.

“이건 지금은 못 정하겠어요.”

라이자가 말했다.

“그럼 보류하자.”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보류 항목으로 두겠습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좋아. 보류도 훌륭한 극적 장치지.”

라이자가 작게 웃었다.

“그 말,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푸리나는 과장되게 감동한 얼굴을 했다.

“라이자가 내 연출론을 이해했어.”

“아니, 아주 조금만.”

“그 조금도 소중해.”

마지막은 은실이었다.

느슨하게 다시 묶인 은실 한 가닥.

은인은 그것을 오래 보았다.

라이자도 그 실을 보았다.

둘 다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말하지 않았다.

이 실은 다른 소품들과 달랐다.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보관할 수도 없었다.

이건 둘 사이에 아직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어디에 둬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실을 들어 자기 손목에 감아보려 했다가 멈췄다.

조일 것 같았다.

라이자의 손목에 감아보려다가 그것도 멈췄다.

라이자를 묶는 것 같았다.

작업대에 놓으려니 너무 멀어 보였다.

의자에 묶으려니, 돌아올 때마다 봐야 해서 조금 무서울 것 같았다.

은인은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문고리에 묶어도 돼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문고리에?”

“네.”

은인은 문을 보았다.

“제가 나갈 때도 보이고, 돌아올 때도 보이니까.”

라이자는 입술을 다물었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고 기다렸다.

은인은 덧붙였다.

“문을 잠그는 실이 아니라, 여기가 문이라는 걸 알려주는 실로요.”

라이자는 아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

은인은 은실을 문고리에 묶었다.

느슨하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도 않게.

은실은 문고리에서 낮게 빛났다.

그건 사슬이 아니었다.

장식도 아니었다.

그냥 표시였다.

여기는 나가는 곳.
여기는 돌아오는 곳.
그리고 문은 잠겨 있지 않다.


---

그때, 레플리카가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푸리나가 불렀다.

은인이 코를 고치고, 소품들을 정리하고, 문고리에 은실을 묶은 뒤였다.

레플리카는 작업실에 들어오자마자 상황을 한 번에 보았다.

문 옆 의자.
문고리에 묶인 은실.
은인의 조금 남은 코끝 결.
라이자의 피곤한 얼굴.
푸리나의 만족스러운 표정.
그레이의 지나치게 성실한 기록판.
죠니의 “나는 관여했지만 책임은 조금만 있다”는 듯한 자세.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많은 일이 있었군.”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피노키오였어.”

레플리카는 그걸 설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더 묻지도 않았다.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아프나?”

은인은 대답했다.

“조금 덜 아파요. 아니, 아프지는 않고…… 불편함이 줄었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정확히 말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은인은 조금 안심했다.

레플리카는 라이자를 보았다.

“그대는?”

라이자는 눈을 깜박였다.

“나?”

“그대도 돌아왔다고 들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의자 공동 사용 사건이 있었지.”

그레이는 정정했다.

“사건이라기보다는 귀환 후 착석 기록입니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그게 그거 같은데.”

레플리카는 라이자에게 다시 물었다.

“아픈 곳은?”

라이자는 대답하려 했다.

없어.

하지만 은인이 옆에 있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은인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한 사람이 자기였다.

라이자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많아.”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라이자는 조금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쉽게 인정하네.”

“고래 배 속에서 자기 손의 실을 보고 돌아왔다면, 아픈 것이 정상이다.”

푸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레플리카, 상황 파악 너무 빠르다.”

레플리카는 라이자에게 다가갔다.

“손을 봐도 되나?”

라이자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실을 다루던 손.
은인을 고치던 손.
너무 많은 실을 만들었던 손.

“왜?”

“떨리고 있다.”

라이자는 그제야 자기 손이 떨리는 것을 알았다.

은인은 놀라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도 아파요?”

라이자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조금.”

레플리카는 말했다.

“좋다. 그 말에서 시작하자.”

그녀는 라이자의 손을 보았다.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굳어 있었고, 손목에 긴장이 남아 있었다.

“무리했다.”

라이자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싸운 것도 아니고, 그냥 극 안에서—”

“극 안에서도 몸은 긴장한다.”

레플리카는 단호했다.

“그리고 마음이 쥔 것은 손에도 남는다.”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레플리카는 붕대가 아니라 따뜻한 천을 꺼냈다.

“쥐는 연습을 했으면, 놓는 연습도 해야 한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플리카는 라이자의 손 위에 천을 올렸다.

“오늘은 고치려고 하지 마라.”

라이자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은인은 아직—”

“은인 말고, 그대.”

라이자는 멈췄다.

레플리카는 낮게 말했다.

“돌아온 사람을 돌보는 자도 돌아온 사람이다. 그대도 쉬어야 한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당황한 듯했다.

자기가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낯선 얼굴이었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이자도 의자에 앉아도 돼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문 옆 의자를 가리켰다.

“귀환용이라서요.”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강제 착석은 금지입니다.”

죠니는 결국 웃었다.

푸리나도 웃었다.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좋은 규칙이다.”

라이자는 버티려 했다.

그러나 결국 의자에 앉았다.

은인은 그 옆에 섰다.

잠시 뒤, 은인은 물었다.

“저도 앉아도 돼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둘은 다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의자는 조금 좁았다.

그래서 푸리나는 바로 옆에 하나 더 의자를 가져왔다.

“좋아. 귀환용 의자 증설.”

그레이가 기록했다.

귀환용 의자: 2개로 증설. 사유 — 동시 귀환 가능성.

죠니가 말했다.

“이제 진짜 시설이네.”

푸리나는 웃었다.

“극장 기반 시설이지.”

레플리카는 라이자와 은인을 보았다.

“좋다. 오늘은 여기서 더 깊이 가지 마라.”

푸리나가 조금 아쉬운 듯 대본을 보았다.

“하지만 4막이 아직—”

레플리카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즉시 대본을 닫았다.

“네. 오늘은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은 판단.”

푸리나는 속삭였다.

“레플리카한테는 가끔 이길 수가 없어.”

그레이가 말했다.

“이기려고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

4막의 마지막 장면은 치료도, 대결도, 거대한 고백도 아니었다.

그저 정리였다.

은인은 붉은 망토를 접어 상자 안에 넣었다.

빈 주머니는 그레이의 기록판 옆에 두었다.

나사는 반환 예정 봉투에 넣었다.

창문 조각은 보류 상자에 넣었다.

문고리에는 느슨한 은실이 남았다.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았다.

그리고 의자는 두 개가 되었다.

라이자는 손에 따뜻한 천을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은인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레플리카는 두 사람의 자세를 보고, 무리가 없는지 확인했다.

죠니는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정리했다.

푸리나는 무대 한가운데, 아니 작업실 한가운데에 서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은 아주 얇게 남아 있었다.

이 신술은 오늘 거창한 기적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질문 하나를 남겼다.

고치기 전에, 먼저 물었는가.

만져도 되는지.
아픈지.
불편한지.
정말 고치고 싶은지.
흔적을 남기고 싶은지.
그리고 고치는 손도 쉬어야 하는지.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4막의 페이지에는 여러 글씨가 남았다.

은인의 글씨.

저는 조금 괜찮아졌어요.

라이자의 글씨.

고칠 수 있어도 멈출 수 있어야 했다.

레플리카의 단정한 글씨.

돌아온 사람을 돌보는 자도 돌아온 사람이다.

그레이의 작은 기록.

문고리의 은실: 출입과 귀환의 표시. 잠금 기능 없음.

죠니의 삐딱한 글씨.

망토가 널 입게 두지 마.

푸리나는 마지막 줄을 비워두었다가, 천천히 적었다.

극은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막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좋아.”

라이자는 이제 그 말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은인이 물었다.

“다음 막은 뭐예요?”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지쳐 있었지만, 눈은 조용했다.

라이자도 피곤해 보였지만, 이전보다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문고리의 은실은 약하게 빛났다.

푸리나는 대본의 다음 장을 넘겼다.

빈 페이지.

마지막 막.

“다음은 결말이야.”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결말이면 안 해.”

푸리나는 웃었다.

“알아.”

은인이 물었다.

“그럼 어떤 결말인가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선언하지 않는 결말.”

“선언하지 않아요?”

“응.”

푸리나는 빈 페이지 위에 제목을 적었다.

5막 —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 결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은빛 피노키오》

5막 —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 결말

—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

마지막 막을 앞두고, 푸리나는 가장 먼저 커튼을 치우기로 했다.

라이자가 물었다.

“커튼을 안 써?”

“응.”

“마지막 막인데?”

“그래서 안 써.”

푸리나는 작업실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원래 마지막 막이라면, 화려한 조명이 있어야 했다.

은빛 별가루.
하늘에서 내려오는 푸른 요정.
기적의 선언.
관객의 숨을 멎게 하는 정적.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이제 너는 진짜 사람이 되었단다.

하지만 이번 극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라이자가 처음부터 조건으로 걸었고, 푸리나도 받아들였다.

은인은 처음부터 라이자의 가족이었다.
누군가가 “이제야 진짜”라고 선언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 막은 선언이 아니라 확인이어야 했다.

커튼을 치우고 나자, 작업실이 그대로 보였다.

문고리에 느슨하게 묶인 은실.

두 개로 늘어난 귀환용 의자.

접힌 붉은 망토.

반환 예정 봉투에 들어간 작은 나사.

보류 상자 안의 창문 조각.

빈 주머니.

그리고 코끝에 아주 작은 결이 남은 은인.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대로 하자.”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며 물었다.

“마지막 막의 무대 장치가 작업실 그대로입니까?”

“응.”

“추가 연출은 없습니까?”

“없지는 않아.”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것들이 전부 연출이야.”

죠니는 벽에 기대어 말했다.

“비싼 연출은 아니네.”

푸리나가 바로 받아쳤다.

“좋은 연출이지.”

“그건 맞아.”

레플리카는 귀환용 의자 두 개를 보고 말했다.

“의자는 그대로 두는 게 좋다.”

“물론이지.”

“앉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결말은 대체로 덜 위험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것도 기록하자.”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고 있었다.

은인은 마지막 막이라는 말을 듣고부터 조금 조용해졌다.

“마지막이면 끝나는 건가요?”

은인이 물었다.

푸리나는 대답했다.

“극은 끝나.”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야기도 끝나요?”

“아니.”

푸리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보통 극보다 오래 가.”

은인은 그 말을 생각했다.

“그럼 저는 끝나지 않나요?”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끝나지 않아.”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금 당황했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극이 끝나도 너는 여기 있어.”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나가도요?”

라이자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가도.”

은인은 다시 물었다.

“돌아와도요?”

“돌아와도.”

“늦어도요?”

라이자는 조금 아픈 얼굴로 웃었다.

“늦어도.”

은인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제가 어떤 이름으로 돌아와도요?”

라이자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이전 질문들보다 조금 더 깊었다.

가족인가.
사람인가.
은인인가.
피노키오인가.
라이자의 아이인가.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인가.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네가 네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은인은 물었다.

“잃어버리면요?”

라이자의 손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으로 은인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그럼 같이 찾자.”

은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내가 대신 정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찾는 건 같이 할 수 있어.”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코끝의 작은 결이 등불에 살짝 빛났다.

“그럼 마지막 막을 해도 돼요.”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좋아.”

이번에도 거창한 선언은 없었다.

다만 작업실의 빛이 조금 낮아지고, 문고리의 은실이 아주 작게 반짝였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신술은 이제 막의 끝을 향해 깊어졌지만, 누구도 밀지 않았다.

그저 빈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놓았다.


---

마지막 막의 첫 장면은 “판정”이었다.

그레이의 역할이었다.

그레이는 작업대 위에 새 기록지를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몇 개의 항목이 있었다.

성명:
관계:
거주:
보호자:
자기 의사 확인:
귀환 경로:
비고:

푸리나는 기록지를 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마지막 막 첫 장면이 행정 서류야?”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 극의 시작점 중 하나가 분류 항목의 실패였으므로, 마지막에는 그 실패를 갱신해야 합니다.”

죠니가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푸리나는 양손을 들었다.

“좋아. 행정 서류 클라이맥스. 매우 새로운 장르야.”

라이자는 기록지를 보았다.

처음 프롤로그에서 그레이가 신분 항목을 물었을 때, 라이자는 “가족”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충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가족이라는 말은 가장 먼저 오는 말이지만, 모든 것을 대신 적어주는 말은 아니었다.

그레이가 은인을 보았다.

“은인 님. 기록을 작성해도 되겠습니까?”

은인은 조금 놀랐다.

“저한테 묻나요?”

“네.”

“기록인데요?”

“은인 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은인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보호와 책임이 흐려집니다. 하지만 묻지 않고 기록하면, 당사자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레이, 마지막 막에서 주제 발언 제대로 하네.”

그레이는 들은 듯 못 들은 듯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성해도 돼요.”

그레이는 첫 항목을 보았다.

“성명.”

은인은 대답했다.

“은인.”

그레이는 적었다.

성명: 은인.

그는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

“극 중 사용명은 별도로 기록하시겠습니까?”

은인은 생각했다.

“은빛 피노키오?”

“네.”

은인은 잠시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인이 정해야 하는 이름이었다.

“그건…… 별명처럼 적어주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별명입니까, 배역명입니까?”

은인은 조금 고민했다.

“둘 다요. 하지만 제 이름은 아니에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극 중 사용명/별명: 은빛 피노키오. 본명 대체 아님.

죠니가 웃었다.

“그레이 기록은 재미없는데 묘하게 든든하네.”

은인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든든해요.”

그레이는 아주 조금 멈칫했다.

“감사합니다.”

다음 항목.

“관계.”

라이자가 바로 말하려 했다.

가족.

하지만 이번에는 멈췄다.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둘 사이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은인이 먼저 말했다.

“라이자의 가족.”

라이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은인은 덧붙였다.

“그리고…… 저 자신.”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라이자는 그 말을 삼키듯 들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적었다.

관계: 라이자의 가족. 독립 의사와 자기 선택을 가진 당사자.

푸리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건 화려하지 않았지만, 굉장한 클라이맥스였다.

은인이 처음으로 “가족”과 “저 자신”을 함께 말했다.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고.

다음 항목.

“거주.”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라이자의 작업실.”

라이자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려는 순간, 은인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갈 수 있어요.”

라이자는 그 말을 들었다.

아팠다.

하지만 이전만큼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레이는 적었다.

거주: 라이자의 작업실. 외출 가능. 귀환 경로 유지.

다음 항목.

“보호자.”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

라이자는 이번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레이가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싫어요, 무서워요, 아파요, 나가고 싶어요, 돌아오고 싶어요.”

레플리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항목이다.”

그레이는 적었다.

보호자: 라이자. 보호 과정에서 당사자 의사 확인 필요. 거부·공포·통증·외출·귀환 의사 발언권 보장.

라이자는 기록지를 보았다.

그건 단순한 행정 문장이었다.

하지만 라이자에게는 거의 맹세처럼 보였다.

다음 항목.

“자기 의사 확인.”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무엇을 확인하나요?”

그레이는 말했다.

“현재 극을 계속할 의사가 있는지, 마지막 막을 끝낼 의사가 있는지, 그리고 이 기록을 남길 의사가 있는지입니다.”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계속할게요.”

“마지막 막도 끝내시겠습니까?”

“네.”

“기록을 남기는 것도 동의하십니까?”

은인은 기록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제 은인의 이름과 관계와 거주와 보호에 대한 말이 적혀 있었다.

은인은 작게 말했다.

“네. 하지만 나중에 바꿀 수 있나요?”

그레이는 바로 대답했다.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그레이는 적었다.

자기 의사: 현재 동의. 추후 변경 가능.

죠니가 말했다.

“서류가 점점 살아있는 것 같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사람에 대한 기록은 살아 있는 편이 안전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박수를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지막 항목.

“귀환 경로.”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문.”

그레이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적겠습니다.”

은인은 말했다.

“문은 잠그지 않아요.”

라이자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위험할 때는 닫을 수 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덧붙였다.

“닫는 것과 잠그는 건 다르니까.”

은인은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문은 닫힐 수 있지만, 제가 두드리면 열려야 해요.”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레이는 기록했다.

귀환 경로: 라이자의 작업실 문. 안전상 닫을 수 있으나, 귀환 요청 시 응답해야 함. 문고리의 은실은 잠금 장치가 아니라 귀환 표시.

이 마지막 문장에, 은인은 조금 웃었다.

“좋아요.”

그레이는 마지막 항목을 보았다.

“비고.”

푸리나가 기대하듯 몸을 기울였다.

“여기 중요하지.”

죠니가 말했다.

“이상한 거 쓰지 마.”

“내가 언제 이상한 걸 썼다고.”

“자주.”

“너무해.”

레플리카는 은인을 보았다.

“비고는 다른 칸에 넣기 어려운 것을 적는 곳인가?”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은인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이라고 적어야 하나요?”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마지막 막의 핵심이 드디어 문장으로 나왔다.

사람이라고 적어야 하는가.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은빛 손.
작은 결이 남은 코.
돌아온 발.
자기 이름을 말한 입.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레이는 펜을 들고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죠니도 말하지 않았다.

레플리카도 기다렸다.

라이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녀는 멈췄다.

전에는 대답하려 했다.

은인은 내 가족이다.
그러니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
그러니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니, 상관없는 게 아니다.

그 모든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라이자는 이번에는 은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은인은 기록지를 보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레이는 펜을 내리지 않았다.

은인은 조금 더 말했다.

“저는 사람이 뭔지 아직 다 몰라요.”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거짓말했고, 도망쳤고, 돌아왔고, 혼났고, 조금 고쳤고, 조금 남겼어요.”

은인은 자기 손을 보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고, 제 이름은 은인이고, 피노키오를 해봤지만 피노키오만은 아니에요.”

라이자의 눈에 물기가 조금 맺혔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비고에는…….”

그녀는 그레이를 보았다.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라고 적어도 되나요?”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는 비고란에 적었다.

비고: 돌아올 수 있는 이름.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눈을 감았다.

사람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완성품이라고 적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어 있지도 않았다.

돌아올 수 있는 이름.

오늘의 결말에는 그 정도가 가장 정확했다.


---

마지막 막의 두 번째 장면은 푸리나가 맡았다.

그녀는 작업실 가운데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아주 작은 무대였다.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사이에 생긴 틈.

은인이 원하면 올라갈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높이.

은인은 그 무대를 보았다.

“마지막에는 제가 올라가야 하나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올라가도 돼.”

“그럼 왜 만들었어요?”

“선택지가 있으면 좋잖아.”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안 올라가도 되는 무대.”

“응.”

죠니가 말했다.

“그건 좋은 무대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렇지?”

“가끔은.”

“가끔은 빼.”

“싫어.”

은인은 작은 무대 앞에 섰다.

라이자는 뒤에서 지켜보았다.

예전 같으면 은인의 자세를 고쳐주었을 것이다.

발의 위치.
무릎의 각도.
넘어지지 않는 중심.

하지만 지금은 지켜보았다.

은인은 무대에 올라갈까 말까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올라갔다.

작은 무대는 삐걱였다.

은인은 놀라 멈췄다.

푸리나가 말했다.

“오래된 무대라서 그래.”

은인은 문을 처음 열 때를 떠올렸다.

“오래된 문도 소리를 냈어요.”

“맞아.”

“소리를 낸다고 나가면 안 되는 건 아니었어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것도 맞아.”

은인은 무대 위에 섰다.

관객은 많지 않았다.

라이자.
푸리나.
그레이.
레플리카.
죠니.

그리고 창가 어딘가에 하융의 기척.

은인은 그들을 보았다.

“저는 마지막 대사를 해야 하나요?”

푸리나는 말했다.

“원하면.”

“정해진 대사는요?”

푸리나는 빈 종이를 들어 보였다.

“없어.”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그럼 제가 써야 하나요?”

“응.”

은인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은빛이었다.

무대 위에서 반짝였다.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저는 사람이 되었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차갑지 않았다.

기다리는 침묵이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에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자의 손 안에만 있지는 않을래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인은 계속 말했다.

“저는 거짓말했어요. 무서워서요. 박수받고 싶어서요. 괜찮다고 말하면 계속 놀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코끝을 만졌다.

“그때 은이 휘었어요.”

죠니가 조용히 들었다.

레플리카는 은인의 손이 떨리는지 보았고, 그레이는 기록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록보다 듣는 것이 먼저였다.

은인은 말했다.

“그런데 진실을 말해도, 모두가 떠나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라이자를 보았다.

“문이 닫히지 않았어요.”

라이자는 숨을 삼켰다.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박수받는 말은 달콤했어요.”

죠니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따뜻했어요.”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고래 안에서, 저는 라이자가 만든 실을 봤어요. 저를 잡으려고만 만든 게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만든 실이었어요. 하지만 너무 조이면 아팠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숙였다.

은인은 말했다.

“그래서 같이 다시 묶었어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지막 문장을 꺼냈다.

“저는 완성품이 아니에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자가 실패한 것도 아니에요.”

라이자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은인은 조금 놀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는……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에요.”

그 말이 떨어졌다.

작업실은 조용했다.

박수는 바로 오지 않았다.

푸리나가 일부러 박수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박수로 덮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라이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라이자가 물었다.

“안아도 돼?”

은인의 눈이 커졌다.

이전의 라이자라면 물어보지 않고 안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물었다.

은인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는 은인을 안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고치기 위한 손이 아니라, 붙잡아두기 위한 손도 아니라, 그냥 가족을 안는 손으로.

은인은 처음에는 몸을 굳혔다.

그러다 천천히 라이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푸리나는 그제야 작게 박수를 쳤다.

짝.

그레이가 박수를 쳤다.

짝.

레플리카가 박수를 쳤다.

짝.

죠니도 짧게 박수를 쳤다.

짝.

어딘가 창가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하융의 박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인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

마지막 막의 세 번째 장면은 라이자의 대사였다.

푸리나는 이것을 처음부터 준비하지 않았다.

라이자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인이 내려온 뒤, 라이자는 작은 무대 위에 올라갔다.

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라이자?”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나도 한 줄쯤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푸리나는 조용히 물러났다.

“물론.”

라이자는 무대 위에서 조금 어색해 보였다.

그녀는 무대 체질은 아니었다.

작업대 앞에 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마주해야 할 것은 작업대가 아니라 빈 무대였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나는 너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어.”

은인은 가만히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내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만든 것이라는 말보다, 가족이라는 말이 더 옳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자기 손을 보았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말로도 내가 네 길을 대신 정할 수는 없었어.”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했어.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했고, 속지 않았으면 했고,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지 않았으면 했어.”

라이자는 낮게 웃었다.

“아직도 그래.”

은인이 작게 웃었다.

라이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나는 아마 계속 걱정할 거고, 때로는 너무 빨리 손을 뻗을 거고, 네 코부터 볼지도 몰라.”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눈가를 조금 누르고 싶어졌다.

라이자는 계속했다.

“하지만 오늘 배웠어.”

그녀는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사랑은 문을 잠그는 실이 아니어야 해.”

은인은 숨을 멈췄다.

라이자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네가 나가도, 돌아와도, 늦어도, 실수해도, 혼나도…….”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내가 네 가족이라는 말이, 네가 내 손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게 할게.”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라이자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는 처음부터 내 가족이었어.”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오늘은, 네가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이라는 걸 배웠어.”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사람이 되었다”보다 더 컸다.

그리고 더 조심스러웠다.

푸리나는 조용히 대본에 적었다.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


---

극은 이제 거의 끝나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남겨두었다.

“은인.”

“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정하자.”

라이자가 경계했다.

“뭘?”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가리켰다.

“이 실.”

은인은 은실을 보았다.

“문고리에 둘래요.”

“계속?”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오늘은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은인은 말했다.

“내일 다시 정할래요.”

그레이가 기록했다.

문고리 은실: 오늘 유지. 내일 재확인.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다. 매일 같은 답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죠니가 말했다.

“내일이 있으면 오늘 답이 좀 가벼워지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귀환용 의자 두 개를 보았다.

“의자는?”

라이자가 말했다.

“두자.”

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자.”

그레이가 기록했다.

귀환용 의자 2개: 유지.

푸리나는 대본을 닫았다.

“좋아. 그럼 이 극의 결말은 이렇게.”

은인은 긴장했다.

“어떻게요?”

푸리나는 선언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실 문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에는 느슨한 은실이 묶여 있었다.

그 옆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빈 주머니와 접힌 망토와 보류 상자와 반환 예정 봉투가 정리되어 있었다.

은인의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라이자의 손 위에는 아직 따뜻한 천이 놓여 있었다.

그레이의 기록지에는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끝.”

은인이 놀랐다.

“이게 끝인가요?”

“응.”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안 해요?”

“안 해.”

“기적도 없나요?”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있잖아.”

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요?”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가리켰다.

“저기.”

다음으로 의자 두 개를 가리켰다.

“저기.”

기록지를 가리켰다.

“저기.”

라이자의 손과 은인의 코끝, 접힌 망토와 빈 주머니를 차례로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저기, 저기, 저기.”

은인은 이해하려고 애썼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기적은 오늘 네 몸이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야.”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럼요?”

“문이 닫히지 않은 것.”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네가 돌아온 것.”

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은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물었다.

“손 올려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자의 손이 은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마침내 막을 내렸다.


---

막이 내려간 뒤에도 아무것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은인은 여전히 은빛이었다.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거짓말하면 아마 다시 휘어질지도 몰랐다.

라이자는 여전히 걱정이 많았다.

은인이 문 쪽을 볼 때마다 눈빛이 조금 흔들릴 것이다.

푸리나는 여전히 극을 만들 것이다.

가끔 너무 멋진 장면을 떠올리고, 그레이에게 제지당할 것이다.

그레이는 여전히 기록할 것이다.

때로는 너무 건조하게, 때로는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죠니는 박수에 대해 심드렁한 말을 남기고, 아마도 언제나처럼 옳은지 위험한지 애매한 조언을 할 것이다.

레플리카는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라고 할 것이다.

하융은 어디선가 창을 열고, 아직 선택되지 않은 길들을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달라졌다.

작업실 문고리에는 은실이 묶여 있었다.

잠그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옆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출발하는 사람을 위한 의자가 아니라, 돌아온 사람을 위한 의자.

그날 이후, 은인은 가끔 그 의자에 앉았다.

라이자도 가끔 앉았다.

어느 날은 둘이 함께 앉았다.

어느 날은 둘 다 앉지 않았다.

그것도 괜찮았다.

의자는 비어 있어도,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푸리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제목을 적었다.

《은빛 피노키오》

그 아래에 부제를 적었다.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그리고 가장 마지막 줄에는, 은인이 직접 쓴 문장이 남았다.

조금 삐뚤고, 조금 느린 글씨였다.

저는 아직 모르지만, 돌아올 수 있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웃었다.

그 이상 선언할 필요는 없었다.

후일담 — 문고리의 은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다 —
아래를 그대로 소스에 추가하면 될 것 같아.
형식은 최신 전선 상황 통합 프롬프트로 정리했어.

# 현재 TRPG 전선 상황 통합 프롬프트
#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 룸 술탄국 / 니케아 / 발칸 / 헝가리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튜튼 / 리보니아
# 최신 우선 소스

이 프롬프트는 현재 TRPG 연재에서 실제 진행된 전선 상황과 각 세력의 전략적 위치를 정리하기 위한 최신 우선 소스다.

앞으로 대체역사 TRPG 연재, 각국 턴 계획, 외교 판단, 전선 우선순위 정리, 군주·가신 행동 앵커 작성, 연합 방위망 논의에서는 이 프롬프트를 우선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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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핵심 전제

이 게임은 거시적으로 플레이어 진영과 킵차크 칸국/몽골 세력 사이의 PVE 디펜스 구도를 가진다.

다만 현재 상황은 단순히 “모두가 한 방향에서 오는 킵차크를 막는 상태”가 아니다.

킵차크·몽골 본공세가 시작되기 전후로, 각 지역에서 내부 반란, 종교 사교도, 괴물 재난, 내전, 변경 약탈, 기사단 붕괴, 대봉기 등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국면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각국은 몽골 디펜스를 준비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내부와 주변에서 발생한 화재를 끄느라 전력이 분산되고 있다.

플레이어들은 다른 진형의 상황을 알고 있지만, 각 캐릭터와 국가는 자기 진형 정보 외에는 제한적으로만 알고 있다.

따라서 실제 턴 판단에서는 플레이어 지식과 캐릭터 지식을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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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전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푸리나 헤툼이 다스리는 국가이며, 현재 룸 술탄국 변경 아미르의 약탈 침공을 받고 있다.

침공해온 변경 아미르의 병력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우수함 중위세 아미르 1카드
- 벗어남 중위세 기병 10카드

이는 룸 술탄국 중앙군이라기보다, 권위와 물자를 확보해야 하는 변경 아미르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기동 약탈군에 가깝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핵심 대응 방향은 다음과 같다.

1. 죠니 죠스타와 성 블레즈 기사단으로 침공군을 요격한다.
2. 성 블레즈 기사단은 매턴 자동 보충되는 국가 유산 전력이므로 수동 보충이 필요 없다.
3. 죠니는 적을 무리하게 섬멸하거나 깊게 추격하지 않고, 국경 마을 보호와 약탈 저지를 최우선으로 한다.
4. 적 아미르의 핵심 카드에 손실 위험을 보여주고, 벗어남 중위세 기병 일부를 꺾어 “킬리키아 약탈은 비싸다”는 계산을 강제한다.
5. 하융은 죠니와 동행하여 전장 분석을 수행한다.
6. 그레이는 피해·포로·약탈물·배상 장부를 작성하고, 회유 가능한 자와 처벌해야 할 자를 구분한다.
7. 레이튼은 룸 중앙에 “이 침공은 중앙 명령인가, 변경 아미르의 독단인가”를 묻는 외교문을 준비한다.
8. 푸리나는 후방 안정, 극장관+신전 복합시설 착수, 인재 개발을 통해 장기적 후방 허브를 구축한다.

장기적으로 킬리키아의 목표는 변경 아미르를 단순히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조건부 완충세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완충 아미르화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킬리키아 국경 약탈 금지
- 포로와 약탈물 반환
- 피해 배상
- 친족 또는 후계자를 인질 겸 유학생으로 킬리키아 궁정에 체류
- 킬리키아 상인과 여관망 보호
- 유사시 보조기병 제공
- 계약 위반 시 성 블레즈 기사단의 징벌 인정
- 룸 중앙의 체면을 해치지 않는 형식 유지
- 일칸국 혈맹 질서와 충돌하지 않는 문구 사용

이 계획은 “약탈자를 친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탈자가 계속 약탈자로 남는 것보다 계약 아래 국경을 지키는 편이 더 싸고 안전하다고 계산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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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룸 술탄국 중앙 상황

현재 룸 술탄국은 이미 몽골/일칸권에 복속된 약화된 술탄국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중앙의 쌍두마차는 다음과 같다.

- 무인 앗 딘 술레이만: 군무와 외교, 변경 통제의 핵심 실권자
- 파흐르 앗 딘 알리: 행정과 재무, 조세·장부·도시 기반 유지의 핵심 실권자

현재 룸 술탄국 중앙은 변경 아미르들의 독자적 약탈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 전체가 아르메니아와 전면전을 원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중앙의 기본 태도는 다음에 가깝다.

> 변경 아미르들이 권위와 물자를 위해 약탈하는 것은 어느 정도 방치한다.
> 그러나 중앙 아미르들이 경거망동하지 않고, 일칸국을 자극할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면 충분하다.

두 재상이 무언가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 중앙 아미르들을 묶어두는 군사·정치적 통제 준비
- 변경 아미르들의 실패 또는 성공을 중앙 장부 안으로 흡수할 재정·이크타 재편 준비
- 일칸국 항의가 들어올 경우 “변경 아미르의 독단”이라고 책임을 회피할 문구 준비
- 변경 아미르들의 약탈전을 중앙의 주작전이 아니라 변경 정리와 자연선별의 기회로 보는 태도

따라서 아르메니아는 룸 중앙과 변경 아미르를 분리해서 다루어야 한다.

변경 아미르에게는 군사적으로 손실을 강요하고, 중앙에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 이 침공은 술탄국 중앙의 명령입니까, 아니면 변경 아미르의 독단입니까?

중앙이 독단이라고 답하면, 아르메니아는 그 아미르를 계약으로 묶을 명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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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니케아 제국 전선

니케아는 현재 여러 위협을 동시에 받고 있다.

확실히 알려진 정보는 다음과 같다.

- 니케아 아나톨리아 방면은 룸 술탄국 변경 아미르의 침공을 받고 있다.
- 해당 전선은 지휘관 부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있다.
- 니케아 서쪽에서도 별도의 전선이 만들어졌다는 정보가 있다.

플레이어 시점에서는 니케아 서부 381번 프로빈스에 부금악룡이라는 용이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금악룡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 381번 프로빈스에 둥지를 틀었다.
- 니케아 국민을 학살했다.
- 탐욕한 용의 성정에 따라 부를 끌어들이고 있다.
- 학살당한 사람들을 용아병이나 타락한 용사 유닛으로 언데드화한다.
- 이 언데드 병력들이 주변 영토를 침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보는 플레이어 진형 전체를 보는 시점에서 아는 정보이며,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캐릭터들이 자동으로 알고 있는 정보는 아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는 니케아에 곧바로 “부금악룡을 도와주겠다”고 말할 수 없다.

레이튼이 해야 할 일은 니케아에 공식 질의서를 보내는 것이다.

질문 방향은 다음과 같다.

- 니케아가 현재 가장 급한 전선은 어디인가?
- 아나톨리아 전선의 피해 원인은 병력 부족인가, 지휘관 부족인가?
- 서부에 생긴 새 전선은 인간 세력인가, 괴물·재난·반란인가?
- 니케아가 아르메니아에 원하는 지원은 지휘관, 전마, 피난 지원, 장례/정화 지원 중 무엇인가?
- 하융 같은 임시 작전고문을 받을 의사가 있는가?
- 전마 보급 협정이 필요한가?

아르메니아가 니케아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전마 공급
- 하융의 임시 작전고문 파견
- 그레이식 피해 장부와 피난·보상 행정 양식
- 여관좌 교단을 통한 피난민·부상자·장례 지원
- 레이튼의 외교·전략 질의
- 푸리나의 후방 안정과 극장관/여관망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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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세르비아와 남부 보스니아 상황

세르비아는 내부 반란을 수습 중이다.

추가로 남부 보스니아 쪽에서는 개척교 사교도들이 준동하고 있다.

다만 이 문제는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직접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교 교단장인 알페라츠가 진압할 예정이다.

알페라츠는 현장 지휘계 인물이며, 세르비아에는 아르메니아의 성 블레즈 기사단과 유사한 초반 국가 유산 병력이 존재한다.

현재 문제는 전투력 부족이 아니라, 사교도들의 꼬리를 아직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개척교 사교도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핵심은 색출·추적·침투·정보전이다.
- 꼬리를 잡으면 알페라츠와 국가 유산 병력이 빠르게 진압할 가능성이 있다.
- 아르메니아가 직접 군사 개입할 필요는 낮다.
- 다만 여관망을 통한 피난민·실종자·피해 기록, 정통 개척교와 사교도의 구분을 존중하는 외교적 태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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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불가리아 3차르 내전 상황

불가리아는 현재 세 명의 차르로 갈라진 내전 상태다.

핵심 세력은 다음과 같다.

1. 레플리카
- 정통 고통교 계열
- 가장 합법적인 차르 후보에 가까움
- 고통을 줄이고 견디게 하는 정통 고통교를 대표
- 현재 세 차르 중 유일하게 후원자가 없음
- 후원자를 찾고 있음

2. 스토얀카 아센
- 척추교 계열 차르
- 광기의 성좌 신도인 왈라흐 족과 성공적으로 외교 합의
- 레플리카의 영토 359번을 공격 중

3. 알렉산드리나 아센
- 사생아 차르 후보
- 시메온 대제의 흉내를 통해 왕도를 걷고자 함
- 스토얀카의 공격을 기회로 보고 있음
- 척추교와 그 후원자에게 접촉한 뒤 레플리카 측에 회전을 걸 생각
- 아센 세력의 사자 2명이 259번 영토로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있음

중요한 변수는 259번 영토가 칸국 영역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센 사자 2명이 259번으로 이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정보다.

가능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 알렉산드리나가 칸국의 직접 후원을 받으려 한다.
- 칸국 영역 안의 척추교 후원자와 접촉하려 한다.
- 칸국 지방 세력, 노얀, 용병, 통행권, 전마, 정보망을 얻으려 한다.
- 칸국을 직접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칸국권 중개자를 접촉하려 한다.
- 혹은 역정보일 수 있다.

아직 확정해서는 안 되지만, 259번으로 향하는 사자의 목적지는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레플리카가 무너지면 불가리아에서 정통 고통교 기반의 비교적 온건하고 질서 있는 축이 사라질 수 있다. 그 결과 척추교, 광기, 칸국권 후원자가 불가리아 내전에 깊게 들어올 위험이 있다.

아르메니아가 직접 군사 개입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레플리카에게 제한적 후원 신호를 보내는 것은 고려할 수 있다.

후원 방식은 군사동맹이 아니라 다음이 적절하다.

- 피난민 보호
- 부상자 치료
- 장례 지원
- 외교적 승인
- 정통 고통교와 척추교를 구분하는 종교적 태도
- 척추교·광기 확산 저지 명분
- 제한적 구호·의약·식량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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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헝가리 왕국 전선

헝가리는 현재 세 방향을 동시에 관리하고 있다.

1. 남부/보스니아 방면 개척교 사교도 토벌 관련 문제
2. 서부 오스트리아 공국 점령
3. 동부 몽골군 디펜스 시작

오스트리아 공국 점령은 소피아/소피가 군권을 잡고 진행할 예정이며, 보헤미아가 이를 지원할 예정이다.

이는 헝가리의 장기 체급을 키울 수 있는 작전이지만, 단기적으로는 동부 방어력과 주의가 분산될 위험이 있다.

헝가리는 킵차크/몽골 디펜스에서 핵심 방패국 중 하나이므로, 아르메니아는 헝가리에 직접 군대를 보내기보다 남동부 전선을 안정화시켜 헝가리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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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폴란드 전선

폴란드는 현재 몽골군의 공격을 받게 될 예정이다.

이는 킵차크/몽골 디펜스 주전선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신호에 가깝다.

폴란드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당장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대군 파견이 아니라 다음과 같다.

- 전마 공급 가능성 확인
- 여관망을 통한 피난민·사절 이동 지원
- 몽골군 진군 정보 공유
- 일칸국 혈맹을 통한 몽골계 정보 루트 활용 가능성
- 전후 난민 수용 또는 경유 지원
- 레이튼의 외교 질의
- 하융 같은 임시 지휘관 파견 가능성 검토

다만 하융은 현재 킬리키아 방면 전투 분석, 니케아 지원 후보, 룸 변경 아미르 대응과 연결되어 있어, 폴란드까지 즉시 보내기는 어렵다.

폴란드 지원은 우선 레이튼의 질의와 전마 외교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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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리투아니아 / 푸르스 / 튜튼 / 리보니아 전선

리투아니아·튜튼·리보니아 방면은 북방 내부 재편 국면에 들어갔다.

주요 상황은 다음과 같다.

- 푸르스인들은 3턴 뒤 대봉기를 일으킬 예정이다.
- 호흐마이스터의 튜튼 기사단은 이 푸르스인들의 마지막 대봉기를 버텨야 한다.
- 민다우가스는 봉기로 인해 남은 피난민들을 보호하기로 했다.
- 민다우가스는 사모기티아와 트레니오테를 사실상 미끼로 던진 뒤 남벌을 천명했다.
-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180번 영지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반란 상태다.
- 검우기사단은 100명을 제외하고 거의 전원이 기사단 자금을 들고 사모기티아를 통과해 튜튼 동쪽의 튜튼 기사단 쪽으로 퇴각 중이다.
- 이 퇴각병들은 트레니오테에게 대부분 학살당할 가능성이 높다.
-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민다우가스의 선택은 냉정하지만 전략적으로 일관적이다.

그는 모든 전선을 구하려 하지 않고, 통제 불가능한 폭력은 적에게 향하게 두며, 자신은 피난민 보호와 남벌이라는 큰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기존 이름으로는 사실상 끝났다.

아스트리트와 남은 100명은 “실패한 성전 기사단”의 이름을 계속 들고 가기보다, 생명을 긍정하는 새 기사단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튜튼 기사단은 푸르스 대봉기를 버티는 것이 최우선이며, 리보니아 잔당을 모두 구하려다 같이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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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아르메니아의 거시적 역할

현재 모든 전선을 고려하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역할은 주전선 국가가 아니라 연합의 남동부 후방 허브다.

아르메니아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 킬리키아 국경의 룸 변경 아미르를 낮은 비용으로 요격한다.
2. 가능하다면 변경 아미르를 완충세력으로 전환한다.
3. 룸 중앙과 변경 아미르를 분리해서 다룬다.
4. 니케아에 공식 질의서를 보내 실제 위협과 필요한 지원을 확인한다.
5. 전마 공급을 니케아뿐 아니라 폴란드·헝가리 등 대몽골 전선 국가의 장기 병목 자원으로 관리한다.
6. 푸리나의 극장관+신전 복합시설을 통해 인재 발굴, 피난민 재배치, 귀순자 가족 관리, 유학생/인질 관리, 후방 사기 유지의 중심지를 만든다.
7. 푸리나는 매턴 가능한 한 인재 개발을 지속한다.
8. 그레이는 포로·피해·배상·피난·전마 배분 장부를 연합 지원용으로 확장한다.
9. 레이튼은 각국에 공식 질의망을 열어 플레이어 지식을 캐릭터 지식으로 전환할 통로를 만든다.
10. 하융은 당장은 킬리키아 전장 분석에 집중하고, 이후 정보가 열린 전선 중 가장 붕괴 위험이 큰 곳으로 파견한다.
11. 죠니와 성 블레즈 기사단은 킬리키아 국경의 기동 예비대이자 계약 위반 시 징벌의 망치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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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현재 가장 중요한 전략 판단

현재 유럽 전선은 “몽골 본공세만 막으면 되는 상황”이 아니다.

각 전선은 다음처럼 압박받고 있다.

- 북방: 폴란드 몽골 공격, 푸르스 대봉기, 튜튼 방어, 리보니아 붕괴
- 동부/중부: 헝가리 동부 몽골 디펜스, 오스트리아 점령, 사교도 문제
- 발칸: 불가리아 3차르 내전, 스토얀카-왈라흐 합의, 알렉산드리나의 259번 칸국권 접촉 의혹, 세르비아 반란과 사교도
- 남동부: 니케아 룸 침공, 니케아 서부 미확인 재난, 킬리키아 룸 변경 아미르 침공
- 킬리키아: 룸 아미르 요격과 완충화 준비

따라서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새 전선을 크게 열어서는 안 된다.

가장 좋은 전략은 다음과 같다.

> 자기 국경을 안정화한다.
> 변경 아미르를 통제 가능한 완충세력으로 바꾼다.
> 니케아와 공식 정보 채널을 연다.
> 전마·인재·여관망·장부·질문을 통해 연합의 빈틈을 메운다.
> 남동부에서 새 불길을 만들지 않아 북방과 중부가 몽골 디펜스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즉 푸리나의 아르메니아는 “모든 전선에 뛰어드는 국가”가 아니라,

> 무대 뒤에서 조명, 말, 피난처, 장부, 질문, 두 번째 배역을 준비하여 각국이 자기 전선에서 무너지지 않게 돕는 후방 허브 국가

로 운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은빛 피노키오》

후일담 — 문고리의 은실

—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다 —

다음 날 아침, 그레이는 작업실 문 앞에서 멈췄다.

문고리에 은실이 묶여 있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였다.

느슨하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도 않게.

그레이는 잠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록판을 꺼냈다.

문고리 은실: 유지 여부 재확인 예정.

그는 그렇게 적고,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레이가 문을 열었다.

은실은 문이 열릴 때 살짝 흔들렸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도 기록했다.

문 개방 시 은실 간섭 없음.

푸리나가 작업실 안쪽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 아침부터 은실의 근무 상태를 점검하는 거야?”

“기능 확인입니다.”

“그거 잠금장치 아니잖아.”

“그렇기 때문에 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잠금장치가 아닌 것이 잠금장치처럼 작동하면 곤란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레이, 가끔 너무 좋은 말을 너무 행정적으로 해.”

“죄송합니다.”

“칭찬이야.”

“그렇습니까?”

“응. 아마도.”

작업실 안에는 전날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귀환용 의자 두 개.

보류 상자.

반환 예정 봉투.

접힌 붉은 망토.

빈 주머니.

그리고 작은 거울 앞에 앉은 은인.

은인은 자기 코끝을 보고 있었다.

그 결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보아야 알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뒤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조금 느린 동작이었다. 손목에 올렸던 따뜻한 천은 작업대 옆에 접혀 있었다.

그레이가 물었다.

“은인 님. 문고리 은실의 유지 여부를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은인이 돌아보았다.

“오늘도 물어보나요?”

“네. 어제 ‘내일 다시 정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은인은 문고리를 보았다.

“기억했어요?”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기록했습니다.”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오늘은…… 그대로 둘래요.”

그레이는 적었다.

금일 유지.

은인이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조금 낮춰도 될까요?”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도 흥미롭게 보았다.

라이자는 차잔을 내려놓았다.

은인은 문고리로 다가갔다.

“어제는 제가 나가고 돌아오는 표시였어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조금 높아요.”

푸리나는 물었다.

“높으면 불편해?”

“불편하다기보다…….”

은인은 은실을 손끝으로 만졌다.

“제가 볼 수는 있는데, 잡으려면 손을 조금 들어야 해요.”

라이자는 조용히 들었다.

은인은 계속 말했다.

“오늘은 조금 낮게 두고 싶어요. 손을 들지 않아도 만질 수 있게.”

그레이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날이었다면, 은실의 장력과 문고리 회전 반경과 손가락 위치부터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먼저 물었다.

“낮추면 더 편할 것 같아?”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 열 때 걸리지 않게 해야 해.”

“그레이가 봐줄 수 있어요?”

그레이는 즉시 말했다.

“가능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귀환용 은실 조정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너는 해설하지 마.”

“하지만 후일담이잖아.”

“그래서 더 하지 마.”

푸리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셋은 문고리 앞에 모였다.

은인이 은실의 매듭을 풀었다.

라이자는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도와줄까?”

은인은 매듭을 보다 말했다.

“조금만요.”

라이자는 은인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치지 않았다.

대신 매듭의 한쪽 끝을 잡아주었다.

그레이는 문을 열고 닫아보며 위치를 확인했다.

“이 높이면 개폐에 방해되지 않습니다.”

은인은 은실을 조금 낮게 묶었다.

느슨하게.

하지만 어제보다 손에 더 가까운 위치에.

은인은 문 앞에 서서 은실을 만졌다.

“좋아요.”

라이자가 물었다.

“오늘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레이는 기록했다.

문고리 은실: 위치 하향 조정. 사유 — 당사자 접근성 향상. 내일 재확인.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제 정말 시설 관리 기록이네.”

그레이는 진지했다.

“중요한 시설입니다.”

은인은 작게 웃었다.

“중요해요.”

그레이는 그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충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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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는 조용했다.

은인은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셨다.

라이자는 은인이 컵을 잡는 손을 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손목의 각도.
관절의 움직임.
코끝의 결.
차의 온도.

보고 싶은 곳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라이자는 은인의 얼굴을 보았다.

“맛은 어때?”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좋아요.”

라이자는 잠시 기다렸다.

은인은 컵을 내려놓고 다시 말했다.

“조금 뜨거워요.”

라이자는 즉시 컵을 가져가려 했다.

은인이 컵을 잡은 채 말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마실게요.”

라이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푸리나가 그 장면을 보며 숨을 죽였다.

라이자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알겠어.”

은인은 차를 조금 식혔다.

후후.

은빛 입술에서 작은 김이 흩어졌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지 않았다.

푸리나도 말하지 않았다.

작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어제 이전의 라이자였다면, 컵은 이미 빼앗겼을 것이다.

어제 이전의 은인이었다면, “괜찮아요”만 말했을 것이다.

오늘 은인은 “좋아요”와 “뜨거워요”를 같이 말했고, 라이자는 컵을 빼앗지 않고 기다렸다.

푸리나는 속으로 박수쳤다.

겉으로는 치지 않았다.

이런 장면은 너무 큰 박수를 받으면 깨질 수 있었다.

라이자가 은인을 보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뒤, 은인이 물었다.

“라이자는 손 괜찮아요?”

라이자는 자기 손을 보았다.

어제 레플리카가 올려준 따뜻한 천이 아직 근처에 있었다.

“괜찮—”

라이자는 멈췄다.

은인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은 비난하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라이자는 짧게 웃었다.

“조금 뻐근해.”

은인은 진지하게 말했다.

“레플리카에게 말해야 하나요?”

푸리나가 끼어들었다.

“레플리카를 부르면 라이자도 의자에 앉아야 할걸.”

라이자는 푸리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 있어요.”

그레이가 조용히 덧붙였다.

“2개 있습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라이자도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작업실의 은빛에 부딪혀, 작게 반짝였다.


---

오후에는 반환 예정 봉투가 문제가 되었다.

작은 나사.

장난감 나라 태엽 아이에게서 떨어진 나사.

은인은 봉투를 들고 오래 바라보았다.

“돌려줘야 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다시 장난감 나라에 가야 해요.”

라이자의 손이 굳었다.

아주 조금.

은인은 그것을 보았다.

“무서워요?”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응.”

은인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럼 안 갈까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답은 쉽지 않았다.

가지 마.

너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은인이 가져온 나사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돌려주는 것도 은인의 책임이었다.

라이자는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어제보다 낮아진 은실.

손을 들지 않아도 닿는 높이.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가야 한다고 생각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태엽 아이의 것이니까요.”

“그 아이가 괜찮다고 했잖아.”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사가 떨어졌는데 괜찮다고 했어요. 그건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아요.”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인은 봉투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저는 돌아올 수 있는지 다시 보고 싶어요.”

그 말에 라이자의 얼굴이 조금 흔들렸다.

돌아올 수 있는지 다시 보고 싶다.

그 말은 위험하면서도, 정직했다.

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이번엔 어떻게 갈래?”

은인은 생각했다.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아요.”

라이자의 눈빛이 밝아지려다가, 은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은인은 말했다.

“하지만 라이자가 전부 대신 말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같이 가되, 네가 먼저 말할래?”

“네.”

그레이가 말했다.

“반환 기록을 작성해야 하므로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나는 무대 문만 열어둘게.”

죠니는 벽가에서 말했다.

“장난감 나라면 하융이 알아서 나타나겠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가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하융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렸다.

“길은 이미 열려 있소.”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후일담답지 않게 다시 외출이네.”

라이자가 말했다.

“외출도 후일담일 수 있어?”

푸리나는 웃었다.

“진짜 후일담은 끝난 뒤에 뭘 하는지 보는 거니까.”

은인은 봉투를 들었다.

“그럼 갔다 올게요.”

라이자는 말했다.

“같이 가자.”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요.”

문고리의 은실이 조금 흔들렸다.

문은 열렸다.


---

장난감 나라는 전날보다 조용했다.

아니, 소리는 여전히 컸다.

나팔도 울렸고, 회전목마도 돌았고, 색종이도 흩날렸다.

하지만 은인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어제는 모든 소리가 은인을 끌어당겼다.

오늘은 그 소리 사이의 틈이 들렸다.

반복되는 웃음 뒤의 태엽 소리.
과자 냄새 아래의 눅눅한 종이 냄새.
“괜찮아!”라는 말 사이에 떨어지는 작은 부품 소리.

은인은 봉투를 꼭 쥐었다.

라이자는 곁에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 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은인보다 먼저 말하지 않았다.

태엽 아이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 옆에서, 같은 웃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괜찮아!”

끼릭.

“괜찮아!”

끼릭.

은인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태엽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너 다시 왔구나!”

“네.”

“놀러 왔어?”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돌려주러 왔어요.”

태엽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은인은 봉투를 열었다.

작은 나사가 나왔다.

태엽 아이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거…….”

“어제 떨어졌어요.”

태엽 아이는 바로 말했다.

“괜찮아!”

끼릭.

은인은 나사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말했다.

“안 괜찮을 수도 있어요.”

태엽 아이는 웃었다.

“괜찮다니까!”

끼릭.

은인은 조금 무서웠다.

이 말이 맞는지, 자기가 괜히 아픈 곳을 건드리는 건 아닌지, 태엽 아이가 화낼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말했다.

“저도 어제 괜찮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태엽 아이가 멈췄다.

라이자가 한 걸음 앞으로 오려다가 멈췄다.

은인은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이걸 돌려줄게요. 다시 붙일지, 보관할지, 버릴지는 당신이 정해도 돼요.”

태엽 아이는 나사를 보았다.

“내가 정해?”

“네.”

“안 붙여도 돼?”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라이자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흔적이 벌이 아니라 접힌 페이지일 수도 있다는 말.

“안 붙여도 돼요. 하지만 떨어졌다는 걸 몰랐던 것과, 알고도 안 붙이는 건 다를 것 같아요.”

태엽 아이는 나사를 받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이거 없으면 조금 느려져.”

“네.”

“있으면 다시 빨리 움직일 수 있어.”

“네.”

“빨리 움직이면 모두가 좋아해.”

은인은 작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요?”

태엽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장난감 나라의 음악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태엽 아이는 나사를 들고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말했다.

“오늘은 안 붙일래.”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붙일지도 몰라.”

“네.”

“아니면 모레.”

“네.”

은인은 조금 웃었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태엽 아이는 그 말을 따라 했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다.”

끼릭.

태엽 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레이는 조용히 기록했다.

나사 반환 완료. 수령자 결정: 금일 미부착, 추후 재결정 가능.

라이자는 그 기록을 보며 생각했다.

반환은 끝이 아니었다.

돌려주고, 상대가 정하도록 기다리는 것.

그것도 배움이었다.

은인은 태엽 아이에게 말했다.

“저는 돌아갈게요.”

태엽 아이가 물었다.

“벌써?”

“네.”

“더 놀지 않고?”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조금 놀고 싶어요.”

라이자의 손이 아주 조금 굳었다.

은인은 그걸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돌아가고 싶어요.”

태엽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놀고 싶은데 돌아가?”

“네.”

“왜?”

은인은 문 쪽을 보았다.

라이자와 그레이, 열린 길, 문고리의 은실을 떠올렸다.

“돌아가도 다시 올 수 있는지 보고 싶어서요.”

태엽 아이는 나사를 손에 쥐고 말했다.

“이상해.”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돌아섰다.

이번에는 길이 그렇게 멀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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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로 돌아오자, 푸리나는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은인은 문을 지나오며 은실을 만졌다.

낮아진 은실은 손끝에 잘 닿았다.

“다녀왔어요.”

라이자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레이도 들어왔다.

문은 닫혔다.

잠기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물었다.

“어땠어?”

은인은 생각했다.

“이상했어요.”

“좋은 쪽?”

“모르겠어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은인은 귀환용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는 라이자가 옆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푸리나는 그걸 보고 웃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다.

라이자는 은인에게 물었다.

“다시 가고 싶어?”

은인은 생각했다.

“언젠가는요.”

라이자의 손이 굳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풀었다.

“그럼 그때 다시 말해줘.”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뒤 은인이 물었다.

“라이자는 무서웠어요?”

라이자는 솔직히 말했다.

“응.”

“그래도 같이 와줬어요.”

“응.”

“제가 먼저 말하게 해줬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응.”

은인은 조금 웃었다.

“잘했어요.”

라이자의 눈이 커졌다.

푸리나는 입을 막았다.

그레이도 아주 잠깐 멈췄다.

라이자가 물었다.

“내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도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아마 오늘 라이자가 받은 가장 큰 보상이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 후일담, 좋네.”

죠니가 어디선가 나타나 말했다.

“지금까지 중 제일 후일담답네.”

푸리나가 놀라 물었다.

“죠니, 어디 있었어?”

“문 밖.”

“왜?”

“들어오면 장면이 내 쪽으로 샐 것 같아서.”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끔은.”

은인은 죠니를 보고 말했다.

“나사를 돌려줬어요.”

“잘했네.”

“놀고 싶었는데 돌아왔어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꽤 잘했네.”

은인은 조금 자랑스러워졌다.

“박수는요?”

죠니는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안 칠래.”

은인이 눈을 깜박였다.

“왜요?”

“이번 건 박수보다 기억 쪽이 나아.”

은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저녁이 되자, 푸리나는 대본 마지막 뒤에 후일담 페이지를 붙였다.

제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문고리의 은실

그 아래에는 오늘 있었던 일들이 적혔다.

은실을 낮춘 일.

뜨거운 차를 천천히 마신 일.

라이자가 손이 조금 뻐근하다고 말한 일.

나사를 돌려준 일.

태엽 아이가 오늘은 나사를 붙이지 않겠다고 정한 일.

은인이 놀고 싶었지만 돌아온 일.

라이자가 무서웠지만 같이 갔고, 대신 말하지 않은 일.

푸리나는 마지막 줄을 비워두었다.

“은인.”

“네.”

“오늘 후일담 마지막 줄, 네가 쓸래?”

은인은 펜을 받았다.

조금 망설이다가 썼다.

오늘은 돌아왔어요. 내일은 다시 정할래요.

라이자가 그 문장을 보았다.

“좋네.”

은인이 물었다.

“좋아요?”

“응.”

라이자는 은실이 묶인 문고리를 보았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으니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다.

레플리카는 저녁 무렵 잠깐 들러 두 사람을 보고, 무리하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말했다.

“오늘은 충분하다. 더 증명하려 하지 마라.”

푸리나는 바로 대답했다.

“네. 막 내립니다.”

레플리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하융의 창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창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필요한 날에는 다시 열릴 것이다.

작업실의 등불이 낮아졌다.

문고리의 은실은 어제보다 낮은 곳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의자 두 개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비어 있다는 것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누군가 돌아오면 앉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푸리나는 대본을 덮었다.

“《은빛 피노키오》, 여기서 끝.”

은인이 물었다.

“정말 끝인가요?”

푸리나는 웃었다.

“극은.”

“이야기는요?”

라이자가 대답했다.

“내일 다시 정하자.”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코끝의 작은 결이 등불에 살짝 반짝였다.

그것은 더 이상 벌처럼 보이지 않았다.

문고리의 은실처럼, 너무 세게 조이지 않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작업실 문은 닫혔다.

잠기지는 않았다.
《세 망령이 찾아온 밤》

프롤로그 — 박수가 끝난 뒤에도 남는 이름

—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산 자가 웃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공연이 끝난 뒤의 극장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발소리도 멎었다.
피난민들이 웃다가 훌쩍이던 소리도 잦아들었다.
방금 전까지 종이 왕관을 쓰고 고양이 왕을 외치던 아이들은, 이제 각자의 부모 품이나 담요 아래로 돌아가 있었다.

무대 위에는 작은 소품들만 남았다.

나무 고양이 인형.
접힌 종이 왕관.
끝이 부러진 장난감 창.
빵 모양으로 깎은 나무 조각.
그리고 너무 많이 박수를 받아 한쪽 귀퉁이가 찢어진 막.

푸리나 헤툼은 그 무대 앞에 서서 손을 허리에 올렸다.

“좋아.”

그녀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그레이가 무대 옆에서 소품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극이요, 아니면 사람들이요?”

푸리나는 잠깐 생각했다.

“둘 다.”

“그렇다면 좋은 기록입니다.”

“기록할 거야?”

“이미 했습니다.”

그레이는 작은 장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공연 제목, 참여한 아이들 수, 부상자는 없었는지, 사용한 소품, 울다가 웃은 사람의 대략적 수, 공연 후 배급된 빵의 양까지 적혀 있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레이, 너는 진짜 극장과 행정의 경계를 계속 무너뜨리고 있어.”

“전하께서 먼저 행정과 극장의 경계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그건 맞아.”

푸리나는 인정했다.

객석 끝에서는 아직 몇몇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극이 끝났는데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웃은 얼굴 그대로 멍하니 있었고, 어떤 이는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수를 친 손.
검을 쥐던 손.
누군가를 묻어주지 못한 손.

푸리나는 그들을 보았다.

그때, 마당 가장자리의 그늘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웃음이었어요.”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공연이 시작될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
무대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객석에 앉지도 않았다.
그러나 떠나지도 않았다.

등불이 닿지 않는 곳.

박수의 가장자리.

웃음이 끝난 뒤에야 남는 침묵 속에서.

푸리나는 아레를 보며 살짝 웃었다.

“칭찬으로 받아도 돼?”

“그럼요.”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웃었으니까요. 살아 있는 이들이 다시 웃는 일은, 작지 않아요.”

푸리나는 조금 안심했다.

그러나 아레의 시선은 무대 위에만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객석 뒤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나무 상자 하나.

푸리나는 그 시선을 따라가다가 조용히 물었다.

“거기에도 누가 있었어?”

아레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보이지 않는 실들이 늘어져 있는 듯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누군가의 마지막 숨으로 내려가고, 누군가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길목에 닿는 실.

“있었겠지요.”

아레가 말했다.

“이런 밤에는 대개 있습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쉽게 웃을 수도 없었다.

아레는 천천히 무대 쪽으로 걸어왔다.

“푸리나 헤툼.”

“응.”

“그대의 박수는 틀리지 않았어요.”

푸리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맞았다는 뜻?”

아레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그리 쉽게 채점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요.”

“그건 또 그렇네.”

아레는 찢어진 막을 보았다.

“산 자에게는 웃음이 필요합니다. 울음만으로는 숨을 이을 수 없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책망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러웠다.

“다만 나는, 그 웃음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듣는 쪽의 사람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정말 알고 있나요?”

그 질문은 날카롭지 않았다.

그래서 더 깊었다.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죽은 자를 외면하려고 극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은, 죽은 부모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피난민에게 빵과 소극을 주는 것은, 불탄 마을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레가 듣는 침묵을, 자신이 정말 같은 깊이로 알고 있는가.

그건 다른 문제였다.

푸리나는 솔직히 말했다.

“아마 전부는 아닐 거야.”

아레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용히 눈을 내렸다.

“전부 알 필요는 없어요. 그대는 그대의 길이 있으니까.”

“아레도 아레의 길이 있고?”

“네.”

아레는 무대 위 나무 고양이 인형을 집어 들었다.

작고 우스꽝스러운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이 아이들은 오늘 몽골을 물리쳤지요.”

“고양이 왕이 아주 훌륭했지.”

“네. 훌륭했어요.”

아레는 고양이 인형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마당 밖에는, 고양이 왕이 물리치지 못한 몽골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응.”

“그리고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도 있어요.”

침묵.

그레이가 소품 정리를 멈췄다.

멀리 앉아 있던 병사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이 극은…… 너무 밝았을까?”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대답은 빠르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밝았기 때문에 필요했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찢어진 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밝은 막이 내려간 뒤에도 이름은 남아요.”

그녀의 눈은 무대가 아니라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박수가 끝난 뒤에, 누군가는 빈자리를 세어야 하지요.”

푸리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 말이 아레였다.

푸리나는 박수로 산 자를 일으킨다.
아레는 박수 뒤의 빈자리를 센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 두 길이 늘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레에게도 무대가 필요할까.

산 자를 웃게 하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죽은 자를 다시 전장에 세우기 위한 무대도 아니라.
아레가 자기 침묵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는 무대.

그 생각이 떠오르자,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가 즉시 반응했다.

“전하.”

“응?”

“그 표정은 새로운 극을 생각하실 때의 표정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너는 왜 항상 맞혀?”

“반복 관찰 결과입니다.”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극인가요?”

푸리나는 조금 망설였다.

평소라면 바로 말했다.

“좋아! 이번엔 아레 주연!”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레에게 극을 건네는 일은 조심해야 했다.

망자의 이름을 다루는 사람에게, 무대는 칼보다 날카로울 수 있었다.

푸리나는 나무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아레.”

“네.”

“너는 기억하는 사람이잖아.”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않았다.

푸리나는 말을 골랐다.

“그런데 혹시, 네가 기억하는 이름들이…… 너를 쉬지 못하게 할 때도 있어?”

마당은 조용했다.

멀리서 등불이 흔들렸다.

아레는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차갑지 않았지만, 아주 오래된 물가처럼 깊었다.

“있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너무 많은 밤이 들어 있었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걸 극으로 볼 수 있을까?”

아레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다.

“내 기억을요?”

“아니.”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 기억을 꺼내서 구경하자는 말이 아니야. 그런 건 안 해.”

그녀는 무대 위에 남은 종이 왕관을 접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세 망령이 찾아오는 이야기.”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입니까?”

푸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아레는 낯선 듯 물었다.

“세 망령.”

“과거, 현재, 미래.”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하지만 아레에게 찾아오는 망령은 좀 다를 거야.”

아레는 침묵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첫 번째는, 네가 처음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름.”

아레의 손이 아주 조금 멈췄다.

“두 번째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웃고 있는 자리.”

객석 뒤편에서 누군가 작게 숨을 삼켰다.

“세 번째는…….”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건 조심해야 했다.

“네가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이 된 미래.”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거절의 침묵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장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이 극은 너한테 ‘잊어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아레의 눈이 푸리나를 향했다.

푸리나는 똑바로 말했다.

“그건 네 길을 부정하는 거니까.”

아레는 낮게 물었다.

“그럼 무엇을 묻는 극인가요?”

푸리나는 대답했다.

“기억이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

바람이 천 조각 막을 흔들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이유가 산 자가 웃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산 자가 다시 웃을 수 있었던 대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레는 눈을 내렸다.

오래.

아주 오래.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었지만 쓰지 않았다.

지금은 기록보다 기다림이 먼저였다.

아레는 마침내 말했다.

“그대다운 극이군요.”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칭찬이야?”

“아마도요.”

“다들 왜 내 주변 사람들은 칭찬을 이렇게 애매하게 해?”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께서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조정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건 더 이상해.”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었다.

작고, 조용하고, 거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푸리나는 그것을 보았다.

아레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푸리나 헤툼.”

“응.”

“그 극에 들어가면, 나는 그 아이들을 다시 보게 되겠지요.”

“응.”

“그 아이들은 나를 탓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어.”

“나를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고.”

“내가 기억이라 부르던 것이, 사실은 붙잡음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야겠군요.”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정말?”

아레는 눈을 떴다.

“기억하는 자가, 기억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위험하니까요.”

그 말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아레의 결심이었다.

푸리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웃었다.

과장되지 않게.

“좋아.”

그녀는 무대 위 찢어진 막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번 극의 제목은…….”

아레가 기다렸다.

그레이도 기록판을 들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세 망령이 찾아온 밤》.”

그리고 조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박수가 끝난 뒤에도 남는 이름을 위하여.”

아레는 그 제목을 조용히 반복했다.

“박수가 끝난 뒤에도 남는 이름.”

그녀는 빈 객석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레는 분명히 무언가를 본 듯했다.

혹은 누군가를.

아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무대 위로 한 걸음 올라섰다.

그 순간,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이번에도 크게 외치지 않았다.

이 극은 축제처럼 시작하면 안 되었다.

마당의 등불이 하나씩 낮아졌다.

아이들의 웃음이 남긴 온기 위로, 조용한 밤이 내려앉았다.

찢어진 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푸리나의 신술이 아주 얇게 마당 위에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무대는 아레에게 배역을 씌우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늘 듣고도, 한 번도 끝까지 마주하지 못한 침묵 앞에 작은 등불 하나를 놓았다.

그 등불 너머로, 첫 번째 망령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푸리나는 막 옆에 서서 낮게 말했다.

“1막.”

그레이의 펜이 조용히 움직였다.

1막 — 첫 번째 망령: 처음으로 이름을 잃은 아이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기억은 언제 의무가 되었는가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1막 — 첫 번째 망령: 처음으로 이름을 잃은 아이

— 기억은 언제 의무가 되었는가 —

첫 번째 망령은 울음소리로 오지 않았다.

그것은 발소리로 왔다.

젖은 흙을 밟는 소리.
멀리서 말발굽이 사라진 뒤, 누구도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 전장 위를 작은 발이 걷는 소리.

톡.

톡.

톡.

마당의 등불이 하나씩 낮아졌다.

야전 여관의 마당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찢어진 막도, 뒤집은 상자 객석도, 나무 고양이 인형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내려앉자, 무대의 가장자리에는 다른 밤이 겹쳤다.

비가 내린 뒤의 들판.
흙탕물.
부러진 깃대.
반쯤 젖은 군기.
그리고 아무도 주워가지 못한 작은 이름표 하나.

아레 마가트로이드는 무대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검을 들지 않았다.
실을 펼치지도 않았다.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푸리나는 막 옆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보았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지만, 아직 쓰지 않았다.

이 막은 기록하기보다 먼저 들어야 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톡.

톡.

톡.

그리고 무대 끝에 아이 하나가 섰다.

정확히는 아이처럼 보이는 병사였다.

어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레의 기억 속에서 그는 늘 아이로 남아 있었다.

젖은 군복.
흙이 묻은 손.
어깨에 맞지 않는 투구.
그리고 목에 걸린 작은 이름표.

하지만 그 이름표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왔구나.”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한 걸음 다가갔다.

“비가 오던 밤이었지.”

망령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왼쪽 능선이 무너졌고, 전령은 돌아오지 못했단다. 나는 3군단이 아직 버틴다고 믿었어. 아니, 믿고 싶었던 것이겠지.”

무대 위에 비 냄새가 번졌다.

푸리나는 등불을 조금 더 낮췄다.

그녀가 만든 무대는 아레에게 대사를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오래 삼켜온 말을,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위치에 놓았다.

아레는 망령을 보았다.

“그때 네 이름을 물었어야 했단다.”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장군님은 물으셨습니다.”

아레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망령은 말했다.

“제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비가 더 굵어졌다.

무대 위에는 과거의 장면이 펼쳐졌다.

흙탕물 속에서 쓰러진 병사.
그를 부축하려고 몸을 숙이는 아레.
뒤쪽에서 들려오는 함성.
전선이 다시 밀려오는 소리.
누군가 외치는 소리.

“장군님! 지금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때의 아레는 망설였다.

아주 짧게.

그러나 전장에서는 짧은 망설임도 명령이었다.

그녀는 병사의 어깨를 눌렀다.

“이름을 말하렴.”

병사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피와 비가 말을 삼켰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전선은 무너지고 있었다.

아레는 일어나야 했다.

아레는 그 아이를 두고 일어났다.

그 후 병사의 이름표는 흙 속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은 돌아오지 못했다.

무대가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망령은 빈 이름표를 쥐고 있었다.

아레는 그 이름표를 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름을 잃은 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정했단다.”

망령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저를 기억하셨습니까?”

“그래.”

“제 이름도 모르시면서요?”

아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비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이름을 말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네가 이름을 잃었다고 생각했단다.”

망령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저는 장군님의 의무가 되었습니까?”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손끝을 움켜쥐었다.

이 질문은 위험했다.

그러나 아레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낮게 인정했다.

“처음에는 그랬단다.”

망령은 아레를 보았다.

“처음에는요?”

아레는 눈을 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너는 한 사람이 아니라 표식이 되었구나.”

비가 멎었다.

무대 위에 부러진 깃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깃대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아레는 그 깃대를 보았다.

“이름을 묻지 못한 나의 실패.
전장을 떠나야 했던 나의 명령.
살리기 위해 버려야 했던 순간.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

그녀는 망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야. 나는 너를 기억한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너를 나의 첫 번째 죄로 세워두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에 무대가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아레의 말투를 들었다.

낮고, 조심스럽고, 오래된 슬픔이 섞인 말.

그것은 전장의 장군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아이를 놓친 어른의 목소리였다.

망령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물었다.

“장군님은 저를 어디에 두셨습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내 명령의 가장 아래에.”

“왜요?”

“다시는 너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그럼 저는 계속 전장에 있었습니까?”

아레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랬겠구나.”

망령은 빈 이름표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쉬고 싶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하지만 푸리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아레 안쪽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것을.

아레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이니?”

망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는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이 저를 잊지 않은 것은 고마웠습니다.”

아레의 시선이 흔들렸다.

망령은 계속 말했다.

“비 오는 밤에 혼자 남겨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장군님이 제 빈 이름표를 들고 계셨으니까요.”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군님.”

망령의 목소리는 작았다.

“저는 매일 전선의 가장 앞에 서 있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숨을 낮췄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망령은 말했다.

“저는 장군님의 맹세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레는 망령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너를 어떻게 기억해야 했니, 아이야?”

“이름으로.”

“네 이름을 모르는데도?”

“모르면, 모른다고 적어도 됩니다.”

아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망령은 빈 이름표를 들어 올렸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것도 제 자리는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군님은 저를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불렀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랬구나.”

“네.”

“나는 네 이름을 찾지 못해서, 그 빈자리에 내 죄를 적어두었구나.”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아레는 무릎을 굽혔다.

망령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만지지 않았다.

붙잡지 않았다.

다만 물었다.

“이름표를 봐도 되겠니?”

망령은 잠시 아레를 보았다.

그리고 빈 이름표를 내밀었다.

아레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름은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레는 그 빈 표면을 오래 보았다.

“아이야. 나는 네 이름을 모른단다.”

그녀는 말했다.

“그날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누구를 두고 왔는지도, 어떤 노래를 알았는지도 알지 못하는구나.”

망령은 조용히 들었다.

“나는 네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단다. 네가 나를 원망했는지, 살려달라고 했는지, 아니면 이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도 알지 못해.”

아레는 이름표를 자기 가슴 가까이 들었다.

“그러니 더는 너를 내 맹세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마.”

무대 위에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비 냄새가 조금 옅어졌다.

아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름을 잃은 병사였고.”

잠시 침묵.

“내가 구하지 못한 아이였단다.”

다시 침묵.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명령 아래 서 있지 않아도 된단다.”

망령의 얼굴이 처음으로 조금 부드러워졌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박수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니었다.

아레는 이름표를 망령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무대 한가운데 놓인 작은 상자 위에 그것을 올렸다.

그 상자는 원래 아이들이 소품을 담아두던 상자였다.

종이 왕관과 나무 빵과 장난감 창을 보관하던 상자.

아레는 그 위에 빈 이름표를 놓았다.

“여기에 두어도 되겠니?”

망령은 물었다.

“전장이 아닌 곳입니까?”

아레는 주변을 보았다.

야전 여관의 마당.

아이들이 웃던 자리.

공연이 끝난 뒤의 조용한 무대.

박수가 있었고, 침묵도 남은 곳.

“그래.”

아레가 말했다.

“전장이 아니란다.”

망령은 다시 물었다.

“명령이 내려오는 곳도 아니고요?”

“아니란다.”

“그럼 좋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무대 위의 비가 멎었다.

부러진 깃대가 천천히 사라졌다.

흙탕물도 잦아들었다.

망령의 젖은 군복은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그는 빈 이름표가 놓인 상자를 보았다.

“장군님.”

“그래, 아이야.”

“저를 모두 기억하지 못해도 됩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망령은 말했다.

“다만, 모른다는 것을 거짓 이름으로 덮지 말아주세요.”

아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리하마.”

망령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조금 쉬겠습니다.”

그 말에, 아레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울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울음이 될 수도 있었던 것.

“그래.”

아레가 말했다.

“이제 쉬어도 된단다.”

망령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무대 뒤편, 찢어진 막 너머에 놓인 작은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 의자는 푸리나가 공연 때 쓰던 소품이었다.

망령은 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병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쉬는 사람처럼 보였다.


---

첫 번째 망령이 의자에 앉은 뒤, 마당의 등불이 조금 밝아졌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마침내 기록판에 첫 줄을 적었다.

첫 번째 망령: 이름을 잃은 병사. 전장 표식에서 휴식의 자리로 이동.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레이.”

“네.”

“오늘 기록은 정말 조심해서 써줘.”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아레는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그녀는 빈 이름표가 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아레.”

“네.”

“괜찮아?”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예전 같으면 “괜찮습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요.”

그녀는 낮게 말했다.

“괜찮지는 않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어요.”

“그건 다행이네.”

“네.”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정도면, 다음 망령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망설였다.

“정말 계속할래?”

“네.”

“쉬어도 돼.”

아레는 무대 뒤편의 의자를 보았다.

그곳에 첫 번째 망령이 앉아 있었다.

“쉬는 것은 저 아이에게 먼저 주어야 할 것 같군요.”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앉아야 해.”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이 극이 끝나면요.”

푸리나는 그 말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반드시.

무대의 바람이 바뀌었다.

비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따뜻한 빵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현재의 망령이 올 차례였다.

그레이는 다음 장을 넘겼다.

푸리나는 막 옆에 서서 조명을 조금 올렸다.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 다시 섰다.

이번에는 비 오는 들판이 아니라, 피난민들의 식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웃음.
나눠 먹는 빵.
부상병의 낮은 농담.
아이들이 다시 고양이 왕을 흉내 내는 소리.

아레는 그 밝음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빛은 눈부셨다.

조금 아플 만큼.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2막.”

그레이가 적었다.

2막 — 두 번째 망령: 지금 웃고 있는 산 자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웃음은 누구를 배신하는가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2막 — 두 번째 망령: 지금 웃고 있는 산 자들

— 웃음은 누구를 배신하는가 —

두 번째 망령은 웃음소리로 왔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바람이 천 조각을 흔드는 소리인 줄 알았다.

히.

히히.

그러다 조금씩 커졌다.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웃는 소리.
빵을 나누다 서로 손이 부딪쳐 민망하게 웃는 소리.
부상병이 아픈 팔을 붙든 채, 그래도 살아 돌아온 동료의 농담에 피식 웃는 소리.

아레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웃음은 밝았다.

그런데 그 밝음이, 그녀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 위에 비치는 등불처럼 느껴졌다.

따뜻했다.

아팠다.

그리고 피할 수 없었다.

무대는 더 이상 비 오는 들판이 아니었다.

야전 여관의 마당은 어느새 긴 식탁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무판자를 대충 이어 만든 식탁.
군용 담요를 접어 만든 의자.
흠집 난 접시.
나눠 먹기 위해 얇게 썬 빵.
김이 조금 빠진 수프.
한쪽이 부러진 숟가락.

그리고 사람들.

피난민들.
아이들.
돌아온 병사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를 기다리는 가족들.
웃고 있지만 울음을 다 끝낸 것은 아닌 사람들.

푸리나는 막 옆에 서 있었다.

이번 장면은 그녀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그녀가 매일 만들고 싶어 하는 장면이었으니까.

밥을 먹는 사람.
웃는 아이.
농담을 던지는 병사.
오늘 밤만큼은 울음 말고 다른 소리로 숨 쉬는 사람들.

그 가운데 두 번째 망령이 앉아 있었다.

망령은 전장의 죽은 병사가 아니었다.

망령은 살아 있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이 왕관을 삐뚤게 쓰고, 나무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은 작은 아이.

아까 공연에서 고양이 왕을 외치던 아이와 비슷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뒤에는 수많은 아이들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
부모를 잃은 아이.
웃어도 되는지 몰라 눈치를 보는 아이.
웃다가도 문득 조용해지는 아이.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도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

아이의 목소리는 밝았다.

너무 밝아서, 아레는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어린 망자에게 하던 말투와는 달랐다.

이 아이는 죽은 자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은 자만은 아니었다.

현재의 망령.

산 자들의 웃음이 빌린 얼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네가 두 번째 망령이니?”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밤은 제가 왕이에요.”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고양이 왕이구나.”

아이는 푸리나 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고양이 왕은 몽골도 무찔렀어요.”

푸리나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랬지. 역사적인 대승이었어.”

그레이가 아주 낮게 말했다.

“실제 전황 기록과 혼동되지 않게 별도 분류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흘겨보았다.

“지금은 감동 장면이야.”

“그래서 더 정확해야 합니다.”

아이는 웃었다.

아레는 그 웃음소리를 들었다.

웃음.

작고, 가볍고, 생생한 소리.

그런데 아레의 등 뒤에서 다른 소리가 따라왔다.

비 오는 들판의 마지막 숨.
이름을 잃은 병사의 침묵.
묻히지 못한 이름표가 상자 위에 놓이는 소리.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빵을 들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빵 좋아했어요.”

옆 아이가 물었다.

“그럼 너는 왜 웃어?”

첫 아이는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웃으라고 했거든.”

그 말에 식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웃음은 다시 퍼졌다.

아레는 그 장면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현재의 망령, 고양이 왕이 물었다.

“장군님은 왜 웃지 않아요?”

아레는 대답했다.

“나는 웃음을 들을 때, 그 아래의 이름들도 함께 듣는단다.”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들이 웃는 걸 싫어해요?”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단순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었다.

“모르겠구나.”

아레가 말했다.

“나는 오래도록, 웃음이 너무 크면 이름들이 묻힌다고 생각했단다.”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꼭 안았다.

“묻혀요?”

“그래.”

“그럼 웃으면 안 돼요?”

식탁의 사람들 몇몇이 아레를 보았다.

푸리나도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그 시선들을 느꼈다.

이것은 재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답해야 하는 자리였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웃어도 된단다.”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정말요?”

“그래. 웃어도 된단다.”

그녀는 식탁의 사람들을 보았다.

“다만 나는, 그 웃음이 누군가를 잊기 위한 소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어.”

고양이 왕은 빵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잊기 위한 웃음도 있어요?”

“있단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무 아파서, 이름을 부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일부러 더 크게 웃는 이들도 있지.”

아이는 빵을 조금 뜯었다.

“그럼 그런 웃음은 나쁜 웃음이에요?”

아레는 입을 다물었다.

무대 위의 식탁에서 한 병사가 낮게 웃었다.

그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장군님.”

아레가 그를 보았다.

그 병사는 어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끼어들었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도 됩니다.”

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는 오늘 많이 웃었습니다. 사실 웃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같이 나간 둘이 돌아오지 못했으니까요.”

식탁이 조용해졌다.

병사는 자기 손을 보았다.

“그런데 안 웃으면…… 밥을 못 넘기겠더군요.”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사는 계속했다.

“웃어서 잊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웃다가 생각났습니다. 그 녀석이 있었으면 이런 농담을 더 심하게 했을 텐데, 하고요.”

아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잊으려고가 아니라, 그 녀석이 앉았을 자리가 너무 조용해서요.”

식탁 끝에서 누군가 훌쩍였다.

하지만 울음은 곧바로 웃음과 섞였다.

아레는 그 섞인 소리를 들었다.

웃음과 울음.

기억과 식사.

산 자의 죄책감과 살아 있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이 한 식탁 위에 있었다.

고양이 왕은 아레에게 물었다.

“장군님은 웃음이 이름을 덮는다고 생각했어요?”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단다.”

“그런데 지금은요?”

아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라면 말할 수 있었다.

웃음은 이름을 덮지 않아.
웃음은 살아남은 사람이 숨 쉬는 방식이야.

하지만 그 말은 푸리나가 하면 안 됐다.

아레가 보아야 했다.

아레가 자기 말로 찾아야 했다.

현재의 망령은 식탁 위로 올라갔다.

푸리나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식탁 위에 신발은—”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망령입니다.”

“망령이면 식탁 예절 면제야?”

“규정이 없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늘만 면제.”

고양이 왕은 나무 인형을 높이 들었다.

“왕이 명령합니다!”

아이들이 웃었다.

“오늘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 빵 한 조각을 더 먹습니다!”

식탁이 멈췄다.

웃음이 끊겼다.

아레의 시선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푸리나도 고양이 왕을 보았다.

그 말은 너무 가벼운 것처럼 들렸다.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 빵 한 조각.

장난처럼.

하지만 고양이 왕은 진지했다.

그 아이의 뒤에 겹친 수많은 산 자들의 그림자가, 모두 같이 아레를 보고 있었다.

아이는 말했다.

“부르지 않으면, 그 자리는 비어 있기만 해요.”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까의 부상병이었다.

“마르코.”

그는 빵을 하나 집었다.

“마르코는 빵 가장자리만 먹었습니다. 속은 늘 남한테 줬습니다. 본인은 그게 더 맛있다고 우겼고요.”

옆 사람이 작게 웃었다.

“거짓말이었지.”

“거짓말이었습니다.”

부상병은 빵을 먹었다.

먹으면서 울었다.

다음은 늙은 여인이었다.

“아나히트.”

그녀는 빵을 찢었다.

“내 딸은 수프에 후추를 너무 많이 넣었지. 손님이 오면 늘 맵지 않다고 했는데, 모두 땀을 흘렸어.”

식탁에서 작게 웃음이 났다.

여인은 울면서 웃었다.

다음은 아이였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토로스예요.”

그는 빵 조각을 들었다.

“아버지는 노래를 못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제일 잘하는 줄 알았어요.”

아이들이 웃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얼마나 못했는데?”

그 아이는 잠깐 울먹이다가, 아주 이상한 가락으로 노래를 흉내 냈다.

식탁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 토로스라는 이름이 놓였다.

아레는 그 광경을 보았다.

이름이 웃음에 덮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이름의 주변에 자리를 만들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들은 전장으로 불려 나오지 않았다.

명령받지 않았다.

복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빵 냄새와 나쁜 노래와 매운 수프와 함께 식탁 위에 앉았다.

아레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렸다.

고양이 왕이 그녀에게 빵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장군님도 하나 불러요.”

아레는 빵을 보았다.

그리고 무대 뒤편,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 아이는 조용히 쉬고 있었다.

아레는 빵을 받지 않았다.

아직은.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모른단다.”

고양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른다고 불러요.”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이름을 잃은 아이야.”

무대 뒤편의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네가 좋아하던 빵을 모른단다. 네가 노래를 잘했는지도, 못했는지도 알지 못해. 네가 누구를 사랑했는지도, 누가 너를 기다렸는지도 알지 못하는구나.”

그녀는 식탁 위 빵을 보았다.

“그러니 오늘은, 너를 내 죄로 부르지 않으마.”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아레는 조심스럽게 빵 한 조각을 집었다.

“나는 너를, 이름을 잃은 병사로 기억하마.”

그녀는 빵을 작게 찢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두겠단다.”

그 말이 끝나자, 식탁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무겁지 않았다.

고양이 왕이 말했다.

“그럼 빵 먹어도 돼요.”

아레는 빵을 보았다.

평범한 빵이었다.

조금 딱딱하고, 조금 식은 빵.

아레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아레가 빵을 먹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큰 일이었다.

기억하는 자가, 죽은 자의 이름 옆에서 산 자의 빵을 먹는 일.

망자를 배신하지 않고.

산 자를 거절하지 않고.

식탁의 사람들이 다시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이번 웃음은 아까보다 낮았다.

하지만 더 깊었다.

아레는 그 웃음을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것이 이름을 덮는 소리만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현재의 망령은 식탁 끝에 앉았다.

고양이 왕관이 조금 내려앉아 한쪽 눈을 가렸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다가 다가가 왕관을 바로잡아 주었다.

“왕관은 시야를 가리면 안 돼.”

고양이 왕이 말했다.

“왕은 앞을 봐야 하니까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응. 그리고 가끔 옆도 봐야 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도요?”

“그건 아레가 잘 봐.”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아레는 잠시 후 아주 작게 대답했다.

“앞도 배워야겠군요.”

그 말에 푸리나는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부상병이 마르코의 흉내를 내며 빵 가장자리를 뜯었다.

늙은 여인은 아나히트의 매운 수프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후추를 더 넣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토로스의 이상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노래는 정말 못했다.

정말로.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레이도 입가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레는 그 소리를 들었다.

웃음.

이름.

울음.

빵.

그리고 여전히 남은 빈자리.

고양이 왕이 물었다.

“장군님.”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웃음은 배신이에요?”

아레는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닐 수도 있단다.”

아이는 눈을 빛냈다.

“그럼 뭐예요?”

아레는 식탁 위에 놓인 빵 부스러기를 보았다.

“때로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살아남은 자가 아직 숨 쉬고 있다는 보고일지도 모르겠구나.”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보고.

아레다운 말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축제로만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죄로만 보지도 않았다.

산 자의 보고.

죽은 자들이 지키려 했던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작은 보고.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고해야 해요.”

아레가 물었다.

“누구에게?”

아이는 나무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이름을 잃은 아이에게요.”

아레는 무대 뒤의 의자를 보았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비 오는 들판에서보다 조금 편안해 보였다.

아레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이야.”

마당이 조용해졌다.

“이곳에는 오늘 웃음이 있었단다.”

첫 번째 망령이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계속했다.

“너를 잊기 위한 웃음은 아니었어. 마르코의 빵 가장자리와, 아나히트의 매운 수프와, 토로스의 못 부르는 노래가 함께 있었단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구나. 웃음이 모든 이름을 지킬 수 있는지는.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름들은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단다.”

첫 번째 망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것은 허락처럼 보였다.

아레는 숨을 내쉬었다.

현재의 망령은 식탁에서 내려왔다.

“장군님.”

“그래.”

“이제 저를 기억할 건가요?”

아레는 고양이 왕을 보았다.

“너는 산 자들의 웃음이구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배고픈 아이들이에요.”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중요하지.”

아이는 또 말했다.

“그리고 웃다가 우는 사람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울다가 먹는 사람들.”

“그렇구나.”

“그리고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빵을 먹는 사람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 너는 그 모든 것이구나.”

현재의 망령은 웃었다.

“그럼 저를 어디에 둘 거예요?”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전장도 아니고, 장례식도 아니고, 왕좌도 아니고, 빈 무덤도 아닌 곳.

식탁.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름이 함께 놓일 수 있는 곳.

“식탁에 두어야겠구나.”

아레가 말했다.

“너는 전장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지우는 웃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산 자의 식탁 곁에 놓는 웃음이었단다.”

고양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계속 웃어도 돼요?”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잠시 멈추고.

“다만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두기 위해서 웃으렴.”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나무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건 어려워요.”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풀렸다.

“나도 어렵단다.”

“그럼 같이 어려워해요.”

그 말에, 식탁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아레도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정도면, 두 번째 망령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

마당의 등불이 다시 흔들렸다.

식탁은 천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빵 냄새가 아주 조금 남았다.

아이들의 웃음도, 부상병의 낮은 농담도, 못 부르는 노래도 멀어졌지만, 어딘가에 남았다.

고양이 왕은 마지막으로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

“그래.”

“나중에 또 웃음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요.”

“응.”

“식탁을 먼저 봐요.”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마.”

“빈자리가 있으면요?”

“이름을 물어보마.”

“이름을 모르면요?”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모른다고 두고, 거짓 이름으로 덮지 않으마.”

고양이 왕은 활짝 웃었다.

“좋아요.”

그리고 그는 식탁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들과 피난민과 부상병의 그림자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현재 속으로 돌아갔다.

아레는 빈 식탁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

웃음이 있던 자리.

죽은 자의 이름이 빵과 함께 놓였던 자리.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레.”

아레는 대답했다.

“네.”

푸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번 건 어땠어?”

아레는 한참 뒤에 말했다.

“눈부셨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조금 아팠어요.”

“응.”

“하지만…….”

아레는 식탁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밝은 것이 모두 지우는 것은 아니었군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박수도, 아마 그렇겠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칭찬이었다.

아레식의 조심스럽고, 무겁고, 아주 깊은 칭찬.

푸리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그 말, 내가 좀 오래 기억할 것 같은데.”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가 기억한다면, 조금 과장되어 남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를 너무 잘 아네.”

“조금은요.”

그레이는 기록판에 적었다.

두 번째 망령: 산 자들의 웃음. 웃음은 이름을 덮는 소리만이 아니라, 이름을 식탁 곁에 놓는 방식일 수 있음.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이번 기록도 좋아.”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주의해서 적고 있습니다.”

“응. 느껴져.”

아레는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보다 조금 덜 외로워 보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첫 번째 망령이 쉬는 의자가 있었고, 앞에는 방금 사라진 식탁의 온기가 있었다.

죽은 자의 자리.

산 자의 자리.

그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때, 마당의 등불이 갑자기 낮아졌다.

빵 냄새가 사라졌다.

웃음도 사라졌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푸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천천히 닫았다.

아레도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망령이 올 차례였다.

이번에는 발소리도 없었다.

웃음소리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오지 않았다.

무대 너머에서, 너무 완전한 침묵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레는 그 침묵을 알아보았다.

자신의 것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3막.”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조금 망설인 뒤, 적었다.

3막 — 세 번째 망령: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3막 — 세 번째 망령: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

세 번째 망령은 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첫 번째 망령은 발소리로 왔다.
두 번째 망령은 웃음소리로 왔다.

그러니 세 번째 망령도 무언가의 형태를 하고 올 것이라고, 푸리나는 생각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노인.
등불을 든 사자.
혹은 원전처럼, 손가락 하나만 뻗어 미래를 가리키는 침묵의 그림자.

하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대신 무대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먼저 빵 냄새가 사라졌다.
그다음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다음 식탁의 온기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멎었다.

마당은 그대로였는데, 이상하게 너무 넓어졌다.

찢어진 막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 고양이 인형은 소리 없이 누워 있었다.
빈 상자 위의 이름표도 빛을 잃었다.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도, 두 번째 망령이 앉았던 식탁도, 모두 회색빛으로 멀어졌다.

푸리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

푸리나는 멈췄다.

“응.”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 서 있었다.

홀로.

그녀를 중심으로 마당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물었다.

“아레?”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들었지만 대답할 수 없는 듯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기록이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왜?”

그레이는 무대 안쪽을 보았다.

“사건이 없습니다.”

“사건이 없어?”

“네.”

그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래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무대가 변했다.


---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돌로 된 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으로 쌓은 성이었다.

벽돌 하나하나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돌아오지 못한 전령.
북쪽 능선에서 묻히지 못한 자.
강가에서 마지막 불침번을 섰던 아이.
성문 앞에서 불탄 마차를 밀던 사람.
아무도 가족을 찾지 못한 피난민.

수많은 이름.

그 이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잊히지 않았다.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문제는,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름들이 벽이 되었다.

이름들이 창문을 막았다.

이름들이 길을 막았다.

이름들이 식탁을 치웠다.

이름들이 의자를 채웠다.

그리고 그 성의 가장 안쪽에, 아레가 앉아 있었다.

아니.

아레의 미래가 앉아 있었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미래의 아레는 왕좌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나빴다.

그녀는 기록대 앞에 앉아 있었다.

끝없는 장부.
끝없는 이름표.
끝없는 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수많은 실이 감겨 있었고, 실의 끝마다 작은 이름표가 매달려 있었다.

모든 이름이 기억되고 있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한 명도 빠뜨리지 않게.
한 사람의 죽음도 웃음 속에 묻히지 않게.

그것은 아레가 원하던 일이었다.

아레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리나도 없었다.
그레이도 없었다.
아이들도 없었다.
식탁도 없었다.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도 없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그 미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이름을 적고 있었다.

한 줄.

또 한 줄.

또 한 줄.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이것이…… 나인가요?”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손은 계속 움직였다.

아레는 조금 더 다가갔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푸리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그건 너야.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서 푸리나의 말은 너무 쉬웠다.

아레가 직접 들어야 했다.

아레가 다시 물었다.

“대답하세요.”

미래의 아레는 그제야 손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아레와 같았다.

그러나 눈이 달랐다.

그 눈에는 분노도, 슬픔도, 따뜻함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오래 침묵을 들은 사람의 눈.

모든 이름을 기억하느라, 이름이 불리던 목소리를 잊어버린 눈.

미래의 아레는 말했다.

“나는 기억하는 자입니다.”

목소리는 아레의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말라 있었다.

아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기억하는 자입니다.”

“아니.”

미래의 아레는 말했다.

“너는 아직 흔들리는 자입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가리켰다.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이름을 적었습니다.
모든 죽음을 세었습니다.
모든 빈자리를 남겨두었습니다.
누구도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박수에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말이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아레는 성벽을 보았다.

수많은 이름.

정말로 누구도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들 사이에 숨 쉴 공간이 없었다.

아레는 물었다.

“산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시끄러웠습니다.”

푸리나의 손이 굳었다.

아레의 눈빛도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시끄러웠다고요.”

“그들은 웃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덮었다.

“처음에는 허락했습니다. 웃음도 기억의 곁에 놓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웃음은 커졌고, 이름은 작아졌습니다. 그러니 나는 식탁을 치웠습니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그래서 의자도 치웠군요.”

“빈자리를 정확히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쉬는 자리는요?”

“쉬는 자리는 흐려집니다. 이름은 정확해야 합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바로 대답했다.

“이름을 잃은 병사. 좌측 벽 17열 4번째.”

“그 아이는 쉬고 있습니까?”

“기록되어 있습니다.”

“쉬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천천히 성벽 쪽으로 걸어갔다.

좌측 벽 17열 4번째.

거기에는 작은 빈 이름표가 박혀 있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정확했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름표는 이제 의자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
전장이 아닌 곳에 쉬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벽이 되어 있었다.

아레는 손을 뻗었다.

이름표를 만지려 했다.

그러나 실이 손목에 감겼다.

미래의 아레가 말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아레는 돌아보았다.

미래의 아레는 일어나 있었다.

“이름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움직이면 흐려집니다. 흐려지면 잊힙니다.”

아레는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이름을 지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두고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대답했다.

“차이가 있습니까?”

그 말에,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이 손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아주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그 차이를 지키려다 잃습니다.”

“무엇을요?”

“이름을.”

미래의 아레는 벽을 가리켰다.

“나는 잃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붙잡았습니다.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산 자들의 편의를 위해 쉬러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산 자들의 편의.

쉬러 보내지지 않았다.

그 말은 끔찍했다.

아레가 망자를 쉬게 하는 일조차, 어느 순간 산 자의 편의라고 의심하기 시작한 미래.

모든 안식을 방임으로 여기고.
모든 웃음을 배신으로 여기고.
모든 식탁을 망각의 시작으로 여긴 끝.

이름의 성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

그때 성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톡.

톡.

톡.

첫 번째 망령의 발소리였다.

아레가 고개를 돌렸다.

성문 밖에, 이름을 잃은 병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들어오지 못했다.

성문에는 수많은 이름표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문이 문이 아니라 벽이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망령은 문 앞에서 서성였다.

아레가 앞으로 나가려 했다.

미래의 아레가 말했다.

“가지 마십시오.”

아레는 돌아보지 않았다.

“왜입니까?”

“그 아이는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어오면 순서가 흐트러집니다.”

아레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순서.”

“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펼쳤다.

“전사일. 전장 위치. 확인 가능 여부. 이름 확인 여부. 장례 여부. 기억 방식. 모두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쉬는지는요?”

“기록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묻는 것입니다.”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 밖에서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

히히.

고양이 왕의 웃음이었다.

두 번째 망령도 성문 밖에 있었다.

그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은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성벽의 이름들이 웃음을 흡수했다.

고양이 왕이 문을 두드렸다.

“장군님!”

미래의 아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럽습니다.”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저 아이는 현재의 망령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위험?”

“현재는 늘 이름을 흐립니다. 산 자들은 너무 쉽게 먹고, 웃고, 잠들고, 잊습니다.”

성 밖에서 고양이 왕이 말했다.

“장군님, 식탁이 없어요!”

아레의 손이 떨렸다.

식탁이 없다.

성 안에는 정말 식탁이 없었다.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빵이 없었다.

의자도 없었다.

쉴 자리도 없었다.

미래의 아레는 차갑게 말했다.

“식탁은 이름을 더럽힙니다.”

아레는 천천히 돌아섰다.

“아니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분명한 반박이었다.

“식탁은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말했다.

“마르코는 빵 가장자리와 함께 돌아왔고, 아나히트는 매운 수프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토로스는 못 부르는 노래와 함께 돌아왔지요.”

“하찮은 기억입니다.”

“하찮지 않습니다.”

아레의 목소리가 조금 깊어졌다.

“그것이 그들이 사람이었다는 흔적입니다.”

미래의 아레는 침묵했다.

아레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전사일과 위치만으로는 사람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기억합니까?”

“때로는 이름으로.”

아레는 벽을 보았다.

“때로는 모른다고 적는 것으로.”

그리고 성문 밖의 웃음을 들었다.

“때로는 식탁으로.”

미래의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하면 빠집니다.”

“무엇이?”

“빠지는 이름이 생깁니다. 놓치는 얼굴이 생깁니다. 흐려지는 죽음이 생깁니다.”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모두 붙잡았군요.”

“그렇습니다.”

“그 결과, 아무도 쉬지 못하고.”

미래의 아레가 멈췄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첫 번째 망령이 조용히 서 있었다.

고양이 왕이 문을 두드렸다.

푸리나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녀도 들어오지 못했다.

성벽 바깥에 있었다.

그레이도, 식탁의 사람들도, 부상병도, 아이들도 모두 바깥에 있었다.

아레는 그제야 보았다.

미래의 자신이 만든 성은 망자만 가둔 것이 아니었다.

산 자도 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레 자신도 성 안에 갇혔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에게 물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부에 적은 것이 아니라.”

아레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목소리로.”

미래의 아레의 손끝이 떨렸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너는 기억하는 자가 되었지만, 부르는 자는 아니게 되었구나.”

그 말에 성 전체가 흔들렸다.

벽의 이름표들이 아주 작게 떨렸다.

미래의 아레는 처음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놓으라는 겁니까?
잊으라는 겁니까?
웃고, 먹고, 자고, 다음 전장으로 가라는 겁니까?
그러는 동안 저 이름들은 누가 지킵니까?”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그 절규를 이해했다.

너무 잘 이해했다.

이것은 낯선 괴물이 아니었다.

아레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아레 자신이 조금만 더 두려워하고, 조금만 더 붙잡고, 조금만 더 혼자 짊어지면 닿을 수 있는 방.

아레는 낮게 말했다.

“혼자 지키지 말아야 했겠지요.”

미래의 아레는 멈췄다.

아레는 이번에는 해요체로 말했다.

망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혼자 지키려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게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을 나누어 들면 가벼워질까 두려웠고, 가벼워지면 잊을까 두려웠어요.”

미래의 아레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름은 가벼워지기 위해 나누는 것이 아니었군요.”

성문 밖에서 푸리나가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말했다.

“쉴 자리를 만들기 위해 나누는 것이었어요.”

미래의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레는 성벽에 박힌 이름표 하나를 보았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미래의 아레가 외쳤다.

“안 됩니다!”

성 전체가 흔들렸다.

실들이 아레의 손목을 감았다.

이름표들이 떨렸다.

“떼어내면 잊힙니다!”

아레는 실을 보았다.

자신이 만든 실.

자신을 묶은 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니요.”

그녀는 이름표를 가슴에 안지 않았다.

장부에 다시 꽂지도 않았다.

대신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 아이는 벽이 아니라 의자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성이 무너집니다!”

“그래야겠지요.”

미래의 아레는 멈췄다.

아레는 성문 앞에 섰다.

문은 이름표로 막혀 있었다.

그녀는 하나씩 떼어냈다.

처음은 이름을 잃은 병사.

그다음은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돌아오지 못한 전령.

강가의 불침번.

북쪽 능선의 아이.

하나씩.

하나씩.

성벽에서 이름을 떼어낼 때마다,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표들은 손에 잡히는 크기로 돌아왔다.

벽돌이 아니라, 놓을 수 있는 작은 표식으로.

미래의 아레는 그 모습을 보며 떨었다.

“그만.”

아레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하십시오.”

아레는 이름표를 품에 쌓지 않았다.

그녀는 성문 앞 바닥에 그것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마치 식탁 위에 접시를 놓듯이.

마치 여관의 방 열쇠를 놓듯이.

마치 전장이 아닌 곳에 이름을 내려놓듯이.

성문이 조금씩 열렸다.

밖에서 첫 번째 망령이 보였다.

고양이 왕도 보였다.

푸리나도, 그레이도, 식탁의 사람들이 보였다.

빛이 들어왔다.

미래의 아레는 그 빛을 보며 눈을 가렸다.

“밝습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아픕니다.”

“나도 그랬어요.”

미래의 아레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들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아레는 이름표들을 보았다.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벽이 아니게 되었다.

“사라지지 않아요.”

그녀는 미래의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만, 더는 성벽이 아니게 됩니다.”

미래의 아레는 그 손을 보았다.

잡지 않았다.

아직은.

대신 물었다.

“그럼 나는 무엇이 됩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혼자 성이 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 말이 떨어지자, 미래의 아레의 얼굴이 무너졌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마 너무 오래 울지 않아서, 우는 법을 잊은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침묵이 갈라졌다.

아레는 다시 말했다.

“당신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혼자였어요.”

그 말에 미래의 아레는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아레가 그 손을 잡는 순간, 이름의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 풀렸다.

벽이 식탁이 되고, 식탁은 긴 여관의 방으로 이어지고, 방마다 작은 이름표가 걸렸다.

전장도 아니고, 감옥도 아니고, 침묵의 성도 아닌 곳.

완전한 안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다림과 휴식이 가능한 자리.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을 잊었다.

“아레…….”

아레는 성문 안쪽에서, 미래의 자신과 마주 서 있었다.

미래의 아레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레 안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모두 기억해야 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혼자서는 안 됩니다.”

아레는 눈을 내렸다.

“그래요.”

미래의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은…… 일찍 들었어야 했는데.”

아레는 대답했다.

“이제라도 들었으니, 늦지 않았어요.”

미래의 아레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성이 아니라, 열린 문과 긴 식탁과 여러 개의 의자였다.

그리고 성벽이었던 이름표들은, 이제 식탁 옆 작은 선반에 놓여 있었다.


---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이름표 몇 개가 들려 있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그 밖의 수많은 이름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아레가 먼저 말했다.

“그레이.”

“네.”

“이름을 기록하는 장부가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장부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레이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아레는 식탁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이름 옆에,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좋아하던 것들을 적어주세요. 빵 가장자리, 매운 수프, 못 부르는 노래 같은 것들.”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어주세요.”

“네.”

“그리고 이름이 없는 자도,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내 죄의 표식만 되지 않도록.”

그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

아레는 푸리나를 돌아보았다.

“네.”

“괜찮아?”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괜찮지는 않아요.”

“응.”

“하지만 조금…… 들어올 수 있게 된 것 같군요.”

푸리나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그 성에 문이 생겼다.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럼 다행이야.”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를 보았다.

그 아이는 아직 있었다.

고양이 왕도 식탁가에 있었다.

둘 다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아레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이야.”

첫 번째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왕도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나는 모두를 혼자 성벽으로 쌓지 않으련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분명했다.

“네 이름은 전장에도, 침묵의 벽에도 두지 않으마.”

그녀는 식탁 옆 선반을 보았다.

“쉴 수 있는 자리에 두마.”

고양이 왕이 물었다.

“식탁에도요?”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풀렸다.

“그래. 식탁에도.”

“빵도요?”

“빵도.”

“못 부르는 노래도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것도.”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웃었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눈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 위에 작은 박수가 울렸다.

짝.

그것은 푸리나가 친 박수가 아니었다.

첫 번째 망령의 박수였다.

아주 작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박수.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푸리나는 그제야 따라 박수를 쳤다.

짝.

그레이도 조용히 박수를 쳤다.

짝.

식탁의 사람들도.

짝.

고양이 왕도 나무 인형 손으로 어설프게 박수를 쳤다.

탁, 탁.

아레는 그 박수를 들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 박수가 이름을 덮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 생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

마당의 등불이 다시 돌아왔다.

침묵의 성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야전 여관의 마당이었다.

찢어진 막.
나무 고양이 인형.
소품 상자 위의 빈 이름표.
새로 놓인 긴 식탁.
그리고 그 식탁 옆에 작은 선반 하나.

푸리나는 선반을 보았다.

“이건 새 소품?”

아레는 대답했다.

“아마도요.”

“이름 선반?”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기억 선반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좋네.”

그레이는 기록했다.

기억 선반: 이름을 벽으로 쌓지 않고, 식탁 곁에 놓기 위한 자리.

아레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록입니다.”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감사합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이제 앉을래?”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고양이 왕이 앉은 식탁을 보았다.

기억 선반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빈 의자 하나를 보았다.

그 의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아레는 그 앞에 섰다.

잠시 망설였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레는 천천히 앉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앉는 법을 잊었던 사람처럼.

의자는 삐걱였다.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아레는 숨을 내쉬었다.

“……앉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군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그런 사람들 많더라.”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도요?”

푸리나는 잠시 딴청을 피했다.

“나는 극장주라서 서 있는 시간이 많을 뿐이야.”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도 종종 앉으셔야 합니다.”

“그레이, 지금은 내 극 아니잖아.”

아레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번에는 푸리나도 보았다.

분명한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침묵의 성 안에서는 결코 나오지 못했을 표정이었다.

아레는 기억 선반을 보았다.

“모두 기억할 수는 없겠지요.”

푸리나는 말했다.

“응.”

“모두 제대로 애도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

아레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혼자 벽을 쌓지는 않겠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해.”

아레는 낮게 말했다.

“충분하다는 말은 늘 어렵습니다.”

“알아.”

“하지만 오늘은, 조금 받아들여보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막을 보았다.

이제 세 망령은 모두 지나갔다.

과거의 이름 없는 아이.

현재의 웃는 식탁.

미래의 침묵의 성.

아레는 모두를 보고 돌아왔다.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런 것은 한 밤의 극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이 생겼다.

침묵에 문이 생겼고, 이름에는 식탁이 생겼고, 아레에게는 의자가 생겼다.

그 정도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조명이 낮아졌다.

마당은 다시 평범한 야전 여관의 마당이 되었다.

하지만 소품 상자 위에는 빈 이름표가 남아 있었다.

식탁 옆에는 기억 선반이 남아 있었다.

아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막이 내려왔다.

4막 — 기억 선반과 빈 의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이름은 벽이 아니라, 쉴 자리 곁에 놓일 수 있다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4막 — 이름의 이정표와 빈 의자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아레가 의자에 앉자, 모두가 잠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푸리나는 막을 내렸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다.

첫 번째 망령은 소품 상자 옆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양이 왕은 식탁 끝에서 나무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아레가 앉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극 전체를 멈추게 했다.

죠니였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앉았네.”



그리고 정말로 죠니는 그렇게 말했다.

“앉았네.”

푸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죠니, 그렇게 건조하게 말할 장면이 아니지 않아?”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앉았잖아.”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사실입니다.”

푸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너희 둘은 가끔 너무 현실적인 박수부대야.”

아레는 의자에 앉은 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지쳐 보였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고, 손끝에는 더 이상 실이 과하게 감겨 있지 않았다. 물론 보이지 않는 실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실들이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었다.

다만 이제 그 실들은 성벽을 쌓기 위해 당겨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레.”

“네.”

“지금부터는 결말을 정리하는 막이야.”

아레는 식탁 옆에 생긴 작은 선반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푸리나가 그걸 ‘기억 선반’처럼 보았다.

하지만 아레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다시 밀어냈다.

선반.

여관.

쉬는 자리.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푸리나의 극장에서는, 그리고 여관의 성좌를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아레가 믿는 별은 그곳에만 머무는 별이 아니었다.

개척의 성좌.

한계를 마주하고, 넘어서고,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경계에 발을 딛게 하는 별.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아레에게 단순히 눕히고 재우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전장에 다시 세우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경계를 지우지 않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무너진 곳.
누군가가 돌아오지 못한 곳.
누군가의 한계가 피와 흙 속에서 멈춘 곳.

그곳에 이름을 세우는 일.

다음 사람이 그 앞에서 멈춰 울고, 이를 악물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아레는 낮게 말했다.

“선반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군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응?”

아레는 식탁 옆의 작은 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이름표가 몇 개밖에 없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그리고 빈 칸들.

아주 많은 빈 칸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이름을 눕혀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는 계속했다.

“그렇다고 다시 전장에 세우자는 뜻은 아니에요. 그건 내가 보았던 미래와 다르지 않겠지요.”

아레는 자기 손을 보았다.

아까 그 손은 성벽에서 이름표를 떼어냈다.

벽으로 만든 이름들.

누구도 잊히지 않았지만,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침묵의 성.

“그 아이들을 성벽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아레가 말했다.

“하지만 길목에서 지워서도 안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에 둬?”

아레는 고개를 들어, 무대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어둠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길들이 있었다.

비가 멎은 들판 너머.
식탁의 온기 너머.
침묵의 성이 무너진 자리 너머.

아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경계에.”

“경계?”

“네.”

아레는 기억의 자리로 보였던 작은 선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누군가 쓰러진 경계. 누군가 돌아오지 못한 한계.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멈추었기에, 산 자들이 다시 마주하게 되는 지점.”

그녀는 첫 번째 망령을 보았다.

“그곳에 이름을 세워야 합니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그에게 말했다.

“아이야. 너를 다시 전장에 세우지는 않으마.”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계속했다.

“하지만 네가 쓰러진 경계를 지우지도 않으마. 그곳에 네 이름을 세워두마.”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개척자의 단단함이 있었다.

“산 자들이 그 앞에서 멈춰 울고, 네가 멈춘 곳을 보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푸리나는 그제야 아레가 말하는 것을 이해했다.

여관이 아니었다.

묘비도 아니었다.

장부도 아니었다.

이정표.

아레는 죽은 자를 쉬게 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죽음이 산 자의 길에서 아무 의미 없이 묻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죽은 자를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멈춘 지점을 별자리처럼 남기려는 사람이었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펜을 들었다.

아레가 말했다.

“적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이름의 이정표: 죽은 자를 명령 아래 다시 세우지 않고, 산 자가 같은 절망 앞에서 멈추지 않도록 경계와 길목에 세워두는 이름.

아레는 그 문장을 읽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

이정표를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사무적이었다.

그래서 그레이가 활약했다.

그레이는 긴 탁자 하나를 가져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종이를 펼쳤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장부 정리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정표를 세우려면 위치와 문구가 필요합니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그레이가 하면 순례길도 행정이 되겠네.”

그레이는 차분히 대답했다.

“길에는 표지가 필요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오늘 죠니가 의외로 그레이 편을 많이 드네.”

“맞는 말을 하면 편을 들어야지.”

아레는 그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이상하게, 그런 건조한 대화가 도움이 되었다.

너무 숭고한 말만 있으면 숨이 막혔을 것이다.

죽은 자의 이름을 이정표로 세우는 자리에도, 누군가는 펜이 마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누군가는 의자가 삐걱이는지 보고, 누군가는 빵을 더 가져와야 했다.

그레이는 종이 상단에 항목을 적었다.

이름 / 확인 여부 / 기억하는 사람 / 남은 흔적 / 멈춘 경계 / 다음 길

푸리나는 마지막 항목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다음 길?”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표라면 필요합니다.”

아레가 그 문장을 보았다.

다음 길.

전장.
장부.
식탁.
표지석.
별.
아직 아무도 넘지 못한 경계.
그리고 그 너머.

아레는 낮게 말했다.

“좋은 항목입니다.”

그레이는 다시 조금 놀란 듯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이름은 마르코였다.

부상병이 앞으로 나왔다.

아까 빵 가장자리를 이야기했던 그 병사였다.

그는 아직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레가 그를 보았다.

“말해도 됩니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마르코. 성은…… 사실 잘 모릅니다. 저희끼리는 그냥 마르코라고 불렀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마르코. 성 미상.

“남은 흔적?”

병사는 조금 웃었다.

“빵 가장자리. 아니, 좋아한 건 아닐 겁니다. 속을 남에게 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겠죠.”

그레이가 적으려다 멈췄다.

푸리나가 물었다.

“왜?”

그레이는 말했다.

“정확한 표현이 필요합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적어주세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빵 가장자리를 좋아한다고 우겼음. 진위는 불명. 그러나 그 말로 타인에게 빵 속을 나누었음.”

병사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레이는 그대로 적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네.”

푸리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좋아.”

아레는 병사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멈춘 경계는 어디였습니까?”

병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후퇴로를 열던 곳입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다들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뒤따라오겠다고 했고요. 늘 그랬습니다. 빵 속도 남에게 주고, 탈출로도 남에게 주고.”

아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다음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조금 뒤, 병사가 말했다.

“다음에는…… 누군가 뒤에 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길이었으면 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후퇴로를 열고 남은 자리.
다음 길: 누군가가 늘 뒤에 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마르코의 이름표는 식탁 끝에 놓이지 않았다.

대신 무대 한쪽, 출구로 이어지는 작은 길목에 세워졌다.

그곳은 누군가가 “먼저 가”라고 말할 법한 자리였다.

이제 그 자리에는 마르코의 이름이 있었다.

전장으로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사람이 그 앞에서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

다음은 아나히트였다.

늙은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딸의 이름을 말하다가 한 번 숨이 막혔다.

아레는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여인은 말했다.

“아나히트. 후추를 너무 많이 넣던 아이.”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아나히트.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남은 흔적: 후추?”

여인이 눈물 사이로 웃었다.

“좋아했다기보단, 양 조절을 못했지요.”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것도 흔적이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아이의 수프는 늘 너무 매웠습니다. 그런데 다들 먹었어요. 먹다 보면 이상하게 몸이 따뜻해져서.”

아레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적지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수프에 후추를 많이 넣었음. 먹는 사람들은 맵다고 말하면서도 비웠음. 추운 날에는 그 수프가 도움이 되었음.”

여인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는?”

여인은 오래 생각했다.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이요.”

“솥?”

“도망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프를 끓였습니다. 모두 빨리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 아이가 말했어요. ‘뜨거운 걸 먹지 않으면 길에서 쓰러진다’고.”

여인은 눈물을 닦았다.

“그 수프가 너무 매워서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덕에 걸었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솥을 정리하다가 늦었습니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다음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여인은 대답했다.

“피난길에서도 따뜻한 것을 사치라고 부르지 않는 길.”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
다음 길: 따뜻한 식사가 생존의 일부임을 잊지 말 것.

아나히트의 이름표는 식탁 가운데와 가까운 곳, 그러나 길목에서도 보이는 자리에 세워졌다.

그 이름표가 놓이자, 식탁 위에 아주 희미하게 후추 냄새가 돌았다.

푸리나는 코를 찡그렸다.

“진짜 맵네.”

죠니가 말했다.

“죽은 뒤에도 세네.”

아레는 그 냄새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나히트는 전장 통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에서 멈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제, 다음 사람을 위한 이정표가 세워졌다.


---

토로스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 아이는 아직 자기 아버지 이름을 말할 때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레는 무릎을 조금 굽혔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말할 수 있겠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로스.”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토로스.

아이는 말했다.

“노래를 못했어요.”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아이는 바로 그 이상한 노래를 흉내 내려다가, 갑자기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노래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해요.”

“왜?”

“그래야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아요.”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웃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노래하려는 것은, 토로스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이상한 가락으로 노래했다.

음정은 엉망이었다.

박자도 엉망이었다.

가사는 중간에 끊겼다.

하지만 노래는 있었다.

끝나자, 아무도 바로 웃지 못했다.

그러다 아이가 먼저 웃었다.

“진짜 못하죠?”

푸리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응. 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음악적 완성도는 낮습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쿡 찔렀다.

“그레이.”

아이가 오히려 웃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불렀어요!”

그제야 식탁에 웃음이 번졌다.

아레는 그 웃음 속에서 토로스라는 이름이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레이는 적었다.

남은 흔적: 노래를 매우 못했으나, 본인은 즐겁게 불렀음. 자녀가 그 노래를 기억함.

“멈춘 경계는?”

아이는 망설였다.

“창가요.”

아레가 물었다.

“왜?”

“아버지는 늘 창밖을 보면서 노래했어요. 엄마가 시끄럽다고 했거든요. 마지막에도 창가에 있었어요. 밖에 적이 오는지 보려고.”

아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노래하다가 멈췄어요.”

아레는 눈을 내렸다.

“다음 길은?”

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노래가 멈추면, 누군가 창밖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아이의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술적인 말이기도 했다.

망루.
감시.
교대.
혼자 창가에 서지 않기.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길이구나.”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창가의 감시 자리.
다음 길: 노래가 멈춘 창가를 혼자 두지 말 것.

토로스의 이름표는 창가 쪽에 세워졌다.

그 이름표가 놓이자, 창밖으로 아주 작은 바람이 들어왔다.

노래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래가 멈춘 뒤, 누군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게 하는 바람이었다.


---

그렇게 이름들이 하나씩 놓였다.

모든 이름을 다 세울 수는 없었다.

그날 밤에는 몇 명뿐이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리고 몇몇 더.

돌아오지 못한 전령은 “말을 무서워했지만 전령이 되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끊어진 길이었다.

다음 길은:

전령이 혼자 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강가의 불침번은 “잠을 잘 못 잤고, 그래서 남의 잠을 잘 지켜주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밤의 강가였다.

다음 길은:

누군가의 잠을 지키는 자에게도 잠을 돌려줄 것.

북쪽 능선의 아이는 “정말 어린지는 모름. 그러나 모두가 아이처럼 걱정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무너진 능선이었다.

다음 길은:

어린 얼굴을 용기라는 말로 너무 빨리 전장에 세우지 말 것.

이름이 없는 자들은 이름 없는 대로 적혔다.

이름 미상. 북쪽 능선. 마지막 확인자 없음. 추정 금지.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다음 길: 알 수 없는 죽음을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말 것.

아레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추정 금지.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말 것.

예전의 그녀라면,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의미를 채웠을 것이다.

누군가의 죄.
누군가의 맹세.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령.

하지만 이제는 빈자리를 빈자리로 둘 수 있어야 했다.

그 빈자리 앞에서 멈추고, 다음 사람이 더 조심스럽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아레는 그레이에게 말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표지도 비워두지 말아주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어떻게 적을까요?”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모른다고 적되, 버려진 표식처럼 보이지 않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 항목을 만들었다.

알 수 없는 것: 이름, 고향, 마지막 말.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넘어야 할 것: 모른다는 이유로 없었던 사람처럼 다루는 습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숨을 멈췄다.

아레도 오래 바라보았다.

“좋군요.”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기록은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속여서는 안 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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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이정표들이 하나씩 세워졌다.

하지만 성벽이 되지는 않았다.

이름표들은 너무 빽빽하게 꽂히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길이 있었다.

누군가 지나갈 수 있는 틈.

멈추고, 읽고, 울고, 다시 걸을 수 있는 틈.

빵 부스러기 하나.
후추 냄새.
노래가 멈춘 창가.
접힌 천.
타다 남은 성냥.
이름 없는 자를 위한 빈 표지.

푸리나는 이정표들을 보며 말했다.

“이거, 순례길 같아.”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이름표들을 가리켰다.

“방마다 이름표가 있는 여관이 아니라, 길목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있는 길. 여기서 멈추고, 읽고, 다시 걸어가라는 길.”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더 맞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정표들 너머, 아직 열리지 않은 어둠을 향했다.

“기억의 순례길.”

그레이가 기록하려다 멈췄다.

아레가 말했다.

“적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기억의 순례길: 죽은 자의 이름을 성벽이 아니라 경계의 이정표로 세우고, 산 자가 그 앞에서 멈춘 뒤 다시 나아가게 하는 길.

아레는 그 문장을 읽었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아레답다.”

아레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극장에서 시작되었으니, 그대답기도 하겠지요.”

푸리나는 조금 놀랐다.

“그건 칭찬으로 받아도 돼?”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이번에는 비교적 명확한 칭찬입니다.”

푸리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비교적 명확한 칭찬을 받았어.”

죠니가 말했다.

“축하해.”

“너무 건조해.”

“비교적 축하야.”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름의 이정표를 조금도 더럽히지 않았다.


---

하지만 아레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기 이름을 놓는 일이었다.

푸리나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망령도, 고양이 왕도 말하지 않았다.

아레가 스스로 알아차렸다.

기억의 순례길에는 죽은 자들의 이름만 있어서는 안 됐다.

그 이름들을 기억하는 자가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로 다시 걸어가는지도 필요했다.

아레는 빈 이름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레이가 물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나의 것.”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이름표를 보았다.

그 위에는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레이가 적으려 하자, 아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적겠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건넸다.

아레는 자기 이름을 적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글씨는 반듯했다.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조금 떨리는 것이 보였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 자리는?”

아레는 의자를 보았다.

아까 자신이 앉았던 빈 의자.

그리고 그 너머, 아직 이어져야 할 순례길.

“길의 끝이 아니라, 중간.”

“중간?”

“네.”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들고 이정표들 사이의 작은 빈 곳으로 걸어갔다.

거기는 마르코의 후퇴로와 아나히트의 솥, 토로스의 창가가 서로 멀리 보이는 자리였다.

아레는 그곳에 자기 이름표를 꽂았다.

죽은 자들의 이름 사이에, 산 자의 이름이 놓였다.

그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필요했다.

아레는 말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그러니 내 이름은 도착한 자의 표지가 아니라, 걷고 있는 자의 표지여야겠지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나는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식탁에도 앉고, 의자에도 앉고, 때로는 그대의 박수도 듣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직 어두운 길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야겠지요.”

푸리나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레.”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네.”

“그거 진짜 큰 말인 거 알아?”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군요.”

“너무 담담하게 말하지 마.”

“담담하지 않으면 말하기 어려워서요.”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는 웃을 수 없었다.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내가 산 자의 길을 잃으면, 죽은 자의 이름도 결국 성벽이 됩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적었다.

기억하는 자의 산 자로서의 경로 필요.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은 결론이네.”

아레는 그를 보았다.

“건조한 칭찬이군요.”

“내 방식이야.”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도 칭찬이야.”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받아두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첫 번째 망령이 일어났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는 소품 상자 위에 있던 빈 이름표를 들었다.

아레는 그를 보았다.

“아이야.”

망령은 아레에게 다가왔다.

“장군님.”

“그래.”

“이제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레는 기억의 순례길을 보았다.

마르코의 후퇴로.

아나히트의 마지막 솥.

토로스의 창가.

이름 없는 자들의 빈 표지.

그리고 그 사이에 꽂힌 자기 자신의 이름.

“원한다면 이곳에.”

망령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

“기억의 순례길.”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전장이 아닌 곳.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곳. 하지만 산 자들이 네가 멈춘 곳을 보고, 다음 걸음을 생각할 수 있는 곳.”

망령은 물었다.

“장군님은 저를 매일 깨우지 않으실 겁니까?”

아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대답은 분명했다.

“그래.”

그녀는 낮게 말했다.

“매일 깨워 세우지 않으마.”

망령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잊지는 않으십니까?”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잊지 않으마.”

망령은 빈 이름표를 작은 길목에 세웠다.

“그럼 저는 조금 쉬겠습니다.”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아이야. 쉬렴.”

망령은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군인처럼 걷지 않았다.

그냥 잠시 쉬러 가는 사람처럼 걸었다.

고양이 왕은 식탁 끝에서 물었다.

“저도 이 길에 와도 돼요?”

아레는 그를 보았다.

“너는 산 자들의 웃음 아니었니?”

고양이 왕은 당당하게 말했다.

“웃음도 길을 알아야 해요.”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오렴.”

고양이 왕은 나무 인형을 안고 식탁 옆, 순례길 입구에 앉았다.

“빵은 있어요?”

푸리나가 말했다.

“후일담에 준비할게.”

그레이가 기록했다.

추후 빵 준비 필요.

죠니가 말했다.

“이런 건 또 바로 적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길을 걷는 자에게 음식은 필요합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작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웃음이었다.


---

막이 내려가기 전, 푸리나는 아레에게 물었다.

“이제 끝내도 될까?”

아레는 기억의 순례길을 보았다.

아직 너무 짧았다.

그리고 너무 길었다.

“네.”

아레는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좋겠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레는 덧붙였다.

“다만, 이 이정표들은 두고 싶군요.”

“물론.”

“식탁도요.”

“응.”

“의자도.”

“응.”

“그리고…….”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보았다.

“내 이름표도, 당분간은 저기에.”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당분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겠지요?”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그 말, 어디서 들은 것 같네.”

“좋은 말이었으니까요.”

“좋아. 내일 다시 정하자.”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의 등불이 천천히 낮아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이 부드럽게 접혔다.

이번에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대 위에 생긴 몇 가지가 현실 쪽으로 남는 느낌이었다.

이름의 이정표.

긴 식탁.

빈 의자.

그리고 길의 중간에 꽂힌 아레의 이름표.

막이 내려왔다.

후일담 —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세 망령이 찾아온 밤》

후일담 —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다음 날 아침, 야전 여관의 마당에는 이상한 길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았다.

마당 한쪽, 찢어진 막과 식탁 사이.
아이들이 뛰어다니면 쉽게 밟고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목.
그곳에 작은 이름표들이 세워져 있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리고 아직 이름이 없는 몇 개의 빈 표지.

누군가가 보기에는 소품처럼 보였을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미처 치우지 않은 장식.
아이들이 세워둔 놀이의 흔적.
혹은 푸리나가 또 무언가를 벌이기 위해 준비한 이상한 무대 장치.

그러나 아레는 그것을 길이라고 불렀다.

기억의 순례길.

그리고 그 길의 중간에는, 작고 반듯한 글씨로 적힌 이름표 하나가 있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푸리나는 그 이름표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정말 남았네.”

그레이는 옆에서 기록판을 확인했다.

“어제 신술이 접힌 뒤에도 물리적 표식 일부가 유지되었습니다. 실제 소품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레이.”

“네.”

“아침부터 너무 딱딱해.”

“그럼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무대에서 생긴 길이 현실에 조금 남았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오.”

“괜찮습니까?”

“좋아. 아주 좋아. 방금 건 기록에도 그렇게 써.”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적었습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쪽에서는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정확히는 빵을 먹으면서 조용히 이름표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어제 고양이 왕을 맡았던 아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푸리나 전하.”

“응, 고양이 왕.”

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저기 지나가도 돼요?”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마당 끝에 서 있었다.

아침빛 속의 아레는 어제 밤보다 조금 더 창백해 보였지만,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레는 아이에게 말했다.

“지나가도 된단다.”

아이의 눈이 밝아졌다.

“뛰어도 돼요?”

아레는 잠시 멈췄다.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레이도 기록판 위에서 펜을 멈췄다.

아레는 이름표들을 보았다.

마르코의 후퇴로.

아나히트의 마지막 솥.

토로스의 창가.

이름 없는 병사의 경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름.

그 사이를 아이가 뛰어간다.

웃으면서.

아레는 한때 그것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름들 사이를 가볍게 뛰어간다는 것.

죽음의 경계가 아이의 놀이길이 된다는 것.

하지만 개척의 길은 원래 그런 모순을 품는다.

어떤 이가 쓰러진 곳을, 다음 이는 지나가야 한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지나가야 한다.
멈출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다시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뛰어도 된단다.”

아이는 웃었다.

아레는 덧붙였다.

“다만, 이름표를 차지 않도록 조심하렴.”

“네!”

고양이 왕은 바로 달려갔다.

그는 마르코의 이름표 앞에서 한 번 멈추었다.

글자를 읽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

아나히트의 이름표 앞에서는 후추 냄새가 나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토로스의 이름표 앞에서는 이상한 노래를 한 소절 흉내 냈다.

그리고 아레의 이름표 앞에서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아레 장군님 이름이에요?”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장군님도 죽었어요?”

푸리나가 숨을 삼켰다.

그레이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하지만 아이는 악의 없이 물었다.

길에 이름이 있으니, 죽은 사람 이름인 줄 안 것이다.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 아니란다.”

아이는 더 헷갈린 얼굴이 되었다.

“그럼 왜 여기에 있어요?”

아레는 조금 생각했다.

“나도 길 위에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아이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장군님도 뛰어요?”

푸리나는 입을 막았다.

죠니가 언제 왔는지 문가에서 낮게 말했다.

“좋은 질문이네.”

아레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작게 웃음을 참았다.

아레는 아이를 다시 보았다.

“오늘은 걷겠단다.”

“내일은요?”

“내일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내일 다시 정하자꾸나.”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오늘 뛸래요!”

그리고 그는 정말로 뛰었다.

이름의 이정표 사이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히.


---

아침 식사가 시작되자, 식탁은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확히는, 어제 있던 식탁에 상자 두 개와 나무판자 하나를 덧댔다.

그레이는 그 구조를 보고 심각하게 말했다.

“하중 분산이 불안정합니다.”

푸리나는 빵 바구니를 올리며 말했다.

“식탁은 마음이 중요해.”

“무너질 경우 마음도 함께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건 곤란하지.”

죠니가 옆에서 나무판자를 발로 살짝 밀어보았다.

“여기 받침 하나 더 대면 되겠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죠니가 가구 조언을?”

“무너지는 식탁 옆에서 밥 먹고 싶진 않으니까.”

“실용적이야.”

“그게 대체로 좋지.”

아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식탁을 고치는 일.

빵을 놓는 일.

아이들이 자리를 다투는 일.

그레이가 이름표와 식탁 사이의 안전거리를 계산하는 일.

죠니가 받침을 대는 일.

푸리나가 “이 정도면 극적 균형이야”라고 말하고, 그레이가 “물리적 균형이 먼저입니다”라고 반박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어제 밤의 아레라면 그것을 막연히 느꼈다.

오늘 아침의 아레는 조금 더 분명히 알았다.

죽은 자의 이름은 조용한 곳에만 놓이지 않는다.

때로는 삐걱이는 식탁 옆에도 놓인다.

빵가루가 떨어지는 곳에도.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길목에도.
누군가가 “이 받침은 약하다”고 말하는 자리에도.

그 모든 것이 산 자가 다음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레는 식탁 끝에 앉았다.

푸리나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죠니는 짧게 말했다.

“앉았네.”

푸리나는 바로 쏘아보았다.

“죠니.”

죠니는 빵을 집었다.

“이번엔 좋은 뜻이야.”

아레는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아레의 앞에 빵을 놓았다.

“먹을래?”

아레는 빵을 보았다.

어제 2막에서 먹었던 빵처럼, 조금 딱딱하고 조금 식은 빵이었다.

“먹겠습니다.”

푸리나는 빵을 더 밀어주었다.

“기억하는 자도 빵을 먹어야 하니까.”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제목으로 쓸 생각이었나요?”

“들켰어?”

“조금.”

“좋은 제목 아니야?”

아레는 빵을 손에 들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레식 칭찬!”

“비교적 명확한 편이지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는 빵을 한 조각 뜯었다.

그 순간, 고양이 왕이 옆에서 말했다.

“그거 가장자리예요.”

아레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가장자리였다.

고양이 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마르코가 좋아한다고 우겼던 부분.”

아레는 빵 가장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먹어도 되겠니, 마르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 끝에 세워진 마르코의 이름표가 아침빛을 받았다.

아레는 빵 가장자리를 먹었다.

딱딱했다.

조금 퍽퍽했다.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삼킬 수 있었다.

그녀는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빵 속을 남에게 주려고 우겼다는 말이 이해되는군요.”

죠니가 말했다.

“맛없어?”

아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맛있다고 우기려면 상당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식탁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듣고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크게 웃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 웃음은 마르코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코의 이름표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왔다.


---

식사가 끝난 뒤, 아레는 이정표들을 다시 점검했다.

이건 거의 의식처럼 보였지만, 아레는 그것을 의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의식이 너무 단단해지면, 또 하나의 성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레이에게 말했다.

“규칙은 너무 많이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레이는 물었다.

“최소 규칙은 필요합니다. 무엇을 남길까요?”

아레는 생각했다.

“첫째. 이름을 알면 이름을 적는다.”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이름을 모르면 모른다고 적는다.”

“셋째. 모르는 것을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않는다.”

“넷째. 그 사람이 멈춘 경계를 확인한다.”

“다섯째. 다음 사람이 그 경계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묻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째는 없습니까?”

아레는 이정표들 사이를 뛰던 아이를 보았다.

“있습니다.”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산 자가 그 길을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적었다.

여섯째. 산 자가 그 길을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가만히 웃었다.

“그거 좋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극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문장일 겁니다.”

푸리나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첫 다섯 줄만 남겼겠지요.”

“여섯째는?”

“그대와 아이들이 가져왔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아, 오늘 바람이 좀 세네.”

죠니가 말했다.

“안 부는데.”

그레이가 하늘을 보았다.

“현재 풍속은 약합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향해 낮게 말했다.

“너희 둘 다 조용히 해.”

아레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더 이상 극 안에서만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


---

오후가 되자, 첫 번째 망령이 다시 나타났다.

아주 잠깐이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는 자신의 이정표 앞에 서 있었다.

그 이정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름 미상. 비 오는 밤, 좌측 능선. 마지막 말 확인 불가.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다음 길: 이름을 듣지 못한 죽음을, 지휘관의 죄만으로 덮지 말 것.

망령은 그것을 읽었다.

아레는 곁에 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마.”

망령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레는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냐?”

망령은 아레를 보았다.

“완전히는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전보다 낫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하구나.”

망령은 이정표를 만지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장군님.”

“그래, 아이야.”

“저는 이름을 잃었지만, 길을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망령은 계속했다.

“누군가 이 앞에서 멈추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 서 있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아레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제가 멈춘 곳이라서요.”

망령은 비가 그친 하늘을 보았다.

“누군가는 지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아레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개척의 성좌가 사랑할 법한 말이었다.

한계에 부딪힌 곳.

누군가가 멈춘 곳.

그러므로 다음 이가 나아갈 곳이 생긴 곳.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렇구나, 아이야.”

망령은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 장군님도 너무 오래 서 있지 마십시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노력하마.”

“네.”

망령은 뒤돌아섰다.

이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정표 너머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전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길도 아니었다.

아레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

해가 기울 무렵, 푸리나는 작은 폐막 공연을 하자고 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바로 경계했다.

“폐막 공연이요?”

“작게.”

“푸리나 헤툼의 ‘작게’는 신뢰도가 낮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억울한 얼굴로 둘을 보았다.

“이번엔 진짜 작게 할 거야.”

죠니가 말했다.

“소품 몇 개?”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음…… 고양이 인형, 빵 바구니, 작은 깃발, 이정표 모형 세 개 정도?”

그레이가 말했다.

“작지 않습니다.”

“작아! 전쟁 장면 없어!”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무엇을 하려는 건가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이들이 길을 지나가는 놀이.”

아레는 침묵했다.

푸리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죽은 자 이름을 장난감처럼 쓰자는 게 아니야. 이정표를 보고 멈추고, 한마디 말하고, 다음으로 가는 놀이. 아주 간단하게.”

아레는 이정표들을 보았다.

그 앞에서 멈추고, 말하고, 지나가는 아이들.

그것이 가벼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너무 무거운 기억은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못한다.
너무 가벼운 기억은 사람을 지나치게 만든다.

그 사이의 길.

아레는 물었다.

“한마디는 무엇을 말하게 할 겁니까?”

푸리나는 대답했다.

“각자 다르게.”

“예를 들면요?”

푸리나는 고양이 왕을 불렀다.

“고양이 왕, 마르코 이정표 앞에서 뭐라고 말하고 싶어?”

아이는 빵을 들고 달려왔다.

“빵 속도 먹으라고요!”

마당에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어때?”

아레는 잠시 마르코의 이름표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군요.”

푸리나는 조금 놀랐다.

“정말?”

“네.”

아레는 작게 덧붙였다.

“마르코에게는 필요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 왕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럼 아나히트한테는 후추 조금만 넣으라고 할래요!”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실용적인 조언입니다.”

죠니도 낮게 웃었다.

아레는 아나히트의 이름표를 보았다.

후추 냄새.

마지막 솥.

피난길의 따뜻한 수프.

“그것도 좋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정표 앞에서 한마디씩 했다.

“뒤에 남으면 꼭 같이 데리러 갈게.”

“수프는 맵게 해도 되는데 물도 같이 줘.”

“노래 못해도 불러도 돼.”

“이름을 모르면, 이름 모르는 사람이라고 불러줄게.”

“길 막지 말고 길 알려줘.”

마지막 말은 고양이 왕이 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길 막지 말고 길 알려줘.

죽은 자의 이름도, 지휘관의 죄책감도, 애도의 의무도 결국 그렇게 되어야 했다.

길을 막는 성벽이 아니라.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아레는 아이에게 말했다.

“좋은 말이구나.”

고양이 왕은 어깨를 폈다.

“제가 왕이라서요.”

푸리나가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고양이 왕.”

그레이도 진지하게 고개를 숙이려다, 잠시 멈췄다.

“이것은 예법상 필요한 행동입니까?”

푸리나가 말했다.

“극장 예법상 필요해.”

그레이는 고양이 왕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 왕은 매우 만족했다.

아레는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작게.

하지만 숨기지 않고.


---

밤이 되자,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 섰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길의 중간.

죽은 자의 이름들 사이.

산 자가 지나가는 길목.

푸리나는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혼자 있게 둘까?”

그레이가 물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히 혼자 두지는 말자. 그래도 가까이 가지는 말고.”

죠니가 말했다.

“거리 조절 어렵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중요한 거지.”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그 이름표는 죽음의 표지가 아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의 표지.

걷고 있는 자의 표지.

아레는 낮게 말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상했다.

망자의 이름은 많이 불렀다.

병사의 이름.
돌아오지 못한 이의 이름.
장부에 남은 이름.
부르지 못한 이름.

하지만 자기 이름은 잘 부르지 않았다.

아레는 다시 말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아직 걷는 자.”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기억하는 자.”

잠시 침묵.

“하지만 혼자 성벽이 되지 않아도 되는 자.”

밤바람이 이정표들 사이로 지나갔다.

마르코의 이름표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나히트의 이름표에서 희미한 후추 냄새가 났다.

토로스의 창가 쪽에서 못 부르는 노래 같은 바람이 지나갔다.

이름을 잃은 병사의 표지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은 더 이상 비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 작은 빵 조각 하나를 놓았다.

마르코의 가장자리 빵이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걸었단다.”

그 말은 망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내일은 다시 정하마.”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레이도 들었다.

죠니도 들었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그 말은 박수보다 밤에 더 어울렸다.


---

그날 밤, 푸리나는 대본 마지막 장에 후일담을 적었다.

제목은 이렇게 적었다.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레가 직접 쓴 한 줄이 남았다.

기억은 멈춰 서는 일이 아니라, 멈춘 곳을 보고 다시 걷게 하는 일이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좋네.”

아레는 대답했다.

“아직 완성된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좋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었다.

“완성된 말은 가끔 너무 빨리 벽이 되니까.”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레이는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극 종료. 이정표 일부 유지. 식탁 유지. 의자 유지. 아레 마가트로이드의 이름표는 길의 중간에 둠. 추후 재확인 필요.

죠니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추후 재확인 필요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도 배웠네.”

그레이는 조금 생각했다.

“기록상 그렇습니다.”

아레는 마당을 보았다.

야전 여관의 등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정표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밤이 되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아레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이 오면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앞에서 멈출 것이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누군가는 다음 길을 걸을 것이다.

그 정도면 오늘의 기억으로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대본을 덮었다.

“《세 망령이 찾아온 밤》, 여기서 끝.”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끝났군요.”

“응. 극은.”

아레는 이정표들을 보았다.

“길은 남았고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게 좋은 결말이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그리고 그날 밤, 박수가 끝난 뒤에도 길목에는 이름들이 남아 있었다.

성벽이 아니라.

이정표로.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프롤로그 — 항구에 남은 아이와, 바다로 나가는 기사

항구에는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

하늘은 푸르지도, 검지도 않았다.
밤이 물러나기 전의 색.
바다가 자기 몸 위에 마지막 어둠을 얇게 덮고, 저 멀리 수평선만이 아주 천천히 은빛으로 풀리는 시간이었다.

푸리나 헤툼은 그 항구 끝에 작은 무대를 세웠다.

무대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했다.

발밑에는 나무판자가 아니라 젖은 부두가 있었고, 막 대신 오래된 돛이 걸려 있었다. 객석도 없었다. 의자 몇 개와 밧줄 더미, 뒤집힌 통, 젖은 그물뿐이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녀는 손가락으로 돛의 주름을 툭툭 쳤다.

“오늘은 화려하지 않게.”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고 옆에 서 있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실제 결과는 대개 화려했습니다.”

“이번엔 진짜야.”

“확인하겠습니다.”

“믿음이 부족해.”

“경험이 많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입을 삐죽였다가, 바다 쪽을 보았다.

이번 극은 큰 무대가 아니었다.

웅장한 합창도 없고, 성벽도 없고, 아이들이 왕관을 쓰고 뛰어나오는 장면도 없었다.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는 막도 아니고, 질문으로 법정을 뒤집는 극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한 남자와 바다.

작은 배.

줄.

손.

물고기.

그리고 돌아오는 길.

그 정도면 충분했다.

푸리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극은 많이 말하지 않을 거야.”

그레이가 물었다.

“전하께서요?”

“나도.”

“그 점은 기록해두겠습니다.”

“왜 그렇게 놀라?”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기록판에 조용히 적었다.

공연 형식: 최소 인원. 바다 위 독백 중심.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바로 그거야.”

그녀는 바다를 향해 손을 들었다.

새벽 전의 바람이 돛을 흔들었다.

천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부두의 낡은 판자들이 무대처럼 길게 이어졌다. 작은 어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거기 있었던 것 같기도 했고, 방금 극장이 꺼내놓은 것 같기도 했다.

낡은 배였다.

새 배가 아니었다.
잘 칠해진 배도 아니었다.
옆구리에는 오래된 흠집이 있었고, 뱃머리에는 소금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배는 떠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죠니 죠스타는 그 배 옆에 앉아 밧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무대가 열렸다고 해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푸리나가 장엄하게 선언할 때도, 그레이가 기록할 때도, 바다가 조금 더 깊은 색으로 변할 때도, 죠니는 계속 손으로 밧줄을 만졌다.

한 번 당기고.

놓고.

다시 감고.

그 손놀림은 느렸지만 게으르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죠니.”

“응.”

죠니는 밧줄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

푸리나는 잠시 무언가 멋진 말을 하려 했다.

삶은 바다이고, 사람은 항해자이며, 오늘 그대가 나아갈 수평선은—

그쯤에서 죠니가 말했다.

“길게 할 거면, 배 띄우기 전에 끝내줘. 물때 지나가면 귀찮아져.”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기록판을 내렸다.

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 짧게 할게.”

“그게 낫지.”

“오늘의 극은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죠니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늙은 말?”

“산티아고의 노인을 그대로 쓰기엔 네가 너무 죠니라서.”

“말은 마음에 드네. 늙은 쪽은 조금 애매하고.”

“그럼 회전하는 바다와 그럭저럭 오래 달린 말?”

“제목이 길어.”

푸리나는 웃었다.

죠니는 다시 밧줄을 감았다.

그는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아직 어두웠다.
그러나 어둠이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였다.

넓고, 깊고, 무심하고, 오래되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나쁘지 않네.”

푸리나가 물었다.

“바다가?”

“무대가.”

“오.”

“너무 꾸미지 않아서 좋아.”

푸리나는 잠깐 가슴을 폈다.

“내가 절제하면 또 잘하지.”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드문 사례입니다.”

“그레이.”

죠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배 안쪽을 점검했다.

그때, 부두 끝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였다.

그녀는 아직 이른 새벽의 바람에 망토를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조금 흐트러졌고, 허리에는 검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검을 들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배웅하러 왔다.

아스트리트는 죠니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죠니 경.”

“응.”

“정말 혼자 나가십니까?”

“원래 그런 이야기잖아.”

“하지만 극이라면 배역을 더 둘 수도 있지 않습니까?”

죠니는 밧줄 끝을 묶으며 말했다.

“바다 위에 사람이 많으면, 그건 고독이 아니라 회의야.”

푸리나가 손뼉을 작게 쳤다.

“좋은 말인데?”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대사로 쓰지 마.”

“이미 기억했어.”

“그럴 줄 알았어.”

아스트리트는 두 사람의 대화를 잠시 듣다가, 다시 물었다.

“너무 멀리 가지 않으시면 안 됩니까?”

죠니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낚싯줄을 손가락 사이에 걸어보았다.

줄은 아직 아무것도 당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죠니는 줄 끝의 무게를 느끼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멀리 가야 걸리는 것도 있어.”

아스트리트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말이 무모하게 들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럼 돌아오셔야 합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알아.”

“정말 아십니까?”

죠니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그 눈에는 장난기가 조금 있었다.

“못 돌아오려고 나가는 건 아니야. 그런 취미는 없어.”

아스트리트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했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그녀는 배 옆에 쪼그려 앉아 작은 물통을 밀어 넣었다.

“물입니다.”

“봤어.”

“건조식량도 넣었습니다.”

“고마워.”

“예비 줄도 있습니다.”

“그건 내가 넣었는데.”

“하나 더 넣었습니다.”

죠니는 배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잠시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걱정이 많네.”

아스트리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노력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죠니는 짧게 웃었다.

“좋은 변명이야.”

“변명입니까?”

“아니. 좋은 대답.”

아스트리트는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조용히 보았다.

이 극에서 아스트리트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자였다.

아직 죠니의 바다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돌아올 자리를 믿고 남는 사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스트리트는 배의 뱃머리를 잡고 말했다.

“저도 언젠가는 저 바다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죠니는 바다를 보았다.

“글쎄.”

“글쎄, 입니까?”

“난 아직도 잘 모르거든.”

아스트리트가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죠니는 담담했다.

“다 안다고 생각하고 나가면, 보통 바다가 먼저 알려줘. 네가 틀렸다고.”

“그럼 왜 나가십니까?”

죠니는 낚싯줄을 손에 감았다.

“모르니까.”

아스트리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조금 뒤에 덧붙였다.

“그리고 모른다고 해서, 안 갈 이유가 되진 않으니까.”

그 말은 거창하지 않았다.

선언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자기 배를 준비하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부두 위에 남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기록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극에서는 너무 빨리 의미를 붙이면 안 됐다.

그레이도 펜을 움직이지 않았다.

좋은 기록자는 때로 기다려야 했다.

죠니는 배에 올랐다.

작은 배가 살짝 흔들렸다.

바다는 아직 조용했다.

그는 노를 잡았다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오래된 굳은살이 있었다.

상처도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찢어지고, 다시 붙고, 다시 찢어졌던 손.

죠니는 손을 향해 말했다.

“오늘도 부탁한다.”

아스트리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에게 말씀하신 겁니까?”

“응.”

“대답합니까?”

“대체로 안 해.”

“그런데도요?”

죠니는 노를 물에 넣었다.

“가끔 말을 안 듣는 쪽이 더 오래 같이 가.”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이해한 듯,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이제 막을 열어야 할 때라고 느꼈다.

그녀는 항구 끝에 서서 조용히 손을 들었다.

평소처럼 화려하게 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바다가 너무 넓었고, 죠니의 배는 너무 작았다.

큰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삶이라는 바다는 오늘, 한 사람에게만 길을 내준다.”

돛이 흔들렸다.

“그대는 노인이며, 기사이며, 아직 돌아오지 않은 말이다.”

죠니가 푸리나를 보았다.

“말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좀 문제 있지 않아?”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분위기 잡는 중이야.”

“미안. 계속해.”

아스트리트가 아주 작게 웃었다.

푸리나도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대가 잡으려는 것은 물고기일 수도 있고, 도달하지 못한 한 점일 수도 있으며, 스스로에게 아직 남아 있는 물음일 수도 있다.”

바다가 조금 밝아졌다.

“그러니 가라.”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다만, 돌아올 자리를 잊지 말고.”

죠니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칭찬?”

“비슷한 거.”

“좋아. 받아둘게.”

죠니는 노를 저었다.

배가 천천히 부두에서 떨어졌다.

아스트리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죠니 경!”

죠니는 돌아보지 않고 손만 들었다.

아스트리트는 잠깐 망설이다가 외쳤다.

“돌아오시면, 제가 배를 고치겠습니다!”

죠니가 그제야 고개를 조금 돌렸다.

“부서질 거라고 예상하는 거야?”

아스트리트는 당황했다.

“그, 그게 아니라—”

“괜찮아.”

죠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도 아주 조금 입가를 움직였다.

아스트리트는 얼굴을 붉혔지만, 곧 똑바로 섰다.

“그럼 반드시 고치겠습니다!”

죠니는 손을 내렸다.

“맡길게.”

배는 더 멀어졌다.

항구의 소리는 작아졌다.

푸리나의 돛 무대도, 그레이의 기록판도, 아스트리트의 금빛 머리도 조금씩 멀어졌다.

남은 것은 바다였다.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

배 밑바닥을 두드리는 잔물결.

아직 오지 않은 태양.

죠니는 혼자였다.

그는 앞을 보았다.

멀리, 수평선이 있었다.

“좋아.”

죠니는 낮게 말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보자고.”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거절도 허락도 아니었다.

죠니는 노를 저었다.

한 번.

또 한 번.

작은 배가 새벽의 바다 위로 나아갔다.

무대는 점점 넓어졌고, 사람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리고 항구 끝에서, 푸리나는 아주 조용히 막의 첫 줄을 적었다.

1막 — 더 먼 바다로

그 아래, 그레이가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1막 — 더 먼 바다로

—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

항구가 멀어지면, 사람의 말도 멀어진다.

처음에는 부두의 나무판자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트리트가 아직 서 있는 기척도 있었다.
푸리나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하다가 참는 숨소리도, 그레이의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배가 물살을 타고 조금 더 나아가자, 그 모든 것은 바다 뒤로 접혔다.

남은 것은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뿐이었다.

촤악.

잠시 침묵.

촤악.

다시 침묵.

죠니는 노를 저었다.

급하게 젓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다는 급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다는 그저 급한 사람을 먼저 지치게 만들 뿐이다.

죠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괜히 성질내봤자 손해지.”

그는 바다에 대고 말했다.

“너는 늘 그랬어.”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어깨를 한 번 풀었다.

배는 작았다.

바다 위에서 배는 언제나 작다.
왕의 배든, 상인의 배든, 기사단의 배든, 피난민을 실은 배든, 혼자 탄 어선이든.

멀리 나오면 다 똑같다.

바다는 크고, 배는 작다.

죠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바다는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

궁정처럼 웃으며 칼을 숨기지도 않고, 전장처럼 깃발을 흔들며 죽음을 장식하지도 않는다. 바다는 그냥 크다. 사람을 삼킬 수 있을 만큼 크고, 사람의 성취를 아무렇지 않게 씻어낼 만큼 넓다.

그런데도 사람은 바다로 나간다.

“이상하지.”

죠니는 노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넓은 걸 보면 꼭 뭔가 해보고 싶어 하거든.”

그는 잠시 자기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너무 인간적이네.”

새벽빛이 조금씩 번졌다.

하늘의 가장 낮은 곳이 먼저 밝아졌다.
회색이 푸른빛을 띠고, 푸른빛 가장자리에 엷은 금색이 번졌다.

배는 항구에서 제법 멀어졌다.

이제 뒤를 돌아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부두의 형태도 희미했다.
푸리나의 돛 무대는 그냥 낡은 하얀 점처럼 보였다.

죠니는 잠깐 뒤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아직 거기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아니, 아이는 아니었다.
기사단장이지.

하지만 오늘의 극에서 그녀는 기다리는 쪽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늘 조금 아이처럼 보인다.
무엇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죠니는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는 쪽도 쉽진 않지.”

그는 노를 한 번 더 저었다.

“뭐,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고.”

그러고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조금은 걱정해야 하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

햇빛이 수면 위에 닿기 시작했을 때, 죠니는 노를 거두었다.

배는 이제 바람과 물결 위에 작게 흔들렸다.

그는 낚싯줄을 준비했다.

줄은 손에 익었다.

낯설지 않았다.

좋은 줄이었다.
너무 새것도 아니고, 너무 낡지도 않았다. 손에 감으면 거칠게 걸리는 감각이 있고, 당기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대략 알 수 있었다.

죠니는 줄을 풀며 말했다.

“오늘은 말 잘 들어라.”

줄은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안 들을 거 알아.”

그는 미끼를 단단히 고정했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이 움직였다.

동작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일을 오래 한 사람의 움직임은, 간단해 보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다.

죠니에게는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줄을 바다로 내렸다.

미끼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물은 금방 그것을 삼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죠니는 기다렸다.

기다림은 바다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전장에서는 기다림이 곧 위험일 때가 많다.
궁정에서는 기다림이 곧 계산이고, 극장에서는 기다림이 곧 장면 전환이다.

하지만 바다의 기다림은 조금 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움직임을 몸 전체로 듣는 시간이었다.

죠니는 줄을 손가락에 살짝 걸었다.

아직 아무 무게도 없었다.

그는 손바닥을 보았다.

아침 햇빛이 굳은살 위에 걸렸다.

“오늘도 멀쩡하네.”

그는 손에게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말고.”

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버틴 손은 늘 대답 대신 흔적을 남긴다.

찢어진 자국.
아물다 만 피부.
다시 굳은살이 된 상처.

죠니는 그 손을 싫어하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하기엔 좀 이상했다.

그냥 자기 손이었다.

말을 안 듣고, 아프고, 가끔은 결정적인 순간에 떨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같이 온 손.

“우린 꽤 멀리 왔어.”

그는 손을 쥐었다 폈다.

“칭찬은 아니야. 사실 확인이지.”

배가 천천히 흔들렸다.

죠니는 수평선을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은, 아직 무엇이든 나올 수 있는 곳이다.


---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까지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미끼 근처를 맴돌기는 했다.

죠니는 그것들을 느꼈다.

작은 움직임.

짧은 당김.

겁이 많고, 빠르고, 욕심 많은 움직임.

하지만 그는 잡지 않았다.

“너희는 아니야.”

그는 줄을 살짝 움직였다.

작은 물고기들은 흩어졌다.

“오늘은 작은 걸로 돌아갈 생각이 없거든.”

그 말에는 허세가 조금 있었다.

죠니도 알고 있었다.

작은 물고기로 돌아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항구에는 음식이 필요하고, 식탁에는 뭔가 올라가야 한다.
매일 거대한 것을 잡아야만 삶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삶은 작은 물고기들로 이어진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의 극은 작은 물고기의 극이 아니었다.

푸리나가 그렇게 무대를 열었고, 죠니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더 먼 바다.

보이지 않는 것.

걸릴지 걸리지 않을지 모르는 큰 무언가.

죠니는 바다를 보며 말했다.

“한 번쯤은 멀리 나와야 할 때가 있지.”

바람이 조금 세졌다.

배가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죠니는 몸을 자연스럽게 맞췄다.

배와 몸이 같은 박자로 흔들렸다.

그는 그런 순간을 좋아했다.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몸이 세상의 움직임에 맞춰지는 순간.

그 짧은 일치.

거기에 사람은 살 수 있다.

“이야기라는 게 꼭 필요한 건 아니야.”

죠니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냥 이 정도면 충분할 때도 있지.”

노도 없고, 말도 없고, 땅도 없다.

물결.

배.

손.

숨.

그리고 아직 당겨지지 않은 줄.

그는 피식 웃었다.

“푸리나가 들으면 싫어하겠네.”

그녀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도 이야기야, 죠니.

네가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지.

죠니는 그 반박을 상상하고 고개를 조금 저었다.

“그래. 아마 네가 이기겠지.”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이 강해졌다.

수면 위의 빛은 가늘게 찢어진 금속 조각처럼 반짝였다.

그 반짝임 속에서, 죠니는 아주 잠깐 먼 들판을 떠올렸다.

바다가 아니라, 땅.

물결이 아니라, 먼지.

노가 아니라, 고삐.

그리고 달리는 말.

말의 근육이 움직이고, 바퀴가 돌고, 땅이 뒤로 밀려나가던 감각.

죠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 기억은 길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바다를 보았다.

“오늘은 배야.”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불평하지 마.”


---

오후가 가까워질 때, 바다가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뀐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배 밑을 지나는 깊은 물살이 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줄이었다.

아주 미세하게.

누군가 줄의 저편에서 생각을 바꾼 것처럼, 줄이 한 번 떨렸다.

죠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줄 위에 얹었다.

또 한 번.

이번에는 조금 더 깊었다.

죠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왔나.”

대답은 없었다.

그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줄이 다시 움직였다.

작은 물고기의 당김이 아니었다.

가볍고 빠른 욕심이 아니라, 무겁고 느린 확신이었다.

죠니는 미끼를 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작지 않다.

성급하지 않다.

이쪽을 시험하고 있다.

“신중하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좋아. 나도 급하지 않아.”

줄은 잠시 잠잠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깊게.

당겨졌다.

배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죠니는 줄을 놓지 않았다.

그는 당기지 않았다.

아직은.

너무 빨리 당기면 끝난다.

너무 늦게 당겨도 끝난다.

그 사이.

찰나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들이 있다.

한 박자 빠르면 놓치고, 한 박자 늦으면 끊어지는 순간.

사람은 그런 순간을 기다리며 산다.

죠니는 줄을 손에 감았다.

손바닥의 오래된 상처들이 깨어났다.

“좋아.”

그는 조용히 말했다.

“서로 예의 있게 가자.”

줄이 갑자기 깊게 끌려갔다.

배가 앞으로 당겨졌다.

죠니의 몸이 휘청였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짧게.

거칠게.

“큰 놈이네.”

줄이 더 깊게 당겨졌다.

배가 바다 위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죠니는 발을 고정하고, 몸을 낮췄다.

손이 뜨거워졌다.

줄이 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악물지 않았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래.”

그는 바다 아래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했다.

“이 정도는 돼야 내가 멀리 온 보람이 있지.”

그 순간,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배를 끌었다.

죠니는 아직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줄은 말하고 있었다.

무겁다.

강하다.

살아 있다.

그리고 쉽게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죠니는 배가 끌려가는 방향을 따라 몸을 틀었다.

바다가 넓어졌다.

항구는 이제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었다.

작은 배 하나가 거대한 물고기에 끌려, 더 먼 바다로 나아갔다.

죠니는 줄을 붙잡은 채 조용히 말했다.

“좋아.”

손바닥에서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보며 덧붙였다.

“이제 시작이네.”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끌려갔다.

하지만 죠니는 그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이 움직이는 것과, 무언가에게 끌려가는 것의 차이가 아주 작아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선택은 남는다.

줄을 놓을 것인가.

붙잡을 것인가.

죠니는 줄을 붙잡았다.

무대 위의 바다는 더 깊어졌다.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푸리나의 막이 한 장 더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2막 — 줄이 당겨지는 순간

그 아래, 보이지 않는 기록자가 적었다.

— 아직 모습을 보지 못한 것들도, 때로는 손바닥의 피로 먼저 도착한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2막 — 줄이 당겨지는 순간

— 아직 모습을 보지 못한 것들도, 때로는 손바닥의 피로 먼저 도착한다 —

줄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깊이.

햇빛이 닿지 않는 물속.

물살과 어둠과 살아 있는 근육의 힘이 한데 섞인 곳.

죠니는 그 끝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손은 알고 있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줄의 무게.
손목을 따라 올라오는 떨림.
어깨 안쪽에서 삐걱이는 통증.
배 전체를 조금씩 끌고 가는 방향.

줄 끝의 그것은 크다.

그리고 살아 있다.

죠니는 몸을 낮추었다.

작은 배가 물결 위에서 삐걱였다.

“천천히.”

그는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말을 했다.

물고기에게인지.

자기 손에게인지.

배에게인지.

아니면 바다에게인지.

“서두르면 둘 다 손해야.”

줄이 다시 깊게 당겨졌다.

죠니의 손이 조금 밀렸다.

그는 손가락을 조였다.

줄이 살을 문질렀다.

뜨거웠다.

아직 찢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다는 늘 천천히 시작한다.

처음에는 미세한 떨림.

그다음에는 무게.

그다음에는 통증.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은 자기가 언제부터 피를 흘리고 있었는지 모르게 된다.

죠니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조금 배어 있었다.

“좋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인사는 했네.”

줄 끝의 물고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배를 끌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작은 배는 바람이 아니라 물고기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죠니는 노를 잡지 않았다.

지금 노는 쓸모가 없었다.

줄을 놓으면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러면 끝이다.

붙잡으면 끌려간다.

그러나 그러면 이어진다.

그는 줄을 붙잡았다.


---

물고기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작은 것들은 자주 성급하다.

겁먹거나, 욕심내거나, 빛에 놀라 펄떡인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곳에서 움직였다.

자기 힘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죠니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시험하는 것처럼.

“신중하네.”

죠니는 줄을 살짝 풀어주었다.

배가 앞으로 조금 더 끌려갔다.

“좋아. 나도 배운 건 있어.”

그는 허리를 낮추고, 줄의 각도를 바꾸었다.

정면으로 버티면 끊어진다.

힘과 힘으로만 부딪치면, 강한 쪽이 이긴다.

대체로 바다가 강하다.

물고기도 강하다.

사람은 작다.

그러니까 사람은 각도를 찾아야 한다.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히.

막는 것이 아니라 흘리는 쪽으로.

죠니는 숨을 길게 뱉었다.

줄이 다시 당겨졌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가, 곧 풀었다.

이를 너무 오래 악물면 몸 전체가 굳는다.

굳으면 반응이 늦어진다.

늦으면 끝이다.

“이런 건 아직 기억하네.”

그는 자기 몸에게 말했다.

“쓸 만해.”

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가 기울었을 때, 죠니의 무릎은 알아서 균형을 잡았다.

왼쪽 어깨는 줄의 방향을 받아냈고, 등은 배의 흔들림과 물고기의 당김 사이에서 조금씩 자세를 고쳤다.

예전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망가진 것도 아니었다.

죠니는 그 사실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인정했다.

“그래.”

그는 낮게 말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지.”


---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다 위의 시간은 땅 위의 시간과 다르다.

항구에서는 해가 오르면 아침이고, 사람들이 움직이면 낮이고, 등불이 켜지면 밤이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는 줄이 시간을 만든다.

당겨지는 시간.

풀어주는 시간.

버티는 시간.

피가 마르는 시간.

다시 찢어지는 시간.

죠니는 그 시간 안에 들어갔다.

물고기는 계속 움직였다.

한 방향으로만 가지 않았다.

깊이 가라앉았다가, 조금 떠오르고, 다시 옆으로 빠졌다. 배는 그 뒤를 따라갔다.

죠니는 줄의 떨림을 읽었다.

“오른쪽.”

그는 중얼거렸다.

배가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아니. 다시 깊게.”

줄이 손바닥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손을 조금 풀어주었다.

“그래. 그렇게 가라.”

말이 이상했다.

잡으려는 물고기에게 가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지금 당장 끌어올리려 하면 놓친다.

물고기가 자기 힘으로 더 가야 했다.

멀리, 더 멀리.

그리고 언젠가 지칠 때까지.

죠니도 지칠 것이다.

그 점은 공평했다.

그는 바다 아래를 향해 말했다.

“너도 나도 별로 젊진 않나 보네.”

물고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은 무겁게 당겨졌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아니면 네가 젊고 내가 늙은 건가.”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쪽이 더 기분 나쁘네.”


---

태양은 머리 위로 올라갔다.

빛이 바다를 하얗게 만들었다.

수면은 눈부셨고, 배 안쪽은 뜨거워졌다.

죠니는 물통을 열었다.

한 모금만 마셨다.

목은 더 원했지만, 손은 줄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물통을 발치에 고정하고 다시 줄을 잡았다.

“아스트리트가 넣어둔 물이네.”

그는 물통을 보고 말했다.

“걱정이 많은 건 나쁘지 않아. 귀찮을 때가 많아서 그렇지.”

조금 뒤, 그는 다시 말했다.

“고맙다고 해둬야겠네.”

바다는 조용했다.

“돌아가면.”

그는 덧붙였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온 뒤,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돌아가면.

그것은 간단한 말인데, 바다 위에서는 조금 무겁다.

나가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다.

돌아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배가 아직 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돌아가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죠니는 줄을 붙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생각은 있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과장하지 마.”

그 말은 자기 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통증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집착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끝인가.

아니다.

물고기가 잡혀도 잃으면 끝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종종 결과 하나를 자기 전부처럼 붙잡는다.

죠니는 그런 사람들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그는 줄을 한 번 더 감았다.

“조금 덜 멍청하게 하자고.”


---

오후가 깊어지자, 물고기가 처음으로 크게 움직였다.

줄이 갑자기 왼쪽 아래로 꺾였다.

죠니는 순간적으로 몸을 숙였다.

배가 휘청였다.

물통이 굴러갈 뻔했다.

죠니는 발로 그것을 막고, 줄을 손목에 감았다.

“오.”

짧은 감탄이 입에서 나왔다.

“힘 남았네.”

줄이 미친 듯이 당겨졌다.

이번에는 천천히가 아니었다.

물고기가 달렸다.

아니, 물속에서 달린다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죠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배가 끌려갔다.

수면이 갈라졌다.

줄이 팽팽하게 뻗었다.

손바닥의 피가 다시 열렸다.

죠니는 몸을 낮췄다.

“좋아, 좋아.”

그는 빠르게 말했다.

“그렇게 갑자기 화낼 건 없잖아.”

줄이 더 세게 당겨졌다.

“아니, 화내도 돼. 내가 잡으려는 거니까.”

그는 웃음과 신음 사이의 소리를 냈다.

몸이 뒤로 끌렸다.

무릎이 배 바닥에 부딪혔다.

통증이 올라왔다.

선명했다.

죠니는 그것을 붙잡았다.

통증은 나쁘지 않다.

너무 많으면 사람을 망가뜨리지만, 적당한 통증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살아 있다.

손이 있다.

줄이 있다.

상대가 있다.

아직 놓지 않았다.

“그래.”

죠니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은 이거면 됐어.”

물고기는 계속 달렸다.

배는 끌려갔다.

바다가 물보라를 일으켰다.

죠니는 줄을 완전히 당기지 않았다.

줄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만 버텼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각도를 바꾸었다.

정면에서 옆으로.

힘에서 궤적으로.

충돌에서 회전으로.

배가 물고기의 힘에 끌리면서도, 조금씩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은 원은 아니었다.

거대한 바다 위의 느린 선회.

죠니는 그 흐름을 느꼈다.

“그래.”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도망만 가는 건 아니지.”

물고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둘 사이에는 길이 생겼다.

줄 하나.

피 묻은 손 하나.

그리고 바다 위에 그려지는 보이지 않는 원.


---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물고기는 다시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죠니는 배 안에서 숨을 고르며 앉아 있었다.

손바닥은 엉망이었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꼴이 좋네.”

잠시 뒤, 덧붙였다.

“너 말고 나도.”

그는 천 조각을 꺼내 손에 감았다.

천이 피를 먹었다.

완전히 지혈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줄을 다시 잡을 수는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죠니는 고개를 들어 바다를 보았다.

수평선은 붉어지고 있었다.

태양은 물속으로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바다는 낮보다 더 넓어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빛이 줄어들수록, 바다는 더 깊어진다.

그는 바다 아래를 향해 말했다.

“너도 지쳤지?”

대답은 없었다.

“아니면 아직 멀쩡한가.”

줄이 아주 작게 떨렸다.

죠니는 그것을 느끼고 웃었다.

“거짓말은 못 하네.”

그는 배 뒤쪽에 몸을 기대었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감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잠깐 생각할 수는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물고기를 잡으려 하는지 생각했다.

먹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극이 그렇게 열렸기 때문에.

멀리 나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빈손이었기 때문에.

모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죠니는 아주 낮게 말했다.

“네가 있어서.”

그 말은 물고기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온 만큼 먼 곳에, 네가 있었으니까.”

이건 사냥꾼의 말 같지 않았다.

승부사의 말도 아니었다.

조금 더 이상한 말이었다.

죠니는 거대한 물고기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물고기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있었다.

물고기가 없었다면, 죠니가 멀리 온 일도 그냥 바다 위의 긴 헛수고였을 것이다.

하지만 물고기는 있었다.

줄 끝에서.

깊은 곳에서.

죠니가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그래.”

죠니는 중얼거렸다.

“넌 있었어.”

그 말이 바다 위에 잠시 남았다.

그리고 바다는 어두워졌다.


---

밤이 왔다.

첫 번째 밤이었다.

죠니는 줄을 붙잡은 채 별을 보았다.

별은 많았다.

항구에서는 등불과 연기와 사람의 소리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바다 위에서는 너무 쉽게 보인다.

그는 별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별은 멀고, 차갑고, 무심하다.

그래서 좋았다.

너무 가까이 와서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죠니는 별을 보며 말했다.

“너희는 편하겠다.”

잠시 침묵.

“아니, 편한지는 모르지. 그냥 멀리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그는 피식 웃었다.

“남 일은 항상 쉬워 보여.”

줄이 다시 당겨졌다.

죠니는 곧바로 자세를 고쳤다.

“알아. 자면 안 되지.”

물고기는 밤에도 움직였다.

느리게.

끈질기게.

죠니는 그 끈질김을 싫어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몸을 배 안에 고정하고, 줄을 어깨와 등에 분산시켰다.

손만으로 버티면 손이 망가진다.

어깨만으로 버티면 어깨가 끝난다.

몸 전체가 조금씩 나눠 들어야 한다.

그것도 오래 살아남은 자의 기술이었다.

“혼자 버틴다고 꼭 한 부위만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는 중얼거렸다.

그 말은 자기 몸에게 한 말이었다.

조금은 자기 삶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바다는 검었다.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항구도 보이지 않았다.

푸리나의 무대도 없었다.

아스트리트의 걱정도 없었다.

그레이의 기록도 없었다.

죠니와 줄과 바다뿐이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물고기가 계속 헤엄치고 있었다.

죠니는 줄을 붙잡고 말했다.

“좋아.”

목소리는 낮았다.

피곤했다.

하지만 꺾이지는 않았다.

“오늘 밤은 같이 가자.”

줄이 조용히 떨렸다.

그것은 대답처럼 느껴졌다.

아니, 대답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죠니는 눈을 뜬 채 밤을 버텼다.

작은 배는 별빛 아래서 천천히 끌려갔다.

바다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고독은 차갑고, 넓고, 이상하게 정직했다.

그리고 죠니는 그 정직함이 싫지 않았다.

막은 조용히 어두워졌다.

3막 — 바다 위의 독백

그 아래, 아직 보이지 않는 손이 한 줄을 남겼다.

— 고독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듣게 한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3막 — 바다 위의 독백

— 고독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듣게 한다 —

밤은 길었다.

처음에는 별을 세려고 했다.

죠니는 실제로 별을 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자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밤바다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줄을 놓지 않는다.
몸을 배 안에 고정한다.
손이 찢어지지 않게 천을 고쳐 감는다.
물고기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몸을 낮춘다.
졸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 별을 본다.

그 정도였다.

“하나.”

죠니는 낮게 말했다.

“둘.”

거기서 그만두었다.

“재미없네.”

그는 별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별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바다는 검었고, 물고기는 아직 깊은 곳에 있었다. 줄은 여전히 팽팽했다. 배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끌려갔다.

죠니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항구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도, 해가 뜨면 어느 방향에 육지가 보일지도,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의 방향은 알 수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너는 알고 있겠지.”

그는 바다 아래의 물고기에게 말했다.

“아니면 그냥 가는 건가.”

잠시 침묵.

“그쪽도 별생각 없을 수도 있지. 나만 괜히 의미 붙이는 걸 수도 있고.”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건 좀 푸리나 같네.”

그는 잠시 푸리나를 떠올렸다.

항구 끝에 서서, 작은 돛 무대를 붙잡고, 조명을 켜고, 삶과 막과 주인공에 대해 말하려던 얼굴.

푸리나는 이런 밤에도 아마 대사를 붙일 것이다.

“바다도 하나의 무대야, 죠니!”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죠니는 그 말을 상상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너라면 그러겠지.”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고.”

바다는 무대였다.

하지만 관객은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대사도 별로 없었다.

그냥 밤과 물과 줄, 그리고 손바닥의 통증뿐이었다.

죠니는 그런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

과장하지 않아도 되는 무대.

쓰러져도 누가 의미를 붙이기 전에 먼저 아픈 곳을 확인해야 하는 무대.

좋은 무대였다.

조용하고, 불친절하고, 정직했다.


---

새벽이 오기 전, 물고기가 다시 깊이 가라앉았다.

줄이 아래로 끌렸다.

죠니의 등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몸을 조금 돌려 힘을 분산했다.

“그래, 내려가라.”

그는 말했다.

“너도 네 방식이 있겠지.”

줄이 더 깊게 당겨졌다.

배가 기울었다.

죠니는 발바닥으로 배 바닥을 눌렀다.

작은 배가 끙,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너도 불평하냐.”

그는 배에게 말했다.

“이해는 해. 나도 하고 싶어.”

배는 삐걱였지만 버텼다.

죠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배는 늙었다.

어쩌면 이 극에서 가장 산티아고에 가까운 것은 배일지도 몰랐다.

오래되고, 닳고, 그래도 바다에 뜬다.

죠니는 배 옆판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조금만 더 버텨.”

그는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조금만 더.

이 말은 위험했다.

사람은 “조금만 더”라는 말로 생각보다 멀리 간다.
살아남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한다.

죠니는 그 차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늘 지키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지.”

그는 혼잣말했다.

줄이 한 번 튕겼다.

죠니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알아. 집중할게.”

물고기가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해두면 조금 낫다.


---

해가 떠오를 무렵, 죠니는 자신의 오른손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줄을 오래 붙잡은 탓이었다.

굳은살과 상처와 피가 섞여 손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

손은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럴 때만 말을 안 듣지.”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아팠다.

손가락 관절이 삐걱였다.

그는 이를 악물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조금 악물었다.

“좋아.”

그는 손가락을 억지로 펴고, 다시 쥐었다.

“아직 붙어 있네.”

그 말은 웃기지도 않았고, 위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정도면 쓸 수 있었다.

그는 줄을 다시 감았다.

물고기는 여전히 아래에 있었다.

“너는 지치지도 않냐.”

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죠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지쳤구나.”

그는 그 떨림을 느꼈다.

아주 작은 변화.

어제의 거대한 당김과 달랐다.

힘은 여전히 컸지만, 조금씩 박자가 바뀌고 있었다.

물고기도 피로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죠니에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상대가 지쳐간다는 사실은 승리에 가까운 소식일 텐데, 죠니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러워졌다.

“너도 여기까지 왔네.”

그는 바다 아래를 향해 말했다.

“나도 그렇고.”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누가 먼저 실수하나 보자고.”

그 말에는 적의가 없었다.

오히려 예의에 가까웠다.

두 존재가 서로를 다치게 하면서도, 서로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의.

죠니는 물고기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존중하고 있었다.


---

낮이 되자 바다는 잔잔해졌다.

잔잔한 바다는 위험하다.

폭풍이 치면 누구나 조심한다.
파도가 높으면 몸이 먼저 긴장한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는 사람을 속인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바다 위의 작은 배와 깊은 물속의 거대한 물고기와 찢어진 손바닥을 모두 평평한 빛 아래 눕혀버린다.

죠니는 그런 잔잔함을 믿지 않았다.

“너도 연기할 줄 아네.”

그는 바다에게 말했다.

“푸리나랑 비슷한 점이 있군.”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푸리나는 적어도 박수라도 치지.”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남은 물을 확인했다.

많지 않았다.

아스트리트가 하나 더 넣어둔 예비 물통이 아니었다면 벌써 계산이 꼬였을 것이다.

죠니는 잠시 물통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면, 그건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는 생각했다.

아스트리트는 아마 정색하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죠니는 그 장면을 상상하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런 애들은 당연한 일을 너무 많이 하다가 지치지.”

그는 물통 뚜껑을 닫았다.

“뭐,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네.”

줄이 다시 움직였다.

죠니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물고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주 조금.

깊은 곳에서, 조금 더 얕은 곳으로.

죠니의 심장이 천천히 박자를 바꿨다.

“드디어 얼굴 보여줄 생각인가.”

그는 줄을 당기지 않았다.

기다렸다.

물고기가 스스로 올라오고 있다면, 성급하게 끌어당길 이유가 없다.

깊은 물속의 그림자가 조금씩 커졌다.

처음에는 착각처럼 보였다.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어두운 선.

그리고 그 선이 길어졌다.

더 길어졌다.

죠니는 숨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된다.

숨은 계속 가야 한다.

손도, 어깨도, 등도.

모든 것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림자가 배 옆을 지나갔다.

죠니는 그제야 처음으로 물고기의 크기를 보았다.

크다.

상상보다 컸다.

배보다 훨씬 길었다.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그 몸은, 단순한 고기가 아니라 바다의 한 조각 같았다.

죠니는 아주 낮게 말했다.

“하.”

웃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였다.

“진짜 있었네.”

물고기는 수면 아래에서 몸을 틀었다.

은빛과 푸른빛이 잠깐 번쩍였다.

청새치였다.

거대한 청새치.

긴 창 같은 주둥이와, 물살을 가르는 몸.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그 존재감은 충분했다.

죠니는 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봤다.”

그는 말했다.

“그래. 넌 있었어.”

청새치는 다시 깊어지려 했다.

죠니는 이번에는 줄을 조금 당겼다.

너무 많이는 아니고.

놓치지 않을 만큼.

“잠깐.”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얼굴 봤잖아.”

줄이 팽팽해졌다.

청새치는 저항했다.

배가 흔들렸다.

죠니의 손이 다시 찢어졌다.

피가 천 사이로 배어 나왔다.

그는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웃었다.

“좋아.”

그는 말했다.

“이제 서로 모르는 척은 못 하겠네.”


---

청새치를 본 뒤, 시간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울 때는 상상할 수 있다.

과장할 수도 있고, 축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본 뒤에는 다르다.

상대가 실제가 된다.

눈앞의 사실이 된다.

죠니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알았다.

너무 크다.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잡으려면, 아마 그만큼 아플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좋네.”

그 말은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좋다.

고통이 좋아서가 아니다.

상대가 커서 좋았다.

멀리 나온 이유가 있어서 좋았다.

자기 손에 남은 줄이 허튼줄이 아니라서 좋았다.

이 바다 위의 시간이 빈 시간이 아니라서 좋았다.

죠니는 청새치에게 말했다.

“너를 잡으면, 아마 살은 많이 남겠지.”

잠시 침묵.

“아니, 그런 생각부터 하는 건 좀 그렇군.”

그는 피식 웃었다.

“미안. 항구에는 식탁도 있으니까.”

바다는 잔잔했다.

청새치는 다시 깊은 곳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죠니는 그것을 느꼈다.

원이 작아지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이제 싸움은 다른 단계로 들어갔다.

끌려가는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서로를 중심으로 도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죠니는 줄을 손에 감고, 배의 각도를 맞췄다.

회전.

바다 위에서 만들어지는 느린 원.

청새치가 돌고, 배가 돌고, 줄이 둘 사이를 잇는다.

죠니는 그 원 안에 있었다.

“이건 좀 익숙하네.”

그는 말했다.

“바다 위라서 기분은 이상하지만.”

청새치가 다시 원을 그렸다.

죠니는 그 움직임에 맞춰 몸을 틀었다.

줄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통증은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이제 통증은 단순한 방해가 아니었다.

통증은 박자가 되었다.

당김.

숨.

피.

배의 흔들림.

청새치의 회전.

죠니의 손.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느린 궤적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더 이상 항구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도, 푸리나도, 그레이도 잠시 멀어졌다.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원이었다.

이 물고기.

이 손.

이 바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지금은 너랑 나뿐이네.”

청새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더 돌았다.

죠니는 줄을 당겼다.

아주 조금.

청새치의 원이 더 작아졌다.


---

해가 기울 무렵, 죠니는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청새치에게 말하는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손에게.

그다음에는 바다에게.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

그는 말했다.

어떤 그때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그때”가 있었다.

처음 넘어졌던 때.

다시 일어나야 했던 때.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고 느꼈던 때.

자기가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래도 움직였던 때.

죠니는 줄을 붙잡고 말했다.

“한 번 끝난 줄 알았던 것들이, 생각보다 자주 다시 시작하더라.”

청새치가 원을 돌았다.

“귀찮지.”

줄이 당겨졌다.

“아주 귀찮아.”

죠니는 손을 고쳐 잡았다.

“그런데 다시 시작하면, 또 진짜가 돼.”

그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슬픔도 아니었다.

사람은 어떤 일을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갇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반복은 감옥이다.

하지만 때로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다.

또 아프고.

또 넘어지고.

또 빈손으로 돌아오고.

또 멀리 나가고.

그래도 어느 순간, 사람은 그 반복 속에서 자기 손으로 줄을 잡는다.

죠니는 청새치를 향해 말했다.

“너는 오늘 내 돌인가.”

잠시 침묵.

“아니, 물고기한테 돌이라고 하는 건 실례겠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청새치면 청새치지.”

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청새치의 원이 더 작아졌다.

죠니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래도 다시 굴러가겠지.”

이번에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청새치에게.

바다에게.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아직 항구에 남아 있는 아스트리트에게.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해는 이제 붉었다.

바다도 붉었다.

그 붉은 빛 속에서 청새치의 그림자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더 선명했다.

죠니는 작살을 준비했다.

손은 떨렸다.

어깨는 아팠다.

등은 굳었다.

목은 말랐다.

그래도 그는 움직였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모든 것이 이 순간을 향해 원을 그려온 것처럼.

죠니는 작살을 잡았다.

청새치가 다시 돌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원에서, 그것은 배 옆으로 떠올랐다.

길고 거대한 몸.

은빛 비늘.

깊은 푸른 등.

창처럼 뻗은 머리.

죠니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그 말은 이상했다.

잡으려는 상대에게 하는 말.

죽일 상대에게 하는 말.

하지만 죠니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끌고 와줘서.”

청새치가 물살을 갈랐다.

죠니는 작살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바다는 조용해졌다.

아니, 정말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파도는 있었고,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죠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모든 소리가 잠깐 뒤로 물러났다.

줄.

손.

피.

숨.

회전.

거대한 물고기.

그리고 한 점.

죠니는 그 점을 보았다.

“좋아.”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닿자.”

막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4막 — 청새치

그 아래, 파도 사이로 한 줄이 남았다.

— 존중한다는 것은, 때로 끝까지 겨루겠다는 뜻이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3막 — 바다 위의 독백

— 고독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듣게 한다 —

밤은 길었다.

처음에는 별을 세려고 했다.

죠니는 실제로 별을 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자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밤바다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줄을 놓지 않는다.
몸을 배 안에 고정한다.
손이 찢어지지 않게 천을 고쳐 감는다.
물고기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몸을 낮춘다.
졸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 별을 본다.

그 정도였다.

“하나.”

죠니는 낮게 말했다.

“둘.”

거기서 그만두었다.

“재미없네.”

그는 별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별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바다는 검었고, 물고기는 아직 깊은 곳에 있었다. 줄은 여전히 팽팽했다. 배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끌려갔다.

죠니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항구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도, 해가 뜨면 어느 방향에 육지가 보일지도,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의 방향은 알 수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너는 알고 있겠지.”

그는 바다 아래의 물고기에게 말했다.

“아니면 그냥 가는 건가.”

잠시 침묵.

“그쪽도 별생각 없을 수도 있지. 나만 괜히 의미 붙이는 걸 수도 있고.”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건 좀 푸리나 같네.”

그는 잠시 푸리나를 떠올렸다.

항구 끝에 서서, 작은 돛 무대를 붙잡고, 조명을 켜고, 삶과 막과 주인공에 대해 말하려던 얼굴.

푸리나는 이런 밤에도 아마 대사를 붙일 것이다.

“바다도 하나의 무대야, 죠니!”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죠니는 그 말을 상상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너라면 그러겠지.”

그리고 조금 뒤에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고.”

바다는 무대였다.

하지만 관객은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대사도 별로 없었다.

그냥 밤과 물과 줄, 그리고 손바닥의 통증뿐이었다.

죠니는 그런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

과장하지 않아도 되는 무대.

쓰러져도 누가 의미를 붙이기 전에 먼저 아픈 곳을 확인해야 하는 무대.

좋은 무대였다.

조용하고, 불친절하고, 정직했다.


---

새벽이 오기 전, 물고기가 다시 깊이 가라앉았다.

줄이 아래로 끌렸다.

죠니의 등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몸을 조금 돌려 힘을 분산했다.

“그래, 내려가라.”

그는 말했다.

“너도 네 방식이 있겠지.”

줄이 더 깊게 당겨졌다.

배가 기울었다.

죠니는 발바닥으로 배 바닥을 눌렀다.

작은 배가 끙,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너도 불평하냐.”

그는 배에게 말했다.

“이해는 해. 나도 하고 싶어.”

배는 삐걱였지만 버텼다.

죠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배는 늙었다.

어쩌면 이 극에서 가장 산티아고에 가까운 것은 배일지도 몰랐다.

오래되고, 닳고, 그래도 바다에 뜬다.

죠니는 배 옆판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조금만 더 버텨.”

그는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조금만 더.

이 말은 위험했다.

사람은 “조금만 더”라는 말로 생각보다 멀리 간다.
살아남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한다.

죠니는 그 차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늘 지키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지.”

그는 혼잣말했다.

줄이 한 번 튕겼다.

죠니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알아. 집중할게.”

물고기가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해두면 조금 낫다.


---

해가 떠오를 무렵, 죠니는 자신의 오른손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줄을 오래 붙잡은 탓이었다.

굳은살과 상처와 피가 섞여 손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

손은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럴 때만 말을 안 듣지.”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아팠다.

손가락 관절이 삐걱였다.

그는 이를 악물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조금 악물었다.

“좋아.”

그는 손가락을 억지로 펴고, 다시 쥐었다.

“아직 붙어 있네.”

그 말은 웃기지도 않았고, 위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정도면 쓸 수 있었다.

그는 줄을 다시 감았다.

물고기는 여전히 아래에 있었다.

“너는 지치지도 않냐.”

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죠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지쳤구나.”

그는 그 떨림을 느꼈다.

아주 작은 변화.

어제의 거대한 당김과 달랐다.

힘은 여전히 컸지만, 조금씩 박자가 바뀌고 있었다.

물고기도 피로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죠니에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상대가 지쳐간다는 사실은 승리에 가까운 소식일 텐데, 죠니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러워졌다.

“너도 여기까지 왔네.”

그는 바다 아래를 향해 말했다.

“나도 그렇고.”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누가 먼저 실수하나 보자고.”

그 말에는 적의가 없었다.

오히려 예의에 가까웠다.

두 존재가 서로를 다치게 하면서도, 서로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의.

죠니는 물고기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존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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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되자 바다는 잔잔해졌다.

잔잔한 바다는 위험하다.

폭풍이 치면 누구나 조심한다.
파도가 높으면 몸이 먼저 긴장한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는 사람을 속인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바다 위의 작은 배와 깊은 물속의 거대한 물고기와 찢어진 손바닥을 모두 평평한 빛 아래 눕혀버린다.

죠니는 그런 잔잔함을 믿지 않았다.

“너도 연기할 줄 아네.”

그는 바다에게 말했다.

“푸리나랑 비슷한 점이 있군.”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푸리나는 적어도 박수라도 치지.”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남은 물을 확인했다.

많지 않았다.

아스트리트가 하나 더 넣어둔 예비 물통이 아니었다면 벌써 계산이 꼬였을 것이다.

죠니는 잠시 물통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면, 그건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는 생각했다.

아스트리트는 아마 정색하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죠니는 그 장면을 상상하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런 애들은 당연한 일을 너무 많이 하다가 지치지.”

그는 물통 뚜껑을 닫았다.

“뭐,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네.”

줄이 다시 움직였다.

죠니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물고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주 조금.

깊은 곳에서, 조금 더 얕은 곳으로.

죠니의 심장이 천천히 박자를 바꿨다.

“드디어 얼굴 보여줄 생각인가.”

그는 줄을 당기지 않았다.

기다렸다.

물고기가 스스로 올라오고 있다면, 성급하게 끌어당길 이유가 없다.

깊은 물속의 그림자가 조금씩 커졌다.

처음에는 착각처럼 보였다.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어두운 선.

그리고 그 선이 길어졌다.

더 길어졌다.

죠니는 숨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된다.

숨은 계속 가야 한다.

손도, 어깨도, 등도.

모든 것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림자가 배 옆을 지나갔다.

죠니는 그제야 처음으로 물고기의 크기를 보았다.

크다.

상상보다 컸다.

배보다 훨씬 길었다.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그 몸은, 단순한 고기가 아니라 바다의 한 조각 같았다.

죠니는 아주 낮게 말했다.

“하.”

웃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였다.

“진짜 있었네.”

물고기는 수면 아래에서 몸을 틀었다.

은빛과 푸른빛이 잠깐 번쩍였다.

청새치였다.

거대한 청새치.

긴 창 같은 주둥이와, 물살을 가르는 몸.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그 존재감은 충분했다.

죠니는 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봤다.”

그는 말했다.

“그래. 넌 있었어.”

청새치는 다시 깊어지려 했다.

죠니는 이번에는 줄을 조금 당겼다.

너무 많이는 아니고.

놓치지 않을 만큼.

“잠깐.”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얼굴 봤잖아.”

줄이 팽팽해졌다.

청새치는 저항했다.

배가 흔들렸다.

죠니의 손이 다시 찢어졌다.

피가 천 사이로 배어 나왔다.

그는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웃었다.

“좋아.”

그는 말했다.

“이제 서로 모르는 척은 못 하겠네.”


---

청새치를 본 뒤, 시간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울 때는 상상할 수 있다.

과장할 수도 있고, 축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본 뒤에는 다르다.

상대가 실제가 된다.

눈앞의 사실이 된다.

죠니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알았다.

너무 크다.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잡으려면, 아마 그만큼 아플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좋네.”

그 말은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좋다.

고통이 좋아서가 아니다.

상대가 커서 좋았다.

멀리 나온 이유가 있어서 좋았다.

자기 손에 남은 줄이 허튼줄이 아니라서 좋았다.

이 바다 위의 시간이 빈 시간이 아니라서 좋았다.

죠니는 청새치에게 말했다.

“너를 잡으면, 아마 살은 많이 남겠지.”

잠시 침묵.

“아니, 그런 생각부터 하는 건 좀 그렇군.”

그는 피식 웃었다.

“미안. 항구에는 식탁도 있으니까.”

바다는 잔잔했다.

청새치는 다시 깊은 곳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죠니는 그것을 느꼈다.

원이 작아지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이제 싸움은 다른 단계로 들어갔다.

끌려가는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서로를 중심으로 도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죠니는 줄을 손에 감고, 배의 각도를 맞췄다.

회전.

바다 위에서 만들어지는 느린 원.

청새치가 돌고, 배가 돌고, 줄이 둘 사이를 잇는다.

죠니는 그 원 안에 있었다.

“이건 좀 익숙하네.”

그는 말했다.

“바다 위라서 기분은 이상하지만.”

청새치가 다시 원을 그렸다.

죠니는 그 움직임에 맞춰 몸을 틀었다.

줄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통증은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이제 통증은 단순한 방해가 아니었다.

통증은 박자가 되었다.

당김.

숨.

피.

배의 흔들림.

청새치의 회전.

죠니의 손.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느린 궤적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더 이상 항구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도, 푸리나도, 그레이도 잠시 멀어졌다.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원이었다.

이 물고기.

이 손.

이 바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지금은 너랑 나뿐이네.”

청새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더 돌았다.

죠니는 줄을 당겼다.

아주 조금.

청새치의 원이 더 작아졌다.


---

해가 기울 무렵, 죠니는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청새치에게 말하는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손에게.

그다음에는 바다에게.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

그는 말했다.

어떤 그때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그때”가 있었다.

처음 넘어졌던 때.

다시 일어나야 했던 때.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고 느꼈던 때.

자기가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래도 움직였던 때.

죠니는 줄을 붙잡고 말했다.

“한 번 끝난 줄 알았던 것들이, 생각보다 자주 다시 시작하더라.”

청새치가 원을 돌았다.

“귀찮지.”

줄이 당겨졌다.

“아주 귀찮아.”

죠니는 손을 고쳐 잡았다.

“그런데 다시 시작하면, 또 진짜가 돼.”

그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슬픔도 아니었다.

사람은 어떤 일을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갇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반복은 감옥이다.

하지만 때로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다.

또 아프고.

또 넘어지고.

또 빈손으로 돌아오고.

또 멀리 나가고.

그래도 어느 순간, 사람은 그 반복 속에서 자기 손으로 줄을 잡는다.

죠니는 청새치를 향해 말했다.

“너는 오늘 내 돌인가.”

잠시 침묵.

“아니, 물고기한테 돌이라고 하는 건 실례겠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청새치면 청새치지.”

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청새치의 원이 더 작아졌다.

죠니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래도 다시 굴러가겠지.”

이번에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청새치에게.

바다에게.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아직 항구에 남아 있는 아스트리트에게.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해는 이제 붉었다.

바다도 붉었다.

그 붉은 빛 속에서 청새치의 그림자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더 선명했다.

죠니는 작살을 준비했다.

손은 떨렸다.

어깨는 아팠다.

등은 굳었다.

목은 말랐다.

그래도 그는 움직였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모든 것이 이 순간을 향해 원을 그려온 것처럼.

죠니는 작살을 잡았다.

청새치가 다시 돌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원에서, 그것은 배 옆으로 떠올랐다.

길고 거대한 몸.

은빛 비늘.

깊은 푸른 등.

창처럼 뻗은 머리.

죠니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그 말은 이상했다.

잡으려는 상대에게 하는 말.

죽일 상대에게 하는 말.

하지만 죠니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끌고 와줘서.”

청새치가 물살을 갈랐다.

죠니는 작살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바다는 조용해졌다.

아니, 정말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파도는 있었고,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죠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모든 소리가 잠깐 뒤로 물러났다.

줄.

손.

피.

숨.

회전.

거대한 물고기.

그리고 한 점.

죠니는 그 점을 보았다.

“좋아.”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닿자.”

막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4막 — 청새치

그 아래, 파도 사이로 한 줄이 남았다.

— 존중한다는 것은, 때로 끝까지 겨루겠다는 뜻이다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4막 — 청새치

— 존중한다는 것은, 때로 끝까지 겨루겠다는 뜻이다 —

청새치는 물 위로 올라왔다.

처음부터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깊은 물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먼저 떠올랐다.
그림자는 배 밑을 지나며 바다의 색을 바꾸었다.
푸른 물은 순간적으로 더 짙어졌고, 햇빛은 그 몸 위에서 은빛으로 부서졌다.

그리고 마침내 등지느러미가 수면을 갈랐다.

죠니는 숨을 멈추지 않았다.

숨을 멈추면 몸이 늦어진다.

그는 천천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손은 피투성이였고, 어깨는 불에 달군 쇠처럼 뜨거웠다. 등은 오래전부터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래도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청새치는 배 옆을 지나갔다.

길었다.

배보다 길었다.

그 몸은 늙은 바다 자체가 잠시 고기의 형상을 빌린 것 같았다.
창처럼 뻗은 주둥이.
깊은 물을 오래 헤엄친 푸른 등.
수면 가까이 오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은빛 옆구리.

죠니는 작살을 잡았다.

손이 미끄러졌다.

피 때문이었다.

그는 작살대를 다시 고쳐 쥐었다.

“이런 순간에 꼭 이러지.”

그는 자기 손에게 말했다.

“그래도 네 잘못만은 아니야. 내가 너무 오래 시켰지.”

청새치는 다시 원을 그렸다.

큰 원.

조금 작아진 원.

더 작아진 원.

죠니는 그 원을 읽었다.

청새치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직 끝까지 자기 몸을 알고 있었다.
어디서 힘을 아껴야 하는지, 어디서 마지막으로 밀어붙여야 하는지, 어디서 사람을 속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죠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너도 꽤 오래 해먹었구나.”

그는 낮게 말했다.

“아니면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랬나.”

물고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돌았다.

죠니는 배 끝에 몸을 낮추었다.

줄은 그의 왼손에 걸려 있었다.

작살은 오른손에 있었다.

오른손은 아직 완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

청새치가 두 번째로 가까이 왔을 때, 죠니는 던지지 않았다.

각도가 좋지 않았다.

거리도 나쁘지 않았고, 물고기의 몸도 충분히 드러났지만, 그 한 점은 아니었다.

조급한 사람이라면 던졌을 것이다.

오랫동안 빈손이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죠니는 던지지 않았다.

그는 작살을 든 채, 청새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직 아니야.”

그는 말했다.

그 말은 청새치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향했다.

“아직 아니야.”

청새치는 깊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랐다.

배가 흔들렸다.

죠니의 무릎이 배 바닥에 부딪혔다.

통증이 올라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괜찮아.”

이번에는 자기 몸에게 말했다.

“이 정도는 계속 말해도 안 속겠지만, 그래도 들어.”

바람이 바뀌었다.

바다가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태양은 이제 기울고 있었고, 수면은 붉은 금빛을 품었다.

그 빛 속에서 청새치가 다시 떠올랐다.

세 번째 원.

죠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청새치의 옆구리에 난 상처와 비늘의 무늬까지 보였다.

그 몸은 아름다웠다.

먹기 위한 고기라고 부르기엔 너무 컸고, 적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당당했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해서, 잡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존중한다는 것은 물러난다는 뜻만은 아니다.

때로는 끝까지 겨룬다는 뜻이다.

죠니는 작살을 들었다.

“고맙다.”

그는 다시 말했다.

“여기까지 끌고 와줘서.”

청새치가 물살을 갈랐다.

그리고 그 순간, 죠니는 던졌다.

작살이 날아갔다.

그것은 크게 휘두른 일격이 아니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바다를 가르는 유성도 아니고, 극장의 조명을 받는 결전 장면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이, 오래 기다린 한 점을 향해 자기 몸에 남은 힘을 정확히 밀어 넣는 동작이었다.

작살은 청새치의 몸에 꽂혔다.

깊이.

정확하게.

청새치가 몸을 뒤틀었다.

바다가 터졌다.

물보라가 배를 덮쳤다.

죠니는 줄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배가 크게 기울었다.

작살대가 떨렸다.

청새치는 마지막 힘으로 물 위를 갈랐다.

그 몸이 거의 전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죠니는 그 순간을 보았다.

아주 짧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거대한 물고기가 붉은 태양 아래 솟아오르고, 배보다 긴 몸이 공중에서 휘어지고, 바닷물이 은빛으로 흩어지고, 세상이 한순간 모든 소리를 잃는 장면.

그 순간 죠니는 생각했다.

닿았다.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올 필요도 없었다.

몸이 먼저 알았다.

손이 알았다.

찢어진 손바닥과 굳은 어깨와 아픈 무릎이 모두 알았다.

닿았다.

청새치는 바다로 떨어졌다.

큰 소리가 났다.

물결이 배를 밀었다.

죠니는 배 안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발을 버텼다.

줄이 다시 팽팽해졌다가, 조금씩 느슨해졌다.

청새치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멀리 가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자기 몸을 확인하는 움직임.

바다를 떠나기 전, 바다가 자기 것임을 한 번 더 말하는 움직임.

죠니는 작살대를 붙잡은 채 숨을 쉬었다.

거칠게.

느리게.

아프게.

그는 청새치가 천천히 옆으로 기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그 목소리에는 환호가 없었다.

승자의 외침도 없었다.

“잡았어.”

그뿐이었다.


---

청새치를 배 옆에 묶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잡는 일보다, 묶는 일이 더 힘들 때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도달의 순간만 이야기한다.

작살이 꽂히는 순간.
검이 닿는 순간.
깃발이 꽂히는 순간.
박수가 터지는 순간.

하지만 그 이후가 있다.

잡은 것을 끌고 돌아가야 하는 시간.

손에 넣은 것을 어떻게 묶을지, 어떻게 지킬지, 어떻게 함께 움직일지 결정해야 하는 시간.

죠니는 청새치를 배 옆에 묶었다.

청새치는 너무 컸다.

배 안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러니 배 옆에 묶어야 했다.

줄을 감고, 매듭을 짓고, 다시 확인했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빨로 줄 끝을 물고 당겼다.

피와 소금 맛이 났다.

“항구에 가져가면 난리 나겠네.”

그는 중얼거렸다.

“푸리나는 분명 과장할 거고.”

그는 잠시 푸리나의 얼굴을 상상했다.

눈을 크게 뜨고, 양손을 들고, “여러분! 보십시오! 바다가 내어준 거대한—”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건 좀 봐주라.”

그는 다시 매듭을 확인했다.

그레이는 어떻게 기록할까.

청새치의 길이.

무게 추정.

소실 여부.

귀환 시간.

피해 정도.

아스트리트는 아마 먼저 배를 볼 것이다.

배가 부서졌는지.

죠니가 다쳤는지.

그리고 청새치를 보고 말을 잃을 것이다.

“그래.”

죠니는 줄을 한 번 더 묶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되겠네.”

그 말은 단순했다.

그러나 지금은, 물고기를 잡는 일만큼 중요했다.

돌아간다.

잡았다면 돌아가야 한다.

닿았다면 돌아가야 한다.

그곳에 닿았다는 사실을, 삶의 나머지 부분으로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죠니는 배 옆에 묶인 청새치를 보았다.

거대한 몸이 물결에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죽은 뒤에도.

아니, 죽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느낌이었다.

생명은 떠났지만, 그 몸에는 방금까지 바다를 가르던 궤적이 남아 있었다.

죠니는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바다가 조용했다.

“그건 좀 이상하잖아.”

그는 청새치를 보았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할 수 있지.”

수면이 붉게 흔들렸다.

죠니는 작살을 내려놓고, 노를 잡았다.

“가자.”

그는 배에게 말했다.

“우리 둘 다 돌아가야지.”

그리고 아주 잠깐 멈췄다.

“아니, 셋인가.”

그는 배 옆의 청새치를 보았다.

“그래. 셋.”

작은 배와 늙은 말과 거대한 청새치.

셋은 붉은 바다 위에서 천천히 항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

귀환의 첫 시간은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청새치는 배 옆에 묶여 있었고, 물살은 무거워졌다.
배는 전보다 느렸다.
노를 저을 때마다, 죠니는 청새치의 무게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무게는 승리의 무게였다.

동시에 빚의 무게였다.

무언가를 잡는다는 것은, 그 무게를 데려오는 일이다.

죠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것까지 생각하게 만들다니.”

그는 청새치에게 말했다.

“너도 꽤 성가신 놈이야.”

물고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다는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죠니는 하늘을 보았다.

해가 거의 내려갔다.

밤이 오기 전에 항구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문제는 밤이 아니었다.

문제는 피였다.

청새치의 피가 바다에 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얇았다.

붉은 실처럼.

그러나 바다는 피를 숨기지 못한다.

냄새는 퍼진다.

깊은 곳으로.

먼 곳으로.

누군가는 그것을 맡을 것이다.

죠니는 수면을 보았다.

“오겠네.”

그는 말했다.

상어.

그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바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죠니도 알고 있었다.

청새치를 잡는 일이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더 지저분할 수 있다.

도달은 깨끗한데, 귀환은 종종 더럽다.

피와 소금과 뜯겨나가는 살과, 더는 완벽하지 않은 결과를 붙잡고 돌아가는 시간.

죠니는 노를 저었다.

조금 더 빨리.

하지만 무리하지 않았다.

무리하면 몸이 먼저 무너진다.

그는 배 옆의 청새치를 보았다.

“미리 말해두는데.”

그는 낮게 말했다.

“전부 지킬 수는 없을지도 몰라.”

잠시 침묵.

“그래도 너무 쉽게 내주진 않을 거야.”

그는 작살을 확인했다.

작살 하나.

칼 하나.

노.

상처 입은 손.

작은 배.

그리고 바다.

상어가 오면 충분한 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늘 충분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은 없다.

죠니는 칼을 가까이에 두었다.

“항상 이렇지.”

그는 중얼거렸다.

“잡는 것보다 지키는 게 어렵다니까.”

해가 졌다.

바다는 어두워졌다.

청새치의 피는 검은 물 위에 붉은 길을 만들었다.

죠니는 그 길을 보았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정직했다.

그 길을 따라, 먼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죠니는 그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바다가 바뀌었다.

조용한 물이 날카로워졌다.

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배 옆의 청새치에게 말했다.

“미안. 조용히 돌아가긴 글렀네.”

그리고 잠시 뒤, 바다 위에 첫 번째 지느러미가 나타났다.

검고 낮게.

물살을 가르며.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입가가 굳었다.

“왔네.”

상어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왔다.

죠니는 노를 내려놓고 작살을 잡았다.

손이 아팠다.

그는 손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리고 곧바로 정정했다.

“아니, 아마 여러 번 더.”

그는 작살을 들어 올렸다.

상어가 청새치의 몸을 향해 돌진했다.

죠니는 몸을 낮추었다.

“좋아.”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선명했다.

“이제 지저분한 막이군.”

상어가 뛰어올랐다.

죠니가 작살을 내질렀다.

밤의 바다 위에서, 피와 물보라가 함께 튀었다.

막은 닫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칠게 열렸다.

5막 — 상어들

그 아래, 바닷물과 피 사이로 한 줄이 새겨졌다.

— 도달한 것을 지키려는 순간, 사람은 자신까지 내어놓고 싶어진다 —
# 《회전하는 바다와 늙은 말》

## 5막 — 상어들

### — 도달한 것을 지키려는 순간, 사람은 자신까지 내어놓고 싶어진다 —

첫 번째 상어는 빠르게 왔다. 청새치가 그랬던 것처럼 깊은 곳에서 오래 돌지도 않았고, 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무게를 묻지도 않았다. 청새치는 죠니를 시험했고, 죠니도 청새치를 시험했다. 둘은 서로를 다치게 하면서도, 적어도 상대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상어는 달랐다. 그것은 피 냄새를 맡았고,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왔다. 그뿐이었다.

죠니는 작살을 들었다. 오른손은 이미 청새치를 찌를 때 자기 몫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굳어 있었고, 손바닥을 감싼 천 아래에서는 피가 다시 번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와 소금에 젖은 천이 손가락 사이에서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알아. 네 입장에선 퇴근 시간이겠지.”

상어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살을 갈랐다. 검은 등과 낮은 지느러미, 물 위로 잠깐 드러난 차갑고 단순한 눈. 죠니는 그 눈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할 틈도 없었다.

상어가 청새치의 옆구리를 물었다. 거대한 몸이 흔들렸고, 죠니는 작살을 내질렀다. 작살은 깊이 박혔다. 상어가 몸부림치자 작살대가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를 타고 올라와 그의 몸을 비틀었다. 죠니는 이를 악물었다가, 곧 풀었다. 너무 오래 이를 악물면 몸이 굳는다. 몸이 굳으면 늦어진다. 늦어지면 끝난다.

“너도 살려고 먹는 거겠지.”

그는 숨을 밀어내듯 말했다.

“나도 살려고 막는 거고.”

죠니는 작살대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상어의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지다가, 어느 순간 힘을 잃었다. 검은 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죠니는 숨을 몰아쉬며 작살대를 당겼다. 그러나 작살은 돌아오지 않았다. 죽은 상어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작살까지 함께 끌고 갔다.

죠니는 잠시 빈손을 보았다. 손에는 작살이 없었다. 배 옆에는 청새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청새치의 살은 조금 뜯겨나가 있었다.

그는 그 자리를 오래 보았다. 흰 살과 붉은 피. 방금까지 완전했던 결과가, 이제 완전하지 않았다.

“벌써 한 입이냐.”

목소리는 낮았다.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물속으로 사라진 작살 쪽을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비싼 한 입이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청새치의 피는 더 넓게 퍼졌다. 밤바다는 검었고, 피는 처음에는 붉었다가 곧 어둠에 섞였다. 하지만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피는 초대장이다. 보내고 싶지 않아도 바다가 대신 보낸다. 죠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배 안을 뒤졌다. 작살은 잃었다. 남은 것은 칼 하나와 노, 줄, 그리고 자기 몸뿐이었다.

죠니는 칼을 노 끝에 묶기 시작했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매듭은 자꾸 느슨해졌다. 한 번 실패하고,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에는 이빨까지 써서 줄을 당겼다. 피와 소금 맛이 입안에 번졌다.

“이런 걸 항구에서 보면 그레이가 싫어하겠지.”

그는 느슨한 매듭을 다시 당겼다.

“임시 장비 규격 미달, 뭐 그런 식으로.”

죠니는 묶은 칼을 흔들어보았다. 튼튼하지 않았다. 하지만 쓸 수는 있었다.

“그 정도면 됐어.”

그는 노 끝의 칼을 들고 배 옆에 섰다. 청새치는 조용히 배 옆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몸은 여전히 컸지만, 처음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살이 뜯겨나가서만은 아니었다. 한 번 손상된 성취는 이상하게 눈에 다르게 보인다. 죠니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아직 너야.”

그는 청새치에게 말했다.

“한 입 뜯겼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지.”

잠시 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한테도 편하고.”

바다 위에 두 번째 지느러미가 나타났다. 곧 세 번째도 보였다. 어둠 때문에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죠니는 입을 다물었다. 상어들은 첫 번째처럼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이제 피가 많았고, 먹이는 컸으며, 배 위의 인간은 지쳐 있었다. 그들도 그것을 아는 듯했다.

죠니는 배와 청새치 사이에 몸을 두었다. 우스운 자세였다. 작은 배 위의 한 남자가 바다와 상어들 사이에 서 있다. 무엇을 막겠다는 건가. 거대한 청새치인가. 자기 승리인가. 자기 고집인가. 아니면, 그곳까지 갔다는 사실인가.

상어 하나가 옆으로 들어왔다. 죠니는 노 끝의 칼을 찔렀다. 칼은 상어의 등 가까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깊지 않았다. 상어가 물러나는 사이, 다른 상어가 청새치의 꼬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죠니는 몸을 돌렸지만 늦었다. 상어가 물었고, 살이 뜯겨나갔다. 죠니는 이를 악물고 칼노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맞았다. 상어가 몸을 튕겼고, 물이 튀었고, 노가 부러질 듯 휘었다.

“그건 내 거야.”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죠니는 그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것.

청새치는 정말 그의 것이었나. 잡았으니 그의 것인가. 죽였으니 그의 것인가. 항구로 가져가려 했으니 그의 것인가. 아니면, 그곳까지 함께 간 시간이 있었으니 그의 것인가.

상어가 다시 돌았다. 죠니는 숨을 거칠게 쉬며 노를 고쳐 잡았다.

“좋아. 말 정정하지.”

상어가 다가왔다.

“전부 내 거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는 칼노를 낮게 겨눴다.

“하지만 너무 쉽게 가져가게 둘 생각도 없어.”

죠니는 다시 찔렀다. 칼이 상어의 머리 근처에 꽂혔고, 상어가 몸부림쳤다. 노가 손에서 빠질 뻔했다. 죠니는 버텼다. 손바닥이 다시 찢어지고, 천은 더 붉어졌다. 욕이 나왔다. 그 욕은 상어에게도, 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향했다.

상어는 결국 물러났지만 청새치의 살은 더 사라졌다. 죠니는 그 빈자리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점점 줄어든다. 자기가 지키는 동안에도, 싸우는 동안에도, 결과는 뜯겨나간다.

그는 갑자기 웃을 뻔했다. 정말 지독하게 익숙한 구조였다.

“그래.”

죠니는 낮게 말했다.

“세상 참 성실하네.”

밤은 더 깊어졌다. 상어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멀어졌다가 다시 왔고, 죠니는 그때마다 찔렀고, 때렸고, 밀어냈다. 처음에는 칼노가 있었다. 그다음에는 칼이 빠졌다. 상어의 몸에 박힌 채 사라졌다. 그러자 노만 남았다. 그는 노로 때렸다. 노는 상어를 죽이지 못했지만, 가끔 물러나게 할 수는 있었다. 그 정도면 싸움이 되었다. 잠시 동안은.

노가 부러졌을 때, 죠니는 부러진 노토막을 들고 잠깐 내려다보았다.

“좋아. 짧아졌네.”

상어 하나가 청새치의 옆구리로 달려들었고, 죠니는 노토막으로 그것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하고 축축한 소리가 났다. 상어가 비틀리는 사이 다른 상어가 반대쪽에서 물었다. 그는 돌아섰지만 늦었다. 살이 또 뜯겼다.

그 순간 몸이 먼저 나가려 했다. 청새치 쪽으로, 상어 쪽으로, 바다 속으로라도 뛰어들 듯이. 죠니는 아주 잠깐 멈췄다. 자기 발을 보았다. 아직 배 위에 있는 발. 아직 배 안에 남아 있는 몸.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자신도 함께 뜯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조금씩 뜯기고 있었다. 손, 어깨, 피, 숨, 고집, 증명하고 싶은 마음, 도달한 것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모든 것이 상어들에게 살점처럼 던져지고 있었다.

“너를 지키는 건지.”

상어가 다시 돌았다.

“나를 증명하는 건지.”

죠니는 부러진 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끔 헷갈린다니까.”

상어가 달려들었다. 죠니는 노토막을 휘둘렀고, 상어가 벌린 입 안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상어가 물었다. 노토막이 부서졌다. 죠니의 손이 빈손이 되었다. 상어는 물러났지만 무기는 사라졌다.

그는 빈손을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지쳤다. 정말 지쳤다.

“이제 맨손으로 하라고?”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좀 너무하네.”

그러나 상어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다시 왔다. 죠니는 배 안에 남은 작은 나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때리고 밀고 소리쳤다. 피와 물이 튀었다. 청새치의 살은 계속 줄었고, 죠니는 계속 싸웠다. 밤은 그 모든 것을 삼켰다.

어느 순간 죠니는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상어들이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바다에는 언제나 더 있다. 다만 청새치에게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거의 사라졌을 뿐이다. 상어들은 목적을 잃었거나, 목적을 달성했다.

배 옆에는 거대한 뼈대가 남아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등뼈, 길고 아름다웠던 몸의 구조, 창처럼 뻗은 머리. 넓었던 살은 거의 없었다.

죠니는 배 안에 주저앉았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작살도 없고, 칼도 없고, 노도 멀쩡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피 묻은 손과, 뜯겨나간 청새치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배였다. 그는 숨을 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숨에서 기침이 나왔다. 목 안에 소금기가 있었다.

상어들의 지느러미는 보이지 않았다. 밤은 너무 조용했다. 죠니는 배 옆의 뼈를 오래 보았다. 완전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뼈는 남았다. 크게, 분명하게, 부정할 수 없게.

“그래도 넌 컸어.”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로 컸어.”

죠니는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오히려 얼굴에 피와 소금이 더 묻었다.

“항구 사람들이 보면 믿긴 하겠네.”

그는 배 옆의 뼈를 보았다.

“살은 없지만.”

죠니는 웃었다. 조금 소리가 난 웃음이었다. 쓴웃음이었지만, 완전히 허무한 웃음은 아니었다.

“미안하다.”

아까는 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왔다. 죠니는 잠시 그 말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안하긴 한데, 후회는 아냐.”

이상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맞는 말이었다. 그는 청새치를 잡았다. 죽였다. 지키지 못했다. 상어들에게 거의 다 빼앗겼다. 자기 몸도 많이 깎았다. 그래도 그 바다로 나간 것을 후회하는가. 아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줄을 놓을 것인가. 아니.

다만 다음에는 좀 덜 멍청하게 싸워야겠지. 죠니는 자기 손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너를 지키겠다고 나까지 전부 던지는 건, 좀 아니었어.”

밤바다가 조용히 흔들렸다. 그는 등을 배에 기대고 별을 보았다. 별은 아까보다 더 많아 보였다.

“웃기지.”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아팠다.

“결과가 거의 다 뜯겨나갔는데, 그래도 잡았다는 생각은 사라지질 않아.”

한참 뒤, 그는 덧붙였다.

“그게 문제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네.”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죠니는 고개를 돌려 배 옆의 뼈를 보았다.

“뭐, 지금은 다행 쪽으로 해두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항구로 돌아가야 했다. 노는 부러졌고, 손은 엉망이고, 배는 무거웠다. 하지만 돌아가야 했다. 뼈만 남았더라도. 아니, 뼈만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돌아가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바다 위에서 끝난 일이 된다. 죠니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도달은 돌아가야 삶이 된다.

그는 부러진 노를 다시 잡았다. 쓸 수 있는 부분은 우스울 정도로 짧았다.

“이걸로 가라고?”

그는 노를 물에 넣었다.

“좋아. 오늘은 너도 고생한다.”

배는 제대로 저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둔중한 노인처럼 움직였다. 아주 조금. 죠니는 다시 저었다. 배는 천천히 방향을 잡았고, 청새치의 뼈는 배 옆에서 물살을 갈랐다. 상어들이 뜯어간 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작살도 돌아오지 않는다. 피도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배는 움직였다.

죠니는 이를 악물었다가, 곧 풀었다.

“또 멀어졌네.”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그래도 내 바다였어.”

잠시 뒤, 그는 덧붙였다.

“언제나의 돌격이 아니라, 물고기였지만.”

피곤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작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웃음이었다. 작은 배는 밤바다를 헤치며, 아주 느리게 항구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막은 피 냄새와 소금 냄새 속에서 천천히 낮아졌다.

**6막 — 뼈만 남은 귀환**

그 아래, 부러진 노 끝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한 줄이 남았다.

**— 빼앗긴 결과가 도달한 사실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프롤로그 — 오늘이라는 무대

### — 이것도 극이야? 그냥 일인데 —

아침은 대체로 극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죠니 죠스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쟁터의 새벽처럼 피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왕궁의 대관식처럼 금실과 향 냄새가 섞이는 것도 아니며, 신전의 축일처럼 누군가가 종을 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직 덜 깬 사람들의 발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장부가 어디 갔습니까?” 하고 묻는 소리와, 또 다른 누군가가 “전하께서 가져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소리로 시작되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러니까, 더 문제였다.

평범한 아침은 방심하게 만든다. 사람이 정말로 망가지는 건 대개 장엄한 전투 한가운데가 아니라,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하루가 조금씩 삐걱이다가 끝내 발목을 잡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죠니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바깥의 빛은 아직 부드러웠고, 성벽 아래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물동이를 들고 지나갔고, 누군가는 말에게 여물을 주었으며, 아이 하나는 빵을 훔치다 들켜 도망치고 있었다. 훔친 빵을 든 아이는 빠르지 않았지만, 잡으러 가는 어른도 진심으로 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죠니는 그 광경을 보며 낮게 말했다.

“좋은 추격전은 아니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온 푸리나였다.

“그럼 제목을 붙여주면 좋아질지도 모르지!”

죠니는 고개를 돌렸다. 푸리나는 이미 아침부터 무언가를 꾸민 얼굴이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녀가 저런 얼굴을 할 때마다 누군가는 배역을 맡았고, 누군가는 소품을 들었고, 누군가는 자기가 왜 무대 위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대체로 그 셋 중 하나는 죠니였다.

그는 잠깐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아침부터?”

“아침이니까.”

“그게 이유가 돼?”

“물론.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은 원래 가장 훌륭한 개막 시간이야.”

“잠을 덜 깬 사람을 속이기 좋은 시간이라는 뜻이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양피지 한 장을 펼쳤다. 양피지에는 제목으로 보이는 글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제목치고는 지나치게 길었다. 죠니는 그걸 보자마자 피곤해졌다.

“읽지 마.”

“아직 안 읽었는데?”

“이미 길어 보여.”

푸리나는 양피지를 가슴에 안고 말했다.

“오늘의 극은 아주 특별해. 전쟁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왕관도 아니고, 죽은 자의 성도 아니야.”

“그럼 더 위험하네.”

“왜?”

“네가 특별하지 않은 걸 특별하게 만들려고 할 때 제일 피곤하거든.”

푸리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그건 좀 맞아.”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해서 고맙네.”

푸리나는 웃으며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창밖을 보았다. 아침빛 아래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하루는 움직이고 있었다. 물류 창고 쪽에서는 누군가 물건 목록을 부르고 있었고, 병사들은 교대 인원을 확인하고 있었으며, 성문 쪽에서는 전선 시찰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거대한 사건은 없었다. 하지만 작은 일들은 이미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그냥 하루야.”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럼 극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극이지.”

죠니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 말, 오늘 몇 번이나 할 생각이야?”

“필요할 때마다.”

“많겠네.”

그때 문밖에서 낮은 노크 소리가 났다. 그레이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장부가 있었다. 장부가 있다는 것은 대개 좋지 않은 뜻이었다. 특히 그레이가 아침 일찍 장부를 들고 나타났다면 더더욱.

그레이는 푸리나와 죠니를 번갈아 보았다.

“전하. 그리고 죠니 경. 아침 회의 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죠니는 그레이의 장부를 보고 말했다.

“그거 죽은 장부야?”

그레이는 아주 잠깐 멈췄다.

“장부는 생물체가 아닙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표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네 표정인가.”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죠니는 더 묻지 않았다.

푸리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문제야?”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페이지마다 숫자가 빽빽했다. 보급품, 마차, 말, 의약품, 수리용 목재, 화살, 빵, 그리고 누군가가 왜 기록했는지 알 수 없는 고양이 인형 세 개.

그레이가 말했다.

“전선 시찰용 배급 수량과 창고 반출 기록이 맞지 않습니다. 차이는 크지 않지만, 그대로 두면 오후에 추가 조정이 필요합니다.”

죠니는 장부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숫자가 틀렸다는 말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특히 누군가가 그것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보고 있을 때는 더 그렇다.

그는 결국 장부를 흘끗 보았다.

“여기.”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입니까?”

죠니는 손가락으로 한 줄을 가리켰다.

“이 숫자, 여기서 이미 죽었네.”

그레이는 다시 한 번 멈췄다.

“숫자는 죽지 않습니다.”

“이건 죽었어. 장례 치러줘.”

푸리나가 웃음을 참다가 실패했다. 그레이는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지만, 곧 장부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죠니가 가리킨 줄을 따라가더니, 조용히 말했다.

“확실히 이 항목에서 중복 계산이 있습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봐. 사망 확인.”

“정정하겠습니다. 사망이 아니라 중복입니다.”

“그게 장부식 장례인가 보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펜이 움직였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죠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오늘의 극이 벌써 시작됐다는 얼굴.”

죠니는 장부와 푸리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극이야?”

푸리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죠니는 천천히 말했다.

“그냥 일이잖아.”

“그러니까 극이지.”

죠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이 하루, 시작부터 피곤하네.”

---

아침 회의실은 조금 뒤에 더 피곤해졌다.

레이튼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 자체는 평범했다. 국경 마을 쪽의 물자 배분, 전선 시찰 경로, 피난민 임시 숙소, 주변 아미르들의 동향 확인, 그리고 푸리나가 몰래 넣은 “공연용 이동무대 수레의 공식 명칭” 안건까지. 마지막 것은 그레이가 회의 목록에서 빼려 했지만, 푸리나는 끝까지 “이름이 있어야 예산도 있다”고 주장했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자세는 아니었다. 그러다 푸리나가 이동무대 수레의 이름을 “달빛 아래 노래하는 방랑 고양이 극장마차 1호”로 제안하는 순간, 그는 입을 열었다.

“그 수레, 이름 부르다가 바퀴 빠지겠는데.”

푸리나는 바로 반박했다.

“이름에는 혼이 있어.”

“바퀴에는 축이 있어.”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축이 더 중요합니다.”

푸리나는 배신당한 얼굴로 그레이를 보았다.

레이튼은 그때까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회의실의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죠니는 그 기척을 느끼고 미리 머리를 짚었다.

“레이튼.”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네, 죠니 경.”

“그 표정은 질문할 표정이야.”

“훌륭한 관찰입니다.”

“하지 마.”

“하지만 이미 모두가 답을 가지고 있는 듯하여, 질문이 필요한 순간으로 보입니다.”

죠니는 눈을 감았다.

“제일 싫은 말이야. 맞는 말이라서.”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고, 회의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우리는 전선 시찰 경로를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군요. 안전한 경로란, 누구에게 안전한 경로입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몇몇 병사들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 죠니는 정말로 머리가 아픈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나왔다.”

레이튼이 말했다.

“시찰단이 다치지 않는 경로와, 피난민이 더 빨리 발견되는 경로가 다르다면, 어느 쪽을 안전하다고 부를 것인지 정해야 할 듯합니다.”

그 말은 회의실을 멈췄다. 진행은 늦어졌다. 시간이 걸렸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답이 다시 열렸다.

죠니는 그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 점이 더 싫었다.

“레이튼.”

“네.”

“너는 가끔 문을 열어놓고, 그 문이 왜 복도 한가운데 생겼는지 설명을 안 해.”

레이튼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문을 지나갈지 말지는, 제가 정할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 대답도 싫어.”

“하지만?”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필요하겠지.”

레이튼은 만족스러운 듯 차를 다시 들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회의록에 새로운 항목을 만들었다. **안전의 정의 재검토.** 죠니는 그 문구를 보고 말했다.

“오늘 장부에 이어 단어까지 죽겠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단어도 생물체가 아닙니다.”

“오늘은 많이 죽어.”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회의는 느려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 더 나아졌다.

---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하융이 전선 시찰 준비를 마쳤다.

그는 마당에서 죠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지 낀 외투, 오래 걸은 사람의 자세, 그리고 현실 뒤쪽에 겹쳐진 무수한 가능성을 보는 듯한 눈. 하융은 늘 어딘가에 반쯤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현재에 있으면서도, 선택되지 않은 길들의 창가에 손을 얹고 있는 사람.

죠니는 말안장을 확인하며 말했다.

“오늘도 먼 길이야?”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소.”

“좋은 시작이네.”

“다만 가야 할 길이오.”

“그건 더 나쁜 말이고.”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크지 않았고, 약간 오래된 종이처럼 조용했다.

“그럼에도 경은 올 것이오.”

죠니는 고삐를 잡았다.

“그 말은 좀 건방진데.”

“틀렸소?”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에 올랐다.

“가자.”

그들은 성문을 나섰다. 푸리나의 무대는 여기서 크게 빛나지 않았다. 아니, 빛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죠니는 길 위의 먼지, 말발굽 소리, 멀리 보이는 피난민 수레, 병사들의 흐트러진 줄, 그리고 하융이 어느 순간 살짝 고개를 돌려 죽은 가능성을 보는 듯한 기척 속에서 이 하루가 이미 극이 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푸리나가 이걸 다 보고 있으면 좀 싫은데.”

하융이 물었다.

“보고 있으면 곤란하오?”

“멋있는 장면으로 만들까 봐.”

“경은 멋있는 것을 싫어하오?”

“내가 멋있는 척하는 걸 싫어하지.”

하융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차이는 중요하구려.”

“그래. 레이튼한테 배우지 마.”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러나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았다. 작은 피난민 무리가 길을 잘못 들어 낮은 언덕 아래에 모여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수레바퀴를 고치다 손을 다쳤다. 큰 사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방치하면 늦어진다. 늦어지면 밤이 온다. 밤이 오면, 작은 사고는 큰 사고가 된다.

죠니는 말에서 내렸다.

“바퀴 봐.”

하융이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였다. 죠니는 다친 사람 쪽으로 갔다. 손을 감싸고 있는 천은 피로 젖어 있었다. 다친 사람은 자꾸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는 말은 대체로 믿을 게 못 된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괜찮으면 손을 그렇게 숨기진 않지.”

남자는 말을 잃었다.

죠니는 천을 풀어 상처를 보았다.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럽게 찢어졌다. 그는 자기 물통을 열어 상처를 씻기고, 대충이나마 묶었다. 그 과정에서 남자가 떨자, 죠니는 짧게 말했다.

“아픈 건 정상이라서 그래.”

남자는 죄송하다고 했다.

죠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과할 일은 아니고.”

그는 상처를 묶은 뒤 일어났다. 그때 수레 쪽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났고, 하융이 손짓했다. 바퀴가 완전히 빠지기 직전이었다. 죠니가 급히 움직였고, 빠지는 수레를 막으려다 손목을 살짝 삐끗했다.

아주 큰 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팠다.

“젠장.”

하융이 다가왔다.

“괜찮소?”

죠니는 자기 손목을 돌려보았다.

“괜찮다고 하면 네가 안 믿을 거잖아.”

“그렇소.”

“그럼 좀 아픈 걸로.”

하융은 수레를 안정시키고, 피난민들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도왔다. 시간이 걸렸다. 예정된 시찰은 늦어졌다. 보고서에는 비효율이라고 적힐지도 몰랐다. 그러나 피난민들은 다시 길을 찾았다.

그중 한 아이가 죠니에게 빵 조각을 내밀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나한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셨으니까요.”

빵은 작았다. 조금 딱딱했고, 모양도 좋지 않았다. 죠니는 잠시 그것을 보다가 받아 들었다.

“고맙네.”

아이는 달려갔다.

죠니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은 별로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융이 말했다.

“오늘 온 보람은 있었구려.”

죠니는 입안의 빵을 삼켰다.

“그 말,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하융은 웃었다.

“그럼 경이 하시오.”

죠니는 피난민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먼지가 올랐다. 햇빛은 뜨거웠다. 손목은 아팠다. 입안의 빵은 퍽퍽했다. 모든 것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낮게 말했다.

“그래.”

잠깐의 침묵 뒤.

“오늘 온 보람은 있네.”

---

그날 저녁, 하루는 이미 충분히 길었다.

하지만 하루는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죠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레이는 수정된 장부를 들고 왔고, 푸리나는 아침에 미뤄둔 긴 제목을 끝내 발표하려 했으며, 레이튼은 전선 시찰의 보고를 듣고 “피난민이 길을 잘못 든 이유는 길이 나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지도에서 그들의 입장이 빠졌기 때문입니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죠니는 식탁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들 정말 지치지도 않네.”

푸리나가 말했다.

“지쳤어.”

“그런 사람의 얼굴이 아닌데.”

“지쳤지만, 제목은 붙일 수 있어.”

“그게 더 무서워.”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죠니 경. 낮에 확인한 피난민 수레와 관련해 배급량을 조정해야 합니다.”

“지금?”

“지금 하지 않으면 내일 오전 보고가 늦어집니다.”

“내일 오전 보고가 좀 늦어지면?”

그레이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죠니는 손을 들었다.

“알았어. 장부 줘.”

레이튼은 차를 따르며 말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생기지 마.”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이미 생겼습니다.”

“죽여.”

“질문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것입니다.”

“장부 숫자도 오늘 죽었는데 질문이라고 못 죽을 건 없지.”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는 웃지 않았지만, 펜 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하융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아스트리트는 그 모든 광경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이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모두 피곤했다. 하루는 엉망이었다. 회의는 늦어졌고, 장부는 틀렸고, 질문은 사람들을 멈추게 했고, 전선 시찰에서는 사고가 생겼으며, 죠니는 손목을 다쳤다. 그런데도 이 식탁에는 이상한 온기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고, 지치게 하고, 놀리고, 붙잡고 있었다.

아스트리트는 그 온기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죠니는 장부를 보다가 빵 조각을 입에 물었다. 낮에 받은 것과 비슷하게 딱딱한 빵이었다. 그는 그것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다시 살 수 있으면, 좀 덜 엉망으로 만들 수 있겠는데.”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식탁 위의 촛불이 흔들렸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아주 조금 빛났다.

“죠니.”

죠니는 빵을 씹다 말고 그녀를 보았다.

“왜.”

푸리나는 천천히 웃었다. 극장주가 새로운 막의 문을 발견했을 때 짓는 웃음이었다.

“방금 좋은 말을 했어.”

죠니는 즉시 얼굴을 찡그렸다.

“취소할게.”

“늦었어.”

촛불이 다시 흔들렸다. 식탁의 그림자가 길어졌고, 창밖의 밤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딘가에서 아침빛이 다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잡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무언가가 겹쳐지는 것을 본 사람처럼 조용해졌다.

아스트리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죠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리나.”

“응.”

“이거 네 짓이야?”

푸리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 말이 문을 열었고 내 극장이 그 문을 무대로 만든 거지.”

“그럼 네 짓이네.”

“대체로.”

죠니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하루도 충분히 길었는데.”

푸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다시 살아보자.”

“싫다고 하면?”

“싫어하는 얼굴도 배역의 일부야.”

“최악이네.”

그러나 촛불은 이미 아침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식탁 위의 장부가 사라지고, 빈 회의실의 아침 공기가 다시 열렸다. 푸리나의 긴 제목이 아직 읽히기 전의 시간. 그레이의 장부가 아직 펼쳐지기 전의 시간. 레이튼의 질문이 아직 회의실을 멈추기 전의 시간. 하융과 전선으로 나가기 전의 시간. 아스트리트가 이 이상한 하루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던 시간.

죠니는 다시 창가에 기대어 있었다.

아침이었다.

방금 전까지 입안에 남아 있던 딱딱한 빵 맛은 사라져 있었다. 손목의 통증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빵과 통증이 있었다는 기억은 남아 있었다.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들어왔다. 아침부터 무언가를 꾸민 얼굴로.

“죠니!”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아.”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오늘의 극은—”

죠니가 말을 끊었다.

“제목 읽기 전에 하나만 말해두자.”

“뭔데?”

죠니는 창밖을 보았다. 빵을 훔쳐 달아나는 아이가 다시 뛰고 있었다. 어른은 이번에도 진심으로 쫓지 않았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이 하루, 생각보다 귀찮아질 거야.”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극이지.”

죠니는 눈을 감았다.

“그래.”

잠깐의 침묵.

“또 그 말이네.”

막이 천천히 열렸다.

**1막 — 첫 번째 하루: 엉망인 하루**

그 아래, 아침 회의록의 빈 칸처럼 한 줄이 남았다.

**— 고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건, 아직 붙잡고 싶은 것들도 많다는 뜻이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1막 — 첫 번째 하루: 엉망인 하루

### — 고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건, 아직 붙잡고 싶은 것들도 많다는 뜻이다 —

죠니는 두 번째로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정확히 말하면, 첫 번째로 반복되는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 차이를 따지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창밖에서 빵을 훔친 아이가 다시 달리고 있었고, 어른은 다시 그 아이를 진심으로 쫓지 않고 있었으며, 문밖에서는 다시 누군가가 “장부가 어디 갔습니까?”라고 묻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죠니는 창가에 기대어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제 본 일이라기엔 너무 선명했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귀찮았다. 그는 자기 손목을 천천히 돌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낮에 수레를 막다가 삐끗했던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아팠던 기억은 남아 있었다.

“좋네.”

그는 낮게 말했다.

“아프진 않은데, 아팠다는 건 기억난다라.”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들어왔다. 얼굴에는 다시 무언가를 꾸미는 빛이 있었다. 방금 전에도 본 얼굴이었다.

“죠니!”

죠니는 먼저 말했다.

“제목 읽지 마.”

푸리나가 멈췄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할 얼굴이었어.”

“그런 얼굴이 따로 있어?”

“너는 있어.”

푸리나는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양피지를 등 뒤로 숨겼다.

“좋아. 그럼 제목은 나중에.”

“나중에도 안 읽으면 더 좋고.”

“그건 안 돼. 제목을 잃은 극은 길을 잃은 고양이와 같아.”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 말도 제목 같아.”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좋지?”

“길어.”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그 얼굴을 보고 자기가 아까 제목을 막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푸리나는 제목을 읽지 않았지만, 제목 같은 말을 했다. 고친 것 같았는데 그대로였다.

그때 그레이가 들어왔다. 손에는 장부가 있었다. 그 장부도 다시 있었다. 죠니는 그 장부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이미 어디가 틀렸는지 알고 있다. 지금 바로 말해주면 아침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장부가 덜 죽고, 그레이가 덜 심각해지고, 회의에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입을 열려 했다.

그러다 멈췄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전하. 그리고 죠니 경. 아침 회의 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죠니는 그녀가 정확히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반복되는 하루라는 게 이런 식이라면 꽤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같다는 것은 안정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시험한다. 다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말을 들을 때, 같은 반응을 할 것인가. 아니면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남의 말을 잘라낼 것인가.

그레이가 페이지를 넘겼다.

“전선 시찰용 배급 수량과 창고 반출 기록이 맞지 않습니다. 차이는 크지 않지만, 그대로 두면 오후에 추가 조정이 필요합니다.”

죠니는 장부를 보았다.

아까 자신이 가리켰던 줄이 거기에 있었다. 중복 계산. 죽은 숫자. 장례가 필요한 숫자.

그는 손가락을 들어 바로 가리켰다.

“여기.”

그레이가 멈췄다.

“아직 설명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복됐어. 이쪽에서 한 번, 여기서 또 한 번 잡혔지.”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죠니가 가리킨 부분을 따라가며 확인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곧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항목에서 중복 계산이 있습니다.”

“그렇지.”

“어떻게 바로 아셨습니까?”

죠니는 잠시 대답을 골랐다.

“숫자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숫자는 생물체가 아닙니다.”

죠니는 조금 안심했다. 이건 그대로였다.

“그래. 그 말도 다시 듣네.”

“다시?”

“아무것도 아니야.”

그레이는 의심스러운 듯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정정 표시를 하고 장부를 닫았다. 문제는 훨씬 빨리 해결되었다. 푸리나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오. 오늘은 빠르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거잖아.”

“좋지.”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크게 웃지는 않았다. 장부가 죽었다느니 장례를 치르라느니 하는 실없는 대화가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죠니는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아주 작은 차이였다. 별것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았다.

---

회의는 빨리 진행되었다.

죠니는 레이튼이 찻잔을 내려놓기 전에 이미 그가 무엇을 물을지 알고 있었다. 안전한 경로란 누구에게 안전한 경로인가. 시찰단이 덜 다치는 길과 피난민을 더 빨리 찾는 길이 다르다면, 어느 쪽을 안전이라 부를 것인가.

좋은 질문이었다.

귀찮은 질문이기도 했다.

죠니는 레이튼이 입을 열려는 순간 먼저 말했다.

“시찰단 기준 안전이랑 피난민 기준 안전이 다를 수 있어. 경로 두 개로 나눠서 보자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레이튼은 찻잔을 든 채 죠니를 보았다.

푸리나도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의 펜은 이미 새 항목을 만들고 있었다. **안전 기준 이원화.**

레이튼은 천천히 말했다.

“제가 하려던 질문과 비슷하군요.”

죠니는 벽에 기대며 말했다.

“그래 보이더라.”

“제가 아직 질문하지 않았는데도요?”

“표정이 질문이었어.”

레이튼은 잠시 웃었다.

“그렇다면 죠니 경께서 질문을 대신 열어주신 셈이군요.”

“열었다기보단, 문고리만 먼저 잡은 거지.”

“그 차이는 중요합니까?”

죠니는 잠깐 멈췄다.

나왔다.

질문은 줄였는데, 질문은 다른 얼굴로 다시 생긴다.

그는 낮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또 시작하지 마.”

레이튼은 온화하게 말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시작이야.”

푸리나는 웃었다. 그러나 회의는 오래 멈추지 않았다. 레이튼의 질문은 이미 정리된 항목으로 처리되었고, 사람들은 빠르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효율적이었다. 모두가 덜 피곤해 보였다.

죠니는 그것도 알아차렸다.

좋은 일이었다.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데 회의실 한쪽에서 묘하게 빠진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답 앞에서 멈추는 침묵. 그 질문 때문에 짜증을 내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 죠니는 그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라지니 알 수 있었다.

그건 귀찮았지만, 없으면 조금 얕아진다.

---

정오 전, 하융과의 전선 시찰 준비도 더 빨리 끝났다.

죠니는 이미 어느 길에서 피난민 수레를 만날지 알고 있었다. 그 바퀴가 어떻게 빠질지, 누가 손을 다칠지, 자신이 어디서 손목을 삐끗할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미리 막으면 된다. 고칠 수 있는 하루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하융은 말을 준비하며 죠니를 보았다.

“오늘은 무언가 알고 있는 얼굴이오.”

죠니는 고삐를 잡았다.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좀 이상하네.”

“기분 나쁘오?”

“그쪽은 아니고. 네가 하면 맞는 말 같아서 귀찮아.”

하융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맞는 말이겠구려.”

“그런 식으로 확정하지 마.”

둘은 성문을 나섰다. 이번에는 죠니가 먼저 길을 틀었다. 하융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예정 경로와 조금 다르오.”

“알아.”

“이유가 있소?”

“있어.”

“말해줄 수 있소?”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수레 하나가 고장 날 예정이야.”

하융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죽은 가능성과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보는 사람이, 지금 죠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예정이라.”

“말이 이상한 건 알아.”

“아니오. 이상하나, 낯설지는 않소.”

그 말은 하융에게만 가능한 대답이었다.

죠니는 수레가 고장날 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아직 피난민 무리는 언덕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는 하융과 함께 길목을 정리했고, 바퀴가 빠질 만한 돌을 치웠고, 좁은 경사를 우회하도록 표식을 남겼다. 얼마 뒤 피난민 무리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수레가 빠지지 않았다. 손을 다친 남자도 없었다. 아이도 놀라 울지 않았다. 낙오도 없었다.

좋은 일이다.

정말 좋은 일이다.

죠니는 그들이 무사히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손을 다치지 않았으므로 죠니에게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는 빵 조각을 주지 않았다.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레는 삐걱이긴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감사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하융은 조용히 그 모습을 보았다.

“좋은 판단이었소.”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손도 다치지 않았구려.”

“그것도 좋고.”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그런데 표정은 왜 그러오?”

죠니는 자기 손목을 돌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좋다. 아프지 않은 건 좋은 일이다. 다친 사람도 없다. 늦어지지도 않았다. 보고서도 깔끔해질 것이다.

그런데 죠니는 낮에 받았던 딱딱한 빵 조각을 떠올렸다.

맛도 없던 빵.

감사하다고 내밀던 아이.

하융이 “오늘 온 보람은 있었구려”라고 말하던 순간.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물론 사라지는 편이 맞다. 사고가 없었으니까. 다치지 않았으니까. 아이가 감사해야 할 일도 없었으니까. 죠니는 그걸 모르지 않았다.

“아니.”

그는 말했다.

“좋은 하루야.”

하융은 잠시 그를 보았다.

“좋은 하루와 다시 살고 싶은 하루는 같소?”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너도 레이튼한테 배웠냐?”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때때로 질문은 전염되오.”

“최악의 병이네.”

그러나 죠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

저녁은 더 깔끔했다.

회의록은 덜 지저분했고, 장부 오류는 아침에 이미 고쳐졌으며, 피난민 수레 문제도 없었다. 그레이는 훨씬 빠르게 보고를 정리했다. 푸리나는 아침에 읽지 못한 긴 제목을 다시 읽으려 했지만, 죠니가 “그 제목은 내일도 살아 있을 거야”라고 말하자 묘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접어두었다. 레이튼은 질문을 몇 개 던졌지만, 이미 낮에 안전 기준이 정리되어 있어 논의는 빠르게 끝났다.

모든 것이 나아졌다.

정확히는, 매끄러워졌다.

식탁에는 피곤함이 덜했다. 대신 이상하게 빈틈도 덜했다. 푸리나가 크게 웃는 순간은 줄었고,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정말로 곤란한 얼굴을 하는 시간도 없었고, 레이튼의 질문 때문에 모두가 멈춰 서로를 보는 침묵도 짧았다. 하융은 차를 마셨고, 죠니는 빵을 먹었다. 빵은 낮의 아이가 준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식탁의 빵이었다.

맛은 조금 더 나았다.

그런데 더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저녁 식탁 한쪽에서 이 하루를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낮에 죠니가 피난민 수레의 사고를 미리 막았다는 보고를 들었다.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치지 않았고, 지연도 없었고, 피난민도 안전했다. 그녀가 믿는 생명의 긍정과도 맞는 일이다.

그런데 죠니는 아침보다 더 조용했다.

아스트리트는 결국 물었다.

“죠니 경.”

죠니는 빵을 씹다 말고 그녀를 보았다.

“응.”

“오늘은 좋은 하루였던 것 아닙니까?”

죠니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그를 보았다. 그레이도 기록판에서 눈을 들었다. 레이튼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융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죠니는 천천히 말했다.

“좋은 하루였지.”

아스트리트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만족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입니까?”

죠니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좋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짜증났다.

“글쎄.”

그는 말했다.

“덜 엉망이긴 한데.”

잠시 멈췄다.

“이상하게, 덜 살아 있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그것은 이상한 말이었다. 덜 다치고, 덜 실패하고, 더 안전한 하루가 어떻게 덜 살아 있을 수 있는가.

푸리나는 아주 조용히 웃었다. 웃었다기보다, 무언가가 이제 시작됐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럼.”

그녀가 말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뭐.”

“한 번 더 살아볼래?”

죠니는 즉시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그 질문, 무대의 질문이지.”

“응.”

“거절하면?”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거절하는 하루도 볼 수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구멍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이 여러 개 있는 것에 가깝겠지요.”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는 지금 조용히 할 수 있었어.”

“그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선택하지 그랬어.”

하융이 낮게 웃었다.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식탁 위의 빵을 보았다. 조금 더 맛있지만, 덜 기억에 남는 빵. 아프지 않은 손목. 감사할 필요가 없어진 아이. 빠르게 끝난 회의. 덜 웃은 푸리나. 덜 곤란했던 그레이. 덜 짜증났던 레이튼. 덜 먼지가 묻은 하융.

완벽하진 않았지만, 첫 번째보다 나은 하루.

그런데 왜 이렇게 이상한가.

죠니는 낮게 말했다.

“좋아.”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정말?”

“어차피 네가 안 멈출 것 같아서.”

“그럼 세 번째 하루!”

“그렇게 신나게 말하지 마. 내 하루야.”

“그러니까 신나는 거지.”

촛불이 흔들렸다. 식탁의 그림자가 다시 길어졌다. 저녁의 소리가 멀어지고, 어딘가에서 아침의 발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장부가 다시 닫히고, 회의록이 다시 비어가고, 피난민 수레는 아직 고장나기 전의 길 위로 돌아갔다.

아스트리트는 이번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죠니는 그 눈을 보며 생각했다.

저 질문도 아마 다시 오겠네.

그리고 아침이 열렸다.

**2막 — 두 번째 하루: 고친 하루**

그 아래, 너무 깔끔하게 정리된 회의록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좋은 결과가 늘 다시 살고 싶은 하루를 만들지는 않는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2막 — 두 번째 하루: 고친 하루

### — 좋은 결과가 늘 다시 살고 싶은 하루를 만들지는 않는다 —

세 번째 아침은 아주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죠니는 창가에 기대어 있었고, 빵을 훔친 아이는 다시 뛰고 있었으며, 그 아이를 쫓는 어른은 이번에도 진심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는 누군가 장부를 찾고 있었고,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다. 푸리나는 들어오지 않았고, 그레이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레이튼의 질문도 아직 찻잔 속에 잠겨 있었다. 하융은 아직 성문 밖의 먼지 속에 없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기 전이었다.

죠니는 손목을 돌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첫 번째 하루의 통증도, 두 번째 하루의 공백도, 모두 몸에서는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남아 있었다. 통증은 사라졌는데, 통증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공백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사라진 것까지 기억한다.

그는 창밖의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빵을 품에 안고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어른은 느릿하게 따라가다가, 곧 포기했다.

“이번엔 저 빵도 안 뺏기게 할 수 있겠네.”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다.

그게 문제였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유혹이다. 틀린 숫자를 미리 고칠 수 있고, 푸리나의 긴 제목을 미리 자를 수 있고, 레이튼의 질문을 미리 정리할 수 있으며, 피난민의 수레를 고장나기 전에 옮길 수 있다. 어제는 그랬다. 결과는 더 좋았다. 그런데 하루는 묘하게 얇아졌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더 철저하게 하면 된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죠니는 낮게 웃었다. 자기 생각이 너무 뻔해서였다. 덜 엉망인 하루가 부족하다면, 완전히 잘 고친 하루를 만들면 된다.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결론인지 알면서도, 사람은 종종 그 방향으로 한 번 더 간다.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들어왔다. 얼굴에는 다시 그 빛이 있었다. 극장주가 오늘 하루를 대본으로 만들 준비를 끝낸 얼굴.

“죠니!”

죠니는 그녀가 양피지를 펼치기 전에 말했다.

“오늘 제목은 짧게.”

푸리나는 멈췄다.

“짧게?”

“응.”

“얼마나?”

“다섯 단어 이하.”

푸리나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건 제목이 아니라 표지판이야.”

“좋네. 길 잃을 일은 없겠어.”

푸리나는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분명히 열 단어는 넘을 제목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말했다.

“좋아. 오늘 제목은…… 《좋은 하루》.”

죠니는 눈썹을 조금 올렸다.

“정말?”

“다섯 단어 이하잖아.”

“극단적이네.”

“짧게 하라며.”

푸리나는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스스로도 그 단순함이 우스운 듯 입가가 올라가 있었다. 죠니는 그 웃음을 보았다. 첫 번째 하루의 웃음과는 달랐다. 그때는 제목이 너무 길어서, 그것을 두고 장난이 길어졌고, 그 장난이 하루의 첫 번째 틈이 되었다. 지금은 짧고, 깔끔하고, 효율적이었다.

나쁘지 않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조금 덜 웃겼다.

그레이가 들어왔다. 손에는 장부가 있었다. 죠니는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았다.

“창고 반출 기록. 세 번째 줄하고 일곱 번째 줄. 중복.”

그레이는 문가에서 멈췄다.

“아직 장부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펼치면 그렇게 나와.”

그레이는 의심스럽게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 확인했다. 정확히 그 줄들이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죠니를 보았다.

“이미 검토하셨습니까?”

“대충.”

“대충으로 맞출 수 있는 오류가 아닙니다.”

“그럼 잘 대충 봤나 보지.”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일은 빨라졌다. 그녀는 오류를 고쳤고, 장부는 깔끔해졌으며, 아침 회의 전에 생겼던 작은 소란은 사라졌다. 죠니는 장부를 들여다보며 숫자가 죽었네, 장례 치러줘,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레이도 숫자는 생물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정확한 결과.

짧은 시간.

쓸데없는 농담 없음.

죠니는 장부가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종이가 서로 맞물리는 깨끗한 소리였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조금 차가웠다.

---

회의는 거의 완벽했다.

푸리나의 이동무대 수레 이름은 《좋은 하루 극장마차》로 짧게 정리되었다. 그레이는 만족했다. 푸리나는 만족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항의하느라 시간을 오래 쓰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죠니가 먼저 말했다.

“안전한 경로를 둘로 나누자. 시찰단 기준, 피난민 발견 기준. 두 경로가 다르면 우선순위를 따로 결정하고.”

레이튼은 손을 멈췄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질문은 알겠어. 안전이 누구의 안전이냐는 거겠지. 좋고 필요한 질문이야. 그러니까 항목으로 넣고 넘어가.”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그레이의 펜은 빠르게 움직였다.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레이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침내 레이튼이 물었다.

“죠니 경.”

죠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뭐.”

“방금 제 질문을 정리해주신 겁니까, 아니면 제 질문을 막으신 겁니까?”

죠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리고 레이튼답게 불편했다.

“둘 다겠지.”

죠니는 결국 그렇게 말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순순히 인정하지 마. 더 불편하니까.”

레이튼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진지한 얼굴이었다.

“질문은 때때로 답을 늦춥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정리된 질문은, 답을 더 깊어지게 할 시간을 잃기도 합니다.”

죠니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 바로 그거. 그런 식으로 말할 줄 알았어.”

“아셨다면 왜 먼저 정리하셨습니까?”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죠니는 레이튼을 보았다. 그 질문도 맞다. 그래서 더 짜증났다. 그는 회의를 빨리 끝내기 위해, 레이튼이 열어야 할 문을 미리 열었다. 하지만 사실 문을 열었다기보다는, 문이 방해되지 않게 벽에 붙여둔 것에 가까웠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죠니?”

그는 한숨을 쉬었다.

“회의 계속하자.”

회의는 계속되었다. 효율적으로. 깔끔하게. 늦지 않게.

그러나 그 질문은 남았다.

정리한 것인가, 막은 것인가.

---

전선 시찰도 이번에는 더 완벽하게 준비했다.

죠니는 하융에게 미리 말했다. 피난민 수레가 지나갈 길, 바퀴가 빠질 수 있는 경사, 손을 다칠 남자, 울 아이, 늦어질 행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막기 위한 우회로. 하융은 처음에는 조용히 들었다. 그러다 말고, 아주 낮게 물었다.

“경은 오늘을 이미 살았소?”

죠니는 고삐를 잡은 채 잠시 멈췄다.

“그 비슷한 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았다. 그는 그런 종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죽은 가능성과 선택되지 않은 세계를 보는 사람이니,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는 말도 어쩌면 아주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덜 다치게 할 수 있겠구려.”

“그럴 생각이야.”

“좋은 일이오.”

하융은 그렇게 말하고도, 어딘가 멀리 보았다. 죠니는 그 시선을 따라가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융에게만 보이는 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야?”

죠니가 묻자 하융은 천천히 대답했다.

“덜 다친 길은 좋은 길이오.”

“그렇지.”

“허나 덜 다친 길이 반드시 더 많이 산 길인지는, 걸어본 뒤에야 알 수 있소.”

죠니는 짧게 웃었다.

“오늘 다들 왜 이렇게 질문자야?”

“나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니오.”

“더 나빠. 문장만 질문처럼 생겼어.”

하융은 이번에는 웃었다.

그들은 길을 나섰다. 죠니는 정확히 움직였다. 피난민 행렬이 잘못 들어갈 샛길에는 미리 표식을 놓았고, 수레가 빠질 경사에는 나무판을 깔았으며, 물자가 부족할 지점에는 보급을 먼저 배치했다. 남자는 손을 다치지 않았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수레는 멈추지 않았다. 행렬은 지연 없이 지나갔다.

보고서라면 완벽에 가까웠다.

하융은 지나가는 피난민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죠니는 말 위에서 그들을 보았다. 다들 무사했다. 그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누군가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은, 구할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구할 일이 없는 편이 더 좋다.

그런데 죠니는 이상한 빈손을 느꼈다.

손목은 멀쩡했다.

그런데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첫 번째 하루의 아이가 내밀었던 딱딱한 빵 조각이 떠올랐다. 그건 맛없었다. 정말 맛없었다. 그래도 아이가 그것을 내밀 때의 얼굴은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빵을 내미는 얼굴. 하융이 옆에서 “그 한 사람에게는 오늘이 세계 전부였을 것이오”라고 말하던 목소리.

오늘은 그런 일이 없었다.

그게 맞다.

그런 일이 없는 게 더 좋다.

그런데.

죠니는 말을 멈췄다.

하융이 물었다.

“왜 그러오?”

“아무것도 아니야.”

하융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얼굴은 아니오.”

죠니는 혀를 찼다.

“그 말 유행이야?”

“아마도.”

“그냥…….”

죠니는 피난민 행렬이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잘 끝났는데, 내가 여기 온 느낌이 별로 없네.”

하융은 잠시 침묵했다.

“경이 하지 않은 일이 좋은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소.”

“예방도 일이야.”

“그렇소.”

“그럼 된 거잖아.”

“그러나 경은 지금 ‘됐다’는 얼굴이 아니오.”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라서였다.

---

오후에는 모든 일정이 빨리 끝났다.

보고는 깔끔했다. 장부는 맞았다. 회의록에는 필요한 항목이 빠짐없이 들어갔다. 전선 시찰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복귀했다. 피난민 행렬은 안전했다. 죠니는 다치지 않았다. 하융도, 병사들도 무사했다.

푸리나는 박수를 치려 했다가 멈췄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왜 멈춰?”

“뭔가 박수칠 장면이 아닌 것 같아서.”

“좋은 하루라며.”

“응. 좋은 하루야.”

푸리나는 회의실과 장부와 보고서를 보았다.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다. 너무 정돈되어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막이 안 올라가.”

죠니는 낮게 말했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좀 무섭네.”

“나도.”

그레이는 보고서를 정리했다. 그녀는 만족해야 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만족했다. 오류는 없었고, 손실은 줄었고, 보고는 정확했다. 그러나 그녀는 죠니를 보다가 말했다.

“죠니 경.”

“응.”

“오늘은 제가 거의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좋은 거 아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레이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같이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말을 더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답게,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멈췄다. 그런데 바로 그 짧은 말이 남았다.

같이 확인하지 않았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죠니는 장부를 보았다. 숫자는 맞았다. 아주 깔끔했다.

그런데 그 숫자들 옆에는, 누군가와 같이 한숨 쉬던 시간이 없었다.

---

저녁 식탁은 조용했다.

나쁜 침묵은 아니었다. 모두가 잘 끝난 하루 뒤에 오는 적당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푸리나는 짧은 제목에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고, 그레이는 보고서를 두 번 확인했으며, 레이튼은 차를 마셨고, 하융은 먼 길을 다녀온 사람처럼 조용했다. 아스트리트는 그 모든 것을 여전히 관찰하고 있었다.

죠니는 빵을 집었다.

오늘의 빵은 부드러웠다. 식탁에 제대로 올라온 빵이었다. 낮에 피난민 아이에게 받은 딱딱한 빵보다 훨씬 나았다.

죠니는 그것을 씹었다.

맛은 좋았다.

기억에는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이튼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죠니는 바로 말했다.

“질문할 거면 해.”

레이튼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허락하시는 겁니까?”

“안 해도 할 거잖아.”

“그렇긴 합니다.”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레이튼은 죠니를 보았다.

“죠니 경. 오늘은 모든 것이 잘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죠니는 빵을 내려놓았다.

레이튼은 천천히 말했다.

“완벽에 가까운 하루가, 다시 살고 싶은 하루와 같습니까?”

그 질문은 정면으로 왔다.

죠니는 이번에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아스트리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긴장했지만 말을 이었다.

“덜 다쳤고, 덜 실패했고, 더 많은 위험을 피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하루 아닙니까? 생명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죠니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웠다.

“맞아.”

죠니는 말했다.

아스트리트의 눈이 흔들렸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그건 맞아. 덜 다치는 건 좋은 일이야. 사고를 막을 수 있으면 막는 게 맞고, 장부가 틀리면 고치는 게 맞고, 쓸데없는 질문도…… 아니, 필요한 질문도 미리 생각하면 좋지.”

레이튼이 아주 작게 웃었다.

죠니는 그를 무시했다.

“그런데.”

그는 식탁을 보았다.

“다 고치니까, 이상하게 남는 게 적어.”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나쁜 일이 줄었는데, 좋은 것도 같이 줄어든 느낌이야. 푸리나가 쓸데없는 제목 가지고 웃기는 시간도 줄고, 그레이랑 숫자 붙잡고 투덜거리는 일도 사라지고, 레이튼 질문 때문에 머리 아픈데 결국 그게 필요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도 없고, 하융이랑 먼지 먹으면서 ‘그래도 온 보람은 있네’ 하는 일도 없었어.”

그는 잠시 멈췄다.

“오늘은 좋은 하루였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근데 다시 살고 싶은 하루인지는 모르겠네.”

식탁 위의 촛불이 흔들렸다.

푸리나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한 번 더?”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너 이거 즐기고 있지.”

“조금.”

“솔직하네.”

“많이.”

“더 솔직하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반복이 계속될 경우 기록 방식이 필요합니다.”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기록부터 생각하냐.”

“반복되는 하루일수록 기록이 필요합니다.”

“그게 문제야.”

“무엇이 말입니까?”

죠니는 빵을 내려놓았다.

“그런 말이 싫지 않다는 거.”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레이튼은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고, 하융은 차를 마셨다. 아스트리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촛불이 다시 흔들렸다. 저녁이 멀어지고, 아침의 빛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죠니가 그 변화를 더 또렷하게 느꼈다. 식탁이 사라지고, 보고서가 비어가고, 부드러운 빵의 맛이 혀에서 사라지고, 창밖의 아이가 다시 빵을 훔치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죠니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창가였다.

다시 아침이었다.

문밖에서 장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푸리나가 곧 들어올 것이다.

그레이도, 레이튼도, 하융도, 아스트리트의 질문도 다시 올 것이다.

죠니는 창밖의 아이를 보았다.

이번에는 아이가 아직 빵을 훔치지 않았다. 가게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완벽하게 고치면, 다 사라지는 건가.”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들어왔다.

“죠니!”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제목을 꺼내기도 전에 말했다.

“이번엔 읽어봐.”

푸리나가 멈췄다.

“정말?”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응.”

푸리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아! 오늘의 극 제목은—”

그는 벌써 후회했다.

하지만 아주 조금, 웃고 있었다.

막이 열렸다.

**3막 — 세 번째 하루: 완벽한 하루**

그 아래, 아직 지워지지 않은 장부의 낙서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실수를 모두 없앤 자리에는, 때때로 웃음도 함께 사라진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3막 — 세 번째 하루: 완벽한 하루

### — 실수를 모두 없앤 자리에는, 때때로 웃음도 함께 사라진다 —

푸리나는 제목을 끝까지 읽었다.

그것은 길었다. 길어도 너무 길었다. 제목이라기보다는 짧은 선언문 같았고, 선언문이라기에는 중간에 고양이와 달빛과 방랑과 기적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 죠니는 처음 두 문장까지는 들으려 했고, 세 번째 문장에서 포기했으며, 네 번째 문장쯤에는 창밖의 아이가 빵을 훔치는 순간을 보고 있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어른은 이번에도 아주 조금 늦게 뒤돌아보았다.

푸리나는 숨도 거의 쉬지 않고 제목을 끝냈다. 그리고 매우 뿌듯한 얼굴로 죠니를 보았다.

“어때?”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수레 이름이 아니라 수레 일생이네.”

푸리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은 평가야?”

“아니.”

“그래도 반응은 있었어.”

“너는 반응이면 다 먹고 살 수 있냐.”

“극장주는 대체로 그래.”

죠니는 피식 웃었다. 완전히 웃은 것은 아니지만, 웃음에 가까웠다. 푸리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제목을 접으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남겨도 되겠네.

하지만 이번 하루는 완벽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는 제목을 들었다. 푸리나의 웃음도 남겼다. 그러면서도 장부를 미리 고치고, 레이튼의 질문을 너무 납작하게 만들지 않고, 하융과 전선에서 사고를 막되 공백을 남기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말만 놓고 보면 간단했다.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몇 번쯤 시도해보는 건 죠니에게 아주 낯선 일도 아니었다.

그레이가 들어왔다. 장부를 들고 있었다.

죠니는 이번에는 그녀가 말하게 두었다. 장부 오류를 설명하게 두고, 페이지를 펼치게 두고, 계산의 흐름을 따라가게 두었다. 그리고 그레이가 중복 항목에 닿기 조금 전에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

“여기. 이 숫자가 좀 이상하지 않아?”

그레이는 멈춰서 그 줄을 보았다. 이번에는 죠니가 답을 통째로 던지지 않았다. 그레이가 직접 확인할 시간을 남겼다. 그녀는 숫자를 따라가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중복 계산입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레이는 펜을 들고 정정했다. 그러다가 아주 잠깐 죠니를 보았다.

“방금은 제가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신 겁니까?”

죠니는 시선을 피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든가.”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첫 번째 하루의 그 미세한 곤란함과 두 번째 하루의 차가운 효율 사이 어딘가에 작은 온도가 생겼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죠니는 그녀가 또 의미를 붙이기 전에 먼저 말했다.

“뭔가 말하지 마.”

푸리나는 입을 닫았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었다.

죠니는 생각했다. 좋아. 이건 조금 나아졌다.

---

회의실에서도 죠니는 비슷한 방식을 시도했다.

레이튼의 질문을 막으면 회의는 빠르다. 하지만 빠른 회의는 얕았다. 그렇다고 레이튼을 그대로 두면 회의는 다시 늦어지고, 모두는 머리를 싸매게 된다. 아마 그게 필요한 시간일 때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그 시간을 조금 다르게 열어야 했다.

레이튼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죠니는 이번에도 그 기척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먼저 결론을 말하지 않았다.

레이튼이 입을 열었다.

“안전한 경로란, 누구에게 안전한 경로입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첫 번째 하루처럼, 사람들은 멈췄다. 그레이의 펜도 멈췄고, 푸리나도 고개를 들었다. 죠니는 그 침묵을 이번에는 끊지 않았다. 잠깐 두었다. 너무 오래 두지도 않았다. 침묵도 오래 두면 사람을 굳게 만든다.

그가 말했다.

“시찰단 기준 안전이랑 피난민 기준 안전이 다를 수 있다는 거지.”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둘 다 적자. 그리고 둘이 충돌할 때 기준을 정해야 해. 그걸 지금 정하는 게 좋겠네.”

레이튼은 죠니를 보았다. 이번에는 질문을 빼앗긴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이 이어진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죠니는 즉시 이마를 짚었다.

“그건 예상 못 했네.”

푸리나가 웃음을 참았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피난민을 더 빨리 발견하는 경로가 시찰단에게 위험하다면, 위험을 감수할 권한은 누가 가집니까? 현장 지휘관입니까, 군주입니까, 아니면 그 길을 걷는 사람들 각자입니까?”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죠니는 작게 욕할 뻔했다. 이건 확실히 필요했다. 필요하니 더 귀찮았다.

그는 낮게 말했다.

“너, 질문이 번식하냐?”

레이튼은 아주 조금 웃었다.

“좋은 질문은 대개 그렇습니다.”

“지독하네.”

그러나 이번 회의는 첫 번째 하루처럼 무작정 늘어지지도 않았고, 두 번째 하루처럼 너무 빨리 닫히지도 않았다. 질문은 열렸고, 곧 항목이 되었다. 그레이는 회의록에 **위험 감수 권한 및 현장 재량**이라는 항목을 만들었다. 푸리나는 그 단어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제목으로는 별로네.”

죠니가 말했다.

“제목으로 쓰지 마.”

“나도 그 정도 감각은 있어.”

“가끔 없잖아.”

회의실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죠니는 그 웃음을 들었다. 그래. 이것도 남았다.

좋은 방향인 것 같았다.

너무 좋은 방향이라 조금 불안했다.

---

전선 시찰에서 죠니는 더 조심했다.

그는 사고를 막되, 모든 것을 지워버리지는 않으려 했다. 말로 하면 우스운 일이다. 사고는 막아야 한다. 다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굳이 피를 흘려서 의미를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가 싫어하는 종류의 낭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우연을 지워버리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닿을 기회를 잃기도 한다. 문제는 그 경계였다.

하융은 이번에도 그를 보며 말했다.

“경은 오늘도 무언가를 조정하려는 얼굴이오.”

죠니는 말 위에서 대답했다.

“너랑 다니면 내 얼굴이 너무 많이 읽히네.”

“경은 생각보다 얼굴에 많이 쓰이오.”

“그런 소리 처음 듣는데.”

“아마 다들 예의상 말하지 않았을 것이오.”

죠니는 하융을 노려보았다.

“너도 예의 좀 챙겨.”

하융은 웃었다.

그들은 수레가 고장날 길목에 먼저 도착했다. 죠니는 이번에는 바퀴가 빠질 돌을 치웠지만, 피난민들이 아예 그 길을 지나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 위험한 경사는 손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가라고 알려주었다. 하융은 옆에서 피난민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죽은 가능성의 창가에 서 있는 사람답게,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의 그림자를 보는 듯했다.

피난민 수레는 천천히 내려왔다. 바퀴는 빠지지 않았다. 남자의 손도 다치지 않았다. 아이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수레가 경사를 지나갈 때, 작은 짐 하나가 떨어졌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말에서 내렸다. 짐은 빵이 든 작은 주머니였다. 아이가 허둥지둥 뛰어오려 했지만, 죠니가 먼저 주워 건넸다.

아이는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죠니는 주머니를 건넸다.

“이번엔 안 흘리게 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주머니 안에서 작은 빵 조각 하나를 꺼냈다. 첫 번째 하루와 같은 빵이었다. 딱딱하고, 모양도 별로고, 맛도 없을 것 같은 빵.

아이는 그것을 죠니에게 내밀었다.

죠니는 잠시 멈췄다.

이번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죠니는 무리하게 사람을 구하지 않았고, 손목도 삐끗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는 빵을 내밀었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떨어진 주머니를 주워줬으니까. 그 정도였다.

그는 빵을 받았다.

“고맙네.”

아이는 웃고 달려갔다.

죠니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첫 번째 하루의 빵과 같은 듯 달랐다. 같은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하융이 옆에서 말했다.

“오늘도 온 보람은 있었구려.”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 일부러 그러냐?”

“무엇을 말이오?”

“아니. 됐어.”

죠니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맛은 별로였다. 이번에도 별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웃음이 조금 나왔다.

“맛없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버릴 정도는 아니오?”

죠니는 빵을 삼켰다.

“응. 그런 정도.”

그리고 잠시 뒤, 낮게 말했다.

“그 정도면 괜찮지.”

---

오후는 순조로웠다.

너무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 점이 이상하게 중요했다. 보고서에는 조정된 경로, 현장 재량, 피난민 행렬 안정화, 소규모 물자 분실 회수 같은 항목이 들어갔다. 큰 부상은 없었다. 손실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아무 일도 없는 하루는 아니었다.

죠니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완벽하게 고치려면, 아직도 더 고칠 수 있다.

푸리나의 제목도 더 짧게 만들 수 있고, 그레이의 장부 오류도 더 빨리 고칠 수 있고, 레이튼의 질문도 더 깔끔하게 항목화할 수 있으며, 하융과의 전선에서 빵 주머니가 떨어지는 일마저 막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하루는 더 안전해지고, 더 빠르고, 더 흠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더 얇아질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죠니는 잠시 멈췄다.

얇아진다는 말이 언제부터 자기 안에서 이렇게 분명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성문으로 돌아오며 하융에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고쳐도 되는 걸까.”

하융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말발굽이 먼지를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성벽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진짜 어렵다는 뜻이네.”

“경이 고치려는 것이 상처라면, 고칠 수 있는 만큼 고치는 것이 좋겠지. 경이 막으려는 것이 죽음이라면, 막을 수 있는 만큼 막아야 할 것이오.”

“그렇지.”

“허나 경이 고치려는 것이 하루 자체라면.”

하융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하루에 살던 사람들도 함께 달라질 것이오.”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융은 이어 말했다.

“죽은 가능성들은 내 뒤에 많소. 그러나 살아 있는 현재는 늘 하나뿐이오. 그 하나를 너무 무서워하지 마시오.”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그 말, 좀 좋네.”

“그렇소?”

“너무 좋게 말해서 문제야.”

“그럼 다음에는 더 투박하게 말하겠소.”

“부탁할게.”

---

저녁 식탁은 처음으로 조금 균형이 맞았다.

푸리나는 아침에 읽었던 긴 제목의 축약판을 다시 제안했다. 그레이는 “행정 문서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고, 푸리나는 “행정 문서가 극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라고 반박했다. 죠니는 빵을 씹으며 말했다.

“행정 문서는 대체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그래서 오래 살아남는 거고.”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문서는 생물체가 아닙니다.”

죠니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 말도 오늘 살아남았네.”

그레이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웃었다.

레이튼은 식탁에 앉아 낮의 회의록을 다시 보았다.

“위험 감수 권한이라는 표현은 너무 딱딱하지 않습니까?”

그레이가 말했다.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딱딱해.”

죠니가 말했다.

“딱딱한데 정확하면 그레이 쪽이 이겨.”

레이튼은 웃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요. 정확한 표현이 반드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입니까?”

죠니는 머리를 감쌌다.

“저녁까지 왜 이래.”

레이튼은 태연했다.

“낮에 다루다 만 질문입니다.”

“질문도 식사 시간은 지켜야지.”

“질문은 식사하지 않습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

“저것도 생물체가 아니래.”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질문은 개념입니다.”

“오늘 다들 나를 이기려고 작정했네.”

식탁에 웃음이 번졌다. 아주 큰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있었다. 푸리나의 웃음, 하융의 낮은 웃음, 레이튼의 조용한 미소, 그레이의 거의 보이지 않는 표정 변화. 아스트리트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보였다.

이들의 하루는 효율적이지 않다. 말이 많고, 질문이 많고, 농담이 중간에 끼어들고, 장부와 극 제목과 전선 보고가 한 식탁 위에서 뒤섞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혼선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잃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은 대신, 서로를 자주 건드린다. 방해하고, 붙잡고, 웃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딱딱한 빵을 씹고 있었다. 낮에 아이에게 받은 빵이었다. 그는 그것을 맛없다는 얼굴로 씹으면서도 버리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그 얼굴을 기억했다.

그것은 승리자의 얼굴도, 구원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생명을 긍정한다는 교리에서 그녀가 배워온 빛나는 얼굴과도 달랐다. 닳고, 피곤하고, 조금 귀찮아하면서도, 이상하게 버리지 않는 얼굴.

그녀는 아직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

그 질문은 식탁이 정리된 뒤에 왔다.

푸리나는 그날의 극이 꽤 마음에 든 듯 보였고, 그레이는 회의록과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으며, 레이튼은 끝내 질문 두 개를 더 남겼고, 하융은 창가에서 밤공기를 보고 있었다. 죠니는 식탁 끝에 앉아 남은 빵 조각을 손가락으로 굴리고 있었다.

아스트리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죠니 경.”

죠니는 고개를 들었다.

“응.”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요즘 질문이 유행이네.”

아스트리트는 조금 당황했다.

“불편하시다면—”

“아니. 해.”

아스트리트는 숨을 고르듯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말을 고르는 데 서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질문은 그녀에게도 쉽게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저는 생명을 긍정하라고 배웠습니다.”

죠니는 빵 조각을 내려놓았다.

아스트리트는 계속했다.

“다치지 않게 하고, 살 수 있게 하고, 더 나아질 수 있게 돕는 것. 저는 그것이 생명을 긍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네.”

죠니가 말했다.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경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어떻게?”

“경은 상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실패를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위험을 일부러 키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완벽하게 고친 하루보다, 조금 닳고 엉성한 하루에서 더 살아 있는 얼굴을 하십니다.”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그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말을 이었다.

“경은 생명을 긍정한다기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닳은 것을 농담처럼 다시 집어 드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가 멀리서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레이튼은 일부러 조용히 있었다. 하융은 창밖을 보던 자세 그대로 듣고 있었다.

죠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 말, 꽤하네.”

아스트리트는 긴장했다.

“무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니. 맞는 쪽이라서 좀 그렇지.”

죠니는 빵 조각을 다시 집어 들었다. 굴렸다. 딱딱한 빵 부스러기가 손끝에 묻었다.

“나도 잘 몰라.”

아스트리트는 눈을 깜박였다.

“모르십니까?”

“응.”

죠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거 다 알고 사는 사람 별로 없어.”

잠시 침묵.

“근데 다 고치면, 내가 좋아하던 것들도 같이 없어지더라.”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들었다.

죠니는 말을 이었다.

“푸리나가 말도 안 되는 제목으로 웃기는 거. 그레이가 죽은 숫자 앞에서 진짜로 심각해지는 거. 레이튼 질문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결국 그 질문이 필요했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거. 하융이랑 먼지 먹으면서 돌아오다가, 그래도 한 사람은 살렸다고 생각하는 거.”

그는 빵 조각을 보았다.

“이런 맛없는 빵을 받고, 버리긴 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스트리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죠니는 피곤하게 웃었다.

“그런 게 다 좀 귀찮은데.”

잠시 멈추고.

“버리긴 아깝더라고.”

또 한 번의 침묵.

“이 삶이.”

그 말은 크지 않았다. 선언도 아니었다. 식탁 끝에서, 딱딱한 빵 조각을 굴리며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방 안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금 알 것 같았다. 생명의 긍정은 늘 밝고 곧은 길의 언어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 닳은 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집어 드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그것은 멋있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농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삶을 다시 선택하는 힘이 있다.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죠니는 말했다.

“조금이면 충분해.”

“경은요?”

“나도 조금만 알아.”

그 말에 푸리나가 결국 웃었다. 작게, 조심스럽게.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왜 웃어.”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그 얼굴은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그 표현은 오늘 세 번째입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

“기록하지 마.”

“이미 했습니다.”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히 살아 있네.”

그 말이 떨어지자, 촛불이 다시 흔들렸다.

푸리나가 죠니를 보았다.

“한 번 더 돌릴래?”

이번에는 죠니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식탁을 보았다. 푸리나, 그레이, 레이튼, 하융, 아스트리트. 딱딱한 빵. 정리되지 않은 질문. 수정이 필요한 장부. 길고 이상한 제목. 먼지 묻은 전선 보고.

그리고 아직 완벽하지 않은 하루.

죠니는 낮게 말했다.

“아니.”

푸리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

“응.”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음은 그냥 살아보자.”

촛불은 흔들리다가, 이번에는 아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저녁은 저녁인 채로 남았다. 하루는 더 이상 접히지 않았다.

막이 천천히 낮아졌다.

**4막 — 네 번째 하루: 고치지 않는 연습**

그 아래, 딱딱한 빵 부스러기처럼 작은 한 줄이 남았다.

**—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때때로 버리기 아까운 귀찮음들을 다시 집어 드는 일이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4막 — 네 번째 하루: 고치지 않는 연습

### —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때때로 버리기 아까운 귀찮음들을 다시 집어 드는 일이다 —

아침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죠니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지 못했다. 식탁 위의 촛불은 몇 번 흔들렸고, 창밖의 밤은 잠시 얇아지는 듯했지만, 더 이상 새벽으로 접히지 않았다. 장부는 장부인 채 남아 있었고, 찻잔은 비어 있었으며, 푸리나가 접어둔 지나치게 긴 제목의 양피지는 식탁 한쪽에서 여전히 쓸데없이 당당했다. 레이튼은 아직 묻지 않은 질문을 품은 사람처럼 조용했고, 그레이는 방금 적은 기록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고, 하융은 창밖의 어둠을 보며 방금 전까지 지나간 하루들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듯했다. 아스트리트는 죠니를 보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이해하지 못함을 숨기지 않았다.

죠니는 손끝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문질렀다. 낮에 아이에게 받았던 빵은 딱딱했고, 저녁 식탁의 빵은 그보다 나았다. 그런데 기억에 더 오래 남는 쪽은 맛없는 빵이었다. 사람은 가끔 아주 쓸모없는 방식으로 기억한다.

“안 돌아가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돌아가.”

“네가 멈춘 거야?”

“아니. 네가 멈춘 거지.”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꼭 무대 중앙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별것 아닌 말을 해도, 그 말 뒤에 조명 하나쯤은 숨어 있는 것처럼 만든다. 죠니는 그 점이 조금 짜증났고, 조금 익숙했고, 이상하게도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굉장히 있어 보이는데, 정확히는 무슨 뜻이야?”

푸리나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도 조금 지쳐 보였다. 하루를 여러 번 다시 산 것은 죠니만이 아니었다. 다만 푸리나는 그것을 피곤함보다 흥미에 가깝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이 극은 내가 네 하루를 마음대로 돌리는 극이 아니야. 네가 ‘다시 살 수 있다면’ 하고 말했기 때문에 문이 열린 거지. 그리고 지금 네가 ‘다음은 그냥 살아보자’고 말했으니까, 무대도 멈춘 거야.”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편리한 설명이네. 책임 소재가 아주 적당히 흩어져 있어.”

푸리나는 웃었다.

“극장주는 책임도 연출할 줄 알아야 하니까.”

“그건 좀 무서운 말인데.”

“조금만 무서운 말이야.”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었다.

“반복 종료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죠니는 고개를 돌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반복의 중심이 죠니 경이었으니까요.”

“그런 표현은 너무 커. 내가 무슨 시계축이라도 된 것 같잖아.”

“시계축이라는 비유는 부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루가 죠니 경의 인식 변화를 기준으로 반복 및 정지했으므로—”

“됐어. 그만. 네가 설명하면 진짜로 내가 기계 부품이 되는 기분이야.”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략히 적겠습니다.”

죠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 종료. 일단은.”

그레이는 적었다.

**반복 종료. 단, 당사자 인식 변화에 따른 잠정 종료로 추정.**

죠니는 그 문장을 흘끗 보고 말했다.

“그게 간략한 거야?”

“필요한 정도로 줄였습니다.”

“장부는 사람을 지치게 해. 숫자랑 문장들이 전부 줄 맞춰 서 있는 척하는데, 꼭 한 놈쯤은 대열에서 빠져 있거든. 그러면 네가 그걸 찾고, 나는 옆에서 눈 아프게 같이 보고, 결국 둘 다 피곤해져.”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장부는 사람을 지치게 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잘해?”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는 반박하려다 말았다. 아마 적절한 반박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쯤에서 반박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며 조금 더 말했다.

“그래도 싫진 않아. 정확히 말하면 장부는 싫어. 장부 자체는 별로야. 그런데 네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숫자 하나를 붙잡고 있는 걸 옆에서 같이 보는 시간은…… 뭐, 그렇게까지 싫진 않더라.”

그레이의 펜 끝이 아주 조금 멈췄다.

“그것은 칭찬입니까?”

“아마도.”

“불명확합니다.”

“죠니식 칭찬은 원래 상태가 안 좋아.”

푸리나가 말하자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너는 왜 남의 칭찬 체계까지 분석하고 있어?”

“재밌으니까.”

“그게 제일 나쁜 이유야.”

하지만 죠니는 웃고 있었다. 아주 조금.

아스트리트는 그 웃음을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죠니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장부는 싫지만, 그레이와 같이 보는 시간은 그렇게 싫지 않다. 그것은 그녀가 배워온 생명의 긍정과는 아주 다른 말이었다. 생명을 긍정한다면 더 낫게 하고, 더 안전하게 하고, 더 많이 살려야 한다. 그것은 여전히 옳았다. 하지만 죠니는 그 옳은 말 사이에 있는 귀찮고 사소한 순간들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아스트리트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십니까?”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뭘?”

“더 이상 되돌리지 않는다면…… 오늘 남은 시간은 그냥 사는 겁니까?”

그 질문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잠깐 방 안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냥 산다. 여러 번 되돌린 뒤에는 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어진다. 죠니는 식탁 위의 것들을 보았다. 양피지, 장부, 빈 찻잔, 빵 부스러기, 덜 정리된 보고서. 푸리나는 아직 제목을 포기하지 않은 얼굴이었고, 그레이는 내일 아침 보고를 걱정하고 있었고, 레이튼은 분명히 아직 묻지 않은 질문이 있었고, 하융은 전선의 다른 가능성 하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낮게 말했다.

“그냥 살아야지.”

잠시 뒤, 덧붙였다.

“그게 제일 귀찮긴 한데.”

푸리나가 물었다.

“귀찮은데?”

죠니는 식탁을 보며 말했다.

“나쁘진 않아. 귀찮은 게 전부 나쁜 건 아니더라. 없애보니까 알겠어.”

---

그날 밤은 끝나지 않은 하루의 뒷정리로 이어졌다.

극이 멈췄다고 해서 장부가 저절로 맞아 들어가지는 않았고, 반복이 끝났다고 해서 질문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피난민 시찰 보고는 정리해야 했고, 배급 수량은 다시 확인해야 했으며, 레이튼이 던졌던 위험 감수 권한 문제는 다음 회의로 넘길지, 오늘 밤 안에 초안을 잡을지 결정해야 했다. 푸리나는 “오늘의 극적 성과”라는 제목으로 무언가를 쓰려다 그레이에게 세 번 제지당했다. 세 번째 제지 때는 그레이도 아주 조금 지쳐 보였다.

죠니는 도망갈 수 있었다. 사실 도망치고 싶었다. 몸은 아프지 않았지만 정신이 피곤했다. 하루를 여러 번 산다는 것은, 하루를 몇 배로 더 길게 겪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도 그는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그레이가 펼친 장부를 보고, 하융의 시찰 보고를 듣고, 레이튼이 가끔 던지는 질문에 짜증을 냈고, 푸리나가 자꾸 쓸데없이 말을 화려하게 만들 때마다 단어를 잘라냈다.

그레이가 말했다.

“피난민 행렬은 임시 숙소까지 도착했습니다. 다만 내일 오전 추가 배급이 필요합니다.”

죠니는 장부를 보았다. 숫자들이 줄을 맞춰 있었다. 하지만 그 줄 맞춤을 믿으면 안 된다. 숫자는 종종 얌전한 얼굴로 거짓말을 한다. 물론 그레이는 숫자가 생물체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죠니는 그런 식으로 느꼈다.

“여기 빵 수량이 또 이상한데.”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 부분입니까?”

죠니는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

“이거. 낮에 받은 추가 명단이 반영 안 됐어. 빵이 숫자에서 탈영했네.”

그레이는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누락입니다.”

“이번엔 숫자가 죽은 건 아니고, 길을 잃은 거지.”

“숫자는 이동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찾아줘야지. 혼자 못 돌아오잖아.”

푸리나는 입을 막고 웃었다. 그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아주 잠깐 시선이 흔들렸다.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그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다. 이게 첫 번째 하루에는 있었고, 완벽한 하루에는 없었다. 그때는 장부가 맞았고, 그레이는 덜 곤란했으며, 모두가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좋은 하루였다. 그런데 이런 작은 흔들림은 없었다.

이런 걸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상하다.

그래도 다시 살아도 괜찮은 조각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레이튼이 옆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질문이 있습니다.”

죠니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없어.”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들을 수 있어. 네 질문은 일어날 때 소리가 나. 사람 머리 안쪽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 같은 게.”

레이튼은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다.

“질문이 일어나는 소리라. 좋은 표현입니다.”

“가져가지 마.”

“이미 기억했습니다.”

죠니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서 뭔데.”

레이튼은 장부와 보고서를 번갈아 보았다.

“우리가 지금 놓친 숫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단순한 누락으로 처리할지, 피난민 집계 방식 자체의 문제로 볼지 정해야 합니다. 즉, 오늘의 오류는 사건입니까, 구조입니까?”

죠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질문은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진짜로 피곤하게 한다. 그런데 없으면 더 위험한 종류의 질문이다. 사람은 실수를 하나의 사건으로 처리하고 넘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면 편하니까. 하지만 같은 종류의 실수가 다시 온다면, 그건 누군가의 실수가 아니라 길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장부의 칸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고, 보는 눈이 잘못 놓인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낮게 말했다.

“네 질문은 머리에 안 좋아. 진짜로. 듣고 있으면 누가 머릿속 책장을 다 열어젖히는 기분이야.”

레이튼은 조용히 기다렸다.

“근데 그게 없으면 우리가 너무 빨리 똑똑한 척을 하게 돼. 숫자 하나 찾았다고, 사람 하나 놓칠 뻔한 구조까지 고친 것처럼 굴겠지.”

죠니는 장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좋아. 구조 문제로 보자. 피곤한 쪽이 대체로 오래 남으니까.”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죠니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그냥 그렇게 말해. 굳이 나한테 돌아서 말하게 하지 말고.”

“죠니 경이 직접 말하는 편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너 진짜 성격 나빠.”

“자주 듣습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그 질문 덕에 내일 같은 사람이 빠지지 않을 수도 있소.”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너까지 붙으면 내가 졌네.”

“이긴 사람이 있소?”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장부?”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장부는 승패의 주체가 아닙니다.”

푸리나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꽤 크게 웃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방 안은 피곤했고, 장부는 아직 닫히지 않았고, 질문은 사람을 계속 붙잡았다. 그런데 그 웃음은 분명히 있었다.

죠니는 그 웃음을 듣고 생각했다.

이런 거구나.

정말 별것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

아스트리트는 그 밤의 식탁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녀가 보기에는 이 사람들은 효율적이지 않았다. 누군가 하나가 답을 알고 있으면 바로 처리하면 될 일을, 굳이 같이 확인했다. 이미 질문의 방향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 정리하면 될 일을, 굳이 질문하게 두었다. 보고서도 한 번에 완벽히 정리하지 않고, 중간중간 농담과 반박과 침묵을 섞었다. 그녀가 기사단에서 배운 방식과는 달랐다. 위계가 있고, 명령이 있고, 확인이 있고, 실행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이 식탁에서는 사람들이 자꾸 서로에게 걸렸다.

푸리나는 죠니가 피곤해하는 순간을 보고 말을 줄였다가, 다시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그레이는 죠니의 지적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확인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다. 레이튼은 답을 강요하지 않고 질문을 놓았다. 하융은 가끔씩,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의 무게를 현재의 한 문장으로 끌고 왔다. 죠니는 그 모든 것에 짜증을 내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말했다.

“이상합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뭐가?”

“분명 더 완벽한 하루가 있었습니다. 덜 다치고, 덜 틀리고, 덜 멈추는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하루가 더…….”

그녀는 말을 찾았다. 푸리나는 기다렸다. 레이튼도, 그레이도, 하융도 기다렸다. 아스트리트는 마침내 말했다.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죠니는 그 표현을 듣고 잠시 멈췄다.

푸리나는 작게 감탄했다.

“좋은 말이네.”

아스트리트는 당황했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닙니다.”

레이튼이 말했다.

“의도하지 않은 말이 더 정확할 때도 있습니다.”

죠니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그래. 맞아.”

그는 장부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손목은 아프지 않았다. 오늘은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 속에는 아팠던 하루도 있었고, 아프지 않았지만 빈 하루도 있었고, 지금처럼 조금 귀찮은 하루도 있었다.

“완벽한 하루에는 사람이 좀 적었어. 이상하지. 다들 있었는데, 덜 보였거든.”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들었다.

“일은 잘 굴러갔고,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장부도 얌전히 맞아떨어졌어. 좋은 하루였지. 그건 알아.”

죠니는 빵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밀었다.

“근데 좋은 하루였다는 것하고, 다시 살아도 괜찮은 하루였다는 건 좀 다르더라. 완벽한 하루는 깔끔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그 안에 별로 없었어. 푸리나도 덜 웃고, 그레이도 덜 곤란해하고, 레이튼도 덜 짜증나고, 하융이랑 먼지 먹으면서 돌아오는 느낌도 없고.”

“덜 짜증나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아스트리트가 물었다.

죠니는 잠깐 생각했다.

“보통은 좋은 일이지.”

“그런데요?”

“근데 레이튼 질문은 짜증나도 가끔 필요해. 진짜 짜증나는 건 그거야. 쓸모없는 질문이면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맞는 질문이라 머리에 남거든.”

레이튼은 웃었다.

죠니는 그를 가리켰다.

“좋아하지 마. 칭찬 반, 항의 반이야.”

“그 비율은 기록해둘 만하군요.”

“기록하지 마.”

그레이가 말했다.

“기록 대상이 아닙니다.”

“고마워.”

푸리나는 이 대화를 들으며 웃었다.

아스트리트는 그 웃음과 죠니의 투덜거림을 보았다. 그녀는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죠니는 상처를 좋아하지 않는다. 실수를 숭배하지도 않는다. 위험을 낭만적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고친다는 이름으로 사람 사이의 마찰과 우연과 웃음까지 지워버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의 긍정은 빛나는 구호가 아니라, 피곤한 식탁에서 빠지지 않고 앉아 있는 태도에 가까웠다.

아스트리트가 말했다.

“그럼 생명을 긍정한다는 건, 단순히 덜 다치게 하는 것만은 아니겠군요.”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기본이고.”

“그다음은요?”

죠니는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그래서 고르지 않고 말했다.

“글쎄. 나한테 그런 걸 깔끔하게 물어보면 대답이 안 나와. 레이튼이나 푸리나 쪽에 물어봐. 그쪽은 말 예쁘게 잘 하잖아.”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죠니가 하는 말도 가끔 좋아.”

“가끔이면 됐어.”

죠니는 다시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덜 다치게 하는 건 중요해. 죽을 사람 살리는 것도 중요하고, 고칠 수 있는 건 고쳐야지. 그걸 안 하자는 게 아니야. 그런 식으로 들리면 내가 말을 잘못한 거고.”

그는 식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근데 그걸 하면서, 사람들이 서로 닿는 순간까지 다 지워버리면 좀 곤란하더라. 부딪히고, 묻고, 웃고, 짜증내고, 같이 숫자 하나 찾아내는 그런 거. 진짜 별거 아닌데, 없애보니까 하루가 얇아졌어.”

잠깐 침묵.

“그러니까 뭐…….”

죠니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그런 걸 버리긴 좀 아까운가 봐.”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숙였다.

“기억하겠습니다.”

죠니는 바로 말했다.

“너무 진지하게 기억하진 마.”

“어째서입니까?”

“그럼 내가 너무 대단한 말 한 것 같잖아. 난 그냥 오늘 하루에 좀 질려서 투덜거리는 중이야.”

푸리나가 웃었다.

아스트리트는 잠깐 멈췄다가, 이번에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어색했다. 하지만 있었다.

죠니는 그걸 보고 생각했다.

이것도 아마.

---

밤이 더 깊어지자 모두가 조금씩 흩어졌다.

그레이는 장부를 정리했고, 레이튼은 남은 질문을 내일로 미루겠다고 선언했다. 죠니는 그 선언에 대해 “훌륭한 자제력”이라고 평가했고, 레이튼은 “질문에도 숙성이 필요합니다”라고 답했다. 하융은 전선 보고를 접으며 내일 다시 길을 살피겠다고 했다. 푸리나는 양피지를 접었다가 다시 폈다가, 결국 제목의 절반을 지우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양보였다.

죠니는 식탁 끝에 남아 있었다.

푸리나가 다가왔다.

“어때?”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뭐가.”

“오늘.”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여러 번 있었다. 엉망인 하루, 고친 하루, 완벽에 가까운 하루, 그리고 지금의 하루.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런 질문은 레이튼에게 넘기는 편이 낫다. 죠니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어느 하루를 다시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는가였다.

그는 말했다.

“길었어.”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게 감상?”

“중요한 감상이야. 하루가 세 번쯤 접혔다 펴졌는데 짧았다고 하면 그게 더 무섭지.”

“그리고?”

“귀찮았어.”

“그것도 감상?”

“아주 중요한 감상이지. 네 제목은 길고, 그레이 장부는 눈 아프고, 레이튼 질문은 사람 머리를 갉아먹고, 하융이랑 전선 돌면 신발에서 먼지가 안 빠져. 오늘은 아스트리트까지 와서 내 삶의 방식이 이상하다고 아주 정중하게 찔렀고.”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나쁘진 않았고?”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응. 나쁘진 않았어.”

그 대답은 작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받았다. 평소 같으면 박수라도 쳤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이번 극은 박수보다 조용한 확인이 어울렸다.

죠니는 푸리나를 보며 말했다.

“너, 처음부터 이걸 보여주려고 한 거야?”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응. 나는 그냥 네가 어떤 하루를 고를지 보고 싶었어.”

“참 극장주다운 무책임이네.”

“칭찬?”

“비슷한 거. 정확히는 항의랑 칭찬이 적당히 섞인 거.”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가 처음에는 큰 순간을 찾는 줄 알았어.”

죠니는 시선을 내렸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이 삶을 다시 살아도 좋다고 말하게 만드는, 엄청나게 반짝이는 순간. 그런 걸 찾는 줄 알았어.”

죠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은 낯설지 않았다. 자신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 지금도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 뭔가 큰 순간, 증명되는 순간, 끝내 닿는 순간. 그런 게 있어야만 삶 전체를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오늘 하루는 그렇지 않았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심각해졌다. 레이튼의 질문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하융과 먼지를 먹고 돌아왔다. 아스트리트가 이해하지 못한 채 진지하게 물었다. 맛없는 빵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있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반짝이긴 하더라.”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뭐가?”

“별거 아닌 것들이. 네가 좋아하는 무대 조명 같은 건 아니고, 장부 위에 묻은 잉크라든가, 맛없는 빵 조각이라든가, 레이튼 질문 듣고 다 같이 표정 썩는 순간이라든가. 하융이 먼지 뒤집어쓴 얼굴로 별일 아닌 말 하는 것도 그렇고.”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는 식탁 위의 빵 부스러기를 보았다.

“없애보니까 알겠더라. 별거 아닌 것들이 빠지면, 하루가 얇아져. 잘 굴러가긴 하는데, 내가 다시 살고 싶은 하루는 아니게 돼.”

그 말이 방 안에 남았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거 좋은 대사야.”

죠니는 바로 말했다.

“가져가지 마.”

“이미 늦었어.”

“알았어. 대신 제목은 짧게 해.”

푸리나는 잠깐 고민했다.

“《별거 아닌 것들》?”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괜찮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응.”

“죠니가 제목을 칭찬했어.”

“취소할까?”

“아니. 이미 기록됐어.”

그레이가 멀리서 말했다.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그레이!”

그레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비공식 제목까지 모두 기록하면 장부가 과밀해집니다.”

죠니는 낮게 웃었다.

정말 별거 아닌 밤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

죠니는 그날 잠들기 전, 잠깐 창밖을 보았다.

성벽 아래는 조용했다. 빵을 훔치던 아이도, 쫓던 어른도 없었다. 장부를 찾던 소리도 사라졌다. 하루는 끝났다. 완벽하지 않았고, 정리되지 않았고, 내일로 미룬 질문도 있었고, 또 틀릴지도 모를 장부도 있었다.

그런데 죠니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아니, 가벼운 건 아니었다. 그의 삶은 가볍지 않았다. 고통도 있었고, 먼 길도 있었고, 이미 지나온 상처들도 있었다. 영원히 반복된다면 지겨울 것이다. 화도 날 것이다. 같은 실수를 다시 보게 된다면, 욕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 안에 이런 하루가 있다면.

푸리나가 쓸데없는 제목을 들고 들어오고,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정색하고, 레이튼이 질문을 번식시키고, 하융이 먼지 속에서 낮게 웃고, 아스트리트가 이해하지 못한 채 진지하게 묻는 하루가 있다면.

죠니는 창틀에 팔을 올렸다.

“그래.”

그는 아주 낮게 말했다.

“다시 살아도, 아주 최악은 아니겠네.”

그 말은 선언이 아니었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막은 조용히 내려왔다.

**5막 — 마지막 하루: 되돌리지 않는 선택**

그 아래, 접히지 않은 하루의 가장자리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는 말은, 거대한 운명이 아니라 작은 식탁에서 먼저 태어난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5막 — 마지막 하루: 되돌리지 않는 선택

### —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는 말은, 거대한 운명이 아니라 작은 식탁에서 먼저 태어난다 —

다음 날 아침은, 정말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 죠니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창밖에는 빵을 훔치던 아이가 없었다. 어른이 뒤쫓는 느린 추격전도 없었다. 복도 저편에서 “장부가 어디 갔습니까?” 하고 묻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 물동이를 엎질렀고, 병사 하나가 말 안장 끈이 사라졌다고 투덜거렸으며, 멀리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 제목은 어제 후보였고! 오늘은 새 제목이 필요하다니까!”

죠니는 창가에 기대어 있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짜 다음 날이네.”

어제와 다른 하루.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이상하게 조금 낯설었다. 같은 하루를 여러 번 겪고 나면, 사람은 다음 날이 온다는 사실에도 잠깐 경계하게 된다. 혹시 또 접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문이 다시 열리는 것은 아닌가. 혹시 푸리나가 문밖에서 웃으며 “한 번 더!” 하고 외치는 것은 아닌가.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들어왔다.

죠니는 그녀를 보기도 전에 말했다.

“한 번 더라면 안 해.”

푸리나는 문가에서 멈췄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할 얼굴이었어.”

“그 얼굴 판정 너무 넓은 거 아니야?”

“너는 전적이 있어.”

푸리나는 잠깐 생각했다. 반박하려다 그만두었다.

“그건 그렇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양피지가 있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또 제목이야?”

“이번 건 짧아.”

“믿을 수가 없는데.”

“정말 짧아. 《별거 아닌 것들》.”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어젯밤 자신이 괜찮다고 말한 제목이었다. 푸리나는 그걸 잊지 않았다. 잊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돌려 창밖을 보았다.

“제목으로 쓰기엔 좀 맥 빠지지 않아?”

“그래서 좋아.”

푸리나는 양피지를 접었다.

“엄청난 운명도, 장엄한 승리도, 세상을 바꾸는 맹세도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하루를 붙잡아주잖아.”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너 방금 꽤 얌전하게 말했네.”

“나도 가끔은 절제해.”

“그 말은 좀 과장이고.”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돌리지 않을 거지?”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네가 묻는 거야?”

“응.”

“너답지 않네. 보통은 돌릴지 말지 묻기 전에 이미 무대 깔아놓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물어보는 거야.”

푸리나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어제의 극이 그녀에게도 무언가 남긴 듯했다. 죠니는 창밖의 아침을 보았다. 오늘은 아직 아무것도 고치지 않았다. 아직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고, 어떤 질문도 듣지 않았고, 어떤 장부도 보지 않았고, 어떤 먼지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이 하루는 아직 완벽할 수도 있고, 엉망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었다.

죠니는 말했다.

“안 돌려.”

“정말?”

“응. 오늘 틀리면 오늘 틀리는 거지.”

푸리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체념이야?”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체념이면 좀 더 멋없고, 내 쪽은 조금 더 귀찮아.”

“귀찮다?”

“응. 틀리면 고쳐야 하잖아. 바로 되돌리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지.”

푸리나는 웃었다.

“그런데?”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사는 거라며.”

그 말은 푸리나가 했던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 죠니가 어제 하루 끝에서 겨우 주워온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푸리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체로.”

“대체로라니.”

“삶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레이튼이 싫어할 것 같아서.”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건 맞네.”

---

아침 회의는 다시 엉망이었다.

완전히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 장부는 어제와 다른 곳에서 틀렸고, 푸리나의 제목은 짧아졌지만 대신 부제가 세 개 붙었고, 레이튼은 어제 미룬 질문을 “충분히 숙성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꺼냈다. 하융은 전선 보고서에 자신이 본 죽은 가능성 중 하나를 너무 담담하게 적어 그레이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아스트리트는 그 내용을 어떻게 공식 문서에 반영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물었다.

죠니는 회의실 벽에 기대어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어제라면 고칠 수 있었다. 아니, 어제의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지금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푸리나가 부제를 세 개 붙이기 전에 하나로 줄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레이의 장부 오류를 더 빨리 찾을 수 있었고, 레이튼의 질문이 회의실을 멈추기 전에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하융의 보고서도 “그 부분은 비공식 참고로 돌리자”고 먼저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러니까 정식 제목은 《별거 아닌 것들》이고, 부제는 ‘그러나 버리기엔 아까운 것들’, ‘장부와 질문과 먼지에 관한 소고’, 그리고 ‘죠니가 드물게 인정한 제목’이야.”

죠니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부제 빼.”

푸리나는 즉시 양피지를 끌어안았다.

“왜?”

“너 그거 오래 우려먹을 거잖아.”

“그렇긴 해.”

“그렇게 솔직하면 내가 더 빼고 싶어져.”

그레이가 말했다.

“공식 문서상 부제는 하나 이하가 적합합니다.”

푸리나는 배신당한 얼굴로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어제부터 내 제목에 너무 엄격해진 거 아니야?”

“기존에도 엄격했습니다.”

“그랬나?”

죠니가 말했다.

“그랬어. 네가 안 들었을 뿐이지.”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나 결국 부제를 하나로 줄였다. 죠니는 그 장면을 보고 생각했다. 이것은 되돌림이 아니라 조정이다. 완벽하게 고치는 것도 아니고,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지금 여기서 말하고, 상대가 반응하고, 그 반응 속에서 하루가 조금 달라지는 것.

그레이가 장부를 펼쳤다.

“다음은 보급 수량입니다. 어제 수정한 항목은 반영되었으나, 새로운 이동 수레 배치에 따라 말 사료 수량이 부족합니다.”

죠니는 장부를 보았다.

“이번엔 말 쪽이 탈영했네.”

그레이는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말은 이동 능력이 있습니다.”

잠시 침묵.

푸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튼도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하융은 낮게 웃었고, 아스트리트는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뒤늦게 웃었다. 그레이는 자신이 방금 농담 비슷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

“방금 좋았어.”

그레이는 차분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아주 조금 늦었다.

“의도한 농담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좋았어.”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그레이가 농담했어!”

“전하, 공식적으로 농담으로 분류하지 말아주십시오.”

죠니는 장부를 보며 웃었다.

이건 고쳐 만든 하루가 아니었다. 그냥 생긴 하루였다. 그래서 좋았다.

레이튼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어제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죠니는 바로 말했다.

“안 돌아가면 안 돼?”

“아쉽게도 질문이 충분히 숙성되었습니다.”

“부패한 걸 수도 있어.”

“부패와 숙성의 차이는 맥락에 달려 있습니다.”

“방금도 질문이야?”

“아직은 아닙니다.”

죠니는 이마를 짚었다.

“벌써 피곤하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위험 감수 권한을 현장에 일부 위임한다면, 현장에 있는 이들이 위험을 판단할 수 있도록 어떤 정보가 제공되어야 합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죠니가 바로 끼어들지 않았다. 질문은 필요했다. 짜증날 만큼 필요했다. 그는 그 침묵이 너무 오래 굳지 않을 만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지도, 피난민 이동 속도, 적 정찰 가능성, 그리고 빠질 수 있는 사람 명단.”

그레이가 적기 시작했다.

레이튼이 물었다.

“빠질 수 있는 사람 명단이란?”

죠니는 대답했다.

“공식 명단 말고. 늦게 걷는 사람, 아이가 있는 사람, 짐을 너무 많이 든 사람, 자꾸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아스트리트가 조용히 물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도 포함합니까?”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안 괜찮을 때 그렇게 말하거든.”

하융이 낮게 말했다.

“좋은 기준이오.”

죠니는 그를 보았다.

“너도 자주 그러잖아.”

하융은 잠시 침묵했다.

“그렇소?”

“그렇소, 같은 말로 빠져나가려고 하지 마.”

푸리나가 웃었다. 그레이는 **자꾸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공식 문서에 어떻게 넣을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죠니는 그 얼굴을 보고 말했다.

“그레이, 그 표정은 공식 표현으로 바꾸려는 얼굴이야.”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뭐라고 쓸 건데?”

“자기 상태를 축소 보고할 가능성이 높은 인원.”

죠니는 잠시 멈췄다.

“괜찮네.”

푸리나가 작게 감탄했다.

“죠니가 오늘 칭찬을 많이 하네.”

죠니는 즉시 말했다.

“많이는 아니야.”

레이튼이 말했다.

“비교 기준을 정해야겠군요.”

“하지 마.”

회의실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죠니는 그 웃음 속에서 생각했다.

이 정도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굴러간다.

---

전선 시찰은 짧게 다녀오기로 했다.

어제 여러 번 다녀온 길이라, 죠니는 이미 위험한 경사와 수레가 지나갈 길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길은 어제와 같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다행이었다. 같은 문제를 완벽하게 다시 푸는 게 아니라,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걷는 것. 삶은 대개 그렇게 사람을 괴롭힌다.

하융은 말 위에서 말했다.

“오늘은 덜 조정하려는 얼굴이오.”

죠니는 고삐를 느슨하게 잡았다.

“얼굴 평가가 네 취미였나?”

“그런 것은 아니오. 다만 경이 어제보다 덜 바빠 보이오.”

“내가 하루를 너무 많이 살았거든. 당분간은 한 번씩만 살고 싶어.”

하융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택이오.”

“너무 쉽게 좋은 선택이라고 하지 마. 왠지 나중에 대가가 붙을 것 같잖아.”

“대가는 대체로 선택 뒤에 붙소.”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하융은 조용히 웃었다.

길가에는 작은 피난민 무리가 있었다. 어제의 그 무리와는 달랐다. 아이도 달랐고, 수레도 달랐고, 고장 난 바퀴도 없었다. 대신 늙은 여인 하나가 뒤처져 있었다. 그녀는 자꾸 괜찮다고 말했다. 죠니는 말에서 내렸다.

“괜찮다고?”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먼저들 가셔도 됩니다.”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방금 공식 문서에 넣은 유형이네.”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죠니는 여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괜찮으면, 왜 그렇게 숨을 아껴 써?”

여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그녀의 짐을 보았다. 너무 무거웠다.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무거웠다. 남들이 보면 괜찮아 보일 만큼만, 하지만 오래 걸으면 사람을 무너뜨릴 만큼.

죠니는 짐을 들어보았다.

“이건 버려.”

여인의 얼굴이 굳었다.

“안 됩니다.”

“왜?”

“가족 물건입니다.”

죠니는 짐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천과 작은 솥, 부러진 장난감, 옷가지, 오래된 나무 숟가락. 버리라고 말하기 쉬운 것들. 하지만 그 말이 언제나 맞지는 않다. 그는 어제의 하루들을 떠올렸다. 고치려고 하다 지워버린 순간들. 효율적으로 바꾸다 얇아진 하루.

그는 짐을 다시 묶었다.

“전부는 못 들고 가.”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죠니는 말했다.

“하지만 전부 버리라고도 안 할게. 여기서 나눠. 진짜 필요한 거, 버리면 안 되는 거, 남이 대신 들어도 되는 거.”

여인은 조용히 짐을 풀었다. 하융이 옆에서 도왔다. 시간이 걸렸다. 아주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인은 자기 손으로 골랐다. 부러진 장난감은 챙겼고, 작은 솥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고, 낡은 천 일부는 버렸다. 나무 숟가락은 끝까지 손에 쥐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았다.

“그건 가져가?”

여인이 말했다.

“남편이 깎아준 겁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져가야지.”

하융은 여인을 부축했다. 피난민 무리는 다시 움직였다. 시간이 늦어졌지만, 모두가 같이 걸었다. 죠니는 말에 오르지 않고 잠시 옆에서 걸었다. 먼지가 신발에 묻었다. 귀찮았다. 정말로 귀찮았다.

그런데 이 귀찮음은 나쁘지 않았다.

하융이 말했다.

“오늘도 온 보람은 있구려.”

죠니는 그를 흘끗 보았다.

“그 대사, 너 마음에 들었나 봐.”

“적절한 말이오.”

“너무 자주 쓰면 푸리나가 제목으로 만든다.”

“그건 피해야겠소.”

죠니는 웃었다.

먼지 속에서, 아주 작게.

---

저녁이 되었을 때, 죠니는 피곤했다.

하지만 그 피로는 반복되는 하루의 피로와 달랐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본 사람의 지침이 아니라, 한 번뿐인 하루를 지나온 사람의 피로였다. 그것은 더 무거웠지만 덜 비어 있었다.

식탁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푸리나는 드디어 《별거 아닌 것들》이라는 제목을 공식적으로 채택했고, 부제는 하나로 줄였다. 그레이는 그 제목이 행정 문서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묵인했다. 레이튼은 오늘의 질문을 “내일 추가 숙성”하겠다고 했고, 죠니는 “숙성고에 잠가둬”라고 말했다. 하융은 차를 마셨고, 아스트리트는 낮의 일을 기록해도 되는지 그레이에게 물었다.

그레이는 대답했다.

“공식 보고에는 간략히. 개인 기록에는 더 자세히 적어도 됩니다.”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빵을 먹었다. 오늘의 빵은 평범했다. 낮에 여인에게 받은 것도, 아이에게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식탁의 빵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모든 빵이 기억에 남을 필요는 없다. 어떤 빵은 그냥 배를 채우면 된다. 그것도 삶의 일부다.

푸리나가 말했다.

“죠니.”

“응.”

“오늘은 어땠어?”

죠니는 빵을 씹으며 그녀를 보았다.

“또 감상문?”

“응.”

“너는 사람 하루를 극으로 만들고 감상문까지 받아가네.”

“극장주니까.”

“편리한 직업이야.”

푸리나는 웃으며 기다렸다.

죠니는 식탁을 보았다. 푸리나, 그레이, 레이튼, 하융, 아스트리트. 각자의 찻잔과 장부와 질문과 보고서. 오늘 하루에 고친 것들, 고치지 못한 것들, 일부러 남긴 것들. 그리고 이미 지나가서 다시는 똑같이 오지 않을 것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완벽하진 않았어. 장부는 또 틀렸고, 네 제목은 아직도 위험했고, 레이튼 질문은 사람 머리를 또 괴롭혔고, 하융이랑 다녀오면 신발이 먼지를 먹어. 아스트리트는 오늘도 너무 진지했고.”

아스트리트는 조금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죠니는 바로 말했다.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야. 좀 부담스럽긴 한데, 나쁘진 않아.”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는 말을 이었다.

“근데 오늘은 한 번만 살았잖아. 그래서 그런지, 좀 낫더라. 틀리면 그 자리에서 고치고, 놓치면 다음부터 덜 놓치려고 하고, 누가 질문하면 머리 아파하다가 듣고, 누가 괜찮다 그러면 일단 의심하고.”

그는 빵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사는 게 되돌리는 것보다 훨씬 귀찮은데, 이상하게 더 내가 사는 것 같아.”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그레이는 기록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박수치지 않았다. 하융은 차를 들고 있었다. 아스트리트는 죠니를 보고 있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그러면 한 번 더 되돌릴 수 있다면?”

죠니는 이번에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안 해.”

“왜?”

“오늘이 대단해서가 아니야. 오히려 별거 아니었지.”

그는 식탁을 보았다.

“근데 별거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아. 하나 고치면 다른 게 사라지고, 하나 막으면 다른 데서 웃음이 빠지고, 하나 편하게 만들면 다른 누군가와 같이 머리 싸매는 시간이 없어져. 그거 일일이 계산하면서 살면, 아마 레이튼보다 피곤한 인간이 될걸.”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것은 꽤 큰 경고군요.”

“넌 좀 경고로 받아들여.”

푸리나는 물었다.

“그럼 오늘은 그냥 둘 거야?”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오늘로 두자.”

그 말과 함께 촛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은 오지 않았다. 식탁은 그대로였고, 장부는 그대로였고,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좋아.”

죠니가 말했다.

“너 아쉬워 보이는데.”

“조금.”

“솔직하네.”

“하지만 이 결말도 좋아.”

죠니는 빵을 집었다.

“제목만 더 안 붙이면.”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하나만.”

“안 돼.”

“정말 짧은 거.”

“안 돼.”

“《오늘은 오늘》.”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건 좀 괜찮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죠니가 또 제목을 칭찬했어!”

“취소한다.”

“늦었어!”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비공식 제목으로만 기록하겠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숙였다.

“너희 진짜 지치지도 않네.”

아스트리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죠니 경.”

“응.”

“저는 아직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게 정상이지.”

“하지만 오늘 경이 말한 것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생명을 긍정한다는 것은 단지 위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닿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군요.”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너는 내가 한 말보다 더 그럴듯하게 말하네.”

“그렇습니까?”

“응. 그러니까 조심해. 푸리나가 제목으로 만든다.”

푸리나가 즉시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닿는 시간》.”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봐.”

아스트리트는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이 식탁에 아주 작게 놓였다.

별거 아닌 것 하나가 더 생겼다.

---

밤이 깊어졌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는 장부를 들고 갔고, 레이튼은 질문을 숙성시키러 갔고, 하융은 내일의 길을 보러 나갔고, 아스트리트는 자신의 기록을 정리하러 갔다. 푸리나는 마지막까지 남아 양피지를 접었다.

죠니는 식탁에 혼자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푸리나가 아직 옆에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죠니.”

“왜.”

“다시 살아도 이 하루야?”

죠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식탁 위에 남은 빵 부스러기와 잉크 자국, 찻잔의 둥근 흔적을 보았다. 오늘의 하루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어떤 것은 흐려지고, 어떤 것은 엉뚱하게 남을 것이다. 푸리나의 제목, 그레이의 뜻밖의 농담, 레이튼의 숙성된 질문, 하융과 먼지 속에서 걸은 길, 아스트리트의 어색한 웃음.

그는 낮게 말했다.

“다시 살아도 완전히 똑같이는 안 살겠지.”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응. 틀린 건 고칠 거고, 위험한 건 줄일 거고, 누가 아프면 덜 아프게 만들 거야. 그런 걸 안 하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그는 잠시 멈췄다.

“근데 다 지우진 않을 거야. 그건 이제 좀 알겠어.”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죠니는 식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다시 살아도, 아마 이쪽이겠지. 좀 시끄럽고, 귀찮고, 질문 많고, 장부는 틀리고, 제목은 길고, 전선은 먼지투성이인 쪽.”

푸리나는 말했다.

“그게 네 찰나야?”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찰나.

그 말은 이상하게도 너무 빛나는 단어처럼 들렸다. 그러나 오늘 하루의 그것들은 빛난다기보다, 손끝에 묻은 빵 부스러기나 옷자락에 남은 먼지에 가까웠다. 작고, 쉽게 털리고, 하지만 완전히 잊히지는 않는 것들.

죠니는 말했다.

“찰나라고 부르면 좀 거창한데.”

“그럼?”

“글쎄. 그냥…….”

그는 생각하다가 피곤하게 웃었다.

“다시 살아도 덜 억울한 이유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조용했다.

“좋네.”

“제목으로 쓰지 마.”

“그건 약속 못 해.”

“역시.”

푸리나는 양피지를 접었다.

“그래도 오늘은 안 쓸게.”

“오늘은?”

“응. 오늘은 오늘로 두기로 했잖아.”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오늘.”

푸리나는 막을 닫듯 손을 내렸다.

하지만 아무 조명도 꺼지지 않았다. 이미 밤이었고, 이미 하루는 끝나고 있었고, 무대는 현실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죠니는 마지막으로 식탁을 보았다.

별거 아닌 하루였다.

그래서 다시 살아도, 아마 이 하루였다.

막은 조용히 내려왔다.

**후일담 — 영원회귀의 작은 식탁**

그 아래, 식탁 위에 남은 빵 부스러기처럼 한 줄이 남았다.

**— 다시 살아도 덜 억울한 이유들은, 대개 아주 사소한 얼굴을 하고 있다 —**
#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 후일담 — 영원회귀의 작은 식탁

### — 다시 살아도 덜 억울한 이유들은, 대개 아주 사소한 얼굴을 하고 있다 —

그날 밤, 식탁은 오래 치워지지 않았다.

누가 특별히 남겨두자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가 “이건 중요한 무대 장치야!”라고 선언한 것도 아니고, 그레이가 “후속 검토를 위해 현장 보존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모두가 조금씩 늦게 일어났고, 누군가는 찻잔을 그대로 두었고, 누군가는 빵 부스러기를 쓸어내는 것을 잊었고, 누군가는 장부 한 귀퉁이에 잉크를 조금 흘렸다. 그렇게 식탁은 하루가 지나간 모양 그대로 남았다.

죠니는 한 번 잠들었다가 새벽 가까운 시간에 깼다.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 때문일 수도 있고, 하루를 너무 여러 번 산 탓에 몸이 시간을 헷갈린 탓일 수도 있었다. 혹은 레이튼이 남기고 간 질문이 정말로 숙성되다가 방 안의 공기까지 건드린 것일 수도 있다. 죠니는 마지막 가능성을 떠올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질문도 발효하면 냄새나려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쪽으로 걸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밤의 성은 낮보다 훨씬 오래된 건물처럼 느껴진다. 낮에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목소리와 명령과 농담이 벽을 덮지만, 밤에는 돌의 차가움이 다시 드러난다. 죠니는 그 차가움을 싫어하지 않았다. 너무 따뜻한 곳은 사람을 방심하게 하고, 너무 차가운 곳은 오래 머물고 싶지 않게 만든다. 그 사이쯤이 좋다.

식당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안에는 불이 하나 남아 있었다. 완전히 꺼진 것도 아니고, 제대로 켜진 것도 아닌 작은 등불. 그 빛 아래에서 식탁은 아직 그대로였다. 장부는 닫혀 있었고, 찻잔의 둥근 흔적은 어둡게 남아 있었고, 푸리나의 양피지는 반쯤 접힌 채 의자 옆에 놓여 있었다. 죠니는 그 식탁을 보며 잠시 멈췄다.

낮에 여러 번 되돌린 하루들은 이제 전부 끝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라진 하루들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하루의 딱딱한 빵, 두 번째 하루의 이상한 공백, 세 번째 하루의 지나치게 매끄러운 보고서, 네 번째 하루의 식탁 웃음. 모두가 한 겹씩 포개져 지금 이 식탁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죠니는 의자 하나를 빼 앉았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그는 조금 뒤에 낮게 말했다.

“이쯤 되면 누가 하나쯤 들어올 때가 됐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푸리나였다.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역시.”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왜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말해?”

“네가 너무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와서.”

“극장주니까.”

“그거 모든 상황에 쓸 수 있는 변명이야?”

“응.”

푸리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도 잠을 제대로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피곤함과 흥미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녀는 식탁을 보고, 죠니를 보고, 다시 식탁을 보았다.

“못 잤어?”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잤어. 그런데 하루를 너무 많이 살아서 그런가, 몸이 아직 계산 중이야.”

“계산은 그레이한테 맡기면 되는데.”

“그레이한테 내 잠까지 장부로 맡기면, 일어나자마자 수면 효율 보고서 받을 것 같아서 싫어.”

푸리나는 웃었다.

“가능하긴 하겠다.”

“가능하니까 더 싫은 거야.”

푸리나는 죠니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식탁이 있었다. 빵 부스러기와 잉크 자국과 찻잔 흔적이 남은 식탁. 아무것도 대단하지 않은 식탁.

푸리나는 손끝으로 양피지 모서리를 톡 건드렸다.

“후일담을 써야 할 것 같은데.”

죠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응.”

“새벽에?”

“후일담은 원래 조금 늦은 시간에 잘 써져.”

“그건 네 습관이겠지.”

푸리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양피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제목이 몇 개 적혀 있었다. 《별거 아닌 것들》, 《오늘은 오늘》, 《다시 살아도 덜 억울한 이유들》. 그 아래에는 푸리나가 새로 덧붙인 듯한 제목이 있었다.

《영원회귀의 작은 식탁》

죠니는 그걸 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 길어?”

죠니는 제목을 다시 보았다.

“길긴 해.”

“역시?”

“근데 이번엔…… 그렇게 나쁘진 않아.”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죠니가 새벽에 제목을 두 번이나 칭찬했어.”

“칭찬이 아니라 판정 보류에 가까워.”

“그건 사실상 칭찬이야.”

“네 기준이 너무 후해.”

푸리나는 양피지에 작은 표시를 했다. 죠니는 그걸 보고 말했다.

“방금 기록했지.”

“응.”

“그럴 줄 알았어.”

푸리나는 웃었다. 그 웃음은 낮보다 작았다. 아마 새벽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이 극이 끝나고 난 뒤의 웃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드물게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죠니도 굳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 창밖의 하늘은 아직 어두웠고, 식탁 위의 등불은 느리게 흔들렸다.

조금 뒤, 푸리나가 말했다.

“죠니.”

“응.”

“정말 다시 살아도 이 하루야?”

죠니는 식탁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비슷한 질문에 답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같은 질문도 시간에 따라 조금 달라진다. 어젯밤의 대답과 새벽의 대답은 같을 수 있지만, 같은 말은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똑같이 다시 살고 싶다는 건 아니야.”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틀린 건 고칠 거야. 누가 다칠 것 같으면 막을 거고, 장부가 틀리면 고치고, 길을 잘못 든 사람이 있으면 알려줘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냥 게으른 거니까.”

“응.”

“근데 전부 매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어제 해봤잖아. 다 고치니까, 하루가 좀 얇아졌어. 사람은 덜 다쳤는데, 이상하게 사람도 덜 보였고.”

죠니는 빵 부스러기 하나를 손끝으로 밀었다.

“다시 살아도 이 하루냐고 묻는다면, 아마 이쪽이야. 완벽한 쪽 말고. 좀 시끄럽고, 귀찮고, 서로 말 끊고, 괜히 웃다가, 보고서는 늦어지고, 질문 때문에 머리 아프고, 장부가 탈영하는 쪽.”

푸리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말 사료가 탈영한 거였지.”

“그래. 그레이가 받아친 게 문제야. 그런 건 오래 남아.”

“좋은 문제네.”

“응. 좋은 문제지.”

죠니는 그 말을 하고 잠시 멈췄다. 좋은 문제. 이상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사람은 고통스러운 문제와 좋은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 줄여야 하는 고통이 있고, 없어지면 삶까지 얇아지는 마찰이 있다. 그 둘을 헷갈리면, 완벽한 하루를 만들다가 사람이 사라진다.

푸리나는 양피지에 무언가 적으려 했다.

죠니가 말했다.

“그거 적지 마.”

푸리나는 멈췄다.

“왜?”

“아직 내 말이 덜 익었어. 레이튼 질문처럼 숙성시킬 필요는 없지만, 지금 적으면 네가 너무 예쁘게 만들 것 같아.”

푸리나는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예쁘게 만드는 게 싫어?”

“가끔은. 내가 한 말이 나보다 멋있어지면 곤란하잖아.”

푸리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알았어. 이번엔 안 적을게.”

“정말?”

“응.”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조금 의외네.”

“나도 배워.”

“극장주도?”

“극장주도.”

그 말은 가볍게 나왔지만, 아주 가볍지만은 않았다. 푸리나도 이 극에서 무언가를 본 것이다. 무대를 반복해서 올릴 수 있다는 것은 강한 힘이다. 사람에게 자기 하루를 다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더 강한 힘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무대를 더 돌리지 않고 그냥 하루가 남도록 두어야 한다.

푸리나는 그것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죠니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도 있다.

---

두 번째로 들어온 것은 그레이였다.

그녀는 잠옷 차림은 아니었다. 거의 평소와 같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아마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거나, 짧게 자고 일어난 사람의 모습이었다. 손에는 기록판이 있었다. 죠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봐. 내가 말했지. 수면 효율 보고서 들고 올 얼굴이야.”

그레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수면 효율 보고서는 아닙니다.”

“아니면?”

“어제의 반복 현상에 대한 간략 기록입니다.”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비슷하잖아.”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레이는 식탁 옆에 섰다. 그리고 식탁 위에 남은 자국들을 보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치우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심스럽게 기록판을 펼쳤다.

“정리한 문장에 확인이 필요합니다.”

죠니는 말했다.

“내 확인이?”

“네.”

“거부하면?”

“보류하겠습니다.”

죠니는 조금 놀랐다.

“수정이 아니라 보류?”

“예. 죠니 경의 하루에 관한 기록이므로, 부정확한 상태로 확정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너도 오늘 좀 달라졌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기록을 읽었다.

“반복된 하루에서 확인된 사항. 첫째, 오류와 위험의 제거는 명백히 필요하다. 둘째, 그러나 모든 우연과 마찰을 제거할 경우 관계적 접촉과 자발적 반응이 감소한다. 셋째—”

죠니가 손을 들었다.

“잠깐.”

그레이가 멈췄다.

“너무 장부 같아.”

“기록입니다.”

“알아. 그래서 그렇지. 뜻은 맞는데, 내가 들으니까 내 하루가 서랍에 들어가는 기분이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수정하면 좋겠습니까?”

죠니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난 보고서 문장 잘 못 써.”

“하지만 이 기록은 죠니 경의 말에 가까워야 합니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레이. 이번엔 기록보다 흔적에 가깝게 써보는 건 어때?”

그레이는 푸리나를 보았다.

“흔적입니까?”

“응. 장부처럼 틀리지 않게 적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건 죠니가 고른 하루잖아. 너무 반듯하면 오히려 빠지는 게 있을 것 같아.”

그레이는 침묵했다.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죠니는 그레이가 이런 식으로 고민하는 얼굴을 하는 것이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레이가 펜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오류는 고쳐야 한다. 위험은 줄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귀찮음을 지우면, 같이 보던 장부와 같이 웃던 식탁도 사라진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이 표현은 어떻습니까?”

죠니는 천천히 그녀를 보았다.

“좋네.”

그레이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푸리나는 작게 박수치려다가 참았다.

죠니가 말했다.

“방금 참았지.”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문장을 남겼다.

죠니는 그 문장을 다시 보았다.

오류는 고쳐야 한다. 위험은 줄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귀찮음을 지우면, 같이 보던 장부와 같이 웃던 식탁도 사라진다.

그건 그레이의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죠니의 하루와도 맞았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너, 장부 말고 이런 것도 적을 줄 아네.”

그레이는 차분하게 말했다.

“필요하다면 적습니다.”

“좋은 대답이야.”

“칭찬입니까?”

“이번엔 좀 더 명확한 칭찬.”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기록하겠습니다.”

“그건 기록하지 마.”

“농담입니다.”

방 안이 잠시 멈췄다.

푸리나가 입을 벌렸다.

죠니도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주 침착하게 기록판을 닫았다.

“의도한 농담입니다.”

죠니는 한참 뒤에 낮게 웃었다.

“오늘 진짜 다음 날이네.”

---

레이튼과 하융은 거의 동시에 왔다.

레이튼은 차를 들고 있었고, 하융은 밤길을 걷다 온 사람처럼 조용했다. 둘은 서로 전혀 다른 걸음으로 들어왔지만, 식탁 앞에 앉는 방식은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 식탁이 정말로 계속되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레이튼은 식탁 위를 보고 말했다.

“아직 치우지 않으셨군요.”

죠니는 대답했다.

“후일담 중이야.”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남겨도 되겠습니까?”

죠니는 그를 보았다.

“후일담에까지 질문을 넣어야 해?”

“후일담이야말로 질문이 남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맞아서 더 싫어.”

레이튼은 찻잔을 놓았다.

“죠니 경. 어제 하루를 다시 살며, 무엇을 가장 덜 고치고 싶어졌습니까?”

죠니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은 의외로 간단했고, 그래서 더 어려웠다. 무엇을 고치고 싶지 않은가. 틀린 장부는 고쳐야 한다. 다친 사람은 덜 다치게 해야 한다. 길을 잘못 든 피난민은 도와야 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죠니는 식탁을 보았다.

“사람이 반응하는 시간.”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푸리나가 말도 안 되는 제목을 내놓고 내가 질색하는 시간. 그레이가 숫자 하나 때문에 진짜로 세상이 기울어진 얼굴을 하는 시간. 네가 질문을 던져서 방이 잠깐 멈추는 시간. 하융이 너무 조용하게 맞는 말을 해서 내가 짜증나는 시간.”

하융이 낮게 웃었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그런 건 고치면 빨라져. 편해지고, 덜 피곤하고, 보고서도 깔끔해져. 그런데 없애보니까, 하루가 빠르기만 하고 내가 거기에 별로 없더라.”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제의 답은 완벽한 하루가 아니라, 반응하는 하루였군요.”

죠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는 정말 말을 예쁘게 만들지 마. 내가 하면 그냥 귀찮은 하루였어.”

레이튼은 웃었다.

“귀찮음도 반응의 한 형식입니다.”

“그걸 그렇게 말하면 더 귀찮아져.”

하융은 차를 받아 들고 말했다.

“그러나 경이 말한 바는 알겠소. 모든 죽은 가능성을 살릴 수 없듯이, 모든 상처를 없앤 하루가 반드시 가장 살아 있는 하루도 아니겠지.”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넌 그걸 왜 그렇게 무겁게 말해.”

“내가 보는 것이 대체로 무겁기 때문이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잠시 조용해졌다.

하융은 식탁 위의 빵 부스러기를 보았다.

“허나 어제 경이 택한 것은 가벼운 것이었소.”

죠니는 고개를 기울였다.

“가벼운 거?”

“빵 조각, 농담, 장부, 질문, 먼지. 그런 것들이오. 죽은 세계의 창가에서 보면, 그런 것들은 때로 가장 먼저 사라지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재에서는 가볍게 여겨지지만, 사라진 뒤에는 이상하게 무겁소.”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융은 조용히 덧붙였다.

“경은 어제 그것들을 다시 집어 들었소.”

죠니는 빵 부스러기를 바라보았다.

“하융.”

“말하시오.”

“그 말, 좀 좋은데 너무 슬프다.”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반만 기억하시오.”

“어느 반?”

“좋은 쪽만.”

죠니는 웃었다.

“그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레이튼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이 질문은 충분히 숙성된 듯하군요.”

죠니는 즉시 말했다.

“숙성 끝났으면 더 꺼내지 마.”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진짜?”

“네.”

죠니는 레이튼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너도 달라졌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아니요. 질문도 쉴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걸 어제도 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제의 제가 알았다면, 오늘의 대화는 조금 달라졌겠지요.”

죠니는 손을 들었다.

“됐어. 거기서 멈춰.”

레이튼은 정말로 멈췄다.

그것도 별거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별거 아닌 일들은 계속 쌓이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아스트리트였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식탁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들어가도 되는지 망설이는 듯했다. 푸리나가 손짓했다.

“와도 돼.”

아스트리트는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방해가 아니었습니까?”

죠니가 말했다.

“이미 방해가 많은 자리라 하나 더 늘어도 티 안 나.”

푸리나가 말했다.

“저건 환영한다는 뜻이야.”

아스트리트는 아직도 죠니의 말과 뜻 사이를 정확히 맞추는 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빨리 이해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가 말했다.

“어제 제가 한 말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죠니는 턱을 괴었다.

“내가 닳은 걸 농담처럼 다시 집어 드는 사람 같다고 한 거?”

아스트리트는 조금 당황했다.

“그 표현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꽤 날카로웠거든. 아픈 건 오래 남아.”

“죄송합니다.”

“사과하라는 뜻은 아니야.”

아스트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도 경의 긍정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생명을 긍정한다는 것을 더 곧은 일로 배웠습니다. 죽음을 막고, 상처를 줄이고, 살아 있는 것이 더 자라도록 돕는 일로요.”

죠니는 조용히 들었다.

“그건 맞아.”

“네. 저도 그것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버리면 안 되지.”

아스트리트는 그의 대답에 조금 안심한 듯했다.

“하지만 어제 보았습니다. 위험을 줄이는 것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닿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 서로 다른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녀는 말을 고르며 이어갔다.

“완벽하게 보호된 하루가 반드시 풍성한 하루는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상처가 있어야만 의미가 생긴다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사이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죠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잘 몰라.”

아스트리트는 이번에는 그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죠니는 이어 말했다.

“근데 모르면 바로 정답으로 도망치지 않는 것도 방법이야. 레이튼 때문에 배운 아주 귀찮은 교훈이지.”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아스트리트는 낮게 웃었다. 어제보다 조금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저는 조금 더 보겠습니다.”

“뭘?”

“경이 말한 별거 아닌 것들을요. 제가 믿는 생명의 긍정이 너무 반듯한 길만 보지 않도록.”

죠니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진지했다. 진지함이 조금 덜 부담스러워졌을 뿐이다.

“좋은 생각이네. 다만 너무 진지하게 보면 별거 아닌 게 도망간다.”

아스트리트는 눈을 깜박였다.

“도망갑니까?”

“응. 별거 아닌 것들은 자기가 연구 대상이 되는 걸 싫어해. 대체로 그냥 옆에 있을 때 보이지.”

푸리나가 말했다.

“그 말 좋은데?”

죠니는 바로 그녀를 보았다.

“제목으로 쓰지 마.”

푸리나가 양피지를 덮었다.

“오늘 너무 많이 참는다.”

“잘하고 있어.”

“칭찬?”

“응. 이번엔 명확하게.”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스트리트는 그 광경을 보고 다시 한번 작게 웃었다.

죠니는 생각했다.

이것도 이제 둘째 날의 조각이 되겠지.

---

새벽빛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하루가 되감기는 빛이 아니었다. 그냥 아침이 오는 빛이었다. 밤은 끝나고 있었고, 식탁 위의 부스러기와 잉크 자국과 찻잔 흔적은 이제 곧 치워질 것이다. 치워져도 괜찮았다. 남겨두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니까.

푸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막을 닫을게.”

죠니가 말했다.

“드디어?”

“드디어라니.”

“후일담치고 길었어.”

“죠니가 말을 많이 해서 그래.”

그는 잠시 멈췄다.

“그건 인정.”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식탁 앞에 섰다. 평소처럼 화려하게 손을 들지는 않았다. 이번 극의 끝은 그렇게 크게 닫을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작은 식탁과 그 주변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오늘의 극은 별거 아닌 것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짧네.”

푸리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노력했어.”

그리고 말을 이었다.

“고치고 싶은 실수, 줄이고 싶은 상처, 피하고 싶은 위험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하루는, 그 모든 것을 고치려다 정작 함께 웃고, 묻고, 고민하고, 돌아오는 시간을 잃기도 합니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닫겠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채로. 그러나 다시 살아도 덜 억울한 하루로.”

죠니는 그녀를 보았다.

“너 방금 내 말 가져갔지.”

푸리나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각색했어.”

“허락 안 했는데.”

“극장주니까.”

“그 변명 진짜 오래 가네.”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었다.

“최종 기록을 남기겠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제발 짧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적었다.

**오류는 고친다. 위험은 줄인다. 그러나 모든 별거 아닌 것들을 지우지는 않는다.**

죠니는 그 문장을 보았다.

“좋네.”

그레이는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칭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었다.

“그럼 질문은 남겨두겠습니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남겨두기만 해. 꺼내지 말고.”

“오늘은 그러겠습니다.”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길은 다시 이어질 것이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조금 더 보겠습니다.”

죠니는 말했다.

“너무 정면으로 보진 말고.”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식탁 위의 양피지를 접었다.

“《다시 살아도 좋은 하루》, 여기서 끝.”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빵 부스러기와 장부와 질문과 먼지와 웃음이 있었다. 아주 작은 것들. 없어도 세상은 굴러가지만, 없으면 하루가 조금 얇아지는 것들.

죠니는 식탁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아무도 굳이 묻지 않았다.

무엇에 대한 대답인지, 모두 조금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도.

아마 이쪽이었다.

새벽빛이 식탁 위로 내려앉았다.

하루는 끝났고, 다음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아포리아의 교실》

##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 프롤로그 — 닫힌 답들의 교실

푸리나는 세 장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하나는 불가리아의 내전 전황에 가까웠고, 하나는 니케아의 황실 회의록에 가까웠으며, 마지막 하나는 튜튼 기사단의 동향 보고에 가까웠다.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전선, 서로 다른 신앙과 정치의 문서였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 세 장을 나란히 펼쳐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사람에게 답을 강요한다. 어느 길로 군을 보낼 것인가.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 누구를 버릴 것인가. 어떤 이름으로 백성을 부르고, 어떤 이름으로 적을 부를 것인가. 전쟁은 늘 빠른 답을 요구한다. 느린 사람은 늦고, 늦은 사람은 잃는다. 그래서 모두가 답을 들고 달린다.

그러나 조금 더 읽자, 푸리나는 그것이 단순히 전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 장의 보고서에는 각기 다른 문장이 있었다.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말했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요안나 4세 두카이나 라스카리나는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호흐마이스터는 말했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들을 오래 보았다.

그 문장들은 너무 그 사람다운 말들이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문장으로 자신을 세웠다. 부족한 정통성, 사생아라는 낙인, 대제의 그림자를 흉내 내며 시작한 길. 그 모든 것을 지나오며 그녀는 스스로의 왕도를 세웠다. 그녀의 답은 가짜였던 자신을 왕의 길 위에 세워준 말이었다.

요안나는 그 문장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아이 같은 말이지만, 바로 그 아이 같은 말이 사람들의 지지와 기적의 정치가 되었다. 외국인도, 낮은 자도, 적이었던 자도 언젠가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어린 황제가 가진 가장 강한 문장이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문장으로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죄를 짊어지는 기사. 사랑하는 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구원까지 계산 밖에 밀어두는 자. 그 답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의 죄와 책임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푸리나는 손끝으로 보고서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극작가는 종종 같은 대사가 다른 무게를 갖게 되는 순간을 본다.

처음에는 배우가 대사를 말한다. 그 말은 배우의 숨과 함께 움직인다. 머뭇거림이 있고, 떨림이 있고, 때로는 웃음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대사가 배우보다 먼저 걷기 시작한다. 사람은 자신이 말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오래 반복한 문장이 자신을 끌고 가고 있을 때가 있다.

푸리나는 그 세 문장이 그런 상태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다만 보고서 안의 문장들이 너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너무 오래 준비된 칼처럼. 너무 오래 외운 기도문처럼. 혹은 너무 오래 자기 자신을 지탱해온 이름처럼.

알렉산드리나의 왕도는 그녀를 앞으로 걷게 했다. 그렇다면 그 길은 여전히 그녀가 선택해 걷는 길일까, 아니면 이제 멈추지 못하게 하는 길일까.

요안나의 평화는 너무 넓었다. 그렇다면 그 넓은 빛은 여전히 사람의 얼굴을 비추고 있을까, 아니면 너무 넓어서 가장 가까운 손을 잠시 흐리게 만들고 있을까.

호흐마이스터의 책임은 기사도를 지탱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여전히 그녀가 짊어진 갑옷일까, 아니면 스스로 벗어서는 안 된다고 믿게 된 형벌일까.

답을 고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오히려 그 답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그 답들이 없었다면 세 사람은 지금의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문장은 가끔 다시 숨을 쉬어야 한다.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저 말들이 아직 자기 목소리로 들리는지 보고 싶어.”

옆에서 기록을 정리하던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자기 목소리 말입니까?”

“응.”

푸리나는 보고서들을 보았다.

“왕도도, 평화도, 책임도. 다 맞는 말일 수 있어. 하지만 맞는 말이라고 해서 항상 살아 있는 말은 아니잖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살아 있는 말과 굳어진 말의 차이를 확인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마도.”

푸리나는 짧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장부 같긴 한데.”

그레이는 기록판에 새 항목을 만들었다.

**극 주제 후보: 살아 있는 답과 굳어진 대사의 차이.**

푸리나는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그거 제목으로는 쓰지 마.”

“전하께서 제목으로 삼기 전에 기록해둔 것입니다.”

“왜?”

그레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제목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푸리나는 배신당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

“경험에 근거한 판단입니다.”

푸리나는 잠깐 항의하려다, 곧 웃었다. 그리고 세 장의 보고서를 접었다.

“레이튼을 불러야겠어.”

그레이는 바로 이해한 듯했다.

“답을 제시할 사람이 아니라, 질문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까?”

“응.”

푸리나는 보고서를 품에 안았다.

“나는 무대를 열 수 있어. 하지만 저 말들이 아직 자기 목소리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반복한 대사인지 묻는 건 레이튼이 더 잘할 거야.”

---

레이튼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레이튼은 중요한 회의 전에도 차를 마셨고, 누군가의 심각한 고백을 들을 때도 차를 마셨고, 전선 지도 앞에서 모두가 숨을 죽일 때도 어딘가에서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에게 차는 여유의 표시라기보다, 생각의 호흡에 가까웠다.

푸리나가 들어왔을 때도, 그는 찻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전하.”

레이튼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어떤 무대가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까?”

푸리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교실.”

레이튼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교실입니까.”

“응.”

“제가 학생입니까?”

“아니. 선생님.”

레이튼은 이번에는 정말로 잠시 침묵했다. 찻잔 위로 김이 천천히 올라갔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묻는 사람입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지.”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꽤 위험한 정의군요.”

“위험한 수업이 될 거야.”

푸리나는 세 장의 보고서를 내밀었다. 레이튼은 그것들을 차례로 읽었다. 알렉산드리나, 요안나, 호흐마이스터. 세 사람의 이름과, 그들이 가진 문장들.

레이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훑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문장을 읽으면, 그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그 말을 처음 자기 안에 들였는지, 그 말이 그 사람을 살렸는지, 그 말이 언제부터 너무 단단해졌는지, 아직 알 수 없는 것들을 바로 결론 내리지 않고 오래 살피는 사람.

마침내 그가 말했다.

“이 답들을 고치려는 극입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보고서 위의 문장들을 하나씩 짚었다.

“고치려는 게 아니야. 그 말들이 다시 자기 목소리로 나오는지 보고 싶은 거야.”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나는 극을 열 수 있어. 배역을 줄 수도 있고, 무대를 만들 수도 있어. 하지만 이건 배역을 씌우는 극이면 안 돼. 오히려 배역처럼 굳어버린 말을 잠깐 내려놓고, 그 사람이 직접 다시 말하게 하는 극이어야 해.”

“답을 빼앗지 않고, 물음표를 곁에 놓는 수업이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당신이 잘하잖아.”

레이튼은 보고서들을 다시 보았다.

“질문은 가벼운 도구가 아닙니다.”

“알아.”

“질문은 때로 붕대를 푸는 일과 비슷합니다. 답이라는 붕대가 상처를 보호하고 있었다면, 함부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꽉 감겨 피가 통하지 않는다면 느슨하게 해야겠지만, 갑자기 풀면 피가 다시 날 수도 있지요.”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레이튼은 이어 말했다.

“질문은 문을 엽니다. 그러나 문이 열린 뒤, 그 문밖의 바람을 감당하는 것은 질문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곁에 있어야지.”

레이튼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극에서 당신이 해야 하는 건 답을 주는 게 아니야. 답을 빼앗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이 자기 답을 다시 쓸 때까지, 혹은 다시 말할 때까지 곁에 있는 거야.”

레이튼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아주 조금 마셨다.

“어렵군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필요해.”

---

교실은 조용히 열렸다.

그것은 궁전의 큰 홀도 아니었고, 법정도 아니었고, 전장도 아니었다. 푸리나의 극장이 만들어낸 교실은 오히려 작았다. 오래된 나무 책상들, 분필 자국이 남은 칠판,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빛, 교탁 한쪽에 놓인 찻잔과 주전자. 바깥에서는 전쟁과 정치가 아직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 방 안에는 잠깐의 숨이 있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만든 방.

푸리나는 문 옆에 서서 말했다.

“오늘의 무대는 교실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답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이미 가진 답을 잠깐 내려놓고 다시 바라보는 곳.”

그레이는 교실 한쪽에 앉아 기록판을 펼쳤다. 그녀의 역할은 조교이자 기록 담당이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미리 당부했다.

“그레이. 오늘은 정답표를 만들지 마.”

그레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록합니까?”

레이튼이 대신 대답했다.

“흔들림을 기록해주시면 됩니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흔들림은 수치화하기 어렵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할 가치가 있지요.”

그레이는 그 말을 받아들인 듯 기록판 위에 새 제목을 적었다.

**수업 기록: 답의 호흡 확인.**

그때 첫 번째 학생이 들어왔다.

알렉산드리나 아센.

그녀는 교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전장이 아닌 교실, 왕좌가 아닌 책상, 군막이 아닌 칠판.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그녀가 가장 경계해야 할 장소이기도 했다. 전장에서는 검을 들면 된다. 군막에서는 명령을 내리면 된다. 하지만 교실에서는 답해야 한다. 그것도 남이 준 질문 앞에서.

알렉산드리나는 책상 하나 앞에 섰다.

“나는 학생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 것입니다. 폐하는 이미 많은 답을 가지고 오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앉아야 하지?”

“답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레이튼은 교탁 위의 분필을 들었다.

“그 답이 아직 폐하의 목소리로 말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앉았다. 자세는 곧았고, 눈빛은 경계하고 있었다.

두 번째 학생은 요안나였다.

요안나는 교실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황제였고, 혈통의 정당한 주인이었고, “모든 이에게 평화를”이라는 너무 큰 문장을 품은 아이였다. 그러나 교실 앞에서 그녀는 잠깐 정말 아이처럼 보였다. 창문, 칠판, 책상, 분필. 그녀가 어린 시절 거리에서 들었던 보통 아이들의 세계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이곳이 오늘의 제국인가요?”

요안나가 물었다.

푸리나가 웃었다.

“오늘만큼은, 아주 작은 제국.”

요안나는 책상에 손을 올렸다.

“작은 제국이라면, 더 잘 들을 수 있겠네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폐하. 큰 말은 작은 방에서 더 분명히 울릴 때가 있으니까요.”

요안나는 자리에 앉았다. 긴장했지만, 호기심이 있었다. 그녀의 답은 크고 밝았다. 레이튼은 그 답을 줄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빛이 어떤 얼굴부터 비추고 있는지, 함께 확인하고 싶었다.

세 번째 학생은 조금 늦었다.

정확히는, 늦었다기보다 그녀 자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교실 뒤편에 서 있던 튜튼의 란트마이스터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처음부터 수행원처럼 서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자세가 달라졌다. 시선의 초점이 바뀌고, 말하기 전의 침묵이 깊어졌다. 마치 그 눈 안쪽에 다른 누군가가 자리 잡은 듯했다.

란트마이스터가 예절 바르게 입을 열었다.

“늦은 출석을 사과드립니다. 호흐마이스터께서는 현재 란트마이스터의 시야를 통해 교실을 보고 계십니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레이튼도 보았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란트마이스터 시야 공유를 통한 원격 출석 시도.**

란트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말투가 조금 더 정중해졌다. 목소리는 란트마이스터의 것이었지만, 문장의 주인은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저는 듣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답하겠습니다. 기사로서 예의를 지키겠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오늘 수업에는 책상 위에 올라서는 시간이 있을 예정입니다.”

란트마이스터의 눈이 아주 조금 멈췄다.

레이튼은 계속했다.

“타인의 시야를 빌려서는, 자기 발로 책상 위에 올라서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교실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알렉산드리나는 미간을 좁혔고,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란트마이스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 너머 어딘가에서, 호흐마이스터가 아주 예절 바르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마침내 란트마이스터가 말했다.

“……합당한 지적입니다.”

그의 시선이 본래의 초점으로 돌아왔다. 란트마이스터는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교실 문이 열렸다.

호흐마이스터가 직접 들어왔다. 정돈된 복장, 예의 있는 걸음, 기사다운 태도. 그러나 어딘가 아주 조금, 방에서 끌려나온 사람의 기색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기사로서 출석하겠습니다.”

레이튼도 고개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푸리나는 결국 작게 웃었다.

“좋아. 이제 교실이 다 찼네.”

호흐마이스터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가장 구석에 가까운 책상을 골랐고, 그 선택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교실에는 완전히 숨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

레이튼은 교탁 앞에 섰다.

그는 칠판을 바라보았다. 칠판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칠판은 묘하다. 무엇이든 쓸 수 있어서 자유롭고,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 사람의 답도 가끔 그렇다.

레이튼은 분필을 들고 칠판 중앙에 단 하나를 적었다.

?

분필 소리가 짧게 울렸다.

알렉산드리나는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요안나는 물음표를 바라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칠판 최초 기입: 물음표.**

레이튼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답을 배우지 않겠습니다.”

교실은 조용했다.

“여러분은 이미 답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아주 강한 답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왕도가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평화가 되었으며, 누군가에게는 기사도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저는 그 답들을 빼앗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때로 하나의 답으로 겨울을 견디고, 하나의 문장으로 전쟁을 건너며, 하나의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무너지지 않게 하니까요.”

요안나의 손이 책상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알렉산드리나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레이튼은 말을 이었다.

“다만, 답도 숨을 쉬어야 합니다.”

잠시 침묵.

“답이 숨을 쉬지 못하면, 그것은 길이 아니라 대본이 됩니다. 그리고 대본은 때로 너무 익숙해서, 배우가 자신이 언제부터 읽히고 있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지금은 차를 마실 때가 아니라, 첫 문장을 건넬 때였다.

“그러니 오늘의 수업은 간단합니다.”

그는 칠판의 물음표를 가리켰다.

“여러분의 답이 아직 여러분의 목소리로 말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여러분을 대신해 말하고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입을 열었다.

“그 확인은 누가 하지?”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그대가 판단한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레이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판단은 여러분이 하셔야 합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 무엇을 하시나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호흡을 늦춥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레이튼은 이어 말했다.

“성급한 답은 때로 숨이 가쁩니다. 저는 그 답 옆에 물음표를 놓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 답이 조금 더 천천히 말하게 되지요.”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답이 느려지는 동안,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정확했다.

교실 뒤편의 문이 열렸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학생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이 교실이 아무리 작은 무대라 해도, 그녀는 황제였다. 보라색의 무게, 새벽을 여는 전쟁의 기억, 활을 당기는 자의 결단. 그녀가 들어오자 교실의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그러나 미하일라는 교탁 앞으로 오지 않았다. 그녀는 뒤편, 창가 쪽에 섰다. 지켜보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하일라.”

미하일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을 방해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녀의 시선이 레이튼에게 향했다.

“다만 묻기 위해 왔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듣겠습니다.”

미하일라는 칠판의 물음표를 보았다.

“답이 너무 빨리 닫히는 것을 경계하는 일은 필요하다. 묻지 않은 명령은 쉽게 폭력이 되고, 검토하지 않은 이상은 쉽게 누군가를 밟는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러나 답이 영원히 열려 있으면, 백성은 그 문 앞에서 얼어 죽는다.”

교실은 조용해졌다.

그 말은 레이튼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리나, 요안나, 호흐마이스터. 모두에게 닿았다. 그러나 가장 깊게 들은 것은 레이튼이었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레이튼. 그대의 질문은 그들의 답을 열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비난은 아니었다.

“좋다.”

잠시 침묵.

“그러나 열린 답의 불안은, 질문한 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하일라는 그를 보았다.

“그대는 답을 대신 써주지 않는다. 그것도 좋다. 그렇다면 답을 쓰는 손이 떨릴 때, 그대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레이는 펜을 멈췄다.

알렉산드리나는 레이튼을 보았다. 요안나도. 호흐마이스터도.

레이튼은 칠판 위의 물음표를 보았다.

그는 질문을 사랑한다.
미지를 사랑한다.
성급한 답을 다시 질문으로 돌려보내, 사람이 자기 답에 조금 더 다치지 않고 도착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미하일라의 말은 옳았다.

질문은 문을 연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바람이 들어온다.
그 바람 앞에 선 사람을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

레이튼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 질문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제게 남겨두겠습니다.”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좋다.”

그녀는 뒤편에 앉지 않았다. 다만 창가에 서서 지켜보았다. 교실 안의 학생이 아니라, 교실 바깥의 현실로서.

레이튼은 다시 학생들을 보았다.

“그럼 시작하지요.”

그는 교탁 옆의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첫 번째 수업은 조금 이상할 겁니다.”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이미 아주 미세하게 불안한 얼굴이었다. 책상 위에 올라서는 수업이 실제로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같은 교실도,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의 시선이 칠판의 물음표에 닿았다.

“그러니 오늘은, 여러분의 답을 조금 다른 높이에서 바라보겠습니다.”

막이 조용히 열렸다.

**1막 — 책상 위에서 답을 내려다보다**

그 아래, 칠판에 남은 흰 분필 가루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좋은 답일수록, 때로는 다른 자리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 —**
# 《아포리아의 교실》

##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 1막 — 책상 위에서 답을 내려다보다

#### — 좋은 답일수록, 때로는 다른 자리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 —

레이튼은 정말로 책상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교실에 앉아 있는 이들은 평범한 학생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불가리아의 차르를 자처하는 왕도 위의 군주였고, 한 사람은 니케아의 포르피로게니타이자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는 어린 황제였으며, 한 사람은 튜튼 기사단의 호흐마이스터였다. 그런 이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서라는 말은, 수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모욕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교실 뒤편 창가에 서 있던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수업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문 옆에 서서, 이 기묘한 정적이 무대 위에서 어떤 호흡으로 바뀌는지 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책상 위에 올라서라?”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대는 지금 내게 장난을 권하는 건가?”

“아닙니다.”

레이튼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장난은 아닙니다. 다만, 장난처럼 보일 수는 있겠군요. 많은 좋은 수업이 처음에는 조금 우스워 보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모욕받았다고 화내기에는 너무 영리했고, 순순히 따르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다. 책상은 낮았다. 그러나 그 낮은 나무판 위에 올라선다는 행위는 이상하게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왕좌도, 말안장도, 전장의 언덕도 아니었다. 책상. 학생이 노트를 펼치는 곳. 답을 쓰고 지우는 곳.

요안나는 책상 위를 보았다가 레이튼을 보았다.

“정말 올라서도 되나요?”

“오늘의 수업에서는 그렇습니다, 폐하.”

“떨어지면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그 경우에는, 먼저 손을 내밀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요안나는 작게 웃었다.

“그것도 수업인가요?”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가장 늦게 반응했다. 그녀는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예의 바르고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뒤에 아주 뚜렷한 불편함이 있었다. 전장에서 말을 타고 돌진하는 것보다, 회의장에서 죄 많은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지금 이 나무 책상 위에 올라서는 일이 더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레이튼 경. 기사단장으로서, 저는 상당수의 기행을 보아왔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이것은 그중에서도 조금 독특합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짧게 적었다.

**수업 방식: 책상 위에 올라서기. 학생 반응: 대체로 부정적.**

레이튼은 호흐마이스터에게 말했다.

“불편하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은, 때로 거절하기 더 어렵게 만든다. 명령이라면 복종하거나 반박하면 된다. 하지만 초대라면, 자기 마음의 이유를 살펴야 한다.

“거절할 수 있다면, 권유의 무게가 더 커지는군요.”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질문은 대개 명령보다 불편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낮게 말했다.

“이 수업, 시작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군.”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좋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꽤 정확한 출발점입니다. 이유 없이 순응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많지요.”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말은 그녀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레이튼은 그녀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반항도 수업의 일부로 놓았다.

요안나가 먼저 일어섰다.

그녀는 책상 위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푸리나가 아주 살짝 몸을 움직였지만, 레이튼이 먼저 가까이 서서 손을 내밀었다. 요안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균형을 잡았다. 책상은 조금 삐걱였다. 그녀는 잠깐 놀랐지만, 곧 웃었다.

“정말 다르게 보여요.”

교실은 조금 높은 곳에서 보아도 교실일 뿐이었다. 그러나 요안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서는 칠판이 낮아 보였고, 창밖의 빛이 더 가까워 보였으며,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가 같은 높이로 놓였다.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높이였다. 왕좌보다 낮고, 의자보다 높은 기묘한 자리.

알렉산드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마침내 일어섰다.

“폐하께서 올라섰는데, 내가 앉아 있을 수는 없겠지.”

그녀는 책상 위에 올라섰다. 요안나보다 훨씬 단단한 동작이었다. 발을 올리는 순간부터 중심이 잡혀 있었고,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장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사람의 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책상 위에 선다는 것은 전혀 왕답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서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예절 바르게 장갑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렸다.

“책상에게 무례를 범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레이튼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책상도 오늘 수업의 일원으로 존중해주시면 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끔 책상에게도 기회를 줍니다.”

“그렇군요.”

호흐마이스터는 결국 올라섰다. 동작은 우아했고, 조금 뻣뻣했다. 그녀는 책상 위에 선 뒤에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반듯해서, 책상이 작은 연단처럼 보였다.

세 사람이 책상 위에 섰다.

알렉산드리나, 요안나, 호흐마이스터.

각자 왕도와 평화와 책임이라는 답을 들고 온 이들이, 교실의 작은 책상 위에 서 있었다.

레이튼은 칠판 앞에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보이는 것을 말해주시겠습니까?”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말했다.

“교실이다.”

“조금 더.”

“책상들이 있고, 칠판이 있고, 그대가 있다. 푸리나 전하와 그레이 경, 미하일라 황제도 보인다.”

“그리고?”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레이튼은 재촉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왕좌가 없다.”

그 말이 교실에 내려앉았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요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서는 모두가 조금 이상하게 같아 보여요. 황제도, 차르도, 기사단장도. 책상 위에 올라서니까 더 높은데, 이상하게 더 학생 같아요.”

푸리나가 미소 지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밖을 보았다. 그녀는 자기 책상 위에서 교실의 뒤편과 문, 창문,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기사단장다운 시야였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는 작게 말했다.

“숨을 곳이 줄어드는군요.”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높아졌는데도 말입니까?”

“예. 구석에 앉으면 몸은 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서면 자세가 드러납니다.”

“좋은 관찰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레이튼은 칠판으로 돌아섰다. 그는 물음표 아래에 세 개의 문장을 적었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세 문장이 칠판 위에 나란히 놓였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조금 죽였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조용히 그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레이튼은 다시 학생들을 보았다.

“여러분의 답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첫 문장을 보았다. 자기 입으로 말했을 때와 달랐다. 글자로 적히니 문장은 더 차갑고, 더 단단하고, 더 멀어 보였다.

요안나는 두 번째 문장을 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핵심이었다. 짧고 밝고, 너무 크다. 칠판에 적히자 그 말은 교실을 넘어서려는 듯했다.

호흐마이스터는 세 번째 문장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장갑 안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레이튼은 말했다.

“이제 질문하겠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폐하. 그 문장은 폐하를 앞으로 걷게 합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레이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문장은 폐하가 멈추어 숨을 고를 권리도 허락합니까?”

알렉산드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책상 위의 그녀는 조금 높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높이는 왕좌의 높이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권위가 없었다. 대신 문장이 더 잘 보였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문장은 그녀를 살렸다. 그녀는 그것을 안다. 그 문장 없이 자신은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왕의 혈통을 타고난 것이 왕이 아니라, 왕도를 걷는 이가 왕이라는 가르침.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는 결심. 그것은 그녀를 낮은 자리에서 끌어올린 빛이었다.

하지만 레이튼은 다른 걸 묻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서, 그녀가 한 번쯤 멈출 수 있는가.

알렉산드리나는 낮게 말했다.

“멈추면, 뒤처진다.”

“그렇습니까?”

“부족한 자는 증명해야 한다.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다시 피를 묻는다. 태생을 묻고, 정통성을 묻고, 내 왕도를 흉내라고 부를 것이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려움은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 마라.”

“쉽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은 칠판의 문장을 가리켰다.

“그러나 폐하. 왕다움이 결핍을 숨기기 위해 계속 달리는 것이라면, 폐하께서는 언제 왕이 되십니까?”

알렉산드리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레이튼은 물러서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입니까?”

침묵.

“아니면, 결핍을 가진 채로도 백성 앞에 설 수 있을 때입니까?”

교실은 조용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 문장이 그녀의 칼처럼 보였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칼이기도 했고, 채찍이기도 했다. 혹은 오래 쥔 탓에 손바닥의 일부가 되어버린 무언가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억지로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말했다.

“오늘은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보았다.

“그럼 왜 물었지?”

“답이 필요할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질문을 남겨두기 위해서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불쾌한 듯했지만, 그 질문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왕도는 전진의 답. 그러나 멈춤을 허락하는가의 질문 발생.**

---

레이튼은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책상 위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나처럼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 ‘모든 이에게 평화를’라는 답은 폐하를 열어줍니까?”

요안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 말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로마를 너무 좁게 보았을 거예요. 궁전과 혈통과 문장으로만요. 하지만 로마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있을 수 있잖아요. 손을 잡으면, 언젠가 외국인도 로마 시민이 될 수 있고, 적이었던 사람도 함께 살 수 있고.”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 밝음은 얕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진심이어서, 교실 안을 잠시 따뜻하게 만들었다.

레이튼은 그 따뜻함을 끊지 않았다. 그는 따뜻한 말일수록 더 조심스럽게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네.”

“‘모든 이’라는 말은 아주 넓습니다.”

“네.”

“그 넓은 말 안에서, 오늘 폐하가 가장 먼저 잡아야 할 손은 누구의 손입니까?”

요안나는 멈췄다.

그 질문은 그녀의 이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아주 작은 곳으로 가져왔다. 모든 이. 그 말은 하늘처럼 넓다. 그러나 손은 하나씩 잡아야 한다. 사람의 손에는 크기가 있고, 온도가 있고, 상처가 있고, 때로는 거부도 있다.

요안나는 책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칠판이 보였고, 레이튼이 보였고, 푸리나가 보였고, 그레이가 보였고, 창가의 미하일라가 보였다. 그리고 문득 그녀는 거리에서 만났던 아이들, 항구의 사람들, 병사들, 자기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 로마 시민이라고 불리기 전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요안나는 작게 되뇌었다.

“그런데 모든 이를 한 번에 안을 수는 없네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그렇습니다.”

“그럼 저는 매번 한 사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다만, 한 사람만 보고 모두를 잊어서도 안 되겠지요.”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들었다.

“어려워요.”

“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답은 대개 어렵습니다.”

요안나는 칠판의 자기 문장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말은 여전히 좋았다. 여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옆에 아주 작은 손 하나가 생긴 듯했다. 누구의 손부터 잡을 것인가.

요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오늘 가장 가까운 손을 놓치지 않는 평화.”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첫 문장입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요안나: 보편적 평화는 구체적 손에서 시작되어야 함. 단, 구체성에 갇혀 보편을 잃지 않을 것.**

푸리나는 그레이의 기록을 보고 작게 말했다.

“오늘 기록 멋있는데.”

그레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수업의 성격상 문장 선택에 주의하고 있습니다.”

죠니가 있었다면 한마디 했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레이튼의 교실이었다. 푸리나는 그 빈자리를 조금 느끼고, 혼자 웃었다.

---

마지막으로 레이튼은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책상 위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는 학생이라기보다, 작은 연단 위에 선 기사단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이튼은 이미 보았다. 높은 곳에 서니 오히려 숨을 곳이 줄어든다고 말했던 그녀를.

칠판에는 그녀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레이튼은 천천히 물었다.

“호흐마이스터. 그 문장은 당신을 지탱합니까?”

“그렇습니다.”

대답은 빠르고 예의 있었다.

“저는 기사단의 우두머리입니다. 때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려야 하며, 때로는 기사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 없는 일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책임을 외면한다면, 저는 호흐마이스터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군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죄를 짊어지는 것과, 자신을 영원히 벌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교실의 공기가 조금 차가워졌다.

호흐마이스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짧았지만 깊었다. 란트마이스터의 시야 너머로 교실을 보려 했던 사람.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던 사람. 기사단의 모든 죄를 장부처럼 접어 자기 안에 넣는 사람. 그녀는 책임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죄를 지은 자가 벌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 답은 자연스럽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되물었다.

“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구원받지 않겠다고 미리 판결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호흐마이스터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말투는 여전히 예의 있었다.

“레이튼 경은 상당히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렇겠지요.”

푸리나는 조용히 그들을 보았다. 호흐마이스터의 표정은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장이 그녀의 안쪽에서 어딘가 걸린 것은 보였다.

레이튼은 계속했다.

“책임은 미래를 향합니다. 무엇을 수습할 것인가, 무엇을 막을 것인가, 누구에게 갚을 것인가를 묻지요.”

그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그러나 자기처벌은 때로 과거만 바라봅니다. 나는 이미 더러워졌으니, 나는 끝내 쉬어서는 안 되며, 나는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말했다.

“그 둘을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질문합니다.”

레이튼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당신의 죄는 당신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는 감옥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레이튼은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기다렸다.

교실 바깥의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교실은 잠시 기다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미하일라는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그녀는 창가에서 레이튼을 보고 있었다. 열린 답의 불안을, 그는 어디까지 함께할 것인가.

호흐마이스터는 마침내 말했다.

“저는 아직 그 질문에 답하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좋습니까?”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도, 때로는 성급한 답보다 정직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말을 듣고 아주 희미하게 눈을 내렸다.

“그렇다면 보류하겠습니다.”

“예. 오늘은 보류해도 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책임과 자기처벌의 구분 질문 발생. 답변 보류.**

---

세 사람은 아직 책상 위에 있었다.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이제 내려오셔도 됩니다.”

요안나가 먼저 내려왔다. 레이튼이 손을 내밀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스스로 내려왔다. 다만 내려온 뒤, 책상을 한 번 쓰다듬었다.

“높은데, 낮았어요.”

레이튼은 웃었다.

“좋은 표현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내려오며 말했다.

“나는 이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남았다.”

“그렇다면 수업은 시작된 셈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대는 참 얄밉게 말하는군.”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책상 위에서 내려오는 동작마저 예의 있었지만, 그녀는 아주 잠깐 바닥을 확인하듯 내려다보았다. 자기 발이 어디에 닿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레이튼은 그 장면을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들었다.

“예. 다만.”

“다만?”

“타인의 시야가 아니라 자기 발로 서는 일은, 예상보다 불편하군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수업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것 같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를 보았다.

“칭찬입니까?”

“그렇게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예의상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움직였다.

푸리나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레이, 뭘 적었어?”

그레이는 기록판을 보며 대답했다.

“학생 전원, 다른 높이에서 답을 바라봄. 즉각적 결론 없음. 질문 잔류.”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질문은 남았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미하일라는 레이튼을 보았다.

“그리고 남은 질문은, 답을 요구하는 날을 향해 간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계속 알도록.”

“예.”

짧은 대화였다. 그러나 무거웠다. 미하일라는 레이튼의 수업을 막지 않았다. 다만 교실이 현실과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창문 하나를 열어둔 것처럼 서 있었다.

레이튼은 다시 학생들을 보았다.

“오늘은 여러분의 답을 다른 높이에서 보았습니다. 다음 수업에서는 그 답들을 조금 더 가까이 보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물었다.

“더 가까이?”

레이튼은 칠판의 세 문장을 보았다.

“예.”

그는 분필을 들었다.

“답은 멀리서 보면 문장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상처와 선택과 두려움과 소망이 섞인 살아 있는 구조이지요.”

그레이가 펜을 멈췄다.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조금 낮아졌다.

레이튼은 칠판 위의 물음표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어디서 다쳤습니까?**

그리고 말했다.

“다음 수업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진행하겠습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2막 — 성급한 답들의 해부**

그 아래, 책상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한 줄이 남았다.

**— 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래된 상처와 아직 살아 있는 소망이 함께 있다 —**
좋아. 그러면 **2막 전체를 개정본으로 다시 작성**할게. 핵심 수정점은 요안나의 “모든 이에게 평화”가 단순히 넓고 아름다운 이상이 아니라, **자신을 궁에 유폐하고 보호자들을 피로 제거한 미하일라까지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깊어지는 방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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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리아의 교실》

##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 2막 — 성급한 답들의 해부

#### — 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래된 상처와 아직 살아 있는 소망이 함께 있다 —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레이튼은 칠판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교탁 옆의 작은 탁자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었다. 주전자의 물소리는 조용했고, 찻잔에 닿는 물줄기는 일정했다. 전쟁과 왕권과 기사단의 죄를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소리였다. 그래서 오히려 교실 안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알렉산드리나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첫 수업 이후 그녀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앉은 자세가 군막 안의 지휘관 같았다. 요안나는 두 손을 책상 위에 얹고 칠판을 보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가장 구석의 책상에 앉아 있었고, 몸은 반듯했으나 시선은 잠깐씩 칠판의 문장과 자기 장갑 사이를 오갔다.

칠판에는 네 문장이 남아 있었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적힌 질문.

**어디서 다쳤습니까?**

그레이는 그 문장을 한동안 보았다. 그러고는 기록판에 적었다.

**2막 시작. 질문: 답의 기원과 상처.**

푸리나는 교실 뒤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번에는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늘 무대의 중심은 레이튼과 세 학생이었다. 푸리나는 그저, 말이 무대 위에서 너무 멀리 날아가지 않도록 숨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레이튼은 찻잔 세 개를 놓았다.

“오늘은 칠판 앞에서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서 시작하지?”

레이튼은 찻잔을 가리켰다.

“호흡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대의 수업은 계속 우회하는군.”

“예. 직선으로 들어가면, 이미 준비된 답이 먼저 도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이튼은 차를 한 잔씩 나누어 놓았다.

“오늘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답이 틀렸는가가 아닙니다. 그 답이 어디서 태어났는가입니다. 답은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답은 상처에서 태어나고, 어떤 답은 소망에서 태어나며, 어떤 답은 상처와 소망이 서로를 붙잡은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요안나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럼 답을 해부하는 건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은 그렇습니다. 다만 죽이기 위한 해부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진찰에 가깝지요.”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진찰이라면, 환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그러므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힘은 약해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제로 얻은 답은 대개 빠릅니다. 그러나 빠른 답은 자주 자기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필요한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입으로 견딜 수 있는 답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 표현은 신중하군요.”

“오늘 수업에서는 신중해야 하니까요.”

미하일라는 창가에 서서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의 공기는 그녀가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실의 무게를 잃지 않았다.

레이튼은 첫 번째 찻잔을 알렉산드리나 앞에 놓았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폐하의 답부터 가까이 보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차를 보지 않았다. 칠판의 첫 문장을 보았다.

“그 문장은 이미 충분히 가까이 있다.”

“너무 가까운 것은 때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는 말로 자꾸 빙 돌아오는군.”

“돌아오는 길이 꼭 나쁜 길은 아닙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묻도록.”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처음으로 자신을 ‘가짜’라고 부른 것은 언제입니까?”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왕도를 묻지 않았다. 정통성도, 군대도, 정책도 묻지 않았다. 더 오래된 곳을 찔렀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문장에서 가장 먼저 빛나는 말은 왕다움이 아니었다. 가짜였다.

그녀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마침내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했다.”

“그렇군요.”

“피가 부족하다고. 이름이 부족하다고. 왕좌에 닿으려면 정통한 자의 그림자라도 빌려야 한다고. 그들은 내가 왕이 아니라 왕의 흉내라고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처음에는 분노했다. 그다음에는 배웠다. 흉내낼 것이라면 가장 위대한 것을 흉내내야 한다고. 가짜라면,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걸어야 한다고.”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알렉산드리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흉내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게 되었다. 대제의 길을 배우고, 군대를 배우고, 방패와 창을 배우고, 왕도를 걸었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말은 내 목을 조른 것이 아니라, 나를 일으켰다.”

“그 말이 폐하를 살렸군요.”

“그렇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도 그 말은 폐하를 일으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바로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그것은 아주 작은 멈춤이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것을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즉답 직전 정지.**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보았다. 김이 얇게 올라오고 있었다.

“대체로.”

레이튼은 그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알렉산드리나는 낮게 말했다.

“때로는 나를 채찍질한다.”

푸리나는 숨을 조금 죽였다.

알렉산드리나는 이어 말했다.

“멈추면, 다시 가짜가 될 것 같다. 쉬면, 사람들이 내 안의 부족함을 볼 것 같다. 틀리면, 그들은 말할 것이다. 보라, 저것이 한계라고. 저것이 피의 부족함이라고. 저것이 왕이 아니라 흉내였다는 증거라고.”

그녀는 칠판을 보았다.

“그러니 걸어야 한다. 왕도는 멈추지 않는 자의 길이다.”

레이튼은 조용히 물었다.

“폐하. 왕도는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하는 길입니까?”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보았다.

“왕도는 무거운 길이다.”

“그렇습니다.”

“쉬운 길이 아니다.”

“그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쉬지 않는 것이 이상한가?”

레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쉴 자격이 없다고 믿는 것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레이튼은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왕도가 결핍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믿으십니다. 그렇다면 결핍을 가진 자신은 왕도 위에 설 수 없습니까?”

“무슨 뜻이지?”

“결핍을 다 지운 뒤에야 왕이 되는 것이라면, 폐하는 영원히 왕이 되기 전의 사람으로 남습니다.”

교실의 공기가 멈췄다.

알렉산드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말을 낮췄다.

“하지만 결핍을 가진 채로도 백성 앞에 설 수 있다면, 폐하의 왕도는 증명의 길이 아니라 통치의 길이 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마시지는 않았다. 손 안에서 온기만 느꼈다.

“그대는 나에게 가짜라는 말을 버리라 하는가?”

“아닙니다.”

레이튼은 대답했다.

“그 말이 폐하를 어디까지 데려왔는지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그 말이 폐하를 영원히 뒤쫓는 채찍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남아야 하지?”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출발점으로.”

알렉산드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출발점.”

“예. 폐하께서 어디서 왔는지 잊지 않게 하는 말. 그러나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가두지는 않는 말.”

알렉산드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처음의 침묵과 달랐다. 방어가 아니라,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침묵이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가짜’는 판결이 아니라 출발점일 수 있음. 왕도는 결핍 삭제가 아니라 결핍을 가진 채 서는 길.**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얄밉군.”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종종 그런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계속 물어라.”

푸리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레이튼은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

다음 찻잔은 요안나 앞에 놓였다.

요안나는 이미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나의 수업을 들으며 여러 번 입을 열려다 닫았다. 요안나는 사람의 마음을 거리에서 배운 황제였다. 그녀는 낮은 사람들의 말, 병사의 한숨, 어부의 농담, 아이들의 다툼을 들어온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레이튼이 묻는 것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상을 낮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이 누구의 얼굴을 통과해야 하는지 물었다.

레이튼은 말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질문드리겠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든 이에게 평화를’라는 말을 처음 품었을 때, 폐하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모든 사람이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여쭙겠습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 안에서, 가장 먼저 얼굴이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 모든 사람을 떠올리고 싶었다. 로마 시민, 아직 시민이 아닌 사람, 병사, 상인, 아이, 어머니, 적, 이방인. 그녀의 로마는 손을 잡는 것으로 시작되는 로마였다. 그러나 레이튼은 지금 하나의 얼굴을 물었다.

요안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 만난 아이들이 있었어요.”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궁 밖에서요. 그 아이들은 저를 황제로 대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제 이름도 몰랐고, 제 혈통도 몰랐어요. 그냥 같이 뛰고, 같이 먹고, 같이 혼났어요. 그때 저는 이상하게 편했어요. 로마가 궁전보다 넓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마 그때였을 거예요.”

“그 아이들이 폐하의 평화에 들어 있습니까?”

“네.”

요안나는 작게 웃었다.

“아마 가장 먼저 들어 있었을 거예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폐하의 ‘모든 이’는 얼굴 없는 말이 아니군요.”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아까는 얼굴을 바로 말하지 못했을까요?”

“말이 너무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큰 말은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커지면, 처음 그 말을 태어나게 한 작은 얼굴들이 안쪽으로 숨어버리기도 하지요.”

요안나는 칠판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문장은 여전히 좋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 거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구체적인 얼굴. 흙 묻은 손. 같이 웃던 소리.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다음 질문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전의 숨이었다.

“폐하.”

“네.”

“그렇다면 ‘모든 이’라는 말 안에는, 폐하를 궁 안에 머물게 한 사람도 들어갑니까?”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작게 멈췄다. 알렉산드리나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고, 호흐마이스터도 눈을 들었다.

창가에 서 있던 미하일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크게 보였다.

요안나는 레이튼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칠판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 창가에 선 보라색 황제를 느꼈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든 황제.
제국의 운명을 자기 화살에 얹은 사람.
그리고 요안나에게는, 아버지의 장례와 피 묻은 궁정 이후에 자신을 궁 안에 머물게 한 사람. 보호자들을 제거하고, 정통성의 주인을 살아 있는 상징으로 남긴 사람. 찬탈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혹은 제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뒤집어쓴 사람. 어느 쪽이든, 요안나의 평화가 피해갈 수 없는 얼굴.

레이튼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분의 손도 잡겠다는 뜻입니까?”

요안나의 손이 찻잔을 더 세게 감쌌다.

그녀는 아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궁 안에 머문 시간은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것은 평화롭다는 뜻이 아니다. 문이 열리지 않는 조용함도 있고, 발소리를 기다리는 조용함도 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예의를 다했다. 혈통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갈 수 없는 예의도 있다. 살아 있는 황제로 남겨진다는 것은, 때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잔인했다.

요안나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말이 멈췄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미하일라도 기다렸다.

교실 안의 누구도 대신 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다시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할 때, 저는 모든 사람이 서로 손을 잡는 장면을 떠올렸어요. 낮은 사람도, 외국인도, 병사도, 적이었던 사람도. 그런데…….”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말 안에 미하일라 폐하를 넣으면, 갑자기 손이 무거워져요.”

미하일라의 눈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요안나는 창가 쪽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제가 그 손을 잡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에요. 아마 그것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그 손을 너무 빨리 잡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될까 봐.”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구분입니다.”

요안나는 이제 레이튼을 보았다.

“평화는 잊는 게 아니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용서도 아닌가요?”

“용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용서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레이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때로 평화는, 있었던 일을 이름 붙인 뒤에도 미래를 완전히 닫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황제의 침묵이면서, 죄를 아는 자의 침묵이기도 했다. 그녀는 요안나의 평화를 평가할 수 없었다. 그 말 안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이미 판결과도 같았다.

요안나가 천천히 창가를 보았다.

미하일라와 눈이 마주쳤다.

요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고 싶어요.”

그 말은 처음보다 작았다.

하지만 더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누가 누구를 가두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면 안 돼요. 누가 피를 흘렸는지, 누가 살아남았는지, 누가 문 안에 남겨졌는지 덮는 말이 되면 안 돼요.”

교실은 조용했다.

요안나는 다시 찻잔을 보았다.

“그래도…….”

레이튼은 기다렸다.

“그래도 저는 미래가 완전히 닫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나왔을 때, 미하일라의 얼굴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아주 잠깐, 그녀의 눈가에 지나간 무게를 보았다. 그것은 안도도 아니고 용서받은 자의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더 무거운 것을 받아든 사람의 얼굴이었다.

요안나는 조용히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하지만 그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기억을 가진 채로도 다음 문을 닫지 않는 말이어야 해요.”

레이튼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목소리로 들립니다.”

요안나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울지도 않았다.

그레이는 한동안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적었다.

**요안나: 평화는 망각이 아님. 죄를 이름 붙인 뒤에도 미래를 완전히 닫지 않는 일. ‘모든 이’에는 가장 아픈 얼굴도 포함될 수 있으나, 그 포함은 침묵이나 면죄가 되어서는 안 됨.**

미하일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요안나.”

교실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은 나를 가볍게 하지 않는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오히려 더 무겁게 한다.”

잠시 침묵.

“그것이 옳다.”

그 말은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음 안에, 피로 왕좌를 붙든 황제와 궁 안에 남겨진 어린 황제가 함께 서 있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질문도 때로 멈춰야 한다.

---

호흐마이스터의 차는 조금 식고 있었다.

그녀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자세는 처음과 거의 같았다. 예의 있고, 단정하고, 빈틈이 적다. 그러나 교실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조금 알았다. 그 빈틈없음은 갑옷이다. 갑옷은 몸을 지킨다. 하지만 오래 입으면, 살과 갑옷의 경계를 잊게 만든다.

레이튼은 서두르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듣고 있습니다.”

“당신의 답을 가까이 보아도 되겠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충분히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레이튼을 보았다.

“방금 전 알렉산드리나 폐하께 하신 말씀과 닮았군요.”

“좋은 질문은 가끔 반복됩니다. 다만 같은 질문도 상대에 따라 다른 문이 되지요.”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물어보십시오.”

레이튼은 칠판의 세 번째 문장을 보았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는 물었다.

“그 죄는 누구의 것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즉시 대답했다.

“제가 명령한 일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기사단 전체의 죄입니까, 호흐마이스터 개인의 죄입니까?”

“둘은 분리되기 어렵습니다.”

“분리되기 어렵다는 것과,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침묵했다.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대신 찻잔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저는 기사단의 우두머리입니다.”

“예.”

“우두머리는 책임을 나눠 갖는 자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모으는 자입니다. 병사의 손에 묻은 피, 지휘관의 판단, 책상 위의 서명, 모두가 결국 제 이름 아래로 옵니다.”

그녀의 말은 정중했지만 차갑지 않았다. 차갑게 굳히려 애쓰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을 모으는 자라는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답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물었다.

“책임을 모으는 일이, 구원받지 않겠다는 결론까지 포함합니까?”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 질문은 책상 위에서 던졌던 질문과 닮아 있었지만, 더 가까웠다. 더 깊은 곳을 건드렸다.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구원은 너무 이른 말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사랑한 땅을 지키기 위해, 저는 사랑받지 못할 선택들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런 자가 쉽게 안식을 말하는 것은 기사답지 않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물었다.

“쉽게 안식을 말하지 않는 것과, 영원히 안식을 거부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호흐마이스터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이 질문이 호흐마이스터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질문도 아프다. 특히 너무 오래 닫힌 문을 두드릴 때는.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제가 구원받기를 바라면, 제가 저지른 일들이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 두려움은 이해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조심하겠습니다.”

레이튼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 죄의 무게는 당신이 행복을 거부한다고 해서 더 진실해지지 않습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자신을 벌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더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쉬지 않는다고 해서 책임이 더 고결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책임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자기처벌은 때로, 이미 내려진 판결을 계속 낭독할 뿐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조용했다.

그 침묵 속에서, 그녀의 기사도와 죄책감과 사랑이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레이튼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당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쉬운 용서를 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묻고 싶습니다.”

그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당신이 짊어진 것은 책임입니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내린 끝없는 형벌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들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고, 그 온기를 손 안에 두었다.

“저는…….”

말이 멈췄다.

그녀는 예의 있는 문장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장이 쉽게 오지 않았다. 오래 반복한 문장은 많았을 것이다. 기사단의 책임, 죄의 무게, 사랑하는 땅을 위한 희생, 구원받지 않을 결심. 그러나 레이튼은 그 문장들이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침내 말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모른다는 답은 기사단장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학생이기도 하시니까요.”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가 다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말은 조금 비겁한 구제책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웃었다.

“하지만 때로 교실은, 잠시 모른다고 말해도 되는 장소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책임과 자기처벌의 경계 미확정. 답변: 아직 모름. 단, ‘모름’을 임시 답으로 허용.**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처음으로 짧게 말했다.

“모른다는 말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미하일라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러나 때로는 다음 명령을 내리기 전,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은 기사단장의 말이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 학생의 말이기도 했다.

---

수업은 잠시 멈췄다.

세 사람의 찻잔은 각기 다르게 남아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거의 마시지 않았고, 요안나는 절반쯤 마셨으며,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데우는 데 더 많이 썼다. 레이튼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답이 같은 속도로 식거나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레이는 기록을 정리했다.

푸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처음의 세 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것들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각 문장 옆에 작은 물음표들이 생겼다.

알렉산드리나의 문장 옆에는:

**출발점인가, 채찍인가?**

요안나의 문장 옆에는: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가, 미래를 닫지 않는가?**

호흐마이스터의 문장 옆에는:

**책임인가, 자기판결인가?**

푸리나는 그 물음표들을 보며 생각했다.

문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숨을 쉬기 시작했다.

레이튼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벌써?”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더 묻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질문도 때로 과식하면 독이 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도 쉬어야 하나요?”

“예. 그래야 다음에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질문을 휴식시킨다는 표현은 조금 낯섭니다.”

“답만 쉬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레이가 기록했다.

**질문도 휴식 필요.**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 그건 제목으로 괜찮지 않아?”

그레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제로도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레이튼은 학생들을 보았다.

“다음 수업에서는 여러분이 직접 답을 다시 써보게 될 겁니다. 제가 쓰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그대가 쓰면 안 되나?”

“제 글씨가 나쁜 편은 아닙니다만.”

“그런 뜻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여러분의 답은 여러분의 손으로 써야 합니다.”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손이 떨리면요?”

교실 뒤편에서 미하일라의 시선이 레이튼에게 닿았다.

그 질문은 이제 레이튼의 것이기도 했다.

답을 쓰는 손이 떨릴 때, 교사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레이튼은 요안나를 보며 말했다.

“그때는 옆에 있겠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 대답이 레이튼에게도 새롭다는 걸 알았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열린 답의 불안**

그 아래, 아직 마르지 않은 찻잔의 온기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질문은 문을 열지만, 열린 문 앞에 선 사람에게는 바람도 함께 닿는다 —**
# 《아포리아의 교실》

##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 3막 — 열린 답의 불안

#### — 질문은 문을 열지만, 열린 문 앞에 선 사람에게는 바람도 함께 닿는다 —

세 번째 수업은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레이튼이 늦은 것이 아니었다. 레이튼은 늘 그렇듯 시간보다 조금 먼저 와 있었다. 교탁 위에는 찻잔이 정돈되어 있었고, 칠판에는 지난 수업의 세 문장과 세 물음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레이도 일찍 와서 기록판을 펼쳤고, 푸리나는 창가 근처에 기대어 교실의 공기를 살피고 있었다. 미하일라는 이번에도 뒤편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학생이 아니었고, 교사도 아니었으며, 관객도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무거운 자리, 교실 바깥의 현실이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들어와 선 자리였다.

늦은 것은 학생들이었다.

알렉산드리나는 문 앞에서 한 번 멈춘 뒤 들어왔다. 그녀의 걸음은 여전히 단단했지만, 지난 수업 때보다 아주 조금 느렸다. 왕도는 사람을 앞으로 걷게 한다. 그러나 어제 레이튼이 남긴 질문은 그 길 위에 작은 돌 하나를 놓아두었다. 출발점인가, 채찍인가. 그 돌은 발을 걸 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묘하게 신경 쓰였다.

요안나는 두 번째로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했지만, 눈 밑에 얕은 그늘이 있었다. 어젯밤을 편히 보내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문장은 여전히 칠판에 있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옆에 새로 붙은 질문도 있었다.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가, 미래를 닫지 않는가. 그 질문은 단순한 철학 문제가 아니었다. 교실 뒤편에 선 미하일라가 그 답의 한가운데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가장 마지막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란트마이스터의 시야를 빌려 먼저 참석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직접 왔다. 다만 문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녀는 들어와서 예절 바르게 고개를 숙였고, 가장 구석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기 전, 아주 잠깐 칠판을 보았다.

**책임인가, 자기판결인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장갑 안에서 굳었다.

레이튼은 모두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답을 쓰지 않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번에는 다음 수업에서 답을 다시 써보게 될 거라 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전에 필요한 시간이 생겼습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필요한 시간이라면요?”

레이튼은 칠판의 물음표들을 보았다.

“열린 답이 불안해하는 시간입니다.”

교실 안에 조용한 바람이 지나갔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모두가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주 얇은 추위를 느낀 듯했다.

레이튼은 말을 이었다.

“질문은 문을 엽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바람이 들어오지요. 때로는 그것이 해방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춥습니다. 익숙한 방에 머물던 사람이 밖의 공기를 처음 맞을 때처럼요.”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문을 열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습니까?”

레이튼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답에 교실이 조금 흔들렸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는 이유가 안식인지, 감금인지 확인하지 않고 지나칠 수도 없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레이튼의 말은 이번 극 전체의 중심을 지나고 있었다. 답을 부수지 않는다. 그러나 답이 닫힌 방이 되었는지는 묻는다. 문을 연다. 그러나 문이 열린 뒤 바람 앞에 선 사람을 두고 떠나지 않는다.

미하일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그 바람을 다루는 수업인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좋다.”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계속하라.”

그 짧은 허락은 이상했다. 황제의 허락이었고, 동시에 경고였다.

---

레이튼은 알렉산드리나의 책상 앞에 섰다.

그는 차를 따르지 않았다. 오늘은 찻잔을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어제 생긴 떨림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폐하.”

“듣고 있다.”

“지난 수업 이후, 폐하의 답은 달라졌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조금 불쾌한 듯 웃었다.

“하룻밤 만에 왕도가 달라진다면, 그것이 더 우스운 일이지.”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꾸겠습니다. 답이 달라지지는 않았더라도, 그 답을 쥔 손의 힘은 달라졌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교묘했다. 아니, 교묘하다는 말은 레이튼에게 조금 부당할지도 몰랐다. 그는 상대를 속이기 위해 묻지 않았다. 다만 정면으로 물으면 이미 준비된 문장이 먼저 대답할 것을 알기에, 조금 비껴 물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그대로였다. 왕도를 걷겠다는 손. 전장에서 명령을 내리고, 방패와 창을 다루며, 부족한 정통성을 자기 업적으로 메워온 손.

“힘을 조금 늦추면, 놓칠 것 같았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내가 쥔 것이 왕도인지, 증명의 칼자루인지 모르겠더군. 그대가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불편하셨겠습니다.”

“불쾌했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필요했다.”

그 말을 한 뒤, 알렉산드리나는 조금 더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자기 입으로 인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푸리나는 아주 작게 웃을 뻔했지만 참았다.

레이튼은 말했다.

“폐하께서 쥔 답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왕도는 폐하를 세운 길입니다. 다만, 그 길을 걷는 폐하의 걸음이 오직 추격당하는 사람의 걸음이 되면 곤란합니다.”

“추격당한다?”

“예. 과거의 말들, 피가 부족하다는 목소리, 흉내라는 조롱, 가짜라는 판결. 그런 것들이 뒤에서 폐하를 몰아붙이고 있다면, 폐하는 왕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바로 인정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도망치지 않는 분이라면, 가끔 멈추어 뒤를 돌아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교실은 조용해졌다.

알렉산드리나는 말을 잃지 않았다. 다만 고르지 않았다. 그녀 안에는 반박할 수 있는 말이 많았다. 왕은 멈추지 않는다. 부족한 자는 증명해야 한다. 새벽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말들은 모두 너무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정말 자기 목소리인지 확인해야 하는 말들이었다.

그녀는 한참 뒤에 말했다.

“멈추면 백성이 나를 기다려줄까.”

레이튼은 대답했다.

“폐하께서 멈추어 숨을 고르는 것과, 백성을 버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대가 어찌 아는가?”

“모릅니다.”

레이튼은 정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폐하께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폐하의 백성은 끊임없이 증명하는 왕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결핍을 가진 채로도 자기 앞에 서는 왕을 원하는 것입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출발점인가, 채찍인가?**

그녀는 그 문장을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결핍을 가진 채 서는 왕이라.”

그 말은 아직 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녀의 입 안에서 “가짜”라는 단어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왕도는 추격이 아니라 정지와 재출발을 포함할 수 있음. 불안: 멈추면 다시 가짜가 될 것이라는 공포.**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오늘은 거기까지면 충분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보았다.

“그대는 자주 충분하다고 말하는군.”

“부족한 것을 충분하다고 우기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것을 더 밀어붙이는 것도 위험하지요.”

“말은 그럴듯하다.”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요안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

요안나의 차례가 되자, 교실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조용해졌다.

알렉산드리나의 질문은 뜨거웠다. 왕도와 결핍, 증명과 출발점의 문제였다. 그러나 요안나의 질문은 차가운 문처럼 서 있었다. 열면 바람이 들어올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특히 미하일라가 같은 방에 있었기 때문에.

레이튼은 요안나의 책상 앞에 섰다.

“폐하.”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

“지난 수업의 질문이 밤새 폐하를 따라갔습니까?”

요안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왔어요.”

“어떤 얼굴로 따라왔습니까?”

요안나는 잠시 창가 쪽을 보았다. 미하일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요안나는 이제 그쪽을 피하지 않았다.

“문 같은 얼굴이었어요.”

“문입니까?”

“네. 닫혀 있는 문. 안에서 열 수 없는 문.”

그 말이 나오자, 교실의 공기가 한 층 낮아졌다.

푸리나는 조용히 눈을 내렸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시선을 내렸다. 알렉산드리나는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계속했다.

“궁에 있을 때, 저는 죽지는 않았어요. 다들 예의를 지켰고, 제 이름도 지워지지 않았고, 제 피도 부정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문은 제가 여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저는 살아 있는 황제였지만, 기다리는 황제였어요.”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그 침묵에는 변명도, 부정도 없었다.

레이튼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문을 닫은 사람도, 폐하의 ‘모든 이’ 안에 들어갑니까?”

요안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 질문은 어제 이미 건드린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어제는 그 문장을 처음으로 상처에 닿게 했다면, 오늘은 그 상처가 열린 뒤의 바람을 견디는 시간이었다.

요안나는 말했다.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생각했습니까?”

“네. 모든 이라고 했으니까요. 낮은 사람도, 외국인도, 적이었던 사람도, 저를 가둔 사람도. 모두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레이튼은 기다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제가 제 상처를 너무 빨리 정리하는 것 같았어요.”

교실은 숨을 죽였다.

요안나는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작은 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손 위에 놓인 말은 황제의 말이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기 위해, 제가 먼저 괜찮아져야 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먼저 용서해야 하고, 제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고, 제가 먼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하지만 저는 아직 아무렇지 않지 않아요.”

미하일라는 그 시선을 받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벽이 아니었다. 칼집에 들어간 칼처럼, 스스로를 통제하는 차가움이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그렇겠지.”

그 짧은 대답은 요안나를 달래지 않았다. 변명도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녀의 상처를 부정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폐하의 평화가 폐하에게 너무 빠른 용서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아직 폐하의 목소리로 완전히 돌아온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럼 평화를 말하지 말아야 하나요?”

“아닙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다만 평화가 침묵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평화가 기억을 덮는 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가 ‘이제 그만 말하라’는 명령이 되면, 그 평화는 폐하를 닫을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어떻게 말해야 하죠?”

레이튼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조금 뒤, 그가 말했다.

“그 질문에 제가 답하면, 폐하의 답이 아닐 것입니다.”

요안나는 아주 조금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선생님은 가끔 정말 어렵게 해요.”

“죄송합니다.”

“사과하는데 답은 안 주시네요.”

“그 점도 죄송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을 뻔했다가 멈췄다.

요안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저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고 싶어요. 그건 변하지 않아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평화가, 제가 겪은 일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았으면 해요. 누가 문을 닫았는지, 누가 문 안에 있었는지, 누가 밖에서 제 이름으로 제국을 다스렸는지.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해요.”

미하일라는 눈을 내리지 않았다. 똑바로 들었다.

요안나는 계속했다.

“그리고 그래도, 미래를 전부 닫지는 않았으면 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제가 말하고 싶은 평화인 것 같아요. 아직은요.”

레이튼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 답은 폐하의 목소리로 들립니다.”

요안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미하일라가 입을 열었다.

“요안나.”

“네.”

“그 답은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요안나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그 답은 나를 잊지도 않는다.”

침묵.

“그렇기에, 나는 그 답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그 말은 미하일라에게도 쉽지 않았다. 요안나를 궁에 머물게 한 자. 보호자들의 피 위에 제국의 결단을 세운 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를 화살로 만든 자. 그녀는 요안나의 평화 안에서 가벼워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안나는 대답했다.

“그럼 서 있어주세요.”

교실이 아주 조용해졌다.

요안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이번에는 아이의 부탁만은 아니었다.

“제가 아직 문을 열지 못해도. 제가 아직 손을 내밀지 못해도. 제가 평화를 말하면서도 떨려도. 폐하가 그 자리에 서 있어주세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보았다.

한참 뒤,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다.”

그레이는 기록판 위에 펜을 올려놓은 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적었다.

**요안나: 평화는 망각도 즉각적 용서도 아님. 닫힌 문을 기억한 채 미래를 완전히 폐쇄하지 않는 답. 미하일라: 그 답 앞에서 가벼워지지 않고 서 있겠다고 응답.**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질문이 더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췄다.

푸리나는 그것이 레이튼의 수업이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그는 문을 열었지만, 바람을 더 세게 만들기 위해 문을 흔들지는 않았다.

---

호흐마이스터의 차는 조금 식고 있었다.

그녀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자세는 처음과 거의 같았다. 예의 있고, 단정하고, 빈틈이 적다. 그러나 교실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조금 알았다. 그 빈틈없음은 갑옷이다. 갑옷은 몸을 지킨다. 하지만 오래 입으면, 살과 갑옷의 경계를 잊게 만든다.

레이튼은 서두르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듣고 있습니다.”

“당신의 답도 밤새 당신을 따라왔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따라왔습니다.”

“어떤 얼굴로 따라왔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칠판을 보았다.

**책임인가, 자기판결인가?**

“거울처럼 따라왔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기울였다.

“거울입니까?”

“예. 무엇을 보아도, 결국 제 얼굴이 보였습니다. 지도의 선을 보아도, 병사의 보고를 보아도, 란트마이스터의 눈을 빌려 전선을 보아도.”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어느 곳에나 제 결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나 제가 서명한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수업에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이번에도 란트마이스터의 시야를 빌릴까 생각했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군요.”

“예.”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잠시, 정말 아주 잠시 난처한 얼굴을 했다.

“타인의 시야로는 자기 발로 책상 위에 올라설 수 없다는 지적이…… 유효했기 때문입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예의 바르게 푸리나를 보았다.

“전하, 웃으셔도 됩니다. 저 역시 약간은 우스운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요안나가 조금 웃었다. 알렉산드리나도 코웃음에 가까운 숨을 냈다. 교실의 공기가 아주 조금 풀렸다.

레이튼은 그 작은 풀림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물었다.

“호흐마이스터. 지난 수업에서 당신은 ‘아직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오늘도 같은 답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칠판을 보았다.

“조금 더 불편한 모름입니다.”

“좋습니다.”

“레이튼 경은 자꾸 불편한 것을 좋다고 하시는군요.”

“불편함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래 굳은 답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불편함은 자주 찾아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들었다. 이번에도 마시지는 않았다. 손 안에 온기를 두었다.

“저는 책임과 자기처벌을 분리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렇군요.”

“책임은 필요합니다. 죄는 실제입니다. 제가 선택한 일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짊어지는 동안, 어느 순간부터 저는 제가 쉬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즐거워해서도 안 되고, 구원받기를 바라서도 안 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으려 해서도 안 된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예의 있었다. 그러나 그 예의 안쪽에서 아주 작은 균열이 들렸다.

“그것이 기사도인지, 자기판결인지 모르겠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물었다.

“그 모름이 두렵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생각했다.

“두렵다기보다는…… 비효율적입니다.”

푸리나는 이번에도 웃음을 참았다.

레이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모른다는 상태는 명령서에 적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잘못 구분하면, 저는 계속 제 죄를 책임이라고 부르며 저 자신을 벌할 것입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찻잔을 조금 더 감쌌다.

“그 또한 비효율적입니다. 오래 지속되면 판단을 흐릴 테니까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말씀은 꽤 중요한 답에 가까워 보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예. 책임과 자기처벌을 구분하는 것이 단지 당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 아니라, 더 나은 판단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뜻이니까요.”

호흐마이스터는 침묵했다.

레이튼은 이어 물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결정을 내린다면, 그 결정은 기사단을 위한 것입니까, 당신의 판결을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 질문은 깊게 들어갔다.

그녀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진다. 그러나 만약 어느 순간부터 죄를 짊어지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더 어두운 결정을 선택하게 된다면?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죄를 필요로 하게 된다면? 그것은 책임인가. 아니면 죄를 사랑하게 되는 가장 위험한 방식인가.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그 지점이 경계일지도 모릅니다.”

“경계.”

“예. 책임은 당신을 더 정확한 결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자기처벌은 당신을 더 어두운 결정을 향해 끌고 갈 수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눈을 내렸다.

“그 말은 기억하겠습니다.”

“너무 무겁게 기억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거의 보이지 않게 웃었다.

“레이튼 경.”

“예.”

“오늘도 저는 완전한 답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호흐마이스터는 천천히 말했다.

“책임을 핑계로 자기처벌을 늘리는 것은, 기사단을 위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실은 조용했다.

이것은 작은 답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책임은 더 정확한 결정을 향해야 함. 자기처벌은 더 어두운 결정을 정당화할 위험. 경계 인식.**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좋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과찬입니다.”

“과찬이 아니다. 판단이다.”

그 말은 황제의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 교실에서는, 학생이 첫 답을 말한 순간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

수업은 잠시 멈췄다.

교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그러나 처음과 같은 무게는 아니었다. 닫힌 문 앞의 답답함이 아니라, 문이 열리고 난 뒤 들어온 바람의 무게였다. 세 사람은 각자 자기 답이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무너지지도 않았다. 다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불안했다.

알렉산드리나는 낮게 말했다.

“질문은 사람을 세우기도 하지만, 발밑을 무르게도 하는군.”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요안나는 찻잔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닫힌 방에 있는 것보다는 나은가요?”

레이튼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건 제가 정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인데도요?”

“선생이기 때문에 더더욱요.”

요안나는 그 대답에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받아들였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그러나 학생이 문 앞에서 떨고 있을 때, 선생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그 말이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레이튼에게 향했다.

그 질문은 미하일라가 프롤로그에서 남긴 질문이었다.

답을 쓰는 손이 떨릴 때, 교사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레이튼은 칠판을 보았다. 세 답과 세 질문. 출발점인가, 채찍인가.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가, 미래를 닫지 않는가. 책임인가, 자기판결인가.

그는 조용히 말했다.

“곁에 서야겠지요.”

미하일라가 물었다.

“곁에 서서 무엇을 하는가.”

레이튼은 대답했다.

“대신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

이 질문은 그에게도 쉬운 답이 아니었다. 그는 질문을 사랑했다. 미지를 사랑했다. 성급한 답에 물음표를 달아, 사람이 조금 덜 다치고 자기 결말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그는 보았다. 질문은 답을 열지만, 열린 답은 불안을 낳는다. 그 불안 앞에서 “이제 스스로 찾으십시오” 하고 물러나는 것은 교육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세련된 방치가 될 수도 있다.

레이튼은 천천히 말했다.

“함께 기다립니다.”

교실은 조용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학생이 자기 답을 쓰기 시작할 때, 그 손이 떨린다는 이유로 답을 빼앗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떨림을 혼자 견디게 두지도 않습니다.”

미하일라는 그를 보았다.

“그것이 그대의 답인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 완성된 답은 아닙니다.”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레이튼은 덧붙였다.

“그러나 오늘의 답입니다.”

그 말에 푸리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오늘의 답.

완성된 답이 아니라도, 오늘 말할 수 있는 답. 레이튼은 질문 뒤에 숨지 않았다. 그는 아직 확정된 교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교실에서 필요한 만큼의 답을 말했다.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충분하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레이튼: 교사는 답을 대신 쓰지 않는다. 재촉하지 않는다. 함께 기다린다. 떨리는 손에서 답을 빼앗지 않되, 그 떨림을 혼자 두지 않는다.**

푸리나는 그 기록을 보며 아주 작게 말했다.

“이번 건 제목감인데.”

그레이는 낮게 대답했다.

“제목으로 쓰기에는 깁니다.”

“줄이면 되지.”

레이튼이 희미하게 웃었다.

“질문은 쉬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직후에 제목 회의가 시작되는군요.”

푸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목은 쉬면 도망가.”

알렉산드리나는 작게 코웃음을 쳤고, 요안나는 웃었고, 호흐마이스터도 아주 희미하게 눈을 내렸다. 교실의 무게가 조금 옅어졌다.

레이튼은 그 순간을 기다렸던 듯, 분필을 들었다.

칠판 아래쪽에 새 문장을 적었다.

**답을 다시 쓰기 전, 손이 떨리는 시간을 허락할 것.**

그는 학생들을 보았다.

“다음 수업에서는 정말로 다시 써보겠습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손이 떨려도요?”

“예.”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틀리면?”

“고치면 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보류해도 됩니까?”

레이튼은 웃었다.

“필요하다면. 다만 영원한 보류는 답이 아니겠지요.”

미하일라가 짧게 말했다.

“그 말은 옳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레이튼은 칠판의 물음표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오늘도 미지는 사라지지 않았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아쉬워?”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각자의 답을 다시 쓰다**

그 아래, 열린 문 앞에 놓인 작은 찻잔처럼 한 줄이 남았다.

**— 답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떨리는 손으로 쓴 첫 문장도, 이미 자신의 길 위에 있다 —**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프롤로그 — 닫힌 답들의 교실

푸리나는 세 장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하나는 불가리아의 내전 전황에 가까웠고, 하나는 니케아의 황실 회의록에 가까웠으며, 마지막 하나는 튜튼 기사단의 동향 보고에 가까웠다.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전선, 서로 다른 신앙과 정치의 문서였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 세 장을 나란히 펼쳐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사람에게 답을 강요한다. 어느 길로 군을 보낼 것인가.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 누구를 버릴 것인가. 어떤 이름으로 백성을 부르고, 어떤 이름으로 적을 부를 것인가. 전쟁은 늘 빠른 답을 요구한다. 느린 사람은 늦고, 늦은 사람은 잃는다. 그래서 모두가 답을 들고 달린다.

그러나 조금 더 읽자, 푸리나는 그것이 단순히 전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 장의 보고서에는 각기 다른 문장이 있었다.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말했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요안나 4세 두카이나 라스카리나는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호흐마이스터는 말했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들을 오래 보았다.

그 문장들은 너무 그 사람다운 말들이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문장으로 자신을 세웠다. 부족한 정통성, 사생아라는 낙인, 대제의 그림자를 흉내 내며 시작한 길. 그 모든 것을 지나오며 그녀는 스스로의 왕도를 세웠다. 그녀의 답은 가짜였던 자신을 왕의 길 위에 세워준 말이었다. 다만 그 문장에는 늘 조심스러운 긴장이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 단정히 서려는 사람의 긴장. 미약한 출발점을 알기에, 누구보다 위대해지고자 하는 사람의 성실함.

요안나는 그 문장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아이 같은 말이지만, 바로 그 아이 같은 말이 사람들의 지지와 기적의 정치가 되었다. 외국인도, 낮은 자도, 적이었던 자도 언젠가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어린 황제가 가진 가장 강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의 말은 궁의 닫힌 문과도 마주해야 했다. 살아 있는 정통성으로 남겨진 시간, 예의 바른 유폐, 그리고 그 문 바깥에 서 있던 또 다른 황제의 그림자와도.

호흐마이스터는 그 문장으로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죄를 짊어지는 기사. 사랑하는 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구원까지 계산 밖에 밀어두는 자. 그 답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의 죄와 책임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를 짊어진다는 말은 때로 갑옷이 되고, 갑옷은 오래 입으면 살과 경계를 잃는다.

푸리나는 손끝으로 보고서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극작가는 종종 같은 대사가 다른 무게를 갖게 되는 순간을 본다.

처음에는 배우가 대사를 말한다. 그 말은 배우의 숨과 함께 움직인다. 머뭇거림이 있고, 떨림이 있고, 때로는 웃음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대사가 배우보다 먼저 걷기 시작한다. 사람은 자신이 말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오래 반복한 문장이 자신을 끌고 가고 있을 때가 있다.

푸리나는 그 세 문장이 그런 상태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다만 보고서 안의 문장들이 너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너무 오래 준비된 칼처럼. 너무 오래 외운 기도문처럼. 혹은 너무 오래 자기 자신을 지탱해온 이름처럼.

알렉산드리나의 왕도는 그녀를 앞으로 걷게 했다. 그렇다면 그 길은 여전히 그녀가 선택해 걷는 길일까, 아니면 이제 멈추지 못하게 하는 길일까.

요안나의 평화는 너무 넓었다. 그렇다면 그 넓은 빛은 여전히 사람의 얼굴을 비추고 있을까, 아니면 너무 넓어서 가장 가까운 손과 가장 아픈 얼굴을 잠시 흐리게 만들고 있을까.

호흐마이스터의 책임은 기사도를 지탱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여전히 그녀가 짊어진 갑옷일까, 아니면 스스로 벗어서는 안 된다고 믿게 된 형벌일까.

답을 고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오히려 그 답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그 답들이 없었다면 세 사람은 지금의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문장은 가끔 다시 숨을 쉬어야 한다.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저 말들이 아직 자기 목소리로 들리는지 보고 싶어.”

옆에서 기록을 정리하던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자기 목소리 말입니까?”

“응.”

푸리나는 보고서들을 보았다.

“왕도도, 평화도, 책임도. 다 맞는 말일 수 있어. 하지만 맞는 말이라고 해서 항상 살아 있는 말은 아니잖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살아 있는 말과 굳어진 말의 차이를 확인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마도.”

푸리나는 짧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장부 같긴 한데.”

그레이는 기록판에 새 항목을 만들었다.

극 주제 후보: 살아 있는 답과 굳어진 대사의 차이.

푸리나는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그거 제목으로는 쓰지 마.”

“전하께서 제목으로 삼기 전에 기록해둔 것입니다.”

“왜?”

그레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제목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푸리나는 배신당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

“경험에 근거한 판단입니다.”

푸리나는 잠깐 항의하려다, 곧 웃었다. 그리고 세 장의 보고서를 접었다.

“레이튼을 불러야겠어.”

그레이는 바로 이해한 듯했다.

“답을 제시할 사람이 아니라, 질문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까?”

“응.”

푸리나는 보고서를 품에 안았다.

“나는 무대를 열 수 있어. 하지만 저 말들이 아직 자기 목소리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반복한 대사인지 묻는 건 레이튼이 더 잘할 거야.”


---

레이튼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레이튼은 중요한 회의 전에도 차를 마셨고, 누군가의 심각한 고백을 들을 때도 차를 마셨고, 전선 지도 앞에서 모두가 숨을 죽일 때도 어딘가에서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에게 차는 여유의 표시라기보다, 생각의 호흡에 가까웠다.

푸리나가 들어왔을 때도, 그는 찻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전하.”

레이튼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어떤 무대가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까?”

푸리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교실.”

레이튼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교실입니까.”

“응.”

“제가 학생입니까?”

“아니. 선생님.”

레이튼은 이번에는 정말로 잠시 침묵했다. 찻잔 위로 김이 천천히 올라갔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묻는 사람입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지.”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꽤 위험한 정의군요.”

“위험한 수업이 될 거야.”

푸리나는 세 장의 보고서를 내밀었다. 레이튼은 그것들을 차례로 읽었다. 알렉산드리나, 요안나, 호흐마이스터. 세 사람의 이름과, 그들이 가진 문장들.

레이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훑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문장을 읽으면, 그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그 말을 처음 자기 안에 들였는지, 그 말이 그 사람을 살렸는지, 그 말이 언제부터 너무 단단해졌는지, 아직 알 수 없는 것들을 바로 결론 내리지 않고 오래 살피는 사람.

마침내 그가 말했다.

“이 답들을 고치려는 극입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보고서 위의 문장들을 하나씩 짚었다.

“고치려는 게 아니야. 그 말들이 다시 자기 목소리로 나오는지 보고 싶은 거야.”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나는 극을 열 수 있어. 배역을 줄 수도 있고, 무대를 만들 수도 있어. 하지만 이건 배역을 씌우는 극이면 안 돼. 오히려 배역처럼 굳어버린 말을 잠깐 내려놓고, 그 사람이 직접 다시 말하게 하는 극이어야 해.”

“답을 빼앗지 않고, 물음표를 곁에 놓는 수업이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당신이 잘하잖아.”

레이튼은 보고서들을 다시 보았다.

“질문은 가벼운 도구가 아닙니다.”

“알아.”

“질문은 때로 붕대를 푸는 일과 비슷합니다. 답이라는 붕대가 상처를 보호하고 있었다면, 함부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꽉 감겨 피가 통하지 않는다면 느슨하게 해야겠지만, 갑자기 풀면 피가 다시 날 수도 있지요.”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레이튼은 이어 말했다.

“질문은 문을 엽니다. 그러나 문이 열린 뒤, 그 문밖의 바람을 감당하는 것은 질문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곁에 있어야지.”

레이튼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극에서 당신이 해야 하는 건 답을 주는 게 아니야. 답을 빼앗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이 자기 답을 다시 쓸 때까지, 혹은 다시 말할 때까지 곁에 있는 거야.”

레이튼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아주 조금 마셨다.

“어렵군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필요해.”


---

교실은 조용히 열렸다.

그것은 궁전의 큰 홀도 아니었고, 법정도 아니었고, 전장도 아니었다. 푸리나의 극장이 만들어낸 교실은 오히려 작았다. 오래된 나무 책상들, 분필 자국이 남은 칠판,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빛, 교탁 한쪽에 놓인 찻잔과 주전자. 바깥에서는 전쟁과 정치가 아직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 방 안에는 잠깐의 숨이 있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만든 방.

아직, 그 교실에는 이름이 없었다.

푸리나는 이름을 붙이는 일을 좋아했다. 긴 제목도 좋아했고, 장면마다 어울리는 막의 이름도 좋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잠시 참았다. 레이튼도 서두르지 않았다. 성급한 이름 역시, 때로는 성급한 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푸리나는 문 옆에 서서 말했다.

“오늘의 무대는 교실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답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이미 가진 답을 잠깐 내려놓고 다시 바라보는 곳.”

그레이는 교실 한쪽에 앉아 기록판을 펼쳤다. 그녀의 역할은 조교이자 기록 담당이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미리 당부했다.

“그레이. 오늘은 정답표를 만들지 마.”

그레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록합니까?”

레이튼이 대신 대답했다.

“흔들림을 기록해주시면 됩니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흔들림은 수치화하기 어렵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할 가치가 있지요.”

그레이는 그 말을 받아들인 듯 기록판 위에 새 제목을 적었다.

수업 기록: 답의 호흡 확인.

그때 첫 번째 학생이 들어왔다.

알렉산드리나 아센.

그녀는 교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전장이 아닌 교실, 왕좌가 아닌 책상, 군막이 아닌 칠판.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그녀가 가장 경계해야 할 장소이기도 했다. 전장에서는 검을 들면 된다. 군막에서는 명령을 내리면 된다. 하지만 교실에서는 답해야 한다. 그것도 남이 준 질문 앞에서.

그럼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책상 하나 앞에 섰다. 자세는 단정했고, 눈빛은 조심스러웠다. 고압적이라기보다,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사람의 단정함이었다.

“제가 학생 역할이라니, 조금 어색하네요.”

그녀는 레이튼을 보았다.

“하지만 필요한 수업이라면 듣겠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다만 제 답을 너무 쉽게 흔들지는 말아주세요.”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칠판이었다.

“그 답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답을 가볍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알렉산드리나는 자리에 앉았다.

두 번째 학생은 요안나였다.

요안나는 교실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황제였고, 혈통의 정당한 주인이었고, “모든 이에게 평화를”이라는 너무 큰 문장을 품은 아이였다. 그러나 교실 앞에서 그녀는 잠깐 정말 아이처럼 보였다. 창문, 칠판, 책상, 분필. 그녀가 어린 시절 거리에서 들었던 보통 아이들의 세계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이곳이 오늘의 제국인가요?”

요안나가 물었다.

푸리나가 웃었다.

“오늘만큼은, 아주 작은 제국.”

요안나는 책상에 손을 올렸다.

“작은 제국이라면, 더 잘 들을 수 있겠네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폐하. 큰 말은 작은 방에서 더 분명히 울릴 때가 있으니까요.”

요안나는 자리에 앉았다. 긴장했지만, 호기심이 있었다. 그녀의 답은 크고 밝았다. 레이튼은 그 답을 줄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빛이 어떤 얼굴부터 비추고 있는지, 함께 확인하고 싶었다.

세 번째 학생은 조금 늦었다.

정확히는, 늦었다기보다 그녀 자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교실 뒤편에 서 있던 튜튼의 란트마이스터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처음부터 수행원처럼 서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자세가 달라졌다. 시선의 초점이 바뀌고, 말하기 전의 침묵이 깊어졌다. 마치 그 눈 안쪽에 다른 누군가가 자리 잡은 듯했다.

란트마이스터가 예절 바르게 입을 열었다.

“늦은 출석을 사과드립니다. 호흐마이스터께서는 현재 란트마이스터의 시야를 통해 교실을 보고 계십니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레이튼도 보았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란트마이스터 시야 공유를 통한 원격 출석 시도.

란트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말투가 조금 더 정중해졌다. 목소리는 란트마이스터의 것이었지만, 문장의 주인은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저는 듣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답하겠습니다. 기사로서 예의를 지키겠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오늘 수업에는 책상 위에 올라서는 시간이 있을 예정입니다.”

란트마이스터의 눈이 아주 조금 멈췄다.

레이튼은 계속했다.

“타인의 시야를 빌려서는, 자기 발로 책상 위에 올라서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교실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알렉산드리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란트마이스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 너머 어딘가에서, 호흐마이스터가 아주 예절 바르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마침내 란트마이스터가 말했다.

“……합당한 지적입니다.”

그의 시선이 본래의 초점으로 돌아왔다. 란트마이스터는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교실 문이 열렸다.

호흐마이스터가 직접 들어왔다. 정돈된 복장, 예의 있는 걸음, 기사다운 태도. 그러나 어딘가 아주 조금, 방에서 끌려나온 사람의 기색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기사로서 출석하겠습니다.”

레이튼도 고개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푸리나는 결국 작게 웃었다.

“좋아. 이제 교실이 다 찼네.”

호흐마이스터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가장 구석에 가까운 책상을 골랐고, 그 선택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교실에는 완전히 숨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

레이튼은 교탁 앞에 섰다.

그는 칠판을 바라보았다. 칠판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칠판은 묘하다. 무엇이든 쓸 수 있어서 자유롭고,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 사람의 답도 가끔 그렇다.

레이튼은 분필을 들고 칠판 중앙에 단 하나를 적었다.

?

분필 소리가 짧게 울렸다.

알렉산드리나는 물음표를 보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요안나는 물음표를 바라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칠판 최초 기입: 물음표.

레이튼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답을 배우지 않겠습니다.”

교실은 조용했다.

“여러분은 이미 답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아주 강한 답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왕도가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평화가 되었으며, 누군가에게는 기사도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저는 그 답들을 빼앗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때로 하나의 답으로 겨울을 견디고, 하나의 문장으로 전쟁을 건너며, 하나의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무너지지 않게 하니까요.”

요안나의 손이 책상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알렉산드리나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레이튼은 말을 이었다.

“다만, 답도 숨을 쉬어야 합니다.”

잠시 침묵.

“답이 숨을 쉬지 못하면, 그것은 길이 아니라 대본이 됩니다. 그리고 대본은 때로 너무 익숙해서, 배우가 자신이 언제부터 읽히고 있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지금은 차를 마실 때가 아니라, 첫 문장을 건넬 때였다.

“그러니 오늘의 수업은 간단합니다.”

그는 칠판의 물음표를 가리켰다.

“여러분의 답이 아직 여러분의 목소리로 말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여러분을 대신해 말하고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확인은 제가 해야 하는 거겠지요?”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럼 레이튼 경은요?”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다면 질문해주세요.”

그녀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다만 아프게 찌를 거라면, 차라도 먼저 주시는 게 좋겠네요.”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레이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제안입니다. 다음 수업부터 반영하겠습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 무엇을 하시나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호흡을 늦춥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레이튼은 이어 말했다.

“성급한 답은 때로 숨이 가쁩니다. 저는 그 답 옆에 물음표를 놓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 답이 조금 더 천천히 말하게 되지요.”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답이 느려지는 동안,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정확했다.

교실 뒤편의 문이 열렸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학생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이 교실이 아무리 작은 무대라 해도, 그녀는 황제였다. 보라색의 무게, 새벽을 여는 전쟁의 기억, 활을 당기는 자의 결단. 그녀가 들어오자 교실의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그러나 미하일라는 교탁 앞으로 오지 않았다. 그녀는 뒤편, 창가 쪽에 섰다. 지켜보는 자리였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하일라.”

미하일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을 방해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녀의 시선이 레이튼에게 향했다.

“다만 묻기 위해 왔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듣겠습니다.”

미하일라는 칠판의 물음표를 보았다.

“답이 너무 빨리 닫히는 것을 경계하는 일은 필요하다. 묻지 않은 명령은 쉽게 폭력이 되고, 검토하지 않은 이상은 쉽게 누군가를 밟는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러나 답이 영원히 열려 있으면, 백성은 그 문 앞에서 얼어 죽는다.”

교실은 조용해졌다.

그 말은 레이튼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리나, 요안나, 호흐마이스터. 모두에게 닿았다. 그러나 가장 깊게 들은 것은 레이튼이었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레이튼. 그대의 질문은 그들의 답을 열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비난은 아니었다.

“좋다.”

잠시 침묵.

“그러나 열린 답의 불안은, 질문한 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하일라는 그를 보았다.

“그대는 답을 대신 써주지 않는다. 그것도 좋다. 그렇다면 답을 쓰는 손이 떨릴 때, 그대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레이는 펜을 멈췄다.

알렉산드리나는 레이튼을 보았다. 요안나도. 호흐마이스터도.

레이튼은 칠판 위의 물음표를 보았다.

그는 질문을 사랑한다.
미지를 사랑한다.
성급한 답을 다시 질문으로 돌려보내, 사람이 자기 답에 조금 더 다치지 않고 도착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미하일라의 말은 옳았다.

질문은 문을 연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바람이 들어온다.
그 바람 앞에 선 사람을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

레이튼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 질문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제게 남겨두겠습니다.”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좋다.”

그녀는 뒤편에 앉지 않았다. 다만 창가에 서서 지켜보았다. 교실 안의 학생이 아니라, 교실 바깥의 현실로서.

레이튼은 다시 학생들을 보았다.

“그럼 시작하지요.”

그는 교탁 옆의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첫 번째 수업은 조금 이상할 겁니다.”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이미 아주 미세하게 불안한 얼굴이었다. 책상 위에 올라서는 수업이 실제로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책상을 보았다가 레이튼을 보았다.

“설마.”

레이튼은 온화하게 웃었다.

“그 설마가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도보다 먼저 책상 위를 걷게 될 줄은 몰랐네요.”

“길은 때로 뜻밖의 높이에서 시작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작게 웃었다.

“좋아요. 그럼 어디까지 이상해지는지 보죠.”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같은 교실도,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의 시선이 칠판의 물음표에 닿았다.

“그러니 오늘은, 여러분의 답을 조금 다른 높이에서 바라보겠습니다.”

막이 조용히 열렸다.

1막 — 책상 위에서 답을 내려다보다

그 아래, 칠판에 남은 흰 분필 가루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은, 다른 높이에서 보인다 —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1막 — 책상 위에서 답을 내려다보다

—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은, 다른 높이에서 보인다 —

레이튼은 정말로 책상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교실에 앉은 이들은 평범한 학생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내전의 한복판에서 왕도를 증명해야 하는 차르였고, 한 사람은 혈통과 지지와 기적으로 로마의 평화를 말하는 어린 황제였으며, 한 사람은 죄와 기사도를 한 몸에 두른 튜튼의 호흐마이스터였다. 그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서라는 말은 수업이라기보다, 아주 예의 바른 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교실 뒤편 창가에 선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수업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고, 푸리나는 문가에 기대어 이 이상한 침묵이 무대 위에서 어떤 호흡으로 바뀌는지 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책상 위에 올라서라는 뜻인가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왕좌도 아니고, 전장의 언덕도 아니고, 사절단 앞의 단상도 아니었다. 학생이 답을 쓰고, 지우고, 틀리고, 다시 쓰는 곳. 그녀는 잠시 난처하게 웃었다.

“제가 아직 왕도 위에서도 제대로 서 있는지 모르겠는데, 책상 위부터 배워야 하다니요.”

“그래서 좋은 출발점일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조금 얄밉네요, 레이튼 경.”

“종종 듣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다시 책상을 보았다. 눈빛은 경계하고 있었지만, 이전처럼 날카롭게 밀어붙이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부족함을 알기에 더 단정히 서려는 사람이었다. 가짜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때로 남들보다 자세를 더 곧게 세운다. 무너지면, 그 말이 사실이 되어버릴까 봐.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그 경우에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야겠지요.”

“그것도 수업인가요?”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요안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작게 웃었다. 그녀는 책상 위를 보았다. 작고 낡은 나무판. 황제의 발이 올라서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한 곳. 그래서 조금 마음에 들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가장 늦게 반응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은 채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기사단장다운 침착한 자세였지만, 그 침착함 안쪽에 분명한 불편함이 있었다.

“레이튼 경.”

“예, 호흐마이스터.”

“기사단장으로서 여러 독특한 명령과 의식을 보아왔습니다만, 이것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합니다.”

“명령은 아닙니다.”

“그 점이 더 어렵군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명령이라면 따르거나 거절하면 된다. 그러나 권유는 자기 마음의 이유를 살펴야 한다. 호흐마이스터에게 그것은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었다.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은, 대체로 거절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질문도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오늘 수업은 시작 전부터 함정이 많습니다.”

“퍼즐이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푸리나가 결국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수업 방식: 책상 위에 올라서기. 학생 반응: 당혹, 경계, 예의 바른 저항.

요안나가 가장 먼저 일어섰다.

그녀는 책상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레이튼이 가까이서 손을 내밀 준비를 했지만, 요안나는 스스로 균형을 잡았다. 책상이 작게 삐걱였다. 그녀는 잠깐 놀라더니, 곧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다르게 보여요.”

교실은 여전히 교실이었다. 그러나 조금 높은 곳에서 보면, 칠판이 낮아지고 창밖의 빛이 가까워졌다. 사람들의 얼굴도 다르게 놓였다. 왕좌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높이였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기묘한 자리. 어쩌면 학생의 자리.

알렉산드리나는 요안나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요안나 폐하께서 먼저 올라가셨는데, 제가 계속 앉아 있기도 어렵네요.”

그녀는 책상 위에 올라섰다. 동작은 조심스러웠지만 몸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단련된 사람의 균형이었다. 그러나 표정은 조금 복잡했다. 책상 위에 올라선 왕도 지망자라니, 그녀 자신도 그 그림이 우스운지 아주 짧게 숨을 흘렸다.

“이건…… 조금 이상하네요.”

레이튼이 물었다.

“이상한 것은 나쁜 일입니까?”

“아니요. 하지만 낯섭니다. 낯선 건 늘 조금 무섭고요.”

“좋은 관찰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책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생님들은 원래 학생이 무서워한다는 말을 하면 칭찬하나요?”

“좋은 선생이라면, 가끔은 그래야겠지요.”

호흐마이스터는 마지막까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서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예의 바르게 장갑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렸다.

“책상에게 무례를 범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레이튼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책상도 오늘 수업의 일원으로 존중해주시면 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끔 책상에게도 기회를 줍니다.”

“그렇군요.”

호흐마이스터는 올라섰다. 동작은 우아했고, 조금 뻣뻣했다. 책상 위에 선 뒤에도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반듯해서, 책상이 작은 연단처럼 보였다.

세 사람이 책상 위에 섰다.

알렉산드리나, 요안나, 호흐마이스터.

왕도와 평화와 책임이라는 답을 들고 온 이들이, 교실의 작은 책상 위에 서 있었다.

레이튼은 칠판 앞에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보이는 것을 말해주시겠습니까?”

요안나가 먼저 대답했다.

“교실이요. 그런데 조금 더 작아 보여요. 아니, 제가 커진 것 같기도 하고요.”

“좋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상하게 같아 보여요. 황제도, 차르도, 기사단장도 책상 위에서는 조금 학생 같아요.”

푸리나는 그 말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레이튼은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폐하께서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알렉산드리나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교실을 보았다. 책상, 칠판, 창문, 레이튼, 푸리나, 그레이, 미하일라. 그리고 자기가 올라선 낮은 높이.

“왕좌가 없네요.”

그 말이 교실에 내려앉았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왕좌가 없으니, 제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 더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

“이상하네요. 왕좌가 없으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요.”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왕좌는 자리를 정해주니까요. 그 자리에 앉으면, 적어도 무엇처럼 보여야 하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여기는…… 제가 직접 서야 하네요.”

그레이는 그 말을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왕좌 없는 자리에서 오히려 자세를 스스로 정해야 함.

레이튼은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호흐마이스터께서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호흐마이스터는 교실 뒤편과 문, 창문,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도 지휘관의 시야였다. 그러나 잠시 뒤, 아주 조용히 말했다.

“숨을 곳이 줄어드는군요.”

“높아졌는데도 말입니까?”

“예. 구석에 앉으면 몸은 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서면 자세가 드러납니다.”

“좋은 관찰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레이튼은 칠판으로 돌아섰다. 그는 물음표 아래에 세 개의 문장을 적었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세 문장이 칠판 위에 나란히 놓였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조금 죽였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조용히 그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레이튼은 다시 학생들을 보았다.

“여러분의 답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첫 문장을 보았다. 자기 입으로 말했을 때와 달랐다. 글자로 적히니 문장은 더 차갑고, 더 단단하고, 더 멀어 보였다.

요안나는 두 번째 문장을 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핵심이었다. 짧고 밝고, 너무 크다. 칠판에 적히자 그 말은 교실을 넘어서려는 듯했다.

호흐마이스터는 세 번째 문장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장갑 낀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레이튼은 말했다.

“오늘은 이 답들이 틀렸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그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히려 반대로 묻겠습니다. 이 답들은 여러분을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걷고 있습니까?”

교실 안은 조용했다.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여러분보다 먼저 걷고 있습니까?”

그 말은 세 사람 모두에게 다르게 닿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자기 문장을 보았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말은 그녀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 말이 앞서 걷는 순간, 그녀는 영원히 그 뒤를 따라가야 하는 사람이 된다.

요안나는 자기 문장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말은 넓고 따뜻했다. 그러나 너무 앞서가면, 아직 그 말에 도착하지 못한 자기 마음을 끌고 가버릴 수도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자기 문장을 보았다.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말은 책임이었다. 그러나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끝없이 뒤쫓는 판결이 될 수도 있었다.

레이튼은 알렉산드리나에게 물었다.

“폐하. 그 문장은 폐하를 앞으로 걷게 합니까?”

알렉산드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전 같으면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지금도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책상 위에서 보니, 문장과 자기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걷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네. 아마도요.”

“아마도.”

레이튼은 그 말을 부드럽게 받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문장을 보며 말했다.

“그 말이 없으면, 저는 제가 여기까지 온 길을 설명하기 어려워요. 부족하다고 들었고, 흉내라고 들었고, 왕의 피가 아니라고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더 왕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답이 폐하를 지켜주었군요.”

“네.”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 답이 저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아요.”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아직 1막이었다. 오늘은 내려다보는 시간이지, 해부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요안나를 보았다.

“폐하. 그 문장은 폐하를 열어줍니까?”

요안나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네.”

대답은 맑았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는 덧붙였다.

“그런데 너무 커요.”

“크다는 것은 나쁜 일입니까?”

“아니요. 로마는 작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평화도 너무 작으면, 누군가를 바깥에 두게 될 테니까요.”

그녀는 교실 뒤편의 미하일라를 보지 않으려 했다가, 결국 보았다.

“하지만 너무 크면…… 제가 아직 말하지 못한 것까지 다 말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미하일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관찰입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호흐마이스터에게는 레이튼이 조금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흐마이스터. 그 문장은 당신을 지탱합니까?”

“그렇습니다.”

대답은 빠르고 예의 있었다.

“기사단의 장은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서 있을 자리를 줍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예.”

“그리고?”

호흐마이스터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때로는 앉을 자리를 빼앗습니다.”

교실 안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호흐마이스터는 더 말하지 않았다. 레이튼도 더 묻지 않았다.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답이 아직 숨 쉬는지 보려면, 너무 오래 손으로 움켜쥐면 안 된다.

레이튼은 말했다.

“이제 내려오셔도 됩니다.”

요안나가 먼저 내려왔다. 이번에도 레이튼의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내려왔지만, 내려온 뒤 책상을 한 번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높은 곳이었어요.”

알렉산드리나는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다.

“왕좌가 아니어도, 서는 연습은 필요하군요.”

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문장입니다.”

“아직 제 문장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보류해두지요.”

호흐마이스터는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책상에서 내려오는 동작마저 예의 바르고 정확했다. 그러나 내려온 뒤, 그녀는 아주 잠깐 자기 발이 닿은 바닥을 확인하듯 내려다보았다.

레이튼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들었다.

“예. 다만 타인의 시야가 아니라 자기 발로 높이를 바꾸는 일은, 예상보다 불편하군요.”

“오늘 수업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것 같습니다.”

“칭찬입니까?”

“그렇게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예의상 받아들이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문득 칠판 위의 물음표와 세 문장을 보았다. 아직 이 교실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로 두기에는, 무언가가 이미 시작된 것 같았다.

그때 요안나가 먼저 물었다.

“선생님.”

“예, 폐하.”

“이 교실에는 이름이 없나요?”

레이튼은 잠시 칠판을 보았다.

“아직 없습니다.”

푸리나의 눈이 빛났다.

“그럼 지금 정하자.”

그레이가 즉시 반응했다.

“기록을 위해서도 임시 명칭은 필요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말했다.

“명칭은 기능을 과도하게 규정할 위험이 있습니다.”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좋은 지적입니다. 이름은 문이 될 수도 있지만, 벽이 될 수도 있지요.”

푸리나는 팔짱을 꼈다.

“하지만 이름 없는 무대는 관객이 길을 잃어.”

“길을 잃는 것도 때로는 수업입니다.”

“레이튼, 그 말은 제목으로 쓰기 힘들어.”

그레이가 말했다.

“임시 명칭을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푸리나는 조금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좋아. 말해봐.”

그레이는 기록판을 보며 말했다.

“답의 재검토 교실.”

푸리나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교실이 아니라 행정 감사야.”

“기능은 정확합니다.”

“정확하기만 하면 제목이 아니야.”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손을 놓지 않는 교실은 어때요?”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좋아. 따뜻해.”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손을 잡을 수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요안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판결을 유예하는 방.”

푸리나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너무 무겁지 않아?”

호흐마이스터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 평소 취향입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요안나도 웃었다. 교실의 공기가 잠깐 가벼워졌다.

푸리나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미지와 물음표와 세 명의 군주와 한 명의 신사와 아무튼 매우 중요한 교실》.”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기록 불가입니다.”

“왜!”

“명칭이 과도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정중하게 덧붙였다.

“작전명으로도 부적절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렸다.

“그래도 푸리나 전하답긴 하네요.”

푸리나는 조금 만족한 듯했다.

레이튼은 웃으며 학생들을 보았다.

“제안들이 모두 흥미롭군요. 그러나 이름은 제가 붙일 것이 아닙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왜요?”

“제가 이름 붙이면, 이 교실은 제 답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레이튼은 칠판의 물음표를 보았다.

“다만, 이 교실이 무엇을 위한 곳인지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급한 답을 다시 질문으로 돌려보내는 곳. 아직 선을 긋지 않은 가능성을 함께 바라보는 곳.”

알렉산드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너무 빨리 정하지 않는 이름이면 어떨까요?”

“흥미롭군요.”

“아직 길을 다 걷지 않았으니까요. 아직 왕인지, 학생인지, 죄인인지, 황제인지, 그런 이름만으로 닫히지 않는 곳이면 좋겠어요.”

레이튼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이번 알렉산드리나의 말은 높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움 안에, 언젠가 위대해질 수 있는 사람의 의지가 있었다.

레이튼은 천천히 칠판의 물음표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별들이 좋겠습니다.”

요안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별이요?”

“별은 거기 있습니다. 하지만 선을 긋기 전에는 아직 별자리가 아닙니다. 성급하게 선을 그으면 하늘이 너무 빨리 닫히지요.”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그러나 선을 전혀 긋지 않으면 항로를 찾기 어렵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긋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긋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교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기록 가능합니다.”

요안나는 미소 지었다.

“좋아요. 아직 별들이니까요.”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아직 이름 붙지 않았으니, 다시 볼 수 있겠네요.”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명칭이 기능을 과도하게 고정하지 않으면서도, 방향은 제공합니다. 적절합니다.”

푸리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결정!”

레이튼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이 교실은 그렇게 불리겠군요.”

그는 칠판 한쪽에 조심스럽게 적었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분필 소리가 교실 안에 낮게 울렸다.

미하일라는 그 이름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반대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별에 선을 그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빨리 그은 선은 하늘을 명령서로 바꾼다.

레이튼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놀란 듯 물었다.

“벌써요?”

“첫 수업은 오래 끌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요.”

“좋은 수업의 첫날은 대개 그렇습니다. 시작한 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시작되어 있지요.”

요안나는 칠판의 이름을 보았다.

“다음에는 뭘 하나요?”

레이튼은 칠판 아래에 새 질문을 적었다.

어디서 다쳤습니까?

그 문장이 쓰이자, 방금 가벼워졌던 공기가 다시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닫히는 무게가 아니라, 다음 문을 예감하는 무게였다.

레이튼은 말했다.

“다음 수업에서는 답을 조금 더 가까이 보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진찰입니까?”

“예.”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맥박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문장은 아직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옆에는 물음표가 있었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아직 선을 긋지 않은 하늘.

그녀는 작게 말했다.

“차가 필요하겠네요.”

레이튼은 웃었다.

“물론입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2막 — 성급한 답들의 해부

그 아래,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빛처럼 한 줄이 남았다.

— 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래된 상처와 아직 살아 있는 소망이 함께 있다 —
맞아. 순서가 꼬였네.
그러면 개정된 1막에서 이어지는 2막으로, 답을 완성하지 않고 상처와 질문만 여는 방향으로 작성할게.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2막 — 성급한 답들의 해부

— 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래된 상처와 아직 살아 있는 소망이 함께 있다 —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레이튼은 칠판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교탁 옆 작은 탁자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었다. 주전자의 물소리는 조용했고, 찻잔에 닿는 물줄기는 일정했다. 전쟁과 왕권과 기사단의 죄를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소리였다. 그래서 오히려 교실 안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칠판에는 지난 수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그 아래에는 물음표 하나.

그리고 세 개의 문장.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마지막 줄에는 레이튼이 1막 끝에 적어둔 질문이 있었다.

어디서 다쳤습니까?

그레이는 그 문장을 한동안 보았다. 그러고는 기록판에 적었다.

2막 시작. 질문: 답의 기원과 상처.

푸리나는 교실 뒤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번에는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늘 무대의 중심은 레이튼과 세 학생이었다. 푸리나는 그저, 말이 무대 위에서 너무 멀리 날아가지 않도록 숨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레이튼은 찻잔 세 개를 놓았다.

“오늘은 칠판 앞에서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찻잔을 보았다.

“차부터 주시는군요.”

“지난 수업에서 폐하께서 제안하셨으니까요.”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그걸 정말 반영하실 줄은 몰랐어요.”

“좋은 제안은 반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더 조심해서 말해야겠네요.”

“그 또한 좋은 배움일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아직 마시지는 않았다. 다만 손끝으로 온도를 확인했다. 그녀에게 차는 여유라기보다, 질문이 오기 전 잠시 손을 데우는 물건에 가까웠다.

요안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그녀는 차를 좋아하는 아이처럼 보였지만, 오늘은 그 따뜻함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녀 역시 마시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았다. 마치 찻잔이 자신에게 허락된 물건인지 먼저 확인하려는 듯했다.

레이튼은 말했다.

“오늘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답이 틀렸는가가 아닙니다.”

그는 칠판의 세 문장을 보았다.

“그 답이 어디서 태어났는가입니다. 답은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답은 상처에서 태어나고, 어떤 답은 소망에서 태어나며, 어떤 답은 상처와 소망이 서로를 붙잡은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오늘은 답을 해부하는 건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은 그렇습니다. 다만 죽이기 위한 해부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진찰에 가깝지요.”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진찰이라면, 환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그러므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힘은 약해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제로 얻은 답은 대개 빠릅니다. 그러나 빠른 답은 자주 자기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필요한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입으로 견딜 수 있는 답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 표현은 신중하군요.”

“오늘 수업에서는 신중해야 하니까요.”

미하일라는 창가에 서서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의 공기는 그녀가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실의 무게를 잃지 않았다.

레이튼은 첫 번째 찻잔을 알렉산드리나 앞에 밀어두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폐하의 답부터 가까이 보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첫 문장을 보았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녀는 그 문장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할 수 없었다. 그 문장은 그녀를 세운 말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부족하다고 불렀고, 어떤 이는 흉내라고 불렀고, 어떤 이는 피가 모자라다 했다. 그 말들 사이에서 그녀는 위대한 왕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흉내는 공부가 되었고, 공부는 길이 되었고, 길은 왕도가 되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께서 처음으로 자신을 ‘가짜’라고 부른 것은 언제입니까?”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왕도를 묻지 않았다. 정통성도, 군대도, 정책도 묻지 않았다. 더 오래된 곳을 찔렀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김이 얇게 올라오고 있었다.

“제가 먼저 말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했습니다. 피가 부족하다고. 이름이 부족하다고. 왕좌에 닿으려면 정통한 자의 그림자라도 빌려야 한다고. 처음에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화가 났다고 말하면 너무 단순하겠네요.”

그녀는 조금 웃었다.

“무서웠어요.”

푸리나가 숨을 작게 삼켰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그 말이 사실일까 봐요. 제가 아무리 걸어도, 결국 흉내에서 끝날까 봐. 그래서 배웠습니다. 흉내낼 거라면 가장 위대한 것을 흉내내야 한다고. 가짜라면,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걸어야 한다고.”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흉내가 단순한 연기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대제의 길을 배우고, 군대를 배우고, 방패와 창을 배우고, 왕도를 배웠습니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말은 저를 무너뜨린 말이 아니라, 저를 일으킨 말이었어요.”

“그 말이 폐하를 살렸군요.”

“네.”

대답은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했다.

레이튼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말은 폐하를 일으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곧장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그 작은 멈춤을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즉답 직전 정지.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대체로요.”

레이튼은 그 말을 그대로 두었다.

대체로.

좋은 답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사람은 종종 그런 말을 쓴다. 언제나, 반드시, 완전히 같은 말이 아니게 될 때.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알렉산드리나는 낮게 말했다.

“때로는 저를 채찍질합니다.”

레이튼은 재촉하지 않았다.

“제가 멈추면, 다시 가짜가 될 것 같아요. 쉬면, 사람들이 제 안의 부족함을 볼 것 같습니다. 틀리면, 그들은 말하겠죠. 보라, 저것이 한계라고. 저것이 피의 부족함이라고. 저것이 왕이 아니라 흉내였다는 증거라고.”

그녀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그래서 저는 더 단정해야 했습니다. 더 강해야 했고, 더 위대해야 했고, 더 왕다워야 했어요.”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께서는 그것을 원하셨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보았다.

“네.”

그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마도요.”

레이튼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하셨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교실 안의 공기가 아주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잔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확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 알렉산드리나는 위대해지고 싶었다. 왕도를 걷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한 번도 쉬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가짜라는 말을 지우기 위해 걷는 길이, 오히려 그 말을 영원히 등 뒤에 세워두는 길이 될까 봐.

“저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가짜라는 말을 버리지 못하겠어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말이 없으면, 제가 여기까지 온 길도 사라질 것 같으니까요. 제가 부족해서 시작한 길이었는데, 그 부족함을 없던 일로 하면…… 제가 배운 것도, 걸은 것도, 버틴 것도 다 거짓말이 될 것 같아요.”

알렉산드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그 말을 붙잡고 있으면, 저는 영원히 증명만 하다가 끝날 것 같기도 해요.”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답을 주지 않았다. “가짜는 출발점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 순간은 답을 정리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말이 어디서 다쳤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선생님.”

“예, 폐하.”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될까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가짜’는 타인의 판결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후 자기 왕도를 세우는 문장이 됨. 현재 상태: 버리면 걸어온 길이 사라질 것 같고, 붙잡으면 영원히 증명만 하게 될 것 같음. 답 미완성.

푸리나는 그 기록을 보았다.

답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다만 문장의 상처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다음 찻잔은 요안나 앞에 놓여 있었다.

요안나는 이미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번 입을 열려다 닫았다. 요안나는 거리에서 사람의 마음을 배운 황제였다. 낮은 사람들의 말, 병사의 한숨, 어부의 농담, 아이들의 다툼을 들어온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레이튼이 묻는 것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상을 낮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이 누구의 얼굴을 통과해야 하는지 물으려 했다.

레이튼은 말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질문드리겠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든 이에게 평화를’라는 말을 처음 품었을 때, 폐하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모든 사람이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여쭙겠습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 안에서, 가장 먼저 얼굴이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 모든 사람을 떠올리고 싶었다. 로마 시민, 아직 시민이 아닌 사람, 병사, 상인, 아이, 어머니, 적, 이방인. 그녀의 로마는 손을 잡는 것으로 시작되는 로마였다. 그러나 레이튼은 지금 하나의 얼굴을 물었다.

요안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 만난 아이들이 있었어요.”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궁 밖에서요. 그 아이들은 저를 황제로 대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제 이름도 몰랐고, 제 혈통도 몰랐어요. 그냥 같이 뛰고, 같이 먹고, 같이 혼났어요. 그때 저는 이상하게 편했어요. 로마가 궁전보다 넓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마 그때였을 거예요.”

“그 아이들이 폐하의 평화에 들어 있습니까?”

“네.”

요안나는 작게 웃었다.

“아마 가장 먼저 들어 있었을 거예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폐하의 ‘모든 이’는 얼굴 없는 말이 아니군요.”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아까는 얼굴을 바로 말하지 못했을까요?”

“말이 너무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큰 말은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커지면, 처음 그 말을 태어나게 한 작은 얼굴들이 안쪽으로 숨어버리기도 하지요.”

요안나는 칠판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문장은 여전히 좋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 거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구체적인 얼굴. 흙 묻은 손. 같이 웃던 소리.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다음 질문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전의 숨이었다.

“폐하.”

“네.”

“그렇다면 ‘모든 이’라는 말 안에는, 폐하를 궁 안에 머물게 한 사람도 들어갑니까?”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작게 멈췄다. 알렉산드리나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고, 호흐마이스터도 눈을 들었다.

창가에 서 있던 미하일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크게 보였다.

요안나는 레이튼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칠판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 창가에 선 보라색 황제를 느꼈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든 황제. 제국의 운명을 자기 화살에 얹은 사람. 그리고 요안나에게는, 아버지의 장례와 피 묻은 궁정 이후에 자신을 궁 안에 머물게 한 사람. 보호자들을 제거하고, 정통성의 주인을 살아 있는 상징으로 남긴 사람. 찬탈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혹은 제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뒤집어쓴 사람. 어느 쪽이든, 요안나의 평화가 피해갈 수 없는 얼굴.

레이튼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분의 손도 잡겠다는 뜻입니까?”

요안나의 손이 찻잔을 더 세게 감쌌다.

그녀는 아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궁 안에 머문 시간은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것은 평화롭다는 뜻이 아니다. 문이 열리지 않는 조용함도 있고, 발소리를 기다리는 조용함도 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예의를 다했다. 혈통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갈 수 없는 예의도 있다. 살아 있는 황제로 남겨진다는 것은, 때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잔인했다.

요안나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말이 멈췄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미하일라도 기다렸다.

교실 안의 누구도 대신 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다시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할 때, 저는 모든 사람이 서로 손을 잡는 장면을 떠올렸어요. 낮은 사람도, 외국인도, 병사도, 적이었던 사람도. 그런데…….”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말 안에 미하일라 폐하를 넣으면, 갑자기 손이 무거워져요.”

미하일라의 눈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요안나는 창가 쪽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제가 그 손을 잡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에요. 아마 그것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그 손을 너무 빨리 잡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될까 봐.”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구분입니다.”

요안나는 이제 레이튼을 보았다.

“평화는 잊는 게 아니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용서도 아닌가요?”

“용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용서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레이튼은 신중하게 말했다.

“때로 평화는, 있었던 일을 이름 붙인 뒤에도 미래를 완전히 닫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황제의 침묵이면서, 죄를 아는 자의 침묵이기도 했다. 그녀는 요안나의 평화를 평가할 수 없었다. 그 말 안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이미 판결과도 같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모르겠어요.”

그 말은 작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고 싶은데, 그 안에 미하일라 폐하를 넣는 순간 목이 막혀요. 그런데 빼고 싶지도 않아요. 빼버리면, 제가 말하는 모든 이가 정말 모든 이가 아니게 될 것 같아서요.”

요안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넣으면…… 제가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할 것 같아요.”

교실은 조용했다.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렇다면 오늘은 기억을 지우지 않는 평화라고 쓰면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 그런 문장을 줄 때가 아니었다. 요안나의 평화는 지금 상처와 처음 만났다. 그 상처 앞에서 너무 빨리 문장을 만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닫힌 답이 될 수 있었다.

미하일라가 아주 짧게 말했다.

“요안나.”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막힘을 없던 것으로 하지 마라.”

그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용서받으려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요안나의 목이 막힌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 말이었다.

요안나는 한참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요안나: ‘모든 이’는 거리의 아이들에서 시작된 얼굴 있는 평화. 그러나 미하일라를 포함하는 순간, 궁의 유폐와 피 묻은 기억이 충돌함. 상태: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이’가 아니고, 포함하면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할 것 같음. 답 미완성.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 제목을 붙일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호흐마이스터의 차는 조금 식고 있었다.

그녀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자세는 처음과 거의 같았다. 예의 있고, 단정하고, 빈틈이 적다. 그러나 교실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조금 알았다. 그 빈틈없음은 갑옷이다. 갑옷은 몸을 지킨다. 하지만 오래 입으면, 살과 갑옷의 경계를 잊게 만든다.

레이튼은 서두르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듣고 있습니다.”

“당신의 답을 가까이 보아도 되겠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충분히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레이튼을 보았다.

“방금 전 알렉산드리나 폐하께 하신 말씀과 닮았군요.”

“좋은 질문은 가끔 반복됩니다. 다만 같은 질문도 상대에 따라 다른 문이 되지요.”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물어보십시오.”

레이튼은 칠판의 세 번째 문장을 보았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는 물었다.

“그 죄는 누구의 것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즉시 대답했다.

“제가 명령한 일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기사단 전체의 죄입니까, 호흐마이스터 개인의 죄입니까?”

“둘은 분리되기 어렵습니다.”

“분리되기 어렵다는 것과,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침묵했다.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대신 찻잔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저는 기사단의 우두머리입니다.”

“예.”

“우두머리는 책임을 나눠 갖는 자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모으는 자입니다. 병사의 손에 묻은 피, 지휘관의 판단, 책상 위의 서명, 모두가 결국 제 이름 아래로 옵니다.”

그녀의 말은 정중했지만 차갑지 않았다. 차갑게 굳히려 애쓰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을 모으는 자라는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답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물었다.

“책임을 모으는 일이, 구원받지 않겠다는 결론까지 포함합니까?”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 질문은 책상 위에서 던졌던 질문과 닮아 있었지만, 더 가까웠다. 더 깊은 곳을 건드렸다.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구원은 너무 이른 말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사랑한 땅을 지키기 위해, 저는 사랑받지 못할 선택들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런 자가 쉽게 안식을 말하는 것은 기사답지 않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물었다.

“쉽게 안식을 말하지 않는 것과, 영원히 안식을 거부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호흐마이스터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이 질문이 호흐마이스터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질문도 아프다. 특히 너무 오래 닫힌 문을 두드릴 때는.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제가 구원받기를 바라면, 제가 저지른 일들이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 두려움은 이해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조심하겠습니다.”

레이튼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 죄의 무게는 당신이 행복을 거부한다고 해서 더 진실해지지는 않습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자신을 벌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더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쉬지 않는다고 해서 책임이 더 고결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책임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자기처벌은 때로, 이미 내려진 판결을 계속 낭독할 뿐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조용했다.

그 침묵 속에서, 그녀의 기사도와 죄책감과 사랑이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레이튼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당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쉬운 용서를 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묻고 싶습니다.”

그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당신이 짊어진 것은 책임입니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내린 끝없는 형벌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들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고, 그 온기를 손 안에 두었다.

“저는…….”

말이 멈췄다.

그녀는 예의 있는 문장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장이 쉽게 오지 않았다. 오래 반복한 문장은 많았을 것이다. 기사단의 책임, 죄의 무게, 사랑하는 땅을 위한 희생, 구원받지 않을 결심. 그러나 레이튼은 그 문장들이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침내 말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모른다는 답은 기사단장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학생이기도 하시니까요.”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가 다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말은 조금 비겁한 구제책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웃었다.

“하지만 때로 교실은, 잠시 모른다고 말해도 되는 장소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책임과 자기처벌의 경계 미확정. 답변: 아직 모름. 단, ‘모름’을 임시 답으로 허용.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처음으로 짧게 말했다.

“모른다는 말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미하일라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러나 때로는 다음 명령을 내리기 전,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은 기사단장의 말이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 학생의 말이기도 했다.


---

수업은 잠시 멈췄다.

세 사람의 찻잔은 각기 다르게 남아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거의 마시지 않았고, 요안나는 절반쯤 마셨으며,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데우는 데 더 많이 썼다. 레이튼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답이 같은 속도로 식거나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레이는 기록을 정리했다.

푸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처음의 세 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것들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각 문장 옆에 작은 물음표를 남겼다.

알렉산드리나의 문장 옆에는:

버리면 길이 사라지고, 붙잡으면 증명만 남는가?

요안나의 문장 옆에는: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이가 아니고, 포함하면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하는가?

호흐마이스터의 문장 옆에는:

책임과 자기판결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푸리나는 그 물음표들을 보며 생각했다.

문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편안하게 닫혀 있지도 않았다.

레이튼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작게 물었다.

“벌써요?”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더 묻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질문도 때로 과식하면 독이 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도 쉬어야 하나요?”

“예. 그래야 다음에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질문을 휴식시킨다는 표현은 조금 낯섭니다.”

“답만 쉬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레이가 기록했다.

질문도 휴식 필요.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 그건 제목으로 괜찮지 않아?”

그레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제로도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레이튼은 학생들을 보았다.

“다음 수업에서는 답을 쓰지 않을 겁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무엇을 하나요?”

레이튼은 칠판의 물음표들을 보았다.

“아마 답들이 스스로 움직일 겁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 말씀은 은유입니까?”

푸리나가 조용히 칠판을 보았다.

물음표의 흰 선이 아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닌 것 같은데.”

교실 안에 작은 바람이 지나갔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열린 답에는 바람이 따른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 듯합니다.”

요안나가 찻잔을 붙잡았다.

“그럼 다음 수업은 조금 추울까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그렇다면, 곁에 있겠습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열린 답의 불안

그 아래, 아직 식지 않은 찻잔의 온기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질문은 문을 열지만, 열린 문 앞에 선 사람에게는 바람도 함께 닿는다 —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3막 — 열린 답의 불안

— 질문은 문을 열지만, 열린 문 앞에 선 사람에게는 바람도 함께 닿는다 —

세 번째 수업은 시작되기 전부터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교실 안에는 소리가 없었지만, 칠판 위의 물음표들은 어딘가 시끄러웠다. 흰 분필로 그려진 세 개의 작은 질문이, 제각기 자기 주인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버리면 길이 사라지고, 붙잡으면 증명만 남는가?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이가 아니고, 포함하면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하는가?

책임과 자기판결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알렉산드리나는 자기 자리 앞에 서서 첫 번째 질문을 보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전보다 조금 늦게 앉았다. 자리에 앉는 일조차 한 번 더 생각해야 하는 사람처럼, 책상 옆에 손을 얹고 잠시 머물렀다.

요안나는 두 번째 질문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평화라는 말은 여전히 그녀의 안에서 빛났다. 그러나 그 빛은 이제 궁의 닫힌 문과도 닿아 있었다. 너무 밝은 말은 때로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를 더 길게 늘인다.

호흐마이스터는 세 번째 질문을 보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모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명령서 위에 서명하기 전처럼. 그러나 손끝은 멈추어 있었다.

레이튼은 교탁 앞에 섰다. 그는 찻잔을 준비하지 않았다. 차가 필요 없는 날이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필요한 날일지도 몰랐다. 다만 오늘은 차를 마시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오늘은 답을 쓰지 않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오늘은 무엇을 하나요?”

“답이 열렸을 때 생기는 불안을 보겠습니다.”

요안나가 손을 모았다.

“그건 수업인가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그렇기를 바랍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확신하지 못하시는군요.”

“예.”

레이튼은 부드럽게 인정했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모든 수업의 결말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급한 답이겠지요.”

푸리나는 교실 한쪽에서 그 말을 들으며 칠판을 바라보았다. 레이튼이 직접 쓴 물음표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레이튼 혼자 만든 기호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나의 떨림, 요안나의 막힌 목, 호흐마이스터의 멈춘 손이 묻은 질문이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3막 시작. 목표: 열린 답의 불안 관찰. 답 작성 없음.

미하일라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학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관객도 아니었다. 그녀는 교실 바깥의 현실로서 서 있었고, 그 현실은 오늘따라 조금 더 가까웠다.

그녀가 말했다.

“레이튼.”

“예, 폐하.”

“그대는 문을 열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미하일라의 목소리는 짧고 정확했다.

“열었다. 이제 바람이 들어올 것이다.”

그 말이 끝난 순간,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분필 가루가 흔들렸다.

푸리나가 눈을 들었다.

극장이 반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변화였다. 칠판 위의 물음표가 조금 번졌다. 하얀 선이 물처럼 흐르더니, 칠판 가장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벽으로 퍼졌다. 책상의 그림자가 길어졌고, 창문 밖의 오후빛이 이상하게 어두워졌다. 교실은 여전히 교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교실이 아닌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요안나가 작게 말했다.

“무대가 바뀌고 있어요.”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내가 의도한 것보다 빠른데.”

레이튼은 칠판을 보았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그 이름 아래, 물음표들이 별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아직 별자리가 되지 않은 별들. 그러나 누군가 선을 긋지 않아도, 별들은 자기 중력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레이튼은 낮게 말했다.

“질문들이 수업을 계속하려는 모양입니다.”

미하일라가 물었다.

“막을 내릴 것인가?”

푸리나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은 학생들을 보았다. 세 사람 모두 아직 답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극장은 이미 그 답들을 바람 앞에 세우려 하고 있었다. 현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을 닮은 압력. 현실의 얼굴을 빌린 무대. 답이 교실 안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

레이튼이 말했다.

“아니요.”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다만,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 말을 기억하라.”

교실의 바닥이 갈라지듯 바뀌었다.

막이 열렸다.


---

첫 번째로 변한 것은 알렉산드리나의 자리였다.

그녀의 책상이 길게 늘어나 군막의 탁자가 되었다. 칠판은 전황도가 되었다. 분필로 적힌 선들이 강과 산맥과 성채의 위치로 바뀌었다. 교실 의자들은 사절의 자리처럼 양옆에 놓였고, 창문으로 들어오던 오후빛은 천막 위를 두드리는 새벽빛이 되었다.

그곳은 실제 불가리아가 아니었다.

푸리나의 극 안에서 만들어진, 알렉산드리나의 답이 가장 불안해지는 장소였다.

알렉산드리나는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옷차림은 그대로였지만, 그림자가 달랐다. 교실 속 학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왕으로 보이기 위해 계속 자세를 바로잡아온 사람이었다.

무대 속 사절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았다. 목소리만 선명했다.

“차르시여, 약점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따르는 자들은 완성된 왕을 원합니다.”

“피의 부족함은 말하지 마십시오.”

“흔들림은 적에게 빌미를 줍니다.”

“가짜라는 말은 적이 붙이는 이름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누구보다 왕답게 보이셔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 말들은 새롭지 않았다. 너무 익숙했다. 익숙해서 편할 정도였다. 그녀는 그 말들에 맞춰 자신을 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정돈하고, 의심받지 않는 답을 내놓는 법.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네. 저는…….”

말이 멈췄다.

레이튼이 옆에 있었다. 그는 사절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의 말을 대신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답이 아니었다. 물음표였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이었던 전황도 한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희미하게 문장이 남아 있었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사절들의 목소리가 다시 밀려왔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누구보다 왕다워야 합니다.”

“멈추지 마십시오.”

“쉬지 마십시오.”

“부족함을 인정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 모두가 다시 묻게 될 것입니다. 정말 왕인가?”

알렉산드리나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저는…… 왕다워야 해요.”

그녀의 말투는 고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처럼 낮고 조심스러웠다.

“그 말로 여기까지 왔어요. 제가 가진 건 완성된 피가 아니라, 걸어온 길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더 잘해야 했고, 더 높이 서야 했고, 더 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절들의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 답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 답이 폐하를 왕으로 만듭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전황도를 보았다.

지도 위의 선들이 모두 그녀를 향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적군의 화살표가 아니라, 질문들이었다. 너는 누구인가. 피가 부족한 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흉내가 왕도가 될 수 있는가. 가짜가 왕이 될 수 있는가.

그녀는 작게 말했다.

“하지만…….”

무대 속 공기가 멈췄다.

레이튼이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제가 계속 증명만 하고 있다면, 저는 언제 왕이 되는 걸까요?”

그 질문은 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녀가 자기 입으로 낸 질문이었다.

사절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말은 위험합니다.”

“의심을 보이면 안 됩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순간, 왕도는 무너집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목소리들을 들었다. 겁이 났다. 그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차르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손을 떨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곳은 교실이었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아직 선을 긋지 않은 곳.

그녀는 떨리는 손을 숨기지 않았다.

“저는 두려워요.”

그 말이 군막에 떨어졌다.

“제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면, 사람들이 저를 왕으로 보지 않을까 봐요. 제가 잠깐 멈추면, 뒤처질까 봐요. 제가 가짜라는 말을 버리면,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까지 사라질까 봐요.”

사절들은 침묵했다.

알렉산드리나는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숨기려고만 한다면…… 저는 왕도를 걷는 게 아니라 계속 도망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전황도의 선들이 흔들렸다. 새벽빛이 천막을 걷어냈다. 군막은 다시 교실의 책상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레이튼은 알렉산드리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다만 말했다.

“좋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조금 지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게 좋은 건가요?”

“답은 아닙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폐하의 질문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으로 돌아가는 전황도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 답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자기 답이 자기 뒤에서 채찍처럼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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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변한 것은 요안나의 자리였다.

교실 문이 길어졌다. 나무문은 궁의 문이 되었다.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벽은 흰색이었지만, 어딘가 차가웠다. 책상은 사라지고, 긴 복도가 생겼다. 발소리가 너무 잘 울리는 복도였다.

그곳도 실제 궁이 아니었다.

요안나의 평화가 가장 아픈 얼굴과 마주해야 하는 무대였다.

요안나는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작은 황제였다. 그러나 작기만 한 황제는 아니었다. 그녀의 혈통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고, 그녀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복도에서는, 혈통도 지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평화의 황제시여.”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려면 먼저 웃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모든 이를 말하겠습니까?”

“그분도 포함해야 합니다.”

“문을 닫은 사람도, 피 위에 선 사람도, 폐하의 평화 안에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요안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문을 알고 있었다. 실제와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무 닮아 있었다. 궁의 문. 예의 바르게 닫힌 문. 폭력적으로 잠기지 않았기에 더 말하기 어려운 문.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로 정치가 유지되고, 자신이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로 질서가 유지되던 문.

그 문 앞에 미하일라가 있었다.

정확히는, 두 명의 미하일라가 있었다.

하나는 창가에 서 있는 현실의 미하일라. 교실 바깥의 현실로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황제.

다른 하나는 무대 속 그림자. 보라색 망토와 활의 그림자를 지닌, 장례와 피와 결단 너머에서 문밖에 서 있던 황제.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은 나왔다.

그러나 이어지지 않았다.

목소리들이 다시 말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이에게.”

“그 손도 잡으셔야 합니다.”

“손을 잡지 못한다면, 평화는 아직 부족합니다.”

“상처를 말하면 사람들은 갈라집니다.”

“기억은 분쟁을 낳습니다.”

“평화는 지나간 일을 넘는 것입니다.”

요안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았다.

“아니요.”

그 말은 작았다.

목소리들이 멈췄다.

요안나는 문을 보았다.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레이튼은 복도 옆에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대신 말하지 않았다. 요안나가 자기 목소리를 찾을 때까지,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요안나는 계속했다.

“저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고 싶어요. 그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어요. 외국인도, 낮은 사람도, 적이었던 사람도, 언젠가 손을 잡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하지만 그 말이 제가 갇혀 있던 문을 없던 일로 만들면 안 돼요.”

문이 조금 흔들렸다.

“제가 아직 손을 잡을 수 없는데, 손을 잡은 척하는 것도 평화는 아니에요.”

무대 속 미하일라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창가의 미하일라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두 침묵이 겹치자, 교실은 숨을 죽였다.

요안나는 천천히 현실의 미하일라를 보았다.

“미하일라 폐하.”

미하일라는 짧게 대답했다.

“듣고 있다.”

“저는 폐하를 용서했다고 말할 수 없어요.”

교실이 아주 조용해졌다.

그 말은 공격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안나의 목소리는 칼이 아니었다. 문 앞에서 떨리는 손이었다.

“저는 아직 그 문을 기억해요. 장례식의 소리도,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도, 제가 살아 있는데도 나갈 수 없던 날들도. 그래서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려고 하면, 목이 막혀요. 그 안에 폐하도 들어가야 하는지 생각하면, 더 막혀요.”

미하일라는 눈을 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말을 받아냈다.

변명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저는 미래를 전부 닫고 싶지도 않아요.”

문틈에 아주 작은 빛이 생겼다.

“이상하죠. 손은 못 잡겠는데, 문을 영원히 잠그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아직 폐하에게 다가갈 수 없지만, 폐하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저는…… 제가 원하는 평화가 뭔지 아직 모르겠어요.”

레이튼은 조용히 말했다.

“모른다는 말이 오늘은 정직할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그를 보았다.

“하지만 황제가 몰라도 되나요?”

창가의 미하일라가 대답했다.

“오래 몰라서는 안 된다.”

요안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미하일라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거짓으로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 말은 차가웠지만, 요안나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요안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모르겠다고 말할게요.”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닫힌 문 앞에서, 요안나는 처음으로 자기가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자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평화를 배신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 알았다.

복도의 벽이 흐려졌다. 궁의 문은 다시 교실 문이 되려 했다.

요안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하지만 그 평화가 기억을 지우는 말이면, 저는 아직 그 말을 제 목소리로 할 수 없어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 말도 폐하의 목소리입니다.”

요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울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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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변한 것은 호흐마이스터의 자리였다.

교실의 책상들이 길게 이어져 기사단 회의실의 탁자가 되었다. 칠판은 거대한 명령서가 되었고, 분필 가루는 눈처럼 보이다가 곧 재처럼 보였다. 방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겹쳤다. 란트마이스터들의 시야. 전선의 보고. 봉인된 편지. 끝내 서명해야 하는 명령들.

호흐마이스터는 탁자 끝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니라, 호흐마이스터였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학생 같았다. 자기가 가장 익숙한 자리에서, 가장 피하고 싶던 질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탁자 위에는 한 장의 명령서가 놓여 있었다.

글자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목만은 선명했다.

징벌 명령.

목소리들이 들렸다.

“호흐마이스터.”

“반란에는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죄는 이미 당신의 몫입니다.”

“더러운 명령은 당신이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기사단은 깨끗하게 남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닙니까?”

호흐마이스터는 명령서를 보았다.

이것은 실제 명령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실제 명령서와 닮아 있었다. 사랑하는 땅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결정. 기사답지 않지만 기사단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결정. 누군가 해야 하며,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결정.

그녀는 펜을 들었다.

레이튼은 탁자 옆에 있었다.

그는 펜을 빼앗지 않았다. 명령서를 찢지도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은, 멈추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었다.

호흐마이스터는 펜 끝을 명령서 위에 놓았다.

목소리들이 속삭였다.

“당신은 이미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니 더러운 일을 맡으십시오.”

“그것이 책임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기사단을 위한 죄입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손은 안정되어 있었다.

너무 안정되어 있었다.

그 안정이 오히려 위험해 보일 정도로.

레이튼이 조용히 물었다.

“호흐마이스터.”

“듣고 있습니다.”

“그 명령은 기사단을 위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대답은 빨랐다.

레이튼은 다시 물었다.

“아니면, 당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까?”

펜이 멈췄다.

탁자 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질문은 과도합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명령서 앞에서는 질문이 늦습니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늦은 질문은 사람을 죽입니다.”

“맞습니다.”

레이튼은 인정했다.

“그러나 너무 빠른 판결도 사람을 죽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들이 다시 밀려왔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이미 죄는 당신의 것입니다.”

“더 어두운 길을 택하십시오.”

“당신이 더러워질수록, 기사단은 남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지 않을수록, 땅은 평화로워집니다.”

그 말은 달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에게는 익숙했다. 익숙한 것은 때로 달콤한 것보다 위험하다. 사람은 익숙한 고통을 자기 본분이라 믿기 쉽다.

호흐마이스터가 낮게 말했다.

“저는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레이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명령한 일은 제게 돌아옵니다. 병사의 손, 란트마이스터의 시야, 서류 위의 잉크. 모두 제 이름 아래 모입니다.”

그녀의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하지만 제가 죄를 짊어진다는 이유로, 더 많은 죄를 필요로 하게 된다면…….”

펜 끝이 명령서 위에서 멈췄다.

“그것은 기사단을 위한 책임이 아니라, 제가 제 판결을 유지하기 위한 명령일지도 모릅니다.”

목소리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명령하지 않을 것입니까?”

“손실을 감당할 것입니까?”

“더 깨끗한 척할 것입니까?”

“당신이 죄를 피하려는 것입니까?”

호흐마이스터의 입술이 아주 조금 굳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저는 죄를 피하지 않습니다.”

명령서의 글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죄를 피하지 않는 것과, 죄를 찾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호흐마이스터는 명령서 제목을 보았다.

징벌 명령.

그녀는 그것을 지우지 않았다. 아직은. 대신 그 아래 빈 줄에 다른 말을 쓰려 했다. 그러나 손이 멈췄다.

“아직 못 쓰겠습니다.”

그 말은 작았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습니다. 명령서 앞에서 아직 못 쓰겠다는 말은 위험합니다.”

“예.”

레이튼은 정직하게 말했다.

“위험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그를 보았다.

“그런데도 괜찮다고 합니까?”

“아니요.”

레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지만, 혼자 두지는 않겠습니다.”

그 말에 호흐마이스터의 표정이 아주 조금 변했다.

아주 조금.

그녀는 다시 명령서를 보았다. 아직 답은 없었다. 징벌을 방어로 바꾸지도 못했고, 자기처벌과 책임을 완전히 구분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자기 안의 어두운 명령이 정말 기사단을 위한 것인지 묻게 되었다.

그 물음만으로도 회의실은 흔들렸다.

탁자가 다시 교실 책상이 되기 시작했다. 명령서는 칠판의 문장으로 흐려졌다. 분필 가루는 다시 분필 가루가 되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놓지 못한 것인지, 놓지 않기로 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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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작은 극이 지나간 뒤, 교실은 다시 교실이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책상들은 조금 다른 위치에 놓인 것 같았고, 칠판의 물음표들은 전보다 더 짙어 보였다. 창문 밖의 빛도 조금 차가웠다. 학생들은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왔지만, 그들이 앉은 자세는 이전과 달랐다.

알렉산드리나는 손을 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주먹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도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요안나는 교실 문을 보고 있었다. 단순한 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직 복도의 문과 겹쳐 보였다.

호흐마이스터는 펜을 들고 있지 않았는데도, 손가락이 무언가를 붙잡은 자세로 굳어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보았다. 적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한동안 적지 못했다. 마침내 그녀는 짧게 썼다.

3막: 질문의 부작용 확인. 학생 전원, 답을 완성하지 못함. 불안 개방.

푸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그녀가 연출한 극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극은 레이튼의 질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문을 열었고, 바람을 불러들였으며, 학생들의 손을 떨게 했다.

미하일라가 입을 열었다.

“레이튼.”

레이튼은 고개를 들었다.

“예, 폐하.”

“그대의 질문은 그들의 답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미하일라는 학생들을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더 불안하다.”

교실은 조용했다.

“그대는 이것을 성장이라 부를 것인가, 상처라 부를 것인가.”

레이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왕도가 도망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들여다보았다.

요안나를 보았다. 그녀는 평화가 기억을 지우는 말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앞에 서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녀는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자기판결을 유지하려 했는지 묻게 되었다.

상처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손들이 떨리고 있었다.
성장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 떨림은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에서 나왔다.

레이튼은 천천히 말했다.

“둘 다일지도 모릅니다.”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레이튼은 말을 이었다.

“상처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의 손이 떨립니다. 성장이라고 쉽게 말하기에는, 그 떨림은 너무 아픕니다.”

그는 칠판의 물음표를 보았다.

“하지만 성장도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은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로 떨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멈춘 듯 들었다.

레이튼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저는…… 그 떨림이 혼자 남지 않도록 곁에 있어야겠지요.”

미하일라가 물었다.

“그것이 그대의 답인가?”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답을 성급히 닫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질문 뒤에 숨을 수는 없었다.

“오늘의 답입니다.”

그는 말했다.

“완성된 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이 교실에서 제가 피해서는 안 되는 답입니다.”

미하일라는 그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좋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었다.

판결에 가까웠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교실의 칠판 한쪽,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이라는 글씨 아래에서 물음표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들. 아직 선을 긋지 않은 답들. 그러나 이제 모두가 알았다. 별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아름답기만 한 일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위험도 함께 있다.

레이튼은 분필을 들었다.

그리고 칠판 아래에 짧게 적었다.

문을 열었다면, 바람 앞에 함께 설 것.

그 문장은 아직 교사의 변론이 아니었다.

다만 변론이 시작될 자리였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질문하는 교사의 변론

그 아래,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차가운 바람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질문자는 문을 여는 사람이다. 그러나 좋은 교사는 문을 열고 떠나지 않는다 —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4막 — 질문하는 교사의 변론

— 질문자는 문을 여는 사람이다. 그러나 좋은 교사는 문을 열고 떠나지 않는다 —

교실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그것을 원래의 교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책상은 다시 책상이었고, 칠판은 다시 칠판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오후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교탁 위의 찻잔도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 책상은 군막의 탁자였고, 그 문은 궁의 닫힌 문이었고, 그 칠판은 기사단의 명령서였다.

무대는 사라졌지만, 무대가 남긴 바람은 아직 빠져나가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주먹을 쥐고 있던 손. 부족함을 들킬까 봐 숨기고, 왕도가 도망이 될까 봐 두려워한 손.

요안나는 교실 문을 보고 있었다. 단순한 나무문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직 궁의 문과 겹쳐 있었다. 열리지 않았던 문. 예의 바르게 닫힌 문. 살아 있는 황제였지만 나갈 수 없었던 문의 기억.

호흐마이스터는 자기 앞의 책상 위를 보고 있었다. 아무 명령서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펜을 쥔 자세로 굳어 있었다. 쓰지 못한 명령, 쓰지 않기로 한 것도 아닌 명령, 아직 구분하지 못한 책임과 자기판결.

그레이는 기록판 위에 적어둔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3막: 질문의 부작용 확인. 학생 전원, 답을 완성하지 못함. 불안 개방.

그녀는 그 문장이 조금 차갑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치지 않았다. 차가운 문장도 때로는 필요했다. 기록은 온기를 줄 수 없지만, 온기가 사라진 자리를 보존할 수는 있다.

푸리나는 레이튼을 보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온화했다. 그러나 그 온화함 안쪽에 피로가 있었다. 질문을 사랑하는 사람도, 질문이 누군가의 손을 떨게 만드는 순간에는 지친다. 레이튼은 그 떨림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친 것이다.

미하일라가 창가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 한 걸음만으로도 교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황제가 걸음을 옮기면, 그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의지의 표시가 된다. 그녀는 교탁 앞으로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완전히 뒤편에만 서 있지도 않았다.

“레이튼.”

“예, 폐하.”

“그대는 방금 답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답을 말했습니다.”

“오늘의 답이라.”

미하일라는 칠판을 보았다.

거기에는 레이튼이 방금 적은 문장이 있었다.

문을 열었다면, 바람 앞에 함께 설 것.

미하일라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좋은 문장이다.”

푸리나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미하일라의 칭찬은 드물었다. 그러나 레이튼은 바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미하일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역시 미하일라는 덧붙였다.

“그러나 좋은 문장이 곧 충분한 답은 아니다.”

레이튼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대의 질문은 그들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불안해졌다. 그대는 곁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묻겠다.”

미하일라의 눈이 레이튼에게 향했다.

“곁에 선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실이 조용해졌다.

미하일라의 질문은 학생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수업은 레이튼에게 돌아왔다. 교사는 질문을 던지는 자였지만, 좋은 교실에서는 교사도 질문 밖에 설 수 없다.

레이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칠판의 이름을 보았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그 아래의 문장들, 물음표들, 아직 답이 되지 못한 떨림들.

“곁에 선다는 것은…….”

그는 조용히 말했다.

“대신 답하지 않는 일입니다.”

미하일라는 곧장 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요.”

레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답하지 않는다는 말은 때로 편리한 핑계가 됩니다. ‘그건 당신의 답입니다’라고 말하며 한 걸음 물러서면, 교사는 아주 우아하게 책임을 피할 수 있지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레이튼이 자기 자신에게 겨누는 말이었다.

레이튼은 계속했다.

“곁에 선다는 것은 재촉하지 않는 일입니다.”

미하일라가 다시 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요.”

레이튼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재촉하지 않는다는 말도 때로 방치가 됩니다. 기다림이 배려인지, 회피인지 구분하지 못하면, 학생은 열린 문 앞에서 홀로 추위에 서 있게 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아주 낮게 말했다.

“그 구분은 어렵군요.”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시 미하일라를 보았다.

“그러니 곁에 선다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답을 대신 쓰지 않고, 재촉하지도 않되, 질문으로 열린 상처가 피를 흘리고 있는지 계속 살피는 일입니다.”

요안나는 작게 물었다.

“그건 선생님인가요, 의사인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그 둘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그럼 선생님은 저희가 낸 답이 틀려도 그냥 두나요?”

“아닙니다.”

레이튼은 천천히 대답했다.

“위험한 답에는 다시 묻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답에도 묻겠습니다. 스스로를 닫아버리는 답에도 묻겠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답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답이 사람을 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답이 사람을 삼킨다.”

“예.”

레이튼은 칠판의 세 문장을 보았다.

“좋은 답일수록 그럴 수 있습니다. 나쁜 답은 대개 저항을 부릅니다. 그러나 좋은 답은 사랑받습니다. 사람을 살렸던 답, 버티게 했던 답, 길을 열어준 답은 너무 소중해서, 어느 순간 자신을 가두기 시작해도 놓기 어렵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저는 그런 답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레이튼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저는 답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답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름이 필요하고, 길이 필요하고, 약속이 필요합니다. 왕도도, 평화도, 책임도 모두 필요합니다.”

그는 칠판에 적힌 문장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다만 저는 너무 빨리 닫힌 답을 두려워합니다.”

교실은 조용했다.

레이튼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연이 아니었다. 변론이었다. 자신이 왜 묻는지, 왜 묻는 일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질문이 왜 때로 위험한지 스스로에게도 설명하는 변론.

“너무 빨리 닫힌 답은 사람을 지켜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심을 줄여주고, 흔들림을 막아주고, 다음 걸음을 빠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때로 그 답은 묻지 못한 사람을 밖에 남겨둡니다. 아직 말하지 못한 상처를 덮어버립니다. 아직 자라지 않은 가능성에 이름을 붙여버립니다.”

그는 칠판 한쪽에 손을 올렸다.

“별에 너무 빨리 선을 그으면, 우리는 별자리를 얻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가능성을 잃습니다.”

요안나는 칠판 위의 이름을 보았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그러나 선을 긋지 않으면 항로를 찾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레이튼은 즉시 인정했다.

“그래서 저는 선을 긋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붙이지 말자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너무 빨리, 너무 적은 별만 보고, 너무 확신에 차서 선을 긋지 말자는 것입니다.”

미하일라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언제 선을 긋는가.”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

그 질문은 어려웠다. 레이튼이 가장 사랑하는 지점이자, 가장 두려운 지점이었다. 세상은 미지로 가득하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지 않았다. 그러나 군주는 영원히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 황제는 어느 순간 화살을 놓아야 하고, 기사단장은 명령서에 서명해야 하며, 차르는 길을 정해야 한다.

“충분히 보았을 때입니다.”

레이튼은 말했다.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충분함은 누가 정하지?”

“그 질문이 가장 어렵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저 혼자 정해서는 안 됩니다. 질문하는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물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혹시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답을 내리는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혹시 불편한 질문을 피하려고 닫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합니다.”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듣고 침묵했다.

그 말은 레이튼에게도, 미하일라에게도 향해 있었다.

레이튼은 다시 말했다.

“그래서 교실이 필요합니다.”

그는 학생들을 보았다.

“혼자 내린 답은 빠릅니다. 그러나 함께 견딘 질문은 조금 더 늦고, 조금 더 무겁고, 때로는 조금 더 사람답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그녀는 이제야 이 극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극은 학생들이 레이튼에게 배우는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레이튼이 자신의 질문을 교실로 가져와, 그것을 혼자만의 아름다운 철학이 아니라 함께 견뎌야 하는 책임으로 바꾸는 이야기였다.

그레이가 기록판에 적었다.

레이튼 변론: 답은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빨리 닫힌 답은 사람을 가둘 수 있다. 질문은 선을 긋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긋지 않기 위한 것.

미하일라가 말했다.

“좋은 말이다.”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예.”

레이튼은 작게 웃었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대는 질문의 아름다움을 말했다. 이제 질문의 죄를 말하라.”

교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알렉산드리나가 미하일라를 보았다. 요안나도. 호흐마이스터도.

레이튼은 눈을 내렸다.

질문의 죄.

그는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질문은 사람을 열 수 있습니다.”

레이튼은 말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질문은 사람을 찢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더 낮아졌다.

“질문은 상대가 자신의 답을 찾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잘못 던지면, 그것은 상대가 겨우 붙잡고 있던 난간을 걷어차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답을 빼앗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어떤 질문은 답보다 강하게 사람을 몰아갑니다.”

슈샤니크가 없었지만, 그 말은 어딘가 그녀가 했을 법한 비판과 닿아 있었다. 질문은 무해한 예의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답보다 강하게 사람을 움직인다.

레이튼은 그것을 인정했다.

“질문자는 자신이 중립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질문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어떤 질문은 길을 열고, 어떤 질문은 길을 좁힙니다. 어떤 질문은 상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어떤 질문은 질문자가 원하는 결론으로 상대를 유도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질문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바로 대답했다.

“질문자는 ‘나는 답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질문으로 문을 열었다면, 그 문으로 들어온 바람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조금 전 그대가 적은 문장이다.”

“예.”

레이튼은 칠판을 보았다.

문을 열었다면, 바람 앞에 함께 설 것.

“이 문장으로도 아직 부족합니다. 함께 선다는 말은 쉽습니다. 그러나 함께 선다는 것은 때로 시간이 걸리고, 피곤하고, 답답합니다. 학생이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찾은 답을 내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질문자가 보기에 너무 느리거나, 너무 돌아가거나, 너무 자기파괴적인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누군가는 자기 결핍을 놓지 못할 것입니다.”

요안나를 보았다.

“누군가는 평화를 말하면서도 아직 용서하지 못할 것입니다.”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누군가는 책임과 자기처벌을 계속 혼동할 것입니다.”

그는 다시 미하일라를 보았다.

“그때 질문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더 날카로운 질문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미하일라가 물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레이튼은 대답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언제까지 허용되는가.”

“영원히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자기 목소리로 다음 문장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그 답은 군사 명령으로 쓰기에는 부정확했다. 행정 절차로 삼기에는 모호했다. 그러나 교실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요안나가 작게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제가 오래 막혀 있어도 기다리나요?”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기다리겠습니다.”

요안나는 조금 안도한 듯했지만, 곧 다시 물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면요?”

“그때는 묻겠습니다.”

“뭐라고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폐하, 지금의 침묵은 당신을 지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을 가두고 있습니까?”

요안나는 그 질문을 듣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리나가 물었다.

“제가 계속 증명하려고만 하면요?”

레이튼은 그녀에게 말했다.

“폐하, 지금의 걸음은 왕도를 향한 것입니까, 아니면 뒤쫓아오는 말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숨을 가만히 들이마셨다.

호흐마이스터가 물었다.

“제가 다시 더러운 명령서를 집어 들면요?”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그 명령은 지키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눈을 내렸다.

“곤란하군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미하일라는 세 사람과 레이튼을 번갈아 보았다.

“그대는 답을 주지 않는다.”

“예.”

“그러나 질문을 멈추지도 않는다.”

“예.”

“그리고 떠나지도 않는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려 합니다.”

“하려 한다?”

“예.”

레이튼은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실패할 수 있으니까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레이튼이 처음으로 스스로를 학생들의 옆에 놓는 말이었다. 질문하는 교사는 언제나 조금 높은 자리에 서기 쉽다. 그러나 실패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교탁 위의 권위를 조금 내려놓았다.

레이튼은 말했다.

“저도 성급할 수 있습니다. 저도 제가 사랑하는 질문에 취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미지로 남아 있는 순간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누군가가 답을 필요로 하는 순간을 늦출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레이튼을 보았다.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가벼운 고백이 아니었다.

“저는 미지를 사랑합니다. 별들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름이 필요합니다. 항로가 필요합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혹은 전장을 지나기 위해, 혹은 궁의 문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는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제 질문도 답을 향해야 합니다. 답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답이 사람을 덜 다치게 하며 닫히도록. 혹은 닫히기 전에 아직 보지 못한 얼굴을 한 번 더 보도록.”

레이튼은 분필을 들었다.

그는 칠판의 문장 아래에 천천히 썼다.

질문은 답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답이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숨을 틔우는 일이다.

분필 소리가 멈췄다.

교실 안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레이는 그 문장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칠판에 쓰인 문장이 이미 모두를 향해 서 있었으니까.

미하일라가 말했다.

“그것이 그대의 변론인가.”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예.”

“충분한가.”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요.”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레이튼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시작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 대답에 푸리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미하일라도 더 묻지 않았다.

아마 그 대답은 완성된 답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교실에서는, 완성된 답보다 더 필요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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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푸리나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럼 이제 수업은 끝?”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아직 아닙니다.”

“그렇지?”

푸리나는 칠판 위의 문장들을 보았다. 아직 학생들의 답은 다시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렸고, 열렸고,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4막은 레이튼의 변론이었지만, 이 극의 끝은 레이튼에게만 있을 수 없었다.

푸리나가 학생들을 보았다.

“이제는 너희 차례겠네.”

알렉산드리나는 조용히 물었다.

“답을 다시 쓰는 건가요?”

레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요안나가 의아한 듯 보았다.

“아직도요?”

“예.”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답을 쓰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질문을 스스로 골라야 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물었다.

“저희의 질문을?”

“지금 칠판에는 제가 던진 질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음 막에서 여러분이 답을 다시 쓰려면, 어떤 질문 앞에서 쓸 것인지 여러분이 골라야 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버리면 길이 사라지고, 붙잡으면 증명만 남는가.
왕도는 결핍을 지우는 길인가.
지금의 걸음은 왕도인가 도망인가.

요안나는 칠판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
그 안에 미하일라도 들어가는가.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가.
아직 잡을 수 없는 손 앞에서도 문을 닫지 않을 수 있는가.

호흐마이스터는 칠판을 보았다.

책임인가, 자기판결인가.
그 명령은 지키기 위한 것인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가.
죄를 피하지 않는 것과 죄를 찾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레이튼은 말했다.

“좋은 답은 좋은 질문을 필요로 합니다. 다음 막에서는,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질문을 고르십시오. 그리고 그 질문 옆에, 오늘 말할 수 있는 만큼의 답을 쓰면 됩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완성되지 않아도 되나요?”

“완성되지 않아도 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틀리면요?”

“고치면 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보류는 가능합니까?”

레이튼은 잠시 웃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영원한 보류가 답이 되지 않도록, 날짜를 적어두는 편이 좋겠지요.”

호흐마이스터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실무적으로 타당합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레이가 기록했다.

다음 막 준비: 학생 각자 질문 선택 후, 오늘 가능한 답 작성. 완성 요구 없음. 보류 가능하나 영원한 보류 불가.

미하일라는 칠판을 보았다.

“이제야 선을 긋는군.”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너무 빨리 긋지 않으려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너무 늦지도 않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하일라는 짧게 대답했다.

“좋다.”

레이튼은 칠판 한쪽, 교실 이름 아래에 작은 별 세 개를 그렸다.

아직 선을 잇지는 않았다.

그저 별만 찍었다.

“다음 수업에서, 각자의 선을 그어보지요.”

푸리나는 그 작은 별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드디어 별자리네.”

레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아직은 별입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5막 — 각자의 별자리를 그리다

그 아래, 아직 선이 이어지지 않은 세 개의 별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좋은 답은 질문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질문은, 각자의 손으로 그은 선이 되어야 한다 —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5막 — 각자의 별자리를 그리다

— 좋은 답은 질문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질문은, 각자의 손으로 그은 선이 되어야 한다 —

다섯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칠판에는 별 세 개가 그려져 있었다.

레이튼이 지난 막의 끝에 남겨둔 별들이었다. 아직 선은 없었다. 그저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나는 알렉산드리나의 문장 가까이에, 하나는 요안나의 문장 가까이에, 하나는 호흐마이스터의 문장 가까이에 있었다.

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고, 분필 자국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하게 눈에 걸렸다.

푸리나는 그 별들을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펼치고 있었다.
미하일라는 창가에 서 있었다.
레이튼은 교탁 앞에 섰지만, 오늘은 분필을 들지 않았다.

그는 분필을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세 개였다.

“오늘은 제가 쓰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이 말했다.

교실은 조용했다.

“오늘은 여러분이 질문을 고르고, 그 질문 옆에 오늘 말할 수 있는 답을 쓰면 됩니다. 완성될 필요는 없습니다. 아름다울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가능하면 자기 목소리여야 합니다.”

요안나는 분필을 보았다.

“자기 목소리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쉽지는 않습니다.”

“역시 어렵네요.”

“대개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목소리는 보통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보다 조금 늦게 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칠판을 보았다.

늦게 오는 문장.

그녀는 그 말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빠른 문장은 많았다. 왕도, 증명, 가짜, 위대함, 결핍, 대제의 그림자. 그 문장들은 이미 길들여진 말처럼 그녀의 입가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튼이 말한 것은 그다음에 오는 것이었다. 조금 느리고, 조금 덜 멋지고, 그래서 더 들키기 쉬운 말.

호흐마이스터가 물었다.

“그 늦게 오는 문장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보장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레이튼은 즉시 대답했다.

“하지만 빠른 문장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지요.”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그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5막 시작. 조건: 학생 각자 질문 선택 후 오늘 가능한 답 작성. 완성·미문 요구 없음. 자기 목소리 우선.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진짜 이름 붙이는 시간이네.”

레이튼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름 붙이는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튼.”

“예.”

“오늘은 좀 이름 붙여도 돼.”

레이튼은 잠시 침묵하다가,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오늘은, 너무 빨리 닫히지 않는 이름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

알렉산드리나가 먼저 일어섰다.

그녀는 일부러 가장 먼저 일어난 것 같기도 했고, 더 늦으면 다시 빠른 문장들이 앞서 걸어갈까 봐 서둘렀던 것 같기도 했다. 발걸음은 단정했지만, 이전보다 조금 느렸다. 왕좌가 없는 교실에서,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 계속 배우는 중이었다.

그녀는 칠판 앞에 섰다.

자기 문장 옆에는 여러 질문이 남아 있었다.

버리면 길이 사라지고, 붙잡으면 증명만 남는가?

왕도는 결핍을 지우는 길인가?

지금의 걸음은 왕도인가, 도망인가?

알렉산드리나는 그 질문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저는 이 질문을 고르겠습니다.”

그녀가 손끝으로 가리킨 것은 세 번째 질문이었다.

지금의 걸음은 왕도인가, 도망인가?

그 질문이 교실에 드러나자, 푸리나는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그건 가장 아픈 질문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나는 피하지 않았다.

레이튼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이 질문이 제일 싫으니까요.”

“싫은 질문을 고른 이유가 있습니까?”

“계속 따라올 것 같아서요.”

그녀는 조금 웃었다.

“차라리 먼저 마주하는 편이 낫겠죠.”

알렉산드리나는 분필을 들었다. 손은 크게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안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칠판에 쓰기 전에 먼저 말했다.

“저는 아직 왕이라고 말하는 게 무서워요.”

교실은 조용해졌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지 않고, 자기 손에 든 분필을 보았다.

“차르라고 불리고, 군막에 서고, 사람들이 제게 결정을 묻습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아직도 누군가가 ‘너는 흉내일 뿐이다’라고 말할까 봐 무서워요. 그래서 더 곧게 서고, 더 강하게 말하고, 더 왕답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저는 백성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목소리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나를 의심했던 사람들, 나를 낮추어 부른 사람들, 나를 가짜라고 부른 사람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분필을 칠판에 댔다.

천천히 썼다.

나는 두려움에서 달아나기 위해 왕도를 걷지 않겠습니다.

그 문장은 짧았다.

너무 짧아서, 그녀는 잠시 불안한 듯 보였다. 그러다가 다시 분필을 댔다.

두려움은 남아도, 저는 백성 앞에 서겠습니다. 결핍을 지운 뒤가 아니라, 결핍을 알고도 걷는 길을 왕도라 부르겠습니다.

분필이 멈췄다.

알렉산드리나는 자기가 쓴 문장을 오래 보았다.

“너무 약해 보이나요?”

그 질문은 레이튼에게 한 것 같기도 했고, 교실 전체에 한 것 같기도 했다.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약해 보이지 않아요.”

알렉산드리나는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오히려…… 그 말을 하려면 강해야 할 것 같아요.”

알렉산드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칭찬을 들은 사람이라기보다, 예상하지 못한 길에서 손을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문장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살짝 굳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바로 이어 말했다.

“그러나 지휘관에게 필요한 문장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에서 도망치는지 모르는 지휘관은, 적이 아니라 그림자를 향해 군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알렉산드리나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고맙습니다.”

“평가입니다.”

“그럼 평가를 고맙게 받겠습니다.”

푸리나는 그 대답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 그 답은 오늘의 폐하의 답입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처음 문장.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새 문장.

나는 두려움에서 달아나기 위해 왕도를 걷지 않겠습니다. 두려움은 남아도, 저는 백성 앞에 서겠습니다. 결핍을 지운 뒤가 아니라, 결핍을 알고도 걷는 길을 왕도라 부르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아주 작게 덧붙였다.

“오늘은요.”

레이튼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충분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선택 질문 — 지금의 걸음은 왕도인가, 도망인가. 오늘의 답 — 두려움에서 달아나기 위해 왕도를 걷지 않겠다. 결핍을 알고도 백성 앞에 서는 길을 왕도라 부르겠다.

알렉산드리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걸음은 여전히 단정했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덜 쫓기고 있었다.


---

요안나는 두 번째로 일어섰다.

그녀는 칠판 앞에 선 뒤, 자기 문장 옆의 질문들을 보았다.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이가 아니고, 포함하면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하는가?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가?

아직 잡을 수 없는 손 앞에서도, 미래의 문을 닫지 않을 수 있는가?

요안나는 마지막 질문 앞에서 멈췄다.

그 질문을 보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교실 문을 보았다. 지금은 평범한 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문과 겹쳐 보였다.

궁의 문.

닫힌 문.

그러나 오늘은, 영원히 닫힌 문이라고 단정하지 않기로 한 문.

요안나는 분필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먼저 말해도 되나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미하일라 폐하.”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듣고 있다.”

요안나는 숨을 골랐다.

“저는 아직 폐하의 손을 잡을 수 없어요.”

그 말은 이미 한 번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분명했다. 미하일라도 그것을 알았다.

“알고 있다.”

“그리고 아직 용서했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알고 있다.”

“그런데…….”

요안나는 손 안의 분필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폐하가 없는 미래를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요안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이게 이상해요. 저는 폐하가 한 일을 잊고 싶지 않아요.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갇혀 있던 문, 사라진 사람들, 제 이름으로 움직이던 궁정의 조용함. 그런 걸 평화라는 말로 덮으면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 때문에 미래의 문까지 모두 잠가버리면, 제가 말한 평화는 복수가 될 것 같아요. 저는 복수를 평화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요.”

미하일라는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요안나의 말을 가볍게 받지 않겠다는 침묵이었다.

요안나는 칠판에 분필을 댔다.

천천히 썼다.

나는 아직 잡을 수 없는 손을 잡은 척하지 않겠습니다.

그 문장을 쓰자, 그녀의 손이 조금 떨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이 있는 미래의 문을 영원히 닫지도 않겠습니다.

요안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지막 줄을 덧붙였다.

나의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기억한 채 다음 문을 닫지 않는 말이어야 합니다.

그녀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문장은 길었다. 아이의 말처럼 솔직했고, 황제의 말처럼 무거웠으며, 아직 정치적 문서로 옮기기에는 너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요안나의 목소리였다.

푸리나는 말없이 그 문장을 보았다.

그레이는 기록하려다가 멈췄다. 문장이 너무 길었다. 그러나 줄일 수 없었다. 줄이면 요안나의 떨림이 사라질 것 같았다.

미하일라가 입을 열었다.

“요안나.”

요안나는 돌아보았다.

“그 문장은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네.”

“나를 지우지도 않는다.”

“네.”

“나를 쉽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요안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그 문장 앞에 설 수 있다.”

그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변명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서 있어주세요.”

미하일라의 눈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요안나는 다시 말했다.

“제가 아직 못 잡는 손 앞에서, 폐하가 가벼워지지 않고 서 있어주세요. 제가 평화라고 말하지 못하는 날에도. 제가 기억한다고 말하는 날에도.”

미하일라는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럼 오늘은…… 그걸로 괜찮아요.”

레이튼은 그 말을 들으며 칠판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

그 말은 여전히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에, 기억과 문과 아직 잡지 못한 손이 생겼다. 평화는 더 쉬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워졌다. 그래서 더 요안나의 것이 되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 그 답은 오늘의 폐하의 답입니까?”

요안나는 칠판을 보았다.

“네.”

그리고 조금 뒤, 덧붙였다.

“아직 슬프지만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슬픈 답도 자기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요안나: 선택 질문 — 아직 잡을 수 없는 손 앞에서도, 미래의 문을 닫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의 답 — 잡을 수 없는 손을 잡은 척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손이 있는 미래의 문을 영원히 닫지도 않겠다.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기억한 채 다음 문을 닫지 않는 말.

요안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교실 문은 여전히 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덜 감옥처럼 보였다.


---

호흐마이스터는 마지막까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기 질문들을 보고 있었다.

책임과 자기판결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그 명령은 지키기 위한 것인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가?

죄를 피하지 않는 것과 죄를 찾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호흐마이스터는 일어섰다.

그녀는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평소처럼 예의 있고 정확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가장자리로 돌지 않았다. 가장 짧은 길로 칠판 앞에 섰다.

“저는 두 번째 질문을 고르겠습니다.”

레이튼은 그 질문을 보았다.

그 명령은 지키기 위한 것인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그래서 선택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필요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분필을 들었다. 그녀의 손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정은 조금 전까지와 달랐다. 완벽한 통제라기보다, 떨림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손을 고정하는 안정이었다.

“저는 죄를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먼저 말했다.

“제가 한 선택은 제게 돌아옵니다. 제가 명령한 일의 죄를 부하에게 넘기지 않겠습니다. 란트마이스터의 시야를 빌려 본 전선도, 서명한 명령도, 침묵으로 승인한 일도 제 이름 아래 모입니다.”

그녀는 칠판의 첫 문장을 보았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이 문장은 아직 필요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흐마이스터는 분필을 댔다.

나는 죄를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 아래에 썼다.

그러나 죄를 짊어진다는 이유로, 더 많은 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분필 소리가 멈췄다.

호흐마이스터의 손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 문장은 그녀에게 몹시 불편한 듯했다. 너무 부드러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확해서 불편한 문장이었다.

그녀는 다시 썼다.

명령은 기사단을 지키기 위해 내려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내려서는 안 됩니다.

교실은 조용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

“불편합니다.”

레이튼이 물었다.

“어떤 점이 불편하십니까?”

“이 문장은 저를 감시합니다.”

“그렇군요.”

“제가 앞으로 내릴 명령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제 죄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 계속 묻게 만들 것입니다.”

“그것은 나쁜 일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비효율적입니다.”

푸리나는 조금 웃을 뻔했다.

호흐마이스터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필요한 비효율입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은 표현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저는 아직 구원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직 안식을 바라겠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또한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아주 낮게 말했다.

“제가 사랑하는 땅을 지키는 일과, 제 영혼을 일부러 더럽히는 일을 혼동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은 칠판에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교실 안에 분명히 남았다.

미하일라가 조용히 말했다.

“그 문장도 쓰는 것이 좋다.”

호흐마이스터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폐하의 판단입니까?”

“그렇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분필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을 썼다.

사랑하는 땅을 지키는 일과, 나를 일부러 더럽히는 일을 혼동하지 않겠습니다.

분필이 멈췄다.

호흐마이스터는 한동안 그 문장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누구에게 한 인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교실에게, 질문에게, 혹은 아직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기사에게 한 인사일 수도 있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호흐마이스터. 그 답은 오늘의 당신의 답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생각했다.

“예.”

그리고 덧붙였다.

“검토 기한은 내일까지로 하겠습니다.”

푸리나가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요안나도 웃었다.

알렉산드리나도 작게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영원한 보류는 답이 아니라고 하셨으므로.”

레이튼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훌륭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선택 질문 — 그 명령은 지키기 위한 것인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가. 오늘의 답 — 죄를 피하지 않되, 더 많은 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명령은 기사단을 지키기 위해 내릴 것. 자기판결 증명을 위해 내리지 않을 것. 사랑하는 땅을 지키는 일과 자신을 일부러 더럽히는 일을 혼동하지 않을 것. 검토 기한: 내일.


---

세 사람의 답이 칠판에 놓였다.

완성된 답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나의 답은 아직 왕도 앞에서 떨렸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도망치는 걸음을 왕도라 부르지 않으려 했다.

요안나의 답은 아직 궁의 문 앞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나 그 문을 영원히 잠그는 것을 평화라 부르지도 않으려 했다.

호흐마이스터의 답은 아직 죄와 책임 사이에서 차가웠다. 그러나 자기판결을 명령으로 위장하는 일을 경계하려 했다.

레이튼은 그 답들을 보았다.

그는 만족스럽다고 말하지 않았다. 성공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사람의 답 앞에서 그런 말은 너무 빠르다.

대신 그는 말했다.

“이제 선을 그어도 되겠습니다.”

그는 분필을 들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가 물었다.

“선이요?”

레이튼은 칠판 위의 세 별을 가리켰다.

“이 교실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요안나가 대답했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세 사람을 보았다.

“별은 혼자 있어도 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찾으려면 언젠가 선을 그어야 합니다. 다만 그 선은 제가 그릴 것이 아닙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각자 긋는 거네.”

“예.”

레이튼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의 답과, 처음의 답 사이에 선을 그어주십시오. 지우는 선이 아니라, 이어보는 선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레이튼이 별다른 주문을 외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이 칠판을 향해 뻗지도 않았고, 찬란한 빛이 터지지도 않았다. 교실 바닥에 마법진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레이튼이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고,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리고 교실의 천장이 조금 높아졌다.

정확히는, 높아진 것처럼 보였다.

낡은 목재 천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칠판도, 책상도, 창문도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그 위로 다른 공간이 아주 얇게 겹쳐졌다. 끝없이 오래된 서재. 천장에는 별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어떤 별도 아직 선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책장들은 멀리까지 이어졌고, 책들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페이지 사이로 질문들이 떠다녔다. 아직 답이 되지 못한 문장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들. 아직 누구의 결론도 되지 않은 별들.

푸리나는 그것을 보았다.

“레이튼……?”

레이튼은 눈을 떴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조금만, 빌리겠습니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교실에게일 수도 있고, 자신의 Inn에게일 수도 있었다. 혹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들에게.

교실 위에 겹쳐진 서재가 조용히 숨을 쉬었다.

《여관:문답의 서재》.

그 이름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곳은 레이튼의 내면과 닮아 있었다. 답의 창고가 아니라 질문의 서재. 결론의 왕좌가 아니라 미지의 책상. 별자리를 완성하는 천문대가 아니라, 별들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채 머무는 천장.

칠판 위의 분필 자국들이 희미하게 떨렸다.

처음의 답들이 별처럼 떠올랐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옆에 알렉산드리나가 쓴 오늘의 답이 별빛처럼 번졌다.

나는 두려움에서 달아나기 위해 왕도를 걷지 않겠습니다. 두려움은 남아도, 저는 백성 앞에 서겠습니다. 결핍을 지운 뒤가 아니라, 결핍을 알고도 걷는 길을 왕도라 부르겠습니다.

레이튼은 말했다.

“제가 선을 긋지 않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분필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떨림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 문장과 오늘의 답 사이에 선이 그어졌다.

선은 곧지 않았다. 중간에 한 번 흔들렸고, 아주 잠깐 끊어질 듯 얇아졌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았다. 그 선은 “가짜”라는 판결에서 “결핍을 알고도 걷는 왕도”로 이어졌다. 처음의 문장을 지우지 않고, 새 문장으로 달아나지도 않고, 그 사이의 길을 자기 손으로 이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직 곧지는 않네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왕도는 반드시 직선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다음, 요안나가 분필을 들었다.

칠판 위에서 그녀의 처음 답이 빛났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옆에 오늘의 답이 조용히 떠올랐다.

나는 아직 잡을 수 없는 손을 잡은 척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손이 있는 미래의 문을 영원히 닫지도 않겠습니다. 나의 평화는 기억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기억한 채 다음 문을 닫지 않는 말이어야 합니다.

요안나는 선을 그으려다가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교실 문으로 향했다. 닫힌 궁문과 겹쳤던 그 문. 미하일라가 서 있는 창가. 아직 잡을 수 없는 손.

요안나는 곧장 선을 긋지 않았다.

그 선은 먼저 문 쪽으로 조금 돌아갔다. 마치 칠판 위에 문이 있는 것처럼, 기억을 피해가지 않고 한 번 감싸듯 돌아간 뒤, 오늘의 답으로 이어졌다.

푸리나는 그 선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선은 멀었다. 돌아갔다. 조금 떨렸다. 그러나 그것이 요안나의 평화였다. 모든 이에게 곧장 닿는 평화가 아니라, 닫힌 문 앞에서 멈추고, 기억을 지우지 않고, 그래도 미래를 완전히 닫지 않는 평화.

요안나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돌아가버렸어요.”

미하일라가 조용히 말했다.

“피하지 않은 것이다.”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하다.”

요안나는 작게 대답했다.

“네. 오늘은요.”

마지막으로 호흐마이스터가 분필을 들었다.

칠판 위에서 그녀의 처음 답이 떠올랐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옆에 오늘의 답이 있었다.

나는 죄를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죄를 짊어진다는 이유로, 더 많은 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명령은 기사단을 지키기 위해 내려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내려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땅을 지키는 일과, 나를 일부러 더럽히는 일을 혼동하지 않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선은 처음에는 지나치게 곧았다.

너무 정확하고, 너무 효율적이고, 너무 명령서 같았다.

그러다 중간에서 아주 작게 꺾였다.

그 꺾임은 실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바로잡으려면 바로잡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흔들림이었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는 그 선을 고치지 않았다.

그녀는 선이 꺾인 자리를 보았다. 책임과 자기판결이 갈라지는 작은 각도. 사랑하는 땅을 지키는 일과, 자신을 일부러 더럽히는 일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불편한 굴절.

“수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금 뒤 덧붙였다.

“검토 기한은 내일까지지만, 이 꺾임은 보존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는 기록하려다 잠시 멈추고, 아주 진지하게 적었다.

호흐마이스터: 선의 꺾임 보존. 검토 기한과 별개로 유지.

레이튼의 [문답의 서재]는 여전히 희미하게 겹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세 선을 하나의 별자리로 묶지 않았다. 아무 이름도 내려오지 않았다. 천장 위의 별들은 여전히 별자리가 아니었다. 책장 속 책들은 여전히 결말을 닫지 않았다. 떠다니는 질문들은 세 사람의 답 위에 조용히 머물 뿐이었다.

레이튼은 칠판을 보았다.

세 개의 선이 생겼다.

별자리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전보다 조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레이튼은 낮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덧붙였다.

“오늘은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푸리나가 물었다.

“이름 붙이지 않아도 돼?”

“예.”

레이튼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별자리는 너무 빨리 이름 붙이면, 하늘을 닫아버리니까요. 오늘은 다만, 길을 잃지 않을 만큼의 선이면 충분합니다.”

그 말과 함께, 겹쳐져 있던 오래된 서재가 조금씩 옅어졌다.

책장들이 사라지고, 끝나지 않은 책들이 사라지고, 천장의 별들이 교실의 낡은 나무 천장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하지만 칠판의 세 선은 남았다.

분필로 그은 선.

그러나 조금 전까지 별빛이었던 선.


---

세 사람의 답과 선이 칠판에 놓였다.

완성된 답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나의 답은 아직 왕도 앞에서 떨렸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도망치는 걸음을 왕도라 부르지 않으려 했다.

요안나의 답은 아직 궁의 문 앞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나 그 문을 영원히 잠그는 것을 평화라 부르지도 않으려 했다.

호흐마이스터의 답은 아직 죄와 책임 사이에서 차가웠다. 그러나 자기판결을 명령으로 위장하는 일을 경계하려 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학생 전원, 최초 답과 오늘의 답 사이에 선을 그림. 선은 삭제가 아니라 연결. 별자리 미완성. 항로 일부 확보. 레이튼의 [문답의 서재]가 일시적으로 교실과 겹침. 별들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음.

미하일라는 조용히 말했다.

“이 정도라면, 전장 밖으로 가져갈 수 있겠군.”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자기 선을 보았다.

“이 선이 내일도 맞을지는 모르겠어요.”

레이튼은 말했다.

“내일 다시 보면 됩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흐려지면요?”

“다시 그으면 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잘못 그었으면?”

레이튼은 웃었다.

“그때는 좋은 지우개가 필요하겠지요.”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그건 내가 준비할게.”

그레이가 덧붙였다.

“기록상 수정 이력도 남기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점은 안심이 됩니다.”

교실에 작게 웃음이 번졌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했다.


---

수업은 끝나가고 있었다.

레이튼은 칠판 앞에 섰다. 그의 뒤에는 세 개의 처음 답, 세 개의 질문, 세 개의 오늘의 답, 그리고 그것들을 잇는 세 개의 선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여러분은 오늘 답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조용히 들었다.

“그러나 처음 답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한 일은 삭제가 아니라 연결입니다. 자신을 세운 말과, 지금 자신을 흔드는 질문과, 오늘 말할 수 있는 답 사이에 선을 그은 것입니다.”

그는 아주 조금 웃었다.

“아직 별자리는 아닙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하지만 예쁘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이름 붙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이름은 언젠가 붙여야 한다.”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채로 두겠습니다. 너무 빨리 닫히지 않도록.”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칠판을 보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자기 선을 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자기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그레이는 기록을 마쳤다.

푸리나는 교실의 문을 보았다. 이제 정말 막을 내릴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후일담이 남아 있었다. 모든 좋은 수업은 끝난 뒤에 더 오래 따라온다. 복도에서, 찻잔 옆에서, 명령서 앞에서, 닫힌 문 앞에서.

레이튼은 마지막으로 칠판 아래에 작은 문장을 썼다.

오늘의 답은 내일의 질문이 되어도 좋다.

분필 소리가 멈췄다.

그 문장 아래, 아주 희미하게 한 줄이 더 떠올랐다.

그것은 레이튼이 쓴 것이 아니었다. 혹은, 레이튼의 안쪽 어딘가에서 오래전부터 쓰여 있던 문장이 잠시 칠판 위에 비친 것인지도 몰랐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 문장을 보고 아주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후일담 — 빈 칠판의 물음표

그 아래,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자리처럼 한 줄이 남았다.

— 답은 완성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물을 수 있을 만큼 살아 있기 위해 쓰인다 —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후일담 — 빈 칠판의 물음표

— 답은 완성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물을 수 있을 만큼 살아 있기 위해 쓰인다 —

수업이 끝난 뒤, 교실은 생각보다 오래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막을 내렸고, 조명은 낮아졌고, 학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리나는 다시 내전의 지도 앞으로, 요안나는 궁의 문과 사람들의 손이 함께 놓인 자리로, 호흐마이스터는 란트마이스터들의 시야와 명령서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미하일라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칠판을 한 번 보고,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갔다.

그러나 교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푸리나의 극장이 만든 무대라면 막이 내리면 함께 접혀야 했다. 칠판도, 책상도, 창가의 빛도, 교탁 옆의 찻잔도 다음 극을 위해 사라져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교실은 잠시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아직 자기 답을 다 챙기지 못한 것처럼.

칠판에는 많은 것이 남아 있었다.

처음의 답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옆의 질문들.

지금의 걸음은 왕도인가, 도망인가?

아직 잡을 수 없는 손 앞에서도, 미래의 문을 닫지 않을 수 있는가?

그 명령은 지키기 위한 것인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세 사람이 남긴 오늘의 답들.

두려움에서 달아나기 위해 왕도를 걷지 않겠다는 문장.

잡을 수 없는 손을 잡은 척하지 않되, 그 손이 있는 미래의 문을 영원히 닫지도 않겠다는 문장.

죄를 피하지 않되, 더 많은 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문장.

그 문장들은 서로 닮지 않았다. 문장 길이도, 무게도, 떨림도 달랐다. 알렉산드리나의 문장은 칼집에 손을 얹고도 한 걸음 멈춘 사람 같았고, 요안나의 문장은 닫힌 문 앞에서 숨을 고르는 작은 황제 같았으며, 호흐마이스터의 문장은 서명 직전의 명령서 위에 놓인 차가운 손 같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세 개의 선이 있었다.

곧지 않은 선.
돌아간 선.
작게 꺾인 선.

별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별들이 완전히 흩어져 있지도 않았다.

푸리나는 빈 교실에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문가에서 잠시 멈췄다. 수업 중에는 이곳이 꽤 북적였는데, 비어 있으니 갑자기 작아 보였다. 혹은 반대로, 더 커 보였다. 사람이 떠난 교실은 이상하다. 말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그곳에서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더 잘 들리는 법이다.

그레이는 이미 칠판 앞에 있었다.

그녀는 지우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우지 않고 있었다.

푸리나는 물었다.

“왜 안 지워?”

그레이는 지우개를 든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무대가 끝났고, 기록은 남겼으며, 다음 장면을 위해 칠판은 비워야 한다. 그런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조금 망설여져서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가?”

“예.”

그레이는 칠판을 보았다. 알렉산드리나의 곧지 않은 선, 요안나의 돌아간 선, 호흐마이스터의 작게 꺾인 선. 모두 분필 자국일 뿐인데, 이상하게 단순한 분필 자국처럼 보이지 않았다.

“기록은 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칠판까지 바로 지워버리면, 조금 아까울 것 같았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레이답지 않은데.”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조금 뒤, 아주 작게 덧붙였다.

“하지만 오늘 수업은…… 조금 그럴 만했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여전히 지우개를 들고 있었다. 자세도 단정했고, 표정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고 조심스러운 망설임이 오히려 더 선명했다. 그녀는 감상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가 멈춘 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 같았다.

푸리나는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분필 선들은 정말로 평범했다. 레이튼의 [문답의 서재]가 겹쳐졌을 때 보였던 별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끝없는 서재도, 이름 붙지 않은 별들도, 아직 닫히지 않은 책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푸리나는 그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끼지 않았다.

분필은 분필이었고, 선은 선이었다.

그러나 한 번 별이었던 것은, 다시 분필이 되어도 어딘가에 하늘을 남긴다.

푸리나는 칠판 아래의 문장을 읽었다.

오늘의 답은 내일의 질문이 되어도 좋다.

그리고 그 아래, 희미하게 남은 문장.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가만히 그 문장을 보았다.

“레이튼답네.”

그레이가 말했다.

“예.”

“답을 줬으면서도 안 줬어.”

“그것이 레이튼 경의 방식으로 보입니다.”

“얄밉지.”

그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은요.”

그레이가 그렇게 말해서, 푸리나는 다시 웃었다.

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

레이튼이 들어왔다.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그 피로는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 어려운 책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지 않은 채 잠시 창밖을 본 사람의 피로였다.

“아직 남아 있었군요.”

푸리나가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다시 올 줄 알았어.”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요?”

“응. 자기 별들을 두고 그냥 갈 사람은 아니잖아.”

“별은 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푸리나는 칠판을 가리켰다.

“그래서, 선생님. 수업은 성공이었어?”

레이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칠판을 보았다. 알렉산드리나의 선, 요안나의 선, 호흐마이스터의 선. 그리고 그 선들이 아직 별자리가 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모습.

“아직 모르겠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도?”

“예.”

레이튼은 칠판 앞에 섰다.

“성공이라는 말은 조금 빠릅니다. 오늘 쓴 답들이 내일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 폐하는 다시 증명하려 달릴 수도 있고, 요안나 폐하는 평화라는 말 앞에서 다시 목이 막힐 수도 있으며, 호흐마이스터는 명령서 앞에서 다시 자기판결과 책임을 혼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실패야?”

“그것도 빠릅니다.”

레이튼은 웃었다.

“오늘은 다만, 그들이 자기 답 옆에 서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

“교실 안에서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교실 밖에서는?”

“그건 다음 질문입니다.”

푸리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 끝까지 레이튼답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반쯤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레이는 지우개를 든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칠판은…… 지워도 괜찮을까요?”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평소처럼 담담하게 서 있었지만, 질문의 끝이 아주 조금 낮았다. 명령을 기다리는 말투가 아니라, 정말로 허락을 구하는 말투였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워도 괜찮습니다.”

푸리나가 놀라 그를 보았다.

“지워도 된다고?”

“예.”

레이튼은 칠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답을 보존하는 것보다, 다시 쓸 수 있는 칠판을 남기는 편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칠판을 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남겨도 될까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푸리나가 물었다.

“뭘 남기게?”

레이튼은 칠판 위쪽의 이름을 보았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그리고 중앙의 물음표 하나.

“이름과 물음표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정도라면…… 다시 쓸 수도 있겠습니다.”

레이튼은 지우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 그레이를 보았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지우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제가요?”

“예.”

그레이는 칠판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두 사람은 칠판을 지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나의 답이 지워졌다. 그러나 그 답이 없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이미 자기 손으로 썼으니까.
요안나의 답이 지워졌다. 그러나 닫힌 문 앞에서 했던 말은 교실 바닥 어딘가에 남은 것 같았다.
호흐마이스터의 답이 지워졌다. 그러나 그 작은 꺾임은, 지워진 분필 가루 속에서도 이상하게 또렷했다.

그레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지웠다.

평소라면 더 빠르고 깔끔하게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장 하나하나가 지워질 때마다 잠시 멈췄다. 그레이는 눈에 보이는 기록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처음의 세 답도 지웠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지워졌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지워졌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지워졌다.

칠판은 점점 비어갔다.

마지막으로 선들이 지워졌다.

곧지 않은 선. 돌아간 선. 꺾인 선.

그 선들이 사라지자, 칠판은 거의 빈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는 남았다.

위쪽의 이름.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그리고 중앙의 물음표.

?

푸리나는 그 칠판을 보았다.

“결국 물음표만 남겼네.”

“예.”

레이튼이 말했다.

“너무 당신답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네.”

레이튼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빈 칠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답이 다 지워졌는데, 이상하게 사라진 느낌은 아니야. 오히려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아.”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라면, 무엇을 지웠고 무엇을 남겼는지 항목별로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적었다.

칠판은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 한 줄을 더 적었다.

하지만 질문은 남았습니다.

그레이는 그 두 줄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한 줄을 덧붙였다.

그리고 아마, 오늘의 선들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푸리나는 기록판을 들여다보고 웃었다.

“좋네.”

그레이는 조금 작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응. 오늘은 그게 더 그레이다워.”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조금, 안도한 듯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

학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리나는 군막으로 돌아가, 전황도를 보았다. 지도 위의 선들은 여전히 차가웠고, 사절들의 말은 여전히 반듯했다. 왕도는 여전히 무거웠다. 그녀는 자기가 쓴 문장을 기억했다.

나는 두려움에서 달아나기 위해 왕도를 걷지 않겠습니다.

그 문장은 군막에 걸어두기에는 너무 사적이었고, 공식 선언문으로 쓰기에는 너무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 문장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전황도 옆, 아무도 보지 않는 작은 여백에 점 하나를 찍었다.

별이라고 부르기에는 작은 점.

그러나 알렉산드리나는 그 점을 보며 한 번 숨을 골랐다.

“오늘은 여기서 다시 보죠.”

누구에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였을 수도 있고, 아직 왕도를 걷는 법을 배우는 작은 차르에게였을 수도 있다.

요안나는 궁의 복도를 걸었다.

문들은 여전히 문이었다. 어떤 문은 열려 있었고, 어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녀는 닫힌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 문은 그때의 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닫힌 문은 조금씩 닮아 있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억지로 열지도 않았다.

다만 문 앞에 서서 작게 말했다.

“아직은 못 해요.”

그리고 조금 뒤, 덧붙였다.

“하지만 영원히 닫는다고도 말하지 않을래요.”

그것은 칙령이 아니었다. 화해도 아니었다. 그러나 요안나는 그 문장으로 그날의 복도를 지나갈 수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란트마이스터의 보고가 들어와 있었다. 명령서도 있었다. 결정을 미룰 수 없는 일들이 여전히 있었다. 그녀는 펜을 들었다. 펜 끝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정 안에 작은 꺾임이 하나 생겨 있었다.

그녀는 명령서 한 줄을 오래 보았다.

징벌.

그 단어는 편했다. 빠르고, 명확하고, 책임을 자기 쪽으로 모으기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멈췄다.

“이것은 지키기 위한 명령입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아니면 제 판결을 유지하기 위한 문장입니까.”

잠시 뒤, 그녀는 첫 단어를 고쳤다.

징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명령서는 조금 더 정확해졌다. 더럽지 않은 명령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자신을 더럽히기 위해 더 어두워진 명령은 아니게 되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문서 여백에 아주 작게 적었다.

검토 기한: 내일.

그리고 정말로 내일 다시 보기로 했다.


---

빈 교실에는 레이튼만 남았다.

푸리나와 그레이도 나간 뒤였다. 창가의 빛은 낮아졌고, 칠판에는 이름과 물음표만 남아 있었다.

레이튼은 교탁 옆에 앉아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이미 향을 조금 잃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식은 차에는 식은 차의 역할이 있다. 뜨거울 때는 몰랐던 떫은맛을 남기고, 오래 놓인 시간의 무게를 알려준다.

레이튼은 칠판을 보았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

그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도 끝까지 이름 붙지 않았군요.”

그 말에는 안도가 있었다.

그러나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이름 붙지 않은 채 남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영원히 이름 붙지 않을 수는 없다. 언젠가 알렉산드리나는 왕도에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고, 요안나는 평화의 문을 열지 닫을지 선택해야 할 것이며, 호흐마이스터는 명령서에 서명해야 할 것이다.

그때 레이튼은 그들의 곁에 언제나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교실은 조금 쓸쓸해졌다.

“선생이라는 것도, 쉬운 퍼즐은 아니군요.”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칠판의 물음표가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레이튼은 눈을 깜박였다.

그것은 신술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았다. 기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다만 [문답의 서재] 깊은 곳에서, 아직 끝이 쓰이지 않은 책 한 권이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같았다.

칠판 아래, 지워진 분필 가루 사이에서 아주 작은 문장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선생은 어디까지 동행하는가?

레이튼은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아, 이런.”

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지막 질문은 제 몫이군요.”

교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이 이 교실의 방식이었다.

레이튼은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갔다. 물음표 아래에 아주 작게, 아무도 보지 못할 만큼 작은 글씨로 적었다.

내일 다시 묻겠습니다.

그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칠판은 다시 조용해졌다.

교실은 이제 정말 사라지기 시작했다. 책상들이 옅어지고, 창가의 빛이 접히고, 칠판의 이름도 천천히 무대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물음표만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막이 완전히 내려가기 직전, 레이튼은 그 물음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밤 되십시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들.”

그리고 교실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분필 가루처럼 희미한 질문 하나였다.

답은 완성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물을 수 있을 만큼 살아 있기 위해 쓰인다.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숨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

### 프롤로그 — 오래된 방의 냄새

방은 네모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네모였을 것이다. 네 벽이 있고, 천장이 있고, 바닥이 있고, 창이 하나쯤 있는, 사람이 잠들고 깨어나고 차를 마시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평범한 방. 그러나 창이 하나 늘 때마다 벽도 하나 늘었다. 벽이 하나 늘 때마다 방은 조금 더 넓어졌고, 이상하게도 하융이 앉을 자리는 조금 더 좁아졌다. 방은 넓어지는데 사람은 놓일 곳을 잃었다. 넓다는 것은 때로 감옥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융은 그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앉아 있었다기보다는 놓여 있었다.

놓인 사람은 사람이 아니오. 물건이오. 물건은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융은 숨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아직 숨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창밖의 세계들이 너무 많아질 때마다, 그는 자주 그 사실을 의심했다.

제1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성 블레즈 기사단이 적의 옆구리를 찢었다. 죠니는 말 위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고, 기병들의 창끝은 어둠 속의 비처럼 기울었다. 그 세계에서는 피난민 수레가 늦지 않았다.

제2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같은 수레가 진창에 걸렸다. 말이 넘어지고, 아이가 울고, 누군가가 바퀴를 밀었다. 죠니의 구령은 한 박자 늦었고, 그 한 박자는 칼날 하나만큼 길었다.

제3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수레가 없었다. 피난민도 없었다. 길은 조용했고, 너무 조용한 길은 대개 이미 늦은 길이었다.

제4의 창은 열리기 전에 닫혀 있었다.

닫힌 창 너머에서 죽은 사람이 하융을 보았다.

제5의 창에서는 하융 자신이 서 있었다. 그는 지금보다 더 정확했다. 더 침착했고, 더 먼저 말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살았다. 그러나 그 대신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죽었다.

하융은 번호를 붙이면 덜 무서울 줄 알았다. 번호란 질서의 흉내니까. 그러나 번호는 질서가 아니었다. 공포가 줄을 선 것뿐이었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푸리나가 낮에 두고 간 차였다. 그녀는 “식기 전에 마셔!”라고 말했고, 곧바로 다른 방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자주 그랬다. 문장을 던지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그 문장이 정말 무대 장치였다고 주장했다. 하융은 그때 웃으며 찻잔을 받아두었다.

지금 차는 식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미지근했다. 현실의 온도는 대개 그렇게 애매했다. 창밖의 세계들은 너무 선명했다. 죽음은 선명했고, 가능성은 선명했고, 실패와 성공은 칼로 그은 선처럼 명료했다. 그런데 손 안의 찻잔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결정되지 않은 온도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아직 이름 붙이기 곤란한 오늘의 온도.

하융은 그것을 오래 붙잡았다.

현실은 때로 이렇게 미지근해서, 오히려 믿기 어렵다.

“오래된 방이 아직 닫히지 않았구려.”

그는 낮게 말했다.

말은 방 안에 떨어졌다. 그러나 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원래 대답하지 않는다. 방은 사람을 담을 뿐이다. 다만 창이 너무 많아진 방은 사람을 담지 못하고, 사람을 진열한다. 그 사실을 하융은 알고 있었다.

한때 그는 정말로 진열되어 있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처음 그 말을 떠올렸을 때, 하융은 웃었었다. 천재라는 말도 우스웠고, 박제라는 말도 우스웠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웃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방 안에 앉혔다. 그에게 보라 했다. 더 보라 했다. 어느 길이 무너지는지, 어느 사람이 배신하는지, 어느 전선이 살고 어느 성벽이 죽는지. 가능성은 귀중했다. 너무 귀중했다. 그러므로 하융은 점점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사람은 귀중하면 귀중할수록 더 조심히 다뤄진다고 누가 말했던가.

귀중한 것은 종종 쓰인다.
쓰이는 것은 닳는다.
닳은 사람은 스스로를 물건이라 부르기 쉽다.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창 안의 나는 방 안의 나를 보았다. 방 안의 나는 창 안의 나를 보았다. 그러나 서로의 체온은 알 수 없었다. 거울이라면 깨뜨리면 되었겠으나, 창은 깨뜨리면 바람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언제나 다른 세계의 냄새를 데려온다.

어느 창에서는 그가 고려로 돌아갔다. 어느 창에서는 돌아가지 못했다. 어느 창에서는 푸리나를 만나지 않았다. 어느 창에서는 죠니가 그를 형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느 창에서는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죽었다. 어느 창에서는 그레이의 장부가 불탔다. 어느 창에서는 장부에 적을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생이, 이미 끝난 생들의 기록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융은 자신의 종생기를 너무 많이 읽은 사람처럼 피곤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소.”

그는 자기 손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나의 죽음은 이미 너무 많구려.”

창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친절하지 않다. 가능성은 보여줄 뿐이다. 보여준 뒤 책임지지 않는다. 계시라 불리면 계시가 되고, 저주라 불리면 저주가 되며, 전술 자원이라 불리면 장부의 한 칸이 된다. 그러나 하융은 이제 알고 있었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오.
이것은 계시도 아니오.
이것은 다만 창이오.

창은 열릴 뿐, 명령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명령으로 만들 때, 창은 비로소 사람을 해친다.

하융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배웠다. 푸리나는 창을 창이라고 불러주었다. 레이튼은 그 창에 질문을 붙여주었다. 그레이는 창밖의 비극을 장부와 점검표로 낮추어, 산 자가 같은 이유로 죽지 않도록 만들었다. 죠니는 창밖을 보고도 대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는 밥부터 먹으라고 했다.

하융은 그들 곁에서 이 세계를 선택했다.

이 세계가 최선이라서가 아니었다.
최선이라는 말은 창밖에 너무 많이 있었다.
최선은 서로를 물어뜯었다.
어느 최선은 누군가의 죽음을 포함했고, 어느 최선은 다른 사람의 부재를 요구했다.

하융은 최선을 믿지 않았다.

다만 오늘을 믿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과 끝났다는 것은 다르다. 상처는 배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방은 잠긴 뒤에도 냄새를 남긴다. 전선 보고서와 피난민 명단과 죽은 가능성의 잔향이 한밤에 겹치면, 그 방은 다시 문을 연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떠돌았다. 죽은 내가 천千이요, 살아남은 내가 만萬이었다. 어느 나는 칼을 들었고, 어느 나는 창틀에 걸려 말라갔고, 어느 나는 웃었으며, 어느 나는 웃는 법을 잊었다. 허나 금일今日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방 안인가. 저 창밖인가. 아니면 또다시 박제되어, 날개를 가지고도 날지 못하는 새처럼 놓여 있는가.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나.
둘.
셋.

“아니오.”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했다.

“그리로 돌아가지는 않겠소.”

그때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문이 예의를 차려 열렸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문은 푸리나 헤툼의 손에 의해 하나의 효과음처럼 밀려났다. 복도의 등불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빛 앞에 푸리나가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망토를 대충 걸쳤고, 한 손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튼 고리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자다가 나온 것 같기도 했고, 애초에 자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푸리나에게는 그런 경계가 자주 애매했다.

그녀는 방 안을 보았다.

창을 보았다.
창밖의 수많은 세계를 보았다.
하융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뜻밖에 조심스러웠다. 푸리나는 소리로 무대를 여는 사람이었지만, 배우가 아직 자기 대사를 찾지 못했을 때는 기다릴 줄 알았다. 하융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조금 고마웠다.

그러나 푸리나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아.”

하융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무엇이 좋다는 말이오?”

“오늘의 극이 정해졌어.”

하융은 주변의 창들을 보았다.

“전하. 지금 이 광경을 보고도 극을 떠올리는 것이오?”

“응.”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이걸 그냥 두면 또 네가 혼자 창문들이랑 싸울 것 같거든. 그러면 안 돼. 창문이 많으면 관객을 불러야지.”

하융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창문이 많으면 관객을 불러야 한다. 이 세계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창문을 막으려 한다. 혹은 창밖을 더 보라 한다. 혹은 어느 창이 가장 유용한지 묻는다. 그런데 푸리나는 관객을 부르겠다고 했다.

그 무례함은 구원과 닮아 있었다.

하융은 낮게 웃었다.

“전하의 극장은 참으로 무례하오. 남의 오래된 악몽에도 표를 팔 생각부터 하는구려.”

“표는 안 팔아.”

“다행이오.”

“대신 감상문을 받을거야.”

“그편이 더 비싸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방 안을 조금 흔들었다. 창들은 여전히 있었다.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푸리나의 웃음은 그 창들을 조금 덜 신성하게 만들었다. 덜 무섭게 만들었다. 무대 장치처럼 만들었다. 커튼을 달 수 있고, 순서를 바꿀 수 있고, 관객이 야유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하융은 그것이 좋았다.

창은 창이어야 한다.
가능성은 가능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 가능성은 야유받아도 된다.

푸리나는 방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커튼 고리를 딸랑 흔들며 창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녀의 시선에는 두려움보다 계산이 많았다. 어디에 조명을 두고, 어디에 막을 치고, 어디서 배우가 들어오면 좋은지 생각하는 눈이었다.

“하융.”

“듣고 있소.”

“오늘은 창을 닫는 날이 아니야.”

“그럼 무엇을 하는 날이오?”

푸리나는 고리를 들어 보였다.

“창밖을 보고, 이쪽에서 뭘 해볼지 정하는 날.”

그 말은 너무 단순했다. 너무 단순해서 하융은 잠시 숨을 잊었다. 창밖을 보고 이쪽에서 뭘 해볼지 정한다. 가능성을 심판으로 삼지 않고, 계시로 삼지 않고, 저주로 삼지 않고, 그저 오늘의 작은 일감으로 가져온다.

어쩌면 오래전 그가 원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더 즐거운 세계를 보면 저럴 수도 있겠구려, 한번 해볼 만하오, 하고 말하는 것. 더 슬픈 세계를 보면 저럴 수도 있겠소, 그러니 조심해야겠지, 하고 적는 것. 창밖의 세계가 방 안을 삼키지 않게 하는 것. 창밖의 세계를 보며, 방 안의 사람들과 같은 숨을 쉬는 것.

하융은 말했다.

“전하.”

“응.”

“나는 이미 이 세계를 골랐소.”

“알아.”

푸리나는 바로 답했다.

그 단순한 대답이 이상하게도 하융을 잠시 멈추게 했다. 푸리나는 그가 이미 골랐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열린 창들이 그 선택을 취소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하융은 다시 구원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곁에 있는 사람이고, 오늘 조금 흔들린 사람일 뿐이었다.

하융은 고개를 낮추었다.

“허나 선택選擇이란 한 번의 도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구려.”

그의 말 속에 고향의 글자가 배어 나왔다. 감정이 새어 나올 때면 그랬다. 평소의 하오체 아래에 숨어 있던 한문풍의 뼈대가,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라 말의 표면에 비쳤다.

“금일今日, 나는 다시 고르겠소. 아니, 다시 골라야만 하겠소.”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오늘 다시 고르자.”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방 안의 가장 큰 창을 가리켰다.

“대신 혼자 고르지는 마. 그건 반칙이야.”

그때 복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반칙이면 규칙 설명부터 해야지.”

죠니였다.

그는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한 손에는 접시가 들려 있었다. 왜 한밤중에 접시를 들고 있는지 하융은 묻지 않았다. 죠니는 종종 설명이 접시보다 늦게 오는 사람이었다.

죠니는 방 안의 창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더 나은 세계, 더 나쁜 세계, 죽은 세계, 살아남은 세계. 그는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죠니는 놀라는 일에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일단 먹어. 배고프면 사람이 이상한 결론을 내리거든.”

하융은 그를 보았다.

“이 광경을 보고도 먹을 것을 먼저 말하는구려.”

“그럼 창문한테 먼저 인사라도 해?”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 세계가 아무리 많아도, 지금 접시는 이쪽에 있어.”

그 뒤에서 레이튼이 나타났다. 그는 이미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소란이 예정된 티타임이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흥미로운 밤이군요.”

하융이 말했다.

“교수. 흥미롭다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창이 너무 많소.”

레이튼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질문도 많겠군요.”

“그 말이 위로라고 생각하시오?”

“아닙니다. 준비운동에 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고,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금세 맑아졌다. 창밖의 우물, 피난로, 장부, 죽은 이름들이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런 질문은 때로 너무 크다. 그는 창밖을 보았고, 손 안의 미지근한 찻잔을 보았고, 접시를 든 죠니와 주전자를 든 레이튼과 기록판을 안은 그레이와 커튼 고리를 든 푸리나를 보았다.

이 방은 아직 오래된 방이었다.

그러나 이제 오래된 방 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이번에는 혼자 놓여 있지 않소.”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기록판을 조금 더 꼭 안았다.

“그럼…… 기록해도 될까요?”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그건 허락받아야지.”

그레이가 조금 당황한 듯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웃었다.

“기록하시오. 다만 오늘은 장부라기보다 관람표가 되겠구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제목입니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목은 됐고, 식기 전에 먹어. 또 식은 차 붙잡고 철학하지 말고.”

하융은 찻잔을 보았다.

식은 차. 미지근한 현실. 창밖보다 덜 선명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람을 붙잡는 것.

그는 접시 쪽으로 손을 뻗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제1의 창, 제2의 창, 제3의 창. 번호를 붙여도 공포가 되고, 이름을 붙여도 작별이 되는 세계들. 그러나 그 밤, 방 안에는 커튼 고리와 찻주전자와 기록판과 접시가 있었다.

너무 사소한 것들.

너무 현실적인 것들.

박제된 천재의 유리관을 두드리기에는 터무니없이 하찮은 물건들.

그래서 충분한 것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높이 들고 선언했다.

“좋아. 제목은 나중에 정하고, 일단 창문여행부터 시작하자.”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창밖만 보지 않았다.

그는 방 안의 사람들도 함께 보았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숨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

프롤로그 — 오래된 방의 냄새

방은 네모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네모였을 것이다. 네 벽이 있고, 천장이 있고, 바닥이 있고, 창이 하나쯤 있는, 사람이 잠들고 깨어나고 차를 마시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평범한 방. 그러나 창이 하나 늘 때마다 벽도 하나 늘었다. 벽이 하나 늘 때마다 방은 조금 더 넓어졌고, 이상하게도 하융이 앉을 자리는 조금 더 좁아졌다. 방은 넓어지는데 사람은 놓일 곳을 잃었다. 넓다는 것은 때로 감옥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융은 그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앉아 있었다기보다는 놓여 있었다.

놓인 사람은 사람이 아니오. 물건이오. 물건은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융은 숨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아직 숨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창밖의 세계들이 너무 많아질 때마다, 그는 자주 그 사실을 의심했다.

제1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성 블레즈 기사단이 적의 옆구리를 찢었다. 죠니는 말 위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고, 기병들의 창끝은 어둠 속의 비처럼 기울었다. 그 세계에서는 피난민 수레가 늦지 않았다.

제2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같은 수레가 진창에 걸렸다. 말이 넘어지고, 아이가 울고, 누군가가 바퀴를 밀었다. 죠니의 구령은 한 박자 늦었고, 그 한 박자는 칼날 하나만큼 길었다.

제3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수레가 없었다. 피난민도 없었다. 길은 조용했고, 너무 조용한 길은 대개 이미 늦은 길이었다.

제4의 창은 열리기 전에 닫혀 있었다.

닫힌 창 너머에서 죽은 사람이 하융을 보았다.

제5의 창에서는 하융 자신이 서 있었다. 그는 지금보다 더 정확했다. 더 침착했고, 더 먼저 말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살았다. 그러나 그 대신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죽었다.

하융은 번호를 붙이면 덜 무서울 줄 알았다. 번호란 질서의 흉내니까. 그러나 번호는 질서가 아니었다. 공포가 줄을 선 것뿐이었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푸리나가 낮에 두고 간 차였다. 그녀는 “식기 전에 마셔!”라고 말했고, 곧바로 다른 방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자주 그랬다. 문장을 던지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그 문장이 정말 무대 장치였다고 주장했다. 하융은 그때 웃으며 찻잔을 받아두었다.

지금 차는 식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미지근했다. 현실의 온도는 대개 그렇게 애매했다. 창밖의 세계들은 너무 선명했다. 죽음은 선명했고, 가능성은 선명했고, 실패와 성공은 칼로 그은 선처럼 명료했다. 그런데 손 안의 찻잔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결정되지 않은 온도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아직 이름 붙이기 곤란한 오늘의 온도.

하융은 그것을 오래 붙잡았다.

현실은 때로 이렇게 미지근해서, 오히려 믿기 어렵다.

“오래된 방이 아직 닫히지 않았구려.”

그는 낮게 말했다.

말은 방 안에 떨어졌다. 그러나 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원래 대답하지 않는다. 방은 사람을 담을 뿐이다. 다만 창이 너무 많아진 방은 사람을 담지 못하고, 사람을 진열한다. 그 사실을 하융은 알고 있었다.

한때 그는 정말로 진열되어 있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처음 그 말을 떠올렸을 때, 하융은 웃었었다. 천재라는 말도 우스웠고, 박제라는 말도 우스웠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웃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방 안에 앉혔다. 그에게 보라 했다. 더 보라 했다. 어느 길이 무너지는지, 어느 사람이 배신하는지, 어느 전선이 살고 어느 성벽이 죽는지. 가능성은 귀중했다. 너무 귀중했다. 그러므로 하융은 점점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사람은 귀중하면 귀중할수록 더 조심히 다뤄진다고 누가 말했던가.

귀중한 것은 종종 쓰인다.
쓰이는 것은 닳는다.
닳은 사람은 스스로를 물건이라 부르기 쉽다.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창 안의 나는 방 안의 나를 보았다. 방 안의 나는 창 안의 나를 보았다. 그러나 서로의 체온은 알 수 없었다. 거울이라면 깨뜨리면 되었겠으나, 창은 깨뜨리면 바람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언제나 다른 세계의 냄새를 데려온다.

어느 창에서는 그가 고려로 돌아갔다. 어느 창에서는 돌아가지 못했다. 어느 창에서는 푸리나를 만나지 않았다. 어느 창에서는 죠니가 그를 형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느 창에서는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죽었다. 어느 창에서는 그레이의 장부가 불탔다. 어느 창에서는 장부에 적을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생이, 이미 끝난 생들의 기록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융은 자신의 종생기를 너무 많이 읽은 사람처럼 피곤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소.”

그는 자기 손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나의 죽음은 이미 너무 많구려.”

창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친절하지 않다. 가능성은 보여줄 뿐이다. 보여준 뒤 책임지지 않는다. 계시라 불리면 계시가 되고, 저주라 불리면 저주가 되며, 전술 자원이라 불리면 장부의 한 칸이 된다. 그러나 하융은 이제 알고 있었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오.
이것은 계시도 아니오.
이것은 다만 창이오.

창은 열릴 뿐, 명령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명령으로 만들 때, 창은 비로소 사람을 해친다.

하융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배웠다. 푸리나는 창을 창이라고 불러주었다. 레이튼은 그 창에 질문을 붙여주었다. 그레이는 창밖의 비극을 장부와 점검표로 낮추어, 산 자가 같은 이유로 죽지 않도록 만들었다. 죠니는 창밖을 보고도 대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는 밥부터 먹으라고 했다.

하융은 그들 곁에서 이 세계를 선택했다.

이 세계가 최선이라서가 아니었다.
최선이라는 말은 창밖에 너무 많이 있었다.
최선은 서로를 물어뜯었다.
어느 최선은 누군가의 죽음을 포함했고, 어느 최선은 다른 사람의 부재를 요구했다.

하융은 최선을 믿지 않았다.

다만 오늘을 믿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과 끝났다는 것은 다르다. 상처는 배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방은 잠긴 뒤에도 냄새를 남긴다. 전선 보고서와 피난민 명단과 죽은 가능성의 잔향이 한밤에 겹치면, 그 방은 다시 문을 연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떠돌았다. 죽은 내가 천千이요, 살아남은 내가 만萬이었다. 어느 나는 칼을 들었고, 어느 나는 창틀에 걸려 말라갔고, 어느 나는 웃었으며, 어느 나는 웃는 법을 잊었다. 허나 금일今日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방 안인가. 저 창밖인가. 아니면 또다시 박제되어, 날개를 가지고도 날지 못하는 새처럼 놓여 있는가.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나.
둘.
셋.

“아니오.”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했다.

“그리로 돌아가지는 않겠소.”

그때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문이 예의를 차려 열렸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문은 푸리나 헤툼의 손에 의해 하나의 효과음처럼 밀려났다. 복도의 등불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빛 앞에 푸리나가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망토를 대충 걸쳤고, 한 손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튼 고리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자다가 나온 것 같기도 했고, 애초에 자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푸리나에게는 그런 경계가 자주 애매했다.

그녀는 방 안을 보았다.

창을 보았다.
창밖의 수많은 세계를 보았다.
하융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뜻밖에 조심스러웠다. 푸리나는 소리로 무대를 여는 사람이었지만, 배우가 아직 자기 대사를 찾지 못했을 때는 기다릴 줄 알았다. 하융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조금 고마웠다.

그러나 푸리나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아.”

하융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무엇이 좋다는 말이오?”

“오늘의 극이 정해졌어.”

하융은 주변의 창들을 보았다.

“전하. 지금 이 광경을 보고도 극을 떠올리는 것이오?”

“응.”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이걸 그냥 두면 또 네가 혼자 창문들이랑 싸울 것 같거든. 그러면 안 돼. 창문이 많으면 관객을 불러야지.”

하융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창문이 많으면 관객을 불러야 한다. 이 세계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창문을 막으려 한다. 혹은 창밖을 더 보라 한다. 혹은 어느 창이 가장 유용한지 묻는다. 그런데 푸리나는 관객을 부르겠다고 했다.

그 무례함은 구원과 닮아 있었다.

하융은 낮게 웃었다.

“전하의 극장은 참으로 무례하오. 남의 오래된 악몽에도 표를 팔 생각부터 하는구려.”

“표는 안 팔아.”

“다행이오.”

“대신 감상문 받아.”

“그편이 더 비싸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방 안을 조금 흔들었다. 창들은 여전히 있었다.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푸리나의 웃음은 그 창들을 조금 덜 신성하게 만들었다. 덜 무섭게 만들었다. 무대 장치처럼 만들었다. 커튼을 달 수 있고, 순서를 바꿀 수 있고, 관객이 야유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하융은 그것이 좋았다.

창은 창이어야 한다.
가능성은 가능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 가능성은 야유받아도 된다.

푸리나는 방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커튼 고리를 딸랑 흔들며 창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녀의 시선에는 두려움보다 계산이 많았다. 어디에 조명을 두고, 어디에 막을 치고, 어디서 배우가 들어오면 좋은지 생각하는 눈이었다.

“하융.”

“듣고 있소.”

“오늘은 창을 닫는 날 아니야.”

“그럼 무엇을 하는 날이오?”

푸리나는 고리를 들어 보였다.

“창밖을 보고, 이쪽에서 뭘 해볼지 정하는 날.”

그 말은 너무 단순했다. 너무 단순해서 하융은 잠시 숨을 잊었다. 창밖을 보고 이쪽에서 뭘 해볼지 정한다. 가능성을 심판으로 삼지 않고, 계시로 삼지 않고, 저주로 삼지 않고, 그저 오늘의 작은 일감으로 가져온다.

어쩌면 오래전 그가 원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더 즐거운 세계를 보면 저럴 수도 있겠구려, 한번 해볼 만하오, 하고 말하는 것. 더 슬픈 세계를 보면 저럴 수도 있겠소, 그러니 조심해야겠지, 하고 적는 것. 창밖의 세계가 방 안을 삼키지 않게 하는 것. 창밖의 세계를 보며, 방 안의 사람들과 같은 숨을 쉬는 것.

하융은 말했다.

“전하.”

“응.”

“나는 이미 이 세계를 골랐소.”

“알아.”

푸리나는 바로 답했다.

그 단순한 대답이 이상하게도 하융을 잠시 멈추게 했다. 푸리나는 그가 이미 골랐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열린 창들이 그 선택을 취소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하융은 다시 구원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곁에 있는 사람이고, 오늘 조금 흔들린 사람일 뿐이었다.

하융은 고개를 낮추었다.

“허나 선택選擇이란 한 번의 도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구려.”

그의 말 속에 고향의 글자가 배어 나왔다. 감정이 새어 나올 때면 그랬다. 평소의 하오체 아래에 숨어 있던 한문풍의 뼈대가,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라 말의 표면에 비쳤다.

“금일今日, 나는 다시 고르겠소. 아니, 다시 골라야만 하겠소.”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오늘 골라.”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방 안의 가장 큰 창을 가리켰다.

“대신 혼자 고르지는 마. 그건 반칙이야.”

그때 복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반칙이면 규칙 설명부터 해야지.”

죠니였다.

그는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한 손에는 접시가 들려 있었다. 왜 한밤중에 접시를 들고 있는지 하융은 묻지 않았다. 죠니는 종종 설명이 접시보다 늦게 오는 사람이었다.

죠니는 방 안의 창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더 나은 세계, 더 나쁜 세계, 죽은 세계, 살아남은 세계. 그는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죠니는 놀라는 일에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일단 먹어. 배고프면 사람이 이상한 결론을 내리거든.”

하융은 그를 보았다.

“이 광경을 보고도 먹을 것을 먼저 말하는구려.”

“그럼 창문한테 먼저 인사라도 해?”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 세계가 아무리 많아도, 지금 접시는 이쪽에 있어.”

그 뒤에서 레이튼이 나타났다. 그는 이미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소란이 예정된 티타임이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흥미로운 밤이군요.”

하융이 말했다.

“교수. 흥미롭다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창이 너무 많소.”

레이튼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질문도 많겠군요.”

“그 말이 위로라고 생각하시오?”

“아닙니다. 준비운동에 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고,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금세 맑아졌다. 창밖의 우물, 피난로, 장부, 죽은 이름들이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런 질문은 때로 너무 크다. 그는 창밖을 보았고, 손 안의 미지근한 찻잔을 보았고, 접시를 든 죠니와 주전자를 든 레이튼과 기록판을 안은 그레이와 커튼 고리를 든 푸리나를 보았다.

이 방은 아직 오래된 방이었다.

그러나 이제 오래된 방 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이번에는 혼자 놓여 있지 않소.”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기록판을 조금 더 꼭 안았다.

“그럼…… 기록해도 될까요?”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그건 허락받아야지.”

그레이가 조금 당황한 듯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웃었다.

“기록하시오. 다만 오늘은 장부라기보다 관람표가 되겠구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제목입니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목은 됐고, 식기 전에 먹어. 또 식은 차 붙잡고 철학하지 말고.”

하융은 찻잔을 보았다.

식은 차. 미지근한 현실. 창밖보다 덜 선명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람을 붙잡는 것.

그는 접시 쪽으로 손을 뻗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제1의 창, 제2의 창, 제3의 창. 번호를 붙여도 공포가 되고, 이름을 붙여도 작별이 되는 세계들. 그러나 그 밤, 방 안에는 커튼 고리와 찻주전자와 기록판과 접시가 있었다.

너무 사소한 것들.

너무 현실적인 것들.

박제된 천재의 유리관을 두드리기에는 터무니없이 하찮은 물건들.

그래서 충분한 것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높이 들고 선언했다.

“좋아. 제목은 나중에 정하고, 일단 창문여행부터 시작하자.”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창밖만 보지 않았다.

그는 방 안의 사람들도 함께 보았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숨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

1막 — 창문여행

죠니 말투 보정 개정본

푸리나는 방 한가운데에서 커튼 고리를 들고 있었다.

그 고리는 본래 커튼을 묶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푸리나가 들고 있으면 물건들은 자기 본래의 일을 금세 잊어버렸다. 포대 자루는 막이 되고, 뒤집힌 상자는 객석이 되고, 낡은 망토는 왕의 망토가 되고, 깨진 잔은 누군가의 운명을 비추는 성배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융은 그 커튼 고리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 저 고리는 아마 창문을 묶는 물건이 아니라, 창문들을 무대 위에 세우는 지휘봉이 될 것이다.

방은 여전히 네모가 아니었다.

창이 너무 많았다. 제1의 창, 제2의 창, 제3의 창. 하융은 이미 번호를 붙여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번호는 질서가 아니었다. 공포가 줄을 선 것뿐이었다. 제1의 창에서는 수레가 살았고, 제2의 창에서는 수레가 죽었다. 제3의 창에서는 수레가 애초에 없었다. 제4의 창은 열리기 전에 닫혔고, 닫힌 창 너머에서 죽은 사람이 하융을 보았다.

방은 방이 아니었다. 창이 너무 많아 방은 창의 부속품이 되었다. 하융은 그 가운데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놓여 있었다. 놓인 사람은 사람이 아니오. 물건이오. 물건은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숨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아직 숨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 숨을 기다려주었다.

그녀는 바로 떠들지 않았다. 커튼 고리를 들고, 방 안의 창들을 한 번 보았다. 더 나은 세계, 더 나쁜 세계, 이미 끝난 세계, 실현되지 않았으나 너무 생생한 세계. 그리고 하융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이 창문들, 너무 잘난 척하고 있어.”

하융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잘난 척 말이오?”

“응. 봐봐. 나는 비극이다, 나는 최선이다, 나는 실패다, 나는 네가 놓친 세계다, 하고 전부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있잖아. 저렇게 무게 잡는 소품은 무대 위에 오래 두면 안 돼. 배우를 잡아먹거든.”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창 하나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종이 조각 하나를 꺼내 창틀에 붙였다. 글씨는 크고 삐뚤었다.

일단 너무 믿지 말 것.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다가 그 문장을 보았다.

“전하, 철학적으로는 상당히 도발적인 안내문이군요.”

푸리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좋지? 무서운 창문한테 필요한 건 향이랑 촛불이 아니라 저런 안내문이야. 신성한 척을 좀 덜 하게 만들어야 해.”

죠니는 문가에 기대어 접시를 들고 있었다. 그는 창틀의 종이를 읽고, 잠깐 창 너머를 보았다. 어딘가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고, 어딘가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비명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죠니는 그쪽을 조금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쁘지 않네. 사람도 너무 믿으면 골치 아픈데, 창문이라고 다를 건 없지. 게다가 저쪽은 얼굴도 없잖아. 따지고 싶어도 누구한테 따져야 할지 모르겠어.”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답게 실용적인 비판이야.”

“실용적이어야지. 창문이 말까지 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교수한테 넘기면 되고.”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경우라면 먼저 창문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어 하는지부터 살펴야겠군요.”

“봐. 벌써 귀찮아졌잖아.”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고, 눈에는 아직 잠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방 안의 창들을 보자마자 그 잠은 사라졌다. 그녀는 푸리나가 붙인 종이를 보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러면…… 하나 더 붙여도 될까요?”

푸리나가 활짝 웃었다.

“물론이지. 그레이의 작은 글씨는 큰 글씨보다 오래 남으니까.”

그레이는 조금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고, 종이 하나에 차분히 적었다.

이 창은 현실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이 창은 오늘 무엇을 해볼 수 있는지 살피기 위한 것입니다.

하융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글씨는 작고 단정했다. 화려하지 않았다. 사람을 휘어잡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문장은 문턱 같았다. 방 안으로 돌아오는 문턱. 창밖이 아무리 많아도, 여기 발을 둘 수 있게 해주는 낮은 선.

“그레이 경의 글씨는, 가끔 부적 같소.”

그레이가 눈을 깜박였다.

“부적……입니까?”

“귀신을 쫓는 것만이 부적은 아니지 않소. 어떤 글씨는 사람이 사람으로 남게 하오.”

그레이는 조금 당황한 듯 기록판을 안았다.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헷갈리지 않게 적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부적인 것이오.”

푸리나는 곧장 끼어들었다.

“좋아. 오늘의 첫 번째 소품은 부적이네.”

“전하, 그건 소품이라기보다는…….”

“괜찮아, 그레이. 무대 위에서는 다 소품이야. 단, 소품이라고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아니야. 소품은 배우를 살리기도 하거든. 넘어질 사람 앞에 놓인 의자 하나처럼.”

그레이는 그 말에 잠시 멈췄다.

그리고 작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네.”

하융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녀는 창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창이 하융을 삼키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 권위를 깎고 있었다. 너무 무거운 이름을 가진 것들은 사람을 무릎 꿇게 한다. 푸리나는 그 이름 위에 삐뚤삐뚤한 종이를 붙였다. 무서운 세계 위에, “일단 너무 믿지 말 것”이라고.

그 무례함은 구원과 닮아 있었다.

죠니가 접시를 살짝 들어 보였다.

“그래서, 이건 어디 두면 되는 건데? 먹을 걸 들고 오래 서 있으면, 내가 뭘 도와주러 온 건지 점점 헷갈리거든.”

푸리나가 그제야 죠니를 보았다.

“그건?”

“먹을 것. 겉보기에는 별거 아니지만, 이런 밤에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아주 중요하지. 관객석 옆.”

“관객석이 어딘데?”

푸리나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상자를 가리켰다.

“저기.”

죠니는 상자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기가 방금 만든 관객석을 한 번 살피고, 창문들과의 거리를 재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쁘지 않은 자리네. 접시 놓기 편하고, 창문이랑도 적당히 멀어. 너무 가까우면 저쪽 세계가 내 빵까지 훔쳐갈 것 같거든.”

“창문은 빵 안 먹어.”

“확신하지 마. 저렇게 많은 세계가 있는데, 빵 먹는 창문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지.”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좋아. 그 창문은 나중에 희극으로 쓰자.”

죠니는 한숨처럼 웃었다.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잠시 뒤 죠니가 물었다.

“그럼 관객은 먹으면서 봐도 되는 거야? 안 된다고 하면 꽤 곤란한데. 지금 이 접시를 다시 가져가긴 싫거든.”

푸리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훌륭한 관객은 먹으면서도 볼 수 있어. 손이 바쁘다고 눈까지 쉬는 건 아니잖아?”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네. 손이 바쁜 건 참을 수 있는데, 입까지 쉬게 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그리고 더 훌륭한 관객은 먹으면서 박수도 칠 수 있어.”

“그건 손이 세 개쯤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발로 쳐.”

“발박수는 좀 별론데. 내가 전장에서 별걸 다 봤지만, 발박수를 치는 관객은 아직 못 믿겠어.”

“무대의 역사는 편견과 싸워왔어, 죠니.”

“그런 식으로까지 싸울 필요는 없어. 편견도 가끔은 살려둘 가치가 있어.”

하융은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이 조금 덜 어렵게 나왔다. 방 안의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푸리나와 죠니가 발박수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 창들은 더 이상 신탁처럼 굴 수 없었다. 그것들은 잠시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소품처럼 보였다.

레이튼은 찻잔을 나누며 말했다.

“그럼 첫 번째 창부터 볼까요. 다만 오늘은 정답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 좋은 질문과 작은 시도를 찾는 시간으로 두면 어떻겠습니까?”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좋아. 레이튼다운 말이야. 다만 너무 교실 같으면 하융이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나는 이렇게 말할래.”

그녀는 커튼 고리로 첫 번째 창을 가리켰다.

“창문여행 첫 번째 목적지. 저쪽에서 뭐 하나 훔쳐와서, 이쪽에서 작게 해보기.”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훔친다는 표현은 계속 문제적입니다만.”

“그럼 밀반입.”

“더 나빠졌습니다.”

“그러면 빌리기.”

“그 정도면 괜찮겠군요.”

“좋아. 가능성에서 소품 빌리기.”

죠니가 접시에서 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빌리는 건 좋아. 다만 빌린 뒤에 갚으라고 찾아오는 가능성은 좀 사양이야. 그런 건 대개 이자가 붙거든.”

하융은 첫 번째 창을 보았다.

창 안에는 시장이 있었다.

킬리키아의 어느 항구 도시인 듯했다. 현실의 그 도시는 며칠 전까지 피난민과 보급마차로 가득 차 있었다. 집은 닫혀 있었고, 상인들은 물건보다 소식을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창 안의 도시는 달랐다. 작은 깃발들이 걸려 있었다. 빵집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아이들은 구운 견과를 손에 쥐고 뛰었다. 어느 악사가 낡은 현악기를 켜고 있었고, 군인들은 경계하고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전쟁이 사라진 세계는 아니었다. 다만 전쟁이 조금 멀리 있는 세계였다.

숨을 쉴 틈이 있는 세계.

하융은 그 창을 오래 보았다.

“저쪽은…… 조금 더 가볍구려.”

푸리나는 창 안을 보았다.

“시장?”

“그렇소.”

“축제네.”

“축제라 부르기에는 작소.”

푸리나는 과장되게 눈을 크게 떴다.

“작은 축제는 축제가 아니야? 무대가 작다고 배우가 덜 주인공이 되는 건 아니잖아. 작은 무대에는 작은 무대의 박수가 있고, 작은 축제에는 작은 축제의 빵 냄새가 있어.”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작은 축제.

가능세계는 거창한 이름을 좋아했다. 최선의 세계, 실패한 세계, 구원된 세계, 멸망한 세계. 그러나 푸리나는 그것을 작은 축제라고 불렀다. 작다는 말은 이상하게도 가능성을 덜 잔인하게 만들었다. 작으면, 따라 할 수 있었다.

“현실의 그 도시는 아직 그럴 여유가 없소.”

“응. 그러니까 그대로는 못 해.”

푸리나는 이번에도 너무 빨리 인정했다. 그 빠른 인정이 하융을 조금 멈추게 했다. 그녀는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도 무대 위에 올릴 크기를 다시 재는 사람이었다.

“저쪽 세계가 아무리 잘났어도, 오늘 우리의 무대에 허락 없이 올라오게 둘 수는 없잖아? 완벽한 축제는 못 가져와. 하지만 빵 한 조각, 잼 한 숟갈, 아이가 웃을 핑계 하나 정도는 가져올 수 있어.”

죠니가 빵을 반으로 찢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완벽한 축제는 준비하다가 다들 지쳐. 빵 한 조각은 바로 먹을 수 있고.”

푸리나가 그를 가리켰다.

“봐. 관객 대표도 동의했어.”

“관객 대표가 아니라 배고픈 사람 대표에 가깝지만, 대충 맞는 말이야.”

“그것이 가능하겠소?”

하융이 묻자, 푸리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가능하게 만들 거야. 안 되면 더 작게 줄이면 돼. 축제가 안 되면 점심. 점심이 안 되면 빵 나눠 먹기. 빵도 없으면…….”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이름만이라도 먼저 붙여두자. 이름 붙은 빈 접시는, 언젠가 채워야 하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창 안의 시장을 다시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꽃나무가 있었다. 전쟁이 조금 늦게 온 세계의 꽃나무. 어느 아이가 그 아래에서 빵을 먹었다. 하융은 그 꽃이 부러웠다. 전쟁보다 먼저 피어난 꽃. 창밖의 꽃은 저쪽 세계의 바람을 맞고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꽃도 있네.”

“그렇소.”

“그럼 이쪽에도 심자.”

“전쟁 중에 말이오?”

“전쟁보다 먼저 피면 되는 거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조금 더 낮게 덧붙였다.

“꽃이 전쟁을 이기지는 못해도, 전쟁이 오기 전에 누군가 고개를 들게 만들 수는 있으니까. 그런 장면 하나쯤은 필요해. 사람이 계속 땅만 보고 걸으면, 길도 감옥처럼 느껴지거든.”

죠니는 창 안의 꽃나무를 보았다.

“나쁘지 않네. 꽃은 방패가 되진 못해도, 사람이 자기가 아직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게 만들 때가 있으니까.”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빵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꽃만 보고 있다가 화살 맞으면 곤란하니까, 심을 거면 성벽 안쪽에 심어. 현실적인 조언이야.”

푸리나가 웃었다.

“현실적인 조언 접수.”

하융은 말없이 그들을 보았다.

푸리나의 밝음은 가벼움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을 몰라서 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을 알기 때문에, 전쟁이 모든 장면의 제목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죠니도 그랬다. 그는 꽃을 보고 감탄하지 않았다. 꽃에 대해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남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다음 순간 성벽 안쪽에 심으라고 했다. 그 균형이 하융에게는 이상하게 편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창외의 꽃을 이쪽 흙에 심을 수는 없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알아.”

“허나 이쪽 흙에 이쪽 꽃을 심을 수는 있겠구려.”

푸리나는 웃었다.

“그거야. 가능성은 남의 무대를 베끼라는 게 아니라, 우리 무대에 뭐 하나 더 올려볼까 묻는 거잖아.”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가능성이 현실을 심판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가능성으로부터 질문 하나를 빌린 셈이군요.”

죠니가 빵을 씹으며 말했다.

“질문 이름이 꽃 심을래? 인 거지? 어렵게 말하면 꽃도 부담스러워할 것 같은데.”

레이튼은 웃었다.

“오늘은 그렇게 해도 좋겠습니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적었다.

시장 축제 가능성.
현실 적용: 빵과 잼 나눔. 작은 꽃 심기. 피난민 아이들도 참여 가능.
축제라는 이름이 부담되면 점심 행사로 낮출 것.

하융은 그 문장을 보았다.

점심 행사.

가능세계의 축제가 그레이의 손을 거치자 점심 행사가 되었다. 웅장함은 사라졌지만, 실현 가능성이 생겼다. 하융은 그게 좋았다. 어떤 아름다움은 너무 높이 있으면 사람을 죽인다. 낮아져야 밟을 수 있다. 낮아져야 앉을 수 있다. 낮아져야 빵 위에 발라 먹을 수 있다.

첫 번째 창이 조금 작아졌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방을 밀어내던 빛이 줄었다. 창은 이제 벽을 잡아먹지 않았다. 그 창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하나의 작은 기록으로, 하나의 점심 행사 제안으로 남았다.

하융은 숨을 내쉬었다.

하나.

둘.

셋.

숨은 조금 쉬워졌다.

푸리나는 두 번째 창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첫 번째 창의 빛과 달리, 두 번째 창에서는 먼지가 났다. 길의 먼지, 발의 먼지, 떠나온 집의 먼지. 피난민의 창이었다.

그곳에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았던 혼란스러운 길과는 달랐다. 수레가 한쪽으로 밀리지 않았고, 아이들이 가운데에 몰려 짓밟히지 않았으며, 노인들이 쉴 수 있는 지점마다 작은 표식이 세워져 있었다. 물통이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었고, 길을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천 조각이 나뭇가지에 묶여 있었다. 그 세계의 피난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덜 무너지고 있었다.

하융의 눈이 가라앉았다.

“저것은…….”

그레이가 한 걸음 다가왔다.

“피난 동선입니까?”

“그렇소. 저쪽에서는 수레를 오른쪽 길로 보내지 않았소. 왼쪽의 완만한 길을 썼소. 물통은 세 번째 굽이마다 있고, 노인들은 돌다리 앞에서 쉬었구려. 아이들은…… 가운데가 아니라 수레 사이에 나누어 세웠소.”

그레이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번째 굽이. 돌다리 앞. 아이들을 수레 사이로 분산.”

하융은 창을 보며 말했다.

“다만 저쪽 세계는 적이 하루 늦게 왔소.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되오.”

레이튼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 창이 남기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하융은 잠시 침묵했다.

창 안의 피난민들이 걸었다. 피난이란 떠나는 일이지만, 동시에 남는 일이다. 집을 떠나도 이름은 남고, 길을 떠나도 두려움은 남는다. 하융은 선택되지 않은 세계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쪽 현실의 사람들은 아직 같은 방식으로 걷지 않았다. 저 세계가 더 낫다고 말하는 순간, 이쪽의 피난민들은 실패한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옳지 않았다.

“저쪽이 정답인 것은 아니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허나 저쪽은 질문을 남기오. 우리는 왜 오른쪽 길만 보았는가. 왜 물통 간격을 더 좁히지 않았는가. 왜 아이들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었는가.”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질문이라면, 이쪽 세계에서도 물을 수 있겠군요.”

그레이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조금 낮게 말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오른쪽 길이 빠르긴 하지만, 수레가 몰리면 병목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왼쪽 길은 느리지만…… 노인과 아이에게는 오히려 나을 수도 있고요.”

푸리나는 창 안의 길을 보았다. 이번에는 바로 농담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난길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가보자.”

하융이 그녀를 보았다.

“직접 말이오?”

“응. 직접.”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어깨에 걸치듯 들었다.

“피난길은 종이에만 있으면 안 돼. 길은 발로 밟아봐야 길이야. 그리고 내가 무대 바닥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배우가 어디서 넘어지는지 어떻게 알아?”

“전하가 돌다리와 물통 간격을 확인하러 가겠다는 말이오?”

“왜? 왕은 돌다리에 발 올리면 안 된다는 법 있어?”

죠니가 접시를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법 있으면 없애. 돌다리가 왕을 가리는 건 좀 건방지잖아.”

푸리나는 즉시 웃었다.

“좋아. 돌다리 반역죄.”

“그 정도로 키우지는 말고. 돌은 죄를 물어도 대답을 안 해. 괜히 재판만 길어져.”

하융은 잠시 푸리나와 죠니를 보았다.

왕이 직접 피난길의 돌다리와 물통 간격을 보러 간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원래 그런 왕이었다. 그녀는 대극장의 주인처럼 말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포대 자루를 들고 무대 뒤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무대는 객석에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을 밟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배우가 넘어질 돌을 치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도 가겠소.”

죠니가 말했다.

“나도 갈게. 돌다리 상태 안 좋으면 말이 싫어하거든. 사람은 불평을 설명하지만, 말은 그냥 안 가.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는 상황마다 다르고.”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말이 안 가면 사람도 못 갑니다.”

죠니가 손가락으로 그레이를 가리켰다.

“봐. 그레이도 동의했어. 말은 행정을 이긴다니까.”

그레이가 조금 당황했다.

“동의했다기보다는…… 사실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말이 행정을 이긴다는 표현은 조금…….”

“현장에서 자주 그래.”

그레이는 반박하려다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내일 아침 피난길 답사. 이거 완전히 여행이네. 창문여행이 현실여행으로 바뀌었어.”

하융은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창 안을 다시 보았다.

피난민의 길이 더 이상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질문이 되었고, 점검표가 되었고, 내일 아침의 답사가 되었다. 답사라는 말은 전쟁보다 작고, 피난보다 차분했다. 어쩌면 사람은 그런 작은 단어들로 살아남는지도 몰랐다.

두 번째 창도 조금 작아졌다.

하융은 방이 다시 네모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네모는 아니었다. 아마 그의 방은 영원히 완전한 네모가 되지 못할 것이다. 창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산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방에 놓인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창을 설명했고, 누군가는 그 설명을 질문으로, 누군가는 장부로, 누군가는 피난길 답사와 말 상태로 바꾸었다.

사람은 혼자 보면 박제가 된다.

함께 보면 증언이 된다.

하융은 그 문장을 마음속에 적었다.

푸리나는 세 번째 창 앞에 서려다가, 하융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하융.”

“듣고 있소.”

“잠깐 쉴까?”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조금 어깨를 으쓱했다.

“창문여행이라며. 여행에는 쉬는 곳이 있어야지. 안 그러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행군이야. 그리고 나는 지금 행군보다 막간이 좋아.”

죠니가 접시를 들어 올렸다.

“막간 담당은 나네. 내가 들고 온 게 드디어 극적 의미를 얻었어. 그냥 야식인 줄 알았는데.”

레이튼이 차를 따랐다.

“훌륭한 배치입니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 번째 창은…… 차를 마신 뒤에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아주 장엄하게 커튼 고리를 들었다.

“좋아. 제1막, 창문여행. 첫 번째 정차. 차와 빵. 관객 여러분께서는 손에 든 현실을 놓치지 마시고, 가능성은 잠시 창가에 세워두시기 바랍니다.”

죠니가 말했다.

“제목이 길어. 차 마시기 전에 다 식겠다.”

“그럼 줄여봐.”

죠니는 잠깐 고민했다.

“먹고 보자.”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채택! 역시 좋은 관객은 핵심을 볼 수 있어. 먹으면서도.”

죠니는 접시를 하융 쪽으로 밀었다.

“먹고 보자. 배고픈 상태로 세계를 비교하면, 대부분의 세계가 다 마음에 안 들거든. 그건 철학이 아니라 혈당 문제일 때도 있어.”

하융은 웃었다.

그 웃음은 이번에는 더 쉽게 나왔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여전히 있었다. 그중 어떤 세계는 오늘보다 아름다웠고, 어떤 세계는 오늘보다 참혹했다. 어느 세계에서는 하융이 더 나은 사람이었고, 어느 세계에서는 이미 끝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방 안에는 차가 있었다.

빵이 있었다.

푸리나가 삐뚤게 붙인 안내문이 있었다.

레이튼의 질문이 있었다.

그레이의 작은 글씨가 있었다.

죠니의 “먹고 보자”가 있었다.

하융은 식은 차 대신 새로 따른 차를 받았다. 잔은 따뜻했다. 이번에는 미지근하지 않았다. 손끝에 온도가 닿았다. 확실한 온도였다. 창밖의 어느 세계도 대신 느낄 수 없는, 이쪽 방 안의 온도.

“좋소.”

푸리나가 물었다.

“뭐가?”

“먹고 보자는 말이.”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철학은 거기서 시작해도 돼. 적어도 내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철학은 그래. 아무것도 안 먹은 사람이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대체로 너무 비장해지거든.”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 주장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논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죠니는 빵을 찢어 하융에게 건넸다.

“논증은 네가 해. 난 먹을게. 역할 분담이라는 게 있잖아.”

그레이가 아주 작게 웃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튼 고리를 내려놓았다.

“좋아. 이 정도면 1막은 성공이네. 창문 두 개를 봤고, 점심 행사 하나랑 피난길 답사 하나를 얻었고, 아무도 창밖으로 끌려가지 않았어. 아주 훌륭한 성과야.”

하융은 빵을 받았다.

날개가 있다면, 아마 이런 순간에도 돋을 수 있을 것이다.

창밖으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 안의 차를 받으러 손을 뻗기 위해서.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숨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

2막 — 마지막 창을 찾는 사람

차는 식지 않았다.

그것은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사소함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온도. 찻잔 바깥에 맺힌 아주 얇은 습기. 빵을 찢을 때 나는 마른 소리. 죠니가 접시를 옮기며 무심하게 흘리는 작은 숨. 그레이가 기록판 위에 잉크를 말리기 위해 손바닥으로 바람을 보내는 움직임.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내려놓을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목을 낮추는 습관. 푸리나가 커튼 고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음 창을 보려는 듯 말려는 듯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

방 안에는 현실이 너무 많았다.

이상한 말이었다. 본래 현실은 하나여야 한다. 그러나 하융에게 현실은 자주 부족했다. 창밖의 세계들은 너무 많았고, 너무 선명했고, 너무 잘난 척했고, 너무 죽은 자의 목소리를 닮았다. 반대로 현실은 너무 작았다. 찻잔 하나. 빵 한 조각. 종이 한 장. 누군가의 헛기침. 이런 것들로 세계 하나를 붙들 수 있다는 것이 때로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작은 것들이 방 안에 많이 있었다.

하융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하.”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

“조금 전, 전하께서는 창밖에서 무엇을 빌려오자 하였소.”

“응. 훔치자는 표현은 레이튼이 싫어했으니까, 빌려오기.”

레이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정확히는 법률적·윤리적 혼란을 줄이기 위한 표현 정정이었습니다.”

죠니가 빵을 씹으며 말했다.

“길게 말했지만, 싫어했다는 뜻이네.”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낮아졌다. 그는 방 안의 창들을 보았다. 첫 번째 창과 두 번째 창은 작아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었다. 창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했다. 푸리나는 창을 지우지 않았다. 그레이는 창을 덮지 않았다. 레이튼은 창을 부정하지 않았다. 죠니는 창을 보고도 밥을 먹었다.

그래서 하융은 다음 말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창을 찾고 있었소.”

푸리나의 손이 커튼 고리 위에서 멈췄다.

그레이도 기록판에 펜을 대지 않았다.

레이튼은 하융을 보았다.

“하나의 창이라 하시면?”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방이 아니었다. 창이 너무 많아 방은 창의 부속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많은 창 사이에도 하융은 늘 하나를 찾았다. 가장 마지막에 열릴 창. 모든 가능성을 정리해줄 창. 어느 세계가 실패였고 어느 세계가 구원이었는지, 어느 선택이 옳았고 어느 선택이 늦었는지, 자신이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알려줄 창.

그 창을 찾으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창을 찾으면, 이 모든 창문 앞에서도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창을 찾으면.

하융은 낮게 말했다.

“마지막 창이오.”

푸리나는 바로 묻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평소라면 “멋진 제목인데?”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제목으로 삼기에는 그 말이 너무 오래 하융 안에서 닳아 있었다.

레이튼이 조용히 물었다.

“그 창은 무엇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하융은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처음에는 최선의 세계라 생각했소.”

창 하나가 저 멀리서 열렸다.

그 창 안에는 전쟁이 조금 덜한 킬리키아가 있었다.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피난민들은 덜 울었고, 성 블레즈 기사단의 말들은 덜 지쳐 있었다. 죠니는 오른손을 다치지 않았고, 푸리나는 밤마다 잠을 조금 더 잤으며, 그레이의 장부에는 사망자보다 배급 완료 표시가 더 많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은 누군가를 아슬아슬하게 살렸다.

하융은 그 창을 보았다.

“저런 세계였소. 조금 더 나은 세계. 조금 덜 잃은 세계. 조금 덜 늦은 세계.”

창 안에서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지금 방 안에 있는 푸리나의 웃음보다 조금 가벼워 보였다.

하융은 고개를 숙였다.

“저 세계를 보면, 이 세계가 못난 것처럼 보이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좋았다. 위로가 급히 들어오지 않는 침묵. 반박이 서둘러 오지 않는 침묵. 하융은 그 침묵 속에서 다음 말을 찾았다.

“나는 그런 창들을 너무 많이 보았소. 저기서는 살았소. 여기서는 죽었소. 저기서는 늦지 않았소. 여기서는 늦었소. 저기서는 내가 더 정확했소. 여기서는 내가 망설였소.”

창외窓外에는 나의 오답이 있었다. 또한 나의 정답도 있었다. 그러나 정답과 오답이 서로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어느 것을 향해 절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아남은 세계가 죽은 세계를 비웃지 않았고, 죽은 세계가 살아남은 세계를 저주하지도 않았다. 다만 모두 보였다.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나는 마지막 창을 찾았소. 이것이 정답이다, 하고 말해줄 창을.”

레이튼이 말했다.

“정답인 세계를 찾으셨군요.”

“그렇소.”

“혹은, 정답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조용한 세계를 찾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융은 눈을 떴다.

“조용한 세계?”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답은 때로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지요. 더 묻지 않아도 되게 하니까요.”

하융은 레이튼을 바라보았다.

그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칼날이 없지는 않았다. 레이튼의 질문은 늘 그랬다. 차를 대접하듯 건네지만, 받아들면 손 안에 작은 칼이 들어 있었다. 자신을 베기 위한 칼이 아니라, 너무 오래 묶어둔 매듭을 자르기 위한 칼.

레이튼은 물었다.

“하융 경께서 찾으신 마지막 창은, 정말로 이 세계를 살피기 위한 창이었습니까?”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레이튼은 조금 더 낮게 말했다.

“아니면 더는 묻지 않아도 되기 위한 창이었습니까?”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레이는 펜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제1의 창. 제2의 창. 제3의 창. 너무 많은 창. 너무 많은 나. 너무 많은 종생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자기 죽음의 기록을 너무 많이 읽으면, 살아 있다는 사실도 문서처럼 느껴진다. 하융은 자기 삶을 한때 그렇게 읽었다. 어느 장에서는 죽었고, 어느 장에서는 살았고, 어느 장에서는 돌아갔고, 어느 장에서는 오지 않았다.

살아 있는 나는 그 기록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아마도.”

하융은 겨우 말했다.

“아마도 나는…… 마지막 창 뒤에 숨어 쉬고 싶었던 것 같소.”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는구려.”

“쉴 곳을 찾는 일을 비겁이라 부를 수는 없지요.”

그 말에 하융은 잠시 여관의 성좌를 떠올렸다. 길 위에서 쓰러진 자에게 방을 내어주는 존재. 그러나 마지막 창은 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닫힌 결론이었다. 답이라는 이름의 창문.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더 묻지 않게 만드는 유리벽.

하융은 중얼거렸다.

“답은 방이 아니었구려.”

레이튼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때로는 그렇습니다. 특히 너무 일찍 닫힌 답은, 방보다 유리관에 가깝지요.”

유리관.

그 말에 하융의 손가락이 멈췄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그 문장은 한때 우스웠다. 그러나 유리 안쪽에서 너무 오래 창밖을 보면, 웃음은 먼저 말라붙는다. 밖에서는 사람이 보인다. 안에서는 사람의 흉내를 내는 표본이 보인다. 날개가 있으나 날 수 없고, 눈이 열려 있으나 보라는 방향으로만 고정된 새.

하융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마지막 창을 찾는 동안, 다시 유리 안에 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푸리나가 그제야 말했다.

“그럼 깨자.”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전하?”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유리관이면 깨야지. 창이면 열어도 되는데, 유리관이면 깨야 해. 그건 극장 소품으로도 별로야. 배우를 못 움직이게 하잖아.”

레이튼이 작게 웃었다.

“과격하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깨기 전에 손은 감싸. 유리 깨면 피 나거든. 그건 경험담이야.”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역시 현실적인 조언 담당.”

“담당이 너무 많아지고 있는데.”

“그럼 임시.”

“임시도 많으면 정규직이야.”

그 말에 그레이가 아주 작게 웃었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하융도 웃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지막 창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웃음은 때로 진지함을 모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지함이 사람을 죽일 만큼 커지는 것을 막는다.

푸리나는 하융 앞에 종이를 하나 내려놓았다.

“자. 그럼 마지막 창에도 안내문 붙이자.”

“아직 열리지도 않았소.”

“그러니까 미리 붙이는 거야. 열리고 나서 붙이면 늦잖아.”

“무슨 말을 붙이려 하오?”

푸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쓰려다가 멈췄다.

“이번 건 내가 쓰면 안 될 것 같아.”

하융은 조금 놀랐다.

“전하가?”

“응. 이건 네 창이잖아. 내가 제목을 붙여버리면, 또 내 무대가 돼. 그건 좀 아니야.”

푸리나는 종이와 펜을 하융 쪽으로 밀었다.

“네가 써.”

하융은 펜을 보았다.

펜은 가벼웠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한동안 들지 못했다. 이상했다. 무수한 세계를 보는 것보다 종이 한 장에 문장을 쓰는 일이 더 무거울 때가 있다. 창밖의 세계는 보이면 된다. 그러나 문장은 선택해야 한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길지 않아도 됩니다.”

레이튼이 덧붙였다.

“정답일 필요도 없습니다.”

죠니는 접시를 보다가 말했다.

“나중에 마음에 안 들면 줄 그으면 돼. 종이는 그런 점이 편하지. 창문보다 훨씬 다루기 쉬워.”

하융은 그 말을 듣고 펜을 들었다.

창 안의 나는 방 안의 나를 보았다. 방 안의 나는 창 안의 나에게 손을 뻗지 못했다. 거울이라면 서로 마주 보았겠으나, 창은 언제나 한쪽만 지나치게 투명했다. 그러나 종이는 달랐다. 종이는 이쪽에서 쓸 수 있었다. 창밖이 아니라, 방 안에서.

하융은 천천히 적었다.

마지막 창은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거기서 멈췄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는 다시 적었다.

마지막 창은, 창을 함께 보는 법을 묻는다.

펜 끝이 종이를 떠났다.

그 문장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완전한 문장은 때로 너무 빨리 무덤이 된다. 하융은 그 종이를 보았다. 마지막 창이 아직 열리지 않았는데도, 조금 덜 무서워진 것 같았다.

푸리나는 종이를 보더니 조용히 웃었다.

“좋네.”

“전하답지 않게 짧은 감상이오.”

“응. 지금은 긴 감상 붙이면 방해될 것 같아서.”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이런 순간에 이상하게 정확했다. 평소에는 과하게 떠들고, 장난치고, 세상 모든 사물에 배역을 붙이려 들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무대의 소리를 낮출 줄 알았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그 문장을 옮겨 적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문장은…… 기록해도 될까요?”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오.”

그레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무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점도 고마웠다.

레이튼은 하융이 쓴 종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정해졌군요.”

하융이 물었다.

“무엇이오?”

“우리가 함께 본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방 안의 창들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 질문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혹은 아직 열리지 않은 마지막 창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것을 느꼈다. 창들이 그를 잡아당기는 힘이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심판처럼 당겼다. 이제는 문처럼 당겼다. 문은 열 수 있고, 닫을 수 있고, 때로는 잠시 기대어 쉴 수도 있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2막 목표는 정해졌네.”

죠니가 빵을 들고 물었다.

“또 목표야?”

“응. 이번 목표는 마지막 창을 찾는 게 아니야.”

푸리나는 하융이 쓴 종이를 가리켰다.

“마지막 창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앉아 있을지 정하는 거야.”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전환입니다.”

죠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의자부터 봐야겠네. 어떻게 앉아 있을지 정하려면, 의자가 멀쩡해야 하니까.”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역시 현실적인 조언 담당.”

“방금 정규직 싫다고 했는데.”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의자는…… 확인하겠습니다.”

죠니가 그레이를 보았다.

“농담이었는데.”

“그래도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실제로 하나가 조금 흔들립니다.”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역시 행정은 강하네.”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마지막 창에 대해 이야기하던 방 안에서, 어느새 의자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이 푸리나의 극장이고, 레이튼의 질문이며, 그레이의 장부이고, 죠니의 현실감이었다. 거창한 구원은 없었다. 다만 너무 큰 창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의자를 확인했다.

그것이 이상하게도 하융을 살렸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더 나은 세계들이 아직 있었다. 더 아름다운 시장, 더 안전한 피난길, 더 적은 죽음, 더 현명한 자신. 그 세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져서도 안 되었다. 사라진다면 배울 것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이제 그 세계들은 이 방을 심판하지 않았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저 세계들은 여전히 아름답소.”

푸리나가 말했다.

“응.”

“그리고 이 세계는 여전히 모자라오.”

“응.”

“그럼에도.”

하융은 찻잔을 들었다.

“나는 이쪽에서 묻겠소.”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융은 창 너머의 시장을, 피난길을, 아직 열리지 않은 마지막 창을 보았다.

“저 아름다움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함인지, 아니면 오늘의 손에 작은 일을 쥐여주기 위함인지.”

잠시 침묵.

그리고 푸리나가 말했다.

“좋아. 그 질문, 마음에 들어.”

죠니가 빵을 삼키고 말했다.

“나도. 부끄러움만 주는 아름다움은 별로야. 사람 기운만 빼거든.”

그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일이라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문답은 여기까지 해도 충분하겠군요. 질문이 살아 있다면, 아직 창은 우리를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융은 레이튼을 보았다.

“창이 우리를 이긴다라.”

“예. 답이 질문을 죽일 때, 창은 사람을 이깁니다.”

그 말은 오래 남았다.

하융은 자신이 쓴 종이를 다시 보았다.

마지막 창은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 창은, 창을 함께 보는 법을 묻는다.

그 문장이 창틀에 붙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창의 창틀에.

그것은 모순이었다. 그러나 하융의 방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창에 먼저 문장을 붙여두는 일. 아직 오지 않은 질문 앞에 의자를 놓아두는 일. 아직 정답이 되지 않은 문장 옆에서 차를 마시는 일.

하융은 생각했다.

날개가 있다면, 아마 이런 일에도 필요할 것이다.

먼 세계로 날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창 앞에, 의자를 하나 더 놓기 위해서.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프롤로그 — 오래된 방의 냄새

방은 네모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네모였을 것이다. 네 벽과 천장과 바닥, 그리고 창 하나쯤을 가진, 사람이 잠들고 깨어나고 차를 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방. 그러나 하융의 방은 오래전부터 그런 형식을 잃어버렸다. 창이 하나 늘 때마다 벽도 하나 늘었고, 벽이 하나 늘 때마다 방은 조금 더 넓어졌으나, 이상하게도 하융이 앉을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방은 넓어질수록 그를 가운데로 밀어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의자 위에 놓인 잔이나 책처럼 보였다. 오래 움직이지 않은 것들은 모두 비슷한 냄새를 낸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융은 문득 자기 숨이 아직 방 안에서 가장 따뜻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어느 창에서는 시장의 깃발이 흔들렸다. 빵 냄새가 났고, 아이들의 웃음이 유리 너머에서 조금 늦게 도착했다. 병사들은 피곤했지만 웃고 있었고, 장사꾼들은 소식보다 손님을 먼저 보았다. 전쟁이 사라진 세계는 아니었다. 다만 전쟁이 잠시 멀어진 세계였다. 그 옆의 창에서는 수레바퀴가 진창을 지나고 있었다. 노인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이 있었고,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는 길이 있었으며, 누군가가 미리 물통을 놓아두었다. 더 먼 창에서는 우물물이 지나치게 맑았다. 맑은 물은 종종 불길했다. 하융은 그 물빛을 보자마자, 아직 쓰이지 않은 장부의 빈 줄을 떠올렸다. 다음 장면에서 아이가 누워 있었고, 그 다음 장면에서 천이 덮인 작은 몸들이 있었으며, 다시 그 다음 장면에서 장부의 끝에는 이름 대신 짧은 말이 남았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잉크가 마르자, 아이의 얼굴도 함께 마르는 것 같았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닫힌 눈꺼풀 안쪽에서도 시장은 흔들렸고, 피난길은 진창을 밟았으며, 우물은 맑은 물빛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4의 창은 열리기도 전에 이미 닫혀 있었고, 제5의 창에서는 죽은 하융이 오늘의 하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번호를 붙이면 덜 무서울 줄 알았다. 번호란 질서의 흉내니까. 그러나 번호는 질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가 줄을 선 모양에 가까웠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있었다. 죽은 내가 천千이요, 살아남은 내가 만萬이었다. 어느 나는 조금 더 빨랐고, 어느 나는 한 박자 늦었다. 어느 나는 푸리나가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창가에서 식어 있었고, 어느 나는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를 끝내 듣지 못했다. 어느 나는 레이튼의 찻잔 앞에서 대답 대신 침묵만 남겼으며, 어느 나는 그레이의 펜 끝에 닿기도 전에 장부의 빈칸으로 밀려났다.

하융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 낮에 푸리나가 두고 간 차였다. 그녀는 “식기 전에 마셔!”라고 말해놓고는, 정작 본인은 다음 장면을 떠올렸는지 복도 끝으로 뛰어가 버렸다. 푸리나는 늘 그랬다.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그 말이 사실은 개막 선언이었다고 주장했다. 지금 그 차는 식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미지근했다. 현실의 온도는 대개 그렇게 애매했다. 창밖의 죽음은 차갑고, 창밖의 축제는 눈부셨으며, 창밖의 실패는 칼자국처럼 또렷했다. 그런데 손 안의 찻잔만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정되지 않은 온도였다. 아직 이름 붙이기 곤란한 오늘의 온도. 하융은 그 찻잔을 오래 붙잡았다.

“오래된 방이 아직 닫히지 않았구려.”

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원래 대답하지 않는다. 방은 사람을 담을 뿐이다. 그러나 창이 너무 많아진 방은 사람을 담지 못하고, 사람을 진열한다. 하융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그는 정말로 진열되어 있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처음 그 말을 떠올렸을 때, 하융은 웃었었다. 천재라는 말도 우스웠고, 박제라는 말도 우스웠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웃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방 안에 앉혔다. 보라 했다. 더 보라 했다. 어느 길이 무너지는지, 어느 병사가 죽는지, 어느 성벽이 버티는지, 어느 선택이 더 적게 피를 흘리는지. 귀중하다는 말은 언제나 따뜻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귀중한 물건은 조심히 보관되기도 하지만, 더 자주 꺼내 쓰인다. 하융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보관되는 쪽인지, 사용되는 쪽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오.”

하융은 숨을 들이마신 뒤,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로 돌아가지는 않겠소.”

하지만 창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져서도 안 되었다. 창을 닫아버린다면 그는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하융이 원하는 안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보지 않는 유리관에 가까웠다. 그가 찾아야 하는 것은 창을 없애는 법이 아니었다. 창에 못 박히지 않는 법이었다. 그 사실을 그는 이미 배운 적이 있었다. 푸리나와 함께, 레이튼과 함께, 그레이와 함께, 죠니와 함께. 하지만 배운다는 것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같지 않다. 회복된 사람도 다시 오래된 냄새를 맡는다. 중요한 것은 그 냄새가 자신을 어디까지 데려가도록 허락할 것인가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문이 하나의 효과음처럼 밀려났다. 복도의 등불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빛 앞에 푸리나 헤툼이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망토를 대충 걸쳤고, 한 손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튼 고리가 들려 있었다. 머리카락 끝은 잠의 흔적을 달고 있었는데, 눈빛만은 방금 막 새 장면을 떠올린 사람처럼 또렷했다. 푸리나는 종종 잠에서 깨어난 사람과 밤을 새운 극작가 사이의 어딘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방 안을 보았다. 창들을 보았다. 더 나은 세계, 더 슬픈 세계, 죽은 가능성, 웃는 가능성, 아직 열리지 않았으나 이미 하융의 시선을 붙잡으려 하는 어떤 창. 그리고 하융의 얼굴을 보았다. 푸리나는 바로 떠들지 않았다. 그 침묵은 뜻밖에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소리로 무대를 여는 사람이었지만, 배우가 아직 자기 대사를 찾지 못했을 때는 기다릴 줄 알았다. 하융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조금 고마웠다.

“하융.”

“듣고 있소.”

“또 창문 앞에 앉아 있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밤중에 남의 방에 들어와, 첫마디로 참으로 정확한 말을 하시는구려.”

“그럼 틀린 말을 할까? 그건 좀 아깝잖아. 기왕 문을 열었으면 첫 대사는 정확해야지.”

푸리나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창 앞에 섰다. 그 창에서는 더 여유로운 시장이 보였다. 푸리나는 그 광경을 잠시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표정에는 감탄도 있었고, 질투도 있었고, 극장주가 다른 극장의 무대를 훔쳐볼 때의 장난스러운 경계심도 있었다.

“흐음.”

“무엇이 보이시오?”

“잘난 척.”

하융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잘난 척 말이오?”

“응. 봐봐. 나는 더 나은 시장이다, 나는 더 아름다운 가능성이다, 나는 네가 놓친 장면이다, 하고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있잖아.”

푸리나는 커튼 고리로 창틀을 톡 쳤다.

“저렇게 무게 잡는 창문은 오래 보면 안 돼. 배우를 잡아먹거든.”

하융은 창을 보았다. 확실히, 그 창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팠다. 현실의 시장은 저렇게 가볍지 않았다. 현실의 피난길은 저렇게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현실의 우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현실의 장부에는 아직 적히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 창은 언제나 더 선명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창이 너무 많소.”

“응.”

푸리나는 바로 인정했다. 그 빠른 인정이 하융을 조금 멈추게 했다. 그녀는 창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그녀는 창틀을 두드리고, 빛의 각도를 살피고,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한 바퀴 돌렸다. 무서운 것을 무대 위에 올릴 때, 어디에 세워야 배우가 잡아먹히지 않는지 재는 얼굴이었다.

“그럼 가보자.”

하융은 눈을 깜박였다.

“어디로 말이오?”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문밖을 가리켰다.

“창이 가리키는 곳으로.”

“창밖으로 나가자는 말이오?”

“아니. 문밖으로.”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차이 중요해. 창밖으로 나가면 네가 또 저쪽 세계한테 붙잡히잖아. 문밖으로 나가면 이쪽 세계의 바닥을 밟게 되고.”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이 아니라 문밖. 그 차이는 너무 단순했지만, 단순한 말이 가끔 가장 깊은 곳을 찌른다. 하융은 창을 보았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었고, 다른 선택이 있었고, 다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복도가 있었다. 돌바닥이 있고, 먼지가 있고, 등불이 있고, 누군가의 발자국이 있는 현실의 복도. 그 복도는 창보다 작았다. 그러나 밟을 수 있었다.

“방 안에서만 보면 창문들이 너무 잘난 척해. 직접 가서 보면 의외로 다들 발밑이 허술해. 시장은 빵이 부족하고, 길은 진흙탕이고, 우물은 냄새가 나고, 죠니는 밤중에도 접시를 들고 다니고.”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건 왜 내가 문제인 것처럼 말해?”

죠니였다. 그는 정말로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에는 빵만이 아니라, 작게 자른 치즈와 말린 과일까지 얹혀 있었다. 야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성의가 있었고, 식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대충이었다. 죠니는 방 안의 창들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장의 금빛과 우물의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곧 탁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접시를 놓을 만한 자리를 찾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그 사소한 눈길을 보고, 아주 잠깐 숨을 쉬기가 쉬워졌다. 어떤 사람은 무수한 세계가 열려 있는 방에서도, 먼저 빵이 기울지 않을 곳을 찾았다.

“창문이 많네.”

“그대에게도 그렇게 보이오?”

“응. 그리고 전부 별로 친절해 보이지는 않아. 보통 친절한 건 저렇게 빛나지 않거든.”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 너는 가끔 정말 이상한 기준으로 정확한 말을 해.”

“오래 살다 보면 알게 돼. 너무 반짝이는 건 대개 비싸거나 귀찮아. 둘 다 좋은 징조는 아니고.”

죠니는 접시를 방 안의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접시와 창들의 거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눈을 움직였다.

“어쨌든 가는 거면 먹고 가. 빈속으로 가능세계 같은 걸 보면, 대부분의 세계가 다 마음에 안 들거든. 그건 철학이 아니라 혈당 문제일 때도 있어.”

“그 말에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소.”

“당연하지. 나는 가끔 쓸데없이 맞는 말을 해.”

그 뒤에서 레이튼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예정된 야간 티타임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레이튼은 문턱에서 방 안을 둘러보았고, 창의 수와 빛의 방향과 하융의 얼굴을 차례로 살핀 뒤, 아주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밤입니다. 물론 창의 수를 고려하면, 다소 복잡한 밤이라고 해야겠지만요.”

푸리나가 손을 흔들었다.

“레이튼, 딱 맞게 왔어. 오늘의 주제는 창문여행이야.”

“창문여행이라. 흥미로운 제목이군요. 다만 첫 질문은 제목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무엇을 묻겠소?”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질문은 늘 차처럼 건네졌다. 다만 마시고 나면, 혀끝보다 마음 한쪽이 먼저 따뜻해지거나, 오래 묶여 있던 매듭 하나가 조용히 느슨해졌다.

“하융 경께서 보고 계신 것은 창입니까, 아니면 창에 붙잡힌 시선입니까?”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농담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췄다. 하융은 레이튼의 말을 곱씹었다. 창인가. 창에 붙잡힌 시선인가. 그는 한때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 자신을 명령한다고 믿었고,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겼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보는 자신과 보이는 세계 사이에 사람의 체온이 남지 않았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창을 없애는 날이 아니라, 시선의 위치를 바꾸는 날이겠군요.”

그때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문가에 섰다. 그녀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했지만, 방 안의 창들을 보자마자 눈빛이 맑아졌다. 그레이는 먼저 창을 보지 않고 하융을 보았다. 방 안에 우물과 장부와 죽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는데도, 그녀의 첫 시선은 살아 있는 사람의 안색에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은가. 그는 창들을 보았다. 시장, 피난길, 우물, 죽은 자신, 살아남은 자신, 더 나은 동료들, 더 나쁜 결말들. 그 다음 푸리나의 커튼 고리, 죠니의 접시, 레이튼의 찻주전자, 그레이의 기록판을 보았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말이 좋았다. 괜찮다고 밀어붙이지 않는 말. 괜찮지 않음을 문제 삼지 않는 말. 다만 지금의 상태를 조용히 받아 적는 듯한 말. 하융은 그 말 때문에 이어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놓여 있지 않소.”

그레이의 손이 기록판 위에서 살짝 멈췄다. 그녀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높이 들었다.

“좋아. 전원 집합. 오늘의 극장은 방 안이 아니야. 시장, 길, 우물, 그리고 점심자리.”

죠니가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점심은 밤에 먹어도 점심인 거야?”

푸리나는 잠깐 생각하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는 가능해.”

“그 말, 너무 많이 쓰면 위험해.”

“괜찮아. 위험한 말은 내가 책임질게.”

“그럼 난 접시를 책임질게. 그쪽이 더 믿음직해.”

레이튼은 가볍게 웃었다.

“훌륭한 역할 분담입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먼저 어디로 가십니까?”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가장 강한 빛을 내는 창을 골랐을 것이다. 혹은 가장 끔찍한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세계가 옳은지, 어느 세계가 자신을 용서하는지, 어느 세계가 마지막 창인지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밖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창밖이 아니라 문밖. 그 차이는 작았고, 그래서 컸다.

하융은 천천히 일어섰다.

“시장으로 가보겠소.”

푸리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첫 장면은 시장.”

죠니는 접시를 다시 들었다.

“먹을 건 들고 가도 되지? 시장에 가는데 빈손이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밤중의 시장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들고 가야지. 닫힌 시장에서 먹을 걸 구하려면 귀찮거든.”

레이튼은 하융의 옆으로 다가왔다.

“하융 경.”

“듣고 있소.”

“오늘은 모든 창에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온화하게 말했다.

“길을 걷는 동안, 어떤 창은 그저 빛만 비출 수도 있지요.”

하융은 잠시 그 말을 들고 있었다. 창은 답이 아니라 빛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직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기에는 충분한 문장이었다. 하융은 방을 돌아보았다.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닫히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를 불렀고, 아직도 다른 세계의 냄새를 흘려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빛이 방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복도 쪽으로 길게 흘러나갔다. 시장의 따뜻한 노랑은 돌바닥의 먼지를 드러냈고, 우물의 푸른빛은 벽의 금 간 자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어느 실패한 세계의 회색은 푸리나의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그 빛 위에 그대로 발을 디뎠다.

하융은 그 빛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너머가 아니라 그 아래를 보았다. 돌바닥. 먼지. 푸리나의 발끝. 죠니가 들고 있는 접시의 그림자. 그레이의 기록판 모서리. 레이튼의 찻주전자에서 흔들리는 작은 반사광. 현실은 창보다 작았다. 그러나 밟을 수 있었다.

“가보지요.”

푸리나는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가며, 무대의 막을 올리듯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개막.”

그리고 아주 밝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창밖이 아니라, 문밖으로.”

하융은 그녀를 따라 걸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하융은 창 너머로 가지 않았다. 그는 창에서 흘러나온 빛 아래, 문밖의 복도를 걸었다.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1막 — 시장의 빛

시장은 잠들어 있었다. 낮의 시장이 목소리와 냄새와 먼지로 몸을 불리는 짐승이라면, 밤의 시장은 접힌 짐승에 가까웠다. 천막들은 축 늘어져 있었고, 닫힌 가게의 나무 덧문에는 낮 동안 묻은 손자국과 먼지가 남아 있었다. 빵집 앞에는 줄이 없었고, 과일 바구니는 뒤집혀 있었으며, 광장 한가운데의 우물 곁에는 누가 잊고 갔는지 모를 빈 물동이가 엎어져 있었다. 하융은 그 광장을 보자마자, 조금 전 창 안에서 보았던 시장을 떠올렸다. 작은 깃발이 걸리고, 아이들이 웃고, 병사들이 피곤하면서도 빵을 나눠 먹던 그 시장. 그곳에서는 전쟁이 멀리 있었다. 이곳에서는 전쟁이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닫힌 덧문과 낮게 꺼진 등불 사이에 이미 앉아 있었다.

푸리나는 광장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는 창 안의 시장과 현실의 시장을 번갈아 보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고,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한 번 돌렸다. 하융은 그녀가 곧 무언가를 선언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푸리나는 선언을 좋아했다. 다만 그녀의 선언은 대개 법령보다 장난에 가까웠고, 장난보다 조금 더 오래 남았다.

“흐음.”

죠니가 접시를 들고 그녀 옆에 섰다.

“왜. 시장이 생각보다 안 극적이야?”

“아니. 너무 극적이야. 닫힌 시장, 식은 화덕, 엎어진 물동이. 이거 완전히 전쟁 전야잖아.”

“보통 사람들은 그걸 그냥 장사가 끝났다고 불러.”

“죠니, 너는 너무 빨리 현실로 도망쳐.”

“현실에 있으니까 현실로 가는 거지. 그게 도망이면, 세상 대부분은 도망 중이야.”

푸리나는 그 말에 잠깐 입술을 삐죽이다가, 곧 광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창에서 흘러나온 빛들이 돌바닥 위에서 조금씩 흔들렸다. 시장의 따뜻한 노랑은 아직 꺼지지 않은 화덕의 재를 닮았고, 더 먼 창에서 온 꽃빛은 닫힌 덧문 틈에 낀 먼지를 희미하게 밝혔다. 하지만 하융의 시선은 자꾸 그 너머로 미끄러졌다. 창 안의 시장에서는 같은 돌바닥 위에 깃발이 걸려 있었다. 저쪽의 빵집에서는 남은 빵을 작게 잘라 아이들에게 주고 있었다. 저쪽의 병사는 웃었다. 이쪽의 병사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이 광장에는 병사도 많지 않았다. 순찰병 둘이 졸음을 참으며 서 있었고, 그중 하나는 푸리나를 알아보고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

“저, 전하?”

푸리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쉿. 오늘 나는 전하가 아니야.”

순찰병은 더 굳었다.

“예?”

“야간 시장 조사단장이야.”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그건 더 수상해 보이는데.”

“그럼 야간 시장 산책객.”

“그건 덜 위험하긴 하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야간 시장 산책객으로 하자. 공식 직함은 나중에 붙이고.”

순찰병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하융과 레이튼과 그레이를 차례로 보았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그레이는 작은 목례로 그를 안심시켰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있었으므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융은 잠시 그 순찰병을 보았다. 창 안의 다른 세계에서는 이 병사가 낮에 빵을 나눠 먹고 있었다. 또 다른 창에서는 길목에서 화살을 맞았다. 또 다른 창에서는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하융은 그 가능성들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중 어느 하나에도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 했다. 그는 순찰병의 신발 끝에 묻은 진흙을 보았다. 끈이 느슨했다. 현실은 가끔 그런 식으로 먼저 나타났다.

“끈이 풀렸소.”

순찰병이 멍하니 그를 보았다.

“예?”

“신발 끈 말이오. 순찰 중 넘어질 수 있소.”

순찰병은 뒤늦게 자기 발을 내려다보고 허둥지둥 끈을 묶었다.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좋아. 첫 수확.”

“수확이라고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넘어지기 전에 발견한 건 좋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전쟁보다 신발 끈이 먼저 사람을 쓰러뜨릴 때도 있거든. 별로 멋은 없지만 꽤 자주 그래.”

하융은 순찰병이 끈을 묶는 손을 보았다. 창 안의 병사는 빵을 들고 웃고 있었고, 현실의 병사는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장면인지 묻는 질문이 목 안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내려앉았다. 지금은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푸리나는 닫힌 빵집 앞에 섰다. 덧문에는 낮에 붙였던 작은 안내문이 남아 있었다. 피난민 배급은 성문 쪽 임시 창고에서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글씨는 급했고, 종이는 비에 한 번 젖었다가 말라 가장자리가 말려 있었다. 푸리나는 그 안내문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너무 재미없어.”

그레이가 가까이 와서 안내문을 확인했다.

“필요한 정보는 들어 있습니다. 장소, 시간, 대상자, 질서 유지 요청까지요.”

“응. 필요한 정보는 있어.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얼굴이 없어.”

“얼굴……입니까?”

“응. 이건 말하자면 무대 뒤 지시문이야. 배우가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서 퇴장해야 하는지는 적혀 있는데, 왜 나와야 하는지는 없어.”

그레이는 잠시 안내문을 보았다. 하융은 그녀가 불편해할까 싶었지만, 그레이는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안내문 왼쪽 아래, 비에 번져 읽기 어려워진 줄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러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표시를 추가하면 좋을까요. 글을 못 읽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빵 그림이나 물동이 그림을 같이 붙이면, 조금 덜 헤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웃었다.

“그거야. 역시 그레이야.”

“대단한 생각은 아닙니다. 실제로 필요해서…….”

“필요한 생각이 제일 대단할 때도 있어.”

그레이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덧문에 붙은 종이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펴더니, 커튼 고리 끝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신술은 아니었다. 혹은 신술이 되기 전의 장난이었다. 하지만 하융은 그런 장난이 푸리나에게서 자주 신술의 전조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세상을 먼저 놀이처럼 만지고, 그 다음에야 그것이 사람을 일으키는 장면이 된다.

“빵 그림, 물동이 그림, 그리고 꽃.”

죠니가 물었다.

“왜 꽃?”

“예쁘잖아.”

“그건 이유가 너무 강해서 반박하기 어렵네.”

레이튼이 웃음을 삼키듯 찻주전자를 살짝 고쳐 들었다.

“때로는 단순한 이유가 가장 오래 버팁니다.”

푸리나는 레이튼을 돌아보았다.

“레이튼, 지금 그 말을 아주 길게 만들려는 얼굴이야.”

“아닙니다. 오늘은 시장이 주인공이니까요.”

“좋아. 훌륭한 자제력이야.”

하융은 빵집 앞에 서서 창 안의 장면을 다시 보았다. 그곳에서는 이미 꽃이 있었다. 창 안의 아이는 꽃나무 아래에서 빵을 먹고 있었다. 이쪽에는 꽃나무가 없었다. 다만 덧문 아래, 돌 틈에 작고 마른 풀 하나가 비집고 나와 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얇았다. 하융은 허리를 숙였다. 손끝으로 건드리자 마른 줄기가 부서질 것 같아, 그는 건드리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뭐 봐?”

“풀잎이오.”

“어디?”

하융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았다. 그러더니 아주 작게 웃었다.

“진짜 있네.”

“창 안에는 꽃나무가 있었소.”

“응.”

“이쪽에는 이것뿐이오.”

푸리나는 그 작은 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평소처럼 바로 “그럼 꽃나무로 만들자!”고 말할 줄 알았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풀잎 주변의 먼지를 살짝 밀어냈다. 너무 거칠게 하면 뿌리가 다칠까 조심하는 손짓이었다.

“이것뿐이라기엔, 얘도 꽤 열심히 나왔는데.”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창 안의 꽃나무는 멋지네. 하지만 그건 저쪽 무대 소품이고, 이쪽 애는 이 돌 틈에서 혼자 올라왔잖아. 그럼 오늘은 얘 편을 들어줘야지.”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돌 틈 풀 편드는 왕이라. 듣기에는 이상한데, 너한테는 꽤 어울리네.”

“그럼 너는?”

“난 안 밟을게. 그 정도면 내 방식으로는 꽤 큰 지지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죠니식 지지 접수.”

하융은 풀잎을 보았다. 창 안의 꽃나무와 비교하면 우스울 만큼 작았다. 하지만 그 작은 것 앞에서 푸리나는 손가락을 조심했다. 죠니는 발을 조심하겠다고 했다. 그레이는 어느새 기록판 한쪽에 빵 그림과 물동이 그림의 위치를 적고 있었고, 레이튼은 시장 골목의 방향을 살피며 순찰병에게 낮게 질문하고 있었다.

“이쪽 골목으로 가면 성문 창고가 보입니까?”

“아, 아닙니다. 중간에 한 번 꺾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처음 온 사람은 놓치기 쉽겠군요. 혹시 낮에 길을 묻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예. 특히 북쪽 피난민들이…….”

“그렇군요. 그들이 처음 보는 표지가 무엇인지부터 바꿔야겠습니다.”

하융은 레이튼의 목소리를 들었다. 레이튼은 답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순찰병이 낮 동안 보았던 길 잃은 사람들의 동선을 하나씩 말하게 했다. 질문은 부드러웠고, 순찰병은 처음에는 긴장했으나 곧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융은 그 대화를 보며 창 안의 피난길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이미 천 조각이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아직 아무도 천 조각을 묶지 않았다. 그러나 순찰병의 손이 허공에서 길을 그리는 동안, 하융은 이쪽 골목의 어둠 속에도 아직 묶일 수 있는 자리가 많다는 것을 보았다.

푸리나는 갑자기 일어섰다.

“좋아. 빵집 주인은 자고 있겠지?”

그레이가 조금 놀라 말했다.

“지금 깨우시려고요?”

“아니. 자는 사람은 자야지. 여관좌의 대리인이 수면권을 침해하면 안 돼.”

죠니가 말했다.

“방금 되게 그럴듯한 말을 했는데, 뭔가 하려는 얼굴이야.”

“응. 가게는 안 깨우고 시장만 조금 깨울 거야.”

“그게 더 문제처럼 들리는데.”

푸리나는 대답 대신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 고리를 들어 올렸다. 하융은 순간 그녀가 신술을 펼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푸리나는 고리를 크게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엎어진 물동이 옆에 서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무대는 아직 닫혀 있습니다.”

그 말은 광장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등불 하나가 살짝 흔들렸고, 순찰병이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말이 닫힌 덧문들에 닿는 것을 느꼈다. 장엄한 선포는 아니었다. 밤중의 장난처럼 작았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조금 덜 헤매게 합시다.”

그리고 그녀는 물동이를 바로 세웠다.

그레이가 곧 다가와 물동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에 두면 통행에 방해가 됩니다. 조금 옆으로 옮기겠습니다.”

“응. 그레이가 옮기면 그게 맞아.”

“제가 직접 옮기겠습니다.”

“같이 하자. 나도 물동이는 들 수 있어.”

“전하, 옷이…….”

“망토는 빨면 돼. 물동이에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것보다 망토가 더 싸.”

죠니가 접시를 들지 않은 손으로 물동이 손잡이를 잡았다.

“셋이 들면 빨리 끝나. 그리고 여왕님이 물동이 하나 들겠다고 씨름하는 그림은 너무 길어지면 곤란해.”

푸리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나 약하다고 했어?”

“아니. 물동이가 귀찮게 생겼다고 했지. 둘은 달라.”

“그럼 인정.”

셋이서 물동이를 옮겼다. 광장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난 곳, 성문 창고로 향하는 길목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표시를 적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내일 낮 이 자리에 임시 표식을 세울 수 있는지 물었다. 푸리나는 물동이 옆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먼지 위에 빵 모양을 그렸다. 빵이라기에는 조금 찌그러진 달 같았다. 죠니는 그 그림을 보더니 낮게 말했다.

“그건 빵이야, 달이야?”

“빵.”

“빵집 주인이 보면 항의할 수도 있겠는데.”

“그럼 네가 그려.”

“난 먹는 쪽이지 그리는 쪽이 아니야.”

“비겁해.”

“현명한 거지.”

하융은 그 대화를 들으며 광장 가장자리에 섰다. 창 안의 시장은 아직도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었다. 작은 깃발, 꽃나무, 빵 냄새, 웃음. 그 아름다운 가능성은 여전히 이 현실보다 가벼웠고, 이 현실보다 따뜻했으며, 이 현실보다 조금 덜 아팠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는 이제 바로 세워진 물동이가 있었다. 먼지 위에 찌그러진 빵 그림이 있었다. 돌 틈의 풀잎 주변에는 푸리나가 밀어낸 작은 빈자리가 있었다. 순찰병은 신발 끈을 다시 묶었고, 그레이는 내일 붙일 그림 안내문의 위치를 적고 있었다. 레이튼은 길을 묻는 사람의 첫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물었고, 죠니는 접시 위의 빵 조각이 기울지 않게 손목을 조정했다.

그것들은 창 안의 축제보다 작았다.

하융은 그 작음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작아서 손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융.”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먼지 위에 그린 빵 그림 옆에 작은 꽃을 하나 더 그리고 있었다. 꽃이라고 하기에는 선이 세 개뿐인 모양이었다.

“이거 어때?”

하융은 다가가 그림을 보았다.

“빵 옆에 꽃이 있구려.”

“응. 길 잃은 사람이 빵을 찾다가 꽃도 보면 좋잖아.”

“꽃을 보러 온 것이 아닐 텐데.”

“그래도 보이면 나쁘지 않잖아.”

그 말은 가벼웠다. 그래서 오래 남았다. 하융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먼지 위의 꽃은 바람이 불면 사라질 것이다. 내일 낮이면 사람들의 발에 밟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있었다. 창 안의 꽃나무처럼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그늘을 만들지도 못하고, 아이가 앉을 자리도 주지 못하는 꽃. 그러나 지금 이 광장 위에서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려둔 꽃.

하융은 낮게 말했다.

“나쁘지 않소.”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채택.”

“무엇을 말이오?”

“내일 안내문에 꽃도 넣기.”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복잡해지면 정보 전달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작게.”

“작게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꽃이 살아남았네.”

“죠니식 축하야?”

“응. 꽤 진심이야. 작은 건 보통 제일 먼저 잘리거든.”

그레이가 기록판에 작게 덧붙였다.

“빵 그림 아래 작은 꽃 표시.”

하융은 그 글씨를 보았다. 창 안의 꽃나무가 아니라, 현실의 안내문 아래 들어갈 작은 꽃 표시. 세계는 그런 식으로도 건너오는가. 창 너머의 커다란 빛이, 먼지 위의 선 세 개와 종이 아래의 작은 표시가 되어 이쪽에 남는가. 그는 그 생각을 말로 만들지 않았다. 말로 만들면 너무 빨리 굳을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물동이 옆에 놓인 작은 돌 하나를 치웠다. 누군가 발을 걸 수 있을 만한 돌이었다.

죠니가 그걸 보고 말했다.

“좋네.”

“무엇이 말이오?”

“그 돌. 저기 있으면 누군가 걸려. 창문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돌은 직접 치워야 하잖아.”

하융은 돌을 손에 든 채 잠시 멈췄다. 돌은 작고 차가웠다. 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돌이었다. 그 돌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남았다. 그는 돌을 길가로 옮겨놓았다.

레이튼이 순찰병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내일 아침에는 성문 창고로 가는 첫 표지를 이곳에 세우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글자보다 그림을 먼저 보이게 하지요. 빵, 물동이, 작은 꽃. 훌륭한 조합입니다.”

푸리나는 가슴을 폈다.

“그렇지?”

“예. 길 안내가 되면서도, 너무 명령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꽃 하나 붙었다고 명령문이 덜 무서워지나?”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가끔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명령받고 있다고 느끼면 늦게 움직이지만, 초대받고 있다고 느끼면 한 걸음 빨라질 때가 있지요.”

푸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야. 초대장!”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배급 안내문이 초대장이 되면…… 혼란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럼 배급 안내 초대장.”

“그 표현도 조금…….”

죠니가 끼어들었다.

“그냥 그림 있는 안내문으로 하자. 이름이 길어지면 붙이기 전에 다들 지쳐.”

푸리나는 잠깐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죠니 의견 채택. 그림 있는 안내문.”

“드디어 정상적인 이름이 나왔네.”

“정상적인 이름도 가끔은 필요하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시장 입구를 돌아보았다. 창 안의 시장은 여전히 멀리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저쪽에 있을 것이다. 이쪽 시장은 내일 아침에도 피곤할 것이고, 빵은 부족할 것이고, 사람들은 줄을 서다 다툴지도 모른다. 작은 꽃 표시 하나가 전쟁을 멀리 보내지는 못할 것이다. 물동이 하나를 옮긴다고 피난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돌 하나를 치운다고 모든 길이 안전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융의 손바닥에는 아직 돌의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그 차가움은 창 너머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하융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시장의 냄새가 들어왔다. 식은 재, 오래된 밀가루, 젖은 나무, 먼지, 그리고 누군가 접시 위에 올려둔 말린 과일의 희미한 단내. 그 모든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창 안의 시장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끝에 닿았다.

푸리나가 문득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저쪽 시장이 더 예뻤어?”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기다렸고,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으며, 레이튼은 등불의 흔들림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렇소. 저쪽이 더 예뻤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것 같았어.”

“허나 이쪽은…….”

하융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돌을 쥐었던 자리가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이쪽은 손이 남는구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웃었다. 이번에는 크게 박수치지도, 당장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다만 커튼 고리를 손안에서 조용히 굴렸다.

“그럼 됐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손이 남으면 뭐라도 할 수 있지. 가끔은 그게 전부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오늘의 첫 장면치고는 충분히 좋은 결말입니다.”

그레이는 작게 덧붙였다.

“내일 할 일도 남았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좋아. 그럼 다음 장면은 내일 할 일을 확인하러 가는 장면!”

죠니가 말했다.

“그러면 사실상 업무잖아.”

“업무도 장면이 될 수 있어.”

“그건 그레이한테 물어봐.”

그레이는 잠시 당황하다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업무는…… 되도록 장면이 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조용히 끝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죠니가 푸리나를 보았다.

“봤지. 전문가 의견이야.”

푸리나는 조금 억울한 얼굴을 했다가, 곧 웃었다.

“좋아. 그럼 조용한 장면.”

하융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광장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창 안의 시장은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는 이제 그들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바로 세운 물동이, 먼지 위의 빵과 꽃, 길가로 옮겨진 돌, 신발 끈을 다시 묶은 순찰병, 내일 붙일 그림 있는 안내문. 창에서 흘러온 빛은 그 위에 희미하게 얹혀 있었다. 빛은 현실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무엇을 만질 수 있는지 보이게 했다.

하융은 문득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아직 첫 장면이었다.

그는 창 너머로 가지 않았다.

그는 시장의 돌바닥 위에 남은 자기 발자국을 보았다.
좋아. 이번 막은 **피난길**이야. 하융이 창에서 본 “더 나은 길”을 그대로 답으로 삼는 게 아니라, 실제 길을 밟으며 창에는 보이지 않던 진흙·돌·아이들의 두려움·말의 습관을 감각하는 방향으로 썼어. 하이라이트 부분에는 하융의 감정이 살짝 새는 식으로 한문체를 넣었어.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2막 — 피난길의 돌

시장을 지나 성문 쪽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밤이 깊어서만은 아니었다. 피난민들이 지나간 길에는 소리가 남지 않고 냄새가 남았다. 젖은 짚 냄새, 오래 끌린 수레바퀴의 흙 냄새, 급하게 꺼낸 가재도구에서 묻어난 집의 냄새, 그리고 사람들이 오래 서 있었던 자리 특유의 눅눅한 체온. 하융은 그 냄새들을 맡으며 걸었다. 창 안의 피난길은 더 정돈되어 있었다. 수레는 줄을 지켰고, 노인들은 그늘에서 쉬었으며, 아이들은 진창을 밟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길은 굽이마다 한 번씩 흐트러졌다. 어느 집 담벼락에는 수레가 긁고 간 자국이 있었고, 길모퉁이에는 떨어진 짐끈이 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푸리나는 앞서 걷다가 몇 걸음마다 멈췄다. 처음에는 창에서 본 길과 현실의 길을 대조하듯 보였지만, 곧 그녀는 벽의 갈라진 틈, 낮은 처마, 기울어진 표지목 같은 것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바닥을 점검하는 극장주의 눈과 닮아 있었다. 어디에 조명을 두면 사람이 덜 헤맬지, 어느 구석에서 배우가 넘어질지, 어느 문으로 나가면 객석이 그걸 퇴장으로 알아볼지 재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그 얼굴을 보다가, 창 안의 다른 푸리나를 떠올렸다. 그 푸리나는 같은 길을 조금 더 일찍 고쳤고, 그래서 어떤 아이가 넘어지지 않았다. 현실의 푸리나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낮은 처마 아래를 직접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 너무 어둡네.”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가 곧 기록판을 열었다.

“등불을 하나 더 둘 수 있습니다. 다만 기름 배급량을 확인해야 합니다.”

“기름이 부족하면?”

“성문 창고에서 남는 폐목을 받아 임시 횃대를 세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만 불씨 관리 인력이 필요합니다.”

“좋아. 그럼 불씨 관리자를 붙이고, 표식은 낮에도 보이게 하자. 밤에만 길이 헷갈리는 건 아니니까.”

죠니는 길모퉁이에 서서 수레바퀴 자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접시를 시장에 맡기고 왔지만, 손은 여전히 뭔가를 들고 있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비어 있었다. 그가 발끝으로 바퀴 자국 옆의 진흙을 눌렀다. 진흙은 생각보다 깊게 들어갔다.

“여긴 수레가 빠지겠네.”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입니까?”

“빈 수레면 몰라도, 짐 실은 수레는 싫어할 거야. 수레꾼은 더 싫어할 거고. 말은 아예 표정으로 욕할걸.”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말이 표정으로 욕해?”

“해. 사람보다 솔직해서 문제지.”

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 길모퉁이의 폭을 살폈다. 그는 직접 결론을 말하지 않고, 옆에 서 있던 순찰병에게 물었다.

“낮에 이 길에서 수레가 멈춘 일이 있었습니까?”

순찰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바퀴가 빠졌고, 한 번은 앞쪽 수레가 멈추는 바람에 뒤가 전부 막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돌아갔습니까?”

“대부분 이 골목으로…… 그런데 이 골목은 좁아서 아이들이 밀렸습니다.”

레이튼은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길은 빠른 길이 아니라, 빠른 길처럼 보이는 길이었군요.”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창 안의 피난길에서는 이 골목을 쓰지 않았다. 그 세계의 수레들은 조금 먼 길을 돌아갔다. 멀지만 넓은 길이었다. 창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창은 이 진흙의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수레꾼이 왜 짧은 길을 고집했는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무엇을 무서워했는지도, 말이 어느 그림자 앞에서 귀를 젖히는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창은 길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길의 무게는 발바닥으로 내려와야 알 수 있었다.

푸리나는 하융을 돌아보았다.

“하융?”

“듣고 있소.”

“창에서는 이 길을 어떻게 썼어?”

하융은 어둠 속의 골목을 바라보았다. 창 안의 장면이 겹쳤다. 더 넓은 길, 느린 수레, 덜 밀리는 사람들, 돌다리 앞에서 쉬는 노인들. 하지만 그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것이다. 저쪽에서는 이렇게 했다. 이쪽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몇 명이 덜 다친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발밑에는 진흙이 있었다. 창 안에서는 밟히지 않던 진흙이었다.

“저쪽에서는 이 골목을 쓰지 않았소. 수레를 조금 돌아가게 했소.”

그레이가 적었다.

“우회로 사용.”

“다만 그쪽 길도 확인해야 하오. 창에서는 넓어 보였으나, 실제로는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소.”

레이튼이 살짝 웃었다.

“좋습니다. 창이 우리를 성급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셨군요.”

하융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는 오늘도 질문하지 않고 칭찬하는 척 질문하시는구려.”

“아, 들켰습니까?”

죠니가 낮게 웃었다.

“교수는 원래 그래. 차를 주는 얼굴로 문을 열어놓고, 정신 차리면 네가 그 문을 지나가고 있지.”

레이튼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비유입니다. 다만 문을 지나는 것은 언제나 본인의 선택이지요.”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좋아. 그럼 우회로 확인. 하지만 지금 전부 가면 피난길 답사가 아니라 밤 산책이 너무 길어져. 먼저 돌다리까지 가자.”

그들이 다시 움직이자, 길은 시장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느 담장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넘어지며 붙잡았던 자리일지도 몰랐다. 어느 집 처마 밑에는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방향 표식처럼 보였지만, 너무 낮아서 키 큰 사람은 지나치기 쉬웠고, 너무 어두워서 아이는 보지 못할 수 있었다. 그레이는 천 조각의 위치를 기록했고, 푸리나는 그것을 보더니 자기 망토 끝을 잠시 만졌다. 죠니가 그 손짓을 보고 미리 말했다.

“망토 찢을 생각이면 하지 마. 네 망토가 표식이 되면, 내일 아침 시장 사람들이 전부 여왕님 망토 조각을 보러 몰릴걸.”

푸리나는 손을 멈췄다.

“그건…… 조금 재밌을지도.”

“재밌긴 한데 길 안내가 아니라 구경거리가 돼. 목적이 바뀌잖아.”

“아쉽네.”

“천은 창고에서 가져와. 왕이 망토로 길 표시하는 나라가 되면, 그레이가 장부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 곤란해져.”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확실히…… 관리 항목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망토는 생존.”

하융은 그 대화를 들으며 걸었다. 창 안의 피난길은 고요하고 질서 있었다. 그러나 이쪽 피난길에는 이런 대화가 있었다. 망토를 찢으려는 왕과, 그것을 말리는 기사단장과, 관리 항목을 걱정하는 행정관. 창 안의 길에는 없는 소리였다. 사소하고, 쓸데없고, 이상하게 사람을 붙드는 소리였다.

돌다리는 성문으로 향하는 작은 물길 위에 놓여 있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그 아래로 내려가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물소리만 어둠 속에서 낮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자체는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쪽 돌판이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난간 일부가 흔들렸다. 하융은 그 다리를 보는 순간 창 안의 장면을 떠올렸다. 저쪽 세계에서는 노인들이 이 다리 앞에서 쉬었다. 아이들은 수레 사이에 나뉘어 걸었고, 물통은 세 번째 굽이마다 있었다. 모든 것이 조금 더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돌다리 앞에는 앉을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쉬었다면 길가에 주저앉았을 것이고, 그들이 일어설 때 뒤의 수레가 멈췄을 것이다. 다리 위에 한 번에 두 수레가 오르면 돌판은 더 내려앉을지도 몰랐다. 하융은 다리 한가운데를 보았다. 창 안의 노인이 거기 앉아 있었다. 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물소리와 돌의 축축한 냄새가 있었다.

“이곳이오.”

그가 말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열었다.

“쉬는 지점으로 보신 곳입니까?”

“저쪽에서는 그랬소. 그러나 이쪽은 앉을 자리가 없소. 다리도 생각보다 낮게 가라앉았구려.”

죠니는 난간을 손으로 눌러보았다. 난간은 삐걱이며 조금 흔들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 번 더 눌렀다.

“이건 기대면 안 돼.”

푸리나가 바로 다가왔다.

“많이 위험해?”

“사람 하나 기대는 건 버틸 수도 있어. 문제는 피난길에서는 사람 하나만 기대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거지. 누가 넘어지면 셋이 같이 잡고, 뒤에서 누가 밀고, 그러다 한 번에 무게가 실려.”

“고쳐야겠네.”

“고쳐야지. 그리고 고치기 전까지는 여기서 쉬게 하면 안 돼. 쉬게 하려면 다리 앞이 아니라 저쪽 넓은 곳이 낫겠어.”

죠니는 손가락으로 다리보다 조금 앞선 빈터를 가리켰다. 잡초가 조금 자라 있었고, 버려진 나무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창 안에서는 보지 못한 자리였다. 하융은 그 빈터를 보았다. 창은 돌다리 앞의 장면을 보여주었지만, 현실의 다리는 사람을 받아줄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대신 현실에는 빈터가 있었다. 잡초와 나무상자와 낮은 벽. 완벽하지 않았지만, 사람 몇 명이 앉기에는 충분했다.

레이튼은 빈터와 다리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재며 순찰병에게 물었다.

“낮에 이쪽을 지나는 사람들은 다리를 보기 전까지 이 빈터를 알아차립니까?”

“아마…… 잘 못 봅니다. 수레가 다리 쪽으로 몰리면 시야가 막혀서요.”

“그렇다면 쉬는 곳은 있지만, 쉬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푸리나가 그 말을 듣고 빈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나무상자 하나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상자는 가벼웠지만, 완전히 썩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바로 세웠다.

“이 정도면 의자.”

그레이가 곧 따라왔다.

“그 상자는 못이 튀어나와 있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손을 멈췄다.

“오.”

죠니가 옆에서 상자를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못 하나를 가리켰다.

“있네. 그레이가 이겼다.”

“이긴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앉기 전에 발견했으면 이긴 거지.”

그레이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푸리나는 상자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좋아. 이 의자는 아직 리허설 탈락.”

“수리 후 재검토입니다.”

그레이가 정정했다.

“수리 후 재검토. 역시 그레이는 탈락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지 않아.”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빈터 한가운데 섰다. 창 안의 돌다리 앞에는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현실의 빈터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자를 고치고, 못을 빼고, 표식을 달고, 다리로 몰리는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하면. 창 안의 장면은 그대로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 비껴왔다. 돌다리 앞이 아니라, 돌다리 전의 빈터로. 노인의 자리도, 아이의 물통도, 수레의 줄도 조금씩 비껴와 이쪽 흙 위에서 다른 모양을 잡으려 했다.

하융은 잠시 숨을 멈췄다.

창외에는 길이 많았다. 길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엇갈려 있었고, 어느 길은 꽃빛으로 젖었으며 어느 길은 피와 진흙으로 막혔다. 그러나 금일今日, 나의 발밑에 있는 것은 한 자尺의 흙이요, 한 개의 돌이며, 한 사람의 숨이었소. 만리萬里의 가능성이 있어도, 발은 한 번에 한 걸음밖에 옮기지 못하오. 그러니 길은 하늘에 있지 않고, 발아래에서 조금씩 태어나는 것이었소.

그 한문 섞인 생각은 입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가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하융?”

하융은 빈터의 흙을 보다가 대답했다.

“이곳이 좋겠소.”

그레이가 물었다.

“쉬는 지점으로요?”

“그렇소. 창에서는 돌다리 앞이었으나, 현실에서는 이곳이 낫소. 다리 앞은 좁고, 난간은 믿기 어렵소. 이 빈터라면…… 손을 볼 수 있겠소.”

죠니가 빈터를 둘러보았다.

“나쁘지 않아. 수레가 다리로 바로 몰리는 것도 줄일 수 있겠네. 말도 여기서 한 번 숨 돌리면 덜 버틸 거고.”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덜 버텨?”

“아니, 덜 버틴다는 건 안 좋은 말이네. 덜 성질낸다고 하자.”

“죠니, 가끔 말보다 말 표현이 더 어려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레이튼은 빈터의 입구와 출구를 번갈아 보았다.

“표식을 세운다면 두 개가 필요하겠습니다. 하나는 이곳이 쉬는 자리라는 표시, 다른 하나는 다리 위에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수레 수를 제한하는 표시.”

그레이가 적었다.

“임시 휴식 지점. 상자 수리 또는 교체. 못 제거. 물통 배치. 다리 난간 수리 전까지 통행 제한. 수레 간격 조정.”

푸리나는 그레이의 기록판을 들여다보려다가, 글씨가 너무 작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 네 글씨는 가끔 비밀문서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 칭찬이야. 비밀문서처럼 믿음직하다는 뜻.”

“그건…… 칭찬입니까?”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식 칭찬이야. 가끔 해석이 필요해.”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이 길을 처음 걷는 사람이, 어디서 가장 먼저 불안해할까요?”

순찰병은 다리와 빈터를 번갈아 보았다.

“아마 다리 앞일 겁니다. 물소리가 들리고, 길이 좁아지고, 뒤에서는 수레가 밀어붙이니까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쉬는 지점은 몸만 쉬게 하는 곳이 아니라, 불안이 몰리기 전에 숨을 고르게 하는 곳이어야겠군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빈터 한가운데를 보았다.

“그럼 여기도 작은 무대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피난길의 휴식 지점이라면…… 무대라는 표현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무대 말고, 숨 고르는 자리.”

그레이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 표현이 좋습니다.”

“채택.”

죠니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이름이 다 정상적으로 가네. 좋은 징조야.”

푸리나가 그를 흘겨보았다.

“내 작명 감각이 평소엔 이상하다는 뜻이야?”

“가끔은 너무 멀리 가. 그런데 뭐, 멀리 가는 사람이 있어야 가까운 이름도 고르지.”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 웃었다.

“좋아. 그건 칭찬으로 받을게.”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창 안의 피난길은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쪽 길은 시끄럽고, 축축하고, 상자는 못이 튀어나와 있었고, 난간은 흔들렸으며, 이름 하나를 정하는 데도 여러 사람이 말을 보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란 속에서 길이 조금씩 생겨났다. 창 안에서 완성되어 있던 길보다 느리고, 더럽고, 불편했지만, 누군가 손을 대고 있었다. 푸리나는 이름을 붙이고, 그레이는 고칠 항목을 적고, 레이튼은 불안을 묻고, 죠니는 난간을 눌러보고, 하융은 창과 흙 사이에서 조금 늦게 도착한 장면을 옮겨놓았다.

그때 다리 건너편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순찰병이 등불을 들고 앞서갔다. 다리 너머 그늘진 벽 아래, 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손에는 찢어진 천 조각을 쥐고 있었고, 무릎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더 울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가 가장 먼저 몸을 낮췄다.

“괜찮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더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녀는 기록판을 닫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천천히 손을 내렸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야. 다친 곳이 있니?”

아이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하지만 손은 천 조각을 더 꽉 쥐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 천은 길 표시였습니까?”

아이는 놀란 듯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아이의 손에 있는 천 조각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저 자기 목소리만 조금 낮췄다.

“혹시 누군가가 그 천을 따라오라고 했나요?”

아이는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파란 천을 따라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건…….”

그가 손을 폈다. 천 조각은 파란색이었지만, 진흙과 물에 젖어 거의 검게 보였다. 낮에는 표식이었을 것이다. 밤에는 그림자와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푸리나는 아이의 손에 있는 천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망토를 보았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망토 찢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얼굴에 썼어.”

“너는 왜 내 얼굴을 그렇게 잘 읽어?”

“오래 봤으니까.”

푸리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망토 대신 머리끈 하나를 풀었다. 푸른빛이 조금 도는 리본이었다. 잠옷과 망토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그것만은 낮의 무대에서 떨어져 나온 소품 같았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그건…….”

“괜찮아. 망토는 안 찢었잖아.”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맞네. 협상안으로는 나쁘지 않아.”

푸리나는 리본을 아이에게 바로 건네지 않았다. 먼저 다리 옆, 빈터로 들어가는 낮은 나뭇가지에 묶었다. 등불이 닿자 푸른 리본이 어둠 속에서 작게 빛났다. 창에서 흘러온 시장의 노랑과 우물의 푸른빛이 그 리본 위에 잠시 섞였다. 아이는 그 빛을 보았다. 울음을 멈춘 얼굴은 아직 겁에 질려 있었지만, 눈은 리본을 따라 움직였다.

“자.”

푸리나가 말했다.

“이제 파란 천은 저기야. 그리고 저기로 가면 쉬는 자리. 내일은 더 잘 보이게 해둘게.”

아이는 아주 작게 물었다.

“엄마도 볼 수 있어요?”

푸리나는 대답하기 전에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성함을 알려줄 수 있니?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아이는 더듬더듬 이름을 말했다. 그레이는 그것을 한 번 듣고, 다시 물었다. 아이는 다시 말했다. 그레이는 세 번째로 확인했다. 아이가 조금 지친 얼굴을 하자,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틀리지 않게 적고 싶어서.”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에서 천 조각을 조금 덜 세게 쥐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 안의 피난길에서는 아이들이 수레 사이에 나뉘어 걷고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았다. 이쪽의 아이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이쪽에는 푸리나가 묶은 푸른 리본이 있었고, 그레이가 세 번 확인한 이름이 있었으며, 레이튼의 질문과 죠니의 낮은 한숨과 순찰병의 등불이 있었다.

하융은 창 안의 아이와 현실의 아이를 번갈아 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선이 오래 갈라지지 않았다. 현실의 아이가 훌쩍이며 리본을 보는 바람에, 창 안의 아이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하융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융 경.”

레이튼이 낮게 불렀다.

“듣고 있소.”

“방금 무엇을 보셨습니까?”

하융은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푸른 리본을 보았다.

“길을 잃은 아이를 보았소.”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아마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죠니는 다리 난간 옆에 서서 아이가 걸어올 방향을 살폈다.

“내일은 저쪽에도 등불 하나 더 둬야겠네. 파란 천이 밤에 검어지면, 그건 안내가 아니라 속임수야.”

그레이는 곧 적었다.

“야간 표식 색상 재검토. 등불 또는 반사 천 필요. 아이 동선 확인.”

푸리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 수 있겠어?”

아이는 푸리나의 손을 보다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푸리나는 아이의 손을 너무 세게 잡지 않았다.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손이 아니라, 돌다리를 건널 때 옆에 있어주는 손이었다.

하융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돌다리는 여전히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난간은 믿기 어려웠으며, 물소리는 어두웠다. 그러나 푸른 리본은 빈터의 입구에서 흔들렸다. 그것은 창 안에는 없던 빛이었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현실의 천에 묶여, 이제 누군가의 길 표시가 되고 있었다.

빈터에 도착하자 아이는 그제야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는 서둘러 달래지 않았다. 아이가 울 수 있게 조금 기다렸다. 죠니는 주머니에서 말린 과일 하나를 꺼내 푸리나에게 건넸고, 푸리나는 그것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아이는 망설이다가 받았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내 몫이었는데.”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진짜?”

“아니. 그냥 말해본 거야. 애한테 준 걸 다시 뺏으면 내가 너무 이상한 놈이 되잖아.”

아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약했지만, 울음만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환하게 말했다.

“좋아. 방금 그거 봤지? 이건 거의 박수 직전이야.”

죠니가 말했다.

“그걸 그렇게 키우면 애가 부담스러워해.”

“알았어. 작은 박수 직전.”

“그것도 좀.”

그레이가 조용히 아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지금은 웃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입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융은 그 말을 들었다. 웃지 않아도 된다는 말. 울어도 된다는 말보다 더 작은 말이었다. 그러나 피난길에서는 그런 작은 말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창 안의 세계에서는 아이가 길을 잃지 않았으므로, 그런 말을 들을 일도 없었다. 이쪽의 아이는 길을 잃었고, 그래서 그 말을 들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질문은 아직도 멀리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융이 그 질문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말린 과일을 천천히 씹는 것을 보았다. 푸른 리본이 등불 아래 흔들렸고, 그레이의 펜이 이름 하나를 조심스럽게 마무리했다. 죠니는 다리 쪽을 다시 확인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아이의 어머니가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은 방향을 묻고 있었다. 푸리나는 아이의 옆에서 괜히 먼지 위에 작은 별을 그렸다가, 아이가 보는 것을 확인하고 별 옆에 더 작은 빵을 그렸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창에서 본 길에는 이 아이가 없었소.”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소. 길은 정돈되어 있었고, 수레는 덜 막혔고, 표식은 제자리에 있었소. 그래서 이 아이가 길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는 말을 멈췄다. 설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명으로 만들면 아이의 울음도, 리본도, 돌다리의 물소리도 너무 빨리 의미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레이가 대신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이 아이를 찾았습니다.”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융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다. 성문 쪽 창고에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반쯤 넋이 나가 찾고 있었다고 했다. 순찰병이 달려가 데려왔고, 여인은 아이를 보자마자 무릎이 풀리듯 주저앉았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쥔 채 어머니에게 안겼다. 여인은 푸리나를 알아보고 무언가 예를 갖추려 했으나, 푸리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나중에. 지금은 아이부터 안아.”

여인은 울면서 아이를 안았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조용해졌다. 죠니는 괜히 다리 쪽을 보았고, 레이튼은 등불을 조금 낮췄으며, 그레이는 이름 옆에 작은 표시를 하나 했다. 하융은 그 표시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아마 확인 완료, 혹은 가족 재회, 혹은 그레이만 알아보는 더 조용한 말일 것이다.

돌다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푸른 리본이 흔들렸다.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더 나은 피난길의 빛은 아직도 어딘가에 있었다. 그 빛은 현실의 다리 위에 내려앉아, 내려앉은 돌판과 흔들리는 난간과 아이의 젖은 신발을 비췄다. 빛이 있다고 길이 저절로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는 조금 더 잘 보였다.

하융은 다리 앞 빈터를 다시 보았다.

“이곳에 표식을 세우면 좋겠소.”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푸른색만으로는 부족하오. 밤에는 검어지오.”

“반사되는 천이나 등불을 함께 쓰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표식을 놓쳤을 때 물을 사람도 필요하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질문은 순찰 동선으로 이어지겠군요.”

죠니는 난간을 한 번 더 눌렀다.

“그리고 이 난간은 아침까지 기대지 말라고 표시해. 내가 보기엔 사람보다 먼저 이쪽이 쉬고 싶어 해.”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숨 고르는 자리, 푸른 리본, 등불, 난간 수리, 순찰 동선. 그리고…….”

그녀는 아이와 어머니를 보았다.

“말린 과일도 조금.”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그건 네 예산에서 내.”

“알았어.”

“너 진짜로 할 생각이지?”

“응.”

죠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많이는 말고. 배고픈 사람 앞에서 간식만 나눠주면 괜히 더 슬퍼질 때도 있어. 빵이랑 같이 줘.”

푸리나는 그 말을 곧장 받아들였다.

“빵이랑 같이. 좋아.”

그레이가 적었다.

“아동 대상 소량 간식은 배급과 함께. 단독 배포 금지.”

죠니가 중얼거렸다.

“내 농담이 행정 문구가 되는 건 아직도 좀 적응이 안 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농담이라도 쓸모가 있으면…… 적습니다.”

“그럼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죠니, 축하해. 네 농담이 정책이 됐어.”

“별로 받고 싶지 않은 영광이야.”

하융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아주 조금 났다. 웃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짧게 흩어졌다. 그는 창 안의 피난길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더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창은 그를 잡아당기기보다, 현실의 빈터 위로 옅은 흙빛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푸른 리본을 보았고, 아이의 이름을 보았고, 난간의 흔들림을 보았다.

그는 창 너머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이쪽 길에서, 돌 하나와 리본 하나와 아이의 젖은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그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3막 — 우물가의 이름

우물은 피난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돌다리에서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낮은 담장과 기울어진 나무 십자가 사이에 오래된 우물 하나가 나왔다. 낮에는 사람들이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갔을 것이다. 밤에는 달라졌다. 골목은 좁았고, 벽은 젖어 있었으며, 우물의 돌턱에는 오래 손이 닿은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물을 길을 때마다 짚고, 기대고, 숨을 고르고, 때로는 두레박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내려다보았을 자리였다. 하융은 우물 앞에서 멈췄다. 창은 이미 열려 있었다. 이번에는 새로 열리는 소리도 없었다. 우물은 현실에도 있었고, 창 너머에도 있었으며, 두 우물의 물빛은 너무 닮아 있었다.

푸리나는 곧장 우물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하융의 발이 멈춘 것을 보고, 한 걸음 뒤에서 섰다. 죠니도 말없이 골목 입구 쪽을 살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등불을 조금 낮춰 들게 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열지 않았다. 먼저 하융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 작은 지연이 하융에게는 느껴졌다. 기록하기 전에 사람을 보는 손. 적기 전에 숨을 확인하는 눈.

“이곳입니까?”

그레이가 물었다.

“그렇소.”

하융은 우물의 돌턱을 보았다. 창 안에서는 아이가 그 돌턱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아이는 두레박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며 발끝을 까딱였고, 옆의 아이는 웃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다음 장면에서 두레박의 물은 작은 그릇에 담겼다. 그 다음 장면에서 아이는 누워 있었다. 하융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이 맑아 보였소.”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 말이 별로 좋은 시작은 아닌데.”

“맑았소. 너무 맑았소. 물 위에 아주 얇은 막이 있었고, 두레박 줄에는 검은 얼룩이 있었소. 처음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레이가 그제야 기록판을 열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소리는 아주 작았다.

“두레박 줄의 얼룩. 물 위의 막. 냄새는 어떠했습니까?”

하융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현실의 물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등불을 가까이 가져가자 빛이 물 위에 흩어졌다. 잠깐, 창 너머의 물빛과 현실의 물빛이 겹쳤다. 하융은 그 겹침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냄새는 피할 수 없었다. 젖은 돌, 오래된 나무, 가라앉은 흙, 그리고 희미하게 신맛이 나는 무언가.

“신 냄새가 조금 있소. 썩은 냄새와는 다르오. 물이 오래 고였거나, 무언가 흘러든 것 같소.”

그레이는 적었다.

“사용 중단이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바로 물었다.

“지금?”

“네. 확인 전까지는 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죠니가 골목 밖을 보았다.

“문제는 대체 물이야. 그냥 쓰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른 데로 몰릴 거야. 밤에 물 때문에 몰리면 다치기 딱 좋고.”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까운 대체 급수 지점을 확인해야겠습니다. 그 뒤에 이 우물은 점검 중이라고 알리는 편이 좋겠군요. ‘오염’이라는 말을 먼저 쓰면, 공포가 우리보다 빨리 달릴 겁니다.”

푸리나는 우물의 돌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과장된 표정이 없었다. 무대를 앞둔 배우의 얼굴도 아니었고, 장난을 꾸미는 극장주의 얼굴도 아니었다. 등불빛이 그녀의 눈가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점검 중. 대체 물 안내. 아이와 노인 먼저 확인.”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배탈, 구토, 열, 어지러움. 그리고…… 이 우물을 쓴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융은 그 말에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이름. 창 안의 장부 끝에는 이름이 없었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그 짧은 말은 마른 잉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하융은 우물가의 돌을 보았다. 현실의 돌에는 아직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창 너머에서는 이미 이름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레이 경.”

“네.”

“저 창에서 본 일을 말하면, 저 아이들의 죽음은 이쪽 세계의 점검 항목이 되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하융은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것이 두렵소. 죽은 세계의 슬픔을 이쪽의 편의로 쓰는 것 같아서.”

골목은 잠시 조용해졌다. 멀리서 밤 순찰의 발소리가 한 번 지나갔고, 우물 안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우물가의 돌을 발끝으로 건드리다 멈췄다. 레이튼은 하융을 보았지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레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록판을 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쓰지도 않았다. 펜촉은 종이 위에 떠 있었다.

“편의로만 쓰면 안 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골목에서는 작은 목소리가 더 멀리 갔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숫자나 절차로만 바꾸면…… 그건 또 한 번 잃어버리는 거니까요.”

하융은 천천히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우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차가운 관료의 얼굴이 아니었다. 새벽까지 장부를 붙들고 있다가, 이름 하나가 틀린 것을 발견하면 다시 처음부터 확인할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되돌려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까지 편의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멈췄다. 더 말하면 하융의 질문을 대신 결론 내릴까 봐, 스스로 문장을 접은 것처럼 보였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네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름은 없어. 하지만 네가 혼자 들고 있어야 하는 이름도 없어.”

하융은 우물 안을 보았다. 물 위에서 등불이 흔들렸다. 창 너머의 아이가 다시 보였다. 붉은 끈. 작은 손. 웃음. 그리고 누운 얼굴. 하융은 손가락을 펴고, 우물의 돌턱에 닿지 않을 만큼 가까이 가져갔다.

이름은 물가에서 잘 미끄러진다. 한 번 떨어지면 깊은 데로 간다. 그 깊은 곳에서 이름은 숫자가 되고, 숫자는 줄이 되고, 줄은 마른 잉크가 된다. 명名이 사라진 사死는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사死는 다시 같은 골목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오늘 밤, 이 우물가에서, 나는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길어 올려야 했소. 두레박이 아니라 혀끝으로, 장부가 아니라 숨으로.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마리암.”

그레이가 적었다.

“마리암.”

“일곱 살, 혹은 여덟 살. 손목에 붉은 끈을 묶고 있었소. 오른쪽 무릎에 작은 흉터가 있었소. 물을 마시기 전에 웃었소.”

그레이는 잠깐 펜을 멈췄다. 그리고 “웃었소”까지 적지는 않았다. 대신 이름 옆에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하융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점은 이상하게도 충분해 보였다.

“아람.”

“아람.”

“확실하지는 않소. 다른 아이가 그 이름으로 부른 듯했소. 파란 조끼를 입었고, 두레박을 같이 잡았소.”

“확실하지 않음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사르키스.”

그레이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사르키스.”

“노인이오. 아이들에게 먼저 물을 주었소. 자신은 가장 늦게 마셨고, 증상을 숨겼소. 아마 아이들이 먼저 치료받기를 바랐을 것이오.”

죠니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은 꼭 그렇게 해.”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우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기가 늦게 아프면 남들도 늦게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하지. 실제로는 반대야. 주변 사람이 더 늦게 알아차려. 본인이 숨기니까.”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 확인은 본인 말만 믿으면 안 됩니다. 특히 노인과 아이 보호자는 따로 봐야 합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내 말이 또 장부로 갔네.”

“필요한 말이라서요.”

“그럼 됐어. 이번 건 농담 아니었으니까.”

레이튼은 우물가에서 조금 떨어져 골목의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순찰병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 우물을 쓰는 사람들은 주로 어느 쪽에서 옵니까?”

“북쪽 피난민들이 많습니다. 성문 창고보다 가까워서…….”

“가까운 물은 대개 먼저 선택되지요. 그 물이 안전한지는 나중 질문이 되고요.”

순찰병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낮에 막았어야 했습니까?”

레이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순찰병의 얼굴을 잠시 보고, 질문을 바꾸었다.

“낮에 이 물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까?”

“아뇨.”

“냄새를 맡았습니까?”

“아니요. 그냥 사람들이 쓰길래…….”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죄인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다음 질문을 앞당기는 일입니다. 누가 이 우물을 쓰는가. 언제부터 썼는가. 대체 물은 어디인가. 증상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순찰병은 고개를 숙였다.

“예.”

푸리나는 그 말을 받듯 앞으로 나섰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는 우물 점검이야. 겁주지 말고, 대신 늦지도 말고. ‘점검 중’이라고 말해. 물은 저쪽 임시 창고에서 받게 하고, 아이랑 노인은 그레이 쪽으로 데려와. 레이튼, 말 순서 잡아줘.”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먼저 대체 급수 지점을 말하고, 그 다음 점검 사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은 금지부터 들으면 길을 잃습니다.”

“죠니.”

푸리나가 부르자, 죠니는 이미 골목 입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아. 몰리는 사람 있으면 길을 틀어줄게. 그리고 누가 물 뜨겠다고 우기면 내가 조금 무섭게 서 있으면 되고.”

“조금만 무섭게.”

“난 원래 많이 무서운 쪽은 아니야.”

푸리나가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그냥 네 자기평가가 흥미로워서.”

“교수한테 옮았어.”

레이튼이 웃었다.

“저는 전염성이 낮은 편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 짧은 농담 덕분에 골목의 공기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하융은 우물가에서 물러섰다. 그레이는 기록판 한 장을 찢어 우물 점검 표식을 만들었다. 푸리나는 커튼 고리 끝으로 종이를 누르며, 순찰병에게 끈을 빌렸다. 종이는 바람에 흔들렸고, 그 위의 글씨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점검 중.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것.
아이와 노인은 먼저 알려주십시오.

그레이가 글씨를 보더니, 마지막 줄 아래에 작게 빵과 물동이 표시를 그렸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꽃은?”

그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없애겠습니다. 급한 안내라서요.”

푸리나는 아주 잠깐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엔 없어도 돼.”

죠니가 낮게 말했다.

“드물게 빠른 포기네.”

“나도 때와 장소는 봐.”

“그럼 다행이고.”

우물에는 임시로 끈이 둘러졌다. 순찰병 둘이 골목 입구와 반대편에 섰다. 죠니는 그들이 서는 위치를 조금씩 바꿨다. 한 명은 너무 안쪽에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빛을 등지고 서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죠니는 그런 것들을 짧게 지적했다.

“거기 서면 사람들이 네 뒤로 지나가. 한 걸음 왼쪽. 너는 등불을 얼굴 옆으로 들어. 금지하는 사람이 얼굴이 안 보이면 괜히 더 싸움 나.”

순찰병들이 곧장 자세를 고쳤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작게 감탄했다.

“죠니, 너 이런 거 잘하네.”

“사람이 몰리는 길목에서 싸움 안 나게 세우는 건 기사단 일이야. 창 들고 달리는 것만 기사단 일이 아니거든.”

“음. 좋다. 그 말도 나중에 써야지.”

“쓰지 마. 너무 업무 같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맞는 말입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가,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장부로 가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사이 레이튼은 순찰병과 함께 가까운 피난민 숙소로 향했다. 그의 말은 멀리서 들려왔다. 크지 않았지만, 사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이 우물은 지금 점검 중입니다.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나 어르신께서 오늘 이 물을 드셨다면, 잠시 확인만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독입니까?”

레이튼은 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도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그래서 확인이 끝날 때까지 다른 물을 쓰려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소문보다 순서입니다.”

소문보다 순서.

하융은 그 말을 속으로 반복했다. 레이튼의 말은 늘 그렇게 조용히 물가에 놓였다. 누군가 발을 디딜 수 있을 만큼만.

푸리나는 우물 앞에 남았다. 그녀는 우물의 돌턱을 만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하융은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우물을 보고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우물가를 지나갔을 사람들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직 공연하지 않은 무대의 빈자리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하.”

“응.”

“꽃을 그리지 않았구려.”

푸리나는 우물에 묶인 안내문을 보았다.

“응. 이번엔 그레이가 맞아. 꽃이 들어가면 예뻐지는데, 예뻐지면 사람들이 잠깐 덜 급하게 읽을 것 같았어.”

“전하답지 않게 조심스럽소.”

“나도 가끔 그래.”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작았다.

“그리고 여기엔 아직 꽃보다 이름이 먼저인 것 같아서.”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푸리나가 평소처럼 길게 꾸민 대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이름이 먼저. 꽃은 나중. 무대도, 조명도, 박수도 나중. 지금은 우물가에서 이름을 놓치지 않는 일이 먼저였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하융 님.”

“듣고 있소.”

“혹시 더 보이는 이름이 있습니까?”

하융은 다시 우물을 보았다. 창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의 손, 노인의 굽은 등, 장부의 마른 잉크. 그는 그 안을 오래 바라보지 않으려 했지만, 아주 짧게는 봐야 했다. 이름이 있을지도 몰랐다. 잃어버리기 전에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린.”

그레이가 적었다.

“나린.”

“아마 아이의 어머니요. 직접 물을 마셨는지는 모르오. 아이를 안고 있었소.”

“나린. 보호자 가능.”

“그리고…… 바르단. 우물가에서 두레박을 고친 남자요. 손에 검은 얼룩이 묻었소.”

“바르단. 두레박 수리. 손 오염 가능.”

그레이의 글씨는 작았다. 그러나 이름들은 그 작은 글씨 안에서 자리를 얻었다. 하융은 그 모습을 오래 보았다. 이름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창 너머의 장면이 조금씩 덜 미끄러졌다. 완전히 붙잡힌 것은 아니었다. 죽은 가능성은 여전히 죽은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물속으로만 가라앉지는 않았다.

골목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아이를 안은 여인 하나가 그레이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에는 겁이 있었고, 팔에는 잠든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이마는 조금 뜨거워 보였다. 그레이는 바로 기록판을 접고, 손등으로 아이 이마 가까이의 공기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언제부터 열이 있었습니까?”

“저녁부터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오늘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까?”

“조금…… 아이가 목마르다고 해서.”

그레이는 여인을 탓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순찰병에게 약재 상자와 따뜻한 물을 요청했다. 푸리나는 여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평소처럼 크게 웃지 않았다.

“앉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아이를 계속 안고 있으면 팔이 먼저 굳어.”

여인은 푸리나를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저는…….”

“지금은 팔부터. 예는 나중에 받아도 돼.”

죠니가 빈 나무상자 하나를 가져오다가, 못이 없는지 먼저 손으로 훑었다.

“이건 앉아도 돼. 내가 확인했어.”

그레이가 여인에게 말했다.

“아이 이름을 알려주세요.”

“마리암입니다.”

하융은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도 멈췄다. 푸리나는 하융을 보지 않았다. 죠니도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멀리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물가의 등불만이 조금 흔들렸다.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다시 물었다.

“마리암. 맞습니까?”

“네. 마리암이에요.”

하융은 아이의 손목을 보았다. 붉은 끈이 있었다. 현실의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열이 있었고, 얼굴은 붉었고, 잠든 숨이 고르지 않았다. 그러나 숨이 있었다. 창 너머의 마리암은 누워 있었다. 이쪽의 마리암은 어머니의 팔 안에서 작게 몸을 웅크렸다.

하융은 손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지금은 여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아주 짧게.

그레이는 마리암의 이름 옆에 현실의 표시를 했다. 하융은 그 표시를 보았다. 창 너머의 이름과 현실의 이름이 같은 줄에 닿지 않도록, 그레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칸을 나누었다. 죽은 가능성과 살아 있는 아이가 섞이지 않게. 잊지 않되, 겹쳐 삼키지 않게.

“열은 높지만 의식은 있습니다. 바로 치료소로 보내겠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빠르지도 않았다. 여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속도였다.

“괜찮을까요?”

여인이 물었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쉽게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봐야 합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여긴 우리가 볼게.”

그레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우물 명단이…….”

“그레이.”

푸리나가 이번에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이름은 계속 받을게. 네가 돌아오면 틀린 데 없는지 같이 확인하자.”

그레이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여인과 아이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그레이가 그 곁을 따라갔다. 그녀의 작은 등이 등불 사이로 멀어졌다. 하융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창 너머의 장부에서는 마리암이 숫자가 되었지만, 현실의 길에서는 그레이가 마리암의 이름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물 안에서 물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하융은 우물가에 서서 오래 숨을 골랐다. 창은 열려 있었다. 죽은 세계의 푸른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 빛은 이제 우물 속으로만 내려가지 않았다. 골목의 젖은 벽, 안내문 위의 잉크, 죠니가 확인한 나무상자, 푸리나의 손등, 레이튼의 목소리가 닿은 사람들의 얼굴 위에 조금씩 묻어 있었다.

죠니가 옆에 섰다.

“괜찮아?”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 대답, 오늘 두 번째네.”

“그렇소?”

“응. 그래도 나쁘진 않아. 거짓말보다는 낫지.”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는 이런 때에도 참으로 현실적인 말을 하는구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라서. 너무 멋진 말은 교수나 여왕님 쪽이 하고, 나는 물통이랑 상자나 보는 게 맞아.”

“그것도 필요한 일이오.”

“알아. 그래서 하는 거야.”

죠니는 우물에 둘러진 끈이 헐겁지 않은지 다시 확인했다. 하융은 그 손을 보았다. 더 온전한 죠니가 있는 창이 아주 먼 곳에서 희미하게 열렸다가, 아직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 장면은 다음 길목의 것이었다. 지금은 우물이었다.

푸리나는 안내문을 한 번 더 눌러 고정했다. 그리고 하융 쪽으로 돌아왔다.

“이름 더 들리면 말해줘. 안 들리면 안 들린다고 말해도 돼.”

“전하께서는 내가 무엇이든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구려.”

“그럼 안 되잖아.”

푸리나는 우물의 물빛을 잠깐 보다가, 금세 시선을 돌렸다.

“너는 창문이 아니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로 숨을 쉬었다. 우물의 냄새는 여전히 있었다. 신 냄새, 젖은 돌, 오래된 나무. 그러나 그 사이에 다른 냄새도 섞여 들어왔다. 죠니가 가져온 말린 과일의 희미한 단내, 푸리나의 망토에 묻은 시장 먼지, 그레이가 지나가며 남긴 약초 냄새, 레이튼의 찻주전자에서 식지 않은 차의 향.

하융은 우물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겠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튼이 골목 안으로 돌아왔다.

“대체 급수 안내는 시작되었습니다. 몇몇 분은 이미 치료소로 이동했고요. 소문은 아직 작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소문에도 크기가 있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작을 때는 질문으로 다룰 수 있고, 커지면 군중이 됩니다.”

“그건 좀 무섭네.”

“예. 그래서 작을 때 말을 걸어야 하지요.”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내려다보았다가, 우물 앞에 걸린 안내문을 보았다.

“오늘은 막을 올리는 게 아니라, 막을 내리는 쪽이네.”

죠니가 물었다.

“우물 막?”

“사용 중지 막.”

“이름은 이상한데 뜻은 맞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닫아야 하는 것도 극의 일부일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웃었다.

“좋아. 오늘은 닫는 장면.”

하융은 우물을 한 번 더 보았다. 창은 닫히지 않았다. 현실의 우물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끈이 둘러졌고, 안내문이 붙었고, 이름이 적혔다. 마리암은 치료소로 갔다. 아람과 사르키스와 나린과 바르단은 아직 확인해야 했다. 끝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물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길어 올려지지 않았다.

그 정도면, 오늘 밤 이 우물가에서는 충분히 큰 일이었다.

하융은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불이 뒤따랐다. 창 너머에서 온 푸른빛은 아직 그의 옆을 따라왔지만, 이제 그것은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젖은 돌의 표면을 비추고, 안내문의 젖은 모서리를 비추고, 저 멀리 치료소로 향하는 그레이의 등을 비추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걸었다.

우물은 뒤에 남았고, 이름은 종이 위에 남았다.

그리고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4막 — 접시의 무게

치료소로 향하는 골목에는 등불이 늦게까지 켜져 있었다. 그레이는 마리암과 그 어머니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고, 문턱에서 잠시 멈춰 하융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결국 작게 고개만 숙였다. 하융도 고개를 끄덕였다.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고, 그레이는 그 숨이 계속 이어지는지 확인하러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약초 냄새와 젖은 천 냄새가 한 번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스며들었다.

푸리나는 치료소 문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그녀는 문에 붙은 낡은 표식을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더니, 떨어질 것 같던 모서리를 다시 붙였다. 별일 아닌 행동이었다. 왕이 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런 일을 종종 했다. 벽에 붙은 안내문이 비뚤어져 있으면 바로잡고, 무대 뒤에서 누가 밟고 넘어질 끈이 있으면 묶어두고, 아이들이 만든 종이 왕관이 구겨져 있으면 손가락으로 펴주었다. 하융은 그 손끝을 보고, 창 안의 다른 푸리나를 보았다. 조금 덜 지친 푸리나. 잠을 더 잔 푸리나. 누군가 대신 벽의 표식을 붙여주어, 그녀가 굳이 멈추지 않아도 되었던 세계의 푸리나.

그 창은 조용히 열렸다.

이번에는 우물처럼 차갑지 않았다. 시장처럼 눈부시지도 않았다. 더 나은 동료들이 있는 창이었다. 푸리나가 덜 지쳐 웃는 세계, 레이튼의 책상이 조금 더 정리된 세계, 그레이의 눈 밑 그늘이 얕은 세계, 죠니가 절뚝이는 박자를 조금 덜 숨기는 세계. 그리고 하융 자신이 창 앞에 오래 앉아 있지 않아도 되었던 세계. 그 세계는 비극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보게 되었다. 슬픈 창은 피하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정한 창은 피하기 어렵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하융은 그제야 자기가 치료소 문을 오래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죠니는 언제 가져왔는지 다시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시장에서 가져온 빵 조각과 말린 과일, 치즈 몇 조각이 남아 있었다. 밤공기에 조금 말라 가장자리가 굳어 있었지만, 먹을 수는 있었다.

“그대는 접시를 잃어버리지 않는구려.”

“그건 중요한 능력이야. 전장에서 창 잃어버리는 것보다 덜 멋없긴 한데, 배고플 때는 이쪽이 더 중요해.”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죠니, 그 접시 아직도 있었어?”

“응. 누가 책임지라고 했잖아.”

“내가?”

“네가 위험한 말은 책임진다고 했고, 난 접시를 책임진다고 했지. 계약은 지켜야지.”

레이튼이 가볍게 웃었다.

“훌륭합니다. 오늘 밤 가장 안정적인 행정 단위는 저 접시였군요.”

“교수,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접시도 부담스러워해.”

“그릇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주장은 흥미롭군요.”

“그건 묻지 마. 지금 시작하면 새벽까지 갈 것 같으니까.”

푸리나는 치료소 벽에서 손을 떼고 걸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하융이 창 안에서 본 푸리나와 비교하려는 순간, 현실의 푸리나는 접시 위의 빵을 하나 집어 들고 너무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럼 먹자. 오늘의 점심.”

죠니가 눈썹을 올렸다.

“밤이야.”

“조용한 장면에서는 시간도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야.”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이상하게 네가 말하니까 그냥 넘어가고 싶어지네.”

“그게 연출력이야.”

“그건 사기랑 가까워.”

“연출이라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작게 웃었다. 치료소 옆 골목에는 의자도 없고 탁자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 담장 곁에 서거나, 빈 나무상자를 조심스럽게 확인한 뒤 앉았다. 죠니는 먼저 상자의 못을 살폈고, 푸리나는 그가 너무 당연하게 그러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고, 그레이는 아직 치료소 안에 있었다. 그녀의 빈자리는 작지 않았다. 접시 위의 빵이 하나 남아 있었고, 푸리나는 그것을 집지 않았다.

“그건 그레이 몫.”

죠니가 먼저 말했다.

“나도 알아.”

푸리나는 손을 거두었다.

“그냥 확인한 거야.”

“네가 확인할 때 표정이 좀 위험해.”

“내가 그렇게 먹보처럼 보여?”

“말해야 돼?”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고, 레이튼은 찻잔을 나누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 안의 더 덜 지친 푸리나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이 피곤한 농담이 없었다. 창 안의 죠니는 조금 더 편하게 서 있었고, 현실의 죠니는 오른발에 무게를 덜 싣고 있었다. 하융은 그걸 보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보았다. 죠니는 자기가 숨기는 것들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하융은 여러 가능성 속의 죠니를 보았기 때문에, 현실의 죠니가 어디를 조금 더 아끼는지, 언제 손목을 늦게 쓰는지, 어느 순간 농담으로 숨을 돌리는지 너무 잘 알았다.

죠니가 빵을 내밀었다.

“왜 그렇게 봐?”

“보고 있었소?”

“응. 너무 오래 봤어. 내가 빵인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로.”

하융은 빵을 받지 못하고 잠시 멈췄다.

“미안하오.”

“사과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빵을 받으면 돼.”

하융은 빵을 받았다. 현실의 빵은 조금 딱딱했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부드럽게 들어가지 않고, 가장자리가 먼저 갈라졌다. 창 안의 세계에서는 아마 더 따뜻한 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또 들었다. 그리고 곧, 더 온전한 죠니가 있는 창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 창 속의 죠니는 접시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말을 타고 있었다. 자세가 조금 더 곧았고, 얼굴에는 피곤한 농담 대신 조용한 여유가 있었다. 푸리나는 그 옆에서 크게 웃고 있었고, 그레이는 장부를 덜 급하게 넘겼으며, 레이튼은 찻잔을 놓을 시간이 있었다. 하융은 그 창을 보며 숨을 아주 조금 놓쳤다. 그것은 죽은 세계가 아니었다. 누구도 천에 덮여 있지 않았고, 우물에는 끈이 둘러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멀쩡했다.

“저쪽이 보여?”

죠니가 물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알고 있었소?”

“네가 나를 보다가, 나 말고 다른 걸 보는 얼굴을 했어. 몇 번 봤거든.”

푸리나는 빵을 들고 있던 손을 멈췄다. 레이튼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골목은 조용했다. 치료소 안쪽에서 누군가 낮게 기침하는 소리와, 그레이가 지시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저쪽에는 그대가 조금 더 온전하오.”

죠니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자기 오른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렇소.”

“말은 잘 타?”

“잘 타오.”

“그건 좀 부럽네.”

죠니는 빵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나와서, 하융은 오히려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씹던 것을 삼키고 나서, 창이 있는 쪽을 보는 듯 하융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 물론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보이지 않는 것에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는 법을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쪽 나는 지금 여기 없지?”

하융의 손 안에서 빵이 조금 눌렸다.

“없소.”

“그럼 됐어.”

“그것으로 되었소?”

“응.”

죠니는 접시를 하융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저쪽 놈이 더 멀쩡하면 좋겠네. 솔직히 부럽긴 해. 말도 잘 타고, 덜 아프고, 네가 보기에도 그럴싸하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겠지.”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접시의 균형을 맞추듯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눌렀다.

“근데 그쪽 놈은 지금 네 옆에 없잖아. 그러니까 이쪽의 좀 망가진 놈이 빵이나 나눠주면 되는 거야.”

푸리나는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레이튼도 질문하지 않았다. 하융은 접시를 보았다. 딱딱한 빵, 조금 마른 치즈, 말린 과일 두 조각. 창 안의 더 나은 죠니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현실의 죠니는 접시를 밀어주고 있었다.

하융은 그 접시가 이상하게 무겁다고 생각했다.

무게는 有하오. 창외之人은 가볍고, 좌측之접시는 현실처럼 무겁소. 저 너머의 완전한 이는 바람 같고, 내 앞의 흠 있는 이는 빵을 건네는 손을 가졌소. 만일 생이란 것이 어디에 더 머무는가 묻는다면, 나는 오늘 밤 이 접시의 가장자리를 가리킬 수밖에 없겠구려. 결함이 있어 무겁고, 곁에 있어 더욱 무겁소.

그 생각은 너무 정직해서, 하융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빵을 조금 떼어 먹었다. 빵은 예상대로 딱딱했고, 예상보다 고소했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맛있소.”

죠니가 그를 보았다.

“거짓말은 아니지?”

“거짓말은 아니오. 조금 딱딱하나, 먹을 수 있소.”

“그게 정확한 평이네. 다음부터 시식 담당도 네가 해.”

푸리나가 말했다.

“죠니, 네가 준 빵에 너무 엄격한 평가를 요구하지 마.”

“먹을 수 있다는 건 좋은 평가야. 배고플 때는 특히.”

레이튼은 찻잔을 하융에게 건넸다.

“차도 드시겠습니까?”

“고맙소.”

하융은 찻잔을 받았다. 프롤로그의 방 안에서 식어 있던 차와 달리, 지금 찻잔은 아직 따뜻했다. 아주 뜨겁지는 않았다. 손을 데울 정도로만 따뜻했다. 하융은 그 온도를 느끼며 창 안의 다른 레이튼을 보았다. 그 레이튼은 더 많은 책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은 더 정교했고, 대답을 기다리는 침묵은 더 여유로웠다. 현실의 레이튼은 골목 한쪽에서 찻잔을 나눠주고 있었고, 등불이 약해지자 주전자 표면에 맺힌 빛이 흔들렸다.

“레이튼.”

“예, 하융 경.”

“저쪽에는 교수도 조금 더…… 여유로워 보였소.”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든 채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까? 그건 상당히 매력적인 가능성이군요.”

“부럽지 않소?”

“부럽습니다.”

레이튼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여유로운 저는 분명 좋은 질문을 더 천천히 골랐겠지요. 하지만 오늘 밤의 저는 조금 빠르게 물어야 했고, 그 덕분에 어떤 질문은 다듬어지지 못한 채 나왔을 겁니다.”

“그것이 아쉽지 않소?”

“아쉽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다듬어진 질문만이 사람을 돕는 것은 아니니까요.”

레이튼은 찻잔을 하나 더 채워 그레이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가끔은 덜 다듬어진 질문이, 더 빨리 손을 잡을 때도 있습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들었다. 레이튼다운 말이었다. 설명처럼 보일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의 손은 그레이의 찻잔을 따뜻한 곳에 옮겨두고 있었다. 말보다 그 동작이 먼저 닿았다.

치료소 문이 열렸다. 그레이가 나왔다. 얼굴에는 피로가 있었지만, 아주 조금 안도도 있었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리암은?”

“열은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은 돌아왔습니다. 물을 더 마시지는 않았고, 바로 조치했습니다. 아직 지켜봐야 합니다.”

푸리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아. 지켜보자.”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이름이 맞았습니다.”

하융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그레이는 이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몫으로 남은 찻잔을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이건…….”

죠니가 말했다.

“네 몫. 식기 전에 마셔. 오늘 밤에는 식은 차가 너무 많았어.”

그레이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푸리나가 남은 빵을 가리켰다.

“빵도 있어. 조금 딱딱하지만 하융이 먹을 수 있대.”

“그건 권유입니까, 경고입니까?”

그레이가 드물게 작게 물었다.

죠니가 곧장 대답했다.

“둘 다. 정확한 정보가 좋은 정보니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빵을 조금 떼어 먹었다. 그녀는 맛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천천히 씹었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며 또 다른 그레이의 창을 보았다. 더 쉬는 그레이. 더 적게 확인하고, 더 적게 자책하고, 더 적은 이름을 잃은 세계의 그레이. 그레이의 장부에는 사망자보다 배급 완료 표시가 많았고, 그녀는 밤에 찻잔을 들고 조금 더 오래 앉아 있었다.

하융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레이 경.”

“네.”

“그대가 조금 덜 지친 세계도 보았소.”

그레이는 찻잔을 든 채 멈췄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 세계의 그대는 조금 더 오래 앉아 있었소.”

그레이는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찻잔을 잡은 손가락 끝이 약간 붉었다. 뜨거워서가 아니라, 밤새 기록판과 약재 상자를 오간 탓이었다.

“좋은 세계네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보았다. 죠니도 말을 멈췄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조심스럽게 접시 가장자리에 내려놓고, 조금 생각한 뒤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리암의 열을 먼저 봐야 합니다. 앉는 건 그 뒤에 하겠습니다.”

그 말에는 체념이 없었다. 과장된 사명감도 없었다. 그저 순서가 있었다. 하융은 그 순서가 그레이를 닳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동시에 그 순서가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도 알았다. 창 안의 쉬는 그레이는 아름다웠다. 현실의 그레이는 다시 치료소 문을 힐끗 보았다.

푸리나가 빵을 하나 집어 그레이의 손에 더 얹었다.

“그 뒤에 앉을 때 먹어.”

“전하, 저는…….”

“명령은 아니고 예약.”

죠니가 말했다.

“예약이면 지켜야지. 여왕님이 이상한 방식으로 상냥할 때는 그냥 받아두는 게 편해.”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지만, 빵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먹겠습니다.”

“나중에 말고, 가능한 빠른 나중.”

푸리나가 덧붙이자, 그레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빠른 나중에 먹겠습니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훌륭한 타협입니다.”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더 나은 동료들의 창은 아직 열려 있었다. 그 창의 빛은 희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에게는 그 빛이 위로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융에게는 조금 아팠다. 저쪽에서는 모두 조금 덜 닳았다. 저쪽에서는 푸리나가 망토 끝을 덜 더럽혔고, 죠니가 오른발에 무게를 조금 더 실었고, 레이튼의 질문은 조금 더 고요했고, 그레이는 찻잔 앞에 조금 더 오래 앉았다.

하융은 무심코 말했다.

“저쪽이 더 좋은 세계일지도 모르오.”

말이 나온 뒤에야, 그는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낮았는지 알았다. 골목의 등불이 흔들렸다.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레이튼은 질문을 준비하지 않았으며,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빵을 하나 더 떼어 먹었다.

“더 좋은 세계라는 게 있으면, 아마 그런 식이겠지. 덜 다치고, 덜 잃고, 잠도 좀 자고. 나도 그런 세계 있으면 싫진 않아.”

“그럼 왜…….”

하융은 말을 멈췄다. 왜 이쪽인가. 왜 이 접시인가. 왜 이 피곤한 밤인가. 왜 마리암이 열이 나는 세계인가. 질문은 많았지만, 어느 것도 입 밖으로 온전히 나오지 않았다.

죠니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가, 하융이 더 잇지 않자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왜 이쪽이냐고?”

하융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평소처럼 바로 농담하지 않았다. 빵과 치즈와 말린 과일이 남은 접시를 보더니, 그중 가장 덜 딱딱한 빵 조각을 하융 앞으로 밀었다.

“모르지.”

그 대답은 너무 허술했다. 하지만 죠니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나는 세계 고르는 법 같은 건 몰라. 저쪽이 더 나은지, 이쪽이 더 맞는지, 그런 건 교수한테 물어봐. 아마 교수도 바로 답하진 않을 거고.”

레이튼은 조용히 웃었다.

“정확한 추측입니다.”

죠니는 계속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이쪽 접시에 빵이 남아 있다는 것뿐이야. 저쪽의 나는 더 멀쩡해도, 지금 네가 먹을 빵을 못 줘. 저쪽 푸리나가 더 잘 쉬었어도, 지금 저 문에 붙은 표식을 다시 눌러주진 못해. 저쪽 그레이가 더 오래 앉아 있어도, 지금 마리암 이름을 세 번 확인한 건 이쪽 그레이고.”

그는 하융을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쪽을 먼저 볼거야. 저쪽은 네가 봐도 돼. 대신 너무 오래 가지는 말고.”

푸리나는 그 말에 아주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는 박수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고, 그레이는 자기 손 안의 빵을 바라보았다. 하융은 죠니가 밀어준 빵 조각을 보았다. 아까보다 조금 덜 딱딱한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너무 오래 가지는 말라.”

“응. 길 잃으면 찾으러 가야 하잖아. 귀찮아.”

“찾으러 와줄 것이오?”

“당연하지. 네가 창문 앞에서 굶고 있으면 여왕님이 나부터 보낼걸. 빵 들려서.”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정확해.”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거봐.”

하융은 웃었다. 웃음이 골목에 작게 번졌다. 치료소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고, 그레이가 곧 다시 들어가봐야 한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접시 가까이에 있었다. 하융은 빵을 입에 넣었다. 조금 딱딱했고, 조금 고소했고, 아주 조금 짰다. 현실의 맛이었다.

창은 닫히지 않았다. 더 온전한 동료들의 빛은 여전히 옆에서 부드럽게 흘렀다. 그러나 그 빛은 이제 접시 위에도 내려앉았다. 푸리나의 손끝, 죠니의 손목, 레이튼의 찻잔, 그레이가 남겨둔 빵 조각 위에 희게 얹혔다. 저쪽의 완전함은 이쪽의 결함을 지우지 않았다. 다만 잠깐, 결함의 가장자리까지 보이게 했다.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가능한 빠른 나중.”

그레이는 빵 조각을 작은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네. 가능한 빠른 나중에 먹겠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많다. 안 먹으면 걸릴거야.”

그레이는 이번에는 분명히 웃었다. 아주 작았지만, 하융은 보았다. 그레이가 치료소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푸리나는 남은 접시를 보더니 하융에게 물었다.

“더 먹을래?”

하융은 접시를 보았다. 창 안의 더 좋은 세계에서는 아마 더 따뜻한 식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접시에는 죠니가 남겨둔 가장 덜 딱딱한 빵이 있었다.

“조금만 더 먹겠소.”

죠니가 말했다.

“좋은 선택이네. 너무 많이 먹으면 걸을 때 후회해.”

“그대는 늘 후회까지 계산하고 먹소?”

“아니. 여러 번 후회해봐서 알아.”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경험론적 식사 철학이군요.”

“교수, 내 식사까지 철학으로 만들지 마.”

“실례했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하융도 웃었다. 치료소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우물의 점검은 끝나지 않았으며, 피난길에는 내일 고쳐야 할 표식들이 남아 있었다. 더 나은 세계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세계를 향해 몸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닿은 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조금 딱딱한 빵이었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5막 — 색색의 빛이 드는 거리

치료소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은 골목 바닥에 길쭉하게 누워 있었고, 그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가끔씩 흔들렸다. 마리암은 안에서 잠들었다고 했다. 열은 아직 있었고, 그레이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안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절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따뜻했다. 하융은 치료소 문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식은 밤공기 속에 섞인 약초 냄새와 차 냄새를 맡았다. 우물의 신 냄새는 아직 코끝에 남아 있었으나, 이제 그것만이 밤을 채우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치료소 옆 벽에 붙은 안내문을 다시 한 번 눌렀다. 이미 잘 붙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손끝으로 모서리를 문질렀고, 종이가 벽에 더 오래 남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잠시 가만히 있었다.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내일 아침까지 필요한 확인 사항을 부드럽게 정리해주고 있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들고 골목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안으로 들어간 뒤 아직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 품에 넣은 빵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아니, 보려 했다. 그러나 시선의 가장자리에 창들이 열렸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시장의 창, 피난길의 창, 우물의 창, 더 온전한 동료들의 창. 창들은 서로 다투듯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열려 있었다. 시장의 금빛은 치료소 벽에 붙은 안내문을 따뜻하게 비췄고, 피난길의 흙빛은 골목 바닥의 발자국 위에 낮게 얹혔다. 우물의 푸른빛은 물동이의 젖은 가장자리를 차갑게 드러냈고, 더 온전한 동료들의 흰빛은 푸리나의 지친 손등과 죠니의 빈 접시, 레이튼의 찻주전자, 치료소 문 안쪽에서 잠시 보였다 사라지는 그레이의 어깨 위에 닿았다.

예전 같았으면 하융은 그중 하나를 골랐을 것이다. 가장 밝은 창, 가장 아픈 창, 가장 옳아 보이는 창, 가장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창. 그는 어느 창이 자신을 부르는지, 어느 창이 자신을 심판하는지, 어느 창이 자신에게 마지막 대답을 줄 수 있는지 찾느라 오래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골목의 돌이 발밑에 있었다. 접시의 빵가루가 죠니의 손가락에 묻어 있었고, 푸리나의 커튼 고리는 밤새 여러 번 휘둘린 탓에 손때를 입고 있었다. 레이튼의 찻주전자는 한쪽 면이 조금 식어 있었고, 치료소 안에서는 그레이가 누군가에게 물을 조금씩 마시게 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그리고 곧, 창 아래를 보았다.

“하융?”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듣고 있소.”

“이번에는 어디를 보고 있어?”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창마다 빛이 달랐다. 어느 빛은 따뜻했고, 어느 빛은 차가웠고, 어느 빛은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빛들이 한곳에서 섞이고 있었다. 치료소 앞의 좁은 골목, 밤이 늦어 사람의 발소리도 드문 그 자리에서, 서로 다른 가능성의 빛들이 현실의 먼지와 돌과 젖은 나무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창들이 열려 있소.”

푸리나는 그의 옆으로 와서 섰다. 그녀에게는 그 창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푸리나는 하융이 보는 방향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무대를 살피는 극장주처럼.

“많이?”

“많이.”

“또 잘난 척해?”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오늘은…… 조금 덜하오.”

죠니가 빈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창문도 피곤한가 보네. 밤새 우리 따라다녔으면 그럴 만하지.”

“그대는 창에게도 피로를 부여하는구려.”

“뭐든 너무 오래 열려 있으면 삐걱거려. 문이든 창문이든 사람 무릎이든.”

푸리나가 죠니를 보았다.

“그건 네 무릎 이야기야?”

“내 무릎은 아직 공식 발언을 거부하고 있어.”

레이튼이 순찰병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방금 들은 농담의 끝자락만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무릎도 침묵할 권리가 있겠군요.”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교수, 제발 내 무릎까지 문답의 장으로 데려가지 마.”

“알겠습니다. 오늘 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질문을 받았으니까요.”

하융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골목을 보았다. 창의 빛은 여전히 흘렀다. 시장의 작은 축제는 푸리나가 붙인 안내문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고, 피난길의 더 나은 동선은 돌다리 앞 푸른 리본에 스며 있었다. 우물에서 죽어버린 가능성은 그레이의 이름 목록 위에 차가운 빛으로 남았고, 더 온전한 죠니의 창은 현실의 죠니가 들고 있는 빈 접시 위에서 잠깐 희게 흔들렸다.

그러나 시선은 더 이상 어느 하나에 박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융은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무언가를 이긴 느낌은 아니었다. 극복했다는 말도 맞지 않았다. 오래전에 배웠던 길을, 밤중에 다시 찾아낸 것에 가까웠다. 그는 이미 한 번 이 세계를 선택했다. 푸리나의 곁에서, 죠니의 농담과 레이튼의 질문과 그레이의 장부 곁에서, 이미 이쪽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오늘 밤은 처음 걷는 길이 아니었다. 다만 오래된 방의 냄새에 잠시 길을 잃었다가, 다시 발밑의 돌을 확인한 밤이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잊고 있었소.”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뭘?”

하융은 열린 창들을 보았다. 그리고 골목을 보았다.

“창 너머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소.”

죠니는 아무 말 없이 접시를 옆구리에 끼웠고, 레이튼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하융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드물게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기다릴 때, 그 침묵은 막이 내려오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하융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창마다 빛이 있었소. 저쪽 시장의 금빛, 죽은 우물의 푸른빛, 피난길의 흙빛, 더 온전한 그대들의 흰빛. 예전의 나는 그 빛을 보면 그 너머를 보았소. 어느 세계가 더 옳은지, 어느 내가 더 나은지, 어느 죽음이 나를 부르는지.”

그는 잠시 눈을 내렸다. 치료소 앞 돌바닥에는 여러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푸리나의 발자국은 작고 빠르게 흩어져 있었고, 죠니의 발자국은 한쪽이 조금 더 깊었다. 레이튼의 발자국은 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섰고, 그레이의 발자국은 치료소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위로 창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빛들이 이쪽을 비추는구려.”

그 말은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하융의 안쪽에서는 오래 닫혀 있던 창호 하나가 바람을 받은 듯 흔들렸다. 그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은 서쪽의 말보다 오래된 음절을 밀고 올라왔다. 고향의 문턱에서 배운 글자들처럼, 한문이 섞인 말이 숨 사이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있소. 허나 금일今日의 발은 이 골목에 있소. 광光은 저 너머에서 오되, 보步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는구려. 내가 찾던 날개가 창밖에 매달려 있던 것이 아니라면…… 그 빛을 모아, 이 거리 위에서 펴야 하는 것이겠소.”

푸리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하융의 말을 다 이해했는지, 혹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커튼 고리를 아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것은 무대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우에게 무대를 넘겨주는 손짓처럼 보였다.

“그럼 네가 연출하는 거네.”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크게 웃지는 않았다. 조금 뿌듯하고, 조금 장난스럽고,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다.

“내 무대가 아니라, 네가 보는 빛으로 네가 만드는 장면. 그런 거잖아?”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푸리나다웠다. 설명하지 않고도 어긋나지 않았다. 죠니가 빈 접시를 가볍게 흔들었다.

“좋네. 드디어 네가 무대 위에 올라왔다는 뜻이잖아.”

“내가 말이오?”

“응. 여태까지는 창문 옆에서 해설만 하고 있었거든. 물론 해설도 중요하긴 한데, 너무 오래 하면 관객도 배우도 지쳐.”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해설자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오는 장면, 꽤 좋아.”

“여왕님, 네가 좋아하면 보통 일이 커져.”

“이번엔 안 키워. 아마도.”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방금 아마도 들었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기록해둘까요?”

“기록은 그레이한테 맡겨. 교수까지 기록하면 이 나라 문서가 너무 많아져.”

그때 치료소 문이 열렸다. 그레이가 나왔다. 손에는 작은 천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푸리나가 억지로 예약해둔 빵 조각이 조금 줄어 있었다. 아마 먹은 모양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먹었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조금만 먹었습니다.”

“가능한 빠른 나중이 지켜졌어.”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많아. 성공이야.”

그레이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빵을 감싼 천을 접었다.

“마리암은 잠들었습니다. 아직 열은 있지만, 물은 조금 마셨고…… 어머니도 옆에 있습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오.”

“아직 확정해서 말하기는 이릅니다.”

“그레이 경답구려.”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낀 듯했다.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프롤로그의 방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완전히 괜찮지는 않다고 답했다. 지금도 완전히 괜찮지는 않았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우물의 푸른빛은 아직 차가웠으며, 더 나은 세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발밑에는 골목의 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빛이 있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허나 지금은 걸을 수 있소.”

그레이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더니 커튼 고리를 다시 들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한 장면만 더.”

죠니가 바로 말했다.

“불안한데.”

“걱정 마. 큰 거 아니야.”

“네가 큰 거 아니라고 말하면 보통 큰 거였어.”

“이번엔 진짜야.”

푸리나는 치료소 옆 골목 벽으로 가더니, 시장에서 가져온 작은 종이 조각을 꺼냈다. 낮에 붙이려던 그림 안내문의 시험용 종이였다. 빵 그림, 물동이 그림, 작은 꽃 표시가 어설프게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 종이를 치료소 벽의 비어 있는 곳에 붙이려다가,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붙여도 돼?”

그레이는 벽을 보고, 치료소 문을 보고, 종이에 그려진 작은 꽃을 보았다.

“여기는 배급 안내 장소가 아닙니다.”

“응. 알아.”

“그럼 안내문으로는 부적절합니다.”

“그것도 알아.”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붙이시려는 겁니까?”

푸리나는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표시.”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조금 더 작게 말했다.

“마리암이 나중에 나와서 보면, 우물 점검 안내문만 있으면 좀 무섭잖아. 빵이랑 물동이랑 꽃도 하나쯤 있으면…… 음, 그래도 밤이 전부 우물 냄새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건 안내문이라기보다는 낙서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안 돼?”

죠니는 잠시 치료소 문을 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낙서도 가끔 필요하지. 다만 너무 높이 붙이지 마. 애가 보려면 낮아야 해.”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 죠니식 승인.”

레이튼이 종이의 위치를 살폈다.

“조금 오른쪽이 좋겠습니다. 등불이 닿는 곳이군요.”

그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품에서 작은 핀을 꺼냈다.

“풀만으로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

“안내문은 아니지만…… 떨어지면 곤란하니까요.”

푸리나는 종이를 낮은 위치에 붙였다. 빵과 물동이와 작은 꽃. 그림은 어설펐다. 그러나 등불이 닿자, 창들에서 흘러온 색들이 그 위에 잠시 모였다. 시장의 금빛은 빵 그림에, 우물의 푸른빛은 물동이에, 피난길의 흙빛은 종이 가장자리에, 더 온전한 세계의 흰빛은 작은 꽃 위에 얹혔다.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앞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었다. 종이를 만지지는 않았다. 손끝은 종이 앞에서 멈췄고, 창빛은 그 손등 위로 얇게 흘렀다.

날자.

그 말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처럼 떠올랐다.

날자. 날자. 다시 한번만 날아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유리 너머로 사라지고 싶은 말도 아니었다. 하융은 종이의 작은 꽃을 보았다. 그 꽃은 푸리나의 장난이었고, 그레이의 핀이었고, 죠니가 낮게 붙이라고 말한 현실감이었으며, 레이튼이 등불의 각도를 살핀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하융의 창에서 들어온 빛들이 잠시 머물렀다.

하융은 아주 낮게, 거의 숨처럼 말했다.

“날개라는 것은…… 반드시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었구려.”

푸리나가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응?”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지금은 말로 다 만들지 않겠소.”

죠니가 말했다.

“좋은 판단이야. 가끔 말로 만들면 너무 커져서 들고 다니기 힘들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러면 오늘 밤의 질문은 잠시 접어두지요.”

그레이는 종이의 핀이 단단히 박혔는지 확인한 뒤, 손을 거두었다.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정말?”

죠니가 물었다.

“응. 정말. 나도 쉬어야 하고, 너도 접시를 내려놔야 하고, 그레이는 빵을 더 먹어야 하고, 레이튼은 차를 다시 데워야 해.”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지막 항목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죠니가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접시는 이미 거의 일 끝났어. 오늘 제일 성실했지.”

푸리나가 웃었다.

“그럼 접시에게도 박수.”

죠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발박수는 하지 마.”

“아, 기억하고 있었네.”

“잊기 힘든 종류의 위협이었거든.”

그레이가 아주 작게 웃었다. 하융도 웃었다. 치료소 앞의 골목에서 웃음은 크지 않았다. 병자가 잠든 곳이었으므로, 다들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낮은 웃음도 웃음이었다. 등불 아래에서, 빵과 물동이와 꽃이 그려진 종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융은 마지막으로 창들을 보았다. 모두 열려 있었다. 어느 것도 닫히지 않았다. 시장의 창도, 피난길의 창도, 우물의 창도, 더 나은 동료들의 창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수많은 창들도. 그러나 이제 그 창들은 그를 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빛만이 흘러나와 현실의 표면을 비췄다. 금빛은 먼지를, 푸른빛은 젖은 돌을, 흙빛은 발자국을, 흰빛은 사람들의 피곤한 얼굴을 드러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한 걸음 걸었다.

그러자 골목은 골목으로 남았다. 창도 창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사람으로 남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치료소 문 안쪽에서 마리암이 잠결에 작게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레이가 즉시 돌아보았고, 푸리나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죠니는 접시가 부딪히지 않도록 손가락을 얹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융은 그들을 따라 걸었다.

창 너머가 아니라, 창빛이 드는 거리 위로.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후일담 — 창가의 점심

아침은 밤보다 늦게 도착했다. 해가 떠오른 것은 오래전인 듯했으나, 도시가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피난민들이 모인 성문 근처에는 아직 밤의 피로가 남아 있었고, 시장의 덧문들은 하나씩 삐걱거리며 열렸다. 어젯밤 먼지 위에 그려졌던 빵과 꽃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물동이는 제자리에 있었고, 그림이 들어간 새 안내문은 빵집 덧문과 성문 길목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빵, 물동이, 작은 꽃. 누가 보아도 훌륭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글자를 읽지 못하는 아이 하나가 그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손을 끌었다. 하융은 멀찍이서 그 장면을 보았다. 아이는 빵 그림을 가리켰고, 어머니는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돌다리 앞 빈터에는 푸른 천이 새로 묶였다. 푸리나의 리본은 치료소 쪽으로 옮겨졌고, 그 대신 창고에서 가져온 천 조각이 등불 아래와 낮 햇빛 아래서 모두 보이도록 조금 높게 달렸다. 죠니는 그 높이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처음에는 아이 눈높이에 너무 높다고 했고, 두 번째에는 수레꾼 눈에는 너무 낮다고 했다. 그레이는 결국 두 개를 달자고 했다. 죠니는 “행정은 가끔 단순한 걸 이긴다”고 중얼거렸고, 그레이는 그 말을 칭찬인지 아닌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기록했다. 레이튼은 그 옆에서 순찰병들에게 길을 묻는 사람에게 먼저 어느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보다 “누구와 함께 오셨습니까?”가 먼저일 때가 있다는 말이었다. 하융은 그 질문을 듣고, 어젯밤 잃어버렸던 아이의 손에 들린 진흙 묻은 천 조각을 떠올렸다.

우물에는 아직 끈이 둘러져 있었다. 점검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이제 그 우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안내문에는 그레이의 단정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점검 중.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것. 아이와 노인은 먼저 알려주십시오. 푸리나는 그 아래에 꽃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옆 치료소 벽 낮은 곳에 붙은 작은 종이에 빵과 물동이와 꽃이 있었다. 아침이 되자 그 그림은 조금 우스워 보였다. 밤의 등불 아래서는 신비한 표식 같았지만, 햇빛 아래에서는 어설픈 낙서에 가까웠다. 그러나 마리암이 치료소 문가에 앉아 그 그림을 보고 있었다.

마리암은 아직 창백했다. 열은 내렸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고, 그레이는 아주 단호하게 밖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는 문가에 잠깐 앉아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그대로 있었다. 푸리나는 아이가 그림을 보는 것을 발견하고, 한껏 비밀스러운 얼굴로 다가갔다.

“어때?”

마리암은 한참 그림을 보다가 말했다.

“빵이 조금 이상해요.”

푸리나는 가슴을 짚었다.

“정확한 감상이야. 하지만 너무 솔직해서 극작가가 다쳤어.”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극작가가 아니라 그림 그린 사람이지. 그리고 애가 맞는 말을 했어.”

“죠니, 넌 왜 아침부터 내 편이 아니야?”

“아침이라서. 빈속에는 거짓말이 잘 안 나와.”

마리암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은 기침으로 바뀔 뻔했지만, 그레이가 바로 물을 조금 건넸다. 아이는 물을 마셨다. 이번에는 점검된 물이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은 열려 있었다. 우물가에서 쓰러졌던 마리암의 창, 이름이 마른 잉크로 바뀌었던 창, 붉은 끈이 천 아래로 사라졌던 창. 그 창은 닫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마리암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그레이가 컵의 기울기를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하융은 그 컵의 기울기를 보았다. 창 너머의 죽음은 컵 안쪽의 물빛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그 푸른빛은 그레이의 손등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손등에는 밤새 생긴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융.”

레이튼이 옆에 섰다. 그는 오늘도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 계속 나오는지 하융은 아직 알지 못했다. 어쩌면 레이튼의 여관에는 찻주전자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오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잠깐 생각했다.

“듣고 있소.”

“오늘은 창들이 조금 조용합니까?”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시장과 돌다리와 우물과 치료소 벽의 그림을 차례로 보았다. 창들은 여전히 있었다. 시장의 금빛, 피난길의 흙빛, 우물의 푸른빛, 더 온전한 동료들의 흰빛. 아침이 되었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젯밤과 달리, 그 빛들은 사물들의 가장자리에 얇게 붙어 있었다. 창고로 향하는 줄, 새로 묶인 천, 점검 중인 우물, 마리암의 컵, 죠니가 닦고 있는 빈 접시. 하융은 그 빛들을 하나씩 보다가, 손안의 찻잔을 받았다.

“조용하다기보다는…… 서로 다투지 않는구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에게 좋은 아침이란, 질문이 덜 싸우는 아침이오?”

“꽤 정확한 표현입니다. 질문도 때로는 순서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니까요.”

하융은 찻잔을 들었다. 차는 따뜻했다. 미지근하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온도가 분명했다. 그는 그 온도를 확인하고, 문득 웃었다.

푸리나가 마리암에게 그림에 대한 변론을 늘어놓는 동안, 죠니는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접시는 어젯밤보다 가벼워 보였다. 빵도 치즈도 말린 과일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레이는 마리암의 상태를 확인한 뒤, 접시를 보더니 잠시 눈을 피했다. 푸리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

그레이가 멈췄다.

“네.”

“가능한 빠른 나중.”

그레이는 조금 작게 말했다.

“먹었습니다.”

“얼마나?”

“조금…….”

죠니가 끼어들었다.

“내가 봤어. 조금은 맞아. 하지만 아예 안 먹은 건 아니니까, 오늘은 봐줘.”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네가 그레이 편을 들어?”

“아침이라 그래. 그리고 나도 다 먹으라고 잔소리하면 내가 남은 거 다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레이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농담이야. 반쯤은.”

푸리나는 접시를 들여다보다가 남은 빵 조각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럼 반쯤만 더.”

그레이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중에…….”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레이는 말을 고쳤다.

“곧 먹겠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전했네.”

레이튼은 즐겁게 웃었다. 마리암은 빵이 이상하다는 자기 평이 아직 마음에 남았는지, 푸리나의 그림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작은 꽃을 가리켰다.

“꽃은 좋아요.”

푸리나는 즉시 살아났다.

“봤지? 꽃은 합격이래!”

죠니가 접시를 닦던 천을 접었다.

“빵은 탈락이고?”

“빵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거야.”

“그 표현 좋네. 실패한 그림한테 상냥해.”

푸리나는 웃으며 마리암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다음에는 빵을 더 잘 그릴게. 네가 봐줄래?”

마리암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융은 그 소리를 들었다. 안도의 숨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의 골목에서는 그런 작은 소리들이 가장 오래 남았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다른 창을 보았다. 그 창에서는 마리암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아니었다. 숫자였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그 창의 푸른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융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 빛이 현실의 마리암 위로 그대로 덮이게 두지 않았다. 현실의 마리암은 푸리나의 그림에 점수를 매기고 있었고, 그레이는 빵을 조금씩 먹고 있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레이튼은 그 모든 것을 보고도 묻지 않았다. 질문을 아낄 줄 아는 사람처럼.

그때 푸리나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하융.”

“듣고 있소.”

“저쪽 세계 점심은 뭐였어?”

하융은 잠시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저쪽 세계라 하시면?”

“네가 본 시장, 길, 우물, 더 괜찮은 우리들. 그런 창들 중 하나에 점심도 있었을 거 아냐.”

죠니가 빈 접시를 내려놓고 흥미롭다는 듯 하융을 보았다.

“그건 나도 궁금하네.”

레이튼은 찻잔을 든 채 웃었다.

“상당히 중요한 비교 항목일 수 있겠군요.”

그레이는 빵을 들고 있다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도…… 확인 대상입니까?”

푸리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세계의 차이는 식탁에서 드러나는 법이야.”

죠니가 말했다.

“그건 맞는 말 같은데, 네가 말하니까 또 연극 대사 같아.”

하융은 창들을 떠올렸다. 더 여유로운 시장의 점심. 피난길이 덜 막혔던 세계의 배급. 더 온전한 죠니가 말 위에서 받았던 식사. 그중 하나가 유난히 선명했다. 바다 쪽 냄새가 조금 섞인 식탁. 생선. 빵. 조금 더 따뜻한 국물.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생선이었소.”

죠니가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쪽이 낫네.”

푸리나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그렇게 빨라?”

“난 아침부터 생선 먹는 건 별로야. 특히 밤새 우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더.”

레이튼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조리 방식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수, 생선의 가능성까지 열어두지 마. 지금은 닫아도 돼.”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이쪽이 낫다고 하였소.”

“응.”

“어째서요?”

죠니는 빈 접시를 들어 보였다. 접시는 정말로 비어 있었다. 빵가루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쪽은 이미 먹었으니까.”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마리암은 푸리나가 웃는 걸 보고 따라 웃다가, 다시 그레이에게 물을 받았다. 그레이는 “천천히”라고 말했다. 레이튼은 웃음을 삼키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빈 접시를 보았다. 저쪽 세계의 생선은 아직 창 너머에 있었다. 이쪽의 빵은 이미 먹혔다. 접시는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빈 접시가 저쪽의 가득 찬 식탁보다 더 확실했다.

그는 낮게 웃었다.

“참으로 죠니다운 기준이오.”

“쓸 만하지?”

“쓸 만하오.”

죠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아침이 조금 더 밝아졌다. 시장에서는 빵집 주인이 덧문을 완전히 열었고, 어젯밤 붙은 그림 안내문을 보고 한참 동안 자기 가게의 빵 그림을 평가했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죠니는 “항의 들어오겠네”라고 중얼거렸고, 푸리나는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 돼”라고 답했다. 그레이는 정말로 그 표현을 적을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레이튼은 빵집 주인에게 내일 그림을 조금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지역 참여형 안내문!”이라고 외치려다가, 치료소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하융은 그들을 보며 걸었다. 창들은 열려 있었다. 그 안의 세계들도 여전히 있었다. 더 나은 시장, 덜 막힌 피난길, 죽은 가능성, 더 온전한 동료들, 아직 보지 못한 수많은 장면들. 그 창들은 앞으로도 열릴 것이다. 때로는 하융을 아프게 할 것이고, 때로는 그를 도울 것이며, 때로는 그저 아름다워서 오래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는 창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창 너머로 사라지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빛이 내려앉은 길을 걸었다.

시장 쪽에서 빵 냄새가 났다. 피난길 쪽에서는 새로 묶은 천이 바람에 흔들렸다. 우물은 아직 닫혀 있었고, 치료소 문가의 작은 꽃 그림은 햇빛 속에서 조금 더 어설퍼 보였다. 마리암은 그 꽃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레이는 빵을 곧 먹겠다고 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들고 있었으며,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다시 데우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푸리나는 벌써 다음 그림을 어떻게 고칠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발등 위에 얇게 놓였다. 금빛과 푸른빛과 흙빛과 흰빛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겹쳤다. 그는 그 빛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도 창은 열려 있구려.”

푸리나가 옆에서 물었다.

“응. 그래서?”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답을 요구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 대사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조금 웃었다.

“그래서, 걸을 수 있소.”

푸리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의 결말은 그걸로 하자.”

죠니가 말했다.

“결말이라기엔 아직 오전인데.”

“후일담의 결말이야.”

“그럼 점심은?”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생선 말고.”

하융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이쪽이 낫겠구려.”

죠니가 빈 접시를 들고 앞장섰다.

“봐. 역시 좋은 판단이야.”

하융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여전히 빛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오늘 하융은 그 빛들을 지나쳐 멀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 빛이 닿은 거리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빈 접시는, 다시 채워질 자리를 찾아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프롤로그 — 등불이 그려진 표

그레이는 촛불을 줄였다. 완전히 끄지는 않았다. 장부 위에 남은 마지막 줄이 아직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책을 덮으면 글자가 번진다. 글자가 번지면 다시 확인해야 한다. 다시 확인하면 늦어진다. 늦어진 일은, 때로 다른 누군가의 아침을 조금 더 춥게 만든다. 그레이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곤해도 촛불을 조금 남겨두었고, 어깨가 굳어도 펜을 놓기 전에 마지막 줄을 확인했으며, 누군가가 보기에는 사소할 문장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종이 냄새와 약초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낮에는 구호소에서 돌아온 아이의 열을 확인했고, 저녁에는 우물 점검표와 배급 변경안을 맞췄으며, 밤에는 장례비 지급 기록을 고쳤다. 그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에게 일은 끝나는 것보다 잠시 놓이는 쪽에 가까웠다. 우물은 내일도 확인해야 했고, 민원은 아침에 다시 들어올 것이며, 누군가의 편지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밤의 손은 더 이상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펜을 잡은 손가락 끝이 조금 차가웠고, 손목에는 오래 기록한 사람 특유의 둔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큰일로 여기지 않았다. 통증은 일의 끝에 흔히 남는 먼지 같은 것이었다. 털어내면 사라지는 때도 있고, 조금 남는 때도 있었다. 다만 그날 밤에는 눈이 자꾸 장부의 줄을 놓쳤다. 같은 이름을 두 번 읽고, 같은 사인을 다시 확인하고, 이미 표시해둔 항목에 또 작은 점을 찍으려 했다. 그녀는 그제야 펜을 내려놓았다. 실수하기 전에 멈추는 것도 일의 일부였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발소리는 대개 가볍지 않았다. 급한 보고, 추가 사망자, 누락된 배급, 이름이 맞지 않는 시신, 도착하지 못한 편지.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장부를 닫지 않고, 빈 종이를 한 장 빼두었다. 그러나 문을 연 사람은 급한 보고를 들고 있지 않았다.

푸리나 헤툼은 양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상자는 극장에서 쓰는 소품 상자처럼 보였지만, 평소 그녀가 들고 다니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리본도 없었고, 금박도 없었고, “개막!”이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장식도 없었다. 다만 상자 윗면에 작은 등불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등불은 잘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누군가 오래 생각한 뒤 최대한 단순하게 남긴 표시 같았다.

“그레이.”

푸리나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무대를 열 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무대 뒤에서 배우의 손을 잡을 때의 목소리였다.

“전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그 말은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레이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방 안을 보았다. 마르지 않은 잉크, 반쯤 식은 찻잔, 어깨에 걸쳐둔 외투, 장부 옆에 놓인 약재 봉투, 그리고 그레이의 얼굴. 그레이는 늘 조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피곤은 조용한 얼굴 위에도 자리를 찾는다. 눈 밑의 얕은 그늘, 평소보다 조금 늦은 반응, 펜을 내려놓은 뒤에도 허공에 남아 있는 손의 자세. 푸리나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본 뒤, 일부러 크게 떠들지 않았다.

“오늘은 공연 표를 가져왔어.”

그레이는 상자를 보았다.

“공연……입니까?”

“응. 그런데 표는 한 장뿐이야.”

“제가 전달하면 됩니까?”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거야.”

그레이의 손이 장부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제 것입니까?”

“응.”

푸리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종이 표가 들어 있었다. 표에는 화려한 문구가 없었다. 극단 이름도, 막 번호도, 출연진도 없었다. 그저 등불 그림 하나와 짧은 글귀가 있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 오늘 밤 손님 한 명.

그레이는 표를 오래 보았다. 손님이라는 말이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관의 성좌를 섬기는 이들의 언어를 알았고, 손님이라는 말이 가진 따뜻함도 알았다. 다만 자신에게 그 말이 향해 있는 것이 낯설었다. 그레이는 늘 손님을 맞이하는 쪽에 가까웠다. 죽은 이의 기억을 맞이하고, 산 자의 민원을 맞이하고, 길 잃은 편지와 늦은 보상과 닫힌 우물의 보고를 맞이했다. 누군가 찾아오면 자리를 내어주었고, 기록하고, 확인하고, 다음 사람이 같은 곳에서 넘어지지 않게 길을 고쳤다.

그런데 표에는 손님 한 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하.”

“응.”

“제가…… 손님입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제가 접수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없어.”

“확인해야 할 명단은요?”

“없어.”

“그러면 제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푸리나는 잠시 표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여기서 멋진 대사를 붙였을 것이다. ‘그저 무대를 즐기면 돼!’라든가, ‘관객의 의무는 보는 것!’이라든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가 그런 말로 쉽게 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물러줘.”

그레이는 그 말을 다시 듣는 사람처럼 눈을 내렸다.

“머무는 것……입니까?”

“응. 오늘은 네가 장부를 들고 들어가서 뭔가를 고치는 극이 아니야. 네가 기록하지 않아도 극은 진행돼. 네가 확인하지 않아도 막은 올라가. 대신 네가 거기 있어야 해.”

그레이는 표의 등불 그림을 보았다. 선은 단순했다. 불꽃은 작았고, 등불 아래에는 아주 짧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사람 같기도 하고, 의자 같기도 했다.

“제가 없어도 진행된다면, 제가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어.”

“죄송합니다.”

“아니, 좋아. 그레이다운 질문이야.”

푸리나는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그녀는 장부 위의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를 보고, 표를 그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장부 옆의 비어 있는 자리, 찻잔과 약재 봉투 사이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이 극은 네가 일을 잘 못해서 준비한 게 아니야.”

그레이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주 천천히 말을 골랐다.

“오히려 네가 너무 잘해서 준비한 거야. 너무 오래, 너무 조용히, 너무 당연한 것처럼.”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칭찬을 받았을 때 그녀는 종종 그러했다. 기뻐하기보다 먼저 그 말이 자신에게 과한지 확인하려는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그 표정을 보고,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죽은 이를 기리며 산 자를 돕는 일. 네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알아. 다는 몰라도, 적어도 가볍게는 생각하지 않아.”

그레이의 손가락이 살짝 접혔다.

“다만 오늘 밤은, 그 일을 무대 위에 그대로 올리려는 게 아니야. 그건 네가 매일 하잖아. 우리는 이미 네가 장부를 보고, 우물을 닫고, 편지를 보내고, 등불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어.”

푸리나는 표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오늘은 그 거리의 다른 문을 열어볼 거야.”

“다른 문……입니까?”

“응. 네가 관리하는 문 말고, 네가 들어가는 문.”

그레이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밤은 깊었고, 복도 끝에서 극장 쪽 등불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등불이 꺼지기 전에 심지를 갈아야 하는지 생각했다가, 곧 그 생각을 멈췄다. 방금 전 푸리나가 가져온 말 때문이었다. 네가 들어가는 문.

그레이는 조용히 물었다.

“제가 들어가도 되는 곳입니까?”

푸리나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응.”

“제가…… 손님으로요?”

“응. 손님으로.”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레이는 아주 잠깐 자기 손을 보았다. 펜을 오래 잡은 손, 장부를 넘긴 손, 시신을 덮은 천의 가장자리를 고친 손, 아이에게 물을 건넨 손. 그 손이 손님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떠올리지 못했다. 손님은 앉는다. 손님은 묵는다. 손님은 맡긴다. 손님은 때로 아무것도 고치지 않는다. 그 마지막이 가장 낯설었다.

푸리나는 그레이가 대답하지 않자, 일부러 조금 밝게 말했다.

“걱정 마. 너무 화려하게 만들지는 않았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제가 싫어할 것 같았습니까?”

“응. 죽음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꾸미는 거, 너는 좋아하지 않을 것 같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꽃비도, 대합창도, 눈물 강요도 없음. 대신 등불은 있어.”

“등불은…… 필요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보다 작았지만, 충분히 푸리나다웠다. 그때 문밖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죠니가 문틀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작게 자른 빵과 말린 과일, 치즈 몇 조각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식사라기엔 조금 대충이고 야식이라기엔 묘하게 성의 있었다.

“아직 시작 안 했어?”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죠니, 너는 왜 항상 접시를 들고 나타나?”

“필요하니까. 밤에 극을 열면 누군가는 배고파져. 이건 예언이 아니라 경험이야.”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준비를 도와드릴까요?”

죠니가 바로 말했다.

“아니. 이 접시는 네가 도와줄 대상이 아니야. 네가 먹을 대상이지.”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저는 아직…….”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에?”

그레이는 말을 삼켰다. 죠니가 접시를 책상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단, 장부와 잉크가 닿지 않는 자리를 먼저 눈으로 확인했다.

“나중에도 좋긴 한데, 가능한 빠른 나중으로 하자. 너무 늦은 나중은 그냥 안 먹겠다는 말이랑 비슷해지거든.”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가능한 빠른 나중에 먹겠습니다.”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들었지. 계약 성립.”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증인으로 기록하고 싶지만, 오늘 그레이는 기록 담당이 아니니까 참을게.”

그레이는 그 말에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웃었다.

곧 레이튼도 도착했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마치 이 밤의 극에 가장 필요한 소품이 그것이라는 듯 태연했다. 레이튼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그레이의 표와 푸리나의 상자와 죠니의 접시를 차례로 본 뒤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밤입니다. 혹은, 잠시 쉬어도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레이튼 님.”

“그레이 경. 오늘은 제가 질문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그거 가능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시도할 가치는 있지요.”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교수한테는 그게 이미 질문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에게 찻잔을 하나 따라주었다.

“다만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레이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네.”

“그레이 경께서 손님으로 초대받는다면,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레이는 조금 생각했다. 보통이라면 출입구, 안전, 손님 명단, 불이 꺼질 가능성, 아픈 사람의 유무, 물과 식사의 상태, 돌아갈 길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손님이 아니라 관리자가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마도…… 제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확인할 것 같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출발점입니다.”

“그게 훌륭합니까?”

“예. 어떤 방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어떤 방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알려줍니다. 오늘 밤의 방은 후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요.”

그레이는 그 말을 들고 잠시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하융이 문가에 나타났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었고, 복도 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하융은 그레이의 피곤한 얼굴과 표 위의 등불 그림을 보더니, 오래 말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레이튼의 침묵과 달랐다. 질문을 준비하는 침묵이 아니라, 이미 비슷한 방을 지나온 사람이 길의 냄새를 확인하는 침묵이었다.

“그레이 경.”

“하융 님.”

“오늘은 그대가 문 안으로 들어가는 날이오?”

그레이는 표를 보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좋소. 문밖에서 오래 선 사람은, 안쪽의 의자가 낯설 때가 있소.”

그 말은 이상하게 부드럽게 닿았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융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말은 아직 뒤에 남겨둔 듯했다.

푸리나는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한 뒤, 상자를 다시 닫았다. 그리고 그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표를 들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갈까?”

그레이는 장부를 보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줄은 이제 거의 마른 듯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책갈피를 끼웠고, 장부를 닫았다. 그러나 품에 넣지는 않았다. 책상 위에 두었다. 표는 손에 들었다. 그 작은 차이를 모두가 보았지만,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겠습니다.”

푸리나는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극장 뒤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소품 상자와 낡은 천막, 쓰지 않는 의자들이 놓여 있던 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복도 끝에 낮은 터널이 하나 열려 있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문인지, 푸리나의 극이 만들어낸 문인지 알기 어려웠다. 문 위에는 작은 등불이 걸려 있었고, 그 불빛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만큼만 길을 밝혔다.

터널 앞에서 푸리나는 멈췄다. 그녀는 평소처럼 “개막!”이라고 외치려다가, 그레이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은 조용히 열게.”

죠니가 접시를 들고 뒤에서 말했다.

“그게 좋겠네. 여관이면 밤에 너무 시끄러우면 항의 들어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맞아. 손님이 쉬어야 하니까.”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품에 안듯 들었다.

“준비되었습니다.”

하융은 터널 안쪽을 보며 낮게 말했다.

“길이 짧지는 않겠구려.”

그레이는 손안의 표를 내려다보았다. 표의 등불 그림이 터널의 빛을 받아 아주 작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름을 묻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이 터널의 구조를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은. 다만 발을 들여놓기 전에, 책상 위에 두고 온 장부의 무게가 손에서 빠져나간 것을 느꼈다. 손은 가벼웠다. 가벼운 손은 낯설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괜찮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편하지는 않습니다.”

“응.”

“하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충분해.”

그레이는 터널 안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돌바닥은 차갑지 않았다. 오래 비어 있었던 길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쓸고 등불을 걸어둔 길 같았다. 등불의 빛은 그녀의 발끝을 작게 비췄고, 뒤에서는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터널 저편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여관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흔들릴 때 나는 소리였다. 그레이는 그 소리를 듣고, 오래전 자신의 [기억이 잠드는 거리] 어딘가에서 보았던 문패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문패를 정리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밤, 그녀는 손님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조용히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1막 — 이름을 맡기는 접수대

터널은 길지 않았다. 발걸음으로 세면 열두 걸음 남짓이었다. 그런데 그 열두 걸음 사이에서, 그레이는 몇 번이나 손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평소라면 장부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아 있었을 자리였다.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받치려는 모양을 만들었다가, 아무것도 닿지 않자 다시 천천히 펴졌다. 터널 벽에는 습기가 많지 않았고, 오래된 극장 뒤편에서 이어진 길치고는 먼지도 적었다. 대신 갓 털어낸 이불과 오래 닦은 나무, 그리고 아주 희미한 차 냄새가 났다.

푸리나는 앞에서 걸었다. 그녀의 걸음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터널이 이렇게 울림이 좋은 곳이라면, 평소의 푸리나는 분명 두세 번쯤은 목소리를 시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가끔 뒤돌아 그레이가 따라오는지 확인했고, 그때마다 손가락에 걸린 작은 커튼 고리만 한 바퀴 굴렸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왔다. 접시에는 작게 자른 빵과 치즈, 말린 과일이 얹혀 있었다. 터널 안까지 접시를 가져오는 것이 맞는지 그레이가 잠시 시선을 주자, 죠니는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여관거리라며. 빈손으로 가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접시는 선물입니까?”

“반쯤은. 나머지 반은 내가 먹을 거고.”

푸리나가 앞에서 작게 웃었다.

“정직하네.”

“선물이라고 다 남 주면 너무 숭고해져. 난 숭고한 접시는 부담스러워.”

레이튼은 낮게 웃었고, 하융은 터널 벽에 비친 등불 그림자를 보며 조용히 걸었다. 그레이는 그들의 발소리를 들었다. 푸리나의 걸음은 가볍고 빠르며, 죠니의 걸음은 한쪽 박자가 아주 조금 늦고, 레이튼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하융은 걸음과 걸음 사이에 잠시 생각을 놓는 듯했다. 그 발소리들은 낮은 천장 아래에서 겹쳤다가, 다시 각자의 보폭으로 풀어졌다. 그레이는 그 차이들을 들었다. 기록하지 않았다.

터널 끝에는 작은 종이 달린 문이 있었다. 문은 크지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문고리 아래에 낡은 나무패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나무패에는 이름 대신 작은 등불이 새겨져 있었다. 푸리나의 극은 종종 무대와 신술과 마음의 경계에서 이름을 늦게 얻었다. 그레이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낮은 등불과 나무패를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가 문 옆에 섰다.

“여기서부터야.”

그레이가 물었다.

“이 문은…… 극의 일부입니까?”

“응. 그리고 아마 조금 더.”

푸리나는 대답을 그렇게 흐렸다. 그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작은 물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물이 흐르는 소리인지,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오가는 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푸리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그레이를 한 번 더 보았다. 그 시선은 개막을 알리는 연출자의 시선이라기보다, 낯선 방에 들어가기 전 손님이 신발을 잘 신고 있는지 확인하는 여관 주인의 시선에 가까웠다.

문이 열렸다.

종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는 거리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극장 뒤편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문 너머의 거리는 극장보다 훨씬 넓었다. 하늘은 밤이었고, 하늘이라기보다는 천장에 가까웠지만, 별처럼 작은 등불들이 높이 걸려 있었다. 양쪽으로 낮은 여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간판들은 바람 없이도 천천히 흔들렸다. 어떤 간판에는 빵 조각이 그려져 있었고, 어떤 간판에는 물동이, 어떤 간판에는 편지 봉투, 어떤 간판에는 낡은 신발, 어떤 간판에는 부러진 숟가락이 그려져 있었다. 글자는 없었다. 그러나 간판들은 비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가장 가까운 간판 앞에 멈췄다. 젖은 신발 모양이었다. 크기가 다른 신발 두 짝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물방울 표시가 있었다. 누군가 오래 걸었을 것이다. 누군가 비를 맞았을 것이다. 누군가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와서도 발을 말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레이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젖은 신발이 그려진 간판 앞에서, 먼저 손을 모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죠니도 접시가 기울지 않게 손목을 조금 고쳤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가슴 가까이 받쳤다. 하융은 간판의 등불빛이 그레이의 손끝에 닿는 것을 보고, 시선을 낮췄다.

거리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처음에는 여관 주인처럼 보였다. 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가까이 올수록 그는 한 사람만의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래 닦인 마룻바닥, 밤새 꺼지지 않은 등불, 손님이 떠난 뒤 접힌 이불의 냄새가 그의 곁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았다. 표정은 부드러웠고, 걸음은 느렸으며, 열쇠 꾸러미는 손안에서 조금도 요란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였다.

그는 접수대 너머가 아니라, 거리 한가운데서 그레이를 맞았다. 아마 이 거리에서는 문턱 자체가 접수대인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그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다. 차를 권하는 여관 주인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규칙을 지키게 하는 단단함도 있었다.

“밤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들어가시지요.”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는 극장주께서 하셨고, 방을 준비한 것은 저입니다. 역할이 다르니 감사도 나누어 받는 편이 좋겠군요.”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역시 여관 주인은 계산이 정확하네.”

여관의 성좌는 푸리나에게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을 데려오신 분께도 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다만 오늘 밤의 주빈은 이분입니다.”

그 말에 그레이는 아주 조금 어깨를 낮췄다. 주빈이라는 말은 손님보다 더 낯설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보고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거리 입구 옆의 작은 접수대를 가리켰다. 접수대 위에는 검은 장부가 아니라, 빈 나무 접시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세 접시의 가장자리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잃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

그레이는 그 글씨를 읽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접시를 보았다.

“이곳에서는…… 이름을 맡깁니까?”

“그렇습니다.”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손님이 나가실 때, 손님께서 알아볼 수 있는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여관의 성좌가 첫 번째 접시를 내밀었다.

“성함을 잠시 맡기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아주 낮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이름은 소리가 되어 접시 위에 내려앉았다. 글자로 변하지 않았다. 대신 작고 옅은 빛이 되었다. 접시 위의 빛은 곧 작은 종이등처럼 접혀, 접수대 뒤의 서랍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레이는 그 빛이 서랍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서랍이 닫히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잘 보관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접시가 나왔다. 여관의 성좌는 그레이가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보듯, 비어 있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짐을 맡기실 차례입니다.”

그레이는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부는 방에 두고 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접시에 올릴 수 있는 짐은 남아 있지요.”

접시 위에 작은 물건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붉은 실이 묶인 민원표, 모서리가 닳은 사망 확인서, 아직 봉해지지 않은 편지, 도장이 찍히지 않은 보상 쪽지, 오래 접었다 펼친 지도 조각, 꺼진 등불이 그려진 얇은 문패. 글씨는 없거나, 너무 작아 읽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레이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가 잠시 멈췄다. 물건들이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접시 위의 나무가 아주 미세하게 눌려 있었다.

푸리나는 말하지 않았다. 죠니도 농담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손잡이를 가볍게 잡고 있었고, 하융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그레이는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버리듯 던지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듯 건조하게도 하지 않았다. 젖은 천을 접듯, 모서리가 더 상하지 않게 맞추었다. 민원표의 붉은 실을 아래로 넣고, 편지 봉투는 접히지 않게 세웠으며, 등불 문패는 가장 위에 올렸다.

“잠시 맡기겠습니다.”

“예.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접시를 작은 상자 안에 넣었다. 상자 뚜껑이 닫히기 직전, 마지막 등불 문패 위의 불꽃 그림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레이는 그 흔들림을 본 뒤에야 손을 거두었다.

죠니가 아주 낮게 말했다.

“접는 것도 잘하네.”

푸리나가 그를 팔꿈치로 살짝 찔렀다.

“죠니.”

“아니, 진짜로. 아무렇게나 안 구기잖아.”

죠니는 접시를 든 손으로 턱짓했다.

“그런 거, 보이거든.”

그레이는 뜻밖의 말에 잠시 눈을 들었다. 죠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듯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구기면…… 다시 펼 때 자국이 남습니다.”

“거봐. 맞다니까.”

세 번째 접시는 비어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내밀지 않고, 접수대 위에 그대로 두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밤 이 거리에서 손님께 드릴 표식이 있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표식입니까?”

“예.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을 찾기 위한 표식이지요.”

여관의 성좌는 작은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글자가 없었다. 아주 작은 등불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 등불 아래에는 가느다란 그림자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 같기도 했고, 의자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작게 말했다.

“예쁘네.”

“밤길의 표식은 지나치게 화려하면 손님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건 맞아.”

그레이는 나무패를 받았다. 이름이 없는 패였지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등불 아래의 작은 그림자를 손끝으로 한 번 확인한 뒤, 여관의 성좌가 내미는 얇은 줄에 손목을 맡겼다.

여관의 성좌는 나무패를 그레이의 손목에 묶어주었다. 줄은 얇고 가벼웠다. 그레이가 손목을 조금 움직이자, 나무패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이 표식을 가진 손님은 준비된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이 표식은 아무 일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보았다. 아주 잠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거리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등불 하나가 가까워졌다. 등불을 든 아이였다. 나이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다가도, 오래된 골목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손에는 작은 등불이 들려 있었고, 신발 끝은 젖어 있었다. 손가락에는 재가 묻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에는 먼지와 빛이 함께 앉아 있었다.

아이는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손님이에요?”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그렇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방까지 안내할게요.”

아이는 뒤돌아섰다. 몇 걸음 걷다가, 그레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아이의 젖은 신발과 등불을 보았다.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이의 등불이 너무 낮게 흔들리지 않도록, 바람이 들어오는 골목 쪽을 한 번 살폈다.

아이가 말했다.

“손님은 그런 거 안 봐도 돼요.”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습관입니다.”

“습관도 맡기고 들어오라던데요.”

푸리나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죠니는 “좋은 안내인이네”라고 중얼거렸고, 레이튼은 흥미로운 질문을 발견한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하융은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을 보며 눈을 조금 낮췄다.

그레이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손님은 무엇을 보면 됩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 질문이 어렵다는 듯 등불을 조금 들어 올렸다. 빛이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를 비췄다.

“방까지 가는 길이요.”

그리고 아이는 덧붙였다.

“넘어지지 않게요.”

그레이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거리 안쪽으로 걸었다. 간판들은 이름 없이 흔들렸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젖은 신발, 부러진 숟가락, 꺼진 등불심지. 그레이는 그 모두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낮추고, 아주 짧게 예를 표했다. 여관의 성좌는 접수대 앞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접수대 뒤에서 그는 여전히 정중하게 서 있었다. 열쇠 꾸러미는 그의 손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접수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 질서가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다고 느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손님.”

그레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여관의 성좌가 말했다.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대답했다.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등불지기를 따라 걸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어둡지 않았다. 그러나 밝지도 않았다. 사람이 잠들 수 있을 만큼만 어두웠고, 길을 잃지 않을 만큼만 밝았다. 손목의 작은 등불패가 걸음마다 조용히 흔들렸다. 접수대에 맡겨둔 것들은 뒤에 있었고, 앞에는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이 있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2막 — 장부 없는 식탁

등불지기는 작은 걸음으로 앞서갔다. 신발 끝은 젖어 있었으나, 걸을 때 물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등불도 이상했다.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고, 아이가 걸음을 늦추면 함께 낮아졌으며, 아이가 고개를 돌리면 빛도 잠시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그 불빛을 따라 걸었다. 길 양쪽의 간판들은 여전히 조용히 흔들렸고, 글자 없는 문패들이 낮은 빛 안에서 조금씩 모습을 바꾸었다. 어떤 것은 편지 봉투였다가 접힌 손수건처럼 보였고, 어떤 것은 낡은 숟가락이었다가 금이 간 찻잔처럼 보였다.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등불지기가 앞에서 멈추면 함께 멈췄고, 아이가 오른쪽으로 돌면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녀는 익숙한 버릇대로 골목의 폭과 바닥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물이 고이는 곳, 불빛이 닿지 않는 모서리, 누군가 발을 헛디딜 수 있는 돌. 그런 것들은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들어왔다. 다만 손목의 등불패가 걸음마다 조용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책상 위에 놓고 온 장부보다 훨씬 가벼웠고, 그래서 자꾸 의식되었다.

등불지기가 뒤돌아보았다.

“또 보고 있어요.”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요. 그런데 오늘은 손님이잖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손님은 가끔 천장만 봐도 돼요.”

그레이는 아이가 가리킨 위쪽을 보았다. 천장처럼 보였던 밤하늘에 작은 등불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별자리처럼 이어지지는 않았다. 각각의 등불은 자기 자리에서 조금씩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너무 작아서 한참 보아야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푸리나가 뒤에서 속삭였다.

“저거 예쁘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응. 근데 저걸 전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별로 안 예쁠 것 같아.”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 방금 되게 중요한 말을 너무 아무렇게나 했어.”

“그럼 주워서 잘 써. 난 아무렇게나 말하는 담당이니까.”

레이튼은 웃음을 삼키듯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아무렇게나 놓인 말도, 때로는 길을 찾는군요.”

“교수, 그건 칭찬이야, 아니면 또 질문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겠습니다.”

하융은 등불들을 올려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별이 아니어도 길은 밝힐 수 있구려.”

그 말은 밤공기 속에 낮게 놓였다. 그레이는 잠시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더 말하지 않는 바람에, 그 문장은 오히려 오래 남았다.

등불지기는 한 여관 앞에서 멈췄다. 간판에는 식탁이 그려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그릇 하나와 빵 한 조각, 접힌 편지와 작은 등불이 놓여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쪽에서는 따뜻한 물소리와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등불지기가 문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가 첫 방이에요.”

그레이는 문턱에서 고개를 숙였다. 안쪽은 예상보다 넓었다. 방이라기보다 긴 식당에 가까웠다. 그러나 북적이지 않았다. 가운데에는 긴 식탁 하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반쯤 먹은 빵, 젖은 신발, 잉크가 묻은 손수건, 아이가 접다 만 종이배, 노인의 깨진 숟가락, 봉하지 못한 편지, 심지가 다 탄 등불, 손잡이가 닳은 물동이. 물건들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막 일어나 곧 돌아올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 잠시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식탁 앞에 섰다. 이름표는 없었다. 사망 원인도, 날짜도, 담당자 표시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찾지 않았다. 먼저 가장 가까운 빵 조각 앞에서 멈췄다. 빵은 한쪽이 마르고 있었고, 잘린 단면에는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급하게 먹다 남긴 것인지, 나누어두고 다시 오려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레이는 양손을 가볍게 모았다. 기도는 아주 짧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커튼 고리를 손안에서 천천히 굴렸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든 채 식탁 옆에 섰지만, 자기 접시를 그 위에 올리지는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식탁 끝에 잠시 내려놓으려다가, 놓을 자리를 찾지 못해 다시 들었다. 하융은 문턱 가까이에 서서 방 안의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다음으로 젖은 신발 앞에 섰다. 발등 부분의 가죽이 늘어나 있었고, 뒤꿈치에는 덧댄 천이 풀려 있었다. 신발 안쪽에는 아주 작은 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레이는 손을 뻗어 돌을 꺼냈다. 그리고 신발을 더 마르기 좋은 방향으로 조금 돌려놓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손님은 그거 안 해도 돼요.”

그레이의 손이 멈췄다.

“신발 안에 돌이 있었습니다.”

“알아요.”

“그대로 두면 신은 사람이 다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지금 아무도 신지 않아요.”

그레이는 잠시 신발을 보았다. 신발은 얌전히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젖어 있었고, 낡았고,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였다. 그레이는 꺼낸 돌을 신발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등불지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빼줬네요.”

“들어 있으면…… 마음이 쓰입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돌 들어간 신발은 보기만 해도 발이 아파.”

푸리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죠니답게 정확한 감상.”

“나는 발에 관해서는 꽤 진지해, 여왕님.”

그레이는 다음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잉크 묻은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한쪽에는 마르지 않은 듯한 검은 얼룩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서툰 바느질 자국이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바로 펴려다가 손을 멈췄다. 대신 허리를 조금 숙여 손수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손수건은 펼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시간이 조금 길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레이 경, 손수건은 그냥 두시는 겁니까?”

그레이는 손수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접힌 방식도 남은 흔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그레이는 아주 작은 숨을 내쉬고, 손수건 곁에서 물러섰다.

아이의 종이배는 식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종이는 얇고 오래되어 끝이 조금 말려 있었다. 물에 띄운 적이 있는지 아래쪽이 구겨져 있었고, 안쪽에는 읽기 어려운 글자 몇 개가 번져 있었다. 그레이는 종이배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식탁 위의 물기만 조심스럽게 닦았다. 종이가 더 젖지 않게 하는 정도였다.

등불지기가 또 말했다.

“그것도 안 해도 돼요.”

“네.”

“그런데 했어요.”

“네.”

“왜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젖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등불지기는 그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레이를 보았다. 그러더니 자기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다. 빛이 종이배 위에 내려앉았다. 번진 글자는 여전히 읽히지 않았지만, 종이배의 접힌 선은 조금 더 또렷해졌다.

푸리나가 식탁 가까이 다가왔다.

“그레이.”

“네, 전하.”

“힘들면 앉아도 돼.”

그레이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앉을 자리는 있었다. 식탁 옆에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낡았지만 깨끗했고, 등받이에는 작은 천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식탁 위의 물건들을 두고 앉는 일은 그녀에게 조금 어색했다. 누군가의 남은 빵, 젖은 신발, 편지, 숟가락 앞에서 자신이 먼저 앉아도 되는지 바로 판단되지 않았다.

죠니가 의자 하나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는 손으로 앉는 부분을 한 번 눌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괜찮네.”

그레이가 말했다.

“확인해주신 겁니까?”

“응. 앉으라고 하려면 의자가 버티는지도 봐야지.”

푸리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죠니, 오늘 되게 여관 종업원 같아.”

“그 말은 좀 복잡한데. 임금은 나오나?”

“접시 들고 왔으니까 식비로 퉁치자.”

“역시 위험한 고용주야.”

그레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결국 의자 앞에 섰다. 바로 앉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패가 의자 등받이에 닿아 작게 흔들렸다. 그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들었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손님 자리예요.”

그레이는 의자를 보았다.

“누군가의 자리였던 것은 아닙니까?”

“지금은 손님 자리예요.”

“지금은…….”

그레이는 그 말을 되풀이하듯 낮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앉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의자가 불편해하지 않게 앉는 사람처럼. 의자는 작게 삐걱였지만 버텼다. 그녀가 앉자, 식탁 위의 물건들이 조금 달라 보였다. 서 있을 때는 하나씩 살펴야 할 것들처럼 보였는데, 앉으니 누군가 함께 식탁에 남겨두고 간 것들처럼 보였다. 빵은 더 멀어졌고, 편지는 조금 가까워졌으며, 깨진 숟가락은 등불 아래에 반쯤 숨어 있었다.

푸리나는 그레이가 앉는 것을 보더니, 안도한 듯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크게 말하지 않고,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좋아. 그럼 나도 앉아야지.”

죠니가 말했다.

“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앉네.”

“손님이니까.”

“방금 네가 만든 극 아니야?”

“극장주도 손님이 될 수 있어.”

“편리한 직업이네.”

레이튼은 조용히 의자를 골랐다. 앉기 전에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고,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허락을 구하듯 잠시 멈췄다. 하융은 식탁 끝쪽에 앉았다. 그는 창문이 없는 벽을 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어딘가 먼 곳에서 돌아온 사람의 것 같았다.

죠니는 마지막으로 앉았다. 다만 자기가 가져온 접시는 식탁 위의 물건들과 섞이지 않게, 자기 앞에만 놓았다. 그러고는 빵을 하나 집어 들어 그레이 쪽으로 내밀었다.

“먹어.”

그레이는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나중에…….”

푸리나가 바로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말을 멈추었다. 죠니는 빵을 든 손을 거두지 않았다.

“빠른 나중.”

그레이는 잠시 빵을 보았다. 식탁 위의 반쯤 먹은 빵과 죠니가 내민 빵은 닮아 있었지만 같지 않았다. 하나는 누군가가 남기고 간 것이고, 하나는 지금 건네진 것이었다. 그레이는 두 빵 사이를 아주 짧게 보았다가, 죠니가 내민 쪽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먹어. 근데 너무 천천히 먹으면 그건 또 안 먹는 거랑 비슷해져.”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 네 식사 규칙은 묘하게 엄격해.”

“사람이 안 먹는 핑계는 종류가 많거든. 막아야 해.”

그레이는 빵을 조금 떼었다. 아주 작게. 죠니는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려다가, 푸리나가 팔꿈치로 가볍게 막자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빵을 입에 넣었다. 딱딱하지는 않았다. 조금 식었고, 밀가루 냄새가 났으며, 말린 과일의 단맛이 손끝에 묻어 있었다.

등불지기가 맞은편 의자에 올라앉았다. 아이의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젖은 신발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질 것처럼 맺혔지만, 끝내 떨어지지는 않았다.

“맛있어요?”

그레이는 빵을 삼키고 대답했다.

“네. 맛있습니다.”

“그럼 됐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등불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았다. 빛이 퍼지자 식탁 위의 물건들이 조금 따뜻해 보였다. 그러나 물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젖은 신발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손수건은 여전히 접혀 있었으며, 편지는 아직 봉해지지 않았고, 숟가락은 깨져 있었다. 다만 빛 안에서 그것들은 조금 덜 외로워 보였다.

레이튼이 찻잔을 나누었다. 어느새 찻잔들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다. 여관거리의 방에서는 필요한 물건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타나, 오히려 묻기 어려웠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그레이 경?”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찻잔을 받았다. 손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잉크 묻은 손수건을 한 번 보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수건은 그대로 접혀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기이하구려. 이 방은 닫힌 듯하나, 무엇도 밀어내지는 않는 듯하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하융, 지금 대사 좋았어.”

“대사가 아니라 감상이오.”

“좋은 감상은 대사로 쓸 수 있지.”

죠니가 말했다.

“또 가져가네.”

“극장주는 좋은 걸 보면 가져가는 법이야.”

“위험한 직업이야, 정말.”

그레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문득 식탁 끝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봉하지 못한 편지. 편지지의 끝은 조금 말려 있었고,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편지를 보았다. 편지는 열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닫아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잠시 그곳에 있었다.

등불지기가 물었다.

“읽고 싶어요?”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왜요?”

“편지에는 받을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이는 그 답을 듣고 편지를 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작게 말했다.

“못 받은 편지도 여기 와요.”

그레이는 아이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네. 어떤 편지는 오래 기다려요. 어떤 편지는 자기가 누구에게 가야 했는지 잊어버리고요.”

푸리나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고 있었고, 죠니는 접시 위의 말린 과일을 손끝으로 밀어놓았다. 하융은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을 한 번 보았다.

그레이는 편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 말은 편지에게 한 말이었다. 누가 쓴 것인지, 누가 받아야 하는 것인지 아직 몰랐다. 그런데도 그 말은 식탁 위에 조용히 놓였다. 편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말려 있던 끝이 등불의 온기 때문인지 아주 조금 펴진 듯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를 빤히 보았다.

“아가씨는 손님인데도 인사를 많이 하네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손님도 인사는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맞아요.”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 안쪽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따뜻한 김이 낮게 흘러나왔다. 향유 냄새보다 젖은 나무와 오래된 쇠의 냄새가 먼저 닿았다. 안쪽에는 나무 욕조들이 층을 이루고 있었고, 벽에는 마른 수건과 낡은 등불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에는 작은 솔, 접힌 천, 금이 간 그릇, 녹슨 못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구도 서둘러 치우지 않은 물건들이었지만,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물 위에는 등불빛이 길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 아래로 무엇인가 오래 불려지는 듯한 냄새가 났다.

등불지기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다음 방이에요.”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잠시 멈추고, 자기 앞에 남은 빵 조각을 보았다. 다 먹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것을 접시에 다시 내려놓으려다가, 죠니와 눈이 마주쳤다.

죠니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접시의 빈 가장자리를 톡 쳤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작은 천에 감쌌다.

“나중에 먹겠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려 하자, 그레이가 먼저 덧붙였다.

“가능한 빠른 나중에요.”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통과.”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럼 저희도 이동할까요?”

하융은 천천히 일어섰다.

“물이 있는 방이라. 다음 손님은 발자국을 남길 모양이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며 말했다.

“좋아. 다음 장면은 물의 방.”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네. 네 작명치고는 얌전해.”

“죠니, 그건 칭찬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자.”

레이튼이 조용히 웃었다.

“좋은 선택입니다.”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 식탁 위의 물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젖은 신발, 손수건, 종이배, 숟가락, 편지.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길지 않았다. 빵을 먹었고, 차를 마셨고, 의자에 앉았기 때문인지, 손목의 등불패가 처음보다 덜 낯설게 흔들렸다.

등불지기가 따뜻한 김이 새어나오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젖은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가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식탁을 뒤로하고 걸었다. 뒤에서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이 따라왔다. 식탁 위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빛은 남은 빵과 접힌 손수건과 봉하지 못한 편지 위에 조용히 머물렀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3막 — 물의 방과 진흙 손님

물의 방은 문 안쪽에서 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작은 욕실처럼 보였으나, 한 걸음 들어서자 나무 욕조들이 층을 이루며 안쪽으로 이어졌고, 천장 아래에는 긴 수증기가 낮은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바닥에는 얇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물길은 발목을 적시지는 않았지만, 등불빛을 받아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벽에는 마른 수건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욕조 가장자리에는 작은 솔과 접힌 천, 금이 간 그릇, 녹슨 못, 부러진 등불 유리 조각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래된 쇠와 젖은 나무 냄새가 먼저 났고, 그 뒤에야 희미한 향유 냄새가 따라왔다.

그레이는 문턱에서 잠시 멈췄다. 식탁의 방과는 달랐다. 식탁의 방은 남겨진 것들이 조용히 놓여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무언가가 오래 묻어 있다가, 물에 불려 천천히 떨어져나가는 곳처럼 보였다. 욕조의 물은 맑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럽지도 않았다. 어떤 욕조는 흙빛이었고, 어떤 욕조는 오래된 잉크를 풀어놓은 듯 엷게 검었으며, 어떤 욕조는 우물 바닥의 돌을 오래 씻은 물처럼 회색빛을 띠었다. 그레이는 물의 색을 하나씩 보다가, 가장 가까운 욕조 옆에 놓인 작은 솔을 보았다. 솔의 털 끝에는 진흙이 조금 굳어 있었다.

등불지기는 익숙한 듯 욕조 사이를 지나갔다. 아이의 젖은 신발은 여전히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 뒤를 따르다가,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금이 간 그릇 하나를 보았다. 그릇 안쪽에는 아주 오래된 곡물 찌꺼기 같은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서 짧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수증기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생각보다 조용하네.”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품에 안고 말했다.

“목욕탕이 조용하다는 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물이 너무 조용하면 그것도 별개의 문제가 되겠지만요.”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튼, 지금 물한테 질문하려는 거야?”

“아직은 아닙니다.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된 물인지 먼저 확인해야지요.”

죠니가 이번에는 바로 끼어들지 않고, 욕조 가장자리를 발끝으로 살폈다. 미끄러운지 확인하는 듯했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고 낮게 웃었다.

“죠니 경은 물에도 예의를 갖추는구려.”

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끄러운 바닥은 신분을 안 가려. 먼저 예의를 차리는 쪽이 덜 넘어진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평등한 철학이오.”

“그걸 철학이라고 부르면 좀 억울한데.”

레이튼이 온화하게 말했다.

“철학은 종종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 발목을 학문으로 만들지 마.”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수증기 사이에서 금방 흐려졌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욕조의 물길을 보았다. 말이 오가는 동안에도 물은 천천히 움직였고, 아주 작은 진흙 조각 하나가 물결을 따라 욕조 가장자리로 밀려왔다.

등불지기가 욕조 한가운데 난 좁은 통로 앞에서 멈췄다.

“여기서는 손님들이 묻은 걸 내려놔요.”

그레이는 아이를 보았다.

“묻은 것……입니까?”

“네. 흙, 물, 말, 냄새, 그런 거요.”

등불지기는 자기 신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가끔은 자기 것이 아닌 것도 묻어 와요.”

그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아이가 말한 “자기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녹슨 못과 찢어진 천 조각과 굳은 흙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밟고 지나간 거리의 흔적. 누군가 닫지 않은 문에서 새어 나온 찬바람. 누군가 놓친 보고. 누군가 오래 견딘 냄새. 그레이는 그 말들을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문장으로 만들기 전에도 방 안의 냄새는 충분히 무거웠다.

그때 안쪽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바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문틈으로 진흙물이 밀려 들어왔다. 등불 하나가 꺼질 듯 흔들렸고, 벽의 수건들이 축 늘어졌다. 문 너머에서 둔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크고 무거운 것이 긴 복도를 지나오는 소리였다. 쿵, 쿵, 쿵. 소리는 규칙적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질척이는 물소리가 섞였고, 오래된 나무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푸리나가 커튼 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 다음 손님이 조금 거칠게 들어오네.”

죠니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다가, 그레이를 보고 멈췄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조심스럽게 옆 선반에 올려두었다. 하융은 수증기 너머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문밖의 진흙이 오래 참은 모양이오.”

안쪽 문이 열렸다.

진흙투성이 손님이 들어왔다. 사람의 모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고,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온몸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진흙 속에는 여러 물건들이 박혀 있었다. 녹슨 못, 부러진 빗장, 찢긴 배급표, 끊어진 우물 밧줄, 젖은 편지, 깨진 등불 유리, 배수구 쇠살대, 이름이 번진 나무패, 작은 신발 한 짝. 손님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그것들이 서로 부딪혀 낮은 소리를 냈다. 냄새는 강했다. 썩은 냄새라기보다, 너무 오래 닫혀 있던 골목이 한꺼번에 열린 냄새였다.

주변의 작은 등불들이 뒤로 물러났다. 수건들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건드리지 마.”

“저건 지워지지 않아.”

“슬럼가 냄새야.”

“그냥 문밖으로 돌려보내.”

그레이는 그 목소리들이 어디서 나는지 찾지 않았다. 방의 벽인지, 수증기인지, 손님 몸에 박힌 종이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진흙투성이 손님을 보았다. 진흙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안에는 작은 돌멩이와 검은 물, 풀리지 않은 실들이 섞여 있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가까이 가면 묻어요.”

그레이는 아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젖은 손이었다.

“네. 묻을 겁니다.”

“그런데 갈 거예요?”

그레이는 대답하기 전에 소매를 조금 걷었다. 젖지 않게 하려는 손짓이 아니라, 젖을 것을 알고 준비하는 손짓이었다.

“먼저 보겠습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돌아보았다.

푸리나는 말끝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면 내가 말릴 거야.”

“네.”

“진짜야.”

“알겠습니다.”

죠니가 옆에서 짧게 덧붙였다.

“말리는 건 내가 더 잘해. 무겁게 서 있으면 되거든.”

하융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것도 일종의 신술 같구려.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막는 법.”

죠니가 그를 보았다.

“하융, 그 말은 좀 마음에 드는데. 나중에 써도 돼?”

“내 말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접시 한 조각으로 받겠소.”

푸리나가 작게 숨을 삼키듯 웃었다.

“하융이 거래를 시작했어.”

레이튼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흥미롭군요. 언어와 접시의 교환 비율은 어느 정도가 적절할까요?”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교수, 농담에 세금 매기지 마.”

그 짧은 소란 덕분에 물의 방의 공기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레이는 그 틈에 진흙투성이 손님 가까이 다가갔다. 손님은 그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진흙과 수건 조각과 젖은 종이들이 겹쳐 있었고, 그 안쪽에서 희미한 물소리만 났다.

그레이는 손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진흙투성이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에 박힌 깨진 등불 유리가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전에 그레이가 손수건을 꺼내 받았다. 손수건은 곧 진흙에 젖었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욕조 가장자리의 작은 그릇에 넣었다.

등불지기가 눈을 크게 떴다.

“손님 손수건인데요.”

“씻으면 됩니다.”

“진흙은 잘 안 빠져요.”

“그래도 씻어보겠습니다.”

그레이는 그릇 옆의 작은 솔을 들었다. 진흙투성이 손님 몸에 박힌 물건들을 바로 잡아당기지는 않았다. 먼저 가장 바깥쪽의 진흙을 물로 적셨다. 물은 금방 검어졌다. 진흙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굳은 곳은 돌처럼 단단했고, 물러진 곳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그레이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다만 진흙이 손목까지 묻자, 소매를 한 번 더 걷었다.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도울까?”

그레이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욕조 가장자리에 있는 큰 그릇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하지.”

죠니는 가볍게 움직였지만, 바닥이 미끄러운 곳에서는 걸음을 늦췄다. 그는 큰 그릇을 들고 와 그레이 옆에 놓았다.

레이튼도 다가왔다.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까요?”

그레이는 진흙 속에 반쯤 묻힌 배수구 쇠살대를 보았다.

“깊이 박힌 것을 바로 잡아당기면 찢길 수 있습니다. 주변부터 불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물의 온도를 조금 조절해보겠습니다.”

레이튼은 욕조의 물을 살피더니, 등불지기에게 물었다.

“이 방에서는 따뜻한 물이 어디서 옵니까?”

등불지기는 천장을 가리켰다.

“위에서요.”

레이튼은 위쪽의 관을 보았다. 관에는 작은 종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종 하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맑은 소리가 났다. 그러자 가까운 욕조의 물결이 조금 따뜻하게 흔들렸다.

푸리나가 감탄했다.

“레이튼, 어떻게 알았어?”

“종이 여섯 개 있었고, 그중 세 개만 녹이 덜 슬어 있었습니다. 자주 쓰는 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였으면 일단 다 쳐봤을 텐데.”

죠니가 말했다.

“그래서 교수가 교수고, 네가 여왕님이지.”

푸리나는 그 말에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반박할 수 없네.”

하융은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접힌 천들을 살폈다. 그는 그중 가장 깨끗한 천을 골라 물에 적시고, 그레이에게 건넸다.

“이 천은 아직 힘이 남았소. 쓰기 좋겠구려.”

그레이는 천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손님도 손님을 도울 수는 있소.”

그 말에 등불지기가 하융을 보았다.

“그건 규칙에 있어요?”

하융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없다면 새로 적어야겠소.”

레이튼이 작게 웃었다.

“좋은 조항입니다. ‘손님은 손님을 도울 수 있다.’”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그거 극장 규칙에도 넣을까?”

죠니가 말했다.

“넣으면 좋아. 대신 밑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도 붙여.”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천으로 진흙을 닦았다. 웃음이 완전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손끝의 힘이 조금 덜 굳었다. 진흙투성이 손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몸 안쪽에서 낮은 물소리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오래 막혀 있던 물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 같았다.

그레이는 먼저 작은 신발 한 짝을 꺼냈다. 억지로 잡아당기지 않았다. 주변 진흙을 적시고, 굳은 흙을 손으로 부수고, 끼어 있는 실을 풀었다. 신발은 작았다. 발등에는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끈은 끊어져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큰 그릇에 담지 않고, 따로 접힌 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으로 젖은 편지를 꺼냈다. 종이는 물을 먹어 거의 찢어질 듯했다. 그레이는 그것을 펼치지 않았다. 펴면 찢어질 것이다. 그녀는 편지를 그대로 얇은 그릇 위에 올리고, 레이튼이 건넨 마른 천으로 주변 물기만 눌렀다.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읽지 않으시는군요.”

“지금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찢긴 배급표가 나왔다. 글자는 거의 지워져 있었지만, 붉은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 선을 오래 보았다. 표가 어디서 끊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누군가 그 선 너머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손끝에 남았다. 그녀는 배급표를 신발 옆이 아니라, 편지 옆에 놓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왜 거기야?”

“같이 젖어 있었습니다.”

“아.”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레이가 아직 말로 만들지 않은 기준을, 무리해서 꺼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진흙투성이 손님은 조금씩 작아졌다. 아니, 작아졌다기보다 진흙 아래의 윤곽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던 몸이, 이제는 여러 겹의 골목과 지붕과 물길이 엉킨 모양처럼 보였다. 손님 몸의 한가운데에는 배수구 쇠살대와 꺼진 등불심지가 뒤엉켜 있었다. 그 둘은 가장 깊이 박혀 있었고, 건드릴 때마다 손님 전체가 낮게 떨렸다.

등불지기가 속삭였다.

“그건 아파요.”

그레이는 손을 멈췄다.

“그렇습니까?”

“아마요. 저기 박힌 지 오래됐거든요.”

그레이는 쇠살대와 등불심지를 보았다. 쇠에는 검은 진흙이 굳어 있었고, 심지는 물을 먹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둘은 서로 다른 물건인데, 너무 오래 붙어 있어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막힌 물길과 꺼진 불이 한몸이 되었구려.”

푸리나는 조용히 그 말을 따라 하듯 중얼거렸다.

“막힌 물길과 꺼진 불.”

죠니가 이번에는 농담하지 않았다. 그는 그레이의 옆에 서서 손님이 흔들릴 때 넘어지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레이튼은 따뜻한 물을 조금 더 불러왔고,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높이 들었다.

그레이는 손을 뻗었다. 바로 잡아당기지 않고, 먼저 쇠살대 주변의 진흙을 손으로 떼어냈다. 손톱 밑에 흙이 들어갔다. 심지에 붙은 검은 물은 손목을 타고 내려왔다. 냄새가 더 강해졌다. 그레이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한 조각씩, 조금씩, 진흙을 떼어냈다. 그러다 심지의 끝이 조금 풀렸고, 쇠살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입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죠니와 하융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죠니는 쇠살대를 잡았고, 하융은 심지를 받쳤다. 레이튼은 물의 온도를 맞추었고,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들어 욕조 위의 등불들이 한꺼번에 흔들리지 않게 빛을 모았다.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가장 가까이 가져왔다.

그레이는 쇠살대와 심지가 엉킨 부분을 잡았다.

“천천히.”

죠니가 말했다.

“알아.”

하융이 낮게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셋에 맞춰 그들은 당겼다.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님이 크게 떨렸고, 욕조의 물이 검게 솟았다. 푸리나가 이를 악물고 커튼 고리를 붙잡았다. 레이튼은 종을 하나 더 울렸다. 따뜻한 물이 흘러들어오자 굳은 진흙이 조금 더 풀렸다. 그레이는 손을 놓지 않았다. 심지가 끊어질 듯 늘어났고, 쇠살대가 삐걱거리며 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가 빠졌다.

쇠살대와 등불심지가 함께 뽑혀 나왔다. 그 순간 진흙투성이 손님 몸에서 검은 물이 쏟아졌다. 모두가 한 걸음 물러섰다. 욕조의 물은 순식간에 탁해졌고, 바닥의 물길은 빠르게 흘렀다. 벽의 등불들이 한꺼번에 낮게 흔들렸다. 그러나 꺼지지는 않았다.

진흙이 씻겨 내려가자, 손님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작은 거리가 나타났다.

방 안 한가운데, 물안개처럼 얇은 골목이 펼쳐졌다. 비가 그친 뒤의 골목이었다. 낮은 집들의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막혀 있던 배수구 옆에는 물웅덩이가 빠져나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물웅덩이를 피해 걷던 좁은 길이 보였고, 문 앞에 놓인 작은 신발들이 보였다. 골목 끝의 등불 하나가 다시 켜졌다. 아주 작은 불이었다. 그러나 불빛이 닿자, 젖은 벽의 금 간 자리와 문턱의 높이와 돌아가는 길이 보였다.

그레이는 그 장면을 보았다.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날짜도 없었다. 하지만 골목은 잠시 거기 있었다. 비 냄새와 젖은 천 냄새와 갓 켜진 등불의 약한 기름 냄새가 방 안으로 흘러나왔다.

등불지기가 작게 말했다.

“이제 보여요.”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내렸다. 죠니는 뽑아낸 쇠살대를 욕조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레이튼은 종에서 손을 뗐고, 하융은 젖은 심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손을 모았다.

기도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들렸다.

“오래 젖어 계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골목의 등불이 한 번 더 흔들렸다. 그러더니 골목은 서서히 얇아졌다. 사라진다기보다, 물에 비친 그림자가 물결에 맞춰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작은 등불심지 하나였다. 젖어 있었지만,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깨끗한 천 위에 올려두었다.

등불지기가 손님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잠든 거예요?”

그레이는 심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마…… 조금은 마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푸리나는 그레이의 손을 보았다.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그레이는 뒤늦게 자기 손을 보고, 손수건을 찾으려 했다. 아까 유리 조각을 받느라 더러워진 손수건은 그릇 옆에 있었다.

죠니가 물을 담은 작은 대야를 밀어주었다.

“먼저 씻어.”

그레이는 대야를 보았다.

“정리부터…….”

푸리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손부터.”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레이튼은 마른 천을 건넸고, 하융은 젖은 등불심지를 안전한 곳에 옮겨두었다. 죠니는 대야가 미끄러지지 않게 발로 받쳤다.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낮게 내려, 물이 잘 보이게 했다.

그레이는 대야에 손을 넣었다. 물이 금세 흐려졌다. 손톱 밑의 흙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씻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물의 방에는 잠시 손 씻는 소리만 남았다.

푸리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오늘 장면은…… 조금 좋네.”

죠니가 낮게 답했다.

“좋다는 말을 쓰기엔 손이 많이 더러워졌는데.”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때로는 그 점 때문에 좋은 장면일 수도 있지요.”

하융이 젖은 심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깨끗함이 처음부터 먼지 없음만을 뜻하지는 않겠구려.”

죠니가 하융을 보았다.

“오늘 하융 말이 꽤 많이 팔리겠는데.”

하융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까 정한 대로라면 접시 한 조각이오.”

푸리나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다만 물의 방이라 그런지, 웃음은 크게 울리지 않고 김 속에서 부드럽게 풀렸다. 그레이도 아주 작게 웃었다. 손은 아직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았지만, 물은 따뜻했다.

등불지기가 다음 문을 가리켰다.

“다음 손님은 말이 많아요.”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말이 많은 손님?”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챙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차례일지도 모르겠군요.”

죠니가 말했다.

“교수, 기뻐하지 마.”

레이튼은 평온하게 답했다.

“기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말이 많은 손님과 조용한 질문의 궁합을 확인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게 기뻐하는 거야.”

하융이 조용히 덧붙였다.

“질문도 가끔 표정을 짓는 법이오.”

레이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현은 제가 접시 반 조각으로 사겠습니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이젠 말에 가격 흥정까지 하는거야?”

그레이는 손을 닦으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물의 방 한쪽에는 진흙이 씻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욕조의 물은 아직 완전히 맑지 않았고, 솔과 천은 더러워졌으며, 큰 그릇에는 꺼낸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작은 신발, 젖은 편지, 찢긴 배급표, 깨진 등불 유리, 쇠살대, 등불심지.

그녀는 그것들을 다시 정리하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등불지기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잠시 생각한 뒤, 손을 거두었다.

“이대로 두어도 됩니까?”

등불지기가 환하게 웃었다.

“네. 여기 사람들이 말려줄 거예요.”

“그렇다면…… 부탁드립니다.”

그레이는 물건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돌아서기 전에 손을 다시 씻지 않았다. 손은 깨끗한 천으로 닦였고, 손목의 등불패에는 아주 작은 진흙 자국 하나가 남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문지르지 않았다. 아직은.

그들은 물의 방을 나섰다. 뒤쪽에서 욕조의 물이 낮게 흔들렸고, 벽의 등불들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흙투성이 손님이 남긴 냄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처음처럼 무겁지는 않았다. 젖은 나무 냄새 사이로 새로 켜진 등불의 기름 냄새가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4막 — 처리 완료

물의 방 다음에는 복도가 없었다. 문을 열자 곧장 낮은 대기실이 나왔다. 대기실이라기에는 의자가 너무 많았고, 광장이라기에는 천장이 너무 낮았다. 벽에는 작은 창구들이 줄지어 있었으며, 각 창구 위에는 글자 없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어떤 팻말에는 접힌 편지가, 어떤 팻말에는 물동이가, 어떤 팻말에는 깨진 숟가락이, 어떤 팻말에는 등불이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는 그 그림들을 하나씩 보았다. 조금 전 물의 방에서 본 물건들과 닮아 있었지만, 이곳의 것들은 훨씬 납작했다. 종이 위에 찍힌 도장처럼, 사물의 무게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몇몇 손님들은 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떤 손님은 창구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흐렸다. 졸린 사람처럼 흐린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지우개로 문질러진 종이처럼 흐렸다. 손에는 각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젖은 편지, 낡은 신발, 작은 숟가락, 금이 간 그릇. 그 물건들은 얼굴보다 또렷했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잠시 멈췄다. 방 안의 공기는 물의 방보다 차가웠다. 젖은 나무 냄새 대신 마른 종이 냄새가 났고, 등불의 기름 냄새 대신 오래된 잉크와 밀랍 냄새가 났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가 작게 흔들렸다. 진흙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다.

등불지기가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는 조금 시끄러워요.”

죠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조용한데.”

“곧 시끄러워져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장 안쪽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검은 손님이 걸어 나왔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림자가 길었다. 얼굴은 없었다. 정확히는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종이가 한 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에는 도장이 들려 있었다. 붉은 인주가 마르지 않았는지, 도장 끝이 번들거렸다.

검은 손님은 창구 앞에 멈췄다.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도장을 찍었다.

쾅.

소리는 방 전체에 울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손님은 종이를 하나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처리 완료.**

곧 다른 손님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에 낡은 신발을 들고 있었다. 신발은 아이 것처럼 작았다. 검은 손님은 신발을 보지도 않고,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쾅.

**처리 완료.**

신발을 든 손님은 그 종이를 받았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듯 내려갔다. 그는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신발의 윤곽이 흐려졌다. 끈이 먼저 사라지고, 뒤꿈치의 천이 흐려지고, 마지막에는 젖은 자국만 남았다. 손님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종이를 품에 안고 긴 의자로 돌아갔다.

그레이는 그 장면을 보고 한 걸음 움직이려 했다가 멈췄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이 없어서인지, 검은 손님은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다만 도장을 들고 다음 종이를 기다렸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말이 많은 손님이라고 하셨지요.”

등불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말은 하나뿐이에요.”

그 순간 검은 손님이 다시 도장을 찍었다.

쾅.

“원인 불명.”

쾅.

“성명 미상.”

쾅.

“관례상 종결.”

각 도장 소리마다 손님들의 손에 들린 물건들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편지의 봉투가 사라지고, 숟가락의 금 간 부분이 지워지고, 물동이의 손잡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손님들은 그 종이를 받아들고 조용해졌다. 조용해질수록 방은 더 마른 종이 냄새로 가득 찼다.

푸리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박수 소리가 아니네.”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접시를 품 가까이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아직 말린 과일이 조금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뭔가 한마디 했을 그가 침묵하자, 방의 도장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하융이 벽의 창구들을 보며 낮게 말했다.

“소리가 크다고 하여 살아 있는 말은 아니구려.”

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방에서는 조용한 질문이 필요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 이번엔 네 차례 같지?”

“아마도요. 다만 먼저 묻는 분은 제가 아닐 듯합니다.”

레이튼의 시선은 그레이에게 가 있었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 쪽으로 걸어갔다. 등불지기가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다만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다. 빛이 검은 손님의 발밑에 닿았지만, 그림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레이는 창구 앞에 섰다. 검은 손님은 그녀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는 비어 있었다.

그레이는 받지 않았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들었다.

“처리 완료.”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무엇이 완료되었습니까?”

검은 손님은 도장을 멈추지 않았다.

“처리 완료.”

“무엇을 처리했습니까?”

“처리 완료.”

도장이 허공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레이는 종이를 받지 않은 채, 도장이 찍히기 전의 빈 종이를 보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름도, 물건도, 날짜도, 장소도 없었다. 종이가 너무 하얘서 오히려 불편했다.

“어느 손님의 일입니까?”

검은 손님은 잠시 멈췄다.

“처리 완료.”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화내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받을 수 없습니다.”

도장이 허공에서 멈췄다. 방 안의 손님들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손님은 처음으로 그레이 쪽을 보는 듯했다. 얼굴 없는 종이 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레이튼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그레이보다 앞서지는 않았다.

검은 손님은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붉은 글씨가 먼저 찍혀 있었다.

**원인 불명.**

그레이는 종이를 보았다.

“모르겠다는 뜻입니까?”

검은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묻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검은 종이 얼굴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둘은 꽤 다르지요.”

검은 손님이 레이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튼은 미소를 유지한 채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모른다는 말은 때로 정직합니다. 하지만 묻지 않았는데 모른다고 쓰면, 종이가 먼저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들어 올렸다.

쾅.

이번에는 창구 위에 도장이 찍혔다.

**관례상 종결.**

하융이 그 글씨를 보며 낮게 말했다.

“관례라. 오래 반복된 길은 때로 길이 아니라 홈이 되오. 발이 빠지기 쉽지.”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좀 맞는 말이네.”

푸리나가 하융을 보았다.

“하융, 오늘 대사 장사가 잘되는데?”

하융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직 접시를 받지 못했소.”

죠니는 말린 과일 하나를 집어 하융 쪽으로 내밀었다.

“선불.”

하융은 그것을 받아들고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실제로 주는구려.”

“네가 청구했잖아.”

푸리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튼은 눈을 가늘게 접고 말했다.

“계약의 성립을 목격했습니다.”

“교수까지 증인 서면 진짜 일이 커지오.”

하융이 그렇게 말하자, 그레이의 입가에도 아주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검은 손님은 그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멈춰 있었다. 도장 끝에서 붉은 인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은 바닥에 닿기 전에 종이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그레이는 다시 검은 손님을 보았다.

“도장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죠니도 그레이를 보았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든 손을 조금 낮췄다.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레이는 창구 옆에 놓인 종이 더미를 보았다. 종이들은 너무 깨끗했다.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그 위에 도장만 찍히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오면 안 됩니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이 내민 종이를 받지 않고, 창구 옆에 놓인 낡은 신발을 들었다. 조금 전 희미해진 신발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종이 위에 올렸다. 빈 종이가 신발의 젖은 자국을 받아들였다. 하얀 종이에 작은 물기가 번졌다. 글자는 아니었지만, 흔적이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검은 손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다음으로 접힌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는 흐려지고 있었지만, 아직 모서리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신발 옆에 놓았다.

“이것도.”

깨진 숟가락.

“이것도.”

금이 간 그릇.

“이것도.”

물동이 손잡이.

“이것도.”

그레이가 물건들을 하나씩 종이 위에 올릴 때마다, 종이는 더 이상 하얗지 않게 되었다. 젖은 자국, 녹 자국, 손때, 잉크 얼룩, 오래된 밀가루 가루가 묻었다. 검은 손님의 도장은 점점 내려올 곳을 잃었다. 붉은 글씨가 찍힐 빈자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레이튼이 아주 부드럽게 물었다.

“그 문서에는 아직 제목이 없군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목이 있어야 합니까?”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직은 없어도 됩니다. 물건들이 먼저 놓였으니까요.”

레이튼은 만족한 듯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검은 손님에게 다가가려다가, 그레이보다 앞서지 않도록 멈췄다. 대신 방 안의 다른 손님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종이 받기 전에 들고 온 거 확인해. 없어졌으면 다시 찾아야지.”

그녀의 말투는 밝았지만, 장난스럽지만은 않았다. 손님들이 하나둘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손님은 편지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고, 어떤 손님은 숟가락 대신 빈 손을 쥐고 있었다. 방 안이 술렁였다.

죠니는 가까운 긴 의자 아래를 살피더니, 흐려진 물동이 손잡이 하나를 주워 올렸다.

“여기 하나.”

등불지기가 달려가 손님에게 돌려주었다. 손님은 손잡이를 받자마자 조금 또렷해졌다. 얼굴은 여전히 흐렸지만, 손가락의 윤곽이 돌아왔다.

하융은 창구 옆에 쌓인 종이 더미를 보았다. 종이들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저 종이들도 무서워하는 듯하오.”

레이튼이 물었다.

“무엇을 무서워한다고 보십니까?”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글자가 되기 전의 사물들 말이오. 종이는 빈 것을 좋아하는 듯하니.”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거 좋다. 빈 무대가 소품을 무서워하는 장면.”

죠니가 말했다.

“빈 무대는 보통 소품 기다리지 않아?”

푸리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좋은 빈 무대는 그렇지. 나쁜 빈 무대는 자기가 비어 있는 걸 아름답다고 착각해.”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극장주께서 질문을 던지셨군요.”

“질문 아니야. 불평이야.”

“좋은 불평은 종종 질문과 닮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으쓱했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검은 손님 앞에 다시 섰다. 검은 손님은 처음보다 작아져 있었다. 키가 줄었다기보다, 그림자가 짧아졌다. 도장은 여전히 손에 있었지만, 손이 조금 떨렸다.

그레이가 말했다.

“도장을 주십시오.”

검은 손님은 도장을 자기 가슴 가까이 당겼다.

“처리 완료.”

“아직 찍지 않겠습니다.”

검은 손님은 멈췄다.

“맡기겠습니다.”

그 말에 검은 손님의 얼굴 없는 종이가 흔들렸다. 여관의 성좌가 없었지만, 접수대에서 들었던 말이 방 안에 잠시 되살아난 듯했다. 맡기는 것. 빼앗는 것이 아니라, 부수는 것도 아니라, 필요한 때까지 손에서 내려놓는 것.

그레이는 손을 내밀었다.

검은 손님은 아주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손님들은 숨죽이고 보았다. 등불지기는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고,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손안에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죠니는 주워온 물건들을 손님들에게 돌려주고 있었고, 레이튼은 창구 옆의 종이들이 날리지 않게 찻잔으로 눌러두었다. 하융은 도장 소리가 남긴 울림이 아직 바닥에 남아 있는지 듣는 사람처럼 고개를 낮추었다.

마침내 검은 손님이 도장을 내밀었다.

그레이는 두 손으로 받았다. 도장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붉은 인주 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것을 창구 위에 내려놓지 않고, 작은 천에 감쌌다.

“감사합니다.”

검은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 없는 종이 위의 주름이 조금 펴졌다. 검은 몸은 더 작아졌다. 이제 그는 방을 집어삼킬 듯한 손님이 아니라, 길을 잃은 종이 인형처럼 보였다. 등불지기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앉을래요?”

검은 손님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장이 사라진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등불지기는 가장 가까운 의자를 가리켰다. 검은 손님은 거기 앉았다. 앉자, 그의 몸에서 종이 몇 장이 떨어졌다.

원인 불명.
성명 미상.
관례상 종결.
처리 완료.

종이들은 바닥에 떨어진 뒤, 붉은 글씨가 조금씩 옅어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크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레이는 그 종이들을 주워 한데 모았다. 그리고 창구 위 빈 상자에 넣었다. 상자에는 뚜껑이 없었다.

푸리나가 다가왔다.

“뚜껑은 안 닫아?”

그레이는 상자를 보았다.

“아직 닫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응.”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레이튼이 찻잔으로 눌러두었던 종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 방은 이전보다 조금 덜 시끄러워졌군요.”

죠니가 말했다.

“도장 소리가 안 나니까 살겠네.”

하융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소리가 줄어드니, 손님들의 손이 보이는구려.”

그 말대로였다. 긴 의자에 앉은 손님들의 얼굴은 여전히 흐렸지만, 손은 전보다 또렷해져 있었다. 누군가는 다시 편지를 쥐고 있었고, 누군가는 숟가락을, 누군가는 신발을, 누군가는 물동이 손잡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더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빈손은 아니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이제 다음 방으로 가도 돼요.”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내려다보았다. 진흙 자국 옆에 아주 작은 붉은 인주 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문지르지 않았다.

“네.”

푸리나가 물었다.

“손은 괜찮아?”

그레이는 자기 손을 보았다. 물의 방에서 씻었지만, 손톱 밑에는 아직 흙이 조금 남아 있었고, 손끝에는 붉은 인주가 묻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이번엔 씻으라고 안 할게. 또 다음 방에서 뭔가 묻을 것 같으니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다시 챙겼다.

“다음 방에서는 말보다 침묵이 많기를 기대해봅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러면 레이튼이 조금 심심하지 않을까?”

레이튼은 고개를 기울였다.

“침묵도 질문이 많습니다.”

죠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심심할 일은 없겠네.”

하융은 문 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말 없는 방이라면, 발소리가 대답하겠지요.”

푸리나는 손뼉을 치려다가, 이 방에서 큰 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손끝만 살짝 맞댔다.

“좋아. 그럼 다음 장면은 발소리.”

“작명은 또 시작되었구려.”

하융이 그렇게 말하자, 푸리나는 밝게 웃었다.

“하융도 이제 익숙해졌네.”

“익숙해지는 것과 납득하는 것은 다르오.”

죠니가 하융을 보며 말했다.

“오늘 제일 정확한 농담이네.”

하융은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 반 조각을 청구하겠소.”

이번에는 모두가 작게 웃었다. 검은 손님도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앉은 의자 아래에서 붉은 종이 하나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그들은 대기실을 나섰다. 뒤쪽 창구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도장도 작은 천 안에 묶인 채 상자 옆에 놓여 있었다. 닫힌 것은 없었다. 사라진 것도 많지 않았다. 다만 방 안의 소리는 달라졌다. 도장 소리 대신, 누군가 자기 물건을 다시 쥐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문을 지나기 전, 상자 쪽으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등불지기의 뒤를 따라 다음 방으로 걸어갔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5막 — 발소리의 정류장

대기실을 지나자 소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도장이 내려찍히던 방의 마른 울림은 문 뒤에 남았고, 대신 바닥 아래에서 낮은 떨림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고, 조금 더 걸으니 바퀴가 오래된 레일 위를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등불지기는 그 소리에 맞춰 걸음을 늦췄다. 아이의 젖은 신발은 여전히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발이 닿은 곳마다 바닥의 등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복도 끝에는 정류장이 있었다. 벽도 없고 지붕도 낮은, 그러나 분명히 정류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긴 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표지판에는 글자가 없었다. 대신 여러 개의 문패 그림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봉투, 젖은 신발, 깨진 숟가락,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 문패들은 바람도 없는데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흔들림이 멈추면 어디선가 바퀴 소리가 가까워졌고, 다시 흔들리면 멀어졌다.

그레이는 정류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정류장이라는 것은 기다리는 곳이었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머무는 곳. 누군가를 보내거나,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돌아오지 않는 발소리를 오래 듣는 곳. 그녀는 표지판의 그림들을 보다가, 가장 아래쪽에 걸린 빈 접시 문패에서 시선이 잠시 멈췄다. 죠니가 들고 있는 접시와 닮아 있었다. 다만 그림 속 접시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반듯이 놓여 있었다.

죠니가 그 시선을 따라가더니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내 건 아직 비어 있진 않아.”

푸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자랑처럼 말하는구나.”

“비어 있지 않은 접시는 자랑해도 돼.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레이튼은 표지판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문패들은 순서일까요, 아니면 정류장 이름일까요?”

등불지기가 대답했다.

“둘 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타고 가는 동안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너무 오래 보면 못 내려요.”

레이튼은 그 대답을 듣고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읽으라는 표지가 아니라, 적당히만 보라는 표지라.”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다. 극장 입구에 붙일까?”

죠니가 바로 말했다.

“너희 극장에 ‘적당히만 보시오’라고 붙이면 관객이 혼란스러워할걸.”

하융은 표지판의 문패들을 보다가 낮게 웃었다.

“과히 오래 보는 자는 길을 놓친다라. 내게 붙이면 퍽 매서운 팻말이겠구려.”

푸리나가 하융을 돌아보았다.

“그럼 붙여줄까?”

“전하께서 붙이시면, 내가 떼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오.”

“그건 또 그것대로 한 막이 되겠네.”

“부디 막이 짧기를 바라오.”

그레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정류장의 의자를 보았다. 의자에는 먼지가 없었다. 누군가 방금 일어난 것처럼, 앉았던 자리가 아주 희미하게 눌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없었다. 등불지기는 의자에 올라앉지 않고, 표지판 아래에 서서 등불을 무릎 높이로 낮췄다. 빛이 바닥을 비추자, 여러 겹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크고 작은 발자국, 맨발의 흔적, 지팡이 끝의 둥근 자국, 수레바퀴가 지나간 얕은 선. 발자국들은 정류장으로 모였다가, 레일 쪽으로 사라졌다.

그레이는 발자국들을 보았다. 기록할 수 없는 발자국이었다. 너무 많았고, 서로 겹쳤으며, 이미 지나간 것들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하나하나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가장 가까운 작은 발자국 앞에서 잠시 눈을 낮췄다. 발자국은 물기에 젖은 듯 반짝였고, 그 끝에는 진흙이 조금 말라 있었다.

정류장 저편에서 빛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등불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빛은 점점 길어졌고, 곧 낮은 마차의 형체가 되었다. 말은 없었다. 바퀴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차체가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다가왔고, 창문마다 작은 등불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마차가 정류장에 멈출 때도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다린 숨이 한 번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타요.”

푸리나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좌석 지정제야?”

“아니요.”

“그럼 내가 창가.”

죠니가 말했다.

“너는 어딜 가도 창가부터 노리네.”

“관객에게 풍경은 중요해.”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레이 경께서 먼저 고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 밤의 손님이시니까요.”

그레이는 마차 안을 보았다. 좌석은 길게 이어져 있었고,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문 가까운 자리로 걸어갔다. 필요하면 바로 내릴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자 등불지기가 고개를 저었다.

“거긴 기다리는 자리예요.”

그레이는 멈췄다.

“기다리는 자리입니까?”

“네. 오늘은 저쪽.”

아이가 가리킨 곳은 가운데 자리였다. 창과도 가깝고 문과도 멀지 않은, 그러나 바로 일어나기에는 조금 애매한 자리였다. 그레이는 잠시 그 자리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고, 죠니는 접시를 가슴 앞에서 살짝 고쳐 들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가 흔들리지 않게 손잡이를 잡았고, 하융은 마차 바닥의 레일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등불패가 무릎 위에서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려다가, 한 손에는 아직 작은 빵 조각을 감싼 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 천을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별말하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자기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렸다.

푸리나는 그레이 옆자리에 앉으려다, 잠시 멈췄다.

“옆에 앉아도 돼?”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푸리나를 보았다.

“물론입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앉았다. 평소라면 “주연 옆자리는 연출자의 특권!” 같은 말을 했을 법했지만,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 맞은편에 앉았고, 하융은 창가에 앉았다. 죠니는 접시가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고르느라 한 번 자리를 바꾸었다.

마차가 움직였다.

창밖에는 거리도 숲도 없었다. 대신 문패들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식탁의 방에서 보았던 빵 조각이 보였다. 빵은 아주 잠깐 창밖에 떠 있다가 뒤로 밀려났다. 다음은 젖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은 걸어가지 않고, 등불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은 접힌 편지였다. 편지는 봉해지지 않은 채 창밖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레이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보았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바퀴 소리도 거의 없었다. 창밖의 문패들이 지나갈 때마다, 각자의 작은 소리만 들렸다. 빵이 식어가는 소리, 물동이에 물이 닿는 소리, 편지지가 접히는 소리, 신발 끈이 젖어 풀리는 소리. 그 소리들은 너무 작아서 귀로 듣는 것인지, 손끝으로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등불지기는 문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흔들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마차가 움직여도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다 적지 않아도 돼요?”

아이가 물었다.

그레이는 창밖의 문패들을 보았다. 깨진 숟가락이 지나가고 있었다. 숟가락의 금 간 부분이 등불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

“지금은…… 보겠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하고 있어요.”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눈을 내렸다. 칭찬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안내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아이의 말은 무겁지 않았다.

푸리나는 창밖을 보다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커튼 고리가 없어서인지, 그녀의 손은 잠시 허공에서 작게 원을 그렸다.

“극장에서 이 장면을 만들면, 관객들이 너무 조용해질까?”

레이튼이 대답했다.

“조용해지는 것도 반응입니다.”

“그건 알아. 그런데 나, 가끔 조용한 반응은 조금 무서워.”

죠니가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도 돼. 네가 안 무서운 척하면 그게 더 무섭거든.”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그 말, 왜 그렇게 맞는 말처럼 들려?”

“맞는 말이라서?”

하융이 창밖을 보며 덧붙였다.

“침묵도 객석의 숨이라면, 박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오. 다만 소리가 안 날 뿐이겠지요.”

푸리나는 하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하융, 오늘 왜 이렇게 연출가한테 유용한 말을 많이 해?”

“내가 창가에 앉았기 때문이오. 경치가 말을 부르는구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창가 좌석의 효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겠습니다.”

죠니가 접시를 보며 말했다.

“그 연구는 식후에 해. 빈속으로 창가 철학하면 멀미날까 무섭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창밖을 보았다. 문패들은 계속 지나갔다. 붉은 끈이 보였다. 작은 손목에 묶였던 것인지, 편지를 묶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는 빈 접시가 지나갔다. 죠니의 접시보다 조금 더 얇고 오래된 접시였다. 접시의 가운데에는 빵가루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천을 보았다. 안에는 아까 받은 빵 조각이 있었다. 그녀는 천을 펼치지 않았지만, 그 무게는 느껴졌다.

마차는 어느 정류장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창밖에는 가끔 의자가 보였다. 누군가 앉아 있다가 방금 일어난 자리처럼, 조금 눌린 의자들. 그 옆에는 등불이 있었다. 어떤 등불은 꺼져 있었고, 어떤 등불은 아주 낮게 타고 있었다. 하융은 그 등불들을 유심히 보았다.

“이곳의 등불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오?”

등불지기가 대답했다.

“내릴 사람요.”

“탈 사람은 아니고?”

“탈 사람은 정류장에서 기다려요. 내릴 사람은 불을 보고 내려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내려야 할 곳에도 별이 필요하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거 좋다.”

죠니가 이번에는 하융보다 먼저 말했다.

“접시 한 조각?”

하융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당한 대가라 생각하오.”

죠니는 말린 과일을 하나 반으로 잘라 하융에게 건넸다.

“요즘 시세가 불안정해서 반 조각이야.”

하융은 받아들고 잠시 보았다.

“언어 시장도 흉년이구려.”

레이튼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경제학적 은유까지 도입되었군요.”

푸리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마차 안의 웃음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래도 좌석 사이에 잠깐 따뜻한 것이 생겼다. 그레이는 그 따뜻함을 느끼며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손으로 눌렀다.

창밖에 물동이가 지나갔다. 물동이는 기울어져 있었지만, 쏟아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물동이의 손잡이를 보았다. 대기실에서 흐려졌다가 되돌아온 손잡이와 닮아 있었다. 다음으로는 심지가 지나갔다. 물의 방에서 진흙 손님이 남기고 간 것보다 더 마른 심지였다. 그 심지 끝에 아주 작은 불씨가 붙어 있었다.

그레이는 그 불씨를 오래 보았다.

마차 안의 불빛이 잠시 낮아졌다. 모두가 창밖을 보았다. 불씨가 뒤로 멀어지자, 어둠 속에서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골목이었다. 비가 온 뒤의 골목. 물의 방에서 보았던 그 골목과 닮았지만, 이번에는 더 조용했다. 문 앞에는 작은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배수구에는 새 쇠살대가 놓여 있었다. 등불은 켜져 있었다. 빛은 크지 않았지만, 문턱 아래까지 닿았다. 누군가 문 안에서 빗자루를 세워두고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방금 지나간 것 같았다.

그레이는 창문을 향해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레이튼도 말하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 위의 마지막 말린 과일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두었다.

하융은 창밖의 골목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마차는 계속 갔다. 그 뒤로 지나간 문패들은 조금씩 낯설어졌다. 낡은 장갑, 깨진 머그잔, 금 간 거울, 구부러진 못, 한쪽만 남은 귀걸이, 초가 거의 다 탄 촛대. 그레이는 더 이상 모든 물건을 오래 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짧게 보고 지나쳤고, 어떤 것은 잠깐 눈을 낮췄으며, 어떤 것은 그저 창밖에서 사라지게 두었다.

등불지기가 옆으로 다가왔다.

“다 기억해요?”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부는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레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작은 나무빗이 지나갔다. 빗살 몇 개가 부러져 있었다. 그 뒤에는 빈 의자가 있었다. 그레이는 그 둘을 본 뒤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등불지기는 만족한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아주 어려운 대답을 하셨군요.”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예. ‘괜찮다’는 말은 종종 지나치게 넓습니다. 그런데 방금은 꽤 알맞은 크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식 칭찬은 가끔 포장지가 두꺼워.”

레이튼은 웃었다.

“그래도 내용물은 칭찬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칭찬이 많네. 조용한 극도 나쁘지 않아.”

하융은 창가에 기대지 않고, 등을 곧게 세운 채 말했다.

“소리가 적으면 작은 농담도 오래 가는 법이오.”

죠니가 접시를 보았다.

“그 말도 꽤 비싸 보이는데.”

하융은 이번에는 손을 저었다.

“이번 것은 무료로 하겠소. 과다 청구는 장기적으로 시장을 해치오.”

푸리나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웃음이 마차 안에서 둥글게 굴러갔다. 그레이도 고개를 아주 조금 숙인 채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작았지만, 전보다 조금 덜 숨겨져 있었다.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창밖의 문패들이 멀어지고, 대신 작은 집 하나가 나타났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방이라고 하기에는 문패가 있었다. 문패에는 등불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와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패에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고, 저 문패에는 의자 하나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등불지기가 문 쪽으로 갔다.

“내려야 해요.”

푸리나가 창밖을 보았다.

“벌써?”

“여기가 손님 방 앞이에요.”

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마차 문이 열렸다. 밖에는 정류장이 없었다. 작은 집 앞에 낮은 등불이 하나 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물을 담은 대야와 접힌 수건, 그리고 작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집 뒤쪽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밤이 잠을 준비하고 있는 어둠에 가까웠다.

그레이는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 위의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잊지 않고 집어 들었다. 죠니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튼도 앉은 채 기다렸다. 하융은 창가에서 그레이를 보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여기부터는 조금만 걸어요.”

그레이는 문 앞에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함께 가십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등불지기를 보았다.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문 앞까지는요. 방 안은 손님 방이에요.”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럼 문 앞까지.”

죠니는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방 안에 음식 반입 금지 같은 규칙은 없지?”

등불지기는 죠니의 접시를 보았다.

“흘리지만 않으면 돼요.”

죠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규칙이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챙겼다.

“차도 문 앞까지는 허락되겠지요?”

등불지기는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차는 대부분 허락돼요.”

하융이 말했다.

“참으로 문명적인 거리로군.”

그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발밑의 바닥은 나무도 돌도 아니었다. 오래 밟힌 마룻바닥 같으면서도, 흙길처럼 부드러웠다. 그레이의 신발 아래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발자국이 남았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레이는 그 자국을 보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여긴 남아요.”

“그렇습니까.”

“금방 사라지지만요.”

그레이는 자기 발자국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러고는 작은 집의 문패를 향해 걸었다. 손목의 등불패가 문패와 가까워지자, 두 등불 그림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문 앞에 놓인 의자는 작았다. 아이의 의자 같기도 하고, 잠깐 앉아 신발을 벗기 위한 의자 같기도 했다.

하융이 문 앞에서 낮게 말했다.

“그레이 경.”

그레이는 돌아보았다.

“네.”

하융은 손잡이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문 앞의 의자를 보았다.

“놓이는 것과 쉬는 것은 다르오.”

그 말은 낮고 오래된 말투로 흘러나왔다. 한문체로 굳어지지는 않았지만, 하융의 목소리 안쪽에서 먼 고향의 문턱이 잠시 열리는 듯했다.

“오늘 그대는 놓인 것이 아니라, 앉는 것이오.”

그레이는 아주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기다렸고, 죠니는 접시를 몸 가까이 들었으며,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등불지기는 문고리를 잡지 않았다. 아무도 먼저 열지 않았다.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리고 그녀는 문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낮았다. 앉으니 손목의 등불패가 무릎 위에 닿았다. 발자국은 아직 문 앞에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감싼 빵 조각을 손에 들고, 잠시 문패의 등불을 보았다.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문은 닫힌 채로, 안쪽에서 따뜻한 빛만 아주 조금 새어 나왔다.

푸리나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다섯 번째 장면.”

죠니가 속삭였다.

“제목은?”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발소리의 정류장.”

레이튼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목입니다.”

하융은 작게 웃었다.

“오늘은 내가 값을 청구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죠니가 말했다.

“방금은 푸리나가 지은 거잖아.”

“그러니 무료요.”

푸리나는 웃음을 참고,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불지기는 그 옆에 서서 등불을 낮게 들었다. 문 앞의 빛은 작았고, 의자는 낮았고, 밤은 길었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6막 — 손님 방

문은 스스로 열리지 않았다. 그레이가 빵 조각을 한 입 베어 문 뒤에도, 문은 닫힌 채로 있었다. 안쪽의 빛만 문틈 아래로 얇게 흘러나왔다. 그 빛은 재촉하지 않았다. 초대장처럼 넓게 펼쳐지지도 않았고, 명령문처럼 곧게 뻗지도 않았다. 다만 문 아래의 먼지를 조금 밝히고, 그레이의 신발 끝에 닿아 있었다. 그레이는 빵을 천천히 삼켰다. 밀가루 냄새와 말린 과일의 단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남은 빵 조각을 다시 천으로 감싸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죠니가 그 모습을 보고 낮게 말했다.

“다 먹으라는 말은 안 할게.”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정말입니까?”

“응. 대신 한 입 더는 권할 수 있어.”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게 네가 말하는 양보야?”

“상당히 큰 양보지. 내가 보기엔 거의 외교야.”

레이튼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협상안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요구를 낮췄고, 선택권을 남겼으니까요.”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 빵 권유를 조약으로 만들지 마.”

하융은 문 앞의 작은 의자를 보며 말했다.

“조약의 이름은 ‘빵 한 입 더’가 되겠구려.”

푸리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문 앞의 빛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레이는 웃는 사람들을 보다가, 결국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죠니는 아무 말 없이 만족한 얼굴을 했고, 푸리나는 승리 선언을 하려다가 손가락만 살짝 들어 올리고 말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을 곳을 찾다가 의자 옆 바닥이 마른 것을 확인했고, 하융은 문패의 등불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등불지기는 문고리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그레이가 빵을 삼키는 동안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이 일인 사람처럼, 아이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천을 접어 무릎 위에 올려두자, 그제야 등불지기가 물었다.

“들어갈래요?”

그레이는 문을 보았다.

“혼자 들어가야 합니까?”

“방 안은 손님 방이에요.”

아이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레이는 그 단순함 때문에 더 묻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레이의 옆에 앉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커튼 고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 앞에는 있을게.”

그레이는 푸리나를 보았다.

“감사합니다.”

“응. 너무 오래 안 나오면 노크할 거야. 아주 품위 있게.”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가 품위 있게 노크하는 건 꽤 보기 드문 공연이겠네.”

푸리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나도 할 때는 해.”

레이튼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품위와 극성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죠니가 잠시 침묵했다.

“그건 칭찬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겠습니다.”

하융이 조용히 덧붙였다.

“레이튼 경의 칭찬은 찻잎과 같소. 뜨거운 물이 닿아야 본색을 알 수 있구려.”

레이튼은 즐겁다는 듯 눈을 접었다.

“아름다운 평가입니다. 그 말은 제가 차 한 잔으로 사겠습니다.”

“오늘은 접시보다 품위 있는 화폐가 나왔구려.”

그레이는 작게 웃었다. 문 앞의 공기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등불지기는 그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문고리를 잡았다.

“손님이 열어야 해요.”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낮아서, 일어날 때 무릎에 손을 짚어야 했다. 그녀는 손목의 등불패가 문패와 나란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두 등불 그림은 닮았지만, 같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은 걸어온 길의 빛 같았고, 문패의 등불은 방 안에서 기다리는 불 같았다.

그레이는 문고리를 잡았다.

문은 가볍게 열렸다.

방 안에는 특별한 것이 많지 않았다. 침대 하나, 작은 탁자 하나, 물이 담긴 대야, 접힌 수건, 낮은 등불, 그리고 빈 의자 하나. 벽에는 장식이 거의 없었다. 한쪽 벽에는 작은 창이 있었지만, 창밖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유리에는 여관거리의 등불들이 희미하게 비쳤다. 침대 위의 이불은 오래 사용한 것처럼 부드러웠고, 베개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탁자 위에는 펜도 장부도 없었다. 대신 따뜻한 물 한 잔과 작은 접시가 있었다. 접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는 문턱 안쪽에서 멈췄다. 방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할 일이 보이지 않았다. 대야의 물은 깨끗했고, 수건은 접혀 있었고, 등불은 이미 켜져 있었으며, 의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녀가 고칠 것은 없었다. 적어도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등불지기가 문밖에서 말했다.

“들어가도 돼요.”

그레이는 한 걸음 들어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뒤쪽에서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기척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이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 기척도 조용히 멀어졌다.

그녀는 먼저 대야 앞에 섰다. 물은 따뜻했다. 물의 방에서 씻은 뒤에도 남아 있던 진흙과 인주 자국이 손가락 사이에 조금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손을 물에 담갔다. 이번에는 누군가 “손부터”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은 조용히 손을 감쌌고, 손톱 밑의 흙은 천천히 풀렸다. 붉은 인주 자국은 한 번에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리해서 문지르지 않았다. 천천히, 물이 허락하는 만큼만 씻었다.

수건은 부드러웠다. 너무 새것도 아니고, 낡아서 거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손님이 부담 갖지 않게 일부러 그런 것을 골라둔 것 같았다. 그레이는 손을 닦은 뒤 수건을 다시 접으려 했다. 손이 반쯤 움직이다가 멈췄다. 이미 접혀 있던 선이 있었고, 그녀가 다시 접으면 젖은 부분이 안쪽으로 들어갈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는 수건을 탁자 옆 작은 걸이에 걸었다. 물기가 마를 수 있게.

그것은 정리라기보다, 다음 손을 위한 작은 배려에 가까웠다. 그러나 방은 그 손짓을 문제 삼지 않았다. 등불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다.

그레이는 의자 앞에 섰다. 의자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다. 문 앞의 작은 의자보다 조금 더 편해 보였다. 앉으면 침대와 탁자와 창이 모두 보일 자리였다. 그녀는 바로 앉지 않고, 먼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고칠 것은 없었다. 쓸 것은 없었다. 물을 갈 필요도, 등불 심지를 자를 필요도, 침대보를 다시 펼 필요도 없었다.

문밖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레이?”

그레이는 문 쪽을 보았다.

“네.”

“괜찮아?”

그레이는 방 안을 보았다. 깨끗한 대야, 걸린 수건, 빈 접시, 켜진 등불, 낮은 의자.

“네.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문밖의 기척이 조금 물러났다.

그레이는 의자에 앉았다.

앉자 방 안의 소리가 달라졌다. 서 있을 때는 물소리와 등불 심지 타는 소리가 분리되어 들렸는데, 앉고 나니 두 소리가 같은 방 안에서 천천히 섞였다. 창에는 여관거리의 불빛이 비쳤고, 그 불빛 사이로 조금 전 지나온 문패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젖은 신발, 편지, 숟가락, 물동이,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것들은 유리 위에 머물렀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빵 조각을 보았다. 천에 싸여 있던 빵은 조금 눌려 있었다. 그녀는 천을 풀고, 남은 빵을 접시 위에 올렸다. 접시는 빈 채로 기다리고 있었고, 빵은 그 위에 조용히 놓였다. 그레이는 한동안 그 모습을 보았다. 접시는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빵을 집어 들고 천천히 먹었다. 아주 조금씩. 밖에서 죠니가 지켜보고 있으면 “너무 천천히 먹는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속도로 먹었다. 식은 빵이었다. 그래도 씹을수록 단맛이 조금 났다. 마지막 조각을 삼키고 나자, 접시에는 작은 빵가루가 남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치우려다가 멈췄다. 손끝에 붙은 빵가루를 보다가, 창밖의 빈 접시 문패를 떠올렸다.

그녀는 빵가루를 손가락으로 모아 접시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렸다.

방 안의 등불이 아주 조금 낮아졌다. 그레이는 등을 의자에 기댔다. 완전히 기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깨가 의자에 닿았다. 그 정도로도 방의 온도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잠들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직 방 안의 빛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창 유리에 다시 문패들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사물들이 아니라, 손들이 보였다. 빵을 반으로 나누던 손, 젖은 신발 끈을 풀던 손, 편지를 접던 손, 숟가락을 쥐던 손, 물동이를 들던 손, 등불 심지를 자르던 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들은 각자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 손들을 보았다. 기록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자를 쓰지도 않았다. 다만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문밖에서 낮은 대화가 들렸다.

“안에서 조용한데.”

죠니의 목소리였다.

푸리나가 대답했다.

“조용한 방이니까.”

“그건 알지. 근데 너무 조용하면 들어가 봐야 하나 싶어서.”

레이튼이 말했다.

“조용함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은 무너지는 조용함보다는 머무는 조용함에 가깝군요.”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 너는 조용함까지 분류하는구나.”

“차도 침묵 속에서 우러나니까요.”

하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덜 우러난 모양이오. 문 앞에서 자꾸 말을 하게 되는구려.”

푸리나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하융, 그거 꽤 귀여운 자기평가야.”

“전하. 귀여움은 내 칭호 목록에 없소.”

“그럼 오늘 추가하자.”

“부디 그러지 마시오. 기록 담당이 지금 방 안에 있소.”

죠니가 낮게 웃었다.

“좋은 방어였네.”

그레이는 의자에 기대어 그 대화를 들었다. 문밖의 목소리들은 멀지 않았지만, 방 안을 침범하지 않았다. 마치 복도에 걸어둔 등불처럼, 거기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가 무릎 위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보다가, 손으로 문지르지 않았다.

탁자 위의 물잔에서 김이 조금 올라왔다. 그레이는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물은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아니었다. 목을 지나기 좋을 만큼 따뜻했다. 물을 내려놓자, 창 유리에 작은 방울이 맺혔다. 그 방울 너머로 손들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나타났다.

장부였다.

그녀가 책상 위에 두고 온 장부와 닮아 있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표지는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고, 모서리에는 손때가 덜했다. 장부는 창 유리 너머에 놓여 있었다. 펼쳐져 있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펴야 할 것 같았다.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닫힌 장부는 늘 다음 일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창 유리 너머의 장부 옆에는 작은 의자가 있었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의자. 그 위에는 접힌 수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장부와 의자는 나란히 있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레이는 손을 다시 무릎 위에 놓았다.

장부는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 창 유리에서 천천히 흐려졌다. 사라지기 전에 표지가 한 번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덮어둔 책을 다시 정돈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그녀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장부에게인지, 문패들에게인지, 자기 손에게인지. 그러나 말은 방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등불 아래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두 번 두드려졌다.

톡, 톡.

정말로 품위 있는 노크였다. 그레이는 문 쪽을 보았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문이 조금 열리고, 푸리나가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문을 활짝 열고 등장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조심스러웠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어색해서,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웃어?”

“정말 품위 있게 노크하셨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가슴을 폈다.

“그렇지? 나도 할 수 있다니까.”

문밖에서 죠니가 말했다.

“드문 장면이라 기억해둬야 해.”

레이튼이 이어 말했다.

“역사적 기록 가치가 있습니다.”

하융도 낮게 덧붙였다.

“품위 있는 노크. 좋은 제목이오.”

푸리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해. 지금 내가 품위 유지 중이야.”

그레이는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웃었다. 방 안의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본 뒤,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문가에 손을 얹었다.

“방은 어때?”

그레이는 방 안을 한 번 보았다. 대야, 수건, 의자, 빈 접시에 남은 빵가루, 따뜻한 물잔, 창 유리에 남은 흐린 김.

“조용합니다.”

“불편하지는 않고?”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낯설지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성공.”

“성공입니까?”

“응. 낯선데 불편하지 않으면, 그건 꽤 좋은 방이야.”

그레이는 그 말을 따라 방 안을 다시 보았다. 낯선데 불편하지 않은 방. 표현은 푸리나다웠지만, 이상하게 맞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커튼 고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별이 하나 있었다. 잘 그린 별은 아니었다. 삐뚤고, 한쪽 끝이 조금 길었다.

“이건 뭐냐면.”

푸리나는 스스로도 조금 민망한 듯 종이를 흔들었다.

“방문 금지 표시는 너무 차갑잖아. 그래서 방문 조심 표식.”

그레이는 종이를 보았다.

“방문 조심…… 표식입니까?”

“응. 내가 너무 자주 들여다보고 싶어질까 봐, 나한테 붙이는 거야.”

문밖에서 죠니가 말했다.

“그건 네게 꽤 필요한 표식이네.”

푸리나는 무시했다.

“문 바깥에 붙여둘게. 필요하면 부르고, 아니면 내가 너무 자주 묻지 않을게.”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의 말은 가벼운 것처럼 들렸지만, 문가에서 멈추는 손은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손님은 종을 울리면 돼.”

“종이 있습니까?”

푸리나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탁자 위의 작은 방울을 발견했다. 아까는 없었던 물건이었다. 은색도 금색도 아닌, 오래 닦은 주석빛 방울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있네.”

“방금 생긴 것 같습니다.”

“여관이니까.”

푸리나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문 바깥에 삐뚤어진 별 표시를 붙였다. 종이가 문에 붙자, 별의 한쪽 끝이 조금 접혔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펴려다가 멈췄다. 아마 너무 손대면 더 구겨질 것 같았던 모양이다.

“좋아. 그럼 잠깐 더 있어도 돼. 다음 장면은 네가 나오고 싶을 때 시작하자.”

그레이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가 정합니까?”

“응. 오늘은 그런 극이야.”

푸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천천히 닫았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틈을 남겼다. 빛과 목소리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그레이는 다시 의자에 기대었다. 탁자 위의 방울은 조용히 있었다. 문밖에서는 낮은 목소리들이 다시 작게 움직였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 레이튼이 차를 따르는 소리, 하융이 무엇인가 짧게 대답하는 소리, 푸리나가 숨을 죽여 웃는 소리. 방 안에서는 등불 심지가 타는 소리와 물잔의 김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 감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등불 하나가 흔들릴 만큼, 찻잔의 김이 한 줄 줄어들 만큼, 문밖의 웃음이 한 번 지나갈 만큼이었다. 눈을 뜨자 방은 그대로 있었다.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대야의 물은 조금 식었고, 접시에는 빵가루가 남았으며, 문밖의 별 표식은 아마 아직 붙어 있을 것이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한 번 만졌다.

그리고 조금 더 앉아 있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7막 — 문패를 고르는 밤

그레이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문밖의 복도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 낮은 목소리와 찻잔 소리가 머물던 자리에는 길게 이어진 나무 바닥이 놓여 있었고, 그 끝에는 작은 정원이 보였다. 정원이라고 부르기에는 흙이 적고, 마당이라고 부르기에는 등불이 많았다. 바닥에는 둥근 돌들이 박혀 있었고, 돌 사이에는 짧은 풀들이 자라 있었다. 풀잎 끝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그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고 작은 불빛을 품고 있었다. 문밖에 붙어 있던 푸리나의 삐뚤어진 별 표식은 아직 그대로였다. 한쪽 끝이 조금 접힌 채로, 아주 당당하게 문을 지키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별 표식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커튼 고리가 아니라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융은 복도 끝의 정원을 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조금 묘했다. 창문도 아닌데 창밖을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푸리나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나왔네.”

그레이는 문가에서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다리는 장면도 극이니까 괜찮아.”

죠니가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이 극은 점점 연출자한테 편리한 규칙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편리한 규칙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남용되면 질문이 필요해지지요.”

푸리나는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 지금 나한테 질문 예고한 거야?”

“아직은 예고에 그치겠습니다.”

하융이 낮게 웃었다.

“예고편이 본편보다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오.”

푸리나는 작게 손뼉을 치려다, 밤의 여관거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손끝만 맞댔다.

“좋아. 오늘은 모두가 적당히 참아주고 있어. 아주 훌륭한 관객들이야.”

죠니가 말했다.

“관객이라기엔 다들 너무 많이 걷고 있는데.”

“걸어 다니는 관객도 있을 수 있어.”

“그럼 발값도 받아야겠네.”

하융은 잠시 자기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몇 막째 관람료를 낸 셈이오.”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웃었다. 방 안에서 쉬고 나온 뒤라서인지, 그 웃음은 전보다 조금 쉽게 나왔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도 과장되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눈만 살짝 휘어졌다.

복도 끝의 정원에서는 등불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자기 등불을 들고 있었지만, 불빛이 전보다 낮았다. 낮아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 이제 가까이 있는 것들만 비추려는 듯했다. 등불지기는 그레이가 다가오자 정원 안쪽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고르면 돼요.”

그레이는 멈췄다.

“무엇을 말입니까?”

“가지고 나갈 것.”

정원 한가운데에는 낮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는 돌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문패가 놓여 있었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봉투, 젖은 신발, 깨진 숟가락,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 외에도 몇 개가 더 있었다. 금 간 찻잔, 작은 종이배, 녹슨 못, 접힌 손수건, 낡은 빗, 물에 젖은 나무패. 문패들은 모두 작았고, 각각의 표면에는 아주 약한 빛이 고여 있었다.

그레이는 탁자 앞에 섰다. 문패들은 조용했다. 그녀가 이름을 묻지 않아도, 문패들은 스스로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놓여 있었다. 오래 놓여 있었던 물건처럼, 그리고 누군가 방금 내려놓은 물건처럼.

푸리나는 그레이보다 조금 뒤에 섰다. 죠니는 접시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탁자에 올려놓지 않았다. 하융은 정원 입구의 돌 하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정원 안쪽에서 여관의 성좌가 걸어왔다. 그는 처음 접수대에서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정한 앞치마, 흔들리지 않는 열쇠 꾸러미, 낮고 정중한 목소리. 다만 이번에는 접수대가 없었다. 그는 문패들이 놓인 탁자 곁에 서서 그레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쉬셨습니까, 손님.”

그레이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조금 앉아 있었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답입니다.”

“좋은 대답입니까?”

“여관에서는 때로 ‘조금 앉아 있었다’는 말이 긴 여행기보다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여관 주인답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말은 좀 인정.”

레이튼은 미소만 지었다. 하융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의 성좌는 탁자 위의 문패들을 가리켰다.

“돌아가기 전에 하나를 고르셔야 합니다.”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하나만입니까?”

“오늘 밤 손님으로 가져갈 것은 하나입니다.”

그레이의 시선이 빵 조각 문패에 닿았다. 식탁의 방에 있던 반쯤 먹은 빵이 떠올랐다. 죠니가 내민 빵도, 손님 방에서 끝까지 먹은 작은 조각도 함께 떠올랐다. 다음으로 물동이를 보았다. 대기실에서 흐려졌던 물동이 손잡이, 물의 방에서 따뜻하게 흔들리던 욕조의 물, 대야의 물. 편지 봉투는 아직 봉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젖은 신발은 돌 하나를 빼낸 뒤 조금 방향을 바꾸어 놓인 채였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고르기 어렵습니까?”

“네.”

“전부 가져가고 싶으십니까?”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전부 가져간다는 말은 이상했다. 손에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져간 뒤 어디에 둘 것인가. 장부에 끼울 것인가, 책상 위에 둘 것인가, 방 안에 걸 것인가. 문패들은 여기에 놓여 있을 때 더 조용해 보였다. 탁자 위에서 서로의 빛을 침범하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기다렸다.

그레이는 다시 문패들을 보았다. 녹슨 못 옆에 놓인 작은 종이배가 조금 젖어 있었다. 붉은 끈은 스스로 엉키지 않도록 느슨하게 말려 있었다. 빈 접시는 가장자리만 낡았고, 가운데는 깨끗했다. 등불 심지는 물의 방에서 보았던 젖은 심지와 달리 마른 상태였다.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심지였다.

그레이는 그 심지를 오래 보았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는 없나?”

여관의 성좌는 푸리나를 보았다.

“극장주께서 그렇게 묻는군요.”

푸리나는 조금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내가 고르는 건 아니지만.”

“맞습니다. 그러나 좋은 동행자는 종종 손님보다 먼저 불편함을 알아차립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칭찬인지 지적인지 애매했지만, 이번에는 받아들이기로 한 듯했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이, 반드시 하나의 물건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또 시작이네.”

“아직 질문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 자체가 시작 같은데.”

하융은 정원의 물방울을 보며 말했다.

“때로는 손에 쥐는 것보다, 두고 나가는 법을 고르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소.”

그 말에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하융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가 말한 뒤에도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풀잎 끝에 매달린 등불빛만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레이는 탁자 위에 손을 올리지 않은 채, 여관의 성좌에게 물었다.

“문패들은 이곳에 남아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남으면…… 잠듭니까?”

“준비가 된 것은 잠듭니다. 아직 기다려야 하는 것은 더 머뭅니다. 어느 쪽이든, 급히 치우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탁자 위의 문패들을 하나씩 보았다. 이번에는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사하기 위해 보는 것 같았다. 빵, 물동이, 편지, 신발, 숟가락, 심지, 끈, 접시. 그녀는 눈으로만 지나가지 않았다. 아주 짧게, 그러나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그녀가 집은 것은 문패가 아니었다. 탁자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작은 등불이었다. 등불은 장식처럼 보였고,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문패들 사이의 빛을 보태는 도구 정도로만 보였다. 안쪽에는 불이 없었다. 기름도 거의 없었다. 다만 손잡이가 있었다. 들고 걸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여관의 성좌가 그 등불을 보았다.

“그것을 고르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문패들은 두고 가겠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져가십니까?”

그레이는 작은 등불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잡았다. 매우 가벼웠다. 그러나 비어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것을…… 빌려가겠습니다.”

정원은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숨을 참았고, 죠니는 접시를 조금 낮췄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손잡이에 닿은 손가락을 멈췄고, 하융은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여관의 성좌는 그레이를 보았다. 부드러운 눈이었다. 그러나 규칙을 확인하는 사람의 눈이기도 했다.

“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빌려간다고 하십니까?”

그레이는 등불을 보았다.

“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입니까?”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언제. 그 질문은 날짜를 묻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등불을 더 이상 들지 않아도 될 때인지, 누군가 다른 손님에게 필요해질 때인지, 혹은 자신이 다시 이 거리의 문을 지나올 때인지 알 수 없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대신해 말하려다 멈췄다. 죠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보태지 않았고, 하융은 기다렸다.

그레이는 천천히 말했다.

“다시 와야 할 때가 오면요.”

여관의 성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때까지 맡기겠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등불에 손끝을 대자, 불이 붙었다. 아주 작은 불이었다. 빛은 탁자 위의 문패들을 모두 비추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그레이의 손과, 손목의 등불패와, 발밑의 돌 하나를 비추기에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그 빛을 보고 낮게 말했다.

“작네.”

여관의 성좌가 대답했다.

“작은 빛은 오래 보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좋아.”

죠니가 접시를 들고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그럼 하나 빌렸으니까, 하나는 먹어.”

그레이가 눈을 깜박였다.

“네?”

죠니는 접시 위의 마지막 말린 과일 조각을 보여주었다.

“정산. 빛만 들고 가면 너무 허전하잖아.”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죠니식 의례네.”

“아주 실용적인 의례지.”

그레이는 말린 과일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먹어도 돼. 이번 건 작으니까.”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죠니 경의 권유가 점점 세련되어지는군요.”

죠니가 말했다.

“교수, 그 말은 좀 불안한데.”

“칭찬입니다.”

“포장지 얇게 해줘서 고맙네.”

하융은 그레이가 든 등불을 보며 말했다.

“그 빛은 장대한 등불이 아니오. 허나 발밑 하나를 비추기엔 족하구려.”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그 말은 내가 사고 싶어.”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전하께는 비싸게 받아도 되오?”

“왜?”

“왕실 예산이 있을 테니.”

죠니가 바로 끼어들었다.

“하융, 그건 위험한 말이야.”

레이튼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재정 담당자가 부재한 자리에서 왕실 예산을 논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막 쓰는 사람처럼 보여?”

죠니, 레이튼, 하융이 동시에 아주 짧게 침묵했다.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좋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그레이는 말린 과일 조각을 손에 든 채 웃었다. 이번에는 작게 숨이 새었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보고, 입술 끝을 올렸다. 여관의 성좌도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은 듯했다.

등불지기가 탁자 위의 문패들을 바라보았다.

“두고 가도 괜찮아요?”

그 질문은 그레이에게 향해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작았다.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빵, 물동이, 편지, 신발, 숟가락, 심지, 끈, 접시. 그중 몇 개는 아직 빛이 흔들리고 있었고, 몇 개는 이미 깊이 잠든 듯 고요했다.

“네.”

그녀는 조금 뒤에 덧붙였다.

“여기에 계시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등불지기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정원 끝에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없었던 문이었다. 크지 않고, 낡지도 않았으며, 문고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 있었다. 그 종은 터널 끝에서 들었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 문을 가리켰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와 손에 든 작은 등불을 번갈아 보았다. 등불패에는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손의 등불은 깨끗했다. 둘은 서로 달랐다. 하지만 나란히 있으니 어색하지 않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등불지기가 앞장섰다. 아이는 정원 끝의 문까지 걸어가다가, 문 앞에서 멈췄다. 여전히 젖은 신발이었지만, 이제 그 신발 끝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아이가 알아차렸는지,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건 아니에요.”

그레이는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덜 젖었어요.”

“다행입니다.”

등불지기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 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조용히 들고 있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받쳤고, 하융은 문 위의 작은 종을 보았다.

여관의 성좌가 마지막으로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맡기신 이름과 짐은 접수대에서 돌려드리겠습니다.”

“네.”

“다만 손님으로 머문 시간은 돌려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레이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도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머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등불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처음의 접수대가 보였다. 세 개의 나무 접시와 작은 서랍, 그리고 거리에 들어올 때 맡겼던 것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한 걸음 내디뎠다. 작은 등불의 빛이 발밑의 돌을 비추었다. 빛은 멀리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걸음이 놓일 자리만큼은 보였다.

그녀는 그 빛을 따라 걸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8막 — 돌려받는 접수대

접수대는 처음보다 가까워 보였다. 거리의 입구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돌아올 때에는 긴 길을 되짚어온 느낌이 아니었다. 등불지기가 앞에서 걸었고, 그레이는 작은 등불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은 조금 뒤에 있었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접수대 위의 세 접시는 그대로 놓여 있었고, 여관의 성좌가 그 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열쇠 꾸러미는 그의 손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희미하게 한 번 흔들렸다. 작은 금속음이 났다. 문을 여닫는 소리라기보다, 손님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그레이는 접수대 앞에 섰다. 손에 든 작은 등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빛은 접시의 가장자리와 서랍 손잡이를 비췄고, 그레이의 손목에 묻은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도 함께 드러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들을 보았지만, 닦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셨군요.”

그레이도 고개를 숙였다.

“네. 돌아왔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에 잠깐 눈을 내렸다. 아마 그 단순한 문장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도 대사를 가로채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를 품 가까이 들고 있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접수대 위에 올릴지 말지 아주 짧게 고민하다가 그대로 들었다. 하융은 접수대 위의 빈 접시들을 보며,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서 작은 종이등이 나왔다. 처음 그레이의 이름이 접혀 들어갔던 빛이었다. 그 빛은 서랍 안에 있었음에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차분해져 있었다. 여관의 성좌가 그것을 첫 번째 접시 위에 올리자, 종이등은 다시 소리가 되었다. 소리는 아주 낮게 흔들리더니, 그레이에게 돌아왔다.

그레이는 자기 이름이 돌아오는 것을 들었다. 밖에서 누군가 부른 것도 아니고, 장부 위에 적힌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고,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잘 보관해주셨습니다.”

“손님께서 잘 맡겨주셨습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여관식 인사, 꽤 좋아.”

죠니가 속삭였다.

“너무 많이 배우면 네 극장이 여관이 될걸.”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극장과 여관은 모두 누군가 잠시 다른 자리에 앉는 곳이니, 의외로 친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막을 열고, 하나는 문을 여는구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 말도 살까?”

하융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손을 저었다.

“오늘은 외상으로 하겠소.”

죠니가 낮게 말했다.

“언어 시장에 신용거래까지 생겼네.”

그레이는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여관의 성좌는 미소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그레이가 맡겼던 작은 물건들이 있었다. 붉은 실이 묶인 민원표, 모서리가 닳은 사망 확인서, 봉하지 않은 편지, 보상 쪽지, 접힌 지도 조각, 꺼진 등불이 그려진 얇은 문패. 들어갈 때보다 조금 더 가지런해 보였지만, 새것이 된 것은 아니었다. 구겨진 자국은 그대로였고, 물든 가장자리도 그대로였다.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전부 돌려받으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접시 위의 물건들을 보았다. 손이 곧장 나가지 않았다. 민원표의 붉은 실, 편지의 접힌 모서리, 등불 문패의 꺼진 불꽃. 모두 익숙했다. 모두 돌아가면 다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접시 가장 아래에 아주 작은 쪽지가 하나 더 있었다. 처음에는 없었던 것 같았다. 아무 글씨도 없는 흰 쪽지였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여관의 성좌는 쪽지를 보았다.

“빈칸입니다.”

“제가 맡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손님 방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레이는 쪽지를 들지 않고 바라보았다. 빈칸은 깨끗했다. 그러나 대기실의 검은 손님이 내밀던 지나치게 하얀 종이와는 달랐다. 이 쪽지는 도장을 기다리는 종이가 아니었다. 접히지도 않았고, 제목도 없었다. 그저 작은 여백처럼 보였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져갈 거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전부 가져가겠습니다.”

여관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접시 위의 물건들을 하나씩 품에 넣었다. 민원표, 확인서, 편지, 보상 쪽지, 지도 조각, 등불 문패. 그리고 마지막에 빈칸을 집었다. 빈칸은 다른 종이들보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손끝에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장부 사이에 끼울 생각을 했다가, 아직 장부를 돌려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결국 빈칸은 소매 안쪽의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죠니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건 어디에 쓰는 거야?”

그레이는 주머니를 살짝 눌렀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좋네.”

“좋습니까?”

“응. 가끔은 모르겠는 게 하나쯤 있어도 돼.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만.”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훌륭한 균형 감각입니다.”

죠니는 레이튼을 보지 않고 말했다.

“교수,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레이튼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 번째 접시는 비어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그레이 쪽으로 밀지 않았다. 대신 접수대 아래에서 그레이의 장부를 꺼냈다. 그녀가 방에 두고 온 장부와 똑같아 보였다. 표지의 모서리, 책갈피의 위치, 닫힌 부분의 두께까지. 그런데 아주 희미하게 차 냄새가 났다. 그레이는 장부를 받기 전에 손을 보았다. 손은 완전히 깨끗하지 않았다. 진흙은 거의 닦였지만 손톱 밑에 옅은 자국이 있었고, 손목의 등불패에는 인주가 조금 남아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장부를 내밀었다.

“맡기신 것은 아니지만, 돌아가실 때 필요하실 듯하여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레이는 두 손으로 장부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장부는 무거웠다. 이상하게도 그 무게가 낯설지 않았다. 다만 전보다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분명했다. 그레이는 습관처럼 장부를 펼치려다 멈췄다. 책갈피가 끼워진 곳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줄이 제대로 말랐는지, 새로 끼운 빈칸이 접히지 않았는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손이 표지 위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들고만 있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닫았다.

하융은 그레이의 손이 멈춘 것을 보고, 시선을 낮췄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치지 않았다. 표지를 한 번 쓸고, 품에 안았다. 장부의 모서리가 다시 손바닥에 닿았다. 손목에는 등불패가 있었고, 다른 손에는 여관에서 빌린 작은 등불이 있었다. 장부와 등불은 서로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들기에는 조금 불편했다. 그레이는 잠시 자세를 고쳤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고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레이가 먼저 균형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죠니는 손을 거두었다.

“알았어.”

여관의 성좌가 마지막 접시를 보았다. 빈 접시였다.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았다.

“세 번째 접시는 그대로 두고 가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접시를 보았다.

“제가 무엇을 올려야 했습니까?”

“손님마다 다릅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비워두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그 접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빈 접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완전히 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등불빛이 접시 안쪽에 둥글게 고여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다가, 품에 안은 장부를 조금 더 단단히 받쳤다.

등불지기가 옆에서 물었다.

“이제 가요?”

여관의 성좌가 대답했다.

“예. 문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접수대 뒤쪽의 문이 열렸다. 처음 들어온 터널로 이어지는 문 같았지만, 조금 달랐다. 문 너머에는 극장 뒤편의 복도와, 그레이의 방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현실의 먼지 냄새가 조금 섞여 들어왔다. 여관거리의 차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그 냄새와 섞였다.

푸리나는 문을 보았다.

“돌아가는 문이네.”

여관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손님께서는 잠시 머무셨으니, 들어오실 때와 완전히 같은 문은 아닐 겁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이번에도 자기 대사로 훔치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를 보았다.

“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등불지기가 먼저 문 앞으로 갔다. 아이는 문고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젖어 있던 신발은 이제 덜 젖어 있었다. 마른 것은 아니었지만, 물방울은 없었다.

“또 올 거예요?”

그레이는 잠시 아이를 보았다. 그 질문은 아이에게서 나왔지만, 여관거리 전체가 묻는 것처럼 들렸다. 다시 올 것인가. 손님으로. 관리자나 기록자가 아니라, 작은 등불을 들고.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품의 장부가 무겁고, 손의 등불이 가벼웠다. 둘 사이에서 손목의 등불패가 조용히 흔들렸다.

“필요하면 오겠습니다.”

등불지기는 그 대답이 조금 마음에 안 든 듯 입술을 내밀었다.

“필요해서만 오면 늦을 때도 있어요.”

그레이는 멈췄다.

푸리나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죠니는 접시를 보았고, 레이튼은 등불지기를 보았다. 하융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레이는 등불지기 앞에 몸을 낮췄다. 장부를 품에 안고 있어서 완전히 무릎을 굽히기는 어려웠지만, 아이의 눈높이에 가까워지려 했다.

“그럼…… 너무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등불지기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네.”

그레이는 아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불지기는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다.

“손님이 잘 따라와서요.”

그레이는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여관의 성좌는 문가에서 기다렸다. 그레이가 다가가자 그는 손을 내밀었다. 손목의 등불패를 돌려받으려는 듯했지만, 바로 풀지는 않았다.

“이 표식은 이 거리의 것입니다. 돌려주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손목을 내밀었다.

“네.”

여관의 성좌는 조심스럽게 줄을 풀었다. 등불패가 손목에서 떨어지자, 그 자리에 아주 희미한 선이 남았다. 끈이 눌렀던 자국이었다. 금세 사라질 정도로 얕은 자국. 여관의 성좌는 등불패를 받아 세 번째 접시 옆에 놓았다. 패 위의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은 그대로였다.

푸리나가 물었다.

“그 자국도 그대로 두는 거야?”

여관의 성좌가 대답했다.

“손님이 지나갔다는 표식이니까요. 닦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여기도 빠른 나중이 있네.”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관리 원칙입니다.”

하융은 등불패를 보며 말했다.

“작은 자국도 객실의 방명록이 되는구려.”

푸리나는 하융을 보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 말은 비싸겠다.”

“오늘은 폐점하였소.”

하융이 그렇게 말하자, 죠니가 낮게 웃었다.

“언어 시장 영업 종료.”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등불패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지나온 물의 방과 대기실과 손님 방의 흔적이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닦지 않았고, 숨기지도 않았다. 그레이는 그 사실에 짧게 고개를 숙였다.

여관의 성좌가 문을 열어주었다.

“다녀가십시오, 손님.”

“감사합니다.”

“다음에 오실 때에도 방은 마련해두겠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제가 오지 않으면요?”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래도 방은 종종 환기해두겠습니다.”

푸리나가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박였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고, 죠니는 괜히 접시 위의 빵가루를 정리했다. 하융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을 지났다.

터널은 다시 열두 걸음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이 비어 있지 않았다. 품에는 장부가 있었고, 한 손에는 작은 등불이 있었다. 다른 손은 장부의 모서리를 받쳤다. 들고 가는 것이 많아 조금 불편했지만, 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발소리가 뒤따랐다. 등불지기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돌아보면 아직 문 앞에 서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레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터널 끝에서 극장 뒤편의 복도 냄새가 짙어졌다. 먼지, 나무, 오래된 천막, 식은 차, 그리고 아주 희미한 잉크 냄새. 그 냄새를 맡자 그레이는 자기 방에 두고 온 마지막 줄을 떠올렸다. 잉크는 이제 완전히 말랐을 것이다.

문밖으로 나왔을 때, 극장 뒤편의 등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귀환.”

죠니가 말했다.

“그 말은 좀 거창한데.”

“그래도 귀환이잖아.”

레이튼은 조용히 덧붙였다.

“돌아왔다는 말과 다녀왔다는 말 사이의 어딘가군요.”

하융은 터널 문을 보았다.

“문은 닫혔으되, 길이 사라진 것은 아니오.”

푸리나가 웃었다.

“영업 종료라며.”

“아, 방금 것은…… 예외요.”

죠니가 말했다.

“언어 시장 재개장.”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자기 방 쪽으로 걸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방 안에는 줄인 촛불, 마른 잉크, 비어 있는 의자, 식은 찻잔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섰다. 장부를 내려놓았다. 작은 등불은 장부 옆에 두었다. 등불의 빛이 마지막 줄을 비췄다. 글자는 번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치지 않았다.

먼저 의자에 앉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죠니도, 레이튼도, 하융도 문밖에 멈췄다. 누구도 방 안으로 먼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레이는 식은 찻잔을 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

“차를 다시 데워도 될까요?”

레이튼이 문밖에서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죠니가 접시를 들어 보였다.

“빵도 아직 조금 있어.”

푸리나가 웃었다.

“좋아. 후일담은 차와 빵이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다녀온 자에게 어울리는 귀환식이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귀환식이라기엔…… 작습니다.”

푸리나가 대답했다.

“작아도 돼.”

그레이는 잠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작은 등불이 장부 옆에서 흔들렸다. 방 안의 촛불보다 작았지만, 더 가까운 빛이었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그녀는 장부 옆의 빈칸을 꺼내지 않은 채, 먼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후일담 — 작은 등불과 식은 차

차는 다시 데워졌다. 레이튼은 어디서 작은 화로를 가져왔는지, 그레이의 방 바깥 복도 한쪽에 찻주전자를 올려두었다. 화로의 불은 크지 않았고, 물은 급하게 끓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번 주전자를 들여다보려다가, 레이튼이 “차는 재촉하면 떫어집니다”라고 말하자 얌전히 물러났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의자 하나를 끌어왔고, 하융은 열린 문가에 서서 방 안의 작은 등불을 바라보았다. 극장은 이미 본래의 극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낡은 천막, 소품 상자, 먼지 낀 의자, 바닥에 남은 오래된 못 자국. 그러나 그레이의 책상 위에는 여관거리에서 빌려온 작은 등불이 있었다. 그 등불은 극장 소품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부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마지막 줄의 잉크는 완전히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래 두면 잉크는 마른다. 촛불을 줄여두어도, 방을 비워두어도, 누군가 잠시 다른 문을 지나 다녀와도, 마를 것은 마른다. 그레이는 표지를 한 번 손끝으로 만졌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하지만 손끝은 바로 책갈피를 찾지 않았다. 대신 장부 옆에 놓인 작은 등불의 손잡이를 살짝 돌렸다. 등불은 조용히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레이 앞의 의자에 앉지 않고, 책상 옆에 기대어 섰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더니,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평소라면 극장주처럼 서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앉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어땠어?”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이 아직 비어 있다는 것을 보았고, 레이튼이 차를 따르기 전까지 기다려도 되는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조용했습니다.”

푸리나는 기대했던 대답과 조금 달랐는지 눈을 깜박였다.

“그게 감상 전부야?”

“아직 정리 중입니다.”

“그럼 조용했다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죠니가 접시를 책상 가장자리 가까이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먼저 장부와 잉크에서 떨어진 자리를 확인했다. 접시 위에는 빵이 조금 남아 있었다. 말린 과일은 거의 없었다. 하융과 레이튼이 중간중간 가져간 탓이었고, 죠니는 그것을 꽤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정리할 때 먹으면서 해도 돼.”

그레이는 접시를 보았다.

“아까 먹었습니다.”

“알아. 그래서 이번에는 더 쉽게 먹을 수 있지.”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의 식사 논리, 오늘 점점 강해지네.”

레이튼이 차를 따르며 말했다.

“반복된 성공이 이론을 강화한 듯합니다.”

죠니는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가 빵 권하는 걸 학파로 만들지는 마.”

하융은 문가에서 낮게 말했다.

“빵 권유학이라. 민생에는 꽤 유익한 학문 같소.”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융까지 합류했어.”

하융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와 빵이 앞에 있으면 사람은 신중한 척하기 어려운 법이오.”

레이튼은 하융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 말은 상당히 실증적입니다.”

“나는 학문을 만들 생각은 없소.”

“이미 늦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는 방심하면 뭐든 학문으로 만들어.”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찻잔을 받았다. 찻잔은 따뜻했다.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의 식은 찻잔과 달랐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던 작은 냉기가 천천히 풀렸다.

푸리나가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방에서 오래 있고 싶었어?”

그레이는 찻잔의 수면을 보았다. 차 위에는 작은 등불의 빛이 비쳤다. 흔들림이 작았다.

“오래는…… 아닙니다.”

“응.”

“하지만 바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럼 좋은 방이었네.”

그레이는 대답 대신 찻잔을 조금 들어 올렸다. 차는 향이 약했다. 레이튼이 일부러 그렇게 우린 듯했다. 너무 강한 차는 늦은 밤의 방에 맞지 않았다.

죠니가 접시를 밀어주었다.

“빵.”

그레이는 이번에는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았다. 작은 조각 하나를 집었다. 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승리 선언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 뚜껑을 닫았고, 하융은 시선을 살짝 내려 웃음을 감추었다.

그레이는 빵을 먹었다. 조각은 작았다. 금방 사라졌다. 그러나 씹는 동안 방 안의 시간이 조금 느려졌다. 장부는 열리지 않았고, 촛불은 줄어들지 않았고, 복도 밖의 극장도 잠시 조용했다.

레이튼이 물었다.

“돌려받은 것들 중 가장 낯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레이는 주머니를 떠올렸다. 빈칸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 그녀는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낼까 하다가, 꺼내지 않았다.

“빈칸이 있었습니다.”

푸리나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

“빈칸?”

“네. 제가 맡긴 것은 아니었는데, 손님 방에서 생겼다고 했습니다.”

죠니는 접시 위의 빵가루를 손끝으로 모았다.

“그거 좀 수상한데.”

레이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수상하지만, 좋은 수상함일 수도 있습니다.”

“교수, 좋은 수상함이란 말은 좀 이상해.”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여백에는 대개 그런 인상이 있습니다.”

하융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비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있소. 너무 꽉 찬 방에는 손님이 앉을 곳이 없지 않겠소.”

푸리나가 하융을 보았다.

“오늘도 장사할 생각 없어?”

“폐점 후 발언이오.”

“그럼 외상으로 적어둘게.”

그레이는 그 말을 듣다가, 조용히 소매 안쪽 주머니를 눌렀다. 빈칸은 거기에 있었다. 접히지 않았다.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지금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 중요한 것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매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푸리나는 작은 등불을 보았다.

“이건 어디 둘 거야?”

그레이도 등불을 보았다. 책상 위, 장부 옆. 우연히 놓은 자리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촛불은 방 전체를 밝혔고, 작은 등불은 장부 가장자리만 비췄다. 둘의 빛은 서로 겹치지 않았다.

“당분간은 여기 두겠습니다.”

“장부 옆?”

“네.”

죠니가 말했다.

“불 조심.”

그레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등불 밑에는 작은 받침을 두겠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죠니가 한마디 하자마자 실무로 들어갔어.”

죠니는 만족스러운 듯 접시를 당겼다.

“좋은 반응이야. 불 조심은 실무가 맞아.”

레이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받침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금속보다는 두꺼운 도자기가 좋겠군요.”

하융이 천천히 말했다.

“등불 하나에도 회의가 열리는구려.”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다운 귀환식이야.”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조용해졌다. 귀환식. 조금 전 그레이가 작다고 했던 말. 차와 빵, 등불 받침, 식은 찻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장부. 거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그 말이 놓일 정도의 자리가 있었다.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하.”

“응.”

“오늘 극은…… 제가 무엇을 새로 배웠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응.”

그레이는 말을 천천히 골랐다. 길게 설명하려 하면, 방금 지나온 거리의 등불들이 종이 위에서 너무 빨리 굳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짧은 말들만 골랐다.

“이름을 맡겼고, 돌려받았습니다. 장부도 돌아왔습니다. 문패들은 그곳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빵을 먹었습니다.”

죠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하지.”

푸리나는 죠니를 한 번 보았지만, 이번에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작은 등불을 보았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리고 조금 뒤,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응. 충분해.”

레이튼은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질문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하융도 무언가 말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침묵했다. 죠니는 접시를 그레이 쪽으로 다시 밀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먹었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는 잠시 차 마시는 소리만 남았다.

그레이는 마침내 장부를 펼쳤다. 모두가 아주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그녀는 새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책갈피가 끼워진 마지막 줄을 확인했다. 글자는 번지지 않았고, 표시는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아래에 바로 새 기록을 쓰지 않았다. 대신 빈칸을 꺼냈다. 여관에서 받은 작은 쪽지. 그것을 장부 맨 뒤,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장 사이에 끼웠다.

푸리나가 물었다.

“거기 넣어두는 거야?”

“네.”

“뭐라고 쓸지는 아직 안 정했고?”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요.”

죠니가 말했다.

“좋네. 빈칸다운 대우야.”

레이튼은 조용히 웃었다.

“동의합니다.”

하융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언젠가 글자가 앉을 자리도, 지금은 쉬어도 되겠지요.”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톡 건드렸다.

“오늘은 다들 여관에 물든 것 같네.”

“전하도 포함입니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맞아. 나도 포함.”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이번에는 다시 바로 펼치지 않았다. 작은 등불이 장부의 표지를 비추었다. 그 빛 아래에서 표지의 닳은 모서리가 조금 부드럽게 보였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었지만, 막을 내리는 동작은 크게 하지 않았다. 그저 방 안을 둘러보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 극은 여기서 닫을게.”

죠니가 말했다.

“박수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오늘은 손뼉 말고, 찻잔.”

레이튼은 그 뜻을 이해한 듯 자기 찻잔을 살짝 들었다. 하융도 찻잔을 들었고, 죠니는 접시를 들었다가 푸리나에게 눈총을 받고 빈 찻잔을 대신 들었다. 그레이는 자기 찻잔을 들었다. 모두의 잔이 아주 작게 부딪혔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나 들렸다.

푸리나가 말했다.

“다녀온 손님에게.”

죠니가 덧붙였다.

“그리고 남은 빵에게.”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아직 쓰이지 않은 빈칸에게.”

하융이 낮게 말했다.

“작은 등불에게.”

그레이는 잠시 찻잔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기다려준 방에게.”

잔들이 다시 조금 흔들렸다. 차는 식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마실 수 있었다. 방 밖의 극장은 조용했고, 장부는 닫혀 있었고, 작은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고, 장부 옆의 등불 받침을 어디에 둘지 조용히 생각했다. 내일 아침에는 우물 점검표를 다시 봐야 할 것이고, 배급 변경안도 확인해야 할 것이며, 편지 한 통의 주소를 다시 대조해야 할 것이다. 그 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손을 뻗지는 않았다.

먼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작은 등불은 그 사이, 장부의 모서리와 빈 접시의 빵가루를 함께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