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70여관◆zAR16hM8he(514e9af3)2026-05-20 (수) 21:11:21
4막 — 지도 위의 장미

—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

사막은 처음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처음의 사막은 끝없이 넓었다.
지도를 삼키고, 발자국을 지우고, 방향이라는 말을 조롱하듯 모든 곳을 같은 색으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사막은 달랐다.

여전히 넓었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이제 그 침묵 속에서 조금 다른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길 위의 물통.

서재의 질문.

등불 아래의 표지판.

장미 정원의 바람.

식탁보 위의 물 한 잔.

그 모든 것이 사막의 모래 사이에 아주 얇은 선처럼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그레이와 함께 걸었다.

손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세 번째 문장이 마음속에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나요.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직 적지 않았다.

아레가 말했기 때문이다.

>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방부터 세우면, 또 다른 조명이 될 수 있단다.



푸리나는 그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또 다른 조명.

선의로 비춘 빛이라도, 상대가 눈을 감고 싶어 하는 밤에는 피로가 될 수 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게 되지는 않았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군주님.”

“응.”

“사막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 추락한 지도선이 보였다.

은실 날개는 여전히 부러져 있었고, 관측판은 반쯤 모래에 묻혀 있었다. 찢어진 지도 조각들이 작은 돌에 눌려 놓여 있었고, 그 곁에 슈샤니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도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조각과 조각 사이에는 맞지 않는 틈이 많았다.

어떤 강은 중간에서 끊겼고, 어떤 산맥은 갑자기 사라졌으며, 어떤 도시 이름은 절반만 남았다.

슈샤니크는 그 틈을 억지로 메우지 않았다.

그저 조각들이 어디까지 맞고, 어디서부터 맞지 않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았다.

“지도는 아직도 안 고쳐졌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지도는 고쳐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전하.”

“그럼?”

“덜 틀리게 만드는 물건에 가깝지요.”

푸리나는 입을 살짝 삐죽였다.

“역시 시작부터 어렵네.”

슈샤니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피곤해 보였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돌아오셨군요.”

“응.”

푸리나는 사막 위에 앉았다.

그레이는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슈샤니크가 그레이를 보았다.

“여우께서도 돌아오셨군요.”

그레이가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

“오늘은 그 배역이었습니다.”

“좋은 귀입니다.”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레이, 그 평가는 기록해도 돼?”

“하지 않겠습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래서, 작은 전하.”

“이번엔 또 작은 전하야?”

“이번 극에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추락한 지도 제작자여.”

“예, 작은 전하.”

푸리나는 표지판 두 개를 내려놓았다.

슈샤니크는 그것들을 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녀의 시선이 두 번째 문장에서 아주 잠깐 멈추었다.

“무언가 배우셨군요.”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는 박수가 끝난 뒤의 길을 보여줬어. 일어난 사람이 어디로 걸어갈지도 봐야 한다고 했어.”

슈샤니크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조스타 경다운 정확한 말이군요. 화려하지 않아서 더 위험합니다.”

“레이튼은 질문했어. 객석이 비어도 무대냐고. 배우가 내려간 뒤의 방도 극장의 일부냐고.”

“그분은 늘 결론의 의자를 빼는 데 능하지요.”

“하융은 길을 보여줬어. 무대와 여관은 닮았지만 같지 않다고 했어. 무대는 사람을 보이게 하고, 여관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게 한다고.”

슈샤니크의 손이 지도 위에서 멈추었다.

그 말은 그녀에게 조금 깊게 들어간 듯했다.

“좋은 말입니다.”

“그레이는 길들인다는 걸 말해줬어. 같은 시간에 찾아가고, 어제랑 필요한 게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거라고.”

슈샤니크는 그레이를 보았다.

“정확하고 잔인하게 현실적인 정의군요.”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현실적이려고 했습니다.”

“성공하셨습니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아레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식탁보.

물.

빵.

빈 의자.

웃음이 먼저 오면 슬픔이 앉을 자리를 잃는 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아레는 박수와 침묵 사이의 자리를 보여줬어.”

슈샤니크는 조용히 들었다.

푸리나는 손을 내려 표지판을 살짝 만졌다.

“내 박수가 틀린 건 아니라고 했어.”

“그랬습니까.”

“응. 하지만 어떤 밤에는 조명을 낮추고, 박수도 늦게 두라고 했어.”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 하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레 경다운 말입니다.”

“그리고 빈 의자 곁에 앉아 있으라고 했어.”

푸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지 못했다.

“그건…… 생각보다 어려웠어.”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평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빈 의자.

말하지 못한 이름.

돌아오지 못한 사람.

지도 위에서만 남은 장소.

푸리나는 그 침묵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의 별에도 장미가 있었어?”

그 질문은 사막에 작게 떨어졌다.

그레이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도에는 있었습니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지도에 있으면 돌아갈 수 있어?”

슈샤니크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푸리나는 손에 든 표지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지도만으로는 부족하네.”

그 말에 슈샤니크의 손이 멈췄다.

바람이 지나갔다.

찢어진 지도 조각 하나가 들썩였지만, 슈샤니크는 바로 누르지 못했다.

푸리나는 자신이 너무 아픈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

슈샤니크는 한참 뒤에 말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아팠지?”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때때로 단순한 말로 오래된 문을 여시는군요.”

“그거 칭찬이야?”

“오늘은 칭찬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슈샤니크는 날아가려던 지도 조각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지도 위의 꽃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물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조명이 밝다고 말하지도 않고, 박수가 피곤하다고 투덜거리지도 않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처음에는 편합니다.”

슈샤니크는 지도 위의 빈 곳을 보았다.

“아주 편합니다. 더는 설득할 필요가 없고, 더는 기다릴 필요도 없고, 더는 밤마다 덮개를 씌워주러 갈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은 정중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슈샤니크는 찢어진 지도 한 조각을 들어 올렸다.

그 조각에는 포도밭을 뜻하는 작은 표시가 있었다.
반쯤 지워진 십자가 표시.
이름의 일부만 남은 마을.
그리고 작은 꽃 모양의 잉크 자국.

“침묵한 꽃은 예의 바릅니다.”

푸리나는 숨을 멈추었다.

슈샤니크는 말했다.

“너무 예의 바릅니다. 결코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조명이 싫다고 하지도 않고, 바람이 찼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군주가 늦었다고 말하지도 않지요.”

그녀는 지도 조각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그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막의 바람만이 오래 지나갔다.

마침내 푸리나가 말했다.

“나는 아직 장미가 투덜거려.”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자기 말을 확인하듯 다시 말했다.

“내 장미는 아직 투덜거려. 박수가 싫다고 하고, 조명이 밝다고 하고, 매일 주인공이면 쉴 수 없다고 하고…… 아마 내가 돌아가면 늦었다고도 하겠지.”

“그럴 것입니다.”

“그럼 다행인 거네.”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울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예전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박수를 준비하는 눈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는 눈이었다.

슈샤니크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예.”

잠시 침묵.

“그것은 다행입니다.”

그 대답은 아주 작았다.

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은 말이었다.


---

푸리나는 지도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 장미는 어디 있었어?”

슈샤니크는 푸리나가 가리킨 지도 조각을 보았다.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여러 곳?”

“전하의 장미처럼 한 송이는 아니었습니다.”

슈샤니크는 천천히 설명했다.

“어떤 장미는 문 앞의 포도나무였고, 어떤 장미는 아이들이 물을 뜨러 가던 우물이었고, 어떤 장미는 예배가 끝난 뒤 나누던 빵이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조각을 짚었다.

“어떤 장미는 언젠가 돌아가면 다시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름이었고.”

또 다른 조각.

“어떤 장미는 세금을 덜어주면 한 해 더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마을이었고.”

마지막 조각.

“어떤 장미는 제가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잠자리였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표지판을 꼭 쥐었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 문장들이 갑자기 너무 늦은 약속처럼 보였다.

슈샤니크는 푸리나의 표정을 보았다.

“전하.”

“응.”

“제 지도를 보고 전하의 장미를 미리 장례 치르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슈샤니크의 말은 정중했지만 날카로웠다.

“제 별의 이야기는, 전하의 별에 내리는 판결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니요.”

슈샤니크는 조용히 말을 끊었다.

“비극은 쉽게 보편이 되려 합니다. 한 번 불탄 사람은 모든 등불을 화재의 전조로 읽고 싶어지지요.”

그녀는 자신의 찢어진 지도를 보았다.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늘 옳은 일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침묵했다.

슈샤니크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의 장미는 아직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푸리나의 표지판으로 내려갔다.

“투덜거리고, 요구하고, 피곤하다고 말하고, 조명이 밝다고 말하고 있지요.”

“응.”

“그렇다면 돌아가십시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슈샤니크는 분명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전하.”

그 말은 마치 지도 위에 못을 박는 것 같았다.

“침묵한 꽃은 예의를 지키지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푸리나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레이가 한 걸음 다가오려 했지만, 멈췄다.

푸리나는 스스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돌아가면…… 뭘 해야 할까?”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걸 제게 물으십니까?”

“응.”

“저는 돌아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물어볼래.”

슈샤니크는 아주 잠시 말문을 잃었다.

푸리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슈샤니크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푸리나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먼저 늦었다고 말하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변명은 뒤에 두십시오.”

“그리고?”

“장미가 먼저 불평하게 두십시오.”

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건 어려운데.”

“그럴 겁니다.”

슈샤니크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군주는 대개 자기 설명을 먼저 하고 싶어 하니까요.”

“그건 맞아.”

“하지만 이번에는 늦게 하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은?”

슈샤니크는 푸리나가 들고 있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묻는 겁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냐고?”

슈샤니크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좋은 질문입니다.”

“아직 표지판에는 안 썼어.”

“잘하셨습니다.”

“왜?”

“그 질문은 장미 앞에서 처음 나와야 할 것 같군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사막의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다.

슈샤니크는 지도선 쪽을 보았다.

부러진 은실 날개.

금 간 관측판.

말라버린 물통.

그리고 찢어진 지도.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슈샤니크가 푸리나를 보았다.

“저 말입니까?”

“응.”

“지도선을 고쳐야지요.”

“돌아가려고?”

“적어도 여기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슈샤니크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덜 틀린 지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푸리나는 찢어진 지도 조각을 하나 집었다.

“내가 도와줄까?”

슈샤니크는 곧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푸리나의 손을 보았다.

물뿌리개를 들던 손.

류트를 잡던 손.

표지판을 쓰던 손.

그리고 아직 지도 조각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 손.

“찢어진 지도를 다루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나 조명도 다루고 커튼도 접어.”

“그 점은 큰 도움이 될 수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럼 배울게.”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작은 지도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이 조각은 가장자리에 두십시오. 가운데가 아닙니다.”

“왜?”

“모든 조각을 중심에 놓으면 지도는 다시 찢어집니다.”

푸리나는 손을 멈추었다.

그 말이 너무 직접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모든 장미를 무대 중앙에 세우면, 무대 중앙이라는 말이 이상해진다.

모든 조각을 중심에 놓으면, 지도는 다시 찢어진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지도 조각을 가장자리에 놓았다.

“여기?”

“조금 왼쪽입니다.”

“여기?”

“조금 더.”

“여기?”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푸리나는 만족한 듯 웃었다.

“지도도 무대 배치랑 비슷하네.”

“그런 말을 들으면 지도 제작자들이 불쾌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저는 조금 불쾌합니다.”

“하지만 맞는 것 같지 않아?”

슈샤니크는 지도 조각들을 보았다.

잠시 뒤, 아주 낮게 말했다.

“조금은.”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사막의 공기를 아주 조금 밝게 했다.

하지만 슈샤니크는 이번에는 그 웃음을 피하지 않았다.


---

그레이는 뒤에서 조용히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푸리나와 슈샤니크.

작은 별의 왕과 추락한 지도 제작자.

아직 투덜거리는 장미를 가진 군주와, 지도 위의 장미만 남은 어른.

두 사람은 한동안 지도 조각을 맞추었다.

완성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완성될 수 있는 지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조각은 서로 이어졌다.

끊겼던 강줄기 하나가 다시 연결되었다.

폐허가 된 성벽의 일부가 제자리를 찾았다.

이름이 반만 남았던 마을 옆에, 푸리나가 작은 점을 찍었다.

슈샤니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방금 무엇을 하셨습니까?”

“여기 쉬어갈 곳 표시.”

“그곳에 실제 여관이 있습니까?”

“아직 없지.”

“그렇다면 지도상 허위 기재입니다.”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예정지라고 해.”

슈샤니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작게 숨을 삼켰다.

푸리나는 목탄으로 점 옆에 아주 작은 표시를 덧붙였다.

예정.

슈샤니크는 그것을 보았다.

한참 동안.

그리고 지우지 않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났어?”

“아닙니다.”

“그럼?”

슈샤니크는 천천히 말했다.

“오래전에 제가 너무 쉽게 지웠던 단어입니다.”

“예정?”

“예.”

슈샤니크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무언가를 다시 세우겠다는 말. 누군가를 다시 맞이하겠다는 말. 내년에도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믿는 말.”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작은 예정 표시를 손끝으로 눌렀다.

“전하께서는 그런 말을 쉽게 쓰시는군요.”

푸리나는 조금 움츠러들었다.

“나쁘게 들려?”

“아니요.”

슈샤니크는 고개를 저었다.

“부럽게 들립니다.”

그 말은 작았다.

그러나 사막 전체가 들은 것 같았다.

푸리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지우지 말자.”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목탄을 들어, 그 옆에 더 작은 글씨를 썼다.

검토 필요.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슈샤니크답다.”

“무분별한 예정은 예산을 파괴합니다.”

“그래도 예정은 남아 있잖아.”

“검토가 붙었습니다.”

“그건 괜찮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예정 사항으로 관리하면 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너 지금 내 편이야, 슈샤니크 편이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예산의 편입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슈샤니크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찢어진 지도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뒤에도, 지도 조각 하나가 조금 덜 차가워 보였다.


---

조금 뒤, 지도선의 은실 날개가 바람에 흔들렸다.

슈샤니크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전하께서 돌아가셔야 할 시간이군요.”

푸리나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응.”

그녀는 두 표지판을 챙겼다.

무대에서 내려와도 됨.

같은 시간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세 번째 문장.

아직 쓰지 않은 질문.

슈샤니크는 푸리나를 보았다.

“돌아가면, 아마 꽃은 전하를 반기지 않을 겁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

“늦었다고 말하겠지요.”

“응.”

“박수는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알아.”

“조명이 싫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에도 가시겠습니까?”

푸리나는 표지판을 품에 안았다.

“응.”

“왜입니까?”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별을 떠올렸다.

조명탑 셋.

커튼.

의자.

대본 덩굴.

그리고 장미.

자기가 조명을 비춘 장미.

하지만 조명이 없어도 살아 있는 장미.

자기 무대의 주인공이었지만, 동시에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어야 했던 장미.

푸리나는 말했다.

“내가 같은 시간에 돌아가야 할 장미니까.”

슈샤니크는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그녀는 찢어진 지도 뒷면에서 처음 그려주었던 상자 속 양을 꺼냈다.

그 종이는 사막 바람에 조금 구겨져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걸 가져가도 돼?”

“애초에 전하의 양입니다.”

“상자잖아.”

“전하께서 좋아하셨습니다.”

“응.”

푸리나는 상자 그림을 보았다.

보이지 않기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양.

아직 장미를 먹지 않은 양.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가능성.

슈샤니크는 말했다.

“전하.”

“응?”

“상자 안의 양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왜?”

“상자도 열어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슈샤니크는 덧붙였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전할 수도 있지만, 방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러니 돌아가시면, 양보다 먼저 장미를 보십시오.”

“그리고 물어보고.”

“예.”

슈샤니크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은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직 빈 세 번째 표지판을 꺼냈다.

슈샤니크가 물었다.

“쓰실 겁니까?”

푸리나는 목탄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왜입니까?”

“장미 앞에서 처음 말할 거야.”

슈샤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 질문은, 지도보다 먼저 도착해야 할 것 같군요.”


---

푸리나는 사막 끝으로 걸어갔다.

그레이가 곁에 섰다.

“같이 가줄 거야?”

그레이는 말했다.

“문턱까지는요.”

푸리나는 그 대답에 조금 웃었다.

“다들 문턱까지만이래.”

“그다음은 군주님께서 하셔야 하니까요.”

“알아.”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돌아보았다.

슈샤니크는 지도선 옆에 서 있었다.

찢어진 지도 조각들이 그녀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에는 이제 작은 표시가 남아 있었다.

예정.

그 옆에 더 작은 글씨.

검토 필요.

푸리나는 손을 흔들었다.

“나 다녀올게.”

슈샤니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투덜거리는 동안 돌아가십시오, 전하.”

푸리나는 크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너무 크게 받을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별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걸었다.

무대 위 사막빛이 천천히 낮아졌다.

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조명탑 셋.

작은 커튼.

해가 지는 의자.

그리고 장미.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무대 뒤 간판이 떠올랐다.

5막 — 장미가 쉬는 법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오늘은 어떻게 쉬고 싶어?
(최대 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