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27여관◆zAR16hM8he(7420cdcd)2026-05-24 (일) 03:02:01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5막 — 색색의 빛이 드는 거리
치료소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은 골목 바닥에 길쭉하게 누워 있었고, 그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가끔씩 흔들렸다. 마리암은 안에서 잠들었다고 했다. 열은 아직 있었고, 그레이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안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절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따뜻했다. 하융은 치료소 문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식은 밤공기 속에 섞인 약초 냄새와 차 냄새를 맡았다. 우물의 신 냄새는 아직 코끝에 남아 있었으나, 이제 그것만이 밤을 채우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치료소 옆 벽에 붙은 안내문을 다시 한 번 눌렀다. 이미 잘 붙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손끝으로 모서리를 문질렀고, 종이가 벽에 더 오래 남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잠시 가만히 있었다.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내일 아침까지 필요한 확인 사항을 부드럽게 정리해주고 있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들고 골목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안으로 들어간 뒤 아직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 품에 넣은 빵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아니, 보려 했다. 그러나 시선의 가장자리에 창들이 열렸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시장의 창, 피난길의 창, 우물의 창, 더 온전한 동료들의 창. 창들은 서로 다투듯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열려 있었다. 시장의 금빛은 치료소 벽에 붙은 안내문을 따뜻하게 비췄고, 피난길의 흙빛은 골목 바닥의 발자국 위에 낮게 얹혔다. 우물의 푸른빛은 물동이의 젖은 가장자리를 차갑게 드러냈고, 더 온전한 동료들의 흰빛은 푸리나의 지친 손등과 죠니의 빈 접시, 레이튼의 찻주전자, 치료소 문 안쪽에서 잠시 보였다 사라지는 그레이의 어깨 위에 닿았다.
예전 같았으면 하융은 그중 하나를 골랐을 것이다. 가장 밝은 창, 가장 아픈 창, 가장 옳아 보이는 창, 가장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창. 그는 어느 창이 자신을 부르는지, 어느 창이 자신을 심판하는지, 어느 창이 자신에게 마지막 대답을 줄 수 있는지 찾느라 오래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골목의 돌이 발밑에 있었다. 접시의 빵가루가 죠니의 손가락에 묻어 있었고, 푸리나의 커튼 고리는 밤새 여러 번 휘둘린 탓에 손때를 입고 있었다. 레이튼의 찻주전자는 한쪽 면이 조금 식어 있었고, 치료소 안에서는 그레이가 누군가에게 물을 조금씩 마시게 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그리고 곧, 창 아래를 보았다.
“하융?”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듣고 있소.”
“이번에는 어디를 보고 있어?”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창마다 빛이 달랐다. 어느 빛은 따뜻했고, 어느 빛은 차가웠고, 어느 빛은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빛들이 한곳에서 섞이고 있었다. 치료소 앞의 좁은 골목, 밤이 늦어 사람의 발소리도 드문 그 자리에서, 서로 다른 가능성의 빛들이 현실의 먼지와 돌과 젖은 나무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창들이 열려 있소.”
푸리나는 그의 옆으로 와서 섰다. 그녀에게는 그 창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푸리나는 하융이 보는 방향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무대를 살피는 극장주처럼.
“많이?”
“많이.”
“또 잘난 척해?”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오늘은…… 조금 덜하오.”
죠니가 빈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창문도 피곤한가 보네. 밤새 우리 따라다녔으면 그럴 만하지.”
“그대는 창에게도 피로를 부여하는구려.”
“뭐든 너무 오래 열려 있으면 삐걱거려. 문이든 창문이든 사람 무릎이든.”
푸리나가 죠니를 보았다.
“그건 네 무릎 이야기야?”
“내 무릎은 아직 공식 발언을 거부하고 있어.”
레이튼이 순찰병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방금 들은 농담의 끝자락만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무릎도 침묵할 권리가 있겠군요.”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교수, 제발 내 무릎까지 문답의 장으로 데려가지 마.”
“알겠습니다. 오늘 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질문을 받았으니까요.”
하융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골목을 보았다. 창의 빛은 여전히 흘렀다. 시장의 작은 축제는 푸리나가 붙인 안내문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고, 피난길의 더 나은 동선은 돌다리 앞 푸른 리본에 스며 있었다. 우물에서 죽어버린 가능성은 그레이의 이름 목록 위에 차가운 빛으로 남았고, 더 온전한 죠니의 창은 현실의 죠니가 들고 있는 빈 접시 위에서 잠깐 희게 흔들렸다.
그러나 시선은 더 이상 어느 하나에 박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융은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무언가를 이긴 느낌은 아니었다. 극복했다는 말도 맞지 않았다. 오래전에 배웠던 길을, 밤중에 다시 찾아낸 것에 가까웠다. 그는 이미 한 번 이 세계를 선택했다. 푸리나의 곁에서, 죠니의 농담과 레이튼의 질문과 그레이의 장부 곁에서, 이미 이쪽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오늘 밤은 처음 걷는 길이 아니었다. 다만 오래된 방의 냄새에 잠시 길을 잃었다가, 다시 발밑의 돌을 확인한 밤이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잊고 있었소.”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뭘?”
하융은 열린 창들을 보았다. 그리고 골목을 보았다.
“창 너머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소.”
죠니는 아무 말 없이 접시를 옆구리에 끼웠고, 레이튼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하융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드물게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기다릴 때, 그 침묵은 막이 내려오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하융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창마다 빛이 있었소. 저쪽 시장의 금빛, 죽은 우물의 푸른빛, 피난길의 흙빛, 더 온전한 그대들의 흰빛. 예전의 나는 그 빛을 보면 그 너머를 보았소. 어느 세계가 더 옳은지, 어느 내가 더 나은지, 어느 죽음이 나를 부르는지.”
그는 잠시 눈을 내렸다. 치료소 앞 돌바닥에는 여러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푸리나의 발자국은 작고 빠르게 흩어져 있었고, 죠니의 발자국은 한쪽이 조금 더 깊었다. 레이튼의 발자국은 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섰고, 그레이의 발자국은 치료소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위로 창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빛들이 이쪽을 비추는구려.”
그 말은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하융의 안쪽에서는 오래 닫혀 있던 창호 하나가 바람을 받은 듯 흔들렸다. 그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은 서쪽의 말보다 오래된 음절을 밀고 올라왔다. 고향의 문턱에서 배운 글자들처럼, 한문이 섞인 말이 숨 사이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있소. 허나 금일今日의 발은 이 골목에 있소. 광光은 저 너머에서 오되, 보步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는구려. 내가 찾던 날개가 창밖에 매달려 있던 것이 아니라면…… 그 빛을 모아, 이 거리 위에서 펴야 하는 것이겠소.”
푸리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하융의 말을 다 이해했는지, 혹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커튼 고리를 아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것은 무대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우에게 무대를 넘겨주는 손짓처럼 보였다.
“그럼 네가 연출하는 거네.”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크게 웃지는 않았다. 조금 뿌듯하고, 조금 장난스럽고,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다.
“내 무대가 아니라, 네가 보는 빛으로 네가 만드는 장면. 그런 거잖아?”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푸리나다웠다. 설명하지 않고도 어긋나지 않았다. 죠니가 빈 접시를 가볍게 흔들었다.
“좋네. 드디어 네가 무대 위에 올라왔다는 뜻이잖아.”
“내가 말이오?”
“응. 여태까지는 창문 옆에서 해설만 하고 있었거든. 물론 해설도 중요하긴 한데, 너무 오래 하면 관객도 배우도 지쳐.”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해설자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오는 장면, 꽤 좋아.”
“여왕님, 네가 좋아하면 보통 일이 커져.”
“이번엔 안 키워. 아마도.”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방금 아마도 들었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기록해둘까요?”
“기록은 그레이한테 맡겨. 교수까지 기록하면 이 나라 문서가 너무 많아져.”
그때 치료소 문이 열렸다. 그레이가 나왔다. 손에는 작은 천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푸리나가 억지로 예약해둔 빵 조각이 조금 줄어 있었다. 아마 먹은 모양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먹었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조금만 먹었습니다.”
“가능한 빠른 나중이 지켜졌어.”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많아. 성공이야.”
그레이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빵을 감싼 천을 접었다.
“마리암은 잠들었습니다. 아직 열은 있지만, 물은 조금 마셨고…… 어머니도 옆에 있습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오.”
“아직 확정해서 말하기는 이릅니다.”
“그레이 경답구려.”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낀 듯했다.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프롤로그의 방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완전히 괜찮지는 않다고 답했다. 지금도 완전히 괜찮지는 않았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우물의 푸른빛은 아직 차가웠으며, 더 나은 세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발밑에는 골목의 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빛이 있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허나 지금은 걸을 수 있소.”
그레이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더니 커튼 고리를 다시 들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한 장면만 더.”
죠니가 바로 말했다.
“불안한데.”
“걱정 마. 큰 거 아니야.”
“네가 큰 거 아니라고 말하면 보통 큰 거였어.”
“이번엔 진짜야.”
푸리나는 치료소 옆 골목 벽으로 가더니, 시장에서 가져온 작은 종이 조각을 꺼냈다. 낮에 붙이려던 그림 안내문의 시험용 종이였다. 빵 그림, 물동이 그림, 작은 꽃 표시가 어설프게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 종이를 치료소 벽의 비어 있는 곳에 붙이려다가,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붙여도 돼?”
그레이는 벽을 보고, 치료소 문을 보고, 종이에 그려진 작은 꽃을 보았다.
“여기는 배급 안내 장소가 아닙니다.”
“응. 알아.”
“그럼 안내문으로는 부적절합니다.”
“그것도 알아.”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붙이시려는 겁니까?”
푸리나는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표시.”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조금 더 작게 말했다.
“마리암이 나중에 나와서 보면, 우물 점검 안내문만 있으면 좀 무섭잖아. 빵이랑 물동이랑 꽃도 하나쯤 있으면…… 음, 그래도 밤이 전부 우물 냄새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건 안내문이라기보다는 낙서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안 돼?”
죠니는 잠시 치료소 문을 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낙서도 가끔 필요하지. 다만 너무 높이 붙이지 마. 애가 보려면 낮아야 해.”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 죠니식 승인.”
레이튼이 종이의 위치를 살폈다.
“조금 오른쪽이 좋겠습니다. 등불이 닿는 곳이군요.”
그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품에서 작은 핀을 꺼냈다.
“풀만으로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
“안내문은 아니지만…… 떨어지면 곤란하니까요.”
푸리나는 종이를 낮은 위치에 붙였다. 빵과 물동이와 작은 꽃. 그림은 어설펐다. 그러나 등불이 닿자, 창들에서 흘러온 색들이 그 위에 잠시 모였다. 시장의 금빛은 빵 그림에, 우물의 푸른빛은 물동이에, 피난길의 흙빛은 종이 가장자리에, 더 온전한 세계의 흰빛은 작은 꽃 위에 얹혔다.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앞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었다. 종이를 만지지는 않았다. 손끝은 종이 앞에서 멈췄고, 창빛은 그 손등 위로 얇게 흘렀다.
날자.
그 말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처럼 떠올랐다.
날자. 날자. 다시 한번만 날아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유리 너머로 사라지고 싶은 말도 아니었다. 하융은 종이의 작은 꽃을 보았다. 그 꽃은 푸리나의 장난이었고, 그레이의 핀이었고, 죠니가 낮게 붙이라고 말한 현실감이었으며, 레이튼이 등불의 각도를 살핀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하융의 창에서 들어온 빛들이 잠시 머물렀다.
하융은 아주 낮게, 거의 숨처럼 말했다.
“날개라는 것은…… 반드시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었구려.”
푸리나가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응?”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지금은 말로 다 만들지 않겠소.”
죠니가 말했다.
“좋은 판단이야. 가끔 말로 만들면 너무 커져서 들고 다니기 힘들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러면 오늘 밤의 질문은 잠시 접어두지요.”
그레이는 종이의 핀이 단단히 박혔는지 확인한 뒤, 손을 거두었다.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정말?”
죠니가 물었다.
“응. 정말. 나도 쉬어야 하고, 너도 접시를 내려놔야 하고, 그레이는 빵을 더 먹어야 하고, 레이튼은 차를 다시 데워야 해.”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지막 항목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죠니가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접시는 이미 거의 일 끝났어. 오늘 제일 성실했지.”
푸리나가 웃었다.
“그럼 접시에게도 박수.”
죠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발박수는 하지 마.”
“아, 기억하고 있었네.”
“잊기 힘든 종류의 위협이었거든.”
그레이가 아주 작게 웃었다. 하융도 웃었다. 치료소 앞의 골목에서 웃음은 크지 않았다. 병자가 잠든 곳이었으므로, 다들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낮은 웃음도 웃음이었다. 등불 아래에서, 빵과 물동이와 꽃이 그려진 종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융은 마지막으로 창들을 보았다. 모두 열려 있었다. 어느 것도 닫히지 않았다. 시장의 창도, 피난길의 창도, 우물의 창도, 더 나은 동료들의 창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수많은 창들도. 그러나 이제 그 창들은 그를 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빛만이 흘러나와 현실의 표면을 비췄다. 금빛은 먼지를, 푸른빛은 젖은 돌을, 흙빛은 발자국을, 흰빛은 사람들의 피곤한 얼굴을 드러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한 걸음 걸었다.
그러자 골목은 골목으로 남았다. 창도 창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사람으로 남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치료소 문 안쪽에서 마리암이 잠결에 작게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레이가 즉시 돌아보았고, 푸리나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죠니는 접시가 부딪히지 않도록 손가락을 얹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융은 그들을 따라 걸었다.
창 너머가 아니라, 창빛이 드는 거리 위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5막 — 색색의 빛이 드는 거리
치료소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은 골목 바닥에 길쭉하게 누워 있었고, 그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가끔씩 흔들렸다. 마리암은 안에서 잠들었다고 했다. 열은 아직 있었고, 그레이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안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절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따뜻했다. 하융은 치료소 문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식은 밤공기 속에 섞인 약초 냄새와 차 냄새를 맡았다. 우물의 신 냄새는 아직 코끝에 남아 있었으나, 이제 그것만이 밤을 채우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치료소 옆 벽에 붙은 안내문을 다시 한 번 눌렀다. 이미 잘 붙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손끝으로 모서리를 문질렀고, 종이가 벽에 더 오래 남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잠시 가만히 있었다. 레이튼은 순찰병에게 내일 아침까지 필요한 확인 사항을 부드럽게 정리해주고 있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들고 골목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안으로 들어간 뒤 아직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 품에 넣은 빵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융은 그들을 보았다. 아니, 보려 했다. 그러나 시선의 가장자리에 창들이 열렸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시장의 창, 피난길의 창, 우물의 창, 더 온전한 동료들의 창. 창들은 서로 다투듯 앞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열려 있었다. 시장의 금빛은 치료소 벽에 붙은 안내문을 따뜻하게 비췄고, 피난길의 흙빛은 골목 바닥의 발자국 위에 낮게 얹혔다. 우물의 푸른빛은 물동이의 젖은 가장자리를 차갑게 드러냈고, 더 온전한 동료들의 흰빛은 푸리나의 지친 손등과 죠니의 빈 접시, 레이튼의 찻주전자, 치료소 문 안쪽에서 잠시 보였다 사라지는 그레이의 어깨 위에 닿았다.
예전 같았으면 하융은 그중 하나를 골랐을 것이다. 가장 밝은 창, 가장 아픈 창, 가장 옳아 보이는 창, 가장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창. 그는 어느 창이 자신을 부르는지, 어느 창이 자신을 심판하는지, 어느 창이 자신에게 마지막 대답을 줄 수 있는지 찾느라 오래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골목의 돌이 발밑에 있었다. 접시의 빵가루가 죠니의 손가락에 묻어 있었고, 푸리나의 커튼 고리는 밤새 여러 번 휘둘린 탓에 손때를 입고 있었다. 레이튼의 찻주전자는 한쪽 면이 조금 식어 있었고, 치료소 안에서는 그레이가 누군가에게 물을 조금씩 마시게 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융은 창들을 보았다.
그리고 곧, 창 아래를 보았다.
“하융?”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듣고 있소.”
“이번에는 어디를 보고 있어?”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창마다 빛이 달랐다. 어느 빛은 따뜻했고, 어느 빛은 차가웠고, 어느 빛은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빛들이 한곳에서 섞이고 있었다. 치료소 앞의 좁은 골목, 밤이 늦어 사람의 발소리도 드문 그 자리에서, 서로 다른 가능성의 빛들이 현실의 먼지와 돌과 젖은 나무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창들이 열려 있소.”
푸리나는 그의 옆으로 와서 섰다. 그녀에게는 그 창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푸리나는 하융이 보는 방향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무대를 살피는 극장주처럼.
“많이?”
“많이.”
“또 잘난 척해?”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오늘은…… 조금 덜하오.”
죠니가 빈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창문도 피곤한가 보네. 밤새 우리 따라다녔으면 그럴 만하지.”
“그대는 창에게도 피로를 부여하는구려.”
“뭐든 너무 오래 열려 있으면 삐걱거려. 문이든 창문이든 사람 무릎이든.”
푸리나가 죠니를 보았다.
“그건 네 무릎 이야기야?”
“내 무릎은 아직 공식 발언을 거부하고 있어.”
레이튼이 순찰병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방금 들은 농담의 끝자락만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무릎도 침묵할 권리가 있겠군요.”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교수, 제발 내 무릎까지 문답의 장으로 데려가지 마.”
“알겠습니다. 오늘 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질문을 받았으니까요.”
하융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골목을 보았다. 창의 빛은 여전히 흘렀다. 시장의 작은 축제는 푸리나가 붙인 안내문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고, 피난길의 더 나은 동선은 돌다리 앞 푸른 리본에 스며 있었다. 우물에서 죽어버린 가능성은 그레이의 이름 목록 위에 차가운 빛으로 남았고, 더 온전한 죠니의 창은 현실의 죠니가 들고 있는 빈 접시 위에서 잠깐 희게 흔들렸다.
그러나 시선은 더 이상 어느 하나에 박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융은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무언가를 이긴 느낌은 아니었다. 극복했다는 말도 맞지 않았다. 오래전에 배웠던 길을, 밤중에 다시 찾아낸 것에 가까웠다. 그는 이미 한 번 이 세계를 선택했다. 푸리나의 곁에서, 죠니의 농담과 레이튼의 질문과 그레이의 장부 곁에서, 이미 이쪽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오늘 밤은 처음 걷는 길이 아니었다. 다만 오래된 방의 냄새에 잠시 길을 잃었다가, 다시 발밑의 돌을 확인한 밤이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잊고 있었소.”
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뭘?”
하융은 열린 창들을 보았다. 그리고 골목을 보았다.
“창 너머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소.”
죠니는 아무 말 없이 접시를 옆구리에 끼웠고, 레이튼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하융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드물게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기다릴 때, 그 침묵은 막이 내려오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하융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창마다 빛이 있었소. 저쪽 시장의 금빛, 죽은 우물의 푸른빛, 피난길의 흙빛, 더 온전한 그대들의 흰빛. 예전의 나는 그 빛을 보면 그 너머를 보았소. 어느 세계가 더 옳은지, 어느 내가 더 나은지, 어느 죽음이 나를 부르는지.”
그는 잠시 눈을 내렸다. 치료소 앞 돌바닥에는 여러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푸리나의 발자국은 작고 빠르게 흩어져 있었고, 죠니의 발자국은 한쪽이 조금 더 깊었다. 레이튼의 발자국은 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섰고, 그레이의 발자국은 치료소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위로 창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빛들이 이쪽을 비추는구려.”
그 말은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하융의 안쪽에서는 오래 닫혀 있던 창호 하나가 바람을 받은 듯 흔들렸다. 그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은 서쪽의 말보다 오래된 음절을 밀고 올라왔다. 고향의 문턱에서 배운 글자들처럼, 한문이 섞인 말이 숨 사이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창외窓外에는 만세계萬世界가 있소. 허나 금일今日의 발은 이 골목에 있소. 광光은 저 너머에서 오되, 보步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는구려. 내가 찾던 날개가 창밖에 매달려 있던 것이 아니라면…… 그 빛을 모아, 이 거리 위에서 펴야 하는 것이겠소.”
푸리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하융의 말을 다 이해했는지, 혹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커튼 고리를 아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것은 무대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우에게 무대를 넘겨주는 손짓처럼 보였다.
“그럼 네가 연출하는 거네.”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크게 웃지는 않았다. 조금 뿌듯하고, 조금 장난스럽고,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다.
“내 무대가 아니라, 네가 보는 빛으로 네가 만드는 장면. 그런 거잖아?”
하융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푸리나다웠다. 설명하지 않고도 어긋나지 않았다. 죠니가 빈 접시를 가볍게 흔들었다.
“좋네. 드디어 네가 무대 위에 올라왔다는 뜻이잖아.”
“내가 말이오?”
“응. 여태까지는 창문 옆에서 해설만 하고 있었거든. 물론 해설도 중요하긴 한데, 너무 오래 하면 관객도 배우도 지쳐.”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해설자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오는 장면, 꽤 좋아.”
“여왕님, 네가 좋아하면 보통 일이 커져.”
“이번엔 안 키워. 아마도.”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방금 아마도 들었지?”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기록해둘까요?”
“기록은 그레이한테 맡겨. 교수까지 기록하면 이 나라 문서가 너무 많아져.”
그때 치료소 문이 열렸다. 그레이가 나왔다. 손에는 작은 천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푸리나가 억지로 예약해둔 빵 조각이 조금 줄어 있었다. 아마 먹은 모양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먹었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조금만 먹었습니다.”
“가능한 빠른 나중이 지켜졌어.”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많아. 성공이야.”
그레이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빵을 감싼 천을 접었다.
“마리암은 잠들었습니다. 아직 열은 있지만, 물은 조금 마셨고…… 어머니도 옆에 있습니다.”
하융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오.”
“아직 확정해서 말하기는 이릅니다.”
“그레이 경답구려.”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낀 듯했다.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프롤로그의 방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완전히 괜찮지는 않다고 답했다. 지금도 완전히 괜찮지는 않았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우물의 푸른빛은 아직 차가웠으며, 더 나은 세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발밑에는 골목의 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빛이 있었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허나 지금은 걸을 수 있소.”
그레이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더니 커튼 고리를 다시 들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한 장면만 더.”
죠니가 바로 말했다.
“불안한데.”
“걱정 마. 큰 거 아니야.”
“네가 큰 거 아니라고 말하면 보통 큰 거였어.”
“이번엔 진짜야.”
푸리나는 치료소 옆 골목 벽으로 가더니, 시장에서 가져온 작은 종이 조각을 꺼냈다. 낮에 붙이려던 그림 안내문의 시험용 종이였다. 빵 그림, 물동이 그림, 작은 꽃 표시가 어설프게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 종이를 치료소 벽의 비어 있는 곳에 붙이려다가,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붙여도 돼?”
그레이는 벽을 보고, 치료소 문을 보고, 종이에 그려진 작은 꽃을 보았다.
“여기는 배급 안내 장소가 아닙니다.”
“응. 알아.”
“그럼 안내문으로는 부적절합니다.”
“그것도 알아.”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붙이시려는 겁니까?”
푸리나는 종이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표시.”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조금 더 작게 말했다.
“마리암이 나중에 나와서 보면, 우물 점검 안내문만 있으면 좀 무섭잖아. 빵이랑 물동이랑 꽃도 하나쯤 있으면…… 음, 그래도 밤이 전부 우물 냄새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건 안내문이라기보다는 낙서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안 돼?”
죠니는 잠시 치료소 문을 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낙서도 가끔 필요하지. 다만 너무 높이 붙이지 마. 애가 보려면 낮아야 해.”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 죠니식 승인.”
레이튼이 종이의 위치를 살폈다.
“조금 오른쪽이 좋겠습니다. 등불이 닿는 곳이군요.”
그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품에서 작은 핀을 꺼냈다.
“풀만으로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
“안내문은 아니지만…… 떨어지면 곤란하니까요.”
푸리나는 종이를 낮은 위치에 붙였다. 빵과 물동이와 작은 꽃. 그림은 어설펐다. 그러나 등불이 닿자, 창들에서 흘러온 색들이 그 위에 잠시 모였다. 시장의 금빛은 빵 그림에, 우물의 푸른빛은 물동이에, 피난길의 흙빛은 종이 가장자리에, 더 온전한 세계의 흰빛은 작은 꽃 위에 얹혔다.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하융은 그 앞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었다. 종이를 만지지는 않았다. 손끝은 종이 앞에서 멈췄고, 창빛은 그 손등 위로 얇게 흘렀다.
날자.
그 말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처럼 떠올랐다.
날자. 날자. 다시 한번만 날아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유리 너머로 사라지고 싶은 말도 아니었다. 하융은 종이의 작은 꽃을 보았다. 그 꽃은 푸리나의 장난이었고, 그레이의 핀이었고, 죠니가 낮게 붙이라고 말한 현실감이었으며, 레이튼이 등불의 각도를 살핀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하융의 창에서 들어온 빛들이 잠시 머물렀다.
하융은 아주 낮게, 거의 숨처럼 말했다.
“날개라는 것은…… 반드시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었구려.”
푸리나가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응?”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지금은 말로 다 만들지 않겠소.”
죠니가 말했다.
“좋은 판단이야. 가끔 말로 만들면 너무 커져서 들고 다니기 힘들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러면 오늘 밤의 질문은 잠시 접어두지요.”
그레이는 종이의 핀이 단단히 박혔는지 확인한 뒤, 손을 거두었다.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정말?”
죠니가 물었다.
“응. 정말. 나도 쉬어야 하고, 너도 접시를 내려놔야 하고, 그레이는 빵을 더 먹어야 하고, 레이튼은 차를 다시 데워야 해.”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지막 항목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죠니가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접시는 이미 거의 일 끝났어. 오늘 제일 성실했지.”
푸리나가 웃었다.
“그럼 접시에게도 박수.”
죠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발박수는 하지 마.”
“아, 기억하고 있었네.”
“잊기 힘든 종류의 위협이었거든.”
그레이가 아주 작게 웃었다. 하융도 웃었다. 치료소 앞의 골목에서 웃음은 크지 않았다. 병자가 잠든 곳이었으므로, 다들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낮은 웃음도 웃음이었다. 등불 아래에서, 빵과 물동이와 꽃이 그려진 종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융은 마지막으로 창들을 보았다. 모두 열려 있었다. 어느 것도 닫히지 않았다. 시장의 창도, 피난길의 창도, 우물의 창도, 더 나은 동료들의 창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수많은 창들도. 그러나 이제 그 창들은 그를 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빛만이 흘러나와 현실의 표면을 비췄다. 금빛은 먼지를, 푸른빛은 젖은 돌을, 흙빛은 발자국을, 흰빛은 사람들의 피곤한 얼굴을 드러냈다.
하융은 그 빛 아래에서 한 걸음 걸었다.
그러자 골목은 골목으로 남았다. 창도 창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사람으로 남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치료소 문 안쪽에서 마리암이 잠결에 작게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레이가 즉시 돌아보았고, 푸리나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죠니는 접시가 부딪히지 않도록 손가락을 얹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융은 그들을 따라 걸었다.
창 너머가 아니라, 창빛이 드는 거리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