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34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12:54:50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5막 — 발소리의 정류장
대기실을 지나자 소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도장이 내려찍히던 방의 마른 울림은 문 뒤에 남았고, 대신 바닥 아래에서 낮은 떨림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고, 조금 더 걸으니 바퀴가 오래된 레일 위를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등불지기는 그 소리에 맞춰 걸음을 늦췄다. 아이의 젖은 신발은 여전히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발이 닿은 곳마다 바닥의 등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복도 끝에는 정류장이 있었다. 벽도 없고 지붕도 낮은, 그러나 분명히 정류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긴 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표지판에는 글자가 없었다. 대신 여러 개의 문패 그림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봉투, 젖은 신발, 깨진 숟가락,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 문패들은 바람도 없는데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흔들림이 멈추면 어디선가 바퀴 소리가 가까워졌고, 다시 흔들리면 멀어졌다.
그레이는 정류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정류장이라는 것은 기다리는 곳이었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머무는 곳. 누군가를 보내거나,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돌아오지 않는 발소리를 오래 듣는 곳. 그녀는 표지판의 그림들을 보다가, 가장 아래쪽에 걸린 빈 접시 문패에서 시선이 잠시 멈췄다. 죠니가 들고 있는 접시와 닮아 있었다. 다만 그림 속 접시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반듯이 놓여 있었다.
죠니가 그 시선을 따라가더니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내 건 아직 비어 있진 않아.”
푸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자랑처럼 말하는구나.”
“비어 있지 않은 접시는 자랑해도 돼.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레이튼은 표지판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문패들은 순서일까요, 아니면 정류장 이름일까요?”
등불지기가 대답했다.
“둘 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타고 가는 동안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너무 오래 보면 못 내려요.”
레이튼은 그 대답을 듣고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읽으라는 표지가 아니라, 적당히만 보라는 표지라.”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다. 극장 입구에 붙일까?”
죠니가 바로 말했다.
“너희 극장에 ‘적당히만 보시오’라고 붙이면 관객이 혼란스러워할걸.”
하융은 표지판의 문패들을 보다가 낮게 웃었다.
“과히 오래 보는 자는 길을 놓친다라. 내게 붙이면 퍽 매서운 팻말이겠구려.”
푸리나가 하융을 돌아보았다.
“그럼 붙여줄까?”
“전하께서 붙이시면, 내가 떼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오.”
“그건 또 그것대로 한 막이 되겠네.”
“부디 막이 짧기를 바라오.”
그레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정류장의 의자를 보았다. 의자에는 먼지가 없었다. 누군가 방금 일어난 것처럼, 앉았던 자리가 아주 희미하게 눌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없었다. 등불지기는 의자에 올라앉지 않고, 표지판 아래에 서서 등불을 무릎 높이로 낮췄다. 빛이 바닥을 비추자, 여러 겹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크고 작은 발자국, 맨발의 흔적, 지팡이 끝의 둥근 자국, 수레바퀴가 지나간 얕은 선. 발자국들은 정류장으로 모였다가, 레일 쪽으로 사라졌다.
그레이는 발자국들을 보았다. 기록할 수 없는 발자국이었다. 너무 많았고, 서로 겹쳤으며, 이미 지나간 것들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하나하나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가장 가까운 작은 발자국 앞에서 잠시 눈을 낮췄다. 발자국은 물기에 젖은 듯 반짝였고, 그 끝에는 진흙이 조금 말라 있었다.
정류장 저편에서 빛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등불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빛은 점점 길어졌고, 곧 낮은 마차의 형체가 되었다. 말은 없었다. 바퀴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차체가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다가왔고, 창문마다 작은 등불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마차가 정류장에 멈출 때도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다린 숨이 한 번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타요.”
푸리나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좌석 지정제야?”
“아니요.”
“그럼 내가 창가.”
죠니가 말했다.
“너는 어딜 가도 창가부터 노리네.”
“관객에게 풍경은 중요해.”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레이 경께서 먼저 고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 밤의 손님이시니까요.”
그레이는 마차 안을 보았다. 좌석은 길게 이어져 있었고,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문 가까운 자리로 걸어갔다. 필요하면 바로 내릴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자 등불지기가 고개를 저었다.
“거긴 기다리는 자리예요.”
그레이는 멈췄다.
“기다리는 자리입니까?”
“네. 오늘은 저쪽.”
아이가 가리킨 곳은 가운데 자리였다. 창과도 가깝고 문과도 멀지 않은, 그러나 바로 일어나기에는 조금 애매한 자리였다. 그레이는 잠시 그 자리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고, 죠니는 접시를 가슴 앞에서 살짝 고쳐 들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가 흔들리지 않게 손잡이를 잡았고, 하융은 마차 바닥의 레일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등불패가 무릎 위에서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려다가, 한 손에는 아직 작은 빵 조각을 감싼 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 천을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별말하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자기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렸다.
푸리나는 그레이 옆자리에 앉으려다, 잠시 멈췄다.
“옆에 앉아도 돼?”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푸리나를 보았다.
“물론입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앉았다. 평소라면 “주연 옆자리는 연출자의 특권!” 같은 말을 했을 법했지만,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 맞은편에 앉았고, 하융은 창가에 앉았다. 죠니는 접시가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고르느라 한 번 자리를 바꾸었다.
마차가 움직였다.
창밖에는 거리도 숲도 없었다. 대신 문패들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식탁의 방에서 보았던 빵 조각이 보였다. 빵은 아주 잠깐 창밖에 떠 있다가 뒤로 밀려났다. 다음은 젖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은 걸어가지 않고, 등불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은 접힌 편지였다. 편지는 봉해지지 않은 채 창밖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레이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보았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바퀴 소리도 거의 없었다. 창밖의 문패들이 지나갈 때마다, 각자의 작은 소리만 들렸다. 빵이 식어가는 소리, 물동이에 물이 닿는 소리, 편지지가 접히는 소리, 신발 끈이 젖어 풀리는 소리. 그 소리들은 너무 작아서 귀로 듣는 것인지, 손끝으로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등불지기는 문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흔들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마차가 움직여도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다 적지 않아도 돼요?”
아이가 물었다.
그레이는 창밖의 문패들을 보았다. 깨진 숟가락이 지나가고 있었다. 숟가락의 금 간 부분이 등불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
“지금은…… 보겠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하고 있어요.”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눈을 내렸다. 칭찬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안내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아이의 말은 무겁지 않았다.
푸리나는 창밖을 보다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커튼 고리가 없어서인지, 그녀의 손은 잠시 허공에서 작게 원을 그렸다.
“극장에서 이 장면을 만들면, 관객들이 너무 조용해질까?”
레이튼이 대답했다.
“조용해지는 것도 반응입니다.”
“그건 알아. 그런데 나, 가끔 조용한 반응은 조금 무서워.”
죠니가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도 돼. 네가 안 무서운 척하면 그게 더 무섭거든.”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그 말, 왜 그렇게 맞는 말처럼 들려?”
“맞는 말이라서?”
하융이 창밖을 보며 덧붙였다.
“침묵도 객석의 숨이라면, 박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오. 다만 소리가 안 날 뿐이겠지요.”
푸리나는 하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하융, 오늘 왜 이렇게 연출가한테 유용한 말을 많이 해?”
“내가 창가에 앉았기 때문이오. 경치가 말을 부르는구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창가 좌석의 효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겠습니다.”
죠니가 접시를 보며 말했다.
“그 연구는 식후에 해. 빈속으로 창가 철학하면 멀미날까 무섭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창밖을 보았다. 문패들은 계속 지나갔다. 붉은 끈이 보였다. 작은 손목에 묶였던 것인지, 편지를 묶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는 빈 접시가 지나갔다. 죠니의 접시보다 조금 더 얇고 오래된 접시였다. 접시의 가운데에는 빵가루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천을 보았다. 안에는 아까 받은 빵 조각이 있었다. 그녀는 천을 펼치지 않았지만, 그 무게는 느껴졌다.
마차는 어느 정류장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창밖에는 가끔 의자가 보였다. 누군가 앉아 있다가 방금 일어난 자리처럼, 조금 눌린 의자들. 그 옆에는 등불이 있었다. 어떤 등불은 꺼져 있었고, 어떤 등불은 아주 낮게 타고 있었다. 하융은 그 등불들을 유심히 보았다.
“이곳의 등불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오?”
등불지기가 대답했다.
“내릴 사람요.”
“탈 사람은 아니고?”
“탈 사람은 정류장에서 기다려요. 내릴 사람은 불을 보고 내려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내려야 할 곳에도 별이 필요하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거 좋다.”
죠니가 이번에는 하융보다 먼저 말했다.
“접시 한 조각?”
하융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당한 대가라 생각하오.”
죠니는 말린 과일을 하나 반으로 잘라 하융에게 건넸다.
“요즘 시세가 불안정해서 반 조각이야.”
하융은 받아들고 잠시 보았다.
“언어 시장도 흉년이구려.”
레이튼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경제학적 은유까지 도입되었군요.”
푸리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마차 안의 웃음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래도 좌석 사이에 잠깐 따뜻한 것이 생겼다. 그레이는 그 따뜻함을 느끼며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손으로 눌렀다.
창밖에 물동이가 지나갔다. 물동이는 기울어져 있었지만, 쏟아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물동이의 손잡이를 보았다. 대기실에서 흐려졌다가 되돌아온 손잡이와 닮아 있었다. 다음으로는 심지가 지나갔다. 물의 방에서 진흙 손님이 남기고 간 것보다 더 마른 심지였다. 그 심지 끝에 아주 작은 불씨가 붙어 있었다.
그레이는 그 불씨를 오래 보았다.
마차 안의 불빛이 잠시 낮아졌다. 모두가 창밖을 보았다. 불씨가 뒤로 멀어지자, 어둠 속에서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골목이었다. 비가 온 뒤의 골목. 물의 방에서 보았던 그 골목과 닮았지만, 이번에는 더 조용했다. 문 앞에는 작은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배수구에는 새 쇠살대가 놓여 있었다. 등불은 켜져 있었다. 빛은 크지 않았지만, 문턱 아래까지 닿았다. 누군가 문 안에서 빗자루를 세워두고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방금 지나간 것 같았다.
그레이는 창문을 향해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레이튼도 말하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 위의 마지막 말린 과일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두었다.
하융은 창밖의 골목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마차는 계속 갔다. 그 뒤로 지나간 문패들은 조금씩 낯설어졌다. 낡은 장갑, 깨진 머그잔, 금 간 거울, 구부러진 못, 한쪽만 남은 귀걸이, 초가 거의 다 탄 촛대. 그레이는 더 이상 모든 물건을 오래 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짧게 보고 지나쳤고, 어떤 것은 잠깐 눈을 낮췄으며, 어떤 것은 그저 창밖에서 사라지게 두었다.
등불지기가 옆으로 다가왔다.
“다 기억해요?”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부는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레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작은 나무빗이 지나갔다. 빗살 몇 개가 부러져 있었다. 그 뒤에는 빈 의자가 있었다. 그레이는 그 둘을 본 뒤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등불지기는 만족한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아주 어려운 대답을 하셨군요.”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예. ‘괜찮다’는 말은 종종 지나치게 넓습니다. 그런데 방금은 꽤 알맞은 크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식 칭찬은 가끔 포장지가 두꺼워.”
레이튼은 웃었다.
“그래도 내용물은 칭찬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칭찬이 많네. 조용한 극도 나쁘지 않아.”
하융은 창가에 기대지 않고, 등을 곧게 세운 채 말했다.
“소리가 적으면 작은 농담도 오래 가는 법이오.”
죠니가 접시를 보았다.
“그 말도 꽤 비싸 보이는데.”
하융은 이번에는 손을 저었다.
“이번 것은 무료로 하겠소. 과다 청구는 장기적으로 시장을 해치오.”
푸리나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웃음이 마차 안에서 둥글게 굴러갔다. 그레이도 고개를 아주 조금 숙인 채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작았지만, 전보다 조금 덜 숨겨져 있었다.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창밖의 문패들이 멀어지고, 대신 작은 집 하나가 나타났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방이라고 하기에는 문패가 있었다. 문패에는 등불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와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패에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고, 저 문패에는 의자 하나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등불지기가 문 쪽으로 갔다.
“내려야 해요.”
푸리나가 창밖을 보았다.
“벌써?”
“여기가 손님 방 앞이에요.”
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마차 문이 열렸다. 밖에는 정류장이 없었다. 작은 집 앞에 낮은 등불이 하나 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물을 담은 대야와 접힌 수건, 그리고 작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집 뒤쪽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밤이 잠을 준비하고 있는 어둠에 가까웠다.
그레이는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 위의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잊지 않고 집어 들었다. 죠니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튼도 앉은 채 기다렸다. 하융은 창가에서 그레이를 보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여기부터는 조금만 걸어요.”
그레이는 문 앞에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함께 가십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등불지기를 보았다.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문 앞까지는요. 방 안은 손님 방이에요.”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럼 문 앞까지.”
죠니는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방 안에 음식 반입 금지 같은 규칙은 없지?”
등불지기는 죠니의 접시를 보았다.
“흘리지만 않으면 돼요.”
죠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규칙이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챙겼다.
“차도 문 앞까지는 허락되겠지요?”
등불지기는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차는 대부분 허락돼요.”
하융이 말했다.
“참으로 문명적인 거리로군.”
그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발밑의 바닥은 나무도 돌도 아니었다. 오래 밟힌 마룻바닥 같으면서도, 흙길처럼 부드러웠다. 그레이의 신발 아래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발자국이 남았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레이는 그 자국을 보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여긴 남아요.”
“그렇습니까.”
“금방 사라지지만요.”
그레이는 자기 발자국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러고는 작은 집의 문패를 향해 걸었다. 손목의 등불패가 문패와 가까워지자, 두 등불 그림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문 앞에 놓인 의자는 작았다. 아이의 의자 같기도 하고, 잠깐 앉아 신발을 벗기 위한 의자 같기도 했다.
하융이 문 앞에서 낮게 말했다.
“그레이 경.”
그레이는 돌아보았다.
“네.”
하융은 손잡이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문 앞의 의자를 보았다.
“놓이는 것과 쉬는 것은 다르오.”
그 말은 낮고 오래된 말투로 흘러나왔다. 한문체로 굳어지지는 않았지만, 하융의 목소리 안쪽에서 먼 고향의 문턱이 잠시 열리는 듯했다.
“오늘 그대는 놓인 것이 아니라, 앉는 것이오.”
그레이는 아주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기다렸고, 죠니는 접시를 몸 가까이 들었으며,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등불지기는 문고리를 잡지 않았다. 아무도 먼저 열지 않았다.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리고 그녀는 문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낮았다. 앉으니 손목의 등불패가 무릎 위에 닿았다. 발자국은 아직 문 앞에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감싼 빵 조각을 손에 들고, 잠시 문패의 등불을 보았다.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문은 닫힌 채로, 안쪽에서 따뜻한 빛만 아주 조금 새어 나왔다.
푸리나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다섯 번째 장면.”
죠니가 속삭였다.
“제목은?”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발소리의 정류장.”
레이튼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목입니다.”
하융은 작게 웃었다.
“오늘은 내가 값을 청구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죠니가 말했다.
“방금은 푸리나가 지은 거잖아.”
“그러니 무료요.”
푸리나는 웃음을 참고,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불지기는 그 옆에 서서 등불을 낮게 들었다. 문 앞의 빛은 작았고, 의자는 낮았고, 밤은 길었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5막 — 발소리의 정류장
대기실을 지나자 소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도장이 내려찍히던 방의 마른 울림은 문 뒤에 남았고, 대신 바닥 아래에서 낮은 떨림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고, 조금 더 걸으니 바퀴가 오래된 레일 위를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등불지기는 그 소리에 맞춰 걸음을 늦췄다. 아이의 젖은 신발은 여전히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발이 닿은 곳마다 바닥의 등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복도 끝에는 정류장이 있었다. 벽도 없고 지붕도 낮은, 그러나 분명히 정류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긴 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표지판에는 글자가 없었다. 대신 여러 개의 문패 그림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봉투, 젖은 신발, 깨진 숟가락,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 문패들은 바람도 없는데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흔들림이 멈추면 어디선가 바퀴 소리가 가까워졌고, 다시 흔들리면 멀어졌다.
그레이는 정류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정류장이라는 것은 기다리는 곳이었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머무는 곳. 누군가를 보내거나,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돌아오지 않는 발소리를 오래 듣는 곳. 그녀는 표지판의 그림들을 보다가, 가장 아래쪽에 걸린 빈 접시 문패에서 시선이 잠시 멈췄다. 죠니가 들고 있는 접시와 닮아 있었다. 다만 그림 속 접시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반듯이 놓여 있었다.
죠니가 그 시선을 따라가더니 접시를 조금 들어 보였다.
“내 건 아직 비어 있진 않아.”
푸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자랑처럼 말하는구나.”
“비어 있지 않은 접시는 자랑해도 돼.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레이튼은 표지판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문패들은 순서일까요, 아니면 정류장 이름일까요?”
등불지기가 대답했다.
“둘 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타고 가는 동안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너무 오래 보면 못 내려요.”
레이튼은 그 대답을 듣고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읽으라는 표지가 아니라, 적당히만 보라는 표지라.”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거 좋다. 극장 입구에 붙일까?”
죠니가 바로 말했다.
“너희 극장에 ‘적당히만 보시오’라고 붙이면 관객이 혼란스러워할걸.”
하융은 표지판의 문패들을 보다가 낮게 웃었다.
“과히 오래 보는 자는 길을 놓친다라. 내게 붙이면 퍽 매서운 팻말이겠구려.”
푸리나가 하융을 돌아보았다.
“그럼 붙여줄까?”
“전하께서 붙이시면, 내가 떼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오.”
“그건 또 그것대로 한 막이 되겠네.”
“부디 막이 짧기를 바라오.”
그레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정류장의 의자를 보았다. 의자에는 먼지가 없었다. 누군가 방금 일어난 것처럼, 앉았던 자리가 아주 희미하게 눌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없었다. 등불지기는 의자에 올라앉지 않고, 표지판 아래에 서서 등불을 무릎 높이로 낮췄다. 빛이 바닥을 비추자, 여러 겹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크고 작은 발자국, 맨발의 흔적, 지팡이 끝의 둥근 자국, 수레바퀴가 지나간 얕은 선. 발자국들은 정류장으로 모였다가, 레일 쪽으로 사라졌다.
그레이는 발자국들을 보았다. 기록할 수 없는 발자국이었다. 너무 많았고, 서로 겹쳤으며, 이미 지나간 것들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하나하나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가장 가까운 작은 발자국 앞에서 잠시 눈을 낮췄다. 발자국은 물기에 젖은 듯 반짝였고, 그 끝에는 진흙이 조금 말라 있었다.
정류장 저편에서 빛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등불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빛은 점점 길어졌고, 곧 낮은 마차의 형체가 되었다. 말은 없었다. 바퀴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차체가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다가왔고, 창문마다 작은 등불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마차가 정류장에 멈출 때도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다린 숨이 한 번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타요.”
푸리나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좌석 지정제야?”
“아니요.”
“그럼 내가 창가.”
죠니가 말했다.
“너는 어딜 가도 창가부터 노리네.”
“관객에게 풍경은 중요해.”
레이튼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레이 경께서 먼저 고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 밤의 손님이시니까요.”
그레이는 마차 안을 보았다. 좌석은 길게 이어져 있었고,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문 가까운 자리로 걸어갔다. 필요하면 바로 내릴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자 등불지기가 고개를 저었다.
“거긴 기다리는 자리예요.”
그레이는 멈췄다.
“기다리는 자리입니까?”
“네. 오늘은 저쪽.”
아이가 가리킨 곳은 가운데 자리였다. 창과도 가깝고 문과도 멀지 않은, 그러나 바로 일어나기에는 조금 애매한 자리였다. 그레이는 잠시 그 자리를 보았다. 푸리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고, 죠니는 접시를 가슴 앞에서 살짝 고쳐 들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가 흔들리지 않게 손잡이를 잡았고, 하융은 마차 바닥의 레일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등불패가 무릎 위에서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려다가, 한 손에는 아직 작은 빵 조각을 감싼 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 천을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죠니는 그것을 보고 별말하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자기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렸다.
푸리나는 그레이 옆자리에 앉으려다, 잠시 멈췄다.
“옆에 앉아도 돼?”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 푸리나를 보았다.
“물론입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앉았다. 평소라면 “주연 옆자리는 연출자의 특권!” 같은 말을 했을 법했지만,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 맞은편에 앉았고, 하융은 창가에 앉았다. 죠니는 접시가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고르느라 한 번 자리를 바꾸었다.
마차가 움직였다.
창밖에는 거리도 숲도 없었다. 대신 문패들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식탁의 방에서 보았던 빵 조각이 보였다. 빵은 아주 잠깐 창밖에 떠 있다가 뒤로 밀려났다. 다음은 젖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은 걸어가지 않고, 등불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은 접힌 편지였다. 편지는 봉해지지 않은 채 창밖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레이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보았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바퀴 소리도 거의 없었다. 창밖의 문패들이 지나갈 때마다, 각자의 작은 소리만 들렸다. 빵이 식어가는 소리, 물동이에 물이 닿는 소리, 편지지가 접히는 소리, 신발 끈이 젖어 풀리는 소리. 그 소리들은 너무 작아서 귀로 듣는 것인지, 손끝으로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등불지기는 문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흔들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마차가 움직여도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다 적지 않아도 돼요?”
아이가 물었다.
그레이는 창밖의 문패들을 보았다. 깨진 숟가락이 지나가고 있었다. 숟가락의 금 간 부분이 등불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
“지금은…… 보겠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하고 있어요.”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눈을 내렸다. 칭찬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안내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아이의 말은 무겁지 않았다.
푸리나는 창밖을 보다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커튼 고리가 없어서인지, 그녀의 손은 잠시 허공에서 작게 원을 그렸다.
“극장에서 이 장면을 만들면, 관객들이 너무 조용해질까?”
레이튼이 대답했다.
“조용해지는 것도 반응입니다.”
“그건 알아. 그런데 나, 가끔 조용한 반응은 조금 무서워.”
죠니가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도 돼. 네가 안 무서운 척하면 그게 더 무섭거든.”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그 말, 왜 그렇게 맞는 말처럼 들려?”
“맞는 말이라서?”
하융이 창밖을 보며 덧붙였다.
“침묵도 객석의 숨이라면, 박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오. 다만 소리가 안 날 뿐이겠지요.”
푸리나는 하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하융, 오늘 왜 이렇게 연출가한테 유용한 말을 많이 해?”
“내가 창가에 앉았기 때문이오. 경치가 말을 부르는구려.”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창가 좌석의 효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겠습니다.”
죠니가 접시를 보며 말했다.
“그 연구는 식후에 해. 빈속으로 창가 철학하면 멀미날까 무섭다.”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창밖을 보았다. 문패들은 계속 지나갔다. 붉은 끈이 보였다. 작은 손목에 묶였던 것인지, 편지를 묶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는 빈 접시가 지나갔다. 죠니의 접시보다 조금 더 얇고 오래된 접시였다. 접시의 가운데에는 빵가루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천을 보았다. 안에는 아까 받은 빵 조각이 있었다. 그녀는 천을 펼치지 않았지만, 그 무게는 느껴졌다.
마차는 어느 정류장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창밖에는 가끔 의자가 보였다. 누군가 앉아 있다가 방금 일어난 자리처럼, 조금 눌린 의자들. 그 옆에는 등불이 있었다. 어떤 등불은 꺼져 있었고, 어떤 등불은 아주 낮게 타고 있었다. 하융은 그 등불들을 유심히 보았다.
“이곳의 등불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오?”
등불지기가 대답했다.
“내릴 사람요.”
“탈 사람은 아니고?”
“탈 사람은 정류장에서 기다려요. 내릴 사람은 불을 보고 내려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내려야 할 곳에도 별이 필요하오.”
푸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거 좋다.”
죠니가 이번에는 하융보다 먼저 말했다.
“접시 한 조각?”
하융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당한 대가라 생각하오.”
죠니는 말린 과일을 하나 반으로 잘라 하융에게 건넸다.
“요즘 시세가 불안정해서 반 조각이야.”
하융은 받아들고 잠시 보았다.
“언어 시장도 흉년이구려.”
레이튼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경제학적 은유까지 도입되었군요.”
푸리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마차 안의 웃음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래도 좌석 사이에 잠깐 따뜻한 것이 생겼다. 그레이는 그 따뜻함을 느끼며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손으로 눌렀다.
창밖에 물동이가 지나갔다. 물동이는 기울어져 있었지만, 쏟아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물동이의 손잡이를 보았다. 대기실에서 흐려졌다가 되돌아온 손잡이와 닮아 있었다. 다음으로는 심지가 지나갔다. 물의 방에서 진흙 손님이 남기고 간 것보다 더 마른 심지였다. 그 심지 끝에 아주 작은 불씨가 붙어 있었다.
그레이는 그 불씨를 오래 보았다.
마차 안의 불빛이 잠시 낮아졌다. 모두가 창밖을 보았다. 불씨가 뒤로 멀어지자, 어둠 속에서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골목이었다. 비가 온 뒤의 골목. 물의 방에서 보았던 그 골목과 닮았지만, 이번에는 더 조용했다. 문 앞에는 작은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배수구에는 새 쇠살대가 놓여 있었다. 등불은 켜져 있었다. 빛은 크지 않았지만, 문턱 아래까지 닿았다. 누군가 문 안에서 빗자루를 세워두고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방금 지나간 것 같았다.
그레이는 창문을 향해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레이튼도 말하지 않았다.
죠니는 접시 위의 마지막 말린 과일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두었다.
하융은 창밖의 골목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마차는 계속 갔다. 그 뒤로 지나간 문패들은 조금씩 낯설어졌다. 낡은 장갑, 깨진 머그잔, 금 간 거울, 구부러진 못, 한쪽만 남은 귀걸이, 초가 거의 다 탄 촛대. 그레이는 더 이상 모든 물건을 오래 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짧게 보고 지나쳤고, 어떤 것은 잠깐 눈을 낮췄으며, 어떤 것은 그저 창밖에서 사라지게 두었다.
등불지기가 옆으로 다가왔다.
“다 기억해요?”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부는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레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작은 나무빗이 지나갔다. 빗살 몇 개가 부러져 있었다. 그 뒤에는 빈 의자가 있었다. 그레이는 그 둘을 본 뒤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등불지기는 만족한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아주 어려운 대답을 하셨군요.”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예. ‘괜찮다’는 말은 종종 지나치게 넓습니다. 그런데 방금은 꽤 알맞은 크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식 칭찬은 가끔 포장지가 두꺼워.”
레이튼은 웃었다.
“그래도 내용물은 칭찬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칭찬이 많네. 조용한 극도 나쁘지 않아.”
하융은 창가에 기대지 않고, 등을 곧게 세운 채 말했다.
“소리가 적으면 작은 농담도 오래 가는 법이오.”
죠니가 접시를 보았다.
“그 말도 꽤 비싸 보이는데.”
하융은 이번에는 손을 저었다.
“이번 것은 무료로 하겠소. 과다 청구는 장기적으로 시장을 해치오.”
푸리나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웃음이 마차 안에서 둥글게 굴러갔다. 그레이도 고개를 아주 조금 숙인 채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작았지만, 전보다 조금 덜 숨겨져 있었다.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창밖의 문패들이 멀어지고, 대신 작은 집 하나가 나타났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방이라고 하기에는 문패가 있었다. 문패에는 등불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와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패에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고, 저 문패에는 의자 하나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등불지기가 문 쪽으로 갔다.
“내려야 해요.”
푸리나가 창밖을 보았다.
“벌써?”
“여기가 손님 방 앞이에요.”
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마차 문이 열렸다. 밖에는 정류장이 없었다. 작은 집 앞에 낮은 등불이 하나 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물을 담은 대야와 접힌 수건, 그리고 작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집 뒤쪽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밤이 잠을 준비하고 있는 어둠에 가까웠다.
그레이는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 위의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잊지 않고 집어 들었다. 죠니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튼도 앉은 채 기다렸다. 하융은 창가에서 그레이를 보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여기부터는 조금만 걸어요.”
그레이는 문 앞에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함께 가십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등불지기를 보았다.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문 앞까지는요. 방 안은 손님 방이에요.”
푸리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럼 문 앞까지.”
죠니는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방 안에 음식 반입 금지 같은 규칙은 없지?”
등불지기는 죠니의 접시를 보았다.
“흘리지만 않으면 돼요.”
죠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규칙이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챙겼다.
“차도 문 앞까지는 허락되겠지요?”
등불지기는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차는 대부분 허락돼요.”
하융이 말했다.
“참으로 문명적인 거리로군.”
그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발밑의 바닥은 나무도 돌도 아니었다. 오래 밟힌 마룻바닥 같으면서도, 흙길처럼 부드러웠다. 그레이의 신발 아래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발자국이 남았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레이는 그 자국을 보았다.
등불지기가 말했다.
“여긴 남아요.”
“그렇습니까.”
“금방 사라지지만요.”
그레이는 자기 발자국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러고는 작은 집의 문패를 향해 걸었다. 손목의 등불패가 문패와 가까워지자, 두 등불 그림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문 앞에 놓인 의자는 작았다. 아이의 의자 같기도 하고, 잠깐 앉아 신발을 벗기 위한 의자 같기도 했다.
하융이 문 앞에서 낮게 말했다.
“그레이 경.”
그레이는 돌아보았다.
“네.”
하융은 손잡이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문 앞의 의자를 보았다.
“놓이는 것과 쉬는 것은 다르오.”
그 말은 낮고 오래된 말투로 흘러나왔다. 한문체로 굳어지지는 않았지만, 하융의 목소리 안쪽에서 먼 고향의 문턱이 잠시 열리는 듯했다.
“오늘 그대는 놓인 것이 아니라, 앉는 것이오.”
그레이는 아주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기다렸고, 죠니는 접시를 몸 가까이 들었으며,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등불지기는 문고리를 잡지 않았다. 아무도 먼저 열지 않았다.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리고 그녀는 문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낮았다. 앉으니 손목의 등불패가 무릎 위에 닿았다. 발자국은 아직 문 앞에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감싼 빵 조각을 손에 들고, 잠시 문패의 등불을 보았다.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문은 닫힌 채로, 안쪽에서 따뜻한 빛만 아주 조금 새어 나왔다.
푸리나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다섯 번째 장면.”
죠니가 속삭였다.
“제목은?”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발소리의 정류장.”
레이튼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목입니다.”
하융은 작게 웃었다.
“오늘은 내가 값을 청구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죠니가 말했다.
“방금은 푸리나가 지은 거잖아.”
“그러니 무료요.”
푸리나는 웃음을 참고,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아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불지기는 그 옆에 서서 등불을 낮게 들었다. 문 앞의 빛은 작았고, 의자는 낮았고, 밤은 길었다.
그레이는 빵 조각을 감싼 천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