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47익명의 참치 씨(21d4b208)2026-05-19 (화) 15:35:02
좋아. 앞으로 죠니가 푸리나를 부를 때는 **“폐하”보다 “여왕님”**으로 갈게.
아래는 그 호칭까지 반영한 1막 개정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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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막 — 키클롭스의 동굴과 아무도 아닌 선장

### 호칭 반영 개정본

처음의 바다는 순했다.

푸른 천 위로 얇은 파도들이 반복해서 접히고 펴졌다. 무대 양옆의 배우들이 천을 흔들 때마다, [여관:극장]의 얇은 막이 그 움직임에 숨결을 보탰다. 물결은 실제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배 옆구리를 두드리는 소리는 실제처럼 들렸다.

이타카행 임시 극장선은 왕궁 극장의 중앙에 있었지만, 그 위에 선 사람들은 어느새 조금씩 균형을 잡고 있었다.

죠니는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배는 안 움직이는데, 다들 걸음걸이가 바뀌었네.”

푸리나는 류트를 품에 안고 웃었다.

“그게 극장의 힘이지!”

“아니. 여왕님이 바닥을 흔들어서 그래.”

“조금만 흔들었어.”

“그 ‘조금만’이 오늘 계속 쌓이면, 배가 안 움직여도 난파할 수 있겠는데.”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파는 4막 이후로 미뤄놨어!”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여왕님, 난파를 일정표에 넣는 선장은 보통 오래 못 가.”

“나는 선장이 아니라 연출자야!”

“그게 더 무서운 부분이야.”

그레이는 조용히 선원들 사이를 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명단판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작게 접은 천과 물병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누군가 실제로 멀미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푸리나의 신술이 불러온 출항감은 생각보다 생생했다. 몇몇 배우는 무대 위에서 정말 배를 탄 사람처럼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레이는 한 병사 역 배우에게 물병을 건넸다.

“목이 마르면 조금씩 드세요. 한 번에 많이 마시면 더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배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연극인데도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연극이라도, 몸은 진짜입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배 위에 남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류트 줄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밝게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레이답다!” 하고 외치며 다시 모두를 웃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잘 돌아와야지.”

죠니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오늘은 대사가 좀 얌전하네.”

“나도 분위기는 읽거든?”

“가끔.”

“죠니!”

“칭찬이야. 오늘은 꽤 자주 읽고 있어.”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지만, 웃었다.

그때 하융이 조타수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푸른 천 너머, 무대 뒤편의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개는 흰 천과 연기로 만든 무대 장치였다. 그러나 하융의 눈에는 그것이 단순한 장치로만 보이지 않는 듯했다.

“섬이오.”

죠니가 고개를 돌렸다.

“벌써?”

“귀향의 길은 직선이 아니오. 떠나자마자 길을 잃는 것도, 오래된 서사의 예법 아니겠소.”

“그건 예법이라기보다, 집에 가는 사람 입장에선 꽤 성가신 문제야.”

푸리나는 바로 류트를 들어 올렸다.

“좋아! 첫 번째 섬!”

죠니가 낮게 말했다.

“신났네.”

“당연하지! 오디세이아잖아!”

“오디세우스 입장에선 별로 안 신났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죠니가 해줘야지.”

“그 논리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그런데 이미 망토까지 입었으니까, 늦은 것 같긴 하네.”

하융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섬의 안쪽에 동굴이 있소. 길은 좁고, 입구는 하나뿐이오. 들어가기는 쉬우나, 나오기는 어렵겠구려.”

레이튼이 옆에서 미소 지었다.

“훌륭한 첫 수수께끼군요. 들어가기 쉬운데 나오기 어려운 곳. 동굴입니까, 선택입니까?”

죠니는 레이튼을 보았다.

“지금은 그냥 동굴이면 좋겠네. 선택까지 끼어들면, 당신이 밤새 설명할 것 같거든.”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대체로 둘 다입니다.”

죠니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

무대가 바뀌었다.

바다는 어두워지고, 배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대신 무대 중앙에는 거대한 바위 동굴이 세워졌다. 바위는 천과 목재로 만든 것이었지만, 조명이 낮게 깔리자 입구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동굴 안에는 양 떼를 흉내 낸 흰 천 뭉치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치즈 덩어리 모형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불빛이 흔들렸다.

아스테르다스가 동굴 앞에서 눈을 빛냈다.

“섬! 동굴! 보물!”

죠니가 말했다.

“세 단어 중에 안전한 게 하나도 없네. 특히 네가 저 순서대로 말하면 더 그래.”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래도 들어가야 하지 않아?”

“보통은 정찰부터 해.”

“정찰하러 들어가자!”

“그건 그냥 들어가는 거야. 말만 바꾼다고 안전해지진 않아.”

그레이가 동굴 입구를 보았다.

“안쪽 통풍이 나빠 보입니다. 오래 머무르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극용 동굴인데도?”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 장치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무대 담당을 보았다.

“연기 조금만!”

무대 담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가 말했다.

“좋아. 오늘의 첫 번째 기적은 여왕님이 ‘조금만’을 진짜 조금만으로 조절했다는 거네.”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나도 성장해!”

“그건 아직 1막이라서 확정하긴 이르지만, 출발은 좋아.”

그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죠니가 앞섰고, 아스테르다스가 그 옆을 따라갔다. 그레이는 뒤에서 담요와 물병이 든 작은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레이튼은 어둠 속의 벽을 유심히 보았고, 하융은 동굴 밖, 바다 쪽에 남아 길을 살폈다.

푸리나는 동굴 입구 근처에서 류트를 들고 서 있었다.

오늘 그녀는 모든 장면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번 장면은 죠니가 말했다.

“여왕님, 이번엔 입구가 좋아.”

“왜?”

“동굴 안에서 네가 노래하면, 괴물보다 먼저 천장이 자기 역할을 과하게 할 것 같아.”

“너무해!”

“반쯤 농담이야.”

“나머지 반은?”

“무대 안전. 그리고 그레이가 이미 동의하는 얼굴이야.”

그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상처받은 얼굴을 했지만, 결국 입구에 섰다.

“좋아. 이번엔 입구에서 해설할게.”

죠니가 작게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동굴 입장에선 꽤 큰 사건일 거야.”

---

동굴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배 위에서 들리던 파도 소리가 멀어지고, 대신 낮은 숨소리 같은 바람이 울렸다. 조명은 희미했고, 벽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치즈 모형을 보았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그레이가 말했다.

“소품입니다.”

“아쉽네.”

죠니가 말했다.

“첫 섬에서 치즈 먹다가 죽는 오디세이아는 좀 짧아. 적어도 2막까진 가보자.”

“그건 그렇지.”

레이튼은 동굴 안쪽의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했다.

“흠. 집주인이 꽤 크군요.”

죠니가 발자국을 보았다.

“안 들어오는 게 나았겠네.”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들어온 다음에 그런 말 하기야?”

“대부분의 모험이 그래. 그리고 대체로 그때는 이미 늦었고.”

그때 동굴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거대한 발걸음.

동굴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무대 뒤에서 커다란 외눈 괴물 인형이 나타났다. 키클롭스였다. 한쪽 눈은 둥글고 큼직했으며, 어깨는 바위처럼 넓었다. 누가 조종하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움직임은 느리고 무겁게 설계되어 있었다.

객석에서는 낮은 탄성이 흘렀다.

요안나가 숨을 삼켰고, 라이자는 눈을 크게 떴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번 인형은 꽤 잘 만들어졌다.

키클롭스의 목소리는 무대 뒤에서 울렸다.

“누가 내 동굴에 들어왔느냐.”

목소리는 일부러 낮고 거칠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묘하게 이상한 정중함이 섞여 있었다.

“방문 목적을 밝혀라. 양에게 접근할 경우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

죠니가 눈을 깜박였다.

“괴물 동굴에도 절차가 있나?”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있다면 안전에는 도움이 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속삭였다.

“이 키클롭스, 생각보다 성실한데?”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성실한 괴물은 매우 흥미로운 모순이지요.”

죠니가 말했다.

“지금은 모순보다 저 팔 길이가 더 흥미롭네. 붙잡히면 토론할 거리도 안 남겠어.”

키클롭스가 다시 말했다.

“이름을 말하라.”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장면.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살아남는 이야기.

그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

그레이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은……”

그녀는 말을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명부에 적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죠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이름을 고르는지, 적어도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죠니는 작게 그녀를 보았다.

“부르지 말라고 지은 이름이야.”

그레이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키클롭스는 외눈을 굴렸다.

“아무도 아니라고?”

“그래.”

“이상한 이름이군.”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이 배에선 그 정도면 꽤 평범한 이름이야. 배 이름부터가 이미 수상하잖아.”

동굴 입구의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레이튼은 웃지 않았다.

그는 죠니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선장님. 이름을 숨기는 것은 거짓입니까, 생존입니까?”

죠니는 키클롭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윤리 토론은 일단 저 거대한 놈 앞에서 말고, 배에 돌아가서 해도 늦진 않을 거야.”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좋은 순서입니다.”

죠니는 조금 낮게 덧붙였다.

“살아 돌아가면 내가 차 한 잔 정도는 마시면서 들어줄게. 지금은 저 손이 먼저 오겠지만.”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동굴 벽에 붙은 작은 그림자들을 보았다.

이름을 숨긴 사람들.

이름을 말하면 잡히는 사람들.

이름이 없어서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이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감추어야만 살 수 있었던 사람들.

그녀는 손에 든 물병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

키클롭스는 그들을 의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아닌 자와 그 동료들아. 왜 내 동굴에 왔느냐.”

아스테르다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죠니가 팔로 살짝 막았다.

“길을 잃었다.”

아스테르다스가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이번엔 거의 사실이야. 이상하게 들리지만, 지금 우리 쪽에서 제일 정직한 답이기도 하고.”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길을 잃었다.”

키클롭스는 외눈을 좁혔다.

“길을 잃은 자들은 대개 남의 치즈를 먹는다.”

아스테르다스는 치즈 모형에서 슬쩍 손을 뗐다.

“아직 안 먹었어.”

죠니가 말했다.

“아직이라는 말은 빼. 그 말은 보통 곧 할 생각이라는 뜻으로 들려.”

아스테르다스는 바로 정정했다.

“안 먹었어.”

키클롭스는 천천히 동굴 입구를 막아섰다.

거대한 바위 세트가 굴러와 입구를 반쯤 가렸다.

무대 위의 공기가 조금 바뀌었다.

웃음은 남아 있었지만, 이제 모두가 알았다.

들어오기는 쉬웠다.

나가기는 어렵다.

키클롭스가 말했다.

“그럼 내 손님이 되어라.”

죠니는 바위와 괴물, 그리고 동료들을 차례로 보았다.

“좋은 초대는 아닌 것 같네. 보통 손님은 나갈 수 있을 때 손님이거든.”

레이튼이 말했다.

“초대와 감금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죠니는 바위를 가리켰다.

“문이 열리면 초대. 닫히면 감금. 오늘은 꽤 명확한 편이네.”

“아주 실용적인 답입니다.”

“지금은 실용적인 게 필요해. 아름다운 답은 일단 살아서 배에 가져가자고.”

아스테르다스는 활을 만지려 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왜?”

“저 크기로 봐선, 네가 먼저 뛰면 거인과 함께 이 동굴이 우리 무덤이 되겠지”

아스테르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죠니는 동굴 안쪽의 양 떼, 치즈, 불, 긴 나무 말뚝 소품을 보았다.

“언제나 무력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머리를 좀 쓰자.”

푸리나가 입구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오디세우스답네.”

그레이는 그 말뚝을 보고 조용히 천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벌써 준비해?”

“누군가는 다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괴물도요.”

아스테르다스가 눈을 깜박였다.

“키클롭스도?”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이라도, 찌르는 장면은 찌르는 장면입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좋아. 그러면 최대한 덜 다치게 끝내보자. 괴물까지 챙기는 항해는 처음이지만, 뭐, 오늘 배 이름부터 임시였으니까.”

키클롭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혹은 들은 척하지 않았다.

---

죠니는 키클롭스에게 술잔을 건넸다.

물론 진짜 술은 아니었다. 향이 강한 포도즙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술이었다.

키클롭스는 잔을 받아 냄새를 맡았다.

“이건 무엇이냐.”

죠니가 말했다.

“동굴에서 혼자 살면 못 마시는 것.”

키클롭스는 잠시 멈췄다.

“좋은 것인가?”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로. 너무 많이 마시면 나쁜 것. 사람도 그렇고, 괴물도 아마 비슷하겠지.”

푸리나가 입구에서 속삭였다.

“대사 좋다.”

레이튼도 조용히 미소 지었다.

키클롭스는 포도즙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세 잔.

동굴의 그림자가 조금 흔들렸다. 키클롭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외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스테르다스가 낮게 물었다.

“지금?”

죠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지금 가면 반쯤 잠든 괴물이랑 완전히 깨어 있는 우리 갈비뼈가 만나게 돼.”

푸리나가 입구에서 눈을 빛냈다.

죠니는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여왕님의 ‘조금만’ 기준 말고, 진짜 조금만 더.”

푸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붕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키클롭스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다.

동굴 안이 조용해졌다.

죠니는 긴 나무 말뚝을 들었다.

그 순간, 웃음이 거의 사라졌다.

그것은 무대 소품이었다. 키클롭스 역시 인형이었다. 그러나 장면의 뜻은 분명했다.

눈을 멀게 해야 나갈 수 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스테르다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죠니는 말뚝을 들고 한참 동안 키클롭스를 보았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작게 숨을 삼켰다.

이 장면을 만든 것은 그녀였다.
하지만 장면 안에 들어가자, 그것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해서 해결될 장면은 아닌 것 같네.”

레이튼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는 말뚝을 들어 올렸다.

무대 위에서는 실제로 찌르지 않았다.

조명이 꺼졌다.

키클롭스의 외눈에 붉은 빛이 번졌고, 동시에 낮은 북소리가 울렸다.

쿵.

키클롭스가 깨어나 울부짖었다.

“누가 나를 해쳤느냐!”

죠니가 뒤로 물러났다.

키클롭스는 손을 휘저었다.

“누가!”

죠니는 어둠 속에서 말했다.

“아무도.”

키클롭스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아무도 나를 해쳤다!”

그 말에 객석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일었다.

원작의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크지 않았다.

“아무도.”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

아무에게도 책임지워지지 않는 상처.

아무도 아닌 이름 뒤에 숨어 살아남은 사람.

그레이는 키클롭스의 외눈에 감긴 붕대를 보았다.

무대 담당이 빠르게 인형의 눈 위에 천을 감아두었다. 피는 없었다. 그러나 상처가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려다 멈췄다.

죠니가 물었다.

“그레이?”

그레이는 작게 말했다.

“상처는 가짜입니다.”

“응.”

“그런데……”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죠니는 잠깐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그레이, 그건 나중에 바꿔주자. 지금 멈추면 저 붕대가 필요한 사람이 더 늘어날 거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

탈출은 양 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원작대로라면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은 양의 배 아래에 매달려 동굴을 빠져나간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무대용으로 바꾸었다. 흰 천 뭉치들이 움직이고, 배우들은 그 사이에 몸을 낮추어 지나갔다.

아스테르다스는 속삭였다.

“이거 생각보다 창피한데.”

죠니가 말했다.

“살아남는 자세는 원래 별로 멋없을 때가 많아. 멋있게 죽는 것보다 훨씬 유용하고.”

“로빈 후드 때보다 덜 멋있어.”

“대신 안 굴렀잖아. 오늘은 그걸로 꽤 이긴 거야.”

그레이도 낮게 몸을 숙였다. 그녀는 양 떼 흰 천 사이를 지나며, 키클롭스 인형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외눈은 붕대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빠져나가기 직전, 자신의 천 주머니에서 작은 붕대 하나를 꺼내 동굴 입구 옆에 놓았다.

죠니가 그것을 보았다.

“왜?”

그레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연극이 끝나면…… 바꿔줄 수 있으니까요.”

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키클롭스는 동굴 안에서 손을 휘저었다.

“아무도! 아무도 나를 해쳤다!”

그들은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다의 소리가 다시 들렸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성공!” 하고 외치려다가, 죠니의 얼굴과 그레이가 동굴 옆에 놓은 붕대를 보고 말을 삼켰다.

대신 작게 말했다.

“나왔네.”

죠니는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응. 나왔어.”

“멋있게?”

죠니는 양 떼 역할을 하던 흰 천 뭉치들을 돌아보았다.

“멋있진 않았어. 양 사이로 기어 나왔으니까. 그래도 살아 나왔지. 오늘은 그쪽이 더 값비싸네.”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중요하지.”

죠니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여왕님, 정말 분위기 자주 읽네.”

“계속 말하면 화낼 거야.”

“그럼 여기까지.”

---

배로 돌아왔을 때, 바다는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다.

하융은 조타수 자리에서 그들을 맞았다.

“첫 섬을 지나왔구려.”

죠니는 배 난간에 손을 얹었다.

“지났다고 해야 하나. 도망쳤다고 해야 하나. 둘 다 틀리진 않겠지.”

레이튼이 말했다.

“대부분의 귀향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지요.”

아스테르다스는 배 위에 주저앉았다.

“나는 다음 섬에서는 밖에서 기다릴래.”

죠니가 말했다.

“그 말 기억해둘게. 그리고 네가 안 지킬 것도 같이 기억해둘게.”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들켰네.”

그레이는 말없이 물병을 건넸다.

아스테르다스는 받아 마셨다.

“고마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그녀는 죠니에게도 물병을 건넸다.

죠니가 받으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그래도 드세요.”

죠니는 잠시 물병을 보다가 마셨다.

“고마워. 이런 건 거절하면 네가 더 걱정할 것 같아서.”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방금 동굴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묻지 않았다.
키클롭스에게 미안했는지, 이름을 숨긴 것이 불편했는지, 아니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는지 캐묻지 않았다.

다만 물을 주었다.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젖지도 않은 망토를 살짝 털어주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류트를 천천히 튕겼다.

이번 노래는 짧았다.

> 아무도 아닌 이름으로
> 어둔 동굴을 지나왔네.
> 이름을 숨긴 것은 죄였나,
> 아니면 아직 숨 쉬고 싶던 마음이었나.
>
> 바다는 묻지 않는다.
> 다만 다음 파도를 보낼 뿐.

죠니는 노래를 듣고 말했다.

“여왕님.”

“응?”

“이번에도 괜찮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오늘 칭찬 많이 해주네.”

“아직 첫 섬인데 벌써 피곤해서 그래. 사람이 피곤하면 좀 솔직해지거든.”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반쯤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배 뒤편에 앉아, 동굴 입구에 두고 온 붕대를 떠올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가짜 괴물의 가짜 상처를 위한 진짜 붕대.

하지만 어쩐지, 그 작은 천 조각이 오늘 첫 항해의 표식처럼 느껴졌다.

배는 다시 나아갔다.

푸른 천의 바다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타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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