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84여관◆zAR16hM8he(28da446d)2026-05-21 (목) 16:11:54
《은빛 피노키오》
5막 —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 결말
—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
마지막 막을 앞두고, 푸리나는 가장 먼저 커튼을 치우기로 했다.
라이자가 물었다.
“커튼을 안 써?”
“응.”
“마지막 막인데?”
“그래서 안 써.”
푸리나는 작업실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원래 마지막 막이라면, 화려한 조명이 있어야 했다.
은빛 별가루.
하늘에서 내려오는 푸른 요정.
기적의 선언.
관객의 숨을 멎게 하는 정적.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이제 너는 진짜 사람이 되었단다.
하지만 이번 극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라이자가 처음부터 조건으로 걸었고, 푸리나도 받아들였다.
은인은 처음부터 라이자의 가족이었다.
누군가가 “이제야 진짜”라고 선언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 막은 선언이 아니라 확인이어야 했다.
커튼을 치우고 나자, 작업실이 그대로 보였다.
문고리에 느슨하게 묶인 은실.
두 개로 늘어난 귀환용 의자.
접힌 붉은 망토.
반환 예정 봉투에 들어간 작은 나사.
보류 상자 안의 창문 조각.
빈 주머니.
그리고 코끝에 아주 작은 결이 남은 은인.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대로 하자.”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며 물었다.
“마지막 막의 무대 장치가 작업실 그대로입니까?”
“응.”
“추가 연출은 없습니까?”
“없지는 않아.”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것들이 전부 연출이야.”
죠니는 벽에 기대어 말했다.
“비싼 연출은 아니네.”
푸리나가 바로 받아쳤다.
“좋은 연출이지.”
“그건 맞아.”
레플리카는 귀환용 의자 두 개를 보고 말했다.
“의자는 그대로 두는 게 좋다.”
“물론이지.”
“앉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결말은 대체로 덜 위험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것도 기록하자.”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고 있었다.
은인은 마지막 막이라는 말을 듣고부터 조금 조용해졌다.
“마지막이면 끝나는 건가요?”
은인이 물었다.
푸리나는 대답했다.
“극은 끝나.”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야기도 끝나요?”
“아니.”
푸리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보통 극보다 오래 가.”
은인은 그 말을 생각했다.
“그럼 저는 끝나지 않나요?”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끝나지 않아.”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금 당황했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극이 끝나도 너는 여기 있어.”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나가도요?”
라이자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가도.”
은인은 다시 물었다.
“돌아와도요?”
“돌아와도.”
“늦어도요?”
라이자는 조금 아픈 얼굴로 웃었다.
“늦어도.”
은인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제가 어떤 이름으로 돌아와도요?”
라이자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이전 질문들보다 조금 더 깊었다.
가족인가.
사람인가.
은인인가.
피노키오인가.
라이자의 아이인가.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인가.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네가 네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은인은 물었다.
“잃어버리면요?”
라이자의 손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으로 은인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그럼 같이 찾자.”
은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내가 대신 정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찾는 건 같이 할 수 있어.”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코끝의 작은 결이 등불에 살짝 빛났다.
“그럼 마지막 막을 해도 돼요.”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좋아.”
이번에도 거창한 선언은 없었다.
다만 작업실의 빛이 조금 낮아지고, 문고리의 은실이 아주 작게 반짝였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신술은 이제 막의 끝을 향해 깊어졌지만, 누구도 밀지 않았다.
그저 빈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놓았다.
---
마지막 막의 첫 장면은 “판정”이었다.
그레이의 역할이었다.
그레이는 작업대 위에 새 기록지를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몇 개의 항목이 있었다.
성명:
관계:
거주:
보호자:
자기 의사 확인:
귀환 경로:
비고:
푸리나는 기록지를 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마지막 막 첫 장면이 행정 서류야?”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 극의 시작점 중 하나가 분류 항목의 실패였으므로, 마지막에는 그 실패를 갱신해야 합니다.”
죠니가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푸리나는 양손을 들었다.
“좋아. 행정 서류 클라이맥스. 매우 새로운 장르야.”
라이자는 기록지를 보았다.
처음 프롤로그에서 그레이가 신분 항목을 물었을 때, 라이자는 “가족”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충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가족이라는 말은 가장 먼저 오는 말이지만, 모든 것을 대신 적어주는 말은 아니었다.
그레이가 은인을 보았다.
“은인 님. 기록을 작성해도 되겠습니까?”
은인은 조금 놀랐다.
“저한테 묻나요?”
“네.”
“기록인데요?”
“은인 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은인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보호와 책임이 흐려집니다. 하지만 묻지 않고 기록하면, 당사자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레이, 마지막 막에서 주제 발언 제대로 하네.”
그레이는 들은 듯 못 들은 듯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성해도 돼요.”
그레이는 첫 항목을 보았다.
“성명.”
은인은 대답했다.
“은인.”
그레이는 적었다.
성명: 은인.
그는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
“극 중 사용명은 별도로 기록하시겠습니까?”
은인은 생각했다.
“은빛 피노키오?”
“네.”
은인은 잠시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인이 정해야 하는 이름이었다.
“그건…… 별명처럼 적어주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별명입니까, 배역명입니까?”
은인은 조금 고민했다.
“둘 다요. 하지만 제 이름은 아니에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극 중 사용명/별명: 은빛 피노키오. 본명 대체 아님.
죠니가 웃었다.
“그레이 기록은 재미없는데 묘하게 든든하네.”
은인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든든해요.”
그레이는 아주 조금 멈칫했다.
“감사합니다.”
다음 항목.
“관계.”
라이자가 바로 말하려 했다.
가족.
하지만 이번에는 멈췄다.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둘 사이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은인이 먼저 말했다.
“라이자의 가족.”
라이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은인은 덧붙였다.
“그리고…… 저 자신.”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라이자는 그 말을 삼키듯 들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적었다.
관계: 라이자의 가족. 독립 의사와 자기 선택을 가진 당사자.
푸리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건 화려하지 않았지만, 굉장한 클라이맥스였다.
은인이 처음으로 “가족”과 “저 자신”을 함께 말했다.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고.
다음 항목.
“거주.”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라이자의 작업실.”
라이자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려는 순간, 은인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갈 수 있어요.”
라이자는 그 말을 들었다.
아팠다.
하지만 이전만큼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레이는 적었다.
거주: 라이자의 작업실. 외출 가능. 귀환 경로 유지.
다음 항목.
“보호자.”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
라이자는 이번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레이가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싫어요, 무서워요, 아파요, 나가고 싶어요, 돌아오고 싶어요.”
레플리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항목이다.”
그레이는 적었다.
보호자: 라이자. 보호 과정에서 당사자 의사 확인 필요. 거부·공포·통증·외출·귀환 의사 발언권 보장.
라이자는 기록지를 보았다.
그건 단순한 행정 문장이었다.
하지만 라이자에게는 거의 맹세처럼 보였다.
다음 항목.
“자기 의사 확인.”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무엇을 확인하나요?”
그레이는 말했다.
“현재 극을 계속할 의사가 있는지, 마지막 막을 끝낼 의사가 있는지, 그리고 이 기록을 남길 의사가 있는지입니다.”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계속할게요.”
“마지막 막도 끝내시겠습니까?”
“네.”
“기록을 남기는 것도 동의하십니까?”
은인은 기록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제 은인의 이름과 관계와 거주와 보호에 대한 말이 적혀 있었다.
은인은 작게 말했다.
“네. 하지만 나중에 바꿀 수 있나요?”
그레이는 바로 대답했다.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그레이는 적었다.
자기 의사: 현재 동의. 추후 변경 가능.
죠니가 말했다.
“서류가 점점 살아있는 것 같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사람에 대한 기록은 살아 있는 편이 안전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박수를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지막 항목.
“귀환 경로.”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문.”
그레이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적겠습니다.”
은인은 말했다.
“문은 잠그지 않아요.”
라이자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위험할 때는 닫을 수 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덧붙였다.
“닫는 것과 잠그는 건 다르니까.”
은인은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문은 닫힐 수 있지만, 제가 두드리면 열려야 해요.”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레이는 기록했다.
귀환 경로: 라이자의 작업실 문. 안전상 닫을 수 있으나, 귀환 요청 시 응답해야 함. 문고리의 은실은 잠금 장치가 아니라 귀환 표시.
이 마지막 문장에, 은인은 조금 웃었다.
“좋아요.”
그레이는 마지막 항목을 보았다.
“비고.”
푸리나가 기대하듯 몸을 기울였다.
“여기 중요하지.”
죠니가 말했다.
“이상한 거 쓰지 마.”
“내가 언제 이상한 걸 썼다고.”
“자주.”
“너무해.”
레플리카는 은인을 보았다.
“비고는 다른 칸에 넣기 어려운 것을 적는 곳인가?”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은인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이라고 적어야 하나요?”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마지막 막의 핵심이 드디어 문장으로 나왔다.
사람이라고 적어야 하는가.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은빛 손.
작은 결이 남은 코.
돌아온 발.
자기 이름을 말한 입.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레이는 펜을 들고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죠니도 말하지 않았다.
레플리카도 기다렸다.
라이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녀는 멈췄다.
전에는 대답하려 했다.
은인은 내 가족이다.
그러니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
그러니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니, 상관없는 게 아니다.
그 모든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라이자는 이번에는 은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은인은 기록지를 보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레이는 펜을 내리지 않았다.
은인은 조금 더 말했다.
“저는 사람이 뭔지 아직 다 몰라요.”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거짓말했고, 도망쳤고, 돌아왔고, 혼났고, 조금 고쳤고, 조금 남겼어요.”
은인은 자기 손을 보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고, 제 이름은 은인이고, 피노키오를 해봤지만 피노키오만은 아니에요.”
라이자의 눈에 물기가 조금 맺혔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비고에는…….”
그녀는 그레이를 보았다.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라고 적어도 되나요?”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는 비고란에 적었다.
비고: 돌아올 수 있는 이름.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눈을 감았다.
사람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완성품이라고 적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어 있지도 않았다.
돌아올 수 있는 이름.
오늘의 결말에는 그 정도가 가장 정확했다.
---
마지막 막의 두 번째 장면은 푸리나가 맡았다.
그녀는 작업실 가운데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아주 작은 무대였다.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사이에 생긴 틈.
은인이 원하면 올라갈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높이.
은인은 그 무대를 보았다.
“마지막에는 제가 올라가야 하나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올라가도 돼.”
“그럼 왜 만들었어요?”
“선택지가 있으면 좋잖아.”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안 올라가도 되는 무대.”
“응.”
죠니가 말했다.
“그건 좋은 무대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렇지?”
“가끔은.”
“가끔은 빼.”
“싫어.”
은인은 작은 무대 앞에 섰다.
라이자는 뒤에서 지켜보았다.
예전 같으면 은인의 자세를 고쳐주었을 것이다.
발의 위치.
무릎의 각도.
넘어지지 않는 중심.
하지만 지금은 지켜보았다.
은인은 무대에 올라갈까 말까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올라갔다.
작은 무대는 삐걱였다.
은인은 놀라 멈췄다.
푸리나가 말했다.
“오래된 무대라서 그래.”
은인은 문을 처음 열 때를 떠올렸다.
“오래된 문도 소리를 냈어요.”
“맞아.”
“소리를 낸다고 나가면 안 되는 건 아니었어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것도 맞아.”
은인은 무대 위에 섰다.
관객은 많지 않았다.
라이자.
푸리나.
그레이.
레플리카.
죠니.
그리고 창가 어딘가에 하융의 기척.
은인은 그들을 보았다.
“저는 마지막 대사를 해야 하나요?”
푸리나는 말했다.
“원하면.”
“정해진 대사는요?”
푸리나는 빈 종이를 들어 보였다.
“없어.”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그럼 제가 써야 하나요?”
“응.”
은인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은빛이었다.
무대 위에서 반짝였다.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저는 사람이 되었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차갑지 않았다.
기다리는 침묵이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에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자의 손 안에만 있지는 않을래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인은 계속 말했다.
“저는 거짓말했어요. 무서워서요. 박수받고 싶어서요. 괜찮다고 말하면 계속 놀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코끝을 만졌다.
“그때 은이 휘었어요.”
죠니가 조용히 들었다.
레플리카는 은인의 손이 떨리는지 보았고, 그레이는 기록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록보다 듣는 것이 먼저였다.
은인은 말했다.
“그런데 진실을 말해도, 모두가 떠나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라이자를 보았다.
“문이 닫히지 않았어요.”
라이자는 숨을 삼켰다.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박수받는 말은 달콤했어요.”
죠니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따뜻했어요.”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고래 안에서, 저는 라이자가 만든 실을 봤어요. 저를 잡으려고만 만든 게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만든 실이었어요. 하지만 너무 조이면 아팠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숙였다.
은인은 말했다.
“그래서 같이 다시 묶었어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지막 문장을 꺼냈다.
“저는 완성품이 아니에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자가 실패한 것도 아니에요.”
라이자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은인은 조금 놀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는……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에요.”
그 말이 떨어졌다.
작업실은 조용했다.
박수는 바로 오지 않았다.
푸리나가 일부러 박수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박수로 덮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라이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라이자가 물었다.
“안아도 돼?”
은인의 눈이 커졌다.
이전의 라이자라면 물어보지 않고 안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물었다.
은인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는 은인을 안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고치기 위한 손이 아니라, 붙잡아두기 위한 손도 아니라, 그냥 가족을 안는 손으로.
은인은 처음에는 몸을 굳혔다.
그러다 천천히 라이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푸리나는 그제야 작게 박수를 쳤다.
짝.
그레이가 박수를 쳤다.
짝.
레플리카가 박수를 쳤다.
짝.
죠니도 짧게 박수를 쳤다.
짝.
어딘가 창가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하융의 박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인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
마지막 막의 세 번째 장면은 라이자의 대사였다.
푸리나는 이것을 처음부터 준비하지 않았다.
라이자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인이 내려온 뒤, 라이자는 작은 무대 위에 올라갔다.
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라이자?”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나도 한 줄쯤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푸리나는 조용히 물러났다.
“물론.”
라이자는 무대 위에서 조금 어색해 보였다.
그녀는 무대 체질은 아니었다.
작업대 앞에 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마주해야 할 것은 작업대가 아니라 빈 무대였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나는 너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어.”
은인은 가만히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내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만든 것이라는 말보다, 가족이라는 말이 더 옳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자기 손을 보았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말로도 내가 네 길을 대신 정할 수는 없었어.”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했어.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했고, 속지 않았으면 했고,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지 않았으면 했어.”
라이자는 낮게 웃었다.
“아직도 그래.”
은인이 작게 웃었다.
라이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나는 아마 계속 걱정할 거고, 때로는 너무 빨리 손을 뻗을 거고, 네 코부터 볼지도 몰라.”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눈가를 조금 누르고 싶어졌다.
라이자는 계속했다.
“하지만 오늘 배웠어.”
그녀는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사랑은 문을 잠그는 실이 아니어야 해.”
은인은 숨을 멈췄다.
라이자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네가 나가도, 돌아와도, 늦어도, 실수해도, 혼나도…….”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내가 네 가족이라는 말이, 네가 내 손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게 할게.”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라이자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는 처음부터 내 가족이었어.”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오늘은, 네가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이라는 걸 배웠어.”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사람이 되었다”보다 더 컸다.
그리고 더 조심스러웠다.
푸리나는 조용히 대본에 적었다.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
---
극은 이제 거의 끝나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남겨두었다.
“은인.”
“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정하자.”
라이자가 경계했다.
“뭘?”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가리켰다.
“이 실.”
은인은 은실을 보았다.
“문고리에 둘래요.”
“계속?”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오늘은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은인은 말했다.
“내일 다시 정할래요.”
그레이가 기록했다.
문고리 은실: 오늘 유지. 내일 재확인.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다. 매일 같은 답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죠니가 말했다.
“내일이 있으면 오늘 답이 좀 가벼워지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귀환용 의자 두 개를 보았다.
“의자는?”
라이자가 말했다.
“두자.”
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자.”
그레이가 기록했다.
귀환용 의자 2개: 유지.
푸리나는 대본을 닫았다.
“좋아. 그럼 이 극의 결말은 이렇게.”
은인은 긴장했다.
“어떻게요?”
푸리나는 선언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실 문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에는 느슨한 은실이 묶여 있었다.
그 옆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빈 주머니와 접힌 망토와 보류 상자와 반환 예정 봉투가 정리되어 있었다.
은인의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라이자의 손 위에는 아직 따뜻한 천이 놓여 있었다.
그레이의 기록지에는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끝.”
은인이 놀랐다.
“이게 끝인가요?”
“응.”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안 해요?”
“안 해.”
“기적도 없나요?”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있잖아.”
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요?”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가리켰다.
“저기.”
다음으로 의자 두 개를 가리켰다.
“저기.”
기록지를 가리켰다.
“저기.”
라이자의 손과 은인의 코끝, 접힌 망토와 빈 주머니를 차례로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저기, 저기, 저기.”
은인은 이해하려고 애썼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기적은 오늘 네 몸이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야.”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럼요?”
“문이 닫히지 않은 것.”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네가 돌아온 것.”
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은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물었다.
“손 올려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자의 손이 은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마침내 막을 내렸다.
---
막이 내려간 뒤에도 아무것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은인은 여전히 은빛이었다.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거짓말하면 아마 다시 휘어질지도 몰랐다.
라이자는 여전히 걱정이 많았다.
은인이 문 쪽을 볼 때마다 눈빛이 조금 흔들릴 것이다.
푸리나는 여전히 극을 만들 것이다.
가끔 너무 멋진 장면을 떠올리고, 그레이에게 제지당할 것이다.
그레이는 여전히 기록할 것이다.
때로는 너무 건조하게, 때로는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죠니는 박수에 대해 심드렁한 말을 남기고, 아마도 언제나처럼 옳은지 위험한지 애매한 조언을 할 것이다.
레플리카는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라고 할 것이다.
하융은 어디선가 창을 열고, 아직 선택되지 않은 길들을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달라졌다.
작업실 문고리에는 은실이 묶여 있었다.
잠그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옆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출발하는 사람을 위한 의자가 아니라, 돌아온 사람을 위한 의자.
그날 이후, 은인은 가끔 그 의자에 앉았다.
라이자도 가끔 앉았다.
어느 날은 둘이 함께 앉았다.
어느 날은 둘 다 앉지 않았다.
그것도 괜찮았다.
의자는 비어 있어도,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푸리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제목을 적었다.
《은빛 피노키오》
그 아래에 부제를 적었다.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그리고 가장 마지막 줄에는, 은인이 직접 쓴 문장이 남았다.
조금 삐뚤고, 조금 느린 글씨였다.
저는 아직 모르지만, 돌아올 수 있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웃었다.
그 이상 선언할 필요는 없었다.
후일담 — 문고리의 은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다 —
5막 —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 결말
—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
마지막 막을 앞두고, 푸리나는 가장 먼저 커튼을 치우기로 했다.
라이자가 물었다.
“커튼을 안 써?”
“응.”
“마지막 막인데?”
“그래서 안 써.”
푸리나는 작업실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원래 마지막 막이라면, 화려한 조명이 있어야 했다.
은빛 별가루.
하늘에서 내려오는 푸른 요정.
기적의 선언.
관객의 숨을 멎게 하는 정적.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이제 너는 진짜 사람이 되었단다.
하지만 이번 극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라이자가 처음부터 조건으로 걸었고, 푸리나도 받아들였다.
은인은 처음부터 라이자의 가족이었다.
누군가가 “이제야 진짜”라고 선언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 막은 선언이 아니라 확인이어야 했다.
커튼을 치우고 나자, 작업실이 그대로 보였다.
문고리에 느슨하게 묶인 은실.
두 개로 늘어난 귀환용 의자.
접힌 붉은 망토.
반환 예정 봉투에 들어간 작은 나사.
보류 상자 안의 창문 조각.
빈 주머니.
그리고 코끝에 아주 작은 결이 남은 은인.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대로 하자.”
그레이가 기록판을 들며 물었다.
“마지막 막의 무대 장치가 작업실 그대로입니까?”
“응.”
“추가 연출은 없습니까?”
“없지는 않아.”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것들이 전부 연출이야.”
죠니는 벽에 기대어 말했다.
“비싼 연출은 아니네.”
푸리나가 바로 받아쳤다.
“좋은 연출이지.”
“그건 맞아.”
레플리카는 귀환용 의자 두 개를 보고 말했다.
“의자는 그대로 두는 게 좋다.”
“물론이지.”
“앉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결말은 대체로 덜 위험하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것도 기록하자.”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고 있었다.
은인은 마지막 막이라는 말을 듣고부터 조금 조용해졌다.
“마지막이면 끝나는 건가요?”
은인이 물었다.
푸리나는 대답했다.
“극은 끝나.”
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야기도 끝나요?”
“아니.”
푸리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보통 극보다 오래 가.”
은인은 그 말을 생각했다.
“그럼 저는 끝나지 않나요?”
라이자가 바로 말했다.
“끝나지 않아.”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조금 당황했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극이 끝나도 너는 여기 있어.”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나가도요?”
라이자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가도.”
은인은 다시 물었다.
“돌아와도요?”
“돌아와도.”
“늦어도요?”
라이자는 조금 아픈 얼굴로 웃었다.
“늦어도.”
은인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제가 어떤 이름으로 돌아와도요?”
라이자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이전 질문들보다 조금 더 깊었다.
가족인가.
사람인가.
은인인가.
피노키오인가.
라이자의 아이인가.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인가.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네가 네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은인은 물었다.
“잃어버리면요?”
라이자의 손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으로 은인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그럼 같이 찾자.”
은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내가 대신 정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찾는 건 같이 할 수 있어.”
은인은 고개를 숙였다.
코끝의 작은 결이 등불에 살짝 빛났다.
“그럼 마지막 막을 해도 돼요.”
푸리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좋아.”
이번에도 거창한 선언은 없었다.
다만 작업실의 빛이 조금 낮아지고, 문고리의 은실이 아주 작게 반짝였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그 신술은 이제 막의 끝을 향해 깊어졌지만, 누구도 밀지 않았다.
그저 빈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놓았다.
---
마지막 막의 첫 장면은 “판정”이었다.
그레이의 역할이었다.
그레이는 작업대 위에 새 기록지를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몇 개의 항목이 있었다.
성명:
관계:
거주:
보호자:
자기 의사 확인:
귀환 경로:
비고:
푸리나는 기록지를 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마지막 막 첫 장면이 행정 서류야?”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 극의 시작점 중 하나가 분류 항목의 실패였으므로, 마지막에는 그 실패를 갱신해야 합니다.”
죠니가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푸리나는 양손을 들었다.
“좋아. 행정 서류 클라이맥스. 매우 새로운 장르야.”
라이자는 기록지를 보았다.
처음 프롤로그에서 그레이가 신분 항목을 물었을 때, 라이자는 “가족”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충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가족이라는 말은 가장 먼저 오는 말이지만, 모든 것을 대신 적어주는 말은 아니었다.
그레이가 은인을 보았다.
“은인 님. 기록을 작성해도 되겠습니까?”
은인은 조금 놀랐다.
“저한테 묻나요?”
“네.”
“기록인데요?”
“은인 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은인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레이는 이어 말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보호와 책임이 흐려집니다. 하지만 묻지 않고 기록하면, 당사자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레이, 마지막 막에서 주제 발언 제대로 하네.”
그레이는 들은 듯 못 들은 듯했다.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성해도 돼요.”
그레이는 첫 항목을 보았다.
“성명.”
은인은 대답했다.
“은인.”
그레이는 적었다.
성명: 은인.
그는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
“극 중 사용명은 별도로 기록하시겠습니까?”
은인은 생각했다.
“은빛 피노키오?”
“네.”
은인은 잠시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인이 정해야 하는 이름이었다.
“그건…… 별명처럼 적어주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별명입니까, 배역명입니까?”
은인은 조금 고민했다.
“둘 다요. 하지만 제 이름은 아니에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극 중 사용명/별명: 은빛 피노키오. 본명 대체 아님.
죠니가 웃었다.
“그레이 기록은 재미없는데 묘하게 든든하네.”
은인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든든해요.”
그레이는 아주 조금 멈칫했다.
“감사합니다.”
다음 항목.
“관계.”
라이자가 바로 말하려 했다.
가족.
하지만 이번에는 멈췄다.
은인을 보았다.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둘 사이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은인이 먼저 말했다.
“라이자의 가족.”
라이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은인은 덧붙였다.
“그리고…… 저 자신.”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라이자는 그 말을 삼키듯 들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적었다.
관계: 라이자의 가족. 독립 의사와 자기 선택을 가진 당사자.
푸리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건 화려하지 않았지만, 굉장한 클라이맥스였다.
은인이 처음으로 “가족”과 “저 자신”을 함께 말했다.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고.
다음 항목.
“거주.”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라이자의 작업실.”
라이자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려는 순간, 은인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갈 수 있어요.”
라이자는 그 말을 들었다.
아팠다.
하지만 이전만큼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레이는 적었다.
거주: 라이자의 작업실. 외출 가능. 귀환 경로 유지.
다음 항목.
“보호자.”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
라이자는 이번에는 대답했다.
“응.”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레이가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싫어요, 무서워요, 아파요, 나가고 싶어요, 돌아오고 싶어요.”
레플리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항목이다.”
그레이는 적었다.
보호자: 라이자. 보호 과정에서 당사자 의사 확인 필요. 거부·공포·통증·외출·귀환 의사 발언권 보장.
라이자는 기록지를 보았다.
그건 단순한 행정 문장이었다.
하지만 라이자에게는 거의 맹세처럼 보였다.
다음 항목.
“자기 의사 확인.”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무엇을 확인하나요?”
그레이는 말했다.
“현재 극을 계속할 의사가 있는지, 마지막 막을 끝낼 의사가 있는지, 그리고 이 기록을 남길 의사가 있는지입니다.”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계속할게요.”
“마지막 막도 끝내시겠습니까?”
“네.”
“기록을 남기는 것도 동의하십니까?”
은인은 기록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제 은인의 이름과 관계와 거주와 보호에 대한 말이 적혀 있었다.
은인은 작게 말했다.
“네. 하지만 나중에 바꿀 수 있나요?”
그레이는 바로 대답했다.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그레이는 적었다.
자기 의사: 현재 동의. 추후 변경 가능.
죠니가 말했다.
“서류가 점점 살아있는 것 같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사람에 대한 기록은 살아 있는 편이 안전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박수를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지막 항목.
“귀환 경로.”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문.”
그레이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적겠습니다.”
은인은 말했다.
“문은 잠그지 않아요.”
라이자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위험할 때는 닫을 수 있어.”
은인은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덧붙였다.
“닫는 것과 잠그는 건 다르니까.”
은인은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문은 닫힐 수 있지만, 제가 두드리면 열려야 해요.”
라이자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레이는 기록했다.
귀환 경로: 라이자의 작업실 문. 안전상 닫을 수 있으나, 귀환 요청 시 응답해야 함. 문고리의 은실은 잠금 장치가 아니라 귀환 표시.
이 마지막 문장에, 은인은 조금 웃었다.
“좋아요.”
그레이는 마지막 항목을 보았다.
“비고.”
푸리나가 기대하듯 몸을 기울였다.
“여기 중요하지.”
죠니가 말했다.
“이상한 거 쓰지 마.”
“내가 언제 이상한 걸 썼다고.”
“자주.”
“너무해.”
레플리카는 은인을 보았다.
“비고는 다른 칸에 넣기 어려운 것을 적는 곳인가?”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은인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이라고 적어야 하나요?”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마지막 막의 핵심이 드디어 문장으로 나왔다.
사람이라고 적어야 하는가.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은빛 손.
작은 결이 남은 코.
돌아온 발.
자기 이름을 말한 입.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레이는 펜을 들고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죠니도 말하지 않았다.
레플리카도 기다렸다.
라이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녀는 멈췄다.
전에는 대답하려 했다.
은인은 내 가족이다.
그러니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
그러니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니, 상관없는 게 아니다.
그 모든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라이자는 이번에는 은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은인은 기록지를 보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레이는 펜을 내리지 않았다.
은인은 조금 더 말했다.
“저는 사람이 뭔지 아직 다 몰라요.”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거짓말했고, 도망쳤고, 돌아왔고, 혼났고, 조금 고쳤고, 조금 남겼어요.”
은인은 자기 손을 보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고, 제 이름은 은인이고, 피노키오를 해봤지만 피노키오만은 아니에요.”
라이자의 눈에 물기가 조금 맺혔다.
은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비고에는…….”
그녀는 그레이를 보았다.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라고 적어도 되나요?”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는 비고란에 적었다.
비고: 돌아올 수 있는 이름.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눈을 감았다.
사람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완성품이라고 적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어 있지도 않았다.
돌아올 수 있는 이름.
오늘의 결말에는 그 정도가 가장 정확했다.
---
마지막 막의 두 번째 장면은 푸리나가 맡았다.
그녀는 작업실 가운데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아주 작은 무대였다.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사이에 생긴 틈.
은인이 원하면 올라갈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높이.
은인은 그 무대를 보았다.
“마지막에는 제가 올라가야 하나요?”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올라가도 돼.”
“그럼 왜 만들었어요?”
“선택지가 있으면 좋잖아.”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안 올라가도 되는 무대.”
“응.”
죠니가 말했다.
“그건 좋은 무대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렇지?”
“가끔은.”
“가끔은 빼.”
“싫어.”
은인은 작은 무대 앞에 섰다.
라이자는 뒤에서 지켜보았다.
예전 같으면 은인의 자세를 고쳐주었을 것이다.
발의 위치.
무릎의 각도.
넘어지지 않는 중심.
하지만 지금은 지켜보았다.
은인은 무대에 올라갈까 말까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올라갔다.
작은 무대는 삐걱였다.
은인은 놀라 멈췄다.
푸리나가 말했다.
“오래된 무대라서 그래.”
은인은 문을 처음 열 때를 떠올렸다.
“오래된 문도 소리를 냈어요.”
“맞아.”
“소리를 낸다고 나가면 안 되는 건 아니었어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것도 맞아.”
은인은 무대 위에 섰다.
관객은 많지 않았다.
라이자.
푸리나.
그레이.
레플리카.
죠니.
그리고 창가 어딘가에 하융의 기척.
은인은 그들을 보았다.
“저는 마지막 대사를 해야 하나요?”
푸리나는 말했다.
“원하면.”
“정해진 대사는요?”
푸리나는 빈 종이를 들어 보였다.
“없어.”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그럼 제가 써야 하나요?”
“응.”
은인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은빛이었다.
무대 위에서 반짝였다.
은인은 천천히 말했다.
“저는 사람이 되었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차갑지 않았다.
기다리는 침묵이었다.
은인은 다시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라이자의 가족이에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자의 손 안에만 있지는 않을래요.”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인은 계속 말했다.
“저는 거짓말했어요. 무서워서요. 박수받고 싶어서요. 괜찮다고 말하면 계속 놀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코끝을 만졌다.
“그때 은이 휘었어요.”
죠니가 조용히 들었다.
레플리카는 은인의 손이 떨리는지 보았고, 그레이는 기록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록보다 듣는 것이 먼저였다.
은인은 말했다.
“그런데 진실을 말해도, 모두가 떠나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라이자를 보았다.
“문이 닫히지 않았어요.”
라이자는 숨을 삼켰다.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박수받는 말은 달콤했어요.”
죠니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수 있는 말은 따뜻했어요.”
은인은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고래 안에서, 저는 라이자가 만든 실을 봤어요. 저를 잡으려고만 만든 게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만든 실이었어요. 하지만 너무 조이면 아팠어요.”
라이자는 고개를 숙였다.
은인은 말했다.
“그래서 같이 다시 묶었어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지막 문장을 꺼냈다.
“저는 완성품이 아니에요.”
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자가 실패한 것도 아니에요.”
라이자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은인은 조금 놀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는……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에요.”
그 말이 떨어졌다.
작업실은 조용했다.
박수는 바로 오지 않았다.
푸리나가 일부러 박수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박수로 덮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라이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라이자가 물었다.
“안아도 돼?”
은인의 눈이 커졌다.
이전의 라이자라면 물어보지 않고 안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물었다.
은인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는 은인을 안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고치기 위한 손이 아니라, 붙잡아두기 위한 손도 아니라, 그냥 가족을 안는 손으로.
은인은 처음에는 몸을 굳혔다.
그러다 천천히 라이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푸리나는 그제야 작게 박수를 쳤다.
짝.
그레이가 박수를 쳤다.
짝.
레플리카가 박수를 쳤다.
짝.
죠니도 짧게 박수를 쳤다.
짝.
어딘가 창가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하융의 박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인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
마지막 막의 세 번째 장면은 라이자의 대사였다.
푸리나는 이것을 처음부터 준비하지 않았다.
라이자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인이 내려온 뒤, 라이자는 작은 무대 위에 올라갔다.
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라이자?”
라이자는 푸리나를 보았다.
“나도 한 줄쯤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푸리나는 조용히 물러났다.
“물론.”
라이자는 무대 위에서 조금 어색해 보였다.
그녀는 무대 체질은 아니었다.
작업대 앞에 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마주해야 할 것은 작업대가 아니라 빈 무대였다.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나는 너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어.”
은인은 가만히 들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내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만든 것이라는 말보다, 가족이라는 말이 더 옳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자기 손을 보았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말로도 내가 네 길을 대신 정할 수는 없었어.”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했어.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했고, 속지 않았으면 했고,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지 않았으면 했어.”
라이자는 낮게 웃었다.
“아직도 그래.”
은인이 작게 웃었다.
라이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나는 아마 계속 걱정할 거고, 때로는 너무 빨리 손을 뻗을 거고, 네 코부터 볼지도 몰라.”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눈가를 조금 누르고 싶어졌다.
라이자는 계속했다.
“하지만 오늘 배웠어.”
그녀는 문고리의 은실을 보았다.
“사랑은 문을 잠그는 실이 아니어야 해.”
은인은 숨을 멈췄다.
라이자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네가 나가도, 돌아와도, 늦어도, 실수해도, 혼나도…….”
그녀는 은인을 보았다.
“내가 네 가족이라는 말이, 네가 내 손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게 할게.”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라이자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는 처음부터 내 가족이었어.”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오늘은, 네가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이라는 걸 배웠어.”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사람이 되었다”보다 더 컸다.
그리고 더 조심스러웠다.
푸리나는 조용히 대본에 적었다.
자기 발로 돌아온 이름.
---
극은 이제 거의 끝나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남겨두었다.
“은인.”
“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정하자.”
라이자가 경계했다.
“뭘?”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가리켰다.
“이 실.”
은인은 은실을 보았다.
“문고리에 둘래요.”
“계속?”
은인은 조금 생각했다.
“오늘은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은인은 말했다.
“내일 다시 정할래요.”
그레이가 기록했다.
문고리 은실: 오늘 유지. 내일 재확인.
레플리카가 말했다.
“좋다. 매일 같은 답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죠니가 말했다.
“내일이 있으면 오늘 답이 좀 가벼워지지.”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귀환용 의자 두 개를 보았다.
“의자는?”
라이자가 말했다.
“두자.”
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자.”
그레이가 기록했다.
귀환용 의자 2개: 유지.
푸리나는 대본을 닫았다.
“좋아. 그럼 이 극의 결말은 이렇게.”
은인은 긴장했다.
“어떻게요?”
푸리나는 선언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실 문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에는 느슨한 은실이 묶여 있었다.
그 옆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빈 주머니와 접힌 망토와 보류 상자와 반환 예정 봉투가 정리되어 있었다.
은인의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라이자의 손 위에는 아직 따뜻한 천이 놓여 있었다.
그레이의 기록지에는 “돌아올 수 있는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끝.”
은인이 놀랐다.
“이게 끝인가요?”
“응.”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안 해요?”
“안 해.”
“기적도 없나요?”
푸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있잖아.”
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요?”
푸리나는 문고리의 은실을 가리켰다.
“저기.”
다음으로 의자 두 개를 가리켰다.
“저기.”
기록지를 가리켰다.
“저기.”
라이자의 손과 은인의 코끝, 접힌 망토와 빈 주머니를 차례로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저기, 저기, 저기.”
은인은 이해하려고 애썼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기적은 오늘 네 몸이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야.”
은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그럼요?”
“문이 닫히지 않은 것.”
푸리나는 웃었다.
“그리고 네가 돌아온 것.”
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은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물었다.
“손 올려도 돼?”
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자의 손이 은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고, 마침내 막을 내렸다.
---
막이 내려간 뒤에도 아무것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은인은 여전히 은빛이었다.
코끝에는 작은 결이 남아 있었다.
거짓말하면 아마 다시 휘어질지도 몰랐다.
라이자는 여전히 걱정이 많았다.
은인이 문 쪽을 볼 때마다 눈빛이 조금 흔들릴 것이다.
푸리나는 여전히 극을 만들 것이다.
가끔 너무 멋진 장면을 떠올리고, 그레이에게 제지당할 것이다.
그레이는 여전히 기록할 것이다.
때로는 너무 건조하게, 때로는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죠니는 박수에 대해 심드렁한 말을 남기고, 아마도 언제나처럼 옳은지 위험한지 애매한 조언을 할 것이다.
레플리카는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라고 할 것이다.
하융은 어디선가 창을 열고, 아직 선택되지 않은 길들을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달라졌다.
작업실 문고리에는 은실이 묶여 있었다.
잠그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옆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출발하는 사람을 위한 의자가 아니라, 돌아온 사람을 위한 의자.
그날 이후, 은인은 가끔 그 의자에 앉았다.
라이자도 가끔 앉았다.
어느 날은 둘이 함께 앉았다.
어느 날은 둘 다 앉지 않았다.
그것도 괜찮았다.
의자는 비어 있어도,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푸리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제목을 적었다.
《은빛 피노키오》
그 아래에 부제를 적었다.
완성품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이름으로
그리고 가장 마지막 줄에는, 은인이 직접 쓴 문장이 남았다.
조금 삐뚤고, 조금 느린 글씨였다.
저는 아직 모르지만, 돌아올 수 있어요.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웃었다.
그 이상 선언할 필요는 없었다.
후일담 — 문고리의 은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