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35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13:04:30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6막 — 손님 방
문은 스스로 열리지 않았다. 그레이가 빵 조각을 한 입 베어 문 뒤에도, 문은 닫힌 채로 있었다. 안쪽의 빛만 문틈 아래로 얇게 흘러나왔다. 그 빛은 재촉하지 않았다. 초대장처럼 넓게 펼쳐지지도 않았고, 명령문처럼 곧게 뻗지도 않았다. 다만 문 아래의 먼지를 조금 밝히고, 그레이의 신발 끝에 닿아 있었다. 그레이는 빵을 천천히 삼켰다. 밀가루 냄새와 말린 과일의 단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남은 빵 조각을 다시 천으로 감싸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죠니가 그 모습을 보고 낮게 말했다.
“다 먹으라는 말은 안 할게.”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정말입니까?”
“응. 대신 한 입 더는 권할 수 있어.”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게 네가 말하는 양보야?”
“상당히 큰 양보지. 내가 보기엔 거의 외교야.”
레이튼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협상안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요구를 낮췄고, 선택권을 남겼으니까요.”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 빵 권유를 조약으로 만들지 마.”
하융은 문 앞의 작은 의자를 보며 말했다.
“조약의 이름은 ‘빵 한 입 더’가 되겠구려.”
푸리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문 앞의 빛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레이는 웃는 사람들을 보다가, 결국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죠니는 아무 말 없이 만족한 얼굴을 했고, 푸리나는 승리 선언을 하려다가 손가락만 살짝 들어 올리고 말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을 곳을 찾다가 의자 옆 바닥이 마른 것을 확인했고, 하융은 문패의 등불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등불지기는 문고리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그레이가 빵을 삼키는 동안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이 일인 사람처럼, 아이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천을 접어 무릎 위에 올려두자, 그제야 등불지기가 물었다.
“들어갈래요?”
그레이는 문을 보았다.
“혼자 들어가야 합니까?”
“방 안은 손님 방이에요.”
아이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레이는 그 단순함 때문에 더 묻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레이의 옆에 앉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커튼 고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 앞에는 있을게.”
그레이는 푸리나를 보았다.
“감사합니다.”
“응. 너무 오래 안 나오면 노크할 거야. 아주 품위 있게.”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가 품위 있게 노크하는 건 꽤 보기 드문 공연이겠네.”
푸리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나도 할 때는 해.”
레이튼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품위와 극성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죠니가 잠시 침묵했다.
“그건 칭찬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겠습니다.”
하융이 조용히 덧붙였다.
“레이튼 경의 칭찬은 찻잎과 같소. 뜨거운 물이 닿아야 본색을 알 수 있구려.”
레이튼은 즐겁다는 듯 눈을 접었다.
“아름다운 평가입니다. 그 말은 제가 차 한 잔으로 사겠습니다.”
“오늘은 접시보다 품위 있는 화폐가 나왔구려.”
그레이는 작게 웃었다. 문 앞의 공기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등불지기는 그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문고리를 잡았다.
“손님이 열어야 해요.”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낮아서, 일어날 때 무릎에 손을 짚어야 했다. 그녀는 손목의 등불패가 문패와 나란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두 등불 그림은 닮았지만, 같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은 걸어온 길의 빛 같았고, 문패의 등불은 방 안에서 기다리는 불 같았다.
그레이는 문고리를 잡았다.
문은 가볍게 열렸다.
방 안에는 특별한 것이 많지 않았다. 침대 하나, 작은 탁자 하나, 물이 담긴 대야, 접힌 수건, 낮은 등불, 그리고 빈 의자 하나. 벽에는 장식이 거의 없었다. 한쪽 벽에는 작은 창이 있었지만, 창밖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유리에는 여관거리의 등불들이 희미하게 비쳤다. 침대 위의 이불은 오래 사용한 것처럼 부드러웠고, 베개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탁자 위에는 펜도 장부도 없었다. 대신 따뜻한 물 한 잔과 작은 접시가 있었다. 접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는 문턱 안쪽에서 멈췄다. 방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할 일이 보이지 않았다. 대야의 물은 깨끗했고, 수건은 접혀 있었고, 등불은 이미 켜져 있었으며, 의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녀가 고칠 것은 없었다. 적어도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등불지기가 문밖에서 말했다.
“들어가도 돼요.”
그레이는 한 걸음 들어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뒤쪽에서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기척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이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 기척도 조용히 멀어졌다.
그녀는 먼저 대야 앞에 섰다. 물은 따뜻했다. 물의 방에서 씻은 뒤에도 남아 있던 진흙과 인주 자국이 손가락 사이에 조금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손을 물에 담갔다. 이번에는 누군가 “손부터”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은 조용히 손을 감쌌고, 손톱 밑의 흙은 천천히 풀렸다. 붉은 인주 자국은 한 번에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리해서 문지르지 않았다. 천천히, 물이 허락하는 만큼만 씻었다.
수건은 부드러웠다. 너무 새것도 아니고, 낡아서 거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손님이 부담 갖지 않게 일부러 그런 것을 골라둔 것 같았다. 그레이는 손을 닦은 뒤 수건을 다시 접으려 했다. 손이 반쯤 움직이다가 멈췄다. 이미 접혀 있던 선이 있었고, 그녀가 다시 접으면 젖은 부분이 안쪽으로 들어갈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는 수건을 탁자 옆 작은 걸이에 걸었다. 물기가 마를 수 있게.
그것은 정리라기보다, 다음 손을 위한 작은 배려에 가까웠다. 그러나 방은 그 손짓을 문제 삼지 않았다. 등불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다.
그레이는 의자 앞에 섰다. 의자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다. 문 앞의 작은 의자보다 조금 더 편해 보였다. 앉으면 침대와 탁자와 창이 모두 보일 자리였다. 그녀는 바로 앉지 않고, 먼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고칠 것은 없었다. 쓸 것은 없었다. 물을 갈 필요도, 등불 심지를 자를 필요도, 침대보를 다시 펼 필요도 없었다.
문밖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레이?”
그레이는 문 쪽을 보았다.
“네.”
“괜찮아?”
그레이는 방 안을 보았다. 깨끗한 대야, 걸린 수건, 빈 접시, 켜진 등불, 낮은 의자.
“네.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문밖의 기척이 조금 물러났다.
그레이는 의자에 앉았다.
앉자 방 안의 소리가 달라졌다. 서 있을 때는 물소리와 등불 심지 타는 소리가 분리되어 들렸는데, 앉고 나니 두 소리가 같은 방 안에서 천천히 섞였다. 창에는 여관거리의 불빛이 비쳤고, 그 불빛 사이로 조금 전 지나온 문패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젖은 신발, 편지, 숟가락, 물동이,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것들은 유리 위에 머물렀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빵 조각을 보았다. 천에 싸여 있던 빵은 조금 눌려 있었다. 그녀는 천을 풀고, 남은 빵을 접시 위에 올렸다. 접시는 빈 채로 기다리고 있었고, 빵은 그 위에 조용히 놓였다. 그레이는 한동안 그 모습을 보았다. 접시는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빵을 집어 들고 천천히 먹었다. 아주 조금씩. 밖에서 죠니가 지켜보고 있으면 “너무 천천히 먹는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속도로 먹었다. 식은 빵이었다. 그래도 씹을수록 단맛이 조금 났다. 마지막 조각을 삼키고 나자, 접시에는 작은 빵가루가 남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치우려다가 멈췄다. 손끝에 붙은 빵가루를 보다가, 창밖의 빈 접시 문패를 떠올렸다.
그녀는 빵가루를 손가락으로 모아 접시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렸다.
방 안의 등불이 아주 조금 낮아졌다. 그레이는 등을 의자에 기댔다. 완전히 기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깨가 의자에 닿았다. 그 정도로도 방의 온도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잠들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직 방 안의 빛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창 유리에 다시 문패들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사물들이 아니라, 손들이 보였다. 빵을 반으로 나누던 손, 젖은 신발 끈을 풀던 손, 편지를 접던 손, 숟가락을 쥐던 손, 물동이를 들던 손, 등불 심지를 자르던 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들은 각자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 손들을 보았다. 기록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자를 쓰지도 않았다. 다만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문밖에서 낮은 대화가 들렸다.
“안에서 조용한데.”
죠니의 목소리였다.
푸리나가 대답했다.
“조용한 방이니까.”
“그건 알지. 근데 너무 조용하면 들어가 봐야 하나 싶어서.”
레이튼이 말했다.
“조용함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은 무너지는 조용함보다는 머무는 조용함에 가깝군요.”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 너는 조용함까지 분류하는구나.”
“차도 침묵 속에서 우러나니까요.”
하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덜 우러난 모양이오. 문 앞에서 자꾸 말을 하게 되는구려.”
푸리나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하융, 그거 꽤 귀여운 자기평가야.”
“전하. 귀여움은 내 칭호 목록에 없소.”
“그럼 오늘 추가하자.”
“부디 그러지 마시오. 기록 담당이 지금 방 안에 있소.”
죠니가 낮게 웃었다.
“좋은 방어였네.”
그레이는 의자에 기대어 그 대화를 들었다. 문밖의 목소리들은 멀지 않았지만, 방 안을 침범하지 않았다. 마치 복도에 걸어둔 등불처럼, 거기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가 무릎 위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보다가, 손으로 문지르지 않았다.
탁자 위의 물잔에서 김이 조금 올라왔다. 그레이는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물은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아니었다. 목을 지나기 좋을 만큼 따뜻했다. 물을 내려놓자, 창 유리에 작은 방울이 맺혔다. 그 방울 너머로 손들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나타났다.
장부였다.
그녀가 책상 위에 두고 온 장부와 닮아 있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표지는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고, 모서리에는 손때가 덜했다. 장부는 창 유리 너머에 놓여 있었다. 펼쳐져 있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펴야 할 것 같았다.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닫힌 장부는 늘 다음 일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창 유리 너머의 장부 옆에는 작은 의자가 있었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의자. 그 위에는 접힌 수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장부와 의자는 나란히 있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레이는 손을 다시 무릎 위에 놓았다.
장부는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 창 유리에서 천천히 흐려졌다. 사라지기 전에 표지가 한 번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덮어둔 책을 다시 정돈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그녀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장부에게인지, 문패들에게인지, 자기 손에게인지. 그러나 말은 방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등불 아래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두 번 두드려졌다.
톡, 톡.
정말로 품위 있는 노크였다. 그레이는 문 쪽을 보았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문이 조금 열리고, 푸리나가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문을 활짝 열고 등장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조심스러웠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어색해서,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웃어?”
“정말 품위 있게 노크하셨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가슴을 폈다.
“그렇지? 나도 할 수 있다니까.”
문밖에서 죠니가 말했다.
“드문 장면이라 기억해둬야 해.”
레이튼이 이어 말했다.
“역사적 기록 가치가 있습니다.”
하융도 낮게 덧붙였다.
“품위 있는 노크. 좋은 제목이오.”
푸리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해. 지금 내가 품위 유지 중이야.”
그레이는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웃었다. 방 안의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본 뒤,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문가에 손을 얹었다.
“방은 어때?”
그레이는 방 안을 한 번 보았다. 대야, 수건, 의자, 빈 접시에 남은 빵가루, 따뜻한 물잔, 창 유리에 남은 흐린 김.
“조용합니다.”
“불편하지는 않고?”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낯설지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성공.”
“성공입니까?”
“응. 낯선데 불편하지 않으면, 그건 꽤 좋은 방이야.”
그레이는 그 말을 따라 방 안을 다시 보았다. 낯선데 불편하지 않은 방. 표현은 푸리나다웠지만, 이상하게 맞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커튼 고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별이 하나 있었다. 잘 그린 별은 아니었다. 삐뚤고, 한쪽 끝이 조금 길었다.
“이건 뭐냐면.”
푸리나는 스스로도 조금 민망한 듯 종이를 흔들었다.
“방문 금지 표시는 너무 차갑잖아. 그래서 방문 조심 표식.”
그레이는 종이를 보았다.
“방문 조심…… 표식입니까?”
“응. 내가 너무 자주 들여다보고 싶어질까 봐, 나한테 붙이는 거야.”
문밖에서 죠니가 말했다.
“그건 네게 꽤 필요한 표식이네.”
푸리나는 무시했다.
“문 바깥에 붙여둘게. 필요하면 부르고, 아니면 내가 너무 자주 묻지 않을게.”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의 말은 가벼운 것처럼 들렸지만, 문가에서 멈추는 손은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손님은 종을 울리면 돼.”
“종이 있습니까?”
푸리나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탁자 위의 작은 방울을 발견했다. 아까는 없었던 물건이었다. 은색도 금색도 아닌, 오래 닦은 주석빛 방울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있네.”
“방금 생긴 것 같습니다.”
“여관이니까.”
푸리나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문 바깥에 삐뚤어진 별 표시를 붙였다. 종이가 문에 붙자, 별의 한쪽 끝이 조금 접혔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펴려다가 멈췄다. 아마 너무 손대면 더 구겨질 것 같았던 모양이다.
“좋아. 그럼 잠깐 더 있어도 돼. 다음 장면은 네가 나오고 싶을 때 시작하자.”
그레이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가 정합니까?”
“응. 오늘은 그런 극이야.”
푸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천천히 닫았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틈을 남겼다. 빛과 목소리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그레이는 다시 의자에 기대었다. 탁자 위의 방울은 조용히 있었다. 문밖에서는 낮은 목소리들이 다시 작게 움직였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 레이튼이 차를 따르는 소리, 하융이 무엇인가 짧게 대답하는 소리, 푸리나가 숨을 죽여 웃는 소리. 방 안에서는 등불 심지가 타는 소리와 물잔의 김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 감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등불 하나가 흔들릴 만큼, 찻잔의 김이 한 줄 줄어들 만큼, 문밖의 웃음이 한 번 지나갈 만큼이었다. 눈을 뜨자 방은 그대로 있었다.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대야의 물은 조금 식었고, 접시에는 빵가루가 남았으며, 문밖의 별 표식은 아마 아직 붙어 있을 것이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한 번 만졌다.
그리고 조금 더 앉아 있었다.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6막 — 손님 방
문은 스스로 열리지 않았다. 그레이가 빵 조각을 한 입 베어 문 뒤에도, 문은 닫힌 채로 있었다. 안쪽의 빛만 문틈 아래로 얇게 흘러나왔다. 그 빛은 재촉하지 않았다. 초대장처럼 넓게 펼쳐지지도 않았고, 명령문처럼 곧게 뻗지도 않았다. 다만 문 아래의 먼지를 조금 밝히고, 그레이의 신발 끝에 닿아 있었다. 그레이는 빵을 천천히 삼켰다. 밀가루 냄새와 말린 과일의 단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남은 빵 조각을 다시 천으로 감싸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죠니가 그 모습을 보고 낮게 말했다.
“다 먹으라는 말은 안 할게.”
그레이는 그를 보았다.
“정말입니까?”
“응. 대신 한 입 더는 권할 수 있어.”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게 네가 말하는 양보야?”
“상당히 큰 양보지. 내가 보기엔 거의 외교야.”
레이튼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협상안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요구를 낮췄고, 선택권을 남겼으니까요.”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 빵 권유를 조약으로 만들지 마.”
하융은 문 앞의 작은 의자를 보며 말했다.
“조약의 이름은 ‘빵 한 입 더’가 되겠구려.”
푸리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문 앞의 빛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레이는 웃는 사람들을 보다가, 결국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죠니는 아무 말 없이 만족한 얼굴을 했고, 푸리나는 승리 선언을 하려다가 손가락만 살짝 들어 올리고 말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을 곳을 찾다가 의자 옆 바닥이 마른 것을 확인했고, 하융은 문패의 등불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등불지기는 문고리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그레이가 빵을 삼키는 동안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이 일인 사람처럼, 아이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천을 접어 무릎 위에 올려두자, 그제야 등불지기가 물었다.
“들어갈래요?”
그레이는 문을 보았다.
“혼자 들어가야 합니까?”
“방 안은 손님 방이에요.”
아이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레이는 그 단순함 때문에 더 묻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레이의 옆에 앉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커튼 고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 앞에는 있을게.”
그레이는 푸리나를 보았다.
“감사합니다.”
“응. 너무 오래 안 나오면 노크할 거야. 아주 품위 있게.”
죠니가 말했다.
“푸리나가 품위 있게 노크하는 건 꽤 보기 드문 공연이겠네.”
푸리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나도 할 때는 해.”
레이튼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품위와 극성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죠니가 잠시 침묵했다.
“그건 칭찬이야?”
“오늘 밤은 칭찬 쪽에 두겠습니다.”
하융이 조용히 덧붙였다.
“레이튼 경의 칭찬은 찻잎과 같소. 뜨거운 물이 닿아야 본색을 알 수 있구려.”
레이튼은 즐겁다는 듯 눈을 접었다.
“아름다운 평가입니다. 그 말은 제가 차 한 잔으로 사겠습니다.”
“오늘은 접시보다 품위 있는 화폐가 나왔구려.”
그레이는 작게 웃었다. 문 앞의 공기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등불지기는 그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문고리를 잡았다.
“손님이 열어야 해요.”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낮아서, 일어날 때 무릎에 손을 짚어야 했다. 그녀는 손목의 등불패가 문패와 나란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두 등불 그림은 닮았지만, 같지는 않았다. 손목의 등불은 걸어온 길의 빛 같았고, 문패의 등불은 방 안에서 기다리는 불 같았다.
그레이는 문고리를 잡았다.
문은 가볍게 열렸다.
방 안에는 특별한 것이 많지 않았다. 침대 하나, 작은 탁자 하나, 물이 담긴 대야, 접힌 수건, 낮은 등불, 그리고 빈 의자 하나. 벽에는 장식이 거의 없었다. 한쪽 벽에는 작은 창이 있었지만, 창밖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유리에는 여관거리의 등불들이 희미하게 비쳤다. 침대 위의 이불은 오래 사용한 것처럼 부드러웠고, 베개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탁자 위에는 펜도 장부도 없었다. 대신 따뜻한 물 한 잔과 작은 접시가 있었다. 접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는 문턱 안쪽에서 멈췄다. 방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할 일이 보이지 않았다. 대야의 물은 깨끗했고, 수건은 접혀 있었고, 등불은 이미 켜져 있었으며, 의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녀가 고칠 것은 없었다. 적어도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등불지기가 문밖에서 말했다.
“들어가도 돼요.”
그레이는 한 걸음 들어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뒤쪽에서 푸리나와 죠니와 레이튼과 하융의 기척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이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 기척도 조용히 멀어졌다.
그녀는 먼저 대야 앞에 섰다. 물은 따뜻했다. 물의 방에서 씻은 뒤에도 남아 있던 진흙과 인주 자국이 손가락 사이에 조금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손을 물에 담갔다. 이번에는 누군가 “손부터”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은 조용히 손을 감쌌고, 손톱 밑의 흙은 천천히 풀렸다. 붉은 인주 자국은 한 번에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리해서 문지르지 않았다. 천천히, 물이 허락하는 만큼만 씻었다.
수건은 부드러웠다. 너무 새것도 아니고, 낡아서 거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손님이 부담 갖지 않게 일부러 그런 것을 골라둔 것 같았다. 그레이는 손을 닦은 뒤 수건을 다시 접으려 했다. 손이 반쯤 움직이다가 멈췄다. 이미 접혀 있던 선이 있었고, 그녀가 다시 접으면 젖은 부분이 안쪽으로 들어갈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는 수건을 탁자 옆 작은 걸이에 걸었다. 물기가 마를 수 있게.
그것은 정리라기보다, 다음 손을 위한 작은 배려에 가까웠다. 그러나 방은 그 손짓을 문제 삼지 않았다. 등불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다.
그레이는 의자 앞에 섰다. 의자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다. 문 앞의 작은 의자보다 조금 더 편해 보였다. 앉으면 침대와 탁자와 창이 모두 보일 자리였다. 그녀는 바로 앉지 않고, 먼저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고칠 것은 없었다. 쓸 것은 없었다. 물을 갈 필요도, 등불 심지를 자를 필요도, 침대보를 다시 펼 필요도 없었다.
문밖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레이?”
그레이는 문 쪽을 보았다.
“네.”
“괜찮아?”
그레이는 방 안을 보았다. 깨끗한 대야, 걸린 수건, 빈 접시, 켜진 등불, 낮은 의자.
“네. 괜찮습니다.”
푸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문밖의 기척이 조금 물러났다.
그레이는 의자에 앉았다.
앉자 방 안의 소리가 달라졌다. 서 있을 때는 물소리와 등불 심지 타는 소리가 분리되어 들렸는데, 앉고 나니 두 소리가 같은 방 안에서 천천히 섞였다. 창에는 여관거리의 불빛이 비쳤고, 그 불빛 사이로 조금 전 지나온 문패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젖은 신발, 편지, 숟가락, 물동이,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것들은 유리 위에 머물렀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빵 조각을 보았다. 천에 싸여 있던 빵은 조금 눌려 있었다. 그녀는 천을 풀고, 남은 빵을 접시 위에 올렸다. 접시는 빈 채로 기다리고 있었고, 빵은 그 위에 조용히 놓였다. 그레이는 한동안 그 모습을 보았다. 접시는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빵을 집어 들고 천천히 먹었다. 아주 조금씩. 밖에서 죠니가 지켜보고 있으면 “너무 천천히 먹는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속도로 먹었다. 식은 빵이었다. 그래도 씹을수록 단맛이 조금 났다. 마지막 조각을 삼키고 나자, 접시에는 작은 빵가루가 남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치우려다가 멈췄다. 손끝에 붙은 빵가루를 보다가, 창밖의 빈 접시 문패를 떠올렸다.
그녀는 빵가루를 손가락으로 모아 접시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렸다.
방 안의 등불이 아주 조금 낮아졌다. 그레이는 등을 의자에 기댔다. 완전히 기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깨가 의자에 닿았다. 그 정도로도 방의 온도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잠들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직 방 안의 빛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창 유리에 다시 문패들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사물들이 아니라, 손들이 보였다. 빵을 반으로 나누던 손, 젖은 신발 끈을 풀던 손, 편지를 접던 손, 숟가락을 쥐던 손, 물동이를 들던 손, 등불 심지를 자르던 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들은 각자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 손들을 보았다. 기록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자를 쓰지도 않았다. 다만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문밖에서 낮은 대화가 들렸다.
“안에서 조용한데.”
죠니의 목소리였다.
푸리나가 대답했다.
“조용한 방이니까.”
“그건 알지. 근데 너무 조용하면 들어가 봐야 하나 싶어서.”
레이튼이 말했다.
“조용함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은 무너지는 조용함보다는 머무는 조용함에 가깝군요.”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 너는 조용함까지 분류하는구나.”
“차도 침묵 속에서 우러나니까요.”
하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덜 우러난 모양이오. 문 앞에서 자꾸 말을 하게 되는구려.”
푸리나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하융, 그거 꽤 귀여운 자기평가야.”
“전하. 귀여움은 내 칭호 목록에 없소.”
“그럼 오늘 추가하자.”
“부디 그러지 마시오. 기록 담당이 지금 방 안에 있소.”
죠니가 낮게 웃었다.
“좋은 방어였네.”
그레이는 의자에 기대어 그 대화를 들었다. 문밖의 목소리들은 멀지 않았지만, 방 안을 침범하지 않았다. 마치 복도에 걸어둔 등불처럼, 거기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레이의 손목에 걸린 등불패가 무릎 위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보다가, 손으로 문지르지 않았다.
탁자 위의 물잔에서 김이 조금 올라왔다. 그레이는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물은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아니었다. 목을 지나기 좋을 만큼 따뜻했다. 물을 내려놓자, 창 유리에 작은 방울이 맺혔다. 그 방울 너머로 손들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나타났다.
장부였다.
그녀가 책상 위에 두고 온 장부와 닮아 있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표지는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고, 모서리에는 손때가 덜했다. 장부는 창 유리 너머에 놓여 있었다. 펼쳐져 있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펴야 할 것 같았다.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닫힌 장부는 늘 다음 일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창 유리 너머의 장부 옆에는 작은 의자가 있었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의자. 그 위에는 접힌 수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장부와 의자는 나란히 있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레이는 손을 다시 무릎 위에 놓았다.
장부는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 창 유리에서 천천히 흐려졌다. 사라지기 전에 표지가 한 번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덮어둔 책을 다시 정돈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그녀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장부에게인지, 문패들에게인지, 자기 손에게인지. 그러나 말은 방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등불 아래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두 번 두드려졌다.
톡, 톡.
정말로 품위 있는 노크였다. 그레이는 문 쪽을 보았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문이 조금 열리고, 푸리나가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문을 활짝 열고 등장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조심스러웠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어색해서, 그레이는 아주 작게 웃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웃어?”
“정말 품위 있게 노크하셨습니다.”
푸리나는 작게 가슴을 폈다.
“그렇지? 나도 할 수 있다니까.”
문밖에서 죠니가 말했다.
“드문 장면이라 기억해둬야 해.”
레이튼이 이어 말했다.
“역사적 기록 가치가 있습니다.”
하융도 낮게 덧붙였다.
“품위 있는 노크. 좋은 제목이오.”
푸리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해. 지금 내가 품위 유지 중이야.”
그레이는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웃었다. 방 안의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본 뒤,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문가에 손을 얹었다.
“방은 어때?”
그레이는 방 안을 한 번 보았다. 대야, 수건, 의자, 빈 접시에 남은 빵가루, 따뜻한 물잔, 창 유리에 남은 흐린 김.
“조용합니다.”
“불편하지는 않고?”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낯설지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푸리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성공.”
“성공입니까?”
“응. 낯선데 불편하지 않으면, 그건 꽤 좋은 방이야.”
그레이는 그 말을 따라 방 안을 다시 보았다. 낯선데 불편하지 않은 방. 표현은 푸리나다웠지만, 이상하게 맞았다.
푸리나는 문가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커튼 고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별이 하나 있었다. 잘 그린 별은 아니었다. 삐뚤고, 한쪽 끝이 조금 길었다.
“이건 뭐냐면.”
푸리나는 스스로도 조금 민망한 듯 종이를 흔들었다.
“방문 금지 표시는 너무 차갑잖아. 그래서 방문 조심 표식.”
그레이는 종이를 보았다.
“방문 조심…… 표식입니까?”
“응. 내가 너무 자주 들여다보고 싶어질까 봐, 나한테 붙이는 거야.”
문밖에서 죠니가 말했다.
“그건 네게 꽤 필요한 표식이네.”
푸리나는 무시했다.
“문 바깥에 붙여둘게. 필요하면 부르고, 아니면 내가 너무 자주 묻지 않을게.”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의 말은 가벼운 것처럼 들렸지만, 문가에서 멈추는 손은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손님은 종을 울리면 돼.”
“종이 있습니까?”
푸리나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탁자 위의 작은 방울을 발견했다. 아까는 없었던 물건이었다. 은색도 금색도 아닌, 오래 닦은 주석빛 방울이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있네.”
“방금 생긴 것 같습니다.”
“여관이니까.”
푸리나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문 바깥에 삐뚤어진 별 표시를 붙였다. 종이가 문에 붙자, 별의 한쪽 끝이 조금 접혔다.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펴려다가 멈췄다. 아마 너무 손대면 더 구겨질 것 같았던 모양이다.
“좋아. 그럼 잠깐 더 있어도 돼. 다음 장면은 네가 나오고 싶을 때 시작하자.”
그레이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가 정합니까?”
“응. 오늘은 그런 극이야.”
푸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천천히 닫았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틈을 남겼다. 빛과 목소리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그레이는 다시 의자에 기대었다. 탁자 위의 방울은 조용히 있었다. 문밖에서는 낮은 목소리들이 다시 작게 움직였다. 죠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 레이튼이 차를 따르는 소리, 하융이 무엇인가 짧게 대답하는 소리, 푸리나가 숨을 죽여 웃는 소리. 방 안에서는 등불 심지가 타는 소리와 물잔의 김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 감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등불 하나가 흔들릴 만큼, 찻잔의 김이 한 줄 줄어들 만큼, 문밖의 웃음이 한 번 지나갈 만큼이었다. 눈을 뜨자 방은 그대로 있었다.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대야의 물은 조금 식었고, 접시에는 빵가루가 남았으며, 문밖의 별 표식은 아마 아직 붙어 있을 것이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를 한 번 만졌다.
그리고 조금 더 앉아 있었다.