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32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12:27:30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3막 — 물의 방과 진흙 손님

물의 방은 문 안쪽에서 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작은 욕실처럼 보였으나, 한 걸음 들어서자 나무 욕조들이 층을 이루며 안쪽으로 이어졌고, 천장 아래에는 긴 수증기가 낮은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바닥에는 얇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물길은 발목을 적시지는 않았지만, 등불빛을 받아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벽에는 마른 수건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욕조 가장자리에는 작은 솔과 접힌 천, 금이 간 그릇, 녹슨 못, 부러진 등불 유리 조각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래된 쇠와 젖은 나무 냄새가 먼저 났고, 그 뒤에야 희미한 향유 냄새가 따라왔다.

그레이는 문턱에서 잠시 멈췄다. 식탁의 방과는 달랐다. 식탁의 방은 남겨진 것들이 조용히 놓여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무언가가 오래 묻어 있다가, 물에 불려 천천히 떨어져나가는 곳처럼 보였다. 욕조의 물은 맑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럽지도 않았다. 어떤 욕조는 흙빛이었고, 어떤 욕조는 오래된 잉크를 풀어놓은 듯 엷게 검었으며, 어떤 욕조는 우물 바닥의 돌을 오래 씻은 물처럼 회색빛을 띠었다. 그레이는 물의 색을 하나씩 보다가, 가장 가까운 욕조 옆에 놓인 작은 솔을 보았다. 솔의 털 끝에는 진흙이 조금 굳어 있었다.

등불지기는 익숙한 듯 욕조 사이를 지나갔다. 아이의 젖은 신발은 여전히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 뒤를 따르다가,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금이 간 그릇 하나를 보았다. 그릇 안쪽에는 아주 오래된 곡물 찌꺼기 같은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서 짧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수증기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생각보다 조용하네.”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품에 안고 말했다.

“목욕탕이 조용하다는 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물이 너무 조용하면 그것도 별개의 문제가 되겠지만요.”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튼, 지금 물한테 질문하려는 거야?”

“아직은 아닙니다.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된 물인지 먼저 확인해야지요.”

죠니가 이번에는 바로 끼어들지 않고, 욕조 가장자리를 발끝으로 살폈다. 미끄러운지 확인하는 듯했다. 하융은 그 모습을 보고 낮게 웃었다.

“죠니 경은 물에도 예의를 갖추는구려.”

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끄러운 바닥은 신분을 안 가려. 먼저 예의를 차리는 쪽이 덜 넘어진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평등한 철학이오.”

“그걸 철학이라고 부르면 좀 억울한데.”

레이튼이 온화하게 말했다.

“철학은 종종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 발목을 학문으로 만들지 마.”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수증기 사이에서 금방 흐려졌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욕조의 물길을 보았다. 말이 오가는 동안에도 물은 천천히 움직였고, 아주 작은 진흙 조각 하나가 물결을 따라 욕조 가장자리로 밀려왔다.

등불지기가 욕조 한가운데 난 좁은 통로 앞에서 멈췄다.

“여기서는 손님들이 묻은 걸 내려놔요.”

그레이는 아이를 보았다.

“묻은 것……입니까?”

“네. 흙, 물, 말, 냄새, 그런 거요.”

등불지기는 자기 신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가끔은 자기 것이 아닌 것도 묻어 와요.”

그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아이가 말한 “자기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녹슨 못과 찢어진 천 조각과 굳은 흙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밟고 지나간 거리의 흔적. 누군가 닫지 않은 문에서 새어 나온 찬바람. 누군가 놓친 보고. 누군가 오래 견딘 냄새. 그레이는 그 말들을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문장으로 만들기 전에도 방 안의 냄새는 충분히 무거웠다.

그때 안쪽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바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문틈으로 진흙물이 밀려 들어왔다. 등불 하나가 꺼질 듯 흔들렸고, 벽의 수건들이 축 늘어졌다. 문 너머에서 둔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크고 무거운 것이 긴 복도를 지나오는 소리였다. 쿵, 쿵, 쿵. 소리는 규칙적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질척이는 물소리가 섞였고, 오래된 나무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푸리나가 커튼 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 다음 손님이 조금 거칠게 들어오네.”

죠니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다가, 그레이를 보고 멈췄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조심스럽게 옆 선반에 올려두었다. 하융은 수증기 너머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문밖의 진흙이 오래 참은 모양이오.”

안쪽 문이 열렸다.

진흙투성이 손님이 들어왔다. 사람의 모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고,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온몸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진흙 속에는 여러 물건들이 박혀 있었다. 녹슨 못, 부러진 빗장, 찢긴 배급표, 끊어진 우물 밧줄, 젖은 편지, 깨진 등불 유리, 배수구 쇠살대, 이름이 번진 나무패, 작은 신발 한 짝. 손님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그것들이 서로 부딪혀 낮은 소리를 냈다. 냄새는 강했다. 썩은 냄새라기보다, 너무 오래 닫혀 있던 골목이 한꺼번에 열린 냄새였다.

주변의 작은 등불들이 뒤로 물러났다. 수건들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건드리지 마.”

“저건 지워지지 않아.”

“슬럼가 냄새야.”

“그냥 문밖으로 돌려보내.”

그레이는 그 목소리들이 어디서 나는지 찾지 않았다. 방의 벽인지, 수증기인지, 손님 몸에 박힌 종이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진흙투성이 손님을 보았다. 진흙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안에는 작은 돌멩이와 검은 물, 풀리지 않은 실들이 섞여 있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가까이 가면 묻어요.”

그레이는 아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젖은 손이었다.

“네. 묻을 겁니다.”

“그런데 갈 거예요?”

그레이는 대답하기 전에 소매를 조금 걷었다. 젖지 않게 하려는 손짓이 아니라, 젖을 것을 알고 준비하는 손짓이었다.

“먼저 보겠습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돌아보았다.

푸리나는 말끝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면 내가 말릴 거야.”

“네.”

“진짜야.”

“알겠습니다.”

죠니가 옆에서 짧게 덧붙였다.

“말리는 건 내가 더 잘해. 무겁게 서 있으면 되거든.”

하융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것도 일종의 신술 같구려.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막는 법.”

죠니가 그를 보았다.

“하융, 그 말은 좀 마음에 드는데. 나중에 써도 돼?”

“내 말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접시 한 조각으로 받겠소.”

푸리나가 작게 숨을 삼키듯 웃었다.

“하융이 거래를 시작했어.”

레이튼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흥미롭군요. 언어와 접시의 교환 비율은 어느 정도가 적절할까요?”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교수, 농담에 세금 매기지 마.”

그 짧은 소란 덕분에 물의 방의 공기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레이는 그 틈에 진흙투성이 손님 가까이 다가갔다. 손님은 그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진흙과 수건 조각과 젖은 종이들이 겹쳐 있었고, 그 안쪽에서 희미한 물소리만 났다.

그레이는 손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진흙투성이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에 박힌 깨진 등불 유리가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전에 그레이가 손수건을 꺼내 받았다. 손수건은 곧 진흙에 젖었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욕조 가장자리의 작은 그릇에 넣었다.

등불지기가 눈을 크게 떴다.

“손님 손수건인데요.”

“씻으면 됩니다.”

“진흙은 잘 안 빠져요.”

“그래도 씻어보겠습니다.”

그레이는 그릇 옆의 작은 솔을 들었다. 진흙투성이 손님 몸에 박힌 물건들을 바로 잡아당기지는 않았다. 먼저 가장 바깥쪽의 진흙을 물로 적셨다. 물은 금방 검어졌다. 진흙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굳은 곳은 돌처럼 단단했고, 물러진 곳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그레이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다만 진흙이 손목까지 묻자, 소매를 한 번 더 걷었다.

죠니가 뒤에서 말했다.

“도울까?”

그레이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욕조 가장자리에 있는 큰 그릇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하지.”

죠니는 가볍게 움직였지만, 바닥이 미끄러운 곳에서는 걸음을 늦췄다. 그는 큰 그릇을 들고 와 그레이 옆에 놓았다.

레이튼도 다가왔다.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까요?”

그레이는 진흙 속에 반쯤 묻힌 배수구 쇠살대를 보았다.

“깊이 박힌 것을 바로 잡아당기면 찢길 수 있습니다. 주변부터 불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물의 온도를 조금 조절해보겠습니다.”

레이튼은 욕조의 물을 살피더니, 등불지기에게 물었다.

“이 방에서는 따뜻한 물이 어디서 옵니까?”

등불지기는 천장을 가리켰다.

“위에서요.”

레이튼은 위쪽의 관을 보았다. 관에는 작은 종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종 하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맑은 소리가 났다. 그러자 가까운 욕조의 물결이 조금 따뜻하게 흔들렸다.

푸리나가 감탄했다.

“레이튼, 어떻게 알았어?”

“종이 여섯 개 있었고, 그중 세 개만 녹이 덜 슬어 있었습니다. 자주 쓰는 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였으면 일단 다 쳐봤을 텐데.”

죠니가 말했다.

“그래서 교수가 교수고, 네가 여왕님이지.”

푸리나는 그 말에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반박할 수 없네.”

하융은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접힌 천들을 살폈다. 그는 그중 가장 깨끗한 천을 골라 물에 적시고, 그레이에게 건넸다.

“이 천은 아직 힘이 남았소. 쓰기 좋겠구려.”

그레이는 천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손님도 손님을 도울 수는 있소.”

그 말에 등불지기가 하융을 보았다.

“그건 규칙에 있어요?”

하융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없다면 새로 적어야겠소.”

레이튼이 작게 웃었다.

“좋은 조항입니다. ‘손님은 손님을 도울 수 있다.’”

푸리나가 눈을 빛냈다.

“그거 극장 규칙에도 넣을까?”

죠니가 말했다.

“넣으면 좋아. 대신 밑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도 붙여.”

그레이는 그 대화를 들으며 천으로 진흙을 닦았다. 웃음이 완전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손끝의 힘이 조금 덜 굳었다. 진흙투성이 손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몸 안쪽에서 낮은 물소리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오래 막혀 있던 물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 같았다.

그레이는 먼저 작은 신발 한 짝을 꺼냈다. 억지로 잡아당기지 않았다. 주변 진흙을 적시고, 굳은 흙을 손으로 부수고, 끼어 있는 실을 풀었다. 신발은 작았다. 발등에는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끈은 끊어져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큰 그릇에 담지 않고, 따로 접힌 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으로 젖은 편지를 꺼냈다. 종이는 물을 먹어 거의 찢어질 듯했다. 그레이는 그것을 펼치지 않았다. 펴면 찢어질 것이다. 그녀는 편지를 그대로 얇은 그릇 위에 올리고, 레이튼이 건넨 마른 천으로 주변 물기만 눌렀다.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읽지 않으시는군요.”

“지금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레이튼은 더 묻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찢긴 배급표가 나왔다. 글자는 거의 지워져 있었지만, 붉은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 선을 오래 보았다. 표가 어디서 끊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누군가 그 선 너머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손끝에 남았다. 그녀는 배급표를 신발 옆이 아니라, 편지 옆에 놓았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왜 거기야?”

“같이 젖어 있었습니다.”

“아.”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레이가 아직 말로 만들지 않은 기준을, 무리해서 꺼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진흙투성이 손님은 조금씩 작아졌다. 아니, 작아졌다기보다 진흙 아래의 윤곽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던 몸이, 이제는 여러 겹의 골목과 지붕과 물길이 엉킨 모양처럼 보였다. 손님 몸의 한가운데에는 배수구 쇠살대와 꺼진 등불심지가 뒤엉켜 있었다. 그 둘은 가장 깊이 박혀 있었고, 건드릴 때마다 손님 전체가 낮게 떨렸다.

등불지기가 속삭였다.

“그건 아파요.”

그레이는 손을 멈췄다.

“그렇습니까?”

“아마요. 저기 박힌 지 오래됐거든요.”

그레이는 쇠살대와 등불심지를 보았다. 쇠에는 검은 진흙이 굳어 있었고, 심지는 물을 먹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둘은 서로 다른 물건인데, 너무 오래 붙어 있어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막힌 물길과 꺼진 불이 한몸이 되었구려.”

푸리나는 조용히 그 말을 따라 하듯 중얼거렸다.

“막힌 물길과 꺼진 불.”

죠니가 이번에는 농담하지 않았다. 그는 그레이의 옆에 서서 손님이 흔들릴 때 넘어지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레이튼은 따뜻한 물을 조금 더 불러왔고,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높이 들었다.

그레이는 손을 뻗었다. 바로 잡아당기지 않고, 먼저 쇠살대 주변의 진흙을 손으로 떼어냈다. 손톱 밑에 흙이 들어갔다. 심지에 붙은 검은 물은 손목을 타고 내려왔다. 냄새가 더 강해졌다. 그레이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한 조각씩, 조금씩, 진흙을 떼어냈다. 그러다 심지의 끝이 조금 풀렸고, 쇠살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입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죠니와 하융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죠니는 쇠살대를 잡았고, 하융은 심지를 받쳤다. 레이튼은 물의 온도를 맞추었고,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들어 욕조 위의 등불들이 한꺼번에 흔들리지 않게 빛을 모았다.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가장 가까이 가져왔다.

그레이는 쇠살대와 심지가 엉킨 부분을 잡았다.

“천천히.”

죠니가 말했다.

“알아.”

하융이 낮게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셋에 맞춰 그들은 당겼다.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님이 크게 떨렸고, 욕조의 물이 검게 솟았다. 푸리나가 이를 악물고 커튼 고리를 붙잡았다. 레이튼은 종을 하나 더 울렸다. 따뜻한 물이 흘러들어오자 굳은 진흙이 조금 더 풀렸다. 그레이는 손을 놓지 않았다. 심지가 끊어질 듯 늘어났고, 쇠살대가 삐걱거리며 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가 빠졌다.

쇠살대와 등불심지가 함께 뽑혀 나왔다. 그 순간 진흙투성이 손님 몸에서 검은 물이 쏟아졌다. 모두가 한 걸음 물러섰다. 욕조의 물은 순식간에 탁해졌고, 바닥의 물길은 빠르게 흘렀다. 벽의 등불들이 한꺼번에 낮게 흔들렸다. 그러나 꺼지지는 않았다.

진흙이 씻겨 내려가자, 손님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작은 거리가 나타났다.

방 안 한가운데, 물안개처럼 얇은 골목이 펼쳐졌다. 비가 그친 뒤의 골목이었다. 낮은 집들의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막혀 있던 배수구 옆에는 물웅덩이가 빠져나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물웅덩이를 피해 걷던 좁은 길이 보였고, 문 앞에 놓인 작은 신발들이 보였다. 골목 끝의 등불 하나가 다시 켜졌다. 아주 작은 불이었다. 그러나 불빛이 닿자, 젖은 벽의 금 간 자리와 문턱의 높이와 돌아가는 길이 보였다.

그레이는 그 장면을 보았다.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날짜도 없었다. 하지만 골목은 잠시 거기 있었다. 비 냄새와 젖은 천 냄새와 갓 켜진 등불의 약한 기름 냄새가 방 안으로 흘러나왔다.

등불지기가 작게 말했다.

“이제 보여요.”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내렸다. 죠니는 뽑아낸 쇠살대를 욕조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레이튼은 종에서 손을 뗐고, 하융은 젖은 심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손을 모았다.

기도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들렸다.

“오래 젖어 계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골목의 등불이 한 번 더 흔들렸다. 그러더니 골목은 서서히 얇아졌다. 사라진다기보다, 물에 비친 그림자가 물결에 맞춰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작은 등불심지 하나였다. 젖어 있었지만,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그것을 깨끗한 천 위에 올려두었다.

등불지기가 손님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잠든 거예요?”

그레이는 심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마…… 조금은 마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푸리나는 그레이의 손을 보았다.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그레이는 뒤늦게 자기 손을 보고, 손수건을 찾으려 했다. 아까 유리 조각을 받느라 더러워진 손수건은 그릇 옆에 있었다.

죠니가 물을 담은 작은 대야를 밀어주었다.

“먼저 씻어.”

그레이는 대야를 보았다.

“정리부터…….”

푸리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손부터.”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 레이튼은 마른 천을 건넸고, 하융은 젖은 등불심지를 안전한 곳에 옮겨두었다. 죠니는 대야가 미끄러지지 않게 발로 받쳤다. 등불지기는 자기 등불을 낮게 내려, 물이 잘 보이게 했다.

그레이는 대야에 손을 넣었다. 물이 금세 흐려졌다. 손톱 밑의 흙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씻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물의 방에는 잠시 손 씻는 소리만 남았다.

푸리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오늘 장면은…… 조금 좋네.”

죠니가 낮게 답했다.

“좋다는 말을 쓰기엔 손이 많이 더러워졌는데.”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때로는 그 점 때문에 좋은 장면일 수도 있지요.”

하융이 젖은 심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깨끗함이 처음부터 먼지 없음만을 뜻하지는 않겠구려.”

죠니가 하융을 보았다.

“오늘 하융 말이 꽤 많이 팔리겠는데.”

하융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까 정한 대로라면 접시 한 조각이오.”

푸리나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다만 물의 방이라 그런지, 웃음은 크게 울리지 않고 김 속에서 부드럽게 풀렸다. 그레이도 아주 작게 웃었다. 손은 아직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았지만, 물은 따뜻했다.

등불지기가 다음 문을 가리켰다.

“다음 손님은 말이 많아요.”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말이 많은 손님?”

레이튼이 찻주전자를 챙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차례일지도 모르겠군요.”

죠니가 말했다.

“교수, 기뻐하지 마.”

레이튼은 평온하게 답했다.

“기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말이 많은 손님과 조용한 질문의 궁합을 확인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푸리나가 웃었다.

“그게 기뻐하는 거야.”

하융이 조용히 덧붙였다.

“질문도 가끔 표정을 짓는 법이오.”

레이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현은 제가 접시 반 조각으로 사겠습니다.”

죠니가 바로 말했다.

“이젠 말에 가격 흥정까지 하는거야?”

그레이는 손을 닦으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물의 방 한쪽에는 진흙이 씻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욕조의 물은 아직 완전히 맑지 않았고, 솔과 천은 더러워졌으며, 큰 그릇에는 꺼낸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작은 신발, 젖은 편지, 찢긴 배급표, 깨진 등불 유리, 쇠살대, 등불심지.

그녀는 그것들을 다시 정리하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등불지기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잠시 생각한 뒤, 손을 거두었다.

“이대로 두어도 됩니까?”

등불지기가 환하게 웃었다.

“네. 여기 사람들이 말려줄 거예요.”

“그렇다면…… 부탁드립니다.”

그레이는 물건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돌아서기 전에 손을 다시 씻지 않았다. 손은 깨끗한 천으로 닦였고, 손목의 등불패에는 아주 작은 진흙 자국 하나가 남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문지르지 않았다. 아직은.

그들은 물의 방을 나섰다. 뒤쪽에서 욕조의 물이 낮게 흔들렸고, 벽의 등불들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흙투성이 손님이 남긴 냄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처음처럼 무겁지는 않았다. 젖은 나무 냄새 사이로 새로 켜진 등불의 기름 냄새가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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