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62여관◆zAR16hM8he(514e9af3)2026-05-20 (수) 19:46:22
2막 — 장미 정원과 여우의 시간
— 세상에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날 —
지구는 너무 컸다.
요안나는 처음 그 별에 내려섰을 때, 자신이 잘못 내려온 줄 알았다.
작은 별들은 둥근 무대판 하나면 충분했다. 왕의 별도, 꽃의 별도, 기록자의 별도, 점등인의 별도, 지리학자의 별도 모두 어딘가 끝이 보였다. 조금만 걸으면 별의 가장자리에 닿았고, 고개를 돌리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는 달랐다.
무대가 넓어졌다.
사막은 한쪽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언덕과 길과 숲과 강이 동시에 나타났다. 먼 곳에는 도시의 불빛이 있었고, 가까운 곳에는 풀잎이 있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만 불지 않았고, 소리도 너무 많았다.
새 소리.
사람 소리.
수레바퀴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이름을 모를 수많은 생명들이 내는 작은 소리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천천히 걸었다.
상자 속 양.
작은 유리 덮개.
빈 이름표에 적어 지도 여백에 붙였던 이름.
장미.
그녀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가시가 얇고, 말이 많고,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던 꽃.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그 앞에는 장미 정원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도 아니었다.
언덕 아래로 수많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붉은 장미.
분홍 장미.
흰 장미.
아직 덜 핀 장미.
이미 활짝 핀 장미.
바람에 흔들리는 장미들.
햇빛 아래에서 아무렇지 않게 반짝이는 장미들.
요안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대 뒤편에서 푸리나도 숨을 삼켰다.
장미 정원은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은, 요안나에게는 조금 잔인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하나뿐이 아니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장미들은 그저 피어 있었다.
자기 별의 장미처럼 까다로운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가시로 호랑이를 막겠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많았다.
너무 많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더 꼭 끌어안았다.
“내 장미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정원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모두 아름다웠다.
그 사실이 요안나를 더 아프게 했다.
만약 자기 별의 장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지 않다면.
만약 비슷한 꽃이 이렇게 많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두고 온 장미는 무엇이었을까.
자기가 매일 물을 주고, 덮개를 씌우려 했고, 투덜거림을 듣다가 도망치듯 떠나온 그 꽃은.
그저 장미들 중 하나였을까.
요안나는 풀밭에 앉았다.
기록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 속 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미하일라가 그려준 유리 덮개가 있었다.
요안나는 손끝으로 그 덮개를 문질렀다.
“그럼 내가 돌아가야 할 이유는 뭐지.”
그 말은 장미들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다.
장미 정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풀숲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바스락.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풀숲 사이에서 레플리카가 나타났다.
오늘의 레플리카는 여우였다.
정확히는 여우 가면을 쓴 사람은 아니었다. 검은빛과 어두운 붉은빛이 섞인 짧은 망토, 가볍게 묶은 머리, 그리고 작은 귀 모양 장식이 달린 후드.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우처럼 조심스럽고, 동시에 이상할 만큼 곧았다.
그녀는 정원 가장자리에서 멈추었다.
요안나는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레플리카는 조금 딱딱하게 대답했다.
“여우다.”
그 말투는 너무 진지해서,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요안나도 잠깐 눈을 깜박였다.
“정말 여우예요?”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렇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레플리카가 여우라고 진지하게 말했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정도로 진지하면 여우도 맞다고 해줘야지.”
레플리카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장미 정원을 보았다.
“울고 있었나?”
요안나는 얼른 눈가를 닦았다.
“안 울었어요.”
레플리카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울기 직전이었군.”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요안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지 않는 거리.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는 거리.
요안나는 그게 이상했다.
“왜 거기에 앉아요?”
“아직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길들여져요?”
요안나는 그 말을 따라 했다.
“그게 뭐예요?”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냥 익숙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어떻게 달라요?”
“서로의 아픔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배우는 일이다.”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어디를 밟으면 아픈지 모른다.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도 모른다. 언제 가까이 가야 하는지,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길들인다는 건, 그런 것을 배우는 일이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그럼 장미도 길들일 수 있어요?”
“아마도.”
“하지만 장미는 사람이 아닌데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니어도, 기다리는 것은 있다.”
그 말에 요안나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던 장미.
밤에 덮개를 씌워달라고 하던 장미.
가라고 말하면서, 울음을 들키기 싫다고 하던 장미.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장미를 길들였던 걸까요?”
레플리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매일 물을 주었나?”
“네.”
“바람이 불면 덮개를 씌우려 했나?”
“네.”
“투덜거림을 들었나?”
“조금은요.”
“귀찮았나?”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작은 했겠지.”
“시작?”
“길들임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이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의 수많은 꽃들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장미가 이렇게 많아요.”
“그렇다.”
“내 장미는 하나뿐이 아니었어요.”
레플리카는 장미들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곳의 장미들은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
요안나는 숨을 멈췄다.
레플리카는 계속 말했다.
“너도 이 장미들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 유리 덮개를 씌우지도 않았고, 바람이 차가운지 묻지도 않았다. 이 장미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강한 척하는지, 나비를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레플리카의 목소리는 딱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갈 길이 없었다.
“그러니 이 장미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네 장미는 아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럼 내 장미는…… 특별한가요?”
레플리카는 요안나를 보았다.
“네가 시간을 썼다면.”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다.
“특별하다는 건,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세상에 비슷한 것이 많아도, 네가 시간을 준 것은 달라진다.”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통도 그렇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많다. 하지만 네가 옆에 앉아준 아픔은, 그저 많은 아픔 중 하나로만 남지 않는다.”
요안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그녀의 말은 이상했다.
차분하고, 조금 무겁고,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럼 길들인다는 건 책임지는 거예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요안나는 조금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무서운 말이네요.”
“맞다.”
레플리카는 바로 인정했다.
“책임은 가볍지 않다. 하지만 책임이 있다는 건, 네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장미가 바람에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움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중 어느 장미도 요안나가 늦게 일어나면 투덜거리지 않았다.
어느 장미도 요안나가 덮개를 씌워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어느 장미도 요안나에게 “가도 좋아요”라고 말하며 꽃잎을 떨지 않았다.
요안나는 눈을 감았다.
자기 별의 장미가 떠올랐다.
가시가 얇은 장미.
자존심이 강한 장미.
울지 않는다고 말했던 장미.
“나는 그 장미를 두고 왔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런데 돌아가기가 무서워요.”
“왜?”
요안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요.”
레플리카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꼭 쥐었다.
“떠날 때는 몰랐어요. 그냥 장미가 나를 귀찮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다른 말을 하고, 강한 척하고, 필요 없다고 하면서 필요해 보이고…….”
“그랬군.”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아요.”
요안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장미가 나를 기다렸을지도 몰라요.”
레플리카는 말없이 기다렸다.
요안나는 그 침묵 덕분에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럼 나는 나쁜 사람인가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잘못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잘못을 알게 된 사람이 전부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레플리카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돌아가려는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레플리카는 풀밭 위에 손을 올렸다.
“내일 다시 오겠나?”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일요?”
“그래. 같은 시간에.”
“왜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기다림이 너무 아프지 않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하루 종일 놀라야 한다. 네가 같은 시간에 오면, 나는 그 시간 전부터 조금씩 기뻐할 수 있다.”
요안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게 길들임이에요?”
“그 일부다.”
“기다리게 만드는 건 나쁜 거 아니에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프다. 하지만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요안나를 보았다.
“기다림이 있다는 건, 누군가 온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요안나는 벨라의 등불을 떠올렸다.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졌다.
돌아올 사람을 위해 불을 켜던 작은 별.
“그럼 내 장미도…… 기다렸을까요?”
레플리카는 답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돌아가서 물어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면 화낼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울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나를 못 본 척할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그럼 너무 아플 것 같아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플 것이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아니었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그래도 네가 물을 주었다면, 돌아가야 한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빈 이름표에 적은 장미.
이제 그것들은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할 곳.
하지만 아직 가기에는 두려운 곳.
요안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잘 알아요?”
레플리카는 잠시 조용했다.
그녀는 자기 검은 망토 끝을 만졌다.
“나는 아픈 것을 배웠다.”
그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이 있었다.
요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장미들에게 가서 말해라.”
“무슨 말을요?”
“너희는 아름답지만, 내 장미는 아니라고.”
요안나는 당황했다.
“그렇게 말하면 장미들이 상처받지 않을까요?”
레플리카는 조금 생각했다.
“아마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는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조금 슬프네요.”
“그래.”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네가 시간을 준 것을 더 조심해야 한다.”
요안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장미 정원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사실은 바라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안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아름다워요.”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하지만 당신들은 제 장미가 아니에요.”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름다운 것이 덜 아름다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장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요안나는 다시 레플리카 쪽으로 돌아왔다.
“말했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런데 아직도 무서워요.”
“무서워도 된다.”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충분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올게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조금 전부터 기다리겠다.”
---
다음 날이 왔다.
물론 무대 위의 다음 날이었다.
조명이 한 번 어두워졌다가 밝아졌고, 장미 정원 위로 아침빛이 내려왔다.
요안나는 같은 시간에 왔다.
레플리카는 풀숲 옆에 앉아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가까운 곳이었다.
“왔군.”
“네.”
“늦지 않았다.”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레플리카는 풀잎을 만졌다.
조금 뒤에 요안나가 말했다.
“오늘은 장미가 덜 아파 보여요.”
“이곳의 장미들?”
“아니요. 제 장미요.”
“여기 없는데도?”
요안나는 기록판을 보았다.
“조금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어떤 것은 멀리서야 보인다.”
“하지만 너무 멀면 잊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도 왔다.
그다음 날도.
매번 레플리카는 조금씩 가까운 곳에 앉았다.
요안나는 처음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다음에는 조금 덜 했다.
어느 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레플리카는 말했다.
“오늘은 조용하군.”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서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것도 길들임이다.”
그 말에 요안나는 가만히 웃었다.
---
그리고 마지막 날이 왔다.
레플리카는 그날, 평소보다 조금 늦게 말을 꺼냈다.
“이제 가야겠군.”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은 네가 계속 하늘을 보고 있다.”
요안나는 작은 별이 있을 법한 하늘을 보았다.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자기 별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별인지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다.”
“그런데도 돌아가야 하나요?”
“네 장미는 어느 별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당신은 외롭지 않을까요?”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외로울 것이다.”
요안나는 마음이 아파졌다.
“그럼 제가 길들이지 않는 게 나았을까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면 아프잖아요.”
“그렇다.”
“그런데 왜요?”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밀밭이 생기니까.”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밀밭이요?”
레플리카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금빛 들판을 가리켰다.
장미 정원 너머에, 어느새 작은 밀밭이 생겨 있었다. 푸리나의 무대 장치인지, 레플리카의 말에 맞춰 피어난 풍경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빵을 먹지 않는다. 밀밭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하지만 네 머리카락은 별빛이 섞인 금빛이다. 네가 떠나면, 밀밭을 볼 때 네가 생각나겠지.”
요안나는 금빛 밀밭을 보았다.
“그럼 밀밭이 슬퍼져요?”
“아니.”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따뜻해진다. 그리고 조금 아파진다. 둘 다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별은 이상해요.”
“그렇다.”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둘 다다.”
레플리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길들였다는 증거는, 헤어질 때 아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 때문에, 이전에는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이 빛나기도 한다.”
요안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작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원망하지 않아요?”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은 할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했다.
“하지만 원망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왜요?”
“네가 같은 시간에 왔으니까.”
요안나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레플리카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난처해했다.
“울어도 된다.”
“안 울어요.”
“울기 직전이군.”
요안나는 결국 조금 웃었다.
레플리카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요안나에게 말했다.
“비밀을 하나 주겠다.”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비밀이요?”
“그래.”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과 밀밭, 그리고 멀리 보이지 않는 작은 별을 차례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요안나는 조용히 들었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요안나의 기록판을 가리켰다.
“네가 시간을 쓴 것. 네가 물을 준 것. 네가 기다리게 한 것. 네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무겁게 만든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었다.
유리 덮개는 그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필요했다.
장미는 여기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선명했다.
“제가 책임져야 하는 거죠.”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아주 천천히 따라 했다.
“내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
그 말은 무거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요안나는 그 무게 때문에 조금 덜 흔들렸다.
무게가 있다는 것은, 붙잡을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플리카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가라.”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못 가요.”
“왜?”
“돌아가는 길을 몰라요.”
그 말에 레플리카는 하늘을 보았다.
지구의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모래빛 길 하나가 생겼다.
사막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을 알려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누가요?”
레플리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뱀.”
요안나는 조금 겁먹었다.
“뱀이요?”
“무서운 이름이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든 무서운 것이 너를 해치러 오는 것은 아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만 혼자 가려고 하지 마라. 어떤 문턱은, 곁에 서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요안나는 레플리카에게 다가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다.
“안아도 돼요?”
레플리카는 굳었다.
무대 위가 잠깐 조용해졌다.
레플리카는 고통교의 전사이고, 흑진과 흑완의 소유자이며, 전장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포옹 요청 앞에서는, 잠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조심해서.”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안았다.
짧은 포옹이었다.
레플리카의 손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가, 아주 어색하게 요안나의 등을 토닥였다.
“무리하지 마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곧 조금 당황한 듯 덧붙였다.
“아니, 이 말은 너무 자주 하는군.”
요안나가 품 안에서 작게 웃었다.
레플리카는 다시 말했다.
“돌아가거라. 네가 가야 할 곳이 있다.”
그 말은 조금 단단했고, 조금 따뜻했다.
요안나는 물러섰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고마워요.”
“기억해라.”
“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같은 시간에 돌아가라.”
“왜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장미도 기다릴 수 있게.”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막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걸었다.
장미 정원은 뒤에 남았다.
수많은 장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요안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미가 많다고 해서, 자기 장미에게 물을 주었던 시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밀밭이 금빛으로 흔들렸다.
레플리카는 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이제 밀밭은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 아니었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작은 방문자는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그래서, 자기 장미가 왜 자기 장미인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사막의 뱀과 침묵의 식탁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었다.
— 돌아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문턱 —
요안나는 사막길 앞에서 멈추었다.
멀리, 모래 위에 검은 숄을 두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은 식탁보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 세상에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날 —
지구는 너무 컸다.
요안나는 처음 그 별에 내려섰을 때, 자신이 잘못 내려온 줄 알았다.
작은 별들은 둥근 무대판 하나면 충분했다. 왕의 별도, 꽃의 별도, 기록자의 별도, 점등인의 별도, 지리학자의 별도 모두 어딘가 끝이 보였다. 조금만 걸으면 별의 가장자리에 닿았고, 고개를 돌리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는 달랐다.
무대가 넓어졌다.
사막은 한쪽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언덕과 길과 숲과 강이 동시에 나타났다. 먼 곳에는 도시의 불빛이 있었고, 가까운 곳에는 풀잎이 있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만 불지 않았고, 소리도 너무 많았다.
새 소리.
사람 소리.
수레바퀴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이름을 모를 수많은 생명들이 내는 작은 소리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천천히 걸었다.
상자 속 양.
작은 유리 덮개.
빈 이름표에 적어 지도 여백에 붙였던 이름.
장미.
그녀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가시가 얇고, 말이 많고,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던 꽃.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그 앞에는 장미 정원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도 아니었다.
언덕 아래로 수많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붉은 장미.
분홍 장미.
흰 장미.
아직 덜 핀 장미.
이미 활짝 핀 장미.
바람에 흔들리는 장미들.
햇빛 아래에서 아무렇지 않게 반짝이는 장미들.
요안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대 뒤편에서 푸리나도 숨을 삼켰다.
장미 정원은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은, 요안나에게는 조금 잔인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하나뿐이 아니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장미들은 그저 피어 있었다.
자기 별의 장미처럼 까다로운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가시로 호랑이를 막겠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많았다.
너무 많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더 꼭 끌어안았다.
“내 장미가…… 세상에서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정원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모두 아름다웠다.
그 사실이 요안나를 더 아프게 했다.
만약 자기 별의 장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지 않다면.
만약 비슷한 꽃이 이렇게 많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두고 온 장미는 무엇이었을까.
자기가 매일 물을 주고, 덮개를 씌우려 했고, 투덜거림을 듣다가 도망치듯 떠나온 그 꽃은.
그저 장미들 중 하나였을까.
요안나는 풀밭에 앉았다.
기록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 속 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미하일라가 그려준 유리 덮개가 있었다.
요안나는 손끝으로 그 덮개를 문질렀다.
“그럼 내가 돌아가야 할 이유는 뭐지.”
그 말은 장미들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다.
장미 정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풀숲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바스락.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풀숲 사이에서 레플리카가 나타났다.
오늘의 레플리카는 여우였다.
정확히는 여우 가면을 쓴 사람은 아니었다. 검은빛과 어두운 붉은빛이 섞인 짧은 망토, 가볍게 묶은 머리, 그리고 작은 귀 모양 장식이 달린 후드.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우처럼 조심스럽고, 동시에 이상할 만큼 곧았다.
그녀는 정원 가장자리에서 멈추었다.
요안나는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레플리카는 조금 딱딱하게 대답했다.
“여우다.”
그 말투는 너무 진지해서,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요안나도 잠깐 눈을 깜박였다.
“정말 여우예요?”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렇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레플리카가 여우라고 진지하게 말했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정도로 진지하면 여우도 맞다고 해줘야지.”
레플리카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장미 정원을 보았다.
“울고 있었나?”
요안나는 얼른 눈가를 닦았다.
“안 울었어요.”
레플리카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울기 직전이었군.”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요안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지 않는 거리.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는 거리.
요안나는 그게 이상했다.
“왜 거기에 앉아요?”
“아직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길들여져요?”
요안나는 그 말을 따라 했다.
“그게 뭐예요?”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냥 익숙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어떻게 달라요?”
“서로의 아픔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배우는 일이다.”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어디를 밟으면 아픈지 모른다.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도 모른다. 언제 가까이 가야 하는지,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길들인다는 건, 그런 것을 배우는 일이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그럼 장미도 길들일 수 있어요?”
“아마도.”
“하지만 장미는 사람이 아닌데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니어도, 기다리는 것은 있다.”
그 말에 요안나는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아침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던 장미.
밤에 덮개를 씌워달라고 하던 장미.
가라고 말하면서, 울음을 들키기 싫다고 하던 장미.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장미를 길들였던 걸까요?”
레플리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매일 물을 주었나?”
“네.”
“바람이 불면 덮개를 씌우려 했나?”
“네.”
“투덜거림을 들었나?”
“조금은요.”
“귀찮았나?”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작은 했겠지.”
“시작?”
“길들임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이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의 수많은 꽃들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장미가 이렇게 많아요.”
“그렇다.”
“내 장미는 하나뿐이 아니었어요.”
레플리카는 장미들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곳의 장미들은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
요안나는 숨을 멈췄다.
레플리카는 계속 말했다.
“너도 이 장미들에게 물을 주지 않았다. 유리 덮개를 씌우지도 않았고, 바람이 차가운지 묻지도 않았다. 이 장미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강한 척하는지, 나비를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레플리카의 목소리는 딱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갈 길이 없었다.
“그러니 이 장미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네 장미는 아니다.”
요안나는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럼 내 장미는…… 특별한가요?”
레플리카는 요안나를 보았다.
“네가 시간을 썼다면.”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다.
“특별하다는 건,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세상에 비슷한 것이 많아도, 네가 시간을 준 것은 달라진다.”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통도 그렇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많다. 하지만 네가 옆에 앉아준 아픔은, 그저 많은 아픔 중 하나로만 남지 않는다.”
요안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그녀의 말은 이상했다.
차분하고, 조금 무겁고,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럼 길들인다는 건 책임지는 거예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요안나는 조금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무서운 말이네요.”
“맞다.”
레플리카는 바로 인정했다.
“책임은 가볍지 않다. 하지만 책임이 있다는 건, 네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장미가 바람에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움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중 어느 장미도 요안나가 늦게 일어나면 투덜거리지 않았다.
어느 장미도 요안나가 덮개를 씌워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어느 장미도 요안나에게 “가도 좋아요”라고 말하며 꽃잎을 떨지 않았다.
요안나는 눈을 감았다.
자기 별의 장미가 떠올랐다.
가시가 얇은 장미.
자존심이 강한 장미.
울지 않는다고 말했던 장미.
“나는 그 장미를 두고 왔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런데 돌아가기가 무서워요.”
“왜?”
요안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요.”
레플리카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꼭 쥐었다.
“떠날 때는 몰랐어요. 그냥 장미가 나를 귀찮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다른 말을 하고, 강한 척하고, 필요 없다고 하면서 필요해 보이고…….”
“그랬군.”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아요.”
요안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장미가 나를 기다렸을지도 몰라요.”
레플리카는 말없이 기다렸다.
요안나는 그 침묵 덕분에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럼 나는 나쁜 사람인가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잘못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잘못을 알게 된 사람이 전부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레플리카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돌아가려는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레플리카는 풀밭 위에 손을 올렸다.
“내일 다시 오겠나?”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일요?”
“그래. 같은 시간에.”
“왜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기다림이 너무 아프지 않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하루 종일 놀라야 한다. 네가 같은 시간에 오면, 나는 그 시간 전부터 조금씩 기뻐할 수 있다.”
요안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게 길들임이에요?”
“그 일부다.”
“기다리게 만드는 건 나쁜 거 아니에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프다. 하지만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요안나를 보았다.
“기다림이 있다는 건, 누군가 온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요안나는 벨라의 등불을 떠올렸다.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졌다.
돌아올 사람을 위해 불을 켜던 작은 별.
“그럼 내 장미도…… 기다렸을까요?”
레플리카는 답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돌아가서 물어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면 화낼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울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나를 못 본 척할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
요안나는 작게 말했다.
“그럼 너무 아플 것 같아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플 것이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아니었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그래도 네가 물을 주었다면, 돌아가야 한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
유리 덮개.
빈 이름표에 적은 장미.
이제 그것들은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할 곳.
하지만 아직 가기에는 두려운 곳.
요안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잘 알아요?”
레플리카는 잠시 조용했다.
그녀는 자기 검은 망토 끝을 만졌다.
“나는 아픈 것을 배웠다.”
그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이 있었다.
요안나는 더 묻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장미들에게 가서 말해라.”
“무슨 말을요?”
“너희는 아름답지만, 내 장미는 아니라고.”
요안나는 당황했다.
“그렇게 말하면 장미들이 상처받지 않을까요?”
레플리카는 조금 생각했다.
“아마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는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조금 슬프네요.”
“그래.”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네가 시간을 준 것을 더 조심해야 한다.”
요안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장미 정원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사실은 바라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안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아름다워요.”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하지만 당신들은 제 장미가 아니에요.”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름다운 것이 덜 아름다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장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요안나는 다시 레플리카 쪽으로 돌아왔다.
“말했어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런데 아직도 무서워요.”
“무서워도 된다.”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충분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올게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조금 전부터 기다리겠다.”
---
다음 날이 왔다.
물론 무대 위의 다음 날이었다.
조명이 한 번 어두워졌다가 밝아졌고, 장미 정원 위로 아침빛이 내려왔다.
요안나는 같은 시간에 왔다.
레플리카는 풀숲 옆에 앉아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가까운 곳이었다.
“왔군.”
“네.”
“늦지 않았다.”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레플리카는 풀잎을 만졌다.
조금 뒤에 요안나가 말했다.
“오늘은 장미가 덜 아파 보여요.”
“이곳의 장미들?”
“아니요. 제 장미요.”
“여기 없는데도?”
요안나는 기록판을 보았다.
“조금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어떤 것은 멀리서야 보인다.”
“하지만 너무 멀면 잊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도 왔다.
그다음 날도.
매번 레플리카는 조금씩 가까운 곳에 앉았다.
요안나는 처음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다음에는 조금 덜 했다.
어느 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레플리카는 말했다.
“오늘은 조용하군.”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서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것도 길들임이다.”
그 말에 요안나는 가만히 웃었다.
---
그리고 마지막 날이 왔다.
레플리카는 그날, 평소보다 조금 늦게 말을 꺼냈다.
“이제 가야겠군.”
요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은 네가 계속 하늘을 보고 있다.”
요안나는 작은 별이 있을 법한 하늘을 보았다.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자기 별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별인지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다.”
“그런데도 돌아가야 하나요?”
“네 장미는 어느 별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당신은 외롭지 않을까요?”
레플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외로울 것이다.”
요안나는 마음이 아파졌다.
“그럼 제가 길들이지 않는 게 나았을까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면 아프잖아요.”
“그렇다.”
“그런데 왜요?”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밀밭이 생기니까.”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밀밭이요?”
레플리카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금빛 들판을 가리켰다.
장미 정원 너머에, 어느새 작은 밀밭이 생겨 있었다. 푸리나의 무대 장치인지, 레플리카의 말에 맞춰 피어난 풍경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빵을 먹지 않는다. 밀밭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하지만 네 머리카락은 별빛이 섞인 금빛이다. 네가 떠나면, 밀밭을 볼 때 네가 생각나겠지.”
요안나는 금빛 밀밭을 보았다.
“그럼 밀밭이 슬퍼져요?”
“아니.”
레플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따뜻해진다. 그리고 조금 아파진다. 둘 다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별은 이상해요.”
“그렇다.”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둘 다다.”
레플리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길들였다는 증거는, 헤어질 때 아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 때문에, 이전에는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이 빛나기도 한다.”
요안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작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원망하지 않아요?”
레플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은 할지도 모른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플리카는 아주 진지했다.
“하지만 원망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왜요?”
“네가 같은 시간에 왔으니까.”
요안나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레플리카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난처해했다.
“울어도 된다.”
“안 울어요.”
“울기 직전이군.”
요안나는 결국 조금 웃었다.
레플리카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요안나에게 말했다.
“비밀을 하나 주겠다.”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비밀이요?”
“그래.”
레플리카는 장미 정원과 밀밭, 그리고 멀리 보이지 않는 작은 별을 차례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요안나는 조용히 들었다.
레플리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요안나의 기록판을 가리켰다.
“네가 시간을 쓴 것. 네가 물을 준 것. 네가 기다리게 한 것. 네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무겁게 만든다.”
요안나는 기록판을 내려다보았다.
상자 속 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었다.
유리 덮개는 그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필요했다.
장미는 여기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선명했다.
“제가 책임져야 하는 거죠.”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아주 천천히 따라 했다.
“내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다.”
그 말은 무거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요안나는 그 무게 때문에 조금 덜 흔들렸다.
무게가 있다는 것은, 붙잡을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플리카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가라.”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못 가요.”
“왜?”
“돌아가는 길을 몰라요.”
그 말에 레플리카는 하늘을 보았다.
지구의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모래빛 길 하나가 생겼다.
사막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을 알려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누가요?”
레플리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뱀.”
요안나는 조금 겁먹었다.
“뱀이요?”
“무서운 이름이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든 무서운 것이 너를 해치러 오는 것은 아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플리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만 혼자 가려고 하지 마라. 어떤 문턱은, 곁에 서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요안나는 레플리카에게 다가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다.
“안아도 돼요?”
레플리카는 굳었다.
무대 위가 잠깐 조용해졌다.
레플리카는 고통교의 전사이고, 흑진과 흑완의 소유자이며, 전장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포옹 요청 앞에서는, 잠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조심해서.”
요안나는 조심스럽게 안았다.
짧은 포옹이었다.
레플리카의 손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가, 아주 어색하게 요안나의 등을 토닥였다.
“무리하지 마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곧 조금 당황한 듯 덧붙였다.
“아니, 이 말은 너무 자주 하는군.”
요안나가 품 안에서 작게 웃었다.
레플리카는 다시 말했다.
“돌아가거라. 네가 가야 할 곳이 있다.”
그 말은 조금 단단했고, 조금 따뜻했다.
요안나는 물러섰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고마워요.”
“기억해라.”
“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같은 시간에 돌아가라.”
“왜요?”
레플리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장미도 기다릴 수 있게.”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막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걸었다.
장미 정원은 뒤에 남았다.
수많은 장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요안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미가 많다고 해서, 자기 장미에게 물을 주었던 시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밀밭이 금빛으로 흔들렸다.
레플리카는 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이제 밀밭은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 아니었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작은 방문자는 장미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그래서, 자기 장미가 왜 자기 장미인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사막의 뱀과 침묵의 식탁
그 아래, 작은 부제가 붙었다.
— 돌아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문턱 —
요안나는 사막길 앞에서 멈추었다.
멀리, 모래 위에 검은 숄을 두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은 식탁보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