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33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12:42:34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4막 — 처리 완료

물의 방 다음에는 복도가 없었다. 문을 열자 곧장 낮은 대기실이 나왔다. 대기실이라기에는 의자가 너무 많았고, 광장이라기에는 천장이 너무 낮았다. 벽에는 작은 창구들이 줄지어 있었으며, 각 창구 위에는 글자 없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어떤 팻말에는 접힌 편지가, 어떤 팻말에는 물동이가, 어떤 팻말에는 깨진 숟가락이, 어떤 팻말에는 등불이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는 그 그림들을 하나씩 보았다. 조금 전 물의 방에서 본 물건들과 닮아 있었지만, 이곳의 것들은 훨씬 납작했다. 종이 위에 찍힌 도장처럼, 사물의 무게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몇몇 손님들은 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떤 손님은 창구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흐렸다. 졸린 사람처럼 흐린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지우개로 문질러진 종이처럼 흐렸다. 손에는 각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젖은 편지, 낡은 신발, 작은 숟가락, 금이 간 그릇. 그 물건들은 얼굴보다 또렷했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잠시 멈췄다. 방 안의 공기는 물의 방보다 차가웠다. 젖은 나무 냄새 대신 마른 종이 냄새가 났고, 등불의 기름 냄새 대신 오래된 잉크와 밀랍 냄새가 났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가 작게 흔들렸다. 진흙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다.

등불지기가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는 조금 시끄러워요.”

죠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조용한데.”

“곧 시끄러워져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장 안쪽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검은 손님이 걸어 나왔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림자가 길었다. 얼굴은 없었다. 정확히는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종이가 한 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에는 도장이 들려 있었다. 붉은 인주가 마르지 않았는지, 도장 끝이 번들거렸다.

검은 손님은 창구 앞에 멈췄다.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도장을 찍었다.

쾅.

소리는 방 전체에 울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손님은 종이를 하나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처리 완료.**

곧 다른 손님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에 낡은 신발을 들고 있었다. 신발은 아이 것처럼 작았다. 검은 손님은 신발을 보지도 않고,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쾅.

**처리 완료.**

신발을 든 손님은 그 종이를 받았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듯 내려갔다. 그는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신발의 윤곽이 흐려졌다. 끈이 먼저 사라지고, 뒤꿈치의 천이 흐려지고, 마지막에는 젖은 자국만 남았다. 손님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종이를 품에 안고 긴 의자로 돌아갔다.

그레이는 그 장면을 보고 한 걸음 움직이려 했다가 멈췄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이 없어서인지, 검은 손님은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다만 도장을 들고 다음 종이를 기다렸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말이 많은 손님이라고 하셨지요.”

등불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말은 하나뿐이에요.”

그 순간 검은 손님이 다시 도장을 찍었다.

쾅.

“원인 불명.”

쾅.

“성명 미상.”

쾅.

“관례상 종결.”

각 도장 소리마다 손님들의 손에 들린 물건들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편지의 봉투가 사라지고, 숟가락의 금 간 부분이 지워지고, 물동이의 손잡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손님들은 그 종이를 받아들고 조용해졌다. 조용해질수록 방은 더 마른 종이 냄새로 가득 찼다.

푸리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박수 소리가 아니네.”

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접시를 품 가까이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아직 말린 과일이 조금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뭔가 한마디 했을 그가 침묵하자, 방의 도장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하융이 벽의 창구들을 보며 낮게 말했다.

“소리가 크다고 하여 살아 있는 말은 아니구려.”

레이튼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방에서는 조용한 질문이 필요하겠습니다.”

푸리나가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 이번엔 네 차례 같지?”

“아마도요. 다만 먼저 묻는 분은 제가 아닐 듯합니다.”

레이튼의 시선은 그레이에게 가 있었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 쪽으로 걸어갔다. 등불지기가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다만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다. 빛이 검은 손님의 발밑에 닿았지만, 그림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레이는 창구 앞에 섰다. 검은 손님은 그녀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는 비어 있었다.

그레이는 받지 않았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들었다.

“처리 완료.”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물었다.

“무엇이 완료되었습니까?”

검은 손님은 도장을 멈추지 않았다.

“처리 완료.”

“무엇을 처리했습니까?”

“처리 완료.”

도장이 허공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레이는 종이를 받지 않은 채, 도장이 찍히기 전의 빈 종이를 보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름도, 물건도, 날짜도, 장소도 없었다. 종이가 너무 하얘서 오히려 불편했다.

“어느 손님의 일입니까?”

검은 손님은 잠시 멈췄다.

“처리 완료.”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화내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받을 수 없습니다.”

도장이 허공에서 멈췄다. 방 안의 손님들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손님은 처음으로 그레이 쪽을 보는 듯했다. 얼굴 없는 종이 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레이튼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그레이보다 앞서지는 않았다.

검은 손님은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붉은 글씨가 먼저 찍혀 있었다.

**원인 불명.**

그레이는 종이를 보았다.

“모르겠다는 뜻입니까?”

검은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묻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검은 종이 얼굴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둘은 꽤 다르지요.”

검은 손님이 레이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튼은 미소를 유지한 채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모른다는 말은 때로 정직합니다. 하지만 묻지 않았는데 모른다고 쓰면, 종이가 먼저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들어 올렸다.

쾅.

이번에는 창구 위에 도장이 찍혔다.

**관례상 종결.**

하융이 그 글씨를 보며 낮게 말했다.

“관례라. 오래 반복된 길은 때로 길이 아니라 홈이 되오. 발이 빠지기 쉽지.”

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좀 맞는 말이네.”

푸리나가 하융을 보았다.

“하융, 오늘 대사 장사가 잘되는데?”

하융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직 접시를 받지 못했소.”

죠니는 말린 과일 하나를 집어 하융 쪽으로 내밀었다.

“선불.”

하융은 그것을 받아들고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실제로 주는구려.”

“네가 청구했잖아.”

푸리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튼은 눈을 가늘게 접고 말했다.

“계약의 성립을 목격했습니다.”

“교수까지 증인 서면 진짜 일이 커지오.”

하융이 그렇게 말하자, 그레이의 입가에도 아주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검은 손님은 그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멈춰 있었다. 도장 끝에서 붉은 인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은 바닥에 닿기 전에 종이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그레이는 다시 검은 손님을 보았다.

“도장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죠니도 그레이를 보았다. 검은 손님은 도장을 든 손을 조금 낮췄다.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레이는 창구 옆에 놓인 종이 더미를 보았다. 종이들은 너무 깨끗했다.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그 위에 도장만 찍히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오면 안 됩니다.”

그레이는 검은 손님이 내민 종이를 받지 않고, 창구 옆에 놓인 낡은 신발을 들었다. 조금 전 희미해진 신발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종이 위에 올렸다. 빈 종이가 신발의 젖은 자국을 받아들였다. 하얀 종이에 작은 물기가 번졌다. 글자는 아니었지만, 흔적이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검은 손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다음으로 접힌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는 흐려지고 있었지만, 아직 모서리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신발 옆에 놓았다.

“이것도.”

깨진 숟가락.

“이것도.”

금이 간 그릇.

“이것도.”

물동이 손잡이.

“이것도.”

그레이가 물건들을 하나씩 종이 위에 올릴 때마다, 종이는 더 이상 하얗지 않게 되었다. 젖은 자국, 녹 자국, 손때, 잉크 얼룩, 오래된 밀가루 가루가 묻었다. 검은 손님의 도장은 점점 내려올 곳을 잃었다. 붉은 글씨가 찍힐 빈자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레이튼이 아주 부드럽게 물었다.

“그 문서에는 아직 제목이 없군요.”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목이 있어야 합니까?”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답했다.

“아직은 없어도 됩니다. 물건들이 먼저 놓였으니까요.”

레이튼은 만족한 듯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검은 손님에게 다가가려다가, 그레이보다 앞서지 않도록 멈췄다. 대신 방 안의 다른 손님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종이 받기 전에 들고 온 거 확인해. 없어졌으면 다시 찾아야지.”

그녀의 말투는 밝았지만, 장난스럽지만은 않았다. 손님들이 하나둘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손님은 편지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고, 어떤 손님은 숟가락 대신 빈 손을 쥐고 있었다. 방 안이 술렁였다.

죠니는 가까운 긴 의자 아래를 살피더니, 흐려진 물동이 손잡이 하나를 주워 올렸다.

“여기 하나.”

등불지기가 달려가 손님에게 돌려주었다. 손님은 손잡이를 받자마자 조금 또렷해졌다. 얼굴은 여전히 흐렸지만, 손가락의 윤곽이 돌아왔다.

하융은 창구 옆에 쌓인 종이 더미를 보았다. 종이들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저 종이들도 무서워하는 듯하오.”

레이튼이 물었다.

“무엇을 무서워한다고 보십니까?”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글자가 되기 전의 사물들 말이오. 종이는 빈 것을 좋아하는 듯하니.”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거 좋다. 빈 무대가 소품을 무서워하는 장면.”

죠니가 말했다.

“빈 무대는 보통 소품 기다리지 않아?”

푸리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좋은 빈 무대는 그렇지. 나쁜 빈 무대는 자기가 비어 있는 걸 아름답다고 착각해.”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극장주께서 질문을 던지셨군요.”

“질문 아니야. 불평이야.”

“좋은 불평은 종종 질문과 닮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으쓱했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검은 손님 앞에 다시 섰다. 검은 손님은 처음보다 작아져 있었다. 키가 줄었다기보다, 그림자가 짧아졌다. 도장은 여전히 손에 있었지만, 손이 조금 떨렸다.

그레이가 말했다.

“도장을 주십시오.”

검은 손님은 도장을 자기 가슴 가까이 당겼다.

“처리 완료.”

“아직 찍지 않겠습니다.”

검은 손님은 멈췄다.

“맡기겠습니다.”

그 말에 검은 손님의 얼굴 없는 종이가 흔들렸다. 여관의 성좌가 없었지만, 접수대에서 들었던 말이 방 안에 잠시 되살아난 듯했다. 맡기는 것. 빼앗는 것이 아니라, 부수는 것도 아니라, 필요한 때까지 손에서 내려놓는 것.

그레이는 손을 내밀었다.

검은 손님은 아주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손님들은 숨죽이고 보았다. 등불지기는 등불을 조금 높이 들었고, 푸리나는 커튼 고리를 손안에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죠니는 주워온 물건들을 손님들에게 돌려주고 있었고, 레이튼은 창구 옆의 종이들이 날리지 않게 찻잔으로 눌러두었다. 하융은 도장 소리가 남긴 울림이 아직 바닥에 남아 있는지 듣는 사람처럼 고개를 낮추었다.

마침내 검은 손님이 도장을 내밀었다.

그레이는 두 손으로 받았다. 도장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붉은 인주 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것을 창구 위에 내려놓지 않고, 작은 천에 감쌌다.

“감사합니다.”

검은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 없는 종이 위의 주름이 조금 펴졌다. 검은 몸은 더 작아졌다. 이제 그는 방을 집어삼킬 듯한 손님이 아니라, 길을 잃은 종이 인형처럼 보였다. 등불지기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앉을래요?”

검은 손님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장이 사라진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등불지기는 가장 가까운 의자를 가리켰다. 검은 손님은 거기 앉았다. 앉자, 그의 몸에서 종이 몇 장이 떨어졌다.

원인 불명.
성명 미상.
관례상 종결.
처리 완료.

종이들은 바닥에 떨어진 뒤, 붉은 글씨가 조금씩 옅어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크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레이는 그 종이들을 주워 한데 모았다. 그리고 창구 위 빈 상자에 넣었다. 상자에는 뚜껑이 없었다.

푸리나가 다가왔다.

“뚜껑은 안 닫아?”

그레이는 상자를 보았다.

“아직 닫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응.”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레이튼이 찻잔으로 눌러두었던 종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 방은 이전보다 조금 덜 시끄러워졌군요.”

죠니가 말했다.

“도장 소리가 안 나니까 살겠네.”

하융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소리가 줄어드니, 손님들의 손이 보이는구려.”

그 말대로였다. 긴 의자에 앉은 손님들의 얼굴은 여전히 흐렸지만, 손은 전보다 또렷해져 있었다. 누군가는 다시 편지를 쥐고 있었고, 누군가는 숟가락을, 누군가는 신발을, 누군가는 물동이 손잡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더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빈손은 아니었다.

등불지기가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이제 다음 방으로 가도 돼요.”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내려다보았다. 진흙 자국 옆에 아주 작은 붉은 인주 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문지르지 않았다.

“네.”

푸리나가 물었다.

“손은 괜찮아?”

그레이는 자기 손을 보았다. 물의 방에서 씻었지만, 손톱 밑에는 아직 흙이 조금 남아 있었고, 손끝에는 붉은 인주가 묻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이번엔 씻으라고 안 할게. 또 다음 방에서 뭔가 묻을 것 같으니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다시 챙겼다.

“다음 방에서는 말보다 침묵이 많기를 기대해봅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러면 레이튼이 조금 심심하지 않을까?”

레이튼은 고개를 기울였다.

“침묵도 질문이 많습니다.”

죠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심심할 일은 없겠네.”

하융은 문 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말 없는 방이라면, 발소리가 대답하겠지요.”

푸리나는 손뼉을 치려다가, 이 방에서 큰 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손끝만 살짝 맞댔다.

“좋아. 그럼 다음 장면은 발소리.”

“작명은 또 시작되었구려.”

하융이 그렇게 말하자, 푸리나는 밝게 웃었다.

“하융도 이제 익숙해졌네.”

“익숙해지는 것과 납득하는 것은 다르오.”

죠니가 하융을 보며 말했다.

“오늘 제일 정확한 농담이네.”

하융은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 반 조각을 청구하겠소.”

이번에는 모두가 작게 웃었다. 검은 손님도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앉은 의자 아래에서 붉은 종이 하나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그들은 대기실을 나섰다. 뒤쪽 창구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도장도 작은 천 안에 묶인 채 상자 옆에 놓여 있었다. 닫힌 것은 없었다. 사라진 것도 많지 않았다. 다만 방 안의 소리는 달라졌다. 도장 소리 대신, 누군가 자기 물건을 다시 쥐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문을 지나기 전, 상자 쪽으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등불지기의 뒤를 따라 다음 방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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