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29여관◆zAR16hM8he(7420cdcd)2026-05-24 (일) 11:31:09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프롤로그 — 등불이 그려진 표

그레이는 촛불을 줄였다. 완전히 끄지는 않았다. 장부 위에 남은 마지막 줄이 아직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책을 덮으면 글자가 번진다. 글자가 번지면 다시 확인해야 한다. 다시 확인하면 늦어진다. 늦어진 일은, 때로 다른 누군가의 아침을 조금 더 춥게 만든다. 그레이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곤해도 촛불을 조금 남겨두었고, 어깨가 굳어도 펜을 놓기 전에 마지막 줄을 확인했으며, 누군가가 보기에는 사소할 문장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종이 냄새와 약초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낮에는 구호소에서 돌아온 아이의 열을 확인했고, 저녁에는 우물 점검표와 배급 변경안을 맞췄으며, 밤에는 장례비 지급 기록을 고쳤다. 그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에게 일은 끝나는 것보다 잠시 놓이는 쪽에 가까웠다. 우물은 내일도 확인해야 했고, 민원은 아침에 다시 들어올 것이며, 누군가의 편지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밤의 손은 더 이상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펜을 잡은 손가락 끝이 조금 차가웠고, 손목에는 오래 기록한 사람 특유의 둔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큰일로 여기지 않았다. 통증은 일의 끝에 흔히 남는 먼지 같은 것이었다. 털어내면 사라지는 때도 있고, 조금 남는 때도 있었다. 다만 그날 밤에는 눈이 자꾸 장부의 줄을 놓쳤다. 같은 이름을 두 번 읽고, 같은 사인을 다시 확인하고, 이미 표시해둔 항목에 또 작은 점을 찍으려 했다. 그녀는 그제야 펜을 내려놓았다. 실수하기 전에 멈추는 것도 일의 일부였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발소리는 대개 가볍지 않았다. 급한 보고, 추가 사망자, 누락된 배급, 이름이 맞지 않는 시신, 도착하지 못한 편지.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장부를 닫지 않고, 빈 종이를 한 장 빼두었다. 그러나 문을 연 사람은 급한 보고를 들고 있지 않았다.

푸리나 헤툼은 양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상자는 극장에서 쓰는 소품 상자처럼 보였지만, 평소 그녀가 들고 다니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리본도 없었고, 금박도 없었고, “개막!”이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장식도 없었다. 다만 상자 윗면에 작은 등불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등불은 잘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누군가 오래 생각한 뒤 최대한 단순하게 남긴 표시 같았다.

“그레이.”

푸리나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무대를 열 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무대 뒤에서 배우의 손을 잡을 때의 목소리였다.

“전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그 말은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레이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방 안을 보았다. 마르지 않은 잉크, 반쯤 식은 찻잔, 어깨에 걸쳐둔 외투, 장부 옆에 놓인 약재 봉투, 그리고 그레이의 얼굴. 그레이는 늘 조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피곤은 조용한 얼굴 위에도 자리를 찾는다. 눈 밑의 얕은 그늘, 평소보다 조금 늦은 반응, 펜을 내려놓은 뒤에도 허공에 남아 있는 손의 자세. 푸리나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본 뒤, 일부러 크게 떠들지 않았다.

“오늘은 공연 표를 가져왔어.”

그레이는 상자를 보았다.

“공연……입니까?”

“응. 그런데 표는 한 장뿐이야.”

“제가 전달하면 됩니까?”

푸리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거야.”

그레이의 손이 장부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제 것입니까?”

“응.”

푸리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종이 표가 들어 있었다. 표에는 화려한 문구가 없었다. 극단 이름도, 막 번호도, 출연진도 없었다. 그저 등불 그림 하나와 짧은 글귀가 있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 오늘 밤 손님 한 명.

그레이는 표를 오래 보았다. 손님이라는 말이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관의 성좌를 섬기는 이들의 언어를 알았고, 손님이라는 말이 가진 따뜻함도 알았다. 다만 자신에게 그 말이 향해 있는 것이 낯설었다. 그레이는 늘 손님을 맞이하는 쪽에 가까웠다. 죽은 이의 기억을 맞이하고, 산 자의 민원을 맞이하고, 길 잃은 편지와 늦은 보상과 닫힌 우물의 보고를 맞이했다. 누군가 찾아오면 자리를 내어주었고, 기록하고, 확인하고, 다음 사람이 같은 곳에서 넘어지지 않게 길을 고쳤다.

그런데 표에는 손님 한 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하.”

“응.”

“제가…… 손님입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제가 접수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없어.”

“확인해야 할 명단은요?”

“없어.”

“그러면 제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푸리나는 잠시 표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여기서 멋진 대사를 붙였을 것이다. ‘그저 무대를 즐기면 돼!’라든가, ‘관객의 의무는 보는 것!’이라든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가 그런 말로 쉽게 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물러줘.”

그레이는 그 말을 다시 듣는 사람처럼 눈을 내렸다.

“머무는 것……입니까?”

“응. 오늘은 네가 장부를 들고 들어가서 뭔가를 고치는 극이 아니야. 네가 기록하지 않아도 극은 진행돼. 네가 확인하지 않아도 막은 올라가. 대신 네가 거기 있어야 해.”

그레이는 표의 등불 그림을 보았다. 선은 단순했다. 불꽃은 작았고, 등불 아래에는 아주 짧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사람 같기도 하고, 의자 같기도 했다.

“제가 없어도 진행된다면, 제가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어.”

“죄송합니다.”

“아니, 좋아. 그레이다운 질문이야.”

푸리나는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그녀는 장부 위의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를 보고, 표를 그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장부 옆의 비어 있는 자리, 찻잔과 약재 봉투 사이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이 극은 네가 일을 잘 못해서 준비한 게 아니야.”

그레이는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주 천천히 말을 골랐다.

“오히려 네가 너무 잘해서 준비한 거야. 너무 오래, 너무 조용히, 너무 당연한 것처럼.”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칭찬을 받았을 때 그녀는 종종 그러했다. 기뻐하기보다 먼저 그 말이 자신에게 과한지 확인하려는 얼굴이 되었다. 푸리나는 그 표정을 보고,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죽은 이를 기리며 산 자를 돕는 일. 네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알아. 다는 몰라도, 적어도 가볍게는 생각하지 않아.”

그레이의 손가락이 살짝 접혔다.

“다만 오늘 밤은, 그 일을 무대 위에 그대로 올리려는 게 아니야. 그건 네가 매일 하잖아. 우리는 이미 네가 장부를 보고, 우물을 닫고, 편지를 보내고, 등불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어.”

푸리나는 표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오늘은 그 거리의 다른 문을 열어볼 거야.”

“다른 문……입니까?”

“응. 네가 관리하는 문 말고, 네가 들어가는 문.”

그레이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밤은 깊었고, 복도 끝에서 극장 쪽 등불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등불이 꺼지기 전에 심지를 갈아야 하는지 생각했다가, 곧 그 생각을 멈췄다. 방금 전 푸리나가 가져온 말 때문이었다. 네가 들어가는 문.

그레이는 조용히 물었다.

“제가 들어가도 되는 곳입니까?”

푸리나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응.”

“제가…… 손님으로요?”

“응. 손님으로.”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레이는 아주 잠깐 자기 손을 보았다. 펜을 오래 잡은 손, 장부를 넘긴 손, 시신을 덮은 천의 가장자리를 고친 손, 아이에게 물을 건넨 손. 그 손이 손님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떠올리지 못했다. 손님은 앉는다. 손님은 묵는다. 손님은 맡긴다. 손님은 때로 아무것도 고치지 않는다. 그 마지막이 가장 낯설었다.

푸리나는 그레이가 대답하지 않자, 일부러 조금 밝게 말했다.

“걱정 마. 너무 화려하게 만들지는 않았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제가 싫어할 것 같았습니까?”

“응. 죽음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꾸미는 거, 너는 좋아하지 않을 것 같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꽃비도, 대합창도, 눈물 강요도 없음. 대신 등불은 있어.”

“등불은…… 필요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보다 작았지만, 충분히 푸리나다웠다. 그때 문밖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죠니가 문틀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작게 자른 빵과 말린 과일, 치즈 몇 조각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식사라기엔 조금 대충이고 야식이라기엔 묘하게 성의 있었다.

“아직 시작 안 했어?”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죠니, 너는 왜 항상 접시를 들고 나타나?”

“필요하니까. 밤에 극을 열면 누군가는 배고파져. 이건 예언이 아니라 경험이야.”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준비를 도와드릴까요?”

죠니가 바로 말했다.

“아니. 이 접시는 네가 도와줄 대상이 아니야. 네가 먹을 대상이지.”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저는 아직…….”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에?”

그레이는 말을 삼켰다. 죠니가 접시를 책상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단, 장부와 잉크가 닿지 않는 자리를 먼저 눈으로 확인했다.

“나중에도 좋긴 한데, 가능한 빠른 나중으로 하자. 너무 늦은 나중은 그냥 안 먹겠다는 말이랑 비슷해지거든.”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가능한 빠른 나중에 먹겠습니다.”

죠니는 푸리나를 보았다.

“들었지. 계약 성립.”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증인으로 기록하고 싶지만, 오늘 그레이는 기록 담당이 아니니까 참을게.”

그레이는 그 말에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웃었다.

곧 레이튼도 도착했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마치 이 밤의 극에 가장 필요한 소품이 그것이라는 듯 태연했다. 레이튼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그레이의 표와 푸리나의 상자와 죠니의 접시를 차례로 본 뒤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밤입니다. 혹은, 잠시 쉬어도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레이튼 님.”

“그레이 경. 오늘은 제가 질문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바로 말했다.

“그거 가능해?”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시도할 가치는 있지요.”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교수한테는 그게 이미 질문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레이에게 찻잔을 하나 따라주었다.

“다만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레이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네.”

“그레이 경께서 손님으로 초대받는다면,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레이는 조금 생각했다. 보통이라면 출입구, 안전, 손님 명단, 불이 꺼질 가능성, 아픈 사람의 유무, 물과 식사의 상태, 돌아갈 길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손님이 아니라 관리자가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마도…… 제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확인할 것 같습니다.”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출발점입니다.”

“그게 훌륭합니까?”

“예. 어떤 방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어떤 방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알려줍니다. 오늘 밤의 방은 후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요.”

그레이는 그 말을 들고 잠시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하융이 문가에 나타났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었고, 복도 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하융은 그레이의 피곤한 얼굴과 표 위의 등불 그림을 보더니, 오래 말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레이튼의 침묵과 달랐다. 질문을 준비하는 침묵이 아니라, 이미 비슷한 방을 지나온 사람이 길의 냄새를 확인하는 침묵이었다.

“그레이 경.”

“하융 님.”

“오늘은 그대가 문 안으로 들어가는 날이오?”

그레이는 표를 보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좋소. 문밖에서 오래 선 사람은, 안쪽의 의자가 낯설 때가 있소.”

그 말은 이상하게 부드럽게 닿았다.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융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말은 아직 뒤에 남겨둔 듯했다.

푸리나는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한 뒤, 상자를 다시 닫았다. 그리고 그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표를 들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갈까?”

그레이는 장부를 보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줄은 이제 거의 마른 듯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책갈피를 끼웠고, 장부를 닫았다. 그러나 품에 넣지는 않았다. 책상 위에 두었다. 표는 손에 들었다. 그 작은 차이를 모두가 보았지만,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겠습니다.”

푸리나는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극장 뒤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소품 상자와 낡은 천막, 쓰지 않는 의자들이 놓여 있던 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복도 끝에 낮은 터널이 하나 열려 있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문인지, 푸리나의 극이 만들어낸 문인지 알기 어려웠다. 문 위에는 작은 등불이 걸려 있었고, 그 불빛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만큼만 길을 밝혔다.

터널 앞에서 푸리나는 멈췄다. 그녀는 평소처럼 “개막!”이라고 외치려다가, 그레이를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은 조용히 열게.”

죠니가 접시를 들고 뒤에서 말했다.

“그게 좋겠네. 여관이면 밤에 너무 시끄러우면 항의 들어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맞아. 손님이 쉬어야 하니까.”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품에 안듯 들었다.

“준비되었습니다.”

하융은 터널 안쪽을 보며 낮게 말했다.

“길이 짧지는 않겠구려.”

그레이는 손안의 표를 내려다보았다. 표의 등불 그림이 터널의 빛을 받아 아주 작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름을 묻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이 터널의 구조를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은. 다만 발을 들여놓기 전에, 책상 위에 두고 온 장부의 무게가 손에서 빠져나간 것을 느꼈다. 손은 가벼웠다. 가벼운 손은 낯설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괜찮아?”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편하지는 않습니다.”

“응.”

“하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충분해.”

그레이는 터널 안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돌바닥은 차갑지 않았다. 오래 비어 있었던 길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쓸고 등불을 걸어둔 길 같았다. 등불의 빛은 그녀의 발끝을 작게 비췄고, 뒤에서는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터널 저편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여관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흔들릴 때 나는 소리였다. 그레이는 그 소리를 듣고, 오래전 자신의 [기억이 잠드는 거리] 어딘가에서 보았던 문패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문패를 정리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밤, 그녀는 손님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조용히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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