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66여관◆zAR16hM8he(514e9af3)2026-05-20 (수) 20:38:23
《작은 별의 막간》

— 박수가 끝난 뒤의 장미 —

개막 — 작은 왕이 되기로 한 군주

그날 극장에는 왕좌가 없었다.

황금 장식도, 개선문도, 군주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긴 서문도 없었다. 대신 무대 중앙에는 아주 작은 둥근 별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걸어 다닐 정도의 별.

한쪽에는 조명탑 세 개가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커튼이 걸려 있었다. 별의 가장자리에는 의자 하나가 놓였는데, 그것을 조금만 옮기면 해가 지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객석에서는 낮은 웃음이 일었다.

“저건 왕국이라기보다…….”

죠니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여왕님 방에 딸린 무대 창고 같은데.”

그레이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창고라고 하기에는 조명탑이 과합니다.”

“그럼 창고 겸 극장?”

“그 표현은 조금 더 부정확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여왕님의 작은 별이라고 해두자.”

그 말이 끝나자, 무대 뒤에서 푸리나 헤툼이 걸어 나왔다.

오늘의 푸리나는 궁정 예복을 입지 않았다.

대신 별빛이 살짝 섞인 푸른 망토, 작은 왕관, 그리고 손에 든 물뿌리개 하나. 옆구리에는 평소보다 작은 류트가 걸려 있었다.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소박하지도 않았다.

딱, 스스로 무대 위에 오르기로 한 군주가 입을 만한 옷이었다.

푸리나는 객석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 나는 작은 별의 왕이 됩니다.”

죠니가 손을 들었다.

“여왕님, 원래도 왕 아니야?”

푸리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오늘은 더 작아질 거야.”

“그게 좋은 일이야?”

“좋은지 보려고 작아지는 거야.”

객석에서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기다렸다가, 웃음이 가라앉을 즈음에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큰 왕국을 다스리다 보면, 작은 별 하나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녀는 무대 중앙의 작은 별을 보았다.

“큰 극장을 열다 보면, 무대 아래 앉아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물뿌리개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왕국을 아주 작게 줄여보려 합니다.”

한 걸음.

그녀는 작은 별 위에 올라섰다.

“별 하나.”

조명탑 하나가 켜졌다.

“무대 하나.”

두 번째 조명탑이 켜졌다.

“장미 한 송이.”

세 번째 조명탑이 켜지자, 작은 별 중앙에 아직 피지 않은 장미 한 송이가 떠올랐다. 꽃봉오리처럼 접힌 천과 철사로 만든 무대 장미였다. 하지만 조명이 닿자, 그것은 정말 곧 숨을 쉬며 피어날 것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장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정도면 도망칠 핑계도 줄어들겠지요.”

죠니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조용히 장미를 보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그 안에는 장난만 있지 않았다.

“그러면 막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푸리나의 신술이 극장 전체로 펼쳐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언제나처럼 화려하게 터지는 박수나 음악은 없었다.

이번 신술은 더 얇았다.

더 조용했다.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화려한 배역을 씌우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마음속에서 박수가 끝난 뒤의 자리를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에게는 식은 수프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접지 못한 침구가.

누군가에게는 막이 내린 뒤에도 떨리던 손이.

누군가에게는, 사람들 앞에서는 웃었지만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얼굴이.

푸리나는 그 감각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늘의 극은 그것을 보러 가는 극이었다.

작은 별 위의 장미가 천천히 꽃봉오리를 열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피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장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줘.”

그리고 객석을 향해 돌아섰다.

“이야기는 사막에서 시작됩니다.”

조명이 낮아졌다.

작은 별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 걸렸다.

그리고 무대 아래로, 모래빛 사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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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찢어진 지도선과 정치적인 양

사막은 지도를 싫어하는 듯했다.

슈샤니크 호르프시메 바흐람 아즈나부르 파흘라부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래는 어느 방향으로도 같아 보였고, 낮은 바람은 방금 그린 선을 아무렇지 않게 지워버렸다. 발자국은 오래 남지 않았고, 바퀴 자국은 더 빨리 사라졌다.

지도 제작자에게 사막만큼 불친절한 장소는 드물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 부러진 지도선이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니케아의 천문관과 장인들이 만든 하늘 측량 마도구였다. 가벼운 목재와 청동 골격, 얇은 은실 날개, 그리고 배 밑에 매달린 관측판으로 이루어진 작은 비행선. 원래라면 하늘에서 땅의 굴곡과 강줄기, 폐허가 된 성벽과 새로 열린 도로를 읽고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추락해 있었다.

은실 날개는 끊어졌다.

관측판은 금이 갔다.

바람의 방향을 읽는 작은 깃대는 모래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조각들을 무릎 위에 모아놓고 있었다.

그녀는 다친 팔을 천으로 묶은 채, 남은 잉크가 마르기 전에 몇 줄을 적었다.

“항로는 모래가 삼켰고, 지도는 반쯤 찢겼으며, 물통은 제 주인보다 먼저 절망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펜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덧붙였다.

“훌륭하군요. 적어도 기록할 비극은 남았습니다.”

말투는 정중했고,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찢어진 지도 조각을 누르는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도에는 선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상은 자주 선을 찢었다.

그 사실을 슈샤니크는 너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막 위로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모래바람 사이에서 작은 왕관이 먼저 보였다. 그다음 별빛이 묻은 푸른 망토, 작은 류트, 손에 든 물뿌리개.

푸리나였다.

오늘의 그녀는 더 이상 극을 여는 연출자만이 아니었다.

작은 별의 왕.

스스로 그렇게 되기로 한 군주.

그녀는 사막 한가운데 쓰러진 지도선과, 그 곁에 앉은 슈샤니크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첫마디를 꺼냈다.

“양을 그려줘.”

슈샤니크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그녀는 푸리나를 한 번 보고, 찢어진 지도선을 한 번 보고,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첫 인사치고는 대단히 목가적이군요, 작은 전하.”

푸리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이야.”

“제 처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제 손에 남은 것은 찢어진 지도와 마른 물통뿐입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니 양 한 마리는, 안타깝게도 제 행정권 밖의 생물입니다.”

푸리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 장미를 먹지 않는 양이어야 해.”

슈샤니크의 손이 아주 잠깐 멈추었다.

“장미를 먹지 않는 양.”

그녀는 그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푸리나는 빠르게 설명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아야 하고, 밤에는 조용히 자야 하고, 내 별의 커튼을 물어뜯으면 안 되고, 장미 곁에서 잠들 수 있어야 해.”

슈샤니크는 펜끝을 지도 조각 위에 올린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

“목축, 치안, 야간 안정, 무대 설비 보존, 그리고 화훼 보호 업무를 한 마리에게 맡기시겠다는 뜻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응!”

슈샤니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상당히 과로하는 양이군요.”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푸리나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필요해. 내 장미는 까다롭거든.”

“까다로운 꽃입니까.”

“응. 조명은 좋아하면서도 너무 밝으면 싫어하고, 박수는 좋아하면서도 너무 오래 들으면 피곤해하고, 덮개를 씌워주면 답답하다고 하고, 안 씌워주면 바람이 찬 것 같다고 해.”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장난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는 정말로 난처함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투정이 아니었다.

군주가 자기 방식으로 돌본 존재가, 그 방식만으로는 쉬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생기는 당혹감.

슈샤니크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를 뒤집었다.

뒷면은 아직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군요.”

“그려줄 거야?”

“꽃을 먹는 양은 한 나라의 조세보다 빠르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칭찬이야?”

“경고에 가깝습니다.”

슈샤니크는 목탄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그려드리지요. 다만 전하의 요구 조건을 전부 만족하는 양은 자연계에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무대에는 있어!”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녀는 첫 번째 양을 그렸다.

작고 둥근 양이었다.

푸리나는 받아들고 잠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얌전해.”

슈샤니크는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전하께서 조용히 잠드는 양을 원하신다고 이해했습니다만.”

“조용히 잠드는 것과 아무 일도 못 하는 건 달라. 이 양은 장미 옆에서 자다가 커튼이 쓰러져도 그냥 잘 것 같아.”

“소극적 방위 실패군요.”

슈샤니크는 두 번째 양을 그렸다.

이번 양은 조금 단단해 보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말했다.

“이 양은 커튼은 지키겠지만 장미가 싫어할 것 같아.”

“왜입니까?”

“너무 근무자처럼 생겼어.”

슈샤니크는 잠시 그림을 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 양은 목에 호루라기를 달고 야간 순찰을 돌 것 같았다.

“그렇군요. 지나친 행정화의 폐해입니다.”

세 번째 양은 더 귀엽게 그렸다.

푸리나는 조금 흔들렸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귀엽긴 한데…… 이 양은 분명 장미한테 박수 받으려고 할 거야.”

“양이 박수를 원합니까?”

“무대 위에 오르면 누구나 조금은 그래.”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말은 가벼운 농담만은 아니었다.

슈샤니크는 목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도 조각의 빈 가운데에 작은 상자를 그렸다.

구멍이 세 개 뚫린 상자였다.

푸리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상자잖아.”

“그 안에 양이 있습니다.”

“안 보이는데?”

“보이지 않기에 아직 장미를 먹지 않았습니다.”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말했다.

“이보다 안전한 양은 드뭅니다.”

푸리나는 상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좋아. 이 양은 내 장미를 먹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보이십니까?”

“응.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슈샤니크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추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 말은 사막보다 조금 멀리 갔다.

정해지지 않은 지도.

정해지지 않은 귀환.

정해지지 않은 실패.

슈샤니크는 손가락으로 찢어진 지도의 모서리를 눌렀다.

“전하께서는 정해지지 않은 것을 좋아하십니까?”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품에 안았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아직 극이 끝나지 않은 것 같잖아.”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이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가 날아가려 하자, 푸리나가 재빨리 발로 눌렀다.

“앗.”

슈샤니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조각은 아직 제법 중요한 비극입니다.”

푸리나는 지도를 주워 건넸다.

“비극도 중요해?”

“기록에는 그렇습니다.”

“극에도 그래.”

푸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삼류 해피엔딩도 꽤 좋아해.”

슈샤니크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잠깐 푸리나를 보았다.

그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안쪽에는 이 세계 어딘가의 기록 성좌가 좋아할 법한 끈질긴 희망이 있었다.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을 받아 들었다.

“전하의 별은 어떤 곳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막 위에 앉았다.

작은 왕관이 살짝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바로잡지 않았다.

“작아.”

“그 점은 이미 짐작했습니다.”

“정말 작아.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해가 지고, 조명탑 세 개를 다 닦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아. 커튼도 내가 직접 접을 수 있어.”

“왕이 직접 커튼을 접습니까?”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작은 별의 왕은 인력이 부족하거든.”

슈샤니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력 부족은 모든 국가의 오래된 비극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장미가 있어.”

그 말을 하자, 무대의 조명이 변했다.

사막 뒤쪽에 작은 별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천장에 걸려 있던 그 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가까워졌다.

별 위에는 조명탑 세 개가 있었다.

작은 커튼.

의자 하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무대 바닥.

그리고 중앙의 장미.

이번에는 봉오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피어난 모습이었다.

조명 아래에서 장미는 화려했다.

아니, 화려하게 보이도록 꾸며져 있었다.

푸리나는 장미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장미에게 무대를 줬어.”

그녀의 목소리는 자랑스러웠다.

“조명도 줬고, 박수도 줬고, 사람들이 보게 해줬어. 장미는 정말 예뻤거든. 그냥 구석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슈샤니크는 장미를 보았다.

그 장미는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조명이 조금 강했다.

“장미는 좋아했습니까?”

“처음에는.”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처음에는 웃었어. 아니, 꽃이니까 웃었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꽃잎이 열렸어.”

“그다음에는요?”

푸리나는 손에 든 상자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날 말했어.”

무대 위 장미가 천천히 움직였다.

꽃잎이 조명 쪽을 향했다가, 다시 조금 접혔다.

그리고 부드럽고 까다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조명이 너무 밝아요.”

푸리나가 작은 별 위에서 말했다.

“하지만 네가 가장 예쁘게 보이는 각도야!”

장미는 대답했다.

“예쁘게 보이는 것과 편한 것은 달라요.”

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

장미는 계속 말했다.

“오늘은 박수도 조금 피곤해요.”

“박수는 따뜻하잖아.”

“따뜻해요. 그런데 오래 들으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아요.”

푸리나는 조명탑을 보았다.

“그럼 조명을 줄일까?”

“줄여도 돼요.”

“얼마나?”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작은 별 위의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대의 왕.

극장의 주인.

모든 이를 주인공으로 세우려는 사람.

그런 그녀에게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는 너무 낯선 요구였다.

장미는 조용히 말했다.

“주인공이 되는 건 좋아요.”

잠깐의 침묵.

“하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가 없어요.”

사막의 푸리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웃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푸리나의 옆얼굴을 보았다.

푸리나는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통치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피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는 군주처럼 보였다.

슈샤니크는 낮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꽃에게 박수를 주셨군요.”

“응.”

“그리고 꽃은 침묵을 청했고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조각을 접었다.

“살아 있는 꽃은 대개 불편합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장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물을 원하고, 햇빛을 거절하고, 바람을 탓하다가, 정작 덮개를 씌우면 숨이 막힌다고 말하지요.”

그녀의 손끝이 지도 위를 스쳤다.

“지도 위의 꽃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편합니다.”

잠깐.

아주 짧은 침묵.

“나중에는…… 그 침묵이 사람을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슈샤니크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하지만 그 말 안에는, 불탄 포도밭의 냄새 같은 것이 있었다.

푸리나는 작은 별을 보았다.

장미는 여전히 조명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조명은 조금 낮아져 있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별을 보러 가기로 했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도망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대답은 빨랐다.

그리고 조금 아팠다.

“도망이면 더 쉬웠겠지. 나는…… 배우러 가려고 했어.”

“무엇을 말입니까?”

푸리나는 장미를 보았다.

“박수 말고도 쉬게 하는 방법.”

슈샤니크는 조용히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별의 왕.

극장의 군주.

박수를 무기로 삼는 아이가 아니라, 박수가 닿지 않는 곳을 보려고 스스로 작아진 왕.

슈샤니크는 아주 낮게 말했다.

“전하의 별은 작군요.”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작아도 내 별이야.”

“예.”

슈샤니크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작아서?”

“작은 별은 핑계가 적으니까요.”

슈샤니크는 장미를 보았다.

“장미 한 송이가 피곤하다 말해도, 군주는 못 들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이 다시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선의 은실 날개가 낮게 울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뒷면에 그린 상자 속 양을 푸리나에게 돌려주었다.

“가십시오, 전하.”

“어디로?”

“별들로.”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받아 들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전하께서 정말 배우러 떠나신 것이라면, 돌아오실 때 무엇을 배웠는지도 들어야겠지요.”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기록할 거야?”

“물론입니다.”

“내 실수도?”

“특히 그것을.”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엄격하네.”

“실수는 잘 보관하면 재산이 됩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방치하면 재난이 되고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뒤쪽에서 별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죠니의 별.

레이튼의 별.

하융의 길.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장미 정원과 여우의 숲.

푸리나는 작은 왕관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사막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좋아.”

그녀는 별빛이 열린 길을 보았다.

“그럼, 작은 왕의 순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죠니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여왕님, 제목은 좋은데 길 잃지 마.”

푸리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길 잃으면 하융이 찾을 거야!”

멀리서 하융의 목소리가 들렸다.

“떠넘기는 솜씨가 제법이구려, 군주여.”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 작은 별의 장미는 조용히 꽃잎을 접고 있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무대 뒤 간판이 떠올랐다.

1막 — 박수 이후의 길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일어난 사람은 어디로 걸어가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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