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91여관◆zAR16hM8he(76492227)2026-05-22 (금) 20:20:20
《세 망령이 찾아온 밤》
4막 — 이름의 이정표와 빈 의자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아레가 의자에 앉자, 모두가 잠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푸리나는 막을 내렸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다.
첫 번째 망령은 소품 상자 옆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양이 왕은 식탁 끝에서 나무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아레가 앉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극 전체를 멈추게 했다.
죠니였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앉았네.”
그리고 정말로 죠니는 그렇게 말했다.
“앉았네.”
푸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죠니, 그렇게 건조하게 말할 장면이 아니지 않아?”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앉았잖아.”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사실입니다.”
푸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너희 둘은 가끔 너무 현실적인 박수부대야.”
아레는 의자에 앉은 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지쳐 보였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고, 손끝에는 더 이상 실이 과하게 감겨 있지 않았다. 물론 보이지 않는 실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실들이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었다.
다만 이제 그 실들은 성벽을 쌓기 위해 당겨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레.”
“네.”
“지금부터는 결말을 정리하는 막이야.”
아레는 식탁 옆에 생긴 작은 선반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푸리나가 그걸 ‘기억 선반’처럼 보았다.
하지만 아레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다시 밀어냈다.
선반.
여관.
쉬는 자리.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푸리나의 극장에서는, 그리고 여관의 성좌를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아레가 믿는 별은 그곳에만 머무는 별이 아니었다.
개척의 성좌.
한계를 마주하고, 넘어서고,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경계에 발을 딛게 하는 별.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아레에게 단순히 눕히고 재우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전장에 다시 세우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경계를 지우지 않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무너진 곳.
누군가가 돌아오지 못한 곳.
누군가의 한계가 피와 흙 속에서 멈춘 곳.
그곳에 이름을 세우는 일.
다음 사람이 그 앞에서 멈춰 울고, 이를 악물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아레는 낮게 말했다.
“선반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군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응?”
아레는 식탁 옆의 작은 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이름표가 몇 개밖에 없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그리고 빈 칸들.
아주 많은 빈 칸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이름을 눕혀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는 계속했다.
“그렇다고 다시 전장에 세우자는 뜻은 아니에요. 그건 내가 보았던 미래와 다르지 않겠지요.”
아레는 자기 손을 보았다.
아까 그 손은 성벽에서 이름표를 떼어냈다.
벽으로 만든 이름들.
누구도 잊히지 않았지만,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침묵의 성.
“그 아이들을 성벽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아레가 말했다.
“하지만 길목에서 지워서도 안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에 둬?”
아레는 고개를 들어, 무대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어둠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길들이 있었다.
비가 멎은 들판 너머.
식탁의 온기 너머.
침묵의 성이 무너진 자리 너머.
아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경계에.”
“경계?”
“네.”
아레는 기억의 자리로 보였던 작은 선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누군가 쓰러진 경계. 누군가 돌아오지 못한 한계.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멈추었기에, 산 자들이 다시 마주하게 되는 지점.”
그녀는 첫 번째 망령을 보았다.
“그곳에 이름을 세워야 합니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그에게 말했다.
“아이야. 너를 다시 전장에 세우지는 않으마.”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계속했다.
“하지만 네가 쓰러진 경계를 지우지도 않으마. 그곳에 네 이름을 세워두마.”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개척자의 단단함이 있었다.
“산 자들이 그 앞에서 멈춰 울고, 네가 멈춘 곳을 보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푸리나는 그제야 아레가 말하는 것을 이해했다.
여관이 아니었다.
묘비도 아니었다.
장부도 아니었다.
이정표.
아레는 죽은 자를 쉬게 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죽음이 산 자의 길에서 아무 의미 없이 묻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죽은 자를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멈춘 지점을 별자리처럼 남기려는 사람이었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펜을 들었다.
아레가 말했다.
“적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이름의 이정표: 죽은 자를 명령 아래 다시 세우지 않고, 산 자가 같은 절망 앞에서 멈추지 않도록 경계와 길목에 세워두는 이름.
아레는 그 문장을 읽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
이정표를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사무적이었다.
그래서 그레이가 활약했다.
그레이는 긴 탁자 하나를 가져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종이를 펼쳤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장부 정리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정표를 세우려면 위치와 문구가 필요합니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그레이가 하면 순례길도 행정이 되겠네.”
그레이는 차분히 대답했다.
“길에는 표지가 필요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오늘 죠니가 의외로 그레이 편을 많이 드네.”
“맞는 말을 하면 편을 들어야지.”
아레는 그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이상하게, 그런 건조한 대화가 도움이 되었다.
너무 숭고한 말만 있으면 숨이 막혔을 것이다.
죽은 자의 이름을 이정표로 세우는 자리에도, 누군가는 펜이 마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누군가는 의자가 삐걱이는지 보고, 누군가는 빵을 더 가져와야 했다.
그레이는 종이 상단에 항목을 적었다.
이름 / 확인 여부 / 기억하는 사람 / 남은 흔적 / 멈춘 경계 / 다음 길
푸리나는 마지막 항목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다음 길?”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표라면 필요합니다.”
아레가 그 문장을 보았다.
다음 길.
전장.
장부.
식탁.
표지석.
별.
아직 아무도 넘지 못한 경계.
그리고 그 너머.
아레는 낮게 말했다.
“좋은 항목입니다.”
그레이는 다시 조금 놀란 듯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이름은 마르코였다.
부상병이 앞으로 나왔다.
아까 빵 가장자리를 이야기했던 그 병사였다.
그는 아직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레가 그를 보았다.
“말해도 됩니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마르코. 성은…… 사실 잘 모릅니다. 저희끼리는 그냥 마르코라고 불렀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마르코. 성 미상.
“남은 흔적?”
병사는 조금 웃었다.
“빵 가장자리. 아니, 좋아한 건 아닐 겁니다. 속을 남에게 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겠죠.”
그레이가 적으려다 멈췄다.
푸리나가 물었다.
“왜?”
그레이는 말했다.
“정확한 표현이 필요합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적어주세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빵 가장자리를 좋아한다고 우겼음. 진위는 불명. 그러나 그 말로 타인에게 빵 속을 나누었음.”
병사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레이는 그대로 적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네.”
푸리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좋아.”
아레는 병사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멈춘 경계는 어디였습니까?”
병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후퇴로를 열던 곳입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다들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뒤따라오겠다고 했고요. 늘 그랬습니다. 빵 속도 남에게 주고, 탈출로도 남에게 주고.”
아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다음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조금 뒤, 병사가 말했다.
“다음에는…… 누군가 뒤에 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길이었으면 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후퇴로를 열고 남은 자리.
다음 길: 누군가가 늘 뒤에 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마르코의 이름표는 식탁 끝에 놓이지 않았다.
대신 무대 한쪽, 출구로 이어지는 작은 길목에 세워졌다.
그곳은 누군가가 “먼저 가”라고 말할 법한 자리였다.
이제 그 자리에는 마르코의 이름이 있었다.
전장으로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사람이 그 앞에서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
다음은 아나히트였다.
늙은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딸의 이름을 말하다가 한 번 숨이 막혔다.
아레는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여인은 말했다.
“아나히트. 후추를 너무 많이 넣던 아이.”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아나히트.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남은 흔적: 후추?”
여인이 눈물 사이로 웃었다.
“좋아했다기보단, 양 조절을 못했지요.”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것도 흔적이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아이의 수프는 늘 너무 매웠습니다. 그런데 다들 먹었어요. 먹다 보면 이상하게 몸이 따뜻해져서.”
아레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적지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수프에 후추를 많이 넣었음. 먹는 사람들은 맵다고 말하면서도 비웠음. 추운 날에는 그 수프가 도움이 되었음.”
여인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는?”
여인은 오래 생각했다.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이요.”
“솥?”
“도망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프를 끓였습니다. 모두 빨리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 아이가 말했어요. ‘뜨거운 걸 먹지 않으면 길에서 쓰러진다’고.”
여인은 눈물을 닦았다.
“그 수프가 너무 매워서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덕에 걸었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솥을 정리하다가 늦었습니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다음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여인은 대답했다.
“피난길에서도 따뜻한 것을 사치라고 부르지 않는 길.”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
다음 길: 따뜻한 식사가 생존의 일부임을 잊지 말 것.
아나히트의 이름표는 식탁 가운데와 가까운 곳, 그러나 길목에서도 보이는 자리에 세워졌다.
그 이름표가 놓이자, 식탁 위에 아주 희미하게 후추 냄새가 돌았다.
푸리나는 코를 찡그렸다.
“진짜 맵네.”
죠니가 말했다.
“죽은 뒤에도 세네.”
아레는 그 냄새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나히트는 전장 통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에서 멈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제, 다음 사람을 위한 이정표가 세워졌다.
---
토로스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 아이는 아직 자기 아버지 이름을 말할 때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레는 무릎을 조금 굽혔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말할 수 있겠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로스.”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토로스.
아이는 말했다.
“노래를 못했어요.”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아이는 바로 그 이상한 노래를 흉내 내려다가, 갑자기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노래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해요.”
“왜?”
“그래야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아요.”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웃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노래하려는 것은, 토로스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이상한 가락으로 노래했다.
음정은 엉망이었다.
박자도 엉망이었다.
가사는 중간에 끊겼다.
하지만 노래는 있었다.
끝나자, 아무도 바로 웃지 못했다.
그러다 아이가 먼저 웃었다.
“진짜 못하죠?”
푸리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응. 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음악적 완성도는 낮습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쿡 찔렀다.
“그레이.”
아이가 오히려 웃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불렀어요!”
그제야 식탁에 웃음이 번졌다.
아레는 그 웃음 속에서 토로스라는 이름이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레이는 적었다.
남은 흔적: 노래를 매우 못했으나, 본인은 즐겁게 불렀음. 자녀가 그 노래를 기억함.
“멈춘 경계는?”
아이는 망설였다.
“창가요.”
아레가 물었다.
“왜?”
“아버지는 늘 창밖을 보면서 노래했어요. 엄마가 시끄럽다고 했거든요. 마지막에도 창가에 있었어요. 밖에 적이 오는지 보려고.”
아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노래하다가 멈췄어요.”
아레는 눈을 내렸다.
“다음 길은?”
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노래가 멈추면, 누군가 창밖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아이의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술적인 말이기도 했다.
망루.
감시.
교대.
혼자 창가에 서지 않기.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길이구나.”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창가의 감시 자리.
다음 길: 노래가 멈춘 창가를 혼자 두지 말 것.
토로스의 이름표는 창가 쪽에 세워졌다.
그 이름표가 놓이자, 창밖으로 아주 작은 바람이 들어왔다.
노래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래가 멈춘 뒤, 누군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게 하는 바람이었다.
---
그렇게 이름들이 하나씩 놓였다.
모든 이름을 다 세울 수는 없었다.
그날 밤에는 몇 명뿐이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리고 몇몇 더.
돌아오지 못한 전령은 “말을 무서워했지만 전령이 되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끊어진 길이었다.
다음 길은:
전령이 혼자 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강가의 불침번은 “잠을 잘 못 잤고, 그래서 남의 잠을 잘 지켜주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밤의 강가였다.
다음 길은:
누군가의 잠을 지키는 자에게도 잠을 돌려줄 것.
북쪽 능선의 아이는 “정말 어린지는 모름. 그러나 모두가 아이처럼 걱정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무너진 능선이었다.
다음 길은:
어린 얼굴을 용기라는 말로 너무 빨리 전장에 세우지 말 것.
이름이 없는 자들은 이름 없는 대로 적혔다.
이름 미상. 북쪽 능선. 마지막 확인자 없음. 추정 금지.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다음 길: 알 수 없는 죽음을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말 것.
아레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추정 금지.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말 것.
예전의 그녀라면,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의미를 채웠을 것이다.
누군가의 죄.
누군가의 맹세.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령.
하지만 이제는 빈자리를 빈자리로 둘 수 있어야 했다.
그 빈자리 앞에서 멈추고, 다음 사람이 더 조심스럽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아레는 그레이에게 말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표지도 비워두지 말아주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어떻게 적을까요?”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모른다고 적되, 버려진 표식처럼 보이지 않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 항목을 만들었다.
알 수 없는 것: 이름, 고향, 마지막 말.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넘어야 할 것: 모른다는 이유로 없었던 사람처럼 다루는 습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숨을 멈췄다.
아레도 오래 바라보았다.
“좋군요.”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기록은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속여서는 안 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이 필요했습니다.”
---
이름의 이정표들이 하나씩 세워졌다.
하지만 성벽이 되지는 않았다.
이름표들은 너무 빽빽하게 꽂히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길이 있었다.
누군가 지나갈 수 있는 틈.
멈추고, 읽고, 울고, 다시 걸을 수 있는 틈.
빵 부스러기 하나.
후추 냄새.
노래가 멈춘 창가.
접힌 천.
타다 남은 성냥.
이름 없는 자를 위한 빈 표지.
푸리나는 이정표들을 보며 말했다.
“이거, 순례길 같아.”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이름표들을 가리켰다.
“방마다 이름표가 있는 여관이 아니라, 길목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있는 길. 여기서 멈추고, 읽고, 다시 걸어가라는 길.”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더 맞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정표들 너머, 아직 열리지 않은 어둠을 향했다.
“기억의 순례길.”
그레이가 기록하려다 멈췄다.
아레가 말했다.
“적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기억의 순례길: 죽은 자의 이름을 성벽이 아니라 경계의 이정표로 세우고, 산 자가 그 앞에서 멈춘 뒤 다시 나아가게 하는 길.
아레는 그 문장을 읽었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아레답다.”
아레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극장에서 시작되었으니, 그대답기도 하겠지요.”
푸리나는 조금 놀랐다.
“그건 칭찬으로 받아도 돼?”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이번에는 비교적 명확한 칭찬입니다.”
푸리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비교적 명확한 칭찬을 받았어.”
죠니가 말했다.
“축하해.”
“너무 건조해.”
“비교적 축하야.”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름의 이정표를 조금도 더럽히지 않았다.
---
하지만 아레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기 이름을 놓는 일이었다.
푸리나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망령도, 고양이 왕도 말하지 않았다.
아레가 스스로 알아차렸다.
기억의 순례길에는 죽은 자들의 이름만 있어서는 안 됐다.
그 이름들을 기억하는 자가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로 다시 걸어가는지도 필요했다.
아레는 빈 이름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레이가 물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나의 것.”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이름표를 보았다.
그 위에는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레이가 적으려 하자, 아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적겠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건넸다.
아레는 자기 이름을 적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글씨는 반듯했다.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조금 떨리는 것이 보였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 자리는?”
아레는 의자를 보았다.
아까 자신이 앉았던 빈 의자.
그리고 그 너머, 아직 이어져야 할 순례길.
“길의 끝이 아니라, 중간.”
“중간?”
“네.”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들고 이정표들 사이의 작은 빈 곳으로 걸어갔다.
거기는 마르코의 후퇴로와 아나히트의 솥, 토로스의 창가가 서로 멀리 보이는 자리였다.
아레는 그곳에 자기 이름표를 꽂았다.
죽은 자들의 이름 사이에, 산 자의 이름이 놓였다.
그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필요했다.
아레는 말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그러니 내 이름은 도착한 자의 표지가 아니라, 걷고 있는 자의 표지여야겠지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나는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식탁에도 앉고, 의자에도 앉고, 때로는 그대의 박수도 듣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직 어두운 길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야겠지요.”
푸리나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레.”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네.”
“그거 진짜 큰 말인 거 알아?”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군요.”
“너무 담담하게 말하지 마.”
“담담하지 않으면 말하기 어려워서요.”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는 웃을 수 없었다.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내가 산 자의 길을 잃으면, 죽은 자의 이름도 결국 성벽이 됩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적었다.
기억하는 자의 산 자로서의 경로 필요.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은 결론이네.”
아레는 그를 보았다.
“건조한 칭찬이군요.”
“내 방식이야.”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도 칭찬이야.”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받아두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첫 번째 망령이 일어났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는 소품 상자 위에 있던 빈 이름표를 들었다.
아레는 그를 보았다.
“아이야.”
망령은 아레에게 다가왔다.
“장군님.”
“그래.”
“이제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레는 기억의 순례길을 보았다.
마르코의 후퇴로.
아나히트의 마지막 솥.
토로스의 창가.
이름 없는 자들의 빈 표지.
그리고 그 사이에 꽂힌 자기 자신의 이름.
“원한다면 이곳에.”
망령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
“기억의 순례길.”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전장이 아닌 곳.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곳. 하지만 산 자들이 네가 멈춘 곳을 보고, 다음 걸음을 생각할 수 있는 곳.”
망령은 물었다.
“장군님은 저를 매일 깨우지 않으실 겁니까?”
아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대답은 분명했다.
“그래.”
그녀는 낮게 말했다.
“매일 깨워 세우지 않으마.”
망령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잊지는 않으십니까?”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잊지 않으마.”
망령은 빈 이름표를 작은 길목에 세웠다.
“그럼 저는 조금 쉬겠습니다.”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아이야. 쉬렴.”
망령은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군인처럼 걷지 않았다.
그냥 잠시 쉬러 가는 사람처럼 걸었다.
고양이 왕은 식탁 끝에서 물었다.
“저도 이 길에 와도 돼요?”
아레는 그를 보았다.
“너는 산 자들의 웃음 아니었니?”
고양이 왕은 당당하게 말했다.
“웃음도 길을 알아야 해요.”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오렴.”
고양이 왕은 나무 인형을 안고 식탁 옆, 순례길 입구에 앉았다.
“빵은 있어요?”
푸리나가 말했다.
“후일담에 준비할게.”
그레이가 기록했다.
추후 빵 준비 필요.
죠니가 말했다.
“이런 건 또 바로 적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길을 걷는 자에게 음식은 필요합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작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웃음이었다.
---
막이 내려가기 전, 푸리나는 아레에게 물었다.
“이제 끝내도 될까?”
아레는 기억의 순례길을 보았다.
아직 너무 짧았다.
그리고 너무 길었다.
“네.”
아레는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좋겠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레는 덧붙였다.
“다만, 이 이정표들은 두고 싶군요.”
“물론.”
“식탁도요.”
“응.”
“의자도.”
“응.”
“그리고…….”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보았다.
“내 이름표도, 당분간은 저기에.”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당분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겠지요?”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그 말, 어디서 들은 것 같네.”
“좋은 말이었으니까요.”
“좋아. 내일 다시 정하자.”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의 등불이 천천히 낮아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이 부드럽게 접혔다.
이번에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대 위에 생긴 몇 가지가 현실 쪽으로 남는 느낌이었다.
이름의 이정표.
긴 식탁.
빈 의자.
그리고 길의 중간에 꽂힌 아레의 이름표.
막이 내려왔다.
후일담 —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4막 — 이름의 이정표와 빈 의자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아레가 의자에 앉자, 모두가 잠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푸리나는 막을 내렸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다.
첫 번째 망령은 소품 상자 옆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양이 왕은 식탁 끝에서 나무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아레가 앉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극 전체를 멈추게 했다.
죠니였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앉았네.”
그리고 정말로 죠니는 그렇게 말했다.
“앉았네.”
푸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죠니, 그렇게 건조하게 말할 장면이 아니지 않아?”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앉았잖아.”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사실입니다.”
푸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너희 둘은 가끔 너무 현실적인 박수부대야.”
아레는 의자에 앉은 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지쳐 보였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고, 손끝에는 더 이상 실이 과하게 감겨 있지 않았다. 물론 보이지 않는 실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실들이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었다.
다만 이제 그 실들은 성벽을 쌓기 위해 당겨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레.”
“네.”
“지금부터는 결말을 정리하는 막이야.”
아레는 식탁 옆에 생긴 작은 선반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푸리나가 그걸 ‘기억 선반’처럼 보았다.
하지만 아레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다시 밀어냈다.
선반.
여관.
쉬는 자리.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푸리나의 극장에서는, 그리고 여관의 성좌를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아레가 믿는 별은 그곳에만 머무는 별이 아니었다.
개척의 성좌.
한계를 마주하고, 넘어서고,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경계에 발을 딛게 하는 별.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아레에게 단순히 눕히고 재우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전장에 다시 세우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경계를 지우지 않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무너진 곳.
누군가가 돌아오지 못한 곳.
누군가의 한계가 피와 흙 속에서 멈춘 곳.
그곳에 이름을 세우는 일.
다음 사람이 그 앞에서 멈춰 울고, 이를 악물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아레는 낮게 말했다.
“선반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군요.”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응?”
아레는 식탁 옆의 작은 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이름표가 몇 개밖에 없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그리고 빈 칸들.
아주 많은 빈 칸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이름을 눕혀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아레는 계속했다.
“그렇다고 다시 전장에 세우자는 뜻은 아니에요. 그건 내가 보았던 미래와 다르지 않겠지요.”
아레는 자기 손을 보았다.
아까 그 손은 성벽에서 이름표를 떼어냈다.
벽으로 만든 이름들.
누구도 잊히지 않았지만,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침묵의 성.
“그 아이들을 성벽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아레가 말했다.
“하지만 길목에서 지워서도 안 됩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에 둬?”
아레는 고개를 들어, 무대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어둠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길들이 있었다.
비가 멎은 들판 너머.
식탁의 온기 너머.
침묵의 성이 무너진 자리 너머.
아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경계에.”
“경계?”
“네.”
아레는 기억의 자리로 보였던 작은 선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누군가 쓰러진 경계. 누군가 돌아오지 못한 한계.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멈추었기에, 산 자들이 다시 마주하게 되는 지점.”
그녀는 첫 번째 망령을 보았다.
“그곳에 이름을 세워야 합니다.”
첫 번째 망령은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그에게 말했다.
“아이야. 너를 다시 전장에 세우지는 않으마.”
망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는 계속했다.
“하지만 네가 쓰러진 경계를 지우지도 않으마. 그곳에 네 이름을 세워두마.”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개척자의 단단함이 있었다.
“산 자들이 그 앞에서 멈춰 울고, 네가 멈춘 곳을 보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푸리나는 그제야 아레가 말하는 것을 이해했다.
여관이 아니었다.
묘비도 아니었다.
장부도 아니었다.
이정표.
아레는 죽은 자를 쉬게 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죽음이 산 자의 길에서 아무 의미 없이 묻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죽은 자를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멈춘 지점을 별자리처럼 남기려는 사람이었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펜을 들었다.
아레가 말했다.
“적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이름의 이정표: 죽은 자를 명령 아래 다시 세우지 않고, 산 자가 같은 절망 앞에서 멈추지 않도록 경계와 길목에 세워두는 이름.
아레는 그 문장을 읽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
이정표를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사무적이었다.
그래서 그레이가 활약했다.
그레이는 긴 탁자 하나를 가져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종이를 펼쳤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장부 정리야?”
그레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정표를 세우려면 위치와 문구가 필요합니다.”
죠니가 중얼거렸다.
“그레이가 하면 순례길도 행정이 되겠네.”
그레이는 차분히 대답했다.
“길에는 표지가 필요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오늘 죠니가 의외로 그레이 편을 많이 드네.”
“맞는 말을 하면 편을 들어야지.”
아레는 그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이상하게, 그런 건조한 대화가 도움이 되었다.
너무 숭고한 말만 있으면 숨이 막혔을 것이다.
죽은 자의 이름을 이정표로 세우는 자리에도, 누군가는 펜이 마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누군가는 의자가 삐걱이는지 보고, 누군가는 빵을 더 가져와야 했다.
그레이는 종이 상단에 항목을 적었다.
이름 / 확인 여부 / 기억하는 사람 / 남은 흔적 / 멈춘 경계 / 다음 길
푸리나는 마지막 항목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다음 길?”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표라면 필요합니다.”
아레가 그 문장을 보았다.
다음 길.
전장.
장부.
식탁.
표지석.
별.
아직 아무도 넘지 못한 경계.
그리고 그 너머.
아레는 낮게 말했다.
“좋은 항목입니다.”
그레이는 다시 조금 놀란 듯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이름은 마르코였다.
부상병이 앞으로 나왔다.
아까 빵 가장자리를 이야기했던 그 병사였다.
그는 아직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레가 그를 보았다.
“말해도 됩니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마르코. 성은…… 사실 잘 모릅니다. 저희끼리는 그냥 마르코라고 불렀습니다.”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마르코. 성 미상.
“남은 흔적?”
병사는 조금 웃었다.
“빵 가장자리. 아니, 좋아한 건 아닐 겁니다. 속을 남에게 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겠죠.”
그레이가 적으려다 멈췄다.
푸리나가 물었다.
“왜?”
그레이는 말했다.
“정확한 표현이 필요합니다.”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적어주세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빵 가장자리를 좋아한다고 우겼음. 진위는 불명. 그러나 그 말로 타인에게 빵 속을 나누었음.”
병사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레이는 그대로 적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네.”
푸리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좋아.”
아레는 병사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멈춘 경계는 어디였습니까?”
병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후퇴로를 열던 곳입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다들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뒤따라오겠다고 했고요. 늘 그랬습니다. 빵 속도 남에게 주고, 탈출로도 남에게 주고.”
아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다음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조금 뒤, 병사가 말했다.
“다음에는…… 누군가 뒤에 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길이었으면 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후퇴로를 열고 남은 자리.
다음 길: 누군가가 늘 뒤에 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마르코의 이름표는 식탁 끝에 놓이지 않았다.
대신 무대 한쪽, 출구로 이어지는 작은 길목에 세워졌다.
그곳은 누군가가 “먼저 가”라고 말할 법한 자리였다.
이제 그 자리에는 마르코의 이름이 있었다.
전장으로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사람이 그 앞에서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
다음은 아나히트였다.
늙은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딸의 이름을 말하다가 한 번 숨이 막혔다.
아레는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여인은 말했다.
“아나히트. 후추를 너무 많이 넣던 아이.”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아나히트.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남은 흔적: 후추?”
여인이 눈물 사이로 웃었다.
“좋아했다기보단, 양 조절을 못했지요.”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것도 흔적이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아이의 수프는 늘 너무 매웠습니다. 그런데 다들 먹었어요. 먹다 보면 이상하게 몸이 따뜻해져서.”
아레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적지요.”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수프에 후추를 많이 넣었음. 먹는 사람들은 맵다고 말하면서도 비웠음. 추운 날에는 그 수프가 도움이 되었음.”
여인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는?”
여인은 오래 생각했다.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이요.”
“솥?”
“도망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프를 끓였습니다. 모두 빨리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 아이가 말했어요. ‘뜨거운 걸 먹지 않으면 길에서 쓰러진다’고.”
여인은 눈물을 닦았다.
“그 수프가 너무 매워서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덕에 걸었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솥을 정리하다가 늦었습니다.”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레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다음 길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여인은 대답했다.
“피난길에서도 따뜻한 것을 사치라고 부르지 않는 길.”
아레는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
다음 길: 따뜻한 식사가 생존의 일부임을 잊지 말 것.
아나히트의 이름표는 식탁 가운데와 가까운 곳, 그러나 길목에서도 보이는 자리에 세워졌다.
그 이름표가 놓이자, 식탁 위에 아주 희미하게 후추 냄새가 돌았다.
푸리나는 코를 찡그렸다.
“진짜 맵네.”
죠니가 말했다.
“죽은 뒤에도 세네.”
아레는 그 냄새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나히트는 전장 통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피난길의 마지막 솥 앞에서 멈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제, 다음 사람을 위한 이정표가 세워졌다.
---
토로스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 아이는 아직 자기 아버지 이름을 말할 때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레는 무릎을 조금 굽혔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말할 수 있겠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로스.”
그레이가 적었다.
이름: 토로스.
아이는 말했다.
“노래를 못했어요.”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아이는 바로 그 이상한 노래를 흉내 내려다가, 갑자기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노래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해요.”
“왜?”
“그래야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아요.”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웃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노래하려는 것은, 토로스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이상한 가락으로 노래했다.
음정은 엉망이었다.
박자도 엉망이었다.
가사는 중간에 끊겼다.
하지만 노래는 있었다.
끝나자, 아무도 바로 웃지 못했다.
그러다 아이가 먼저 웃었다.
“진짜 못하죠?”
푸리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응. 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음악적 완성도는 낮습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쿡 찔렀다.
“그레이.”
아이가 오히려 웃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불렀어요!”
그제야 식탁에 웃음이 번졌다.
아레는 그 웃음 속에서 토로스라는 이름이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레이는 적었다.
남은 흔적: 노래를 매우 못했으나, 본인은 즐겁게 불렀음. 자녀가 그 노래를 기억함.
“멈춘 경계는?”
아이는 망설였다.
“창가요.”
아레가 물었다.
“왜?”
“아버지는 늘 창밖을 보면서 노래했어요. 엄마가 시끄럽다고 했거든요. 마지막에도 창가에 있었어요. 밖에 적이 오는지 보려고.”
아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노래하다가 멈췄어요.”
아레는 눈을 내렸다.
“다음 길은?”
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노래가 멈추면, 누군가 창밖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아이의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술적인 말이기도 했다.
망루.
감시.
교대.
혼자 창가에 서지 않기.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길이구나.”
그레이는 적었다.
멈춘 경계: 창가의 감시 자리.
다음 길: 노래가 멈춘 창가를 혼자 두지 말 것.
토로스의 이름표는 창가 쪽에 세워졌다.
그 이름표가 놓이자, 창밖으로 아주 작은 바람이 들어왔다.
노래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래가 멈춘 뒤, 누군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게 하는 바람이었다.
---
그렇게 이름들이 하나씩 놓였다.
모든 이름을 다 세울 수는 없었다.
그날 밤에는 몇 명뿐이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리고 몇몇 더.
돌아오지 못한 전령은 “말을 무서워했지만 전령이 되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끊어진 길이었다.
다음 길은:
전령이 혼자 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강가의 불침번은 “잠을 잘 못 잤고, 그래서 남의 잠을 잘 지켜주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밤의 강가였다.
다음 길은:
누군가의 잠을 지키는 자에게도 잠을 돌려줄 것.
북쪽 능선의 아이는 “정말 어린지는 모름. 그러나 모두가 아이처럼 걱정했다”고 적혔다.
그가 멈춘 경계는 무너진 능선이었다.
다음 길은:
어린 얼굴을 용기라는 말로 너무 빨리 전장에 세우지 말 것.
이름이 없는 자들은 이름 없는 대로 적혔다.
이름 미상. 북쪽 능선. 마지막 확인자 없음. 추정 금지.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다음 길: 알 수 없는 죽음을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말 것.
아레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추정 금지.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말 것.
예전의 그녀라면,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의미를 채웠을 것이다.
누군가의 죄.
누군가의 맹세.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령.
하지만 이제는 빈자리를 빈자리로 둘 수 있어야 했다.
그 빈자리 앞에서 멈추고, 다음 사람이 더 조심스럽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아레는 그레이에게 말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표지도 비워두지 말아주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어떻게 적을까요?”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모른다고 적되, 버려진 표식처럼 보이지 않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 항목을 만들었다.
알 수 없는 것: 이름, 고향, 마지막 말.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넘어야 할 것: 모른다는 이유로 없었던 사람처럼 다루는 습관.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숨을 멈췄다.
아레도 오래 바라보았다.
“좋군요.”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기록은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속여서는 안 됩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이 필요했습니다.”
---
이름의 이정표들이 하나씩 세워졌다.
하지만 성벽이 되지는 않았다.
이름표들은 너무 빽빽하게 꽂히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길이 있었다.
누군가 지나갈 수 있는 틈.
멈추고, 읽고, 울고, 다시 걸을 수 있는 틈.
빵 부스러기 하나.
후추 냄새.
노래가 멈춘 창가.
접힌 천.
타다 남은 성냥.
이름 없는 자를 위한 빈 표지.
푸리나는 이정표들을 보며 말했다.
“이거, 순례길 같아.”
아레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이름표들을 가리켰다.
“방마다 이름표가 있는 여관이 아니라, 길목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있는 길. 여기서 멈추고, 읽고, 다시 걸어가라는 길.”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더 맞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정표들 너머, 아직 열리지 않은 어둠을 향했다.
“기억의 순례길.”
그레이가 기록하려다 멈췄다.
아레가 말했다.
“적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적었다.
기억의 순례길: 죽은 자의 이름을 성벽이 아니라 경계의 이정표로 세우고, 산 자가 그 앞에서 멈춘 뒤 다시 나아가게 하는 길.
아레는 그 문장을 읽었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아레답다.”
아레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극장에서 시작되었으니, 그대답기도 하겠지요.”
푸리나는 조금 놀랐다.
“그건 칭찬으로 받아도 돼?”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이번에는 비교적 명확한 칭찬입니다.”
푸리나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비교적 명확한 칭찬을 받았어.”
죠니가 말했다.
“축하해.”
“너무 건조해.”
“비교적 축하야.”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름의 이정표를 조금도 더럽히지 않았다.
---
하지만 아레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기 이름을 놓는 일이었다.
푸리나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망령도, 고양이 왕도 말하지 않았다.
아레가 스스로 알아차렸다.
기억의 순례길에는 죽은 자들의 이름만 있어서는 안 됐다.
그 이름들을 기억하는 자가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로 다시 걸어가는지도 필요했다.
아레는 빈 이름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레이가 물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아레는 대답했다.
“나의 것.”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레는 이름표를 보았다.
그 위에는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레이가 적으려 하자, 아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적겠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건넸다.
아레는 자기 이름을 적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글씨는 반듯했다.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조금 떨리는 것이 보였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 자리는?”
아레는 의자를 보았다.
아까 자신이 앉았던 빈 의자.
그리고 그 너머, 아직 이어져야 할 순례길.
“길의 끝이 아니라, 중간.”
“중간?”
“네.”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들고 이정표들 사이의 작은 빈 곳으로 걸어갔다.
거기는 마르코의 후퇴로와 아나히트의 솥, 토로스의 창가가 서로 멀리 보이는 자리였다.
아레는 그곳에 자기 이름표를 꽂았다.
죽은 자들의 이름 사이에, 산 자의 이름이 놓였다.
그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필요했다.
아레는 말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그러니 내 이름은 도착한 자의 표지가 아니라, 걷고 있는 자의 표지여야겠지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나는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식탁에도 앉고, 의자에도 앉고, 때로는 그대의 박수도 듣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직 어두운 길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야겠지요.”
푸리나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레.”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네.”
“그거 진짜 큰 말인 거 알아?”
아레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군요.”
“너무 담담하게 말하지 마.”
“담담하지 않으면 말하기 어려워서요.”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는 웃을 수 없었다.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내가 산 자의 길을 잃으면, 죽은 자의 이름도 결국 성벽이 됩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적었다.
기억하는 자의 산 자로서의 경로 필요.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은 결론이네.”
아레는 그를 보았다.
“건조한 칭찬이군요.”
“내 방식이야.”
푸리나가 말했다.
“그래도 칭찬이야.”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받아두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첫 번째 망령이 일어났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는 소품 상자 위에 있던 빈 이름표를 들었다.
아레는 그를 보았다.
“아이야.”
망령은 아레에게 다가왔다.
“장군님.”
“그래.”
“이제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레는 기억의 순례길을 보았다.
마르코의 후퇴로.
아나히트의 마지막 솥.
토로스의 창가.
이름 없는 자들의 빈 표지.
그리고 그 사이에 꽂힌 자기 자신의 이름.
“원한다면 이곳에.”
망령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
“기억의 순례길.”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전장이 아닌 곳.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곳. 하지만 산 자들이 네가 멈춘 곳을 보고, 다음 걸음을 생각할 수 있는 곳.”
망령은 물었다.
“장군님은 저를 매일 깨우지 않으실 겁니까?”
아레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대답은 분명했다.
“그래.”
그녀는 낮게 말했다.
“매일 깨워 세우지 않으마.”
망령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잊지는 않으십니까?”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잊지 않으마.”
망령은 빈 이름표를 작은 길목에 세웠다.
“그럼 저는 조금 쉬겠습니다.”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아이야. 쉬렴.”
망령은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군인처럼 걷지 않았다.
그냥 잠시 쉬러 가는 사람처럼 걸었다.
고양이 왕은 식탁 끝에서 물었다.
“저도 이 길에 와도 돼요?”
아레는 그를 보았다.
“너는 산 자들의 웃음 아니었니?”
고양이 왕은 당당하게 말했다.
“웃음도 길을 알아야 해요.”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오렴.”
고양이 왕은 나무 인형을 안고 식탁 옆, 순례길 입구에 앉았다.
“빵은 있어요?”
푸리나가 말했다.
“후일담에 준비할게.”
그레이가 기록했다.
추후 빵 준비 필요.
죠니가 말했다.
“이런 건 또 바로 적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길을 걷는 자에게 음식은 필요합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작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웃음이었다.
---
막이 내려가기 전, 푸리나는 아레에게 물었다.
“이제 끝내도 될까?”
아레는 기억의 순례길을 보았다.
아직 너무 짧았다.
그리고 너무 길었다.
“네.”
아레는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좋겠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레는 덧붙였다.
“다만, 이 이정표들은 두고 싶군요.”
“물론.”
“식탁도요.”
“응.”
“의자도.”
“응.”
“그리고…….”
아레는 자기 이름표를 보았다.
“내 이름표도, 당분간은 저기에.”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응. 당분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겠지요?”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그 말, 어디서 들은 것 같네.”
“좋은 말이었으니까요.”
“좋아. 내일 다시 정하자.”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의 등불이 천천히 낮아졌다.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의 기척이 부드럽게 접혔다.
이번에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대 위에 생긴 몇 가지가 현실 쪽으로 남는 느낌이었다.
이름의 이정표.
긴 식탁.
빈 의자.
그리고 길의 중간에 꽂힌 아레의 이름표.
막이 내려왔다.
후일담 —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그 아래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