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28여관◆zAR16hM8he(7420cdcd)2026-05-24 (일) 03:07:47
《비껴간 창가의 날개》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후일담 — 창가의 점심
아침은 밤보다 늦게 도착했다. 해가 떠오른 것은 오래전인 듯했으나, 도시가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피난민들이 모인 성문 근처에는 아직 밤의 피로가 남아 있었고, 시장의 덧문들은 하나씩 삐걱거리며 열렸다. 어젯밤 먼지 위에 그려졌던 빵과 꽃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물동이는 제자리에 있었고, 그림이 들어간 새 안내문은 빵집 덧문과 성문 길목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빵, 물동이, 작은 꽃. 누가 보아도 훌륭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글자를 읽지 못하는 아이 하나가 그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손을 끌었다. 하융은 멀찍이서 그 장면을 보았다. 아이는 빵 그림을 가리켰고, 어머니는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돌다리 앞 빈터에는 푸른 천이 새로 묶였다. 푸리나의 리본은 치료소 쪽으로 옮겨졌고, 그 대신 창고에서 가져온 천 조각이 등불 아래와 낮 햇빛 아래서 모두 보이도록 조금 높게 달렸다. 죠니는 그 높이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처음에는 아이 눈높이에 너무 높다고 했고, 두 번째에는 수레꾼 눈에는 너무 낮다고 했다. 그레이는 결국 두 개를 달자고 했다. 죠니는 “행정은 가끔 단순한 걸 이긴다”고 중얼거렸고, 그레이는 그 말을 칭찬인지 아닌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기록했다. 레이튼은 그 옆에서 순찰병들에게 길을 묻는 사람에게 먼저 어느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보다 “누구와 함께 오셨습니까?”가 먼저일 때가 있다는 말이었다. 하융은 그 질문을 듣고, 어젯밤 잃어버렸던 아이의 손에 들린 진흙 묻은 천 조각을 떠올렸다.
우물에는 아직 끈이 둘러져 있었다. 점검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이제 그 우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안내문에는 그레이의 단정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점검 중.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것. 아이와 노인은 먼저 알려주십시오. 푸리나는 그 아래에 꽃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옆 치료소 벽 낮은 곳에 붙은 작은 종이에 빵과 물동이와 꽃이 있었다. 아침이 되자 그 그림은 조금 우스워 보였다. 밤의 등불 아래서는 신비한 표식 같았지만, 햇빛 아래에서는 어설픈 낙서에 가까웠다. 그러나 마리암이 치료소 문가에 앉아 그 그림을 보고 있었다.
마리암은 아직 창백했다. 열은 내렸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고, 그레이는 아주 단호하게 밖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는 문가에 잠깐 앉아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그대로 있었다. 푸리나는 아이가 그림을 보는 것을 발견하고, 한껏 비밀스러운 얼굴로 다가갔다.
“어때?”
마리암은 한참 그림을 보다가 말했다.
“빵이 조금 이상해요.”
푸리나는 가슴을 짚었다.
“정확한 감상이야. 하지만 너무 솔직해서 극작가가 다쳤어.”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극작가가 아니라 그림 그린 사람이지. 그리고 애가 맞는 말을 했어.”
“죠니, 넌 왜 아침부터 내 편이 아니야?”
“아침이라서. 빈속에는 거짓말이 잘 안 나와.”
마리암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은 기침으로 바뀔 뻔했지만, 그레이가 바로 물을 조금 건넸다. 아이는 물을 마셨다. 이번에는 점검된 물이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은 열려 있었다. 우물가에서 쓰러졌던 마리암의 창, 이름이 마른 잉크로 바뀌었던 창, 붉은 끈이 천 아래로 사라졌던 창. 그 창은 닫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마리암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그레이가 컵의 기울기를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하융은 그 컵의 기울기를 보았다. 창 너머의 죽음은 컵 안쪽의 물빛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그 푸른빛은 그레이의 손등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손등에는 밤새 생긴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융.”
레이튼이 옆에 섰다. 그는 오늘도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 계속 나오는지 하융은 아직 알지 못했다. 어쩌면 레이튼의 여관에는 찻주전자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오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잠깐 생각했다.
“듣고 있소.”
“오늘은 창들이 조금 조용합니까?”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시장과 돌다리와 우물과 치료소 벽의 그림을 차례로 보았다. 창들은 여전히 있었다. 시장의 금빛, 피난길의 흙빛, 우물의 푸른빛, 더 온전한 동료들의 흰빛. 아침이 되었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젯밤과 달리, 그 빛들은 사물들의 가장자리에 얇게 붙어 있었다. 창고로 향하는 줄, 새로 묶인 천, 점검 중인 우물, 마리암의 컵, 죠니가 닦고 있는 빈 접시. 하융은 그 빛들을 하나씩 보다가, 손안의 찻잔을 받았다.
“조용하다기보다는…… 서로 다투지 않는구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에게 좋은 아침이란, 질문이 덜 싸우는 아침이오?”
“꽤 정확한 표현입니다. 질문도 때로는 순서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니까요.”
하융은 찻잔을 들었다. 차는 따뜻했다. 미지근하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온도가 분명했다. 그는 그 온도를 확인하고, 문득 웃었다.
푸리나가 마리암에게 그림에 대한 변론을 늘어놓는 동안, 죠니는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접시는 어젯밤보다 가벼워 보였다. 빵도 치즈도 말린 과일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레이는 마리암의 상태를 확인한 뒤, 접시를 보더니 잠시 눈을 피했다. 푸리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
그레이가 멈췄다.
“네.”
“가능한 빠른 나중.”
그레이는 조금 작게 말했다.
“먹었습니다.”
“얼마나?”
“조금…….”
죠니가 끼어들었다.
“내가 봤어. 조금은 맞아. 하지만 아예 안 먹은 건 아니니까, 오늘은 봐줘.”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네가 그레이 편을 들어?”
“아침이라 그래. 그리고 나도 다 먹으라고 잔소리하면 내가 남은 거 다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레이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농담이야. 반쯤은.”
푸리나는 접시를 들여다보다가 남은 빵 조각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럼 반쯤만 더.”
그레이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중에…….”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레이는 말을 고쳤다.
“곧 먹겠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전했네.”
레이튼은 즐겁게 웃었다. 마리암은 빵이 이상하다는 자기 평이 아직 마음에 남았는지, 푸리나의 그림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작은 꽃을 가리켰다.
“꽃은 좋아요.”
푸리나는 즉시 살아났다.
“봤지? 꽃은 합격이래!”
죠니가 접시를 닦던 천을 접었다.
“빵은 탈락이고?”
“빵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거야.”
“그 표현 좋네. 실패한 그림한테 상냥해.”
푸리나는 웃으며 마리암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다음에는 빵을 더 잘 그릴게. 네가 봐줄래?”
마리암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융은 그 소리를 들었다. 안도의 숨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의 골목에서는 그런 작은 소리들이 가장 오래 남았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다른 창을 보았다. 그 창에서는 마리암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아니었다. 숫자였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그 창의 푸른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융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 빛이 현실의 마리암 위로 그대로 덮이게 두지 않았다. 현실의 마리암은 푸리나의 그림에 점수를 매기고 있었고, 그레이는 빵을 조금씩 먹고 있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레이튼은 그 모든 것을 보고도 묻지 않았다. 질문을 아낄 줄 아는 사람처럼.
그때 푸리나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하융.”
“듣고 있소.”
“저쪽 세계 점심은 뭐였어?”
하융은 잠시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저쪽 세계라 하시면?”
“네가 본 시장, 길, 우물, 더 괜찮은 우리들. 그런 창들 중 하나에 점심도 있었을 거 아냐.”
죠니가 빈 접시를 내려놓고 흥미롭다는 듯 하융을 보았다.
“그건 나도 궁금하네.”
레이튼은 찻잔을 든 채 웃었다.
“상당히 중요한 비교 항목일 수 있겠군요.”
그레이는 빵을 들고 있다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도…… 확인 대상입니까?”
푸리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세계의 차이는 식탁에서 드러나는 법이야.”
죠니가 말했다.
“그건 맞는 말 같은데, 네가 말하니까 또 연극 대사 같아.”
하융은 창들을 떠올렸다. 더 여유로운 시장의 점심. 피난길이 덜 막혔던 세계의 배급. 더 온전한 죠니가 말 위에서 받았던 식사. 그중 하나가 유난히 선명했다. 바다 쪽 냄새가 조금 섞인 식탁. 생선. 빵. 조금 더 따뜻한 국물.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생선이었소.”
죠니가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쪽이 낫네.”
푸리나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그렇게 빨라?”
“난 아침부터 생선 먹는 건 별로야. 특히 밤새 우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더.”
레이튼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조리 방식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수, 생선의 가능성까지 열어두지 마. 지금은 닫아도 돼.”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이쪽이 낫다고 하였소.”
“응.”
“어째서요?”
죠니는 빈 접시를 들어 보였다. 접시는 정말로 비어 있었다. 빵가루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쪽은 이미 먹었으니까.”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마리암은 푸리나가 웃는 걸 보고 따라 웃다가, 다시 그레이에게 물을 받았다. 그레이는 “천천히”라고 말했다. 레이튼은 웃음을 삼키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빈 접시를 보았다. 저쪽 세계의 생선은 아직 창 너머에 있었다. 이쪽의 빵은 이미 먹혔다. 접시는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빈 접시가 저쪽의 가득 찬 식탁보다 더 확실했다.
그는 낮게 웃었다.
“참으로 죠니다운 기준이오.”
“쓸 만하지?”
“쓸 만하오.”
죠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아침이 조금 더 밝아졌다. 시장에서는 빵집 주인이 덧문을 완전히 열었고, 어젯밤 붙은 그림 안내문을 보고 한참 동안 자기 가게의 빵 그림을 평가했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죠니는 “항의 들어오겠네”라고 중얼거렸고, 푸리나는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 돼”라고 답했다. 그레이는 정말로 그 표현을 적을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레이튼은 빵집 주인에게 내일 그림을 조금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지역 참여형 안내문!”이라고 외치려다가, 치료소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하융은 그들을 보며 걸었다. 창들은 열려 있었다. 그 안의 세계들도 여전히 있었다. 더 나은 시장, 덜 막힌 피난길, 죽은 가능성, 더 온전한 동료들, 아직 보지 못한 수많은 장면들. 그 창들은 앞으로도 열릴 것이다. 때로는 하융을 아프게 할 것이고, 때로는 그를 도울 것이며, 때로는 그저 아름다워서 오래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는 창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창 너머로 사라지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빛이 내려앉은 길을 걸었다.
시장 쪽에서 빵 냄새가 났다. 피난길 쪽에서는 새로 묶은 천이 바람에 흔들렸다. 우물은 아직 닫혀 있었고, 치료소 문가의 작은 꽃 그림은 햇빛 속에서 조금 더 어설퍼 보였다. 마리암은 그 꽃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레이는 빵을 곧 먹겠다고 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들고 있었으며,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다시 데우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푸리나는 벌써 다음 그림을 어떻게 고칠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발등 위에 얇게 놓였다. 금빛과 푸른빛과 흙빛과 흰빛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겹쳤다. 그는 그 빛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도 창은 열려 있구려.”
푸리나가 옆에서 물었다.
“응. 그래서?”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답을 요구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 대사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조금 웃었다.
“그래서, 걸을 수 있소.”
푸리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의 결말은 그걸로 하자.”
죠니가 말했다.
“결말이라기엔 아직 오전인데.”
“후일담의 결말이야.”
“그럼 점심은?”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생선 말고.”
하융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이쪽이 낫겠구려.”
죠니가 빈 접시를 들고 앞장섰다.
“봐. 역시 좋은 판단이야.”
하융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여전히 빛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오늘 하융은 그 빛들을 지나쳐 멀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 빛이 닿은 거리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빈 접시는, 다시 채워질 자리를 찾아 흔들리고 있었다.
— 창밖의 세계들을 지나, 오늘의 거리 위에 날개를 펴는 이야기 —
후일담 — 창가의 점심
아침은 밤보다 늦게 도착했다. 해가 떠오른 것은 오래전인 듯했으나, 도시가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피난민들이 모인 성문 근처에는 아직 밤의 피로가 남아 있었고, 시장의 덧문들은 하나씩 삐걱거리며 열렸다. 어젯밤 먼지 위에 그려졌던 빵과 꽃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물동이는 제자리에 있었고, 그림이 들어간 새 안내문은 빵집 덧문과 성문 길목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빵, 물동이, 작은 꽃. 누가 보아도 훌륭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글자를 읽지 못하는 아이 하나가 그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손을 끌었다. 하융은 멀찍이서 그 장면을 보았다. 아이는 빵 그림을 가리켰고, 어머니는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돌다리 앞 빈터에는 푸른 천이 새로 묶였다. 푸리나의 리본은 치료소 쪽으로 옮겨졌고, 그 대신 창고에서 가져온 천 조각이 등불 아래와 낮 햇빛 아래서 모두 보이도록 조금 높게 달렸다. 죠니는 그 높이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처음에는 아이 눈높이에 너무 높다고 했고, 두 번째에는 수레꾼 눈에는 너무 낮다고 했다. 그레이는 결국 두 개를 달자고 했다. 죠니는 “행정은 가끔 단순한 걸 이긴다”고 중얼거렸고, 그레이는 그 말을 칭찬인지 아닌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기록했다. 레이튼은 그 옆에서 순찰병들에게 길을 묻는 사람에게 먼저 어느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보다 “누구와 함께 오셨습니까?”가 먼저일 때가 있다는 말이었다. 하융은 그 질문을 듣고, 어젯밤 잃어버렸던 아이의 손에 들린 진흙 묻은 천 조각을 떠올렸다.
우물에는 아직 끈이 둘러져 있었다. 점검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이제 그 우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안내문에는 그레이의 단정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점검 중. 물은 성문 임시 창고에서 받을 것. 아이와 노인은 먼저 알려주십시오. 푸리나는 그 아래에 꽃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옆 치료소 벽 낮은 곳에 붙은 작은 종이에 빵과 물동이와 꽃이 있었다. 아침이 되자 그 그림은 조금 우스워 보였다. 밤의 등불 아래서는 신비한 표식 같았지만, 햇빛 아래에서는 어설픈 낙서에 가까웠다. 그러나 마리암이 치료소 문가에 앉아 그 그림을 보고 있었다.
마리암은 아직 창백했다. 열은 내렸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고, 그레이는 아주 단호하게 밖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는 문가에 잠깐 앉아 있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그대로 있었다. 푸리나는 아이가 그림을 보는 것을 발견하고, 한껏 비밀스러운 얼굴로 다가갔다.
“어때?”
마리암은 한참 그림을 보다가 말했다.
“빵이 조금 이상해요.”
푸리나는 가슴을 짚었다.
“정확한 감상이야. 하지만 너무 솔직해서 극작가가 다쳤어.”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극작가가 아니라 그림 그린 사람이지. 그리고 애가 맞는 말을 했어.”
“죠니, 넌 왜 아침부터 내 편이 아니야?”
“아침이라서. 빈속에는 거짓말이 잘 안 나와.”
마리암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은 기침으로 바뀔 뻔했지만, 그레이가 바로 물을 조금 건넸다. 아이는 물을 마셨다. 이번에는 점검된 물이었다. 하융은 그 장면을 보았다. 창은 열려 있었다. 우물가에서 쓰러졌던 마리암의 창, 이름이 마른 잉크로 바뀌었던 창, 붉은 끈이 천 아래로 사라졌던 창. 그 창은 닫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마리암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그레이가 컵의 기울기를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하융은 그 컵의 기울기를 보았다. 창 너머의 죽음은 컵 안쪽의 물빛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그 푸른빛은 그레이의 손등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손등에는 밤새 생긴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융.”
레이튼이 옆에 섰다. 그는 오늘도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 계속 나오는지 하융은 아직 알지 못했다. 어쩌면 레이튼의 여관에는 찻주전자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오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잠깐 생각했다.
“듣고 있소.”
“오늘은 창들이 조금 조용합니까?”
하융은 대답하기 전에 시장과 돌다리와 우물과 치료소 벽의 그림을 차례로 보았다. 창들은 여전히 있었다. 시장의 금빛, 피난길의 흙빛, 우물의 푸른빛, 더 온전한 동료들의 흰빛. 아침이 되었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젯밤과 달리, 그 빛들은 사물들의 가장자리에 얇게 붙어 있었다. 창고로 향하는 줄, 새로 묶인 천, 점검 중인 우물, 마리암의 컵, 죠니가 닦고 있는 빈 접시. 하융은 그 빛들을 하나씩 보다가, 손안의 찻잔을 받았다.
“조용하다기보다는…… 서로 다투지 않는구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에게 좋은 아침이란, 질문이 덜 싸우는 아침이오?”
“꽤 정확한 표현입니다. 질문도 때로는 순서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니까요.”
하융은 찻잔을 들었다. 차는 따뜻했다. 미지근하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온도가 분명했다. 그는 그 온도를 확인하고, 문득 웃었다.
푸리나가 마리암에게 그림에 대한 변론을 늘어놓는 동안, 죠니는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접시는 어젯밤보다 가벼워 보였다. 빵도 치즈도 말린 과일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레이는 마리암의 상태를 확인한 뒤, 접시를 보더니 잠시 눈을 피했다. 푸리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
그레이가 멈췄다.
“네.”
“가능한 빠른 나중.”
그레이는 조금 작게 말했다.
“먹었습니다.”
“얼마나?”
“조금…….”
죠니가 끼어들었다.
“내가 봤어. 조금은 맞아. 하지만 아예 안 먹은 건 아니니까, 오늘은 봐줘.”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네가 그레이 편을 들어?”
“아침이라 그래. 그리고 나도 다 먹으라고 잔소리하면 내가 남은 거 다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레이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농담이야. 반쯤은.”
푸리나는 접시를 들여다보다가 남은 빵 조각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럼 반쯤만 더.”
그레이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중에…….”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레이는 말을 고쳤다.
“곧 먹겠습니다.”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전했네.”
레이튼은 즐겁게 웃었다. 마리암은 빵이 이상하다는 자기 평이 아직 마음에 남았는지, 푸리나의 그림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작은 꽃을 가리켰다.
“꽃은 좋아요.”
푸리나는 즉시 살아났다.
“봤지? 꽃은 합격이래!”
죠니가 접시를 닦던 천을 접었다.
“빵은 탈락이고?”
“빵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거야.”
“그 표현 좋네. 실패한 그림한테 상냥해.”
푸리나는 웃으며 마리암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다음에는 빵을 더 잘 그릴게. 네가 봐줄래?”
마리암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융은 그 소리를 들었다. 안도의 숨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의 골목에서는 그런 작은 소리들이 가장 오래 남았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다른 창을 보았다. 그 창에서는 마리암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아니었다. 숫자였다. 성명 미상. 처리 완료. 그 창의 푸른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융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 빛이 현실의 마리암 위로 그대로 덮이게 두지 않았다. 현실의 마리암은 푸리나의 그림에 점수를 매기고 있었고, 그레이는 빵을 조금씩 먹고 있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닦고 있었다. 레이튼은 그 모든 것을 보고도 묻지 않았다. 질문을 아낄 줄 아는 사람처럼.
그때 푸리나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하융.”
“듣고 있소.”
“저쪽 세계 점심은 뭐였어?”
하융은 잠시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저쪽 세계라 하시면?”
“네가 본 시장, 길, 우물, 더 괜찮은 우리들. 그런 창들 중 하나에 점심도 있었을 거 아냐.”
죠니가 빈 접시를 내려놓고 흥미롭다는 듯 하융을 보았다.
“그건 나도 궁금하네.”
레이튼은 찻잔을 든 채 웃었다.
“상당히 중요한 비교 항목일 수 있겠군요.”
그레이는 빵을 들고 있다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도…… 확인 대상입니까?”
푸리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세계의 차이는 식탁에서 드러나는 법이야.”
죠니가 말했다.
“그건 맞는 말 같은데, 네가 말하니까 또 연극 대사 같아.”
하융은 창들을 떠올렸다. 더 여유로운 시장의 점심. 피난길이 덜 막혔던 세계의 배급. 더 온전한 죠니가 말 위에서 받았던 식사. 그중 하나가 유난히 선명했다. 바다 쪽 냄새가 조금 섞인 식탁. 생선. 빵. 조금 더 따뜻한 국물.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생선이었소.”
죠니가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쪽이 낫네.”
푸리나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그렇게 빨라?”
“난 아침부터 생선 먹는 건 별로야. 특히 밤새 우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더.”
레이튼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조리 방식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수, 생선의 가능성까지 열어두지 마. 지금은 닫아도 돼.”
하융은 죠니를 보았다.
“이쪽이 낫다고 하였소.”
“응.”
“어째서요?”
죠니는 빈 접시를 들어 보였다. 접시는 정말로 비어 있었다. 빵가루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쪽은 이미 먹었으니까.”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마리암은 푸리나가 웃는 걸 보고 따라 웃다가, 다시 그레이에게 물을 받았다. 그레이는 “천천히”라고 말했다. 레이튼은 웃음을 삼키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융은 빈 접시를 보았다. 저쪽 세계의 생선은 아직 창 너머에 있었다. 이쪽의 빵은 이미 먹혔다. 접시는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빈 접시가 저쪽의 가득 찬 식탁보다 더 확실했다.
그는 낮게 웃었다.
“참으로 죠니다운 기준이오.”
“쓸 만하지?”
“쓸 만하오.”
죠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아침이 조금 더 밝아졌다. 시장에서는 빵집 주인이 덧문을 완전히 열었고, 어젯밤 붙은 그림 안내문을 보고 한참 동안 자기 가게의 빵 그림을 평가했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죠니는 “항의 들어오겠네”라고 중얼거렸고, 푸리나는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 돼”라고 답했다. 그레이는 정말로 그 표현을 적을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레이튼은 빵집 주인에게 내일 그림을 조금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지역 참여형 안내문!”이라고 외치려다가, 치료소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하융은 그들을 보며 걸었다. 창들은 열려 있었다. 그 안의 세계들도 여전히 있었다. 더 나은 시장, 덜 막힌 피난길, 죽은 가능성, 더 온전한 동료들, 아직 보지 못한 수많은 장면들. 그 창들은 앞으로도 열릴 것이다. 때로는 하융을 아프게 할 것이고, 때로는 그를 도울 것이며, 때로는 그저 아름다워서 오래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는 창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창 너머로 사라지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빛이 내려앉은 길을 걸었다.
시장 쪽에서 빵 냄새가 났다. 피난길 쪽에서는 새로 묶은 천이 바람에 흔들렸다. 우물은 아직 닫혀 있었고, 치료소 문가의 작은 꽃 그림은 햇빛 속에서 조금 더 어설퍼 보였다. 마리암은 그 꽃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레이는 빵을 곧 먹겠다고 했고, 죠니는 빈 접시를 들고 있었으며,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다시 데우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푸리나는 벌써 다음 그림을 어떻게 고칠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발등 위에 얇게 놓였다. 금빛과 푸른빛과 흙빛과 흰빛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겹쳤다. 그는 그 빛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도 창은 열려 있구려.”
푸리나가 옆에서 물었다.
“응. 그래서?”
하융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답을 요구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다음 대사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하융은 조금 웃었다.
“그래서, 걸을 수 있소.”
푸리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의 결말은 그걸로 하자.”
죠니가 말했다.
“결말이라기엔 아직 오전인데.”
“후일담의 결말이야.”
“그럼 점심은?”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생선 말고.”
하융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이쪽이 낫겠구려.”
죠니가 빈 접시를 들고 앞장섰다.
“봐. 역시 좋은 판단이야.”
하융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창밖에는 무수한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들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여전히 빛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오늘 하융은 그 빛들을 지나쳐 멀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 빛이 닿은 거리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빈 접시는, 다시 채워질 자리를 찾아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