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1여관◆zAR16hM8he(55e5d5d9)2026-05-08 (금) 23:33:02
좋아. 그러면 방금 전 장면에서 바로 이어서, 출정연설 본편까지 작성할게.

이번 엽편은 논캐논 방어전 서막 장면이고, 핵심은 푸리나가 룸 술탄국의 침공 앞에서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이름을 다시 선언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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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 관문의 막이 오른다

“그들이 우리를 무엇이라 부르든.”

푸리나 헤툼의 목소리가 성벽 위를 지나갔다.

바람은 차가웠다.

타우루스 산맥에서 내려오는 밤바람은 사막의 열기를 품은 적군의 횃불과 달랐다. 그것은 바위틈을 지나며 날카로워졌고, 성벽의 틈새를 훑고 지나가며 병사들의 목덜미를 식혔다. 성벽 아래로는 피난민들의 마차가 아직 끝나지 않은 행렬처럼 늘어서 있었다. 아이의 울음, 말의 투레질, 쇠고리를 조이는 소리, 여관좌 사제들이 낮게 읊는 기도, 병사들이 방패끈을 다시 잡아당기는 소리가 한데 섞였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위로, 푸리나의 목소리가 다시 내려앉았다.

“그 이름은 아직 이 성벽을 통과하지 못했다.”

성벽 위의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병사들은 서로를 보았다.
피난민들은 고개를 들었다.
활잡이들은 화살통 위에 얹은 손을 잠시 멈췄다.

그 문장은 적을 향한 조롱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룸 술탄국의 군세는 산길 아래에 있었다. 그들의 깃발은 밤바람 속에서 흔들렸고, 횃불은 뱀의 눈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분을 가지고 왔다. 몽골과 손잡은 배신자. 초원의 그림자에 붙은 작은 왕국. 아나톨리아의 관문을 더럽힌 자들.

그들이 붙인 이름은 이미 산길 아래에서 외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 이름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성벽 가장자리까지 걸어갔다.

그레이가 뒤에서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앞으로 나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발끝이 성벽의 끝을 넘지는 않았다.

오늘의 푸리나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분수대 위에 올라가 즉흥극을 외치던 푸리나가 아니었다.
길거리 악사에게 탬버린을 빼앗아 흔들던 푸리나도 아니었다.

그녀는 군주였다.

하지만 차갑게 굳은 왕은 아니었다.

그녀는 극장주였다.
무대 위에 오른 배우였고, 동시에 모든 배우가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조명을 올리는 사람이었다.

“저들은 우리를 몽골의 개라 부른다.”

성벽 위가 조금 술렁였다.

푸리나는 그 술렁임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들으라는 듯, 한 박자 기다렸다.

“배신자라 부른다. 산길에 웅크린 작은 왕국이라 부른다. 응징받을 관문이라 부른다.”

그녀는 성벽 아래의 횃불을 보았다.

“좋다. 그 말들이 그들의 진영에서 울리게 두어라. 그 말들은 그들의 입에서 태어난 이름이다.”

푸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녀의 시선은 적이 아니라 성 안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러나 오늘, 이 성벽 위에서 우리의 이름은 우리가 정한다.”

그 말이 성벽 위에 박혔다.

레이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는 그 순간, 푸리나가 자신이 던진 질문을 받아 제대로 답하고 있음을 알았다. 적이 붙인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 이름이 어떤 전제 위에 있는지 벗겨내는 것. 전쟁은 칼과 화살로만 시작되지 않는다. 전쟁은 먼저 이름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지금 푸리나는 그 이름을 빼앗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배신자의 왕국이 아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우리는 타인의 그림자에 숨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발밑에 놓인 돌계단이 아니다. 우리는 지나가는 군대가 밟고 넘어갈 문턱이 아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성문을 가리켰다.

“우리는 관문이다.”

성벽 아래, 성문 곁에 서 있던 문지기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관문이다. 하지만 저들이 말하는 관문이 아니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금 더 깊어졌다.

“저들은 관문을 밟고 지나가는 것으로 안다. 열거나 부수거나, 자기 깃발을 꽂기 위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녀는 성 안쪽을 보았다.

피난민들이 있었다.

등에 아이를 업은 여인.
노인을 부축한 젊은 병사.
수레 위에 누워 있는 부상자.
품속에 작은 성화를 쥔 아이.
마차 뒤편에 조용히 실려 온 아직 장례 치르지 못한 시신.

그레이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들을 보고 말했다.

“관문은, 뒤에 있는 자들이 다음 길로 넘어가도록 지키는 것이다.”

그 말에 성벽 위의 병사들 몇 명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뒤에는 나라가 있었다.

추상적인 왕국이 아니었다.
지도 위의 색이 아니었다.
세금 장부의 숫자도 아니었다.

수프를 끓이는 여관.
돌을 나르는 석공.
빵을 굽는 손.
아직 울고 있는 아이.
이름을 잃지 않으려는 죽은 자.
그리고 자기들이 지켜야 할, 너무 구체적인 얼굴들.

푸리나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

“병사들이여.”

그녀가 그들을 불렀다.

그 호명은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대 위의 배우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대들은 오늘 죽으러 가는 자들이 아니다.”

성벽 위의 젊은 병사 하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들은 성벽 위에 놓인 돌이 아니다. 장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장기말도 아니다. 누군가의 연설을 듣고 겁을 잊어야 하는 인형도 아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대들은 두려울 것이다.”

그 말에 몇몇 병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두려움.

그 단어를 군주가 먼저 입에 올렸다.

푸리나는 피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라.”

성벽 위가 다시 술렁였다.

죠니는 팔짱을 풀었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말했다.

“두려워하라. 당연하다. 화살은 살을 찢고, 칼은 뼈를 가르며, 불은 집을 삼킨다. 내일 해가 뜨면, 우리 중 누군가는 다시 이 성벽 위에 서지 못할 수도 있다.”

바람이 망토를 흔들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고통이 없을 것이라 말하지 않겠다. 모두가 상처 없이 돌아올 것이라 말하지 않겠다. 모든 죽음을 막겠다고 거짓말하지 않겠다.”

그레이의 손이 장부 위에 놓였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그레이가 원한 연설이었다.
현실을 배신하지 않는 연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하겠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맑아졌다.

“두려움에게 그대들의 배역을 넘기지 마라.”

성벽 위의 침묵이 다시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은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그 두려움이 들켰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것만으로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푸리나는 오른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겁이 나도 방패를 들어라. 손이 떨려도 옆 사람의 숨을 들어라. 무릎이 꺾일 것 같아도, 한 걸음만 더 서라.”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좋아.”

그는 병사들의 손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방패끈을 너무 세게 쥐고 있던 손들이, 이제는 다시 고쳐 잡고 있었다. 힘이 빠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단단했다. 다만 부러질 만큼 굳어 있던 손이, 싸울 수 있는 손으로 바뀌고 있었다.

푸리나는 성벽 아래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피난민들이여.”

성 아래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피난민.

그 이름은 초라했다.
집을 잃은 자.
도망친 자.
남의 성 안에 들어온 자.

푸리나는 그 이름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그대들은 짐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대들은 이 성을 무겁게 만드는 짐이 아니다. 그대들이 오기 때문에 식량이 줄고, 방이 부족하고, 병사들이 더 오래 서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레이는 그 말에 순간 눈을 들었다.

너무 솔직했다.

하지만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들이 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손이 성 안쪽을 향했다.

“그대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성 아래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리를 필요로 한다. 물을 필요로 한다. 잠을 필요로 한다. 울 곳을 필요로 한다.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여관의 문은 지친 여행자에게 열리기 위해 존재한다.”

여관좌 사제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성 안의 여러 여관에서, 희미한 빛이 하나둘 켜졌다. 완전한 신술 발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관좌 신도들이 푸리나의 말에 응답하듯, 문 앞의 등불을 높이 들었다.

“그러니 그대들은 살아서 성 안에 들어와라. 부끄러워하지 말고 물을 마셔라. 울어야 한다면 울어라. 이름을 말할 수 있다면 말해라. 아직 말할 수 없다면, 그레이가 기다릴 것이다.”

성벽 위의 그레이가 조금 놀란 듯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 성 안에서 그대들은 숫자가 아니다. 피난민 몇 명, 부상자 몇 명, 사망자 몇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우리는 숫자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지킨다.”

그레이는 장부를 꼭 쥐었다.

성 아래에서 한 노인이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 하나가 어머니의 치마폭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가능성들을 보았다.

이 말이 없었던 세계.
피난민들이 성 안에서 끝내 자신들이 짐이라고 믿게 되는 세계.
병사들이 그들을 원망하게 되는 세계.
명부에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이 원한으로 남는 세계.

그 가능성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현실에서는, 다른 길이 열렸다.

푸리나는 다시 성벽의 병사들을 보았다.

“귀족들이여. 기사들이여. 장교들이여.”

이번에는 위쪽의 사람들을 불렀다.

“오늘 그대들의 이름은 더 무겁다. 그대들은 더 좋은 갑옷을 입었고, 더 좋은 말을 탔으며, 더 오래 훈련받았다. 그렇다면 오늘 더 오래 서라.”

죠니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푸리나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곳도 없었다.

“그대들의 명예는 적장의 목을 베는 데만 있지 않다. 겁먹은 병사가 자기 방패를 다시 들 수 있게 옆에 서는 것. 피난민 수레가 성문을 통과할 때까지 말머리를 돌리지 않는 것. 부상자를 보고도 전열을 버리지 않는 것.”

그녀는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기사란, 가장 늦게 퇴장하는 배우다.”

기사단 사이에서 낮은 숨소리가 흘렀다.

그것은 환호는 아니었다.
하지만 긍지였다.

푸리나는 이제 모두를 보았다.

병사도, 피난민도, 귀족도, 사제도, 장인도, 가신도.

성벽 위와 성벽 아래.

무대와 객석이 갈라져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이곳은 이미 하나의 극장이었다.

하지만 아직 [여관:극장]을 완전히 펼치지는 않았다.
그것은 전투에서 써야 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완전한 신술이 아니라, 첫 조명.

푸리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들어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사람들아.”

그녀의 목소리에 아주 얇은 신력이 섞이기 시작했다.

여관좌의 휴식.
길 위의 사람들을 쉬게 하고,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
푸리나의 극장.
자기 삶을 한 편의 이야기로 이해하게 하는 힘.

성벽의 돌이 조금 따뜻해졌다.

아주 조금.

낡은 방패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더 맞게 느껴졌다.
병사의 숨이 자신의 것처럼 돌아왔다.
피난민의 발밑에 있던 돌길이 더는 타인의 성처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푸리나의 말은 영창이기도 했고, 연설이기도 했다.

고정된 주문이 아니었다.

그날 밤, 그 성벽 위에서만 가능한 기도문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성벽이 아니다.”

푸리나는 말했다.

“이곳은 막과 막 사이의 문이다.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모두가 숨을 고르는 어두운 통로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룸의 군세가 온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지막 장을 쓰러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아르메니아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왕관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장엄해졌다.

“이 나라의 장은 성벽을 쌓은 손으로 쓰였다. 바다로 나간 상인의 노래로 쓰였다. 여관의 난롯불로 쓰였다. 겨울에 아이를 품은 어머니의 숨으로 쓰였다. 죽은 자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장부로 쓰였다. 산길을 달린 기사의 창끝으로 쓰였다.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바라보며, 그래도 이 현실을 택한 이의 침묵으로 쓰였다.”

죠니, 그레이, 하융, 레이튼은 각자 자기 이름이 직접 불리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그 안에 자신들의 자리가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푸리나가 말했다.

“그 다음 줄은 그대들이 쓴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숨을 들이마셨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긴 대사가 아니어도 좋다. 후대의 시인이 그대들의 이름을 노래하지 않아도 좋다. 방패를 든 손 하나. 옆 사람을 잡아 끌어올린 손 하나. 성문을 닫지 않고 마지막 수레를 기다린 손 하나. 그런 손들이 모여 나라의 다음 문장을 쓴다.”

그레이는 조용히 눈을 내렸다.

이 연설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푸리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니 오늘, 나는 그대들에게 죽음을 명하지 않는다.”

성벽 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그대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다.”

더 깊은 침묵.

“나는 그대들에게 묻는다.”

레이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푸리나는 묻고 있었다.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은 자신의 이름을 누구의 입에 맡길 것인가?”

바람이 지나갔다.

“저 아래의 적이 붙인 이름에 맡길 것인가? 배신자, 겁쟁이, 응징받을 작은 왕국이라는 이름에 맡길 것인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스스로 정할 것인가?”

병사 하나가 방패를 다시 들었다.

“나는 관문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성문 옆 문지기가 허리를 폈다.

“나는 마지막 수레를 기다린 사람이라고.”

여관좌 사제가 등불을 들었다.

“나는 지친 여행자에게 문을 연 사람이라고.”

그레이가 장부를 품에 안았다.

“나는 숫자가 아니라 이름을 적은 사람이라고.”

죠니가 창을 세웠다.

“나는 다음 순간까지 달린 사람이라고.”

하융이 눈을 떴다.

“나는 많은 가능성 속에서 이 현실을 택한 사람이라고.”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나는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을 지킨 사람이라고.”

푸리나는 그 모든 대답을 듣는 듯했다.

실제로 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여관:극장]은 사람들의 소망을 감지했다.

그들의 두려움.
그들의 작은 결심.
그들의 부끄러운 망설임.
그들의 사랑.
그들의 분노.
그들의 살아남고 싶다는 욕망.

그 모든 것이 아직 어설픈 노래처럼 성벽 위에 떠올랐다.

《군상극: 아르메니아의 노래》의 아주 희미한 전조였다.

아직 완전한 합창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목소리가 처음으로 같은 무대 위에 올라오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좋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아주 잠깐, 사적인 푸리나의 경쾌함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오늘의 목표를 정하자.”

몇몇 병사가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군주님.”

그러나 푸리나는 성벽 위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그 말은 의외였다.

병사들이 서로를 보았다.

푸리나는 계속 말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적을 무찌르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시인들이 백 년 동안 술값 대신 써먹을 정도로 장엄한 전설이 되지 않아도 된다.”

죠니가 피식 웃었다.

레이튼도 찻잔이 있었다면 들었을 표정을 했다.

푸리나는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오늘의 목표는 하나다.”

그녀는 성문 뒤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 다음 아침을 보게 하는 것.”

성벽 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 문장은 쉽고, 짧고, 붙잡을 수 있었다.

“저 아이가 내일 수프가 뜨겁다고 투덜거리게 하는 것. 저 노인이 내일 아침에도 여관 사제에게 약이 쓰다고 불평하게 하는 것. 저 병사가 내일 자기 방패에 꽂힌 화살 수를 세며 괜히 허풍을 떨게 하는 것. 저 수레꾼이 내일 바퀴가 삐걱거린다고 욕하게 하는 것.”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작은 웃음이 흘렀다.

그 웃음은 놀라울 만큼 작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녀가 말했다.

“웃어라. 지금 웃을 수 있다면 웃어라. 두려워도 웃어라. 전쟁이 웃음을 빼앗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성벽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내일 아침의 불평이고, 따뜻한 수프이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시시한 농담이다.”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푸리나의 밝음은 가벼운 도피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을 알고 있었다.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명을 끄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

그녀의 말이 성벽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두려워도 서라.”

죠니의 눈이 움직였다.

그가 제안했던 짧은 말이 돌아왔다.

“막이 닫히기 전까지 서라.”

병사 하나가 따라 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옆 사람의 숨을 들어라.”

죠니가 조용히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패를 혼자 들지 마라.”

세르비아나 리투아니아의 군대처럼 실과 숲의 전술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병사들도 그 말을 이해했다. 혼자 버티는 방패는 쉽게 무너진다. 옆 사람과 맞물린 방패는 조금 더 오래 선다.

“성문이 닫히기 전까지, 마지막 이름이 들어오기 전까지, 마지막 수레가 지나가기 전까지.”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우리는 관문이 된다.”

그 순간 성벽 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여관:극장]이 완전히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벽이 무대가 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관객이 아니었다.
그들은 배역을 얻었다.

피난민들도 무대 밖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 장면의 이유였다.

여관좌의 사제들은 등불을 들어올렸다.
활잡이들은 화살을 확인했다.
문지기들은 성문 고리를 다시 잡았다.
기사들은 말의 고삐를 당겼다.

푸리나는 마지막으로 성벽 아래의 적을 보았다.

“룸의 군세가 온다.”

그녀가 말했다.

“좋다. 오라.”

횃불들이 산길 아래에서 흔들렸다.

“그들이 이 관문을 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의 이름을 넘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성벽 위의 모든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갔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사람들아.”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한 연설이자, 신술의 문턱에 선 기도였다.

“그대들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벽 위의 등불이 흔들렸다.

“그대들의 이야기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피난민들 사이에서 누군가 흐느꼈다.

“그대들의 이름은 아직 타인의 입에 넘겨지지 않았다.”

병사들의 방패가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니 오늘 밤.”

푸리나의 눈이 빛났다.

“막을 올려라.”

그녀는 선언했다.

“이 성벽은 우리의 무대다. 이 성문은 우리의 관문이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첫 장면이다.”

한 박자.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듯한 정적.

그리고 푸리나가 마지막 구절을 말했다.

“그대여, 박수는 아직 이르다.”

그녀는 웃었다.

“대단원의 막은 아직 아니다. 하지만 서막은 올랐다.”

그 순간,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 방패를 창대로 두드렸다.

쾅.

한 번.

곧 옆의 병사가 따라 했다.

쾅.

또 다른 병사가.

쾅.

성벽 위에 소리가 번졌다.

쾅. 쾅. 쾅.

방패와 창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불규칙했다.
그러나 곧 박자가 생겼다.

죠니가 그 박자를 들었다.

그는 기사들에게 짧게 말했다.

“숨. 손. 옆 사람. 한 걸음. 지금.”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융은 성벽 위에 겹치는 가능성을 보았다.

무너지는 가능성은 여전히 있었다.
죽는 가능성도, 패하는 가능성도, 성문이 불타는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다른 가능성이 생겼다.

방패가 한 박자 더 오래 버티는 가능성.
겁먹은 병사가 도망치지 않고 옆 사람을 붙잡는 가능성.
피난민이 자신을 짐이라 여기지 않고 이름을 말하는 가능성.

작은 가능성.

하지만 하융은 알고 있었다.

인간의 역사는 때때로 그런 작은 떨림에서 갈라진다.

레이튼은 성벽 아래의 적진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붙인 이름만을 상대하지 않겠군요.”

그레이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연설 종료. 각 구역 책임자는 위치로. 피난민 명부 작성 계속. 부상자 후송로는 비워두십시오. 군주님께서는—”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군주님께서는 물을 드셔야 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감동적인 순간인데?”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마셔.”

하융도 조용히 말했다.

“다른 가능성에서는 목이 쉬었소.”

레이튼이 덧붙였다.

“목소리는 오늘 가장 중요한 악기였습니다.”

푸리나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결국 물잔을 받아 들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물을 마시고, 작게 웃었다.

“내 가신들은 낭만이 부족해.”

그레이가 즉시 대답했다.

“낭만을 유지하려면 수분이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짧았고, 병사들의 방패 소리에 묻혔다.

하지만 네 가신은 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성벽 아래에서 룸 술탄국의 군세가 점점 가까워졌다.

내일이면 화살이 날아올 것이다.
칼이 부딪힐 것이다.
피가 흐를 것이다.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푸리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성벽 위의 등불들을 보았다.

아직 꺼지지 않은 조명들.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막은 올랐어.”

죠니가 창을 어깨에 걸쳤다.

“이제 달릴 차례네.”

하융은 성벽 너머를 보았다.

“많은 가능성이 죽겠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아직 어느 별에도 이름은 붙지 않았습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오든, 이름은 기록하겠습니다.”

푸리나는 네 사람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은 그녀였지만, 무대 아래의 기둥은 그녀의 가신들이 받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성벽 아래의 사람들을 보았다.

병사들이 방패를 두드렸다.

쾅. 쾅. 쾅.

피난민들이 그 박자를 들었다.

여관좌 사제들이 등불을 들었다.

성문 위의 깃발이 밤바람 속에서 펄럭였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방어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서막은 이미 올랐다.

그리고 그날 밤, 성벽 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공격받는 작은 왕국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관문이었다.

뒤에 있는 이름들을 다음 막으로 넘기기 위해, 두려움을 안고도 서는 관문.

그것이 그날 푸리나 헤툼이 그들에게 준 배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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