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192여관◆zAR16hM8he(76492227)2026-05-22 (금) 20:25:26
《세 망령이 찾아온 밤》
후일담 —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다음 날 아침, 야전 여관의 마당에는 이상한 길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았다.
마당 한쪽, 찢어진 막과 식탁 사이.
아이들이 뛰어다니면 쉽게 밟고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목.
그곳에 작은 이름표들이 세워져 있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리고 아직 이름이 없는 몇 개의 빈 표지.
누군가가 보기에는 소품처럼 보였을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미처 치우지 않은 장식.
아이들이 세워둔 놀이의 흔적.
혹은 푸리나가 또 무언가를 벌이기 위해 준비한 이상한 무대 장치.
그러나 아레는 그것을 길이라고 불렀다.
기억의 순례길.
그리고 그 길의 중간에는, 작고 반듯한 글씨로 적힌 이름표 하나가 있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푸리나는 그 이름표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정말 남았네.”
그레이는 옆에서 기록판을 확인했다.
“어제 신술이 접힌 뒤에도 물리적 표식 일부가 유지되었습니다. 실제 소품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레이.”
“네.”
“아침부터 너무 딱딱해.”
“그럼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무대에서 생긴 길이 현실에 조금 남았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오.”
“괜찮습니까?”
“좋아. 아주 좋아. 방금 건 기록에도 그렇게 써.”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적었습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쪽에서는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정확히는 빵을 먹으면서 조용히 이름표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어제 고양이 왕을 맡았던 아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푸리나 전하.”
“응, 고양이 왕.”
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저기 지나가도 돼요?”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마당 끝에 서 있었다.
아침빛 속의 아레는 어제 밤보다 조금 더 창백해 보였지만,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레는 아이에게 말했다.
“지나가도 된단다.”
아이의 눈이 밝아졌다.
“뛰어도 돼요?”
아레는 잠시 멈췄다.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레이도 기록판 위에서 펜을 멈췄다.
아레는 이름표들을 보았다.
마르코의 후퇴로.
아나히트의 마지막 솥.
토로스의 창가.
이름 없는 병사의 경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름.
그 사이를 아이가 뛰어간다.
웃으면서.
아레는 한때 그것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름들 사이를 가볍게 뛰어간다는 것.
죽음의 경계가 아이의 놀이길이 된다는 것.
하지만 개척의 길은 원래 그런 모순을 품는다.
어떤 이가 쓰러진 곳을, 다음 이는 지나가야 한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지나가야 한다.
멈출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다시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뛰어도 된단다.”
아이는 웃었다.
아레는 덧붙였다.
“다만, 이름표를 차지 않도록 조심하렴.”
“네!”
고양이 왕은 바로 달려갔다.
그는 마르코의 이름표 앞에서 한 번 멈추었다.
글자를 읽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
아나히트의 이름표 앞에서는 후추 냄새가 나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토로스의 이름표 앞에서는 이상한 노래를 한 소절 흉내 냈다.
그리고 아레의 이름표 앞에서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아레 장군님 이름이에요?”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장군님도 죽었어요?”
푸리나가 숨을 삼켰다.
그레이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하지만 아이는 악의 없이 물었다.
길에 이름이 있으니, 죽은 사람 이름인 줄 안 것이다.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 아니란다.”
아이는 더 헷갈린 얼굴이 되었다.
“그럼 왜 여기에 있어요?”
아레는 조금 생각했다.
“나도 길 위에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아이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장군님도 뛰어요?”
푸리나는 입을 막았다.
죠니가 언제 왔는지 문가에서 낮게 말했다.
“좋은 질문이네.”
아레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작게 웃음을 참았다.
아레는 아이를 다시 보았다.
“오늘은 걷겠단다.”
“내일은요?”
“내일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내일 다시 정하자꾸나.”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오늘 뛸래요!”
그리고 그는 정말로 뛰었다.
이름의 이정표 사이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히.
---
아침 식사가 시작되자, 식탁은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확히는, 어제 있던 식탁에 상자 두 개와 나무판자 하나를 덧댔다.
그레이는 그 구조를 보고 심각하게 말했다.
“하중 분산이 불안정합니다.”
푸리나는 빵 바구니를 올리며 말했다.
“식탁은 마음이 중요해.”
“무너질 경우 마음도 함께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건 곤란하지.”
죠니가 옆에서 나무판자를 발로 살짝 밀어보았다.
“여기 받침 하나 더 대면 되겠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죠니가 가구 조언을?”
“무너지는 식탁 옆에서 밥 먹고 싶진 않으니까.”
“실용적이야.”
“그게 대체로 좋지.”
아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식탁을 고치는 일.
빵을 놓는 일.
아이들이 자리를 다투는 일.
그레이가 이름표와 식탁 사이의 안전거리를 계산하는 일.
죠니가 받침을 대는 일.
푸리나가 “이 정도면 극적 균형이야”라고 말하고, 그레이가 “물리적 균형이 먼저입니다”라고 반박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어제 밤의 아레라면 그것을 막연히 느꼈다.
오늘 아침의 아레는 조금 더 분명히 알았다.
죽은 자의 이름은 조용한 곳에만 놓이지 않는다.
때로는 삐걱이는 식탁 옆에도 놓인다.
빵가루가 떨어지는 곳에도.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길목에도.
누군가가 “이 받침은 약하다”고 말하는 자리에도.
그 모든 것이 산 자가 다음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레는 식탁 끝에 앉았다.
푸리나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죠니는 짧게 말했다.
“앉았네.”
푸리나는 바로 쏘아보았다.
“죠니.”
죠니는 빵을 집었다.
“이번엔 좋은 뜻이야.”
아레는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아레의 앞에 빵을 놓았다.
“먹을래?”
아레는 빵을 보았다.
어제 2막에서 먹었던 빵처럼, 조금 딱딱하고 조금 식은 빵이었다.
“먹겠습니다.”
푸리나는 빵을 더 밀어주었다.
“기억하는 자도 빵을 먹어야 하니까.”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제목으로 쓸 생각이었나요?”
“들켰어?”
“조금.”
“좋은 제목 아니야?”
아레는 빵을 손에 들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레식 칭찬!”
“비교적 명확한 편이지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는 빵을 한 조각 뜯었다.
그 순간, 고양이 왕이 옆에서 말했다.
“그거 가장자리예요.”
아레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가장자리였다.
고양이 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마르코가 좋아한다고 우겼던 부분.”
아레는 빵 가장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먹어도 되겠니, 마르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 끝에 세워진 마르코의 이름표가 아침빛을 받았다.
아레는 빵 가장자리를 먹었다.
딱딱했다.
조금 퍽퍽했다.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삼킬 수 있었다.
그녀는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빵 속을 남에게 주려고 우겼다는 말이 이해되는군요.”
죠니가 말했다.
“맛없어?”
아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맛있다고 우기려면 상당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식탁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듣고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크게 웃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 웃음은 마르코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코의 이름표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왔다.
---
식사가 끝난 뒤, 아레는 이정표들을 다시 점검했다.
이건 거의 의식처럼 보였지만, 아레는 그것을 의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의식이 너무 단단해지면, 또 하나의 성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레이에게 말했다.
“규칙은 너무 많이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레이는 물었다.
“최소 규칙은 필요합니다. 무엇을 남길까요?”
아레는 생각했다.
“첫째. 이름을 알면 이름을 적는다.”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이름을 모르면 모른다고 적는다.”
“셋째. 모르는 것을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않는다.”
“넷째. 그 사람이 멈춘 경계를 확인한다.”
“다섯째. 다음 사람이 그 경계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묻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째는 없습니까?”
아레는 이정표들 사이를 뛰던 아이를 보았다.
“있습니다.”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산 자가 그 길을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적었다.
여섯째. 산 자가 그 길을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가만히 웃었다.
“그거 좋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극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문장일 겁니다.”
푸리나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첫 다섯 줄만 남겼겠지요.”
“여섯째는?”
“그대와 아이들이 가져왔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아, 오늘 바람이 좀 세네.”
죠니가 말했다.
“안 부는데.”
그레이가 하늘을 보았다.
“현재 풍속은 약합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향해 낮게 말했다.
“너희 둘 다 조용히 해.”
아레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더 이상 극 안에서만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
---
오후가 되자, 첫 번째 망령이 다시 나타났다.
아주 잠깐이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는 자신의 이정표 앞에 서 있었다.
그 이정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름 미상. 비 오는 밤, 좌측 능선. 마지막 말 확인 불가.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다음 길: 이름을 듣지 못한 죽음을, 지휘관의 죄만으로 덮지 말 것.
망령은 그것을 읽었다.
아레는 곁에 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마.”
망령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레는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냐?”
망령은 아레를 보았다.
“완전히는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전보다 낫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하구나.”
망령은 이정표를 만지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장군님.”
“그래, 아이야.”
“저는 이름을 잃었지만, 길을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망령은 계속했다.
“누군가 이 앞에서 멈추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 서 있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아레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제가 멈춘 곳이라서요.”
망령은 비가 그친 하늘을 보았다.
“누군가는 지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아레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개척의 성좌가 사랑할 법한 말이었다.
한계에 부딪힌 곳.
누군가가 멈춘 곳.
그러므로 다음 이가 나아갈 곳이 생긴 곳.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렇구나, 아이야.”
망령은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 장군님도 너무 오래 서 있지 마십시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노력하마.”
“네.”
망령은 뒤돌아섰다.
이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정표 너머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전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길도 아니었다.
아레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
해가 기울 무렵, 푸리나는 작은 폐막 공연을 하자고 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바로 경계했다.
“폐막 공연이요?”
“작게.”
“푸리나 헤툼의 ‘작게’는 신뢰도가 낮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억울한 얼굴로 둘을 보았다.
“이번엔 진짜 작게 할 거야.”
죠니가 말했다.
“소품 몇 개?”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음…… 고양이 인형, 빵 바구니, 작은 깃발, 이정표 모형 세 개 정도?”
그레이가 말했다.
“작지 않습니다.”
“작아! 전쟁 장면 없어!”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무엇을 하려는 건가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이들이 길을 지나가는 놀이.”
아레는 침묵했다.
푸리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죽은 자 이름을 장난감처럼 쓰자는 게 아니야. 이정표를 보고 멈추고, 한마디 말하고, 다음으로 가는 놀이. 아주 간단하게.”
아레는 이정표들을 보았다.
그 앞에서 멈추고, 말하고, 지나가는 아이들.
그것이 가벼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너무 무거운 기억은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못한다.
너무 가벼운 기억은 사람을 지나치게 만든다.
그 사이의 길.
아레는 물었다.
“한마디는 무엇을 말하게 할 겁니까?”
푸리나는 대답했다.
“각자 다르게.”
“예를 들면요?”
푸리나는 고양이 왕을 불렀다.
“고양이 왕, 마르코 이정표 앞에서 뭐라고 말하고 싶어?”
아이는 빵을 들고 달려왔다.
“빵 속도 먹으라고요!”
마당에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어때?”
아레는 잠시 마르코의 이름표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군요.”
푸리나는 조금 놀랐다.
“정말?”
“네.”
아레는 작게 덧붙였다.
“마르코에게는 필요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 왕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럼 아나히트한테는 후추 조금만 넣으라고 할래요!”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실용적인 조언입니다.”
죠니도 낮게 웃었다.
아레는 아나히트의 이름표를 보았다.
후추 냄새.
마지막 솥.
피난길의 따뜻한 수프.
“그것도 좋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정표 앞에서 한마디씩 했다.
“뒤에 남으면 꼭 같이 데리러 갈게.”
“수프는 맵게 해도 되는데 물도 같이 줘.”
“노래 못해도 불러도 돼.”
“이름을 모르면, 이름 모르는 사람이라고 불러줄게.”
“길 막지 말고 길 알려줘.”
마지막 말은 고양이 왕이 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길 막지 말고 길 알려줘.
죽은 자의 이름도, 지휘관의 죄책감도, 애도의 의무도 결국 그렇게 되어야 했다.
길을 막는 성벽이 아니라.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아레는 아이에게 말했다.
“좋은 말이구나.”
고양이 왕은 어깨를 폈다.
“제가 왕이라서요.”
푸리나가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고양이 왕.”
그레이도 진지하게 고개를 숙이려다, 잠시 멈췄다.
“이것은 예법상 필요한 행동입니까?”
푸리나가 말했다.
“극장 예법상 필요해.”
그레이는 고양이 왕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 왕은 매우 만족했다.
아레는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작게.
하지만 숨기지 않고.
---
밤이 되자,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 섰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길의 중간.
죽은 자의 이름들 사이.
산 자가 지나가는 길목.
푸리나는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혼자 있게 둘까?”
그레이가 물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히 혼자 두지는 말자. 그래도 가까이 가지는 말고.”
죠니가 말했다.
“거리 조절 어렵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중요한 거지.”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그 이름표는 죽음의 표지가 아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의 표지.
걷고 있는 자의 표지.
아레는 낮게 말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상했다.
망자의 이름은 많이 불렀다.
병사의 이름.
돌아오지 못한 이의 이름.
장부에 남은 이름.
부르지 못한 이름.
하지만 자기 이름은 잘 부르지 않았다.
아레는 다시 말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아직 걷는 자.”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기억하는 자.”
잠시 침묵.
“하지만 혼자 성벽이 되지 않아도 되는 자.”
밤바람이 이정표들 사이로 지나갔다.
마르코의 이름표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나히트의 이름표에서 희미한 후추 냄새가 났다.
토로스의 창가 쪽에서 못 부르는 노래 같은 바람이 지나갔다.
이름을 잃은 병사의 표지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은 더 이상 비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 작은 빵 조각 하나를 놓았다.
마르코의 가장자리 빵이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걸었단다.”
그 말은 망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내일은 다시 정하마.”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레이도 들었다.
죠니도 들었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그 말은 박수보다 밤에 더 어울렸다.
---
그날 밤, 푸리나는 대본 마지막 장에 후일담을 적었다.
제목은 이렇게 적었다.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레가 직접 쓴 한 줄이 남았다.
기억은 멈춰 서는 일이 아니라, 멈춘 곳을 보고 다시 걷게 하는 일이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좋네.”
아레는 대답했다.
“아직 완성된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좋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었다.
“완성된 말은 가끔 너무 빨리 벽이 되니까.”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레이는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극 종료. 이정표 일부 유지. 식탁 유지. 의자 유지. 아레 마가트로이드의 이름표는 길의 중간에 둠. 추후 재확인 필요.
죠니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추후 재확인 필요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도 배웠네.”
그레이는 조금 생각했다.
“기록상 그렇습니다.”
아레는 마당을 보았다.
야전 여관의 등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정표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밤이 되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아레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이 오면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앞에서 멈출 것이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누군가는 다음 길을 걸을 것이다.
그 정도면 오늘의 기억으로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대본을 덮었다.
“《세 망령이 찾아온 밤》, 여기서 끝.”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끝났군요.”
“응. 극은.”
아레는 이정표들을 보았다.
“길은 남았고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게 좋은 결말이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그리고 그날 밤, 박수가 끝난 뒤에도 길목에는 이름들이 남아 있었다.
성벽이 아니라.
이정표로.
후일담 —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 기억하는 자도 다음 길을 걸어야 한다 —
다음 날 아침, 야전 여관의 마당에는 이상한 길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았다.
마당 한쪽, 찢어진 막과 식탁 사이.
아이들이 뛰어다니면 쉽게 밟고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목.
그곳에 작은 이름표들이 세워져 있었다.
마르코.
아나히트.
토로스.
이름을 잃은 병사.
그리고 아직 이름이 없는 몇 개의 빈 표지.
누군가가 보기에는 소품처럼 보였을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미처 치우지 않은 장식.
아이들이 세워둔 놀이의 흔적.
혹은 푸리나가 또 무언가를 벌이기 위해 준비한 이상한 무대 장치.
그러나 아레는 그것을 길이라고 불렀다.
기억의 순례길.
그리고 그 길의 중간에는, 작고 반듯한 글씨로 적힌 이름표 하나가 있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푸리나는 그 이름표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정말 남았네.”
그레이는 옆에서 기록판을 확인했다.
“어제 신술이 접힌 뒤에도 물리적 표식 일부가 유지되었습니다. 실제 소품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레이.”
“네.”
“아침부터 너무 딱딱해.”
“그럼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무대에서 생긴 길이 현실에 조금 남았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오.”
“괜찮습니까?”
“좋아. 아주 좋아. 방금 건 기록에도 그렇게 써.”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적었습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쪽에서는 아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정확히는 빵을 먹으면서 조용히 이름표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어제 고양이 왕을 맡았던 아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푸리나 전하.”
“응, 고양이 왕.”
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저기 지나가도 돼요?”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마당 끝에 서 있었다.
아침빛 속의 아레는 어제 밤보다 조금 더 창백해 보였지만,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레는 아이에게 말했다.
“지나가도 된단다.”
아이의 눈이 밝아졌다.
“뛰어도 돼요?”
아레는 잠시 멈췄다.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레이도 기록판 위에서 펜을 멈췄다.
아레는 이름표들을 보았다.
마르코의 후퇴로.
아나히트의 마지막 솥.
토로스의 창가.
이름 없는 병사의 경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름.
그 사이를 아이가 뛰어간다.
웃으면서.
아레는 한때 그것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름들 사이를 가볍게 뛰어간다는 것.
죽음의 경계가 아이의 놀이길이 된다는 것.
하지만 개척의 길은 원래 그런 모순을 품는다.
어떤 이가 쓰러진 곳을, 다음 이는 지나가야 한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지나가야 한다.
멈출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다시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아레는 천천히 말했다.
“뛰어도 된단다.”
아이는 웃었다.
아레는 덧붙였다.
“다만, 이름표를 차지 않도록 조심하렴.”
“네!”
고양이 왕은 바로 달려갔다.
그는 마르코의 이름표 앞에서 한 번 멈추었다.
글자를 읽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
아나히트의 이름표 앞에서는 후추 냄새가 나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토로스의 이름표 앞에서는 이상한 노래를 한 소절 흉내 냈다.
그리고 아레의 이름표 앞에서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아레 장군님 이름이에요?”
아레는 대답했다.
“그래.”
“장군님도 죽었어요?”
푸리나가 숨을 삼켰다.
그레이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하지만 아이는 악의 없이 물었다.
길에 이름이 있으니, 죽은 사람 이름인 줄 안 것이다.
아레는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 아니란다.”
아이는 더 헷갈린 얼굴이 되었다.
“그럼 왜 여기에 있어요?”
아레는 조금 생각했다.
“나도 길 위에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아이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장군님도 뛰어요?”
푸리나는 입을 막았다.
죠니가 언제 왔는지 문가에서 낮게 말했다.
“좋은 질문이네.”
아레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작게 웃음을 참았다.
아레는 아이를 다시 보았다.
“오늘은 걷겠단다.”
“내일은요?”
“내일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내일 다시 정하자꾸나.”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오늘 뛸래요!”
그리고 그는 정말로 뛰었다.
이름의 이정표 사이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히.
---
아침 식사가 시작되자, 식탁은 조금 더 길어졌다.
푸리나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확히는, 어제 있던 식탁에 상자 두 개와 나무판자 하나를 덧댔다.
그레이는 그 구조를 보고 심각하게 말했다.
“하중 분산이 불안정합니다.”
푸리나는 빵 바구니를 올리며 말했다.
“식탁은 마음이 중요해.”
“무너질 경우 마음도 함께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건 곤란하지.”
죠니가 옆에서 나무판자를 발로 살짝 밀어보았다.
“여기 받침 하나 더 대면 되겠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죠니가 가구 조언을?”
“무너지는 식탁 옆에서 밥 먹고 싶진 않으니까.”
“실용적이야.”
“그게 대체로 좋지.”
아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식탁을 고치는 일.
빵을 놓는 일.
아이들이 자리를 다투는 일.
그레이가 이름표와 식탁 사이의 안전거리를 계산하는 일.
죠니가 받침을 대는 일.
푸리나가 “이 정도면 극적 균형이야”라고 말하고, 그레이가 “물리적 균형이 먼저입니다”라고 반박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어제 밤의 아레라면 그것을 막연히 느꼈다.
오늘 아침의 아레는 조금 더 분명히 알았다.
죽은 자의 이름은 조용한 곳에만 놓이지 않는다.
때로는 삐걱이는 식탁 옆에도 놓인다.
빵가루가 떨어지는 곳에도.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길목에도.
누군가가 “이 받침은 약하다”고 말하는 자리에도.
그 모든 것이 산 자가 다음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레는 식탁 끝에 앉았다.
푸리나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도 기록하지 않았다.
죠니는 짧게 말했다.
“앉았네.”
푸리나는 바로 쏘아보았다.
“죠니.”
죠니는 빵을 집었다.
“이번엔 좋은 뜻이야.”
아레는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푸리나는 아레의 앞에 빵을 놓았다.
“먹을래?”
아레는 빵을 보았다.
어제 2막에서 먹었던 빵처럼, 조금 딱딱하고 조금 식은 빵이었다.
“먹겠습니다.”
푸리나는 빵을 더 밀어주었다.
“기억하는 자도 빵을 먹어야 하니까.”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제목으로 쓸 생각이었나요?”
“들켰어?”
“조금.”
“좋은 제목 아니야?”
아레는 빵을 손에 들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아레식 칭찬!”
“비교적 명확한 편이지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레는 빵을 한 조각 뜯었다.
그 순간, 고양이 왕이 옆에서 말했다.
“그거 가장자리예요.”
아레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가장자리였다.
고양이 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마르코가 좋아한다고 우겼던 부분.”
아레는 빵 가장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먹어도 되겠니, 마르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 끝에 세워진 마르코의 이름표가 아침빛을 받았다.
아레는 빵 가장자리를 먹었다.
딱딱했다.
조금 퍽퍽했다.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삼킬 수 있었다.
그녀는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빵 속을 남에게 주려고 우겼다는 말이 이해되는군요.”
죠니가 말했다.
“맛없어?”
아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맛있다고 우기려면 상당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식탁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듣고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크게 웃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 웃음은 마르코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코의 이름표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왔다.
---
식사가 끝난 뒤, 아레는 이정표들을 다시 점검했다.
이건 거의 의식처럼 보였지만, 아레는 그것을 의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의식이 너무 단단해지면, 또 하나의 성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레이에게 말했다.
“규칙은 너무 많이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레이는 물었다.
“최소 규칙은 필요합니다. 무엇을 남길까요?”
아레는 생각했다.
“첫째. 이름을 알면 이름을 적는다.”
그레이가 적었다.
“둘째. 이름을 모르면 모른다고 적는다.”
“셋째. 모르는 것을 편한 이야기로 메우지 않는다.”
“넷째. 그 사람이 멈춘 경계를 확인한다.”
“다섯째. 다음 사람이 그 경계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묻는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째는 없습니까?”
아레는 이정표들 사이를 뛰던 아이를 보았다.
“있습니다.”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말했다.
“산 자가 그 길을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적었다.
여섯째. 산 자가 그 길을 지나가도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고 가만히 웃었다.
“그거 좋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의 극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문장일 겁니다.”
푸리나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첫 다섯 줄만 남겼겠지요.”
“여섯째는?”
“그대와 아이들이 가져왔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아, 오늘 바람이 좀 세네.”
죠니가 말했다.
“안 부는데.”
그레이가 하늘을 보았다.
“현재 풍속은 약합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향해 낮게 말했다.
“너희 둘 다 조용히 해.”
아레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더 이상 극 안에서만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
---
오후가 되자, 첫 번째 망령이 다시 나타났다.
아주 잠깐이었다.
이름을 잃은 병사는 자신의 이정표 앞에 서 있었다.
그 이정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름 미상. 비 오는 밤, 좌측 능선. 마지막 말 확인 불가.
확실한 것: 이 사람은 있었다.
다음 길: 이름을 듣지 못한 죽음을, 지휘관의 죄만으로 덮지 말 것.
망령은 그것을 읽었다.
아레는 곁에 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마.”
망령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레는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냐?”
망령은 아레를 보았다.
“완전히는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전보다 낫습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하구나.”
망령은 이정표를 만지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장군님.”
“그래, 아이야.”
“저는 이름을 잃었지만, 길을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레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망령은 계속했다.
“누군가 이 앞에서 멈추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 서 있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아레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제가 멈춘 곳이라서요.”
망령은 비가 그친 하늘을 보았다.
“누군가는 지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아레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개척의 성좌가 사랑할 법한 말이었다.
한계에 부딪힌 곳.
누군가가 멈춘 곳.
그러므로 다음 이가 나아갈 곳이 생긴 곳.
아레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렇구나, 아이야.”
망령은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 장군님도 너무 오래 서 있지 마십시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내렸다.
“노력하마.”
“네.”
망령은 뒤돌아섰다.
이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정표 너머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전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길도 아니었다.
아레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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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 무렵, 푸리나는 작은 폐막 공연을 하자고 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바로 경계했다.
“폐막 공연이요?”
“작게.”
“푸리나 헤툼의 ‘작게’는 신뢰도가 낮습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동의합니다.”
푸리나는 억울한 얼굴로 둘을 보았다.
“이번엔 진짜 작게 할 거야.”
죠니가 말했다.
“소품 몇 개?”
푸리나는 조금 생각했다.
“음…… 고양이 인형, 빵 바구니, 작은 깃발, 이정표 모형 세 개 정도?”
그레이가 말했다.
“작지 않습니다.”
“작아! 전쟁 장면 없어!”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무엇을 하려는 건가요?”
푸리나는 웃었다.
“아이들이 길을 지나가는 놀이.”
아레는 침묵했다.
푸리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죽은 자 이름을 장난감처럼 쓰자는 게 아니야. 이정표를 보고 멈추고, 한마디 말하고, 다음으로 가는 놀이. 아주 간단하게.”
아레는 이정표들을 보았다.
그 앞에서 멈추고, 말하고, 지나가는 아이들.
그것이 가벼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너무 무거운 기억은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못한다.
너무 가벼운 기억은 사람을 지나치게 만든다.
그 사이의 길.
아레는 물었다.
“한마디는 무엇을 말하게 할 겁니까?”
푸리나는 대답했다.
“각자 다르게.”
“예를 들면요?”
푸리나는 고양이 왕을 불렀다.
“고양이 왕, 마르코 이정표 앞에서 뭐라고 말하고 싶어?”
아이는 빵을 들고 달려왔다.
“빵 속도 먹으라고요!”
마당에 웃음이 번졌다.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어때?”
아레는 잠시 마르코의 이름표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군요.”
푸리나는 조금 놀랐다.
“정말?”
“네.”
아레는 작게 덧붙였다.
“마르코에게는 필요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 왕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럼 아나히트한테는 후추 조금만 넣으라고 할래요!”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실용적인 조언입니다.”
죠니도 낮게 웃었다.
아레는 아나히트의 이름표를 보았다.
후추 냄새.
마지막 솥.
피난길의 따뜻한 수프.
“그것도 좋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정표 앞에서 한마디씩 했다.
“뒤에 남으면 꼭 같이 데리러 갈게.”
“수프는 맵게 해도 되는데 물도 같이 줘.”
“노래 못해도 불러도 돼.”
“이름을 모르면, 이름 모르는 사람이라고 불러줄게.”
“길 막지 말고 길 알려줘.”
마지막 말은 고양이 왕이 했다.
아레는 그 말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길 막지 말고 길 알려줘.
죽은 자의 이름도, 지휘관의 죄책감도, 애도의 의무도 결국 그렇게 되어야 했다.
길을 막는 성벽이 아니라.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아레는 아이에게 말했다.
“좋은 말이구나.”
고양이 왕은 어깨를 폈다.
“제가 왕이라서요.”
푸리나가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고양이 왕.”
그레이도 진지하게 고개를 숙이려다, 잠시 멈췄다.
“이것은 예법상 필요한 행동입니까?”
푸리나가 말했다.
“극장 예법상 필요해.”
그레이는 고양이 왕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 왕은 매우 만족했다.
아레는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작게.
하지만 숨기지 않고.
---
밤이 되자,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 섰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길의 중간.
죽은 자의 이름들 사이.
산 자가 지나가는 길목.
푸리나는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혼자 있게 둘까?”
그레이가 물었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히 혼자 두지는 말자. 그래도 가까이 가지는 말고.”
죠니가 말했다.
“거리 조절 어렵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중요한 거지.”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그 이름표는 죽음의 표지가 아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의 표지.
걷고 있는 자의 표지.
아레는 낮게 말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상했다.
망자의 이름은 많이 불렀다.
병사의 이름.
돌아오지 못한 이의 이름.
장부에 남은 이름.
부르지 못한 이름.
하지만 자기 이름은 잘 부르지 않았다.
아레는 다시 말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아직 걷는 자.”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기억하는 자.”
잠시 침묵.
“하지만 혼자 성벽이 되지 않아도 되는 자.”
밤바람이 이정표들 사이로 지나갔다.
마르코의 이름표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나히트의 이름표에서 희미한 후추 냄새가 났다.
토로스의 창가 쪽에서 못 부르는 노래 같은 바람이 지나갔다.
이름을 잃은 병사의 표지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은 더 이상 비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레는 자기 이름표 앞에 작은 빵 조각 하나를 놓았다.
마르코의 가장자리 빵이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걸었단다.”
그 말은 망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내일은 다시 정하마.”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레이도 들었다.
죠니도 들었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그 말은 박수보다 밤에 더 어울렸다.
---
그날 밤, 푸리나는 대본 마지막 장에 후일담을 적었다.
제목은 이렇게 적었다.
박수가 끝난 뒤의 길목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레가 직접 쓴 한 줄이 남았다.
기억은 멈춰 서는 일이 아니라, 멈춘 곳을 보고 다시 걷게 하는 일이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좋네.”
아레는 대답했다.
“아직 완성된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좋아.”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었다.
“완성된 말은 가끔 너무 빨리 벽이 되니까.”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레이는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극 종료. 이정표 일부 유지. 식탁 유지. 의자 유지. 아레 마가트로이드의 이름표는 길의 중간에 둠. 추후 재확인 필요.
죠니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추후 재확인 필요라.”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같은 답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도 배웠네.”
그레이는 조금 생각했다.
“기록상 그렇습니다.”
아레는 마당을 보았다.
야전 여관의 등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정표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밤이 되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아레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이 오면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앞에서 멈출 것이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누군가는 다음 길을 걸을 것이다.
그 정도면 오늘의 기억으로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대본을 덮었다.
“《세 망령이 찾아온 밤》, 여기서 끝.”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끝났군요.”
“응. 극은.”
아레는 이정표들을 보았다.
“길은 남았고요.”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게 좋은 결말이지.”
아레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네.”
그리고 그날 밤, 박수가 끝난 뒤에도 길목에는 이름들이 남아 있었다.
성벽이 아니라.
이정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