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0여관◆zAR16hM8he(55e5d5d9)2026-05-08 (금) 19:14:51
엽편 — 박수와 침묵 사이
야전 여관의 마당에는 천 조각으로 만든 막이 걸려 있었다.
진짜 무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기둥은 부러진 창대를 묶어 세웠고, 막은 피난민들이 입고 온 낡은 망토와 포대 자루를 이어 붙인 것이었다. 객석은 나무 의자 대신 뒤집은 상자와 돌무더기였고, 조명은 병사들이 들고 선 등불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푸리나 헤툼은 그 앞에 서서, 마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극장에 오른 배우처럼 양팔을 펼쳤다.
“좋아!”
그 한마디에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들은 어제까지 울고 있었다.
그제까지는 말을 잃고 있었다.
사흘 전에는 자기 집이 불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손에 나무 인형과 종이 왕관을 들고, 어설픈 무대 뒤에서 서로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의 공연은 짧아. 대사도 틀려도 돼. 넘어져도 돼. 웃어도 되고, 울어도 돼.”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반드시 지킬 것.”
아이들이 숨을 삼켰다.
푸리나는 씩 웃었다.
“끝나면 인사하기!”
몇몇 아이들이 웃었다.
그 작은 웃음이 마당 위로 굴러갔다.
부상병들이 그 웃음을 들었다.
팔에 붕대를 감은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가를 닦다 말고 아이들을 보았다.
그레이가 멀리서 약재 상자를 정리하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마당 가장자리, 등불이 닿지 않는 그늘에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서 있었다.
세르비아의 군주.
첫 번째 마가트로이드.
전장의 실타래와 침묵으로 가라앉는 이들의 어머니.
그녀는 푸리나의 작은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실처럼 가는 시선이었다.
차갑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깊었다.
아레의 곁에는 몇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실들은 아직 이름을 잃지 못한 자들,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 아직 누군가의 울음에 묶인 자들을 따라 마당 뒤편의 어둠으로 이어졌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다.
그늘에 누군가 더 있다는 것을.
박수를 칠 수 없는 손들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무대가 먼저였다.
“자, 시작!”
아이 하나가 막 뒤에서 튀어나왔다.
머리에 종이 왕관을 쓴 고양이 인형을 들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 왕이다!”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두 번째 아이가 나무 막대기를 들고 뛰어나왔다.
“몽골이 온다!”
그러자 고양이 왕 인형이 높이 들렸다.
“야옹!”
그 한마디에 마당 전체에서 웃음이 터졌다.
부상병 하나가 웃다가 옆구리를 붙잡았다.
아기를 안은 여인도 울면서 웃었다.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려 있었다.
푸리나는 객석 뒤에 서서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쳤다.
“좋아! 훌륭해! 왕관 각도가 완벽했어!”
아이들은 더 크게 웃었다.
고양이 왕은 몽골 기병을 물리쳤고, 종이 성벽은 두 번 무너졌다가 세 번 다시 세워졌으며, 마지막에는 모든 인물이 빵을 나눠 먹었다.
이상한 극이었다.
전쟁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 같기도 했다.
죽음을 우스꽝스러운 인형극으로 만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분명히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푸리나는 다시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자, 마지막!”
아이들이 어설프게 줄을 섰다.
“하나, 둘, 셋!”
아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이번에는 푸리나 혼자만의 박수가 아니었다.
부상병도, 피난민도, 그레이도, 여관의 시종도, 늙은 병사도 모두 손뼉을 쳤다.
박수는 작았다.
전쟁을 밀어낼 만큼 크지 않았다.
죽은 자를 되돌릴 만큼 강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마당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때,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따뜻하구나.”
푸리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레는 여전히 그늘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웃었다.
“봤어?”
“보았다.”
“어땠어?”
아레는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공연이 끝났는데도 자기들끼리 고양이 왕의 대사를 따라 하고 있었다.
“좋은 웃음이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
아레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마당 뒤편.
무대 막이 끝나는 곳.
등불이 닿지 않는 어둠.
“하지만 저 아이가 웃는 동안, 그 아이의 아버지는 침묵으로 가라앉고 있단다.”
푸리나의 웃음이 아주 조금 멈췄다.
마당의 소리는 그대로였다.
아이들의 웃음.
부상병의 기침.
솥에서 끓는 수프.
말의 낮은 울음.
멀리서 들려오는 망치질.
그 모든 소리 아래에, 푸리나는 그제야 다른 것을 느꼈다.
침묵.
웃음이 없어서 생긴 빈자리가 아니라, 웃음 아래로 가라앉은 이름들의 무게.
푸리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웃으면 안 된다는 거야?”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대답은 느렸고, 부드러웠다.
“웃어야 한다. 산 자는 웃어야 한다. 울다가도 숨을 쉬어야 하고, 숨을 쉬다 보면 언젠가 웃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자의 권리란다.”
그녀는 푸리나를 보았다.
“다만, 웃음이 침묵을 덮어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란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레는 마당을 향해 한 걸음 나왔다.
그녀가 움직이자, 그늘도 함께 움직이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실들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저 아이들은 웃었다. 좋다. 그 웃음은 지켜야 한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저 아이가 내일 그 공연만 기억하고, 오늘 묻지 못한 아버지의 이름을 삼켜버린다면. 저 여인이 아이가 웃었다는 이유로 남편을 잃은 울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저 병사가 박수를 쳤다는 이유로 자기 곁에서 죽은 전우의 침묵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때 웃음은 구원이 아니라 덮개가 된단다.”
푸리나는 손끝으로 자신의 소매를 잡았다.
아레의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푸리나는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었다.
웃음이 살아 있는 증거라고 믿었다.
전쟁이 모든 사람의 입에서 노래를 빼앗아 가기 전에, 다시 노래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웃음이 너무 밝으면, 그 뒤의 어둠은 더 말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나는……”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저 사람들이 계속 울기만 하게 두고 싶지 않았어.”
“안다.”
아레는 곧장 답했다.
“그대는 조명을 끄지 않는 아이니까.”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어둠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어머니란다.”
그 말에 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아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막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직 공연 안 끝났네.”
아레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무엇을 하려는 거니?”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무대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그녀를 보았다.
부상병들도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마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평소처럼 활짝 웃었다.
하지만 이번 웃음은 조금 달랐다.
너무 밝지 않았다.
너무 가볍지도 않았다.
등불을 낮추듯, 그녀는 목소리의 높이를 낮췄다.
“좋아. 방금 공연은 아주 훌륭했어.”
아이들이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우리 극장에는 규칙이 하나 더 있어.”
푸리나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무대가 끝나면, 출연한 사람들만 인사하는 게 아니야.”
그녀는 마당 뒤편을 보았다.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 장면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사람들도 불러야 해.”
피난민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어떤 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어떤 이는 알아듣고도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이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었다.
푸리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오늘 고양이 왕을 만든 건 누구야?”
종이 왕관을 들고 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요.”
“종이는?”
“아저씨가 줬어요.”
“어떤 아저씨?”
아이는 잠시 망설였다.
“우리 아버지요.”
마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름이 뭐였어?”
아이는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그 작은 입술이 떨렸다.
푸리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아레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실 하나가 아이의 뒤에서 흔들렸다.
아이의 손에 들린 종이 왕관은 엉성했다.
접힌 부분이 삐뚤고, 한쪽 끝은 찢어져 있었다.
아이는 마침내 말했다.
“미하일.”
그 이름이 마당에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그녀는 일어서서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오늘 고양이 왕의 왕관은 미하일이 남긴 종이로 만들어졌어.”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푸리나는 다른 아이를 보았다.
“성벽 역할을 한 저 나무판자는?”
“우리 할머니 수레에서……”
“이름은?”
“엘레나.”
“엘레나.”
푸리나는 또 다른 아이를 보았다.
“몽골 기병 인형에 붙인 천 조각은?”
“형 옷이요.”
“이름은?”
“스테판.”
“스테판.”
이름들이 하나씩 마당 위에 올라왔다.
미하일.
엘레나.
스테판.
아르칠.
소피아.
니카.
바크라는 이름의 개까지.
웃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웃음 옆에 울음이 앉았다.
아이들은 울면서 자기 인형을 들었다.
여인들은 얼굴을 가렸다.
부상병들은 고개를 숙였다.
늙은 병사는 떨리는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 섰다.
이번에는 공적인 푸리나의 목소리였다.
군주이자 극장주.
여관좌의 휴식의 별.
그녀는 등불 아래에서 천천히 말했다.
“그대들의 막이 여기서 닫혔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마당 전체가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대들의 이름이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가 부르겠다.”
푸리나는 종이 왕관을 든 아이의 손을 살짝 감싸주었다.
“그대들이 지킨 사람들은 아직 여기에 있다.”
그녀는 아레를 보았다.
“그러니 오늘, 박수와 침묵을 함께 남기자.”
그 말에 아레가 움직였다.
아레는 아주 천천히 무대 앞으로 걸어왔다.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아레는 푸리나 옆에 섰다.
두 여왕은 닮지 않았다.
푸리나는 등불 앞의 조명 같았고,
아레는 등불 뒤의 깊은 그림자 같았다.
그러나 둘은 같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아레가 손을 들었다.
보이지 않던 실들이 처음으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가늘고 어두운 실.
그러나 차갑지 않은 실.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고, 가라앉는 이름을 조심스럽게 감싸는 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아레는 아이가 말한 첫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
실 하나가 종이 왕관에 닿았다.
“엘레나.”
실 하나가 나무판자에 닿았다.
“스테판.”
실 하나가 천 조각에 닿았다.
그 이름들은 공중에 뜨지 않았다.
빛나지도 않았다.
기적처럼 죽은 자가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저 잊히지 않았다.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이름 하나하나를 끝까지 바라보며 불렀다.
“아르칠.”
“소피아.”
“니카.”
“바크.”
마지막 이름에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울음 섞인 웃음이 나왔다.
아레는 그 웃음도 받아들였다.
“그래. 그 아이도 기억하마.”
푸리나는 조용히 그 옆에 서 있었다.
아레의 실들은 이름을 푸리나의 무대에서 빼앗아가지 않았다.
반대로, 무대 위에 잠시 놓인 이름들을 조심스럽게 받아 마당 뒤편의 침묵으로 이어주었다.
그것은 붙잡는 실이 아니었다.
보내기 전에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실이었다.
아레가 낮게 말했다.
“부디 가라앉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마당 전체에 들릴 만큼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들었다.
“모두가 그대들을 잊더라도, 나는 그대들을 기억할 테니.”
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안았다.
부상병 하나가 얼굴을 덮고 흐느꼈다.
누군가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더 불렀다.
누군가는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푸리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아직은 박수칠 시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기다렸다.
산 자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이름이 울음 속에서 한 번 더 살아날 때까지.
그리고 그 울음이 숨으로 바뀔 때까지.
한참 뒤, 아레가 손을 내렸다.
실들이 천천히 사라졌다.
마당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처음의 침묵과는 달랐다.
처음의 침묵은 말하지 못한 것들이 가라앉는 침묵이었다.
지금의 침묵은 이름을 부른 뒤에 오는 침묵이었다.
푸리나는 그 차이를 느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제.”
사람들이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이들을 향해 웃었다.
“이제 인사하자.”
아이들은 울먹이며 서로를 보았다.
푸리나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도 따라 숙였다.
객석의 사람들도, 하나둘 고개를 숙였다.
아레도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박수가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보다 작았다.
하지만 더 깊었다.
짝.
짝.
짝.
이번 박수는 공연을 잘했다는 박수가 아니었다.
웃음을 되찾은 아이들에게 보내는 박수였고,
이름을 말한 산 자들에게 보내는 박수였고,
오늘 마침내 한 번 더 불린 죽은 자들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푸리나는 박수를 치며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지 않고, 마당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사람들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종이 왕관을 조심히 접어 상자 안에 넣었다.
누군가 천 조각을 가져와 작은 매듭을 만들었다.
그레이는 이름을 하나씩 받아 적기 시작했다.
라이자에게 배운 방식으로, 피난민 아이 하나가 작은 은실을 나눠 묶었다.
아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좋은 매듭이구나.”
푸리나는 옆에서 물었다.
“오늘은 괜찮았어?”
아레는 그녀를 보았다.
“무엇이 말이니?”
“내 무대.”
푸리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너는 아까 내 웃음이 침묵을 덮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아레는 잠시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전장의 가장 낮은 곳을 본 사람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주 조용한 온기도 있었다.
“오늘 그대의 무대는 덮지 않았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들추어냈지. 조심스럽게.”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칭찬이야?”
“그래.”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스러운 아이야. 오늘 그대의 박수는 침묵을 쫓아내지 않았다. 침묵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푸리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좋아.”
이번의 “좋아”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아레는 마당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는 산 자를 다시 무대 위에 세우는구나.”
“응.”
푸리나는 같은 방향을 보았다.
“그리고 너는?”
아레는 말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간 자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실을 잣는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필요하네.”
“그래.”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박수만으로는 부족하다.”
푸리나는 말했다.
“침묵만으로도 부족해.”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푸리나가 먼저 웃었다.
“그럼 다음엔 같이 하자.”
아레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다음?”
“응. 다음 공연.”
푸리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처음엔 웃고, 마지막엔 이름을 부르는 거야. 너무 무겁지 않게. 너무 가볍지도 않게.”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전쟁 중에도 공연을 계속할 생각이니?”
푸리나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전쟁 중이니까.”
아레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는 참으로 변하지 않는구나.”
“변해야 할 때는 변해. 근데 조명은 안 꺼.”
“그렇겠지.”
아레는 푸리나의 뒤에 있는 마당을 보았다.
아이 하나가 종이 왕관을 다시 꺼내 보더니, 조심스럽게 자기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눈물이 말라 있었다.
웃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숨은 돌아왔다.
아레는 그 숨을 들었다.
“좋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짧게. 죽은 자가 너무 오래 무대 위에 붙잡히지 않을 만큼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약속!”
말을 마치고 나서 푸리나는 흠칫했다.
“아, 계약 아니야. 약속. 기록좌 없지?”
어디선가 아카식 단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레는 그 모습을 보고 낮게 웃었다.
“겁내는 것이 독특하구나.”
“기록좌 앞에서 ‘약속’은 조심해야 해.”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꾸나.”
아레는 손끝에 실 하나를 감았다가 풀었다.
“계약도, 맹세도 아니다. 다만 오늘의 매듭으로 남기자.”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다.”
아레는 푸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푸리나는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 아주 가는 실 하나가 생겼다.
실은 빛나지 않았다.
그러나 끊어지지도 않았다.
아레가 말했다.
“박수가 침묵을 덮지 않도록.”
푸리나가 말했다.
“침묵이 박수를 삼키지 않도록.”
그 실은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머물렀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마당에는 다시 작은 소리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프를 젓는 소리.
붕대를 가는 소리.
아이들이 낮게 속삭이는 소리.
누군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는 소리.
푸리나는 그것을 듣고 말했다.
“아레.”
“말하렴.”
“너는 진짜 조용한데, 엄청 강하게 끼어드는구나.”
아레는 부드럽게 웃었다.
“어머니란 본래 그렇단다.”
푸리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랑 좀 통할지도 모르겠네.”
“그레이?”
“우리 쪽의 장부와 현실과 잔소리의 어머니.”
멀리서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군주님, 들립니다.”
푸리나는 움찔했다.
아레는 낮게 웃었다.
“좋은 아이들이 많구나.”
“응.”
푸리나는 마당을 보았다.
“그래서 조명을 끌 수가 없어.”
아레도 마당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단다.”
그날 밤, 야전 여관의 마당에는 두 가지가 함께 남았다.
아이들의 작은 공연.
그리고 죽은 자들의 이름.
사람들은 울었고, 웃었고, 다시 수프를 먹었다.
누군가는 잠들었고, 누군가는 오래 깨어 있었다.
누군가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했고, 누군가는 그 이름을 듣고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몽골의 말발굽은 아직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고, 내일도 누군가는 다칠 것이며,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만큼은, 박수와 침묵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박수는 산 자를 일으켰고,
침묵은 죽은 자를 잊지 않게 했다.
그리고 두 여왕은 알았다.
삶이라는 무대에는 조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대 뒤 어둠에도, 이름을 놓아둘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야전 여관의 마당에는 천 조각으로 만든 막이 걸려 있었다.
진짜 무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기둥은 부러진 창대를 묶어 세웠고, 막은 피난민들이 입고 온 낡은 망토와 포대 자루를 이어 붙인 것이었다. 객석은 나무 의자 대신 뒤집은 상자와 돌무더기였고, 조명은 병사들이 들고 선 등불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푸리나 헤툼은 그 앞에 서서, 마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극장에 오른 배우처럼 양팔을 펼쳤다.
“좋아!”
그 한마디에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들은 어제까지 울고 있었다.
그제까지는 말을 잃고 있었다.
사흘 전에는 자기 집이 불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손에 나무 인형과 종이 왕관을 들고, 어설픈 무대 뒤에서 서로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의 공연은 짧아. 대사도 틀려도 돼. 넘어져도 돼. 웃어도 되고, 울어도 돼.”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반드시 지킬 것.”
아이들이 숨을 삼켰다.
푸리나는 씩 웃었다.
“끝나면 인사하기!”
몇몇 아이들이 웃었다.
그 작은 웃음이 마당 위로 굴러갔다.
부상병들이 그 웃음을 들었다.
팔에 붕대를 감은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가를 닦다 말고 아이들을 보았다.
그레이가 멀리서 약재 상자를 정리하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마당 가장자리, 등불이 닿지 않는 그늘에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서 있었다.
세르비아의 군주.
첫 번째 마가트로이드.
전장의 실타래와 침묵으로 가라앉는 이들의 어머니.
그녀는 푸리나의 작은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실처럼 가는 시선이었다.
차갑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깊었다.
아레의 곁에는 몇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실들은 아직 이름을 잃지 못한 자들,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 아직 누군가의 울음에 묶인 자들을 따라 마당 뒤편의 어둠으로 이어졌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다.
그늘에 누군가 더 있다는 것을.
박수를 칠 수 없는 손들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무대가 먼저였다.
“자, 시작!”
아이 하나가 막 뒤에서 튀어나왔다.
머리에 종이 왕관을 쓴 고양이 인형을 들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 왕이다!”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두 번째 아이가 나무 막대기를 들고 뛰어나왔다.
“몽골이 온다!”
그러자 고양이 왕 인형이 높이 들렸다.
“야옹!”
그 한마디에 마당 전체에서 웃음이 터졌다.
부상병 하나가 웃다가 옆구리를 붙잡았다.
아기를 안은 여인도 울면서 웃었다.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려 있었다.
푸리나는 객석 뒤에 서서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쳤다.
“좋아! 훌륭해! 왕관 각도가 완벽했어!”
아이들은 더 크게 웃었다.
고양이 왕은 몽골 기병을 물리쳤고, 종이 성벽은 두 번 무너졌다가 세 번 다시 세워졌으며, 마지막에는 모든 인물이 빵을 나눠 먹었다.
이상한 극이었다.
전쟁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 같기도 했다.
죽음을 우스꽝스러운 인형극으로 만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분명히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푸리나는 다시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자, 마지막!”
아이들이 어설프게 줄을 섰다.
“하나, 둘, 셋!”
아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이번에는 푸리나 혼자만의 박수가 아니었다.
부상병도, 피난민도, 그레이도, 여관의 시종도, 늙은 병사도 모두 손뼉을 쳤다.
박수는 작았다.
전쟁을 밀어낼 만큼 크지 않았다.
죽은 자를 되돌릴 만큼 강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마당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때,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따뜻하구나.”
푸리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레는 여전히 그늘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웃었다.
“봤어?”
“보았다.”
“어땠어?”
아레는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공연이 끝났는데도 자기들끼리 고양이 왕의 대사를 따라 하고 있었다.
“좋은 웃음이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
아레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마당 뒤편.
무대 막이 끝나는 곳.
등불이 닿지 않는 어둠.
“하지만 저 아이가 웃는 동안, 그 아이의 아버지는 침묵으로 가라앉고 있단다.”
푸리나의 웃음이 아주 조금 멈췄다.
마당의 소리는 그대로였다.
아이들의 웃음.
부상병의 기침.
솥에서 끓는 수프.
말의 낮은 울음.
멀리서 들려오는 망치질.
그 모든 소리 아래에, 푸리나는 그제야 다른 것을 느꼈다.
침묵.
웃음이 없어서 생긴 빈자리가 아니라, 웃음 아래로 가라앉은 이름들의 무게.
푸리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웃으면 안 된다는 거야?”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대답은 느렸고, 부드러웠다.
“웃어야 한다. 산 자는 웃어야 한다. 울다가도 숨을 쉬어야 하고, 숨을 쉬다 보면 언젠가 웃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자의 권리란다.”
그녀는 푸리나를 보았다.
“다만, 웃음이 침묵을 덮어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란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레는 마당을 향해 한 걸음 나왔다.
그녀가 움직이자, 그늘도 함께 움직이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실들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저 아이들은 웃었다. 좋다. 그 웃음은 지켜야 한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저 아이가 내일 그 공연만 기억하고, 오늘 묻지 못한 아버지의 이름을 삼켜버린다면. 저 여인이 아이가 웃었다는 이유로 남편을 잃은 울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저 병사가 박수를 쳤다는 이유로 자기 곁에서 죽은 전우의 침묵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때 웃음은 구원이 아니라 덮개가 된단다.”
푸리나는 손끝으로 자신의 소매를 잡았다.
아레의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푸리나는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었다.
웃음이 살아 있는 증거라고 믿었다.
전쟁이 모든 사람의 입에서 노래를 빼앗아 가기 전에, 다시 노래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웃음이 너무 밝으면, 그 뒤의 어둠은 더 말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나는……”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저 사람들이 계속 울기만 하게 두고 싶지 않았어.”
“안다.”
아레는 곧장 답했다.
“그대는 조명을 끄지 않는 아이니까.”
푸리나는 아레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어둠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어머니란다.”
그 말에 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아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막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직 공연 안 끝났네.”
아레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무엇을 하려는 거니?”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고 무대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그녀를 보았다.
부상병들도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마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평소처럼 활짝 웃었다.
하지만 이번 웃음은 조금 달랐다.
너무 밝지 않았다.
너무 가볍지도 않았다.
등불을 낮추듯, 그녀는 목소리의 높이를 낮췄다.
“좋아. 방금 공연은 아주 훌륭했어.”
아이들이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우리 극장에는 규칙이 하나 더 있어.”
푸리나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무대가 끝나면, 출연한 사람들만 인사하는 게 아니야.”
그녀는 마당 뒤편을 보았다.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 장면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사람들도 불러야 해.”
피난민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어떤 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어떤 이는 알아듣고도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이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었다.
푸리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오늘 고양이 왕을 만든 건 누구야?”
종이 왕관을 들고 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요.”
“종이는?”
“아저씨가 줬어요.”
“어떤 아저씨?”
아이는 잠시 망설였다.
“우리 아버지요.”
마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름이 뭐였어?”
아이는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그 작은 입술이 떨렸다.
푸리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아레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실 하나가 아이의 뒤에서 흔들렸다.
아이의 손에 들린 종이 왕관은 엉성했다.
접힌 부분이 삐뚤고, 한쪽 끝은 찢어져 있었다.
아이는 마침내 말했다.
“미하일.”
그 이름이 마당에 내려앉았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그녀는 일어서서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오늘 고양이 왕의 왕관은 미하일이 남긴 종이로 만들어졌어.”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푸리나는 다른 아이를 보았다.
“성벽 역할을 한 저 나무판자는?”
“우리 할머니 수레에서……”
“이름은?”
“엘레나.”
“엘레나.”
푸리나는 또 다른 아이를 보았다.
“몽골 기병 인형에 붙인 천 조각은?”
“형 옷이요.”
“이름은?”
“스테판.”
“스테판.”
이름들이 하나씩 마당 위에 올라왔다.
미하일.
엘레나.
스테판.
아르칠.
소피아.
니카.
바크라는 이름의 개까지.
웃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웃음 옆에 울음이 앉았다.
아이들은 울면서 자기 인형을 들었다.
여인들은 얼굴을 가렸다.
부상병들은 고개를 숙였다.
늙은 병사는 떨리는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 섰다.
이번에는 공적인 푸리나의 목소리였다.
군주이자 극장주.
여관좌의 휴식의 별.
그녀는 등불 아래에서 천천히 말했다.
“그대들의 막이 여기서 닫혔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마당 전체가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대들의 이름이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가 부르겠다.”
푸리나는 종이 왕관을 든 아이의 손을 살짝 감싸주었다.
“그대들이 지킨 사람들은 아직 여기에 있다.”
그녀는 아레를 보았다.
“그러니 오늘, 박수와 침묵을 함께 남기자.”
그 말에 아레가 움직였다.
아레는 아주 천천히 무대 앞으로 걸어왔다.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아레는 푸리나 옆에 섰다.
두 여왕은 닮지 않았다.
푸리나는 등불 앞의 조명 같았고,
아레는 등불 뒤의 깊은 그림자 같았다.
그러나 둘은 같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아레가 손을 들었다.
보이지 않던 실들이 처음으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가늘고 어두운 실.
그러나 차갑지 않은 실.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고, 가라앉는 이름을 조심스럽게 감싸는 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아레는 아이가 말한 첫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
실 하나가 종이 왕관에 닿았다.
“엘레나.”
실 하나가 나무판자에 닿았다.
“스테판.”
실 하나가 천 조각에 닿았다.
그 이름들은 공중에 뜨지 않았다.
빛나지도 않았다.
기적처럼 죽은 자가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저 잊히지 않았다.
아레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이름 하나하나를 끝까지 바라보며 불렀다.
“아르칠.”
“소피아.”
“니카.”
“바크.”
마지막 이름에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울음 섞인 웃음이 나왔다.
아레는 그 웃음도 받아들였다.
“그래. 그 아이도 기억하마.”
푸리나는 조용히 그 옆에 서 있었다.
아레의 실들은 이름을 푸리나의 무대에서 빼앗아가지 않았다.
반대로, 무대 위에 잠시 놓인 이름들을 조심스럽게 받아 마당 뒤편의 침묵으로 이어주었다.
그것은 붙잡는 실이 아니었다.
보내기 전에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실이었다.
아레가 낮게 말했다.
“부디 가라앉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마당 전체에 들릴 만큼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들었다.
“모두가 그대들을 잊더라도, 나는 그대들을 기억할 테니.”
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안았다.
부상병 하나가 얼굴을 덮고 흐느꼈다.
누군가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더 불렀다.
누군가는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푸리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아직은 박수칠 시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기다렸다.
산 자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이름이 울음 속에서 한 번 더 살아날 때까지.
그리고 그 울음이 숨으로 바뀔 때까지.
한참 뒤, 아레가 손을 내렸다.
실들이 천천히 사라졌다.
마당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처음의 침묵과는 달랐다.
처음의 침묵은 말하지 못한 것들이 가라앉는 침묵이었다.
지금의 침묵은 이름을 부른 뒤에 오는 침묵이었다.
푸리나는 그 차이를 느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제.”
사람들이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이들을 향해 웃었다.
“이제 인사하자.”
아이들은 울먹이며 서로를 보았다.
푸리나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도 따라 숙였다.
객석의 사람들도, 하나둘 고개를 숙였다.
아레도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박수가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보다 작았다.
하지만 더 깊었다.
짝.
짝.
짝.
이번 박수는 공연을 잘했다는 박수가 아니었다.
웃음을 되찾은 아이들에게 보내는 박수였고,
이름을 말한 산 자들에게 보내는 박수였고,
오늘 마침내 한 번 더 불린 죽은 자들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푸리나는 박수를 치며 아레를 보았다.
아레는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지 않고, 마당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사람들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종이 왕관을 조심히 접어 상자 안에 넣었다.
누군가 천 조각을 가져와 작은 매듭을 만들었다.
그레이는 이름을 하나씩 받아 적기 시작했다.
라이자에게 배운 방식으로, 피난민 아이 하나가 작은 은실을 나눠 묶었다.
아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좋은 매듭이구나.”
푸리나는 옆에서 물었다.
“오늘은 괜찮았어?”
아레는 그녀를 보았다.
“무엇이 말이니?”
“내 무대.”
푸리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너는 아까 내 웃음이 침묵을 덮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아레는 잠시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전장의 가장 낮은 곳을 본 사람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주 조용한 온기도 있었다.
“오늘 그대의 무대는 덮지 않았다.”
푸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레는 이어 말했다.
“들추어냈지. 조심스럽게.”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칭찬이야?”
“그래.”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스러운 아이야. 오늘 그대의 박수는 침묵을 쫓아내지 않았다. 침묵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푸리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좋아.”
이번의 “좋아”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아레는 마당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는 산 자를 다시 무대 위에 세우는구나.”
“응.”
푸리나는 같은 방향을 보았다.
“그리고 너는?”
아레는 말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간 자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실을 잣는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필요하네.”
“그래.”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박수만으로는 부족하다.”
푸리나는 말했다.
“침묵만으로도 부족해.”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푸리나가 먼저 웃었다.
“그럼 다음엔 같이 하자.”
아레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다음?”
“응. 다음 공연.”
푸리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처음엔 웃고, 마지막엔 이름을 부르는 거야. 너무 무겁지 않게. 너무 가볍지도 않게.”
아레는 조용히 말했다.
“전쟁 중에도 공연을 계속할 생각이니?”
푸리나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전쟁 중이니까.”
아레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는 참으로 변하지 않는구나.”
“변해야 할 때는 변해. 근데 조명은 안 꺼.”
“그렇겠지.”
아레는 푸리나의 뒤에 있는 마당을 보았다.
아이 하나가 종이 왕관을 다시 꺼내 보더니, 조심스럽게 자기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눈물이 말라 있었다.
웃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숨은 돌아왔다.
아레는 그 숨을 들었다.
“좋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짧게. 죽은 자가 너무 오래 무대 위에 붙잡히지 않을 만큼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약속!”
말을 마치고 나서 푸리나는 흠칫했다.
“아, 계약 아니야. 약속. 기록좌 없지?”
어디선가 아카식 단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레는 그 모습을 보고 낮게 웃었다.
“겁내는 것이 독특하구나.”
“기록좌 앞에서 ‘약속’은 조심해야 해.”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꾸나.”
아레는 손끝에 실 하나를 감았다가 풀었다.
“계약도, 맹세도 아니다. 다만 오늘의 매듭으로 남기자.”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다.”
아레는 푸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푸리나는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 아주 가는 실 하나가 생겼다.
실은 빛나지 않았다.
그러나 끊어지지도 않았다.
아레가 말했다.
“박수가 침묵을 덮지 않도록.”
푸리나가 말했다.
“침묵이 박수를 삼키지 않도록.”
그 실은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머물렀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마당에는 다시 작은 소리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프를 젓는 소리.
붕대를 가는 소리.
아이들이 낮게 속삭이는 소리.
누군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는 소리.
푸리나는 그것을 듣고 말했다.
“아레.”
“말하렴.”
“너는 진짜 조용한데, 엄청 강하게 끼어드는구나.”
아레는 부드럽게 웃었다.
“어머니란 본래 그렇단다.”
푸리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랑 좀 통할지도 모르겠네.”
“그레이?”
“우리 쪽의 장부와 현실과 잔소리의 어머니.”
멀리서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군주님, 들립니다.”
푸리나는 움찔했다.
아레는 낮게 웃었다.
“좋은 아이들이 많구나.”
“응.”
푸리나는 마당을 보았다.
“그래서 조명을 끌 수가 없어.”
아레도 마당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단다.”
그날 밤, 야전 여관의 마당에는 두 가지가 함께 남았다.
아이들의 작은 공연.
그리고 죽은 자들의 이름.
사람들은 울었고, 웃었고, 다시 수프를 먹었다.
누군가는 잠들었고, 누군가는 오래 깨어 있었다.
누군가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했고, 누군가는 그 이름을 듣고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몽골의 말발굽은 아직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고, 내일도 누군가는 다칠 것이며,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만큼은, 박수와 침묵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박수는 산 자를 일으켰고,
침묵은 죽은 자를 잊지 않게 했다.
그리고 두 여왕은 알았다.
삶이라는 무대에는 조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대 뒤 어둠에도, 이름을 놓아둘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