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24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01:40:53
좋아. 이번 막은 **피난길**이야. 하융이 창에서 본 “더 나은 길”을 그대로 답으로 삼는 게 아니라, 실제 길을 밟으며 창에는 보이지 않던 진흙·돌·아이들의 두려움·말의 습관을 감각하는 방향으로 썼어. 하이라이트 부분에는 하융의 감정이 살짝 새는 식으로 한문체를 넣었어.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2막 — 피난길의 돌
시장을 지나 성문 쪽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밤이 깊어서만은 아니었다. 피난민들이 지나간 길에는 소리가 남지 않고 냄새가 남았다. 젖은 짚 냄새, 오래 끌린 수레바퀴의 흙 냄새, 급하게 꺼낸 가재도구에서 묻어난 집의 냄새, 그리고 사람들이 오래 서 있었던 자리 특유의 눅눅한 체온. 하융은 그 냄새들을 맡으며 걸었다. 창 안의 피난길은 더 정돈되어 있었다. 수레는 줄을 지켰고, 노인들은 그늘에서 쉬었으며, 아이들은 진창을 밟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길은 굽이마다 한 번씩 흐트러졌다. 어느 집 담벼락에는 수레가 긁고 간 자국이 있었고, 길모퉁이에는 떨어진 짐끈이 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푸리나는 앞서 걷다가 몇 걸음마다 멈췄다. 처음에는 창에서 본 길과 현실의 길을 대조하듯 보였지만, 곧 그녀는 벽의 갈라진 틈, 낮은 처마, 기울어진 표지목 같은 것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바닥을 점검하는 극장주의 눈과 닮아 있었다. 어디에 조명을 두면 사람이 덜 헤맬지, 어느 구석에서 배우가 넘어질지, 어느 문으로 나가면 객석이 그걸 퇴장으로 알아볼지 재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그 얼굴을 보다가, 창 안의 다른 푸리나를 떠올렸다. 그 푸리나는 같은 길을 조금 더 일찍 고쳤고, 그래서 어떤 아이가 넘어지지 않았다. 현실의 푸리나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낮은 처마 아래를 직접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 너무 어둡네.”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가 곧 기록판을 열었다.
“등불을 하나 더 둘 수 있습니다. 다만 기름 배급량을 확인해야 합니다.”
“기름이 부족하면?”
“성문 창고에서 남는 폐목을 받아 임시 횃대를 세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만 불씨 관리 인력이 필요합니다.”
“좋아. 그럼 불씨 관리자를 붙이고, 표식은 낮에도 보이게 하자. 밤에만 길이 헷갈리는 건 아니니까.”
죠니는 길모퉁이에 서서 수레바퀴 자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접시를 시장에 맡기고 왔지만, 손은 여전히 뭔가를 들고 있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비어 있었다. 그가 발끝으로 바퀴 자국 옆의 진흙을 눌렀다. 진흙은 생각보다 깊게 들어갔다.
“여긴 수레가 빠지겠네.”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입니까?”
“빈 수레면 몰라도, 짐 실은 수레는 싫어할 거야. 수레꾼은 더 싫어할 거고. 말은 아예 표정으로 욕할걸.”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말이 표정으로 욕해?”
“해. 사람보다 솔직해서 문제지.”
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 길모퉁이의 폭을 살폈다. 그는 직접 결론을 말하지 않고, 옆에 서 있던 순찰병에게 물었다.
“낮에 이 길에서 수레가 멈춘 일이 있었습니까?”
순찰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바퀴가 빠졌고, 한 번은 앞쪽 수레가 멈추는 바람에 뒤가 전부 막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돌아갔습니까?”
“대부분 이 골목으로…… 그런데 이 골목은 좁아서 아이들이 밀렸습니다.”
레이튼은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길은 빠른 길이 아니라, 빠른 길처럼 보이는 길이었군요.”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창 안의 피난길에서는 이 골목을 쓰지 않았다. 그 세계의 수레들은 조금 먼 길을 돌아갔다. 멀지만 넓은 길이었다. 창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창은 이 진흙의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수레꾼이 왜 짧은 길을 고집했는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무엇을 무서워했는지도, 말이 어느 그림자 앞에서 귀를 젖히는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창은 길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길의 무게는 발바닥으로 내려와야 알 수 있었다.
푸리나는 하융을 돌아보았다.
“하융?”
“듣고 있소.”
“창에서는 이 길을 어떻게 썼어?”
하융은 어둠 속의 골목을 바라보았다. 창 안의 장면이 겹쳤다. 더 넓은 길, 느린 수레, 덜 밀리는 사람들, 돌다리 앞에서 쉬는 노인들. 하지만 그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것이다. 저쪽에서는 이렇게 했다. 이쪽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몇 명이 덜 다친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발밑에는 진흙이 있었다. 창 안에서는 밟히지 않던 진흙이었다.
“저쪽에서는 이 골목을 쓰지 않았소. 수레를 조금 돌아가게 했소.”
그레이가 적었다.
“우회로 사용.”
“다만 그쪽 길도 확인해야 하오. 창에서는 넓어 보였으나, 실제로는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소.”
레이튼이 살짝 웃었다.
“좋습니다. 창이 우리를 성급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셨군요.”
하융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는 오늘도 질문하지 않고 칭찬하는 척 질문하시는구려.”
“아, 들켰습니까?”
죠니가 낮게 웃었다.
“교수는 원래 그래. 차를 주는 얼굴로 문을 열어놓고, 정신 차리면 네가 그 문을 지나가고 있지.”
레이튼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비유입니다. 다만 문을 지나는 것은 언제나 본인의 선택이지요.”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좋아. 그럼 우회로 확인. 하지만 지금 전부 가면 피난길 답사가 아니라 밤 산책이 너무 길어져. 먼저 돌다리까지 가자.”
그들이 다시 움직이자, 길은 시장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느 담장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넘어지며 붙잡았던 자리일지도 몰랐다. 어느 집 처마 밑에는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방향 표식처럼 보였지만, 너무 낮아서 키 큰 사람은 지나치기 쉬웠고, 너무 어두워서 아이는 보지 못할 수 있었다. 그레이는 천 조각의 위치를 기록했고, 푸리나는 그것을 보더니 자기 망토 끝을 잠시 만졌다. 죠니가 그 손짓을 보고 미리 말했다.
“망토 찢을 생각이면 하지 마. 네 망토가 표식이 되면, 내일 아침 시장 사람들이 전부 여왕님 망토 조각을 보러 몰릴걸.”
푸리나는 손을 멈췄다.
“그건…… 조금 재밌을지도.”
“재밌긴 한데 길 안내가 아니라 구경거리가 돼. 목적이 바뀌잖아.”
“아쉽네.”
“천은 창고에서 가져와. 왕이 망토로 길 표시하는 나라가 되면, 그레이가 장부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 곤란해져.”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확실히…… 관리 항목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망토는 생존.”
하융은 그 대화를 들으며 걸었다. 창 안의 피난길은 고요하고 질서 있었다. 그러나 이쪽 피난길에는 이런 대화가 있었다. 망토를 찢으려는 왕과, 그것을 말리는 기사단장과, 관리 항목을 걱정하는 행정관. 창 안의 길에는 없는 소리였다. 사소하고, 쓸데없고, 이상하게 사람을 붙드는 소리였다.
돌다리는 성문으로 향하는 작은 물길 위에 놓여 있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그 아래로 내려가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물소리만 어둠 속에서 낮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자체는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쪽 돌판이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난간 일부가 흔들렸다. 하융은 그 다리를 보는 순간 창 안의 장면을 떠올렸다. 저쪽 세계에서는 노인들이 이 다리 앞에서 쉬었다. 아이들은 수레 사이에 나뉘어 걸었고, 물통은 세 번째 굽이마다 있었다. 모든 것이 조금 더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돌다리 앞에는 앉을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쉬었다면 길가에 주저앉았을 것이고, 그들이 일어설 때 뒤의 수레가 멈췄을 것이다. 다리 위에 한 번에 두 수레가 오르면 돌판은 더 내려앉을지도 몰랐다. 하융은 다리 한가운데를 보았다. 창 안의 노인이 거기 앉아 있었다. 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물소리와 돌의 축축한 냄새가 있었다.
“이곳이오.”
그가 말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열었다.
“쉬는 지점으로 보신 곳입니까?”
“저쪽에서는 그랬소. 그러나 이쪽은 앉을 자리가 없소. 다리도 생각보다 낮게 가라앉았구려.”
죠니는 난간을 손으로 눌러보았다. 난간은 삐걱이며 조금 흔들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 번 더 눌렀다.
“이건 기대면 안 돼.”
푸리나가 바로 다가왔다.
“많이 위험해?”
“사람 하나 기대는 건 버틸 수도 있어. 문제는 피난길에서는 사람 하나만 기대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거지. 누가 넘어지면 셋이 같이 잡고, 뒤에서 누가 밀고, 그러다 한 번에 무게가 실려.”
“고쳐야겠네.”
“고쳐야지. 그리고 고치기 전까지는 여기서 쉬게 하면 안 돼. 쉬게 하려면 다리 앞이 아니라 저쪽 넓은 곳이 낫겠어.”
죠니는 손가락으로 다리보다 조금 앞선 빈터를 가리켰다. 잡초가 조금 자라 있었고, 버려진 나무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창 안에서는 보지 못한 자리였다. 하융은 그 빈터를 보았다. 창은 돌다리 앞의 장면을 보여주었지만, 현실의 다리는 사람을 받아줄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대신 현실에는 빈터가 있었다. 잡초와 나무상자와 낮은 벽. 완벽하지 않았지만, 사람 몇 명이 앉기에는 충분했다.
레이튼은 빈터와 다리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재며 순찰병에게 물었다.
“낮에 이쪽을 지나는 사람들은 다리를 보기 전까지 이 빈터를 알아차립니까?”
“아마…… 잘 못 봅니다. 수레가 다리 쪽으로 몰리면 시야가 막혀서요.”
“그렇다면 쉬는 곳은 있지만, 쉬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푸리나가 그 말을 듣고 빈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나무상자 하나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상자는 가벼웠지만, 완전히 썩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바로 세웠다.
“이 정도면 의자.”
그레이가 곧 따라왔다.
“그 상자는 못이 튀어나와 있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손을 멈췄다.
“오.”
죠니가 옆에서 상자를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못 하나를 가리켰다.
“있네. 그레이가 이겼다.”
“이긴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앉기 전에 발견했으면 이긴 거지.”
그레이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푸리나는 상자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좋아. 이 의자는 아직 리허설 탈락.”
“수리 후 재검토입니다.”
그레이가 정정했다.
“수리 후 재검토. 역시 그레이는 탈락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지 않아.”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빈터 한가운데 섰다. 창 안의 돌다리 앞에는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현실의 빈터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자를 고치고, 못을 빼고, 표식을 달고, 다리로 몰리는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하면. 창 안의 장면은 그대로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 비껴왔다. 돌다리 앞이 아니라, 돌다리 전의 빈터로. 노인의 자리도, 아이의 물통도, 수레의 줄도 조금씩 비껴와 이쪽 흙 위에서 다른 모양을 잡으려 했다.
하융은 잠시 숨을 멈췄다.
창외에는 길이 많았다. 길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엇갈려 있었고, 어느 길은 꽃빛으로 젖었으며 어느 길은 피와 진흙으로 막혔다. 그러나 금일今日, 나의 발밑에 있는 것은 한 자尺의 흙이요, 한 개의 돌이며, 한 사람의 숨이었소. 만리萬里의 가능성이 있어도, 발은 한 번에 한 걸음밖에 옮기지 못하오. 그러니 길은 하늘에 있지 않고, 발아래에서 조금씩 태어나는 것이었소.
그 한문 섞인 생각은 입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가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하융?”
하융은 빈터의 흙을 보다가 대답했다.
“이곳이 좋겠소.”
그레이가 물었다.
“쉬는 지점으로요?”
“그렇소. 창에서는 돌다리 앞이었으나, 현실에서는 이곳이 낫소. 다리 앞은 좁고, 난간은 믿기 어렵소. 이 빈터라면…… 손을 볼 수 있겠소.”
죠니가 빈터를 둘러보았다.
“나쁘지 않아. 수레가 다리로 바로 몰리는 것도 줄일 수 있겠네. 말도 여기서 한 번 숨 돌리면 덜 버틸 거고.”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덜 버텨?”
“아니, 덜 버틴다는 건 안 좋은 말이네. 덜 성질낸다고 하자.”
“죠니, 가끔 말보다 말 표현이 더 어려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레이튼은 빈터의 입구와 출구를 번갈아 보았다.
“표식을 세운다면 두 개가 필요하겠습니다. 하나는 이곳이 쉬는 자리라는 표시, 다른 하나는 다리 위에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수레 수를 제한하는 표시.”
그레이가 적었다.
“임시 휴식 지점. 상자 수리 또는 교체. 못 제거. 물통 배치. 다리 난간 수리 전까지 통행 제한. 수레 간격 조정.”
푸리나는 그레이의 기록판을 들여다보려다가, 글씨가 너무 작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 네 글씨는 가끔 비밀문서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 칭찬이야. 비밀문서처럼 믿음직하다는 뜻.”
“그건…… 칭찬입니까?”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식 칭찬이야. 가끔 해석이 필요해.”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이 길을 처음 걷는 사람이, 어디서 가장 먼저 불안해할까요?”
순찰병은 다리와 빈터를 번갈아 보았다.
“아마 다리 앞일 겁니다. 물소리가 들리고, 길이 좁아지고, 뒤에서는 수레가 밀어붙이니까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쉬는 지점은 몸만 쉬게 하는 곳이 아니라, 불안이 몰리기 전에 숨을 고르게 하는 곳이어야겠군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빈터 한가운데를 보았다.
“그럼 여기도 작은 무대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피난길의 휴식 지점이라면…… 무대라는 표현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무대 말고, 숨 고르는 자리.”
그레이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 표현이 좋습니다.”
“채택.”
죠니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이름이 다 정상적으로 가네. 좋은 징조야.”
푸리나가 그를 흘겨보았다.
“내 작명 감각이 평소엔 이상하다는 뜻이야?”
“가끔은 너무 멀리 가. 그런데 뭐, 멀리 가는 사람이 있어야 가까운 이름도 고르지.”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 웃었다.
“좋아. 그건 칭찬으로 받을게.”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창 안의 피난길은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쪽 길은 시끄럽고, 축축하고, 상자는 못이 튀어나와 있었고, 난간은 흔들렸으며, 이름 하나를 정하는 데도 여러 사람이 말을 보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란 속에서 길이 조금씩 생겨났다. 창 안에서 완성되어 있던 길보다 느리고, 더럽고, 불편했지만, 누군가 손을 대고 있었다. 푸리나는 이름을 붙이고, 그레이는 고칠 항목을 적고, 레이튼은 불안을 묻고, 죠니는 난간을 눌러보고, 하융은 창과 흙 사이에서 조금 늦게 도착한 장면을 옮겨놓았다.
그때 다리 건너편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순찰병이 등불을 들고 앞서갔다. 다리 너머 그늘진 벽 아래, 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손에는 찢어진 천 조각을 쥐고 있었고, 무릎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더 울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가 가장 먼저 몸을 낮췄다.
“괜찮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더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녀는 기록판을 닫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천천히 손을 내렸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야. 다친 곳이 있니?”
아이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하지만 손은 천 조각을 더 꽉 쥐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 천은 길 표시였습니까?”
아이는 놀란 듯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아이의 손에 있는 천 조각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저 자기 목소리만 조금 낮췄다.
“혹시 누군가가 그 천을 따라오라고 했나요?”
아이는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파란 천을 따라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건…….”
그가 손을 폈다. 천 조각은 파란색이었지만, 진흙과 물에 젖어 거의 검게 보였다. 낮에는 표식이었을 것이다. 밤에는 그림자와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푸리나는 아이의 손에 있는 천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망토를 보았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망토 찢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얼굴에 썼어.”
“너는 왜 내 얼굴을 그렇게 잘 읽어?”
“오래 봤으니까.”
푸리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망토 대신 머리끈 하나를 풀었다. 푸른빛이 조금 도는 리본이었다. 잠옷과 망토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그것만은 낮의 무대에서 떨어져 나온 소품 같았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그건…….”
“괜찮아. 망토는 안 찢었잖아.”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맞네. 협상안으로는 나쁘지 않아.”
푸리나는 리본을 아이에게 바로 건네지 않았다. 먼저 다리 옆, 빈터로 들어가는 낮은 나뭇가지에 묶었다. 등불이 닿자 푸른 리본이 어둠 속에서 작게 빛났다. 창에서 흘러온 시장의 노랑과 우물의 푸른빛이 그 리본 위에 잠시 섞였다. 아이는 그 빛을 보았다. 울음을 멈춘 얼굴은 아직 겁에 질려 있었지만, 눈은 리본을 따라 움직였다.
“자.”
푸리나가 말했다.
“이제 파란 천은 저기야. 그리고 저기로 가면 쉬는 자리. 내일은 더 잘 보이게 해둘게.”
아이는 아주 작게 물었다.
“엄마도 볼 수 있어요?”
푸리나는 대답하기 전에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성함을 알려줄 수 있니?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아이는 더듬더듬 이름을 말했다. 그레이는 그것을 한 번 듣고, 다시 물었다. 아이는 다시 말했다. 그레이는 세 번째로 확인했다. 아이가 조금 지친 얼굴을 하자,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틀리지 않게 적고 싶어서.”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에서 천 조각을 조금 덜 세게 쥐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 안의 피난길에서는 아이들이 수레 사이에 나뉘어 걷고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았다. 이쪽의 아이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이쪽에는 푸리나가 묶은 푸른 리본이 있었고, 그레이가 세 번 확인한 이름이 있었으며, 레이튼의 질문과 죠니의 낮은 한숨과 순찰병의 등불이 있었다.
하융은 창 안의 아이와 현실의 아이를 번갈아 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선이 오래 갈라지지 않았다. 현실의 아이가 훌쩍이며 리본을 보는 바람에, 창 안의 아이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하융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융 경.”
레이튼이 낮게 불렀다.
“듣고 있소.”
“방금 무엇을 보셨습니까?”
하융은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푸른 리본을 보았다.
“길을 잃은 아이를 보았소.”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아마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죠니는 다리 난간 옆에 서서 아이가 걸어올 방향을 살폈다.
“내일은 저쪽에도 등불 하나 더 둬야겠네. 파란 천이 밤에 검어지면, 그건 안내가 아니라 속임수야.”
그레이는 곧 적었다.
“야간 표식 색상 재검토. 등불 또는 반사 천 필요. 아이 동선 확인.”
푸리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 수 있겠어?”
아이는 푸리나의 손을 보다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푸리나는 아이의 손을 너무 세게 잡지 않았다.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손이 아니라, 돌다리를 건널 때 옆에 있어주는 손이었다.
하융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돌다리는 여전히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난간은 믿기 어려웠으며, 물소리는 어두웠다. 그러나 푸른 리본은 빈터의 입구에서 흔들렸다. 그것은 창 안에는 없던 빛이었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현실의 천에 묶여, 이제 누군가의 길 표시가 되고 있었다.
빈터에 도착하자 아이는 그제야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는 서둘러 달래지 않았다. 아이가 울 수 있게 조금 기다렸다. 죠니는 주머니에서 말린 과일 하나를 꺼내 푸리나에게 건넸고, 푸리나는 그것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아이는 망설이다가 받았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내 몫이었는데.”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진짜?”
“아니. 그냥 말해본 거야. 애한테 준 걸 다시 뺏으면 내가 너무 이상한 놈이 되잖아.”
아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약했지만, 울음만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환하게 말했다.
“좋아. 방금 그거 봤지? 이건 거의 박수 직전이야.”
죠니가 말했다.
“그걸 그렇게 키우면 애가 부담스러워해.”
“알았어. 작은 박수 직전.”
“그것도 좀.”
그레이가 조용히 아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지금은 웃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입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융은 그 말을 들었다. 웃지 않아도 된다는 말. 울어도 된다는 말보다 더 작은 말이었다. 그러나 피난길에서는 그런 작은 말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창 안의 세계에서는 아이가 길을 잃지 않았으므로, 그런 말을 들을 일도 없었다. 이쪽의 아이는 길을 잃었고, 그래서 그 말을 들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질문은 아직도 멀리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융이 그 질문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말린 과일을 천천히 씹는 것을 보았다. 푸른 리본이 등불 아래 흔들렸고, 그레이의 펜이 이름 하나를 조심스럽게 마무리했다. 죠니는 다리 쪽을 다시 확인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아이의 어머니가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은 방향을 묻고 있었다. 푸리나는 아이의 옆에서 괜히 먼지 위에 작은 별을 그렸다가, 아이가 보는 것을 확인하고 별 옆에 더 작은 빵을 그렸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창에서 본 길에는 이 아이가 없었소.”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소. 길은 정돈되어 있었고, 수레는 덜 막혔고, 표식은 제자리에 있었소. 그래서 이 아이가 길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는 말을 멈췄다. 설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명으로 만들면 아이의 울음도, 리본도, 돌다리의 물소리도 너무 빨리 의미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레이가 대신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이 아이를 찾았습니다.”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융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다. 성문 쪽 창고에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반쯤 넋이 나가 찾고 있었다고 했다. 순찰병이 달려가 데려왔고, 여인은 아이를 보자마자 무릎이 풀리듯 주저앉았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쥔 채 어머니에게 안겼다. 여인은 푸리나를 알아보고 무언가 예를 갖추려 했으나, 푸리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나중에. 지금은 아이부터 안아.”
여인은 울면서 아이를 안았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조용해졌다. 죠니는 괜히 다리 쪽을 보았고, 레이튼은 등불을 조금 낮췄으며, 그레이는 이름 옆에 작은 표시를 하나 했다. 하융은 그 표시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아마 확인 완료, 혹은 가족 재회, 혹은 그레이만 알아보는 더 조용한 말일 것이다.
돌다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푸른 리본이 흔들렸다.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더 나은 피난길의 빛은 아직도 어딘가에 있었다. 그 빛은 현실의 다리 위에 내려앉아, 내려앉은 돌판과 흔들리는 난간과 아이의 젖은 신발을 비췄다. 빛이 있다고 길이 저절로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는 조금 더 잘 보였다.
하융은 다리 앞 빈터를 다시 보았다.
“이곳에 표식을 세우면 좋겠소.”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푸른색만으로는 부족하오. 밤에는 검어지오.”
“반사되는 천이나 등불을 함께 쓰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표식을 놓쳤을 때 물을 사람도 필요하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질문은 순찰 동선으로 이어지겠군요.”
죠니는 난간을 한 번 더 눌렀다.
“그리고 이 난간은 아침까지 기대지 말라고 표시해. 내가 보기엔 사람보다 먼저 이쪽이 쉬고 싶어 해.”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숨 고르는 자리, 푸른 리본, 등불, 난간 수리, 순찰 동선. 그리고…….”
그녀는 아이와 어머니를 보았다.
“말린 과일도 조금.”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그건 네 예산에서 내.”
“알았어.”
“너 진짜로 할 생각이지?”
“응.”
죠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많이는 말고. 배고픈 사람 앞에서 간식만 나눠주면 괜히 더 슬퍼질 때도 있어. 빵이랑 같이 줘.”
푸리나는 그 말을 곧장 받아들였다.
“빵이랑 같이. 좋아.”
그레이가 적었다.
“아동 대상 소량 간식은 배급과 함께. 단독 배포 금지.”
죠니가 중얼거렸다.
“내 농담이 행정 문구가 되는 건 아직도 좀 적응이 안 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농담이라도 쓸모가 있으면…… 적습니다.”
“그럼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죠니, 축하해. 네 농담이 정책이 됐어.”
“별로 받고 싶지 않은 영광이야.”
하융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아주 조금 났다. 웃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짧게 흩어졌다. 그는 창 안의 피난길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더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창은 그를 잡아당기기보다, 현실의 빈터 위로 옅은 흙빛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푸른 리본을 보았고, 아이의 이름을 보았고, 난간의 흔들림을 보았다.
그는 창 너머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이쪽 길에서, 돌 하나와 리본 하나와 아이의 젖은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그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비껴간 창가의 날개》
##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 2막 — 피난길의 돌
시장을 지나 성문 쪽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밤이 깊어서만은 아니었다. 피난민들이 지나간 길에는 소리가 남지 않고 냄새가 남았다. 젖은 짚 냄새, 오래 끌린 수레바퀴의 흙 냄새, 급하게 꺼낸 가재도구에서 묻어난 집의 냄새, 그리고 사람들이 오래 서 있었던 자리 특유의 눅눅한 체온. 하융은 그 냄새들을 맡으며 걸었다. 창 안의 피난길은 더 정돈되어 있었다. 수레는 줄을 지켰고, 노인들은 그늘에서 쉬었으며, 아이들은 진창을 밟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길은 굽이마다 한 번씩 흐트러졌다. 어느 집 담벼락에는 수레가 긁고 간 자국이 있었고, 길모퉁이에는 떨어진 짐끈이 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푸리나는 앞서 걷다가 몇 걸음마다 멈췄다. 처음에는 창에서 본 길과 현실의 길을 대조하듯 보였지만, 곧 그녀는 벽의 갈라진 틈, 낮은 처마, 기울어진 표지목 같은 것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바닥을 점검하는 극장주의 눈과 닮아 있었다. 어디에 조명을 두면 사람이 덜 헤맬지, 어느 구석에서 배우가 넘어질지, 어느 문으로 나가면 객석이 그걸 퇴장으로 알아볼지 재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그 얼굴을 보다가, 창 안의 다른 푸리나를 떠올렸다. 그 푸리나는 같은 길을 조금 더 일찍 고쳤고, 그래서 어떤 아이가 넘어지지 않았다. 현실의 푸리나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낮은 처마 아래를 직접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 너무 어둡네.”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가 곧 기록판을 열었다.
“등불을 하나 더 둘 수 있습니다. 다만 기름 배급량을 확인해야 합니다.”
“기름이 부족하면?”
“성문 창고에서 남는 폐목을 받아 임시 횃대를 세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만 불씨 관리 인력이 필요합니다.”
“좋아. 그럼 불씨 관리자를 붙이고, 표식은 낮에도 보이게 하자. 밤에만 길이 헷갈리는 건 아니니까.”
죠니는 길모퉁이에 서서 수레바퀴 자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접시를 시장에 맡기고 왔지만, 손은 여전히 뭔가를 들고 있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비어 있었다. 그가 발끝으로 바퀴 자국 옆의 진흙을 눌렀다. 진흙은 생각보다 깊게 들어갔다.
“여긴 수레가 빠지겠네.”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입니까?”
“빈 수레면 몰라도, 짐 실은 수레는 싫어할 거야. 수레꾼은 더 싫어할 거고. 말은 아예 표정으로 욕할걸.”
푸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말이 표정으로 욕해?”
“해. 사람보다 솔직해서 문제지.”
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 길모퉁이의 폭을 살폈다. 그는 직접 결론을 말하지 않고, 옆에 서 있던 순찰병에게 물었다.
“낮에 이 길에서 수레가 멈춘 일이 있었습니까?”
순찰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바퀴가 빠졌고, 한 번은 앞쪽 수레가 멈추는 바람에 뒤가 전부 막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돌아갔습니까?”
“대부분 이 골목으로…… 그런데 이 골목은 좁아서 아이들이 밀렸습니다.”
레이튼은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길은 빠른 길이 아니라, 빠른 길처럼 보이는 길이었군요.”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창 안의 피난길에서는 이 골목을 쓰지 않았다. 그 세계의 수레들은 조금 먼 길을 돌아갔다. 멀지만 넓은 길이었다. 창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창은 이 진흙의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수레꾼이 왜 짧은 길을 고집했는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무엇을 무서워했는지도, 말이 어느 그림자 앞에서 귀를 젖히는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창은 길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길의 무게는 발바닥으로 내려와야 알 수 있었다.
푸리나는 하융을 돌아보았다.
“하융?”
“듣고 있소.”
“창에서는 이 길을 어떻게 썼어?”
하융은 어둠 속의 골목을 바라보았다. 창 안의 장면이 겹쳤다. 더 넓은 길, 느린 수레, 덜 밀리는 사람들, 돌다리 앞에서 쉬는 노인들. 하지만 그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것이다. 저쪽에서는 이렇게 했다. 이쪽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몇 명이 덜 다친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발밑에는 진흙이 있었다. 창 안에서는 밟히지 않던 진흙이었다.
“저쪽에서는 이 골목을 쓰지 않았소. 수레를 조금 돌아가게 했소.”
그레이가 적었다.
“우회로 사용.”
“다만 그쪽 길도 확인해야 하오. 창에서는 넓어 보였으나, 실제로는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소.”
레이튼이 살짝 웃었다.
“좋습니다. 창이 우리를 성급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셨군요.”
하융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는 오늘도 질문하지 않고 칭찬하는 척 질문하시는구려.”
“아, 들켰습니까?”
죠니가 낮게 웃었다.
“교수는 원래 그래. 차를 주는 얼굴로 문을 열어놓고, 정신 차리면 네가 그 문을 지나가고 있지.”
레이튼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비유입니다. 다만 문을 지나는 것은 언제나 본인의 선택이지요.”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좋아. 그럼 우회로 확인. 하지만 지금 전부 가면 피난길 답사가 아니라 밤 산책이 너무 길어져. 먼저 돌다리까지 가자.”
그들이 다시 움직이자, 길은 시장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느 담장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넘어지며 붙잡았던 자리일지도 몰랐다. 어느 집 처마 밑에는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방향 표식처럼 보였지만, 너무 낮아서 키 큰 사람은 지나치기 쉬웠고, 너무 어두워서 아이는 보지 못할 수 있었다. 그레이는 천 조각의 위치를 기록했고, 푸리나는 그것을 보더니 자기 망토 끝을 잠시 만졌다. 죠니가 그 손짓을 보고 미리 말했다.
“망토 찢을 생각이면 하지 마. 네 망토가 표식이 되면, 내일 아침 시장 사람들이 전부 여왕님 망토 조각을 보러 몰릴걸.”
푸리나는 손을 멈췄다.
“그건…… 조금 재밌을지도.”
“재밌긴 한데 길 안내가 아니라 구경거리가 돼. 목적이 바뀌잖아.”
“아쉽네.”
“천은 창고에서 가져와. 왕이 망토로 길 표시하는 나라가 되면, 그레이가 장부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 곤란해져.”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확실히…… 관리 항목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망토는 생존.”
하융은 그 대화를 들으며 걸었다. 창 안의 피난길은 고요하고 질서 있었다. 그러나 이쪽 피난길에는 이런 대화가 있었다. 망토를 찢으려는 왕과, 그것을 말리는 기사단장과, 관리 항목을 걱정하는 행정관. 창 안의 길에는 없는 소리였다. 사소하고, 쓸데없고, 이상하게 사람을 붙드는 소리였다.
돌다리는 성문으로 향하는 작은 물길 위에 놓여 있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그 아래로 내려가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물소리만 어둠 속에서 낮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자체는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쪽 돌판이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난간 일부가 흔들렸다. 하융은 그 다리를 보는 순간 창 안의 장면을 떠올렸다. 저쪽 세계에서는 노인들이 이 다리 앞에서 쉬었다. 아이들은 수레 사이에 나뉘어 걸었고, 물통은 세 번째 굽이마다 있었다. 모든 것이 조금 더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돌다리 앞에는 앉을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쉬었다면 길가에 주저앉았을 것이고, 그들이 일어설 때 뒤의 수레가 멈췄을 것이다. 다리 위에 한 번에 두 수레가 오르면 돌판은 더 내려앉을지도 몰랐다. 하융은 다리 한가운데를 보았다. 창 안의 노인이 거기 앉아 있었다. 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물소리와 돌의 축축한 냄새가 있었다.
“이곳이오.”
그가 말했다.
그레이가 기록판을 열었다.
“쉬는 지점으로 보신 곳입니까?”
“저쪽에서는 그랬소. 그러나 이쪽은 앉을 자리가 없소. 다리도 생각보다 낮게 가라앉았구려.”
죠니는 난간을 손으로 눌러보았다. 난간은 삐걱이며 조금 흔들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 번 더 눌렀다.
“이건 기대면 안 돼.”
푸리나가 바로 다가왔다.
“많이 위험해?”
“사람 하나 기대는 건 버틸 수도 있어. 문제는 피난길에서는 사람 하나만 기대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거지. 누가 넘어지면 셋이 같이 잡고, 뒤에서 누가 밀고, 그러다 한 번에 무게가 실려.”
“고쳐야겠네.”
“고쳐야지. 그리고 고치기 전까지는 여기서 쉬게 하면 안 돼. 쉬게 하려면 다리 앞이 아니라 저쪽 넓은 곳이 낫겠어.”
죠니는 손가락으로 다리보다 조금 앞선 빈터를 가리켰다. 잡초가 조금 자라 있었고, 버려진 나무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창 안에서는 보지 못한 자리였다. 하융은 그 빈터를 보았다. 창은 돌다리 앞의 장면을 보여주었지만, 현실의 다리는 사람을 받아줄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대신 현실에는 빈터가 있었다. 잡초와 나무상자와 낮은 벽. 완벽하지 않았지만, 사람 몇 명이 앉기에는 충분했다.
레이튼은 빈터와 다리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재며 순찰병에게 물었다.
“낮에 이쪽을 지나는 사람들은 다리를 보기 전까지 이 빈터를 알아차립니까?”
“아마…… 잘 못 봅니다. 수레가 다리 쪽으로 몰리면 시야가 막혀서요.”
“그렇다면 쉬는 곳은 있지만, 쉬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푸리나가 그 말을 듣고 빈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나무상자 하나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상자는 가벼웠지만, 완전히 썩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바로 세웠다.
“이 정도면 의자.”
그레이가 곧 따라왔다.
“그 상자는 못이 튀어나와 있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손을 멈췄다.
“오.”
죠니가 옆에서 상자를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못 하나를 가리켰다.
“있네. 그레이가 이겼다.”
“이긴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앉기 전에 발견했으면 이긴 거지.”
그레이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푸리나는 상자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좋아. 이 의자는 아직 리허설 탈락.”
“수리 후 재검토입니다.”
그레이가 정정했다.
“수리 후 재검토. 역시 그레이는 탈락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지 않아.”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빈터 한가운데 섰다. 창 안의 돌다리 앞에는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현실의 빈터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자를 고치고, 못을 빼고, 표식을 달고, 다리로 몰리는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하면. 창 안의 장면은 그대로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 비껴왔다. 돌다리 앞이 아니라, 돌다리 전의 빈터로. 노인의 자리도, 아이의 물통도, 수레의 줄도 조금씩 비껴와 이쪽 흙 위에서 다른 모양을 잡으려 했다.
하융은 잠시 숨을 멈췄다.
창외에는 길이 많았다. 길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엇갈려 있었고, 어느 길은 꽃빛으로 젖었으며 어느 길은 피와 진흙으로 막혔다. 그러나 금일今日, 나의 발밑에 있는 것은 한 자尺의 흙이요, 한 개의 돌이며, 한 사람의 숨이었소. 만리萬里의 가능성이 있어도, 발은 한 번에 한 걸음밖에 옮기지 못하오. 그러니 길은 하늘에 있지 않고, 발아래에서 조금씩 태어나는 것이었소.
그 한문 섞인 생각은 입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가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하융?”
하융은 빈터의 흙을 보다가 대답했다.
“이곳이 좋겠소.”
그레이가 물었다.
“쉬는 지점으로요?”
“그렇소. 창에서는 돌다리 앞이었으나, 현실에서는 이곳이 낫소. 다리 앞은 좁고, 난간은 믿기 어렵소. 이 빈터라면…… 손을 볼 수 있겠소.”
죠니가 빈터를 둘러보았다.
“나쁘지 않아. 수레가 다리로 바로 몰리는 것도 줄일 수 있겠네. 말도 여기서 한 번 숨 돌리면 덜 버틸 거고.”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덜 버텨?”
“아니, 덜 버틴다는 건 안 좋은 말이네. 덜 성질낸다고 하자.”
“죠니, 가끔 말보다 말 표현이 더 어려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레이튼은 빈터의 입구와 출구를 번갈아 보았다.
“표식을 세운다면 두 개가 필요하겠습니다. 하나는 이곳이 쉬는 자리라는 표시, 다른 하나는 다리 위에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수레 수를 제한하는 표시.”
그레이가 적었다.
“임시 휴식 지점. 상자 수리 또는 교체. 못 제거. 물통 배치. 다리 난간 수리 전까지 통행 제한. 수레 간격 조정.”
푸리나는 그레이의 기록판을 들여다보려다가, 글씨가 너무 작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 네 글씨는 가끔 비밀문서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 칭찬이야. 비밀문서처럼 믿음직하다는 뜻.”
“그건…… 칭찬입니까?”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식 칭찬이야. 가끔 해석이 필요해.”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이 길을 처음 걷는 사람이, 어디서 가장 먼저 불안해할까요?”
순찰병은 다리와 빈터를 번갈아 보았다.
“아마 다리 앞일 겁니다. 물소리가 들리고, 길이 좁아지고, 뒤에서는 수레가 밀어붙이니까요.”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쉬는 지점은 몸만 쉬게 하는 곳이 아니라, 불안이 몰리기 전에 숨을 고르게 하는 곳이어야겠군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빈터 한가운데를 보았다.
“그럼 여기도 작은 무대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피난길의 휴식 지점이라면…… 무대라는 표현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무대 말고, 숨 고르는 자리.”
그레이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 표현이 좋습니다.”
“채택.”
죠니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이름이 다 정상적으로 가네. 좋은 징조야.”
푸리나가 그를 흘겨보았다.
“내 작명 감각이 평소엔 이상하다는 뜻이야?”
“가끔은 너무 멀리 가. 그런데 뭐, 멀리 가는 사람이 있어야 가까운 이름도 고르지.”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 웃었다.
“좋아. 그건 칭찬으로 받을게.”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창 안의 피난길은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쪽 길은 시끄럽고, 축축하고, 상자는 못이 튀어나와 있었고, 난간은 흔들렸으며, 이름 하나를 정하는 데도 여러 사람이 말을 보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란 속에서 길이 조금씩 생겨났다. 창 안에서 완성되어 있던 길보다 느리고, 더럽고, 불편했지만, 누군가 손을 대고 있었다. 푸리나는 이름을 붙이고, 그레이는 고칠 항목을 적고, 레이튼은 불안을 묻고, 죠니는 난간을 눌러보고, 하융은 창과 흙 사이에서 조금 늦게 도착한 장면을 옮겨놓았다.
그때 다리 건너편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순찰병이 등불을 들고 앞서갔다. 다리 너머 그늘진 벽 아래, 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손에는 찢어진 천 조각을 쥐고 있었고, 무릎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더 울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가 가장 먼저 몸을 낮췄다.
“괜찮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더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녀는 기록판을 닫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천천히 손을 내렸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야. 다친 곳이 있니?”
아이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하지만 손은 천 조각을 더 꽉 쥐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 천은 길 표시였습니까?”
아이는 놀란 듯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아이의 손에 있는 천 조각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저 자기 목소리만 조금 낮췄다.
“혹시 누군가가 그 천을 따라오라고 했나요?”
아이는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파란 천을 따라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건…….”
그가 손을 폈다. 천 조각은 파란색이었지만, 진흙과 물에 젖어 거의 검게 보였다. 낮에는 표식이었을 것이다. 밤에는 그림자와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푸리나는 아이의 손에 있는 천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망토를 보았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망토 찢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얼굴에 썼어.”
“너는 왜 내 얼굴을 그렇게 잘 읽어?”
“오래 봤으니까.”
푸리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망토 대신 머리끈 하나를 풀었다. 푸른빛이 조금 도는 리본이었다. 잠옷과 망토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그것만은 낮의 무대에서 떨어져 나온 소품 같았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그건…….”
“괜찮아. 망토는 안 찢었잖아.”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맞네. 협상안으로는 나쁘지 않아.”
푸리나는 리본을 아이에게 바로 건네지 않았다. 먼저 다리 옆, 빈터로 들어가는 낮은 나뭇가지에 묶었다. 등불이 닿자 푸른 리본이 어둠 속에서 작게 빛났다. 창에서 흘러온 시장의 노랑과 우물의 푸른빛이 그 리본 위에 잠시 섞였다. 아이는 그 빛을 보았다. 울음을 멈춘 얼굴은 아직 겁에 질려 있었지만, 눈은 리본을 따라 움직였다.
“자.”
푸리나가 말했다.
“이제 파란 천은 저기야. 그리고 저기로 가면 쉬는 자리. 내일은 더 잘 보이게 해둘게.”
아이는 아주 작게 물었다.
“엄마도 볼 수 있어요?”
푸리나는 대답하기 전에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성함을 알려줄 수 있니?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아이는 더듬더듬 이름을 말했다. 그레이는 그것을 한 번 듣고, 다시 물었다. 아이는 다시 말했다. 그레이는 세 번째로 확인했다. 아이가 조금 지친 얼굴을 하자,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틀리지 않게 적고 싶어서.”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에서 천 조각을 조금 덜 세게 쥐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 안의 피난길에서는 아이들이 수레 사이에 나뉘어 걷고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았다. 이쪽의 아이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이쪽에는 푸리나가 묶은 푸른 리본이 있었고, 그레이가 세 번 확인한 이름이 있었으며, 레이튼의 질문과 죠니의 낮은 한숨과 순찰병의 등불이 있었다.
하융은 창 안의 아이와 현실의 아이를 번갈아 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선이 오래 갈라지지 않았다. 현실의 아이가 훌쩍이며 리본을 보는 바람에, 창 안의 아이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하융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융 경.”
레이튼이 낮게 불렀다.
“듣고 있소.”
“방금 무엇을 보셨습니까?”
하융은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푸른 리본을 보았다.
“길을 잃은 아이를 보았소.”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아마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죠니는 다리 난간 옆에 서서 아이가 걸어올 방향을 살폈다.
“내일은 저쪽에도 등불 하나 더 둬야겠네. 파란 천이 밤에 검어지면, 그건 안내가 아니라 속임수야.”
그레이는 곧 적었다.
“야간 표식 색상 재검토. 등불 또는 반사 천 필요. 아이 동선 확인.”
푸리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 수 있겠어?”
아이는 푸리나의 손을 보다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푸리나는 아이의 손을 너무 세게 잡지 않았다.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손이 아니라, 돌다리를 건널 때 옆에 있어주는 손이었다.
하융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돌다리는 여전히 조금 내려앉아 있었고, 난간은 믿기 어려웠으며, 물소리는 어두웠다. 그러나 푸른 리본은 빈터의 입구에서 흔들렸다. 그것은 창 안에는 없던 빛이었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현실의 천에 묶여, 이제 누군가의 길 표시가 되고 있었다.
빈터에 도착하자 아이는 그제야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레이는 서둘러 달래지 않았다. 아이가 울 수 있게 조금 기다렸다. 죠니는 주머니에서 말린 과일 하나를 꺼내 푸리나에게 건넸고, 푸리나는 그것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아이는 망설이다가 받았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내 몫이었는데.”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진짜?”
“아니. 그냥 말해본 거야. 애한테 준 걸 다시 뺏으면 내가 너무 이상한 놈이 되잖아.”
아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약했지만, 울음만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환하게 말했다.
“좋아. 방금 그거 봤지? 이건 거의 박수 직전이야.”
죠니가 말했다.
“그걸 그렇게 키우면 애가 부담스러워해.”
“알았어. 작은 박수 직전.”
“그것도 좀.”
그레이가 조용히 아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지금은 웃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입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융은 그 말을 들었다. 웃지 않아도 된다는 말. 울어도 된다는 말보다 더 작은 말이었다. 그러나 피난길에서는 그런 작은 말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창 안의 세계에서는 아이가 길을 잃지 않았으므로, 그런 말을 들을 일도 없었다. 이쪽의 아이는 길을 잃었고, 그래서 그 말을 들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질문은 아직도 멀리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융이 그 질문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말린 과일을 천천히 씹는 것을 보았다. 푸른 리본이 등불 아래 흔들렸고, 그레이의 펜이 이름 하나를 조심스럽게 마무리했다. 죠니는 다리 쪽을 다시 확인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아이의 어머니가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은 방향을 묻고 있었다. 푸리나는 아이의 옆에서 괜히 먼지 위에 작은 별을 그렸다가, 아이가 보는 것을 확인하고 별 옆에 더 작은 빵을 그렸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창에서 본 길에는 이 아이가 없었소.”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소. 길은 정돈되어 있었고, 수레는 덜 막혔고, 표식은 제자리에 있었소. 그래서 이 아이가 길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는 말을 멈췄다. 설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명으로 만들면 아이의 울음도, 리본도, 돌다리의 물소리도 너무 빨리 의미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레이가 대신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이 아이를 찾았습니다.”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융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다. 성문 쪽 창고에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반쯤 넋이 나가 찾고 있었다고 했다. 순찰병이 달려가 데려왔고, 여인은 아이를 보자마자 무릎이 풀리듯 주저앉았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쥔 채 어머니에게 안겼다. 여인은 푸리나를 알아보고 무언가 예를 갖추려 했으나, 푸리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나중에. 지금은 아이부터 안아.”
여인은 울면서 아이를 안았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조용해졌다. 죠니는 괜히 다리 쪽을 보았고, 레이튼은 등불을 조금 낮췄으며, 그레이는 이름 옆에 작은 표시를 하나 했다. 하융은 그 표시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아마 확인 완료, 혹은 가족 재회, 혹은 그레이만 알아보는 더 조용한 말일 것이다.
돌다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푸른 리본이 흔들렸다. 창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더 나은 피난길의 빛은 아직도 어딘가에 있었다. 그 빛은 현실의 다리 위에 내려앉아, 내려앉은 돌판과 흔들리는 난간과 아이의 젖은 신발을 비췄다. 빛이 있다고 길이 저절로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는 조금 더 잘 보였다.
하융은 다리 앞 빈터를 다시 보았다.
“이곳에 표식을 세우면 좋겠소.”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푸른색만으로는 부족하오. 밤에는 검어지오.”
“반사되는 천이나 등불을 함께 쓰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표식을 놓쳤을 때 물을 사람도 필요하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질문은 순찰 동선으로 이어지겠군요.”
죠니는 난간을 한 번 더 눌렀다.
“그리고 이 난간은 아침까지 기대지 말라고 표시해. 내가 보기엔 사람보다 먼저 이쪽이 쉬고 싶어 해.”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숨 고르는 자리, 푸른 리본, 등불, 난간 수리, 순찰 동선. 그리고…….”
그녀는 아이와 어머니를 보았다.
“말린 과일도 조금.”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그건 네 예산에서 내.”
“알았어.”
“너 진짜로 할 생각이지?”
“응.”
죠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많이는 말고. 배고픈 사람 앞에서 간식만 나눠주면 괜히 더 슬퍼질 때도 있어. 빵이랑 같이 줘.”
푸리나는 그 말을 곧장 받아들였다.
“빵이랑 같이. 좋아.”
그레이가 적었다.
“아동 대상 소량 간식은 배급과 함께. 단독 배포 금지.”
죠니가 중얼거렸다.
“내 농담이 행정 문구가 되는 건 아직도 좀 적응이 안 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농담이라도 쓸모가 있으면…… 적습니다.”
“그럼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죠니, 축하해. 네 농담이 정책이 됐어.”
“별로 받고 싶지 않은 영광이야.”
하융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아주 조금 났다. 웃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짧게 흩어졌다. 그는 창 안의 피난길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더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창은 그를 잡아당기기보다, 현실의 빈터 위로 옅은 흙빛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푸른 리본을 보았고, 아이의 이름을 보았고, 난간의 흔들림을 보았다.
그는 창 너머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이쪽 길에서, 돌 하나와 리본 하나와 아이의 젖은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그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