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25여관◆zAR16hM8he(7420cdcd)2026-05-24 (일) 02:31:23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3막 — 우물가의 이름
우물은 피난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돌다리에서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낮은 담장과 기울어진 나무 십자가 사이에 오래된 우물 하나가 나왔다. 낮에는 사람들이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갔을 것이다. 밤에는 달라졌다. 골목은 좁았고, 벽은 젖어 있었으며, 우물의 돌턱에는 오래 손이 닿은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물을 길을 때마다 짚고, 기대고, 숨을 고르고, 때로는 두레박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내려다보았을 자리였다. 하융은 우물 앞에서 멈췄다. 창은 이미 열려 있었다. 이번에는 새로 열리는 소리도 없었다. 우물은 현실에도 있었고, 창 너머에도 있었으며, 두 우물의 물빛은 너무 닮아 있었다.
푸리나는 곧장 우물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하융의 발이 멈춘 것을 보고, 한 걸음 뒤에서 섰다. 죠니도 말없이 골목 입구 쪽을 살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등불을 조금 낮춰 들게 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열지 않았다. 먼저 하융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 작은 지연이 하융에게는 느껴졌다. 기록하기 전에 사람을 보는 손. 적기 전에 숨을 확인하는 눈.
“이곳입니까?”
그레이가 물었다.
“그렇소.”
하융은 우물의 돌턱을 보았다. 창 안에서는 아이가 그 돌턱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아이는 두레박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며 발끝을 까딱였고, 옆의 아이는 웃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다음 장면에서 두레박의 물은 작은 그릇에 담겼다. 그 다음 장면에서 아이는 누워 있었다. 하융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이 맑아 보였소.”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 말이 별로 좋은 시작은 아닌데.”
“맑았소. 너무 맑았소. 물 위에 아주 얇은 막이 있었고, 두레박 줄에는 검은 얼룩이 있었소. 처음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레이가 그제야 기록판을 열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소리는 아주 작았다.
“두레박 줄의 얼룩. 물 위의 막. 냄새는 어떠했습니까?”
하융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현실의 물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등불을 가까이 가져가자 빛이 물 위에 흩어졌다. 잠깐, 창 너머의 물빛과 현실의 물빛이 겹쳤다. 하융은 그 겹침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냄새는 피할 수 없었다. 젖은 돌, 오래된 나무, 가라앉은 흙, 그리고 희미하게 신맛이 나는 무언가.
“신 냄새가 조금 있소. 썩은 냄새와는 다르오. 물이 오래 고였거나, 무언가 흘러든 것 같소.”
그레이는 적었다.
“사용 중단이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바로 물었다.
“지금?”
“네. 확인 전까지는 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죠니가 골목 밖을 보았다.
“문제는 대체 물이야. 그냥 쓰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른 데로 몰릴 거야. 밤에 물 때문에 몰리면 다치기 딱 좋고.”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까운 대체 급수 지점을 확인해야겠습니다. 그 뒤에 이 우물은 점검 중이라고 알리는 편이 좋겠군요. ‘오염’이라는 말을 먼저 쓰면, 공포가 우리보다 빨리 달릴 겁니다.”
푸리나는 우물의 돌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과장된 표정이 없었다. 무대를 앞둔 배우의 얼굴도 아니었고, 장난을 꾸미는 극장주의 얼굴도 아니었다. 등불빛이 그녀의 눈가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점검 중. 대체 물 안내. 아이와 노인 먼저 확인.”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배탈, 구토, 열, 어지러움. 그리고…… 이 우물을 쓴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융은 그 말에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이름. 창 안의 장부 끝에는 이름이 없었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그 짧은 말은 마른 잉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하융은 우물가의 돌을 보았다. 현실의 돌에는 아직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창 너머에서는 이미 이름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레이 경.”
“네.”
“저 창에서 본 일을 말하면, 저 아이들의 죽음은 이쪽 세계의 점검 항목이 되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하융은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것이 두렵소. 죽은 세계의 슬픔을 이쪽의 편의로 쓰는 것 같아서.”
골목은 잠시 조용해졌다. 멀리서 밤 순찰의 발소리가 한 번 지나갔고, 우물 안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우물가의 돌을 발끝으로 건드리다 멈췄다. 레이튼은 하융을 보았지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레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록판을 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쓰지도 않았다. 펜촉은 종이 위에 떠 있었다.
“편의로만 쓰면 안 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골목에서는 작은 목소리가 더 멀리 갔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숫자나 절차로만 바꾸면…… 그건 또 한 번 잃어버리는 거니까요.”
하융은 천천히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우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차가운 관료의 얼굴이 아니었다. 새벽까지 장부를 붙들고 있다가, 이름 하나가 틀린 것을 발견하면 다시 처음부터 확인할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되돌려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까지 편의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멈췄다. 더 말하면 하융의 질문을 대신 결론 내릴까 봐, 스스로 문장을 접은 것처럼 보였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네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름은 없어. 하지만 네가 혼자 들고 있어야 하는 이름도 없어.”
하융은 우물 안을 보았다. 물 위에서 등불이 흔들렸다. 창 너머의 아이가 다시 보였다. 붉은 끈. 작은 손. 웃음. 그리고 누운 얼굴. 하융은 손가락을 펴고, 우물의 돌턱에 닿지 않을 만큼 가까이 가져갔다.
이름은 물가에서 잘 미끄러진다. 한 번 떨어지면 깊은 데로 간다. 그 깊은 곳에서 이름은 숫자가 되고, 숫자는 줄이 되고, 줄은 마른 잉크가 된다. 명名이 사라진 사死는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사死는 다시 같은 골목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오늘 밤, 이 우물가에서, 나는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길어 올려야 했소. 두레박이 아니라 혀끝으로, 장부가 아니라 숨으로.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마리암.”
그레이가 적었다.
“마리암.”
“일곱 살, 혹은 여덟 살. 손목에 붉은 끈을 묶고 있었소. 오른쪽 무릎에 작은 흉터가 있었소. 물을 마시기 전에 웃었소.”
그레이는 잠깐 펜을 멈췄다. 그리고 “웃었소”까지 적지는 않았다. 대신 이름 옆에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하융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점은 이상하게도 충분해 보였다.
“아람.”
“아람.”
“확실하지는 않소. 다른 아이가 그 이름으로 부른 듯했소. 파란 조끼를 입었고, 두레박을 같이 잡았소.”
“확실하지 않음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사르키스.”
그레이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사르키스.”
“노인이오. 아이들에게 먼저 물을 주었소. 자신은 가장 늦게 마셨고, 증상을 숨겼소. 아마 아이들이 먼저 치료받기를 바랐을 것이오.”
죠니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은 꼭 그렇게 해.”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우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기가 늦게 아프면 남들도 늦게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하지. 실제로는 반대야. 주변 사람이 더 늦게 알아차려. 본인이 숨기니까.”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 확인은 본인 말만 믿으면 안 됩니다. 특히 노인과 아이 보호자는 따로 봐야 합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내 말이 또 장부로 갔네.”
“필요한 말이라서요.”
“그럼 됐어. 이번 건 농담 아니었으니까.”
레이튼은 우물가에서 조금 떨어져 골목의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순찰병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 우물을 쓰는 사람들은 주로 어느 쪽에서 옵니까?”
“북쪽 피난민들이 많습니다. 성문 창고보다 가까워서…….”
“가까운 물은 대개 먼저 선택되지요. 그 물이 안전한지는 나중 질문이 되고요.”
순찰병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낮에 막았어야 했습니까?”
레이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순찰병의 얼굴을 잠시 보고, 질문을 바꾸었다.
“낮에 이 물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까?”
“아뇨.”
“냄새를 맡았습니까?”
“아니요. 그냥 사람들이 쓰길래…….”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죄인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다음 질문을 앞당기는 일입니다. 누가 이 우물을 쓰는가. 언제부터 썼는가. 대체 물은 어디인가. 증상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순찰병은 고개를 숙였다.
“예.”
푸리나는 그 말을 받듯 앞으로 나섰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는 우물 점검이야. 겁주지 말고, 대신 늦지도 말고. ‘점검 중’이라고 말해. 물은 저쪽 임시 창고에서 받게 하고, 아이랑 노인은 그레이 쪽으로 데려와. 레이튼, 말 순서 잡아줘.”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먼저 대체 급수 지점을 말하고, 그 다음 점검 사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은 금지부터 들으면 길을 잃습니다.”
“죠니.”
푸리나가 부르자, 죠니는 이미 골목 입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아. 몰리는 사람 있으면 길을 틀어줄게. 그리고 누가 물 뜨겠다고 우기면 내가 조금 무섭게 서 있으면 되고.”
“조금만 무섭게.”
“난 원래 많이 무서운 쪽은 아니야.”
푸리나가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그냥 네 자기평가가 흥미로워서.”
“교수한테 옮았어.”
레이튼이 웃었다.
“저는 전염성이 낮은 편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 짧은 농담 덕분에 골목의 공기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하융은 우물가에서 물러섰다. 그레이는 기록판 한 장을 찢어 우물 점검 표식을 만들었다. 푸리나는 커튼 고리 끝으로 종이를 누르며, 순찰병에게 끈을 빌렸다. 종이는 바람에 흔들렸고, 그 위의 글씨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점검 중.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것.
아이와 노인은 먼저 알려주십시오.
그레이가 글씨를 보더니, 마지막 줄 아래에 작게 빵과 물동이 표시를 그렸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꽃은?”
그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없애겠습니다. 급한 안내라서요.”
푸리나는 아주 잠깐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엔 없어도 돼.”
죠니가 낮게 말했다.
“드물게 빠른 포기네.”
“나도 때와 장소는 봐.”
“그럼 다행이고.”
우물에는 임시로 끈이 둘러졌다. 순찰병 둘이 골목 입구와 반대편에 섰다. 죠니는 그들이 서는 위치를 조금씩 바꿨다. 한 명은 너무 안쪽에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빛을 등지고 서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죠니는 그런 것들을 짧게 지적했다.
“거기 서면 사람들이 네 뒤로 지나가. 한 걸음 왼쪽. 너는 등불을 얼굴 옆으로 들어. 금지하는 사람이 얼굴이 안 보이면 괜히 더 싸움 나.”
순찰병들이 곧장 자세를 고쳤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작게 감탄했다.
“죠니, 너 이런 거 잘하네.”
“사람이 몰리는 길목에서 싸움 안 나게 세우는 건 기사단 일이야. 창 들고 달리는 것만 기사단 일이 아니거든.”
“음. 좋다. 그 말도 나중에 써야지.”
“쓰지 마. 너무 업무 같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맞는 말입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가,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장부로 가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사이 레이튼은 순찰병과 함께 가까운 피난민 숙소로 향했다. 그의 말은 멀리서 들려왔다. 크지 않았지만, 사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이 우물은 지금 점검 중입니다.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나 어르신께서 오늘 이 물을 드셨다면, 잠시 확인만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독입니까?”
레이튼은 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도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그래서 확인이 끝날 때까지 다른 물을 쓰려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소문보다 순서입니다.”
소문보다 순서.
하융은 그 말을 속으로 반복했다. 레이튼의 말은 늘 그렇게 조용히 물가에 놓였다. 누군가 발을 디딜 수 있을 만큼만.
푸리나는 우물 앞에 남았다. 그녀는 우물의 돌턱을 만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하융은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우물을 보고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우물가를 지나갔을 사람들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직 공연하지 않은 무대의 빈자리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하.”
“응.”
“꽃을 그리지 않았구려.”
푸리나는 우물에 묶인 안내문을 보았다.
“응. 이번엔 그레이가 맞아. 꽃이 들어가면 예뻐지는데, 예뻐지면 사람들이 잠깐 덜 급하게 읽을 것 같았어.”
“전하답지 않게 조심스럽소.”
“나도 가끔 그래.”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작았다.
“그리고 여기엔 아직 꽃보다 이름이 먼저인 것 같아서.”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푸리나가 평소처럼 길게 꾸민 대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이름이 먼저. 꽃은 나중. 무대도, 조명도, 박수도 나중. 지금은 우물가에서 이름을 놓치지 않는 일이 먼저였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하융 님.”
“듣고 있소.”
“혹시 더 보이는 이름이 있습니까?”
하융은 다시 우물을 보았다. 창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의 손, 노인의 굽은 등, 장부의 마른 잉크. 그는 그 안을 오래 바라보지 않으려 했지만, 아주 짧게는 봐야 했다. 이름이 있을지도 몰랐다. 잃어버리기 전에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린.”
그레이가 적었다.
“나린.”
“아마 아이의 어머니요. 직접 물을 마셨는지는 모르오. 아이를 안고 있었소.”
“나린. 보호자 가능.”
“그리고…… 바르단. 우물가에서 두레박을 고친 남자요. 손에 검은 얼룩이 묻었소.”
“바르단. 두레박 수리. 손 오염 가능.”
그레이의 글씨는 작았다. 그러나 이름들은 그 작은 글씨 안에서 자리를 얻었다. 하융은 그 모습을 오래 보았다. 이름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창 너머의 장면이 조금씩 덜 미끄러졌다. 완전히 붙잡힌 것은 아니었다. 죽은 가능성은 여전히 죽은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물속으로만 가라앉지는 않았다.
골목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아이를 안은 여인 하나가 그레이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에는 겁이 있었고, 팔에는 잠든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이마는 조금 뜨거워 보였다. 그레이는 바로 기록판을 접고, 손등으로 아이 이마 가까이의 공기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언제부터 열이 있었습니까?”
“저녁부터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오늘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까?”
“조금…… 아이가 목마르다고 해서.”
그레이는 여인을 탓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순찰병에게 약재 상자와 따뜻한 물을 요청했다. 푸리나는 여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평소처럼 크게 웃지 않았다.
“앉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아이를 계속 안고 있으면 팔이 먼저 굳어.”
여인은 푸리나를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저는…….”
“지금은 팔부터. 예는 나중에 받아도 돼.”
죠니가 빈 나무상자 하나를 가져오다가, 못이 없는지 먼저 손으로 훑었다.
“이건 앉아도 돼. 내가 확인했어.”
그레이가 여인에게 말했다.
“아이 이름을 알려주세요.”
“마리암입니다.”
하융은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도 멈췄다. 푸리나는 하융을 보지 않았다. 죠니도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멀리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물가의 등불만이 조금 흔들렸다.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다시 물었다.
“마리암. 맞습니까?”
“네. 마리암이에요.”
하융은 아이의 손목을 보았다. 붉은 끈이 있었다. 현실의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열이 있었고, 얼굴은 붉었고, 잠든 숨이 고르지 않았다. 그러나 숨이 있었다. 창 너머의 마리암은 누워 있었다. 이쪽의 마리암은 어머니의 팔 안에서 작게 몸을 웅크렸다.
하융은 손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지금은 여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아주 짧게.
그레이는 마리암의 이름 옆에 현실의 표시를 했다. 하융은 그 표시를 보았다. 창 너머의 이름과 현실의 이름이 같은 줄에 닿지 않도록, 그레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칸을 나누었다. 죽은 가능성과 살아 있는 아이가 섞이지 않게. 잊지 않되, 겹쳐 삼키지 않게.
“열은 높지만 의식은 있습니다. 바로 치료소로 보내겠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빠르지도 않았다. 여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속도였다.
“괜찮을까요?”
여인이 물었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쉽게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봐야 합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여긴 우리가 볼게.”
그레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우물 명단이…….”
“그레이.”
푸리나가 이번에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이름은 계속 받을게. 네가 돌아오면 틀린 데 없는지 같이 확인하자.”
그레이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여인과 아이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그레이가 그 곁을 따라갔다. 그녀의 작은 등이 등불 사이로 멀어졌다. 하융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창 너머의 장부에서는 마리암이 숫자가 되었지만, 현실의 길에서는 그레이가 마리암의 이름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물 안에서 물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하융은 우물가에 서서 오래 숨을 골랐다. 창은 열려 있었다. 죽은 세계의 푸른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 빛은 이제 우물 속으로만 내려가지 않았다. 골목의 젖은 벽, 안내문 위의 잉크, 죠니가 확인한 나무상자, 푸리나의 손등, 레이튼의 목소리가 닿은 사람들의 얼굴 위에 조금씩 묻어 있었다.
죠니가 옆에 섰다.
“괜찮아?”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 대답, 오늘 두 번째네.”
“그렇소?”
“응. 그래도 나쁘진 않아. 거짓말보다는 낫지.”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는 이런 때에도 참으로 현실적인 말을 하는구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라서. 너무 멋진 말은 교수나 여왕님 쪽이 하고, 나는 물통이랑 상자나 보는 게 맞아.”
“그것도 필요한 일이오.”
“알아. 그래서 하는 거야.”
죠니는 우물에 둘러진 끈이 헐겁지 않은지 다시 확인했다. 하융은 그 손을 보았다. 더 온전한 죠니가 있는 창이 아주 먼 곳에서 희미하게 열렸다가, 아직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 장면은 다음 길목의 것이었다. 지금은 우물이었다.
푸리나는 안내문을 한 번 더 눌러 고정했다. 그리고 하융 쪽으로 돌아왔다.
“이름 더 들리면 말해줘. 안 들리면 안 들린다고 말해도 돼.”
“전하께서는 내가 무엇이든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구려.”
“그럼 안 되잖아.”
푸리나는 우물의 물빛을 잠깐 보다가, 금세 시선을 돌렸다.
“너는 창문이 아니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로 숨을 쉬었다. 우물의 냄새는 여전히 있었다. 신 냄새, 젖은 돌, 오래된 나무. 그러나 그 사이에 다른 냄새도 섞여 들어왔다. 죠니가 가져온 말린 과일의 희미한 단내, 푸리나의 망토에 묻은 시장 먼지, 그레이가 지나가며 남긴 약초 냄새, 레이튼의 찻주전자에서 식지 않은 차의 향.
하융은 우물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겠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튼이 골목 안으로 돌아왔다.
“대체 급수 안내는 시작되었습니다. 몇몇 분은 이미 치료소로 이동했고요. 소문은 아직 작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소문에도 크기가 있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작을 때는 질문으로 다룰 수 있고, 커지면 군중이 됩니다.”
“그건 좀 무섭네.”
“예. 그래서 작을 때 말을 걸어야 하지요.”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내려다보았다가, 우물 앞에 걸린 안내문을 보았다.
“오늘은 막을 올리는 게 아니라, 막을 내리는 쪽이네.”
죠니가 물었다.
“우물 막?”
“사용 중지 막.”
“이름은 이상한데 뜻은 맞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닫아야 하는 것도 극의 일부일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웃었다.
“좋아. 오늘은 닫는 장면.”
하융은 우물을 한 번 더 보았다. 창은 닫히지 않았다. 현실의 우물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끈이 둘러졌고, 안내문이 붙었고, 이름이 적혔다. 마리암은 치료소로 갔다. 아람과 사르키스와 나린과 바르단은 아직 확인해야 했다. 끝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물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길어 올려지지 않았다.
그 정도면, 오늘 밤 이 우물가에서는 충분히 큰 일이었다.
하융은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불이 뒤따랐다. 창 너머에서 온 푸른빛은 아직 그의 옆을 따라왔지만, 이제 그것은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젖은 돌의 표면을 비추고, 안내문의 젖은 모서리를 비추고, 저 멀리 치료소로 향하는 그레이의 등을 비추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걸었다.
우물은 뒤에 남았고, 이름은 종이 위에 남았다.
그리고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3막 — 우물가의 이름
우물은 피난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돌다리에서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낮은 담장과 기울어진 나무 십자가 사이에 오래된 우물 하나가 나왔다. 낮에는 사람들이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갔을 것이다. 밤에는 달라졌다. 골목은 좁았고, 벽은 젖어 있었으며, 우물의 돌턱에는 오래 손이 닿은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물을 길을 때마다 짚고, 기대고, 숨을 고르고, 때로는 두레박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내려다보았을 자리였다. 하융은 우물 앞에서 멈췄다. 창은 이미 열려 있었다. 이번에는 새로 열리는 소리도 없었다. 우물은 현실에도 있었고, 창 너머에도 있었으며, 두 우물의 물빛은 너무 닮아 있었다.
푸리나는 곧장 우물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하융의 발이 멈춘 것을 보고, 한 걸음 뒤에서 섰다. 죠니도 말없이 골목 입구 쪽을 살폈고,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등불을 조금 낮춰 들게 했다. 그레이는 기록판을 열지 않았다. 먼저 하융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 작은 지연이 하융에게는 느껴졌다. 기록하기 전에 사람을 보는 손. 적기 전에 숨을 확인하는 눈.
“이곳입니까?”
그레이가 물었다.
“그렇소.”
하융은 우물의 돌턱을 보았다. 창 안에서는 아이가 그 돌턱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아이는 두레박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며 발끝을 까딱였고, 옆의 아이는 웃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다음 장면에서 두레박의 물은 작은 그릇에 담겼다. 그 다음 장면에서 아이는 누워 있었다. 하융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이 맑아 보였소.”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 말이 별로 좋은 시작은 아닌데.”
“맑았소. 너무 맑았소. 물 위에 아주 얇은 막이 있었고, 두레박 줄에는 검은 얼룩이 있었소. 처음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레이가 그제야 기록판을 열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소리는 아주 작았다.
“두레박 줄의 얼룩. 물 위의 막. 냄새는 어떠했습니까?”
하융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현실의 물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등불을 가까이 가져가자 빛이 물 위에 흩어졌다. 잠깐, 창 너머의 물빛과 현실의 물빛이 겹쳤다. 하융은 그 겹침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냄새는 피할 수 없었다. 젖은 돌, 오래된 나무, 가라앉은 흙, 그리고 희미하게 신맛이 나는 무언가.
“신 냄새가 조금 있소. 썩은 냄새와는 다르오. 물이 오래 고였거나, 무언가 흘러든 것 같소.”
그레이는 적었다.
“사용 중단이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바로 물었다.
“지금?”
“네. 확인 전까지는 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죠니가 골목 밖을 보았다.
“문제는 대체 물이야. 그냥 쓰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른 데로 몰릴 거야. 밤에 물 때문에 몰리면 다치기 딱 좋고.”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까운 대체 급수 지점을 확인해야겠습니다. 그 뒤에 이 우물은 점검 중이라고 알리는 편이 좋겠군요. ‘오염’이라는 말을 먼저 쓰면, 공포가 우리보다 빨리 달릴 겁니다.”
푸리나는 우물의 돌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과장된 표정이 없었다. 무대를 앞둔 배우의 얼굴도 아니었고, 장난을 꾸미는 극장주의 얼굴도 아니었다. 등불빛이 그녀의 눈가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점검 중. 대체 물 안내. 아이와 노인 먼저 확인.”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배탈, 구토, 열, 어지러움. 그리고…… 이 우물을 쓴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융은 그 말에 손가락을 살짝 굽혔다. 이름. 창 안의 장부 끝에는 이름이 없었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그 짧은 말은 마른 잉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하융은 우물가의 돌을 보았다. 현실의 돌에는 아직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창 너머에서는 이미 이름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레이 경.”
“네.”
“저 창에서 본 일을 말하면, 저 아이들의 죽음은 이쪽 세계의 점검 항목이 되오.”
그레이의 펜이 멈췄다.
하융은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것이 두렵소. 죽은 세계의 슬픔을 이쪽의 편의로 쓰는 것 같아서.”
골목은 잠시 조용해졌다. 멀리서 밤 순찰의 발소리가 한 번 지나갔고, 우물 안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우물가의 돌을 발끝으로 건드리다 멈췄다. 레이튼은 하융을 보았지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레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록판을 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쓰지도 않았다. 펜촉은 종이 위에 떠 있었다.
“편의로만 쓰면 안 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골목에서는 작은 목소리가 더 멀리 갔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숫자나 절차로만 바꾸면…… 그건 또 한 번 잃어버리는 거니까요.”
하융은 천천히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우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차가운 관료의 얼굴이 아니었다. 새벽까지 장부를 붙들고 있다가, 이름 하나가 틀린 것을 발견하면 다시 처음부터 확인할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되돌려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까지 편의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멈췄다. 더 말하면 하융의 질문을 대신 결론 내릴까 봐, 스스로 문장을 접은 것처럼 보였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네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름은 없어. 하지만 네가 혼자 들고 있어야 하는 이름도 없어.”
하융은 우물 안을 보았다. 물 위에서 등불이 흔들렸다. 창 너머의 아이가 다시 보였다. 붉은 끈. 작은 손. 웃음. 그리고 누운 얼굴. 하융은 손가락을 펴고, 우물의 돌턱에 닿지 않을 만큼 가까이 가져갔다.
이름은 물가에서 잘 미끄러진다. 한 번 떨어지면 깊은 데로 간다. 그 깊은 곳에서 이름은 숫자가 되고, 숫자는 줄이 되고, 줄은 마른 잉크가 된다. 명名이 사라진 사死는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사死는 다시 같은 골목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오늘 밤, 이 우물가에서, 나는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길어 올려야 했소. 두레박이 아니라 혀끝으로, 장부가 아니라 숨으로.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마리암.”
그레이가 적었다.
“마리암.”
“일곱 살, 혹은 여덟 살. 손목에 붉은 끈을 묶고 있었소. 오른쪽 무릎에 작은 흉터가 있었소. 물을 마시기 전에 웃었소.”
그레이는 잠깐 펜을 멈췄다. 그리고 “웃었소”까지 적지는 않았다. 대신 이름 옆에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하융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점은 이상하게도 충분해 보였다.
“아람.”
“아람.”
“확실하지는 않소. 다른 아이가 그 이름으로 부른 듯했소. 파란 조끼를 입었고, 두레박을 같이 잡았소.”
“확실하지 않음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사르키스.”
그레이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사르키스.”
“노인이오. 아이들에게 먼저 물을 주었소. 자신은 가장 늦게 마셨고, 증상을 숨겼소. 아마 아이들이 먼저 치료받기를 바랐을 것이오.”
죠니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은 꼭 그렇게 해.”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우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기가 늦게 아프면 남들도 늦게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하지. 실제로는 반대야. 주변 사람이 더 늦게 알아차려. 본인이 숨기니까.”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 확인은 본인 말만 믿으면 안 됩니다. 특히 노인과 아이 보호자는 따로 봐야 합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내 말이 또 장부로 갔네.”
“필요한 말이라서요.”
“그럼 됐어. 이번 건 농담 아니었으니까.”
레이튼은 우물가에서 조금 떨어져 골목의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순찰병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 우물을 쓰는 사람들은 주로 어느 쪽에서 옵니까?”
“북쪽 피난민들이 많습니다. 성문 창고보다 가까워서…….”
“가까운 물은 대개 먼저 선택되지요. 그 물이 안전한지는 나중 질문이 되고요.”
순찰병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낮에 막았어야 했습니까?”
레이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순찰병의 얼굴을 잠시 보고, 질문을 바꾸었다.
“낮에 이 물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까?”
“아뇨.”
“냄새를 맡았습니까?”
“아니요. 그냥 사람들이 쓰길래…….”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죄인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다음 질문을 앞당기는 일입니다. 누가 이 우물을 쓰는가. 언제부터 썼는가. 대체 물은 어디인가. 증상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순찰병은 고개를 숙였다.
“예.”
푸리나는 그 말을 받듯 앞으로 나섰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는 우물 점검이야. 겁주지 말고, 대신 늦지도 말고. ‘점검 중’이라고 말해. 물은 저쪽 임시 창고에서 받게 하고, 아이랑 노인은 그레이 쪽으로 데려와. 레이튼, 말 순서 잡아줘.”
레이튼은 고개를 숙였다.
“먼저 대체 급수 지점을 말하고, 그 다음 점검 사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은 금지부터 들으면 길을 잃습니다.”
“죠니.”
푸리나가 부르자, 죠니는 이미 골목 입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아. 몰리는 사람 있으면 길을 틀어줄게. 그리고 누가 물 뜨겠다고 우기면 내가 조금 무섭게 서 있으면 되고.”
“조금만 무섭게.”
“난 원래 많이 무서운 쪽은 아니야.”
푸리나가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그냥 네 자기평가가 흥미로워서.”
“교수한테 옮았어.”
레이튼이 웃었다.
“저는 전염성이 낮은 편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 짧은 농담 덕분에 골목의 공기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하융은 우물가에서 물러섰다. 그레이는 기록판 한 장을 찢어 우물 점검 표식을 만들었다. 푸리나는 커튼 고리 끝으로 종이를 누르며, 순찰병에게 끈을 빌렸다. 종이는 바람에 흔들렸고, 그 위의 글씨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점검 중.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것.
아이와 노인은 먼저 알려주십시오.
그레이가 글씨를 보더니, 마지막 줄 아래에 작게 빵과 물동이 표시를 그렸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꽃은?”
그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없애겠습니다. 급한 안내라서요.”
푸리나는 아주 잠깐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엔 없어도 돼.”
죠니가 낮게 말했다.
“드물게 빠른 포기네.”
“나도 때와 장소는 봐.”
“그럼 다행이고.”
우물에는 임시로 끈이 둘러졌다. 순찰병 둘이 골목 입구와 반대편에 섰다. 죠니는 그들이 서는 위치를 조금씩 바꿨다. 한 명은 너무 안쪽에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빛을 등지고 서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죠니는 그런 것들을 짧게 지적했다.
“거기 서면 사람들이 네 뒤로 지나가. 한 걸음 왼쪽. 너는 등불을 얼굴 옆으로 들어. 금지하는 사람이 얼굴이 안 보이면 괜히 더 싸움 나.”
순찰병들이 곧장 자세를 고쳤다. 푸리나는 그걸 보고 작게 감탄했다.
“죠니, 너 이런 거 잘하네.”
“사람이 몰리는 길목에서 싸움 안 나게 세우는 건 기사단 일이야. 창 들고 달리는 것만 기사단 일이 아니거든.”
“음. 좋다. 그 말도 나중에 써야지.”
“쓰지 마. 너무 업무 같아.”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맞는 말입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가,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장부로 가라.”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사이 레이튼은 순찰병과 함께 가까운 피난민 숙소로 향했다. 그의 말은 멀리서 들려왔다. 크지 않았지만, 사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이 우물은 지금 점검 중입니다.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나 어르신께서 오늘 이 물을 드셨다면, 잠시 확인만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독입니까?”
레이튼은 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도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그래서 확인이 끝날 때까지 다른 물을 쓰려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소문보다 순서입니다.”
소문보다 순서.
하융은 그 말을 속으로 반복했다. 레이튼의 말은 늘 그렇게 조용히 물가에 놓였다. 누군가 발을 디딜 수 있을 만큼만.
푸리나는 우물 앞에 남았다. 그녀는 우물의 돌턱을 만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하융은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우물을 보고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우물가를 지나갔을 사람들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직 공연하지 않은 무대의 빈자리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하.”
“응.”
“꽃을 그리지 않았구려.”
푸리나는 우물에 묶인 안내문을 보았다.
“응. 이번엔 그레이가 맞아. 꽃이 들어가면 예뻐지는데, 예뻐지면 사람들이 잠깐 덜 급하게 읽을 것 같았어.”
“전하답지 않게 조심스럽소.”
“나도 가끔 그래.”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작았다.
“그리고 여기엔 아직 꽃보다 이름이 먼저인 것 같아서.”
하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푸리나가 평소처럼 길게 꾸민 대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이름이 먼저. 꽃은 나중. 무대도, 조명도, 박수도 나중. 지금은 우물가에서 이름을 놓치지 않는 일이 먼저였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하융 님.”
“듣고 있소.”
“혹시 더 보이는 이름이 있습니까?”
하융은 다시 우물을 보았다. 창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의 손, 노인의 굽은 등, 장부의 마른 잉크. 그는 그 안을 오래 바라보지 않으려 했지만, 아주 짧게는 봐야 했다. 이름이 있을지도 몰랐다. 잃어버리기 전에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린.”
그레이가 적었다.
“나린.”
“아마 아이의 어머니요. 직접 물을 마셨는지는 모르오. 아이를 안고 있었소.”
“나린. 보호자 가능.”
“그리고…… 바르단. 우물가에서 두레박을 고친 남자요. 손에 검은 얼룩이 묻었소.”
“바르단. 두레박 수리. 손 오염 가능.”
그레이의 글씨는 작았다. 그러나 이름들은 그 작은 글씨 안에서 자리를 얻었다. 하융은 그 모습을 오래 보았다. 이름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창 너머의 장면이 조금씩 덜 미끄러졌다. 완전히 붙잡힌 것은 아니었다. 죽은 가능성은 여전히 죽은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물속으로만 가라앉지는 않았다.
골목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아이를 안은 여인 하나가 그레이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에는 겁이 있었고, 팔에는 잠든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이마는 조금 뜨거워 보였다. 그레이는 바로 기록판을 접고, 손등으로 아이 이마 가까이의 공기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언제부터 열이 있었습니까?”
“저녁부터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오늘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까?”
“조금…… 아이가 목마르다고 해서.”
그레이는 여인을 탓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순찰병에게 약재 상자와 따뜻한 물을 요청했다. 푸리나는 여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평소처럼 크게 웃지 않았다.
“앉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아이를 계속 안고 있으면 팔이 먼저 굳어.”
여인은 푸리나를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저는…….”
“지금은 팔부터. 예는 나중에 받아도 돼.”
죠니가 빈 나무상자 하나를 가져오다가, 못이 없는지 먼저 손으로 훑었다.
“이건 앉아도 돼. 내가 확인했어.”
그레이가 여인에게 말했다.
“아이 이름을 알려주세요.”
“마리암입니다.”
하융은 숨을 멈췄다.
그레이의 펜도 멈췄다. 푸리나는 하융을 보지 않았다. 죠니도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멀리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물가의 등불만이 조금 흔들렸다.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다시 물었다.
“마리암. 맞습니까?”
“네. 마리암이에요.”
하융은 아이의 손목을 보았다. 붉은 끈이 있었다. 현실의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열이 있었고, 얼굴은 붉었고, 잠든 숨이 고르지 않았다. 그러나 숨이 있었다. 창 너머의 마리암은 누워 있었다. 이쪽의 마리암은 어머니의 팔 안에서 작게 몸을 웅크렸다.
하융은 손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하융.”
“듣고 있소.”
“지금은 여기.”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아주 짧게.
그레이는 마리암의 이름 옆에 현실의 표시를 했다. 하융은 그 표시를 보았다. 창 너머의 이름과 현실의 이름이 같은 줄에 닿지 않도록, 그레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칸을 나누었다. 죽은 가능성과 살아 있는 아이가 섞이지 않게. 잊지 않되, 겹쳐 삼키지 않게.
“열은 높지만 의식은 있습니다. 바로 치료소로 보내겠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빠르지도 않았다. 여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속도였다.
“괜찮을까요?”
여인이 물었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쉽게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봐야 합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여긴 우리가 볼게.”
그레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우물 명단이…….”
“그레이.”
푸리나가 이번에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이름은 계속 받을게. 네가 돌아오면 틀린 데 없는지 같이 확인하자.”
그레이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여인과 아이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그레이가 그 곁을 따라갔다. 그녀의 작은 등이 등불 사이로 멀어졌다. 하융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창 너머의 장부에서는 마리암이 숫자가 되었지만, 현실의 길에서는 그레이가 마리암의 이름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물 안에서 물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하융은 우물가에 서서 오래 숨을 골랐다. 창은 열려 있었다. 죽은 세계의 푸른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 빛은 이제 우물 속으로만 내려가지 않았다. 골목의 젖은 벽, 안내문 위의 잉크, 죠니가 확인한 나무상자, 푸리나의 손등, 레이튼의 목소리가 닿은 사람들의 얼굴 위에 조금씩 묻어 있었다.
죠니가 옆에 섰다.
“괜찮아?”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 대답, 오늘 두 번째네.”
“그렇소?”
“응. 그래도 나쁘진 않아. 거짓말보다는 낫지.”
하융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는 이런 때에도 참으로 현실적인 말을 하는구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라서. 너무 멋진 말은 교수나 여왕님 쪽이 하고, 나는 물통이랑 상자나 보는 게 맞아.”
“그것도 필요한 일이오.”
“알아. 그래서 하는 거야.”
죠니는 우물에 둘러진 끈이 헐겁지 않은지 다시 확인했다. 하융은 그 손을 보았다. 더 온전한 죠니가 있는 창이 아주 먼 곳에서 희미하게 열렸다가, 아직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 장면은 다음 길목의 것이었다. 지금은 우물이었다.
푸리나는 안내문을 한 번 더 눌러 고정했다. 그리고 하융 쪽으로 돌아왔다.
“이름 더 들리면 말해줘. 안 들리면 안 들린다고 말해도 돼.”
“전하께서는 내가 무엇이든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구려.”
“그럼 안 되잖아.”
푸리나는 우물의 물빛을 잠깐 보다가, 금세 시선을 돌렸다.
“너는 창문이 아니니까.”
하융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로 숨을 쉬었다. 우물의 냄새는 여전히 있었다. 신 냄새, 젖은 돌, 오래된 나무. 그러나 그 사이에 다른 냄새도 섞여 들어왔다. 죠니가 가져온 말린 과일의 희미한 단내, 푸리나의 망토에 묻은 시장 먼지, 그레이가 지나가며 남긴 약초 냄새, 레이튼의 찻주전자에서 식지 않은 차의 향.
하융은 우물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겠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튼이 골목 안으로 돌아왔다.
“대체 급수 안내는 시작되었습니다. 몇몇 분은 이미 치료소로 이동했고요. 소문은 아직 작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소문에도 크기가 있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작을 때는 질문으로 다룰 수 있고, 커지면 군중이 됩니다.”
“그건 좀 무섭네.”
“예. 그래서 작을 때 말을 걸어야 하지요.”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내려다보았다가, 우물 앞에 걸린 안내문을 보았다.
“오늘은 막을 올리는 게 아니라, 막을 내리는 쪽이네.”
죠니가 물었다.
“우물 막?”
“사용 중지 막.”
“이름은 이상한데 뜻은 맞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닫아야 하는 것도 극의 일부일 때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웃었다.
“좋아. 오늘은 닫는 장면.”
하융은 우물을 한 번 더 보았다. 창은 닫히지 않았다. 현실의 우물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끈이 둘러졌고, 안내문이 붙었고, 이름이 적혔다. 마리암은 치료소로 갔다. 아람과 사르키스와 나린과 바르단은 아직 확인해야 했다. 끝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물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길어 올려지지 않았다.
그 정도면, 오늘 밤 이 우물가에서는 충분히 큰 일이었다.
하융은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불이 뒤따랐다. 창 너머에서 온 푸른빛은 아직 그의 옆을 따라왔지만, 이제 그것은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젖은 돌의 표면을 비추고, 안내문의 젖은 모서리를 비추고, 저 멀리 치료소로 향하는 그레이의 등을 비추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걸었다.
우물은 뒤에 남았고, 이름은 종이 위에 남았다.
그리고 마리암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