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89여관◆zAR16hM8he(76492227)2026-05-22 (금) 20:02:09
《세 망령이 찾아온 밤》
2막 — 두 번째 망령: 지금 웃고 있는 산 자들
— 웃음은 누구를 배신하는가 —
두 번째 망령은 웃음소리로 왔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바람이 천 조각을 흔드는 소리인 줄 알았다.
히.
히히.
그러다 조금씩 커졌다.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웃는 소리.
빵을 나누다 서로 손이 부딪쳐 민망하게 웃는 소리.
부상병이 아픈 팔을 붙든 채, 그래도 살아 돌아온 동료의 농담에 피식 웃는 소리.
아레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웃음은 밝았다.
그런데 그 밝음이, 그녀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 위에 비치는 등불처럼 느껴졌다.
따뜻했다.
아팠다.
그리고 피할 수 없었다.
무대는 더 이상 비 오는 들판이 아니었다.
야전 여관의 마당은 어느새 긴 식탁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무판자를 대충 이어 만든 식탁.
군용 담요를 접어 만든 의자.
흠집 난 접시.
나눠 먹기 위해 얇게 썬 빵.
김이 조금 빠진 수프.
한쪽이 부러진 숟가락.
그리고 사람들.
피난민들.
아이들.
돌아온 병사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를 기다리는 가족들.
웃고 있지만 울음을 다 끝낸 것은 아닌 사람들.
푸리나는 막 옆에 서 있었다.
이번 장면은 그녀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그녀가 매일 만들고 싶어 하는 장면이었으니까.
밥을 먹는 사람.
웃는 아이.
농담을 던지는 병사.
오늘 밤만큼은 울음 말고 다른 소리로 숨 쉬는 사람들.
그 가운데 두 번째 망령이 앉아 있었다.
망령은 전장의 죽은 병사가 아니었다.
망령은 살아 있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이 왕관을 삐뚤게 쓰고, 나무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은 작은 아이.
아까 공연에서 고양이 왕을 외치던 아이와 비슷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뒤에는 수많은 아이들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
부모를 잃은 아이.
웃어도 되는지 몰라 눈치를 보는 아이.
웃다가도 문득 조용해지는 아이.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도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
아이의 목소리는 밝았다.
너무 밝아서, 아레는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어린 망자에게 하던 말투와는 달랐다.
이 아이는 죽은 자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은 자만은 아니었다.
현재의 망령.
산 자들의 웃음이 빌린 얼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네가 두 번째 망령이니?”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밤은 제가 왕이에요.”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고양이 왕이구나.”
아이는 푸리나 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고양이 왕은 몽골도 무찔렀어요.”
푸리나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랬지. 역사적인 대승이었어.”
그레이가 아주 낮게 말했다.
“실제 전황 기록과 혼동되지 않게 별도 분류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흘겨보았다.
“지금은 감동 장면이야.”
“그래서 더 정확해야 합니다.”
아이는 웃었다.
아레는 그 웃음소리를 들었다.
웃음.
작고, 가볍고, 생생한 소리.
그런데 아레의 등 뒤에서 다른 소리가 따라왔다.
비 오는 들판의 마지막 숨.
이름을 잃은 병사의 침묵.
묻히지 못한 이름표가 상자 위에 놓이는 소리.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빵을 들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빵 좋아했어요.”
옆 아이가 물었다.
“그럼 너는 왜 웃어?”
첫 아이는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웃으라고 했거든.”
그 말에 식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웃음은 다시 퍼졌다.
아레는 그 장면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현재의 망령, 고양이 왕이 물었다.
“장군님은 왜 웃지 않아요?”
아레는 대답했다.
“나는 웃음을 들을 때, 그 아래의 이름들도 함께 듣는단다.”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들이 웃는 걸 싫어해요?”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단순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었다.
“모르겠구나.”
아레가 말했다.
“나는 오래도록, 웃음이 너무 크면 이름들이 묻힌다고 생각했단다.”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꼭 안았다.
“묻혀요?”
“그래.”
“그럼 웃으면 안 돼요?”
식탁의 사람들 몇몇이 아레를 보았다.
푸리나도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그 시선들을 느꼈다.
이것은 재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답해야 하는 자리였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웃어도 된단다.”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정말요?”
“그래. 웃어도 된단다.”
그녀는 식탁의 사람들을 보았다.
“다만 나는, 그 웃음이 누군가를 잊기 위한 소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어.”
고양이 왕은 빵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잊기 위한 웃음도 있어요?”
“있단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무 아파서, 이름을 부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일부러 더 크게 웃는 이들도 있지.”
아이는 빵을 조금 뜯었다.
“그럼 그런 웃음은 나쁜 웃음이에요?”
아레는 입을 다물었다.
무대 위의 식탁에서 한 병사가 낮게 웃었다.
그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장군님.”
아레가 그를 보았다.
그 병사는 어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끼어들었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도 됩니다.”
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는 오늘 많이 웃었습니다. 사실 웃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같이 나간 둘이 돌아오지 못했으니까요.”
식탁이 조용해졌다.
병사는 자기 손을 보았다.
“그런데 안 웃으면…… 밥을 못 넘기겠더군요.”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사는 계속했다.
“웃어서 잊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웃다가 생각났습니다. 그 녀석이 있었으면 이런 농담을 더 심하게 했을 텐데, 하고요.”
아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잊으려고가 아니라, 그 녀석이 앉았을 자리가 너무 조용해서요.”
식탁 끝에서 누군가 훌쩍였다.
하지만 울음은 곧바로 웃음과 섞였다.
아레는 그 섞인 소리를 들었다.
웃음과 울음.
기억과 식사.
산 자의 죄책감과 살아 있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이 한 식탁 위에 있었다.
고양이 왕은 아레에게 물었다.
“장군님은 웃음이 이름을 덮는다고 생각했어요?”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단다.”
“그런데 지금은요?”
아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라면 말할 수 있었다.
웃음은 이름을 덮지 않아.
웃음은 살아남은 사람이 숨 쉬는 방식이야.
하지만 그 말은 푸리나가 하면 안 됐다.
아레가 보아야 했다.
아레가 자기 말로 찾아야 했다.
현재의 망령은 식탁 위로 올라갔다.
푸리나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식탁 위에 신발은—”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망령입니다.”
“망령이면 식탁 예절 면제야?”
“규정이 없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늘만 면제.”
고양이 왕은 나무 인형을 높이 들었다.
“왕이 명령합니다!”
아이들이 웃었다.
“오늘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 빵 한 조각을 더 먹습니다!”
식탁이 멈췄다.
웃음이 끊겼다.
아레의 시선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푸리나도 고양이 왕을 보았다.
그 말은 너무 가벼운 것처럼 들렸다.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 빵 한 조각.
장난처럼.
하지만 고양이 왕은 진지했다.
그 아이의 뒤에 겹친 수많은 산 자들의 그림자가, 모두 같이 아레를 보고 있었다.
아이는 말했다.
“부르지 않으면, 그 자리는 비어 있기만 해요.”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까의 부상병이었다.
“마르코.”
그는 빵을 하나 집었다.
“마르코는 빵 가장자리만 먹었습니다. 속은 늘 남한테 줬습니다. 본인은 그게 더 맛있다고 우겼고요.”
옆 사람이 작게 웃었다.
“거짓말이었지.”
“거짓말이었습니다.”
부상병은 빵을 먹었다.
먹으면서 울었다.
다음은 늙은 여인이었다.
“아나히트.”
그녀는 빵을 찢었다.
“내 딸은 수프에 후추를 너무 많이 넣었지. 손님이 오면 늘 맵지 않다고 했는데, 모두 땀을 흘렸어.”
식탁에서 작게 웃음이 났다.
여인은 울면서 웃었다.
다음은 아이였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토로스예요.”
그는 빵 조각을 들었다.
“아버지는 노래를 못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제일 잘하는 줄 알았어요.”
아이들이 웃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얼마나 못했는데?”
그 아이는 잠깐 울먹이다가, 아주 이상한 가락으로 노래를 흉내 냈다.
식탁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 토로스라는 이름이 놓였다.
아레는 그 광경을 보았다.
이름이 웃음에 덮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이름의 주변에 자리를 만들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들은 전장으로 불려 나오지 않았다.
명령받지 않았다.
복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빵 냄새와 나쁜 노래와 매운 수프와 함께 식탁 위에 앉았다.
아레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렸다.
고양이 왕이 그녀에게 빵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장군님도 하나 불러요.”
아레는 빵을 보았다.
그리고 무대 뒤편,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 아이는 조용히 쉬고 있었다.
아레는 빵을 받지 않았다.
아직은.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모른단다.”
고양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른다고 불러요.”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이름을 잃은 아이야.”
무대 뒤편의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네가 좋아하던 빵을 모른단다. 네가 노래를 잘했는지도, 못했는지도 알지 못해. 네가 누구를 사랑했는지도, 누가 너를 기다렸는지도 알지 못하는구나.”
그녀는 식탁 위 빵을 보았다.
“그러니 오늘은, 너를 내 죄로 부르지 않으마.”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아레는 조심스럽게 빵 한 조각을 집었다.
“나는 너를, 이름을 잃은 병사로 기억하마.”
그녀는 빵을 작게 찢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두겠단다.”
그 말이 끝나자, 식탁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무겁지 않았다.
고양이 왕이 말했다.
“그럼 빵 먹어도 돼요.”
아레는 빵을 보았다.
평범한 빵이었다.
조금 딱딱하고, 조금 식은 빵.
아레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아레가 빵을 먹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큰 일이었다.
기억하는 자가, 죽은 자의 이름 옆에서 산 자의 빵을 먹는 일.
망자를 배신하지 않고.
산 자를 거절하지 않고.
식탁의 사람들이 다시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이번 웃음은 아까보다 낮았다.
하지만 더 깊었다.
아레는 그 웃음을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것이 이름을 덮는 소리만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현재의 망령은 식탁 끝에 앉았다.
고양이 왕관이 조금 내려앉아 한쪽 눈을 가렸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다가 다가가 왕관을 바로잡아 주었다.
“왕관은 시야를 가리면 안 돼.”
고양이 왕이 말했다.
“왕은 앞을 봐야 하니까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응. 그리고 가끔 옆도 봐야 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도요?”
“그건 아레가 잘 봐.”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아레는 잠시 후 아주 작게 대답했다.
“앞도 배워야겠군요.”
그 말에 푸리나는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부상병이 마르코의 흉내를 내며 빵 가장자리를 뜯었다.
늙은 여인은 아나히트의 매운 수프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후추를 더 넣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토로스의 이상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노래는 정말 못했다.
정말로.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레이도 입가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레는 그 소리를 들었다.
웃음.
이름.
울음.
빵.
그리고 여전히 남은 빈자리.
고양이 왕이 물었다.
“장군님.”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웃음은 배신이에요?”
아레는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닐 수도 있단다.”
아이는 눈을 빛냈다.
“그럼 뭐예요?”
아레는 식탁 위에 놓인 빵 부스러기를 보았다.
“때로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살아남은 자가 아직 숨 쉬고 있다는 보고일지도 모르겠구나.”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보고.
아레다운 말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축제로만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죄로만 보지도 않았다.
산 자의 보고.
죽은 자들이 지키려 했던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작은 보고.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고해야 해요.”
아레가 물었다.
“누구에게?”
아이는 나무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이름을 잃은 아이에게요.”
아레는 무대 뒤의 의자를 보았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비 오는 들판에서보다 조금 편안해 보였다.
아레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이야.”
마당이 조용해졌다.
“이곳에는 오늘 웃음이 있었단다.”
첫 번째 망령이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계속했다.
“너를 잊기 위한 웃음은 아니었어. 마르코의 빵 가장자리와, 아나히트의 매운 수프와, 토로스의 못 부르는 노래가 함께 있었단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구나. 웃음이 모든 이름을 지킬 수 있는지는.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름들은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단다.”
첫 번째 망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것은 허락처럼 보였다.
아레는 숨을 내쉬었다.
현재의 망령은 식탁에서 내려왔다.
“장군님.”
“그래.”
“이제 저를 기억할 건가요?”
아레는 고양이 왕을 보았다.
“너는 산 자들의 웃음이구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배고픈 아이들이에요.”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중요하지.”
아이는 또 말했다.
“그리고 웃다가 우는 사람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울다가 먹는 사람들.”
“그렇구나.”
“그리고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빵을 먹는 사람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 너는 그 모든 것이구나.”
현재의 망령은 웃었다.
“그럼 저를 어디에 둘 거예요?”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전장도 아니고, 장례식도 아니고, 왕좌도 아니고, 빈 무덤도 아닌 곳.
식탁.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름이 함께 놓일 수 있는 곳.
“식탁에 두어야겠구나.”
아레가 말했다.
“너는 전장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지우는 웃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산 자의 식탁 곁에 놓는 웃음이었단다.”
고양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계속 웃어도 돼요?”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잠시 멈추고.
“다만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두기 위해서 웃으렴.”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나무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건 어려워요.”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풀렸다.
“나도 어렵단다.”
“그럼 같이 어려워해요.”
그 말에, 식탁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아레도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정도면, 두 번째 망령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
마당의 등불이 다시 흔들렸다.
식탁은 천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빵 냄새가 아주 조금 남았다.
아이들의 웃음도, 부상병의 낮은 농담도, 못 부르는 노래도 멀어졌지만, 어딘가에 남았다.
고양이 왕은 마지막으로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
“그래.”
“나중에 또 웃음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요.”
“응.”
“식탁을 먼저 봐요.”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마.”
“빈자리가 있으면요?”
“이름을 물어보마.”
“이름을 모르면요?”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모른다고 두고, 거짓 이름으로 덮지 않으마.”
고양이 왕은 활짝 웃었다.
“좋아요.”
그리고 그는 식탁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들과 피난민과 부상병의 그림자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현재 속으로 돌아갔다.
아레는 빈 식탁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
웃음이 있던 자리.
죽은 자의 이름이 빵과 함께 놓였던 자리.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레.”
아레는 대답했다.
“네.”
푸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번 건 어땠어?”
아레는 한참 뒤에 말했다.
“눈부셨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조금 아팠어요.”
“응.”
“하지만…….”
아레는 식탁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밝은 것이 모두 지우는 것은 아니었군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박수도, 아마 그렇겠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칭찬이었다.
아레식의 조심스럽고, 무겁고, 아주 깊은 칭찬.
푸리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그 말, 내가 좀 오래 기억할 것 같은데.”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가 기억한다면, 조금 과장되어 남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를 너무 잘 아네.”
“조금은요.”
그레이는 기록판에 적었다.
두 번째 망령: 산 자들의 웃음. 웃음은 이름을 덮는 소리만이 아니라, 이름을 식탁 곁에 놓는 방식일 수 있음.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이번 기록도 좋아.”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주의해서 적고 있습니다.”
“응. 느껴져.”
아레는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보다 조금 덜 외로워 보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첫 번째 망령이 쉬는 의자가 있었고, 앞에는 방금 사라진 식탁의 온기가 있었다.
죽은 자의 자리.
산 자의 자리.
그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때, 마당의 등불이 갑자기 낮아졌다.
빵 냄새가 사라졌다.
웃음도 사라졌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푸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천천히 닫았다.
아레도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망령이 올 차례였다.
이번에는 발소리도 없었다.
웃음소리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오지 않았다.
무대 너머에서, 너무 완전한 침묵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레는 그 침묵을 알아보았다.
자신의 것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3막.”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조금 망설인 뒤, 적었다.
3막 — 세 번째 망령: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
2막 — 두 번째 망령: 지금 웃고 있는 산 자들
— 웃음은 누구를 배신하는가 —
두 번째 망령은 웃음소리로 왔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바람이 천 조각을 흔드는 소리인 줄 알았다.
히.
히히.
그러다 조금씩 커졌다.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웃는 소리.
빵을 나누다 서로 손이 부딪쳐 민망하게 웃는 소리.
부상병이 아픈 팔을 붙든 채, 그래도 살아 돌아온 동료의 농담에 피식 웃는 소리.
아레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웃음은 밝았다.
그런데 그 밝음이, 그녀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 위에 비치는 등불처럼 느껴졌다.
따뜻했다.
아팠다.
그리고 피할 수 없었다.
무대는 더 이상 비 오는 들판이 아니었다.
야전 여관의 마당은 어느새 긴 식탁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무판자를 대충 이어 만든 식탁.
군용 담요를 접어 만든 의자.
흠집 난 접시.
나눠 먹기 위해 얇게 썬 빵.
김이 조금 빠진 수프.
한쪽이 부러진 숟가락.
그리고 사람들.
피난민들.
아이들.
돌아온 병사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를 기다리는 가족들.
웃고 있지만 울음을 다 끝낸 것은 아닌 사람들.
푸리나는 막 옆에 서 있었다.
이번 장면은 그녀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그녀가 매일 만들고 싶어 하는 장면이었으니까.
밥을 먹는 사람.
웃는 아이.
농담을 던지는 병사.
오늘 밤만큼은 울음 말고 다른 소리로 숨 쉬는 사람들.
그 가운데 두 번째 망령이 앉아 있었다.
망령은 전장의 죽은 병사가 아니었다.
망령은 살아 있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이 왕관을 삐뚤게 쓰고, 나무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은 작은 아이.
아까 공연에서 고양이 왕을 외치던 아이와 비슷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뒤에는 수많은 아이들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
부모를 잃은 아이.
웃어도 되는지 몰라 눈치를 보는 아이.
웃다가도 문득 조용해지는 아이.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도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
아이의 목소리는 밝았다.
너무 밝아서, 아레는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어린 망자에게 하던 말투와는 달랐다.
이 아이는 죽은 자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은 자만은 아니었다.
현재의 망령.
산 자들의 웃음이 빌린 얼굴.
아레는 낮게 말했다.
“네가 두 번째 망령이니?”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밤은 제가 왕이에요.”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고양이 왕이구나.”
아이는 푸리나 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고양이 왕은 몽골도 무찔렀어요.”
푸리나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랬지. 역사적인 대승이었어.”
그레이가 아주 낮게 말했다.
“실제 전황 기록과 혼동되지 않게 별도 분류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흘겨보았다.
“지금은 감동 장면이야.”
“그래서 더 정확해야 합니다.”
아이는 웃었다.
아레는 그 웃음소리를 들었다.
웃음.
작고, 가볍고, 생생한 소리.
그런데 아레의 등 뒤에서 다른 소리가 따라왔다.
비 오는 들판의 마지막 숨.
이름을 잃은 병사의 침묵.
묻히지 못한 이름표가 상자 위에 놓이는 소리.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빵을 들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빵 좋아했어요.”
옆 아이가 물었다.
“그럼 너는 왜 웃어?”
첫 아이는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웃으라고 했거든.”
그 말에 식탁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웃음은 다시 퍼졌다.
아레는 그 장면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현재의 망령, 고양이 왕이 물었다.
“장군님은 왜 웃지 않아요?”
아레는 대답했다.
“나는 웃음을 들을 때, 그 아래의 이름들도 함께 듣는단다.”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들이 웃는 걸 싫어해요?”
아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단순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었다.
“모르겠구나.”
아레가 말했다.
“나는 오래도록, 웃음이 너무 크면 이름들이 묻힌다고 생각했단다.”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꼭 안았다.
“묻혀요?”
“그래.”
“그럼 웃으면 안 돼요?”
식탁의 사람들 몇몇이 아레를 보았다.
푸리나도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그 시선들을 느꼈다.
이것은 재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답해야 하는 자리였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웃어도 된단다.”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정말요?”
“그래. 웃어도 된단다.”
그녀는 식탁의 사람들을 보았다.
“다만 나는, 그 웃음이 누군가를 잊기 위한 소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어.”
고양이 왕은 빵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잊기 위한 웃음도 있어요?”
“있단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았다.
“너무 아파서, 이름을 부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일부러 더 크게 웃는 이들도 있지.”
아이는 빵을 조금 뜯었다.
“그럼 그런 웃음은 나쁜 웃음이에요?”
아레는 입을 다물었다.
무대 위의 식탁에서 한 병사가 낮게 웃었다.
그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장군님.”
아레가 그를 보았다.
그 병사는 어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끼어들었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도 됩니다.”
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는 오늘 많이 웃었습니다. 사실 웃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같이 나간 둘이 돌아오지 못했으니까요.”
식탁이 조용해졌다.
병사는 자기 손을 보았다.
“그런데 안 웃으면…… 밥을 못 넘기겠더군요.”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사는 계속했다.
“웃어서 잊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웃다가 생각났습니다. 그 녀석이 있었으면 이런 농담을 더 심하게 했을 텐데, 하고요.”
아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잊으려고가 아니라, 그 녀석이 앉았을 자리가 너무 조용해서요.”
식탁 끝에서 누군가 훌쩍였다.
하지만 울음은 곧바로 웃음과 섞였다.
아레는 그 섞인 소리를 들었다.
웃음과 울음.
기억과 식사.
산 자의 죄책감과 살아 있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이 한 식탁 위에 있었다.
고양이 왕은 아레에게 물었다.
“장군님은 웃음이 이름을 덮는다고 생각했어요?”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단다.”
“그런데 지금은요?”
아레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라면 말할 수 있었다.
웃음은 이름을 덮지 않아.
웃음은 살아남은 사람이 숨 쉬는 방식이야.
하지만 그 말은 푸리나가 하면 안 됐다.
아레가 보아야 했다.
아레가 자기 말로 찾아야 했다.
현재의 망령은 식탁 위로 올라갔다.
푸리나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식탁 위에 신발은—”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망령입니다.”
“망령이면 식탁 예절 면제야?”
“규정이 없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늘만 면제.”
고양이 왕은 나무 인형을 높이 들었다.
“왕이 명령합니다!”
아이들이 웃었다.
“오늘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 빵 한 조각을 더 먹습니다!”
식탁이 멈췄다.
웃음이 끊겼다.
아레의 시선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푸리나도 고양이 왕을 보았다.
그 말은 너무 가벼운 것처럼 들렸다.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 빵 한 조각.
장난처럼.
하지만 고양이 왕은 진지했다.
그 아이의 뒤에 겹친 수많은 산 자들의 그림자가, 모두 같이 아레를 보고 있었다.
아이는 말했다.
“부르지 않으면, 그 자리는 비어 있기만 해요.”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까의 부상병이었다.
“마르코.”
그는 빵을 하나 집었다.
“마르코는 빵 가장자리만 먹었습니다. 속은 늘 남한테 줬습니다. 본인은 그게 더 맛있다고 우겼고요.”
옆 사람이 작게 웃었다.
“거짓말이었지.”
“거짓말이었습니다.”
부상병은 빵을 먹었다.
먹으면서 울었다.
다음은 늙은 여인이었다.
“아나히트.”
그녀는 빵을 찢었다.
“내 딸은 수프에 후추를 너무 많이 넣었지. 손님이 오면 늘 맵지 않다고 했는데, 모두 땀을 흘렸어.”
식탁에서 작게 웃음이 났다.
여인은 울면서 웃었다.
다음은 아이였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토로스예요.”
그는 빵 조각을 들었다.
“아버지는 노래를 못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제일 잘하는 줄 알았어요.”
아이들이 웃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얼마나 못했는데?”
그 아이는 잠깐 울먹이다가, 아주 이상한 가락으로 노래를 흉내 냈다.
식탁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 토로스라는 이름이 놓였다.
아레는 그 광경을 보았다.
이름이 웃음에 덮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이름의 주변에 자리를 만들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들은 전장으로 불려 나오지 않았다.
명령받지 않았다.
복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빵 냄새와 나쁜 노래와 매운 수프와 함께 식탁 위에 앉았다.
아레의 입술이 아주 조금 떨렸다.
고양이 왕이 그녀에게 빵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장군님도 하나 불러요.”
아레는 빵을 보았다.
그리고 무대 뒤편,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 아이는 조용히 쉬고 있었다.
아레는 빵을 받지 않았다.
아직은.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모른단다.”
고양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른다고 불러요.”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이름을 잃은 아이야.”
무대 뒤편의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네가 좋아하던 빵을 모른단다. 네가 노래를 잘했는지도, 못했는지도 알지 못해. 네가 누구를 사랑했는지도, 누가 너를 기다렸는지도 알지 못하는구나.”
그녀는 식탁 위 빵을 보았다.
“그러니 오늘은, 너를 내 죄로 부르지 않으마.”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아레는 조심스럽게 빵 한 조각을 집었다.
“나는 너를, 이름을 잃은 병사로 기억하마.”
그녀는 빵을 작게 찢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두겠단다.”
그 말이 끝나자, 식탁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무겁지 않았다.
고양이 왕이 말했다.
“그럼 빵 먹어도 돼요.”
아레는 빵을 보았다.
평범한 빵이었다.
조금 딱딱하고, 조금 식은 빵.
아레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아레가 빵을 먹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큰 일이었다.
기억하는 자가, 죽은 자의 이름 옆에서 산 자의 빵을 먹는 일.
망자를 배신하지 않고.
산 자를 거절하지 않고.
식탁의 사람들이 다시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이번 웃음은 아까보다 낮았다.
하지만 더 깊었다.
아레는 그 웃음을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것이 이름을 덮는 소리만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현재의 망령은 식탁 끝에 앉았다.
고양이 왕관이 조금 내려앉아 한쪽 눈을 가렸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다가 다가가 왕관을 바로잡아 주었다.
“왕관은 시야를 가리면 안 돼.”
고양이 왕이 말했다.
“왕은 앞을 봐야 하니까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응. 그리고 가끔 옆도 봐야 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도요?”
“그건 아레가 잘 봐.”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살짝 웃었다.
아레는 잠시 후 아주 작게 대답했다.
“앞도 배워야겠군요.”
그 말에 푸리나는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부상병이 마르코의 흉내를 내며 빵 가장자리를 뜯었다.
늙은 여인은 아나히트의 매운 수프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후추를 더 넣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토로스의 이상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노래는 정말 못했다.
정말로.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레이도 입가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레는 그 소리를 들었다.
웃음.
이름.
울음.
빵.
그리고 여전히 남은 빈자리.
고양이 왕이 물었다.
“장군님.”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웃음은 배신이에요?”
아레는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닐 수도 있단다.”
아이는 눈을 빛냈다.
“그럼 뭐예요?”
아레는 식탁 위에 놓인 빵 부스러기를 보았다.
“때로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살아남은 자가 아직 숨 쉬고 있다는 보고일지도 모르겠구나.”
푸리나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보고.
아레다운 말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축제로만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죄로만 보지도 않았다.
산 자의 보고.
죽은 자들이 지키려 했던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작은 보고.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고해야 해요.”
아레가 물었다.
“누구에게?”
아이는 나무 고양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이름을 잃은 아이에게요.”
아레는 무대 뒤의 의자를 보았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비 오는 들판에서보다 조금 편안해 보였다.
아레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이야.”
마당이 조용해졌다.
“이곳에는 오늘 웃음이 있었단다.”
첫 번째 망령이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계속했다.
“너를 잊기 위한 웃음은 아니었어. 마르코의 빵 가장자리와, 아나히트의 매운 수프와, 토로스의 못 부르는 노래가 함께 있었단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구나. 웃음이 모든 이름을 지킬 수 있는지는.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름들은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단다.”
첫 번째 망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것은 허락처럼 보였다.
아레는 숨을 내쉬었다.
현재의 망령은 식탁에서 내려왔다.
“장군님.”
“그래.”
“이제 저를 기억할 건가요?”
아레는 고양이 왕을 보았다.
“너는 산 자들의 웃음이구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배고픈 아이들이에요.”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중요하지.”
아이는 또 말했다.
“그리고 웃다가 우는 사람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울다가 먹는 사람들.”
“그렇구나.”
“그리고 죽은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빵을 먹는 사람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 너는 그 모든 것이구나.”
현재의 망령은 웃었다.
“그럼 저를 어디에 둘 거예요?”
아레는 식탁을 보았다.
전장도 아니고, 장례식도 아니고, 왕좌도 아니고, 빈 무덤도 아닌 곳.
식탁.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름이 함께 놓일 수 있는 곳.
“식탁에 두어야겠구나.”
아레가 말했다.
“너는 전장 아래로 가라앉는 이름들을 지우는 웃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산 자의 식탁 곁에 놓는 웃음이었단다.”
고양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계속 웃어도 돼요?”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잠시 멈추고.
“다만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두기 위해서 웃으렴.”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나무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건 어려워요.”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풀렸다.
“나도 어렵단다.”
“그럼 같이 어려워해요.”
그 말에, 식탁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아레도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정도면, 두 번째 망령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
마당의 등불이 다시 흔들렸다.
식탁은 천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빵 냄새가 아주 조금 남았다.
아이들의 웃음도, 부상병의 낮은 농담도, 못 부르는 노래도 멀어졌지만, 어딘가에 남았다.
고양이 왕은 마지막으로 아레를 보았다.
“장군님.”
“그래.”
“나중에 또 웃음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요.”
“응.”
“식탁을 먼저 봐요.”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마.”
“빈자리가 있으면요?”
“이름을 물어보마.”
“이름을 모르면요?”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모른다고 두고, 거짓 이름으로 덮지 않으마.”
고양이 왕은 활짝 웃었다.
“좋아요.”
그리고 그는 식탁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들과 피난민과 부상병의 그림자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현재 속으로 돌아갔다.
아레는 빈 식탁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
웃음이 있던 자리.
죽은 자의 이름이 빵과 함께 놓였던 자리.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레.”
아레는 대답했다.
“네.”
푸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번 건 어땠어?”
아레는 한참 뒤에 말했다.
“눈부셨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조금 아팠어요.”
“응.”
“하지만…….”
아레는 식탁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밝은 것이 모두 지우는 것은 아니었군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박수도, 아마 그렇겠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칭찬이었다.
아레식의 조심스럽고, 무겁고, 아주 깊은 칭찬.
푸리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그 말, 내가 좀 오래 기억할 것 같은데.”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가 기억한다면, 조금 과장되어 남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를 너무 잘 아네.”
“조금은요.”
그레이는 기록판에 적었다.
두 번째 망령: 산 자들의 웃음. 웃음은 이름을 덮는 소리만이 아니라, 이름을 식탁 곁에 놓는 방식일 수 있음.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이번 기록도 좋아.”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주의해서 적고 있습니다.”
“응. 느껴져.”
아레는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보다 조금 덜 외로워 보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첫 번째 망령이 쉬는 의자가 있었고, 앞에는 방금 사라진 식탁의 온기가 있었다.
죽은 자의 자리.
산 자의 자리.
그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때, 마당의 등불이 갑자기 낮아졌다.
빵 냄새가 사라졌다.
웃음도 사라졌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푸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천천히 닫았다.
아레도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망령이 올 차례였다.
이번에는 발소리도 없었다.
웃음소리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오지 않았다.
무대 너머에서, 너무 완전한 침묵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레는 그 침묵을 알아보았다.
자신의 것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3막.”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조금 망설인 뒤, 적었다.
3막 — 세 번째 망령: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