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정리/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1190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작성자 여관◆zAR16hM8he작성일 2026-05-08 (금) 01:04:15갱신일 2026-05-13 (수) 19:12:03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 《아포리아의 교실》

##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 1막 — 책상 위에서 답을 내려다보다

#### — 좋은 답일수록, 때로는 다른 자리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 —

레이튼은 정말로 책상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교실에 앉아 있는 이들은 평범한 학생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불가리아의 차르를 자처하는 왕도 위의 군주였고, 한 사람은 니케아의 포르피로게니타이자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는 어린 황제였으며, 한 사람은 튜튼 기사단의 호흐마이스터였다. 그런 이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서라는 말은, 수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모욕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교실 뒤편 창가에 서 있던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수업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문 옆에 서서, 이 기묘한 정적이 무대 위에서 어떤 호흡으로 바뀌는지 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책상 위에 올라서라?”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대는 지금 내게 장난을 권하는 건가?”

“아닙니다.”

레이튼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장난은 아닙니다. 다만, 장난처럼 보일 수는 있겠군요. 많은 좋은 수업이 처음에는 조금 우스워 보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모욕받았다고 화내기에는 너무 영리했고, 순순히 따르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다. 책상은 낮았다. 그러나 그 낮은 나무판 위에 올라선다는 행위는 이상하게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왕좌도, 말안장도, 전장의 언덕도 아니었다. 책상. 학생이 노트를 펼치는 곳. 답을 쓰고 지우는 곳.

요안나는 책상 위를 보았다가 레이튼을 보았다.

“정말 올라서도 되나요?”

“오늘의 수업에서는 그렇습니다, 폐하.”

“떨어지면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그 경우에는, 먼저 손을 내밀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요안나는 작게 웃었다.

“그것도 수업인가요?”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가장 늦게 반응했다. 그녀는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예의 바르고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뒤에 아주 뚜렷한 불편함이 있었다. 전장에서 말을 타고 돌진하는 것보다, 회의장에서 죄 많은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지금 이 나무 책상 위에 올라서는 일이 더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레이튼 경. 기사단장으로서, 저는 상당수의 기행을 보아왔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이것은 그중에서도 조금 독특합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짧게 적었다.

**수업 방식: 책상 위에 올라서기. 학생 반응: 대체로 부정적.**

레이튼은 호흐마이스터에게 말했다.

“불편하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은, 때로 거절하기 더 어렵게 만든다. 명령이라면 복종하거나 반박하면 된다. 하지만 초대라면, 자기 마음의 이유를 살펴야 한다.

“거절할 수 있다면, 권유의 무게가 더 커지는군요.”

“그렇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질문은 대개 명령보다 불편합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낮게 말했다.

“이 수업, 시작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군.”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좋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꽤 정확한 출발점입니다. 이유 없이 순응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많지요.”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말은 그녀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레이튼은 그녀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반항도 수업의 일부로 놓았다.

요안나가 먼저 일어섰다.

그녀는 책상 위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푸리나가 아주 살짝 몸을 움직였지만, 레이튼이 먼저 가까이 서서 손을 내밀었다. 요안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균형을 잡았다. 책상은 조금 삐걱였다. 그녀는 잠깐 놀랐지만, 곧 웃었다.

“정말 다르게 보여요.”

교실은 조금 높은 곳에서 보아도 교실일 뿐이었다. 그러나 요안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서는 칠판이 낮아 보였고, 창밖의 빛이 더 가까워 보였으며,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가 같은 높이로 놓였다.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높이였다. 왕좌보다 낮고, 의자보다 높은 기묘한 자리.

알렉산드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마침내 일어섰다.

“폐하께서 올라섰는데, 내가 앉아 있을 수는 없겠지.”

그녀는 책상 위에 올라섰다. 요안나보다 훨씬 단단한 동작이었다. 발을 올리는 순간부터 중심이 잡혀 있었고,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장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사람의 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책상 위에 선다는 것은 전혀 왕답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서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예절 바르게 장갑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렸다.

“책상에게 무례를 범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레이튼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책상도 오늘 수업의 일원으로 존중해주시면 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끔 책상에게도 기회를 줍니다.”

“그렇군요.”

호흐마이스터는 결국 올라섰다. 동작은 우아했고, 조금 뻣뻣했다. 그녀는 책상 위에 선 뒤에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반듯해서, 책상이 작은 연단처럼 보였다.

세 사람이 책상 위에 섰다.

알렉산드리나, 요안나, 호흐마이스터.

각자 왕도와 평화와 책임이라는 답을 들고 온 이들이, 교실의 작은 책상 위에 서 있었다.

레이튼은 칠판 앞에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보이는 것을 말해주시겠습니까?”

알렉산드리나가 바로 말했다.

“교실이다.”

“조금 더.”

“책상들이 있고, 칠판이 있고, 그대가 있다. 푸리나 전하와 그레이 경, 미하일라 황제도 보인다.”

“그리고?”

알렉산드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레이튼은 재촉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왕좌가 없다.”

그 말이 교실에 내려앉았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요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서는 모두가 조금 이상하게 같아 보여요. 황제도, 차르도, 기사단장도. 책상 위에 올라서니까 더 높은데, 이상하게 더 학생 같아요.”

푸리나가 미소 지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창밖을 보았다. 그녀는 자기 책상 위에서 교실의 뒤편과 문, 창문,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기사단장다운 시야였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는 작게 말했다.

“숨을 곳이 줄어드는군요.”

레이튼은 그녀를 보았다.

“높아졌는데도 말입니까?”

“예. 구석에 앉으면 몸은 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서면 자세가 드러납니다.”

“좋은 관찰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레이튼은 칠판으로 돌아섰다. 그는 물음표 아래에 세 개의 문장을 적었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세 문장이 칠판 위에 나란히 놓였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조금 죽였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조용히 그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레이튼은 다시 학생들을 보았다.

“여러분의 답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첫 문장을 보았다. 자기 입으로 말했을 때와 달랐다. 글자로 적히니 문장은 더 차갑고, 더 단단하고, 더 멀어 보였다.

요안나는 두 번째 문장을 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핵심이었다. 짧고 밝고, 너무 크다. 칠판에 적히자 그 말은 교실을 넘어서려는 듯했다.

호흐마이스터는 세 번째 문장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장갑 안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레이튼은 말했다.

“이제 질문하겠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폐하. 그 문장은 폐하를 앞으로 걷게 합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레이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문장은 폐하가 멈추어 숨을 고를 권리도 허락합니까?”

알렉산드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책상 위의 그녀는 조금 높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높이는 왕좌의 높이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권위가 없었다. 대신 문장이 더 잘 보였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문장은 그녀를 살렸다. 그녀는 그것을 안다. 그 문장 없이 자신은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왕의 혈통을 타고난 것이 왕이 아니라, 왕도를 걷는 이가 왕이라는 가르침.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는 결심. 그것은 그녀를 낮은 자리에서 끌어올린 빛이었다.

하지만 레이튼은 다른 걸 묻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서, 그녀가 한 번쯤 멈출 수 있는가.

알렉산드리나는 낮게 말했다.

“멈추면, 뒤처진다.”

“그렇습니까?”

“부족한 자는 증명해야 한다.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다시 피를 묻는다. 태생을 묻고, 정통성을 묻고, 내 왕도를 흉내라고 부를 것이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려움은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 마라.”

“쉽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은 칠판의 문장을 가리켰다.

“그러나 폐하. 왕다움이 결핍을 숨기기 위해 계속 달리는 것이라면, 폐하께서는 언제 왕이 되십니까?”

알렉산드리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레이튼은 물러서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입니까?”

침묵.

“아니면, 결핍을 가진 채로도 백성 앞에 설 수 있을 때입니까?”

교실은 조용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 문장이 그녀의 칼처럼 보였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칼이기도 했고, 채찍이기도 했다. 혹은 오래 쥔 탓에 손바닥의 일부가 되어버린 무언가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억지로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말했다.

“오늘은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보았다.

“그럼 왜 물었지?”

“답이 필요할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질문을 남겨두기 위해서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불쾌한 듯했지만, 그 질문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왕도는 전진의 답. 그러나 멈춤을 허락하는가의 질문 발생.**

---

레이튼은 요안나를 보았다.

요안나는 책상 위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나처럼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 ‘모든 이에게 평화를’라는 답은 폐하를 열어줍니까?”

요안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 말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로마를 너무 좁게 보았을 거예요. 궁전과 혈통과 문장으로만요. 하지만 로마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있을 수 있잖아요. 손을 잡으면, 언젠가 외국인도 로마 시민이 될 수 있고, 적이었던 사람도 함께 살 수 있고.”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 밝음은 얕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진심이어서, 교실 안을 잠시 따뜻하게 만들었다.

레이튼은 그 따뜻함을 끊지 않았다. 그는 따뜻한 말일수록 더 조심스럽게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네.”

“‘모든 이’라는 말은 아주 넓습니다.”

“네.”

“그 넓은 말 안에서, 오늘 폐하가 가장 먼저 잡아야 할 손은 누구의 손입니까?”

요안나는 멈췄다.

그 질문은 그녀의 이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아주 작은 곳으로 가져왔다. 모든 이. 그 말은 하늘처럼 넓다. 그러나 손은 하나씩 잡아야 한다. 사람의 손에는 크기가 있고, 온도가 있고, 상처가 있고, 때로는 거부도 있다.

요안나는 책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칠판이 보였고, 레이튼이 보였고, 푸리나가 보였고, 그레이가 보였고, 창가의 미하일라가 보였다. 그리고 문득 그녀는 거리에서 만났던 아이들, 항구의 사람들, 병사들, 자기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 로마 시민이라고 불리기 전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요안나는 작게 되뇌었다.

“그런데 모든 이를 한 번에 안을 수는 없네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그렇습니다.”

“그럼 저는 매번 한 사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다만, 한 사람만 보고 모두를 잊어서도 안 되겠지요.”

요안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들었다.

“어려워요.”

“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답은 대개 어렵습니다.”

요안나는 칠판의 자기 문장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말은 여전히 좋았다. 여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옆에 아주 작은 손 하나가 생긴 듯했다. 누구의 손부터 잡을 것인가.

요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오늘 가장 가까운 손을 놓치지 않는 평화.”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첫 문장입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요안나: 보편적 평화는 구체적 손에서 시작되어야 함. 단, 구체성에 갇혀 보편을 잃지 않을 것.**

푸리나는 그레이의 기록을 보고 작게 말했다.

“오늘 기록 멋있는데.”

그레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수업의 성격상 문장 선택에 주의하고 있습니다.”

죠니가 있었다면 한마디 했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레이튼의 교실이었다. 푸리나는 그 빈자리를 조금 느끼고, 혼자 웃었다.

---

마지막으로 레이튼은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책상 위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는 학생이라기보다, 작은 연단 위에 선 기사단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이튼은 이미 보았다. 높은 곳에 서니 오히려 숨을 곳이 줄어든다고 말했던 그녀를.

칠판에는 그녀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레이튼은 천천히 물었다.

“호흐마이스터. 그 문장은 당신을 지탱합니까?”

“그렇습니다.”

대답은 빠르고 예의 있었다.

“저는 기사단의 우두머리입니다. 때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려야 하며, 때로는 기사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 없는 일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책임을 외면한다면, 저는 호흐마이스터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군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죄를 짊어지는 것과, 자신을 영원히 벌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교실의 공기가 조금 차가워졌다.

호흐마이스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짧았지만 깊었다. 란트마이스터의 시야 너머로 교실을 보려 했던 사람.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던 사람. 기사단의 모든 죄를 장부처럼 접어 자기 안에 넣는 사람. 그녀는 책임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죄를 지은 자가 벌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 답은 자연스럽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되물었다.

“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구원받지 않겠다고 미리 판결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호흐마이스터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말투는 여전히 예의 있었다.

“레이튼 경은 상당히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렇겠지요.”

푸리나는 조용히 그들을 보았다. 호흐마이스터의 표정은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장이 그녀의 안쪽에서 어딘가 걸린 것은 보였다.

레이튼은 계속했다.

“책임은 미래를 향합니다. 무엇을 수습할 것인가, 무엇을 막을 것인가, 누구에게 갚을 것인가를 묻지요.”

그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그러나 자기처벌은 때로 과거만 바라봅니다. 나는 이미 더러워졌으니, 나는 끝내 쉬어서는 안 되며, 나는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말했다.

“그 둘을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질문합니다.”

레이튼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당신의 죄는 당신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는 감옥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레이튼은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기다렸다.

교실 바깥의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교실은 잠시 기다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미하일라는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그녀는 창가에서 레이튼을 보고 있었다. 열린 답의 불안을, 그는 어디까지 함께할 것인가.

호흐마이스터는 마침내 말했다.

“저는 아직 그 질문에 답하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좋습니까?”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도, 때로는 성급한 답보다 정직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말을 듣고 아주 희미하게 눈을 내렸다.

“그렇다면 보류하겠습니다.”

“예. 오늘은 보류해도 됩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책임과 자기처벌의 구분 질문 발생. 답변 보류.**

---

세 사람은 아직 책상 위에 있었다.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이제 내려오셔도 됩니다.”

요안나가 먼저 내려왔다. 레이튼이 손을 내밀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스스로 내려왔다. 다만 내려온 뒤, 책상을 한 번 쓰다듬었다.

“높은데, 낮았어요.”

레이튼은 웃었다.

“좋은 표현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내려오며 말했다.

“나는 이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남았다.”

“그렇다면 수업은 시작된 셈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대는 참 얄밉게 말하는군.”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책상 위에서 내려오는 동작마저 예의 있었지만, 그녀는 아주 잠깐 바닥을 확인하듯 내려다보았다. 자기 발이 어디에 닿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레이튼은 그 장면을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들었다.

“예. 다만.”

“다만?”

“타인의 시야가 아니라 자기 발로 서는 일은, 예상보다 불편하군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수업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것 같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를 보았다.

“칭찬입니까?”

“그렇게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예의상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레이는 펜을 움직였다.

푸리나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레이, 뭘 적었어?”

그레이는 기록판을 보며 대답했다.

“학생 전원, 다른 높이에서 답을 바라봄. 즉각적 결론 없음. 질문 잔류.”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질문은 남았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미하일라는 레이튼을 보았다.

“그리고 남은 질문은, 답을 요구하는 날을 향해 간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계속 알도록.”

“예.”

짧은 대화였다. 그러나 무거웠다. 미하일라는 레이튼의 수업을 막지 않았다. 다만 교실이 현실과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창문 하나를 열어둔 것처럼 서 있었다.

레이튼은 다시 학생들을 보았다.

“오늘은 여러분의 답을 다른 높이에서 보았습니다. 다음 수업에서는 그 답들을 조금 더 가까이 보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물었다.

“더 가까이?”

레이튼은 칠판의 세 문장을 보았다.

“예.”

그는 분필을 들었다.

“답은 멀리서 보면 문장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상처와 선택과 두려움과 소망이 섞인 살아 있는 구조이지요.”

그레이가 펜을 멈췄다.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조금 낮아졌다.

레이튼은 칠판 위의 물음표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어디서 다쳤습니까?**

그리고 말했다.

“다음 수업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진행하겠습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2막 — 성급한 답들의 해부**

그 아래, 책상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한 줄이 남았다.

**— 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래된 상처와 아직 살아 있는 소망이 함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