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22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00:56:25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프롤로그 — 오래된 방의 냄새
방은 네모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네모였을 것이다. 네 벽과 천장과 바닥, 그리고 창 하나쯤을 가진, 사람이 잠들고 깨어나고 차를 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방. 그러나 하융의 방은 오래전부터 그런 형식을 잃어버렸다. 창이 하나 늘 때마다 벽도 하나 늘었고, 벽이 하나 늘 때마다 방은 조금 더 넓어졌으나, 이상하게도 하융이 앉을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방은 넓어질수록 그를 가운데로 밀어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의자 위에 놓인 잔이나 책처럼 보였다. 오래 움직이지 않은 것들은 모두 비슷한 냄새를 낸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융은 문득 자기 숨이 아직 방 안에서 가장 따뜻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어느 창에서는 시장의 깃발이 흔들렸다. 빵 냄새가 났고, 아이들의 웃음이 유리 너머에서 조금 늦게 도착했다. 병사들은 피곤했지만 웃고 있었고, 장사꾼들은 소식보다 손님을 먼저 보았다. 전쟁이 사라진 세계는 아니었다. 다만 전쟁이 잠시 멀어진 세계였다. 그 옆의 창에서는 수레바퀴가 진창을 지나고 있었다. 노인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이 있었고,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는 길이 있었으며, 누군가가 미리 물통을 놓아두었다. 더 먼 창에서는 우물물이 지나치게 맑았다. 맑은 물은 종종 불길했다. 하융은 그 물빛을 보자마자, 아직 쓰이지 않은 장부의 빈 줄을 떠올렸다. 다음 장면에서 아이가 누워 있었고, 그 다음 장면에서 천이 덮인 작은 몸들이 있었으며, 다시 그 다음 장면에서 장부의 끝에는 이름 대신 짧은 말이 남았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잉크가 마르자, 아이의 얼굴도 함께 마르는 것 같았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닫힌 눈꺼풀 안쪽에서도 시장은 흔들렸고, 피난길은 진창을 밟았으며, 우물은 맑은 물빛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4의 창은 열리기도 전에 이미 닫혀 있었고, 제5의 창에서는 죽은 하융이 오늘의 하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번호를 붙이면 덜 무서울 줄 알았다. 번호란 질서의 흉내니까. 그러나 번호는 질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가 줄을 선 모양에 가까웠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있었다. 죽은 내가 천千이요, 살아남은 내가 만萬이었다. 어느 나는 조금 더 빨랐고, 어느 나는 한 박자 늦었다. 어느 나는 푸리나가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창가에서 식어 있었고, 어느 나는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를 끝내 듣지 못했다. 어느 나는 레이튼의 찻잔 앞에서 대답 대신 침묵만 남겼으며, 어느 나는 그레이의 펜 끝에 닿기도 전에 장부의 빈칸으로 밀려났다.
하융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 낮에 푸리나가 두고 간 차였다. 그녀는 “식기 전에 마셔!”라고 말해놓고는, 정작 본인은 다음 장면을 떠올렸는지 복도 끝으로 뛰어가 버렸다. 푸리나는 늘 그랬다.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그 말이 사실은 개막 선언이었다고 주장했다. 지금 그 차는 식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미지근했다. 현실의 온도는 대개 그렇게 애매했다. 창밖의 죽음은 차갑고, 창밖의 축제는 눈부셨으며, 창밖의 실패는 칼자국처럼 또렷했다. 그런데 손 안의 찻잔만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정되지 않은 온도였다. 아직 이름 붙이기 곤란한 오늘의 온도. 하융은 그 찻잔을 오래 붙잡았다.
“오래된 방이 아직 닫히지 않았구려.”
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원래 대답하지 않는다. 방은 사람을 담을 뿐이다. 그러나 창이 너무 많아진 방은 사람을 담지 못하고, 사람을 진열한다. 하융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그는 정말로 진열되어 있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처음 그 말을 떠올렸을 때, 하융은 웃었었다. 천재라는 말도 우스웠고, 박제라는 말도 우스웠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웃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방 안에 앉혔다. 보라 했다. 더 보라 했다. 어느 길이 무너지는지, 어느 병사가 죽는지, 어느 성벽이 버티는지, 어느 선택이 더 적게 피를 흘리는지. 귀중하다는 말은 언제나 따뜻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귀중한 물건은 조심히 보관되기도 하지만, 더 자주 꺼내 쓰인다. 하융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보관되는 쪽인지, 사용되는 쪽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오.”
하융은 숨을 들이마신 뒤,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로 돌아가지는 않겠소.”
하지만 창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져서도 안 되었다. 창을 닫아버린다면 그는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하융이 원하는 안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보지 않는 유리관에 가까웠다. 그가 찾아야 하는 것은 창을 없애는 법이 아니었다. 창에 못 박히지 않는 법이었다. 그 사실을 그는 이미 배운 적이 있었다. 푸리나와 함께, 레이튼과 함께, 그레이와 함께, 죠니와 함께. 하지만 배운다는 것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같지 않다. 회복된 사람도 다시 오래된 냄새를 맡는다. 중요한 것은 그 냄새가 자신을 어디까지 데려가도록 허락할 것인가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문이 하나의 효과음처럼 밀려났다. 복도의 등불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빛 앞에 푸리나 헤툼이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망토를 대충 걸쳤고, 한 손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튼 고리가 들려 있었다. 머리카락 끝은 잠의 흔적을 달고 있었는데, 눈빛만은 방금 막 새 장면을 떠올린 사람처럼 또렷했다. 푸리나는 종종 잠에서 깨어난 사람과 밤을 새운 극작가 사이의 어딘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방 안을 보았다. 창들을 보았다. 더 나은 세계, 더 슬픈 세계, 죽은 가능성, 웃는 가능성, 아직 열리지 않았으나 이미 하융의 시선을 붙잡으려 하는 어떤 창. 그리고 하융의 얼굴을 보았다. 푸리나는 바로 떠들지 않았다. 그 침묵은 뜻밖에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소리로 무대를 여는 사람이었지만, 배우가 아직 자기 대사를 찾지 못했을 때는 기다릴 줄 알았다. 하융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조금 고마웠다.
“하융.”
“듣고 있소.”
“또 창문 앞에 앉아 있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밤중에 남의 방에 들어와, 첫마디로 참으로 정확한 말을 하시는구려.”
“그럼 틀린 말을 할까? 그건 좀 아깝잖아. 기왕 문을 열었으면 첫 대사는 정확해야지.”
푸리나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창 앞에 섰다. 그 창에서는 더 여유로운 시장이 보였다. 푸리나는 그 광경을 잠시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표정에는 감탄도 있었고, 질투도 있었고, 극장주가 다른 극장의 무대를 훔쳐볼 때의 장난스러운 경계심도 있었다.
“흐음.”
“무엇이 보이시오?”
“잘난 척.”
하융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잘난 척 말이오?”
“응. 봐봐. 나는 더 나은 시장이다, 나는 더 아름다운 가능성이다, 나는 네가 놓친 장면이다, 하고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있잖아.”
푸리나는 커튼 고리로 창틀을 톡 쳤다.
“저렇게 무게 잡는 창문은 오래 보면 안 돼. 배우를 잡아먹거든.”
하융은 창을 보았다. 확실히, 그 창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팠다. 현실의 시장은 저렇게 가볍지 않았다. 현실의 피난길은 저렇게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현실의 우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현실의 장부에는 아직 적히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 창은 언제나 더 선명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창이 너무 많소.”
“응.”
푸리나는 바로 인정했다. 그 빠른 인정이 하융을 조금 멈추게 했다. 그녀는 창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그녀는 창틀을 두드리고, 빛의 각도를 살피고,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한 바퀴 돌렸다. 무서운 것을 무대 위에 올릴 때, 어디에 세워야 배우가 잡아먹히지 않는지 재는 얼굴이었다.
“그럼 가보자.”
하융은 눈을 깜박였다.
“어디로 말이오?”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문밖을 가리켰다.
“창이 가리키는 곳으로.”
“창밖으로 나가자는 말이오?”
“아니. 문밖으로.”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차이 중요해. 창밖으로 나가면 네가 또 저쪽 세계한테 붙잡히잖아. 문밖으로 나가면 이쪽 세계의 바닥을 밟게 되고.”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이 아니라 문밖. 그 차이는 너무 단순했지만, 단순한 말이 가끔 가장 깊은 곳을 찌른다. 하융은 창을 보았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었고, 다른 선택이 있었고, 다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복도가 있었다. 돌바닥이 있고, 먼지가 있고, 등불이 있고, 누군가의 발자국이 있는 현실의 복도. 그 복도는 창보다 작았다. 그러나 밟을 수 있었다.
“방 안에서만 보면 창문들이 너무 잘난 척해. 직접 가서 보면 의외로 다들 발밑이 허술해. 시장은 빵이 부족하고, 길은 진흙탕이고, 우물은 냄새가 나고, 죠니는 밤중에도 접시를 들고 다니고.”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건 왜 내가 문제인 것처럼 말해?”
죠니였다. 그는 정말로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에는 빵만이 아니라, 작게 자른 치즈와 말린 과일까지 얹혀 있었다. 야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성의가 있었고, 식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대충이었다. 죠니는 방 안의 창들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장의 금빛과 우물의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곧 탁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접시를 놓을 만한 자리를 찾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그 사소한 눈길을 보고, 아주 잠깐 숨을 쉬기가 쉬워졌다. 어떤 사람은 무수한 세계가 열려 있는 방에서도, 먼저 빵이 기울지 않을 곳을 찾았다.
“창문이 많네.”
“그대에게도 그렇게 보이오?”
“응. 그리고 전부 별로 친절해 보이지는 않아. 보통 친절한 건 저렇게 빛나지 않거든.”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 너는 가끔 정말 이상한 기준으로 정확한 말을 해.”
“오래 살다 보면 알게 돼. 너무 반짝이는 건 대개 비싸거나 귀찮아. 둘 다 좋은 징조는 아니고.”
죠니는 접시를 방 안의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접시와 창들의 거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눈을 움직였다.
“어쨌든 가는 거면 먹고 가. 빈속으로 가능세계 같은 걸 보면, 대부분의 세계가 다 마음에 안 들거든. 그건 철학이 아니라 혈당 문제일 때도 있어.”
“그 말에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소.”
“당연하지. 나는 가끔 쓸데없이 맞는 말을 해.”
그 뒤에서 레이튼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예정된 야간 티타임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레이튼은 문턱에서 방 안을 둘러보았고, 창의 수와 빛의 방향과 하융의 얼굴을 차례로 살핀 뒤, 아주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밤입니다. 물론 창의 수를 고려하면, 다소 복잡한 밤이라고 해야겠지만요.”
푸리나가 손을 흔들었다.
“레이튼, 딱 맞게 왔어. 오늘의 주제는 창문여행이야.”
“창문여행이라. 흥미로운 제목이군요. 다만 첫 질문은 제목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무엇을 묻겠소?”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질문은 늘 차처럼 건네졌다. 다만 마시고 나면, 혀끝보다 마음 한쪽이 먼저 따뜻해지거나, 오래 묶여 있던 매듭 하나가 조용히 느슨해졌다.
“하융 경께서 보고 계신 것은 창입니까, 아니면 창에 붙잡힌 시선입니까?”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농담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췄다. 하융은 레이튼의 말을 곱씹었다. 창인가. 창에 붙잡힌 시선인가. 그는 한때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 자신을 명령한다고 믿었고,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겼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보는 자신과 보이는 세계 사이에 사람의 체온이 남지 않았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창을 없애는 날이 아니라, 시선의 위치를 바꾸는 날이겠군요.”
그때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문가에 섰다. 그녀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했지만, 방 안의 창들을 보자마자 눈빛이 맑아졌다. 그레이는 먼저 창을 보지 않고 하융을 보았다. 방 안에 우물과 장부와 죽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는데도, 그녀의 첫 시선은 살아 있는 사람의 안색에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은가. 그는 창들을 보았다. 시장, 피난길, 우물, 죽은 자신, 살아남은 자신, 더 나은 동료들, 더 나쁜 결말들. 그 다음 푸리나의 커튼 고리, 죠니의 접시, 레이튼의 찻주전자, 그레이의 기록판을 보았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말이 좋았다. 괜찮다고 밀어붙이지 않는 말. 괜찮지 않음을 문제 삼지 않는 말. 다만 지금의 상태를 조용히 받아 적는 듯한 말. 하융은 그 말 때문에 이어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놓여 있지 않소.”
그레이의 손이 기록판 위에서 살짝 멈췄다. 그녀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높이 들었다.
“좋아. 전원 집합. 오늘의 극장은 방 안이 아니야. 시장, 길, 우물, 그리고 점심자리.”
죠니가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점심은 밤에 먹어도 점심인 거야?”
푸리나는 잠깐 생각하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는 가능해.”
“그 말, 너무 많이 쓰면 위험해.”
“괜찮아. 위험한 말은 내가 책임질게.”
“그럼 난 접시를 책임질게. 그쪽이 더 믿음직해.”
레이튼은 가볍게 웃었다.
“훌륭한 역할 분담입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먼저 어디로 가십니까?”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가장 강한 빛을 내는 창을 골랐을 것이다. 혹은 가장 끔찍한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세계가 옳은지, 어느 세계가 자신을 용서하는지, 어느 세계가 마지막 창인지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밖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창밖이 아니라 문밖. 그 차이는 작았고, 그래서 컸다.
하융은 천천히 일어섰다.
“시장으로 가보겠소.”
푸리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첫 장면은 시장.”
죠니는 접시를 다시 들었다.
“먹을 건 들고 가도 되지? 시장에 가는데 빈손이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밤중의 시장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들고 가야지. 닫힌 시장에서 먹을 걸 구하려면 귀찮거든.”
레이튼은 하융의 옆으로 다가왔다.
“하융 경.”
“듣고 있소.”
“오늘은 모든 창에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온화하게 말했다.
“길을 걷는 동안, 어떤 창은 그저 빛만 비출 수도 있지요.”
하융은 잠시 그 말을 들고 있었다. 창은 답이 아니라 빛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직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기에는 충분한 문장이었다. 하융은 방을 돌아보았다.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닫히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를 불렀고, 아직도 다른 세계의 냄새를 흘려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빛이 방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복도 쪽으로 길게 흘러나갔다. 시장의 따뜻한 노랑은 돌바닥의 먼지를 드러냈고, 우물의 푸른빛은 벽의 금 간 자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어느 실패한 세계의 회색은 푸리나의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그 빛 위에 그대로 발을 디뎠다.
하융은 그 빛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너머가 아니라 그 아래를 보았다. 돌바닥. 먼지. 푸리나의 발끝. 죠니가 들고 있는 접시의 그림자. 그레이의 기록판 모서리. 레이튼의 찻주전자에서 흔들리는 작은 반사광. 현실은 창보다 작았다. 그러나 밟을 수 있었다.
“가보지요.”
푸리나는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가며, 무대의 막을 올리듯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개막.”
그리고 아주 밝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창밖이 아니라, 문밖으로.”
하융은 그녀를 따라 걸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하융은 창 너머로 가지 않았다. 그는 창에서 흘러나온 빛 아래, 문밖의 복도를 걸었다.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프롤로그 — 오래된 방의 냄새
방은 네모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네모였을 것이다. 네 벽과 천장과 바닥, 그리고 창 하나쯤을 가진, 사람이 잠들고 깨어나고 차를 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방. 그러나 하융의 방은 오래전부터 그런 형식을 잃어버렸다. 창이 하나 늘 때마다 벽도 하나 늘었고, 벽이 하나 늘 때마다 방은 조금 더 넓어졌으나, 이상하게도 하융이 앉을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방은 넓어질수록 그를 가운데로 밀어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의자 위에 놓인 잔이나 책처럼 보였다. 오래 움직이지 않은 것들은 모두 비슷한 냄새를 낸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융은 문득 자기 숨이 아직 방 안에서 가장 따뜻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어느 창에서는 시장의 깃발이 흔들렸다. 빵 냄새가 났고, 아이들의 웃음이 유리 너머에서 조금 늦게 도착했다. 병사들은 피곤했지만 웃고 있었고, 장사꾼들은 소식보다 손님을 먼저 보았다. 전쟁이 사라진 세계는 아니었다. 다만 전쟁이 잠시 멀어진 세계였다. 그 옆의 창에서는 수레바퀴가 진창을 지나고 있었다. 노인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이 있었고,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는 길이 있었으며, 누군가가 미리 물통을 놓아두었다. 더 먼 창에서는 우물물이 지나치게 맑았다. 맑은 물은 종종 불길했다. 하융은 그 물빛을 보자마자, 아직 쓰이지 않은 장부의 빈 줄을 떠올렸다. 다음 장면에서 아이가 누워 있었고, 그 다음 장면에서 천이 덮인 작은 몸들이 있었으며, 다시 그 다음 장면에서 장부의 끝에는 이름 대신 짧은 말이 남았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잉크가 마르자, 아이의 얼굴도 함께 마르는 것 같았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닫힌 눈꺼풀 안쪽에서도 시장은 흔들렸고, 피난길은 진창을 밟았으며, 우물은 맑은 물빛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4의 창은 열리기도 전에 이미 닫혀 있었고, 제5의 창에서는 죽은 하융이 오늘의 하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번호를 붙이면 덜 무서울 줄 알았다. 번호란 질서의 흉내니까. 그러나 번호는 질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가 줄을 선 모양에 가까웠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있었다. 죽은 내가 천千이요, 살아남은 내가 만萬이었다. 어느 나는 조금 더 빨랐고, 어느 나는 한 박자 늦었다. 어느 나는 푸리나가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창가에서 식어 있었고, 어느 나는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를 끝내 듣지 못했다. 어느 나는 레이튼의 찻잔 앞에서 대답 대신 침묵만 남겼으며, 어느 나는 그레이의 펜 끝에 닿기도 전에 장부의 빈칸으로 밀려났다.
하융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 낮에 푸리나가 두고 간 차였다. 그녀는 “식기 전에 마셔!”라고 말해놓고는, 정작 본인은 다음 장면을 떠올렸는지 복도 끝으로 뛰어가 버렸다. 푸리나는 늘 그랬다.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그 말이 사실은 개막 선언이었다고 주장했다. 지금 그 차는 식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미지근했다. 현실의 온도는 대개 그렇게 애매했다. 창밖의 죽음은 차갑고, 창밖의 축제는 눈부셨으며, 창밖의 실패는 칼자국처럼 또렷했다. 그런데 손 안의 찻잔만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정되지 않은 온도였다. 아직 이름 붙이기 곤란한 오늘의 온도. 하융은 그 찻잔을 오래 붙잡았다.
“오래된 방이 아직 닫히지 않았구려.”
말은 방 안에 낮게 떨어졌다. 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은 원래 대답하지 않는다. 방은 사람을 담을 뿐이다. 그러나 창이 너무 많아진 방은 사람을 담지 못하고, 사람을 진열한다. 하융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그는 정말로 진열되어 있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처음 그 말을 떠올렸을 때, 하융은 웃었었다. 천재라는 말도 우스웠고, 박제라는 말도 우스웠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웃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방 안에 앉혔다. 보라 했다. 더 보라 했다. 어느 길이 무너지는지, 어느 병사가 죽는지, 어느 성벽이 버티는지, 어느 선택이 더 적게 피를 흘리는지. 귀중하다는 말은 언제나 따뜻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귀중한 물건은 조심히 보관되기도 하지만, 더 자주 꺼내 쓰인다. 하융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보관되는 쪽인지, 사용되는 쪽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오.”
하융은 숨을 들이마신 뒤,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로 돌아가지는 않겠소.”
하지만 창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져서도 안 되었다. 창을 닫아버린다면 그는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하융이 원하는 안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보지 않는 유리관에 가까웠다. 그가 찾아야 하는 것은 창을 없애는 법이 아니었다. 창에 못 박히지 않는 법이었다. 그 사실을 그는 이미 배운 적이 있었다. 푸리나와 함께, 레이튼과 함께, 그레이와 함께, 죠니와 함께. 하지만 배운다는 것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같지 않다. 회복된 사람도 다시 오래된 냄새를 맡는다. 중요한 것은 그 냄새가 자신을 어디까지 데려가도록 허락할 것인가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문이 하나의 효과음처럼 밀려났다. 복도의 등불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빛 앞에 푸리나 헤툼이 서 있었다. 잠옷 위에 망토를 대충 걸쳤고, 한 손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튼 고리가 들려 있었다. 머리카락 끝은 잠의 흔적을 달고 있었는데, 눈빛만은 방금 막 새 장면을 떠올린 사람처럼 또렷했다. 푸리나는 종종 잠에서 깨어난 사람과 밤을 새운 극작가 사이의 어딘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방 안을 보았다. 창들을 보았다. 더 나은 세계, 더 슬픈 세계, 죽은 가능성, 웃는 가능성, 아직 열리지 않았으나 이미 하융의 시선을 붙잡으려 하는 어떤 창. 그리고 하융의 얼굴을 보았다. 푸리나는 바로 떠들지 않았다. 그 침묵은 뜻밖에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소리로 무대를 여는 사람이었지만, 배우가 아직 자기 대사를 찾지 못했을 때는 기다릴 줄 알았다. 하융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조금 고마웠다.
“하융.”
“듣고 있소.”
“또 창문 앞에 앉아 있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밤중에 남의 방에 들어와, 첫마디로 참으로 정확한 말을 하시는구려.”
“그럼 틀린 말을 할까? 그건 좀 아깝잖아. 기왕 문을 열었으면 첫 대사는 정확해야지.”
푸리나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창 앞에 섰다. 그 창에서는 더 여유로운 시장이 보였다. 푸리나는 그 광경을 잠시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표정에는 감탄도 있었고, 질투도 있었고, 극장주가 다른 극장의 무대를 훔쳐볼 때의 장난스러운 경계심도 있었다.
“흐음.”
“무엇이 보이시오?”
“잘난 척.”
하융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잘난 척 말이오?”
“응. 봐봐. 나는 더 나은 시장이다, 나는 더 아름다운 가능성이다, 나는 네가 놓친 장면이다, 하고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있잖아.”
푸리나는 커튼 고리로 창틀을 톡 쳤다.
“저렇게 무게 잡는 창문은 오래 보면 안 돼. 배우를 잡아먹거든.”
하융은 창을 보았다. 확실히, 그 창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팠다. 현실의 시장은 저렇게 가볍지 않았다. 현실의 피난길은 저렇게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현실의 우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현실의 장부에는 아직 적히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 창은 언제나 더 선명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창이 너무 많소.”
“응.”
푸리나는 바로 인정했다. 그 빠른 인정이 하융을 조금 멈추게 했다. 그녀는 창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그녀는 창틀을 두드리고, 빛의 각도를 살피고,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한 바퀴 돌렸다. 무서운 것을 무대 위에 올릴 때, 어디에 세워야 배우가 잡아먹히지 않는지 재는 얼굴이었다.
“그럼 가보자.”
하융은 눈을 깜박였다.
“어디로 말이오?”
푸리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문밖을 가리켰다.
“창이 가리키는 곳으로.”
“창밖으로 나가자는 말이오?”
“아니. 문밖으로.”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차이 중요해. 창밖으로 나가면 네가 또 저쪽 세계한테 붙잡히잖아. 문밖으로 나가면 이쪽 세계의 바닥을 밟게 되고.”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이 아니라 문밖. 그 차이는 너무 단순했지만, 단순한 말이 가끔 가장 깊은 곳을 찌른다. 하융은 창을 보았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었고, 다른 선택이 있었고, 다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복도가 있었다. 돌바닥이 있고, 먼지가 있고, 등불이 있고, 누군가의 발자국이 있는 현실의 복도. 그 복도는 창보다 작았다. 그러나 밟을 수 있었다.
“방 안에서만 보면 창문들이 너무 잘난 척해. 직접 가서 보면 의외로 다들 발밑이 허술해. 시장은 빵이 부족하고, 길은 진흙탕이고, 우물은 냄새가 나고, 죠니는 밤중에도 접시를 들고 다니고.”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건 왜 내가 문제인 것처럼 말해?”
죠니였다. 그는 정말로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에는 빵만이 아니라, 작게 자른 치즈와 말린 과일까지 얹혀 있었다. 야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성의가 있었고, 식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대충이었다. 죠니는 방 안의 창들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장의 금빛과 우물의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곧 탁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접시를 놓을 만한 자리를 찾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그 사소한 눈길을 보고, 아주 잠깐 숨을 쉬기가 쉬워졌다. 어떤 사람은 무수한 세계가 열려 있는 방에서도, 먼저 빵이 기울지 않을 곳을 찾았다.
“창문이 많네.”
“그대에게도 그렇게 보이오?”
“응. 그리고 전부 별로 친절해 보이지는 않아. 보통 친절한 건 저렇게 빛나지 않거든.”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 너는 가끔 정말 이상한 기준으로 정확한 말을 해.”
“오래 살다 보면 알게 돼. 너무 반짝이는 건 대개 비싸거나 귀찮아. 둘 다 좋은 징조는 아니고.”
죠니는 접시를 방 안의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접시와 창들의 거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눈을 움직였다.
“어쨌든 가는 거면 먹고 가. 빈속으로 가능세계 같은 걸 보면, 대부분의 세계가 다 마음에 안 들거든. 그건 철학이 아니라 혈당 문제일 때도 있어.”
“그 말에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소.”
“당연하지. 나는 가끔 쓸데없이 맞는 말을 해.”
그 뒤에서 레이튼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예정된 야간 티타임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레이튼은 문턱에서 방 안을 둘러보았고, 창의 수와 빛의 방향과 하융의 얼굴을 차례로 살핀 뒤, 아주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밤입니다. 물론 창의 수를 고려하면, 다소 복잡한 밤이라고 해야겠지만요.”
푸리나가 손을 흔들었다.
“레이튼, 딱 맞게 왔어. 오늘의 주제는 창문여행이야.”
“창문여행이라. 흥미로운 제목이군요. 다만 첫 질문은 제목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무엇을 묻겠소?”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질문은 늘 차처럼 건네졌다. 다만 마시고 나면, 혀끝보다 마음 한쪽이 먼저 따뜻해지거나, 오래 묶여 있던 매듭 하나가 조용히 느슨해졌다.
“하융 경께서 보고 계신 것은 창입니까, 아니면 창에 붙잡힌 시선입니까?”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농담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췄다. 하융은 레이튼의 말을 곱씹었다. 창인가. 창에 붙잡힌 시선인가. 그는 한때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 자신을 명령한다고 믿었고,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겼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보는 자신과 보이는 세계 사이에 사람의 체온이 남지 않았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창을 없애는 날이 아니라, 시선의 위치를 바꾸는 날이겠군요.”
그때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문가에 섰다. 그녀는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했지만, 방 안의 창들을 보자마자 눈빛이 맑아졌다. 그레이는 먼저 창을 보지 않고 하융을 보았다. 방 안에 우물과 장부와 죽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는데도, 그녀의 첫 시선은 살아 있는 사람의 안색에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은가. 그는 창들을 보았다. 시장, 피난길, 우물, 죽은 자신, 살아남은 자신, 더 나은 동료들, 더 나쁜 결말들. 그 다음 푸리나의 커튼 고리, 죠니의 접시, 레이튼의 찻주전자, 그레이의 기록판을 보았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말이 좋았다. 괜찮다고 밀어붙이지 않는 말. 괜찮지 않음을 문제 삼지 않는 말. 다만 지금의 상태를 조용히 받아 적는 듯한 말. 하융은 그 말 때문에 이어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놓여 있지 않소.”
그레이의 손이 기록판 위에서 살짝 멈췄다. 그녀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높이 들었다.
“좋아. 전원 집합. 오늘의 극장은 방 안이 아니야. 시장, 길, 우물, 그리고 점심자리.”
죠니가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점심은 밤에 먹어도 점심인 거야?”
푸리나는 잠깐 생각하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는 가능해.”
“그 말, 너무 많이 쓰면 위험해.”
“괜찮아. 위험한 말은 내가 책임질게.”
“그럼 난 접시를 책임질게. 그쪽이 더 믿음직해.”
레이튼은 가볍게 웃었다.
“훌륭한 역할 분담입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먼저 어디로 가십니까?”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가장 강한 빛을 내는 창을 골랐을 것이다. 혹은 가장 끔찍한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세계가 옳은지, 어느 세계가 자신을 용서하는지, 어느 세계가 마지막 창인지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밖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창밖이 아니라 문밖. 그 차이는 작았고, 그래서 컸다.
하융은 천천히 일어섰다.
“시장으로 가보겠소.”
푸리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첫 장면은 시장.”
죠니는 접시를 다시 들었다.
“먹을 건 들고 가도 되지? 시장에 가는데 빈손이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밤중의 시장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들고 가야지. 닫힌 시장에서 먹을 걸 구하려면 귀찮거든.”
레이튼은 하융의 옆으로 다가왔다.
“하융 경.”
“듣고 있소.”
“오늘은 모든 창에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융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온화하게 말했다.
“길을 걷는 동안, 어떤 창은 그저 빛만 비출 수도 있지요.”
하융은 잠시 그 말을 들고 있었다. 창은 답이 아니라 빛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직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기에는 충분한 문장이었다. 하융은 방을 돌아보았다.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닫히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를 불렀고, 아직도 다른 세계의 냄새를 흘려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빛이 방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복도 쪽으로 길게 흘러나갔다. 시장의 따뜻한 노랑은 돌바닥의 먼지를 드러냈고, 우물의 푸른빛은 벽의 금 간 자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어느 실패한 세계의 회색은 푸리나의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그 빛 위에 그대로 발을 디뎠다.
하융은 그 빛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너머가 아니라 그 아래를 보았다. 돌바닥. 먼지. 푸리나의 발끝. 죠니가 들고 있는 접시의 그림자. 그레이의 기록판 모서리. 레이튼의 찻주전자에서 흔들리는 작은 반사광. 현실은 창보다 작았다. 그러나 밟을 수 있었다.
“가보지요.”
푸리나는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가며, 무대의 막을 올리듯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개막.”
그리고 아주 밝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창밖이 아니라, 문밖으로.”
하융은 그녀를 따라 걸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하융은 창 너머로 가지 않았다. 그는 창에서 흘러나온 빛 아래, 문밖의 복도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