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31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12:16:16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2막 — 장부 없는 식탁

등불지기는 작은 걸음으로 앞서갔다. 신발 끝은 젖어 있었으나, 걸을 때 물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등불도 이상했다.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고, 아이가 걸음을 늦추면 함께 낮아졌으며, 아이가 고개를 돌리면 빛도 잠시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그 불빛을 따라 걸었다. 길 양쪽의 간판들은 여전히 조용히 흔들렸고, 글자 없는 문패들이 낮은 빛 안에서 조금씩 모습을 바꾸었다. 어떤 것은 편지 봉투였다가 접힌 손수건처럼 보였고, 어떤 것은 낡은 숟가락이었다가 금이 간 찻잔처럼 보였다.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등불지기가 앞에서 멈추면 함께 멈췄고, 아이가 오른쪽으로 돌면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녀는 익숙한 버릇대로 골목의 폭과 바닥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물이 고이는 곳, 불빛이 닿지 않는 모서리, 누군가 발을 헛디딜 수 있는 돌. 그런 것들은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들어왔다. 다만 손목의 등불패가 걸음마다 조용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책상 위에 놓고 온 장부보다 훨씬 가벼웠고, 그래서 자꾸 의식되었다.

등불지기가 뒤돌아보았다.

“또 보고 있어요.”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요. 그런데 오늘은 손님이잖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손님은 가끔 천장만 봐도 돼요.”

그레이는 아이가 가리킨 위쪽을 보았다. 천장처럼 보였던 밤하늘에 작은 등불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별자리처럼 이어지지는 않았다. 각각의 등불은 자기 자리에서 조금씩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너무 작아서 한참 보아야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푸리나가 뒤에서 속삭였다.

“저거 예쁘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응. 근데 저걸 전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별로 안 예쁠 것 같아.”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 방금 되게 중요한 말을 너무 아무렇게나 했어.”

“그럼 주워서 잘 써. 난 아무렇게나 말하는 담당이니까.”

레이튼은 웃음을 삼키듯 찻주전자를 고쳐 들었다.

“아무렇게나 놓인 말도, 때로는 길을 찾는군요.”

“교수, 그건 칭찬이야, 아니면 또 질문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겠습니다.”

하융은 등불들을 올려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별이 아니어도 길은 밝힐 수 있구려.”

그 말은 밤공기 속에 낮게 놓였다. 그레이는 잠시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더 말하지 않는 바람에, 그 문장은 오히려 오래 남았다.

등불지기는 한 여관 앞에서 멈췄다. 간판에는 식탁이 그려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그릇 하나와 빵 한 조각, 접힌 편지와 작은 등불이 놓여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쪽에서는 따뜻한 물소리와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등불지기가 문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가 첫 방이에요.”

그레이는 문턱에서 고개를 숙였다. 안쪽은 예상보다 넓었다. 방이라기보다 긴 식당에 가까웠다. 그러나 북적이지 않았다. 가운데에는 긴 식탁 하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반쯤 먹은 빵, 젖은 신발, 잉크가 묻은 손수건, 아이가 접다 만 종이배, 노인의 깨진 숟가락, 봉하지 못한 편지, 심지가 다 탄 등불, 손잡이가 닳은 물동이. 물건들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막 일어나 곧 돌아올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 잠시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식탁 앞에 섰다. 이름표는 없었다. 사망 원인도, 날짜도, 담당자 표시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찾지 않았다. 먼저 가장 가까운 빵 조각 앞에서 멈췄다. 빵은 한쪽이 마르고 있었고, 잘린 단면에는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급하게 먹다 남긴 것인지, 나누어두고 다시 오려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레이는 양손을 가볍게 모았다. 기도는 아주 짧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커튼 고리를 손안에서 천천히 굴렸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든 채 식탁 옆에 섰지만, 자기 접시를 그 위에 올리지는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식탁 끝에 잠시 내려놓으려다가, 놓을 자리를 찾지 못해 다시 들었다. 하융은 문턱 가까이에 서서 방 안의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다음으로 젖은 신발 앞에 섰다. 발등 부분의 가죽이 늘어나 있었고, 뒤꿈치에는 덧댄 천이 풀려 있었다. 신발 안쪽에는 아주 작은 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레이는 손을 뻗어 돌을 꺼냈다. 그리고 신발을 더 마르기 좋은 방향으로 조금 돌려놓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손님은 그거 안 해도 돼요.”

그레이의 손이 멈췄다.

“신발 안에 돌이 있었습니다.”

“알아요.”

“그대로 두면 신은 사람이 다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지금 아무도 신지 않아요.”

그레이는 잠시 신발을 보았다. 신발은 얌전히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젖어 있었고, 낡았고,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였다. 그레이는 꺼낸 돌을 신발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등불지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빼줬네요.”

“들어 있으면…… 마음이 쓰입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돌 들어간 신발은 보기만 해도 발이 아파.”

푸리나가 아주 작게 웃었다.

“죠니답게 정확한 감상.”

“나는 발에 관해서는 꽤 진지해, 여왕님.”

그레이는 다음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잉크 묻은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한쪽에는 마르지 않은 듯한 검은 얼룩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서툰 바느질 자국이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바로 펴려다가 손을 멈췄다. 대신 허리를 조금 숙여 손수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손수건은 펼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시간이 조금 길었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레이 경, 손수건은 그냥 두시는 겁니까?”

그레이는 손수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접힌 방식도 남은 흔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그레이는 아주 작은 숨을 내쉬고, 손수건 곁에서 물러섰다.

아이의 종이배는 식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종이는 얇고 오래되어 끝이 조금 말려 있었다. 물에 띄운 적이 있는지 아래쪽이 구겨져 있었고, 안쪽에는 읽기 어려운 글자 몇 개가 번져 있었다. 그레이는 종이배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식탁 위의 물기만 조심스럽게 닦았다. 종이가 더 젖지 않게 하는 정도였다.

등불지기가 또 말했다.

“그것도 안 해도 돼요.”

“네.”

“그런데 했어요.”

“네.”

“왜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젖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등불지기는 그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레이를 보았다. 그러더니 자기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다. 빛이 종이배 위에 내려앉았다. 번진 글자는 여전히 읽히지 않았지만, 종이배의 접힌 선은 조금 더 또렷해졌다.

푸리나가 식탁 가까이 다가왔다.

“그레이.”

“네, 전하.”

“힘들면 앉아도 돼.”

그레이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앉을 자리는 있었다. 식탁 옆에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낡았지만 깨끗했고, 등받이에는 작은 천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식탁 위의 물건들을 두고 앉는 일은 그녀에게 조금 어색했다. 누군가의 남은 빵, 젖은 신발, 편지, 숟가락 앞에서 자신이 먼저 앉아도 되는지 바로 판단되지 않았다.

죠니가 의자 하나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보았다.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는 손으로 앉는 부분을 한 번 눌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괜찮네.”

그레이가 말했다.

“확인해주신 겁니까?”

“응. 앉으라고 하려면 의자가 버티는지도 봐야지.”

푸리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죠니, 오늘 되게 여관 종업원 같아.”

“그 말은 좀 복잡한데. 임금은 나오나?”

“접시 들고 왔으니까 식비로 퉁치자.”

“역시 위험한 고용주야.”

그레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결국 의자 앞에 섰다. 바로 앉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패가 의자 등받이에 닿아 작게 흔들렸다. 그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들었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손님 자리예요.”

그레이는 의자를 보았다.

“누군가의 자리였던 것은 아닙니까?”

“지금은 손님 자리예요.”

“지금은…….”

그레이는 그 말을 되풀이하듯 낮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앉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의자가 불편해하지 않게 앉는 사람처럼. 의자는 작게 삐걱였지만 버텼다. 그녀가 앉자, 식탁 위의 물건들이 조금 달라 보였다. 서 있을 때는 하나씩 살펴야 할 것들처럼 보였는데, 앉으니 누군가 함께 식탁에 남겨두고 간 것들처럼 보였다. 빵은 더 멀어졌고, 편지는 조금 가까워졌으며, 깨진 숟가락은 등불 아래에 반쯤 숨어 있었다.

푸리나는 그레이가 앉는 것을 보더니, 안도한 듯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크게 말하지 않고,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좋아. 그럼 나도 앉아야지.”

죠니가 말했다.

“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앉네.”

“손님이니까.”

“방금 네가 만든 극 아니야?”

“극장주도 손님이 될 수 있어.”

“편리한 직업이네.”

레이튼은 조용히 의자를 골랐다. 앉기 전에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고,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허락을 구하듯 잠시 멈췄다. 하융은 식탁 끝쪽에 앉았다. 그는 창문이 없는 벽을 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어딘가 먼 곳에서 돌아온 사람의 것 같았다.

죠니는 마지막으로 앉았다. 다만 자기가 가져온 접시는 식탁 위의 물건들과 섞이지 않게, 자기 앞에만 놓았다. 그러고는 빵을 하나 집어 들어 그레이 쪽으로 내밀었다.

“먹어.”

그레이는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나중에…….”

푸리나가 바로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말을 멈추었다. 죠니는 빵을 든 손을 거두지 않았다.

“빠른 나중.”

그레이는 잠시 빵을 보았다. 식탁 위의 반쯤 먹은 빵과 죠니가 내민 빵은 닮아 있었지만 같지 않았다. 하나는 누군가가 남기고 간 것이고, 하나는 지금 건네진 것이었다. 그레이는 두 빵 사이를 아주 짧게 보았다가, 죠니가 내민 쪽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먹어. 근데 너무 천천히 먹으면 그건 또 안 먹는 거랑 비슷해져.”

푸리나가 웃었다.

“죠니, 네 식사 규칙은 묘하게 엄격해.”

“사람이 안 먹는 핑계는 종류가 많거든. 막아야 해.”

그레이는 빵을 조금 떼었다. 아주 작게. 죠니는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려다가, 푸리나가 팔꿈치로 가볍게 막자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는 빵을 입에 넣었다. 딱딱하지는 않았다. 조금 식었고, 밀가루 냄새가 났으며, 말린 과일의 단맛이 손끝에 묻어 있었다.

등불지기가 맞은편 의자에 올라앉았다. 아이의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젖은 신발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질 것처럼 맺혔지만, 끝내 떨어지지는 않았다.

“맛있어요?”

그레이는 빵을 삼키고 대답했다.

“네. 맛있습니다.”

“그럼 됐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등불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았다. 빛이 퍼지자 식탁 위의 물건들이 조금 따뜻해 보였다. 그러나 물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젖은 신발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손수건은 여전히 접혀 있었으며, 편지는 아직 봉해지지 않았고, 숟가락은 깨져 있었다. 다만 빛 안에서 그것들은 조금 덜 외로워 보였다.

레이튼이 찻잔을 나누었다. 어느새 찻잔들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다. 여관거리의 방에서는 필요한 물건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타나, 오히려 묻기 어려웠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그레이 경?”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찻잔을 받았다. 손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잉크 묻은 손수건을 한 번 보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수건은 그대로 접혀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기이하구려. 이 방은 닫힌 듯하나, 무엇도 밀어내지는 않는 듯하오.”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하융, 지금 대사 좋았어.”

“대사가 아니라 감상이오.”

“좋은 감상은 대사로 쓸 수 있지.”

죠니가 말했다.

“또 가져가네.”

“극장주는 좋은 걸 보면 가져가는 법이야.”

“위험한 직업이야, 정말.”

그레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문득 식탁 끝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봉하지 못한 편지. 편지지의 끝은 조금 말려 있었고,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편지를 보았다. 편지는 열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닫아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잠시 그곳에 있었다.

등불지기가 물었다.

“읽고 싶어요?”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왜요?”

“편지에는 받을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이는 그 답을 듣고 편지를 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작게 말했다.

“못 받은 편지도 여기 와요.”

그레이는 아이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네. 어떤 편지는 오래 기다려요. 어떤 편지는 자기가 누구에게 가야 했는지 잊어버리고요.”

푸리나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고 있었고, 죠니는 접시 위의 말린 과일을 손끝으로 밀어놓았다. 하융은 등불지기의 젖은 신발을 한 번 보았다.

그레이는 편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 말은 편지에게 한 말이었다. 누가 쓴 것인지, 누가 받아야 하는 것인지 아직 몰랐다. 그런데도 그 말은 식탁 위에 조용히 놓였다. 편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말려 있던 끝이 등불의 온기 때문인지 아주 조금 펴진 듯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를 빤히 보았다.

“아가씨는 손님인데도 인사를 많이 하네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손님도 인사는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맞아요.”

아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 안쪽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따뜻한 김이 낮게 흘러나왔다. 향유 냄새보다 젖은 나무와 오래된 쇠의 냄새가 먼저 닿았다. 안쪽에는 나무 욕조들이 층을 이루고 있었고, 벽에는 마른 수건과 낡은 등불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에는 작은 솔, 접힌 천, 금이 간 그릇, 녹슨 못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구도 서둘러 치우지 않은 물건들이었지만,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물 위에는 등불빛이 길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 아래로 무엇인가 오래 불려지는 듯한 냄새가 났다.

등불지기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다음 방이에요.”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잠시 멈추고, 자기 앞에 남은 빵 조각을 보았다. 다 먹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것을 접시에 다시 내려놓으려다가, 죠니와 눈이 마주쳤다.

죠니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접시의 빈 가장자리를 톡 쳤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작은 천에 감쌌다.

“나중에 먹겠습니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려 하자, 그레이가 먼저 덧붙였다.

“가능한 빠른 나중에요.”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통과.”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럼 저희도 이동할까요?”

하융은 천천히 일어섰다.

“물이 있는 방이라. 다음 손님은 발자국을 남길 모양이오.”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며 말했다.

“좋아. 다음 장면은 물의 방.”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네. 네 작명치고는 얌전해.”

“죠니, 그건 칭찬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자.”

레이튼이 조용히 웃었다.

“좋은 선택입니다.”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 식탁 위의 물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젖은 신발, 손수건, 종이배, 숟가락, 편지.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길지 않았다. 빵을 먹었고, 차를 마셨고, 의자에 앉았기 때문인지, 손목의 등불패가 처음보다 덜 낯설게 흔들렸다.

등불지기가 따뜻한 김이 새어나오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젖은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가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식탁을 뒤로하고 걸었다. 뒤에서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이 따라왔다. 식탁 위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빛은 남은 빵과 접힌 손수건과 봉하지 못한 편지 위에 조용히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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