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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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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작성자 여관◆zAR16hM8he작성일 2026-05-08 (금) 01:04:15갱신일 2026-05-13 (수) 19:12:03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숨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

2막 — 마지막 창을 찾는 사람

차는 식지 않았다.

그것은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사소함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온도. 찻잔 바깥에 맺힌 아주 얇은 습기. 빵을 찢을 때 나는 마른 소리. 죠니가 접시를 옮기며 무심하게 흘리는 작은 숨. 그레이가 기록판 위에 잉크를 말리기 위해 손바닥으로 바람을 보내는 움직임.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내려놓을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목을 낮추는 습관. 푸리나가 커튼 고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음 창을 보려는 듯 말려는 듯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

방 안에는 현실이 너무 많았다.

이상한 말이었다. 본래 현실은 하나여야 한다. 그러나 하융에게 현실은 자주 부족했다. 창밖의 세계들은 너무 많았고, 너무 선명했고, 너무 잘난 척했고, 너무 죽은 자의 목소리를 닮았다. 반대로 현실은 너무 작았다. 찻잔 하나. 빵 한 조각. 종이 한 장. 누군가의 헛기침. 이런 것들로 세계 하나를 붙들 수 있다는 것이 때로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작은 것들이 방 안에 많이 있었다.

하융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하.”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

“조금 전, 전하께서는 창밖에서 무엇을 빌려오자 하였소.”

“응. 훔치자는 표현은 레이튼이 싫어했으니까, 빌려오기.”

레이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정확히는 법률적·윤리적 혼란을 줄이기 위한 표현 정정이었습니다.”

죠니가 빵을 씹으며 말했다.

“길게 말했지만, 싫어했다는 뜻이네.”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낮아졌다. 그는 방 안의 창들을 보았다. 첫 번째 창과 두 번째 창은 작아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었다. 창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했다. 푸리나는 창을 지우지 않았다. 그레이는 창을 덮지 않았다. 레이튼은 창을 부정하지 않았다. 죠니는 창을 보고도 밥을 먹었다.

그래서 하융은 다음 말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창을 찾고 있었소.”

푸리나의 손이 커튼 고리 위에서 멈췄다.

그레이도 기록판에 펜을 대지 않았다.

레이튼은 하융을 보았다.

“하나의 창이라 하시면?”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방이 아니었다. 창이 너무 많아 방은 창의 부속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많은 창 사이에도 하융은 늘 하나를 찾았다. 가장 마지막에 열릴 창. 모든 가능성을 정리해줄 창. 어느 세계가 실패였고 어느 세계가 구원이었는지, 어느 선택이 옳았고 어느 선택이 늦었는지, 자신이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알려줄 창.

그 창을 찾으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창을 찾으면, 이 모든 창문 앞에서도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창을 찾으면.

하융은 낮게 말했다.

“마지막 창이오.”

푸리나는 바로 묻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평소라면 “멋진 제목인데?”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제목으로 삼기에는 그 말이 너무 오래 하융 안에서 닳아 있었다.

레이튼이 조용히 물었다.

“그 창은 무엇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하융은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처음에는 최선의 세계라 생각했소.”

창 하나가 저 멀리서 열렸다.

그 창 안에는 전쟁이 조금 덜한 킬리키아가 있었다.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피난민들은 덜 울었고, 성 블레즈 기사단의 말들은 덜 지쳐 있었다. 죠니는 오른손을 다치지 않았고, 푸리나는 밤마다 잠을 조금 더 잤으며, 그레이의 장부에는 사망자보다 배급 완료 표시가 더 많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은 누군가를 아슬아슬하게 살렸다.

하융은 그 창을 보았다.

“저런 세계였소. 조금 더 나은 세계. 조금 덜 잃은 세계. 조금 덜 늦은 세계.”

창 안에서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지금 방 안에 있는 푸리나의 웃음보다 조금 가벼워 보였다.

하융은 고개를 숙였다.

“저 세계를 보면, 이 세계가 못난 것처럼 보이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좋았다. 위로가 급히 들어오지 않는 침묵. 반박이 서둘러 오지 않는 침묵. 하융은 그 침묵 속에서 다음 말을 찾았다.

“나는 그런 창들을 너무 많이 보았소. 저기서는 살았소. 여기서는 죽었소. 저기서는 늦지 않았소. 여기서는 늦었소. 저기서는 내가 더 정확했소. 여기서는 내가 망설였소.”

창외窓外에는 나의 오답이 있었다. 또한 나의 정답도 있었다. 그러나 정답과 오답이 서로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어느 것을 향해 절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아남은 세계가 죽은 세계를 비웃지 않았고, 죽은 세계가 살아남은 세계를 저주하지도 않았다. 다만 모두 보였다.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나는 마지막 창을 찾았소. 이것이 정답이다, 하고 말해줄 창을.”

레이튼이 말했다.

“정답인 세계를 찾으셨군요.”

“그렇소.”

“혹은, 정답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조용한 세계를 찾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융은 눈을 떴다.

“조용한 세계?”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답은 때로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지요. 더 묻지 않아도 되게 하니까요.”

하융은 레이튼을 바라보았다.

그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칼날이 없지는 않았다. 레이튼의 질문은 늘 그랬다. 차를 대접하듯 건네지만, 받아들면 손 안에 작은 칼이 들어 있었다. 자신을 베기 위한 칼이 아니라, 너무 오래 묶어둔 매듭을 자르기 위한 칼.

레이튼은 물었다.

“하융 경께서 찾으신 마지막 창은, 정말로 이 세계를 살피기 위한 창이었습니까?”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레이튼은 조금 더 낮게 말했다.

“아니면 더는 묻지 않아도 되기 위한 창이었습니까?”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레이는 펜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제1의 창. 제2의 창. 제3의 창. 너무 많은 창. 너무 많은 나. 너무 많은 종생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자기 죽음의 기록을 너무 많이 읽으면, 살아 있다는 사실도 문서처럼 느껴진다. 하융은 자기 삶을 한때 그렇게 읽었다. 어느 장에서는 죽었고, 어느 장에서는 살았고, 어느 장에서는 돌아갔고, 어느 장에서는 오지 않았다.

살아 있는 나는 그 기록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아마도.”

하융은 겨우 말했다.

“아마도 나는…… 마지막 창 뒤에 숨어 쉬고 싶었던 것 같소.”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는구려.”

“쉴 곳을 찾는 일을 비겁이라 부를 수는 없지요.”

그 말에 하융은 잠시 여관의 성좌를 떠올렸다. 길 위에서 쓰러진 자에게 방을 내어주는 존재. 그러나 마지막 창은 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닫힌 결론이었다. 답이라는 이름의 창문.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더 묻지 않게 만드는 유리벽.

하융은 중얼거렸다.

“답은 방이 아니었구려.”

레이튼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때로는 그렇습니다. 특히 너무 일찍 닫힌 답은, 방보다 유리관에 가깝지요.”

유리관.

그 말에 하융의 손가락이 멈췄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그 문장은 한때 우스웠다. 그러나 유리 안쪽에서 너무 오래 창밖을 보면, 웃음은 먼저 말라붙는다. 밖에서는 사람이 보인다. 안에서는 사람의 흉내를 내는 표본이 보인다. 날개가 있으나 날 수 없고, 눈이 열려 있으나 보라는 방향으로만 고정된 새.

하융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마지막 창을 찾는 동안, 다시 유리 안에 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푸리나가 그제야 말했다.

“그럼 깨자.”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전하?”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유리관이면 깨야지. 창이면 열어도 되는데, 유리관이면 깨야 해. 그건 극장 소품으로도 별로야. 배우를 못 움직이게 하잖아.”

레이튼이 작게 웃었다.

“과격하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깨기 전에 손은 감싸. 유리 깨면 피 나거든. 그건 경험담이야.”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역시 현실적인 조언 담당.”

“담당이 너무 많아지고 있는데.”

“그럼 임시.”

“임시도 많으면 정규직이야.”

그 말에 그레이가 아주 작게 웃었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하융도 웃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지막 창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웃음은 때로 진지함을 모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지함이 사람을 죽일 만큼 커지는 것을 막는다.

푸리나는 하융 앞에 종이를 하나 내려놓았다.

“자. 그럼 마지막 창에도 안내문 붙이자.”

“아직 열리지도 않았소.”

“그러니까 미리 붙이는 거야. 열리고 나서 붙이면 늦잖아.”

“무슨 말을 붙이려 하오?”

푸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쓰려다가 멈췄다.

“이번 건 내가 쓰면 안 될 것 같아.”

하융은 조금 놀랐다.

“전하가?”

“응. 이건 네 창이잖아. 내가 제목을 붙여버리면, 또 내 무대가 돼. 그건 좀 아니야.”

푸리나는 종이와 펜을 하융 쪽으로 밀었다.

“네가 써.”

하융은 펜을 보았다.

펜은 가벼웠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한동안 들지 못했다. 이상했다. 무수한 세계를 보는 것보다 종이 한 장에 문장을 쓰는 일이 더 무거울 때가 있다. 창밖의 세계는 보이면 된다. 그러나 문장은 선택해야 한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길지 않아도 됩니다.”

레이튼이 덧붙였다.

“정답일 필요도 없습니다.”

죠니는 접시를 보다가 말했다.

“나중에 마음에 안 들면 줄 그으면 돼. 종이는 그런 점이 편하지. 창문보다 훨씬 다루기 쉬워.”

하융은 그 말을 듣고 펜을 들었다.

창 안의 나는 방 안의 나를 보았다. 방 안의 나는 창 안의 나에게 손을 뻗지 못했다. 거울이라면 서로 마주 보았겠으나, 창은 언제나 한쪽만 지나치게 투명했다. 그러나 종이는 달랐다. 종이는 이쪽에서 쓸 수 있었다. 창밖이 아니라, 방 안에서.

하융은 천천히 적었다.

마지막 창은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거기서 멈췄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는 다시 적었다.

마지막 창은, 창을 함께 보는 법을 묻는다.

펜 끝이 종이를 떠났다.

그 문장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완전한 문장은 때로 너무 빨리 무덤이 된다. 하융은 그 종이를 보았다. 마지막 창이 아직 열리지 않았는데도, 조금 덜 무서워진 것 같았다.

푸리나는 종이를 보더니 조용히 웃었다.

“좋네.”

“전하답지 않게 짧은 감상이오.”

“응. 지금은 긴 감상 붙이면 방해될 것 같아서.”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이런 순간에 이상하게 정확했다. 평소에는 과하게 떠들고, 장난치고, 세상 모든 사물에 배역을 붙이려 들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무대의 소리를 낮출 줄 알았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그 문장을 옮겨 적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문장은…… 기록해도 될까요?”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오.”

그레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무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점도 고마웠다.

레이튼은 하융이 쓴 종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정해졌군요.”

하융이 물었다.

“무엇이오?”

“우리가 함께 본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방 안의 창들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 질문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혹은 아직 열리지 않은 마지막 창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것을 느꼈다. 창들이 그를 잡아당기는 힘이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심판처럼 당겼다. 이제는 문처럼 당겼다. 문은 열 수 있고, 닫을 수 있고, 때로는 잠시 기대어 쉴 수도 있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2막 목표는 정해졌네.”

죠니가 빵을 들고 물었다.

“또 목표야?”

“응. 이번 목표는 마지막 창을 찾는 게 아니야.”

푸리나는 하융이 쓴 종이를 가리켰다.

“마지막 창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앉아 있을지 정하는 거야.”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전환입니다.”

죠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의자부터 봐야겠네. 어떻게 앉아 있을지 정하려면, 의자가 멀쩡해야 하니까.”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역시 현실적인 조언 담당.”

“방금 정규직 싫다고 했는데.”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의자는…… 확인하겠습니다.”

죠니가 그레이를 보았다.

“농담이었는데.”

“그래도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실제로 하나가 조금 흔들립니다.”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역시 행정은 강하네.”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마지막 창에 대해 이야기하던 방 안에서, 어느새 의자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이 푸리나의 극장이고, 레이튼의 질문이며, 그레이의 장부이고, 죠니의 현실감이었다. 거창한 구원은 없었다. 다만 너무 큰 창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의자를 확인했다.

그것이 이상하게도 하융을 살렸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더 나은 세계들이 아직 있었다. 더 아름다운 시장, 더 안전한 피난길, 더 적은 죽음, 더 현명한 자신. 그 세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져서도 안 되었다. 사라진다면 배울 것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이제 그 세계들은 이 방을 심판하지 않았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저 세계들은 여전히 아름답소.”

푸리나가 말했다.

“응.”

“그리고 이 세계는 여전히 모자라오.”

“응.”

“그럼에도.”

하융은 찻잔을 들었다.

“나는 이쪽에서 묻겠소.”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융은 창 너머의 시장을, 피난길을, 아직 열리지 않은 마지막 창을 보았다.

“저 아름다움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함인지, 아니면 오늘의 손에 작은 일을 쥐여주기 위함인지.”

잠시 침묵.

그리고 푸리나가 말했다.

“좋아. 그 질문, 마음에 들어.”

죠니가 빵을 삼키고 말했다.

“나도. 부끄러움만 주는 아름다움은 별로야. 사람 기운만 빼거든.”

그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일이라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문답은 여기까지 해도 충분하겠군요. 질문이 살아 있다면, 아직 창은 우리를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융은 레이튼을 보았다.

“창이 우리를 이긴다라.”

“예. 답이 질문을 죽일 때, 창은 사람을 이깁니다.”

그 말은 오래 남았다.

하융은 자신이 쓴 종이를 다시 보았다.

마지막 창은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 창은, 창을 함께 보는 법을 묻는다.

그 문장이 창틀에 붙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창의 창틀에.

그것은 모순이었다. 그러나 하융의 방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창에 먼저 문장을 붙여두는 일. 아직 오지 않은 질문 앞에 의자를 놓아두는 일. 아직 정답이 되지 않은 문장 옆에서 차를 마시는 일.

하융은 생각했다.

날개가 있다면, 아마 이런 일에도 필요할 것이다.

먼 세계로 날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창 앞에, 의자를 하나 더 놓기 위해서.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프롤로그 — 오래된 방의 냄새

방은 네모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네모였을 것이다. 네 벽과 천장과 바닥, 그리고 창 하나쯤을 가진, 사람이 잠들고 깨어나고 차를 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방. 그러나 하융의 방은 오래전부터 그런 형식을 잃어버렸다. 창이 하나 늘 때마다 벽도 하나 늘었고, 벽이 하나 늘 때마다 방은 조금 더 넓어졌으나, 이상하게도 하융이 앉을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방은 넓어질수록 그를 가운데로 밀어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의자 위에 놓인 잔이나 책처럼 보였다. 오래 움직이지 않은 것들은 모두 비슷한 냄새를 낸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융은 문득 자기 숨이 아직 방 안에서 가장 따뜻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어느 창에서는 시장의 깃발이 흔들렸다. 빵 냄새가 났고, 아이들의 웃음이 유리 너머에서 조금 늦게 도착했다. 병사들은 피곤했지만 웃고 있었고, 장사꾼들은 소식보다 손님을 먼저 보았다. 전쟁이 사라진 세계는 아니었다. 다만 전쟁이 잠시 멀어진 세계였다. 그 옆의 창에서는 수레바퀴가 진창을 지나고 있었다. 노인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이 있었고,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는 길이 있었으며, 누군가가 미리 물통을 놓아두었다. 더 먼 창에서는 우물물이 지나치게 맑았다. 맑은 물은 종종 불길했다. 하융은 그 물빛을 보자마자, 아직 쓰이지 않은 장부의 빈 줄을 떠올렸다. 다음 장면에서 아이가 누워 있었고, 그 다음 장면에서 천이 덮인 작은 몸들이 있었으며, 다시 그 다음 장면에서 장부의 끝에는 이름 대신 짧은 말이 남았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잉크가 마르자, 아이의 얼굴도 함께 마르는 것 같았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닫힌 눈꺼풀 안쪽에서도 시장은 흔들렸고, 피난길은 진창을 밟았으며, 우물은 맑은 물빛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4의 창은 열리기도 전에 이미 닫혀 있었고, 제5의 창에서는 죽은 하융이 오늘의 하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번호를 붙이면 덜 무서울 줄 알았다. 번호란 질서의 흉내니까. 그러나 번호는 질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가 줄을 선 모양에 가까웠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있었다. 죽은 내가 천千이요, 살아남은 내가 만萬이었다. 어느 나는 조금 더 빨랐고, 어느 나는 한 박자 늦었다. 어느 나는 푸리나가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창가에서 식어 있었고, 어느 나는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를 끝내 듣지 못했다. 어느 나는 레이튼의 찻잔 앞에서 대답 대신 침묵만 남겼으며, 어느 나는 그레이의 펜 끝에 닿기도 전에 장부의 빈칸으로 밀려났다.

하융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 낮에 푸리나가 두고 간 차였다. 그녀는 “식기 전에 마셔!”라고 말해놓고는, 정작 본인은 다음 장면을 떠올렸는지 복도 끝으로 뛰어가 버렸다. 푸리나는 늘 그랬다.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그 말이 사실은 개막 선언이었다고 주장했다. 지금 그 차는 식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미지근했다. 현실의 온도는 대개 그렇게 애매했다. 창밖의 죽음은 차갑고, 창밖의 축제는 눈부셨으며, 창밖의 실패는 칼자국처럼 또렷했다. 그런데 손 안의 찻잔만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정되지 않은 온도였다. 아직 이름 붙이기 곤란한 오늘의 온도. 하융은 그 찻잔을 오래 붙잡았다.

“오래된 방이 아직 닫히지 않았구려.”

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원래 대답하지 않는다. 방은 사람을 담을 뿐이다. 그러나 창이 너무 많아진 방은 사람을 담지 못하고, 사람을 진열한다. 하융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그는 정말로 진열되어 있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처음 그 말을 떠올렸을 때, 하융은 웃었었다. 천재라는 말도 우스웠고, 박제라는 말도 우스웠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웃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방 안에 앉혔다. 보라 했다. 더 보라 했다. 어느 길이 무너지는지, 어느 병사가 죽는지, 어느 성벽이 버티는지, 어느 선택이 더 적게 피를 흘리는지. 귀중하다는 말은 언제나 따뜻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귀중한 물건은 조심히 보관되기도 하지만, 더 자주 꺼내 쓰인다. 하융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보관되는 쪽인지, 사용되는 쪽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오.”

하융은 숨을 들이마신 뒤,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로 돌아가지는 않겠소.”

하지만 창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져서도 안 되었다. 창을 닫아버린다면 그는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하융이 원하는 안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보지 않는 유리관에 가까웠다. 그가 찾아야 하는 것은 창을 없애는 법이 아니었다. 창에 못 박히지 않는 법이었다. 그 사실을 그는 이미 배운 적이 있었다. 푸리나와 함께, 레이튼과 함께, 그레이와 함께, 죠니와 함께. 하지만 배운다는 것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같지 않다. 회복된 사람도 다시 오래된 냄새를 맡는다. 중요한 것은 그 냄새가 자신을 어디까지 데려가도록 허락할 것인가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문이 하나의 효과음처럼 밀려났다. 복도의 등불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빛 앞에 푸리나 헤툼이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망토를 대충 걸쳤고, 한 손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튼 고리가 들려 있었다. 머리카락 끝은 잠의 흔적을 달고 있었는데, 눈빛만은 방금 막 새 장면을 떠올린 사람처럼 또렷했다. 푸리나는 종종 잠에서 깨어난 사람과 밤을 새운 극작가 사이의 어딘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방 안을 보았다. 창들을 보았다. 더 나은 세계, 더 슬픈 세계, 죽은 가능성, 웃는 가능성, 아직 열리지 않았으나 이미 하융의 시선을 붙잡으려 하는 어떤 창. 그리고 하융의 얼굴을 보았다. 푸리나는 바로 떠들지 않았다. 그 침묵은 뜻밖에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소리로 무대를 여는 사람이었지만, 배우가 아직 자기 대사를 찾지 못했을 때는 기다릴 줄 알았다. 하융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조금 고마웠다.

“하융.”

“듣고 있소.”

“또 창문 앞에 앉아 있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밤중에 남의 방에 들어와, 첫마디로 참으로 정확한 말을 하시는구려.”

“그럼 틀린 말을 할까? 그건 좀 아깝잖아. 기왕 문을 열었으면 첫 대사는 정확해야지.”

푸리나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창 앞에 섰다. 그 창에서는 더 여유로운 시장이 보였다. 푸리나는 그 광경을 잠시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표정에는 감탄도 있었고, 질투도 있었고, 극장주가 다른 극장의 무대를 훔쳐볼 때의 장난스러운 경계심도 있었다.

“흐음.”

“무엇이 보이시오?”

“잘난 척.”

하융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잘난 척 말이오?”

“응. 봐봐. 나는 더 나은 시장이다, 나는 더 아름다운 가능성이다, 나는 네가 놓친 장면이다, 하고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있잖아.”

푸리나는 커튼 고리로 창틀을 톡 쳤다.

“저렇게 무게 잡는 창문은 오래 보면 안 돼. 배우를 잡아먹거든.”

하융은 창을 보았다. 확실히, 그 창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팠다. 현실의 시장은 저렇게 가볍지 않았다. 현실의 피난길은 저렇게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현실의 우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현실의 장부에는 아직 적히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 창은 언제나 더 선명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창이 너무 많소.”

“응.”

푸리나는 바로 인정했다. 그 빠른 인정이 하융을 조금 멈추게 했다. 그녀는 창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그녀는 창틀을 두드리고, 빛의 각도를 살피고,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한 바퀴 돌렸다. 무서운 것을 무대 위에 올릴 때, 어디에 세워야 배우가 잡아먹히지 않는지 재는 얼굴이었다.

“그럼 가보자.”

하융은 눈을 깜박였다.

“어디로 말이오?”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문밖을 가리켰다.

“창이 가리키는 곳으로.”

“창밖으로 나가자는 말이오?”

“아니. 문밖으로.”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차이 중요해. 창밖으로 나가면 네가 또 저쪽 세계한테 붙잡히잖아. 문밖으로 나가면 이쪽 세계의 바닥을 밟게 되고.”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이 아니라 문밖. 그 차이는 너무 단순했지만, 단순한 말이 가끔 가장 깊은 곳을 찌른다. 하융은 창을 보았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었고, 다른 선택이 있었고, 다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복도가 있었다. 돌바닥이 있고, 먼지가 있고, 등불이 있고, 누군가의 발자국이 있는 현실의 복도. 그 복도는 창보다 작았다. 그러나 밟을 수 있었다.

“방 안에서만 보면 창문들이 너무 잘난 척해. 직접 가서 보면 의외로 다들 발밑이 허술해. 시장은 빵이 부족하고, 길은 진흙탕이고, 우물은 냄새가 나고, 죠니는 밤중에도 접시를 들고 다니고.”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건 왜 내가 문제인 것처럼 말해?”

죠니였다. 그는 정말로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에는 빵만이 아니라, 작게 자른 치즈와 말린 과일까지 얹혀 있었다. 야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성의가 있었고, 식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대충이었다. 죠니는 방 안의 창들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장의 금빛과 우물의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곧 탁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접시를 놓을 만한 자리를 찾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그 사소한 눈길을 보고, 아주 잠깐 숨을 쉬기가 쉬워졌다. 어떤 사람은 무수한 세계가 열려 있는 방에서도, 먼저 빵이 기울지 않을 곳을 찾았다.

“창문이 많네.”

“그대에게도 그렇게 보이오?”

“응. 그리고 전부 별로 친절해 보이지는 않아. 보통 친절한 건 저렇게 빛나지 않거든.”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 너는 가끔 정말 이상한 기준으로 정확한 말을 해.”

“오래 살다 보면 알게 돼. 너무 반짝이는 건 대개 비싸거나 귀찮아. 둘 다 좋은 징조는 아니고.”

죠니는 접시를 방 안의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접시와 창들의 거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눈을 움직였다.

“어쨌든 가는 거면 먹고 가. 빈속으로 가능세계 같은 걸 보면, 대부분의 세계가 다 마음에 안 들거든. 그건 철학이 아니라 혈당 문제일 때도 있어.”

“그 말에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소.”

“당연하지. 나는 가끔 쓸데없이 맞는 말을 해.”

그 뒤에서 레이튼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예정된 야간 티타임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레이튼은 문턱에서 방 안을 둘러보았고, 창의 수와 빛의 방향과 하융의 얼굴을 차례로 살핀 뒤, 아주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밤입니다. 물론 창의 수를 고려하면, 다소 복잡한 밤이라고 해야겠지만요.”

푸리나가 손을 흔들었다.

“레이튼, 딱 맞게 왔어. 오늘의 주제는 창문여행이야.”

“창문여행이라. 흥미로운 제목이군요. 다만 첫 질문은 제목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무엇을 묻겠소?”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질문은 늘 차처럼 건네졌다. 다만 마시고 나면, 혀끝보다 마음 한쪽이 먼저 따뜻해지거나, 오래 묶여 있던 매듭 하나가 조용히 느슨해졌다.

“하융 경께서 보고 계신 것은 창입니까, 아니면 창에 붙잡힌 시선입니까?”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농담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췄다. 하융은 레이튼의 말을 곱씹었다. 창인가. 창에 붙잡힌 시선인가. 그는 한때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 자신을 명령한다고 믿었고,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겼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보는 자신과 보이는 세계 사이에 사람의 체온이 남지 않았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창을 없애는 날이 아니라, 시선의 위치를 바꾸는 날이겠군요.”

그때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문가에 섰다. 그녀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했지만, 방 안의 창들을 보자마자 눈빛이 맑아졌다. 그레이는 먼저 창을 보지 않고 하융을 보았다. 방 안에 우물과 장부와 죽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는데도, 그녀의 첫 시선은 살아 있는 사람의 안색에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은가. 그는 창들을 보았다. 시장, 피난길, 우물, 죽은 자신, 살아남은 자신, 더 나은 동료들, 더 나쁜 결말들. 그 다음 푸리나의 커튼 고리, 죠니의 접시, 레이튼의 찻주전자, 그레이의 기록판을 보았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말이 좋았다. 괜찮다고 밀어붙이지 않는 말. 괜찮지 않음을 문제 삼지 않는 말. 다만 지금의 상태를 조용히 받아 적는 듯한 말. 하융은 그 말 때문에 이어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놓여 있지 않소.”

그레이의 손이 기록판 위에서 살짝 멈췄다. 그녀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높이 들었다.

“좋아. 전원 집합. 오늘의 극장은 방 안이 아니야. 시장, 길, 우물, 그리고 점심자리.”

죠니가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점심은 밤에 먹어도 점심인 거야?”

푸리나는 잠깐 생각하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는 가능해.”

“그 말, 너무 많이 쓰면 위험해.”

“괜찮아. 위험한 말은 내가 책임질게.”

“그럼 난 접시를 책임질게. 그쪽이 더 믿음직해.”

레이튼은 가볍게 웃었다.

“훌륭한 역할 분담입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먼저 어디로 가십니까?”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가장 강한 빛을 내는 창을 골랐을 것이다. 혹은 가장 끔찍한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세계가 옳은지, 어느 세계가 자신을 용서하는지, 어느 세계가 마지막 창인지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밖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창밖이 아니라 문밖. 그 차이는 작았고, 그래서 컸다.

하융은 천천히 일어섰다.

“시장으로 가보겠소.”

푸리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첫 장면은 시장.”

죠니는 접시를 다시 들었다.

“먹을 건 들고 가도 되지? 시장에 가는데 빈손이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밤중의 시장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들고 가야지. 닫힌 시장에서 먹을 걸 구하려면 귀찮거든.”

레이튼은 하융의 옆으로 다가왔다.

“하융 경.”

“듣고 있소.”

“오늘은 모든 창에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온화하게 말했다.

“길을 걷는 동안, 어떤 창은 그저 빛만 비출 수도 있지요.”

하융은 잠시 그 말을 들고 있었다. 창은 답이 아니라 빛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직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기에는 충분한 문장이었다. 하융은 방을 돌아보았다.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닫히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를 불렀고, 아직도 다른 세계의 냄새를 흘려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빛이 방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복도 쪽으로 길게 흘러나갔다. 시장의 따뜻한 노랑은 돌바닥의 먼지를 드러냈고, 우물의 푸른빛은 벽의 금 간 자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어느 실패한 세계의 회색은 푸리나의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그 빛 위에 그대로 발을 디뎠다.

하융은 그 빛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너머가 아니라 그 아래를 보았다. 돌바닥. 먼지. 푸리나의 발끝. 죠니가 들고 있는 접시의 그림자. 그레이의 기록판 모서리. 레이튼의 찻주전자에서 흔들리는 작은 반사광. 현실은 창보다 작았다. 그러나 밟을 수 있었다.

“가보지요.”

푸리나는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가며, 무대의 막을 올리듯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개막.”

그리고 아주 밝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창밖이 아니라, 문밖으로.”

하융은 그녀를 따라 걸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하융은 창 너머로 가지 않았다. 그는 창에서 흘러나온 빛 아래, 문밖의 복도를 걸었다.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1막 — 시장의 빛

시장은 잠들어 있었다. 낮의 시장이 목소리와 냄새와 먼지로 몸을 불리는 짐승이라면, 밤의 시장은 접힌 짐승에 가까웠다. 천막들은 축 늘어져 있었고, 닫힌 가게의 나무 덧문에는 낮 동안 묻은 손자국과 먼지가 남아 있었다. 빵집 앞에는 줄이 없었고, 과일 바구니는 뒤집혀 있었으며, 광장 한가운데의 우물 곁에는 누가 잊고 갔는지 모를 빈 물동이가 엎어져 있었다. 하융은 그 광장을 보자마자, 조금 전 창 안에서 보았던 시장을 떠올렸다. 작은 깃발이 걸리고, 아이들이 웃고, 병사들이 피곤하면서도 빵을 나눠 먹던 그 시장. 그곳에서는 전쟁이 멀리 있었다. 이곳에서는 전쟁이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닫힌 덧문과 낮게 꺼진 등불 사이에 이미 앉아 있었다.

푸리나는 광장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는 창 안의 시장과 현실의 시장을 번갈아 보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고,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한 번 돌렸다. 하융은 그녀가 곧 무언가를 선언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푸리나는 선언을 좋아했다. 다만 그녀의 선언은 대개 법령보다 장난에 가까웠고, 장난보다 조금 더 오래 남았다.

“흐음.”

죠니가 접시를 들고 그녀 옆에 섰다.

“왜. 시장이 생각보다 안 극적이야?”

“아니. 너무 극적이야. 닫힌 시장, 식은 화덕, 엎어진 물동이. 이거 완전히 전쟁 전야잖아.”

“보통 사람들은 그걸 그냥 장사가 끝났다고 불러.”

“죠니, 너는 너무 빨리 현실로 도망쳐.”

“현실에 있으니까 현실로 가는 거지. 그게 도망이면, 세상 대부분은 도망 중이야.”

푸리나는 그 말에 잠깐 입술을 삐죽이다가, 곧 광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창에서 흘러나온 빛들이 돌바닥 위에서 조금씩 흔들렸다. 시장의 따뜻한 노랑은 아직 꺼지지 않은 화덕의 재를 닮았고, 더 먼 창에서 온 꽃빛은 닫힌 덧문 틈에 낀 먼지를 희미하게 밝혔다. 하지만 하융의 시선은 자꾸 그 너머로 미끄러졌다. 창 안의 시장에서는 같은 돌바닥 위에 깃발이 걸려 있었다. 저쪽의 빵집에서는 남은 빵을 작게 잘라 아이들에게 주고 있었다. 저쪽의 병사는 웃었다. 이쪽의 병사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이 광장에는 병사도 많지 않았다. 순찰병 둘이 졸음을 참으며 서 있었고, 그중 하나는 푸리나를 알아보고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

“저, 전하?”

푸리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쉿. 오늘 나는 전하가 아니야.”

순찰병은 더 굳었다.

“예?”

“야간 시장 조사단장이야.”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그건 더 수상해 보이는데.”

“그럼 야간 시장 산책객.”

“그건 덜 위험하긴 하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야간 시장 산책객으로 하자. 공식 직함은 나중에 붙이고.”

순찰병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하융과 레이튼과 그레이를 차례로 보았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그레이는 작은 목례로 그를 안심시켰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있었으므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융은 잠시 그 순찰병을 보았다. 창 안의 다른 세계에서는 이 병사가 낮에 빵을 나눠 먹고 있었다. 또 다른 창에서는 길목에서 화살을 맞았다. 또 다른 창에서는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하융은 그 가능성들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중 어느 하나에도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 했다. 그는 순찰병의 신발 끝에 묻은 진흙을 보았다. 끈이 느슨했다. 현실은 가끔 그런 식으로 먼저 나타났다.

“끈이 풀렸소.”

순찰병이 멍하니 그를 보았다.

“예?”

“신발 끈 말이오. 순찰 중 넘어질 수 있소.”

순찰병은 뒤늦게 자기 발을 내려다보고 허둥지둥 끈을 묶었다.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좋아. 첫 수확.”

“수확이라고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넘어지기 전에 발견한 건 좋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전쟁보다 신발 끈이 먼저 사람을 쓰러뜨릴 때도 있거든. 별로 멋은 없지만 꽤 자주 그래.”

하융은 순찰병이 끈을 묶는 손을 보았다. 창 안의 병사는 빵을 들고 웃고 있었고, 현실의 병사는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장면인지 묻는 질문이 목 안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내려앉았다. 지금은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푸리나는 닫힌 빵집 앞에 섰다. 덧문에는 낮에 붙였던 작은 안내문이 남아 있었다. 피난민 배급은 성문 쪽 임시 창고에서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글씨는 급했고, 종이는 비에 한 번 젖었다가 말라 가장자리가 말려 있었다. 푸리나는 그 안내문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너무 재미없어.”

그레이가 가까이 와서 안내문을 확인했다.

“필요한 정보는 들어 있습니다. 장소, 시간, 대상자, 질서 유지 요청까지요.”

“응. 필요한 정보는 있어.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얼굴이 없어.”

“얼굴……입니까?”

“응. 이건 말하자면 무대 뒤 지시문이야. 배우가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서 퇴장해야 하는지는 적혀 있는데, 왜 나와야 하는지는 없어.”

그레이는 잠시 안내문을 보았다. 하융은 그녀가 불편해할까 싶었지만, 그레이는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안내문 왼쪽 아래, 비에 번져 읽기 어려워진 줄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러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표시를 추가하면 좋을까요. 글을 못 읽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빵 그림이나 물동이 그림을 같이 붙이면, 조금 덜 헤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웃었다.

“그거야. 역시 그레이야.”

“대단한 생각은 아닙니다. 실제로 필요해서…….”

“필요한 생각이 제일 대단할 때도 있어.”

그레이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덧문에 붙은 종이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펴더니, 커튼 고리 끝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신술은 아니었다. 혹은 신술이 되기 전의 장난이었다. 하지만 하융은 그런 장난이 푸리나에게서 자주 신술의 전조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세상을 먼저 놀이처럼 만지고, 그 다음에야 그것이 사람을 일으키는 장면이 된다.

“빵 그림, 물동이 그림, 그리고 꽃.”

죠니가 물었다.

“왜 꽃?”

“예쁘잖아.”

“그건 이유가 너무 강해서 반박하기 어렵네.”

레이튼이 웃음을 삼키듯 찻주전자를 살짝 고쳐 들었다.

“때로는 단순한 이유가 가장 오래 버팁니다.”

푸리나는 레이튼을 돌아보았다.

“레이튼, 지금 그 말을 아주 길게 만들려는 얼굴이야.”

“아닙니다. 오늘은 시장이 주인공이니까요.”

“좋아. 훌륭한 자제력이야.”

하융은 빵집 앞에 서서 창 안의 장면을 다시 보았다. 그곳에서는 이미 꽃이 있었다. 창 안의 아이는 꽃나무 아래에서 빵을 먹고 있었다. 이쪽에는 꽃나무가 없었다. 다만 덧문 아래, 돌 틈에 작고 마른 풀 하나가 비집고 나와 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얇았다. 하융은 허리를 숙였다. 손끝으로 건드리자 마른 줄기가 부서질 것 같아, 그는 건드리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뭐 봐?”

“풀잎이오.”

“어디?”

하융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았다. 그러더니 아주 작게 웃었다.

“진짜 있네.”

“창 안에는 꽃나무가 있었소.”

“응.”

“이쪽에는 이것뿐이오.”

푸리나는 그 작은 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평소처럼 바로 “그럼 꽃나무로 만들자!”고 말할 줄 알았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풀잎 주변의 먼지를 살짝 밀어냈다. 너무 거칠게 하면 뿌리가 다칠까 조심하는 손짓이었다.

“이것뿐이라기엔, 얘도 꽤 열심히 나왔는데.”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창 안의 꽃나무는 멋지네. 하지만 그건 저쪽 무대 소품이고, 이쪽 애는 이 돌 틈에서 혼자 올라왔잖아. 그럼 오늘은 얘 편을 들어줘야지.”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돌 틈 풀 편드는 왕이라. 듣기에는 이상한데, 너한테는 꽤 어울리네.”

“그럼 너는?”

“난 안 밟을게. 그 정도면 내 방식으로는 꽤 큰 지지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죠니식 지지 접수.”

하융은 풀잎을 보았다. 창 안의 꽃나무와 비교하면 우스울 만큼 작았다. 하지만 그 작은 것 앞에서 푸리나는 손가락을 조심했다. 죠니는 발을 조심하겠다고 했다. 그레이는 어느새 기록판 한쪽에 빵 그림과 물동이 그림의 위치를 적고 있었고, 레이튼은 시장 골목의 방향을 살피며 순찰병에게 낮게 질문하고 있었다.

“이쪽 골목으로 가면 성문 창고가 보입니까?”

“아, 아닙니다. 중간에 한 번 꺾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처음 온 사람은 놓치기 쉽겠군요. 혹시 낮에 길을 묻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예. 특히 북쪽 피난민들이…….”

“그렇군요. 그들이 처음 보는 표지가 무엇인지부터 바꿔야겠습니다.”

하융은 레이튼의 목소리를 들었다. 레이튼은 답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순찰병이 낮 동안 보았던 길 잃은 사람들의 동선을 하나씩 말하게 했다. 질문은 부드러웠고, 순찰병은 처음에는 긴장했으나 곧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융은 그 대화를 보며 창 안의 피난길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이미 천 조각이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아직 아무도 천 조각을 묶지 않았다. 그러나 순찰병의 손이 허공에서 길을 그리는 동안, 하융은 이쪽 골목의 어둠 속에도 아직 묶일 수 있는 자리가 많다는 것을 보았다.

푸리나는 갑자기 일어섰다.

“좋아. 빵집 주인은 자고 있겠지?”

그레이가 조금 놀라 말했다.

“지금 깨우시려고요?”

“아니. 자는 사람은 자야지. 여관좌의 대리인이 수면권을 침해하면 안 돼.”

죠니가 말했다.

“방금 되게 그럴듯한 말을 했는데, 뭔가 하려는 얼굴이야.”

“응. 가게는 안 깨우고 시장만 조금 깨울 거야.”

“그게 더 문제처럼 들리는데.”

푸리나는 대답 대신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 고리를 들어 올렸다. 하융은 순간 그녀가 신술을 펼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푸리나는 고리를 크게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엎어진 물동이 옆에 서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무대는 아직 닫혀 있습니다.”

그 말은 광장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등불 하나가 살짝 흔들렸고, 순찰병이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말이 닫힌 덧문들에 닿는 것을 느꼈다. 장엄한 선포는 아니었다. 밤중의 장난처럼 작았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조금 덜 헤매게 합시다.”

그리고 그녀는 물동이를 바로 세웠다.

그레이가 곧 다가와 물동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에 두면 통행에 방해가 됩니다. 조금 옆으로 옮기겠습니다.”

“응. 그레이가 옮기면 그게 맞아.”

“제가 직접 옮기겠습니다.”

“같이 하자. 나도 물동이는 들 수 있어.”

“전하, 옷이…….”

“망토는 빨면 돼. 물동이에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것보다 망토가 더 싸.”

죠니가 접시를 들지 않은 손으로 물동이 손잡이를 잡았다.

“셋이 들면 빨리 끝나. 그리고 여왕님이 물동이 하나 들겠다고 씨름하는 그림은 너무 길어지면 곤란해.”

푸리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나 약하다고 했어?”

“아니. 물동이가 귀찮게 생겼다고 했지. 둘은 달라.”

“그럼 인정.”

셋이서 물동이를 옮겼다. 광장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난 곳, 성문 창고로 향하는 길목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표시를 적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내일 낮 이 자리에 임시 표식을 세울 수 있는지 물었다. 푸리나는 물동이 옆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먼지 위에 빵 모양을 그렸다. 빵이라기에는 조금 찌그러진 달 같았다. 죠니는 그 그림을 보더니 낮게 말했다.

“그건 빵이야, 달이야?”

“빵.”

“빵집 주인이 보면 항의할 수도 있겠는데.”

“그럼 네가 그려.”

“난 먹는 쪽이지 그리는 쪽이 아니야.”

“비겁해.”

“현명한 거지.”

하융은 그 대화를 들으며 광장 가장자리에 섰다. 창 안의 시장은 아직도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었다. 작은 깃발, 꽃나무, 빵 냄새, 웃음. 그 아름다운 가능성은 여전히 이 현실보다 가벼웠고, 이 현실보다 따뜻했으며, 이 현실보다 조금 덜 아팠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는 이제 바로 세워진 물동이가 있었다. 먼지 위에 찌그러진 빵 그림이 있었다. 돌 틈의 풀잎 주변에는 푸리나가 밀어낸 작은 빈자리가 있었다. 순찰병은 신발 끈을 다시 묶었고, 그레이는 내일 붙일 그림 안내문의 위치를 적고 있었다. 레이튼은 길을 묻는 사람의 첫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물었고, 죠니는 접시 위의 빵 조각이 기울지 않게 손목을 조정했다.

그것들은 창 안의 축제보다 작았다.

하융은 그 작음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작아서 손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융.”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먼지 위에 그린 빵 그림 옆에 작은 꽃을 하나 더 그리고 있었다. 꽃이라고 하기에는 선이 세 개뿐인 모양이었다.

“이거 어때?”

하융은 다가가 그림을 보았다.

“빵 옆에 꽃이 있구려.”

“응. 길 잃은 사람이 빵을 찾다가 꽃도 보면 좋잖아.”

“꽃을 보러 온 것이 아닐 텐데.”

“그래도 보이면 나쁘지 않잖아.”

그 말은 가벼웠다. 그래서 오래 남았다. 하융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먼지 위의 꽃은 바람이 불면 사라질 것이다. 내일 낮이면 사람들의 발에 밟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있었다. 창 안의 꽃나무처럼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그늘을 만들지도 못하고, 아이가 앉을 자리도 주지 못하는 꽃. 그러나 지금 이 광장 위에서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려둔 꽃.

하융은 낮게 말했다.

“나쁘지 않소.”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채택.”

“무엇을 말이오?”

“내일 안내문에 꽃도 넣기.”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복잡해지면 정보 전달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작게.”

“작게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꽃이 살아남았네.”

“죠니식 축하야?”

“응. 꽤 진심이야. 작은 건 보통 제일 먼저 잘리거든.”

그레이가 기록판에 작게 덧붙였다.

“빵 그림 아래 작은 꽃 표시.”

하융은 그 글씨를 보았다. 창 안의 꽃나무가 아니라, 현실의 안내문 아래 들어갈 작은 꽃 표시. 세계는 그런 식으로도 건너오는가. 창 너머의 커다란 빛이, 먼지 위의 선 세 개와 종이 아래의 작은 표시가 되어 이쪽에 남는가. 그는 그 생각을 말로 만들지 않았다. 말로 만들면 너무 빨리 굳을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물동이 옆에 놓인 작은 돌 하나를 치웠다. 누군가 발을 걸 수 있을 만한 돌이었다.

죠니가 그걸 보고 말했다.

“좋네.”

“무엇이 말이오?”

“그 돌. 저기 있으면 누군가 걸려. 창문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돌은 직접 치워야 하잖아.”

하융은 돌을 손에 든 채 잠시 멈췄다. 돌은 작고 차가웠다. 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돌이었다. 그 돌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남았다. 그는 돌을 길가로 옮겨놓았다.

레이튼이 순찰병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내일 아침에는 성문 창고로 가는 첫 표지를 이곳에 세우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글자보다 그림을 먼저 보이게 하지요. 빵, 물동이, 작은 꽃. 훌륭한 조합입니다.”

푸리나는 가슴을 폈다.

“그렇지?”

“예. 길 안내가 되면서도, 너무 명령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꽃 하나 붙었다고 명령문이 덜 무서워지나?”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가끔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명령받고 있다고 느끼면 늦게 움직이지만, 초대받고 있다고 느끼면 한 걸음 빨라질 때가 있지요.”

푸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야. 초대장!”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배급 안내문이 초대장이 되면…… 혼란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럼 배급 안내 초대장.”

“그 표현도 조금…….”

죠니가 끼어들었다.

“그냥 그림 있는 안내문으로 하자. 이름이 길어지면 붙이기 전에 다들 지쳐.”

푸리나는 잠깐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죠니 의견 채택. 그림 있는 안내문.”

“드디어 정상적인 이름이 나왔네.”

“정상적인 이름도 가끔은 필요하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시장 입구를 돌아보았다. 창 안의 시장은 여전히 멀리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저쪽에 있을 것이다. 이쪽 시장은 내일 아침에도 피곤할 것이고, 빵은 부족할 것이고, 사람들은 줄을 서다 다툴지도 모른다. 작은 꽃 표시 하나가 전쟁을 멀리 보내지는 못할 것이다. 물동이 하나를 옮긴다고 피난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돌 하나를 치운다고 모든 길이 안전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융의 손바닥에는 아직 돌의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그 차가움은 창 너머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하융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시장의 냄새가 들어왔다. 식은 재, 오래된 밀가루, 젖은 나무, 먼지, 그리고 누군가 접시 위에 올려둔 말린 과일의 희미한 단내. 그 모든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창 안의 시장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끝에 닿았다.

푸리나가 문득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저쪽 시장이 더 예뻤어?”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기다렸고,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으며, 레이튼은 등불의 흔들림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렇소. 저쪽이 더 예뻤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것 같았어.”

“허나 이쪽은…….”

하융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돌을 쥐었던 자리가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이쪽은 손이 남는구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웃었다. 이번에는 크게 박수치지도, 당장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다만 커튼 고리를 손안에서 조용히 굴렸다.

“그럼 됐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손이 남으면 뭐라도 할 수 있지. 가끔은 그게 전부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오늘의 첫 장면치고는 충분히 좋은 결말입니다.”

그레이는 작게 덧붙였다.

“내일 할 일도 남았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좋아. 그럼 다음 장면은 내일 할 일을 확인하러 가는 장면!”

죠니가 말했다.

“그러면 사실상 업무잖아.”

“업무도 장면이 될 수 있어.”

“그건 그레이한테 물어봐.”

그레이는 잠시 당황하다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업무는…… 되도록 장면이 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조용히 끝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죠니가 푸리나를 보았다.

“봤지. 전문가 의견이야.”

푸리나는 조금 억울한 얼굴을 했다가, 곧 웃었다.

“좋아. 그럼 조용한 장면.”

하융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광장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창 안의 시장은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는 이제 그들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바로 세운 물동이, 먼지 위의 빵과 꽃, 길가로 옮겨진 돌, 신발 끈을 다시 묶은 순찰병, 내일 붙일 그림 있는 안내문. 창에서 흘러온 빛은 그 위에 희미하게 얹혀 있었다. 빛은 현실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무엇을 만질 수 있는지 보이게 했다.

하융은 문득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아직 첫 장면이었다.

그는 창 너머로 가지 않았다.

그는 시장의 돌바닥 위에 남은 자기 발자국을 보았다.
좋아. 이번 막은 **피난길**이야. 하융이 창에서 본 “더 나은 길”을 그대로 답으로 삼는 게 아니라, 실제 길을 밟으며 창에는 보이지 않던 진흙·돌·아이들의 두려움·말의 습관을 감각하는 방향으로 썼어. 하이라이트 부분에는 하융의 감정이 살짝 새는 식으로 한문체를 넣었어.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2막 — 피난길의 돌

시장을 지나 성문 쪽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밤이 깊어서만은 아니었다. 피난민들이 지나간 길에는 소리가 남지 않고 냄새가 남았다. 젖은 짚 냄새, 오래 끌린 수레바퀴의 흙 냄새, 급하게 꺼낸 가재도구에서 묻어난 집의 냄새, 그리고 사람들이 오래 서 있었던 자리 특유의 눅눅한 체온. 하융은 그 냄새들을 맡으며 걸었다. 창 안의 피난길은 더 정돈되어 있었다. 수레는 줄을 지켰고, 노인들은 그늘에서 쉬었으며, 아이들은 진창을 밟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길은 굽이마다 한 번씩 흐트러졌다. 어느 집 담벼락에는 수레가 긁고 간 자국이 있었고, 길모퉁이에는 떨어진 짐끈이 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푸리나는 앞서 걷다가 몇 걸음마다 멈췄다. 처음에는 창에서 본 길과 현실의 길을 대조하듯 보였지만, 곧 그녀는 벽의 갈라진 틈, 낮은 처마, 기울어진 표지목 같은 것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바닥을 점검하는 극장주의 눈과 닮아 있었다. 어디에 조명을 두면 사람이 덜 헤맬지, 어느 구석에서 배우가 넘어질지, 어느 문으로 나가면 객석이 그걸 퇴장으로 알아볼지 재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그 얼굴을 보다가, 창 안의 다른 푸리나를 떠올렸다. 그 푸리나는 같은 길을 조금 더 일찍 고쳤고, 그래서 어떤 아이가 넘어지지 않았다. 현실의 푸리나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낮은 처마 아래를 직접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 너무 어둡네.”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가 곧 기록판을 열었다.

“등불을 하나 더 둘 수 있습니다. 다만 기름 배급량을 확인해야 합니다.”

“기름이 부족하면?”

“성문 창고에서 남는 폐목을 받아 임시 횃대를 세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만 불씨 관리 인력이 필요합니다.”

“좋아. 그럼 불씨 관리자를 붙이고, 표식은 낮에도 보이게 하자. 밤에만 길이 헷갈리는 건 아니니까.”

죠니는 길모퉁이에 서서 수레바퀴 자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접시를 시장에 맡기고 왔지만, 손은 여전히 뭔가를 들고 있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비어 있었다. 그가 발끝으로 바퀴 자국 옆의 진흙을 눌렀다. 진흙은 생각보다 깊게 들어갔다.

“여긴 수레가 빠지겠네.”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입니까?”

“빈 수레면 몰라도, 짐 실은 수레는 싫어할 거야. 수레꾼은 더 싫어할 거고. 말은 아예 표정으로 욕할걸.”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말이 표정으로 욕해?”

“해. 사람보다 솔직해서 문제지.”

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 길모퉁이의 폭을 살폈다. 그는 직접 결론을 말하지 않고, 옆에 서 있던 순찰병에게 물었다.

“낮에 이 길에서 수레가 멈춘 일이 있었습니까?”

순찰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바퀴가 빠졌고, 한 번은 앞쪽 수레가 멈추는 바람에 뒤가 전부 막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돌아갔습니까?”

“대부분 이 골목으로…… 그런데 이 골목은 좁아서 아이들이 밀렸습니다.”

레이튼은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길은 빠른 길이 아니라, 빠른 길처럼 보이는 길이었군요.”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창 안의 피난길에서는 이 골목을 쓰지 않았다. 그 세계의 수레들은 조금 먼 길을 돌아갔다. 멀지만 넓은 길이었다. 창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창은 이 진흙의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수레꾼이 왜 짧은 길을 고집했는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무엇을 무서워했는지도, 말이 어느 그림자 앞에서 귀를 젖히는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창은 길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길의 무게는 발바닥으로 내려와야 알 수 있었다.

푸리나는 하융을 돌아보았다.

“하융?”

“듣고 있소.”

“창에서는 이 길을 어떻게 썼어?”

하융은 어둠 속의 골목을 바라보았다. 창 안의 장면이 겹쳤다. 더 넓은 길, 느린 수레, 덜 밀리는 사람들, 돌다리 앞에서 쉬는 노인들. 하지만 그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것이다. 저쪽에서는 이렇게 했다. 이쪽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몇 명이 덜 다친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발밑에는 진흙이 있었다. 창 안에서는 밟히지 않던 진흙이었다.

“저쪽에서는 이 골목을 쓰지 않았소. 수레를 조금 돌아가게 했소.”

그레이가 적었다.

“우회로 사용.”

“다만 그쪽 길도 확인해야 하오. 창에서는 넓어 보였으나, 실제로는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소.”

레이튼이 살짝 웃었다.

“좋습니다. 창이 우리를 성급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셨군요.”

하융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는 오늘도 질문하지 않고 칭찬하는 척 질문하시는구려.”

“아, 들켰습니까?”

죠니가 낮게 웃었다.

“교수는 원래 그래. 차를 주는 얼굴로 문을 열어놓고, 정신 차리면 네가 그 문을 지나가고 있지.”

레이튼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비유입니다. 다만 문을 지나는 것은 언제나 본인의 선택이지요.”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좋아. 그럼 우회로 확인. 하지만 지금 전부 가면 피난길 답사가 아니라 밤 산책이 너무 길어져. 먼저 돌다리까지 가자.”

그들이 다시 움직이자, 길은 시장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느 담장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넘어지며 붙잡았던 자리일지도 몰랐다. 어느 집 처마 밑에는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방향 표식처럼 보였지만, 너무 낮아서 키 큰 사람은 지나치기 쉬웠고, 너무 어두워서 아이는 보지 못할 수 있었다. 그레이는 천 조각의 위치를 기록했고, 푸리나는 그것을 보더니 자기 망토 끝을 잠시 만졌다. 죠니가 그 손짓을 보고 미리 말했다.

“망토 찢을 생각이면 하지 마. 네 망토가 표식이 되면, 내일 아침 시장 사람들이 전부 여왕님 망토 조각을 보러 몰릴걸.”

푸리나는 손을 멈췄다.

“그건…… 조금 재밌을지도.”

“재밌긴 한데 길 안내가 아니라 구경거리가 돼. 목적이 바뀌잖아.”

“아쉽네.”

“천은 창고에서 가져와. 왕이 망토로 길 표시하는 나라가 되면, 그레이가 장부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 곤란해져.”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확실히…… 관리 항목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망토는 생존.”

하융은 그 대화를 들으며 걸었다. 창 안의 피난길은 고요하고 질서 있었다. 그러나 이쪽 피난길에는 이런 대화가 있었다. 망토를 찢으려는 왕과, 그것을 말리는 기사단장과, 관리 항목을 걱정하는 행정관. 창 안의 길에는 없는 소리였다. 사소하고, 쓸데없고, 이상하게 사람을 붙드는 소리였다.

돌다리는 성문으로 향하는 작은 물길 위에 놓여 있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그 아래로 내려가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물소리만 어둠 속에서 낮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자체는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쪽 돌판이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난간 일부가 흔들렸다. 하융은 그 다리를 보는 순간 창 안의 장면을 떠올렸다. 저쪽 세계에서는 노인들이 이 다리 앞에서 쉬었다. 아이들은 수레 사이에 나뉘어 걸었고, 물통은 세 번째 굽이마다 있었다. 모든 것이 조금 더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돌다리 앞에는 앉을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쉬었다면 길가에 주저앉았을 것이고, 그들이 일어설 때 뒤의 수레가 멈췄을 것이다. 다리 위에 한 번에 두 수레가 오르면 돌판은 더 내려앉을지도 몰랐다. 하융은 다리 한가운데를 보았다. 창 안의 노인이 거기 앉아 있었다. 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물소리와 돌의 축축한 냄새가 있었다.

“이곳이오.”

그가 말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열었다.

“쉬는 지점으로 보신 곳입니까?”

“저쪽에서는 그랬소. 그러나 이쪽은 앉을 자리가 없소. 다리도 생각보다 낮게 가라앉았구려.”

죠니는 난간을 손으로 눌러보았다. 난간은 삐걱이며 조금 흔들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 번 더 눌렀다.

“이건 기대면 안 돼.”

푸리나가 바로 다가왔다.

“많이 위험해?”

“사람 하나 기대는 건 버틸 수도 있어. 문제는 피난길에서는 사람 하나만 기대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거지. 누가 넘어지면 셋이 같이 잡고, 뒤에서 누가 밀고, 그러다 한 번에 무게가 실려.”

“고쳐야겠네.”

“고쳐야지. 그리고 고치기 전까지는 여기서 쉬게 하면 안 돼. 쉬게 하려면 다리 앞이 아니라 저쪽 넓은 곳이 낫겠어.”

죠니는 손가락으로 다리보다 조금 앞선 빈터를 가리켰다. 잡초가 조금 자라 있었고, 버려진 나무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창 안에서는 보지 못한 자리였다. 하융은 그 빈터를 보았다. 창은 돌다리 앞의 장면을 보여주었지만, 현실의 다리는 사람을 받아줄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대신 현실에는 빈터가 있었다. 잡초와 나무상자와 낮은 벽. 완벽하지 않았지만, 사람 몇 명이 앉기에는 충분했다.

레이튼은 빈터와 다리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재며 순찰병에게 물었다.

“낮에 이쪽을 지나는 사람들은 다리를 보기 전까지 이 빈터를 알아차립니까?”

“아마…… 잘 못 봅니다. 수레가 다리 쪽으로 몰리면 시야가 막혀서요.”

“그렇다면 쉬는 곳은 있지만, 쉬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푸리나가 그 말을 듣고 빈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나무상자 하나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상자는 가벼웠지만, 완전히 썩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바로 세웠다.

“이 정도면 의자.”

그레이가 곧 따라왔다.

“그 상자는 못이 튀어나와 있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손을 멈췄다.

“오.”

죠니가 옆에서 상자를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못 하나를 가리켰다.

“있네. 그레이가 이겼다.”

“이긴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앉기 전에 발견했으면 이긴 거지.”

그레이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푸리나는 상자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좋아. 이 의자는 아직 리허설 탈락.”

“수리 후 재검토입니다.”

그레이가 정정했다.

“수리 후 재검토. 역시 그레이는 탈락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지 않아.”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빈터 한가운데 섰다. 창 안의 돌다리 앞에는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현실의 빈터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자를 고치고, 못을 빼고, 표식을 달고, 다리로 몰리는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하면. 창 안의 장면은 그대로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 비껴왔다. 돌다리 앞이 아니라, 돌다리 전의 빈터로. 노인의 자리도, 아이의 물통도, 수레의 줄도 조금씩 비껴와 이쪽 흙 위에서 다른 모양을 잡으려 했다.

하융은 잠시 숨을 멈췄다.

창외에는 길이 많았다. 길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엇갈려 있었고, 어느 길은 꽃빛으로 젖었으며 어느 길은 피와 진흙으로 막혔다. 그러나 금일今日, 나의 발밑에 있는 것은 한 자尺의 흙이요, 한 개의 돌이며, 한 사람의 숨이었소. 만리萬里의 가능성이 있어도, 발은 한 번에 한 걸음밖에 옮기지 못하오. 그러니 길은 하늘에 있지 않고, 발아래에서 조금씩 태어나는 것이었소.

그 한문 섞인 생각은 입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가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하융?”

하융은 빈터의 흙을 보다가 대답했다.

“이곳이 좋겠소.”

그레이가 물었다.

“쉬는 지점으로요?”

“그렇소. 창에서는 돌다리 앞이었으나, 현실에서는 이곳이 낫소. 다리 앞은 좁고, 난간은 믿기 어렵소. 이 빈터라면…… 손을 볼 수 있겠소.”

죠니가 빈터를 둘러보았다.

“나쁘지 않아. 수레가 다리로 바로 몰리는 것도 줄일 수 있겠네. 말도 여기서 한 번 숨 돌리면 덜 버틸 거고.”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덜 버텨?”

“아니, 덜 버틴다는 건 안 좋은 말이네. 덜 성질낸다고 하자.”

“죠니, 가끔 말보다 말 표현이 더 어려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레이튼은 빈터의 입구와 출구를 번갈아 보았다.

“표식을 세운다면 두 개가 필요하겠습니다. 하나는 이곳이 쉬는 자리라는 표시, 다른 하나는 다리 위에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수레 수를 제한하는 표시.”

그레이가 적었다.

“임시 휴식 지점. 상자 수리 또는 교체. 못 제거. 물통 배치. 다리 난간 수리 전까지 통행 제한. 수레 간격 조정.”

푸리나는 그레이의 기록판을 들여다보려다가, 글씨가 너무 작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 네 글씨는 가끔 비밀문서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 칭찬이야. 비밀문서처럼 믿음직하다는 뜻.”

“그건…… 칭찬입니까?”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식 칭찬이야. 가끔 해석이 필요해.”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이 길을 처음 걷는 사람이, 어디서 가장 먼저 불안해할까요?”

순찰병은 다리와 빈터를 번갈아 보았다.

“아마 다리 앞일 겁니다. 물소리가 들리고, 길이 좁아지고, 뒤에서는 수레가 밀어붙이니까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쉬는 지점은 몸만 쉬게 하는 곳이 아니라, 불안이 몰리기 전에 숨을 고르게 하는 곳이어야겠군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빈터 한가운데를 보았다.

“그럼 여기도 작은 무대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피난길의 휴식 지점이라면…… 무대라는 표현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무대 말고, 숨 고르는 자리.”

그레이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 표현이 좋습니다.”

“채택.”

죠니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이름이 다 정상적으로 가네. 좋은 징조야.”

푸리나가 그를 흘겨보았다.

“내 작명 감각이 평소엔 이상하다는 뜻이야?”

“가끔은 너무 멀리 가. 그런데 뭐, 멀리 가는 사람이 있어야 가까운 이름도 고르지.”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 웃었다.

“좋아. 그건 칭찬으로 받을게.”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창 안의 피난길은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쪽 길은 시끄럽고, 축축하고, 상자는 못이 튀어나와 있었고, 난간은 흔들렸으며, 이름 하나를 정하는 데도 여러 사람이 말을 보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란 속에서 길이 조금씩 생겨났다. 창 안에서 완성되어 있던 길보다 느리고, 더럽고, 불편했지만, 누군가 손을 대고 있었다. 푸리나는 이름을 붙이고, 그레이는 고칠 항목을 적고, 레이튼은 불안을 묻고, 죠니는 난간을 눌러보고, 하융은 창과 흙 사이에서 조금 늦게 도착한 장면을 옮겨놓았다.

그때 다리 건너편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순찰병이 등불을 들고 앞서갔다. 다리 너머 그늘진 벽 아래, 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손에는 찢어진 천 조각을 쥐고 있었고, 무릎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더 울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가 가장 먼저 몸을 낮췄다.

“괜찮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더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녀는 기록판을 닫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천천히 손을 내렸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야. 다친 곳이 있니?”

아이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하지만 손은 천 조각을 더 꽉 쥐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 천은 길 표시였습니까?”

아이는 놀란 듯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아이의 손에 있는 천 조각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저 자기 목소리만 조금 낮췄다.

“혹시 누군가가 그 천을 따라오라고 했나요?”

아이는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파란 천을 따라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건…….”

그가 손을 폈다. 천 조각은 파란색이었지만, 진흙과 물에 젖어 거의 검게 보였다. 낮에는 표식이었을 것이다. 밤에는 그림자와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푸리나는 아이의 손에 있는 천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망토를 보았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망토 찢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얼굴에 썼어.”

“너는 왜 내 얼굴을 그렇게 잘 읽어?”

“오래 봤으니까.”

푸리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망토 대신 머리끈 하나를 풀었다. 푸른빛이 조금 도는 리본이었다. 잠옷과 망토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그것만은 낮의 무대에서 떨어져 나온 소품 같았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그건…….”

“괜찮아. 망토는 안 찢었잖아.”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맞네. 협상안으로는 나쁘지 않아.”

푸리나는 리본을 아이에게 바로 건네지 않았다. 먼저 다리 옆, 빈터로 들어가는 낮은 나뭇가지에 묶었다. 등불이 닿자 푸른 리본이 어둠 속에서 작게 빛났다. 창에서 흘러온 시장의 노랑과 우물의 푸른빛이 그 리본 위에 잠시 섞였다. 아이는 그 빛을 보았다. 울음을 멈춘 얼굴은 아직 겁에 질려 있었지만, 눈은 리본을 따라 움직였다.

“자.”

푸리나가 말했다.

“이제 파란 천은 저기야. 그리고 저기로 가면 쉬는 자리. 내일은 더 잘 보이게 해둘게.”

아이는 아주 작게 물었다.

“엄마도 볼 수 있어요?”

푸리나는 대답하기 전에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성함을 알려줄 수 있니?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아이는 더듬더듬 이름을 말했다. 그레이는 그것을 한 번 듣고, 다시 물었다. 아이는 다시 말했다. 그레이는 세 번째로 확인했다. 아이가 조금 지친 얼굴을 하자,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틀리지 않게 적고 싶어서.”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에서 천 조각을 조금 덜 세게 쥐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 안의 피난길에서는 아이들이 수레 사이에 나뉘어 걷고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았다. 이쪽의 아이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이쪽에는 푸리나가 묶은 푸른 리본이 있었고, 그레이가 세 번 확인한 이름이 있었으며, 레이튼의 질문과 죠니의 낮은 한숨과 순찰병의 등불이 있었다.

하융은 창 안의 아이와 현실의 아이를 번갈아 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선이 오래 갈라지지 않았다. 현실의 아이가 훌쩍이며 리본을 보는 바람에, 창 안의 아이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하융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융 경.”

레이튼이 낮게 불렀다.

“듣고 있소.”

“방금 무엇을 보셨습니까?”

하융은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푸른 리본을 보았다.

“길을 잃은 아이를 보았소.”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아마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죠니는 다리 난간 옆에 서서 아이가 걸어올 방향을 살폈다.

“내일은 저쪽에도 등불 하나 더 둬야겠네. 파란 천이 밤에 검어지면, 그건 안내가 아니라 속임수야.”

그레이는 곧 적었다.

“야간 표식 색상 재검토. 등불 또는 반사 천 필요. 아이 동선 확인.”

푸리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 수 있겠어?”

아이는 푸리나의 손을 보다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푸리나는 아이의 손을 너무 세게 잡지 않았다.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손이 아니라, 돌다리를 건널 때 옆에 있어주는 손이었다.

하융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돌다리는 여전히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난간은 믿기 어려웠으며, 물소리는 어두웠다. 그러나 푸른 리본은 빈터의 입구에서 흔들렸다. 그것은 창 안에는 없던 빛이었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현실의 천에 묶여, 이제 누군가의 길 표시가 되고 있었다.

빈터에 도착하자 아이는 그제야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는 서둘러 달래지 않았다. 아이가 울 수 있게 조금 기다렸다. 죠니는 주머니에서 말린 과일 하나를 꺼내 푸리나에게 건넸고, 푸리나는 그것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아이는 망설이다가 받았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내 몫이었는데.”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진짜?”

“아니. 그냥 말해본 거야. 애한테 준 걸 다시 뺏으면 내가 너무 이상한 놈이 되잖아.”

아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약했지만, 울음만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환하게 말했다.

“좋아. 방금 그거 봤지? 이건 거의 박수 직전이야.”

죠니가 말했다.

“그걸 그렇게 키우면 애가 부담스러워해.”

“알았어. 작은 박수 직전.”

“그것도 좀.”

그레이가 조용히 아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지금은 웃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입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융은 그 말을 들었다. 웃지 않아도 된다는 말. 울어도 된다는 말보다 더 작은 말이었다. 그러나 피난길에서는 그런 작은 말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창 안의 세계에서는 아이가 길을 잃지 않았으므로, 그런 말을 들을 일도 없었다. 이쪽의 아이는 길을 잃었고, 그래서 그 말을 들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질문은 아직도 멀리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융이 그 질문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말린 과일을 천천히 씹는 것을 보았다. 푸른 리본이 등불 아래 흔들렸고, 그레이의 펜이 이름 하나를 조심스럽게 마무리했다. 죠니는 다리 쪽을 다시 확인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아이의 어머니가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은 방향을 묻고 있었다. 푸리나는 아이의 옆에서 괜히 먼지 위에 작은 별을 그렸다가, 아이가 보는 것을 확인하고 별 옆에 더 작은 빵을 그렸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창에서 본 길에는 이 아이가 없었소.”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소. 길은 정돈되어 있었고, 수레는 덜 막혔고, 표식은 제자리에 있었소. 그래서 이 아이가 길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는 말을 멈췄다. 설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명으로 만들면 아이의 울음도, 리본도, 돌다리의 물소리도 너무 빨리 의미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레이가 대신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이 아이를 찾았습니다.”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융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다. 성문 쪽 창고에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반쯤 넋이 나가 찾고 있었다고 했다. 순찰병이 달려가 데려왔고, 여인은 아이를 보자마자 무릎이 풀리듯 주저앉았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쥔 채 어머니에게 안겼다. 여인은 푸리나를 알아보고 무언가 예를 갖추려 했으나, 푸리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나중에. 지금은 아이부터 안아.”

여인은 울면서 아이를 안았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조용해졌다. 죠니는 괜히 다리 쪽을 보았고, 레이튼은 등불을 조금 낮췄으며, 그레이는 이름 옆에 작은 표시를 하나 했다. 하융은 그 표시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아마 확인 완료, 혹은 가족 재회, 혹은 그레이만 알아보는 더 조용한 말일 것이다.

돌다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푸른 리본이 흔들렸다.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더 나은 피난길의 빛은 아직도 어딘가에 있었다. 그 빛은 현실의 다리 위에 내려앉아, 내려앉은 돌판과 흔들리는 난간과 아이의 젖은 신발을 비췄다. 빛이 있다고 길이 저절로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는 조금 더 잘 보였다.

하융은 다리 앞 빈터를 다시 보았다.

“이곳에 표식을 세우면 좋겠소.”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푸른색만으로는 부족하오. 밤에는 검어지오.”

“반사되는 천이나 등불을 함께 쓰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표식을 놓쳤을 때 물을 사람도 필요하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질문은 순찰 동선으로 이어지겠군요.”

죠니는 난간을 한 번 더 눌렀다.

“그리고 이 난간은 아침까지 기대지 말라고 표시해. 내가 보기엔 사람보다 먼저 이쪽이 쉬고 싶어 해.”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숨 고르는 자리, 푸른 리본, 등불, 난간 수리, 순찰 동선. 그리고…….”

그녀는 아이와 어머니를 보았다.

“말린 과일도 조금.”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그건 네 예산에서 내.”

“알았어.”

“너 진짜로 할 생각이지?”

“응.”

죠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많이는 말고. 배고픈 사람 앞에서 간식만 나눠주면 괜히 더 슬퍼질 때도 있어. 빵이랑 같이 줘.”

푸리나는 그 말을 곧장 받아들였다.

“빵이랑 같이. 좋아.”

그레이가 적었다.

“아동 대상 소량 간식은 배급과 함께. 단독 배포 금지.”

죠니가 중얼거렸다.

“내 농담이 행정 문구가 되는 건 아직도 좀 적응이 안 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농담이라도 쓸모가 있으면…… 적습니다.”

“그럼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죠니, 축하해. 네 농담이 정책이 됐어.”

“별로 받고 싶지 않은 영광이야.”

하융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아주 조금 났다. 웃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짧게 흩어졌다. 그는 창 안의 피난길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더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창은 그를 잡아당기기보다, 현실의 빈터 위로 옅은 흙빛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푸른 리본을 보았고, 아이의 이름을 보았고, 난간의 흔들림을 보았다.

그는 창 너머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이쪽 길에서, 돌 하나와 리본 하나와 아이의 젖은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그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3막 — 우물가의 이름

우물은 피난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돌다리에서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낮은 담장과 기울어진 나무 십자가 사이에 오래된 우물 하나가 나왔다. 낮에는 사람들이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갔을 것이다. 밤에는 달라졌다. 골목은 좁았고, 벽은 젖어 있었으며, 우물의 돌턱에는 오래 손이 닿은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물을 길을 때마다 짚고, 기대고, 숨을 고르고, 때로는 두레박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내려다보았을 자리였다. 하융은 우물 앞에서 멈췄다. 창은 이미 열려 있었다. 이번에는 새로 열리는 소리도 없었다. 우물은 현실에도 있었고, 창 너머에도 있었으며, 두 우물의 물빛은 너무 닮아 있었다.

푸리나는 곧장 우물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하융의 발이 멈춘 것을 보고, 한 걸음 뒤에서 섰다. 죠니도 말없이 골목 입구 쪽을 살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등불을 조금 낮춰 들게 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열지 않았다. 먼저 하융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 작은 지연이 하융에게는 느껴졌다. 기록하기 전에 사람을 보는 손. 적기 전에 숨을 확인하는 눈.

“이곳입니까?”

그레이가 물었다.

“그렇소.”

하융은 우물의 돌턱을 보았다. 창 안에서는 아이가 그 돌턱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아이는 두레박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며 발끝을 까딱였고, 옆의 아이는 웃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다음 장면에서 두레박의 물은 작은 그릇에 담겼다. 그 다음 장면에서 아이는 누워 있었다. 하융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이 맑아 보였소.”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 말이 별로 좋은 시작은 아닌데.”

“맑았소. 너무 맑았소. 물 위에 아주 얇은 막이 있었고, 두레박 줄에는 검은 얼룩이 있었소. 처음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레이가 그제야 기록판을 열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소리는 아주 작았다.

“두레박 줄의 얼룩. 물 위의 막. 냄새는 어떠했습니까?”

하융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현실의 물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등불을 가까이 가져가자 빛이 물 위에 흩어졌다. 잠깐, 창 너머의 물빛과 현실의 물빛이 겹쳤다. 하융은 그 겹침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냄새는 피할 수 없었다. 젖은 돌, 오래된 나무, 가라앉은 흙, 그리고 희미하게 신맛이 나는 무언가.

“신 냄새가 조금 있소. 썩은 냄새와는 다르오. 물이 오래 고였거나, 무언가 흘러든 것 같소.”

그레이는 적었다.

“사용 중단이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바로 물었다.

“지금?”

“네. 확인 전까지는 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죠니가 골목 밖을 보았다.

“문제는 대체 물이야. 그냥 쓰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른 데로 몰릴 거야. 밤에 물 때문에 몰리면 다치기 딱 좋고.”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까운 대체 급수 지점을 확인해야겠습니다. 그 뒤에 이 우물은 점검 중이라고 알리는 편이 좋겠군요. ‘오염’이라는 말을 먼저 쓰면, 공포가 우리보다 빨리 달릴 겁니다.”

푸리나는 우물의 돌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과장된 표정이 없었다. 무대를 앞둔 배우의 얼굴도 아니었고, 장난을 꾸미는 극장주의 얼굴도 아니었다. 등불빛이 그녀의 눈가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점검 중. 대체 물 안내. 아이와 노인 먼저 확인.”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배탈, 구토, 열, 어지러움. 그리고…… 이 우물을 쓴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융은 그 말에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이름. 창 안의 장부 끝에는 이름이 없었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그 짧은 말은 마른 잉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하융은 우물가의 돌을 보았다. 현실의 돌에는 아직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창 너머에서는 이미 이름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레이 경.”

“네.”

“저 창에서 본 일을 말하면, 저 아이들의 죽음은 이쪽 세계의 점검 항목이 되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하융은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것이 두렵소. 죽은 세계의 슬픔을 이쪽의 편의로 쓰는 것 같아서.”

골목은 잠시 조용해졌다. 멀리서 밤 순찰의 발소리가 한 번 지나갔고, 우물 안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우물가의 돌을 발끝으로 건드리다 멈췄다. 레이튼은 하융을 보았지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레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록판을 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쓰지도 않았다. 펜촉은 종이 위에 떠 있었다.

“편의로만 쓰면 안 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골목에서는 작은 목소리가 더 멀리 갔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숫자나 절차로만 바꾸면…… 그건 또 한 번 잃어버리는 거니까요.”

하융은 천천히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우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차가운 관료의 얼굴이 아니었다. 새벽까지 장부를 붙들고 있다가, 이름 하나가 틀린 것을 발견하면 다시 처음부터 확인할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되돌려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까지 편의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멈췄다. 더 말하면 하융의 질문을 대신 결론 내릴까 봐, 스스로 문장을 접은 것처럼 보였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네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름은 없어. 하지만 네가 혼자 들고 있어야 하는 이름도 없어.”

하융은 우물 안을 보았다. 물 위에서 등불이 흔들렸다. 창 너머의 아이가 다시 보였다. 붉은 끈. 작은 손. 웃음. 그리고 누운 얼굴. 하융은 손가락을 펴고, 우물의 돌턱에 닿지 않을 만큼 가까이 가져갔다.

이름은 물가에서 잘 미끄러진다. 한 번 떨어지면 깊은 데로 간다. 그 깊은 곳에서 이름은 숫자가 되고, 숫자는 줄이 되고, 줄은 마른 잉크가 된다. 명名이 사라진 사死는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사死는 다시 같은 골목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오늘 밤, 이 우물가에서, 나는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길어 올려야 했소. 두레박이 아니라 혀끝으로, 장부가 아니라 숨으로.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마리암.”

그레이가 적었다.

“마리암.”

“일곱 살, 혹은 여덟 살. 손목에 붉은 끈을 묶고 있었소. 오른쪽 무릎에 작은 흉터가 있었소. 물을 마시기 전에 웃었소.”

그레이는 잠깐 펜을 멈췄다. 그리고 “웃었소”까지 적지는 않았다. 대신 이름 옆에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하융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점은 이상하게도 충분해 보였다.

“아람.”

“아람.”

“확실하지는 않소. 다른 아이가 그 이름으로 부른 듯했소. 파란 조끼를 입었고, 두레박을 같이 잡았소.”

“확실하지 않음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사르키스.”

그레이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사르키스.”

“노인이오. 아이들에게 먼저 물을 주었소. 자신은 가장 늦게 마셨고, 증상을 숨겼소. 아마 아이들이 먼저 치료받기를 바랐을 것이오.”

죠니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은 꼭 그렇게 해.”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우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기가 늦게 아프면 남들도 늦게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하지. 실제로는 반대야. 주변 사람이 더 늦게 알아차려. 본인이 숨기니까.”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 확인은 본인 말만 믿으면 안 됩니다. 특히 노인과 아이 보호자는 따로 봐야 합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내 말이 또 장부로 갔네.”

“필요한 말이라서요.”

“그럼 됐어. 이번 건 농담 아니었으니까.”

레이튼은 우물가에서 조금 떨어져 골목의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순찰병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 우물을 쓰는 사람들은 주로 어느 쪽에서 옵니까?”

“북쪽 피난민들이 많습니다. 성문 창고보다 가까워서…….”

“가까운 물은 대개 먼저 선택되지요. 그 물이 안전한지는 나중 질문이 되고요.”

순찰병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낮에 막았어야 했습니까?”

레이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순찰병의 얼굴을 잠시 보고, 질문을 바꾸었다.

“낮에 이 물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까?”

“아뇨.”

“냄새를 맡았습니까?”

“아니요. 그냥 사람들이 쓰길래…….”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죄인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다음 질문을 앞당기는 일입니다. 누가 이 우물을 쓰는가. 언제부터 썼는가. 대체 물은 어디인가. 증상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순찰병은 고개를 숙였다.

“예.”

푸리나는 그 말을 받듯 앞으로 나섰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는 우물 점검이야. 겁주지 말고, 대신 늦지도 말고. ‘점검 중’이라고 말해. 물은 저쪽 임시 창고에서 받게 하고, 아이랑 노인은 그레이 쪽으로 데려와. 레이튼, 말 순서 잡아줘.”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먼저 대체 급수 지점을 말하고, 그 다음 점검 사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은 금지부터 들으면 길을 잃습니다.”

“죠니.”

푸리나가 부르자, 죠니는 이미 골목 입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아. 몰리는 사람 있으면 길을 틀어줄게. 그리고 누가 물 뜨겠다고 우기면 내가 조금 무섭게 서 있으면 되고.”

“조금만 무섭게.”

“난 원래 많이 무서운 쪽은 아니야.”

푸리나가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그냥 네 자기평가가 흥미로워서.”

“교수한테 옮았어.”

레이튼이 웃었다.

“저는 전염성이 낮은 편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 짧은 농담 덕분에 골목의 공기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하융은 우물가에서 물러섰다. 그레이는 기록판 한 장을 찢어 우물 점검 표식을 만들었다. 푸리나는 커튼 고리 끝으로 종이를 누르며, 순찰병에게 끈을 빌렸다. 종이는 바람에 흔들렸고, 그 위의 글씨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점검 중.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것.
아이와 노인은 먼저 알려주십시오.

그레이가 글씨를 보더니, 마지막 줄 아래에 작게 빵과 물동이 표시를 그렸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꽃은?”

그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없애겠습니다. 급한 안내라서요.”

푸리나는 아주 잠깐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엔 없어도 돼.”

죠니가 낮게 말했다.

“드물게 빠른 포기네.”

“나도 때와 장소는 봐.”

“그럼 다행이고.”

우물에는 임시로 끈이 둘러졌다. 순찰병 둘이 골목 입구와 반대편에 섰다. 죠니는 그들이 서는 위치를 조금씩 바꿨다. 한 명은 너무 안쪽에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빛을 등지고 서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죠니는 그런 것들을 짧게 지적했다.

“거기 서면 사람들이 네 뒤로 지나가. 한 걸음 왼쪽. 너는 등불을 얼굴 옆으로 들어. 금지하는 사람이 얼굴이 안 보이면 괜히 더 싸움 나.”

순찰병들이 곧장 자세를 고쳤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작게 감탄했다.

“죠니, 너 이런 거 잘하네.”

“사람이 몰리는 길목에서 싸움 안 나게 세우는 건 기사단 일이야. 창 들고 달리는 것만 기사단 일이 아니거든.”

“음. 좋다. 그 말도 나중에 써야지.”

“쓰지 마. 너무 업무 같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맞는 말입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가,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장부로 가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사이 레이튼은 순찰병과 함께 가까운 피난민 숙소로 향했다. 그의 말은 멀리서 들려왔다. 크지 않았지만, 사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이 우물은 지금 점검 중입니다.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나 어르신께서 오늘 이 물을 드셨다면, 잠시 확인만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독입니까?”

레이튼은 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도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그래서 확인이 끝날 때까지 다른 물을 쓰려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소문보다 순서입니다.”

소문보다 순서.

하융은 그 말을 속으로 반복했다. 레이튼의 말은 늘 그렇게 조용히 물가에 놓였다. 누군가 발을 디딜 수 있을 만큼만.

푸리나는 우물 앞에 남았다. 그녀는 우물의 돌턱을 만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하융은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우물을 보고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우물가를 지나갔을 사람들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직 공연하지 않은 무대의 빈자리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하.”

“응.”

“꽃을 그리지 않았구려.”

푸리나는 우물에 묶인 안내문을 보았다.

“응. 이번엔 그레이가 맞아. 꽃이 들어가면 예뻐지는데, 예뻐지면 사람들이 잠깐 덜 급하게 읽을 것 같았어.”

“전하답지 않게 조심스럽소.”

“나도 가끔 그래.”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작았다.

“그리고 여기엔 아직 꽃보다 이름이 먼저인 것 같아서.”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푸리나가 평소처럼 길게 꾸민 대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이름이 먼저. 꽃은 나중. 무대도, 조명도, 박수도 나중. 지금은 우물가에서 이름을 놓치지 않는 일이 먼저였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하융 님.”

“듣고 있소.”

“혹시 더 보이는 이름이 있습니까?”

하융은 다시 우물을 보았다. 창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의 손, 노인의 굽은 등, 장부의 마른 잉크. 그는 그 안을 오래 바라보지 않으려 했지만, 아주 짧게는 봐야 했다. 이름이 있을지도 몰랐다. 잃어버리기 전에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린.”

그레이가 적었다.

“나린.”

“아마 아이의 어머니요. 직접 물을 마셨는지는 모르오. 아이를 안고 있었소.”

“나린. 보호자 가능.”

“그리고…… 바르단. 우물가에서 두레박을 고친 남자요. 손에 검은 얼룩이 묻었소.”

“바르단. 두레박 수리. 손 오염 가능.”

그레이의 글씨는 작았다. 그러나 이름들은 그 작은 글씨 안에서 자리를 얻었다. 하융은 그 모습을 오래 보았다. 이름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창 너머의 장면이 조금씩 덜 미끄러졌다. 완전히 붙잡힌 것은 아니었다. 죽은 가능성은 여전히 죽은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물속으로만 가라앉지는 않았다.

골목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아이를 안은 여인 하나가 그레이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에는 겁이 있었고, 팔에는 잠든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이마는 조금 뜨거워 보였다. 그레이는 바로 기록판을 접고, 손등으로 아이 이마 가까이의 공기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언제부터 열이 있었습니까?”

“저녁부터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오늘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까?”

“조금…… 아이가 목마르다고 해서.”

그레이는 여인을 탓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순찰병에게 약재 상자와 따뜻한 물을 요청했다. 푸리나는 여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평소처럼 크게 웃지 않았다.

“앉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아이를 계속 안고 있으면 팔이 먼저 굳어.”

여인은 푸리나를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저는…….”

“지금은 팔부터. 예는 나중에 받아도 돼.”

죠니가 빈 나무상자 하나를 가져오다가, 못이 없는지 먼저 손으로 훑었다.

“이건 앉아도 돼. 내가 확인했어.”

그레이가 여인에게 말했다.

“아이 이름을 알려주세요.”

“마리암입니다.”

하융은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도 멈췄다. 푸리나는 하융을 보지 않았다. 죠니도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멀리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물가의 등불만이 조금 흔들렸다.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다시 물었다.

“마리암. 맞습니까?”

“네. 마리암이에요.”

하융은 아이의 손목을 보았다. 붉은 끈이 있었다. 현실의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열이 있었고, 얼굴은 붉었고, 잠든 숨이 고르지 않았다. 그러나 숨이 있었다. 창 너머의 마리암은 누워 있었다. 이쪽의 마리암은 어머니의 팔 안에서 작게 몸을 웅크렸다.

하융은 손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지금은 여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아주 짧게.

그레이는 마리암의 이름 옆에 현실의 표시를 했다. 하융은 그 표시를 보았다. 창 너머의 이름과 현실의 이름이 같은 줄에 닿지 않도록, 그레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칸을 나누었다. 죽은 가능성과 살아 있는 아이가 섞이지 않게. 잊지 않되, 겹쳐 삼키지 않게.

“열은 높지만 의식은 있습니다. 바로 치료소로 보내겠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빠르지도 않았다. 여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속도였다.

“괜찮을까요?”

여인이 물었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쉽게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봐야 합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여긴 우리가 볼게.”

그레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우물 명단이…….”

“그레이.”

푸리나가 이번에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이름은 계속 받을게. 네가 돌아오면 틀린 데 없는지 같이 확인하자.”

그레이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여인과 아이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그레이가 그 곁을 따라갔다. 그녀의 작은 등이 등불 사이로 멀어졌다. 하융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창 너머의 장부에서는 마리암이 숫자가 되었지만, 현실의 길에서는 그레이가 마리암의 이름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물 안에서 물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하융은 우물가에 서서 오래 숨을 골랐다. 창은 열려 있었다. 죽은 세계의 푸른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 빛은 이제 우물 속으로만 내려가지 않았다. 골목의 젖은 벽, 안내문 위의 잉크, 죠니가 확인한 나무상자, 푸리나의 손등, 레이튼의 목소리가 닿은 사람들의 얼굴 위에 조금씩 묻어 있었다.

죠니가 옆에 섰다.

“괜찮아?”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 대답, 오늘 두 번째네.”

“그렇소?”

“응. 그래도 나쁘진 않아. 거짓말보다는 낫지.”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는 이런 때에도 참으로 현실적인 말을 하는구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라서. 너무 멋진 말은 교수나 여왕님 쪽이 하고, 나는 물통이랑 상자나 보는 게 맞아.”

“그것도 필요한 일이오.”

“알아. 그래서 하는 거야.”

죠니는 우물에 둘러진 끈이 헐겁지 않은지 다시 확인했다. 하융은 그 손을 보았다. 더 온전한 죠니가 있는 창이 아주 먼 곳에서 희미하게 열렸다가, 아직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 장면은 다음 길목의 것이었다. 지금은 우물이었다.

푸리나는 안내문을 한 번 더 눌러 고정했다. 그리고 하융 쪽으로 돌아왔다.

“이름 더 들리면 말해줘. 안 들리면 안 들린다고 말해도 돼.”

“전하께서는 내가 무엇이든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구려.”

“그럼 안 되잖아.”

푸리나는 우물의 물빛을 잠깐 보다가, 금세 시선을 돌렸다.

“너는 창문이 아니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로 숨을 쉬었다. 우물의 냄새는 여전히 있었다. 신 냄새, 젖은 돌, 오래된 나무. 그러나 그 사이에 다른 냄새도 섞여 들어왔다. 죠니가 가져온 말린 과일의 희미한 단내, 푸리나의 망토에 묻은 시장 먼지, 그레이가 지나가며 남긴 약초 냄새, 레이튼의 찻주전자에서 식지 않은 차의 향.

하융은 우물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겠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튼이 골목 안으로 돌아왔다.

“대체 급수 안내는 시작되었습니다. 몇몇 분은 이미 치료소로 이동했고요. 소문은 아직 작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소문에도 크기가 있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작을 때는 질문으로 다룰 수 있고, 커지면 군중이 됩니다.”

“그건 좀 무섭네.”

“예. 그래서 작을 때 말을 걸어야 하지요.”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내려다보았다가, 우물 앞에 걸린 안내문을 보았다.

“오늘은 막을 올리는 게 아니라, 막을 내리는 쪽이네.”

죠니가 물었다.

“우물 막?”

“사용 중지 막.”

“이름은 이상한데 뜻은 맞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닫아야 하는 것도 극의 일부일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웃었다.

“좋아. 오늘은 닫는 장면.”

하융은 우물을 한 번 더 보았다. 창은 닫히지 않았다. 현실의 우물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끈이 둘러졌고, 안내문이 붙었고, 이름이 적혔다. 마리암은 치료소로 갔다. 아람과 사르키스와 나린과 바르단은 아직 확인해야 했다. 끝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물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길어 올려지지 않았다.

그 정도면, 오늘 밤 이 우물가에서는 충분히 큰 일이었다.

하융은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불이 뒤따랐다. 창 너머에서 온 푸른빛은 아직 그의 옆을 따라왔지만, 이제 그것은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젖은 돌의 표면을 비추고, 안내문의 젖은 모서리를 비추고, 저 멀리 치료소로 향하는 그레이의 등을 비추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걸었다.

우물은 뒤에 남았고, 이름은 종이 위에 남았다.

그리고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4막 — 접시의 무게

치료소로 향하는 골목에는 등불이 늦게까지 켜져 있었다. 그레이는 마리암과 그 어머니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고, 문턱에서 잠시 멈춰 하융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결국 작게 고개만 숙였다. 하융도 고개를 끄덕였다.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고, 그레이는 그 숨이 계속 이어지는지 확인하러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약초 냄새와 젖은 천 냄새가 한 번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스며들었다.

푸리나는 치료소 문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그녀는 문에 붙은 낡은 표식을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더니, 떨어질 것 같던 모서리를 다시 붙였다. 별일 아닌 행동이었다. 왕이 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런 일을 종종 했다. 벽에 붙은 안내문이 비뚤어져 있으면 바로잡고, 무대 뒤에서 누가 밟고 넘어질 끈이 있으면 묶어두고, 아이들이 만든 종이 왕관이 구겨져 있으면 손가락으로 펴주었다. 하융은 그 손끝을 보고, 창 안의 다른 푸리나를 보았다. 조금 덜 지친 푸리나. 잠을 더 잔 푸리나. 누군가 대신 벽의 표식을 붙여주어, 그녀가 굳이 멈추지 않아도 되었던 세계의 푸리나.

그 창은 조용히 열렸다.

이번에는 우물처럼 차갑지 않았다. 시장처럼 눈부시지도 않았다. 더 나은 동료들이 있는 창이었다. 푸리나가 덜 지쳐 웃는 세계, 레이튼의 책상이 조금 더 정리된 세계, 그레이의 눈 밑 그늘이 얕은 세계, 죠니가 절뚝이는 박자를 조금 덜 숨기는 세계. 그리고 하융 자신이 창 앞에 오래 앉아 있지 않아도 되었던 세계. 그 세계는 비극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보게 되었다. 슬픈 창은 피하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정한 창은 피하기 어렵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하융은 그제야 자기가 치료소 문을 오래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죠니는 언제 가져왔는지 다시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시장에서 가져온 빵 조각과 말린 과일, 치즈 몇 조각이 남아 있었다. 밤공기에 조금 말라 가장자리가 굳어 있었지만, 먹을 수는 있었다.

“그대는 접시를 잃어버리지 않는구려.”

“그건 중요한 능력이야. 전장에서 창 잃어버리는 것보다 덜 멋없긴 한데, 배고플 때는 이쪽이 더 중요해.”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죠니, 그 접시 아직도 있었어?”

“응. 누가 책임지라고 했잖아.”

“내가?”

“네가 위험한 말은 책임진다고 했고, 난 접시를 책임진다고 했지. 계약은 지켜야지.”

레이튼이 가볍게 웃었다.

“훌륭합니다. 오늘 밤 가장 안정적인 행정 단위는 저 접시였군요.”

“교수,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접시도 부담스러워해.”

“그릇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주장은 흥미롭군요.”

“그건 묻지 마. 지금 시작하면 새벽까지 갈 것 같으니까.”

푸리나는 치료소 벽에서 손을 떼고 걸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하융이 창 안에서 본 푸리나와 비교하려는 순간, 현실의 푸리나는 접시 위의 빵을 하나 집어 들고 너무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럼 먹자. 오늘의 점심.”

죠니가 눈썹을 올렸다.

“밤이야.”

“조용한 장면에서는 시간도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야.”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이상하게 네가 말하니까 그냥 넘어가고 싶어지네.”

“그게 연출력이야.”

“그건 사기랑 가까워.”

“연출이라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작게 웃었다. 치료소 옆 골목에는 의자도 없고 탁자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 담장 곁에 서거나, 빈 나무상자를 조심스럽게 확인한 뒤 앉았다. 죠니는 먼저 상자의 못을 살폈고, 푸리나는 그가 너무 당연하게 그러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고, 그레이는 아직 치료소 안에 있었다. 그녀의 빈자리는 작지 않았다. 접시 위의 빵이 하나 남아 있었고, 푸리나는 그것을 집지 않았다.

“그건 그레이 몫.”

죠니가 먼저 말했다.

“나도 알아.”

푸리나는 손을 거두었다.

“그냥 확인한 거야.”

“네가 확인할 때 표정이 좀 위험해.”

“내가 그렇게 먹보처럼 보여?”

“말해야 돼?”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고, 레이튼은 찻잔을 나누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 안의 더 덜 지친 푸리나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이 피곤한 농담이 없었다. 창 안의 죠니는 조금 더 편하게 서 있었고, 현실의 죠니는 오른발에 무게를 덜 싣고 있었다. 하융은 그걸 보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보았다. 죠니는 자기가 숨기는 것들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하융은 여러 가능성 속의 죠니를 보았기 때문에, 현실의 죠니가 어디를 조금 더 아끼는지, 언제 손목을 늦게 쓰는지, 어느 순간 농담으로 숨을 돌리는지 너무 잘 알았다.

죠니가 빵을 내밀었다.

“왜 그렇게 봐?”

“보고 있었소?”

“응. 너무 오래 봤어. 내가 빵인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로.”

하융은 빵을 받지 못하고 잠시 멈췄다.

“미안하오.”

“사과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빵을 받으면 돼.”

하융은 빵을 받았다. 현실의 빵은 조금 딱딱했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부드럽게 들어가지 않고, 가장자리가 먼저 갈라졌다. 창 안의 세계에서는 아마 더 따뜻한 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또 들었다. 그리고 곧, 더 온전한 죠니가 있는 창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 창 속의 죠니는 접시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말을 타고 있었다. 자세가 조금 더 곧았고, 얼굴에는 피곤한 농담 대신 조용한 여유가 있었다. 푸리나는 그 옆에서 크게 웃고 있었고, 그레이는 장부를 덜 급하게 넘겼으며, 레이튼은 찻잔을 놓을 시간이 있었다. 하융은 그 창을 보며 숨을 아주 조금 놓쳤다. 그것은 죽은 세계가 아니었다. 누구도 천에 덮여 있지 않았고, 우물에는 끈이 둘러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멀쩡했다.

“저쪽이 보여?”

죠니가 물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알고 있었소?”

“네가 나를 보다가, 나 말고 다른 걸 보는 얼굴을 했어. 몇 번 봤거든.”

푸리나는 빵을 들고 있던 손을 멈췄다. 레이튼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골목은 조용했다. 치료소 안쪽에서 누군가 낮게 기침하는 소리와, 그레이가 지시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저쪽에는 그대가 조금 더 온전하오.”

죠니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자기 오른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렇소.”

“말은 잘 타?”

“잘 타오.”

“그건 좀 부럽네.”

죠니는 빵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나와서, 하융은 오히려 대답하지 못했다. 죠니는 씹던 것을 삼키고 나서, 창이 있는 쪽을 보는 듯 하융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 물론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보이지 않는 것에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는 법을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쪽 나는 지금 여기 없지?”

하융의 손 안에서 빵이 조금 눌렸다.

“없소.”

“그럼 됐어.”

“그것으로 되었소?”

“응.”

죠니는 접시를 하융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저쪽 놈이 더 멀쩡하면 좋겠네. 솔직히 부럽긴 해. 말도 잘 타고, 덜 아프고, 네가 보기에도 그럴싸하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겠지.”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접시의 균형을 맞추듯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눌렀다.

“근데 그쪽 놈은 지금 네 옆에 없잖아. 그러니까 이쪽의 좀 망가진 놈이 빵이나 나눠주면 되는 거야.”

푸리나는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레이튼도 질문하지 않았다. 하융은 접시를 보았다. 딱딱한 빵, 조금 마른 치즈, 말린 과일 두 조각. 창 안의 더 나은 죠니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현실의 죠니는 접시를 밀어주고 있었다.

하융은 그 접시가 이상하게 무겁다고 생각했다.

무게는 有하오. 창외之人은 가볍고, 좌측之접시는 현실처럼 무겁소. 저 너머의 완전한 이는 바람 같고, 내 앞의 흠 있는 이는 빵을 건네는 손을 가졌소. 만일 생이란 것이 어디에 더 머무는가 묻는다면, 나는 오늘 밤 이 접시의 가장자리를 가리킬 수밖에 없겠구려. 결함이 있어 무겁고, 곁에 있어 더욱 무겁소.

그 생각은 너무 정직해서, 하융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빵을 조금 떼어 먹었다. 빵은 예상대로 딱딱했고, 예상보다 고소했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맛있소.”

죠니가 그를 보았다.

“거짓말은 아니지?”

“거짓말은 아니오. 조금 딱딱하나, 먹을 수 있소.”

“그게 정확한 평이네. 다음부터 시식 담당도 네가 해.”

푸리나가 말했다.

“죠니, 네가 준 빵에 너무 엄격한 평가를 요구하지 마.”

“먹을 수 있다는 건 좋은 평가야. 배고플 때는 특히.”

레이튼은 찻잔을 하융에게 건넸다.

“차도 드시겠습니까?”

“고맙소.”

하융은 찻잔을 받았다. 프롤로그의 방 안에서 식어 있던 차와 달리, 지금 찻잔은 아직 따뜻했다. 아주 뜨겁지는 않았다. 손을 데울 정도로만 따뜻했다. 하융은 그 온도를 느끼며 창 안의 다른 레이튼을 보았다. 그 레이튼은 더 많은 책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은 더 정교했고, 대답을 기다리는 침묵은 더 여유로웠다. 현실의 레이튼은 골목 한쪽에서 찻잔을 나눠주고 있었고, 등불이 약해지자 주전자 표면에 맺힌 빛이 흔들렸다.

“레이튼.”

“예, 하융 경.”

“저쪽에는 교수도 조금 더…… 여유로워 보였소.”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든 채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까? 그건 상당히 매력적인 가능성이군요.”

“부럽지 않소?”

“부럽습니다.”

레이튼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여유로운 저는 분명 좋은 질문을 더 천천히 골랐겠지요. 하지만 오늘 밤의 저는 조금 빠르게 물어야 했고, 그 덕분에 어떤 질문은 다듬어지지 못한 채 나왔을 겁니다.”

“그것이 아쉽지 않소?”

“아쉽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다듬어진 질문만이 사람을 돕는 것은 아니니까요.”

레이튼은 찻잔을 하나 더 채워 그레이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가끔은 덜 다듬어진 질문이, 더 빨리 손을 잡을 때도 있습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들었다. 레이튼다운 말이었다. 설명처럼 보일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의 손은 그레이의 찻잔을 따뜻한 곳에 옮겨두고 있었다. 말보다 그 동작이 먼저 닿았다.

치료소 문이 열렸다. 그레이가 나왔다. 얼굴에는 피로가 있었지만, 아주 조금 안도도 있었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리암은?”

“열은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은 돌아왔습니다. 물을 더 마시지는 않았고, 바로 조치했습니다. 아직 지켜봐야 합니다.”

푸리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아. 지켜보자.”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이름이 맞았습니다.”

하융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그레이는 이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몫으로 남은 찻잔을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이건…….”

죠니가 말했다.

“네 몫. 식기 전에 마셔. 오늘 밤에는 식은 차가 너무 많았어.”

그레이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푸리나가 남은 빵을 가리켰다.

“빵도 있어. 조금 딱딱하지만 하융이 먹을 수 있대.”

“그건 권유입니까, 경고입니까?”

그레이가 드물게 작게 물었다.

죠니가 곧장 대답했다.

“둘 다. 정확한 정보가 좋은 정보니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빵을 조금 떼어 먹었다. 그녀는 맛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천천히 씹었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며 또 다른 그레이의 창을 보았다. 더 쉬는 그레이. 더 적게 확인하고, 더 적게 자책하고, 더 적은 이름을 잃은 세계의 그레이. 그레이의 장부에는 사망자보다 배급 완료 표시가 많았고, 그녀는 밤에 찻잔을 들고 조금 더 오래 앉아 있었다.

하융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레이 경.”

“네.”

“그대가 조금 덜 지친 세계도 보았소.”

그레이는 찻잔을 든 채 멈췄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 세계의 그대는 조금 더 오래 앉아 있었소.”

그레이는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찻잔을 잡은 손가락 끝이 약간 붉었다. 뜨거워서가 아니라, 밤새 기록판과 약재 상자를 오간 탓이었다.

“좋은 세계네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보았다. 죠니도 말을 멈췄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조심스럽게 접시 가장자리에 내려놓고, 조금 생각한 뒤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리암의 열을 먼저 봐야 합니다. 앉는 건 그 뒤에 하겠습니다.”

그 말에는 체념이 없었다. 과장된 사명감도 없었다. 그저 순서가 있었다. 하융은 그 순서가 그레이를 닳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동시에 그 순서가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도 알았다. 창 안의 쉬는 그레이는 아름다웠다. 현실의 그레이는 다시 치료소 문을 힐끗 보았다.

푸리나가 빵을 하나 집어 그레이의 손에 더 얹었다.

“그 뒤에 앉을 때 먹어.”

“전하, 저는…….”

“명령은 아니고 예약.”

죠니가 말했다.

“예약이면 지켜야지. 여왕님이 이상한 방식으로 상냥할 때는 그냥 받아두는 게 편해.”

그레이는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지만, 빵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먹겠습니다.”

“나중에 말고, 가능한 빠른 나중.”

푸리나가 덧붙이자, 그레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빠른 나중에 먹겠습니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훌륭한 타협입니다.”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더 나은 동료들의 창은 아직 열려 있었다. 그 창의 빛은 희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에게는 그 빛이 위로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융에게는 조금 아팠다. 저쪽에서는 모두 조금 덜 닳았다. 저쪽에서는 푸리나가 망토 끝을 덜 더럽혔고, 죠니가 오른발에 무게를 조금 더 실었고, 레이튼의 질문은 조금 더 고요했고, 그레이는 찻잔 앞에 조금 더 오래 앉았다.

하융은 무심코 말했다.

“저쪽이 더 좋은 세계일지도 모르오.”

말이 나온 뒤에야, 그는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낮았는지 알았다. 골목의 등불이 흔들렸다.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레이튼은 질문을 준비하지 않았으며,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죠니는 빵을 하나 더 떼어 먹었다.

“더 좋은 세계라는 게 있으면, 아마 그런 식이겠지. 덜 다치고, 덜 잃고, 잠도 좀 자고. 나도 그런 세계 있으면 싫진 않아.”

“그럼 왜…….”

하융은 말을 멈췄다. 왜 이쪽인가. 왜 이 접시인가. 왜 이 피곤한 밤인가. 왜 마리암이 열이 나는 세계인가. 질문은 많았지만, 어느 것도 입 밖으로 온전히 나오지 않았다.

죠니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가, 하융이 더 잇지 않자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왜 이쪽이냐고?”

하융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죠니는 잠시 생각했다. 평소처럼 바로 농담하지 않았다. 빵과 치즈와 말린 과일이 남은 접시를 보더니, 그중 가장 덜 딱딱한 빵 조각을 하융 앞으로 밀었다.

“모르지.”

그 대답은 너무 허술했다. 하지만 죠니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나는 세계 고르는 법 같은 건 몰라. 저쪽이 더 나은지, 이쪽이 더 맞는지, 그런 건 교수한테 물어봐. 아마 교수도 바로 답하진 않을 거고.”

레이튼은 조용히 웃었다.

“정확한 추측입니다.”

죠니는 계속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이쪽 접시에 빵이 남아 있다는 것뿐이야. 저쪽의 나는 더 멀쩡해도, 지금 네가 먹을 빵을 못 줘. 저쪽 푸리나가 더 잘 쉬었어도, 지금 저 문에 붙은 표식을 다시 눌러주진 못해. 저쪽 그레이가 더 오래 앉아 있어도, 지금 마리암 이름을 세 번 확인한 건 이쪽 그레이고.”

그는 하융을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쪽을 먼저 볼거야. 저쪽은 네가 봐도 돼. 대신 너무 오래 가지는 말고.”

푸리나는 그 말에 아주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는 박수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내려놓았고, 그레이는 자기 손 안의 빵을 바라보았다. 하융은 죠니가 밀어준 빵 조각을 보았다. 아까보다 조금 덜 딱딱한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너무 오래 가지는 말라.”

“응. 길 잃으면 찾으러 가야 하잖아. 귀찮아.”

“찾으러 와줄 것이오?”

“당연하지. 네가 창문 앞에서 굶고 있으면 여왕님이 나부터 보낼걸. 빵 들려서.”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정확해.”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거봐.”

하융은 웃었다. 웃음이 골목에 작게 번졌다. 치료소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고, 그레이가 곧 다시 들어가봐야 한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접시 가까이에 있었다. 하융은 빵을 입에 넣었다. 조금 딱딱했고, 조금 고소했고, 아주 조금 짰다. 현실의 맛이었다.

창은 닫히지 않았다. 더 온전한 동료들의 빛은 여전히 옆에서 부드럽게 흘렀다. 그러나 그 빛은 이제 접시 위에도 내려앉았다. 푸리나의 손끝, 죠니의 손목, 레이튼의 찻잔, 그레이가 남겨둔 빵 조각 위에 희게 얹혔다. 저쪽의 완전함은 이쪽의 결함을 지우지 않았다. 다만 잠깐, 결함의 가장자리까지 보이게 했다.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가능한 빠른 나중.”

그레이는 빵 조각을 작은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네. 가능한 빠른 나중에 먹겠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많다. 안 먹으면 걸릴거야.”

그레이는 이번에는 분명히 웃었다. 아주 작았지만, 하융은 보았다. 그레이가 치료소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푸리나는 남은 접시를 보더니 하융에게 물었다.

“더 먹을래?”

하융은 접시를 보았다. 창 안의 더 좋은 세계에서는 아마 더 따뜻한 식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접시에는 죠니가 남겨둔 가장 덜 딱딱한 빵이 있었다.

“조금만 더 먹겠소.”

죠니가 말했다.

“좋은 선택이네. 너무 많이 먹으면 걸을 때 후회해.”

“그대는 늘 후회까지 계산하고 먹소?”

“아니. 여러 번 후회해봐서 알아.”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경험론적 식사 철학이군요.”

“교수, 내 식사까지 철학으로 만들지 마.”

“실례했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하융도 웃었다. 치료소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우물의 점검은 끝나지 않았으며, 피난길에는 내일 고쳐야 할 표식들이 남아 있었다. 더 나은 세계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세계를 향해 몸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닿은 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조금 딱딱한 빵이었다.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5막 — 색색의 빛이 드는 거리

치료소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은 골목 바닥에 길쭉하게 누워 있었고, 그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가끔씩 흔들렸다. 마리암은 안에서 잠들었다고 했다. 열은 아직 있었고, 그레이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안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절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따뜻했다. 하융은 치료소 문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식은 밤공기 속에 섞인 약초 냄새와 차 냄새를 맡았다. 우물의 신 냄새는 아직 코끝에 남아 있었으나, 이제 그것만이 밤을 채우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치료소 옆 벽에 붙은 안내문을 다시 한 번 눌렀다. 이미 잘 붙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손끝으로 모서리를 문질렀고, 종이가 벽에 더 오래 남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잠시 가만히 있었다.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내일 아침까지 필요한 확인 사항을 부드럽게 정리해주고 있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들고 골목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안으로 들어간 뒤 아직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 품에 넣은 빵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아니, 보려 했다. 그러나 시선의 가장자리에 창들이 열렸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시장의 창, 피난길의 창, 우물의 창, 더 온전한 동료들의 창. 창들은 서로 다투듯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열려 있었다. 시장의 금빛은 치료소 벽에 붙은 안내문을 따뜻하게 비췄고, 피난길의 흙빛은 골목 바닥의 발자국 위에 낮게 얹혔다. 우물의 푸른빛은 물동이의 젖은 가장자리를 차갑게 드러냈고, 더 온전한 동료들의 흰빛은 푸리나의 지친 손등과 죠니의 빈 접시, 레이튼의 찻주전자, 치료소 문 안쪽에서 잠시 보였다 사라지는 그레이의 어깨 위에 닿았다.

예전 같았으면 하융은 그중 하나를 골랐을 것이다. 가장 밝은 창, 가장 아픈 창, 가장 옳아 보이는 창, 가장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창. 그는 어느 창이 자신을 부르는지, 어느 창이 자신을 심판하는지, 어느 창이 자신에게 마지막 대답을 줄 수 있는지 찾느라 오래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골목의 돌이 발밑에 있었다. 접시의 빵가루가 죠니의 손가락에 묻어 있었고, 푸리나의 커튼 고리는 밤새 여러 번 휘둘린 탓에 손때를 입고 있었다. 레이튼의 찻주전자는 한쪽 면이 조금 식어 있었고, 치료소 안에서는 그레이가 누군가에게 물을 조금씩 마시게 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그리고 곧, 창 아래를 보았다.

“하융?”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듣고 있소.”

“이번에는 어디를 보고 있어?”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창마다 빛이 달랐다. 어느 빛은 따뜻했고, 어느 빛은 차가웠고, 어느 빛은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빛들이 한곳에서 섞이고 있었다. 치료소 앞의 좁은 골목, 밤이 늦어 사람의 발소리도 드문 그 자리에서, 서로 다른 가능성의 빛들이 현실의 먼지와 돌과 젖은 나무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창들이 열려 있소.”

푸리나는 그의 옆으로 와서 섰다. 그녀에게는 그 창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푸리나는 하융이 보는 방향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무대를 살피는 극장주처럼.

“많이?”

“많이.”

“또 잘난 척해?”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오늘은…… 조금 덜하오.”

죠니가 빈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창문도 피곤한가 보네. 밤새 우리 따라다녔으면 그럴 만하지.”

“그대는 창에게도 피로를 부여하는구려.”

“뭐든 너무 오래 열려 있으면 삐걱거려. 문이든 창문이든 사람 무릎이든.”

푸리나가 죠니를 보았다.

“그건 네 무릎 이야기야?”

“내 무릎은 아직 공식 발언을 거부하고 있어.”

레이튼이 순찰병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방금 들은 농담의 끝자락만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무릎도 침묵할 권리가 있겠군요.”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교수, 제발 내 무릎까지 문답의 장으로 데려가지 마.”

“알겠습니다. 오늘 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질문을 받았으니까요.”

하융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골목을 보았다. 창의 빛은 여전히 흘렀다. 시장의 작은 축제는 푸리나가 붙인 안내문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고, 피난길의 더 나은 동선은 돌다리 앞 푸른 리본에 스며 있었다. 우물에서 죽어버린 가능성은 그레이의 이름 목록 위에 차가운 빛으로 남았고, 더 온전한 죠니의 창은 현실의 죠니가 들고 있는 빈 접시 위에서 잠깐 희게 흔들렸다.

그러나 시선은 더 이상 어느 하나에 박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융은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무언가를 이긴 느낌은 아니었다. 극복했다는 말도 맞지 않았다. 오래전에 배웠던 길을, 밤중에 다시 찾아낸 것에 가까웠다. 그는 이미 한 번 이 세계를 선택했다. 푸리나의 곁에서, 죠니의 농담과 레이튼의 질문과 그레이의 장부 곁에서, 이미 이쪽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오늘 밤은 처음 걷는 길이 아니었다. 다만 오래된 방의 냄새에 잠시 길을 잃었다가, 다시 발밑의 돌을 확인한 밤이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잊고 있었소.”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뭘?”

하융은 열린 창들을 보았다. 그리고 골목을 보았다.

“창 너머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소.”

죠니는 아무 말 없이 접시를 옆구리에 끼웠고, 레이튼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하융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드물게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기다릴 때, 그 침묵은 막이 내려오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하융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창마다 빛이 있었소. 저쪽 시장의 금빛, 죽은 우물의 푸른빛, 피난길의 흙빛, 더 온전한 그대들의 흰빛. 예전의 나는 그 빛을 보면 그 너머를 보았소. 어느 세계가 더 옳은지, 어느 내가 더 나은지, 어느 죽음이 나를 부르는지.”

그는 잠시 눈을 내렸다. 치료소 앞 돌바닥에는 여러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푸리나의 발자국은 작고 빠르게 흩어져 있었고, 죠니의 발자국은 한쪽이 조금 더 깊었다. 레이튼의 발자국은 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섰고, 그레이의 발자국은 치료소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위로 창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빛들이 이쪽을 비추는구려.”

그 말은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하융의 안쪽에서는 오래 닫혀 있던 창호 하나가 바람을 받은 듯 흔들렸다. 그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은 서쪽의 말보다 오래된 음절을 밀고 올라왔다. 고향의 문턱에서 배운 글자들처럼, 한문이 섞인 말이 숨 사이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있소. 허나 금일今日의 발은 이 골목에 있소. 광光은 저 너머에서 오되, 보步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는구려. 내가 찾던 날개가 창밖에 매달려 있던 것이 아니라면…… 그 빛을 모아, 이 거리 위에서 펴야 하는 것이겠소.”

푸리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하융의 말을 다 이해했는지, 혹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커튼 고리를 아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것은 무대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우에게 무대를 넘겨주는 손짓처럼 보였다.

“그럼 네가 연출하는 거네.”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크게 웃지는 않았다. 조금 뿌듯하고, 조금 장난스럽고,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다.

“내 무대가 아니라, 네가 보는 빛으로 네가 만드는 장면. 그런 거잖아?”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푸리나다웠다. 설명하지 않고도 어긋나지 않았다. 죠니가 빈 접시를 가볍게 흔들었다.

“좋네. 드디어 네가 무대 위에 올라왔다는 뜻이잖아.”

“내가 말이오?”

“응. 여태까지는 창문 옆에서 해설만 하고 있었거든. 물론 해설도 중요하긴 한데, 너무 오래 하면 관객도 배우도 지쳐.”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해설자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오는 장면, 꽤 좋아.”

“여왕님, 네가 좋아하면 보통 일이 커져.”

“이번엔 안 키워. 아마도.”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방금 아마도 들었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기록해둘까요?”

“기록은 그레이한테 맡겨. 교수까지 기록하면 이 나라 문서가 너무 많아져.”

그때 치료소 문이 열렸다. 그레이가 나왔다. 손에는 작은 천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푸리나가 억지로 예약해둔 빵 조각이 조금 줄어 있었다. 아마 먹은 모양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먹었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조금만 먹었습니다.”

“가능한 빠른 나중이 지켜졌어.”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많아. 성공이야.”

그레이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빵을 감싼 천을 접었다.

“마리암은 잠들었습니다. 아직 열은 있지만, 물은 조금 마셨고…… 어머니도 옆에 있습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오.”

“아직 확정해서 말하기는 이릅니다.”

“그레이 경답구려.”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낀 듯했다.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프롤로그의 방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완전히 괜찮지는 않다고 답했다. 지금도 완전히 괜찮지는 않았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우물의 푸른빛은 아직 차가웠으며, 더 나은 세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발밑에는 골목의 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빛이 있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허나 지금은 걸을 수 있소.”

그레이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더니 커튼 고리를 다시 들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한 장면만 더.”

죠니가 바로 말했다.

“불안한데.”

“걱정 마. 큰 거 아니야.”

“네가 큰 거 아니라고 말하면 보통 큰 거였어.”

“이번엔 진짜야.”

푸리나는 치료소 옆 골목 벽으로 가더니, 시장에서 가져온 작은 종이 조각을 꺼냈다. 낮에 붙이려던 그림 안내문의 시험용 종이였다. 빵 그림, 물동이 그림, 작은 꽃 표시가 어설프게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 종이를 치료소 벽의 비어 있는 곳에 붙이려다가,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붙여도 돼?”

그레이는 벽을 보고, 치료소 문을 보고, 종이에 그려진 작은 꽃을 보았다.

“여기는 배급 안내 장소가 아닙니다.”

“응. 알아.”

“그럼 안내문으로는 부적절합니다.”

“그것도 알아.”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붙이시려는 겁니까?”

푸리나는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표시.”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조금 더 작게 말했다.

“마리암이 나중에 나와서 보면, 우물 점검 안내문만 있으면 좀 무섭잖아. 빵이랑 물동이랑 꽃도 하나쯤 있으면…… 음, 그래도 밤이 전부 우물 냄새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건 안내문이라기보다는 낙서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안 돼?”

죠니는 잠시 치료소 문을 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낙서도 가끔 필요하지. 다만 너무 높이 붙이지 마. 애가 보려면 낮아야 해.”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 죠니식 승인.”

레이튼이 종이의 위치를 살폈다.

“조금 오른쪽이 좋겠습니다. 등불이 닿는 곳이군요.”

그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품에서 작은 핀을 꺼냈다.

“풀만으로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

“안내문은 아니지만…… 떨어지면 곤란하니까요.”

푸리나는 종이를 낮은 위치에 붙였다. 빵과 물동이와 작은 꽃. 그림은 어설펐다. 그러나 등불이 닿자, 창들에서 흘러온 색들이 그 위에 잠시 모였다. 시장의 금빛은 빵 그림에, 우물의 푸른빛은 물동이에, 피난길의 흙빛은 종이 가장자리에, 더 온전한 세계의 흰빛은 작은 꽃 위에 얹혔다.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앞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었다. 종이를 만지지는 않았다. 손끝은 종이 앞에서 멈췄고, 창빛은 그 손등 위로 얇게 흘렀다.

날자.

그 말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처럼 떠올랐다.

날자. 날자. 다시 한번만 날아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유리 너머로 사라지고 싶은 말도 아니었다. 하융은 종이의 작은 꽃을 보았다. 그 꽃은 푸리나의 장난이었고, 그레이의 핀이었고, 죠니가 낮게 붙이라고 말한 현실감이었으며, 레이튼이 등불의 각도를 살핀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하융의 창에서 들어온 빛들이 잠시 머물렀다.

하융은 아주 낮게, 거의 숨처럼 말했다.

“날개라는 것은…… 반드시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었구려.”

푸리나가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응?”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지금은 말로 다 만들지 않겠소.”

죠니가 말했다.

“좋은 판단이야. 가끔 말로 만들면 너무 커져서 들고 다니기 힘들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러면 오늘 밤의 질문은 잠시 접어두지요.”

그레이는 종이의 핀이 단단히 박혔는지 확인한 뒤, 손을 거두었다.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정말?”

죠니가 물었다.

“응. 정말. 나도 쉬어야 하고, 너도 접시를 내려놔야 하고, 그레이는 빵을 더 먹어야 하고, 레이튼은 차를 다시 데워야 해.”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지막 항목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죠니가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접시는 이미 거의 일 끝났어. 오늘 제일 성실했지.”

푸리나가 웃었다.

“그럼 접시에게도 박수.”

죠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발박수는 하지 마.”

“아, 기억하고 있었네.”

“잊기 힘든 종류의 위협이었거든.”

그레이가 아주 작게 웃었다. 하융도 웃었다. 치료소 앞의 골목에서 웃음은 크지 않았다. 병자가 잠든 곳이었으므로, 다들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낮은 웃음도 웃음이었다. 등불 아래에서, 빵과 물동이와 꽃이 그려진 종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융은 마지막으로 창들을 보았다. 모두 열려 있었다. 어느 것도 닫히지 않았다. 시장의 창도, 피난길의 창도, 우물의 창도, 더 나은 동료들의 창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수많은 창들도. 그러나 이제 그 창들은 그를 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빛만이 흘러나와 현실의 표면을 비췄다. 금빛은 먼지를, 푸른빛은 젖은 돌을, 흙빛은 발자국을, 흰빛은 사람들의 피곤한 얼굴을 드러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한 걸음 걸었다.

그러자 골목은 골목으로 남았다. 창도 창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사람으로 남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치료소 문 안쪽에서 마리암이 잠결에 작게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레이가 즉시 돌아보았고, 푸리나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죠니는 접시가 부딪히지 않도록 손가락을 얹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융은 그들을 따라 걸었다.

창 너머가 아니라, 창빛이 드는 거리 위로.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후일담 — 창가의 점심

아침은 밤보다 늦게 도착했다. 해가 떠오른 것은 오래전인 듯했으나, 도시가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피난민들이 모인 성문 근처에는 아직 밤의 피로가 남아 있었고, 시장의 덧문들은 하나씩 삐걱거리며 열렸다. 어젯밤 먼지 위에 그려졌던 빵과 꽃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물동이는 제자리에 있었고, 그림이 들어간 새 안내문은 빵집 덧문과 성문 길목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빵, 물동이, 작은 꽃. 누가 보아도 훌륭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글자를 읽지 못하는 아이 하나가 그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손을 끌었다. 하융은 멀찍이서 그 장면을 보았다. 아이는 빵 그림을 가리켰고, 어머니는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돌다리 앞 빈터에는 푸른 천이 새로 묶였다. 푸리나의 리본은 치료소 쪽으로 옮겨졌고, 그 대신 창고에서 가져온 천 조각이 등불 아래와 낮 햇빛 아래서 모두 보이도록 조금 높게 달렸다. 죠니는 그 높이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처음에는 아이 눈높이에 너무 높다고 했고, 두 번째에는 수레꾼 눈에는 너무 낮다고 했다. 그레이는 결국 두 개를 달자고 했다. 죠니는 “행정은 가끔 단순한 걸 이긴다”고 중얼거렸고, 그레이는 그 말을 칭찬인지 아닌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기록했다. 레이튼은 그 옆에서 순찰병들에게 길을 묻는 사람에게 먼저 어느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보다 “누구와 함께 오셨습니까?”가 먼저일 때가 있다는 말이었다. 하융은 그 질문을 듣고, 어젯밤 잃어버렸던 아이의 손에 들린 진흙 묻은 천 조각을 떠올렸다.

우물에는 아직 끈이 둘러져 있었다. 점검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이제 그 우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안내문에는 그레이의 단정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점검 중.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것. 아이와 노인은 먼저 알려주십시오. 푸리나는 그 아래에 꽃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옆 치료소 벽 낮은 곳에 붙은 작은 종이에 빵과 물동이와 꽃이 있었다. 아침이 되자 그 그림은 조금 우스워 보였다. 밤의 등불 아래서는 신비한 표식 같았지만, 햇빛 아래에서는 어설픈 낙서에 가까웠다. 그러나 마리암이 치료소 문가에 앉아 그 그림을 보고 있었다.

마리암은 아직 창백했다. 열은 내렸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고, 그레이는 아주 단호하게 밖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는 문가에 잠깐 앉아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그대로 있었다. 푸리나는 아이가 그림을 보는 것을 발견하고, 한껏 비밀스러운 얼굴로 다가갔다.

“어때?”

마리암은 한참 그림을 보다가 말했다.

“빵이 조금 이상해요.”

푸리나는 가슴을 짚었다.

“정확한 감상이야. 하지만 너무 솔직해서 극작가가 다쳤어.”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극작가가 아니라 그림 그린 사람이지. 그리고 애가 맞는 말을 했어.”

“죠니, 넌 왜 아침부터 내 편이 아니야?”

“아침이라서. 빈속에는 거짓말이 잘 안 나와.”

마리암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은 기침으로 바뀔 뻔했지만, 그레이가 바로 물을 조금 건넸다. 아이는 물을 마셨다. 이번에는 점검된 물이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은 열려 있었다. 우물가에서 쓰러졌던 마리암의 창, 이름이 마른 잉크로 바뀌었던 창, 붉은 끈이 천 아래로 사라졌던 창. 그 창은 닫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마리암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그레이가 컵의 기울기를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하융은 그 컵의 기울기를 보았다. 창 너머의 죽음은 컵 안쪽의 물빛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그 푸른빛은 그레이의 손등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손등에는 밤새 생긴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융.”

레이튼이 옆에 섰다. 그는 오늘도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 계속 나오는지 하융은 아직 알지 못했다. 어쩌면 레이튼의 여관에는 찻주전자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오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잠깐 생각했다.

“듣고 있소.”

“오늘은 창들이 조금 조용합니까?”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시장과 돌다리와 우물과 치료소 벽의 그림을 차례로 보았다. 창들은 여전히 있었다. 시장의 금빛, 피난길의 흙빛, 우물의 푸른빛, 더 온전한 동료들의 흰빛. 아침이 되었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젯밤과 달리, 그 빛들은 사물들의 가장자리에 얇게 붙어 있었다. 창고로 향하는 줄, 새로 묶인 천, 점검 중인 우물, 마리암의 컵, 죠니가 닦고 있는 빈 접시. 하융은 그 빛들을 하나씩 보다가, 손안의 찻잔을 받았다.

“조용하다기보다는…… 서로 다투지 않는구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에게 좋은 아침이란, 질문이 덜 싸우는 아침이오?”

“꽤 정확한 표현입니다. 질문도 때로는 순서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니까요.”

하융은 찻잔을 들었다. 차는 따뜻했다. 미지근하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온도가 분명했다. 그는 그 온도를 확인하고, 문득 웃었다.

푸리나가 마리암에게 그림에 대한 변론을 늘어놓는 동안, 죠니는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접시는 어젯밤보다 가벼워 보였다. 빵도 치즈도 말린 과일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레이는 마리암의 상태를 확인한 뒤, 접시를 보더니 잠시 눈을 피했다. 푸리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

그레이가 멈췄다.

“네.”

“가능한 빠른 나중.”

그레이는 조금 작게 말했다.

“먹었습니다.”

“얼마나?”

“조금…….”

죠니가 끼어들었다.

“내가 봤어. 조금은 맞아. 하지만 아예 안 먹은 건 아니니까, 오늘은 봐줘.”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네가 그레이 편을 들어?”

“아침이라 그래. 그리고 나도 다 먹으라고 잔소리하면 내가 남은 거 다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레이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농담이야. 반쯤은.”

푸리나는 접시를 들여다보다가 남은 빵 조각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럼 반쯤만 더.”

그레이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중에…….”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레이는 말을 고쳤다.

“곧 먹겠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전했네.”

레이튼은 즐겁게 웃었다. 마리암은 빵이 이상하다는 자기 평이 아직 마음에 남았는지, 푸리나의 그림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작은 꽃을 가리켰다.

“꽃은 좋아요.”

푸리나는 즉시 살아났다.

“봤지? 꽃은 합격이래!”

죠니가 접시를 닦던 천을 접었다.

“빵은 탈락이고?”

“빵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거야.”

“그 표현 좋네. 실패한 그림한테 상냥해.”

푸리나는 웃으며 마리암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다음에는 빵을 더 잘 그릴게. 네가 봐줄래?”

마리암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융은 그 소리를 들었다. 안도의 숨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의 골목에서는 그런 작은 소리들이 가장 오래 남았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다른 창을 보았다. 그 창에서는 마리암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아니었다. 숫자였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그 창의 푸른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융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 빛이 현실의 마리암 위로 그대로 덮이게 두지 않았다. 현실의 마리암은 푸리나의 그림에 점수를 매기고 있었고, 그레이는 빵을 조금씩 먹고 있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레이튼은 그 모든 것을 보고도 묻지 않았다. 질문을 아낄 줄 아는 사람처럼.

그때 푸리나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하융.”

“듣고 있소.”

“저쪽 세계 점심은 뭐였어?”

하융은 잠시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저쪽 세계라 하시면?”

“네가 본 시장, 길, 우물, 더 괜찮은 우리들. 그런 창들 중 하나에 점심도 있었을 거 아냐.”

죠니가 빈 접시를 내려놓고 흥미롭다는 듯 하융을 보았다.

“그건 나도 궁금하네.”

레이튼은 찻잔을 든 채 웃었다.

“상당히 중요한 비교 항목일 수 있겠군요.”

그레이는 빵을 들고 있다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도…… 확인 대상입니까?”

푸리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세계의 차이는 식탁에서 드러나는 법이야.”

죠니가 말했다.

“그건 맞는 말 같은데, 네가 말하니까 또 연극 대사 같아.”

하융은 창들을 떠올렸다. 더 여유로운 시장의 점심. 피난길이 덜 막혔던 세계의 배급. 더 온전한 죠니가 말 위에서 받았던 식사. 그중 하나가 유난히 선명했다. 바다 쪽 냄새가 조금 섞인 식탁. 생선. 빵. 조금 더 따뜻한 국물.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생선이었소.”

죠니가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쪽이 낫네.”

푸리나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그렇게 빨라?”

“난 아침부터 생선 먹는 건 별로야. 특히 밤새 우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더.”

레이튼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조리 방식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수, 생선의 가능성까지 열어두지 마. 지금은 닫아도 돼.”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이쪽이 낫다고 하였소.”

“응.”

“어째서요?”

죠니는 빈 접시를 들어 보였다. 접시는 정말로 비어 있었다. 빵가루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쪽은 이미 먹었으니까.”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마리암은 푸리나가 웃는 걸 보고 따라 웃다가, 다시 그레이에게 물을 받았다. 그레이는 “천천히”라고 말했다. 레이튼은 웃음을 삼키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빈 접시를 보았다. 저쪽 세계의 생선은 아직 창 너머에 있었다. 이쪽의 빵은 이미 먹혔다. 접시는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빈 접시가 저쪽의 가득 찬 식탁보다 더 확실했다.

그는 낮게 웃었다.

“참으로 죠니다운 기준이오.”

“쓸 만하지?”

“쓸 만하오.”

죠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아침이 조금 더 밝아졌다. 시장에서는 빵집 주인이 덧문을 완전히 열었고, 어젯밤 붙은 그림 안내문을 보고 한참 동안 자기 가게의 빵 그림을 평가했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죠니는 “항의 들어오겠네”라고 중얼거렸고, 푸리나는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 돼”라고 답했다. 그레이는 정말로 그 표현을 적을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레이튼은 빵집 주인에게 내일 그림을 조금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지역 참여형 안내문!”이라고 외치려다가, 치료소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하융은 그들을 보며 걸었다. 창들은 열려 있었다. 그 안의 세계들도 여전히 있었다. 더 나은 시장, 덜 막힌 피난길, 죽은 가능성, 더 온전한 동료들, 아직 보지 못한 수많은 장면들. 그 창들은 앞으로도 열릴 것이다. 때로는 하융을 아프게 할 것이고, 때로는 그를 도울 것이며, 때로는 그저 아름다워서 오래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는 창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창 너머로 사라지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빛이 내려앉은 길을 걸었다.

시장 쪽에서 빵 냄새가 났다. 피난길 쪽에서는 새로 묶은 천이 바람에 흔들렸다. 우물은 아직 닫혀 있었고, 치료소 문가의 작은 꽃 그림은 햇빛 속에서 조금 더 어설퍼 보였다. 마리암은 그 꽃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레이는 빵을 곧 먹겠다고 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들고 있었으며,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다시 데우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푸리나는 벌써 다음 그림을 어떻게 고칠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발등 위에 얇게 놓였다. 금빛과 푸른빛과 흙빛과 흰빛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겹쳤다. 그는 그 빛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도 창은 열려 있구려.”

푸리나가 옆에서 물었다.

“응. 그래서?”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답을 요구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 대사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조금 웃었다.

“그래서, 걸을 수 있소.”

푸리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의 결말은 그걸로 하자.”

죠니가 말했다.

“결말이라기엔 아직 오전인데.”

“후일담의 결말이야.”

“그럼 점심은?”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생선 말고.”

하융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이쪽이 낫겠구려.”

죠니가 빈 접시를 들고 앞장섰다.

“봐. 역시 좋은 판단이야.”

하융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여전히 빛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오늘 하융은 그 빛들을 지나쳐 멀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 빛이 닿은 거리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빈 접시는, 다시 채워질 자리를 찾아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프롤로그 — 등불이 그려진 표

그레이는 촛불을 줄였다. 완전히 끄지는 않았다. 장부 위에 남은 마지막 줄이 아직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책을 덮으면 글자가 번진다. 글자가 번지면 다시 확인해야 한다. 다시 확인하면 늦어진다. 늦어진 일은, 때로 다른 누군가의 아침을 조금 더 춥게 만든다. 그레이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곤해도 촛불을 조금 남겨두었고, 어깨가 굳어도 펜을 놓기 전에 마지막 줄을 확인했으며, 누군가가 보기에는 사소할 문장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종이 냄새와 약초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낮에는 구호소에서 돌아온 아이의 열을 확인했고, 저녁에는 우물 점검표와 배급 변경안을 맞췄으며, 밤에는 장례비 지급 기록을 고쳤다. 그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에게 일은 끝나는 것보다 잠시 놓이는 쪽에 가까웠다. 우물은 내일도 확인해야 했고, 민원은 아침에 다시 들어올 것이며, 누군가의 편지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밤의 손은 더 이상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펜을 잡은 손가락 끝이 조금 차가웠고, 손목에는 오래 기록한 사람 특유의 둔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큰일로 여기지 않았다. 통증은 일의 끝에 흔히 남는 먼지 같은 것이었다. 털어내면 사라지는 때도 있고, 조금 남는 때도 있었다. 다만 그날 밤에는 눈이 자꾸 장부의 줄을 놓쳤다. 같은 이름을 두 번 읽고, 같은 사인을 다시 확인하고, 이미 표시해둔 항목에 또 작은 점을 찍으려 했다. 그녀는 그제야 펜을 내려놓았다. 실수하기 전에 멈추는 것도 일의 일부였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발소리는 대개 가볍지 않았다. 급한 보고, 추가 사망자, 누락된 배급, 이름이 맞지 않는 시신, 도착하지 못한 편지.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장부를 닫지 않고, 빈 종이를 한 장 빼두었다. 그러나 문을 연 사람은 급한 보고를 들고 있지 않았다.

푸리나 헤툼은 양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상자는 극장에서 쓰는 소품 상자처럼 보였지만, 평소 그녀가 들고 다니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리본도 없었고, 금박도 없었고, “개막!”이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장식도 없었다. 다만 상자 윗면에 작은 등불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등불은 잘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누군가 오래 생각한 뒤 최대한 단순하게 남긴 표시 같았다.

“그레이.”

푸리나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무대를 열 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무대 뒤에서 배우의 손을 잡을 때의 목소리였다.

“전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그 말은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레이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방 안을 보았다. 마르지 않은 잉크, 반쯤 식은 찻잔, 어깨에 걸쳐둔 외투, 장부 옆에 놓인 약재 봉투, 그리고 그레이의 얼굴. 그레이는 늘 조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피곤은 조용한 얼굴 위에도 자리를 찾는다. 눈 밑의 얕은 그늘, 평소보다 조금 늦은 반응, 펜을 내려놓은 뒤에도 허공에 남아 있는 손의 자세. 푸리나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본 뒤, 일부러 크게 떠들지 않았다.

“오늘은 공연 표를 가져왔어.”

그레이는 상자를 보았다.

“공연……입니까?”

“응. 그런데 표는 한 장뿐이야.”

“제가 전달하면 됩니까?”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거야.”

그레이의 손이 장부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제 것입니까?”

“응.”

푸리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종이 표가 들어 있었다. 표에는 화려한 문구가 없었다. 극단 이름도, 막 번호도, 출연진도 없었다. 그저 등불 그림 하나와 짧은 글귀가 있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 오늘 밤 손님 한 명.

그레이는 표를 오래 보았다. 손님이라는 말이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관의 성좌를 섬기는 이들의 언어를 알았고, 손님이라는 말이 가진 따뜻함도 알았다. 다만 자신에게 그 말이 향해 있는 것이 낯설었다. 그레이는 늘 손님을 맞이하는 쪽에 가까웠다. 죽은 이의 기억을 맞이하고, 산 자의 민원을 맞이하고, 길 잃은 편지와 늦은 보상과 닫힌 우물의 보고를 맞이했다. 누군가 찾아오면 자리를 내어주었고, 기록하고, 확인하고, 다음 사람이 같은 곳에서 넘어지지 않게 길을 고쳤다.

그런데 표에는 손님 한 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하.”

“응.”

“제가…… 손님입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제가 접수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없어.”

“확인해야 할 명단은요?”

“없어.”

“그러면 제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푸리나는 잠시 표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여기서 멋진 대사를 붙였을 것이다. ‘그저 무대를 즐기면 돼!’라든가, ‘관객의 의무는 보는 것!’이라든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가 그런 말로 쉽게 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물러줘.”

그레이는 그 말을 다시 듣는 사람처럼 눈을 내렸다.

“머무는 것……입니까?”

“응. 오늘은 네가 장부를 들고 들어가서 뭔가를 고치는 극이 아니야. 네가 기록하지 않아도 극은 진행돼. 네가 확인하지 않아도 막은 올라가. 대신 네가 거기 있어야 해.”

그레이는 표의 등불 그림을 보았다. 선은 단순했다. 불꽃은 작았고, 등불 아래에는 아주 짧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사람 같기도 하고, 의자 같기도 했다.

“제가 없어도 진행된다면, 제가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어.”

“죄송합니다.”

“아니, 좋아. 그레이다운 질문이야.”

푸리나는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그녀는 장부 위의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를 보고, 표를 그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장부 옆의 비어 있는 자리, 찻잔과 약재 봉투 사이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이 극은 네가 일을 잘 못해서 준비한 게 아니야.”

그레이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주 천천히 말을 골랐다.

“오히려 네가 너무 잘해서 준비한 거야. 너무 오래, 너무 조용히, 너무 당연한 것처럼.”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칭찬을 받았을 때 그녀는 종종 그러했다. 기뻐하기보다 먼저 그 말이 자신에게 과한지 확인하려는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그 표정을 보고,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죽은 이를 기리며 산 자를 돕는 일. 네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알아. 다는 몰라도, 적어도 가볍게는 생각하지 않아.”

그레이의 손가락이 살짝 접혔다.

“다만 오늘 밤은, 그 일을 무대 위에 그대로 올리려는 게 아니야. 그건 네가 매일 하잖아. 우리는 이미 네가 장부를 보고, 우물을 닫고, 편지를 보내고, 등불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어.”

푸리나는 표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오늘은 그 거리의 다른 문을 열어볼 거야.”

“다른 문……입니까?”

“응. 네가 관리하는 문 말고, 네가 들어가는 문.”

그레이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밤은 깊었고, 복도 끝에서 극장 쪽 등불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등불이 꺼지기 전에 심지를 갈아야 하는지 생각했다가, 곧 그 생각을 멈췄다. 방금 전 푸리나가 가져온 말 때문이었다. 네가 들어가는 문.

그레이는 조용히 물었다.

“제가 들어가도 되는 곳입니까?”

푸리나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응.”

“제가…… 손님으로요?”

“응. 손님으로.”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레이는 아주 잠깐 자기 손을 보았다. 펜을 오래 잡은 손, 장부를 넘긴 손, 시신을 덮은 천의 가장자리를 고친 손, 아이에게 물을 건넨 손. 그 손이 손님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떠올리지 못했다. 손님은 앉는다. 손님은 묵는다. 손님은 맡긴다. 손님은 때로 아무것도 고치지 않는다. 그 마지막이 가장 낯설었다.

푸리나는 그레이가 대답하지 않자, 일부러 조금 밝게 말했다.

“걱정 마. 너무 화려하게 만들지는 않았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제가 싫어할 것 같았습니까?”

“응. 죽음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꾸미는 거, 너는 좋아하지 않을 것 같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꽃비도, 대합창도, 눈물 강요도 없음. 대신 등불은 있어.”

“등불은…… 필요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보다 작았지만, 충분히 푸리나다웠다. 그때 문밖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죠니가 문틀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작게 자른 빵과 말린 과일, 치즈 몇 조각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식사라기엔 조금 대충이고 야식이라기엔 묘하게 성의 있었다.

“아직 시작 안 했어?”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죠니, 너는 왜 항상 접시를 들고 나타나?”

“필요하니까. 밤에 극을 열면 누군가는 배고파져. 이건 예언이 아니라 경험이야.”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준비를 도와드릴까요?”

죠니가 바로 말했다.

“아니. 이 접시는 네가 도와줄 대상이 아니야. 네가 먹을 대상이지.”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저는 아직…….”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에?”

그레이는 말을 삼켰다. 죠니가 접시를 책상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단, 장부와 잉크가 닿지 않는 자리를 먼저 눈으로 확인했다.

“나중에도 좋긴 한데, 가능한 빠른 나중으로 하자. 너무 늦은 나중은 그냥 안 먹겠다는 말이랑 비슷해지거든.”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가능한 빠른 나중에 먹겠습니다.”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들었지. 계약 성립.”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증인으로 기록하고 싶지만, 오늘 그레이는 기록 담당이 아니니까 참을게.”

그레이는 그 말에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웃었다.

곧 레이튼도 도착했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마치 이 밤의 극에 가장 필요한 소품이 그것이라는 듯 태연했다. 레이튼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그레이의 표와 푸리나의 상자와 죠니의 접시를 차례로 본 뒤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밤입니다. 혹은, 잠시 쉬어도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레이튼 님.”

“그레이 경. 오늘은 제가 질문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그거 가능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시도할 가치는 있지요.”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교수한테는 그게 이미 질문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에게 찻잔을 하나 따라주었다.

“다만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레이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네.”

“그레이 경께서 손님으로 초대받는다면,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레이는 조금 생각했다. 보통이라면 출입구, 안전, 손님 명단, 불이 꺼질 가능성, 아픈 사람의 유무, 물과 식사의 상태, 돌아갈 길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손님이 아니라 관리자가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마도…… 제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확인할 것 같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출발점입니다.”

“그게 훌륭합니까?”

“예. 어떤 방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어떤 방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알려줍니다. 오늘 밤의 방은 후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요.”

그레이는 그 말을 들고 잠시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하융이 문가에 나타났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었고, 복도 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하융은 그레이의 피곤한 얼굴과 표 위의 등불 그림을 보더니, 오래 말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레이튼의 침묵과 달랐다. 질문을 준비하는 침묵이 아니라, 이미 비슷한 방을 지나온 사람이 길의 냄새를 확인하는 침묵이었다.

“그레이 경.”

“하융 님.”

“오늘은 그대가 문 안으로 들어가는 날이오?”

그레이는 표를 보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좋소. 문밖에서 오래 선 사람은, 안쪽의 의자가 낯설 때가 있소.”

그 말은 이상하게 부드럽게 닿았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융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말은 아직 뒤에 남겨둔 듯했다.

푸리나는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한 뒤, 상자를 다시 닫았다. 그리고 그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표를 들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갈까?”

그레이는 장부를 보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줄은 이제 거의 마른 듯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책갈피를 끼웠고, 장부를 닫았다. 그러나 품에 넣지는 않았다. 책상 위에 두었다. 표는 손에 들었다. 그 작은 차이를 모두가 보았지만,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겠습니다.”

푸리나는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극장 뒤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소품 상자와 낡은 천막, 쓰지 않는 의자들이 놓여 있던 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복도 끝에 낮은 터널이 하나 열려 있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문인지, 푸리나의 극이 만들어낸 문인지 알기 어려웠다. 문 위에는 작은 등불이 걸려 있었고, 그 불빛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만큼만 길을 밝혔다.

터널 앞에서 푸리나는 멈췄다. 그녀는 평소처럼 “개막!”이라고 외치려다가, 그레이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은 조용히 열게.”

죠니가 접시를 들고 뒤에서 말했다.

“그게 좋겠네. 여관이면 밤에 너무 시끄러우면 항의 들어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맞아. 손님이 쉬어야 하니까.”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품에 안듯 들었다.

“준비되었습니다.”

하융은 터널 안쪽을 보며 낮게 말했다.

“길이 짧지는 않겠구려.”

그레이는 손안의 표를 내려다보았다. 표의 등불 그림이 터널의 빛을 받아 아주 작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름을 묻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이 터널의 구조를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은. 다만 발을 들여놓기 전에, 책상 위에 두고 온 장부의 무게가 손에서 빠져나간 것을 느꼈다. 손은 가벼웠다. 가벼운 손은 낯설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괜찮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편하지는 않습니다.”

“응.”

“하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충분해.”

그레이는 터널 안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돌바닥은 차갑지 않았다. 오래 비어 있었던 길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쓸고 등불을 걸어둔 길 같았다. 등불의 빛은 그녀의 발끝을 작게 비췄고, 뒤에서는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터널 저편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여관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흔들릴 때 나는 소리였다. 그레이는 그 소리를 듣고, 오래전 자신의 [기억이 잠드는 거리] 어딘가에서 보았던 문패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문패를 정리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밤, 그녀는 손님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조용히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1막 — 이름을 맡기는 접수대

터널은 길지 않았다. 발걸음으로 세면 열두 걸음 남짓이었다. 그런데 그 열두 걸음 사이에서, 그레이는 몇 번이나 손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평소라면 장부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아 있었을 자리였다.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받치려는 모양을 만들었다가, 아무것도 닿지 않자 다시 천천히 펴졌다. 터널 벽에는 습기가 많지 않았고, 오래된 극장 뒤편에서 이어진 길치고는 먼지도 적었다. 대신 갓 털어낸 이불과 오래 닦은 나무, 그리고 아주 희미한 차 냄새가 났다.

푸리나는 앞에서 걸었다. 그녀의 걸음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터널이 이렇게 울림이 좋은 곳이라면, 평소의 푸리나는 분명 두세 번쯤은 목소리를 시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가끔 뒤돌아 그레이가 따라오는지 확인했고, 그때마다 손가락에 걸린 작은 커튼 고리만 한 바퀴 굴렸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왔다. 접시에는 작게 자른 빵과 치즈, 말린 과일이 얹혀 있었다. 터널 안까지 접시를 가져오는 것이 맞는지 그레이가 잠시 시선을 주자, 죠니는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여관거리라며. 빈손으로 가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접시는 선물입니까?”

“반쯤은. 나머지 반은 내가 먹을 거고.”

푸리나가 앞에서 작게 웃었다.

“정직하네.”

“선물이라고 다 남 주면 너무 숭고해져. 난 숭고한 접시는 부담스러워.”

레이튼은 낮게 웃었고, 하융은 터널 벽에 비친 등불 그림자를 보며 조용히 걸었다. 그레이는 그들의 발소리를 들었다. 푸리나의 걸음은 가볍고 빠르며, 죠니의 걸음은 한쪽 박자가 아주 조금 늦고, 레이튼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하융은 걸음과 걸음 사이에 잠시 생각을 놓는 듯했다. 그 발소리들은 낮은 천장 아래에서 겹쳤다가, 다시 각자의 보폭으로 풀어졌다. 그레이는 그 차이들을 들었다. 기록하지 않았다.

터널 끝에는 작은 종이 달린 문이 있었다. 문은 크지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문고리 아래에 낡은 나무패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나무패에는 이름 대신 작은 등불이 새겨져 있었다. 푸리나의 극은 종종 무대와 신술과 마음의 경계에서 이름을 늦게 얻었다. 그레이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낮은 등불과 나무패를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가 문 옆에 섰다.

“여기서부터야.”

그레이가 물었다.

“이 문은…… 극의 일부입니까?”

“응. 그리고 아마 조금 더.”

푸리나는 대답을 그렇게 흐렸다. 그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작은 물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물이 흐르는 소리인지,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오가는 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푸리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그레이를 한 번 더 보았다. 그 시선은 개막을 알리는 연출자의 시선이라기보다, 낯선 방에 들어가기 전 손님이 신발을 잘 신고 있는지 확인하는 여관 주인의 시선에 가까웠다.

문이 열렸다.

종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는 거리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극장 뒤편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문 너머의 거리는 극장보다 훨씬 넓었다. 하늘은 밤이었고, 하늘이라기보다는 천장에 가까웠지만, 별처럼 작은 등불들이 높이 걸려 있었다. 양쪽으로 낮은 여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간판들은 바람 없이도 천천히 흔들렸다. 어떤 간판에는 빵 조각이 그려져 있었고, 어떤 간판에는 물동이, 어떤 간판에는 편지 봉투, 어떤 간판에는 낡은 신발, 어떤 간판에는 부러진 숟가락이 그려져 있었다. 글자는 없었다. 그러나 간판들은 비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가장 가까운 간판 앞에 멈췄다. 젖은 신발 모양이었다. 크기가 다른 신발 두 짝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물방울 표시가 있었다. 누군가 오래 걸었을 것이다. 누군가 비를 맞았을 것이다. 누군가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와서도 발을 말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레이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젖은 신발이 그려진 간판 앞에서, 먼저 손을 모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죠니도 접시가 기울지 않게 손목을 조금 고쳤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가슴 가까이 받쳤다. 하융은 간판의 등불빛이 그레이의 손끝에 닿는 것을 보고, 시선을 낮췄다.

거리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처음에는 여관 주인처럼 보였다. 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가까이 올수록 그는 한 사람만의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래 닦인 마룻바닥, 밤새 꺼지지 않은 등불, 손님이 떠난 뒤 접힌 이불의 냄새가 그의 곁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았다. 표정은 부드러웠고, 걸음은 느렸으며, 열쇠 꾸러미는 손안에서 조금도 요란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였다.

그는 접수대 너머가 아니라, 거리 한가운데서 그레이를 맞았다. 아마 이 거리에서는 문턱 자체가 접수대인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그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다. 차를 권하는 여관 주인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규칙을 지키게 하는 단단함도 있었다.

“밤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들어가시지요.”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는 극장주께서 하셨고, 방을 준비한 것은 저입니다. 역할이 다르니 감사도 나누어 받는 편이 좋겠군요.”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역시 여관 주인은 계산이 정확하네.”

여관의 성좌는 푸리나에게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을 데려오신 분께도 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다만 오늘 밤의 주빈은 이분입니다.”

그 말에 그레이는 아주 조금 어깨를 낮췄다. 주빈이라는 말은 손님보다 더 낯설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보고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거리 입구 옆의 작은 접수대를 가리켰다. 접수대 위에는 검은 장부가 아니라, 빈 나무 접시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세 접시의 가장자리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잃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

그레이는 그 글씨를 읽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접시를 보았다.

“이곳에서는…… 이름을 맡깁니까?”

“그렇습니다.”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손님이 나가실 때, 손님께서 알아볼 수 있는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여관의 성좌가 첫 번째 접시를 내밀었다.

“성함을 잠시 맡기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아주 낮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이름은 소리가 되어 접시 위에 내려앉았다. 글자로 변하지 않았다. 대신 작고 옅은 빛이 되었다. 접시 위의 빛은 곧 작은 종이등처럼 접혀, 접수대 뒤의 서랍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레이는 그 빛이 서랍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서랍이 닫히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잘 보관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접시가 나왔다. 여관의 성좌는 그레이가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보듯, 비어 있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짐을 맡기실 차례입니다.”

그레이는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부는 방에 두고 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접시에 올릴 수 있는 짐은 남아 있지요.”

접시 위에 작은 물건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붉은 실이 묶인 민원표, 모서리가 닳은 사망 확인서, 아직 봉해지지 않은 편지, 도장이 찍히지 않은 보상 쪽지, 오래 접었다 펼친 지도 조각, 꺼진 등불이 그려진 얇은 문패. 글씨는 없거나, 너무 작아 읽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레이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가 잠시 멈췄다. 물건들이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접시 위의 나무가 아주 미세하게 눌려 있었다.

푸리나는 말하지 않았다. 죠니도 농담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손잡이를 가볍게 잡고 있었고, 하융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그레이는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버리듯 던지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듯 건조하게도 하지 않았다. 젖은 천을 접듯, 모서리가 더 상하지 않게 맞추었다. 민원표의 붉은 실을 아래로 넣고, 편지 봉투는 접히지 않게 세웠으며, 등불 문패는 가장 위에 올렸다.

“잠시 맡기겠습니다.”

“예.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접시를 작은 상자 안에 넣었다. 상자 뚜껑이 닫히기 직전, 마지막 등불 문패 위의 불꽃 그림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레이는 그 흔들림을 본 뒤에야 손을 거두었다.

죠니가 아주 낮게 말했다.

“접는 것도 잘하네.”

푸리나가 그를 팔꿈치로 살짝 찔렀다.

“죠니.”

“아니, 진짜로. 아무렇게나 안 구기잖아.”

죠니는 접시를 든 손으로 턱짓했다.

“그런 거, 보이거든.”

그레이는 뜻밖의 말에 잠시 눈을 들었다. 죠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듯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구기면…… 다시 펼 때 자국이 남습니다.”

“거봐. 맞다니까.”

세 번째 접시는 비어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내밀지 않고, 접수대 위에 그대로 두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밤 이 거리에서 손님께 드릴 표식이 있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표식입니까?”

“예.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을 찾기 위한 표식이지요.”

여관의 성좌는 작은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글자가 없었다. 아주 작은 등불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 등불 아래에는 가느다란 그림자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 같기도 했고, 의자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작게 말했다.

“예쁘네.”

“밤길의 표식은 지나치게 화려하면 손님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건 맞아.”

그레이는 나무패를 받았다. 이름이 없는 패였지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등불 아래의 작은 그림자를 손끝으로 한 번 확인한 뒤, 여관의 성좌가 내미는 얇은 줄에 손목을 맡겼다.

여관의 성좌는 나무패를 그레이의 손목에 묶어주었다. 줄은 얇고 가벼웠다. 그레이가 손목을 조금 움직이자, 나무패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이 표식을 가진 손님은 준비된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이 표식은 아무 일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보았다. 아주 잠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거리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등불 하나가 가까워졌다. 등불을 든 아이였다. 나이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다가도, 오래된 골목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손에는 작은 등불이 들려 있었고, 신발 끝은 젖어 있었다. 손가락에는 재가 묻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에는 먼지와 빛이 함께 앉아 있었다.

아이는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손님이에요?”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그렇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방까지 안내할게요.”

아이는 뒤돌아섰다. 몇 걸음 걷다가, 그레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아이의 젖은 신발과 등불을 보았다.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이의 등불이 너무 낮게 흔들리지 않도록, 바람이 들어오는 골목 쪽을 한 번 살폈다.

아이가 말했다.

“손님은 그런 거 안 봐도 돼요.”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습관입니다.”

“습관도 맡기고 들어오라던데요.”

푸리나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죠니는 “좋은 안내인이네”라고 중얼거렸고, 레이튼은 흥미로운 질문을 발견한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하융은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을 보며 눈을 조금 낮췄다.

그레이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손님은 무엇을 보면 됩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 질문이 어렵다는 듯 등불을 조금 들어 올렸다. 빛이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를 비췄다.

“방까지 가는 길이요.”

그리고 아이는 덧붙였다.

“넘어지지 않게요.”

그레이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거리 안쪽으로 걸었다. 간판들은 이름 없이 흔들렸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젖은 신발, 부러진 숟가락, 꺼진 등불심지. 그레이는 그 모두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낮추고, 아주 짧게 예를 표했다. 여관의 성좌는 접수대 앞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접수대 뒤에서 그는 여전히 정중하게 서 있었다. 열쇠 꾸러미는 그의 손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접수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 질서가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다고 느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손님.”

그레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여관의 성좌가 말했다.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대답했다.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등불지기를 따라 걸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어둡지 않았다. 그러나 밝지도 않았다. 사람이 잠들 수 있을 만큼만 어두웠고, 길을 잃지 않을 만큼만 밝았다. 손목의 작은 등불패가 걸음마다 조용히 흔들렸다. 접수대에 맡겨둔 것들은 뒤에 있었고, 앞에는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이 있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2막 — 장부 없는 식탁

등불지기는 작은 걸음으로 앞서갔다. 신발 끝은 젖어 있었으나, 걸을 때 물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등불도 이상했다.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고, 아이가 걸음을 늦추면 함께 낮아졌으며, 아이가 고개를 돌리면 빛도 잠시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그 불빛을 따라 걸었다. 길 양쪽의 간판들은 여전히 조용히 흔들렸고, 글자 없는 문패들이 낮은 빛 안에서 조금씩 모습을 바꾸었다. 어떤 것은 편지 봉투였다가 접힌 손수건처럼 보였고, 어떤 것은 낡은 숟가락이었다가 금이 간 찻잔처럼 보였다.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등불지기가 앞에서 멈추면 함께 멈췄고, 아이가 오른쪽으로 돌면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녀는 익숙한 버릇대로 골목의 폭과 바닥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물이 고이는 곳, 불빛이 닿지 않는 모서리, 누군가 발을 헛디딜 수 있는 돌. 그런 것들은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들어왔다. 다만 손목의 등불패가 걸음마다 조용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책상 위에 놓고 온 장부보다 훨씬 가벼웠고, 그래서 자꾸 의식되었다.

등불지기가 뒤돌아보았다.

“또 보고 있어요.”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요. 그런데 오늘은 손님이잖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손님은 가끔 천장만 봐도 돼요.”

그레이는 아이가 가리킨 위쪽을 보았다. 천장처럼 보였던 밤하늘에 작은 등불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별자리처럼 이어지지는 않았다. 각각의 등불은 자기 자리에서 조금씩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너무 작아서 한참 보아야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푸리나가 뒤에서 속삭였다.

“저거 예쁘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응. 근데 저걸 전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별로 안 예쁠 것 같아.”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 방금 되게 중요한 말을 너무 아무렇게나 했어.”

“그럼 주워서 잘 써. 난 아무렇게나 말하는 담당이니까.”

레이튼은 웃음을 삼키듯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아무렇게나 놓인 말도, 때로는 길을 찾는군요.”

“교수, 그건 칭찬이야, 아니면 또 질문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겠습니다.”

하융은 등불들을 올려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별이 아니어도 길은 밝힐 수 있구려.”

그 말은 밤공기 속에 낮게 놓였다. 그레이는 잠시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더 말하지 않는 바람에, 그 문장은 오히려 오래 남았다.

등불지기는 한 여관 앞에서 멈췄다. 간판에는 식탁이 그려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그릇 하나와 빵 한 조각, 접힌 편지와 작은 등불이 놓여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쪽에서는 따뜻한 물소리와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등불지기가 문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가 첫 방이에요.”

그레이는 문턱에서 고개를 숙였다. 안쪽은 예상보다 넓었다. 방이라기보다 긴 식당에 가까웠다. 그러나 북적이지 않았다. 가운데에는 긴 식탁 하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반쯤 먹은 빵, 젖은 신발, 잉크가 묻은 손수건, 아이가 접다 만 종이배, 노인의 깨진 숟가락, 봉하지 못한 편지, 심지가 다 탄 등불, 손잡이가 닳은 물동이. 물건들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막 일어나 곧 돌아올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 잠시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식탁 앞에 섰다. 이름표는 없었다. 사망 원인도, 날짜도, 담당자 표시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찾지 않았다. 먼저 가장 가까운 빵 조각 앞에서 멈췄다. 빵은 한쪽이 마르고 있었고, 잘린 단면에는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급하게 먹다 남긴 것인지, 나누어두고 다시 오려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레이는 양손을 가볍게 모았다. 기도는 아주 짧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커튼 고리를 손안에서 천천히 굴렸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든 채 식탁 옆에 섰지만, 자기 접시를 그 위에 올리지는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식탁 끝에 잠시 내려놓으려다가, 놓을 자리를 찾지 못해 다시 들었다. 하융은 문턱 가까이에 서서 방 안의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다음으로 젖은 신발 앞에 섰다. 발등 부분의 가죽이 늘어나 있었고, 뒤꿈치에는 덧댄 천이 풀려 있었다. 신발 안쪽에는 아주 작은 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레이는 손을 뻗어 돌을 꺼냈다. 그리고 신발을 더 마르기 좋은 방향으로 조금 돌려놓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손님은 그거 안 해도 돼요.”

그레이의 손이 멈췄다.

“신발 안에 돌이 있었습니다.”

“알아요.”

“그대로 두면 신은 사람이 다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지금 아무도 신지 않아요.”

그레이는 잠시 신발을 보았다. 신발은 얌전히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젖어 있었고, 낡았고,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였다. 그레이는 꺼낸 돌을 신발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등불지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빼줬네요.”

“들어 있으면…… 마음이 쓰입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돌 들어간 신발은 보기만 해도 발이 아파.”

푸리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죠니답게 정확한 감상.”

“나는 발에 관해서는 꽤 진지해, 여왕님.”

그레이는 다음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잉크 묻은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한쪽에는 마르지 않은 듯한 검은 얼룩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서툰 바느질 자국이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바로 펴려다가 손을 멈췄다. 대신 허리를 조금 숙여 손수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손수건은 펼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시간이 조금 길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레이 경, 손수건은 그냥 두시는 겁니까?”

그레이는 손수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접힌 방식도 남은 흔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그레이는 아주 작은 숨을 내쉬고, 손수건 곁에서 물러섰다.

아이의 종이배는 식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종이는 얇고 오래되어 끝이 조금 말려 있었다. 물에 띄운 적이 있는지 아래쪽이 구겨져 있었고, 안쪽에는 읽기 어려운 글자 몇 개가 번져 있었다. 그레이는 종이배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식탁 위의 물기만 조심스럽게 닦았다. 종이가 더 젖지 않게 하는 정도였다.

등불지기가 또 말했다.

“그것도 안 해도 돼요.”

“네.”

“그런데 했어요.”

“네.”

“왜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젖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등불지기는 그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레이를 보았다. 그러더니 자기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다. 빛이 종이배 위에 내려앉았다. 번진 글자는 여전히 읽히지 않았지만, 종이배의 접힌 선은 조금 더 또렷해졌다.

푸리나가 식탁 가까이 다가왔다.

“그레이.”

“네, 전하.”

“힘들면 앉아도 돼.”

그레이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앉을 자리는 있었다. 식탁 옆에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낡았지만 깨끗했고, 등받이에는 작은 천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식탁 위의 물건들을 두고 앉는 일은 그녀에게 조금 어색했다. 누군가의 남은 빵, 젖은 신발, 편지, 숟가락 앞에서 자신이 먼저 앉아도 되는지 바로 판단되지 않았다.

죠니가 의자 하나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는 손으로 앉는 부분을 한 번 눌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괜찮네.”

그레이가 말했다.

“확인해주신 겁니까?”

“응. 앉으라고 하려면 의자가 버티는지도 봐야지.”

푸리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죠니, 오늘 되게 여관 종업원 같아.”

“그 말은 좀 복잡한데. 임금은 나오나?”

“접시 들고 왔으니까 식비로 퉁치자.”

“역시 위험한 고용주야.”

그레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결국 의자 앞에 섰다. 바로 앉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패가 의자 등받이에 닿아 작게 흔들렸다. 그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들었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손님 자리예요.”

그레이는 의자를 보았다.

“누군가의 자리였던 것은 아닙니까?”

“지금은 손님 자리예요.”

“지금은…….”

그레이는 그 말을 되풀이하듯 낮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앉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의자가 불편해하지 않게 앉는 사람처럼. 의자는 작게 삐걱였지만 버텼다. 그녀가 앉자, 식탁 위의 물건들이 조금 달라 보였다. 서 있을 때는 하나씩 살펴야 할 것들처럼 보였는데, 앉으니 누군가 함께 식탁에 남겨두고 간 것들처럼 보였다. 빵은 더 멀어졌고, 편지는 조금 가까워졌으며, 깨진 숟가락은 등불 아래에 반쯤 숨어 있었다.

푸리나는 그레이가 앉는 것을 보더니, 안도한 듯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크게 말하지 않고,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좋아. 그럼 나도 앉아야지.”

죠니가 말했다.

“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앉네.”

“손님이니까.”

“방금 네가 만든 극 아니야?”

“극장주도 손님이 될 수 있어.”

“편리한 직업이네.”

레이튼은 조용히 의자를 골랐다. 앉기 전에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고,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허락을 구하듯 잠시 멈췄다. 하융은 식탁 끝쪽에 앉았다. 그는 창문이 없는 벽을 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어딘가 먼 곳에서 돌아온 사람의 것 같았다.

죠니는 마지막으로 앉았다. 다만 자기가 가져온 접시는 식탁 위의 물건들과 섞이지 않게, 자기 앞에만 놓았다. 그러고는 빵을 하나 집어 들어 그레이 쪽으로 내밀었다.

“먹어.”

그레이는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나중에…….”

푸리나가 바로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말을 멈추었다. 죠니는 빵을 든 손을 거두지 않았다.

“빠른 나중.”

그레이는 잠시 빵을 보았다. 식탁 위의 반쯤 먹은 빵과 죠니가 내민 빵은 닮아 있었지만 같지 않았다. 하나는 누군가가 남기고 간 것이고, 하나는 지금 건네진 것이었다. 그레이는 두 빵 사이를 아주 짧게 보았다가, 죠니가 내민 쪽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먹어. 근데 너무 천천히 먹으면 그건 또 안 먹는 거랑 비슷해져.”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 네 식사 규칙은 묘하게 엄격해.”

“사람이 안 먹는 핑계는 종류가 많거든. 막아야 해.”

그레이는 빵을 조금 떼었다. 아주 작게. 죠니는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려다가, 푸리나가 팔꿈치로 가볍게 막자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빵을 입에 넣었다. 딱딱하지는 않았다. 조금 식었고, 밀가루 냄새가 났으며, 말린 과일의 단맛이 손끝에 묻어 있었다.

등불지기가 맞은편 의자에 올라앉았다. 아이의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젖은 신발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질 것처럼 맺혔지만, 끝내 떨어지지는 않았다.

“맛있어요?”

그레이는 빵을 삼키고 대답했다.

“네. 맛있습니다.”

“그럼 됐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등불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았다. 빛이 퍼지자 식탁 위의 물건들이 조금 따뜻해 보였다. 그러나 물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젖은 신발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손수건은 여전히 접혀 있었으며, 편지는 아직 봉해지지 않았고, 숟가락은 깨져 있었다. 다만 빛 안에서 그것들은 조금 덜 외로워 보였다.

레이튼이 찻잔을 나누었다. 어느새 찻잔들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다. 여관거리의 방에서는 필요한 물건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타나, 오히려 묻기 어려웠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그레이 경?”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찻잔을 받았다. 손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잉크 묻은 손수건을 한 번 보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수건은 그대로 접혀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기이하구려. 이 방은 닫힌 듯하나, 무엇도 밀어내지는 않는 듯하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하융, 지금 대사 좋았어.”

“대사가 아니라 감상이오.”

“좋은 감상은 대사로 쓸 수 있지.”

죠니가 말했다.

“또 가져가네.”

“극장주는 좋은 걸 보면 가져가는 법이야.”

“위험한 직업이야, 정말.”

그레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문득 식탁 끝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봉하지 못한 편지. 편지지의 끝은 조금 말려 있었고,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편지를 보았다. 편지는 열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닫아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잠시 그곳에 있었다.

등불지기가 물었다.

“읽고 싶어요?”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왜요?”

“편지에는 받을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이는 그 답을 듣고 편지를 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작게 말했다.

“못 받은 편지도 여기 와요.”

그레이는 아이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네. 어떤 편지는 오래 기다려요. 어떤 편지는 자기가 누구에게 가야 했는지 잊어버리고요.”

푸리나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고 있었고, 죠니는 접시 위의 말린 과일을 손끝으로 밀어놓았다. 하융은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을 한 번 보았다.

그레이는 편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 말은 편지에게 한 말이었다. 누가 쓴 것인지, 누가 받아야 하는 것인지 아직 몰랐다. 그런데도 그 말은 식탁 위에 조용히 놓였다. 편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말려 있던 끝이 등불의 온기 때문인지 아주 조금 펴진 듯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를 빤히 보았다.

“아가씨는 손님인데도 인사를 많이 하네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손님도 인사는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맞아요.”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 안쪽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따뜻한 김이 낮게 흘러나왔다. 향유 냄새보다 젖은 나무와 오래된 쇠의 냄새가 먼저 닿았다. 안쪽에는 나무 욕조들이 층을 이루고 있었고, 벽에는 마른 수건과 낡은 등불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에는 작은 솔, 접힌 천, 금이 간 그릇, 녹슨 못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구도 서둘러 치우지 않은 물건들이었지만,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물 위에는 등불빛이 길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 아래로 무엇인가 오래 불려지는 듯한 냄새가 났다.

등불지기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다음 방이에요.”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잠시 멈추고, 자기 앞에 남은 빵 조각을 보았다. 다 먹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것을 접시에 다시 내려놓으려다가, 죠니와 눈이 마주쳤다.

죠니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접시의 빈 가장자리를 톡 쳤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작은 천에 감쌌다.

“나중에 먹겠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려 하자, 그레이가 먼저 덧붙였다.

“가능한 빠른 나중에요.”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통과.”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럼 저희도 이동할까요?”

하융은 천천히 일어섰다.

“물이 있는 방이라. 다음 손님은 발자국을 남길 모양이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며 말했다.

“좋아. 다음 장면은 물의 방.”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네. 네 작명치고는 얌전해.”

“죠니, 그건 칭찬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자.”

레이튼이 조용히 웃었다.

“좋은 선택입니다.”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 식탁 위의 물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젖은 신발, 손수건, 종이배, 숟가락, 편지.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길지 않았다. 빵을 먹었고, 차를 마셨고, 의자에 앉았기 때문인지, 손목의 등불패가 처음보다 덜 낯설게 흔들렸다.

등불지기가 따뜻한 김이 새어나오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젖은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가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식탁을 뒤로하고 걸었다. 뒤에서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이 따라왔다. 식탁 위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빛은 남은 빵과 접힌 손수건과 봉하지 못한 편지 위에 조용히 머물렀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3막 — 물의 방과 진흙 손님

물의 방은 문 안쪽에서 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작은 욕실처럼 보였으나, 한 걸음 들어서자 나무 욕조들이 층을 이루며 안쪽으로 이어졌고, 천장 아래에는 긴 수증기가 낮은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바닥에는 얇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물길은 발목을 적시지는 않았지만, 등불빛을 받아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벽에는 마른 수건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욕조 가장자리에는 작은 솔과 접힌 천, 금이 간 그릇, 녹슨 못, 부러진 등불 유리 조각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래된 쇠와 젖은 나무 냄새가 먼저 났고, 그 뒤에야 희미한 향유 냄새가 따라왔다.

그레이는 문턱에서 잠시 멈췄다. 식탁의 방과는 달랐다. 식탁의 방은 남겨진 것들이 조용히 놓여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무언가가 오래 묻어 있다가, 물에 불려 천천히 떨어져나가는 곳처럼 보였다. 욕조의 물은 맑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럽지도 않았다. 어떤 욕조는 흙빛이었고, 어떤 욕조는 오래된 잉크를 풀어놓은 듯 엷게 검었으며, 어떤 욕조는 우물 바닥의 돌을 오래 씻은 물처럼 회색빛을 띠었다. 그레이는 물의 색을 하나씩 보다가, 가장 가까운 욕조 옆에 놓인 작은 솔을 보았다. 솔의 털 끝에는 진흙이 조금 굳어 있었다.

등불지기는 익숙한 듯 욕조 사이를 지나갔다. 아이의 젖은 신발은 여전히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 뒤를 따르다가,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금이 간 그릇 하나를 보았다. 그릇 안쪽에는 아주 오래된 곡물 찌꺼기 같은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서 짧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수증기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생각보다 조용하네.”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품에 안고 말했다.

“목욕탕이 조용하다는 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물이 너무 조용하면 그것도 별개의 문제가 되겠지만요.”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튼, 지금 물한테 질문하려는 거야?”

“아직은 아닙니다.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된 물인지 먼저 확인해야지요.”

죠니가 이번에는 바로 끼어들지 않고, 욕조 가장자리를 발끝으로 살폈다. 미끄러운지 확인하는 듯했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고 낮게 웃었다.

“죠니 경은 물에도 예의를 갖추는구려.”

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끄러운 바닥은 신분을 안 가려. 먼저 예의를 차리는 쪽이 덜 넘어진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평등한 철학이오.”

“그걸 철학이라고 부르면 좀 억울한데.”

레이튼이 온화하게 말했다.

“철학은 종종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 발목을 학문으로 만들지 마.”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수증기 사이에서 금방 흐려졌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욕조의 물길을 보았다. 말이 오가는 동안에도 물은 천천히 움직였고, 아주 작은 진흙 조각 하나가 물결을 따라 욕조 가장자리로 밀려왔다.

등불지기가 욕조 한가운데 난 좁은 통로 앞에서 멈췄다.

“여기서는 손님들이 묻은 걸 내려놔요.”

그레이는 아이를 보았다.

“묻은 것……입니까?”

“네. 흙, 물, 말, 냄새, 그런 거요.”

등불지기는 자기 신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가끔은 자기 것이 아닌 것도 묻어 와요.”

그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아이가 말한 “자기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녹슨 못과 찢어진 천 조각과 굳은 흙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밟고 지나간 거리의 흔적. 누군가 닫지 않은 문에서 새어 나온 찬바람. 누군가 놓친 보고. 누군가 오래 견딘 냄새. 그레이는 그 말들을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문장으로 만들기 전에도 방 안의 냄새는 충분히 무거웠다.

그때 안쪽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바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문틈으로 진흙물이 밀려 들어왔다. 등불 하나가 꺼질 듯 흔들렸고, 벽의 수건들이 축 늘어졌다. 문 너머에서 둔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크고 무거운 것이 긴 복도를 지나오는 소리였다. 쿵, 쿵, 쿵. 소리는 규칙적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질척이는 물소리가 섞였고, 오래된 나무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푸리나가 커튼 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 다음 손님이 조금 거칠게 들어오네.”

죠니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다가, 그레이를 보고 멈췄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조심스럽게 옆 선반에 올려두었다. 하융은 수증기 너머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문밖의 진흙이 오래 참은 모양이오.”

안쪽 문이 열렸다.

진흙투성이 손님이 들어왔다. 사람의 모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고,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온몸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진흙 속에는 여러 물건들이 박혀 있었다. 녹슨 못, 부러진 빗장, 찢긴 배급표, 끊어진 우물 밧줄, 젖은 편지, 깨진 등불 유리, 배수구 쇠살대, 이름이 번진 나무패, 작은 신발 한 짝. 손님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그것들이 서로 부딪혀 낮은 소리를 냈다. 냄새는 강했다. 썩은 냄새라기보다, 너무 오래 닫혀 있던 골목이 한꺼번에 열린 냄새였다.

주변의 작은 등불들이 뒤로 물러났다. 수건들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건드리지 마.”

“저건 지워지지 않아.”

“슬럼가 냄새야.”

“그냥 문밖으로 돌려보내.”

그레이는 그 목소리들이 어디서 나는지 찾지 않았다. 방의 벽인지, 수증기인지, 손님 몸에 박힌 종이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진흙투성이 손님을 보았다. 진흙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안에는 작은 돌멩이와 검은 물, 풀리지 않은 실들이 섞여 있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가까이 가면 묻어요.”

그레이는 아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젖은 손이었다.

“네. 묻을 겁니다.”

“그런데 갈 거예요?”

그레이는 대답하기 전에 소매를 조금 걷었다. 젖지 않게 하려는 손짓이 아니라, 젖을 것을 알고 준비하는 손짓이었다.

“먼저 보겠습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돌아보았다.

푸리나는 말끝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면 내가 말릴 거야.”

“네.”

“진짜야.”

“알겠습니다.”

죠니가 옆에서 짧게 덧붙였다.

“말리는 건 내가 더 잘해. 무겁게 서 있으면 되거든.”

하융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것도 일종의 신술 같구려.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막는 법.”

죠니가 그를 보았다.

“하융, 그 말은 좀 마음에 드는데. 나중에 써도 돼?”

“내 말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접시 한 조각으로 받겠소.”

푸리나가 작게 숨을 삼키듯 웃었다.

“하융이 거래를 시작했어.”

레이튼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흥미롭군요. 언어와 접시의 교환 비율은 어느 정도가 적절할까요?”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교수, 농담에 세금 매기지 마.”

그 짧은 소란 덕분에 물의 방의 공기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레이는 그 틈에 진흙투성이 손님 가까이 다가갔다. 손님은 그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진흙과 수건 조각과 젖은 종이들이 겹쳐 있었고, 그 안쪽에서 희미한 물소리만 났다.

그레이는 손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진흙투성이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에 박힌 깨진 등불 유리가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전에 그레이가 손수건을 꺼내 받았다. 손수건은 곧 진흙에 젖었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욕조 가장자리의 작은 그릇에 넣었다.

등불지기가 눈을 크게 떴다.

“손님 손수건인데요.”

“씻으면 됩니다.”

“진흙은 잘 안 빠져요.”

“그래도 씻어보겠습니다.”

그레이는 그릇 옆의 작은 솔을 들었다. 진흙투성이 손님 몸에 박힌 물건들을 바로 잡아당기지는 않았다. 먼저 가장 바깥쪽의 진흙을 물로 적셨다. 물은 금방 검어졌다. 진흙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굳은 곳은 돌처럼 단단했고, 물러진 곳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그레이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다만 진흙이 손목까지 묻자, 소매를 한 번 더 걷었다.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도울까?”

그레이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욕조 가장자리에 있는 큰 그릇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하지.”

죠니는 가볍게 움직였지만, 바닥이 미끄러운 곳에서는 걸음을 늦췄다. 그는 큰 그릇을 들고 와 그레이 옆에 놓았다.

레이튼도 다가왔다.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까요?”

그레이는 진흙 속에 반쯤 묻힌 배수구 쇠살대를 보았다.

“깊이 박힌 것을 바로 잡아당기면 찢길 수 있습니다. 주변부터 불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물의 온도를 조금 조절해보겠습니다.”

레이튼은 욕조의 물을 살피더니, 등불지기에게 물었다.

“이 방에서는 따뜻한 물이 어디서 옵니까?”

등불지기는 천장을 가리켰다.

“위에서요.”

레이튼은 위쪽의 관을 보았다. 관에는 작은 종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종 하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맑은 소리가 났다. 그러자 가까운 욕조의 물결이 조금 따뜻하게 흔들렸다.

푸리나가 감탄했다.

“레이튼, 어떻게 알았어?”

“종이 여섯 개 있었고, 그중 세 개만 녹이 덜 슬어 있었습니다. 자주 쓰는 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였으면 일단 다 쳐봤을 텐데.”

죠니가 말했다.

“그래서 교수가 교수고, 네가 여왕님이지.”

푸리나는 그 말에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반박할 수 없네.”

하융은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접힌 천들을 살폈다. 그는 그중 가장 깨끗한 천을 골라 물에 적시고, 그레이에게 건넸다.

“이 천은 아직 힘이 남았소. 쓰기 좋겠구려.”

그레이는 천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손님도 손님을 도울 수는 있소.”

그 말에 등불지기가 하융을 보았다.

“그건 규칙에 있어요?”

하융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없다면 새로 적어야겠소.”

레이튼이 작게 웃었다.

“좋은 조항입니다. ‘손님은 손님을 도울 수 있다.’”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그거 극장 규칙에도 넣을까?”

죠니가 말했다.

“넣으면 좋아. 대신 밑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도 붙여.”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천으로 진흙을 닦았다. 웃음이 완전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손끝의 힘이 조금 덜 굳었다. 진흙투성이 손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몸 안쪽에서 낮은 물소리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오래 막혀 있던 물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 같았다.

그레이는 먼저 작은 신발 한 짝을 꺼냈다. 억지로 잡아당기지 않았다. 주변 진흙을 적시고, 굳은 흙을 손으로 부수고, 끼어 있는 실을 풀었다. 신발은 작았다. 발등에는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끈은 끊어져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큰 그릇에 담지 않고, 따로 접힌 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으로 젖은 편지를 꺼냈다. 종이는 물을 먹어 거의 찢어질 듯했다. 그레이는 그것을 펼치지 않았다. 펴면 찢어질 것이다. 그녀는 편지를 그대로 얇은 그릇 위에 올리고, 레이튼이 건넨 마른 천으로 주변 물기만 눌렀다.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읽지 않으시는군요.”

“지금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찢긴 배급표가 나왔다. 글자는 거의 지워져 있었지만, 붉은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 선을 오래 보았다. 표가 어디서 끊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누군가 그 선 너머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손끝에 남았다. 그녀는 배급표를 신발 옆이 아니라, 편지 옆에 놓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왜 거기야?”

“같이 젖어 있었습니다.”

“아.”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레이가 아직 말로 만들지 않은 기준을, 무리해서 꺼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진흙투성이 손님은 조금씩 작아졌다. 아니, 작아졌다기보다 진흙 아래의 윤곽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던 몸이, 이제는 여러 겹의 골목과 지붕과 물길이 엉킨 모양처럼 보였다. 손님 몸의 한가운데에는 배수구 쇠살대와 꺼진 등불심지가 뒤엉켜 있었다. 그 둘은 가장 깊이 박혀 있었고, 건드릴 때마다 손님 전체가 낮게 떨렸다.

등불지기가 속삭였다.

“그건 아파요.”

그레이는 손을 멈췄다.

“그렇습니까?”

“아마요. 저기 박힌 지 오래됐거든요.”

그레이는 쇠살대와 등불심지를 보았다. 쇠에는 검은 진흙이 굳어 있었고, 심지는 물을 먹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둘은 서로 다른 물건인데, 너무 오래 붙어 있어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막힌 물길과 꺼진 불이 한몸이 되었구려.”

푸리나는 조용히 그 말을 따라 하듯 중얼거렸다.

“막힌 물길과 꺼진 불.”

죠니가 이번에는 농담하지 않았다. 그는 그레이의 옆에 서서 손님이 흔들릴 때 넘어지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레이튼은 따뜻한 물을 조금 더 불러왔고,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높이 들었다.

그레이는 손을 뻗었다. 바로 잡아당기지 않고, 먼저 쇠살대 주변의 진흙을 손으로 떼어냈다. 손톱 밑에 흙이 들어갔다. 심지에 붙은 검은 물은 손목을 타고 내려왔다. 냄새가 더 강해졌다. 그레이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한 조각씩, 조금씩, 진흙을 떼어냈다. 그러다 심지의 끝이 조금 풀렸고, 쇠살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입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죠니와 하융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죠니는 쇠살대를 잡았고, 하융은 심지를 받쳤다. 레이튼은 물의 온도를 맞추었고,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들어 욕조 위의 등불들이 한꺼번에 흔들리지 않게 빛을 모았다.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가장 가까이 가져왔다.

그레이는 쇠살대와 심지가 엉킨 부분을 잡았다.

“천천히.”

죠니가 말했다.

“알아.”

하융이 낮게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셋에 맞춰 그들은 당겼다.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님이 크게 떨렸고, 욕조의 물이 검게 솟았다. 푸리나가 이를 악물고 커튼 고리를 붙잡았다. 레이튼은 종을 하나 더 울렸다. 따뜻한 물이 흘러들어오자 굳은 진흙이 조금 더 풀렸다. 그레이는 손을 놓지 않았다. 심지가 끊어질 듯 늘어났고, 쇠살대가 삐걱거리며 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가 빠졌다.

쇠살대와 등불심지가 함께 뽑혀 나왔다. 그 순간 진흙투성이 손님 몸에서 검은 물이 쏟아졌다. 모두가 한 걸음 물러섰다. 욕조의 물은 순식간에 탁해졌고, 바닥의 물길은 빠르게 흘렀다. 벽의 등불들이 한꺼번에 낮게 흔들렸다. 그러나 꺼지지는 않았다.

진흙이 씻겨 내려가자, 손님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작은 거리가 나타났다.

방 안 한가운데, 물안개처럼 얇은 골목이 펼쳐졌다. 비가 그친 뒤의 골목이었다. 낮은 집들의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막혀 있던 배수구 옆에는 물웅덩이가 빠져나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물웅덩이를 피해 걷던 좁은 길이 보였고, 문 앞에 놓인 작은 신발들이 보였다. 골목 끝의 등불 하나가 다시 켜졌다. 아주 작은 불이었다. 그러나 불빛이 닿자, 젖은 벽의 금 간 자리와 문턱의 높이와 돌아가는 길이 보였다.

그레이는 그 장면을 보았다.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날짜도 없었다. 하지만 골목은 잠시 거기 있었다. 비 냄새와 젖은 천 냄새와 갓 켜진 등불의 약한 기름 냄새가 방 안으로 흘러나왔다.

등불지기가 작게 말했다.

“이제 보여요.”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내렸다. 죠니는 뽑아낸 쇠살대를 욕조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레이튼은 종에서 손을 뗐고, 하융은 젖은 심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손을 모았다.

기도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들렸다.

“오래 젖어 계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골목의 등불이 한 번 더 흔들렸다. 그러더니 골목은 서서히 얇아졌다. 사라진다기보다, 물에 비친 그림자가 물결에 맞춰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작은 등불심지 하나였다. 젖어 있었지만,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깨끗한 천 위에 올려두었다.

등불지기가 손님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잠든 거예요?”

그레이는 심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마…… 조금은 마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푸리나는 그레이의 손을 보았다.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그레이는 뒤늦게 자기 손을 보고, 손수건을 찾으려 했다. 아까 유리 조각을 받느라 더러워진 손수건은 그릇 옆에 있었다.

죠니가 물을 담은 작은 대야를 밀어주었다.

“먼저 씻어.”

그레이는 대야를 보았다.

“정리부터…….”

푸리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손부터.”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레이튼은 마른 천을 건넸고, 하융은 젖은 등불심지를 안전한 곳에 옮겨두었다. 죠니는 대야가 미끄러지지 않게 발로 받쳤다.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낮게 내려, 물이 잘 보이게 했다.

그레이는 대야에 손을 넣었다. 물이 금세 흐려졌다. 손톱 밑의 흙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씻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물의 방에는 잠시 손 씻는 소리만 남았다.

푸리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오늘 장면은…… 조금 좋네.”

죠니가 낮게 답했다.

“좋다는 말을 쓰기엔 손이 많이 더러워졌는데.”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때로는 그 점 때문에 좋은 장면일 수도 있지요.”

하융이 젖은 심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깨끗함이 처음부터 먼지 없음만을 뜻하지는 않겠구려.”

죠니가 하융을 보았다.

“오늘 하융 말이 꽤 많이 팔리겠는데.”

하융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까 정한 대로라면 접시 한 조각이오.”

푸리나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다만 물의 방이라 그런지, 웃음은 크게 울리지 않고 김 속에서 부드럽게 풀렸다. 그레이도 아주 작게 웃었다. 손은 아직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았지만, 물은 따뜻했다.

등불지기가 다음 문을 가리켰다.

“다음 손님은 말이 많아요.”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말이 많은 손님?”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챙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차례일지도 모르겠군요.”

죠니가 말했다.

“교수, 기뻐하지 마.”

레이튼은 평온하게 답했다.

“기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말이 많은 손님과 조용한 질문의 궁합을 확인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게 기뻐하는 거야.”

하융이 조용히 덧붙였다.

“질문도 가끔 표정을 짓는 법이오.”

레이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현은 제가 접시 반 조각으로 사겠습니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이젠 말에 가격 흥정까지 하는거야?”

그레이는 손을 닦으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물의 방 한쪽에는 진흙이 씻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욕조의 물은 아직 완전히 맑지 않았고, 솔과 천은 더러워졌으며, 큰 그릇에는 꺼낸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작은 신발, 젖은 편지, 찢긴 배급표, 깨진 등불 유리, 쇠살대, 등불심지.

그녀는 그것들을 다시 정리하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등불지기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잠시 생각한 뒤, 손을 거두었다.

“이대로 두어도 됩니까?”

등불지기가 환하게 웃었다.

“네. 여기 사람들이 말려줄 거예요.”

“그렇다면…… 부탁드립니다.”

그레이는 물건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돌아서기 전에 손을 다시 씻지 않았다. 손은 깨끗한 천으로 닦였고, 손목의 등불패에는 아주 작은 진흙 자국 하나가 남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문지르지 않았다. 아직은.

그들은 물의 방을 나섰다. 뒤쪽에서 욕조의 물이 낮게 흔들렸고, 벽의 등불들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흙투성이 손님이 남긴 냄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처음처럼 무겁지는 않았다. 젖은 나무 냄새 사이로 새로 켜진 등불의 기름 냄새가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4막 — 처리 완료

물의 방 다음에는 복도가 없었다. 문을 열자 곧장 낮은 대기실이 나왔다. 대기실이라기에는 의자가 너무 많았고, 광장이라기에는 천장이 너무 낮았다. 벽에는 작은 창구들이 줄지어 있었으며, 각 창구 위에는 글자 없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어떤 팻말에는 접힌 편지가, 어떤 팻말에는 물동이가, 어떤 팻말에는 깨진 숟가락이, 어떤 팻말에는 등불이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는 그 그림들을 하나씩 보았다. 조금 전 물의 방에서 본 물건들과 닮아 있었지만, 이곳의 것들은 훨씬 납작했다. 종이 위에 찍힌 도장처럼, 사물의 무게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몇몇 손님들은 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떤 손님은 창구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흐렸다. 졸린 사람처럼 흐린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지우개로 문질러진 종이처럼 흐렸다. 손에는 각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젖은 편지, 낡은 신발, 작은 숟가락, 금이 간 그릇. 그 물건들은 얼굴보다 또렷했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잠시 멈췄다. 방 안의 공기는 물의 방보다 차가웠다. 젖은 나무 냄새 대신 마른 종이 냄새가 났고, 등불의 기름 냄새 대신 오래된 잉크와 밀랍 냄새가 났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가 작게 흔들렸다. 진흙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다.

등불지기가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는 조금 시끄러워요.”

죠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조용한데.”

“곧 시끄러워져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장 안쪽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검은 손님이 걸어 나왔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림자가 길었다. 얼굴은 없었다. 정확히는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종이가 한 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에는 도장이 들려 있었다. 붉은 인주가 마르지 않았는지, 도장 끝이 번들거렸다.

검은 손님은 창구 앞에 멈췄다.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도장을 찍었다.

쾅.

소리는 방 전체에 울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손님은 종이를 하나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처리 완료.**

곧 다른 손님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에 낡은 신발을 들고 있었다. 신발은 아이 것처럼 작았다. 검은 손님은 신발을 보지도 않고,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쾅.

**처리 완료.**

신발을 든 손님은 그 종이를 받았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듯 내려갔다. 그는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신발의 윤곽이 흐려졌다. 끈이 먼저 사라지고, 뒤꿈치의 천이 흐려지고, 마지막에는 젖은 자국만 남았다. 손님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종이를 품에 안고 긴 의자로 돌아갔다.

그레이는 그 장면을 보고 한 걸음 움직이려 했다가 멈췄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이 없어서인지, 검은 손님은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다만 도장을 들고 다음 종이를 기다렸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말이 많은 손님이라고 하셨지요.”

등불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말은 하나뿐이에요.”

그 순간 검은 손님이 다시 도장을 찍었다.

쾅.

“원인 불명.”

쾅.

“성명 미상.”

쾅.

“관례상 종결.”

각 도장 소리마다 손님들의 손에 들린 물건들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편지의 봉투가 사라지고, 숟가락의 금 간 부분이 지워지고, 물동이의 손잡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손님들은 그 종이를 받아들고 조용해졌다. 조용해질수록 방은 더 마른 종이 냄새로 가득 찼다.

푸리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박수 소리가 아니네.”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접시를 품 가까이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아직 말린 과일이 조금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뭔가 한마디 했을 그가 침묵하자, 방의 도장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하융이 벽의 창구들을 보며 낮게 말했다.

“소리가 크다고 하여 살아 있는 말은 아니구려.”

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방에서는 조용한 질문이 필요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 이번엔 네 차례 같지?”

“아마도요. 다만 먼저 묻는 분은 제가 아닐 듯합니다.”

레이튼의 시선은 그레이에게 가 있었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 쪽으로 걸어갔다. 등불지기가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다만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다. 빛이 검은 손님의 발밑에 닿았지만, 그림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레이는 창구 앞에 섰다. 검은 손님은 그녀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는 비어 있었다.

그레이는 받지 않았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들었다.

“처리 완료.”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무엇이 완료되었습니까?”

검은 손님은 도장을 멈추지 않았다.

“처리 완료.”

“무엇을 처리했습니까?”

“처리 완료.”

도장이 허공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레이는 종이를 받지 않은 채, 도장이 찍히기 전의 빈 종이를 보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름도, 물건도, 날짜도, 장소도 없었다. 종이가 너무 하얘서 오히려 불편했다.

“어느 손님의 일입니까?”

검은 손님은 잠시 멈췄다.

“처리 완료.”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화내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받을 수 없습니다.”

도장이 허공에서 멈췄다. 방 안의 손님들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손님은 처음으로 그레이 쪽을 보는 듯했다. 얼굴 없는 종이 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레이튼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그레이보다 앞서지는 않았다.

검은 손님은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붉은 글씨가 먼저 찍혀 있었다.

**원인 불명.**

그레이는 종이를 보았다.

“모르겠다는 뜻입니까?”

검은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묻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검은 종이 얼굴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둘은 꽤 다르지요.”

검은 손님이 레이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튼은 미소를 유지한 채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모른다는 말은 때로 정직합니다. 하지만 묻지 않았는데 모른다고 쓰면, 종이가 먼저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들어 올렸다.

쾅.

이번에는 창구 위에 도장이 찍혔다.

**관례상 종결.**

하융이 그 글씨를 보며 낮게 말했다.

“관례라. 오래 반복된 길은 때로 길이 아니라 홈이 되오. 발이 빠지기 쉽지.”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좀 맞는 말이네.”

푸리나가 하융을 보았다.

“하융, 오늘 대사 장사가 잘되는데?”

하융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직 접시를 받지 못했소.”

죠니는 말린 과일 하나를 집어 하융 쪽으로 내밀었다.

“선불.”

하융은 그것을 받아들고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실제로 주는구려.”

“네가 청구했잖아.”

푸리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튼은 눈을 가늘게 접고 말했다.

“계약의 성립을 목격했습니다.”

“교수까지 증인 서면 진짜 일이 커지오.”

하융이 그렇게 말하자, 그레이의 입가에도 아주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검은 손님은 그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멈춰 있었다. 도장 끝에서 붉은 인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은 바닥에 닿기 전에 종이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그레이는 다시 검은 손님을 보았다.

“도장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죠니도 그레이를 보았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든 손을 조금 낮췄다.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레이는 창구 옆에 놓인 종이 더미를 보았다. 종이들은 너무 깨끗했다.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그 위에 도장만 찍히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오면 안 됩니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이 내민 종이를 받지 않고, 창구 옆에 놓인 낡은 신발을 들었다. 조금 전 희미해진 신발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종이 위에 올렸다. 빈 종이가 신발의 젖은 자국을 받아들였다. 하얀 종이에 작은 물기가 번졌다. 글자는 아니었지만, 흔적이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검은 손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다음으로 접힌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는 흐려지고 있었지만, 아직 모서리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신발 옆에 놓았다.

“이것도.”

깨진 숟가락.

“이것도.”

금이 간 그릇.

“이것도.”

물동이 손잡이.

“이것도.”

그레이가 물건들을 하나씩 종이 위에 올릴 때마다, 종이는 더 이상 하얗지 않게 되었다. 젖은 자국, 녹 자국, 손때, 잉크 얼룩, 오래된 밀가루 가루가 묻었다. 검은 손님의 도장은 점점 내려올 곳을 잃었다. 붉은 글씨가 찍힐 빈자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레이튼이 아주 부드럽게 물었다.

“그 문서에는 아직 제목이 없군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목이 있어야 합니까?”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직은 없어도 됩니다. 물건들이 먼저 놓였으니까요.”

레이튼은 만족한 듯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검은 손님에게 다가가려다가, 그레이보다 앞서지 않도록 멈췄다. 대신 방 안의 다른 손님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종이 받기 전에 들고 온 거 확인해. 없어졌으면 다시 찾아야지.”

그녀의 말투는 밝았지만, 장난스럽지만은 않았다. 손님들이 하나둘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손님은 편지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고, 어떤 손님은 숟가락 대신 빈 손을 쥐고 있었다. 방 안이 술렁였다.

죠니는 가까운 긴 의자 아래를 살피더니, 흐려진 물동이 손잡이 하나를 주워 올렸다.

“여기 하나.”

등불지기가 달려가 손님에게 돌려주었다. 손님은 손잡이를 받자마자 조금 또렷해졌다. 얼굴은 여전히 흐렸지만, 손가락의 윤곽이 돌아왔다.

하융은 창구 옆에 쌓인 종이 더미를 보았다. 종이들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저 종이들도 무서워하는 듯하오.”

레이튼이 물었다.

“무엇을 무서워한다고 보십니까?”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글자가 되기 전의 사물들 말이오. 종이는 빈 것을 좋아하는 듯하니.”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거 좋다. 빈 무대가 소품을 무서워하는 장면.”

죠니가 말했다.

“빈 무대는 보통 소품 기다리지 않아?”

푸리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좋은 빈 무대는 그렇지. 나쁜 빈 무대는 자기가 비어 있는 걸 아름답다고 착각해.”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극장주께서 질문을 던지셨군요.”

“질문 아니야. 불평이야.”

“좋은 불평은 종종 질문과 닮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으쓱했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검은 손님 앞에 다시 섰다. 검은 손님은 처음보다 작아져 있었다. 키가 줄었다기보다, 그림자가 짧아졌다. 도장은 여전히 손에 있었지만, 손이 조금 떨렸다.

그레이가 말했다.

“도장을 주십시오.”

검은 손님은 도장을 자기 가슴 가까이 당겼다.

“처리 완료.”

“아직 찍지 않겠습니다.”

검은 손님은 멈췄다.

“맡기겠습니다.”

그 말에 검은 손님의 얼굴 없는 종이가 흔들렸다. 여관의 성좌가 없었지만, 접수대에서 들었던 말이 방 안에 잠시 되살아난 듯했다. 맡기는 것. 빼앗는 것이 아니라, 부수는 것도 아니라, 필요한 때까지 손에서 내려놓는 것.

그레이는 손을 내밀었다.

검은 손님은 아주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손님들은 숨죽이고 보았다. 등불지기는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고,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손안에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죠니는 주워온 물건들을 손님들에게 돌려주고 있었고, 레이튼은 창구 옆의 종이들이 날리지 않게 찻잔으로 눌러두었다. 하융은 도장 소리가 남긴 울림이 아직 바닥에 남아 있는지 듣는 사람처럼 고개를 낮추었다.

마침내 검은 손님이 도장을 내밀었다.

그레이는 두 손으로 받았다. 도장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붉은 인주 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것을 창구 위에 내려놓지 않고, 작은 천에 감쌌다.

“감사합니다.”

검은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 없는 종이 위의 주름이 조금 펴졌다. 검은 몸은 더 작아졌다. 이제 그는 방을 집어삼킬 듯한 손님이 아니라, 길을 잃은 종이 인형처럼 보였다. 등불지기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앉을래요?”

검은 손님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장이 사라진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등불지기는 가장 가까운 의자를 가리켰다. 검은 손님은 거기 앉았다. 앉자, 그의 몸에서 종이 몇 장이 떨어졌다.

원인 불명.
성명 미상.
관례상 종결.
처리 완료.

종이들은 바닥에 떨어진 뒤, 붉은 글씨가 조금씩 옅어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크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레이는 그 종이들을 주워 한데 모았다. 그리고 창구 위 빈 상자에 넣었다. 상자에는 뚜껑이 없었다.

푸리나가 다가왔다.

“뚜껑은 안 닫아?”

그레이는 상자를 보았다.

“아직 닫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응.”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레이튼이 찻잔으로 눌러두었던 종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 방은 이전보다 조금 덜 시끄러워졌군요.”

죠니가 말했다.

“도장 소리가 안 나니까 살겠네.”

하융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소리가 줄어드니, 손님들의 손이 보이는구려.”

그 말대로였다. 긴 의자에 앉은 손님들의 얼굴은 여전히 흐렸지만, 손은 전보다 또렷해져 있었다. 누군가는 다시 편지를 쥐고 있었고, 누군가는 숟가락을, 누군가는 신발을, 누군가는 물동이 손잡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더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빈손은 아니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이제 다음 방으로 가도 돼요.”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내려다보았다. 진흙 자국 옆에 아주 작은 붉은 인주 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문지르지 않았다.

“네.”

푸리나가 물었다.

“손은 괜찮아?”

그레이는 자기 손을 보았다. 물의 방에서 씻었지만, 손톱 밑에는 아직 흙이 조금 남아 있었고, 손끝에는 붉은 인주가 묻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이번엔 씻으라고 안 할게. 또 다음 방에서 뭔가 묻을 것 같으니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다시 챙겼다.

“다음 방에서는 말보다 침묵이 많기를 기대해봅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러면 레이튼이 조금 심심하지 않을까?”

레이튼은 고개를 기울였다.

“침묵도 질문이 많습니다.”

죠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심심할 일은 없겠네.”

하융은 문 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말 없는 방이라면, 발소리가 대답하겠지요.”

푸리나는 손뼉을 치려다가, 이 방에서 큰 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손끝만 살짝 맞댔다.

“좋아. 그럼 다음 장면은 발소리.”

“작명은 또 시작되었구려.”

하융이 그렇게 말하자, 푸리나는 밝게 웃었다.

“하융도 이제 익숙해졌네.”

“익숙해지는 것과 납득하는 것은 다르오.”

죠니가 하융을 보며 말했다.

“오늘 제일 정확한 농담이네.”

하융은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 반 조각을 청구하겠소.”

이번에는 모두가 작게 웃었다. 검은 손님도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앉은 의자 아래에서 붉은 종이 하나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그들은 대기실을 나섰다. 뒤쪽 창구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도장도 작은 천 안에 묶인 채 상자 옆에 놓여 있었다. 닫힌 것은 없었다. 사라진 것도 많지 않았다. 다만 방 안의 소리는 달라졌다. 도장 소리 대신, 누군가 자기 물건을 다시 쥐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문을 지나기 전, 상자 쪽으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등불지기의 뒤를 따라 다음 방으로 걸어갔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5막 — 발소리의 정류장

대기실을 지나자 소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도장이 내려찍히던 방의 마른 울림은 문 뒤에 남았고, 대신 바닥 아래에서 낮은 떨림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고, 조금 더 걸으니 바퀴가 오래된 레일 위를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등불지기는 그 소리에 맞춰 걸음을 늦췄다. 아이의 젖은 신발은 여전히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발이 닿은 곳마다 바닥의 등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복도 끝에는 정류장이 있었다. 벽도 없고 지붕도 낮은, 그러나 분명히 정류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긴 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표지판에는 글자가 없었다. 대신 여러 개의 문패 그림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봉투, 젖은 신발, 깨진 숟가락,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 문패들은 바람도 없는데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흔들림이 멈추면 어디선가 바퀴 소리가 가까워졌고, 다시 흔들리면 멀어졌다.

그레이는 정류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정류장이라는 것은 기다리는 곳이었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머무는 곳. 누군가를 보내거나,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돌아오지 않는 발소리를 오래 듣는 곳. 그녀는 표지판의 그림들을 보다가, 가장 아래쪽에 걸린 빈 접시 문패에서 시선이 잠시 멈췄다. 죠니가 들고 있는 접시와 닮아 있었다. 다만 그림 속 접시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반듯이 놓여 있었다.

죠니가 그 시선을 따라가더니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내 건 아직 비어 있진 않아.”

푸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자랑처럼 말하는구나.”

“비어 있지 않은 접시는 자랑해도 돼.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레이튼은 표지판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문패들은 순서일까요, 아니면 정류장 이름일까요?”

등불지기가 대답했다.

“둘 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타고 가는 동안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너무 오래 보면 못 내려요.”

레이튼은 그 대답을 듣고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읽으라는 표지가 아니라, 적당히만 보라는 표지라.”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다. 극장 입구에 붙일까?”

죠니가 바로 말했다.

“너희 극장에 ‘적당히만 보시오’라고 붙이면 관객이 혼란스러워할걸.”

하융은 표지판의 문패들을 보다가 낮게 웃었다.

“과히 오래 보는 자는 길을 놓친다라. 내게 붙이면 퍽 매서운 팻말이겠구려.”

푸리나가 하융을 돌아보았다.

“그럼 붙여줄까?”

“전하께서 붙이시면, 내가 떼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오.”

“그건 또 그것대로 한 막이 되겠네.”

“부디 막이 짧기를 바라오.”

그레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정류장의 의자를 보았다. 의자에는 먼지가 없었다. 누군가 방금 일어난 것처럼, 앉았던 자리가 아주 희미하게 눌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없었다. 등불지기는 의자에 올라앉지 않고, 표지판 아래에 서서 등불을 무릎 높이로 낮췄다. 빛이 바닥을 비추자, 여러 겹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크고 작은 발자국, 맨발의 흔적, 지팡이 끝의 둥근 자국, 수레바퀴가 지나간 얕은 선. 발자국들은 정류장으로 모였다가, 레일 쪽으로 사라졌다.

그레이는 발자국들을 보았다. 기록할 수 없는 발자국이었다. 너무 많았고, 서로 겹쳤으며, 이미 지나간 것들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하나하나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가장 가까운 작은 발자국 앞에서 잠시 눈을 낮췄다. 발자국은 물기에 젖은 듯 반짝였고, 그 끝에는 진흙이 조금 말라 있었다.

정류장 저편에서 빛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등불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빛은 점점 길어졌고, 곧 낮은 마차의 형체가 되었다. 말은 없었다. 바퀴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차체가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다가왔고, 창문마다 작은 등불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마차가 정류장에 멈출 때도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다린 숨이 한 번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타요.”

푸리나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좌석 지정제야?”

“아니요.”

“그럼 내가 창가.”

죠니가 말했다.

“너는 어딜 가도 창가부터 노리네.”

“관객에게 풍경은 중요해.”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레이 경께서 먼저 고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 밤의 손님이시니까요.”

그레이는 마차 안을 보았다. 좌석은 길게 이어져 있었고,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문 가까운 자리로 걸어갔다. 필요하면 바로 내릴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자 등불지기가 고개를 저었다.

“거긴 기다리는 자리예요.”

그레이는 멈췄다.

“기다리는 자리입니까?”

“네. 오늘은 저쪽.”

아이가 가리킨 곳은 가운데 자리였다. 창과도 가깝고 문과도 멀지 않은, 그러나 바로 일어나기에는 조금 애매한 자리였다. 그레이는 잠시 그 자리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고, 죠니는 접시를 가슴 앞에서 살짝 고쳐 들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가 흔들리지 않게 손잡이를 잡았고, 하융은 마차 바닥의 레일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등불패가 무릎 위에서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려다가, 한 손에는 아직 작은 빵 조각을 감싼 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 천을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별말하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자기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렸다.

푸리나는 그레이 옆자리에 앉으려다, 잠시 멈췄다.

“옆에 앉아도 돼?”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푸리나를 보았다.

“물론입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앉았다. 평소라면 “주연 옆자리는 연출자의 특권!” 같은 말을 했을 법했지만,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 맞은편에 앉았고, 하융은 창가에 앉았다. 죠니는 접시가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고르느라 한 번 자리를 바꾸었다.

마차가 움직였다.

창밖에는 거리도 숲도 없었다. 대신 문패들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식탁의 방에서 보았던 빵 조각이 보였다. 빵은 아주 잠깐 창밖에 떠 있다가 뒤로 밀려났다. 다음은 젖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은 걸어가지 않고, 등불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은 접힌 편지였다. 편지는 봉해지지 않은 채 창밖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레이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보았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바퀴 소리도 거의 없었다. 창밖의 문패들이 지나갈 때마다, 각자의 작은 소리만 들렸다. 빵이 식어가는 소리, 물동이에 물이 닿는 소리, 편지지가 접히는 소리, 신발 끈이 젖어 풀리는 소리. 그 소리들은 너무 작아서 귀로 듣는 것인지, 손끝으로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등불지기는 문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흔들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마차가 움직여도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다 적지 않아도 돼요?”

아이가 물었다.

그레이는 창밖의 문패들을 보았다. 깨진 숟가락이 지나가고 있었다. 숟가락의 금 간 부분이 등불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

“지금은…… 보겠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하고 있어요.”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눈을 내렸다. 칭찬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안내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아이의 말은 무겁지 않았다.

푸리나는 창밖을 보다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커튼 고리가 없어서인지, 그녀의 손은 잠시 허공에서 작게 원을 그렸다.

“극장에서 이 장면을 만들면, 관객들이 너무 조용해질까?”

레이튼이 대답했다.

“조용해지는 것도 반응입니다.”

“그건 알아. 그런데 나, 가끔 조용한 반응은 조금 무서워.”

죠니가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도 돼. 네가 안 무서운 척하면 그게 더 무섭거든.”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그 말, 왜 그렇게 맞는 말처럼 들려?”

“맞는 말이라서?”

하융이 창밖을 보며 덧붙였다.

“침묵도 객석의 숨이라면, 박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오. 다만 소리가 안 날 뿐이겠지요.”

푸리나는 하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하융, 오늘 왜 이렇게 연출가한테 유용한 말을 많이 해?”

“내가 창가에 앉았기 때문이오. 경치가 말을 부르는구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창가 좌석의 효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겠습니다.”

죠니가 접시를 보며 말했다.

“그 연구는 식후에 해. 빈속으로 창가 철학하면 멀미날까 무섭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창밖을 보았다. 문패들은 계속 지나갔다. 붉은 끈이 보였다. 작은 손목에 묶였던 것인지, 편지를 묶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는 빈 접시가 지나갔다. 죠니의 접시보다 조금 더 얇고 오래된 접시였다. 접시의 가운데에는 빵가루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천을 보았다. 안에는 아까 받은 빵 조각이 있었다. 그녀는 천을 펼치지 않았지만, 그 무게는 느껴졌다.

마차는 어느 정류장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창밖에는 가끔 의자가 보였다. 누군가 앉아 있다가 방금 일어난 자리처럼, 조금 눌린 의자들. 그 옆에는 등불이 있었다. 어떤 등불은 꺼져 있었고, 어떤 등불은 아주 낮게 타고 있었다. 하융은 그 등불들을 유심히 보았다.

“이곳의 등불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오?”

등불지기가 대답했다.

“내릴 사람요.”

“탈 사람은 아니고?”

“탈 사람은 정류장에서 기다려요. 내릴 사람은 불을 보고 내려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내려야 할 곳에도 별이 필요하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거 좋다.”

죠니가 이번에는 하융보다 먼저 말했다.

“접시 한 조각?”

하융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당한 대가라 생각하오.”

죠니는 말린 과일을 하나 반으로 잘라 하융에게 건넸다.

“요즘 시세가 불안정해서 반 조각이야.”

하융은 받아들고 잠시 보았다.

“언어 시장도 흉년이구려.”

레이튼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경제학적 은유까지 도입되었군요.”

푸리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마차 안의 웃음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래도 좌석 사이에 잠깐 따뜻한 것이 생겼다. 그레이는 그 따뜻함을 느끼며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손으로 눌렀다.

창밖에 물동이가 지나갔다. 물동이는 기울어져 있었지만, 쏟아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물동이의 손잡이를 보았다. 대기실에서 흐려졌다가 되돌아온 손잡이와 닮아 있었다. 다음으로는 심지가 지나갔다. 물의 방에서 진흙 손님이 남기고 간 것보다 더 마른 심지였다. 그 심지 끝에 아주 작은 불씨가 붙어 있었다.

그레이는 그 불씨를 오래 보았다.

마차 안의 불빛이 잠시 낮아졌다. 모두가 창밖을 보았다. 불씨가 뒤로 멀어지자, 어둠 속에서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골목이었다. 비가 온 뒤의 골목. 물의 방에서 보았던 그 골목과 닮았지만, 이번에는 더 조용했다. 문 앞에는 작은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배수구에는 새 쇠살대가 놓여 있었다. 등불은 켜져 있었다. 빛은 크지 않았지만, 문턱 아래까지 닿았다. 누군가 문 안에서 빗자루를 세워두고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방금 지나간 것 같았다.

그레이는 창문을 향해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레이튼도 말하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 위의 마지막 말린 과일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두었다.

하융은 창밖의 골목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마차는 계속 갔다. 그 뒤로 지나간 문패들은 조금씩 낯설어졌다. 낡은 장갑, 깨진 머그잔, 금 간 거울, 구부러진 못, 한쪽만 남은 귀걸이, 초가 거의 다 탄 촛대. 그레이는 더 이상 모든 물건을 오래 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짧게 보고 지나쳤고, 어떤 것은 잠깐 눈을 낮췄으며, 어떤 것은 그저 창밖에서 사라지게 두었다.

등불지기가 옆으로 다가왔다.

“다 기억해요?”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부는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레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작은 나무빗이 지나갔다. 빗살 몇 개가 부러져 있었다. 그 뒤에는 빈 의자가 있었다. 그레이는 그 둘을 본 뒤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등불지기는 만족한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아주 어려운 대답을 하셨군요.”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예. ‘괜찮다’는 말은 종종 지나치게 넓습니다. 그런데 방금은 꽤 알맞은 크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식 칭찬은 가끔 포장지가 두꺼워.”

레이튼은 웃었다.

“그래도 내용물은 칭찬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칭찬이 많네. 조용한 극도 나쁘지 않아.”

하융은 창가에 기대지 않고, 등을 곧게 세운 채 말했다.

“소리가 적으면 작은 농담도 오래 가는 법이오.”

죠니가 접시를 보았다.

“그 말도 꽤 비싸 보이는데.”

하융은 이번에는 손을 저었다.

“이번 것은 무료로 하겠소. 과다 청구는 장기적으로 시장을 해치오.”

푸리나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웃음이 마차 안에서 둥글게 굴러갔다. 그레이도 고개를 아주 조금 숙인 채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작았지만, 전보다 조금 덜 숨겨져 있었다.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창밖의 문패들이 멀어지고, 대신 작은 집 하나가 나타났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방이라고 하기에는 문패가 있었다. 문패에는 등불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와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패에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고, 저 문패에는 의자 하나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등불지기가 문 쪽으로 갔다.

“내려야 해요.”

푸리나가 창밖을 보았다.

“벌써?”

“여기가 손님 방 앞이에요.”

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마차 문이 열렸다. 밖에는 정류장이 없었다. 작은 집 앞에 낮은 등불이 하나 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물을 담은 대야와 접힌 수건, 그리고 작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집 뒤쪽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밤이 잠을 준비하고 있는 어둠에 가까웠다.

그레이는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 위의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잊지 않고 집어 들었다. 죠니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튼도 앉은 채 기다렸다. 하융은 창가에서 그레이를 보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여기부터는 조금만 걸어요.”

그레이는 문 앞에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함께 가십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등불지기를 보았다.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문 앞까지는요. 방 안은 손님 방이에요.”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럼 문 앞까지.”

죠니는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방 안에 음식 반입 금지 같은 규칙은 없지?”

등불지기는 죠니의 접시를 보았다.

“흘리지만 않으면 돼요.”

죠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규칙이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챙겼다.

“차도 문 앞까지는 허락되겠지요?”

등불지기는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차는 대부분 허락돼요.”

하융이 말했다.

“참으로 문명적인 거리로군.”

그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발밑의 바닥은 나무도 돌도 아니었다. 오래 밟힌 마룻바닥 같으면서도, 흙길처럼 부드러웠다. 그레이의 신발 아래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발자국이 남았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레이는 그 자국을 보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여긴 남아요.”

“그렇습니까.”

“금방 사라지지만요.”

그레이는 자기 발자국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러고는 작은 집의 문패를 향해 걸었다. 손목의 등불패가 문패와 가까워지자, 두 등불 그림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문 앞에 놓인 의자는 작았다. 아이의 의자 같기도 하고, 잠깐 앉아 신발을 벗기 위한 의자 같기도 했다.

하융이 문 앞에서 낮게 말했다.

“그레이 경.”

그레이는 돌아보았다.

“네.”

하융은 손잡이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문 앞의 의자를 보았다.

“놓이는 것과 쉬는 것은 다르오.”

그 말은 낮고 오래된 말투로 흘러나왔다. 한문체로 굳어지지는 않았지만, 하융의 목소리 안쪽에서 먼 고향의 문턱이 잠시 열리는 듯했다.

“오늘 그대는 놓인 것이 아니라, 앉는 것이오.”

그레이는 아주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기다렸고, 죠니는 접시를 몸 가까이 들었으며,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등불지기는 문고리를 잡지 않았다. 아무도 먼저 열지 않았다.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리고 그녀는 문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낮았다. 앉으니 손목의 등불패가 무릎 위에 닿았다. 발자국은 아직 문 앞에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감싼 빵 조각을 손에 들고, 잠시 문패의 등불을 보았다.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문은 닫힌 채로, 안쪽에서 따뜻한 빛만 아주 조금 새어 나왔다.

푸리나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다섯 번째 장면.”

죠니가 속삭였다.

“제목은?”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발소리의 정류장.”

레이튼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목입니다.”

하융은 작게 웃었다.

“오늘은 내가 값을 청구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죠니가 말했다.

“방금은 푸리나가 지은 거잖아.”

“그러니 무료요.”

푸리나는 웃음을 참고,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불지기는 그 옆에 서서 등불을 낮게 들었다. 문 앞의 빛은 작았고, 의자는 낮았고, 밤은 길었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6막 — 손님 방

문은 스스로 열리지 않았다. 그레이가 빵 조각을 한 입 베어 문 뒤에도, 문은 닫힌 채로 있었다. 안쪽의 빛만 문틈 아래로 얇게 흘러나왔다. 그 빛은 재촉하지 않았다. 초대장처럼 넓게 펼쳐지지도 않았고, 명령문처럼 곧게 뻗지도 않았다. 다만 문 아래의 먼지를 조금 밝히고, 그레이의 신발 끝에 닿아 있었다. 그레이는 빵을 천천히 삼켰다. 밀가루 냄새와 말린 과일의 단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남은 빵 조각을 다시 천으로 감싸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죠니가 그 모습을 보고 낮게 말했다.

“다 먹으라는 말은 안 할게.”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정말입니까?”

“응. 대신 한 입 더는 권할 수 있어.”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게 네가 말하는 양보야?”

“상당히 큰 양보지. 내가 보기엔 거의 외교야.”

레이튼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협상안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요구를 낮췄고, 선택권을 남겼으니까요.”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 빵 권유를 조약으로 만들지 마.”

하융은 문 앞의 작은 의자를 보며 말했다.

“조약의 이름은 ‘빵 한 입 더’가 되겠구려.”

푸리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문 앞의 빛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레이는 웃는 사람들을 보다가, 결국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죠니는 아무 말 없이 만족한 얼굴을 했고, 푸리나는 승리 선언을 하려다가 손가락만 살짝 들어 올리고 말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을 곳을 찾다가 의자 옆 바닥이 마른 것을 확인했고, 하융은 문패의 등불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등불지기는 문고리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그레이가 빵을 삼키는 동안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이 일인 사람처럼, 아이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천을 접어 무릎 위에 올려두자, 그제야 등불지기가 물었다.

“들어갈래요?”

그레이는 문을 보았다.

“혼자 들어가야 합니까?”

“방 안은 손님 방이에요.”

아이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레이는 그 단순함 때문에 더 묻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레이의 옆에 앉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커튼 고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 앞에는 있을게.”

그레이는 푸리나를 보았다.

“감사합니다.”

“응. 너무 오래 안 나오면 노크할 거야. 아주 품위 있게.”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가 품위 있게 노크하는 건 꽤 보기 드문 공연이겠네.”

푸리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나도 할 때는 해.”

레이튼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품위와 극성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죠니가 잠시 침묵했다.

“그건 칭찬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겠습니다.”

하융이 조용히 덧붙였다.

“레이튼 경의 칭찬은 찻잎과 같소. 뜨거운 물이 닿아야 본색을 알 수 있구려.”

레이튼은 즐겁다는 듯 눈을 접었다.

“아름다운 평가입니다. 그 말은 제가 차 한 잔으로 사겠습니다.”

“오늘은 접시보다 품위 있는 화폐가 나왔구려.”

그레이는 작게 웃었다. 문 앞의 공기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등불지기는 그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문고리를 잡았다.

“손님이 열어야 해요.”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낮아서, 일어날 때 무릎에 손을 짚어야 했다. 그녀는 손목의 등불패가 문패와 나란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두 등불 그림은 닮았지만, 같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은 걸어온 길의 빛 같았고, 문패의 등불은 방 안에서 기다리는 불 같았다.

그레이는 문고리를 잡았다.

문은 가볍게 열렸다.

방 안에는 특별한 것이 많지 않았다. 침대 하나, 작은 탁자 하나, 물이 담긴 대야, 접힌 수건, 낮은 등불, 그리고 빈 의자 하나. 벽에는 장식이 거의 없었다. 한쪽 벽에는 작은 창이 있었지만, 창밖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유리에는 여관거리의 등불들이 희미하게 비쳤다. 침대 위의 이불은 오래 사용한 것처럼 부드러웠고, 베개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탁자 위에는 펜도 장부도 없었다. 대신 따뜻한 물 한 잔과 작은 접시가 있었다. 접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는 문턱 안쪽에서 멈췄다. 방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할 일이 보이지 않았다. 대야의 물은 깨끗했고, 수건은 접혀 있었고, 등불은 이미 켜져 있었으며, 의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녀가 고칠 것은 없었다. 적어도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등불지기가 문밖에서 말했다.

“들어가도 돼요.”

그레이는 한 걸음 들어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뒤쪽에서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기척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이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 기척도 조용히 멀어졌다.

그녀는 먼저 대야 앞에 섰다. 물은 따뜻했다. 물의 방에서 씻은 뒤에도 남아 있던 진흙과 인주 자국이 손가락 사이에 조금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손을 물에 담갔다. 이번에는 누군가 “손부터”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은 조용히 손을 감쌌고, 손톱 밑의 흙은 천천히 풀렸다. 붉은 인주 자국은 한 번에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리해서 문지르지 않았다. 천천히, 물이 허락하는 만큼만 씻었다.

수건은 부드러웠다. 너무 새것도 아니고, 낡아서 거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손님이 부담 갖지 않게 일부러 그런 것을 골라둔 것 같았다. 그레이는 손을 닦은 뒤 수건을 다시 접으려 했다. 손이 반쯤 움직이다가 멈췄다. 이미 접혀 있던 선이 있었고, 그녀가 다시 접으면 젖은 부분이 안쪽으로 들어갈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는 수건을 탁자 옆 작은 걸이에 걸었다. 물기가 마를 수 있게.

그것은 정리라기보다, 다음 손을 위한 작은 배려에 가까웠다. 그러나 방은 그 손짓을 문제 삼지 않았다. 등불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다.

그레이는 의자 앞에 섰다. 의자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다. 문 앞의 작은 의자보다 조금 더 편해 보였다. 앉으면 침대와 탁자와 창이 모두 보일 자리였다. 그녀는 바로 앉지 않고, 먼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고칠 것은 없었다. 쓸 것은 없었다. 물을 갈 필요도, 등불 심지를 자를 필요도, 침대보를 다시 펼 필요도 없었다.

문밖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레이?”

그레이는 문 쪽을 보았다.

“네.”

“괜찮아?”

그레이는 방 안을 보았다. 깨끗한 대야, 걸린 수건, 빈 접시, 켜진 등불, 낮은 의자.

“네.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문밖의 기척이 조금 물러났다.

그레이는 의자에 앉았다.

앉자 방 안의 소리가 달라졌다. 서 있을 때는 물소리와 등불 심지 타는 소리가 분리되어 들렸는데, 앉고 나니 두 소리가 같은 방 안에서 천천히 섞였다. 창에는 여관거리의 불빛이 비쳤고, 그 불빛 사이로 조금 전 지나온 문패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젖은 신발, 편지, 숟가락, 물동이,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것들은 유리 위에 머물렀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빵 조각을 보았다. 천에 싸여 있던 빵은 조금 눌려 있었다. 그녀는 천을 풀고, 남은 빵을 접시 위에 올렸다. 접시는 빈 채로 기다리고 있었고, 빵은 그 위에 조용히 놓였다. 그레이는 한동안 그 모습을 보았다. 접시는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빵을 집어 들고 천천히 먹었다. 아주 조금씩. 밖에서 죠니가 지켜보고 있으면 “너무 천천히 먹는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속도로 먹었다. 식은 빵이었다. 그래도 씹을수록 단맛이 조금 났다. 마지막 조각을 삼키고 나자, 접시에는 작은 빵가루가 남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치우려다가 멈췄다. 손끝에 붙은 빵가루를 보다가, 창밖의 빈 접시 문패를 떠올렸다.

그녀는 빵가루를 손가락으로 모아 접시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렸다.

방 안의 등불이 아주 조금 낮아졌다. 그레이는 등을 의자에 기댔다. 완전히 기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깨가 의자에 닿았다. 그 정도로도 방의 온도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잠들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직 방 안의 빛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창 유리에 다시 문패들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사물들이 아니라, 손들이 보였다. 빵을 반으로 나누던 손, 젖은 신발 끈을 풀던 손, 편지를 접던 손, 숟가락을 쥐던 손, 물동이를 들던 손, 등불 심지를 자르던 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들은 각자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 손들을 보았다. 기록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자를 쓰지도 않았다. 다만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문밖에서 낮은 대화가 들렸다.

“안에서 조용한데.”

죠니의 목소리였다.

푸리나가 대답했다.

“조용한 방이니까.”

“그건 알지. 근데 너무 조용하면 들어가 봐야 하나 싶어서.”

레이튼이 말했다.

“조용함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은 무너지는 조용함보다는 머무는 조용함에 가깝군요.”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 너는 조용함까지 분류하는구나.”

“차도 침묵 속에서 우러나니까요.”

하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덜 우러난 모양이오. 문 앞에서 자꾸 말을 하게 되는구려.”

푸리나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하융, 그거 꽤 귀여운 자기평가야.”

“전하. 귀여움은 내 칭호 목록에 없소.”

“그럼 오늘 추가하자.”

“부디 그러지 마시오. 기록 담당이 지금 방 안에 있소.”

죠니가 낮게 웃었다.

“좋은 방어였네.”

그레이는 의자에 기대어 그 대화를 들었다. 문밖의 목소리들은 멀지 않았지만, 방 안을 침범하지 않았다. 마치 복도에 걸어둔 등불처럼, 거기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가 무릎 위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보다가, 손으로 문지르지 않았다.

탁자 위의 물잔에서 김이 조금 올라왔다. 그레이는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물은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아니었다. 목을 지나기 좋을 만큼 따뜻했다. 물을 내려놓자, 창 유리에 작은 방울이 맺혔다. 그 방울 너머로 손들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나타났다.

장부였다.

그녀가 책상 위에 두고 온 장부와 닮아 있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표지는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고, 모서리에는 손때가 덜했다. 장부는 창 유리 너머에 놓여 있었다. 펼쳐져 있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펴야 할 것 같았다.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닫힌 장부는 늘 다음 일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창 유리 너머의 장부 옆에는 작은 의자가 있었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의자. 그 위에는 접힌 수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장부와 의자는 나란히 있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레이는 손을 다시 무릎 위에 놓았다.

장부는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 창 유리에서 천천히 흐려졌다. 사라지기 전에 표지가 한 번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덮어둔 책을 다시 정돈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그녀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장부에게인지, 문패들에게인지, 자기 손에게인지. 그러나 말은 방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등불 아래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두 번 두드려졌다.

톡, 톡.

정말로 품위 있는 노크였다. 그레이는 문 쪽을 보았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문이 조금 열리고, 푸리나가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문을 활짝 열고 등장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조심스러웠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어색해서,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웃어?”

“정말 품위 있게 노크하셨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가슴을 폈다.

“그렇지? 나도 할 수 있다니까.”

문밖에서 죠니가 말했다.

“드문 장면이라 기억해둬야 해.”

레이튼이 이어 말했다.

“역사적 기록 가치가 있습니다.”

하융도 낮게 덧붙였다.

“품위 있는 노크. 좋은 제목이오.”

푸리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해. 지금 내가 품위 유지 중이야.”

그레이는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웃었다. 방 안의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본 뒤,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문가에 손을 얹었다.

“방은 어때?”

그레이는 방 안을 한 번 보았다. 대야, 수건, 의자, 빈 접시에 남은 빵가루, 따뜻한 물잔, 창 유리에 남은 흐린 김.

“조용합니다.”

“불편하지는 않고?”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낯설지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성공.”

“성공입니까?”

“응. 낯선데 불편하지 않으면, 그건 꽤 좋은 방이야.”

그레이는 그 말을 따라 방 안을 다시 보았다. 낯선데 불편하지 않은 방. 표현은 푸리나다웠지만, 이상하게 맞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커튼 고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별이 하나 있었다. 잘 그린 별은 아니었다. 삐뚤고, 한쪽 끝이 조금 길었다.

“이건 뭐냐면.”

푸리나는 스스로도 조금 민망한 듯 종이를 흔들었다.

“방문 금지 표시는 너무 차갑잖아. 그래서 방문 조심 표식.”

그레이는 종이를 보았다.

“방문 조심…… 표식입니까?”

“응. 내가 너무 자주 들여다보고 싶어질까 봐, 나한테 붙이는 거야.”

문밖에서 죠니가 말했다.

“그건 네게 꽤 필요한 표식이네.”

푸리나는 무시했다.

“문 바깥에 붙여둘게. 필요하면 부르고, 아니면 내가 너무 자주 묻지 않을게.”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의 말은 가벼운 것처럼 들렸지만, 문가에서 멈추는 손은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손님은 종을 울리면 돼.”

“종이 있습니까?”

푸리나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탁자 위의 작은 방울을 발견했다. 아까는 없었던 물건이었다. 은색도 금색도 아닌, 오래 닦은 주석빛 방울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있네.”

“방금 생긴 것 같습니다.”

“여관이니까.”

푸리나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문 바깥에 삐뚤어진 별 표시를 붙였다. 종이가 문에 붙자, 별의 한쪽 끝이 조금 접혔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펴려다가 멈췄다. 아마 너무 손대면 더 구겨질 것 같았던 모양이다.

“좋아. 그럼 잠깐 더 있어도 돼. 다음 장면은 네가 나오고 싶을 때 시작하자.”

그레이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가 정합니까?”

“응. 오늘은 그런 극이야.”

푸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천천히 닫았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틈을 남겼다. 빛과 목소리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그레이는 다시 의자에 기대었다. 탁자 위의 방울은 조용히 있었다. 문밖에서는 낮은 목소리들이 다시 작게 움직였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 레이튼이 차를 따르는 소리, 하융이 무엇인가 짧게 대답하는 소리, 푸리나가 숨을 죽여 웃는 소리. 방 안에서는 등불 심지가 타는 소리와 물잔의 김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 감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등불 하나가 흔들릴 만큼, 찻잔의 김이 한 줄 줄어들 만큼, 문밖의 웃음이 한 번 지나갈 만큼이었다. 눈을 뜨자 방은 그대로 있었다.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대야의 물은 조금 식었고, 접시에는 빵가루가 남았으며, 문밖의 별 표식은 아마 아직 붙어 있을 것이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한 번 만졌다.

그리고 조금 더 앉아 있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7막 — 문패를 고르는 밤

그레이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문밖의 복도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 낮은 목소리와 찻잔 소리가 머물던 자리에는 길게 이어진 나무 바닥이 놓여 있었고, 그 끝에는 작은 정원이 보였다. 정원이라고 부르기에는 흙이 적고, 마당이라고 부르기에는 등불이 많았다. 바닥에는 둥근 돌들이 박혀 있었고, 돌 사이에는 짧은 풀들이 자라 있었다. 풀잎 끝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그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고 작은 불빛을 품고 있었다. 문밖에 붙어 있던 푸리나의 삐뚤어진 별 표식은 아직 그대로였다. 한쪽 끝이 조금 접힌 채로, 아주 당당하게 문을 지키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별 표식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커튼 고리가 아니라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융은 복도 끝의 정원을 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조금 묘했다. 창문도 아닌데 창밖을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푸리나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나왔네.”

그레이는 문가에서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다리는 장면도 극이니까 괜찮아.”

죠니가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이 극은 점점 연출자한테 편리한 규칙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편리한 규칙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남용되면 질문이 필요해지지요.”

푸리나는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 지금 나한테 질문 예고한 거야?”

“아직은 예고에 그치겠습니다.”

하융이 낮게 웃었다.

“예고편이 본편보다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오.”

푸리나는 작게 손뼉을 치려다, 밤의 여관거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손끝만 맞댔다.

“좋아. 오늘은 모두가 적당히 참아주고 있어. 아주 훌륭한 관객들이야.”

죠니가 말했다.

“관객이라기엔 다들 너무 많이 걷고 있는데.”

“걸어 다니는 관객도 있을 수 있어.”

“그럼 발값도 받아야겠네.”

하융은 잠시 자기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몇 막째 관람료를 낸 셈이오.”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웃었다. 방 안에서 쉬고 나온 뒤라서인지, 그 웃음은 전보다 조금 쉽게 나왔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도 과장되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눈만 살짝 휘어졌다.

복도 끝의 정원에서는 등불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자기 등불을 들고 있었지만, 불빛이 전보다 낮았다. 낮아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 이제 가까이 있는 것들만 비추려는 듯했다. 등불지기는 그레이가 다가오자 정원 안쪽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고르면 돼요.”

그레이는 멈췄다.

“무엇을 말입니까?”

“가지고 나갈 것.”

정원 한가운데에는 낮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는 돌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문패가 놓여 있었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봉투, 젖은 신발, 깨진 숟가락,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 외에도 몇 개가 더 있었다. 금 간 찻잔, 작은 종이배, 녹슨 못, 접힌 손수건, 낡은 빗, 물에 젖은 나무패. 문패들은 모두 작았고, 각각의 표면에는 아주 약한 빛이 고여 있었다.

그레이는 탁자 앞에 섰다. 문패들은 조용했다. 그녀가 이름을 묻지 않아도, 문패들은 스스로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놓여 있었다. 오래 놓여 있었던 물건처럼, 그리고 누군가 방금 내려놓은 물건처럼.

푸리나는 그레이보다 조금 뒤에 섰다. 죠니는 접시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탁자에 올려놓지 않았다. 하융은 정원 입구의 돌 하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정원 안쪽에서 여관의 성좌가 걸어왔다. 그는 처음 접수대에서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정한 앞치마, 흔들리지 않는 열쇠 꾸러미, 낮고 정중한 목소리. 다만 이번에는 접수대가 없었다. 그는 문패들이 놓인 탁자 곁에 서서 그레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쉬셨습니까, 손님.”

그레이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조금 앉아 있었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답입니다.”

“좋은 대답입니까?”

“여관에서는 때로 ‘조금 앉아 있었다’는 말이 긴 여행기보다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여관 주인답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말은 좀 인정.”

레이튼은 미소만 지었다. 하융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의 성좌는 탁자 위의 문패들을 가리켰다.

“돌아가기 전에 하나를 고르셔야 합니다.”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하나만입니까?”

“오늘 밤 손님으로 가져갈 것은 하나입니다.”

그레이의 시선이 빵 조각 문패에 닿았다. 식탁의 방에 있던 반쯤 먹은 빵이 떠올랐다. 죠니가 내민 빵도, 손님 방에서 끝까지 먹은 작은 조각도 함께 떠올랐다. 다음으로 물동이를 보았다. 대기실에서 흐려졌던 물동이 손잡이, 물의 방에서 따뜻하게 흔들리던 욕조의 물, 대야의 물. 편지 봉투는 아직 봉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젖은 신발은 돌 하나를 빼낸 뒤 조금 방향을 바꾸어 놓인 채였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고르기 어렵습니까?”

“네.”

“전부 가져가고 싶으십니까?”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전부 가져간다는 말은 이상했다. 손에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져간 뒤 어디에 둘 것인가. 장부에 끼울 것인가, 책상 위에 둘 것인가, 방 안에 걸 것인가. 문패들은 여기에 놓여 있을 때 더 조용해 보였다. 탁자 위에서 서로의 빛을 침범하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기다렸다.

그레이는 다시 문패들을 보았다. 녹슨 못 옆에 놓인 작은 종이배가 조금 젖어 있었다. 붉은 끈은 스스로 엉키지 않도록 느슨하게 말려 있었다. 빈 접시는 가장자리만 낡았고, 가운데는 깨끗했다. 등불 심지는 물의 방에서 보았던 젖은 심지와 달리 마른 상태였다.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심지였다.

그레이는 그 심지를 오래 보았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는 없나?”

여관의 성좌는 푸리나를 보았다.

“극장주께서 그렇게 묻는군요.”

푸리나는 조금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내가 고르는 건 아니지만.”

“맞습니다. 그러나 좋은 동행자는 종종 손님보다 먼저 불편함을 알아차립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칭찬인지 지적인지 애매했지만, 이번에는 받아들이기로 한 듯했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이, 반드시 하나의 물건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또 시작이네.”

“아직 질문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 자체가 시작 같은데.”

하융은 정원의 물방울을 보며 말했다.

“때로는 손에 쥐는 것보다, 두고 나가는 법을 고르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소.”

그 말에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하융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가 말한 뒤에도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풀잎 끝에 매달린 등불빛만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레이는 탁자 위에 손을 올리지 않은 채, 여관의 성좌에게 물었다.

“문패들은 이곳에 남아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남으면…… 잠듭니까?”

“준비가 된 것은 잠듭니다. 아직 기다려야 하는 것은 더 머뭅니다. 어느 쪽이든, 급히 치우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탁자 위의 문패들을 하나씩 보았다. 이번에는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사하기 위해 보는 것 같았다. 빵, 물동이, 편지, 신발, 숟가락, 심지, 끈, 접시. 그녀는 눈으로만 지나가지 않았다. 아주 짧게, 그러나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그녀가 집은 것은 문패가 아니었다. 탁자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작은 등불이었다. 등불은 장식처럼 보였고,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문패들 사이의 빛을 보태는 도구 정도로만 보였다. 안쪽에는 불이 없었다. 기름도 거의 없었다. 다만 손잡이가 있었다. 들고 걸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여관의 성좌가 그 등불을 보았다.

“그것을 고르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문패들은 두고 가겠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져가십니까?”

그레이는 작은 등불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잡았다. 매우 가벼웠다. 그러나 비어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것을…… 빌려가겠습니다.”

정원은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숨을 참았고, 죠니는 접시를 조금 낮췄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손잡이에 닿은 손가락을 멈췄고, 하융은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여관의 성좌는 그레이를 보았다. 부드러운 눈이었다. 그러나 규칙을 확인하는 사람의 눈이기도 했다.

“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빌려간다고 하십니까?”

그레이는 등불을 보았다.

“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입니까?”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언제. 그 질문은 날짜를 묻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등불을 더 이상 들지 않아도 될 때인지, 누군가 다른 손님에게 필요해질 때인지, 혹은 자신이 다시 이 거리의 문을 지나올 때인지 알 수 없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대신해 말하려다 멈췄다. 죠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보태지 않았고, 하융은 기다렸다.

그레이는 천천히 말했다.

“다시 와야 할 때가 오면요.”

여관의 성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때까지 맡기겠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등불에 손끝을 대자, 불이 붙었다. 아주 작은 불이었다. 빛은 탁자 위의 문패들을 모두 비추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그레이의 손과, 손목의 등불패와, 발밑의 돌 하나를 비추기에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그 빛을 보고 낮게 말했다.

“작네.”

여관의 성좌가 대답했다.

“작은 빛은 오래 보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좋아.”

죠니가 접시를 들고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그럼 하나 빌렸으니까, 하나는 먹어.”

그레이가 눈을 깜박였다.

“네?”

죠니는 접시 위의 마지막 말린 과일 조각을 보여주었다.

“정산. 빛만 들고 가면 너무 허전하잖아.”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죠니식 의례네.”

“아주 실용적인 의례지.”

그레이는 말린 과일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먹어도 돼. 이번 건 작으니까.”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죠니 경의 권유가 점점 세련되어지는군요.”

죠니가 말했다.

“교수, 그 말은 좀 불안한데.”

“칭찬입니다.”

“포장지 얇게 해줘서 고맙네.”

하융은 그레이가 든 등불을 보며 말했다.

“그 빛은 장대한 등불이 아니오. 허나 발밑 하나를 비추기엔 족하구려.”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그 말은 내가 사고 싶어.”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전하께는 비싸게 받아도 되오?”

“왜?”

“왕실 예산이 있을 테니.”

죠니가 바로 끼어들었다.

“하융, 그건 위험한 말이야.”

레이튼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재정 담당자가 부재한 자리에서 왕실 예산을 논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막 쓰는 사람처럼 보여?”

죠니, 레이튼, 하융이 동시에 아주 짧게 침묵했다.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좋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그레이는 말린 과일 조각을 손에 든 채 웃었다. 이번에는 작게 숨이 새었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보고, 입술 끝을 올렸다. 여관의 성좌도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은 듯했다.

등불지기가 탁자 위의 문패들을 바라보았다.

“두고 가도 괜찮아요?”

그 질문은 그레이에게 향해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작았다.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빵, 물동이, 편지, 신발, 숟가락, 심지, 끈, 접시. 그중 몇 개는 아직 빛이 흔들리고 있었고, 몇 개는 이미 깊이 잠든 듯 고요했다.

“네.”

그녀는 조금 뒤에 덧붙였다.

“여기에 계시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등불지기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정원 끝에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없었던 문이었다. 크지 않고, 낡지도 않았으며, 문고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 있었다. 그 종은 터널 끝에서 들었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 문을 가리켰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와 손에 든 작은 등불을 번갈아 보았다. 등불패에는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손의 등불은 깨끗했다. 둘은 서로 달랐다. 하지만 나란히 있으니 어색하지 않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등불지기가 앞장섰다. 아이는 정원 끝의 문까지 걸어가다가, 문 앞에서 멈췄다. 여전히 젖은 신발이었지만, 이제 그 신발 끝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아이가 알아차렸는지,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건 아니에요.”

그레이는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덜 젖었어요.”

“다행입니다.”

등불지기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 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조용히 들고 있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받쳤고, 하융은 문 위의 작은 종을 보았다.

여관의 성좌가 마지막으로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맡기신 이름과 짐은 접수대에서 돌려드리겠습니다.”

“네.”

“다만 손님으로 머문 시간은 돌려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레이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도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머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등불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처음의 접수대가 보였다. 세 개의 나무 접시와 작은 서랍, 그리고 거리에 들어올 때 맡겼던 것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한 걸음 내디뎠다. 작은 등불의 빛이 발밑의 돌을 비추었다. 빛은 멀리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걸음이 놓일 자리만큼은 보였다.

그녀는 그 빛을 따라 걸었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8막 — 돌려받는 접수대

접수대는 처음보다 가까워 보였다. 거리의 입구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돌아올 때에는 긴 길을 되짚어온 느낌이 아니었다. 등불지기가 앞에서 걸었고, 그레이는 작은 등불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은 조금 뒤에 있었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접수대 위의 세 접시는 그대로 놓여 있었고, 여관의 성좌가 그 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열쇠 꾸러미는 그의 손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희미하게 한 번 흔들렸다. 작은 금속음이 났다. 문을 여닫는 소리라기보다, 손님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그레이는 접수대 앞에 섰다. 손에 든 작은 등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빛은 접시의 가장자리와 서랍 손잡이를 비췄고, 그레이의 손목에 묻은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도 함께 드러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들을 보았지만, 닦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셨군요.”

그레이도 고개를 숙였다.

“네. 돌아왔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에 잠깐 눈을 내렸다. 아마 그 단순한 문장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도 대사를 가로채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를 품 가까이 들고 있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접수대 위에 올릴지 말지 아주 짧게 고민하다가 그대로 들었다. 하융은 접수대 위의 빈 접시들을 보며,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서 작은 종이등이 나왔다. 처음 그레이의 이름이 접혀 들어갔던 빛이었다. 그 빛은 서랍 안에 있었음에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차분해져 있었다. 여관의 성좌가 그것을 첫 번째 접시 위에 올리자, 종이등은 다시 소리가 되었다. 소리는 아주 낮게 흔들리더니, 그레이에게 돌아왔다.

그레이는 자기 이름이 돌아오는 것을 들었다. 밖에서 누군가 부른 것도 아니고, 장부 위에 적힌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고,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잘 보관해주셨습니다.”

“손님께서 잘 맡겨주셨습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여관식 인사, 꽤 좋아.”

죠니가 속삭였다.

“너무 많이 배우면 네 극장이 여관이 될걸.”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극장과 여관은 모두 누군가 잠시 다른 자리에 앉는 곳이니, 의외로 친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막을 열고, 하나는 문을 여는구려.”

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 말도 살까?”

하융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손을 저었다.

“오늘은 외상으로 하겠소.”

죠니가 낮게 말했다.

“언어 시장에 신용거래까지 생겼네.”

그레이는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여관의 성좌는 미소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그레이가 맡겼던 작은 물건들이 있었다. 붉은 실이 묶인 민원표, 모서리가 닳은 사망 확인서, 봉하지 않은 편지, 보상 쪽지, 접힌 지도 조각, 꺼진 등불이 그려진 얇은 문패. 들어갈 때보다 조금 더 가지런해 보였지만, 새것이 된 것은 아니었다. 구겨진 자국은 그대로였고, 물든 가장자리도 그대로였다.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전부 돌려받으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접시 위의 물건들을 보았다. 손이 곧장 나가지 않았다. 민원표의 붉은 실, 편지의 접힌 모서리, 등불 문패의 꺼진 불꽃. 모두 익숙했다. 모두 돌아가면 다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접시 가장 아래에 아주 작은 쪽지가 하나 더 있었다. 처음에는 없었던 것 같았다. 아무 글씨도 없는 흰 쪽지였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여관의 성좌는 쪽지를 보았다.

“빈칸입니다.”

“제가 맡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손님 방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레이는 쪽지를 들지 않고 바라보았다. 빈칸은 깨끗했다. 그러나 대기실의 검은 손님이 내밀던 지나치게 하얀 종이와는 달랐다. 이 쪽지는 도장을 기다리는 종이가 아니었다. 접히지도 않았고, 제목도 없었다. 그저 작은 여백처럼 보였다.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져갈 거야?”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전부 가져가겠습니다.”

여관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접시 위의 물건들을 하나씩 품에 넣었다. 민원표, 확인서, 편지, 보상 쪽지, 지도 조각, 등불 문패. 그리고 마지막에 빈칸을 집었다. 빈칸은 다른 종이들보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손끝에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장부 사이에 끼울 생각을 했다가, 아직 장부를 돌려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결국 빈칸은 소매 안쪽의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죠니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건 어디에 쓰는 거야?”

그레이는 주머니를 살짝 눌렀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좋네.”

“좋습니까?”

“응. 가끔은 모르겠는 게 하나쯤 있어도 돼.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만.”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훌륭한 균형 감각입니다.”

죠니는 레이튼을 보지 않고 말했다.

“교수,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레이튼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 번째 접시는 비어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그레이 쪽으로 밀지 않았다. 대신 접수대 아래에서 그레이의 장부를 꺼냈다. 그녀가 방에 두고 온 장부와 똑같아 보였다. 표지의 모서리, 책갈피의 위치, 닫힌 부분의 두께까지. 그런데 아주 희미하게 차 냄새가 났다. 그레이는 장부를 받기 전에 손을 보았다. 손은 완전히 깨끗하지 않았다. 진흙은 거의 닦였지만 손톱 밑에 옅은 자국이 있었고, 손목의 등불패에는 인주가 조금 남아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장부를 내밀었다.

“맡기신 것은 아니지만, 돌아가실 때 필요하실 듯하여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레이는 두 손으로 장부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장부는 무거웠다. 이상하게도 그 무게가 낯설지 않았다. 다만 전보다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분명했다. 그레이는 습관처럼 장부를 펼치려다 멈췄다. 책갈피가 끼워진 곳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줄이 제대로 말랐는지, 새로 끼운 빈칸이 접히지 않았는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손이 표지 위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들고만 있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닫았다.

하융은 그레이의 손이 멈춘 것을 보고, 시선을 낮췄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치지 않았다. 표지를 한 번 쓸고, 품에 안았다. 장부의 모서리가 다시 손바닥에 닿았다. 손목에는 등불패가 있었고, 다른 손에는 여관에서 빌린 작은 등불이 있었다. 장부와 등불은 서로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들기에는 조금 불편했다. 그레이는 잠시 자세를 고쳤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고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레이가 먼저 균형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죠니는 손을 거두었다.

“알았어.”

여관의 성좌가 마지막 접시를 보았다. 빈 접시였다.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았다.

“세 번째 접시는 그대로 두고 가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접시를 보았다.

“제가 무엇을 올려야 했습니까?”

“손님마다 다릅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비워두어도 됩니다.”

그레이는 그 접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빈 접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완전히 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등불빛이 접시 안쪽에 둥글게 고여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다가, 품에 안은 장부를 조금 더 단단히 받쳤다.

등불지기가 옆에서 물었다.

“이제 가요?”

여관의 성좌가 대답했다.

“예. 문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접수대 뒤쪽의 문이 열렸다. 처음 들어온 터널로 이어지는 문 같았지만, 조금 달랐다. 문 너머에는 극장 뒤편의 복도와, 그레이의 방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현실의 먼지 냄새가 조금 섞여 들어왔다. 여관거리의 차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그 냄새와 섞였다.

푸리나는 문을 보았다.

“돌아가는 문이네.”

여관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손님께서는 잠시 머무셨으니, 들어오실 때와 완전히 같은 문은 아닐 겁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이번에도 자기 대사로 훔치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를 보았다.

“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등불지기가 먼저 문 앞으로 갔다. 아이는 문고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젖어 있던 신발은 이제 덜 젖어 있었다. 마른 것은 아니었지만, 물방울은 없었다.

“또 올 거예요?”

그레이는 잠시 아이를 보았다. 그 질문은 아이에게서 나왔지만, 여관거리 전체가 묻는 것처럼 들렸다. 다시 올 것인가. 손님으로. 관리자나 기록자가 아니라, 작은 등불을 들고.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품의 장부가 무겁고, 손의 등불이 가벼웠다. 둘 사이에서 손목의 등불패가 조용히 흔들렸다.

“필요하면 오겠습니다.”

등불지기는 그 대답이 조금 마음에 안 든 듯 입술을 내밀었다.

“필요해서만 오면 늦을 때도 있어요.”

그레이는 멈췄다.

푸리나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죠니는 접시를 보았고, 레이튼은 등불지기를 보았다. 하융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레이는 등불지기 앞에 몸을 낮췄다. 장부를 품에 안고 있어서 완전히 무릎을 굽히기는 어려웠지만, 아이의 눈높이에 가까워지려 했다.

“그럼…… 너무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등불지기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네.”

그레이는 아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불지기는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다.

“손님이 잘 따라와서요.”

그레이는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여관의 성좌는 문가에서 기다렸다. 그레이가 다가가자 그는 손을 내밀었다. 손목의 등불패를 돌려받으려는 듯했지만, 바로 풀지는 않았다.

“이 표식은 이 거리의 것입니다. 돌려주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손목을 내밀었다.

“네.”

여관의 성좌는 조심스럽게 줄을 풀었다. 등불패가 손목에서 떨어지자, 그 자리에 아주 희미한 선이 남았다. 끈이 눌렀던 자국이었다. 금세 사라질 정도로 얕은 자국. 여관의 성좌는 등불패를 받아 세 번째 접시 옆에 놓았다. 패 위의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은 그대로였다.

푸리나가 물었다.

“그 자국도 그대로 두는 거야?”

여관의 성좌가 대답했다.

“손님이 지나갔다는 표식이니까요. 닦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여기도 빠른 나중이 있네.”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관리 원칙입니다.”

하융은 등불패를 보며 말했다.

“작은 자국도 객실의 방명록이 되는구려.”

푸리나는 하융을 보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 말은 비싸겠다.”

“오늘은 폐점하였소.”

하융이 그렇게 말하자, 죠니가 낮게 웃었다.

“언어 시장 영업 종료.”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등불패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지나온 물의 방과 대기실과 손님 방의 흔적이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닦지 않았고, 숨기지도 않았다. 그레이는 그 사실에 짧게 고개를 숙였다.

여관의 성좌가 문을 열어주었다.

“다녀가십시오, 손님.”

“감사합니다.”

“다음에 오실 때에도 방은 마련해두겠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제가 오지 않으면요?”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래도 방은 종종 환기해두겠습니다.”

푸리나가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박였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고, 죠니는 괜히 접시 위의 빵가루를 정리했다. 하융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을 지났다.

터널은 다시 열두 걸음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이 비어 있지 않았다. 품에는 장부가 있었고, 한 손에는 작은 등불이 있었다. 다른 손은 장부의 모서리를 받쳤다. 들고 가는 것이 많아 조금 불편했지만, 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발소리가 뒤따랐다. 등불지기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돌아보면 아직 문 앞에 서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레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터널 끝에서 극장 뒤편의 복도 냄새가 짙어졌다. 먼지, 나무, 오래된 천막, 식은 차, 그리고 아주 희미한 잉크 냄새. 그 냄새를 맡자 그레이는 자기 방에 두고 온 마지막 줄을 떠올렸다. 잉크는 이제 완전히 말랐을 것이다.

문밖으로 나왔을 때, 극장 뒤편의 등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귀환.”

죠니가 말했다.

“그 말은 좀 거창한데.”

“그래도 귀환이잖아.”

레이튼은 조용히 덧붙였다.

“돌아왔다는 말과 다녀왔다는 말 사이의 어딘가군요.”

하융은 터널 문을 보았다.

“문은 닫혔으되, 길이 사라진 것은 아니오.”

푸리나가 웃었다.

“영업 종료라며.”

“아, 방금 것은…… 예외요.”

죠니가 말했다.

“언어 시장 재개장.”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자기 방 쪽으로 걸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방 안에는 줄인 촛불, 마른 잉크, 비어 있는 의자, 식은 찻잔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섰다. 장부를 내려놓았다. 작은 등불은 장부 옆에 두었다. 등불의 빛이 마지막 줄을 비췄다. 글자는 번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치지 않았다.

먼저 의자에 앉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죠니도, 레이튼도, 하융도 문밖에 멈췄다. 누구도 방 안으로 먼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레이는 식은 찻잔을 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

“차를 다시 데워도 될까요?”

레이튼이 문밖에서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죠니가 접시를 들어 보였다.

“빵도 아직 조금 있어.”

푸리나가 웃었다.

“좋아. 후일담은 차와 빵이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다녀온 자에게 어울리는 귀환식이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귀환식이라기엔…… 작습니다.”

푸리나가 대답했다.

“작아도 돼.”

그레이는 잠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작은 등불이 장부 옆에서 흔들렸다. 방 안의 촛불보다 작았지만, 더 가까운 빛이었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그녀는 장부 옆의 빈칸을 꺼내지 않은 채, 먼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후일담 — 작은 등불과 식은 차

차는 다시 데워졌다. 레이튼은 어디서 작은 화로를 가져왔는지, 그레이의 방 바깥 복도 한쪽에 찻주전자를 올려두었다. 화로의 불은 크지 않았고, 물은 급하게 끓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번 주전자를 들여다보려다가, 레이튼이 “차는 재촉하면 떫어집니다”라고 말하자 얌전히 물러났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의자 하나를 끌어왔고, 하융은 열린 문가에 서서 방 안의 작은 등불을 바라보았다. 극장은 이미 본래의 극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낡은 천막, 소품 상자, 먼지 낀 의자, 바닥에 남은 오래된 못 자국. 그러나 그레이의 책상 위에는 여관거리에서 빌려온 작은 등불이 있었다. 그 등불은 극장 소품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부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마지막 줄의 잉크는 완전히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래 두면 잉크는 마른다. 촛불을 줄여두어도, 방을 비워두어도, 누군가 잠시 다른 문을 지나 다녀와도, 마를 것은 마른다. 그레이는 표지를 한 번 손끝으로 만졌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하지만 손끝은 바로 책갈피를 찾지 않았다. 대신 장부 옆에 놓인 작은 등불의 손잡이를 살짝 돌렸다. 등불은 조용히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레이 앞의 의자에 앉지 않고, 책상 옆에 기대어 섰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더니,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평소라면 극장주처럼 서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앉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어땠어?”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이 아직 비어 있다는 것을 보았고, 레이튼이 차를 따르기 전까지 기다려도 되는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조용했습니다.”

푸리나는 기대했던 대답과 조금 달랐는지 눈을 깜박였다.

“그게 감상 전부야?”

“아직 정리 중입니다.”

“그럼 조용했다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죠니가 접시를 책상 가장자리 가까이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먼저 장부와 잉크에서 떨어진 자리를 확인했다. 접시 위에는 빵이 조금 남아 있었다. 말린 과일은 거의 없었다. 하융과 레이튼이 중간중간 가져간 탓이었고, 죠니는 그것을 꽤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정리할 때 먹으면서 해도 돼.”

그레이는 접시를 보았다.

“아까 먹었습니다.”

“알아. 그래서 이번에는 더 쉽게 먹을 수 있지.”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의 식사 논리, 오늘 점점 강해지네.”

레이튼이 차를 따르며 말했다.

“반복된 성공이 이론을 강화한 듯합니다.”

죠니는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가 빵 권하는 걸 학파로 만들지는 마.”

하융은 문가에서 낮게 말했다.

“빵 권유학이라. 민생에는 꽤 유익한 학문 같소.”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융까지 합류했어.”

하융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와 빵이 앞에 있으면 사람은 신중한 척하기 어려운 법이오.”

레이튼은 하융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 말은 상당히 실증적입니다.”

“나는 학문을 만들 생각은 없소.”

“이미 늦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는 방심하면 뭐든 학문으로 만들어.”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찻잔을 받았다. 찻잔은 따뜻했다.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의 식은 찻잔과 달랐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던 작은 냉기가 천천히 풀렸다.

푸리나가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방에서 오래 있고 싶었어?”

그레이는 찻잔의 수면을 보았다. 차 위에는 작은 등불의 빛이 비쳤다. 흔들림이 작았다.

“오래는…… 아닙니다.”

“응.”

“하지만 바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럼 좋은 방이었네.”

그레이는 대답 대신 찻잔을 조금 들어 올렸다. 차는 향이 약했다. 레이튼이 일부러 그렇게 우린 듯했다. 너무 강한 차는 늦은 밤의 방에 맞지 않았다.

죠니가 접시를 밀어주었다.

“빵.”

그레이는 이번에는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았다. 작은 조각 하나를 집었다. 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승리 선언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 뚜껑을 닫았고, 하융은 시선을 살짝 내려 웃음을 감추었다.

그레이는 빵을 먹었다. 조각은 작았다. 금방 사라졌다. 그러나 씹는 동안 방 안의 시간이 조금 느려졌다. 장부는 열리지 않았고, 촛불은 줄어들지 않았고, 복도 밖의 극장도 잠시 조용했다.

레이튼이 물었다.

“돌려받은 것들 중 가장 낯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레이는 주머니를 떠올렸다. 빈칸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 그녀는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낼까 하다가, 꺼내지 않았다.

“빈칸이 있었습니다.”

푸리나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

“빈칸?”

“네. 제가 맡긴 것은 아니었는데, 손님 방에서 생겼다고 했습니다.”

죠니는 접시 위의 빵가루를 손끝으로 모았다.

“그거 좀 수상한데.”

레이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수상하지만, 좋은 수상함일 수도 있습니다.”

“교수, 좋은 수상함이란 말은 좀 이상해.”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여백에는 대개 그런 인상이 있습니다.”

하융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비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있소. 너무 꽉 찬 방에는 손님이 앉을 곳이 없지 않겠소.”

푸리나가 하융을 보았다.

“오늘도 장사할 생각 없어?”

“폐점 후 발언이오.”

“그럼 외상으로 적어둘게.”

그레이는 그 말을 듣다가, 조용히 소매 안쪽 주머니를 눌렀다. 빈칸은 거기에 있었다. 접히지 않았다.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지금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 중요한 것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매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푸리나는 작은 등불을 보았다.

“이건 어디 둘 거야?”

그레이도 등불을 보았다. 책상 위, 장부 옆. 우연히 놓은 자리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촛불은 방 전체를 밝혔고, 작은 등불은 장부 가장자리만 비췄다. 둘의 빛은 서로 겹치지 않았다.

“당분간은 여기 두겠습니다.”

“장부 옆?”

“네.”

죠니가 말했다.

“불 조심.”

그레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등불 밑에는 작은 받침을 두겠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죠니가 한마디 하자마자 실무로 들어갔어.”

죠니는 만족스러운 듯 접시를 당겼다.

“좋은 반응이야. 불 조심은 실무가 맞아.”

레이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받침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금속보다는 두꺼운 도자기가 좋겠군요.”

하융이 천천히 말했다.

“등불 하나에도 회의가 열리는구려.”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다운 귀환식이야.”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조용해졌다. 귀환식. 조금 전 그레이가 작다고 했던 말. 차와 빵, 등불 받침, 식은 찻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장부. 거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그 말이 놓일 정도의 자리가 있었다.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하.”

“응.”

“오늘 극은…… 제가 무엇을 새로 배웠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응.”

그레이는 말을 천천히 골랐다. 길게 설명하려 하면, 방금 지나온 거리의 등불들이 종이 위에서 너무 빨리 굳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짧은 말들만 골랐다.

“이름을 맡겼고, 돌려받았습니다. 장부도 돌아왔습니다. 문패들은 그곳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빵을 먹었습니다.”

죠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하지.”

푸리나는 죠니를 한 번 보았지만, 이번에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작은 등불을 보았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리고 조금 뒤,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응. 충분해.”

레이튼은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질문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하융도 무언가 말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침묵했다. 죠니는 접시를 그레이 쪽으로 다시 밀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먹었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는 잠시 차 마시는 소리만 남았다.

그레이는 마침내 장부를 펼쳤다. 모두가 아주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그녀는 새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책갈피가 끼워진 마지막 줄을 확인했다. 글자는 번지지 않았고, 표시는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아래에 바로 새 기록을 쓰지 않았다. 대신 빈칸을 꺼냈다. 여관에서 받은 작은 쪽지. 그것을 장부 맨 뒤,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장 사이에 끼웠다.

푸리나가 물었다.

“거기 넣어두는 거야?”

“네.”

“뭐라고 쓸지는 아직 안 정했고?”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요.”

죠니가 말했다.

“좋네. 빈칸다운 대우야.”

레이튼은 조용히 웃었다.

“동의합니다.”

하융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언젠가 글자가 앉을 자리도, 지금은 쉬어도 되겠지요.”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톡 건드렸다.

“오늘은 다들 여관에 물든 것 같네.”

“전하도 포함입니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맞아. 나도 포함.”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이번에는 다시 바로 펼치지 않았다. 작은 등불이 장부의 표지를 비추었다. 그 빛 아래에서 표지의 닳은 모서리가 조금 부드럽게 보였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었지만, 막을 내리는 동작은 크게 하지 않았다. 그저 방 안을 둘러보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 극은 여기서 닫을게.”

죠니가 말했다.

“박수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오늘은 손뼉 말고, 찻잔.”

레이튼은 그 뜻을 이해한 듯 자기 찻잔을 살짝 들었다. 하융도 찻잔을 들었고, 죠니는 접시를 들었다가 푸리나에게 눈총을 받고 빈 찻잔을 대신 들었다. 그레이는 자기 찻잔을 들었다. 모두의 잔이 아주 작게 부딪혔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나 들렸다.

푸리나가 말했다.

“다녀온 손님에게.”

죠니가 덧붙였다.

“그리고 남은 빵에게.”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아직 쓰이지 않은 빈칸에게.”

하융이 낮게 말했다.

“작은 등불에게.”

그레이는 잠시 찻잔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기다려준 방에게.”

잔들이 다시 조금 흔들렸다. 차는 식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마실 수 있었다. 방 밖의 극장은 조용했고, 장부는 닫혀 있었고, 작은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고, 장부 옆의 등불 받침을 어디에 둘지 조용히 생각했다. 내일 아침에는 우물 점검표를 다시 봐야 할 것이고, 배급 변경안도 확인해야 할 것이며, 편지 한 통의 주소를 다시 대조해야 할 것이다. 그 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손을 뻗지는 않았다.

먼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작은 등불은 그 사이, 장부의 모서리와 빈 접시의 빵가루를 함께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