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88여관◆zAR16hM8he(76492227)2026-05-22 (금) 19:52:30
《세 망령이 찾아온 밤》

1막 — 첫 번째 망령: 처음으로 이름을 잃은 아이

— 기억은 언제 의무가 되었는가 —

첫 번째 망령은 울음소리로 오지 않았다.

그것은 발소리로 왔다.

젖은 흙을 밟는 소리.
멀리서 말발굽이 사라진 뒤, 누구도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 전장 위를 작은 발이 걷는 소리.

톡.

톡.

톡.

마당의 등불이 하나씩 낮아졌다.

야전 여관의 마당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찢어진 막도, 뒤집은 상자 객석도, 나무 고양이 인형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푸리나의 신술이 얇게 내려앉자, 무대의 가장자리에는 다른 밤이 겹쳤다.

비가 내린 뒤의 들판.
흙탕물.
부러진 깃대.
반쯤 젖은 군기.
그리고 아무도 주워가지 못한 작은 이름표 하나.

아레 마가트로이드는 무대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검을 들지 않았다.
실을 펼치지도 않았다.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푸리나는 막 옆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보았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지만, 아직 쓰지 않았다.

이 막은 기록하기보다 먼저 들어야 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톡.

톡.

톡.

그리고 무대 끝에 아이 하나가 섰다.

정확히는 아이처럼 보이는 병사였다.

어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레의 기억 속에서 그는 늘 아이로 남아 있었다.

젖은 군복.
흙이 묻은 손.
어깨에 맞지 않는 투구.
그리고 목에 걸린 작은 이름표.

하지만 그 이름표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왔구나.”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한 걸음 다가갔다.

“비가 오던 밤이었지.”

망령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왼쪽 능선이 무너졌고, 전령은 돌아오지 못했단다. 나는 3군단이 아직 버틴다고 믿었어. 아니, 믿고 싶었던 것이겠지.”

무대 위에 비 냄새가 번졌다.

푸리나는 등불을 조금 더 낮췄다.

그녀가 만든 무대는 아레에게 대사를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오래 삼켜온 말을,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위치에 놓았다.

아레는 망령을 보았다.

“그때 네 이름을 물었어야 했단다.”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장군님은 물으셨습니다.”

아레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망령은 말했다.

“제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비가 더 굵어졌다.

무대 위에는 과거의 장면이 펼쳐졌다.

흙탕물 속에서 쓰러진 병사.
그를 부축하려고 몸을 숙이는 아레.
뒤쪽에서 들려오는 함성.
전선이 다시 밀려오는 소리.
누군가 외치는 소리.

“장군님! 지금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때의 아레는 망설였다.

아주 짧게.

그러나 전장에서는 짧은 망설임도 명령이었다.

그녀는 병사의 어깨를 눌렀다.

“이름을 말하렴.”

병사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피와 비가 말을 삼켰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전선은 무너지고 있었다.

아레는 일어나야 했다.

아레는 그 아이를 두고 일어났다.

그 후 병사의 이름표는 흙 속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은 돌아오지 못했다.

무대가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망령은 빈 이름표를 쥐고 있었다.

아레는 그 이름표를 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름을 잃은 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정했단다.”

망령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저를 기억하셨습니까?”

“그래.”

“제 이름도 모르시면서요?”

아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비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이름을 말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네가 이름을 잃었다고 생각했단다.”

망령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저는 장군님의 의무가 되었습니까?”

푸리나는 무대 옆에서 손끝을 움켜쥐었다.

이 질문은 위험했다.

그러나 아레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낮게 인정했다.

“처음에는 그랬단다.”

망령은 아레를 보았다.

“처음에는요?”

아레는 눈을 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너는 한 사람이 아니라 표식이 되었구나.”

비가 멎었다.

무대 위에 부러진 깃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깃대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아레는 그 깃대를 보았다.

“이름을 묻지 못한 나의 실패.
전장을 떠나야 했던 나의 명령.
살리기 위해 버려야 했던 순간.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

그녀는 망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야. 나는 너를 기억한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너를 나의 첫 번째 죄로 세워두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에 무대가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아레의 말투를 들었다.

낮고, 조심스럽고, 오래된 슬픔이 섞인 말.

그것은 전장의 장군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아이를 놓친 어른의 목소리였다.

망령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물었다.

“장군님은 저를 어디에 두셨습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내 명령의 가장 아래에.”

“왜요?”

“다시는 너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그럼 저는 계속 전장에 있었습니까?”

아레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랬겠구나.”

망령은 빈 이름표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쉬고 싶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하지만 푸리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아레 안쪽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것을.

아레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이니?”

망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는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이 저를 잊지 않은 것은 고마웠습니다.”

아레의 시선이 흔들렸다.

망령은 계속 말했다.

“비 오는 밤에 혼자 남겨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장군님이 제 빈 이름표를 들고 계셨으니까요.”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군님.”

망령의 목소리는 작았다.

“저는 매일 전선의 가장 앞에 서 있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숨을 낮췄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망령은 말했다.

“저는 장군님의 맹세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레는 망령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너를 어떻게 기억해야 했니, 아이야?”

“이름으로.”

“네 이름을 모르는데도?”

“모르면, 모른다고 적어도 됩니다.”

아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망령은 빈 이름표를 들어 올렸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것도 제 자리는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군님은 저를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불렀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랬구나.”

“네.”

“나는 네 이름을 찾지 못해서, 그 빈자리에 내 죄를 적어두었구나.”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아레는 무릎을 굽혔다.

망령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만지지 않았다.

붙잡지 않았다.

다만 물었다.

“이름표를 봐도 되겠니?”

망령은 잠시 아레를 보았다.

그리고 빈 이름표를 내밀었다.

아레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름은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레는 그 빈 표면을 오래 보았다.

“아이야. 나는 네 이름을 모른단다.”

그녀는 말했다.

“그날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누구를 두고 왔는지도, 어떤 노래를 알았는지도 알지 못하는구나.”

망령은 조용히 들었다.

“나는 네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단다. 네가 나를 원망했는지, 살려달라고 했는지, 아니면 이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도 알지 못해.”

아레는 이름표를 자기 가슴 가까이 들었다.

“그러니 더는 너를 내 맹세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마.”

무대 위에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비 냄새가 조금 옅어졌다.

아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름을 잃은 병사였고.”

잠시 침묵.

“내가 구하지 못한 아이였단다.”

다시 침묵.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명령 아래 서 있지 않아도 된단다.”

망령의 얼굴이 처음으로 조금 부드러워졌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박수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니었다.

아레는 이름표를 망령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무대 한가운데 놓인 작은 상자 위에 그것을 올렸다.

그 상자는 원래 아이들이 소품을 담아두던 상자였다.

종이 왕관과 나무 빵과 장난감 창을 보관하던 상자.

아레는 그 위에 빈 이름표를 놓았다.

“여기에 두어도 되겠니?”

망령은 물었다.

“전장이 아닌 곳입니까?”

아레는 주변을 보았다.

야전 여관의 마당.

아이들이 웃던 자리.

공연이 끝난 뒤의 조용한 무대.

박수가 있었고, 침묵도 남은 곳.

“그래.”

아레가 말했다.

“전장이 아니란다.”

망령은 다시 물었다.

“명령이 내려오는 곳도 아니고요?”

“아니란다.”

“그럼 좋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무대 위의 비가 멎었다.

부러진 깃대가 천천히 사라졌다.

흙탕물도 잦아들었다.

망령의 젖은 군복은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그는 빈 이름표가 놓인 상자를 보았다.

“장군님.”

“그래, 아이야.”

“저를 모두 기억하지 못해도 됩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망령은 말했다.

“다만, 모른다는 것을 거짓 이름으로 덮지 말아주세요.”

아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리하마.”

망령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조금 쉬겠습니다.”

그 말에, 아레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울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울음이 될 수도 있었던 것.

“그래.”

아레가 말했다.

“이제 쉬어도 된단다.”

망령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무대 뒤편, 찢어진 막 너머에 놓인 작은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 의자는 푸리나가 공연 때 쓰던 소품이었다.

망령은 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병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쉬는 사람처럼 보였다.


---

첫 번째 망령이 의자에 앉은 뒤, 마당의 등불이 조금 밝아졌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마침내 기록판에 첫 줄을 적었다.

첫 번째 망령: 이름을 잃은 병사. 전장 표식에서 휴식의 자리로 이동.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레이.”

“네.”

“오늘 기록은 정말 조심해서 써줘.”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아레는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그녀는 빈 이름표가 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아레.”

“네.”

“괜찮아?”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예전 같으면 “괜찮습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요.”

그녀는 낮게 말했다.

“괜찮지는 않군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어요.”

“그건 다행이네.”

“네.”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정도면, 다음 망령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망설였다.

“정말 계속할래?”

“네.”

“쉬어도 돼.”

아레는 무대 뒤편의 의자를 보았다.

그곳에 첫 번째 망령이 앉아 있었다.

“쉬는 것은 저 아이에게 먼저 주어야 할 것 같군요.”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앉아야 해.”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이 극이 끝나면요.”

푸리나는 그 말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반드시.

무대의 바람이 바뀌었다.

비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따뜻한 빵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현재의 망령이 올 차례였다.

그레이는 다음 장을 넘겼다.

푸리나는 막 옆에 서서 조명을 조금 올렸다.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 다시 섰다.

이번에는 비 오는 들판이 아니라, 피난민들의 식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웃음.
나눠 먹는 빵.
부상병의 낮은 농담.
아이들이 다시 고양이 왕을 흉내 내는 소리.

아레는 그 밝음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빛은 눈부셨다.

조금 아플 만큼.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2막.”

그레이가 적었다.

2막 — 두 번째 망령: 지금 웃고 있는 산 자들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웃음은 누구를 배신하는가 —
(최대 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