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30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11:55:23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1막 — 이름을 맡기는 접수대
터널은 길지 않았다. 발걸음으로 세면 열두 걸음 남짓이었다. 그런데 그 열두 걸음 사이에서, 그레이는 몇 번이나 손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평소라면 장부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아 있었을 자리였다.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받치려는 모양을 만들었다가, 아무것도 닿지 않자 다시 천천히 펴졌다. 터널 벽에는 습기가 많지 않았고, 오래된 극장 뒤편에서 이어진 길치고는 먼지도 적었다. 대신 갓 털어낸 이불과 오래 닦은 나무, 그리고 아주 희미한 차 냄새가 났다.
푸리나는 앞에서 걸었다. 그녀의 걸음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터널이 이렇게 울림이 좋은 곳이라면, 평소의 푸리나는 분명 두세 번쯤은 목소리를 시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가끔 뒤돌아 그레이가 따라오는지 확인했고, 그때마다 손가락에 걸린 작은 커튼 고리만 한 바퀴 굴렸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왔다. 접시에는 작게 자른 빵과 치즈, 말린 과일이 얹혀 있었다. 터널 안까지 접시를 가져오는 것이 맞는지 그레이가 잠시 시선을 주자, 죠니는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여관거리라며. 빈손으로 가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접시는 선물입니까?”
“반쯤은. 나머지 반은 내가 먹을 거고.”
푸리나가 앞에서 작게 웃었다.
“정직하네.”
“선물이라고 다 남 주면 너무 숭고해져. 난 숭고한 접시는 부담스러워.”
레이튼은 낮게 웃었고, 하융은 터널 벽에 비친 등불 그림자를 보며 조용히 걸었다. 그레이는 그들의 발소리를 들었다. 푸리나의 걸음은 가볍고 빠르며, 죠니의 걸음은 한쪽 박자가 아주 조금 늦고, 레이튼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하융은 걸음과 걸음 사이에 잠시 생각을 놓는 듯했다. 그 발소리들은 낮은 천장 아래에서 겹쳤다가, 다시 각자의 보폭으로 풀어졌다. 그레이는 그 차이들을 들었다. 기록하지 않았다.
터널 끝에는 작은 종이 달린 문이 있었다. 문은 크지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문고리 아래에 낡은 나무패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나무패에는 이름 대신 작은 등불이 새겨져 있었다. 푸리나의 극은 종종 무대와 신술과 마음의 경계에서 이름을 늦게 얻었다. 그레이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낮은 등불과 나무패를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가 문 옆에 섰다.
“여기서부터야.”
그레이가 물었다.
“이 문은…… 극의 일부입니까?”
“응. 그리고 아마 조금 더.”
푸리나는 대답을 그렇게 흐렸다. 그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작은 물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물이 흐르는 소리인지,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오가는 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푸리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그레이를 한 번 더 보았다. 그 시선은 개막을 알리는 연출자의 시선이라기보다, 낯선 방에 들어가기 전 손님이 신발을 잘 신고 있는지 확인하는 여관 주인의 시선에 가까웠다.
문이 열렸다.
종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는 거리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극장 뒤편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문 너머의 거리는 극장보다 훨씬 넓었다. 하늘은 밤이었고, 하늘이라기보다는 천장에 가까웠지만, 별처럼 작은 등불들이 높이 걸려 있었다. 양쪽으로 낮은 여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간판들은 바람 없이도 천천히 흔들렸다. 어떤 간판에는 빵 조각이 그려져 있었고, 어떤 간판에는 물동이, 어떤 간판에는 편지 봉투, 어떤 간판에는 낡은 신발, 어떤 간판에는 부러진 숟가락이 그려져 있었다. 글자는 없었다. 그러나 간판들은 비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가장 가까운 간판 앞에 멈췄다. 젖은 신발 모양이었다. 크기가 다른 신발 두 짝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물방울 표시가 있었다. 누군가 오래 걸었을 것이다. 누군가 비를 맞았을 것이다. 누군가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와서도 발을 말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레이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젖은 신발이 그려진 간판 앞에서, 먼저 손을 모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죠니도 접시가 기울지 않게 손목을 조금 고쳤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가슴 가까이 받쳤다. 하융은 간판의 등불빛이 그레이의 손끝에 닿는 것을 보고, 시선을 낮췄다.
거리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처음에는 여관 주인처럼 보였다. 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가까이 올수록 그는 한 사람만의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래 닦인 마룻바닥, 밤새 꺼지지 않은 등불, 손님이 떠난 뒤 접힌 이불의 냄새가 그의 곁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았다. 표정은 부드러웠고, 걸음은 느렸으며, 열쇠 꾸러미는 손안에서 조금도 요란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였다.
그는 접수대 너머가 아니라, 거리 한가운데서 그레이를 맞았다. 아마 이 거리에서는 문턱 자체가 접수대인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그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다. 차를 권하는 여관 주인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규칙을 지키게 하는 단단함도 있었다.
“밤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들어가시지요.”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는 극장주께서 하셨고, 방을 준비한 것은 저입니다. 역할이 다르니 감사도 나누어 받는 편이 좋겠군요.”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역시 여관 주인은 계산이 정확하네.”
여관의 성좌는 푸리나에게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을 데려오신 분께도 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다만 오늘 밤의 주빈은 이분입니다.”
그 말에 그레이는 아주 조금 어깨를 낮췄다. 주빈이라는 말은 손님보다 더 낯설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보고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거리 입구 옆의 작은 접수대를 가리켰다. 접수대 위에는 검은 장부가 아니라, 빈 나무 접시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세 접시의 가장자리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잃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
그레이는 그 글씨를 읽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접시를 보았다.
“이곳에서는…… 이름을 맡깁니까?”
“그렇습니다.”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손님이 나가실 때, 손님께서 알아볼 수 있는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여관의 성좌가 첫 번째 접시를 내밀었다.
“성함을 잠시 맡기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아주 낮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이름은 소리가 되어 접시 위에 내려앉았다. 글자로 변하지 않았다. 대신 작고 옅은 빛이 되었다. 접시 위의 빛은 곧 작은 종이등처럼 접혀, 접수대 뒤의 서랍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레이는 그 빛이 서랍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서랍이 닫히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잘 보관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접시가 나왔다. 여관의 성좌는 그레이가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보듯, 비어 있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짐을 맡기실 차례입니다.”
그레이는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부는 방에 두고 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접시에 올릴 수 있는 짐은 남아 있지요.”
접시 위에 작은 물건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붉은 실이 묶인 민원표, 모서리가 닳은 사망 확인서, 아직 봉해지지 않은 편지, 도장이 찍히지 않은 보상 쪽지, 오래 접었다 펼친 지도 조각, 꺼진 등불이 그려진 얇은 문패. 글씨는 없거나, 너무 작아 읽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레이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가 잠시 멈췄다. 물건들이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접시 위의 나무가 아주 미세하게 눌려 있었다.
푸리나는 말하지 않았다. 죠니도 농담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손잡이를 가볍게 잡고 있었고, 하융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그레이는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버리듯 던지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듯 건조하게도 하지 않았다. 젖은 천을 접듯, 모서리가 더 상하지 않게 맞추었다. 민원표의 붉은 실을 아래로 넣고, 편지 봉투는 접히지 않게 세웠으며, 등불 문패는 가장 위에 올렸다.
“잠시 맡기겠습니다.”
“예.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접시를 작은 상자 안에 넣었다. 상자 뚜껑이 닫히기 직전, 마지막 등불 문패 위의 불꽃 그림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레이는 그 흔들림을 본 뒤에야 손을 거두었다.
죠니가 아주 낮게 말했다.
“접는 것도 잘하네.”
푸리나가 그를 팔꿈치로 살짝 찔렀다.
“죠니.”
“아니, 진짜로. 아무렇게나 안 구기잖아.”
죠니는 접시를 든 손으로 턱짓했다.
“그런 거, 보이거든.”
그레이는 뜻밖의 말에 잠시 눈을 들었다. 죠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듯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구기면…… 다시 펼 때 자국이 남습니다.”
“거봐. 맞다니까.”
세 번째 접시는 비어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내밀지 않고, 접수대 위에 그대로 두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밤 이 거리에서 손님께 드릴 표식이 있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표식입니까?”
“예.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을 찾기 위한 표식이지요.”
여관의 성좌는 작은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글자가 없었다. 아주 작은 등불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 등불 아래에는 가느다란 그림자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 같기도 했고, 의자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작게 말했다.
“예쁘네.”
“밤길의 표식은 지나치게 화려하면 손님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건 맞아.”
그레이는 나무패를 받았다. 이름이 없는 패였지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등불 아래의 작은 그림자를 손끝으로 한 번 확인한 뒤, 여관의 성좌가 내미는 얇은 줄에 손목을 맡겼다.
여관의 성좌는 나무패를 그레이의 손목에 묶어주었다. 줄은 얇고 가벼웠다. 그레이가 손목을 조금 움직이자, 나무패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이 표식을 가진 손님은 준비된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이 표식은 아무 일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보았다. 아주 잠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거리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등불 하나가 가까워졌다. 등불을 든 아이였다. 나이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다가도, 오래된 골목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손에는 작은 등불이 들려 있었고, 신발 끝은 젖어 있었다. 손가락에는 재가 묻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에는 먼지와 빛이 함께 앉아 있었다.
아이는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손님이에요?”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그렇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방까지 안내할게요.”
아이는 뒤돌아섰다. 몇 걸음 걷다가, 그레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아이의 젖은 신발과 등불을 보았다.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이의 등불이 너무 낮게 흔들리지 않도록, 바람이 들어오는 골목 쪽을 한 번 살폈다.
아이가 말했다.
“손님은 그런 거 안 봐도 돼요.”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습관입니다.”
“습관도 맡기고 들어오라던데요.”
푸리나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죠니는 “좋은 안내인이네”라고 중얼거렸고, 레이튼은 흥미로운 질문을 발견한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하융은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을 보며 눈을 조금 낮췄다.
그레이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손님은 무엇을 보면 됩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 질문이 어렵다는 듯 등불을 조금 들어 올렸다. 빛이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를 비췄다.
“방까지 가는 길이요.”
그리고 아이는 덧붙였다.
“넘어지지 않게요.”
그레이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거리 안쪽으로 걸었다. 간판들은 이름 없이 흔들렸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젖은 신발, 부러진 숟가락, 꺼진 등불심지. 그레이는 그 모두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낮추고, 아주 짧게 예를 표했다. 여관의 성좌는 접수대 앞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접수대 뒤에서 그는 여전히 정중하게 서 있었다. 열쇠 꾸러미는 그의 손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접수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 질서가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다고 느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손님.”
그레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여관의 성좌가 말했다.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대답했다.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등불지기를 따라 걸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어둡지 않았다. 그러나 밝지도 않았다. 사람이 잠들 수 있을 만큼만 어두웠고, 길을 잃지 않을 만큼만 밝았다. 손목의 작은 등불패가 걸음마다 조용히 흔들렸다. 접수대에 맡겨둔 것들은 뒤에 있었고, 앞에는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이 있었다.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1막 — 이름을 맡기는 접수대
터널은 길지 않았다. 발걸음으로 세면 열두 걸음 남짓이었다. 그런데 그 열두 걸음 사이에서, 그레이는 몇 번이나 손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평소라면 장부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아 있었을 자리였다.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받치려는 모양을 만들었다가, 아무것도 닿지 않자 다시 천천히 펴졌다. 터널 벽에는 습기가 많지 않았고, 오래된 극장 뒤편에서 이어진 길치고는 먼지도 적었다. 대신 갓 털어낸 이불과 오래 닦은 나무, 그리고 아주 희미한 차 냄새가 났다.
푸리나는 앞에서 걸었다. 그녀의 걸음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터널이 이렇게 울림이 좋은 곳이라면, 평소의 푸리나는 분명 두세 번쯤은 목소리를 시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가끔 뒤돌아 그레이가 따라오는지 확인했고, 그때마다 손가락에 걸린 작은 커튼 고리만 한 바퀴 굴렸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왔다. 접시에는 작게 자른 빵과 치즈, 말린 과일이 얹혀 있었다. 터널 안까지 접시를 가져오는 것이 맞는지 그레이가 잠시 시선을 주자, 죠니는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여관거리라며. 빈손으로 가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접시는 선물입니까?”
“반쯤은. 나머지 반은 내가 먹을 거고.”
푸리나가 앞에서 작게 웃었다.
“정직하네.”
“선물이라고 다 남 주면 너무 숭고해져. 난 숭고한 접시는 부담스러워.”
레이튼은 낮게 웃었고, 하융은 터널 벽에 비친 등불 그림자를 보며 조용히 걸었다. 그레이는 그들의 발소리를 들었다. 푸리나의 걸음은 가볍고 빠르며, 죠니의 걸음은 한쪽 박자가 아주 조금 늦고, 레이튼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하융은 걸음과 걸음 사이에 잠시 생각을 놓는 듯했다. 그 발소리들은 낮은 천장 아래에서 겹쳤다가, 다시 각자의 보폭으로 풀어졌다. 그레이는 그 차이들을 들었다. 기록하지 않았다.
터널 끝에는 작은 종이 달린 문이 있었다. 문은 크지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문고리 아래에 낡은 나무패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나무패에는 이름 대신 작은 등불이 새겨져 있었다. 푸리나의 극은 종종 무대와 신술과 마음의 경계에서 이름을 늦게 얻었다. 그레이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낮은 등불과 나무패를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가 문 옆에 섰다.
“여기서부터야.”
그레이가 물었다.
“이 문은…… 극의 일부입니까?”
“응. 그리고 아마 조금 더.”
푸리나는 대답을 그렇게 흐렸다. 그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작은 물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물이 흐르는 소리인지,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오가는 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푸리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그레이를 한 번 더 보았다. 그 시선은 개막을 알리는 연출자의 시선이라기보다, 낯선 방에 들어가기 전 손님이 신발을 잘 신고 있는지 확인하는 여관 주인의 시선에 가까웠다.
문이 열렸다.
종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는 거리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극장 뒤편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문 너머의 거리는 극장보다 훨씬 넓었다. 하늘은 밤이었고, 하늘이라기보다는 천장에 가까웠지만, 별처럼 작은 등불들이 높이 걸려 있었다. 양쪽으로 낮은 여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간판들은 바람 없이도 천천히 흔들렸다. 어떤 간판에는 빵 조각이 그려져 있었고, 어떤 간판에는 물동이, 어떤 간판에는 편지 봉투, 어떤 간판에는 낡은 신발, 어떤 간판에는 부러진 숟가락이 그려져 있었다. 글자는 없었다. 그러나 간판들은 비어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가장 가까운 간판 앞에 멈췄다. 젖은 신발 모양이었다. 크기가 다른 신발 두 짝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물방울 표시가 있었다. 누군가 오래 걸었을 것이다. 누군가 비를 맞았을 것이다. 누군가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와서도 발을 말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레이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젖은 신발이 그려진 간판 앞에서, 먼저 손을 모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죠니도 접시가 기울지 않게 손목을 조금 고쳤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가슴 가까이 받쳤다. 하융은 간판의 등불빛이 그레이의 손끝에 닿는 것을 보고, 시선을 낮췄다.
거리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처음에는 여관 주인처럼 보였다. 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가까이 올수록 그는 한 사람만의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래 닦인 마룻바닥, 밤새 꺼지지 않은 등불, 손님이 떠난 뒤 접힌 이불의 냄새가 그의 곁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았다. 표정은 부드러웠고, 걸음은 느렸으며, 열쇠 꾸러미는 손안에서 조금도 요란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였다.
그는 접수대 너머가 아니라, 거리 한가운데서 그레이를 맞았다. 아마 이 거리에서는 문턱 자체가 접수대인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그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다. 차를 권하는 여관 주인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규칙을 지키게 하는 단단함도 있었다.
“밤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들어가시지요.”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는 극장주께서 하셨고, 방을 준비한 것은 저입니다. 역할이 다르니 감사도 나누어 받는 편이 좋겠군요.”
푸리나가 살짝 웃었다.
“역시 여관 주인은 계산이 정확하네.”
여관의 성좌는 푸리나에게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을 데려오신 분께도 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다만 오늘 밤의 주빈은 이분입니다.”
그 말에 그레이는 아주 조금 어깨를 낮췄다. 주빈이라는 말은 손님보다 더 낯설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보고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거리 입구 옆의 작은 접수대를 가리켰다. 접수대 위에는 검은 장부가 아니라, 빈 나무 접시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세 접시의 가장자리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잃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
그레이는 그 글씨를 읽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접시를 보았다.
“이곳에서는…… 이름을 맡깁니까?”
“그렇습니다.”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손님이 나가실 때, 손님께서 알아볼 수 있는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여관의 성좌가 첫 번째 접시를 내밀었다.
“성함을 잠시 맡기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아주 낮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이름은 소리가 되어 접시 위에 내려앉았다. 글자로 변하지 않았다. 대신 작고 옅은 빛이 되었다. 접시 위의 빛은 곧 작은 종이등처럼 접혀, 접수대 뒤의 서랍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레이는 그 빛이 서랍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서랍이 닫히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잘 보관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접시가 나왔다. 여관의 성좌는 그레이가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보듯, 비어 있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짐을 맡기실 차례입니다.”
그레이는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부는 방에 두고 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접시에 올릴 수 있는 짐은 남아 있지요.”
접시 위에 작은 물건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붉은 실이 묶인 민원표, 모서리가 닳은 사망 확인서, 아직 봉해지지 않은 편지, 도장이 찍히지 않은 보상 쪽지, 오래 접었다 펼친 지도 조각, 꺼진 등불이 그려진 얇은 문패. 글씨는 없거나, 너무 작아 읽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레이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가 잠시 멈췄다. 물건들이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접시 위의 나무가 아주 미세하게 눌려 있었다.
푸리나는 말하지 않았다. 죠니도 농담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손잡이를 가볍게 잡고 있었고, 하융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그레이는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버리듯 던지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듯 건조하게도 하지 않았다. 젖은 천을 접듯, 모서리가 더 상하지 않게 맞추었다. 민원표의 붉은 실을 아래로 넣고, 편지 봉투는 접히지 않게 세웠으며, 등불 문패는 가장 위에 올렸다.
“잠시 맡기겠습니다.”
“예.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접시를 작은 상자 안에 넣었다. 상자 뚜껑이 닫히기 직전, 마지막 등불 문패 위의 불꽃 그림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레이는 그 흔들림을 본 뒤에야 손을 거두었다.
죠니가 아주 낮게 말했다.
“접는 것도 잘하네.”
푸리나가 그를 팔꿈치로 살짝 찔렀다.
“죠니.”
“아니, 진짜로. 아무렇게나 안 구기잖아.”
죠니는 접시를 든 손으로 턱짓했다.
“그런 거, 보이거든.”
그레이는 뜻밖의 말에 잠시 눈을 들었다. 죠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듯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구기면…… 다시 펼 때 자국이 남습니다.”
“거봐. 맞다니까.”
세 번째 접시는 비어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것을 내밀지 않고, 접수대 위에 그대로 두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밤 이 거리에서 손님께 드릴 표식이 있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표식입니까?”
“예.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을 찾기 위한 표식이지요.”
여관의 성좌는 작은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글자가 없었다. 아주 작은 등불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 등불 아래에는 가느다란 그림자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 같기도 했고, 의자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작게 말했다.
“예쁘네.”
“밤길의 표식은 지나치게 화려하면 손님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건 맞아.”
그레이는 나무패를 받았다. 이름이 없는 패였지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등불 아래의 작은 그림자를 손끝으로 한 번 확인한 뒤, 여관의 성좌가 내미는 얇은 줄에 손목을 맡겼다.
여관의 성좌는 나무패를 그레이의 손목에 묶어주었다. 줄은 얇고 가벼웠다. 그레이가 손목을 조금 움직이자, 나무패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이 표식을 가진 손님은 준비된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이 표식은 아무 일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보았다. 아주 잠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거리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등불 하나가 가까워졌다. 등불을 든 아이였다. 나이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다가도, 오래된 골목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손에는 작은 등불이 들려 있었고, 신발 끝은 젖어 있었다. 손가락에는 재가 묻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에는 먼지와 빛이 함께 앉아 있었다.
아이는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손님이에요?”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그렇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방까지 안내할게요.”
아이는 뒤돌아섰다. 몇 걸음 걷다가, 그레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아이의 젖은 신발과 등불을 보았다.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이의 등불이 너무 낮게 흔들리지 않도록, 바람이 들어오는 골목 쪽을 한 번 살폈다.
아이가 말했다.
“손님은 그런 거 안 봐도 돼요.”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습관입니다.”
“습관도 맡기고 들어오라던데요.”
푸리나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죠니는 “좋은 안내인이네”라고 중얼거렸고, 레이튼은 흥미로운 질문을 발견한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하융은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을 보며 눈을 조금 낮췄다.
그레이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손님은 무엇을 보면 됩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 질문이 어렵다는 듯 등불을 조금 들어 올렸다. 빛이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를 비췄다.
“방까지 가는 길이요.”
그리고 아이는 덧붙였다.
“넘어지지 않게요.”
그레이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거리 안쪽으로 걸었다. 간판들은 이름 없이 흔들렸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젖은 신발, 부러진 숟가락, 꺼진 등불심지. 그레이는 그 모두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낮추고, 아주 짧게 예를 표했다. 여관의 성좌는 접수대 앞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접수대 뒤에서 그는 여전히 정중하게 서 있었다. 열쇠 꾸러미는 그의 손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접수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 질서가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다고 느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손님.”
그레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여관의 성좌가 말했다.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대답했다.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등불지기를 따라 걸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는 어둡지 않았다. 그러나 밝지도 않았다. 사람이 잠들 수 있을 만큼만 어두웠고, 길을 잃지 않을 만큼만 밝았다. 손목의 작은 등불패가 걸음마다 조용히 흔들렸다. 접수대에 맡겨둔 것들은 뒤에 있었고, 앞에는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