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90여관◆zAR16hM8he(76492227)2026-05-22 (금) 20:10:50
《세 망령이 찾아온 밤》

3막 — 세 번째 망령: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 모든 이름을 혼자 짊어진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

세 번째 망령은 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첫 번째 망령은 발소리로 왔다.
두 번째 망령은 웃음소리로 왔다.

그러니 세 번째 망령도 무언가의 형태를 하고 올 것이라고, 푸리나는 생각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노인.
등불을 든 사자.
혹은 원전처럼, 손가락 하나만 뻗어 미래를 가리키는 침묵의 그림자.

하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대신 무대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먼저 빵 냄새가 사라졌다.
그다음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다음 식탁의 온기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멎었다.

마당은 그대로였는데, 이상하게 너무 넓어졌다.

찢어진 막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 고양이 인형은 소리 없이 누워 있었다.
빈 상자 위의 이름표도 빛을 잃었다.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도, 두 번째 망령이 앉았던 식탁도, 모두 회색빛으로 멀어졌다.

푸리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

푸리나는 멈췄다.

“응.”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 서 있었다.

홀로.

그녀를 중심으로 마당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물었다.

“아레?”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들었지만 대답할 수 없는 듯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기록이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왜?”

그레이는 무대 안쪽을 보았다.

“사건이 없습니다.”

“사건이 없어?”

“네.”

그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래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무대가 변했다.


---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돌로 된 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으로 쌓은 성이었다.

벽돌 하나하나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돌아오지 못한 전령.
북쪽 능선에서 묻히지 못한 자.
강가에서 마지막 불침번을 섰던 아이.
성문 앞에서 불탄 마차를 밀던 사람.
아무도 가족을 찾지 못한 피난민.

수많은 이름.

그 이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잊히지 않았다.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문제는,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름들이 벽이 되었다.

이름들이 창문을 막았다.

이름들이 길을 막았다.

이름들이 식탁을 치웠다.

이름들이 의자를 채웠다.

그리고 그 성의 가장 안쪽에, 아레가 앉아 있었다.

아니.

아레의 미래가 앉아 있었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미래의 아레는 왕좌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나빴다.

그녀는 기록대 앞에 앉아 있었다.

끝없는 장부.
끝없는 이름표.
끝없는 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수많은 실이 감겨 있었고, 실의 끝마다 작은 이름표가 매달려 있었다.

모든 이름이 기억되고 있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한 명도 빠뜨리지 않게.
한 사람의 죽음도 웃음 속에 묻히지 않게.

그것은 아레가 원하던 일이었다.

아레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리나도 없었다.
그레이도 없었다.
아이들도 없었다.
식탁도 없었다.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도 없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그 미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이름을 적고 있었다.

한 줄.

또 한 줄.

또 한 줄.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이것이…… 나인가요?”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손은 계속 움직였다.

아레는 조금 더 다가갔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푸리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그건 너야.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서 푸리나의 말은 너무 쉬웠다.

아레가 직접 들어야 했다.

아레가 다시 물었다.

“대답하세요.”

미래의 아레는 그제야 손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아레와 같았다.

그러나 눈이 달랐다.

그 눈에는 분노도, 슬픔도, 따뜻함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오래 침묵을 들은 사람의 눈.

모든 이름을 기억하느라, 이름이 불리던 목소리를 잊어버린 눈.

미래의 아레는 말했다.

“나는 기억하는 자입니다.”

목소리는 아레의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말라 있었다.

아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기억하는 자입니다.”

“아니.”

미래의 아레는 말했다.

“너는 아직 흔들리는 자입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가리켰다.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이름을 적었습니다.
모든 죽음을 세었습니다.
모든 빈자리를 남겨두었습니다.
누구도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박수에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말이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아레는 성벽을 보았다.

수많은 이름.

정말로 누구도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들 사이에 숨 쉴 공간이 없었다.

아레는 물었다.

“산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시끄러웠습니다.”

푸리나의 손이 굳었다.

아레의 눈빛도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시끄러웠다고요.”

“그들은 웃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덮었다.

“처음에는 허락했습니다. 웃음도 기억의 곁에 놓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웃음은 커졌고, 이름은 작아졌습니다. 그러니 나는 식탁을 치웠습니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그래서 의자도 치웠군요.”

“빈자리를 정확히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쉬는 자리는요?”

“쉬는 자리는 흐려집니다. 이름은 정확해야 합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바로 대답했다.

“이름을 잃은 병사. 좌측 벽 17열 4번째.”

“그 아이는 쉬고 있습니까?”

“기록되어 있습니다.”

“쉬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천천히 성벽 쪽으로 걸어갔다.

좌측 벽 17열 4번째.

거기에는 작은 빈 이름표가 박혀 있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정확했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름표는 이제 의자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
전장이 아닌 곳에 쉬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벽이 되어 있었다.

아레는 손을 뻗었다.

이름표를 만지려 했다.

그러나 실이 손목에 감겼다.

미래의 아레가 말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아레는 돌아보았다.

미래의 아레는 일어나 있었다.

“이름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움직이면 흐려집니다. 흐려지면 잊힙니다.”

아레는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이름을 지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두고 있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대답했다.

“차이가 있습니까?”

그 말에,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이 손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있습니다.”

미래의 아레는 아주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그 차이를 지키려다 잃습니다.”

“무엇을요?”

“이름을.”

미래의 아레는 벽을 가리켰다.

“나는 잃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붙잡았습니다.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웃음 아래 묻히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산 자들의 편의를 위해 쉬러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산 자들의 편의.

쉬러 보내지지 않았다.

그 말은 끔찍했다.

아레가 망자를 쉬게 하는 일조차, 어느 순간 산 자의 편의라고 의심하기 시작한 미래.

모든 안식을 방임으로 여기고.
모든 웃음을 배신으로 여기고.
모든 식탁을 망각의 시작으로 여긴 끝.

이름의 성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

그때 성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톡.

톡.

톡.

첫 번째 망령의 발소리였다.

아레가 고개를 돌렸다.

성문 밖에, 이름을 잃은 병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들어오지 못했다.

성문에는 수많은 이름표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문이 문이 아니라 벽이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망령은 문 앞에서 서성였다.

아레가 앞으로 나가려 했다.

미래의 아레가 말했다.

“가지 마십시오.”

아레는 돌아보지 않았다.

“왜입니까?”

“그 아이는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어오면 순서가 흐트러집니다.”

아레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순서.”

“네.”

미래의 아레는 장부를 펼쳤다.

“전사일. 전장 위치. 확인 가능 여부. 이름 확인 여부. 장례 여부. 기억 방식. 모두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쉬는지는요?”

“기록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묻는 것입니다.”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 밖에서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

히히.

고양이 왕의 웃음이었다.

두 번째 망령도 성문 밖에 있었다.

그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은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성벽의 이름들이 웃음을 흡수했다.

고양이 왕이 문을 두드렸다.

“장군님!”

미래의 아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럽습니다.”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저 아이는 현재의 망령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위험?”

“현재는 늘 이름을 흐립니다. 산 자들은 너무 쉽게 먹고, 웃고, 잠들고, 잊습니다.”

성 밖에서 고양이 왕이 말했다.

“장군님, 식탁이 없어요!”

아레의 손이 떨렸다.

식탁이 없다.

성 안에는 정말 식탁이 없었다.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빵이 없었다.

의자도 없었다.

쉴 자리도 없었다.

미래의 아레는 차갑게 말했다.

“식탁은 이름을 더럽힙니다.”

아레는 천천히 돌아섰다.

“아니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분명한 반박이었다.

“식탁은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말했다.

“마르코는 빵 가장자리와 함께 돌아왔고, 아나히트는 매운 수프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토로스는 못 부르는 노래와 함께 돌아왔지요.”

“하찮은 기억입니다.”

“하찮지 않습니다.”

아레의 목소리가 조금 깊어졌다.

“그것이 그들이 사람이었다는 흔적입니다.”

미래의 아레는 침묵했다.

아레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전사일과 위치만으로는 사람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기억합니까?”

“때로는 이름으로.”

아레는 벽을 보았다.

“때로는 모른다고 적는 것으로.”

그리고 성문 밖의 웃음을 들었다.

“때로는 식탁으로.”

미래의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하면 빠집니다.”

“무엇이?”

“빠지는 이름이 생깁니다. 놓치는 얼굴이 생깁니다. 흐려지는 죽음이 생깁니다.”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모두 붙잡았군요.”

“그렇습니다.”

“그 결과, 아무도 쉬지 못하고.”

미래의 아레가 멈췄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첫 번째 망령이 조용히 서 있었다.

고양이 왕이 문을 두드렸다.

푸리나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녀도 들어오지 못했다.

성벽 바깥에 있었다.

그레이도, 식탁의 사람들도, 부상병도, 아이들도 모두 바깥에 있었다.

아레는 그제야 보았다.

미래의 자신이 만든 성은 망자만 가둔 것이 아니었다.

산 자도 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레 자신도 성 안에 갇혔다.

아레는 미래의 자신에게 물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미래의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부에 적은 것이 아니라.”

아레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목소리로.”

미래의 아레의 손끝이 떨렸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너는 기억하는 자가 되었지만, 부르는 자는 아니게 되었구나.”

그 말에 성 전체가 흔들렸다.

벽의 이름표들이 아주 작게 떨렸다.

미래의 아레는 처음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놓으라는 겁니까?
잊으라는 겁니까?
웃고, 먹고, 자고, 다음 전장으로 가라는 겁니까?
그러는 동안 저 이름들은 누가 지킵니까?”

아레는 미래의 자신을 보았다.

그 절규를 이해했다.

너무 잘 이해했다.

이것은 낯선 괴물이 아니었다.

아레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아레 자신이 조금만 더 두려워하고, 조금만 더 붙잡고, 조금만 더 혼자 짊어지면 닿을 수 있는 방.

아레는 낮게 말했다.

“혼자 지키지 말아야 했겠지요.”

미래의 아레는 멈췄다.

아레는 이번에는 해요체로 말했다.

망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혼자 지키려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게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을 나누어 들면 가벼워질까 두려웠고, 가벼워지면 잊을까 두려웠어요.”

미래의 아레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름은 가벼워지기 위해 나누는 것이 아니었군요.”

성문 밖에서 푸리나가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말했다.

“쉴 자리를 만들기 위해 나누는 것이었어요.”

미래의 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레는 성벽에 박힌 이름표 하나를 보았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미래의 아레가 외쳤다.

“안 됩니다!”

성 전체가 흔들렸다.

실들이 아레의 손목을 감았다.

이름표들이 떨렸다.

“떼어내면 잊힙니다!”

아레는 실을 보았다.

자신이 만든 실.

자신을 묶은 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니요.”

그녀는 이름표를 가슴에 안지 않았다.

장부에 다시 꽂지도 않았다.

대신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 아이는 벽이 아니라 의자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성이 무너집니다!”

“그래야겠지요.”

미래의 아레는 멈췄다.

아레는 성문 앞에 섰다.

문은 이름표로 막혀 있었다.

그녀는 하나씩 떼어냈다.

처음은 이름을 잃은 병사.

그다음은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돌아오지 못한 전령.

강가의 불침번.

북쪽 능선의 아이.

하나씩.

하나씩.

성벽에서 이름을 떼어낼 때마다,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표들은 손에 잡히는 크기로 돌아왔다.

벽돌이 아니라, 놓을 수 있는 작은 표식으로.

미래의 아레는 그 모습을 보며 떨었다.

“그만.”

아레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하십시오.”

아레는 이름표를 품에 쌓지 않았다.

그녀는 성문 앞 바닥에 그것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마치 식탁 위에 접시를 놓듯이.

마치 여관의 방 열쇠를 놓듯이.

마치 전장이 아닌 곳에 이름을 내려놓듯이.

성문이 조금씩 열렸다.

밖에서 첫 번째 망령이 보였다.

고양이 왕도 보였다.

푸리나도, 그레이도, 식탁의 사람들이 보였다.

빛이 들어왔다.

미래의 아레는 그 빛을 보며 눈을 가렸다.

“밝습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아픕니다.”

“나도 그랬어요.”

미래의 아레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들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아레는 이름표들을 보았다.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벽이 아니게 되었다.

“사라지지 않아요.”

그녀는 미래의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만, 더는 성벽이 아니게 됩니다.”

미래의 아레는 그 손을 보았다.

잡지 않았다.

아직은.

대신 물었다.

“그럼 나는 무엇이 됩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혼자 성이 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 말이 떨어지자, 미래의 아레의 얼굴이 무너졌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마 너무 오래 울지 않아서, 우는 법을 잊은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침묵이 갈라졌다.

아레는 다시 말했다.

“당신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혼자였어요.”

그 말에 미래의 아레는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아레가 그 손을 잡는 순간, 이름의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 풀렸다.

벽이 식탁이 되고, 식탁은 긴 여관의 방으로 이어지고, 방마다 작은 이름표가 걸렸다.

전장도 아니고, 감옥도 아니고, 침묵의 성도 아닌 곳.

완전한 안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다림과 휴식이 가능한 자리.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을 잊었다.

“아레…….”

아레는 성문 안쪽에서, 미래의 자신과 마주 서 있었다.

미래의 아레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레 안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모두 기억해야 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혼자서는 안 됩니다.”

아레는 눈을 내렸다.

“그래요.”

미래의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은…… 일찍 들었어야 했는데.”

아레는 대답했다.

“이제라도 들었으니, 늦지 않았어요.”

미래의 아레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성이 아니라, 열린 문과 긴 식탁과 여러 개의 의자였다.

그리고 성벽이었던 이름표들은, 이제 식탁 옆 작은 선반에 놓여 있었다.


---

아레는 무대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이름표 몇 개가 들려 있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그 밖의 수많은 이름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아레가 먼저 말했다.

“그레이.”

“네.”

“이름을 기록하는 장부가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장부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레이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아레는 식탁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이름 옆에,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좋아하던 것들을 적어주세요. 빵 가장자리, 매운 수프, 못 부르는 노래 같은 것들.”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어주세요.”

“네.”

“그리고 이름이 없는 자도,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내 죄의 표식만 되지 않도록.”

그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

아레는 푸리나를 돌아보았다.

“네.”

“괜찮아?”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괜찮지는 않아요.”

“응.”

“하지만 조금…… 들어올 수 있게 된 것 같군요.”

푸리나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침묵.

그 성에 문이 생겼다.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럼 다행이야.”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쉬던 의자를 보았다.

그 아이는 아직 있었다.

고양이 왕도 식탁가에 있었다.

둘 다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아레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이야.”

첫 번째 망령이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왕도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낮게 말했다.

“나는 모두를 혼자 성벽으로 쌓지 않으련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분명했다.

“네 이름은 전장에도, 침묵의 벽에도 두지 않으마.”

그녀는 식탁 옆 선반을 보았다.

“쉴 수 있는 자리에 두마.”

고양이 왕이 물었다.

“식탁에도요?”

아레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풀렸다.

“그래. 식탁에도.”

“빵도요?”

“빵도.”

“못 부르는 노래도요?”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것도.”

고양이 왕은 만족한 듯 웃었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눈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 위에 작은 박수가 울렸다.

짝.

그것은 푸리나가 친 박수가 아니었다.

첫 번째 망령의 박수였다.

아주 작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박수.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푸리나는 그제야 따라 박수를 쳤다.

짝.

그레이도 조용히 박수를 쳤다.

짝.

식탁의 사람들도.

짝.

고양이 왕도 나무 인형 손으로 어설프게 박수를 쳤다.

탁, 탁.

아레는 그 박수를 들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 박수가 이름을 덮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 생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

마당의 등불이 다시 돌아왔다.

침묵의 성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야전 여관의 마당이었다.

찢어진 막.
나무 고양이 인형.
소품 상자 위의 빈 이름표.
새로 놓인 긴 식탁.
그리고 그 식탁 옆에 작은 선반 하나.

푸리나는 선반을 보았다.

“이건 새 소품?”

아레는 대답했다.

“아마도요.”

“이름 선반?”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기억 선반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좋네.”

그레이는 기록했다.

기억 선반: 이름을 벽으로 쌓지 않고, 식탁 곁에 놓기 위한 자리.

아레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록입니다.”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감사합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이제 앉을래?”

아레는 첫 번째 망령이 앉은 의자를 보았다.

고양이 왕이 앉은 식탁을 보았다.

기억 선반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빈 의자 하나를 보았다.

그 의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아레는 그 앞에 섰다.

잠시 망설였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레는 천천히 앉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앉는 법을 잊었던 사람처럼.

의자는 삐걱였다.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아레는 숨을 내쉬었다.

“……앉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군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그런 사람들 많더라.”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도요?”

푸리나는 잠시 딴청을 피했다.

“나는 극장주라서 서 있는 시간이 많을 뿐이야.”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전하도 종종 앉으셔야 합니다.”

“그레이, 지금은 내 극 아니잖아.”

아레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번에는 푸리나도 보았다.

분명한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침묵의 성 안에서는 결코 나오지 못했을 표정이었다.

아레는 기억 선반을 보았다.

“모두 기억할 수는 없겠지요.”

푸리나는 말했다.

“응.”

“모두 제대로 애도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

아레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혼자 벽을 쌓지는 않겠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해.”

아레는 낮게 말했다.

“충분하다는 말은 늘 어렵습니다.”

“알아.”

“하지만 오늘은, 조금 받아들여보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막을 보았다.

이제 세 망령은 모두 지나갔다.

과거의 이름 없는 아이.

현재의 웃는 식탁.

미래의 침묵의 성.

아레는 모두를 보고 돌아왔다.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런 것은 한 밤의 극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이 생겼다.

침묵에 문이 생겼고, 이름에는 식탁이 생겼고, 아레에게는 의자가 생겼다.

그 정도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조명이 낮아졌다.

마당은 다시 평범한 야전 여관의 마당이 되었다.

하지만 소품 상자 위에는 빈 이름표가 남아 있었다.

식탁 옆에는 기억 선반이 남아 있었다.

아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막이 내려왔다.

4막 — 기억 선반과 빈 의자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이름은 벽이 아니라, 쉴 자리 곁에 놓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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