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68여관◆zAR16hM8he(514e9af3)2026-05-20 (수) 20:59:20
좋아. 그러면 핵심 문장을 **“내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 “내가 조명을 비춘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로 바꾸고, 그 의미가 더 잘 살아나도록 주변 문장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작성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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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 장미 정원과 그레이 여우

— 모두가 주인공이라면, 모두에게 내려올 자리도 있어야 한다 —

붉은빛은 처음에는 하나였다.

작은 점 하나.

조명탑 아래 피어난 장미 한 송이처럼.

푸리나는 처음 그것을 보고, 자기 별의 장미라고 생각했다.

“찾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곧 두 번째 붉은빛이 켜졌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윽고 언덕 전체가 붉어졌다.

장미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송이.

수백 송이.

아직 봉오리인 장미도 있었고, 활짝 피어난 장미도 있었다. 조명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붉은 꽃잎을 펼친 장미들. 바람에 흔들리며 각자의 향기를 품은 장미들.

푸리나는 멈춰 섰다.

손에는 하융의 길에서 적은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 문장은 갑자기 조금 작아 보였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바라보았다.

“많네.”

그녀는 웃으려 했다.

“정말 많네.”

웃음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수많은 장미들을 보았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각도로 피어 있었다. 어떤 장미는 햇빛을 향했고, 어떤 장미는 그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어떤 장미는 바람을 견디듯 줄기를 세웠고, 어떤 장미는 피곤한 듯 낮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든 장미가 무대 위에 오르면,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푸리나는 그 질문을 떠올렸다가, 곧 스스로 당황했다.

그것은 원래 그녀가 가장 자신 있게 대답하던 문제였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이는 주인공일 수 있다.

그녀의 극장은 그렇게 열렸다.

그런데 지금 장미들이 너무 많았다.

모두에게 조명을 비추려 하면, 너무 눈부실 것 같았다.

모두에게 박수를 주려 하면, 누군가는 그 박수에 지칠 것 같았다.

모두를 무대 중앙에 세우려 하면, 무대 중앙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푸리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내가 조명을 비춘 장미만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장미가 흔들렸다.

어느 장미도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한 송이 장미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 장미는 자기 별의 장미와 닮아 있었다. 꽃잎의 색도 비슷하고, 가시도 얇았고, 바람이 불면 조금 떨리는 방식도 닮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조명이 싫은 날이 있어?”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 박수가 피곤한 날이 있어?”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주인공에서 내려오고 싶은 날이 있어?”

장미는 바람에 흔들렸다.

그뿐이었다.

그때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가 있었다.

오늘의 그레이는 여우였다.

정확히 말하면 여우 가면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후드를 쓰고 있었고, 후드 끝에는 작은 여우 귀 같은 장식이 달려 있었다. 손에는 장부 대신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물병, 붕대, 작은 빗, 그리고 접힌 담요가 있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

그레이는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여우입니다, 군주님.”

무대 뒤인지 객석인지 모를 곳에서 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진짜 여우 같진 않은데, 그래도 귀는 잘 어울리네.”

그레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후드 아래 귀 끝이 아주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귀엽다.”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 평가는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왜?”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내가 왕명으로 기록하라고 하면?”

“그 경우에는 별도 항목으로 분리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드디어 조금 웃었다.

장미 정원의 무거운 공기가 아주 살짝 풀렸다.

그러나 그레이는 웃음이 지나가길 기다린 뒤,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많군요.”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아.”

“모두 다른 장미입니다.”

“그건 알아.”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해. 내가 늘 말했잖아. 모든 이는 주인공이라고. 그런데 막상 모두가 장미인 걸 보니까…….”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레이는 기다렸다.

푸리나는 결국 말했다.

“모두를 무대 중앙에 세우면, 무대가 너무 밝아질 것 같아.”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렸던 걸까?”

그 질문은 빠르게 나왔다.

그리고 나온 뒤에야 푸리나는 자신이 그 말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한 송이 장미의 아래쪽 흙을 살폈다. 손끝으로 마른 잎을 하나 떼어냈다. 아주 조심스럽게. 장미가 아프지 않도록.

그런 다음에야 말했다.

“군주님께서 사람들을 무대 위로 불러낸 것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보이지 않던 사람을 보이게 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이름 없이 지나가던 사람에게 이름을 주고, 박수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박수를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다음도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물병을 꺼냈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의 일입니다.”

푸리나는 하융의 표지판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레이.”

“네, 군주님.”

“길들인다는 건 뭐야?”

그레이는 물병을 든 채 멈췄다.

그녀는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장미들이 내 장미가 아닌 건 알겠어. 아니, 그렇게 말하면 이상한가.”

그녀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내가 이 장미들의 주인이 아닌 건 알아. 그런데 내 장미가 왜 내 장미인지, 아직 전부는 모르겠어.”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꽃들.

그리고 그중 어디에도 없는, 푸리나의 작은 별의 장미.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같은 시간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전부야?”

“아니요.”

그레이는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같은 시간에 찾아갔을 때, 어제와 필요한 것이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것까지입니다.”

푸리나는 침묵했다.

그레이는 말을 이었다.

“어제는 박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한 송이 장미의 흙에 아주 조금 물을 주었다.

“같은 장미라도 매일 같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기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어제는 조명이 좋다고 했던 장미.

오늘은 조명이 너무 밝다고 했던 장미.

박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박수가 오래되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다고 했던 장미.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그게 변덕이라고 생각했어.”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변덕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변덕이라고 해서 전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레이는 장미의 잎을 살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어제는 웃을 수 있었던 사람이 오늘은 웃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무대에 설 수 있었던 사람이 오늘은 방 안에 있고 싶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접힌 담요를 꺼냈다.

“먼저 물어야 합니다.”

“묻고?”

“들어야 합니다.”

“듣고?”

“가능한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건?”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군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왕인데도?”

“왕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 말은 슈샤니크의 말과 조금 닮아 있었다.

작은 별은 핑계가 적다.

하지만 큰 왕국도 모든 핑계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더 꼭 잡았다.

“그럼 내가 모두를 주인공으로 세우겠다고 말한 것도…… 너무 큰 말이었을까?”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큰 말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큰 말이 전부 거짓말인 것은 아닙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네.”

그레이는 아주 조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큰 말은, 작게 나누어 지켜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큰 말은 작게 나누어 지켜야 한다.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말도.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무대 중앙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씩, 한 장면씩, 그리고 내려온 뒤의 방까지.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길들인다는 건, 매일 공연하는 게 아니구나.”

“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확인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재미없네.”

“대체로 그렇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답다.”

“하지만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레이답고.”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수많은 장미들.

그 장미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것을 모두 자기 무대로 데려올 수는 없다.

모두에게 박수를 줄 수는 있어도, 모두에게 같은 박수가 휴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장미가 특별한 것은, 자기 무대에서 가장 빛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푸리나가 매일 보았기 때문이다.

매일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매일 조명을 조절하려 했고, 매일 투덜거림을 들었고, 어느 날은 듣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푸리나에게 말했다.

“군주님.”

“응.”

“장미들에게 말해보시겠습니까?”

“무슨 말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 생각하신 말이 있다면, 그대로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너,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았어?”

“대략은요.”

“내 장미가 아니라고 하려 했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하지만 군주님께서는 모든 장미의 주인이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모든 장미가 주인공일 수는 있지?”

“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다만 각자의 무대에서요.”

그 말은 푸리나의 가슴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 앞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 앞에서 작은 왕관을 살짝 고쳐 썼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아름다워.”

장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들은 내 장미가 아니야…… 라고 말하려 했는데.”

푸리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바람이 장미 정원을 지나갔다.

“아니. 그건 조금 틀린 말 같아.”

그녀는 천천히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장미야. 각자의 별과, 각자의 밤과, 각자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겠지.”

장미들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아까와 달랐다.

푸리나는 품 안의 표지판을 더 꼭 안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내가 이름을 몰라도, 내가 조명을 비추지 않아도, 당신들의 막은 분명히 어딘가에서 오르고 있을 거야.”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은 막이 내려가 있겠지.”

그 말은 장미들에게 하는 말이었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같은 시간에 돌아가야 할 장미에게 가야 해.”

그 순간 자기 별의 장미가 더 선명해졌다.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하던 목소리.

박수가 피곤하다고 말하던 목소리.

주인공이 되는 건 좋지만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 없다고 말하던 목소리.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내 장미는…… 아마 지금도 투덜거리고 있겠지.”

그레이는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네.”

“왜?”

“살아 있으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살아 있으니까.

투덜거릴 수 있다.

피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은 조명이 싫다고 말할 수 있다.

푸리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럼 다행이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동의처럼 느껴졌다.


---

시간이 조금 흘렀다.

물론 무대 위의 시간이었다.

조명이 한 번 낮아졌다가 다시 켜졌고, 장미 정원 위로 다른 빛이 내려왔다.

푸리나는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레이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바구니는 옆에 놓여 있었고, 장부는 없었다. 그러나 그레이가 장부 없이 앉아 있어도, 왠지 그녀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다.

푸리나는 물었다.

“나 또 왔어.”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간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움찔했다.

“그렇게 바로 지적해?”

“하지만 다시 오셨습니다.”

“그건 괜찮은 거야?”

“네.”

그레이는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다음에는 시간을 정하면 더 좋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 옆에 앉았다.

“길들여지는 건 어렵네.”

“어렵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해?”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필요해서 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의 시선은 장미 정원에 있었다.

“군주님께서 막을 올리시면, 저는 막이 내린 뒤의 것을 봅니다.”

“힘들어?”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은요.”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사과하실 필요는—”

“아니. 필요해.”

푸리나는 말을 끊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내가 네가 보고 있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잖아.”

그레이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푸리나에게는 충분히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레이가 말했다.

“군주님께서 막을 올리셨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었던 일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

“네.”

그레이는 아주 조금 미소 지었다.

“웃은 사람은, 도움을 받으러 오는 길을 조금 덜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군주님의 박수는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다만, 박수가 끝난 뒤의 길도 같이 열어주시면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그 길에는 표지판이 필요하겠지요.”

푸리나는 하융의 길에서 적은 표지판을 꺼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그레이는 그 문장을 보았다.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좋은 표지판입니다.”

“정말?”

“네.”

“더 필요한 게 있을까?”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하나 더 있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레이는 바구니에서 작은 빈 표지판을 꺼냈다.

대체 언제 준비했는지 알 수 없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런 것도 가지고 다녀?”

“필요할 수 있으니까요.”

“역시 그레이야.”

그레이는 빈 표지판을 푸리나에게 건넸다.

“여기에 쓰십시오.”

“뭘?”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푸리나는 멈췄다.

그 말은 약속이었다.

극의 대사가 아니라.

관객을 향한 선언도 아니라.

장미에게 하는 약속.

푸리나는 목탄을 들었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표지판에 적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글씨는 또렷했다.

첫 번째 표지판보다 덜 화려했지만, 더 무거웠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장미 정원을 보았다.

“이제 돌아가면 될까?”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뭐가?”

그레이는 장미 정원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식탁보의 흰빛이 보였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저건…….”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박수와 침묵 사이의 자리입니다.”

푸리나는 손에 든 두 표지판을 꼭 쥐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는 물었다.

“그레이, 같이 가줄 거야?”

그레이는 잠시 망설였다.

“문턱까지는요.”

“그다음은?”

“그다음은 군주님께서 들으셔야 합니다.”

“무엇을?”

그레이는 어둠 속 식탁보를 보았다.

“아레 님의 침묵을요.”

푸리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네.”

그레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려울 겁니다.”

그 대답이 너무 그레이다워서,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장미 정원을 지나 어둠 쪽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장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푸리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든 장미를 자기 무대 위에 올릴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자기 장미에게 돌아갈 길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장미 정원의 붉은빛이 조금씩 낮아졌다.

어둠 속 흰 식탁보가 더 선명해졌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박수와 침묵 사이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붙었다.

— 막이 내린 뒤에도 남아 있는 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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