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76여관◆zAR16hM8he(d3c1cbff)2026-05-21 (목) 13:37:26
《은빛 피노키오》

프롤로그 — 가족이라고 적기에는 칸이 너무 좁았다

—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결말이면 안 해 —

라이자의 작업실에는 늘 은빛 냄새가 났다.

정확히 말하면, 은에는 냄새가 없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라이자의 작업실에 들어올 때마다 그렇게 느꼈다.

차가운 금속.
막 식은 용광로.
부드러운 천 위에 놓인 작은 부품들.
반쯤 열린 공구함.
벽면에 기대어 선 은빛 골격.
그리고 누군가의 손끝이 너무 오래 닿아, 금속이라기보다 체온을 기억하게 된 것들.

“음.”

푸리나는 문 앞에서 팔짱을 꼈다.

“오늘도 여기는 반짝이고, 차갑고, 위험하고, 비싸 보이네.”

그레이는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전하, 위험하고 비싼 것은 보통 만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레이. 나는 군주야.”

“그래서 더 만지지 않으셔야 합니다.”

“너무 설득력 있어.”

푸리나는 얌전히 손을 뒤로 숨겼다.

작업대 앞에 앉아 있던 라이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만지면 안 돼. 특히 왼쪽 세 번째 상자.”

푸리나는 이미 왼쪽 세 번째 상자를 보고 있었다.

“안 만졌어.”

“생각했잖아.”

“생각까지 금지야?”

“네가 생각하면 대체로 10초 안에 사고가 나.”

그레이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배신당한 얼굴로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

“통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통계는 때때로 잔인해.”

라이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가느다란 은실이 감겨 있었다. 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단하고, 철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부드러운 것. 그것은 라이자의 손끝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휘었다.

작업대 위에는 작은 관절 부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은인이 앉아 있었다.

은인은 조용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빛을 받으면 피부 아래에서 은빛이 얇게 흔들렸고, 눈동자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배우는 중인 것처럼 맑았다.

푸리나는 은인을 볼 때마다, 잠깐씩 말을 고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해서 그랬다.

이제는 아니었다.

“안녕, 은인.”

은인이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푸리나.”

발음은 조금 느렸지만 또렷했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오늘도 훌륭하게 인사했어.”

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훌륭한 인사는 사람다운 인사인가요?”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레이도 기록판을 들던 손을 멈췄다.

라이자는 은실을 감던 손가락을 아주 조금 늦췄다.

작업실 안의 은빛 소리들이 잠깐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웃었다.

너무 크게 웃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글쎄. 인사를 잘한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닐 거야.”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저는 사람처럼 인사한 건가요?”

푸리나는 무심코 말했다.

“응. 정말 사람 같—”

그 순간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푸리나는 말을 삼켰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선명했다.

“사람 같아서 가족인 게 아니야.”

작업실의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라이자는 천천히 말했다.

“내 가족이니까, 사람처럼 대해야 하는 거야.”

푸리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내가 말을 잘못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인가요?”

라이자는 망설이지 않았다.

“응.”

“그럼 사람처럼 대해야 하나요?”

“응.”

“그러면 저는 사람인가요?”

이번에는 라이자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의 은실이 아주 작게 떨렸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 질문은, 작업실 안에서 끝나지 않겠구나.


---

그레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정확히는 간단했어야 했다.

라이자의 은인 관련 지원 물품, 작업실 안전 관리, 보호자 권한, 출입 기록, 예산 항목, 긴급 대피 동선, 그리고 혹시 모를 행정상 신분 분류.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기록판을 넘겼다.

“라이자 님. 기록상 항목이 필요합니다.”

라이자는 은인의 어깨 부품을 살피며 대답했다.

“무슨 항목?”

“신분입니다.”

푸리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레이가 이런 목소리를 낼 때는 보통 질문이 아주 현실적이고, 그래서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종류였다.

라이자는 짧게 대답했다.

“가족.”

그레이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신분 항목은 별도로 필요합니다.”

라이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게는 그게 제일 먼저야.”

“알고 있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장부는 관계만으로는 물자를 배정하지 못합니다. 보호 권한, 의료 책임, 거주 자격, 외부 접촉 권한, 피해 발생 시 책임 소재가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살짝 손을 들었다.

“그레이, 조금만 덜 장부처럼 말할 수 있어?”

그레이는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인을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보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인이 먼저 물었다.

“저는 어느 칸에 들어가나요?”

그 질문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 작업실 전체가 그 질문에 걸린 것처럼 멈췄다.

은인은 그레이의 기록판을 보았다.

“도구인가요?”

라이자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실험체인가요?”

“아니.”

“피보호자인가요?”

그레이가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그럼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면 충분한가요?”

라이자는 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사랑해서였다.

가족.

그 말은 라이자에게 가장 먼저 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은인의 질문은 그 뒤를 묻고 있었다.

가족이면 충분한가.
가족이라는 말이 은인의 이름, 권리, 실수, 선택, 외출, 거짓말, 귀환까지 모두 대신 정해도 되는가.

푸리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무대라면, 여기서 조명을 낮췄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작업실이었다.

조명은 은빛으로 차갑게 빛났고, 누구도 대사를 준비하지 못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천천히 닫았다.

“현재 항목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이자가 말했다.

“새 항목을 만들겠다는 뜻이야?”

“필요하다면요.”

“이름은?”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펴졌다.

“저는 이름이 있나요?”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있어.”

“그럼 그걸 적으면 안 되나요?”

그레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은 칸의 제목이 아니라, 칸 안에 들어가는 사람을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은인은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심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사람이 행정의 틈에서 사라지는 일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기에, 아무 칸에나 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자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그럼 새 칸을 만들어.”

라이자가 말했다.

“가족이라고 적고.”

그레이는 낮게 대답했다.

“그 칸을 만들면, 그 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칸.

그것은 따뜻한 말이지만,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칸이었다.


---

사건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푸리나는 그날의 대화를 대충 축제로 바꾸려고 했다.

“좋아! 오늘은 어려운 이야기가 많았으니, 잠깐 쉬자. 라이자, 은인이 좋아하는 간식 같은 거 없어?”

라이자는 아직 표정이 어두웠지만 대답했다.

“간식이라기보다, 은인은 단맛이 나는 차를 좋아해.”

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차를 좋아합니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완벽해. 그럼 차를 마시자. 장부도, 신분도, 철학도 잠시 휴식!”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철학은 휴식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레이, 지금은 사라진 척하는 거야.”

“그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보류입니다.”

“보류도 훌륭한 극적 장치야!”

그레이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라이자가 차를 준비하러 잠시 작업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은인은 작업대 위의 은실을 바라보았다.

그 은실은 조금 전 라이자가 다루던 것이었다. 가느다랗고, 반짝이고, 손끝에 감기면 마치 작은 강처럼 흐르는 은.

은인은 손을 뻗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만져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은실 끝을 만졌다.

은실은 손가락에 감겼다.

은인은 놀라 손을 뒤로 뺐다.

그러자 은실은 더 감겼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은인은 당황했다.

“어.”

그레이가 보았다.

“은인 님?”

그 순간 라이자가 돌아왔다.

“은인, 작업대 위 은실 만졌어?”

은인은 아주 작게 굳었다.

손가락에는 은실이 감겨 있었다.

누구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의 얼굴에는 걱정이 있었다.

화가 아니라 걱정.

그 걱정이 은인에게는 더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작업실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레이도 기록판을 들지 않았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은실은 분명히 감겨 있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안 만졌어요.”

그 순간, 은인의 코가 삐걱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끼익.

은빛 얼굴 한가운데에서, 코의 끝이 아주 조금 앞으로 밀려났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은인도 눈을 깜박였다.

끼이익.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가 중얼거렸다.

“와.”

그레이가 아주 낮게 말했다.

“시각적 반응이 발생했습니다.”

라이자는 창백해졌다.

“그건 설계에 없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면 저는 잘못 만들어진 건가요?”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얼굴이었다.

“아니.”

라이자는 은인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방금 말은 취소할게.”

은인은 손을 움켜쥐었다.

은실이 더 엉켰다.

“하지만 설계에 없다고 했어요.”

“그건 네가 잘못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니야.”

라이자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내가 모르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야.”

은인은 코끝을 만지려 했다.

끼이익.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작게 말했다.

“원전 반영이 너무 정확한데.”

그레이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폈다.

“왜 거짓말했어?”

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는 다시 물었다.

“혼날까 봐?”

은인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고장났다고 할까 봐요.”

라이자의 손이 멈췄다.

은인은 작게 말했다.

“가족이라고 했는데, 제가 잘못하면 가족이 아닌 게 될까 봐요.”

그 말은 작업실의 차가운 은빛보다 더 날카로웠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가락에 감긴 은실을 풀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은인.”

“네.”

“거짓말은 잘못이야.”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네.”

“하지만 네가 잘못했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게 되지는 않아.”

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는 휘어진 코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것을 고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팠어?”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무서웠어요.”

“그럼 무서웠다고 말해도 돼.”

“말하면 실망할까 봐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건 내가 배워야 할 일이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조용히 보았다.

원래라면 여기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좋아! 감동적이야!” 하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건 아직 박수를 받을 장면이 아니었다.

이건 첫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첫 귀환이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이었다.


---

그날 저녁, 푸리나는 라이자의 작업실 밖 복도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그레이가 있었다.

라이자는 안쪽에서 은인의 코를 살피고 있었다.

“고칠 수 있을까?”

푸리나가 물었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기계적 손상이라면 라이자 님이 고칠 수 있을 겁니다.”

“기계적 손상이 아니라면?”

“그 경우에는 고친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푸리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라.”

“원전 피노키오와 유사합니다.”

“응. 너무 유사해.”

그레이가 물었다.

“그래서 극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티 났어?”

“전하께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세 가지 표정을 지으십니다.”

“뭔데?”

“첫째, 당장 사고를 칠 것 같은 표정.”

“억울해.”

“둘째, 이미 사고를 쳤지만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표정.”

“더 억울해.”

“셋째, 극으로 만들면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표정.”

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

“네.”

“너 진짜 너무 정확해.”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무릎 위에 팔을 올렸다.

“회의로 하면, 은인은 항목이 될 거야.”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판으로 하면, 잘못이 될 거고.”

“네.”

“실험으로 하면, 결과가 되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푸리나는 작업실 문을 보았다.

안쪽에서는 라이자가 은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설명하고 있었다. 은인은 가끔 “네” 하고 대답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극으로 하자.”

그레이는 예상했다는 듯 눈을 내렸다.

“그 극은 은인을 무대 위에 세우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인을 분류하기 위한 것도 아니야. 은인이 자기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자는 거야.”

“자기 이야기.”

“응.”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피노키오.”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나무 인형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군요.”

“이번에는 은빛 피노키오야.”

“라이자 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아.”

“특히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결말은 거부하실 겁니다.”

“그것도 알아.”

푸리나는 웃었다.

“그래서 결말은 정하지 않을 거야.”

그레이는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결말을 정하지 않는 극입니까?”

“응.”

푸리나는 작업실 안쪽의 은빛을 보았다.

“가족 이야기니까.”


---

라이자는 역시 싫어했다.

정확히는, 푸리나가 “피노키오를 하자”고 말하는 순간 아주 차가운 눈으로 푸리나를 보았다.

“싫어.”

“아직 설명 안 했는데?”

“제목에서 이미 싫어.”

“제목이 뭘 잘못했는데?”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그 이야기는 싫어. 마치 누군가가 ‘이제야 진짜 아이가 되었다’고 허락해주는 것 같잖아.”

은인은 라이자의 옆에 앉아 있었다.

코는 임시로 손봐서 원래에 가까워졌지만, 끝이 아주 조금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 코를 보았다가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은인은 처음부터 내 가족이야. 누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해줘야 가족이 되는 게 아니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라이자는 조금 의심스럽게 보았다.

“너무 빨리 인정하는데.”

“네 말이 맞으니까.”

“그럼 왜 피노키오야?”

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에 놓인 빈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라이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뭐야?”

“대본.”

“빈 종이잖아.”

“응.”

푸리나는 은인 쪽으로 종이를 돌렸다.

“그래서 좋아.”

라이자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푸리나는 빈 종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첫 줄을 써줄 수 있어. 무대를 만들고, 조명을 켜고, 객석이 너무 무섭지 않게 낮춰줄 수도 있어. 필요하면 커튼 뒤에 의자도 놓아줄게.”

은인은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하지만 두 번째 줄부터는 내가 쓰면 안 돼.”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노키오라는 이름은 빌려줄 수 있어. 제페토라는 자리도 빌려줄 수 있고. 하지만 그 이름 안에서 무슨 말을 할지는, 은인과 네가 정해야 해.”

라이자가 물었다.

“그게 네 극이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극은 배우를 움직이는 줄이 아니야.”

그녀는 작업대 위에 엉켜 있던 은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런 줄은 라이자가 더 잘 다루잖아.”

라이자는 어이없다는 듯 푸리나를 보았다.

“그런 농담을 지금 해?”

“조금은 해야지. 너무 무거우면 무대가 내려앉아.”

푸리나는 다시 빈 대본을 내려놓았다.

“나는 길을 하나 그려둘 뿐이야. 걷는 건 배우가 해야 해. 넘어지면 잠깐 막을 내릴 수는 있어. 하지만 대신 걸어줄 수는 없어.”

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대사를 틀리면요?”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아주 좋아.”

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좋아요?”

“응. 그때부터 네 대사가 되거든.”

라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보다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푸리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걱정 마, 라이자. 내가 은인을 피노키오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야.”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이 피노키오라는 옷을 한번 입어보고, 안 맞는 곳은 찢고, 맞는 곳만 가져가게 하자는 거야.”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 옷이 은인을 조이면?”

푸리나는 곧장 대답했다.

“그럼 벗기면 돼.”

라이자가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장난치지 않았다.

“극은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아.”

은인은 그 말을 곱씹듯 작게 따라 했다.

“극은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보고, 어디까지 걸어가고, 어디로 돌아오고 싶은지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

“네.”

“하고 싶어?”

은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서워요.”

“그럼 하지 않아도 돼.”

은인은 휘어진 코끝을 만졌다.

“그런데…… 궁금해요.”

라이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말이 아마 가장 무서웠을 것이다.

궁금하다.

가족의 손 밖이.
거짓말의 다음이.
돌아오는 길이.
자기 발로 걷는 이야기가.

라이자는 한참 뒤에 말했다.

“좋아.”

푸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해.”

라이자는 또렷하게 말했다.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결말이면 안 해.”

“좋아.”

“은인을 물건 취급하는 대사는 없어.”

“없어.”

“은인이 도망치는 장면이 있다면, 그게 배신처럼만 보이면 안 돼.”

“알겠어.”

“그리고 은인이 돌아왔을 때, 내가 무조건 훌륭한 보호자로 보이면 안 돼.”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나도 배워야 하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결말은 정하지 마.”

푸리나는 웃었다.

“응. 가족 이야기는 원래, 끝을 먼저 정하면 안 되니까.”

은인은 그 말을 조용히 반복했다.

“끝을 먼저 정하면 안 되는 이야기.”


---

은인이 다시 물었다.

“제가 돌아오면, 문은 열려 있나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이 다시 물었다.

“제가 늦어도요?”

라이자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응.”

“제가 거짓말해도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짓말은 혼날 거야.”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문은 닫지 않아.”

그 말이 떨어지자,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평소처럼 화려하게 외치지는 않았다.
오늘의 무대는 왕궁도, 광장도, 전쟁 전야도 아니었다.

은빛 부품이 놓인 작업대.
반쯤 식은 용광로.
빈 대본 한 장.
그리고 가족이라는 말로도 아직 다 적히지 않는 두 사람.

푸리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막을 열자.”

등불이 조금 낮아졌다.

은빛은 차갑게 번쩍이지 않고, 사람의 얼굴을 비출 만큼만 부드러워졌다.
작업실의 벽은 그대로였고, 공구도 그대로였고, 은실도 여전히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사이에, 아주 얇은 무대의 기척이 내려앉았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신술은 오늘, 세상을 크게 뒤집지 않았다.

다만 은인 앞에 빈 첫 장면을 놓았다.
라이자 앞에 닫히지 않은 문을 놓았다.
그리고 푸리나는 그 둘 사이에서, 대본의 첫 줄만 비워두었다.

은인은 처음으로 배역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그것은 고장이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첫 표시였다.

1막 — 거짓말은 은을 휘게 한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무서워서 한 거짓말도, 돌아올 길을 멀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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