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13여관◆zAR16hM8he(c2970e66)2026-05-23 (토) 03:24:05
맞아. 순서가 꼬였네.
그러면 개정된 1막에서 이어지는 2막으로, 답을 완성하지 않고 상처와 질문만 여는 방향으로 작성할게.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2막 — 성급한 답들의 해부
— 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래된 상처와 아직 살아 있는 소망이 함께 있다 —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레이튼은 칠판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교탁 옆 작은 탁자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었다. 주전자의 물소리는 조용했고, 찻잔에 닿는 물줄기는 일정했다. 전쟁과 왕권과 기사단의 죄를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소리였다. 그래서 오히려 교실 안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칠판에는 지난 수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그 아래에는 물음표 하나.
그리고 세 개의 문장.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마지막 줄에는 레이튼이 1막 끝에 적어둔 질문이 있었다.
어디서 다쳤습니까?
그레이는 그 문장을 한동안 보았다. 그러고는 기록판에 적었다.
2막 시작. 질문: 답의 기원과 상처.
푸리나는 교실 뒤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번에는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늘 무대의 중심은 레이튼과 세 학생이었다. 푸리나는 그저, 말이 무대 위에서 너무 멀리 날아가지 않도록 숨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레이튼은 찻잔 세 개를 놓았다.
“오늘은 칠판 앞에서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찻잔을 보았다.
“차부터 주시는군요.”
“지난 수업에서 폐하께서 제안하셨으니까요.”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그걸 정말 반영하실 줄은 몰랐어요.”
“좋은 제안은 반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더 조심해서 말해야겠네요.”
“그 또한 좋은 배움일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아직 마시지는 않았다. 다만 손끝으로 온도를 확인했다. 그녀에게 차는 여유라기보다, 질문이 오기 전 잠시 손을 데우는 물건에 가까웠다.
요안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그녀는 차를 좋아하는 아이처럼 보였지만, 오늘은 그 따뜻함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녀 역시 마시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았다. 마치 찻잔이 자신에게 허락된 물건인지 먼저 확인하려는 듯했다.
레이튼은 말했다.
“오늘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답이 틀렸는가가 아닙니다.”
그는 칠판의 세 문장을 보았다.
“그 답이 어디서 태어났는가입니다. 답은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답은 상처에서 태어나고, 어떤 답은 소망에서 태어나며, 어떤 답은 상처와 소망이 서로를 붙잡은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오늘은 답을 해부하는 건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은 그렇습니다. 다만 죽이기 위한 해부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진찰에 가깝지요.”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진찰이라면, 환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그러므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힘은 약해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제로 얻은 답은 대개 빠릅니다. 그러나 빠른 답은 자주 자기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필요한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입으로 견딜 수 있는 답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 표현은 신중하군요.”
“오늘 수업에서는 신중해야 하니까요.”
미하일라는 창가에 서서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의 공기는 그녀가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실의 무게를 잃지 않았다.
레이튼은 첫 번째 찻잔을 알렉산드리나 앞에 밀어두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폐하의 답부터 가까이 보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첫 문장을 보았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녀는 그 문장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할 수 없었다. 그 문장은 그녀를 세운 말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부족하다고 불렀고, 어떤 이는 흉내라고 불렀고, 어떤 이는 피가 모자라다 했다. 그 말들 사이에서 그녀는 위대한 왕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흉내는 공부가 되었고, 공부는 길이 되었고, 길은 왕도가 되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께서 처음으로 자신을 ‘가짜’라고 부른 것은 언제입니까?”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왕도를 묻지 않았다. 정통성도, 군대도, 정책도 묻지 않았다. 더 오래된 곳을 찔렀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김이 얇게 올라오고 있었다.
“제가 먼저 말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했습니다. 피가 부족하다고. 이름이 부족하다고. 왕좌에 닿으려면 정통한 자의 그림자라도 빌려야 한다고. 처음에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화가 났다고 말하면 너무 단순하겠네요.”
그녀는 조금 웃었다.
“무서웠어요.”
푸리나가 숨을 작게 삼켰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그 말이 사실일까 봐요. 제가 아무리 걸어도, 결국 흉내에서 끝날까 봐. 그래서 배웠습니다. 흉내낼 거라면 가장 위대한 것을 흉내내야 한다고. 가짜라면,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걸어야 한다고.”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흉내가 단순한 연기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대제의 길을 배우고, 군대를 배우고, 방패와 창을 배우고, 왕도를 배웠습니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말은 저를 무너뜨린 말이 아니라, 저를 일으킨 말이었어요.”
“그 말이 폐하를 살렸군요.”
“네.”
대답은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했다.
레이튼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말은 폐하를 일으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곧장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그 작은 멈춤을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즉답 직전 정지.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대체로요.”
레이튼은 그 말을 그대로 두었다.
대체로.
좋은 답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사람은 종종 그런 말을 쓴다. 언제나, 반드시, 완전히 같은 말이 아니게 될 때.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알렉산드리나는 낮게 말했다.
“때로는 저를 채찍질합니다.”
레이튼은 재촉하지 않았다.
“제가 멈추면, 다시 가짜가 될 것 같아요. 쉬면, 사람들이 제 안의 부족함을 볼 것 같습니다. 틀리면, 그들은 말하겠죠. 보라, 저것이 한계라고. 저것이 피의 부족함이라고. 저것이 왕이 아니라 흉내였다는 증거라고.”
그녀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그래서 저는 더 단정해야 했습니다. 더 강해야 했고, 더 위대해야 했고, 더 왕다워야 했어요.”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께서는 그것을 원하셨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보았다.
“네.”
그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마도요.”
레이튼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하셨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교실 안의 공기가 아주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잔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확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 알렉산드리나는 위대해지고 싶었다. 왕도를 걷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한 번도 쉬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가짜라는 말을 지우기 위해 걷는 길이, 오히려 그 말을 영원히 등 뒤에 세워두는 길이 될까 봐.
“저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가짜라는 말을 버리지 못하겠어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말이 없으면, 제가 여기까지 온 길도 사라질 것 같으니까요. 제가 부족해서 시작한 길이었는데, 그 부족함을 없던 일로 하면…… 제가 배운 것도, 걸은 것도, 버틴 것도 다 거짓말이 될 것 같아요.”
알렉산드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그 말을 붙잡고 있으면, 저는 영원히 증명만 하다가 끝날 것 같기도 해요.”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답을 주지 않았다. “가짜는 출발점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 순간은 답을 정리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말이 어디서 다쳤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선생님.”
“예, 폐하.”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될까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가짜’는 타인의 판결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후 자기 왕도를 세우는 문장이 됨. 현재 상태: 버리면 걸어온 길이 사라질 것 같고, 붙잡으면 영원히 증명만 하게 될 것 같음. 답 미완성.
푸리나는 그 기록을 보았다.
답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다만 문장의 상처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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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찻잔은 요안나 앞에 놓여 있었다.
요안나는 이미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번 입을 열려다 닫았다. 요안나는 거리에서 사람의 마음을 배운 황제였다. 낮은 사람들의 말, 병사의 한숨, 어부의 농담, 아이들의 다툼을 들어온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레이튼이 묻는 것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상을 낮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이 누구의 얼굴을 통과해야 하는지 물으려 했다.
레이튼은 말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질문드리겠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든 이에게 평화를’라는 말을 처음 품었을 때, 폐하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모든 사람이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여쭙겠습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 안에서, 가장 먼저 얼굴이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 모든 사람을 떠올리고 싶었다. 로마 시민, 아직 시민이 아닌 사람, 병사, 상인, 아이, 어머니, 적, 이방인. 그녀의 로마는 손을 잡는 것으로 시작되는 로마였다. 그러나 레이튼은 지금 하나의 얼굴을 물었다.
요안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 만난 아이들이 있었어요.”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궁 밖에서요. 그 아이들은 저를 황제로 대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제 이름도 몰랐고, 제 혈통도 몰랐어요. 그냥 같이 뛰고, 같이 먹고, 같이 혼났어요. 그때 저는 이상하게 편했어요. 로마가 궁전보다 넓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마 그때였을 거예요.”
“그 아이들이 폐하의 평화에 들어 있습니까?”
“네.”
요안나는 작게 웃었다.
“아마 가장 먼저 들어 있었을 거예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폐하의 ‘모든 이’는 얼굴 없는 말이 아니군요.”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아까는 얼굴을 바로 말하지 못했을까요?”
“말이 너무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큰 말은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커지면, 처음 그 말을 태어나게 한 작은 얼굴들이 안쪽으로 숨어버리기도 하지요.”
요안나는 칠판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문장은 여전히 좋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 거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구체적인 얼굴. 흙 묻은 손. 같이 웃던 소리.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다음 질문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전의 숨이었다.
“폐하.”
“네.”
“그렇다면 ‘모든 이’라는 말 안에는, 폐하를 궁 안에 머물게 한 사람도 들어갑니까?”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작게 멈췄다. 알렉산드리나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고, 호흐마이스터도 눈을 들었다.
창가에 서 있던 미하일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크게 보였다.
요안나는 레이튼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칠판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 창가에 선 보라색 황제를 느꼈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든 황제. 제국의 운명을 자기 화살에 얹은 사람. 그리고 요안나에게는, 아버지의 장례와 피 묻은 궁정 이후에 자신을 궁 안에 머물게 한 사람. 보호자들을 제거하고, 정통성의 주인을 살아 있는 상징으로 남긴 사람. 찬탈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혹은 제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뒤집어쓴 사람. 어느 쪽이든, 요안나의 평화가 피해갈 수 없는 얼굴.
레이튼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분의 손도 잡겠다는 뜻입니까?”
요안나의 손이 찻잔을 더 세게 감쌌다.
그녀는 아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궁 안에 머문 시간은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것은 평화롭다는 뜻이 아니다. 문이 열리지 않는 조용함도 있고, 발소리를 기다리는 조용함도 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예의를 다했다. 혈통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갈 수 없는 예의도 있다. 살아 있는 황제로 남겨진다는 것은, 때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잔인했다.
요안나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말이 멈췄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미하일라도 기다렸다.
교실 안의 누구도 대신 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다시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할 때, 저는 모든 사람이 서로 손을 잡는 장면을 떠올렸어요. 낮은 사람도, 외국인도, 병사도, 적이었던 사람도. 그런데…….”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말 안에 미하일라 폐하를 넣으면, 갑자기 손이 무거워져요.”
미하일라의 눈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요안나는 창가 쪽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제가 그 손을 잡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에요. 아마 그것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그 손을 너무 빨리 잡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될까 봐.”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구분입니다.”
요안나는 이제 레이튼을 보았다.
“평화는 잊는 게 아니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용서도 아닌가요?”
“용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용서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레이튼은 신중하게 말했다.
“때로 평화는, 있었던 일을 이름 붙인 뒤에도 미래를 완전히 닫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황제의 침묵이면서, 죄를 아는 자의 침묵이기도 했다. 그녀는 요안나의 평화를 평가할 수 없었다. 그 말 안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이미 판결과도 같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모르겠어요.”
그 말은 작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고 싶은데, 그 안에 미하일라 폐하를 넣는 순간 목이 막혀요. 그런데 빼고 싶지도 않아요. 빼버리면, 제가 말하는 모든 이가 정말 모든 이가 아니게 될 것 같아서요.”
요안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넣으면…… 제가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할 것 같아요.”
교실은 조용했다.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렇다면 오늘은 기억을 지우지 않는 평화라고 쓰면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 그런 문장을 줄 때가 아니었다. 요안나의 평화는 지금 상처와 처음 만났다. 그 상처 앞에서 너무 빨리 문장을 만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닫힌 답이 될 수 있었다.
미하일라가 아주 짧게 말했다.
“요안나.”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막힘을 없던 것으로 하지 마라.”
그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용서받으려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요안나의 목이 막힌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 말이었다.
요안나는 한참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요안나: ‘모든 이’는 거리의 아이들에서 시작된 얼굴 있는 평화. 그러나 미하일라를 포함하는 순간, 궁의 유폐와 피 묻은 기억이 충돌함. 상태: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이’가 아니고, 포함하면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할 것 같음. 답 미완성.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 제목을 붙일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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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흐마이스터의 차는 조금 식고 있었다.
그녀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자세는 처음과 거의 같았다. 예의 있고, 단정하고, 빈틈이 적다. 그러나 교실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조금 알았다. 그 빈틈없음은 갑옷이다. 갑옷은 몸을 지킨다. 하지만 오래 입으면, 살과 갑옷의 경계를 잊게 만든다.
레이튼은 서두르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듣고 있습니다.”
“당신의 답을 가까이 보아도 되겠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충분히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레이튼을 보았다.
“방금 전 알렉산드리나 폐하께 하신 말씀과 닮았군요.”
“좋은 질문은 가끔 반복됩니다. 다만 같은 질문도 상대에 따라 다른 문이 되지요.”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물어보십시오.”
레이튼은 칠판의 세 번째 문장을 보았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는 물었다.
“그 죄는 누구의 것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즉시 대답했다.
“제가 명령한 일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기사단 전체의 죄입니까, 호흐마이스터 개인의 죄입니까?”
“둘은 분리되기 어렵습니다.”
“분리되기 어렵다는 것과,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침묵했다.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대신 찻잔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저는 기사단의 우두머리입니다.”
“예.”
“우두머리는 책임을 나눠 갖는 자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모으는 자입니다. 병사의 손에 묻은 피, 지휘관의 판단, 책상 위의 서명, 모두가 결국 제 이름 아래로 옵니다.”
그녀의 말은 정중했지만 차갑지 않았다. 차갑게 굳히려 애쓰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을 모으는 자라는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답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물었다.
“책임을 모으는 일이, 구원받지 않겠다는 결론까지 포함합니까?”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 질문은 책상 위에서 던졌던 질문과 닮아 있었지만, 더 가까웠다. 더 깊은 곳을 건드렸다.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구원은 너무 이른 말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사랑한 땅을 지키기 위해, 저는 사랑받지 못할 선택들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런 자가 쉽게 안식을 말하는 것은 기사답지 않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물었다.
“쉽게 안식을 말하지 않는 것과, 영원히 안식을 거부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호흐마이스터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이 질문이 호흐마이스터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질문도 아프다. 특히 너무 오래 닫힌 문을 두드릴 때는.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제가 구원받기를 바라면, 제가 저지른 일들이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 두려움은 이해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조심하겠습니다.”
레이튼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 죄의 무게는 당신이 행복을 거부한다고 해서 더 진실해지지는 않습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자신을 벌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더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쉬지 않는다고 해서 책임이 더 고결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책임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자기처벌은 때로, 이미 내려진 판결을 계속 낭독할 뿐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조용했다.
그 침묵 속에서, 그녀의 기사도와 죄책감과 사랑이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레이튼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당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쉬운 용서를 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묻고 싶습니다.”
그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당신이 짊어진 것은 책임입니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내린 끝없는 형벌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들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고, 그 온기를 손 안에 두었다.
“저는…….”
말이 멈췄다.
그녀는 예의 있는 문장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장이 쉽게 오지 않았다. 오래 반복한 문장은 많았을 것이다. 기사단의 책임, 죄의 무게, 사랑하는 땅을 위한 희생, 구원받지 않을 결심. 그러나 레이튼은 그 문장들이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침내 말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모른다는 답은 기사단장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학생이기도 하시니까요.”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가 다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말은 조금 비겁한 구제책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웃었다.
“하지만 때로 교실은, 잠시 모른다고 말해도 되는 장소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책임과 자기처벌의 경계 미확정. 답변: 아직 모름. 단, ‘모름’을 임시 답으로 허용.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처음으로 짧게 말했다.
“모른다는 말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미하일라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러나 때로는 다음 명령을 내리기 전,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은 기사단장의 말이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 학생의 말이기도 했다.
---
수업은 잠시 멈췄다.
세 사람의 찻잔은 각기 다르게 남아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거의 마시지 않았고, 요안나는 절반쯤 마셨으며,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데우는 데 더 많이 썼다. 레이튼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답이 같은 속도로 식거나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레이는 기록을 정리했다.
푸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처음의 세 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것들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각 문장 옆에 작은 물음표를 남겼다.
알렉산드리나의 문장 옆에는:
버리면 길이 사라지고, 붙잡으면 증명만 남는가?
요안나의 문장 옆에는: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이가 아니고, 포함하면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하는가?
호흐마이스터의 문장 옆에는:
책임과 자기판결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푸리나는 그 물음표들을 보며 생각했다.
문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편안하게 닫혀 있지도 않았다.
레이튼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작게 물었다.
“벌써요?”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더 묻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질문도 때로 과식하면 독이 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도 쉬어야 하나요?”
“예. 그래야 다음에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질문을 휴식시킨다는 표현은 조금 낯섭니다.”
“답만 쉬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레이가 기록했다.
질문도 휴식 필요.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 그건 제목으로 괜찮지 않아?”
그레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제로도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레이튼은 학생들을 보았다.
“다음 수업에서는 답을 쓰지 않을 겁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무엇을 하나요?”
레이튼은 칠판의 물음표들을 보았다.
“아마 답들이 스스로 움직일 겁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 말씀은 은유입니까?”
푸리나가 조용히 칠판을 보았다.
물음표의 흰 선이 아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닌 것 같은데.”
교실 안에 작은 바람이 지나갔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열린 답에는 바람이 따른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 듯합니다.”
요안나가 찻잔을 붙잡았다.
“그럼 다음 수업은 조금 추울까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그렇다면, 곁에 있겠습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열린 답의 불안
그 아래, 아직 식지 않은 찻잔의 온기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질문은 문을 열지만, 열린 문 앞에 선 사람에게는 바람도 함께 닿는다 —
그러면 개정된 1막에서 이어지는 2막으로, 답을 완성하지 않고 상처와 질문만 여는 방향으로 작성할게.
《아포리아의 교실》
— 성급한 답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법 —
2막 — 성급한 답들의 해부
— 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오래된 상처와 아직 살아 있는 소망이 함께 있다 —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레이튼은 칠판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교탁 옆 작은 탁자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었다. 주전자의 물소리는 조용했고, 찻잔에 닿는 물줄기는 일정했다. 전쟁과 왕권과 기사단의 죄를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소리였다. 그래서 오히려 교실 안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칠판에는 지난 수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의 교실
그 아래에는 물음표 하나.
그리고 세 개의 문장.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마지막 줄에는 레이튼이 1막 끝에 적어둔 질문이 있었다.
어디서 다쳤습니까?
그레이는 그 문장을 한동안 보았다. 그러고는 기록판에 적었다.
2막 시작. 질문: 답의 기원과 상처.
푸리나는 교실 뒤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번에는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늘 무대의 중심은 레이튼과 세 학생이었다. 푸리나는 그저, 말이 무대 위에서 너무 멀리 날아가지 않도록 숨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레이튼은 찻잔 세 개를 놓았다.
“오늘은 칠판 앞에서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찻잔을 보았다.
“차부터 주시는군요.”
“지난 수업에서 폐하께서 제안하셨으니까요.”
알렉산드리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그걸 정말 반영하실 줄은 몰랐어요.”
“좋은 제안은 반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더 조심해서 말해야겠네요.”
“그 또한 좋은 배움일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아직 마시지는 않았다. 다만 손끝으로 온도를 확인했다. 그녀에게 차는 여유라기보다, 질문이 오기 전 잠시 손을 데우는 물건에 가까웠다.
요안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그녀는 차를 좋아하는 아이처럼 보였지만, 오늘은 그 따뜻함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녀 역시 마시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았다. 마치 찻잔이 자신에게 허락된 물건인지 먼저 확인하려는 듯했다.
레이튼은 말했다.
“오늘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답이 틀렸는가가 아닙니다.”
그는 칠판의 세 문장을 보았다.
“그 답이 어디서 태어났는가입니다. 답은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답은 상처에서 태어나고, 어떤 답은 소망에서 태어나며, 어떤 답은 상처와 소망이 서로를 붙잡은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오늘은 답을 해부하는 건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은 그렇습니다. 다만 죽이기 위한 해부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진찰에 가깝지요.”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진찰이라면, 환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그러므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힘은 약해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제로 얻은 답은 대개 빠릅니다. 그러나 빠른 답은 자주 자기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필요한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입으로 견딜 수 있는 답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 표현은 신중하군요.”
“오늘 수업에서는 신중해야 하니까요.”
미하일라는 창가에 서서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의 공기는 그녀가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실의 무게를 잃지 않았다.
레이튼은 첫 번째 찻잔을 알렉산드리나 앞에 밀어두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폐하의 답부터 가까이 보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의 첫 문장을 보았다.
나는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녀는 그 문장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할 수 없었다. 그 문장은 그녀를 세운 말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부족하다고 불렀고, 어떤 이는 흉내라고 불렀고, 어떤 이는 피가 모자라다 했다. 그 말들 사이에서 그녀는 위대한 왕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흉내는 공부가 되었고, 공부는 길이 되었고, 길은 왕도가 되었다.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께서 처음으로 자신을 ‘가짜’라고 부른 것은 언제입니까?”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왕도를 묻지 않았다. 정통성도, 군대도, 정책도 묻지 않았다. 더 오래된 곳을 찔렀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김이 얇게 올라오고 있었다.
“제가 먼저 말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했습니다. 피가 부족하다고. 이름이 부족하다고. 왕좌에 닿으려면 정통한 자의 그림자라도 빌려야 한다고. 처음에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화가 났다고 말하면 너무 단순하겠네요.”
그녀는 조금 웃었다.
“무서웠어요.”
푸리나가 숨을 작게 삼켰다.
알렉산드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그 말이 사실일까 봐요. 제가 아무리 걸어도, 결국 흉내에서 끝날까 봐. 그래서 배웠습니다. 흉내낼 거라면 가장 위대한 것을 흉내내야 한다고. 가짜라면,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걸어야 한다고.”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흉내가 단순한 연기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대제의 길을 배우고, 군대를 배우고, 방패와 창을 배우고, 왕도를 배웠습니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말은 저를 무너뜨린 말이 아니라, 저를 일으킨 말이었어요.”
“그 말이 폐하를 살렸군요.”
“네.”
대답은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했다.
레이튼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말은 폐하를 일으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곧장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그 작은 멈춤을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즉답 직전 정지.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대체로요.”
레이튼은 그 말을 그대로 두었다.
대체로.
좋은 답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사람은 종종 그런 말을 쓴다. 언제나, 반드시, 완전히 같은 말이 아니게 될 때.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알렉산드리나는 낮게 말했다.
“때로는 저를 채찍질합니다.”
레이튼은 재촉하지 않았다.
“제가 멈추면, 다시 가짜가 될 것 같아요. 쉬면, 사람들이 제 안의 부족함을 볼 것 같습니다. 틀리면, 그들은 말하겠죠. 보라, 저것이 한계라고. 저것이 피의 부족함이라고. 저것이 왕이 아니라 흉내였다는 증거라고.”
그녀는 칠판의 문장을 보았다.
“그래서 저는 더 단정해야 했습니다. 더 강해야 했고, 더 위대해야 했고, 더 왕다워야 했어요.”
레이튼은 물었다.
“폐하께서는 그것을 원하셨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그를 보았다.
“네.”
그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마도요.”
레이튼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하셨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교실 안의 공기가 아주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잔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확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 알렉산드리나는 위대해지고 싶었다. 왕도를 걷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한 번도 쉬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가짜라는 말을 지우기 위해 걷는 길이, 오히려 그 말을 영원히 등 뒤에 세워두는 길이 될까 봐.
“저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가짜라는 말을 버리지 못하겠어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말이 없으면, 제가 여기까지 온 길도 사라질 것 같으니까요. 제가 부족해서 시작한 길이었는데, 그 부족함을 없던 일로 하면…… 제가 배운 것도, 걸은 것도, 버틴 것도 다 거짓말이 될 것 같아요.”
알렉산드리나는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그 말을 붙잡고 있으면, 저는 영원히 증명만 하다가 끝날 것 같기도 해요.”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답을 주지 않았다. “가짜는 출발점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 순간은 답을 정리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말이 어디서 다쳤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선생님.”
“예, 폐하.”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될까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알렉산드리나: ‘가짜’는 타인의 판결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후 자기 왕도를 세우는 문장이 됨. 현재 상태: 버리면 걸어온 길이 사라질 것 같고, 붙잡으면 영원히 증명만 하게 될 것 같음. 답 미완성.
푸리나는 그 기록을 보았다.
답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다만 문장의 상처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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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찻잔은 요안나 앞에 놓여 있었다.
요안나는 이미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번 입을 열려다 닫았다. 요안나는 거리에서 사람의 마음을 배운 황제였다. 낮은 사람들의 말, 병사의 한숨, 어부의 농담, 아이들의 다툼을 들어온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레이튼이 묻는 것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상을 낮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이 누구의 얼굴을 통과해야 하는지 물으려 했다.
레이튼은 말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질문드리겠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든 이에게 평화를’라는 말을 처음 품었을 때, 폐하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요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모든 사람이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여쭙겠습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 안에서, 가장 먼저 얼굴이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요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 모든 사람을 떠올리고 싶었다. 로마 시민, 아직 시민이 아닌 사람, 병사, 상인, 아이, 어머니, 적, 이방인. 그녀의 로마는 손을 잡는 것으로 시작되는 로마였다. 그러나 레이튼은 지금 하나의 얼굴을 물었다.
요안나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 만난 아이들이 있었어요.”
레이튼은 조용히 들었다.
“궁 밖에서요. 그 아이들은 저를 황제로 대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제 이름도 몰랐고, 제 혈통도 몰랐어요. 그냥 같이 뛰고, 같이 먹고, 같이 혼났어요. 그때 저는 이상하게 편했어요. 로마가 궁전보다 넓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마 그때였을 거예요.”
“그 아이들이 폐하의 평화에 들어 있습니까?”
“네.”
요안나는 작게 웃었다.
“아마 가장 먼저 들어 있었을 거예요.”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폐하의 ‘모든 이’는 얼굴 없는 말이 아니군요.”
요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아까는 얼굴을 바로 말하지 못했을까요?”
“말이 너무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큰 말은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커지면, 처음 그 말을 태어나게 한 작은 얼굴들이 안쪽으로 숨어버리기도 하지요.”
요안나는 칠판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문장은 여전히 좋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 거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구체적인 얼굴. 흙 묻은 손. 같이 웃던 소리.
레이튼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다음 질문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전의 숨이었다.
“폐하.”
“네.”
“그렇다면 ‘모든 이’라는 말 안에는, 폐하를 궁 안에 머물게 한 사람도 들어갑니까?”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이 아주 작게 멈췄다. 알렉산드리나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고, 호흐마이스터도 눈을 들었다.
창가에 서 있던 미하일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크게 보였다.
요안나는 레이튼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칠판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 창가에 선 보라색 황제를 느꼈다.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든 황제. 제국의 운명을 자기 화살에 얹은 사람. 그리고 요안나에게는, 아버지의 장례와 피 묻은 궁정 이후에 자신을 궁 안에 머물게 한 사람. 보호자들을 제거하고, 정통성의 주인을 살아 있는 상징으로 남긴 사람. 찬탈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혹은 제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뒤집어쓴 사람. 어느 쪽이든, 요안나의 평화가 피해갈 수 없는 얼굴.
레이튼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분의 손도 잡겠다는 뜻입니까?”
요안나의 손이 찻잔을 더 세게 감쌌다.
그녀는 아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궁 안에 머문 시간은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것은 평화롭다는 뜻이 아니다. 문이 열리지 않는 조용함도 있고, 발소리를 기다리는 조용함도 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예의를 다했다. 혈통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갈 수 없는 예의도 있다. 살아 있는 황제로 남겨진다는 것은, 때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잔인했다.
요안나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말이 멈췄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미하일라도 기다렸다.
교실 안의 누구도 대신 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다시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할 때, 저는 모든 사람이 서로 손을 잡는 장면을 떠올렸어요. 낮은 사람도, 외국인도, 병사도, 적이었던 사람도. 그런데…….”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 말 안에 미하일라 폐하를 넣으면, 갑자기 손이 무거워져요.”
미하일라의 눈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요안나는 창가 쪽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제가 그 손을 잡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에요. 아마 그것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그 손을 너무 빨리 잡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될까 봐.”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구분입니다.”
요안나는 이제 레이튼을 보았다.
“평화는 잊는 게 아니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용서도 아닌가요?”
“용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용서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레이튼은 신중하게 말했다.
“때로 평화는, 있었던 일을 이름 붙인 뒤에도 미래를 완전히 닫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미하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황제의 침묵이면서, 죄를 아는 자의 침묵이기도 했다. 그녀는 요안나의 평화를 평가할 수 없었다. 그 말 안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이미 판결과도 같았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모르겠어요.”
그 말은 작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고 싶은데, 그 안에 미하일라 폐하를 넣는 순간 목이 막혀요. 그런데 빼고 싶지도 않아요. 빼버리면, 제가 말하는 모든 이가 정말 모든 이가 아니게 될 것 같아서요.”
요안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넣으면…… 제가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할 것 같아요.”
교실은 조용했다.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렇다면 오늘은 기억을 지우지 않는 평화라고 쓰면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 그런 문장을 줄 때가 아니었다. 요안나의 평화는 지금 상처와 처음 만났다. 그 상처 앞에서 너무 빨리 문장을 만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닫힌 답이 될 수 있었다.
미하일라가 아주 짧게 말했다.
“요안나.”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막힘을 없던 것으로 하지 마라.”
그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용서받으려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요안나의 목이 막힌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 말이었다.
요안나는 한참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요안나: ‘모든 이’는 거리의 아이들에서 시작된 얼굴 있는 평화. 그러나 미하일라를 포함하는 순간, 궁의 유폐와 피 묻은 기억이 충돌함. 상태: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이’가 아니고, 포함하면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할 것 같음. 답 미완성.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 제목을 붙일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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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흐마이스터의 차는 조금 식고 있었다.
그녀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자세는 처음과 거의 같았다. 예의 있고, 단정하고, 빈틈이 적다. 그러나 교실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조금 알았다. 그 빈틈없음은 갑옷이다. 갑옷은 몸을 지킨다. 하지만 오래 입으면, 살과 갑옷의 경계를 잊게 만든다.
레이튼은 서두르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
“듣고 있습니다.”
“당신의 답을 가까이 보아도 되겠습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충분히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레이튼을 보았다.
“방금 전 알렉산드리나 폐하께 하신 말씀과 닮았군요.”
“좋은 질문은 가끔 반복됩니다. 다만 같은 질문도 상대에 따라 다른 문이 되지요.”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물어보십시오.”
레이튼은 칠판의 세 번째 문장을 보았다.
나는 기사단을 위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는 물었다.
“그 죄는 누구의 것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즉시 대답했다.
“제가 명령한 일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기사단 전체의 죄입니까, 호흐마이스터 개인의 죄입니까?”
“둘은 분리되기 어렵습니다.”
“분리되기 어렵다는 것과,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침묵했다.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대신 찻잔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저는 기사단의 우두머리입니다.”
“예.”
“우두머리는 책임을 나눠 갖는 자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모으는 자입니다. 병사의 손에 묻은 피, 지휘관의 판단, 책상 위의 서명, 모두가 결국 제 이름 아래로 옵니다.”
그녀의 말은 정중했지만 차갑지 않았다. 차갑게 굳히려 애쓰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을 모으는 자라는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답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물었다.
“책임을 모으는 일이, 구원받지 않겠다는 결론까지 포함합니까?”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 질문은 책상 위에서 던졌던 질문과 닮아 있었지만, 더 가까웠다. 더 깊은 곳을 건드렸다.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구원은 너무 이른 말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사랑한 땅을 지키기 위해, 저는 사랑받지 못할 선택들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런 자가 쉽게 안식을 말하는 것은 기사답지 않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물었다.
“쉽게 안식을 말하지 않는 것과, 영원히 안식을 거부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호흐마이스터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푸리나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이 질문이 호흐마이스터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질문도 아프다. 특히 너무 오래 닫힌 문을 두드릴 때는.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제가 구원받기를 바라면, 제가 저지른 일들이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 두려움은 이해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조심하겠습니다.”
레이튼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 죄의 무게는 당신이 행복을 거부한다고 해서 더 진실해지지는 않습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자신을 벌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더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쉬지 않는다고 해서 책임이 더 고결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책임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자기처벌은 때로, 이미 내려진 판결을 계속 낭독할 뿐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조용했다.
그 침묵 속에서, 그녀의 기사도와 죄책감과 사랑이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레이튼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당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쉬운 용서를 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묻고 싶습니다.”
그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당신이 짊어진 것은 책임입니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내린 끝없는 형벌입니까?”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들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고, 그 온기를 손 안에 두었다.
“저는…….”
말이 멈췄다.
그녀는 예의 있는 문장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장이 쉽게 오지 않았다. 오래 반복한 문장은 많았을 것이다. 기사단의 책임, 죄의 무게, 사랑하는 땅을 위한 희생, 구원받지 않을 결심. 그러나 레이튼은 그 문장들이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마침내 말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모른다는 답은 기사단장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학생이기도 하시니까요.”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가 다시 레이튼을 보았다.
“그 말은 조금 비겁한 구제책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레이튼은 웃었다.
“하지만 때로 교실은, 잠시 모른다고 말해도 되는 장소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그레이는 기록했다.
호흐마이스터: 책임과 자기처벌의 경계 미확정. 답변: 아직 모름. 단, ‘모름’을 임시 답으로 허용.
미하일라는 창가에서 처음으로 짧게 말했다.
“모른다는 말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미하일라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러나 때로는 다음 명령을 내리기 전,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은 기사단장의 말이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 학생의 말이기도 했다.
---
수업은 잠시 멈췄다.
세 사람의 찻잔은 각기 다르게 남아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거의 마시지 않았고, 요안나는 절반쯤 마셨으며,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데우는 데 더 많이 썼다. 레이튼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답이 같은 속도로 식거나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레이는 기록을 정리했다.
푸리나는 칠판을 보았다.
처음의 세 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것들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각 문장 옆에 작은 물음표를 남겼다.
알렉산드리나의 문장 옆에는:
버리면 길이 사라지고, 붙잡으면 증명만 남는가?
요안나의 문장 옆에는:
포함하지 않으면 모든 이가 아니고, 포함하면 너무 빨리 괜찮아져야 하는가?
호흐마이스터의 문장 옆에는:
책임과 자기판결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푸리나는 그 물음표들을 보며 생각했다.
문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편안하게 닫혀 있지도 않았다.
레이튼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작게 물었다.
“벌써요?”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더 묻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질문도 때로 과식하면 독이 됩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도 쉬어야 하나요?”
“예. 그래야 다음에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질문을 휴식시킨다는 표현은 조금 낯섭니다.”
“답만 쉬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레이가 기록했다.
질문도 휴식 필요.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 그건 제목으로 괜찮지 않아?”
그레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제로도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레이튼은 학생들을 보았다.
“다음 수업에서는 답을 쓰지 않을 겁니다.”
알렉산드리나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무엇을 하나요?”
레이튼은 칠판의 물음표들을 보았다.
“아마 답들이 스스로 움직일 겁니다.”
호흐마이스터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 말씀은 은유입니까?”
푸리나가 조용히 칠판을 보았다.
물음표의 흰 선이 아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닌 것 같은데.”
교실 안에 작은 바람이 지나갔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열린 답에는 바람이 따른다.”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럴 듯합니다.”
요안나가 찻잔을 붙잡았다.
“그럼 다음 수업은 조금 추울까요?”
레이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그렇다면, 곁에 있겠습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3막 — 열린 답의 불안
그 아래, 아직 식지 않은 찻잔의 온기처럼 한 줄이 남았다.
— 질문은 문을 열지만, 열린 문 앞에 선 사람에게는 바람도 함께 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