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82여관◆zAR16hM8he(28da446d)2026-05-21 (목) 15:56:22
《은빛 피노키오》
3막 — 녹슨 바다와 고래
— 돌아오고 싶다는 말은, 길을 잃은 뒤에 더 무거워진다 —
녹슨 바다는, 바다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작업실 바닥 위에 얇은 푸른빛이 깔렸고, 그 위로 붉은 갈색의 결이 번져 나갔다. 물결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철판의 얼룩 같았고, 파도라기보다는 누군가 오랫동안 닦지 못한 기억 같았다.
은인은 문 옆 의자에 앉은 채 그 바닥을 보았다.
“저건 바다인가요?”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전적으로는 바다야.”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시각적으로는 부식된 금속 표면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럼 녹슨 바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왜 바다야?”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은인을 보았다.
은인의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아주 조금. 라이자가 고칠 수 있었지만, 은인이 남겨두기로 한 만큼만.
은인은 그 휘어짐을 더 이상 벌처럼 만지지 않았다.
하지만 잊지도 않았다.
“피노키오는 고래에게 삼켜졌지.”
푸리나가 말했다.
“보통은 그 장면에서 아이가 아버지를 구하러 가.”
라이자의 눈빛이 조금 굳었다.
“아버지?”
“제페토.”
“나는 은인의 아버지가 아니야.”
“알아.”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대로 하지는 않을 거야.”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그럼 뭘 할 건데?”
푸리나는 녹슨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은인이 너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네가 은인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게 삼켜지는 이야기이기도 해.”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은인은 불안하게 물었다.
“라이자가 삼켜지나요?”
“극 속에서.”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짜로 다치게 하지는 않아.”
그레이가 즉시 덧붙였다.
“비상 중지 절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역시.”
“이번 극은 은인 님의 심리적 부담이 크므로, 안전 절차가 필요합니다.”
라이자가 짧게 말했다.
“좋아.”
은인은 그레이를 보았다.
“비상 중지 절차가 있으면, 무서워도 괜찮나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무서운 것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은 도움이 됩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멈출 수 있다.”
푸리나는 은인의 앞에 빈 대본을 놓았다.
“그래. 그리고 이번 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거야.”
“무엇인가요?”
푸리나는 은인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대본을 밀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작업실 안에서는 가벼울 수 있어. 문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은인은 대본을 보았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요?”
“무거워지지.”
푸리나는 녹슨 바다 너머를 보았다.
“그런데 그때도 그 말을 할 수 있는지 보는 거야.”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도 같이 가나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려 했다.
같이 간다.
당연히 같이 간다.
하지만 푸리나가 먼저 말했다.
“처음에는 아니.”
라이자의 시선이 푸리나에게 꽂혔다.
푸리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간다. 라이자는 뒤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다리다가…… 삼켜질 거야.”
“기다리다가 삼켜진다니, 설명이 최악이야.”
“의도적으로 최악으로 말한 건 아니야.”
“그럼 더 나빠.”
푸리나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필요한 장면이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녹슨 바다를 보고 있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떼지 않았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은인.”
“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말 알아?”
“네.”
은인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궁금해요.”
라이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녹슨 바다처럼 조금씩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궁금하다.
그 말은 은인이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그리고 라이자에게서 조금씩 멀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좋아. 대신.”
“조건?”
“은인이 멈춘다고 하면 즉시 멈춰.”
“당연하지.”
“내가 멈추라고 해도?”
푸리나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푸리나.”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라이자, 네가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멈출 거야.”
“그리고?”
“하지만 네가 무서워서 멈추라고 하는 거라면…… 그건 은인에게도 물을 거야.”
라이자는 침묵했다.
그 말은 잔인했다.
하지만 약속한 극이라면, 필요한 잔인함이었다.
라이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은인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라이자도 무서워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응.”
“무엇이요?”
“네가 나 없이 무서운 곳으로 가는 것.”
은인은 아주 작게 말했다.
“저도 무서워요.”
라이자는 손을 뻗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라이자는 그 손을 잡았다.
은인은 말했다.
“다녀올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기다릴게.”
---
녹슨 바다의 첫걸음은 차가웠다.
은인은 발끝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닥은 흔들렸다. 철판처럼 단단해 보였는데, 밟으면 얇은 파문이 번졌다. 파문은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갈색이었다.
녹이 번지는 모양.
은인은 자기 발밑을 보았다.
“제가 녹슬게 하나요?”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대답했다.
“아니. 네가 밟아서 생긴 게 아니야.”
“그럼 원래 녹슬어 있었나요?”
“아마도.”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고 말했다.
“오래 방치된 두려움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이번에는 꽤 시적이야.”
“분석입니다.”
“응. 오늘도 그레이답네.”
은인은 조금 더 앞으로 걸었다.
작업실은 뒤에 있었다.
처음에는 가까웠다.
은인은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라이자는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무대 옆에 있었다.
죠니는 인형극장 쪽에서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하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창가의 기척이 있었다.
은인은 조금 더 걸었다.
그러자 작업실이 멀어졌다.
정확히는,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사이에 바다가 늘어났다.
은인은 멈췄다.
“문이 멀어졌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길을 잃는 장면이니까.”
“벌써요?”
“극은 가끔 성급해.”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주인을 닮았겠지.”
푸리나는 그쪽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죠니, 오늘 자꾸 그 말 한다?”
“두 번째야.”
“충분히 많아.”
은인은 조금 웃을 뻔했다.
하지만 바다는 곧 그 웃음을 삼켰다.
바다 위로 작은 물건들이 떠올랐다.
나무 단추.
종이 왕관.
동전 주머니.
붉은 망토.
은실.
그리고 작은 나사.
태엽 아이에게서 떨어진 나사였다.
은인은 그 나사를 보고 멈췄다.
“저건 왜 있어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은인이 봐야 할 장면이었다.
녹슨 바다 위의 물건들은 은인을 향해 천천히 떠왔다.
동전 주머니가 말했다.
“받았어야지.”
은인은 움찔했다.
“말했어요?”
동전 주머니는 반짝였다.
“받았으면 더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종이 왕관이 말했다.
“나는 왕이다, 라고 말했잖아.”
붉은 망토가 말했다.
“입으면 박수받았어.”
은실이 속삭였다.
“만지지 않았다고 했지.”
은인은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가 귀가 아니라 안쪽에서 들렸다.
작은 나사가 굴러왔다.
또르르.
은인은 그것을 주웠다.
나사는 차가웠다.
태엽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끼릭.
“나는 내가 괜찮다고 믿어!”
은인은 손안의 나사를 꼭 쥐었다.
“하지만 떨어졌잖아요.”
파도가 일었다.
녹슨 물결이 은인의 발목까지 올라왔다.
은인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작업실 쪽에서 라이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은인!”
은인은 돌아보았다.
라이자가 보였다.
아직 보였다.
은인은 말하려 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코끝이 아주 작게 삐걱였다.
끼익.
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안 괜찮아요.”
코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자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달려가지 않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잘했어.”
은인은 녹슨 바다 한가운데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하지만 무서운 건 사라지지 않았다.
---
바다의 두 번째 구간에는 인형극장이 떠 있었다.
처음의 작은 무대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관객석이 텅 비어 있었다.
박수도 없었다.
무대 위에는 은인의 붉은 망토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은인은 무대 앞에 섰다.
죠니가 어느새 무대 턱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젖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녹슨 바다가 진짜 물인지 아닌지도 모호했다.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박수 없는 무대는 처음이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때?”
은인은 무대 위 망토를 보았다.
“조용해요.”
“그래.”
“조용하면 제가 잘했는지 모르겠어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그래.”
은인은 그를 보았다.
“죠니도 그랬나요?”
죠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아주 멀리, 반복되는 길과 돌아가는 길, 그리고 도달해야 하는 찰나를 보는 듯했다.
“박수가 없으면 네가 한 일이 사라진 것 같을 때가 있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사라지는 건 보통 박수 쪽이야.”
죠니는 무대 바닥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네가 걸은 건 남아.”
은인은 자기 발을 보았다.
녹슨 바다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은빛 발자국은 조금씩 녹빛에 덮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건 남나요?”
“네가 다시 볼 줄 알면.”
“못 보면요?”
“그럼 누군가 알려줄 수도 있지.”
죠니는 작업실 쪽을 턱짓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은인은 라이자를 떠올렸다.
문 옆 의자.
기다리는 손.
코부터 보지 않으려던 얼굴.
은인은 조용히 말했다.
“라이자는 화낼 거예요.”
“그럴 수 있지.”
“실망할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기다려요?”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그건 네가 돌아가서 확인해야지.”
은인은 눈을 내렸다.
“확인하기 무서워요.”
죠니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럼 무서운 채로 가.”
푸리나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정말 교육적으로 위험한데, 묘하게 맞는 말만 해.”
죠니는 들은 듯 말 듯 은인에게 말했다.
“돌아가는 길이 편해서 돌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대체로 불편하고, 혼날 것 같고, 도망치고 싶은데도 가는 거지.”
은인은 물었다.
“왜요?”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거기에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까.”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뒤, 은인은 무대 위 망토를 집어 들었다.
입지는 않았다.
접었다.
“이건 가져가도 되나요?”
죠니는 말했다.
“네가 입었던 거잖아.”
“저를 입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접어.”
은인은 망토를 천천히 접었다.
그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입는 것보다 접는 게 더 어려웠다.
---
세 번째 구간에서 하융이 기다리고 있었다.
녹슨 바다 위에 작은 창이 떠 있었다.
창 너머에는 길들이 보였다.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
인형극장에 남는 길.
장난감 나라에서 계속 웃는 길.
녹슨 바다 위에서 멈춰 서는 길.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먼 길.
은인은 창 앞에서 멈췄다.
“이게 다 제 길인가요?”
하융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될 수도 있었던 길이오.”
“아직도 될 수 있나요?”
“어떤 길은 아직 열려 있고, 어떤 길은 이미 닫혔소. 어떤 길은 닫힌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서면 작은 문이 있소.”
은인은 창들을 보았다.
한 창에서는 은인이 인형극장에 남아 있었다. 은인은 붉은 망토를 입고 계속 웃었다.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코는 더 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진실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창에서는 은인이 장난감 나라에서 계속 놀고 있었다. 은인은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예 묻지 않는 법을 배웠다.
또 다른 창에서는 은인이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이자는 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래도록.
은인은 그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라이자가 계속 기다려요.”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 길도 있었소.”
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안 돌아가는 길?”
“그렇소.”
“그럼 라이자는 어떻게 돼요?”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은인은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녹슨 바다가 흔들렸다.
작업실 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은인은 돌아보았다.
하지만 작업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녹슨 바다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고래였다.
아니, 고래의 형상을 한 거대한 철갑 장치였다.
몸은 녹슨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고, 옆구리에는 오래된 나사와 톱니가 박혀 있었다. 입은 너무 커서, 바다와 무대와 창문까지 한 번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거대한 고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안쪽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는 작업실의 등불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은인은 숨을 멈췄다.
“라이자?”
푸리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라이자!”
그 순간, 고래가 움직였다.
작업실 문 옆에 서 있던 라이자의 그림자가 고래의 입 쪽으로 끌려갔다.
라이자는 은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은인에게 닿지 않았다.
고래의 입이 닫혔다.
쿵.
녹슨 바다가 조용해졌다.
은인은 움직이지 못했다.
하융은 창가에서 은인을 보았다.
“삼켜졌구려.”
은인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푸리나의 신술이 흔들렸다.
그레이의 기록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죠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가장 먼저 움직이려 한 것은 은인이었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 같았다.
“라이자가…….”
은인의 코끝이 삐걱였다.
“괜찮을 거예요.”
끼이익.
코가 휘었다.
은인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했다.
“안 괜찮을 수도 있어요.”
코는 멈췄다.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가야 하나요?”
하융은 대답했다.
“가야 한다고 말하면, 그건 명령이오.”
“그럼요?”
“가고 싶은지 물어야 하오.”
은인은 고래를 보았다.
거대한 철갑 고래.
녹슨 입.
어두운 배 속.
그 안에 라이자가 있었다.
라이자가 은인을 기다리다가, 은인을 놓아주는 법을 배우다가, 자기 두려움에게 삼켜졌다.
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들어가면 못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소.”
“라이자가 화낼 수도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해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또 길을 잃어서.”
“그럴 수도 있소.”
은인은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왜 자꾸 그럴 수도 있다고만 해요?”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길이니까.”
은인은 고래를 다시 보았다.
그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
라이자가 안에서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고래를 뜯어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마 둘 다였다.
은인은 아주 작게 웃었다.
“라이자는 안에서도 고래를 분해하려고 할까요?”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그럴 것 같은데.”
푸리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마 그럴 거야.”
그레이는 기록판을 주워 들며 말했다.
“라이자 님의 행동 양식상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인은 조금 웃었다.
웃음은 아주 작았지만, 녹슨 바다 위에 퍼졌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은인은 한 걸음 내디뎠다.
“저는 가고 싶어요.”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명령이 아니어도, 제가 가고 싶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라이자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말에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융은 창을 닫았다.
“그럼 그 길이오.”
은인은 물었다.
“돌아올 수 있나요?”
하융은 이번에도 확답하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잃지 않으면, 길은 늦게라도 생기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가 고래 쪽으로 걸어왔다.
“같이 갈까?”
은인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처음은 제가 갈게요.”
죠니는 멈췄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좋아.”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무서우면 막을 내려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말?”
“네.”
은인은 고래의 입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열어주세요.”
푸리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신술이 조금 깊어졌다.
이번에도 세계를 뒤집지는 않았다.
다만 녹슨 바다 위에 아주 좁은 길 하나를 놓았다.
고래의 입까지 이어지는 길.
은인은 그 길을 걸었다.
---
고래의 입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따뜻했다.
겉은 녹슨 철갑이었는데, 안쪽은 오래된 작업실 같았다.
벽에는 부품들이 박혀 있었고, 천장에서는 은실과 녹슨 쇠사슬이 함께 늘어져 있었다. 발밑에서는 물소리와 톱니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걸었다.
“라이자?”
대답은 없었다.
대신 고래의 배 속 어딘가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은인?”
“라이자!”
은인은 달리려 했다.
그러나 바닥이 흔들렸다.
끼릭.
고래의 안쪽 톱니들이 움직였다.
벽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가족이면 충분해.”
“가족이면 나가지 않아도 돼.”
“가족이면 거짓말하지 않아야지.”
“가족이면 걱정시키면 안 돼.”
“가족이면 돌아와야지.”
“가족이면 떠나면 안 되지.”
은인은 귀를 막았다.
“아니에요.”
목소리들은 계속 들렸다.
“가족이면 라이자의 손 안에 있어야 해.”
“그래야 안전해.”
“그래야 고장나지 않아.”
“그래야 잃어버리지 않아.”
은인의 코끝이 삐걱였다.
은인은 말하려 했다.
“라이자는 그런 말 안 해요.”
끼익.
코가 조금 움직였다.
은인은 멈췄다.
라이자는 그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인은 느낀 적이 있었다.
라이자의 손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오히려 자기 발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게 되는 순간들.
라이자의 걱정이 너무 따뜻해서, 거절하기 어려웠던 순간들.
라이자가 가족이라고 말해줄 때마다 기뻤지만, 동시에 그 말 밖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던 순간들.
은인은 다시 말했다.
“라이자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가끔 그렇게 들었어요.”
이번에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래의 배 속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저 안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은인은 그쪽으로 달렸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아프면 멈추고, 흔들리면 벽을 짚고, 모르면 주변을 보고.
마침내 은인은 고래의 배 속 깊은 곳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라이자가 있었다.
라이자는 녹슨 쇠사슬과 은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묶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주변에 너무 많은 은실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은실들은 라이자의 손끝에서 뻗어나와 있었다.
은인을 고치기 위한 실.
은인을 보호하기 위한 실.
은인이 넘어지면 잡으려던 실.
은인이 길을 잃으면 끌어오려던 실.
은인이 다치지 않게 둘러치려던 실.
그 모든 실이, 지금은 라이자 자신을 감고 있었다.
은인은 천천히 다가갔다.
“라이자.”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제일 먼저 코를 보았다.
이번에도.
하지만 곧 얼굴을 보았다.
라이자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휘었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팠어?”
“무서웠어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
“또 그랬구나.”
“하지만 돌아왔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말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요.”
그 말에 라이자는 작게 웃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였다.
“여기까지 왜 왔어?”
은인은 라이자의 은실을 보았다.
“라이자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라이자의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나는 네가 들어오길 원한 게 아니야.”
“알아요.”
“위험했어.”
“알아요.”
“내가 알아서 나가려고 했어.”
은인은 주변을 보았다.
은실과 녹슨 쇠사슬.
고래의 어두운 배 속.
“그런 것 같았어요.”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은인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자.”
“응.”
“이 실들은 저를 잡으려고 한 건가요?”
라이자는 바로 부정하려 했다.
아니.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거짓말이 될까 봐.
은인의 코는 거짓말을 보이게 했지만, 라이자의 마음도 이미 그 앞에서 숨을 수 없었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처음에는 잡으려고 한 게 아니었어.”
“그럼요?”
“넘어지면 받으려고 했어. 길 잃으면 찾으려고 했고. 다치면 고치려고 했어.”
“네.”
“그런데…….”
라이자는 자기 손끝의 은실을 보았다.
“내가 무서워질수록 실이 많아졌어.”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라이자는 아주 어렵게 말했다.
“네가 나가면, 내가 가족을 잃는 것 같았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인데요.”
“응.”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어.”
은인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은실 하나를 만졌다.
차갑고, 부드럽고, 단단했다.
“이거 끊어도 되나요?”
라이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은인은 바로 손을 거두었다.
“싫으면 안 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그 말이 더 아팠다.
은인이 이제 허락을 물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자는 모든 허락을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라이자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같이 끊자.”
은인은 고개를 들었다.
“같이요?”
“응.”
라이자는 손을 내밀었다.
“이건 내가 만든 실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해.”
은인은 그 손을 보았다.
“그럼 저는요?”
“너는…….”
라이자는 잠시 생각했다.
“네가 어느 실이 아팠는지 말해줘.”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하나씩 실을 보았다.
넘어지지 않게 하려던 실.
“이건 너무 조였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끊자.”
길 잃지 않게 하려던 실.
“이건 필요했어요. 그런데 너무 짧았어요.”
“그럼 끊지 말고 길게 만들자.”
“길게요?”
“응. 끌어오는 실이 아니라, 네가 잡고 싶을 때 잡는 실로.”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나지 않게 하려던 실.
은인은 그 실 앞에서 오래 멈췄다.
“이건…… 라이자가 저를 많이 사랑해서 만든 것 같아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말했다.
“그런데 이 실이 있으면, 제가 새로 배운 걸 말하기 어려워요.”
“왜?”
“고장났다고 할까 봐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끊자.”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함께 실을 끊었다.
툭.
고래의 배 속이 흔들렸다.
---
마지막으로 가장 굵은 실이 남았다.
그 실은 라이자의 손목과 은인의 가슴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은인은 그 실을 보았다.
“이건 뭔가요?”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가족.”
은인은 가만히 있었다.
라이자는 빠르게 덧붙였다.
“이건 끊자는 뜻이 아니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이 실도 조이면 안 돼.”
은인은 실을 만졌다.
그 실은 다른 실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무거웠다.
“이건 어떻게 해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생각했다.
그러다 자기 휘어진 코끝을 만졌다.
“접힌 페이지처럼 남기면 안 되나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말했다.
“끊지 않고. 짧게 당기지도 않고.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게만.”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느슨하게?”
“네.”
은인은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제가 잡고 싶을 때 잡을 수 있고, 라이자도 제가 너무 멀리 간 것 같으면 부를 수 있지만…… 끌지는 않는 실.”
라이자는 아주 오래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둘은 그 굵은 실을 끊지 않았다.
대신 다시 묶었다.
느슨하게.
조이지 않게.
그러나 사라지지 않게.
그 순간 고래의 배 속에 작은 빛이 들어왔다.
밖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죠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길 열렸다.”
그레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귀환 경로 확인됩니다.”
하융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창문이 열리는 느낌이 있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걸어 나가기 위해서.
“나갈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서워?”
“네.”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둘은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완전한 해결의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래의 배 속에서는 충분히 밝았다.
---
고래는 입을 열었다.
녹슨 바다가 갈라졌다.
은인과 라이자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이 조금 젖어 있었지만,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꼭 쥐고 있었다.
죠니는 어깨에 걸친 창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멀리, 녹슨 바다 위 작은 창가에 서 있었다.
은인은 문 옆 의자를 보았다.
아직 있었다.
라이자도 보았다.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은인은 라이자에게 물었다.
“앉을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둘은 의자 쪽으로 갔다.
은인이 앉았다.
라이자는 그 옆 바닥에 앉았다.
푸리나는 놀라 물었다.
“라이자도?”
라이자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돌아왔으니까.”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렇네.”
그레이는 기록했다.
귀환: 은인 및 라이자. 문 유지. 의자 공동 사용.
죠니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의자 공동 사용은 좀 웃기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합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졌다.
조금 더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고칠까?”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만요.”
“얼마나?”
“아프지 않을 만큼.”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은인은 라이자의 손목을 보았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느슨한 실.
은인은 말했다.
“라이자.”
“응.”
“제가 나가도 가족이에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했다.
“응.”
“제가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있어도요?”
라이자의 얼굴이 아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건 무서울 거야.”
“네.”
“화도 날 거야.”
“네.”
“찾으러 갈지도 몰라.”
“네.”
라이자는 은인의 눈을 보았다.
“하지만 네가 가족이 아니게 되지는 않아.”
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돌아오고 싶어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네.”
은인은 문 옆 의자에 앉은 채 말했다.
“지금은 돌아왔어요.”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응.”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3막의 페이지는 처음에는 비어 있었다.
이제 거기에 은인의 글씨와 라이자의 글씨가 함께 남았다.
은인의 글씨.
저는 무서워도 들어갔어요.
라이자의 글씨.
나는 사랑한다고 해서 끌어당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레이는 그 아래에 아주 작게 적었다.
느슨한 실은 끊어진 실이 아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들을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대본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좋아.”
라이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좋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녹슨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녹은 조금 옅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좋아.”
---
막이 내려가기 전, 하융이 은인 곁으로 다가왔다.
은인은 그를 보았다.
“하융.”
“돌아왔구려.”
“네.”
“같은 곳으로 돌아왔소?”
은인은 문을 보았다.
작업실.
의자.
라이자.
그레이.
푸리나.
죠니.
그리고 자기 코끝의 작은 휘어짐.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같은 곳인데, 조금 달라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이 대개 그렇소.”
은인은 물었다.
“저는 사람이 되는 길에 있나요?”
하융은 잠시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길의 이름을 모르오.”
은인은 조금 실망한 듯했다.
하융은 덧붙였다.
“다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만든 것은 보았소.”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사람이 되는 길.
돌아올 수 있는 길.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후자가 더 따뜻했다.
푸리나는 조명을 낮췄다.
녹슨 바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고래의 그림자도 흩어졌다.
남은 것은 작업실 문과, 그 옆의 의자와, 은인과 라이자의 손 사이에 보이지 않게 느슨해진 실이었다.
막이 내려왔다.
4막 — 고장보다 먼저 아픔을 보는 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고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하는 말이 있다 —
3막 — 녹슨 바다와 고래
— 돌아오고 싶다는 말은, 길을 잃은 뒤에 더 무거워진다 —
녹슨 바다는, 바다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작업실 바닥 위에 얇은 푸른빛이 깔렸고, 그 위로 붉은 갈색의 결이 번져 나갔다. 물결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철판의 얼룩 같았고, 파도라기보다는 누군가 오랫동안 닦지 못한 기억 같았다.
은인은 문 옆 의자에 앉은 채 그 바닥을 보았다.
“저건 바다인가요?”
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전적으로는 바다야.”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시각적으로는 부식된 금속 표면에 가깝습니다.”
푸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럼 녹슨 바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왜 바다야?”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은인을 보았다.
은인의 코끝은 아직 조금 휘어 있었다. 아주 조금. 라이자가 고칠 수 있었지만, 은인이 남겨두기로 한 만큼만.
은인은 그 휘어짐을 더 이상 벌처럼 만지지 않았다.
하지만 잊지도 않았다.
“피노키오는 고래에게 삼켜졌지.”
푸리나가 말했다.
“보통은 그 장면에서 아이가 아버지를 구하러 가.”
라이자의 눈빛이 조금 굳었다.
“아버지?”
“제페토.”
“나는 은인의 아버지가 아니야.”
“알아.”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대로 하지는 않을 거야.”
라이자는 팔짱을 꼈다.
“그럼 뭘 할 건데?”
푸리나는 녹슨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은인이 너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네가 은인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게 삼켜지는 이야기이기도 해.”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은인은 불안하게 물었다.
“라이자가 삼켜지나요?”
“극 속에서.”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짜로 다치게 하지는 않아.”
그레이가 즉시 덧붙였다.
“비상 중지 절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역시.”
“이번 극은 은인 님의 심리적 부담이 크므로, 안전 절차가 필요합니다.”
라이자가 짧게 말했다.
“좋아.”
은인은 그레이를 보았다.
“비상 중지 절차가 있으면, 무서워도 괜찮나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무서운 것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은 도움이 됩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멈출 수 있다.”
푸리나는 은인의 앞에 빈 대본을 놓았다.
“그래. 그리고 이번 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거야.”
“무엇인가요?”
푸리나는 은인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대본을 밀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작업실 안에서는 가벼울 수 있어. 문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은인은 대본을 보았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요?”
“무거워지지.”
푸리나는 녹슨 바다 너머를 보았다.
“그런데 그때도 그 말을 할 수 있는지 보는 거야.”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도 같이 가나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하려 했다.
같이 간다.
당연히 같이 간다.
하지만 푸리나가 먼저 말했다.
“처음에는 아니.”
라이자의 시선이 푸리나에게 꽂혔다.
푸리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간다. 라이자는 뒤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다리다가…… 삼켜질 거야.”
“기다리다가 삼켜진다니, 설명이 최악이야.”
“의도적으로 최악으로 말한 건 아니야.”
“그럼 더 나빠.”
푸리나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필요한 장면이야.”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녹슨 바다를 보고 있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떼지 않았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은인.”
“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말 알아?”
“네.”
은인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궁금해요.”
라이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녹슨 바다처럼 조금씩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궁금하다.
그 말은 은인이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그리고 라이자에게서 조금씩 멀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좋아. 대신.”
“조건?”
“은인이 멈춘다고 하면 즉시 멈춰.”
“당연하지.”
“내가 멈추라고 해도?”
푸리나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푸리나.”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라이자, 네가 정말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멈출 거야.”
“그리고?”
“하지만 네가 무서워서 멈추라고 하는 거라면…… 그건 은인에게도 물을 거야.”
라이자는 침묵했다.
그 말은 잔인했다.
하지만 약속한 극이라면, 필요한 잔인함이었다.
라이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은인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라이자도 무서워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응.”
“무엇이요?”
“네가 나 없이 무서운 곳으로 가는 것.”
은인은 아주 작게 말했다.
“저도 무서워요.”
라이자는 손을 뻗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라이자는 그 손을 잡았다.
은인은 말했다.
“다녀올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기다릴게.”
---
녹슨 바다의 첫걸음은 차가웠다.
은인은 발끝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닥은 흔들렸다. 철판처럼 단단해 보였는데, 밟으면 얇은 파문이 번졌다. 파문은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갈색이었다.
녹이 번지는 모양.
은인은 자기 발밑을 보았다.
“제가 녹슬게 하나요?”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대답했다.
“아니. 네가 밟아서 생긴 게 아니야.”
“그럼 원래 녹슬어 있었나요?”
“아마도.”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고 말했다.
“오래 방치된 두려움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 이번에는 꽤 시적이야.”
“분석입니다.”
“응. 오늘도 그레이답네.”
은인은 조금 더 앞으로 걸었다.
작업실은 뒤에 있었다.
처음에는 가까웠다.
은인은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라이자는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무대 옆에 있었다.
죠니는 인형극장 쪽에서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하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창가의 기척이 있었다.
은인은 조금 더 걸었다.
그러자 작업실이 멀어졌다.
정확히는,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사이에 바다가 늘어났다.
은인은 멈췄다.
“문이 멀어졌어요.”
푸리나는 말했다.
“길을 잃는 장면이니까.”
“벌써요?”
“극은 가끔 성급해.”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주인을 닮았겠지.”
푸리나는 그쪽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죠니, 오늘 자꾸 그 말 한다?”
“두 번째야.”
“충분히 많아.”
은인은 조금 웃을 뻔했다.
하지만 바다는 곧 그 웃음을 삼켰다.
바다 위로 작은 물건들이 떠올랐다.
나무 단추.
종이 왕관.
동전 주머니.
붉은 망토.
은실.
그리고 작은 나사.
태엽 아이에게서 떨어진 나사였다.
은인은 그 나사를 보고 멈췄다.
“저건 왜 있어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은인이 봐야 할 장면이었다.
녹슨 바다 위의 물건들은 은인을 향해 천천히 떠왔다.
동전 주머니가 말했다.
“받았어야지.”
은인은 움찔했다.
“말했어요?”
동전 주머니는 반짝였다.
“받았으면 더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종이 왕관이 말했다.
“나는 왕이다, 라고 말했잖아.”
붉은 망토가 말했다.
“입으면 박수받았어.”
은실이 속삭였다.
“만지지 않았다고 했지.”
은인은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가 귀가 아니라 안쪽에서 들렸다.
작은 나사가 굴러왔다.
또르르.
은인은 그것을 주웠다.
나사는 차가웠다.
태엽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끼릭.
“나는 내가 괜찮다고 믿어!”
은인은 손안의 나사를 꼭 쥐었다.
“하지만 떨어졌잖아요.”
파도가 일었다.
녹슨 물결이 은인의 발목까지 올라왔다.
은인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작업실 쪽에서 라이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은인!”
은인은 돌아보았다.
라이자가 보였다.
아직 보였다.
은인은 말하려 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코끝이 아주 작게 삐걱였다.
끼익.
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안 괜찮아요.”
코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자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달려가지 않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잘했어.”
은인은 녹슨 바다 한가운데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하지만 무서운 건 사라지지 않았다.
---
바다의 두 번째 구간에는 인형극장이 떠 있었다.
처음의 작은 무대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관객석이 텅 비어 있었다.
박수도 없었다.
무대 위에는 은인의 붉은 망토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은인은 무대 앞에 섰다.
죠니가 어느새 무대 턱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젖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녹슨 바다가 진짜 물인지 아닌지도 모호했다.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박수 없는 무대는 처음이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때?”
은인은 무대 위 망토를 보았다.
“조용해요.”
“그래.”
“조용하면 제가 잘했는지 모르겠어요.”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그래.”
은인은 그를 보았다.
“죠니도 그랬나요?”
죠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아주 멀리, 반복되는 길과 돌아가는 길, 그리고 도달해야 하는 찰나를 보는 듯했다.
“박수가 없으면 네가 한 일이 사라진 것 같을 때가 있지.”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사라지는 건 보통 박수 쪽이야.”
죠니는 무대 바닥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네가 걸은 건 남아.”
은인은 자기 발을 보았다.
녹슨 바다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은빛 발자국은 조금씩 녹빛에 덮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건 남나요?”
“네가 다시 볼 줄 알면.”
“못 보면요?”
“그럼 누군가 알려줄 수도 있지.”
죠니는 작업실 쪽을 턱짓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은인은 라이자를 떠올렸다.
문 옆 의자.
기다리는 손.
코부터 보지 않으려던 얼굴.
은인은 조용히 말했다.
“라이자는 화낼 거예요.”
“그럴 수 있지.”
“실망할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기다려요?”
죠니는 은인을 보았다.
“그건 네가 돌아가서 확인해야지.”
은인은 눈을 내렸다.
“확인하기 무서워요.”
죠니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럼 무서운 채로 가.”
푸리나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정말 교육적으로 위험한데, 묘하게 맞는 말만 해.”
죠니는 들은 듯 말 듯 은인에게 말했다.
“돌아가는 길이 편해서 돌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대체로 불편하고, 혼날 것 같고, 도망치고 싶은데도 가는 거지.”
은인은 물었다.
“왜요?”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거기에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까.”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뒤, 은인은 무대 위 망토를 집어 들었다.
입지는 않았다.
접었다.
“이건 가져가도 되나요?”
죠니는 말했다.
“네가 입었던 거잖아.”
“저를 입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접어.”
은인은 망토를 천천히 접었다.
그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입는 것보다 접는 게 더 어려웠다.
---
세 번째 구간에서 하융이 기다리고 있었다.
녹슨 바다 위에 작은 창이 떠 있었다.
창 너머에는 길들이 보였다.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
인형극장에 남는 길.
장난감 나라에서 계속 웃는 길.
녹슨 바다 위에서 멈춰 서는 길.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먼 길.
은인은 창 앞에서 멈췄다.
“이게 다 제 길인가요?”
하융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될 수도 있었던 길이오.”
“아직도 될 수 있나요?”
“어떤 길은 아직 열려 있고, 어떤 길은 이미 닫혔소. 어떤 길은 닫힌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서면 작은 문이 있소.”
은인은 창들을 보았다.
한 창에서는 은인이 인형극장에 남아 있었다. 은인은 붉은 망토를 입고 계속 웃었다.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코는 더 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진실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창에서는 은인이 장난감 나라에서 계속 놀고 있었다. 은인은 “괜찮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예 묻지 않는 법을 배웠다.
또 다른 창에서는 은인이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이자는 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래도록.
은인은 그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라이자가 계속 기다려요.”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 길도 있었소.”
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안 돌아가는 길?”
“그렇소.”
“그럼 라이자는 어떻게 돼요?”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은인은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녹슨 바다가 흔들렸다.
작업실 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은인은 돌아보았다.
하지만 작업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녹슨 바다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고래였다.
아니, 고래의 형상을 한 거대한 철갑 장치였다.
몸은 녹슨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고, 옆구리에는 오래된 나사와 톱니가 박혀 있었다. 입은 너무 커서, 바다와 무대와 창문까지 한 번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거대한 고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안쪽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는 작업실의 등불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은인은 숨을 멈췄다.
“라이자?”
푸리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라이자!”
그 순간, 고래가 움직였다.
작업실 문 옆에 서 있던 라이자의 그림자가 고래의 입 쪽으로 끌려갔다.
라이자는 은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은인에게 닿지 않았다.
고래의 입이 닫혔다.
쿵.
녹슨 바다가 조용해졌다.
은인은 움직이지 못했다.
하융은 창가에서 은인을 보았다.
“삼켜졌구려.”
은인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푸리나의 신술이 흔들렸다.
그레이의 기록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죠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가장 먼저 움직이려 한 것은 은인이었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 같았다.
“라이자가…….”
은인의 코끝이 삐걱였다.
“괜찮을 거예요.”
끼이익.
코가 휘었다.
은인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했다.
“안 괜찮을 수도 있어요.”
코는 멈췄다.
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가야 하나요?”
하융은 대답했다.
“가야 한다고 말하면, 그건 명령이오.”
“그럼요?”
“가고 싶은지 물어야 하오.”
은인은 고래를 보았다.
거대한 철갑 고래.
녹슨 입.
어두운 배 속.
그 안에 라이자가 있었다.
라이자가 은인을 기다리다가, 은인을 놓아주는 법을 배우다가, 자기 두려움에게 삼켜졌다.
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들어가면 못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소.”
“라이자가 화낼 수도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해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또 길을 잃어서.”
“그럴 수도 있소.”
은인은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왜 자꾸 그럴 수도 있다고만 해요?”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길이니까.”
은인은 고래를 다시 보았다.
그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
라이자가 안에서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고래를 뜯어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마 둘 다였다.
은인은 아주 작게 웃었다.
“라이자는 안에서도 고래를 분해하려고 할까요?”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그럴 것 같은데.”
푸리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마 그럴 거야.”
그레이는 기록판을 주워 들며 말했다.
“라이자 님의 행동 양식상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인은 조금 웃었다.
웃음은 아주 작았지만, 녹슨 바다 위에 퍼졌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은인은 한 걸음 내디뎠다.
“저는 가고 싶어요.”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명령이 아니어도, 제가 가고 싶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은인은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라이자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말에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융은 창을 닫았다.
“그럼 그 길이오.”
은인은 물었다.
“돌아올 수 있나요?”
하융은 이번에도 확답하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잃지 않으면, 길은 늦게라도 생기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가 고래 쪽으로 걸어왔다.
“같이 갈까?”
은인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처음은 제가 갈게요.”
죠니는 멈췄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좋아.”
푸리나는 은인을 보았다.
“무서우면 막을 내려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말?”
“네.”
은인은 고래의 입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열어주세요.”
푸리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신술이 조금 깊어졌다.
이번에도 세계를 뒤집지는 않았다.
다만 녹슨 바다 위에 아주 좁은 길 하나를 놓았다.
고래의 입까지 이어지는 길.
은인은 그 길을 걸었다.
---
고래의 입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따뜻했다.
겉은 녹슨 철갑이었는데, 안쪽은 오래된 작업실 같았다.
벽에는 부품들이 박혀 있었고, 천장에서는 은실과 녹슨 쇠사슬이 함께 늘어져 있었다. 발밑에서는 물소리와 톱니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걸었다.
“라이자?”
대답은 없었다.
대신 고래의 배 속 어딘가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은인?”
“라이자!”
은인은 달리려 했다.
그러나 바닥이 흔들렸다.
끼릭.
고래의 안쪽 톱니들이 움직였다.
벽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가족이면 충분해.”
“가족이면 나가지 않아도 돼.”
“가족이면 거짓말하지 않아야지.”
“가족이면 걱정시키면 안 돼.”
“가족이면 돌아와야지.”
“가족이면 떠나면 안 되지.”
은인은 귀를 막았다.
“아니에요.”
목소리들은 계속 들렸다.
“가족이면 라이자의 손 안에 있어야 해.”
“그래야 안전해.”
“그래야 고장나지 않아.”
“그래야 잃어버리지 않아.”
은인의 코끝이 삐걱였다.
은인은 말하려 했다.
“라이자는 그런 말 안 해요.”
끼익.
코가 조금 움직였다.
은인은 멈췄다.
라이자는 그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인은 느낀 적이 있었다.
라이자의 손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오히려 자기 발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게 되는 순간들.
라이자의 걱정이 너무 따뜻해서, 거절하기 어려웠던 순간들.
라이자가 가족이라고 말해줄 때마다 기뻤지만, 동시에 그 말 밖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던 순간들.
은인은 다시 말했다.
“라이자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가끔 그렇게 들었어요.”
이번에도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래의 배 속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저 안쪽에서 라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은인은 그쪽으로 달렸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아프면 멈추고, 흔들리면 벽을 짚고, 모르면 주변을 보고.
마침내 은인은 고래의 배 속 깊은 곳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라이자가 있었다.
라이자는 녹슨 쇠사슬과 은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묶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주변에 너무 많은 은실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은실들은 라이자의 손끝에서 뻗어나와 있었다.
은인을 고치기 위한 실.
은인을 보호하기 위한 실.
은인이 넘어지면 잡으려던 실.
은인이 길을 잃으면 끌어오려던 실.
은인이 다치지 않게 둘러치려던 실.
그 모든 실이, 지금은 라이자 자신을 감고 있었다.
은인은 천천히 다가갔다.
“라이자.”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제일 먼저 코를 보았다.
이번에도.
하지만 곧 얼굴을 보았다.
라이자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휘었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팠어?”
“무서웠어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
“또 그랬구나.”
“하지만 돌아왔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말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요.”
그 말에 라이자는 작게 웃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였다.
“여기까지 왜 왔어?”
은인은 라이자의 은실을 보았다.
“라이자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라이자의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나는 네가 들어오길 원한 게 아니야.”
“알아요.”
“위험했어.”
“알아요.”
“내가 알아서 나가려고 했어.”
은인은 주변을 보았다.
은실과 녹슨 쇠사슬.
고래의 어두운 배 속.
“그런 것 같았어요.”
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은인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자.”
“응.”
“이 실들은 저를 잡으려고 한 건가요?”
라이자는 바로 부정하려 했다.
아니.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거짓말이 될까 봐.
은인의 코는 거짓말을 보이게 했지만, 라이자의 마음도 이미 그 앞에서 숨을 수 없었다.
라이자는 낮게 말했다.
“처음에는 잡으려고 한 게 아니었어.”
“그럼요?”
“넘어지면 받으려고 했어. 길 잃으면 찾으려고 했고. 다치면 고치려고 했어.”
“네.”
“그런데…….”
라이자는 자기 손끝의 은실을 보았다.
“내가 무서워질수록 실이 많아졌어.”
은인은 그 말을 들었다.
라이자는 아주 어렵게 말했다.
“네가 나가면, 내가 가족을 잃는 것 같았어.”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인데요.”
“응.”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어.”
은인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은실 하나를 만졌다.
차갑고, 부드럽고, 단단했다.
“이거 끊어도 되나요?”
라이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은인은 바로 손을 거두었다.
“싫으면 안 해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그 말이 더 아팠다.
은인이 이제 허락을 물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자는 모든 허락을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라이자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같이 끊자.”
은인은 고개를 들었다.
“같이요?”
“응.”
라이자는 손을 내밀었다.
“이건 내가 만든 실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해.”
은인은 그 손을 보았다.
“그럼 저는요?”
“너는…….”
라이자는 잠시 생각했다.
“네가 어느 실이 아팠는지 말해줘.”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하나씩 실을 보았다.
넘어지지 않게 하려던 실.
“이건 너무 조였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끊자.”
길 잃지 않게 하려던 실.
“이건 필요했어요. 그런데 너무 짧았어요.”
“그럼 끊지 말고 길게 만들자.”
“길게요?”
“응. 끌어오는 실이 아니라, 네가 잡고 싶을 때 잡는 실로.”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나지 않게 하려던 실.
은인은 그 실 앞에서 오래 멈췄다.
“이건…… 라이자가 저를 많이 사랑해서 만든 것 같아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말했다.
“그런데 이 실이 있으면, 제가 새로 배운 걸 말하기 어려워요.”
“왜?”
“고장났다고 할까 봐요.”
라이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끊자.”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함께 실을 끊었다.
툭.
고래의 배 속이 흔들렸다.
---
마지막으로 가장 굵은 실이 남았다.
그 실은 라이자의 손목과 은인의 가슴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은인은 그 실을 보았다.
“이건 뭔가요?”
라이자는 오래 침묵했다.
“가족.”
은인은 가만히 있었다.
라이자는 빠르게 덧붙였다.
“이건 끊자는 뜻이 아니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이 실도 조이면 안 돼.”
은인은 실을 만졌다.
그 실은 다른 실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무거웠다.
“이건 어떻게 해요?”
라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인은 생각했다.
그러다 자기 휘어진 코끝을 만졌다.
“접힌 페이지처럼 남기면 안 되나요?”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말했다.
“끊지 않고. 짧게 당기지도 않고.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게만.”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느슨하게?”
“네.”
은인은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제가 잡고 싶을 때 잡을 수 있고, 라이자도 제가 너무 멀리 간 것 같으면 부를 수 있지만…… 끌지는 않는 실.”
라이자는 아주 오래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둘은 그 굵은 실을 끊지 않았다.
대신 다시 묶었다.
느슨하게.
조이지 않게.
그러나 사라지지 않게.
그 순간 고래의 배 속에 작은 빛이 들어왔다.
밖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죠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길 열렸다.”
그레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귀환 경로 확인됩니다.”
하융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창문이 열리는 느낌이 있었다.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걸어 나가기 위해서.
“나갈까?”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서워?”
“네.”
라이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둘은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은 완전한 해결의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래의 배 속에서는 충분히 밝았다.
---
고래는 입을 열었다.
녹슨 바다가 갈라졌다.
은인과 라이자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이 조금 젖어 있었지만,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꼭 쥐고 있었다.
죠니는 어깨에 걸친 창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멀리, 녹슨 바다 위 작은 창가에 서 있었다.
은인은 문 옆 의자를 보았다.
아직 있었다.
라이자도 보았다.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은인은 라이자에게 물었다.
“앉을까요?”
라이자는 대답했다.
“응.”
둘은 의자 쪽으로 갔다.
은인이 앉았다.
라이자는 그 옆 바닥에 앉았다.
푸리나는 놀라 물었다.
“라이자도?”
라이자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돌아왔으니까.”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렇네.”
그레이는 기록했다.
귀환: 은인 및 라이자. 문 유지. 의자 공동 사용.
죠니가 그 기록을 보고 말했다.
“의자 공동 사용은 좀 웃기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중요합니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은인은 자기 코끝을 만졌다.
조금 더 휘어 있었다.
라이자는 그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고칠까?”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만요.”
“얼마나?”
“아프지 않을 만큼.”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은인은 라이자의 손목을 보았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느슨한 실.
은인은 말했다.
“라이자.”
“응.”
“제가 나가도 가족이에요?”
라이자는 바로 대답했다.
“응.”
“제가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있어도요?”
라이자의 얼굴이 아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건 무서울 거야.”
“네.”
“화도 날 거야.”
“네.”
“찾으러 갈지도 몰라.”
“네.”
라이자는 은인의 눈을 보았다.
“하지만 네가 가족이 아니게 되지는 않아.”
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돌아오고 싶어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네.”
은인은 문 옆 의자에 앉은 채 말했다.
“지금은 돌아왔어요.”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잡았다.
“응.”
푸리나는 대본을 펼쳤다.
3막의 페이지는 처음에는 비어 있었다.
이제 거기에 은인의 글씨와 라이자의 글씨가 함께 남았다.
은인의 글씨.
저는 무서워도 들어갔어요.
라이자의 글씨.
나는 사랑한다고 해서 끌어당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레이는 그 아래에 아주 작게 적었다.
느슨한 실은 끊어진 실이 아니다.
푸리나는 그 문장들을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대본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좋아.”
라이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좋아?”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녹슨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녹은 조금 옅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좋아.”
---
막이 내려가기 전, 하융이 은인 곁으로 다가왔다.
은인은 그를 보았다.
“하융.”
“돌아왔구려.”
“네.”
“같은 곳으로 돌아왔소?”
은인은 문을 보았다.
작업실.
의자.
라이자.
그레이.
푸리나.
죠니.
그리고 자기 코끝의 작은 휘어짐.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같은 곳인데, 조금 달라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이 대개 그렇소.”
은인은 물었다.
“저는 사람이 되는 길에 있나요?”
하융은 잠시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길의 이름을 모르오.”
은인은 조금 실망한 듯했다.
하융은 덧붙였다.
“다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만든 것은 보았소.”
은인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사람이 되는 길.
돌아올 수 있는 길.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후자가 더 따뜻했다.
푸리나는 조명을 낮췄다.
녹슨 바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고래의 그림자도 흩어졌다.
남은 것은 작업실 문과, 그 옆의 의자와, 은인과 라이자의 손 사이에 보이지 않게 느슨해진 실이었다.
막이 내려왔다.
4막 — 고장보다 먼저 아픔을 보는 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고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하는 말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