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69여관◆zAR16hM8he(514e9af3)2026-05-20 (수) 21:04:47
3막 — 박수와 침묵 사이
— 막이 내린 뒤에도 남아 있는 자리 —
어둠 속에는 식탁보가 있었다.
처음에는 별빛인 줄 알았다.
장미 정원 너머, 붉은빛이 서서히 낮아진 자리에 희고 작은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무대도 아니고, 객석도 아니고, 길가의 쉼터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푸리나는 그것이 식탁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 장식도 없는 흰 천.
그 위에는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빵 한 조각.
그리고 빈 의자 하나.
푸리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이는 그녀보다 한 발짝 뒤에서 멈췄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레이?”
“저는 문턱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식탁보를 보았다.
“저기에는 누가 있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검은 숄이 움직였다.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오늘의 그녀는 뱀이었다.
그러나 뱀의 가면도, 비늘도, 화려한 독의 장식도 없었다. 검은 숄이 모래 위를 낮게 끌렸고, 그녀의 손에는 접히지 않은 침묵 같은 것이 들려 있는 듯했다.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왔구나, 아이야.”
푸리나는 가볍게 웃어넘기려 했다.
“아이야라니, 나 그래도 군주인데.”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주이기에 더 아이로 앉아야 하는 밤도 있단다.”
그 말에 푸리나는 웃지 못했다.
아레는 식탁보 곁에 무릎을 낮추었다.
“앉으렴.”
푸리나는 흰 식탁보를 보았다.
“여긴 무대야?”
“아니란다.”
“그럼?”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막이 내린 뒤란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막이 내린 뒤.
그 말은 너무 조용했다.
막이 오르면 푸리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조명을 켜고, 장면을 열고, 배우를 부르고, 박수를 준비하면 된다.
누군가 울고 있으면 웃게 만들고, 누군가 무너졌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 무대 위로 올리면 된다.
하지만 막이 내린 뒤에는?
관객이 떠나고, 박수가 사라지고, 배우가 분장을 지우고, 아무도 더 이상 보지 않을 때.
그곳에서 군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레이는 멀리서 고개를 숙인 뒤, 장미 정원 쪽으로 물러났다.
아레와 푸리나만 남았다.
아니, 식탁 위의 물 한 잔과 빵 한 조각과 빈 의자도 남았다.
푸리나는 빈 의자를 보았다.
“저 의자는 누구 거야?”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의 자리란다.”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
“웃지 못한 사람. 먹지 못한 사람. 떠난 사람의 이름을 삼키고 있는 사람.”
아레는 아주 느리게 물잔을 푸리나 쪽으로 밀었다.
“혹은, 박수가 너무 커서 자기 침묵을 놓친 사람.”
푸리나는 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물은 평범했다.
빛나지도 않았다.
신술도 아니었다.
그냥 물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었어.”
“안다.”
아레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차갑지 않았다.
“나는 무너진 사람도, 겁먹은 사람도, 자기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시 무대 위로 올리고 싶었어.”
“그래.”
“그게 틀린 거야?”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다, 아이야.”
푸리나는 조금 놀라 그녀를 보았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네 박수는 잘못이 아니란다. 산 자가 웃어야 다시 밥을 삼킬 수 있는 밤도 있지. 네가 열어준 무대 덕분에, 고개를 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꼭 잡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럼 왜 여기로 온 거야?”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박수로 모든 침묵을 덮을 수는 없기 때문이란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정확했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식탁보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폈다.
“어떤 밤에는 웃음이 먼저 와야 한다. 웃지 않으면 살아남은 몸이 굳어버리는 밤이 있단다.”
“응.”
“하지만 어떤 밤에는,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레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았다.
슬픔이 오래 머문 사람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을 무기로 쓰지 않으려 애쓰는 지휘관의 눈이었다.
아레는 말했다.
“그런 밤에는 조명을 낮추렴.”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도 낮추렴.”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박수는 조금 뒤에 두렴.”
“그럼 나는 뭘 해?”
푸리나의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다.
“앉으렴.”
“앉아서?”
“기다리렴.”
“말은?”
“상대가 숨을 고를 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단다.”
푸리나는 식탁 위의 물잔을 보았다.
“노래는?”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늦게.”
“박수는?”
“더 늦게.”
푸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내가 할 게 없잖아.”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있단다.”
“뭔데?”
“떠나지 않는 것.”
푸리나는 숨을 멈추었다.
식탁보 위의 물잔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레는 푸리나를 아이처럼, 그러나 결코 낮추어 보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야. 무대 위에 세우는 일은 귀하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직 떨고 있다면, 그 떨림 곁에도 있어주어야 한단다.”
푸리나는 자신의 작은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조명을 좋아하던 장미.
하지만 어느 날,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하던 장미.
박수를 좋아했지만, 박수가 오래되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다고 말하던 장미.
>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푸리나는 그 말을 그때 이해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
주인공이 아닌 채로 쉬는 것.
그런 것도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늦게 배우고 있었다.
“아레.”
“말하렴.”
“나는 장미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하는 법을 몰랐어.”
“그럴 수 있단다.”
“그럼 내가 나빴던 거야?”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빵 한 조각을 작은 접시 위에 올렸다.
“나쁘다, 아니다로 너무 빨리 묶지 말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는 네가 줄 수 있는 것을 주었다. 박수와 조명과 이름. 그것은 가벼운 선물이 아니란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부족했지.”
“그래.”
아레는 피하지 않았다.
“부족했다.”
그 말은 칼처럼 들어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베이지는 않았다.
그 말 뒤에 아레가 다시 낮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배워야 한다.”
푸리나는 식탁보를 바라보았다.
흰 천.
물.
빵.
빈 의자.
너무 평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어떤 무대보다 어려워 보였다.
“이것도 극장의 일부일까?”
푸리나가 물었다.
아레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네 극장이 넓어지려 한다면.”
“넓어진다?”
“그래.”
아레는 빈 의자 곁에 손을 놓았다.
“박수가 울리는 무대만 극장이라면, 이곳은 극장이 아니겠지. 하지만 네가 부른 이들이 박수 뒤에 앉아 쉴 곳까지 품으려 한다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 침묵도 네 극장의 방 하나가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극장의 방.
박수가 없는 방.
아무도 보지 않아도 되는 방.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
막이 내린 뒤에도, 쫓겨나지 않는 자리.
푸리나는 자신의 표지판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이 표지판을 여기에도 걸 수 있을까?”
아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 수 있단다.”
“그럼 사람들이 올까?”
“어떤 이는 오고, 어떤 이는 오지 않겠지.”
“오지 않는 사람은?”
“기다리렴.”
“얼마나?”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네가 부른 사람이라면, 조금 더.”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
장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오늘은 박수도 조금 피곤해요.
그 말 뒤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렸다.
푸리나는 장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조명을 줄이려 했고, 박수를 조절하려 했고, 장면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장미가 말한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그냥 내려가고 싶다는 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쉬고 싶다는 말.
푸리나는 그걸 “장면 조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는 장미를 계속 무대 위에서만 고치려고 했어.”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푸리나가 스스로 다음 말을 하도록 남겨둔 것 같았다.
“장미가 내려오고 싶다고 했는데.”
“그렇구나.”
“나는 무대 위에서 더 편하게 해주려고 했어.”
“그랬구나.”
“그게 틀렸던 거네.”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기보다, 닿지 않은 것이란다.”
푸리나는 눈을 떴다.
아레는 말했다.
“네 박수는 장미에게 닿았다. 그래서 장미는 피었겠지. 하지만 어느 날 장미가 더 낮은 곳의 휴식을 청했다면, 그날의 박수는 거기까지 닿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그날은 내려가야지.”
“같이?”
아레는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그래. 아이야.”
그 말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푸리나는 식탁보 위에 표지판을 내려놓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흰 천 위에 그 문장이 놓이자, 그곳은 조금 덜 낯설어졌다.
푸리나는 두 번째 표지판도 꺼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표지판 옆에 놓았다.
아레는 그것을 보았다.
“좋은 약속이구나.”
“지킬 수 있을까?”
“항상은 어렵겠지.”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약속은 완벽한 자만 하는 것이 아니란다. 늦을 수 있음을 아는 자가, 늦으면 돌아와 말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도 하지.”
“늦으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늦었다고 말하렴.”
“그다음은?”
“물어보렴.”
“무엇을?”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그것은 대사가 아니었다.
선언도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푸리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
어둠이 조금 움직였다.
식탁보 너머에 아주 작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이기도 했고, 배우이기도 했고, 병사이기도 했고, 이름 없는 관객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박수를 받다가 멈춘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울다가 웃은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웃은 뒤 방으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식탁보 앞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서려 했다.
“내가—”
아레가 낮게 말했다.
“아이야.”
푸리나는 멈췄다.
“앉아 있으렴.”
“하지만 저 사람들이—”
“보았단다.”
“그럼 뭘 해야 해?”
“지금은 아무것도.”
그 말은 어려웠다.
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공백이었다.
관객의 불안을 부르는 침묵이었다.
서둘러 대사나 음악이나 웃음으로 채워야 하는 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여기서 침묵은 누군가 앉을 수 있도록 비워둔 자리였다.
그림자 하나가 식탁보 곁에 앉았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푸리나도 박수치지 않았다.
아레도 말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물을 마셨다.
빵을 조금 떼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숨을 골랐다.
그뿐이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여전히 노래하고 싶었다.
위로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레가 말했던 것처럼,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 밤을 처음으로 지켜보았다.
한참 뒤, 그림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 조금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이제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말해도 돼?”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푸리나는 그림자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막을 올리지 않을게.”
그림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을 이었다.
“대신 여기 있을게.”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것은 박수에 반응한 몸짓이 아니었다.
휴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작은 변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기립박수보다 더 조용하고 어려운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
시간이 흘렀다.
무대의 시간인지, 침묵의 시간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의 그림자가 일어나고, 다른 그림자가 앉았다.
어떤 이는 물만 마셨다.
어떤 이는 빵을 조금 먹었다.
어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그들 모두에게 노래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다.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에는 손이 어색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물뿌리개를 만지작거렸고, 표지판의 모서리를 문질렀고, 류트를 보고 싶어졌다.
아레는 그때마다 말없이 곁에 있었다.
가끔 아주 낮게만 말했다.
“조금 더 기다리렴.”
“목소리를 낮추렴.”
“그 이름은 아직 부르지 말거라.”
“지금은 물이면 된단다.”
그 말들은 명령 같기도 했고, 아이에게 밤길을 가르치는 낮은 안내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조금씩 배웠다.
침묵도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장면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연출자가 아니라,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
마지막 그림자가 일어났을 때, 식탁보 위의 빵은 조금 줄어 있었고, 물잔은 거의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아레.”
“말하렴.”
“이런 밤에도 마지막에는 박수를 쳐도 돼?”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 의자를 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그들이 원한다면.”
“내가 원하면?”
“그때는 조금 더 기다리렴.”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응.”
아레는 아주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야, 박수는 선물이란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선물은 받는 이가 손을 내밀 때 주는 편이 좋다.”
그 말에 푸리나는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
“전부 알 필요는 없단다.”
아레는 검은 숄을 정리했다.
“다만 오늘 밤에는, 그 정도면 되었다.”
푸리나는 식탁보 위의 두 표지판을 다시 들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는 거기에 세 번째 문장을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목탄을 들었다가 멈췄다.
아직 말이 너무 빨랐다.
아레는 그것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비워두어도 된단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레이튼도 그런 말 했어.”
“그 아이는 질문을 잘 두는 편이지.”
“너 레이튼한테도 아이야라고 해?”
아레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때로는.”
푸리나는 웃음을 참으려다 조금 실패했다.
아레의 입가에도 아주 희미한 온기가 스쳤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먼 기억이 잠깐 식탁가에 앉았다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
어둠 저편에서 그레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조용히 식탁보 쪽으로 다가왔다.
푸리나는 일어섰다.
“그레이.”
“네, 군주님.”
“나, 조금 알 것 같아.”
그레이는 푸리나의 표지판들을 보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푸리나는 식탁보를 돌아보았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극장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거.”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극장은 박수치는 곳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해.”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좋은 개정입니다.”
“개정?”
“군주님의 극장 운영 원칙에 대한 개정입니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행정 같아.”
“실제로 행정이 필요할 겁니다.”
“왜?”
그레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물과 빵, 의자와 담요, 그리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휴식도 예산이구나.”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레가 낮게 말했다.
“식탁은 저절로 차려지지 않는단다, 아이야.”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둘이 같이 말하니까 엄청 무섭네.”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렴.”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아니, 이건 좀 무서워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장미한테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졌잖아.”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서 묻는 것이 먼저란다.”
푸리나는 멈췄다.
“먼저?”
“그래.”
아레는 빈 의자를 접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두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또 다른 조명.
좋은 의도로 만든 방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또 다른 무대가 될 수 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물어볼게.”
그레이가 말했다.
“그리고 들으시면 됩니다.”
아레가 덧붙였다.
“서두르지 말렴.”
푸리나는 두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장미 정원의 붉은빛도 사라지고, 식탁보의 흰빛도 낮아졌다.
대신 멀리 사막의 모래빛이 다시 보였다.
슈샤니크가 있는 곳.
찢어진 지도선이 있는 곳.
푸리나가 처음 상자 속 양을 받은 곳.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아레는 여전히 식탁보 곁에 있었다.
“아레.”
“말하렴.”
“내 박수는…… 그래도 가져가도 돼?”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낮고, 조용하고, 조금 슬펐다.
“가져가렴.”
푸리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레는 말했다.
“필요한 밤이 올 것이다.”
잠시 침묵.
“다만 아이야.”
“응.”
“박수가 먼저인지, 물 한 잔이 먼저인지, 물어보는 것을 잊지 말렴.”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을게.”
아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검은 숄이 어둠과 섞였다.
푸리나는 그레이와 함께 사막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표지판이 마음속에 생겨 있었다.
어쩌면 그 문장은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하지만 푸리나는 아직 적지 않았다.
그 말은 장미에게 직접 물어본 뒤에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지도 위의 장미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
— 막이 내린 뒤에도 남아 있는 자리 —
어둠 속에는 식탁보가 있었다.
처음에는 별빛인 줄 알았다.
장미 정원 너머, 붉은빛이 서서히 낮아진 자리에 희고 작은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무대도 아니고, 객석도 아니고, 길가의 쉼터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푸리나는 그것이 식탁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 장식도 없는 흰 천.
그 위에는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빵 한 조각.
그리고 빈 의자 하나.
푸리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이는 그녀보다 한 발짝 뒤에서 멈췄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레이?”
“저는 문턱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식탁보를 보았다.
“저기에는 누가 있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검은 숄이 움직였다.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오늘의 그녀는 뱀이었다.
그러나 뱀의 가면도, 비늘도, 화려한 독의 장식도 없었다. 검은 숄이 모래 위를 낮게 끌렸고, 그녀의 손에는 접히지 않은 침묵 같은 것이 들려 있는 듯했다.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왔구나, 아이야.”
푸리나는 가볍게 웃어넘기려 했다.
“아이야라니, 나 그래도 군주인데.”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주이기에 더 아이로 앉아야 하는 밤도 있단다.”
그 말에 푸리나는 웃지 못했다.
아레는 식탁보 곁에 무릎을 낮추었다.
“앉으렴.”
푸리나는 흰 식탁보를 보았다.
“여긴 무대야?”
“아니란다.”
“그럼?”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막이 내린 뒤란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막이 내린 뒤.
그 말은 너무 조용했다.
막이 오르면 푸리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조명을 켜고, 장면을 열고, 배우를 부르고, 박수를 준비하면 된다.
누군가 울고 있으면 웃게 만들고, 누군가 무너졌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 무대 위로 올리면 된다.
하지만 막이 내린 뒤에는?
관객이 떠나고, 박수가 사라지고, 배우가 분장을 지우고, 아무도 더 이상 보지 않을 때.
그곳에서 군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레이는 멀리서 고개를 숙인 뒤, 장미 정원 쪽으로 물러났다.
아레와 푸리나만 남았다.
아니, 식탁 위의 물 한 잔과 빵 한 조각과 빈 의자도 남았다.
푸리나는 빈 의자를 보았다.
“저 의자는 누구 거야?”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의 자리란다.”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
“웃지 못한 사람. 먹지 못한 사람. 떠난 사람의 이름을 삼키고 있는 사람.”
아레는 아주 느리게 물잔을 푸리나 쪽으로 밀었다.
“혹은, 박수가 너무 커서 자기 침묵을 놓친 사람.”
푸리나는 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물은 평범했다.
빛나지도 않았다.
신술도 아니었다.
그냥 물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었어.”
“안다.”
아레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차갑지 않았다.
“나는 무너진 사람도, 겁먹은 사람도, 자기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시 무대 위로 올리고 싶었어.”
“그래.”
“그게 틀린 거야?”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다, 아이야.”
푸리나는 조금 놀라 그녀를 보았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네 박수는 잘못이 아니란다. 산 자가 웃어야 다시 밥을 삼킬 수 있는 밤도 있지. 네가 열어준 무대 덕분에, 고개를 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꼭 잡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럼 왜 여기로 온 거야?”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박수로 모든 침묵을 덮을 수는 없기 때문이란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정확했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식탁보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폈다.
“어떤 밤에는 웃음이 먼저 와야 한다. 웃지 않으면 살아남은 몸이 굳어버리는 밤이 있단다.”
“응.”
“하지만 어떤 밤에는,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레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았다.
슬픔이 오래 머문 사람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을 무기로 쓰지 않으려 애쓰는 지휘관의 눈이었다.
아레는 말했다.
“그런 밤에는 조명을 낮추렴.”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도 낮추렴.”
아레는 빈 의자를 보았다.
“박수는 조금 뒤에 두렴.”
“그럼 나는 뭘 해?”
푸리나의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다.
“앉으렴.”
“앉아서?”
“기다리렴.”
“말은?”
“상대가 숨을 고를 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단다.”
푸리나는 식탁 위의 물잔을 보았다.
“노래는?”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늦게.”
“박수는?”
“더 늦게.”
푸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내가 할 게 없잖아.”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있단다.”
“뭔데?”
“떠나지 않는 것.”
푸리나는 숨을 멈추었다.
식탁보 위의 물잔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레는 푸리나를 아이처럼, 그러나 결코 낮추어 보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야. 무대 위에 세우는 일은 귀하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직 떨고 있다면, 그 떨림 곁에도 있어주어야 한단다.”
푸리나는 자신의 작은 별의 장미를 떠올렸다.
조명을 좋아하던 장미.
하지만 어느 날, 조명이 너무 밝다고 말하던 장미.
박수를 좋아했지만, 박수가 오래되면 꽃잎이 마르는 것 같다고 말하던 장미.
> 오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도로요.
푸리나는 그 말을 그때 이해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
주인공이 아닌 채로 쉬는 것.
그런 것도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늦게 배우고 있었다.
“아레.”
“말하렴.”
“나는 장미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하는 법을 몰랐어.”
“그럴 수 있단다.”
“그럼 내가 나빴던 거야?”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빵 한 조각을 작은 접시 위에 올렸다.
“나쁘다, 아니다로 너무 빨리 묶지 말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는 네가 줄 수 있는 것을 주었다. 박수와 조명과 이름. 그것은 가벼운 선물이 아니란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부족했지.”
“그래.”
아레는 피하지 않았다.
“부족했다.”
그 말은 칼처럼 들어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베이지는 않았다.
그 말 뒤에 아레가 다시 낮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배워야 한다.”
푸리나는 식탁보를 바라보았다.
흰 천.
물.
빵.
빈 의자.
너무 평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어떤 무대보다 어려워 보였다.
“이것도 극장의 일부일까?”
푸리나가 물었다.
아레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네 극장이 넓어지려 한다면.”
“넓어진다?”
“그래.”
아레는 빈 의자 곁에 손을 놓았다.
“박수가 울리는 무대만 극장이라면, 이곳은 극장이 아니겠지. 하지만 네가 부른 이들이 박수 뒤에 앉아 쉴 곳까지 품으려 한다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이 침묵도 네 극장의 방 하나가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극장의 방.
박수가 없는 방.
아무도 보지 않아도 되는 방.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
막이 내린 뒤에도, 쫓겨나지 않는 자리.
푸리나는 자신의 표지판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이 표지판을 여기에도 걸 수 있을까?”
아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 수 있단다.”
“그럼 사람들이 올까?”
“어떤 이는 오고, 어떤 이는 오지 않겠지.”
“오지 않는 사람은?”
“기다리렴.”
“얼마나?”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네가 부른 사람이라면, 조금 더.”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
장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오늘은 박수도 조금 피곤해요.
그 말 뒤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렸다.
푸리나는 장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조명을 줄이려 했고, 박수를 조절하려 했고, 장면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장미가 말한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그냥 내려가고 싶다는 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쉬고 싶다는 말.
푸리나는 그걸 “장면 조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는 장미를 계속 무대 위에서만 고치려고 했어.”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푸리나가 스스로 다음 말을 하도록 남겨둔 것 같았다.
“장미가 내려오고 싶다고 했는데.”
“그렇구나.”
“나는 무대 위에서 더 편하게 해주려고 했어.”
“그랬구나.”
“그게 틀렸던 거네.”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기보다, 닿지 않은 것이란다.”
푸리나는 눈을 떴다.
아레는 말했다.
“네 박수는 장미에게 닿았다. 그래서 장미는 피었겠지. 하지만 어느 날 장미가 더 낮은 곳의 휴식을 청했다면, 그날의 박수는 거기까지 닿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그날은 내려가야지.”
“같이?”
아레는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그래. 아이야.”
그 말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푸리나는 식탁보 위에 표지판을 내려놓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흰 천 위에 그 문장이 놓이자, 그곳은 조금 덜 낯설어졌다.
푸리나는 두 번째 표지판도 꺼냈다.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표지판 옆에 놓았다.
아레는 그것을 보았다.
“좋은 약속이구나.”
“지킬 수 있을까?”
“항상은 어렵겠지.”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약속은 완벽한 자만 하는 것이 아니란다. 늦을 수 있음을 아는 자가, 늦으면 돌아와 말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도 하지.”
“늦으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늦었다고 말하렴.”
“그다음은?”
“물어보렴.”
“무엇을?”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그것은 대사가 아니었다.
선언도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푸리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
어둠이 조금 움직였다.
식탁보 너머에 아주 작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이기도 했고, 배우이기도 했고, 병사이기도 했고, 이름 없는 관객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박수를 받다가 멈춘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울다가 웃은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웃은 뒤 방으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식탁보 앞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서려 했다.
“내가—”
아레가 낮게 말했다.
“아이야.”
푸리나는 멈췄다.
“앉아 있으렴.”
“하지만 저 사람들이—”
“보았단다.”
“그럼 뭘 해야 해?”
“지금은 아무것도.”
그 말은 어려웠다.
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공백이었다.
관객의 불안을 부르는 침묵이었다.
서둘러 대사나 음악이나 웃음으로 채워야 하는 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여기서 침묵은 누군가 앉을 수 있도록 비워둔 자리였다.
그림자 하나가 식탁보 곁에 앉았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푸리나도 박수치지 않았다.
아레도 말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물을 마셨다.
빵을 조금 떼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숨을 골랐다.
그뿐이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여전히 노래하고 싶었다.
위로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레가 말했던 것처럼,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 밤을 처음으로 지켜보았다.
한참 뒤, 그림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 조금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레가 푸리나를 보았다.
“이제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말해도 돼?”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푸리나는 그림자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막을 올리지 않을게.”
그림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말을 이었다.
“대신 여기 있을게.”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것은 박수에 반응한 몸짓이 아니었다.
휴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작은 변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기립박수보다 더 조용하고 어려운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
시간이 흘렀다.
무대의 시간인지, 침묵의 시간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의 그림자가 일어나고, 다른 그림자가 앉았다.
어떤 이는 물만 마셨다.
어떤 이는 빵을 조금 먹었다.
어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그들 모두에게 노래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다.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에는 손이 어색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물뿌리개를 만지작거렸고, 표지판의 모서리를 문질렀고, 류트를 보고 싶어졌다.
아레는 그때마다 말없이 곁에 있었다.
가끔 아주 낮게만 말했다.
“조금 더 기다리렴.”
“목소리를 낮추렴.”
“그 이름은 아직 부르지 말거라.”
“지금은 물이면 된단다.”
그 말들은 명령 같기도 했고, 아이에게 밤길을 가르치는 낮은 안내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조금씩 배웠다.
침묵도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장면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
자신은 연출자가 아니라,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
마지막 그림자가 일어났을 때, 식탁보 위의 빵은 조금 줄어 있었고, 물잔은 거의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아레.”
“말하렴.”
“이런 밤에도 마지막에는 박수를 쳐도 돼?”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 의자를 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그들이 원한다면.”
“내가 원하면?”
“그때는 조금 더 기다리렴.”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응.”
아레는 아주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야, 박수는 선물이란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선물은 받는 이가 손을 내밀 때 주는 편이 좋다.”
그 말에 푸리나는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
“전부 알 필요는 없단다.”
아레는 검은 숄을 정리했다.
“다만 오늘 밤에는, 그 정도면 되었다.”
푸리나는 식탁보 위의 두 표지판을 다시 들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는 거기에 세 번째 문장을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목탄을 들었다가 멈췄다.
아직 말이 너무 빨랐다.
아레는 그것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비워두어도 된단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레이튼도 그런 말 했어.”
“그 아이는 질문을 잘 두는 편이지.”
“너 레이튼한테도 아이야라고 해?”
아레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때로는.”
푸리나는 웃음을 참으려다 조금 실패했다.
아레의 입가에도 아주 희미한 온기가 스쳤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먼 기억이 잠깐 식탁가에 앉았다가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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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저편에서 그레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조용히 식탁보 쪽으로 다가왔다.
푸리나는 일어섰다.
“그레이.”
“네, 군주님.”
“나, 조금 알 것 같아.”
그레이는 푸리나의 표지판들을 보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푸리나는 식탁보를 돌아보았다.
“막이 내린 뒤에도 극장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거.”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극장은 박수치는 곳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해.”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좋은 개정입니다.”
“개정?”
“군주님의 극장 운영 원칙에 대한 개정입니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행정 같아.”
“실제로 행정이 필요할 겁니다.”
“왜?”
그레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물과 빵, 의자와 담요, 그리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휴식도 예산이구나.”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레가 낮게 말했다.
“식탁은 저절로 차려지지 않는단다, 아이야.”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둘이 같이 말하니까 엄청 무섭네.”
그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렴.”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아니, 이건 좀 무서워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장미한테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졌잖아.”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서 묻는 것이 먼저란다.”
푸리나는 멈췄다.
“먼저?”
“그래.”
아레는 빈 의자를 접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두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또 다른 조명.
좋은 의도로 만든 방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또 다른 무대가 될 수 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물어볼게.”
그레이가 말했다.
“그리고 들으시면 됩니다.”
아레가 덧붙였다.
“서두르지 말렴.”
푸리나는 두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장미 정원의 붉은빛도 사라지고, 식탁보의 흰빛도 낮아졌다.
대신 멀리 사막의 모래빛이 다시 보였다.
슈샤니크가 있는 곳.
찢어진 지도선이 있는 곳.
푸리나가 처음 상자 속 양을 받은 곳.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아레는 여전히 식탁보 곁에 있었다.
“아레.”
“말하렴.”
“내 박수는…… 그래도 가져가도 돼?”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낮고, 조용하고, 조금 슬펐다.
“가져가렴.”
푸리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레는 말했다.
“필요한 밤이 올 것이다.”
잠시 침묵.
“다만 아이야.”
“응.”
“박수가 먼저인지, 물 한 잔이 먼저인지, 물어보는 것을 잊지 말렴.”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을게.”
아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검은 숄이 어둠과 섞였다.
푸리나는 그레이와 함께 사막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표지판이 마음속에 생겨 있었다.
어쩌면 그 문장은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하지만 푸리나는 아직 적지 않았다.
그 말은 장미에게 직접 물어본 뒤에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대 뒤 간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4막 — 지도 위의 장미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