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23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01:22:47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1막 — 시장의 빛

시장은 잠들어 있었다. 낮의 시장이 목소리와 냄새와 먼지로 몸을 불리는 짐승이라면, 밤의 시장은 접힌 짐승에 가까웠다. 천막들은 축 늘어져 있었고, 닫힌 가게의 나무 덧문에는 낮 동안 묻은 손자국과 먼지가 남아 있었다. 빵집 앞에는 줄이 없었고, 과일 바구니는 뒤집혀 있었으며, 광장 한가운데의 우물 곁에는 누가 잊고 갔는지 모를 빈 물동이가 엎어져 있었다. 하융은 그 광장을 보자마자, 조금 전 창 안에서 보았던 시장을 떠올렸다. 작은 깃발이 걸리고, 아이들이 웃고, 병사들이 피곤하면서도 빵을 나눠 먹던 그 시장. 그곳에서는 전쟁이 멀리 있었다. 이곳에서는 전쟁이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닫힌 덧문과 낮게 꺼진 등불 사이에 이미 앉아 있었다.

푸리나는 광장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는 창 안의 시장과 현실의 시장을 번갈아 보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고,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한 번 돌렸다. 하융은 그녀가 곧 무언가를 선언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푸리나는 선언을 좋아했다. 다만 그녀의 선언은 대개 법령보다 장난에 가까웠고, 장난보다 조금 더 오래 남았다.

“흐음.”

죠니가 접시를 들고 그녀 옆에 섰다.

“왜. 시장이 생각보다 안 극적이야?”

“아니. 너무 극적이야. 닫힌 시장, 식은 화덕, 엎어진 물동이. 이거 완전히 전쟁 전야잖아.”

“보통 사람들은 그걸 그냥 장사가 끝났다고 불러.”

“죠니, 너는 너무 빨리 현실로 도망쳐.”

“현실에 있으니까 현실로 가는 거지. 그게 도망이면, 세상 대부분은 도망 중이야.”

푸리나는 그 말에 잠깐 입술을 삐죽이다가, 곧 광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창에서 흘러나온 빛들이 돌바닥 위에서 조금씩 흔들렸다. 시장의 따뜻한 노랑은 아직 꺼지지 않은 화덕의 재를 닮았고, 더 먼 창에서 온 꽃빛은 닫힌 덧문 틈에 낀 먼지를 희미하게 밝혔다. 하지만 하융의 시선은 자꾸 그 너머로 미끄러졌다. 창 안의 시장에서는 같은 돌바닥 위에 깃발이 걸려 있었다. 저쪽의 빵집에서는 남은 빵을 작게 잘라 아이들에게 주고 있었다. 저쪽의 병사는 웃었다. 이쪽의 병사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이 광장에는 병사도 많지 않았다. 순찰병 둘이 졸음을 참으며 서 있었고, 그중 하나는 푸리나를 알아보고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

“저, 전하?”

푸리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쉿. 오늘 나는 전하가 아니야.”

순찰병은 더 굳었다.

“예?”

“야간 시장 조사단장이야.”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그건 더 수상해 보이는데.”

“그럼 야간 시장 산책객.”

“그건 덜 위험하긴 하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야간 시장 산책객으로 하자. 공식 직함은 나중에 붙이고.”

순찰병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하융과 레이튼과 그레이를 차례로 보았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그레이는 작은 목례로 그를 안심시켰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있었으므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융은 잠시 그 순찰병을 보았다. 창 안의 다른 세계에서는 이 병사가 낮에 빵을 나눠 먹고 있었다. 또 다른 창에서는 길목에서 화살을 맞았다. 또 다른 창에서는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하융은 그 가능성들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중 어느 하나에도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 했다. 그는 순찰병의 신발 끝에 묻은 진흙을 보았다. 끈이 느슨했다. 현실은 가끔 그런 식으로 먼저 나타났다.

“끈이 풀렸소.”

순찰병이 멍하니 그를 보았다.

“예?”

“신발 끈 말이오. 순찰 중 넘어질 수 있소.”

순찰병은 뒤늦게 자기 발을 내려다보고 허둥지둥 끈을 묶었다.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좋아. 첫 수확.”

“수확이라고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넘어지기 전에 발견한 건 좋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전쟁보다 신발 끈이 먼저 사람을 쓰러뜨릴 때도 있거든. 별로 멋은 없지만 꽤 자주 그래.”

하융은 순찰병이 끈을 묶는 손을 보았다. 창 안의 병사는 빵을 들고 웃고 있었고, 현실의 병사는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장면인지 묻는 질문이 목 안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내려앉았다. 지금은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푸리나는 닫힌 빵집 앞에 섰다. 덧문에는 낮에 붙였던 작은 안내문이 남아 있었다. 피난민 배급은 성문 쪽 임시 창고에서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글씨는 급했고, 종이는 비에 한 번 젖었다가 말라 가장자리가 말려 있었다. 푸리나는 그 안내문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너무 재미없어.”

그레이가 가까이 와서 안내문을 확인했다.

“필요한 정보는 들어 있습니다. 장소, 시간, 대상자, 질서 유지 요청까지요.”

“응. 필요한 정보는 있어.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얼굴이 없어.”

“얼굴……입니까?”

“응. 이건 말하자면 무대 뒤 지시문이야. 배우가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서 퇴장해야 하는지는 적혀 있는데, 왜 나와야 하는지는 없어.”

그레이는 잠시 안내문을 보았다. 하융은 그녀가 불편해할까 싶었지만, 그레이는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안내문 왼쪽 아래, 비에 번져 읽기 어려워진 줄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러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표시를 추가하면 좋을까요. 글을 못 읽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빵 그림이나 물동이 그림을 같이 붙이면, 조금 덜 헤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웃었다.

“그거야. 역시 그레이야.”

“대단한 생각은 아닙니다. 실제로 필요해서…….”

“필요한 생각이 제일 대단할 때도 있어.”

그레이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덧문에 붙은 종이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펴더니, 커튼 고리 끝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신술은 아니었다. 혹은 신술이 되기 전의 장난이었다. 하지만 하융은 그런 장난이 푸리나에게서 자주 신술의 전조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세상을 먼저 놀이처럼 만지고, 그 다음에야 그것이 사람을 일으키는 장면이 된다.

“빵 그림, 물동이 그림, 그리고 꽃.”

죠니가 물었다.

“왜 꽃?”

“예쁘잖아.”

“그건 이유가 너무 강해서 반박하기 어렵네.”

레이튼이 웃음을 삼키듯 찻주전자를 살짝 고쳐 들었다.

“때로는 단순한 이유가 가장 오래 버팁니다.”

푸리나는 레이튼을 돌아보았다.

“레이튼, 지금 그 말을 아주 길게 만들려는 얼굴이야.”

“아닙니다. 오늘은 시장이 주인공이니까요.”

“좋아. 훌륭한 자제력이야.”

하융은 빵집 앞에 서서 창 안의 장면을 다시 보았다. 그곳에서는 이미 꽃이 있었다. 창 안의 아이는 꽃나무 아래에서 빵을 먹고 있었다. 이쪽에는 꽃나무가 없었다. 다만 덧문 아래, 돌 틈에 작고 마른 풀 하나가 비집고 나와 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얇았다. 하융은 허리를 숙였다. 손끝으로 건드리자 마른 줄기가 부서질 것 같아, 그는 건드리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뭐 봐?”

“풀잎이오.”

“어디?”

하융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았다. 그러더니 아주 작게 웃었다.

“진짜 있네.”

“창 안에는 꽃나무가 있었소.”

“응.”

“이쪽에는 이것뿐이오.”

푸리나는 그 작은 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평소처럼 바로 “그럼 꽃나무로 만들자!”고 말할 줄 알았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풀잎 주변의 먼지를 살짝 밀어냈다. 너무 거칠게 하면 뿌리가 다칠까 조심하는 손짓이었다.

“이것뿐이라기엔, 얘도 꽤 열심히 나왔는데.”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창 안의 꽃나무는 멋지네. 하지만 그건 저쪽 무대 소품이고, 이쪽 애는 이 돌 틈에서 혼자 올라왔잖아. 그럼 오늘은 얘 편을 들어줘야지.”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돌 틈 풀 편드는 왕이라. 듣기에는 이상한데, 너한테는 꽤 어울리네.”

“그럼 너는?”

“난 안 밟을게. 그 정도면 내 방식으로는 꽤 큰 지지야.”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죠니식 지지 접수.”

하융은 풀잎을 보았다. 창 안의 꽃나무와 비교하면 우스울 만큼 작았다. 하지만 그 작은 것 앞에서 푸리나는 손가락을 조심했다. 죠니는 발을 조심하겠다고 했다. 그레이는 어느새 기록판 한쪽에 빵 그림과 물동이 그림의 위치를 적고 있었고, 레이튼은 시장 골목의 방향을 살피며 순찰병에게 낮게 질문하고 있었다.

“이쪽 골목으로 가면 성문 창고가 보입니까?”

“아, 아닙니다. 중간에 한 번 꺾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처음 온 사람은 놓치기 쉽겠군요. 혹시 낮에 길을 묻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예. 특히 북쪽 피난민들이…….”

“그렇군요. 그들이 처음 보는 표지가 무엇인지부터 바꿔야겠습니다.”

하융은 레이튼의 목소리를 들었다. 레이튼은 답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순찰병이 낮 동안 보았던 길 잃은 사람들의 동선을 하나씩 말하게 했다. 질문은 부드러웠고, 순찰병은 처음에는 긴장했으나 곧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융은 그 대화를 보며 창 안의 피난길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이미 천 조각이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아직 아무도 천 조각을 묶지 않았다. 그러나 순찰병의 손이 허공에서 길을 그리는 동안, 하융은 이쪽 골목의 어둠 속에도 아직 묶일 수 있는 자리가 많다는 것을 보았다.

푸리나는 갑자기 일어섰다.

“좋아. 빵집 주인은 자고 있겠지?”

그레이가 조금 놀라 말했다.

“지금 깨우시려고요?”

“아니. 자는 사람은 자야지. 여관좌의 대리인이 수면권을 침해하면 안 돼.”

죠니가 말했다.

“방금 되게 그럴듯한 말을 했는데, 뭔가 하려는 얼굴이야.”

“응. 가게는 안 깨우고 시장만 조금 깨울 거야.”

“그게 더 문제처럼 들리는데.”

푸리나는 대답 대신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 고리를 들어 올렸다. 하융은 순간 그녀가 신술을 펼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푸리나는 고리를 크게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엎어진 물동이 옆에 서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무대는 아직 닫혀 있습니다.”

그 말은 광장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등불 하나가 살짝 흔들렸고, 순찰병이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말이 닫힌 덧문들에 닿는 것을 느꼈다. 장엄한 선포는 아니었다. 밤중의 장난처럼 작았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조금 덜 헤매게 합시다.”

그리고 그녀는 물동이를 바로 세웠다.

그레이가 곧 다가와 물동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에 두면 통행에 방해가 됩니다. 조금 옆으로 옮기겠습니다.”

“응. 그레이가 옮기면 그게 맞아.”

“제가 직접 옮기겠습니다.”

“같이 하자. 나도 물동이는 들 수 있어.”

“전하, 옷이…….”

“망토는 빨면 돼. 물동이에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것보다 망토가 더 싸.”

죠니가 접시를 들지 않은 손으로 물동이 손잡이를 잡았다.

“셋이 들면 빨리 끝나. 그리고 여왕님이 물동이 하나 들겠다고 씨름하는 그림은 너무 길어지면 곤란해.”

푸리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나 약하다고 했어?”

“아니. 물동이가 귀찮게 생겼다고 했지. 둘은 달라.”

“그럼 인정.”

셋이서 물동이를 옮겼다. 광장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난 곳, 성문 창고로 향하는 길목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그레이는 기록판에 표시를 적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내일 낮 이 자리에 임시 표식을 세울 수 있는지 물었다. 푸리나는 물동이 옆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먼지 위에 빵 모양을 그렸다. 빵이라기에는 조금 찌그러진 달 같았다. 죠니는 그 그림을 보더니 낮게 말했다.

“그건 빵이야, 달이야?”

“빵.”

“빵집 주인이 보면 항의할 수도 있겠는데.”

“그럼 네가 그려.”

“난 먹는 쪽이지 그리는 쪽이 아니야.”

“비겁해.”

“현명한 거지.”

하융은 그 대화를 들으며 광장 가장자리에 섰다. 창 안의 시장은 아직도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었다. 작은 깃발, 꽃나무, 빵 냄새, 웃음. 그 아름다운 가능성은 여전히 이 현실보다 가벼웠고, 이 현실보다 따뜻했으며, 이 현실보다 조금 덜 아팠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는 이제 바로 세워진 물동이가 있었다. 먼지 위에 찌그러진 빵 그림이 있었다. 돌 틈의 풀잎 주변에는 푸리나가 밀어낸 작은 빈자리가 있었다. 순찰병은 신발 끈을 다시 묶었고, 그레이는 내일 붙일 그림 안내문의 위치를 적고 있었다. 레이튼은 길을 묻는 사람의 첫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물었고, 죠니는 접시 위의 빵 조각이 기울지 않게 손목을 조정했다.

그것들은 창 안의 축제보다 작았다.

하융은 그 작음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작아서 손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융.”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먼지 위에 그린 빵 그림 옆에 작은 꽃을 하나 더 그리고 있었다. 꽃이라고 하기에는 선이 세 개뿐인 모양이었다.

“이거 어때?”

하융은 다가가 그림을 보았다.

“빵 옆에 꽃이 있구려.”

“응. 길 잃은 사람이 빵을 찾다가 꽃도 보면 좋잖아.”

“꽃을 보러 온 것이 아닐 텐데.”

“그래도 보이면 나쁘지 않잖아.”

그 말은 가벼웠다. 그래서 오래 남았다. 하융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먼지 위의 꽃은 바람이 불면 사라질 것이다. 내일 낮이면 사람들의 발에 밟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있었다. 창 안의 꽃나무처럼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그늘을 만들지도 못하고, 아이가 앉을 자리도 주지 못하는 꽃. 그러나 지금 이 광장 위에서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려둔 꽃.

하융은 낮게 말했다.

“나쁘지 않소.”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채택.”

“무엇을 말이오?”

“내일 안내문에 꽃도 넣기.”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복잡해지면 정보 전달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작게.”

“작게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꽃이 살아남았네.”

“죠니식 축하야?”

“응. 꽤 진심이야. 작은 건 보통 제일 먼저 잘리거든.”

그레이가 기록판에 작게 덧붙였다.

“빵 그림 아래 작은 꽃 표시.”

하융은 그 글씨를 보았다. 창 안의 꽃나무가 아니라, 현실의 안내문 아래 들어갈 작은 꽃 표시. 세계는 그런 식으로도 건너오는가. 창 너머의 커다란 빛이, 먼지 위의 선 세 개와 종이 아래의 작은 표시가 되어 이쪽에 남는가. 그는 그 생각을 말로 만들지 않았다. 말로 만들면 너무 빨리 굳을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물동이 옆에 놓인 작은 돌 하나를 치웠다. 누군가 발을 걸 수 있을 만한 돌이었다.

죠니가 그걸 보고 말했다.

“좋네.”

“무엇이 말이오?”

“그 돌. 저기 있으면 누군가 걸려. 창문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돌은 직접 치워야 하잖아.”

하융은 돌을 손에 든 채 잠시 멈췄다. 돌은 작고 차가웠다. 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돌이었다. 그 돌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남았다. 그는 돌을 길가로 옮겨놓았다.

레이튼이 순찰병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내일 아침에는 성문 창고로 가는 첫 표지를 이곳에 세우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글자보다 그림을 먼저 보이게 하지요. 빵, 물동이, 작은 꽃. 훌륭한 조합입니다.”

푸리나는 가슴을 폈다.

“그렇지?”

“예. 길 안내가 되면서도, 너무 명령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꽃 하나 붙었다고 명령문이 덜 무서워지나?”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가끔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명령받고 있다고 느끼면 늦게 움직이지만, 초대받고 있다고 느끼면 한 걸음 빨라질 때가 있지요.”

푸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야. 초대장!”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배급 안내문이 초대장이 되면…… 혼란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럼 배급 안내 초대장.”

“그 표현도 조금…….”

죠니가 끼어들었다.

“그냥 그림 있는 안내문으로 하자. 이름이 길어지면 붙이기 전에 다들 지쳐.”

푸리나는 잠깐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죠니 의견 채택. 그림 있는 안내문.”

“드디어 정상적인 이름이 나왔네.”

“정상적인 이름도 가끔은 필요하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시장 입구를 돌아보았다. 창 안의 시장은 여전히 멀리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저쪽에 있을 것이다. 이쪽 시장은 내일 아침에도 피곤할 것이고, 빵은 부족할 것이고, 사람들은 줄을 서다 다툴지도 모른다. 작은 꽃 표시 하나가 전쟁을 멀리 보내지는 못할 것이다. 물동이 하나를 옮긴다고 피난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돌 하나를 치운다고 모든 길이 안전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융의 손바닥에는 아직 돌의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그 차가움은 창 너머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하융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시장의 냄새가 들어왔다. 식은 재, 오래된 밀가루, 젖은 나무, 먼지, 그리고 누군가 접시 위에 올려둔 말린 과일의 희미한 단내. 그 모든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창 안의 시장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끝에 닿았다.

푸리나가 문득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저쪽 시장이 더 예뻤어?”

하융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기다렸고, 그레이는 기록판을 닫았으며, 레이튼은 등불의 흔들림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렇소. 저쪽이 더 예뻤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것 같았어.”

“허나 이쪽은…….”

하융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돌을 쥐었던 자리가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이쪽은 손이 남는구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웃었다. 이번에는 크게 박수치지도, 당장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다만 커튼 고리를 손안에서 조용히 굴렸다.

“그럼 됐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손이 남으면 뭐라도 할 수 있지. 가끔은 그게 전부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오늘의 첫 장면치고는 충분히 좋은 결말입니다.”

그레이는 작게 덧붙였다.

“내일 할 일도 남았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좋아. 그럼 다음 장면은 내일 할 일을 확인하러 가는 장면!”

죠니가 말했다.

“그러면 사실상 업무잖아.”

“업무도 장면이 될 수 있어.”

“그건 그레이한테 물어봐.”

그레이는 잠시 당황하다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업무는…… 되도록 장면이 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조용히 끝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죠니가 푸리나를 보았다.

“봤지. 전문가 의견이야.”

푸리나는 조금 억울한 얼굴을 했다가, 곧 웃었다.

“좋아. 그럼 조용한 장면.”

하융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광장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창 안의 시장은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는 이제 그들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바로 세운 물동이, 먼지 위의 빵과 꽃, 길가로 옮겨진 돌, 신발 끈을 다시 묶은 순찰병, 내일 붙일 그림 있는 안내문. 창에서 흘러온 빛은 그 위에 희미하게 얹혀 있었다. 빛은 현실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무엇을 만질 수 있는지 보이게 했다.

하융은 문득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아직 첫 장면이었다.

그는 창 너머로 가지 않았다.

그는 시장의 돌바닥 위에 남은 자기 발자국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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