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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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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작성자 여관◆zAR16hM8he작성일 2026-05-08 (금) 01:04:15갱신일 2026-05-13 (수) 19:12:03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숨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

프롤로그 — 오래된 방의 냄새

방은 네모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네모였을 것이다. 네 벽이 있고, 천장이 있고, 바닥이 있고, 창이 하나쯤 있는, 사람이 잠들고 깨어나고 차를 마시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평범한 방. 그러나 창이 하나 늘 때마다 벽도 하나 늘었다. 벽이 하나 늘 때마다 방은 조금 더 넓어졌고, 이상하게도 하융이 앉을 자리는 조금 더 좁아졌다. 방은 넓어지는데 사람은 놓일 곳을 잃었다. 넓다는 것은 때로 감옥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융은 그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앉아 있었다기보다는 놓여 있었다.

놓인 사람은 사람이 아니오. 물건이오. 물건은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융은 숨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아직 숨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창밖의 세계들이 너무 많아질 때마다, 그는 자주 그 사실을 의심했다.

제1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성 블레즈 기사단이 적의 옆구리를 찢었다. 죠니는 말 위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고, 기병들의 창끝은 어둠 속의 비처럼 기울었다. 그 세계에서는 피난민 수레가 늦지 않았다.

제2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같은 수레가 진창에 걸렸다. 말이 넘어지고, 아이가 울고, 누군가가 바퀴를 밀었다. 죠니의 구령은 한 박자 늦었고, 그 한 박자는 칼날 하나만큼 길었다.

제3의 창이 열렸다.

그 창에서는 수레가 없었다. 피난민도 없었다. 길은 조용했고, 너무 조용한 길은 대개 이미 늦은 길이었다.

제4의 창은 열리기 전에 닫혀 있었다.

닫힌 창 너머에서 죽은 사람이 하융을 보았다.

제5의 창에서는 하융 자신이 서 있었다. 그는 지금보다 더 정확했다. 더 침착했고, 더 먼저 말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살았다. 그러나 그 대신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죽었다.

하융은 번호를 붙이면 덜 무서울 줄 알았다. 번호란 질서의 흉내니까. 그러나 번호는 질서가 아니었다. 공포가 줄을 선 것뿐이었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푸리나가 낮에 두고 간 차였다. 그녀는 “식기 전에 마셔!”라고 말했고, 곧바로 다른 방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자주 그랬다. 문장을 던지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그 문장이 정말 무대 장치였다고 주장했다. 하융은 그때 웃으며 찻잔을 받아두었다.

지금 차는 식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미지근했다. 현실의 온도는 대개 그렇게 애매했다. 창밖의 세계들은 너무 선명했다. 죽음은 선명했고, 가능성은 선명했고, 실패와 성공은 칼로 그은 선처럼 명료했다. 그런데 손 안의 찻잔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결정되지 않은 온도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아직 이름 붙이기 곤란한 오늘의 온도.

하융은 그것을 오래 붙잡았다.

현실은 때로 이렇게 미지근해서, 오히려 믿기 어렵다.

“오래된 방이 아직 닫히지 않았구려.”

그는 낮게 말했다.

말은 방 안에 떨어졌다. 그러나 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원래 대답하지 않는다. 방은 사람을 담을 뿐이다. 다만 창이 너무 많아진 방은 사람을 담지 못하고, 사람을 진열한다. 그 사실을 하융은 알고 있었다.

한때 그는 정말로 진열되어 있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처음 그 말을 떠올렸을 때, 하융은 웃었었다. 천재라는 말도 우스웠고, 박제라는 말도 우스웠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웃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방 안에 앉혔다. 그에게 보라 했다. 더 보라 했다. 어느 길이 무너지는지, 어느 사람이 배신하는지, 어느 전선이 살고 어느 성벽이 죽는지. 가능성은 귀중했다. 너무 귀중했다. 그러므로 하융은 점점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사람은 귀중하면 귀중할수록 더 조심히 다뤄진다고 누가 말했던가.

귀중한 것은 종종 쓰인다.
쓰이는 것은 닳는다.
닳은 사람은 스스로를 물건이라 부르기 쉽다.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창 안의 나는 방 안의 나를 보았다. 방 안의 나는 창 안의 나를 보았다. 그러나 서로의 체온은 알 수 없었다. 거울이라면 깨뜨리면 되었겠으나, 창은 깨뜨리면 바람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언제나 다른 세계의 냄새를 데려온다.

어느 창에서는 그가 고려로 돌아갔다. 어느 창에서는 돌아가지 못했다. 어느 창에서는 푸리나를 만나지 않았다. 어느 창에서는 죠니가 그를 형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느 창에서는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죽었다. 어느 창에서는 그레이의 장부가 불탔다. 어느 창에서는 장부에 적을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생이, 이미 끝난 생들의 기록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융은 자신의 종생기를 너무 많이 읽은 사람처럼 피곤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소.”

그는 자기 손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나의 죽음은 이미 너무 많구려.”

창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친절하지 않다. 가능성은 보여줄 뿐이다. 보여준 뒤 책임지지 않는다. 계시라 불리면 계시가 되고, 저주라 불리면 저주가 되며, 전술 자원이라 불리면 장부의 한 칸이 된다. 그러나 하융은 이제 알고 있었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오.
이것은 계시도 아니오.
이것은 다만 창이오.

창은 열릴 뿐, 명령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명령으로 만들 때, 창은 비로소 사람을 해친다.

하융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배웠다. 푸리나는 창을 창이라고 불러주었다. 레이튼은 그 창에 질문을 붙여주었다. 그레이는 창밖의 비극을 장부와 점검표로 낮추어, 산 자가 같은 이유로 죽지 않도록 만들었다. 죠니는 창밖을 보고도 대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는 밥부터 먹으라고 했다.

하융은 그들 곁에서 이 세계를 선택했다.

이 세계가 최선이라서가 아니었다.
최선이라는 말은 창밖에 너무 많이 있었다.
최선은 서로를 물어뜯었다.
어느 최선은 누군가의 죽음을 포함했고, 어느 최선은 다른 사람의 부재를 요구했다.

하융은 최선을 믿지 않았다.

다만 오늘을 믿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과 끝났다는 것은 다르다. 상처는 배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방은 잠긴 뒤에도 냄새를 남긴다. 전선 보고서와 피난민 명단과 죽은 가능성의 잔향이 한밤에 겹치면, 그 방은 다시 문을 연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떠돌았다. 죽은 내가 천千이요, 살아남은 내가 만萬이었다. 어느 나는 칼을 들었고, 어느 나는 창틀에 걸려 말라갔고, 어느 나는 웃었으며, 어느 나는 웃는 법을 잊었다. 허나 금일今日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방 안인가. 저 창밖인가. 아니면 또다시 박제되어, 날개를 가지고도 날지 못하는 새처럼 놓여 있는가.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나.
둘.
셋.

“아니오.”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했다.

“그리로 돌아가지는 않겠소.”

그때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문이 예의를 차려 열렸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문은 푸리나 헤툼의 손에 의해 하나의 효과음처럼 밀려났다. 복도의 등불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빛 앞에 푸리나가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망토를 대충 걸쳤고, 한 손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튼 고리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자다가 나온 것 같기도 했고, 애초에 자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푸리나에게는 그런 경계가 자주 애매했다.

그녀는 방 안을 보았다.

창을 보았다.
창밖의 수많은 세계를 보았다.
하융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뜻밖에 조심스러웠다. 푸리나는 소리로 무대를 여는 사람이었지만, 배우가 아직 자기 대사를 찾지 못했을 때는 기다릴 줄 알았다. 하융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조금 고마웠다.

그러나 푸리나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아.”

하융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무엇이 좋다는 말이오?”

“오늘의 극이 정해졌어.”

하융은 주변의 창들을 보았다.

“전하. 지금 이 광경을 보고도 극을 떠올리는 것이오?”

“응.”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이걸 그냥 두면 또 네가 혼자 창문들이랑 싸울 것 같거든. 그러면 안 돼. 창문이 많으면 관객을 불러야지.”

하융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창문이 많으면 관객을 불러야 한다. 이 세계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창문을 막으려 한다. 혹은 창밖을 더 보라 한다. 혹은 어느 창이 가장 유용한지 묻는다. 그런데 푸리나는 관객을 부르겠다고 했다.

그 무례함은 구원과 닮아 있었다.

하융은 낮게 웃었다.

“전하의 극장은 참으로 무례하오. 남의 오래된 악몽에도 표를 팔 생각부터 하는구려.”

“표는 안 팔아.”

“다행이오.”

“대신 감상문 받아.”

“그편이 더 비싸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방 안을 조금 흔들었다. 창들은 여전히 있었다.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푸리나의 웃음은 그 창들을 조금 덜 신성하게 만들었다. 덜 무섭게 만들었다. 무대 장치처럼 만들었다. 커튼을 달 수 있고, 순서를 바꿀 수 있고, 관객이 야유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하융은 그것이 좋았다.

창은 창이어야 한다.
가능성은 가능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 가능성은 야유받아도 된다.

푸리나는 방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커튼 고리를 딸랑 흔들며 창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녀의 시선에는 두려움보다 계산이 많았다. 어디에 조명을 두고, 어디에 막을 치고, 어디서 배우가 들어오면 좋은지 생각하는 눈이었다.

“하융.”

“듣고 있소.”

“오늘은 창을 닫는 날 아니야.”

“그럼 무엇을 하는 날이오?”

푸리나는 고리를 들어 보였다.

“창밖을 보고, 이쪽에서 뭘 해볼지 정하는 날.”

그 말은 너무 단순했다. 너무 단순해서 하융은 잠시 숨을 잊었다. 창밖을 보고 이쪽에서 뭘 해볼지 정한다. 가능성을 심판으로 삼지 않고, 계시로 삼지 않고, 저주로 삼지 않고, 그저 오늘의 작은 일감으로 가져온다.

어쩌면 오래전 그가 원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더 즐거운 세계를 보면 저럴 수도 있겠구려, 한번 해볼 만하오, 하고 말하는 것. 더 슬픈 세계를 보면 저럴 수도 있겠소, 그러니 조심해야겠지, 하고 적는 것. 창밖의 세계가 방 안을 삼키지 않게 하는 것. 창밖의 세계를 보며, 방 안의 사람들과 같은 숨을 쉬는 것.

하융은 말했다.

“전하.”

“응.”

“나는 이미 이 세계를 골랐소.”

“알아.”

푸리나는 바로 답했다.

그 단순한 대답이 이상하게도 하융을 잠시 멈추게 했다. 푸리나는 그가 이미 골랐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열린 창들이 그 선택을 취소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하융은 다시 구원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곁에 있는 사람이고, 오늘 조금 흔들린 사람일 뿐이었다.

하융은 고개를 낮추었다.

“허나 선택選擇이란 한 번의 도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구려.”

그의 말 속에 고향의 글자가 배어 나왔다. 감정이 새어 나올 때면 그랬다. 평소의 하오체 아래에 숨어 있던 한문풍의 뼈대가,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라 말의 표면에 비쳤다.

“금일今日, 나는 다시 고르겠소. 아니, 다시 골라야만 하겠소.”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오늘 골라.”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방 안의 가장 큰 창을 가리켰다.

“대신 혼자 고르지는 마. 그건 반칙이야.”

그때 복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반칙이면 규칙 설명부터 해야지.”

죠니였다.

그는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한 손에는 접시가 들려 있었다. 왜 한밤중에 접시를 들고 있는지 하융은 묻지 않았다. 죠니는 종종 설명이 접시보다 늦게 오는 사람이었다.

죠니는 방 안의 창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더 나은 세계, 더 나쁜 세계, 죽은 세계, 살아남은 세계. 그는 그 모든 것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죠니는 놀라는 일에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일단 먹어. 배고프면 사람이 이상한 결론을 내리거든.”

하융은 그를 보았다.

“이 광경을 보고도 먹을 것을 먼저 말하는구려.”

“그럼 창문한테 먼저 인사라도 해?”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 세계가 아무리 많아도, 지금 접시는 이쪽에 있어.”

그 뒤에서 레이튼이 나타났다. 그는 이미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소란이 예정된 티타임이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흥미로운 밤이군요.”

하융이 말했다.

“교수. 흥미롭다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창이 너무 많소.”

레이튼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질문도 많겠군요.”

“그 말이 위로라고 생각하시오?”

“아닙니다. 준비운동에 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고,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금세 맑아졌다. 창밖의 우물, 피난로, 장부, 죽은 이름들이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런 질문은 때로 너무 크다. 그는 창밖을 보았고, 손 안의 미지근한 찻잔을 보았고, 접시를 든 죠니와 주전자를 든 레이튼과 기록판을 안은 그레이와 커튼 고리를 든 푸리나를 보았다.

이 방은 아직 오래된 방이었다.

그러나 이제 오래된 방 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이번에는 혼자 놓여 있지 않소.”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기록판을 조금 더 꼭 안았다.

“그럼…… 기록해도 될까요?”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그건 허락받아야지.”

그레이가 조금 당황한 듯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웃었다.

“기록하시오. 다만 오늘은 장부라기보다 관람표가 되겠구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제목입니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목은 됐고, 식기 전에 먹어. 또 식은 차 붙잡고 철학하지 말고.”

하융은 찻잔을 보았다.

식은 차. 미지근한 현실. 창밖보다 덜 선명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람을 붙잡는 것.

그는 접시 쪽으로 손을 뻗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제1의 창, 제2의 창, 제3의 창. 번호를 붙여도 공포가 되고, 이름을 붙여도 작별이 되는 세계들. 그러나 그 밤, 방 안에는 커튼 고리와 찻주전자와 기록판과 접시가 있었다.

너무 사소한 것들.

너무 현실적인 것들.

박제된 천재의 유리관을 두드리기에는 터무니없이 하찮은 물건들.

그래서 충분한 것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높이 들고 선언했다.

“좋아. 제목은 나중에 정하고, 일단 창문여행부터 시작하자.”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창밖만 보지 않았다.

그는 방 안의 사람들도 함께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